부업이 재벌 3세 친구다.
001.
때는 1988년, 모든 이들이 올림픽을 기대하는 날.
한일 기계 상무실 안은 냉기가 좔좔 흘러내렸다.
“유 대리, 얼마나 말해야 알아들어? 내가 몇 번을 말해? 다정 테크와 거래하라고?”
오늘도 어김 없이 사장의 아내인 박 상무에게 잡혀 한 소리를 들었다.
“거래야 하려고 했죠. 그런데 단가가 맞지 않는데 어떻게 합니까? 그냥 제게 회사 망하게 해달라고 부탁하는 게 낫지 않습니까?”
기존 거래 기업보다 단가가 적게는 5천 원, 많게는 10만 원이 차이 난다.
원가를 낮추라고 난리인 사장과 너무도 다른 노선을 타는 박 상무의 만행에 머리가 어질어질하다.
회사를 키우겠다는 건지.
말아먹겠다는 건지.
정상적인 사고인 경영인이라면 절대 하지 않을 행동이었다.
“뭔 말이 그리 많아! 넌 대리고, 난 상무야. 상사 말이 말처럼 들리지 않아!!”
비명에 가까운 노성이 쩌렁쩌렁 울린다. 노기로 이글이글 타오르는 뜨거운 시선이 마주 선 남자를 겨냥했다.
당장이라도 달려들 기세를 풍겼다.
“전 구매 실무자로 원가를 관리할 의무가 있는 실무자입니다. 제가 이 회사에 채용된 이유이기도 하고요. 상무님께서 내리는 지시는 직권남용입니다.”
노발대발하는 상사는 직장인에게 있어 부담과 공포 그 자체이건만.
유선율의 표정과 태도는 너무도 여유가 넘치고 태연자약했다.
결코, 직장인이 보일 모습은 아니었다.
“상무님의 영역은 구매, 외주관리가 아닌, 회계, 경리까지입니다.”
박 상무의 영역은 회계, 경리 업무까지다.
그 이상은 공정성을 잃은 ‘직권남용’이다.
생각만 하고 있을 대사를 던져버리는 패기를 선보였다.
“야!”
당연하게도 분노의 노성이 공기를 차갑게 얼려버렸다.
“말이란, 말처럼 들려야 말인 겁니다. 회사에 손실이 뻔한 거래인데, 제가 왜 그 회사와 거래해야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상무님께서 타당성 있게 다시 말씀해 주시면 고려해 보겠습니다.”
굴하지 않고 하고자 하는 말을 사정없이 퍼붓는 그의 얼굴엔 여유로 넘쳐났다.
“이익! 너 해고야!!”
박 상무는 급기야 해고를 통보했다.
저딴 직원은 자신의 회사에 필요 없었다.
“상무님껜 인사권도 없습니다. 또한, 부당하게 직원을 해고할 수 없습니다. 근로계약서 보여드릴까요? 모르시면 복사해서 가져오겠습니다.”
근로기준법 23조 1항에 사용자는 근로자에게 정당한 이유 없이 해고, 휴직, 정직, 감봉 등의 징벌을 하지 못하게 되어있다.
“내가 널 해고 못할 거 같아!”
“예. 상무님은 절 해고 못합니다.”
다시 언급하지만, 정당한 사유 없이는 사용자는 근로자를 해고하지 못한다.
제 발로 나가는 거면 모를까?
“당장 나가!”
할 말이 궁색해진 박 상무는 붉게 달아오른 얼굴로 목에 핏대를 세워 악을 질렀다.
“물러가겠습니다.”
남자는 아무렇지 않은 평온한 얼굴로 허리를 작게 굽혀 보인 후, 상무실을 빠져나갔다.
아아아악!
안에서 박 상무의 비명이 꼬리처럼 따라붙었다.
고막이 얼얼하다.
“야, 유 대리.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그렇게 대들어서 어쩌려고 그래. 박 상무 지시 좀 따라주라.”
경리 부장이 손으로 귀를 막은 채, 불만이 가득한 시선을 보냈다.
그의 시선이 제법 공격적이다.
“부장님도 그 회사에서 리베이트 (rebate)라도 받기로 했나요? 왜들 단가도 다정하지 않은 그곳을 왜 거래하자고 하는 겁니까? 골프 모임 친구면 답니까? 회사 생각 안 해요? 거기서 단가 올려서 발주 들어가면 다른 회사는요? 똑같이 올려도 된다면 전부 올려 받지요. 그런데 말이죠? 회사 재정 상태도 좋지 않은 상황에 단가를 올리면서까지 거래하라고요? 말이 되는 소릴 하세요. 매달 대금 이월시켜달라며 아쉬운 소리하기 바쁜 이 마당에 뭔 단가를 올려서 거래합니까.”
아주 웃기는 짬뽕이다.
저리 책임감이 없는 사람이 어떻게 부장 자리를 꿰차고 있는지 신기할 따름이다.
‘아, 맞다. 박 상무 동생의 남편이랬지.’
믿을 건 가족이라지만, 가만 보니 제대로 된 경영인과 간부가 없었다.
이상한 사고방식을 가진 가족들이 회사의 중요한 자리에 올라가 있었다.
정말이지 황당할 따름이다.
“이 사람이 말을, 어디서 배워먹은 태도인가!”
급기야 경리 부장은 목소리를 높였다.
그의 얼굴에도 노기가 실렸다.
“어디서 배우긴요. 저기 상무님께 배우고 나오는 길인데요. 못 들으셨어요? 방금 부장님은 상무님 욕을 하신 겁니다.”
고개를 틀어 박 상무가 있는 방을 눈으로 가리켰다.
“뭔 되지도 않는 소리를. 지금 나랑 말장난하나. 유 대리!”
“부장님, 그렇게 살지 마세요. 아래 사람이 보고 배웁니다. 저처럼요. 더 다퉈봤자 서로 피곤할 테니 가보겠습니다.”
‘싸가지’ 없다며 난리를 칠지 모를 일이나, 도덕적인 문제를 일으키는 자들에겐 강하게 나가는 게 유선율이 보유한 똘끼였다.
유선율은 사무실에 재앙의 씨앗을 뿌리고 홀연히 자리를 떠났다. 떠나는 그의 얼굴은 역시 평온하기 이를 데 없었다.
“사장님, 저 유 대리입니다.”
자리로 돌아온 유선율은 아무 일 없었다는 듯, 수화기를 들어 거래처로 전화를 돌렸다.
─ 어, 유 대리. 저녁이면 가공 다 끝날 거야.
수화기 너머에서 중년 남성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 네. 그런데 거기 미수금이 얼만가요?”
─ 미수금? 음, 4천이었나? 그랬지?
“그거 이번 달 안으로 싹 받으세요. 저도 밀린 미수금 받을 수 있도록 해드릴게요.”
─ 허허, 너무 무리하지 마. 난 유 대리 믿고 하는 거니까.
“절 믿으시면 회사로 전화해서 경리팀 볶으세요.”
─ 왜, 무슨 일이라도 있는 건가?
“퇴사하려고요.”
─ 아니, 왜?
“회사의 민낯이라 제가 말하기 부끄럽고요. 그런 건 묻지 마세요.”
회사에 소속된 직원으로서 최소한의 의리를 지켰다.
─ 음, 그래. 알았어.
“더는 발주는 나가지 않을 거예요. 기회가 닿으면 연락드릴게요.”
회사 자금이 불안한 마당에 자신을 믿고 거래하는 사장님들께 피해를 주는 건 사양이다.
“퇴사계획을 세워보실까.”
박 상무에겐 회사를 나가지 않을 것처럼 굴었지만, 역시 나가는 게 답이다.
회사 대표이사를 달아준다면 다 쓰러지는 회사를 살리기 위해 모든 인생을 갈아 넣겠지만.
고작 대리이기에 그럴 생각은 없었다.
또한, 월급을 떼일 생각도 없었다.
유선율은 남들의 시선이 미치지 않는 장소에서 계획을 진행해 나갔다.
*
며칠이 지나 대표실에서 유선율을 호출했다.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대화를 나눴다.
한쪽은 괴로운 표정을, 한쪽은 무표정으로 일관하며 음료를 마셨다.
“유 대리, 적당히 하면 안 될까? 내가 자네 때문에 미치겠어.”
괴로운 표정을 짓는 이는 한일 기계 김일섭 대표였다.
“제가 잘못한 게 있나요?”
“없지, 없는데. 집사람 말 좀 들어주게.”
“들어줄 게 없어요. 그러면 원가 관리 포기할 건가요? 그 회사 올리면 다른 회사들도 똑같이 올려줄 겁니다. 그렇지 않아도 몇 년째 같은 단가로 가격 유지 중인데. 이거 받아 주시면 다정 테크랑 거래할게요.”
“아니, 그런 말이 아니지 않나.”
“그러면 저도 못 해요. 형평성도 문제고요.”
“아니, 내가 대표...... 아니. 이보게.”
“대표님도 절 자르고 싶으신가요?”
이건 정말 궁금해서 물었다.
“아니, 그 말이 아니잖나.”
“제가 듣기에는 그렇게 들려요. 다정 테크 대표님이 상무님과 친분이 있는 곳이란 거 알아요. 하지만, 공과 사는 확실히 구별해야죠. 회사 망하게 하고 싶은 게 아니라면요. 제 말이 틀렸나요?”
“허어.”
이놈을 욕할 수 없는 이유, 대표인 자신보다 회사를 더 걱정하는 직원이었다.
보통이라면 시키는 대로 하는 게 일반적인 직원들의 모습인데, 유선율은 회사에 손해가 가는 짓은 일절 하지 않고 버텼다.
무엇보다 엄청난 강심장에 독종이란 게 문제다.
별별 욕을 해대고 소리를 친들, 소귀에 경 읽기였다.
조금도 위축되지 않고 오히려 맞는 말로 때려 버린다.
“기업은 말이죠, 대표님이나 상무님의 이윤보다 기업의 가치에 집중해야 합니다. 그런데 회사의 이윤도 아니고, 개인의 이윤을 좇고 계시는데 제가 왜 회사에 손해 끼칠 일을 해야 합니까?”
“끙.”
그래 저게 문제다. 저게 문제야.
싫은 소리를 아예 하지 못하게 만들어 버린다.
“좋아요. 더 고집부리지 않을게요. 대표님 가정도 있는 거니까요.”
“.........?”
꺾이지 않을 거 같던 고목 나무 같은 녀석이 갑자기 뜻을 꺾어 버렸다.
어떻게 설득하고 타일러야 하나 골머리를 앓고 있던 김일섭의 눈이 크게 떠졌다.
“대신, 제 보고서에 서명해 주세요.”
보고서를 김일섭 대표에게 내밀었다.
일반적인 회사에선 보일 수 없는 모습이었다.
과장, 부장을 건너뛰어 대표에게 전해졌다.
“미수금이 잡힌 회사 결제 건입니다. 모든 회사를 넣진 않았어요. 꼭 해줘야 할 회사만 넣었습니다. 총 1억 5천만 원입니다. 이곳 결제해 주면 다정 테크와 거래하겠습니다.”
유선율은 조건을 걸었다.
“.........”
“그동안 우리 회사의 이익을 위해 많은 도움을 준 회사입니다.”
“좋아, 해주지. 대신 두 번 말 나오지 않게 해주게.”
그제야 김일섭의 표정이 풀어졌다.
그는 바로 보고서에 서명했다.
“바로 발주 들어가겠습니다.”
“그래, 오늘 퇴근하면 뭐 하나?”
“퇴근해서 쉴 겁니다.”
“그래, 그래. 나가보게.”
한잔하자고 말하려던 걸 삼켰다.
“예.”
유선율은 자리에서 일어나 대표실을 나섰다.
*
그날이 있고 보름이 지났다.
“아직도 안 들어왔다고요? 알겠어요. 제가 이번 주 안으로 받게 해드릴게요.”
AS, 무료 가공, 할인은 무지 좋아하면서 결제는 더럽게도 해주지 않는다.
보고서까지 작성해 올렸건만.
역시 이 회사는 몸으로 때우지 않는 이상, 제대로 진행되는 게 없다.
“그림도 확실하고. 좋아, 전설 한번 찍어보자.”
자기 이름이 회사에 영원히 사람들 입에 오르내릴 전설적인 일을 저질러 보기로 했다.
강인한 심장을 장착하고 박 상무가 있는 방으로 향했다.
이동하는 그의 손에는 결재판이 함께 했다.
“자네 어디 가나?”
박 상무 방으로 들어가려는 걸음을 경리 부장이 막아섰다.
“거래처 미납금 결제일이 어제까지였는데, 아직도 들어가지 않았다고 해서요.”
“그걸 왜 유 대리 자네가 챙기나? 자네는 윗사람도 없어?”
“말하면 달라지나요? 회피들 하시는데.”
과장, 부장에게 보고하면 반응들이 뜨뜻미지근했다.
모두 ‘때가 되면 결제해 주겠지.’로 끝내고 직접 나서려 하지 않았다.
이사는 박 상무의 눈치를 보기 급급했다.
이러니 중소기업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자금난에 시달리는 지경에 이르지.
“정부 과제도 그래요. 총무 경리에서 할 일을, 제가 하고요. 웃긴 일이죠. 회사가 굴러가는 게 신기할 정도인 거 아세요? 말이 나와서 하는 얘긴데, 하고 싶은 거만 하면 회사는 왜 다닙니까?”
어려운 일은 아예 하지 않으려 회피하고 오히려 다른 부서로 일을 떠넘기기 급급했다.
‘이러니까 여기서 벗어나지 못하지.’
하며 넘기며 회사의 발전을 위해 나서서 다 해줬다.
회사가 성장해 좋은 회사가 되길 바라는 마음이 강해 나섰건만.
물을 부어도 부어도 채워지지 않고 오히려 옆으로 줄줄 샜다.
깨진 항아리에 물 붓는 격이랄까?
그걸 느낀 이후, 잔소리를 좀 하고 다녔다.
그럴 때마다 듣는 이야기가 ‘넌 대리야, 시키는 일이나 해’가 전부.
그래서 생각했다.
아, 착하게 살면 이렇게 되네?
덕분에 본래 성격대로 살기로 마음을 굳혔다.
이 회사는 굴러온 복을 차버렸다.
“할 말 없죠? 있다고 하면 양심 없는 겁니다. 전 제가 올린 보고서 안, 결제해 줄 때까지 버틸 거니까, 들여보내 줄지 마음대로 하세요. 여기서 죽치고 있으면 나올 테니 누가 이기나 보자고요. 제 성격 아시죠? 하면 한다는 거?!”
저들이 강하게 나오면 더 강하게 나갈 뿐이다.
미친개의 봉인을 해제해 버린 대가는 치러야지.
“잘 생각하세요. 여기서 망신당할지, 절 안으로 들여보내고 일을 빨리 해결 지을지.”
“......... 끙.”
경리 부장은 지끈거리는 두통에 관자놀이를 꾹 눌렀다.
회사 생활을 하며 다양한 놈들은 다 만나봤지만.
눈앞에 있는 저놈처럼 강짜를 부리는 미친놈은 처음이었다.
회사마다 핵탄두 하나씩을 달고 산다더니만, 저건 핵탄두가 아니라 자연재해였다.
이대로 막으면 정말로 퇴근하는 시간까지 저리 죽치고 있을 게 분명했다.
몇 날 며칠이고 찾아와 저러고 있겠지.
경리 부장은 앓는 소리를 내며.
“시X. 미친 새끼. 몰라, 마음대로 해.”
누가 위고 누가 아래인지. 미친 새X.
욕을 하고 자리를 피했다.
이럴 땐 그냥 자리를 피하는 게 상책이었다.
“.........”
“.........”
이걸 보는 직원들은 이러한 결과를 예상이라도 했다는 듯이, 작게 웃음을 터트리고 슬쩍 사무실을 비웠다.
앞으로 일어날 일이 머릿속에 그려졌다.
“흥. 이럴 거면서 왜 막아.”
유선율은 걸음을 옮겨 상무실 문을 열어젖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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