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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드서클 1권(1)

2015.09.18 조회 803 추천 12


 프롤로그
 
 
 할라얀 538, 아불렘 전능궁
 
 아불렘은 대륙에서 가장 크고 부유한 나라였다. 뿐만 아니라 훌륭한 말과 희귀한 보석, 맛있는 크렘 젓갈로 이름이 높았다.
 그리고 그에 못지않게 유명한 것이 ‘왕국의 얼룩’ 혹은 ‘방탕한 얼간이’라고 불리는 셋째 왕자, 차페인 아불레만이었다.
 왕은 때때로 측근인 대신을 앉혀 놓고 한숨을 쉬었다.
 “어릴 때는 나라가 만들어진 이래 더없는 천재라 불리지 않았던가? 그런 아이가 어쩌다 이리되었을꼬?”
 셋째 왕자가 왜 그리되었나? 궁 안에서 오직 왕만이 그토록 분명한 이유를 모르고 있었다.
 얼마 뒤면 열여섯 살이 되는 차페인은 왕국의 유일한 적통이었다. 나머지 두 왕자는 후궁에게서 얻은 자식이었다.
 그렇다고는 해도 이웃 나라 살하나 부엔처럼 적통만 왕위를 이을 수 있는 것은 아니라 ‘적통’이라는 딱지 자체에는 그다지 힘이 없었지만, 왕은 후궁에 수많은 비를 두고서도 왕후를 무척이나 아꼈다.
 때문에 다른 후궁의 여자들보다 한참 늦었지만, 왕후가 차페인을 갖자 왕은 세상을 얻은 듯 기뻐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걱정이 되기도 했다.
 왕후는 몸이 약한 여자였다. 혼례를 올린 지 십여 년이 지나도 아이가 들어서지 않았던 이유도 그 때문이었다.
 불행히도 왕의 예상은 그대로 맞아떨어졌다. 왕후는 차페인을 낳다가 얻은 병으로 시름시름 앓다 차페인의 여섯 번째 생일, 두 번째 허물벗기를 하고 난 뒤 곧장 세상을 뜨고 말았다.
 왕은 목 놓아 울었다. 후궁에는 수많은 여자들이 있지만 삭막한 궁정에서 그토록 정 깊은 여자는 전에도 없었고 후에도 없을 것이다.
 그토록 정이 깊었기에 언제 죽어도 이상할 것 없는 몸을 끌고 아들의 두 번째 허물벗기까지 버텨 온 것이리라.
 아불렘 사람들은 태어나며 첫 허물을 벗어 무사히 세상에 첫발을 디딘 것을 축하하고, 여섯 살에 두 번째 허물을 벗어 일생에서 가장 무력한 때를 건강하게 지난 것을 축하하고, 열여덟이 되면 세 번째 허물을 벗어 어른이 된 것을 축하한다. 그리고 예순여섯, 삶에서 제 한몫을 해낸 뒤, 마지막 허물을 벗고 위대한 할의 부름 받을 준비를 한다.
 아들의 가장 무력한 시기만은 지켜 주려 왕후는 혼신의 힘을 다한 것이리라.
 그리 생각하니 막내아들은 보고만 있어도 애틋했다. 왕은 차페인에게 각별한 관심을 기울이고 정을 쏟았다. 물론 차페인이 비뚤어지기 시작한 것이 그 때문이라는 것은 꿈에도 모르고 있었다.
 왕은 통찰력이 뛰어나고 수완 좋은 선왕의 딸도 없는 외아들이었다. 당연히 별 어려움 없이 왕좌에 올랐다. 때문에 어미 없는 자식에게 배경은 만들어 주지 않고, 각별한 관심만 쏟았을 때 어떤 일이 일어날지 미처 짐작하지 못했다.
 왕은 선왕에게서 관대함과 사람을 끄는 재주는 물려받았지만, 냉철한 판단력은 물려받지 못했던 것이다.
 하지만 그의 큰아들 로히텐과 둘째 아들 셀문은 반대였다. 아비가 물려받지 못한 할아버지의 재능을 고스란히 물려받은 데다, 외가 쪽에서 각기 피도 눈물도 없는 잔인함과 뱀도 혀를 내두르는 교활함까지 물려받았다.
 그들은 하나같이 제가 왕이 될 거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 어미들 또한 저마다 왕의 어미가 될 것이라고 굳게 믿었다. 그리고 그 믿음을 현실로 만들기 위해 갖은 수를 썼다.
 그들이 가장 유력한 후계자인 차페인을 망가뜨리기 위해 특별히 심혈을 기울인 것은 두말할 것도 없었다.
 큰형 로히텐은 차페인이 철이 들기도 전에 여자를 가르쳤다. 아직 성년식도 치르지 못한 차페인의 후궁에는 마흔이 다 되어 가는 로히텐의 후궁보다 여자가 많았다.
 로히텐이 보낸 솜씨 좋은 여자들은 낯익힐 틈도 없이 수없이 바뀌며 차페인의 넋을 빼어 놓았다.
 왕은 이렇게 푸념을 늘어놓기도 했다.
 “젊은 나이라 여자한테 넋이 나갈 수도 있지. 암, 그럼. 그건 나도 이해하지. 나라고 젊은 날이 없었겠나. 하지만, 하지만 말일세, 그 정도로 놀았으면 이제 정신을 차릴 법도 하지 않은가?”
 하나 그 또한 모르는 소리다. 맏이 로히텐이 손을 쓰는 동안 둘째 셀문이라고 놀고 있었을까? 셀문이 차페인에게 가르친 것은 여자 놀이보다 더하면 더했지 그에 비해 조금도 꿀리지 않는 재미난 놀이였다.
 “신의 숨결이라는 거란다. 마음이 울적해지면 한번 피워 보려무나.”
 셀문은 차페인의 열세 번째 생일 선물로 물담배와 비단 쌈지를 내밀었다. 물담배는 첫눈에도 보통 물건 같지가 않았다.
 언제 만들어졌는지 짐작조차 할 수 없이 고색창연했지만, 겉면을 장식한 정교한 은세공은 지금껏 본 적 없이 아름답고 우아했다.
 차페인은 둘째 형의 선물에 완전히 마음을 빼앗겼다. 비단 쌈지의 가루를 담아 물담배를 피우자, 정신은 그대로 천국까지 날아갔다.
 며칠이 지나 셀문이 찾아오자, 차페인은 둘째 형, 셀문의 손을 잡고 다정하게 몇 번이고 다시 인사를 했다. 그러고는 그해 생일 선물로 왕이 내린 단검을 내어 주었다.
 차페인의 거처를 떠나는 셀문의 발걸음은 가벼웠다. 여자에 파묻혀 하루 종일 햇빛 한 번 보지 못해도 사라지지 않던 총기가 차페인의 눈에서 흔적도 없이 자취를 감추었다.
 바라던 대로였다. 큰형 로히텐이 마무리하지 못한 일을 자신이 해냈다.
 그것은 셀문의 능력이 로히텐을 앞선다는 뜻이었으며, 셀문이 다음 왕이 될 확률이 더 높다는 증거이기도 했다. 셀문의 입가에 웃음이 맺혔다. 어찌 즐겁지 않을 수 있으랴!
 그 후, 차페인은 급속도로 망가져 갔다.
 융통성 없이 성실한 왕은 가장 아끼는 셋째 아들이 더 이상 어찌할 수 없을 만큼 망가진 후에야 그 사실을 깨달았다.
 너무 늦은 깨달음이었다. 신하들을 붙잡고 어찌 된 일인지 아무리 물어보았자 누가 제대로 된 대답을 해 주겠는가?
 저울은 이미 기울었다. 매처럼 날카로운 눈에 이리처럼 사나운 엄니를 가진 로히텐과 셀문을 등지고 가망 없이 망가져 버린 차페인의 손을 들어 줄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신하들은 이미, 미리 발 빠르게 손을 써 놓은 첫째 로히텐 왕자 파와 둘째 셀문 왕자 파로 완벽하게 갈려 있었다.
 
 
 
 한낮이 다 되었건만 차페인의 거처, 동쪽 별궁의 침실은 어두컴컴하기만 했다.
 거대한 침대 네 기둥의 붉은 휘장도 그대로 드리워져 있어 바깥에서 수군거리는 소리 따위는 새어 들어갈 틈도 없건만, 그 속에서 차페인 아불레만은 소문 그대로 오늘도 위대한 할의 규율을 무시하며 약과 여자에 빠져 허랑방탕한 생활을 하고 있었다.
 “이리 가까이 오너라.”
 손짓 한 번에 발을 닦던 후궁이 나긋하게 허리를 움직이며 다가왔다.
 눈치 빠른 후궁은 차페인의 어깨에 몸을 기대며 뾰족하게 입술을 내밀었다.
 차페인은 초점 없는 눈으로 흐릿하게 웃으며 후궁에게 고개를 기울였다. 순간 그의 눈앞에서 붉은빛이 부나비처럼 번뜩이다 후다닥 사라졌다.
 “이상해……. 요즘… 가끔… 이렇게 어지럽거든……. 왜 그럴까?”
 차페인의 고개가 엉뚱한 쪽으로 떨어지며 후궁의 어깨 위에 걸쳐졌다. 후궁이 부드럽게 차페인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걱정할 것 없어요. 여기 귀한 약이 있잖아요. 자, 한 모금 들이켜세요. 고통은 가시고 즐거움만 남을 거예요.”
 후궁은 살짝 웃으며 어느새 차페인의 입가로 길쭉한 파이프를 가져가고 있었다.
 파이프를 입에 물자 차페인의 한껏 오므라든 눈썹 사이가 조금 부드러워졌다.
 
 
 
 “서서히 증상이 보인다고 합니다.”
 잿빛 옷을 입은 사내가 기분 좋게 소곤거렸지만 로히텐은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그저 찻숟가락으로 차를 저을 뿐이었다.
 잠시 뒤, 그 커다란 체구와 닮은 투박한 손끝이 솜씨 좋게 찻물을 떨어트리고 숟가락을 들어 올렸다.
 로히텐은 꼼꼼하게 숟가락을 살폈다. 살하 특산인 순은으로 만들어져 조금이라도 이상한 것이 들어 있다면 바로 색이 변할 것이다.
 “약을 쓰다니, 정말 셀문다운 비열한 짓거리 아닌가? 이번에는 우리가 그 덕을 좀 보았지만 언제 똑같이 당할지는 모르는 노릇이지.”
 로히텐은 찻숟가락을 내려놓고 차를 한 모금 들이켰다.
 “어쨌든 궁 안에서 시체를 치우게 내버려 두면 안 돼. 죽으려면 나가서 죽어야지, 별궁 침대에서 그대로 숨이 끊어졌다가는 부왕께서 가만히 계실 리가 없어. 가뜩이나 차페인밖에 모르는 분이니, 나라 안에 이름난 치료사, 마법사들은 모조리 불러들여 조사하실 게 뻔하지. 셀문이 무슨 약을 썼건, 반드시 덜미가 잡히고 말 게야.”
 “그 불똥이 여기까지 튀지 말라는 법도 없지요. 우리 쪽도 조심해야 합니다. 여자들 몸에 넣어 둔…….”
 “허, 거참, 답답한 소리를 하는군. 그저 조심하는 걸로는 안 돼. 조심한다고 어디 한순간에 사방으로 튀는 불똥을 막을 수 있을 거 같은가?”
 로히텐이 역정을 내자 잿빛 옷을 입은 사내가 입을 다물었다.
 그러고는 잠시 생각에 빠지는가 싶더니 조심스레 말을 꺼냈다.
 “차페인을 타이타히로 보내는 건 어떻겠습니까?”
 로히텐의 눈썹 한쪽이 슬쩍 위로 올라갔다.
 “흠… 그거 나쁘지 않군. 맞아, 차페인도 슬슬 타이타히에 갈 나이가 되었지.”
 “이미 셀문이 쓴 약이 심장에 미쳤으니 그 상태라면 타이타히에서 한 달을 버티기도 힘들 겁니다. 차페인이 거기서 죽어 버리고 난 뒤에는 아무리 왕이라도 손쓸 도리가 없을 겁니다. 무슨 이유를 대건 중립국인 타이타히에 막무가내로 밀고 들어간다면 살하와 부엔에서 가만히 있을 리 없으니까요. 기껏 해 봐야 차페인의 시체를 돌려받는 게 전부일 테지요.”
 “물론 그렇겠지. 그런데 말이야, 내가 듣기로는 타이타히에서 오는 길에는 굶주린 산짐승들이 꽤 있다더군.”
 로히텐이 슬쩍 말을 흘리자 잿빛 옷을 입은 사내가 대뜸 말을 이었다.
 “그 이야기는 저도 들었습니다. 산 사람도 종종 물려 가 자취도 없이 사라진다고 합니다. 하물며 손가락 하나 까딱 못하는 시체쯤이야 얼마든지 사라질 수 있겠지요.”
 사내의 대답이 꽤 만족스러웠던지 로히텐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그렇게 서둘러 진행을 하게나. 아참, 서두르긴 서두르되 말이야. 셀문한테서 뭘 좀 받아 낼 수 있으면 좋겠어. 모르긴 몰라도 그쪽이 우리보다 열 배 스무 배는 더 애가 타겠지. 잘하면 괜찮은 걸 건질 수도 있을 거야.”
 “그리하겠습니다. 혹시 원하는 것이라도……?”
 “글쎄… 뭐가 좋을까? 참, 그런데 셀문이 말이야, 타이타히에 다녀왔던가?”
 로히텐이 짐짓 고개를 갸웃거리며 다시 찻잔을 들자, 사내는 아무 말 없이 주인에게 고개를 숙여 보이고 자리에서 물러났다.
 문득 그의 뇌리에 아불렘의 세 왕자들 앞에 자주 붙는 수식어들이 떠올랐다.
 잔인한 로히텐, 교활한 셀문, 방탕한 차페인. 틀린 것은 없지만 빠진 것이 있다.
 교활하기로 따지자면 그의 주인도 셀문에 비해 결코 뒤처지지 않았다.
 
 
 
 왕은 로히텐의 말에 무릎을 쳤다.
 차페인을 타이타히에 보낸다니, 지금까지 왜 그 생각을 하지 못했을까?
 그렇지 않아도 막내아들을 바로잡을 방법을 고심하던 참에 더할 나위 없는 해답이 아닌가!
 “선왕후께서 돌아가신 뒤, 막내가 오랫동안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습니다. 큰형으로서 그것이 늘 안쓰러웠습니다. 타이타히에 있는 강철기단이라면 절도 있기로 전 대륙에서도 이름난 곳이고, 아버님과 저를 비롯해 아불렘의 왕자들이 대대로 거쳐 간 곳 아닙니까? 그 아이가 마음이 너무 여려 그런 것이니, 그곳에서 몇 년 수학한다면 훨씬 단단해져 돌아올 것입니다.”
 왕은 로히텐이 한마디씩 할 때마다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단 하나, 걱정되는 것이 있었다.
 “헌데 로히텐, 너도 알다시피 차페인이… 그러니까 좀… 문제가 있지 않느냐? 강철기단은 귀족이든 왕가의 핏줄이든 전혀 배려가 없으니, 그것이 걱정이로구나.”
 곁에 조용히 서 있던 셀문이 한발 앞으로 나섰다.
 “폐하, 제가 차페인과 같이 가면 어떻겠습니까? 때를 놓치긴 했지만 저 역시 아불렘의 왕자, 강철기단을 거치지 않을 수는 없지요. 좀 늦긴 했지만 차페인과 함께라면 그곳 생활이 훨씬 수월하리라 생각합니다. 힘든 훈련이라도 형제가 함께라면 아무래도 낫지 않겠습니까?”
 왕의 얼굴은 대번에 밝아졌다. 모자란 막내를 탓하지 않고 오히려 제가 도움을 주겠다고 하다니, 이 얼마나 인정 넘치는 마음 씀씀이인가? 하지만 그리 생각한 것은 왕뿐이었다.
 특히 형제 운운하는 마지막 대목에서 자리를 함께한 신하들은 속으로 실소를 금치 못했다.
 셀문을 보는 왕의 눈매는 부드러웠다. 너무 계산적이라 꺼리던 둘째 아들이 이렇게 기껍게 느껴진 적은 없었다.
 그동안 둘째 아들을 오해하고 있었던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그리하겠느냐?”
 셀문은 조용히 고개를 숙여 왕에게 복종의 뜻을 비쳤다.
 언뜻 알게 모르게 꿈틀거리는 로히텐의 턱이 눈에 들어왔다.
 ‘웃고 있는 건가? 뜻대로 되어 기쁜가 보군, 형님. 하지만 이쪽이라고 패가 없는 건 아냐. 뭐, 내가 떠난 동안은 한껏 즐겨 보라고. 주인 없는 산에서 왕 노릇 하는 것도 그때뿐일 테니.’
 
 
 
 정작 당사자인 차페인은 친절한 두 형의 배려를 전혀 고마워하지 않았다.
 시종이 타이타히로 떠나게 되었다는 소식을 알려 오자, 바로 꽃병을 내던졌다. 그러고는 일곱 개나 되는 별궁의 문을 모두 직접 걸어 잠갔다.
 모르긴 몰라도 그가 이토록 부리나케 움직인 것은 약에 빠져 산 뒤 처음일 것이다.
 차페인은 그만큼 절박했다. 약에 절어 생시가 꿈인 듯 꿈이 생시인 듯해도 강철기단이 어떤 곳인지만큼은 떠올릴 수 있었다.
 방탕한 세월이 찾아오기 전, 검술은 그가 가장 열심히 익히던 것이었다.
 대륙 최고의 검사가 될 거라며 온종일 검에 매달리고도 모자라, 심심하면 강철기단의 이야기를 들려 달라고 검술 스승을 조르곤 했다.
 하지만 그때는 그때다. 한 줄기 미약하게 남은 이성이 필사적으로 경고를 보냈다. 몸도 마음도 망가질 대로 망가졌다.
 멀쩡한 사람도 견디기 힘든 강철기단에 이런 자신을 굳이 보내려는 이유는 보지 않아도 뻔했다.
 어째서 그토록 순진했던가!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듣고 싶은 것만 듣고 살았다.
 할렘의 여자야 안지 않으면 그만이라 생각했다. 물담배도 몇 번 피우다 말리라 생각했다. 하지만 어느 것 하나 제 뜻대로 되지 않았다.
 여자들 눈에 탐욕만이 있다는 것을, 물담배를 피운 뒤에 끔찍한 공허함이 남는다는 것을 알면서도 지금은 어쩔 수가 없었다.
 누구를 탓할까? 닿는 순간만은 천상의 쾌락을 주는 도구들에 싸여 차페인은 자신의 어리석음을 저주하며 하루하루를 보냈다.
 하지만 때때로 꿈을 꾸곤 했다. 이 모든 것을 잊고 깨끗하게, 순백의 몸으로 다시 태어나는 꿈을.
 저들이 원하는 것은 자신의 죽음. 그 흐릿한 꿈을 꿀 시간마저도 빼앗으려 한다. 하지만 모든 것을 빼앗겨도 그것만큼은 순순히 빼앗길 수 없다.
 말리는 후궁들을 뿌리치고 차페인은 비틀비틀 위태롭게 걸음을 옮겼다.
 하나하나 문을 잠그며 다짐했다. 무슨 일이 있어도 강철기단으로 떠나지 않겠노라고.
 
 
 
 정확히 닷새 뒤, 이른 아침부터 마차 두 대가 앞서거니 뒤서거니 기사들의 호위를 받으며 궁문을 빠져나갔다.
 둘 다 큼지막한 매 문양이 새겨진 왕가의 마차였다.
 그리고 그 안에 며칠 전 굳은 다짐이 무색하게 차페인이 오도카니 앉아 있었다.
 그는 코 아래부터 얼굴 반 이상을 베일로 가린 채 꾸벅꾸벅 태평스럽게 졸고 있었다.
 왕위 계승권을 가진 왕자들에게 베일을 씌우는 것은 아불렘의 오랜 관습이었다. 원칙대로라면 정비의 침실이 아니고는 후궁에도 베일을 쓰고 가야 했다.
 다소 효과가 의심스럽기는 하지만, 후계자의 얼굴을 비밀에 부쳐 암살을 막아 보고자 하는, 왕가의 고심이 묻어나는 전통이었다.
 새벽 햇살이 차페인의 옆얼굴을 비추었다. 반밖에 드러나지 않았지만 유령처럼 음울한 얼굴이었다.
 이마 위에 달라붙은 까마귀 깃처럼 새카만 머리카락과 눈 아래 드리워진 짙은 그림자에 그렇지 않아도 흰 얼굴이 석고처럼 창백해 보였다. 게다가 얼굴 어느 한 곳도 살집이라고는 없어, 뚜렷한 윤곽이 되레 기괴하기만 했다.
 얼굴뿐이 아니다. 웃옷 사이로 살짝 드러난 목덜미나 팔도 앙상하기 짝이 없었다. 유난히 체구가 큰 아불레마의 혈통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만큼 가느다란 몸집이었다.
 한창 자랄 때에 약에 빠져 끼니조차 거르고, 매일 밤낮 여자들에게 정을 쏟았으니 제대로 자랐다면 그게 이상한 일이었다.
 산 귀신이나 다름없는 그 모습에 마주 앉은 시종이 조용히 혀를 찼다.
 그러건 말건 차페인은 단잠에 빠져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한잠 잘 시간에 억지로 깨워 데리고 나왔으니 오죽할까.
 꾀병에 자해 공갈까지 별궁을 떠나지 않겠다며 갖은 수를 다 쓴 차페인을 설득한 것은 둘째 왕자 셀문이었다. 무슨 수를 썼는지는 보지 않아도 뻔했다.
 시종이 달리 시종인가? 눈치 하나로 이 자리까지 왔다. 저리도 소중하게 끌어안고 있는 물담배를 보고도 짐작하지 못하면 그게 오히려 바보다.
 둘째 왕자는 ‘약’을 가져가는 것을 눈감아 주기로 한 것이리라. 함께 가지 않으면 더 이상 약을 주지 않겠노라고 은근슬쩍 협박도 섞었을지 모른다.
 시종은 고개를 돌려 창밖을 바라보았다. 문득 가슴께가 뻐근해 왔다.
 며칠 전 둘째 왕자의 측근이 한밤에 찾아와 엄지손톱만 한 병을 건네주었다. 시종은 단박에 병의 쓰임새를 알아챘다. 그리고 과연, 그가 생각하던 말이 그대로 들려왔다.
 
 -신호를 하면 그 속에 든 걸 차페인 왕자의 담배 종지에 넣어라. 내 말을 따른다면 큰 상이 있을 게다. 허나 만일 허튼짓을 하면…….
 
 뒷이야기가 채 이어지기도 전에 시종은 냉큼 고개를 끄덕였다. 망설일 게 무언가? 차페인을 위해 위험을 무릅쓸 의리도 이유도 없다. 약에 전 차페인은 수년간 곁에서 시중을 든 그의 이름은커녕 얼굴조차 헷갈릴 때가 태반이었다.
 품속에 든 엄지손가락만 한 병이 천 근인 양 무거웠다.
 하지만 그때까지만 해도, 그 병을 그리 일찍 사용하게 될 줄 그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일이 터진 것은 사흘째 밤. 타이타히까지 가는 길에서 유일하게 노숙을 해야 했던 밤이다.
 사실 노숙이라고는 해도 시켐 산 속에서 잠을 청해야 한다는 것뿐, 한 나라의 왕자들을 밤이슬에 젖게 내버려 둘 리는 없다.
 그날 밤 잠자리로 정한 곳은 산지기들이 쓰는 낡은 오두막이었다. 그래도 왕자들을 위해서는 비단에 새털을 누벼 넣은 푹신한 잠자리가 마련되었다.
 잠자리가 준비되자 차페인이 기다렸다는 듯 그대로 그 위에 쓰러졌다.
 여행을 시작하고 며칠 사이 그렇지 않아도 비실거리던 차페인은 눈에 띄게 망가져 갔다.
 곁에 관심을 돌릴 만한 여자들이 없으니 하루 종일 담배 파이프를 입에 달고 살았다.
 위가 망가졌는지 음식은 먹는 족족 토해 내어, 그날은 아예 물밖에는 아무것도 삼키지 못했다.
 기력은 완전히 떨어졌다. 누가 부축해 주지 않으면 제대로 걸음조차 옮기지 못했다.
 그날 밤도 시체처럼 누워 있다 일어나지 못하고 그대로 반들거리는 비단 이불 위에 배 속에 든 것을 모두 쏟아 내고 말았다.
 먹은 것이 없으니 나올 것도 없었지만 냄새는 지독했다. 깔끔하기로 소문난 둘째 왕자 셀문이 당장 자리를 박차고 일어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나는 마차에서 자겠다.”
 
 그리고 다음 날 새벽, 사람들은 싸늘히 식은 왕자의 시체에 경악했다. 가장 먼저 시신을 발견한 사람은 새벽 일찍 마차가 갈 길을 살펴보러 근처를 돌아보던 젊은 기사였다.
 기사가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소식을 전해 오자 호위대장은 분명 셋째 왕자 차페인의 주검이라 여겼다. 하지만 풀숲 위에서 둘째 왕자 셀문의 옷가지를 걸친 싸늘한 주검이 나타났다.
 저 건장한 체구가 차페인일 리가 없다. 호위대장은 둘째 왕자의 시종을 불러 앉혔다.
 “셀문 님이 맞으시냐?”
 아무리 왕가의 핏줄 앞이 아니고는 베일을 벗지 않는다 해도 곁에서 모시는 시종이 주인을 알아보지 못할 리는 없으리라.
 아니나 다를까, 떨리는 손으로 베일을 들추던 시종의 얼굴이 바로 흙빛으로 변했다.
 그때, 확인차 오두막에 보낸 호위기사가 차페인이 무사하다는 소식을 전해 왔다.
 언제 죽어도 이상할 것 없는 이는 살아 있고, 천년만년 살 것 같은 이가 죽었다. 아무도 쉽사리 그 사실을 믿지 못했다.
 호위대장은 시신을 샅샅이 살폈다. 숨을 쉬지 않고 몸이 딱딱하게 굳었다 뿐, 상처는커녕 살아 있다 해도 믿을 만큼 말끔했다.
 둘째 왕자 셀문이 죽어 그나마 다행인 걸까? 아니면 불행인 걸까? 그 와중에 호위대장은 잠깐 가늠해 보았다.
 타이타히까지 저 차페인을 끌고 가는 것이 걱정이긴 했지만, 왕의 편애는 궁 안에 모르는 사람이 없을 만큼 유명했다.
 만약 차페인이 죽었다면 셀문의 죽음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큰 벌을 받을 것이 분명하다.
 호위대장은 크게 한숨을 쉬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쁜 일이긴 했지만 최악은 아니라는 결론을 내리며.
 
 
 
 호위대장은 셀문의 시신을 그가 타고 온 마차에 태워 다시 아불렘으로 돌려보냈다.
 그리고 비실거리는 차페인을 데리고 타이타히로 떠났다.
 형의 죽음에 충격을 받은 건지 어떤 건지, 그날부터 차페인은 간단한 거동조차 힘겨워하며 아예 마차 밖으로는 한 발짝도 나오지 않았다.
 하지만 아무도 마차 안에서 일어나는 일에는 신경 쓰지 않았다.
 차페인은 살아 있기만 하면 되었다. 어쨌건 살아서 타이타히에 도착하기만 하면 그걸로 끝이었다.
 
 
 
 그들이 타이타히에 도착한 것은 그날로부터 엿새 뒤였다. 차페인은 마차 밖으로는 고개도 내밀지 않은 채 시종만 데리고 강철기단에 들어가겠다고 고집을 부렸지만, 호위대장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금방이라도 쓰러질 듯 비실거리는 그 모습을 보지 않아 다행이라 여기며 허겁지겁 말 머리를 돌렸다.
 그리고 행여나 차페인이 어찌 되었다는 소리라도 들을까, 아불렘에 도착할 때까지 쉼 없이 말을 달렸다.
 모두들 아불렘에 돌아가서야 알게 될 것이다. 먼저 떠난 셀문의 시체가 시켐 산의 사나운 들짐승의 밥이 되어 아불렘에 되돌아가지 못했다는 사실을.
 그리고 어쩌면 죽은 자와 산 자 사이에 얽힌 진실은 영영 알지 못할지도 모른다.
 그런들 어떠랴.
 누구 하나 진실에 신경 쓰는 사람은 없다. 둘째 왕자 셀문이 죽은 뒤, 차페인이 단 한 번도 사람들 앞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은 이유도, 짐승에게 물려 갔다던 시체가 시켐 산 어딘가에 고스란히 묻혀 있는 이유도……. 귓가에 속삭여 준다 해도 못 들은 척 고개를 돌리고 말 것이다.
 
 
 
 날마다 새로운 아침입니다
 
 
 첫날, 시켐 산, 해 질 녘
 
 “아이고, 이놈의 산은 어찌 가도 가도 끝이 없누?”
 “한두 번 넘는 산도 아닌데 새삼스레 무슨 엄살을 그리 떠십니까?”
 “한두 번 넘는 게 아니니 더하지. 한 번 넘고 말 거면 무슨 걱정이야? 걸핏하면 넘어가고 넘어와야 하니, 생각하면 한숨만 나오는 거 아니냐.”
 “뭐, 그건 또 그렇습니다.”
 산이 이상하게 소란스럽다 싶으면 언제나 사람 소리가 난다.
 짐승이나 겨우 다닐 만한 험한 산속, 시끌벅적한 말소리가 한바탕 숲을 훑고 지나간 뒤, 검은 옷을 입은 두 남자가 나무 사이를 빠져나왔다.
 둘 다 똑같은 로브에 키도 몸집도 비슷해 누가 누군지 알아보기가 쉽지 않았다.
 앞선 사내가 가까운 나무 등걸에 걸터앉으며 머리에 쓴 후드를 젖혔다. 귀밑머리가 희끗희끗한 늙수그레한 얼굴이 드러났다.
 “바루한, 여기서 땀 좀 식히다 가자꾸나.”
 뒤따르던 사내가 걸음을 멈추고 후드를 벗었다. 이번에는 새파랗게 젊은 얼굴이 드러났다. 아직 앳된 티가 가시지 않았지만 웬만한 여자라면 한 번 뒤돌아볼 만한 단정한 얼굴이었다.
 “역시 나이는 속일 수 없는 모양이지요. 그 모습을 젊은 날 스승님을 사모하던 귀부인들이 보았더라면 한숨깨나 크게 쉬겠습니다.”
 공손한 얼굴과 예의 바른 말투였지만 썩 듣기 좋은 소리는 아니었다. 스승은 대뜸 바닥에서 돌멩이 하나를 집어 던졌다.
 “이 버르장머리 없는 놈. 저런 놈을 제자라고 거둔 내가 바보지, 바보야.”
 나이가 무색하게 재빠른 움직임이었지만 바루한은 살짝 고개만 움직여 돌멩이를 피했다.
 “그럼요. 아직 의탁할 곳도 찾지 못한 제자 얼굴에 흠집을 내려 했으니, 맞는 말씀입니다. 얼굴에 흉이 진 마법사를 어느 영주가 데려가겠습니까?”
 “흥, 실력이나 갖추고 그런 소리를 하면 밉지나 않지. 그래, 얼굴만 멀쩡하면 누가 데려간다 하더냐?”
 단단히 토라졌는지 스승이 하는 말에는 가시가 숭숭 박혀 있었다.
 바루한은 발끈해서 질세라 말을 받았다.
 “사실 말이야 바른말이지, 마법사한테 얼굴 빼면 뭐가 남습니까?”
 말이 미끄러져 나간 순간 그는 아차 하며 재빨리 입을 닫았다.
 간혹 진실이지만 결코 입 밖에 내어서는 안 될 말이 있다.
 스승이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가시가 돋았건 말건 그래도 농지거리를 주고받던 분위기가 순식간에 싸늘하게 가라앉았다. 바루한은 사태를 수습하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아니, 그게 아니라, 마법사한테는 주문이 제일이지요. 그깟 얼굴이 무슨 소용입니까. 스승님, 정 기분이 풀리지 않으시면 이거라도 한 번 더 던지시지요.”
 바루한은 억지로 웃음을 지으며 바닥에서 조금 큼지막한 돌멩이를 주워 스승에게 내밀었다. 초조하게 상대의 반응을 기다리는데 뜻밖에도 스승은 빙긋 웃으며 돌멩이를 받아 들었다.
 “이걸 던지라고? 글쎄다.”
 그렇게 화를 푸는가 했던 스승이 소매를 걷어붙이며 품 안에서 작은 막대를 꺼냈다. 곧 스승의 입에서 중얼중얼 주문 소리가 들려오자 바루한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렸다.
 “돌멩이 크기가 마음에 안 드시면 말씀을 하시지요. 기운을 허비해 가며 주문까지 쓰실 것 뭐 있습니까? 더 큰 걸 바로 찾아 드리겠습니다.”
 바닥을 살피며 사내는 작게 한숨을 쉬었다. 반쯤은 스스로 판 무덤이었다. 스승의 성미를 알면서도 긁어 대는 자신의 나쁜 버릇이 문제였다. 잠시 잠깐 사이 스승의 손에 들린 돌멩이가 벌써 배도 넘게 부풀어 올랐다.
 ‘젠장, 하나밖에 없는 제자를 병신으로 만들 작정인가?’
 다급하게 주위를 둘러보던 바루한의 눈에 반쯤 땅에 묻힌 제법 커다란 돌멩이가 잡혔다. 바루한은 달려가 돌멩이를 잡아 뺐다.
 쑥, 돌멩이가 밖으로 빠진 순간 바루한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스승님!”
 “…….”
 “스승님! 지금 장난치고 있을 때가 아니에요.”
 스승의 이마에 핏줄이 섰다.
 “뭐? 장난? 네 눈에는 이게 장난으로 보이냐? 오냐, 장난 맛 한번 봐라.”
 “시체가 나왔다고요!”
 막 손에 든 돌멩이를 던지려던 스승의 움직임이 우뚝 멎었다.
 원래 크기의 다섯 배도 넘는 돌멩이가 바루한과 스승 사이에 둥실 뜬 채 멈춰 있었다.
 바루한의 이마에 땀이 맺혔다. 저걸 정통으로 맞았다가는 밝은 곳에서 마법사 노릇을 한다는 생각은 그대로 접어야 했으리라. 그 표정을 본 스승의 입가가 묘하게 말려 올라갔다.
 “허튼소리를 하는 거라면 여기서 곱절은 더 커진 돌멩이에 얻어맞을 것이야.”
 바루한의 입술이 삐죽 튀어나왔다.
 “거기서 곱절이면 그게 돌멩이예요? 바위지. 하여튼 어서 좀 와 보세요. 스승님이 좋아하실 만한 게 있다고요.”
 순간 공중에 떠 있던 돌멩이가 순식간에 제 크기로 돌아오는 듯싶더니 바닥으로 떨어졌다. 스승은 막대를 품에 넣고 소매를 내렸다.
 “내가 언제부터 시체를 좋아했다고 그러냐? 검은 마법을 쓸 일도 없는데.”
 스승이 다가오자 사내는 쓴웃음을 지으며 손에 쥔 것을 내밀었다. 한눈에도 오래되어 보이는 유리 세공품이었다.
 “멤브릴어예요.”
 바루한의 말이 떨어지자마자 스승은 다짜고짜 사내의 손에 든 것을 채어 갔다.
 “어디 보자… 허어, 정말이로구나. 멤브릴어야.”
 바루한의 눈에 장난기 섞인 호기심이 떠올랐다.
 “뭐라고 적혀 있나요?”
 스승의 멤브릴어 실력은 문장을 해석하기에는 아직 멀었다.
 그것을 알면서 부러 던진 물음이었다. 스승의 한쪽 눈썹이 슬쩍 올라갔다.
 “글쎄다, 마법사치고는 무척이나 악필이었던 모양이야. 무슨 소리인지 도통 알 수가 없구나.”
 스승의 곤혹스러운 목소리에 바루한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고대 주문에나 쓰던 멤브릴어를 제대로 해독할 수 있는 사람은 살아 있는 자들 가운데 아무도 없었지만, 그나마 몇 단어라도 읽을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 바로 스승이었다.
 문장을 해석하지는 못해도 아는 글자 한두 개로 온갖 거드름을 다 피울 스승인데, 한 글자도 못 알아보겠다고 하다니…….
 하지만 고대어를 찾은 것만으로 한껏 흥분한 스승에게는 읽을 수 있는지 없는지는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았다.
 “어쨌든 차차 알게 되겠지. 좋은 것을 찾았구나. 어디 더 떨어진 것은 없는지 찾아보자꾸나.”
 스승과 제자는 나머지 조각을 찾기 위해 근처를 뒤지기 시작했다.
 이리저리 흙을 파헤치자, 헝겊 조각 하나 걸치지 않은 발가벗은 시체가 점점 모습을 드러냈다. 하지만 둘 다 시체는 본척만척 멤브릴어가 적힌 조각을 찾기에 바빴다.
 일은 생각보다 어렵지 않았다. 파묻으면서 깨진 건지 근처의 흙을 잠시 뒤적이자 금방 조각을 모두 찾았다. 반은 유리고, 반은 은이다.
 스승은 아무 말 없이 주문을 외워 가며 천천히 조각들을 맞추었다.
 “물담배 같은데요?”
 군데군데 금이 갔지만 은세공이 멋들어진 물담배였다.
 스승은 등에서 후드를 떼어 내, 물담배를 조심스레 감아 가방 안에 넣었다.
 좀처럼 남들에게 얼굴을 드러내기 싫어하는 스승이 망설이지도 않고 후드를 떼어 내다니, 물담배에 새겨진 것이 멤브릴어가 아니라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자, 그럼 이건 어쩐다?”
 그제야 둘의 관심이 흙더미 속에 삐죽이 튀어나온 볼썽사나운 시체로 옮아갔다.
 유령처럼 음울한 얼굴이었다.
 이마 위에 달라붙은 까마귀 깃처럼 새카만 머리카락과 감은 눈 아래 드리워진 짙은 그림자가 그렇지 않아도 흰 얼굴을 석고처럼 창백하게 만들었다.
 게다가 얼굴이고 몸이고 어느 한 곳도 살집이라고는 없어, 뚜렷한 윤곽이 되레 기괴하게 보였다.
 하지만 헝겊 조각 하나 걸치지 못한 채 벌거벗은 시체는, 열여섯, 열일곱? 아직 어린 티도 가시지 않아 애처로웠다.
 “어쩌긴요. 고이 묻어 줘야죠. 모르긴 몰라도 물담배 주인인 것 같은데, 물건을 슬쩍하는 대신 장사라도 제대로 지내 줘야죠. 그거 스승님 특기잖아요. 타이타히의 장사란 장사, 제사란 제사는 다 지내는 이름 높은…….”
 “그쯤 해 두지 그러냐? 넌 쓸데없는 말이 너무 많아. 뭐, 어쨌든 틀린 말은 아니야. 귀한 물건을 얻었으니 합당한 보답을 해야지.”
 바루한은 ‘슬쩍한’ 것을 ‘얻은’ 것으로 은근슬쩍 바꿔 버린 스승을 물끄러미 바라보았지만, 스승은 모르는 척 근엄한 표정을 지었다.
 “불쌍하게도 이리 앙상하니, 그 삶이 얼마나 고달팠을꼬.”
 “그런 것치고는 피부가 상당히 고운데요. 아니, 그냥 고운 정도가 아니라, 저 손마디 좀 보세요. 모르긴 몰라도 살아 있을 때 할의 경전보다 무거운 건 들어 본 적도 없을 걸요?”
 바루한의 예리한 관찰력에 스승은 칭찬은커녕 짜증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거참, 꼬치꼬치 따지기는. 빨리 장사 지내야 마을로 내려갈 것 아니냐. 시켐 산에서 밤을 보내고 싶은 거냐? 넌 젊어서 괜찮을지 모르겠지만 이 몸은 나이가 들어 그런지 노숙은 하기 싫구나.”
 마법사란 자고로 밤하늘의 별을 보며 영감을 얻어야 한다며, 멀쩡한 잠자리를 놓아두고 노숙을 하자던 스승이 아닌가?
 입술이 씰룩거렸지만 바루한은 애써 입을 닫았다.
 스무 날이 넘는 긴긴 여행 끝에 노숙이라니, 싫은 건 그도 마찬가지였다.
 바루한은 묵묵히 스승을 도와 시체에 묻은 흙을 대충 털고 아무렇게나 구겨진 팔다리를 바로 폈다.
 “그런데 이상하구나.”
 스승이 손을 멈추자, 이번에는 제 차례라는 듯 바루한이 냉큼 말을 받았다.
 “노숙 안 하신다면서요?”
 보통 때라면 뭐가 날아오고도 남았다. 그런데 뜻밖에도 스승은 심각한 얼굴로 시체를 살피기에 바빴다.
 “죽은 것 같지가 않아.”
 “네?”
 눈을 휘둥그레 뜨고 바라보는 바루한에게 스승은 드물게도 차근차근 설명을 했다.
 “주변에 덮어 놓은 흙을 봐도 그렇고… 죽은 지 만 하루도 안 됐어. 그런데 이렇게 몸이 말랑하다니 이상하지 않으냐?”
 “하지만 숨도 안 쉬고 심장도 안 뛰는데 그게 송장이지, 살아 있다고…….”
 “숨 안 쉬고, 심장 안 뛰는 거 네가 확인해 봤냐?”
 “아니, 그건 아니지만, 몸이 싸늘하게 식은 데다 옷에 흙물이 저만치 들 정도면…….”
 “아니면 잠자코 있어. 내가 확인할 테니까.”
 이름값도 못 하고 언제나 헤실헤실하는 스승이었지만 허튼소리를 하는 법은 없었다.
 바루한의 표정이 굳었다.
 죽지 않고 살아 있다고 꼭 좋다는 법은 없다. 특히나 귀한 몸인 경우에는 더더욱.
 누더기라도 걸치고 있었다면 ‘시장할 테니 요기나 하시게.’ 하고 은돈 몇 닢 쥐여 주면 그만이지만, 어딘가 유력한 가문의 자제라면 재수 없이 휘말려 돈 몇 푼이 아니라 목숨을 내놓아야 할지도 몰랐다. 바루한은 슬며시 스승의 옷깃을 끌어당겼다.
 “그냥 가시는 게 어떨는지요?”
 한껏 조심스레 말을 꺼냈지만 돌아보는 스승의 얼굴은 험악했다.
 “산 사람을 두고 가자는 소리냐? 이대로라면 오늘 밤 그대로 짐승 밥이 되고 말 게야.”
 바루한의 이맛살이 절로 오므라들었다.
 마법사치고는 이상하게 ‘윤리’에 집착하는 스승은 뒤에 어떤 일을 감당해야 한다 해도 이대로 떠나지는 않을 것이다. 무엇보다도 애초에 뒷일을 생각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럴 리가요. 살아 있는데 그냥 두고 간다니요? 서둘러 마을로 내려가 치료해야지요.”
 바루한이 재빨리 말을 바꾸자 그제야 스승은 만족스러운 얼굴을 했다.
 “그래, 그래야지. 그런데 이를 어쩐다… 나는 짐이 있으니 하는 수 없이 네가 저자를 좀 챙겨야겠구나.”
 스승은 툭툭 바루한의 어깨를 두드리며 앞서 걸어 나갔다. 뒤에 남은 바루한은 도저히 살아 있는 걸로는 보이지 않는 늘어진 몸뚱이와 한 손에 물담배를 싼 모자를 달랑거리며 발걸음도 가볍게 걸어가는 스승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뭐 하는 게냐! 서두르자면서?”
 바루한은 깊고 깊은 한숨을 쉬었다. 입고 있던 로브를 벗어 바닥에 널브러진 벌거벗은 몸뚱이를 아무렇게나 감싸 들쳐 업었다.
 정신을 잃고 늘어져 있어 무거울 것을 각오했다. 하지만 몸뚱이는 뜻밖에도 가벼웠다.
 얼마나 깡말랐던지 로브로 감싸고도 두드러진 뼈가 닿아 아플 정도였다.
 그나마 가벼운 것이 다행이라면 다행. 가는 길이 아니라 돌아오는 길에 발견했으니 그것 또한 다행이라면 다행.
 바루한은 긍정적으로 생각하기로 했다.
 서두른다고 서둘렀지만 밤이 이슥해서야 스승과 바루한은 원에 도착했다.
 바루한은 초조한 듯 곧장 자신의 거처로 가려는 스승을 억지로 잡아끌어 제 방으로 데려갔다. 스승의 거처는 너무 눈에 띄는 장소였다.
 방문을 닫자마자 스승은 품 안에서 야무의 피가 든 병을 꺼내, 재빨리 바닥에 진陣을 그려 넣기 시작했다. 둥근 원을 그리고, 그 안에 또 원을 그려 테두리를 만들었다.
 그리고 테두리 안에 글자를 써넣었다.
 그동안 바루한은 등에 걸머진 자를 내려놓았다. 숨이 끊어졌기를 내심 바랐지만 인간의 생명이란 뜻밖에도 질기다.
 그는 아직도 위태위태한 숨을 이어 가고 있었다.
 스승의 눈짓에 바루한은 벽장에서 호마포를 꺼냈다. 호마는 주위의 기운을 빨아들여 좋은 기운은 품어 내고 나쁜 기운은 모아 두는 귀한 풀이었다.
 이번 겨우내 지은 호마포가 겨우 다섯 장, 그 가운데 한 장을 이렇게 어이없이 날리다니 입맛이 썼다. 하지만 어쩌랴, 멤브릴어 세공품에 치른 값치고는 그래도 싸다고 스스로 위로하는 수밖에.
 아무리 그래도 유령 껍데기처럼 늘어진 자를, 그것도 벌거벗은 사내 녀석을 끌어안는 것이 즐거울 리 없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꼼꼼하게 호마포로 감아야 했으니, 바루한의 얼굴은 내내 부루퉁하게 부어 있었다.
 어찌어찌 겨우 일이 끝나 진 가운데 눕히자 안도의 한숨이 절로 나왔다.
 스승은 마지막 문을 그려 마법진을 닫고는 이마에 맺힌 땀을 닦았다.
 “생기가 너무 희미해 자리를 털고 일어나려면 며칠은 이 안에 있어야 하니, 그동안 잘 지켜보거라, 바루한.”
 며칠? 솔직히 아무리 마법진이라 해도 저 시체나 다름없는 자가 살아나리라고는 믿기지 않았다. 그런 가망 없는 일에 마법진을 며칠이나 놓아두다니!
 “그리 오래! 너무 위험하지 않습니까?”
 “그러니 네게 지켜보라는 것 아니냐? 먼 길을 걸어와 피곤하니 언쟁은 하고 싶지 않다. 어쩌겠느냐, 다 이런 스승을 만난 탓이니 네가 참는 수밖에.”
 스승은 뻔뻔스레 웃어 보이고는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먼 길을 걸어온 것이 어디 스승뿐인가? 세상 참 불공평했다. 하나 말 그대로 그런 스승을 만난 탓이니 어쩔 도리가 없다.
 바루한은 방 가운데를 지켜보며 뻑뻑한 눈을 몇 번이고 비볐다.
 자신이 지켜보고 있는 자가 얼마나 골칫거리가 될 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한 채.
 
 
 잠에서 깨어나는 것은 언제나 그렇다.
 새벽 동이 트듯 희미하게 밝아 오는 것이 아니라, 촛불이 켜지듯 깜박, 순간에 경계를 넘는다.
 그는 천천히 눈을 뜨고 부스스 몸을 일으켰다.
 어두컴컴한 방, 낯선 천장, 여기가 어딜까? 잘 기억이 나지 않았다.
 눈을 비비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니, 일어나려 했다. 하지만 잿빛 천이 칭칭 몸에 엉겨 있어 제대로 움직일 수가 없었다.
 몇 번을 버둥거린 뒤, 겨우 쪼그리고 앉아 주위를 살폈다.
 조금 멀찍이, 누군가 한잠이 들어 있다.
 커다란 몸집에 굵직한 얼굴선으로 보아 아마도 남자. 그는 남자의 얼굴을 꼼꼼히 뜯어보았다. 부슬부슬 흐트러진 갈색 머리에, 뚜렷하게 솟은 코. 역시나 모르는 얼굴이다.
 짙은 위화감이 들었다. 모르는 곳에 모르는 사람… 아니, 그 때문이 아니다. 당연히 떠올라야 할 것들이 생각나지 않았다.
 ‘나는 왜 여기 있는 걸까? 나는, 나는… 나는……?’
 자신에 대한 기억이 하나도 없었다.
 혹시 무슨 실마리라도 없나 싶어 이리저리 몸을 살폈지만, 아무것도 찾지 못했다.
 반지나 귀걸이 같은 흔한 장신구 한 조각 걸치지 않은 발가벗은 몸에 잿빛 천.
 이 모습을 평범하다고 할 수 있을까? 이상하다 싶은 자신의 차림새만 마음에 걸릴 뿐이었다.
 방 안도 마찬가지다.
 달랑 침대에 의자, 너절하게 벽에 걸린 평범한 옷가지, 바깥으로 난 작은 창이 전부였다.
 이리저리 둘러본들, 방 주인이 어떤 자인지, 여기가 어디인지 짐작도 하지 못했다. 하는 수 없다. 그는 자고 있는 남자를 깨웠다.
 “이봐! 이봐!”
 그 소리에 남자가 화들짝 놀라며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고는 허둥지둥 주위를 둘러보다 자신에게 눈을 돌렸다.
 남자는 얼굴에 당황과 모호함, 놀람이 차례로 스쳐 지나갔다. 하지만 어느 것도 아는 사람을 보는 표정이 아니었다.
 “어떻게 벌써……!”
 남자는 그의 물음보다 딴 데 정신이 팔려 있었다. 턱을 쓰다듬으며 바닥을 살피는데, 눈길이 절로 같은 곳을 향했다.
 그리고 그제야 자신이 쭈그려 앉은 바닥에 둥그런 원이 그려져 있다는 것을 알았다.
 하지만 그는 그것이 마법진이라는 것도, 마법진이 마신魔神을 부르는 금지된 술법이라는 것도, 위험을 각오하고 그 금지된 술법을 쓴 덕분에 시체나 다름없던 자신이 하룻밤 만에 깨어났다는 것도 모르고 있었다.
 그저 소박하다 못해 궁핍한 방에 어울리지 않게 화려한 바닥 장식이라는 감상이 전부였다.
 아니, 지금 바닥이나 감상하고 있을 때가 아니다. 딱히 불안해 가슴이 조인다거나 안절부절못하고 있지는 않았지만, 기억이 없다는 것은 큰일이었다.
 남자는 자신을 잘 모르는 눈치였지만, 그래도 한 방에서 자고 있었으니 아예 관계가 없지는 않을 것이다. 그는 고개 숙인 남자의 뒤통수에다 대고 다시 물었다.
 “나는 누구지? 정신을 차리고 보니 아무것도 기억이 나지 않아. 내가 누군지, 여기가 어딘지, 당신하고 뭘 하고 있었는지. 다른 건 그렇다 쳐도 내가 누구인지 생각나지 않는 건 정말 이상한 일 아닌가? 안 그래?”
 남자가 고개를 들고 멀뚱멀뚱 그를 쳐다보았다. 왜 대답을 하지 않는 걸까? 상대가 말이 없자, 그는 다시 입을 열었다.
 “이름은 뭐고, 나이는 몇 살이며 어느 나라 사람일까? 무얼 하며 살고 있었고, 어떤 신분의 사람일까? 부모 형제는 있는지, 혼인은 했는지, 혹시 자식도 있는 건 아닐까?”
 그는 남자가 이해할 수 있도록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은 말투로 담담하게 말을 풀어 놓았다.
 퍼즐을 맞추듯 자신에 대한 정보를 하나하나 캐묻자니, 마치 남의 일을 이야기하는 듯한 기분이었다.
 하긴, 무슨 소리를 듣건 전혀 기억에 없는 과거를 자신의 일이라 선뜻 받아들이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계속해서 물음을 이어 가자 남자가 손사래를 했다.
 “잠깐잠깐, 그러니까 네가 누구인지 모르겠다고? 정말 전혀 기억이 안 나?”
 잡아먹을 듯 다그치는 기세에 그는 흠칫 뒤로 물러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엉겁결에 뒤로 물러선 순간, 헛것을 본 걸까? 머리 위로 언뜻 커다랗고 푸르죽죽한 것이 지나간 것 같은데… 그는 놀라 고개를 들어 살폈다.
 하지만 얼룩진 천장만 보일 뿐 머리 위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그가 본의 아니게 딴청을 부리는 동안, 대답을 기다리는 남자의 얼굴에 짜증스러운 기색이 스쳤다. 기다리다 못한 남자가 마침내 입을 여는데, 마침 바깥에서 인기척이 났다.
 “바루한, 일어났느냐?”
 늙수그레하지만 기민하게 들리는 목소리.
 그는 천장에서 눈을 떼어 소리가 들린 쪽을 바라보았다.
 남자는 어느새 자리에서 일어나 문을 열고 있었다.
 “예, 스승님, 어서 들어오시지요.”
 “방 안이 어수선한 것이, 무슨 일이라도 있는 게냐?”
 노인이 묻자, 남자는 이쪽을 잠깐 쳐다보고는 다시 고개를 돌렸다.
 “정신을 차렸습니다. 그런데 어찌 된 일인지 기억을 모두 잃었습니다.”
 사람을 옆에 놓고 수군거리는 품이 썩 마음에 들지는 않았지만, 감추려는 뜻은 없는지 들리지 않도록 속닥거리는 것은 아니라 그나마 나았다.
 남자와 몇 마디 말을 주고받은 노인이 그에게로 다가왔다. 무언가 알고 있는 걸까?
 내심 기대하며 노인을 기다리는데, 그에게 다가온다 싶던 노인은 바닥에 그려진 둥근 무늬 앞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그리고 그대로 쭈그리고 앉아 고개를 숙인 채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놀랍군!”
 노인이 중얼거리자 남자가 그 곁에 가서 앉았다.
 “마법진의 빈자리가 새카맣게 변해, 그렇지 않아도 이상하다 여겼습니다.”
 “쯧쯧, 눈을 뜨고도 못 보는 게냐? 그냥 새카만 게 아니야.”
 “네?”
 “글씨인지 그림인지 몰라도, 의도를 가진 선이야. 워낙에 빽빽해서 그렇게 보이는 것뿐.”
 “하지만 어떻게……?”
 “저기 흑연 통이 나뒹구는 걸 보니, 누군가 네 흑연으로 마법진에 그려 넣었겠지.”
 남자가 눈살을 찌푸리며 성큼 손을 뻗어 왔다.
 “어디 손 좀 보자! 스승께서 애써 만든 마법진을 엉망으로 만들어 놓다니!”
 하지만 노인이 당장 남자의 손을 끌어 내리고 감싸듯 앞으로 팔을 뻗었다.
 “건드리지 마. 바루한, 가만히 있어라.”
 나지막한, 그러나 다급한 목소리였다. 왜 저렇게 질색을 하는 걸까? 그는 노인의 태도를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저 가만히 앉아 있었을 뿐인데, 뭘 어쨌다고 그러는가? 혹시 자신에게 다른 사람한테 옮는 병이라도 있는 건가?
 노인의 행동이 이해되지 않는 것은 그만이 아닌 듯, 남자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스승님, 물어보실 것 뭐 있습니까? 이 방에 저와 저 녀석 말고 또 누가 더 있었습니까? 손을 보면 분명히 흑연이 묻었을 겁니다.”
 노인이 거세게 따져 드는 남자를 똑바로 쳐다보았다.
 “너는 대체 보는 수련을 어찌한 게냐. 깊은 바다 속 모래알, 어두운 밤 떨어지는 깃털을 보기는커녕, 눈앞에 뻔히 드러난 것조차 보지 못하다니. 부끄러운 줄 알고 입 닫고 지켜보기나 해라. 한마디라도 벙긋할 때에는 보는 수련을 처음부터 다시 해야 할 게야!”
 그리 크지 않은 목소리였지만 남자의 얼굴은 대번에 달아올랐다.
 갑자기 분위기가 서늘하게 가라앉았다.
 마법진이라던가? 그저 바닥 장식인 줄로만 알았던 둥근 무늬가 둘에게는 보통 중요한 것이 아닌 모양이었다.
 하지만 급하기로 따지면 어디 자신만 할까? 자고 일어나니 기억이 없다는 게 어디 보통 일인가?
 그는 엉킨 호마포를 끌고 뒤뚱뒤뚱 다가와 노인을 마주 보고 앉았다.
 “혹시 내가 누구인지 아십니까?”
 그제야 노인의 눈길이 그에게로 향하는가 싶더니, 마법진을 한번 내려다보고 다시 그를 향했다.
 하지만 노인의 입에서는 바라던 대답이 아니라 엉뚱한 물음이 대신 나왔다.
 “자네가 그린 겐가? 사실대로 말한다 해도 아무 일 없을 것이야. 나, 압둘 칼리바의 정원을 이끄는 자, 고렌 하이마의 이름을 걸고 맹세하겠네.”
 노인이 읊어 대는 이름에 남자의 표정이 눈에 띄게 굳었다.
 어째서? 내심 고개를 갸웃거리던 그는 부드럽게 웃고 있는 노인의 턱이 유독 딱딱하게 굳은 것을 알았다. 아무래도 이름을 걸고 맹세한다는 것이 보통 일이 아닌 모양이었다.
 하지만 모든 일에는 순서가 있는 법이다.
 “제가 먼저 물었으니, 먼저 대답해 주십시오. 제 대답은 그다음입니다.”
 노인의 얼굴에 얼핏 난감한 표정이 스쳤다. 그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노인도 모른다면 또 누구에게 물어야 하는 걸까? 하지만 다행히 잠시 고민하는 듯하던 노인이 마음을 정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좋네. 그렇게 하세.”
 노인의 말이 떨어지자마자 그는 한마디라도 놓칠세라 바짝 노인에게 다가섰다. 곁에 앉은 남자의 표정이 미묘하게 바뀌고 있었지만, 거기에 눈길을 줄 여유가 없었다.
 하지만 남자의 표정을 보았다 한들 그가 어찌 알겠는가! 압둘 칼리바의 정원을 이끄는 자, 마법사 고렌 하이마의 숨겨진 특기를.
 마법만큼이나 초절 기교를 자랑하는, 아주 가까운 자들 사이에서만 알려진 숨은 특기, 노인의 딱딱한 윤리관을 기묘하게 비껴 나간 그 기술이…….
 “자네 이름은 치포…라고 한다네.”
 바로 거, 짓, 말이라는 사실을.
 “치포……?”
 “부모도 없이 떠돌아다니는 고아로 열다섯인지 열여섯인지, 아니면 열네 살인지, 나이도 잘 모른다고 했지. 이름도 철이 든 뒤 거리에서 만난 자가 지어 주었다고 하고. 사실 어제 시켐 산에서 처음 만난 사이라 자세한 이야기는 별로 듣지 못했어. 하지만 자네도 자신에 대해 썩 많이 아는 것 같지는 않았다네. 워낙 어려서 고아가 되어 부모나 형제에 대해서도 기억을 잘 못하는 것 같았고.”
 하늘도 믿고, 땅도 속을 능청스러운 거, 짓, 말.
 “그런데 전 왜 아무것도 기억을 못하는 겁니까? 또 왜 저 희끄무레한 천을 감고 여기 누워 있었고?”
 “함께 앞서거니 뒤서거니 산을 넘는데, 먼저 가던 자네가 갑자기 푹 고꾸라지는 게야. 놀라 달려가 보니 손에 독버섯을 들고 있더군. 배가 고프면 고프다고 말만 했어도 먹을 것을 나눠 주었을 텐데 안타까운 일이었지. 사람이 죽어 가는 걸 그대로 볼 수가 있나. 쓰러진 자네를 우리가 사는 곳으로 데려왔지. 기억이 나지 않는 건 아마 그 독버섯의 부작용 때문이 아닐까 싶어. 그리고 자네가 걸치고 있는 천은 호마포라고 생기를 북돋아 주는 귀한 천인데, 빨리 나으라고 감아 놓았어. 웬만한 치료사들이 약을 쓰는 것보다 훨씬 효과가 좋을 게야. 그리고…….”
 물처럼 구름처럼, 거침없이 끊임없이 도도히 흐르는 거, 짓, 말.
 남자, 바루한은 설레설레 고개를 저었다.
 ‘나중에 기억이 돌아오면 어쩌려고 저러는 건지…….’
 노인, 고렌은 멋대로 치포라고 이름 붙인 그를 보며 온화하게 웃어 보였다.
 “이제 내 물음에 대답해 주겠나?”
 그, 조금 전부터 치포가 되고 만 치포는 조금 멍한 표정으로 손을 내밀었다.
 “검은 선이 무엇인지는 모르지만, 제가 그린 게 아닙니다.”
 깨끗한 손에는 손톱 밑이고 손끝이고 흑연 자국은 없었다. 고렌은 눈에 띄게 실망했다. 실망은 순식간에 분노로 변해 고스란히 바루한에게 쏟아졌다.
 “바루한, 이 마법진을 그대로 베껴 놓아라. 스승의 말을 어기고 잠이 든 벌이야.”
 “잠이 들었다니요! 저는…….”
 “입가에 침이나 닦고 말하려무나. 내 일러두건대 며칠이 걸려 그리더라도 한 치도 어긋나서는 안 된다. 또 내 허락이 있을 때까지 바닥에 그린 마법진이 지워지지 않도록 각별히 조심하고.”
 고렌은 착 가라앉은 목소리로 바루한에게 일침을 놓았다.
 하지만 반대로, 치포를 향한 목소리는 부드럽기만 했다.
 “자네는 오늘 하루 더 호마포를 두르고 마법진 안에 있는 게 좋겠어. 아직도 안색이 좋지 않아. 그럼 난 나가 볼 테니 푹 쉬고, 저녁에 다시 이야기를 좀 더 하세.”
 
 
 그날 내내 치포는 우두커니 마법진 안에 앉아 있었다. 호마포 때문에 움직이기도 어려웠거니와, 아무리 되뇌어도 낯설기만 한 과거를 곱씹느라 딴 데 관심을 기울일 여유가 없었다.
 그래 보았자 이름과 고아라는 하잘것없는 처지가 전부라, 기억이 없는 것이나 별반 다를 것은 없었지만 아예 아무것도 모르는 것보다는 나았다. 그것이 실마리가 되어 떠오르는 게 있을지도 몰랐다.
 하루 온종일 머릿속을 뒤졌다. 하지만 떠오르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해가 지고 한밤이 되어서야, 서둘러 찾는다고 될 일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차차 기억이 떠오르기를 기다리는 수밖에. 그래도 불릴 이름이 있다는 것만 해도 어디인가!
 치포는 크게 한숨을 쉬고는 주욱 기지개를 폈다. 그제야 방 안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맞은편의 바루한은 눈썹 사이에 짙은 주름을 만들고 종이에 둥그런 모양을 그리고 있었다.
 그 역시 하루 종일 그러고 있었던 걸까? 곁에 구겨진 종이가 수북했다.
 그런데 너무 오래 같은 자세로 앉아 있었던 걸까? 갑자기 발이 저려 와 몸을 가눌 수가 없었다.
 쿵!
 한껏 뒤로 휘던 치포의 몸이 그대로 넘어갔다.
 그때 번뜩, 무언가를 보았다. 뒤로 넘어가며 저도 모르게 눈을 감기 직전, 붉고 커다란 것, 반들거리는 노랑.
 직감적으로 아침에 본 것과 같은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치포는 아침에 한 것처럼 쉽사리 눈을 뜰 수가 없었다.
 봐서는 안 될 것을 본 것만 같은 느낌이 강하게 들었다.
 놀란 듯 서둘러 다가오는 바루한의 발소리가 들렸다. 치포는 조금 안심이 되어 슬며시 눈을 떴다. 그러나 천장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바루한이 불쑥, 고개를 들이밀었다.
 “야, 너 괜찮아?”
 눈을 뜨고도 꼼짝 않고 누워 있자, 바루한이 휘휘, 치포의 눈앞에 손을 저었다. 치포는 비척비척 몸을 일으켰다.
 발에 쥐가 났다고 하기도 무엇하고, 뭔지 모르지만 무서운 걸 보았다고 하기는 더더욱 무엇해, 그저 머쓱하게 웃어 보였다.
 “이제 괜찮아. 잠깐 좀 어지러워서.”
 어떻게 된 걸까? 하루에 두 번씩이나 헛것을 보다니? 아니, 정말 헛것인 걸까? 생김새는 잘 떠오르지 않았지만 분명 거대한 형태를 보았다. 형체 없는 붉은 덩어리에 노란빛 두 개……?
 오싹오싹, 온몸을 휘감아 오는 기분 나쁜 느낌이 좀처럼 가시지를 않았다.
 기분 나쁜? 아니 좀 다르다. 뭐랄까? 콕 집어 표현하기는 어렵지만, 이 세상 것 같지 않은 이질적인 느낌…….
 치포의 몸이 절로 부르르 떨려 왔다.
 “왜? 추워? 약해 빠져 가지고는.”
 바루한이 끌끌 혀를 차며 벽장에서 옷가지를 꺼내 왔다.
 “호마포는 벌써 시커멓게 변했으니 효과도 별로 없을 거야. 좀 크겠지만, 이거라도 입어.”
 그러고는 마구 엉킨 호마포를 솜씨 좋게 풀고 옷을 걸쳐 주었다.
 “참, 별것도 아닌 걸로 사람을 그렇게 놀라게 하다니.”
 바루한은 투덜대며 원래 자리로 돌아갔다.
 그러고도 한참이 지나서야 치포는 겨우 마음이 가라앉았다.
 깊이 생각할 것도 없다. 잘못 본 거다.
 그런 게 세상에 있을 리 없다. 몸이 너무 약해져서 그런 것이리라. 아니면, 바루한이 저렇게 태연할 리 있겠는가?
 바루한은 펜을 손에 쥐고 마법진을 살피기에 딴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거참, 눈이 빠지게 복잡하네. 스승님이 돌아오기 전에 끝내야 하는데.”
 그러고 보니 종이 위의 마법진은 아직 반도 채 못 그렸다.
 물끄러미 종이와 바닥의 마법진을 번갈아 보던 치포가 고개를 모로 기울였다.
 “하나 보고, 하나 그리고, 그러지 말고 한꺼번에 주욱 그리면 더 빠를 텐데.”
 바루한이 홱, 눈을 들었다.
 치포의 시선이 조금만 높았어도 분명히 볼 수 있었으리라. 바루한의 이마에 솟은 혈관을.
 그렇지 않아도 하루 종일 그려도 끝이 보이지 않는 마법진을 그려 넣으며 모두 치포 탓이라고 이를 갈고 또 갈던 바루한이었다.
 그래도 마음 좋게 옷까지 챙겨 주었건만, 되레 시비를 걸다니!
 바루한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말도 안 되는 소리! 이 복잡한 걸 어떻게 한꺼번에 그려!”
 “그냥 똑같이 그리면 되잖아? 그게 어려워?”
 줄곧 곁에 있었던 주제에 무슨 소리인가! 그게 쉬울 것 같으면 옆에 쌓아 놓은 종이 뭉치는 다 뭐고, 하루 종일 마법진을 그린답시고 죽치고 앉아 있을 건 또 뭔가?
 속이 뒤집힐 대로 뒤집어진 바루한은 치포를 노려보며 싸늘하게 말했다.
 “그렇게 쉬울 것 같으면 직접 한번 그려 보지그래?”
 치포는 멀뚱멀뚱 바루한을 바라보았다.
 “그럴까? 그런데 이제 마법진 바깥으로 나가도 돼?”
 바루한은 온 얼굴을 찌푸린 채 치포의 낯빛을 살폈다.
 아침에 비해 훨씬 생기가 돌았다. 바루한이 고개를 끄덕이자, 치포는 흘러내리는 옷을 추스르며 마법진 밖으로 나왔다.
 펜을 받아 들고 마법진을 한번 유심히 살핀 뒤, 바루한이 그리다 만 종이를 가져다 바닥에 놓았다.
 “잉크는?”
 바루한이 잉크통을 찾아 탁, 소리가 나도록 종이 곁에 놓았다.
 “조심히 다뤄. 기껏 가라앉힌 잉크 덩어리가 올라오면 안 되잖아.”
 마치 뭘 알기라도 하는 듯 오히려 충고까지 하자, 바루한의 얼굴은 완전히 험악해졌다.
 잡아먹을 듯 노려보는 바루한의 눈길을 고스란히 받으며 치포는 펜 끝을 잉크에 담았다.
 화가 난 가운데서도 바루한은 치포의 손놀림을 유심히 바라보았다.
 역시 귀한 집 자제일 거라는 처음의 생각이 맞았던 걸까? 치포는 펜 끝에서 잉크 방울을 능숙하게 떨어트렸다.
 바루한은 저도 모르게 흡족한 웃음을 떠올렸다. 흙투성이 몸뚱이만 보고 한눈에 알아보다니, 자신의 보는 수련도 제법 경지에 이르렀다.
 하지만 펜이 움직이기 시작하자 바루한의 얼굴에서 웃음이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펜은 종이 위를 나는 듯이 달려갔다. 위를 그리는가 하면 아래를 그리고, 옆에서 얼쩡거리는가 하면 가운데를 건드렸다.
 그리고 얼마나 지났을까?
 무질서하게 여기저기 만들어지던 얼룩이 어느새 똑바른 원이 되었다. 하지만 치포는 그러고도 한참 동안 펜을 놓지 않았다.
 뭐가 달라졌는지 모를 만큼 세세한 선들을 지루할 정도로 오랫동안 그려 넣은 뒤에야 겨우 고개를 들었다.
 “다했어. 어때?”
 치포는 의기양양하게 웃으며 바루한에게 종이를 건넸다.
 바루한은 잉크가 번질세라 조심스레 종이를 받아 바닥에 놓았다.
 눈이며 입이 절로 채신머리없이 벌어지며, 종이와 바닥을 번갈아 가며 그림을 맞춰 보느라 정신이 없었다.
 그때, 꼬르르륵 요란스러운 소리가 났다. 바루한은 그제야 하루 종일 마법진을 그리는 데 정신이 팔려 아무것도 먹지 못한 것이 떠올랐다.
 힐끔 치포를 바라보았다. 치포도 배가 고픈지 고개를 끄덕였다.
 “누가 했건 스승님이 시킨 일은 다 했으니까, 이제 느긋하게 저녁을 먹어 볼까? 그래 봤자 이 시간에는 빵 조각과 양젖이 전부겠지만. 잠깐 기다려. 먹을 걸 가져올 테니.”
 바루한이 문밖으로 나가자, 치포는 열린 문 틈으로 슬쩍 바깥을 내다보았다.
 여기가 대체 어디인 걸까? 압둘 칼리바의 정원이라는데, 어두워서 그런지 정원같이 보이지는 않았다.
 잠깐 바깥을 내다보려 걸음을 옮겼다. 아무 생각 없이 마법진이 그려진 종이를 지나쳐 가는데, 문득 무언가 눈가에 일렁거렸다.
 누가 잡아당기기라도 한 듯 절로 눈이 그리 향했다. 머리끝이 쭈뼛 솟았다.
 산 채 물어뜯긴 짐승처럼, 종이에 그린 검은 마법진에서 새빨간 것이 번져 나왔다. 연기? 낯설지 않은 느낌이었다.
 오늘 아침과 밤에 느꼈던 온몸이 오싹한 기운, 역시나 잘못 본 게 아니다. 당장이라도 달아나고 싶었지만 어느새 붉은 연기 속에 잠긴 다리는 꼼짝도 하지 않았다.
 연기는 점점 짙어졌다. 처음에는 안개처럼 새어 나오던 것이 국이 끓어 넘치듯 뭉클뭉클 한 덩이씩 쏟아져 나왔다.
 쑤욱.
 그리고 어느 순간, 연기 속에서 어떤 형체가 솟아올랐다.
 치포는 다급한 숨을 들이켰다.
 족히 서너 뼘은 될 것 같은, 나란히 솟은 초록색 터럭. 이 세상의 어떤 짐승의 털빛도 저런 빛깔을 띠지는 않으리라.
 갈기처럼 빳빳하게 솟은 터럭이 점점 위로 떠오르더니, 그 아래 푸른 비늘이 덮인 거대한 몸체가 드러나기 시작했다.
 아아, 세상에! 무서웠다! 그런데 공포에 질린 나머지 살짝 어디가 어떻게 된 걸까?
 온몸의 솜털까지 곤두설 만큼 겁을 집어먹은 주제에, 서서히 떠오르는 정체 모를 형체를 보고 있자니 불쑥 화가 치밀어 올랐다.
 모르긴 몰라도 이만하면 불행은 겪을 만큼 겪지 않았나? 부모도 형제도 모르고, 이름조차 길 가는 사람이 붙여 준 하잘것없는 고아 신세에다, 독버섯을 먹고 죽을 뻔한 게 어제 일이다. 그뿐인가? 그 후유증으로 지난 기억까지 모조리 잃었다.
 겨우 그런 처지를 받아들이고 굳세게 살아가려고 마음먹은 판에, 그걸로 모자라, 또, 또!
 아니 그럴 수는 없다. 그 정도면 충분하다. 치포의 눈에 뚜껑도 덮지 않은 채 종이 곁에 그대로 놓여 있는 잉크병이 들어왔다.
 마법진에서 솟아난 게 분명하니 저것만 어떻게 하면…….
 치포는 몸을 구부려 잉크병으로 손을 뻗었다.
 ‘조금만 더, 조금만 더…….’
 다리가 움직이지 않아, 한껏 몸을 뻗는 수밖에 없었다. 주먹만 한 푸른 비늘이 코앞에서 번들거렸다. 아슬아슬하게 손이 병에 닿을까 말까 했다. 그동안에도 몸체는 솟아올랐지만 얼마나 큰지 이제 겨우 구부정한 등이 나왔을 뿐이다.
 그 얼굴은 상상만 해도 소름이 돋았다. 몸체만으로도 무시무시한 기운을 뿜어내고 있는데 그 눈을 정면으로 보다니, 생각조차 하기 싫었다. 하지만 다음 순간 치포는 그대로 얼어붙었다.
 제 얼굴만 한 노랗고 둥그런 한 쌍이 붉은 연기 위로 떠오른 것이다.
 꿀꺽.
 침 넘어가는 소리가 천둥처럼 들려왔다. 그 소리를 들은 걸까? 반쯤 떠오르던 노란 것이 데굴데굴, 치포 쪽을 향했다.
 그 눈길을 정면으로 받을까 두려워 치포는 질끈 눈을 감고 미친 듯이 손을 휘저었다.
 ‘제발, 제발!’
 간절한 마음이 통한 걸까? 툭, 무언가 손에 걸리는 소리가 났다.
 그 작은 소리가 이토록 반가울 줄이야!
 치포는 크게 숨을 들이쉬고 가늘게 눈을 떴다. 한순간 깜박 잠이 들어 꿈을 꾸다 깨어난 듯, 붉은 연기도 거대한 몸체도 말끔히 사라졌다.
 마법진이 그려진 종이 위는 깨끗했다. 다만 마법진 한쪽이 쏟아진 잉크로 얼룩진 것밖에는.
 치포는 가슴을 쓸어내렸다.
 그러다 문득 등 뒤, 원래의 마법진에 생각이 미쳤다.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홱 고개를 돌리는데, 아니나 다를까 마법진 가운데서 붉은 안개가 희미하게 새어 나왔다.
 치포는 화들짝 놀라 그리로 달려갔다. 당장 한 귀퉁이 흑연으로 그린 선들을 손으로 뭉갰다.
 마법진이 망가지자, 붉은 연기는 이내 잦아들었다. 치포는 방 안을 휘휘 둘러보다, 어느 구석엔가 마법진이 있어 다시 ‘그것’이 나타나지 않을까 두려워, 방구석이며 벽장 속, 천장까지 속속들이 살폈다.
 아무것도 없다 여긴 치포가 막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데, 벌컥 방문이 열렸다.
 “뭐 하는 거야, 치포?”
 문 앞에 바루한이 빵과 병이 담긴 광주리를 들고 서 있었다.
 바루한의 눈길은 흑연으로 더러워진 치포의 손과 뭉개진 바닥의 마법진에 닿았다가, 쏟아진 잉크병이며 마법진을 그려 놓은 종이에 번진 잉크로 옮겨 갔다.
 그리고 순간, 광주리를 팽개치다시피 하고 달려들었다.
 “어떻게 된 거야, 이게!”
 바루한이 눈을 부릅뜨고 노려보았다. 본 대로 말한다면 믿어 줄까?
 눈 뜨고 빤히 지켜본 저도 꿈인지 생시인지 가늠하기 어려운데 누가 믿겠는가? 우물쭈물하다 입을 연 치포는 결국 딴소리를 했다.
 “벌레가 있어서, 잡으려다…….”
 바루한은 맥이 빠진 표정으로 털썩 자리에 주저앉았다.
 마법진이 그려진 종이를 바닥의 마법진과 몇 번이나 비교해 보더니 길고 긴 한숨을 내쉬었다.
 “여기랑 여기, 지워진 부분이 겹쳤어. 치포 너, 생각 안 나? 여기 말이야, 여기만 알면 되는데.”
 치포는 설레설레 고개를 저었다.
 붉은 연기 때문에 혼비백산한 탓인지 머릿속이 텅 비어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았다. 아니, 떠오른다 해도 말하고 싶지 않았다.
 “난, 이제 죽었다.”
 바루한이 딱딱하게 굳은 표정으로 종이를 들었다 놓았다 하는 동안, 멀리서 낮은 고동 소리가 나른하게 들려왔다.
 부우우우? 부우우우?.
 치포가 작게 하품을 하며 물었다.
 “이게 무슨 소리야?”
 “밤이 되었다고 알려 주는 밤 나팔 소리야.”
 바루한은 시큰둥하게 대답하며 고개를 들었다. 그런데 웬일인가! 좀 전까지만 해도 멀쩡하던 치포가 푹 고꾸라지는 게 아닌가!
 바루한은 손을 뻗어 치포를 받아 들었다. 놀라 낯빛을 살피는데 품 안에서 새근새근 곤한 숨소리가 규칙적으로 흘러나왔다.
 바루한의 입술이 기묘하게 뒤틀렸다.
 “잠든 거냐? 일을 이렇게 만들어 놓고!”
 잉크 자국으로 얼룩진 방 안, 바루한의 황당한 목소리가 쩌렁쩌렁 울렸다.
 
 
 
 “이건 굉장해! 단 한 군데도 틀린 곳이 없어.”
 고렌은 종이와 바닥을 번갈아 가며 하염없이 보고 또 보았다. 스승의 흥분한 목소리에 바루한의 입매가 뒤틀렸다. 그래, 굉장하다.
 저 빽빽한 그림을, 그는 하루 종일 그려도 반의반도 못 그린 그림을, 두어 시간 만에 완벽하게 그려 냈으니 정말로 굉장하다.
 하지만 이왕에 하는 것 끝까지 잘했으면 얼마나 좋을까? 바루한은 긴장한 표정으로 스승을 지켜보았다.
 아니나 다를까, 한 곳을 뚫어져라 쳐다보던 스승이 땅이 꺼져라 한숨을 쉬었다.
 “잉크 자국만 없으면 얼마나 좋았을꼬?”
 어제에 이어 오늘까지 스승의 당부를 지키지 못해 바루한은 입맛이 썼다. 하지만 어디 그게 제 탓인가?
 바루한은 슬쩍 말을 돌렸다.
 “그러니까 제가 그랬잖습니까? 바닥의 마법진도 치포가 그린 거라니까요. 제대로 보지도 않고 휙휙 그리던데, 자신이 그린 게 아니라면 그럴 수는 없지요. 기억을 잃었다는 것도 그저 핑계인지 모르죠.”
 고렌이 작게 혀를 찼다.
 “바루한, 정말 너는 아직 수련이 모자라. 그것도 보는 수련이 크게 모자라. 보는 수련은 마법의 기초 중의 기초. 기초가 튼튼해야 대성한다고 내가 몇 번이나 말을 하더냐. 자, 나는 보았는데 네가 보지 못한 게 뭘까? 우선, 마법진. 설마 아직도 저 마법진이 아무렇게나 그려 넣은 낙서라고 생각하지는 않겠지?”
 바루한이 바로 고개를 저었다.
 “생각이 바뀌었다니 그나마 다행이구나. 너도 짐작하겠지만 저건 제대로 된 마법진이다. 아마도 생기를 북돋아 주기 위한 마법진. 모르긴 몰라도 내가 처음에 그려 놓은 것의 효과를 몇 배, 어쩌면 수십 배 더 키워 놓았을 거야.”
 바루한의 눈이 휘둥그레지자 고렌이 작게 혀를 찼다.
 “그렇지 않다면 숨도 쉬지 않던 아이가 어떻게 하루 만에 깨어났다고 생각한 거냐? 지난번 내가 그린 마법진의 효과를 보지 않았더냐? 날개가 부러진 새가 며칠 만에 나아서 날아갔는지 비교해 보면 알 것 아니냐? 만의 하나라는 심정으로 마법진을 그렸다. 그냥 죽게 내버려 둘 수 없어 하는 수 없이 그린 거야. 솔직히 그대로 몸이 식을 거라 생각했어. 그래서 더 부담 없이 원으로 데려올 수 있었지. 어차피 죽을 거라 생각했으니까. 바루한, 사람들은 자신이 잘 모르는 것에 대해서는 피상적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어. 그래서 그것에 대해 직접 보고 겪은 정보조차 무시하곤 하지. 너 역시 같은 함정에 빠진 게야. 자신이 겪은 마법진에 대한 것을 깡그리 무시하고 ‘마법진’이라는 어떤 신비한 대상만 생각하다 보니, 이전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마법진의 효과를 눈앞에서 보고도, 그러려니 하고 손쉽게 넘어간 거지. 마법사는 그래서는 안 돼. 제대로 보지 못하면 결코 훌륭한 마법사가 될 수 없어. 네 마음속에 너도 모르게 만들어 놓은 장막을 헤치고 그 뒤를 꿰뚫어 볼 수 있어야 해. 그래야만 사물의 본질에 다가설 수 있어.”
 바루한은 고개를 숙였다. 광대뼈 위쪽이 따귀라도 맞은 듯 화끈거렸다.
 그런 바루한에게 스승은 어떤 위로도 질책도 하지 않았다. 그저 담담히 말을 이어 갈 뿐이었다.
 “너는 저 아이가 마법진을 그렸을 거라고 했지? 나로서는 엄두도 못 내는 마법진을 손쉽게 그려 내는 자라면 대체 뭘까? 너와 나로서는 도저히 당해 낼 수 없는 굉장한 마법사일 거야. 그런 마법사에게 사사건건 대들다가 겁도 없이 손까지 대려 하다니. 간이 오그라들다 못해 아예 없어지는 줄 알았다. 지금으로써는 저 아이가 직접 마법진을 그렸는지, 어떤 놀라운 마법사가 몰래 들어와 그려 놓고 사라졌는지 알 도리가 없어. 일단은 치포의 말을 믿는 수밖에. 진실은 때가 되면 밝혀지는 법이니까. 어쨌든 중요한 건 저 아이가 마법진과 관계가 있다는 거야. 뿐만 아니라 저 복잡한 마법진을 단번에 그릴 수 있는 능력도 가지고 있지. 바루한, 우리가 주워 온 녀석은 굉장한 마법사든지 보기 드문 천재, 아니면 그 둘 다야.”
 구구절절 옳은 말이었다. 바루한은 스승의 말에 고개를 주억거리는 것밖에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하지만 스승이 다시 입을 열자 바루한은 저도 모르게 벌떡 고개를 들었다.
 “치포를 원에 둘까 한다.”
 “네? 하지만!”
 바루한이 새된 소리를 지르자 고렌의 한쪽 눈썹이 위로 치솟았다.
 “마법진이 이 모양이 되었으니 하는 수 없지. 너도 직접 그려 보았으니 알아챘을 게다. 마법진 사이사이, 이 괴이하게 엉긴 선들이 실은 모두 멤브릴어란 걸. 멤브릴어는 어디 비서秘書를 찾아 읽는다고 접할 수 있는 게 아니야. 구전으로 전승되니 비서가 있을 리도 없지. 다시 말해 누군가에게 교육받지 않고서는 결코 알 수 없다는 말이야. 이건, 바루한…….”
 고렌이 잠시 말을 멈추고 침을 삼켰다.
 그 목울대가 흔들리는 것을 바루한은 긴장된 눈으로 지켜보았다.
 “고대 마법이 어디선가는 비밀리에 전승되고 있다는 이야기야. 그리고 애초에 저 아이와 함께 있던 물담배에도 멤브릴어가 새겨 있지 않았더냐? 바루한, 우리가 무슨 수를 쓰든 그 전승에 닿을 수만 있다면, 세상이 바뀔 거야. 비루한 마법의 시대가 가고, 위대한 옛 영화가 다시 꽃필 게야. 나는 이 기회를 결코 그냥 흘려보낼 수는 없구나. 어떤 위험이 닥친다 해도.”
 “하지만 무슨 수로 말입니까?”
 “수는 무슨 수? 한창 새 수련생을 받을 때가 아니냐? 나이도 딱 적당하고.”
 “원의 수련생으로 들이자고요? 그게 말이 된다고 생각하십니까?”
 “내가 지금껏 말한 것을 어디로 들은 게냐? 말이 되건 말건 저 아이를 원에 붙들어 놓으려면 그 수밖에 없어. 손에 들어온 행운은 움켜쥐어야지.”
 “시대가 시대이니 출신을 모르는 자를 받아들이는 것은 둘째 치고라도, 기운이 전혀 없는 녀석입니다. 저 같은 수련생도 보이는데 장로들께서 그걸 못 보겠습니까? 마법사가 뭡니까? 남보다 기운이 강해 자신과 공명하는 세상의 기운을 끌어들여 움직이는 자 아닙니까!”
 “그쯤 해라. 이 마당에 마법 이론이라니, 누가 스승인지 모르겠구나. 내게 생각이 있다. 무아진이라면 어떻겠느냐?”
 “무아진요?”
 바루한이 살짝 이맛살을 찌푸렸다.
 무아진, 원래 고대어로 예배 시간을 알리는 신성한 자란 뜻이었지만 정원의 무아진은 달랐다. 수련생의 껍질을 쓴 허드렛일 담당이나 다름없었다.
 그 옛날, 초대 정원의 수장은 등대를 지키고 시간을 알리는 조건으로 여기 땅을 빌려 정원을 세웠다고 한다. 거기까지는 좋았는데, 문제는 ‘누가 그 일을 하느냐’였다.
 외떨어진 데다, 높디높은 등대를 하루 여섯 번이나 오르락내리락해야 하는데 누가 하려 하겠는가?
 마법사들이 제 연구를 제쳐 놓고 하겠는가, 아니면 수련생들이 수련을 빼먹고 하겠는가.
 그렇다고 비술秘術을 공공연하게 쓰는 수련장에 바깥 사람을 들이겠는가? 하는 수 없이 사람을 따로 뽑아 무아진이란, 이름만 그럴듯한 자리를 내어 준 것이다.
 당연히 남들은 삼사 년 안에 수련을 마치고 나가지만, 무아진은 십 년 이상 정원에 남아도 간단한 마법조차 제대로 구사하지 못하는 일이 태반이었다.
 “그래, 무아진. 좋은 기회가 아니냐? 마침 이번 무아진이 운 좋게도 살하의 영주에게 발탁되지 않았느냐? 그가 속인으로 돌아가면 누구를 무아진으로 삼겠느냐? 새로 들어올 수련생들까지 모두 편 가르기를 끝낸 이 마당에, 장로들이나 마법사들에게 제자를 내어 놓으라 하면 모두 뒷걸음질 칠 게 뻔하지. 내가 무아진으로 쓸 사람을 데려왔다고 하면 다들 두 손 들고 환영할 게다. 기운이 보이지 않아도 보이는 척하고도 남을걸? 바루한, 모든 것이 준비라도 한 듯 딱딱 맞아떨어지는 건 ‘가라!’는 신호야. 그때는 망설이면 안 돼.”
 고렌의 표정은 단호했다. 바루한은 작게 한숨을 쉬었다.
 자신이 어찌 스승을 모르랴? 이쯤 되면 스승은 누가 뭐라고 해도 귓등으로 흘려들을 것이다. 바루한은 설레설레 고개를 저었다.
 “그런데 치포란 괴상한 이름은 어디서 따온 겁니까?”
 “물담배에 새겨진 유일한 공용어야. 철자로만 딱 두 자, 새겨진 지 얼마 안 되어 바로 알아볼 수 있었지. 나쁘지 않지? 뭔가의 머리글자 같기도 하고, 여섯 번째 ‘치’와 스물여덟 번째 ‘포’, 완전수 자리를 차지한 글자니, 뭔가 그럴듯해 보이고 말이야. 좀 특이하긴 해도 아주 얼토당토않은 건 아니잖아?”
 고렌은 자신이 붙인 이름이 꽤나 마음에 드는지 기분 좋게 웃어 보였다.
 
 
 
 다음 날 바루한은 아침부터 바빴다. 장로들에게 선을 보여야 하는데 그 꼴로 보낼 수는 없는 일이라, 해가 뜨기도 전에 몰래 마을에 내려가 문도 열지 않은 가게를 두드려 치포에게 맞을 법한 옷과 신발을 샀다.
 돌아오는 길 내내 치포가 잠에서 깨어 엉뚱한 짓을 저지르지나 않았는지 신경이 쓰였다. 외떨어진 곳에 있는 방이라 안에서 무슨 소리를 낸들 들을 사람은 없겠지만, 혹시 바깥을 돌아다니다 누굴 만나 쓸데없는 소리라도 하면, 그길로 스승의 염원은 물거품이 되고 말 것이다.
 마음을 졸이며 서둘러 돌아와 방문을 열어 보니, 치포는 이미 깨어 우두커니 허공의 한 점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런데 어째 낯빛이 이상했다.
 이른 아침 설익은 햇빛이 들이친 탓일까, 파리한 얼굴로 매달리듯 자신을 바라보는 것이 엊저녁보다 상태가 더 나빠 보였다.
 하지만 잠시 솟아나던 동정심은 이내 사라졌다. 불쌍하다, 불쌍하다, 봐주다가 일이 이 지경까지 된 것 아닌가!
 바루한은 챙겨 온 옷가지를 내려놓으며 싸늘하게 말했다.
 “뒤꼍에 길어다 놓은 물이 있으니까 어서 씻고, 옷 먼저 갈아입어.”
 치포가 이상하다 싶게 오랫동안 옷과 바루한을 번갈아 바라보자, 바루한은 눈을 치뜨며 뒤꼍을 가리켰다.
 “서둘러! 아침 시간 전에 스승님께 가야 한다고.”
 지금쯤 스승 고렌도 한창 바쁘게 움직이고 있을 것이다.
 자신만만하게 말을 하긴 했지만 그 뻣뻣한 장로들을 구워삶으려면 간단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동안 바루한이 해야 할 일은 치포를 최대한 그럴듯하게 보이게 만드는 것이었다.
 아무리 수련장보다 등대에 있는 시간이 많은 무아진이라지만 원의 수련생은 수련생, 장로들의 눈은 결코 너그럽지 않을 것이다.
 옷을 갈아입은 치포는 여전히 허공을 힐끔거리며 주춤거렸다. 대체 무슨 꿍꿍이인지 알 수가 없었다.
 한나절도 되기 전에 몇 년을 알고 지낸 것처럼 제멋대로 굴 때는 언제고, 이제 와 처음 만난 사이처럼 행동하다니.
 바루한은 신경질적으로 치포의 팔을 잡아끌어 허겁지겁 머리를 빗겼다.
 “저기…….”
 영문 모를 장단에 맞춰 줄 때가 아니다. 대충 머리가 정리되자, 바루한은 치포의 손을 잡고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서 가자. 지금 가도 아슬아슬해.”
 바루한이 성큼성큼 걸어 나가자 치포는 이내 숨을 몰아쉬기 시작했다.
 비실거리는 체구에 걸맞게 휘청휘청한 걸음걸이, 씻고 닦아도 도무지 태가 나지 않았다.
 도대체 무슨 지병이라도 있었던 건지, 마치 여자처럼 말랑한 손을 보면 귀한 집 자제 같은데, 끼니도 제대로 못 얻어먹은 것처럼 몰골이 저럴 수가 있을까?
 저 한심한 체력으로 무아진 노릇을 제대로 할 수나 있을는지…….
 곧 쓰러질 듯 위태롭게 헐떡거리는 치포를 겨우 스승의 집무실에 데려다 놓았다.
 스승은 손에 든 종이들을 내려놓으며 바루한과 치포를 바라보았다. 애써 웃고 있었지만 피곤한 기색이 역력했다.
 “장로들의 반대가 심하셨나 봅니다.”
 바루한이 말을 꺼내자 고렌은 옳다구나, 푸념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반대? 흥! 제대로 반대라도 했으면 말도 안 해. 알잖느냐, 어떤지? 허락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뻔히 보이는데도 이런 구실, 저런 트집 끝까지 물고 늘어지면서 잔소리를 늘어놓는 거. 어떻게 꼬투리를 잡아 두고두고 우려먹을 작정인 게지.”
 바루한의 표정이 가벼워졌다. 투덜대는 품이 그다지 심각하지 않은 것이, 어쨌든 장로들이 치포를 받아들이기로 마음을 정한 모양이었다.
 고렌이 말끝에 잠깐 숨을 몰아쉬고는 치포에게로 눈길을 돌렸다.
 “그래, 어젯밤 잠은 잘 잤고?”
 치포가 힘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것 같기는 한데…….”
 “자기 일인데, 그럼 그런 거고, 아니면 아닌 거지, 그런 것 같은 건 또 뭔가?”
 농담이라고 한 소리였지만 치포의 표정은 영 그게 아니었다.
 “헴헴!”
 고렌이 멋쩍어 괜히 목을 가다듬었다. 그때 치포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정확한 건 알 수가 없습니다. 지난밤의 기억이 전혀 없으니까…….”
 고렌의 표정이 그대로 굳었다.
 “지난밤의… 기억이 없다고……?”
 더듬더듬 물어 오는 말에 치포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지난밤 기억뿐만 아니라, 아예 아무것도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 죄송하지만 저는 누구죠? 이름은 뭐고, 나이는 몇 살이며 어느 나라 사람입니까? 무얼 하며 살고 있었고, 어떤 신분의 사람인지, 부모 형제는 있는지, 혼인은 했는지……?”
 고렌은 대번에 고리눈을 뜨고 바루한을 노려보았다. 바루한은 바루한대로 이 얼토당토않은 상황에 어떤 반응을 보여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기억을 잃고도 담담하게 질문을 늘어놓는 것까지, 어제와 같은 일이 다시 벌어지고 있었다.
 정말로 시간을 거슬러 올라간 듯 창백한 얼굴빛마저도 똑같았다.
 스승은 벌떡 자리에서 일어나 몸을 돌렸다. 창밖을 바라본 채 그대로 시간이 멎은 듯 꼼짝도 하지 않았다. 방 안은 침묵으로 가득 찼다.
 바루한의 얼굴도 어둡기 그지없었다. 스승의 마음이 손에 잡힐 듯했다.
 이제 곧 장로들에게 데리고 가야 하는데 이 일을 어찌 수습한단 말인가!
 이제부터 입을 맞춰도 시간이 모자랄 판에, 하릴없이 시간만 흐르고 있었으니.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스승이 다시 몸을 돌렸다. 마음을 단단히 먹은 얼굴이었다.
 “일단 자네 이름은 치포라고 한다. 어째서 또다시 기억을 잃었는지 모르겠지만, 곧 나의 제자가 될 몸이야. 그래서 이제부터…….”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지조차 모를 만큼 어수선한 하루가 결국 지나갔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장로들은 치포를 정원의 무아진으로 받아들였다.
 바루한은 그날 완전히 깨달았다. 스승의 두 번째 특기가 자신의 상상을 초월하는 경지에 이르렀다는 것을. 그리고 요령도 눈치도 없는, 어찌 보면 마법광에 불과한 스승이 어떻게 지금까지 굳건히 정원의 수장 자리를 지킬 수 있었는지도.
 언제나 위태위태하게 보이던 스승의 든든한 능력에 마음이 놓여야 했건만, 그날 밤 바루한은 좀처럼 잠이 들 수 없었다.
 도대체 왜 기억을 잃은 걸까? 땅에 파묻히기 전에 큰 충격을 받아 그럴 거라는 어제의 막연한 짐작은 하룻밤 만에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오늘은, 대체 오늘은 왜 기억을 잃었단 말인가?
 어쨌든 치포가 일부러 기억을 잃은 척한다는 혐의는 벗겨졌다.
 어떤 바보가 뭐 얻을 게 있다고 연이틀 기억을 잃은 시늉을 하겠는가?
 바루한은 곯아떨어진 치포를 노려보았다.
 “병에라도 걸린 거 아냐? 잠에서 깨면 모든 걸 잊어버린다든지?”
 제가 한 말에 흠칫 몸이 떨려 왔다. 불길한 예감이 바루한을 스쳤다. 만약에 그 말대로라면 앞일을 어쩐단 말인가!
 나을 수 있는 병인지, 치포의 장래는 어떻게 될지 따위는 눈곱만치도 걱정스럽지 않았다.
 세상에! 날마다 새로운 아침이라니! 날마다 너는 누구고, 나는 누구고, 우리는 누구의 제자이며, 여기는 어디고, 너는 오늘 하루 이런 일을 해야 한다고 누군가 일일이 알려 주어야 한다는 소리다. 그리고 그 누군가가 될 사람은 원을 통틀어 단 한 명밖에 없었다.
 바루한의 얼굴이 있는 대로 일그러졌다.
 벌떡 일어나, 잠이 든 치포를 있는 힘껏 발로 찼다.
 쿵!
 치포는 침대 밖으로 떨어지며 꽤 큰 소리를 냈지만 호흡조차 그대로 곤히 잠든 채였다.
 바루한은 그런 치포를 본척만척, 이불을 머리끝까지 덮고는 빈 침대 위에 드러누웠다.
 과연 바루한, 잠들 수 있을 것인가!
 
 
 
 압둘 칼리바의 정원
 
 
 그래서 열일곱째 날, 등대, 이른 새벽
 
 그러니까, 기지개까지 늘어지게 펴며 평범하게 잠에서 깨어난 것까지는 좋았다.
 그런데 정신을 차리고 보니 자신이 누구인지 모르겠다.
 이름도, 나이도, 당연히 떠올라야 할 어제의 일이, 그제의 일이, 지난 일들이 전혀 떠오르지 않았다.
 툭!
 발치에 뭔가가 차였다.
 둘둘 말린 담요 속에 모르는 사람이 들어 있었다. 커다란 몸집으로 보아 아마도 남자.
 담요가 몇 번 꿈틀대는가 싶더니 남자가 힘겹게 눈을 떴다. 온 얼굴을 찌푸리고 몇 번 눈을 끔벅거려 초점을 맞추더니, 잠이 떨 깬 탁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네 베개 밑을 봐.”
 말이 끝나자마자 남자의 눈이 스르륵 감겼다. 금세 가늘게 코 고는 소리가 들려왔다.
 베개 밑? 잠꼬대라도 하는 건가?
 그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남자를 내려다보며 조금 큰 소리로 물었다.
 “무슨 말을 하는 건지……?”
 남자가 벌떡 고개를 들고는 짜증스럽게 말했다.
 “베개 밑을 보라니까! 어제 치포, 네 녀석 때문에 언제 잠든 줄 알아! 날 좀 내버려 둬!”
 그러고는 머리끝까지 이불을 돌돌 말아 홱, 등을 돌렸다.
 그는 멍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치포……?”
 분명 그리 불렀다. 스스럼없이 고함을 치는 것 보면 아무래도 자신을 잘 아는 사람 같은데, 그렇다면 그게 내 이름인가?
 하지만 몇 번 더 웅얼거려 보아도 혀에서 껄끄럽게 굴러다닐 뿐 아무런 감흥도 없었다.
 어쩌면 이렇게도 까맣게 잊을 수가 있을까? 오다가다 마주친 사람도 아니고 바로 자기 자신인데……. 그는 설레설레 고개를 저으며 침대로 다가갔다.
 베개를 치우자 아래에서 작고 네모진 것이 나왔다. 정말로 수첩이다.
 밀랍을 녹여 봉인한 수첩 겉장에는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하는 자를 위한 꼼꼼한 기록’이라고 적혀 있었다.
 그는 봉인을 뜯고 수첩을 열었다.
 
 내 이름은 치포다. 열다섯인지, 여섯인지 일곱인지 잘 모른다. 고아로 시켐 산에 쓰러진 것을 바루한과 고렌이 데려왔다고 한다. 고렌은 압둘 칼리바의 정원을 이끄는 마법사다. 바루한의 스승이자, 내 스승이다……
 …압둘 칼리바의 정원은 중립 도시 국가 타이타히의 마법 수련장인데……
 …나는 새 수련생으로……
 …무아진이라는…….
 
 수첩에는 이름이며 나이 같은 기본 정보부터 시작해, 어떻게 여기 오게 되었는지, 여기가 뭐 하는 곳인지, 어디를 어떻게 찾아가는지, 지난 보름 남짓 보고 들은 것이 말 그대로 꼼꼼하게 쓰여 있었고, 마지막으로 오늘 해야 할 일까지 나와 있었다.
 한 장, 한 장, 주의 깊게 수첩을 읽어 가던 그는, 수첩에 달린 작은 흑연으로 마지막 장에 끼적거렸다.
 
 압둘 칼리바의 정원, 셋째 날.
 
 그러고는 앞 장을 넘겨 글씨를 번갈아 보았다. 똑같은 필체였다. 치포는 수첩의 마지막 장을 덮고 깊은 한숨을 쉬었다.
 운이 나쁘다고 해야 할까?
 이런 을씨년스러운 곳에서 잠이 깬 주제에 감히 어느 나라 왕자일 거라고는 생각지도 않았다. 하지만 고아에다, 자고 나면 기억을 몽땅 잃어버리는 괴병怪病에까지 걸렸다니!
 그리고 한술 더 떠 고상함이라고는 눈곱만치도 없는 이름, 대체 치포가 뭔가, 치포가! 바루한이나 고렌같이 제법 그럴듯한 이름도 있는데, 하필이면 ‘치포’라니!
 몸이라도 튼실하면 그래도 위로가 되련만, 소매 밖으로 드러난 앙상한 팔목이 눈을 찔렀다. 이런 사내 주제에 힘도 제대로 쓰지 못하는 깡마른 몸이라니. 누군들 한숨이 절로 나오지 않을까! 아무리 잘 봐주어도 운이 좋다고는 할 수 없었다.
 치포는 설레설레 고개를 흔들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수첩에 쓰여 있기를 자신은 늘 같은 때 깨고 같은 때 잠이 든다고 했다. 일어나서 ‘기록’을 읽고 나면 대충 일을 시작할 시간이라 했으니, 느긋하게 있을 때가 아니다.
 
 하나. 무아진의 일: 새벽, 아침, 낮, 한낮, 저녁, 밤, 시각에 맞춰 나팔을 불 것.
 
 자신은 무아진 노릇을 하는 대신 정원의 수련생이 될 수 있었다…고 한다. 다시 말해, 무아진 노릇을 제대로 하지 않으면 정원에서 쫓겨날지도 모른다는 이야기다.
 서둘러 밖으로 나가자, 마당처럼 생긴 좁고 둥그런 돌바닥이 펼쳐졌다.
 치포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나팔이라더니, 저런 것도 나팔이라고 할 수 있을까!
 크기는 웬만한 어른 남자 키보다 크고, 두께는 허벅지만 한 대롱이 크고 부드러운 곡선을 그리며 비스듬히 세워져 있었다.
 치포는 성큼성큼 나팔이 있는 데로 다가가 이쪽저쪽을 살폈다. 바로 옆벽에 나팔만큼이나 신기한 물건이 걸려 있었다.
 눈금이 자잘하게 새겨진 넙적한 판인데, 그림자를 늘어뜨린 가는 막대가 꽂혀 있었다.
 “해시계?”
 순간적으로 튀어나온 이름이었다. 다시 좀 더 자세히 나무판을 살피자, ‘새벽’이라고 새겨진 눈금에 바짝 다가서고 있는 가는 그림자가 눈에 들어왔다. 더더욱 해시계일 거라는 확신이 들었다.
 ‘그렇다면 여기 맞춰 나팔을 부는 것일 테지.’
 그림자가 눈금에 닿기를 기다려, 치포는 나팔로 다가가 한껏 숨을 들이켰다. 슬쩍 손으로 문질러 닦은 리드에 입술을 대고 천천히 숨을 내쉬자 부드러운 소리가 울려 퍼졌다.
 다소 어둡기는 하지만 모나지 않은 부드러운 음색, 기분 좋은 소리였다.
 헐떡이며 관에서 입을 떼는데 입가에 어느새 웃음이 맺혀 있었다.
 얼마나 그렇게 있었을까, 소리가 퍼져 나가는 쪽을 하염없이 멍한 눈으로 바라보던 치포는 문득 정신이 들었다.
 지난 일을 모조리 잊고도, 이렇게 태연할 수 있다니. 적응력을 떠나서 지나치게 태평한 것 아닌가?
 치포는 작게 혀를 차며 한 귀퉁이에 만들어진 나선형 계단으로 걸어갔다.
 느긋하게 나팔 소리나 감상하기에는 오늘 하루 해야 할 일들이 너무나 많았다.
 
 둘. 무아진의 일: 새벽이 되면 등대를 끄고 밤이 되면 등대를 켤 것.
 
 무아진은 정원의 잡일꾼이며 시각을 알리는 나팔수인 동시에, 등대지기였다.
 계단을 올라가 위층에 고개를 들이밀자 대뜸 눈에 들어온 것은 방 가운데서 활활 타오르는 불길이었다. 이게 등대의 불인가?
 화덕 뒤에 빛을 비추는 커다란 거울이 달려 있는 것을 보면 그렇겠지.
 “시계면 시계, 화덕이면 화덕. 기억을 잃은 주제에 모르는 게 없군. 보편적인 상식은 그대로 기억하면서, 자신에 대한 것만 쏙 잊어버렸다는 건가?”
 혼자 중얼거리며 치포는 화덕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이내 그가 찾던 것이 눈에 들어왔다. 도르래 끝에 달린 작은 밧줄이었다.
 밧줄을 잡아당기자 화덕의 문이 닫혔다. 이제 더 이상 공기가 화덕 안에 들어가지 못하니 곧 불이 꺼질 것이다.
 치포는 별 어려움 없이 ‘오늘 해야 할 일’ 가운데 두 가지 일을 해낸 자신이 대견하기만 했다.
 수첩에는 지나치게 꼼꼼하게 써넣은 하루 일과와는 달리 ‘오늘 해야 할 일’은 그저 몇 마디 말로 적당히 쓰여 있었던 것이다.
 화덕의 불을 끄고 치포는 한 바퀴 주위를 둘러보았다. 등대라기에 바깥 풍경이라도 볼 수 있을까 했지만 아직도 어두컴컴한 바깥은 그저 짙은 회색빛뿐. 이래서야 뭍인지 바다인지조차 알 수가 없었다.
 불이 꺼져 그런지 주위가 갑자기 추워졌다. 치포는 부르르 몸이 떨렸다. 사방에 여덟 개나 뚫린, 덧문도 안 달린 커다란 창으로 사나운 바람이 용서 없이 들이쳤다.
 바람결에 찝찔한 소금기가 묻어났다. 서쪽 해안 도시라더니, 바다는 바다인 모양이었다.
 치포는 킁킁 코를 벌름거리며 아래로 내려왔다. 정취는 둘째고 추워서 더 이상 있을 수가 없었다. 아래층으로 내려와 다시 방 안에 들어오자, 바루한은 아직도 나올 때 모습 그대로 자고 있었다.
 생각할수록 못마땅했다.
 누구는 오르락내리락, 덥지도 않은 날에 이마에 땀을 훔쳐 가며 일을 하는데 누구는 팔자 좋게 자고 있다니. 치포는 일부러 바루한의 다리 한쪽을 꾸욱 지르밟고 지나갔다. 끄응, 억눌린 신음이 흘러나왔지만 짐짓 못 들은 척 곧장 벽장으로 다가가 문을 열었다.
 
 셋. 체력 단련: 수련장으로 가기 전에 다리와 팔에 모래주머니를 차고 ‘밤’ 시각이 될 때까지 풀지 말 것.
 
 벽장 안에는 소박한 로브 두 벌과 안에 받쳐 입을 간단한 윗도리, 아랫도리가 서너 장씩 둘로 나뉘어 있었다. 하나는 제 것이고 하나는 바닥에 뒹구는 저자의 것이리라.
 그중 어느 것이 제 것인지 아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보기에도 두툼한 모래주머니들이 떡하니 올라가 있는 쪽이 내 것이겠지. 치포는 작게 한숨을 쉬고 팔다리에 모래주머니를 묶었다. 시험 삼아 몇 걸음 걸어 보니, 넷으로 나눠 묶어서일까, 생각만큼 무겁지는 않았다.
 ‘오늘 해야 할 일’ 가운데 가장 필요한 일이고, 가장 마음에 드는 일이기도 했다. 무슨 일로 이렇게 깡말랐는지는 모르지만 일단 빌어먹더라도 몸은 튼튼해야 할 것 아닌가.
 무거운 것을 매달고 근력을 키우는 것이 그 방법이라는 건 썩 마음에 들지는 않았지만, 지난 며칠 동안 자신이 무척이나 고민해 내린 결론일 것이다.
 치포는 모래주머니 아래 놓여 있던 옷을 입고 그 위에 로브까지 걸쳤다. 약간 헐렁하긴 했지만 그럭저럭 몸에 맞았다.
 
 넷. 체력 단련: 등대에서 내려가 바닷가에서 몰을 마흔 개 이상 캐어 먹을 것.
 
 네 번째 할 일을 떠올리자 치포의 얼굴이 절로 찌푸려졌다.
 몰이라니! 그것도 날것으로 먹어야 한단다. 우웩! 지금껏 순순히 수첩에 적힌 ‘기록’대로 해 왔지만, 이번만은 선뜻 몸이 움직이지 않았다.
 정말 스스로 남긴 기록인지 의심스러웠다. 자기가 자기에게 그런 짓을 시키다니 믿기지가 않았다.
 혹시 기록이고 뭐고, 모든 것이 누가 지어낸 이야기가 아닐까?
 하지만 필체도 필체였고, 수첩에 적어 놓은 몰을 먹어야 하는 이유가 너무나 타당했다.
 여기서는 마법적인 감수성을 드높이기 위해서 채식만 한다…고 한다. 때문에 단기간에 힘 있는 몸을 만들기 위해서는 ‘고기’를 따로 먹어 주어야 하는데, 이곳에서 구할 수 있는 유일한 ‘고기’가 몰이다. 몰은 돌에 딱딱하게 붙어 있으니 구하기도 쉽고, 수가 많아 일 년은 내내 거뜬히 먹을 수 있다.
 일 년이라는 대목에서는 절로 헛구역질이 나왔다. 그때만큼은 매일 아침 기억을 잃는다는 것을 진심으로 기뻐하고 말았다.
 자, 어쨌든 이렇게 분명한 이유가 있기에 몰을 먹으러 가야 했다!
 치포는 기세 좋게 문을 열고 계단을 따라 아래로 내려갔다. 하지만 예닐곱 계단이나 내려갔을까, 치포의 걸음이 멎었다.
 층이 없다. 가로막는 층도 없이 휑한 공간이 바닥까지 뚫려 있었다.
 그리고 몇 개인지 상상도 가지 않는 긴긴 계단이 이야기 속의 콩 줄기처럼 까마득히 아래까지 뻗어 있었다.
 “어쩐지 일이 너무 수월하다고 했어.”
 더 끔찍한 점은 이 끝없는 계단을 한 번 오르내린다고 끝이 아니라는 거다.
 하루 여섯 번 나팔을 불어야 한다 했으니, 하루에 적어도 다섯 번 이상은 오르내려야 한다는 소리다. 아래를 내려다보며 주춤주춤 한 계단, 한 계단 내려오는데 헛웃음이 절로 나왔다.
 단지 느리게 흐를 뿐, 아무리 힘들어도 시간은 간다. 안간힘을 쓴 끝에 마지막 계단을 내려온 치포는 등대 문을 열고 바깥으로 뛰쳐나왔다.
 언제 동이 텄는지 세상이 바뀌어 있었다. 치포는 그대로 털썩 바닥에 주저앉아 거칠게 쏟아지는 숨을 골랐다.
 바다는 아름다웠다. 푸른 하늘과 바다, 흰 구름과 바닷새, 노랗고 빨간 갖가지 색깔의 돛을 올린 배들. 하지만 치포는 아무것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치포의 눈은 거무죽죽한 바닷가에 못 박혀 있었다.
 “문제는 풀라고 있는 게 문제지.”
 숨 쉬기가 조금 수월해지자 치포는 호기롭게 외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하지만 다리를 내딛기도 전에 무릎이 꺾여 걸음걸이는 위태롭기만 했다.
 다행히 얼마 내려가지 않아 바위에 다닥다닥 새까맣게 붙은 몰을 찾아냈다. 썰물 때라 물이 많이 빠진 모양이었다.
 치포는 제법 큰 돌을 찾아 몰 껍질을 내리쳤다. 서너 번 돌을 내리치자 한데 붙어 있던 몰이 대여섯 개씩 속을 드러냈다. 잔껍질을 들어내고, 몰을 꺼내려는데 손끝에서 꿈틀, 아직 살아 있는 몰이 움직였다.
 아예 눈을 딱 감았다.
 그러고는 숨을 들이쉬고 단번에 몰을 뜯어내어 입 안에 넣었다.
 꿀꺽!
 일부러 씹지도 않고 그대로 삼켰지만, 입 안 가득 역한 비린내가 남았다.
 “우웩, 우웨엑.”
 반사적으로 구역질이 솟아오르자 치포는 두 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토해 내고 다시 삼킨다고 나아질 리 없다. 이미 삼킨 공이 아까워서라도 절대로 먹어야 했다.
 한참 실랑이 끝에 결국 몰을 다시 삼키기는 했지만 얼굴은 눈물, 콧물로 범벅이 된 뒤였다.
 코를 훌쩍거리며 입가에 묻은 침을 닦는데 오기가 솟았다.
 ‘에라, 모르겠다. 이렇게 된 거, 한번 제대로 먹어 주지.’
 치포는 날카로운 몰 껍질을 들고 숨도 쉬지 않고 몰 속을 파내었다. 하나, 둘, 셋, 넷…….
 벌써 열흘이 넘었다. 그사이에 숙달이 되었는지 자신이 생각하기에도 손놀림이 예사롭지 않았다.
 그렇게 미친 듯이 몰 서른아홉 개를 파내었다. 하지만 두 손 가득 담긴 몰을 본 순간, 그 하늘을 찌르던 오기가 순식간에 사라지고 말았다.
 흐물흐물 한데 엉킨 주황색 덩어리. 아직 입에 가져가지도 않았는데, 형용할 수 없이 강력한 비린내가 풍겨 나왔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손 안에 담긴 괴물체를 쳐다보고 있는데, 등 뒤에서 누군가가 소리를 질렀다.
 “어이, 많이 잡았어? 이참에 마법사는 때려치우고 어부로 나서지그래.”
 바루한이었다.
 치포의 눈이 살짝 가늘어지더니 대뜸 두 손을 들어 꿀꺽꿀꺽 몰을 삼키기 시작했다. 다른 건 다 참아도 열심히 일한 자를 놀려 대는 게으름뱅이만은 참을 수가 없다.
 한 번에 몰을 다 삼킨 후 치포는 잠깐 눈을 감고 명상을 했다.
 ‘내 목구멍을 타고 넘어가는 것은 향기로운 과일.’
 초인적인 정신력으로 몸에서 감각을 분리해 낸 뒤 훌륭히 임무를 완수했다.
 치포는 담담한 표정으로 바위를 타고 올라가 바루한의 뒤를 쫓아 뛰어갔다.
 발소리를 들었는지 바루한이 멈춰 서서 뒤를 돌아보았다. 이불에 둘둘 말려 오만상을 찌푸릴 때와 완전히 다른 단정한 얼굴이었다.
 “매일 아침저녁으로 바닷가에서 뭘 하느라 그렇게 늑장을 부리는 거야? 새 수련생들은 벌써 수련을 시작했을 텐데. 제발 너를 제자로 삼아 수련생으로 받아들인 스승님의 얼굴에 먹칠하는 짓은…….”
 바루한의 도도한 일장 연설은 제대로 끝을 맺지 못했다. 잘못했다는 듯 고개까지 숙인 채 설교를 듣고 있던 치포가 갑자기 두 손을 들어 그대로 바루한의 얼굴에다 문지른 것이다.
 바루한은 그대로 굳어 버렸다. 얼굴에서 붉은빛이 완전히 사라지는가 싶더니, 갑자기 바다를 향해 달려가기 시작했다.
 “우웩, 우웩, 우웨엑?!”
 치포는 등 뒤에서 들려오는 상쾌한 소리에 발걸음도 가볍게 수련장으로 향했다.
 등대에서 멀어질수록 사람들이 하나 둘 늘어났다. 하지만 치포에게 알은척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하나같이 없는 사람 대하듯 무심하게 스쳐 지나갔다. 그리고 멀찌감치 떨어져서야 소곤거리는 소리가 들려온다.
 “저 까마귀 깃털처럼 불길한 머리 색 좀 봐.”
 “저 퀭한 눈은 어떻고? 저 자식 옆에만 가면 이상하게 기분이 나빠져.”
 “그러게, 무아진 주제에 인사는 왜 먼저 안 하는 거야?”
 “마법사에게는 마법사의 도리, 수련생에게는 수련생의 도리, 무아진에게는 무아진의 도리가 있는 줄 모르나?”
 “저번 무아진은 좋았지. 고분고분하고, 부지런하고, 인사 잘하고. 그러니 높으신 분의 눈에 들었지.”
 소곤거린답시고 하는 소리가 들으라는 듯 또렷하게 들려왔다. 하지만 치포는 별다른 감정이 들지 않았다. 수첩에 무아진이라 무시당할 것이라고 미리 쓰여 있기도 했지만, 실제로 별 느낌이 없었다.
 자신에 대해 이것 한 가지는 수첩을 읽지 않았다 해도 절로 알게 되었으리라.
 상식을 넘어선 무, 사, 태, 평.
 치포는 담담한 얼굴로 길을 따라 걸음을 재촉했다. 다음에 해야 할 일이 자신을 기다리고 있었다.
 
 다섯. 무아진의 일: 하루 한 번 수련장 청소.
 
 길을 따라 죽 가다 보니 금세 건물 하나가 나타났다. 잘은 모르지만 평범하다고는 할 수 없는 건물이었다. 기둥도 보이지 않고, 지붕이라 할 것도 없이 꼭대기가 납작한 데다, 빠끔빠끔 쥐 파먹은 듯 제멋대로 창이 뚫려 있었다.
 유심히 건물을 살피던 치포는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건물 옆에 달린 낡은 나무 간판에 희미하게 ‘수련장’이란 글씨가 쓰여 있었다.
 문이 열려 있어 그저 들어가기만 하면 되었다. 창이 제구실을 못 하는지 볕 좋은 날인데도 건물 복도는 어두컴컴했다.
 복도 안쪽, 희미하게 드리워진 한 줄기 빛이 바로 눈에 들어왔다.
 살짝 열린 문 틈 사이로 빛과 함께 카랑카랑한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바꾸는 마법, 변화법에는 ‘안을 바꾸는 마법’과 ‘겉을 바꾸는 마법’, 다시 말해, 변성變性 마법과 변용變容 마법이 있다. 변성은 성질을 바꾸는 것인데, 예를 들면 여기 이 지팡이를 보자. 겉보기에는 그냥 나무 같지만, 물에 잘 젖지 않고 불에도 쉽게 타지 않는다. 왜냐하면 나무의 속성을 바꾸는 변성 마법을 걸어 두었기 때문이지. 형태를 그대로 두고 물질의 성격을 바꾸는 것이 바로 변성이라면…….”
 서두른다고 서둘렀지만 생각보다 오래 걸린 모양이었다. 물자루 방에는 수첩의 기록대로 오늘의 첫 수련, ‘바꾸는 마법’ 수련이 벌써 한창이었다. 하지만 치포는 그 문을 지나쳐 복도 끝까지 갔다.
 복도 끝에 있는 작은 문을 열어 빗자루며 걸레를 꺼내 들고, 살며시 물자루 방 뒷문으로 들어갔다.
 “반대로 성질은 그대로 두고 형태를 바꾸는 마법도 있지. 그것을 변용이라고 한다. 변용 마법을 쓴 예를 들어 볼 사람?”
 수련생들에게 질문을 던지던 물자루 방 마법사, 브람의 눈이 치포와 딱 마주쳤다. 하지만 그 싸늘한 눈길은 잠시도 머물지 않고 그대로 다른 수련생들에게로 흘러갔다.
 치포는 안도하며 바닥을 쓸기 시작했다. 물어본들 아는 게 있어야 대답할 것 아닌가.
 무아진은 수련생이기 전에 무아진이다. 등대를 끄고 켜고, 시각마다 나팔을 불고, 수련장 방 네 개를 모두 청소한 뒤에야 수련생 노릇을 할 수 있다.
 수첩의 기록에 따르면, 자신은 그동안 무아진 일을 하는 것만으로 벅차 수련에 제대로 참가한 적이 단 한 번도 없다고 했다.
 “그래, 도리 아츠, 대답해 보거라.”
 브람의 말에 신경 쓰이는 이름이 섞여 나왔다. 치포는 슬그머니 고개를 들었다.
 도리 아츠, 요주의 인물.
 수첩에서 읽은 내용이 떠올랐다. 과연 누가 도리 아츠일까?
 조금 긴장해서 수련생을 지켜보는데, 한 명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금발에 초록 눈, 곧은 콧날에 반듯한 이마, 자신만만한 웃음을 띠고 있는 얼굴이 요주의 인물? 아니, 어느 나라 왕자라 해도 믿을 만큼 근사한 외모였다. 석류 같은 입술에서 얼굴에 걸맞은 낭랑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변용 마법의 대표적인 예는 본격적인 전투를 하기 전에 선보이는 기세 싸움입니다. 방패나 칼, 가문의 문장을 거대화하거나, 바람의 색깔을 바꾸어 적을 겁먹게 하고 아군의 사기를 돋웁니다.”
 급히 하루의 일을 정리해야 했던 탓일까? 수첩의 설명은 일정하지가 않았다. 사소한 것을 시시콜콜하게 일러 주다가도, ‘요주의 인물, 도리 아츠’처럼 앞뒤 없이 달랑 한마디로 넘어가기도 했다.
 왜 도리 아츠를 요주의 인물이라 했을까? 치포는 이해가 되지 않았다.
 홀린 듯 물끄러미 그를 바라보고 있는데, 문득 도리 아츠의 눈길이 치포를 향했다. 뜻밖에도 눈이 마주치자 치포가 쑥스럽게 웃어 보였다. 하지만 상대는 완전히 달랐다. 똥이라도 밟은 듯 대번에 얼굴이 일그러지더니 홱 고개를 돌렸다.
 여기까지 오는 길에도 그다지 살가운 대우는 받지 못했지만, 그래도 저렇게까지 노골적으로 혐오감을 드러낸 사람은 없었다.
 치포가 어색한 표정으로 멍하니 서 있자, 물자루 방 마법사가 눈살을 찌푸렸다.
 “너는 언제까지 청소나 하고 있을 거냐. 무아진이라도 수련생은 수련생이야! 오늘도 수련 한 번 받지 못하고 등대 불을 끄러 올라갈 거냐!”
 수련장 여기저기서 쿡쿡 작은 웃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하지만 물자루 방 마법사가 미간을 찌푸리자 소란은 이내 잦아들었다.
 오늘로써 수련을 시작한 지 열흘. 새 수련생들에게 벌써 마법사를 거스를 만한 배짱은 없었다.
 “어떤 마법사들은 지금의 바꾸는 마법이 마법의 본질을 외면한다는 둥, 품위가 없다는 둥, 쓸데없는 소리를 하기도 한다. 옛이야기에나 나오는 허황된 변성 마법만을 진짜 변화법이라고 믿고 납으로 금을 만드느니 어쩌니 구름 잡는 소리나 하고 있지. 하지만 제대로 된 마법사라면 누구나 알고 있듯 바꾸는 마법, 변화법의 꽃은 변용 마법이다. 여러분이 이곳 정원을 나가 가장 많이 쓰게 될 마법도 바로 변용 마법이다. 그러니만큼 허황된 이야기에 귀 기울이지 말고 겉을 바꾸는 마법을 기초부터 철저히 닦아 나가기 바란다. 그러면 겉을 바꾸는 마법, 변용 마법에 대해 좀 더 이야기해 보자…….”
 물자루 방 마법사의 강론이 끝나고, 실습이 시작될 때까지도 치포는 수련장 구석구석을 쓸고 닦느라 바빴다.
 그리고 채 수련이 끝나기도 전에 바깥으로 나와야 했다.
 삐걱, 뒷문을 열자 그 소리에 도리 아츠가 찌릿 치포를 노려보았다.
 요주의 인물답게 치포의 행동 하나하나가 마음에 들지 않는 모양이었다. 하지만 어쩌란 말인가, 벌써 또 나팔을 불러 갈 시간이 된 것을.
 치포는 작게 한숨을 쉬었다. 이러니 수련을 제대로 할 수 없을밖에.
 뭐니 뭐니 해도, 가장 급한 것은 체력이었다. 등대 계단을 한달음에 오르내릴 만큼 힘이 붙으면 시간이 훨씬 절약될 것이다.
 많이 움직여 그런지 몰을 그렇게나 먹었는데도 금방 허기가 졌다.
 치포는 돌아가는 길에 식당에 들러, 게 눈 감추듯 허겁지겁 빵과 오니 열매를 집어 먹었다.
 그러고는 헉헉거리며 등대를 향해 달려갔다. 계단을 오르기 시작하면 너무 쉽게 지칠 테니, 평지를 갈 때 미리 시간을 벌어 놓으려는 계산이었다.
 문득 자신이 왜 이렇게 뛰고 있을까 싶었다.
 이렇게까지 해서 정원에 남아 있어야 하는 걸까? 하긴, 매일 아침 기억을 잃는 주제에 어디 간들 편히 잠들 수 있을까?
 좀 불편하긴 해도 등대는 비교적 안전한 장소였다. 이 괴상한 병이 나을 때까지는, 제 한 몸 지킬 수 있는 체력이 생길 때까지는 몸을 사리는 수밖에 없었다.
 등대 문을 열자 비비 꼬인 계단이 치포를 기다리고 있었다. 계단은 기억보다 훨씬 높았다. 치포는 잠시 그대로 서서 헐떡이는 숨을 추스르고는 계단을 오르기 시작했다.
 위를 보지 않고, 오로지 바로 앞 계단만 보고 거기까지 몸을 옮기는 데 온 힘을 다했다. 다행히도 아침나절 한 발짝도 더 못 걷겠다 싶을 만큼 후들거리던 다리가 제법 제 구실을 해 주었다.
 하지만 꾸역꾸역 올라가 마침내 꼭대기에 다다랐을 때, 치포는 거의 바닥을 기고 있었다. 팔다리에 달린 모래주머니를 떼어 내고 싶은 생각이 열두 번도 더 들었지만 꾹 참고 끝까지 올라왔다.
 치포는 나팔이 있는 곳으로 엉금엉금 기어가며 자조적인 웃음을 흘렸다. 이 투철한 책임감을 보라. 지나치게 느긋하긴 해도 나쁘지 않은 성격이다.
 생김새나 배경은 보잘것없지만, 끈기 있고 책임감도 강하니 최소한 지난 세월을 망나니로 살지는 않았으리라.
 나팔 옆에 달린 시계를 본 치포는 그대로 바닥에 드러누웠다. 숨 돌릴 시간은 남았다.
 네 활개를 펼치고 누워 있는데 서늘한 바닷바람이 코끝을 스쳤다. 깨끗하고 찝찔한 냄새에 정신이 맑아지는 것 같았다.
 잠시 후 그림자가 아침 눈금으로 바짝 다가서자, 치포는 후들거리는 다리에 힘을 주고 몸을 일으켰다. 나팔을 불자 부드러운 소리가 울려 퍼졌다.
 숨이 고르지 않아 오래 불지 못했지만 소리는 그가 입을 뗀 뒤에도 저 바다 너머로 부드럽고 길게 뻗어 나갔다.
 눈길이 절로 소리를 따라 흘렀다. 공간을 가득 채운 소리가 창밖으로 퍼져 나갔다. 그러고 보니… 아아! 세상에, 덧문도 없이 뻥 뚫린 창에 바다가 가득 담겨 있었다.
 끝없이 펼쳐진 세계의 끝, 서쪽 바다가 눈 안 가득 들어오자 치포의 가슴이 뭐라 표현할 수 없는 감정으로 넘실댔다.
 문득 망연히 바다를 바라보던 치포가 화들짝 정신을 차렸다. 서두르지 않으면 오늘 하루도 제대로 된 수련 한 번 못 받고 끝나 버릴 것이다.
 
 여섯. 수련생의 일: 수련에 참가하기 위해 최선을 다할 것. 이상 끝.
 
 가진 것 없는 자에게 능력만큼 귀중한 것은 없다. 애를 쓴다고 과연 얼마나 대단한 능력이 주어질지는 모르지만 이대로는 안 된다.
 나아지는 것이 없다면 내일도 그다음 날도, 또 그다음 날도, 오늘처럼 다람쥐 쳇바퀴 돌듯 등대를 오르락내리락하는 것으로 하루를 보내고 말리라.
 빨리 몸을 움직여야 했다.
 청소가 끝난 것은 물자루 방 하나뿐, 나머지 방들은 손도 대지 못했다. 아침에는 별것 아니라 여겼던 모래주머니가 묵직하게 몸을 내리눌렀다.
 마음 한구석에서 조그맣게 유혹의 소리가 들려왔지만 치포는 고개를 흔들어 털어 냈다.
 내려가는 것이니 올라올 때보다는 수월하리라.
 
 
 
 네 가지 마법
 
 
 그래서 다시 열일곱째 날, 등대, 늦은 오후
 
 허겁지겁 등대에서 내려왔을 때는 이미 수련이 모두 끝났는지 수련장이 텅 비어 있었다.
 부리나케 달려와 청소부터 했지만 결과는 썩 좋지 않았다.
 아직도 청소를 못 한 방이 하나 남았다. 치포는 작게 한숨을 쉬었다. 그래도 사람이 없으니 거치적거리는 것이 없어 빨리 끝나기는 할 것이다.
 수련장에는 네 개의 방이 있었다. 방마다 정해진 마법사가 있고, 그가 어떤 마법을 가르치느냐에 따라 방 이름이 달랐다.
 치포가 오전에 청소한 ‘물자루 방’은 물의 마법사 브람의 방으로, 바꾸는 마법을 수련하는 곳이었다. 마법사 브람은 새 수련생의 관리를 맡은 마법사로 수첩의 기록에 따르면 ‘자주 보게 될 사람’이었다.
 ‘물자루 방’ 외에 ‘부싯돌 방’, ‘쥘부채 방’, ‘씨앗 방’이 있었는데, 부싯돌 방은 불의 마법사 롤이 ‘쫓는 마법’을 가르치고, 쥘부채 방은 바람의 마법사 알하무드가 ‘움직이는 마법’을 가르쳤다.
 청소가 이렇게 오래 걸린 것은 모두 쥘부채 방 때문이었다.
 움직이는 마법을 수련하는 방이라 그런지 크기가 다른 방의 다섯 배는 되었다.
 게다가 수련 중에는 크고 작은 물건들이 마구 날아다녀 피해 다니느라 청소하기가 보통 골치 아픈 게 아니었다.
 먼지를 쓸어 모은 곳에 모자가 떨어진다든지 하는 일이 다반사였지만, 물건이 저 혼자 날아다니는 광경은 굉장했다.
 상급 수련생들은 몇 마디 주문을 외는 것만으로 어렵지 않게 책이나 지팡이 따위를 움직였다. 청소하면서 몰래 훔쳐보는 걸로는 도무지 어떻게 움직이는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치포는 청소 도구를 챙겨 들고 마지막 남은 씨앗 방의 문을 열었다. 다행히 씨앗 방은 쥘부채 방처럼 크지 않았다. ‘보는 마법’은 보기만 하면 되는 건지 큰 자리가 필요하지는 않은 모양이었다.
 방 안을 두리번거리던 치포는 빗자루를 들어 뒤에서부터 바닥을 쓸어 가기 시작했다. 저녁 나팔을 불기 전에는 몰도`─`우웩`─`뜯어 먹어야 했기에 시간이 많지 않았다.
 그런데 그때, 갑자기 벌컥, 방문이 열렸다. 수업이 모두 끝난 게 아니었나? 멀뚱멀뚱 문을 바라보고 있는데, 수련생 셋이 안으로 들어왔다. 치포는 내심 고개를 갸웃거렸다.
 ‘보라색 허리띠?’
 치포 같은 새 수련생은 초록색, 초급 수련생은 노란색, 중급 수련생은 빨간색, 고급 수련생은 파란색 허리띠를 매는데, 저들처럼 보라색 허리띠를 맨 수련생들은 처음 보았다.
 서로 주거니 받거니 이야기를 나누며 안으로 들어오던 사람들 가운데 한 명이 치포와 눈이 마주쳤다. 빳빳한 갈색 머리가 삐죽삐죽 사방으로 솟은, 유난히 광대뼈가 튀어나온 남자였다.
 “아직까지 청소야? 무아진이 고생이 많네.”
 낯선 사람이 말을 걸자 치포는 잠깐 뭐라 말을 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수첩에는 말을 거는 것은 바루한과 스승 고렌뿐이라 했는데, 설마 저자가 자신의 스승 고렌인 걸까? 아니, 그럴 리 없다. 마법사라고 하기에는 너무 젊고, 수첩에 나온 고렌의 모습과는 딴판이었다.
 그렇다면 누구일까? 누구든 간에 묻는 말에 대답을 하지 않는 건 예의가 아니다. 치포는 고개를 끄덕였다.
 “응, 그래도 이 방만 청소하면 끝이야.”
 웃음까지 떠올린 싹싹한 대답이었건만, 뭐가 마음에 들지 않는 걸까? 순간 사람들의 말소리가 잦아들고, 삐죽 머리가 눈살을 찌푸렸다.
 “과연, 대단하신 고렌 님께서 직접 거두셨으니 평범한 무아진은 아니시라는 건가?”
 삐죽 머리의 빈정거림을 시작으로, 뭐라 변명할 틈도 없이 셋은 사이좋게 번갈아 가며 말을 이어 가기 시작했다.
 “그래 봤자, 무아진인데.”
 “무아진 중에서 이렇게 어리바리한 놈은 처음이라던데.”
 “새 수련생을 받은 지가, 어디 보자… 벌써 열흘 넘게 지났는데 수련을 한 번도 못 했다지?”
 “원을 아끼시는 고렌 님의 마음 씀씀이에 감사해야 하는 건가? 무아진 노릇 할 사람이 없으니 이렇게 제자까지 내놓으셨잖아?”
 “이왕 내어 놓을 거면 그나마 좀 나은 큰 제자를 내놓으시지. 바루한 녀석은 그래도 제법 똑똑하잖아. 원 참, 수련장 청소만으로 하루 온종일을 보내는 미련한 녀석을 내놓으셨으니… 쯧쯧! 등대의 화덕이나 제대로 간수할까, 나팔 부는 시간이나 놓치지나 않을까,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야.”
 “쯧쯧, 너는 어찌 그리 고렌 님의 깊은 속을 헤아리지 못하는 게냐. 지난번 무아진처럼 겨우 몇 년 무아진 노릇을 하다가 떠나 버리면 번거롭지 않겠어? 저 녀석이라면 아마 평생토록 정원에 남을 게야.”
 이어지는 조롱 속에 치포가 끼어들 틈이 없었다. 그때, 이제까지와는 다른 싸늘한 목소리가 문턱을 넘어왔다.
 “꼴사나운 짓거리는 그쯤 하시지. 여럿이 하나를 둘러싸고 씹어 대는 게 최고 수련생이라니, 부끄러운 줄 알아!”
 언제 들어온 걸까, 바루한이 문 앞에 서 있었다. 처음 본 수련복 차림에다 허리에는 다른 이들처럼 보라색 띠를 감고 있었다.
 바루한이 걸어오자 문 가까이에 몰려 있던 이들이 양옆으로 갈라져 길을 텄다. 바루한은 그들 누구에게도 눈길 한 번 주지 않고 가까이에 놓인 의자에 대충 몸을 기댔다.
 이불을 둘둘 말고 코를 골던 그 사람이랑, 몰 즙을 온 얼굴에 묻힌 채 사색이 되어 달려가던 그 사람이랑, 지금 눈앞에 있는 저 사람이 정말 같은 사람이라고? 믿기지 않는 일이었다.
 지금의 바루한은 고까운 눈으로 봐도 꽤나 멋있는 모습이었다.
 한창 떠들어 대던 셋은 바루한이 자리에 앉을 때까지 아무 말도 못 하고 있다가, 그제야 속이 끓어오르는 듯 뒤늦게 투덜댔다.
 “고렌 님이 아무리 대단하…….”
 그때, 무리 가운데 하나가 다급히 외쳤다.
 “고렌 님이 오신다.”
 종알거리던 소리가 그대로 멎었다. 그 모습에 바루한이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이렇게도 뚜렷한 흙의 기운을 읽은 자가 최고 수련생 셋 중 겨우 하나라, 정말이지 안타까운 일이야.”
 바루한의 말이 끝나자마자 기다렸다는 듯 노랫소리가 들려왔다.
 
 화를 내시게. 심각하고, 심각하고, 심각하신 어르신들. 크게 웃어라. 어리고, 어리고, 어린 아이들. 나는 그대들을 위해 재미나고, 재미나고, 재미난…….
 
 흥얼거리는 소리가 점점 가까워지더니 잠시 후 문이 열리고 뾰족모자를 쓴 마법사가 들어왔다. 치포의 눈이 못이라도 박힌 듯 그를 따라 움직였다.
 압둘 칼리바의 정원을 이끄는 대륙 최고의 마법사…라는, 흙의 마법사 고렌 하이마. 그 앞에 붙는 수식어가 아니라 해도, 자신의 스승이 어떤 사람인지 너무나 궁금했다.
 아무렇게나 걸쳐 입은 로브, 제멋대로 길어 나온 희끗희끗한 머리, 바루한의 스승이라기에 어딘지 그와 닮은 서늘한 모습을 상상했는데 분위기가 완전히 달랐다. 하지만 흰머리만 아니라면 나이를 가늠할 수 없을 만큼 그럴듯한 얼굴은 역시 그 스승의 그 제자라고나 할까?
 고렌은 싸늘하게 식은 씨앗 방의 분위기를 알아채지 못한 듯 싱글거리며 말을 꺼냈다.
 “자, 오늘은 히란 수업이다. 오랜만에 ‘세세히 보는 법’에 대해 공부를 좀 하자꾸나. 시간이 모자라 하는 수 없이 중급 수련생부터는 히란 과정을 뺐지만, 안타깝기 짝이 없는 노릇이야. 마법의 가장 기초는 보는 마법, 보는 마법의 기초는 히란, 다시 말해 히란은 마법의 기초 중에 기초지. 별을 보는 법도, 기후의 변화를 짐작하는 것도, 사람의 얼굴을 보는 법도, 땅 모양을 보는 것도, 모두 히란에서 시작한다. 히란이 얼마나 중요한 수련인지는 몇 번이나 강조해도 아쉬운데, 수련을 어느 정도 하면 히란을 모두 안다는 듯 한쪽에 밀어 놓고 수련할 생각도 안 해. 성을 쌓을 주춧돌을 개똥처럼 취급하는 것도 유분수지.”
 고렌은 열성적으로 ‘히란’이란 수련의 중요성을 외쳤지만 방 안 분위기는 심드렁하기만 했다. 모두 지루한 기색을 감출 생각도 하지 않았다.
 바루한마저도 한눈을 팔고 있었으니 알 만하지 않은가?
 그런 방 분위기를 ‘보는 수련’을 시키는 고렌이 보지 못할 리 없다.
 고렌의 한쪽 눈썹이 올라갔다.
 “이런 못된 녀석들 같으니라고. 기껏 최고 수련생으로 만들어 놓았더니, 수련에 정진할 생각은 않고 간만 커져서는 스승의 말을 귓등으로 흘려들어? 그래서 납득을 못 하겠다는 거냐? 그렇게 설명을 했는데도 보는 수련을 하찮게 여겨? 좋다. 정 그렇다면, 이 방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아맞혀 보거라. 만약 제대로 맞힌다면 앞으로 정원을 나갈 때까지 보는 수련은 하지 않게 해 주마. 단, 이십 년 이상 지난 일을 알아맞혀야 합격이다.”
 바루한은 설레설레 고개를 저었다. 십 년이라면 모른다. 다들 최고 수련생이니만큼 어릴 때 원에 들어와 지금까지 지낸 시간이 길게는 칠팔 년에 이르니 풍문에 들은 이야기라도 주워섬길 수 있다. 하지만 이십 년이라니.
 초라한 명성과는 달리 원의 역사만큼은 제법 길어 백 년 남짓이나 되었다. 하지만 이 수련장만은 지은 지가 십 년이 겨우 넘었다고 한다.
 그 전에는 마법사의 감수성을 단련하고, 자연의 기운을 직접 받아들여야 한다는 구실로 그냥 한데서 수련을 했다고 한다.
 그때 수련한 마지막 세대가 지금 원의 네 마법사들이었고, 이후 명맥이 끊길 정도로 수련생이 줄어들자, 하는 수 없이 세우게 된 것이 지금의 수련장인 것이다.
 바루한은 도무지 스승의 의도를 짐작할 수가 없었다. 장로들조차 갈피를 못 잡는 그 마음을 무슨 수로 읽을까만, 자그마치 이십 년 전의 일을 설마 누구 하나라도 맞힐 수 있다고 정말로 믿고 있는 걸까? 아니면 그저 시위를 하는 걸까? ‘보는 마법을 제대로 수련하면 길고 긴 시간의 장벽도 문제될 것 없다!’라고?
 하지만 이 자리에 모인 이들은 아무것도 모르는 새 수련생이 아니라, 묵을 만큼 묵은 최고 수련생이다. 의도가 무엇이건 고렌의 변덕에 일일이 장단을 맞출 만큼 순진하지 않았다.
 “달과 해가 볕을 내리쬐고.”
 “밤과 낮이 찾아오고.”
 “바람도 불어 지나가고.”
 “때때로 비도 내렸겠지요.”
 앞서거니 뒤서거니 심드렁한 대답이 이어지자, 고렌은 아무 말 없이 품 안으로 손을 가져가, 마술 막대를 꺼내 휘저었다.
 그제야 모두의 표정이 굳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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