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낭인무적 1권-1

2015.09.08 조회 2,070 추천 38


 서장
 
 “이봐! 언제까지 그렇게 노려만 볼 건가? 빨리 덤비라고.”
 30대 초반쯤 돼 보이는 흑의인(黑衣人) 한 명이 오연한 자세로 서서 누군가를 향해 외치고 있다. 그런데 그 ‘누군가’는 사람이 아니었다.
 흑의인을 노려보는 두 개의 눈동자! 족히 어린아이 주먹 하나는 될 만한 커다란 눈동자였다. 그런데 왠지 겁먹은 듯한 기색이 역력해 보였다.
 “확실히 영물은 영물이군. 만나는 놈들마다 저렇게 두려움을 느끼니…….”
 잔뜩 겁먹은 듯한 표정으로 흑의인을 바라보는 동물, 그것은 호랑이였다. 백수(百獸)의 제왕으로서 사람들 사이에서 신성시되고 영물이나 다름없게 평가받는 바로 그…….
 흑의인은 호랑이 쪽으로 한 걸음씩 다가갔다. 그의 몸에는 아무런 무기도 없었다.
 크르릉!
 순간, 호랑이는 흠칫하며 눈에서는 더 짙은 두려움의 빛이 드리워졌다. 주술에라도 걸린 것일까? 호랑이는 흑의인이 바로 자신의 앞까지 접근했음에도 불구하고 어떤 행동도 취하지 않았다. 도망을 치지도 공격을 하지도 않았다. 그저 부들부들 떨 뿐이었다. 지금껏, 자신과 마주쳤었던 짐승들이 그랬던 것처럼.
 깡!
 쇠막대로 바위를 힘껏 내리칠 때 나는 소리와 흡사한 음향이 산속에 울려 퍼졌다. 그와 동시에, 기세 좋게 달려들던 호랑이의 몸이 순간 멈춰졌다. 마치 시간이 정지라도 한 듯한 광경이었다.
 잠시 후, 호랑이의 몸은 서서히 땅바닥 위로 힘없이 축 늘어지고 있었다. 호랑이의 이마 부분은 쇠망치에라도 힘껏 맞은 것처럼 함몰된 상태였는데, 두 눈은 여전히 부릅떠져 있었다. 눈조차 못 감고 즉사한 것이었다.
 
 
 제1장 만남
 
 무이산(武夷山). 복건성(福建省) 북부에 있는 험준한 산으로서, 절강성이나 강서성으로 가는 지름길이나 다름없는 곳이었다. 이곳에도 소위 ‘녹림’이라고 불리는 산적들이 존재했다.
 “당주님! 한 1리 밖에서 두 명이 오고 있습니다.”
 손에 도끼를 든 우락부락한 장한(壯漢) 한 명이 헐레벌떡 뛰어와서는 다급한 음성으로 말했다. 산적 주제에 당주라는 호칭이 조금은 어색하게 들릴지도 모르지만, 그들도 분명히 무림인이었다. 그들의 조직이나 명칭이 무림 문파의 그것과 비슷한 것은 어떻게 보면 당연했다.
 “오, 그래? 돈은 좀 있게 생겼나?”
 산채로 원체 유명한 곳이라 인적이 드물기는 하지만 지나는 이가 전혀 없지는 않다. 녹림에 정식으로 소속된 산적들은 사람들을 거의 죽이지 않기 때문이다. 재수 없게 이들과 마주친다 해도 가진 돈 전부를 순순히 내놓으면 큰 해는 면할 수 있다. 우스갯소리로, 수중에 돈이 전혀 없는 사람이라면 오히려 이곳을 당당하게 지나갈 수도 있었다.
 당주란 인물은 대도(大刀)를 허리에 차고 있었는데, 활짝 젖혀진 상의 사이로 보이는 가슴의 털이나 험상궂은 인상이, 누가 봐도 딱 산적임을 알 수 있게 할 정도였다. 소싯적에 중원 무림에서 제법 유명했다며 자랑스럽게 떠들고 다니는 인물이었다.
 “돈은 있게 생겼는데, 문제가…….”
 도끼를 든 장한의 안색이 별로 안 좋아 보였다.
 “무슨 문제인가?”
 “아무래도 무림인 같습니다. 둘 다 검을 착용했습니다.”
 “뭐라고? 그런데 왜 여기까지 뛰어와서 그런 얘기를 하는 것이냐?”
 당주는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수하를 바라보았다.
 상대가 무림인이 확실할 경우, 산적들은 무조건이라고 해도 될 정도로 그냥 못 본 체한다. 혹시라도 ‘엄청난 고수가 아닐까’라는 막연한 두려움이 전혀 없을 수는 없겠지만, 그것이 문제가 아니었다. 산채 내부에서 거의 명령으로서 그런 행위를 금지했기 때문이었다.
 녹림에 속한 산채의 수입은 9할 이상이 표국을 통해서 얻어진다. 산 속에서 만난 행인들의 주머니를 터는 것은 산채의 측면에서 볼 때 별 도움이 안 된다. 이런 상황에서, 쓸데없이 무림인과 시비가 붙어 그 와중에 수하들이 한 명이라도 상한다면, 산채의 측면에서 볼 때, 엄청난 손해였다. 게다가 무림인이 속한 문파와 전혀 쓸데없는 원한 관계가 생길 수도 있었다.
 그런데 몇몇 어리석은 인물들은 산적들의 이런 행태를 보고, 그들이 무림인들을 무조건 두려워한다는 식으로 잘못 알고 녹림을 우습게 보는 경우가 제법 많았다.
 이런 사정을 도끼들 든 수하가 모를 리는 없었다. 그가 여기까지 헐레벌떡 뛰어와 보고한 데는 나름대로 이유가 있었다.
 “저, 그런데… 한 명이 여자인데, 굉장히 예쁩니다.”
 
 “사매! 다시 한 번 생각해 보는 게…….”
 “휴! 사형이 무엇을 걱정하는지는 알겠는데… 더 이상 선택의 여지가 없어요. 그 말고 복건성에서 누가 그들을 상대할 수가 있겠어요?”
 무이산 깊숙한 곳까지 겁도 없이 발을 들여놓은 두 남녀. 소녀라 해도 전혀 의심치 않을 정도의 앳된 용모를 지닌 여인의 말에 남자는 그저 긴 한숨만 내쉴 뿐이었다.
 “그나저나 검을 괜히 착용한 것은 아닌지 모르겠네요. 산적들이 겁을 먹고 우리 앞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다면, 시간이 꽤 걸릴지도 모르겠네요.”
 여인의 말에 남자는 왠지 허탈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아마 조만간 모습을 드러낼 거야. 단지 무림인 같아서 포기하기엔, 너의 미모가 너무 돋보이니…….”
 “사형도, 참 별말씀을…….”
 쑥스러운 듯, 얼굴을 살짝 붉히는 여인의 모습은 정말이지 아름다웠다. 청의경장(靑衣輕裝)을 통해 은근히 드러나는 날씬한 몸매는 둘째 치고, 서글서글한 눈매하며 오뚝한 콧날, 게다가 작고 도톰한 입술까지, 미인으로서 갖추어야 할 것은 다 갖춘 매력적인 여인이었다.
 “잠깐!”
 산속을 한참 걸어가던 중, 뭔가 낌새를 느꼈는지 남자가 갑자기 걸음을 멈추었다.
 여인 역시 잔뜩 긴장된 표정으로 같이 걸음을 멈추고 주위를 살피기 시작했다. 아니나 다를까, 잠시 후 주위에서 10명의 낯선 인물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냥 척 보기에도 산적들로 보이는 인물들이었다.
 “굳이 죽일 생각까지는 없다. 갖은 돈을 순순히 내놓는다면 목숨만은 살려 주겠다.”
 당주라 불린 장한이었다. 그는 도를 꼭 움켜쥔 채, 그들을 노려보며 입을 열었다. 아니, 정확히 말해 그의 시선은 온통 여인에게만 집중되어 있었다.
 ‘으! 정말이지, 내 저런 미인은… 옆에 있는 놈의 기도가 만만치 않기는 하지만…….’
 아무리 탐나는 물건(?)이 있다 해도, 무림인으로 보이는 인물 앞에서 함부로 출수할 수는 없었다. 일단 돈을 내놓으라고 했으니 상대방도 어떤 행동을 취할 것이다. 그걸 봐서 별것 아니다 싶으면 원래 목적을 달성할 수 있겠고, 아니라면 일이 좀 복잡해질 수도 있었다. 그러나 만약의 상황들을 고려해 미리 포기하기에는, 눈앞에 보이는 여인이 너무나 예뻤다.
 “아, 그 전에…….”
 상대가 어떤 반응을 보이기도 전에, 다시 무이산채의 당주가 입을 열었다.
 “뭐 하는 놈들이기에 여기까지 왔나? 설마, 길을 잃은 것은 아닐 테고.”
 제일 중요한 문제였다. 10명의 인원으로 충분히 이길 수 있는 상대인지 아닌지도 중요했지만, 상대가 속한 문파도 그에 못지않게 중요했던 것이다.
 1남 1녀 중, 남자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상대가 왜 그런 질문을 하는지 알겠다는 투였다.
 “우리는 월영문(月榮門)에서 왔다. 나는 그곳 문주이신 월야검객(月夜劍客) 유협 님의 제자고, 여기 있는 여인은 그분의 따님이시다.”
 순간 당주의 안색이 미묘하게 변했다. 월영문이라면 익히 아는 문파였다. 게다가 그곳의 문주인 유협을 모르는 무림인은 최소한 복건성 내에는 없었다. 그는 복건성에서 다섯 손가락으로 꼽힐 정도의 고수였다. 그렇다면 당연히 길을 터주는 것이 상식이겠는데.
 “오! 그러신가? 그렇다면 그대가 한때나마, 강북(江北)―복건성을 관통하는 민강(閩江)을 경계로 그 이북 지역을 지칭―제일의 후기지수라 불리었던 왕덕진이란 분이시고 그 옆에 계신 분은 강북 제일미라는 유세희 낭자겠군. 그런데 이렇게 먼 곳까지 어인 행차신가?”
 당주는 특히 ‘한때나마’라는 부분에서 힘을 잔뜩 실어 말했다. 그의 음성에는 전체적으로 조롱하는 느낌이 역력했다. 또한, 상대가 ‘제일의’ 후기지수라는 평가를 받은 것도 아니었다.
 ‘허어! 일개 산적들에게까지 이제 본문이 업신여김을 당하는가?’
 5년 전, 불과 5년 전만 해도, 사부의 존함 세 글자에 무릎이라도 꿇고 용서를 빌었으리라. 아니, 예까지 와서 이런 수모를 당할 이유도 없었을 것이다.
 5년 전, 무림 역사상 가장 치열했다는 마교와의 정사대전! 그 와중에 사부는 한 팔을 잃은 채, 영원히 무공을 쓰지 못하는 몸이 되었다. 그 후 5년이 지난 지금, 일개 산적에게조차 머리를 숙여 도움을 청해야 할 신세로 몰락한 것이다.
 “혈쾌검을 만나러 왔다.”
 순간, 상대를 향해 서서히 접근하던 당주의 동작이 멈칫했다.
 “그, 그분과… 아시는 사이요?”
 말투도 확 바뀌었고, 당주의 눈에서는 두려움까지 실려 있었다.
 ‘소문으로만 들어서 혹시나 했는데… 다행이군!’
 왕덕진이 내심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뭐라고 말을 꺼내려는데, 옆에 있던 유세희가 먼저 입을 열었다. 그런데 그것이 실수였다.
 “아는 사이는 아니지만, 그분을 꼭 만나야 해요.”
 ‘이런?’
 왕덕진의 안색이 바로 굳어졌는데 아니나 다를까, 당주의 표정도 변하고 있었다.
 “응? 아는 사이가 아니라고? 난 또… 흐흐! 그분은 워낙 바쁘셔서 아무나 만날 수가 없소이다, 유 소저.”
 음흉한 미소와 함께 당주는 다시 서서히 그들에게 접근하기 시작했다. 그와 동시에 나머지 산적들도 그 거리를 좁혀 오기 시작했다. 그들의 눈빛은 탐욕에 이글거리고 있었다.
 “사매! 내 옆에 꼭 붙어라!”
 “아!”
 왕덕진의 다급한 음성과 함께, 그제야 그녀도 자신의 실책을 깨닫는 표정이었다.
 챙!
 왕덕진이 먼저 검을 뽑았고, 뒤이어 유세희도 따라 검을 뽑았다.
 “우리는 당신들과 싸우러 온 것이 아니다! 혈쾌검 그분을 만나러 왔다. 자신을 찾아온 손님을 이렇게 대했다는 것을 알면 그분이 좋아하겠는가?”
 왕덕진의 말에 당주는 잠시 동요하는 듯했으나 바로 원래의 안색으로 돌아왔다.
 “흐흐! 그거야 진짜 손님일 때 얘기고… 게다가 죽은 자는 말이 없지 않겠나?”
 10명의 산적들이 서서히 포위망을 좁혀 오고 있었다.
 왕덕진의 이마에는 식은땀이 흐르기 시작했다. 저들의 의도는 뻔했다. 자신을 죽이고 유세희를 취하려는 것이 틀림없었다. 자신 혼자라면 최소한 죽지 않고 도주할 자신은 있다. 이기는 것도 충분히 가능했다. 그러나 유세희란 존재가 걸림돌이었다. 그에게 있어 그녀는 죽더라도 지켜야 할 여인이었다.
 산적들의 포위망이 점점 좁혀질수록, 왕덕진의 이마에서 흐르는 땀방울은 더욱 굵어졌다.
 ‘녹림 18채에 못지않다고 하더니, 과연 그렇구나!’
 무이산채가 18채 중에 못 들은 이유는 그 가진바 힘이 약해서가 아니었다. 복건이라는 외진 곳에 있다 보니, 그 수입이 중원의 요지에 근거를 둔 18채에 비해 적었기 때문이었다.
 왕덕진은 제법 고수란 소리를 듣는 인물이지만, 상대의 기세도 결코 만만찮았다. 특히 무리의 수장으로 보이는 자의 기세는 일 대 일로 싸우더라도 결코 확신까지는 할 수 없는 상대였다. 게다가 어느 정도 무공을 익혔다 싶은 수하들까지 합세할 것이 틀림없었다. 특히 무공이 약한 유세희를 돌보며 싸워야 하는 것이 가장 문제였다.
 『사매! 기회를 봐서 도망가거라. 너만 없으면 나는 충분히 이들을 상대할 수가 있으니.』
 『알았어요, 사형.』
 당주는 둘이서 전음으로 뭔가를 주고받고 있음을 눈치챘다.
 “이봐! 저 계집을 특히 신경 쓰도록 해라! 아무래도 눈치가 도망가려는 분위기다.”
 “걱정 마십시오, 당주님.”
 ‘이런, 제기랄!’
 포위망은 서서히 좁혀 오고 있었고… 순간.
 “타앗!”
 왕덕진을 향해 도끼가 날아들었다. 왕덕진은 급히 검을 들어 그것을 막았다.
 깡!
 “윽!”
 도끼와 검이 부딪쳤는데, 도끼를 휘두른 사나이는 손목에 엄청난 충격을 느끼며 몸이 휘청거렸다. 그 틈을 이용해 왕덕진의 검이 다시 상대를 향해 날아들었는데, 옆에서 누군가의 검이 날아들었다. 왕덕진은 그것을 살짝 피하고 검을 휘두른 상대를 향해 일검을 날렸다.
 “크흑!”
 상대는 어깨 부근에 피를 흘리며 뒤로 나동그라졌다. 그러나 적들의 공세는 더욱 거세졌다. 이번에는 3명의 산적이 동시에 그를 향해 공격을 해오고 있었다. 마구잡이 합공이 아니었다. 그들은 품(品)자의 형태를 취하며 왕덕진의 앞뒤 세 방향에서 동시에 공격하고 있었다.
 산적들의 공세는 그의 예상을 훨씬 뛰어넘는 수준이었다. 그는 재빨리 몸을 움직여 앞쪽에서 공격을 해오는 상대에게 일 검을 날렸다. 왕덕진의 반격을 받은 산적 한 명이 검을 쥔 손목에서 엄청난 통증을 느끼며 뒤로 비틀거렸다. 자신의 등 뒤와 오른쪽에서 거의 동시에 날아오는 검과 도를 피해야 했던 터라 재차 공격할 여유도 없었다.
 ‘위험하다.’
 왕덕진은 황급히 그 공세에서 벗어났다. 순식간에 1장(약 3M) 가까이 몸을 날린 왕덕진은 바로 몸을 추스르고, 계속해서 이어질 적들의 공세에 대비했는데…….
 “꺄악!”
 갑자기 울려 퍼지는 비명 소리!
 ‘이런!’
 왕덕진이 급히 고개를 돌려 바라보니…….
 “크크! 더 할 텐가?”
 어느새, 유세희가 당주에게 제압되어 그의 품에 안기다시피 축 늘어져 있었다. 그새 이미 혈도가 몇 군데 짚인 것 같았다. 그녀는 검은 바닥에 처량하게 뒹굴고 있었다.
 예상을 훨씬 뛰어넘는 적들의 공세에 정신이 팔려 유세희와의 거리를 염두에 두지 못했던 결과였다. 당주는 수하들과 왕덕진이 대결하는 틈을 노려 왕덕진이 눈치 못 채게 유세희에게 접근을 했던 것이다.
 “아아, 사형! 저는 신경 쓰지… 헉!”
 유세희는 더 이상 말을 할 수가 없었다. 당주가 더 이상 말을 할 수 없도록 그녀의 아혈을 짚은 것이다. 그녀는 그저 안타까운 눈으로 자신의 사형을 바라볼 뿐이었다.
 “그녀를 놔주지 못할까!”
 왕덕진의 분노 섞인 일갈이 터져 나왔지만, 당주는 전혀 개의치 않았다. 그 순간, 산적 한 명이 왕덕진에게 접근하려다 그와 눈이 마주치자 흠칫하며 다시 뒤로 물러섰다. 상대의 실력은 충분히 알았던 것이다.
 “검을 버리지 않으면, 이 계집을 죽이겠다!”
 당주가 유세희의 목에 도를 들이댔다.
 “이…!”
 왕덕진은 그런 당주를 정말이지 죽일 듯이 노려보았지만, 어떤 행동도 할 수 없었다.
 “지금부터 열을 세겠다. 그때까지도 검을 버리지 않는다면, 이 계집의 목숨은 끝이다. 하나, 둘…….”
 정말로 검을 버리고 상대의 처분에 맡길 수는 없었다.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상대는 절대로 자신의 사매를 죽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자신이 내키는 대로 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그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그저 온몸에 식은땀을 흘리며 당주를 노려볼 뿐이었다. 그러는 동안, 당주의 음성은 계속 들렸다.
 “여섯, 일곱, 여덟, 아홉.”
 막 열을 헤아리려는 순간, 갑자기 들려오는 목소리!
 “이봐! 길 좀 비켜 주겠나?”
 왕덕진과 당주의 옆 방향, 정확히 말해 당주의 오른쪽으로 2장 정도 떨어진 숲에서 누군가 불쑥 튀어나오더니 내뱉은 말이었다. 당연히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났고 숲에서 나와 몇 걸음 움직인 상태였지만, 왕덕진이나 산적들이나 서로에게 신경을 쓰느라 전혀 몰랐었다.
 길을 비켜 달라고 하는 사나이!
 위아래 온통 흑의를 입고 있었다. 키가 상당히 크고 호리호리한 몸매였다. 나이는 30대 초반이나 되었을까? 그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가 들고 있는 물건이 시선을 확 끌었다. 어떤 동물의 꼬리를 오른손으로 잡고 질질 끌며 오고 있었다. 그 동물이 문제였다. 호랑이였다. 백수의 왕이라는 호랑이.
 ‘저자는 뭔가?’
 왕덕진은 그 긴박한 순간에도 본능적으로 느껴지는 황당한 감정은 어쩔 수 없었다. 호랑이를 끌고 오는 것도 상당히 놀랄 일이었지만, 그거야 ‘사냥꾼이구나’ 하며 넘어갈 수도 있는 문제다. 그러나 지금 상황이 어떤 상황인가? 10명이 넘는 인물들이 병장기를 꺼내 들고 서로 대치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런 무리들을 향해 길을 비키라니! 정신이 어떻게 된 인물인가?
 그런데 그보다 더 황당한 장면이 바로 눈앞에서 펼쳐지고 있었다.
 정말… 비켜 주고 있었다. ‘이런 미친놈!’ 운운하며 단칼에 목을 베어도 뭐랄 사람이 없을 것 같은 분위긴데, 산적들은 군말 없이 길을 비켜주고 있었던 것이다.
 산적들은 당황한 표정으로 급하게 뒤로 물러섰고, 당주 역시 유세희를 끌어안은 채 황급히 물러서고 있었다. 오직 왕덕진만이 그의 길을 막은 형국이었다. 그는 걸어오는 흑의인을 그저 멍하니 바라볼 뿐이었다.
 “나한테… 무슨 용무라도 있나?”
 흑의인은 왕덕진을 향해 ‘왜 안 비키고 내 앞길을 막느냐?’는 눈빛을 보냈다.
 “에? 아, 아니오.”
 왕덕진은 그제야 정신을 차린 듯, 황급히 뒤로 물러섰다.
 유유히 호랑이를 질질 끌며 길을 통과하던 흑의인이 갑자기 뭔가 생각이라도 난 듯, 걸음을 멈추었다. 그리고 그는 당주를 향해 입을 열었다.
 “아, 뭐 하나 부탁 좀 해도 될까?”
 “헉, 마… 말해 보게. 천호(天虎).”
 당주의 얼굴에는 당황하는 빛이 역력했다. 흑의인은 호랑이를 가리키며 입을 열었다.
 “어제 내가 술이 과했는지, 좀 피곤해서 그런데… 어차피 이놈은 자네들 있는 곳으로 가져가려던 참이야. 그러니 누가 좀 도와줬으면 하는데, 안 되겠나?”
 “안 될 리가 있나? 이봐, 뭐하나? 천호가 힘들다고 하지 않나?”
 “예! 당주님.”
 갑자기 산적 5명이 우루루 몰려오더니 호랑이를 흑의인의 손에서 받아들었다.
 “죄송합니다. 진즉에 저희가 들었어야 했는데, 정신이 없어서…….”
 4명이 각자 호랑이의 사지를 잡았고 한 명이 가운데에서 호랑이의 몸을 떠받드는 형국이었다. 왕덕진은 그 광경을 넋 나간 사람처럼 멍한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도대체…? 일개 사냥꾼에 불과한 인물 같은데, 저렇게 쩔쩔매는 모습이라니…….’
 “응? 그런데…….”
 흑의인은 묘한 눈길로 당주를 응시했다. 아니, 당주의 손에 축 늘어진 채로 있는 유세희를 응시하는 것 같았다.
 “자네들, 여자 장사도 하나?”
 순간 당주의 얼굴이 사색이 되었다.
 “헉! 아, 아니야. 영업 중인데… 저, 저자가 말을 잘 안 들어서…….”
 그는 왕덕진을 가리키며 대답을 하는데, 그의 얼굴에는 식은땀이 조금 흐르고 있었다.
 흑의인은 이번에는 왕덕진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이봐! 그냥 있는 돈 줘 버려. 이 친구들도 먹고살아야 하지 않겠나? 돈 몇 푼에 쓸데없이 목숨 걸고 그러나?”
 원래 멍한 표정의 왕덕진이었는데, 그를 더욱 멍하게 하기에 충분한 내용이었다. 흑의인은 상대의 대답 따위는 필요 없다는 듯, 바로 몸을 휙 돌려 근처에 있던 바위에 턱 걸터앉는다. 그리고 다시 당주를 향해 입을 열었다.
 “기다리기 지루하니, 영업 빨리 끝내게.”
 “아! 그, 그래야…….”
 당주는 어떻게 해야 할지 갈피를 못 잡는 것 같았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왕덕진의 뇌리에 뭔가가 떠올랐다.
 ‘왠지, 이자에게 말을 하면 될 것 같다.’
 “우리는 단순히 이곳을 지나는 행인이 아니오. 무이산채에 용무가 있는 사람들이오. 그런데 저자가…….”
 “우하하!”
 왕덕진의 말을 가로막는 당주의 광소! 왕덕진은 물론이고, 주위에 있던 산적들까지 어리둥절한 모습이었다.
 “이런, 이런! 그런 오해가 있었군. 하하! 진작 말을 하시지. 난 또 그것도 모르고…….”
 왕덕진은 계속 어리둥절한 표정이었는데, 이때쯤 산적들은 뭔가 알겠다는 표정이었다.
 ‘아니, 저자가 갑자기 무슨 속셈으로?’
 도무지 영문을 몰라 하며 다시 뭐라 말을 하려는 순간, 왕덕진의 귀에 당주의 전음이 들려왔다.
 『부채주님을 만나게 해줄 테니, 얌전히 있어라! 만약 쓸데없는 말을 지껄이면 이 여인을 죽이겠다!』
 내용과는 달리, 당주의 눈빛은 뭔가 두려움에 떤다는 것을 확실히 느낄 수 있었다. 잠시 뭔가 생각에 잠기는 듯한 표정을 보이던 왕덕진은 천천히 당주를 향해 입을 열었다.
 “오해가 있었다니… 이제 그만 사매의 혈도를 풀어 주시겠소?”
 “아, 이런! 그래야지.”
 당주가 유세희의 몸을 몇 군데 두드리는 것 같더니 잠시 후, 유세희는 ‘후!’ 하는 깊은 한숨 소리와 함께 몸을 움직일 수 있었다. 그녀는 재빨리 왕덕진의 곁으로 몸을 움직였다.
 “고마워요, 정말.”
 당연히 흑의인을 향해 하는 소리일 텐데, 흑의인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좌우를 두리번거리는 동작을 취한다.
 “나에게 하는 소린가?”
 “예? 아, 그래요.”
 “뭐가 고맙다는 것이지?”
 “예?”
 “난 너에게 그런 말을 들을 행동을 한 적이 없는데?”
 “아, 그게…….”
 유세희가 생각해 보니, 정말로 흑의인이 자신들을 위해 한 행동은 아무것도 없었다. 도무지 이해가 되지는 않지만, 산적들의 태도가 갑자기 돌변한 것뿐이었다. 그 이유가 흑의인 때문이란 것은 확신할 수 있었지만.
 ‘참 무뚝뚝하고 퉁명스러운 사람이구나. 굳이 저런 식으로 말할 것까지야…….’
 
 “혹시, 무림인이십니까? 저는 월영문의 문주이신 유협 님의 제자인 왕덕진이라고 합니다. 옆은 그분의 따님입니다. 이름은 세희라고 합니다.”
 무이산채로 가는 도중이었다. 당주가 앞장을 섰고, 그 뒤로 5명의 산적들이 끙끙대며 호랑이를 들고 갔다. 그리고 제일 후미에 흑의인이 뒤따랐다. 당연히 왕덕진과 유세희는 흑의인과 걸음을 같이 했다.
 아무런 말도 없이 그냥 걷기가 상당히 답답했는지, 왕덕진이 흑의인을 향해 입을 열었다. 우선 상대에 대한 강렬한 호기심이 가장 큰 이유였지만 그저 통성명이나 하자는 의도에서였다.
 ‘…?’
 갑자기 흑의인이 걸음을 멈추었다. 그리고는 우뚝 그 자리에 선 채, 한 발자국도 안 움직이고 있었다.
 “무슨 일이신지…?”
 흑의인은 왕덕진의 질문에는 일언반구 대꾸도 없이 서서히 몸을 돌려 유세희를 묘한 눈길로 응시했다.
 ‘헉!’
 순간, 유세희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으며 거의 충격에 가까운 감정을 느낀다. 상대의 눈빛이 무섭거나 한 것은 절대 아니었다. 어떤 강렬한 슬픔을 담고 있었던 것이다.
 ‘도대체… 너무나도 깊어 보이는 저런 회한(悔恨)의 눈빛이라니…….’
 “네 이름이… 뭐라고?”
 “예? 저 세, 세희. 유… 세희예요.”
 “세희, 세희라고? 흐흐, 세희라? 세희…….”
 마치 미치기라도 한 사람처럼 혼자 중얼거리던 흑의인은 뜻 모를 광소를 터뜨리며 다시 발걸음을 재촉했다.
 “하하하! 앞으로 술을 좀 줄이려 했는데, 오늘 밤새 술 마실 이유가 생겨났군.”
 왕덕진이나 유세희는 그저 멍한 눈으로 흑의인의 뒷모습을 바라볼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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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누나는 생일 선물로 뭘 사 달라고 할 거야? 나는 옷하고 신발을 사 달라고 할 건데.”
 “글쎄, 누나는 아버지 오시면 그때 생각해 볼래.”
 마을하고 조금 떨어진 외진 곳에 있는 장원. 그 대문 앞에서 남자아이와 여자아이가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여자아이의 나이는 열두 살이었는데, 그 예쁘장한 용모 하며 몸매에서 제법 여인의 태가 나는 귀여운 소녀였다. 두 아이는 공교롭게도 태어난 날이 같았는데 며칠 후면 그 날이었다.
 이들의 아비는 무림인으로서 소녀가 태어나자마자 외지로 떠나 일을 하고 있었는데, 아이들의 생일이면 어김없이 집에 들렀기에, 혹시라도 아비가 오지 않을까 하는 심정에서 두 남매는 며칠 전부터 매일 대문 앞에 쪼그려 앉아 기다리고 있었다.
 “어? 누나 저기…….”
 동생이 가리킨 쪽으로 고개를 돌린 소녀는 제법 놀라운 광경에 그 귀여운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는 감탄사를 연발했다.
 “어머, 세상에! 저 말들 좀 봐.”
 말 한 마리의 가격이 워낙 비쌌기에, 말을 타고 다니는 일반인을 보기란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런데 저 멀리에서 보이는 말의 무리는 30마리는 족히 되어 보였으니, 소녀에게는 아주 신기한 장면이었다. 게다가 말 위에 탄 인물들이 하나같이 모두 검은색 옷을 입고 있었으니, 그 모습은 일대 장관이나 다름없었다.
 그런데 소녀를 더욱 놀라게 하는 것이 있었다.
 “어머, 이쪽으로 오네?”
 처음에는 설마 하는 심정이었는데, 그들 일행은 정말로 남매가 사는 장원으로 오고 있었다.
 “너희는 이곳에 살고 있니?”
 일행 중 선두에 있던 한 청년이 소녀를 향해 물었다. 일행은 대부분 병장기를 휴대하고 있었고 몇 명은 부상을 당했는지 붕대를 감고 있었다.
 동생은 겁먹은 표정을 한 채 소녀의 등 뒤로 얼른 숨었지만, 소녀는 의연하게 대답했다.
 “예, 저희 집이에요. 그런데 왜 그러시죠?”
 소녀는 무림에 대해 잘 알지는 못했어도 상식이랄 수 있는 정도의 지식은 가지고 있었다. 지금 무림은 좋은 사람들이 지배하고 있고, 최소한 ‘사천 당문’이 코앞에 있는 이곳에는 사람을 마구 해치는 나쁜 무림인들이 존재할 수 없다는 정도. 물론 그 유명한 ‘사천 당문’이 바로 하루 전, 완전히 멸문당했다는 것을 소녀로서는 알 도리가 없었다.
 전혀 두려움 없이 두 눈을 똑바로 쳐다보며 또박또박 대꾸하는 소녀의 모습이 조금은 의외였을까? 청년은 약간 묘한 눈빛을 보이더니 다시 입을 열었다.
 “집이 제법 큰데, 살고 있는 식구가 많니?”
 “아니요. 할아버지, 할머니, 그리고 어머니까지 모두 다섯 식구예요.”
 1년이면, 집에 묵는 날이 보름도 채 안 되는 아비였으니, 소녀가 생각하기에 ‘살고 있는’ 식구라 보기는 어려웠다.
 “그러니? 어른 한 분만 모셔 오겠니?”
 잠시 후, 밖으로 나온 소녀의 할아버지는 청년이 아닌 웬 중년인과 이야기를 나누었다. 부상자의 치료를 위해 며칠 묵었으면 하는 내용이었다. 처음에는 난색을 표하던 소녀의 할아버지는 선불로 숙식비에 해당되는 돈을 지급하겠다는 말에 바로 태도를 바꾸었다.
 “참, 네 이름이 뭐니?”
 장원 안으로 들어가려다 말고 갑자기 처음 소녀에게 말을 건넨 청년이 소녀를 바라보며 질문을 던졌다. 처음과는 달리 부드러운 눈빛에 입가에는 옅은 미소까지 비치고 있었다.
 “예? 아…….”
 소녀는 얼굴에 홍조를 띠며 바로 대답을 못하고 있었다. 상대에 대한 부끄럼이 아니었다. 청년이 소녀에게 말을 건네기 위해 몸을 멈추었는데, 그 순간 일행 모두가 청년을 따라 동작을 멈추었던 것이다. 그에 따라 자연스럽게 그들의 모든 시선이 소녀에게 모두 쏠리고 있었다.
 소녀는 30명의 시선을 차마 감당하지 못하고 얼굴을 붉히며 간신히 대답했다.
 “세희… 라고 불러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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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를 찾은 이유가 궁금하군.”
 호피로 둘러싸인 커다란 의자에 몸을 푹 기댄 채, 상당히 거만을 떠는 40대의 중년인! 그러나 실제로는 60을 바라보는 나이였다. 그의 내공이 얼마나 대단한지를 보여주는 대목이었다. 그는 이곳 무이산채에 있는 3명의 부채주들 중 한 명이었는데, 원래부터 그랬는지는 모르겠지만, 한쪽 눈에 커다란 안대를 착용하고 있었다.
 그의 앞에는 유세희와 왕덕진이 서 있었다. 왕덕진은 상대에 대한 놀라움과 함께 어떤 의혹을 느꼈다.
 ‘과연, 대단한 기도구나! 나 따위는… 혈쾌검의 이름이 역시 허명이 아니었군. 그런데 그가 독안(獨眼)이라는 소리는 못 들었는데…?’
 혈쾌검(血快劍)!
 불과 5년 전만 해도, 그의 이름은 절강 무림에서는 공포 그 자체였다. 별호에서 보듯이 그의 쾌검은 천하를 통틀어도 가히 일절(一絶)이라 불릴 정도로 대단한 것이었다. 그 손속이 워낙 잔인해 비무를 벌인 상대들 중 살아남은 이는 거의 없을 정도였다. 또한 색을 밝히는 것으로도 꽤나 유명했었다.
 마교가 천하를 지배하던 당시, 그는 마교에 대항하지 않고 협력함으로써 마교 절강지부의 부지부장 중의 한 명으로 임명되어 막강한 위세를 누릴 수 있었다.
 그러나 5년 전, 마교가 무림맹이 주도하는 정도 무림에 의해 중원에서 쫓겨난 후, 그 행방이 묘연했었다. 그러다 6개월 전 그 모습을 드러냈다가 무림맹 소속 문파의 무인들과 시비가 붙었는데, 그 와중에 수십 명의 무인들을 살해하는 일이 벌어졌다. 그 후, 무림맹에 의해 쫓기다가 이곳에 몸을 의탁한 것이다.
 녹림이야말로 무림에서는 가장 안전한 곳이라 할 수 있었다. 현(現) 무림을 주도하는 무림맹의 힘이 미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것은 녹림의 힘이 강하다기보다는 무림맹의 힘이 약하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5년 전, 마교를 중원에서 몰아내면서 정도 무림에서 치른 희생은 실로 막대했다. 최소한 수십 년은 지나야 다시 예전의 힘을 되찾지 않을까 생각될 정도로 엄청난 피해를 입었던 것이다.
 “도움을 청하러 왔어요.”
 유세희의 말에 혈쾌검은 계속해서 거만한 말투로 대꾸를 한다.
 “호, 도움이라? 그리 쉬운 일은 아닌 것 같은데…….”
 “부채주님의 능력이라면 충분한 일이에요. 그 대가는 충분히…….”
 “아, 잠깐!”
 혈쾌검은 그녀의 말을 도중에 끊더니 묘한 눈길로 왕덕진을 바라보았다.
 “자네는 좀 나가 있었으면 하는군.”
 왕덕진은 움찔하며 뭐라고 하려 했지만, 유세희가 만류하고 있었다.
 “사형! 그렇게 하세요.”
 왕덕진은 어쩔 수 없다는 표정으로 밖으로 나갔다.
 “흠, 이제야 좀 분위기가 부드러워지는군. 아, 자리에 앉지.”
 상대의 어울리지 않는 친절! 그것이 무엇을 뜻하는지 유세희는 확실히 알 수 있었다. 자신을 바라보는 저 눈빛이 무엇을 뜻하는지 너무나 잘 알았던 것이다. 그녀가 철이 들면서부터 정말이지 질리게 봐왔던 사내들의 눈빛이었다.
 “어디 한번, 그 부탁이란 것을 들어볼까?”
 “저희 월영문을 대표해서 비무를 해주시면 됩니다.”
 “비무?”
 “본문과 천형방 간에 분쟁이 생겼는데, 비무를 통해서 모든 것을 결정짓기로 합의를 봤어요.”
 혈쾌검은 대충은 알겠다는 표정이었다.
 “음, 원래부터 천형방 놈들이 월영문을 호시탐탐하고 있었지. 월영문의 위치가 좀 좋나? 예전에는 네 아비 때문에 엄두도 못 내다가 지금에야 그 행동에 돌입하는군. 이것도 좀 늦은 감이 있군. 하긴, 정사대전 직후에는 그래도 좀 힘이 있었지, 아마? 그 후, 쓸 만한 인물들이 하나둘 떠나고… 지금은 남아 있는 문도들도 별로 없으니…….”
 “쓸데없는 소리 말고, 제 부탁을 들어줄 건지 아닌지를 말해 주세요.”
 상대의 말이 상당히 듣기 싫었는지, 그녀의 안색은 꽤나 굳어졌다.
 “하하! 이런, 급하기는. 그거야… 가만, 그런데?”
 혈쾌검은 뭔가 이상하다는 표정을 짓는다.
 “비무로써 분쟁을 해결한다? 이상하군. 이해가 안 돼. 천형방의 힘이라면, 월영문을 어떻게 하는 것은 너무나 쉬운 일일 텐데, 비무라? 문파 전체의 힘에서야 비교도 안 되겠지만, 고수급의 인물은 천형방에도 거의 없지 않나? 무공은 정말로 별 볼 일 없는 것들인데… 그들에게는 일종의 모험일 수도 있는 일 아닌가?”
 “거기에는… 이유가 있어요.”
 그런데 그녀의 얼굴은 갑자기 홍조를 띠기 시작했다.
 ‘…?’
 “우리가 이길 경우, 천형방에서는 향후 20년간, 우리 구역을 못 넘어오게 돼 있는데… 우리가 질 경우, 우리는 상대에게 합병이 돼요. 그런데… 다른 조건이 하나 더 있어요.”
 “다른 조건?”
 “저하고 천형방의 소방주하고… 결혼하는 거예요.”
 “결혼?”
 잠시 놀란 표정을 짓던 혈쾌검이 광소를 터뜨렸다.
 “우하하! 그 소방주란 놈이 네 미모에 눈이 돌아갔나 보군. 하긴, 우격다짐으로 월영문을 피로 물들였다가는 너를 취할 수가 없겠지. 최소한 복건 무림의 모든 이목이 쏠릴 텐데, 강제로 취하기도 난감하겠고 말이야. 하하하!”
 잠시 후, 웃음을 그친 혈쾌검이 그녀를 향해 입을 열었는데, 왠지 상당히 끈적거리는 느낌의 음성이었다.
 “너 같은 미인을 그런 놈에게 줄 수야 없겠지. 흐흐!”
 그의 눈길을 받는 순간, 유세희는 수치심에 얼굴을 붉히며 몸을 떨었다.
 ‘참아라, 유세희! 이깟 몸뚱이 뭐가 대수야? 상대는 색을 밝히는 것으로 유명한 인간인데… 어차피, 각오한 것을…….’
 “허락한 것으로 생각해도 되겠지요?”
 “하하! 물론이지. 자, 그럼, 내가 너의 부탁을 들어주는 것에 대한 대가에 관해 이야기를 나누어 볼까?”
 “그 전에… 비무할 상대에 관해 알고 싶지 않나요?”
 “하하! 천형방의 방주라 해도 내 상대가… 응?”
 갑자기 뭔가 느껴지기라도 한 듯, 혈쾌검이 말을 하다 말고 뭔가 생각에 잠긴다.
 ‘가만? 월영문의 입장에서 나는 외부에서 초빙한 고수가 아닌가? 그렇다면?’
 “혹시, 천형방에서도 외부에서 고수를 초빙하나?”
 “맞아요. 남북쌍괴라고 들어보셨나요?”
 “뭐라고? 남북… 쌍괴?”
 처음으로 혈쾌검의 안색이 굳어졌다. 속으로 ‘이 지역에서 그놈들만 아니면 누구라도 상관없다’라는 생각을 갖고 있던 그였다.
 굳은 안색으로 뭔가 고민하는 혈쾌검의 귀에 계속해서 유세희의 음성이 들려왔다.
 “각 문파에서 서로 3명까지 고수를 내보낼 수가 있어요. 3명 중에서 2명이 이긴 문파가 승리하는 것이 아니라 한 명이 계속해서 싸울 수가 있어요. 그러니까 확실한 고수 한 명만 있으면 이번 비무에서 승리를 할 수가 있다는 소리예요.”
 “그런데 상대는 2명뿐인가?”
 “그래요. 아마 그 둘이면 충분하다는 생각을 하는 것 같아요.”
 “하긴, 충분히 그렇게 생각하고도 남겠지. 그 둘이라면… 허, 이거 참.”
 “설마, 자신이 없다는 뜻인가요?”
 순간, 혈쾌검의 한쪽 눈이 번뜩이며 유세희를 처음으로 무서운 눈으로 노려보았다.
 “내가 그따위 놈들을 두려워할 놈으로 보이나?”
 유세희는 자신도 모르게 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 그런데 왜 그렇게 망설이는…….”
 “하나라면 확실하게 자신이 있는데, 둘이니까 문제지. 설마 밖에 있는 저 허약한 놈이 나머지 하나를 상대하지는 않을 것 아닌가?”
 “둘을 한꺼번에 상대하는 게 아니에요. 한 명씩 상대하면 돼요. 서로 원한다면 승자가 바로 다음 상대와 비무를 하지만, 그렇지 않을 경우 다음 날로 비무를 미룰 수가 있어요.”
 “이런 답답하기는, 내가 무슨 천하제일 고수라도 되는 줄 아나?”
 “예? 무슨…?”
 “그 정도 고수와 한 번 싸움을 벌인 후의 내공 소모가 얼마나 심한 줄 알기나 해?”
 “…….”
 “최상의 몸 상태라면 자신이 있지만, 한 번 힘을 뺀 다음 날의 싸움까지는 확신할 수 없단 말이야. 더군다나 내가 첫 번째 싸움에서 전혀 부상을 안 당한다는 보장도 없고.”
 “아! 제발 부탁드려요. 만약 저희 가문을 무사히 지켜만 주신다면, 뭐든지 하시란 대로 다 하겠습니다.”
 상당히 난색을 표하는 혈쾌검을 향해 유세희가 간절하게 애원하고 있었다. 그녀의 눈망울에서는 금방이라도 눈물이 떨어질 것만 같았다. 복건성 최고의 미인이라고까지 불리는 유세희의 간절한 눈빛! 사내라면 도저히 거부할 수 없는 마력까지 풍기는 듯했다.
 애틋하게까지 보이는 그녀의 눈망울을 혈쾌검은 그저 멍한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그는 자신도 모르게 마른침까지 꿀꺽 삼키고 있었다.
 “원하는 것은 뭐든지 들어준다고?”
 “그, 그래요. 가문만 지켜 주신다면…….”
 끈적끈적하다 못해 아예 뜨겁기까지 한 사내의 눈빛. 그녀는 얼굴을 붉히며 차마 상대의 얼굴도 똑바로 보지 못하고 있었다.
 “유 소저! 잠깐 자리에서 일어나 보겠나?”
 갑자기 혈쾌검의 목소리가 더욱 부드러워졌다. 물론 유세희로서는 차라리 원래 목소리가 훨씬 더 듣기 좋았다.
 그녀는 상대의 의도를 어느 정도는 짐작했는지, 별 반문 없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중앙으로 좀 나와 봐.”
 천천히 중앙으로 나오는 그녀의 몸은 미세하나마 떨리고 있었다.
 “흠, 확실히… 정말로 좋군!”
 자신의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샅샅이 훑고 지나가는 상대의 시선에, 그녀는 또다시 참을 수 없는 모멸감을 느꼈지만 이미 모든 것을 포기한 듯한 눈빛이었다.
 무슨 예술품이라도 감상하는 듯한 태도를 취하던 혈쾌검이, 갑자기 자리에서 일어나 그녀 앞으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
 그의 몸이 그녀 바로 앞까지 도달하자 그녀는 어떤 소름을 느끼며 자신도 모르게 몸을 한 차례 부르르 떨었다. 그러나 그것은 시작에 불과했다.
 “정말이지, 내가 숱한 계집을 접해 봤지만 너 같은 우물(尤物, 아름다운 여자를 지칭하는 말)은 내 평생 처음이구나.”
 혈쾌검의 손이 그녀의 양 볼을 쓰다듬는다. 흠칫하며 몸을 빼려던 유세희는 속으로 길게 심호흡을 한 번 하더니 그저 상대가 하는 대로 가만히 있을 뿐이다.
 “정말이지, 인간의 살이 이토록 부드러울 수도 있구나.”
 유세희의 양 볼은 도화 빛으로 물들었다. 수줍다는 의미가 아니란 것은 너무나 당연했다. 그러나 그 모습에 혈쾌검은 순간적으로 거의 넋이 나간 모습이었다.
 잠시 후, 혈쾌검의 손이 점점 아래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녀의 희고 긴 목덜미를 지나 동그랗게 예쁜 곡선을 그린 그녀의 좁은 어깨, 그리고 그리 크지는 않았지만 엄청난 탄력을 자랑할 것 같은 봉오리를 슬쩍 지나쳐 한 줌도 안 돼 보이는 그녀의 허리, 그리고 그 밑으로 갑자기 생기는 엄청난 굴곡.
 그녀의 둔부를 쓰다듬는 순간, 혈쾌검의 눈은 거의 충혈 되다시피 하고 있었다.
 ‘이 미세한 떨림! 틀림없는 숫처녀로군. 빨리 채주에게 보고를 하고 지금 당장이라도 떠나야겠군.’
 하지만 그런 생각과는 달리, 그의 손이 다시 한 번 위로 올라가고 있었다. 조금 전에 그냥 스쳐 지나간 것이 못내 아쉬웠을까? 그의 손은 그녀의 가슴을 향하고 있었다. 그런데.
 “꺄악!”
 그때까지 얌전히 상대의 손길에 자신의 청백지신을 맡기던 유세희가 더는 못 참겠는지, 갑자기 비명을 지르며 뒤로 몸을 움직였다. 혈쾌검의 손이 그녀의 가슴을 향해 아예, 옷 속으로 들어왔던 것이다.
 쾅!
 그 순간, 문이 급하게 열리며 왕덕진이 안으로 뛰어들었다.
 “사매! 무슨 일이냐?”
 혈쾌검은 그저 멀뚱멀뚱 서 있었고, 구석에서 유세희는 얼굴이 온통 붉어진 채 가슴 부위를 손으로 가리고 있었다.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는 안 봐도 너무나 뻔한 상황이었다.
 “이게 무슨 짓이냐?”
 왕덕진은 너무나 흥분된 마음에 자신도 모르게 검을 뽑아 들었다. 그 순간, 혈쾌검이 재빨리 몸을 움직였다. 그의 몸은 어느새 왕덕진의 바로 앞에까지 도달해 있었다.
 왕덕진이 화들짝 놀라며 본능적으로 상대를 향해 검을 휘두르려 했지만, 혈쾌검의 몸은 그것보다 몇 배는 더 빨랐다. 혈쾌검의 손이 상대의 손목을 한 번 내리치자 바로 왕덕진은 검을 바닥에 떨어뜨렸고, 그와 동시에 혈쾌검의 오른손이 왕덕진의 목줄기를 움켜쥐었다. 유세희의 육안으로는 그 과정을 전혀 볼 수 없었을 정도로, 정말이지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커억! 커억!”
 왕덕진은 숨을 제대로 못 쉬는 것은 물론이고, 몸조차 제대로 움직이지 못하고 있었다. 그저 혈쾌검의 손아귀에서 볼썽사납게 바동거릴 뿐이었다.
 “제발, 놓아주세요.”
 유세희가 혈쾌검 앞으로 급히 달려가 사정을 하자, 혈쾌검은 손에 힘을 풀었다.
 우당탕!
 물론 얌전히 손에 힘만 푼 것이 아니라 왕덕진을 거의 바닥에 내동댕이치는 식이었다.
 “운이 좋은 놈이군. 나에게 검을 겨눈 놈을 살려준 적이 없는데.”
 혈쾌검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바닥에 비참한 모습으로 나동그라진 왕덕진을 더욱 비참하게 만드는 유세희의 음성이 장내에 울려 퍼졌다. 거의 악을 쓰는 듯한 음성이었다.
 “나가세요!”
 “사, 사매!”
 “나가 계시라고요. 제발!”
 “…….”
 왕덕진은 두 눈을 질끈 감고는 그저 말없이 다시 밖으로 나갈 수밖에 없었다. 앙다문 그의 입가에서 한 줄기 선혈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사부님! 무능력한 내가 저주스럽습니다!’
 ‘사형! 알아요. 그 마음. 그러나… 차라리 죽는 게 훨씬 편할 것도 같군요.’
 “거참, 저자와 정인 사이라도 되나? 왜 저렇게 분수도 모르고 날뛰는 건가?”
 ‘정인(情人)’이라는 말에 흠칫하던 유세희는 바로 원래 표정으로 돌아간다.
 “아니에요. 그저… 사형일 뿐입니다.”
 “흠, 그런가? 어쨌든, 내 도움을 받을 건가 아닌가?”
 “제발, 도와주세요.”
 그녀의 목소리는 한없이 떨리고 있었다.
 “하하! 좋아. 도와주지.”
 그는 다시 유세희에게 접근했다. 그는 그녀의 등 뒤로 돌아가 그녀를 감싸 안고 있었다.
 “조금만 기다리거라. 내가 채주에게 허락을 받고 바로 올 테니…….”
 가기 전에 아까의 아쉬움을 조금이나마 달래려는 듯, 그의 손이 다시 그녀의 가슴으로 접근했다. 다시 한 번, 그의 손이 옷 속으로 들어가고 있었지만, 이번에는 비명 소리 따위는 없었다. 혈쾌검의 손이 너무나 탄력적인 그녀의 젖무덤을 지나 봉오리 정상의 돌출 부위를 막 정복하려는 순간.
 꽝!
 또다시 문이 열리고 있었다. 아까와는 비교도 안 되게 엄청난 굉음을 내면서 누군가 문을 발로 힘껏 박차고 들어왔다.
 “아니, 이놈이 또!”
 왕덕진의 짓이라 생각한 혈쾌검이, 마치 이번에는 무조건 죽이기라도 하겠다는 식으로, 한껏 성을 내며 문 쪽을 향해 돌아섰는데.
 “헉!”
 갑자기 혈쾌검은 헛바람을 들이켜고 있었다. 그의 한쪽 눈은 뭔가에 크게 놀라기라도 한 것처럼, 한없이 커지고 있었다.
 ‘저 사람은……?’
 “자, 자네가… 여기에는 웬일로……?”
 문이 부셔져라 박차고 들어온 인물. 여기 오는 도중에 유세희가 만났던 그 흑의인이었다.
 흑의인은 혈쾌검의 말에 아무런 대꾸도 없이, 묘한 눈길로 유세희를 바라보더니 천천히 입을 열었다.
 “네가… 비명 질렀냐?”
 “예?”
 유세희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뭐라고 말을 하려는데, 갑자기 혈쾌검이 끼어들었다.
 “하하! 비명은 무슨? 좀 전에 뭔가 오해가 있어서 그런 것이네. 우리는 사업에 대해 얘기를 나누고 있었다네. 안 그런가, 유 소저?”
 그의 표정은 누가 봐도 어색했지만, 흑의인은 그를 보고 있지 않았다.
 “예? 아, 맞아요.”
 그녀는 얼떨결에 혈쾌검의 말에 맞장구를 치고 있었다. 그래도 뭔가 미심쩍은지 흑의인은 계속 고개를 갸웃거리며 유세희를 바라보았다. 이 순간, 그녀의 머리는 엄청나게 혼란스러웠다. 갑자기 나타난 흑의인의 행동도 그랬지만, 혈쾌검 정도 되는 인물의 태도 역시 좀 전에 산적들이 보였던 것과 다름이 없었던 것이다.
 ‘대체, 왜 저렇게 쩔쩔매는 것일까?’
 “이거 미안한데… 우리가 지금, 중요한 얘기를 나누어야 되는데…….”
 그만 나가 달라는 소리였다. 그런데 혈쾌검은 차마 말을 제대로 끝맺지도 못하고 있었다. 게다가 그의 행동은 안절부절못하고 있었다.
 “아, 그런가? 내가 쓸데없이 방해를 했나 보군. 미안하게 됐네.”
 흑의인은 밖으로 나가려고 몸을 돌렸다. 그를 향해 다시 혈쾌검이 입을 열었는데, 아무리 봐도 아부에 가까운 말이었다.
 “하하! 이 사람. 미안하기는 우리 사이에, 전혀 신경 쓰지 말게나.”
 순간 유세희의 가슴속 한구석에 뭔가 쿵 하는 소리가 들렸다.
 ‘안 돼! 잡아야 돼! 저 사람을 이대로 돌려보내면… 저 사람에게 도움을 청해야 돼!’
 그러나 그런 생각은 행동으로 옮겨지지 않았다.
 ‘아니야. 저 사람이 고수라서 쩔쩔맨다고는… 뭔가 다른 이유가 있을 수도… 그런 고수가 사냥이나 할 리가 없어. 괜히 부채주의 비위를 건드렸다가…….’
 엄청난 혼란을 느끼며 아무런 행동도 못 하고 있었는데, 밖으로 나서려던 흑의인이 우뚝 멈춰 섰다. 그리고 천천히 몸을 돌렸다.
 “아, 깜빡했군.”
 “또, 무슨……?”
 단지 뒤돌아섰을 뿐인데, 이상하게 혈쾌검은 놀라는 것 같았다.
 “자네 안대를 보니까 갑자기 떠오르는군.”
 “헉!”
 혈쾌검은 다시 한 번, 헛바람을 들이켠다.
 “그날, 내가 좀 심하게 힘을 준 것 같아서 말이야. 아직까지 안대를 하고 있다니, 어디 한번 보세나.”
 “아, 아닐세. 다 나았어. 정말 괜찮다니까!”
 ‘저건 또 뭐지?’
 유세희도 그렇고 밖에 있는 왕덕진 역시 거의 황당하다는 표정으로 이 광경을 지켜보고 있었다. ‘안대’ 이야기가 나오자 혈쾌검이 아예 발악하듯 말을 토해내고 있었던 것이다.
 “내가 계속 마음이 쓰여서 그렇다네. 어느 정도인가 한 번 보자니까.”
 “괜찮아! 정말 괜찮다니까!”
 “잠깐만 좀… 봤으면 좋겠군.”
 사람의 음성이 저토록 감정이 없을 수가 있을까? 정말이지, 혼이 없는 어떤 물체의 입에서 나오는 소리 같았다. 흑의인은 화나거나 굳은 것도 아닌 그저 무표정이었을 뿐인데, 이상하게도 냉기가 풀풀 날리고 있었다.
 그런데 그 음성을 듣는 순간의 혈쾌검의 표정이란.
 ‘맙소사! 저거… 내가… 잘못 보는 것인가?’
 유세희는 자신의 눈을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지금 보이는 혈쾌검의 얼굴은 틀림없이 겁에 질린 그것이었다. 잘못 본 것이 아닌가, 눈을 씻고 봐도 확실했다. 그의 이마에서 몇 방울 떨어지는 식은땀이 그것을 증명이라도 하는 것 같았다.
 “그, 그래. 보고 싶다니…….”
 혈쾌검은 서서히 자신의 안대를 향해 손을 움직였다. 차라리 죽는 게 낫지, 정말로 하기 싫다는 표정이었다. 도살장에 끌려가는 소의 표정이 저럴까?
 그리고 드러난 혈쾌검의 한쪽 눈!
 ‘저…!’
 그것을 본 유세희의 눈은 처음엔 어떤 경악을 표시하고 있었다. 그러나 바로 그것은 바뀌었다. 그녀로서는 갑자기 터져 나오는 웃음을 참느라 상당히 애를 먹어야 했다. 그런 심정은 왕덕진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당연히 없을 것이라 생각했던 혈쾌검의 한쪽 눈!
 있었다. 분명히 있었다. 그런데 왜 안대로 가렸을까 하는 의문은 바로 풀렸다. 분명히 존재하는 그의 눈. 그것은 반쯤, 아니, 거의 감겨 있었다. 그리고 눈 주위가 퉁퉁 부어 있는 상태에서 온통 시퍼렇게 멍이 들어 있었다.
 좀 잔인한 말이겠지만, 그저 평범한 사람이라도 상당히 우스운 모양새일 것이다. 그런데 좀 전까지만 해도 마치 제왕이라도 되는 양, 온갖 거드름을 다 떨었던 인물이 아니던가? 그런 인물의 눈 주위가 그런 모습이었으니, 그 우스움은 더욱 심할 수밖에 없었다.
 “흠, 다행이군. 난 또 실명이라도 한 줄 알고 놀랐지 뭔가? 내가 원래 그렇게까지 세게 사람을 안 때리는데, 그날은 자네가 상당한 고수인 줄 알고, 나도 모르게 힘이 좀 많이 들어갔다네. 어쨌든, 다행이군.”
 ‘뭐라고?’
 자신의 처지도 잊은 듯, 고개를 숙인 채 터져 나오는 웃음을 간신히 참던 유세희의 눈빛이 경악에 물들었다.
 ‘그럼, 저 상처가… 저 사람에게 맞아서……?’
 그녀는 그 눈빛 그대로 고개를 들어 흑의인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그는 더 이상의 용건은 없다는 듯이 막 문밖으로 나서는 중이었다.
 혈쾌검은 어느새 다시 안대를 착용한 상태였다. 그의 얼굴은 좀 전의 유세희처럼 붉게 물들어 있었다. 아니, 그것과는 비교조차 안 될 정도였다. 아예, 불타는 듯이 시뻘겋게 변해 있었다.
 “잠깐만요!”
 “…?”
 갑자기 유세희가 악을 쓰듯, 흑의인을 불러 세웠다. 그러더니 그녀는 황급히 몸을 움직여 흑의인 앞으로 다가갔다. 그리고 그녀는 그의 앞에 털썩 무릎을 꿇었다.
 “제발, 저를 도와주세요!”
 
 
 제2장 풍운의 전조
 
 “그 친구가 여기 무이산에 모습을 보인 것은 한 달도 채 안 됐을 게요. 처음엔 그냥 사냥꾼인가 했는데, 놀랍게도 호랑이를 사냥하더군요. 그런데 더욱 놀라운, 아니, 황당한 일은 그자가 오자마자 바로 벌어졌습니다.”
 “황당한 일이요?”
 왕덕진과 대화를 나누는 인물은 그가 산채 안으로 들어오기 전에 마주쳤던 산적들 중의 하나였다.
 “아, 글쎄, 그 친구가 호랑이를 들고는 산채로 찾아왔지 뭡니까? 당시에는 당연히 사냥한 호랑이를 우리에게 상납하는 것으로 알았습니다. 뭐, 그리 자주는 못 보지만 간혹 이곳에서 사냥을 하는 사냥꾼들도 있었지요. 그들은 예외 없이, 사냥한 것들 중 일부를 우리에게 상납했었습니다. 우리가 그런 사냥꾼들에게까지 일일이 신경을 쓰지는 않지만, 알아서 긴다고나 해야 할까요?”
 “천호란 인물은 그렇게 안 했다는 소리겠군요.”
 “돈을 요구하더군요. 비싸게는 안 받고 그냥 시세대로만 달라더군요. 하하! 당시에는 너무나 기가 막혀 미친놈이라고까지 생각했는데… 그래서 당연히, 미친놈에게는 몽둥이가 약이라는 생각에 본때를 보여주려다가… 쩝.”
 “반대로 그에게 당했다는 소리입니까?”
 “어휴! 말도 마시오. 당한 친구들 얘기를 들어보니, 뭐가 그냥 휙휙 지나갔답니다. 거의 주먹질 한 방, 발길질 한 방에 기절하다시피 했다는군요. 그중 몇 명은 지금까지 절뚝거리는 사람도 있다오.”
 “그런데 그 부채주란 분은?”
 “흠, 이거 참. 내가 한 얘기는 어디 가서 절대 하지 마시오.”
 “걱정 마십시오.”
 내색이야 안 했지만, 왕덕진은 속으로 실소는 지었다. 저러면서 굳이 왜 얘기를 꺼내는 걸까? 아마 상대의 손에 쥐여 준 돈의 힘이었을 것이다.
 “한 20명 정도가 천호에게 당하고 나서는 어쩔 수 없이 위에다 보고했습니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그때가, 혈쾌검이라는 명호로 무림에서 명성이 자자했다는 그 신임 부채주께서 이곳에 온 지 며칠 안 됐을 때의 얘기입니다. 아마도 신임 부채주로서 자신의 무공을 수하들에게 과시라도 하고 싶었는지, 적극적으로 나서서 천호를 혼내 주겠다고 하더군요. 수하들 50여 명을 우루루 이끌고 천호를 찾아갔다고 들었습니다.”
 “그래서 어떻게……?”
 “크크! 자신을 과시하러 갔다가 수하들 앞에서 한마디로 말해, ‘개망신’을 당한 것이죠.”
 “개망신?”
 “같이 갔던 동료들의 얘기를 들으니, 그냥… ‘복날에 개 맞듯이’ 그렇게 천호에게 맞았다고 하더군요. 지금은 눈 부위만 빼고 멀쩡해 보이지만, 한 5일 정도 아예 걷지도 못 했었죠. 특히 한쪽 눈은 실명했다고까지 생각했는데, 다행히 애꾸는 면하더군요.”
 “거참? 그런데 도무지 이해가 안 가는군요. 아무리 그렇다 해도, 이곳의 인원이라면, 500명은 족히 넘을 텐데… 설마, 이곳의 인원이 다 덤벼도 못 당할 정도의 고수일 리는 없지 않소?”
 “그건 우리도 궁금해하는 점인데… 부채주가 그렇게 당하고 나서 당연히 채주님이 직접 나섰습니다. 채주께서는 상대의 내력이 범상치 않을 것 같다고 하시면서, 바로 어떤 행동에 돌입하지 않고 따로 그를 단독으로 만났었죠. 그런데… 거, 참?”
 “그래서 어떻게 되었다는 거요?”
 “그를 만나고 나서 채주께서 우리를 모두 불러 모아 놓고 엄명을 내리시더군요.”
 “어떤…?”
 “토씨 하나 안 틀리고 그대로 말하면…….”
 “…?”
 “앞으로 누구든지, 호랑이 사냥꾼에게 불손한 행동을 하는 놈은 다 죽여 버리겠다!”
 “…….”
 잠시 멍하니 있던 왕덕진이 다시 입을 열었다.
 “그렇다면 그의 내력에 대해 채주께서는, 아니, 오직 그분만 안다는 뜻이겠군요.”
 “그런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대강 눈치를 살피건대, 부채주분들도 모르시는 것 같더군요.”
 “잘 들었소이다. 아, 그리고 끝으로 아까 당신의 상관이 우리에게 보여준 행동이 그래도 잘 이해가 안 되는데… 내 사매를 제압하고 천호를 만났을 때의 그…?”
 “아, 그것도 당연히 이유가 있지요. 그러니까 채주님의 엄명이 떨어진 후, 당연히 그와 직접적으로 싸움이 붙은 사람들이 그를 찾아가 사죄를 했습니다. 오히려 우리가 일방적으로 맞았지만… 어쨌든, 그랬는데 거기서 그가 한 말이 있습니다. 그것 역시 토씨 하나 안 틀리고 그대로 전하면…….”
 “…?”
 “내가 보는 앞에서 웬만하면 살인 같은 거 하지 말게. 예전에는 아니었는데, 지금은 별로 안 좋아하니… 뭐, 불가피한 상황도 있으니 그런 것까지 내가 뭐랄 수는 없겠고… 그런데 한 가지, 그럴 일이야 없을 것도 같은데, 계집을 강제로 어떻게 하는 짓 따위는 절대 내 앞에서 하지 마라. 난 그런 걸 보면 절대 못 참는다.”
 
 “결국, 그 사람의 내력은 알 수가 없지만, 무림인이었다는 것만은 확실하겠군요.”
 “그렇다고 봐야겠지. 어쨌든…….”
 왕덕진이 몇 마디 더 말을 했지만, 유세희의 귀에는 들리지 않았다. 그녀의 머리에는 온통, 오늘 처음 본 어떤 남자에 대한 생각으로 가득 차 있었다.
 ‘도대체 얼마나 대단한 내력을 지녔기에, 산채 전체가……?’
 그녀의 뇌리에 오늘 낮에 있었던 일이 다시금 떠올랐다. 아비 외에는 처음으로 누군가의 앞에서 무릎을 꿇었었다. 그리고 애원했다. 제발 도와 달라고. 그런데 상대는 어떤 대꾸도 없었다. 그저 묵묵히 자신만을 바라볼 뿐이었다.
 그 침묵의 시간! 비록 그리 길지 않았던 그녀의 인생이었지만, 단언컨대 그녀의 인생 중 가장 길고 고통스러운 시간이었다. 그리고 잠시 후, 상대의 입에서 나온 한 마디.
 “일단… 내가 있는 곳으로 가자.”
 다시 단언컨대, 그녀의 인생에 있어서 가장 감격을 느끼게 해준 소리였다.
 그런데 지금 무엇을 하자는 것일까?
 “혼자 생각할 것이 있으니, 잠시 기다려라.”
 산등성이에 있는, 대충 아무렇게나 지은 듯한 초라한 모옥이었다. 그 한 마디만 남긴 채, 혼자 그곳으로 들어가서는 벌써 한 시진이 흘렀다. 그동안 왕덕진은 다시 산채로 가서 무엇인가를 알아왔고 그녀는 그저 멍하니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고도 반 시진이 다시 흘렀다. 도저히 더는 못 기다리겠는지, 유세희나 왕덕진이 어떤 행동을 취하려는데 드디어 안에서 소리가 들려왔다.
 “이제 들어와도 좋다.”
 이런 깊은 산 속에서 혼자 사는 거처로서는 그런대로 말끔한 실내였다. 손으로 대충 만들었다는 태가 나기는 했지만, 침상도 있었고 의자와 탁자도 있었다. 산채의 인물들이 갖다 주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천호는 그 의자에 앉아 있었다.
 들어가자마자 가장 그녀의 눈길을 끈 것은 두 가지였다.
 먼저 술병들. 바닥에 마구 굴러다니는 빈 술병과 더불어 아직 개봉을 안 한 새 술병들이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그다음으로 눈길을 끈 것은 검이었다. 마치 방치되어 있는 것처럼, 구석에 아무렇게나 기대어 서 있는 한 자루의 검. 기분 탓일까? 왠지 칙칙한 느낌을 주는 검이었다.
 자세히 보니 평범한 검이 아니었다. 보검이라는 소리가 아니다. 그 검은 검집과 손잡이 부분이 뭔가에 의해 묶여 있었다. 쇠사슬이었다. 쇠사슬로 칭칭 감겨 있었던 것이다. 그녀의 느낌상, 왠지 풀리는 쇠사슬 같지가 않았다. 그렇다면 검을 뽑기 위해서는 끊어야 한다는 소린데…….
 “앉지.”
 주위를 두리번거리는 두 명의 방문객을 향해 천호가 입을 열었다. 아니, 한 명의 방문객만을 향한 소리였다. 유세희와 왕덕진이 막 의자에 앉으려는 찰라.
 “아, 자네는 좀 나가 있겠나?”
 왕덕진을 향해 하는 소리였다. 처음 보는 순간부터 계속되는 하대였지만, 그런 것은 전혀 신경 쓰이지 않았다. 상대는 나이가 60에 가까운 혈쾌검에게도 말을 마구 하는 자였다. 게다가 그런 것 가지고 뭐랄 형편이 아니었다. 단지 그냥 하대가 아니라 나이 든 사람이 어린 사람에게 하는 식의 하대라는 점이 좀 의아할 뿐이었다.
 ‘설마, 이 자도?’
 묘한 눈길로 상대를 응시하며 엉거주춤하고 있는 왕덕진에게 유세희가 눈짓을 보냈다. 상대의 말에 따르라는 신호였다.
 “본인은 그럼.”
 왕덕진이 나간 후, 실내에는 단둘밖에 없었지만, 유세희는 전혀 신경 쓰이지 않았다. 혈쾌검의 경우하고는 전혀 달랐다. 상대에 대해 대충은 파악이 된 것도 있었지만, 그녀는 확신할 수 있었다. 상대는 여인의 미모에 혹해 추접한 행동을 할 사람이 절대 아니었고, 결정적으로 상대는 자신에 대해 전혀 흑심이 없는 인물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나를 바라보는 저 무심한 눈빛! 정말이지 저런 눈빛을 보내는 사내는 평생 처음이야.’
 좀 전에 밖에서 하릴없이 있으며 곰곰 생각해 보니, 상대는 처음 자신을 볼 때부터 전혀 관심조차 없었다는 생각마저 들었었다. 지금 생각해봐도 어이없는 일이었는데, 순간적이나마 기분이 나쁘다는 생각마저 들지 않았던가?
 “저 친구를 내보낸 것에 대해 오해하지 마. 딴 뜻이 있어서 그런 건 아니다. 단지…….”
 “…?”
 “아니다. 그건 됐고… 네 이름이… 세희라고 했지?”
 “예? 아, 유세희입니다.”
 “너… 몇 살이냐?”
 그녀를 바라보는 천호의 눈빛이 묘하게 변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탐욕’이라는 개념은 절대 아니었다. 처음 그녀의 이름을 들었을 때의 그 눈빛이었다. 어떤 ‘회한(悔恨)’이 깃든 그런…….
 “열…여덟이에요.”
 “열여덟이라…….”
 천호는 그녀에게서 시선을 돌려 허공을 응시하며 혼잣말인 양, 중얼거린다.
 “그 아이도… 원래대로라면, 그 정도 나이가… 좀 더 됐겠나?”
 ‘원래대로라면?’
 그녀는 몇 가지 사실을 유추해낼 수가 있었다. 상대가 ‘세희’라는 이름을 가진 자기 또래의 여자를 예전에 잘 알고 있었으며, 아마 지금은 살아 있는 사람이 아닐 것이다.
 ‘세희라는 이름의 딸이 있었는데, 일찍 죽었나?’
 기껏해야 30대 초반으로 보이는 상대의 나이를 감안한다면, 말도 안 되는 생각이었다. 그러나 대충이나마 예상되는 상대의 경지로 볼 때, 전혀 말도 안 되는 소리는 아니었다. 반로환동까지야 당연히 아니겠지만, 무공의 경지가 높아질수록 실제 나이에 비해 훨씬 젊어 보인다는 것은 그녀도 익히 봐왔었다.
 ‘세희’라는 여자에 대해 상당히 궁금했지만, 그녀는 그것에 대해 묻거나 할 수는 없었다. 상대에게 안 좋은 이야기가 될 것은 확실했던 것이다. 그녀는 바로 본론으로 들어갔다.
 “저를 도와주기로 결정하셨나요?”
 “결정? 그거야 너를 이곳에 데려오는 순간, 이미 확정된 게 아닌가?”
 “예? 아, 그런가요?”
 그녀로서는 당연히 기쁜 소리였지만, 한 가지 의혹은 떨칠 수가 없었다.
 “그런데 거의 한나절을 생각에 잠기신 것은…?”
 “아, 그건 다른 생각을 좀 하느라 그랬다. 내가 왜 너를 도와주기로 마음먹었을까, 그게 잘 이해가 안 돼서 말이야.”
 “예?”
 유세희는 어이가 없었다. 고작 그런 생각을 하느라고 사람을 그렇게 밖에다 세워 놓았다는 것인가?
 “내가 원래 그런 놈이 아니거든. 남을 돕거나 하는… 뭐, 아무 생각 없이 한 행동이 남에게 도움이 되는 경우는 있었겠지만…….”
 ‘확실히… 뭔가… 조금은 이상한 사람이야.’
 “도와줄 내용이 뭔가? 혹시라도 살인을 해야 한다면 다시 생각해 봐야 하는데…….”
 “그런 건 절대 아니에요. 그저 저희 문파를 대표해서 비무를 해주시면 됩니다.”
 “그런가? 간단하군. 알았다. 그런데 시일이 촉박한가? 내일 출발해도 상관없겠나?”
 “상관없습니다.”
 “잘됐군. 그럼 내일 출발하도록 하지.”
 ‘……?’
 “저, 저기요.”
 “왜? 또 다른 할 말이라도 있나?”
 “아니, 그게…….”
 유세희는 황당할 지경이었다. 틀림없이 더 들어야 할 말이 있을 텐데, 상대는 아무런 질문도 없이 자신에게 시선을 돌려 다른 생각이라도 하는 것 같았던 것이다. 또한, 실제로도 그랬다.
 “뭐, 궁금하거나 하는 점은 없으세요?”
 “궁금? 더 이상 들을 것이 있나? 비무에서 이겨주면 되는 것이 아닌가? 또 추가로 내가 해야 할 일이라도 있나?”
 “아니, 그러니까요. 어떤 상황에서 비무를 하는지… 그리고 누구와 비무를 하는지… 그 상대가 누군지 정도는…….”
 “응?”
 천호는 그제야 뭔가 깨닫기라도 한 듯한 표정이었다.
 “아, 그렇겠군. 그럴 리는 없다는 생각이었는데… 그렇지. 만에 하나라는 것이 있겠군.”
 ‘도무지, 무슨 말을 하는 건지?’
 “내 비무 상대가 누군가?”
 “누구냐 하면…….”
 유세희는 긴장이 되어 마른침까지 꿀꺽 삼켰다. 혈쾌검을 개 패듯 팼다는 사람이니 당연히 남북쌍괴를 이길 수 있다는 생각은 들었지만, 그래도 불안했다. 혹시라도 그들이 두려워 꼬리를 뺄 수도 있다는 불길한 상상마저 언뜻 들었다. 남북쌍괴가 주는 위압감이란 것은, 그녀에게 그만큼 대단했다.
 남북쌍괴(南北雙魁)!
 나이가 100세에 가까운 인물들로 정사 중간의 고수들이었다. 문파에 소속되지 않고 철저하게 혼자서만 활동했다. 남괴는 민강 이남 지역에서, 북괴는 이북 지역에서 주로 활동했다. 복건성 내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드는 고수들로서, 50년 가까이 이 지역을 주름잡다시피 한 인물들이었다. 정사 중간으로서 거의 단독으로 활동하는 인물들이었기에, 5년 전 사상 최악의 정사대전에도 거의 영향을 받지 않았었다.
 “남북쌍괴라는 인물들이에요.”
 “그래? 알았다.”
 “…….”
 너무나도 간단한 상대의 대답에, 잠시 멍해 있던 유세희는 뭔가를 느끼고는 거의 희열에 찬 표정을 짓는다.
 “아! 그들에 대해 잘 아시는군요. 확실히 자신이 있다는 소리겠죠?”
 그렇지 않고서는 저런 식의 태도를 보일 리가 없다는 것이 그녀의 생각이었다. 그런데.
 “잘 안다고? 몰라. 처음 듣는 이름이야.”
 “예?”
 그리고 흐르는 침묵. 유세희는 그저 멍한 얼굴로 상대를 바라볼 뿐이다.
 “왜 그런 얼굴로 쳐다보지?”
 “무림인… 아니신가요?”
 “지금은 좀 애매한데… 무림인…이었었지.”
 “그런데 그들을 전혀 몰라요?”
 “응? 뭐, 이상한가?”
 “아무리 그들이 이곳에서만… 아니, 그게 중요한 것이 아니라…….”
 유세희는 갑자기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다. 무림에 몸담았으면서 그들을 모르는 것도 잘 이해가 안 됐지만, 그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전혀 그들을 모른다면서… 뭐, 궁금하거나 한 점 없으세요?”
 “뭘… 궁금해해야 되지?”
 “아니, 하다못해, 어떤 무기를 사용하는지…….”
 “그거야, 비무장에 가보면 저절로 알 것 아닌가? 왜 지금 그런 걸 신경 써야 되지?”
 “에…?”
 다시 한 번 그녀는 멍한 눈으로 천호를 바라본다.
 ‘어디 한 군데 모자란 사람 아니야? 아니면, 그 누구도 자신의 적수가 될 수 없다는 과대망상이라도…?’
 “그런데 상대가 누군지는 왜 물으신 거죠?”
 “만에 하나, 내가 아는 사람일까 봐 그런 거지.”
 “그게 무슨 소리죠?”
 “내가 아는, 그러니까 나를 아는 사람하고 마주치기는 싫거든. 그런데 내가 전혀 처음 듣는 이름이니, 그자들도 당연히 나를 모를 것 아닌가?”
 ‘죄를 짓고 쫓기는 중인가?’
 “그렇…겠죠.”
 “그러면 된 거지, 더 이상 뭐가 필요한가?”
 “뭐, 그렇…겠네요.”
 상대의 말을 정말 이해를 하는 것인지는 의문이었지만, 어쨌든 그녀는 연신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뭔가를 포기한 것 같은 표정으로도 보였다.
 “그런데 너 혹시…….”
 “말씀…하세요.”
 “요리 같은 거, 잘하나?”
 “…?”
 
 ‘후! 내가 지금 뭘 하는 건지…….’
 유세희의 볼은 홍조를 띠고 있었다. 수치심이나 부끄러움 때문이 아니었다. 술기운이었다.
 요리를 잘하느냐는 난데없는 상대의 질문에, 그녀는 대충은 할 줄 안다는 식으로 얼버무렸다. 그러자 상대는 기다렸다는 듯이 어디론가 사라졌다. 한 1각(약 15분)쯤 지났을까? 그는 손에 무엇인가를 들고 다시 들어왔다. 척 보기에 짐승의 살덩이였다. 어떤 짐승이냐고 물으니 호랑이란다.
 그 후, 그녀는 온갖 정성을 다해 고기를 요리했다. 신기하게도 주방용품 같은 것은 제대로 갖추고 있었다. 물론 산적들에게서 얻은 것이 확실하겠지만.
 호랑이 고기라는 것에 대한 호기심 따위는 생기고 말고도 없었다. 어떡해서든 상대를 만족시켜야 한다는 일념에, 그녀는 온 정신을 집중해 요리를 만들었다. 내심 이 정도 집중력으로 계속 무공을 수련했다면, 아마 지금보다 두 배는 강해졌을 거라는 생각마저 들 정도였다.
 요리가 다 끝난 후, 밖에 있던 자신의 사형을 부르려 했을 때 상대가 한 말은 다시 한 번 그녀를 멍하게 만들었다.
 “그 친구는 왜 불러?”
 “예? 그러면 굶겨요?”
 “그럴 수는 없겠지. 접시에 담아서 밖에서 먹으라고 해.”
 “…….”
 더러워서 안 먹겠다는 식의 태도를 보이던 왕덕진은, 그녀가 몇 번 간청하고 나서야 할 수 없다는 표정을 보이며 접시에 든 요리를 받아 들었다. 그리고는 처량하게 밖에서 홀로, 그것도 땅바닥에 앉아서 음식을 먹을 수밖에 없었다.
 천호는 음식에는 거의 손을 대지 않았다. 거의 술만 마실 뿐이었다. 그것도 병째로. 더욱 유세희를 난감하게 했던 것은 아무런 말도 안 한다는 것이었다. 그저 묵묵히 술만 마실 뿐이었다.
 그러기를 반 시진(약 1시간). 뭔가 말을 걸려고 해도 분위기가 도저히 그럴 분위기가 아니었다. 그 와중에 내뱉은 상대의 첫 마디.
 “너도 마시겠나?”
 그렇게 해서 홀짝홀짝 마신 술이 지금은 꽤 되었다. 취기 탓이었는지, 그녀는 용기를 내서 말을 걸어 본다.
 “예전에 무림인이었다고 하셨는데… 혹시 속했던 문파라도 있었나요?”
 어떻게 보면 ‘네 내력을 말해 달라’는 소리나 마찬가지였다. 물론 상대가 선선히 말해 줄 거라는 생각은 그녀에게도 없었다. 그저 아무 말이나 해야겠다는 생각에서 한 말이었다. 역시 상대의 대답은 그녀의 예상대로였다. 그나마 소득이 좀 있다면, 상당히 어색해 보이긴 했어도, 처음으로 상대방의 웃음 띤 얼굴을 보았다는 것이었다.
 “풋! 아마 모르는 게 훨씬 좋을 거다.”
 비록 찰나였지만, 상대의 웃는 얼굴에 용기를 얻었는지, 그녀는 계속해서 질문을 던졌다.
 “그런데 원래 검을 쓰셨나요?”
 이번에는 굳이 안 밝힐 이유가 없었는지, 천호는 선선히 대답을 해주었다.
 “예전에는 검을 많이 썼지.”
 ‘많이? 여러 가지 무공을 익혔다는 소린가?’
 유세희는 뭔가 애매하다는 듯이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었는데, 그런 그녀의 귀에 천호의 음성이 들렸다. 그런데 그 내용이 순간적이나마, 그녀의 심장을 얼어붙게 만들고 있었다.
 “살인을 하는 데 검이 제일 효과적이거든.”
 “…….”
 ‘살수였단 소리…?’
 조금 화기가 돌던 분위기가 다시 싸늘해지는 순간이었다. 그런 분위기를 바꿔 보려고 했는지, 그녀는 계속해서 말을 걸었다. 물론 술기운의 힘이 가장 컸다.
 “그런데 저 쇠사슬은 뭔가요?”
 구석에 처박히다시피 놓여 있는 검을 슬쩍 바라보며 던진 질문이었다.
 “뭐, 일종의 금제(禁制)지.”
 “금제라면… 검을 사용하지 못하도록 일부러 그랬다는 건가요?”
 “그런 셈이지.”
 “하지만 어쩔 수 없는 상황이라면… 만약 그러면 어떻게 되는 거죠?”
 “글쎄, 그럴 경우가…? 어쨌든 저 검이 뽑히는 순간, 그러니까 저 쇠사슬이 끊어지는 순간… 내 자유가 100일간 더 구속당한다고 생각하면 된다.”
 점점 더 모를 말만 하는 천호였다. 도무지 모르겠다는 식의 표정을 보이는 유세희를 향해 천호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냥, 그 정도만 알아둬. 그리고 나에 대해 자세하게 알려고 하지 마. 너에게 하등의 도움도 안 되니까.”
 “아, 알겠어요. 아참, 그런데…….”
 상대에 대해 더 이상 캐물어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드는 그녀였는데, 마지막으로 한 가지만 더 물어보고 싶었다.
 “저랑 같은 이름을 가진 사람을 아는 것 같던데…….”
 그런데 그 말이 끝나자마자.
 ‘헉!’
 유세희는 순간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것 같았다. 비록 무표정에 가까운 상대의 얼굴이었지만, 그런대로 분위기는 괜찮았었다. 그런데 갑자기 느껴지는 이런 싸늘한 냉기라니!
 상대가 자신을 노려보는 것이 아니었다. 똑같이 무표정한 눈빛 같은데, 이상하게도 상대의 분위기는 얼음처럼 차가워진 것이다. 게다가 그뿐만이 아니었다.
 벌컥! 벌컥!
 갑자기 천호는 미친 듯이 술을 들이켰다. 원래부터 병째로 마셨지만, 이번에는 아예 한꺼번에 한 병을 다 들이켜고 있었다.
 유세희는 자신이 큰 실수라도 저질렀다는 생각이 들었다.
 “죄, 죄송해요. 저는 아무 생각 없이…. 다시는 그런…….”
 그러나 그녀의 말은 중도에 끊긴다.
 “내가 아까, 왜 너를 도와줘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는지 이해가 안 갔다고 했지? 난 말이야. 원래가 누구를 돕거나 하는 놈이 아니야. 옆에서 누가 죽어 가도 나랑 상관없는 사람이면 그냥 지나치는 게 나야. 그런데 왜 너를 도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을까?”
 “…?”
 “너 때문이야. 아니, 네 이름 때문이라고 해야 할까? 네 이름을 듣는 순간, 갑자기 그 아이가 생각났어. 10살 정도의 꽃다운 나이에 죽은…….”
 유세희는 그저 멍한 얼굴로 상대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리고 네가 내 앞에서 무릎 꿇었을 때, 그러면서 나에게 애원했을 때, 정말이지 생생하게 떠오르더군.”
 천호의 음성은 상당히 떨리고 있었고, 취했다는 것을 바로 알 수 있었다.
 “그 아이가… 당신 앞에서… 무릎 꿇고 애원이라도 했다는 말인가요?”
 거의 무의식중에 유세희의 입에서 흘러나온 말이었다.
 “아니! 그 애의 아비가 그랬지.”
 “…?”
 “살려 달라고, 자신은 죽어도 좋으니, 제발 자기 딸만은 살려 달라고 말이야.”
 ‘맙소사! 그럼, 설마?’
 순간 유세희는 어떤 무서운 상상이 떠오르면서 천호를 바라보는 그녀의 눈빛은 경악으로 물들기 시작했다.
 계속해서 천호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음성은 아예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그래, 맞아! 내가… 죽였다!”
 
 @
 
 “드디어 그들의 움직임이 포착되었습니다.”
 “어느 지역인가?”
 “복건성입니다.”
 “복건성이라? 좀 멀군. 하긴 중원 한복판에서 일을 벌일 수는 없었겠지.”
 침중한 안색으로 중얼거리는 문사 차림의 중년인. 그는 태사의에 몸을 푹 파묻은 채, 두 눈을 지그시 감고 뭔가 생각에 잠기는 듯했다.
 잠시 후, 수하로 보이는 자가 손에 들고 있던 서류뭉치를 중년인에게 건네주었다.
 “지난 두 달간 산발적으로 입수한 정보를 종합해서 정리한 것입니다.”
 중년인은 그것을 찬찬히 살피기 시작했다.
 “정황으로 봐서는 거의 확실한데… 그렇다고 섣불리 건드렸다가는…….”
 “그러면 유능한 인물 몇 명을 보내어 은밀하게 조사를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당연히 그런 식으로 하기는 해야겠는데…….”
 중년인은 다시 한 번 뭔가 생각에 잠겼다. 그리고 잠시 후.
 “아무래도 여기 있는 인원을 보내는 것은 별로 안 좋겠군. 어지간한 능력의 인물이 아니고서는 수행하기가 거의 힘든 임무가 아닌가?”
 “그럴 겁니다.”
 “그들 역시 이곳의 움직임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을 텐데, 그 정도 능력 되는 인물이 이곳을 벗어난다면 그들의 귀에도 들어간다고 봐야 될 거야. 그러면 바로 꼬리를 감추겠고.”
 “정말 그렇겠군요. 그러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협조를 구해야지.”
 “협조…라 하시면…?”
 수하로 보이는 자가 ‘협조’라는 단어에 어떤 의구심을 갖는 데는 이유가 있었다. 앞에 앉아 있는 중년인의 입에서 ‘명령’이나 ‘통보’ 따위가 아닌, ‘협조’라는 단어를 사용해야 되는 문파나 인물은 정말이지 극히 드물었던 것이다.
 “가까운 곳에 남궁세가가 있지 않나?”
 “아! 그들이라면.”
 “자네는 지금 즉시, 모든 자료들과 함께 남궁세가에 협조 공문을 띄울 준비를 하게. 내가 직접 적겠네.”
 “알겠습니다.”
 어디론가 수하가 사라진 후, 혼자 남은 중년인의 표정은 상당히 굳어 있었다.
 “그 끔찍했던 정사대전이 끝난 지 이제 겨우 5년인데, 또 이런…….”
 ‘초장에 그들의 음모를 분쇄하지 못한다면… 물론 그때와는 비교도 안 되겠지만, 어쨌든 적지 않은 피를 또다시 흘릴 수도…….’
 
 @
 
 “유세희가 무이산으로 갔다던데, 어떤 변수 같은 것은 없겠소?”
 중앙의 커다란 의자에 오만한 자세로 앉아 있는 한 인물!
 그는 얼굴을 면사(面紗)로 가리고 있었다. 목소리로 봐서는 그리 많은 나이의 소유자는 아닌 듯했다.
 실내에는 그 말고도 4명이 더 있었다. 그중 노인 2명은 서 있었고, 중년인과 청년은 바닥에 부복해 있었다. 면사인(面紗人)의 질문은 부복해 있는 중년인에게 한 것이었다.
 “만약 유세희가 그곳의 채주라도 데려온다면 상황이 조금은 복잡해지겠지만, 18채에 버금간다는 무이산채의 수장 신분인 그가 이곳에 올 리는 없다고 봅니다.”
 면사인도 수긍한다는 듯, 가볍게 고개를 끄덕인다.
 “그렇다면 방주가 생각하기에, 그 혈쾌검인가 하는 그 작자는 어떨 것 같소?”
 “아마 유세희가 그자를 데리고 올 확률은 거의 9할 이상이라고 생각됩니다. 애초에 그자를 노리고 간 것일 겁니다. 게다가 그 자는 색을 밝히기로 유명한 자입니다. 그런 자가 유세희를 보고 거절을 할 리가 없습니다.”
 “그렇다면 혈쾌검이 오는 것은 기정사실로 봐야겠고.”
 이번에는 면사인의 시선이 두 명의 노인들을 향했다.
 “어떻습니까? 혈쾌검이라면 결코 만만한 인물이 아닌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만.”
 두 명의 노인들 중, 키가 좀 큰 인물이 호쾌한 웃음을 터뜨린다.
 “하하! 몇 년 전이라면 몰라도 지금은 충분히 자신 있소이다. 5년 전, 교주님을 만나 ‘대법(大法)’을 시전 받은 이후 우리의 무공은…….”
 “말조심하십시오!”
 노인이 말을 하는 도중, 갑자기 면사인의 입에서 날카로운 음성이 튀어나왔다. 거의 고함에 가까운 음성이었다.
 “헉! 왜 그러시오, 소교주(小敎主)?”
 “지금 우리가 왜 이렇게 복잡하게 일을 꾸미는지 몰라서 그런 겁니까? 그저 힘으로 밀어붙이면 간단한 일을 가지고 말입니다.”
 순간 노인도 뭔가를 깨닫는 듯한 표정이었다.
 “무슨 말인지 알겠소이다. 앞으론 주의하겠소.”
 “다시 한 번 강조하지만, 꿈속에서라도 우리의 존재에 대해 발설하지 마십시오. ‘그것’이 완성되는 그날까지 말입니다.”
 “명심하겠소이다.”
 “그리고 특히 이번 일을 수행함에 있어서는 더욱 주의를 하십시오. 아무래도 우리가 하는 일에 대해 하남(河南)에서 뭔가 감을 잡은 눈치입니다. 방주나 소방주도 명심하도록!”
 바닥에 부복한 두 명은 더욱 머리를 조아렸다.
 “명심하겠습니다.”
 
 @
 
 무이산채의 채주는 수하에게 뭔가를 보고받고 있었다.
 “정말로 그가 떠났다는 말이지? 정말 확실한 건가?”
 그의 목소리는 거의 희열에 들뜬 것 같았다.
 “그렇습니다, 채주님. 제가 언제쯤 다시 올 거냐는 식으로 슬쩍 떠보았는데, 분명히 다시 오지 않겠다는 식으로 말을 했습니다.”
 “아, 알았네. 됐으니 이만 나가봐.”
 수하가 나간 후, 채주는 긴 한숨을 토해내고 있었다.
 “후우! 이제 다리 쭉 뻗고 잘 수 있겠구나! 정말이지 한 달 가까이 불안해서 잠조차 제대로 못 잤거늘…….”
 잠시 후, 채주의 표정이 차분히 가라앉으면서 그의 표정은 뭔가 강렬한 의혹을 내비치고 있었다.
 ‘그런데 도무지 모를 일이군. 그가 멀쩡한 것도 천지가 개벽할 일이겠지만, 왜 이런 곳에서 호랑이 사냥 따위나 하고 있을까? 게다가 월영문 따위를 돕기 위해 그곳 딸과 함께 그곳으로 갔다고? 그건 더 이해가 안 되는군. 아마 내 말을 들으면 다들 미친놈 취급하며 아무도 안 믿으려 하겠군. 당분간 그 누구에게도 발설할 수는 없겠지만… 어쨌든 앞으로 월영문과 확실한 친분을 맺어야겠군. 복건성의 패자가 될지도 모르니…….’
 상념에서 벗어난 채주의 얼굴은, 갑자기 뭔가 재미있는 일이라도 떠오른 표정이었다.
 “그나저나 그 높으신 양반들은 이 사실을 알고 있을까? 만약 알게 되었을 경우, 어떤 표정들을 지을지 정말 궁금하군. 나처럼 잠이 문제가 아니라, 아예 밥조차 목구멍으로 못 넘길 것은 확실할 텐데 말이야. 하하하!”
 
 
 제3장. 비무전야
 
 ‘상당히 황량하군.’
 월영문에 도착해서 천호가 처음 느낀 감정이었다. 한때 500명에 달하는 인원이 북적대던 건물이었다. 그런 곳에 100명 남짓한 인원만이 거주하고 있었으니, 어떻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유세희가 천호의 처소로 내준 방은 후원에 있는 별채 건물이었다. 지금이야 어느 건물이든 별 차이가 없었지만, 상대가 사람이 북적대는 것을 싫어할 것이라는 나름대로의 생각이 들어서 제일 후미진 곳을 천호의 거처로 내준 것이었다.
 “어때요? 마음에 드시나요?”
 그녀의 이마에는 땀이 송골송골 맺혀 있었다. 사람의 발길이 몇 년 동안 끊겼던 곳이라 그 내부는 묵은 먼지에 후미진 곳에 쳐진 거미줄로 엉망일 수밖에 없었다. 그녀가 직접, 그것도 혼자서 그곳을 청소하고 정리했던 것이다.
 지금은 고작 몇 명에 불과했지만, 시비를 시킬 수도 있는 일이었다. 그러나 그녀는 그렇게 하지 않고 직접 그 일을 했다. 물론 자신의 처소에는 유세희를 제외하고는 누구도 오게 하지 말라는 천호의 말이 있었지만, 꼭 그것 때문만은 아니었다. 뭔가 나름대로, 다른 더 큰 이유가 있었다.
 “뭐, 그런대로.”
 복건 제일의 미녀가 땀을 뻘뻘 흘리며 혼자서 고생하는 모습을 보고도 그는 아무런 행동도 하지 않았다. 그저 뒷짐만 지고 있었다. 그리고 수고했다거나 고맙다거나 하는 말조차 하지 않는 천호였다.
 ‘정말 무뚝뚝한 사람…….’
 상대의 그런 태도에 대해 전혀 예상 못 한 것은 아니었지만, 그녀는 내심 서운했다.
 “저, 그런데…….”
 유세희가 고생고생해서 말끔히 치워놓은 방에 들어가 천호가 막 짐을 풀려는 순간 그녀가 뭔가 난감한 듯한 표정을 지으며 입을 열었다.
 “제 아버님을 좀 만나주시겠어요?”
 “네 아비를…?”
 그저 단순히 놀러 갔다 해도 그 집의 존장(尊長)에게 인사를 드리는 것은 당연한 일일 것이다. 물론 존장과 그 격에서 너무 차이가 크게 나는 경우는 예외겠지만, 천호가 그런 경우가 아니라는 것은 확실했다.
 ‘예의’하고는 담을 쌓은 것처럼 보이는 천호란 사나이를 자신의 아비와 대면시키는 것이 상당히 불안한 그녀였다. 그래서 상당히 내키지 않지만, 그녀의 아비가 그것을 강력히 원했다.
 “그러지.”
 무슨 어려운 일이라도 부탁받은 것처럼, 약간의 시간을 고민하는 듯하더니 천호는 수락의 뜻을 비친다. 그런데 유세희가 정말 하고 싶었던 말은 따로 있었다.
 “아버님 앞에서는 좀… 예의를 갖춰 주시면 안 될까요? 워낙 몸이 안 좋은 분이라서…….”
 정말로 힘들게 말을 꺼내는 그녀였다. 또한, 그녀가 땀을 뻘뻘 흘리며 고생을 자처한 가장 큰 이유였다.
 비록 순간적이지만, 천호의 얼굴에는 간만에 미소가 보였다.
 “풋! 내가 그렇게… 무례해 보이나?”
 “아니, 뭐 꼭… 그렇다는 게 아니라…….”
 “알았다. 노력하지.”
 “아! 고마워요.”
 ‘휴! 그런데 이런 일로 이렇게까지 고마워해야 하는 것이 맞는 건가?’
 
 “귀찮게 예까지 오시라 해서 죄송하게 됐습니다.”
 유세희의 아비인 유협은 정중한 태도로 천호를 맞았다. 그런데 자리에서 일어나 맞이하지는 않았다. 그럴 수가 없었던 것이다. 비록 멀쩡해 보이는 다리였지만, 한쪽 다리는 신경이 완전히 마비되어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팔이라도 성하면 몸을 지탱해 몸을 세울 수도 있었겠지만, 그의 팔은 아예 오른쪽이 없는 상태였다.
 “아닙니다. 상관없습니다.”
 천호는 공손히 포권을 취하고는 자리에 앉았다. 너무나 당연해 보이는 행동이겠지만, 그것을 바라보던 유세희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불안했던 가슴을 쓸어내리고 있었다.
 유협의 몸은 며칠 굶기라도 한 사람처럼 야위어 있었다. 그리고 그의 얼굴은 거칠었고, 상당히 초췌한 모습이었다. 어떤 병이 있어서 그런 것이 아니었다. 아니, 병이라면 병이었다. 그 어떤 명의라도 고칠 수 없는… 마음의 병…….
 그의 얼굴은 내일 죽어도 전혀 이상할 것이 없어 보이는 70대 노인의 그것이었다. 유협의 그런 몰골을 볼 때마다 유세희는 강하게 밀려오는 슬픔 때문에 흘러내리려는 눈물을 참느라 언제나 애를 써야만 했다.
 5년, 불과 5년 전이었다. 그 당시만 하더라도 자신과 같이 있는 모습을 보고 사람들은 막내 동생이 아니냐는 농을 건네곤 했었다. 또한, 그것이 전혀 어색하지 않을 정도로, 나이에 비해 젊고 당당했던 아비의 풍모였었다.
 “저희 가문을 위해서 예까지 와 주셔서, 정말 뭐라고 감사를 드려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제가 원해서 그런 것입니다.”
 “그런데 어떤 무공을 익히셨는지, 여쭤도 되겠습니까?”
 순간 유세희는 아차 하는 표정이었다. 상대를 대함에 있어 어떤 주의사항(?) 같은 것을 아비에게 말해주지 않았던 것이다. 그런데 다행히 천호는 그녀와의 약속을 그런대로 잘 이행해 주었다.
 “뭐, 이것저것 잡다하게 익혔다고 생각하십시오.”
 더 이상 묻지 말라는 뜻이 강하게 내포되어 있는 말이겠지만, 그래도 ‘네가 알 필요 없다’라는 식의 말보다는 훨씬 부드러운 소리였다.
 “아, 그렇습니까? 그런데 귀인께서 상대하셔야 할 남북쌍괴라는 인물들이 워낙 강한 고수들이라 좀 걱정이 되고… 남괴는 몰라도, 제가 예전에 북괴라 불리는 인물하고는 마주친 적이 있었는데…….”
 한 10년 전, 마교와의 정사대전이 발발하기 전에 유협과 북괴는 한 번 대결을 펼칠 기회가 있었다. 그러나 그 대결은 끝까지 가지 않았다. 싸움 도중에 서로가 합의해서 나중에 확실한 승부를 가리자는 식으로 결정지었던 것이다. 어떤 필요에 의해 하는 대결이 아니라 단지 무인 간의 호승심 때문에 펼쳐진 대결이었다. 당시 월영문은 복건성 이북 지역에서 최고의 성세를 구가하던 문파 중의 하나였다. 그런 월영문의 문주 입장에서 일개 낭인(浪人) 고수와의 싸움에서 패하기라도 한다면 그 타격은 문파 전체에 미치는 것이었다.
 북괴가 그 싸움을 회피했다는 것이 더 맞는 소리였다. 유협의 입장은 ‘자신은 있는데, 만에 하나라도……’라는 생각이었고, 북괴는 그냥, 자신이 없었던 것이다.
 뭔가 상대에게 도움이 되지 않겠는가 하는 마음에서 나온 소리였지만, 천호는 간단하게 유협의 말을 막는다.
 “그들에 대한 얘기를 듣고 싶은 생각은 전혀 없습니다. 그리고 어차피 듣자마자 바로 잊어 먹을 내용입니다.”
 “…….”
 그 후 몇 마디 말을 더 주고받았지만, 전혀 대수로울 게 없는 내용들이었다. 게다가 분위기도 왠지 어색했다. 결국, 유협은 대충 정리하고 천호를 돌려보냈다.
 “혈쾌검을 개 패듯… 음, 어쨌든 그것은 확실한 것이냐?”
 “제 눈으로 혈쾌검의 눈에 난 상처를 똑똑히 봤어요. 그리고 산적들이 우리에게 그런 거짓말을 할 리도 없고… 앞뒤 정황으로 미루어 볼 때, 분명해요.”
 “거참?”
 유협은 도무지 모르겠다는 표정이었다.
 “강호에 갓 출두한 신진고수라면 그러려니 하겠는데, 과거에 무림에 몸담았다니…….”
 “아버님도 짐작조차 안 가시나요?”
 “내 지식으로는, 저 정도 나이에 혈쾌검보다 확실하게 강하다고 할 수 있는 고수는 단 두 명이란다.”
 “아하!”
 유세희도 뭔가 알겠다는 표정이었다.
 “사천에서 활동 중인 천룡대협이야 당연히 아니겠고… 설마, 마교의 부교주인…?”
 뭔가를 느꼈는지 말을 하던 도중, 그녀의 눈이 갑자기 휘둥그레졌다.
 “그 인물도 절대 아니다. 내가 그를 직접 본 적이야 없지만, 정사대전 기간 중 그의 대충의 외양(外樣)에 관한 것은 웬만한 무림인이라면 다 아는 사실이었단다.”
 “그런가요?”
 “마교에 있는 그 자는 상당히 잘생겼다고 들었다. 천호라는 사람은 그저 그런 얼굴 아니냐? 게다가 결정적으로, 저렇게 키가 크지 않아. 보통 키라고 알고 있다.”
 천호의 키는 바로 눈에 띌 정도로 훤칠했다. 그녀가 보기에, 최소한 6척(약 180cm)이 넘을 것은 확실했다.
 “참, 지금 갑자기 떠오른 건데 저 사람… 살수였다는 느낌이 들었어요.”
 “살수(殺手)?”
 유협은 약간은 수긍이 간다는 눈빛이었다.
 ‘살수라? 그렇다면 내가 모르는 것이 당연할 수도…. 하나, 정면대결에서 혈쾌검 정도의 고수를 그렇게 압도할 만한 살수란 것이…….’
 
 “웬일인가? 급한 일이라도 생겼나?”
 그날 밤, 유세희는 천호가 머무르는 별채를 찾았다. 야심하다고까지는 할 수 없었지만 제법 늦은 시각이었다.
 “아니, 뭐… 불편하신 거라도 없나 해서…….”
 왠지, 쑥스러운 듯한 그녀의 음성이었다. 특별한 용무가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일종의 불안감이었다. 내일 일어났을 때, 혹시 이 사람이 어디론가 사라지지나 않을까 하는 그런… 어떻게 보면, 다소 유아적인 생각이었다. 그러나 그 정도로 지금의 상황이 그녀에게는 절박했다.
 그런데 그 시각, 불이 밝혀진 별채의 방을 멀리서 응시하는 눈이 있었다.
 ‘도대체 이 시각에 사매는 왜 저자와…?’
 왕덕진이었다. 그의 눈빛은 상당히 불안한 감정을 비치고 있었다.
 그가 이곳에 입문한 것은 10년이 훨씬 더 된 일이었다. 당연히 유세희를 어렸을 적부터 쭉 지켜보며 자랐다. 오랜 기간 동안 같이 생활하면서, 그녀 정도의 미모에 남자로서 묘한 감정이 생기지 않는다면 오히려 그것이 이상할 것이다.
 유세희가 점점 여인으로서 성숙해가면서, 왕덕진의 가슴속에는 그녀에 대한 연모의 정이 새록새록 자라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그의 사부가 저 지경이 된 이후, 그런 감정 따위를 내색하거나 행동에 옮길 수는 없었다. 그저 월영문의 재건을 위해 피나는 노력을 하는 것이 최선이었다.
 유세희 그녀도 이런 왕덕진의 마음을 전혀 모르지는 않았다. 그러나 그녀의 진심이 어떠냐를 떠나, 그런 남녀 간의 사랑 따위를 논하기에는 가문의 상황이 너무나 절박했다.
 왕덕진의 뇌리에는 며칠 전 보았던 광경이 생생하게 떠오르고 있었다. 천호의 모옥에서 쫓겨나서 처량하게 밖에서 홀로 술과 음식을 먹던 날. 그리고 자신도 모르게 깜빡 잠이 들었고, 깨어 보니 다음 날 아침이었다.
 “사매! 지금 뭐 하는 것이냐?”
 “응? 아, 사형. 응, 근데 지금…….”
 유세희는 잠이 덜 깼는지, 몇 번 눈을 깜빡이더니 간신히 눈을 뜨며 대답했다.
 “지금 뭐하는 거냐? 어서 일어나거라!”
 거의 호통에 가까운 왕덕진의 음성이었다. 그제야 유세희는 정신이 번쩍 드는 것 같았다.
 ‘응? 사형이 왜 저러지? 가만, 여기는…? 그래, 그 사람하고 술을 먹다가… 근데 내가 언제 잠들었지? 응? 그런데……?’
 그녀의 목 부위에 뭔가 푹신한 감촉이 느껴졌다. 그리고 왠지 바로 옆에 뭔가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신도 모르게 옆을 돌아본 그녀는.
 “어머! 이게 뭐야?”
 갑자기 그녀는 기겁을 하며 자리에서 튕겨지듯 몸을 일으켰다. 당연히 모옥 안이었는데, 천호의 침상 위에서 자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것까지도 충분히 그럴 수 있는 일이었는데, 결정적으로.
 ‘맙소사! 내가 밤새 저 사람하고 한 침상에서, 그것도…….’
 그녀는 아예 천호의 팔베개를 베고 잠이 들었던 것이다.
 그리고 잠시 후, 천호도 잠에서 깨어났는데 그는 자신이 죽였다는 세희라는 소녀에 대해 했던 이야기는 전혀 기억하지 못했다.
 ‘그때 잠에서 깨기 전의 사매의 얼굴! 낯선 남자의 곁에서 자면서 그런 평온한 표정이라니…….’
 “아니다! 내가 이런 치졸한 생각을 하다니. 저자는 최소한 사매에게 흑심이 있는 인물은 아니다. 게다가 본문을 구할 은인이 될지도 모르는데…….”
 왕덕진은 상념을 떨치려는 듯, 고개를 좌우로 세차게 흔들어댔다. 그리고는 자신의 처소를 향해 발걸음을 돌렸다.
 “…?”
 천호는 묘한 눈길로 유세희를 바라보고 있었다. 비록 며칠 안 됐지만, 지금껏 봐온 그녀의 옷차림과는 너무나 차이가 났던 것이다.
 지금까지는 무복(武服)이라고도 볼 수 있는 경장의 옷을 입고 있었는데 천호의 눈앞에 있는 그녀는 전혀 딴판이었다. 그리 화려하다고까지는 할 수 없었지만, 연회 따위에 참석해도 될 정도로 화사한 옷차림이었다. 아무런 치장도 없이 무복만 입었을 때도 그녀의 미모는 가려지지 않았다. 그런데 이렇게 치장을 해 놓고 보니, 그녀의 화사한 미모가 훨씬 돋보이는 듯했다.
 “아, 제가 원래 이런 옷차림을 좋아해요.”
 상대의 태도가 무엇을 뜻하는지 눈치챘는지, 그녀는 변명에 가까운 말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상대의 태도가 조금은 묘했다.
 “원래부터?”
 “예, 어렸을 적부터 워낙 이런 옷을 많이 입어서 그런 것 같아요.”
 “무공에는 별로 관심이 없었나?”
 “그건 아닌데, 아버님이 무공을 배워서 뭐하느냐는 식으로 저를 대하셨거든요. 편한 옷을 입고 무공이라도 배워 보려고 하면, 바로 아버님의 꾸중이 내려졌고… 그래서 다시 이런 옷으로 갈아입고…….”
 유세희가 어렸을 때라면, 한창 마교가 기승을 부릴 때였다. ‘마교 천하’라고 불릴 만한 시기가 3년 정도 지속되었었다.
 이곳이라고 예외는 아니었다. 그리고 그 기간 동안, 마교나 그에 복속된 문파에 의해 정도 계열의 문파가 상당히 억압받았다. 그 와중에 젊은 여인들이 당하는 수모도 제법 심했었다. 더구나 그 용모가 예쁘다면 더욱 그러했다. 그런데 한 가지 묘한 것은, 무공을 모르는 여인에 대한 횡포랄까, 그런 것은 ‘전혀’라고 해도 될 정도로 거의 없었다. 당시 여론 따위를 의식해서였는지, 마교에서는 일반인에 대한 어떠한 횡포도 용납하지 않는다는 식의 정책을 펼쳤는데, 그와 맞물려서 그렇게 된 것이었다.
 유협의 딸 유세희는 다섯 살 이전부터 주위 사람들로부터 ‘천하제일 미녀가 될 것이다’라는 찬사를 받으면서 자랄 정도였다. 그런 딸이 무공을 익혀 봤자 마교 천하가 된 이 땅에서 받을 대우는 뻔하다고 생각했는지, 아니면 마교에 의해 숨조차 못 쉬는 당시의 시대 상황을 비관해서였는지, 그는 자신의 딸이 절대로 무공을 익히지 못하도록 했다. 별것 아닌 그녀의 무공이지만 지금의 무공도 유협이 그 지경이 된 후, 그녀의 사형인 왕덕진에게 배운 것이었다.
 “일이 그렇게 된 것인가? 나는 내가 착각을 한 줄로 알았는데…….”
 유세희에게 대충의 사정을 들은 천호는 그녀에게 묘한 눈빛을 보내고 있었다.
 “그게 무슨 말이죠?”
 “좀 가까이 와 봐.”
 “예?”
 “가까이 오라고.”
 “아… 예.”
 그녀는 도무지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으며 자리에서 일어나 천천히 천호의 앞으로 다가갔다. 불안한 마음 따위는 생기지 않았다. 상대의 의도가 불순하지 않다는 것은 확실했다.
 “팔 좀 걷어봐. 아무 팔이나 하나만.”
 ‘…?’
 그녀는 더 이상의 질문은 하지 않고 순순히 상대가 하라는 대로 했다. 거의 어깨까지 맨살이 드러난 그녀의 가녀린 팔이 묘한 감흥을 불러일으킬 만도 하건만, 천호의 눈빛은 전혀 변함이 없었다.
 그는 그녀의 맨살을 이리저리 만지기 시작했다. 그녀는 흠칫하는 듯했지만, 반항 따위는 전혀 하지 않았다. 아무래도 혈이 있는 부위를 만지는 것 같았다.
 “이번엔 다리 좀 걷어봐. 역시 아무 다리나.”
 “예?”
 그녀는 이번에는 어쩔 수 없이 두 눈을 치켜뜨고 반항(?)을 할 수밖에 없었다. 세상에 다리를, 그것도 젊은 여인의 다리를 보겠다니?
 “싫으면 말고.”
 “아, 아니에요. 할게요.”
 분명히 ‘강제’는 아니었건만, 그녀는 황급히 자신의 치마를 걷어 올리기 시작했다. 마치 상대의 말을 들어주지 않으면, 지금이라도 당장 상대가 떠나기라도 하는 것처럼…….
 허벅지 위까지 드러난 그녀의 다리!
 단지 ‘매끈하다’라는 말로는 표현이 안 되는 하나의 예술품이었다. 당연히 좀 전에 보여주었던 팔하고는 비교도 안 되게 어떤 감흥이 일어야 하겠건만, 역시 천호의 눈빛은 변함이 없었다. 오히려 변하는 것은 유세희, 그녀의 눈빛이었다.
 상대의 의도가 불순하지 않은 것은 확실히 알았지만, 자신의 다리를 여기저기 쓰다듬는 남자의 손길에 묘한 감정이 느껴지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여인의 숙명이었다. 특히 천호의 손길이 허벅지 쪽으로 향할수록 더욱 그러했다. 허벅지 부분의 혈도 몇 개에 상대의 손길이 닿는 순간 그녀의 몸은 움찔거리며 낮은 신음성까지 흘러나오고 있었다.
 잠시 후, 작업(?)이 다 끝났는지 유세희는 다시 원래의 자리에 앉아 있었다. 그녀는 고개를 푹 숙이고 차마 상대의 얼굴을 똑바로 쳐다보지도 못하고 있었고, 얼굴은 귀밑까지 온통 붉게 물들어 있었다.
 “역시 착각이 아니었군.”
 “그게… 무슨 소리죠?”
 “네 재질이 제법 괜찮다고 느꼈는데, 실제로 지닌 무공이 너무 형편없어서 내가 착각한 줄 알았다는 소리야.”
 “예? 저의 재질이 좋다고요?”
 아까의 부끄러움은 다 잊은 듯, 그녀는 천호를 똑바로 응시하며 반문을 한다.
 “좋은 정도가 아니라 근골을 대충 살펴보니 상당히 뛰어나.”
 “예? 하지만…….”
 그녀는 도저히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
 “제가 무공을 깨치는 진도는 오히려 평범한 사람보다도 못하다고 느꼈는데…….”
 “네가 처음 무공을 배우기 시작한 게 언제라고?”
 “그때가… 열세 살이었어요.”
 “혹시 머리로는 이해가 되는데, 몸이 안 따라주지 않던가?”
 “그건… 확실히… 그런 것 같았어요.”
 ‘보석에 진흙을 잔뜩 묻혀 놓고 돌멩이 취급을 했는데, 이제 그 진흙이 굳어 진짜 돌멩이가 되어 가는 격이군. 뭐, 그런 것까지 내가 신경 쓸 필요는…….’
 
 “휴!”
 자신의 처소에 돌아온 유세희는 늦은 시각까지 잠을 청할 수 없었다. 천호라는 인물이 그녀의 뇌리에서 지워지지 않고 계속 떠오르고 있었다.
 ‘왠지 가슴 아픈 과거가 있는 것 같은 사람… 그런데…….’
 갑자기 며칠 전 그와 술을 함께 마셨던 날이 떠올랐다. 그녀는 내심 실소를 짓는다.
 ‘풋! 아무리 술이 취했다고 해도 남자와 동침이라니? 그런데… 아버님이 그렇게 되신 이후, 내가 그렇게 편안하게 잤던 적이 있었나?’
 그동안은 아무리 오래 잠을 자도―물론 이런 경우도 거의 없었다―다음 날이면 왠지 몸이 무겁고 개운하지 않았던 그녀였다. 무려 5년 동안을. 그런데 그날은 달랐다. 전날 과음으로 머리가 좀 아프고 속이 울렁거리기는 했지만, 정신만은 맑고 몸은 가뿐했던 것이다.
 ‘그리고 아까…….’
 자신의 허벅지를 만지던 상대의 손길이, 아니, 그 손길에 의한 느낌이 떠올랐는지 그녀의 얼굴은 약간 홍조를 띠었다.
 ‘그런데 정말 내가… 원래는 재질이 뛰어난 아이였을까?’
 그녀는 알 수 없었다. 천호라는 인물의 입에서 ‘상당히 재질이 뛰어나다’라는 말이 나왔다는 것 자체가 얼마나 엄청난 의미를 가지는지를… 또한 앞으로 일어날 사건의 모든 원인이 그것 하나 때문이라는 사실을…….
 
 @
 
 “무슨 일인가?”
 아침을 먹고 얼마 안 된 시각이었다. 별채를 찾아온 유세희의 표정은 뭔가 흥분돼 보였다.
 “저하고 같이 누구를 만나 주세요.”
 “…?”
 “천형방에서 소방주가 방문했는데, 남북쌍괴도 같이 왔어요.”
 
 월영문주의 집무실, 지금은 유협의 제자인 왕덕진이 그 업무를 거의 대행하다시피 하고 있었다. 물론 명목상의 소문주는 유세희였다. 그러나 모든 업무를 왕덕진과 의논해서 처결했는데, 그 의논이라는 것이 실질적으로, 왕덕진의 의견이 모두 받아들여진다고 보면 된다.
 ‘회의’와 ‘접대’라는 두 가지 목적에 사용되었음직한 정방형의 탁자에 4명의 인물이 앉아 있었다. 마치 편이라도 가르려고 했는지, 왕덕진이 나머지 세 명과 서로 마주 보고 앉아 있었다.
 방에 들어서자마자 제일 먼저 눈에 띄는 것은, 거의 눈싸움이라도 벌이고 있는 듯한 착각마저 불러일으킬 정도로 왕덕진과 서로 노려보다시피 하고 있던 청년이었다.
 “하하! 어서 오시오. 유 소저! 오랜만입니다.”
 마치 귀한 손님이라도 접대하는 양, 유세희가 들어서자마자 자리에서 벌떡 일어서서 거의 호들갑에 가까운 행동을 보이는 청년. 눈이 어지러울 정도로 형형색색의 수가 놓인 화려한 의상을 입고 있었다. 천형방의 소방주인 종리변(鍾離辨)이었다. 여기서 눈에 띈다는 것은 보통의 사람의 경우였고, 천호에게는 화려하게 치장하는 것을 좋아하는 애송이 청년 따위는 눈에 들어오지도 않는 듯했다.
 유세희와 함께 안으로 들어온 천호의 시선은 종리변과 함께 앉아 있던 두 명의 노인에게 집중되어 있었다. 그들 역시 복건 제일의 미녀라는 유세희는 안중에도 없다는 듯, 낯선 흑의인(黑衣人)에게 온통 시선이 쏠리고 있었다.
 “오랜만이군요.”
 유세희는 힐끗 한 번 종리변에게 눈길을 주더니 바로 자리에 앉았다. 당연히 왕덕진의 옆자리였는데, 공교롭게도 종리변과 정면으로 마주보는 위치였다.
 “이런, 며칠 후면 부군(夫君)이 될 사람에게 너무 쌀쌀맞구려.”
 한 차례 너스레를 떨며 다시 자리에 앉는 종리변이었다. 그런데 그의 표정이 약간의 의아함을 비치고 있었다.
 ‘어라? 아예 무시를…?’
 그와 유세희는 오늘까지 포함, 모두 네 번의 만남이 있었다. 만날 때마다 종리변은 그녀를 향해 이런 식으로 ‘부군’ 운운하며 조금은 음흉한 듯한 눈길을 보냈었고, 그때마다 유세희는 화를 내며 수치심에 몸을 떨었었다. 그런 모습이 오히려 더욱 그녀를 아름답게 보이게 했었다. 그래서 종리변은 아예, 그런 것들을 즐겼던 것이다.
 그런데 오늘 유세희는 확실히 달랐다. 무시하는 척이 아니라 웬 개가 짖느냐는 식으로 완전히 무시하고 있었다.
 ‘호! 무이산에서 데리고 온 혈쾌검을 확실히 믿는다는 것인가? 그런데 혈쾌검이 저렇게 젊었나?’
 종리변은 그때까지도 자리에 앉지 않고 우두커니 서 있는 흑의인을 의아한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그런 생각은 두 명의 노인들도 마찬가지인 듯했다.
 “유 소저! 누구인지 소개를 좀 해주겠나?”
 종리변과 같이 온 두 명의 노인들의 외모는 서로 상반되었다. 한 명은 무이산에 있는 산적들 저리 가라 할 정도로 우락부락했고, 나머지 한 명은 연약해 보일 정도로 청수한 용모였다. 그중 우락부락한 용모의 노인의 입에서 나온 소리였다. 남북쌍괴 중 ‘북괴’라고 불리는 인물이었다.
 “그러죠. 이분은……?”
 유세희는 뭔가 소개하려다 말고 묘한 눈길로 천호를 바라보았다. 그때까지도 천호는 자리에 앉지 않고 멀거니 서 있었던 것이다.
 “앉으…세요.”
 “흠… 그러지.”
 상당히 내키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잠시 뭔가 생각하는 듯하더니, 천호는 유세희의 옆에 있던 빈 의자에 털썩 소리를 내며 앉았다.
 ‘하여튼 이상한 식으로 사람을 불안하게 만든다니까.’
 천호가 자신의 옆자리에 앉은 것을 확인한 유세희가 종리변과 남북쌍괴를 향해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녀의 음성 역시 그 외모에 걸맞게 아름다웠다. 마치 천상에서 들려오는 선녀의 옥음처럼 아름답게 장내에 울려 퍼진다.
 “옆에 계신 분은 이번 비무를 위해 우리가 특별히 초빙한 고수입니다.”
 “…?”
 그런데 상당히 어색한 침묵이 장내에 흘렀다. 유세희의 말이 끝났으니, 바로 본인의 직접 소개가 나와야 정상이었다. 그래서 천형방의 인물들도 그것을 기다렸는데, 아무리 기다려도 당사자의 입에서는 아무런 말도 나오지 않고 있었던 것이다. 그들은 그저 천호의 얼굴만 멀뚱멀뚱 바라볼 뿐이었다. 오히려 당황한 것은 유세희였다.
 “저… 저기요.”
 “응? 왜?”
 “뭐라고 말을 좀…….”
 그제야 뭔가를 느낀 듯한 천호의 표정이었다.
 “아! 내 소개를 해야 하나?”
 “뭐, 그런… 거죠.”
 그가 이렇게까지 분위기 파악을 못 하는 인물은 아니었다. 잠시 다른 생각을 하느라 장내의 분위기를 전혀 못 느꼈던 것이다. 그가 이렇게 다른 상념에 빠진 것은 남북쌍괴를 한 번 훑어본 다음부터였다.
 “아, 나는…….”
 잠시 망설이는 듯하더니 잠시 후, 천호는 자신의 소개를 한다. 그런데 그 소개란 것이.
 “사냥꾼이오.”
 “…?”
 “설마… 짐승을 사냥하는 그… 진짜 ‘사냥꾼’이라는 소리는……?”
 어떤 비유적인 표현으로서 ‘사냥꾼’이라는 단어를 쓸 수도 있었다. 사람을 워낙 많이 죽여 그 잔인함을 강조하기 위해 ‘인간 사냥꾼’이라는 섬뜩한 별호를 쓰는 경우도 무림에는 간혹 있었다. 혹시 그런 의미가 아니겠느냐는 식의 생각이 드는 종리변이었는데, 상대는 그 의문에 대해 단호하게 결론을 내려 준다.
 “무이산에서 주로 호랑이를 사냥했소.”
 “혈쾌검이 아니라 사냥꾼? 정말 사냥꾼이란 말인가?”
 북괴가 어이없다는 얼굴로 유세희를 바라보았다. 그에 대한 그녀의 답변은 정말이지 당당했다.
 “맞아요, 사냥꾼입니다. 뭐, 잘못됐나요? 비무에 나설 인물의 조건에 사냥꾼은 안 된다는 조항은 없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만.”
 “허, 이거야… 허…허허, 하하하!”
 북괴는 광소를 터뜨렸다.
 “호랑이 사냥꾼이라! 호랑이를 잡을 정도면 힘은 확실히 세겠군. 하하! 어디서 힘센 놈 하나를 골라온 것인가? 아니지, 쓸 만한 외문기공 하나 정도는 익힌 친구겠군. 하하하!”
 북괴의 조롱 섞인 웃음은 그칠 줄을 몰랐고, 옆에 있던 종리변도 따라 웃고 있었다. 단지 청수한 용모의 남괴만이 묘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런데 천호의 표정이 상당히 묘했다. 아니, 태도가 묘하다고 할까? 상대의 노골적인 조롱에 당연히 화가 날 법도 하건만, 그의 눈빛은 처음 이곳에 들어왔을 때하고 전혀 차이가 없었다. 상대의 의도를 못 알아차릴 정도로 바보는 아닐 텐데.
 오히려 같이 있던 왕덕진이나 유세희의 안색이 굳어졌다. 그 이유에서는 차이가 났다. 왕덕진은 상대의 조롱에 대한 분노였고, 유세희는 혹시라도 천호가 어떤 돌출행위라도 하지 않을까 하는 우려였다.
 “후배들을 조롱하려고 예까지 오시지는 않았겠지요?”
 북괴의 웃음소리 뒤로 왕덕진의 격앙된 음성이 들렸다. 그러나 그 조롱은 더욱 심해진다.
 “아, 이런. 미안하게 됐네. 자네들이 절세의 고수를 모셔왔다기에 조금은 겁이 나서 정탐을 온 것이라네. 하하!”
 순간 유세희의 고함 소리가 장내를 울렸다.
 “비무의 세부사항에 대한 최종 합의를 시작하죠!”
 “…!”
 남북쌍괴조차 순간 움찔할 정도로 박력 있는 목소리였다. 특히 왕덕진의 경우는 아예 놀랍다는 눈치였다.
 ‘사매에게… 이런 기백이 있었나?’
 “험, 험, 소방주! 시작하지.”
 북괴가 뭔가 쑥스러운 듯한 표정으로 종리변을 향해 입을 열었다.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자신의 언행이 방정맞았다는 느낌이 조금은 들었던 것이다.
 “알겠습니다, 어르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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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음에 걸리시는 것이라도 있습니까?”
 종리변은 의아한 표정으로 남괴를 향해 물었다. 월영문을 방문하고 다시 자신들이 묵고 있는 객잔에 온 이후, 아니, 월영문을 나서면서부터 남괴의 표정은 계속 안 좋았었다.
 “정말 아까부터 안색이 계속 안 좋으신 것 같소이다.”
 함께 있던 북괴도 느끼는 것이었다.
 남괴는 굳은 표정으로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 흑의인 말이오. 사냥꾼이라는… 비무 상대로서 월영문에서 내세운 그자 말이오.”
 “그자가 왜…?”
 “왠지 상당한 주의를 요해야 할 인물 같소이다.”
 순간 북괴의 표정이 변했다. 그가 아는 남괴는 그 무공도 그렇지만 오히려 ‘심계(心計)’ 부분에서 더 뛰어난 인물이었다. 허튼소리를 하거나 틀린 추측을 하는 경우는 거의 없는 사람이었던 것이다.
 “어째서 그렇소이까?”
 “일단 유세희나 왕덕진이 바보천치는 아닐 게요.”
 “…?”
 “그들은 우리의 능력에 대해 충분히 알고 있소이다. 물론 5년 전의 능력이겠지만… 어쨌든 그들이 선택한 인물이오. 게다가 나는 유세희 그 아이의 눈빛에서 어떤 자신감을 읽을 수 있었소.”
 “너무 비약된 상상 아니오? 대충 그를 살폈지만, 내공을 익힌 어떤 흔적도 발견하지 못했소. 그저 그런대로 쓸 만한 외문기공이나 익히고 자기가 천하무적이라도 되는 양, 그렇게 착각하는 철부지나 다름없는 애송이가 아니겠소?”
 “그가 내공을 익힌 흔적은 나도 발견할 수 없었소이다. 허나…….”
 ‘나보다 아예 한 차원 높은 고수라면 내가 발견 못 할 수도 있겠지만, 그런 고수라면 천하를 오시할 고수다. 사냥꾼 따위의 일을 할 리는…. 게다가 그 나이에 그런 경지는 무조건 불가능이겠고. 그러나 그 눈빛은…….’
 한참을 아무 말 없이 뭔가 생각에 잠겼던 남괴를 향해 북괴가 답답하다는 투로 말을 했다.
 “뭐가 또 문제란 소리요?”
 “아까 북괴께서 월영문을 조롱하지 않았소?”
 “아, 좀… 그랬소만.”
 “그때 그자의 눈빛을 보았소?”
 “…?”
 “그자의 입장에서는 당연히 화가 치밀어 올라야 정상인데, 그 자는 그저 묵묵하게 있지 않았소이까?”
 “그게 무슨 대수요? 그거야 장소가 장소인지라 그런 것 아니겠소? 물론 자신의 감정을 내색하지 않는 것을 보니, 제법 수양은 됐구나 라는 생각은 나도 확실히 드는구려.”
 “그게 아니요.”
 “아니라고요?”
 “내가 확신컨대, 그 자는 자신의 감정을 내색하지 않은 것이 절대 아니오.”
 “그러면……?”
 “정말로 전혀 화가 나지 않았소이다. 감정의 기복이 전혀 없었단 말이오.”
 “…….”
 북괴도 조금은 심각한 표정으로 잠시 뭔가 생각에 잠기는 듯했지만, 바로 원래의 표정으로 돌아왔다.
 “글쎄 그게 그렇게 중요한 것인지… 보통 사람으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특이한 성격의 소유자 아니겠소? 나 역시 살면서 도저히 이해가 안 되는 괴팍한 성격의 소유자를 제법 만났소이다. 그러나 그것과 무공과는 아무런 연관도 없는 것 아니겠소? 그저 이해하기 힘들 정도로 무신경한 듯 하오만.”
 남괴도 상대의 말에 어느 정도는 수긍한다는 표정이었다. 그러나 북괴처럼 그 표정이 완전히 풀리지는 않았다.
 ‘그래, 좀 특이한 인물일 뿐인데… 거참, 이상하게… 불안하군.’
 
 “당신도 보시는 게 좋을 것 같아서…….”
 유세희는 쭈뼛거리면서 탁자에 뭔가를 내려놓았다. 이번 비무에 대해 최종적으로 합의한 약정서였다. 이런 쓸데없는 것을 내가 왜 보느냐는 식으로 나올 것이 예상되었는지, 뭔가 주눅이라도 든 것 같은 그녀의 표정이었다. 그런데 천호는 의외로 그녀를 반갑게 맞이하고 있었다.
 “아, 잘 왔다! 안 그래도 좀 궁금한 것이 있었는데.”
 “아! 그런가요? 그런데 뭐가 궁금하신지?”
 잠시 환해졌던 그녀의 표정이 조금은 애매하게 변한다.
 ‘저 사람이 궁금해할 일이란 게 도대체……?’
 “아까 본 그 노인네 둘이 남북쌍괴일 텐데, 좀 그럴듯한 용모의 노인이 어느 쪽인가?”
 조금은 애매한 질문일 수도 있었지만, 생각하고 자시고 할 것도 없이 바로 대답이 나왔다.
 “아마 남괴를 말씀하시는 것 같네요.”
 “원래 둘 간에 격차가 있었나?”
 “예, 맞아요. 제가 알기로도 큰 차이는 아닌데, 남괴가 조금은 더 강하다고 들었어요. 예전에 복건성 최고의 고수를 굳이 꼽으라고 하면, 복건쌍검이니 남북쌍검이니 해서 둘을 꼽았는데, 그중에 한 명이… 남괴였어요.”
 갑자기 그녀는 음성에 힘이 없어지더니 표정이 착 가라앉았다. 자신이 말한 ‘쌍검’ 중에 한 명이, 지금은 몸조차 제대로 못 가누고 있는, 그녀의 아비인 유협이었던 것이다.
 “당연히 그렇겠군. 그런데 여기 오면서 너에게 들은 기억으로는… 혈쾌검이란 자가 쌍괴 중 한 명보다는 강하다는 식으로 말한 것 같은데, 맞나?”
 여기 오는 동안, 그녀는 굳이 들을 필요 없다는 식으로 나오는 천호에게 거의 반강제로 남북쌍괴에 관한 이야기를 죄다 늘어놓았었다.
 “제가 알기론… 뭐, 무림의 소문이 틀린 경우도 많겠지만, 어쨌든 혈쾌검이 최소한 동수(同手)는 확실하다고 알고 있어요. 혈쾌검 하면 한때, 마교 절강지부의 부지부장까지 한 인물이니…….”
 마교가 천하를 지배하던 당시, 지부장은 마교에서 파견된 고수였지만 부지부장은 그 지역에서 가장 강한 고수가 맡았다. 비록 마교에 반대하지 않고 머리를 숙인 고수들 중에서였지만, 절강성 최고의 고수로서 거의 공인받았다는 소리다.
 혈쾌검이나 남북쌍괴가 천하를 통틀어서까지 그렇게 대단한 고수는 아니었다. 이곳 복건도 비슷하지만 절강의 최고수라고 해도, 하남이나 사천 같은 곳에 가면 그리 대단할 것이 없었다. 여기와 인접한 안휘에 있는 남궁세가만 해도 혈쾌검 정도의 그러니까, 절강이나 복건 같은 변방 지역에서 최고수라 꼽힐 정도의 실력을 갖춘 무인이 최소한 열 명은 훨씬 넘었다. 그렇다고 중원과 좀 떨어진 변방이라고 해서 무조건 다 그렇지는 않았다. 마교의 본거지가 있는 감숙의 경우는 그 사정이 완전히 틀렸다.
 그러나 대부분의 경우, 중원이라는 곳에 위치한 문파나 그에 속한 고수와 변방이라고 불리는 지역의 문파와 고수들 간에는 그 양적인 면을 떠나, 질적으로 엄청난 차이가 있었다.
 “그렇다면 소문이 완전히 틀렸단 소린가?”
 “그게 무슨 말이죠?”
 “내가 보기엔, 북괴보다는 남괴가 훨씬 강해.”
 “원래 소문도…….”
 “아, 그게 문제가 아니라 중요한 것은, 북괴가 혈쾌검보다 강하다는 것이지. 그것도 훨씬!”
 “예? 훠, 훨씬요?”
 “그래, 훨씬! 아마 둘이 싸우면 백초지적(百秒之敵)이나 간신히 될까?”
 순간 유세희의 얼굴은 아예 사색이 되었다.
 “너, 왜 그러니?”
 “그, 그러면…….”
 그녀의 음성은 떨려서 제대로 나오지도 못하고 있었다.
 “크, 큰일이잖아요. 북괴가 그렇게 강하면… 남괴는 훨씬… 더 강하다면서요.”
 온몸을 부르르 떨면서 겁에라도 질린 눈으로 천호를 바라보는 그녀의 모습! 어떻게 표현해야 할까? 상황에 어울리지 않는 표현이겠지만, 아름다웠다. 남자라면 자신의 목숨을 걸고서라도 감싸 주고 싶을 정도로…….
 “이런, 이런! 내 말을 뭔가 오해했나 보구나.”
 천호는 웃음 띤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나 그녀의 곁으로 다가갔다. 그때까지도 그녀의 몸은 연신 떨리고 있었다. 천호는 그녀의 양어깨를 두 손으로 부드럽게 감싸 안았다. 약간 움찔거리던 그녀는 천천히 고개를 들어 상대의 얼굴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표정이 조금은 풀린 듯했다.
 “당신… 자신 있겠죠? 아무리 그들이 강해도… 이길 수 있는 거죠?”
 뭔가에 홀리기라도 한 것 같은 그녀의 음성이었다. 천호는 그녀를 내려다보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래, 자신 있다. 날 믿어라.”
 그런데 천호의 얼굴에 비록 순간적이었지만, 처음으로 당황이라는 개념의 표정이 떠올랐다.
 “흑! 고마워요. 정말 고마워요.”
 갑자기 눈물을 보이는가 싶더니, 그녀가 천호의 품에 덥석 안겨 왔던 것이다.
 ‘이거야 원!’
 천하절색의 미녀를 안은 남자의 눈빛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난감한 천호의 표정이었다. 그런데 점점 그 눈빛이 묘하게 변해가고 있었다. 뭔가 아련한 추억이라도 떠올리는 듯한… 그녀의 머리칼에서 나는 향취가 그렇게 만든 것이었다.
 ‘이 냄새! 여자들은 원래 이런가? 이 아이의 머리칼에서 나는 향기도 그녀의 그것과…….’
 그들의 어색한 포옹은 잠시 계속되었다. 천호는 뭔가 생각에 잠긴 표정으로 계속 그러고 있었는데, 오히려 당황스러운 것은 유세희 그녀였다. 먼저 정신이 들었다고나 할까?
 ‘내가 지금… 미쳤나봐!’
 그러나 그녀는 바로 몸을 못 빼고 있었다. 일종의 쑥스러움이었다. 어린아이가 아픔을 느껴 울고불고 난리를 친다고 했을 때, 그 아픔이 갑자기 사라진다고 해서, 바로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울음을 뚝 그치지는 않는다. 그것과 비슷한 맥락일까? 그런데 그것보다 더 큰 이유가 있었다.
 ‘남자의 가슴이란 게… 이토록 포근할 줄이야.’
 천호의 가슴에 파묻힌 채,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그 감촉을 즐기고 있었다. 그러나 마냥 그러고 있을 수는 없는 법. 그녀가 먼저 이성을 찾았다.
 “죄송해요. 추한 꼴을 보여서…….”
 황급히 몸을 빼고 뒤로 물러서는 그녀의 얼굴은 귀밑까지 발갛게 물들어 있었다. 거기에 맞춰 천호도 제정신으로 돌아온 듯했다.
 ‘내가 지금, 무슨…….’
 도무지 이해가 안 되는 모습이었는데, 그의 눈은 거의 짜증스럽다는 그것이었다. 고개를 푹 숙이고 있던 유세희의 눈에는 당연히 안 보였다.
 ‘하긴 그때 이후, 내가 생각해도… 나란 놈, 정말 많이 변하기는…….’
 속으로 뜻 모를 소리를 중얼거리더니, 그의 표정은 원래의 그 무심한 눈빛으로 돌아갔다.
 “뭐, 다른 할 말이 또 있나?”
 “아니, 없어요. 그럼…….”
 분위기가 영 어색했던지 바로 나가려던 그녀가 갑자기 멈칫했다. 꼭 해주고 싶었던 말이 갑자기 생각나서였다.
 “참, 그리고 아까 정말 고마웠어요.”
 “아까?”
 천호는 웬 뚱딴지같은 소리냐는 표정이었다.
 “그러니까… 아까 천형방하고 회담을 할 때, 잘 참아 주셔서 고맙다고요.”
 그런데 천호는 더욱 모르겠다는 표정을 짓는다.
 “참아? 뭘? 난 그런 적 없는데?”
 “아니, 그게…….”
 유세희는 좀 전까지의 부끄러운 표정은 없어지고, 대신 뭔가 답답하다는 표정이었다.
 “그 북괴란 사람이 우리를 그러니까, 당신을 조롱했잖아요.”
 “뭐… 그런 것 같군.”
 “그런데도 화를 참고, 내색을 안 하셨으니… 그래서 무사히 대화가 끝났으니…….”
 순간 천호는 실소를 짓는다.
 “풋! 난 또 뭐라고. 무슨 말인지는 이제 대충 알겠는데, 고마워할 필요는 전혀 없다. 난 그런 적이 전혀 없으니.”
 “그게 무슨 말이죠?”
 “화난 적이 없다는 소리야. 그러니 화를 참은 적도 당연히 없지 않겠니?”
 유세희는 도무지 모르겠다는 표정이었다.
 “상대방이 그렇게 노골적으로 조롱을 했는데 화가 전혀… 안 나셨다고요?”
 “세희야!”
 “예?”
 마치 자상한 아비가 딸을 부르는 듯한 천호의 음성이었다. 묘하게도 그녀는 그 순간 어떤 소름이 돋는 것을 느낀다. 물론 나쁜 의미에서의 소름은 아니었다.
 천호는 한술 더 떠, 다시 한 번 천천히 그녀의 곁으로 다가가더니 그녀의 머리를 손으로 쓰다듬고 있었다.
 ‘…?’
 그녀는 순간적으로, 자신을 예전에 그가 죽였다던 그 소녀와 착각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그리고 들리는 상대의 음성. 그녀의 착각이었을까? 자상한 아비가 아직 철이 안 난 어린 딸에게 하는 그것과 다름없었다.
 “하룻강아지가 자기 앞에서 짖어 댄다고 해서, 그걸 가지고 화를 내는 호랑이는 없단다.”
 
 
 (다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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