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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롤로그+첫 번째 봄-별내리 시골집

2024.05.17 조회 35,941 추천 519


 프롤로그
 
 이따금씩 어린 시절 꿈을 꾸곤 한다.
 
 여름방학이면 시골의 할머니 댁을 놀러갔었다.
 
 그늘 진 마당에서 할머니가 잘라 준 수박을 먹고.
 
 할머니의 무릎을 벤 채 누워 있으면 산들바람이 기분 좋게 내 뺨을 어루만졌다.
 
 살랑살랑 할머니의 부채 바람을 맞고 있노라면 저도 모르게 잠이 솔솔 왔다.
 
 그러다 풀벌레 우는 소리에 눈을 뜨면 어느덧 밤이 내려 있었다.
 
 까만 하늘에는 별들이 아름답게 수놓아 나를 반겨주었다.
 
 내게 무릎을 내어준 할머니는 그때까지도 자리를 지키고서 꾸벅꾸벅 졸고 계셨다.
 
 부스스 일어나 밤하늘을 보고 있을땐, 내가 마치 우주의 한 조각이라도 된 것만 같은 착각에 빠지곤 했다.
 
 그 당시에는 몰랐다.
 
 그때의 모든 것들이 내게 얼마나 큰 치유가 되어 주었는지를.
 
 힐링.
 
 그것이 지금을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얼마나 필요한 것인지를.
 
 26살의 봄.
 
 문득 그때가 그리워 할머니도 없는 옛집을 다시 찾아갔을 때.
 
 난 상상도 못할 일들에 휘말리게 됐다.
 
 1화 첫 번째 봄-별내리 시골집
 
 사는 게 참 퍽퍽하다.
 
 뉴스를 틀면 허구한날 속 뒤집어지는 사건 사고들만 가득이다.
 
 전쟁, 연쇄살인마, 치정살인, 대기업 임원의 갑질, 전세 사기, 부실시공 건물들, 성희롱으로 인한 자살, 거짓 미투, 보이스 피싱 등등.
 
 하지만 그런 문제들에 신경을 쓰기에는 사람들이 현실을 살아내기만도 벅차다.
 
 집값에, 물가는 계속해서 오르는데 민생을 책임져야할 정치인들은 제 밥 그릇 지켜내기만 급급하다.
 
 
 
 “그들은 민생에 관심 없어요. 지금 대한민국이라는 나라가 굴러가는 게 기적이에요.”
 
 
 
 전(前) 보좌관 출신인 어느 회사원의 증언이다.
 
 오죽 답답하면 익명을 요청해 인터넷 방송에서 저런 말을 했을까.
 
 그럼에도 사람들은 정치권에서 서로 편을 갈라 내가 옳니, 네가 틀리니 싸워대느라 바쁘다.
 
 하구한날 혈투를 벌이는 게 어디 정치권 뿐이겠는가?
 
 남녀 사이에서.
 
 노소 사이에서.
 
 엄마와 아빠가.
 
 친가와 처가가.
 
 의사와 한의사가.
 
 국가와 국가가.
 
 하루가 멀다하고 서로를 비방하는 기사들, 커뮤니티의 글들이 우후죽순 올라온다.
 
 그야말로 대 혐오의 시대.
 
 하루라도 누군가가 다른 누군가를 혐오하지 않고서는 살 수 없는 것만 같다.
 
 ‘정지안’도 그런 시대를 살아가는 수많은 이들 중 한 명이었다.
 
 그는 고등학교 2학년이 되었을 때 부모님을 사고로 여의고 고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군대부터 다녀왔다.
 
 세상에 홀로서야 하는 입장에서 대학은 고사하고 당장 먹고 사는 문제가 급급했기에, 군 문제부터 해결했다.
 
 그 곳에서는 적어도 재워주고 먹여주기는 하니까.
 
 부모님이 돌아가시면서 그의 앞으로 떨어진 보험금이 2억 정도 되었지만, 그 돈을 어떻게 써야 할지 알 수 없었기에 묵혀두기로 했다.
 
 군 생활을 하며 정지안은 매달 받는 월급을 최대한 쓰지 않고 모았다.
 
 그렇게 1년 6개월의 복무기간을 마치고 사회로 나오니 통장에 1,500만원이 더해졌다.
 
 이제 본격적으로 밥 벌어 먹고 살 걱정을 해야했다.
 
 운이 좋게는 그는 서울의 작은 중소기업에 바로 입사할 수 있었다.
 
 해서, 회사 근처 옥탑방에 세를 얻어 들어갔다.
 
 보증금 500에 월세 40.
 
 수도권에 있는 옥탑방 치고 나름 저렴하게 들어온 것이다.
 
 그렇게 4년 동안 지옥의 좆소 생활이 시작됐다.
 
 거의 가족 경영을 하고 있는 이 회사에서 정지안은 홀로 3인분의 일을 해결해야 했다.
 
 주말 같은 것도 없었다.
 
 언제든 부르면 튀어나와 사장님의 대리운전을 하거나, 사모님의 쇼핑 짐꾼을 하거나, 이사님의 등산 친구, 술친구를 해야했다.
 
 ‘이건 사람 사는 게 아니야.’
 
 그 동안 지독한 스트레스로 역류성 식도염과 수면장애, 원형 탈모, 과민성대장증후군 등등 별의별 병을 다 얻었다.
 
 뿐만 아니라 한 번은 회사에 들어온 어마어마한 물류를 쉬지도 못하고 나르다가 크게 다쳤다.
 
 이후로 허리 디스크에 시달렸지만 산재 같은 건 꿈도 못 꿨고 위로금으로 10만원을 받는 게 전부였다.
 
 문득 자신에게 인수인계를 해주고 퇴사하던 사수의 마지막 말이 떠올랐다.
 
 
 
 “도망가.”
 
 
 
 결국 정지안은 그 말을 따르기로 하고 퇴사했다.
 
 심신은 처참하게 망가졌지만, 그의 꼼꼼한 절약정신으로 인해 4년 간 통장의 돈은 6,000이 늘어났다.
 
 꾸준히 이자가 붙어 총 2억 8천이 조금 넘어버린 돈.
 
 그것을 쥐고 무얼 해야 좋을지 고민하면서 열흘을 보냈다.
 
 부모 없이 어떻게든 하루하루를 살아내려 쉬지 않고 달려왔던 지난 날들이 툭하면 주마등처럼 스쳐지나갔다.
 
 그럴 때 마다 심한 탈력감이 정지안을 덮쳤다.
 
 문득 그는 깨달았다.
 
 지금은 내가 뭘 할 때가 아니다.
 
 정신부터 건강하게 만들어야 한다.
 
 ‘정신과에서 상담을 받을까?’
 
 하지만 써본 적은 없고 늘 모아오기만 했던 정지안인지라 큰 돈이 나갈지도 모른다는 사실에 망설여졌다.
 
 그럼 돈 없이 정신을 치유할 방법은 없는 걸까?
 
 고민하던 와중 갑자기 떠오른 지난날의 광경.
 
 찌르르르- 찌르르르-
 
 풀벌레 우는 소리에 취해 아름다운 별들이 빼곡하게 박혀있던 밤하늘을 보면 시간 가는 줄 모르고서 마냥 행복했었다.
 
 시원한 밤바람도 기분이 좋았고, 투박한 밥그릇에 할머니가 떠 놓은 보리차도 참 맛있었다.
 
 ‘······가볼까?’
 
 할머니가 돌아가신지도 9년.
 
 외동인 아버지는 할머니의 집을 팔지 않고 정지안의 앞으로 물려주었다.
 
 
 
 “아빠의 추억이 고스란히 남아있는 곳이야. 아빠도 언젠가는 죽을 거 아니냐. 그때 아빠가 그리우면 거기 가서 추억하고 그래라. 꼭 그런 걸 떠나서, 너한테도 좋은 기억이 많은 곳이잖아.”
 
 
 
 그랬다.
 
 생각해보니 정지안에게는 낡은 집이 하나 있었다.
 
 부모님이 돌아가신 이후로 한 번도 가보지 않았지만, 할머니의 시골집은 정지안의 것이었다.
 
 ‘가보자.’
 
 만약 손을 좀 대서 살만하다 싶으면 몇 달 정도 눌러 있어도 되지 않을까?
 
 그러면 월세도 안 나가고 썩 괜찮을 것 같았다.
 
 마침 옥탑방 계약도 이번 달로 연장 2년을 꽉 채운다.
 
 모든 상황이 정지안을 그곳으로 떠미는 것만 같았다.
 
 마음을 굳힌 그는 그날로 할머니의 집을 향해 떠났다.
 
 
 
 **
 
 
 
 낮은 돌담 너머로 넓은 마당과 낡았지만 제법 규모가 큰 저택이 보인다.
 
 후우웅-
 
 갑자기 불어온 칼바람에 모래가 눈에 들어갔다.
 
 “윽.”
 
 정지안이 걸치고 있던 안경을 벗고 눈을 비볐다.
 
 시력이 지독하게 나쁜 그는 안경 없인 눈 뜬 장님이었다.
 
 끼이익-
 
 몸살을 앓는 철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선 정지안의 얼굴에 그리운 미소가 피어났다.
 
 모든 것이 기억 속의 모습 그대로였다.
 
 정면으로 넓게 펼쳐진 대청마루를 중심으로 해서 양옆에 달려있는 방들.
 
 큰 안방 하나와 작은 방이 두 개.
 
 그리고 조금 떨어진 곳에 방 두 개와 화장실이 달린 별채가 있었다.
 
 마루에 엉덩이를 걸치니 할머니와 아버지의 온기가 느껴지는 것만 같았다.
 
 아버지가 어렸을 때 이 대청마루를 좋아해서 온 종일 붙어살 정도였다고 할머니는 말씀 하셨었다.
 
 “이상하네.”
 
 잠시 감상에 빠져있던 정지안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혼잣말을 뱉었다.
 
 오래도록 방치된 집 치고는 마루에 먼지 한 톨이 없었다.
 
 그러고 보니 마당도 깨끗하고 건물 구석구석 사람의 손을 타고 있는 듯한 흔적이 보였다.
 
 그가 부엌으로 향했다.
 
 불을 떼는 아궁이가 달린 주방도 깔끔한 모습이다.
 
 누군가 관리를 해주지 않는 이상 이렇게 유지될 수가 없었다.
 
 정지안이 의아함을 느끼고 있을 때였다.
 
 “거 안에 누구요!”
 
 카랑카랑한 목소리가 마당에서 터졌다.
 
 깜짝 놀란 그가 얼른 부엌에서 나오니 낯익은 얼굴의 노인이 노한 기색을 띤 채 서 있었다.
 
 노인은 정지안을 보자마자 터벅터벅 걸어오며 삿대질을 해댔다.
 
 “아니 뉘시길래 주인도 없는 집에 마음대로 턱턱 들어오는 거요! 대관절 도둑이 아니고서야······ 응?”
 
 호통 치던 노인의 고개라 옆으로 기울어졌다.
 
 “너 혹시······ 꽃님이 손자 아니냐? 그 이름이······.”
 
 “영수 할아버지! 저 지안이예요!”
 
 “아아아! 지안이! 정말 지안이냐? 응?”
 
 “네.”
 
 “아이고~ 이 녀석아!”
 
 그제야 정지안을 알아본 ‘박영수’의 얼굴에서 노기가 싹 사라지고 미소가 피어났다.
 
 “왜 이제사 왔어~ 왜! 아이구 이 무심한 놈아!”
 
 박영수가 후다닥 다가와 정지안을 꽉 끌어안고 등을 두들겼다.
 
 퍽퍽퍽!
 
 “콜록.”
 
 근데 좀 셌다.
 
 “하, 할아버지. 힘은 여전하시네요. 하하.”
 
 “어디. 얼굴 좀 다시 보자. 맞네, 맞아. 영락없는 지안이네!”
 
 “네. 그 어린 지안이 맞습니다. 건강히 잘 지내셨어요?”
 
 “그럼~ 그럼~ 내가 꽃님이 보낼 때, 뭐라 그랬냐. 네 몫까지 잘 살아 줄테니 하늘에서 지켜보라고 하지 않았냐. 그 약속 지키려면 몇십년은 더 살아야 돼!”
 
 “당연히 그러셔야죠.”
 
 정지안의 할머니 ‘이꽃님’과 박영수는 주변에서 알아주는 죽마고우였다.
 
 이꽃님은 아들을 낳자마자 서방을 떠나보냈다.
 
 앓고 있는 줄도 몰랐던 위암이 목숨을 앗아간 것.
 
 그 당시 홀로 남은 이꽃님을 그토록 많이 도와주었던 사람도 박영수였다.
 
 “할아버지. 혹시 이 집······ 관리해주고 계셨어요?”
 
 “내가 아니면 누가 그리 하겠냐. 사람이 살지 않아도 꽃님이의 넋이 남아 있는 곳인데.”
 
 그 말을 듣고 나니 박영수에게 고맙고 미안한 마음이 드는 정지안이었다.
 
 자신이 해야 했던 일을 몇 년이나 박영수 할아버지가 해주고 있었으니 말이다.
 
 박영수가 어깨에 힘을 딱 주면서 말했다.
 
 “여기 당장 누가 들어와서 산다고 해도 무리 없을 정도로 열심히 관리했어. 어디 부서진 곳 있으면 고치고, 때 탄 곳 있으면 닦고. 내가 얼마나 신경을 썼다고.”
 
 “네. 그런 것 같아요. 정말 감사해요, 할아버지.”
 
 “근데 통 소식 없더니만 어쩐 일로 왔어?”
 
 그 목소리엔 약간의 야속함이 어려 있었다.
 
 “그게······.”
 
 정지안이 시골집에 걸음을 하지 않았던 해.
 
 그러니까 부모님이 돌아가신 그 해부터 지금까지 있었던 일들을 담담히 털어놓았다.
 
 이야기를 듣고 난 박영수가 눈물을 쏟으며 정지안의 손을 잡아주었다.
 
 “그랬구나. 그랬어. 아이구, 하늘도 무심하시지. 어찌 이 어린놈한테 그런 시련을 안겨줄꼬.”
 
 “이제 많이 괜찮아졌어요.”
 
 “그래서 여기 들어와 살 생각이야?”
 
 “마음 다친 거 치료할 동안만요. 아무래도 여기서는 제가 벌어먹고 살만한 일이 없을 것 같아서요.”
 
 “그렇지. 요즘 애들이 이런 깡시골에서 뭘 하겠어. 그래그래, 잘 생각했다. 몇 달이고 몇 년이고 좋으니, 네 마음 다스리면서 편히 있도록 해. 혹시 지내다가 불편한 거 있으면 언제든지 말하고.”
 
 “네, 감사합니다.”
 
 “당장 들어올거야?”
 
 “서울집부터 정리하고요.”
 
 “오야, 오야. 그건 그렇고 밥은 먹었어?”
 
 정지안이 고개를 내젓자 박영수가 다짜고짜 팔목을 잡고 자기 집으로 이끌었다.
 
 그 날 저녁.
 
 박영수는 귀한 손님을 위해 장닭을 잡아 푹 고았다.
 
 정지안은 실로 몇 년 만에 눈이 스르르 감길 만큼 맛있는 백숙을 먹을 수 있었다.
 
 
 
 **
 
 
 
 며칠 후.
 
 정지안은 빠르게 옥탑방을 정리했다.
 
 작은 시골 마을 ‘별내리’에 1톤 트럭 한 대가 들어섰다.
 
 이꽃님의 집 앞에 선 트럭의 조수석에서 정지안이 내렸다.
 
 트럭 운전수가 몇 개 안되는 짐 나르는 걸 도와주었다.
 
 “고생하셨어요, 선생님.”
 
 “귀촌 잘 하세요.”
 
 쉰이 넘은 트럭 운전수가 미소를 남기고 떠났다.
 
 정지안은 자신의 짐을 집안에 바삐 정리하고서 대청마루에 앉아 한숨 돌렸다.
 
 “후우.”
 
 휘이이-
 
 하늘하늘한 봄바람이 식은땀을 식혀주니 쾌청하고 좋았다.
 
 그래, 이 맛이지.
 
 이게 사람 사는 거지.
 
 벌써부터 마음이 편해지는 정지안이었다.
 
 “읏차.”
 
 다시 몸을 일으켜 남은 짐을 정리하다 옷을 넣기 위해 자개장을 열었다.
 
 그런데.
 
 “응?”
 
 그 안에서 뭔가가 반짝 하고 빛났다.

작가의 말

작품에 등장하는 모든 인물과 기업, 지역, 학교, 기관등은 전부 픽션입니다.

제 글을 일독해주셔서 감사합니다.

항상 건강하시고 행복하세요.

댓글(41)

ca    
오옷. 꽉찬 1편
2024.05.22 15:18
인기영    
소중한 댓글 감사합니다!
2024.05.24 15:23
yeom    
잘 보고 갑니다. 응원합니다.
2024.06.06 09:37
인기영    
소중한 댓글 감사드립니다~!
2024.06.06 12:11
바부다컴    
무릎을 밴 채 -> 벤 채
2024.06.07 00:42
인기영    
수정했습니다~ 제보 감사드립니다!
2024.06.07 00:56
보람이맘    
잘보고갑니다
2024.06.08 06:50
인기영    
보람이맘님~ 최신화까지 꾸준히 달아주시는 댓글 정말 감사드립니다~!
2024.06.09 10:54
인생뭐잇냐    
근대 개연성이 이상한게 부모님 없으면 군 면제 아님??
2024.06.08 16:50
인기영    
안녕하세요 독자님! 애정어린 댓글 정말 감사드립니다~ 제가 조사한 바로 고아 사유로 제2국민역 처분 대상에 해당하려면, 13세 이전에 부모님이 돌아가셔야 하는 걸로 압니다. 하여 고아일 경우 5년 정도 보육시설에서 살아야 군면제 조건을 갖출 수 있으며, 기초 생활 수급자일 경우에도 부양 가족이 있을 경우에만 면제라 알고 있습니다. 혹, 제가 조사한 것에 대해 부족함이 있다면 더 말씀 주세요! 틀렸을 경우 바로 수정토록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2024.06.09 10: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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