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장
한음지체(寒陰肢體)
강한 음기를 품고 태어나 한랭한 무공을 익히는 데 특화된 체질.
백씨 성을 물려받은 이들은 예외 없이 이 한음지체를 타고났다.
먼 과거 중원 무림에서 퇴출되어 멸문 직전까지 내몰렸던 그들이 혹독한 북해에서 명맥을 유지할 수 있던 이유다.
북해 전역에 가득한 음기와 음한기공을 바탕으로 한 가전 무공, 그리고 한음지체가 조화롭게 맞물려 그들의 위세는 나날이 높아져만 갔고.
당대의 북해빙궁주 백소천에 이르러서는 새외에서 그들을 당할 세력을 찾을 수 없게 되었다.
중원 진출이라는 가문의 숙원을 이룰 순간이 목전까지 드리운 것이다.
유일하고도 중대한 문제가 하나 있다면 체질의 부작용으로 대가 이어질수록 후사를 보기가 힘들어졌다는 것이었으나,
다행히도.
“사내아이입니다, 경하드리옵니다. 궁주님!”
백소천은 늘그막에나마 건강한 후사 역시 볼 수 있었다.
‘내 대에서 선조들의 한을 풀 수 있겠구나.’
이제는 정말 나아가는 일만 남았다고 생각했다.
저 늙은 의원이 입을 떼기 전까진.
“···지금 양기라고 하셨소.”
백소천이 되물었다.
목소리는 잔뜩 갈라져 있었으나, 표정만큼은 궁을 둘러싼 호수만큼이나 잔잔했다.
“바로 들으셨습니다. 열공을 대성한 절세 고수라 해도 감당키 어려울 극양지기가 소궁주의 혈도를 녹이고 있습니다.”
얄미울 정도로 덤덤히 늘어놓는 의선의 말에 백소천은 가만히 눈을 감았다.
어둠 위로 벌써 한 달째 정신을 놓고 있는 아들의 이목구비를 그렸다.
칠순을 목전에 둔 백소천의 것과는 다르게 윤기 흐르는 백발과 청정빙호(淸淨氷湖)를 닮은 짙푸른 눈동자는 틀림없는 가문의 상징이었다.
한데 어찌.
‘···양기 따위를 품었다는 말이냐.’
빙궁주가 상념에 잠기거나 말거나 의원은 부연했다.
“구양절맥입니다.”
천하에 어깨를 견줄 이가 단 둘뿐이라는 명의의 진단이었다. 믿지 않을 요량이 없다.
“절맥증을 앓는 아이는 열이면 열, 채 다섯 해를 넘기지 못하고 죽는다고 알고 있는데.”
그러나 긴 침묵 끝에 나온 것은 현실을 부정하는 말이었다.
“동룡, ···소궁주는 올해 여덟이오.”
의원이 아니라 닥친 현실을 믿기가 힘들었다.
“천운이라고밖에 설명할 길이 없겠습니다. 이 땅에 가득한 음기가 양기를 억제하고 있었다고 볼 수밖에요. 전해 듣기로는 소궁주가 최근에 무공을 익히기 시작했다던데 맞습니까?”
흔들리는 청안을 본 의선이 고개를 끄덕였다.
“단전에 내공이 깃들며 덩달아 양기도 기세를 키운 것이겠지요.”
“······내가 무얼, 어찌해야 하는 것이오?”
“절맥증은 완치가 불가능한 병입니다. 세맥이 눌어붙고, 기경팔맥이 완전히 막히게 되면 소궁주는 죽습니다. 제 짧은 식견으로는 앞으로 두 해를 넘기기 쉽지 않─”
─까득
빙궁을 이루는 가장 거대한 기둥에 금이 가는 소리가 늙은 의원의 말을 끊었다.
“의선.”
“말씀하십시오, 궁주.”
“내 이성을 지키기가 버겁소.”
서릿발 같은 눈동자를 마주한 의원이 흠칫 굳었다.
“말을 가려하시는 게 좋겠소.”
빙궁주의 몸에서 뿜어져 나온 기세에 의선의 등줄기를 타고 흘러내리던 땀방울이 얼어붙었다.
‘···동토에 용이 웅크리고 있다더니.’
천하제일을 논할 때면 항시 이름을 올리는 무림맹주와 비견해도 전혀 뒤처지지 않을 수준이 아닌가.
얼어붙은 의선을 보던 백소천이 눈가를 쓸었다.
그제야 숨통을 옥죄이던 냉기가 흩어졌다.
“···명심하지요.”
한 차례 침묵이 이어지고, 무언가 골똘히 생각하던 의선이 입을 열었다.
“하나, 병의 진행을 늦출 수는 있을 듯싶습니다. 이곳 북해에는 강한 음기를 품은 영물과 약초들이 즐비하다 들었습니다만.”
그 말대로 북해를 구성하는 대부분의 동식물은 음기를 품고 있다.
천년설삼과 같은 영초부터 귀한 빙정에 이르기까지 그 종류도 다양했다.
“외열을 한기로 식히는 동시에 영약으로 내부의 양기를 다스릴 수 있다면 호전을 기대해봄직합니다. 소궁주의 침소를 만년한철로 꾸리는 것도 도움이 될 것이고요.”
같은 양의 황금으로도 구하기 힘들다는 만년한철로 꾸민 방이라니!
누군가 들었다면 기함할 만한 말에도 백소천은 담담히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노년을 앞두고 맞이한 자식, 혹여 암중쟁투에라도 휘말릴까 거사까지 미루어 가며 숨죽여 키웠다.
살릴 수만 있다면야 천년 묵은 소백산 은호의 내단은 물론이요, 만년 묵은 설삼일랑 구해 보이지 못할까.
즉시 빙궁의 보고에 쌓아둔 영약을 모조리 찾을 것을 명한 백소천이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물었다.
“무공을 계속해서 익히도록 한다면 어떻겠소? 알려져 있다시피 본가의 무공은 음한기공을 바탕으로 하고 있소.”
“흐르는 용암에 얼음을 떨어뜨리는 격입니다.”
“······.”
“몸이 버티지 못할 겁니다. 용암을 천천히 식혀 굳혀 유속을 늦추는 것이 현재로서는 최선입니다.”
“하면.”
아비의 망설임이 깊어졌다.
“하면, 만일 북해를 벗어나면 어찌 되겠소?”
의선의 단호한 고갯짓을 본 백소천의 얼굴에 짙은 그늘이 드리웠다.
이미 중원 진출을 위한 물밑 작업이 상당 부분이 진행된 상태였다.
현실적으로 이 이상 거사를 미루는 것은 힘들었다. 중원으로 나아가는 것으로 끝나는 일이 아니기에 그랬다.
천부지토(天府之土)에 단단히 뿌리 내린 거목과 우뚝 선 거석을 쪼개고, 다져 기반을 마련하는 데에만 해도 적잖은 시간이 걸릴 터.
기껏 힘들게 병을 털고 일어났는데 딛고 설 땅이 흔들린다면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백소천의 시선이 감각이 거의 사라진 제 손을 향했다.
거뭇하게 물든 손끝이 눈에 들어왔다.
가전 무공인 빙천수라공의 부작용이었다.
“···필요한 모든 물품은 무슨 수를 써서라도 구해드리겠소. 3년, 그 안에 소궁주가 살 수 있는 방법을 찾아주시오. 내 이렇게 부탁하오.”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
그날을 기점으로 소궁주 백동룡의 삶은 급격하게 변했다.
천년설령과.
만년설삼.
소백산 은호의 내단.
일각고래의 뿔 등.
궁에 갇히다시피 하여 귀하다는 온갖 영약을 섭취하고, 그 기운을 모두 단전에 갈무리했다.
“소궁주가 은연중에 발산하는 기도가 숙련된 무인의 그것이라 해도 믿을 정도로 사납더이다.”
품은 공력에서 발출되는 기세며 정순함 따위가 지학(志學)을 앞둔 아이의 것으로 보기 힘들 정도.
“심법의 경지가 얕아 영약의 기운을 온전히 흡수하지 못했을 것인데, 당최 어찌 된 영문인지···.”
백소천이 은근한 기대를 담아 중얼거리자, 의선이 쓰게 웃으며 콩깍지를 벗겨냈다.
“제가 살핀 바로도 공력의 양 자체는 그리 많지 않았습니다. 실제로 소궁주께서 익힌 빙백신공의 경지도 아직 일성에 불과하고요.”
그러자 백소천이 머쓱한 미소를 머금었다.
“크흠, 아직 일성에 이르지 못했다오.”
“···그랬습니까?”
침묵이 흐르던 가운데 의선이 덧붙였다.
“짐작이나 소궁주가 받아들인 음기와 극양지기의 반발로 인한 부가적인 효과가 아닐까 싶습니다. 이를테면 활활 타오르는 불에 물을 부었을 때 피어오르는 수증기와 같은···. ”
체면을 차려주기 위함인지 넌지시 돌려 말했으나 백소천은 단박에 무슨 말인지 알아들었다.
겉보기에만 그럴싸할 뿐이니 괜한 기대일랑 접어두라는 이야기였다.
‘욕심이 과하면 독이 되는 것을···.’
백소천은 내심 고개를 치켜들던 기대심을 고이 접어놓고 본론으로 들어갔다.
“하면 속은 어떻소? 이번에는 좀 더 차도가 좀 있겠소? 이번에 가져온 빙정(氷晶)의 순도가···.”
그러나 그들의 모든 노력은 동룡의 몸속에 깃든 극양지기를 겨우 억누르는 것에 그칠 뿐이었다.
“이 이상 내공이 늘어나면 소궁주의 목숨을 장담할 수 없습니다.”
백소천은 몰라보게 자란 아이를 데려다 앉혀놓고 말했다.
“앞으로의 무공 수련을 일체 금하겠다. 소궁주는 정양하며 몸을 보전하도록.”
“지금으로서는 현상을 유지하는 편이 좋겠습니다 소궁주.”
백소천이 통보했고 의선이 보충했다.
“······.”
한 지붕 아래에서 여섯 해를 지내서일까, 노인 둘이서 죽이 곧잘 맞았다.
“체력 단련조차 못 하게 하시더니, 이제는 저더러 운기조차 하지 말라고 하시는군요.”
“무공을 모르는 편이 죽는 것보다는 낫다.”
당초 기획했던 기한의 배가 흘렀지만 의선도, 백소천도 북해를 떠날 생각을 하지 않고 있다.
오롯이 그 자신 때문이라는 것을 동룡은 잘 알고 있었다.
북해의 음기를 받잡고, 귀하디귀한 영약을 뭉텅이로 밀어 넣고도 ‘겨우’ 양기를 억누르는 것에 그쳤기 때문에.
“북해 백가는 무가입니다, 아버지. 겨우 심법만 익힌 가주라니요, 초식 한 구절 모르는 빙궁주라니요, 이보다 우스운 것이 어디 있답니까!”
북해의 척박한 환경은 백씨 가문을 제외한 이들에게 있어 한시도 가혹하지 않은 적이 없다.
먼저 중원으로 향한 부궁주는 물론이고, 아직 북해에 남아있는 각 속가의 수뇌들과 궁도들의 불만 역시 해가 지날수록 깊어지고 있었다.
아버지의 그늘이 사라진 뒤에도 과연 빙궁주의 권위는 이어질 수 있을까.
동룡은 나약한 군주의 말로를 근거로 들며 아비의 미련을 끊고자 했다.
“네 목숨보다 중한 것은 없다. 빙천수라공은 네 자식이 이을 것이다.”
“저는 그저 대가 끊기지 않게 이을 다리에 불과합니까?”
“···말을 가려 하거라.”
“기름진 땅에서 나고 자란 화초들의 웃음거리가 되느니 차라리 죽겠습니다.”
“백동룡!”
동룡은 노호성을 끄집어낸 뒤에야 더 깊은 본심을 드러냈다.
“아비의 발목을 잡는 아들이 되고 싶지 않습니다.”
결국 아비는 늦둥이 자식의 고집을 꺾지 못했다.
“···일이 마무리 되는대로 데리러 올 것이다. 부디 그때까지만 버텨다오.”
그렇게 백동룡은 북해에 남아 폐관에 들었다.
만년한철로 이루어진 빙굴에서 셀 수 없이 소주천을 반복했다.
몸이 타는 듯한 통증과 숨결마저 얼릴 듯한 냉기 속에서 의지는 몇 번이고 꺾였다가 재립하길 반복했다.
정신없이 휘몰아치는 통증의 해일 속에서 부여잡은 동아줄 하나는 아버지의 말이었다.
“버티거라. 반드시, 너를 데리러 올 것이다.”
두 해가 흘렀다.
밤이 되면 골수까지 얼릴 듯한 한기가 스며들고, 낮이 되면 몸속의 액체란 액체는 모두 증발 시킬 듯한 열기가 깨어났다.
통증은 격통이 되었고, 깨어 있는 날보다 정신을 잃는 날이 많아졌다.
또 두 해가 흘렀다.
상극의 두 기운은 조화를 이루기는커녕 더욱더 미쳐 날뛰며 내부를 진탕으로 만들기 일쑤였다.
달마다 달인 탕약과 함께 벽곡단을 채워놓고 가던 시비의 발길이 끊어진 것은 그즈음이었다.
조금 더 긴 시간이 흘렀다.
만년한철로 틀어막힌 빙굴의 입구는 마지막 기억보다 좀 더 빛이 바랜 듯했다. 동 난 바구니를 채운 것은 벽곡단이 아니라 두텁게 깔린 서리였다.
이제 더 이상 고통스럽지도, 하물며 배가 고프지도 않았다.
‘죽는 건가.’
직감하는 와중에 드는 감정은 야트막한 원망과 그 곱절쯤 되는 후회였다.
‘아무도 모르는 설산에서, 아무도 모르게, 이렇게.’
또한 그 곱절쯤 되는 그리움이 있었다.
‘아버지.’
그 모든 것을 아우르는 아쉬움이 있었다.
가을이면 지평선 끝까지 금빛이 너울거린다는 논밭과 싱그러운 녹음이 우거진 수해(樹海)를 직접 보고 싶었다.
무엇보다 그 비옥한 땅에 우뚝 선 강호 무림을 느껴보고 싶었다.
‘젠장······.’
동룡의 의식이 한없이, 한없이 침잠했다.
***
동면에 든 용이 깨어난 것은 그로부터 아주 오랜 시간이 흐른 뒤였다.
강산이 몇 번이나 뒤바뀌고,
경지 높은 무가가 자취를 감추고,
강호 무림의 구조가 바뀔 만큼 오랜 시간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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