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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화

2024.09.20 조회 3,709 추천 44


 1화.
 
 수십 개의 위패가 가지런히 놓인 협탁 아래, 일흔이 훨씬 넘어 보이는 흑의인이 머리를 조아리고 벌벌 떨고 있었다.
 
 그의 앞에서 옥관을 한 남자가 하얀 장포를 입은 채 서서 혀를 찼다. 나이를 짐작하기 어려운 외모에, 눈빛으로 사람도 죽일 수 있을 것 같은 그는 속세를 초월한 듯 범상치 않아 보였다.
 
 “가문에 쓸 만한 놈이 그동안 한 놈도 나오질 않았던 것이냐. 수행을 위해 떠날 때 내가 남긴 것이 결코 적지 않았거늘 집안 꼴이 어찌 이리되었다는 것이냐.”
 
 “5대 조부님께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자손이 불민하여 심려를 끼쳐 드리게 되어 송구할 따름입니다.”
 
 “되었다. 이제 와서 그런 이야기를 해서 무엇 하겠느냐. 나도 상황이 좋지 않아 해줄 수 있는 것이 많지 않다. 수선계(修仙界)의 상황이 좋지 않아 결단기 수사인 나도 내일을 장담하기 어려운 형편이다. 저물대에 법보와 단약이 있는데 원수에게 뺏기느니 몇 가지를 너에게 남기겠다.”
 
 그 말에 흑의인이 저도 모르게 고개를 들었다. 그러자 그의 5대 조부가 저물대에서 검을 꺼내주었다. 그렇게 기다란 것이 저물대에 어떻게 보관되어 있었던 건가 하며 흑의인이 두 손을 내밀어 공손하게 받았다.
 
 검을 받아 든 순간 흑의인은 손바닥에 타서 눌어붙는 것 같은 고통에 비명을 질렀다. 깜짝 놀라 검을 던지려 하자 날카로운 목소리가 들렸다.
 
 “검을 던지면 네놈의 목을 칠 것이다!”
 
 결국 흑의인은 눈을 질끈 감고 그 고통을 다 견뎌야 했다. 그렇게 얼마쯤 지나자 통증이 서서히 사라졌다.
 
 흑의인은 호기심에 자신의 손바닥을 살폈다. 그러자 희한한 낙인 같은 것이 손바닥에 새겨져 있었다.
 
 “네가 죽으면 너를 계승하는 자의 손으로 그것이 옮겨질 것이다. 그리고 손에 그 표식이 있는 자만이 이 검을 효용대로 사용할 수 있을 것이다. 이 검으로 사람을 베면 그자는 죽은 후에 너희의 심복이 되어 너희를 위해 싸울 것이고 웬만한 고수는 그것들을 죽이지 못할 것이다.”
 
 “강시···를 만드는 검입니까, 5대 조부님?”
 
 흑의인이 묻자 5대 조부가 웃었다.
 
 “강시라··· 범인이 이해하기에는 그 편이 쉽겠구나. 그래, 강시를 만드는 검이라고 이해하도록 하여라.”
 
 “이 검으로 죽이기만 하면 강시를 무한으로 만들 수 있습니까?”
 
 흑의인의 눈이 탐욕으로 일렁거렸다.
 
 “법보를 사용하는 것에는 한계가 따른다. 그러나 법력을 아끼지 않고 만든 것이라 한 시대를 호령할 정도는 될 것이다. 만약 네가 정한 후계자가 이 검을 사용하기를 원하지 않는다면 이 검의 효용은 다하게 된다. 그러니 후계자를 정할 때 신중하게 해야 한다.”
 
 “예, 5대 조부님.”
 
 “이 검으로 인해 많은 사람의 운명이 바뀌게 될 것이라 제한이 따를 것이다. 이 검이 세상에 나가 혼란을 야기시킨다면 나와 대척점에 있는 자 중 누군가 이 검에 대항하기 위해 다른 공법을 펼칠 수도 있다.”
 
 흑의인은 그 말을 이해하지 못해 5대 조부를 보았다.
 
 “그것이 무슨 말씀인지요, 5대 조부님?”
 
 “이 검으로 인해 너 외에 다른 자도 이익을 얻게 될 수도 있다는 것이다. 이 검이 가진 원래의 효용과 별개로 말이다.”
 
 흑의인은 여전히 어리둥절한 얼굴이었지만 5대 조부도 더 이상 설명을 해주지는 못했다. 자기도 그런 가능성이 있을 거라는 것 정도로만 알 뿐, 그것이 어떤 방식으로 나타날지는 몰랐기 때문이었다.
 
 “이 검을 사용해서 생기는 일에는 일절 관여치 않을 것이고 이 검을 내가 주었다는 것도 인정하지 않을 것이니 이후에는 내 도움을 바라지 말거라. 이 검을 내가 주었다는 말도 하지 않는 것이 좋을 것이다. 네깟 놈이 그리 말한다고 해봐야 내가 해를 입지는 않을 것이다만 말이다.”
 
 “그런 일은 결코 없을 것입니다, 5대 조부님.”
 
 흑의인이 깊이 고개를 숙인 후에 다시 고개를 들었을 때 5대 조부는 홀연히 사라져 더 이상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
 
 금영상단이 정확히 무엇을 하는 곳인지 제대로 아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그곳에서는 수많은 일이 가능했고 웬만한 물건은 다 살 수 있었다. 그래서 많은 곳에서 금영상단을 이용했다. 금영상단에 일단 물건이 있기만 하면 그들은 다른 곳의 3분지 1 정도의 값에 물건을 살 수 있었다.
 
 사람들은 금영상단이 산적과 수적들에게서 물건을 받는 거라고 짐작했다. 상단과 표국 마차를 습격해 물건을 쌓아두었다가 그것을 넘기는 것이 아니면 그렇게 싼 가격에 물건을 파는 것은 불가능해 보였다. 게다가 그곳에서 일하는 사람 중 무인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어디선가 끌려온 노복이었다.
 
 상황을 짐작한 이들 중 몇 사람이 금영상단을 관에 고변한 적이 있었지만 금영상단 지휘부는 매번 아무런 타격도 입지 않고 유유히 현청을 나오곤 했다. 듣기로는 고관대작의 애첩이 상단주의 혈육이라 현령은 물론 성주도 함부로 할 수 없다 했다. 고변한 사람들만 일을 치르고 가산까지 뺏기다 보니 결국 아무도 금영상단의 일에 나서지 않게 되었다.
 
 금영상단은 보통의 상단과 달리 깊은 산속에 본거지를 두고 있었다. 그곳은 사시사철 짙은 운무에 가려 있었고 길을 잘못 든 사람들은 안개 속을 헤매다가 금영상단의 노복으로 전락하곤 했다.
 
 열여섯 살의 사무영도 금영상단의 노복 중 하나였다. 그는 자기가 언제 이곳에 온 건지, 누가 데려온 건지 알지 못했다. 그저 살아남기 위해 일을 할 뿐이었고 아침에 눈을 뜨면 아직 살아 있다는 것을 다행으로 여겼다. 아무 희망도 보이지 않는 삶에 무슨 미련이 그리 많은 건지 그 자신도 알 수가 없었다.
 
 깊은 산속인 데다 안개까지 짙어서 햇빛을 볼 수 있는 시간은 많지 않았다. 여름인데 한낮에도 서늘한 기운이 느껴질 정도였다. 동이 트기 전부터 노복들은 모두 일어나서 일을 하고 있었다.
 
 금영상단을 찾는 이들이 많고 늘 성황을 이루다 보니 할 일은 끝이 없었다.
 
 “사무영, 오선현에 잔치가 있어 나물 말린 것과 술을 배달해야 한다. 지금부터 시작해도 오늘 안에 다 끝내기 어려울 수 있으니 서둘러라.”
 
 무인의 말에 사무영은 알겠다고 대답하고 즉각 움직였다.
 
 그에게 지시를 내린 무인은 채찍을 들고 있었는데 채찍에서 피가 떨어지고 있었다. 오늘 채찍질을 당한 사람은 아마 열흘을 넘기지 못하고 죽을 것이다.
 
 상단을 출발할 수레들이 끝도 없이 늘어서 있었는데 아무리 할당량이 많아도 좋은 수레는 그의 차지가 되기가 쉽지 않았다.
 
 “뭘 보고 서 있는 거냐? 실어야 할 것이 안 보이느냐? 우리더러 이걸 다 실으라고 멀뚱히 서 있기만 하는 거야?”
 
 나이 든 노복들이 사무영에게 버럭 소리를 질렀다. 물건을 실어 올리는 것은 그들이 하는 일이었지만 소란이 벌어지면 무인들은 누가 잘했는지는 따지지 않고 모두에게 채찍을 휘두를 터였다. 늙은 노복들은 사무영이 그것을 겁낸다는 것을 알고 있어서 그런 식으로 일을 떠넘기는 것이었다.
 
 자기들이 사무영을 괴롭히면 무인들도, 지휘부도 은근히 흐뭇해하는 것 같아 날이 갈수록 사무영을 향한 괴롭힘이 조금씩 심해졌다.
 
 그러다 보니 사무영은 상단을 떠나 배달을 하는 시간이 좋았다. 몸은 힘들지언정 다른 사람들로 인해 마음이 지치는 것은 잠깐이라도 벗어날 수 있어서였다.
 
 마른 나물을 전부 싣자 늙은 노복들의 소리가 들려왔다.
 
 “나물을 다 실었으면 이제 술을 실어야지 뭘 그리 멍청히 보고 있는 거냐? 여기 있는 것들 전부 실어.”
 
 사무영은 그가 말하는 곳을 보고 커다란 항아리가 예순 동이나 있는 것을 보고 놀랐다.
 
 “안 싣고 뭐 해?”
 
 사무영은 머리를 굴리고 뺀질거리는 성격은 아니었다. 그런데 아무래도 그것은 자신의 힘으로 들 수가 없을 것 같았다. 다른 거라면 일단 들어보고 안 되면 내려놔도 되겠지만 이건 깨질 수도 있을 듯했다.
 
 “아저씨, 이건 못 들 것 같은데 어쩌지요? 깰 것 같아요.”
 
 노복들은 화를 냈지만 사무영이 거짓말을 못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들은 화를 내면서 항아리를 실었다. 수레가 크지 않아서 높이 쌓아도 여덟 동이가 한계였다. 원래 자기들이 해야 할 일을 하는 거면서도 화를 내더니 생색을 냈다.
 
 그들은 그 일을 하면 이제 한참 동안 쉬어도 되는 거지만 사무영은 이제부터 쉬지도 못하고 일을 해야 했다.
 
 가는 동안 먹으려고 식당에서 먹을 걸 얻으려 했지만 노복들이 난리를 피웠다.
 
 “늦어서 잔치에 술이 제때 도착하지 못하면 네가 책임질 거냐? 그렇게 해서 우리 상단이 손님을 잃으면 네가 책임질 거냔 말이야!”
 
 그들도 금영상단에서 사무영과 처지가 똑같으면서 사무영을 못 잡아먹어 안달이었다. 그들도 굶주린 채로 격무에 시달리면서 사무영에게는 더 지독하게 굴었다.
 
 사무영은 결국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수레를 끌었다. 수레가 잘 움직이지도 않아서 사무영은 용을 썼다.
 
 그걸 보고 노복들이 와서 결국 항아리 두 개를 내려놓고야 사무영은 수레를 끌 수 있었다.
 
 “오늘 안에 예순 동이를 날라야 하니까 똑똑하게 구는 게 좋을 거다.”
 
 사무영은 오선현에 가본 적이 있었고 그 거리를 알고 있었다.
 
 밥 먹을 시간이 없는 것은 물론이고, 쉬지 않고 한다고 해도 오늘 안에 다 나르지는 못할 것 같았다, 가만히 서서 걱정할 시간도 없을 것 같아서 사무영은 온 힘을 다해 수레를 끌었다.
 
 ***
 
 오선현의 연가장에서 장주의 생일연이 벌어졌다. 연가장은 그 주위를 호령하는 무가였고 장주의 생일연에는 근처에서 세를 자랑하는 이들이 모두 왔다. 멀리서 오는 지인도 있어서 연회는 사흘 동안 열릴 예정이었고 그 때문에 많은 술이 필요했다.
 
 먹은 것도 없어서 눈앞이 핑핑 도는 것을 느끼며 연가장에 도착하자 수많은 사람들이 연회 준비를 하느라 바삐 돌아다녔다.
 
 문 앞에서 금영상단의 이름을 대고 나물과 술을 가져왔다 말하자 문 앞을 지키던 무인이 고개를 끄덕이고 소주방을 알려주었다. 그러다 사무영이 너무 힘들어 보였는지 나와보라 말하고 자기가 수레를 끌어주었다. 사무영은 그런 호의를 받아본 적이 없어 깜짝 놀라며 그를 따라갔다.
 
 무인은 문 앞을 지켜야 해서 오래 있지는 못하고 서두르면서도 소주방 숙수와 시비들에게 음식을 좀 챙겨주라 했다. 그러다가 사람들이 다들 바쁜 틈을 타서 자기가 멋대로 음식을 집어 유지에 싸서 사무영에게 주었다. 금영상단이 어떤 식으로 운영되는지 알고 있어서 사무영이 처한 상황이 짐작되는 듯했다.
 
 그사이에 다른 사람들이 항아리를 내려놓았다.
 
 “그걸 네가 혼자 다 나르느냐?”
 
 “네······.”
 
 “오늘 안에 다 오기는 해야 할 텐데··· 됐으니 어서 먹어라. 말 시키지 않으마. 수정과도 함께 마셔라.”
 
 사무영은 그렇게 귀한 걸 자기 같은 사람에게 주는 게 믿기지 않았다.
 
 “정말 제가 이걸 마셔도 되나요?”
 
 “걱정하지 말거라. 우리 장주님은 남에게 베푸는 건 하나도 빠짐없이 전부 다 돌아온다고 생각하신단다.”
 
 사무영은 그 말이 믿기지 않았지만 허겁지겁 먹었다. 그때부터 오고 가는 사람들이 나누는 이야기가 귀에 들어왔다.
 
 “그 말 들었소? 하북에 강시가 나타났다고 하던데.”
 
 “그건 할 일 없는 사람들이 지어내 퍼뜨리는 이야기 아니오?”
 
 “그게 아닌 모양이오. 오는 길에 객잔에서 쟁자수들이 말하는 걸 들었는데 그자들이 표행을 갔다가 직접 들었다고 했소.”
 
 사무영의 손이 멈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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