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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마황 1

2015.08.30 조회 3,544 추천 40


 序
 
 
 어두운 밤. 달은 회색으로 빛났다.
 휘스스스!
 어둠조차 집어삼키는 시커먼 기운, 그것은 완벽한 암흑의 구름이었다.
 소용돌이치듯 산자락에 머물던 구름이 흩어지며 한 명의 청년이 드러났다.
 그의 왼손에는 피처럼 붉은 도(刀)가, 오른손에는 암흑같이 검은 도가 들려 있었다.
 청년은 섬뜩하기 이를 데 없는 눈빛으로 산 아래 모여 있는 수많은 사람들을 내려다봤다.
 그들은 무기를 소지한 무인들이었는데 모두들 잔뜩 긴장한 표정이었다.
 그 순간 청년의 주위로 온갖 끔찍한 형상의 괴물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크르르르!
 끄으으으!
 끼끼끼끼!
 핏빛으로 빛나는 시뻘건 눈에 번뜩이는 가공할 살기!
 그것들은 결코 인세에 존재할 수 없는, 마치 지옥에서나 볼 수 있을 법한 끔찍한 외모를 지니고 있었다.
 곧바로 괴물들이 산 아래로 달려 내려가기 시작했는데 그 모습은 흡사 산 위에서 시커먼 구름들이 쏟아져 내리는 것 같았다.
 사람들은 필사적으로 무공을 펼쳐 맞섰으나 불가사의한 괴력을 지닌 괴물들을 막기는 역부족이었다.
 “으아악!”
 “아악!”
 사람들은 괴물들의 이빨과 발톱에 처참히 뜯기고 찢겨졌다. 그런 괴물들을 뚫고 세 명의 노도사가 청년을 향해 날아와 검을 휘둘렀다.
 그들의 검에는 푸른색 기운이 서려있었고, 세 명이 동시에 펼친 검초는 거대한 태극(太極)의 형상을 이루며 청년에게 쇄도했다.
 그것은 마치 산이라도 부술 수 있을 만한 가공한 기세였지만.
 “크큭!”
 청년은 가소롭다는 듯 입가를 비틀며 도를 내리그었다.
 번쩍!
 그 순간 마치 뇌전이 번뜩이듯 수백 개의 도영(刀影)들이 공간을 휩쓸었다.
 파파파파팟-!
 “아악!”
 “크아악!”
 태극의 형상이 파괴됨과 동시에 합벽검진을 펼치며 날아오던 세 명의 무사가 허공에서 분시되어 흩어져 버렸다.
 그들의 죽음에 수많은 사람들이 절망의 표정을 지으며 후퇴했으나 괴물들은 그들을 끝까지 쫓아가 물어뜯었다.
 “크악!”
 “으아악!”
 수십 채의 전각이 무너져 내렸고, 도처에 사지가 처참이 뭉개져 죽은 사람들의 시체가 널브러졌다.
 전멸(全滅)이었다.
 사방 어디를 둘러봐도 생존자는 보이지 않았다.
 순식간에 수천의 무사가 죽은 이곳에는 놀랍게도 적막이 감돌았다. 그토록 괴기스러운 소리를 내던 괴물들은 숨소리조차 내지 않았다.
 “크크크.”
 적막을 깨는 청년의 웃음소리. 다시 암흑의 구름이 청년을 감쌌고, 소용돌이치듯 그 구름은 어딘가를 향해 날아갔다.
 그 뒤를 괴물들이 빠른 속도로 뒤따랐고 순식간에 어디론가 사라져버렸다.
 
 잠시가 지났을까?
 수 천구가 넘는 시신들이 처참하게 뒤엉킨 곳을 거니는 한 명의 소년이 있었으니.
 “여, 여긴 대체 어디일까? 내가 왜 이런 곳에……!”
 소년은 사방에 펼쳐진 끔찍한 참상을 보고는 입을 쩍 벌렸다.
 그러다 소년은 자신의 양손에 각각 한 자루씩의 도가 들려 있는 것을 발견하고는 더욱 깜짝 놀랐다.
 피처럼 붉은 도(刀)와 암흑처럼 검은 도(刀)!
 기이하게도 그것들은 본래 소년의 것인 듯 익숙했다.
 크르르르!
 그때 전방에서 무려 십 척이 넘는 커다란 괴물 하나가 나타나 소년을 향해 다가왔다.
 “허억!”
 소년은 기겁하여 도망가려 했으나 몸이 굳기라도 한 듯 움직여지지 않았다.
 그 사이 괴물은 그의 지척까지 다가왔다.
 “무, 물러나라!”
 소년은 악을 쓰며 외쳤다. 그러자 괴물이 소년을 향해 부복하는 것이었다.
 이게 대체 어찌된 일?
 소년은 황당했으나 그때 다시 이해할 수 없는 일이 벌어졌다.
 어디론가 사라졌던 수많은 괴물들!
 그것들이 다시 나타나 소년을 향해 무릎을 꿇기 시작했던 것이다.
 
 “…···허억!”
 소년은 소리를 지르며 벌떡 일어났다. 밖을 보니 아직 밤이었다.
 “휴우!”
 소년은 한숨을 내쉬고는 수건을 들어 땀을 닦았다.
 “내가 또 악몽을 꾸었구나. 뭔가 비슷한 내용의 꿈을 꾸는 것 같은데 일어나면 꿈의 내용이 전혀 기억나지를 않으니.”
 소년은 문을 열고 나갔다. 하늘에 달이 떠 있어 밖은 그리 어둡지 않았다.
 “혹시 몇 달 앞으로 다가온 과거 때문에 악몽을 꾸는 것일까…….”
 소년은 탄식했다.
 그럴 지도 모른다.
 물론 과거를 본다면 장원 급제할 자신이야 있지만 그는 태생적으로 뭔가에 얽매이는 걸 싫어했다.
 부친의 뜻에 의해 어쩔 수 없이 과거를 보겠다고 했을 뿐 관복을 입고 평생 살 것을 생각하면 실로 끔찍했던 것이다.
 “무슨 방법이 없을까?”
 소년은 한동안 고심하다가 이내 고개를 흔들고는 심호흡을 했다.
 “이대로는 잠이 안 올 테니 검법 수련이나 해야겠군.”
 소년은 가볍게 권각을 움직이며 몸을 풀고는 목검을 들어 검법을 한동안 펼쳤다.
 그렇게 대략 반 시진쯤 지났을까?
 소년은 얼굴에 흐르는 땀을 소매로 닦으며 목검을 내려놓았다.
 한참을 수련하니 확실히 마음이 후련해진 것 같았다. 소년은 문득 하늘을 응시했다.
 “저 환한 달빛을 받으며 유유히 떠다니는 구름들처럼 나는 자유롭게 살 것이다. 평생 관복을 입고 얽매여 살 수는 없어.”
 소년은 뭔가 큰 결심을 한 듯 그의 두 눈에 강인한 의지가 느껴졌다.
 
 * * *
 
 “네 이놈! 기어이 떠나겠다는 말이냐?”
 창노한 음성이었다. 사십대 중반으로 보이는 한 중년 문사 앞에 소년이 무릎을 꿇고 앉아있었다.
 “소자를 부디 용서하십시오.”
 공손했지만 단호한 음성이었다. 중년 문사는 소년을 노려보았다.
 “과거시험이 몇 개월 남지 않았다는 것을 잊었느냐?”
 “…….”
 소년은 말이 없었다.
 “공들여 왔던 탑을 무너뜨리려 하다니, 대체 무엇 때문인 것이냐?”
 “천하를 주유하며 세상을 더욱 깊이 알고 싶습니다.”
 “세상을 깊이 안다? 지금까지 학문을 했다는 녀석이 그것을 말이라고 하느냐?”
 “소자가 이 세상을 이해하는 데는 더 이상 책을 통해서 얻을 수 있는 것이 없는 것 같습니다. 그동안 수없이 노력해 보았지만 이제 그 한계에 도달해 더 이상 책을 읽을 수 없습니다.”
 “허어.”
 “이제 보다 실질적인 것을 찾고 싶습니다. 대자연 속에 뛰어들어 그동안 머리로만 생각했던 법칙과 이치들을 직접 느끼고 만져 보고 싶습니다. 천하를 주유하며 수많은 일들을 겪어보겠습니다. 그로써 세상을 깊이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유강아, 너는 실로 인생의 가장 큰 기회를 저버리려 하고 있구나. 너는 이로 인해 평생 동안 후회할 지도 모른다.”
 “그럴 수도 있겠지요. 하오나 학문에서는 더 이상 성취감도 없고 모든 것이 뜬구름 잡는 것 같은 생각이 들어 아무런 의욕이 생기지 않습니다.”
 중년 문사는 안타깝다는 듯 한숨을 내쉬었다.
 “여행을 하다 산속에서 초적들이나 길거리 부랑배를 만나 변을 당할 수도 있다. 그래도 떠나겠느냐?”
 “소자, 결코 산의 초적들이나 길거리 부랑배들에게 괴로움을 당할 만큼 약하진 않습니다. 또한 무공이라는 것이 재미있어 앞으로 계속 연구해 볼 생각입니다.”
 “그래, 그렇다면 어디로 갈 생각이냐?”
 “일단 이곳 산천을 둘러본 후 명나라로 갈 생각입니다.”
 “…….”
 중년 문사는 잠시 말이 없었다. 소년은 묵묵히 기다렸다. 잠시 후 중년 문사가 입을 열었다.
 “좋다. 네 뜻대로 해라. 다만 한 가지 약조를 해줘야겠다.”
 “무엇이온지…….”
 “다른 건 없다. 네가 그 어떤 곳에서 그 어떠한 극한 일을 겪든지 네 마음의 중심을 잃지 말라는 것이다.”
 “반드시 명심하겠습니다.”
 “또한 언제든 네 마음이 바뀐다면 주저 말고 다시 돌아와 본래의 길을 가도록 하여라.”
 “예, 아버지.”
 
 * * *
 
 “어머니, 소자 유강이옵니다.”
 “어서 들어오너라.”
 십칠 세 정도의 소년이 문을 열고 들어가자 삼십대 후반의 중년 미부인(美婦人)이 앉아있었다.
 그녀는 힐끗 소년을 바라봤다.
 “네가 떠난다는 얘기를 하시더구나. 과거를 포기하고 주유천하를 하려 한다고. 철없는 것! 네 녀석은 세상이 그리 만만한 곳 같아 보이더냐?”
 “어머니, 저는…….”
 “유강아, 너는 겉보기에는 유약한 듯 보이나 내면에 고집과 호기심이 무궁무진한 아이였다. 어려서부터 한 번 작정한 것은 반드시 하고야 마는 그 고집을 누가 꺾겠느냐? 그래도 혹시 네 뜻을 꺾을 생각은 없느냐?”
 “…···죄송합니다.”
 소년은 고개를 숙었다. 그러자 중년 부인이 탄식을 하더니 어쩔 수 없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동안 검법에는 진척은 있었느냐?”
 “잘 모르겠습니다. 그저 매일 꾸준히 수련하고 있을 뿐입니다.”
 “네가 내게 배운 검법은 그다지 강한 무공이 아니란다. 혹 무공에 관심이 있다면 명나라에 가거든 외가에 들러보거라. 나의 오라버니, 네게는 외숙부 되시는 분께 이 서찰을 전해주면 그분께서 네게 흔쾌히 무공을 전수해 주실 것이야.”
 중년 부인은 한쪽에 접어놓은 서찰을 소년에게 건네주었다. 소년은 서찰을 품 속 깊이 넣었다.
 “외숙부님의 무공은 어느 정도입니까?”
 그 말에 중년 부인은 미소 지었다.
 “…···글쎄다. 아마 그분이 너를 보면 무척 좋아하실 지도 모르겠구나. 이것도 챙기거라. 여행에서 노자가 부족하면 궁색해질 것이니 아껴 쓰도록 해라. 그리고 이 주머니 안에 들어 있는 것은 귀한 보석들이니 노자가 떨어지면 한 개씩 처분해서 쓰면 되고…··· 참, 명나라에 가면 전장에서 전표로 교환하는 것도 잊지 말거라.”
 “예.”
 “그리고 이것은 금창약이라는 것인데 외상을 입게 되면 바로 바르도록 해라. 그리고 이 환단은 내상약이니 내상을 입게 되면 즉시 복용하고 운기요상을 취하거라.”
 “예.”
 중년 부인은 철없는 아들이 어디서 크게 다치기라도 할까봐 걱정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소년은 순간 덥석 그녀의 손을 잡았다.
 “소자! 무고히 다녀올 것이니 염려 마십시오, 어머니.”
 
 
 
 
 
 
 
 
 
 
 
 제1장 흑의인
 
 
 
 “주모, 여기 술 한 병만 갖다 주시오!”
 “아, 예에! 지금 가요!”
 관도가 이어지는 산 밑의 한 주막이었다.
 한낮의 땡볕을 피하려 했는지 벌써부터 손님들이 제법 있었다.
 장사치로 보이는 사람들 몇 명이 그늘진 와상 위에서 산채에 비빈 밥을 먹고 있었고, 뜨거운 무더위에도 불구하고 김이 모락모락 나는 국밥을 땀을 뻘뻘 흘리며 먹고 있는 사람도 있었다.
 심지어 대낮부터 한잔한 모양인지 얼굴이 불그레한 사람들도 많았다.
 “호호호!”
 이십대 중반으로 보이는 예쁘장한 얼굴의 주모는 얼굴에 미소를 연신 흘리며 여기저기 음식과 술을 바쁘게 날랐다.
 ‘손님들이 제법 많군.’
 이유강은 이마에 흐르는 땀을 닦으며 주막으로 들어섰다.
 “어머나 서방님! 어서 오시와요!”
 주모는 바쁜 와중에도 호들갑을 떨었다. 심지어 그녀는 은근한 눈빛으로 이유강을 쳐다보며 요염한 미소를 짓기도 했다.
 “그럼 방으로 안내하겠사와요, 서방님.”
 서방이라니. 이 무슨 황당한 소리를! 그러나 이유강은 당황하지 않고 태연히 와상 위에 앉으며 대답했다.
 “방은 됐고 간단히 요기할 것 좀 하고 술 한 병 주게.”
 이유강은 눈에 띄도록 잘 생긴 외모 덕분에 여자들의 뜨거운 눈빛을 자주 받았다.
 그러나 지금은 단순히 그런 이유로 주모가 끈적끈적한 눈빛을 보내는 것이 아니었다.
 그녀가 노리는 것은 순진해 보이는 이유강의 품속에 들어있는 돈주머니일 터. 정신을 바짝 차리지 않으면 무슨 봉변을 당하게 될지 모른다.
 이유강이 수작에 넘어오지 않자 새침해진 주모가 물었다.
 “그럼 국밥으로 드릴까요?”
 “아니, 산채 비빔밥으로 주게.”
 “예에, 조금만 기다리셔요!”
 주모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엉덩이를 살랑살랑 흔들면서 부엌 쪽으로 총총히 걸어 들어갔다.
 이유강은 등에 진 봇짐을 풀어 옆에 놓고 편하게 앉았다.
 집을 나온 지 한 달 째.
 이유강은 구름처럼 유유히 떠돌았고, 그 사이 이런 생활이 제법 익숙해졌다.
 이런 곳에서 어설프게 행동했다간 무시받기 십상이고, 그러면 가끔 취객들이 만만하게 보고 시비를 건다는 것도 잘 알았다.
 특히 여자를 조심해야 한다.
 여자를!
 방금 전 주모도 그렇고. 이유강을 보면 탐스러운 먹잇감을 발견한 맹수들처럼 달려오는 여자들이 한둘이 아니었으니까.
 그때 주모가 커다란 사발에 물을 가져왔다. 그녀는 허리를 숙이며 하얗고 굴곡진 어깨와 가슴 위쪽을 슬쩍 드러내 보였다.
 “일단 여기 시원한 냉수부터 드셔요. 호홍!”
 “험! 고맙소.”
 아직도 포기를 안했나 보다. 이유강도 남자인 이상 두 눈이 휘둥그레졌지만, 짐짓 관심이 없는 척 시선을 돌렸다.
 그러자 주모가 코웃음을 치며 돌아가 버렸다.
 그녀가 나지막하게 고자가 어쩌고 하는 말이 들렸지만 이유강은 못들은 척 무시했다.
 ‘덥다! 더워! 그래. 물이나 마셔야지.’
 시원한 물을 들이키자 좀 살 것 같았다.
 잠시 후 비빔밥과 함께 탁주도 나왔다. 이유강은 먼저 술을 따라 한잔 크게 들이켰다.
 “커어!”
 달짝지근하면서도 시원한 맛이었다.
 ‘후후, 이 동동주의 맛을 그 무엇과 비교할 수 있단 말인가. 신선이 부럽지 않구나.’
 이유강은 나름대로 주도(酒道)에도 눈을 떠가고 있었다. 간혹 바람을 벗삼아 혼자서 술을 마시며 시를 읊기도 했으니 말이다.
 지금도 목을 타고 들어오는 동동주의 구수하면서도 톡 쏘는 맛을 음미하며 혼자서 나직이 흥얼거리고 있었다.
 그때 갑자기 주막에 십여 명의 장정들이 들어왔다.
 무더위에 지친 듯 모두 들어오자마자 마당의 그늘진 한쪽에 깔아진 멍석 위에 털썩 주저앉았다.
 “젠장, 그놈의 초적 토벌인지 뭔지 오늘 또 못 넘어가게 생겼네.”
 “염병! 괜히 관군들이나 더 뒈지든지 하겠지. 어이, 주모! 여기 술 좀 갖고 와!”
 “으흐흐! 오늘 기왕 이렇게 된 거 술판이나 실컷 땡겨보자구.”
 “거 좋지.”
 십 수 명이 되는 장정들이 투덜투덜 소리를 질러대니 주막이 시끌벅적해졌다.
 “어머나! 멋진 오빠들! 술을 얼마나 드릴까요?”
 “으험! 일단 두어 말 가져다 놔. 고기 안주도 좀 썰어오고.”
 “호호! 알았어요. 잠깐만 기다리셔용!”
 주모는 콧노래를 부르며 술을 가져다 날랐다.
 무더위에도 불구하고 손님들이 많아 흥에 겨운 모양인지 주모의 입가에는 미소가 떠나지 않았다.
 ‘초적 토벌 때문에 관군들이 길을 막고 있나 보군.’
 이유강은 인상을 살짝 찌푸렸다. 저들의 말을 듣고나니 아무래도 오늘은 여기서 유숙해야 할 것 같았다.
 “아, 그러니까 오늘은 다르단 말이야.”
 “다르긴 뭐가 달라. 관군이 아무리 많아도 그 떡대 놈을 어떻게 이겨?”
 “맞아. 그놈이 어디 보통 놈인가? 천 년 묵은 산삼을 먹어 힘은 장사에 어디서 배웠는지 칼 하나는 기가 막히게 잘 쓴다고 그러던데.”
 장정들은 벌써 술이 오르는지 얼굴이 발그레했다. 그러면서도 시종 입을 쉬지 않고 떠들어댔다.
 이유강은 그들의 얘기에 흥미가 생겨 귀를 기울였다. 얼굴에 커다란 점이 난 장정이 눈을 크게 뜨며 말했다.
 “아, 진짜 오늘은 다르다니까. 관군에서도 보통내기가 아닌 사람이 왔어.”
 “누군데 그래?”
 “박 뭐라고 했는데……. 암튼 대단한 고수라고 소문이 자자하더라고.”
 “고수? 그게 뭐지?”
 그러자 얼굴이 불그레하다 못해 시뻘겋게 술이 오른 자가 소리쳤다.
 “아, 칼을 기통차게 잘 쓴다 이 말이지! 무식하기는!”
 “뭣이? 이 잡놈이! 무식하긴 누가 무식해! 아무리 날고 기는 놈이라도 그 떡대 놈한텐 안 된다니까! 그 놈이 어떤 놈인데.”
 “그건 그래. 박 머시긴지 지랄인지도 아마 한 칼에 뒈질 것이다.”
 그때 이유강은 탁주를 단 번에 들이마신 후 자리에서 일어났다.
 ‘저들 말대로라면 상당한 고수들끼리의 싸움이 벌어지는 것이 분명하군.’
 위험한 일이었지만 내심 호기심이 일어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잠시 후 이유강은 산중턱에 이르렀다. 도처에서 무기들이 부딪치는 소리와 함성이 들렸다.
 ‘이미 접전이 시작된 모양이구나.’
 이유강은 급히 그쪽으로 신형을 날렸다.
 “네 이놈!”
 갑자기 큰 고함 소리와 함께 관병 한 명이 창을 찔러왔다. 이유강은 창을 피하며 말했다.
 “나는 초적이 아니니 공격하지 마시오.”
 “닥치거라! 초적이 아니라면 왜 이 곳에 있느냐? 에이잇!”
 관병이 다시 창을 겨누어 공격해 왔다. 이유강은 몸을 돌려 창을 빼앗았다. 관병이 움찔 놀라자 이유강은 씩 웃으며 창을 돌려줬다.
 “나는 초적이 아니라 하지 않았소.”
 관병이 다급히 창을 잡으며 인상을 썼다.
 “그럼 썩 돌아가시오, 이곳에 있으며 위험하오!”
 “초적 소탕이 있다기에 관군을 도우러 왔소.”
 “뭐요? 참 내, 죽든지 말든지 난 모르오.”
 관병은 기가 찬 듯 창을 부여잡고는 다른 곳을 향해 달려갔다. 이유강도 신형을 날렸다.
 
 멀리 위쪽으로 초적들의 요새가 보였고, 초적들은 밑에서 올라오는 관군들을 맞아 싸웠다.
 관군들의 숫자가 초적들에 비해 몇 배는 많았으나 가파른 지형 곳곳에 함정을 설치하여 잠복해 있는 초적들을 쉽게 제압하지는 못했다.
 “답답하군.”
 이유강은 전장이 잘 보이는 커다란 나무 위에 서 있었다.
 “요새를 방비하는 적을 단순히 밀어붙여 싸우다니. 병법의 기본도 모르는구나.”
 부득이한 상황이 아니라면 쓰지 말아야 할 최악의 방법이었다.
 이유강은 잠시 사태를 관망했다. 도와주고 싶어도 어떤 방법으로 도와야 할지 고민이 되었다.
 무작정 뛰어들어 초적들을 제압하는 것도 지금 상황에서는 쉬운 일이 아니었다.
 자칫 좀 전처럼 초적으로 오인받아 관군들에게 공격을 받을 수도 있는 일!
 그렇다고 관군의 수뇌를 만나 병법에 대해 얘기할 수도 없지 않은가.
 그 사이 전세는 점점 관군에게 불리하게 진행되고 있었다.
 “흠.”
 그런데 이상하게 관군들의 수뇌인 듯한 자가 보이지 않았다. 몇몇 부장들만 보일 뿐 장수로 보이는 자가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박모라는 군관은 어디에 있단 말인가? 듣기로는 상당히 강한 것 같던데…….”
 ‘혹시 그 사람도 나와 같은 생각을 한 게 아닐까?’
 무공에 자신이 있다면 요새로 몰래 들어가 초적 두목을 제압하는 게 이 싸움을 가장 빨리 끝낼 수 있는 방법일 것이다.
 “그렇다면 위험할 수도 있다. 빨리 도와야겠군.”
 이유강은 경공을 펼쳤다.
 전장은 나무가 드문 개활지에서 벌어지고 있었고, 나무들이 빽빽이 우거진 곳에는 길이 험해 초적들이나 관군들이 거의 없었다.
 간혹 몇몇의 초적들이 공격해 왔지만 어렵지 않게 쓰러뜨릴 수 있었다.
 요새 안에 도착하니 생각보다 지키는 초적들이 많지 않았다. 대부분 밖에 나가 관군들을 막고 있는 듯했다.
 ‘저쪽이군.’
 요새 안쪽 공터에 초적 이십여 명이 몰려 있었고, 두 명의 무사가 싸우고 있었다.
 한 명은 덩치가 아주 큰 초적이었고 다른 한 명은 관군의 복장이었다.
 ‘저 사람이 그 박모라는 군관인가?’
 초적은 덩치에 걸맞은 매우 큰 칼을 휘두르고 있었고, 군관은 검을 들고 있었는데 실력은 비등해 보였다.
 잠시 지켜보니 군관은 약간 지쳐 보였지만 초적 두목은 조금도 지친 기색이 없었다.
 공터 곳곳에 널브러진 초적들의 시체를 보아 그들로 인해 군관은 상당한 체력 소모를 한 듯했다.
 ‘저대로 두면 위험하다. 상당히 무모한 행동을 했군…….’
 생각보다 초적 두목의 무공이 뛰어나 곤욕을 치르고 있는 것 같았다.
 군관은 자신이 초적 두목을 단번에 제압할 수 있으리라 생각하고 홀로 요새에 진입했지만 자신과 막상막하의 실력일 줄은 상상도 못했을 것이다.
 스윽.
 이유강은 두리번거리다 바닥에 널브러진 창을 하나 집어 들었다.
 ‘이걸 사용하는 게 좋겠군.’
 그러자 결투에 집중하고 있던 초적들 중 하나가 그것을 보고는 소리쳤다.
 “웬 놈이냐?”
 동시에 몇 명이 무기를 휘두르며 달려왔다.
 “흥! 덤벼라.”
 이유강은 코웃음 치고는 창으로 그들을 간단하게 제압했다. 확실히 이렇게 여러 명이 달려들 때는 검보다는 창으로 상대하기가 수월한 법이었다.
 “아니, 저놈이?”
 “모두 저놈을 쳐라!”
 군관과 싸우고 있는 초적 두목을 제외한 나머지 초적들이 각자 무기를 빼어 들고 몰려왔다.
 그러자 이유강은 창을 공중에서 붕붕 회전시키며 크게 소리쳤다.
 “으하하하! 얼마든지 덤벼라.”
 “으아악!”
 “크억!”
 창 바람 가르는 소리가 날 때마다 초적들이 쓰러졌다.
 그렇게 대여섯 명이 쓰러지자 초적들이 놀라 쉽게 다가서려 하지 않고 눈치만 봤다.
 순간 군관과 싸우던 도적 두목이 힐끗 이유강을 노려보더니 인상을 썼다.
 “으득! 멍청한 놈들! 대체 뭐 하느냐? 저깟 애송이 한 놈도 못 당한단 말이냐?”
 초적들은 두목의 호령에 잠시 머뭇거리더니 이유강을 향해 우루루 몰려왔다.
 “죽어라, 애송이 놈!”
 “머리에 피도 안 마른 자식이 어디서 감히! 명년 오늘이 네놈의 제삿날이다 이놈아!”
 “흥! 너희들은 내 상대가 아니다.”
 이유강은 창을 휘돌려 그들의 무기를 한 지점에 모았다가 퉁겼다. 동시에 창을 땅에 꽂고 도약해 주위를 둘러싼 초적들을 모두 발로 차버렸다.
 “크윽!”
 “컥!”
 순간 초적 두목과 군관이 놀란 표정을 지었다. 초적 두목은 입을 씰룩이며 웃었다.
 “애송이 녀석이 제법이구나. 하지만 내가 볼 땐 아직 멀었으니 엄마 젖이나 먹고 다시 오는 게 어떠냐?”
 이유강은 담담히 그를 노려봤다.
 “네놈이 얼마나 대단한 실력을 지녔기에 그와 같은 말을 하는지 모르겠군.”
 “크하하하! 그건 곧 알게 될 것이다. 지금은 이놈이 우선이니 네놈은 조금 있다 두고 보자.”
 초적 두목은 이유강을 가소롭다는 듯 한 번 노려보더니 다시 군관을 향해 칼을 휘둘렀다.
 카앙!
 군관은 가까스로 막았다. 그가 지쳐있는 걸 다시 확인한 이유강은 초적 두목을 향해 창을 힘껏 던졌다.
 쉬익ㅡ
 창은 두목의 정수리를 향해 정확히 날아갔다.
 “흐억!”
 초적 두목은 순간 기겁하더니 황급히 칼을 들어 막았다.
 차앙!
 창이 칼에 맞아 떨어졌다. 초적 두목이 험상궂은 눈빛으로 이유강을 노려봤다.
 “이놈! 감히! 죽고 싶으냐?”
 “말로만 말고 덤벼라!”
 이유강은 밑에 떨어져 있는 검을 하나 주워 들고는 초적 두목을 향해 뛰어갔다.
 “크흐! 좋다! 그렇게 죽고 싶다면 네놈부터 죽여주지!”
 초적 두목은 가소롭다는 듯 웃었다.
 창! 차앙!
 이유강은 연거푸 네 번을 공격했다. 그러나 초적 두목은 모두 막아냈다.
 천 년 묵은 산삼을 먹었다는 말이 사실인지 그의 힘은 곰을 연상케 했다. 어려서부터 꾸준히 검법과 체력을 단련해 온 이유강도 팔이 저려올 정도였다.
 ‘으음, 보통 놈이 아니구나. 저 군관이 고전한 이유를 알겠군.’
 그 때 뒤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조심하게. 저놈은 괴이한 무공을 익혔는지 도통 공격이 먹히질 않네.”
 군관은 이십대 중반의 청년이었다. 투구를 쓴 이마 아래로 땀이 비 오듯 흘렀지만 두 눈의 기세는 죽지 않았다.
 ‘그럼 함께 공격하는 게 좋겠소.’
 ‘나도 그렇게 생각하네.’
 둘은 서로의 눈빛을 교환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야앗!”
 “타앗!”
 이유강은 좌로, 군관은 우로 동시에 초적 두목을 공격했다.
 둘이 동시에 덤벼들지는 몰랐는지 초적 두목은 일순 당황한 기색으로 공격을 막았다.
 “으… 이놈들, 비겁하게 합공을 하다니!”
 이유강과 군관은 아무 말 없이 계속 초적 두목을 밀어붙였다. 관군들이 죽고 있는 마당에 비겁한 것을 따질 때가 아니었다.
 창! 차차창! 차앙!
 그러나 약간 밀리는 듯했던 초적 두목은 이유강과 군관의 합공을 그리 어렵지 않게 막아냈다.
 게다가 조금도 지친 기색이 없었다. 이유강은 조금씩 숨이 가빠왔다.
 ‘기이하군. 대체 무슨 무공이기에 이리도 방어를 잘하는 것일까?’
 군관이 나직이 말했다.
 “이대로는 승산이 없다. 자네 일 각 정도만 혼자 버틸 수 있겠나?”
 “그게 무슨 말이오?”
 이유강은 그의 말을 이해할 수 없었다. 둘이서 합공을 해도 밀리는 판에 혼자서 일각을 버티라니!
 그러나 군관의 눈빛이 이글거렸다.
 “부탁이네. 어떻게든 일 각만 버텨주게. 그러면 자네에게 꼭 보답하겠네.”
 “보답은 필요 없소. 한데 왜 일 각을 버티라는지 이유를 물어도 되겠소?”
 “그걸 설명할 시간은 없네. 부탁이네.”
 “알았소. 버텨보겠소.”
 이유강은 군관의 두 눈에 깃든 비장한 의지를 읽었다. 일 각을 버티라는 건 분명 뭔가 이유가 있을 터였다.
 “사악한 도적놈! 네놈은 나 혼자서도 충분하다.”
 이유강은 즉시 앞으로 달려 나가며 초적 두목을 공격했다.
 그러자 군관은 뒤쪽으로 물러서더니 자리에 앉아 운기조식을 취했다.
 그 모습을 본 초적 두목이 어이없어하는 표정을 지었다. 그는 이유강을 향해 키득거리며 말했다.
 “크흐흐흐! 네 녀석 혼자서 나를 당할 수 있을 것 같으냐?”
 이유강은 대답 대신 검을 휘둘렀다.
 스팟ㅡ
 그의 검이 초적 두목의 시선을 교란시켰다가 바람처럼 목을 향해 날아갔다.
 “큭! 얕은 수법.”
 초적 두목이 가볍게 검을 퉁기고는 그대로 칼을 돌려 베었다.
 차앙!
 이유강은 검을 휘둘러 막았지만 초적 두목의 막대한 힘에 눌려 뒤로 움찔 물러났다.
 “애송이! 아직 멀었다.”
 바로 그 순간의 빈틈을 노려 초적 두목이 발이 이유강의 가슴을 차버렸다.
 퍽!
 “으윽!”
 이유강은 뒤로 구르며 벌떡 일어났다.
 “크흐흐! 그만 뒈져랏!”
 초적 두목이 뛰어와 칼을 휘둘렀다. 이유강은 다급히 몸을 굴려 피했다.
 ‘으윽! 제기랄!’
 가슴이 욱신거리고 아팠다. 입에서 조금씩 피가 새어 나왔다. 초적 두목이 냉소했다.
 “쿠하하하! 젖비린내 나는 놈 같으니! 고작 그 따위 실력으로 나를 죽이려 했더냐?”
 그는 빠르게 칼을 휘둘렀다.
 창! 차앙!
 정신없이 몰아치는 공격에 이유강은 도무지 반격할 틈이 없었다.
 점점 팔이 저려왔다.
 갈비뼈라도 부러진 듯 숨 쉬기가 힘들 정도로 고통이 심했다.
 ‘으윽!’
 바로 그 순간,
 “네 이놈!”
 갑자기 큰 호령 소리가 들렸다.
 군관이었다.
 그는 공중으로 도약 후 맹렬히 회전하면서 초적 두목을 향해 쇄도했다.
 아까와 확연히 달라진 기세!
 군관의 움직임은 마치 태풍이라도 몰아치는 듯 가공했다.
 “허억!”
 초적 두목은 깜짝 놀란 표정으로 검을 들어 막았다.
 촤앙! 카가가칵!
 강한 금속성이 울리는가 싶더니 초적 두목의 칼이 두 동강 났다. 군관의 검은 그대로 초적 두목의 몸을 수직으로 갈라버렸다.
 “크아악!”
 초적 두목은 그대로 절명했다. 이유강은 급히 뛰어가 비틀거리는 군관을 부축했다.
 “괜찮소?”
 “하하하! 놈을 해치웠군.”
 “잠깐! 말을 아끼시오! 출혈이 매우 심하오!”
 그러나 군관의 얼굴엔 이미 혈색이 없었다. 그의 입 밖으로 연신 붉은 피가 쏟아져 나왔다.
 “나는…··· 이미 틀렸네. 자네 덕분에 놈을 해치울 수 있어 다행이군.”
 “운기요상을 취하시오! 여기 내상약이 있으니……!”
 군관은 고개를 저으며 품속에서 힘겹게 뭔가를 꺼냈다. 한 권의 책자였다. 이 와중에 웬 책일까?
 “약속대로 보답을 하겠네. 받게.”
 “이것은…….”
 “어서 받아.”
 대체 무슨 책인지 모르지만 이유강은 어쩔 수 없이 그것을 받아 품속에 넣었다. 일단은 빨리 군관을 설득하여 내상약을 먹여야 할 것 같아서였다.
 그러나 군관은 고개를 흔들었다.
 “나는…··· 틀렸어. 도저히 현 상태로는 펼쳐서는 안 될 무공을 펼쳤기 때문이지. 그래도 인연이 이어질 수 있어 다행이군. 자네······, 그 책을 소홀히 여기지 말고 끝까지 익히도록 하게. 부디.”
 군관은 마지막으로 한 번 웃더니 그대로 숨을 거두었다.
 ‘이런 안타까운 일이!’
 청년 군관의 죽음에 이유강은 망연자실한 표정을 지었다. 그런데 지금은 그의 죽음에 슬퍼하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아직 전쟁이 끝나지 않았다. 속히 남은 잔당을 토벌하지 않으면 희생이 커질 것이다.
 그런데 문득 거기까지 생각이 미친 이유강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뭔가가 이상해서였다.
 “흠, 왜 이렇게 조용하지?”
 방금 전 초적 두목이 죽었다 하지만 분명 남은 초적들과 관군들의 격전으로 시끄러울 터인데 마치 아무도 없는 산속처럼 고요했다.
 “설마 그 사이 벌써 전투가 끝났단 말인가?”
 그럴 리는 없었다. 이유강은 괴이쩍은 느낌에 요새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이럴 수가!”
 믿을 수 없게도 모두가 쓰러져 있었다.
 아니, 죽어 있는 것 같았다.
 부상당해 쓰러진 사람의 신음 소리조차 없는 것으로 보아 모두 죽은 게 분명했다.
 “이게 어찌 된 일인가?”
 잠시 망연히 서 있던 이유강은 뒤쪽에서 서늘한 기운이 느껴져 돌아섰다.
 ‘아니?’
 뜻밖에도 누군가 있었다.
 “당신은 누구요?”
 그는 흑발이 허리까지 늘어진 흑의인이었다.
 칠 척이 넘는 훤칠한 키에 흑발 사이로 드러난 얼굴은 음산하듯 창백했다. 게다가 두 눈은 흰자위도 없이 온통 검었다.
 그런 두 눈이 이유강을 섬뜩하게 노려보고 있었다.
 ‘으윽!’
 얼음장처럼 싸늘한 안광! 이유강은 그의 눈빛을 받아낼 수 없었다.
 “크크크!”
 그의 입에서 거친 괴소가 흘러나오는 순간 음습한 검은색 구름이 이유강의 온몸을 휘어 감았다. 몸이 굳어져 움직여지지 않았다.
 ‘으으…….’
 이럴 수가! 사방이 암흑으로 변해버렸다. 이유강은 아득한 나락으로 떨어지는 듯한 절망감에 휩싸였다.
 “네놈이 저 놈을 쓰러뜨렸느냐?”
 마치 환청과도 같은 음성이었다.
 들어본 적은 없지만 저승사자의 목소리가 저럴 것이다. 이유강은 가까스로 대답했다.
 “나는 아니오.”
 그러자 흑의인은 멀리서 힐끗 쓰러져 있는 군관의 시체를 쳐다봤다.
 “본신 진력을 쓰고 죽은 걸 보니 저놈 짓이군. 하나 네놈도 저놈과 한통속인 것 같으니 죽어줘야겠다.”
 죽인다는 말에 이유강은 흠칫 다시 놀랐다. 그러고 보니 흑의인은 죽은 초적 두목과 무슨 관계가 있는 모양이었다.
 “…···정말로 나를 죽일 생각이오?”
 “물론이다.”
 흑의인의 입가에 마치 사신과도 같은 잔혹한 살소(殺笑)가 맺히는 걸 본 이유강은 이제 살아남기 힘들다는 것을 깨달았다.
 흑의인이 무슨 기괴한 사술을 펼쳤는지 이유강을 꼼짝도 하지 못했던 것이다.
 ‘아아, 이런······.’
 부모님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고집을 피워 집을 떠난 지 한 달째.
 천하를 주유하며 세상의 이치를 이해하기는커녕 이런 산중에서 개죽음 당하게 된 것일까?
 막상 죽는다고 생각하니 눈물이 주루룩 흘러내렸다.
 ‘아버지, 어머니, 아무래도 소자 먼저 세상을 하직할 것 같습니다. 이 불효자식을 용서하십시오.’
 그러자 흑의인이 실소를 흘렸다.
 “사내놈이 눈물을 흘리다니, 형편없는 놈이군.”
 “…….”
 형편없는 놈이라니!
 그 말을 듣는 순간 이유강은 문득 오기가 치밀었다.
 제기랄, 어차피 죽을 몸이라면 무슨 말인들 못하겠는가.
 “실로 분하군. 네놈 같은 살인마 따위에게 개죽음을 당하게 되다니 말이야.”
 “뭐라 했느냐?”
 “으득! 비겁하게 사술을 쓰지 말고 정정당당하게 겨루자.”
 그러자 흑의인이 웃었다.
 “무식한 놈, 암흑마기를 사술이라 부르다니 그럼 어디 풀어줄 테니 한번 발악해봐라!”
 그가 손을 흔들자 이유강은 몸이 자유로워졌다.
 “나 혼자 죽진 않겠다!”
 이유강은 혼신의 힘을 다해 검을 휘둘렀지만 흑의인은 가볍게 손을 흔들어 검을 부러뜨려버렸다.
 “쿠윽!”
 검이 부러진 충격에 이유강은 기혈이 진탕되었다.
 부러진 검을 흑의인을 향해 힘껏 던지고 뒤로 퉁기듯 물러나 창을 주워들었다.
 휙! 휘잉!
 이유강은 필사적으로 창을 휘두르고 찔렀다.
 그가 알고 있는 초식 중 가장 빠르고 절묘한 것들만 골라 펼쳤지만 흑의인은 창마저 빼앗아 멀리 던져 버렸다.
 흑의인이 괴소를 흘렸다.
 “큭! 자질은 나빠 보이진 않는데 어디서 허접쓰레기 같은 무공만 배웠구나. 어쨌든 이대로 죽이긴 아까운 놈이로군. 크크, 좋아! 네놈은 이제 나의 하인이다. 나의 하인이 죽었으니 앞으로 네가 대신 나의 하인이 되어야 한다.”
 “다, 닥쳐라!”
 이유강은 번쩍 도약해 양 발을 교차하며 흑의인의 머리를 찼으나 그 또한 허사로 돌아갔다.
 ‘내가 차라리 죽을지언정 어찌 저런 마귀 놈의 하인이 될 수 있겠는가?’
 이유강은 죽을 각오를 하고 팔꿈치로 흑의인의 옆구리를 가격했다.
 “소용없는 짓.”
 흑의인은 싸늘히 웃으며 주먹을 뻗었다.
 쾅!
 “커억!”
 마치 철퇴가 날아와 머리를 후려친 듯했다. 이유강은 그대로 정신을 잃었다.
 
 
 ‘으음…….’
 눈을 떴다. 머리가 아팠다.
 “여기가 어디지?”
 고통이 느껴지는 것으로 보아 죽은 것은 아니었다. 가까스로 몸을 움직여 일어났다. 출렁이는 물결이 보였다. 주위를 돌아봐도 온통 물이었다.
 “바다?”
 이유강은 벌떡 일어났다.
 그는 대해를 표류하고 있는 배 위에 쭈그려 앉아 있었다.
 ‘이 배는 뭐지?’
 작은 고기잡이 어선보다도 더 작은 배. 조그만 돛 하나에 작열하는 땡볕을 가릴 그늘도 없었다.
 ‘저 놈은……!’
 그러고 보니 배의 한쪽에 흑의인이 앉아 있었다. 그는 눈을 감은 채 기척도 없었다. 이유강은 울컥 소리쳤다.
 “나를 어디로 데려가는 것이냐?”
 순간, 흑의인이 번쩍 눈을 떴다.
 검은 빛의 안광이 폭사되더니 음침한 검은색 구름이 이유강의 몸을 휘감았다.
 ‘으윽…….’
 무슨 악마의 손아귀에라도 붙들린 것인가?
 이유강은 몸이 마비된 듯 입을 열 수가 없었다.
 이대로라면 심장이 멎어버릴 것 같았다.
 그때 다시 환청과도 같은 차가운 음성이 들렸다.
 “조용히 있어라. 다시 한 번 시끄럽게 하면 네놈의 두 다리를 잘라 해적선에 팔아버리겠다.”
 흑의인은 그 말을 끝으로 다시 눈을 감았다.
 동시에 이유강의 몸을 꼼짝 못하게 헸던 검은색 구름도 사라졌다.
 “······.”
 몸이 자유로워졌지만 이유강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하루가 지났다. 흑의인은 계속 자리에 앉아 있었다.
 이유강은 배가 어디로 흘러가는지도 몰랐다.
 예전에 몇 번 배를 타본 적이 있었으나 잠깐 유람선을 탔을 뿐 지금처럼 오래 타본 적은 없었다.
 뱃멀미와 배고픔, 갈증……, 이유강은 죽을 지경이었다.
 ‘나는 대체 어떻게 되는 것일까?’
 정말 이대로 저 잔인무도한 괴인의 하인이 되어야 한다면?
 하늘도 무심했다.
 관군을 도와 초적을 무찌른 것뿐인데 이렇게 비참한 신세가 되다니…….
 
 
 
 
 
 
 
 
 
 
 제2장 기서(奇書)의 비밀
 
 
 
 
 
 휘이이이ㅡ
 바람이 세게 얼굴을 쳤다.
 여전히 바다였다.
 검푸른 하늘에 수많은 별들이 아름답게 떠 있었지만 그런 것들이 눈에 들어올 리 없었다.
 ‘아아, 내가 너무 무모했구나.’
 이유강은 세상이 결코 만만한 곳이 아니라는 부친의 말이 계속 떠올랐다.
 세상이 이토록 험한 곳이었을 줄이야.
 그렇다 해도 충분히 헤쳐 나갈 수 있을 거라 자신했건만, 그것은 그저 망상에 불과했다.
 ‘이제 나는 꼼짝없이 저 마귀의 하인이 되어야 하는 것인가?’
 이유강은 망연히 바다를 쳐다봤다.
 촤아아아!
 놀랍게도 배는 빠른 속도로 물살을 가르고 있었다.
 돛도 달지 않았는데 육지에서 말이 달리는 속도보다 빨랐다.
 ‘저게 무슨 조화인가.’
 그러고 보니 실로 기이했다. 아무래도 흑의인이 뭔가 특별한 조화를 부리고 있는 것 같았다.
 ‘무림의 고수들은 내력으로 배를 움직일 수 있다고 들었다. 과연 저 놈은 엄청난 고수로구나.’
 그렇지 않아도 무림의 고수를 만나보고 싶었던 이유강이었다. 그러나 그토록 대단해 보이는 무림 고수를 만났지만 그의 마음은 무겁기만 했다.
 ‘망할! 하필이면 저런 마귀 같은 놈을 만나다니.’
 배는 한참 동안 물살을 가로질렀다.
 흑의인은 묵묵히 앉아 앞만 보고 있었다. 며칠이 지났지만 그는 조금도 지친 기색이 없었다.
 
 그렇게 하루 정도가 지났을까?
 드디어 배가 한 섬에 도착했다.
 이상하게도 섬 외곽에는 한 치 앞도 분간하기 힘들 만큼 안개가 가득했다.
 그러나 흑의인은 안개 속으로 배를 돌진시켰고, 그렇게 한참을 들어가자 백사장이 나왔다.
 “이곳은 어디입니까?”
 이유강은 조심스레 물었다. 흑의인은 대답 대신 배에서 내려 걸었다.
 “내려라.”
 “이곳이 어디인지부터 알려······으윽.”
 그 순간 이유강의 몸은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백사장으로 내동댕이쳐졌다.
 “따라와라.”
 “크윽! 대체 왜 나를 이곳에 데려온 것입니까?”
 이유강이 절규하며 물었지만 흑의인은 아무 말 없이 걸어갔다.
 하늘은 낮인지 밤인지 분간하기 힘들었다.
 칙칙한 어둠이 깔려 있는데 어찌 주위가 선명하게 보일 수 있는 것일까?
 ‘여긴 평범한 섬이 절대 아니다.’
 이유강은 긴장했다. 뭔가 알 수 없는 음습한 기운이 섬 전체를 지배하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삐걱.
 방은 제법 컸다. 방의 한 편에 침대가 있었고 서가에는 책들이 많았다.
 책상과 옷장, 심지어 욕실도 딸려 있었다.
 욕실엔 두 개의 우물이 있었는데 하나의 우물에서는 뜨거운 물이 나왔고 다른 우물에서는 차가운 물이 나왔다.
 매우 신기한 곳이었지만.
 ‘제길!’
 이유강은 인상을 구기며 손에 들고 있던 걸레를 들어 방과 욕실을 깨끗이 닦았다.
 삭삭ㅡ
 청소를 마친 후 욕조에는 따뜻한 물과 차가운 물을 적당히 섞어 온욕을 할 수 있도록 채웠다.
 물론 이 곳은 흑의인이 거하는 방이었다.
 이유강의 처소는 그로부터 한참 떨어진 작은 창고였고, 그 안에는 침대 하나와 옷장이 전부였다.
 이유강의 하루 일과는 새벽에 일어나 청소를 하고 식사를 만들어야 했다.
 특이하게도 흑의인은 하루 한 끼의 식사만을 했다.
 그나마 그것은 다행이었다.
 게다가 그는 그의 방에서 지내지 않고 연무장으로 보이는 지하 밀실에서 생활했다. 심지어 잠까지도 거기서 자는 것 같았다.
 따라서 그는 제때에 식사를 가져다주기만 하면 이유강이 무슨 일을 하든 상관하지 않았다.
 물론 탈출만 제외하고 말이다.
 이유강이 울타리 밖으로 발을 내디디는 순간 사지를 찢어 죽인다느니 목을 비틀어 죽이겠다느니 하는 전음이 귀에 들려왔던 것이다.
 그러나 이유강은 탈출을 포기할 생각은 없었다.
 평생 이런 곳에서 살아야 한다면 차라리 죽느니만 못할 것이다.
 그렇다고 무턱대고 탈출을 하는 건 이미 불가능한 일임을 알았으니 일단은 상황을 살피는 중이었다.
 ‘기회를 엿보자. 그 놈도 인간이니 언제고 틈을 보이겠지.’
 작업을 마친 이유강은 자신의 처소로 돌아왔다.
 비좁은 방.
 멍하니 앉아 있자니 왠지 현재의 비참한 처지가 계속 떠올라 침울해졌다.
 ‘내가 어쩌다 이런 신세가 된 건가?’
 정녕 이렇게 살아야 하는 건가? 차라리 죽고 싶은 마음도 들었지만 부모님을 떠 올리니 차마 죽지 못했다.
 ‘죽는 건 안 된다. 어떻게든 살아남아 이곳을 탈출해야 한다.’
 하늘이 갑자기 이런 고난을 주는 건 필시 이유가 있을 터였다. 아닐 지도 모르지만 이유강은 최대한 그럴 것이라 생각하며 이를 악물었다.
 그렇게 의지를 다지던 이유강은 문득 얼마 전 박군관에게 받은 책이 생각났다.
 ‘그렇군. 그게 있었지?’
 그가 죽기 전에 보답이라며 준 것인데 당시 경황 중이라 제목조차 확인하지 않았었다.
 
 방중기서(房中奇書)
 
 ‘아니, 방중기서라니! 설마 이건…….’
 책의 제목을 확인한 이유강의 표정이 멍해졌다. 펴보지 않아도 왠지 그 내용을 알 것 같아서였다.
 파락.
 그래도 혹시나 싶어 책을 펴보았더니 역시나 예상대로 남녀상열지사(男女相悅之詞)에 관한 내용이었다.
 ‘으음.’
 이유강은 왠지 어처구니가 없었다. 이 책의 내용이 야릇해서라기보다는 박군관이 마지막으로 한 말이 떠올라서였다.
 
 자네······, 그 책을 소홀히 여기지 말고 끝까지 익히도록 하게. 부디.
 
 그 때는 경황 중이라 흘려듣긴 했지만 방금 전 책을 펴기 전에 문득 그 말이 떠올라 뭔가 기대를 했던 것이 사실이었다.
 혹시라도 박군관이 마지막에 펼쳤던 가공할 검초가 적힌 비법이 적혀 있지 않을까 하고 말이다.
 그런데 남녀상열지사와 각종 방중술에 대해 적혀 있는 내용임을 확인하고 나자 왠지 허탈해졌다.
 ‘쯧쯧, 거 참! 그러니까 나보고 이 책에 나와 있는 저속한 방중술들을 끝까지 익히라고 한 건가?’
 대체 사람을 어떻게 보고 그 따위 말을 했단 말인가? 몇 번을 생각해봐도 어처구니가 없었지만 그와 달리 그의 두 눈은 책의 내용을 훑고 있었다.
 ‘화, 화끈해. 하하, 이 자세는 너무 노골적인 걸.’
 본래라면 이 따위 잡서는 집어 던져 버렸어야 하리라.
 그러나 이유강의 손은 책장을 계속 넘겼고 책의 내용은 속속 그의 머리로 들어왔다.
 ‘죽은 사람이 마지막으로 한 유언과 같은 말이니 가급적 들어주는 게 도리일 것이다.’
 이유강은 그렇게 스스로를 합리화했다.
 그렇다고 이 책에 나와 있는 방중술을 끝까지 익히겠다는 것은 아니고 마지막까지 일독은 해보겠다는 뜻이었다.
 그렇게 한참을 몰두해서 책장을 넘기던 이유강의 두 눈에 문득 이채가 일었다.
 ‘이럴 수가! 이건 정말 절묘하군.’
 방중기서의 각 쪽마다 낯 뜨거운 남녀의 정사장면이 그려져 있었는데, 기이하게도 여인의 음부나 가슴과 같은 주요 부위는 글자들로 아슬아슬하게 가려져 있었다.
 왜 하필 그 부위들을 다 가려버렸단 말인가?
 그것은 이유강도 왠지 불만이었다.
 그는 보면 볼수록 그 글자들이 거슬렸고, 할 수만 있다면 글자들을 깨끗이 지워버리고 심정이었다.
 그런데 그 글자들이 뜻하는 내용이 충격적이었으니!
 무심코 각각의 문자들을 연결했더니 마치 무공 구결과 같은 심오한 뜻을 내포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유강도 처음에는 그저 우연히 그러한 글자들이 그곳에 위치해 있으리라 생각했다.
 설마 누가 춘화도의 은밀한 부위들에 무공 구결을 적어 놓았을 것이란 생각을 하겠는가.
 그러나 그러한 구결들이 반복되자 이유강은 결국 춘화도의 모든 글자들을 연결시켜 보았다.
 
 대천삼식(大天三式)!
 
 놀랍게도 그것은 대천삼식이라는 거창한 이름을 가진 검법의 구결이었다.
 역시나 그러면 그렇지.
 박군관이 그 와중에 한낱 방중술에 관한 책을 보답이라며 건네줬을 리 있겠는가.
 ‘무공비급이구나. 아아, 내가 기연을 얻은 것인가?’
 말로만 듣던 기연(奇緣)! 이유강은 두근거리는 가슴을 진정시키며 구결들을 차근차근 읽어보았다.
 첫 번째 초식인 비상참(飛上斬)은 날아올라 그 앞을 가로막는 어떤 것이든 베어버릴 수 있는 필살 초식!
 다름 아닌 박군관이 초적 두목을 칼과 함께 양단해버렸던 바로 그 초식이었다.
 최소 삼십 년의 내공이 있어야 시전이 가능하고 삼십 년 이하의 내공으로 섣불리 시전하게 되면 본신 진력의 소모로 반드시 죽는다고 적혀 있었다.
 “나의 내공은 겨우 십 년 남짓이니 지금으로선 그림의 떡이로군.”
 앞으로 이십 년은 지나야 간신히 시전이 가능한 무공이었다.
 소림사의 대환단과 같은 무림의 보물을 얻어 복용한다면 모를까 그러한 특별한 기연을 만나지 않는다면 수련한 기간만큼의 내공만 얻을 수 있을 테니까.
 두 번째 초식인 비풍파(飛風破)는 비상참보다 위력이 몇 배 강하지만 최소 육십 년의 내공이 필요하다 했다.
 마지막 초식은 비광무(飛狂舞)라는 것으로 내공이 백 년 이상이 되지 않고서는 펼칠 꿈도 꾸지 말라고 적혀 있었다. 심지어 그것의 위력이 어떤지도 나와 있지 않았다.
 “백 년 내공이 있어야 펼칠 수 있다고? 과연 내가 그때까지 살아 있을 수나 있을까?”
 대천삼식의 무공은 모두 꿈같은 얘기였다. 첫째 초식인 비상참도 현재 상태로는 이십 년 후에나 펼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일단 모두 기억해 놓기로 했다.
 ‘내공이 없으니 펼칠 수는 없겠지만 그래도 초식의 오의와 자세는 몸에 익혀놓아야겠다.’
 그 후로 한 달 동안 이유강은 그것에 몰두했다.
 그로인해 그는 눈을 감고도 대천삼식을 펼칠 수 있었다.
 물론 초식 상으로만 말이다.
 하지만 그로써 자신감을 얻은 이유강의 두 눈이 이글거렸다.
 ‘앞으로 이십 년!’
 그렇다. 이십 년만 지나면 그는 대천삼식의 첫 번째 초식인 비상참을 자유자재로 펼칠 수 있게 될 것이다.
 ‘그때가 되면 그 초식을 펼쳐 그 놈을 상대할 수 있을까?’
 비상참이 앞을 가로막는 뭐든 베어버릴 수 있다는 필살초식이라 했지만 흑의인은 눈빛만으로 이유강을 꼼짝 못하게 만드는 사술을 지니고 있으니 문제였다.
 ‘휴!’
 그러던 이유강은 문득 한숨이 나왔다.
 생각해 보니 설령 확실히 이긴다는 보장이 있더라도 무려 이십 년이라는 시간을 이곳에서 보내야 한다는 것은 끔찍한 일이었다.
 그때까지 아까운 청춘을 이곳에서 보내야 한다는 말인가?
 ‘그럴 수는 없어! 그 전에 반드시 이곳을 탈출한다.’
 
 
 그 후로도 이유강의 하인 생활은 계속 되었다.
 집의 뒤뜰에는 작은 농장이 있었는데, 흑의인은 농장에서 신선한 과일 몇 개와 채소 한 접시만 갖다 주면 그것으로 충분해 했다.
 신기한 것은 농장에는 기후 변화가 거의 없다는 것이었다.
 과일 나무에는 항상 열매가 열려 있었고 채소들은 누가 돌보지 않는데도 잘 자랐다.
 ‘그보다 이상해. 그 놈이 어제부터 왜 식사를 하지 않는 거지?’
 흑의인은 이유강이 절대 밀실 안으로 들어오지 못하게 했다.
 그로 인해 항상 밀실 문 앞에 빈 접시가 놓여 있었는데, 이틀 전부터는 이유강이 가져다 놓은 음식이 그대로 놓여 있었던 것이다.
 ‘혹시 이틀 전 밤에 들렸던 그 큰 소리가……?’
 이유강은 그날 밤에 자다가 땅이 크게 울리는 거대한 굉음을 듣고 깜짝 놀라 깼었다.
 지하 밀실에서 나는 소리였다.
 가끔 제법 큰 소리들이 그쪽에서 나긴 했지만 그토록 엄청난 굉음은 처음이었다.
 ‘설마 그때 밀실이 무너져 내려 그 놈이 죽기라도 한 건 아니겠지.’
 그랬으면 얼마나 좋겠냐만 그는 절대로 그렇게 쉽게 죽을 리가 없었다.
 아마도 뭔가 굉장한 파괴력을 지닌 무공을 펼친 후 한동안 운기요상을 취하고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때를 노려 탈출하는 게 좋지 않을까?
 그러나 이유강은 문득 보름 전의 일이 떠올랐다.
 그때 그는 은밀히 탈출을 시도했다.
 그리고 집의 울타리를 열자마자 들렸던 흑의인의 음성.
 
 ‘애송이 놈! 한 번만 더 쓸데없는 짓을 하면 다리를 확 잘라 버리겠다. 시험해 봐도 좋다. 과연 내가 네놈의 다리를 자르나 안 자르나 확인하고 싶으면 다시 한 번 더 집 밖으로 나가봐라.’
 
 그 뒤로 이유강은 한동안 탈출할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런데 지금 다시 탈출하고 싶은 마음이 드는 것이었다.
 이때가 아니면 또 언제 기회가 오겠는가?
 그러나 이유강은 고개를 흔들었다.
 ‘혹시 그 놈이 내 다리를 자르기 위해 일부러 시험하는 것이라면? 하긴 그 놈이라면 그러고도 남을 놈이지.’
 절대 말려들면 안 될 것이다. 그런 식으로 허무하게 다리를 잃을 수는 없는 일이니까.
 
 그 후로 다시 열흘이 지났다.
 이유강은 그동안 꾸준히 음식을 가져다 날랐다.
 그 전날 가져다 놓았던 것을 그대로 회수하여 버리고 새로운 음식을 계속 가져다 놓는 것이 하루 일과였다.
 그런데 뭔가 이상했다.
 아무리 흑의인이 대단한 고수라 해도 열흘이 넘도록 아무것도 먹지 않고 살 수 있을까?
 게다가 예전에 밀실에서 가끔 들렸던 큰 소리도 요즘은 들리지 않았다.
 ‘흠.’
 이유강은 귀에 내력을 집중시킨 후 밀실 문에 대고 소리를 들어보았다. 그런데 마치 텅 비어있기라도 하듯 아무 기척도 느껴지지 않았다.
 ‘혹시 정말로 죽은 거 아냐?'
 탁탁!
 이유강은 밀실 문을 손으로 쳐서 소리를 내보았다.
 아무 반응이 없자 이번에는 작정하고 밀실 문을 세게 두드렸다.
 쾅쾅쾅!
 “이보시오!”
 그런데도 반응이 없었다. 밀실 문을 열어보려 했지만 문은 꽉 잠겨 있었다.
 순간 이유강의 입가에 슬쩍 회심의 미소가 맺혔다.
 상황이 이렇다면 더 이상 고민할 것 있겠는가.
 ‘후후, 하늘이 나를 불쌍히 여겨 그 마귀 놈을 죽인 것이 분명하다.’
 이유강은 즉시 떠날 채비를 했다.
 특별히 가져갈 것은 없었다.
 창고 옷장을 열어 봇짐을 꺼낸 후 십여 일 정도 먹을 수 있는 음식을 준비해 봇짐에 넣었다.
 혹시 모르니 창고에 처박혀 있던 철검도 한 자루 챙겼다.
 ‘이 정도면 떠날 준비가 되었군.’
 막상 떠난다고 생각하니 왠지 울컥했다.
 근 두어 달 동안 종노릇을 하며 지냈으니 어찌 억울하지 않겠는가.
 “네 이놈! 네놈이 살아 있든 죽었든 각오해라! 언제고 내 반드시 다시 찾아와 혼을 내주마!”
 밀실 앞에서 크게 소리쳤으나 여전히 밀실 안에서는 아무 소리도 없었다.
 그래도 큰소리를 한 번 치고 나니까 후련했다.
 이제 떠날 일만 남은 것이다.
 삐걱ㅡ
 곧바로 이유강은 울타리 문을 열고 집을 나섰다.
 조심조심 십여 보를 걸었으나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예전 같았으면 서너 보를 채 걷기도 전에 흑의인의 협박 전음이 들려왔을 것이다.
 “하하하! 역시 그놈, 천벌을 받아 죽은 것이 분명해.”
 그러던 이유강은 문득 고개를 들어 하늘을 쳐다봤다.
 처음부터 그랬지만 이곳은 항시 하늘이 회색빛이었다. 구름도 없었고 해와 달도 보이지 않았다.
 뭔지 모를 안개 같은 것이 주위에 가득했지만 선명하도록 시야는 트여 있었다.
 “어서 떠나자. 언제 봐도 여긴 기분 나쁜 곳이야.”
 그렇게 다시 몇 보를 걸었을 때였다.
 “끄끅!”
 전방에서 뭔가가 괴이한 소리를 내며 다가왔다. 이게 무슨 소리인가?
 “끄끄끅!”
 그것은 사람이 내는 소리가 아니었다. 살아 있는 짐승의 간장을 쥐어짜면 이런 소리가 날 것이다.
 스릉.
 깜짝 놀란 이유강은 검을 빼어 들었다.
 “네놈은 뭐냐?”
 발목까지 치렁하게 늘어진 흑발, 일 장(一丈)이 넘는 거대한 몸체, 시뻘겋다 못해 핏빛으로 물든 두 눈과 늑대를 연상케 하는 누런 이빨 외에는 모든 것이 검었다.
 ‘저럴 수가! 어찌 저런 것이 존재한다는 말인가?’
 뱀의 눈과 늑대의 이빨을 가진 괴수의 모습을 확인한 이유강은 온몸이 얼어붙은 듯 경직되었다.
 세상에 아마도 악령이라는 것이 존재한다면 딱 저와 같은 모습이리라.
 “끄끄끅!”
 괴수는 순식간에 삼 장 앞까지 다가와 시뻘겋게 충혈 된 두 눈으로 이유강을 노려봤다.
 머리의 반을 차지할 만큼 큰 입속의 송곳니 아래로 누런 액체가 흘러내렸다.
 “물러나라!”
 이유강은 이를 악물고 검을 겨눴다.
 ‘필시 저것은 진법의 환영임이 분명하다.’
 아무리 생각해도 세상에 저런 것이 존재할 수는 없는 것이다.
 따라서 이유강은 흑의인이 집 근처에 괴이한 진법을 펼쳐두었을 것이라 생각했다.
 쉬익ㅡ
 그러나 괴수가 달려들어 휘두른 주먹을 검으로 막아내는 순간 이유강은 이 상황이 진법의 환상이 아닌 현실임을 깨달았다.
 까강! 깡!
 괴수의 손과 이유강의 검이 부딪힐 때마다 둔탁한 쇳소리가 울렸다.
 괴수의 힘은 상상을 초월했다.
 이유강은 결국 뒤로 나가떨어지고 말았다.
 ‘으으, 이런!’
 괴인이 성큼성큼 다가왔다.
 “끄끄끅!”
 폐부를 찌르는 고약한 냄새와 함께 엄습하는 섬뜩한 살기!
 이유강은 정신이 아득해졌지만 이를 악물었다.
 멍하니 있을 때가 아니었다.
 이대로 있다간 죽는 것은 물론이요 시체조차 보전하지 못할 것이다.
 이 악령과 같은 괴수는 이유강을 한 끼 식사로 먹어치우고도 남을 테니까.
 “으득! 내가 순순히 당할 것 같으냐?”
 이유강은 훌쩍 날아올라 괴수의 목을 향해 검을 휘둘렀다.
 팟!
 그러나 괴수는 허리를 슬쩍 숙여 이유강의 검을 피함과 동시에 바람처럼 주먹을 날렸다.
 퍼억ㅡ
 “크윽!”
 이유강은 최대한 몸을 회전하여 비껴 맞았지만 충격은 엄청났다.
 그는 거의 삼 장 가까이 날려가 곤두박질쳐졌다.
 벌어진 입으로 선혈이 울컥 쏟아져 나왔다.
 ‘이렇게 강하다니……. 설마 그놈이 저렇게 변했단 말인가?’
 밀실 속에서 아무 기척이 없던 흑의인.
 그인지도 몰랐다.
 그렇지 않다면 아무리 귀신이라 해도 이리 강할 수는 없는 것이다.
 그런데 그것이 문제가 아니었다. 비틀거리며 일어난 이유강은 돌연 두 눈을 부릅떴다.
 “허억! 저, 저것들은……?”
 사방에서 다가오는 시커먼 그림자들!
 사람보다 큰 키에 날카로운 이빨을 번뜩이며 다가오는 괴수들!
 모두 지옥에서나 볼 수 있을 법한 흉측한 것들이었는데 그 수가 헤아릴 수 없이 많았다.
 ‘어헉!’
 이제는 탈출이 문제가 아니었다.
 이유강은 뒤로 돌아 울타리 문을 열고 집 안으로 뛰어들었다.
 달칵!
 곧바로 창고 안으로 들어가 문을 닫아걸었다.
 “아아, 세상에 어찌 저런 끔찍한 것들이 존재할 수 있단 말인가? 내가 꿈을 꾸고 있는 것인가?”
 창고 안으로 숨었지만 괴수들이라면 쉽게 문을 부수고 들어올 것이다.
 이대로라면 도저히 살아날 길이 없었다.
 이유강은 문득 화가 치밀어 올랐다. 아무래도 흑의인이 뭔가 술수를 부려놓은 것이 분명한 것이다.
 “제길! 사악한 놈 같으니…….”
 괴수에게 맞은 옆구리가 심하게 아려왔다. 이유강은 봇짐을 열어 그 안에 있던 약을 상처 부위에 발랐다.
 ‘아.’
 신기하게도 고통이 금세 줄어들었다. 그러고 보니 그것은 여행을 떠나기 전 모친이 챙겨준 금창약이었다.
 ‘어머니…….’
 이유강은 손등으로 눈물을 훔쳤다. 자신도 모르게 눈물이 흘러내렸던 것이다.
 그러던 그는 피곤에 지쳐 잠이 들었다.
 
 
 
 
 제3장 기이한 무공들
 
 
 
 잠에서 깨었다. 온몸이 부서질 듯 아팠다.
 ‘내가 살아 있단 말인가……?’
 이유강은 상처에 금창약을 바르고 자신도 모르게 잠이 들었다.
 사실상 그는 삶을 체념했었다.
 아마 그 누구라 해도 그와 같은 상황에서 살아남을 수 있으리라 생각하기는 힘들 것이다.
 수를 헤아릴 수 없는 괴물들!
 이 집이 무슨 철옹벽을 가진 성이라도 된다면 모를까 그 무시무시한 괴물들을 막기엔 집의 울타리는 너무 연약했다.
 물론 이유강이 문을 닫아 걸은 이곳 창고도 마찬가지다.
 그 끔찍한 괴물이 강철 같은 주먹으로 한 번만 후려쳐도 이 따위 창고 문은 박살이 나고도 남았을 것이다.
 그런데 어째서 이리 조용한 것일까?
 이유강은 조심스레 창고 문을 열어 보았다.
 집 안에는 아무도 없었다.
 집안 곳곳, 그리고 뒤뜰의 농장에도 가보았지만 괴물들의 흔적은 없었다.
 ‘이상한 일이군. 내가 꿈을 꾼 것일까?’
 상처가 아직 욱신거리고 있는 것을 보면 결코 꿈은 아니었다.
 다만 상처 부위는 금창약을 발라서인지 어제보다는 한결 부드러웠다.
 “그래, 혹시……?”
 이유강은 문득 울타리 문을 열고 밖을 쳐다보았다.
 “끄끄끅!”
 이럴 수가! 문 앞에서 어제 만났던 그 괴수의 시뻘건 두 눈이 이유강을 잡아먹을 듯 노려보고 있었다.
 ‘허억!’
 이유강은 간이 철렁 내려앉을 듯 놀라 잽싸게 문을 닫았다.
 ‘역시 꿈이 아니었구나.’
 이유강은 바닥에 털썩 주저 않았다. 식은땀이 흘러서인지 등 뒤가 축축했다.
 ‘어찌 이러한 일이 있을 수 있단 말인가.’
 무엇보다 기괴한 것은 그것들이 집 안으로 들어오지를 못한다는 것.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한 일이로군.’
 한참 동안 멍하니 앉아 있던 이유강은 돌연 벌떡 일어났다.
 “으득! 그러고 보니 그 놈이 죽을 때를 대비해서 술수를 써놨구나. 내가 이 섬을 벗어나지 못하도록 그런 괴물들을 풀어 놓은 게 분명해.”
 곧바로 이유강은 지하 밀실로 가서 밀실 문을 밀어보았다.
 그러나 문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에잇!”
 내공을 실어 힘껏 발로 차보기도 했지만 미동도 없었다. 오히려 발만 아플 뿐이었다.
 그 무슨 수를 써도 밀실 문은 열리지 않았다.
 이유강은 결국 지쳐서 창고로 돌아와 침대에 누웠다.
 ‘일단 좀 쉬어야 겠군.’
 그러다 그는 돌연 벌떡 일어났다.
 ‘그래. 그러고 보니!’
 잠시 후 이유강은 창고에 있던 봇짐을 들고 흑의인의 방으로 들어갔다.
 그 방은 흑의인이 언제 나올지 몰라 항시 깨끗이 청소해 놓은 곳이었다. 널찍한 방에 욕실도 있었고 서가에 책들도 많았다.
 “하하하! 그놈도 죽었으니 이제 이곳이 내 방이다.”
 일단 목욕부터 하기로 했다. 전에는 숲 속에 있는 찬 우물에서 목욕을 했는데 이제는 그럴 필요가 없었다.
 뜨거운 물이 나오는 신비한 욕조가 바로 옆 욕실에 있었으니까.
 그는 곧바로 욕조에 뜨거운 물과 찬물을 적당히 섞어 물을 채운 후 옷을 벗고 몸을 담갔다.
 “오, 좋구나……!”
 상처 부위가 약간 쓰라리긴 했지만 온욕을 하니 피곤이 싹 가셨다.
 
 다음날.
 이유강은 숲에서 열매를 몇 개 따와 아침을 해결했다.
 혹시나 해서 슬쩍 문밖을 힐끔거렸지만 역시 괴물들은 그대로 있었다.
 “이대로라면 꼼짝없이 여기서 늙어 죽어야 하겠군.”
 그야말로 감옥이 따로 없었다. 그나마 집 안으로 괴물들이 들어오지 못하는 것이 얼마나 다행인가.
 이유강은 차라리 이 안에서 늙어죽으면 죽었지 저런 끔찍한 것들에게 찢겨 죽고 싶지는 않았다.
 그러다 돌연 그는 정신을 집중하고 주위를 찬찬히 살펴봤다.
 “아무리 봐도 저런 것들이 현세에 존재할 리 없다. 기문둔갑의 술법으로 나타난 환상이 분명해.”
 어제는 경황 중이라 착각했을 수도 있다.
 ‘다른 것도 아니고 기문진법의 일종이라면 내가 알아내지 못할 리 없지.’
 이유강은 어지간한 고대의 진법은 다 꿰고 있었다. 하지만 한나절이 지나도 그런 흔적을 찾을 수 없었다.
 “결론적으로 저것들은 모두 살아 있는 존재들이다. 결코 허상이 아니야.”
 이유강은 탄식했다. 대체 지옥에서나 존재해야 할 마물(魔物)들이 어찌 현세에 존재하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
 ‘혹시 내가 죽어 지옥에 온 것인가?’
 그럴 리가 없었다. 정녕 지옥이라면 벌써 그것들에게 온몸을 뜯기고 있을 것이다.
 “제기랄! 지옥이든 어디든 상관없다. 난 무슨 수를 써서라도 이곳을 빠져나갈 것이다.”
 이유강은 방 안으로 들어가 서가로 눈을 돌렸다.
 방 한쪽 면을 모두 차지한 서가에는 책들이 상당히 많이 꽂혀 있었지만, 그는 사실 책이라면 이력이 나도록 봤던 터라 별다른 흥미가 생기지 않았다.
 그러나 잠시 책들을 살펴보니 그게 아니었다. 아득한 고대 범어(梵語)로 된 책들이었던 것이다.
 “조환물여의경(造幻物如意經)?”
 해석해 보니 무척 생소한 제목이었다.
 서가의 책은 도합 삼백두 권이었는데, 그중 무려 이백 권이 ‘조환물여의경’ 이라는 제목의 책들이었다.
 실로 방대한 분량이었는데 종이가 아닌 양피지로 만들어져 있었고, 그 색도 변해 있어서 자세히 보지 않으면 글자를 알아보기 힘들었다.
 더욱 놀라운 것은 그 옆의 서가에 가득한 책들의 제목도 하나였으니.
 “신조환물여의경(新造幻物如意經)?”
 앞에 신(新)이라는 글자가 붙은 이 책들은 표지나 속지가 상당히 깨끗한 걸로 보아 최근에 집필된 것 같았다.
 ‘신조환물여의경’은 총 백 권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딱 봐도 그것의 저자는 ‘조환물여의경’을 연구하고 보완하여 책을 집필한 것이 분명했다.
 단순한 해설이나 주석집이라면 분명 조환물여의경해록(造幻物如意經解錄)이거나 조환물여의경주석집(造幻物如意經註釋集)과 같은 제목을 붙였을 것이다.
 그러나 앞에 신(新)이라는 글자를 붙였다는 것은 예전의 내용을 보완하여 더욱 새롭게 발전시켰다는 자신감의 표현이리라.
 “이거 의외로 흥미로운 걸.”
 이유강은 어차피 달리 할 일도 없었다.
 여기서 언제 나갈지도 모르고 어쩌면 이대로 늙어 죽을지도 모른다.
 이런 판에 장장 삼백 권이나 되는 엄청난 분량의 책을 발견했으니 어찌 즐겁지 않겠는가.
 “처음 보는 책들이 있다는 것이 이토록 반가운 걸 보면 역시나 서생이 내게 어울리는 건가.”
 이유강은 씁쓸하게 웃으며 서가의 맨 오른쪽 아래에 있는 두 권의 책을 끄집어냈다.
 제목을 읽어보니 광마도법(狂魔刀法)이라는 책과 암흑마공(暗黑魔功)이라는 책이었다.
 모두 한어(漢語)가 아닌 범어(梵語)였다.
 그러고 보니 서가에 있는 모든 책들이 다 범어로 적혀 있었다.
 “지금은 거의 쓰이지 않는 고대의 범어라니……. 심지어 최근에 집필된 책들도 범어로 적어 놓았군. 아무나 알아보지 못하게 하려고 했던 것일까?”
 어지간한 학자들도 해독하기 힘든 문자였다.
 솔직히 이유강 자신도 그리 빠르게 해독할 수는 없을 것 같았다.
 그는 비록 범어를 알고 있긴 하지만 이러한 문자로 된 책은 몇 권밖에 본 적이 없었던 것이다.
 “시간도 많으니 천천히 아껴서 읽으면 되겠지.”
 그는 별로 서두르고 싶은 생각도 없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 괴이한 곳을 빠져나가는 것은 거의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기왕 이렇게 되었으니 차라리 고독을 즐기며 무공이나 학문을 연구하며 평생 지내다 죽는 것도 나쁘진 않을 것이다.
 “이 두 권의 제목을 보니 무공 서적인 듯한데…….”
 이유강은 광마도법이라는 책과 암흑마공이라는 책을 서가에서 빼어 탁자 위에 올려놓았다.
 ‘분량 상 이 두 권의 책을 먼저 읽는 것이 좋을 것 같구나.’
 두 권 모두 제법 두꺼웠다.
 
 
 이유강이 두 권의 무공비급을 읽는 데는 꼬박 열흘이 걸렸다.
 “아아! 무공도 학문처럼 끝이 없구나. 고작 칼을 하나 움직이는 데도 이토록 심오한 이치가 있다니…….”
 광마도법은 무척 심오한 내용의 무공서였다.
 두꺼운 책 가득 그림 하나도 없이 조그만 글자로 빽빽하게 채워져 있었는데 놀랍게도 그 많은 분량이 단 하나의 초식을 설명하는 것이었다.
 “천 개의 변화가 궁극적으로 하나의 초식을 이룬다?”
 그 초식을 이해하려면 초식을 이루고 있는 천 개의 변화를 이해해야 한다고 했다.
 천 개의 변화!
 책에 적혀 있는 바에 의하면 천 개의 변화 중 불과 수십 개의 변화만 이해해도 어지간한 공격은 방어할 수 있다고 했다.
 대략 백 개의 변화를 이해하면 일류고수의 반열에 들 수가 있고 삼백 개 이상의 변화를 이해하게 되면 무림의 절정고수를 능히 상대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그러고 보니 그놈의 무공이 이것이었구나.”
 이유강과 박군관의 합공을 어렵지 않게 막아냈던 초적 두목의 도법이 바로 광마도법이었던 것이다.
 그 당시의 결투를 잠시 떠올려 보니 그는 대략 수십여 개의 변화를 이해하고 있는 것 같았다.
 “좋아, 그렇다면 나는 천 개의 변화를 모두 익혀 보도록 하겠다. 어쩌면 그때는 괴물들을 물리치고 섬을 떠날 수 있을 지도 모르지.”
 기사회생의 기회라는 것이 바로 이런 것을 의미하는 것일까?
 꼼짝없이 섬 안에 갇혀 있을 것이라 생각했던 이유강은 희대의 무공비급인 광마도법을 접하고 새로운 희망을 품게 되었다.
 ‘역시 하늘이 나를 돕고 있구나.’
 그는 주먹을 불끈 쥐었다.

댓글(1)

유적하    
광마도법부터 2부를 기달렸는데 개정판이 나왔다고 하여 모두 리디에서 구매해서 봤습니다. 그런데 2부연결이 아니고 1부에서 완결시키는 분위기로 글이 바꼈더군요. 백향목님이 오렌님이라는 것도 깜짝 놀랐지만 오래동안 2부를 기다려온 입장에서 아쉽습니다. 앞으로도 좋은글 부탁드립니다.
2015.11.15 17: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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