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근하고 돌아와 보니 우편이 와 있었다.
<일반건강진단 결과통보서>
2주 전쯤 받았던 건강검진.
그 결과지였다.
자취 중인 오피스텔 안으로 들어온 다음 봉투를 뜯었다.
확인해 보니 위의 상태가 좋지 않았다.
위축성 위염, 역류성 식도염 등.
위쪽 질환이 제법 많았다.
스트레스 수치도 꽤 높은 편이었다.
스마트폰으로 확인해 보니 위축성위염은 직장인들이 흔히 겪는 질환 중 하나였다.
“탄 음식과 짠 음식은 피하고 야식도 먹으면 안 되고 탄산음료도 마시지 말라고?”
읽다 보니 내가 좋아하는 건 죄다 몸에 나쁜 것투성이었다.
“에휴.”
한숨을 내쉬고는 스마트폰을 집어 들었다.
곧바로 전화를 걸었고.
금방 전화가 연결됐다.
“어, 엄마. 나야.”
[그래. 아들. 이제 퇴근했어?]
“응. 방금 전 집에 들어왔어. 다른 건 아니고 건강검진 결과 나오면 알려 달랬잖아. 그거 말해주려고.”
[결과 나왔어? 어때? 별 이상 없는 거 맞지?]
“응. 위염이 있긴 한데 직장인 절반은 갖고 있는 증상이래. 너무 신경 쓰지 않아도 될 거 같아.”
그러나 엄마는 달리 생각하는 듯했다.
제대로 관리 안 하고 방치해 뒀다가는 만성 위염이 될 수도 있고, 그게 또 지속되다가 위궤양, 위암으로 발전할 수 있다며 각별히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고 거듭 당부했다.
“또 잔소리. 알겠어. 당분간 관리 좀 할게.”
[그래. 아, 지현이 하고는 어때? 잘 되어가?]
“응. 내일은 둘 다 바빠서 못 볼 거 같고, 내일모레 만나서 데이트하기로 했어.”
[잘됐네. 일요일에 데이트하기로 한 거지? 맛있는 거 사줘. 알았지?]
“걱정 마. 알아서 잘 챙길게. 그보다 엄마는 어디 아픈 데 없어?”
[나야 건강하지. 여기 공기가 얼마나 맑은데. 그리고 텃밭에서 직접 가꾼 채소로 밥 해먹는 게 완전 별미야.]
“맞아. 하, 엄마가 해준 반찬에 밥 비벼먹고 싶다. 양푼비빔밥이 진짜 맛있는데.”
생각만으로도 침이 입가에 고였다.
[먹고 싶으면 언제든 내려와. 지현이 데리고 내려와도 좋고.]
“어?”
[지현이도 시골 좋아한다며. 저번에 그러지 않았어? 2층에 너희 잘 곳 있으니까 하룻밤 자고 가. 엄마가 백반 해줄게.]
“아. 응. 우리 둘 다 안 바쁠 때, 그때 꼭 내려갈게.”
[그 말, 저번 달에도 한 거 알지? 그러고보니 지현이도 못 본지 꽤 됐네.]
“조만간 데리고 갈게. 엄마, 늦었다. 나 내일도 출근해야 해서. 먼저 끊을게. 잘 자, 엄마.”
[그래, 아들. 잘 자고 좋은 꿈 꿔.]
부리나케 전화를 끊었다.
엄마한테 거짓말을 한 게 민망했다.
어제 그녀가 보낸 메시지를 재차 확인했다.
-김지현 : 미안해, 오빠. 나 어머니 뵈러 가는 거 아직은 좀 부담스러워. 시골 내려가는 것도 불편하고. 다음에 기회 봐서 가자.
아버지와 사별하고 고향에서 혼자 지내는 엄마.
엄마는 지현이가 시골을 좋아하는 걸로 알고 있지만 정작 결혼을 생각 중인 여자친구는 엄마를 껄끄럽게 여기고 있었다.
‘지금이라도 연락을 해볼까.’
망설이다가 스마트폰을 내려놓았다.
재차 전화를 해서 의사를 물어봤는데도 그녀가 부정적인 대답을 한다면?
그때에는 어떻게 대응해야 할지.
아직 생각해 둔 게 없었기 때문이다.
‘일요일에 만나기로 했으니까 그때 물어보는 수밖에.’
사귄 지 2년이 넘었을뿐더러.
나는 지현이의 부모님을 만나 뵌 적 있고 지현이도 우연찮게 상경한 우리 엄마를 만난 적이 있다.
양가에서 결혼 이야기도 주고받고 있는만큼 엄마를 보러 가자고 하면 흔쾌히 따라나설 줄 알았는데 아직 그 정도로 가까운 것은 아닌 걸까.
‘내 장래희망이 귀농인 걸 알게 되면 어떻게 되려나.’
나는 지금도 귀농하고 싶은 욕심이 있다.
매일 스트레스를 받으며 야근해야 하고 주말에도 출근하는 대도시가 아니라 자연을 벗삼아 텃밭을 가꾸며 소소하게 살고 싶었다.
‘그러려면 못해도 십 억은 있어야겠지?’
그러나 평생 일한다고 해서 10억을 벌 수 있을지 의문이다.
로또 1등에 당첨된다면 모를까.
“씻고 자자.”
내일도 이른 아침 출근을 해야 한다.
난 간단히 씻은 다음 침대 안으로 기어 들어갔다.
밤사이 꿈을 꿨다.
로또 1등에 당첨된 내가 팀장님에게 호기롭게 사직서를 내고 있었다.
***
지하철은 평소보다 한적했다.
이유는 간단하다.
오늘이 토요일이기 때문이다.
주말 출근.
그래도 특근비라도 주니까 다행이다.
자리에 앉은 채 스마트폰을 확인했다.
여전히 지현이는 메시지를 보내지 않았다.
하는 수없이 내가 먼저 메시지를 보냈다.
-출근했어?
잠시 후.
답장이 도착했다.
-지금 하는 중이야. 오빠는?
-나도 하고 있어. 내일 몇 시쯤 볼래?
-오전에 전시회 하는 거 있다는데 거기 가 보는 거 어때?
지하철에서 내리며 답장을 보냈다.
-전시회 보고 나서 점심 먹을 거야?
-응응. 그러려고. 내일 아침에 태우러 올 수 있지?
-어. 아침 10시쯤 보자.
-응응. 오늘 출근 잘해. 파이팅! [이모티콘]
엄마를 보러 고향에 내려갈 생각은 없냐고 차마 물어보지 못했다.
대답이 예상됐기 때문이다.
메시지를 확인하며 큰길을 따라 걸어갈 때.
아침 일찍부터 문을 연 로또 판매점이 보였다.
어젯밤 로또 1등에 당첨됐다는 망상을 꾼 것도 그렇고.
이왕 이렇게 된 거 5천 원어치만 사볼까 싶었다.
딸랑딸랑.
판매점 문을 열고 들어갔다.
룰은 간단하다.
1부터 45까지의 번호에서, 무작위로 숫자 6개를 고르면 된다.
나는 테이블 위에 있는 OMR카드를 꺼낸 뒤 네임펜을 들고 A줄부터 D줄까지 무작위로 여섯 칸을 칠했다.
그리고 E줄을 마저 칠하려 할 때.
지현이가 생각났다.
-지현아, 바빠?
-응? 아직. 왜? 무슨 일 있어?
-나 로또 사러 왔거든. 번호 여섯 개만 골라줘.
-무슨 로또야. 그게 될 리가 없잖아. 정 그러면 그냥 아무 번호나 찍어.
-그러지 말고 네가 골라줘. 될 수도 있잖아.
답장이 잠깐 멈췄다.
잠시 후.
그녀가 답장을 보냈다.
-2, 22, 7, 28, 19, 39. 됐지?
-응. 고마워.
답장을 보낸 뒤 지현이가 찍은 번호 칸을 차례대로 칠했다.
2월 22일, 내 생일.
7월 28일은 지현이의 생일이다.
19와 39는?
그냥 랜덤으로 찍은 모양이다.
그렇게 OMR카드를 모두 칠한 뒤 판매점 사장님에게 5천 원과 함께 건넸다.
“당첨되세요.”
덕담과 함께 추첨 용지를 건네는 사장님.
추첨 용지를 입고 있는 바지 호주머니에 구겨 넣은 채 가게를 나왔다.
1등에 당첨될 가능성은 희박하다고 하지만.
매주 10명씩 꼬박꼬박 나오고 있는 만큼.
어젯밤 꿈에서 봤던 것처럼 내심 내가 당첨됐으면 하는 바람뿐이었다.
***
“하아암.”
하품을 늘어지게 하며 기지개를 폈다.
귀중한 주말 중 하루가 순식간에 삭제됐다.
오늘은 일요일.
지현이와의 데이트가 있는 날이다.
꼼꼼히 샤워를 하고 나온 다음 깔끔한 옷을 꺼내 입었다.
여기에 코트까지 걸치고 나니 제법 그럴싸했다.
주차장에 세워둔 국산 준중형차에 올라탔다.
외근을 갈 때 주로 타는 자동차로 중고로 천만 원 남짓 주고 구매한, 연식이 꽤 되는 녀석이지만 그래도 내게는 애정이 각별하다.
이 녀석을 타고 전국 곳곳을 누볐으니까.
-지현아, 나 지금 출발할게.
메시지를 보내놓고서 시동을 걸었다.
털털거리는 소리를 내며 시동이 걸린 자동차.
주차장을 빠져나온 뒤 지현이의 집으로 향했다.
삼십여 분만에 도착한 지현이의 집.
혼자 살고 있는 나하고 다르게 지현이는 부모님, 남동생과 같이 살고 있었다.
시동을 끈 다음 스마트폰을 만지작거리며 그녀가 나오길 기다렸다.
웹사이트를 둘러보며 유쾌한 움짤을 보고 히히덕거릴 때.
인기글로 선정된 게시글 제목을 보니 눈길이 갔다.
<방금 나온 이번 주 로또 1등 번호>
그러고보니 어제가 로또 당첨 발표날이었다.
확인해 보고 잔다는 걸 깜빡 까먹고 말았다.
애초에 로또를 산 적이 몇 번 없었으니까.
당첨될 거라고 생각하지도 않았고.
‘한번 확인해 볼까.’
게시글을 눌렀다.
그러자 화면이 바뀌고 당첨번호가 떴다.
<2, 7, 19, 22, 28, 39 + 5>
앞의 여섯 자리는 1등 당첨 번호.
뒤의 숫자 5는 2등 보너스 번호다.
화면 아래에는 총 당첨금과 당첨 복권수, 1개당 당첨금도 적혀 있었다.
“어라?”
잠깐만.
내 눈이 이상한 건가?
이상하게 숫자가 낯이 익었다.
“2와 22, 7과 28, 그리고 19와 39······.”
맙소사.
어젯밤 지현이가 메시지로 보내준 번호와 정확히 일치했다.
서둘러 호주머니를 뒤적거렸다.
그러나 지금 입고 있는 옷에 복권 용지가 있을 리가 없었다.
그 바지는 빨래바구니 안에 넣어놨으니까.
‘잠깐만. 내가 어제 네임팬으로 마킹을 제대로 했던가? 혹시 엄마가 갑자기 올라오셔서 빨래를 돌리는 건 아니겠지?’
별의별 생각이 들기 시작하면서 마음이 초조해졌다.
지금 당장 집에 돌아가서 복권 용지를 확인하고 싶었다.
정말 1등에 당첨된 게 맞는지.
직접 내 눈으로 확인해 봐야 할 것 같았다.
‘맙소사. 1등에 당첨된 게 사실이면 도대체 얼마인 거지?’
인터넷으로 검색을 해봤다.
확인 결과 이번 주 로또 1등 당첨 금액은 세금을 다 떼고 나면 18억 원 정도였다.
“하하, 하하하.”
실성한 사람인 것마냥 말이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머리도 어질거렸다.
지금 이 상황이 꿈인지 현실인지 분간이 가지 않을 정도였다.
그 순간.
똑똑.
창문을 두드리는 노크 소리.
고개를 돌려보니 지현이가 서 있었다.
“오빠! 문 잠겼어!”
서둘러 잠금을 풀었다.
문이 열리고 지현이가 올라탔다.
그녀가 뾰로퉁한 표정으로 투덜거렸다.
“문은 잠가놓고 뭐 하고 있었어? 내가 계속 불렀는데 대답도 없고.”
“어? 아, 그, 그게······.”
좀처럼 말이 나오지 않았다.
말을 더듬으면서 생각을 정리했다.
‘로또에 당첨됐다는 사실을 알려야 하나?’
내가 1등에 당첨될 수 있었던 것은 지현이의 공로가 컸다고 봐야 했다.
그녀가 불러준 번호가 1등에 당첨된 것이니까.
게다가 우리 둘은 결혼을 약속한 사이.
그녀에게 알려주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결심을 굳히고 말문을 열었다.
“지현아, 내가 너한테 알려줄 좋은 소식이······.”
“나 사실 오빠한테 할 말이 있어.”
응?
타이밍도 얄궂다.
내가 말하려 할 때 동시에 그녀도 말문을 열고 말았다.
“어?”
“응?”
당황하던 것도 잠시.
내가 먼저 입술을 떼었다.
“너 먼저 말해. 나는 그 다음 말할게.”
“아, 응. 알았어.”
내가 양보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좀처럼 말을 꺼내지 못하고 머뭇거리는 지현이.
나는 그녀를 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도대체 무슨 말을 하려고 저렇게 뜸을 들이는 거지?
왠지 모르겠는데 느낌이 싸했다.
침묵이 길어질수록 당혹스러운 마음이 커져갔다.
그때 그녀가 결심을 한 듯 입술을 깨물었다.
그런 뒤, 조수석에 앉아 있던 그녀가 날 빤히 바라보며 도톰한 입술을 떼었다.
한숨을 내뱉으며 그녀가 말했다.
“오빠, 미안한데 우리 헤어지자.”
어?
한참을 망설이던 그녀가 조심스럽게 내게 꺼낸 말.
그것은 바로 헤어지자는 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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