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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아직 전쟁도 안 끝났다.

2024.05.08 조회 31,258 추천 420


 재벌이 반도체 전쟁을 기다림
 
 1. 아직 전쟁도 안 끝났다.
 
 “아야, 아파!”
 
 나는 어깨를 찌르는 날카로운 통증에 깜짝 놀라 소리를 질렀다. 그리고 주위를 둘러보면서 내 주위를 둘러싸고 있는 놀라운 크기의 거인들을 보고 울음을 터뜨렸다.
 
 “으아아앙!”
 
 내가 왜 나보다 몇 배로 큰 거인들에게 둘러싸인 것인지 알 수 없었다. 그리고 내가 왜 어린아이처럼 울음을 터뜨렸는지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
 
 내가 울음을 터뜨리자 누군가가 내 등을 토닥거리고 주사를 맞은 자리에 입김을 불면서 말했다.
 
 “괜찮아, 괜찮아, 이제 다 끝났어. 호 해주면 이제 안 아프지? 호, 호.”
 
 어떻게 이 목소리를 내가 잊겠는가.
 
 나는 급히 목소리가 들린 곳을 향해 돌아보았고 거기에는 아주 젊은 모습의 엄마가 서 있었다.
 
 나는 엄마를 보자마자 눈물이 핑 돌았다.
 
 엄마, 엄마, 우리 엄마.
 
 뭐 그렇다고 우리 엄마가 일찍 돌아가셨다고 오해하지 마라. 우리 어머니는 90 넘게 장수하셨다.
 
 아니 근데 내가 왜 갑자기 어린 시절로 돌아가 있는 거지? 설마 내가 죽어서 회귀한 거야? 아니 회귀는 그렇다 쳐도 내가 죽었다고?
 
 엄마는 당신을 바라보는 내 눈에 눈물이 고인 것을 보고 내 어깨를 찌른 주사 때문이라고 생각했는지 의사를 향해 말했다.
 
 “우리 애가 평소에는 주사를 맞아도 이렇게까지 잘 안 우는데 오늘은 좀 심하게 우네요.”
 
 흰 가운을 걸친 백인 의사가 말했다.
 
 “이 무렵 애들은 다 그렇죠. 갑자기 어른스러워 진듯싶다가 다시 어려진 듯 보이고 하는 건 성장기에 흔한 일입니다.”
 
 어? 잠깐 지금 저 백인 의사가 말하는 게 한국어가 아니라 영어인데 엄마랑 영어로 이야기하고 있다고?
 
 아버지가 영어를 제법 하는 건 아버지 직업 때문에 알고 있었지만 엄마도 이렇게 의사소통이 가능한 수준으로 영어를 한다는 사실은 방금 알았다.
 
 엄마가 영어를 하는 모습을 보니 문득 어머니가 돌아가시기 얼마 전 엄마가 저글링을 할 줄 아는 것과 악보를 읽을 줄 안다는 사실을 깨닫고 엄청 놀랐던 일이 떠올랐다.
 
 저글링은 어릴 때 그러고 놀았다고 해서 바로 이해했지만 악보를 읽을 아는 사실은 바로 이해가 되지 않아 놀라서 다시 물었더니 오히려 내가 악보를 읽지 못한다는 사실을 알고 엄마도 놀라던 모습이 생각났다.
 
 “학교에서 악보 읽는 법 안 배웠어? 왜 악보를 못 읽어?”
 
 “아니 그게 학교에서 잠깐 배운다고 바로 읽어져요?”
 
 “그럼 한 번 배우면 읽어지지, 악보가 어려운 것도 아니고 그걸 왜 못 읽어?”
 
 우리 엄마는 일제강점기에 초등학교 그러니까 당시 소학교만 나온 평범한 주부였다. 난 엄마가 평생 살림 사는 모습만 봐왔기 때문에 엄마의 의외의 모습에 깜짝 놀랐었다.
 
 근데 지금 영어를 하는 모습을 보자 그때의 기억이 다시 떠올랐다. 일제강점기에 일본인 마을에 사셔서 일본어를 일본 사람들만큼 잘하는 건 알고 있었지만 영어를 하는 모습은 처음 보았다.
 
 그러나 엄마가 영어를 할 줄 안다는 사실도 내가 어린 시절로 회귀했다는 지금의 이 상황을 이길 수는 없었고 먼저 머릿속을 정리할 필요가 있어서 입을 열지 않고 생각을 정리해 나갔다.
 
 그러니까 내가 어린 시절로 회귀한 거 같은데 지금이 몇 년이지?
 
 나는 주위를 두리번 거리다가 벽에 붙어 있는 한 장 짜리 달력을 발견했다.
 
 하긴 이 시대에는 저렇게 12달 365일을 한 장에 담아놓은 달력이 많이 사용되었다.
 
 달력 위에는 1953이라는 숫자가 크게 박혀 있어 올해가 1953년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어느 정도 내 상황에 대한 인식이 되자 머리가 약간 정리 되었고 엄마와 의사가 대화를 나누는 소리를 들었다. 의사와 엄마의 대화를 들으면서 엄마의 영어 실력이 대단한 것은 아니고 겨우 의사소통이 가능한 수준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물론 당시로서는 이 정도만 해도 대단한 것이지만 외가에서 누누히 들었던 엄마의 영리한 머리나 아버지가 미군을 상대로 하는 직업이라는 사실을 생각했을 때 엄마가 이 정도로 영어를 구사하는 일이 특별한 일은 아니라고 생각되었다.
 
 엄마와 의사의 대화를 듣다가 내가 의사에게 물었다.
 
 “난 왜 주사를 맞은 거야?”
 
 내가 영어로 질문하자 의사가 깜짝 놀라서 나를 바라보았다.
 
 “이 애도 영어를 할 줄 알았어요?”
 
 엄마도 깜짝 놀란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아뇨, 얘가 영어를 하는 건 저도 처음 봐요. 애 아빠랑 내가 영어를 하는 걸 보고 배웠나? 애 앞에서는 영어로 말한 적이 없는 것 같은데 이상하네요.”
 
 의사가 내게 물었다.
 
 “영어를 어디서 배웠니?”
 
 “몰라, 근데 내가 왜 주사 맞은 거야?”
 
 의사가 엄마에게 말했다.
 
 “아빠랑 엄마가 미국인이랑 대화하는 걸 보고 저절로 배운 모양이네요.”
 
 엄마에게 그렇게 말한 의사가 내게 말했다.
 
 “네가 맞은 건 결핵 백신이야. 네 아빠가 부탁해서 특별히 네게 주사를 놔준거야. 근데 백신이 뭔지 알아?”
 
 “응, 한 번 맞으면 그 병에 안 걸리는 거. 근데 결핵 백신만 맞고 천연두 백신은 안 맞아도 돼?”
 
 나는 조금 전 상황 정리가 조금 되자 내가 천재라는 사실을 과시하는 게 좋겠다는 판단을 했다. 미래 지식을 가지고 있으면서 그걸 완전히 감추는 것보다 천재 꼬마 행세를 하는 쪽이 더 편할 듯싶어서였다. 어차피 내가 평생 배운 지식이 어디 간 게 아니니 천재 행세를 해도 별로 어색하지 않을 것이었다.
 
 의사는 내 말을 듣자 내 말에 대답하는 대신 감탄하는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엄마도 무척 당황해서 안고 있던 나를 돌려보며 말했다.
 
 “아니, 얘가 갑자기 왜 이러지? 백신은 어떻게 알고 천연두는 또 어떻게 알았데?”
 
 “천연두 백신은 안 맞아도 돼?”
 
 나는 이 시대에 천연두가 얼마나 무서운 병인지 알고 있어 기회가 있을 때 백신을 맞고 싶었다.
 
 엄마가 말했다.
 
 “천연두 백신은 조금 더 나이 들면 맞을 거야. 넌 아직 너무 어려서 안 맞아도 돼.”
 
 내가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자 날 바라보던 의사가 파안대소했다.
 
 “푸하하하, 이놈 정말 신통하네. 혹시 글도 읽을 줄 아는 거 아냐?”
 
 의사는 농담 삼아서 한 말이라도 난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읽을 줄 알아.”
 
 내 나이 대 어린애가 말을 좀 빠르게 배우는 건 특이한 일이 아니다. 그게 외국어라고 해도 언어인 이상 특정 빈도 이상으로 노출된다면 전혀 이상하지 않다. 그러나 내 나이에 문자를 안다는 건 굉장히 특이한 일이다.
 
 “뭐 정말 글을 읽을 줄 안다고?”
 
 “응, 읽을 수 있어. 저기 1953년 그리고 여기 닥터 A. H. 심슨. 심슨이 선생님 이름이야?”
 
 의사는 고개만 끄덕일 뿐 입을 다물지도 못하고 날 빤히 바라보았고 엄마도 놀라서 말이 없었다. 의사 뒤에서 뭔가 준비를 하던 간호원(이때는 간호사를 간호원이라고 불렀다.)도 손을 멈추고 나를 바라보았다.
 
 의사는 급히 탁자 위에 놓여 있던 책 한 권을 들어서 보여주었다.
 
 “읽을 수 있겠니?”
 
 “Moby-Dick; or, The Whale by 허먼 멜빌. 1851년”
 
 그 뒤에 출판사 이름까지 읽어내자 그때부터 난리가 났다. 날 보고 있던 간호원이 지나가던 사람을 불러 날 구경시켰고 구경꾼들이 하나둘 모여들기 시작했다.
 
 누군가가 물었다.
 
 “6 곱하기 7은?”
 
 “42.”
 
 사방에서 웅성거렸다.
 
 “우와, 곱셈까지 할 줄 아네.”
 
 “천재야, 천재!”
 
 “미스터 정의 아들이 이렇게 천재였어?”
 
 “미스터 정도 머리가 엄청 좋잖아. 아빠 닮았나?”
 
 “아니, 그 사람 머리가 좋아도 이 정도는 아니지.”
 
 난 6.25전쟁이 일어난 1950년에 태어났다. 내가 태어난 해에 전쟁이 일어났지만 우리 부모님은 전부 부산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전쟁으로 큰 고생을 한 일은 없었다.
 
 그리고 미군이 참전하면서 아버지는 바로 미군 부대에서 일을 따내어 먹고 사는 일도 이 시대 기준으로는 어려움이 없었다.
 
 이후 아버지는 이때 미군 부대에서 일하면서 배운 기술과 영어 실력으로 평생 동안 큰 어려움 없이 사실 수 있었고 나도 덕분에 대학까지 나올 수 있었다.
 
 내가 한창 사람들 앞에서 실력을 뽐내며 재롱을 부리고 있을 때 저쪽에서 아버지의 목소리가 들렸다.
 
 “우리 아들이 뭘 한다고 일하는 사람을 부르는 거야? 애한테 예방주사 하나 놔 달라는 부탁 정도는 할 수 있잖아.”
 
 내가 부대 안에서 일하는 아버지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알고 누군가가 급히 연락을 해준 모양이었다.
 
 아무리 시간을 거슬러 회귀했어도 엄마의 목소리를 바로 알아봤듯이 아버지의 못소리도 바로 알아들을 수 있었다.
 
 “아버지!”
 
 나는 의자에서 일어나 아버지를 부르며 아버지에게 달려갔다. 이때는 많은 경우 엄마는 엄마라고 불러도 아빠는 아빠라고 부르지 않고 아버지라고 불렀다.
 
 부모님 모두 내가 회귀하기 몇 년 전에 돌아가셨기 때문에 정말 눈물이 핑 돌 정도로 반가웠다.
 
 아버지는 달려 온 날 안으며 혹시 내가 뭔가 사고라도 친 게 아닌지 우려했으나 당연히 기우였다.
 
 아버지는 주위에서 중구난방으로 떠들어대는 사정을 듣고 긴가민가 의아해하다가 마침내 내가 하는 것을 보고 벌린 입을 다물지 못했다.
 
 아버지는 약간 우려되는 표정으로 의사인 심슨 박사에게 물었다.
 
 “앨버트, 이거 뭔가 이상한 건 아닌가요?”
 
 앨버트는 심슨 박사의 이름이었다. 아무래도 아버지와 상당한 친분이 있는 듯했고 그래서 일부러 날 부대로 불러 예방주사를 놔 준 모양이었다.
 
 “나도 처음 볼 정도로 영리한 아이이긴 한데 특별한 병은 아닐세. 머리 좋은 게 병은 아니잖아.”
 
 “하지만 전 오늘 아침까지도 얘가 이렇게 똑똑한 건 몰랐다고요.”
 
 “아이의 천재성이 갑자기 드러나는 경우는 흔한 일이야.”
 
 이 시대에 미국 의사가 그렇다고 하면 한국인은 무조건 그렇다고 믿었다.
 
 엄마랑 아버지도 심슨 박사의 말을 듣자 고개를 끄덕였다.
 
 “애를 위해 뭐 특별히 해야 할 일은 없나요?”
 
 심슨 박사를 어깨를 한 번 으쓱이며 말했다.
 
 “난들 이런 걸 언제 봤어야 뭘 알지. 나도 이런 경우는 처음 봐서 잘 모르겠네. 나중에 다른 사람들에게 물어보겠네. 근데 애 나이가 몇 살이라고?”
 
 “애가 5월에 났으니까 지금 3살 하고 1개월됐네요.”
 
 아버지는 서양식 나이 세는 법을 잘 알고 있었고 한국식 나이가 아닌 서양식 나이로 알려주었다.
 
 주위에서 다시 한 번 크게 떠들었다.
 
 “아니 3살짜리가 곱셈까지 할 줄 안다고?”
 
 “누구 이런 거 본 적 있어?”
 
 “난 처음 보는데, 들어보는 것도 처음이야.”
 
 “다섯 살짜리가 하는 건 본 적이 있는데.”
 
 “이 나이 때는 한 달도 차이가 나는 시기라서 그건 비교가 안 돼.”
 
 사람들의 웅성거림 속에서 처음에는 우려하는 눈으로 보던 부모님이 점점 의기양양한 모습으로 변하는 게 보였다.
 
 처음에는 자식에게서 의외의 모습을 보고 걱정부터 앞섰지만 그게 아니라는 걸 알고 안심이 되자 입끝이 점점 올라가기 시작했다.
 
 자식이 똑똑하다는 건 부모에게는 정말 큰 자랑이 될 수밖에 없었다.
 
 엄마가 아버지에게 뭐라고 속삭였고 아버지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앨버트, 애를 부대에 자주 데려와도 될까요? 애가 영어라도 확실히 배워두면 나중에 큰 도움이 될 겁니다.”
 
 “난 상관이 없는데 좀 위험하지 않겠나?”
 
 아버지가 일하는 이 부대는 최전선에 보내는 물자를 관리하는 부대라 자재 이송이 빈번했고 어린 아이에게는 위험한 일이 많았다.
 
 심슨 박사가 말했다.
 
 “부대 안으로 데려가는 건 위험하니까 출근할 때 여기 애를 놔두고 가게. 여긴 위험한 일이 거의 없고 나나 다른 사람들이 애를 봐 줄 수도 있으니까. 그리고 다른 애들도 있고 하니까 심심하지는 않겠지.”
 
 아닌 게 아니라 이곳은 미군들이 치료를 받거나 휴식을 취하는 곳이고 한국 출신 고아들도 몇 명 있었다.
 
 당시 미군들은 전쟁터에서 고아가 된 한국 아이들을 주워 부대에서 키우는 일이 제법 있었고 이 부대에도 그런 애들이 몇 명 있었다.
 
 21세기의 시각으로 보면 아이들을 고아원에 보내지 않고 이렇게 부대에서 키우는 일이 아이를 애완동물 취급하는 것 같이 보일지 몰라도 이 시절은 그런 생각 자체가 사치스러운 시대였다.
 
 거리에는 깡통 하나를 들고 구걸하는 어린 거지가 차고 넘쳤다. 그날 끼니를 못 때워 굶주리는 일은 예사였고 심한 경우 굶어 죽거나 매서운 추위에 얼어 죽는 일도 빈번했는데 이렇게 부대의 마스코트가 되면 최소한 굶거나 추위에 떨 일은 없었다.
 
 하여간 심슨 박사가 일하는 곳은 그런 아이들도 드나드는 곳이라 내가 놀면서 뭔가를 배우기엔 좋은 장소였다.

댓글(27)

두성심    
드디어 대역물로 돌아오셨네요. 기대 만빵입니다.
2024.05.08 21:00
유유천천    
대역이라기 보다는 재벌물인데 아무래도 전 이쪽이 나은 거 같더라고요. ^^
2024.05.08 21:13
조졸졸    
작가님 전작 재밌게 읽었어요. 건필하세요
2024.05.09 16:37
fo*****    
신 연재군요. 기대 됩니다
2024.05.09 20:01
비열한습격    
굶주는 --> 굶주리는
2024.05.10 21:54
유유천천    
수정했습니다. 오탈자 조언 감사합니다.
2024.05.10 22:07
as*****    
재미있게 잘 보고 갑니다
2024.05.11 10:47
혜린    
오래 기다렸네요.. 기대하고 있습니다
2024.05.11 21:28
디고스    
포드 외전은요?
2024.05.13 06:40
유유천천    
포드를 완결 즈음부터 갑자기 몸이 안 좋아져서 고혈압, 당뇨, 고지혈증 등등이 한꺼번에 나타나고 간단한 외과 수술이지만 수술도 두 번이나 하는 등 몸을 추스리는 일이 먼저다 보니 외전 쓸 여유가 없었네요. 그 뒤에는 이미 글을 쓸 맥락을 잃어버려 그런지 글이 안 써지더군요.
2024.05.13 1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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