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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포칼립스의 생존자

2024.05.08 조회 76,833 추천 1,314


 어둠이 내려앉은 저녁, 부서진 아스팔트 도로 위로 먼지에 뒤덮인 자동차들이 셀 수 없이 방치되어 있다.
 좌우로 가득한 건물들은 하나같이 창문이 깨져 있었는데 그 때문에 당장 귀신이 튀어나올 것 같은 분위기였다.
 조명이라도 있으면 훨씬 낫겠지만 지금 같은 세상에 그런 호사를 누릴 만한 곳은 매우 드물었다.
 
 저벅저벅.
 
 을씨년한 거리에서 유일하게 들리는 발소리.
 소리의 주인공인 남자는 무거운 짐을 진 탓인지 발소리가 상당히 묵직했다.
 그의 이름은 김지혁, 아포칼립스 3년 차에 살아남은 생존자였다.
 그때 규칙적으로 들리던 발소리가 뚝 멈췄다.
 지혁의 기척을 느끼고 막 골목에서 기어 나오는 좀비가 있어서였다.
 일반인들에겐 충분히 두려운 상황이었지만 지혁은 무서워하기는커녕 아쉬움이 담긴 목소리로 혀를 찼다.
 
 "쯧.... 또 일반 좀비인가."
 
 지혁은 허릿춤의 마체테를 뽑아 느릿느릿 다가오는 좀비의 머리를 단칼에 쪼갰다.
 두개골을 간단하게 쪼깨는 걸 보면 그가 이런 작업을 수도 없이 해왔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래도 없는 것보단 나으니까. 루팅.“
 
 허리를 굽혀 쓰러진 좀비를 손등으로 툭 치자 사체에서 빠져나오는 빛무리.
 몇 초 지나자 빛은 형태를 갖추며 모습을 드러냈다.
 AA 건전지 2개였다.
 
 "오. 당첨."
 
 그러자 내내 굳어있던 지혁의 입가에 살짝 미소가 지어졌다.
 비교적 가치가 높은 전리품을 얻었기 때문이다.
 예전이라면 모를까 지금 시대에 새 건전지는 배급권 서너 개와 맞교환되는 사치품이었다
 지혁은 건빵 주머니에 건전지를 집어넣고 혹시 잃어버리지 않게 꼼꼼히 단속했다.
 다시 걸음을 재촉하는 지혁.
 그는 10분을 걸어 마침내 아지트 입구에 도착할 수 있었다.
 아지트는 5층짜리 상가의 꼭대기층.
 바로 들어가지 않고 주변을 살피자 다행히 침입자 확인용으로 설치해 둔 트랩이 무사했다.
 솔직히 안전한 대피소나 셸터를 두고 이런 위험지역까지 사람이 돌아다닐 가능성은 극히 낮았지만 조심해서 나쁠 것은 없었다.
 
 쿵.
 
 지혁은 아지트에 들어가고 나서도 방심하지 않고 창문으로 주변을 몇 번이나 탐색한 후에나 무기를 내려놓았다.
 그리고 안전하다고 판단되자 미니 버너에 주전자를 올려놓고 쇼파에 앉아 한쪽 귀에 이어폰을 끼고 라디오의 다이얼을 돌렸다.
 세상이 망한 후에 생긴 그의 습관이었다.
 
 [치지지직――]
 
 딸각
 
 [서울 정부는 여러분의 편입니다. 우리의 국군은 강하고, 여러분들을 보호할 것입니다. 부디 희망을 잃지 마십시오······.]
 
 딸각
 
 [대한민국 정부는 서울을 불법 점거한 쿠데타군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이들은 법과 질서를 무시하고 사적인 이익을 추구하고 있는 불법집단입니다······국민 여러분 국가를 지키기 위해선 우리 모두 단결해야 합니다······.]
 
 딸각
 
 [어둠이 내려앉은 시간~♪]
 
 정부의 탈을 뒤집어쓴 서울의 군벌과 부산에 위치한 정부의 프로파간다 방송을 지나 도착한 건 노래방송.
 지혁은 희망을 담은 노래를 들으며 눈을 감았다.
 어차피 해가 져서 칠흑 같은 어둠이 내려앉은 지금 그가 할 수 있는 건 이런 것밖에 없었다.
 
 보글보글
 
 적막에 잠긴 방은 물 끓는 소리가 노랫소리와 겹쳐 배경음처럼 들렸다.
 
 ***
 
 달이 뜨지 않은 어두운 새벽.
 암막이 쳐진 방 안에는 한 남자가 흐릿한 랜턴빛의 도움을 받으며 백팩에 짐을 집어넣는 중이었다.
 살림살이를 전부 챙기는 것을 보건대 아무래도 다른 곳으로 떠나려는 듯했다.
 왜 아침에 출발하지 않냐고 생각할 수 있지만 밝을 때 이동하면 총을 맞을 위험이 높아 지금 시대엔 색적이 어려운 밤에 이동하는 게 상식이었다.
 워낙 단촐하게 살아서일까. 짐정리는 순식간에 끝났다.
 지혁은 배낭을 메고 아지트를 나섰다.
 셸터까지 걸리는 시간은 대략 40분.
 엎어지면 코 닿는 거리였지만 약탈자에게 뒤통수를 맞기엔 충분한 시간이었기에 긴장을 늦추지 않았다.
 지금 세상에선 좀비보다 사람이 더 무서웠기 때문이다.
 
 ”후···.“
 
 그렇게 경계를 유지하며 이동하자 얼마 지나지 않아 바리케이트와 철조망으로 철저하게 막힌 도로와 철판을 용접해서 만든 방벽이 보였다.
 지혁이 현재 머무르는 화성 셸터였다.
 방벽 앞에 서자 곧 작은 창으로 내려다보는 시선이 느껴졌다.
 
 철컹-
 
 초소 경비와 안면이 있었기에 문은 바로 열렸다.
 안 쪽에는 총을 어깨에 맨 경비 3명이 있었다.
 
 ”형님. 무사하셨군요. 다행입니다.“
 
 머리를 짧게 친 20대 중반의 선임경비가 싹싹하게 인사를 건넸다.
 셸터에서 나름 권력을 가진 녀석치고 과도하게 친절하다.
 다른 출입자들에겐 사무적으로 대하는 것과 완전히 다른 태도.
 지혁은 그런 경비의 행동에 피식 웃고는 담배 한 갑을 던져줬다.
 
 ”역시. 형님. 수완이 대단하십니다. 그럼 이번에도 잘 피겠습니다.“
 
 당연하게도 친절의 비밀은 주기적으로 건네는 뇌물에 있었다.
 루팅으로 물자를 얻는 지혁의 씀씀이는 아주 컸기에 경비들은 항상 자신의 순번 때 지혁이 지나가기를 원했다.
 아무렇지 않게 툭툭 던져주는 물건의 가치가 상당했기 때문이다.
 실제로 담배만 해도 요즘 세상엔 구하지 못해서 안달인 사치품이었다.
 선임 경비의 월급으로도 구하기 부담될 정도로 말이다.
 
 ”특이사항은 없지?“
 ”네. 평소처럼 방벽에 좀비 몇 마리가 어슬렁거린 게 전부예요.“
 ”그래. 혹시 뭔 일이 있으면 바로 알려줘. 섭섭하지 않게 보답할 테니까.“
 ”맡겨만 주십쇼. 충성!“
 
 담배의 효과가 컸는지 선임경비는 경례까지 하는 시늉을 했다.
 지혁은 고개를 끄덕이고 셸터 안으로 들어갔다.
 
 ”선배. 누군데 그렇게 깍듯하게 하시는 겁니까? 나이도 비슷한 것 같은데 혹시 가족분이십니까?“
 ”가족은 무슨. 저 사람이 내가 아는 까마귀 중에 이거다. 이거. 이 바닥을 아는 사람들 사이에서 실력 좋기로 유명한 인간이야. 그리고 가장 중요한 건······.“
 
 선임 경비는 엄지를 세우며 말 끝을 흐렸다.
 
 ”중요한 건요?“
 “손이 무척 크다는 거지. 인사로 담배 한 갑을 주는 까마귀가 어딨겠냐. 그러니까 너도 괜히 검문할 때 꼬투리 잡지 말고 편의를 좀 봐줘. 어차피 윗분들이랑도 선이 닿아있어서 건드리면 피곤해져.”
 
 ***
 
 이른 새벽 시간이라 거리에는 사람을 찾아볼 수 없었다.
 간이 컨테이너와 판넬 건물을 지나 도착한 곳은 2층 주택이었다.
 커다란 자물쇠를 풀고 안쪽 경첩을 슬쩍 확인한다.
 다행히 외출 도중에 침입자는 없었던 것 같았다.
 
 ”얼마 전에 비가 왔으니까 물은 충분할 테고 배터리 잔량도 넉넉하네.“
 
 태양광이 설치된 집이라 얻을 때 값을 제법 많이 치렀지만 전기를 포기하기에는 잃는 게 너무 많았다.
 지혁은 욕조에 물을 붓고 쇠막대기처럼 생긴 간이용 전기온수기를 넣었다.
 그리고 물이 끓는 동안 전리품을 분류했다.
 우선 에너지바, 과자, 초콜릿, 사탕, 샴푸, 바디워시, 치약, 담배, 술, 건전지, 장갑, 신발, 손목시계 등의 자잘한 것들이 먼저 나왔고 부드러운 천으로 감싼 물건을 풀자 전자기기가 두 개 나왔다.
 모두 드랍템이라 물건은 새것과 다름없는 상태였다.
 판매할 물건과 아닌 것들을 나누자 욕실에서 빠져나온 따뜻한 증기가 뺨을 간지럽혔다.
 아무래도 물이 적당히 끓기 시작한 모양이다.
 
 촤악-
 
 따뜻한 온수로 며칠 만의 샤워를 즐기는 지혁.
 먼지와 기름때를 벗겨내고 욕조 안에 들어가자 외부탐색 동안 쌓였던 피로가 풀린다.
 지금이 아포칼립스라는 걸 생각하면 과분한 사치였다.
 그래도 유흥에 흥청망청 쓰는 다른 까마귀들보단 지혁처럼 위생과 컨디션을 관리하는 게 훨씬 나았다.
 언제 죽을지 모르는데 재산을 쌓아두면 뭐 하겠는가.
 지혁은 해가 뜰 때까지 충분한 휴식을 하고 슬슬 밖으로 나갈 준비를 했다.
 물건을 판매할 시간이었다.
 
 늦은 아침.
 
 시장에 들어서자 사람들이 꽤 많이 보인다.
 대부분이 활발하게 거래를 이어가고 있었는데 물건보다 자기 자신을 파는 사람이 더 많았다.
 물자가 부족하다 보니 넘치는 건 인력뿐이었기 때문이다.
 거리에 흔히 보이는 광경이 남자는 푼돈에 목숨을 팔고 여자는 배급권 한 장에 몸을 파는 것이었다.
 전문지식과 기술이 없으면 천대받는 세상이었다.
 가엾고 불쌍한 광경이었지만 지혁은 그들을 철저히 외면했다.
 철없던 시절 베풀었던 어쭙잖은 동정이 어떻게 돌아오는지 뼈저리게 경험해서였다.
 물에서 구해주면 보따리를 내놓으라고 하는 게 사람이었다.
 선현의 말씀대로 검은 머리 짐승은 거두는 게 아니었다.
 
 ”도착했네.“
 
 지혁은 붉은 글씨로 ‘전당포’라고 써진 유리문을 열고 들어갔다.
 그의 단골 전당포로 화성에서 알아주는 수완가가 운영하는 곳이었다.
 
 딸랑-
 
 ”잡상인 안 받는다···. 오! 김지혁이! 이번엔 어떤 물건을 가지고 왔나?“
 ”열심히 돌아다녀봤자 이 근처인데 평소랑 똑같죠. 뭐.“
 
 전당포의 주인인 노인은 지혁의 얼굴을 보고 쇠창살 너머에서 반겨줬다.
 수완이 좋은 그에게도 매번 많은 물자를 가져다주는 지혁은 거물 고객이었다.
 노인은 빵빵한 가방을 흘깃 보고 크게 소리를 쳤다.
 
 ”세희야! 귀한 손님이 왔으니까 차라도 한잔 내와라!“
 ”귀한 손님요?“
 
 차를 타라는 말에 안쪽 방문이 살짝 열린다.
 그러자 스무 살쯤 되어 보이는 예쁘장한 여자의 얼굴이 반쯤 보였다.
 전당포 노인의 하나뿐인 손녀, 이세희였다.
 
 ”아! 아저씨가 왔구나! 바로 타올게요!“
 ”쯧쯧. 이놈아! 얌전히 좀 다녀라! 말만한 처녀가 저렇게 천방지축이라니. 누가 저 얘를 데려갈련지.“
 
 지혁은 당사자가 있는 자리에서 칭찬을 하기도, 험담을 하기도 애매해서 그냥 입을 다물었다.
 자신은 뭐가 됐든 거래만 하면 되었으니 말이다.
 집에서 미리 판매품목을 분류해 놔서 물건은 빠르게 종류별로 선반 위에 올라갔다.
 그렇게 물건 쌓일수록 전당포 노인의 얼굴에는 흡족한 미소가 짙어졌다.
 배낭이 텅텅 비었을 때. 세희가 차를 받침대에 받쳐 가져왔다.
 
 ”와. 이번 물건들도 최상품이네요. 진짜 밖에 나가면 이런 게 굴러다녀요? 다른 아저씨들은 이거에 반의 반도 못 가져오던데. 품질도 들쭉날쭉하고요.“
 ”이 녀석아! 그게 바로 실력이라는 거다. 이 놈이 그런 어중이떠중이들이랑 비교할 군번이더냐.“
 ”아저씨가 실력 좋은 건 다 알죠. 그래도 몇 년이 지났는데 아직도 물건이 남아있다는 게 신기해서요. 분명 셸터 근처는 물자의 씨가 말랐을 텐데. 대체 얼마나 멀리까지 나가길래···.“
 ”쓰읍.“
 
 노인은 세희의 말에 경고하듯 소리를 냈다.
 까마귀에게 물건의 출처를 묻는 건 금기였기 때문이다.
 상식적으로 밥줄을 건드는 질문을 누가 좋아하겠는가.
 세희는 그제야 정신을 차린 건지 아차 하는 표정으로 사과했다.
 
 ”아저씨, 죄송해요. 그럴 의도가 아니었는데···.“
 ”괜찮아. 저번에 이게 필요하다고 했지?“
 
 선반 위의 기초화장품을 슬쩍 밀어주자 시무룩하던 입꼬리가 씰룩거린다.
 당장이라도 챙기고 싶은 눈치다.
 하지만 할아버지의 눈치를 보느라 망설이는 듯했다.
 지혁은 그런 마음을 안 다는 듯 차를 마시고 세희의 솜씨를 칭찬했다.
 
 ”흠흠. 차가 맛있네요.“
 ”쯧. 뭘 눈치를 보는 거냐. 어른이 주는 선물은 거절하는 거 아니다.“
 “아저씨 최고!”
 
 노인의 허락이 떨어지자 만세를 외치며 화장품을 챙기는 세희.
 그 순수한 행동은 전당포밖의 아이들과 완전히 다른 세상에 사는 것처럼 느껴졌다.
 화성 셸터에서 노인이 손녀를 금지옥엽처럼 애지중지하며 키웠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배급권 한 장에 치마를 걷는 또래들을 생각하면 화성 셸터에서 세희는 공주님이나 다름없었다.

댓글(42)

시골누렁이    
오 뭔가 느낌좋은데여
2024.05.15 20:13
먕코    
초반 분위기는 좋네요 주인공 외에 다른 각성자는 없는건지 또 일부 물건들의 경우 제조일자나 유통기한 등이 표기되어 있을텐데 루팅된 물건들은 어떤지 궁금하네요. 3년이 지났는데 화장품 같은 제품들 유통기한이 넉넉하다면 의심할 만도 한데...
2024.05.17 21:49
샤인네스    
잘보고갑니다
2024.05.18 08:49
gr*****    
오 진짜 재미있게 읽고 갑니다. 역시 조회 수가 급등하는 작가님이 다르시네요 많이 배우고 합니다. 즐겁고 좋은 날 되시길요^^
2024.05.19 19:24
hy*****    
오 특이하게 좀 지난 시점부터 시작이네요. 흥미롭습니다
2024.05.24 12:02
탈퇴아이디    
말만한 처녀가 저리 천방지축이라니................... 와 이 고농도의 딸피향.....
2024.05.27 13:04
musado0105    
잘 보고 갑니다. 건 필 하세요^^*
2024.05.29 20:34
똘이똘이    
어떻게 1화에서 역따음표 검수를 못해요? 믿고 거름
2024.05.31 02:09
라라.    
아포칼립스 좀비라 일단 봄
2024.06.01 23:07
풍뢰전사    
머리속이 꽃으로 가득찬 여자네요 저런 세상에서 저게 가능한가 ?
2024.06.02 19: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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