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혼대법은 성공했다.
감았던 눈을 뜬 곳은 대한민국의 서울이었으니까.
“오빠아!”
누군가가 나를 끌어안고 울고 있다.
“물···좀···”
목이 탔다.
천마쟁탈전에서 죽을 고비를 몇 번이나 살아남았다.
그래도 당황하지 않은 나였다.
하지만 갑작스레 생긴 여동생 앞에서는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내공을 슬쩍 움직여본다.
‘모두 사라졌군.’
아직 팔다리는 움직이지 않았다.
하지만 손가락 발가락은 꼼지락거린다.
내공은 사라졌지만 다행히도 몸의 기능은 정상적인 모양이었다.
천마 나이로 72세.
무림에 끌려가기 전 나이로는 28세.
갑자기 여동생이 생겼다.
“오빠. 여기 200년 된 산삼을 아버지가 보냈어.”
동생이 커다란 쟁반에 산삼을 담아왔다.
1000년 이하로는 거들떠도 보지 않던 산삼.
하지만 성의를 생각해서 꼭꼭 씹어먹는다.
“고맙다고 전해줘. 아버님은 많이 바쁘신가보지?”
“알잖아. 폴란드 공장때문에 아빠 요즘 눈코뜰새없이 바쁜거. 세계경영도 좋지만 몸이나 상하지 않을까 걱정이야.”
방도 어마무시하게 크다.
나는 재벌집의 아들로 환생한 모양이었다.
귀령사혼장로가 제법 충성심을 발휘한 모양이다.
“세계경영? 아버님이 어디 재벌이신가 보지?”
“오빠! 머리를 너무 심하게 다쳤나봐! 정말 아무것도 기억이 안나는거야?”
동생이 걱정스런 얼굴로 내 이마를 쓰다듬는다.
갓 스물이나 넘었을까?
아직도 젖살이 빠지지 않은 앳된 얼굴이었다.
“때때로 기억이 나지 않을때가 있어. 솔직히 네가 누군지 기억도 잘 안나.”
나는 이마를 찌푸리고 말했다.
기억상실증은 이런때는 만병통치약이다.
“너무 걱정마. 천천히 좋아질거야. 난 오빠가 깨어난 것 만으로도 행복해.”
처음보는 동생이 봄처럼 미소지었다.
처음 보는 사람이 내게 건네는 마음에 내 마음에도 봄이 피어났다.
“고맙다.”
“딱딱하게 말하지마.”
“고마워.”
“오빠는 꼭 시켜야만 말을 듣더라.”
쓸데없는 소리를 하는건 무림이나 이곳이나 같은 모양이었다.
나는 아버님이 뭐하는 사람인지 물었는데 아직도 대답을 듣지 못하고 있다.
내가 누구인지 궁금하지만.
내가 누구인지 묻는것은 너무 한심한 관계로.
주변인부터 천천히 탐색한다.
그러면 나에 대해서도 곧 알게 될 것이다.
“아버님이 외국에 자주 나가시나봐?”
“일년에 200일은 외국에 계시잖아. 오빠도 이제 곧 경영에 참여해서 아빠를 도와야 할텐데 이렇게 돼서 아빠가 실망이 커.”
이렇게 됐다는건 아마 죽었다는 것.
귀혼대법이라는 건 싱싱한 갓 죽은 사람의 몸으로 영혼을 보내는 거니까.
이 몸의 주인은 아마도 큰 사고를 당했거나, 죽음에 준하는 자해를 했을 것이다.
“경영이라···”
경영 따위를 할 생각은 없다.
천마생활 50년.
천마가 돈벌이 따위를 한다는 것은 적성에 맞지 않았다.
천상천하 유아독존.
말 그대로 놀고먹는 직업이 천마다.
“의사 말로는 한달이면 걸을 수 있을거래! 오빠! 듣고 있어? ”
“응.”
어쨌든 재벌집 아들로 환생한 모양이다.
나쁘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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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V에서 유치한 멘트의 광고가 흘러나왔다.
아무래도 나는 꽤나 과거로 회귀한 모양이었다.
차입경영으로 덩치를 불리다 IMF때 사라진 거대기업 세우.
대한민국의 1년 국가예산이 84조였던 당시 86조의 빚.
20조원의 분식회계.
추징금만 17조원.
IMF와 함께 몰락한 대한민국 재계 2위의 재벌 세우.
세우전자의 광고가 흘러 나오는 것을 보니 아무래도 나는 2000년 이전으로 온 모양.
예상보다 20년은 족히 이른 시간대로 온 것 같다.
“아빠가 오빠한테 전자나 자동차를 맡긴다고 했는데···”
TV를 보던 동생이 아쉬운 모양으로 입을 달싹거렸다.
“뭐?”
“아무래도 외부인보다는 가족이 믿을만하잖아.”
“그러니까···아버님이 김우성 회장이라고?”
“정말 아무 기억도 안나는거야? 오빠가 그림이나 그린다고 아빠한테 계속 반항하던것도?”
안타까운 표정으로 나를 바라본다.
나는 아무래도 망할 재벌의 집안에 환생한 모양이었다.
“지금이 몇년이야?”
“1997년 이잖아. 그것도 기억못해?”
X됐다.
나는 X됐음이 분명했다.
# # #
이 아이가 이렇게나 강단이 있었나?
김우성은 물끄러미 아들을 바라보았다.
하나밖에 없는 아들.
예술병에 빠져서 그림에 미쳐있던 아들이었다.
호부견자라더니 딱 그 꼴이었다.
자본금 500만원으로 창업해서 재계 3위까지 성장시킨 자신이다.
지구 전체를 돌며 세계를 경영하는 김우성이다.
스스로도 자신을 영웅이라 생각한다.
세계를 경영하는 자신을 일컬어 사람들은 샐러리맨의 신화라고 불렀다.
중국, 몽골, 인도, 우즈벡, 루마니아, 폴란드까지 자동차공장을 확장했다.
서양인들은 짧은 시간에 세계를 호령하는 그를 ‘킴키즈 칸’이라고 불렀다.
정치인은 임기가 있지만 재벌은 임기가 없다.
즉 김우성은 대한민국의 서열 3위.
그리고 곧 사성과 KG를 제치고 재계 1위가 될 남자였다.
그런 그에게 재계 2세들과의 교류도 제대로 하지 못하고 방에만 틀어박힌.
며칠이고 햇볕도 쬐지 않고 그림만 그려대던 아들은 아픈 손가락이었다.
정신적으로 문제가 있나 걱정할때도 있었다.
“진심이냐?”
“진심입니다. 세우증권을 맡겨 주십시오.”
휠체어 위에 앉은 아들은 단호했다.
김우성은 잠시 생각에 잠긴다.
대형트럭에 추돌당한 교통사고.
심정지까지 왔다가 확정된 죽음속에서 되살아난 기적적인 상황.
그런데 깨어나자마자 제대로 움직이지도 못하는 주제에.
경영 참여를 요구하고 있다.
“일단 몸이 다 나은 후에 다시 이야기하자.”
“안 됩니다. 지금도 움직일 수 있습니다.”
그림에 미쳤던 놈은 지금 경영에 미친 모양이었다.
아니, 어쩌면 교통사고로 정신이 잘못된 것인지도 모른다.
“안된다고 했다.”
“당신은 안된다고 했지만, 나는 안된다고 한 적이 없습니다. 된다, 안된다는 내가 결정하는 것입니다. 나는 해야합니다.”
아들의 눈이 퍼렇게 빛난다.
김우성은 한편으로 위화감을 느끼면서도 한편으로 뿌듯했다.
감히 자신 앞에서도 당당할 수 있는 저런 기개.
저것은 자신이 아들에게 원했던 바로 그것이었다.
하나뿐인 아들.
언젠가는 물려줘야할 기업이다.
“과장부터 시작해라. 로얄패밀리라고해서 아무 경력도 없이 남의 위에 설수는 없다.”
“아니오.”
김무혁은 단호했다.
이런 면은 아버지인 자신을 닮았다고 생각한다.
“실력이 없으면 누구도 인정하지 않는다. 그리고 실력이란 것은 검증이 필요하다. 네가 그림을 그리겠답시고 낭비한 시간들을 경영수업에 쏟아부었다면, 지금 네 말을 받아들일 수도 있겠지. 하지만 지금은 네가 사장급으로 가봐야 허수아비가 될 뿐이다.”
김우성 역시도 단호하다.
인간은 교활하고 냉혹하다.
김무혁은 아직 세상모르는 어린 호랑이일 뿐이다.
제아무리 로얄패밀리라고 해도 닳고 닳은 여우들에게 휘둘릴 것이었다.
그런 꼴을 볼 수는 없었다.
“사장을 달라고 한 적은 없습니다. 이사회 의결없이 갈 수 있는 가장 높은 직급을 원합니다.”
“이유는?”
김우성은 이미 결심했다.
계열사 하나쯤이야 망해도 세우에는 아무런 타격이 없다.
그것이 재계 3위 그룹 세우.
세우를 물려받을 아들 김무혁의 경영경험을 위해서라면 그 정도는 지불할 수 있다.
“말해라. 합당하다면 내게 세우증권을 주겠다.”
김무혁이 낙하산으로 세우증권에 간다하더라도 회사는 무너지지 않는다.
그것이 대기업의 시스템이다.
경보가 울릴때면 언제든 김무혁을 제지할 수 있다.
“단순한 호기심이냐? 아니면 경영이라는 놀이가 하고싶은게냐?”
대답이 없는 아들에게 다시 묻는다.
김우성은 아들의 의도가 알고 싶을 뿐이다.
침묵을 지키던 김무혁이 마침내 대답했다.
“대한민국과 세우를 구하려는 것. 그 뿐입니다.”
“허···”
김우성은 헛웃음을 지었다.
그리고 이내 큰 소리로 웃어대기 시작했다.
“하하하하! 하하하하! 대한민국이라! 대한민국을 구한다?하하하하! 거창해서 좋구나.”
1년 뒤 대한민국에는 IMF가 온다.
환율은 3배로 치솟고 대한민국이라는 국가는 부도가 난다.
그리고 세우를 비롯한 수십개의 재벌이 무너진다.
수많은 중소기업이 도산하고, 국민들은 거지가 된다.
가장은 실직하고, 삶의 가장 비참한 하층까지 내몰리게 된다.
‘당신은 역적이 되어 한국을 쫒겨나고, 다시는 돌아오지 못하고 타국에서 죽는다.’
김무혁은 마음속으로 김우성에게 말한다.
김우성을 위한 것은 아니다.
다만 대한민국이 그런 고통을 겪는 것은 한 번으로 족했다.
IMF까지 1년.
김무혁은 그것을 막고자 할 뿐이다.
# # #
세우증권의 로비는 아침부터 분주했다.
직원들 모두 2층의 계단에서 1층 로비를 훔쳐보고 수군거리고 있었다.
“28살짜리가 본부장이라니 말이 되냐?”
“회장님은 무슨 생각인거지?”
“애초에 경영쪽도 아니고 미대출신 아니냐?”
“미대출신이니까 괜찮아. 미대 탈락이면 위험하지만···”
1층에는 임원들이 어슬렁거리고 있다.
로비 정문의 양쪽으로 두 줄로 선 임원들을 보자 기가 찬다.
“눈도장 찍으려고 저거 줄서는거 봐라.”
김우성회장의 외동아들 김무혁.
로얄패밀리라는 것 외에는 아무런 타이틀도 없는 남자.
그가 대한민국 증권업계 1위인 세우증권의 본부장으로 취임하는 첫날인 것이다.
“미래전략 연구본부장이라니··· 자리 만든다고 고생했겠네.”
“어차피 얼굴마담이지 뭐. 스쳐갈건데 우리같은 서민들은 엮이지나 않게 조심하는 거지 뭐.”
배가 아프다.
하지만 닿을 수 없는 존재.
질투조차 나지 않는 신분의 격차.
-끼이익!
로비의 거대한 유리문이 열리고.
휠체어 한 대가 굴러들어 왔다.
“반갑습니다. 내가 김무혁입니다.”
휠체어.
그리고 환자복.
한 쪽 팔과 다리에는 하얀 깁스를 한 채로.
조금은 가냘퍼보이는 몸을 가진 젊은 남자가 환하게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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