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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메라곤 1권-1

2015.09.04 조회 2,242 추천 30


 프롤로그
 
 강한 바람 소리가 들렸다.
 퍽! 소리와 함께 마차가 왼쪽으로 흔들렸다. 눈처럼 새하얀 발톱이 마차의 오른쪽 상단의 나무 벽을 뚫고 들어왔다. 발톱 하나가 어른 주먹만 했다.
 쩍! 찢어지는 소리와 함께 마차의 천장이 벽의 중간쯤에서 통째로 뜯겨 나갔다. 차가운 공기가 마차에 타고 있던 자멜과 카반을 후려쳤다. 부서진 마차 벽 너머로 좁다란 길 양쪽의 깊은 협곡이 보였다. 길을 조금이라도 벗어나 떨어지면 시체도 찾기 힘들다는 킨브리지 협곡이었다. 마부 그룸은 본능적으로 고삐를 당기고 풀며 말을 조종했다.
 그때, 자멜은 회백색의 거대한 몸뚱이를 발견했다.
 “와…이번이다!”
 자멜은 석궁을 들어 마차의 덮개를 뜯어내어 절벽 위쪽으로 날아가는 와이번을 향해 화살을 쏘기 시작했다.
 핑핑핑.
 연속으로 발사된 화살이 회백색 와이번을 향해 날아갔다. 완전무장한 라이더가 와이번의 뾰족한 돌기 사이에서 손바닥이 보이도록 뻗자 화살은 와이번의 몸에 닿지도 못하고 허공의 투명한 벽에 튕겨 나갔다.
 자멜, 카반은 물론 곁눈질로 상황을 살피던 그룸의 얼굴이 새하얗게 변했다.
 곧 낮고 힘 있는 목소리가 들렸다.
 “나는 라스펫 전투단 소속의 라이더 마카론이다. 너희들은 왕국의 귀중한 재산을 탈취했다. 경고한다. 지금 즉시 마차를 세우고 항복한다면 나 마카론은 너희들의 목숨을 보장하겠다. 하지만 계속 도피한다면 죽음을 피할 수 없을 것이다. 다시 한 번 경고한다. 항복하라.”
 절벽을 타고 올라오는 강렬한 돌풍 속에서도 또렷이 들리는 와이번 라이더의 음성.
 카반이 자멜과 마차 바닥에 고정시켜 둔 붉은 금속 상자를 번갈아 살폈다. 카반이 물었다.
 “자멜?”
 “저놈을 믿을 순 없어. 잡히면 죽을 때까지 고문당할 거야. 그리고 저놈은 쉽게 우리를 공격할 수 없어. 저 금속 상자를 잃고 싶진 않을 테니까. 날 믿어. 너는 걸쇠를 풀고 금속 상자를 들고 있어. 내가 시키는 대로만 해.”
 자멜은 의자를 밟고 찢어진 마차 외벽을 손으로 꽉 움켜잡았다. 회백색 와이번이 독수리보다 더 빨리 날아와 자멜의 바로 위를 스치듯 지나갔다. 민첩하게 선회한 와이번은 라이더의 지시에 따라 자멜을 목표로 순식간에 다가왔다. 자멜은 목청이 터져라 소리쳤다.
 “만약 한 번 더 공격한다면, 금속 상자를 절벽 아래로 던져 버리겠다.”
 라이더 마카론은 붉은 상자를 품에 안은 카반을 발견하고는 고도를 높였다. 와이번의 강력한 날갯짓에 마차가 흔들렸지만 절벽 아래로 떨어지지는 않았다. 마카론은 눈살을 찌푸리며 ‘알베도 알레스’종인 자신의 와이번 ‘게롤’의 돌기를 어루만졌다.
 “어쩌지?”
 -기다릴 수밖에. 저놈들을 없애는 것보다 물건을 회수하는 게 더 중요해.
 와이번 게롤의 커다란 입에서 묵직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마카론은 몸을 돌려 크루마스터 벤슨을 바라보았다.
 “벤슨, 저 두 놈의 미간을 정확히 맞힐 수 있겠나?”
 마카론이 물었다. 마차는 여전히 킨브리지의 좁은 길을 따라 달리는 중이었다.
 “가능성을 물으신다면, 열 번 중에 여섯, 일곱 번 정도는 가능합니다.”
 “반드시 맞혀야 해. 꼭!”
 “네, 캡틴.”
 마카론은 진취적인 성격만큼이나 실력이 좋은 벤슨이 마음에 들었다.
 벤슨은 직접 개조한 석궁을 들고 가늠쇠 너머의 마차를 노려보았다. 마차의 속도, 와이번 게롤의 흔들림, 갑자기 불어오는 돌풍. 실패의 요인은 너무도 많지만, 벤슨은 개의치 않았다. 얼마나 많은 시간을 훈련으로 보냈던가. 이 순간, 필요한 건 실패에 대한 두려움이 아니라 성공의 확신이었다.
 와이번은 석궁을 든 벤슨이 보이지 않도록 한쪽으로 기우뚱한 자세로 접근했다.
 자멜은 뒤쪽 무기 설치대 아래에서 갈색 주머니를 가져왔고, 거기에 들었던 화살 통을 다 써 버린 화살 통과 교체했다.
 카반은 자멜 옆에서 언제든지 금속 상자를 밖으로 던질 수 있는 자세로 서 있었다. 마차 바로 위까지 날아온 와이번이 몸을 홱 젖히자 자멜은 자신들을 겨냥하고 있는 벤슨을 발견했다.
 “카반, 조심해!”
 자멜이 외쳤다.
 순간, 벤슨의 손가락이 방아쇠를 당겼다. 화살은 자멜의 목소리가 끝나기도 전에 공간을 꿰뚫어 카반의 이마에 박혔다. 자멜의 외침에 그룸이 고개를 돌려 뒤쪽의 상황을 살폈다. 금속 상자를 든 카반이 통나무처럼 쓰러졌다.
 벤슨의 석궁은 자멜을 향했다. 석궁에서 발사된 화살은 반사적으로 들어 올린 자멜의 왼손에 박혔다. 화살의 반 이상이 왼손을 뚫었다. 자멜은 짐승처럼 울부짖으며 석궁을 쏘아 댔다.
 두 개의 화살이 안장이 달리지 않은 와이번의 꼬리에 박혔다. 화살 하나는 와이번의 날개를 뚫고 지나갔다. 와이번이 고통으로 몸을 버둥거렸다. 회백색의 기다란 꼬리가 마차의 오른쪽 벽을 후려쳤다. 마차의 바퀴를 고정한 원목이 부서지며 바퀴가 이탈했다. 그 충격을 두 마리의 흑마는 이기지 못했다.
 마차는 왼쪽으로 휘청거렸고, 곧 남은 바퀴 중 하나가 절벽으로 미끄러졌다. 마차가 먼저 절벽으로 떨어지자 흑마들은 미친 듯이 허우적댔으나 그 무게를 견디지 못해 절벽 아래로 끌려갔다.
 마부 그룸은 몸을 날려 절벽 가장자리에 매달려 겨우 올라섰다. 하지만 화가 난 마카론의 명령에 크루들이 발사한 화살들이 그룸의 몸에 가시처럼 박혔다.
 떨어지는 마차 속에서 자멜은 죽음을 예감했다. 그는 기어서 죽은 카반에게로 다가가 금속 상자를 손으로 붙잡았다.
 “후후, 그냥 줄 수는 없지.”
 자멜은 금속 상자를 힘껏 마차 밖으로 내던졌다. 자욱한 안개 너머로 붉은 금속 상자가 힐끔 보이더니 곧 사라졌다.
 자멜은 부서진 바닥 사이로 빠르게 다가오는 급류를 발견했다. 곳곳에 솟아오른 검은 바위들 사이를 매섭게 휘돌아 지나가는 거센 물길.
 마차는 뾰족한 바위에 부딪쳐 산산조각이 났다.
 
 게롤의 부상은 그리 크지 않았다. 크루 중 하나가 걸쇠를 옮기며 꼬리까지 내려가 화살을 뽑고, 상처 부위에 레머디를 바르자 부글부글 거품이 끓으며 붉은 살이 올라왔다. 날개 부위는 정확한 치료가 필요해서 공중에서의 응급조치는 취하지 않았다.
 게롤은 마카론의 지시를 받아 조심스레 절벽의 바닥까지 내려갔다. 돌풍 때문에 마카론을 제외한 크루들은 이리저리 흔들리는 게롤의 등 위에서 아침에 먹은 것을 모조리 토해 내고 말았다.
 마차의 잔해를 발견한 마카론은 한숨을 내쉬고 말았다.
 “…큰일이로군.”
 이 급류 속에서 어떻게 그 물건을 회수할 수 있단 말인가.
 “죄, 죄송합니다, 각하.”
 벤슨이었다.
 “아니, 자네 잘못이 아닐세. 애초에 무리를 한 내게 문제가 있는 게지. 그나저나 라스펫 백작에게 뭐라고 말해야 할지 모르겠군. 그 노인네, 나를 잡아먹으려 할 텐데. 어쩔 수 없지. 게롤, 올라가자.”
 마카론이 말하자 와이번은 날개를 퍼덕여 절벽 위로 상승하기 시작했다.
 
 급류에 떨어진 붉은 금속 상자는 붕 허공을 날았다.
 잠시 물 밖으로 나온 금속 상자는 바위 위로 떨어졌고, 3개의 경첩이 순간적인 충격을 흡수하지 못해 부서졌다. 덜거덕거리던 금속 상자는 크게 휘어진 물살을 따라 흘러가다 바위 사이에 걸려 있던 통나무와 부딪쳐 박살이 났다.
 상자 속에 있던 대리석 문양의 타원형 돌은 울퉁불퉁한 바닥을 구르다 바위틈에 박혔다.
 킨브리지를 만든 거대한 협곡을 흐르는 강 살투스에서만 사는 물고기 차리바 몇 마리가 동그란 돌 옆으로 힘겹게 물살을 가르며 다가왔다. 선두에 선 손바닥만 한 차리바가 용기를 내어 동그란 돌을 주둥이로 건드렸다. 그 순간, 둥근 대리석 문양의 돌을 받치고 있던 바위에 금이 가더니 돌은 급류 속으로 떠 내려갔다.
 킨브리지의 절벽은 끝이 났다. 물살은 약해졌지만 유량이 많아졌고, 강폭도 넓어졌다. 북쪽에서 내려온 게노 강과 합쳐진 살투스 강은 이제 락소라는 이름으로 불렸다. 한참을 떠 내려온 둥근 돌은 물 위로 비스듬히 드러난 검붉은 바위에 부딪쳐 강가로 떨어졌다. 넓고 평평한 바위에 부딪친 둥근 돌은 데구루루 굴러 숲과 강의 경계 근처에서 멈췄다.
 태양의 시간이 끝나고, 달의 힘이 강해지는 밤이 왔다. 둥근 돌에 달빛이 닿았다. 햇빛 아래서는 보이지 않던 검붉은 실핏줄 같은 그물 문양이 도드라졌다. 낮과 밤이 바뀌는 사이, 돌 위를 이끼가 덮었다. 돌 특유의 질감, 빛깔 그리고 문양은 이끼에 덮여 사라졌다.
 돌은 거의 반년을 이끼 아래서 잠잤다. 돌을 찾으려는 사람들의 눈을 피해서.
 이윽고 시간이 되자, 돌은 스스로 굴러 강으로 떨어졌다. 이끼는 자연스럽게 떨어졌고, 돌은 하류로의 여행을 시작했다.
 
 
 1. 난 조금도 원하지 않았어!
 
 벨란드 마을의 레이먼 펍에 남루한 옷차림의 음유시인이 들어섰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마을의 소년, 소녀들은 죄다 펍으로 몰려왔다. 아직 해가 떨어지기 전이어서 술 마시는 사람이 없는 탓에 펍의 주인 레이먼은 사람 좋은 미소를 지으며 문을 활짝 열었다.
 어린 시절, 가끔 찾아오는 음유시인 덕분에 꿈을 키웠던 기억을 떠올린 레이먼은 음유시인 넬에게 공짜로 흑맥주를 제공하기까지 했다. 넬은 시원한 흑맥주로 먼지 낀 목구멍을 씻어 낸 후에 아이들의 초롱초롱한 눈동자를 바라보며 물었다.
 “자, 무슨 얘기를 들려줄까?”
 아이들의 반응은 열광적이었다.
 “몽펠리에!”
 몽펠리에는 칼포엘의 유명한 모험가 카르마초가 발견한 신대륙의 이름이었다. 이 시골에도 신대륙의 모험에 대한 소식이 전해진 모양이었다. 넬은 흐뭇하게 웃었다. 이 아이들이 좀 더 자라나 바다의 사나이가 된다면 다르크는 좀 더 강해질 것이다. 물론 먼저 지금의 혼란을 종식시켜야 하겠지만.
 “레이크 나이트 루첼라이요!”
 “플라툼 마기아 볼테르!”
 “룬 제국의 마지막 황제 레이건!”
 룬은 멸망한 지 오래된, 역사에나 기록될 제국이었다.
 “최강의 타커 아르벤스!”
 소년, 소녀에서 청년으로 변해 가는 과정이지만 여전히 호기심이 많은 아이들이 저마다 소리치기 시작했다. 넬은 자신을 반기는 아이들의 아우성을 들을 때면 음유시인으로서의 자부심이 가슴을 치고 온몸으로 퍼져 나가는 걸 느꼈다. 혼자 들판을 걷노라면 불쑥 고독이 온몸을 에워싸기도 하지만 이런 맛에 음유시인이라는 직업을 포기할 수 없는 것이리라.
 넬은 한 가지 얘기를 떠올리며 두 손을 가슴 언저리로 올렸다. 의자에 걸터앉은 넬을 에워싼 아이들은 쥐 죽은 듯 조용했다.
 넬이 이야기를 시작하려던 찰나, 새까만 머리카락의 한 소년이 문을 열고 급히 걸어왔다. 넬은 소년의 왼쪽 얼굴의 대부분을 덮은 목제 가면을 보고는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다 소년의 두 눈동자 색깔이 다르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오른쪽 눈동자는 흑색, 왼쪽은 은색이었다. 오드아이였다.
 가면 쓴 소년은 성큼성큼 다가와 넬 바로 옆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마치 이 레이먼 펍의 홀이 자기 집인 것처럼 당당했다. 넬은 인상을 찡그렸다. 소년의 몸에서 흘러나온 악취 때문이었다. 넬은 대번에 소년이 무슨 일을 하고 왔는지 알아냈다. 무두질, 그 힘든 과정 중에서도 가장 더러운 일이었다.
 “늦었습니다.”
 소년이 말했다.
 다른 소년, 소녀들이 가면 쓴 소년을 노려보고 있었다. 넬 바로 앞쪽에 자리 잡은 뚱뚱한 소년이 툭 말을 내뱉었다.
 “어디서 오줌 썩는 냄새가 나는데?”
 그 소년 주위의 네댓 아이들이 쿡쿡 웃었다. 다른 아이들도 따라서 웃음을 터트렸다. 가면 쓴 소년의 드러난 얼굴이 붉어졌으나 조금도 움츠러들지 않았다. 오히려 고개를 빳빳이 세워 뚱뚱한 소년을 조용히 바라보았다.
 뚱뚱한 소년이 낮고 빠르게 말했다.
 “곤, 당장 나가. 여긴 네가 올 곳이 아니야.”
 “난 이야기를 듣고 싶어서 온 거야. 내가 알기로 이 펍의 주인은 레이먼 아저씨인데, 언제 롤랑 네가 주인이 된 거지? 오, 그렇다면 잘됐구나. 평소 좋아하던 술을 마음껏 마실 수 있으니 말이야.”
 곤의 응수에 뒤쪽에 있던 몇 소녀가 킥킥 웃음을 터트렸다. 롤랑이 홱 고개를 돌리자 소녀들은 입을 손으로 막았다.
 “너, 각오하는 게 좋을 거야.”
 롤랑이 눈을 부라렸다.
 곤은 과장해서 몸을 돌려 뒤쪽을 살피더니 롤랑을 바라보며 말했다.
 “롤랑, 누구에게 한 말이야? 설마 나한테 한 말은 아니겠지, 뚱보?”
 곤의 말에 롤랑의 얼굴은 빨갛게 달아올랐고, 나머지 소년, 소녀들은 손으로 입을 가리며 키득거렸다. 컵을 닦던 레이먼은 웃음을 참다못해 헛기침을 남발했다. 곤의 목소리에 담긴 유쾌함에 넬도 미소를 지었다.
 “뭐……? 이 재수 없는 가면 따위 쓰고 돌아다니는 주제에. 넌 눈깔도 이상하잖아. 악마의 눈깔. 그뿐이 아니잖아. 너 때문에 아빠는 불타서 죽고, 엄마는 반쯤 미쳤잖아. 안 그래?”
 곤의 얼굴이 돌처럼 딱딱해졌다.
 분위기가 가라앉자 레이먼이 천천히 곤에게로 다가왔고, 넬도 자리에서 일어나 두 걸음 앞으로 걸었다. 롤랑은 곤이 아무런 말도 하지 않자 더 신이 나서 지껄였다.
 “네 엄마는 너 때문에 죽을 거야. 분명히. 내가 장담해. 올가을을 넘기지 못할걸?”
 롤랑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곤의 손엔 작은 단검이 쥐여 있었다. 시꺼먼 날이 번들거렸다. 레이먼, 넬은 잔뜩 긴장했다. 혹시라도 곤이 홧김에 단검을 찌르지 않을까 염려한 것이다.
 “롤랑, 입 다물어. 냄새가 나잖아. 네가 여기 왜 있지? 참고로 여긴 돼지우리가 아니야.”
 곤은 활짝 웃으며 단검을 공중으로 던졌다가 받아서 허리의 가죽집에 꽂았다. 잔뜩 쫄았던 아이들이 웃음을 터트렸다. 곤이 롤랑을 차갑게 노려보며 말을 이었다.
 “그리고 롤랑, 네 엄마라니? 그분은 네 이모야. 넌 내 이종사촌이고. 알았어?”
 “쳇.”
 곤이 더 이상 화를 내지 않자 흥미가 사라졌는지 롤랑은 콧방귀를 뀌었다.
 레이먼은 카운터의 자기 자리로 돌아갔다.
 넬은 적잖이 놀랐다. 보통 마을에서 저런 가면을 쓴 사람은 철저하게 따돌림을 당하기 마련이다. 사람들은 정상적인 것을 좋아한다. 자신들과 다르면, 다르다는 이유로 배척한다. 때로는 저주라는 굴레를 씌워 멀리 쫓아 버리기도 했다. 그러면 배척을 당하는 이들은 잘못한 것도 없이 속으로 분을 삭이며 평생을 죄인처럼 살아야 한다. 그들은 행인들이 오가는 거리에서는 제대로 고개도 들지 못하고, 친구도 사귈 수 없는 외로운 시간을 보내야 했다.
 저 소년은 목제 가면을 쓴 데다 오드아이였다. 목제 가면에 대해서는 넬도 잘 알았다. 태어날 때부터 얼굴에 흉측한 자국이 남거나 화상 등으로 불길한 흉터가 남았을 경우, 움브란 신관의 조언을 받은 영주의 지시로 목제 가면을 쓰게 된다. 특이한 것을 불길한 징조로 받아들이는 사람들에게 목제 가면은 저주의 상징이기도 했다. 오드아이 역시 불길함의 상징이었다. 두 가지 이유로 가족을 제외한 사람들 모두가 저 소년을 무시하고, 배척하고, 멀리했을 것이다. 어쩌면 가족마저도 저 소년을 버렸을지도 몰랐다.
 그런데도 저렇게 당당하다니. 곤이 온몸으로 보여 주는 자신감, 당당함은 넬이 여태 한 번도 보지 못한 것이었다. 넬은 소년의 당당함 속에 감춘 두려움을 간파하지 못했다.
 분위기는 가라앉아 모두들 입을 꽉 다물고 있었다. 넬은 아이들이 흥분하면 금세 모든 걸 잊는다는 사실을 떠올리며 일부러 가장 아끼는 이야기를 떠올렸다.
 “자, 오늘은 ‘라이더’에 대해 말해 주마.”
 “와아!”
 “라이더!”
 목제 가면을 쓴 소년 곤과 뚱보 롤랑 때문에 어색해진 분위기가 단번에 사라졌다. 넬은 아이들의 심리를 잘 알았다. 달갑잖은 일이 있어도 그보다 더 신 나는 일이 생기면 순수하게 기뻐하는 게 아이들이었다. 그에 비해 어른들은 모든 걸 계산했다.
 넬이 웃으며 질문을 던졌다.
 “라이더가 뭐 하는 사람이지?”
 “와이번을 타는 사람요!”
 “다르크 최고의 라이더는 누구지?”
 “콘스탄틴 공작 각하요!”
 넬은 몰랐지만, 소년들은 콘스탄틴이라는 이름을 들을 때마다 자부심을 느꼈다. 멋대로 붙인 패거리의 이름이지만, 콘스탄틴을 입에 올릴 때마다 마치 영웅의 친구 혹은 가족이 된 듯한 짜릿한 전율을 느꼈기 때문이다.
 소년들은 곤을 슬쩍 바라보았다. 롤랑은 웃음을 터트리기 직전으로 손으로 입을 막은 채 킥킥댔다. 델로 주니어는 롱보엘의 귀에 대고 소곤거렸다. 곤의 얼굴이 붉게 물들어 손이라도 대면 톡 터질 듯했다. 곤은 눈을 부릅뜨고 롤랑을 노려보았다.
 벨란드 마을의 어른 남자들에게 벨란드 유니언이라는 모임이 있듯, 곤 또래의 소년들에게도 패거리라는 것이 존재했다. 롤랑, 레딩, 타츠가 속해 있는 패거리의 이름은 ‘콘스탄틴’이었다. 다르크 당대 최고의 영웅의 이름을 붙인 것이다. 떼를 지어 몰려다니며 사냥을 하거나 고기를 잡기도 하는데, 가끔은 닭이나 거위 따위를 훔쳐 내어 구워 먹기도 했다.
 한 가지를 더 추가한다면, 저주받은 소년을 괴롭히는 일도 포함해야 할 것이다.
 ‘내가 왜 그런 짓을 했을까?’
 곤은 눈살을 찌푸리며 후회했다.
 재작년 겨울, 곤은 용기를 내어 콘스탄틴에 들어가려 했다. 무슨 일이든 다 할 테니까 패거리에 끼워달라고 반쯤 빌듯 부탁했다. 곤은 소년들의 지시대로 닭을 훔쳤고, 창고에 숨겨둔 벌꿀 단지를 말없이 가져왔으며 촛불이 살갗을 태워도 신음 한번 내지 않고 꾹 참았다. 은밀한 모임일수록 그런 통과의례는 혹독하리라 생각했다.
 하지만 그건 잔인한 장난이었다. 콘스탄틴에 속한 소년들 중 누구도 곤을 패거리에 넣어 줄 마음이 없었다. 그저 곤을 갖고 놀았던 것이다. 그 일을 통해 곤은 깨달았다. 더 이상의 정당한 노력은 무의미하다는 사실을.
 넬은 곤과 롤랑 그리고 주위의 소년들을 바라보며 뭔가 있음을 느꼈다. 하지만 그는 능숙한 음유시인으로서 이야기에 열중했다. 이야기만 재미있다면 누구든 현실은 잊기 마련이다. 그는 보통 사람보다 머리 하나가 더 크고, 성격도 화끈한 콘스탄틴 공작을 떠올리며 아이들을 바라보았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라이더가 될 수 있을까?”
 신 나게 외쳐 대던 아이들이 입을 꼭 다물었다.
 날개 달린 거대한 도마뱀처럼 생긴 와이번을 타고 하늘을 나는 라이더는 아이들의 꿈이었지만 이들 중 누구도 꿈을 현실로 바꿀 수 있다는 사실을 알지는 못했다.
 카운터 뒤에서 컵을 닦고 있던 레이먼이 넬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아이들에게 불가능한 꿈을 심어 주지나 않을까 걱정해서였다. 넬은 레이먼을 바라보며 윙크했다. 적당히 하겠다는 의미였다.
 “와이번 본 사람 손 들어 봐라.”
 “…….”
 아이들은 서로를 바라볼 뿐이었다.
 “자, 모두 눈을 감아라. 그리고 상상해라. 다 자란 와이번은 황소보다 20배 크고, 30배 더 무겁단다. 와이번의 키는 레이먼 아저씨의 키에 5배에 가깝단다. 커다란 눈동자는 너희들 머리만 하고, 입을 벌리면 수백 개의 날카로운 이빨이 위아래로 달려 있고, 머리통만 한 새까만 콧구멍에선 뜨거운 공기가 흘러나온단다.”
 “와…….”
 아이들의 반응에 넬은 웃음 지었다.
 “와이번이 날개를 펼쳐서 퍼덕이면 그 바람 때문에 사람이 서 있기 힘들 정도지. 콘스탄틴 공작 각하의 와이번 베릴카사가 날아오를 때, 나는 뒤로 미끄러지다가 결국 진흙탕에 코를 박고 말았단다.”
 넬은 콧속으로 차가운 진흙이 밀려 들어오는 당시를 기억했다. 콘스탄틴 공작은 꽤나 장난이 심한 사람이기도 했다.
 “…베릴카사를 보셨어요?”
 롤랑이 물었다.
 “봤지. 아주 대단했어. 붉은색의 거대한 와이번이 햇빛을 받아 반짝거리며 하늘로 올라갔는데, 그건… 정말이지, 말로 표현할 수 없었지. 베릴카사에는 모두 10명의 크루가 올라탔어. 그러고도 베릴카사는 가볍게 날아올랐지.”
 “크루가 뭐죠?”
 몸집이 작고, 뺨이 주근깨로 가득한 델로 주니어가 물었다.
 “그것도 몰라? 라이더 말고 와이번에 올라타는 사람들이잖아.”
 롤랑이 벌컥 화를 냈다. 움츠러드는 델로 주니어.
 “크루는 와이번에 올라타는 승무원을 말한다. 보통 와이번은 3명의 크루를 태운단다. 라이더를 포함하면 4명을 태우는 셈이지. 크루는 전투 중에 와이번이 다쳤을 때 응급조치를 담당하기도 하고, 적의 라이더나 크루를 공격하기도 한다. 아주 중요한 역할이야. 라이더의 능력이 최고로 중요하지만 크루가 멍청하면 전투에서 이길 수 없지. 콘스탄틴 공작의 크루들은 최고의 실력을 가지고 있지. 최고의 라이더에 최고의 와이번, 거기에 최고의 크루들. 그러니 최고일 수밖에.”
 “어떻게 해야 라이더가 될 수 있죠?”
 롤랑이 힘차게 물었다.
 “롤랑, 안타깝게도 뚱뚱하면 라이더가 될 수 없단다.”
 폭소가 터져 나왔다. 롤랑의 얼굴이 삶은 소시지처럼 붉게 달아올랐다. 넬은 곤을 향해 슬쩍 윙크했다. 곤이 당황한 듯 고개를 숙였다.
 “게다가 라이더는 모두 귀족이란다.”
 소년, 소녀들 모두가 입을 다물었다.
 펍으로 몰려와 음유시인의 말에 귀를 기울이는 아이들 중에 귀족은 단 한 명도 없었다.
 “하지만 와이번이 귀족만 선택하는 건 아니잖아요.”
 곤이었다.
 넬은 깜짝 놀랐다. 이 아이가 어떻게 그 사실을 알고 있을까? 와이번이 본능적으로 라이더를 택한다는 건 널리 알려진 사실이지만 귀족이 아닌 평민, 심지어 노예까지도 택한다는 점은 비밀이었다. 발설하면 몸이 위태로울 수도 있는 위험한 비밀이었다.
 “이름이 뭐지?”
 “곤. 타메라 곤이에요.”
 “타메라 곤?”
 “네.”
 “어떻게 알았지?”
 “아버지가 말씀해 주셨어요.”
 “아버지?”
 “…돌아가셨어요.”
 곤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저 녀석 때문에 죽은 거야. 재수가 없거든.”
 롤랑은 옆에 앉은 소년에게 낮게 속삭였지만 곤은 물론 다른 아이들에게 들릴 만큼 충분히 컸다. 롤랑 근처의 소년들이 맞장구치면서 교활하게 웃어 댔다. 그들 모두 콘스탄틴 패거리였다.
 넬은 곤에게로 다가가 곤의 어깨를 가볍게 만지며 귀에 대고 속삭였다.
 “곤, 네가 한 말은 사실이지만 그게 알려지면 큰 소란이 생길 수도 있단다. 그러니까 내가 네 말이 사실이 아니라고 할 테니, 너무 섭섭하게 생각하지는 말거라. 알았으면 눈을 깜박거려라.”
 잠시 망설였지만 곤은 뚱보는 라이더가 될 수 없다는 넬의 말에 얼굴이 구겨지던 롤랑을 떠올렸다.
 곤이 크고 깊은 눈을 깜박거리자 넬은 짐짓 화가 난 것처럼 곤을 노려보며 소리쳤다.
 “어디서 그런 말도 안 되는 엉터리 소리를 지껄이는 것이냐? 음유시인이라고 해서 감히 나를 무시하는 게냐? 그런 것이냐?”
 “…….”
 “썩 꺼져라.”
 넬이 외치며 손가락으로 문을 가리켰다. 곤은 돌변한 넬을 잠시 살피다 어깨를 축 늘어뜨린 채 문을 향해 걸었다. 밖으로 나가기 직전에 고개를 돌린 곤은 자신을 바라보며 슬쩍 윙크하는 넬을 발견했다. 잔뜩 주눅 든 곤의 얼굴이 아주 약간 원래대로 돌아왔다.
 “자, 어디까지 얘기했지?”
 “라이더가 모두 귀족이라는 말까지 했어요.”
 넬은 빙긋 웃으며 라이더 무용담을 말하기 시작했다. 넬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이야기는 아이들을 웃기다가 긴장시켰고, 울리다가도 폭소를 터트리게 할 만큼 매력적이었다. 일찍 펍으로 찾아온 어른들까지 넬의 말에 귀 기울일 정도였다.
 한바탕 신 나는 얘기로 아이들을 감동시킨 넬은 레이먼이 내온 맛있는 음식을 먹은 뒤에 기다리던 어른들에게 피비린내 나는 전쟁담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물론 아이들은 레이먼이 내보낸 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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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락소 강으로 베스티아 강이 합류했다. 단단한 암석 지대를 우회한 락소 강은 도키아 영지의 서쪽을 지나 바다로 흘러들었다. 가물어도 물이 풍부한 락소 강 덕분에 도키아 사람들은 물 걱정 없이 살 수 있었다. 락소 강 근처인 벨란드 마을에는 나루터가 만들어져 있었다.
 평소 아이들이 나와 헤엄치거나 물고기를 잡곤 하는 벨란드 나루터 근처에는 펍에서 쫓겨난 곤뿐이었다. 아이들의 안전을 위해 어른들이 돌을 쌓아 만든 강가의 작은 저수지 곁에 선 곤은 수면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들여다보았다. 목제 가면과 오드아이. 곤은 물속의 자신을 향해 돌진했다.
 첨벙.
 화가 난 곤은 두 손, 두 발로 거칠게 움직여 잔잔한 수면을 흩뜨렸다. 하지만 곧 물은 고요해졌고, 곤의 모습이 물 위로 나타났다.
 상처에 물이 닿자 쓰렸다. 곤은 손을 뻗어 목제 가면을 벗었다. 가면은 물 위를 둥둥 떠다녔다. 왼쪽 눈썹 근처에서 시작된 검붉은 자국이 눈을 관통하듯 내려와 뺨을 점령하더니 입 꼬리 근처에서 끝이 났다. 와이번의 날개와 흡사한 자국이었다. 신관 부클은 악마의 날개라고 단언했다. 이 자국을 숨기기 위해 곤은 기억도 나지 않는 어린 시절부터 목제 가면을 써야 했다. 그 덕분에 오른쪽의 까무잡잡한 피부와 달리 왼쪽 얼굴은 기괴할 정도로 창백했다. 물 위로 흑색과 은색의 눈동자가 곤을 바라보고 있었다. 곤은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난 이런 걸 조금도 원하지 않았어!”
 곤은 울분을 담아 외쳤다. 아이들 앞에서 아무렇지도 않게 행동하던 곤은 이곳에 없었다. 타고난 얼굴의 흔적과 눈동자 색 때문에 수도 없이 차별을 받아서 상처 입은 소년이 있을 뿐이었다.
 쿠쿵.
 땅이 흔들렸다. 수면에도 요란한 파문이 일었다. 마치 곤의 분노에 땅이 반응한 듯했다. 흔들림은 오래지 않아 사라졌다.
 해는 뉘엿뉘엿 도키아 산맥의 봉우리들 사이로 저물었고, 근처의 하늘은 붉게 물들었다가 빠르게 어두워지는 중이었다. 곤은 해를 대신해서 달이 둥실 떠올라 저수지 위로 차가운 빛을 비출 때에야 밖으로 걸어 나와 가면을 뒤집어썼다. 몸이 덜덜 떨렸다. 강가를 걷던 곤은 락소 강 중간쯤에서 위로 솟구친 붉은빛을 발견했다. 눈을 비빈 후에 다시 유유히 흐르는 강물을 바라본 곤,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잘못 봤나?”
 
 집으로 돌아온 곤이 돌담을 지나 안뜰로 들어서려는 순간, 발이 걸려 앞으로 넘어졌다. 자갈 위로 넘어져 가슴이 움푹 들어간 게 아닐까 싶을 만큼 아팠고, 목제 가면은 벗겨져 흙탕물 속으로 첨벙 소리를 내며 들어가 버렸다. 돌담 뒤쪽의 그늘에서 팔짱 낀 롤랑이 걸어 나와 손으로 얼굴을 가린 곤을 내려다보았다.
 “재수 없는 녀석, 너 때문에 그 자식에게 놀림 당했잖아.”
 롤랑은 음유시인 넬에게 당한 수치를 곤 때문이라고 확신했다. 곤은 말없이 손을 뻗어 흙탕물 속에서 목제 가면을 꺼내어 조심스럽게 썼다. 롤랑이 히죽 웃는 게 수상했다. 어쩐지 오줌 냄새가 나는 듯했다.
 “후후, 이걸 어쩌지? 거기다 좀 전에 내가 오줌을 쌌걸랑.”
 가면 속의 흑색, 은색 눈동자가 롤랑을 사납게 노려보았다. 자신도 모르게 한 걸음 뒤로 물러선 롤랑은 그 행동이 부끄러운지 소리를 지르며 곤을 발로 때리고, 밟았다. 곤은 이를 악물고 참으며 속으로 생각했다.
 ‘당분간만 참자. 당분간만. 지금은 어쩔 수 없어. 엄마와 함께 있으려면 어쩔 수 없어. 조금만 더 참자.’
 “한 번만 더 까불면 그때는 죽는다.”
 “…알았어.”
 곤은 비틀거리며 일어섰다.
 “쳇, 재수 없으려니까.”
 롤랑은 곤의 가슴에 침을 뱉고는 따뜻한 빛이 흘러나오는 벽돌집으로 들어갔다.
 곤은 빵과 고기 냄새가 진동하는 그 집을 돌아가 뒤쪽의 헛간으로 향했다. 배가 등에 달라붙을 만큼 허기졌다. 헛간 아래쪽의 좁다란 개천으로 내려가 몸을 씻은 곤이 돌아오자 헛간 안쪽 나무통에 엄마가 앉아 있었다. 핏기 하나 없이 창백한 엄마는 피 묻은 손수건을 입에 대고 쿨럭 거렸다.
 “엄마, 왜 나왔어?”
 “저녁, 아직 안 먹었지?”
 엄마 옆의 짚단 위에는 빵과 고기 그리고 우유가 반쯤 담긴 나무 컵이 놓여 있었다. 멜란 이모, 톰 이모부 그리고 롤랑 몰래 엄마가 가져온 게 분명했다.
 “엄마는?”
 “나는 배불리 먹었단다. 빨리 먹으렴.”
 곤은 엄마의 말이 사실이 아님을 잘 알았다. 멜란 이모가 이런 빵과 고기를 그냥 내줄 사람이 아니었다.
 멜란 이모는 엄마의 친동생인데 어떻게 저리 매정할까.
 이번에도 뭔가를 엄마에게 요구했을 것이다. 지난번에는 곤이 좋아하는 노루 뒷다리 고기를 얻기 위해 엄마는 아끼던 반지를 멜란 이모에게 주고 말았다.
 곤은 앞을 가리는 눈물을 꾹 참고 빵과 고기를 꾸역꾸역 입 안으로 밀어 넣고 우물거렸다. 목이 막힐 것 같아 우유를 벌컥벌컥 마셨다. 삽시간에 해치우자 엄마는 기둥을 잡고 일어나 곤의 오른쪽 뺨을 어루만졌다.
 “나 때문에 네가 고생하는구나. 나 때문에…….”
 “아니야, 엄마. 난 정말 잘 지내. 무두질 작업장 일도 재미있어. 오늘은 펍에서 음유시인을 봤어. 그분은 다른 사람들과 다른 것 같아. 날 앞쪽으로 불러내어 이야기를 들려주셨거든. 정말 좋았어.”
 “…그랬구나.”
 “빨리 들어가. 푹 쉬어야 병도 낫지. 빨리.”
 “그, 그래.”
 엄마는 달빛으로 희미하게 빛나는 잡초 사이를 지나가 벽돌집 뒷문 앞에 섰다. 문고리를 돌려 안으로 들어가기 직전, 엄마는 고개를 돌려 곤을 바라보았다. 곤은 최대한 밝게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엄마의 모습이 사라지자 곤은 헛간을 떠받치는 8개의 기둥 중 두 번째로 굵은 기둥의 아래쪽 구멍에서 작은 가죽 주머니를 꺼냈다. 거기에는 6개의 은전과 3개의 동전이 들어가 있었다. 6실버, 3브론즈. 독립하기 위해서는 적어도 5골드가 필요한데, 아직 1골드도 모으지 못했다. 그 사실에 곤은 마음이 상했다. 한동안 들여다보지 않으리라 마음먹어도 밤이 되면 꼭 가죽 주머니를 꺼내어 돈을 세 보는 자신이 이상하게 느껴졌다.
 곤의 등으로 시선이 느껴졌다.
 “잘 있었니, 아게스?”
 히힝.
 헛간 한쪽의 기둥에 고삐가 묶인 늙은 나귀가 곤을 바라보며 울어 댔다. 곤은 산더미처럼 쌓인 짚단으로 손을 쑥 집어넣고 흙 묻은 당근 하나를 꺼냈다. 늙은 나귀의 흐릿한 눈동자가 빛나기 시작했다.
 “오늘은 어땠어? 톰이 많이 부려 먹었지? 그렇지? 그럴 줄 알았어.”
 곤이 준 당근을 너무도 맛있게 먹는 늙은 나귀.
 그때 아래쪽에서 찍찍, 소리가 들려왔다. 곤이 고개를 숙이자, 며칠 동안 보이지 않던 흰쥐 스노랫이 뒷발과 궁둥이로 반쯤 일어서서 앞발을 문지르며 곤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곤은 바닥에 엉덩이를 대고 주저앉아 스노랫을 바라보았다.
 “어디 갔다 온 거냐?”
 찍찍.
 무슨 말인지 몰라도 곤은 상관없었다. 질문을 던지면 반응을 한다는 게 신기할 뿐이었다. 스노랫과 아게스는 마을에서 유일하게 곤을 무시하지 않는 친구였다.
 “일은 잘 해결됐어?”
 곤은 스노랫을 사람처럼 대했다.
 찍찍.
 “음, 해결됐다니 다행이야.”
 곤은 검지로 스노랫의 작은 머리를 긁어 주었다. 간지러웠던 듯, 스노랫은 분홍빛의 발로 머리와 코를 문질러 댔다. 그 모양새가 너무도 귀여워 곤은 웃고 말았다. 하지만 웃음소리가 사라지자 헛간은 더없이 고요해졌고, 곤의 마음은 착 가라앉았다. 아무리 말을 걸어도 이해하지 못하는 늙은 나귀와 흰쥐에게 명랑하게 얘기하는 자신의 모습이 비참하게 느껴졌다.
 사람들은 목제 가면을 보기만 해도 고개를 돌렸다. 그래서일까? 언제부터인지 곤은 늙은 나귀에게 아게스, 흰쥐에게 스노랫이라는 이름을 지어 주고는 가족처럼 대했다.
 스노랫이 다리 위로 올라와 곤의 팔을 긁었다.
 “왜 그래, 스노랫?”
 스노랫은 곤의 팔에 자국이 남을 만큼 강하게 긁었다. 곤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어느 날 헛간에서 발견한 이 흰쥐는 다른 집쥐와는 달리 곤을 보고도 도망치지 않았다. 오히려 다가와 곤을 또랑또랑한 눈으로 올려다보았다. 스노랫이 이런 식으로 행동하던 적이 있었나? 결코 없었다.
 스노랫은 곤의 다리에서 펄쩍 뛰어내려 헛간 문으로 달리다 몸을 세우고는 곤을 바라보았다. 마치 자신을 따라오라는 것 같았다.
 “설마, 따라오라는 거니?”
 찍찍.
 스노랫이 잠시 곤을 바라보다 헛간 밖으로 나갔다. 곤은 혹시 올빼미 따위가 스노랫을 채갈까 봐 걱정이 되어 달려 나갔다. 스노랫은 굉장히 빨랐다. 곤이 따라오기 힘들 것 같으면 잠시 멈춰 섰다가, 곤이 보이면 다시 달렸다.
 한참을 달리자 락소 강의 물소리가 들렸다. 스노랫은 강가의 평평한 바위 위에 앉아 혀로 두 발을 핥는 중이었다.
 “자, 따라왔다. 이제 왜 날 여기로 데려왔는지 알려 줘야겠지, 스노랫?”
 곤은 웃으며 스노랫 앞에 앉았다. 잔잔하게 흐르는 강물 위로 수없이 많은 별이 흔들렸다. 하늘에서 유성이 꼬리를 남기며 떨어지자, 강물 위에서도 유성이 빛을 뿌리며 나타났다. 신비로웠다. 곤은 팔베개하며 누웠다. 하늘이 갑자기 수십 배로 커진 듯했다. 시야 전부가 하늘로 가득 찼다.
 “스노랫, 저 별이 모두 몇 갠지 알아?”
 찍찍.
 “모른다고? 모르는 게 당연하지. 알면 사람, 아니… 쥐가 아니지.”
 제멋대로 스노랫의 말을 해석해 버린 곤은 자신의 말이 웃긴지 키득키득 웃어 댔다. 강을 건너오느라 차가워진 바람이 곤의 머리카락을 감아올리자 새까만 하늘 사이로 검은 머리카락이 춤을 췄다.
 그때였다.
 둥.
 뭔가 진동이 느껴졌다. 곤은 벌떡 상체를 일으켜 주위를 살폈다. 강물 중간쯤의 수면으로 붉은빛이 흘러나와 하늘로 솟구쳐 올랐다. 잠시 후, 붉은빛은 사라졌다. 곤은 오후에 있었던 일을 떠올렸다. 잘못 본 게 아니었다.
 둥.
 또 진동이 느껴졌는데, 이번에는 낮고 무거운 소리도 들렸다. 곤은 천천히 일어서서 강가로 향했다. 스노랫은 어느새 곤의 조끼 주머니로 들어가 새하얀 머리만 밖으로 내밀고 있었다. 이번에도 붉은빛이 하늘로 솟아오르더니 이내 사라졌다.
 “…저게 뭐지?”
 곤의 발끝이 강가의 찰랑대는 물에 닿는 순간,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위쪽에서 흘러오던 물이 보이지 않는 벽에 막힌 듯 쌓였고, 아래쪽의 물은 흘러내려 가지 않고 쌓이기 시작했다. 잠시 후, 곤과 그 붉은빛이 올라오는 강 중간까지 자갈과 모래로 이루어진 강바닥이 드러났다. 곤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놀라운 광경에 입을 벌리고 서 있었다.
 찍찍.
 스노랫의 소리에 곤은 정신을 차렸다.
 “저것 때문에 날 이곳으로 데리고 온 거니?”
 찍찍.
 곤은 스노랫의 소리가 ‘그래.’라는 뜻이라고 확신했다.
 곤은 심호흡을 했다. 쿵쾅거리는 심장이 왼쪽 가슴의 원래 자리를 벗어나 어디론가 가 버릴 것 같아서였다. 몸을 진정시킨 후에야 곤은 양쪽으로 물이 쌓인 바닥 길을 천천히 걸었다.
 그는 손을 뻗어 물벽을 만졌다. 곤의 손가락은 아무런 방해도 받지 않고 물벽 너머로 쑥 들어갔다. 차가운 물의 감촉이 선명하게 느껴졌다. 신기했다.
 축축하게 젖은 모래를 밟고 걸어가니 앞쪽에 타원형의 붉은 돌이 보였다. 도구점에서 본 푸른빛의 대리석과 비슷했다. 자유가 느껴지는 문양, 반들거리는 표면. 그 붉은 돌의 두 걸음 뒤에는 물벽이 곤의 키보다 2배 정도 솟아올라 있었다. 곤은 이 신비한 광경을 만든 게 붉은 돌임을 깨달았다. 붉은 돌은 바라볼수록 마음이 평온해졌다. 롤랑의 도발, 불쌍한 엄마의 모습, 매정한 이모와 이모부로 인한 불편한 마음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곤은 손을 뻗어 붉은 돌의 매끈한 표면을 만졌다. 표면 위로 실핏줄같이 촘촘한 그물 모양이 나타났다.
 쏴아.
 그때, 곤 맞은편의 물벽 너머로 물이 내려오기 시작했다. 좌우의 물벽 역시 마찬가지였다. 화들짝 놀란 곤은 붉은 돌을 가슴에 앉고 강가로 달렸다. 뒤쪽의 물벽이 와르르 무너지며 거센 물살이 곤을 쫓아왔다. 강가의 안전한 곳을 얼마 안 남긴 곳에서 미끄러진 곤. 쫓아온 물살이 곤을 뒤로 날려 버렸다. 곤은 임시로 만든 저수지에 풍덩 빠졌다. 곤은 붉은 돌을 두 손으로 들고 저수지 밖으로 나왔다.
 “아!”
 곤은 주머니를 살폈다. 스노랫은 보이지 않았다. 혹시 저수지에 빠진 걸까?
 다행히 저수지로 들어가려던 곤의 귀에 익숙한 소리가 들렸다.
 찍찍.
 스노랫은 뾰족한 바위 끄트머리에 절묘한 자세로 서서 곤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 눈빛이 자신은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고 말하는 것 같아 곤은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었다.
 곤은 바닥에 주저앉아 붉은 돌을 살폈다. 강바닥에 처박혀 있을 때는 아주 신비로웠는데, 이렇게 들고 나오자 색과 문양이 독특한 타원형 돌에 불과했다. 이 붉은 돌이 강물을 둘로 갈랐다는 게 믿기지 않았다.
 하지만 바라보기만 해도 마음이 편해지는 건 여전했다. 손으로 어루만지자 조금씩 따뜻해지는 게 너무 신기했다. 곤은 붉은 돌을 가슴에 안고 헛간으로 향했다. 스노랫은 곤의 젖은 조끼 주머니 안이 아니라, 곤의 머리 꼭대기에 앉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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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넬은 아이들뿐 아니라 어른들도 그 가면 쓴 소년 곤을 꺼려한다는 사실에 적잖이 놀랐다. 물론 목 위에 달린 머리를 장식용으로 달고 살아가는 사람들도 적지는 않지만, 조금만 생각하면 타고난 상처 혹은 자국과 눈동자 색깔 때문에 한 아이를 망쳐 버리는 건 옳지 않다는 걸 알 수 있을 텐데.
 움브란 신전이 사람들을 망치고 있었다. 넬은 화가 났지만 별 수 없었다. 어떻게 한 사람의 힘으로 사람들의 생각을 바꿀 수 있을까?
 넬이 여러 사람을 붙잡고 곤의 집을 알아내려고 애를 쓰는 모습에 레이먼이 다가왔다. 레이먼은 주위 사람들의 시선에 신경 쓰며 속삭이듯 말했다.
 “찾아가지 않는 게 좋을 거요.”
 “충고는 고맙지만, 제가 결정할 문제라고 생각되는군요. 혹시 어딘지 아십니까?”
 넬의 목소리에 가시가 돋쳤다. 사람과 부딪치는 게 일인 레이먼은 손을 들어 손바닥을 보이며 미소 지었다.
 “오해하지 마시오. 내 말은 당신이 찾아가지 않는 게 곤을 위해 좋을 거란 거요. 하지만 원한다면 가르쳐 줄 수는 있소.”
 “어디죠?”
 넬은 레이먼의 말을 이해하기 어려웠다. 게다가 넬은 곤에게 할 말이 있었다. 곤을 내버려 두면 언젠가 그 얘기를 다른 사람에게 할 테고, 라이더의 비밀에 대해 알고 있는 귀족의 귀에 흘러들어 가면 곤은 봉변을 당하고 말 것이다. 적어도 찾아가서 차근차근 그 얘기가 왜 위험한지 알려야 했다. 넬은 그게 자신의 의무라 여겼다.
 레이먼은 더 이상 참견하지 않고 톰의 집으로 가는 길을 자세히 알려 주었다. 넬은 얼마 안 되는 짐을 들고 펍 밖으로 나갔다. 레이먼이 현관까지 따라 나왔다.
 “한 가지만 말하겠소. 곤은 지금 이모 댁에 얹혀살고 있소. 곤을 만나고 싶으면 뒤쪽의 헛간으로 가 보시오.”
 레이먼의 말을 듣는 순간, 넬은 자신이 오해했음을 깨달았다. 레이먼은 갑작스러운 음유시인의 방문에 곤의 입장이 난처해지지 않을까 걱정한 것이었다.
 헛간이라……. 넬은 이모 댁에 함께 산다는 곤의 사정이 그리 좋지 않음을 눈치 챘다.
 “실수는 하지 않을 테니 걱정하지 마시오.”
 “밤길 조심하시오. 그럼, 잘 가시오.”
 넬은 직접 곡을 만들고, 거기에 가사를 붙인 ‘라이더의 노래’를 흥얼거리며 걸었다.
 레이먼이 가르쳐 준 길은 정확했다. 모퉁이를 돌자 돌담 너머의 벽돌집이 보였고, 그 뒤로 희미한 빛이 흘러나오는 헛간이 나타났다. 넬은 아예 뒤로 돌아가 담을 가볍게 넘었다. 헛간으로 조심스럽게 소리 내지 않고 걸어 들어가자 눈앞에 가면 쓴 곤이 나타났다.
 “무슨 일이시죠?”
 경계하는 눈초리.
 = 밤중에 갑자기 찾아온 사람이라서...
 “그게 말이다… 그렇지. 아까 네가 한 말에 대해 알려 줄 게 있어서 왔다.”
 넬은 당황했지만 곧 정신을 추슬렀다.
 “들어오세요.”
 곤을 따라 들어간 넬은 헛간을 자세히 살폈다. 한쪽에 거의 천장까지 쌓인 짚단 옆에는 늙은 나귀가 가볍게 졸고 있었고, 벽에 쟁기, 낫, 곡괭이 따위의 농기구가 늘어서 있었다. 사다리를 통해 벽이 없이 사방이 탁 트인 다락방으로 올라갈 수 있었는데, 얼핏 보니 짚을 깔고 그 위에 담요를 덮어 만든 조악한 침대뿐이었다. 침대 머리맡에 책 몇 권과 등잔이 놓인 걸 보니 곤의 잠자리인 모양이었다.
 “아버지가 크루셨느냐?”
 “아니에요.”
 “그러면 어떻게 그 사실을 아셨지?”
 곤의 눈이 가늘어졌다.
 “내가 널 의심하는 건 아니란다. 다만 그 얘기를 귀족들이 듣게 되면 네게 좋지 않은 일이 생길 것 같아서 이렇게 직접 찾아온 거란다. 무슨 말인지 알겠느냐?”
 “왜 귀족들이 들으면 좋지 않은 일이 생긴다는 거죠?”
 “자, 생각해 보거라. 네가 귀족이라고 상상하는 게 도움이 되겠다. 넌 귀족으로서 어릴 때부터 라이더 교육을 엄격하게 받았고, 그래서 오래지 않아 와이번의 선택을 받을 예정이야. 잔뜩 기대하고 있지. 와이번 라이더는 왕국 전체에서 크게 대우를 받으니 마음이 설레는 건 당연해. 그런데 만약 와이번이 하찮은 고삐를 쥐고 뒤따르는 하인을 선택했다면 네 마음이 어떨까? 한번 말해 봐라.”
 “안 좋을 것 같아요.”
 “그렇지. 나도 그렇게 생각한다. 와이번이 귀족만 택하는 게 아니라는 사실이 알려지면 귀족들은 무척 기분이 나쁠 거고, 그 얘기를 퍼뜨린 사람을 찾아내어 벌을 줄 게다. 왜냐하면 그 얘기를 믿는 놈들이 행여라도 와이번의 주인이 되어서는 안 되기 때문이지. 귀족은 와이번을 독차지했고, 앞으로도 그럴 생각이다. 무슨 말인지 알겠느냐?”
 “자존심과 돈 때문인가요?”
 “바로 그거야.”
 명예와 부. 넬은 곤이 똑똑하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물었다.
 “몇 살이지?”
 “열다섯요.”
 “아직 어리구나.”
 곤의 이모가 누구인지 알 수는 없으나 15세밖에 되지 않은 아이를 이런 헛간에서 살게 하다니. 순간, 넬은 코를 킁킁거렸다. 뭔가 고약한 냄새가 코를 찔렀다.
 “…냄새가 빠지질 않아요.”
 “무슨 일을 하는데?”
 넬은 이미 알고 있었지만, 확인을 위해 물었다.
 “무두질요.”
 “음…….”
 넬의 얼굴이 와락 구겨졌다. 돼지, 소, 말 따위의 생가죽을 처리해 부드럽고 바로 사용 가능한 가죽으로 바꾸는 무두질은 어른들도 기피할 정도로 힘들도 더러운 일이었다. 질긴 생가죽을 부드럽게 만들기 위해 무거운 나무 봉으로 쉬지 않고 밀어야 하는 것도 어렵지만, 무엇보다도 반쯤 썩은 오줌을 사용해야 생가죽 내부에 찰싹 달라붙은 기름을 빼낼 수 있기 때문에 불결했고, 건강에도 좋지 않았다. 그 때문에 수도 네르바에서는 흉악한 죄수에게나 무두질 일을 시키곤 했다. 그러니 더더욱 15세 소년에게는 가혹한 일인 것이다.
 쿠쿵.
 그때 갑자기 땅이 흔들렸지만 곤은 개의치 않았다. 그에 비해 넬은 화들짝 놀라며 바닥에 넙죽 몸을 엎드렸다.
 “괜찮아요. 하루 이틀도 아닌걸요.”
 “…여긴 원래 이렇게 지진이 자주 일어나냐?”
 “예전엔 안 그랬는데, 1년 전부터 조금씩 일어나다가 점점 잦아지더니 요즘엔 하루에 한두 번 정도는 꼭 일어나요.”
 “음…….”
 넬은 팔짱을 끼고 일부러 진지하게 생각하는 듯했다. 그래야 곤 앞에서 넙죽 엎드린 게 조금은 덜 부끄러울 것 같았다.
 “…여쭤 볼 게 있어요.”
 곤이 머뭇거리다가 결심을 했는지 주먹을 꼭 쥐고 넬을 바라보았다.
 “얼마든지 물어봐라.”
 “강물이 갈라져서 바닥이 드러난 걸 본 적이 있으세요?”
 “강물이? 그런 얘기는 아직 듣지도 못했다. 그런데 왜 그러지?”
 “그냥요.”
 곤은 급히 얼버무렸다.
 “너, 엄마도 안 계시냐?”
 “아프세요. 하지만 곧 나으실 거예요.”
 넬이 보기에 곤은 충분히 어려운 상황에 처해 있었다. 목제 가면을 쓴 데다 타고난 오드아이였다. 무두질 일을 시키고, 이런 헛간에다 재울 만큼 고약한 이모와 몸이 아픈 엄마. 그 정도면 징징거리며 발버둥을 쳐도 누구도 탓하지 못할 것이다.
 하지만 곤은 마치 자기에게는 아무런 문제도 없으며, 앞으로도 그럴 거라고 확신하는 듯했다. 넬은 곤의 자연스러운 태도와 당당함이 너무도 마음에 들었다. 곤은 쓰레기 더미에서 피어난 장미 같았다.
 넬은 미소 지으며 고개를 끄덕이다가 어깨에 메고 있던 낡은 가방에서 나무로 만든 화려한 육면체를 꺼내어 곤에게 건넸다. 엄지손톱만큼 작은 나무토막이 한 면에 9개씩 있는데, 상하 좌우로 일부 나무토막만 옮길 수 있었다. 나무토막의 표면에는 신기한 문양이 새겨져 있었다. 문양의 종류는 6가지였고, 각 면마다 적색, 청색, 흑색, 백색 등의 선명한 색으로 칠해져 있었다.
 받는 데 익숙지 않은 곤이 멍하니 넬을 바라보았다.
 “단순하지만 꽤 재미있는 장난감이지. 잘 봐라.”
 넬은 그 육면체를 이리저리 움직여 한쪽 면을 ‘불꽃’의 문양으로 모두 맞췄다. 곤은 그 장난감을 넋을 잃고 보았다.
 “이름은 큐빅이야. 문양은 불꽃, 바람, 물, 땅, 빛, 어둠을 뜻하지. 이것을 모두 다 맞추면, 후후, 재미있는 일이 생길 거야. 자, 한번 해 봐라. 쉽지는 않을 게다.”
 넬은 불꽃의 면만 정렬된 큐빅을 곤에게 건넸다. 곤은 천천히 큐빅을 이리저리 만지다가 이내 깜짝 놀라며 원래대로 되돌리려 했지만 어느새 불꽃의 면은 흐트러지고 말았다. 곤의 어깨가 축 늘어졌다.
 “괜찮아. 이제부터 네 거니까.”
 “…정말요?”
 “딴사람에게는 말하지 말거라. 웬만하면 보여 주지도 말고. 선물인데 빼앗기면 곤란하겠지?”
 “…제게 뭘 원하시죠?”
 “무슨 뜻이냐?”
 “뭔가 원하는 게 없다면, 제게 이런 걸 줄 리가 없잖아요.”
 곤의 말에 넬은 마음이 아팠다. 곤은 너무 일찍 어른들의 세계를 알아 버린 것이리라. 순수한 의도란 존재하지 않는 냉정한 세계.
 “풋, 원하는 거 없다. 지금 당장은. 받아라.”
 하지만 곤은 여전히 의심했다.
 “그냥 고맙다고 받으면 되는 거야.”
 “고맙습니다.”
 넬은 곤의 머리를 가볍게 쓰다듬고는 헛간을 빠져나와 여관으로 향했다. 며칠을 차가운 들판에서 야숙했기에 온몸이 쑤셨다. 오늘은 따뜻한 물에 몸을 담가 피곤을 풀 수 있다고 생각하니 마음이 푸근해졌다.
 여관 주인 바바라는 몸 둘레가 맥주 통만큼이나 큰, 넉넉한 성격의 소유자였다. 음유시인에게는 돈을 받지 않는다는 바바라의 말에 넬은 감동했다. 그래서 목욕을 마친 넬은 지친 몸을 이끌고 사람들이 기다리는 1층 홀로 내려와 ‘시골 청년과 바람난 백작 부인’이라는 코믹한 얘기를 풀어 놓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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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말 내게 선물로 준 걸까?’
 곤은 큐빅을 손바닥에 올려놓고 한참이나 고민했다. 아버지가 화재로 돌아가셨고, 엄마가 아파서 쓰러진 후로 곤은 뭔가를 받아 본 적이 없었다. 더군다나 한눈에도 정교하고 화려해서 값비싸 보이는 이런 장난감은 상상도 하기 어려웠다.
 곤은 큐빅을 손가락 끝으로 건드리면서 계속 생각했다.
 ‘그냥 받자. 선물로 줬다고 했잖아. 만약에 나중에 딴소리하면 돌려주면 그만이야. 어렵게 생각하지 말자.’
 곤은 마음을 정했다.
 곤은 밤새 큐빅을 이리저리 움직였다. 넬처럼 불꽃의 면을 다 맞추면, 바람과 물 그리고 대지의 나무토막들이 흩어져 있고, 바람의 면을 맞추다 보면 불꽃의 면이 어긋나 엉망이 되기 일쑤였다. 새벽 특유의 어스름이 헛간을 감쌀 무렵, 곤은 이 큐빅을 과연 완벽하게 맞출 수 있을지 의심스러워졌다.
 고개를 돌린 곤은 피식 웃었다. 붉은 돌의 한쪽에 기댄 채 스노랫이 잠들었고, 반대편에는 아게스가 벌러덩 다리를 뻗어 푹신한 짚 위에 침을 흘리며 자는 중이었다. 두 녀석도 붉은 돌이 주는 느낌이 좋은 모양이다.
 곤은 큐빅을 주머니에 넣고는 벌떡 일어나 팔다리를 주물렀다. 잠 한숨 자지 않았는데도 그리 피곤하지 않았다. 큐빅을 맞추려다 잠깐씩 락소 강의 일부가 갈라진 어젯밤의 사건을 떠올렸는데, 곤은 결국 착각 혹은 꿈이라 여겼다. 그게 아니라면 도저히 설명할 수가 없어서였다.
 이모부 톰이 가지고 나갈 농기구를 깨끗이 씻고, 두엄터를 뒤집은 다음에 헛간을 정리하니 햇살이 날아와 나무 벽에 박혔다. 곤이 붉은 돌을 짚단 뒤의 공간에 숨기자마자 톰이 멜빵바지를 입고서 어기적거리며 헛간 안으로 들어와 곡괭이, 낫, 쟁기를 챙겨 아게스 옆으로 갔다. 곤은 재빨리 안장을 아게스 등에다 올리고 줄을 당겨서 맸다. 톰이 안장을 얹으면 아게스가 고통스러워하기 때문이었다. 톰은 한마디 말도 없이 아게스를 이끌고 나가 버렸다. 일하러 가는 게 얼마나 바쁘다고 저렇게 일찍 집을 나설까?
 곤은 옷에 묻은 먼지를 털고 뒷문을 통해 식당으로 들어섰다. 곤을 본 롤랑이 엄지와 검지로 코를 잡아 쥐었고, 이모 멜란은 노골적으로 눈살을 찌푸리며 홱 돌아섰다. 롤랑의 동생 몽테는 커다란 숟가락으로 수프를 떠먹느라 곤이 왔는지도 몰랐다. 엄마가 환하게 웃으며 곤 옆으로 다가왔다.
 “밤새… 춥지는 않았어?”
 “따뜻했어.”
 “곤, 빨리 앉아라.”
 멜란 이모가 차갑게 툭 내뱉었다.
 곤은 멜란의 눈치를 보면서 의자 다리가 바닥을 긁는 소리가 나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앉았다. 곤은 엄마 옆에 자리를 잡았다. 맞은편에 롤랑과 몽테가 앉았다. 멜란이 접시를 가져와 앞에 내려놓았다. 롤랑과 몽테의 접시엔 새하얗고 김이 피어오르는 새 빵과 잘 구워 향이 좋은 고기가 놓였는 데 비해 곤과 엄마의 접시에는 며칠은 지난 마른 빵과 질겨서 먹을 수 있을지 걱정이 될 법한 시꺼먼 고기가 기름에 엉겨 붙어 있었다. 곤은 화가 나서 멜란의 뚱뚱한 뒷모습을 노려보았는데, 엄마가 손을 뻗어 곤의 손목을 부드럽게 잡았다.
 식사가 시작되었다.
 멜란이 곤을 힐끔 보더니 입을 열었다.
 “집에 빵이 남아서 그냥 버릴 수 없었다. 그러니 꼭꼭 씹어서 잘 먹어라. 괜히 아프면 안 되니까.”
 “…알았어.”
 “급히 쓸데가 있으니까 가불 좀 해 오너라.”
 “지난달에도 가불을 해서 안 될 것 같은데.”
 “뭐라고?”
 멜란의 고양이 눈이 곤을 사납게 노려보았다. 곤은 조금도 지지 않았다. 그 눈초리를 그대로 받아 내며 할 말은 다 했다. 처음 멜란을 봤을 때, 곤은 무서워서 눈을 마주치지도 못했다. 하지만 곤은 엄마를 위해 용기를 냈고, 지금은 엄마 문제에 대해서라면 누구에게도 달려들 수 있는 아들로 성장했다.
 “벌써 5실버나 가불했어. 그 이상은 안 된다고 팔머 아저씨가 말했다고. 그건 정말 힘들어. 알잖아, 팔머 아저씨 성격.”
 “네 엄마 병을 고치는 데 필요한 귀한 약재가 시장에 나왔는데도 돈이 없어서 못 사는구나. 알았다.”
 “그게 정말이야?”
 “이모를 못 믿는 거니?”
 “이모는 델로의 옷가게에만 관심이 있잖아.”
 “너……!”
 멜란은 눈치 빠른 조카의 말에 뜨끔했다.
 “알았어. 어떻게든 해 볼게.”
 곤은 자신이 지고 말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이모는 사람의 약점을 꿰뚫는데 선수였다.
 “그래, 그래야지. 그래야 착한 아들이지.”
 멜란은 곤의 약점을 너무도 잘 알았다. 어디를 건드려야 돈이 나오는지, 어떻게 건드려야 돈이 잘 나오는지.
 처음에 언니가 어린 아들을 데리고 자신을 찾아왔을 때는 짜증이 하늘을 찔렀다. 아픈 언니와 어린 아들이라니. 단지 그것만이라면 어떻게든 참을 수 있었겠지만, 조카란 녀석은 가면을 썼고, 오드아이였다. 멜란은 난감했다. 이들을 내보낸다면 ‘움브란’을 믿는 신자답지 않게 박정하다는 소리를 들을 테고, 가족으로 받아들인다면 톰이 벨란드 유니언에서 난처해질 게 불 보듯 뻔했다. 재수 없는 아이와 한 핏줄이 아니냐는 의혹 섞인 비난을 받으면서.
 결국 멜란은 곤을 헛간으로 내쫓는 것으로 사람들의 불만을 잠재웠다.
 하지만 곧 멜란은 언니에게서 뭘 얻어 낼 수 있는지 알아냈다. 목걸이, 귀걸이 그리고 반지.
 가끔 그럴듯한 구실을 붙이면 언니는 별로 화도 내지 않고 장신구를 내놓았다. 거기에 언니의 아들이자 자신의 조카인 곤은 뭐든 시키면 꾸준히 성실하게 일하는 아이였다. 롤랑과는 사뭇 달랐다. 아마도 저 징그러운 목제 가면과 오드아이 때문일 것이다.
 멜란은 언니와 곤 덕분에 예전보다 한결 여유로운 살림살이에 재미를 붙이는 중이었다.
 곤이 돈을 가불해 오면 뭘 할까? 수도에서 새로운 옷이 도착했다는데, 안 가 볼 수는 없겠지.
 엄마는 빵을 삼분의 일가량 먹고는 나머지를 곤의 접시로 옮겼다. 곤은 고개를 푹 숙인 채로 오래된 빵과 질긴 고기를 억지로 씹어서 삼켰다. 롤랑은 벌써 다 먹고 밖으로 나간 후였고, 몽테는 뺨과 턱, 목 언저리에 수프를 묻힌 채 울기 직전이었다. 멜란이 몽테 옆에 붙어 다정한 미소를 보이며 깨끗한 손수건으로 턱과 뺨을 닦아 주었다. 곤은 그 모습에 구역질이 날 것 같았다.
 “이모, 별로 차린 건 없지만 잘 먹었어.”
 “…….”
 곤을 노려보는 멜란. 곤은 일그러진 멜란 이모의 얼굴을 확인한 뒤에야 일어섰다.
 “엄마, 오늘도 몸조리 잘해. 나중에 봐.”
 “나 때문에 네가…….”
 “난 괜찮아, 엄마.”
 곤은 밝게 웃으며 문을 나섰다.
 그때, 헛간에서 롤랑의 목소리가 들렸다.
 “우와!”
 곤은 재빨리 헛간으로 달렸다. 롤랑은 붉은 돌을 두 팔로 안고 헛간 밖으로 나오는 중이었다.
 “롤랑, 그건 내 거야!”
 곤이 외쳤다.
 “무슨 헛소리야?”
 “어젯밤 강가에서 주웠단 말이야.”
 “말도 안 되는 소리. 난 이걸 지난달에 늪지 근처에서 발견했어. 집에 두면 엄마가 뭐라고 할까 봐 여기 헛간에 숨겨 뒀지. 그런데 어젯밤에 발견했다고? 웃기는 소리 하지 마. 이건 내 거야, 내 거. 알았어?”
 롤랑은 아무렇지도 않게 거짓말을 해 댔다. 곤은 저 주둥이를 꽉 꿰매 버리고 싶었다.
 “말도 안 돼.”
 “왜 말이 안 된다고 생각하지, 이 멍청아?”
 롤랑이 한 걸음 다가와 곤을 사납게 내려다보았다. 곤이 반걸음 뒤로 물러서자 롤랑은 버럭 고함을 내질렀다. 곤은 깜짝 놀랐지만 더 이상 물러서진 않았다. 화가 난 롤랑이 왼손으로 돌을 지탱한 채로 오른쪽 주먹을 휘둘렀다. 퍽 소리가 났고, 곤은 턱을 감싸 쥐며 주저앉았다. 롤랑은 승자의 웃음을 터트렸다. 곤의 눈에 슬며시 롤랑의 뒤로 다가오는 스노랫이 보였다.
 찍찍.
 그 소리에 롤랑의 얼굴이 삽시간에 굳었다. 천천히 몸을 돌린 롤랑은 흰쥐를 발견했다.
 “아악!”
 롤랑은 비명을 지르며 헛간 밖으로 뛰었다. 그 와중에도 붉은 돌을 놓치지는 않았다. 덩치가 웬만한 어른보다 더 큰 롤랑이 작은 쥐를 이렇게 무서워하다니. 곤은 다가온 스노랫의 머리를 검지로 긁어 주며 한숨을 내쉬었다.
 붉은 돌이 사라지자 헛간이 휑한 듯했다. 곤은 후회했다. 조금 더 은밀한 곳에 숨겨야 했다.
 “스노랫, 어쩌지?”
 찍찍.
 스노랫의 붉은 눈동자가 곤을 빤히 쳐다보았다. 마치 포기하지 말라는 뜻 같았다.
 “그래, 맞아. 반드시 되찾아야 해.”
 곤은 벌떡 일어섰다.
 지금은 일하러 가지만, 꼭 롤랑에게서 그 돌을 되찾고 말리라. 곤은 어느 때보다도 굳게 다짐했다.
 
 
 2. 진실은 항상 이면에 숨어 있는 법이지
 
 왈라크는 동트기 전에 일어나 어망을 어깨에 메고 몇 개 남지 않은 이로 육포를 씹으며 강가로 향했다. 눈두덩 아래의 검버섯, 휜 등, 깊게 팬 주름살은 왈라크가 마을 최고의 노인임을 알려 주었다. 그럼에도 기력이 왕성한 왈라크는 하루도 빠지지 않고 어망을 락소 강 곳곳에 설치했다.
 젊은 시절, 그러니까 50년도 더 지난 과거에 직접 만든 그의 배는 나루 근처의 커다란 바위 앞 물 위에 둥실 떠 있었다. 왈라크는 어망을 던져 놓고, 바위에 묶인 밧줄을 풀어 배 위로 뛰었다. 배가 크게 휘청거렸지만 왈라크는 개의치 않을 만큼 균형을 잘 잡았다.
 어제, 종일토록 잘 보이지 않는 눈으로 깁고, 수선한 그물을 망대에 걸어 둔 왈라크는 뱃고물로 가서 노를 젓기 시작했다. 배는 유유히 안개 낀 강의 한복판으로 미끄러지듯 이동했다.
 왈라크에겐 세 명의 아들과 며느리, 두 딸과 사위 그리고 여섯 손자, 다섯 명의 손녀가 있었다. 모두가 도키아나 이웃인 테이난 영지에 살았다.
 올해로 나이가 67세가 된 왈라크는 아직도 건강했다. 유복한 집이어서 모두가 왈라크를 부러워했다. 하지만 그건 왈라크를 비롯해 가족들이 한 가지 사실을 숨겨 왔기에 가능했다. 태어나자마자 저주를 받았다고 신관에게 판정받은 질리언의 아들 곤.
 질리언과 결혼했지만 먼저 죽어 버린 사위를 왈라크는 죽도록 원망했다. 그 녀석이 아니었다면 질리언이 저주스러운 손자를 낳지 않았을 테고, 가족들이 고통을 당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왈라크는 곤을 낳은 질리언을 내쳤다. 질리언이 아들을 데리고 도키아 남부의 그리 크지 않은 마을 벨란드의 멜란 집에 머물고 있다는 소식을 몇 해 전에 들었지만 왈라크는 관심이 없는 척했다.
 벨란드는 왈라크가 사는 곳에서 하룻길이었다. 그때만 해도 왈라크는 제멋대로 남자를 만나 반대를 무릅쓰고 결혼한 질리언을 용서하지 않았다. 하지만 시간이 흘러 죽을 때가 다가오자 왈라크는 자신의 결정을 후회했다. 비록 함께 있는 아들과 딸 내외에게는 말로 표현하지는 않지만, 왈라크는 아내와 의논해서 질리언에게 떼어 줄 유산을 은밀히 마련해 둔 상태였다.
 “할멈의 말이 옳았을지도 모르겠군. 그때 좀 잘해 줄 것을…….”
 후회는 아무리 빨라도 늦는 법이다.
 한 가지 안타까운 건, 지금쯤 15세가 되었을 곤을 단 한 번도 보지 못했다는 사실이었다. 질리언을 닮았다면 잘생겼을 테고, 심성도 올바를 텐데. 버릇없고 돈만 밝히는 자식, 손자들에게 실망한 왈라크는 요즘 질리언을 자주 생각했다.
 “지금 죽는다고 해도 괜찮겠지. 누릴 건 다 누렸으니까.”
 노인 특유의 지혜로운 미소를 지은 왈라크는 자신만의 감각으로 어망을 던지고, 부표를 띄웠다. 노를 저어 어제 새벽에 쳐 둔 어망을 건지니 팔뚝만 한 물고기 다섯 마리가 힘차게 저항했다. 왈라크는 집에 와 있는 손자 녀석을 데리고 잡화점으로 가서 신기한 장난감을 사 줄 수 있을 것 같아 기분이 좋아졌다.
 물고기를 나무 상자에 넣은 왈라크는 노를 굳은살 박인 손으로 꽉 잡았다. 뭔가 이상했다. 공기가 괴괴했다. 당연히 들려야 할 락소 강의 물소리가 끊긴 듯 사라졌다. 왈라크는 있는 힘을 다해 노를 젓기 시작했다. 왈라크의 작은 나룻배가 락소 강의 중심을 벗어난 순간, 잔잔하던 물이 빠르게 회전하더니 소용돌이가 생겨났다. 잠깐이라도 머뭇거렸다면 왈라크는 소용돌이에 휘말려 다시는 자식들과 손자, 손녀들을 보지 못했을 것이다.
 안도의 한숨을 쉬던 왈라크는 할 말을 잃었다.
 “이, 이럴 수가…….”
 도키아 영지 쪽의 강가로 가려면 아직도 한참인데, 곳곳에 소용돌이가 나타났기 때문이다. 다리가 후들거렸다. 왈라크는 마음을 다잡았다. 다섯 번의 전쟁에 끌려갔지만 결코 포기하지 않았기에 살아남을 수 있었다. 왈라크가 힘을 주자 노를 쥔 팔의 근육이 부풀어 올랐다. 누가 왈라크를 60대 후반의 노인이라고 생각할까?
 묘기를 발휘해 몇 개의 소용돌이를 우회했지만, 무시무시한 소리를 내며 회전하는 소용돌이가 왈라크의 배를 끌어당겼다. 젖 먹던 힘까지 뽑아냈지만, 그의 배는 점점 소용돌이 속으로 빨려들었다.
 “휴우, 이게 마지막인가?”
 왈라크는 배가 부서지기 직전, 락소 강이 자줏빛으로 물드는 광경을 목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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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햇볕이 내리쬐는 여름날의 오후.
 곤은 흙탕물 튀는 길을 건너 파리 꼬이는 수레로 걸어갔다. 수레 위엔 생가죽이 잔뜩 쌓여 있었다.
 “너 이 새끼. 저리로 둘러서 가.”
 수레를 끌고 온 푸줏간 주인 밀리안이 곤을 노려보았다.
 밀리안은 여동생 레비가 사라진 지 두 달이 넘었건만, 아무런 소식도 듣지 못했다. 몇 번이나 촌장을 찾아갔고, 수차례에 걸쳐 숲을 뒤졌지만 레비는 봄나물 뜯으러 바구니를 끼고 나갔다가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다. 그는 오라버니로서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 했음에도 동생을 찾지 못한 것을 볼 때마다 눈에 거슬리는 저 저주스러운 놈 때문이라고 생각하곤 했다.
 위대한 움브란의 신전에서도 저 소년이 재앙 덩어리라고 말하지 않았던가? 게다가 행방불명된 건, 레비만이 아니었다. 잡화점을 운영하는 알랜의 이종 사촌 게튼, 펍 주인 레이먼의 고모인 펠리엘, 촌장 브뢰딩의 조카 마키 등 여러 명이 합당한 이유 없이 벨란드 마을에서 자취를 감췄다. 특히 브뢰딩의 조카 마키를 찾기 위해 대대적인 조사를 벌였지만, 아무도 행방이 묘연한 이유를 알지 못했다. 마키는 레이먼 펍에서 술을 마시다 집으로 가는 길에 행방불명이 되고 말았다. 아무도 드러내 놓고 저 녀석 때문에 사람들이 사라졌다고 주장하지 않았다. 하지만 곤을 볼 때마다 사람들은 욕을 퍼붓거나 채찍이나 몽둥이로 곤을 괴롭히고 싶은 충동에 사로잡혔다.
 곤은 잠시 머뭇거렸지만 이를 꼭 악물더니 일부러 밀리안 앞을 지나갔다.
 “여긴 길이고, 아무나 지나갈 수 있어요.”
 곤이 툭 내뱉듯 말했다.
 “뭐?”
 밀리안은 화를 내며 수레를 끌던 두 마리의 황소 엉덩이에 생채기를 남긴 낡은 가죽 채찍을 꺼냈다.
 곤은 도망칠 준비를 했다. 밀리안이 채찍을 휘두르는 즉시 달아날 태세였다.
 “괜한 일 하지 마. 재수 없어져.”
 하지만 옆에 서 있던 갈란드의 한마디에 참았다. 밀리안은 참나무로 만든 파이프를 입에 물고는 소리쳤다.
 “타메라 곤, 까불지 마라. 호되게 당하는 수가 있다.”
 그때, 희미한 진동이 느껴졌다. 곧 땅이 좌우로 흔들렸다.
 쿠쿵.
 곤은 물론 밀리안, 갈란드는 지탱할 만한 것을 꽉 붙잡았다. 평소처럼 가벼운 지진이었다. 하루에 한두 번 별 피해 없는 지진은 이제 벨란드 마을 사람들의 일상이었다.
 곤은 대머리 밀리안과 구레나룻을 길러 한층 더 거친 인상을 가지게 된 갈란드를 힐끔 보며 수레에 가득 실린 생가죽을 향해 다가갔다.
 ‘재수 없는 건 당신들이야. 내가 뭘 잘못했어? 태어날 때부터 있던 멍 자국 비슷한 흔적과 두 눈동자의 색깔이 다른 거뿐이잖아? 그게 그렇게 잘못된 거야? 당신들은 그저 움브란 신전에서 하는 말을 믿을 뿐이야. 멍청하게도 자기 생각은 없는 거잖아. 밀리안, 갈란드… 언젠가는 꼭 갚아 줄 거야. 너희들은 날 사람 취급도 하지 않았어. 돈도 주지 않고 일을 시키고, 때리고, 욕하고, 뼈가 부러졌는데도 그대로 방치하고. 내 사지가 멀쩡한 건… 그야말로 기적이야, 기적. 두고 봐. 받은 대로 돌려 줄 테니까.’
 눅진한 수레 위에서 무거운 생가죽을 꺼낸 곤은 힘겹게 어깨 위로, 오늘 새벽까지만 해도 소의 앞발을 덮고 있었을 가죽을 끌어당겼다. 밀리안과 갈란드의 대화가 귀에 들렸다. 움브란에게 저주 받은 가면과 오드아이에 대한 원색적인 욕설이었다.
 곤은 정신을 집중했다. 서서히 주변에서 들리는 소리가 희미해지더니 밀리안, 갈란드의 비웃음도 작아졌다. 곧 소리는 완전히 사라졌다. 곤의 두 귀는 여전히 남자들의 이야기를 받아서 위로 전달했지만, 머리가 이해하기를 거부했다. 듣고 싶지 않은 말을 듣지 않기 위해 곤은 나름대로 특이한 능력을 갖춘 것이다. 하지만 곤은 그것을 특별한 능력이라 생각하지 않았다.
 가죽을 어깨에 걸친 곤은 진흙탕을 밟고 길을 건넜다.
 곤은 돌아보지 않고 지하로 향하는 계단을 내려갔다.
 회전 날개 돌아가는 소리가 요란했다.
 곤은 맨 안쪽의 더러운 작업대로 걸어가 생가죽을 내려놓았다. 등과 어깨, 가슴 근처에 묻은 죽은 동물의 기름이 여름날의 더위에 노출되어 코를 찌르는 악취가 흘러나왔다. 곤은 반달 칼로 생가죽의 앞발, 뒷발 부분을 잘라 내어 세 걸음 떨어진 동그란 통에 던졌다. 수백 마리의 파리들이 허공으로 날아올랐다가 다시 내려앉았다.
 문득 화가 치솟았다. 자기들은 뭐가 잘났다고 그렇게 비웃을까? 밀리안, 갈란드. 당장 뛰어올라가 한바탕 욕을 퍼붓고 싶었다. 얻어맞겠지만, 참는 것보다는 나을 듯했다. 하지만 두려웠다. 어떻게 될까? 싸움이 시작될 테고 누구도 곤을 도와주지 않을 것이며, 자칫 잘못하면 이곳에서 쫓겨날 수도 있었다.
 밀리안, 갈란드는 벨란드 마을의 어엿한 남자라면 당연히 속해 있는 벨란드 유니언의 일원이었다. 벨란드 유니언은 펍의 레이먼, 대장간 몰루카, 도구점의 툴스, 잡화점의 알랜을 비롯해 결혼해서 가정을 이끄는, 제대로 된 남자들의 친목 모임으로 귀족의 사교 모임을 흉내 낸 것이었다. 귀족들의 테이블에 오르는 고급 포도주와 고소한 비스킷은 없지만 거친 남자들은 럼주를 마시고, 고기를 뜯으며 나름대로 친밀감을 유지했다.
 일주일에 한두 번 모이는 벨란드 유니언은 마을 남자들에겐 굉장히 중요했다. 실수를 저질러 그 모임에서 쫓겨나는 날엔 벨란드 마을에서 살 수 없을 정도였다.
 남자에게 있어 유니언은 인정받아야 할 사회였다. 유니언 내의 책임 있는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벌이는 남자들만의 경쟁은 치열해서 때론 불법을 자행하기도 했다. 이런 유니언은 사람들이 모여 사는 마을이라면 어디든 만들어져 그 마을을 지탱하는 원동력으로 작용했다. 당연히 영주는 각 마을의 유니언을 인정했고, 때론 지원까지 아끼지 않았다.
 안타깝게도 곤에겐 아버지가 없었다. 그건 곧 벨란드 유니언이 가지는 강력한 끈이 곤에겐 존재하지 않는다는 뜻이었다. 곤은 잘 알았다. 지금 자신에게 필요한 것은 인내와 약간의 웃음이라는 사실을.
 파리가 붕붕 날아다녔다.
 ‘저 파리 한 마리가 알을 얼마나 낳을까?’
 곤은 생가죽에 붙은 살과 기름 덩어리를 끌로 긁었다.
 ‘백 개만 낳는다 해도 수만 개의 알이 저 통 어딘가에 뿌려질 텐데. 잘만 하면 이 지옥 같은 지하 작업장이 구더기로 가득 차겠어. 그렇게 되면 팔머는 기가 막히겠지?’
 곤은 그 광경을 머릿속으로 상상하며 히죽 웃었다. 이런 상상은 곤이 고약한 시간을 이겨 내는 방법 중 하나였다.
 그 순간, 곤의 머릿속으로 밀리안의 음성이 파고들었다.
 ‘아프지만 않으면 내가 어떻게 해 볼 텐데 말이야. 그 몸매, 죽이잖아. 쿠쿠, 오랫동안 남자 맛을 못 보고 꾹 참았을 테니 살짝만 안아도 짐승처럼 달려들걸. 그 여자도 참 불쌍해. 저런 놈을 아들이라고 키워야 하니까 말이야. 아무튼, 벨란드에서 젤로 얼굴 반반하고 몸매 죽이는 여자야. 기회만 생기면 이 몸이 직접 하룻밤에 다섯 번이라도 즐겁게 해 줄 수 있는데.’
 갈란드가 뒤를 이었다.
 ‘고작 다섯 번? 후후후, 나라면 열 번은 식은 죽 먹기지. 하지만 조심해야 돼. 그러다 잘못해서 애라도 들어섰다가 낳아 보니 저 새끼처럼 눈깔이 이상하면 어쩌려고 해? 창녀 같은 여자 때문에 인생을 망칠 수는 없지. 안 그래?’
 ‘당연하지.’
 곤은 머릿속을 울린 목소리가 무엇인지 직감했다. 가죽을 짊어지고 무두질 작업장으로 들어오는 길에 들었던 밀리안, 갈란드의 대화라는 걸. 잠시 방심한 사이, 머릿속 어딘가에 저장되어 있던 두 남자의 대화가 흘러나온 것이다.
 곤은 부들부들 떨다가 날이 뭉툭한 손칼을 들고 벌떡 일어섰다. 작업장 안의 누구도 곤을 보지 않았다. 곤은 작업장 중앙 통로를 가로질러 지상으로 올라왔다.
 밀리안은 마부석에 앉아 채찍으로 황소의 등을 사정없이 내려치는 중이었고, 갈란드는 진흙 구덩이에 빠진 바퀴에 장대를 찔러 넣어 어떻게든 바퀴를 빼내려 애쓰고 있었다. 곤은 흙탕물로 질퍽한 길을 건너 장대를 잡고 힘을 쓰는 갈란드의 뒤로 접근했다. 갈란드에게 힘 좀 더 쓰라고 말하려던 밀리안이 곤을 발견했다.
 “뒤를 봐! 뒤!”
 몸을 돌린 갈란드의 턱을 팔꿈치로 올려치는 곤.
 퍽 소리가 났다.
 갈란드는 한 걸음 뒤로 물러섰지만 쓰러지지는 않았고, 오히려 턱을 어루만지며 곤을 노려보았다. 손칼을 앞세우고 달려든 곤을 가볍게 피한 갈란드는 발을 걸었다. 곤은 바퀴 옆 흙탕물에 얼굴을 박았다. 갈란드는 곤의 뒤통수를 발로 밟았다. 흙탕물에 깊이 박힌 곤, 콧구멍으로 진흙이 밀고 올라왔다. 곤은 숨쉬기가 어려워 버둥거렸지만 갈란드는 히죽 웃을 뿐이었다.
 “미친 새끼…….”
 “어이, 갈란드. 그러다 죽겠어.”
 밀리안이었다.
 그제야 갈란드는 뒤통수에서 발을 떼고, 곤의 옆구리를 발끝으로 걷어찼다. 신음을 흘리며 옆으로 구른 곤은 헐떡거렸다. 갈란드는 발꿈치로 곤의 명치를 가격했다. 곤의 허리가 대나무처럼 휘어졌다.
 “웃긴 녀석이야. 아깐 아무렇지도 않더니만. 후후, 이 새끼도 사람이긴 사람인 모양이야. 제 어미를 욕하니 화를 내는 걸 보면 말이지.”
 그때, 두 마리의 황소가 수레의 바퀴를 진흙구덩이에서 끌어냈다. 밀리안이 휘파람을 불자 갈란드는 수레 위로 펄쩍 뛰어올랐다. 밀리안, 갈란드는 곤을 잊은 듯 요즘 과부 안젤라가 수상하다는 음탕한 이야기를 떠들며 웃기 시작했다. 갈란드는 움브란의 신관이 락소 강의 변색을 막는 의식을 거행할 때, 안젤라를 자세히 보자며 농담을 던졌다.
 수레가 시야에서 사라진 후에야 곤은 비틀거리며 일어섰다. 속이 상했다. 저런 놈들을 그냥 내버려 둬야 하다니. 밤마다, 시간이 날 때마다 몸을 단련하는데도 용병대 생활을 경험한 갈란드를 당해 낼 수 없었다. 곤은 엄마만 아니라면 그냥 혀를 깨물어 죽고 싶었다.
 작업장 근처의 우물가에서 대충 진흙을 씻어 낸 곤은 손으로 벽을 짚으며 작업장으로 내려왔다. 자리에 앉아 일을 하려는데, 억센 손이 곤의 뒤통수를 후려쳤다.
 “어디 갔었지?”
 작업장 주인 팔머였다.
 “그, 그게…….”
 “농땡이를 치다니.”
 퍽! 한 대 더 맞았다.
 “…토할 것 같아서 자, 잠시 바람을 쐰 것뿐이에요.”
 곤은 한 번 더 인내심을 발휘했다. 머리를 뒤흔든 고통보다도 이곳에서 쫓겨나면 갈 곳이 없다는 사실이 더 중요했다. 지하 작업장에서 일하는 다른 사람들이 받는 돈의 절반에 불과하지만, 돈을 벌 수 있다는 건 다행한 일이었다. 돈이 되는 일이라면 뭐든 손대는 팔머가 아니라면 벨란드 마을에서 누가 곤을 고용할까? 곤은 그 사실을 잘 알았다.
 하지만 불쑥 가슴을 치고 솟구치는 분노는 시간이 갈수록 뜨거워졌다. 약점을 알기에 마치 노예처럼 부려 먹는 팔머의 기름진 얼굴을 보면 남은 눈동자마저 손가락으로 빼내고 싶은 잔인한 충동에 사로잡힐 때도 있었다.
 곤은 땀범벅인 목제 가면을 가볍게 들어 안쪽의 땀이 흘러내리도록 했다.
 ‘두고 봐, 모두들. 꼭 갚아 줄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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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벨란드 나루터 앞에 모인 사람들이 웅성거렸다.
 사람들의 틈을 비집고 들어간 곤은 롤랑의 어깨 너머로 자줏빛으로 변해 버린 락소 강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어떻게 강물이 핏빛과 비슷하게 변할 수 있을까? 나루터 근처의 물 위로 물고기 수백 마리가 허연 배를 드러낸 채 둥둥 떠다녔다. 떼죽음이었다. 그리고 락소 강 곳곳에 소용돌이가 나타나 맹렬하게 회전하고 있었다. 누구에게도 저 락소 강으로 들어갈 용기는 없을 것이다.
 촌장 브뢰딩이 입을 열었다.
 “모두들 락소 강의 상태를 잘 알 거라 믿습니다만, 촌장으로서 몇 마디 하겠습니다. 당분간 락소 강에 들어가서는 안 됩니다. 위대한 움브란 신전의 신관 부클 님이 지금 조사 중이니 곧 결과가 나올 겁니다. 그때까지 누구도, 특히 아이들이 락소 강에 들어가지 않도록 각별히 주의를 기울여야 할 겁니다. 이것은 대공자 그라디안 님의 명령입니다.”
 “촌장님, 북쪽은 어떤가요?”
 도구점 주인 툴스가 물었다.
 “들리는 소식으론 거기도 마찬가지인 모양일세. 아니, 우리보다 더 심해. 멋도 모르고 강에 들어갔다가 죽은 사람도 있으니까.”
 “아…….”
 사람들은 크게 놀라며 붉게 물든 락소 강을 바라보았다. 벨란드 마을은 극심한 가뭄 때에도 락소 강 덕분에 재앙을 면했다. 오랫동안 평작 이상을 유지했기에 사람들은 이 생각도 못 한 사태에 어찌할 바를 몰랐다.
 “자, 일단 집으로 돌아가 기다리십시오. 결과가 나오면 바로 알리겠습니다.”
 브뢰딩은 나귀에 올라타더니 급히 자신의 집으로 향했다. 평소 촌장의 결벽증을 알고 있던 사람들은 락소 강의 나쁜 기운 때문에 몸이 아프지는 않을까 두려워 빨리 자리를 떠난 거라고 확신했다.
 곤은 사람들의 눈에 맺힌 희미한 두려움을 읽었다. 모두들 곤을 힐끔거렸다. 마을에 상식으로 설명할 수 없는 일이 벌어지면, 제일 먼저 의심을 받는 건… 곤이었다. 노골적으로 저주 때문에 이 재앙이 발생했다고 소리치며 술잔을 부딪치는 어른들이 생각보다 많았다. 그들 중 다수가 벨란드 마을을 뒤흔드는 기묘한 지진이 곤에게 임한 저주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곤은 락소 강의 기묘한 변화가 계속 이어질 경우를 떠올렸다. 무시와 멸시는 적극적인 폭력으로 바뀔 것이다.
 몸이 떨렸다.
 툴스는 잡화점 주인 알랜의 옆구리를 푹 찔렀다.
 “락소 강이 왜 저럴 거라고 생각하나?”
 “음, 몇 가지 이유가 있겠지. 요즘 날씨가 꽤 따뜻했잖아. 어쩌면 눈에 보이지 않는 작은 벌레들의 수가 비정상적으로 늘어났고, 그 때문에 색이 바뀌었는지도 모르지. 네르바의 대현자 램바르트는 이런 벌레들 때문에 전염병이 유행한다고 주장했어. 개인적으로 그 주장은 사실이라고 생각해.”
 알랜은 평소 논리와 이성을 추구하는 현자들의 책을 즐겨 읽었다. 그는 현자들이야말로 사람들을 눈부신 미래로 이끌 수 있다고 확신했다. 매부리코 위에 걸린 작고 동그란 안경, 힘이 들어간 눈동자, 어디를 가든지 끼고 다니는 두껍고 어려워 보이는 책은 알랜을 현자처럼 보이게 했다. 지금도 들고 다니기 부담스러울 정도로 무거운 책을 옆구리에 끼고 있었다. 물론 그 책은 십중팔구 과시용이었다. 툴스는 그런 가식이 싫었다.
 “눈에 보이지 않는 벌레라고? 풋, 그 얼마나 웃기는 소린가. 자넨, 보이지 않는 건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했잖은가? 자네의 평소 주장과는 사뭇 다른걸.”
 툴스가 알랜의 허점을 찔렀다.
 “그, 그건 아직 그 벌레를 볼 수 있는 도구가 만들어지지 않았기 때문일세.”
 “그건 변명거리가 될 수 없어. 게다가 전염병이 벌레 때문이라고? 말도 안 돼. 그건 이미 알려진 사실이야. 전염병은 쥐 때문이고, 쥐를 불러 모으는 건… 악과 저주라는 걸. 네르바를 휩쓸었던 그 전염병은 뜨거운 불을 통해 진정되었다는 게 그 증거지.”
 “그러는 자네는 왜라고 생각하는가?”
 한 방 먹은 알랜이 분통을 터트리며 물었다. 알랜이 현자들의 논리를 좋아한다면, 툴스는 움브란 신도로서 경전을 철석같이 믿으며, 신관들이 주장하는 악마, 천사, 저주, 축복 따위의 체계를 선호했다. 툴스의 도구점에는 점치는 점토판, 특이하게 조각된 나무 상, 점을 위한 도구들이 잔뜩 있었다. 마을 사람들은 대부분 툴스와 비슷했다. 그들은 위대한 신 움브란과 그 경전을 믿지 않으면 큰일이 나는 줄 알았다. 툴스처럼 달려들어 저주에 심취하진 않았지만, 이상 현상을 움브란의 저주로 설명하는 게 그들에겐 훨씬 쉬웠다.
 “당연히 저주 때문이지.”
 툴스는 곤을 힐끔거렸다.
 “말도 안 돼. 저 녀석 때문에 이 거대한 락소 강이 변했다고? 설마 그걸 사실이라고 믿는 건 아니겠지?”
 “경전엔 이보다 더 괴상한 일도 기록되어 있지만, 그건 모두 사실이야. 어떻게 아니라고 단언할 수 있지?”
 “증거가 없으니까.”
 “그 작은 벌레들보다는 나은 설명이야. 왜냐하면 움브란의 경전에 나오는 내용이니까. 저주는 존재한다네. 설마 움브란과 경전을 부정하는 건 아니겠지?”
 “다, 당연하지.”
 움브란을 부정한다고 말하는 순간,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알랜은 잘 알았다. 아무리 머릿속으로 움브란 따위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해도 절대 입으로 발설해서는 안 되었다. 벨란드 마을에서 계속 살고 싶다면, 다르크에서 계속 거주하고 싶다면 말이다.
 “나는 저 녀석 때문에 이런 일이 벌어진다고 생각하네. 날 그렇게 보지 말게. 나만 그런 생각을 하는 건 아니니까. 마을 어르신들 중 상당수가 저주 때문이라고 생각하시네. 그분들은 경전을 아는 것만큼이나 락소 강을 잘 알고 계시지. 평생을 락소 강을 바라보며 사셨으니까. 만약 부클 신관님조차 아무런 해결책을 내놓지 못하면, 저 녀석… 어쩌면 화형을 당할지도 몰라. 저주는 불에 약하거든.”
 마지막 부분은 낮게 속삭인 툴스.
 “뭐?”
 “자넨 화형이 사라졌다고 생각하겠지만, 불행히도 아니라네. 아니, 다행인가? 후후.”
 툴스의 눈동자가 타오르듯 빛났다.
 “난 그렇게 생각하지 않네.”
 “자네의 생각은 중요하지 않아.”
 툴스와 알랜은 서로의 주장을 물고 늘어지며 나루터를 떠났다. 많은 사람들이 툴스, 알랜의 생각 사이 어딘가에서 이야기를 나누며 곤을 힐끔거렸다. 곤은 그들의 시선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너무도 잘 알았다. ‘화형’이라고 속삭이는 소리가 곤의 귀를 자극했다. 곤은 그 자리에서 벗어나기 위해 몸을 돌렸다.
 롤랑이 다가왔다.
 “너, 그 돌에 대해서는 한마디도 하지 마.”
 “무슨 말이야?”
 “그 붉은 돌 말이야. 강가에서 주웠다면서?”
 “그래.”
 “그러니까 아무 말도 하지 마. 알았지?”
 “…알았어.”
 곤은 롤랑의 부라리는 눈동자 너머에 두려움이 있음을 깨달았다. 아, 그렇구나. 롤랑은 사람들의 속삭이는 대화에 겁을 먹은 것이다.
 락소 강에서 주운 그 붉은 돌은 누가 봐도 평범치 않았다. 만질수록 따뜻하고, 마음이 평온해지는 붉은 돌. 충분히 오해를 살 만했다. 그 순간 곤은 롤랑이 돌을 버리려 한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어디에다 버릴까? 당연히 락소 강에다 던져 버릴 것이다.
 “다시 한 번 말하는데, 난 그 돌을 본 적도 없는 거야.”
 롤랑은 콘스탄틴 패거리에게로 걸어갔다. 그들은 노골적으로 곤 때문에 강이 변해 버렸다고 악담을 하며 마을로 향했다.
 이제 나루터에는 곤 홀로 남았다.
 “아아악! 아아아아악!”
 곤은 락소 강을 향해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가슴속의 분노가 목소리를 타고 퍼져 나갔다. 펑 뚫리는 느낌. 곤은 고개를 푹 숙였다.
 ‘왜, 왜… 저런 말을 들여야 하지?’
 그때 한 사람이 다가왔다. 인기척을 느낀 곤은 소매로 눈가를 닦아 내곤 시선을 락소 강으로 돌렸다.
 “큐빅은 다 맞췄니?”
 넬이었다.
 “…….”
 락소 강을 하염없이 바라보는 곤.
 “휘유, 붉은 강이라… 대단하구나.”
 넬은 곤 옆에 서서 붉게 물들고, 소용돌이치는 락소 강을 바라보며 휘파람을 불어 댔다. 음유시인으로서 놓쳐서는 안 될 광경이었다. 그의 입에서 자연스럽게 불길한 멜로디가 흘러나왔다. 락소 강의 변화는 세상에 혼란이 생길 징조이며 새로운 영웅이 필요하다는 게 노래의 내용이었다. 곤이 넬을 올려다보았다.
 “그러다간 저주의 주문을 외웠다는 이유로 불타서 죽을지도 몰라요.”
 “풋, 그럴까?”
 “조금 전에 사람들이 절 바라보며 저주, 화형 어쩌고 쑥덕거렸어요. 원하신다면 제가 불에 탈 때 아저씨를 특별히 제 옆 자리로 모실 수도 있어요.”
 곤의 신랄한 풍자가 넬을 웃겼다.
 “뭐? 하하하. 그건 그때 가서 보자꾸나.”
 넬은 곤에게 음유시인의 자질이 있다고 생각했다. 음유시인에게는 세상을 비트는 재주가 필요했다. 보이는 그대로를 노래하는 거라면, 목청 좋은 사람이라면 누구든 음유시인의 길을 걸을 수 있으리라. 하지만 역사가 기억하는, 세상이 알아주는 음유시인은 독특한 시각으로 세상을 비틀어 진실을 보여 주는 사람이었다. 젤다가 그랬고, 웰링트웬이 그랬다.
 “곤, 내 질문에 답하지 않았다. 큐빅, 다 맞췄냐?”
 “한 면은 맞출 수 있는데, 다른 면을 맞추다 보면 헝클어져요. 혹시 불가능한 건 아니겠죠?”
 “가지고 있냐?”
 “네.”
 곤은 품에서 큐빅을 꺼내 넬에게 건넸다. 넬은 빙긋 웃으며 두 손의 손가락 모두를 빠르게 움직여 큐빅을 이리저리 돌렸다. 손가락에 가려 잠깐씩 보이지 않던 큐빅은 서서히 맞춰지기 시작했다. 한 면이 완성되었다. 다른 면을 맞추기 위해 원래 맞춰진 면은 여지없이 헝클어졌는데, 신기하게도 어느샌가 원래대로 돌아와 있었다. 뭔가 비법이 있는 듯했다.
 넬은 몇 개 조각을 제외한 물, 불, 바람, 대지, 어둠 그리고 빛의 문양이 거의 맞춰진 큐빅을 곤에게 건넸다. 곤은 휘둥그레진 눈으로 넬과 큐빅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어떻게 하는 거죠?”
 “완벽하진 않지만, 이 정도도 쉽진 않을 거야. 내겐 이게 한계야. 잘 생각해 보거라.”
 넬은 쉽게 가르쳐 줄 생각이 없었다.
 “여기 계실 건가요?”
 “그래야지. 눈앞에서 락소 강이 변해 버렸으니까.”
 “…그 이야기, 들려주셔야 해요.”
 “무슨 말이냐?”
 “라이더. 저는 못 듣고 쫓겨났잖아요.”
 “아, 그랬지. 당연히 들려줘야지. 언제든지 말하려무나.”
 “고마워요. 급한 일 때문에 가 볼게요.”
 “그래.”
 곤은 마을을 향해 달렸다. 아무도 없는 것을 확인한 넬은 지팡이를 뻗어 락소 강물에 닿게 했다. 갈색이던 지팡이 끝 부분이 까맣게 변했다.
 “역시, 마법이었구나.”
 넬은 고개를 들어 파란 하늘을 바라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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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불이 하나, 둘 꺼지고 인적이 끊겼다. 롤랑은 가방에 붉은 돌을 넣어 살금살금 벽돌집 밖으로 나왔다. 주위를 살핀 그는 돌담을 넘어 락소 강으로 향했다. 기다렸던 곤이 롤랑의 뒤를 쫓았다. 락소 강에 도착한 롤랑은 또 한 번 날카롭게 주변을 살핀 후에야 붉은 돌을 가방에서 꺼냈다. 밤이어서 그런지 더 밝게 빛나는 돌을 본 곤의 심장이 쿵쾅거렸다.
 “재수 없어…….”
 말은 그렇게 했지만, 롤랑은 쉽게 돌을 강으로 던지지 않았다. 돌이 가진 매력 때문이었다.
 하지만 롤랑은 결심을 했는지 두 팔로 돌을 들어 나루터 선창 끄트머리로 향했다. 롤랑은 돌을 던지고 곧바로 몸을 돌려 달렸다. 혹시라도 튕긴 강물에 몸이 닿을까 걱정해서였다. 잠시 강물을 살핀 롤랑은 애꿎은 돌멩이를 발로 차며 집으로 향했다.
 곤은 롤랑이 사라지자 장대를 가져와 롤랑이 돌을 던진 곳을 뒤졌다. 장대가 건드렸는지 검붉은 물 아래서 붉은빛이 일렁거렸다. 열심히 장대로 돌을 물가로 옮기려던 곤은 선창 바로 아래쪽에서 기묘한 흐름이 생기는 걸 보지 못했다. 곤이 낌새를 눈치 챘을 무렵에는 소용돌이가 선창의 낡은 다리를 후려쳐 여기저기서 끼익 소리를 냈다.
 곤은 장대를 버리고 달렸지만, 중간쯤에서 선창이 흔들렸다. 선창을 지탱하는 나무다리가 후두둑 부러지며 강 쪽으로 면한 선창만 남았고, 나머지는 물속으로 처박혔다. 곤이 한 번의 도약으로 열 걸음의 거리를 뛰어넘지 않는 한, 검붉은 물에 닿지 않고 땅으로 돌아갈 방법은 사라졌다.
 곤은 가슴에 손을 얹고 심호흡을 했다. 그는 붉은 돌을 어떻게 찾아냈는지 기억해 냈다. 꿈이라 생각했지만, 죽을지도 모르는 상황이라 가릴 처지가 아니었다. 선창의 끝에 걸터앉아 발을 아래로 늘어뜨렸다. 조심스럽게 발끝이 소용돌이치는 물에 닿게 했는데, 그 순간 물이 좌우로 물러가더니 물벽이 생겼다.
 “꿈이 아니었어.”
 모래와 진흙이 섞인 바닥에 돌이 박혀 있었다. 곤은 선창에서 훌쩍 뛰어내려 바닥에 착지한 후에 조심스럽게 다가갔다. 두 손으로 돌을 들어 올린 곤은 재빨리 물가로 달렸다. 물벽이 무너지며 검붉은 물이 쏟아졌다. 지난번과 달리 한 번도 미끄러지지 않고 자갈과 바위 그리고 모래로 가득한 물가에 무사히 도착했다.
 “헉헉…….”
 선창은 완전히 사라졌다. 물벽이 무너지면서 생긴 거센 물살이 남아 있던 선창마저 삼킨 것이었다. 하마터면 죽을 뻔했다. 곤은 무거운 돌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왜 이 돌에 집착할까? 롤랑이 빼앗아서? 이모 집에 살면서부터 롤랑에게 빼앗긴 게 얼마나 많았던가? 그건 아니었다. 바라보기만 해도 마음이 평온해져서? 그럴지도 몰랐다. 아무튼, 이 돌은 특별했다. 흐르는 강물을 두 쪽으로 나눌 만큼.
 곤의 머릿속으로 ‘마법’이라는 단어가 떠올랐다. 마법은 상식적으로 불가능한 모든 것을 포함했다. 부싯돌, 기름 따위가 없이 불을 일으키는 것, 주문만으로 폭풍을 일으키는 것, 지팡이를 내리쳐 땅을 갈라지게 하는 것…들이 마법에 속했다. 누군지 몰라도 대단한 마법사가 이 돌에 마법을 건 것이리라. 마법은 곤뿐 아니라 또래 소년들의 가슴에 불을 지피는 강력한 꿈이었다.
 “나도 마법을 배울 수 있을까?”
 곤은 자기가 말해 놓고도 겸연쩍은지 히죽 웃었다. 귀족 중에서도 선택받은 소수에게만 길이 열린 마법. 평민인 데다 목제 가면을 썼고, 오드아이의 소유자인 자신이 마법을 꿈꾸다니.
 곤은 속으로 생각했다.
 ‘꿈꾸는 건 죄가 아니야. 아무도 모를 테니까. 하지만 꿈이 드러나면 위험할 거야. 드러난 꿈은 더 이상 꿈이 아닐 테지……. 휴우… 난 왜 이렇게 태어났을까?’
 곤은 돌을 들고 몰래 헛간으로 들어섰다. 아게스의 머리 꼭대기에 앉아 있던 스노랫이 목덜미를 타고 등으로 내려오더니 통통 몸을 튕기며 털을 잡고 미끄러지듯 앞다리를 타고 바닥으로 내려왔다. 스노랫은 붉은 돌을 응시했다.
 “잘 숨겨야 돼. 만약에 들키면 정말 사람들이 장작더미를 쌓아 놓고 날 불태우려고 할지 모르니까.”
 곤은 스노랫, 아게스를 바라보며 속삭였다. 그는 어디다 돌을 숨길까 고민하다가 발로 헛간 바닥을 쿵쿵 굴렀다. 벽에 세워진 곡괭이, 삽을 가져온 곤은 마루를 뜯은 후에 열심히 땅을 팠고, 스노랫은 작은 앞다리를 뻗어 콩알 같은 흙덩이를 밀었다. 한참 만에 바닥에 깊은 구덩이가 드러났다. 곤은 돌을 그 구덩이에 넣었다. 딱 맞았다. 그 위에 마루를 올리니 감쪽같았다.
 “좋아.”
 곤은 신이 났다. 마루 위에 짚을 깔고 그 위에 앉았는데, 붉은 돌의 따스한 기운이 엉덩이를 타고 올라와 온몸으로 퍼지는 듯했다. 스노랫은 그 자리를 좋아했고, 고삐 풀린 아게스도 유독 돌이 숨겨진 자리만 고집했다. 곤이 벌렁 드러눕자 스노랫은 곤의 배 위로 올라왔다. 모로 누운 아게스의 머리는 곤의 정수리에 맞닿았다.
 솔솔 잠이 왔다. 곤은 그날 밤, 커다란 뱀을 타고 검붉은 락소 강을 건너는 꿈을 꾸었다. 물론 아침에 일어났을 때는 꿈을 기억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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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루터를 떠난 배 위엔 새하얀 신관 특유의 복장을 갖춰 입은 신관 부클이 서 있었다. 소매에 루비, 다이아몬드, 사파이어 등의 보석이 달려 가볍게 움직여도 영롱한 소리가 울렸다. 부클은 자줏빛 락소 강물 위에서도 당당했다. 그에 비해 노를 잡은 무기점 주인 갈란드는 단단한 근육질 몸에도 불구하고 눈을 이리저리 굴리며 불안해했다. 갈란드는 배가 뒤집혀 이 저주받은 강에 빠지지 않을까 두려워했다.
 곤의 눈에 비친 키 작은 신관은 대단한 존재였다.
 소용돌이에서 안전한 곳에 이르자 배는 멈췄다.
 부클은 나루터에 모여 자신의 일거수일투족에 집중하는 마을 사람들을 속으로 비웃었다. 어리석은 무지렁이들. 그는 신관의 상징이자 표시인 하얀 지팡이를 양손으로 번쩍 들었다. 사람들이 일제히 환호했다.
 “나 움브란의 신관 부클은 하늘과 땅의 기운을 빌려 오늘 락소 강에 임한 저주를 풀려고 한다. 하늘이여 땅이여, 위대한 신 움브란이여, 내게 태고의 힘을 주소서. 그리하여 이 깊고 깊은 저주의 사슬을 깨뜨리게 하소서.”
 부클은 품속에서 빛나는 금빛 가루를 꺼내어 사방으로 던졌다. 햇살에 반짝이는 가루들이 부클을 에워쌌다. 마을 사람들의 환호는 더욱 커졌다. 부클은 잠시 뜸을 들이다가 지팡이를 들고 경전의 일부를 외웠다.
 “암니스 아블루오니카 콘페스티움 나카!”
 목소리가 크진 않았지만, 뭔가 확연히 달랐다. 곤은 처음 듣는 신관의 주문에 귀를 기울이다가 깜짝 놀랐다. 진동이 느껴지는 목소리. 어딘지 모르게 힘이 실린 듯했다. 사람에게서 저런 목소리가 나올 수도 있구나 싶었다.
 부클이 새하얀 지팡이로 락소 강물을 치는 순간, 지팡이 끝 부분에서부터 점차 넓게 원래의 강물 색으로 변하기 시작했다. 마을 사람들, 특히 도구점 주인 툴스를 비롯해 움브란을 맹신하는 자들은 무릎을 꿇고 부클을 향해 절했다. 그런 모습을 비웃는 알랜 등의 사람들도 락소 강물이 빠르게 원래대로 회복되는 기적에 할 말을 잃었다. 신관이 이토록 강력한 존재라는 사실을 새삼 깨달았다.
 “풋, 저건 쇼야.”
 어느새 곤 옆으로 다가온 넬이 속삭였다.
 “어째서 쇼라는 거죠?”
 신관의 능력에 한껏 고무된 곤이 물었다.
 “쇼니까. 신관에게 저런 능력은 없어. 더군다나 촌구석의 삼류 신관 따위가 감히…….”
 그 이상의 말은 필요 없다고 생각하는 넬의 단호한 답.
 곤도 입을 다물었다.
 신관 부클은 오만한 표정으로 마을 사람들 사이를 지나가 대기하던 검은 마차에 올라탔다. 그 뒤로 수석 수사 갈베르가 올라타며 문을 닫았다. 마차는 출발해서 벨란드 언덕 위의 저택 왼쪽에 자리 잡은 움브란의 벨란드 신전으로 향했다. 수십 명의 젊은 수사들은 천천히 신전으로 걷기 시작했다.
 마을 사람들이 흩어지려는 찰나, 밭에 나가 일을 하던 톰이 땀을 뻘뻘 흘리며 달려와 롤랑, 몽테와 함께 있던 멜란 곁으로 다가갔다. 곤은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무슨 일이 생겼나? 톰의 이야기를 들은 멜란은 몽테의 손을 잡고 마을로 달렸다.
 ‘혹시 엄마에게 무슨 일이 생긴 건가?’
 겁이 났다.
 “저 먼저 가 볼게요.”
 “엄마 걱정 하는구나. 그래, 가 봐라.”
 곤은 넬의 말에 크게 놀랐다. 어떻게 알았을까?
 곤은 있는 힘을 다해 집으로 달렸다. 벽돌집의 뒷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섰는데, 톰과 멜란은 커다란 가죽 가방에 옷가지를 넣으며 짐을 싸고 있었다. 롤랑, 몽테는 보이지 않았다. 위층에서 우당탕 소리가 나는 걸 보니 뭔가를 하는 모양이었다. 엄마는 탁자에 앉아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는 중이었다.
 “엄마?”
 “곤…….”
 엄마는 말도 제대로 하지 못했다.
 “왜 그래? 무슨 일 있어?”
 “네 외…할아버지가 돌아가셨다.”
 곤은 입을 꼭 다물었다. 그게 슬퍼해야 할 일인가?
 키가 크고 살짝 머리가 벗겨진 외할아버지는 곤을 싫어했고, 곤도 그 사실을 잘 알았다. 외가에 머물렀을 때, 곤을 보기만 하면 온갖 욕을 퍼붓고, 수치를 주었기 때문에 곤은 외할아버지 눈에 띄지 않으려고 숨어 다녔다. 그런 외할아버지가 죽었다니 조금은 속이 시원했다. 하지만 외할아버지는 엄마의 아버지였다. 자신이 아버지를 좋아하듯 엄마도 아버지를 좋아하지 않았을까. 그렇게 생각하니 엄마는 굉장히 슬프지 않을까 싶었다.
 “가야겠지?”
 “…그래.”
 “얼마나 걸릴까?”
 곤은 몸이 안 좋은 엄마가 외할아버지 집에 간다는 게 마음에 들지 않았다.
 “열흘쯤.”
 오가는 길은 이틀이면 되지만, 장례 절차를 생각한다면 더 긴 시간이 필요했다.
 “알았어.”
 곤은 그 집에 갈 생각도 없었고, 갈 수도 없었다. 이모, 삼촌들은 물론 사촌들까지 떼로 몰려와 욕하고, 때리고, 내쫓을 게 분명했다. 그건 엄마도 잘 알았다.
 “언제 출발해?”
 “오늘.”
 “…그래.”
 곤은 엄마를 가볍게 안아 주고는 걸어 나오다 조금도 슬픈 기색이 없는 멜란 이모를 바라보았다.
 “뭘 보냐?”
 툭 내뱉는 멜란.
 “아무것도 아니야. 그저 할아버지가 돌아가셨는데도 이모는 평소와 같아서 말이야. 나처럼.”
 “뭐?”
 곤은 서릿발 치는 이모의 눈초리를 간단히 무시하고는 헛간으로 향했다.
 오랜만에 기분이 좋았다. 아픈 엄마가 무리해서 가는 게 싫었지만, 멜란과 톰, 롤랑과 몽테까지 모조리 사라진다고 생각하니 마음이 그리 가벼울 수 없었다. 이모 집에 온 뒤로 처음 느끼는 환희였다. 열흘 동안 뭘 할 수 있을까?
 헛간으로 돌아온 곤은 깜짝 놀랐다. 붉은 돌을 묻어 둔 자리에 스노랫과 수십 마리의 새까만 쥐, 몇 마리의 토끼, 너구리 등이 벌러덩 드러누웠고, 그 근처로 풍뎅이, 나방, 지네, 나비, 벌 따위의 곤충 수백, 수천 마리가 떼를 지어 몰려 있었다. 또 천장을 가로지르는 들보에는 꾀꼬리, 비둘기, 까마귀, 종다리 등이 따닥따닥 붙어 있었다.
 새라면 당연히 곤충을 보자마자 쏜살처럼 날아가 잡아야 할 텐데, 가만히 지켜보는 게 신기했다.
 곤을 본 놈들은 허겁지겁 도망쳤다. 결국 스노랫만 남았다. 곤은 멜란 이모 가족 모두가 벨란드 마을을 떠나는 게 다행이라 생각했다. 교활한 롤랑이 이 모습을 보면 눈치 챌 것이다. 곤은 적당히 때를 봐서 뒷산의 우거진 숲 어딘가에 돌을 숨겨야겠다고 마음먹었다.
 해가 서쪽으로 기울어졌다. 톰이 마차를 빌려 오자 곤은 재빨리 짐을 뒤쪽에다 실었다. 흑색 드레스를 차려입은 멜란은 몽테, 롤랑과 함께 마차에 탔고, 톰은 마부석에 앉아 가죽 장갑을 끼는 중이었다. 곤은 엄마를 부축해 마차로 향했다. 옷을 몇 겹 깔아 푹신한 의자에 엄마를 앉히자 멜란이 차갑게 말했다.
 “빵은 네가 알아서 사 먹도록 해라. 문은 잠갔으니까 안으로 들어갈 생각은 말고. 무두질 작업장도 잘 다녀야 한다. 알았니?”
 “알았어.”
 곤은 이모와 말다툼하기 싫어 짧게 답했다. 당연히 팔머 아저씨가 당분간, 적어도 열흘 정도 무두질 작업장을 쉬어야겠다고 말했다는 사실도 숨겼다. 락소 강 때문이었다. 잘못된 물을 마시고 죽은 동물의 생가죽을 이용했다가 무슨 일이 생기면 주인 팔머가 책임져야 했다. 그 때문에 팔머는 작업장을 닫기로 결정한 것이다. 멜란 이모가 알면 길길이 날뛰며 다른 일이라도 구하라고 말할 게 뻔했다.
 “곤… 잘 지내거라. 곧 돌아오마.”
 엄마가 눈물을 글썽이며 말했다. 곤이 내리자마자 톰은 채찍으로 말 궁둥이를 때렸다. 앞발을 들어 올린 말이 흙탕물을 튀기며 달리기 시작했다. 마차가 시야에서 사라지자 곤은 해방감보다 왠지 모를 씁쓸함에 기분이 묘했다. 보기 싫은 톰과 멜란 그리고 롤랑을 보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이 얼마나 좋은가. 그런데 기분이 왜 이렇지?
 엄마 때문이었다. 힘든 여행, 반가워하지 않을 고향의 가족들. 엄마에게는 분명히 고생의 시간이 될 텐데, 이렇게 자유롭다면서 좋아하는 게 미안했다.
 “…차라리 따라갈 걸 그랬나?”
 이미 때를 놓친 후회였다.
 
 
 
 다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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