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화. 프롤로그
“하아아, 포장재는 다 옮겨놨고. 이제 오늘 할 일은 이걸로 끝났나?”
스티로폼 포장재 수백 박스를 옮겨 온 나는 구슬땀을 닦아내며 방바닥에 드러누웠다.
이제 와서 새삼스럽지만 대한민국에는 전염병이 돌고 있다.
코로나 얘기가 아니다. 그보다 더 고대부터 전래되어 아직도 퇴치되지 않은 불치병이다.
놀랍게도 그 전염병은 은퇴하고 여유로운 50, 60대 장년 부부들에게만 전염된다고 전해 내려져 온다. 그 전염 매개체로는 ‘나는 자X인이다’, ‘6시 내 X향’ 등이 있다.
나는 그걸 ‘귀농병’이라 부른다.
평생 서울 인근에서만 살면서 그 흔한 주말 농장 체험조차 안 해보신 부모님이 갑자기 웬 바람이 들어서 땅만 4,000평짜리 샤인머스캣 농장을 차리셨는지 모르겠다.
······아니, 사실 안다. 평소에 어머니께 다단계 물품 떠넘기던 그 아주머니가 ‘은퇴해서 유유자적 쉽게 돈 버는 방법’이라며 이상한 소리를 흘려 넣은 거겠지.
두 분은 그렇게 귀농의 큰 뜻과 낭만을 품고서 ‘공기 좋고 물 좋고 평화롭고 인심 좋다는’ 시골로 내려가셨고.
‘요즘 젊은 것들에게 인기가 좋아 없어서 못 판다는’ 샤인머스캣 농장 설비를 큰돈 들여 벌컥 구매하셨다.
허리도 안 좋은 분들이 무슨 포도 농사냐는 말에 요새는 장비가 잘되어 있어 괜찮다고 호언장담하시더라.
그리고 정확히 1년 4개월 뒤.
-‘미안해, 아들! 우리는 도시 체질인가 봐~^^”
······같은 문자와 함께 그 농장은 내 몫으로 떠넘겨졌다.
마침 알맞게(?) 코로나 사태로 실직하고 떠돌던 아들.
마침 때맞춰(?) 고된 농사일로 작살나고 있던 부모님의 허리.
그리고 생각보다 짜증 나는 농촌의 모기떼와 벌레떼, 생각보다 성가신 가지치기와 비료 주기 등등의 요인이 맞물린 환상의 결과였다.
“후우우, 너도나도 샤인머스캣 농사짓는다고 설쳐대기 시작하니까 포도값이 똥값이 됐잖아!”
냉장고에서 꺼낸 맥주캔을 따며 한숨을 내쉬어도 들을 사람 하나 없다.
창창한 20대 초반에 갑자기 서울 생활 청산하고 웬 포도밭에 자리 잡은 지도 약 5년. 아마 내가 이 동네 평균 연령을 혼자 5년 이상 깎아 먹고 있지는 않을까?
원래라면 천상 도시 사람인 나도 팔자에 없던 농사 따위 1, 2년 만에 때려치우는 게 순리였겠지만.
안타깝게도 코로나 때까지는 샤인머스캣이 ‘요즘 젊은 것들에게 인기가 좋아 없어서 못 판다는’ 물건이 맞았다.
즉.
-“수, 순매출이 이만큼 나온다고요? 하하, 하하하! 샤인머스캣 농사만 한 20년은 지어야겠는데요!”
나도 꽤나 재미를 보았다.
딱 시작하고 3년까지는.
그러나 실직하고서 슬쩍 찌끄려 보았던 웹소설도 ‘조회수 14회’ 정도 처참한 성적으로 막을 내린 내게 그때의 성공은 너무 달콤했다.
마치 초반에 한창 농사 잘되던 샤인머스캣의 그 맛처럼.
“성공이란 게······ 마약이지. 마약이야······. 나라에서 사람들 성공 못 하게 막아야 하는 거 아냐? 대한민국 경찰들 하는 게 뭐지?”
그 맛을 못 잊어서 5년째 이 짓거리에 물려 있는 참이다.
그래도 5년이 지나니 이 짓도 슬슬 할 만해졌다.
웬 젊은 총각이 왔다고 텃세 부리던 이웃들도 이제는 안쓰러운 눈길과 함께 감자니 닭이니 하는 물건을 물물교환해 주고.
나 역시 이제 농약 치고, 물 주고, 가지 치고 하는 일에 익숙해져서 혼자 짓는 농사라도 부담이 확 줄었다.
물론 한창 수확철이 되면 혼자서 다 감당 못 할 노동이 몰아닥친다. 그럴 때면 (아주 살짝) 미안해 보이는 얼굴의 부모님과, 부모님이 끌고 온 설렘 가득한 표정의 예비 귀농인들이 일을 도와주고 가니 상관없지만.
“그러고 보니······ 곧 있으면 수확철이네.”
오랜만에 나 혼자 사는 이 시골집이 시끄러워지게 생겼다. 그나마 겨우 만끽하던 귀한 여유 시간도 이제는 사라져가게 되겠고.
띵동.
“아, 왔다!”
이렇게 취미를 즐길 시간도 사라진다는 뜻이다.
“김이상 씨 맞으시죠? 여기 싸인 좀 부탁드릴게요.”
“아, 예. 예. 감사합니다!”
그래서는 안 될 일이지.
나는 즐거운 마음으로 우체국 직원에게 사람 좋은 미소를 지어 보인 뒤 들어와 곧장 택배 박스를 뜯었다.
그 내용물은 다름이 아닌, 올해 4분기 최고 기대작 오픈월드 잠입액션 RPG ‘임모털 오더: 오리진’의 예약 구매 한정 패키지다!
미국 독립 혁명, 남북전쟁, 양차 세계 대전 등 굵직굵직한 역사적 사건의 배후에 놓인 비밀 결사에 맞선 주인공의 투쟁을 그린 황숙소프트의 명작 시리즈, 그 대망의 프리퀄.
이번 편에서 드디어 시리즈 내내 꽁꽁 감춰오고 떡밥만 잔뜩 뿌려댄 그 비밀결사의 숨겨진 기원과 진실을 밝힌다고 들었다. 그 스토리의 스포일러를 방지하기 위해 벌써 이틀간 인터넷에 접촉 자체를 하지 않았다.
스르륵. 탁.
아, 딱 봐도 공들인 패키징은 언박싱하는 특유의 맛이 있다.
-‘바야흐로 16세기, 엘리자베스 여왕이 다스리던 잉글랜드는 북미에 최초로 영구적인 식민지를 건설하기 위해 로어노크 섬에 개척민들을 파견한다. ‘우리 세계에서’ 그 시도는 처참한 실패로 끝났다고 알려져 있다. 그러나 과연 그 배후의 진실은 어떠할 것인가······.’
캬. 한글화도 완벽하다. 오늘부로 배급사 방향으로 세 번씩 절한다.
심지어 작중 배경이라는 로어노크 식민지와 인근의 상세한 지도와 설명문까지 예스러운 느낌이 나게 동봉되어 있다.
아주 충실하다. 이 정도면 만족스러운 구성이다.
안 그래도 포털사이트에 ‘샤인머스캣’이라고 치면 ‘샤인머스캣 노맛’ 따위 천인공노할 연관검색어가 뜨는 포도 아포칼립스 상황에 무려 거금 144,000원을 들였다.
고로 이 게임은 재미없어서는 안 된다.
아니, 재미없을 수가 없다.
나는 곧장 패키지에서 나온 CD키를 입력한 뒤 군침을 삼켰다. 귀가 좀 많이 크신 황숙님의 얼굴이 큼직하게 박힌 황숙소프트의 로고가 나오고, 웅장한 BGM이 가슴을 설레게 한다.
이윽고 나타나는 검은 화면. 한국어 더빙을 켜겠냐는 말에 ‘예’를 택하자 선택창 위로 불길과 함께 자막과 음성이 떠오르기 시작한다.
-‘그대는 충분히 준비되었다.’
그래. 나 준비 많이 됐다.
-‘그대에게는 지금껏 쌓여 온 비밀 너머로, 수백 년의 세월 너머로 나아가 진실을 엿볼 자격이 있다.’
144,000원 들였으면 없던 자격도 생겨야 하는 게 인지상정이다.
-‘시대를 넘어 불멸할 자여, 이제 새로운 세계가 그대를 부른다.’
-‘신세계로 이주하기.’, ‘포기하기.’
······신세계로 이주하기?
이상하군. 원래 ‘임모털 오더 시리즈’는 전통적으로 시작화면에다 ‘결사에 맞서기’라는 버튼을 박아넣는 게 시그니처인데.
그래, 뭐. 프리퀄이니까 이런 쌈박한 변화 한 번 주는 것도 나쁘지는 않다. 그렇게 생각하며 마우스를 움직이는 순간이었다.
파직.
왠지, 불길한 생각이 뇌리를 스치고 지나간다.
왠지······ 왠지 말이다.
보통 웹소설 같은 걸 보면 이런 데서 뭔가 불길한 일이 일어나지 않나? 내가 이 시작 버튼을 누르면 화면 속으로 빨려 들어간다든지 하는 그런 일 말이다.
“하······ 수확철 얼마 안 남았다고 나도 무슨 이상한 생각을.”
딸깍.
······
······
······
거봐라, 역시 아무 일도 없잖아.
순간 무슨 멍청한 생각을 한 건가 싶어 스스로의 머리를 쥐어박으며 몸을 일으켰다. 머리에 피가 안 돌아서 그런가 싶어서 스트레칭도 하고.
다시 화면을 돌아보자 검은 바탕에 단 한마디만 적혀 있었다.
-‘······그대는 분명 동의했다.’
그리고 그대로 컴퓨터가 꺼졌다.
“······.”
딸깍. 딸깍.
“······.”
다시 안 켜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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