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이 억까였다.
이건 절대로 엄살이나 변명이 아니었다.
내 나이 서른.
올해로 딱 10년차 헌터.
하지만 아직도 C급이다.
열심히 살지 않았던 것은 아니다.
만약 그랬다면 몇 번이나 죽을 고비를 넘기진 않았겠지.
돌이켜보면, 대박이 날만한 기회는 얼마든지 있었다.
그러나 죄다 일보 직전에서 엎어져버렸다.
도대체 어디서부터 잘못된 걸까.
던전에서 숨겨진 아이템을 놓쳤을 때?
아니면 최강 헌터 검사의 비전 스킬을 전수받지 못했을 때인가?
전설의 몬스터를 테이밍하지 못했을 때?
보통 헌터들은 일생에 한 번 만날까말까한 기연이 몇 번이나 있었고...
그 때마다 놓쳐버렸다.
그리고 그것은 결코 내 잘못은 아니었다.
누가 그 낡아빠진 철검이 전설급 마검인 줄 알았겠나.
그 폐급 신입이 회장님 외동딸인 줄은 정말 아무도 몰랐다.
억까는 정말 여럿 있지만...
가장 문제가 됐던 것은 역시 처음의 억까였다.
'오늘로 딱 10년인가.'
정확히 10년 전.
나는 당시 유명 길드였던 [청풍]에 합격했다.
한국 최고까진 아니지만, 한 손에 꼽히는 길드였다.
그리고 그것이 모든 억까의 시작이었다.
'이제와서 푸념해봤자 뭐하나.'
고개를 털어내곤 슬슬 자기로 했다.
몬스터와 10년을 싸웠는데 이런 단칸방 신세라니.
헌터라도 나 같은 말단은 정말로 못 번다.
"슬슬 잘까."
몸이 고되니까 잠드는 것도 빠르다.
눈을 감자 눈 앞에 익숙한 광경이 펼쳐졌다.
@
"강운 씨, 청풍 길드 합격 축하해요!"
"헉?"
익숙한 호프집에 익숙한 얼굴들.
하지만 나를 포함한 모두가 훨씬 젊다.
딱 10년 전, 청풍 길드의 합격을 축하하기 위한 술자리.
아무것도 모르는 내가 자리에 앉아서 헤실헤실 웃고 있다.
"우리들 중에서 청풍길드에 합격한 건 강운 씨밖에 없네요."
"에이, 다들 더 좋은 길드 가실 거예요."
10년 전의 내가 태연히 속 터지는 소리를 해댔다.
나는 녀석을 위에서 내려다보며 멍하니 굳어있었다.
'오늘 푸념이 너무 심했나? 하필이면 이런 꿈을 꾸다니...'
이 정도로 생생한 꿈은 처음이다.
내가 놀라거나 말거나, 대화는 태연히 진행됐다.
모든 것들이 내 기억대로였다.
"청풍 길드 말고 또 어디에 합격하셨어요?"
"잘 모르실 걸요? 네메시스라고, 신생 길드인데..."
"네메시스요? 이름이 좀 웃기긴 하네요."
"하하, 좀 그렇죠?"
하나도 안 웃기다.
네메시스는 앞으로 3년 안에 대한민국 최고의 길드가 될 테니까.
반면 청풍 길드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대한민국 헌터 업계 역사상 최악의 스캔들...
주가조작과 민간인 살해를 비롯하여 수많은 논란들이 터질 것이다.
그것도 내가 가입한 바로 그 날에!
'다시 생각해도 열받네.'
되새겨봐도 진짜 말이 안 되는 억까였다.
신입 길드원인 내가 뭘 안다고 놈들과 함께 조사를 받았단 말인가?
그놈의 검찰 조사 때문에 자그마치 6개월을 허비했다.
제대로 사냥도 못하고.
훈련도 당연히 못하고.
헌터 생활에서 가장 중요한 시절을 통째로 날려버린 것이다.
그 때문에 내 검술 스킬은 제대로 성장하지도 못했다.
하지만 내가 여기서 악을 질러봤자 소용없다.
일어난 일은 일어난 것이다.
과거는 무슨 수를 써도 바꿀 수 없다.
10년 전의 나는 그새 잠시 바람을 쐬러 나갔다.
"후우, 청풍 길드... 이제 나도 큰 물에서 놀아보는 거야!"
[그거 아냐 병신아! 거기 구정물이야!]
"으응?"
참다 못해 외치자 녀석이 내 말에 반응했다.
그래도 꿈은 꿈이란 건가.
현실과 다르게 일말의 희망 정도는 있다.
나는 이미 늦어버렸지만...
녀석은 다르다.
아직 앞날이 창창하다.
아무짝에도 소용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순수하게 녀석을 위해서 외쳤다.
[청풍 길드로 가면 안 돼! 네메시스로 가!]
"뭐, 뭐라고? 너 누구야?"
주변을 잠시 두리번거리던 녀석이 코웃음치며 반문했다.
"대기업 길드 놔두고 스타트업에서 구르라고? 너 네메시스 사람이지?"
[청풍 길드 간부들 완전 개쓰레기야! 걔들 얼마 안 가서 구속돼!]
"웃기지도 않는 소리를..."
내 목소리가 하도 간절해서 녀석도 잠시 멈칫한다.
나는 오직 녀석을 위해서 사정사정했다.
[딱 하루! 딱 하루만 입사를 미뤄봐! 그럼 바로 알게 된다니까?]
"대기업 길드 입사를 미루라니... 그냥 가지 말라는 소리잖아?"
[바로 그거야! 청풍으로 가면 좆된다고!]
"..."
잠시 말을 잃었던 녀석이 다른 부분을 걸고 넘어졌다.
"그리고 네메시스? 거길 왜 가?"
[네메시스가 신생이긴 해도 인재풀이 끝내준다니까? 협회에서 작정하고 밀어주는 길드야! 이번 분기 유망주들은 죄다 네메시스로 간다.]
지금 대한민국 S급이 20명인데 그 중 17명이 네메시스 소속이다.
아주 말도 안 되는 길드인 것이다.
[아무튼 청풍은 안 돼! 정 의심되면 조금만 더 조사를 해봐.]
당장 얼마 뒤에 검찰 구속까지 당하는 놈들이다.
조금만 파헤쳐봐도 뭔가 나오겠지.
"으음..."
이 정도면 할만큼 해줬다.
녀석을 내려보다가 꿈에서 깨어났다.
@
"흐아암..."
하품과 함께 잠에서 깨어났지만, 곧바로 눈을 뜨진 않았다.
어차피 눈을 뜨면 참혹하고 자비없는 현실만 남아있다.
오랜만에 좋은 꿈이었다.
잠시라도 희망을 가질 수 있어서 좋았다.
그런데, 가만히 누워있던 내게 난데없는 불호령이 떨어졌다.
"언제까지 늘어져 있을 거야? 얼른 일어나."
"헉!"
웬 여자의 목소리.
불에 데인 듯한 기분으로 일어났다.
황급히 눈을 뜨자 처음 보는 침실이었다.
"어엇?"
"뭘 놀라고 앉았어?"
내게 말을 걸어온 것은 나도 아는 얼굴이었다.
네메시스 길드의 A급 헌터.
TV에서 몇 번 봤다.
'뭐야 이거? 아직 꿈인가?'
재촉에 못이겨서 일단 일어났다.
비좁은 원룸이 어느새 어엿한 아파트로 바뀌어 있었다.
탁자 위에 지갑이 있어서 열어보니까 내 신분증이 나왔다.
[B급 헌터 - 한강운]
내가 B급이라고?
설마... 어제 꿈 속에서 내가 청풍 길드에 들어가지 않았기 때문인가?
탁자에는 결혼 사진으로 보이는 것도 하나 있었다.
아까 그 여자와 내가 식장에서 어색하게 웃고 있다.
'말도 안 돼. 10년 전의 내 선택이 바뀌어서 미래까지 바뀐 거야?'
10년 전, 내가 청풍 길드에 들어가지 않았다면 대충 이 정도는 살고 있을 것 같긴 하다.
그래도 결혼까지 했다니...
원래 헌터들이 결혼을 좀 일찍 한다.
쭈삣쭈삣 거실로 나가자 아내가 나를 채근한다.
"정신 좀 차려. 얼른 먹고 출근해야지."
"아, 알았어."
그래도 아침 정도는 차려주는 건가?
그런데 아내가 식탁 앞에 가만히 앉아있는다.
'... 요리는 내가 하는 거야?'
마침 식빵이 있어서 토스트를 만들었다.
사랑한 적도 없는 여자이지만 명색이 아내니까 아침밥 정도는 차려줄 수 있다.
그런데, 그녀는 밥을 다 먹곤 접시를 놔둔 채 일어났다.
"설거지도 빠릿빠릿하게 좀 하고."
"..."
뭔가 이상한데?
보통 둘 중 하나 정도는 본인이 해야하는 것 아닌가?
그래도 토스트라서 설거지 할 것 자체도 거의 없다.
군말없이 빠르게 끝내버리기로 하자, 상태창이 떠올랐다.
[설거지 스킬이 27레벨로 상승했습니다.]
"... 27레벨?"
상태창이 떠오른 것 자체는 전혀 놀랍지 않다.
헌터라면 누구나 익숙하다.
하지만 27레벨이란 수치는 듣도보도 못했다.
참고로 내 검술 스킬이 5레벨이었다.
"설거지를 얼마나 시킨 거야?"
스킬 덕분에 설거지는 빛의 속도로 끝났지만...
벌써부터 결혼생활에서 위기가 느껴진다.
불안 속에서 냉큼 샤워하고 출근했다.
다행히 운전은 아내가 한다.
네메시스 길드의 본사는 처음이다.
"자, 다 왔다. 잘 다녀와."
"어... 자기도."
"갑자기 웬 자기?"
그녀가 피식 웃으며 나를 떠났다.
잽싸게 스마트폰의 기록을 살펴보자 비로소 상황이 이해된다.
"네메시스 길드에 들어간 게 맞구나. 그래도 고작 B급이라니..."
S급까지 바라진 않았지만 A급은 될 수 있을 줄 알았다.
내 장대한 억까의 역사를 제대로 극복하지 못한 건가?
하지만 만년 C급 헌터보단 훨씬 낫다.
"네메시스에서도 중역은 아니네."
오늘 던전 공략은 없다.
나는 차분히 훈련장에 들어가서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어서오세요 강운 씨."
"좋은 아침."
TV에서나 봤던 네메시스 길드원들이 반갑게 인사를 건넨다.
이게 진짜 큰 물이지.
직접 훈련을 시작해보자 체력 자체가 늘어난 것이 느껴진다.
어제와는 몸이 다르다.
길드의 시설도 너무 훌륭하다.
'... 이게 인생이지.'
오래전에 도둑맞은 인생을 되찾은 듯한 기분이다.
하지만... 이대로 괜찮나?
설거지 스킬 27레벨은 문제가 좀 있는 것 같은데?
흥분 속에서 하루를 마친 나는 또다시 잠자리에 들었다.
참고로 저녁 식사와 설거지도 내 담당이었다.
아내는 설거지가 쌓이는 것 자체를 못 참는 것 같다.
본인은 손에 물도 안 묻히면서.
맞벌이면 집안일은 반반씩 해야하는 것 같은데...
'설마 결혼도 억까당한 건가?'
이대로는 안 된다.
불안감 속에서 겨우 잠든 나는 또다시 10년 전의 나를 발견했다.
녀석은 인터넷 뉴스를 보며 놀란 가슴을 진정시키고 있다.
「검찰에서 청풍 길드에 강도 높은 압수수색을 진행...」
「주가조작과 계획 살인 혐의까지 적용되었다고 공식적으로 발표를...」
「간부들은 물론 일반 길드원들까지 구속 대상이 된 데에 대해...」
「헌터 협회도 예외적으로 수사에 적극 협조하겠다고 밝혔습니다.」
[... 이제 내 말을 좀 믿겠어?]
"헉! 지, 진짜였을 줄은... 의심해서 미안해요."
뒤늦게 내 존재를 눈치챈 녀석.
이제라도 사과를 받으니 기분이 좀 풀린다.
의심했어도 괜찮다.
억까가 괜히 억까인가?
진짜 말도 안 되니까 억까지.
["이제 네메시스 길드 갈거지?]
"네! 이미 가입하고 왔어요!"
[아주 잘 했어. 근데 말야...]
잠시 망설이다가 어렵게 말을 꺼냈다.
[너는 연애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해?]
"연애요? 아직 좀 이르지 않나..."
[그치? 근데 네가 네메시스 길드에서 피해야 할 여자가 한 명 있어.]
"허억!"
다음 날 아침.
나는 또다른 침실에서 눈을 떴다.
아주 천천히 고개를 돌리자, 옆자리에 다른 여자가 보였다.
네메시스 소속의 S급 헌터인 신서아다.
아파트도 어제보다 좀 더 넓어졌다.
"... 당첨!"
"당첨은 뭐가 당첨이야? 당신 이번에도 승진 못하면 진짜 혼날 줄 알아. 이혼이야! 이혼!"
"아, 아니..."
다짜고짜 이혼 운운하다니.
뭔가 불안한데?
황급히 상태창을 확인해보자 설거지 스킬이 29레벨이다.
'2레벨 올랐군.'
불행히도 헌터등급은 그대로다.
역시 청풍길드를 걸렀을 때처럼 극적으로 바뀌진 않는다.
그대로 하루 동안 생활해본 나는 또다시 꿈을 꿨다.
10년 전의 나를 발견하자마자 신신당부했다.
[잘 들어. 네가 네메시스 길드에서 피해야 할 여자가 두 명 있어.]
"... 한 명 늘었네요?"
[그렇지.]
그래도 시키는대로 해서 다행이다.
나는 내 인생을 10년 전부터 새로 설계해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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