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
숨이 턱밑까지 차오른다.
무거운 배낭이 온 몸을 짓누른다.
힘들어 죽을 것 같지만, 앞장선 헌터들은 오히려 걸음을 재촉했다.
“강이두! 빨리빨리 안 와?”
짜증 섞인 헌터 정재훈의 다그침.
오늘따라 저 뱀눈이 유난히 더 거슬린다.
‘진짜 좆같네.’
욕이 목구멍까지 올라왔지만 참았다.
헌터는 짐꾼의 직속상관과 같다.
나라에서 그렇게 정해버렸다.
그렇다고 21살 헌터가 26살 짐꾼에게 하대하는 게 흔한 일은 아니었다.
대부분은 기본적으로 예의를 지키니까.
‘그나마 나는 다행이지 형들은···.’
함께하는 짐꾼 형들은 30대 중반.
묵묵히 참고 걷지만 표정은 밝지 않았다.
그들도 아는 거다.
개겨봐야 쳐맞기만 할 뿐이란 것을.
주먹으로 쳐맞고 법으로도 쳐맞고.
“죄송합니다.”
결국 이렇게 될 수밖에 없다.
이를 악물고 걸음을 내딛었다.
온 힘을 다해 걷다 보니 어느덧 게이트 출구가 보였다.
“후우···.”
거친 숨을 내쉬며 걸어 나온 게이트 밖.
온종일 무거운 배낭을 메고 다녔다.
땀이 비 오듯 흐르지만 마음만은 후련했다.
오늘도 무사히 하루를 마쳤다는 것에 감사할 뿐.
“짐은 이쪽으로 주세요.”
미리 대기하고 있던 관리국 직원 앞에 배낭이 하나씩 쌓였다.
짐꾼이 셋이니 배낭도 세 개다.
“짐꾼 분들은 잠시 소지품 확인이 있겠습니다.”
혹시 빼돌린 물건은 없는지.
깐깐하게 확인한 직원이 ok 사인을 냈다.
띠링.
[Web발신]
헌터은행 4/6 17:05
입금 270,000원
잔액 15,662,173원
입금 완료문자를 확인했다.
짐꾼 일당은 30만원.
헌터관리국이 수수료 10%를 먹고 나머지 금액이 입금되었다.
목숨 걸고 하는 만큼 보수는 센 편이다.
“고생하셨습니다. 내일도 꼭 시간 맞춰서 나와 주세요.”
관리국 직원의 작별 인사.
짐꾼의 역할은 여기까지다.
이제부터는 소탕에 참가했던 3인의 헌터가 전리품을 나눌 차례.
최소 수천에서 많게는 억 단위도 나오지만, 짐꾼에게는 해당사항이 없다.
진짜 돈 되는 건 헌터들의 몫인 거다.
.
.
.
샤워를 하고 나와 가상현실 게임기에 몸을 뉘였다.
게임을 하는 동안 신체는 수면과 같은 효과를 본다.
항상 지쳐 있는 짐꾼에게는 꽤 괜찮은 취미활동이었다.
스르륵 눈이 감기며 들려오는 익숙한 음성.
「 루나틱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
이제 판타지 배경이 나올 차례.
하지만 오늘은 공지가 유독 더 길었다.
「 4월 10일 부로 루나틱의 서비스가 종료됩니다. 남은 기간 동안 훈련용 목인형의 경험치가 100억 배로 조정되오니, 그동안 즐기지 못했던 만렙 컨텐츠를 마음껏 즐기시길 바랍니다. 」
갑자기?
선심 쓰듯 나오는 공지에 할 말을 잃었다.
‘내 유일한 취미마저···.’
아쉬움을 안고 가상 세계에 소환되었다.
푸른 들판이 넓게 펼쳐진 이곳은 시작마을 루나빌.
처음에는 다른 유저들과 같이 레벨을 올리고 더 높은 사냥터를 찾아다니며 즐겼지만, 짐꾼 일을 시작한 뒤로는 시작마을을 벗어나지 않았다.
한적한 마을 속 공터.
일정한 간격으로 세워진 수십 개의 목인형.
저기에 스킬을 쓰면 소량의 경험치를 준다.
물론 너무 소량이라 극초반을 제외하면 이용자가 없었다.
‘그런데 왜?’
분명 100억배 이벤트가 공지되었다.
그러면 유저들로 바글바글해야 정상 아닌가?
하지만 이곳은 평소와 마찬가지로 쥐새끼 한 마리도 얼씬거리지 않았다.
‘희한하네. 나한테만 공지한 것도 아닐 텐데···.’
의아함을 안고 목인형 앞에 섰다.
평소처럼 훈련용 목검을 들었다.
원래는 있는 힘껏 막 두들겨 패곤 했다.
짐꾼 일을 하며 받은 스트레스를 그런 식으로 풀었다.
아직 시작마을에 남아 있는 이유랄까.
목인형에게 마음껏 분풀이를 하고 나면 마음속 응어리가 제법 풀린다.
하지만 오늘은 경험치 100억 배를 준다고 하니 조금 다르게 해 볼 작정이다.
「 스킬 장전 : 파워 스트라이크 」
팔에 핏줄이 불끈불끈 돋아났다.
빛을 뿜어낸 검이 목인형을 강타하는 순간.
“어?”
검이 목인형에 닿지 않았다.
닿기 직전에 미지의 반탄력이 검을 밀어낸 것.
더 놀라운 일은 그 다음이었다.
투둑. 투두둑.
바닥에 박혀 있던 인형 말뚝이 뽑히며 공중으로 치솟았다.
두둥실 떠오른 목인형.
목표물을 탐색하기라도 하는 걸까.
제멋대로 빙빙 돌던 목인형은 곧 엄청난 속도로 강이두를 향해 날아들었다.
“으아악!”
피할 수 없다.
찰나의 순간에 이미 목인형은 이두의 머리에 도달한 상태.
곧 죽고 부활하겠지.
아쉬울 건 없다.
어차피 시작지점은 코앞에 있으니까.
그러나···.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뭐지? 분명히 머리에 박혔는데!’
뾰족한 말뚝이 이마에 박혔다.
그런데 닿는 순간 그대로 스며들어 버렸다.
마치 목인형이 뇌에 빨려 들어온 것 같은.
“크윽.”
진짜 그렇게 된 걸까.
갑자기 찾아든 극심한 고통과 함께 정신을 잃었다.
“으음···.”
눈을 뜨자 낯익은 천장이 보였다.
벽지 위로 떠오르는 글자와 숫자의 조합들.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너무 잘 알고 있다.
‘설마 내가 각성을?’
「 강이두 」
레벨 : 1
등급 : E
특성 : 수련 경험치 100억배 증폭
스킬 : ―
진짜 각성해버렸다.
E급이고 나발이고 그게 중요한가.
헌터가 되었다.
헌터가 되었다고!
“이런 씨발!”
기쁨의 욕을 찰지게 뱉으며 접이식 침대에 걸터앉았다.
이게 상태창이란 거구나.
집중해서 보면 상세보기가 된다던데.
특성에 집중하자 알려진 대로 상세보기가 떴다.
「 수련 경험치 100억배 증폭 」
의식적으로 행하는 모든 행위에 경험치 100억배가 적용된다. 단, 수련하려는 동작과 100% 일치해야 한다.
대충 무슨 말인지는 알겠다.
뭐부터 수련해 볼까.
일상적으로 가장 많이 하는 행동.
그건 아마도 숨쉬기일 텐데.
‘무의식적으로 호흡하고 있으니까 적용이 안 된 거겠지?’
강이두는 바른 자세로 고쳐 앉고 호흡을 의식했다.
‘이제부터 호흡을 수련한다.’
숨을 크게 들이마시고.
다시 천천히 내쉰다.
그러자 기대했던 반응이 나타났다.
「 스킬 : 호흡 」
「 일치율 : 57% 」
「 분석 결과 : 들숨이 일정하지 않음, 날숨의 세기가 너무 강함 」
100% 일치하지 않아서 경험치가 들어오지 않았다.
‘하다보면 금방 100% 뜨겠지.’
숨 쉬는 것만큼 쉬운 일이 있을까.
부담 없이 계속 시도를 이어갔다.
「 일치율 : 71% 」
「 일치율 : 85% 」
「 일치율 : 64% 」
「 일치율 : 77% 」
생각처럼 쉽지 않다.
금방 익힐 것 같았던 호흡 스킬작은 다음날 새벽까지 이어졌다.
「 일치율 : 96% 」
「 일치율 : 93% 」
「 일치율 : 97% 」
분석 결과를 토대로 계속 수정에 수정을 거듭했다.
이제는 거의 대부분이 90%대.
99%도 여러 번 찍혔지만 100은 아직이다.
이미 눈꺼풀은 반쯤 감긴 상태.
꾸벅꾸벅 졸면서도 호흡을 의식하며 끝없이 시도를 반복하던 도중.
「 일치율 : 100% 」
「 스킬 획득 : 호흡(극) 」
‘됐다!’
강이두는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그대로 곯아떨어졌다.
그리고 불과 한 시간 뒤에 침대에서 일어났다.
맞춰놓은 알람이 울리기 3분 전이었다.
‘성공하고 바로 잠들었나 보네.’
사실 미친 짓이었다.
던전에 나가는 날이라 숙면은 필수.
그런데···.
‘왜 이렇게 상쾌하지?’
기분 탓이 아니었다.
정말로 피로가 씻은 듯이 사라졌다.
원래는 8시간을 자도 몸이 천근만근인데.
‘설마 스킬 때문에?’
이유가 있다면 그것밖에 없다.
서둘러 상태창을 열고 스킬을 확인했다.
「 스킬 : 호흡(극) 」
「 스킬 레벨에 의한 효과 : 726배 」
“우와!”
탄성이 절로 나왔다.
‘한 시간 수면으로 완벽한 몸 상태를 회복한 이유가 이거였구나!’
(극)은 극한까지 올렸다는 뜻이겠지.
무궁무진한 가능성이 머리에 그려진다.
곧 요란한 알람이 울렸다.
거의 동시에 단톡방 알림도 왔다.
(헌터관리국)
오늘도 늦지 않게 와주세요. 짐꾼들은 헌터분들보다 5분 일찍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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