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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야행 1권

2015.08.12 조회 1,278 추천 10


 # 第 一 章
 
 해가 내리쬐는 정오.
 “야행자(夜行者)가 되겠다고?”
 약관도 안 된 청년의 방문에 총관은 눈살을 찌푸렸다.
 총관은 붓을 놀리며 물어왔다.
 “무장 상태는?”
 “철검에 비수 열 자루요.”
 “…….”
 철검이란 말에 흘끗 청년의 허리춤을 본 총관은 인상마저 찌푸렸다.
 흔한 검집조차 없는 녹슨 철검.
 소규모 산채의 산적들도 거들떠보지 않을 물건이었다.
 기름은 제법 먹인 듯하지만, 관리 받지 못한지도 수년은 훌쩍 넘어 보였다. 무장도 무장이었고, 신장은 육 척이나 호리호리한 몸매는 코웃음만 나왔다. 액받이로나 겨우 쓸 정도다.
 “심법은?”
 이쯤 되면 거의 반쯤 합격이었다.
 청년은 준비된 대답을 했다.
 “삼재심법을 익혔소.”
 “동네 무관의 토납법을 익힌 수준이겠구만. 외기방사는 당연히 안 될 거고, 진기도인은 되겠지?”
 다른 무공은 물어보나 마나다. 기대도 안 한다는 물음에 청년은 고개만 끄덕였다.
 “칼질이나 될지 모르겠군.”
 삼류낭인보다 못하다는 짤막한 평을 내리고는 손을 내밀었다.
 그 손을 본 청년은 품속을 뒤졌다. 호패를 꺼내 총관에게 건넸다.
 청년을 이리저리 살펴보던 총관의 눈빛에 경멸이 섞여 있었다.
 “뭐야? 오기로 한 귀휴(歸休) 중인 복역수였군. 그럼 호패 먼저 내밀 것이지. 괜한 쓸데없는 문답을 하게 해?”
 그제야 청년의 오른쪽 손목에 새겨진 문신이 눈에 들어온 것이다. 이십칠(二十七)이라고 새겨진 글자가 보였다.
 “이십칠 년 형이라. 몇 년이나 갇혀 있었나?”
 “칠 년이오.”
 청년은 짧게 말하고, 족자에 수결했다.
 총관도 호패에 붓을 놀리며 마음에도 없는 말을 했다.
 “운이 좋아. 이번 월야행(月夜行)은 살아 돌아올 가능성이 매우 높거든.”
 기름칠까지 한 호패를 화톳불에 대충 말린 뒤 휙 던졌다.
 호패를 받아든 청년은 품속에 집어넣었다.
 수결이 된 족자를 살피던 총관이 손사래를 쳤다.
 “가보게, 해가 지면 출발할 터이니.”
 밖으로 나오자 성안의 낮은 분주했다.
 오가는 사람 중엔 대낮부터 거나하게 취한 이들도 있었다.
 기방에선 기녀들의 웃음꽃이 벌써 만개했다.
 그들을 뒤로한 청년의 발걸음은 묵직했다.
 “억울합니다!”
 앳된 외침이 들려왔다.
 소요가 일어나는 곳을 보니 관병들이 한 소년을 포박하고 있었다.
 잠시 귀를 기울이니.
 새벽녘에 일어난 부녀자 살해사건에 연루된 듯 보였다.
 창백하게 질린 소년은 닭모가지 잡아 비틀 힘도 없어 보였지만, 관병들은 서슬 퍼런 얼굴로 끌고 가고 있었다. 억울하다며 연신 사정하는 소년의 남루한 행색이 눈에 들어왔다.
 사람들이 쯧쯧 혀를 찼지만, 어느 하나 나서는 이가 없었다.
 소곤거리는 말로는 일가친척이 없다고 한다.
 울먹거리며 끌려가는 소년을 보는 청년의 눈빛이 회상에 젖어들었다.
 
 ***
 
 덜컹.
 문이 닫히자 소년이 창살을 부여잡았다.
 -억울합니다, 전 정말 억울합니다!
 -여기서 억울하지 않은 이가 어딨어?
 덥수룩한 수염의 장한이 창살을 붙잡은 소년의 뒷덜미를 낚아채 꿇어 앉혔다.
 냉골인 옥 바닥에 무릎이 시렸음에도, 소년은 장한을 노려보기까지 했다.
 -그래, 그렇게 정신 똑바로 차려. 안 그럼 하루도 못 버틴다.
 -저 좀 도와주세요, 전 정말 억울해요!
 그게 무슨 소리인지 몰랐고, 그 말을 귀담아들을 정신도 없었다. 일어나서 창살로 가려는데.
 짝!
 소년은 따귀를 호되게 얻어맞았다.
 장한의 솥뚜껑만 한 손바닥이 살짝 벌게졌다.
 소년은 바닥을 기며 핏물 섞인 침을 퉤 내뱉었다. 올려다보는 눈빛엔 두려움보다 독기가 먼저였다.
 -싹수는 보이는군.
 -당신이 뭔데, 날 때려……!
 쾅.
 장한이 달려드는 소년의 멱살을 틀어쥐어 바닥에 내리꽂았다.
 -놔, 놓으라고!
 소년이 억눌린 신음을 흘리는 와중에도 무릎과 손으로 장한을 때렸다. 힘이 안 실려서 의미 없는 몸짓이었지만, 그게 장한의 마음을 기껍게 했다. 해서 안 해줄 충고까지 덧붙여줬다.
 -밤이 오는군. 이제 뇌옥이 아니라, 지옥이지.
 킬킬대는 장한의 어깨너머 간수들이 분주해졌다.
 땅땅땅.
 타종을 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해가 떨어지는 속도가 빨라졌다.
 간수들이 기름을 잔뜩 먹인 횃불에 서둘러 불을 붙였다. 그리곤 긴장된 얼굴로 옥 중간마다 놓인 화톳불에 불을 놓았다.
 화르륵.
 장한은 타오르는 불길을 보며 이를 드러냈다.
 -정신 바짝 차려. 이제부터니까.
 소년은 이해가 되질 않았다. 성벽을 대낮보다 밝힐 횃불들로 빼곡히 둘러놓아서 성안만큼은 안전하지 않았던가. 뇌옥이라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싶었지만.
 장한이 말한 뜻을 이해하는 덴 그리 많은 시간이 필요치 않았다.
 달 뜬 교성이 뇌옥 안의 숨 막히는 적막을 깨트렸다.
 죄수들의 숨소리가 긴장으로 거칠어졌다.
 -어, 어째서 이곳에!
 소년은 너무 놀라 뒷말을 채 내뱉지 못했다.
 밖에 있는 화톳불이 미처 밝히지 못한 뇌옥 안.
 그 어둠 속에서 홀연히 나타난 창백한 얼굴이 요요한 미소를 입가에 띠고 있었다. 나삼으로 가린 제 몸을 쓰다듬어대는 중이다.
 소년에겐 세상에 다시없을 징그러운 몸짓이나, 죄수들에겐 아니었다.
 바들바들.
 소년에게 충고해줬던 장한이 창살을 움켜쥐었다. 겁이 나서가 아니었다. 제 비소를 거리낌 없이 보여주며 야릇한 신음을 내는 야행유녀들 때문이었다.
 -보, 보지 말거라. 내일 아침 해를 보고 싶다면. 말이다.
 뇌옥의 어둠 속에서 죄수들은 창살을 부여잡았다.
 공포에 질린 채 얼굴을 창살 사이에 고정했다. 혹시라도 시선이 뒤로 돌아갈까 봐 저어된 것이다.
 귓가를 잡아끄는 신음과 질척거리는 소리에 소년은 눈살을 찌푸렸다. 두려움보다 혐오감이 먼저 찾아왔다.
 -어째서 성 밖에 있어야 할 저주받을 것이 뇌옥 안에 나타난 거죠?
 아찔한 체향과 분향에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장한은 대답할 수가 없었다. 어서 빨리 이 밤이 가기만을 기다리며 창살만 부여잡았다.
 확, 확.
 그래도 못 참겠는지 윗옷을 벗어 창살과 자신의 팔을 단단히 결부시켰다.
 소년은 입술을 피가 나도록 깨문 장한에 의아해했다.
 다른 뇌옥의 죄수들도 대동소이한 반응이었다.
 그러다 한 명이 윗옷을 벗어젖히다가 야행유녀와 눈이 마주쳤다.
 [상공, 어서 요.]
 요요한 미소와 귓가를 간질이는 나긋함에 멍해진 죄수는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멈추게, 멈춰!
 -자네, 기다리는 가족이 있다지 않았나? 당장 멈춰야 하네!
 안면이 있는 죄수들이 연신 소리쳤지만, 이미 이성을 잃은 죄수는 내달려서 야행유녀의 품에 안겼다.
 그리고,
 소년은 거친 숨을 토해내는 두 마리의 짐승을 눈앞에서 목도했다.
 “끄으으으!”
 마지막 숨과 정을 토해낸 사내는 축 늘어졌다.
 찌지직.
 -으, 음서(蔭鼠). 저, 저리가!
 귀청을 긁는 소리에 늘어졌던 사내가 벌떡 일어서려 했지만, 야행유녀의 탄탄한 허벅지에 둘러싸여 그리할 수가 없었다.
 [저도 재미 좀 봐야죠.]
 이렇게 끔찍한 코맹맹이 소리가 있을까.
 “으, 으으!”
 온몸의 정기를 빨아들이는 흡입력에 사내는 형언할 수 없는 고통을 느꼈다.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제 발과 손을 갉아먹기 시작하는 음서들을 보고는 두 눈을 까뒤집었다.
 간수들이 사라진 뇌옥 안엔 참지 못한 사내의 끔찍한 비명만 그득했다.
 모두가 얼굴을 일그러트린 채 귀를 막았다.
 장한이 거무죽죽해진 얼굴로 소년에게 충고했다.
 -절대 잊지 말거라. 이곳의 밤은 성 밖의 밤만큼 위험하다는 걸. 만월이라도 뜨는 밤엔…….
 
 ***
 
 회상에서 빠져나온 청년이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저벅저벅.
 청년이 자신을 향해 걸어오자, 끌려가던 소년의 안색에 화색이 돌았다. 허리춤에 찬 녹슨 철검도 보였다.
 관병들은 제지하려다가 순순히 길을 비켜줬다. 손목에 있는 문신을 본 것이다.
 “짧게 해.”
 우두머리로 보이는 관병의 말에 소년은 다가오는 청년을 향해 다급히 외쳤다.
 “저 좀 도와주세요. 전 정말 억울해요!”
 토씨 하나도 틀리지 않는 말이다.
 청년은 허리를 숙여 소년의 귀에다 입술을 갔다 대었다. 그리곤 연신 억울하다는 소년을 향해 한 마디 해줬다.
 “정신 바짝 차려야 산다.”
 “예, 예?”
 “지금 네가 가는 곳은 지옥이니까.”
 소년의 겁먹은 눈망울이 점점 커지더니, 암울한 빛으로 채색됐다.
 “저, 전 정말 억울해요. 도움이 필요하다구요.”
 청년은 바들바들 떠는 소년의 멱살을 쥐었다.
 흔들리는 소년의 눈망울 속.
 그곳에 비친 자신을 보면서 나직하게 읊조렸다.
 “아니, 필요한 건 독기뿐이다.”
 
 삼류낭인 서른.
 칠대 제자로 꾸려진 이류무인 스물.
 이들의 우두머리이자 낭아대(狼牙隊)의 말석인 십이대의 부대주인 일류 무인 한 명.
 총합 쉰하나.
 새로 합류된 청년 장무린까지 치면 쉰둘이겠다.
 이번 월야행에 꾸려진 인원수는 제법 괜찮은 수준에 속했다.
 자그마치 낭아방(狼牙幇)이 야행자를 모집하였다. 이곳 호곡성(狐谷城)에서 제법 방귀깨나 뀐다는 방파였기에, 삼류낭인들의 얼굴엔 두려움 대신 자신감이 들어찼다.
 “이번 월야행에선 돈푼 꽤나 만지겠어.”
 “그러게, 한몫 두둑이 잡을 정도로 숫자도 적당하고. 행선지가 여우골이면 멀지도 않아 그리 큰 위험도 없겠고 말이야.”
 “하긴, 여우골에서 나오는 내단(內丹)은 연단술사에게 재연단을 부탁해도 값이 나갈 정도로 괜찮다지, 아마.”
 “이성(二成) 급이니까. 축기를 할 수 있을 정도라더군. 잘하면 삼성급까지 구할 수 있다는 소문이 있고.”
 “그야말로 대박이군. 일성 급은 불순물이 많아서 위험하다고 하던데. 이성도 모자라 삼성이라니, 그만큼 위험하단 소리겠지? 근데 내가 어제 들은 바로는, 구성(九成)급이 있을지도 모른다던데?”
 “뭐? 그 정도면 이미 호곡성에 재앙이 닥치고도 남지. 말도 안 되네.”
 면박을 준 낭인은 옆에 있던 장무린에게 말 걸려다가, 손목에 새겨진 문신을 발견하고 말을 말았다. 액받이로 쓸 귀휴 중인 장기복역수였다.
 “…….”
 장무린은 아직 열리지 않은 성문을 바라보고 있었다.
 거대한 화톳불이 일렁이는 성문 앞.
 그곳에서 낭아대 십이대의 부대주이자 일류 무인인 구종학이 호곡성 문지기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문지기가 건승을 빌어주는 소리가 들려왔다.
 “부디 이번 월야행에서 좋은 성과 있으시길 바랍니다.”
 “당연하지. 이번 월야행에 낭아방은 아주 큰 성과를 거둘 거네.”
 “예, 성주님께서도 기대감이 크다 들었습니다. 이번 월야행의 보고를 누구보다 기다리고 계시겠지요.”
 “후후, 걱정 붙들어 매시라고 전해주게. 반드시 좋은 소식을 갖고 올 터이니.”
 “낭아방인데 여부가 있겠습니까? 매번 성벽 경계에 칠대 제자분들을 지원해주셔서 감사해도 모자를 지경인데요.”
 “어디 불철주야 눈에 불을 켜고 있는 병사들의 노고만 하겠는가.”
 “말씀만이라도 감사합니다.”
 “내 이번 월야행이 잘 끝나면 두둑이 한턱내겠네.”
 문지기도 슬쩍 따라 웃고는 지켜보던 위병들에게 손짓을 보냈다.
 “성문을 열거라.”
 “예.”
 위병들은 긴장한 얼굴로 절도있게 움직였다.
 드드드드드.
 성벽의 문이 서서히 열리자, 멀지 않은 곳에 늘어선 집들에서 숨을 삼키는 소리가 들려왔다. 간간이 들려오던 애 우는 소리도 더는 들려오지 않았다.
 거리엔 월야행에 나갈 인원들을 제외하고 인적이 없었다.
 그 괴괴한 침묵 가운데 성문이 사람 서넛 지나갈 길을 내었다.
 휘오오오.
 그 틈 사이로 새어 들어오는 음산한 바람 소리.
 구슬피 우는 호곡성(號哭聲)처럼 들렸다.
 위병들은 손아귀에 움켜쥔 창을 더욱 세게 잡았다. 땀으로 흥건해졌는지 제 관복에 손을 닦고는 도로 잡는 이들도 있었다.
 문지기가 구종학에게 포권을 취했다.
 “그럼 무운을 빌겠습니다.”
 “고맙네.”
 희미하게 웃어준 구종학은 칠대 제자들에게 손을 흔들어줬다.
 화답이라도 하듯이 칠대 제자들이 낭인들을 다독였다.
 “자자, 어서 움직이게들! 오늘 단단히 한몫 잡아야지 않겠나?”
 “내일이 오면 기방에서 원 없이 마시고, 기녀들을 떡 주무르듯이 주무를 수 있게 해주겠네.”
 낭인들은 오오! 거리며 화답했다.
 한눈에 봐도 강해 보이는 낭아방의 칠대 제자들과 부대주 구종학이라면.
 여우골의 앞마당 정도는 무난했다.
 월야행.
 달밤에 길을 내어간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었다.
 적당한 긴장감이 피어오른 낭인을 비롯한 야행자들은 손에 횃불을 들었다.
 “…….”
 장무린도 그들을 따라 횃불을 들었다. 그리고 제 품속의 비수들과 뇌옥의 장한이 말해줬던 장소에서 찾아온 걸 매만졌다.
 -아무도 믿지 말거라.
 뇌옥에서 자신을 살아남을 수 있도록 가르쳐줬던 장한의 말이 음산한 바람 소리와 함께 어우러졌다.
 쿵쾅쿵쾅.
 해서 도움이 될지 모르지만, 검병마저 움켜쥐었다.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심장이 요동치다 못해 입 밖으로 뛰쳐나올 것만 같았다.
 첫 월야행.
 장무린은 더는 강호인의 밤이 아닌 곳으로 첫발을 내디뎠다.
 
 ***
 
 [아아.]
 [으음. 상공 어서 이리로.]
 야릇한 비음 섞인 교성들이 들려왔다.
 반 시진을 쉼 없이 내달려 숲으로 들어서자마자 벌어진 소란이었다.
 피 끓는 사내들의 귓가를 잡아끌다 못해 발길마저 끄는 교성들이 끝이 아니다.
 부스럭부스럭.
 어둠 속의 수풀이 언뜻 헤쳐지자 달빛 아래 눈부신 나신의 여인들이 보였다. 비소를 가리지도 않은 여인들이 애달픈 얼굴로 그들에게 손짓했다.
 “야행유녀(夜行遊女)다. 설마 아랫도리 간수 못 하는 넋 나간 놈들은 없겠지?”
 “예.”
 구종학의 싸늘한 외침에 칠대 제자들은 당연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낭인들은 아니었다. 얼굴이 벌겋게 상기된 채 나신들에서 시선을 못 뗐다.
 한심한 것들.
 고작 일성급인 야행유녀에게 정신이 팔리다니.
 “정신 차려라!”
 구종학의 내력이 담긴 일갈에 그제야 낭인들이 퍼뜩 고개를 돌렸다.
 제 몸을 연신 주무르며 손짓해보지만, 낭인들은 벌게진 얼굴로 시선을 피할 뿐이다. 야행유녀들이 안타깝다는 듯이 입술을 혀로 핥아댔다.
 [흐윽, 상공.]
 영롱한 눈물마저 내비치는 교성은 어지간한 철석간장의 사내들이라도 시선을 돌리게 하는 힘이 있었다.
 대놓고는 아니어도 흘끗거리며 훔쳐보는 낭인들이 그러했다. 못해도 몇몇은 이미 회가 동한 듯이 아랫도리가 두둑해졌다.
 하지만 서슬 퍼런 눈길로 구종학과 칠대 제자들이 지켜보고 있어서 감히 발길을 옮기지 못했다.
 스릉.
 “정기가 고갈되어 죽고 싶다면 말리진 않겠으나, 월야행 중이다. 대열을 이탈하는 놈이 있다면 단박에 목을 쳐주겠다.”
 검을 뽑고 협박을 해서야 겨우 알아듣는 눈치다.
 칠대 제자 중 유일한 여인인 단이령은 경멸에 찬 눈초리로 쏘아봤다.
 “하여간 낭인들이란, 무공을 익힌 무인이라면 당연히 자제력이 뛰어나야 한데 한심해.”
 안 어울리게 혀까지 차던 단이령의 눈빛에 이채가 흘렀다.
 경공술의 강행군에 뒤처지지 않고 제법 따라오던 한 청년에 눈길이 머문 것이다.
 이번 여우골에 들어서자마자 액받이로 쓰일 청년이라고 했다.
 “안타까워.”
 준수한 외모도 그렇고, 낭인들과 다른 깊은 눈빛이 마음에 적잖은 파문을 불러일으켰다.
 “뭐가 안타까워?”
 칠대 제자 중 맏이인 구장익이었다. 구종학을 숙부로 둔 자인데, 요즘 들어 단이령에 눈독을 들이는 중이다. 하니 단이령이 무슨 말만 하면 끼어들었다.
 “아무것도 아니에요, 사형.”
 단이령은 귀찮다는 듯이 냉랭하게 대꾸했다.
 구장익은 그 태도가 몹시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어쩌겠나. 관심 있는 쪽은 그녀가 아니라 자신인데.
 야멸차게 대꾸도 해주지 않은 것만 해도 어디인가.
 “사매, 이번이 첫 월야행이지?”
 “알면서 뭘 물어요.”
 단이령은 짤막하게 쏘아주고는 쳐다도 안 봤다.
 구장익은 이어갈 말을 찾지 못했다. 하고 다니는 난잡한 행실에 비해 여인과의 대화는 영 숙맥인지 얼굴만 붉히고 있었다.
 단이령은 코웃음을 치고는 다시 선두 쪽으로 발길을 돌렸다.
 마침 장무린이란 청년도 선두 쪽으로 걸음을 옮기는 중이었다.
 단이령은 말이라도 한 번 붙여볼 요량에 입술을 뗐다.
 “얘, 너 몇 살이니?”
 “……열일곱이요.”
 장무린은 흘끗 단이령을 보고는 짤막하게 대꾸했다. 선두에 오니 긴장한 얼굴로 주위를 둘러보기 시작하였다.
 여우골이 머지않은 듯 음습한 공기의 밀도가 짙어지고 있었다.
 “흐음.”
 꽤 반반한 외모 덕에 칠대 제자들의 관심을 한몸에 받았던 그녀였다. 그 신선한 반응에 기분이 나쁘기보다, 호기심이 생겨났다.
 “이번에 네가 액받이니? 월야행은 처음이고? 난 단이령이라고 하는데, 넌 이름이 뭐니?”
 단이령은 대화의 물꼬를 트려고 알면서도 질문을 퍼부었다.
 장무린은 부담스러워했지만, 마지막 물음에 대한 답만 해줬다.
 “장무린.”
 “이름도 멋있네. 아직 도착까지 시간 좀 남았는데, 우리 얘기 좀 해.”
 빠르게 재잘대는 그녀의 목소리에 칠대 제자들이 피식거렸다. 뒤에서 구장익이 씨근덕거리는 얼굴로 단이령과 장무린을 지켜봐서다.
 단이령은 구장익을 조금도 신경 쓰지 않았다.
 그런 단이령을 장무린도 신경 쓰지 않았고.
 굳은 표정을 보아하니, 어두컴컴한 숲 속 저편에서 뭐가 튀어나올지 잔뜩 긴장한 듯 보였다.
 “얘는 신장은 나보다 큰데 겁이 많구나? 그렇게 주위가 신경 쓰여? 여긴 야행유녀들 외엔 위협이 될 만한 게 없는데 말이야. 불에 눈 멀까 봐 다가오지 못하는 조무래기들뿐이라고.”
 단이령은 장무린과 보폭을 맞추며 속삭였다.
 낭인들은 그걸 매우 부러운 눈초리로 봤다.
 구장익은 말할 것도 없었다. 적의마저 띈 눈초리로 노려보는 중이다.
 장무린은 아까부터 옆에서 떠드는 그녀가 귀찮았다. 그래도 월야행을 위해선 대충 대꾸는 해줘야 했다.
 “소저에겐 위협이 되지 않겠지만, 본인에겐 아니오.”
 나지막한 목소리가 참 듣기 좋다는 생각을 하며 단이령은 싱긋 웃었다.
 “왜?”
 “조무래기니까 그렇소.”
 “흠, 지켜보니깐 야행유녀들 정도에겐 눈길조차 안 줄 정도로 침착하던데.”
 “실력과는 별개의 문제요.”
 “하긴, 그래서 그렇게 안절부절못하는 거니?”
 “혈구(血狗)와 교토(狡兎)들이 야행유녀 근처에서 머무른다고 들었소.”
 그러니 사주경계는 당연한데.
 그래 봐야 일성급 야행수다.
 “그깟 조무래기들은 식후 거리도 안 되지. 저기 옆에서 틈틈이 기회를 엿보는 야행유녀들보다 좀 더 강하달까?”
 [하아, 장무린 공자님 저 좀 어떻게 해주세요. 몸이 너무 뜨거워요. 옆의 젖비린내나는 계집보다는 소녀가 나을 거예요.]
 음탕한 야행유녀의 조롱에 단이령이 눈을 매섭게 떴다.
 휘휙!
 구리동전 두 개가 빠르게 쏘아졌다.
 [아, 아악! 상공, 도와주세요.]
 여인이 상처 입은 신음성을 내며 헐떡였다.
 휙.
 관심이 절로 가는 소리에 낭인 중 하나가 못 참고 그쪽으로 뛰어들었다. 음심이 동한 것도 있었지만, 그보다 중상을 입었을 야행유녀의 배를 갈라낼 작정이었다. 오십 냥인 일성 급 내단에 욕심을 낸 것이다.
 횃불을 들었다지만 위험하다.
 단이령이 대경실색했다. 쫓아내려고 위협을 가한 정도에 불과한 공격이었다.
 “안 돼, 멈춰요!”
 “놔둬라.”
 일축한 구종학은 행렬을 계속해서 이끌었다.
 [상공!]
 기쁜 내색이 담긴 애절한 목소리와 함께 으르렁거림이 터져 나왔다.
 커허엉, 컹컹!
 까드득, 까드득.
 “흐아아악, 컥, 커헉!”
 뛰어들었던 낭인이 듣기만 해도 섬뜩해지는 비명을 내질렀다.
 아니나 다를까.
 혈구와 교토들이 야행유녀의 근처에 잠복하고 있었다.
 낭인은 놈들에게 산채로 온몸을 뜯어먹히는 중이었는지, 연신 살려달라며 비명을 질러댔다.
 아연실색한 얼굴들로 그 수풀 속을 보는 낭인들의 귀를 후벼 파는 목소리가 있었다.
 “이제 더는 속아 넘어가는 멍청한 놈은 없으리라, 믿겠다.”
 마치 본보기라는 듯이 말하는 구종학의 냉랭한 목소리였다.
 낭인들은 긴장한 얼굴로 고개만 끄덕였다.
 “앞으론 경거망동하지 말거라.”
 구종학이 단이령을 질책했다.
 “……네.”
 단이령은 자책 어린 눈빛으로 낭인이 들어간 수풀을 일별하고는, 고개를 숙였다.
 
 장무린은 밤하늘을 올려다봤다.
 그믐달.
 다행히도 오늘은 음기가 가장 약한 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장무린은 긴장을 지우지 못했다.
 얼마나 걸었을까.
 “정지.”
 구종학의 목소리에 행렬이 멈췄다.
 화르륵.
 횃불을 앞으로 내민 구종학에 컴컴한 어둠이 조금이나마 가셨다.
 “진무(塵霧)다.”
 넘실거리는 짙은 연기와 안개.
 저너머는 마치 강호와 단절된 것처럼 보였다.
 진무를 본 장무린의 첫 느낌은 가슴을 짓누르는 불길함이었다.
 구종학이 밤하늘을 올려다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그나마 그믐달이라 다행이었다.
 “여우골의 기문진(奇門陣)이다. 이제부터가 진짜지.”
 그러면서 뒤를 돌아봤다.
 하나같이 긴장한 얼굴빛이 역력했다.
 경험이 있는 칠대 제자 두엇은 제법 여유로웠지만, 처음 월야행을 따라온 단이령은 아니었다.
 퍼렇게 질린 입술.
 지독한 음기에 노출된 것이다.
 “운기조식 하거라.”
 구종학의 명령에 단이령을 비롯한 칠대 제자는 서둘러 운기를 시작했다.
 낭인들도 따라 하려고 했지만, 구종학의 일갈에 그럴 수가 없었다.
 “죽고 싶지 않으면 호법을 서도록. 네놈들이 횃불을 놓는 순간, 지옥을 맛보게 될 것이다.”
 그게 구종학에 의해서가 아니라는 건 누구나 잘 알았다.
 음기에 침습 당한 몇몇 낭인들이 나직이 불만을 터트렸지만, 대부분은 군말 없이 따랐다.
 칠대 제자들이 제대로 된 몸 상태가 되어야 여우골에서 살아 돌아올 가능성이 높아진다.
 장무린도 운기조식을 취하는 칠대 제자들의 맨 앞에 호법을 섰다.
 구종학의 시선이 잠시 장무린에게 머물렀다.
 액받이로 데려온 호리호리한 청년.
 “두렵지 않으냐?”
 그답지 않게 질문까지 했다.
 장무린은 슬쩍 고개를 돌렸다. 친절을 베풀만한 이가 아니어서 눈을 마주친 것이다. 평소라면 호통을 듣고도 남을 행동이나, 구종학은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그건 그가 대인의 풍모를 갖춰서가 아니었다.
 마지막이나 다름없으니 베푸는 아량.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다.
 장무린은 냉랭한 눈동자 속에 흐르는 무언가를 잡아챘다.
 무정(無情).
 인자한 말투와 달리 그 눈동자엔 아무것도 담겨있지 않았다.
 “두렵습니다.”
 장무린은 침착한 표정과 다른 대답을 하였다.
 솔직한 대답에 구종학의 눈빛이 반짝였지만, 이내 신경을 껐다. 정을 붙일 만한 이도 아니었고, 잠깐의 무료함을 달래기 위한 관심에 불과했다.
 장무린도 그걸 아는지 전면만 바라봤다.
 진무.
 손을 대볼까도 했지만, 장한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
 -닿는 순간 시작된다.
 구종학은 날카로운 눈빛으로 장무린을 주시했다. 혹시라도 호기심에 손을 뻗을까 봐 저어된 것이다. 만약 손을 뻗었다면 단숨에 손모가지를 잘라냈을 터.
 액받이는 두 발만 있어도 가능했다.
 그런 내심을 아는지 모르는지 장무린은 고요한 눈빛으로 진무만 눈에 담았다.
 음탕한 소리를 일삼던 야행유녀와 기이한 소리를 내던 혈구와 교토들이 만들어내던 소음도 점차 사라졌다.
 잠시 뒤.
 운기조식을 마친 칠대 제자들이 하나 둘 일어났다.
 음기를 몰아낸 두 눈에 정광이 넘쳐 흘렀다.
 최상의 몸 상태를 만들자, 낭인들이 막 주저앉으려고 했다.
 “……!”
 순간 장무린은 자신의 뒷목을 잡아채는 손길에 고개를 돌렸다.
 구종학이었다.
 “들어가자마자 오른쪽으로 원을 그리며 크게 돌아라.”
 휙!
 장무린은 대답할 새도 없이 기문진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그 순간.
 진무가 그들을 삼키려는 듯 서서히 다가왔다.
 구종학은 행렬을 뒤로 후퇴시켰다.
 아직 좀 더 기다려야 한다.
 창!
 물러난 지 반 각이 채 되지 않아서야, 구종학이 검을 뽑았다.
 “월야행의 시작이다.”
 차차차차차창!
 구종학의 읊조림과 함께 칠대 제자들은 하나같이 검을 빼어 들었다.
 낭인들도 서둘러 병장기를 꺼냈다.
 진무가 그들을 덮치자, 곧 그들의 눈앞이 아찔해졌다.
 # 第 二 章
 
 가장 먼저 기문진 안으로 들어온 장무린의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상전벽해(桑田碧海).
 이 말에 딱 맞는 전혀 다른 풍경이 눈앞에 펼쳐졌다.
 땅이 변하고, 수풀이 사라졌다. 너른한 앞마당의 오른쪽엔 빽빽이 들어선 나무숲이 보였다.
 음산한 바람 속에 드러난 호젓한 골짜기는 진무에 가려졌다고 하기엔 너무나도 웅장한 크기다.
 기문진 안은 완벽히 다른 세상이었다.
 그믐달인 바깥과 달리.
 밤하늘을 수놓는 총총한 별과 붉디붉은 만월 아래의 음산한 골짜기.
 이곳이 바로 여우골이다.
 횃불이 점점 꺼져갔다. 마치 무언가 잔뜩 응축된 농밀함에 먹혀가는 모습이었다.
 캥캥캥.
 멀지 않은 곳에서 들려오는 짐승 소리가 가슴을 두방망이질 쳤다.
 넋 놓고 있을 때가 아니지.
 장무린은 장한의 말을 떠올렸다.
 -첫 월야행에서 네가 할 역할은 단 하나다. 놈들의 이목이 모조리 쏠린 상황에서.
 장무린의 시야에 푸른 귀화들이 하나 둘 보이기 시작했다.
 거리는 오십 여장.
 멀리서도 그 동체가 가늠된다.
 캐르르르.
 여우골의 터줏대감까진 아니어도 주민임은 분명하다.
 그리고 그 주민은 외지인을 증오하면서도 환영했다.
 -도망쳐라. 넌 그들의 사냥감이다.
 장무린은 뇌리로 스쳐 지나가는 장한의 외침에 두 다리에 진기를 보냈다.
 경공술을 펼치려는 것이다.
 속도에 비해 내공소모가 커서 그리 효율적이지 못한 하급 경공술이었다.
 일단 장무린은 속도를 필부보다 조금 빠르게 달릴 작정이었다.
 아슬아슬한 간격을 유지해야 사냥감을 쫓는 사냥꾼들이 더 신이 나지 않겠나.
 타앗.
 대지를 힘차게 밟은 장무린의 신형에 속도가 붙었다.
 자그마치 칠 년.
 그 칠 년 동안 장무린이 익힌 경공술이다. 처음엔 펼치는 게 어설퍼 보였지만, 조금씩 숙련도가 붙었는지 자연스러워지기 시작했다.
 그 모습은 놈들을 자극하는 데 충분했다.
 귀호리(鬼狐狸).
 일반 여우와는 비교도 되지 않는 덩치와 입안에 빼곡히 박혀있는 송곳 같은 이빨들, 설치류나 잡아먹고 살기엔 그 용도의 쓰임이 맞지 않을 것 같다.
 제대로 된 용도는 바로 장무린 정도의 육신을 찢어발기기 위한 것.
 캐캥!
 장무린의 어설픈 움직임에 자극받은 귀호리들이 동료를 불러제꼈다. 그리곤 네 발을 날래게 움직여 쫓았다.
 장무린은 맡은 바 임무에 충실했다. 오른쪽으로 크게 움직이기 시작한 것이다.
 다른 이들도 속속 들어왔지만, 다들 나무나 바위에 은신했다. 그리곤 장무린이 하는 양을 지켜보며 거리가 멀어지길 기다렸다.
 슬쩍 뒤를 바라봐 그들의 위치를 확인한 장무린은 다리에 힘을 주었다.
 -하지만 사냥감이 아니라 몰이꾼이 되어야 한다. 사냥감이 되는 순간, 넌 죽는다.
 눈이 붉게 충혈된 귀호리들이 침을 흘리며 미친 듯이 달려들었다. 그 속도는 어지간한 성인이라면 스무 발짝도 못 가서 잡힐 정도다.
 이성 급이라 하지만, 지금의 장무린에겐 인세의 재앙이라는 구성급 못지않았다.
 생사의 간극.
 장무린은 뒤에서 쫓아오는 귀호리와의 간극이 점점 좁혀져 옴을 느꼈다.
 타타타타탁!
 장무린은 경공술이란 말이 무색한 빠른 달리기에 좀 더 속도를 붙였다.
 숫자는 어느새 열 마리로 불어났다.
 그 소란에 자극받은 귀호리들이 속속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액받이.
 그 모호했던 말은 그저 미끼란 뜻에 불과하다.
 침착, 또 침착이다.
 장무린의 눈빛이 깊게 가라앉았다. 이곳의 지형지물을 처음 보지만, 뇌리에 기억해두며 속도를 좀 더 올렸다.
 “후욱, 후욱!”
 장무린은 그간 열심히 익혀왔던 삼재심법으로 오 년에 가까운 내공을 쌓아왔다.
 이 정도 속도로 소모된다면 반 시진은 버티겠으나, 모여드는 귀호리 수를 보건대, 속도를 더욱 내야 했다. 그러면 이 각이 채 안 돼서 단전이 텅 비고도 남았다.
 애초부터 효율성이 좋지 않은 심법과 경공술이었다.
 불만을 토로할 새가 없다.
 귀호리들을 몰아서 뒤이어 도착한 이들과 최대한 거리를 벌려간다. 장무린이 시간을 버는 동안, 다른 이들은 남은 귀호리를 각개격파해나가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무리 사냥을 즐기는 귀호리들에 둘러싸여 전멸에 가까운 타격을 입게 될 것이다.
 칠대 제자의 피해를 줄이려는 구종학.
 여우골의 앞마당에 서식하는 귀호리의 숫자를 절반가량 줄이는 게 그의 목적이다.
 장무린이 어찌 되는진 전혀 중요치 않았다. 최대한 시간을 끌고, 미끼가 잡혔을 때쯤이면 이미 상황은 끝이다. 이 귀호리들이 장무린을 찢어발기고 귀환했을 땐.
 구종학과 칠대 제자, 낭인들이 기다릴 것이다.
 장무린은 이를 악물다 못해 입술까지 피가 나도록 깨물었다.
 이대로 죽어줄 순 없다.
 캐캥캥!
 하지만 장무린의 속도를 비웃듯이 귀호리들은 머리를 쳐들어 올리며 짖어댔다. 늘어지다 못해 귀밑까지 찢어진 귀호리들의 입매, 툭 불거진 혈안은 재미난 장난감을 발견한 듯이 번뜩였다.
 장무린은 뒤를 흘끗 보고는 검미를 찌푸렸다.
 숫자가 더 늘었다.
 대략 스물.
 합류하는 숫자는 계속해서 늘었다. 벌인 소란에 하나 둘 고개를 내밀었다가 장무린을 발견하고 뒤쫓는 것이다.
 이미 들어 알고 있었지만, 이대로라면 놈들에게 따라잡혀 육신이 갈가리 찢겨 나간다.
 두려움이 치밀어 올랐지만, 그럴수록 내공소모는 심해진다.
 장한이 해준 말을 잊지 말자.
 -내력을 최대한 아끼려면 평정을 유지하고, 지형지물을 이용해야 한다.
 평정 또, 평정이다.
 속으로 되뇐 장무린은 경공술을 펼치면서 지형지물을 빠짐없이 살피고 있었다.
 철퍽, 철퍽!
 그리 넓지 않은 개울물을 헤치며 지나갔다. 수원지는 여우골의 깊숙한 곳이다.
 휘이익!
 귀호리들은 개울물을 아예 뛰어넘었다. 탄력 넘치는 뒷다리는 그들에게 뛰어난 도약력이 있음을 증명해줬다.
 “…….”
 장무린은 그걸 그냥 보아 넘기지 않았다.
 거리를 순식간에 오장으로 좁혔다.
 역시 가지고 노는 게 확실하다는 결론이 내려졌다.
 이대로 뒤를 돌아 허리춤에 찬 철검과 비수 열 자루로 상대할까 했지만, 그것이야말로 자진행위다.
 한 마리도 아닌 스물다섯 아니, 서른 마리로 숫자가 또 늘었다.
 녹슨 철검을 휘둘러보기도 전에 빼곡한 송곳니들에 사지를 뜯기는 게 먼저다.
 “후욱, 훅.”
 숨을 내쉰 장무린의 신형이 살짝 휘청거렸다.
 캥캥캥!
 귀호리들이 바람결에 실려온 후끈한 땀 냄새에 웃는 것만 같았다. 후각이 예민한 놈들답게 장무린이 점점 지쳐간다는 걸 느낀 것이다.
 곧 있을 만찬에 침을 바닥에 수놓는 녀석들도 있었다.
 무리 사냥을 즐긴다는 이성 급 귀호리.
 한 마리당 삼류낭인이라면 둘이 필요하다.
 이류인 낭아방의 칠대 제자라면 두어 마리는 어렵지 않게 잡는다.
 일류라면 둘러싸이지만 않는다는 전제하에 열 이상은 충분히 해치우고도 남았다.
 한데 장무린은 그 삼류낭인에도 못 미쳤다. 서른이 넘는 숫자가 된 귀호리를 상대로 언감생심 칼 한 번 휘두를 생각조차 하면 안 됐다.
 얼마나 달렸을까.
 장무린은 속도를 조금씩 늦추기 시작했다.
 뭔가 숨겨둔 한 수가 있는 걸까?
 따라오던 귀호리들이 킁킁거렸다. 의심 많은 성정답게 좌우까지 살핀다.
 사냥감이 지치기까지 시간이 좀 남는다.
 냄새로 귀호리들은 장무린의 상태를 파악하고 있었다.
 서른이 넘는 귀호리들도 덩달아 속도를 줄였다. 장무린이 품 안에 손을 집어넣었음을 발견한 것이다.
 
 핑!
 번쩍이는 은빛.
 제법 날랜 출수였지만.
 텅.
 귀호리의 빼곡한 송곳니들을 뚫진 못했다.
 캥캥.
 기습이라고 하면 우스운 공격에 귀호리는 비수를 바닥에 뱉었다.
 마치 겨우 이거야?
 라고 보는 듯한 놈의 시선을 볼 새도 없이 장무린은 달리는 중이었다.
 귀호리들이 다시 속도를 올렸다.
 핑!
 그럼 또다시 쏘아지는 은빛.
 텅.
 귀호리는 이를 가볍게 낚아챘다.
 이렇게 반복하기를 수차례.
 남은 비수는 두 자루다.
 귀호리들도 슬슬 지루해졌는지, 속도를 올리기 시작했다. 반항하는 사냥감은 즐겁지만, 이것뿐이라면 의미도 없었다.
 서른이 넘는 숫자도 이젠 마흔 정도가 되더니 더는 늘지도 줄지도 않았다.
 나머진 흥미를 잃은 것이다.
 게다가 남은 놈들의 신경을 거슬리게 하는 일도 생겼다.
 제법 멀리서 풍겨오는 혈향이 코를 자극하였다.
 쫓던 귀호리들의 눈빛이 변했다.
 캐앵캥!
 귀호리들은 서로 돌아보며 짖었다.
 장무린은 최후의 순간이 왔음을 깨달았다.
 타타탁!
 놈들의 발놀림이 빨라졌다.
 장무린은 있는 힘껏 땅을 박찼다. 절반도 안 남은 내공으로는 거리유지만 겨우 가능했다.
 속도를 올리면 좀 더 시간을 끄는 게 가능했지만, 오 장거리는 귀호리들의 도약력이라면 순식간에 좁힐 터다.
 그걸 증명이라도 하듯이.
 파바바박!
 마흔 귀호리가 부채꼴로 쫙 퍼지더니 일제히 땅을 박찼다.
 장무린의 등을 향해서였다.
 그가 품 안에 손을 넣고 있었지만, 뭐가 나올지는 충분히 예상하고도 남는 귀호리들이었다.
 닥칠 만찬에 흥분했다. 침으로 흥건한 입을 쩍― 벌렸다. 단숨에 숨통을 끊어놓을 수도 있지만, 팔다리를 뜯어내고 내장을 끄집어냈을 때 나오는 사냥감의 비명이 먼저였다.
 거리는 일 장.
 이대로라면 장무린은 유흥거리가 되고도 남음이다.
 주르륵.
 달리던 장무린이 느닷없이 경공술을 멈췄다. 그리곤 날아드는 귀호리들과 정면으로 마주했다.
 귀호리들이 의아했지만, 마지막 발악이라고 여겼다.
 휙!
 장무린이 품 안에서 무언가를 제일 앞선 놈에게 던졌다.
 그 귀호리가 이제 그만하라는 듯이 거칠게 낚아챘다.
 장무린의 눈빛이 번뜩이고.
 콰득.
 송곳니로 그걸 물어뜯은 귀호리는 얼굴에 징그러운 주름을 만들어냈다.
 나머지 귀호리들이 장무린의 몸을 물어뜯기 위해 쩍 벌어진 주둥이를 가져갔다.
 그 순간.
 퍼엉!
 장무린의 눈앞에서 터지는 소리와 함께 매캐한 연기가 사방을 메웠다.
 마침 바람도 놈들 쪽으로 불었다.
 장무린은 그 틈을 타 바닥을 굴렀다.
 나려타곤.
 게으른 당나귀가 주인을 골탕먹이기 위해 땅바닥을 구른다 하여 붙여진 치욕적인 회피기술이었다.
 지금의 장무린에겐 최고의 회피기술이다.
 파앙!
 장무린은 거기서 그치지 않고, 구르던 신형을 바로 세워 땅을 박찼다.
 캐캥캥캥!
 후각이 예민한 귀호리들이 거칠게 숨을 토해냈다. 손으로 주둥이를 쓸어내며 괴로워했다. 매캐한 연기의 정체는 정향을 섞은 연막탄이다.
 그것은 만약을 대비하라며 장한이 일러준 곳에서 찾아낸 물건.
 장무린이 지금껏 숨겨둔 최후의 한 수였다.
 살상력은 전무했지만, 시간을 벌었다.
 장무린의 신형은 이미 쑥쑥 나아갔다. 아까보다 더욱 빠른 속도다.
 한참을 캥캥거리던 귀호리들의 눈빛이 달라졌다. 놈에게 유인당했음을 깨달은 것이다.
 가장 후미에 있던 귀호리 하나가 황급히 옆으로 피했다. 그렇기에 정향에 당하지 않았다. 놈이 장무린을 가장 먼저 따라갔다.
 거리는 쉬이 좁혀지지 않는다.
 질주하는 장무린의 등을 노려보는 쭉 찢어진 눈매엔 농밀한 살의만이 담겨 있었다.
 캥캥!
 한 놈, 두 놈이 정신 차리고 쫓자 나머지도 뒤를 따르기 시작했다.
 타앗!
 도약을 써대며 거리를 좁히는 귀호리들.
 장무린은 지금껏 아껴둔 내공을 아낌없이 퍼부었다.
 
 경공술의 속도가 좀 더 빨라졌다. 마지막이라는 생각에 속력을 올리는 데 주저함이 없었다.
 귀호리들의 눈빛이 가늘어졌다. 일부러 자신들이 따라오기 쉽게 최선을 다한 게 아님을 알게 됐다. 그럼에도 귀호리들은 포기하지 않고 열심히 따라붙었다.
 가장 앞서서 따라가고 있는 동료 귀호리가 놈을 거꾸러트리길 바랐다.
 “후우, 후욱!”
 한 놈이 근거리에 따라붙었음을 알아챈 장무린이었지만, 보보엔 조금의 흔들림이 없었다.
 익숙지 않은 지형이라 잠깐의 주저함이 생기고, 그 주저함에 속도가 늦춰져야 했지만, 이젠 그렇지 않았다.
 장무린은 오던 길을 되짚어가는 중이었으니까.
 장무린의 신형이 대각선으로 쭉 빠졌다. 나무가 우거진 숲 쪽으로 향한 것이다.
 휙휙!
 눈에 담아둔 지형지물을 스쳐 지나가며 귀호리들의 도약력에 방해가 되어줄 게 분명하다.
 캥캥캥!
 귀호리들은 영악한 장무린의 행적을 따라가며 분통을 터트렸다.
 우거진 나무들이 들어서 있어서 도약을 쓸 수가 없던 것이다.
 장무린은 이미 최단 경로를 머릿속에 그려놓은 사람처럼, 나무의 사이사이로 물 흐르듯이 지나갔다. 시간이 흐를수록 경공술의 숙련도가 늘어나는 듯했다.
 덕분에 귀호리들과 일정한 거리를 유지할 수 있었다.
 쾅, 캥!
 나무에 어깨를 부딪친 귀호리가 잠시 주춤대더니 다시 뒤쫓는다.
 쾅쾅쾅쾅!
 귀호리들이 나무들을 들이받았다. 우거진 나무를 빠져나가기엔 그들의 덩치가 제법 컸다.
 장무린은 입가에 미소를 지으며 거침없이 질주했다. 이럴 때 호리호리한 체형이 도움될 줄은 그조차도 몰랐다.
 거리는 더욱 벌어졌다.
 “후욱, 훅!”
 이제 슬슬 내공이 고갈됐는지, 단전에서 극심한 허탈감이 찾아왔다.
 쾅쾅쾅쾅!
 성난 귀호리들이 나무에 이리저리 부딪치면서도 미친 듯이 쫓아왔다. 약이 바짝 오른 것이다.
 희번덕거리는 귀호리의 눈동자는 확인할 새도 없었다.
 시간은 벌었지만, 슬슬 한계에 다다랐다.
 가장 가까운 거리에 있던 한 놈도 그걸 눈치채고 끈질기게 따라붙는다.
 아직 본대는 보이지 않았다.
 녹슨 철검과 남은 비수 두 자루는 하등의 도움이 되지 않았다.
 아, 자진하는 방법이 있었지.
 목을 그어버리면 사냥감의 비명을 기대하던 귀호리들은 약이 바짝 오를 것이다.
 그거도 나름의 좋은 생각이었지만, 장무린은 그렇게 나약하지 않았다.
 반드시 살아남아야 한다.
 해서 달리고 또 달렸다.
 오늘만을 위해 칠 년 동안 기다리고 또 기다렸던 것처럼.
 이젠 다리마저 휘청거린다. 아까와 달리 놈들을 유인하기 위한 몸짓이 아니었다.
 “허억, 헉!”
 숨이 거칠어졌다. 경공술의 속도도 느려졌다.
 입에서 단내가 나고, 폐가 제게 아닌 것처럼 더 이상의 공기를 내뱉길 주저했을 때.
 “……!”
 장무린의 눈이 커다래졌다.
 드디어 찾았다.
 같이 월야행에 나섰던 구종학과 칠대 제자들, 그리고 스물밖에 남지 않은 낭인들이 눈에 들어온 것이다.
 마흔에 가까운 귀호리들의 시체가 그들의 발아래 죽어 있었다.
 캥―!
 그리고 귓전으로 들려오는 으르렁거림.
 언제 여기까지!
 장무린은 대경실색했다.
 입을 쩍 벌린 귀호리가 확대됐다. 입천장까지 빼곡히 들어선 송곳니가 보였다.
 제일 끈질기게 따라붙었던 그놈이다. 느려진 장무린의 경공술을 드디어 따라잡은 것이다.
 “조심해!”
 단이령이 장무린과 귀호리를 발견하고 경고성을 토해냈다.
 쉭!
 장무린은 기함할 새도 없이 허리춤의 녹슨 철검을 얼른 뽑았다.
 
 입천장을 찌른 철검.
 쨍그랑!
 귀호리는 그대로 입을 다물어 수수깡처럼 부러트렸다.
 미미한 고통과 저항에 귀호리의 다물리던 입에 찰나의 틈이 생겼다.
 장무린이 이 천재일우의 기회를 놓칠 리 만무했다.
 서둘러 고개를 숙인 장무린.
 머리카락 바로 위로 텁! 소리와 함께 입이 다물렸다.
 만약 저 주둥이에 잡혔으면 얼굴이 꿰뚫리는 고통에 비명을 토해냈으리라.
 미꾸라지처럼 빠져나가는 장무린에 성난 놈의 눈동자가 갑자기 툭 불거졌다.
 휙!
 장무린이 손을 휘둘렀는데, 그 손에 들린 비수가 원인이었다.
 피하고 자시고 하기엔 너무 가까웠고, 귀호리는 사냥감이 이렇게 기민하게 반격해올 줄도 몰랐다.
 퍼억!
 방심이 불러올 대가는 매우 컸다.
 캐앵!
 눈동자가 꿰뚫린 귀호리가 비명을 토해냈다.
 하지만 여기서 끝이 아니었다.
 장무린은 눈동자에 꽂아 넣었던 비수를 지지대 삼아 땅을 박찼다.
 휘익!
 장무린의 신형이 멋들어진 호선을 그리며 귀호리의 뒷목에 올라탔다.
 캥캥!
 당황한 놈이 내지르는 울부짖음, 비수에 꿰뚫린 눈구멍에서 느껴지는 고통으로 말미암은 것이다.
 “아직이다.”
 나직한 읊조림이 끝나기 무섭게 장무린은 품속에 남은 마지막 비수를 반대쪽 눈동자에 꽂아넣었다.
 푸욱, 캐애애앵!
 귀호리가 피눈물을 흘리며 날뛰었다. 목 등에 매달린 놈에 정신을 쏟기엔 두 눈이 터진 고통이 너무나도 끔찍했다. 떨쳐내려고 미친 듯이 내달리기 시작했다.
 그 방향은 본대가 있는 쪽이었다. 눈이 보이지 않은 덕분이다.
 “이럴 수가!”
 장무린을 발견했던 이들도 나지막이 감탄했다.
 그가 보인 기예는 대단치 않았지만, 절체절명의 위기를 기회로 탈바꿈시켰다.
 말 그대로 전화위복.
 어지간한 강심장이 아니고서는 시도조차 할 수 없을 것이다.
 꾸욱.
 장무린은 귀호리의 양쪽 눈을 꿰뚫은 비수 두 자루가 구명의 동아줄인 마냥, 손바닥이 하얘질 정도로 부여잡았다. 양다리는 떨어지지 않기 위해 놈의 목을 단단히 옥죄었다.
 캐애애앵!
 사고가 고통에 마비될 정도였는지, 귀호리는 미친 듯이 내달렸다. 영악한 놈답게 고통에 그리 큰 내성을 지니지 않았다.
 그러니 이성급이겠지.
 장무린은 비수를 고삐 삼아 원하는 방향으로 고개를 틀었다.
 캥캥!
 눈 안쪽을 헤집는 고통에 귀호리는 고개를 틀었고, 신형도 덩달아 틀어졌다.
 “허어.”
 구종학의 눈빛에 이채가 흘렀다.
 찢어발겨서 죽은 줄 알았던 놈이 살아남았다.
 액받이 아니, 몰이꾼의 역할을 하고 죽을 줄 알았는데 말이다.
 옆에서 떨고 있는 삼류낭인보다 못한 실력인데 불구하고, 아직도 목숨을 부지하다니.
 장무린이 탄 귀호리의 뒤로.
 마흔에 가까운 귀호리들이 나무숲에서 속속들이 뛰쳐나왔다.
 단이령도 저 많은 귀호리를 상대로 버티고 있었을 줄은 꿈에도 몰랐는지, 순수하게 감탄했다.
 “정말 대단해.”
 구장익의 눈매가 쭉 찢어졌다. 하지만 감탄하거나 혹은 질시하며 지켜볼 때가 아니었다.
 구종학이 일갈했다.
 “준비하거라!”
 장무린이 끌고 온 마흔의 귀호리들.
 그 시뻘건 눈들이 이젠 그들에게로 향해져 있었다. 연신 골탕 먹은 걸 보상받으려는 듯이 살기로 번뜩였다.
 마흔이면 앞서 잡았던 놈들의 숫자와 동일하다.
 놈들의 돌진을 저지할 벽만 있다면, 칠대 제가들의 피해 없이 잡을 수 있다는 계산이 내려진다.
 구종학이 검을 들었다.
 “낭아대진!”
 말이 끝나기 무섭게 칠대 제자들인 검진을 형성했다.
 낭인들도 그 양옆에 늘어서 병장기를 겨누었다. 덜덜 떨리는 손길과 눈빛이 귀호리의 등에 올라탄 장무린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본대와의 거리는 십여 장.
 기호지세(騎虎之勢)라는 말이 절로 생각난 장무린의 눈빛이 순간 번뜩였다.
 이대로 충돌하면 많은 사상자가 발생할 건 불을 보듯 뻔했다.
 “제길!”
 검진을 형성한 칠대 제자 앞으로, 구종학이 겁먹은 낭인들을 앞세우고 있다.
 낭인들로 일차 저지선을 만들어, 칠대 제자의 피해를 최소한으로 줄이려는 것이다.
 촤악!
 반항하는 낭인의 목을 베기까지 한다.
 장무린의 눈빛이 깊게 가라앉았다. 생각 같아서는 귀호리를 도약하게 해서 낭인들을 뛰어넘어 칠대 제자를 치고 싶었지만, 생각으로만 그쳐야 했다.
 남은 거리는 오 장.
 뒤따르며 쫓아오는 놈들과의 거리도 더욱 가까워졌다.
 이젠 놈들이 도약해서 물어뜯을 만한 거리다.
 마침 그러려는 듯이 귀호리들의 일부가 땅을 박찼다.
 열이 넘는 귀호리가 장무린을 낚아채려는 순간.
 장무린은 왼쪽 손에 힘을 꽉! 주어 당겼다.
 캐앵!
 타고 있는 귀호리가 비명을 질렀다. 고개가 비틀리자 달리던 신형이 그대로 엎어지고 있었다.
 장무린도 땅바닥에 놈과 어우러져 큰 부상을 입을 수도 있었지만.
 그런 바보는 아니지.
 파앙!
 넘어지는 귀호리의 등을 지지대 삼아 마지막 남은 진기를 운용했다.
 휘이익!
 시위에 잰 화살처럼 날아간 장무린의 신형.
 캐륵.
 도약해오던 귀호리들이 날아오른 장무린을 물어뜯으려고 했지만.
 장무린은 간발의 차로 두 다리를 오므렸다.
 텁, 텁, 텁!
 빈 허공만 헛되이 물어뜯은 놈들의 허망함 속에 뒤섞인 분노.
 장무린은 그 오므린 주둥이를 다시 한 번 박찼다.
 캥!
 졸지에 주둥이를 얻어맞아 지지대가 된 귀호리가 그대로 나뒹굴었다.
 갑자기 바닥을 나뒹군 동료를 피해 가는 놈들도 있었지만, 대개는 속도를 늦춰야 했다.
 그 반면에 장무린의 신형은 속도가 붙었다.
 “와아!”
 낭인들이 적잖이 감탄하고, 단이령도 커진 눈망울로 휘릭― 날아오는 장무린의 신형을 담았다.
 낭인들의 시선과 낭아대진을 형성한 칠대 제자들의 감탄 어린 시선을 받으며 넘어간 장무린이 흙바닥에 주르륵― 밀렸다.
 멋들어진 착지와 함께 미끄러지듯이 제동을 건 장무린은 소리쳤다.
 “온다!”
 캐르르!
 선두에서 넘어진 귀호리들을 피해오느라 속도가 늦춰진 놈들이 으르렁거렸다.
 낭인들이 서둘러 진기를 끌어올렸다.
 그리고 일제히 달려드는 귀호리들을 향해 병장기를 있는 힘껏 휘둘렀다.
 퍼버버버벅!
 낭인들은 죽기 살기로 병장기로 놈들을 후려쳤다.
 깨갱, 깨갱!
 병장기에 제대로 얻어맞은 놈들은 폭삭 주저앉았고.
 “크아아악!”
 손발이 늦은 낭인들은 그대로 귀호리들에게 물어 뜯겼다.
 그래도 한칼 있는 낭인들 덕분에 귀호리들의 돌진을 힘겹게 막아낸 것이다.
 그 찰나의 순간.
 구종학이 손을 들며 소리쳤다.
 “진격!”
 휘휘휘휘휙!
 칠대 제자 스무 명이 낭인들과 뒤엉킨 귀호리들을 일제히 뛰어넘었다.
 귀호리들의 당혹 어린 혈안과 정광이 흐르는 눈동자들이 교차했다.
 
 삼류와 이류의 차이는 극명히 갈렸다.
 힘겹게 막아내는 삼류 낭인들과 달리 이류 무인인 칠대 제자들은 날뛰었다.
 숫제 물 만난 고기였다.
 캐앵, 캥!
 검광이 번뜩일 때마다 귀호리들은 단말마의 비명과 함께 쓰러졌다.
 개중 제법 반항을 하는 놈들도 있어 칠대 제자들이 위험에 빠질 뻔했지만, 구종학이 빛살처럼 날아와 귀호리의 목을 단칼에 잘라냈다.
 “크아아악!”
 물론 낭인들은 예외였다.
 귀호리에게 물어뜯기며 살려달라고 울부짖어도 구종학은 눈 하나 꿈쩍도 안 했다. 오로지 칠대 제자들을 지원하는 데 여념이 없었다.
 그 덕분에 칠대 제자들은 난전임에도 낭아대진을 형성하여 귀호리들에게 충분히 맞설 수 있게 됐다.
 부족한 부분은 일류 무인인 구종학이 나서서 채워주고, 위기에 빠지면 몸을 날려서 도와줬다.
 퍽, 캥!
 방금도 단이령을 노리던 귀호리가 그대로 나가떨어졌다. 뇌수를 철철 흘리더니 이내 축 늘어진다.
 “조심하거라, 놈들은 영악하다. 정직하게 검초를 펼쳐선 안 된다.”
 “예, 부대주님!”
 단이령은 당차게 대답하고는 자신을 물어뜯으려는 놈의 미간에 일검을 꽂아 넣었다.
 
 캥!
 단단한 두개골을 두부처럼 파고들어 헤집는 검날에 귀호리는 그대로 절명했다. 진기를 불어넣은 검을 당해낼 재간이 없었다.
 촤촤촤촤촥!
 일제히 검을 휘두르는 칠대 제자는 일격에 한 마리씩. 수준이 좀 떨어지면 이 격, 삼 격에 하나씩 차근차근 없애나갔다.
 낭아대진의 효과였다.
 검진조차 형성하지 못한 낭인들은 그러질 못했다.
 그저 제 앞에서 이빨을 들이대는 놈들을 임기응변으로 겨우겨우 막아내는 중이었다.
 “크흑!”
 힘이 부쳤는지 낭인 하나가 그대로 뒤로 밀렸다.
 하나까진 어찌 해보겠지만, 빈틈을 노리고 온 또 다른 한 마리가 이빨을 들이대자 물러나기 바빴다.
 그렇게 생긴 빈틈으로 귀호리 하나가 빠르게 끼어들었다. 막 제 동료의 목을 치려던 낭인의 목줄까지 물어뜯어 버렸다.
 “커허억!”
 단박에 목을 뜯긴 낭인은 그대로 절명했다.
 그걸 본 물러났던 낭인이 파리한 안색으로 보다가, 제 앞으로 다가온 귀호리의 커다란 입에 욕설을 내뱉었다.
 “제기랄.”
 그 또한 귀호리에게 물어뜯겨 유명을 달리하려던 찰나.
 푸욱!
 귀호리의 입천장을 사선으로 뚫고 나오는 검극이 있었다.
 빈틈을 노리는 건 귀호리만이 아니었다. 전력 외로 분류되었던 장무린이 낭인에 정신이 팔린 귀호리를 급습한 것이다.
 캐, 캐액!
 귀호리가 몸부림을 쳤지만, 눈구멍을 통해 뇌까지 꿰뚫린 터라 부르르 떨더니 축 늘어졌다.
 “고, 고맙다.”
 얼굴을 사선으로 가로지르는 검상의 낭인이 저를 구해준 장무린을 바라봤다.
 휙!
 장무린은 대꾸없이 검을 뽑아내고는 위기에 처한 낭인을 돕기 시작했다. 그냥 막무가내로 달려들지 않고, 낭인을 물어뜯으려는 그 순간을 노렸다.
 분명 내력이 달려 팔다리가 후들거리는 와중이었는데도, 전투에 대한 감각이 남다르다는 걸 알 수 있었다.
 그걸 본 구종학이 눈을 빛냈다.
 장무린 덕분에 전황이 좀 더 유리해졌다.
 “하압!”
 낭인들도 장무린의 기습에 힘을 얻었다.
 그리고 장무린이 하는 방법대로 귀호리의 눈을 노리기 시작했다. 힘겹게 두꺼운 가죽을 뚫느니 차라리 목이나 눈을 노리는 게 여러모로 나았다.
 낭인들을 몰아붙이던 귀호리들이 밀려나기 시작했다.
 그리고 낭아대진으로 재미를 톡톡히 봤던 칠대 제자들이 가세하자, 전세는 기울다 못해 거의 끝 무렵에 접어들었다.
 캥!
 마지막 남은 귀호리의 목에 일검을 꽂아 넣은 구종학이 뒤를 돌아봤다.
 칠대 제자들이 거칠게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장무린이 오기 전 잡은 사십 마리에 방금 잡은 사십을 더해서, 자그마치 귀호리 팔십을 잡았다. 이성 급이라고 해도 숫자가 제법 많았으니 지치는 건 당연했다.
 그래도 크게 다친 칠대 제자가 없자 구종학은 엷은 미소를 지었다.
 이번 월야행은 성공적이다.
 칠대 제자들의 경험도 쌓은 데다, 이성급 내단 팔십 개도 획득했다.
 팔면 개당 대략 백 냥씩이니, 약 팔천 냥의 수익을 올린 것이다.
 쌀 한 가마니가 두 냥에 거래되는 시대다.
 “나쁘지 않아.”
 구장익의 지휘 아래 칠대 제자들은 죽은 귀호리들의 내단을 회수하기 시작했다. 간혹 숨통이 붙어있는 놈들도 있었지만, 단박에 숨통을 끊어줬다.
 정확히 팔십 개의 내단이 모였다.
 살아남은 낭인들은 기대 어린 눈빛을 보였다. 서른 명 중 열 명이 살아남았다. 거기에 장무린까지 더하면 열한 명이었다.
 구종학은 약속한 반 몫 대신 한 몫으로 가격을 쳐줬다.
 “한 사람당 백 냥씩 주겠다.”
 괜찮은 대가였지만, 마뜩찮은 시선들을 내비쳤다.
 구종학은 피식 웃고는 귀호리의 시체를 가리켰다.
 “저 부산물들은 마음대로 하고.”
 “와아아아!”
 살아남은 낭인들이 환호했다. 벗긴 가죽과 힘줄, 이빨을 팔면 돈을 제법 만질 수 있었다.
 양이 제법 되니, 못해도 한 사람당 백 냥은 더 벌 수 있으리라.
 구종학은 콧노래를 부르며 부산물을 챙겨내는 낭인들을 뒤로하고 칠대 제자들에게 명을 내렸다.
 “잘 챙기거라.”
 어차피 내단만 있으면 되는 일이었다. 낭아방의 소속된 연단술사가 연단하면 족히 두 배는 벌 수 있다. 물론 돈보다 중요한 건 칠대 제자들의 전력을 끌어올리는 것이었다.
 이번 월야행은 칠대 제자의 경험을 쌓게 해주기 위한 자리였으니까.
 저깟 부산물은 짐일 뿐.
 냉엄한 표정을 짓고 있던 구종학의 시선에 장무린이 들어왔다.
 귀휴 중이었다지.
 지친 표정의 장무린은 운기조식을 취하고 있었다.
 삼재심법.
 그걸 한눈에 알아차린 구종학이었다.
 그런데도 살아남았다.
 제법 싹수가 보이는 놈이란 소리다.
 또한, 장무린이 선두에서 마지막까지 귀호리들의 진격을 방해한 장면도 떠올랐다.
 임기응변도 제법이고, 위기에 빠진 낭인들을 도운 걸 보면, 전세의 흐름을 읽을 줄 안다는 소리다.
 기본 중의 기본인 삼재심법이라면, 다른 심법을 익혀도 무방하다. 낭아방으로 데려가고 싶은 욕심이 생겼다. 죽을 줄 알았던 놈이 살아남은 것도 마음에 들었고, 미끼주제에 몰이꾼 역할을 훌륭히 수행해냈다. 익힌 무공은 형편없는데 말이다.
 거기다 어리기까지 하다.
 약관도 안 된 장무린을 쳐다보는 눈길에 탐욕이 서렸다.
 자신의 지도로 잘 단련시킨다면 이류까지 넘볼 수 있을 성싶었다.
 진기를 어느 정도 갈무리한 장무린이 주위를 둘러봤다. 하지만 낭인들처럼 부산물에는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고요히 서서 주위를 둘러보며 경계하는 중이었다.
 “근골이 좋으나, 더 좋은 건 정신력이군.”
 구종학은 침착한 태도를 보이는 장무린이 보면 볼수록 마음에 들었다. 그러나 구종학은 그 마음을 접어야 함을 잘 알았다.
 “아깝군.”
 전열을 정비하는 칠대 제자들을 뒤로한 구종학이 장무린에게 다가갔다.
 장무린이 고개를 돌렸다.
 구종학이 짐짓 엄한 표정을 지었다.
 “어째서 부산물을 챙기지 않는 것이냐?”
 “지금은 짐일 뿐입니다.”
 “…….”
 구종학은 그 말에 눈을 가늘게 떴다. 사리분별력이 뛰어난 놈이었다.
 희희낙락하는 낭인들과 달리 이번 월야행이 이게 다가 아님을 눈치챈 듯 보였다.
 기꺼운 마음이 들었다.
 구종학은 한 번 더 물어봤다.
 “내단에 욕심이 나느냐?”
 “…….”
 장무린의 시선이 와 닿았다.
 구종학은 그 시선에서 담긴 기이한 열망을 읽어 들였다.
 돈에 대한 열망이 아닌 강한 힘.
 무인으로서 강해지고 싶다는 열망이 절로 느껴졌다.
 나쁘지 않아.
 해서 구종학은 품속에서 책자 하나를 던져줬다.
 그걸 받아든 장무린의 눈빛이 달라졌다.
 낭아풍운보(狼牙風雲步).
 상급은 아니어도 지금 익히고 있는 경공술에 비할 순 없었다. 정진한다면 경공술만큼은 일류에 준하게 될 수 있었다. 지금 가장 장무린에게 필요한 것이었다.
 “본 방의 무공이다. 기본공인 삼재심법으로도 운용이 가능하지. 주어진 시간은 반 시진.”
 “……!”
 장무린은 화들짝 놀랐다.
 “정확히 반 시진 뒤에 그 책자를 돌려주도록.”
 그리 말하고는 구종학은 몸을 돌리며 히죽 웃었다.
 “어디 네놈 스스로 얻을 수 있다면 얻어 보거라. 조언은 기대하지 말고.”
 장무린은 다급히 고개를 숙이고 낭아풍운보를 탐독했다.
 구종학은 차가운 시선을 보냈다.
 멍청한 놈이면 볼 것도 없었다.
 하지만 재능이 있다면.
 큰 쓰임이 있을 거다.
 # 第 三 章
 
 약간의 휴식시간.
 구종학의 호법 아래 운기조식을 마친 칠대 제자들이 하나둘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낭인들도 부산물을 빠짐없이 챙겼다.
 등에 한 아름씩 짐보따리를 든 그들에 칠대 제자들이 눈살을 찌푸렸다. 고약한 냄새에 코가 마비되는 것 같았다.
 하지만 그들의 희생이 있었기에 이번 월야행은 성공적으로 마칠 수 있었다.
 대놓고 뭐라 하는 이들은 없었지만, 낭인들의 주위는 피했다.
 낭인들도 그 이유를 알기에 크게 개의치 않았다. 어서 빨리 이 부산물들을 가지고 돌아갈 생각밖에 없었다.
 구종학이 단이령에게 뭐라 명을 내리자, 그녀의 봉목이 반짝였다.
 종종걸음으로 장무린에게 다가가는 모습에 칠대 제자들의 시선이 쏠렸다.
 그 발걸음 소리에도 장무린은 책자를 탐독하느라 여념이 없었다.
 낭아풍운보.
 반 시진 안에 책자 하나를 통으로 외우는 건 결코, 쉽지 않았다. 아니, 불가능했다. 어지간한 기재가 아니고서는 낭아풍운보의 요체를 단박에 파악하기 어려웠다.
 익혀본 단이령이 누구보다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해서 좀 더 기다려줬다. 약간의 말미를 주고 싶기도 했고, 무언가에 집중하는 장무린의 단정한 얼굴이 가슴에 묘한 울림을 주었다.
 내가 왜 이러지.
 단이령은 그 수많은 귀호리에게 쫓기면서도 흐트러짐이 없던 장무린의 모습을 떠올려봤다. 이류에 오른 그녀 아니, 칠대 제자들이라도 그런 모습을 보이긴 어려웠다.
 그림처럼 귀호리의 목마를 타던 날랜 움직임이라니.
 것도 그녀보다 한참 떨어지는 무위로 벌인 일이다.
 과연 자신이라면, 그 와중에 그런 기지를 발휘할 수 있었을까?
 어느 정도 가능하다는 결론은 내려졌으나, 그래도 장무린의 활약이 퇴색되진 않았다.
 무사해서 다행이야.
 그녀가 줄곧 장무린의 앳된 얼굴에서 시선을 떼지 않았음을 모두가 봤다.
 들뜬 표정과 설렘이 느껴지는 뒷모습은 칠대 제자들은 어느 정도 감을 잡았다. 단이령의 가족사를 떠올린 것이다.
 한 살 터울의 남동생이 있었다지.
 이를 알 리 없는 한 남자는 질시부터 했다.
 구장익은 얼굴빛이 붉으락푸르락해져 있었다.
 “사매!”
 못된 눈으로 흘기며 불러 젖혔다.
 그제야 동상이몽에 젖어 있다가, 퍼뜩 정신을 차린 단이령과 장무린이었다.
 단이령은 자신이 온 지도 몰랐다는 표정을 한 장무린을 향해 배시시 웃었다.
 장무린은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벌써 시간이 다 됐군.”
 “좀 더 봐도 돼.”
 단이령은 내친김에 좀 더 시간을 끌어볼 심산이었다. 꾀를 부리기 위해 머리를 굴리려는데.
 장무린은 책자를 내밀고 있었다.
 “여깄소.”
 “응? 더 봐도 된다니까.”
 “약속은 지켜지라고 있는 거니까. 이미 충분한 배려를 받았소.”
 “좀 더 볼 걸 하고, 나중에 후회하지 마.”
 단이령은 쌀쌀맞은 대답과 달리 상기된 얼굴로 낭아풍운보를 받았다.
 구종학은 장무린이 미련 없이 건네는 모습에 의외라는 시선을 보냈다. 단이령이 꾀를 부리면 은근슬쩍 넘어가 줄 의향이 있었던 그다.
 하지만 놈은 그러지 않았다.
 그게 제법 마음에 들었다.
 마음에 든 건 구종학만이 아니었는지, 단이령은 설레는 표정으로 돌아왔다.
 단이령의 관심이 지나치다 여긴 칠대 제자들이 매서운 시선으로 장무린을 노려봤다.
 장무린은 얼굴이 따가울 새도 없었다. 자신이 읽은 낭아풍운보를 되새기는 중이었다.
 하면 되새긴다는 건 다 외웠다는 뜻인데.
 장무린은 낭아풍운보를 모조리 외웠단 말인가?
 그에 대한 답은 구장익이 해줬다.
 “반 시진 안에 외웠으면 내 손에 장을 지진다.”
 “맞아, 말도 안 되지. 어떻게 낭아풍운보를 반 시진 안에 외워? 만에 하나 외웠다고 쳐도, 외우는 것과 익히는 건 엄연히 차이가 있지. 제깟 놈이 뭘 얼마나 외웠겠어? 몇 장이나 겨우 읽었겠지.”
 다른 칠대 제자가 이죽거렸다.
 
 경공술이란 게 그랬다. 구결을 그저 외웠다고 해서 끝나는 문제가 아니었다. 뼈를 깎는 수련이 동반되어야 했다.
 하지만 그들은 몰랐다.
 장무린은 너른한 수련장이 아닌, 옥중에서 경공술을 익혔음을. 열 사람이 몸을 뉘일 수 있는 어두컴컴한 지옥이나 다름없는 곳에서 말이다.
 욕설과 매질을 서슴지 않는 간수들의 틈바구니에서 익힌 것도 모자라, 이곳에서 펼치기까지 했다.
 그게 말이 돼?
 하지만 그런 말도 안 되는 짓을 장무린은 해냈다. 거기다 귀호리들의 서슬 퍼런 추격에서도 그 어설픈 경공술로 살아남았다.
 심상수련(心象修鍊).
 장무린은 그 지옥 같은 곳에서 오로지 심상수련 만으로 경공술을 익혔다. 장한의 도움이 있었다지만, 그건 정말이지 말도 안 되는 듯하면서도 획기적인 방법이었다.
 그리고 그 방법이 효과가 있는지 없는지는 장무린이 몸소 증명해냈다.
 “…….”
 해서 두 눈을 감은 장무린은 낭아풍운보를 마음속에 그려내는 중이었다.
 그림을 이루는 복잡한 난선과 정신 사납게 하는 구결들.
 놀랍게도 장무린은 낭아풍운보를 모조리 외웠다.
 뒤의 몇 장은 정확히 읽지 못했지만, 이미 뇌리로 옮겨놓은 상태다.
 장무린이 옥중에서 했던 심상수련이 빛을 발한 것이다.
 새삼 장한에 대한 고마움이 무럭무럭 치솟았다.
 그가 아니었다면, 이곳에서 뼈를 묻었을 터 아니, 어쩌면 옥중에서도 살아남지 못했을 거다.
 그곳의 밤은 사람이 미치지 않고서는 견딜 수 없는 곳이니까.
 장무린이 도로 눈을 떴을 때.
 형형한 안광까진 아니더라도, 뭔가 달라졌음을 보이듯이 눈빛까지 깊어져 있었다.
 십성대성 기준으로 봤을 때 낭아풍운보를 삼성 수준까지 이해한 것이다. 즉, 지금껏 써왔던 경공술보다 어려운 수준의 무공인 낭아풍운보를 어느 정도 펼칠 정도가 된다는 소리였다.
 만약 칠대 제자들이 알았다면 말도 안 되는 소리라며 윽박지르고도 남았다. 구종학도 눈에 불을 켜고 거짓을 고하지 말라고 했을 거고.
 마침 구종학이 장무린에게 다가왔다.
 “외우기엔 시간이 적지 않았느냐?”
 묻는 그의 말투만 봐도 알만했다. 반 시진 안에 그걸 외우기란 구종학 기준으로 요원한 일이었다. 그럼에도 그의 눈동자엔 설마 하는 기대감이 엿보였다.
 장무린은 바보가 아니었다.
 장한이 해준 강호의 격언을 떠올렸다.
 -강호에 나가면 자신의 실력은 삼 할 숨겨야 한다. 그게 네놈의 생명을 구해줄 거다.
 이번에도 따른다.
 “능력이 미거하여 다 외우지 못했습니다.”
 “흐음.”
 약간은 실망과 의심이 뒤섞인 눈초리.
 장무린은 그가 좋아할 한 마디를 덧붙였다.
 “하지만 낭아풍운보가 워낙 뛰어난 무학이어서 익힌 경공술이 좀 나아졌습니다.”
 “그래? 무공에 대한 감각이 있긴 하군.”
 “부대주님의 배려 덕분입니다.”
 “허허, 그 정도면 되었다.”
 기껏 베푼 호의가 무위로 돌아가지 않는데다, 자신이 몸담은 낭아방의 무공을 칭찬해주니 흡족한 목소리가 절로 나왔다.
 단이령은 안타까워했지만, 나머지 칠대 제자들은 하나같이 비웃음을 흘렸다.
 언감생심 꿈도 못 꿀 기연을 만나고도 얻지 못한 멍청이라며.
 하지만 그들은 모를 것이다.
 장무린이 낭아풍운보의 요체를 습득한 것도 모자라, 펼칠 수 있다는 걸 말이다.
 구장익은 손에 장을 지져야 했지만.
 고개 숙인 장무린의 번쩍이는 눈빛은 아무도 보질 못했다.
 
 호리병을 닮은 구조의 여우골.
 음산한 두 번째 골짜기를 눈에 담은 구종학이었다. 주위를 둘러보자, 돌아가고 싶어 안달이 난 낭인들의 얼굴이 보였다. 앞마당을 쓸어낸 거에 만족하는 눈치들이었다.
 칠대 제자들도 말은 안 했지만, 내심 그러길 바라는 눈치다.
 이성 급인 귀호리만으로도 전력의 삼분지 일 이상을 잃었다.
 여우골짜기 깊숙한 곳에 사는 삼성급을 사냥하려면 칠대 제자 절반이 희생당할지도 몰랐다. 낭인들은 모조리 전멸당하고도 남았고.
 깊은 여우골짜기는 그야말로 사지(死地)다.
 구종학을 제외한 모두의 얼굴에 말 못한 긴장감이 피어올랐다.
 “저 구 대협, 이제 자정까지 한 시진 남았는데 그만 출발해야 하지 않을까요?”
 한 낭인이 용기 내어 물어왔다. 구종학이 한 행동은 대협이라고 칭할 수 없었지만, 비위를 맞출 수 있다면 무슨 호칭이라도 붙일 수 있었다.
 구종학도 그 호칭이 마음에 들었는지 미소를 지었다.
 “반 시진.”
 “예?”
 “정확히 반 시진 뒤에 출발한다.”
 그 말에 낭인들은 얼굴을 표가 나게 일그러트렸다. 남은 반 시진 동안은 깊은 여우골짜기로 들어간다는 말이기 때문이다.
 칠대 제자들도 내심 실망감이 일었지만, 부대주의 말이었다. 얼른 무장을 정비하기 시작했다.
 이제부터 촌각을 다투게 될 거다.
 구종학은 손짓으로 낭인들을 불러 모았다.
 낭인들이 떨떠름한 얼굴로 짐을 내려놓고 모였다.
 “반 시진, 그 뒤엔 두 배로 몫을 쳐줄 것이다. 그리고 가장 공헌도가 큰 사람에게는 삼성급 내단을 따로 내줄 것이고.”
 “……!”
 상상을 초월하는 보상에 낭인들은 할 말을 잃었다.
 그 정도로 위험한 일이란 생각에 다들 잠시 주저했지만, 두 배의 몫과 삼성급 내단이라는 말이 이성에 파문을 일으켰다.
 그야말로 일확천금이다.
 구종학은 참을성 있게 기다렸다. 아까는 전시라 명령을 듣지 않아 목을 베는 강단을 보였지만, 지금은 그들의 마음을 돌려야 할 때다.
 낭인들이 서로 모여 의견을 나누었다.
 구종학은 그들의 망설임에 방점을 찍어줬다.
 “너희의 역할은 전투가 아니다.”
 “예? 그게 무슨 말씀인지?”
 듣던 중 반가운 소리였는지 처음으로 물었던 낭인이 나섰다.
 구종학은 부드러운 미소까지 띄웠다. 그리곤 장무린을 가리켰다.
 “아까 저 청년이 하는 일을 봤지? 첫 월야행이라던데 임무를 아주 잘해냈지.”
 청년이라는 말에 낭인들이 장무린을 바라봤다.
 자신들보다 어린데다 무공도 약한 귀휴 중인 야행자.
 게다가 첫 월야행이라고 했다.
 “저 청년도 해낸 일을 자네들이라고 못할까?”
 비록 장무린이 기지를 발휘해 자신들을 도와줬다지만, 한 가닥 자존심들은 있는지 못한다는 말은 안 나왔다.
 경공술도, 쌓은 경험과 내력도 자신들이 앞섰으니까.
 장무린은 음울한 눈빛을 해 보였다. 좋지 않은 예감이 엄습했고, 어째서 자신에게 낭아풍운보를 보여줬는지 눈치채서였다.
 구종학은 그런 장무린의 내심을 모르는지 낭인들에게 솔깃한 제안을 했다.
 “저 청년과 함께 한 번 더 수고해주게. 몰이만 잘해줘서 돌아오면, 다 같이 빠져나가도록 내가 직접 나섬세. 아주 간단한 일이지? 그리고 일을 잘 끝마치면 낭아풍운보의 비급을 보여주겠네.”
 낭아방의 무공까지 보여준단다.
 내심 장무린이 봤던 낭아풍운보를 보고 싶었던 낭인들이었다.
 웅성웅성.
 서로 이야기를 나눠 성공 가능성을 점쳐보던 낭인들.
 평소라면 당연히 돌아가자는 이야기가 나왔겠지만, 눈앞의 장무린의 존재가 걸렸다. 전투도 아닌데다가, 도망만 다니며 몰이하면 되는 일이다.
 저 어린 청년도 해낸 일을 자신들이라고 못 할까?
 호승심이 피어오르는 얼굴 밑으로 탐욕의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내심 그들이 다른 선택을 하길 바랐던 장무린이었다.
 이젠 빼도 박도 못하게 됐다. 여기서 그럴 수 없다고 말하는 순간, 제 목이 달아날 건 불을 보듯 뻔했다.
 “하겠소!”
 낭인들의 대표로 한 명이 말하자 나머지 아홉이 고개를 끄덕였다.
 구종학은 기꺼운 얼굴로 그들을 치켜세워줬다.
 “내 호곡성주에게 자네들의 노고를 단단히 일러둠세.”
 대우해주는 말투로 듣기 좋은 소리만 골라 한다.
 낭인들의 허파에 바람이 자연스레 들어갔다.
 구종학은 쇠뿔도 단김에 뺄 듯이 품속에서 미리 준비한 족자를 꺼냈다.
 “여기에 수결들 하게. 자네들의 몫을 제대로 챙겨주겠단 증거가 되어줄 걸세. 아무리 낭아방의 약조가 천금과 같다지만, 자네들은 문서화시키는 게 여러모로 낫겠지?”
 새로 내밀어 진 계약서를 보는 낭인들은 흔쾌히 응했다.
 그렇지 않아도 워낙 큰 보상이라 나중에 딴말하면 어쩌나 싶던 차다.
 불감청이언정 고소원이라.
 낭인들은 족자에 빠짐없이 수결을 마쳤다.
 제법 꼼꼼해 보이는 낭인이 계약서를 살피더니 가장 먼저 수결한 게 컸다. 달리 문제도 없었고, 하는 일에 비해 보상도 컸다.
 마지막 차례인 장무린.
 둘둘.
 구종학은 족자를 말았다. 귀휴 중인 장무린에겐 따로 금전적인 보상을 할 필요가 없어서다.
 부산물이나 내단을 주는 건 구종학의 재량껏 챙겨주면 되었다.
 이를 잘 아는 장무린도 별말 없었다.
 하지만 감언이설은 덧붙여줬다.
 “자네도 월야행이 끝나는 대로 내 따로 무공을 전수해주겠네. 내가 뇌옥의 간수와 친분이 있으니 걱정은 말게.”
 그 말에 반응이 극과 극으로 갈렸다.
 낭인들은 직접 전수해준다는 말에 부러워하는 눈치였고, 칠대 제자들의 얼굴을 울긋불긋하게 변했다. 불만이 턱밑까지 치솟았지만, 감히 구종학의 행사에 끼어들지는 못했다.
 단이령 만이 반기는 눈치였다.
 “정말 잘 됐어.”
 기쁨이 역력한 단이령의 발언에 구장익이 장무린에게 눈알을 부라려댔다.
 장무린은 조금도 기쁘지 않았다.
 기뻐해도 모자라건만, 가만히 있으니 사람들이 의아해했다.
 낭아방의 무공을 전수받는다는 게 어떤 의미인지 모르는 건가 싶었지만, 이어진 장무린의 말엔 하나같이 고개를 끄덕였다.
 “감사합니다, 대협.”
 단조롭기까지 한 인사에 구종학의 눈동자에 이채가 흘렀다. 낭아풍운보를 반 시진만 보고 달라고 한 연유도 이걸 위해서였다.
 모름지기 무인이라면 채 익히지 못한 무공에 강한 미련을 갖기 마련, 게다가 다른 무공까지 전수해준다고 하면 부복하며 기뻐해도 모자랐다.
 낭아방의 무공은 꾸준히 수련하면 일류에 오를 수 있는 무공이었다.
 하물며 삼류낭인보다 못한 처지의 장무린이라면, 제 목숨까지 바치겠단 소리가 절로 나와야 했다.
 그러나 놈은 단정하게 서 있을 뿐이다.
 귀호리의 눈에 꽂혀 있던 비수 두 자루를 회수하고, 이름 모를 낭인의 철검까지 허리춤에 패용한 장무린, 깊은숨을 몰아쉬고는 말했다.
 “잠시 운기조식을 해도 되겠습니까?”
 “그러게.”
 떨떠름한 얼굴로 구종학은 허락했다. 마치 자신의 속내를 들킨 것 같은 기분이었지만, 다른 낭인들도 군말 없이 운기조식에 들어가는 걸 보며 머릿속에서 지워냈다.
 제깟 놈이 어찌 알겠어?
 괘씸한 놈이란 생각을 하며 칠대 제자들을 불러 모았다.
 어떤 방식으로 탐사를 시작할지 설명해주기 시작했다.
 단이령이 자꾸 장무린을 흘끗거려서 몇 번 주의받긴 했지만, 다들 어느 정도 알아들은 눈치였다.
 칠대 제자들도 운기조식에 들어간 구종학의 호법을 섰다.
 그리곤 장무린을 보며 서로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눴다.
 결코, 호의적이지 않은 대화였다.
 단이령이 반발했지만, 이미 한 번 꼬인 심사들이 풀릴 리 만무했다.
 잠시 뒤.
 운기조식을 마친 낭인들과 장무린이 일어났고.
 구종학도 천천히 운기조식을 마쳐갔다.
 장무린은 구종학을 지그시 바라봤다. 그가 한 약속이 지켜질 리 없음을 누구보다 잘 알았다.
 늘 그렇듯.
 -누구도 믿지 말거라.
 장한이 해준 말이 틀리는 법은 없었으니까.
 
 “흐아아악!”
 경공술을 펼치는 와중에 다리를 잡아 뜯기 낭인이 미친 듯이 손을 휘저었다. 손톱이 부러지며 빠지는 것도 인지 못하고 땅바닥을 긁어보지만.
 텁, 텁!
 적면호리(赤面狐狸)의 붉은색 주둥이의 억센 힘을 당해낼 순 없었다. 낭인을 통째로 씹어 삼키려는 놈의 행태에 낭인들은 경공술을 펼치는 와중에도 아연실색했다.
 “사, 살려… 끄르륵!”
 낭인을 산채로 삼킨 커다란 적면호리는 자그마치 삼성급이었다.
 목에서 요동치는 움직임도 잠시.
 송곳니에 머리라도 찔렸는지 아니면, 질식했는지 이내 잠잠해졌다.
 하얗게 질린 얼굴로 뒤를 돌아보던 장무린은 마음을 다잡았다.
 “이, 이건 말도 안 돼.”
 뒤따르던 낭인의 얼굴은 눈물 콧물로 범벅되었다.
 벌써 세 명째 적면호리에게 희생당했다.
 캐르르!
 뒤쫓는 놈들이 그들을 비웃는 듯했다.
 골짜기 안에 들어서기 전만 해도 그들은 자신이 있었다.
 귀호리보다 덩치가 배가 큰 적면호리가 따라와도 낭인들은 자신했었다. 덩치가 크니 속도가 느릴 거라 여긴 것이다.
 그건 철저한 오판이었다.
 덩치가 크면 근육량도 배고, 보폭도 배다.
 삼류낭인들의 경공술로 유인 아니, 도망친다고?
 어림도 없는 일이었다.
 그나마 죽기 살기로 내달려 거리를 유지했지만, 장무린은 경공술을 펼치는 와중에도 긴장의 끈을 놓치지 않았다.
 놈들의 습성을 앞서 견식 하지 않았나.
 몰아서 가지고 논다.
 뒤따르는 적면호리의 숫자는 불어서 어느덧 열 마리다.
 전부 다 삼성급이었다.
 낭인들이 속도, 힘 모든 면에서 뒤처지는 건 당연지사.
 일류 무인인 구종학과 칠대 제자들이 있다 치더라도 낭인들의 생사를 장담할 수가 없었다.
 “소, 속은 거야. 우리가 속은 거라고!”
 발악적인 외침을 내지르는 낭인은 맨 처음 수결을 했던 자였다.
 장무린은 외칠 힘이라도 아끼라고 말해주고 싶었다. 하지만 제 코가 석 자다. 지금은 한 모금의 진기라도 아껴야 할 때다.
 평정을 잃으면 내공 소모가 빨라지고, 속도가 늦춰지기 마련.
 그럼 찾아오는 참담한 결과는.
 “끄아아악!”
 빠른 내공소모를 견디지 못한 낭인이 기어코 속도가 늦춰줬는지 꼬리를 밟혔다.
 텁, 텁!
 이번엔 두 놈이 상체와 하체를 각기 물었다.
 “도, 도와……!”
 낭인이 손을 뻗어보지만.
 서로 제 거라고 으르렁거리던 적면호리들.
 촤아아악!
 두 놈이 고개를 반대쪽으로 틀자, 내장과 피가 주르륵 쏟아졌다.
 그곳에 다른 한 놈이 난입해 서둘러 코를 박았다. 간을 찾는 것이다.
 쩝쩝.
 만족스러운 얼굴을 한 적면호리가 냉큼 간을 주워 먹었다.
 캥캥캥!
 먼저 선점했던 두 놈이 그놈에게 달려들지만, 이미 위장으로 들어가 소화된 지 오래다.
 두 적면호리는 아쉬운 마음에 상체와 하체를 통째로 집어삼켰다.
 아직 사냥감은 많았다.
 피묻은 주둥이를 긴 혀로 핥는 모습이 그렇게 끔찍해 보일 수가 없었다.
 살아남은 여섯 낭인은 안색이 파리해졌다.
 “시팔! 도망가나 마나, 야 이 개새끼들아!”
 한 낭인이 공포심에 미쳐 눈알이 홱 돌아갔다. 뒤로 내달려 온 힘을 다해 뒤쫓아 오던 적면호리의 머리를 사슬에 매달린 철공으로 내리쳤다.
 깡!
 쇳덩어리를 내려치는 소리가 터져 나왔다.
 끼잉.
 졸지에 한 방 얻어맞은 적면호리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얻어맞은 적면호리가 당황한 낭인을 내려다봤다.
 캥캥캥!
 낭인을 스쳐 지나가는 적면호리들이 비웃었다.
 모종의 약속이라도 있는지 그 낭인을 건드리는 적면호리들은 없었다. 오로지 나머지의 뒤를 쫓을 뿐이다.
 “미, 미안하다. 차, 착하지?”
 벌벌 떨던 낭인이 철공을 떨어트렸다. 동네 개처럼 쓰다듬으려는 듯이 주둥이에 손까지 대었다. 정신 나간 행태의 결과는 처참했다.
 쩍―
 벌어진 주둥이가 그대로 낭인을 자근자근 씹어대기 시작했다. 머리는 기다란 혀에 감겨 보호받았다. 어째서 그러는지 곧 밝혀졌다.
 “커, 커헉!”
 머리를 제외한 온몸을 꿰뚫는 송곳니에 낭인은 산채로 지옥을 맛보았다.
 질겅질겅.
 적면호리는 통째로 삼키기보다 낭인의 육신을 빼곡히 세운 송곳니로 씹어대기 시작한 것이다.
 엄청난 양의 피가 주둥아리를 타고 흘러내렸다. 놈은 그 피가 아까웠는지 하늘을 향해 주둥아리를 세웠다.
 꿀꺽, 꿀꺽.
 “끄으으으.”
 미약한 신음성을 안주 삼은 적면호리는 낭인의 피를 남김없이 받아마셨다. 그리고는 텁, 텁 소리를 내며 그대로 삼켰다.
 끔찍한 고통을 산채로 받은 낭인은 그렇게 유명을 달리했다.
 그 소름 끼치는 광경을 본 생존자들은 감히 맞설 생각은 꿈도 꾸지 못했다.
 외기방사까진 아니더라도, 적면호리의 몸에 상처를 내려면 적어도 검에 내력을 실을 정도는 돼야 한다.
 삼류낭인인 그들로서는 아득한 경지.
 적어도 이류에 이르러야 한다.
 파바바박!
 그러니 미친 듯이 발을 놀려 경공술을 펼칠 수밖에.
 그들의 절망 어린 얼굴을 보던 장무린은 마땅한 방도가 없었다.
 이대로라면 장무린도 앞서 간 낭인들처럼 먹잇감이 될 판이다.
 그런 장무린의 뇌리에 스쳐 지나가는 장면.
 얕은 개울물인데도 불구하고 귀호리들은 하나같이 도약으로 건너뛰었다.
 절대 그냥 넘겨봐선 안 되는 장면이었다.
 또 한 가지.
 개울물의 수원지도 있었다.
 장무린은 뒤를 돌아봤다.
 낭아풍운보를 펼치는 중이었기에, 지금 누구보다 앞선 이는 장무린이었다.
 구종학이나 칠대 제자들이 봤다면 경악하고도 남을 광경이다.
 워낙 다급한 상황이기에 낭인들은 눈치 채지 못했다. 그저 생각 외로 몸이 좀 날래구나 싶은 정도였다.
 낭인들은 자신들을 돌아보는 장무린의 눈빛에 서린 희망을 읽었다.
 “따라오세요.”
 장무린의 외침에 낭인들은 얼른 고개를 끄덕였다. 귀호리 사십 마리에게 쫓기고도 살아남은 이의 말이었다. 감히 토를 달 생각은 언감생심 꿈도 못 꿨다.
 “속도를 더.”
 장무린이 짤막하게 외치자, 낭인들이 헐레벌떡 따라붙었다.
 장무린의 신형이 한줄기의 바람이 되어 쏘아진 탓이다.
 낭아풍운보의 삼성.
 그 경지에 이르렀음을 증명이라도 하는 듯했다.
 낭인들은 넋이 나간 얼굴로 그 끄트머리라도 잡기 위해 미친 듯이 경공술을 펼쳤다. 하지만 진기도 불순했고, 제대로 된 경공술을 익히지 못한 터라 희끗희끗한 신형의 끝자락만 보였다.
 “이, 이봐!”
 낭인 하나가 애달프게 불러서야 장무린은 자신의 실책을 깨닫고 속도를 늦췄다. 그리고 그건 절체절명의 위기를 벗어나게 해줬다.
 텁!
 바로 한 치 앞을 물어뜯는 붉은 주둥아리.
 앞서 가서 은신해 있었는지 적면호리가 아깝다는 듯이 입맛을 다시고 있었다.
 휙!
 빠르게 방향을 틀어 속도를 낸 장무린.
 쿵쾅쿵쾅.
 요동치는 심장에 손으로 가슴을 움켜쥐었다.
 캥!
 입맛을 다시던 적면호리는 뒤따라오다가, 제 곁을 피해 스쳐 지나가려는 낭인을 덥석! 낚아챘다.
 “커헉!”
 제일 처음 수결을 했던 낭인이었다.
 콰직.
 떨리는 손을 뻗어보지만, 곧 피 분수와 함께 반 토막이 날 정도로 적면호리의 턱 힘은 무시무시했다.
 후두둑.
 대량의 핏물이 바닥을 적시며 낭인이 고개를 떨어트렸다.
 “……!”
 장무린의 떨리는 눈동자가 다시 앞쪽을 향했다. 흔들리려는 마음을 다잡으려 했지만, 눈동자에 물기가 아른거리는 건 막지 못했다.
 짝.
 장무린은 제 뺨을 소리 나게 쳤다.
 약해지면 안 된다.
 무슨 일이 있어도 살아남아야 한다.
 # 第 四 章
 
 쾅!
 적면호리의 머리가 수박처럼 반으로 쪼개졌다.
 “후우.”
 혀를 빼어 물고 죽은 적면호리 세 마리를 내려다본 구종학은 숨을 가다듬었다. 둘러싸이지만 않으면 어렵지 않은 상대였다.
 주위를 둘러보자 나머지 여덟 마리도 낭아대진을 펼친 칠대 제자들에 의해 다져지고 있었다. 숫자에서 우위를 점한 덕분이다.
 구종학은 합세하지 않았다. 세 마리만 상대한 이유도 여기에 있었다. 칠대 제자들의 경험을 쌓기 위함이었다.
 캥, 캥!
 곧 여덟 마리의 적면호리도 이내 숨을 거두었다.
 “으으, 끈질긴 놈들.”
 칠대 제자들이 질린 눈빛으로 적면호리의 시체를 바라봤다.
 네댓 마리만 더 가세했어도 시체가 되는 건 놈들이 아니라, 자신들이었을 거다.
 생각 외로 적면호리는 강했다. 특히 무리지어 사냥하는 능력은 귀호리와 비교를 불허하였다.
 “삼성급이 이 정도면 대체 사성이나 오성, 육성은 어떻게 잡으라는 거야?”
 생각만 해도 치가 떨리는지 구장익이 몸까지 떨었다. 자잘한 상처들은 입었지만, 다행히도 큰 부상자는 없었다. 검진을 필사적으로 수련한 빛을 본 것이다.
 구종학은 칠대 제자들을 향해 부드러운 표정을 지었다.
 “그래도 잘들 해냈다. 낭아대진의 중요성을 다들 잘 알았겠지? 앞으로 꾸준히 정진하면 사성급 야행수까지도 무리 없이 상대할 수 있을 것이다. 이 내가 그리될 수 있도록 해주겠다.”
 “예, 부대주님!”
 칠대 제자들은 한목소리로 대답했다.
 단이령은 파리해진 안색으로 물어왔다.
 “부대주님, 낭인들은요? 낭인들이 오질 않아요.”
 낭인들이라고 했지만, 단이령이 걱정하는 이가 누군지 누구보다 잘 아는 그들이었다.
 장무린이란 청년.
 미끼로 내몰린 그와 낭인들이 감감무소식이었다.
 적면호리들과 직접 마주한 단이령을 비롯한 이들의 머릿속에 그려진 건.
 바로 참혹한 죽음이었다.
 구종학도 이를 잘 알고 있었다.
 “돌아오기로 했는데 못 오는 거면 어쩔 수 없지 않느냐?”
 “하지만 그들을 도와줘야 해요. 그렇지 않으면 그들은 모두…….”
 단이령의 외침은 구종학의 서슬 퍼런 눈빛에 잦아들었다.
 “이미 늦었다. 열 마리가 넘는 숫자가 따라갔음을 이령이도 보지 않았느냐? 지금쯤이면 못해도 숫자가 배는 될 것이다.”
 “그래, 사매. 우리가 도와주기엔 숫자도 많고, 시간도 너무 많이 흘렀어.”
 구장익이 끼어들었다.
 처음부터 그럴 작정이었잖아요!
 라는 말이 목구멍까지 치솟아오른 단이령이었지만, 그걸 입 밖으로 내는 우를 범하진 않았다.
 칠대 제자들은 애석하다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불의의 사고였지.”
 “그래, 만약 그들의 희생이 아니었다면 우리는 이렇게 두 다리로 서 있지 못했을 거야.”
 “맞아, 아쉽지만 어쩌겠어? 우리가 대신 죽어줄 순 없잖아?”
 남은 칠대 제자들이 한 마디씩 거들어줬다.
 단이령은 허망한 표정을 짓다가, 구종학을 애절하게 바라봤다. 그들을 도와주자는 눈빛이었지만, 구종학은 이미 내단을 수습하는 구장익을 향해 명을 내리고 있었다.
 “남은 시간이 얼마 없다. 빨리 이 근처를 수색하도록.”
 “부대주님!”
 단이령이 뾰족한 목소리를 냈지만, 구종학은 들은 척도 안 했다.
 “성주께서 원하는 물건을 찾아야 한다.”
 이미 들은 바가 있었기에 칠대 제자들은 주위를 수색하기 시작했다. 나머지 적면호리들이 모두 장무린과 낭인들을 쫓아간 덕분에 가능한 일이었다.
 이른바 빈집털이였다.
 단이령은 사형제들이 주위를 샅샅이 뒤지는 모습에 입술을 피가 나도록 깨물었다.
 구종학도 삼성급 적면호리들이 머무는 둥지를 뒤지기 시작했다.
 단이령를 신경 쓰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단이령만이 발을 동동 굴렀다.
 “그들을 도와줘야 해요. 부대……!”
 “단이령!”
 기어이 구종학의 입에서 일갈이 터져 나왔다.
 
 말을 멈춘 단이령은 눈물이 그렁그렁한 눈동자로 구종학을 바라봤다.
 “저희가 아무리 정사지간 방파라고 해도 도의를 잊어선 안 되잖아요. 우린, 우린.”
 “그럼 네 사형제가 그들 때문에 희생되어도 좋다는 소리더냐?”
 구종학의 외침에 사형제들의 눈빛도 곱지 않았다.
 단이령은 ‘아니라고, 그래도 강한 우리가 그들을 도와주는 게 도리가 아니냐고. 처음부터 그들을 사지를 내몰아선 안 됐다.’ 말하고 싶었지만, 눈물만 뚝뚝 흘러나왔다.
 동고동락하던 사형제들이 적면호리에게 당하는 것도 바라는 바가 아니었다.
 구종학과 사형제들도 그 마음을 익히 아는지 표정을 풀었다.
 구장익이 말했다.
 “이령이 넌 너무 착해서 탈이야. 어차피 놈들이 자청해서 한 일이잖아. 그러니까 돈에 눈먼 놈들에게 너무 마음……!”
 단이령의 서슬 퍼런 눈빛에 찔끔한 구장익은 입을 다물어야 했다.
 “알겠어요.”
 소매로 얼굴을 슥슥 문지른 단이령이 검을 패용했다. 그리고 말없이 수색하기 시작하였다.
 구종학은 그 모습에 만족스러운 미소를 짓고는 수색을 해나가기 시작했다.
 오늘 안에 못 찾는다 하더라도 단서만이라도 찾아야 한다.
 삼성급 내단 열한 개로 만족할 순 없었다.
 잠시 후.
 이 잡듯이 뒤지다가 적면호리 두 마리와 조우했지만, 이미 잡아본 경험이 있었던 터라 낭아대진과 구종학에 의해 잘게 다져진 고기 신세가 되었다.
 여우골이 무서운 점은 무리를 이루는 놈들의 습성 때문이지, 각개격파를 한다면 큰 어려움이 없었다.
 해서 그들은 좀 더 안쪽까지 샅샅이 뒤져갔다.
 하지만.
 적면호리 한 마리를 추가로 발견하는 거 외엔 더 이상의 소득이나 단서는 찾지 못했다.
 “후우, 아무래도 삼성급 내단 네 개를 성주에게 바치는 걸로 끝내야겠군.”
 팔백 냥 이상의 가치를 지닌 물건을 뇌물로 바치는 게 씁쓸하긴 했지만, 어쩌겠나.
 호곡성주가 원하는 물건을 찾지 못했는데.
 단서라도 발견하면 다음 월야행을 기대하고 바칠 뇌물의 양을 줄여라도 보겠지만.
 지금은 그럴 수가 없었다.
 칠대 제자들도 난색을 보였다.
 더는 시간을 끌 수도 없었다. 이제 슬슬 적면호리들이 돌아올 시간이다.
 구종학이 전장을 정리하라고 할 것도 없이 칠대 제자들은 이미 떠날 채비를 서두르는 중이었다.
 숫자가 불어난 적면호리는 위험했다.
 그들이 일시에 들이닥치면 아무리 자신들이라고 해도 큰 피해를 당할 터였다.
 집단 전투에 특화된 건 강호인만이 아니었다.
 여우골의 적면호리들도 무리 사냥에 매우 능숙했다.
 숫자로 겨우 우위를 점했는데, 비등한 숫자라면 암울한 상황이 절로 그려진다.
 해서 구종학은 칠대 제자들을 이끌고 여우골의 앞마당으로 향했다.
 거기에 낭인들이 놓고 간 짐들이 덩그러니 놓여있었다.
 구장익이 거기에 손대려고 했다. 챙기려는 손짓에 단이령이 손을 휘둘렀다.
 짝.
 손등을 호되게 얻어맞은 구장익이 볼멘 목소리로 말했다.
 “어차피 죽은 놈들 거잖아?”
 단이령은 물러서지 않았다.
 “이건 그들의 정당한 대가에요. 그러니까 손댈 생각은 꿈도 꾸지 마세요.”
 “어차피 가져가지도 못할 건데.”
 구장익이 투덜거렸다. 다른 칠대 제자들이 망인의 유품은 재수 없을 거라며 다독여주자, 욕심을 접었다.
 구종학은 그 모습에 피식 웃고는 칠대 제자들을 데리고 여우골을 나섰다.
 이번 월야행의 성과는 그리 나쁘지 않은 편이다.
 “오늘은 제자들이 귀중한 경험을 해준 걸로 만족해야겠지만.”
 구종학의 시야에 단이령이 이대로 나가길 주저하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하지만 이내 사형제들의 재촉에 고개를 떨어트렸다.
 마지막으로 나서던 구종학.
 잠시 뒤를 바라보며 아쉬운 눈초리를 했다.
 “쓰고 버리기엔 제법 아까운 놈이었는데 말이야.”
 휘오오오.
 그마저 빠져나가자, 여우골엔 음산한 바람만이 불어왔다.
 
 얼마나 내달렸을까.
 콰아아…….
 귀를 절로 잡아끄는 소리에 발길마저 이끌렸다.
 “헉, 헉!”
 마지막 남은 낭인의 거친 숨소리가 뒤를 이었다. 사선으로 그어진 검상의 얼굴이 잔뜩 일그러졌다.
 장무린은 뒤를 돌아봤다. 그리고 희망 섞인 눈빛을 보냈다.
 지친 낭인도 그제야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장무린이 말하고자 하는 바를 이해한 듯 보였다.
 그도 들을 수 있는 귀가 있으니까.
 개울물의 수원지인 폭포.
 가슴을 뒤흔드는 소리의 정체였다.
 장무린은 좀 더 힘을 짜내 속도를 올렸다.
 낭인도 마찬가지로 젖먹던 힘까지 다해냈다.
 타다다다닥!
 뒤따르는 적면호리들의 발소리가 급박 해졌다.
 그것만으로 장무린은 자신의 짐작이 맞았음을 깨달았다.
 “조금만 더 힘내요.”
 “그, 그러마. 근데 너 몇 살이냐?”
 “네?”
 난데없는 물음에 장무린이 의아해했다.
 낭인은 헐레벌떡 뒤따르면서 묻고는 어색하게 웃었다. 자신이 묻고도 어이가 없었나 보다. 그래서 객쩍은 표정을 감추지 않았다.
 “아들 생각이 나서.”
 “…열일곱이요.”
 장무린은 주저하다가 답했다. 왜 느닷없이 이런 말을 묻는지 알 수가 없었다.
 낭인은 고개를 주억거렸다.
 “어리군. 이름은?”
 절체절명의 순간에 통성명이나 하자는 걸까? 달리기도 바쁜데.
 “체력을 조금이라도 비축해요. 놈들의 유희도 이제 끝이에요.”
 이대로 내달리면 못해도 일 각 아니, 반 각도 안 돼서 도착할 것이다.
 낭인도 동의하는지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여전히 물어왔다.
 “이름은?”
 “장무린이요. 말할 힘이 있으면, 경공술에만 집중하세요.”
 장무린이 나무랐지만, 낭인은 흐흐 거리며 웃을 뿐이다.
 “좋은 이름이군. 부모님이?”
 “…….”
 장무린은 답하지 않았다. 어째서 이러는지 모를 일이다. 지금 같은 급박한 상황에선 좋지 않았다. 해서 손을 뻗었다.
 “제 손을 잡으세요. 좀 더 속도를 내죠.”
 “흐흐.”
 낭인은 고맙다는 듯이 손을 마주 뻗었다.
 어느새 전우애라도 싹튼 걸까.
 장무린은 제 손을 잡아오는 낭인의 이름도 모르고 있음을 깨달았다.
 “아저씨는요?”
 “말할 힘이 있으면 경공술에만 집중해. 아저씨, 힘들다.”
 “…….”
 되레 면박을 받은 장무린은 입을 꾹 다물었다.
 캥캥!
 느긋하게 굴던 적면호리들이 본격적으로 시작하려는지 부채꼴로 펼쳐졌다.
 장무린의 표정이 다급해졌다.
 저놈들이 저럴 때 어찌 나올지 누구보다 잘 알지 않는가.
 “아저씨!”
 그 다급함을 눈치 챈 낭인이 두 다리에 있는 힘을 다했다.
 장무린도 그의 손을 덥석 잡고는 좀 더 힘을 내려 했다. 단전이 거의 비어갔지만, 혼자보단 둘이 나았다.
 아무도 믿지 말라는 장한의 말을 처음으로 어긴 장무린이었다.
 낭인은 순진하게 제 손을 잡은 장무린을 묘한 눈빛으로 바라봤다.
 “……순진하구나.”
 “……!”
 장무린은 순간 아차 싶었다. 낭인이 악심 품고 자신을 공격해 미끼로 쓸 가능성을 배제하다니.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제 손을 꽉 잡은 억센 힘에 장무린의 안색이 창백하게 질렸다.
 텁!
 순간 장무린의 앞쪽에서 붉은색 주둥이가 빠르게 다 물렸다.
 입맛을 쩝쩝 다시는 피묻은 주둥이.
 아까 그놈이다.
 어느새 근처까지 쫓아온 놈이 가장 선두에 선 장무린을 또다시 노린 것이다.
 설마 제 목숨을 낭인이 구해줄 줄은 몰랐던 장무린이 두 눈을 크게 떴다.
 “어서 가라!”
 그리고 있는 힘껏 가슴팍을 세게 밀치자, 장무린의 신형이 앞으로 휙 날아갔다.
 낭인의 두 눈에 서린 필사의 각오.
 그걸 본 장무린이 저도 모르게 물었다.
 “아, 아들은요?”
 아들이 생각났다는 그의 말을 떠올린 것이다.
 낭인은 히죽 웃었다.
 “이제 보러 간다.”
 “……!”
 장무린은 흔들리는 눈빛으로 낭인을 쳐다봤다.
 “이놈들아!”
 크게 고함을 지르며 장무린의 뒤를 쫓으려던 적면호리의 등에 올라탔다.
 병장기를 꺼내 들어 퍽퍽! 소리 나게 때려보지만, 적면호리는 꿈쩍도 안 했다. 오히려 귀찮다는 듯이 몸을 털었다.
 떼구르르.
 굴러떨어진 낭인이 목이 찢어져라, 소리쳤다.
 “장무린―!”
 어서 가지 않고 뭐하냐는 거다.
 장무린은 이리저리 날뛰며 시선을 끄는 낭인의 모습에 가슴을 움켜쥐었다. 그와 반면에 다리는 쉼 없이 움직였다.
 “이놈아, 어딜 가느냐!”
 퍽퍽.
 병장기가 적면호리의 엉덩이를 때렸다.
 장무린의 뒤를 따라잡으려는 적면호리의 신경을 낭인이 자꾸 건드리자, 기어이 적면호리가 등을 돌렸다.
 그리고 뒤이어 당도한 적면호리들이 기회를 뺏길세라 입들을 쩍― 벌렸다.
 “죽어라, 이놈들!”
 낭인이 병장기를 미친 듯이 휘두르는 소리가 들려온다.
 장무린은 저도 모르게 뒤를 흘끗 바라봤다. 그리고 손을 들어 심장 어림을 움켜쥐었다.
 입을 꾹 다문 낭인의 입술에서 핏줄기가 용솟음치듯이 흘러나오는 중이었다. 하지만 그는 입을 벌리지 않았다. 비명이 터져 나와 혹시라도 장무린의 발길을 잡아 끌까 봐 저어된 것이다.
 형언할 수 없는 고통을 당하는 눈동자.
 피잉!
 장무린이 품속의 비수를 날렸다.
 푸욱!
 비수는 정확히 낭인의 목을 꿰뚫었다. 고통이라도 덜어주려는 그 의도를 알았는지, 낭인이 입가에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
 도대체 왜 날.
 왜 날 도와줬느냐고 묻고 싶었지만.
 한 모금의 진기는 생존을 위해 두 다리를 계속해서 움직이게 했다.
 저 살고자 미친 듯이 뛰어가는 중이다.
 장무린의 신형이 희미한 점이 되어간다.
 낭인은 제 시야가 점점 어두워져 옴을 느꼈다.
 텁, 텁.
 장무린의 비수 덕분에 물어뜯기는 고통은 더 이상 없었다.
 원한은 뼈에 새기고, 은혜는 강물에 흘려보내는 게 강호인인데.
 어째서일까.
 낭인의 한 가닥 남은 이성이 자문을 해보았지만.
 모르겠다.
 그냥 미쳤나 보지.
 끌끌 거리는 방정맞은 웃음까지 나오는 걸 보니 정말 그런가 보다.
 캥캥캥!
 낭인을 갈기갈기 찢어먹은 적면호리들이 다시 속도를 올렸다.
 마지막 남은 사냥감을 마저 잡기 위해 미친 듯이 내달리고 있었다.
 유희는 끝났다.
 
 콰콰콰콰.
 폭포수가 언뜻 보인다. 그 규모로 보건대 어지간한 깊이는 될 것 같았다.
 좀 더 힘을 내자.
 장무린이 있는 내공을 쥐어짜 경공술의 속도를 올리려는 찰나.
 캐르르!
 순식간에 앞을 가로막는 적면호리가 있었다.
 장무린은 방향을 틀었다.
 역시 이번에도 다른 적면호리가 앞을 가로막았다.
 유희를 끝낼 때가 됐다는 듯이 입매를 귀밑까지 찢고 있었다.
 파앙!
 장무린은 젖먹던 힘을 다해 방향을 한 번 더 틀었다.
 그리고.
 “크헉!”
 콰앙!
 온몸이 부서지는 충격과 함께 나가떨어졌다.
 천지가 뒤바뀌는 광경과 오른쪽 반신이 마비된 듯한 착각마저 들었다.
 전마보다 큰 동체를 지닌 적면호리의 몸통박치기였으니, 이 정도로 끝난 게 다행이다.
 장무린은 땅바닥을 구르며 손을 쫙 펼쳤다. 그리고 한 움큼 움켜쥔 흙먼지를 전면에 뿌렸다.
 막 달려들던 적면호리의 눈을 향해 흙먼지가 날았다.
 적면호리가 두 눈을 반사적으로 감는다.
 장무린은 그 찰나의 기회를 틈타 신형을 빠르게 날렸다.
 텁!
 그러나 다른 한 놈이 발을 물어뜯었다.
 “크윽!”
 아득한 고통에 머릿속이 하얘졌다.
 절체절명의 순간이 찾아온 것이다.
 
 퍼억!
 장무린은 당황하지 않고 다른 쪽 발로 놈의 코, 사람에겐 인중에 해당하는 급소를 온 힘으로 후려쳤다.
 우드득!
 다리가 부러지는 소리와 함께 적면호리가 캥! 소리를 냈다.
 불의의 일격이 운 좋게 입을 벌리게 한 것이다. 하지만 물린 다리는 피로 흥건했다. 뼈와 힘줄이 상한 듯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상황은 악화일로로 치달았다.
 휘익!
 그래도 놈의 인중을 지지대 삼아 찬 게 신형을 날리는데 도움을 줬다.
 적면호리들의 다리 근육들이 부풀어 올랐다.
 파바바바박!
 공중으로 뜬 장무린을 낚아채기 위해 도약한 것이다.
 사방으로 쩍 벌려진 주둥이들이 다가왔다.
 역한 혈향이 코를 찌른다.
 피를 머금은 송곳니들이 다가오는 모습에 소름이 끼쳤다.
 장무린은 허리춤에 패용했던 이름 모를 낭인의 검을 빼어 들었다.
 챙!
 휘두르기 위한 것이 아니었다.
 장무린의 실력으론 어림도 없는 일.
 휘릭.
 장무린은 막 제 몸통을 물어뜯으려는 송곳니를 기다렸다. 두 손으로 맞잡은 검을 뒤로 잡아당겼다.
 송곳니는 그야말로 지척으로 다가왔다. 암울한 상황 속에서도 장무린은 기지를 발휘했다
 챙!
 뻗어낸 검극으로 송곳니를 밀어낸 것이었다.
 휙!
 이 한 수는 생각 못했는지 적면호리들은 신형이 뒤로 밀린 장무린을 놓쳤다.
 텁, 텁, 텁!
 빈 허공을 물어뜯는 적면호리들의 눈매가 툭 불거졌다.
 그들은 포기라는 걸 모르는 사냥감에 화가 났다.
 휘릭.
 장무린의 신형이 쏘아진 방향에 자리한 나뭇가지.
 천재일우의 기회가 찾아왔다.
 장무린은 그 나뭇가지를 잡아 신형을 당겼다. 그리고 멀쩡한 발로 그 나뭇가지에 걸치는 순간 체중을 실었다.
 나뭇가지가 쭉 젖혀졌다.
 낭아풍운보.
 삼성에 이르렀던 경공술은 펼치는 도중에 숙련도가 더해지고, 이해도까지 깊어져 어느덧 사성에 이르렀다.
 경신법(輕身法).
 몸을 가볍게 하자마자.
 파앙!
 활의 시위가 당겨진 것처럼 휘었던 나뭇가지가 튕겨져 올라왔다.
 장무린의 신형은 되돌아오는 반탄력을 추진력 삼아 신형을 날렸다.
 캐르르.
 허망한 얼굴로 내뺀 장무린을 보던 적면호리들이 이를 갈았다.
 하지만 놈들의 머릿속에 포기란 없었다.
 무슨 일이 있어도 마지막 사냥감을 잘근잘근 씹어먹을 테다.
 장무린은 휙휙 지나가는 풍경에 이를 악물었다. 피가 철철 흘러넘치다 못해 넝마가 된 한쪽 다리도 눈에 들어왔다. 절름발이가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지금은 목숨이라도 부지해야 할 때다.
 폭포수가 머지않았다.
 순간 장무린은 몸을 공처럼 둥글게 말았다.
 휘익!
 기다렸다는 듯이 장무린을 향해 주둥아리를 다무는 놈.
 예의 그놈이다.
 질리지도 않는지 장무린보다 앞서 가서 또다시 낚아채려 한다.
 하지만 이미 두 번이나 당할 뻔했고, 이미 놈의 수는 예상하고 있었다. 세 번씩이나 같은 수에 당할 정도로 장무린은 멍청하지 않았다.
 한 일자(一)로 세워진 검이 입천장과 턱주가리 사이에 끼었다.
 텁석!
 오므린 주둥아리 속, 입천장과 아랫송곳니에 낀 검이 활대처럼 휘었다.
 어마어마한 힘이다.
 녹슨 철검이었다면 부서지고도 남았다. 지금 꽂은 철검도 곧 반으로 동강 날 것만 같은 순간.
 “하압!”
 장무린이 휜 검신의 오목해진 부분을 박찼다.
 휘익!
 쨍그랑!
 검이 반으로 동강이 나며 장무린의 신형이 다시 앞으로 날아갔다.
 간발의 차로 주둥아리가 닫혔다. 역한 냄새에서 벗어나자, 장무린을 맞이해준 건 신선한 공기였다.
 그리고.
 풍덩!
 몸이 떨어진 곳은 천만다행으로 폭포수가 만들어낸 웅덩이.
 장무린은 온몸을 찌르르 울리는 찬 기운에 전율을 느꼈다.
 해서 빌었다.
 제발, 호랑이처럼 물을 두려워하지 않고 수영을 즐기는 놈이 아니길.
 물을 두려워하는 살쾡이의 습성이 남아있기를 간절히 바라고 또, 바랐다.
 온몸을 감싸는 물의 한기를 느끼며 장무린이 두 눈을 뜨고 지켜봤다.
 그리곤 양손을 억세게 움켜쥐었다.
 적면호리가.
 그 잔악무도한 적면호리들이 물가에서 서성이는 모습들이 눈에 들어왔다.
 캥캥캥캥!
 분하다는 듯이 짓던 놈들이 이제는 서로 질책하듯이 몸싸움까지 벌여댔다.
 수중이라서 표가 안 났지만, 장무린의 눈에서 눈물이 줄기차게 흘렀다.
 드디어.
 드디어 살아남았다.
 “그으으으.”
 이 지옥 같은 곳에서 목숨 줄을 부지한 것이다.
 온몸을 굽힌 장무린이 물웅덩이 깊숙한 곳으로 점점 가라앉아갔다. 숙인 고개를 드는 장무린의 눈동자가 독기로 번뜩였다.
 반드시 살아남으리라!
 
 고개를 물 위로 내민 장무린의 눈에 이채를 흘렀다.
 폭포수가 떨어지는 흰 물거품 위로 음영 진 곳을 발견한 것이다.
 밤하늘 위에 뜬 붉은 달과 거듭된 죽을 위기로 다듬어진 예민한 감각이 아니었다면, 발견하지 못했을 음영 진 곳이었다.
 캐르르르.
 경계하는 적면호리들의 울음소리.
 웅덩이 속으로 뛰어들려는 시도조차 못 한 놈들의 붉은 눈동자에 서린 감정이 읽혔다. 장무린이 줄곧 봐온 것이기 때문이었다.
 낭인들의 눈동자와 닮았다.
 그것은 공포.
 장무린이 읽은 감정이었다.
 물을 기피하긴 하나, 좀 더 근원적인 뭔가가 있었다. 장무린이 음영이 진 곳을 바라보는 순간 내비치기 시작했으니.
 캥캥캥!
 시끄럽게 짖어대는 놈들과 폭포수가 떨어지는 소리에 귀청이 먹먹해졌다. 정신이 사나울 지경이다.
 잠깐 물속으로 들어간 장무린.
 갈등이 일었다.
 슬슬 한기도 치밀어 올라, 입술이 퍼렇게 변했다. 손발이 떨리고, 다리에서 흘린 다량의 피로 체력은 계속해서 떨어졌다.
 즉, 몸이 차가워지기 시작한 것이다.
 많은 경험을 하지 않았다고 해도 알건 알았다. 이대로 물속에 오래 있으면 아주 곤란한 문제에 직면한다는 걸.
 부들부들
 그걸 증명이라도 하듯 온몸이 심상치 않게 떨려왔다.
 물 밖으로 나가 서둘러 지혈해야 했고, 차가운 물로 뺏긴 체온을 되찾아야 한다.
 물속에선 불가능한 일.
 다시 고개를 내민 장무린의 시야에 음영진 곳, 폭포수에 가려진 동혈이 잡혔다.
 죽기 아니면 까무러치기다.
 이대로 물속에 있어도 죽고, 물가로 나가도 죽는다.
 진퇴양난의 상황에서 택할 장소는 놈들이 두려워하는 동혈 뿐이다.
 캥캥캥!
 장무린이 등장하자마자 적면호리들이 시끄럽게 짖어댔다. 놓친 사냥감에 대한 안타까움이 물씬 느껴졌다.
 “저놈들 배를 채워줄 순 없지. 이곳에서 물고기 밥이 될 수도 없고.”
 혼잣말로 각오를 다진 장무린은 천천히 몸을 움직였다.
 콰콰콰콰.
 폭포수가 떨어지는 흰 물거품이 이는 곳을 피해 옆으로 돌아갔다. 온몸을 내리누르는 폭포에 하마터면 미끄러져 자빠질 뻔했지만, 튀어나온 돌을 꽉 움켜쥐었다. 거의 기다시피 올라갔다. 미끄러져서 돌에 머리라도 부딪치면 큰 낭패였기에 무척 조심스럽게 이동했다.
 똑, 똑.
 겨우겨우 몸을 동혈 쪽으로 들이민 장무린을 맞이해준 건 천장에서 떨어지는 물소리였다.
 “……!”
 폭포수가 떨어지는 소리가 더는 들려오지 않았다.
 혹시나 해서 밖으로 고개를 슬쩍 내밀었다.
 콰콰콰콰…….
 다시 안쪽으로 고개를 들이밀자, 폭포수 소리는 온데간데없었다.
 두 눈 뜨고 있어도 믿기 어려운 기사.
 “하긴, 내가 살아남은 것 자체가 더 믿기 어려운 기사지.”
 스스로 납득시킨 장무린은 안쪽으로 걸음을 옮겨갔다.
 축축한 곳엔 박쥐나 징그러운 벌레가 나올 법도 했지만, 이곳의 분위기는 무척 아늑했고 훈훈한 공기마저 감돌았다.
 장무린은 주위를 둘러봤다.
 동혈 곳곳을 밝히는 불빛에 또 한 번 놀랐다.
 야명주.
 한 알의 가치만 해도 집 한 채값은 훌쩍 넘어가는 물건이 동굴 천장에 틈틈이 박혀 있었다.
 입이 쩍 벌어지는 광경에 장무린은 절뚝거리며 움직였다. 다시 다리의 통증에 이를 악물어야 했다. 천 허리띠를 끌러서 허벅지를 꽉 졸라매었다.
 치료가 필요하다.
 이대로 방치하면 괴사할 게 분명했기에 장무린은 걸음을 옮기면서 주위를 둘러봤다.
 동혈이 이렇게 깊을 줄은 몰랐는지 절뚝거리며 걸어도 끝이 보이질 않았다. 쓸 만한 것도 없었다.
 피도 어느 정도 멎었고, 온몸을 떨리게 하던 한기도 차츰 가신다.
 동혈 속의 온기가 아니었다면 꿈도 못 꿀 일이었다.
 상황은 나쁘지 않았지만, 나른해진 정신에 몰려오는 수마가 문제였다.
 너무 지친데다, 피도 흘린 탓이다.
 저벅저벅.
 절뚝거리며 한 걸음씩 힘겹게 발을 옮기길 수십 차례.
 동혈의 끝이 보였다.
 은은한 야명주 빛에 밝혀진 그곳은 마치 동혈이라기보다 누군가 머무는 곳처럼 보였다. 문만 있었다면 내실이라고 해도 좋을 정도다.
 “대체 누가 머무르고 있었던 거지?”
 일단은 적면호리와 같은 야행수(夜行獸)는 아닌 듯했다. 놈들에게서 느껴졌던 고약한 노린내가 없었다. 인기척도 느껴지지 않았다.
 장무린이 오고 있는 걸 눈치채고 숨었다고 하기엔, 동혈 안의 공기가 너무나도 고요했다.
 마치 야행수에게 뜯어먹힌 죄수가 있는 뇌옥을 바라보는 느낌이랄까.
 “이름 모를 고인이 머물다 간 곳 일수도.”
 혹시나 하는 기대감에 동혈의 끝에 도착한 장무린은 주위를 둘러봤다.
 싸리잎으로 만든 그릇이 눈에 들어왔고, 망태기도 보였다.
 장무린이 서둘러 망태기를 뒤적거렸다. 약초를 찾는 것이다.
 탁.
 땅에 떨어진 망태기는 아쉽게도 속이 비어 있었다.
 장무린은 좀 더 기운 내서 수색했다. 사람이 머물다간 흔적이라고 할 순 없지만, 혹시라도 있을 금창약 같은 거나 먹을 걸 찾는 중이다.
 “후우, 후우.”
 숨이 거칠어지고, 눈앞이 가물거려왔다.
 바닥을 친 체력에 피까지 너무 흘렸다. 밀려오는 수마를 이겨내기가 점점 힘겨워진다.
 탁, 탁.
 잘 깎아진 벽을 손으로 짚어가며, 잘 보이지 않는 눈 대신으로 활용했다.
 꽤 짚어가다가 포기할 마음이 들 때쯤.
 “……!”
 벽을 짚은 손이 쑥 들어갔다.
 가물거리는 눈으로 봐도 분명 벽이어야 하는데, 공간이 있다니.
 장무린은 손을 휘저어 크기를 가늠했다. 그리곤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무언가 따뜻한 게 잡힌 것이다.
 말랑말랑하고 보드라운 느낌.
 한 손에 잡히는 작은 그건 마치 작은 계란 같았다.
 그랬다.
 뇌옥에서 특식으로 가끔 나오던 찐 계란처럼 보드랍기 그지없었다.
 덥석.
 따뜻하기 그지없는 그걸 움켜쥔 장무린이 그걸 서둘러 입으로 가져갔다.
 극심한 허기로 말미암은 본능적인 행동이었다.
 이미 빙글빙글 도는 머릿속은 정상적인 사고도 힘들었고, 가물거리는 눈은 휘황찬란하게 빛나는 영롱한 보주(寶珠)를 보지도 못하고 감기는 중이다.
 꿀꺽.
 장무린은 그 영롱하게 빛나는 보주를 보지도 않고 삼켰다.
 그게 어떠한 결과를 불러올지 감히 상상도 못하고 혼절까지 한다.
 후우우우.
 동혈에서 때아닌 바람이 불어왔다.
 목구멍으로 사르르 넘어간 보주.
 그 휘황찬란한 빛을 피부 밖으로 투과시키며 제 위치를 알려줬다.
 가슴을 타고 명치를 지나 내려가던 빛이 어느 한 지점에서 멈췄다.
 하복부.
 강호에서 단전이라고 일컫는 그 부위에 보주가 안착했다. 동시에 영롱한 빛, 서광(瑞光)이 점점 사그라졌다.
 없어진 게 아니었다.
 단전에서 시작된 서광이 전신으로 빠르게 퍼져 나갔다.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찬란한 서광에 둘러싸였다.
 우드득.
 무언가 심상치 않은 소리가 들려왔지만, 이미 혼절한 장무린은 듣지 못했다.
 서광이 더욱 짙어지다 못해 먼동을 밝혀오는 태양처럼 그 빛을 더해갔다.
 환하다 못해 작열하는 빛이 장무린의 전신을 응축시키는 듯하더니.
 마침내 폭발했다.
 콰아앙!
 동혈 안에 일진광풍이 몰아친 것이다.
 # 第 五 章
 
 낮엔 해가 보이지 않는 이곳.
 가득 찼던 붉은 달이 그믐달처럼 기울었다.
 혼절한 날로부터 보름이 흐른 것이다.
 퉁퉁 부었던 다리의 붓기도 많이 빠져 걸을 정도로 회복됐다.
 족히 석 달 이상은 정양해야 할 정도로 큰 부상이었는데 말이다.
 “운이 좋다고 해야 하나.”
 장무린은 자신의 회복력이 눈에 띄게 좋아졌다는 걸 느꼈다. 뭔가를 먹은 것까지는 기억하는데, 그 이후로는 깜깜했다. 해서 자신에게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정확히 모르겠다.
 놀라운 회복력 외에 한 가지 사실은 확실히 알았다.
 운기조식을 할 때 너무 놀라 입까지 벌릴 뻔한 획기적인 사실이었다. 장한이 해준 금기사항임을 가까스로 떠올리며 입을 벌리지 않았지만.
 “대체 무슨 일이 내게 벌어진 거지?”
 혼탁했던 진기가 극도의 정제과정을 거친 것처럼 정순하기 그지없었다.
 온몸을 휘도는 진기의 속도는 예전과 비교를 불허하였고, 그 순도가 매우 높아져 진기의 양도 족히 배는 늘었다.
 십 년 내공.
 장무린이 자신의 단전에 들어찬 내공의 양을 가늠해본 결과다.
 그리고 보름간 또 한 가지 발견한 새로운 사실이 있었다.
 삼재심법의 축기하는 속도가 과거와 달라도 너무 달라져 있었다. 자신이 익힌 기본공인 삼재심법이 맞는지 의심이 들 정도였다. 이건 마치 마인(魔人)들의 축기법인 역혈심법과 같았다.
 삼재심법을 전수해준 장한이 말했었다.
 -삼재심법은 범용성이 뛰어난 만큼, 그 효용성은 지극히 떨어지지. 십 년의 수련을 해도 오 년 내공을 쌓는 정도에 불과하다. 정파의 상급 심법이 십 년의 수련을 해서 십 년 내공을 쌓는다면, 마인들의 축기법인 역혈심공은 십 년을 수련해서 십오 년 이상의 내공을 쌓는 게 가능하다. 앞서 설명한 각 심법들도 오성(悟性)이 뛰어날수록 효과는 더욱 늘겠지만, 특히 역혈심법은 그 순도는 굉장히 떨어지고, 불안정하기에 정파인보다 주화입마에 빠지기가 쉽지. 하지만 실망하지 말도록…….
 은사나 다름없는 장한을 생각하니 입술이 절로 깨물렸다.
 지금은 감상에 젖을 때가 아니다.
 어찌 됐든.
 장무린은 자신의 몸 상태가 좋아졌음은 확실히 알았다. 이 정도면 삼류의 수준은 될까 싶었지만, 속단은 금물이었다. 내공만으로 전보다 나아졌다고 하기엔 장무린이 익힌 무공이 너무나 형편없었다.
 경공술인 낭아풍운보를 제외하고는 변변찮은 무공조차 익히지 못했다. 장한의 집중적인 지도로 익힌 건 경공술과 비도술이었고, 짬짬이 검격도 배웠다.
 그마저도 감지덕지하는 장무린에 장한은 이름조차 없는 거라며 자조적인 표정을 해 보였었다.
 “더 강한 무공이 필요해.”
 장무린은 낭아방의 칠대 제자들과 구종학이 펼치던 검격을 떠올리며 읊조렸다.
 삼류낭인들이 마구잡이로 휘둘러대던 검격과는 차원이 달랐다.
 낭아대진이란 검진도 마찬가지였다.
 낭인들의 피해가 컸던 건 합격술의 부재가 컸고, 서로 도우며 싸우기보다 제 앞가림에 급급했던 탓도 있었다.
 그래서 피해가 더 컸고, 끝내 몰살당했다.
 체계적인 공부를 쌓은 무인의 위력을 직접 목도한 뒤라 그런지, 강한 무공에 대한 열망이 더욱 커졌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엉망이 된 이곳을 뒤져봤지만, 무공에 대한 책자는 물론이거니와, 단서조차 없었다. 그저 누군가 잠시 머무르다 가는 장소에 불과해 보였다.
 일단은 낭아풍운보.
 이거 하나만 제대로 익히자, 사성의 성취를 보였던 낭아풍운보를 확실히 익히면 이곳을 빠져나가는 데 큰 도움이 될 성싶었다.
 장무린의 머릿속엔 그때 봤던 책자의 내용이 빠짐없이 들어있었다.
 장무린은 장한도 뛰어난 오성이라고 칭찬했을 정도로 재능이 넘쳐흘렀다.
 구결은 빠짐없이 암기했고, 아직도 책자의 난해한 그림들이 눈에 선했다.
 해서 지난 보름간 장무린은 낭아풍운보의 심상수련을 해왔다.
 다리가 부은 상태에서 할 거라곤 그것밖에 없었으니까.
 다시금 심상 속에 떠오른 적면호리들이 쫓는다.
 장무린은 낭아풍운보를 펼쳤다.
 그러자 놈들이 최고의 속도로 내달려왔다. 엄청난 도약력을 써가며 달려오는 적면호리의 숫자는 자그마치 열.
 장무린은 당황하지 않았다. 둘로 시작했던 숫자가 어느덧 열까지 됐을 정도로 심상 속의 장무린은 수련에 수련을 거듭해왔다.
 평정 또, 평정.
 첫 조우 때처럼 심장이 터질 듯이 요동치지도 않았다. 심상 속의 장무린은 잔잔한 호수처럼 고요하게 서 있다가도, 바람 따라 구름 따라 자유로이 떠돌았다.
 일견 난해한 움직임이긴 하나, 장무린의 머릿속은 당시의 적면호리들이 보인 날랜 속도와 자신의 경공술 경로를 대입하여 최적의 회피 경로를 찾아내고 있었다.
 적면호리들이 장무린의 그림자를 뒤쫓으며 큼지막한 주둥아리를 들이밀어 보지만.
 입가에 잔잔한 미소를 흘리는 장무린의 낭아풍운보를 따라잡지 못했다.
 심상 속의 장무린은 그야말로 손에 잡히지 않는 바람이자, 구름이었다.
 광활한 초원을 질주하는 한 마리의 늑대가 된 것이다.
 낭아풍운보.
 이처럼 장무린에게 잘 어울리는 무공이 있을까?
 미친 듯이 도망치는데 여념이 없었던 지난날과 달리 장무린은 적면호리들이 만들어낸 숨결과 공간의 틈으로 신형을 비집어 넣었다.
 적면호리들은 몸통 박치기도 해오고, 뒷발로 차고. 흙먼지까지 흩뿌려보지만.
 장무린은 너무나도 자유로웠다.
 그렇게 심상수련을 거듭하며 이룬 성취는 자그마치 육성.
 구종학이나 칠대 제자들이 알았다면 도저히 믿기지 않을 성취였다. 오히려 박탈감에 젖어 허덕였을 것이다.
 그들도 수년을 고련한 끝에 겨우 육성의 성취에 이르지 않았던가.
 하지만 장무린은 고작 십오일 만에 그 성취를 따라잡는 것도 모자라 넘어설 예정이었다. 과거 뇌옥에서 오랜 시간 죽자 살자 경공술만 익힌 게 크나큰 득이 된 것이다.
 십성대성까지는 아직 갈 길이 멀었지만, 수많은 실전을 겪고 부단히 정진한다면 언젠가는 오를 일.
 조급해하지 말자.
 그런 다짐과 달리 장무린은 심상수련에 다섯 마리를 더 추가했다. 쫓기던 당시의 상황과 유사했지만, 그때와 달리 장무린은 여유로웠다.
 심력 소모가 그리 크지 않은데다, 이 기분 좋은 수련을 멈추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답답한 동혈 생활 속에서 장무린이 유일하게 자유로워지는 시간이다.
 얼마의 시간이 흘렀을까.
 “후우우우.”
 심상수련에 운기조식까지 마친 장무린이 감은 두 눈을 떴다. 지난날과 달리 안광이 형형해졌다.
 이를 알 리 없는 장무린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다리에서 느껴지는 통증은 미미하다. 주위를 둘러본 장무린이 입맛을 다셨다.
 허기도 허기지만, 천장에 붙어있던 야명주가 모조리 박살이 나서 아쉬웠다.
 “야명주를 팔았다면 쓸 만한 중상급 무공비급을 구할 수 있었을 텐데, 아쉽군. 아쉬워.”
 견물생심이라고 장무린은 잘게 부서진 야명주들을 물끄러미 보다가 고개를 저었다. 그는 자신에게 연이 닿지 않은 물건에 미련을 두는 어리석은 이가 아니었다.
 슥슥.
 배를 문지르는 장무린은 동혈 밖으로 향했다. 이 안에 먹을 거라곤 없었기에 폭포수로 배를 채우거나, 물속에 사는 물고기를 잡기 위함이었다.
 장무린은 품속을 뒤적여 한 자루의 비수를 찾아냈다.
 현재 유일하게 남은 무기였다.
 장무린의 눈빛이 회한에 젖어들었다. 매번 비수를 볼 때마다 검상이 새겨진 낭인의 강인한 얼굴이 떠올라서다.
 “고마워요.”
 그리고 미안해요.
 뒷말을 감정과 함께 가까스로 삼킨 장무린.
 은혜를 베푼 낭인을 생각하며 동혈 밖으로 터벅터벅 걸음을 옮겼다.
 
 캥캥!
 장무린을 보자마자 놈들이 날뛰었다.
 적면호리.
 얼굴을 일그러트려 주름을 만들어낸 놈들은 아직까지 장무린을 포기하지 않았다.
 숫자는 제법 줄어들어 열 마리였지만, 그것만으로 긴장감을 불러일으키기엔 충분했다.
 적면호리를 보는 장무린의 눈빛도 곱지 않았다. 철천지원수를 보듯이 독기마저 흘러나왔다.
 “그래, 그렇게 기다리고 있어라. 반드시 네놈들을 내 손으로 잡을 테니까.”
 캐르르르.
 장무린의 살기를 느꼈음인지, 놈들은 안절부절못했다. 물속으로 뛰어들기만 하면 되는데, 적면호리들은 물가 근처에서만 서성였다.
 천행이라고 할 수 있는 광경.
 장무린은 적면호리들을 지그시 노려보며 물속으로 뛰어들었다. 잠영하기 위해서다.
 풍덩.
 물속으로 들어오자 통통하게 살이 오른 물고기가 눈에 잡혔다.
 장무린은 꺼내 든 비수를 쥔 손아귀에 내력을 머금었다.
 비도술의 성취도 예전과 달라졌다.
 처음엔 물속이라 번번이 허탕을 쳤지만, 수도 없이 펼친 덕분에 숙련도가 붙은 것이다.
 설마 물속의 엄청난 저항력이 비도술의 성취를 끌어올릴 줄이야.
 성급해지려는 마음을 다스리자, 장무린의 몸이 더욱 깊숙이 가라앉았다.
 자신이 목표가 된 지도 모르는 물고기는 편하게 유영을 즐기며 뻐금거렸다.
 물고기를 잡겠다는 건지, 구경하겠다는 건지 모를 상태가 계속됐다.
 천천히 물속을 유영하는 물고기가 막 지느러미를 움직이는 순간.
 휙!
 장무린의 손이 빛살처럼 쏘아졌다.
 물속의 저항력은 이제 우스울 경지에 다다른 비도술.
 경로는 단순하나, 내공을 듬뿍 담은 팔심에 비수가 쏜살같이 날아갔다.
 퍽!
 비수는 그대로 물고기를 꿰뚫었다.
 좋았어.
 처음 시도했을 땐, 열 번 시도해서 두어 번 성공할까 말까였는데, 지금은 백발백중이었다.
 비수에 꿰뚫린 물고기가 몇 번 퍼덕거리더니 이내 잠잠해졌다.
 장무린은 헤엄을 쳐 물고기를 손에 쥐고, 바닥에 박힌 비수를 회수했다. 그리곤 다시 폭포 쪽으로 향하려는 순간.
 텁!
 기회를 노리던 붉은 긴 주둥아리가 장무린을 노리고 달려들었다.
 어림도 없지.
 장무린은 이미 놈들의 이리 나올 거란 걸 예상했다.
 처음엔 당황한 나머지 당할 뻔도 했으나, 지금은 여유롭게 놈의 주둥아리를 피해 보였다.
 첨벙, 첨벙.
 허탕을 친 놈이 물속에서 귀까지 꼬라박았다가, 동료가 꼬리를 물고 끌어 올려줘서야 겨우 신형을 가누었다.
 깨앵.
 물이 귀에라도 들어갔는지 연신 날뛰며 괴로워 해댔다.
 장무린은 더욱 깊숙한 곳으로 들어가자, 이젠 그런 식으로 공격하기란 요원한 일이었다.
 캥캥!
 발을 동동 구르는 적면호리의 모습에 장무린은 비소를 지었다. 이대로 비수를 날려 놈의 눈동자를 노릴까도 싶었지만, 하나 남은 무기를 한 놈을 잡기 위해 헛되이 쓸 순 없었다.
 첨벙, 첨벙.
 놈들이 닿지 않는 동혈 쪽으로 나온 장무린, 물 밖으로 나와 느닷없이 엉덩이를 까 뒤집었다.
 찰싹, 찰싹!
 그리곤 제 엉덩이를 찰지게 때려댔다.
 처음에 적면호리들은 그게 무슨 의미인지 몰랐지만, 그게 자신들을 약 올리려는 의도인 걸 눈치채고는 거칠게 짖어댔다. 뒷발로 흙먼지를 팍팍! 뿌려대는 놈들도 있었다.
 “정말이지 사람만큼 영민한 놈들이야.”
 고개를 저은 장무린은 바지를 추스르려다 말고, 적면호리들을 정면으로 바라봤다.
 캐앵?
 늘 동혈 속으로 기어가던 놈이 갑자기 그러니 적면호리들이 일제히 주시하였다.
 
 쪼르르!
 폭포수에 빗겨서 오줌 줄기를 쏘아낸 장무린이었다.
 캐캐캐캐캥!
 놈들이 미친 듯이 날뛰기 시작했다.
 왠지 모르게 그 모습이 너무나도 얄미웠고, 마치 자신의 영역이라고 표시하는 듯한 행동에 광분했다.
 쫙쫙쫙!
 그래서 적면호리들도 일제히 오줌을 쐈다.
 때 아닌 오줌난사에 장무린도 있는 힘껏 힘을 주었다.
 누가 더 오래 싸나 내기하는 것도 아니고.
 너무 유치하단 생각에 자신도 모르게 피식 웃었다. 장무린은 크게 한 번 털어주고는 바지를 다시 추슬렀다.
 캐릉, 캐릉!
 적면호리들은 방방 뛰며 어떻게든 분을 풀고 싶어했으나, 동혈과 물이 주는 본능적인 공포와 혐오감만큼은 어찌할 수가 없었다.
 “이거도 먹어라.”
 장무린은 가볍게 감자를 먹여주고는 동혈 안으로 들어갔다.
 사각사각.
 비수로 비늘을 빠짐없이 벗겨 내고, 배를 갈라 내장을 끄집어내 폭포수에 말끔하게 씻어냈다.
 그리곤 비수의 날로 살점을 얇게 저며내기 시작하였다.
 이 동혈에서 불을 피울 방법이 없었기에 택한 방법이다. 빈 망태기와 싸리로 만든 그릇이 있었지만, 부싯돌이 없어 불을 붙일 수도 없었다.
 그렇다고 장무린은 삼매진화를 피워올릴 수 있는 고수도 아니었다.
 쩝쩝.
 얇게 저며낸 살들을 입안에 우물거리며 장무린은 허기를 채워갔다. 흙내도 그렇고 좀 비리긴 하지만, 그럭저럭 먹을 만하였다.
 오물오물.
 팔뚝만 한 물고기 한 마리가 사라지는 건 순식간이었다.
 아쉬울 만도 했지만, 장무린은 어느 정도 배만 채우면 되었다. 영양상태가 그리 좋지 않은데도 혈색은 과거보다 더욱 좋아졌다.
 뇌옥 안에서 아주 가끔 먹었던 만두나 찐 계란이 그리웠지만, 그곳의 진한 혈향과 오물이 만들어낸 고약한 악취까진 그립진 않았다. 그리고 밤마다 벌벌 떨 필요도 없었고.
 야행유녀의 유혹에 넘어가, 정을 토해내고는 달려든 음서들에 산채로 뜯어 먹히는 모습을 보지 않았던가.
 그야말로 목불인견의 참상이자 현세에 도래한 지옥이었다.
 장무린은 침울해진 안색으로 앞으로의 행보를 그려보았다.
 “후우.”
 여기에서 살아나간다 해도 장무린에게 씌워진 굴레가 있었다.
 복역 중인 귀휴자.
 그걸 나타내는 손목의 흉터.
 반사적으로 손목을 들어보던 장무린의 두 눈이 더할 나위 없이 커졌다.
 “이, 이럴 수가!”
 지금껏 그리 신경 쓰지 않았는데, 놀랍게도 손목의 흉터가 치유되고 있었던 것이다. 낙인처럼 찍힌 화상에 바늘로 특수제작한 먹물까지 들여 새긴 흉터였는데 말이다.
 처음 정신을 차렸을 땐 분명히 남아있던 흉터였는데, 십오 일이 지난 지금은 그 흉터가 천천히 사라지고 있었다. 거기다 들인 먹물까지 희미해지다니.
 잘라내지 않는 한 영원히 남을 거라고, 새겨준 간수가 말하지 않았던가.
 실제로 지난 몇 년간 아무리 손목의 살이 벗겨질 듯이 비벼보아도 낙인은 지워지지 않았었다.
 장무린은 서둘러 두 눈을 비벼보았다.
 “……!”
 평생을 따라다닐 그 흉터가.
 사람들이 손가락질해댈 지워지지 않을 낙인이.
 점점 아물어가다 못해 사라지고 있었다.
 장무린의 눈동자가 잘게 흔들렸다. 사라져가는 흉터가 마치 지난 세월의 고초와 억울한 죄를 사면해주는 기분을 들게 해서다.
 “……난 잘못하지 않았어.”
 쓸쓸한 읊조림이 동혈에 울려 퍼지자, 마음속에 채워져 있던 족쇄가 파삭! 하고 부서져 나갔다. 광활한 초원을 질주하려는 늑대를 억압하고 있던 그 족쇄가 말이다.
 장무린의 수막 어린 눈동자 속에 기이한 열기가 점점 크게 확장됐다.
 자유.
 그 달콤한 글자를 곱씹으며, 운기조식을 취했다.
 또다시.
 십오 일이 유수와 같이 흘렀다.
 
 장무린은 떠날 채비를 마쳤다. 사실 채비라고 할 것까지도 없었다.
 공수래공수거(空手來空手去)였으니.
 장무린은 과거 다친 다리를 묶었던 천 허리띠만 졸라매었다.
 이곳을 떠나기로 마음먹은 이유는 두 가지였다.
 첫 번째는 낭아풍운보 칠성의 성취.
 뇌옥에서 쭉 익혀왔던 경공술의 성취가 낭아풍운보의 빠른 성취를 도와준 것이다.
 마지막으로 가장 큰 이유인 부상완쾌.
 쿵쿵.
 발을 구르는 다리는 더할 나위 없이 튼튼해 보였다. 부러졌던 뼈가 붙는 것도 모자라 오히려 더 강인해진 건 착각만이 아닐 거다.
 또 손목의 낙인.
 이젠 아예 사라져 있었다.
 장무린은 손목을 보고는 상쾌한 미소를 흘렸다. 처녀의 방심을 여지없이 흔들고도 남았다.
 어떻게 이곳에 들어오기 전보다 피부가 맑아지고, 건강은 더욱 좋아졌는지 모를 일이다. 먹는 게 부실했는데.
 아마도 처음 이곳에 와서 혼절하기 전 먹었던 게 기연을 불러온 듯싶었다. 혼절하기 전엔 제정신이 아니어서 찐 계란으로 여겼지만, 몸 상태가 이리 달라진 걸 보면 정말 어처구니없는 착각이었다.
 “이렇게 좋은 선물을 세 개나 받았는데, 말도 안 되지.”
 탁월한 회복력과 증진된 오 년 내공, 기이한 정제능력.
 장무린은 말랑말랑했던 그걸 일종의 내단으로 여겼다.
 야행수가 지닌 내단의 효과가 바로 내공 증진이었으니까.
 일성급 내단이 일 년, 이성급은 이 년, 삼성급은 사 년, 사성급은 팔 년의 내공이 담겨있었다. 하지만 불순물과 독기(毒氣) 때문에 연단술사에게 연단하게 되면, 그 효과는 절반으로 뚝 떨어졌다.
 영초(靈草)와 영약(靈藥)이 아예 자취를 감춘 오늘날.
 강호인이 내공 증진을 이루는 방법은 꾸준한 심법 수련과 야행수를 잡아 내단을 취하는 것뿐이었다.
 해서 어떻게 오 년의 내공을 불려줬는지에 대한 답은.
 기이한 정제력으로 인한 순도 높아진 내공 덕분이라고 여겼다.
 자신이 먹은 내단이 어떤 건지는 잘 모르겠지만, 앞으로 알아보면 될 일이었다.
 “일단은 가볼까?”
 보보는 호호탕탕 거침없어 보였지만, 장무린은 품 안의 비수를 그러쥐고 있었다. 그렇지 않으면 점점 피어오르려는 긴장감을 억누를 수가 없을 것 같았다. 그렇지 않으면 점점 피어오르려는 긴장감을 억누를 수가 없을 것 같았다.
 지옥 같은 여우골을 나가야 할 때.
 과연 집요한 적면호리들이 가만히 지켜보기만 할까?
 대답은 아니었다.
 장무린이 폭포수 밖으로 나가자, 증명된 사실이다.
 콰콰콰콰.
 귀청을 먹먹하게 하는 소리와 더불어.
 캥캥.
 이젠 네 마리가 된 적면호리가 부르짖었다. 장무린이 나오자마자 각기 다른 위치로 흩어졌다. 퇴로를 미연에 차단하는 것이다.
 그간 꾸준히 얼굴을 들이밀었다가 들어가서 그런지, 다른 놈들은 포기한 터라 네 마리밖에 안 남았나 보다.
 사람의 달콤한 살과 피를 잊지 못한 끈질긴 놈들.
 캐르르르.
 이젠 아무리 놈들이 날뛰어도 동료는 오지 않는다. 또다시 동혈로 기어들어갈 거라고 여기는 거다.
 순간 장무린의 눈빛이 달라졌다.
 정말 탈출만 할 거냐?
 마음속 깊은 곳에서 피어오르는 호승심, 주먹에 바짝 힘이 들어갔다.
 낭아풍운보의 칠성을 이루는 순간, 장무린은 심상 속에서 도합 이십이 넘는 적면호리를 여유롭게 상대해왔다.
 엄연히 실전과 심상훈련은 달랐다.
 여우골에 들어선 첫날을 떠올려보면 부인할 수 없는 진실이었다. 어설픈 경공술로 쫓기는 와중에 현실과 심상과의 오차를 바로잡긴 했지만, 역시 직접 펼쳐서 숙련도를 높여야 한다.
 즉, 일말의 시간이라도 필요하다.
 하지만 적면호리들의 주름진 얼굴과 혈안을 마주하는 순간.
 꾸욱.
 끝 모를 적개심이 피어올랐다. 비수를 움켜쥐고 있으니 잔혹하게 죽어간 낭인들의 모습도 뒤이어 떠올랐다.
 도망치고자 하면 도망칠 수 있었다.
 낭아풍운보의 칠성을 익히면서 수도 없이 세운 도주계획이었으니까.
 하지만 한 번 뒤를 보이고 도망치면, 영원히 그래야 할 것만 같았다.
 한발 물러서게 되면, 다음번에 두 발, 세 발 물러서게 되는 게 강호의 생리 아닌가.
 “넌 도망만 칠 거냐?”
 우우우웅.
 단전 깊숙이 끓어오르는 진기는 단호하게 거부했다.
 “억울하게 죽어간 원혼을 위로하지 않고 제 한 몸만 건사할 거냐?”
 형형한 눈빛도 아니라고 대답하였다.
 “하면 저놈들을 죽일 자신은 있는 거냐?”
 쿵쾅쿵쾅.
 이번엔 가슴께의 심장이 답해줬다.
 긴장감으로?
 아니었다.
 가슴 속 깊은 곳에서부터 퍼 나르는 혈류가.
 그렇다.
 라고 소리치듯이 전신을 질주하고 있었다.
 피가 돌은 장무린의 눈빛이 툭 불거졌다.
 -만약 도망칠 수 없는 상황이라면. 가슴은 불길보다 뜨겁게, 머리는 얼음보다 차갑게 하거라. 그게 네가 월야행에서 살아남는 또 다른 방법이다.
 장한의 말은 언제나 그렇듯 틀리는 법이 없었다.
 싸늘하게 식어가는 머릿속이 최단 경로를 그려냈다.
 도주를 위한 경로가 아니었다.
 캥캥!
 짖는 적면호리의 입천장에 남은 상흔을 발견하자마자 생긴 자신과의 최단 거리다.
 얼굴에 검상을 아로새긴 낭인을 물어뜯은 바로 그놈이었다.
 장무린의 입매가 비틀렸다.
 “그렇게까지 날 먹고 싶단 소리겠지?”
 캥캥!
 그 징글징글한 적면호리가 오줌까지 싸며 날뛰었다.
 같잖은 도발행위에 장무린의 검미마저 꿈틀거렸다.
 휙!
 물웅덩이의 중앙을 향해 빈 망태기가 던져진다.
 장무린이 무릎을 굽힌다.
 크게 흩어져 있던 적면호리들이 움찔거렸다.
 무리 사냥에 특화된 놈들인데, 장무린의 퇴로를 차단한답시고 벌린 거리가 제법 된다. 놈들의 도약력을 생각하면 촌각 만에 좁혀오겠지만.
 놈들은 방심하고 있는 상태다.
 이건 절호의 기회다.
 쉬이익!
 마침내 낭아풍운보가 펼쳐졌다.
 멋들어지게 날아간 신형이 물웅덩이의 중간에 놓인 빈 망태기로 떨어졌다.
 캐르르르.
 비웃는 듯한 소리를 낸 놈들이 땅바닥에 오줌을 갈기며 도발했다.
 장무린은 입매에 그림 같은 미소가 걸려 있었다.
 그렇게 방심하고 있으라고.
 물속으로 풍덩 빠져야 할 신형이 빈 망태기에 척! 하니 버텨낸다.
 적면호리들이 고개를 갸우뚱하는 찰나.
 파앙!
 장무린의 신형이 화포의 포탄처럼 쏘아졌다.
 낭아풍운보!
 까드득.
 장무린은 비수를 부서질 듯이 움켜쥔 손을 뒤로 쭉! 당겼다.
 암암리에 담긴 내공에 비수가 부르르 떨린다. 마치 기뻐서 우는 것만 같았다.
 당혹 어린 표정을 짓던 그놈을 향해 비수가 빛살처럼 쏘아졌다.
 피잉!
 일직선의 궤도가 그리는 사선(死線).
 빠악―!
 폭죽이 터지는 소리와 함께 비수가 그 사선의 끝에 도달했을 때.
 툭 불거진 눈동자부터 뒤통수까지 통로가 생겼다. 배가 된 내공 덕분이기도 했지만, 순도가 기이할 정도로 높아져 속도와 위력이 배가 됐다. 좋아진 육체적인 힘은 말할 것도 없고.
 오히려 쏘아낸 장무린이 드러난 결과에 놀랄 정도다.
 털썩.
 머리가 꿰뚫린 적면호리의 몸이 실 끊어진 인형처럼 픽 쓰러지는 건 당연지사.
 단말마의 비명조차 내지르지 못할 정도로 툭 불거진 놈의 눈이 시야에 들어왔다.
 당혹스러워하는 적면호리들이 전투태세를 갖추기도 전에.
 촤아아악!
 멋들어지게 흙바닥을 긁으며 착지한 장무린이 바닥에 박힌 비수를 빼어 들었다.
 캐르르!
 그리 멀지 않은 위치에 있던 놈이 도약했다. 입을 쩍― 벌리며 다가오는 중이었다. 둘러싸이지만 않으면 놈들은 그리 두렵지 않았다.
 해서 벌려진 놈의 입속, 목젖을 목표로 잡았다.
 “늦었다.”
 물론 늦은 건 장무린이 아니었다.
 바로 놈이었다.
 
 피잉!
 장무린은 있는 힘을 다해 회수한 비수를 쏘아 보냈다.
 퍼억, 캥!
 이번엔 담은 힘이 약했지만, 두개골을 뚫고 나오기엔 충분하였다.
 그러나 나오자마자 힘을 잃은 비수는 황급히 도약해온 다른 놈이 낚아채기에 충분한 속도였다.
 비수를 씹어 삼키려는 듯이 주둥아리를 벌린 놈.
 휘릭.
 그보다 빠른 장무린의 신형이 비수를 낚아챘다. 놈들의 행동 방식은 이미 계산해두고 있었고, 흩어져 있던 게 아주 큰 도움이 됐다.
 심상수련으로 그간 수도 없이 그려본 장면이었으니까.
 이 모든 게 낭아풍운보가 칠성에 이르렀기에 가능한 일.
 그저 그런 지난날의 경공술이 아니다.
 경악한 듯한 놈의 얼굴을 보며 장무린의 신형이 공중에서 팽그르르― 돌았다.
 핑, 퍽!
 회전력을 실어 던진 비도술은 내공을 담지 않았음에도, 놈의 눈을 꿰뚫고 들어가 뇌를 헤집을만했다.
 캐액!
 죽어가는 다른 쪽의 눈동자에 장무린의 얼굴이 확대됐다. 본능 적으로 입을 벌리려고 했지만, 명령을 내릴 기관을 잃은 육신은 따라주지 않는다.
 캐앵!
 제일 멀리 있던 놈이 장무린을 물어뜯기 위해 미친 듯이 도약했다.
 장무린은 조금의 당황도 하지 않고, 죽은 놈의 박살이 난 눈두덩에 손을 집어넣었다.
 푹!
 물컹거리는 느낌에 질색할 새도 없이 팔을 집어넣어 헤집었다. 그리고 무언가 손끝에 걸렸다.
 이번엔 적면호리가 빨랐고, 장무린이 늦은 것만 같았다.
 텁!
 마지막 남은 적면호리가 쾌재를 부르며 주둥아리를 다물었다.
 아무리 장무린이 신묘한 움직임을 보여도 이건 피하지 못하리라.
 질겅질겅.
 주둥아리를 다물어 있는 힘을 다해 씹어댔다.
 곧 부드럽고 달콤한 피와 살이 느껴져야 하는데, 너무나도 질기다.
 끼잉.
 의아해할 새도 없이 씹어대다가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자신이 미친 듯이 씹어대던 게 장무린이 아닌, 동료의 주둥아리여서다.
 휘익!
 이미 장무린의 신형은 멋지게 휘돌아 놈의 옆면에 자리해 있었다.
 그리고 그건 홀로 남은 적면호리가 본 마지막 광경이었다.
 피잉!
 죽은 놈을 끌어당겨 동료를 물게 한 장무린.
 그가 쏘아낸 비수가 그놈의 눈동자를 헤집고 들어갔다.
 적면호리의 눈과 눈 사이에서 피와 파편이 튀었다.
 퍼억!
 기형이 아닌 이상 두 눈동자가 동시에 터져 나가는 건, 막을 수가 없던 것이다.
 방심한 대가들을 톡톡히 치른 놈이 고통스러워했다.
 캐앵, 캐앵!
 연신 비명을 지른 적면호리가 네 발을 미친 듯이 놀려댔다.
 도주하는 놈의 뒷모습을 보며 장무린은 꿰뚫고 나온 비수를 회수하였다. 그리고 자신의 팔을 바라봤다.
 “…….”
 육체에도 뭔가 변화가 생겼다. 그에 대한 생각은 일단은 뒤로 미뤄뒀다.
 왜냐면 지금은.
 수확의 시간이었으니까.
 장무린은 피와 뇌수로 범벅된 비수를 들고, 죽은 세 마리의 시체를 향해 다가갔다.
 차가운 장무린의 눈동자가 제일 처음 죽인 놈을 잠시 내려다보는 중이다.
 하나 남은 풀린 동공에 장무린의 모습이 비쳤다.
 “날 먹고 싶었겠지.”
 스아악―!
 비수가 놈의 배를 향해 거침없이 휘둘렸다.
 “하지만 이젠 내가 먹을 차례다.”
 # 第 六 章
 
 죽은 놈들의 배를 갈라 삼성급 내단 세 개를 확보했다.
 장무린은 수면에 뜬 빈 망태기를 집어서 물기를 탈탈 털어냈다. 그리곤 내단 세 개를 망태기에 집어넣었다. 기다란 끈을 이용해 사선으로 비켜 멘 뒤, 빈틈없이 조였다.
 끼잉끼잉.
 멀리서 들려오는 고통스러워하는 적면호리의 울음소리.
 장무린은 그 소리가 동료를 부르는 소리임을 누구보다 잘 알았다.
 모인다면 못해도 스물은 되리라.
 냉정해져야 할 때다.
 장무린은 현재 무장 상태와 무공으로는 놈들 모두를 맞상대하기 어려움을 잘 알았다. 조금 전의 쾌거는 뿔뿔이 흩어져 있던 놈들이 방심도 했었고, 진보된 내공과 육체 능력, 낭아풍운보의 성취 덕분이었다.
 지난날과 현재를 비교해보면 그야말로 천양지차다.
 내공의 순도가 높아진 덕분에 진기의 흐름이 매우 매끄러웠고, 비도술의 위력도 배 이상이 됐다.
 비수가 스무 자루 정도 더 있다면 해볼 만하겠다고 여길 수도 있겠지만, 적면호리의 장점은 집단 전에서 발휘되었다.
 사냥하는 법을 잘 아는 놈들이 조금 전처럼 쉬이 당해줄 리 만무하다.
 해서 지금은 도주해야 할 시기다.
 “제길.”
 힘이 생기니, 가슴속 깊은 곳에서 분기가 치밀어 올라 무모하게 굴 수도 있었지만, 차가워진 머리는 그러지 말라 권고했다.
 장무린은 새로 얻은 힘을 시험하지 못해 날뛰는 애송이가 아니었다. 적면호리의 가죽과 힘줄, 송곳니가 눈에 들어왔다.
 짐이 속도를 늦추고, 욕심은 화가 되어 돌아온다.
 “내게 아니야.”
 가볍게 욕심을 억누르고는 발을 굴렀다.
 휘익!
 장무린의 신형이 나뭇가지 위에 올라섰다.
 그때였다.
 챙챙챙!
 귀를 자극하는 아련한 쇳소리가 들려왔다.
 캐앵, 캐앵!
 적면호리가 짖는 소리도 함께.
 장무린의 눈이 가늘어졌다.
 누군가 여우골을 다시 찾은 것이다.
 장무린은 밤하늘을 올려다봤다.
 붉은 보름달이 떠올라 있었다.
 달이 차고 기우는 걸로 여우골에서 삼십일을 보냈음을 계산해온 장무린이었다.
 그렇다면 지금 기문진 밖은 그믐달일 터.
 월야행을 떠나기에 가장 적기인 날이었다.
 “그래서 이곳에 네 마리밖에 남지 않은 거였군. 침입자가 있으니까.”
 장무린은 묘한 미소를 짓고는 나무에서 나무로 신형을 움직였다. 잠행해본 적이 없지만, 그 몸짓은 매우 조심스러웠다.
 침입한 이가 누군지 살필 필요가 있었다.
 휘이잉.
 장무린의 신형은 나뭇잎을 나부끼는 한 줄기 미풍이 되었다.
 
 ***
 
 “모두 좀 더 힘을 내요!”
 앳된 목소리로 다부지게 외쳐보지만, 전세는 기울어진 지 오래였다.
 스무 마리나 되는 적면호리가 사방을 에워싼 터라 퇴로도 마땅치 않았다.
 에워싸인 여덟 명은 원형검진을 형성해서 겨우 버티는 중이었다.
 캐르르.
 적면호리들이 히죽히죽 웃는 듯한 주름진 얼굴로 관망하고 있었다.
 이미 퇴로를 막은 터라, 숫자가 적은 애송이들은 적면호리에게 큰 위협을 주지 못했다.
 해서 지금 가지고 노는 중이었다.
 그냥 뱃속으로 보내주기엔 섭섭한가 보다.
 적면호리들은 빙글빙글 돌면서 간간이 공격했지만, 진심은 담겨 있지 않았다. 들이댔다가도 애송이들이 고슴도치처럼 날을 세우면 뒤로 펄쩍 뛰어 피했다.
 “제길!”
 그 경쾌한 움직임은 심각한 상황에 직면한 애송이들의 낯빛을 더욱 어둡게 하였다.
 바보가 아닌 이상 알아줘야 했다.
 지금 적면호리들이 자신들을 가지고 놀고 있음을.
 그리고 저 장난기가 살의로 뒤바뀌었을 시 닥칠 상황이 머릿속에 절로 그려졌다.
 자그마치 삼성급 적면호리 스물이다.
 애송이 중 여인인 묵가장의 장녀 묵부용은 이곳으로 자신들을 이끌고 온 단이령을 질책했다.
 “령아, 이게 대체 어떻게 된 거야? 경험 삼아 정찰만 하고 올 정도라고 했잖아!”
 “미, 미안해요. 언니, 저도 이렇게 많은 수가 다 올 줄은 몰랐어요.”
 단이령이 파리해진 안색으로 검을 움켜쥐었다.
 월야행에서 액받이, 즉 미끼나 몰이꾼 없이는 안된다는 사실을 절감하는 중이었다.
 깡!
 그리고 막 주둥이를 들이미는 적면호리의 송곳니를 쳐냈다.
 캥!
 놀라 한 발짝 물러난 적면호리가 앞발로 제 송곳니와 주둥이를 쓸며 쳐다봤다. 그게 얼마나 사람 같아 보였으면, 적면호리의 탈을 쓴 사람이 아닐까 싶었다.
 묵부용의 남동생 묵이건도 적면호리의 주둥아리를 쳐내며 외쳤다.
 “누나, 지금 남 탓할 때야? 정확히는 이령이 말을 들은 누나가 경험 삼아 가고 싶다고 해서 온 거잖아?”
 “이건이, 너!”
 “왜, 내가 틀린 말 했어?”
 하나뿐인 동생이 단이령 편을 들자 묵부용이 얼굴을 빨갛게 물들였다.
 “지금은 우리끼리 부딪칠 때가 아닌 걸로 생각하오만.”
 신기수사 제갈군사의 차남인 제갈윤도 어느 정도 동의하는 눈치였다. 그의 청수한 문사복도 이미 땀으로 흥건하게 젖어있었다.
 마침 단이령에게 점수를 따고 싶었던 구장익이 맞장구쳐댔다.
 “사매를 탓하는 건 지금 상황에 맞지도 않소. 어차피 우리 모두 동의해서 나선 길 아니오?”
 제법 맥을 짚는 말이었기에, 묵부용은 꿀 먹은 벙어리처럼 입을 다물었다.
 의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래도 제 탓이라는 건 변함없어요. 제가 말해서 꾸려진 월야행이니까. 부용 언니의 질책은 당연해요.”
 단이령은 구장익의 참견이 하나도 고맙지 않은 얼굴이었다. 오히려 쌀쌀맞았다.
 구장익은 얼굴을 붉혔고, 묵부용의 얼굴엔 화색이 돌았다. 하지만 닥친 상황에 얼굴색은 도로 어두워졌다.
 수행원으로 이끌고 온 호위무사 셋도 점점 지쳐가는 기색이었다.
 이류의 끝자락에 이른 호위무사들의 활약이 아니었다면, 그녀들은 진즉 적면호리의 뱃속에 들어가고도 남았다.
 그들이 구종학만큼 강했다면 이 난국을 타개해 보겠지만, 아쉽게도 구종학보다 한 수 떨어졌다.
 그래도 제갈윤이 제안한 원형검진이 훌륭했기에, 지금까지 버틸 수 있었던 것이다.
 “변수가 필요한데 말이요.”
 무공이 호위 무인보다 떨어졌지만, 머리가 뛰어난 제갈윤의 말에 모두가 고개를 끄덕였다.
 캐갱캐갱!
 그때 어디선가 고통스러워하는 적면호리의 비명이 들려왔다. 곧 넘어졌다가 일어서는 이상한 행동을 일삼는 적면호리가 눈에 들어왔다. 제자리에서 빙글빙글 돌다가 고통스러워하는 중이다.
 캥캥!
 주위에 있던 적면호리 중 하나가 부르짖었다.
 그제야 이상한 행동을 보이던 적면호리가 방향을 잡고 동료가 있는 곳으로 왔다.
 가까이서 본 적면호리의 모습에 원형검진을 형성한 여덟 명이 놀랐다.
 놀랍게도 적면호리는 눈두덩이에 끔찍한 구멍이 있었다.
 양쪽 눈두덩이 가로로 뚫려 반대쪽이 훤히 보였다. 뇌를 비켜나가 겨우 목숨줄을 부지하고 있었다.
 그 몰골을 본 제갈윤의 눈빛이 가늘어졌다.
 “혹 우리 말고 누군가 있는 건가?”
 “설마 그럴 리가요.”
 “맞아, 이번에 여우골의 월야행을 계획한 건 우리밖에 없잖아, 누나?”
 묵부용과 묵이건이 부정부터 했다. 사실이었으니까.
 “……!”
 단이령의 봉목이 일렁거렸다. 설마 하는 심정에 떨리는 입술을 떼려고 했지만.
 캐르르르.
 동료의 부상과 울부짖음에 적면호리들의 기세가 급변하고 있었다. 관망하고 있던 적면호리들이 하나둘 가세하기 위해 송곳니를 드러낸 것이다.
 장난기를 버리고 진지하게 모두가 나섰다.
 묵가장의 호위무사들 안색이 급변했다. 일행을 이끌던 제갈윤에게 다급히 외쳤다.
 “제갈윤 공자, 무슨 일이 있어도 부용 소저와 이건 공자는 살려야 하오. 우리가 어떻게든 막아설 테니 나머지 후기지수들을 이끌고 탈출해주십시오.”
 “하지만.”
 “이대로라면 모두가 이곳에 뼈조차 남기지 못할 것이오!”
 “……!”
 절박한 호위무사의 외침에 제갈윤은 창백하게 질린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이미 퇴로마저 차단당한 마당에 과연 살아나갈 수 있을까?
 잘난 그의 머리를 아무리 굴려봐도 죽었다 깨나도 불가능한 일이었다.
 “제길.”
 그래서 청수한 인상과 어울리지 않게 욕설까지 내뱉었다.
 계기가.
 이 절체절명의 상황을 반전시킬 계기가 필요하였다.
 
 장무린은 하마터면 침음을 흘릴 뻔하였다. 부상당한 적면호리의 뒤를 따르다가 발견한 이들 때문이었다.
 정확히는 단이령.
 내심 구종학인 줄 알았는데, 그는 보이질 않았다.
 구장익 만이 있었다. 그리고 나머지 인원들은 장무린도 처음 보는 이들이었다.
 무공수위는 삼십 대 장한, 셋이 좀 더 강해 보였지만, 대개 이류 남짓이다.
 개중 문사복을 입은 청년이 제법 호위무사와 비슷한 느낌을 주었지만, 적면호리의 숫자가 너무 많았다.
 지금껏 버틴 것도 용하다.
 당연히 적면호리들이 갖고 노는 중이었기에 가능했지만, 그들이 펼치고 있는 원형검진이 인상적이었다.
 절박한 형세임에도 그들이 적면호리에게 물려가지 않기 위한 최적의 방어진이었다.
 장무린은 그게 검진을 진두지휘하는 문사복 청년에 의한 것임을 간파했다.
 적재적소에 인원을 배치해 동료가 동료를 위험으로부터 구한다.
 서로의 믿음은 기본이고, 원형검진을 지휘하는 문사복 청년을 신뢰하지 않으면 불가능 일이었다.
 나무 위에선 장무린은 검진을 보며 적잖이 감탄했다. 위에서 내려다보니 그 움직임이 한눈에 들어왔다.
 잠시 뒤.
 호위무사가 외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제갈공자, 무슨 일이 있어도 부용소저와 이건 공자를 살려야 하오. 우리가 어떻게든 막아설 테니 나머지 후기지수들을 이끌고 탈출해주십시오.”
 제갈공자?
 신기수사로 유명한 무림맹의 제갈군사를 말하는 걸까? 당연히 아닐 거다. 제갈류진은 오십 줄에 접어들었으니, 그 자식뻘이나 되겠지.
 과연 제갈세가의 피는 어디 가지 않는다는 거다.
 장무린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검진의 변화를 눈에 담았다. 그 물이 흐르듯 한 유기적인 움직임이 보인 변화에 감탄하는 것도 잠시.
 단이령을 비롯한 이들의 절박한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청초한 미모를 뽐내는 단이령과 쌍벽을 이루는 미모의 여인, 그 옆에 준수한 어린 청년이 긴장한 기색이 여기까지 전해졌다.
 구장익은 이미 혼란에 빠져 손발이 어지러워지는 중이다.
 그나마 상대적으로 뛰어난 호위무사들의 검격과 제갈공자의 지휘, 원형검진의 탁월함으로 어찌어찌 버텨내고 있었다.
 캐캥!
 날카로운 울음소리.
 적면호리들이 진득한 살기를 내비치기 시작한다. 본격적으로 나서기로 작정한 듯 보였다.
 장무린은 전세가 급격히 기울어지는 모습을 보면서 이들이 전멸할 시간을 가늠했다.
 일 각 아니, 반 각.
 어쩌면 그보다 더 빠를지도 모른다.
 단이령.
 그녀가 눈에 살짝 밟혔다.
 꽃 같은 외모 때문이 아니었다.
 어째서 이곳에 다시 온 걸까?
 이 물음이 그 이유였다.
 그냥 철없는 행보로 보기엔 그녀는 주위를 둘러보느라 여념이 없었다. 마치 누군가를 찾는 모양새였다.
 설마 자신을 비롯한 낭인을 찾는 건가?
 머릿속에 뜬 의문은 금방 뭉개졌다. 그럴 만한 정을 쌓은 것도 아니고, 챙길 의리도 없었다. 자신이 버젓이 살아있긴 하나, 생존자를 찾으러 왔다고 하기엔 인원구성이 너무 무모했다.
 하면 대체 왜?
 이 무모한 월야행에 나선 걸까?
 장무린은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구종학이라도 같이 왔다면 그 이유를 짐작할 수 있었겠지만, 제 동년배들과 호위 셋만 꾸려서 왔다. 그것도 적은 인원으로.
 모르겠다.
 대체 무슨 정신머리로 이런 말도 안 되는 월야행을 계획했는지, 그냥 앞마당의 귀호리들로 만족하고 갈 것이지 왜 욕심은 부려대서.
 물론 욕심을 부려서 온 이들이라고 하기엔 행장이라든지, 몰이꾼으로 쓸 액받이나 낭인들이 없다는 게 걸렸다.
 즉, 수색 내지는 경험 삼아 온 거로 여겨야 한다.
 “꺅!”
 단이령의 비명.
 쨍그랑!
 송곳니에 팔을 긁힌 그녀가 검을 떨어트렸다. 하얀 피부 위로 핏줄기가 솟구쳤다.
 적면호리가 징그러운 주름을 만들어내며, 혀로 송곳니에 묻은 피를 핥았다.
 제법 버티게 해줬던 원형검진에 균열이 생긴 순간이었다.
 그리고 그 균열을 눈뜨고 놓칠 정도로 적면호리들은 멍청하지 않았다.
 오히려 교활했다.
 단이령이 얼른 검을 주워들어 대항했지만, 당황은 금방 손발을 어지럽게 만들었다. 봉두난발까진 아니더라도 헝클어진 머리카락 사이로 보이는 눈망울에 익숙한 감정이 엿보였다.
 공포.
 그런 와중에도 주위를 흘끗거리느라 여념이 없다니.
 장무린은 그것 때문에 검진의 균열이 갔음을 눈치챘다.
 참으로 멍청하다.
 집중했다면 조금이라도 버틸 수 있었을 텐데 말이다. 물론 얼마 안 가 전멸하겠지만서도.
 호위무사들이 소리를 지르며 주위를 끌고 검을 휘둘러보지만, 이미 단이령을 향한 적면호리의 주둥아리를 막기엔 역부족이었다. 지금 당장 제 앞가림하기도 벅찼다.
 가장 옆에 있던 구장익이 몸이라도 던져 막아야 했지만, 핼쑥해진 얼굴과 동공에 피어오른 두려움은 그러길 거부하였다. 몸을 던지면 그다음이 자신의 차례임을 직감한 것이다.
 단이령은 자신이 물려가기 직전에도 고개를 돌리고 있었다.
 “……멍청하긴.”
 죽게 놔두고 싶었다.
 그들이 자신들을 버리고 갔던 것처럼, 적면호리에게 갈기갈기 찢겨나가길 바랐다.
 죽을 만한 짓거리들을 했으니까.
 하지만.
 인면수심인 그들과 똑같이 굴고 싶지는 않았다.
 난 그들과 다르니까!
 순간 그녀의 봉목이 점점 크게 확대됐다.
 붉은 달 아래서 빛살처럼 날아오는 점이, 거뭇한 인영이 그 봉목에 맺혀가고 있었다.
 수막이 점점 차오르는 봉목에 그 인영이 벼락처럼 출수하는 모습이 잡혔다.
 피잉!
 내력을 듬뿍 머금은 비수가 그대로 사선을 그리고 날아온다.
 단이령의 코에 역한 냄새가 물씬 풍겨왔다.
 입을 쩍― 벌린 적면호리가 그제야 눈에 들어온다.
 “아.”
 안타까운 신음이 절로 나왔다.
 이대로 날아오는 인영이 누군지 확인도 못 해보고 죽는구나.
 단이령은 자신이 어째서 월야행을 계획했는지 몹시 후회했다. 아무리 죽은 남동생과 동년배인 장무린을 버려두고 온 게 마음에 걸려도 그렇지. 자신이 말을 꺼내면, 호기심 많은 묵가 남매가 흔쾌히 응할 거라는 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는데.
 치기 어린 마음이 이 모두를 죽음 속으로 몰아넣은 거다.
 미안해요.
 라는 말이 폐부를 찢고 나올 엄두도 못 냈다. 입매만 떨려서 겨우 한 단어를 만들어낼 뿐.
 “미, 미……!”
 떨리는 목소리, 곧 흉측한 송곳니들이 그녀의 가녀린 육신을 찢어발기려는 찰나!
 빠악―!
 폭죽이 터지는 소리와 함께 입을 벌렸던 적면호리가 그대로 스러졌다.
 푹.
 비수가 땅바닥에 틀어박히는 소리에 모두의 이목이 쏠렸다.
 봉두난발인지라 얼굴은 확인할 수가 없었다.
 그래도 안색들에 희망이 생겼다. 더욱 힘을 내서 달려드는 적면호리를 열심히 막아냈다.
 스으으, 덥석.
 바람처럼 날아온 봉두난발의 괴인이 그 비수를 도로 뽑아냈다.
 캥!
 적면호리가 빠르게 다가왔다.
 피잉!
 고개를 푹 숙인 괴인, 장무린은 자신을 물어뜯으려는 놈을 향해 또다시 출수했다.
 한 줄기의 날카로운 바람처럼 뻗어 나가는 비수의 목표는 적면호리의 목젖이다.
 퍼억!
 둔중한 소리와 함께 한 마리가 또 쓰러지자, 세 놈이 동시에 달려들었다.
 장무린이 미처 비수를 회수할 틈도 주지 않는 영악함이라니.
 역시 아까 세 마리를 잡은 건 운도 좋았고, 무리를 이루지 않았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적면호리들이 몸통박치기를 해왔지만.
 파앙!
 장무린은 가볍게 발을 굴렀다.
 하늘 위로 솟구치는 한줄기의 경쾌한 바람.
 낭아풍운보였다.
 다른 이들은 제 앞의 적면호리에 정신이 팔려 몰랐지만, 줄곧 괴인만 눈에 담고 있던 단이령은 눈치챘다.
 “흐윽.”
 봉목에선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린다.
 붉은 달 위에 뜬 검은 인영이 그리는 궤적에서.
 휘이이잉.
 바람이 불어왔다.
 그녀의 가슴에 새겨진 깊은 죄책감이 그 바람으로 말미암아 조금 사그라진 것만 같았다.
 장무린.
 그가 살아있었다.
 
 캐앵캥!
 적면호리들이 광분했다. 제 동료를 둘이나 죽인 놈이 보란 듯이 도주하고 있어서다.
 개중 우두머리 격인 놈이 캥캥! 거리자, 아홉이 캐르르거리며 호응했다.
 순식간에 둘로 나누어진 적면호리들.
 남은 여덟이 시간 끌 동안 저놈을 잡아 죽이려는 것이다.
 놈들이 택한 방법은 속전속결.
 적면호리 열 마리가 장무린이 그리는 궤적을 뒤쫓았다. 놈에게서 느껴지는 짙은 혈향이 원인이었다.
 동료의 내단.
 그 혈향을 맡은 적면호리의 눈동자가 더욱 붉어졌다. 눈이 뒤집힌 것이다.
 캐애앵!
 광분한 적면호리 열 마리의 추격은 가공할 지경이었다.
 거침없이 도약하며 장무린을 물어뜯으려고 안간힘을 썼다.
 장무린은 그럴 때마다 요리조리 잘 피해냈다.
 아슬아슬한 차이로 피해 가는 탓에 적면호리들이 두 눈을 희번덕거렸다. 조금만 더 힘을 내면 잡아 죽일 수 있다.
 놈에게선 짜증스러운 철 내음도 나질 않았다.
 이 점도 컸다.
 적면호리 열 마리를 쫓게 하기엔 말이다.
 금방에라도 잡힐 듯한 장무린의 신형에 단이령이 달려나가려고 했지만.
 제갈윤이 앞을 가로막았다.
 “조심하시오!”
 깡!
 막 단이령을 물어뜯으려던 적면호리가 아깝다는 듯이 입맛을 다셨다. 벌겋게 달아오른 주둥이를 앞발로 쓸었다.
 하마터면 물려갈 뻔한 단이령이 철렁 내려앉은 가슴을 쓸었다.
 “고, 고마워요.”
 “감사인사는 나중에. 이곳을 이탈하겠소!”
 “오오.”
 그 말에 나머지 여덟이 호응을 했다.
 단이령은 기다려달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제갈윤의 서슬 퍼런 눈빛에 그럴 수가 없었다.
 “누굴 찾으려고 왔다는 건 잘 알겠소. 하지만 더 이상의 위험은 사양하겠소.”
 싸늘한 읊조림이 그녀의 가슴에 파문을 일으켰다. 단이령은 입을 닫을 수밖에 없었다.
 묵부용이 다급히 소리쳤다.
 “령아, 빨리! 놈들이 눈치챈 듯해.”
 아직 여덟이나 남은 적면호리들이 퇴로를 차단하려고 우르르 몰려가고 있었다.
 주저하다간 천재일우의 기회를 준 이의 뜻이 물거품으로 변한다.
 제갈윤은 내심 그를 향해 감사를 보내고는 서둘러 진형을 이동시켰다.
 “퇴진!”
 척척척!
 그 약속된 말에 이미 들은 바가 있었는지, 가장 강한 호위무사들이 선두에 섰고, 제갈윤과 구장익이 가장 뒤쪽에 섰다.
 이 자리의 가장 어린 단이령, 묵부용과 묵이건을 보호하는 형세다.
 쉬쉬쉬쉬쉭!
 호위무사들이 있는 힘을 다해 적면호리들을 밀어냈다.
 사력을 다하는지 검엔 푸르슴한 기마저 맺혀 있었다.
 아직 일류의 경지가 아니기에 그 형태는 안개보다 더 흐릿했지만.
 적면호리들은 감히 맞서질 못했다. 속절없이 밀려나고 있었다.
 이런 최후의 한 수를 숨기고 있었다니.
 휘휘휘휘휙!
 이마에 땀을 뻘뻘 흘리는 호위무사들만 봐도 얼마나 무리하고 있는지 알만하였다. 어설픈 검기는 오래가지 않아 사라질 것이다.
 해서 단이령도 더는 뒤를 돌아보지 못했다. 지금 자신들의 생사를 위해 그들이 얼마나 필사의 노력을 하고 있는지 깨달아서다.
 “……!”
 순간 뒤따르던 단이령의 눈에 바닥에 떨어진 비수가 보였다.
 서둘러 그걸 주운 단이령에 묵부용이 의아했지만, 일단은 눈앞에서 발악하는 적면호리들이 더욱 중요하였다.
 캥캥!
 거칠게 짖으며 위협은 물론, 몸통박치기까지 시도해오고 있었다.
 
 하지만 이들의 검진을 깨트릴 수는 없었다.
 특히 선두에 선 호위무사들의 검에 맺힌 기가 적면호리들에게 두려움을 안겨줘서 그런지, 저지 효과는 미미했다.
 그나마 약한 뒤를 노려야 했지만, 그랬다간 비등한 형세가 깨져서 동료를 잃는 걸 감수해야 한다.
 동료애가 있는 적면호리들로서는 주저할 수밖에 없는 상황.
 그 순간 제갈윤의 눈이 반짝였다.
 “추형(錐形)!”
 그 일갈을 알아들은 구장익이 제갈윤과 반대쪽에 서고, 그 둘 사이에 자리한 단이령과 묵부용과 묵이건 남매는 한일(一)자로 섰다.
 호위무사들을 삼각대형으로 앞세우고, 묵가 남매를 가운데에 둔 송곳진형이었다.
 휘휘휘휘휙!
 모두가 전력을 다해 검을 휘두르며 돌진하자, 적면호리들이 크게 당황했다.
 적면호리들은 얼기설기 서 있던 터라, 드러난 틈으로 그들이 일제히 돌진한 것이다.
 순식간에 와해가 된 아니, 비켜선 적면호리들.
 제갈윤이 검을 바닥에 꽂아 넣으며 우렁차게 소리쳤다.
 어허엉―!
 쩌렁쩌렁한 그 외침은.
 바로 사자후(獅子吼)!
 지금껏 숨기고 있던 시기적절한 한 수였다.
 물러서기 바빴던 적면호리들이 움찔거리며 주저앉을 정도로 사자후는 우렁찼다. 갑작스러운 진형변화에 당황했는데, 귀가 밝은 덕분에 귀청이 먹먹해졌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두려움에 움츠렸다.
 만약 제갈윤이 절정에 이른 실력이었다면, 이 사자후에 적면호리뿐만 아니라, 다른 이들까지 귀청이 터지다 못해 뇌가 곤죽이 되었을 것이다.
 제갈윤은 사자후를 흉내 내는 수준에 불과했다. 그것만으로도 제갈윤의 안색은 하얗게 탈색되었다. 무리를 각오한 비장의 한 수였다.
 하지만 적면호리들을 주저앉게 하여 틈을 만들어낼 정도는 되었다.
 파바바바바박!
 그 찰나를 틈타 모두가 땅을 박찼다.
 경공술을 펼친 것이다.
 빠르게 쏘아지는 신형들에 대경한 적면호리들이 필사적으로 따라붙었지만.
 이미 경공술을 극성으로 펼친 그들이었다.
 그 신형들의 끄트머리라도 따라잡으려는 시도로 도약까지 해봤다.
 그럼에도 그들의 쾌진격(快進擊)을 따라잡진 못했다.
 캥캥캥!
 뒤로 들려오는 분한 울부짖음에 제갈윤이 슬쩍 미소를 지었다.
 탈주는 성공적이었다.
 작정하고 경공술을 있는 대로 펼치는 그들을 적면호리들이 따라잡을 리 만무했으니까.
 그리고.
 반대쪽에 있는 장무린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이 빠져나가는 걸 증명이라도 하듯 우렁찬 사자후와 적면호리들의 분통 어린 울부짖음을 듣는 순간.
 연기를 그만두었다.
 낭아풍운보를 극성으로 펼친다.
 파앙!
 나뭇가지를 박찬 장무린의 신형이 더욱 쾌속하게 쏘아져 나갔다.
 캥!
 당황한 우두머리의 울음에 따르던 나머지 적면호리들이 서로 돌아봤다.
 이게 대체 어찌 된 영문인지 몰라 했다.
 분명 금방에라도 잡힐 것처럼 힘 빠져있던 놈이 바람처럼 쏘아져 나가니 말이다.
 지붕 위로 올라간 닭 쫓던 개 마냥.
 그들은 사라진 장무린의 신형에 걸음을 서서히 늦추었다.
 쫓고자 하는 마음이 안 생길 정도로 장무린의 신형은 이미 밤의 숲 속으로 사라졌다. 동료의 내단들이 풍기는 혈향으로도 그 종적이 가늠조차 안 될 정도다.
 캥캥캥!
 그들이 서로 돌아보며 울부짖고 있을 때, 뒤쪽에서 나머지 여덟이 합류했다.
 그리곤 서로 주둥이를 들이밀며 교감을 하나 싶더니 이내 물어뜯으며 싸우기 시작했다.
 캐캐캐캐캥!
 우두머리의 질책 어린 물어뜯음에 뒤늦게 합류한 여덟은 앙앙 거리기만 할 뿐, 곧 꼬리를 내렸다. 주눅이 잔뜩 들은 그 모습은 당연했다.
 맴매를 맞는 중이었으니까.
 
 휘이이잉!
 장무린의 쾌속하게 쏘아진 신형이 꽤 돌아와서, 골짜기의 입구 쪽으로 향했다.
 골짜기를 나가려던 순간 멈칫했다.
 장무린의 눈에 이채가 흘렀다.
 남겨진 두 구의 시체와 부상당한 놈이 바닥에 엎드려있었다.
 거기다 멀지 않은 곳에 검 하나가 보였다.
 바닥에 꽂힌 검날이 달빛에 반짝였다.
 사자후를 펼칠 때 제갈윤이 꽂아두고 간 그 검이었다.
 혹시 누가 당했나?
 장무린은 의아했지만, 일단은 그 검을 뽑았다.
 “잠시 빌려 쓰지.”
 말이 끝나기 무섭게.
 장무린은 전력으로 내달렸다.
 두 눈이 사라진데다, 피까지 많이 흘려 기운 빠진 놈이 고개를 들었다.
 곧 그 목을 향해서 시퍼런 검날이 떨어져 내렸다.
 스아악!
 
 ***
 
 추가로 삼성급 내단 세 개를 확보한 장무린이 골짜기를 벗어났다.
 여우골의 앞마당.
 그곳에 모여있는 인원들이 보였다.
 다해서 여덟 명.
 부상을 당하거나 죽은 이는 없어 보인다.
 장무린은 수풀 속에서 자신을 기다리는 게 분명한 그들을 바라보았다.
 특히 제갈윤.
 청수한 인상의 문사복 청년은 빈 검집을 들고 서 있었다.
 장무린은 누군가를 기다리는 그 모양새에 입매로 호선을 그렸다.
 제갈윤은 회수를 못 한 게 아니라 안 한 거다.
 혹시라도 있을 만약을 위해, 그리고 장무린을 위해 제 검을 남기고 간 것.
 만약 그런 목적이 아니었다면 이미 여우골을 나서고도 남았으니까.
 어째서 기다리는지 눈치챈 장무린의 가슴에 묘한 파문이 번졌다.
 제갈윤.
 누가 그 죽을지도 모를 위기의 상황에 자신을 도와준 이를 위해 검까지 남기겠는가.
 물론 나중에 월야행을 와서 회수해도 되고, 그 가진 뜻이 장무린을 다시 보기 위한 빌미를 만들기 위한 거지만.
 장무린은 안절부절못하는 단이령의 어여쁜 모습보다, 제갈윤의 헌앙한 모습에 눈길이 더 갔다.
 남색에 취미가 있어서가 아니다.
 유인하려는 자신의 몸짓을 단박에 꿰뚫어보고, 그에 발맞춰 상황을 반전시켰다. 한 마디로 제갈윤은 모두를 안전으로 이끈 인물이었다.
 호감이 절로 갔다.
 그런 그가 진두지휘하던 원형검진이 주는 호기심도 한몫했다.
 뜻이 통할 것 같은 상대는 처음이었다.
 오래 사귀어 가까이 두고 싶은 느낌이랄까?
 “……이것 참, 처음 봤는데.”
 그랬다.
 가끔 같이 술 한 잔 기울이고 싶어하던 벗이 있다는 장한의 말처럼.
 장무린도 제갈윤과 술은 몰라도 대화를 나누고 싶은 마음이 생겨났다.
 하지만.
 누구보다 잘 알았다.
 지금 구장익과 단이령 앞에 모습을 드러낸다는 게 어떤 의미인지 말이다.
 손목을 내려다보는 장무린의 시선.
 이제 아무것도 없었다.
 그럼에도 귀휴 중인 자신의 처지가 새삼 떠오른다.
 캐앵캐앵.
 뒤쪽에서 들려오는 아련한 울음소리.
 동료의 시체를 발견한 듯했다.
 이대로라면 눈에 불을 켠 놈들이 앞마당까지 나올지도 몰랐다.
 스윽.
 장무린은 제갈윤의 청강장검을 들어 보였다.
 붉은 달이 매끈한 검날에 비칠 정도로 잘 벼려졌다.
 질 좋은 한철로 만든 게 분명한 청강장검은 척 보기에도 명검이었다. 그리고 그걸 거리낌 없이 내준 제갈윤의 표정엔 한 치의 초조함도 없었다.
 그야말로 군자의 풍모다.
 다부진 얼굴은 장무린의 무사귀환을 믿는 듯했다.
 어째서?
 라는 의문이 들었지만, 백년수재로 이름난 천재의 머릿속을 이해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슥슥.
 장무린은 내단에 묻은 피를 검지로 찍어 매끈한 검신에 글자를 남겼다.
 그리고.
 휘익!
 있는 힘껏 검을 던졌다.
 긴 호선을 그리며 날아간 검날이 붉은 달빛에 번쩍였다.
 바람을 가르는 소리에 모두의 시선이 위로 향했다.
 휘리리릭!
 그게 무엇인지 알아본 제갈윤이 신형을 날려 낚아챘다.
 “……!”
 바닥에 내려선 제갈윤은 검을 살피더니 눈빛이 잘게 떨렸다.
 침묵에 빠진 제갈윤의 곁으로 나머지 일곱이 달려왔다.
 “뭐예요?”
 묵부용이 물어왔다. 그리곤 검날에 쓰인 글자를 보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제갈윤이 뭐 때문에 이러고 있었는지 짐작조차 못 한 듯했다.
 “윤 형님, 어째서 그러십니까?”
 묵이건도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물어왔다.
 “후우.”
 제갈윤은 대답 대신 나직이 탄식했다. 상대가 전한 뜻이 가슴에 와 닿아서다. 제갈윤은 정말이지 아쉬운 눈빛으로 자신의 검신만 바라봤다.
 “아쉽구나, 참으로 아쉬워.”
 모두의 목숨을 구해준 것도 모자라, 제 뜻을 알아준 이였는데 못 보고 간다니.
 단이령도 그 검신의 글자를 보더니 고개를 푹 숙였다.
 
 회자정리(會者定離).
 
 사람은 만나면 누구나 헤어지게 된다는.
 장무린의 가슴에 깊은 상흔을 남긴 장한의 마지막 한 마디가.
 매끈한 검신에 남겨져 있었다.
 
 # 第 七 章
 
 그들이 떠나가는 모습을 지켜본 뒤.
 콰콰콰콰.
 장무린은 폭포수의 동혈로 다시 들어왔다.
 이곳으로 돌아온 이유는 간단했다.
 망태기 안에 담긴 여섯 개의 내단.
 바로 이게 문제였다.
 월야행은 기문진 안에서 사냥하는 것도 위험했지만, 성으로 복귀할 때도 마찬가지로 위험하였다.
 바로 내단이 풍기는 혈향 때문이다.
 장무린은 자신을 쫓던 적면호리 수가 열 마리가 됐음을 결코, 그냥 흘려보지 않았다.
 적면호리들은 기껏 공을 들여놨던 사냥감이 도망칠 가능성이 있음에도, 반이 넘는 수가 장무린을 따라왔다.
 동료애도 동료애지만, 그 정도로 야행수들은 내단에 집착하였다.
 월야행의 복귀가 위험한 점은 그래서였다.
 불이 무서워 달려들지 못하던 일성급 야행수들도 개미떼처럼 달려들게 하니까.
 그믐달에 월야행을 떠나는 이유가 바로 거기에 있었다. 불안정한 일성급 야행수들만이 지천에 널려있지만, 그래도 많은 수의 횃불로 견제하면 복귀할 수는 있었다.
 물론 발 한번 잘 못 디디면 일성급 야행수들로 천라지망이 펼쳐지겠지만 말이다.
 그러나.
 달이 차오르는 밤은 다르다.
 삼성급 이상의 야행수들이 슬슬 모습을 드러낸다고 한다.
 만월엔 육성급 야행수들도 돌아다닌다고 하였다. 소문으론 독자적인 행동을 시작한다는 칠성급을 목격했다고 했었다.
 대문파 하나쯤은 찜 쪄먹는 칠성급 야행수.
 요근래 구성급을 목격한 이는 없지만, 구성급 야행수면 성 하나쯤은 쑥대밭으로 만든다고 하였다.
 말 그대로 재앙.
 수십 년 전 관과 무림이 일치단결하여 구성급을 대적했던 적이 있었다.
 황궁이 있던 성도(聖都)는 갑자기 나타난 구성급 용린대망(龍鱗大蟒)에 그야말로 쑥대밭이 됐다. 천하의 모든 병력과 고수들이 집중된 성도가 용린대망의 분탕질 한 번에 폐허가 된 것이다.
 어찌어찌 패퇴시키긴 했지만, 성도는 천도(遷都)해야 할 정도로 입은 피해가 어마어마했다. 죽은 이들은 아직까지 공식적으로 집계되지 않은데다가, 그 피해복구는 언감생심 꿈도 못 꿨다.
 황궁, 관군, 강호인들의 경각심을 일깨운 전대미문의 사건이었다.
 그러니.
 장무린이 여우골의 기문진 밖으로 나가지 않은 이유가 간단하였다.
 혼자 삼성급 내단 여섯 개를 가지고 밤길을 나선다는 건.
 섶을 지고 불 속으로 뛰어드는 거나 진배없었다.
 일성급 야행수들이 득달같이 달려들 것이니까.
 호곡성까지 한 시진 거리.
 장무린의 경공술이라면 반 시진으로 줄일 수 있었다.
 충분히 시도해볼 만하나, 장무린의 목적지는 호곡성이 아니었고, 밤길을 나서는 건 여러모로 위험하다.
 그럼 어디일까.
 칠야시(漆夜市).
 장무린이 정한 목적지는 칠야시였다.
 제갈윤을 비롯한 이들이 향한 호곡성과 정반대 방향에 있는 곳이었다. 거점에 들리지 않고, 족히 칠 일을 쉬지 않고 경공술을 펼쳐야 닿을 거리에 자리 잡고 있었다.
 그곳을 목적지로 정한 이유는 간단했다.
 “강한 무공이 필요해.”
 
 장무린이 씁쓸하게 읊조렸다. 경공술을 제외한 나머지 무공은 강호인들과 비교했을 때, 눈뜨고 봐주기 어려웠다.
 여느 문파의 제자로 들어가 사승관계를 맺고 무공을 전수받으면 되었지만, 그게 어디 쉬운 일인가.
 문파는 결코, 함부로 무공을 전수해주지 않았다.
 제자를 받아들일 때, 철저한 사전조사는 기본이었다. 특별한 연이 있는 게 아닌 이상, 과거가 불확실하면 절대 문을 열어주지 않는 곳이 문파다.
 그 폐쇄적인 성향을 생각한다면 구종학이 보여줬던 낭아풍운보는 나름의 기연이었다. 당연히 구종학이 심중에 품은 흉악한 뜻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다.
 해서 장무린은 무공을 배울 수 있는 다른 방법을 찾았는데.
 떠오른 곳이 칠야시였다.
 각종 밀거래가 이루어지고, 국법으로 금지한 인신매매로 노예까지 암묵적으로 사고파는 칠야시.
 그곳은 돈만 있으면 무공 비급을 구할 수 있다고 장한이 말했었다.
 그 수준이 어느 정도인지는 알 길이 없으나, 현재 익히고 있는 검공은 말할 것도 없고, 비도술보다는 나을 것이다.
 문파에서 대대로 전해지는 비전의 무공은 아니어도, 어느 정도 수준이 되는 무공, 또는 마공까지 구할 수 있다는 곳이니 자신에게 맞는 비급이 있을 성싶었다.
 “으음.”
 장무린의 입에서 침음성이 절로 나왔다.
 눈앞에 놓인 여섯 개의 삼성급 내단.
 이걸 어찌 처분할지가 또 문제다.
 다해서 천 냥은 훌쩍 넘는 이 내단들이 불러올 화를 생각하는 것이었다. 보물은 지킬 능력이 없으면, 그 보물이 화가 되어 돌아오는 법이다.
 또 복용하자니 연단술사에 부탁해 정밀한 정제과정을 거쳐 연단하지 않으면, 주화입마를 일으킨다.
 욕심에 눈이 멀어 연단하지 않은 내단을 성급히 복용했다간, 전신이 뒤틀려 죽은 이가 한둘이 아니었다.
 장무린은 하나도 아닌, 여섯 개나 되는 삼성급 내단을 감히 복용할 생각을 하지 못했다. 팔아야 하지만, 이 역시 뒤에 문파가 없으면 사기를 맞거나 뺏길 가능성도 컸고.
 “난제네.”
 장무린은 고심에 빠졌다. 그러다 자신이 동혈에서 복용했던 내단에 생각이 미쳤다.
 부드럽고 말랑말랑했던 모종의 내단.
 장무린은 손을 뻗어 눈앞의 삼성급 내단을 움켜쥐었다.
 “이건 딱딱해.”
 아무리 장무린이 경험이 많지 않다고 해도, 내단이 그렇게 부드럽고 말랑말랑할 리가 없다는 건 잘 알았다.
 대제 뭐였을까?
 대체 뭐였기에 내공을 배로 증진시킨 것도 모자라 내공의 순도마저 높여…….
 순간 장무린은 벼락 맞은 사람처럼 딱딱하게 굳어졌다. 그걸 먹고 난 뒤 제 몸에 생긴 변화가 떠오른 것이다.
 마치 내공이 극도의 정제과정을 거친 것처럼 순도는 지극히 높아졌고, 양까지 배는 늘었다. 삼재심법으로는 언감생심 꿈도 못 꿀 일이다.
 “분명 뭔가 있어.”
 장무린은 이걸 그냥 ‘좋은 게 좋은 거지.’라고 생각지 않았다. 의원에게 치료받고 석 달은 정양해야 할 부상도 탁월한 회복력에 한 달 만에 완쾌했다.
 그 무섭던 적면호리들도 별 볼 일 없는 비도술로 죽일 정도로 육체적인 능력도 좋아졌고.
 “내가 비수에 진기를 실을 정도의 실력도 아닌데 실렸고 말이야.”
 장무린은 갈등이 일었다.
 삼성급 내단 하나를 꽉 움켜쥐었다.
 기연미연(期然未然)할 때가 아니다.
 어차피 처음부터 답은 정해졌는지 몰랐다.
 설령 그 결과가 참혹하게 되돌아올지라도 믿자.
 내 몸에서 벌어진 일이 그냥 벌어진 건 아닐 터.
 이 강호는 강해져야 산다.
 강해지려면 목숨을 걸어라!
 위험을 무릅써야 기회가 찾아온다.
 장무린은 결심이 선 눈으로 손을 들었다.
 그리곤.
 두 눈을 감고 내단을 입안에 털어 넣어버렸다.
 
 삼성급 내단은 지닌 내공이 대략 사 년.
 뛰어난 연단술사에 맡겨 연단하고, 심법으로 운기조식을 취하면 약 이 년의 내공을 얻는 게 가능하다고 한다.
 연단술사에 들어가는 돈도 돈이지만, 불순한 진기를 모두 없애진 못했다. 며칠간 꾸준히 운기조식을 취해서 제 걸로 만들어야 한다.
 그래도 가장 획기적으로 내공을 올리는 방법이기에 제법 높은 가격으로 거래됐다.
 삼성급 내단은 개당 이백 냥이고, 연단했을 시에는 사백 냥을 받을 수 있었다. 물론 고정적이 아닌 대략적인 가격이었다.
 하면 돈이 썩어 넘치는 부호들이나 문파들은 내단을 모조리 사들여 강해지는 방법이 있지 않겠는가?
 어느 정도 맞는 말이다.
 하지만 엄연히 한계가 존재한다.
 내단을 통한 내공의 증진은 고통을 수반하고, 복용했을 시 늘 주화입마의 위험과 싸워야 했다. 게다가 고위 야행수의 내단일수록 고통은 증가하고, 주화입마의 위험도는 더욱 커졌다.
 한 마디로 각오를 단단히 하다못해 목숨까지 걸어야 하는 일이었다.
 위험이 커질수록 보상도 커지는 법.
 당연한 진리였다.
 그리고 강호엔 그 진리를 받아들여 위험을 감수하고, 누구보다 빠르게 절정에 오른 고수들도 많았다. 당연히 주화입마에 걸려 폐인이 되거나 죽은 고수들은 그보다 배는 더 되었고.
 꿀꺽.
 장무린도 지금 그 위험을 감수한 것도 모자라, 목숨까지 걸었다. 연단하여 정제과정을 거치지 않은 내단을 그냥 복용했으니, 그게 얼마나 무모한 짓이었는지는 곧 깨달았다.
 “……!”
 화아아악.
 단전에서부터 불길이 격렬하게 치솟더니 곧 업화(業火)가 되어 맹렬히 타올랐다. 하마터면 단전이 타들어 가버릴 것 같은 고통에 입을 벌릴 뻔했으나 가까스로 참았다.
 삼재심법에 의해 정해진 혈맥의 경로를 따라 기운을 흘려보내는 일은 생각보다 쉬웠다. 그러나 불같은 내단의 기운이 혈맥을 가로지른 덕분에, 가는 길마다 끔찍한 고통을 수반하는 건 결코, 쉽지 않았다.
 뿌드득.
 이가 갈리다 못해, 앙다문 입술에서 핏줄기가 흘러나왔다.
 주화입마는 아니었다. 어떻게든 고통을 견뎌내려고 필사의 노력을 한 결과였다.
 편법은 늘 그렇듯 크나큰 위험성을 동반했다.
 머릿속이 아득해져 온다.
 혈맥을 휘젓는 내단의 기운은 결코, 쉽사리 항복하지 않았다. 처음엔 간질간질하게 굴던 것이 종국엔 생살이 갈기갈기 찢겨나가는 고통을 주었다.
 우우우웅.
 푸들거리는 뺨과 손등 위로 굵은 핏줄이 불거져도 장무린은 멈추지 않았다. 오히려 더욱 대담하게 나아갔다.
 고작 삼성급 내단이다.
 겨우 이 정도 고통에 굴복해서 어찌 사성급이나 오성급, 육성급 내단을 취하겠나.
 장한에게 미리 언질을 받았기에 망정이지, 만약 모른 상태에서 겪었다면 포기했을 지도 모를 정도로, 극렬한 격통은 계속됐다.
 어떻게 된 게 운기조식을 하면 할수록 고통이 잦아드는 게 아니라, 커지는지 모를 일이었다.
 원래대로라면 이 같은 편법을 쓸 때는 문파의 어른인, 내가고수가 등 뒤에 장심을 대고 혈맥을 보호한 상태에서 이루어지는 법이었다. 혈맥을 찢어발기는 고통은 어지간한 독심을 가진 사람이라고 해도 견디기 어려웠다.
 한데 장무린은 지금 홀로 견뎌내고 있었다.
 자업자득이었기에 멈추지도 않았다. 그저 어서 이 영겁과 같은 순간이 지나가길 바라며 필사적으로 운기조식을 할 뿐이었다.
 야생마처럼 날뛰는 내단의 기운을 우격다짐으로 밀어 넣는 이 무식한 방법밖에 쓸 수 없는 현실이라니.
 정파의 유장한 진기와 달리 이리저리 폭급하게 날뛰며 고통스럽게 하는 기운 때문에, 야행자들이 강해질수록 독해지는가 보다.
 내단의 기운은 너 또한 야행자들처럼 독해져야 한다며 야생마처럼 날뛰어댔다.
 넝마가 된 것 같은 혈맥에서 끊임없이 전해지는 극통은 머릿속을 하얗게 만들었다. 정제되지 않은 내단이 전한 독기가 원인이다.
 이대로라면.
 이대로라면 도저히 버틸 수가 없었다.
 정말이지 빌어먹게도 아팠으니까.
 아무리 남들에게 말 못할 목표가 있다고 해도 이대론 너무나도 힘겨웠다. 포기하고 싶을 정도로 아팠다.
 그때였다.
 사르르.
 단전에서 청아한 기운 한 줄기가 일어났다.
 혼절하지 않았던 장무린도 그 존재감을 느꼈다. 운기조식 중이라 눈을 뜰 수 없었지만.
 장무린의 단전에서 시작된 서광이 혈맥을 통해 전신으로 번져갔다. 김이 모락모락 나는 뜨거운 전신에 청량한 물을 뿌린 것처럼, 말 못할 상쾌한 느낌이 전신을 감싸 안았다.
 “……!”
 그러자 거짓말처럼 날뛰던 내단의 기운이 순한 양처럼 굴기 시작하였다.
 ‘이게 대체 어떻게 된 거지?’란 의문이 들었지만, 장무린의 머리로는 도무지 답을 내릴 수가 없었다.
 그저 청아한 기운이 이끄는 대로, 내단의 기운도 혈맥을 휘돌더니 단전으로 차곡차곡 쌓이기 시작했다. 혈맥에 스며들어 타는 듯한 고통을 줬던 독기(毒氣)마저도 청아한 기운에 이끌려 단전으로 향한다.
 그리고 장무린의 내공과 함께 한데 어우러져 갔다.
 맑은 청정수에 오수(汚水)가 주르륵 흘러들어 가는 형세니 그 순도는 혼탁해져야 함이 마땅하다.
 삼성급 내단은 장무린이 지닌 내공의 절반가량인 기운 아니던가.
 하지만.
 장무린은 부들부들 떨어댔다.
 내공의 순도는 여전히 순수하였다.
 코를 간질이는 상쾌한 바람의 냄새.
 장무린이 진기를 갈무리하고 눈을 떴다. 그리고 뛸 듯이 기뻐했다.
 대략 사 년의 내공.
 장무린은 삼성급 내단의 기운을 모조리 흡수하고 만 것이다.
 “아!”
 탄성까지 지른 장무린의 눈에 남은 다섯 알의 삼성급 내단이 들어왔다.
 고통을 잊어버린 듯이 그 내단들이 탐스럽게 보이기까지 한다.
 “좋아.”
 지금부터 시작이었다.
 
 “쿨럭, 쿨럭!”
 죽은 피를 끊임없이 토해낸 장무린은 형용할 수 없는 고통에 바닥을 기어 다녔다.
 주화입마는 아니었다. 주화입마였다면 뒤틀리는 기혈과 근골에 사지가 꺾어버렸을 테니 말이다.
 “쿠에에엑!”
 구토는 계속되었다. 이미 죽은 피가 바닥을 적시다 못해 웅덩이를 이루었다.
 두 번째 내단을 먹고 운기조식할 때부터 뭔가 심상치 않은 느낌을 받았는데, 세 번째 내단을 먹고 난 뒤부터는 큰 사달이 났다.
 운기조식을 마치자마자 장무린은 가슴에 응어리진 울혈의 존재를 느꼈다. 그리고는 지금처럼 구토하기 시작한 것이다. 어떻게든 진정시켜보려고 했지만, 구역질은 멈추지 않았다.
 한 식경을 그랬을까.
 장무린은 바닥에 축 늘어졌다. 다행히 구토는 멈췄지만, 온몸의 힘이란 힘은 죄다 빠져나간 기분이었다. 남은 세 개의 내단엔 손조차 가지 않았다.
 과유불급.
 정도를 지나침은 미치지 못한 것과 같다는 말이 장무린의 머릿속에 경종을 울렸다.
 장무린은 남은 힘을 쥐어짜 가부좌를 틀고 운기조식을 해봤다.
 잠시 뒤.
 운기조식을 마친 장무린의 얼굴은 참담하게 일그러졌다.
 첫 내단으로 얻은 사 년 내공에, 두 개의 내단이 준 육 년 내공을 더해 정확히 십 년 내공만 증가해 있었다.
 첫 내단을 먹기 전과 비교해 배로 증가했으니 정확했다.
 “어째서?”
 처음 내단을 먹었을 때만 효능이 최고치였고, 나머진 효능이 절반 가까이 떨어졌다.
 한 가지 다행인 점은 진기의 순도가 여전하다는 것인데.
 장무린은 눈에 들어온 세 개의 내단을 더는 복용할 엄두가 나지 않았다. 고통도 고통이지만, 바닥에 고인 시커먼 웅덩이가 눈에 들어왔다.
 육신이, 단전의 기이한 힘이 경고를 보낸 것이다.
 
 장무린은 남은 내단을 망태기에 대충 넣었다.
 “크윽.”
 어찌나 구토해댔으면 목이 탈 것처럼 아플까.
 터벅터벅, 쿵.
 기운이 쑥 빠진 장무린은 몇 걸음 가지도 못하고, 바닥에 널브러졌다. 이제는 육신마저 타는 듯이 아팠다. 실제로 전신에 열이 펄펄 끓었다.
 스윽, 스윽.
 이대로 누워있으면 큰일 날지도 모른다는 걸 직감한 장무린이 기어갔다. 시커먼 웅덩이의 지독한 냄새를 피해 사지를 이용해 버둥거리는 중이었다.
 “너무 과욕을 부렸구나.”
 장무린은 온 힘을 다해 동혈 밖으로 이동했다. 그리고 물속으로 뛰어들었다.
 풍덩.
 기분 좋은 상쾌함이 전신으로 번져갔다. 타오르던 열기가 서서히 식는 느낌이다.
 아, 이대로 눈을 감고 싶다.
 온몸이 물속에 잠긴 장무린은 큰일 날 생각을 하며 바닥으로 가라앉았다.
 그와 반면에 웅덩이에 있던 물고기들은 장무린을 피하려는 듯이 일제히 위로 향했다.
 희미한 시야에 수면으로 올라간 물고기들이 잡혔다.
 자신의 몸에 묻은 죽은 피, 독혈이 그리 만든 듯 보였다.
 미안해.
 장무린이 곧 배를 하늘로 뒤집는 물고기들을 보고한 생각이었다.
 이십 년의 내공이 도도히 전신을 흐르고 있었지만, 아까처럼 뛸 듯이 좋아할 순 없었다. 형용할 수 없는 고통을 생각하는 것만으로 머릿속이 마비되는 것 같았다.
 하지만 차디찬 물이 정신력을 서서히 일깨워줬다.
 풀렸던 눈동자도 서서히 초점이 잡혔고, 나른했던 육신에도 서서히 힘이 돌았다. 전신을 휘도는 내공 덕분이었다.
 주인의 위험을 알았을까.
 혈맥을 타고 도도히 흐르는 진기에 의해 활력이 조금씩 차오르기 시작했다.
 철벅, 철벅.
 폭포수 밖으로 나온 장무린이 동혈로 올라섰다. 뒤를 돌아본 장무린의 눈빛이 어두워졌다.
 역시 잘못 본 게 아니었다.
 웅덩이에 살던 물고기들이 떼죽음을 당했다.
 양손을 모아 폭포수의 물로 목을 축인 장무린은 폭포수에 몸을 내맡겼다.
 콰콰콰콰.
 한참 동안 물을 맞자 이젠 얼굴에 제법 생기가 돌았다.
 장무린은 동혈 쪽으로 걸어 들어가 망태기를 집어 들었다. 남은 내단 세 개는 따로 처분해야겠다.
 이십 년 내공을 이룬 것에 만족하자.
 내공을 담을 그릇이 너무도 약하면 깨지기 마련이다. 도자기를 불에 무리하게 달구다간 깨지는 것처럼, 지금은 시간과 수련이 필요했다.
 게다가 오늘 일에 대한 의문은 사성급 내단을 복용해보면 알 일이다.
 “욕심이 지나치면 화가 되는 법이니까.”
 장무린은 일단 자신에게 가장 필요한 걸 생각해 보았다.
 내단 세 개를 팔면 대략 육백 냥, 그걸로 살 수 있는 걸 떠올려봤다.
 연단이 안 된 사성급 내단을 사볼까 했지만, 아직은 시기상조다. 내공만 늘려서는 상승의 경지를 이룰 수가 없었다. 자꾸 중언부언하는데 지금은 단전이란 그릇을 단단하게 만들 때다.
 하여 만병지왕인 검공과 비도술은 필수.
 심법을 구할까도 싶었지만, 지금 당장은 범용성이 뛰어난 삼재심법에 만족했다. 축기 속도는 빠른 지금 상태에서 심법보다는 공격할 무공 쪽이 급했다.
 일단은 급한 불부터 꺼야 한다.
 “남은 돈으로 무장도 갖춰야겠어.”
 현재 장무린은 빈손이었다. 퍼뜩 든 생각이 있는지 장무린은 경공술을 펼쳐 동혈 밖으로 나갔다.
 잠시 후.
 돌아온 장무린의 안색이 좋질 못했다.
 영악한 적면호리들이 낭인들이 썼던 무기를 어딘가 감춰둔 것이었다. 자신들이 머무는 둥지에 숨겼음이 분명했다. 빈손으로 놈들의 둥지를 찾아가는 건 바보 같은 짓이었고, 또 낭인들이 쓴 병장기가 그리 질이 좋지 않음은 이미 봐서 알고 있었다.
 “천상 호곡성에 들러야겠군.”
 칠야시까지는 꽤 멀었고, 삼성급 내단 세 개를 가지고 이동하는 건 자살행위였다.
 낮에는 그렇다 치더라도 밤에는 어쩔 건데?
 신월을 넘어서 달이 차오르기 시작하면 성밖은 복마전이 시작된다.
 그러니 호곡성에서 삼성급 내단을 팔아치워야 했다.
 어느 정도 기본 무장을 갖추고, 여정을 떠날 준비까지 해야 했다.
 혼자서는 절대로 무리였다.
 월야행은 당연히 안됐고, 칠야시 인근을 거치는 표행단에 합류해야 했다.
 그러면 적어도 밤의 안전은 어느 정도 확보할 수 있었다.
 “신분이 확실해야 하는 표사는 당연히 안 되고, 쟁자수 자리라도 알아봐야겠군.”
 결정을 내린 장무린은 동혈 밖 하늘을 바라봤다. 아직 붉은 달이 동쪽 하늘로 지려면 시간이 꽤 남았다.
 넉넉잡고 한 시진.
 장무린은 붉은 달이 동쪽 하늘로 거의 기운 뒤에 여우골을 나설 작정이었다.
 기문진이 닫히기 직전인 새벽녘에 나가야 한다.
 반 시진 거리라도 밤에 내단을 들고 홀로 길을 나서는 건 자살행위였다.
 내공이 배가 늘었으니, 경공술의 성취가 높아져 속도도 배가 늘었을 거란 생각은 바보나 하는 착각이다. 경공술의 성취는 내공에 따라 고무줄처럼 늘었다 줄었다 하는 게 아니었다.
 지구력처럼 경공술을 펼칠 시간은 더욱 늘어나겠지만, 속도는 오직 성취에 따라 늘어났다.
 꾸준한 수련.
 그게 바로 십성으로 오르는 답이었다.
 일단은 열기를 식히자.
 장무린은 폭포수 아래서 심상 수련을 하였다.
 수담(手談) 뒤에 복기하는 것처럼 장무린은 적면호리들과 일전을 떠올리며 더 좋은 경로와 방법을 찾기 시작했다. 구결과 복잡한 난선을 따라 가장 몸이 편안할 경로를 말이다.
 칠성에 오른 이후론 그다음 단계에 오르기가 어려웠다.
 사람의 발길을 쉬이 허락하지 않는 험준한 산이 눈앞에 있는 것 같달까?
 암담한 기분이 들어야 할 장무린이었지만, 입매엔 그린 것 같은 미소가 걸려 있었다.
 전인미답의 처녀림을 정복해가는 즐거움을 안 사람처럼, 어느덧 장무린도 무인으로서의 즐거움을 서서히 깨닫는 중이었다.
 
 봉두난발의 청년이 새벽녘을 틈타 호곡성의 성벽을 타 넘었다.
 여명에 긴장이 풀린 상태에다, 그 신형이 워낙 쾌속한지라 위병들은 눈치조차 못 챘다.
 낭아풍운보가 그 정도로 완숙해진 것이다.
 봉두난발의 청년은 바로 장무린이었다. 그러니 위병들의 눈썰미로 발견되면 그게 더 이상했다. 경공술을 제외한 무공수준은 아직은 삼류이긴 하나, 나설 때보다 수배는 강해져 있었다.
 “그래도 위험했어.”
 장무린은 성벽 아래서 한숨을 돌렸다.
 힘이 쫙 빠진 일성급 야행수들이었기에 따돌렸지.
 만약 밤이었다면, 개미떼처럼 끝도 없이 몰려드는 야행수들에 적잖은 곤욕을 치렀을 것이다.
 그래도 무사히 도착한 터라 입가엔 싱그러운 미소가 절로 그려진다.
 “일단 배부터 채울까?”
 극심한 허기짐에 밥 생각이 절로 났지만, 돈이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바보같이, 돈부터 구해야 하잖아.”
 장무린은 망태기 속의 삼성급 내단들을 생각하고 걸음을 옮겼다.
 하루의 시작은 새벽녘부터였다.
 너른 한 호곡성 안이 사람들로 북적였다. 밤에 미처 못 푼 회포라도 풀려는지, 아침 댓바람부터 술을 마시는 이들마저 있을 정도였다.
 행색이 초라한 장무린이 등장하자, 이내 시선이 집중됐다.
 곧 걸인이라 여겼는지 다들 관심을 껐다. 후줄근한 망태기도 한몫했다.
 장무린은 사람들의 냉담한 반응에 의복을 사들여야 함을 알아챘다. 쟁자수가 되려면 적어도 복장부터 갖춰야 한다.
 멀쩡한 사람처럼 보여야 뽑아주지 않겠나?
 장무린은 걸음을 옮겨 연단술사들이 모여있는 금단(金丹)의 거리로 향했다. 그곳엔 금단회에 소속된 연단술사들만이 자리를 잡고 영업할 수 있는 곳이었다.
 금단회(金丹會)는.
 연단술의 창시자이자 명문가 출신인 위백호를 태상회주로 둔, 그의 열두 제자가 함께 창시한 단체로 현재 어마어마한 부귀영화를 누리고 있었다.
 특히 위백호의 열두 제자.
 십이 회주인 그들은 왕이 부럽지 않은 호화로운 생활을 일삼았고, 어지간한 대문파나 고관대작들도 십이 회주 앞에선 큰 목소리를 내지 못했다.
 그야말로 현 강호의 실세라고 봐도 무방하였다.
 오죽하면 강호 오대세가의 전신인 무림맹이 그들의 눈치를 볼까.
 금단의 거리에 들어서자 수증기로 자욱한 모습이 한눈에 들어왔다.
 그곳엔 야행자로 보이는 강호인들이 제법 있었다. 조금이라도 값을 후려칠까 봐 눈알을 부라리며 연단술사의 도제들과 흥정을 하는 이들도 있었고, 제발 가격 좀 잘 쳐달라며 연신 굽실거리는 이들도 있었다.
 연단술사의 도제들은 거드름을 피우며 야행자들이 구해온 내단을 암실(暗室)에서 살펴줬다. 그리고 도제들은 진품인지 가품인지 철저히 구별해냈다.
 가품이면 다시는 금단의 거리에 엉덩이를 못 디밀 것이고, 진품이면 이런저런 흉을 잡아서 가격을 깎아내려고 안간힘을 쓸 거다.
 물론 대부분이 가격을 깎였고, 그거라도 받고 가거나 드잡이질을 하였다.
 그래도 칼부림까진 나지 않았다.
 금단회의 힘을 증명이라도 하듯이 거리 곳곳엔 회에 소속된 무사들이 눈에 불을 켜고 있었다.
 하나같이 일류 무인인지라.
 야행자들도 감히 칼부림하지 못했다. 그저 내가 누군지 아느냐고? 큰소리쳐대며 인맥을 들먹이는 정도였다.
 그럼 대부분의 도제는 적당히 구슬려서 돌려보내거나, 오히려 같이 언성을 높여댔다.
 아무리 요즘 연단술사들끼리 경쟁이 치열하다고 하지만, 갑질은 여전하였다.
 이곳에 홀로 오는 야행자들은 대부분 일성급 내단을 가지고 오거나, 이성급 내단을 들고왔다.
 이성 급 내단까지는 구하기 쉬운 덕분이다.
 하지만 삼성급 내단부터는 대우가 조금씩 달라졌다.
 삼성급 내단은 월야행의 규모가 제법 되어야 했으니까.
 장무린도 이 사실을 잘 알았다.
 낭아방 정도의 문파라면 자체적으로 연단술사들을 데리고 있었으니, 이곳에 팔러올 리가 만무했다.
 하여 사성급이나 오성급 내단은 오히려 도제들이 못 받아서 안달을 냈다.
 해서 장무린은 일단 금단의 거리를 거닐었다.
 봉두난발의 장무린을 본 어린 도제의 영악한 눈망울이 반짝였다. 추레한 행색에 야행자임을 알아본 것이다.
 “형님, 값 잘 쳐줄게요. 이리로 오세요.”
 언제 봤다고 형님인지.
 영악한 얼굴엔 뼛속까지 값을 후려치겠다는 의지가 번뜩였다.
 장무린은 가볍게 코웃음을 치고는 지나쳤다.
 호객행위를 하는 곳 치고 값을 제대로 쳐주는 곳이 없다는 장한의 말이 떠올랐다.
 하지만 금단의 거리에 문을 연 연단점포는 하나같이 호객행위를 일삼았다. 중소규모 연단점포의 비애였다.
 어떤 놈은 돌부리에 걸려 넘어지는 척하며 장무린의 앞을 가로막기까지 했다.
 장무린이 한숨을 쉬고 일으켜주면.
 “어이쿠, 야행자님. 옷깃만 스쳐도 인연이라는데 안으로 들어와서 좀 둘러보시죠. 몸에 좋고 맛도 좋은 내단이 많이 있습니다.”
 바로 영업 들어왔다.
 장무린은 장한이 해준 말을 철저히 따랐다.
 뒤에서 ‘어디 다른 곳에 가서 좋은 값에 구하거나 팔 줄 아느냐.’고 볼멘 목소리가 들려왔지만.
 아무래도 좋았다.
 다른 건 몰라도 손님을 대하는 기본조차 안되는 곳에다가 팔 생각은 없었다.
 한참을 돌아다녀 본 결과 중소점포들의 반응은 대동소이했다.
 “대형 점포로 가야 하나.”
 호객행위에 진저리가 난 장무린의 안색이 어두워졌다. 대형 점포는 신분확인이 필수여서다.
 그냥 가격을 후려치려는 곳에 팔아넘겨야 하나 싶을 때.
 장무린의 시야에 어색하게 서 있는 여아가 들어왔다.
 예닐곱은 됐을까?
 머리의 양쪽에 볼록하게 자리한 만두 머리가 귀여운 아이였다. 그 애가 장무린을 보며 쭈뼛거리고 있었다.
 
 뭔가는 해야겠다 싶은데.
 봉두난발에 초라한 행색의 장무린을 보니 무서워서 못 다가오고 있었다.
 그런 아이의 뒤로 허름한 점포 하나가 보였다. 점포 앞 패목(牌木)엔 중원 최고의 연단술사라는 글자가 적혀있었다.
 거침없는 필체도 필체지만, 그 내용의 광오함이란.
 그 패목과 달리 점포 앞엔 파리 새끼 한 마리도 보이지 않았다. 금단거리의 맨 끝 가장자리에 있는 점포였는데, 인적이 워낙 드문지라 찾는 손님이 없었던 것이다. 앞선 약삭빠른 도제들이 모조리 손님을 가로채니 여기까지 올 리가 만무하였다.
 “…….”
 “…….”
 마주 보는 장무린과 여아 사이에 정적이 흘렀다.
 뭔가 좀 해보라는 말이 목구멍까지 치솟았지만, 여아는 땅만 바라보고 있었다. 앙증맞은 당혜의 코로 땅을 톡톡 두드리는 것이 주저하는 모양새다.
 장무린은 자신의 행색 때문이라고 여기고, 여아에게 영업 당하길 포기했다.
 그냥 제 발로 찾아가는 수밖에.
 어차피 갈 데도 마땅치 않았다.
 저벅저벅.
 장무린의 발걸음 소리에 여아가 화들짝 놀랐다.
 설마 정말 오려는 거야?
 라고 묻는 듯한 표정에 장무린은 입매에 미소를 그렸다.
 “안…….”
 “으아아앙!”
 하지만 여아는 다짜고짜 울음을 터트렸다.
 인사를 건네려던 장무린은 순간 당황했다.
 덜컹!
 점포의 문이 부서질 듯이 열리더니 거한이 뛰쳐나왔다. 고슴도치처럼 턱수염이 빼곡히 들어선 거한은 퉁방울만 한 눈을 부라렸다.
 “누가 감히 내 고금제일미를 울리는 것이냐!”
 쩌렁쩌렁한 목소리도 단연 압권이었다.
 근데 고금제일미라고?
 거한의 얼굴과 여아의 얼굴을 본 장무린은 동의할 수가 없었다.
 둘이 꽤나 닮았으니까.
 # 第 八 章
 
 햇볕 한 점 들지 않는 어두운 내실을 밝히는 호롱불.
 “뭐야? 손님이었군.”
 거한 황팔모는 껄껄 웃으며 장무린의 등을 팡팡 쳤다.
 표정은 반가워하는 게 분명한데, 솥뚜껑만 한 손엔 감정이 실린 건 아닌가 의심이 들 정도다.
 장무린은 자신을 물끄러미 올려다보는 황팔모의 딸을 향해 어색하게 웃어줬다.
 고금제일미 아니, 취취라고 했지.
 “우리 취취가 낯을 좀 가려. 이 황팔모처럼 잘난 사내가 아니라면 붙여주지도 않는다고.”
 “…….”
 신빙성이 확 떨어졌지만, 굳이 내색할 필요는 없었기에 물건부터 꺼냈다.
 황팔모는 단도직입적인 장무린의 태도가 마음에 들었는지, 아니면 꺼낸 물건이 마음에 들었는지 히죽 웃었다.
 “오호라.”
 험상궂은 얼굴과 다르게 웃음이 참 많은 사내다.
 장무린이 내단 세 개를 모두 꺼내자, 안색이 살짝 달라졌다. 한눈에 내단의 가치를 알아본 것이다.
 “삼성급 내단 세 개라. 설마 혼자 잡은 건가?”
 “그렇습니다.”
 “보기보다 실력이 좋군.”
 황팔모는 장무린의 맑은 눈빛에서 거짓이 아님을 알 수 있었다.
 “내단을 망태기에 담아온 것치고 상태도 나쁘지 않아. 다음부턴 햇볕을 조금이라도 쬐지 않도록 해. 취취야.”
 취취를 향해 손짓했다.
 취취는 아까처럼 쭈뼛거리긴 했지만, 내단을 본 뒤라 눈빛을 반짝이고 있었다.
 데굴데굴.
 단풍잎처럼 작은 손으로 탁자 위에서 내단을 굴려보고는 몇 번 만지작거리기 시작했다. 그러고는 황팔모를 향해 고개를 끄덕여줬다.
 “진품이 맞다는군.”
 “…….”
 누가 봐도 가지고 노는 모양새였다.
 확실히 가지고 놀았다.
 장무린은 여기 괜찮을까 싶었지만, 황팔모는 취취를 대견하다는 듯이 머리를 쓰다듬었다.
 “내 딸이어서 하는 말이 아니다. 우리 취취보다 빨리 진품인지 가품인지 알아내는 도제는 단언컨대, 없다고.”
 팔불출처럼 침까지 튀겨대며 자랑했다.
 장무린은 취취가 어찌 알아본 건지 궁금하긴 했지만, 아무래도 좋았다. 값만 제대로 쳐준다면 말이다.
 “오백 냥.”
 황팔모가 손가락 다섯 개를 폈다.
 백 냥이나 후려친다.
 장무린은 내단 세 개를 도로 담았다.
 황팔모는 느긋했다. 오히려 제 딸을 향해 눈짓까지 보냈다.
 취취가 앙증맞은 손가락 다섯 개를 펴 보였다.
 장무린이 그걸 보자 황팔모가 덧붙였다.
 “오백오십 냥. 더 이상은 안 된다.”
 “…….”
 장무린이 말없이 떠나려고 하자, 황팔모가 이죽거렸다.
 “내 장담하는데. 신원이 불확실한 자네는 어딜 가도 내가 말한 가격은 절대 못 받아. 오히려 가격을 더 후려치려고 하겠지.”
 장무린의 발이 멎었다. 이어진 황팔모의 말 때문이었다.
 “특히 귀휴 중인 복역수라면 사백 냥을 받아도 할 말이 없지.”
 “……!”
 장무린의 고개가 서서히 돌아왔다. 손목의 낙인이 도로 생겼을 리는 만무했다.
 마치 어떻게 알았느냐는 그 순진한 눈빛에 황팔모가 혀를 찼다.
 “한 달 전에 낭아방에서 칠대 제자들을 이끌고 여우골로 월야행을 떠났지. 낭인 서른에 귀휴 중인 죄수 하나를 액받이로 한 채 말이야. 한데 돌아온 사람은 낭아방의 칠대 제자 스물과 부대주 구종학 외엔 없었다. 금단의 거리에 소문이 쫙 퍼졌다고. 낭인 서른 명을 모조리 희생시키고 돌아올 정도면 여우골의 앞마당이 아닌, 깊은 골짜기에 들어갔다는 건데. 그곳의 삼성급 야행수는 적면호리밖에 없지.”
 눈썰미가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황팔모의 말은 계속됐다.
 “그런데 행색이 초라한 네가 삼성급 귀면호리의 내단을 가져왔어? 그것도 세 개나 말이야. 그래서 한 번 넘겨짚어 봤지. 보아하니 혼자서 월야행을 떠날 정도로 뛰어난 실력자는 아니었으니까 말이다.”
 아차 싶었다.
 장무린은 자신이 너무 순진하게 반응했음을 깨달았다.
 황팔모는 팔짱을 끼고는 탁자에 엉덩이를 걸터앉았다.
 탁자에서 끼익 거리며 부서질 듯한 소리가 들려왔다.
 “부서져.”
 취취가 다가와 황팔모의 엉덩이를 밀어내려 했지만, 꿈쩍도 안 했다.
 황팔모가 코를 킁킁거렸다.
 “야행자 주제에 몸에서 풍기는 정기가 너무 맑아. 뭔 기연을 만났는지 모르겠지만, 지옥에서 살아 돌아온 걸 환영은 해주마.”
 “…….”
 장무린은 흔들리는 눈빛으로 황팔모를 바라봤다.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게 이런 심정일까 싶었지만.
 황팔모는 콧방귀만 뀌었다.
 “그런 불쌍한 얼굴로 본다고 해서 한 푼이라도 더 쳐줄 줄 알아? 후려친 오십 냥은 우리 고금제일미에게 당과 하나 사준다고 생각하라고.”
 너무 의외의 말이었을까.
 “네?”
 장무린은 자신도 모르게 되물었다. 오십 냥 하는 당과도 당과지만, 자신과 계속 거래를 하겠단 소리여서다.
 황팔모는 한껏 거드름 피우며 턱을 치켜들었다.
 “어때, 이제는 제법 괜찮은 거래란 생각이 들지? 그러니까 망태기 내려놓으시게.”
 “…….”
 장무린은 그의 말대로 망태기를 내려놓았다.
 황팔모는 험상궂은 얼굴을 더욱 일그러트렸다.
 장무린은 그가 화가 났나 싶었지만.
 취취는 그게 아주 만족스러워하는 얼굴이라는 걸 잘 알았기에, 배시시 웃었다.
 뭔가 이상한 분위기다.
 이번엔 장무린이 쭈뼛거리며 서 있었다.
 황팔모는 망태기를 들고 안으로 들어갔다. 그러면서 말을 툭 던졌다.
 “천하의 못된 놈들, 이렇게 멍청하기 짝이 없는 애송이를 끌고 가서 지놈들끼리만 살아 돌아와? 벼락을 수도 없이 처맞아도 할 말 없을 놈들 같으니.”
 “…….”
 그 말을 들은 장무린은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황팔모가 낭아방과 관가에게 함구한다는 말로 들려서다.
 “어째서입니까?”
 함축적인 의미가 담긴 물음이었다.
 황팔모는 망태기 안의 내단을 꺼내면서 송충이 같은 눈썹을 추켜세웠다.
 “왜 거래 물리고 싶어서 그래? 어디 가도 이 정도 쳐주는 데 없다니까는!”
 신경질적인 반응이 담긴 동문서답이다.
 장무린은 재차 묻고 싶었지만, 소매를 잡아끄는 손길에 그럴 수가 없었다.
 취취가 작은 손가락을 오므린 입술 위에 세웠다.
 장무린이 입을 다물었다.
 황팔모는 만족스러운 얼굴을 했다. 물론 화난 것처럼 보이는 게 문제였지만.
 “좋아, 매우 좋은 거래는 침묵 속에 이루어지는 법이지. 백날 떠들어봐야 뭣해? 값이나 후려치려고 흥정이나 해댈 뿐인데. 하여간 이놈이고, 저놈이고 요즘은 마음에 드는 놈들이 없어.”
 느닷없이 소리친 황팔모에 장무린은 침을 꿀꺽 삼켰다. 그러다 누그러진 황팔모의 눈매를 바라볼 수 있었다.
 “강호가 미쳐 돌아가고 있는 거다. 그렇지 않고서 어떻게 야행수에 부모 잃은 애들을 잡아다가 액받이로 써?”
 “……!”
 장무린의 심장이 미친 듯이 쿵쾅거렸다.
 황팔모도 그 소리를 들었는지 내단을 따로 챙겨놓다가 물끄러미 바라봤다.
 “앞으로 뭔 짓을 하려는지는 모르겠다마는 야행자로 계속 남으려거든. 내단은 이 황팔모에게 팔도록. 예전과 달리 요즘은 중소점포에서도 신원확인은 필수조건이니까.”
 그건 몰랐다는 듯한 장무린의 표정을 보며 황팔모가 얼굴을 잔뜩 찡그렸다.
 “물론 우리 취취 당과값은 제외할 것이다. 고금제일미를 울린 대가치고는 정말 싼 값이지. 암, 그렇고말고.”
 만족스러워하면서도 값을 후려치는 건 잊지 않았다.
 장무린은 저도 모르게 헛웃음을 쳤다.
 황팔모가 눈을 부라렸다.
 “더 안쳐준다니까, 그러네?”
 
 정확히 오백오십 냥을 전표로 받았다.
 허름한 점포인지라 제대로 받을 수 있을까 싶었지만, 전장도 신용도가 높은 중원전장이었다. 액수가 큰 오백 냥은 고액전표로, 오십 냥은 쓰기 편하게 소액 전표로 받았다.
 생긴 것과 다르게 쏠쏠한 배려를 해준 것이다.
 밖으로 나온 장무린이 멀거니 서 있자, 누군가가 잡아끌었다.
 취취였다.
 황팔모와 대화를 나누어서 그런지 이제는 낯을 가리지 않았다.
 왜 그러는가 싶어 바라보자, 취취가 한참을 머뭇거리더니 떠듬떠듬 말했다.
 “아, 아빠가 집 가래.”
 “너희 집?”
 아무도 믿지 말라는 장한의 말이 떠올라, 경계심이 인 표정이 절로 지어졌다.
 괜찮다고 말하려는 찰나.
 취취가 울상을 했다.
 “흐윽.”
 “누가 또 내 고금제일미를 울리는 것이냐!”
 우렁찬 외침과 함께 황팔모가 뛰쳐나왔다. 두 팔까지 걷어붙이고는 황소처럼 콧김을 훙훙 내뿜었다.
 장무린은 황망한 얼굴로 취취와 황팔모를 바라봤다.
 “또 너냐?”
 “아니야, 아빠.”
 황팔모가 불같이 외치자, 취취가 소매로 눈을 부비며 고개 저었다.
 황팔모는 장무린의 눈앞에서 으르렁거렸다.
 “당과 값 이미 치렀다고 해서, 내 딸 또 울리면, 정말 가만 안 둔다.”
 “…….”
 억울함이 치밀어올랐지만, 이어진 황팔모의 말에 도로 가라앉았다.
 “그리고 썩 내 집에나 가서 씻고, 옷이라도 처 갈아입어. 객잔에서 쫓겨나기 좋은 몰골로 철방에 갔다가 덤터기나 쓴 것도 모자라, 전장까지 갔다가 도둑으로 오인 받아서 괜히 나까지 곤란 당하게 하지 말란 이야기다.”
 황팔모는 대차게 콧방귀 한 번 뀌고는 도로 들어갔다.
 쾅.
 문짝이 떨어져 나가는 건 아닐까 싶을 정도였다.
 말은 거칠게 해도 내용은 장무린을 하나같이 신경 써주고 있었다.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스윽.
 취취가 용기를 내어 다시 한 번 소매를 잡아끌었다.
 장무린은 그 눈물 젖은 눈망울을 보면서 한숨을 내쉬었다. 순박한 사슴 같은 눈을 한 어린 애에게 매몰차게 구는 건 쉽지 않았다.
 잠시 후.
 장무린의 입은 쩍 벌어지고 말았다.
 
 호곡성의 중심부로 향할 때만 하더라도 반신반의했는데.
 취취에게 안내받은 황팔모의 안가는 그야말로 으리으리했다.
 눈앞의 전각이 정녕 너희 집이 맞느냐고 물을 필요도 없었다.
 신이 난 취취가 종종걸음으로 전각으로 들어가는 중이었으니까.
 “총관 할아버지!”
 한달음에 마중 나온 노인의 품에 안긴 취취가 어리광을 부렸다.
 노인 진유정은 늙수그레한 미소를 지었다. 취취를 애지중지한다는 건 따스한 눈빛만 봐도 알 수 있었다.
 취취는 한껏 어리광을 부리다가 생각난 게 있었는지, 진유정의 귀에다가 손을 대고 소곤거렸다.
 점점 커지는 진유정의 눈동자, 취취를 땅에 조심스레 내리고는 장무린에게 다가왔다.
 “어서 오십시오. 공자님. 저희 창천황가(蒼天黃家)에 오신 걸 환영합니다.”
 공수를 들어 올린 공손한 인사에 장무린은 당황하며 공수를 들었다.
 공자님이라니 어색하다. 그리고 창천황가라고? 들어본 적이 없었다.
 “예.”
 떨떠름한 그 심정을 이해한다는 듯이 진유정은 온화한 미소를 지었다. 어서 들어오시라며 거듭 청하기까지 하니, 장무린으로서는 도무지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대체 왜?
 란 의문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다.
 그도 그렇지만, 황팔모와 허름한 점포는 눈앞의 으리으리한 전각과 도무지 어울리지가 않았다.
 기인 중의 기인.
 황팔모를 떠올린 장무린의 표정이 해괴해졌다.
 눈치 빠른 진유정이 차분히 설명해줬다.
 “중원에서 열 손가락 안에 꼽히는 연단술사인 황팔모 가주님의 장원이 제법 크지요? 흑요성을 비롯하여 강호 전역에 지부가 있을 정도지요.”
 “아, 네.”
 그럼 호곡성 최고의 연단술사라는 패목이 허언이 아니었단 말인가. 그렇다 치면 오십 냥은 대체 왜 깎은 건지 의문이었다.
 어쩌면 이 으리으리한 전각.
 정녕 취취란 여아가 먹는 당과가 오십 냥이란 말도 안 되는 가격일지도 모른다. 혹 금칠을 하면 가능할까?
 장무린은 그런 말도 안 되는 생각마저 할 정도로 경황이 없었다.
 “이쪽으로 오시지요.”
 진유정은 다 이해한다는 듯이 장무린을 이끌어 장원의 안쪽으로 향했다.
 늘 뇌옥 속에 갇혀있었던 장무린에게 이곳은 말 그대로 별세계였다.
 장원 안은 도원경이 따로 필요 없을 정도로 아름다웠고, 일하는 하인들은 눈이 마주칠 때마다 밝게 웃어 보였다.
 맞지 않는 옷을 입은 것처럼 몸도, 마음도 불편해진다.
 가장 장무린을 불편하게 한 건.
 하나같이 절색인 시비들이 다가와 장무린의 옷을 벗겨주며 목욕시중을 들어준다고 했을 때였다.
 장무린은 놀라 까무러치는 줄 알았다.
 “정말 괜찮소.”
 한사코 거절하는 장무린에 시비들이 무척 아쉬워했다.
 취취가 옆에서 ‘응큼해!’라고 하자 시비들이 까르르 웃음보를 터트렸다.
 시비들이 필요하시면 꼭 불러달라는 말을 남기고, 취취를 안고 나갔다.
 달칵.
 한바탕 소란과 함께 문이 닫히자, 장무린은 넋이 나갔다.
 김이 모락모락 나는 커다란 욕조가 눈앞에 놓여 있었다. 사람 목까지 차는 이 질 좋은 나무욕조에서 목욕시중을 들겠다는 게 어떤 뜻인지는 금방 알아차렸다.
 같이 들어가겠단 소리다.
 장무린은 손으로 이마를 짚었다. 다리가 휘청거릴 지경이다.
 “뭐야, 이게 대체.”
 장무린은 이런 친절을 베푸는 연유를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었기에 도주를 택하고 싶었다.
 하지만.
 “공자님, 목욕물이 뜨거우세요? 아님, 혼자 목욕하기 불편하지 않으세요? 지금 저희가 들어갈게요.”
 아리따운 시비의 목소리에 장무린은 얼른 물속으로 뛰어들었다.
 풍덩.
 물론 옷은 모두 벗어 던진 뒤였다.
 “…불편하지 않소.”
 “네에.”
 나지막한 거절에 시비들이 한숨을 연거푸 내쉬었다. 밖에서 귀를 기울이고 있는 게 분명한 그녀들이었다.
 연단술사가 엄청난 성세를 이루는 현 강호라지만, 이런 다른 세상이 존재할 줄이야.
 어두운 낯빛이 된 장무린, 뇌옥 안에서의 삶이 절로 떠올랐다.
 푸르르.
 얼굴까지 물속에 담근 장무린이 긴 한숨을 내쉬었다. 뇌리에 각인된 장한의 서글픈 눈동자가 떠올라서다.
 -아무도 믿지 말거라.
 가슴이 절로 아릿해졌다. 고개를 내민 장무린이 씁쓸히 읊조렸다.
 “알아요, 나도.”
 
 봉두난발이었던 머리칼을 잘 빗어 넘겨 영웅건으로 동여매고, 정갈하게 차려입은 장무린의 용모는 군계일학이라는 말도 부족할 지경이었다.
 단정한 흑의무복이 하얀 피부와 대비를 이룬 것도 그렇고, 흑백이 또렷한 눈동자는 눈을 뗄 수 없게 만들었다. 화려한 의관까지 갖췄다면 고관대작의 자제라고 해도 믿어질 정도였다.
 “와.”
 가장 어린 취취의 짤막한 감탄성만 들어도 알만한 일이었다.
 장무린을 본 시비들이 볼에 홍조를 띄우는 건 말할 것도 없었다.
 때 빼고 광낸 것도 모자라 의복까지 제대로 갖추니.
 환골탈태라는 말로도 부족할 지경이었다.
 총관 진유정이 허허로운 웃음을 터트렸다.
 “오늘 공자님 덕분에 저뿐만 아니라, 아이들마저도 눈이 호강하는군요. 제 젊었을 적과 똑 닮았습니다.”
 시비들이 어디 가당키나 한 말이냐며 코웃음을 쳤다.
 총관 진유정이 눈썹을 추켜세워보지만, 취취마저 팔짱을 끼고 고개를 젓자 웃음보를 터트렸다.
 시비들이 다가와 장무린의 옷매무새를 매만져댔다. 이미 단정히 의복을 입었는데도 굳이 신경을 써주는 건, 다른 뜻이 있어서겠다.
 “괜찮소.”
 장무린이 사양의 뜻을 내비쳐도 시비들은 개의치 않았다. 물끄러미 올려다보는 모양새가 하나같이 장무린의 난처해하는 얼굴을 보고 싶은 듯했다.
 그렇지 않아도 아름다운 시비들인데, 아찔한 방향까지 풍기니 장무린은 난처함을 넘어서 불편함까지 느꼈다.
 그런 장무린을 구해준 건 취취였다.
 소매를 잡아끄는 손길에 고개를 내리자, 취취가 배시시 웃어 보였다.
 “아빠가 같이 가랬어.”
 “어딜?”
 “당과.”
 진심이었군.
 취취는 한숨을 내쉬는 장무린을 이끌고 저잣거리로 향했다.
 시비들도 질세라 날 듯이 따라붙어서 옆에서 재잘거렸다.
 장무린은 그녀들의 수다를 들으며 고개를 젓다가, 자신을 둘러싼, 정확히는 취취를 호위하는 듯한 형태를 보고 눈빛이 변했다. 제갈윤이 보였던 원형검진처럼 보여서다.
 그제서야 그녀들의 옥보를 내딛는 소리가 들리지 않음을 깨달았다. 발뒤꿈치를 들고 움직이는 모습에 무공을 익혔음을 알게 됐다.
 느껴지는 기세는 없는데, 무공을 익힌 게 확실하다면.
 장무린과는 비교조차 안 되는 강자라는 뜻이었다.
 “…….”
 새삼 창천황가의 저력이 느껴졌다. 지금 와서는 일개 시비들로 보이진 않지만, 시비들처럼 행동하는 그녀들이 무공을 익힐 정도면.
 총관 진유정이나 문지기들은 어떨까 싶었다. 어쩌면 잡일 하는 하인들도 무공을 익혔을지도 모른다.
 호랑이굴이란 생각이 절로 든다.
 “조심…….”
 장무린이 혼잣말로 다짐하다가, 눈을 크게 떴다.
 “앗.”
 취취가 저잣거리를 둘러보느라 여념이 없다가 돌부리에 걸려 넘어질 뻔해서다.
 시비 중 하나가 바람처럼 섬섬옥수를 뻗어 취취를 부드럽게 받아냈다.
 “조심하세요, 아씨.”
 “고마워.”
 장무린은 취취를 받아낸 시비를 유심히 바라봤다. 손이 흐릿하게 보일 정도로 빠른 움직임으로 보건대, 역시 자신이 본 낭아방의 칠대 제자들과는 비교도 안 되는 실력자인 듯했다.
 장무린의 시선에 그 어여쁜 시비가 부끄러워했다.
 “그렇게 쳐다보시면 싫어요.”
 “아, 미안하오.”
 장무린이 자신의 실책을 사과하자, 시비들은 자신들끼리 속닥거리며 까르르 웃음보를 터트렸다.
 웃음꽃이 만발하는 선녀들에 중인의 시선이 주목되는 건 당연지사.
 장무린을 부러운 눈초리로 바라보다가, 고개를 주억거렸다.
 어디 귀한 집의 자제분인가 보다.
 장무린은 얼굴이 따가워지는 기분을 느끼고는 근처에 있는 죽립 하나를 집어 들었다.
 “공자님, 그건 왜요?”
 “쓰려고 하오.”
 당연한 말을 왜 물을까? 싶었지만 시비들이 아쉬워하는 눈초리로 바라봤다.
 주인에게 값을 치르고 거스름돈을 받은 장무린은 죽립을 썼다.
 시비들이 모두 탄식했다.
 취취는 작은 눈썹을 찌푸리며 그녀들의 마음을 대변해줬다.
 “안 어울려.”
 “…….”
 장무린은 죽립을 벗는 대신 근처에서 당과 하나를 사서 취취의 입에 물려줬다.
 “에헤헤.”
 취취의 앙증맞은 미간 주름이 단박에 펴졌다.
 당과를 할짝대는 모습이 여간 귀여운 게 아니었다.
 장무린이 피식 웃고는 길을 나서려는데, 따가운 시선에 그럴 수가 없었다. 분명 죽립을 썼는데도, 얼굴이 뚫릴 듯한 기분이 들었다.
 “……!”
 고개를 돌리자, 시비들이 애절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결국, 장무린은 당과를 사 그녀들의 입에 하나씩 물려줘야 했다.
 애도 아니고.
 작게 한숨을 내쉬었지만, 시비들은 날아갈 듯이 보보를 옮겨갔다.
 주위의 시선을 한몸에 받으며 걷다 보니 귀청을 두드리는 소리에 그제야 정신이 들어왔다.
 깡깡.
 어느새 철방에 도착한 것이다.
 야장이 쇠를 두드리다가 들어선 일단의 무리에 콧등을 찡그렸다. 쇠 냄새와 여인들의 방향은 결코, 어울리지 않았다.
 게다가 그녀들이 나타나자마자 도제들은 손을 멈추고 넋 놓고 있었다.
 깡!
 “끄악!”
 어떤 놈은 망치로 제 손가락까지 빻았다. 다행히 손톱이 빠지는 부상으로 그쳤지만, 야장의 심기를 불편하게 만들었다.
 “정신들 못 차려!”
 추상같은 호통에 도제들이 다시 일에 집중했으나, 낭창낭창한 허리와 잔뜩 부푼 젖가슴에 눈이 절로 힐끔거려지는 건, 막을 수가 없었다.
 야장은 고개를 저으며 일어났다. 얼른 이들에게 물건만 팔고 쫓아 보낼 작정이었다.
 “무슨 일로 오셨소?”
 카랑카랑한 목소리에 담긴 불만을 모를 리가 없었다.
 장무린이 죽립을 벗자, 시비들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깡깡깡깡!
 도제들이 한탄하며 망치를 사정없이 내리쳐댔다.
 야장이 천천히 치라고 호통을 쳐서야 도제들은 풀 죽은 얼굴로 살살치기 시작했다.
 야장은 대차게 콧방귀를 끼다가, 의외의 눈빛을 보내왔다. 장무린이 공손히 인사를 건네와서다.
 “검과 비수를 사러 왔습니다. 좀 볼 수 있겠습니까?”
 공손한 태도에 야장의 얼굴빛이 누그러졌다. 어디 귀한 집안의 자제 같은데 일개 야장인 자신을 대하는 태도가 마음에 든 것이다.
 오는 말이 고와야 가는 말도 고운 걸 증명하듯이 야장이 누그러진 어조로 말했다.
 “이쪽으로 오시오.”
 그리고는 철방의 가판대로 장무린을 이끌었다.
 장무린은 생전 처음 받아오는 대우였다. 이곳 철방에 처음 온 게 아니었다. 야행자로 등록하기 전 몇 푼 안 되는 돈으로 겨우 녹슨 철검과 비수를 산 곳이 여기였다.
 그땐 자신을 쳐다도 안 보고 도제를 보낸 야장이었는데, 이젠 그가 직접 진열장으로 이끌었다.
 자신은 그때와 변함이 없는데.
 아니지.
 장무린은 자신이 갖춰 입은 의복과 당과를 할짝대는 취취와 시비들을 보았다.
 귀한 집안의 자제로 아니 볼 수가 없는 상황이다.
 그땐 만들다 실패한 검들이 있는 진열장이라고 보기도 우스운 가판대였는데, 이번엔 제법 구색을 갖춘 진열장으로 안내했다.
 휘황찬란 까진 아니더라도 한눈에 봐도 질 좋은 철을 쓴 물건들이었다. 야장의 실력도 제법 좋았는지 날카로운 예기가 번뜩였다.
 
 “제가 직접 만든 물건이외다, 커흠.”
 야장이 가볍게 헛기침을 하며 골라보라는 듯이 쳐다봤다.
 장무린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천천히 둘러봤다.
 시비들이 옆으로 다가와 연신 참견했다.
 장무린의 손에 맞는지부터 날을 손가락으로 퉁겨보기도 하고, 검을 이리저리 휘두르며 무게중심은 잘 잡혀있는지 확인까지 했다.
 여인들의 참견에 불편함을 내색하려던 야장이었지만.
 휘휘휙!
 범상치 않은 그녀들의 칼 놀림에 안색이 변했다.
 한눈에 봐도 무공의 고수들.
 조용히 입을 다물고 그녀들이 하는 양을 가만히 지켜만 봤다.
 장무린은 옆에서 새처럼 지저귀는 그녀들의 말을 허투루 듣지 않았다.
 적어도 검을 보는 안목은 자신보다 그녀들이 훨씬 뛰어났으니까.
 취취가 당과를 모조리 한입에 넣고는 우물우물 거릴 때쯤.
 장무린은 검 한 자루와 비수 쉰 개를 구매했다. 예전에 구매했던 것과는 질 자체가 달랐다. 그녀들의 안목 덕분이었다.
 그녀들 중 하나가 물어왔다.
 “더 좋은 검을 고르지 않고요? 이 근방에 저희가 아는 철방이 있는데, 거기의 검은 하나같이 명품이에요.”
 “…….”
 야장의 눈빛이 살짝 일그러졌다. 자존심을 건든 것이다. 장무린의 이어진 말이 아니었다면 안 판다고 했을지도 몰랐다.
 “내겐 이 검과 비수들이 명품이나 다름없소. 오히려 돼지 목에 진주 목걸이라고 할 수 있소.”
 “하지만.”
 시비가 반론하려고 했지만, 장무린은 가볍게 손을 저었다.
 “돈이 있다고 명검을 살 수 있는 게 아니오. 그 검에 어울리는 주인이 되어야지. 지금의 내겐 이 검과 비수들도 무척 과분하오.”
 장무린의 말에 시비들이 이해했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야장의 표정도 누그러졌다. 전표를 받아들더니 한쪽 벽을 가리켰다.
 “저건 비수를 꽂을 수 있는 가죽보호대인데, 그냥 드리리다.”
 품평이나 값을 흥정하지 않고, 제값을 주는 장무린이 마음에 든 눈치였다. 조금 전 말한 공손한 언행이 가장 컸다.
 “감사합니다. 그래도 값은 치러야…….”
 “호의를 받을 줄도 알아야 줄 수도 있는 법이요.”
 장무린이 감사하다며 받아들이자, 야장은 가죽보호대를 입도록 도움까지 줬다. 시비들이 끼어들려고 했지만, 야장은 그럴 틈도 주지 않았다.
 흑의무복 안쪽에 착용한 가죽보호대는 쉰 개를 모두 꼽을 수 있는 이중 구조였는데, 방호복으로 나쁘지 않을 정도로 질이 꽤 좋았다.
 “몸에 딱 맞는구려.”
 야장의 말처럼 좀 조이긴 했지만 움직이는데 불편함은 없었다. 오히려 든든함마저 느꼈다.
 “이렇게 좋은 물건을 그냥 받아도 될지.”
 장무린의 말에 야장은 괜한 헛기침만 했다.
 “좋긴, 그냥 길가다 주운 거요.”
 정말 길가다 주웠을 리는 없었다.
 시비들도 정말 좋은 거라며 장무린의 옷매무새를 또 다듬어줬다. 물론 사심이 다분한 손놀림들이었다. 이리저리 만지는 통에 장무린은 괜찮다며 막아내야 했다.
 깡깡깡깡깡!
 도제들이 철을 두드리다 못해 부서트리려는 소리는 막지 못했다.
 “아, 고막 터져. 이놈들아!”
 야장이 격하게 호통을 쳐서야, 도제들의 울분을 삼키는 행위는 멎었다.
 취취가 귀 아프다며 장무린의 소매를 잡아끌었다.
 다음으로 그들이 간 곳은 중원전장이었다.
 이번에도 앞서 철방보다 극진한 대우를 받으며 돈을 맡겼다.
 암구어를 설정했을 뿐 신원확인은 하지 않았다. 취취와 시비들이 누군지 알아본 터라, 허리까지 깍듯하게 꺾어댔다.
 “창천황가라면 신원보증은 말할 것도 없지요. 이 증서를 가지고 중원전장을 찾아오시면 어디서나 돈을 찾으실 수 있을 겁니다, 공자님.”
 “…….”
 극진하게 예우해주는 그들에 장무린은 할 말을 잃었다.
 창천황가가 그리 대단한 걸까 싶은 것도 있지만, 한 달이란 시간을 두고 너무나도 다른 대우가 주는 괴리감이 이유였다.
 중원전장을 나서는 장무린의 낯빛이 좋지 않자, 어린 취취까지 걱정 어린 눈빛을 보냈다.
 장무린은 알 수 없는 마음을 뒤로하고 그녀들과 함께 창천황가로 돌아갔다.
 장무린은 감사인사와 함께 바로 떠나려 했다.
 총관 진유정이 하룻밤만 머물다 가시라고 붙잡았다.
 단호하게 거절하려 했지만, 그럴 순 없었다.
 “객잔에서 머물면 됩…….”
 “으아아앙!”
 서운함에 취취가 울음을 터트린 것이다.
 어디선가 누군가에게 무슨 일이 생기면 날 듯이 달려오는 황팔모가 어김없이 나타났다.
 “누가 감히 내 고금제일미를 울리는 것이냐!”
 “…….”
 “또 너냐? 이젠 돈푼깨나 있다고, 오십 냥이 우습지! 백 냥으로 늘려줘?”
 그놈의 고금제일미.
 이제 지겹지도 않느냐는 말이 턱밑까지 치솟았지만, 한숨만 흘러나왔다.
 어찌 됐든 오늘 하루는 그에게 신세를 졌으니까.
 마침 해도 서산으로 기우는 중이었다.
 호곡성에 밤이 찾아온 것이다.
 # 第 九 章
 
 매끈한 몸매가 일품인 아름다운 시비가 밤 시중을 들겠단 소리에 장무린은 기함했다.
 최대한 기분 나쁘지 않게 시비를 달래 돌려보냈다. 상처받을 여인의 자존심을 생각했지만, 시비는 아쉬워할 뿐 전혀 그런 기색이 없었다. 오히려 나가면서 생각이 바뀌면 말씀해달라고 눈웃음까지 쳤다.
 장무린은 황망한 표정으로 홀로 내실에 남겨졌다.
 “이건 도가 지나쳐도 너무 지나쳐.”
 장무린이 읊조리자 밖에서 기다렸다는 듯이 껄껄거리는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황팔모였다.
 그렇지 않아도 할 말이 있었던 장무린이 문을 열어주자, 황팔모는 거침없이 들어와 한 자리 떡하니 차지했다.
 자신의 집이니 당연한데.
 왠지 얄밉다. 이어진 말은 더 그랬다.
 “한창 혈기왕성한 나이인데다, 잔뜩 쌓였을 텐데 풀지 않고서?”
 “뭘 말씀하시는 겁니까?”
 “혹시 우리 애들을 내가 억지로 보냈다고 여기는 거라면, 천만의 말씀이야. 우리 애들은 내 말을 듣지 않거든. 자발적인 거라고. 네가 나처럼 오죽 잘났어야지.”
 역시 신빙성이 확 떨어진다.
 장무린이 곱지 않은 눈초리를 보내도, 황팔모는 전혀 거리낌이 없었다.
 나갔던 시비가 눈치 빠르게 술상을 봐왔다. 그러면서 장무린을 향해 고운 눈매로 초승달까지 그렸다. 황팔모의 말은 사실이었다.
 사내라면 녹아내리고도 남는 고혹적인 눈웃음에도 장무린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쪼르륵.
 시비가 새치름한 표정으로 술을 따르자, 황팔모는 뭐가 좋은지 껄껄 웃으며 자신의 무릎을 쳤다.
 “우리 월희가 마음을 뺏겨도 단단히 뺏겼구나.”
 “가주님.”
 월희가 고개 숙이며 부끄러워하자, 고운 목덜미에 복사꽃이 폈다.
 장무린은 가볍게 헛기침을 했다.
 좀 불편하다는 뜻을 알아들었는지 황팔모는 월희를 향해 말했다.
 “사내들끼리 긴히 할 이야기가 있으니, 오늘은 네가 마음에 들어 하는 공자의 수청을 들지 않아도 된다.”
 “네.”
 다소곳이 대답한 월희는 장무린을 잠시 야속하다는 듯이 바라보는 듯하다가도, 배시시 웃어 보였다. 여우가 따로 없었다.
 그 꽃 같은 미소에도 장무린은 가볍게 눈인사만 해줬다.
 “내 딸아이처럼 귀한 아이들이지.”
 함부로 대하지 않는 장무린의 태도가 마음에 들었는지, 황팔모는 호의마저 섞인 시선을 보내왔다.
 그 눈빛은 왠지 모르게 시험을 한 듯한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장무린은 똑바른 시선으로 황팔모를 바라봤다.
 황팔모도 장무린을 마주했다. 장무린의 잔잔한 눈빛에선 맑디맑은 정기가 느껴지는 것만 같았다. 이 월야를 살아가기엔 어울리지 않았다.
 “하지만 내가 상관할 바는 아니지.”
 “예?”
 뜻 모를 소리에 장무린이 되물었지만, 황팔모는 제 앞에 놓인 술잔만 비워냈다.
 “크으, 좋군. 한잔하겠느냐?”
 “전 술을 못합니다.”
 “잘됐군. 술은 원래 어른에게 배워야 하는 법이지.”
 “전 술을 싫어…….”
 “오십 냥이 백 냥으로 늘어나는 것보단 좋아하게 될 거다.”
 치졸하다.
 장무린은 어쩔 수 없이 잔을 내밀었다. 설령 다른 뜻이 있다 해도 그에게 받은 도움을 생각하면, 거절하는 건 모양새가 좋지 않았다. 물론, 술에 대한 호기심도 한몫했다.
 황팔모는 껄껄 웃고는 장무린의 잔을 채워줬다.
 “쭈욱 비우거라.”
 “…….”
 장무린은 조심스레 입을 가져가다가 멈췄다. 이 밤에 너무 마음을 놓은 건 아닌가 해서 순간 경각심이 든 것이다.
 눈동자를 굴리는 모습에 황팔모는 피식 웃었다.
 “뇌옥에서처럼 잡것들이 나타날까 봐 겁나는 것이냐?”
 “……알고 계셨습니까?”
 장무린은 눈앞의 황팔모가 보통 사람이 아닌 건 알고 있었지만, 대화를 거듭할수록 알게 됐다. 팔불출인 겉모습과 달리 거물 중의 거물이 아닐까 싶었다.
 중원전장의 반응도 그렇고, 열 손가락 안에 꼽히는 연단술사란 말도 떠올렸다.
 그래도 마음을 완전히 내려놓을 순 없었다.
 장무린의 경계 어린 눈빛에 황팔모는 쓴웃음을 지었다. 뇌옥 안에서의 시간이 순박한 아이를 저리 만든 것임을 잘 알았다.
 “요즘은 밤하늘을 수놓던 혈익응(血翼鷹)들이 잠잠할 시기니까 걱정은 붙들어 매거라.”
 말을 살짝 돌리는 황팔모에 장무린은 원점을 돌릴까 했지만, 단호한 그의 눈빛은 더 물어봐도 답해줄 것 같지는 않았다.
 수많은 의문점이 생겼다면 자신의 손으로 직접 알아내야 하는 법.
 누군가에게 의지하는 건 결코, 좋은 버릇이 아니었다.
 장무린의 침잠이 가라앉는 눈동자를 본 황팔모는 속으로 적잖이 감탄했다.
 영민하기보다 현명하다고 봐야 옳겠지.
 볼 때부터 느꼈지만, 경박하지 않고 생각이 깊은 아이란 생각이 들었다.
 보면 볼수록 진국이다.
 “하지만 내 금지옥엽을 절대로 줄 수 없지, 암.”
 “대체 그게 무슨 소리십니까?”
 뜬금없는 말에 장무린이 검미를 있는 대로 찌푸렸다. 한데 그 모습조차 잘났다.
 우물(尤物)이라는 표현이 사내인 장무린에겐 어울리지 않았지만, 황팔모는 장무린의 관상에 활짝 핀 도화살을 보았다. 자신처럼 여인 꽤나 울릴 상판이다.
 금지옥엽인 취취가 장무린의 간다는 말에 울음을 터트린 게 떠올랐다. 벌써 정을 붙인 것이다.
 황팔모가 으르렁거렸다.
 “내일 당장 떠나도록.”
 “…….”
 어차피 그럴 생각이었던 장무린은 한숨과 함께 술잔을 기울였다.
 목구멍이 순간 확 달아올랐다.
 “콜록, 콜록!”
 장무린이 기침을 하자, 황팔모가 고소하다는 듯이 손뼉까지 쳤다.
 “어른처럼 굴어도 애송이는 애송이지.”
 그 이죽거리는 모습이 말도 못 하게 꼴 보기 싫었다.
 장무린은 오기가 치밀었다. 술잔을 자신이 채우고는 그대로 다시 넘겼다.
 두 번째는 좀 나았다.
 “으흠.”
 잔기침이 나오려는 걸 살짝 억눌러야 했지만, 그럭저럭 마실만했다.
 황팔모는 ‘요놈 봐라?’란 표정으로 빈 술잔을 다시 채워줬다.
 쪼르륵.
 술잔이 채워지자, 벌겋게 얼굴이 달아오른 장무린이 다시 입안에 털었다.
 “뭔 술을 그렇게 급하게 마셔? 술 아깝게, 이놈아!”
 “으흠.”
 다시 한 번 잔기침을 억누르고는 장무린은 술잔을 내밀었다.
 황팔모는 혀를 찼다.
 “쯧쯧, 풍류라곤 쥐뿔도 모르는 초전박살(初戰撲殺)이었군. 진정한 술꾼은 그렇게…….”
 황팔모가 연신 떠들었지만, 멍멍해진 장무린의 귀에는 들어오지 않았다.
 꿀꺽.
 술을 연거푸 마시니 머릿속에 차오르는 의심이 주는 불안이 눈 녹듯이 사라졌다.
 밤을 두려워할 이유도 없어진다.
 그냥 눈앞에 맑은 빛의 술만이 들어왔다.
 얼마나 마셨을까.
 꿀꺽.
 흔들리는 눈빛을 한 제 얼굴과 함께 술잔을 비워냈다. 그리곤 깊은숨을 토해냈다.
 “제게 원하는 게 있으십니까?”
 “…….”
 황팔모는 대답 대신 주위를 둘러보라 손짓했다.
 장무린은 취기가 올랐어도 그 손짓이 어떤 뜻인지 깨달았다.
 이런 대궐 같은 집을 갖고, 고작 애송이에게 눈독을 들이겠느냐는 뜻이었다.
 장무린은 연거푸 잔을 비워냈다. 이해가 여전히 안 돼서다.
 호의를 받을 줄 알아야 줄 줄도 안다는, 야장의 말이 왜 떠오를까?
 “천천히 마셔, 이것아. 아주 제거인 마냥 다 마시네. 난 따라주지도 않고.”
 황팔모가 슬쩍 불만을 내비쳤지만, 장무린은 이미 다른 한쪽 귀로 흘려보냈다. 얼굴이 새빨개진 채 제 할 말만 주절거렸다.
 “그럼 왜 제게 잘해주는 겁니까?”
 “잘해주긴 개뿔, 앞으로 이 황팔모의 점포만 애용해달라는 접대지, 접대.”
 “……!”
 “딴 데 가면 내 장담하건대, 오늘 먹은 거 다 토해내게 해주겠어. 알겠느냐?”
 황팔모의 협박 아닌 협박에 장무린은 손으로 입을 가렸다. 감동 받아서가 아니었다.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우웨에엑!”
 구토가 나올 것 같아서였다. 물론 이미 탁자를 아름답게 수놓았지만.
 황팔모의 송충이 눈썹이 꿈틀거렸다.
 “얼씨구?”
 철퍼덕.
 장무린은 탁자 위로 엎어졌다.
 “술 한잔도 안 따라줘 놓고 나보고 뒤처리까지 하라고? 네놈과 다시 술을 마시면 내 성을 간다.”
 황팔모의 이를 갈았다.
 어렴풋이 내 입은 주둥이냐고 어떻게 제 놈만 처마시느냐는 불평이 들려왔지만.
 장무린의 의식은 이미 나락으로 떨어졌다.
 
 포근한 잠자리.
 대체 이게 얼마 만일까.
 장무린은 따스한 느낌에 좀 더 몸을 파묻었다.
 “으응.”
 “……!”
 야릇한 비음에 사색이 된 장무린이 벌떡 일어났다.
 야행유녀!
 경악한 장무린이 황급히 침상 아래로 뛰어내렸다. 주위에 무기가 될 만한 걸 찾기 시작했다. 하지만 아무리 찾아도 보이질 않았다. 참담한 얼굴을 한 장무린이 두 손으로 의자를 잡아챘다.
 그리고는 침상 쪽을 바라보는데.
 익숙한 얼굴이 보였다.
 시비 월희였다.
 속이 훤히 다비치는 나삼을 입은 그녀가 야릇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소녀가 놀라게 해드렸다면 사죄드릴게요.”
 “…….”
 그 목소리에 쿵쾅거리는 심장이 점점 안정을 되찾아간다.
 털썩.
 의자를 내려놓은 장무린은 다리에 힘이 풀려 주저앉았다. 등줄기에 식은땀이 맺혔다. 너무 마음을 놓았다는 자책감이 찾아왔다.
 부스스.
 몸을 일으킨 월희가 풀었던 머리를 도로 틀어 올렸다. 그 고혹적인 자태에 사내라면 군침을 삼키고도 남았지만, 장무린의 눈에는 들어오지 않았다.
 “대체 이게 어떻게 된 것이오?”
 황망한 얼굴이 빚은 의문에 월희는 미소만 지었다. 그리곤 침상에서 내려와 벗어놓은 의복을 입기 시작했다. 탄탄한 허벅지와 잘록한 허리, 봉긋한 수밀도가 차례대로 가려져 갔다.
 장무린은 피가 아래로 쏠리는 느낌이 찾아왔지만, 가까스로 억눌렀다.
 그걸 눈치챈 월희가 묘한 눈으로 바라봤다.
 “도로 내려드려요?”
 “그럴 리가!”
 장무린의 새된 목소리에 입술을 삐죽인 월희는 지난밤의 일을 간략하게 설명해줬다.
 “가주님께서 소녀를 부르셔서 깨끗이 씻기고, 잠자리를 봐 드리라고 하셨어요. 온몸에 오물이 묻었거든요. 그래서 제가 옷을 벗기고 씻겨드렸죠.”
 “아.”
 장무린은 순간 얼굴이 달아오르는 걸 느꼈다. 제 몸을 보였다는 부끄러움보다, 고역을 겪었을 그녀에 대한 미안함이 먼저 찾아왔다.
 “미안하오.”
 “어머.”
 사죄부터 하는 장무린에 월희의 아미가 상큼하게 치솟았다. 보면 볼수록 매력이 넘치는 공자였다.
 좀 더 놀려주고 싶은 순진함이 돋보였지만.
 월희는 진지한 그의 눈빛에 장난기를 거두었다.
 “혹시나 해서 걱정할까 봐 말씀드리는데. 공자님께서 걱정하는 일 같은 건 없었어요.”
 “…….”
 장무린은 대답 대신 고개를 수그렸다. 여인의 입으로 듣기엔 민망한 일이었다. 잠자리 의복을 입은 자신의 상태가 그제야 눈에 들어왔다.
 그녀의 말은 사실이다.
 장무린은 가볍게 헛기침을 했다.
 의복을 정제한 월희가 장무린을 일으켜 세워줬다.
 “원하신다면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는데, 이른 새벽녘이긴 해도 밤은 길죠.”
 여우처럼 꼬리를 치는 것도 잊지 않았다.
 장무린은 고개를 저었다.
 “그러지 않아도 되오. 이미 충분한 폐를 끼쳤으니까.”
 “…….”
 월희는 새삼스러운 눈빛으로 장무린을 올려다봤다.
 듣기론 뇌옥에 오랜 시간을 갇힌 데다 월야행까지 나갔다 왔다 하였다.
 그런데도 이렇게 멀쩡한 정신을 유지한다는 건.
 “정신력이 정말 남다르군요. 술은 못하시지만.”
 진심이 담긴 감탄에 장무린이 얼굴을 살짝 붉혔다. 그녀를 안지 않아서 한 칭찬으로 들려서다.
 그런 모습조차 너무 귀엽다.
 월희는 좀 더 있고 싶었지만, 황팔모가 내린 명과 함께 준 물건이 떠올랐다. 그녀가 품속 깊은 곳에서 무언가를 꺼내 건네줬다.
 장무린은 그걸 받으며 살폈다. 아찔한 체향이 느껴졌지만, 지금은 그것보다 받은 호패가 눈에 먼저 들어왔다. 뒷면에 창천황가란 글자가 음각되어 있었다.
 “저희 연단점포와 독점계약을 맺은 야행자에게만 드리는 호패에요. 아주 특별한 손님에게만 드리는 거죠.”
 “…….”
 장무린은 말없이 월희를 바라봤다.
 그녀가 붉은 입술을 나풀거렸다.
 “떠나실 거잖아요? 그러려면 기존에 쓰던 호패보다는 지금 드린 호패가 여러모로 유용하실 거예요. 이래봬도 저희 쪽에서 신분을 보증해드리면 어지간한 성문은 전부 다 통과거든요.”
 “어째서 이런 친절을 내게 베푸는 건지 알 수 있겠소?”
 진지한 표정에 월희는 그의 손을 잡았다.
 “타인의 호의가 불편하신 건가요?”
 “솔직히 말하면, 그렇소.”
 “그럼 마음 편하게. 계약 정도로 생각하세요. 호의라고 생각되는 점들은 가주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앞으로 저희 점포만 이용해달라는 일종의 접대라 여기시고.”
 월희는 그가 어째서 의심 많게 구는지 안다는 듯이 맑은 웃음을 지어줬다.
 꾸욱.
 장무린은 복잡한 심경에 호패만 그러쥐었다.
 월희는 설마 그 호패를 부수려는가 싶어 걱정이 일었다. 그러다 곧 장무린의 품속으로 들어가는 걸 보고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자신의 감정이 앞서는 이가 아닌, 타인의 마음을 먼저 헤아릴 줄 아는 현명한 청년이란 생각에 마음이 적잖이 흔들렸다.
 두근두근.
 심장이 뛰는 걸 느낀 월희가 장무린을 물끄러미 올려다봤다.
 장무린은 그 시선을 피했다.
 선남선녀 단둘이 있는 내실.
 묘한 분위기가 잡히는 건 당연했다.
 이 밤은 아직 다 가지 않았다.
 월희가 그의 손을 잡은 채 한 걸음 더 다가왔다.
 장무린은 자신도 모르게 한 발짝 물러섰다.
 “너무해요. 이렇게까지 했는데도 그러면 저 정말 상처받아요. 제 모든 걸 보여준 사내는 공자님이 처음이라구요.”
 “아니, 그게 아니고……!”
 두 눈을 슬며시 감는 그녀의 모습에 장무린은 어찌할 바를 몰랐다.
 혈류량이 치솟는 아래의 본능으로 가자니, 그러면 절대 안 됐다. 난 이들을 안 지 하루도 지나지 않았다. 이미 떡이 되어 혼절한 와중에 경계심이 드는 것도 우스웠지만, 변명은 해야 했다.
 “난.”
 “네.”
 “여인을 모르오.”
 “알려줄게요.”
 손을 잡아서 제 봉긋한 가슴에 대었다.
 점입가경이었다.
 장무린은 얼른 손을 빼냈다.
 월희는 이번엔 정말 상처받은 얼굴을 해 보였다. 수막이 어리기 시작했다.
 장무린이 서둘러 변명하였다.
 “난 야행자요.”
 “알아요.”
 그게 뭐 어쨌냐는 표정에 장무린은 눈빛이 더욱 깊어졌다.
 “밤길을 헤매는 자에 돌아올 곳은 어울리지 않소.”
 “그럼 새벽이슬에 목만 축이고 가면 그만이지요.”
 떠도는 삶에 잠시 머물렀다 갈 안식처가 생긴다는 말이 얼마나 달콤한지 장무린은 새삼 느꼈다.
 하지만 자신은 그래선 안 됐다.
 “…….”
 장한과 검상을 입었던 낭인의 얼굴이 뒤이어 떠올랐다. 뇌옥과 여우골에서의 참혹한 시신들과 함께.
 월희가 달라진 눈빛으로 물어왔다.
 “행복해지는 게 두렵나요? 아니면 자신만 행복해지는 게 미안한 건가요?
 아까의 그녀가 요부처럼 굴었다면, 지금은 정숙한 여인과 같았다. 장무린의 일그러진 눈동자를 본 뒤로 태도를 바꾼 것이다.
 “…….”
 장무린은 답을 하지 못했다.
 월희는 한숨 섞인 미소를 지었다.
 “자책하지 마세요. 가주님께서 공자님과의 연을 만들었으면 좋겠다는 뜻을 내비치셔서, 소녀 스스로 나선 일이었으니까요.”
 “……!”
 장무린은 모골이 송연해지는 느낌을 받았다. 하긴, 당연했다. 그녀 같은 미인이 처음 만난 자신에게 이리 살갑게 구는 건 다른 뜻이 있어서지, 반해서가 아니었다.
 오히려 월희 쪽이 미안한 표정을 짓고는, 장무린의 뺨에 손바닥을 포갰다.
 “그렇다고 가주님을 나쁘게 보지 마세요. 갈 곳이 없어진 우리를 받아주시고, 남부럽지 않게 살게 해주신 분이니까요. 단지, 인재에 대한 욕심이 남다르셔서 그런 거라고 이해해줘요.”
 “…….”
 “꼭 이곳에 들러주세요. 짧은 인연이라도 소중히 여길 줄 안다면, 공자님의 행보에 큰 복이 되어줄 날이 있을 테니까요. 소녀 또한 그 연을 소중히 한 덕분에 이렇게 행복하게 되었거든요.”
 월희는 그 말과 함께 입술을 포개어왔다.
 장무린은 그걸 거절할 생각을 하지 못했다. 그녀가 한 말이 오래전 장한이 했던 모순된 말과 겹쳐진 탓이었다.
 잠시 후.
 월희가 교구를 돌려 내실을 나섰다. 슬쩍 뒤돌아보는 숨 막히는 뒤태에선 설렘마저 느껴졌다.
 “후우.”
 장무린은 우두커니 서서 창밖을 바라봤다.
 칠흑 같은 어둠을 갈기갈기 찢어내는 사나운 새벽이 끝을 맺고 있었다.
 하지만 장무린은 이제부터 시작이었다.
 그런데 안식처라니.
 말도 안 된다.
 왜냐면 월야행은.
 “너무나도 위험하니까.”
 지금도.
 그리고 앞으로도 계속 그럴 것이다.
 창밖으로 여명이 밝아왔다.
 이제 그만 이곳을 떠날 때가 됐다.
 
 장무린은 수소문 끝에 청해 인근까지 가는 표행이 있는 곳을 찾았다.
 그 길목에 폐허가 된 성도(聖都)가 있었고, 칠야시는 지하에 자리 잡은 곳이었다.
 청천표국.
 웅장한 필체로 쓰인 현판이 보였다. 그 옆에 쟁자수와 표사를 상시 모집한다고 쓰여 있었다.
 어쩌면 무공을 구하는 건 청천황가의 가주 황팔모에게 부탁하면 될 수도 있었다.
 하지만 장무린은 그러지 않기로 마음먹었다.
 호의는 넘치게 받았다. 신분을 보증해줄 호패도 부담스러울 지경이다.
 “대가 없는 호의란 없으니까.”
 접대라며 대가를 바라지 않는 황팔모의 행동은 확실히 이상했다. 인연을 맺고 싶다는 말만 믿고, 순진하게 의탁할 정도로 멍청해선 안 됐다. 장무린은 자신의 결정을 믿었다.
 장한이 해준 말은 결코, 틀리는 법이 없었으니까.
 “어서 오시오.”
 청천표국의 나이 든 서기관이 찾아온 장무린을 맞이해줬다.
 “저어.”
 “무슨 표물을 맡기려고 오신 거요?”
 단도직입적인 물음에 장무린은 고개를 저었다.
 “표물을 맡기려고 온 게 아닙니다.”
 “그럼 공자님의 호위를 맡기려 함이요?”
 “그것도 아닙니다. 이번 청해 인근까지 가는 표행에 성도까지 동행했으면 해서 찾아왔습니다. 쟁자수라도 좋습니다.”
 
 “…….”
 서기관의 표정이 달라졌다. 마뜩찮은 얼굴이었다. 객인 줄 알았는데, 군식구도 안 되는 뜨내기였으니 당연했다.
 장무린은 호의가 귀찮은 기색으로 변하자, 이상하게 안심이 됐다.
 그래, 이래야지.
 줄곧 받아온 호의에 의한 불편함이 해소되는 기분이었다.
 서기관은 제 손에 들린 회계장부를 보면서 손사래를 쳤다.
 “호패는 거기다 놓고 연무장으로 가게. 일단 거기서 쟁자수 시험에 통과한 뒤에 오게나.”
 말투와 태도마저 달라졌지만, 장무린은 신경 쓰지 않았다. 호패를 놓고는 연무장으로 향했다. 딱 보니 시험에 통과해야 호패를 볼성싶었다.
 청천표국의 연무장.
 이미 그곳엔 장무린처럼 이번 표행에 참여하고 싶은 자들이 몇몇 있었다.
 눈이 부리부리한 표사가 그들에게 이번 표행에 대한 일장연설을 막 하려던 참이었다. 장무린이 다가오자 역시 그도 마뜩잖은 눈빛을 보내왔다.
 “무슨 일로 오셨소?”
 일단 갖춘 의복과 준수한 용모에 말이 함부로 나가진 않았다. 장무린이 이번 표행에 성도까지 동행하고 싶다는 말을 하자, 역시 그도 눈빛과 말투가 달라졌다.
 “무공수위는 어떻게 되는가? 익힌 무공은 뭐고?”
 어느 정도 가늠이 됐지만, 예의상 물어왔다.
 장무린은 자신을 관조해봤다.
 이십 년 내공에 있으나 마나 한 검공, 그에 비해 좀 나은 비도술. 중급 무공인 낭아풍운보. 특히 낭아풍운보는 숨기는 게 나았다.
 “토납법을 조금 익혔습니다.”
 “…….”
 표사의 얼굴이 썩은 간을 씹은 것처럼 일그러졌다. 말 그대로 무공을 건강 삼아 익힌 정도라서다.
 풋!
 대기하고 있던 자들이 하나같이 비웃음을 흘릴 정도였으니 말 다했다.
 
 표사는 내심 돌아가라고 쫓아내고 싶었지만, 질 좋은 의복과 맑은 눈빛이 마음에 걸렸다. 행색이 초라하면 두말하지 않고 돌려보냈을 터, 일단은 참아냈다.
 “차례를 기다리게.”
 참을성을 발휘한 그는 날 선 눈빛으로 말했다.
 장무린은 고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앞서 온 자는 열 명이었고, 장무린의 뒤로 더 오는 자가 없자, 표사는 표행의 어려움에 대해 장황하게 설명했다.
 점점 길어지자, 지루함에 몇몇이 하품을 했다가 표사의 눈총에 도로 입을 다물었다.
 “…산속의 야행수들 탓에 이젠 표행을 노리는 녹림도가 없어졌다지만, 알다시피 야행수들로 인해 표행은 더욱 어려워지고 위험해졌지. 그래도 월야행만큼은 아니니 걱정하지 말게. 우리는 기문진이 아니라 대로를 따라 표행을 떠나는 거니까.”
 그래도 청년들은 야행수와 월야행이란 말에 잔뜩 긴장하였다.
 표사는 그걸 보고는 알면서도 물어봤다.
 “월야행을 나가 본 적이 있는 이가 있는가?”
 “…….”
 모두가 침묵했다.
 표사는 그것 보라는 듯이 입꼬리 한쪽을 올렸다. 천상 쟁자수나 할 놈들이었다. 새로 온 놈이 움찔거리는 게 눈에 들어왔지만, 겁먹어서라고 여겼다.
 장무린은 하마터면 들어 올릴 뻔한 손을 겨우 붙잡았다.
 안되지, 안돼.
 속으로 되뇐 장무린의 귀에 청년의 외침이 들려왔다.
 “표사님은 야행수를 잡아본 적이 있으십니까?”
 표사는 거드름 피웠다.
 “본인으로 말할 것 같으면, 워낙 공사다망하여 월야행에 나가지 않았지만, 표행 중에 삼성급 야행수를 잡아본 적이 있었다.”
 “오오.”
 이성 급도 아니고 삼성급이란 말에 청년들은 감탄했다.
 ‘모두와 함께.’라는 말을 빼먹은 표사였지만, 굳이 넣을 필요성은 못 느꼈다.
 표행 또한 월야행처럼 그믐달에 떠나는데다가, 대로만 따라가면 됐고, 일정한 거리마다 있는 거점들에서 밤을 보내면 됐다.
 삼성급 야행수는 정말 운이 나쁠 때나 만나는 것이었다. 또한, 이 시기엔 삼성급 야행수인 혈익응이 활동을 안 했다. 그리 큰 위험은 없는 시기다.
 사주경계만 철저히 하면서 대로를 따라, 거점에서 거점으로 이동하면 되는 게 표행이었다. 백 명이 넘는 숫자가 든 횃불이라면, 일성급 야행수는 쉬이 다가오지도 못한다.
 경계만 해대며 쫓아오겠지.
 “에헴, 자네들도 운이 좋으면 이성급 야행수 정도는 경험해볼 수 있을 거네. 물론 시험을 통과해야겠지만 말이야.”
 태어나서 성 밖으로 한 번도 나가보지 못한 청년들이었는지, 다들 긴장된 얼굴로 서로 돌아봤다.
 그러다 입가에 미미한 미소 띤 장무린을 발견하였다.
 “넌 무섭지 않아?”
 또래로 보이는 순박한 청년이 물어왔다.
 장무린은 고개를 끄덕이려다가 그냥 저었다.
 “무서워.”
 “그렇지? 솔직히 나도 그래. 어머니 몰래 표행에 따라나서려는 거라, 긴장이 너무 되네.”
 “처음?”
 장무린이 새삼스러운 눈빛을 보내자 청년이 머리를 긁적였다.
 “응, 너처럼 처음이야. 쟁자수부터 경험해보려고.”
 순박한 청년은 자신을 곽해라고 불러 달라며 악수를 청해왔다. 아무래도 이중 가장 약해 보이는 장무린과 묘한 동질감을 느꼈나 보다.
 장무린은 마주 잡으며 무린 이라고 말해줬다.
 “무린? 이름이 잘생긴 얼굴하고 잘 어울리네.”
 곰살맞은 반응에 장무린은 낯이 달아올랐지만, 곽해의 순박한 얼굴을 보니 원래 칭찬이 인색한 청년이 아닌 듯했다.
 눈이 마주치니 넉살 좋게 웃기까지 한다.
 장무린도 어색하게 웃었다.
 둘의 잡담은 표사가 눈알을 부라려서야 끝을 맺었다.
 옆에 있던 다른 청년들이 코웃음을 쳤다. 어디서 외공 한 자락을 익혔는지 하나같이 팔 근육이 성난 것처럼 올라와 있었다.
 “끼리끼리 어울리는군.”
 “원래 약한 놈들끼리 뭉쳐 다니는 법이지.”
 그 비아냥거림에 장무린은 반응하지 않았다.
 곽해도 마찬가지였다. 자신의 뒷머리를 긁적거리며 얼굴을 붉혔다. 사실이었으니까 별다른 말은 하지 않았다.
 “잡담은 그쯤하고. 본 시험에 들어가기 전에 말해주는데, 표행에 참가할 자격을 얻는 시험은 힘들다. 어쩌면 크게 다칠지도 모른다. 그러니 포기하고 싶으면 지금 돌아가. 겁쟁이는 겁쟁이답게 굴어야지.”
 표사가 으름장을 놔도 혈기가 들끓는 애송이들이 들을 리 만무하였다.
 오히려 오오! 거리며 제 팔 근육들을 자랑하기 바빴다.
 어떻게든 돋보이려고 안달 난 모습을 보며 장무린은 묘한 미소를 입매에 그렸다.
 표행에 참가하기 위한 시험이란 게 어떤 건지 좀 기대가 된 것이다.
 설마하니 월야행보다 어렵겠어?
 
 “대청천표국의 쟁자수를 뽑는데 아무나 뽑을 수는 없지. 해서 간단하게 시험을 치르겠다.”
 표사의 말에 의하면 첫 번째는 완력 시험이란다.
 연무장 한 편에 마련된 커다란 돌을 옮기면 되는 건데, 보는 것처럼 무게가 제법 나가 보였다.
 “무게는 약 삼백오십 근 정도는 된다. 힘이 장사인 쟁자수들은 대략 일곱 걸음 정도를 옮기지. 어때 쉽겠지?”
 삼백오십 근이라는 무게와 일곱 걸음이란 말에 몇몇 안색이 창백해졌다.
 표사가 히죽 웃었다.
 “일전엔 이 돌을 옮기다가, 그만 돌을 놓치고 말아서 발등이 찍힌 놈이 있었다. 어떻게 됐을까?”
 물을 것도 없었다.
 저 어마어마한 무게의 돌이 발등을 찍혔다면 어찌 될지 불을 보듯 뻔했다.
 마침 표사도 설명해줬다.
 “아마 평생 그 발은 못 쓰게 됐다더군. 아주 걸레짝이 됐거든. 아직도 놈이 내 발 좀 돌려달라고 울부짖으며 날뛰던 모습이 눈에 선하군.”
 표사가 겁을 주자 다들 안색이 창백해졌다. 울부짖으며 날뛰는 모습이 자신들의 모습처럼 느껴진 탓이다.
 의외인 건 호리호리한 체형의 장무린에게서 별반 반응이 없었다.
 뭐 지켜보면 알겠지.
 짧게 코웃음 친 표사가 한 명씩 불러냈다.
 우람한 팔 근육을 과시하던 놈들이 하나 둘 나와 커다란 돌을 잡고 용을 썼다.
 “으라라랏!”
 “끄어어……!”
 얼굴까지 시뻘게진 채로 한 발짝 옮기는 놈부터, 네 걸음까지 옮겼다가 똥까지 싸지른 놈까지.
 최대가 네 걸음이었다.
 포기하는 놈들은 없었다. 한두 걸음이라도 옮겨는 놨다.
 “흐음.”
 표사도 내색은 안 했지만, 그래도 제법이라는 생각에 다음 사람을 불렀다.
 순박한 청년인 곽해 차례였다.
 곽해가 긴장한 표정으로 일어섰다.
 “가, 갔다 올게.”
 “응.”
 다들 기대도 안 한다는 표정이었지만, 장무린은 곽해의 물렁살이 그냥 물렁살이 아님을 간파했다.
 “제깟 놈이 걸어봐야 얼마나 걸겠어.”
 특히 똥까지 쌌다가 뒷간 가서 마저 처리하고 나온 놈은 코웃음만 쳤다. 열 발짝 떨어진 곳에서 바람맞으며 팔짱을 낀 채 근육을 과시하고 있었다. 자신이 가장 많은 네 걸음을 걸었기에 부끄러움보다 자부심이 넘쳐흘렀다.
 “빨리하라고, 이 멍청한 돼……!”
 들썩.
 어렵지 않게 곽해가 돌을 들자, 똥싸개는 말을 하다 말았다. 자신보다 돌을 높게 든 탓이다.
 “끄응.”
 저벅, 저벅.
 그리고 시뻘게진 얼굴로 일곱 걸음을 걷고는 돌을 내려놨다.
 쿠웅.
 대지를 울리는 소리에 청년들이 오오! 감탄했다.
 최고의 성적이었다.
 표사가 고개를 끄덕였다.
 “보기와 달리 힘이 장사군. 물렁살인 줄 알았는데 말이야.”
 곽해는 멋쩍게 웃고는 뒷머리를 긁적였다.
 “어렸을 때부터 쌀가마니를 이고 다녀서요.”
 “나쁘지 않군.”
 순박한 반응에 표사는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무식하게 힘만 좋은 것이 쟁자수로 쓰기에 딱 맞았다.
 “제길, 멍청하게 생긴 게 힘만 좋아서.”
 똥싸개가 이를 바득바득 갈았다. 자신과 달리 곽해는 똥을 싸지르지 않은 게 불만인 듯했다.
 표사는 심드렁한 얼굴로 손짓했다.
 “다음.”
 마지막이 호리호리한 체형의 장무린이어서다.
 이번엔 모두가 기대도 안 한다는 표정을 지었다.
 표사는 다음 장소로 안내하려고 모두를 일으켜 세웠다.
 곽해가 유일하게 장무린을 응원했다.
 “허릿심으로 들지 말고 온몸으로 들어야 해. 그렇지 않으면 허리 다치니까. 조심해야 해.”
 조언까지 해주는 곽해의 눈동자엔 진심이 담겨 있었다.
 장무린은 고맙다는 뜻을 내비치고는 돌 앞으로 걸어갔다. 내공을 쓸까 싶었다. 하지만 이내 고개를 가로저었다. 자신의 힘이 어느 정도인지 가늠해보고 싶은 것이다.
 내공은 쓰지 말아보자.
 장무린이 주먹을 쥐었다 폈다 했다.
 다음 장소로 이동하려는 표사와 다른 이들이 빨리하라고 재촉하였다.
 “왜 이렇게 뜸들여? 얼른 안 해?”
 “천지신명에게 기도라도 하나 보죠. 제발 돌 좀 잘 들게 해주세요 하……!”
 비아냥거리던 똥싸개는 이번에도 말을 멈췄다. 얄쌍한 장무린이 돌을 번쩍 들어서다.
 “으음.”
 장무린은 별로 힘들지 않은 기색으로 돈을 들고는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모두가 입을 쩍 벌렸다.
 특히 똥싸개의 입은 너무 벌려 턱이 빠지는 건 아닌가 싶을 정도다.
 “우와.”
 곽해는 손뼉을 치며 제 일처럼 좋아했다.
 어색하게 웃은 장무린, 무려 일곱 걸음이나 걸었다. 사실 열 걸음을 옮기는 것도 모자라, 던지기까지 가능할 정도로 힘이 넘쳤다. 그저 주목받는 게 싫어 자제했을 뿐이다.
 표사의 눈빛도 살짝 변했다. 곽해처럼 얼굴이 벌게지지 않은 것에 주목하였다.
 “흐음, 힘이 좋아 보이진 않은데 말이야. 건강 삼아 익힌 토납법이 꽤 도움이 됐나 보지?”
 내공을 수련했음을 상기시키자, 청년들은 그제야 좀 납득한 얼굴들이었다.
 
 “쳇! 반칙이라고, 내공은.”
 똥싸개가 애써 위안 삼으며 이죽댔지만, 한 번 상한 자존심은 회복되지 않았다. 똥까지 싸지르고도 일등을 못한 덕분이었다.
 모두를 놀라게 한 장무린은 다음 장소로 이동했다.
 “대단해, 정말 대단해.”
 “뭘, 네가 더 대단하지.”
 곽해의 칭찬에 장무린은 겸연쩍게 웃었다. 예전과 달리 힘이 엄청 붙었음을 느꼈다. 내공을 쓰지 않았기에 재확신할 수 있었다.
 어쩐지 적면호리에게 비수를 던질 시 힘마저 남달라진 것 같더니, 이래서였구나.
 장무린이 상념에 젖어있을 때.
 표사가 다음 시험에 대해 설명해줬다. 가리킨 방향엔 병장기들이 놓여 있었다.
 “저 병장기들 보이지? 두 번째이자 마지막인 이번 시험은 더 간단하다. 익힌 무공을 마음껏 펼쳐 보이는 거다.”
 지금껏 보이던 엄포와 달리 매우 쉽게 들렸지만.
 스르릉.
 검을 뽑는 표사의 행동에 모두가 의아해했다.
 “이 나를 향해서 말이지. 물론 몸성이 돌아갈 생각은 꿈에도 하지 않는 게 좋을 것이다. 이 손과인 어르신은 대충이란 걸 모르는 사람이거든.”
 그 서슬 퍼런 엄포에 모두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물론 장무린만 빼고 말이다. 오히려 이류 무인인 표사에게 자신의 힘이 얼마나 통할까 싶어 적잖이 기대하는 눈치였다.
 다분히 도전적인 눈빛을 보냈다.
 다행히 손과인은 보지 못했다. 검을 들고 갖은 멋진 척을 하느라 여념이 없어서였다.
 “하압!”
 금계독립(金鷄獨立) 자세로 서서 열정적으로 검을 휙휙~ 휘둘러대더니, 히죽 웃어 보였다.
 “다들 준비됐겠지? 이제 나와서 한 놈씩 처맞는 아니, 시험 보는 거다.”
 손과인의 말에 장무린을 제외한 나머지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분명히 처맞는다고 두 귀로 똑똑히 들어서다.
 
 
 # 第 十 章
 
 퍼억!
 “커헉!”
 복부에 일격을 허용한 똥싸개는 그대로 무너졌다.
 똥싸개를 개 패듯이 팬 표사 손과인은 짜릿한 손맛에 히죽 웃었다. 이 손맛에 쟁자수를 뽑는 시험에 나선 불만이 단박에 날아갔다.
 “제법 버틴 건 칭찬해주마. 익힌 외공도 괜찮고. 하지만 표사가 되려면 멀었다.”
 “저, 전 표사가 아니라 쟁자수가 되려고 온 건데요.”
 기진맥진한 똥싸개의 변명에 손과인은 흥! 하고 코웃음을 쳤다.
 “사내로 태어났으면 사내대장부답게 표사를 노려야지. 쟁자수가 뭐냐?”
 “재, 쟁자수 뽑는 시험이라고 해서 표행 경험 삼으려고요.”
 “시끄럽다.”
 불만을 터트려보지만, 손과인의 개를 쫓는 듯한 발길질에 기어서 들어가야 했다.
 “후우, 후우.”
 똥싸개는 엎어진 채 거칠게 숨을 몰아쉬었다.
 나머지 여덟도 대동소이한 몰골로 끙끙 앓아대고 있었다.
 그래도 똥싸개가 가장 오래 버텼다.
 다음 차례인 곽해의 안색이 파리해졌다. 기진맥진한 채 두들겨 맞아서 온몸이 피멍이든 청년들의 모습이 잠시 후 자신의 모습으로 보여서다.
 장무린은 긴장한 기색이 역력한 곽해의 어깨를 두드려줬다. 그리곤 작은 목소리로 속삭여줬다.
 “첫 일격은 겁주기 위해 검을 횡으로 휘두를 거야. 그때가 유일한 기회야. 상체를 있는 대로 숙여.”
 “뭐?”
 “개구리처럼 납작 엎드리라고, 그리곤 두 다리를 잡아채. 아마 무릎으로 치거나, 팔꿈치로 등을 때리겠지만. 진심을 담지 않을 거니 네 맷집이면 버틸 수 있을 거야.”
 지금껏 지켜본 장무린의 조언에 곽해는 반신반의했지만, 뭔 잡담을 그리하느냐는 손과인의 말에 얼른 뛰쳐나갔다.
 “무기는?”
 빈손으로 온 곽해에 손과인이 물어왔다.
 곽해는 어리둥절해하더니 서둘러 병장기가 놓인 진열대로 갔다.
 그리곤 뭔가 집으려고 그러는데, 마땅한 게 없었다. 해서 무게 좀 나가 보이는 철구를 들었다.
 “어떻게 들어도 저 같은 걸 드냐.”
 어느새 기진맥진한 숨이 돌아왔는지 똥싸개가 선 채로 이죽거렸다.
 긴장한 곽해가 쳐다보자, 장무린은 오히려 잘했다는 눈빛을 보내줬다.
 손과인은 눈빛을 교환하는 두 놈에 코웃음만 쳤다. 뭔 작당 모의를 하는지 몰라도, 대충 넘어갈 생각은 없었다. 때리기 좋은 물렁살이 마음에 쏙 들어왔다.
 일 각, 더도 말고 일 각 정도만 패야지.
 손과인은 그리 작정하고는 지금껏 하던 대로 검을 까닥였다.
 “들어와, 들어와.”
 “예, 예.”
 곽해는 그리 대답하고는 쭈뼛거리며 다가갔다.
 손과인은 그 굼벵이처럼 굼뜬 행동에 눈을 부라렸다.
 “안 오며 내가 간다?”
 “제, 제가 가겠습니다!”
 그러면서 철구를 훙! 하고 던졌다.
 유일하게 할 수 있는 곽해의 공격법이었지만, 모두를 어처구니없게 만들기엔 충분했다.
 장무린만이 눈빛을 반짝였다. 보기와 달리 머리가 좋은 친구란 생각이 들어서다.
 손과인은 싸늘하게 웃고는 피하기보다 어떻게 하면 이걸 멋지게 쳐 날릴까 고민했다.
 그래, 좌에서 우로 깔끔하게 쳐내는 거야. 자세 잘 나오겠지?
 휘잉, 깡!
 철구를 날려버린 자신의 자세가 끝내준다고 생각한 손과인이 사형을 선고했다.
 “이게 다라면 네놈은 죽었다고 복창해야 할……!”
 덥석.
 그러다 제 두 다리를 낚아챈 곽해에 멀뚱히 내려다봤다.
 “뭐냐.”
 “드, 들려고요.”
 어색하게 웃은 곽해가 손과인을 좀 더 높이 들었다.
 마치 애들 얼러주는 듯한 모양새에 손과인이 눈을 부라렸다.
 “맞기 전에 내려놔.”
 “네? 네!”
 왠지 그냥 내려놨다가는 끝장이란 생각에 곽해는 에라, 모르겠다는 심정으로 뒤로 날려버렸다.
 휙.
 “음?”
 힘이 좋은 줄 알았지만, 이렇게까지 좋을 줄은 몰랐던 손과인은 날아가며 침음을 삼켰다. 물론 그는 경공술을 익힌 무인이었으니, 아주 가볍게 착지하였다.
 착지자세도 역시 금계독립이다.
 장무린은 손을 들어 얼굴을 가렸다. 이왕이면 들어 메쳐서 올라타 주먹질이라도 하길 바랐지만, 곽해의 순한 성정은 누군가를 때리기보다 던지는 쪽을 택했다.
 만약 쌀가마니 멀리 던지기 시험이었다면 장원급제하고도 남을 괴력이었다.
 그러나 이건 익힌 무공을 보는 시험이다.
 “확실히 힘만 좋은 네놈은 쟁자수로는 딱 맞는군.”
 그래도 손과인에게 눈도장은 확실히 찍었다.
 뒷머리를 긁적인 곽해가 순박하게 웃었다.
 “저 통과입니까? 들어가도 되는 거죠?”
 “아니, 일단 좋은 구경 시켜줬으니 보답은 해줘야지.”
 “예, 예?”
 어리둥절한 반응에 손과인은 예의 냉소를 흘렸다.
 퍼퍼퍼퍼퍼퍽!
 곽해는 아주 시원하게 얻어터졌다. 정확히 일 각 동안, 쥐어 터지더니 기어이 정신줄을 놓아버렸다. 땅바닥에 엎드린 채 엉덩이만 든 곽해가 부들거리는 손을 뻗었다.
 “어, 어머니…….”
 헛것이라도 보는지 눈이 완전히 풀려 있었다.
 손과인은 아주 상쾌한 얼굴로 이마 위에 서린 땀을 소매로 닦았다.
 “후우, 속이 다 후련하네.”
 그 말에 청년들의 낯빛이 좋지 않았다.
 왠지 이 시험 사감이 다분하다.
 “자, 다음.”
 손과인은 이 기분 좋은 손맛을 더 느껴보기 위해 장무린을 향해 손짓했다.
 그렇지 않아도 뺀질거리는 얼굴이 마음에 안 들었는데, 잘됐다.
 자고로 기생오라비처럼 잘생긴 놈은 사내들의 잠재적인 적이 아니던가.
 “얼굴을 아주 멋있게, 사내답게! 만들어주겠다.”
 그 선언에 청년들이 떨떠름한 얼굴을 했다. 역시나 강한 사감이 느껴져서다. 그제야 깨달았다. 이건 시험이 아니라, 표사 손과인의 개인적인 분풀이라는 걸.
 표사 중 최고 선임인데다, 이류 무인인 그가 이런 쟁자수를 뽑는 시험에 불려 나오게 된 건, 다른 사람들이 비번이어서였다. 마침 애인도 없고, 일도 없던 터라 어쩔 수 없이 불려 나온 건데.
 오늘 아주 날 잡았다.
 뚜두둑.
 “그렇지 않아도 네놈의 얼굴이 마음에 안 들었는데, 잘 된 거지.”
 잠시 검을 내려놓고 양손까지 껴 푼 손과인의 기세가 달라졌다.
 장무린은 걸어나오며 검을 쓸까, 비수를 쓸까 고민에 빠졌다.
 퍽.
 손과인은 곽해의 엉덩이를 걷어차 줬다.
 “빨리 안 일어나느냐?”
 “예에.”
 그제야 정신 차린 곽해가 ‘조심해.’ 라는 말만 남기며 엉금엉금 기어들어갔다.
 연무장엔 이제 검을 도로 든 손과인과 장무린 만이 서 있었다.
 이 순간만큼은 청년들은 한마음 한뜻으로 장무린을 응원했다. 큰 기대는 안 해도 자신들을 개 패듯이 때린 것에 대한 반발심이었다.
 한 방이라도 먹이길 바랐다.
 앞으로 걸어나온 장무린은 비수를 손에 쥐고 있었다.
 “뭐야? 그거 가지고 과녁 맞히기라도 하게? 왜 사과라도 들고 있……!”
 이죽거리던 손과인은 그야말로 대경실색했다.
 피잉!
 비수가 벼락처럼 날아온 것이다.
 
 깡!
 “크헉!”
 검을 들어 가까스로 쳐내긴 했지만, 꼴사나운 비명을 내지르고 말았다. 검날이 부르르 떨렸다. 화가 나서가 아니었다. 비수에 담긴 여력을 채 해소시키지 못했다.
 장무린은 역시라는 생각을 하며 비수 두 개를 꺼냈다.
 양손으로 그러쥔 비수 두 개에 손과인이 바짝 긴장하였다. 시험이고 나발이고 비수에 얼굴이 꿰뚫릴 뻔한 터라, 검극을 들어 장무린을 겨눈 것이다.
 숫제 생사결을 앞둔 사람이었다.
 장무린은 의아해했다.
 “안 오세요?”
 “엉?”
 저도 모르게 되물은 손과인은 그제야 자신이 너무 긴장했음을 깨달았다. 한바탕 너털웃음을 터트리더니 눈알을 부라렸다.
 “감히 나보고 들어오라는 것이냐?”
 “알겠습니다. 그럼 제가…….”
 “기다려! 성격이 급하군. 네놈이 공격했으니 다음은 내 차례다.”
 손과인이 손을 들어 막고는 검병을 쌍수로 잡았다. 피어오른 긴장감에 등골에 식은땀마저 흘렀다.
 청년들의 눈빛이 가늘어졌지만, 지금 그게 눈에 들어올 리 만무하다.
 장무린이 방금 보인 한 수는 그 정도로 대단했다. 그리고 지금 진지해 보이는 얼굴로 든 두 개의 비수는 왠지 모르게 더 대단해 보였다.
 꿀꺽.
 침을 삼킨 손과인이 빠르게 몸을 날렸다.
 순간 장무린의 손에서 비수 하나가 쏜살같이 날아갔다.
 피잉!
 이번엔 더욱 빨랐다.
 “으헉!”
 경악한 손과인은 바닥에 철퍼덕 엎어졌다. 그리고는 두 번째 비수를 생각해 땅바닥을 심하게 굴렀다.
 나려타곤!
 강호인들이 가장 치욕스럽게 여긴다는 회피기술을 손과인은 체면도 잊고 펼쳐댔다.
 그 정도로 손과인은 생사의 간극에서 허우적대는 중이었다.
 “…….”
 장무린은 비수를 쏘아 보내는 대신 갈무리했다. 두 번째 날린 비수로 깨달았다.
 비도술에 진심을 담으면 방심한 손과인을 죽일 수도 있다는 걸.
 사실 첫수에 어느 정도 예상했지만, 두 번째 날린 비수로 확신했다.
 비도술로 방심한 이류 무인 정도는 어느 정도 상대할 수 있음을.
 그럼 검공은 어떨까.
 스르릉.
 호기심이 든 장무린이 검을 뽑아들었다.
 질 좋은 철검이 햇빛에 반짝였다.
 바닥을 굴러대다가 겸연쩍은 얼굴로 일어난 손과인.
 “으하하.”
 호방하게 웃어젖혔지만, 얼굴까지 뒤집어쓴 흙먼지 때문에 영 꼴사나웠다.
 장무린은 그가 자세 잡기를 기다렸다. 검공만큼은 부족한 터라 약간은 긴장했다. 그래서 정신집중을 최고조로 끌어올렸다.
 그 매서운 눈빛에 손과인은 더욱 긴장했다. 비도술이 이 정도라면 다른 건 어떨까 싶은 것이다. 만약 놈이 두 번째 비수를 날렸다면 어찌 됐을지 가늠이 안 됐다.
 보통 놈이 아니다.
 손과인은 땀을 삐질삐질 흘렸다.
 청년들은 그 모습에 서로 돌아봤다.
 겁먹었네.
 겁먹었어.
 그런 눈빛을 교환한 그들의 모습이 눈에 들어올 리 없는 손과인, 속으로 욕을 있는 대로 퍼부었다.
 서기관, 이 망할 노친네는 어디서 이런 육시랄 놈을 보내서 얼굴 팔리게 하는지.
 쟁자수 시험에 이런 놈을 보낸 서기관 욕을 입이 찢어지게 하였다.
 “이번엔 제가 먼저 가겠습니다.”
 기다리다 지친 장무린이 그리 말하며 가볍게 발을 굴렀다.
 낭아풍운보가 아닌 뇌옥에서 익힌 경공술이었지만, 신형은 무리 없이 쏘아졌다.
 물론 긴장한 손과인에겐 그마저도 대단해보였다.
 “헙!”
 갑자기 앞에 나타난 장무린에 화들짝 놀랐다.
 쉭!
 장무린은 가볍게 태산압정(泰山押釘)의 초식으로 내려쳤다.
 단순한 경로에 의외라는 눈빛을 보낸 손과인이 반사적으로 검을 머리 위로 들었다.
 이 정도면 해볼 만하다.
 란 생각이 끝나기 무섭게.
 까앙!
 귀청이 찢어지는 듯한 소리와 함께 손과인은 뒤로 주르륵 밀렸다.
 자그마치 이십 년 내공.
 검공만큼은 자신이 없었던 장무린도 긴장한 나머지, 온 내공을 담아 내리친 것이다.
 “콜록!”
 기혈이 들끓는 걸 억지로 참았지만, 기침이 나오는 건 막지 못했던 손과인이었다.
 안색은 백지장처럼 하얗게 탈색됐다.
 쨍그랑.
 잘린 검의 절반이 떨어져 내렸고, 검병을 쥔 손아귀는 파르르 떨렸다. 호구가 찢어졌는지 아릿한 아픔이 전해져왔다.
 이놈 완전 괴물이잖아!
 손과인은 제 검을 반 토막 낸 장무린을 떨리는 눈으로 바라봤다.
 다른 청년들도 경외의 눈빛으로 장무린을 바라봤다. 일검에 손과인을 패퇴시킨 것도 모자라, 검까지 잘라냈으니 당연한 반응이었다.
 
 장무린은 자신도 모르게 내공을 모두 담아 내려친 것에 자책했다.
 “죄송합니다. 제가 너무…….”
 장무린은 말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누군가 연무장 쪽으로 헐레벌떡 뛰어와서다.
 나이 든 서기관이었다.
 “고, 공자님!”
 얼굴이 핼쑥해진 서기관의 손엔 호패가 들려있었다.
 갑작스러운 난입에 손과인이 눈알을 부라렸다. 내심은 다행이란 생각을 하면서.
 “아니, 이게 대체 어찌 된 것이오!”
 시험 중에 난입한 걸 따지는 게 아니었다. 어디서 이런 괴물을 쟁자수 시험에, 그것도 자신에게 보냈느냐고 따지려던 참이다.
 “허억, 헉. 미안하네, 손 표사. 그보다 공자님.”
 서기관이 장무린을 바라보자, 그제야 공자님이라는 게 자신을 지칭함을 알아차렸다.
 “예?”
 “어째서 제게 창천황가의 빈객이라고 말씀해주지 않으셨습니까?”
 “뭐요?”
 다른 청년들은 몰라도 표사인 손과인은 알았는지, 아연실색한 얼굴로 장무린을 바라봤다.
 장무린은 그제야 서기관이 자신이 놓고 간 호패의 뒷면을 살폈음을 알았다.
 서기관이 송구한 얼굴로 공수를 들었다.
 “진즉 말씀해주셨으면 이런 무례를 범하지 않았을 텐데요. 쟁자수 시험을 보게 한 소인의 무례를 용서해주십시오.”
 뭐 얼마나 대단한 가문이길래 저럴까 싶었던 청년들, 자신들에게 쌀쌀맞았던 서기관의 극진한 반응을 보고, 부러워했다.
 “제길, 귀한 집안의 자제였군.”
 똥싸개가 질시 어린 눈으로 장무린을 흘겨봤다.
 “역시 뭔가 다르다고 여겼는데 대단한 가문의 공자님이셨구나.”
 곽해의 순수한 감탄에 청년들이 고개들을 주억거렸다.
 손과인은 매서운 눈빛으로 서기관을 노려봤다.
 “진즉 잘 처신했으면 본 표사가 쪽을 당해도 이런 개쪽을…….”
 거칠게 말이 튀어나올 뻔한 손과인은 가까스로 입을 막았다. 창천황가의 빈객 앞이란 걸 상기한 것이다.
 장무린은 그 반응들에 얼떨떨했다. 창천황가의 이름값이 이렇게 대단한가 싶었다.
 장무린과 청년들에게 창천황가가 생소했지만, 청천표국은 아니었다.
 창천황가는 대외적으로 활동하기보다 줄곧 뒤에서 활동하는 큰손이었는데, 마침 청천표국의 가장 큰 투자금을 대는 곳이 바로 창천황가였다.
 그랬기에 서기관은 눈물까지 글썽였다. 장무린이 말 한마디만 내뱉으면 자신이 잘리게 될 거란 걸 누구보다 잘 알아서다.
 국주와 표두들이 창천황가에 얼마나 큰 은혜를 입었는지 잘 알았다.
 국주가 자리를 비웠기에 망정이지 만약 있었다면.
 털썩.
 “소인을 용서해주십시오.”
 줄곧 뻣뻣했던 서기관이 무릎까지 꿇었다.
 장무린은 나이 든 서기관의 행동에 새삼 창천황가의 위명이 가슴에 와 닿았다.
 “쯧.”
 손과인은 서기관의 그 모습에 혀를 찼다. 볼멘소리를 내기엔 서기관도 같은 밥 먹던 식구였다. 그래서 이번 일은 그냥 넘어가기 어렵단 생각이 절로 들었다.
 국주의 불같은 성정이라면.
 서기관은 자리를 보전하기 어려웠다.
 상처받았던 손과인의 자존심은 창천황가의 숨은 위명 앞에 말끔하게 치유됐다.
 이제 결정은 장무린이 내리면 되었다.
 모두가 장무린을 긴장한 눈빛으로 바라봤다.
 서기관의 실수로 신분에 맞지 않는 쟁자수 시험을 보게 됐으니.
 다들 불같이 화를 낼 거라 여겼다.
 
 “일어나세요.”
 장무린은 서기관을 일으켜 세웠다. 그리고는 다리에 뭍은 흙먼지까지 털어줬다.
 서기관의 눈빛에 설마 하는 감정이 실렸다.
 장무린은 그 눈빛을 마주하며 말했다.
 “고작 호패 하나일 뿐이에요. 노인장께서 무릎까지 꿇을 일도 아니고요.”
 “하지만 소인이 보인 태도와 호패를 늦게 확인한데다, 호패 확인도 안 하고 쟁자수 시험을 보게 해드려서.”
 “쟁자수 시험을 보게 된 건 전적으로 제 의견이었고, 호패야 늦게 확인할 수도 있는 거죠. 그리고 노인장께서 보이신 태도는 제가 생각하기에 이렇게까지 무릎을 꿇을 정도는 아닌 것 같군요.”
 사람을 편안하게 해주는 맑은 목소리였다.
 “공자님.”
 서기관은 감명받은 얼굴을 해 보였다.
 장무린은 불편한 느낌에 주위를 둘러봤다.
 표사 손과인은 부드러운 표정을 하고 있었고, 나머지 청년들도 그리 다르지 않았다.
 곽해는 열화와 같은 시선으로 장무린을 바라보는 중이었다. 그 눈빛이 동경이란 감정임을 모르지 않았던 장무린은 헛기침을 했다.
 “표사님, 전 쟁자수로 합격입니까?”
 그 말에 손과인은 물론, 서기관마저 놀랐다.
 서기관은 그게 무슨 천부당만부당한 말이냐는 표정으로 외쳤다.
 “쟁자수라니요. 어디까지 이 늙은이를 부끄럽게 할 참이십니까? 공자님.”
 “예?”
 “요인 호위지요. 아니 그런가?”
 장무린은 그 말에 바로 고개 저었다.
 “성도까지만 가면 됩니다. 쟁자수면 충분하니 괜한 일에 심려하지 마십시오.”
 “안됩니다. 그랬다간 이 늙은이의 목이 달아납니다. 국주님이 아시면, 어휴.”
 옥신각신하는 둘에 손과인은 피식 웃었다. 보면 볼수록 마음에 드는 말만 골라 하는 장무린 때문이었다. 실력도 나쁘지 않았고, 충분히 제압할 수 있음에도 두 번째 비수를 날리지 않고 기다려주는 심성도 마음에 들었다.
 거기다 꽤나 거들먹거려도 되는 신분임에도 그러지 않는 점이 단연 최고였다.
 창천황가의 빈객.
 이 이름이 가진 가치를 모르는 게 분명하나, 적어도 사람이라면 주위 눈칫밥으로 알아차리고도 남는다.
 나이 든 서기관의 극진한 태도만 해도 알만하잖은가.
 “공자님, 제발 소인 좀 살려주십시오.”
 “하지만 전 그냥 동행할 정도만 되면 됩니다.”
 그런데도 장무린은 그런 내색을 일절 안 했다. 오히려 이런 대우가 불편하다는 듯이 손사래를 쳤다.
 손과인의 입가에 흐뭇한 미소가 절로 걸린다.
 “그러지 말고 공자, 명예 표사는 어떻소?”
 “명예 표사?”
 장무린의 표정이 해괴해졌다.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었다.
 서기관은 아니었는지, 옳다구나! 하고 무릎을 쳤다.
 “그런 방법이 있었군. 과연 손표사요!”
 “보아하니 공자가 지닌 일신의 무공도 제법이니 요인호위까진 할 필요는 없을 듯하고. 차라리 명예 표사로 하는 게 여러모로 표행에 도움이 될 듯싶소.”
 “그래도 이왕이면 요인으로 했으면 하는데.”
 “쟁자수가 안된다면 그걸 하겠습니다.”
 미련을 못 버리는 서기관의 모습에 장무린은 냉큼 고개를 끄덕였다. 요인호위는 결코 원하는 바가 아니었다. 명예 표사도 어쩔 수 없이 받아들인 거다.
 서기관은 고심에 빠졌다.
 “명예 표사라.”
 표사가 은퇴하기 전에 마지막 표행에 나서는 직함을 말하는 건데, 자질구레한 일은 하지 않고, 위험한 경우에만 어쩔 수 없이 나서는 직함이었다.
 그 정도면 창천황가에 낯이 서긴 하나, 표행에서 위험이라도 만나서 행여 무슨 일이라도 생길까 봐 저어됐다.
 그 내심을 간파한 손과인이 서기관에게 어깨동무해왔다.
 “이보오. 내 솔직히 부끄러워서 말 못하고 있었지만…….”
 그리곤 자신이 겪었던 일을 가감 없이 이야기해줬다.
 장무린을 보는 서기관의 눈동자가 점점 커졌다.
 날린 비수를 회수하고 있는 장무린이 그 정도로 실력이 뛰어난가 싶었다.
 “걱정하지 마시오. 공자는 자신의 한 몸은 건사할 실력자니까.”
 이렇게까지 말했는데 아니라고 하기엔, 손과인을 너무 무시하는 처사였다.
 서기관은 한숨을 길게 내쉬고는 알았다고 했다.
 장무린은 참 표행 한 번 끼기 어렵다는 생각을 하며 비수를 품 안에 갈무리했다.
 손과인은 청년들을 향해 합격자와 불합격자를 발표해줬다.
 그리고 장무린은 서기관의 간곡한 부탁에 표국에서 하루를 머물러야 했다.
 
 먼동이 터왔다.
 전날에 꾸려진 표행단이 출발 준비를 서둘렀다.
 표행단의 규모는 새로 뽑은 이들을 포함한 쟁자수 마흔과 삼류 표사 서른에. 손과인이 포함된 이류 표사 스물, 최고참인 표두 열 명까지 더해졌다. 마지막으로 총표두 일류고수 한 명이 포함됐다.
 원행이었기에 총표두는 일류고수인 파산권(破山拳)으로 명호를 날린 고효기로 정해졌다.
 백 명이 떠나는 터라 총표두 고효기는 심기가 매우 날카로워져 있었다. 표행의 총책임자니 당연했다.
 청천이란 글자가 쓰인 표기들이 반쯤 들렸다.
 준비를 마친 표행단 인원들의 긴장된 얼굴도 눈에 들어왔다.
 이 정도 규모면, 먼 거점 때문에 꼭 가야 할 밤길도 안전했다. 어차피 휴식은 중간 거점에서 취할 거니깐 문제 될 것도 없었기에, 고효기가 외쳤다.
 “출발!”
 악단이 요란한 악기 소리를 울리자, 기수들이 표기를 위풍당당하게 들었다.
 장무린도 그들의 틈바구니에 섞여 있었다. 죽립을 쓰려고 했지만, 표사가 출발할 때 죽립을 쓰면 살아 돌아오지 못한다는 뜻과 같다며 손과인이 말려왔다.
 고집을 부릴까도 했지만, 표사들의 시선이 그리 곱지 않았다.
 표행에 불길한 일 하나라도 줄이려는 그들이었다.
 장무린은 어쩔 수 없이 죽립을 포기했다.
 호곡성의 새벽녘을 깨우는 소리에 사람들이 거리에 나와 표행단의 무사귀환을 빌어줬다.
 사람들의 격려를 받자 어깨에 힘이 잔뜩 들어간 표사들이 화답해줬다.
 쟁자수들은 짐 마차를 끌며 거리로 나온 가족 친지들에게 손을 흔들어줬다.
 “부디 조심하세요!”
 “건강한 모습으로 돌아오셔야 해요.”
 눈물바람까진 아니지만, 무사안녕을 빌어주는 애절한 목소리들이었다.
 “곽해, 이것아 꼭 무사해야 한다!”
 중년부인의 눈물 젖은 외침에 곽해는 고개만 푹 수그렸다. 어젯밤에 한바탕 난리가 났지만, 자식 이기는 부모 없다고 기어이 허락해준 어머니였다. 볼 낯이 없었다.
 중년부인이 공수를 취했다.
 “고 대협, 제 아들 좀 잘 부탁합니다.”
 말을 탄 고효기는 부리부리한 눈빛으로 전면만 주시했다. 물론 미미하게 고개를 끄덕이는 건 잊지 않았다.
 그 듬직한 모습에 중년부인을 비롯한 사람들이 환호하였다.
 고효기는 태산같이 굳건한 자세로 말을 몰았다.
 장무린은 처음 겪는 일에 얼떨떨한 표정을 감추지 않았다. 그래도 행렬에 방해되지 않도록 조용히 걸음만 옮겼다.
 그러다 찌르는 듯한 시선에 고개를 돌렸다.
 단이령.
 바로 그녀다.
 두 눈이 화등잔만 해진 그녀에 장무린이 서둘러 시선을 정면으로 향했다.
 바보같이.
 다행히 그녀 외엔 그때 봤던 동료는 없는 듯하였다.
 장무린이 오히려 당당하게 전면만 바라봤다.
 옆에 있던 곽해가 의아해했다.
 “손이라도 흔들어주지 그러십니까? 저 아리따운 소저가 저리 애절하게 보는데요.”
 쟁자수가 된 곽해의 태도가 매우 공손했다. 어색하다고 말을 해도 곽해는 막무가내였다. 존경하는 눈빛도 여간 불편한 게 아니었다.
 “헹!”
 똥싸개의 질시 어린 눈빛이 꽂혔다. 말도 못하게 부러운 것이다.
 장무린은 단호하게 이야기했다.
 “처음 보는 여인이야.”
 막 지나치는 와중이라 그 말을 들은 단이령의 눈망울이 흔들렸다.
 곽해도 그걸 봤지만, 뭔가 사연이 있겠지 싶어 더는 말을 꺼내지 않았다.
 단연 군계일학인 장무린을 보고 얼굴을 붉힌 처녀들은 그 여인만이 아니었으니까.
 오히려 당당하게 군 게 득이 되었는지, 단이령이 아는 척도 하지 못했다.
 장무린이 속으로 한숨을 돌렸다. 뒤를 돌아보는 누는 저지르지 않았다. 대신 청명한 새벽하늘을 올려다봤다.
 “날은 좋네.”
 “그렇네요.”
 곽해의 얼굴에도 푸근한 미소가 걸렸다.
 장무린도 따라 웃었다.
 저 청명한 하늘 위 구름처럼.
 바람결 따라.
 잠시 스쳐 지나가는 인연일 뿐이니까.
 허허로운 하늘을 보는 장무린의 눈빛엔 모종의 결심이 점점 서려갔다.
 강해지면.
 누구보다 강해지면.
 다시 이곳으로 돌아오리라.
 
 ***
 
 금단의 거리 말미에 위치한 허름한 점포.
 황팔모는 삼성급 내단 세 개를 물끄러미 보고 있었다.
 탁.
 뒤에서 느껴지는 인기척에 고개를 돌렸다.
 자신이 도착했음을 알리는 인기척의 주인이 그곳에 서 있었다. 마치 처음부터 그곳에 있었다는 듯이 미동도 하지 않았다.
 홍의경장을 입은 면사의 여인.
 “오라버니, 정말 오랜만에 연통하네요.”
 옥구슬이 굴러가는 듯한 목소리만 들어도 그녀가 대단한 미인임을 알 수가 있었다. 경장을 입었음에도 드러나는 육감적인 몸매가 그걸 증명했다.
 사내라면 침을 질질 흘리고도 남았다.
 황팔모는 당연히 그런 한심한 사내가 아니었다.
 “그럴 만한 일이니까.”
 면사를 쓴 여인의 눈에 이채가 흘렀다.
 “혹?”
 “그래, 드디어 연자(緣者)가 나타났다.”
 “아.”
 짤막하게 감탄한 여인의 면사가 너풀거렸다.
 “확실해요?”
 “풍기는 맑은 정기에 술에 떡이 됐을 때 재확인까지 했다.”
 그럼 확실했다.
 “연자는 지금 어디 있죠?”
 “떠났지.”
 홍의경장의 여인은 못 본 게 안타까웠는지 발까지 동동 굴렀다. 진즉 부르지 않고, 붙잡아두지도 않았냐는 말에 황팔모는 냉소를 흘렸다.
 “그렇지 않아도 호패를 줬으니 걱정 붙들어 매거라.”
 “호패요?”
 “그래, 창천황가가 음각된 호패니 어디 어느 곳을 가든지 위치가 보고될 거다.”
 “여전히 음흉해요.”
 왜 미리 말해주지 않았냐는 토라진 눈빛에 황팔모는 고개를 돌렸다.
 그녀는 자신에게 다가와 대체 누구냐며 따졌지만, 황팔모는 말해주지 않았다.
 금단회의 십이회주 중 가장 성격 급하기로 소문난 그녀라면, 당장 배를 갈라서라도 확인하고 싶어했을 테니까.
 황금알을 낳는 거위보다 더욱 귀중한 패를 그렇게 버릴 순 없었다.
 “그래, 그렇게 되어선 안 되지.”
 나직하게 읊조린 황팔모는 창밖 너머.
 장무린이 있을 곳을 바라봤다.
 강해져야 할 것이다, 애송이.
 그렇지 않으면 이 월야에서 살아남는 게 불가능할 테니까.
 
 돈에 눈먼 녹림도는 더 이상은 없었기에 표행은 순조로웠다.
 어지간한 규모의 산채는 야행수들의 습격에 명맥을 유지하기도 벅찼기에 뿔뿔이 흩어졌고. 그나마 녹림산성처럼 팔천이 넘는 병력이 있는 곳이나, 녹림도의 명맥을 유지하는 게 가능했다.
 녹림도 최후의 보루라고 할 수 있는 그곳도 칠성급 야행수 무영대호(無影大虎)의 등장에 위태위태하단 소문이 들려왔다.
 언제 어느 때 무너져도 이상할 것 없는 녹림산성은 더는 표행단을 습격할 여력이 없었다.
 밤마다 소리 없이 찾아오는 무영대호에 분위기가 뒤숭숭했으니까.
 칠성급을 막기엔 산성의 낮은 성벽은 장벽으로서 역할을 못한다는 뜻이었다.
 지금도 이탈자는 계속해서 늘어나는 중이라고 전해졌다.
 하여 간간이 녹림도로 보이는 놈들과 우연히 만났지만.
 표행단의 규모에 감히 습격할 생각은 하지 못했다.
 차라리 그럴 시간에 인근 성에 숨어들어 목숨줄을 부지하는 게 더 나았다.
 해가 떨어지면 지옥이니까.
 “밤이 머지않았다. 거점까지 도착해야 하니 좀 더 힘을 내거라.”
 
 표행단도 고효기의 재촉 아래 속도를 올리기 시작했다.
 하루 이틀은 일성급 야행수만 보게 되겠지만, 달이 차오르기 시작하면 고위급 야행수가 활동을 시작할 것이다.
 편히 갈 수 있을 때 빨리 가야 한다.
 힘이 장사인 곽해도 입에 단내가 날 정도로 힘들어했다.
 장무린이 그 짐을 나눠 들려고 했으나, 곽해가 한사코 거절하였다.
 “저 호되게 혼나는 꼴 보고 싶으십니까? 제발, 그런 말은 하지 말아주십시오.”
 “…….”
 장무린은 마차에 곽해의 짐을 실으라고 하고 싶었지만, 표사들이 눈에 불을 켜고 있어서 그럴 수가 없었다.
 표국 만의 법도가 있는 것이다.
 장무린이 따라야 했다.
 그 반면에 장무린은 표사 손과인이 배려하여 마차에 올라탄 상태였다. 표두들도 창천황가의 빈객이란 말에 고개를 끄덕여 허락했다.
 고효기도 별말은 없었다.
 그들은 서기관처럼 저자세는 아니었지만, 요인 호위를 하는 듯한 태도를 보여줬다.
 불편했다.
 그러나 덕분에 시간이 남아 돌았다.
 장무린은 마차에 탄 상태로 가부좌를 틀었다. 심상수련 중이었다. 적면호리와의 일전을 복기하며 낭아풍운보와 비도술의 성취를 좀 더 끌어 올리려 함이다.
 그러다 자신의 육체적인 능력에 관심이 쏠렸다.
 특별한 단련을 한 것도 아닌데, 외공을 익히고 근육단련을 한 청년들보다 힘이 좋았다.
 내공을 쓰지 않은 덕분에 막연한 짐작이 확신으로 변했다.
 어쩐지 비도술의 위력이 배가 됐더라니.
 장무린은 제 육신의 남다름이 회복력에 국한되지 않음을 알게 됐다. 삼재심법의 축기 속도만 봐도 혈맥이 깨끗해졌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이대로 공을 더 들이면 이류의 벽을 허물 수 있을 성싶었다.
 통상적으로 삼류를 약 십 년 내공으로 봤고, 이류는 이십 년 내공이었다. 일류는 사십 년 내공, 절정은 육십 년 내공이라 하였다. 물론 절정은 내공만 우격다짐으로 쌓는다고 오를 수 있는 경지가 아니었다.
 수많은 일류고수가 그 절정을 오르지 못하는 경우가 허다한 게 증거였다.
 그 위로 초절정이란 경지가 존재했고, 그 경지에 들면 능히 강호에서 손꼽히는 고수라 부를 만하였다. 대문파의 문주나 무림맹주와 극마교주, 금단회의 십이회주가 이 경지에 속한다고 볼 수 있었다.
 어찌 됐든.
 세부적으로 들어가면 그 경지의 차이는 더 세세하게 나눠줘야 하지만, 대략적인 기준이 그러했다.
 그리고 경지가 올랐다는 증명은 확장된 단전으로 알 수 있었다.
 내공을 담는 그릇이 넓어진다는 말이었다.
 지금 장무린의 단전은 십 년 내공을 담는 정도에 불과했다. 그런데 자그마치 이십 년 내공이 담겨 있었다.
 언제 어느 때고 단전이 깨져도 이상할 것이 없는 상태다.
 물론 순도 높은 내공은 서로 충돌 없이 잘 어우러지다 못해 압축되어 있으나, 요즘 들어 축기를 할 때마다 하복부에서 찌릿한 아픔이 느껴졌다.
 장무린은 고민에 빠졌다.
 삼류에서 이류로 가는 방법이 무엇이 있을까?
 적어도 우격다짐으로 늘려선 안 된다는 걸 지난 일로 잘 알고 있었다.
 “하마터면 죽을 뻔했지.”
 심상수련을 마친 장무린이 씁쓸히 읊조렸다.
 삼성급 내단을 세 개나 흡수했을 때.
 죽은 피를 토한 건 내단의 독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그것만이 다가 아니었다.
 단전의 위험을 육체가 경고를 보낸 것이다.
 이대로라면 큰일 난다고.
 장무린은 고민에 빠졌다. 무공의 경지를 올리려면 당연히 상승의 무공이 필요했다.
 태산압정과 횡소천군(橫掃千軍)의 초식만 있는 검공은 볼 것도 없었고, 삼재심법과 비도술은 엄밀히 말해 하급 수준이다. 그나마 낭아풍운보는 괜찮았지만, 중급의 무공에 불과했었다.
 상승의 무리가 담겨있다고 하기엔 무리가 있는 무공들.
 자신이 익히고 있는 하급 무공들을 오래도록 수련한다면, 이류의 경지를 오르는 건 가능하겠다.
 하지만 시간 대비 효율성은 최악이었다.
 단순히 빠른 축기만으론 문제가 해결되지 않았다.
 어쩌면 삼재심법이 진흙 속의 진주라 숨겨진 진면목이 있을 수도 있지만, 혼자 가는 길이었다.
 장무린의 두뇌가 뛰어나다고 해도 엄연히 한계는 존재했다.
 경지를 끌어올려 줄 상급 무공은 물론이거니와, 스승의 존재가 없다는 게 어떤 건지.
 새삼 절감하는 요즘이다.
 “후우.”
 단순히 심상수련만 몰두해서 해결할 문제도 아니었고.
 마차 밖을 바라보는 장무린의 시선에 오십 대 무인, 고효기가 잡혔다.
 일류고수.
 일류 무인에 고수란 글자를 붙였다는 말은 그가 지닌 실력이 거의 절정이 임박했다고 봐야 했다. 물론 절정이란 벽을 뚫고 올랐을 때와 그렇지 못할 때의 차이는 천양지차다.
 그래도 일류고수란 건 정말이지 대단한 거였다.
 고효기는 같은 일류이나 낭아방의 부대주 구종학과는 비교를 불허하였다.
 저런 뛰어난 무인이 스승이라면 어떨까.
 앞길이 탄탄하게 다져지다 못해 쭉 벋은 대로처럼 뻥 뚫려있는 기분이겠지?
 거점으로 향하는 이정표만 따라가면 되는 것처럼 얼마나 편할까 싶었지만, 고소가 절로 지어진다.
 “장무린, 어찌 편한 길만 가려는 것이냐. 한심하구나, 정말 한심해.”
 요근래 낭아풍운보의 성취도 칠성에서 멈췄다. 수없이 복기하고 심상수련을 해도 더는 늘지 않아서 그런지, 초조함이 절로 찾아온 것이다.
 제갈윤이 펼쳤던 원형검진의 운용방법을 머릿속에 복기하면서 그 초조함을 달래보지만, 답답함은 여전히 해갈되지 않았다.
 누군가에게 이 답답함을 토로해보고 싶었으나, 말도 안 됐다.
 대체 누군가에게 말한단 말인가.
 만약 이대로 고민에 고민을 거듭한다면, 이류에 오르기도 전에 주화입마에 빠질 건 불을 보듯 뻔했다.
 무인은 심마(心魔)를 가장 경계해야 하는 법이었으니까.
 “후우.”
 장무린은 한숨을 내쉬며 다시 심상수련을 하려고 했다.
 마음이 싱숭생숭하니 집중이 잘 안 되는 게 문제라서 그렇지.
 무공이, 그리고 그 무공을 제대로 피땀 흘리며 수련할 시간과 장소가 필요했다.
 하지만 장무린에게 그런 장소가 있을 리 만무했다.
 그렇다면 강해지는 방법은 단 하나.
 생과 사를 넘나드는 실전 속에서 가다듬어야 한다.
 다져질 대로 다져진 날카로운 긴장감 속에서 무공을 쓰고, 그 무공으로 인해 살아남는다.
 생사결을 통해 배워가는 단 하나의 방법.
 월야행밖에 없었다.
 좋은 무공비급도 구해야지만, 당장 월야행을 떠나야 한다.
 그것만이 장무린이 이 월야에서 살아가는 방법이었다.
 생사의 갈림길엔 천 길 낭떠러지로 향하는 곳도 있겠지만, 앞으로 갈 길도 있는 법이니까.
 
 ***
 
 해가 떨어지기 바로 직전.
 겨우 첫 번째 거점에 당도한 표행단이었다.
 모두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원래대로라면 밤길을 재촉해서라도 음기가 미약한 시기에 더욱 가야 했으나, 인근에 산이 너무 많았다.
 산이 많다는 소린 야행수가 더 많다는 소리와 동의어였다.
 대로가 구불구불한 산길로 변하는 길목이었기에 낮이 아니면, 이동할 엄두가 안 났다.
 월야행이 아닌 표행이기에 더욱 그러했다.
 거점의 위병들이 표행단을 반가이 맞이해줬다.
 고효기는 위병들의 노고를 위로해주며 술과 음식을 건넸다.
 일종의 통행세라고 봐도 무방하였다.
 물론 위병들은 술과 음식을 지금 먹지 않았다. 밤에 먹는 건 그야말로 ‘나 잡아잡수.’ 하는 꼴이어서다.
 표행단에서도 실력 좋은 표사를 따로 빼내 거점의 성벽에 경계근무를 서게 했다.
 위병들로서는 대환영이었다. 표사들로 밤의 안전이 어느 정도 보장되는데 거절할 리 만무하였다.
 화르륵.
 거대한 화톳불들이 성벽 앞을 수놓았다.
 거점인 원형 성벽은 대낮처럼 환해졌다. 화톳불이 미처 밝히지 못한 부분은 병사들이 횃불을 들고 경계에 섰다.
 한 가지 재밌는 점은.
 병사들이 화톳불에 주먹만 한 공을 던져넣는 것이다.
 그럼 불길은 더욱 세지고, 화톳불에 장작을 더할 필요도 없이 오래간다고 한다.
 연단술사들이 제작한 지화단(地火丹)이라는 물건으로, 얼마 되지 않은 장작의 불길을 더욱 세게 그리고, 하룻밤 정도는 무리 없이 버티게 해준단다.
 장무린은 위병들이 던져 넣는 지화단을 보면서, 새삼 창천황가와 같은 연단술사들이 어째서 엄청난 성세를 누릴 수 있었는지 알만했다.
 내단 뿐만 아니라, 생필품이나 다름없는 저 지화단이라는 물건이 그들의 금력을 마르지 않게 해주는 걸지도 몰랐다.
 손과인이 다가왔다.
 “공자, 밤이 깊었으니 들어가서 쉬지요. 거점의 천인장이 배려해줘서 병영에 머물 수 있게 됐으니, 마음에 드는 방을 골라서 머물면 되오. 그리 넓진 않겠지만, 혼자 쓰시기에 불편하지 않을 거요.”
 원래라면 거절부터 하겠지만, 장무린은 다른 뜻이 있었기에 공수를 취했다.
 “손표사님의 배려에 감사드립니다.”
 “하하, 내가 뭐한 게 있다고 그러오? 오히려 편의를 더 봐주지 못해서 미안하오.”
 호의가 다분한 그 눈빛에 장무린은 입가에 미미한 미소를 띠었다.
 “편의는 분에 넘치게 받았습니다. 넘치면 아니 받는 것만 못하니 심려치 마십시오.”
 “하하, 정말 공자는 알다가도 모를 분이요. 대개 사람들은 대접받지 못해 안달인데, 그런 내색을 일절 안 하니 오히려 본인이 민망하외다.”
 손과인은 손사래를 치면서 가더니, 쟁자수를 시켜 장무린에게 식사를 가져다주라 명했다.
 기다렸다는 듯이 곽해가 식사거리를 들고 왔다.
 김이 모락모락 나는 국수와 큰 만두 두 개였다.
 구수한 냄새를 맡는 것만으로도 허기가 졌다. 표행단이라 그런지 보급도 괜찮은 편이었다.
 물론 창천황가에 머물 땐 산해진미를 먹었지만, 마음이 너무 불편해서 무슨 맛이었는지 기억조차 안 났다.
 “여기 있습니다.”
 “고마워.”
 장무린이 웃어주자 곽해가 뒷머리를 긁적였다.
 “맛있게 드십시오. 소인은 이만 가보겠습니다.”
 “같이 먹지 않고서?”
 장무린의 제안에 곽해는 웃는 낯으로 손사래를 쳤다.
 “이 기회에 쟁자수의 선임들과 친분이라도 더욱 쌓아야지요.”
 그 말에 더는 권하지 못하였다. 자신은 성도에 도착하면 끝나지만, 곽해는 앞으로도 계속 표행단 식구가 되어 떠나야 했다.
 곽해는 제안해준 것만으로도 황송하다는 듯이 고개를 꾸벅 숙이고는, 쟁자수들이 있는 곳으로 향했다.
 장무린은 깍듯한 곽해의 태도에 한숨만 내쉬었다. 이왕이면 시험을 볼 때처럼 편한 사이였으면 좋겠는데, 주위에 보는 눈도 많고, 곽해가 장무린을 무슨 귀한 집안의 자제로 보는 통에 그럴 수가 없게 됐다.
 특히 손과인 표사가 호의 그득한 태도로 대하는 게 가장 컸다.
 장무린은 고소를 짓고는 새삼 자신이 쥔 호패의 위력을 실감했다.
 걸친 의복과 호패에 음각된 글자들로 이리 대우가 달라지다니.
 이래서 사람들이 그렇게 권력에 목매나 보다.
 분명 편한 생활이지만, 몸에 맞지 않는 옷처럼 불편하다.
 “익숙해져야겠지. 적어도 표행단과 함께 할 때만큼은.”
 장무린은 품속에 호패를 넣고 식사를 해갔다.
 잠시 후.
 식사를 마친 장무린이 빈 그릇을 들고 가자, 곽해가 헐레벌떡 뛰어왔다.
 “무슨 급한 일이라도 있어?”
 “소인에게 주십시오.”
 곽해가 빈 그릇을 가져가려고 하자, 장무린이 고개를 저었다.
 “괜찮아, 그러지 않아도 돼. 어서 식사나 마저 해.”
 “어이쿠, 큰일 날 소리를 다 합니다. 어서 주십시오.”
 곽해가 빈 그릇을 빼앗아 들 듯이 가져갔다.
 장무린이 난처한 얼굴로 볼을 긁적였다.
 정말 적응이 안 된다.
 주위의 집중된 시선도 그렇고, 곽해의 극진한 대우도 그랬다.
 이러다 오해를 쌓는 건 아닌가 싶었지만, 대부분은 당연한 일처럼 받아들였다.
 단 한 명.
 똥싸개 이양후는 아니었다.
 “망할, 부러워죽겠네. 누구는 짐 드느라 온종일 고생하고 겨우 한술 뜨는데, 누구는 편하게 마차 타고 가고 심부름까지 해주다니.”
 질시 어린 눈으로 장무린을 쏘아봤지만, 선임 쟁자수의 손바닥에 뒤통수를 딱 소리 나게 얻어맞았다.
 “바지에 똥이나 싸대는 놈이 말이 많다. 밥이나 처먹어. 그거 먹고 또 똥 싸러 가야지.”
 “아니라고 몇 번을 말합니까요? 전 똥을 싸지 않았다고요. 그리고 제가 밥만 먹으면 똥만 싸대는 놈인 줄 아십니까?”
 이양후가 벌게진 얼굴로 항변해보지만, 이미 소문은 돌대로 다 돌았는지 쟁자수들이 히죽거렸다.
 “똥이 아니면 알이라도 깠더냐? 그럼 어서 밥 처먹고 알이라도 낳으러 갔다 오려무나. 배도 더부룩할 텐데.”
 “그러고 보니까, 아까부터 이상한 냄새 좀 나지 않아?”
 “뭔 냄새?”
 “이양후 냄새.”
 “아니라구요!”
 형용할 수 없는 유치한 대화에 이양후가 새된 목소리를 냈다.
 이양후의 선임인 쟁자수가 나섰다.
 “아, 더럽게 밥 먹는데. 그만 좀 하게들. 밥맛 떨어지게, 쯧!”
 “여, 역시 제 선임밖에 없습니다.”
 이양후가 감복한 얼굴로 편을 들어준 선임 쟁자수를 바라봤다.
 그가 손사래를 쳤다.
 “넌 저어쪽 가서 먹거라. 가서 알 까고 오면 더 좋고. 우리도 잠은 편하게 자야지? 안 그럼 성벽 밖에서 오늘 밤을 자야 할 것이다.”
 짐짓 눈까지 부라렸다.
 이양후의 시뻘게진 안색에 모두가 껄껄거리며 웃었다.
 끼리끼리 어울린다더니 그놈이 그놈이었다.
 고효기까지 피식 웃었다. 어째서 저리 유치하게 구는지 잘 알았다.
 다가오는 밤이, 앞으로의 표행이 두려운 거다.
 “크윽.”
 이양후는 시뻘게진 얼굴로 한참을 그러고 서 있더니 눈물마저 찔끔 흘렸다. 괴롭힘을 당하는 자신의 기구한 처지 때문이었지만, 그게 기폭제가 되어 이젠 표사들까지 나섰다.
 단연 압권은 손과인이었다. 무거운 돌을 들은 듯이 끙끙대며 엉거주춤 거리던 모습까지 흉내 내더니, ‘끄어억~’소리와 함께 만두 서너 개를 땅에 떨어트렸다.
 철퍼덕.
 “거, 시원하고만.”
 휘파람을 불며 터진 만두를 발로 슬쩍 치우는 모습에 위병들까지 껄껄댔다.
 “이건 아니야. 이건 내가 생각한 표행이 아니라고!”
 결국, 이양후가 꼴사납게 울음까지 터트려서야 놀림은 끝을 맺었다.
 식사를 모두 마친 뒤.
 경계조를 제외한 이들은 각자의 숙소로 들어갔다.
 장무린도 숙소로 향했다. 보란 듯이 하품을 늘어지게 했지만, 눈빛은 졸림과 거리가 멀었다. 오히려 형형하게 빛이 났다.
 드디어 때가 온 것이다.
 
 <『월야행』 2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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