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물함
뒤로가기버튼 미연시의 교수가 과거를 숨김

상실의 시대였다

2024.05.29 조회 3,393 추천 91


 #1화
 
 사내는 기억하고 있다.
 
 『상실의 시대였다.』
 
 친구의 강요로 시작한 미연시 게임의 인트로 첫 문장.
 모니터에서 뿜어지던 빛.
 평민 집안의 어린 셋째 아들로 깨어난 그 순간을.
 
 혼란스러웠다. 갑작스러운 제2의 삶도 그랬지만, 사내가 아는 거라고는 게임이 아카데미 물이라는 사실뿐이었기에 더욱 그랬다.
 그래서 처음에는 원작 따위 신경 안 쓰고 살아보려 했다.
 
 어차피 미연시니까. 잘난 주인공이 아카데미에서 히로인들과 연애질하는 게 다일 테니, 크게 신경 쓸 필요 없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새로운 삶은 생각한 것 이상으로 열악했다.
 
 갓 태어난 동생은 첫울음을 끝으로 숨을 쉬지 않았다.
 연년생 형은 땔감을 구하러 갔다가 돌아오지 않았다.
 우습게도 이유는 알 수 없었다.
 
 죽음은 멀리 있지 않았다.
 이 세계는 미연시를 표방했지만, 상냥하지는 않았다. 살려면 주인공 곁에 붙어 있어야 했다.
 짚 이불을 덮은 채 추위에 떨다가 해피엔딩이 진국이라던 친구의 말이 떠올랐을 때는 마침내 결심을 굳혔다.
 
 ‘중앙 아카데미로 가자.’
 
 그 뒤로 촌장의 비위를 맞춰주며 구걸하듯 문자를 익혔다.
 은퇴한 용병의 샌드백 역할을 자처해 싸우는 법을 익혔다.
 중간에 용병이 그를 용병단에 팔아버리려는 문제가 생기기도 했지만, 지닌바 재능이 있어 어찌저찌 아카데미에 합격할 수 있었다.
 
 문제는 누가 주인공과 일행이냐는 것이었지만, 그것도 입학하니 우스울 정도로 쉽게 해결되었다.
 당대 용사와 성녀, 용의 혼혈인 기사, 하이엘프 마법사가 동기인데 뭘 더 찾을까.
 실제로 곁에서 본 그들은 주인공들이라 할 만했다.
 
 그 용사, ‘희망’을 알기에 웃음을 잃지 않는 이였다.
 그 기사, ‘긍지’를 알기에 앞에서 피 흘리는 이였다.
 그 마법사, ‘꿈’을 알기에 누구보다 늦게 잠드는 이였다.
 그 성녀, ‘사랑’을 알기에 선을 궁구하고 실천하는 이였다.
 
 그들과 학창 시절을 즐기다 보니, 정신을 차렸을 때는 어느덧 마왕의 침공이 시작되었다.
 연일 밀리는 전선. 그들, 용사 파티는 대륙의 부름에 아카데미를 휴학하고 전쟁에 뛰어들었다.
 그렇게 10년 가까이 지속된 전쟁.
 
 그래도 그들은 서로가 서로를 지탱하며 나아간 끝에 마침내 마왕의 숨통을 끊었다.
 그래. 사내라는 단 하나의 생존자만을 남겨둔 채······.
 
 “후.”
 
 산꼭대기에 선 사내는 손에 쥔 편지를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중앙 아카데미의 총장이자, 그들의 스승인 ‘대마녀, 올리비아’에게서 온 편지였다.
 「잭, 내 소중한 흰 까마귀. 네 소식은 제자들을 통해 종종 듣고 있으니 따로 묻지는 않으마.
 내가 이렇게 편지를 한 건, 네게 희소식을 전해주고 싶어서란다」
 
 무소식이 희소식이다. 사내는 그리 중얼거렸고, 실제로 이어진 내용은 썩 유쾌하지 않은 소식이었다.
 
 「올해 대륙에서 내로라하는 진귀한 꽃들이 화원에 들어올 예정이란다.
 당연히 꿀 내음에 이끌린 벌레들이 화원 주위를 기웃거리고 있지.」
 
 사내는 그 뜻을 이해하고 미간을 찡그렸다.
 대마녀의 화원, 중앙 아카데미가 올해 신입생 때문에 시끄러운 모양이다. 당대 용사가 원인이리라.
 
 「이걸 보고 읽을 네 표정이 눈에 훤하구나. 보나 마나 고운 미간으로 한껏 불만을 표시하고 있겠지.
 그래. 나도 안단다. 네가 날개를 접었음을 내가 어찌 잊었겠니.
 하지만 잭, 나는 이 편지를 쓰고 있는 이 순간에도 화원 주위를 기웃거리는 벌레들의 발소리를 듣는단다.」
 
 분명 대마녀의 품은 넓다. 100년 가까이 중앙 아카데미를 지켰으니, 그건 의심할 여지가 없다.
 하지만 홀로 화원의 모든 꽃을 지킬 수는 없다.
 
 대표적인 게 용사 파티다.
 대마녀의 드라이플라워.
 사내의 상처.
 
 「그러니 내가 아는 대륙 최고의 사냥꾼아.
 네가 노닐던 화원을 기억한다면 돌아와 주렴.
 아직 어린 씨앗들이 싹을 틔우고, 세상의 풍파에 스스로 버틸 수 있도록 네 지혜를 빌려주렴.
 부디 긍정적인 답변을 기다리고 있으마. 올리비아 셔먼.」
 
 편지는 그것을 끝으로, 대마녀의 마법에 따라 푸른 불꽃으로 이루어진 나비가 되어 흩어졌다.
 하지만 사내는 여전히 글귀를 읽는 중이었다.
 허공에 나타난 반투명한 글귀.
 
 [‘두근두근! 아카데미 생활!’이 시작됨에 따라 ‘별칭’ 및 ‘호감도 시스템’이 해금됩니다.]
 [【용사】 미하일 레온하르트(호감도: 100)]
 [해당 대상이 이미 사망한 상태입니다.]
 [【기사】 일레인 드래고니카(호감도: 100)]
 [해당 대상이 이미 사망한 상태입니다.]
 [【마법사】 요르시아 랙돌](호감도: 100)]
 [해당 대상이 이미 사망한 상태입니다.]
 [【성녀】 엘리시아 셰퍼드(호감도: 100)]
 [해당 대상이 이미 사망한 상태입니다.]
 
 아.
 용사 파티의 도적, 잭 레이븐은 그제야 그의 인생을 뒤바꾼 문장을 이해했다.
 
 「상실의 시대였다.」
 “그건 나와 너희의 얘기였구나.”
 
 배드 엔딩을 보았다. 그래도 고통스럽더라도 최선을 다하였기에 요 5년간 납득하려 노력했다.
 하지만 눈앞에 나타난 메시지는 그들이 최선이 겨우 원작 전 배경스토리라 말하고 있다.
 
 “······아카데미로 가야겠어.”
 
 이대로 마경에 평생 은거하려 했으나, 생각이 바뀌었다.
 그들의 이야기가 원작이 아니었다면, 이 세상은 다시금 추운 겨울을 맞이하겠지.
 진짜 이 세상의 주인공에게 시련을 주기 위해.
 
 미연시라 아무 일도 없을 거다? 이 세상의 비정함을 몸소 겪은 사내는 그런 믿음 따위 버린 지 오래였다.
 동시에 그런 운명 따위 용납할 수 없었다.
 ‘내일’을 위해 목숨 바친 이들의 모습이 아직도 이렇게 생생한데, 그 시절을 반복하자고?
 
 “마왕이 살아나면 다시 죽이고, 위정자의 탐욕이 문제라면 그들 전부 목을 걸어주마.”
 
 슬픔에 은거를 택한 흰 까마귀가 그 몸을 일으키고 있었다.
 
 ***
 
 [운명 경로의 이탈을 확인]
 [【도적】 잭 레이븐이 활동···.]
 [오류!) 해당 인물은 기록상 용사 파티와 사망했어야 하는······]
 지지직!
 *
 *
 *
 『상실의 시대였다.
 죽음은 맞지 않는 옷처럼 목을 옥죄었고, 눈물은 전우의 시체처럼 말라버린 지 오래였다.
 이름을 새길 여백조차 남지 않아 추억이 사치로 전락한 나날.
 
 그러나 세상에 영원한 겨울은 없는 법이기에
 오라, 찬란한 봄아
 널 닮은 흰 까마귀를 남기니, 이 땅에 내려와 희망을 꽃피워라.
 
 우리 그걸 위해 기꺼이 이 한 몸 대지에 뉠 터이니
 어서 오라, 우리의 꿈이여.』
 
 [【도적】 잭 레이븐이 활동을 시작합니다.]

작가의 말

감사합니다.

댓글(5)

fo****    
운명이라.. 그럼 주인공이 빙의하지 않았더라도 잭은 결국 용사 파티에 합류했었으리란 걸까요
2024.06.07 04:29
sjsnsl    
허미 시바 맛깔나네
2024.06.10 14:09
이시오넬    
일단 첫화 퀄 좋고..
2024.06.13 12:30
에퍼    
랙돌, 셰퍼드 강아지랑 고양이 이름이네요 ㅋㅋㅋㅋㅋ
2024.06.13 22:39
김영한    
시놉시스가 긴 듯 흠
2024.06.28 10:41
0 / 3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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