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물함
뒤로가기버튼 러시아에 혁명 따윈 없다

001화. 확인

2024.06.24 조회 53,939 추천 1,070


 #001화. 확인
 
 
 
 
 
 <제목: 어떻게 곰탱이 이샛기들은 학습 능력이 없냐>
 
 「아, 기어코 전쟁을 하네. 내가 말했지, 이것들 뒤늦게 콧물 눈물 똥물 다 짜면서 도리도리 해도 서방 큰행님들 안 봐준다고. 덕분에 오일 롱 포지션 시원하게 먹고 갑니다.」
 
 └안녕하세요, 성지순례하러 왔습니다.
 └여윽시 불곰사냥꾼, 야매처럼 말하지만 이 양반 진짜네. 러시아 한정 틀린 걸 본 적이 없음 ㄹㅇ.
 └당신 푸틴이지, 국정원이다, 솔직히 말해!
 
 “국정원은 개뿔. 이미 국정원 조사까지 받아본 사람이다, 임마.”
 
 댓글들이 예언가 불곰사냥꾼이라느니, 푸틴 드 노스트라다무스가 미래를 봤다니 떠들어대지만 그런 오컬트 취급에 난 코웃음만 나올 뿐이다.
 
 러시아다. 그 러시아. 정치체계가 바뀌고 사상이 바뀌고 정권이 바뀌어도 근본은 바뀌지 않는 그 미련곰탱이 같은 나라.
 
 사람도 10년이면 변할진대 나라가 150년이 지나도 변하질 않으니 어째.
 나 같은 일개 개인도 이젠 국가방향성을 맞추는 시대가 와버린 거지.
 
 <제목: 혹시 자기가 영화 빅쇼트 주인공이라고 생각하는 흑우 없제?>
 
 「미쳐날뛰는 천연가스 그래프에 호옥시나 주인공병 걸려서 숏치는 놈 없제?
 아직 그래프 시작도 안 했다. 천연가스 진도 9.0 대지진에서 안 흔들릴 자신 있으면 덤비고, 아니면 그냥 딱 1년만 기다려. 개같이 떨어지고 다시 롱잡을 기회 오니까.
 어떻게 아냐고? 아ㅋ 러시아잖아. 꼭 힘든 거 인정 안하고 버티다가 이번에도 여기저기 싸게 사달라고 싹싹 빌고 또 삐져서 올리겠지.」
 
 └와, 나 이전 글 읽고 숏 타이밍만 대기타고 있었는데 미숏다.
 └당신 좋은 말 할 때 내 머리에서 나가시오. 이건 마지막 경고요.
 └행님, 전쟁 시작 한 달 만에 재작년 가격의 세 배가 뛰었는데 이걸 어캐 참습니까. 다섯 번 나눠서 숏 때려서 한 번만 맞아도 인생 펴겠는뎁쇼.
 └(글쓴이)해봐. 로씨아 대지진에 전재산 싹 다 꼴아박고 싶으면.
 
 인정한다. 아직 러시아식 전쟁을 잘 모르니 저런 소리할 수 있지.
 왜인지 현대전이라 단기전일 것 같고 우크라이나가 서방지원도 빵빵하게 받아서 뭔가 러시아랑 전 세계랑 싸우는 느낌이겠지.
 
 “근데 러시아에서 인명 경시는 그냥 전통문화라고.”
 
 마지막으로 오늘 블로그 포스팅을 쓰려고 노트북 타자를 두들겼다.
 
 <제목: 혹시 이번 전쟁 결말 미리 알고 싶어?>
 
 「내 누누이 말하지만, 러시아의 종전은 이번에도 똑같다. 승리라고 자축하겠지만 사실 누구보다 상처가 쓰라려서 뒤에선 입에 주먹 넣고 광광 울게 될 거다.
 어? 왜 그렇게 되냐고?
 그게 약속이니까(끄덕끄덕).」
 
 └아ㅋㅋ 이미 그렇게 끝내기로 약속 했다고 ㅋㅋ.
 └누구랑 약속함? 그런 조약도 있음?
 └일본 환경부 장관이랑 약속함.
 └대대로 내려오는 슬라브 전통임. 이득 없는 승리. 자기네만의 승리. 아무도 인정 안 해주는 승리. 보통 강대국들이 전쟁으로 뽕뽑을 때 이 나라는 전쟁으로 국력 바닥까지 싹싹김치해서 밥도둑함.
 
 온갖 조롱과 비꼬는 댓글이 난무하는 블로그. 내가 포스팅했지만 진짜 이런 인터넷 여론이 무색하게 내용만큼은 진심이다.
 
 댓글을 하나하나 읽어가며 올라가던 입꼬리는 언제나와 같은 반응에 미소로 번지진 못했다.
 
 “에휴, 진짜 내가 다 답답하다. 내가 다 답답해.”
 
 주도적이지 못하고 끌려다니다가 뒤늦게 마음에 안 들어서 판 엎기.
 
 외교라면 본디 하나 주고 하나 받는 무역과도 같은 과정이다. 그 과정에서 상호국가이익이 나게 되는 거고.
 
 허나 러시아는 받지도 못할 부실채권을 무작정 주거나 매번 하나 꿀꺽 삼키고 자기 주머니를 안 열 때도 있다.
 
 지키지도, 얻지도 못하는 외교.
 그게 19세기부터 이어져온 러시아식 외교다.
 
 외교 꼬라지가 그럴진대 내부라고 다를까. 모든 국가 역사에는 전성기와 쇠퇴기가 있기 마련이라지만 이 나라는 먹고 살기 어려운 소련 시대가 국가 전성기였으니 말 다 했다.
 
 “전성기도 아니지. 미국이 페인트로 도색할 때 인민의 피로 도색하던 나라니까.”
 
 정상국가였던 적이 없다.
 상식이 존재하던 적도 없다.
 그냥 이 나라는 고유의 방식으로 돌아가는 듯하다.
 
 그럼에도 왜 러시아는 망하지 않았는가?
 아, 역사적으로 러시아가 망할 뻔한 적은 많았지. 당장 나폴레옹 때도 그랬고 나치 때도 수도까지 따일 뻔했는데.
 
 그냥 이유는 하나.
 
 바로 체급.
 
 정말 체급 하나로 밀어붙여서 여기까지 왔다. 딱히 무언갈 잘한 게 있는 게 아니다. 장점이 있는 것도 아니다.
 
 넓은 국토와 인구. 즉, 체급. 이 나라는 체급빨로 여기까지 살아남았다.
 
 그리고, 오늘날 현대에서도 또 제 살 깎아 먹기를 시전 중이다.
 
 지금에서야 블로그 구독자들과 함께 히히덕거리며 비웃어 대지만 사실 처음부터 이런 건 아니었다.
 
 문과 출신으로 좋아하던 걸 찾아 사학과에 진학했고 세계를 돌아다니며 과거를 파헤치는 꿈을 꾸기도 했다.
 
 허나 현실의 벽은 너무 높았고 세상은 과거보단 미래를 지향하는 곳이었다.
 
 그래서 나 또한 미래를 보기로 했다. 바로 과거를 통해.
 
 러시아 경제 전문가.
 주식, 채권, 선물, 무엇이든 좋다.
 
 러시아란 나라가 어떤 식으로 반응할지는 내 눈에 너무 뻔히 보이니까.
 
 뭐? 유가가 미쳐 날뛰어? 아, 일단 방관하다가 뒤늦게 생산량 최대로 찍어!
 
 어라, 외교로 문제가 해결 안 되네? 그럼 일단 군대부터 움직여. 국제적인 명분은 뒤늦게 한번 찾아보자고.
 
 무지성 개방했더니 외국자본 수탈이 심상치 않은데···. 그렇다고 국내 자본은 다 썩었고.
 오케이, 한번 뒤엎자. 국내자본은 족치고 공포분위기 조성해서 외국자본 쫓아내고. 리스타트 버튼 온!
 
 공정성? 상식? 그런 건 저 나라에서 160% 투표율 같은 거다. 어차피 결과는 정해졌으니 과정을 끼워맞추는 부품이란 말이다.
 
 이토록 뻔해서 오늘도 앉은 자리에서 돈을 벌었다. 청산된 유가 롱 포지션 수익률 123%.
 
 깜짝 전쟁에 뒤늦게 브렌트유, 두바이유, 텍사스 중질유 생산량이 폭등한다.
 
 “슬슬 새로운 포지션 조금씩 잡아야겠네.”
 
 만약 차근차근 전쟁의 정당성을 펼치며 ‘와, 양쪽이 어쩔 수 없이 전쟁이네.’라는 느낌을 줬다면 이리 궁지에 몰리지 않았을 텐데.
 하다못해 국지전이나 부분전쟁으로 돌려서 우크라이나가 자발적으로 확전하는 느낌을 줬다면 이리 사면초가에 몰리진 않았을 거다.
 
 아니, 애초에 이 전쟁은 그냥 글러먹었다.
 
 독재국가 대통령의 권력욕을 무시한 서방.
 나토의 무리한 동진과 구소련 지역 통합 정책의 충돌.
 
 전부 예견된 사항이었다.
 
 그리고 난 이를 이용해 돈을 벌었다···. 벌었는데.
 
 “···왜 이렇게 웃음이 안 나오지.”
 
 그토록 세상이 미래지향적으로 살라기에 나 또한 그에 편승했는데. 그래서 누가 봐도 박수칠 만한 결과를 만들었는데 왜 기쁘지 않은 걸까.
 
 “내가 다 안타깝다 진짜.”
 
 계속 내 기분이 나쁜 걸 작금의 비극적인 사태가 안타까워서라고 치부해본다.
 
 “예전에는 역사책 하나만 읽어도 하루종일 기분 좋았는데.”
 
 기록으로만 남은 과거.
 활자와 몇 가지 그림이나 삽화만 남은 사건에 대해 파헤칠 때면 마치 내가 그 시대 그 사건 한가운데 있는 기분이었다.
 
 단순히 기록물이 아닌 간접 경험의 수단으로 역사를 대했던 것 같다.
 
 그땐 그랬다. 마냥 인류의 과거가 좋았다.
 
 안타까운 결과에 나 또한 안타까워했고 슬픈 과거에 나 또한 공감했다.
 
 그랬던 내가 지금은···.
 
 <제목: 남의 불행은 뭐다? 내 돈이 ㄷ
 
 쓰던 블로그의 글자가 가만히 깜빡이며 완성되길 기다린다.
 
 아마 이 글이 올라가고 나면 또 한 번 막대한 재산을 불리게 되겠지.
 다른 이들의 반응은 어떨까.
 
 언제나 그랬듯 날 찬양하고 글에 올라온 대상을 욕하고 모두 비웃음을 띄우고 있을 거다.
 
 “···기분이 이상하네.”
 
 전쟁이 끝나면 돈을 벌고, 러시아가 체급으로 다시 일어서면 또 돈을 벌고, 그렇게 러시아가 완전히 재기하면 또 견제받을 테니 돈을 벌고.
 
 돈, 돈, 그놈의 돈은 정말 앞으로 러시아 덕에 무지막지하게 벌 수 있을 텐데 왜 이리 찝찝하지.
 
 이제 와서 기관의 공매도를 비난하는 개미처럼 남의 불행에 간접적인 죄책감이라도 느끼는 걸까?
 
 아니면 뻔히 보이는 불행에도 난 겨우 컴퓨터 앞에 앉아 돈밖에 못 버는 신세가 불행한 걸까.
 
 “그냥 멍청한 꼴을 보니 답답한 거야.”
 
 그런 거다. 장님이 뻔히 돌에 걸려 넘어지는 걸 아는 정상인의 동정. 그런 류의 가벼운 마음이다.
 
 <제목: 남의 불행은 뭐다? 내 돈이 ㄷ
 
 여전히 깜빡거리는 글자. 어째서인지 오늘따라 제목조차 쓰기 싫어지는 포스팅.
 
 백스페이스 키를 연타하며 제목을 전부 지운 난 뭐에라도 홀린 듯 마구잡이로 마음 한켠에 잠들어 있던 생각을 쏟아냈다.
 
 <제목: 과거의 러시아가 조금만 달랐더라면.>
 
 「작금의 러시아 상황이 어디서부터 잘못되었는지는 이제 와서 논평해봤자 무의미한 비판에 불과하겠지만 그래도 한번 지껄여 보려고 한다.
 미합중국에 못지않은 가능성을 가졌음에도 성장하지 못한 이 나라의 삽질은 오래전부터 끊이질 않았다.
 사상에 심취해 내실 없는 제국을 세웠던 소련 때문에 21세기 러시아가 저리 우크라이나 하나 못 먹는다고 보겠지만 난 더 멀리부터 따져보고자 한다.
 
 감히 단언하건대, 이 나라는 제정 시절부터 잘못되었다.」
 
 “···음.”
 
 여기까지 무슨 억하심정이라도 있는 듯 키보드를 두드리던 난 너무나 길어지는 문장과 글에 잠시 멈추었다.
 
 이대로라면 5천7백 자가 아니라 5만7천 자를 써도 공감도, 설득도 못 얻을 가능성이 높다.
 
 그러니 마우스를 움직여 페이지에 쓴 내용을 전부 드래그하고 지워버린 뒤, 난 다시 키보드를 두들겼다.
 
 전과는 다르게, 아주 짧고 가벼운 느낌으로.
 
 <제목: 걍 러시아는 19세기부터 쉬지 않고 말아먹었음.>
 
 「반박시 니 핏줄 슬라브.」
 
 음, 말하고 싶은 내용은 다 담겼다.
 
 딸깍 소리와 함께 업로드를 한다.
 
 언제나 그렇듯 까내리고 비웃겠지만 이보다 간결하게 요약할 자신이 없다.
 
 띠링.
 
 “벌써 댓글이 달렸네.”
 
 └너라고 그 상황에 뭐가 달랐을 것 같아?
 └(글쓴이) ㅎㅇ 이반.
 └장담컨대 너 또한 크게 다르지 않았을 거다. 아니? 오히려 더 심각했을지도 모르지.
 └(글쓴이)타타르의 의견 잘 들었습니다~
 └기어코 선을 넘는구나.
 
 “선 넘기는 무슨. 자기도 러시아 역사가 개판이라는 건 아는 모양이네.”
 
 그러니 나한테 ‘어쩔 수 없었다’ 같은 소리나 하면서 열을 내는 거다.
 
 마지막으로 난 따끔하게 정리해주기로 마음 먹었다.
 
 └(글쓴이)나였으면 달랐음.
 
 어디 혁명 터지는 한가운데 떨어져서 바로 죽는 게 아니라면 진짜 달랐을 거다.
 
 이 말만큼은 수도 없이 러시아 역사를 공부해온 사람으로 자신 있게 할 수 있는 소리다.
 
 왜냐면 이 댓글 단 놈의 말처럼 ‘나였다면···.’을 수백, 수천 번 생각해왔기 때문이다.
 
 끝까지 반박 못 하던 놈은 한참이나 대답이 없었다. 역시 논리 싸움에서 도망쳤나 싶던 순간, 새로운 답글이 달렸다.
 
 └그럼 확인해보자고.
 
 대뜸 확인하자니, 설마 나한테 전략 시뮬레이션 게임 대전이라도 신청하려는 건가. 그게 아니고서 어떻게 확인을 할 건데.
 
 “확인은 얼어죽을 확인-”
 
 딱 거기까지. 혼잣말로 중얼거리던 말은 나의 의지와 상관없이 끊겨버렸다.
 
 그리고 다시 목소리를 낼 만한 힘이 입에서 느껴질 때 즈음.
 내 말보다 먼저 귓가를 때리는 소리가 들려온다.
 
 “대제국을 영위하시는 임페라토르의 적법한 승계자 체사레비치(Tsesarevich), 후계 황태자 전하이신 니콜라이 알렉산드로비치 로마노프 대공이십니다!”
 “귀빈들은 무척 환영하는 바입니다. 저는 천황 폐하의 명을 받고 환대를 맡은 아리쓰가와의 다케히토 친왕입니다.”
 
 이해할 수 없는 말과 함께 고개를 살짝 숙이는 상대.
 
 나보다 연장자 같은데 고개를 숙이니 일단 나도 어떨떨하게 호응하듯 고개를 살짝 숙였다.
 
 그러자 당황하는 눈앞의 동양인.
 허나 그보다 이제야 눈에 들어오는 풍경에 내가 더 당황했다.
 
 “···여긴 어디야.”
 
 파도치는 바다, 항구의 해안가 부두. 옆으로 보이는 거대한 선박.
 
 그리고 눈앞에 머리 하나는 낮은 제복의 동양인들.
 
 러시아어. 일본어. 일제 제복, 그리고 철선. 마지막으로 양측의 자기소개까지. 황태자란 단어와 친왕이란 단어가 귓가에 또렷히 남았다.
 
 “아.”
 
 이거 니콜라이 2세의 황태자시절 동부 여행인데.
 
 연도는 내 기억으로···.
 
 1891년.

작가의 말

안녕하세요, 쿤타세계관입니다.


성실히 연재하겠습니다!

댓글(76)

쿤타세계관    
1등
2024.06.24 17:48
마루다롱    
신작응원합니다!! .. 1등뺏겼어 작가님한테.....
2024.06.24 18:07
쿤타세계관    
좀 더 빨리 오셨어야죠 ㅇㅅㅇ!
2024.06.24 18:11
nizoo    
오쓰사건?
2024.06.24 19:01
th*****    
엣 니콜라이 쿤 일찍 왔네요... 이러다 저, 근왕공산당이 되어요?
2024.06.24 19:02
귀욤둥이    
캬 돌아왔구먼
2024.06.24 19:40
쿤타세계관    
ㅎㅎ 돌아온다고 했죠?
2024.06.24 20:28
권독자    
오늘도 잘보고 갑니다
2024.06.24 19:43
은색의왕    
그....신작 홍보 쪽지 돌리실 거라면, 최소한 작품 제목이랑 링크 정도는 줘야 한다고 생각해요....
2024.06.24 19:56
쿤타세계관    
아앗!!!!
2024.06.24 20:28
0 / 3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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