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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칼 1권

2015.09.18 조회 775 추천 13


 # 글 소개
 
 조선시대 명종 임금 때에 활약했던 임꺽정의 이야기는 워낙에 유명한 것이라 따로 할 말이 없다. 그래서 임꺽정이 토포사(討捕使) 남치근에게 잡혀 죽은 그 사건의 뒷이야기에 관심을 가져 보았다.
 이 글은 조선조 13대 왕인 명종 시대를 무대로 해서 당시의 악명 높은 권신이었던 윤원형과 요부 정난정 그리고 명재상 정유길과 남치근, 토정 이지함, 보우선사 등 실존했던 역사적인 인물과 사건들이 얽히고 풀려가는 이야기이다.
 그렇다고 본격 역사소설은 아니고, 적당한 허구와 가상의 사건이 그 시대상 속에 녹아들어가 있는, 말 그대로 <소설>이다. 조선시대를 배경으로 한 시대활극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임꺽정이 죽지 않고 살아서 숨어 있었던 것이라면? 하는 막연한 상상에서 시작한 이 이야기는 그에게 한을 품은 주인공 이장생(李長生)이 칼 한 자루를 들고 세상 끝까지 그의 존재를 찾아다닌다는 게 큰 줄거리이다. 그것에 역사 속 인물들과 다양한 관계와 정서로 얽히면서 가지가 뻗고 잎이 돋아난다. 그 과정에 사랑과 음모, 배신, 애증이 있다는 것은 여타 소설들과 다를 바가 없다.
 소설 속에서 당시의 시대상과 함께 눈부시게 활약하는 이장생의 삶을 지켜보는 것도 재미있을 것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다.
 
 
 # 서(序)
 
 사람은 죽어도 원한은 죽지 않는다.
 
 # 제1장 이장생(李長生)의 한(恨)
 
 사내는 허공에 대하여 크나큰 적의를 가지고 있는 것 같았다. 그렇기에 점점 무심해져가고 있는 내면이 바람소리 같은 중얼거림을 칼끝을 통해 흘려보내고 있는 것이리라.
 죽는다는 것과 죽어가고 있다는 것과의 사이에는 하늘과 땅 만큼이나 큰 차이가 있다. 그러나 죽인다는 것에는 아무런 차이도 없다. 하늘이든 땅이든 죽인다는 결의와 행동 앞에서는 한 가지일 뿐이다.
 그러므로 지독한 증오와 살의를 가지고 있는 자에게 세상은 오직 하나만 존재한다. 바로 그놈. 내가 죽여야 할 그놈만이 내가 가지고 있는 세상의 모든 것이다.
 지금 사내가 온통 두르고 있는 살기는 바로 그런 것이었다.
 지독한 집념과 고집으로 허공을 대하고 있는 것이다.
 치켜세워 들고 있는 칼이 새파란 요기를 뿌리며 번쩍였다. 바람도 그것 앞에서 두려워 떨며 멀어진다.
 해봐. 너의 집념과 고집으로 할 수 있는 일이 과연 얼마나 될까? 나는 그게 궁금해. 너의 분노가 대체 무얼 할 수 있다는 거지? 네 자신을 돌아봐. 너는 아무 것도 아니야.
 저만큼 달려간 바람이 멈추어 서서 돌아보며 그렇게 비웃는 소리가 들렸다. 사내의 짙은 눈썹이 꿈틀거렸다.
 머리 위에 붉은 단풍잎을 우산처럼 펼쳐놓고 있는 커다란 나무가 흔들린다.
 
 -살기로 너의 기운을 누르리라.
 
 그 자와 대면한 뒤 사내가 품었던 첫 번째 결의였다.
 그 자의 거대한 기운을 이길 수 없어서 절망했기에 생겨난 오기 같은 것이다.
 너의 기운이 태산 같다면 나는 살기로 그것을 이기고 말 테다.
 그리고 또 하나.
 그 자의 바윗덩이처럼 굳세고, 커다란 파도처럼 무서웠던 힘. 그 믿을 수 없는 힘 앞에서 느꼈던 두려움.
 사내는 그때의 두려움을 결코 잊을 수 없었다. 그래서 이처럼 허공을 향해 칼을 치켜세우고 있는 것이다. 그 두려움을 떨쳐버리고, 베어버리기를 오직 소망하면서.
 사내는 스스로 비결을 찾아냈다. 그 자의 큰 파도 같은 힘을 베어버릴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을 찾아낸 것이다.
 빠름.
 오직 그것만이 세상의 모든 걸 베어버릴 수 있는 무서움이라고 사내는 굳게 믿었다. 그래서 빠르면 빠를수록 내 칼의 무서움은 배가될 것이라는 신념 하나를 붙들고 벌써 삼 년째 이렇게 홀로 짐승이 되어 몸부림치고 있는 중이었다.
 머리 위에서 붉은 나뭇잎 한 장이 떨어져 내렸다.
 좌로, 우로 비틀리고 방향성 없이 허공을 흔들어대며 떨어진다.
 그 순간 사내의 칼이 번쩍, 하고 뻗어나갔다. 번갯불이 어둠을 가르듯이, 소리없는 바람 한 줄기가 풀잎을 흔들 듯이, 그리고 맹렬한 화살이 표적을 꿰뚫는 것처럼.
 찰나의 순간에 사내는 칼과 한 몸이 되어 낙엽을 뚫고 지나갔다. 이쪽에서 저쪽으로 움직여간 순간은 세상의 시간이 멈춘 것 같았다. 아니, 번갯불처럼 빠르게 감겨버린 것 같다.
 한 장의 낙엽이 몇 조각의 나뭇잎이 되어 허공에 흩어졌다. 사내의 발아래 나뒹군다.
 하나, 둘, 셋… 여덟.
 여덟 조각이었다.
 그것을 눈으로 세어본 사내가 “으음.” 하고 신음을 흘렸다. 만족하지 못하는 것이다.
 칼의 빠름과 정확함은 이 세상에서 그를 따라올 자가 없을 것 같았다. 그러나 사내는 만족하지 못했다.
 수많은 인생의 길처럼 수많은 검법의 길이 있지만 사내가 그 중에서 택한 건 오직 빠름 하나였다. 그리고 그것의 정점에 올라선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아니었다. 그렇지 못하다. 칼을 쥐고 있는 사내 스스로가 아니라고 부정했기 때문이다.
 그는 더 빠른 칼을, 더 정확하고 힘 있는 칼을 원했다. 그렇기에 만족할 수 없다.
 사내는 눈앞에 떨어지는 나뭇잎 한 장이 땅에 닿기 전에 서른 두 조각으로 잘라버릴 수 있는 칼을 원하고 있었다. 그래서 지난 삼 년 동안 제 삶을 버렸다. 그리고 그 대가로 지금 얻은 건 여덟 조각의 나뭇잎이었다.
 ‘내 살기는 그놈의 기운을 이길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내 칼은 아직 아니다.’
 한참동안 분한 듯 나뭇잎 조각을 노려보던 사내가 칼을 거두었다.
 네 꼴을 좀 봐. 이제는 짐승이나 다름없게 되었구나. 너는 어디 있지?
 조각난 나뭇잎이, 그 나무가, 숲이 그리고 커다란 산이 그렇게 비웃었다. 깔깔거리고 웃는다.
 ‘뭘?’
 사내가 신경질적으로 고개를 들고 머리 위에 우뚝 솟아 있는 거대한 산봉우리를 베어버릴 듯이 노려보았다.
 
 ***
 
 이장생(李長生).
 칼 한 자루를 지닌 그가 스물다섯 살의 나이를 버리고 이 산에 들어온 건 삼 년 전이었다. 여름이 막바지에 이르렀을 무렵이다.
 그때의 그는 곱상하게 생긴 청년이었다. 강단 있어 보이는 체구에 눈빛이 매서웠지만 그저 잘 생긴 청년이었을 뿐이다. 단지 오만한 기운이 넘쳐났다는 게 남달랐다.
 그의 오만한 기운은 자기 자신에 대한 자부심이었다. 어디에 학식 있는 선비가 있고, 어디에 솜씨 좋은 예인(藝人)이 있으며, 어디에 나와 맞설 왈자(曰子)며 건달이 있단 말이냐? 하는 자부심이다.
 그 자부심이 그에게 지독한 오기와 독기를 품게 했다. 그래서 풀이 죽는 대신 기가 더욱 펄펄 살아 이 산으로 들어왔던 것이다.
 그리고 삼 년.
 미친 것처럼 살았다. 이 산 봉우리와 저 산 봉우리를 하루에도 몇 차례씩 뛰어다니고, 노루를 쫓아 골짜기를 바람처럼 달려갔다. 멧돼지에게 받힐 뻔한 위기를 넘긴 건 헤아릴 수도 없고, 호랑이와 조우한 적도 여러 번이었다.
 그때마다 그는 죽지 않고 살아났다. 처음에는 운이 좋아서, 다음에는 발이 빨라서 그리고 언제부터인가는 당연히 그렇게 되었다.
 좋아하던 학문도, 서예와 그림 그리기도 다 잊었다. 오직 한 가지, 빠른 칼을 갖기 위해 스스로의 방법으로 죽을 만큼 연마하고 또 연마했을 뿐이다.
 스승은 없어도 좋았다. 가르침은 제 안에서 활화산처럼 타오르는 적개심으로 충분했다. 그놈에 대한 증오와 제 자신에 대한 한탄이야말로 넘치도록 충분한 스승이었으니까.
 처음 그에게 수벽(手癖)치기라고도 하는 수박(手搏)과 격검(擊劍)의 도리를 가르쳐주었던 노인. 곽노(郭老)라고 하던 그 뜨내기 노인이 없었다면 오늘날 이장생이 이처럼 저만의 검법을 찾아 미친놈처럼 온 산을 밤낮없이 뛰어다니지 않았을 것이다.
 
 열두 살 되던 해 겨울에 장사치들 속에 섞여 마을에 들어온 곽노는 이장생을 예사 아이들과 다르게 보았다. 아이가 관내의 진사 이춘명(李春明)의 서자라는 걸 알고서는 더욱 관심을 보였던 것이다.
 이장생이 또래에 비해 체구가 단단하고 활달한데다가 타고난 재능까지 있다는 걸 안 곽노는 그해 겨울 혼자서 마을에 남아 아이를 가르쳤다. 이장생은 곧 수박과 격검의 재미에 흠뻑 빠져 글 읽은 것도 폐하고 종일 곽노와 붙어살았다.
 봄이 오자 길을 떠나기 전 곽노가 말했다.
 “얘, 아무리 힘이 세고 주먹과 손바닥이 매서워도 빠르고 정확하지 못하면 다 소용없느니라. 칼도 마찬가지지. 그것이 아무리 예리하고 그것을 다루는 손이 아무리 훌륭해도 굼벵이처럼 느려서야 무 하나 제대로 자르겠느냐?”
 그 말이 어린 이장생의 머릿속에 들어와 박혔다.
 “함부로 힘자랑하는 건 용렬한 짓이다. 언젠가는 네가 배운 걸 요긴하게 쓸 때가 있을 거야. 그때까지는 그저 아침저녁으로 연습해서 잊지 않도록 하렴. 그러길 바란다.”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어 준 곽노가 괴나리봇짐을 추스르며 허청허청 떠나갔다. 그가 산모퉁이를 돌아 보이지 않게 될 때까지 아이는 당산나무 아래에 서서 제 무예의 첫 스승이라고 할 수 있는 노인의 뒷모습을 바라보기만 했다.
 곽노는 한 번도 뒤돌아봄 없이 그렇게 떠나가 다시는 만날 수 없었다.
 자라면서 이장생은 그가 누구인지 궁금했지만 알 길이 없었고, 이제는 잊어버렸다.
 하지만 그때 곽노로부터 배웠던 수박의 기묘한 수법들과 격검의 비결은 여전히 간직하고 있었다. 곽노의 말대로 하루도 거르지 않고 연습에 연습을 거듭했으므로 스무 살 무렵이 되었을 때는 한양성중에서 이장생의 적수가 될 만한 한량, 건달들을 찾아보기 힘들었다.
 그의 집은 흥인문 밖 장안벌에 있는데, 용마산을 뒤에 두고 있는 곳이었다. 중랑천변의 논과 밭은 홍수가 나는 일도 거의 없는데다가 기름지기까지 해서 일대의 농민들을 먹여 살리기에 충분했다.
 그곳에서 이장생의 부친인 이춘명은 내로라하는 지주이면서 양반이었다. 비록 관직에는 나가지 않았으나 윤원형(尹元衡)과 쌍벽을 이루는 세도가이면서 왕족인 이량(李樑)의 먼 친척뻘이 되었으므로 현령은 물론 현청의 관원들 누구도 그를 업신여기지 못했다.
 이장생은 그런 이춘명의 서자로 태어났다. 이춘명이 기방에 출입하면서 춘향(春香)이라는 기생과 배가 맞아 몇 날 며칠 머물더니 그 결과를 보았던 것이다.
 이춘명은 그래도 제 씨앗이라고 핏덩어리 이장생을 냉큼 빼앗아왔을 뿐, 춘향이는 더 이상 거들떠보지 않았다. 그래서 이장생은 오늘날까지 제 어미가 죽었는지, 살았는지조차 알지 못하고 있었다.
 커가면서 이장생의 재주는 본처 소생인 두 형을 앞지르기 시작했다. 학문에서 그랬음은 물론 주먹질과 배포에 있어서도 나이 많은 두 형은 그의 상대가 되지 못했다.
 어렸을 무렵, 형들을 놀려주다가 아버지에게 불려가 서출 주제에 감히 형들을 능멸했다는 이유로 치도곤을 당한 뒤로 다시는 그러지 않았다. 아예 두 형을 무시했던 것이다.
 그때부터 이장생의 가슴에는 서출이라는 두 글자가 각인이 되어 박혔다. 살아생전에는 영영 지울 수 없는 화인(火印)같은 것이다.
 겉으로는 본처의 두 소생과 이장생 사이를 엄격하게 갈라놓았을망정 뜻하지 않게 본 막둥이에 대한 부친 이춘명의 사랑은 애틋했다. 아이의 재주와 총명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기에 더욱 그렇다.
 언젠가 이춘명은 이장생이 서출로 태어난 것을 못내 안타까워하며 탄식한 적이 있었다.
 “저 녀석의 재주라면 약관에 능히 과거에 급제하여 이름을 당상에 올리고도 남을 것이다. 서출만 아니었다면 우리 집안을 크게 일으켜 세울 재목인데 정말 아깝다, 아까워.”
 그 말을 들은 두 형은 질투심이 일어 그 뒤부터 어린 동생을 더욱 미워하고 구박했다.
 억울하기 짝이 없는 일이었다. 생각 같아서는 형이고 뭐고 가릴 것 없이 머리가 터지도록 싸우고 싶었다. 그래야 분이 풀릴 것이지만 한번 아버지에게 호되게 혼난 뒤가 아니던가. 이장생은 감히 형들에게 대항하여 싸울 생각을 하지 못하고 분한 마음을 삭히며 멀찍이 피하는 걸로 대책을 삼았다.
 그는 집과 부친을 멀리하고 겉돌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열여덟 살 무렵부터 학문보다 글과 그림으로 먼저 이름을 떨쳤는데, 사서삼경을 줄줄 꿰고 시재(詩才)를 자랑해 봐야 아무짝에도 쓸모없다는 걸 안 결과였다.
 그의 글씨체는 안평대군을 이어받았다는 말을 들었다. 특히 초서에 두각을 보여서 한번 붓을 잡으면 관운장이 청룡도 휘두르듯이 단번에 부(賦)와 사(辭)를 써내려갔다. 필체의 화려함과 붓 끝을 날리는 현란한 기교는 이미 대가의 반열에 들었다고 해도 좋을 정도였다.
 그 손놀림으로 화선지에 붓을 찍어 그림을 그리면 생동감이 넘쳐났다. 말을 그리면 버드나무 아래에서 풀을 뜯고 있던 그놈이 즉시 발을 굴러 화선지 밖으로 뛰쳐나올 것 같았고, 난을 치면 시퍼렇게 뻗친 난 잎의 예리함이 눈을 찌를 것 같아서 감히 똑바로 바라보기 어려웠다.
 그와 같은 재주로 인해 오래지 않아 한양에 거하는 사류(士類) 중에서 이장생이라는 이름 석 자를 모르는 자가 없게 되었다. 누구나 그의 글과 그림 한 폭을 얻으면 보물을 얻은 것처럼 좋아하며 헤프게 술과 밥을 샀다. 약관의 나이에 이장생은 한양성중의 유명인사가 되었던 것이다.
 그만한 재주와 성취는 아무에게서나 볼 수 있는 게 아니었지만 그는 서출이었다. 아무리 뛰어나도 출세할 길이 없지 않은가. 그래서 스무 살 무렵부터 이장생은 저자의 망나니 건달들과 어울려 지냈다.
 강단이 있고, 주먹질은 물론 검술 또한 능하니 한양의 저자에서 그는 곧 글씨와 그림보다 한량으로 더 이름이 높아지게 되었다.
 내로라하는 왈짜는 물론 건달들도 그와 시비가 붙으면 두세 주먹 만에 펑펑 나가떨어졌으므로 두 해가 지났을 때는 감히 그에게 시비를 거는 자가 없었다. 그러니 기방에 가든 주막에 앉든 곁에는 늘 그를 따르는 건달들이 웅성거렸고, 교재하려는 자들이 줄을 섰다. 그러므로 이장생은 굳이 집에 들어가지 않아도 어디에서든 호사스러운 생활을 할 수 있었다.
 닷새나 열흘쯤에 한 번 집에 찾아가 데면데면한 아버지에게 형식적인 인사를 드리면 그뿐 두 형이야 거들떠보지도 않았으며, 그들의 구박과 잔소리는 담 너머 개가 짖는 소리로 들어 넘기면 그만이었다. 그러다가 그것도 지겨워졌는지 어느덧 한 달에 한 번 집에 들어갈까 말까했다.
 그러던 중에 아버지가 비명횡사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기방 안에서였다.
 삼 년 전이다.
 
 그날도 이장생은 늦도록 월녀의 무릎을 베고 누워서 빈둥거리고 있었다. 지난밤의 숙취가 아직도 남아있는 데다가 유난히 보채며 파고드는 그녀를 몇 번이나 품었는지 모르는 터라 사지가 노곤했던 것이다.
 훤하게 날이 밝았을 때 낯익은 건달 한 놈이 헐레벌떡 찾아왔다.
 “학현 관아가 깨지고 네 부친이 살해당했다더라.”
 이장생이 월녀를 밀쳐내고 벌떡 일어나 앉았다.
 부친이 뒤늦게 해주부에 속한 학현의 현감이라는 벼슬을 받아 식솔을 이끌고 임지로 떠난 게 두 달 전이었다. 이장생은 홀로 한양에 남았다. 따라가 봐야 여기에서보다 좋을 일도 없었던 것이다. 그런데 살해당했다니 어안이 벙벙하다.
 “네가 지금 나를 놀리는 것이냐?”
 정색하며 묻자 그놈이 두 손을 홰홰 내저었다.
 “저자에 벌써 소문이 파다하다. 이틀 전 임꺽정의 무리가 학현 관아를 들이쳐서 네 부친을 죽이고 곳간을 열었다던데? 일부는 소굴로 져 나르고 일부는 백성들에게 마음껏 가져가라고 쌓아두고 갔다더라.”
 굳은 얼굴로 말을 듣고 있던 이장생이 떨리는 손으로 의관을 갖추고 환도를 쥐었다. 아무리 야속해도 아비는 아비 아닌가. 곱게 죽지 못하고 살해당했다니 마음이 급하지 않을 수 없다. 그 길로 말에 올라탄 이장생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해주로 달려갔다.
 그가 학현의 관아에 이르렀을 때는 그로부터 닷새 뒤였다. 벌써 초상이 끝나고 사태가 수습되었지만 학현 전체가 어수선하고 들떠 있었다. 관아의 무너진 담도 아직 그대로여서 당시의 상황이 얼마나 보기 흉했을지 짐작이 갔다.
 “뭐 하러 왔어?”
 사저의 대문에 들어서자 마침 방에서 나오던 큰형 새문이 장생을 알아보고 대뜸 소리쳤다. 그는 아직 거친 베옷을 입고 허리에 새끼줄을 묶은 차림이었다.
 방에 있던 둘째 형 새경도 뛰어나왔다. 새문의 호통에 종들이 우르르 달려나와 마당 안이 시끌벅적해졌다.
 “어째서 나에게는 기별도 하지 않았소?”
 이장생이 원망하자 새문이 잡아먹을 듯 눈을 부릅뜨고 삿대질을 해가며 소리쳤다.
 “부친이 흉적에게 화를 입었는지 아닌지도 모르고 발정난 개새끼마냥 온 천하를 싸돌아다니는 놈이니 기별은 해서 무엇 한단 말이냐? 네놈이 어느 기방에 처박혀 있는지 어찌 알고?”
 “서출이라고 손가락질 받는 이유가 달리 있는 줄 아시오? 행실이 저모양이니 누군들 곱게 볼까?”
 중형 새경이 거드는 말에 이장생은 울화가 치밀고 말았다.
 “시끄럽소! 평소에도 형제라고 생각해본 적 없으니 아우 대접을 하지 않는다고 탓하지 않겠소. 그러나 이왕 온 터, 나리께 절이라도 올리고 갈 테니 비켜서시오.”
 “그럴 필요 없다. 너는 이제 우리 집안과의 한 가닥 끈도 떨어진 터이니 어디로든 꺼져버려라. 가서 네 마음대로 살아. 다시는 찾아오지 마라.”
 저놈을 내치라는 불호령에 종들 서넛이 우르르 달려들었지만 잔뜩 화가 난 이장생의 주먹질 몇 번에 모두 나뒹굴었고, 한 달음에 마당을 건너뛰어 새문의 멱살을 틀어쥔 이장생이 으르렁거렸다.
 “집안을 이끌어갈 장형께서는 그래, 아버지가 도적들에게 죽임을 당할 때 무얼 하고 계셨나? 설마 측간에 숨어 문고리를 잡고 벌벌 떨고만 있지는 않았겠지?”
 “이, 이놈. 네까짓 놈이 감히…….”
 “형이 말 잘했어. 아버지의 영전에 절을 올리고 나면 나는 이 빌어먹을 집안과 영영 남이 되고 말 테니 그때부터는 형 아우를 따질 일도 없겠지.”
 수틀리면 한 주먹에 때려 죽여 버리기라도 할 듯한 기세에 이새문은 부들부들 떨기만 했다. 이장생이 더욱 멱살을 틀어쥐었다.
 “나는 서출이지. 이 집에서는 낯익은 개보다 못해. 그러나 아버지의 피를 받은 건 사실이니 그걸 어쩌겠어? 사람의 손으로 천륜을 끊을 수는 없지. 다시 방해하면 먼저 피를 뿌리고 난 뒤에 아버지의 영전에 절을 올려도 그만이야.”
 와락 밀쳐버리고 성큼 마루로 올라서지만 이새문은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무릎 꿇고 앉아 아버지의 위패를 멍하니 바라보던 이장생이 부드득, 이를 갈았다.
 “생전에 나를 자식 취급하지 않으셨지만 나리의 영전에서 감히 맹세하겠습니다. 내 손으로 반드시 임꺽정과 그 도당들을 섬멸하여 통쾌하게 복수해 드리겠다고.”
 말투에 절절이 한과 원망이 묻어났다.
 “당신의 한을 풀어주는 사람이 과연 누구인지 똑똑히 보십시오. 나중에 저승에서 만나게 될 텐데 그때 과연 나에게 무어라고 하실지 그게 궁금해지는군요. 나는 반드시 나리에게서 고맙다는 말을 듣고야 말 것입니다. 네가 진정한 내 자식이라는 말을 들을 수 있다면 저승에서나마 크게 웃을 수 있겠지요. 그때를 위해서 이제는 붓 대신 이것을 들으렵니다.”
 선뜻 칼을 뽑아 위패 앞에서 크게 휘두른 이장생이 미련 없이 돌아섰다.
 두 형에게는 눈길 한 번 주지 않고 그 길로 집을 떠나 구월산으로 향하는 건 거기 청석골이 있고 임꺽정이 있을 터이기 때문이었다. 오직 죽어서라도 아버지로부터 인정을 받고 두 형을 비웃어주겠다는 오기가 있을 뿐 두려움은 조금도 없었다.
 
 ***
 
 구월산이 아직 멀리 있는데 궁벽한 화전민 촌에서 그를 만났다. 마을 초입에 있는 허름한 주막에서였다.
 이장생은 주막이 저 앞에 보일 때에 벌써 수상쩍은 기미를 느꼈다. 무너진 돌담을 건너오는 걸걸한 음성들도 그렇거니와, 문 앞 버드나무에 매어 있는 말이며 노새들 때문에 더욱 그랬다. 말은 이런 궁촌에서 볼 수 없는 좋은 종자이고, 세 마리의 노새 등에는 단단히 묶은 봇짐이 바리바리 실려 있었다.
 임꺽정이다.
 학현을 부수고 돌아가는 길에 두 차례 더 약탈을 하고 한 차례 강도질을 했다더니 그러느라고 길이 늦었으리라.
 학현의 일로 황해도 관찰사가 대로하여 길목마다 관병들을 풀어 지키는 한편 뒤를 쫓게 했다는데, 그런 와중에도 약탈과 강도질을 하며 달아나 이곳까지 왔으니 대담한 놈들이 아닐 수 없다.
 지그시 주막을 노려보던 이장생이 곧장 쳐들어갔다.
 성큼 마당으로 들어서며 “이리 오너라!” 하고 소리치자 왁자하던 웃음과 말소리가 뚝, 끊겼다.
 방마다 그득하게 들어앉았고, 마루며 평상에 눌러앉아 질펀한 술판을 벌이고 있는 놈들은 어림잡아도 스무 놈이 넘어 보였다. 그들의 시선을 한 몸에 받으며 마당 가운데 우뚝 선 이장생이 천둥치듯 소리쳤다.
 “임꺽정이를 잡으러 왔다!”
 어리둥절해서 바라보던 자들이 일제히 와, 하고 웃어댔다. 곱상하게 생긴 새파란 총각 놈이 천둥벌거숭이 같이 뛰어들어 대뜸 임꺽정이를 잡으러 왔다고 소리쳤으니 그럴 만도 한 일이다.
 “너는 누구냐? 어디에서 왔는고?”
 시커먼 얼굴에 가시 같은 수염이 턱이며 볼을 뒤덮은 커다란 놈이 제법 의젓하게 물었다.
 이장생은 그 자가 누구인지 짐작했다. 귀동냥으로 들은 말에 의하면 여섯 놈의 두령들 중 한 놈이 저렇게 생겼다고 했다.
 쇠도리깨를 잘 쓴다는 무지막지한 놈, 곽오주가 틀림없다.
 이장생이 코웃음을 쳤다.
 “나는 이장생이다. 네놈들이 무참히 살해한 학현 현감 이춘명 나리의 복수를 하기 위해 왔다.”
 “네가 그와 무슨 상관이기에 이렇게 소란을 떠는 것인고?”
 곽오주가 생긴 것 답지 않게 여전히 점잖을 떨었다. 놀리는 것이다. 이장생이 주먹을 움켜쥐고 버럭 소리쳤다.
 “나는 그분의 자식이다. 네놈들에게 분하게 돌아가신 선부의 복수를 하러 왔으니 너는 썩 꺼지고 어서 임꺽정이를 내놓아라!”
 “그래? 어린놈의 용기가 가상하구나. 그런데 이춘명이에게는 아들이 둘 밖에 없던데? 제 아비가 맞아 죽는 걸 보면서도 너처럼 대들기는커녕 오줌을 지리며 벌벌 떨기만 하더구나. 그런데 너는 별종이니 아무래도 믿기 어렵다.”
 곽오주가 왕왕 짖어대는 귀여운 강아지를 보듯 빙글빙글 웃으며 이장생을 바라보는데, 어두컴컴한 방안에서 누가 카랑카랑한 음성으로 말했다.
 “듣기로 이춘명이 제법 쓸 만한 서출을 한 놈 두었다던데 저 어린놈이 바로 그놈인 모양이요.”
 “그래?”
 곽오주가 고개를 갸웃거리더니 껄껄 웃었다.
 “이놈아, 적자라는 놈들도 가만히 있는데 서출인 주제에 복수가 다 무어냐? 너는 우리와 별다를 게 없는 불쌍한 놈이니 특별히 봐주마. 임 두령은 잊고 이리 오거라. 내 술이나 한 잔 받고 몸 성히 돌아가렴. 똘똘하게 생긴 놈이니 처신도 그렇게 하겠지?”
 철부지 조카라도 어르듯 하는 곽오주의 말에 도적패들이 다시 와, 하고 웃어댔다.
 독이 오른 이장생이 악을 썼다.
 “개소리! 임꺽정이를 잡고 너도 잡은 뒤에 술은 내 스스로 따라 마시겠다!”
 곽오주가 눈살을 찌푸렸으나 여전히 발작하지 않았다. 그가 이처럼 참는 건 보기 드문 일이었다.
 “어린놈이라 정말 철이 없구나. 그래, 포승은 가져왔느냐?”
 환도 한 자루를 허리에 찼을 뿐 빈손인 이장생을 아래위로 훑어보며 여전히 비웃는다. 이장생이 코웃음을 쳤다.
 “필요 없다. 목을 따서 그것만 들고 갈 작정이거든.”
 “저런 쳐죽일 놈!”
 “귀엽다고 오냐, 오냐 해줬더니 기어이 상투를 쥐고 흔드는구나!”
 “곽 두령, 더 타이를 것 없소. 내 저놈의 주둥이부터 찢어놓고 보리다!”
 토방 툇마루 아래의 평상에 앉아 있던 세 놈이 일제히 소리치더니 술상을 엎어버리고 뛰어 일어났다.
 곽오주도 화가 치솟은 참이라 그들을 말리지 않았다. 시커먼 입을 꾹 닫고 이글거리는 눈으로 노려보기만 한다. 이장생은 마음을 다잡고 어금니를 악물었다.
 이렇게 독기를 품고 오기를 부려 쳐들어왔다는 게 누가 보든 무모하기 짝이 없는 일이었지만 이장생 본인에게만은 그렇지 않았다. 그에게 중요한 것은 죽은 아버지의 복수를 하기 위해 제가 나섰다는 그것이었다.
 맹세한대로 임꺽정을 죽일 수 있으면 좋으나 제가 죽는다고 해도 상관없었다. 어쨌든 저승에 가서 아버지를 만나면 기특하게 여기고 진심으로 고마워할 것 아닌가. 그래서 “서출이라고 무시했던 네가 두 형도 엄두를 내지 못한 일을 하겠다고 나섰으니 너야말로 진정한 내 아들이다. 고맙구나.” 라고 말해주지 않을 것인가.
 이장생이 원하는 건 바로 그 말 한 마디를 듣는 것이었다. 저승에서라도 상관없었다. 임꺽정이의 목을 따지 못해도 상관없고, 저 무지막지한 곽오주의 쇠도리깨에 맞아 죽어도 상관없는 것이다. 어쩌면 그렇게 되기를 바라고 정신없이 달려온 것인지도 몰랐다.
 휙, 하고 바람을 이끌며 솥뚜껑 같은 주먹이 코앞을 스쳐갔다.
 이장생은 죽을 때 죽더라도 제가 허풍쟁이가 아니고 미친놈도 아니라는 것을 확실하게 보여주겠다고 작정했다. 그래야 저승에서 아버지를 만나도 떳떳할 것 아닌가.
 슬쩍 발을 물리며 어깨를 틀자 또 한 놈의 발길질이 가슴 앞으로 흘러갔다.
 춤을 추듯 하는 가볍고 부드러운 움직임으로 분기탱천한 세 놈의 주먹과 발길질을 피한 이장생이 손바닥을 활짝 폈다.
 다시 들이닥치는 놈의 주먹을 감싸 비틀며 손바닥으로 얼굴을 뒤덮듯이 하여 인중을 치고 밀어내는 건 ‘안면치기’라고 하는 수벽치기의 교묘한 수법이다.
 의외의 장격(掌擊)을 당한 놈이 비명을 터뜨리며 나가떨어졌는데, 뒤에서 누가 세게 잡아당긴 것처럼 한 길이나 날려갔다.
 수벽치기의 장격은 온몸의 힘을 쏟아 치고 밀어내는 것이니 한 대 제대로 맞으면 황소라도 뒷걸음질 칠 수밖에 없다.
 퍽, 퍽! 하는 소리가 연거푸 들리고, 기세등등하여 달려들었던 세 놈이 어느 순간 모두 패대기친 개구리처럼 사지를 쭉, 뻗고 널브러졌다. 얼굴이 온통 피범벅이 된 채 꼼짝하지 않는 것이 단 한 번의 타격에 숨이 끊어진 것 같았다.
 순식간에 벌어진 그 일에 곽오주가 “엇!” 하고 놀란 외침을 터뜨렸고, 느긋하게 구경하던 놈들도 모두 “으앗!” 하며 벌떡 일어섰다.
 갑작스럽게 무거운 적막이 내려덮였다. 시간이 멈추어버린 것 같다.
 “어린놈이 당돌하구나!”
 방안에서 한 놈이 소리치고 나와 마당으로 내려섰다. 호리호리한 체구에 눈매가 음침하고 날카롭게 생긴 자였다. 청석골의 두령들 중 한 명인 배돌석이다.
 이장생은 그가 생긴 것과 달리 완력이 대단하며 돌팔매에 능하고 여색을 밝히는 잔인무도한 놈이라는 걸 들어 알고 있었다. 그러나 조금도 두렵지는 않았다.
 “이놈, 기어이 피를 뿌렸으니 살아서 돌아갈 생각은 하지 마라.”
 음침하게 말한 배돌석이 옷소매를 걷어붙이며 성큼성큼 다가왔다.
 이장생이 널찍하게 벌려선 두 발의 무릎을 삼 푼 쯤 굽히고 활짝 편 한 손을 가슴 앞에, 다른 손으로는 그 손의 팔꿈치를 받치는 것처럼 하며 어깨를 낮추었다.
 “음.”
 그것을 본 배돌석이 의미를 알 수 없는 신음을 흘리더니 대뜸 한 발을 번쩍 들어 걷어찼다.
 가슴을 노리고 벼락처럼 다가서며 찬 발길질이지만 무시할 수 없는 위력이 깃들어 있다. 그러나 이장생은 그것이 저를 홀리기 위한 헛발질이라는 걸 간파했다. 이쪽이 당황하여 급히 움직이기를 바라는 것이다. 네모난 돌을 움직이려면 모서리를 밀어야 한다는 이치다.
 이장생이 부드럽고 유연하게 몸을 틀어 방향을 바꾸었다. 그 즉시 배돌석이 와락 달려들었다. 우측으로 몸을 기울였으므로 그쪽을 치고 들어오려는 것 같지만 실은 허술해 보이는 좌측에 온 힘과 술법을 숨기고 있다.
 그와 같은 허허실실(虛虛實實)은 수벽치기에 능숙한 자만이 할 수 있는 비결이었다. 그것을 이미 훤히 꿰고 있는 이장생이 맥없이 당할 리가 없다.
 그가 물러서거나, 상대의 의도대도 왼쪽으로 비켜서는 대신 오히려 성큼 파고들었다.
 “엇?”
 의외의 반응에 당황한 배돌석이 즉시 몸을 옆으로 세우며 손끝을 곧게 뻗어 명치를 찌를 듯이 공격해 왔다. 상대가 미처 수법을 펼치기 전에 선수를 친 것이니 역시 고수의 재빠른 임기응변이다. 그래서 이장생은 장을 어깨 너머로 휘둘러 안면을 찍어 누르듯 치려던 생각을 버리고 한 걸음 물러설 수밖에 없었다.
 방안에서 그들의 싸움을 구경하고 있던 임꺽정이 고개를 끄덕였다.
 “방금 저놈이 ‘오광잽이’의 술수를 부리려고 했지?”
 “그렇소. 보아하니 어린 녀석이 수박을 제대로 배운 것 같소이다.”
 말을 받은 자는 박유복이었다. 곁에 있던 또 한 명의 두령, 황천왕동이가 낮게 투덜댔다.
 “쳇, 단칼에 목을 쳐버리고 말 것이지 이게 뭐하는 장난이요? 어른들이 총각 한 놈 잡아두고 놀려대는 게 그리 재미있으시오?”
 임꺽정이 벙긋 웃었다.
 “저놈은 우리가 잡아다놓은 게 아니다. 그러니 네 말이 틀렸지. 놀려대는 게 재미있느냐는 말은 일면 맞는 구석도 있다.”
 애매하게 말을 하고 나서 박유복이를 향해 웃음 띤 눈길을 던졌다.
 “제법이다. 어린놈이라고 얕봤다가는 된통 당하겠어. 저것 봐라, 돌석이가 아주 쩔쩔매는구나. 허허, 그놈 참.”
 기특하다는 듯 무성한 턱수염을 쓰다듬으며 실소를 흘린다. 박유복이 고개를 끄덕였다.
 “솜씨를 보아하니 전라도 쪽에서 챕이를 배운 모양이요. 돌석이의 그것과는 같은 것 같으면서도 조금씩 차이가 나오.”
 같은 수벽치기의 수법이지만 전라도 쪽에서는 ‘챕이’라는 말을 썼고, 경상도 쪽에서는 ‘잽이’라고 했다. 같은 것 같으면서도 다른 말이듯이 수법에 있어서도 그랬다. 미묘한 차이가 있었던 것이다. 임진강 이북과 이남이 다르고, 같은 전라도에서도 동쪽과 서쪽이 달랐다. 그 지방 사람의 기질과 습성, 풍토에 맞게 약간씩 변해왔으니 그럴 것이다.
 “그래, 네 눈이 밝구나. 저놈의 솜씨는 틀림없이 전라도 쪽에서 나온 것이다. 그 중에서도 순천의 풍미가 있어. 대체 누구에게서 배웠을까?”
 막 배돌석에게 옆발질을 하고 좌로 돌아 물러서는 이장생의 가뿐한 몸놀림을 보며 임꺽정이 감탄하는 한편 궁금증을 드러냈다.
 임꺽정은 물론 박유복 역시 수벽치기에 두루 밝았다. 보통 사람이 보아서는 좀체 알아낼 수 없는 수법의 미세한 차이를 단박 알아볼 만큼 고수들인 것이다.
 그 무렵 이장생과 배돌석의 싸움은 정점에 이르고 있었다. 두 사람 모두 범이 으르렁거리듯 낮게 기합성을 넣으며 손발을 놀리지만 한 번도 부딪친 적은 없었다. 수벽치기의 수법들이 워낙 힘이 있고 사나운 것이라 한 대 맞으면 어떻게 되는지 잘 알기에 서로 피했던 것이다.
 저쪽에서 이런 수법으로 공격하면 미리 알아채고 이쪽에서는 그것을 찌를 수법을 생각해 낸다. 그러면 저쪽에서 또 그것을 알고 수법을 바꾸는 식이었다. 그러니 온 힘을 써서 손발을 나누고, 붙었다가 떨어지기를 거듭했지만 정작 누구도 매섭게 상대를 때릴 수 없었다.
 마당 한쪽에 모여서서 와, 와 하며 함성을 질러대는 졸개들에게는 두 사람이 서로 양보하는 건가? 하는 의문도 들었으리라. 그 안의 수많은 속임수와 치열한 머리싸움을 알아볼 수 없으니 그렇다.
 “안 되겠다.”
 지켜보던 임꺽정이 상을 집고 일어섰다.
 “어? 임 두령이 직접 할 생각이오? 그럴 것까지 있겠소?”
 박유복이 깜짝 놀라 말렸다. 저나 곽오주가 나서도 될 일이라고 보지만 임꺽정의 생각은 달랐다.
 “나를 찾아온 빚쟁이이니 내가 얼굴을 내밀어야 옳지.”
 성큼 걸어나가는 건 아무래도 배돌석이 위태로워질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 제2장 구명(求命)
 
 “그만!”
 임꺽정이 마루에 우뚝 서서 소리쳤다.
 범이 산중에서 포효하는 것처럼 쩌르릉, 울려나오는 그 소리에 막 ‘호안치기’ 일격을 때려 넣으려던 이장생이 움찔 했고, 그 틈에 배돌석이 재빨리 몸을 뺐다. 펄쩍 뛰어 다섯 걸음 밖으로 물러서더니 제 분을 삭이지 못해 씩씩거리고 노려본다.
 흉명이 자자한 그로서는 젖비린내 나는 백면서생 놈에게 쩔쩔매는 꼴을 보였다는 게 이가 갈리도록 분할 것이다.
 ‘임꺽정이다!’
 성큼 마루를 내려서는 텁석부리 사내의 눈에 횃불처럼 이글거리는 광채가 담겨 있었다.
 그를 본 이장생은 목이 타는 것 같은 긴장으로 몸이 굳었다.
 “그 재주는 누구에게서 배웠느냐?”
 장승처럼 우뚝 서서 한동안 바라보던 임꺽정이 불쑥 물었다.
 “곽 노인이라는 사람에게서요.”
 엉겁결에 대답한 건 역시 당황해서였다.
 임꺽정이 “그래?” 하는 듯 턱을 끄덕이더니 다시 물었다. 그의 관심은 이장생의 당돌함에도, 저기 저렇게 널브러져 아직까지 깨어나지 못하고 있는 부하 세 놈에게도 있지 않았다.
 “순천의 그 곽 노인이란 말이냐?”
 “어디 사람인지는 모르오.”
 “하관이 빠지고 말랐으며, 왼쪽 눈두덩이 아래 시커먼 사마귀가 나 있는 영감이 아니더냐? 손마디가 남보다 굵으니라.”
 “그렇소, 바로 그 노인이요.”
 얼결에 또박또박 대답하면서 이장생은 이상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어찌 곽 노인을 그렇게 잘 안단 말인가?’
 임꺽정이 껄껄 웃더니 곽오주를 돌아보고 말했다.
 “얘, 오주야. 네 아재비가 아직 살아 있는 모양이구나.”
 이번에는 곽오주가 급하게 물었다.
 “언제 만났느냐? 어디에서? 또 지금도 거기 계시냐?”
 “도성의 흥인문 밖에서였소. 헤어진 게 오 년 전이었으니 지금은 어디에서 무얼 하는지 나도 모르오.”
 “허허, 그놈 또박또박 대답도 잘 하는 것이 착하구나.”
 흐뭇하다는 듯 웃는 임꺽정의 말에 이장생이 비로소 화들짝 놀라며 정신을 차렸다.
 ‘내가 잠시 무엇에 홀려도 단단히 홀렸구나.’
 등에 식은땀이 흘렀다. 불쑥 나타난 임꺽정의 기세에 형편없이 짓눌려 넋을 잃었던 것이다.
 그저 웃으며 서 있을 뿐인데도 이렇게 오금이 저릿저릿해 오니 일반 사람들이야 어떨 것인가, 하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그가 노여움을 내비치기만 해도 놀라서 숨이 멎어버릴 것이다. 깊은 산중에서 굶주린 범과 딱 마주친 것 같을 테니 그렇지 않을 것인가.
 죽이겠다는 결의마저 깜빡 잊은 채 저도 모르게 꼬박 꼬박 공대를 했으니 부끄럽기 짝이 없다. 그래서 분이 치솟았다.
 바짝 정신을 차린 이장생이 뱃심을 든든히 하고 두 눈에 잔뜩 힘을 주며 가슴을 폈다.
 “면상을 보니 임꺽정이 틀림없는 터. 자, 이리 와 목을 늘여라. 내 오늘 반드시 그것을 가져가고 말 테다!”
 “저런, 죽일 놈! 임 두령, 잠시 비켜서시오. 내가 저놈을 떡메로 짓이기듯이 아주 박살을 내버리고 말겠소!”
 여전히 분한 숨을 씩씩거리고 있던 배돌석이 버럭 소리쳤으나 정작 끔찍한 소리를 들은 임꺽정은 태연했다.
 “이왕 참은 길에 조금만 더 참아라. 아직 이 녀석과 할 말이 남았다.”
 점잖게 타이른 임꺽정이 다시 말했다.
 “아비의 복수를 하겠다는 생각이 기특하고, 곽 영감에게서 배웠다는 재주가 보기 좋다마는 네 뜻을 이루기는 어렵겠구나. 그러지 말고 하나뿐인 목숨을 보존할 궁리나 하는 게 어떻겠느냐?”
 “개소리!”
 이장생이 한 소리 고함과 함께 그대로 몸을 날렸다. 허공에 떴다 싶었는데 한 바퀴 몸을 틀더니 뒷발을 세차게 내뻗어 걷어찼다. ‘돌아 뒤쪽 차기’라는 고명한 발기술이다.
 그것이 그대로 임꺽정의 가슴 복판에 작열했다.
 온몸을 던져서 걷어찬 것이니 그것에 실린 힘이 황소라도 넘어뜨릴 만할 터인데 임꺽정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미련스럽게 커다란 바위를 찬 것 같아서 이장생이 깨금발을 디디며 껑충 뛰었다. 걷어찼던 발이 견딜 수 없이 아프지만 어금니를 악물고 참는다.
 “그만하면 분이 풀렸겠지?”
 앞가슴을 툭툭 턴 임꺽정이 무슨 일이 있었느냐는 듯 태연한 신색으로 다시 말했다.
 “네 아비는 죽을 만한 짓을 했기에 그리 된 것이니 원통해 할 것 없다.”
 “무슨 헛소리를 하는 것이냐?”
 “네 아비가 어찌 현감 벼슬을 얻었을 것 같으냐?”
 이장생이 눈살을 찌푸렸다. 아버지는 당대의 세도가 이량의 먼 친척이고 진사라는 신분이었지만 벼슬과는 상관없는 사람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현감 자리를 얻어 떠난다니 어리둥절하기는 했었다.
 “짐작했겠지만 네 아비라는 작자는 돈으로 그 자리를 샀지. 그 돈을 장만하기 위해서 종이며 소작들을 얼마나 닦달했겠느냐? 그래서 현감이 되어 부임해 왔으니 당연히 본전 생각이 났겠지. 인끈을 물려받자마자 관내의 민초들을 잡아들인 게 수십 명이고, 호구조사만으로 모자라 집집마다 광을 뒤지는 건 물론 시렁에 얹어놓은 놋쇠 주발까지 개수를 헤아렸다더라. 무엇 때문에 그 난리를 쳤겠느냐?
 이장생은 입을 꾹 다문 채 말하지 않았다. 아버지의 아귀 같은 탐심이야 일찍부터 알고 있지 않았던가.
 “그런 수령이라면 영영 가망이 없는 터. 일찌감치 죽여 없애는 게 민초들을 위한 길이니라.”
 부리부리한 눈에 위엄까지 갖추고 찍어 누르듯이 바라보는 데에 이장생은 절로 어깨가 늘어질 수밖에 없었다.
 “또, 네가 기왕에 곽 영감에게서 재주를 배웠다니 나는 물론 저기 오주와도 이미 인연을 맺은 것이다. 나도 한때 그에게서 재주를 배운 적이 있거니와, 그 영감이 오주의 아재비이니 그렇다. 그러니 굳이 족보를 따진다면 너와 나는 동문의 사형제 간이라고 할 수 있지. 이쯤 말했으면 알아들었을 터. 네가 이춘명이의 서출 신세라는 건 따로 거들 필요도 없으리라.”
 말을 마치고 지그시 바라보는 건 그러니 쓸데없는 원한 따위는 잊고 나를 따르는 게 어떻겠느냐는 뜻이다.
 몇 번 거친 숨을 몰아쉰 이장생이 선뜻 환도를 뽑아들었다. 육박(肉薄)으로 되지 않는다는 걸 알았으니 흉기를 써서라도 끝장을 보고야 말겠다는 각오였다.
 번쩍이는 칼을 본 임꺽정의 눈에 비로소 이글거리는 노여움이 떠올랐다. 가슴과 허리를 쫙 펴자 태산이라도 누를 것 같은 기운이 일어 사방을 뒤덮는다.
 그건 이장생이 여태까지 겪어본 적이 없고, 상상해본 적도 없는 무서운 기운이었다. 사람에게서 어찌 이와 같은 기운이 뻗어나올 수 있단 말인가? 하는 의문이 절로 인다.
 노루새끼가 호랑이 앞에 섰을 때가 이럴 것이고, 쥐가 고양이와 딱 마주쳤을 때의 심정이 이와 같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두 손으로 칼을 움켜쥐고 선 채 이장생은 꼼짝도 하지 못했다. 온몸이 얼어붙은 것 같아 숨을 쉬기도 힘들었다.
 “내 칼을 가져와라!”
 임꺽정의 호령에 이장생이 움찔 놀랐다. 멍해졌던 정신이 화들짝 깨어나고, ‘여기서 죽는구나.’ 하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그러자 오히려 두려움이 사라졌다. 그래서 이를 악물고 애써 살기를 불러 일으켰다.
 커다란 칼을 쥔 임꺽정이 그것을 허공에 두어 번 휘둘렀다.
 어지간한 장정은 들고 다니기에도 버거워할 칼이었다. 그것을 한 손으로 부지깽이 휘두르듯 해 보이는 임꺽정 앞에서 이장생은 말할 수 없이 초라한 자기 자신을 느껴야 했다. 애써 일으켰던 살기가 한 순간에 절망으로 바뀐다.
 곽오주와 배돌석은 물론 졸개들이 모두 놀라서 눈을 휘둥그레 뜨고 임꺽정과 이장생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여간해서는 칼을 뽑지 않고 또 그럴 일도 없는 임꺽정이 칼을 들었기 때문이다.
 방안에서 그 광경을 본 황천왕동이가 술상을 두드렸다.
 “대체 매부는 뭘 하려는 거야? 기껏 저따위 놈에게 칼을 뽑아 들다니, 쯧쯧…….”
 젓가락을 만지작거리던 박유복이 못마땅한 얼굴로 혀를 차는 황천왕동이를 보고 빙긋 웃었다.
 “임 두령은 저 녀석을 한 명의 상대로 인정해 준 것이야.”
 “쳇, 그게 말이 되오?”
 “그의 용기를 높이 산 것이지. 생각해 봐라. 너 같으면 아비의 원수를 갚겠다고 혼자서 임 두령을 찾아오겠느냐?”
 “내가 미쳤소?”
 “그렇지. 제 정신을 가진 자라면 누구든 그럴 수가 없지. 그러니 저 녀석의 용기가 더욱 가상하지 않으냐?”
 무언가 알 것도 같고 여전히 모를 일이기도 해서 황천왕동이가 머리를 갸웃거렸다.
 임꺽정은 가슴 앞에 칼을 세워든 엄숙한 모습으로 이장생을 마주보고 있었다.
 “자, 재주를 마음껏 부려보아라. 네가 곽 영감에게서 무엇을 얼마나 배웠는지 보자꾸나. 나를 한 걸음이라도 물러서게 한다면 네가 이긴 것이다. 기꺼이 목을 내주지.”
 “헛소리는 아니겠지?”
 “다른 놈이라면 몰라도 내가, 이 임꺽정이가 어찌 너 따위 철없는 아이에게 헛소리를 하겠느냐?”
 조롱과 무시로밖에 들리지 않는 그 말에 이장생이 불끈 투지를 불러 일으켰다.
 죽일 수 있으면 더욱 좋고, 죽임을 당해도 원통할 것 없다는 생각으로 쳐들어오지 않았던가. 이제 살든 죽든 결판을 낼 때가 되었다.
 이장생이 휘파람 소리 같은 격한 숨을 토해내며 몸을 던졌다.
 그의 환도가 쉬잉, 하는 매서운 소리와 함께 좌에서 우로 비스듬히 떨어졌다.
 수벽치기의 수법에는 손으로 칼을 대신하는 비결이 담겨 있다. 손을 칼처럼 쓰는 것이다. 그러므로 능통한 자는 당연히 격검의 수법에도 밝다.
 치고 베고 찌르고 자르는 수십 가지의 수법은 그것들 간의 상호 배합과 변화를 더해 공수의 많은 수법들을 만들어낸다. 그 비결을 터득하고 있는 이장생이었다. 단순하게 사선을 긋는 것 같은 그의 칼끝에는 어디로 향할지 모르는 수많은 변화가 감추어져 있었다.
 그 솜씨의 정교함을 본 임꺽정이 벙긋 웃었다.
 이리저리 몸을 움직이고 칼을 가볍게 놀려 받아내는데, 조금의 어색함도 없다.
 눈 깜짝할 사이에 십여 차례나 땡강거리는 쇳소리가 터져나오고 불똥이 어지럽게 솟구쳤다.
 그러는 동안 이장생은 저의 온 힘과 살기를 쏟아냈고, 지닌 재주를 아낌없이 다했지만 임꺽정을 물러서게 만들지 못했다. 그의 두 발은 땅 속에 깊이 박힌 것처럼 요지부동이었다.
 다시 이장생의 칼이 가슴을 찔러오자 임꺽정이 처음으로 “핫!” 하고 기합을 넣었다. 그저 가로막기만 하던 여태까지와는 다르게 손목에 힘을 넣어 칼을 뿌린 것이다. 그것이 찔러오는 칼을 쳐버렸다. 그러자 땅! 하는 소리가 크게 울리고 칼이 덧없이 부러져 날았다.
 이장생이 손목을 움켜쥐고 비틀거리며 물러섰는데, 저를 밀어낸 칼 힘을 견디지 못하고 기어이 엉덩방아를 찧었다. 제아무리 용을 써도 임꺽정의 한 주먹, 한 칼을 당할 수 없다는 절망감에 얼굴이 새파랗게 질린다.
 칼을 거둔 임꺽정이 고개를 끄덕였다.
 “장하다. 네가 곽 영감에게서 제대로 배웠음은 물론, 그동안 게으름을 부리지 않고 열심히 연마해 왔다는 걸 알았다. 그러나 내 목을 치기에는 아직도 까마득히 멀었다. 그것을 깨달았기 바란다. 돌아가라. 한 번 더 기회를 줄 테니 언제든 자신이 생기면 다시 찾아와도 좋다.”
 “죽이지 않는 거요?”
 배돌석이 분하다는 듯 소리치자 임꺽정이 그에게 엄하게 말했다.
 “나는 아비를 죽이고 그 자식마저 죽이는 살인귀가 아니다.”
 그게 포악한 저를 꾸짖는 말이라는 걸 안 배돌석이 머쓱해져서 목을 움츠렸고, 이장생은 수치와 분노와 절망으로 부들부들 떨며 방안으로 들어가는 임꺽정을 노려보기만 했다.
 
 ***
 
 부끄러웠다. 하늘을 보기 부끄러웠고 땅을 보기 부끄러웠다. 무엇보다도 자기 자신에게 가장 부끄럽다.
 내가 고작 이것밖에 안 되다니, 하는 생각을 떨쳐버릴 수 없다는 게 더 끔찍하다. 그래서 이장생은 정신없이 말을 몰았다.
 임꺽정을 죽여 복수하리라는 분노는 곧 저의 못남에 대한 분노였다.
 아버지가 화를 당하는 자리에 없었다는 분노이며, 어쩌면 제가 그 시간에 기생을 희롱하며 낄낄거리거나, 술에 취해 비틀거려 웃음거리가 되었거나, 아니면 어느 골목에서 건달 놈들과 싸움질이나 하고 있었을지도 모른다는 것에 대한 분노였다. 그리고 세상이 모두 내 것인 양 거들먹거리며 저자를 휘젓고 다녔던 제 꼴에 대한 부끄러움이기도 했다.
 임꺽정에 대한 분노의 정체가 바로 그러한 것이었음을 자각할 수밖에 없는 이 각성의 부끄러움이기도 하다.
 차라리 거기서 죽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지금이라도 돌아가 곽오주의 쇠도리깨에 머리가 깨져 죽거나 배돌석이의 주먹에 맞아 죽는 게 마음 편할지도 모른다. 그럴 것이다.
 임꺽정이는 생각하기도 싫었다. 한 주먹 거리도 되지 않는 저의 초라함만 더 커질 것이기 때문이다.
 채찍질을 당해가며 쉬지않고 달려온 말이 구슬픈 비명을 지르더니 기어이 앞발을 꿇고 쓰러졌다.
 그것을 버린 이장생이 두 발로 달리기 시작했다. 잊어버리기 위해서 숨이 턱에 차도록 달리고 또 달린다. 제가 지금 어디로 가고 있는 것인지, 여기가 어디인지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다. 길이 있는 듯 없는 듯한 깊은 숲속이고, 적막한 산속이라는 것도 몰랐다. 머릿속에는 오직 임꺽정의 부리부리한 눈과 껄껄 웃는 웃음소리만 가득했다. 그건 떠올리지 않으려고 애를 쓰면 쓸수록 더욱 생생하게 떠오르는 악몽이었다.
 숨이 막힐 정도로 크고 무시무시하던 임꺽정의 기세. 그것이 여전히 저를 뒤쫓아 오고, 덮어 누르는 것 같았다.
 그의 힘은 또 어떻던가. 그것 앞에서는 제아무리 솜씨가 좋고 검법이 훌륭해도 다 소용없을 것이다. 서너 살 먹은 꼬마가 아무리 용을 쓴들 어찌 장정의 눈을 찌를 수 있을 것인가.
 그러나 분했다.
 그런 생각을 하는 자기 자신에게 실망하기에 또 분하다.
 죽어서라도 아버지에게 인정을 받고 두 형을 비웃어주겠다는 유일한 소망을 이룰 수 없으니 더 분한 것이다.
 “술!”
 사립문을 박차고 뛰어들며 버럭 소리부터 지르는 이장생은 정말 미친 놈 같았다.
 이름도 알 수 없는 산속 길가에 있는 허름한 주막이었는데, 아마도 개성 쪽으로 오가는 장사치들이 묵어가는 곳이리라. 날이 어두워지면 산을 넘을 수 없으니 여기서 하룻밤 묵고 다음 날 아침에 다시 길을 나서는 것이다.
 “술을 가져와!”
 사지를 활짝 펴고 평상에 벌렁 드러누워 숨을 헐떡이다가 다시 소리치자 그제야 부엌에서 늙은 주모가 앞치마에 손을 닦으며 나왔다. 일찍 와 방에 들어 있던 몇 명의 장사치들이 고개를 내밀고 기웃거리더니 혀를 차고 문을 닫았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는지 모른다. 정신없이 몇 사발의 독한 술을 들이켜고 나서 그대로 평상 위에 널브러져 기절하듯 잠에 떨어졌던 모양이다.
 “일어나.”
 카랑카랑한 음성이 어렴풋이 들려왔다. 꿈속인가 싶기만 했다.
 “이놈이 아주 떡이 되었구먼, 쯧쯧.”
 누군가 혀를 차는 소리도 들렸다.
 그래도 이장생은 눈을 뜰 수 없었다. 천근만근 무거워진 몸과 함께 눈꺼풀 또한 그랬던 것이다.
 찰싹 찰싹 뺨을 때리는 손이 느껴졌다. 비로소 조금씩 정신이 돌아온다.
 이장생이 힘겹게 눈을 떴다. 제가 여전히 평상 위에 큰 대자로 널브러져 있다는 걸 깨닫는 데 조금 시간이 필요했다.
 한 밤중인 모양이었다. 검은 하늘에 촘촘히 박혀 있는 별들이 참 영롱하기도 하다는 엉뚱한 생각이 드는데 저를 내려다보고 있는 두 개의 얼굴이 그것을 가려버렸다.
 깨끗한 얼굴에 광대뼈가 두드러진 사내와 익히 알고 있는 얼굴 하나였다. 배돌석이다.
 대체 이게 꿈인지 생시인지 아직도 모르겠다는 듯 이장생이 눈을 끔벅이며 그 얼굴들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비로소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려왔고, 횃불로 붉게 물들어 있는 어둠도 눈에 들어왔다.
 “아는지 모르겠지만 나는 박유복이다.”
 낯선 자가 제 이름을 밝혔다.
 ‘박유복!’
 이장생이 벌떡 몸을 일으켰다. 그가 청석골의 두령 중 한 명이고 표창 솜씨가 귀신같다는 걸 익히 들어 알고 있었다. 술기운이 저 멀리 달아나는 것과 동시에 가슴이 싸늘해졌다.
 “임 두령은 너를 기특하게 여기는 모양이다만, 나와 돌석이는 그렇지 않다. 너는 반드시 후환이 될 놈이니 미리 제거하지 않을 수 없지.”
 그가 흐흐, 하고 음침하게 웃는 배돌석이를 이끌고 뒤로 물러섰다.
 주춤거리며 평상 아래로 내려선 이장생이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다섯 놈의 졸개들이 사립문을 지키고 있는 것을 보고 가슴이 철렁했다. 부러진 칼일망정 지니고 있을 걸 괜히 내던지고 왔다는 후회가 드는데 박유복이 횃불 빛을 받아 이글거리는 눈으로 노려보며 침착하게 말했다.
 “얌전히 무릎을 꿇어라. 그러면 아무 고통 없이 죽여주마.”
 이렇게는 죽을 수 없다. 이장생이 우뚝 서서 핏발선 눈으로 박유복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제가 어떻게 해야 할지 판단하고 결정하는 데 촌각의 시간도 긴 상황이다. 재빨리 주변을 파악한 이장생이 입술을 아프게 깨물었다. 정신이 조금 더 맑아진다.
 “그렇게 하지 못하겠다면?”
 “고통을 자초할 뿐이지. 죽는 건 달라질 게 없으니 쉽게 가자. 그래야 너도 우리도 편하지 않겠느냐?”
 “호걸입네, 의적입네 하더니 고작 이렇게 치사한 놈들이었구나.”
 “뭐라고 해도 좋다. 떳떳하지 못하다는 건 인정하지. 그러나 너를 살려 보내줄 수는 없다. 얌전히 군다면 양지바른 곳에 잘 묻어주마.”
 “아니면?”
 “숲에 던져서 짐승들의 밥이 되게 해야지. 죽어서도 몸뚱이를 보존하지 못하고 갈가리 찢겨 흩어진다면 원귀 밖에 더 되겠느냐?”
 그러니 좋은 말로 할 때 들으라는 듯 거만하게 턱을 치켜들고 바라본다.
 술은 이미 깼고, 상황이 어떤지도 파악했다. 박유복은 느긋한 여유를 부리고 있었다. 그렇다면 시간을 끌 필요 없다. 바로 지금이 아니면 영영 기회가 없을 것이다.
 아직 술이 덜 깬 듯 비틀거리며 박유복에게 다가서던 이장생이 고양이가 비둘기를 노리고 뛰어오르듯 홱, 몸을 틀더니 맹렬하게 도약했다. 한쪽에서 음흉한 웃음을 흘리며 바라보고 있는 배돌석에게였다.
 “으헛!”
 갑작스런 일에 박유복이 두어 걸음 물러섰고, 배돌석이 놀란 외침을 터뜨리며 급히 목을 움츠렸다. 이장생의 발길질이 두려웠던 것이다.
 무릎으로 가슴을 찍을 듯이 날아들던 이장생이 그의 어깨를 딛고 반쯤 무너진 돌담을 뛰어넘는 게 눈 깜짝할 새였다.
 박유복이 “이놈!” 하고 소리치며 뒤를 쫓았다. 훌쩍 돌담 위로 뛰어오른 그가 십여 걸음 앞을 달려가고 있는 이장생을 향해 손을 홱, 뿌렸다. 이십 보 안에서는 결코 빗나가는 법이 없다는 표창이다. 그것이 번쩍, 하고 이장생의 허벅지 깊숙이 박혀들었다.
 앞으로 고꾸라질 것 같던 이장생이 뒤도 돌아보지 않고 다시 어둠 속으로 달려갔다.
 박유복이 돌담을 차고 힘껏 몸을 날리며 다시 두 자루의 표창을 던졌다. 어둠을 가르고 날아간 그것이 등과 어깨에 여지없이 박혔으나 이장생은 움찔하고 몸을 떨었을 뿐 여전히 어둠 속으로 달아났다. 필사적이다.
 다시 두 자루의 표창을 던지며 쫓아간 박유복이 멈추어 섰다. 이장생의 모습이 어둠 속으로 완전히 꺼져버렸던 것이다. 뒤따라 배돌석과 졸개들이 횃불을 들고 달려왔다.
 “어떻게 된 거야? 놓친 거냐?”
 배돌석이 악을 쓰지만 박유복은 대꾸하지 않았다. 졸개의 손에서 횃불을 빼앗아 들고 발아래를 비추어 본다. 핏방울이 점점이 떨어져 있었다.
 “그 어린놈은 내 표창을 다섯 대나 맞았다. 멀리 가지 못할 거야.”
 씩씩대는 배돌석을 안심시킨 그가 소리없이 웃었다.
 “게다가 독까지 발라놓은 것이니 살아날 수 없지. 날이 밝은 뒤에 이 핏자국을 느긋하게 따라가면 된다. 그러면 짐승들이 뜯어먹고 남긴 몸뚱이를 찾을 수 있을 게다.”
 배돌석은 지금이라도 쫓아가 확인하고 싶은 생각에 어깨를 움찔거렸다. 그러나 칠흑 같은 어둠에 잠겨 있는 울창한 숲을 보고는 한숨을 쉴 수밖에 없었다.
 
 주막에서 하룻밤을 보내고 다음날 아침 일찍 그들은 이장생을 찾아 나섰다. 이슬에 젖어 묽어진 핏자국을 뒤쫓는다.
 여기저기 뚝 뚝 떨어져 있는 핏자국은 숲속으로 들어갈수록 양이 많아졌고 간격도 좁아졌다. 달아나는 자의 걸음이 느려졌다는 증거다.
 저 앞 바위 아래 그가 쓰러져 있으리라고 확신한 박유복은 느긋해졌다.
 “그러면 그렇지. 제까짓 놈이 내 표창을 맞고 살 수 있겠어? 허허, 그렇긴 해도 참으로 지독한 놈이로구나. 몸뚱이에 다섯 대의 표창을 꽂고서도 여기까지 도망쳐 왔으니 말이야.”
 나무 그루터기에 앉아 숨을 돌리는데 바위 아래로 달려갔던 졸개들이 소리쳤다.
 “여기 없소!”
 “핏자국도 사라졌구려!”
 “어디로 갔는지 통 모르겠소.”
 “뭐야?”
 배돌석이 버럭 소리쳤고, 박유복은 혀를 찼다.
 “쯧쯧, 뒈진 놈이 땅으로 꺼졌단 말이냐, 하늘로 솟았단 말이냐? 잘 찾아 봐라.”
 엉덩이를 털고 일어나 늘쩡거리며 다가간 그가 더욱 눈살을 찌푸렸다. 과연 핏자국이 거기에서 뚝 끊어졌던 것이다. 사방을 두리번거려 보아도 어디로 갔는지 알 수가 없었다. 여기 엎어져 있어야 할 놈이 감쪽같이 사라진 것이다.
 한동안 생각하던 박유복이 피식 웃었다.
 “상관없어. 어디서든 죽었을 것이다. 짐승이 끌고 간 것인지도 모르지.”
 살모사의 독을 발라놓은 표창을 맞았으니 틀림없으리라고 믿는다.
 
 ***
 
 얼마나 시간이 지났는지 모른다. 죽은 것인지 살아있는 것인지도 모호하다. 깜깜한 어둠에 푹 잠겨 영영 벗어나지 못할 것 같다.
 혈관에 피 대신 지독하게 쓰고 아린 어둠이 콸콸 흐르고 있었다.
 이장생은 제가 죽어서 저승에 와 있는 것이라고 여겼다. 벌레들이 몸뚱이를 파먹고 있는 모양이었다. 그렇기에 이처럼 온몸이 간질거리고 바늘로 찌르는 것 같은 고통이 함부로 날뛰며 오르내리는 것 아니겠는가.
 ‘아니다!’
 그가 목청껏 소리쳤다. 제 머릿속에서만 울릴 뿐 숨도 새 나오지 않는 소리였지만 그것에 놀란 의식이 조금 더 뚜렷해졌다.
 고통을 느끼고 생각을 할 수 있다는 건 아직 내가 살아 있다는 것 아니겠는가. 그렇다면 어떻게? 여기는? 하는 의문이 잇따르는데 귓속에 웅웅 울리는 음성이 파고들었다.
 “허허, 정말 목숨 줄이 질긴 녀석이로다. 이놈아, 깨어났으면 눈을 떠야지 어째서 여전히 죽은 척 꼼짝하지 않는고?”
 ‘기어이 내가 붙잡힌 모양이구나.’
 그렇게 여긴 이장생이 분해서 이를 악물고 눈을 떴다. 눈꺼풀을 밀어내는 일이 이처럼 힘들다는 걸 처음 느낀다.
 시커멓고 커다란 얼굴이 눈앞에 있었다. 임꺽정이 아니라는 데에 우선 마음이 놓인다.
 “뉘십니까?”
 눈에 초점을 맞추며 던진 첫 마디가 젖먹이의 옹알거림보다 못하게 흘러나왔다.
 “허허, 그놈 참.”
 낯설고 커다란 얼굴이 저만큼 물러났다.
 “저승사자의 손에서 너를 빼앗아온 사람이지 누구이겠느냐?”
 ‘그렇다. 내가 확실히 살아 있구나.’
 그 말을 들은 이장생의 가슴이 기쁨과 희망으로 뛰었다.
 “벌써 움직이려고? 아서라. 항우장사라도 그렇게는 못한다. 꼼짝 말고 있어. 앞으로 닷새는 말도 하지 말고 그저 눈만 끔벅거리고 있어야 할 게다.”
 애써 일어나 보려던 이장생은 제가 손가락 하나 움직일 수 없는 신세라는 걸 알았다. 온몸에 기운이 한 가닥도 남아 있지 않았던 것이다. 오행산에 눌린 손오공이라도 된 것 같았다. 천근만근 무거운 몸이 자꾸만 밑으로 가라앉는 걸 느끼며 다시 의식이 멀어졌다.
 
 구수한 냄새가 코를 간질이는 것이어서 재채기를 하고 눈을 떴다. 여전히 온몸은 무력감에 결박당한 것 같지만 그래도 처음 의식을 차렸을 때보다는 나았다.
 고개를 돌려 바라보니 저쪽 구석에 화덕이 있고, 이글거리는 숯불 위에 기묘하게 생긴 청동 그릇이 올라앉아 있는 게 보였다.
 저와 같은 그릇을 처음 보았다. 주발이라기에는 지나치게 크고, 솥단지도 아니다. 생김이 말총갓을 뒤집어놓은 것 같은 기묘한 물건이었다. 정체를 알 수 없는 장년의 사내는 열심히 그 속을 휘젓고 있는 중이었는데, 그때마다 무럭무럭 솟아나는 김과 함께 이루 말할 수 없이 구수한 냄새가 풍겨왔다.
 주위를 두리번거려 본 이장생은 비로소 이곳이 쥐똥 지린내가 배어 있는 낡은 산신당 안이라는 걸 알았다.
 그가 버둥거리는 기척을 느꼈는지 오십 중반쯤으로 보이는 사내가 돌아보았다.
 “어? 깨어났느냐? 그놈, 회복도 빠르구나.”
 “대체 당신은 뉘시오? 내가 어떻게 된 거요? 얼마나 시간이 지났소?”
 여전히 힘이라고는 하나도 실려 있지 않은 음성으로 겨우 묻자 사내가 껄껄 웃었다.
 “이놈아, 보채지 마라. 우선 내 배부터 채우고 보자꾸나.”
 바랑에서 주발과 수저를 꺼내더니 놋쇠 단지 속에서 무언가를 건져 후후 불어가며 정신없이 먹는다.
 
 ***
 
 열흘이 지났다.
 아직 몸을 움직일 때마다 통증이 남아 있었고, 기력 또한 부상을 입기 전과 비교할 수 없었으나 지금은 그걸 애석하게 여길 때가 아니었다. 죽지 않고 살아 있지 않은가.
 이장생은 텅 빈 사당 안을 둘러보았다. 저 구석에 앉아 졸던 사람. 죽어가는 저를 들쳐 업고 하룻밤 사이에 세 개의 산봉우리를 넘어왔다는 사내. 침과 뜸으로 독기를 몰아내고 원기의 불씨를 살려놓고 떠난 장년의 그 사람에 대해 생각할 때마다 감탄하게 된다.
 정체를 물었을 때 그가 웃으며 말했다.
 “나도 내가 누구인지 모르는데 세상 사람들은 나를 토정이라고 부르더구나.”
 그 말에 이장생이 기암을 할 듯 놀라 소리쳤다.
 “토정이라고요? 당신이 정말 그 토정 이지함 선생이란 말씀입니까?”
 “내 성이 이 가고 이름이 지함인 건 맞지.”
 “아!”
 한양성중에 토정(土亭) 이지함(李之菡)이 어떤 기인인지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 이장생 또한 익히 듣고 사모해 왔던 터라 더욱 놀랐다.
 화담 서경덕 선생 문하에서 수학했고, 마포 강변에 흙집을 지어놓고 살며 하늘과 땅의 이치를 훤히 꿰고 있다는 사람 아닌가.
 개성에서 황진이를 추억하며 하룻밤 술에 취하고 아침 일찍 길을 나서서 평양으로 가는 중에 표장을 맞고 죽어가는 이장생을 발견했노라고 했다.
 한나절에 삼백 리 길을, 그것도 산을 타고 그렇게 왔다니 믿을 수 없는 일이나 그가 토정 이지함이라는 걸 생각하고는 믿지 않을 수 없었다.
 축지법이라도 쓰신 것이냐고 묻자 실없는 소리라고 핀잔을 주었다. 그따위 잡술쯤이야, 하는 말에 이장생은 기가 막히고 말았다.
 그가 저 때문에 여러 날 길을 지체하고 있었다는 걸 미안해하자 이지함이 손사래를 쳤다. 그리고 바랑을 짊어지고 나서며 말했다.
 “너와는 인연이 있으니 언젠가는 또 만나게 될 게다.”
 “그때가 언제쯤이겠습니까?”
 “때가 되면.”
 “그동안 소생이 무얼 하고 있어야 하겠습니까?”
 “살기를 키워야지.”
 “살기?”
 “임꺽정이를 죽여 선부의 한을 풀고 서출로 괄시받던 너의 한 또한 풀기를 소원한다고 하지 않았느냐? 그래서 지금은 죽을 수 없다고 말이다.”
 “그랬습지요.”
 “이놈아. 너는 죽었다 깨어나도 임꺽정이를 이길 수 없느니라. 그놈의 힘과 기운은 하늘이 허락해 준 것이니 사람으로 어찌 그것을 이길 수 있겠느냐?”
 “하오면 살기를 키우라는 말씀은…….”
 “짐승이 된다면 또 모르지.”
 “소생이 말입니까?”
 “한을 품은 놈 아니냐? 짐승 아니라 더한 것도 못될 리 없지. 네 기운으로는 그놈의 기운을 이길 수 없지만 짐승의 살기를 키운다면 가능할 수도 있다는 말이다.”
 “어떻게 하면 되겠습니까?”
 “간절히 원하면 되는 거지 뭘 어떻게 해?”
 눈을 부릅뜨고 핀잔을 주더니 중얼거렸다.
 “악이 극성을 떨면 하늘은 때로 악으로써 악을 응징하기도 하느니라. 하늘의 뜻에서 누가 벗어날 수 있을꼬? 너를 보니 이제 그 때가 된 것 같아 한편 마음이 놓이면서도 한편으로는 불쌍해서 눈물이 나는구나.”
 “소생을 불쌍히 여기시는 것입니까?”
 감격하여 묻자 이지함이 눈을 부라렸다.
 “흉악한 짐승이 되어야 할 놈인데 불쌍하기는 뭐가 불쌍해? 장차 사나운 짐승과 악귀가 서로 물어뜯으며 싸우게 될 테니 수많은 생령들이 어찌 성할 것이냐? 그들의 삶이 비록 헛된 것이라도 끊어지는 건 슬픈 일이지.”
 이장생이 그 자리에 엎드렸다.
 “제발 가르침을 주소서.”
 “이미 다 배웠는데 뭘 더 가르쳐?”
 “예?”
 “글을 배웠고, 수박과 검술을 배웠으며 글씨와 그림솜씨 또한 제법이라면서?”
 “어찌 아셨습니까?”
 “들었지. 이춘명이의 서출 이장생이가 한 재주 하는 놈이라는 소리를 말이다.”
 “부끄러울 뿐입니다.”
 “그러니 더 배울 건 없고, 내 가르침 또한 이미 받았으니 나머지는 네가 알아서 해라.”
 그러더니 ‘그 약을 다 먹을 때까지 여기 꼼짝 말고 있으라’는 말을 던지고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휭 하니 떠나버렸다.
 이장생은 ‘짐승이 되라’는 토정 선생의 말을 곰곰이 생각하고 또 생각했다. 살기로 임꺽정의 기운을 이길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그 말은 한 줄기 빛과도 같았다.
 살기는 생령을 끊어버리는 의지다. 그리고 단호함이 그것을 이루어준다.
 사악함에는 주저함이 없지 않던가.
 “나는 본래 짐승이었다.”
 문득 그 말이 터져 나왔다. 그리고 돌이켜 생각해 보니 저에게 그보다 알맞은 말이 없었다. 스스로 짐승처럼 살아오고 있었던 것이다. 그랬기에 일찍부터 술과 기생의 단맛을 알았고, 거들먹거리며 저자를 활보하다가 울분이 생기면 굳이 싸울 구실을 찾아 한바탕 난리를 피우곤 했다.
 아무 목적도 없이, 이루고자 하는 목표도 없이 쏟아버리듯 헛되이 버린 그 시간들은 자기 자신에 대한 자학이었다. 그러면서도 한 번도 그런 자신을 짐승이라고 생각해본 적이 없지 않았던가. 실로 뻔뻔했다는 자책감 때문에 가슴이 아파왔다.
 시간은 속히 지나가고 날은 기다려주지 않는다. 떠내려간 나뭇잎이 물을 거슬러 돌아올 수 없는 것과 같이 과거의 시간과 날을 되돌릴 수는 없다. 아무리 후회한들 무엇 할 것인가. 그보다는 지금 이 순간에 내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 생각하는 게 현명한 일이다.
 그래서 이장생은 처음으로 제가 무엇이 되어야 할지, 무엇을 해야 할지를 결심했다.
 “이미 짐승이었으니 이제는 그보다 더한 게 되고 말리라.”
 짐승보다 더한 것. 맹수보다 끔찍한 것. 그건 야차(夜叉) 밖에 없다. 두억시니가 되어야 하는 것이다.
 이장생이 부드득, 이를 갈았다.
 “살기로 그놈의 기운을 누르고 빠름으로 그놈의 힘을 베어버릴 테다.”
 토정 선생이 던져주고 간 화두가 바로 그것이라고 믿었다.
 한 주머니의 환약을 다 먹는 데 다시 열흘이 걸렸다. 그리고 이장생은 멀쩡한 몸이 되어서 지난 이십여 일 동안 짐승처럼 웅크리고 있던 산신당을 버리고 떠났다.
 삼 년 전의 일이었다.
 
 ***
 
 토정 선생과 헤어지고 나서 칼 한 자루를 구해 이 깊은 산중으로 들어온 후 벌써 세 번째 겨울을 눈앞에 두고 있었다.
 피부가 파랗게 변해가고, 턱이 절로 떨리며 악문 이가 부딪쳐 딱딱거리는 소리를 크게 냈다. 이장생은 머리카락이 곤두서는 한기에 온몸을 내맡긴 채 지독하리만큼 미련스럽게 차가운 폭포의 물줄기를 견뎌내고 있었다.
 시월의 계곡 물은 칼끝보다 날카롭게 살을 찌르고 뼈를 쪼갠다. 이장생은 그 물을 온몸으로 받아들이는 일이 어디까지 가능한지 시험해 보는 것 같았다. 맨몸뚱이를 푸른 웅덩이 속에 처박고 한 길 높이에서 떨어져 내리는 물줄기를 정수리로 고스란히 맞고 있는 것이다.
 정신이 혼미해질 지경에 이르도록 버티고 있었다. 가슴이 쪼개지는 것 같았다. 심장이 얼어붙어 간다.
 이장생은 그런 지독한 고통을 스승으로 삼아 어떤 경우에도 흔들리지 않을 평정심을 얻기 위해 정신을 집중하고 단련하는 게 아니었다.
 도를 닦는 자들은 종종 그런 자기 고통을 통해 더 높은 정신세계를 들여다본다고 한다. 그래서 그처럼 미련한 짓을 하지만 지금 이장생이 원하는 건 살기가 더 지독해지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것을 오직 한 점에 집중시키기 위해 이를 갈며 버티고 있다.
 임꺽정.
 그에 대한 증오는 이제 선부의 복수를 하겠다는 단순한 동기를 넘어서버린 원한이고 미움이 되어 있었다.
 매일, 매 순간 그 생각만 했다. 그렇게 하지 않고서는 짐승이 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자학이라 해야 마땅할 만큼의 지독한 수련을 하면서 오직 임꺽정을 죽여 선부의 복수를 하고 내 한을 풀 것이라고 수도 없이 다짐했다.
 그건 자기 최면을 거는 것과 같았다. 이장생은 머뭇거리지 않고 그것에 빠져 들어갔다. 그러자 어느 순간부터 증오가 제 스스로 증폭되기 시작하더니 이제는 걷잡을 수 없이 커져서 그의 본질인 것처럼 되어가고 있었다.
 그것이 지난 삼 년 동안 그를 살아남게 해준 힘이었다. 그게 없었다면 벌써 포기하고 하산했거나, 아무도 알지 못하는 이 깊은 산중에서 병든 짐승처럼 죽어버렸을 것이다.
 스스로 만들어 가진 지독한 고통 속에서 그가 원하는 건 오직 하나였다.
 세상에서 가장 강한 칼을 이루는 것이다. 그것만이 한을 풀어주고 증오를 소멸시켜줄 것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다.
 이장생은 그것을 빠름에서 찾았다. 어렸을 적, 저에게 수박을 가르쳐 주고 떠났던 곽 노인의 말 속에 그 단서가 있었다.
 
 -칼이 아무리 예리하고 그것을 다루는 손이 아무리 훌륭해도 굼벵이처럼 느려서야 무 하나 제대로 자르겠느냐?
 
 이장생은 곽 노인의 그 말을 아직도 기억하고 있었다. 아니, 그동안 까맣게 잊고 있었는데 간절하게 힘을 원하자 가슴속에 묻혀 있던 그것이 되살아났던 것이다. 그래서 임꺽정의 힘을 베어버릴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그것뿐이라고 확신했다.
 
 
 
 
 
 # 제3장 짐승이 되리라
 
 심장이 멎어버리기 직전에 물에서 나왔다. 혼미해지는 정신을 가까스로 붙들며 엉금엉금 기어 나온 것이다.
 그처럼 죽음 직전까지 자기를 몰아가는 건 인내만으로 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이 산의 호통과 이 물의 충동질이 그를 그렇게 하도록 강요한 탓이다.
 
 -그래가지고 그를 이기겠다고? 쓸데없는 고집 따위는 시원하게 버려라. 이놈아, 그냥 한량으로 빈둥거리며 살다가 죽어. 누구도 너를 탓하지 않을 테니 그게 편하잖아?
 -나를 이길 수 없으면 네 자신도 이길 수 없지. 그래가지고서야 임꺽정이를 죽이겠다고 말할 수 있겠어? 자, 다시 와 봐. 이번에는 확실히 너를 얼려 죽여줄 테니까.
 
 그런 산의 소리와 물의 소리는 끊임없이 반복되는 제 안의 충동질이었고 채찍질이었다. 그래서 이장생은 죽을 수 없었다. 죽어버린다면 한껏 세웠던 오기가 웃음꺼리 밖에는 되지 않을 테니 그렇다. 그래서 악착같이 살며 버티는데, 그게 그에게는 수련의 모든 것이었다.
 그가 정법(正法)을 버리고 사도(邪道)를 택한 건 오직 살기를 키우기 위해서였다. 임꺽정과 마주했을 때 느꼈던 그의 거대한 기운은 백 년 동안 정법을 수련해도 이길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분하게도 토정 선생의 말처럼 그놈의 기운은 하늘이 내려준 게 틀림없었다.
 그것을 꺾으려면 역천의 방법을 택할 수밖에 없지 않겠는가.
 그래서 이장생은 스스로 야차가 되기를 간절히 바라면서 살기를 절망의 자리에 채워 넣었다.
 혹독한 수련을 하는 동안 온갖 사마와 요괴들이 몰려들어 수시로 그를 흔들어대고 유혹했다. 이장생은 그것들마저 살기로 눌러버렸고, 수련이 거듭될수록 무섭게 커지는 그의 살기는 드디어 이 산의 온갖 사악한 것들을 굴복시키고 말았다. 그래서 그는 그해 겨울이 지나가고 봄이 왔을 때에 드디어 저만의 비법을 완성시킬 수 있게 되었다. 살기마저도 극복해낸 것이다. 그리하여 스스로 무겁고 장중해졌다.
 다시 일 년이 지났다. 그리고 그는 드디어 원하던 칼을 얻었다.
 네 번째 겨울이 다가오고 있을 무렵이었다.
 눈의 빠름과 몸의 가벼움이 모두 손목에 실리고, 손아귀의 힘이 칼을 통해 연 줄이 풀리듯이 풀려나갔다. 한 점 미혹됨이 없고 막힘이 없다.
 가볍게 허공을 긋고 가르는 칼에 실린 힘이 천변만화했다. 그것을 따르는 눈과 몸이 바람보다 빠르고 깃털보다 가볍다.
 팔랑거리고 떨어지는 나뭇잎이 이마 앞에 있을 때 한 순간에 저절로 그렇게 되듯이 베어져 두 조각이 되었고, 그것이 다시 네 조각 여덟 조각으로 갈라졌다. 각기 흩어지는 열여섯 개의 조각을 쫓는 눈과 손과 칼이 열여섯 개로 변화했다. 한 명이던 이장생이 열여섯 명이 된 것 같은 현란함이었다.
 그리고 모두 베었다.
 서른 두 조각으로 나뉜 나뭇잎은 제 형체를 잃었고, 바람에 날려 사라졌다.
 누구도 하지 못할 일을 사 년 만에 기어이 이루어낸 것이다.
 
 세상을 등지고 산속 깊이 들어왔을 때 그는 아직 감정을 지닌 사람이었다. 그러나 사 년이 지난 후 산을 등지고 세상으로 돌아갈 때는 짐승도 아니고 사람도 아닌 이상한 무엇이 되어 있었다.
 
 ***
 
 “영영 당신을 보지 못할 줄 알았어요.”
 믿지 못하겠다는 듯 멍하니 바라보고 섰던 여인이 와락 품으로 뛰어들었다.
 “하지만 이렇게 돌아와 줄 것을 믿었어요. 꿈속에서는 늘 당신이 웃으며 돌아왔으니까요.”
 울먹이며 더욱 품속으로 파고들지만 이장생은 어색하기만 했다. 손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고 엉거주춤하더니 겨우 그녀의 어깨를 안았다.
 그녀는 기생이다.
 화장추색(花藏秋色) 임가선(任佳嬋)이라면 장안의 한량들치고 알지 못하는 자가 없을 만큼 이름난 기생인 것이다.
 미모가 출중하고 거문고를 잘 탔으며 시(詩)에 밝았지만 그런 재주를 가진 기생은 한양에만도 열 명이 넘었다. 그녀가 특히 이름을 얻은 건 행실이 바르고 선하기 때문이었다. 어느 여염집의 규수라고 해도 그녀처럼 단정하고 심성이 곱지 못할 것이다.
 그런 그녀를 탐내서 때로는 돈 많은 장사치가, 때로는 권세 높은 양반이 첩실로 들이기 원했지만 그녀는 결코 허락하지 않았다. 자신과 같은 서출 자식을 낳아 원통함을 대물려 주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자 한양성중에 화장추색 임가선이 지나치게 콧대가 높다는 소문이 돌았다.
 젊은 유생들은 물론 제 딴에는 풍류를 안다는 점잖은 선비와, 우격다짐으로라도 어찌 해보려는 왈짜패들이 갖은 수단을 다 썼다. 누가 먼저 그녀를 꺾느냐 하는 걸로 많은 재물을 걸고 내기를 하는 자들까지 생겨날 정도였던 것이다.
 그러나 장안의 망나니이면서 재주꾼으로 이름 높은 이장생이 화장추색 임가선의 정인이라는 게 알려지면서부터 치근대던 자들이 싹 사라졌다. 그가 여러 모로 껄끄러운 존재였기 때문이다.
 뭇 사내들이 그를 질투했는데, 고관대작의 자제들은 물론 내로라하는 사대부가의 염치없는 늙은 나리들도 예외는 아니었다.
 이장생을 헐뜯고 임가선을 비방하는 온갖 소문들이 떠돌았다. 그러나 누가 뭐라고 하든 임가선은 저와 처지가 같은 이장생을 지극히 위하고 사랑했다. 하지만 그의 마음을 알 수 없어서 애태워야했다. 제 침소를 무시로 드나들면서도 믿음을 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는 자유분방한 여느 바람둥이와 다를 게 없어 보였다. 그래서 그녀는 그가 저를 그저 천한 기생으로 대하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에 많이 울기도 했다. 그러나 화류계의 평은 그렇지 않았다. 임가선이 한양의 풍류남으로 이름난 이장생을 독차지했다며 많은 기생들이 그녀를 시샘했던 것이다.
 그러던 어느 날 그가 한양성중에서 꺼지듯이 사라져버렸다. 그리고 얼마 뒤 아버지의 원수를 갚기 위해 필마단창(匹馬單槍)으로 임꺽정을 찾아갔다가 청석골의 두령들에게 맞아 죽었다는 말이 떠돌았다.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은 충격을 받은 임가선은 쓰러져 눕고 말았다. 세상의 모든 남자들이 징그러워지고 삶의 의욕마저 사라져갔다. 그래서 그녀는 몇 달씩이나 기방에 나가지도 않은 채 두문불출했다.
 그러나 목구멍이 포도청이고 타고난 팔자가 모진지라 기생어멈의 닦달을 견디지 못하고 다시 기방에 나왔으나 예전 같지 않았다. 그래서 그녀를 본 한량들은 모두 혀를 차며 안타까워했다. 개성의 황진이와 비견되던 한양의 명물 하나가 이렇게 사라지는가, 하는 애석함을 가졌던 것이다.
 그렇게 무의미한 하루, 하루를 실연의 시름 속에 보내고 있었는데 천둥벌거숭이 뛰어들 듯 이 깊은 밤중에 이장생이 남루한 몰골로 불쑥 찾아왔다.
 
 방안을 둘러본 그가 실소를 흘렸다. 북쪽으로 난 창 아래 제단이 있고, 자신의 위패가 모셔져 있었던 것이다.
 얼굴을 붉힌 임가선이 얼른 그것을 치웠다. 등 뒤로 감추고 멋쩍은 웃음을 짓는다.
 그녀를 물끄러미 바라보는 이장생의 심정은 복잡하기만 했다. 제가 죽었다고 여긴 사람이 어디 한둘일 것인가. 그러나 이처럼 위패를 모셔놓고 날마다 애도하는 사람은 이 넓은 천지에 그녀 한 명뿐일 것이다.
 그녀의 진심이야 벌써부터 알고 있었지만 설마 이 정도일 줄은 몰랐던 터라 충격이 크기도 했다. 이장생은 그래서 더욱 무심해지려고 애쓸 수밖에 없었다.
 ‘찾아오는 게 아니었다.’
 그런 후회가 드는 건 그녀를 위해서였다. 저를 깊이 사랑하면 할수록 이 아름다운 여인에게 불행이 빨리 다가오리라는 걸 예감할 수 있기 때문이다.
 화난 듯 말없이 돌아서 나가려고 하자 임가선이 두 팔을 활짝 벌리고 막아섰다.
 “이제 다시는 가시지 못합니다. 보내드리지 않을 거예요.”
 “나는…….”
 “말하지 마세요.”
 그녀가 온몸으로 그의 말을 가로막았다. 가슴속으로 파고들어가기라도 할 듯 안겨들며 도리질을 친다.
 “백 마디, 천 마디 말해도 소용없어요. 무슨 말도 듣고 싶지 않아요. 그냥 내 말만 들으세요. 딱 한 마디만 할 게요. 나는 이제 절대로 이랑을 보내지 않을 거예요.”
 이장생이 탄식했다. 찾아오는 게 아니었다고 다시 한 번 생각하지만 그의 팔은 애처롭도록 가녀린 그녀의 몸을 으스러지게 껴안고 있었다.
 그래, 네가 원한다면 떠나지 않으마. 살아서 떠나지 않고 죽어서도 떠나지 않으마. 그러나 그런 내 마음을 너에게 말할 수가 없구나. 내 몸은 다시 너를 떠나야 하니까. 그래야 너를 지켜줄 수 있을 테니까. 하지만 그때가 되어도 슬퍼하지 마렴. 원망하지 마렴. 내 마음은 영원히 너와 함께 있을 거니까. 약속할 게. 이렇게.
 이장생은 마음속에 가득 넘쳐나는 그 열정적인 말들을 한 마디도 입 밖으로 꺼낼 수 없었다. 그래서 그녀를 더욱 힘주어 끌어안을 뿐이다. 제 몸의 따뜻함과 그녀의 몸의 따뜻함이 섞여 하나로 되고 다시는 나뉘지 않기를 바라듯이.
 
 임꺽정이 죽었다.
 그 말은 이장생을 다시 한 번 절망하게 했다.
 무엇 때문에 그토록 지독한 집념을 가지고 살아왔던가. 무엇 때문에 뼈가 부수어지도록 검법을 연마했던가.
 그런데 오직 하나의 목표이자 목적이었던 그가 죽었다니…….
 산에서 내려오자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들려온 세상의 말 앞에서 이장생은 기가 막혔다.
 삼 년 전, 청석골의 꾀주머니 서림이 체포되어 투항한 것을 계기로 조정에서는 선전관 정수인과 봉산, 평산의 관병들을 동원했으나 오히려 평산에서 임꺽정에게 대패당하는 수모를 겪었다.
 기가 오른 임꺽정 무리는 더욱 포악을 떨어댔고, 보다 못한 임금이 남치근을 토포사로 삼아 대규모의 군사들을 이끌고 그 무리를 토벌하게 했으니, 그해 십일월의 일이었다.
 소식을 들은 임꺽정의 무리는 몇 개로 쪼개져 달아났으나 남치근과 그의 병사들에 의해 토벌되었다. 근거지였던 청석골마저 초토화되었으며, 이듬해 정월에 기어이 임꺽정 또한 황해도 서흥에서 체포되어 목이 잘렸다고 했다(명종 17년, 1562). 벌써 이 년이나 지난 일인 것이다. 임꺽정을 따르던 적도들은 물론 두령들까지 모두 죽었다고 하니 허탈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이장생은 그 길로 청석골로 달려갔다. 그리고 그곳에서 제가 들은 말들이 사실이라는 걸 확인했다. 도적의 무리로 들끓었을 그곳이 낮도깨비라도 나올 것처럼 을씨년스럽게 변해 있었던 것이다. 임꺽정은 물론 곽오주와 배돌석이 그리고 저에게 표창을 날렸던 박유복이까지 이제는 이 세상 사람이 아니라는 걸 생각하자 온몸에 맥이 풀려 털썩 주저앉고 말았다.
 이승에서는 영영 그놈들을 찾아가 원한을 풀 수 없게 되었으니 기가 막힌다.
 지난 사 년 동안의 수련이 헛고생이 되었다는 것쯤은 대범하게 웃어넘길 수 있었다. 그러나 임꺽정의 목이 내가 아닌 다른 자의 손에 의해 잘렸다는 건 용납할 수 없었다. 그래서는 안 된다고 목이 쉬도록 악을 써봐야 공허한 메아리만 돌아왔다.
 청석골 복판에서 넋을 잃고 주저앉아 뜬눈으로 하룻밤을 보낸 이장생은 다음날 아침 이슬을 차며 그곳을 떠나 한양으로 향했다.
 
 갑자기 삶의 목표를 잃어버린 자의 참담한 심정이 되어 무기력해진 채 숨듯이 한양성으로 들어왔지만 갈 곳이 없었다.
 장안벌의 집으로 돌아가기는 죽기보다 싫었다. 원망도 했으나 그래도 마음 한 구석에는 위안이 되었던 아버지마저 죽고 없으니 더욱 그렇다.
 기세등등하여 떠났다가 사 년 만에 거지꼴이 되어 돌아왔다는 걸 알면 누가 비웃지 않을 것인가. 저를 따르던 건달들은 물론 재주를 질투하던 유생 나부랭이들이 모두 박장대소하며 좋아할 것이다.
 가슴속에는 아직 한과 증오가 남아 있고 검법을 이루어 천하에 두려운 자가 없었지만 그것을 쏟아낼 대상을 잃어버렸다는 건 주머니가 빈 것보다 더 비참한 일이었다.
 생각 끝에 이장생은 한때 저를 끔찍이 위하고 사랑했던 임가선을 찾아가기로 했다. 그녀가 아직도 저를 사랑하고 있을지, 가면 반겨줄 것인지 몰라 한 걸음, 한 걸음이 천근처럼 무거웠다.
 어쩌면 그새 어느 영감의 첩실로 들어앉았을지도 모르지 않는가. 그렇다면 맥없이 돌아서는 걸음이 더 비참해질 것이다.
 그런 온갖 생각과 근심을 안고 찾아왔는데 불쑥 들이닥친 저를 그녀가 이처럼 반겨주니 더욱 미안했다.
 “다 잊으세요. 그러면 예전으로 돌아갈 수 있어요. 처음에야 당신이 살아왔다는 걸 알고 다들 놀라겠지요. 더러는 이랑의 말처럼 비웃고 손가락질할 거예요. 하지만 몇 날 지나지 않아서 그들은 다시 이랑의 재주 앞에 기가 죽고, 그림 한 폭, 글씨 한 자를 얻기 위해 안달을 할 게 틀림없어요.”
 어린 아이를 재우듯 가슴을 토닥거리며 소곤소곤 하는 그녀의 말에 이장생은 다시 가슴이 아려왔다.
 다음 날 아침상을 물린 이장생이 임가선을 넌지시 바라보았다.
 “아직 그 어른이 안녕하시겠지?”
 정유길(鄭惟吉)을 말하는 것이다.
 동래 사람으로서 자를 길원(吉元) 호를 임당(林塘)이라고 한다. 중종 33년(1539)에 별시 문과에 장원하여 출사한 문신으로서 시문에 뛰어나고 서화에도 능하기로 이름 높았다.
 이조와 예조의 참판을 지내고 판서가 된 고관이었으나 재주 있는 자와는 신분과 귀천을 가리지 않고 두루 사귀었으므로 서얼 출신의 이장생과도 거리낌 없이 왕래를 했었다.
 특히 이장생의 그림을 좋아했는데, 그 자신이 사군자를 잘 그릴 뿐 아니라 서도에도 밝았으므로 누구보다 이장생의 재주를 높이 보았다. 그래서 그가 서얼 출신이라는 것을 늘 애석하게 여기던 사람이다.
 말썽을 부려 관아에 끌려가는 일이 있을 때마다 나서서 구해주곤 했으며, 좋은 말로 타이르기를 잊지 않았다.
 이장생이 누구의 안부를 묻는 것인지 잘 아는 임가선이 고개를 저었다.
 “웬걸요. 관직에서 물러나셨지요. 지금은 한가하게 지내신답니다. 가끔 저희 기방에도 찾아오세요.”
 의외의 말이었다.
 “그 어른이 관직에서 물러났어?”
 “쫓겨나신 거지요.”
 “허, 아니 무엇 때문에?”
 “아직 그 소식은 듣지 못하셨군요.”
 임가선이 한숨을 쉬었다.
 “작년에 이량 대감이 탄핵을 받고 조정에서 내쫓겼답니다. 그 일로 세상이 시끄러웠는데, 다들 을사년의 피바람 이후에 다시 한 차례 피바람이 부는 게 아닌가 하여 전전긍긍했지요. 평소 이량 대감과 가까이 했던 사람들이 모두 파직당하고 더러는 귀양을 가고 그랬어요. 그 와중에 그 어른도 관직을 내놓은 거지요.”
 “허!”
 이장생이 탄식했다.
 “권불십년이라더니 그 말이 맞긴 맞는가보구나. 천하의 권세가 이량 대감이 그렇게 될 줄 누가 짐작이나 했겠느냐?”
 이량은 왕족이자 임금의 외척으로서 무소불위의 권력을 행사하던 자였다. 역시 외척인 윤원형과 함께 권력을 다투며 전횡을 일삼았는데, 기어이 과욕을 부려 신진 사림(士林)을 제거하려다가 기대승(奇大升)의 사촌 형인 홍문관 부제학 기대항과 적이 되더니, 돈령부영사 심강(沈鋼)과 심의겸(沈義謙) 부자의 탄핵을 받고 삭탈관직 되어 평안도 강계로 유배되었다가 그곳에서 죽었다(명종 18년, 1563).
 이량이 그렇게 권좌에서 밀려나고 그를 따르던 자들마저 축출되자 다시 그 끔찍한 사화(士禍)가 재현되는 것 아닌가 하여 다들 두려워했다.
 평소 이량의 당여(黨與)로 꼽히던 예조판서 정유길도 벼슬을 내놓았는데, 그 와중에서 귀양을 가지 않고 무사할 수 있었던 건 그의 무던한 성품 때문이었다. 호방하고, 사람 사귀기를 좋아하여 곳곳에 친분 있는 사람이 많았으므로 그 덕을 본 것이다.
 이제 천하는 윤원형의 손에 들어갔다고 해도 좋았다. 세간에는 이량의 축출 뒤에 윤원형과 문정대비가 있다는 말이 공공연히 나돌았다. 사정이 그러니 백성과 뜻있는 선비들은 욕심이 아귀 같던 이량의 도태를 기뻐하는 것 못지않게 세상이 윤원형의 손에 들어간 걸 더욱 근심할 수밖에 없었다.
 잠시 생각하던 이장생이 도포를 입고 갓을 찾아 썼다.
 “어디를 가시려고요?”
 “그 어른을 뵐 일이 있다. 저물기 전에 돌아오마.”
 
 ***
 
 “이 녀석, 죽었다더니 살아 있었구나. 하하, 이래서 세상의 소문이란 죄다 헛되다는 것이다.”
 한거(閑居)하고 있다는 북촌의 집으로 찾아간 이장생을 정유길이 반갑게 맞아 주었다.
 인사를 마치고 그동안의 사정에 대하여 대충 고하자 정유길이 탄식했다.
 “애석하구나. 네가 학문을 버리고 검객의 길로 들어섰다니 참으로 애석한 일이다. 하지만 어찌할꼬? 임꺽정은 이미 죽어 없어졌으니 수고가 헛되고 말지 않았느냐? 그러니 이제 다시 글을 읽고 그림을 그리는 게 어떻겠느냐? 내가 볼 때 너의 재주는 그쪽으로 훨씬 더 깊으니라.”
 “소생은 아직도 얼떨떨하기만 합니다. 임꺽정과 마주해본 적이 있는 저로서는 그가 그처럼 허망하게 죽었다는 말이 도무지 믿어지지 않는군요.”
 “쯧쯧, 믿지 않으면 어쩔 것이냐? 서림이라는 자가 그의 목을 확인했고, 붙잡혀 온 자들도 모두 그러했으니 그걸 믿지 않으면 무엇을 믿는단 말인고?”
 “그 자를 붙잡아 목을 쳤다는 남치근 영감을 만나보고 싶습니다. 실은 그 부탁을 드리고자 찾아뵌 것이지요.”
 “이 녀석, 내가 보고 싶어서 온 게 아니었단 말이지? 고얀 놈 같으니.”
 정유길이 눈을 흘겼다. 서운해 하는 기색이 역력하다. 이장생이 미소지었다.
 “소생에게 나리는 아버지 같으신 분입니다. 어찌 보고 싶고 그렇지 않고가 있으며, 어찌 흠모하는 마음을 입 밖에 꺼내 말할 수 있겠습니까?”
 “허허, 이 녀석 그동안 검법을 수련했다더니 세 치 혀도 그렇게 한 모양이구나.”
 비로소 흡족한 듯 수염을 쓸며 너털웃음을 흘린 정유길이 지그시 바라보았다.
 “그래, 그 사람은 만나서 어쩌려고? 정 만나고 싶으면 네 발로 찾아가 문을 두드리면 될 일 아니냐?”
 “듣기로 임꺽정 토벌 이후 남 영감이 좌포청의 포도대장으로 부임했다더군요. 범 중의 범이 되신 셈인데 저 같은 서출이 감히 대면을 청할 주제가 되겠습니까?”
 “하긴 그렇구나. 좋다. 나도 그 사람 본지 오래 되었으니 겸사해서 불러내지. 오늘 저녁에 명월향으로 가마. 가선이 얼굴도 보고 노래도 한번 들어보자꾸나.”
 힐끔 이장생의 안색을 살피는 건 그가 임가선의 정인이라는 걸 아는 까닭이다. 이장생이 활짝 웃었다.
 “감사합니다. 언제든 어르신께 진 신세는 반드시 갚겠습니다.”
 “허허, 그놈. 생전 안 하던 말도 할 줄 아는 걸 보니 철이 든 모양인 게로군.”
 흡족하게 웃은 그가 정색을 했다.
 “지금 당장 내 부탁 하나 들어주련?”
 “말씀하시지요.”
 “지난 사 년 동안 네가 변한 건 알겠다. 과연 네 그림은 또 어떻게 변했을지 궁금하구나. 오랜만에 나를 위해 난을 한 폭 쳐주지 않겠니?”
 “붓 대신 칼을 쥔 지 몇 해인데 예전처럼 될지 모르겠습니다.”
 겸양을 하던 이장생이 마지못한 듯이 정유길이 밀어놓은 화선지를 펼쳐놓고 붓을 잡았다.
 허리를 꼿꼿이 펴고 앉아 낙엽을 노려보듯이 화선지를 무섭게 노려보던 그가 거침없이 붓을 놀리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정유길이 눈살을 찌푸렸다. 이장생의 그림 그리는 모습을 여러 번 보았지만 지금처럼 무섭지 않았던 까닭이다. 그의 붓을 놀리는 손에서, 모습에서 갈수록 살기가 느껴지고 있었다.
 이장생은 칼을 휘두르듯이 붓을 치달리고 있었다. 칼끝이 허공을 베고 돌아나가는 것처럼 화선지 위를 달리는 붓끝에 충만한 힘과 의지가 실렸다. 그렇게 난 한 폭을 후딱 친 이장생이 그것을 정유길에게 바치고 물러앉았다.
 뚫어질 듯이 그림을 바라보던 정유길이 한숨을 쉬고 노려보았다.
 “이놈!”
 갑자기 벼락치듯 하는 호통을 터뜨린다.
 “내가 난을 한 폭 쳐달라고 했지 언제 살벌한 싸움판을 그려달라고 했더냐?”
 이장생이 말없이 고개를 숙였다.
 “어허, 화법은 어디로 가고 흉심을 드러내는 검법만 남았단 말이냐? 너 같은 놈은 처음 본다. 붓을 칼 휘두르듯 하는 놈이라니, 쯧쯧…….”
 못마땅하고 그래서 화가 난 것처럼 이장생을 흘겨보던 그가 불쑥 말했다.
 “그림을 보자고 할 게 아니라 네놈의 칼을 보자고 하는 게 나을 뻔했다. 보여주겠느냐?”
 이장생이 다시 머리를 조아렸다.
 “흉한 물건이라 함부로 보여드릴 게 못 됩니다.”
 “그냥 솔직히 말해라 이 녀석아. 나 같은 문사 나부랭이 앞에서 검법을 보이는 게 철부지 어린애 앞에서 시문을 뽐내는 것처럼 소용없고 유치한 짓이라 못 하겠노라고 말이다.”
 그 말에 한숨을 쉰 이장생이 칼을 쥐고 일어서더니 서너 걸음 물러서서 읍했다.
 “정 그러시다면 하찮은 재주이나마 보여드리겠습니다. 그 앞의 붓을 제게 던져 보시겠습니까?”
 “그러지.”
 정유길이 냉큼 붓을 잡아 힘껏 던졌다. 그 순간 번쩍, 하고 이장생의 칼이 눈부신 빛을 뿌리며 허공을 갈랐다.
 토막난 붓대가 투두둑, 하고 발아래 떨어졌는데 모두 여덟 조각이었다.
 번갯불이 번쩍이는 것보다 빠른 솜씨였던지라 정유길은 눈을 부릅뜨고 있었지만 대체 어찌된 건지 알아보지 못했다.
 “허!”
 믿지 못할 그 일에 한동안 넋을 놓았던 정유길이 비로소 정신을 차렸다.
 언제 칼을 뽑아 쳤고 언제 그것을 갈무리했는지 이장생은 제자리에 손을 모으고 조용히 서 있었다. 방금 전 눈앞에서 신기(神技)를 보여준 사람 같지 않다.
 정유길이 머리를 설레설레 흔들었다.
 “이놈아, 검법을 보여달라고 했지 언제 요술을 보여달라고 했더냐?”
 “어르신의 눈을 어지럽게 했으니 송구합니다.”
 “허어-”
 겸양하는 그를 보고 다시 탄성을 발한 정유길이 제 눈을 비볐다. 보고도 여전히 믿을 수 없는 것이다.
 대나무 뿌리로 만든 붓대는 단단한 물건이다. 그것을 후려치면 당연히 튕겨져 나가리라. 두 쪽으로 동강났다고 해도 마찬가지 아닌가. 그런데 이장생은 그것을 뒤쫓아 가 네 쪽으로 만들었고, 다시 그 네 조각을 하나씩 뒤쫓아 가 절단했다. 그 움직임이 얼마나 빨랐으면 붓 조각이 미처 튕겨지기 전에 그렇게 했을 것인가, 하는 생각에 머리가 어지러웠다.
 더욱 믿을 수 없는 건 칼보다 빠르게 붓 조각을 쫓았을 이장생의 눈이었다. 자신은 눈을 부릅뜨고 있었으면서도 번쩍이는 검광만 보았을 뿐인데 이장생은 찰나의 순간도 놓치지 않고 낱낱이 보았다는 것 아닌가. 그 눈의 빠름과 밝음이 대체 어떤 것일지 상상조차 되지 않았다.
 그는 이장생이 제 솜씨의 삼분지 일 밖에 보여주지 않았다는 것은 짐작도 하지 못하고 있었다. 방금 본 것만으로도 놀라 자빠질 지경인데 이장생이 제 솜씨를 모두 보여주었더라면 기절해 쓰러졌을지도 모른다.
 “네 검법을 보니 말로만 듣던 추풍검법이라는 것을 대성한 모양이구로구나.”
 정유길이 혀를 차며 하는 말에 이장생은 어리둥절해졌다.
 “추풍검법이라니요?”
 “모른단 말이냐?”
 “그렇습니다.”
 “검법을 수련했다는 놈이 조선의 유명한 검법을 모른다니 우습구나.”
 운을 뗀 정유길이 비로소 가슴이 진정된 듯 느긋하게 말했다.
 “대전별감 중에 김호원이라고 하는 자가 있지. 그 자의 검법이 매우 훌륭하다고 들었다. 언젠가 함께 술을 마신 적이 있었는데 그 자가 그러더구나. 고려 때부터 전해져 내려오는 신비한 검술 두 가지가 있으니 하나는 추풍검법이고 하나는 월녀검법이라고 말이다.”
 이장생의 눈이 호기심으로 반짝였다.
 “추풍검법은 검객들에 의해 은밀히 전승되는데, 가을날 떨어지는 낙엽을 베며 수련한다고 하더라. 그러니만큼 빠르고 정교한 검법이겠지. 그에 비해 월녀검법은 무장들에게 계승되는 것인데 보름밤에 달빛의 기운을 받아 수련한다더구나. 장중한 중에 음사한 기운이 있고, 위력이 지대해서 장수들이 익힐 만한 검법이라더군. 그러니 네 검광을 보고 과연 추풍검법을 대성한 자의 검이 저러하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지 않을 수 있겠느냐?”
 “흥미로운 이야기로군요. 그러나 소생은 금시초문이니 어리둥절할 뿐입니다. 소생의 검법 수련이 우연히도 추풍검법의 그것과 통하는 바가 있었던 모양입니다. 스승 없이 홀로 연마한 검법이라 조악할 터인데 고명한 검법과 비교해주시니 부끄러울 뿐입니다.”
 “정말 너 혼자서 그만한 성취를 이루어냈단 말이지?”
 “그렇습니다. 제가 어찌 나리께 거짓말을 하겠습니까?”
 “그렇다면 더욱 놀라운 일이지. 아마도 오늘날 너의 그 솜씨를 당해낼 자가 몇 되지 않을 것이다.”
 이장생은 또 다른 호기심을 느꼈다. 제 칼에 대한 자부심이 대단한데 저와 겨룰 만한 자들이 있다니 그렇다.
 “나리께서는 그림을 보는 안목이 남다르듯 사물을 꿰뚫어보는 안목 또한 그럴 것입니다. 그러니 나리의 말을 믿지 않을 수 없지요. 궁금하군요. 대체 그 검객들이 누구입니까?”
 “내가 아는 건 세 사람이지. 우선 방금 말한 그 대전별감 김호원이 있느니라. 그가 어떤 검법을 익혔는지 모르나 그의 칼은 귀신도 벤다는 소문이 자자하지. 하지만 그는 주상을 모시는 별감이니 남과 다툴 일이 없을 터라 예외로 쳐야 할 것이다. 다른 한 명은 장약허인데 조선 제일의 검객이라고 하더구나. 검법이 더할 수 없이 뛰어난 모양이다만 심성이 음침하고 포악하니 가까이 할 자가 못 되지. 다른 한 명은 곽거도이니라. 그 자의 검법 또한 조선 제일을 다툴 만하다더구나. 듣기로 곽 가는 무가의 피를 받은 자로서 월녀검법을 익혔다니…… 그 말이 사실이라면 그런 자가 장수가 되어 공을 세울 생각을 하지 않고 강호의 검객으로 자족하고 있다는 건 아까운 일이 아니겠느냐?”
 “말씀을 들어보니 어르신께서는 그들을 모두 잘 아시는 것 같군요?”
 “김 별감이야 저절로 알게 된 사이이고, 장약허 그놈은 교동 윤 대감의 식객으로 있다가 발탁되어 호위무사들의 우두머리가 되었다더라. 눈꼴신 일이지.”
 쯧쯧, 혀를 차며 못마땅해 하는 게 그 장약허(張若虛)에 대해서인지 윤원형에 대해서인지 애매하다.
 “그리고 곽거도는 그가 뛰어다나는 소문을 들은 이정빈이 거금을 주고 끌어들여 자신의 호위로 삼았다더라.”
 “이정빈이라면?”
 “탄핵당해 돌아가신 이량 대감의 장남이지. 교동 윤 대감의 세가 무시무시하게 커졌으니 위기감을 느끼지 않을 수 있겠느냐? 게다가 윤 대감의 수하에 고수라고 할 만한 자들이 넘쳐난다니 더욱 불안할 수밖에. 나라도 그 입장이 되면 든든한 무사들을 호위로 두고 싶을 게야.”
 이장생은 정유길의 말을 들으며 무언가 심상치 않게 돌아가고 있다는 것을 직감했다. 조선 제일을 다툴 만하다는 두 검객이 모두 한양에 와 있는 것만 해도 수상쩍은 일인데 한 명은 윤원형에게 다른 한 명은 그에게 앙심을 품고 있을 이정빈(李廷賓)에게 붙어 있다니 그렇다.
 “됐다. 그만 가 보거라.”
 정유길이 손을 내저었다.
 공손히 절하고 물러나는 이장생을 바라보던 그가 홀로 남게 되자 탄식을 했다.
 “흉이 될지 길이 될지 모르겠구나. 저놈이 과연 피바람을 불러올 놈인지, 그것을 잠재울 놈인지…….”
 
 
 
 
 # 제4장 의혹(疑惑)
 
 날이 저물어갈 무렵부터 종로 뒷골목의 기생집 명월향(明月香)은 하나 둘씩 찾아오는 한량들로 인해 바빠지기 시작했다. 후원의 임가선 처소에서도 들을 수 있을 만큼 떠들썩해진다.
 명월향에는 모두 일곱 명의 기생들이 있었는데 주인인 기부(妓夫) 홍 가는 다른 장사 일로 바빠 얼굴 내미는 일이 드물고, 대신 첩실인 퇴기 명월이 기생어멈으로서 실제 주인 노릇을 하고 있었다.
 그녀의 수단도 좋지만, 명월향이 장안에서 제일 유명한 기방이 되어 돈을 쓸어 담는 건 임가선이 있기 때문이었다. 명월향을 찾는 한량, 건달들은 말할 것도 없고, 궐내의 대 소 별감이며 여타 벼슬아치들도 오직 그녀를 보기 위해 수시로 드나들었던 것이다.
 때로는 이름을 대면 누구나 알 만한 무관, 사대부들도 변복을 하고 찾아왔다. 그들의 세도라면 제 집에 앉아서 기생을 불러다가 놀 수도 있으련만 임가선이 워낙 까탈을 부렸으므로 그게 마음대로 되지 않았던 까닭이다.
 그녀의 명성이 높아 한양의 황진이라고 불릴 정도였던지라 함부로 오라 가라 하기도 껄끄러운 면이 있었다. 때문에 대감으로 불리는 당상관들도 그녀를 보려면 평복을 하고 몸소 찾아오는 수밖에 없었다.
 세도가 당당한 나리가 일행 몇 명과 함께 은근히 걸음한 날은 일찍부터 와 죽치고 있던 한량이며 유생들은 슬그머니 꽁무니를 뺐다.
 그런 날이면 기생어멈 명월이는 물론 기생들과 기방에 딸린 식솔들 모두가 비로소 허리를 펼 수 있어서 좋아했다. 시중들 손님이 적은데다가 다들 체면을 차리느라고 점잖을 떠니 일이 한결 수월했던 까닭이다.
 이장생은 오늘도 그와 같을 것이라고 생각하며 듣기 싫은 소음을 꾹 눌러 참고 있었다. 여느 날과 달리 유독 시끄럽게 구는 자들이지만 밤이 되면 정유길이 포도대장 남치근과 함께 올 것이니 그때까지만 참으면 된다고 여긴 것이다.
 임가선의 몸 냄새가 배어 있는 자리에 팔베개를 하고 누워 이런저런 생각을 하는데 바깥이 더욱 소란스러워졌다. 누가 다투기라도 하는 모양이다.
 취객들이 서로 목청을 높여 다투는 건 흔한 일이라 그러려니 하는데 참담한 비명이 연이어 터져나오고 카랑카랑한 호통소리도 들려왔다.
 이건 무언가 심상치 않다고 느낀 이장생이 슬그머니 일어나 앉았다. 이내 바쁘게 달려오는 발소리가 들리고 문 밖에서 누가 다급하게 말했다.
 “큰 일 났소. 아무래도 이 형이 좀 나와 봐야 할 것 같소.”
 장 가의 음성이었다. 기방에서 먹고 사는 네 놈의 장정들 중 한 놈이다.
 이장생이 낯을 찌푸렸다. 저의 존재는 이 명월향에서 없는 것으로 치는 게 무언의 약조 아니던가. 기생어멈 명월이 그렇게 명했으므로 누구든 지키지 않을 수 없다. 그런데 이처럼 급히 불러대는 건 그만큼 심상치 않은 일이 생겼다는 것이리라.
 이장생의 머릿속에 퍼뜩 임가선이 떠올랐다. 그가 문을 벌컥 열자 초조하여 손을 비비고 있던 장 가 놈이 사색이 되어서 빠르게 말했다.
 “가선이를 데려가려 하오.”
 “뭐라고?”
 “막아보려고 했지만 모두 된통 당했소. 우리가 상대할 자들이 아니요. 오죽했으면 안주인이 이 형을 데려오라 했겠소?”
 명월이 그렇게 분부했다면 예삿일이 아닐 것이다. 이장생이 침착하게 물었다.
 “어떤 자들이냐? 몇 놈이나 되고?”
 “교동 윤 대감 댁에 거하는 장정들이라오. 윤 대감을 믿고 행패를 부리는데 우리가 어쩌겠소? 모두 다섯 놈인데 아주 악질들이요.”
 윤원형이 거느리고 있다는 무사들이 분명하다. 그 자들이 작심하고 행패를 부린다면 기생집의 장정 놈들 열이 있다고 해도 소용없을 것이다.
 “호가호위하는 여우같은 놈들이군.”
 코웃음을 친 이장생이 옷자락을 허리춤에 찔러넣고 성큼성큼 후원을 가로질렀다.
 
 마당에 핏자국이 선명했다. 여기저기 쓰러져 끙끙대고 있는 세 놈의 장정을 일별한 이장생이 안을 바라보았다.
 아수라장이 따로 없었다. 술상은 엎어져 있고 명월이 사색이 되어 벌벌 떨고 있었으며, 기생 셋이 머리채를 잡히거나, 어디를 얻어맞았는지 잔뜩 웅크리고 애절하게 끙끙거리고 있었다.
 임가선은 눈매가 매서운 놈의 품에 안겨 발버둥치고 있는 중인데 심상치 않아 보였다.
 이장생이 성큼 댓돌 위로 올라서더니 신도 벗지 않은 채 방 안으로 쑥 들어갔다. 문을 가로막고 서서 난장을 치고 있는 다섯 놈을 노려본다.
 기생의 머리채를 쥐고 있던 놈이 핏발선 눈을 부라렸다.
 “네놈 눈에는 먼저 온 나리들이 있는 게 안 보인단 말이냐? 방에 들어오려거든 선객의 허락부터 구해야지!”
 기방에 출입하는 자들이 지켜야 할 규칙을 들먹인 것이다.
 늦게 온 자는 기생 차지에서도 늦을 수밖에 없다. 제가 마음에 들어 하는 기생이 이미 다른 손님의 술시중을 들고 있을 수도 있고, 방마다 한량들로 꽉 차서 따로 잡을 수 없는 형편일 때도 있다.
 그러면 맥없이 돌아가거나 합석을 해야 하는데, 신분의 고하나 귀천에 상관없이 늦게 온 자는 선객의 양해를 구해야만 하는 것이다.
 우선 격식을 차려서 저를 소개하고 점잖은 말로 허락을 구하는 게 상례다. 그러면 선객은 그 자의 생김새를 살펴보고 언변을 들어서 판단을 한다.
 마음에 들어 선뜻 합석을 허락하면 다행이지만 물리치면 때로 고성이 오가기도 하고 더러는 주먹다짐이 벌어지기도 했다. 거절을 당하고 나면 놀겠다는 마음보다 자존심이 앞서는 탓이다.
 그처럼 기생을 끼고 노는 술자리가 낯선 자들 간의 교제가 이루어지는 자리가 되느냐, 아니면 앙심을 품는 자리가 되느냐 하는 것은 선객의 마음에 달렸다.
 지금 기생의 머리채를 움켜쥔 채 눈을 부라리는 놈은 그런 규칙을 들어 이장생을 나무라는 것 같았지만 실은 위협하는 것이었다.
 생긴 것을 보아하니 기방의 머슴 놈들과는 다르게 사족(士族) 같은지라 다짜고짜 윽박지르고 걷어차기에는 아무래도 껄끄러운 데가 있기 때문이다.
 이장생의 입가에 싸늘한 비웃음이 떠올랐다.
 “내 눈은 사람만 볼 뿐이다. 이 방 어디에 사람이 있느냐? 너는 개한테도 허락을 구하는 놈인 모양이구나.”
 “무엇이?”
 지독한 말에 그놈이 즉각 몸을 폈고, 다른 놈들도 흉흉한 눈으로 노려보았다.
 후객이 이렇게 나오면 더 이상 왈가왈부 할 필요가 없다.
 “어디 네 몸뚱이도 주둥이처럼 야무진지 보자!”
 소리친 놈이 쓰러져 있는 기생을 뛰어넘어 들이쳐 왔다. 주먹이 매서운 바람소리를 내는 것이 싸움깨나 해본 솜씨였다.
 임가선이 발버둥치는 걸 본 순간부터 이장생의 마음에는 자비심이 사라지고 없었다. 장안 제일의 세도가인 윤 대감 댁 무사들이라고 해서 거리끼지 않는다.
 “흥.” 하고 코웃음을 치며 놈의 주먹을 어깨 위로 흘려보내고 ‘턱밀기’라는 수법으로 턱을 후려쳐 밀어버리는 손속에 사정이 없었다.
 호기롭게 달려들었던 놈이 퍽! 하는 소리와 함께 내던져진 것처럼 뒤로 나가떨어졌는데 깨진 턱이 형체도 없이 사라졌다. 충격을 받을 때 혀를 깨물었던지 선지피를 울컥, 울컥 쏟아내며 축 늘어진다.
 다행히 죽지 않는다고 해도 영영 사람구실 하기 어려울 게 틀림없어 보였다.
 “저놈이!”
 놀란 두 놈이 엎어진 술상을 걷어차며 사납게 달려들었다. 이장생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두 놈의 주먹질이 코앞에 닥쳤을 때에야 가볍게 움직였는데, 한 놈의 무릎을 걷어차 중심을 빼앗고 ‘팔굽치기’의 수법으로 팔꿈치를 불쑥 뻗어 다른 놈의 가슴을 찍어버리는 게 한 동작처럼 보였다.
 무릎을 걷어차인 놈이 “어이쿠!” 하는 비명을 터뜨리며 지저분한 방바닥에 얼굴을 처박을 때 다른 놈에게서는 빠각! 하고 가슴뼈 박살나는 소리가 났다.
 그놈이 눈을 까뒤집고 입을 딱 벌렸다. 신음소리도 내지 못하고 주저앉듯이 천천히 무릎을 꿇더니 이내 앞으로 풀썩 꼬꾸라져 몇 차례 바들바들 떨다가 잠잠해진다. 그대로 숨이 끊어져버린 것 같았다.
 잠깐 사이에 벌어진 끔찍한 일이었다.
 앞서 무릎이 꺾여 엎어진 놈의 목을 짓밟고 선 이장생이 아직까지도 임가선을 붙들고 있는 놈을 바라보았다. 날카로운 그놈의 눈에 어리둥절했던 기색이 사라지고 이글거리는 살기가 실리기 시작했다. 이장생을 잡아먹을 듯 노려보며 음침하게 묻는다.
 “너는 누구냐?”
 “개를 때려잡는 백정이지.”
 그놈이 빠드득 이를 가는데 남은 한 놈이 소리쳤다.
 “내가 저놈을 아오! 흥인문 밖에 살던 이장생이 틀림없소!”
 “이장생?”
 눈매 날카로운 자가 비로소 임가선을 풀어주고 비웃음을 흘렸다. 눈에는 여전히 살기가 이글거리고 있었다.
 “들어보았지. 한양성 중의 건달패들을 주무르던 놈이었다지? 뒈졌다는 말을 들었는데 그렇지 않았던 모양이구나. 하지만 상관없어. 이제 곧 그렇게 될 테니까.”
 이장생을 알아본 놈이 삿대질을 했다.
 “이놈, 우리가 교동 윤 대감 댁의 사람들이라는 건 알고 이 짓을 한 것이냐?”
 이장생이 코웃음을 쳤다.
 “새장 속에 새를 넣었듯이 세상을 손에 넣고 있는 윤 대감 아니더냐? 그런 분이 제 집의 개 몇 마리 때려잡았다고 화를 낼 리도 없을 터이니 속 보이는 짓은 그만 둬라.”
 “저런 발칙한 놈!”
 발을 구르지만 그놈은 감히 나서지 못하고 힐끔거리며 눈매 매서운 자의 눈치를 보았다. 그 자가 이놈들의 우두머리가 틀림없다. 이장생이 턱짓으로 그 자를 가리켰다.
 “듣자하니 윤 대감 집에 쓸 만한 검객이 한 명 있다고 하더군. 네가 그 장 뭐라는 자이냐?”
 “흥, 네까짓 파락호 놈이 감히 그를 입에 올리다니, 살고 싶은 마음을 일찌감치 버린 놈이로구나.”
 그 자가 코웃음을 치고 천천히 칼을 뽑았다. 그걸 보는 이장생의 눈에서도 살기가 옅게 배어나기 시작했다.
 “칼을 지닌 놈이라면 그것을 뽑아드는 순간 목숨을 걸어야 한다는 걸 잘 알겠지?”
 “흥!” 하고 다시 코웃음을 친 놈이 칼끝을 아래위로 조금씩 흔들며 발을 소리없이 끌었다. 상대의 주의를 빼앗으려는 술책이다.
 이장생은 그 자의 칼을 바라보지 않았다. 꿈쩍도 하지 않고 서서 두 눈을 똑바로 노려볼 뿐이다.
 “이얏!”
 그놈이 날카로운 기합성을 터뜨리며 훌쩍 술상을 뛰어넘었는데 가볍고 민첩한 운신이었다. 이장생은 그 자의 솜씨가 제법이라는 걸 한눈에 알아보았다. 그래서 더욱 살기가 솟구쳤다.
 휙!
 매서운 칼바람이 비스듬히 떨어졌다가 다시 긋고 올라왔다. 과연 능숙한 솜씨였다.
 허깨비처럼 몸을 움직여 세 번의 칼질을 피한 이장생이 성큼 그놈의 가슴 앞으로 다가섰다. 목을 쳐오는 칼을 뿌리치며 손목을 낚아채는 솜씨가 경쾌하다.
 “헛!”
 놈이 급하게 칼을 물렸으나 이장생의 손아귀에서 빠져나갈 수 없었다.
 팔이 맥없이 뒤로 꺾였다. 온 힘을 써보지만 관절을 비틀고 꺾는 데에는 견딜 수가 없다. 기어이 우두둑, 하고 팔꿈치 관절이 어긋나 쑥 빠졌다.
 이장생은 거기서 멈추지 않고 사정없이 수도(手刀)를 내리쳐 놈의 어깨뼈를 부수어 버렸다. 빠각! 하는 끔찍한 소리와 함께 놈이 새된 비명을 터뜨리며 주저앉았다.
 상처가 나으려면 몇 달 족히 고생해야 할 것이고, 다 낫는다고 해도 다시는 칼을 잡을 수 없을 것이다.
 놈이 고통을 참느라고 진땀을 흘리며 이장생을 노려보았다. 원독이 풀풀 날리는 눈길이었다.
 
 “어쩌려고 그리 큰일을 저질렀어요?”
 상황이 수습되자 임가선이 책망하듯 말했다. 가슴뼈가 부러진 놈이 기어이 숨이 끊어져 업혀 갔던 것이다. 뼛조각이 안으로 밀리면서 간을 뚫고 폐를 찢어놓았던 모양이다.
 가만히 이장생을 바라보던 임가선이 다시 한숨을 쉬었다.
 “윤 대감 댁의 사람들이라는 걸 알면서도 살인을 했으니 윤 대감은 차치하고라도 그들이 가만히 있지 않을 거예요. 장차 그 화를 어찌 당하시려고…….”
 나무라지만 이장생은 태연하기만 했다.
 “오면 오는 족족 숨통을 끊어버리지 뭘.”
 “윤 대감의 세도가 어떤지 알면서도 그런 말을 하세요?”
 “졸개 몇 놈 손봐줬다고 설마 관병을 풀겠느냐? 제 얼굴에 먹칠을 하는 짓이니 그렇게 할 리가 없지. 그렇게 한다고 해도 겁날 건 없다.”
 “이랑은 그렇다고 쳐요. 장차 우리 명월향은 어찌 되겠습니까?”
 한숨을 쉬는 건 기생어멈 명월의 심정을 대신하는 것이리라.
 이장생은 역시 제가 이곳에 머물러 있지 말았어야 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미 엎질러진 물이니 할 수 없다.
 
 ***
 
 “기분 나쁜 놈이더군요.”
 남치근이 분한 듯 씨근댔다.
 정유길은 그의 성정이 포악하고 냉정한 자라는 걸 잘 알고 있었다. 달래주어야 한다.
 “이 사람, 너무 불쾌하게 여기지 말게. 그 아이가 한이 깊어서 그런 것 아니겠는가.”
 “그래도 내가 마치 저를 속이는 것처럼 대할 건 뭐란 말입니까? 아니, 대감이 보시기에 소관이 그까짓 놈한테 거짓부렁이나 지껄일 그런 자입니까?”
 “허허, 그럴 리가 있는가. 아직 어리고 철이 들지 않아 그러니 자네가 이해하시게. 대범한 장군님 아니신가. 허허-”
 아무리 불같은 성정을 가진 남치근이지만 예조와 이조의 참판과 판서를 두루 지낸 정유길 앞에서 제 성질대로 할 수는 없었다.
 명월향에서 술대접을 잘 받고 돌아가는 길이었다.
 그 자리에서 이장생을 처음 대면한 남치근은 날카로운 그의 눈을 보고 ‘이놈 봐라?’ 하는 생각이 들었다. 타고난 무장답게 상대의 심상치 않은 기운을 즉각 느낄 수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호기심을 가지고 요모조모 뜯어보는 중이었는데 이장생이 따지듯 임꺽정에 대한 일들을 물어대는 것 아닌가.
 격식을 차린 인사말이 오가고, 술을 권하며 일상적인 잡담 몇 마디를 나누는 동안에는 그저 성정 반듯하고 기개가 있는 젊은 놈인 줄만 알았다.
 제법 머리에 든 것도 많고 은근히 사람을 위압하는 자신감까지 엿보이는 것이어서 서출로 썩고 있기에는 아까운 놈이라는 생각을 하기도 했었다.
 이장생이 넌지시 토포사 시절에 세웠던 저의 공을 치하하는 말을 꺼냈을 때는 껄껄 웃으며 우쭐대기도 했다.
 그런데 그것이 저를 닦달하기 위해 던져준 미끼였다는 것을 알고는 얼마나 분했던가.
 평소 그의 성질대로였다면 당장 이장생은 물론 명월향의 기생이며 군식구들을 모조리 포도청으로 잡아가 물고를 냈을 게 틀림없다.
 수틀리면 백성은 물론 지방의 수령들까지도 거침없이 두드려 패버리는 그의 포악함은 이미 조정 내에 모르는 자가 없었다.
 그가 전라방어사로 있던 때의 일이 유명하다.
 군령을 시행한답시고 나주목사 최환을 잡아다가 곤장을 때렸는데, 얼마나 모질게 때렸던지 최환은 풀려난 뒤 며칠 가지 못해 장독으로 죽었다.
 대신들이 들고 일어나 탄핵했으나 임금은 남치근이 최환을 그 자리에서 때려죽인 게 아니라는 핑계로 의금부로 압송하는 대신 삭탈관직하는 선에서 무마했다. 그리고 몇 년 뒤에 다시 순찰사로 등용했으니 그에 대한 신뢰가 얼마나 깊은지 알 수 있다.
 그는 분명 조선에 몇 되지 않는 뛰어난 장수이고 능력도 출중한 자이지만 그런 성질 때문에 여러 번 고초를 겪기도 했다. 그러면서도 매번 다시 등용되었고, 그때마다 승진을 거듭했던 건 그만한 장수를 찾아보기 어려운 탓이었다. 임금은 어떻게 하든 그를 달래서 쓰기 원했던 것이다.
 그런 주상의 믿음에 보답하듯 남치근은 을묘왜변을 진압하는 큰 공을 세웠고, 얼마 전에는 나라 안의 골칫거리였던 임꺽정 일당을 토벌하는 공을 세웠다.
 그 후 좌포청의 포도대장이 되어서 한양의 호랑이로 군림하는 저에게 한낱 서출에 지나지 않는 놈이 꼬치꼬치 캐묻고 되묻는 데에 울화가 치밀지 않을 수 없었다.
 임가선의 나긋나긋한 접대와 정유길의 눈짓이 없었다면 무슨 일을 저질렀을지 모른다.
 “소관이 보건데 그놈은 반드시 큰 사고를 칠 놈입니다. 대감께서 그놈을 어찌 그렇게 역성드는지 모르겠으나 조심하시는 게 좋을 것입니다.”
 “명심함세. 그나저나 조만간 내 집에서 다시 한 번 보세. 오늘 자네에게 신세를 졌으니 갚아야지.”
 “그러지요.”
 남치근이 시원하게 대답하고 껄껄 웃었다.
 정유길은 조정에 뿌리가 깊은 사람이었다. 주상의 신임도 두텁다. 지금이야 파직되어 하릴없이 날을 보내고 있으나 조만간 다시 출사할 게 틀림없었다. 장차 판서도 되고 정승도 될 사람인 것이다. 잘 사귀어 두어야 저에게도 득이 된다는 걸 아는 터라 남치근은 조금 전의 불쾌했던 일은 툴툴 털어버릴 수밖에 없었다.
 실제로 정유길은 몇 년 후 복직되었고, 선조 임금 치세에는 우의정과 좌의정의 자리를 두루 거쳤다.
 
 “어쩌자고 그처럼 무례하게 구셨어요?”
 그 시간에 이장생은 또 한 차례 임가선의 책망을 듣고 있었다.
 “그분이 어떤 분이신줄 잘 알면서 그렇게 대들 듯이 하다니…… 저는 당장 무슨 일이 벌어질 것만 같아 가슴이 조마조마해서 죽는 줄 알았답니다.”
 “일은 무슨…….”
 멋쩍은 얼굴로 중얼거리면서도 이장생은 속으로 여전히 남치근이 했던 말에 대해서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가 마지못해 하면서도 임꺽정을 토벌하던 때의 일을 자세히 말해주었는데 제 고생이 심했다는 것과, 저의 무용과 지략이 뛰어났기에 성공할 수 있었다는 것을 은근히 강조했다.
 재령의 전투에서 임꺽정은 심복들을 다 잃고 가까스로 몸을 빼 달아났다고 했다.
 화가 난 남치근이 사람으로 벽을 두르고는 재령에서부터 서흥에 이르기까지 한 집 한 집 샅샅이 뒤지며 수색해 갔다. 그러기를 며칠. 한 노파의 집에 숨어 있던 임꺽정이 관병으로 변복을 하고 달아나는 걸 서림이 발견했다고 한다.
 뒤쫓은 남치근이 활을 쏘아 기어이 그를 잡고 즉각 목을 쳐버렸다는 대목에서 이장생이 벌컥 화를 냈다. 그처럼 대역무도한 도적을 형조나 의금부에 넘겨 왕명에 따라 조치하지 않고 어째서 사사롭게 목을 쳤느냐고 매섭게 따졌던 것이다.
 그토록 원하는 임꺽정의 목을 남치근이 가져갔다는 데 대한 억울함이었으나 남치근으로서는 괘씸하기 짝이 없는 일이었다. 그래서 노성을 터뜨리고 발작하려는 그를 임가선이 붙들었고 정유길이 큰 기침으로 만류했다.
 가까스로 분을 삭인 남치근이 석 잔의 술을 거푸 들이켜고 나서 다시 말했다.
 “한양으로 압송해 가는 중에 아직 어디엔가 숨어 있을 잔당들이 구출해 간답시고 달려들 테니 그게 귀찮고, 또 화살에 맞아 목숨이 경각지간에 달렸으므로 그렇게 할 수도 없었느니라.”
 그의 해명이 이치에 맞았지만 이장생은 여전히 불만일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혹시 가짜를 잡고 진짜라고 한 건 아니냐고 불쑥 묻자 남치근이 기어이 화를 버럭 내며 상을 내리쳐 두 쪽을 내고 일어섰다.
 이장생이 그런 엉뚱한 질문을 던진 건 억지가 아니었다.
 그 전에도 순경사 이사증이 임꺽정을 잡았다고 조정에 보고했으나 나중에 그 자가 임꺽정이 아니라 그의 형인 가도치라는 게 밝혀져 처벌을 받았고, 그 후에는 의주목사 이수철이 임꺽정을 잡았다고 했으나 그 또한 가짜였다. 이수철이 가짜를 협박하여 진짜라고 자백하도록 한 것임이 드러나 문책을 받고 파면되었던 일도 있었다.
 임꺽정이 득세할 때부터 각처에 그를 자처하는 자들이 여럿 생겨났었다. 이름을 도둑질해 이득을 얻거나 위세를 떨치려던 자들인데 임꺽정에게는 그게 꼭 나쁜 일만은 아니었다. 제 곁에 저와 흡사하게 생긴 자를 두어서 수색을 면했던 일이 있기도 했던 것이다. 그런 사실을 모르는 사람이 없는 터라 이장생이 의심을 품을 만도 했다.
 “이제 그만 잊어버리세요. 서림이라는 사람이 진짜 임꺽정이라고 증언했고, 봉산 사람들도 죄다 그렇다고 했다니 의심할 여지가 없잖아요?”
 임꺽정이 황해도 봉산에서 오래 있었던지라 그곳 사람들 중에 아는 사람이 적지 않았다. 그들을 불러다가 수급을 보여주었는데 모두의 증언이 일치했다.
 그래도 이장생은 믿을 수 없었다. 믿고 싶지 않았다. 제가 본 임꺽정은 그렇게 맥없이 죽을 자가 결코 아니었던 것이다.
 더구나 잡배처럼 산골 노파의 집에, 그것도 냄새나는 헛간에 숨어 있었다는 게 얼토당토않았고, 발각되자 꽁지가 빠져라 하고 달아나다가 등에 화살을 맞고 붙잡혔다는 것도 그랬다.
 만약 그게 사실이라면 그렇게 시시한 자에게 한을 품고 사 년 동안이나 목숨을 건 수련을 했다는 것 자체가 허탈해지고 만다.
 
 남치근과 헤어진 정유길은 제 집으로 가는 대신 광통교(廣通橋)를 성큼성큼 건너고 있었다.
 그가 붓골(필동)의 한 저택에 이른 건 한밤중이었다. 횃불이 이글거리는 대문 앞에 두 명의 건장한 사내가 칼을 찬 채 서 있다가 다가오는 정유길을 알아보고 얼른 달려와 인사했다.
 “대감마님께서 이 시간에 어인 일이십니까?”
 “이 집 주인이 지금 주무시느냐?”
 “사헌부의 나리들이 찾아와 늦게까지 한담하시다가 조금 전에 돌아가셨으니 아직 안 주무시고 계실 겁니다요.”
 “그럼 내가 좀 뵙겠다고 전하여라.”
 “우선 안으로 드시지요.”
 무사가 정유길을 공손하게 사랑채로 안내했다. 조금 뒤에 어린 계집종이 종종걸음으로 찾아와 고했다.
 “안으로 뫼시라는 분부가 계셨습니다.”
 헛기침을 한 정유길이 넓은 마당을 지나는데, 힐끔 힐끔 바라보는 곳마다 건장한 무사들이 창이며 칼을 쥔 채 서 있었다. 그늘진 곳에는 궁수도 숨어 있는 듯했다. 모두 이 집 주인 이정빈의 수하들로서 사병이나 다름없는 자들이었다. 낮에는 이정빈을 호위할 최소한의 무사만 집에 있다가 밤이 되면 이렇게 죄다 모여들어 겹겹이 저택을 에워싸고 지키는 것이다.
 윤원형이 언제 살수를 뻗어올지 몰라 전전긍긍하는 이정빈의 모습을 보는 듯 하여 입맛이 썼다.
 “대감께서 이 늦은 밤중에 어인 일이십니까?”
 대청으로 나와 반갑게 맞이하는 이정빈의 얼굴 가득 의아해 하는 기색이 있었다.
 이량의 장자인 그는 잘 생긴 스물여섯 살의 청년이었다. 무너져가는 집안을 일으켜 세우고자 안간힘을 쓰고 있는 게 안타까워 보일 수밖에 없는 나이다.
 이량이 삭탈관직당하고 귀양지에서 허망하게 죽은 게 작년의 일이었다. 그가 비록 처량한 신세가 되어 세상을 떠났으나 조정을 떨게 하던 위세마저 모두 사라져버린 건 아니었다. 실권을 잡고 전횡하고 있는 윤원형이 여전히 이량의 잔존 세력을 꺼려하는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그 세력의 중심에 서 있는 사람이 이정빈이었다. 윤원형으로서는 눈엣가시 같은 존재가 아닐 수 없고, 이정빈으로서는 윤원형의 세도 하에서 어떻게든 살아남기 위해 발버둥치지 않을 수 없는 형편이었다.
 그런 이정빈에게 누구보다 든든한 힘이 되어주는 사람이 바로 정유길이었다. 선부와 비슷한 연배인데다가 서로 가까이 지냈을 뿐 아니라 학문과 정치적 역량이 뛰어났으므로 어렸을 때부터 그를 존경해온 터였다.
 좌정하자 정유길이 물끄러미 바라보더니 혀를 찼다.
 “쯧쯧, 자네의 그 몰골이 뭔가? 가문의 흥망은 가장의 얼굴에 제일 먼저 나타나는 법일세. 그러니 식솔들은 물론 아랫것들 모두가 가장의 눈치만 보는 게지. 아무리 처지가 궁색해도 낙심한 기색을 달고 살아서는 안 되네.”
 “죄송합니다.”
 이정빈이 고개를 숙였다. 부친이 살아 돌아와 꾸짖는 것 같아서 마음이 더욱 쓰라리다.
 시무룩해진 그의 안색을 보고 안타까워진 정유길이 넌지시 말했다.
 “내가 자네에게 호통을 치는 건 선부와의 교우를 생각해서이기도 하지만 자네를 그만큼 아끼고 있기 때문이라는 걸 알아주게.”
 “이를 말씀입니까? 소생은 나리의 꾸짖음을 듣고 반성하고 있을 뿐 조금도 원망하는 마음을 품지 않았습니다.”
 “그래야지. 그건 그렇고…….”
 “말씀하소서.”
 “내가 이렇게 늦은 밤에 불쑥 찾아온 건 한 가지 일러줄 말이 있어서라네.”
 “일러줄 말이라 하심은……?”
 이정빈이 의아하여 바라보았다. 무언가 중요한 일이 틀림없으리라는 생각이 들어 긴장되기도 하는데 정유길이 불쑥 꺼낸 말을 듣고서는 어리둥절해지고 말았다.
 “밖에 곽 가가 있겠지?”
 “갑자기 곽 가라니요? 소생은 무슨 영문인지 모르겠습니다만…….”
 “아무튼 있으면 이리 불러 주게.”
 고개를 갸웃거린 이정빈이 종을 불러 말을 전했다. 잠시 후 곽거도(郭巨道)가 들어왔는데 가벼운 옷차림에 칼을 차고 있었다.
 그는 삼십 대로 보이는 걸걸한 사내였다. 체구가 큼직하고 손이 두툼했으며 각진 얼굴에 부리부리한 눈은 누구나 위엄을 느낄 만한 용모다.
 “하명하실 일이라도……?”
 정유길에게 인사한 그가 이정빈을 향해 두 손을 모으고 서서 공손히 물었다. 이정빈이 손짓해 불렀다.
 “자네를 찾은 건 내가 아니라 어르신일세. 이리 가까이 와서 뵙게나.”
 성큼 다가온 곽거도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정유길이 고개를 끄덕였다.
 “언제 봐도 네 기상은 늠름하구나. 그리 앉아라.”
 곽거도를 불러 앉힌 정유길이 가타부타 말없이 품에서 이장생이 그려주고 갔던 난(蘭) 그림 한 폭을 꺼내 펼쳐놓았다.
 “보거라.”
 “예?”
 어리둥절해 하던 곽거도가 유심히 난 그림을 살펴보기 시작했다. 점점 눈살을 찌푸리더니 이내 얼굴마저 벌겋게 상기되어 씩씩거린다.
 그와 같은 반응이 의아해서 목을 빼고 그림을 살펴보던 이정빈의 낯빛도 변해갔다.
 그들의 반응을 넌지시 지켜보던 정유길이 헛기침으로 주의를 환기시키고 물었다.
 “그래, 무얼 느꼈느냐?”
 곽거도는 여전히 상기된 얼굴로 그림에 제 눈을 갖다 붙이기라도 하듯이 바라보기만 하고 있었다. 그의 숨결이 점점 거칠어져 갔다.
 잠시 후에야 그가 휴, 하고 길게 숨을 내쉬고 정유길을 마주 보았다.
 “감히 여쭙겠습니다. 대체 이런 그림을 그린 자가 누구입니까?”
 이정빈이 의아해서 곽거도를 보았다.
 “아니, 자네가 언제부터 그림도 볼 줄 알았나?”
 곽거도는 듣지 못한 것처럼 정유길만 바라볼 뿐이었다. 정유길이 그림을 말아 품속에 넣고 말했다.
 “그래, 역시 너도 느끼는군. 이 그림은 내가 아는 어떤 사람이 그려준 것이니라. 자, 네가 느낀 바를 말해 보거라. 그러면 그가 누구인지 가르쳐 주지.”
 “서화에 무지한 소인이 뭘 알겠습니까마는 그 그림에서 한 가지는 매우 잘 느낄 수 있었습니다. 이 그림을 그린 자는 아마도 소인 같은 무사가 아닐까 합니다만…….”
 “옳거니, 네가 느낀 그게 무어냐?”
 “살기입죠.”
 곽거도의 말에 이정빈이 불길한 소리를 들었다는 듯 얼굴을 찌푸렸으나 정유길의 입가에는 미소가 떠올랐다.
 “그래, 잘 봤군. 역시 너는 뛰어난 검객이라 단번에 그림의 기운을 느낄 수 있었던 게야.”
 “이와 같이 그림 속에 제 살기를 담을 줄 아는 자라면 아마도…….”
 “아마도?”
 “보기 드물게 뛰어난 검객일 게 틀림없습니다. 그것도 지독한 심성을 지닌 자이겠지요. 가만, 그렇다면 혹시?”
 누구를 떠올렸던지 곽거도의 눈빛이 매서워졌다. 정유길이 그의 속을 안다는 듯 대뜸 말했다.
 “장약허를 생각한 것이냐?”
 “그렇습니다.”
 “하하, 좋은 생각이다만 그 자는 너와 마찬가지로 서화에는 문외한이다. 그러니 그 자가 이런 그림을 그렸을 리가 없지.”
 “하오면 누구입니까?”
 “이장생.”
 “예?”
 정유길의 말에 곽거도가 눈을 크게 떴다. 들어보지 못한 이름이었던 것이다. 혹시 이 높으신 대감이 저를 놀리는 게 아닌가, 하고 생각하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정빈은 그렇지 않았다.
 “아니, 그 녀석이 죽지 않았단 말입니까?”
 “멀쩡하게 살아서 나를 찾아 왔었다네. 이 그림 한 장을 그려주더군.”
 “그 녀석이 죽었다는 소문을 들었을 때 타고난 재주가 아깝다고 애석해 했는데 다행이군요.”
 말은 그렇게 하지만 가볍게 낯을 찌푸리는 건 이장생이 먼 인척인 이춘명의 서출이라는 것 때문이었다. 장안의 난봉꾼으로, 싸움꾼으로 소문이 나지 않았던가. 그 재주가 아까워 눈여겨 본 적도 있었으나 행실이 바르지 못한 자라서 가까이 하지 않았다. 혹시라도 가문에 누가 될지 모르기 때문이다.
 곽거도가 심각해져서 말했다.
 “소인은 그 자가 누구인지 모릅니다. 하지만 이런 그림을 그릴 수 있는 자라니 한번 만나보고 싶군요. 그런데 검객이 아닙니까?”
 그렇게 짐작하는 건 그림의 주인이라는 자를 정유길은 물론 이정빈 역시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 자가 검객이라면 눈앞의 두 양반이 잘 알 리가 없다고 생각했다. 다른 세상에 살고 있는 사람들 아닌가.
 정유길이 곽거도의 말에는 대답하지 않고 불쑥 물었다.
 “저에게 붓을 던지게 하고 그것을 단번에 여덟 토막으로 자를 수 있는 검객이 조선에 몇이나 되겠느냐?”
 “예?”
 곽거도가 눈을 휘둥그레 떴다.
 “너는 그렇게 할 수 있느냐?”
 “그렇게 할 수 있는 자라면 지독히 빠른 검법을 익혀 대성한 자일 것입니다. 소생이 배운 검법은 쾌검과 다른 것인지라 그렇게 할 수 없습니다.”
 비교당하는 것 같아서 기분이 나쁘다는 게 말투에 고스란히 드러난다. 정유길이 빙긋 웃었다.
 “네가 월녀검법을 대성한 보기 드문 검객이라는 걸 안다. 추풍검법과 월녀검법이 아무래도 차이가 있으니 어느 것이 우월하다고 단정할 수 없겠지.”
 “아니, 대감의 말씀은 그럼, 그 자가 추풍검법을 대성한 자라는 것입니까?”
 “내가 알기로 그처럼 빠른 검법은 추풍검법 밖에 없는 줄 아는데 그 녀석은 부정하더구나. 그러니 아닌 게지. 하지만 분명히 내 눈앞에서 붓을 여덟 토막으로 잘랐더니라. 너무 빨라서 나는 번쩍이는 검광 밖에 보지 못했다.”
 “허!”
 이제는 이정빈도 탄성을 터뜨렸다.
 “정말 그만한 검객이라면 장약허 그놈과 겨루어도 지지 않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게 이장생이라니 믿기 힘들군요.”
 “나도 그랬지. 직접 보았으면서도 여전히 믿어지지 않네.”
 “하오면 나리께서 몸소 저를 찾아오신 건 바로?”
 “그렇다네. 자네에게 도움이 될까 해서 귀띔이라도 해줄 목적이었지. 자고로 문사가 붓을 소중히 여기고 검객이 검을 품에서 떼어놓지 않는 건 언젠가는 제 재주로 좋은 주인을 모시고자 함이 아니겠는가? 그걸 알아줄 주인을 기다리는 것이기도 하지. 내 생각에는 그 녀석이 자네를 돕는다면 큰 힘이 될 것 같은데 자네 생각은 어떠한가?”
 “여부가 있겠습니까? 그런데 나리 말고 그 녀석이 검객이 되어 돌아왔다는 걸 아는 사람이 또 있는지요?”
 “아마도 없을 걸세.”
 이정빈의 얼굴에 웃음이 떠올랐다.
 아직 아무도 그런 사정을 알고 있지 못한 것 같으니 마음이 급해진다. 윤원형이 알게 되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제 수하로 끌어들이려고 할 테니 그 전에 손을 뻗쳐야 되겠다는 마음에 벌써 엉덩이가 들썩거렸다.
 
 비슷한 시간에 남치근은 사저로 돌아와 있었다. 옷도 갈아입지 않은 채 종들에게 호통을 쳐서 최달평(崔達平)을 불러오게 했다.
 종들이 놀란 꿩 새끼들 마냥 사방으로 흩어져 내달렸다.
 느지막이 집에 돌아와 잘 준비를 하던 최달평이 급한 말을 전해들은 건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서였다.
 한밤중이지만 포도대장의 호출을 받았으니 못들은 척 할 수 없다. 최달평은 투덜대면서도 옷을 다시 입고 나설 수밖에 없었다.
 그는 흔히 포교라고 부르는 포도부장 직위에 있는 자인데 여느 포교보다 몇 배는 더 끈질기고 집념이 강해서 한 번 점찍은 범죄자를 놓치는 법이 없기로 유명했다.
 완력도 있고 무예 솜씨 또한 뛰어난데다가 오랜 경험에서 얻은 눈썰미가 남달랐다. 부하 포도군관이며 포졸들을 부리는 수단도 능수능란하다. 타고난 포교인 것이다.
 한양성중의 무뢰배, 범죄자들이 저승사자보다 무서워한다는 최 포교이지만 남치근 앞에서는 그저 고양이 만난 쥐 신세였다.
 부지런히 달려와 머리를 조아리자 활활 옷을 벗어부치고 홑옷 차림으로 앉아 있던 남치근이 이글거리는 눈으로 바라보는 것이어서 최달평은 영 불안하기만 했다. 혹시 제가 무언가 잘못한 일이 있는 건 아닌지 좌불안석이다.
 “네가 재주가 좋고 수단 또한 좋아서 다른 놈들보다 믿음직하다.”
 남치근의 첫 마디가 엉뚱한 것이어서 최달평은 더 가슴이 조마조마했다. 제가 모시는 이 어른이 면전에서 부하를 칭찬하는 사람이 아니라는 걸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내가 너에게 특별히 한 가지 일을 시키려고 하는데 잘 할 수 있겠느냐?”
 “하명만 하십시오.”
 “너는 이제부터 다른 모든 일을 제쳐두고 한 놈의 뒤만 쫓아라.”
 “예?”
 “당직이니 번이니 하는 걸 설 필요도 없다. 조회 자리에 나오지 않아도 좋아. 시시한 도적놈들 뒤를 쫓는 건 다른 놈들에게 다 맡기고 너는 그저 한 놈만 쫓으란 말이다.”
 워낙 엉뚱한 일이요 뜬금없는 말이라 최달평은 제가 지금 꿈을 꾸고 있는 건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명월향에 이장생이라고 하는 수상쩍은 놈이 있느니라. 나이는 스물아홉이고 서출이다. 제법 완력이 있고 강단이 있는 놈이라더라. 하지만 너만이야 하겠느냐?”
 “하오나 그놈은 이미…….”
 죽은 놈이 아닙니까? 하고 대꾸하려다가 입을 다물었다. 들은 풍문이었을 뿐 확실한 것도 아니었거니와, 남치근이 이처럼 이름까지 거명하면서 특명을 내려주는 걸 보면 무언가 사단이 벌어졌기 때문이라는 생각에서였다.
 “제가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좀 더 자세히 말씀해 주십시오. 그저 뒤꽁무니를 따라다니기만 하라는 건 아니겠습지요?”
 “이놈아!”
 남치근이 버럭 소리쳤으므로 최달평은 움찔하여 얼른 고개를 숙였다.
 “대체 그놈이 무슨 꿍꿍이짓을 하는지 잘 감시하라는 말이다. 그리고 수상쩍은 짓이나, 죄가 될 만한 짓을 하거들랑 냉큼 잡아와라. 당장 시작해!”
 “명을 받듭니다.”
 얼떨결에 복명하고 물러나지만 최달평은 대체 이게 무슨 일인지 여전히 어리둥절하기만 했다.
 대면한 적은 없지만 이장생이라면 그도 이미 알고 있었다. 한때 요주의 인물이었으나 한양에서 사라진 뒤에 죽었다고 소문이 파다하게 나지 않았던가. 그것도 사년 전이다. 그런데 뜬금없이 그놈의 뒤를 밟으라니 귀신에 홀린 것만 같았다.
 “제기랄, 상관없어. 죽은 놈이면 어떻고 산 놈이면 어떠며 귀신이면 또 어떨 것이냐? 하라시면 해야 하는 거지. 빌어먹을.”
 아무래도 포도대장이 저를 밉본 모양이라고 밖에는 생각할 수 없었다. 그래서 골탕을 먹이려는 모양인데 저로서는 못 하겠노라고 할 수도 없으니 부아가 났다.
 
 
 
 
 
 
 
 
 
 
 
 
 # 제5장 얽히는 사람들
 
 남치근의 사저에서 달아나듯 나온 최달평은 집으로 돌아가려다가 멈추어 섰다.
 억울하기도 하고 분하기도 해서 골이 났던 것이다.
 “제기랄, 내가 이게 무슨 꼴이냐, 그래.”
 사저를 향해 한껏 눈을 흘기고 주먹질을 해보일 뿐 제가 할 수 있는 게 아무 것도 없다는 데에 한숨이 나온다.
 혀를 차고 발길을 돌린 그가 어슬렁거리며 향하는 곳은 장통방 방향이었다. 다시 돌아가 잠을 잘 생각이 싹 사라져버린 것이다. 아닌 밤중에 홍두깨라고, 느닷없이 불려가 호통을 듣고 엉뚱한 명령을 받은 터라 부아도 났다.
 장통방은 좌우로 온갖 상점이 즐비하고, 각처에서 온 장사치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 곳이라 종일 사람들로 북새통을 이루는 거리다. 그러나 새벽을 바라보는 이 시간에 오가는 자가 있을 리 없었다. 순라를 도는 포졸들이 가끔 지나다닐 뿐인데 지금은 그들도 보이지 않았다.
 최달평은 기다리기로 했다. 순라꾼을 만나면 그놈들을 붙잡고 한바탕 치도곤을 내 줄 작정인 것이다. 괜한 트집이라도 잡아서 분풀이를 해야 가슴이 시원해질 것 아닌가. 그래서 그는 장통방 거리가 저 앞에 보이는 곳에서 몸을 감추고 있었다.
 남의 집 대문 기둥에 찰싹 붙어 서서 여기저기 기웃거리는 꼴이 영락없이 만만해 보이는 놈을 하나 골라 냅다 후려치고 주머니를 털어 달아나려는 잡배 같다.
 그러나 아직 통행금지가 발효되고 있는 시간의 거리는 쥐죽은 듯 고요하기만 했다. 가끔 어느 집 아이가 꿈을 꾸다 놀랐는지 자지러지게 울어대는 소리며 개짓는 소리만 간간히 들려올 뿐이다.
 하품을 하다가 꾸벅꾸벅 졸던 최달평이 고개를 들었다. 인기척이 났던 것이다.
 이 시간에 돌아다니는 놈이라면 그 자체로 수상쩍은 놈이 아닐 수 없다. 고개만 내밀고 살펴보던 그가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저쪽 어둠 속에서 다섯 놈이 다가오고 있었는데, 보아하니 술에 잔뜩 취한 놈들인 것 같았다.
 화풀이 할 대상을 찾은 최달평의 눈이 매우 반짝였다.
 왕명으로 시행되는 통금을 어기고 이 시간에 저렇게 고주망태가 되어 활보하고 있으니 잡아다가 물고를 내도 할 말이 없으리라. 싹싹 빌면서 묵직한 돈꾸러미라도 슬그머니 건네준다면 다시 생각해 볼 수도 있다.
 화풀이를 단단히 할 것이냐, 실속을 챙길 것이냐. 어느 쪽이 좋을지 속으로 저울질하지만 한심한 놈들이라는 생각은 변함없었다. 그래서 속으로 혀를 차며 가까워지기를 기다리던 그가 눈을 휘둥그레 떴다.
 “가만, 그게 아닌 것 같은데?”
 절로 인상이 찌푸려지는 것은 다가오는 놈들의 수상쩍은 몰골을 이제 똑똑히 알아볼 수 있게 된 때문이었다.
 고주망태가 된 것 같은 두 놈은 서로 부축하고 비틀거렸으며, 멀쩡해 보이는 한 놈은 정신을 잃은 것처럼 보이는 놈 하나를 업고 있었다. 다른 한 놈은 비록 혼자서 걸어오고 있었지만 역시 온전해 보이지 않았다.
 다섯 놈 모두 피투성이였다. 서로 부축하고 있는 두 놈은 물론 혼자 걸어오고 있는 놈도 팔에 부목을 대고 붙들어 맨 꼴이 상태가 심각해 보였다. 한 놈의 등에 업혀 있는 자는 이미 숨이 끊어진 놈이라는 느낌이 즉각 왔다.
 그렇다면 이건 그냥 지나칠 일이 아니다.
 범죄자 사냥꾼의 본능이 발동한 최달평은 남치근의 명령마저 까맣게 잊고 눈을 더욱 반짝이며 그놈들을 노려보았다.
 그들 다섯 명은 명월향에서 포악을 떨다가 이장생에게 호되게 당하고 쫓겨난 놈들이었다. 명월향에서 나와 종루 뒤쪽 피맛골에 있는 의원에게 찾아가 급한 대로 처치를 받았다. 그러나 가슴뼈가 박살난 자는 이미 죽었으니 소용없었고, 턱뼈가 부서진 놈과 어깨뼈가 부서진 놈은 무사했다. 목을 밟혔던 자도 급한 대로 침을 맞고 그럭저럭 운신할 수 있게 될 때까지 시간이 꽤 지체되었다.
 이 꼴로는 교동으로 돌아갈 수 없다고 여긴 그들은 우선 장통방에 있는 지인의 집에 묵으면서 치료를 더 받기로 하고 그리로 가는 길이었다.
 그러나 그런 사정을 알 리 없는 최달평의 눈에는 그저 그들이 무언가 심상치 않은 일을 벌이고 오는 도적놈들로 보일 뿐이었다. 그래서 그놈들을 잡을 요량으로 더 가까이 다가오기를 기다리는데 저 앞 어둠 속에서 빠르게 달려오는 발소리가 났다.
 이건 또 웬 놈들인가 하여 훔쳐보던 그가 눈살을 찌푸렸다. 가마 한 채와 앞뒤에서 그것을 호위하는 무사 네 명이 뛰듯이 다가오고 있었던 것이다. 가마를 메고 있는 두 놈의 씩씩거리는 소리가 들린다.
 통행금지를 무시하는 건 물론 호위 무사까지 대동하고 있으니 가마 안에 있는 사람의 신분이 예사롭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누구인지 더 궁금해져 고개를 슬며시 내밀고 엿보던 최달평이 “염병.” 하고 낮게 중얼거렸다.
 재빨리 어둠 속으로 기어들어가 꼼짝하지 않는 건 가마의 휘장을 알아본 때문이었다.
 붉은 모란꽃을 화려하게 수놓은 비단 휘장인데, 한양성중에서 가마에 그런 휘장을 치는 사람은 딱 한 명, 정경부인 정난정이 있을 뿐이다.
 ‘정경부인이 이 시간에 왜 이런 곳에?’
 의문이 일었지만 가마가 다가오자 은은히 풍겨오는 향냄새를 맡고서는 고개를 끄덕였다. 도대선사(都大禪師) 보우(普雨)가 있는 선릉 아래의 봉은사(奉恩寺)에 찾아가 늦도록 불공을 드리고 교동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 틀림없었던 것이다.
 첩실에 불과한 그녀가 무슨 요사를 떨었던지 윤원형을 꽉 틀어쥐었다는 건 이미 천하가 다 아는 사실이었다.
 그녀에게 빠진 윤원형은 정실 김 씨를 내쫓고 정난정을 안방마님으로 들였으며, 주상마저 움직여 그녀를 정경부인으로 올렸다. 그 일로 세상이 떠들썩했던 게 얼마 전이다.
 다들 뒤에서 정난정을 염치도 없는 계집이라고 욕했지만 윤원형의 위세에 눌려 감히 입을 뻥긋거리는 자도 없었다. 지금에 이르러서는 더 말할 것도 없다.
 윤원형도 윤원형이지만 수렴청정을 하고 있는 문정대비와 정난정이 형님, 아우님 하며 지내는 사이 아닌가.
 그처럼 위세 당당한 정경부인께서 행차하는 것도 모르고 저쪽에서는 다섯 명의 수상쩍은 놈들이 마주오고 있으니 무언가 사단이 날 터였다.
 최달평은 어떻게 되든지 지켜보기만 할 작정으로 어둠 속에서 눈을 반짝였다. 정경부인 앞인데 제가 나설 처지가 아니기도 하려니와, 이럴 때는 그저 숨죽이고 있는 게 보신하는 일임을 잘 아는 것이다.
 “웬 놈들이냐?”
 저 앞에서 마주 오는 수상한 놈들을 발견한 무사 한 명이 소리치고 앞으로 나섰다. 즉시 가마가 멈추어 선다.
 비틀거리며 정신없이 다가오던 놈들이 주춤하더니 이내 저희들 앞의 무리를 알아보고 반색을 했다.
 “너희들이구나. 나다. 김 가야.”
 이장생에게 한쪽 팔이 부러진 놈이 살았다는 듯 소리치고 나섰다.
 “어? 이 시간에 네가 어쩐 일이냐? 왜 여기에 있지? 아니, 그 꼴들은 또 뭐야?”
 앞서 하문했던 놈이 비로소 알아보고 놀란 소리를 질렀다.
 ‘어라? 이것들 봐라?’
 숨어서 지켜보고 있던 최달평의 눈이 호기심으로 반짝였다.
 ‘이제 보니 저놈들도 교동 윤 대감의 수하들이었군. 서둘러 덮치지 않기를 잘했다.’
 그런 생각이 드는 건 윤원형 대감의 수하 무사들과 시비를 벌여봐야 저만 피해를 볼 게 뻔하기 때문이었다. 포도대장 남치근도 윤 대감의 눈치를 보는 건 물론 그를 제 상전처럼 떠받들고 있지 않은가.
 그때 가마 뒤에서 한 사람이 앞으로 나왔다. 후리후리한 키에 마른 몸집이 장작개비처럼 단단해 보이는 자였다. 장도(長刀) 한 자루를 찼고, 번쩍이는 눈빛이 차갑기 짝이 없었다. 하관이 빠져서 강퍅해 보이는 얼굴인데, 가늘게 찢어진 눈과 뾰족하게 솟은 콧날 때문에 더욱 날카로워 보이는 인상이었다.
 ‘장약허다!’
 그 자를 알아본 최달평은 정말 운이 좋았다는 생각에 가슴을 쓸었다.
 장약허가 귀신같은 자라는 걸 모르는 사람이 없는 터 아니던가. 멋모르고 뛰어나갔더라면 큰 봉변을 당하고 말았을 것이다.
 “무슨 일이냐? 그 꼴은 뭐고?”
 장약허가 한 팔을 붙들어 매고 있는 김 가를 싸늘하게 노려보았다. 김 가가 이를 갈며 말했다.
 “비번이기로 명월향에 놀러갔다가 한 놈에게 당했소이다. 정 가는 목숨을 잃었습지요. 이렇게 장 대형을 만났으니 마음이 놓입니다. 우리들의 원을 풀어줍시오.”
 자못 억울하다는 듯 말하지만 장약허의 눈길에는 노여움도, 분해 하는 기색도 떠오르지 않았다. 얼음을 조각해 박아놓은 것처럼 차갑고 무심할 뿐이다.
 “한 놈에게 당해 그 꼴들이 되었단 말이지?”
 “그렇소. 분하기 짝이 없소이다. 그놈은 우리가 교동 대감마님 댁 사람들이라는 걸 알면서도…….”
 “시끄럽다!”
 낮게 꾸짖는 장약허의 어조에서 살기가 느껴졌다.
 “그놈이 누구냐?”
 “이장생이랍디다.”
 “이장생?”
 장약허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러나 그 말을 엿들은 최달평은 뒤통수를 한 대 얻어맞은 것 같았다.
 장약허가 다시 말했다.
 “너는 이제 다시는 칼을 잡을 수 없겠구나.”
 냉정한 말에 김 가가 두 눈에서 원독의 불길을 활활 뿜어냈다.
 “장 대형이 복수해주기를 바랄 뿐이오. 그래준다면 은혜를 잊지 않으리다.”
 “그래주지. 하지만 그 전에 너희들의 죄를 물어야겠다.”
 “아니 무슨 그런 말을…….”
 “너희들은 신분을 밝힘으로써 우리 모두의 얼굴에 먹칠을 했다. 대감마님의 체면마저 손상시켰지.”
 그 말에 김 가가 대꾸하지 못하고 고개를 푹 숙였다. 장약허의 말투가 더욱 차가워졌다.
 “그분을 위해 써야 할 몸뚱이를 고작 기방에서 그 지경으로 망가뜨렸으니 더욱 용서할 수 없다.”
 말을 마친 순간 허공에 번쩍, 하고 검광이 뿌려졌다.
 ‘헙!’
 최달평이 급히 제 입을 틀어막았다. 장약허의 칼이 김 가의 목을 치고 나가는 걸 본 것이다.
 그의 칼은 거기에서 그치지 않았다. 이내 나머지 놈들 속으로 파고들었는데, 한 번 번쩍일 때마다 한 놈씩 목이 꺾이고 가슴이 쪼개져 쓰러졌다. 비명을 지를 새도 주지 않는 잔인하고 쾌속한 검격이었다.
 그 눈부시게 빠르고 깨끗한 솜씨를 본 최달평이 부르르 진저리를 쳤다. 동료들에게 눈 한번 깜짝하지 않고 살수를 펼치는 장약허의 잔인함에 치를 떨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죽은 자의 옷깃에 칼을 문질러 닦은 장약허가 주위를 둘러보았다. 최달평은 꼼짝도 할 수 없었다. 숨을 멈추고 그의 눈길이 지나가기를 기다리는 시간이 끔찍하게 길기만 하다.
 “흉한 꼴을 보여서 송구합니다.”
 장약허가 가마를 향해 고개를 숙였다. 가마 안에서는 아무 말도 없었다.
 “너희는 저것들을 처리하고 뒤따라라. 가자.”
 그가 가마꾼을 재촉해 떠났고, 남은 자들이 시체를 옮기기 시작했다. 최달평은 비로소 안도의 숨을 쉬고 가슴을 폈다.
 아침이 되면 수표교 아래에서 변사체 다섯 구가 발견되었다는 신고가 들어올 것이다. 그 일로 포도청이 시끄러워지리라.
 “나하고는 상관없는 일이다. 나는 본 게 아무 것도 없는 거야.”
 중얼거린 최달평이 다시 부르르 몸을 떨었다.
 “그런데 이장생이라는 놈이 정말 죽지 않았던 모양이구나. 그렇다면 심각한 일이 생기겠는걸?”
 비로소 남치근의 명을 충실히 수행해야겠다는 결의가 선다.
 
 ***
 
 “어디를 가시려고요?”
 “잠시 다녀오마. 며칠 걸릴지도 몰라.”
 “이랑이 없는 새 그들이 또 찾아오기라도 하면…….”
 임가선이 울 것 같은 얼굴을 하고 옷깃을 잡았다. 아침 일찍 행장을 갖추고 나서는 그를 보기가 왠지 불안했던 것이다.
 “걱정 마라. 한번 치도곤을 당했으니 당분간은 조용할 거야.”
 즉각 찾아와 소란을 떨 만큼 치졸한 놈들은 아닐 것이라고 생각했다. 세도가 윤원형을 모신다는 놈들 아닌가. 여타 하오잡배들과 같을 리 없으리라고 믿지만 그대로 넘어갈 리도 없으니 장차가 문제였다.
 후환을 없애려면 역시 그놈들과 담판을 짓는 게 최선일 것이다.
 이장생은 이번 일을 마치고 돌아와서 그렇게 하겠다고 생각했다.
 그는 충청도 금산에 다녀올 작정이었다. 거기 임꺽정이 죽기 전에 그의 노릇을 했던 가짜가 있다는 걸 알았기 때문이다. 김갑석이라는 자인데 생긴 모양이 임꺽정을 빼다 박은 것 같아서 한동안 진짜 임꺽정이 그놈을 저 대신 부리기도 했다는 말을 들었다.
 임꺽정이 죽었다고 알려진 후 각처에서 준동하던 가짜들도 싹 사라진 터에 그가 특별히 김갑석이라는 놈에게 관심을 갖는 건 그런 이유 때문이었다.
 이장생이 다른 사람들에게는 아무 말도 없이 명월향을 나섰을 때 최달평은 맞은편의 국밥집에서 아침밥을 먹으며 어디서부터 시작할지 궁리하고 있는 중이었다. 그러다가 그가 나오는 걸 보았다.
 ‘저놈이다.’
 한눈에 알아보았다.
 가만히 엿보던 최달평이 급히 수저를 내려놓고 국밥집을 나갔다.
 이장생은 빠른 걸음으로 광통교를 건너 남산을 바라보고 나아가고 있었다. 아침이 되어 부산스럽게 깨어나는 성중의 활기를 느끼면서도 마음은 무겁기만 했다.
 숭례문을 나와 한양성을 벗어나자 도성 안과는 완연히 다른 풍경이 펼쳐졌다. 용산에 이르기까지 논과 밭이 연이어 있고, 드문드문 모여 있는 마을들은 고요하기만 했다.
 이장생이 나루에서 배를 타는 것을 본 최달평은 낙심하고 말았다. 더 이상 뒤쫓을 수 없게 되었기 때문이다.
 “다시 돌아오겠지.”
 미행을 멈추고 혀를 차면서 최달평은 지금 제 존재를 발각당하는 것보다 그가 돌아오기를 기다리는 게 현명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언덕에 서서 느릿느릿 강을 건너가는 배를 멍하니 바라보던 그가 한숨을 쉬고 돌아섰다.
 “명월향에서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질지 그걸 지켜보고 있는 것도 중요한 일일 것이다.”
 그렇게 위안을 삼으며 다시 명월향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그날 저물녘에 수상한 자 한 명이 그곳으로 들어가는 걸 발견했다.
 ‘저놈?’
 최달평이 머리를 갸웃거렸다. 장년의 장사치로 보이는 자 하나가 문을 지키고 있던 장정 놈의 환대를 받으며 명월향으로 들어갔는데, 옷차림이며 거드름을 떠는 행태가 돈깨나 만지는 자인 게 틀림없어 보였다.
 최달평이 이상하게 여기는 건 그 자가 어디에서인가 본 자인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얼핏 본 그 얼굴을 당최 생각해 낼 수가 없었다.
 인상을 쓰던 최달평이 어슬렁거리며 명월향으로 다가갔다. 문을 지키던 놈이 수상하다는 듯이 바라본다.
 “이보게, 방금 들어간 그 양반이 뉘신가?”
 “그건 왜 물으시오?”
 “지나가던 길에 얼핏 보았는데 내가 아는 사람 같지 뭔가. 그래서 내 짐작이 맞는다면 공술이라도 한 잔 얻어먹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지. 그래, 뉘신가?”
 장한이 허름한 최달평의 행색을 아래위로 훑어보고 혀를 찼다.
 명월향의 술값은 비싸고 기생값은 더 비싸기로 이름 높다. 어지간한 자들은 감히 구경할 엄두도 내지 못하는 곳인 것이다. 그래서 가끔 이처럼 개꾼으로 붙으려는 자들이 귀찮게 굴기도 했다. 그러니 나오는 말이 퉁명스럽지 않을 수 없다.
 “댁이 생각하는 사람이 누군지 먼저 말해 보구려. 맞으면 안에 통보해 드리지.”
 “글쎄, 내 생각에는…….”
 눈살을 찌푸렸던 최달평이 얼른 수를 생각해 냈다.
 “장통방의 포목점 김 나리가 아닌가?”
 장통방에는 포목점이 많고, 김 씨는 흔한 성이니 대충 걸려들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오산이었다.
 장한이 콧방귀를 뀌었다.
 “흥, 어줍잖은 수작 말고 썩 꺼지시지?”
 “아니란 말인가?”
 “장통방의 나리가 맞기는 한데 그 양반의 성은 김 씨가 아니라 이 씨라네. 괜한 수작 부렸다가는 알지?”
 눈을 부라리며 주먹을 쳐들어 보인다.
 ‘제기랄, 잘못 짚었군. 하필 이 가람.’
 멋쩍어진 최달평이 입맛을 다시며 물러섰다. 그러나 수확이 있으니 헛걸음은 아니었다. 적어도 그 자가 장통방에서 포목점을 한다는 건 알아냈지 않은가. 명월향을 들락거릴 정도이니 포목점 중에서도 제법 규모가 큰 점포를 가진 자일 것이고, 성이 이 가라니 나중에라도 찾기 쉬울 것이다.
 최달평은 한번 의문이 생기면 무슨 수를 쓰든 풀어야만 만족하는 사람이었다. 점찍은 자를 집요하게 쫓아 반드시 결과를 보고야 마는 데에는 그런 성품의 영향이 컸다.
 포목점 이 가라는 자가 분명 어디에서인가 본 자인 것 같기도 하고 아니기도 한데 굳이 거기에 매달릴 필요는 없는 일이었다. 그냥 내가 잘못 보았나보다, 하고 넘겨도 될 일을 자꾸 생각하는 건 느낌 때문이었다. 그가 생각하는 ‘어디에서인가 본 자’가 기억 속에 ‘나쁜 놈’으로 남아있기 때문이다.
 이장생이 돌아올 때까지 할 일도 없는 터라 최달평은 그놈을 한번 밝혀보기로 작정했다.
 
 “얘, 가선아. 어찌 그렇게 고집이 세단 말이냐?”
 “벌써 백 번도 넘게 말씀드렸잖아요.”
 “그러니까, 네 그 기둥서방이라는 자가 뭐가 그렇게 아까워서 미련을 버리지 못하느냐 그 말이다. 돈이 있느냐, 뒷줄이 있느냐? 아니면 장차 벼슬아치라도 되어서 인끈을 꿰찰 그런 위인이냐?”
 “…….”
 “나도 뚫린 귀는 있어서 들을 건 다 주워듣고 산다. 그 자는 인물 빼면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건달이야. 재주가 아무리 많으면 뭐하니? 누가 알아줘야 말이지. 그런 자에게 순정을 바쳐봐야 돌아오는 건 네 눈물 밖에 없을걸?”
 “말씀이 과하십니다.”
 임가선이 노골적으로 불쾌하다는 기색을 내비치지만 포물점 이 가라는 사내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러지 말고 내 후처로 들어앉으라니까 그러는구나. 자식이 하나 있기는 하지만 다 큰 놈이니 무슨 상관이냐? 게다가 첩 노릇 하라는 것도 아니고 엄연히 처가 되라는 것 아니니. 내 집에만 들어오면 안방을 차지하고 종들에게 이래라, 저래라 하면서 편히 살 수 있지 않겠느냐?”
 포물점 이 가가 오래 전에 죽은 마누라 대신 임가선을 후처(後妻)로 삼기 위해 안달이 난 게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었다. 그러나 가선의 마음은 여전히 돌덩이 같기만 했다.
 그녀의 냉랭한 얼굴 앞에서 더욱 애가 단 사내가 간곡하게 말했다.
 “너도 생각해 봐라. 꽃다운 네 얼굴이 십 년 이십 년 가는 것도 아닐 테고, 백 년 천 년 기생질 하고 살 수 있는 것도 아닌데 늘그막을 생각해야지. 얼굴의 윤기가 시들어가고, 이마에 주름살이 하나 둘 생기며, 흰 머리카락이 파뿌리처럼 자라나는 게 순식간이다. 아침에 일어나서 어제와 오늘이 다르다는 걸 느끼고 한숨을 쉴 때는 이미 돌이킬 수 없느니라. 그러니 그렇게 되기 전에 나 같은 사람에게 찰싹 붙는 게 백방으로 네게 이로운 게야. 안 그러냐?”
 구구절절이 옳은 말이다. 그러나 역시 임가선의 마음을 돌려놓을 수는 없었다. 그녀에게는 돈보다, 장래의 일보다 지금의 사랑이 더 크고 소중했던 것이다. 제 인생에서 언제 또 그와 같은 사랑이 찾아올 것인가, 하고 생각한다.
 “아이, 쓸데없는 소리 그만 하고 어서 잔이나 비우세요.”
 그녀가 억지웃음을 지으며 술을 권했다.
 장통방에 번듯한 가게를 여럿 가지고 있는 그는 이필교(李弼交)라는 자였다.
 오십 줄에 든 홀아비이지만 재력가로 소문나 있는 터라 그의 재산을 보고 수많은 매파들이 달려들었다. 그래도 내내 독신을 고집하더니 임가선을 한 번 보고는 홀딱 빠져서 이제는 제 가게마저 거추장스럽게 여길 지경이 되었다.
 장통방 뒤편의 저택 외에 중촌에 고래등 같은 기와집만도 세 채를 가지고 있으며, 명나라를 뻔질나게 드나드는 무역업자이기도 한 그의 재산이 얼마나 되는지 아는 사람이 없었다. 그의 집에 가면 발에 차이는 게 돈이고 굴러다니는 게 호박, 마노 같은 귀물이라고 했다. 그런 자가 오직 임가선을 후처로 들이기 위해서 안달을 하는 것이다.
 이필교는 명월향에 찾아올 때마다 돈을 물쓰듯 해가며 사람들의 마음을 사려고 애썼다. 그들의 입을 통해서라도 임가선의 마음을 움직여볼 요량인 것이다.
 그러나 그녀는 요지부동이었다. 열녀도 그런 열녀가 없을 것이다. 그럴수록 이필교의 마음은 더욱 달아오르기만 했다. 오르지 못할 나무일수록 기어이 올라가고 싶어지고, 갖지 못할 물건이 더욱 탐나는 것 아니던가.
 시간이 지날수록 찾아오는 자들이 많아졌다. 이필교는 그동안 뿌린 돈의 힘으로 임가선을 독차지하고 있었으나 그녀를 찾는 자들의 성화가 갈수록 커지니 더 이상 어쩔 수 없었다.
 그가 아쉬움이 가득 담긴 손으로 그녀의 손을 잡고 손등을 쓸며 한숨을 쉬었다.
 “얘, 가선아. 내일이라도 내가 죽었다는 소리가 들리거든 다 너 때문인 줄 알거라.”
 “어머나, 농도 잘하시네요. 왜 저 때문입니까?”
 “상사병을 앓다가 그리 된 것이니 너 때문이지.”
 “에그, 무슨 그런 흉한 말씀을 하세요?”
 “사실이다. 어쨌거나 내일 명나라로 떠나는데 한 달쯤 지나서야 돌아올 것 같구나. 뭐 가지고 싶은 거라도 있니? 억만금을 들이는 한이 있어도 반드시 구해다 주마.”
 “아무 것도 필요 없어요.”
 “그러지 말고 말해보렴.”
 “꼭 하나 있기는 해요.”
 “응? 그래? 그게 뭔지 말해보아라. 황제가 산다는 자금성을 월담해 들어가서라도 구해다 줄 테니까.”
 “단정초(斷情草)라는 게 있다던데 그걸 가져다주세요.”
 “먹으면 죽는 단장초(斷腸草)가 있다는 말은 들었다만 단정초라니 금시초문이구나. 그런 게 다 있어?”
 “그 약초를 다려 마시면 정인에 대한 애틋한 마음이 사라지게 된다고 하더군요.”
 “오라, 그걸 마시고 이장생이라는 녀석을 잊을 셈이구나? 그렇다면 생전 들어보지 못한 물건이지만 죽을힘을 다해서 구해와야지.”
 그의 너스레에 임가선이 입을 가리고 웃었다.
 “웬걸요. 소첩은 그 약초를 다려서 나리의 술에 섞어 드리려고 그런답니다.”
 “이런, 이런 발칙한 것 같으니. 하지만 소용없을 거야. 잊었다가도 너를 보면 다시 새 정이 생겨날 테니 너는 단정초를 끓이다가 늙어 죽고 말걸?”
 “에그, 참 딱도 하시지.”
 임가선이 곱게 눈을 흘기고 한숨을 쉬었다.
 
 어두워진 거리를 걸어 장통방의 제 가게로 돌아온 이필교가 깜짝 놀라 “억!” 하고 소리쳤다.
 “어딜 그렇게 싸돌아다니는 거야? 또 명월향에 갔었지?”
 팔짱을 끼고 서서 매섭게 다그치는 사람은 이십대 중반의 아가씨였다. 꽉 조인 허리띠 틈에 두 자루의 짧은 칼을 꽂고 있다.
 도톰하고 붉은 입술을 잘근잘근 깨물며 실눈을 뜨고 노려보는 것이 영락없이 앙칼진 고양이 같았다.
 “너, 너, 묘화 아니냐?”
 “왜 귀신이라도 본 것처럼 놀라?”
 “어허, 차라리 귀신이 반갑지.”
 정말 그렇다는 듯 부르르 진저리까지 치는 이필교를 향해 그녀, 묘화(猫花)가 코웃음을 쳤다.
 “흥, 쓸데없는 소리 말고 내 말 똑똑히 들어. 오늘 아침에 수표교 아래에서 다섯 놈이 시체로 발견된 걸 알지?”
 “안다.”
 이필교가 한숨을 쉬었다. 묘화의 그 말에 술이 다 깬 얼굴이다.
 “뒈진 놈들이 그 시간에 왜 장통방 초입에서 어슬렁거리고 있었던 것인지, 그것도 짐작하지?”
 “나에게 오려고 했겠지. 그런데 대체 어떤 극악무도한 자가 그런 짓을 저질렀단 말이냐?”
 “장 대형이었어.”
 “허!”
 장약허의 짓이었다는 말에 이필교의 눈이 찢어질 듯 커졌다.
 “아니, 그 자가 드디어 미친 게냐? 어째서 제 수하들을 파리 때려잡듯 해?”
 “그 일로 어르신의 엄명이 떨어졌다. 당신은 더 이상 명월향에 출입해서는 안 돼.”
 “뭐라고? 그 양반이 정말 그랬단 말이냐? 나에게만 금족령을 내린 이유가 뭐래?”
 “죽을 걸 살려주려는 것이지. 당신은 우리의 돈줄이잖아.”
 “내가 명월향에 가면 왜 죽는단 말이냐?”
 “임가선이라는 여우같은 년 때문이지.”
 “말조심해라. 듣기 싫구나.”
 “흥, 그 다섯 놈이 죽은 것도 그년 때문이었다. 그년에게 홀렸다가 그리 된 거야. 그러니 다음 차례가 당신이 될지, 아닐지 누가 알겠어?”
 “뭐라고? 아니 그건…….”
 이필교의 입이 딱 벌어졌다.
 “나는 분명히 말을 전했다. 죽든지 살든지 그건 이제 당신이 알아서 할 일이고 돈이나 내놔.”
 묘화가 불쑥 손을 내밀었다.
 “무슨 돈?”
 “어르신이 시킨 거야. 뒈진 놈들이야 하나도 불쌍하지 않지만 그놈들의 가족은 그렇지 않잖아? 오백 냥이다.”
 이필교가 끄응, 하고 강아지 앓는 소리를 냈다. 이럴 때를 위해 쌓아두고 있는 재물이니 어쩔 수 없지만 그래도 아깝다는 생각이 든 것이다.
 
 최달평은 명월향 밖에서 이필교가 나오기를 끈질기게 기다렸다. 그리고 그의 뒤를 밟아 기어이 장통방에 있는 가게를 알아냈다.
 이만하면 되었으니 오늘은 일단 돌아갈까, 하다가 그래도 무언가 미심쩍은 마음이 들어서 미적거리고 있는 중인데 그곳에서 나오는 묘화를 보았다. 문 곁에 붙어 선 그녀가 잠시 사방의 동정을 살피고 나서 재빨리 인적 뜸해진 거리 저쪽으로 멀어져갔다. 그 꼴이 영 수상쩍다.
 내내 엿보고 있던 최달평이 인상을 썼다.
 “저건 또 뭐야? 계집애야, 사내야?”
 선머슴 같은 행색도 그렇지만 허리띠에 두 자루의 칼을 꽂고 있는 것이며, 가볍고 빠른 걸음걸이가 호기심을 끈다.
 망설이던 최달평은 그녀의 뒤를 밟기로 했다.
 청계천을 따라 종묘 방향으로 걷는 동안 밤이 더욱 깊어졌고 인적도 끊어졌다. 조금 전에 통금을 알리는 인정(人定) 종이 울린 시간인 것이다.
 최달평은 여자 혼자서 두려움도 없이 어두운 거리를 활개치고 걷는 묘화에게 흥미를 느꼈다. 멀찍이에서도 꽉 조인 허리의 잘록함과 그 아래 펑퍼짐한 엉덩이 하며, 날렵하고 단단해 보이는 몸매가 잘 보이는 건 달이 밝아서도 아니고 눈이 밝은 때문만도 아닐 것이다.
 저 계집애의 얼굴은 어떨까, 하고 엉뚱한 생각을 하는데 앞에서 순라꾼들의 딱따기 소리가 들려왔다.
 “엇?”
 최달평이 저도 모르게 놀란 소리를 냈다. 어둠 저쪽에서 순라꾼들의 형상이 보이기 무섭게 묘화가 땅을 박차고 뛰어올랐던 것이다.
 한 줄기 바람처럼 소리없이 솟구쳐 한 길도 넘는 담 위에 사뿐히 내려앉아 몸을 감추는 솜씨가 놀라웠다.
 입을 딱 벌렸던 최 포교도 재빨리 솟을대문의 기둥 뒤에 몸을 숨겼다.
 아무 것도 모르는 순라꾼들이 딱따기를 치며 지나갔다. 그들의 발소리가 멀어지고 나서야 고개를 내민 최달평은 난감해졌다. 어디로 사라졌는지 묘화의 모습을 찾아볼 수 없었던 것이다.
 잠시 기다려보던 그가 혀를 차고 몸을 드러냈다.
 “쳇, 놓쳤군. 실로 날랜 고양이 같은 계집애로구나.”
 다시 혀를 차고 돌아서는데 머리 위에서 싸늘한 음성이 들려왔다.
 “어떤 쥐새끼이기에 내 뒤를 밟는 것이냐?”
 “헛!”
 기겁을 하고 바라보는 최달평 앞에 묘화가 낙엽처럼 가볍게 내려섰다. 그녀가 언제 움직여 제가 숨어 있던 대문 지붕 위로 옮겨왔던지 전혀 알지 못하고 있었다는 데에 가슴이 철렁한다.
 싸늘하게 노려보고 있는 묘화를 찬찬히 살펴보던 최달평이 속으로 탄성을 터뜨렸다. 앙칼진 고양이 같지만 보기 드물게 예쁜 얼굴이었던 것이다.
 그녀의 훌륭한 몸매와 얼굴 앞에서 나이 든 홀아비인 최달평은 주눅이 드는 걸 어쩔 수 없었다. 새침한 표정과 냉랭한 분위기마저 그녀에게 잘 어울리는 것이어서 더욱 기가 죽는다.
 “너는 누구냐? 누구의 명을 받고 내 뒤를 밟았지?”
 다시 묻는 말에 최달평이 비로소 정신을 차렸다.
 “어허, 아가씨의 입이 생긴 것과 다르게 험하구나. 내 물음에 대답하면 나도 네 물음에 대답해주마.”
 어이없다는 듯 묘화가 피식 웃었다. 그러자 달빛 아래 그녀의 얼굴이 더욱 요염하게 빛나는 것이어서 최달평의 가슴이 쿵쾅거리고 뛰었다.
 “마지막 소원을 들어주지 못할까. 말해봐.”
 마지막이라는 말이 마음에 걸렸지만 개의치 않고 최달평이 물었다.
 “네 이름이 무엇이냐? 이 깊은 밤중에 어디로 가는 길이지? 장통방 이 가의 포목점에서 나오던데 그와는 어떤 사이냐?”
 말을 듣는 동안 묘화의 눈길이 점점 더 싸늘해지더니 말이 끝났을 때는 살기를 띠고 번쩍였다.
 “나는 묘화다. 그밖에는 아무 것도 말해줄 수 없으니 그것만 알아둬.”
 “그렇다면 나도 대답해줄 수 없다.”
 “상관없어. 네가 재수 없는 포청의 포졸이라는 걸 알았으니까.”
 “어? 어떻게 말이냐? 나는 한 마디도 하지 않았는데?”
 “흥!”
 깜짝 놀란 시늉을 했던 최달평이 너스레를 떨었다. 아무래도 그녀가 내비치고 있는 살기가 심상치 않다고 느낀 것이다.
 제 팔자가 아녀자의 칼에 맞아 죽을 팔자는 아니라고 믿지만 묘화의 허리춤에 꽂혀 있는 짧은 칼에 신경이 쓰이는 건 어쩔 수 없었다.
 “허허, 너는 생긴 것만 예쁜 게 아니라 눈치도 빠르니 여우의 변신인 모양이로구나. 그렇다면 여우굴로 돌아가고 있을 터. 내가 괜히 방해했는가 보다. 다시 뒤를 밟지 않을 테니 그만 가보렴. 우리 각자 제 길을 가자꾸나.”
 짐짓 너털웃음까지 쳐가며 되도 않는 소리를 해대는 건 어떻게 하든 그녀의 주의를 산만하게 해서 살기를 가라앉혀 보려는 의도였다. 제가 포도청 사람이라는 걸 짐작했으니 설마 대들기야 하겠나, 하는 마음도 있다.
 그러나 묘화의 생각은 그렇지 않은 모양이었다.
 “네가 보지 못했으면 좋을 걸 보았으니 살려 보낼 수 없지.”
 기어이 쨍, 하고 두 자루의 시퍼런 칼을 뽑아든다.
 “너?”
 비로소 상황이 여유롭지 못하다는 걸 느낀 최달평이 주춤 물러선 것과 함께 그녀가 가볍게 쳐들어오며 좌우로 칼을 뿌렸다.
 고양이가 쥐를 움키려는 것처럼 날렵하고 사나운 솜씨였다.
 거듭 물러서며 몸을 피하던 최달평이 더 견디지 못하고 품에서 두 자루의 단봉을 꺼내들었다. 그래야 할 만큼 묘화의 칼이 주는 위협이 컸던 것이다.
 손아귀에 착 달라붙는 굵기에 한 자 다섯 치 길이의 단봉은 잘 마른 박달나무를 깎아 만든 것이라 쇠처럼 단단했다.
 완력과 솜씨가 뛰어난 그의 손에 들리자 그것은 단순한 몽둥이가 아니라 끔찍한 흉기가 되었다. 한대 맞으면 누구라도 여지없이 뼈가 부러지고 머리통이 깨질 것이다.
 “조심해라. 내 몽둥이에 맞아 머리통이 깨져서 그 예쁜 얼굴에 핏물을 뒤집어쓰면 끔찍하지 않겠느냐?”
 번쩍이는 빛을 뿌리며 눈앞을 어질어질하게 하는 칼을 향해 단봉을 휘둘러 마주쳐 가면서도 최달평은 희롱하기를 멈추지 않았다. 역시 그녀의 주의를 흩뜨리기 위해서였다.
 따다당, 하는 묵직한 소리가 정신없이 터져 나왔다.
 상대의 격한 반응이 의외라는 듯 묘화가 흠칫하더니 더욱 이를 악물고 칼을 휘두르며 쳐들어왔다.
 사방이 온통 칼빛으로 번쩍거렸다. 그물을 덮어씌운 것 같다. 아차, 하는 순간에 목숨을 빼앗기고 말 위험한 상황이 거듭해서 지나갔다.
 ‘이건 여간내기가 아니다. 잘못했다가는 큰 코 다치겠는걸?’
 급히 몸을 움직이고 단봉을 휘둘러 몇 차례의 위기를 넘긴 최달평은 묘화가 위험한 아가씨라는 것을 절실히 느꼈다.
 이래서는 그녀를 아녀자라고 봐줄 형편이 되지 않는다. 정말 목숨을 걸고 싸워야 할 상대라는 것을 의식하자 마음에 갈등이 생겼다.
 ‘이 최달평이가 고작 여자하고 싸움질이나 하고 있어서야 되겠어?’ 하는 오만과, ‘이러다가 저것의 칼에 맞아 죽으면 대체 포도대장 영감이 뭐라고 비웃을 것인가?’ 하는 걱정 그리고 묘화에 대한 괘씸함이 범벅이 되어 정신이 산란해진다.
 ‘그냥 때려 잡아버려?’ 하는 충동이 들기를 여러 번이었다. 그러나 묘화가 그리 만만한 상대가 아니고, 또 모질게 대하고 싶지 않다는 얄궂은 마음이 들기도 해서 갈수록 혼란해지기만 했다.
 최달평이 부지런히 손발을 놀리면서도 그런 생각들로 갈팡질팡할 때 묘화 또한 자못 의외라고 여기며 놀라고 있었다. 별 것 아니게 보였던 자가 저의 칼을 벌써 십여 차례나 막아냈으니 그렇다.
 교동 윤 대감 댁에는 솜씨 좋은 무사들이 많이 있다. 묘화는 그러나 그들 중 제 쌍칼을 당해낼 만한 자는 장약허 한 사람 뿐이라고 믿었다.
 그건 장약허는 물론 다른 자들 모두가 인정해주는 터라 그에 대한 자부심도 대단하다. 그런데 한낱 포청의 포졸 하나를 어쩌지 못했다면 그들이 모두 비웃을 것 아닌가.
 그런 생각에 그녀가 이를 악물고 한층 매섭게 칼을 휘둘렀다. 반드시 죽이고 말겠다는 살기가 더욱 충만해진다.
 묘화의 더욱 앙칼져진 칼질 앞에서 최달평은 난감하기만 했다. 망설일수록 위험이 가중된다.
 “이크!”
 칼이 머리카락 몇 올을 베고 이마를 서늘하게 하며 스쳐 지나갔다. 정신이 아찔해진 순간 “이얍!” 하고 사납게 외친 최달평이 온 힘을 다해 단봉을 휘둘렀다.
 따당!
 그것이 목과 옆구리를 동시에 노리고 쓸어오는 칼을 부수어버릴 듯이 두드렸다. 그 힘에 놀란 묘화가 주춤거렸다. 손목이 저릿저릿해지고 칼이 윙윙거리며 진동을 한다.
 최달평은 그 틈에 몸을 빼 뒤도 돌아보지 않고 달아났다.
 “거기 서!”
 묘화가 날카롭게 외치며 뒤쫓았지만 최달평의 걸음 또한 그녀 못지않게 날랬다. 게다가 어둠 속 아닌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달아나는 그를 쉽게 따라잡을 수 없었다.
 “쳇, 쥐새끼 같은 놈.”
 묘화가 분해서 발을 굴렀다. 그리고 이내 얼굴에 수심이 가득해져서 한탄했다.
 “그나저나 귀찮게 되었잖아. 하필 포청의 개에게 뒤를 밟혔으니…….”
 거듭 발을 구르고 후회하지만 엎질러진 물이다. 이 일을 보고하면 제가 모시고 있는 어르신이 화를 낼 게 틀림없다고 생각했다. 어쩌면 문책을 당할지도 모른다.
 마지못한 듯이 칼을 갈무리하면서 묘화가 다시 “호-” 하고 한숨을 쉬었다.
 “그러나 해결도 그분이 해주실 테니 맡기는 수밖에.”
 최달평이 달아난 어둠을 노려보더니 혀를 차고 재빨리 사라진다.
 
 
 
 
 
 
 
 
 
 
 
 # 제6장 음모자(陰謀者)
 
 어떻게 밤을 보냈는지 모르고 아침을 맞은 최달평은 묘화와의 일을 남치근에게 보고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고민하지 않을 수 없었다.
 “제기랄, 그 고약한 것이 나를 어지럽게 하는구나.”
 벌컥, 저 혼자 역정을 내는 건 자꾸만 눈앞에 그녀의 앙칼진 모습이 떠올라서였다.
 임가선이 장안의 미녀로 손꼽히지만 묘화가 결코 그녀에게 뒤지지 않을 것이라는 엉뚱한 생각마저 들었다. 임가선에게서는 찾아볼 수 없는 야성적이 매력이 있으니 더욱 그렇다.
 “대체 그 깜찍한 것의 정체가 뭘까?”
 사람들로 붐비는 장통방 거리의 찻집에 앉아서 한동안 생각하던 최달평은 몇 가지 결정을 했다.
 우선 묘화와의 일은 남치근에게 보고하지 않겠다는 것이었다.
 보고해 봐야 이장생을 감시하라고 했지 쓸데없는 짓을 하라고 했느냐며 불호령을 내릴 게 뻔하지 않은가.
 다음으로 이장생이 다시 나타날 때까지 명월향을 계속 지켜봐야겠다는 것이고, 끝으로 이필교의 포목점을 끈질기게 감시하겠다는 것이다.
 거기서 묘화를 다시 볼 수 있을지도 모르기 때문이라는 야릇한 이유가 하나 더 붙었다.
 그런 최달평에게 처음으로 낙심할 일이 생겼다.
 
 이필교의 포목점 앞을 태연히 지나가던 그가 우뚝 걸음을 멈추었다.
 다른 가게들은 모두 문을 열었는데 웬일인지 이필교의 포목점만 여전히 문이 닫혀 있었던 것이다.
 “뭐야? 명나라로 떠났어? 아니 언제?”
 점원으로 보이는 놈이 쪽문을 열고 나오는 걸 붙들고 물어보자 이필교가 물건을 구입하기 위해 벌써 떠났다는 것이었다.
 “새벽같이 길 나섰다오. 그런데 댁은 뉘시오?”
 “어허, 그 양반이 나와의 약조를 그새 까맣게 잊은 모양이구나.”
 짐짓 발을 구르며 탄식한 최달평이 점원을 붙잡고 간절하게 말했다.
 “그 양반이 내게 일백 냥을 빌려준다고 약조했거든. 그게 오늘 날짜일세. 그래서 일찍 찾아온 길인데 이런 낭패가 있나. 이보게, 혹시 그 양반이 떠나기 전에 자네에게 맡겨두지 않던가?”
 “쳇, 아침부터 별 실없는 소리를 다 하시오. 주인이 어떤 사람인데 남에게 돈을, 그것도 일백 냥이나 맡긴단 말이요? 그리고 나는 주인이 누구에게 돈 빌려준다는 말을 듣지도 못했고 그런 꼴을 보지도 못했소.”
 “다른 사람에게는 몰라도 나에게는 철석같이 약조했다네. 그러니 잘 좀 생각해 보게. 죽고 사는 일이 걸렸어. 어허, 이거 정말 큰 낭패인 걸…….”
 “생각하고 말고 할 것 없소. 주인이 돌아오면 그때 다시 와서 묻든지 따지든지 하시구려.”
 “언제 돌아오시나?”
 “한 달 뒤라야 할 거요.”
 “아니, 그렇게 오래?”
 “보통 열흘이나 길어도 보름을 넘기지 않았는데 이번에는 건수가 크고 중요한 모양이외다.”
 “무얼 들여오기에 그런단 말인가? 그렇게 오래 가게를 비워둘 만큼 중요한 일인가?”
 “가게야 내일 주인 대신 관리할 사람이 오면 다시 열 테고, 주인이 무엇을 사올지는 내가 어찌 알겠소?”
 눈을 흘긴 점원이 부지런히 떠나가는 걸 보며 낯을 찌푸렸던 최달평이 히죽 웃었다.
 “적어도 세 가지는 알았군. 제기랄, 어째 갈수록 귀찮은 일만 계속 생긴담. 포도대장 영감에게 가서 이번 임무는 제발 물러달라고 해볼까?”
 잠깐 생각하던 그가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었다.
 “아서라, 그랬다가는 볼기가 터지도록 곤장을 맞을걸? 덤으로 주리나 틀리지 않으면 다행이지. 에휴, 내 팔자가 왜 이러냐?”
 
 그날 저녁 다시 명월향을 감시하고 있던 최달평은 깜짝 놀라 눈을 비볐다. 두 명이 그리로 들어갔는데, 익히 아는 사람들이었던 것이다.
 “아니, 저 나리는 붓골의 이 정랑이 아닌가? 어허, 저 공자님이 이런 곳에 출입을 하다니…….”
 그가 알아본 사람은 이정빈이었다. 아버지 이량이 이조참판에 있을 때 그를 따라 출사하여 정랑 벼슬을 하다가 물러났으므로 아직도 사람들은 그를 이 정랑이라고 불렀다.
 그는 아비 이량이 권세를 잃고 죽은 후 윤원형의 자객들을 두려워해서 붓골 저택 밖으로는 좀체 나오지 않는다고 널리 알려져 있었다. 그런데 이 저물녘에 호위로 보이는 장정 한 명만 대동하고 명월향에 찾아왔으니 놀랄 일이다.
 그러나 이정빈의 곁에 붙어 서 있는 큼직한 체구의 장한을 보고는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곽거도가 직접 모시고 나왔구나. 그러면 그렇지.”
 그 자가 어떤 인물인지는 최달평도 잘 알고 있었다.
 조선에서 첫째 둘째를 다투는 검객이라는 그가 호위하고 있는 한 감히 이정빈을 노리는 자는 없을 것이다.
 그렇기는 해도 이건 극히 예외적인 일이었던지라 최달평은 더욱 궁금증을 참을 수 없었다.
 “아무리 임가선의 미모가 장안을 시끄럽게 한다고 해도 그렇지, 부친상을 당하고 집안이 풍비박산나기 직전인데 한가롭게 기방 출입이나 해? 쯧쯧…….”
 혀를 차다가 제 머리통을 쥐어박는다.
 “아니지, 그럴 리가 없지. 세상의 눈과 입을 두려워하는 양반이 그럴 리가 없는 게야. 그렇다면?”
 다른 이유가 있어서 명월향에 찾아왔다면 그게 뭘까, 하고 곰곰이 생각하던 최 달평이 인상을 썼다.
 “우라질, 이것도 역시 이장생 그놈과 관계된 일이란 말인가?”
 
 “정말 그렇다면 땅을 칠 일이 아닐 수 없구나. 한발 늦었으니 말이다.”
 이정빈이 진심으로 탄식했다. 그 앞에서 기생어멈 명월은 물론 임가선은 어쩔 줄 모르고 머리만 조아렸다.
 “천한 것이 어찌 나리께 거짓을 아뢰겠습니까?”
 비록 죽었다지만 이량이 얼마 전까지도 천하를 쥐락펴락하던 세도가였던 만큼 그의 후광은 여전히 빛을 발하고 있다. 때문에 선부(先父)를 대신해 가문을 이끌고 있는 이정빈을 어리다고 무시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이정빈이 그윽한 눈길로 임가선을 보았다.
 “네가 윤 대감 댁의 무도하고 무지한 놈들에게 큰 욕을 치렀다고 들었다. 얼마나 놀랐겠느냐?”
 임가선이 어리둥절하여 얼굴을 들었다가 얼른 숙였다.
 그 일이 있은 지 고작 며칠이 지났을 뿐이고, 명월이 모두의 입단속을 단단히 했으므로 밖으로 소문이 새나가지도 않았을 것이다.
 아무도 그런 일이 있었다는 걸 짐작하는 자도 없을 텐데 이정빈이 훤히 알고 있으니 신기하기도 했다.
 곁에 있던 명월이 얼른 말을 받았다.
 “다행히 이 서방이 있어서 간신히 화를 면했습지요. 천만다행이었사옵니다.”
 명월은 이장생에게 ‘서방’이라는 호칭을 썼다. 가선이는 임자가 있는 몸이니 탐내지 말라고 은근히 암시를 준 것이다. 이정빈이 빙긋 웃었다.
 “그래, 들었다. 그때 그 다섯 무뢰배들이 그에게 된통 당했다고?”
 “깨소금 맛이었습지요.”
 “그 뒤로 다른 놈들이 또 찾아와 귀찮게 하지는 않더냐?”
 이정빈은 계속해서 임가선에게 물었고, 대답은 여전히 명월이 했다.
 “웬걸요. 그때 학을 떼었던지 얼씬도 하지 않았답니다.”
 이장생이 돌아오면 반드시 기별을 해달라는 당부의 말과 함께 적지 않은 돈을 쥐어준 이정빈이 돌아가고 나자 명월이 싱글벙글했다.
 “얘, 가선아. 네가 이 서방 덕분에 말년 운이 활짝 피려나보다. 붓골 나리가 이처럼 애틋하게 이 서방을 찾으니 반드시 좋은 일이 있을 거야. 안 그러냐?”
 명월이 호들갑을 떨지만 임가선의 얼굴은 어둡기만 했다.
 “두고 봐야 할 일이지요. 그게 과연 이랑에게 좋은 일이기만 할지…….”
 “좋은 일이고말고. 지금이야 붓골 이 대감 댁이 졸아들었다만 언젠가는 예전의 성세를 구가하게 될 거다. 상감마마의 인척이라는 게 그게 어디 보통 일이냐? 그러면 이 서방도 한 자리 얻어 할 수 있을 거야. 재주가 그만하니 틀림없다.”
 “그이는 서출인데 정말 그렇게 될 수 있을까요?”
 가선이 안타까워하는 건 이장생의 태생 때문이었다. 서출이 행세할 곳은 어디에도 없는 게 이 나라 아닌가.
 명월이 그녀의 등을 다독였다.
 “이 정랑이 괜히 몸소 찾아왔겠니? 게다가 윤원형 대감이 상감마마를 움직여 서얼허통법을 공표하게 한 게 오래 전이잖아. 이제는 능력만 있으면 서얼들도 얼마든지 관직에 나갈 수 있다니까. 너 그때가 되면 나를 모른척하면 안 된다.”
 명월이 묵직한 전낭을 추스르면서 연신 너스레를 떨어대지만 가선의 얼굴은 여전히 어둡기만 했다.
 계축년(癸丑年, 명종 8년, 1553년)에 윤원형이 무리하게 밀어붙여 서얼허통법이 임금의 명으로 공표된 적이 있었다. 그러나 조정의 대신과 유생들의 반발이 강력해 제대로 시행되지 못하더니 지금에 와서는 유명무실한 것이 되다시피 했다. 그런 게 있다는 걸 아는 사람조차 드물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 일은 이 땅의 모든 서출들에게 한 가닥 희망을 주었다.
 “빨리 그런 세상이 왔으면 좋겠어요.”
 임가선이 한숨을 쉬었다.
 
 ***
 
 “대감, 무슨 언짢은 일이라도 있었나요?”
 다소곳이 앉아 묻는 정난정의 자태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윤원형이 탄식했다.
 “임자, 나도 이제 늙은 모양이야.”
 “무슨 그런 말씀을 하세요?”
 “그렇지 않고서야 그까짓 주둥이만 살아서 나불거리는 유생 몇 놈을 피해 달아나듯이 이렇게 왔을까.”
 “무슨 일이 있었는지 소첩에게 말씀해 보세요. 억울한 일을 당하셨다면 즉시 대비전에 고하고 주상께 아뢰어야지요.”
 “퇴궐하고 오는 길에 성균관의 유생이라는 것들이 길을 막더군.”
 다시 생각해도 분하다는 듯 거친 숨을 내쉰 윤원형이 입술을 깨물었다.
 오늘도 그는 임금과 독대하여 과거제도를 뜯어고쳐야 한다는 걸 간하고 오는 길이었다. 벌써 며칠 째 끈질기게 제 주장을 펴지만 임금은 난감한 기색을 지을 뿐 가타부타 말을 하지 않았다.
 윤원형은 그게 뒤에서 벌떼처럼 떠들어대는 조신들의 압력 때문이라는 걸 잘 알고 있었다. 오늘 아침의 어전 조회 때에도 대신들이 두 패로 나뉘어 임금 앞이라는 것마저 잊고 언성을 높이지 않았던가.
 예조판서 김한식이 앞장서서 과거의 서얼허통법마저 비판하고 나서자 조정에서 윤원형의 입이라고 불리는 이조판서 윤춘년이 그를 공박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이내 조정의 대신들이 김한식과 윤춘년을 지지하는 두 패로 나뉘어 얼굴을 붉혀가며 언성을 높였던 것이다.
 시끄럽게 떠들어대는 그 잡다한 말에 골치가 아파진 임금이 말도 없이 조회의 자리를 떠났다. 그렇게 자신의 불만을 나타낼 뿐 조신들 앞에서 위엄조차 세울 수 없는 심약한 왕이었다.
 임금이 이마를 짚고 물러갔으므로 그날 조회는 흐지부지 되었다. 윤원형을 두고 그에게 아부하고 동조하는 자들과 그렇지 않은 자들이 누구인지 다시 한 번 확연하게 드러난 것 외에는 아무 소득도 없었다.
 오늘 아침의 일만이 아니었다. 매번 조회가 열리면 그런 일이 반복되었다.
 조정의 그와 같은 분란은 역시 윤원형 때문이었다. 그가 있으나마나하게 된 서얼허통법을 더욱 강화하여 서출들에게도 유생들과 동등하게 문무 과거의 시험장에 나올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임금에게 주장한 것이 빌미가 되었던 것이다.
 유능한 자라면 출신을 따지지 않고 등용하여 쓰는 게 나라에 큰 힘이 된다는 그의 주장은 일리가 있다. 그러나 조선 왕조를 유지해 온 신분제의 근간을 뒤흔드는 일이었으므로 이미 그 혜택을 크게 누리고 있는 유생이며 족당들이 그것을 환영할 리가 없었다.
 그래서 불거진 논란이지만 그 이면에는 윤원형의 소회(所懷)가 있었다. 양반 중심의 신분제가 계속되는 한 정난정과 저 사이에 태어난 자식들도 서출이라는 손가락질을 받아야만 할 것이기 때문이다.
 비록 정경부인에 올려놓았어도 유생들은 정난정이 기생 첩 출신이라는 걸 잊지 않고 있었다. 그러니 자신과 그녀가 죽고 난 뒤에는 자식들의 처지가 어찌될지 뻔하지 않은가.
 윤원형은 제가 아직 살아 있고, 권세를 쥐고 있을 때에 그들의 앞길을 열어주어야 한다고 결심했다. 그래야 죽어서도 통한을 남기지 않게 될 것이니 더욱 그렇다.
 그래서 이왕 임금의 명으로 공표했던 서얼허통법을 더욱 강화하고 당대에 실현이 되도록 밀어붙이려는 것인데 반대 세력들이 결사적으로 대응해오니 골치가 아팠다. 게다가 임금이 예전과는 달리 제 편을 들어주는 말 한 마디 하지 않으니 더욱 심난했다.
 비록 아직 문정대비의 섭정이 지속되고 있지만 몇 해 뒤에는 어찌될지 그것도 알 수 없는 일이다.
 이제는 제 마음대로 주물럭거릴 수 있던 예전의 그 어린 주상이 아니라는 데에 윤원형의 초조함은 날로 커지고 있는 중이었다.
 제 뜻대로 되지 않아 치솟은 울화를 삭히며 퇴청하여 집으로 향하는 길에 갑자기 십여 명의 성균관 유생들이 뛰어나와 가마 앞을 막아섰다. 호위들이 즉각 달려들어 밀어냈으나 아랑곳하지 않고 그들과 몸싸움을 하며 떠들어대는 말이 온통 윤원형을 비난하고 그의 불충함을 꾸짖는 당돌한 말들뿐이었다. 사람들이 구름처럼 모여들어 구경을 하고 있으니 성질대로 그놈들을 패대기칠 수도 없는 터라 창피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윤원형은 대범함을 가장하고 껄껄 웃으며, “너희와 같이 입 바른 유생들이 있으니 조선의 장래가 밝다.” 하고 마음에 없는 찬사로 응답해주고는 도망치듯이 그곳을 뜰 수밖에 없었다.
 “소첩이 대비전에 다녀오겠습니다. 감히 정승의 가마 앞을 막고 패악을 떨어대는 유생들이라니. 대체 어느 시대에 그처럼 몰지각한 패거리가 있었단 말입니까? 그자들이야말로 뒤에서 조정을 흔들고 주상의 위엄을 능멸하는 자들이 아닙니까? 그런 자들이 성균관의 유생이랍시고 거들먹거리는 한 나라의 꼴이 말이 아니게 될 것입니다. 차제에 기강을 바로잡고 나리의 위엄과 주상의 위엄을 확고하게 해야 할 것입니다.”
 정난정이 제가 일을 당하기라도 한 것처럼 흥분했다.
 평소에는 요조숙녀의 표본 같은 그녀였지만 한번 화를 내면 타오르는 불길 같았다. 과단성이 여느 사내 못지않아서 윤원형으로서도 그녀가 하겠다고 나서는 일을 만류하기 힘들었다.
 “가마를 대령해라, 대비전으로 행차하겠다!”
 소리친 그녀가 옷자락을 떨치고 일어섰다.
 
 ***
 
 “얘, 너는 대감마님의 생각이 어떻다고 보느냐?”
 “예?”
 “서출이나 천민들 중에도 분명 학식이 깊거나 재주가 뛰어난 자들이 있을 것 아니겠니?”
 “그렇사옵니다.”
 묘화가 동의하자 흡족해서 그녀를 지그시 바라본 정난정이 다시 말했다.
 “너도 그런 사람들 중 한 명이지. 서출이 아니라 계집이라는 게 다르지만 그래도 네 재주라면 귀하게 쓰여야 옳지 않겠느냐? 이 조선 땅에서는 서출과 계집들이 사람 취급을 받지 못한다. 아무리 재주가 있어도 할 수 있는 게 없어. 이래서야 어디 단군 국조께서 처음 나라를 세우실 때 지표로 삼았던 홍익인간의 뜻이 살아 있다고 할 수 있겠느냐? 태조대왕께서 고려를 멸하고 나라를 세우실 때 단군조선의 정통을 이어받았다는 뜻에서 국호를 조선이라 하였건만 오늘날 단군왕검의 이념은 사라지고 없느니라. 그게 다 저 덜떨어진 유생 놈들 때문이야. 성리학으로 조선의 이념을 대신했으니 어찌 보면 태조대왕의 원대한 뜻을 뒤집어엎고 조선을 엉뚱한 곳으로 몰고 간 역적 놈들이지.”
 묘화가 눈을 휘둥그레 뜨고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누가 엿들을 리도 없건만 귀신이라도 들을까봐 경계하는 것 같았다. 정난정의 말이 구구절절 옳았으나 지나치게 과해서 두려웠던 것이다.
 정난정은 아랑곳없이 제 말을 했다.
 “갖바치 병해 대사가 좋은 예이니라. 그는 비록 천출이지만 경서에 밝고 신통력 또한 있어서 조광조 같은 양반과도 교류하지 않았더냐? 하지만 천출의 벽을 넘을 수 없었지. 그런 사람이라면 육조에 호패를 걸어도 결코 부족함이 없을 것이야.”
 병해 대사는 양주팔이라는 속명을 가지고 있는데 그가 임꺽정의 스승이라는 것을 아는 사람이 많지 않았다.
 그는 젊은 시절 갖바치 노릇을 하며 떠돌다가 나이 지긋해지자 중이 되어 안성 칠현산 아래에 있는 고찰 칠장사(七長寺)에 정착했다. 이후 불도에 전념한 결과 지금은 모든 사람이 생불로 숭앙하는 고승이 되어 있었다.
 “또 이 시대에 토정 이지함 같은 분도 있느니라. 그 양반도 학식이 깊고 재주가 많기로 조선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울 지경이지. 그러나 결코 사대부가의 적통임을 내세워 거만하지도 않을뿐더러 천출이나 서얼이라고 괄시하지도 않는다. 그런 양반이 높은 관직에 나아가 당하를 호령해야 마땅하련만 사림의 유생이라는 것들은 그저 이단아요 기인 취급을 할 뿐 상대하지 않는다. 나라의 장래를 위해서 이 얼마나 안타까운 일이냐? 너는 이 일에 대하여 어찌 생각하는고?”
 “그건…… 소녀는 생각이 짧아서 감히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말은 그렇게 하지만 묘화의 가슴속에도 그런 생각이 있었다. 그래서 제가 모시고 있는 정경부인의 울분에 찬 말을 듣고 두려운 한편 속이 시원해지기도 했다.
 묘화는 정난정이 자리에 들면 그림자가 되어서 침소를 지켰다. 그녀가 윤원형과 합방하는 날에도 문밖에 앉아 아침이 될 때까지 움직이지 않았다. 그러나 이처럼 난정이 독침하는 날은 방안에 들어와 늦도록 그녀의 말상대가 되어주기도 했다.
 종이 감히 주인의 침소에 들어 잠자리를 지킨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러나 정난정이 강권했으므로 어쩔 수 없이 그렇게 하기를 여러 날. 이제 교동 윤원형의 집에서 그 일은 공공연한 비밀이 되어 있었다.
 난정이 유독 묘화를 귀여워하고 아끼는 걸 보고 정경부인이 그녀를 불쌍히 여겨서 그러는 것이라고 다들 이해했다. 그러니 종들은 하나같이 난정의 너그러움과 자애로움에 대하여 감복할 수밖에 없었다.
 윤원형 또한 그런 사실을 잘 알고 있기에 가끔 묘화와 마주치면, “부인의 마음을 두고 이제는 내가 너와 다투어야 하겠구나.” 하는 농을 던지곤 껄껄 웃기도 했다. 그러면 묘화는 얼굴을 붉힌 채 몸 둘 바를 모르고 쩔쩔맸다.
 그녀의 솜씨가 여느 검객들보다 뛰어나고 앙칼지다는 걸 잘 아는 터라 윤원형은 오히려 잘 된 일이라며 묘화를 격려해주었다. 그녀가 난정의 곁에 그림자처럼 붙어 있는 한 누구도 이 귀하고 사랑스러운 부인을 해치지 못할 것이니 그렇다.
 난정이 슬그머니 손을 뻗어 묘화의 손을 어루만지며 말했다.
 “갖바치가 불도에 귀의하여 병해 대사로 불리게 된 것은 그런 자신의 처지를 원망했기 때문이지. 그래서 스님들 중에 손꼽히는 선승이 되었으니 조선의 불자들에게는 오히려 다행한 일이 아닐 수 없구나.”
 “대사님의 불력이 매우 고명해서 칠현산의 짐승들마저 그분을 따른다고 들었어요.”
 “고명하다뿐이냐? 얘, 내가 보름 뒤에 그분의 설법을 듣기 위해 칠장사에 갈 계획인데 그때 너도 함께 가자꾸나. 병해 대사의 설법을 한번 듣고 나면 네 마음에도 부처님의 자비가 깃들게 될 것이야.”
 “마님이 원하시면 어디든 모시고 가야지요. 그게 소녀가 이 집에 있는 이유인걸요.”
 “에그, 나는 진정을 바라지 그따위 의무나 책임감을 바라는 게 아니란다.”
 곱게 눈을 흘긴 난정이 자리에 누웠다.
 “이리 오렴. 오늘은 나와 함께 자자꾸나.”
 “예?”
 뜻밖의 말에 묘화가 깜짝 놀라 눈을 휘둥그레 떴다.
 “놀라긴. 네가 거기 앉아서 밤을 꼬박 새는 게 안쓰러워서 그러느니라. 또 누가 발치에 앉아서 지켜보고 있으면 무섭지 않겠니? 편히 잘 수가 없어. 그러니 너도 나와 같이 누워서 푹 자렴.”
 “하오나 소녀는 마님을 지켜야 하는지라…….”
 “밖에 장약허 그 얼음장 같은 자가 있는데 어떤 놈이 감히 뛰어들겠느냐? 걱정할 것 없느니라.”
 오늘 밤의 경비를 책임지고 있는 자는 장약허였다. 그가 번직(番職) 맡은 날은 저택 내의 무사들이 모두 바짝 긴장하여 감히 게으름을 부리지 못했다.
 “어서 오래두.”
 정난정이 아미를 찌푸리고 짜증을 냈으므로 묘화는 어쩔 수 없었다. 호, 하고 가늘게 한숨을 쉬더니 주춤거리며 다가간다.
 “칼은 저리 치워놓아라. 꿈자리 사납겠다. 그리고 편히 자려면 그 겉옷이라도 벗어야 하지 않겠니? 나는 깔깔한 게 살에 닿으면 잠을 못 자.”
 재촉하는 그녀 앞에서 묘화가 다시 가늘게 한숨을 쉬고 겉옷을 벗었다.
 “옳지, 착하구나. 자, 이제 이리 누우렴.”
 
 그 시간에 윤원형은 사랑채에서 한 사람과 마주앉아 있었다.
 일렁거리는 불빛 아래 사내의 그림자가 커다란 곰이 웅크리고 있는 것처럼 벽을 온통 가리고 흔들렸다.
 패랭이를 썼고 거친 옷을 입었는데 미투리를 매단 큼직한 보따리 한 개를 곁에 두고 있는 것이 길 떠나려는 장사꾼 차림이었다. 그러나 턱 아래 더부룩하게 난 뻣뻣한 수염과 각진 얼굴, 큰 몸집이며 굵은 팔뚝 등은 예사로운 장사치가 아니라는 것을 짐작할 수 있게 했다.
 임꺽정이다.
 “오늘 퇴청하시는 길에 봉변을 당했다고 들었소이다. 철없는 유림의 아이들 몇 놈이 대감을 욕했다더군요.”
 걸걸한 말투가 여전했다. 거리낌 없는 태도도 그렇다. 천하의 세도가 윤원형 앞에서 그와 같이 말할 수 있는 자는 아무도 없을 것이다.
 “벌써 그 소문이 장안에 좍 퍼진 모양이로구나?”
 “대감에 대한 일이라면 그 즉시 온 세상에 퍼지지요. 나라님의 포고보다 더 빠르니 그게 다 대감의 위세 때문 아니겠소이까?”
 “참 한심한 일이지. 유생이라는 것들이 저자의 무뢰배처럼 나대고 있으니 말이다. 장차 그것들이 벼슬길에 오르고 그 중에는 당상관이 될 자도 있을지 모르니 어찌 한심한 일이 아니겠느냐?”
 “허허, 그런 놈들은 자라기 전에 싹을 잘라버려야지요. 말씀만 하십시오. 찾아내서 물고를 내 주리다.”
 임꺽정이 거침없으나 윤원형은 그의 말투와 무례함에 대하여 조금도 신경 쓰지 않았다. 두 사람은 마치 죽이 잘 맞는 술친구 같아 보였다.
 임꺽정이 흉한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하는 건 이미 윤원형을 위해 그런 일들을 십여 차례나 처리해 준 이력이 있기 때문이었다.
 윤원형은 제 일에 방해가 되는 인물들을 제거해야 할 필요가 있었다. 그러나 다시 을사사화와 같은 옥사를 일으킬 수는 없었으므로 눈엣가시 같은 자들에게는 자객을 보낼 수밖에 없었는데 그 일은 전적으로 임꺽정의 소관이었다.
 그는 강도를 가장하거나 사고를 꾸며서 윤원형이 청부한 자들을 해치웠다. 때로는 일가족을 몰살하는 일도 있었으므로 한양성중이 두려움에 떨었다.
 임꺽정이 토벌되더니 이제는 정체를 알 수 없는 떼강도가 출몰하여 한양성중을 휘젓고 다닌다는 흉흉한 소문이 돌기도 했다.
 신변에 위협을 느끼는 사대부들은 종들을 무장시켜 집을 지키게 하거나 많은 돈을 들여 검객들을 호위로 고용하기도 했다.
 그렇게라도 해서 자신과 가족의 목숨을 지키고자 했던 것인데 그 대표적인 인물이 붓골의 이정빈이다.
 잠시 생각하던 윤원형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어찌 피라미 몇 마리 때문에 그물을 찢을 수 있겠느냐? 네가 해야 할 일은 그런 소소한 게 아니지.”
 “그렇다면 그만 두지요. 그나저나 어쩌시려고 자꾸 차일피일 미루기만 하는 겁니까? 설마 나와의 약조를 잊은 건 아니겠지요?”
 책망하듯 똑바로 바라보는 임꺽정의 눈에서 불같은 정광이 쏟아졌다.
 윤원형이 달래듯 말했다.
 “모든 건 때가 있느니라. 서두른다고 해서 될 일도 아니고, 그렇게 해서 일을 만들어낸들 오래 갈 수 없는 게 이치이니라. 순리를 기다리고 따라야 하는 게야.”
 “제기랄, 바로 지금이 순리인지 뭔지가 우리 편에 있고, 그 ‘때’라는 놈도 그렇지 않소이까?”
 똑바로 바라보는 눈이 부리부리하다. 횃불을 담아두고 있는 것 같은 그 눈을 마주할 때마다 윤원형은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기분을 느껴야 했다. 지금도 그래서 언짢아졌지만 내색하지는 않았다.
 “기다리고 있을수록 대비께서는 늙고 임금은 철이 들어갈 테니 그러면 예전처럼 고분고분하지 않을 게 뻔하지 않소? 더 지체했다가 임금에 의해 내침을 받고 이량 대감의 꼴이 되지나 않을지 그게 염려스러울 뿐이외다.”
 그 말에 윤원형이 기어이 역정을 냈다.
 “어허! 어찌 그런 망발을 한단 말이냐? 너는 네 목숨이 나와 붙어 있다는 걸 모르는 것이냐? 내가 죽으면 너 또한 죽게 될 터. 내가 이량처럼 사약을 받고 죽기를 바라는 게냐?”
 윤원형이 역정을 내는 건 권좌에서 쫓겨나 귀양을 가는 길에 사약을 받고 비참하게 죽은 이량을 잊지 못하기 때문이었다.
 그것 또한 제가 저지른 일이나 마찬가지였으므로 한 가닥 미안함과 함께, 나도 언젠가는 그런 신세가 될지 모른다는 불안한 마음을 늘 가지고 있다.
 임꺽정이 얼른 사과했다.
 “잘못했소. 내가 원래 말을 가려서 할 줄 모르니 그리 알고 노를 푸시구려. 내 본심은 그게 아니라는 걸 대감께서도 잘 아시지 않소이까?”
 끄응, 하고 된숨을 내쉰 윤원형이 언짢은 기색을 감추지 못하고 외면했다.
 임꺽정이 벙긋 웃었다.
 “오늘 내가 이렇게 대감을 찾아온 건 한 가지 부탁할 일이 있어서요.”
 “말해보아라.”
 “묘화가 며칠 전 장통방에서 뒤를 밟힌 일이 있는데 아직 그 자를 처리하지 못한 모양이외다.”
 “뒤를 밟히다니?”
 “평복을 한 포졸이었답니다.”
 “어허, 하필 포청 사람에게 뒤를 밟혔단 말이냐?”
 “며칠이 지나도록 잠잠한 걸로 보아 그 자가 포도대장에게 보고하지는 않은 게지요. 하지만 안심할 수 없는 일이니 대감께서 좀 알아봐 주셨으면 하외다.”
 “내일 남치근을 불러 알아보마.”
 묘화의 일이라면 윤원형 자신도 불안하지 않을 수 없었다. 포졸이 멋모르고 그녀의 뒤를 캐 올라온다면 죽은 것으로 알려진 임꺽정이 멀쩡하게 살아 있고, 저와 밀통하고 있는 일이 드러날 수도 있기 때문이다.
 한 가지 다행이라면 장통방에서 마주쳤다니 그 자가 좌포청 소속일 게 틀림없다는 것이었다. 그러면 포도대장 남치근을 움직여 다시는 그러지 못하도록 압력을 행사할 수 있다.
 임꺽정이 봇짐을 들고 일어섰다.
 “그럼 그 일은 대감께서 잘 처리하시리라 믿겠소이다. 어쨌거나 대감과 내가 꿈꾸는 세상이 속히 이루어지기만을 바라오. 내 목숨이 대감에게 붙어 있다는 건 곧 대감의 목숨 또한 내게 붙어 있다는 것이니 그것만 잊지 않으시면 되오이다. 그럼 나는 이만 물러갑니다.”
 “어디로 가려는 것이냐? 함부로 돌아다녀서 좋을 게 없을 텐데?”
 “걱정 마시오. 내 한 몸 처신은 내가 알아서 잘 하리다.”
 찍어 누르듯이 지그시 바라보는 건 ‘그러니 당신도 당신의 일을 제발 알아서 잘 처리해라.’ 하는 뜻이다. 그것을 알지 못할 윤원형이 아니었다. 그가 눈살을 찌푸리고 다시 말했다.
 “사람의 팔자와 운명이라는 건 알다가도 모를 것이야. 조심해서 나쁠 게 없지.”
 “며칠 뒤가 스승의 생신이라오. 제자라고는 나 하나를 두었을 뿐인 양반이니 가서 인사를 차려야 도리가 아니겠소?”
 “그렇다면 별 수 없는 일이지. 그런데 네 스승이 올해 몇이냐?”
 “일흔 번째 생일을 맞으시지요.”
 “허, 오래도 살았구나. 금년 생일이 어쩌면 마지막이 될지도 모르겠다. 그러니 더욱 가봐야 하겠구나. 조심해서 다녀오기 바란다.”
 마지막 생일이라는 말이 마음에 걸렸지만 임꺽정은 개의치 않았다. 일흔 살 된 노인이라면 누구나 그렇게 생각할 것 아닌가.
 임꺽정이 사랑채에서 나오자 다섯 명의 사내들이 다가왔다. 하나같이 패랭이를 쓰고 봇짐을 짊어진 장사꾼 차림이었다. 그리고 또 한 사람이 어둠 속에서 느릿느릿 걸어 나왔는데 장약허였다.
 “나 없는 동안 뒷일을 부탁한다.”
 임꺽정의 말에 장약허가 흰 이를 드러내고 소리없이 웃었다.
 “염려 마시오.”
 “처리해야 할 놈들이 몇 있다.”
 장약허가 고개를 꾸벅, 했다.
 “말씀만 하시오.”
 “너도 들었겠지? 나리가 오늘 퇴청 길에 봉변을 당하셨다는 것 말이다.”
 “들었소.”
 “나리는 거기에 대해서 가타부타 말이 없다만 그런 일은 우리가 알아서 처리해 드려야지.”
 “잘 알겠소이다. 수일 안에 깨끗이 해결합지요.”
 “감쪽같아야 한다는 건 더 말하지 않아도 되겠지?”
 장약허가 대답 대신 다시 흰 이를 드러내고 히죽 웃었다.
 “묘화가 뒤를 밟힌 적이 있다니 너 또한 각별히 주의해라. 엉뚱한 짓을 해서 꼬리를 밟히면 곤란해.”
 장통방에서 수하들을 죽인 일을 꾸짖는 것이다. 장약허가 그 말에는 대꾸하지 않고 말꼬리를 돌렸다.
 “포청의 졸개였던 모양인데, 차라리 쥐도 새도 모르게 죽여 없애는 게 낫지 않겠소?”
 “어허!”
 임꺽정이 혀를 차고 무섭게 장약허를 바라보았다. 그가 슬그머니 눈길을 피한다.
 “포청을 들쑤셔 놓는다면 뒷일을 감당하기가 더 복잡해질 것이다. 조심해서 몸을 사리는 게 네가 해야 할 일이야. 명심해라.”
 “잘 알겠소이다.”
 그래도 마음이 놓이지 않는다는 듯 한동안 더 바라본 임꺽정이 “으음.” 하는 탄식을 흘리고 돌아섰다.
 그가 어둠 속으로 사라져 보이지 않게 되자 장약허가 흰 눈을 번뜩이며 히죽 웃었다.
 
 다음날 아침, 임꺽정은 안개 자욱한 봉은사 경내를 서성이고 있었다.
 아직 이른 아침이라 찾아온 신도도 없고 중들 또한 보이지 않아 텅 빈 것처럼 적막했다.
 그가 잠시 서성이는데 다른 세상에서 오는 것처럼 안개를 헤치고 저쪽에서 동자승이 자박자박 다가왔다.
 “저리로 가시지요. 큰스님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앙증맞은 손을 합장하고 꾸벅 고개를 숙이더니 노래하듯 말한다. 임꺽정이 빙긋 웃었다.
 “그럼 작은 스님 신세를 지겠네.”
 볼이 통통한 동자승을 따라 안개 속을 얼마쯤 걸어가자 종각 곁에 서 있는 노승이 보였다. 선종판사(禪宗判事)로서 문정대비와 정난정의 후원을 받아 조선 불교의 중흥을 위해 매진하고 있는 보우(普雨)였다.
 임꺽정이 합장하고 공손히 머리 숙여 인사하자 보우가 대뜸 물었다.
 “어디에서 왔는고?”
 “교동에서 오는 길입니다.”
 “어디로 가는고?”
 “칠장사로 갑니다.”
 “허허, 부처님도 인생이 어디에서 오고 어디로 가는 것인지 모르셨는데 너는 온 곳과 가는 곳을 죄다 알고 있으니 그만하면 도가 나보다 높구나.”
 더 볼 일 없다는 듯 외면하고 손을 내젓는다. 임꺽정이 눈을 휘둥그레 떴다.
 “스님, 설마 이대로 가라고 하시는 건 아니겠지요?”
 “네 도가 이미 나를 앞질렀는데 내가 너를 뵈러 가야지 네가 나에게 오는 게 말이 되느냐?”
 “저를 놀리시는 거라면 그만 두십시오.”
 보우가 정색을 했다.
 “이곳에는 무엇하러 왔느냐?”
 “지나는 길에 단지 스님을 뵙고 문안을 여쭙기 위해 들렸습니다.”
 “내가 아직 죽지 않고 살아 있는 걸 보았으니 이제 마음이 놓이느냐?”
 “강녕하셔야지요. 하실 일이 많이 남아 있지 않습니까?”
 “너 이게 무엇인지 아느냐?”
 보우가 뜬금없이 목어(木魚)를 가리켰다.
 “목어 아닙니까?”
 “아니다. 이건 나무야. 그렇지 않으냐?”
 “그렇습니다. 나무를 깎아 만든 것이니 나무인 게지요.”
 “이놈! 말을 똑바로 해라. 이것이 나무냐, 목어냐?”
 “나무이면서 목어입니다.”
 임꺽정이 주저 없이 하는 말에 보우가 기가 막힌다는 듯 그를 빤히 바라보더니 혀를 찼다.
 “참으로 말을 잘 하는 중생이로다. 이놈아, 내 말을 들어보아라.”
 “말씀하십시오.”
 “절에는 네 가지 소리 나는 물건이 있으니 운판과 목어와 법고 그리고 범종이니라. 운판은 두드려서 하늘을 나는 짐승들의 극락왕생을 비는 것이고 목어는 물속에 사는 짐승들의 극락왕생을 빌며 쇠북은 땅에 사는 짐승들의 극락왕생을 비니라. 범종은 그 소리로 지옥에 있는 중생들을 제도하지. 너는 그중 무엇이 되고 싶은고?”
 “이것도 저것도 다 필요 없고 법고를 두드리는 북채 한 개면 족합니다.”
 “왜 하필 법고도 아니고 북채가 되고 싶은 게냐? 그것도 달랑 한 개?”
 “하늘의 짐승이나 물속의 짐승은 내 알바 아니고, 지옥에 있는 중생이야 스님 같으신 분이 제도하셔야 할 일이니 역시 저와는 상관이 없습니다. 저는 이 땅 위의 축생 같은 중생들을 제도할 북채가 필요한데 한 개는 칠장사의 스승님이 이미 가지셨으니 나머지 한 개로 족해야지요.”
 “그 북채 한 개가 땅에 떨어졌으니 너는 외롭게 되었구나. 쯧쯧, 이제는 하나가 남았을 뿐이니 그것을 아무리 휘둘러본들 법고가 제대로 울리겠느냐?”
 “예?”
 문득 불길한 생각이 들어 빤히 바라보는데 보우가 시치미를 떼고 다그치듯 말했다.
 “네 속을 내가 다 아느니라. 네놈이 무슨 짓을 꾸미고 있는지 다 알아.”
 “하오면 스님께서 도와주시겠군요?”
 “네가 천리를 거스르지 않는다면 나의 도움 따위는 애초에 필요 없는 일이고, 그렇지 않다면 백 명의 보우가 있어서 도와준다고 해도 소용없을 것이다. 하늘의 일을 어찌 중생이 바꾸거나 흔들어놓을 수 있겠느냐?”
 “지성이면 감천이라지 않습니까? 저는 다만 있는 힘을 다할 뿐입니다.”
 “고얀 놈!”
 보우가 버럭 소리쳤다.
 “네놈이 머리 깎고 내 상좌가 된다면 기꺼이 법을 전해주겠으나 지금처럼 건방진 소리를 지껄이는 한 다시는 보지 않을 테다. 썩 가거라! 찾아올 것도 없다!”
 무안해진 임꺽정이 고개 숙이고 말없이 돌아섰다.
 안개 속으로 성큼성큼 걸어 들어가는 그의 뒷모습을 보던 보우가 탄식했다.
 “불법을 지키는 천왕이 되기에 족한 물건인데 욕심이 지나쳐 나찰귀가 되었으니 애석한 일이다. 스스로 불속에 발을 들여놓고 숯불을 밟았으면서도 뜨거운 걸 모르니, 쯧쯧…… 제 살이 타고 뼈가 녹아야 비로소 앗 뜨거워라, 하고 소리칠 미련한 놈이로다.”
 혀를 차더니 동자승을 향해 근엄하게 말했다.
 “너는 절대 저 미련한 중생처럼 되어서는 안 되느니라.”
 동자승이 무슨 영문인지도 모르고 고개를 끄덕인다.
 
 
 
 
 
 
 
 
 
 
 # 제7장 무정한 칼
 
 길을 재촉하면서도 임꺽정은 마음이 편지 못했다. 그냥 지나갈 걸 괜히 봉은사에 들렸다는 후회도 들었다. 그러나 역천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는 보우 선사의 도움이 반드시 필요했다. 저와 윤원형만으로는 부족한 것이다.
 그는 보우 선사도 제 뜻에 동의하고 도와줄 것이라고 지금도 믿고 있었다. 선사에게는 이 나라를 불국토로 만들고자 하는 염원이 있을 테니 그렇다.
 조선이 건국된 이후 성리학을 신봉하는 사대부들에 의해서 불교가 얼마나 탄압을 받았던가. 각처의 유서 깊은 사찰들이 폐허가 되어갔고, 중들은 천민이나 다름없는 멸시를 받았으며, 수시로 만취한 유생들이 절간에 뛰어들어서는 난동을 부리고 재물을 도둑질해 갔다. 그런 꼴을 당하지만 어디 한 군데 억울함을 호소할 곳도 없었다.
 그러던 것이 문정대비가 불심을 크게 일으켜 보우 선사를 통해 다시 이 땅에 불교 중흥의 초석을 다지고 있는 중이었다.
 윤원형과 정난정 또한 두 팔을 걷어 부치고 그 일에 앞장서고 있는 터라 조정의 대신이며 사림의 유생들은 불만이 컸으나 어쩌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니 보우 선사의 마음속에 어찌 지금이야말로 불교를 크게 부흥시킬 절호의 기회라는 생각이 없을 것인가.
 임꺽정 또한 자비와 평등의 사상을 가지고 있는 불교가 성해야만 제가 만들려고 하는 세상의 기틀이 확고해질 것이라는 신념을 갖고 있었다. 스승인 병해 대사에게서 가르침을 받은 영향이다.
 그리고 보우의 지지를 받는다는 것은 곧 조선에 있는 모든 불자들의 지지를 받는다는 것이나 다름없지 않겠는가.
 실은 그것이 가장 큰 이유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불교는 이 땅에 뿌리내린 지 오랜 종교였다. 몇 개의 왕조를 거치는 동안 지금처럼 탄압을 받았던 적이 없었지만 그래도 여전히 민간에 널리 퍼져 있다. 그러므로 불교도들의 마음을 얻는 게 곧 민심을 얻는 것이라고 해도 틀린 말이 아닐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라도 반드시 보우 선사를 설득해야 할 필요가 있었다. 장차의 일을 생각하면 더욱 절실해진다.
 그 보우 선사가 좀체 속내를 드러내지 않고 있다는 게 답답하기만 했다. 그러나 안달하지는 않았다. 자칫 잘못 했다가는 영영 보우라는 커다란 연이 멀리 날아가 버릴 것이라는 우려에서였다.
 임꺽정에게 지금 보우 선사는 연(鳶)이었다. 그것도 세상을 끌고 갈 만큼 커다란 방패연이다.
 그 연을 붙잡고 있으려면 그것을 띄우는 바람을 이길 힘이 있어야 하리라.
 임꺽정은 저에게 그런 힘이 있다고 자신했다.
 연은 이미 앞에 있고, 중요한 것은 그것과 저를 이어줄 연줄을 쥐는 것이다. 그리고 그 연줄도 저절로 마련되었다. 세상에서 유일하게 존경하는 스승 병해 대사다.
 임꺽정은 이 모든 것이 저에게 있으니 이는 바로 하늘의 뜻이라고 여겼다.
 바람은 벌써 커다란 연을 띄우고도 남을 만큼 거세어졌다. 그러므로 연줄을 묶은 연을 들고 일어서기만 하면 된다는 게 그의 믿음이었다.
 지금 그는 저의 그런 믿음을 실현시켜 줄 스승을 만나기 위해 안성의 칠장사로 향하는 중이었다.
 굳이 위험을 무릅쓰고 나선 건 스승이 평소 당신의 명이 칠십 세까지라고 했던 말이 꺼림칙해서이기도 했다. 금년이 칠십 세가 되는 해인지라 그렇다.
 
 그 무렵 이장생도 부지런히 칠장사를 향해 걷고 있었다.
 금산에서 큰 수확을 보았던 탓에 어깨가 한결 가벼워진 터라 걸음이 경쾌했다.
 보름 전 그는 금산에 도착했고, 수소문하여 김갑석이 살았다는 마을을 찾아냈다.
 그곳은 천태산과 대둔산으로 이어지는 산골짜기 깊숙이 위치한 궁벽한 산골마을이었다. 그런 곳에서 한 뙤기의 다락논과 자갈밭을 일구며 살아가는 사람들의 삶이 어떨지는 뻔하다.
 김갑석은 그곳에서 태어나 자랐는데, 임꺽정이 한창 기세를 부릴 때에 가짜 노릇으로 유명해진 자였다. 생김새가 워낙 임꺽정을 빼닮아서 누구나 감쪽같이 속았다고 한다.
 불과 몇 해 전의 일이니 마을에는 아직도 그의 행적을 아는 사람들이 많을 것이라고 잔뜩 기대했으나 돌아온 건 실망일 뿐이었다. 몇 사람을 붙잡고 물어보았지만 다들 머리를 설레설레 흔들기만 할 뿐 좀체 김갑석에 대해서 입을 열려고 하지 않았던 것이다. 오히려 꼬치꼬치 캐묻고 다니는 외지인을 경계하고 더러는 증오의 눈총을 쏘아보내기도 했다.
 낙심한 이장생이 마지막이라 여기고 마을 초입의 당산나무 아래에 앉아 쉬고 있는 노인들에게 물었다.
 “뭐여, 당신 기찰 나온 포졸이여? 왜 그런 건 캐묻고 댕겨?”
 이런저런 잡담 끝에 넌지시 김갑석에 대한 말을 꺼내자 한 노인이 버럭 화부터 냈다. 이장생이 쓴웃음을 지었다.
 “가는 길에 마침 이 마을을 지나게 됐기로 한때 임꺽정 행세로 유명했던 김갑석의 일이 궁금해서 몇 마디 물었을 뿐 다른 뜻은 없소이다.”
 이장생이 점잖게 사정을 밝혔지만 노인들의 경계심은 풀어지지 않았다.
 한 노인이 손사래를 치며 말했다.
 “우리는 아무 것도 몰러. 그 잡눔이 시방 워디서 뭔 짓을 허고 자빠졌는지 우덜이 알 게 뭐간디? 그눔 살았을 적에는 관아에서 잡도리를 해쌌는 통에 고초를 겪었는디, 뒈져서는 그눔 애비가 대 나서서 잡도리를 해싸니, 생전에 우덜이 그눔과 뭔 원수진 일이 있었던지 당최 모르것당게?”
 “그가 죽었소?”
 노인이 무심코 한 말에 이장생이 깜짝 놀랐다. 노인들의 낯빛이 즉시 험악해졌다.
 “그만 묻고 어여 가던 길 가! 여즉 여기서 이러고 있는 걸 청년들이 알면 성치 못할 것인게. 누가 뒤통수를 쌔려도 여기서는 언놈이 그렸는지 알 수가 없어.”
 한 노인이 억지로 이장생을 돌려세우며 얼러댔다.
 “정 그 잡놈에 대해서 알고 싶으면 그놈 애비헌티 물어봐.”
 “그가 어디 있소?”
 “쩌그 장신에 있응게 싸게 그리로 가봐.”
 장신이라면 그리 먼 곳도 아니다. 여전히 경계심을 잔뜩 품고 힐끔거리는 노인들에게 천수를 누리시라는 말로 사례한 이장생이 성큼성큼 걸음을 떼어놓았다.
 “생긴 건 기생오라비처럼 생긴 작것이 시방 뭔일로 김갑석이를 찾는디야?”
 “거지반 잊어버질 뻔혔는디 저 작것이 사람 속을 다시 뒤집어놓고 가네 그랴.”
 “그만들 둬. 다 지 나름대로 볼일이 있는 게비지 뭐. 그 잡눔을 찾든지 말든지 우덜이 신경 쓸 거 뭐 있것어? 이미 뒈진 눔인걸.”
 뒤통수에 노인들의 투덜거림이 그대로 와 닿지만 이장생은 돌아보지 않았다.
 한 달음에 대둔산자락 아래의 장신현으로 달려간 이장생은 그곳 사람들에게 물어 어렵지 않게 김갑석의 아비가 산다는 집을 찾을 수 있었다. 그리고 그 집에 이르러서는 깜짝 놀라고 말았다.
 찢어지게 가난한 산골마을에서 살았던 이력이 여전하려니, 하고 짐작했으나 그 집은 대여섯 간의 행랑채마저 갖춘 번듯한 기와집이었던 것이다. 어지간한 지주가 아니면 엄두도 내지 못할 모양새였다.
 김갑석은 죽은 게 확실했다.
 그의 아비는 만나지 못했으나 잘 안다는 마을 사람들의 말을 종합해보면 그런 결론을 내릴 수밖에 없었다.
 임꺽정이 토포사 남치근에게 잡혀 죽었다는 말이 전해진 후 김갑석도 죽었다고 했다. 그리고 얼마 뒤 궁기 흐르던 그의 식솔들은 부자가 되었는데, 김갑석이 그동안 임꺽정이 행세를 하면서 모아두었던 돈이 넘쳐난다고도 했고, 그가 죽었다는 소식을 가지고 왔던 외지인이 한 보따리의 돈을 풀어놓고 갔다고도 했다.
 아무튼 그 이후 김갑석의 아비는 땅이란 땅은 닥치는 대로 사들였다. 제가 살던 마을의 논밭을 대부분 사들였음은 물론 인근의 논밭도 나오는 족족 사들였던 것이다.
 죽도록 일해도 끼니 걱정을 면치 못하던 무지렁이 소작농이 졸지에 지주가 되었다. 그리고는 한풀이라도 하듯이 제 땅에 붙어 사는 사람들을 달달 볶아대기 시작했다. 악덕 지주도 그런 악덕 지주가 없었다. 그게 그의 고향마을 사람들이 치를 떠는 이유였다.
 김갑석의 소식이 끊어지고 그의 아비와 가족들은 돈벼락을 맞았다. 이장생은 그 사실에서 수상쩍은 냄새를 맡을 수 있었다.
 임꺽정은 죽지 않았다. 남치근이 임꺽정이라고 잡아 죽인 건 바로 김갑석일 것이다, 하는 심증이 굳어졌다.
 ‘그렇다면 임꺽정은 어디엔가 꼭꼭 숨어 있을 것이다.’ 하는 생각과 함께, ‘왜 남치근이 그렇게 서둘러 임꺽정의 목을 쳤을까?’ 하는 의문이 생겼다.
 이장생은 그런 확신과 의문을 가지고 돌아섰다.
 한양으로 가려면 안성을 지나야 하는데 그곳에 임꺽정이 한때 여러 두령들과 함께 출입했던 칠장사라는 절이 있다. 급할 것도 없으니 그 절에 한번 들려볼 작정으로 방향을 잡았다. 어쩌면 그곳에서 임꺽정의 행적에 대한 단서를 찾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한 가닥 기대를 가졌던 것이다.
 
 이틀 뒤, 저물녘에 안성 외곽의 허름한 객주가에 든 이장생은 술과 밥을 배불리 먹었다. 쉬지 않고 먼 길을 온 터라 피곤과 식곤증이 밀려들어 객방 하나를 빌려 잠에 빠져있기를 얼마쯤, 바깥이 술렁대는 소리에 어렴풋이 정신이 들었다.
 비몽사몽간에 들어보니 방을 두고 주인과 나그네들이 실랑이하는 모양이었다.
 일행이 여섯인데 방 하나로 어떻게 잘 수 있겠느냐는 객과, 그럼 없는 방을 어찌 내놓을 것이냐고 뻗대는 주인 사이에 간간이 고성도 오갔다.
 그러다가 걸걸한 음성의 사내가 “늦게 온 죄니 어쩌겠느냐. 한데서 밤이슬 맞으며 지새는 것보다야 나을 테니 새우잠이라도 자자.” 하고 무마하는 소리도 들렸다. 그들이 투덜거리며 옆방에 드는 기척을 듣는 둥 마는 둥 이장생은 돌아누워 다시 잠을 청했다.
 얇은 벽 하나를 사이에 두고 밤새 그들의 코고는 소리가 들렸다.
 다음날 새벽.
 이장생은 아직 어둠이 남아있는 무렵에 일찍 그곳을 나섰다. 바라보니 옆방의 툇마루에 여섯 개의 보따리가 쌓여 있었다. 방이 좁아 사람들만 겨우 들어간 게 틀림없다. 코고는 소리가 밖에까지 새나오는 것이 아직 깊이 잠들어 있는 모양이었다. 혼자서 방 하나를 독차지하고 활개치며 잤던 일이 조금은 미안하기도 했다.
 소리없이 그곳을 떠난 이장생은 걸음을 빨리하여 아침 공양이 끝났을 무렵 칠장사의 산문에 들어설 수 있었다.
 잠시 경내를 서성이는데 저쪽에서 젊은 중이 다가왔다.
 “불공을 드리러 오셨습니까?”
 “아니네.”
 “그럼 절 구경을 하러 오셨군요?”
 “그것도 아니네.”
 젊은 중이 이상하다는 듯 아래위를 훑어보았다.
 “갓을 쓰고 도포를 입었으나 유생은 아닌 것 같고, 허리에 환도를 찼으나 검객도 아닌 것처럼 보이니 참 이상한 분이군요.”
 “내가 유생도 검객도 아니라는 걸 어찌 아는가?”
 “유생이라면 이른 아침부터 절에 찾아와 서성일 리가 없고, 검객이라면 치렁거리는 불편한 옷차림을 할 리가 없지 않겠습니까?”
 “당신 말도 일리가 있군.”
 이장생이 빙긋 웃었다. 제법 사근사근한 것이 붙임성이 있어 보이고, 눈치도 그만하면 나무랄 데 없는지라 호감이 생겼던 것이다.
 두 사람은 말을 나누면서 천천히 걸어 나한전의 흰 돌계단에 나란히 앉았다.
 “실은 사람을 좀 찾으려고 한다네.”
 “스님입니까?”
 “누구라도 상관없어. 내게 한 가지 일에 대하여 가르쳐줄 사람이면 되니까.”
 “그 일이라는 게 무언지 알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한때 이 절에 임꺽정이 출입했다고 들었네만?”
 “그렇다고 하더군요. 저는 그때 이곳에 있지 않았던 터라 임 두령을 보지 못한 게 원통하기만 하답니다.”
 가볍게 코웃음을 친 이장생이 다시 말했다.
 “그렇다면 그와 교분을 나누었을 스님이 있을 터. 그에게서 임꺽정의 행적에 대하여 자세히 듣고 싶다네. 소개해주겠나?”
 “임 두령이 죽은 지 몇 해가 지났는데 이제 와서 그의 행적을 알아 무엇 하시렵니까?”
 “호기심 때문이지. 그가 이 절에서 무엇을 했으며 어떤 말을 했는지 궁금하거든.”
 그러한 소소한 것들을 모아 조합해 보면 임꺽정의 행동방식이라든가 생각들을 짐작할 수 있고, 그것을 근거로 해서 그가 무엇을 할지, 숨어 있다면 어떤 곳을 선호할 것인지 추론해낼 수 있다.
 젊은 중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일이라면 병해 대사만한 스님이 없을 것입니다.”
 “병해 대사?”
 “활불이시지요.”
 “흥, 세상에 활불 따위가 어디 있담.”
 비웃는 말에 젊은 중이 깜짝 놀랐다.
 “부처님을 믿지 않으십니까?”
 이장생이 코웃음을 쳤다.
 “나는 유생은 아니지만 어려서부터 유학의 경서를 읽었고 공맹의 도를 배우며 자랐어. 부처는 알지 못하고 알고 싶지도 않네. 그러나 부처가 있고 활불이 진정 있다면 세상에 어째서 악이 공존하는 것인가? 그렇다면 그는 악을 물리칠 힘이 없는 것이니 활불이라고 할 수도 없겠지.”
 불쌍한 중생이라는 듯 젊은 중이 나무아미타불을 중얼거렸다.
 “부처님은 대자대비하시고 불법은 광대무변하니 장차 윤회의 악업을 벗어버리고 악연을 끊어…….”
 이장생이 낯을 찌푸리고 손사래를 쳤다.
 “됐네. 어쨌거나 활불이든 뭐든 그런 건 관심 없고, 그가 임꺽정을 잘 안단 말이지?”
 “알다 뿐이겠습니까? 과거 임 두령에게 글과 무예를 가르친 스승이라니 그보다 더 잘 아는 사람은 또 없을 것입니다.”
 ‘스승!’
 이장생의 머릿속에 천둥치는 소리가 울렸다. 병해 대사라는 사람이 임꺽정의 스승이라는 말을 처음 들은 충격이 크다.
 “왜 그러십니까?”
 젊은 중이 의아하게 바라보았다. 이장생은 심장 뛰는 소리를 감추어야 할 지경이었다. 임꺽정을 있게 한 자가 중이 되어 이곳에 있다니 분노가 치솟았던 것이다.
 그가 없었더라면 임꺽정도 없었을 것이라는 생각을 떨쳐버릴 수 없다.
 “그 병해라는 중이 정말 임꺽정의 스승이란 말이지?”
 “그렇습니다. 굳이 말하지 않아도 알 만한 사람들은 다 아는 사실이지요.”
 네가 모르고 있었다는 게 이상하다는 듯이 빤히 바라본다.
 “이것도 인연이라는 것인 모양이군.”
 중얼거리는 이장생의 어투가 어느덧 스산해졌다.
 “그가 어디에 있나?”
 “저는 불력이 깊지 못해 시주님의 마음을 열 수 없으나 병해 대사께서는 불력이 수미산처럼 크고 넓으니 단번에 시주님의 마음을 깨뜨려버릴지도 모르지요.”
 한숨을 쉰 젊은 중이 손을 들어 천왕각 뒤의 산을 가리켰다.
 “저 위에 있는 귀거암에 기거하고 계신답니다. 높지 않은 산이니 천천히 걸어도 점심 무렵 전에 올라갈 수 있을 겁니다.”
 “고맙네.”
 벌떡 일어난 이장생이 옷자락을 펄럭이며 나한전을 돌아 사라지자 어리둥절해서 바라보던 젊은 중이 합장하고 나무아미타불을 중얼거렸다.
 
 이장생은 성큼성큼 산길을 탔다. 임꺽정의 스승 노릇을 했다는 자가 중으로 제 신분을 감추고 이런 곳에 숨어 살고 있었다는 생각에 더욱 노여워진다.
 반쯤 산을 올라갔을 때 머리 위 하얀 바위 위에 꾀죄죄한 몰골의 늙은 중이 앉아 있는 게 보였다. 주름살투성이의 얼굴과 굽은 어깨를 하고 낡은 승복을 입은 꼴은 마치 요괴 하나가 웅크리고 있는 것 같은 기이한 모습이었다.
 늙은 중은 옷자락을 헤치며 이를 잡고 있는 중이었다. 얼마나 열심이었던지 누가 다가오는 것도 모르는 것 같았다.
 바위 아래에서 이장생이 소리쳤다.
 “말 좀 묻겠소.”
 “응? 뭐라고 했느냐?”
 늙은 중이 짓무른 눈을 비비며 내려다보았다.
 “귀거암이 저 위에 있소?”
 “그건 왜 물어?”
 “한 사람을 찾아가는 길이요.”
 “그게 누군데?”
 “병해라는 중이 거기 있다던데 그렇소?”
 “병해는 왜 찾는고?”
 “죽이려고 그러오.”
 이장생의 거침없는 말에 늙은 중이 히히, 웃더니 제 옆을 손바닥으로 탁탁, 쳤다.
 “이리 올라와 앉아봐라.”
 “묻는 말에 대답이나 해주시오.”
 “와서 앉아보라니까. 그러면 가르쳐 주마.”
 쓴 입맛을 다신 이장생이 두 발에 불끈 힘을 주고 땅을 박찼다. 가볍게 뛰어올라 곁에 앉자 늙은 중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너는 날개가 달렸느냐? 어찌 사람의 몸이 그렇게 가벼운고?”
 “자, 앉았으니 어서 가르쳐 주기나 하시오.”
 “조금만 기다려 보거라. 그러면 힘들게 올라갈 필요 없이 병해를 만나게 될 것이니라.”
 “음, 그가 내려오는 모양이군.”
 그렇다면 굳이 귀거암까지 올라갈 필요 없다고 생각한 이장생이 우두커니 앉아 허공만 바라보았다.
 “에그, 에그, 요놈은 피를 얼마나 빨아 먹었는지 아주 살이 통통하게 쪘구나. 고얀 놈 같으니.”
 노승이 큼직한 이 한 마리를 찾아내 손톱 사이에 넣고 터뜨렸다. 피가 얼굴까지 튄다.
 “히히, 극락왕생하여라.”
 매우 즐거운 듯했다. 계속 이를 찾아내 터뜨려 죽일 때마다 히죽거리며 극락왕생을 빌어준다. 노승의 그런 추괴한 꼴에 이장생이 눈살을 찌푸렸다.
 “듣기로 중은 살생을 하지 않는다던데 늙은 중 당신은 그렇지 않소 그려.”
 “어리석은 것들이 하는 소리지. 때로는 살보시가 육보시보다 좋으니라.”
 “살보시?”
 “죽여서 일찌감치 해탈하도록 도와주는 것 말이다. 남보다 빨리 극락왕생할 수 있게 해주는 것이니 그 아니 공덕을 베푸는 일이겠느냐? 너 또한 그 살보시를 베풀려고 병해를 찾아왔다니 기특하기 짝이 없구나.”
 엉뚱한 소리에 이장생이 낯을 찌푸렸다. 이 중이 늙어서 정신이 오락가락하는 모양이구나, 하고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그래서 의심도 들었다.
 “정말 여기 있으면 그를 만날 수 있는 것이요? 괜히 나를 놀리려고 한 말이었다면 재미없소이다.”
 눈을 부라리지만 노승은 태연했다.
 “귀거암은 저 위에 있거니와 병해는 여기 있으니 수고스럽게 올라갈 필요 없다.”
 이장생이 깜짝 놀라 일어섰다.
 “당신이 병해 대사란 말이요?”
 노승이 그를 올려다보며 히히 웃었다.
 “네가 찾아올 줄 알고 있었느니라. 아침부터 기다렸는데 이제 왔으니 게으른 놈이로구나.”
 “알고 있었다고?”
 “태어날 때는 몰라도 죽을 때는 알아야 하느니라. 짐승도 저 죽을 때를 아는데 하물며 사람이 모른대서야 어디 될 소리냐?”
 “무슨 헛소리요?”
 “나는 죽기를 기다렸고, 너는 살보시를 베풀기 위해 땀 뻘뻘 흘리며 찾아왔으니 이보다 더 손발이 척척 맞을 수가 없구나.”
 이장생은 기가 막혔다. 그가 생각하는 병해 대사는 아직 팔팔한 초로의 인물 쯤 되어야 했다. 임꺽정에게 무술을 가르쳤다니 솜씨도 뛰어나야 한다. 그래야 칼을 뽑아 후려칠 투지가 생겨나지 않겠는가.
 그러나 눈앞의 늙은 중은 그대로 두어도 얼마 살지 못할 것 같은 상노인에 지나지 않았다. 정신마저 오락가락하는 것 같다.
 이런 자를 베어봐야 무슨 통쾌함이 있을 것인가 하는 생각과, 그래도 임꺽정이를 있게 한 원흉이나 다름없니 용서할 수 없다는 생각이 충돌했다.
 잠시 무섭게 노승을 노려보던 이장생이 한숨을 쉬고 말했다.
 “그만둡시다. 임꺽정이 어디에 있는지만 가르쳐 주시오. 그러면 곱게 물러가리다.”
 늙은 중, 병해 대사가 이장생을 빤히 보며 히죽 히죽 웃었다. 놀리는 것도 같고, 정신이 나가서 그러는 것 같기도 했다.
 “내가 그놈이 아닌데 그놈이 어디에 있는지 어찌 알꼬?”
 “스승이라니 그가 종종 찾아왔을 것 아니겠소?”
 “제 발로 왔다가 제 발로 가는 놈이니 붙잡아둘 수도 없거니와 어디로 가는지도 알 수 없느니라. 짐승은 오가는 길이 있어 그리로 다니지만 사람이야 어디 그렇더냐? 또, 안다고 해도 가르쳐줄 수 없지.”
 “어째서?”
 “술래가 어디 숨어 있는지 훤히 안다면 무슨 재미로 술래잡기를 할꼬?”
 이장생이 혀를 찼다. 병해 대사를 죽이겠다고 이곳까지 찾아와서 고작 정신이 오락가락하는 노인을 붙잡고 있는 제가 한심하게 여겨졌던 것이다.
 병해 대사가 여전히 히죽거리며 물었다.
 “그런데 불쌍한 중생아, 네가 나를 죽이려는 이유가 무엇인고?”
 “당신이 임꺽정의 스승이라니 그렇소.”
 “흘흘, 그것과 네가 무슨 상관이기에?”
 “나는 임꺽정은 물론 그를 따르는 자들을 모조리 죽여 버릴 작정이요.”
 “그놈에게 지독한 일을 당한 모양이구나?”
 “선부의 원수이니 자식 된 도리로 갚지 않을 수 없지.”
 그 말에 병해 대사의 얼굴에서 히죽거리던 웃음이 싹 사라졌다.
 그가 잔뜩 골이 난 듯이 흘겨보며 날카롭게 소리쳤다.
 “이제 보니 너는 불효자였구나! 고얀 놈 같으니!”
 “뭐요?”
 이장생이 발끈해서 마주 소리치자 다시 실실 웃는 것이 확실히 정신이 온전치 못한 늙은이 같았다.
 그 노인이 거칠거칠한 얼굴을 손바닥으로 쓸고 나서 정색을 했다.
 “부모는 자식이 태어날 때를 알지만 자식은 부모가 언제 죽을지 모른다. 그러니 불효 아닌 자식이 있겠느냐? 네 아비가 언제 죽을 것인지 알았더라면 네 힘으로 막을 수 있었겠지?”
 “그건…….”
 뜻밖의 말에 깜짝 놀라고 당황한 이장생이 얼굴이 어두워져서 말을 얼버무렸다.
 병해 대사의 한 마디가 여태까지는 조금도 생각하지 않고 있었던 것을 돌아보게 해주었던 것이다. 아무 생각 없이 있다가 바늘에 뒤통수를 찔린 것처럼 깜짝 놀라게 된다.
 이장생이 고개를 숙이고 침묵했다.
 ‘알았다고 해도 그때의 내 힘으로는 임꺽정을 막을 수 없었을 것이다. 무서워 벌벌 떨기만 했다던 두 형과 다를 게 없었겠지.’
 그런 자각과 함께, ‘그러니 역시 나는 불효자인가? 이제 와서 아버지의 죽음에 대해 따진다고 해서 무엇이 달라지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다가 다시 ‘그때는 그때다. 그래서 지금의 내가 있는 것 아니냐.’ 하는 오기도 불끈 일었다.
 그런 이장생의 표정의 변화를 지그시 바라보던 병해 대사가 다시 느긋하게 말했다.
 “네 아비가 죽을 때 아무 것도 하지 못했으면서 이제 와서 나를 죽이고 그놈을 죽인들 무슨 소용이냐? 기껏 네 분풀이야 할 수 있겠지만 그래도 불효자 소리를 면할 수는 없을 게다.”
 “요설!”
 이장생이 버럭 소리쳤다. 그러나 병해 대사는 태연하기만 했다. 정신이 오락가락하던 노인은 간데없고 그 자리에 장중하게 앉아 있는 노승이 있을 뿐이라 이장생은 내심 어리둥절해지기도 했다.
 “어쨌거나 이렇게 나를 찾아왔으니 네 마음속에도 불심이 깃들어 있다는 것이지. 그걸 보았으니 나는 기분이 매우 좋구나.”
 “헛소리. 나는 중들을 경멸하고 부처를 알지 못하는데 무슨 불심이요? 살심이라면 또 모르지.”
 “흘흘, 오고 가는 것이 어찌 내 뜻대로 하는 일이랴. 너는 살심을 가지고 내게 왔지만 그게 실은 불심이라는 것을 모르고 있을 뿐이니라.”
 이장생은 대꾸하지 않았다. 이 늙은 중과 말이 길어질수록 마음이 편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어쨌거나 죽이러 왔다니 죽이고 가거라. 하늘이 그렇게 정해놓은 일이니 따르지 않는다면 화가 될 것이다.”
 “당신을 죽이지 않으면 내게 화가 미친다는 말이요?”
 “순리를 따르지 않음은 역천이니 어찌 하늘이 용서하겠는고?”
 “흥, 그렇다면 나는 싫어도 어쩔 수 없이 당신을 죽여야겠군?”
 “그게 네가 해야 할 일이고 또한 내 운명인 게야.”
 탄식하더니 다시 말한다.
 “하늘이 너를 보내 죄를 묻는 것이니 나는 해탈하려니와 꺽정이 그놈은 그러지도 못할 테니 참으로 불쌍하구나.”
 “그가 내 손에 죽으리라는 것도 아시오?”
 “하늘이 네 손을 빌리는 것이지 어디 네가 자의로 행할 수 있는 일이겠느냐?”
 “흥, 어쨌든 내 손에 죽을 운명이라니 그건 듣던 중 반가운 말이구려.”
 “자, 네 솜씨를 한번 보여 봐라. 하늘이 택한 자가 정말 너인지 아니면 따로 있는지 알아보자꾸나.”
 그러나 이장생은 차마 칼자루에 손을 올려놓을 수 없었다.
 병해 대사가 키득거렸다.
 “자신이 없는 게로구나? 그렇다면 네가 아닌 게 틀림없으니 그만 내려가 보거라. 나는 그 사람을 더 기다리고 있어야겠다.”
 이장생이 탄식했다.
 “내 한이 아무리 깊다고 해도 어찌 온전치 못한 늙은 중을 죽이겠소?”
 역시 그건 할 짓이 못 된다는 생각에 돌아서는데 병해 대사가 소리쳤다.
 “나를 죽이면 그놈도 죽일 수 있으려니와 나를 죽이지 못하면 그놈도 죽일 수 없을 것이다. 칼을 지닌 놈이 무정하지 못하다면 어찌 뜻을 이룰 수 있겠느냐? 밭에 나가 쟁기를 잡는 것도 사치스러운 일이지.”
 “무엇이?”
 “내게 보여 보아라. 네 의지가 과연 한을 풀만한 것인지 아니지를.”
 순간, 이장생과 병해 사이의 공간이 번쩍 하고 갈라졌다. 차가운 검광이 벼락처럼 떨어지더니 늙은 중의 주름진 목덜미에서 딱 멈춘다.
 병해 대사가 짓무른 눈을 부릅떴다. 그토록 빠른 검을 처음 보거니와, 그 검을 이렇게 갑자기 멈추는 솜씨 또한 처음 보았던 것이다.
 “빠르구나. 정말 빨라. 너는 대체 어떻게 한 것이냐?”
 “이만하면 그 자를 죽이기에 충분하겠지?”
 “네 칼솜씨는 그럴지 몰라도 네 의지는 그렇지 못하니 그것 때문에 죽는 자는 그놈이 아니라 네가 될 것이다.”
 “이래도 헛소리를 할 수 있겠소?”
 불끈 오기가 생긴 이장생이 칼에 지그시 힘을 주었다. 그것이 살갗을 찢어 피가 배어나오지만 병해 대사는 조금도 피하려 하지 않았다.
 “멀었다. 멀었어. 나는 기다려주지만 꺽정이 그놈은 기다려주지 않을 테니 잠깐 망설이는 동안 목이 떨어지는 건 역시 너일 것이다.”
 이장생이 이를 악물었다. 칼을 쥐고 있는 손에 힘이 들어간다.
 “그놈은 순리를 버리고 스스로 악귀가 되었으니 오욕칠정을 가지고 있는 사람으로서는 죽일 수 있는 자가 없을 것이다. 오직 피도 눈물도 없는 짐승만이 그렇게 할 수 있을 터. 너는 일찌감치 칼을 버리고 저자에 나가 장사라도 하는 게 오래 사는 길이겠다.”
 “이해할 수 없군.”
 “무엇을 이해할 수 없어?”
 “당신은 그의 스승이라면서 어째서 내가 그를 죽이기를 바라는 것처럼 말하시오?”
 “필요할 때 보내는 것도 하늘이고 거두어가는 것도 하늘이지. 때가 되었는데 돌아갈 생각을 하지 않고 제 욕심을 부려 천리를 거스르는 짓까지 마다하지 않으니 일찍 죽기를 바라는 게 오히려 그놈을 위해 내가 빌어주어야 할 일이 아니겠느냐?”
 “이승에서의 죄업을 조금이라도 덜 지도록 말이요?”
 “그렇지. 말귀가 밝은 놈이구나. 그래야 지옥에 떨어지더라도 고통 또한 조금은 덜 받을 것 아니겠느냐?”
 “흥, 당신 말대로라면 나는 그 자를 죽이지 말고 오히려 오래 오래 살도록 해줘야겠군?”
 “흘흘, 그거야 네 마음이고 자, 어쩔 것이냐? 나를 죽일 테냐 말 테냐?”
 “죽이겠소.”
 “그럼 어서 보시를 해라.”
 병해 대사가 지그시 눈을 감았다. 장중한 것이 좌선에 든 것 같다. 그의 어깨 뒤로 눈부신 후광이 둘린 것 같기도 해서 잠시 망설이던 이장생이 이를 악물었다.
 마음을 굳게 하고 선뜻 목을 그어버린다.
 기어이 살보시(殺布施)를 한 것이다.
 
 산에서 내려온 이장생은 화가 난 사람 같았다. 성큼성큼 걸어 경내를 벗어나는데 나한전 계단에 나란히 앉아 이야기했던 젊은 중이 저쪽에서 바라보지만 아는 체도 하지 않았다.
 “성불하십시오. 나무아미타불…….”
 젊은 중이 멀리서 합장하고 소리쳤다.
 절을 떠나는 이장생의 마음은 무겁게 가라앉아 있었다. 검법을 수련하고 세상에 나온 후 처음 칼을 휘둘러 기껏 늙은 중의 목숨을 빼앗았다는 사실이 그를 괴롭게 했던 것이다.
 “이제 나는 정말 야차가 되고 만 것인가?”
 힐끔 저 멀리 있는 칠장사의 산문을 돌아보며 중얼거리는 말이 공허했다.
 참고 그냥 돌아섰어야 했다는 후회가 들었다. 그러나 병해 대사의 충동은 집요했고, 임꺽정에 대한 살심을 더욱 불러일으키게 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이래도 내가 그놈을 죽일 수 없을 것 같아?’ 하는 오기가 불끈 생겨서 기어이 베어버리고 말았다.
 짐승처럼 무자비한 냉혈한이라야만 임꺽정을 죽일 수 있을 것이라고, 그런데 너는 그렇지 못하니 틀렸다고 낙심해서 하던 늙은 중의 말 속에는 정말 누군가 그 자를 죽여줄 사람이 나오기를 바라는 간절함이 있었다.
 이장생은 병해 대사가 묘한 말로 비꼬며 충동질했던 것이 나에게서 그런 가능성을 보았기 때문이라고 믿었다. 그렇다면 왜 스스로 죽기를 원했을까? 하는 의문이 남아 괴로웠다. 알 것 같기도 하고 영영 모를 것 같기도 해서 더욱 머릿속이 어지러웠다. 현기증이 난다.
 
 산 아래 마을 끝에 허름한 주막이 하나 있었는데 늦은 오후라 목이 컬컬한 때가 되어서인지 몇몇 농사꾼 사내들이 자리를 잡고 있었다.
 이장생은 그 앞을 지나가면서도 주막 안에서 저를 쏘아보는 눈길이 있다는 것을 의식하지 못했다. 병해 대사를 죽인 일이 마음에 후회와 번민으로 남아 심난했던 탓이다.
 주막 안에서 임꺽정은 무료함을 애써 달래고 있는 중이었다. 조금 더 기다렸다가 해가 서산마루에 걸릴 무렵 나서서 마을을 지나 칠장사로 갈 작정인 것이다.
 사내들은 기우는 해를 아쉬워하며 밭일에 더욱 매달려 있을 것이고, 아낙네들은 저녁 준비를 하러 집에 돌아가 있을 때라 왕래하는 사람이 드물 테니 주목을 받지 않고 움직일 수 있는 시간이다.
 방에 앉아 하품을 하고 두리번거리던 그의 눈에 갓을 쓰고 환도를 찬 한 사람이 도포자락을 펄럭이며 잰걸음으로 지나가는 게 보였다.
 얼핏 본 얼굴이 낯이 익은 것이어서 고개를 길게 빼보았지만 그 사람은 어느새 저만큼 멀어져 뒷모습만 보였다.
 누구였더라? 하고 잠시 생각하던 임꺽정이 피식 웃었다.
 “그래, 맞아. 그 녀석이었군. 학현 현감 이춘명의 아들이라고 했었지? 이름이 이장생이던가?”
 당돌하게 제 뒤를 쫓아와 죽이겠노라고 포악을 떨어대던 몇 년 전의 일이 생각났다. 얼굴과 이름을 아직도 기억하는 건 그때 당돌하고 당차던 그의 모습에 호감을 느꼈던 때문이다.
 “알 수 없는 일이군. 저놈이 이곳에는 웬 일이란 말인가? 설마 아직도 내 뒤를 쫓아다니고 있는 건 아니겠지?”
 그가 칠장사 방면에서 오고 있었으니 더럭 그런 의심이 들었다.
 “뭘 그렇게 중얼거리시오?”
 수하 한 놈이 궁금하다는 얼굴로 물었다. 임꺽정이 손사래를 쳤다.
 “아무 것도 아니다. 그 방문을 반쯤 닫아둬야겠다.”
 “덥지 않으시겠소?”
 “더운 게 낫지. 밖에서 빤히 들여다보이면 그게 더 곤란해.”
 “명령대로 합지요.”
 그놈이 방문을 반쯤 닫고 다시 제 일행과 실없는 농을 주고받기 시작했다.
 드디어 오후의 해가 서산마루에 한층 가까워졌다. 마을의 조용함이 주막에서도 느껴진다. 임꺽정이 그제야 수하들을 채근해 짐을 지고 일어서게 했다.
 아직 해가 남았을 때 칠장사 앞에 도착한 그는 산문을 놓아두고 멀찍이 담을 돌아 길도 없는 숲을 가로질렀다. 절 경내를 통과하면 편한 일이지만 혹시라도 저를 알아보는 중이 있을까봐 꺼려졌던 것이다.
 이내 길을 잡고 잰 걸음으로 산을 오르는데 익숙하기가 제 소굴로 돌아가는 것 같았다.
 까마귀들이 수십 마리나 떼지어 능선 위를 오르내리며 까옥거리고 있었다. 문득 불길한 예감이 든 임꺽정이 수하들마저 떼놓은 채 더욱 빨리 걸었다. 뛰듯이 산 위로 올라가더니 흰 바위가 보이는 곳에서 “억!” 하는 비명을 터뜨리고 우뚝 섰다. 굳어버린 것처럼 꼼짝도 하지 못한다.
 헐떡거리며 뒤따라 올라온 수하들이 어리둥절하다가 임꺽정의 시선이 향하는 곳을 보고는 한 소리로 “으악!” 하고 비명을 터뜨렸다.
 노을빛을 받아 붉게 빛나는 바위에 점점이 피얼룩이 졌고, 그 아래 한 사람이 쓰러져 있었는데 까마귀들이 벌써 드러난 살을 쪼아대고 있었다. 끔찍하다.
 “대사!”
 버럭 소리친 임꺽정이 허둥지둥 달려갔다. 까마귀들이 놀라 푸드덕거리며 달아났고, 임꺽정은 참혹하게 변해버린 주검 앞에 무너지듯이 주저앉았다.
 
 “그놈!”
 다시 허공을 노려보며 부드득 이를 간다.
 벌써 몇 번째인지 모른다.
 바위 아래 스승의 참혹해진 시신을 매장하고 나서 임꺽정은 산을 내려갈 생각을 잊은 듯 주저앉아 있기만 했다. 그러다가 불쑥 “그놈!” 하고 소리쳤고, 그때마다 이를 갈았다.
 이장생이다. 그놈의 짓이 틀림없다. 그때 그 어린놈을 밟아 죽여 버렸어야 했다는 후회가 들어 더욱 분했다. 죽여 후환을 없애야 한다던 박유복이의 말을 듣지 않았던 게 이토록 원통하다.
 그러나 세상을 뒤엎어버릴 듯하던 노여움도 찬이슬을 맞으며 밤을 새는 동안 차츰 가라앉았고 차갑고 싸늘한 침착함이 찾아왔다.
 북채 하나가 땅에 떨어졌다던 보우의 말이 떠올랐다. 그는 병해 대사가 죽을 것을 미리 알고 있었던 것인가? 하는 생각과 함께 자신의 명이 칠십 세까지라던 스승의 말이 떠올랐다.
 그 예언은 기막히게 맞았다. 그렇다면, “사람으로서는 이 하늘 아래 너를 죽일 자가 없지. 그러니 너는 짐승에게 물려 죽을 것이다. 그게 다 네가 타고난 업보이니 누구를 탓하겠느냐?” 라고 했던 말도 맞지 않을까? 하는 불길한 생각이 들어 심난했다.
 그 말을 들었을 때 임꺽정은 껄껄 웃었다. “호랑이도 곰도 오히려 내 주먹을 무서워할 텐데 어떤 짐승이 나를 물어죽일 것이요?” 하며 스승 양주팔을 놀리지 않았던가.
 ‘그렇다면 그 짐승은 바로 그놈을 두고 했던 말일까?’
 자꾸 주막 앞을 지나가던 이장생이 떠올랐다. 처음 보았던 때와는 달리 마르고 단단해 보이던 모습이었다. 무심하고 차가운 기운이 느껴지기도 했다.
 그러나 그까짓 놈에게 죽임을 당할 것이라면 여태까지 살아있지도 못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 조선 땅에서 나를 이길 자가 어디 있단 말인가, 하는 자부심도 여전하다.
 새벽 하늘이 밝아올 무렵 임꺽정은 툴툴 옷을 털고 일어섰다. 어떤 놈이든 어떤 짐승이든 와봐라, 하는 마음이 되어 성큼성큼 산을 내려가는데 스승의 무덤을 한 번 뒤돌아보지도 않았다.
 
 
 
 
 
 # 제8장 요악(妖惡)한 여인
 
 남자의 힘은 여자에게서 나온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현모양처가 그래서 중요한 것이다.
 슬기롭게 남자를 내조하고 용기를 북돋아 주며 때로는 희생도 마다하지 않는 그런 여자와 함께 사는 남자라면 뜻한 바를 성취하기가 훨씬 쉬울 것이다.
 윤원형이 그런 사람들 중의 한 명이었다.
 세상은 정난정을 두고 요부라며 온갖 욕을 하고 있지만 윤원형에게 있어서는 그녀야말로 제 힘의 원동력이었던 것이다.
 유원형이 주상의 외척으로서 조정에 힘을 미치고 있다면 정난정은 문정대비의 각별한 사랑을 받으며 음지에서 온갖 권력을 행사하고 있었다. 그 힘이 대신들은 물론 사대부가에 두루 미치고 있음을 모르는 사람은 없다. 그리고 그 힘으로 윤원형을 더욱 든든하게 받쳐주고 있다는 것도 누구나 아는 사실이다.
 그러니 윤원형에게 앙심을 품은 자들은 제거하기 어려운 그 대신 호시탐탐 정난정의 목숨을 노렸다. 그런 자들 중에 으뜸이 바로 이정빈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그에게 있어서 윤원형은 부친을 죽인 원수이며, 주상의 총애를 빼앗아 가문을 위태롭게 한 자이기도 했다. 철천지원수라는 말이 적당할 것이다.
 비록 선부 이량이 권신으로서 생전에 지금의 윤원형 못지않은 악명을 떨쳤더라도 그때의 부귀영화만큼은 왕이 부럽지 않을 만큼 대단하지 않았던가. 그것을 되찾는 길이 곧 몰락해 가는 가문을 다시 일으키는 것이고, 그러기 위해서는 반드시 윤원형을 제거해야만 한다는 게 이정빈의 믿음이었다.
 그건 제가 여차하다가는 선부처럼 윤원형의 술수에 걸려 죽고 말 것이라는 두려움 때문이기도 했다.
 그러나 그에게는 접근하기도 어려웠다. 그를 둘러싸고 있는 무사들이 한둘이 아닌 것이다.
 하지만 정난정은 그렇지 않았다. 윤원형에 비하자면 허술하기만 한 호위 속에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이정빈은 항상 그녀의 목숨을 노렸는데, 윤원형이 가지고 있는 힘의 절반이 바로 그녀에게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정난정은 가끔 한양을 떠나 명산대찰을 찾아 불공을 드리곤 했으니 기회는 언제든지 있는 셈이다.
 윤원형도 그것을 아는지라 정난정이 집을 떠날 때면 늘 장약허로 하여금 그녀를 따르도록 했다. 비록 몇 명의 무사들이 그녀를 호위할지라도 그 속에 장약허가 있다면 철옹성을 두르고 행차하는 것과 다를 바 없는지라 누구도 그녀에게 접근하지 못했다.
 그래도 이정빈이 그때를 노리는 것은 혹시나, 하는 한 가닥 기대를 버릴 수 없어서였다.
 “그래? 칠장사란 말이지?”
 “그렇습니다. 조만간 떠날 모양입니다.”
 “늘 봉은사로 찾아가 보우를 만나더니 웬일로 멀리 떨어진 칠장사란 말이냐?”
 “그곳에 병해라고 하는 중이 있는데, 그와도 친분이 각별하다고 합니다. 그러니 이번에는 병해를 찾아 가는 것입지요.”
 “허, 그 요망한 것이 여기저기 꼬리를 흔들고 다니는구나.”
 낯을 찌푸리고 혀를 차지만 이정빈의 가슴 속에서는 ‘이번에야 말로.’ 하는 흥분이 뛰놀고 있었다.
 칠장사는 안성에 있으니 한양과 멀리 떨어진 곳이고, 도중에 인적 드문 길목도 여럿이다. 그러니 이것이야말로 하늘이 준 기회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조급함으로 입이 말랐다.
 교동 윤원형의 집을 정탐하고 온 자가 무릎걸음으로 바짝 다가앉으며 더욱 은밀하게 말했다.
 “그리고 이번 행차에는 장약허가 동행하지 않는답니다.”
 “뭐야?”
 이정빈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제 귀로 듣고도 믿을 수 없었던 것이다.
 “그게 사실이냐? 어째서?”
 “그것까지야 소인이 알 수 없습지요. 하지만 믿을 만한 자로부터 얻어낸 그쪽의 사정이니 틀림없을 것입니다요.”
 “어허, 이거야 원…….”
 이정빈은 머릿속이 혼란해졌다. 이것이 진정 그 요부의 명이 다할 때가 된 징조인지, 아니면 윤원형이 저를 잡기 위해서 파놓은 함정인지 언뜻 판단하기 어려웠다.
 “알았다. 나가 봐라.”
 수하의 무릎 앞에 묵직한 전낭을 던져 준 이정빈이 눈살을 찌푸리고 깊은 생각에 잠겼다.
 그날 밤새도록 그의 방에는 불이 밝혀져 있었다. 그리고 다음 날 날이 밝자 홍필두가 은밀히 불려 들어갔다.
 그는 궁의 별감 출신으로서 검법이 뛰어나 혼자서 능히 열 명을 상대하는 자였다.
 몇 달 전, 한량 노릇을 하던 사대부가의 자식들과 기방에서 다툰 적이 있었는데, 대여섯 놈을 상대하다가 한 놈을 잘못 때려서 그만 즉사시키고 말았다.
 더 재수가 없었던 것은, 그렇게 죽은 놈이 바로 형조참의를 지낸 박소암 대감의 삼자라는 것이다.
 그 일로 일차 포청에 끌려가 치도곤을 당한 홍필두는 형조의 뇌옥으로 옮겨갔다. 그리고 곧 참수될 형편에 처했는데, 그 소문을 들은 이정빈이 수단껏 손을 썼다.
 홍필두 같은 자가 그렇게 죽도록 할 수 없다는 것이었으니 그에게는 정말 인재를 아끼는 마음이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 덕에 홍필두는 겨우 사형을 면하고 죽지 않을 만큼 곤장을 맞은 후 방면된 일이 있었다.
 홍필두는 그 길로 붓골로 찾아가 고개 숙이고 이정빈의 심복 수하가 되었다.
 이정빈은 그에게 이번 일을 맡길 작정이었다. 정말 장약허가 없다면 홍필두가 충분히 해낼 것이라고 믿었던 것이다.
 그래도 한 가닥 의심이 남아 그에게 몇 번을 일러 주었다.
 “먼저 세밀하게 정탐을 하고, 만약 장약허가 섞여 있거나, 뒤에라도 합류할 예정이라면 즉시 일을 그만두고 돌아오도록 해라. 괜한 공명심으로 호기를 부려서는 절대로 안 된다.”
 “명심하겠습니다.”
 “성공한다면 이곳으로 돌아오지 말고 그 길로 합천에 내려가 별도의 기별이 있을 때까지 두문불출하고 있어라.”
 “합천이라시면…….”
 “거기 나의 외가가 있느니라. 내 말을 전하면 깊이 숨겨 줄 것이다.”
 “하오면 데려가는 자들은 어찌 하오리까?”
 “더러 죽는 자가 나올지도 모른다. 그러면 즉시 묻어 버리고, 부상을 입어 운신이 어렵게 된 자는…….”
 잠시 생각하던 이정빈이 결연하게 말했다.
 “네 손으로 베어서 후환이 없게 해라. 뒷일은 내가 다 책임져 줄 테니 염려하지 말고.”
 “명을 받듭니다.”
 “이와 같은 일은 은밀함과 신속함 못지않게 무정해져야 반드시 성공할 터. 내 말을 잊지 마라.”
 홍필두가 일어나 나가자 이정빈이 방안을 서성거렸다. 초조하고 불안하기도 하면서 기대감으로 들뜨기도 한 것이다.
 만약 홍필두가 정난정의 암살에 성공한다면 사림들이 열렬히 환호할 게 틀림없다.
 이정빈은 그들의 지지를 배경으로 해서 조정에 출사하고 가문의 영광을 재현하게 될 것을 기대했다. 아버지 이량의 대를 이어 윤원형의 전횡을 제어할 세력으로 부각되는 것이다. 주상 또한 그것을 마다할 리가 없으니 이번 거사야말로 중요한 일이었다.
 곽거도를 불러 일을 대충 설명하고 집 안팎의 경계에 더욱 집중할 것을 명하자 그가 씩씩거리며 불만을 터뜨렸다.
 “나리. 대체 무슨 생각이신지 모르겠소이다. 그처럼 중요한 일에 홍필두를 보내시다니? 소인은 꾸어온 보릿자루요?”
 이정빈이 빙그레 웃었다.
 “이번 일은 홍필두만으로 충분할 거네. 정난정 곁에 장약허가 없다지 않는가.”
 “응? 그게 정말이요? 허! 아니 그놈이 어째서?”
 장약허가 정난정을 호위하지 않는다는 건 곽거도에게도 의외의 일이었다.
 “어떤 놈이 감히 호랑이의 콧수염을 뽑을 것이냐, 하고 방심한 게지.”
 이정빈은 그렇게 믿었다. 그렇지 않고서야 윤원형이 정난정을 그처럼 허술하게 내보낼 리가 없다.
 “아니면 그 백정 놈에게 따로 시킨 일이 있어서이거나.”
 “따로 시킨 일이라니요? 설마 나리를…….”
 곽거도가 긴장하여 두리번거렸다.
 “그럴 리는 없겠지만 그래도 안심할 수 없어서 자네 대신 홍필두를 보내고 자네에게는 따로 당부하는 것이네. 그놈이 아무리 야차 같은 놈이라고 해도 자네가 나서서 단단히 방비하고 있다면 감히 혼자서 쳐들어올 용기를 내겠나?”
 곽거도가 비로소 안심했다는 얼굴로 물었다.
 “나리, 그럼 윤 대감이 그놈을 남겨둔 건 다른 일이 있어서라는 거지요? 우리에게 해코지를 할 것도 아니라면 그게 뭘까요?”
 “지난 며칠 동안 열 명의 유생들이 죽어나갔네. 자네도 알고 있지?”
 “그 일로 장안의 소문이 흉흉합디다. 거리에 나돌아 다니는 유생들도 싹 사라졌소.”
 세검정에서 두 명의 유생이 강도를 만나 죽임을 당했고, 돈의문(敦義門:서대문) 밖에서 세 명이 죽임을 당했다.
 이틀 전 아침나절과 오후의 일이었다.
 특히 돈의문 밖에서의 살인은 오가는 사람도 많은 때에 대로에서 이루어진 대담하고 잔인한 범행이었다. 행인들이 비명을 지르며 사방으로 흩어져 달아나느라고 아비규환의 전쟁터처럼 되었다고 한다.
 목격자가 사건을 맡은 포교에게 증언한 말로는 한 놈의 짓이었다. 삿갓을 눌러써서 얼굴을 볼 수 없었는데 길가에 앉아 있다가 갑자기 칼을 뽑아들고 뛰어들더니 잡담을 나누며 지나가던 유생들의 앞을 가로막고는 다짜고짜 베어버렸다고 했다.
 어찌나 빠르고 흉맹한 검격이었던지 “어? 어?” 하는 사이에 세 명 모두 변을 당했고, 흉수는 바람처럼 사라져버렸다고 한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유생들을 백주 대로에서 무참히 살해한 일은 그냥 넘어갈 수 없는 중대한 범죄였다.
 우포청의 포졸들이 죄다 나서서 눈에 핏발이 서도록 찾아다녔으나 아직까지 범인의 흔적조차 발견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리고 어제는 자하문(紫霞門) 아래에서 다섯 명의 유생이 떼죽음을 당했다.
 각자 환도를 차고 입문하여 동곡(洞谷:효자동)을 지나던 중에 누군가에게 난자를 당해 참혹한 꼴로 죽었던 것이다. 유생 살인사건에 대한 우포청의 수사에 불만을 갖고 조정에 항의하기 위해 궁궐로 향하는 길이었을 것이다.
 검시관의 말에 의하면 한 놈의 짓이라고 했다.
 다섯 유생이 미처 검을 뽑아 대항할 새도 없이 순식간에 당해 나뒹굴었다니 귀신같은 솜씨라고 해도 틀린 말이 아닐 것이다.
 그 범행은 인적 없는 골목길에서 눈 깜짝할 사이에 일어났던지라 이번에는 목격자도 없었다.
 도성 안에서 그처럼 흉악한 짓을 서슴지 않은 걸로 보아 범인은 조정을 우습게 아는 대담무쌍한 자가 틀림없다.
 “그와 같이 며칠 사이에 열 명의 유생이 비명횡사했는데, 그 이유를 짐작하겠나?”
 잔뜩 낯을 찌푸리고 이정빈의 말을 듣고 있던 곽거도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어떤 놈인지 정말 끔찍하도록 무서운 놈이라는 것 밖에는 짐작할 수 있는 게 없소이다.”
 “잘 생각해 보면 알 거네. 살해당한 자들에게 공통점이 있거든.”
 “공통점?”
 “모두 얼마 전 궐문 앞에서 퇴청하는 교동 윤 대감의 가마를 가로막고 시비를 걸었던 자들일세.”
 “아니, 그럼?”
 “짐작이 가지? 그런데 우포청에서는 아직까지도 범인에 대한 단서조차 찾지 못했다고 하더군. 아마 조만간 미결사건으로 넘어가고 말 걸세. 한 두어 달쯤 지나면 사람들은 그런 일이 있었다는 것조차 잊어버리게 되겠지.”
 “으음-”
 곽거도가 이를 악물고 길게 신음했다.
 이정빈이 그를 지그시 바라보았다.
 “세상이 더 어지러워지기 전에 바로잡아야 할 텐데 그러자면 조만간 자네의 힘이 반드시 필요하게 된 터이니 항상 준비하고 있게.”
 “알겠습니다. 그리고 오늘부터는 소인이 직접 나리의 신변 경비에 나서지요.”
 
 ***
 
 과천으로 들어가는 관문인 남태령의 울창한 숲속에 수상한 자들의 기척이 있었다.
 “확실히 이 길로 지나간다고 했소?”
 “조금만 더 기다려 보자.”
 “젠장, 벌써 날이 새고 있잖소. 이래서야 다 헛일이야. 그냥 돌아가는 게 낫겠소.”
 “이놈이? 정 겁이 나면 썩 꺼져버려라. 다른 놈들까지 맥 빠지게 하지 말고!”
 수하에게 눈을 부라리는 사내는 이정빈으로부터 밀명을 받고 무사들 중에서 솜씨가 좋은 다섯 명을 뽑아 데리고 나온 홍필두였다.
 그는 어제 오후 느지막이 수하들과 먼저 마포나루를 건너와 몸을 숨기고 정난정이 오기를 기다렸었다. 잠시 후 그녀가 호위들과 함께 나룻배에서 내리는 것을 유심히 살펴보았는데, 과연 장약허는 없었다. 수상해 보이는 자도 없다.
 그걸 제 눈으로 확인한 홍필두는 쾌재를 부르고 한달음에 남태령으로 달려와 은신하고 있는 중이었다.
 도성에서 나와 안성으로 가려면 열에 아홉은 과천을 지나 수원 방향으로 가는데 그러자면 남태령을 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니 기다리고 있으면 정난정이 반드시 이리로 올 것이라고 확신했다.
 그러나 지난 밤 내내 찬 이슬에 젖어가며 목을 빼고 기다렸지만 정난정의 일행은 오지 않았다. 아마도 오는 길에 봉은사에 들러 하루 묵은 것인지도 모른다. 그러니 밤새 이슬에 젖어가며 기다렸던 수하들이 불평을 터뜨리는 것도 당연했다.
 “그냥 마포나루에서 들이쳐 모조리 죽여 버릴 걸 그랬나보오,”
 “보는 눈들이 많은 데서 그런 짓을 하면 안 되지.”
 “어차피 우리 짓이라는 걸 알게 될 텐데 무슨 상관이 있겠소?”
 수하의 말에도 일리가 있었다. 아무리 감춘다고 해도 조금 지나면 붓골의 무사들이 한 짓이라는 걸 세상이 모두 알게 될 것 아닌가.
 잠시 망설이던 홍필두가 단호하게 말했다.
 “그래도 그건 안 돼. 알 때 알게 되더라도 사람들 앞에서 그런 짓을 할 수는 없다. 우리는 무사이지 떼강도가 아니다. 또 그런 짓을 하면 즉각 포청에서 야단법석을 떨며 수사할 게 뻔하지 않으냐? 그러면 붓골 나리의 처지가 곤란하게 돼.”
 “감춘다고 해도 결국 드러날 텐데 뭘.”
 “목격자가 없으면 무마하기가 쉽지만 많은 목격자가 있다면 그렇지 않다. 그 차이는 크고 중요한 거야.”
 사람들의 이목이 있으니 포도청으로서도 수사에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그때는 이정빈의 영향력이 아무리 크다고 해도 타격을 입지 않을 수 없고, 한번 그렇게 타격을 입으면 다시 회복하기 어렵다.
 “제기랄, 오금에 쥐나겠소. 이럴 게 아니라 내가 내려가서 대체 어찌된 영문인지 정탐을 하고 오리다.”
 한 놈이 그렇게 말하고 나섰다. 홍필두는 그것도 괜찮겠다 싶어 굳이 말리지 않았다. 길목을 잘못 잡아서 놓친 것이라면 다시 쫓아가 오산쯤에서 해도 좋고, 그것도 곤란하면 돌아오는 길에 들이쳐도 상관없으니 지금은 만전을 기해야 할 때이지 서두를 때가 아닌 것이다.
 숲에서 나가 고갯길 아래로 내려갔던 놈이 조금 있자 헐레벌떡거리며 뛰어올라왔다.
 “옵니다, 와요. 저 아래쪽에서 올라오는 걸 봤소.”
 “그러면 그렇지.”
 홍필두가 무릎을 치고 다시 수하들을 매복시켰다.
 뜨거운 밥 한 그릇을 먹을 만큼 기다렸을까, 과연 아래쪽에서 정난정의 행렬이 올라오는 게 숲 사이로 보이기 시작했다.
 가마를 멘 두 명의 가마꾼 외에 세 명의 호위무사가 앞섰고, 가마 곁에는 시비 한 명이 장옷을 뒤집어쓴 채 따르고 있었다.
 눈을 가늘게 뜨고 그들을 꼼꼼히 살펴본 홍필두가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다시 확인해 보아도 장약허는 없었던 것이다.
 정난정의 명이 다할 때가 된 모양이라고 확신했다. 그렇지 않고서야 교동을 떠날 때마다 그림자처럼 달고 다니던 장약허를 떼어놓은 채 저렇게 단출한 행차를 할 리가 없지 않은가.
 잠시 후 정난정의 가마가 언덕 위에 나타났다. 그 즉시 홍필두의 수하 다섯 놈이 숲에서 뛰어나와 앞을 가로막았다.
 세 명의 무사가 놀라는 기색도 없이 침착하게 삼 면으로 벌려 서서 가마를 지킨다.
 “이놈들. 이 가마의 주인이 어떤 분이신줄 알고 감히 노략질을 하려는 것이냐? 썩 꺼지면 목숨은 보존하려니와, 그렇지 않으면 모두 목이 떨어질 줄 알거라!”
 우두머리로 보이는 자가 제법 근엄하게 꾸짖었다. 시시한 산적 놈들이 귀찮게 구는 모양이라고 생각한 것이리라.
 아직 홍필두는 숲속에 숨어서 동정을 엿보기만 했고, 다섯 놈이 조금 더 가마 앞으로 다가갔다.
 “흐흥, 그 안에 타고 있는 사람에게 볼 일이 있을 뿐이니 너희들이야말로 기회가 있을 때 내빼는 게 좋을걸? 그렇지 않으면 죄다 죽여서 묻어버릴 테다.”
 한 놈이 기세 좋게 을러댔다.
 “뭐라고?”
 가마를 지키던 자들이 비로소 심상치 않은 일이라는 것을 눈치 채고 동요했다.
 “너희들은 누구냐? 누가 시켰기에 감히 이런 짓을 하는 거지?”
 “흥, 용기가 있다면 네가 이리 나와서 알아보아라.”
 다섯 놈이 빙글빙글 웃으며 점점 가까이 다가왔다.
 서로 눈짓을 주고받은 세 명의 무사가 칼을 뽑아들더니 “이얏!” 하는 기합성과 함께 일제히 달려들었다.
 설마 가마를 버린 채 먼저 쳐나올 줄 몰랐던지라 주춤하던 다섯 놈이 이내 칼을 휘두르며 마주쳐 나갔다.
 가마꾼 두 놈은 벌벌 떨기만 할 뿐 어찌할 바를 모르고 발만 구르고 있었다. 신경 쓸 것도 없는 놈들이다. 다만 가마 곁에 장옷을 뒤집어쓰고 태연히 서 있는 시비가 눈에 거슬렸다. 그러나 계집 혼자서 뭘 어쩌겠는가, 싶은 생각에 다섯 놈은 느긋한 마음이 되어 세 명의 무사들을 상대하는 데에만 전념했다.
 칼빛이 번쩍이고 쨍강거리는 소리가 쉴 새 없어 터져 나오는 중에 살기가 점점 짙어졌다.
 갑작스런 칼부림에 놀란 산새들이 여기저기에서 날아오르고 숲을 서늘하게 하던 바람도 달아나버렸다.
 “저놈들이 제법이구나.”
 어슬렁거리며 숲에서 나와 팔짱을 끼고 싸움 구경을 하던 홍필두가 고개를 끄덕였다. 교동 윤 대감 댁의 무사들이 모두 솜씨가 좋다더니 과연 그 말이 사실임을 실감한 것이다.
 그들은 이쪽의 다섯 명을 맞아 셋이서 한 몸이 된 듯이 꿋꿋하게 버티고 있었는데, 번갈아 쳐나오고 돌아가며 서로를 지켜주는 게 이런 상황에 대비해 훈련을 잘 해둔 것 같았다.
 ‘그건 그렇고, 대체 저 계집의 정체는 뭐지?’ 하는 생각에 홍필두가 눈살을 찌푸렸다. 가마 곁에 서 있는 시비의 태도가 영 눈에 거슬렸던 것이다. 아무리 담이 큰 계집이라고 해도 그렇지, 이처럼 험악한 칼부림이 눈앞에서 벌어지고 있는데도 놀라기는커녕 닭싸움 구경하듯이 재미있어 하는 것 같지 않은가.
 “으악!”
 기어이 비명이 터져나왔다. 가마를 호위해 온 세 명의 무사들에게서였다. 그 중 한 명이 가슴을 깊게 베어 쓰러지고 있었다. 아무래도 셋이서 다섯 명을 상대하기에는 무리였던 것이다. 게다가 이쪽이 시시한 산적 놈들이 아니라 붓골의 무사들 중에서도 제법 솜씨가 있다고 하는 자들이니 칼을 나누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불리해질 건 뻔한 일이다.
 여태까지 잘 버텼지만 한 명이 쓰러지자 전세가 급격히 기울었다.
 남은 두 명이 이를 악물고 온 힘을 다해 칼을 휘둘러댔다. 좌우로 나뉘어 막고 버티는 솜씨가 역시 감탄할 만하다.
 쨍강거리는 소리가 거푸 터져나오고 기어이 또 한 명이 비명과 함께 쓰러졌다. 그 때까지도 가마 곁의 시비는 꼼짝도 하지 않고 있었다. 장옷의 그늘로 얼굴을 덮은 채 불을 켠 듯이 눈만 반짝거리며 싸움을 지켜본다.
 홍필두의 가슴이 철렁, 하고 내려앉았다.
 ‘이제 보니 저 계집은 이쪽의 솜씨를 살펴보고 있는 것이로구나. 지독한 계집이 아닌가.’
 함께 온 무사들이 죽어나가고 있는데도 두려워하기는커녕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상대의 전력을 탐색하고 있기가 어디 쉬운 일인가.
 낮은 신음과 함께 마지막까지 저항하던 자가 반쯤 목이 잘려 쓰러졌다. 그들을 공격한 다섯 명의 무사들은 여전히 건재하니 상황은 이제 끝난 것 같아 보였다.
 그들이 살인의 흥분으로 높아진 숨을 씩씩거리며 가마를 향해 다가왔다. 그러자 비로소 가마 곁의 시비가 장옷을 벗어 던지고 앞으로 나섰다.
 “어?”
 다섯 놈이 핏발선 눈을 휘둥그레 떴다. 장옷을 벗어버리자 드러난 시비의 미모 때문이었다.
 눈이 번쩍 뜨일 만큼 요염하고 황홀한 얼굴은 꿈에서나 그리던 그런 것 아닌가.
 “허! 이건 기막힌 계집이로구나. 죽이기 아깝다.”
 “죽이기는. 이런 물건을 죽인다면 천벌을 받지. 품고 사랑해줘야 하는 거다, 아주 뜨겁게. 흐흐-”
 “그렇다면 내가 먼저야.”
 그들이 각기 음흉한 눈으로 그녀를 핥듯이 바라보았다.
 묘화였다.
 그녀가 차가운 미소를 지었다. 그게 더욱 사내들의 마음을 뒤흔들어놓는다.
 “병신 같은 것들. 곧 뒈질 텐데 그것도 모르고 제멋대로 지껄이는구나.”
 말을 하면서 허리춤에서 두 자루의 짧은 칼을 뽑아드는데, 그 모습 또한 요염한 자태로 보일 뿐이었다.
 “자, 이리 와. 어느 놈부터 목을 따줄까? 귀찮게 굴지 말고 줄을 서 있다가 차례로 왔으면 좋겠다.”
 아무렇지도 않게 하는 흉한 말이지만 나긋나긋하고 졸린 듯도 한 음성에 색기가 줄줄 흐르는 것이어서 세 놈의 귀에는 꾀꼬리가 지저귀는 소리처럼 들렸다.
 그 무렵 한 사람이 과천 방면에서 올라와 저만큼 떨어진 곳에 서 있었다. 안성을 떠나 한양으로 향하고 있던 이장생이다.
 칼 부딪치는 소리와 비명소리를 듣고 무슨 일인가 하여 서둘러 올라왔다가 두 자루의 짧은 칼을 든 아가씨가 자객이 분명한 다섯 명의 사내와 마주서 있는 걸 보고 멈추어 선 것이다.
 묘화와 홍필두가 힐끔 그런 이장생을 바라보았으나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조심해. 예사 계집이 아니다.”
 뒤에서 홍필두가 당부했지만 다섯 놈의 귀에는 재촉하는 소리로 들릴 뿐이었다. 어서 눈앞의 이 기막힌 계집을 품고 싶어서 조바심이 났다.
 묘화가 생긋 웃으며 한 걸음 앞으로 나섰다. 그 차갑고 매혹적인 미소에 다섯 놈의 얼이 또다시 빠져 달아났다.
 묘화는 이미 그들을 어떻게 상대할지 머릿속에 동선(動線)을 그려놓고 있었다. 동료 세 명이 죽어가는 동안 충분히 그들의 솜씨와 검법을 파악해 두었던 것이다.
 뱁새눈을 한 자의 솜씨가 가장 좋았고, 빠르고 날카롭기는 수수깡처럼 마른 자의 칼이 제일이었다. 나머지 세 놈은 크게 위협이 되지 않는다.
 그렇게 판단한 묘화는 경계해야 할 두 놈을 우선 처리하기로 했다. 빠르면 빠를수록 좋다.
 “이얏!”
 요염하게 웃으며 다가간 그녀가 바람처럼 달려들었다. 치맛자락이 펄럭인 것 같은 순간 벌써 가장 가까운 곳에 있던 뱁새눈의 목을 치고 한 놈을 건너뛰어 깡마른 자의 가슴을 찔렀다. 목이 베인 자는 제가 지금 무슨 일을 당한 것인지도 모르고 멍하니 서 있었다.
 눈부시게 빠르고 신랄한 그 솜씨에 크게 당황한 홍필두가 “조심!” 하고 버럭 소리치며 달려왔지만 이미 깡마른 자의 가슴도 단번에 꿰뚫리고 난 뒤였다.
 “아!”
 묘화의 그 놀라운 움직임에 이장생이 탄성을 터뜨렸다. 저와 같은 고수는 보기 힘들 터인데 더욱이 가냘픈 아가씨라니 믿을 수가 없다.
 그때 묘화는 비로소 정신을 차리고 고함을 지르며 삼면에서 달려드는 세 놈을 여유 있게 상대하고 있었다. 가장 꺼림칙했던 두 놈을 기습으로 처치하는 데 성공했다는 기쁨이 그녀의 까르르, 하고 웃는 웃음소리에 고스란히 실렸다.
 “이것들이 아주 발악을 하네? 어머, 어머. 그러다가 내 귀한 옷이라도 찢어지면 어쩌려고 그러니? 에구머니나, 죽을 뻔했잖아!”
 머리카락 몇 올을 자르고 눈앞을 스쳐 지나간 칼에 묘화가 호들갑을 떨었다.
 “감히 나를 놀라게 하다니? 너부터 죽여야겠다. 이리 와!”
 그녀가 정말 화가 난 듯이 두 자루의 칼을 어지럽게 휘두르며 사내들을 맹렬히 후려치기 시작했다.
 넓은 옷소매와 치맛자락이 펄럭이는 중에 눈부신 칼빛이 허공을 조각조각 베어댄다.
 그 정교하고 재빠르며 신랄한 쌍칼의 재주 앞에서 세 명의 사내들은 쩔쩔매기만 했다. 난도질하려는 듯이 쳐들어오는 묘화의 칼을 막고 피하기에 급급할 뿐 반격의 엄두도 내지 못한다.
 홍필두가 눈을 부릅떴다. 묘화의 휘모리장단에 맞추어 춤을 추듯 하는 칼솜씨에 어안이 벙벙했던 것이다. 넓은 옷소매와 남색 치맛자락이 온통 허공을 쓸듯이 빙글빙글 돌아가니 눈이 어지러울 지경이다.
 도와주고 싶어도 네 명이 한 덩어리로 어울려 어지럽게 칼을 휘두르고 뿌려댔으므로 끼어들 틈도 없을 뿐더러 그럴 정신도 없었다.
 두 자루의 짧은 칼은 신명이 돌아 저절로 치고 베며 꺾어지는 것 같기만 했다. 그 속에서 “으악!” 하고 비명이 터져 나왔다. 기어이 묘화가 점찍은 자의 어깨를 강하고 깊게 찍어버린 것이다. 그 순간에 다시 신음소리가 들렸다.
 또 하나의 칼로 옆에 있는 놈의 목을 치고 빠져나온 그녀의 움직임은 멈출 줄을 몰랐다. 퍽! 하는 둔탁한 소리와 함께 가슴을 걷어차인 놈이 뒤뚱거리며 급하게 물러서다가 그녀가 비수처럼 던져버린 칼을 목에 꽂고 쓰러졌다.
 두어 호흡 사이에 세 명을 정신없이 몰아치고 해치워버리는 묘화의 솜씨는 끔찍함을 넘어서 요악하기 짝이 없는 것이었다.
 “별 것도 아니면서 사람을 놀라게 해. 흥, 이제 다시는 그러지 못하겠지.”
 그녀가 눈을 부릅뜬 채 푸들푸들 떨고 있는 놈의 얼굴을 짓밟고 목에 박힌 칼을 뽑아냈다. 뜨거운 피가 왈칵 뿌려져 치맛자락을 적신다.
 “에그, 징그러워라.”
 잔뜩 눈살을 찌푸리고 물러서더니 홍필두에게 돌아서서 요염하게 눈웃음을 쳤다.
 “이제 너 혼자 남았네? 외롭겠다.”
 홍필두는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내가 요괴를 만난 건 아닌가? 하는 엉뚱한 의심마저 들 지경이다.
 “이리 와. 아프지 않게 해줄게.”
 묘화가 불쌍하다는 듯, 연민이 가득한 얼굴로 다가왔다.
 표정과 감정의 변화가 수시로 바뀌니 그녀가 더욱 무섭고 끔찍하게 여겨지는 것이어서 홍필두는 저도 모르게 주춤거리고 물러섰다. 이런 계집이 있다는 말은 들어본 적이 없었다.
 윤원형이 왜 장약허를 보내지 않았던 건지 이제야 이해되지만 그만두기에는 너무 늦었다.
 싸움을 지켜보고 있던 이장생의 놀라움도 홍필두 못지않게 컸다. 아가씨의 칼이 저렇게 무섭고 잔인하다는 게 끔찍했으나 그 멋진 솜씨만은 인정해주지 않을 수 없었다. 곳곳에 이처럼 숨은 고수들이 있으니 자만할 수 없다는 경각심마저 든다.
 그가 한편으로 감탄하고 한편으로는 그녀의 악독한 심성에 혀를 내두르면서 지켜보는데 묘화가 힐끔 돌아보더니 손짓을 했다.
 “얘, 거기 말뚝처럼 서 있는 너. 너도 이놈들을 도와주러 온 거니? 그렇다면 얼른 이리 와. 귀찮기도 하고 시간도 없으니까 그냥 한꺼번에 같이 하자. 내가 조금 더 힘을 쓰면 두 사내쯤은 동시에 충분히 즐겁게 해줄 수 있어.”
 허리에 차고 있는 환도를 본 모양이다.
 묘화가 눈을 가늘게 뜨고 붉은 입술을 살짝 벌려서 방긋 웃었다. 싸우자는 게 아니라 노류장화가 지나가는 남정네를 유혹하는 것 같다. 그러나 이장생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쳇, 싫으면 그만 두고.”
 입을 삐죽거린 묘화가 이번에는 홍필두를 향해 생긋 웃었다.
 “그대로 서 있을래? 에휴, 그러면 내가 해줄 수밖에 없겠네. 이리 좀 가까이 와봐. 이왕이면 목도 길게 빼고.”
 “으음-”
 정신을 차린 홍필두가 힐끔 이장생을 바라보았다. 부끄러웠다. 그런 한편 그가 거들어 준다면 일이 좀 더 쉬울 것이라는 생각도 했다. 그러나 처음 보는 자이고, 움직일 기미가 없으니 도와달라고 손을 내밀기도 멋쩍었다. 무엇보다 자존심 상하는 일이 아닌가.
 홍필두가 천천히 칼을 뽑아들며 이 요녀에게 더 이상 홀려서는 안 된다고 스스로를 다잡았다. 비로소 눈빛이 매서워진다.
 그가 칼을 굳게 움켜쥐고 정면에 곧추 세워든 채 한 발 내딛자 냉엄한 기운이 일었다. 묘화가 어떤 술수를 부려도 똑바로 가르고 쳐들어가 일격에 쪼개고 말 기세다.
 “흠, 제법인데?”
 묘화가 코를 찡긋거렸다. 여전히 미소를 흘리고 있지만 당혜 신은 발을 조금씩 밀어 옆으로 이동하는 움직임은 여태까지와 달리 신중했다.
 홍필두는 사뭇 흔들렸던 마음을 물리치고 빠르게 냉정을 되찾았다. 검법의 수련이 그만큼 깊다는 증거다.
 묘화도 상대의 그런 변화를 느낄 수 있었다. 그래서 여태까지와는 다르게 긴장하여 입을 꾹 닫았다.
 단물을 가득 담고 부푼 것 같은 붉은 입술과 투명한 볼, 오똑한 콧날과 검고 빛나는 두 눈이 코앞에 있었다. 달콤한 숨결마저 느낄 수 있을 만큼 그녀가 가까이 다가와 있는 것이다.
 그 자체로서 상대를 위험에 빠뜨리게 하는 마력을 타고난 요물. 그런 그녀 앞에서 감정의 자유로움을 지킬 수 있는 자는 흔치 않으리라.
 그러므로 지금 자신을 억누르고 잡념을 물리치며 살기를 불러일으키는 홍필두의 수양은 칭찬을 받을 만했다. 칼을 쥐면 삶과 죽음을 그것 하나에 온통 맡겨버릴 줄 아는 진정한 무사인 것이다.
 묘화의 눈 속에 이글거리는 빛이 점점 짙어졌다. 그녀 또한 먹이를 노리는 맹수가 되어가고 있었던 것이다. 홍필두를 제 상대가 되기에 부족함이 없는 자라고 인정한 것이기도 하다. 그래서 긴장하고, 그만큼 더 큰 승부욕을 느끼고 있었다. 흥분으로 입술마저 가늘게 떤다.
 이장생은 숨마저 멈추고 그들을 지켜보았다. 이와 같은 고수들의 싸움을 볼 수 있는 기회가 어디 흔하던가.
 무거운 긴장의 시간이 얼마나 계속되었을까, 온 숲이 무너져 내리는 것 같은 순간에 두 사람의 입에서 동시에 기합성이 터져나왔다. 그리고 번쩍이는 칼빛이 허공을 갈랐다.
 맞닿을 것처럼 좁은 공간으로 낙뢰가 떨어진 것 같았다. 세상이 온통 하얗게 바래버렸다는 착각이 든다.
 쨍, 하는 날카로운 쇳소리가 났다. 묘화의 칼이 홍필두의 칼을 쳐낸 것이다. 그리고 휘두르는 또 한 자루의 칼을 홍필두가 몸을 틀며 재빨리 막아냈다.
 일합을 나눈 두 사람은 똑같이 상대를 베지 못했다는 걸 분하게 여겼다.
 이를 악문 묘화가 표독한 얼굴로 두 자루의 칼을 어지럽게 휘둘러 쳐들어왔고, 물러설 마음을 버린 홍필두 또한 장검을 맹렬하게 뿌려 묘화의 난격(亂擊)을 베고 끊어갔다.
 한 덩어리가 된 것처럼 뒤엉킨 그들은 무아지경에 빠져있는 것 같았다. 필생의 적수를 만나 나를 잊고 승패를 잊었으며 삶과 죽음도 잊은 채 오직 칼의 의지를 따르는 것이다.
 그것을 지켜보고 있는 이장생도 마찬가지였다. 제가 칼을 들고 묘화나 홍필두를 상대하는 것처럼 몰입해 있었다. 곁에 벼락이 떨어져도 모를 지경이다.
 “이얏!” 하는 묘화의 날카로운 기합성이 터져 나온 순간 이장생이 저도 모르게 “억!” 하고 놀란 외침을 터뜨렸다. 쨍, 하는 날카로운 소리와 함께 홍필두의 칼이 빛을 잃고 흩어지는 걸 본 것이다. 그리고 묘화가 뿌리는 또 한 자루의 칼이 그의 옆구리를 깊이 베고 지나가는 것도 똑똑히 보았다.
 홍필두가 낮은 신음을 흘리며 비틀거렸다. 그 순간 돌아온 묘화의 칼이 나무 둥치를 찍는 도끼처럼 그의 목덜미에 콱 박혔다.
 
 모두 죽었다.
 아홉 명이나 되는 무사들이 죽어 널브러져 있는 고갯길에 무거운 적막이 깔렸다. 숨죽이고 있던 바람이 슬그머니 지나가자 비릿한 피냄새가 왈칵 퍼져나간다.
 묘화의 낯빛은 지나친 흥분과 긴장 그리고 아직 가시지 않은 살기로 인해 창백하게 굳어 있었다. 웃음이 사라진 얼굴이 귀신의 그것과 같이 끔찍했다.
 천천히 칼을 거둔 그녀가 길게 숨을 내쉬더니 이장생을 바라보았다. 아직 경계심을 풀지 않고 있다.
 ‘지독한 계집이로군.’
 묘화의 솜씨와 지독한 심성을 똑똑히 보고 느낀 이장생은 그녀와 한번 겨루어보고 싶다는 충동을 참기 힘들었다.
 “으음.” 하고 깊은 신음을 흘린 그가 천천히 걸어 다가갔다. 묘화가 차갑게 가라앉은 눈을 번쩍이며 바라본다.
 이장생이 점점 다가올수록 그녀의 눈빛이 더욱 반짝였다. 살기 위에 또 다른 느낌이 실려 있었는데, 호기심이기도 하고 관심이기도 한 그런 것이었다.
 제 앞을 지나가는 이장생을 향해 그녀가 불쑥 말을 던졌다.
 “너는 누구지?”
 “이장생.”
 “이장생?”
 고개를 갸웃거리더니 붉은 입술 사이로 흰 이를 드러내며 싸늘하게 웃는다.
 “본 이상 살아서는 못 가.”
 그러나 이장생은 듣지 못한 것처럼 무심하게 지나갈 뿐이었다. 묘화가 입을 씰룩였다.
 “흥, 죽이지 못할 줄 알고?”
 눈빛이 다시 매서워지더니 번쩍 하고 칼빛을 쏘아냈다. 마치 손에 쥐고 있던 비수를 던진 것처럼 갑작스럽고 맹렬한 일격이었다. 그대로 이장생의 등이 길게 쪼개질 것만 같다.
 그 순간 한 줄기 또 다른 빛이 불쑥 뻗어나와 그것을 받았다.
 창, 하는 쇳소리가 울리고 묘화가 잔뜩 낯을 찌푸린 채 물러섰다.
 돌아보지도 않고 뽑아 후려친 이장생의 칼이 그녀의 칼을 보기 좋게 쳐냈던 것이다. 그 힘이 고스란히 전해져왔는데, 손아귀가 찢어질 듯 아팠다.
 묘화는 깜짝 놀랐다. 대체 그가 언제 칼을 뽑아 후려친 것인지 보지 못했고, 어떻게 돌아보지도 않고 그처럼 정확하게 저의 칼을 쳐낸 것인지도 알 수 없었다.
 윙윙 울고 있는 제 칼을 보고 이장생을 바라보는데 그가 아무 말도 없이 무심하게 성큼성큼 멀어져갔다.
 “저, 저것이?”
 묘화가 모욕을 당한 것처럼 부르르 떨었다. 표독스럽게 이장생의 등을 노려보지만 다시 달려들 생각은 없는 것 같았다. 한 번 칼을 부딪쳐본 것만으로 그가 어떤 자인지 느낀 것이다.
 이장생이 저만큼 멀어진 뒤에야 한숨을 쉰 묘화가 중얼거렸다.
 “흥, 이제 생각났어. 네가 바로 장안의 골칫덩이라는 그 이장생이었군? 제법 잘 생겼는데?”
 그 말을 해놓고 스스로도 어이가 없는지 피식 웃었다.
 “등 뒤에도 눈이 달린 놈이었구나. 그거 재미있겠는걸?”
 입을 삐죽거리며 이제는 숲에 가려져 보이지 않는 이장생이 저 아래 멈추어 있기라도 한 것처럼 흘겨본다.
 “돌아가자. 오늘은 일진이 흉하니 더 가고 싶은 마음이 없구나.”
 그때까지도 죽은 듯이 아무 소리도 없이 가마 안에서 꼼짝하지 않고 있던 정난정이 한숨과 함께 그렇게 말했다.
 묘화가 화들짝 놀라 가마 곁으로 돌아갔다.
 
 <『조선의 칼』 2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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