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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구 온라인 1권

2015.10.08 조회 5,339 추천 55


 # 프롤로그
 
 한 남자가 길게 한숨을 내쉬고 있었다.
 “후우.”
 남자는 발밑에 있는 축구공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포기해야 할까?”
 남자의 이름은 최민규. K리그 챌린지(2부) 부천FC 소속 공격수로서 현재 축구선수다.
 내일도 경기가 있는 그가 이토록 절망에 빠져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해답은 이어지는 그의 입에서 드러났다.
 “왜 실력이 안 느는 걸까?”
 감독이나 코치가 들으면 언성을 높일 수도 있는 발언이었다. 실력이 안 늘면 연습을 하면 되는 거 아니냐고 할 테니까.
 허나 최민규는 뜻을 굽히지 않았다.
 이유?
 연습해도 늘지 않으니까. 죽도록 공을 차고, 죽도록 땀을 흘려도 실력이 올라가질 않으니까.
 11살 때부터 공을 잡았다. 군대를 제외하고 항상 공만 찼다. 그러나 실력은 항상 제자리였다. 동료들이 1부 리그로 올라가고, 벤치였던 선수들이 주전으로 올라가도 최민규는 매일 같은 자리를 지켰다.
 울분이 터진다. 너무나 속상하다.
 ‘미치겠다, 진짜.’
 연습을 헛되이 한 거 아니냐고?
 아니다. 최민규는 정말 그 누구보다 열정적으로 살았다. 남들 쉴 때 필드라도 한 바퀴 더 돌았고, 남들 놀 때 축구 관련 글이라도 하나 더 읽었다. 그만큼 열심히 노력했다.
 허나 돌아온 건 무엇인가?
 없다. 정말이지 아무 것도 없다.
 ‘내일도 벤치 신세고.’
 내일은 챌린지 리그가 있는 날이다. 순위를 치고 올라갈 수 있는 기회라서 정말 중요한 경기다.
 그래서…… 뽑히지 못했다. 중요하기 때문에 최민규는 벤치 신세다.
 잘하지 못하니까. 못하면 그런 경기에 나설 수 없는 게 당연했다.
 ‘정신 차리자, 최민규! 정신, 정신, 정신!’
 최민규는 부정적인 생각으로 도배된 머리를 거세게 두드리며 벌떡 일어섰다.
 이러라고 부모님이 그 많은 도움을 주셨던가?
 이러라고 그 많은 응원을 받았던가?
 그 사람들에게 미안해서라도 이런 행동은 옳지 않다. 힘들더라도 박차고 일어나서 더욱 더 분발해야 한다.
 ‘힘내자!’
 조금 표정이 밝아진 최민규는 숙소로 발걸음을 돌렸다.
 벤치 신세라서 일찍 잠을 잘 필요는 없지만, ‘축구선수’라면 항상 규칙적인 생활을 해야 했다.
 달빛을 지표삼아 걸어가던 최민규. 그가 돌연 발을 멈췄다.
 ‘뭐야, 이건?’
 조그마한 동전이었다. 10원 짜리보단 컸고, 500원 짜리보단 작았다. 그렇다고 100원 짜리와 비슷하지도 않았다. 달빛에 비춰 바라보니 발행연도나 금액 표시도 안 써져있었다.
 ‘먼지가 묻어서 그런가?’
 최민규는 동전을 가슴팍에 대고 스윽 문질렀다.
 
 ●축구 온라인에 오신 걸 환영합니다!
 
 급히 주위를 돌아보았지만 사람은커녕 쥐새끼 한 마리조차 보이지 않았다.
 환청을 들은 것인가 싶어 고개를 갸웃거리는 최민규의 귓전에 다시 한 번 같은 소리가 울렸다.
 
 ●육성을 시작합니다.
 
 세게 볼을 잡아당겼다. 멀쩡했다. 머리를 세차게 흔들어보기도 했다. 역시 이상 없었다. 혹시 몰라 귀를 연신 후볐다. 귓속에 이물질이 들어가서 이상한 소리가 들리나 싶었다. 하지만 귀지가 조금 묻어나올 뿐, 별 다른 건 나오지 않았다.
 그리고
 ‘사라졌다?’
 동전이 없어졌다. 검지와 엄지 사이에 껴있던 그것이 마치 처음부터 없었다는 듯 자취를 감췄다.
 
 ●캐릭터를 생성합니다……(20%)
 
 ‘뭐, 뭐야?’
 
 ●캐릭터 생성 중……(40%)
 
 ‘뭘 생성한다는 거야?’
 
 ●캐릭터 생성 중……(60%)
 
 퍼센트가 올라갈수록 최민규는 점점 더 당혹스러워졌다.
 
 ●캐릭터 생성 중……(80%)
 
 다시 한 번 주위를 살폈다. 누군가 몰래 소리를 내고 있는 게 아닐까 하며 수풀까지 뒤졌다. 그러나 아무도 존재하지 않았다.
 
 ●캐릭터 생성 완료. 상태창을 확인합니다.
 
 최민규는 말을 잃었다. 눈앞에 떠오른 반투명한 창을 보자 정말이지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그저 멍하니 입을 벌리고 바라보는 것밖에는.
 
 ━━━━━━━━━━━
 이름 : 최민규
 레벨 : 1
 소속 : 부천FC
 신장 : 183cm
 체중 : 75kg
 포지션 : FW(포워드)
 슈팅 : 50
 패스 : 50
 결정력 : 55
 공간창출 : 60
 드리블 : 40
 헤딩 : 50
 크로스 : 50
 테크닉 : 50
 체력 : 50
 민첩성 : 40
 몸싸움 : 50
 리더쉽 : 50
 판단력 : 55
 예측력 : 50
 태클 : 40
 위치선정 : 40
 대인방어 : 40
 사용 가능한 포인트 : 0
 ━━━━━━━━━━━
 
 최민규는 넋을 잃고 한참을 바라보았다.
 1분. 2분. 3분.
 한참을 멍하니 있던 최민규는 문득 생각했다.
 ‘…… 게임이잖아?’
 항상 훈련을 하는 터라 게임을 많이 해보진 않았다. 하지만 상태창이란 게 뭔 지는 알고 있었다.
 캐릭터의 수준을 알 수 있는 그래프 같은 것.
 ‘미칠 노릇이네.’
 꿈은 아니다. 환상도 아니다. 명백한 현실이고, 사실이다. 그래서 더욱 머리가 아프다.
 ‘내가 게임 속 캐릭터처럼 육성을 한다고?’
 두 눈으로 보고 있음에도 믿기 힘들다. 쉽사리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누군가 거짓말이라고 한다면 즉시 수긍할 것만 같다.
 최민규는 그렇게 한참을 더 서있었다.
 다행히 주위에 다른 선수나 코치들이 없어서 이상한 눈초리는 받지 않았다.
 ‘상태창 닫아봐.’
 무심코 내뱉은 말.
 정말 게임과 같은 시스템이라면 유저의 말에 따라 상태창이 닫혀야 한다.
 이윽고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닫히잖아?’
 최민규는 입을 함지박만 하게 벌리며 재차 생각했다.
 ‘상태창 열어봐.’
 예의 그 창이 다시 시야를 가렸다. 이름, 리그, 소속부터 시작해서 공격, 속도 등의 스탯이 모두 나열된다.
 ‘내 전력이 수치화 된다?’
 최민규는 상태창을 꼼꼼히 훑어보았다. 자신의 현 상태와 비교하면서 맞고, 틀림을 구분했다.
 이내 결론이 내려졌다.
 ‘딱 내 상태야.’
 최민규는 키가 크고 체격이 좋은 편이라 헤딩, 체력, 몸싸움에서 제법 준수한 실력을 가지고 있었는데, 상태창 역시 그 세 가지 부분에선 다른 것보다 높은 수치를 보였다.
 ‘드리블, 민첩성 등은 확실히 떨어지지.’
 항상 문제점이 되던 것들 역시 상태창 상에서 낮은 수치를 기록하고 있었다.
 ‘이건…… 기회다.’
 여전히 어불성설과도 같은 상황이다. 그만큼 믿기 어렵다. 그러나 최민규는 복잡하게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하늘이 주신 기회 같았으니까.
 이유?
 ‘노력하면 그 노력이 무조건 실력으로 나온다는 거잖아?’
 열심히 훈련하거나 경기를 뛰어서 레벨을 올리면 포인트가 주어진다. 그것을 찍기만 하면 무조건 기량이 상승한다. 흘린 땀에 비해 별 다른 변화가 없던 최민규에게는 이보다 좋은 희소식이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스탯을 얻기 위해선……’
 최민규의 속마음을 알아차리기라도 한 듯 알림음이 울렸다.
 
 ●현재 사용 가능한 포인트가 없습니다. 레벨을 올려 포인트를 얻으십시오. 레벨 업에 필요한 경험치는 경기 중의 활약이나 훈련 등으로 얻을 수 있습니다.
 
 ‘그 포인트로 스탯을 올리는 건가?’
 
 ●포인트로 능력치(스탯)를 올려 신체를 강화할 수 있습니다.
 
 최민규는 저도 모르게 볼을 꼬집었다.
 눈앞의 상태창만 봐도 현 상황이 꿈인지 현실인지 알 수 있지만, 그렇게 확인하고 또 확인했다.
 너무나 말이 안 되니까.
 이유는 그 하나였다.
 ‘경험치를 올려보자.’
 야밤에 훈련장을 돌기 시작하는 최민규. 이런 식으로 혼자 훈련을 많이 했던 터라 누구도 이상하게 보지 않았다. 물론 이미 다들 숙소에 들어간 상태라 볼 사람이 없다는 게 더 정확한 말이지만.
 뛰는 동안 특별한 건 없었다. 여태까지처럼 똑같이 숨이 찼고, 똑같이 땀이 흘렀다.
 최민규는 3바퀴를 돌고 자리에 멈췄다.
 ‘상태창.’
 만약 경험치가 올라가 있다면 최민규의 ‘축구 온라인’은 정말로 시작되는 셈이었다.
 띵!
 상태창을 확인한 최민규는 어안이 벙벙했다. 빈 공간이었던 경험치 바가 3퍼센트나 채워져 있었다.
 최민규는 두 주먹을 불끈 쥐었다.
 ‘내 축구 인생은 오늘부터 다시 시작이다.’
 
 # 시작
 
 다음 날.
 최민규는 부천FC 동료들과 함께 아침 뜀걸음으로 하루를 시작했다. 자면서 굳어졌던 몸이 조금 풀어졌다.
 ‘또 올랐다.’
 뜀걸음을 마치고 상태창을 확인한 최민규는 진한 웃음을 떠올렸다.
 그리 오래 뛰지 않았음에도 경험치가 1퍼센트나 올라있었다.
 1레벨이라 금방 오르는 것도 있겠지만, 그래도 기분 좋은 걸 감출 수가 없었다.
 “자, 다들 식사하고 훈련장에 모여!”
 “예!”
 양대섭 코치의 말에 최민규는 서둘러 식당으로 발을 옮겼다. 얼른 밥을 먹고 훈련을 하고 싶었다. 그래야 경험치를 쌓을 수 있을 테니까.
 룰루랄라 콧노래를 부르는 최민규의 옆에 한 남자가 나타났다.
 진한 눈썹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남자, 서태준이었다.
 “민규!”
 “어.”
 최민규는 서태준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실력이 좋다는 이유로 항상 남을 깔보는 게 마음에 들지 않았다.
 “오늘도 교체야?”
 빈정거림.
 어제 감독이 미리 선발명단을 불러주었기에 모를 리가 없었다. 일부러 속을 긁으려는 게 분명했다.
 최민규는 빙그레 웃으며 답했다.
 “그렇게 됐네.”
 “잘 좀 해봐. 대체 언제까지 챌린지에 있을 거야?”
 “잘 하려고 노력 중이야. 그보다 너 좀 열심히 해야겠더라. 허투루 하다가 네 축구 인생 쫑 날라.”
 “뭐, 뭐라고?
 동료들이 큭큭대며 웃었다. 거드름 피우던 놈이 한방 제대로 맞은 게 속 시원한 모양이었다.
 서태준.
 원래 1부 리그, K리그 클래식 소속 선수였다. 그것도 교체가 아닌 선발멤버로 있었다.
 그러나 재작년, 부상을 당했다. 수술을 받아야 할 정도로 큰 충격이었다.
 수술은 잘 됐다. 재활도 나쁘지 않게 끝났다. 하지만 뭐가 잘못되기라도 한 건지 쭉 폼이 하락했다. 서태준으로서는 나락이라고 할 수 있는 챌린지까지 떨어질 정도로. 물론 아주 잠깐의 임대이긴 하지만.
 최민규는 씨익 입 꼬릴 올리며 서태준의 어깨를 두드렸다.
 “먼저 간다. 밥 맛있게 먹어라.”
 서태준이 부글부글 끓는 소리가 뒤통수 너머로 들렸지만 최민규는 신경도 안 썼다. 한방 먹여줬을 뿐더러 냄새나는 똥과 별로 가까이 하고 싶지 않았다.
 아침 식사는 금방 끝났다. 선수들은 간단히 휴식 후 다시 훈련장에 모였다.
 “오늘은 경기가 있으니까 체력훈련보단 패스훈련 위주로 하자.”
 “예, 코치님.”
 선수들이 몇몇씩 짝을 이뤄 패스연습을 시작했다.
 최민규도 한 무리에 속해 선수들과 패스를 주고받았다.
 ‘이런 것도 경험치가 오른다는 거지?’
 최민규는 이곳저곳을 뛰어다니며 열심히 훈련에 임했다.
 동료들이 이내 의아한 기색을 보였다. 최민규가 평소 열심히 뛰기는 했지만 이 정도로 과하진 않았기 때문이었다.
 미드필더 포지션을 맡고 있는 정혁이 물었다.
 “민규. 왜 이리 열심이야?”
 “항상 실전처럼 해야죠.”
 “정말 대단하다, 너도.”
 서태준이었다면 그렇게 열심히 하는데도 챌린지냐면서 비아냥거렸을 테지만 다른 선수들은 그러지 않았다. 누구보다 최민규의 노력을 잘 알고 있으니까.
 훈련은 정오가 돼서야 끝났다.
 온 몸이 땀으로 젖은 선수들이 몸을 씻기 위해 샤워장을 찾았다.
 최민규는 다른 이들의 눈을 피해 잠깐 외진 곳에 왔다.
 ‘어떤 걸 찍지?’
 레벨 업.
 훈련 내내 쉬지 않고 뛰어다닌 덕에 최민규는 2레벨이 되었다.
 물론 저 레벨이라 가능한 일이었다. 레벨이 높아지면 겨우 이 정도 움직임으론 업 하지 못할 터였다.
 최민규는 고민했다.
 수많은 능력치 중에서 어떤 걸 찍어야 할까?
 ‘일단 내가 부족한 걸 찍자.’
 마음을 정한 최민규는 드리블과 민첩성에 5개의 포인트를 골고루 분배했다.
 ‘너무 두 가지만 찍었나?’
 캐릭터 육성의 기본은 균형.
 모자라는 것만 채우다 보면 멀쩡했던 것도 망가지기 십상이다.
 최민규는 자신의 부족함을 채우는 것도 중요하지만 스트라이커라는 포지션에 맞게 능력치를 분배해야겠다고 생각했다. 한 마디로, 다음부턴 모든 능력치를 고루 찍겠단 뜻이다.
 능력치를 올리느라 뒤늦게 샤워장을 찾은 최민규. 그 덕에 점심 식사도 남들보다 늦게 했다.
 식사를 끝낸 후, 다시 훈련장을 찾았다.
 원래라면 경기 전까지 휴식시간이라 잠깐 숙소에서 뒹굴어도 무방하지만 최민규는 훈련을 택했다.
 ‘교체 투입이라 체력을 안배하지 않아도 된다.’
 최민규는 오늘 교체선수.
 굳이 체력을 아낄 필요가 없다. 아무리 길게 뛰어봤자 30분 미만일 테니까.
 최민규는 훈련장을 돌기 시작했다. 바퀴 수가 늘어날수록 경험치 바가 올라갔다.
 기분이…… 굉장히 좋았다.
 ‘꿈만 같군.’
 여태까지는 어땠던가?
 불철주야 노력해도 성장할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지금 뭘 하고 있나 싶을 때도 많았다. 뭔가를 했으면 결과가 따라야하는데 그게 없었기 때문이다.
 지금은 다르다. 노력하면 그만큼 퍼센트가 차고, 그것은 결국 포인트로 이어진다. 획득한 포인트를 능력치에 적용시키면 100퍼센트 신체가 성장한다.
 ‘미묘하지만 빨라진 느낌이 든다.’
 최민규가 민첩성에 투자한 건 불과 2포인트. 그런데도 몸이 조금 날렵해진 느낌이 들었다.
 기분 탓이긴 할 것이다. 겨우 2포인트로 신체가 급변할 린 만무했다.
 ‘점차 변화폭이 커지겠지’
 최민규는 공을 잡고 필드를 달려보았다.
 드리블과 속도는 그의 취약점 중 하나.
 ‘이건 좀 달라졌군.’
 드리블과 민첩성에 투자한 능력치 포인트는 각각 3과 2.
 기분 탓이 아니라 정말로 예전과 느낌이 달랐다.
 뭔가 편했고 자연스러웠다. 부드럽기까지 했다.
 ‘훈련이 지루하지 않다.’
 즐겁다. 신이 난다. 불과 어제까지만 하더라도 이런 시간에 홀로 훈련하면 마음이 무너지곤 했는데, 지금은 그렇지 않다. 하면 할수록 성장한다는 것에 그저 기뻤다.
 최민규는 그렇게 또 몇 시간을 훈련했다.
 
 ***
 
 오후 3시 40분.
 20분 후면 부천FC와 대구FC의 챌린지 경기가 시작된다.
 선수들이 라커룸에서 각자 몸을 풀기 시작했다.
 “민규야. 교체면서 뭘 그렇게 신경 써서 묶어?”
 신발 끈을 조이고 있었던 최민규는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에도 굳이 고개를 들지 않았다. 말투가 서태준의 것임을 알았기 때문이다.
 “너처럼 무릎 아작 나면 어떡해? 신경 써서 묶어야지.”
 “너, 너!”
 최민규는 고개를 들어 서태준을 올려봤다.
 아침의 복수를 위해 일부러 자신을 찾은 서태준이 도리어 머리 위로 뿔 두 개를 세우고 있었다. 단단히 열불이 나는 모양이었다.
 사실 최민규와 서태준은 고등학교 동문이었다. 프로에 데뷔할 때까지 같이 훈련했고, 같은 경기에 뛰었다. 하지만 과정만 같을 뿐, 결과는 완전히 달랐다.
 나날이 제자리인 최민규와 달리 서태준은 점점 성장했다. 타고난 재능으로 매 경기 좋은 활약을 펼쳤다.
 고등학교 시절, 서태준을 모르는 이가 없었다. 대한민국의 떠오르는 유망주 서태준! 이라면서 기사가 나기도 했다.
 이어진 신인 드래프트!
 서태준은 1부 리그 서울FC의 1차 지명에서 바로 뽑혔다. 요즘엔 그 명성이 사그라지긴 했어도 서울FC라면 누구나 알아주는 명문. 그런 곳에서 바로 프로로 데뷔하게 된 것이다.
 반면 최민규는 지명되지 못했다. 그 어떤 프로 팀도 그를 원하지 않았다. 간신히 지푸라기를 잡고 잡아 한 곳에 들어왔다. 그곳이 현 소속 구단인 부천FC다.
 서태준이 붉으락푸르락 안면을 달군 상태로 말했다.
 “너 오늘 교체돼서 얼마나 잘하나 보자.”
 “그래, 너도 실수 없게 잘해. 괜히 민폐 끼치지 말고.”
 뭐라 더 주둥이를 놀리는 소리가 들렸지만 최민규는 더 귀담아 듣지 않았다. 오늘 경기를 위해 마인드를 컨트롤하기도 시간이 빠듯했다.
 ‘30분. 충분히 긴 시간이다.’
 최민규는 긍정적으로 생각했다. 선발만 출전하는 선수들은 어떨지 몰라도 자신에겐 매우 긴 시간이었다.
 겨우 3분만 뛰었던 날도 있지 않았던가?
 ‘골보단 좋은 모습이다.’
 스트라이커에게 가장 중요한 건 골. 하지만 최민규는 욕심을 버렸다.
 이제 겨우 시작일 뿐이다. 10레벨, 20레벨도 아니고 골만 생각하는 건 잘못된 생각이다.
 일단은 경기 전체적으로 좋은 활약을 하는 게 오늘의 목표였다.
 “자자! 경기 시작한다!”
 코치가 박수를 치며 선수들을 일으켰다.
 선발 선수들이 다시 한 번 몸을 풀어주며 필드로 나갔다.
 교체 선수인 최민규는 라인 밖 벤치로 향했다.
 ‘서태준의 움직임을 주시하자.’
 싫어도 인정할 건 인정해야하는 법.
 최민규는 같은 포지션인 서태준이 어떤 식으로 플레이 하는 지 면밀히 관찰하기로 했다. 실력 향상에 도움이 될 터였다.
 
 삐이익-
 
 휘슬이 울리며 경기가 시작됐다. 붉은 유니폼의 부천FC가 푸른 유니폼의 대구FC를 상대로 선축했다.
 챌린지 경기임에도 불구하고 선수들의 얼굴엔 열의가 넘쳤다.
 서태준이 최전방 스트라이커로써 공을 몰고 나가기 시작했다. 무릎 부상을 당했음에도 움직임이 물결처럼 부드러웠다.
 “지금은 많이 떨어지긴 했지만 역시 1부 리그였던 애는 다르네.”
 “서태준?”
 “응. 확실히 움직임이 달라.”
 최민규는 수비수 김강현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이 봐도 서태준의 움직임은 여타 선수들과 달랐다.
 경기 시작한 지 얼마나 되지 않았음에도 벌써 여타 선수들과 차이를 보였다.
 속도. 정확성. 드리블. 테크닉.
 모든 면에서 우월함을 보였다.
 “고등학교 동문이라면서?”
 “응.”
 “그 때도 잘했지?”
 “날아다녔지. 프로팀 관계자들도 몇 번 오고.”
 “괜히 유망주가 아니었군.”
 경기는 부천FC가 우세했다.
 서태준을 필두로 압박 플레이를 가하자 대구FC는 속수무책으로 당했다.
 그리고 전반 28분.
 서태준은 대구FC의 프리킥 실패로 생긴 역습 찬스를 이용해 상대 골키퍼와 일대일 상황을 만들어냈다.
 “막히겠는데?”
 김강현의 말에 최민규는 고개를 저었다.
 “넣을 것 같은데?”
 골키퍼의 대응은 좋았다. 서태준이 오는 길목에 몸을 날리며 슛 공간을 차단했다. 하지만 서태준은 더 앞서 생각했다.
 차분하게 속도를 줄여 골키퍼를 제친 후, 아무도 없는 골대에 공을 차 넣었다.
 “이야!”
 “역시 1군!”
 “와아아아아!”
 벤치에서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 작긴 했지만 응원석에서도 박수갈채가 쏟아졌다.
 최민규도 일어서서 박수를 보냈다. 잘한 것은 잘한 것이므로 다른 감정을 섞어선 안 됐다.
 서태준은 멋진 세레모니를 하며 골을 만끽했다.
 ‘우리가 기세를 완전히 빼앗았군.’
 가뜩이나 부천FC에게 쏠려있던 분위기가 골이 터지면서 더 넘어왔다.
 이후로 추가골이 터지진 않았지만 압도적인 점유율과 슈팅횟수로 전반전을 끝냈다.
 10분간의 쉬는 시간.
 감독과 코치는 서태준의 어깨를 두드리며 그를 칭찬하기 바빴다. 요 근래 매우 떨어져있었던 경기력이 오늘 가파르게 상승했기 때문이었다.
 멤버는 바뀌지 않았다. 감독은 선발멤버를 그대로 후반전에도 출전시켰다.
 “자자, 45분만 더 힘내라!”
 감독의 힘 있는 응원을 받으며 쉬다보니 10분은 금방 흘렀다.
 경기 양상은 전반과 똑같이 이어졌다.
 서태준이 필드 이곳저곳을 휘저으며 대구FC 수비수들을 무너뜨렸다. 그야말로 전체적인 분위기를 부천FC가 압도하고 있었다.
 후반 18분.
 좌측 윙 포워드인 김낙중이 서태준의 쓰루패스를 받아 강력한 왼발 슛을 날렸다.
 “크! 아깝다!”
 벤치에서 아쉬운 함성이 터졌다. 수비수와 골키퍼 모두 막을 수 없는 슛이어서 추가골을 예상했는데, 불행하게도 골대에 맞고 말았다.
 후반 25분.
 최민규는 감독으로부터 몸을 풀라는 지시를 받았다.
 ‘잘하자.’
 몸 이곳저곳을 모두 풀어주었다. 비록 30분이지만 항상 최상의 상태로 경기에 임할 필요가 있었다.
 그리고 5분 후.
 최민규는 서태준과 교체되었다.
 “민규! 무리하지 말고 잘 뛰어라!”
 “예, 감독님!”
 대답은 잘했으나 최민규는 이상하리만치 긴장하는 자신을 발견했다. 심장이 쿵쾅거리고, 심장박동이 빨라졌다.
 ‘능력치라는 것만 생겼을 뿐이다. 지금까지와 똑같아.’
 최민규는 마음을 다 잡았다. 바뀐 건 없다. 그저 노력이 실질적인 결과를 만들어내는 ‘능력치’만 생겼을 뿐이다.
 필드에 들어선 그는 곧바로 최전방을 파고들었다.
 상대 수비수들이 조곤조곤 떠들고 있었다.
 “다들 힘내자고! 서태준이 나갔어!”
 “최민규면 할 만해!”
 최민규는 수비수의 말들을 모두 한 귀로 흘려버렸다.
 겨우 이 정도로 열이 받을 거라면 진즉에 서태준과 한판 싸웠을 것이다. 더 모욕적인 말을 하는 사람은 서태준이니까.
 공은 부천FC의 소유였다.
 수비진에서 찬찬히 공을 올리고 있었다.
 최민규는 상대 진영을 파고들며 공간을 찾고자 노력했다.
 그때였다.
 
 # 명성
 
 중앙 미드필더인 이민성이 필드를 돌파하며 땅볼패스를 찔러줬다.
 안전하게 패스 받은 최민규는 침착하게 공을 몰고 나갔다.
 2명의 수비수가 전면에서 진득하게 자리 잡고 있었다.
 ‘무리다.’
 제치고 돌파해서 골을 넣는다면 그보다 좋을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최민규는 냉정하게 판단했다. 보다 더 가능성 있는 상황에 공을 보내기로 했다.
 좌측에 자리 잡고 있던 김낙중.
 최민규는 수비수를 파고드는 김낙중에게 쓰루패스를 보냈다.
 최민규의 패스를 받은 김낙중은 공을 터치한 후, 곧바로 슛을 날렸다. 수비수가 달려오는 터라 받아서 돌릴 여지가 없었기 때문이다.
 빠른 땅볼 슛.
 아쉽게도 몸을 날린 골키퍼의 손에 걸리고 말았다.
 “나이스, 민규!”
 김낙중은 엄지를 치켜들었다. 골은 넣지 못한 건 아쉽지만 그래도 이런 기회를 만들어준 최민규에게 고마웠다.
 최민규도 마주 엄지를 치켜들며 다시 경기에 임했다.
 그 순간.
 
 ●좋은 패스로 인해 명성이 0.1 상승합니다!
 
 ‘명성은 뭐야?’
 최민규는 일단 의문을 지웠다.
 지금은 경기 중인 상태.
 다른 걸 신경 쓰면 안 되는 상황이다.
 상대 골키퍼가 힘껏 공을 찼다. 하프라인을 넘어 멀리 부천FC의 좌측 그라운드까지 날아간 공은 헤딩경합을 만들어냈다.
 좌측 미드필더 성태빈.
 키가 큰 성태빈은 그 이점을 살려 가볍게 공을 따냈다.
 부천FC 진영 가운데로 떨어지는 공을 다시 이민성이 받았다. 그는 공을 굴리며 패스 공간을 찾았다.
 최민규는 이 틈을 노리지 않고 수비수 사이를 파고들었다.
 ‘오케이. 좋아.’
 이민성의 기가 막힌 공간 패스.
 최민규는 공을 잡은 후, 빠르게 앞으로 치고 나갔다. 수비수들이 뒤늦게 따라 붙었지만 그의 몸은 이미 골키퍼와 일대일 상황을 만들고 있었다.
 ‘침착하자.’
 마음만 앞서면 될 것도 안 되는 법이다.
 긴박하고 중요한 순간임에도 최민규는 절대 서두르지 않았다. 좋은 기회라고 해서 무작정 슛을 날리는 건 골키퍼에게 이것 좀 잡아주시오, 하는 것과 다를 게 없었다.
 ‘유지헌 선배님한테 주자.’
 우측 윙 포워드 유지헌. 그가 측면에서 달려오고 있었다.
 최민규는 고민 없이 그에게 패스하기로 결정했다.
 골을 넣는 건 결국 확률.
 더 높은 확률의 찬스가 있다면 양보해야 옳았다.
 수비수들은 모두 최민규에게 달라 드는 상태였다.
 유지헌에게도 한 명의 수비수가 따라붙었으나, 역부족.
 최민규는 안전하게 패스할 수 있었다.
 빠르게. 그러면서 정확하게 굴러간 공은 정확히 유지헌의 발끝에 걸렸다. 그는 골대의 빈 공간을 찾아 그대로 슛을 날렸다.
 “골!”
 도망가는 추가 골. 2:0 상황이 만들어졌다.
 유지헌은 세레모니보다 최민규를 먼저 찾았다.
 “땡큐, 민규!”
 “선배님이 잘하신 거죠!”
 “아냐! 고맙다!”
 유지헌과 최민규에게 몰려드는 선수들. 저마다 머리와 몸을 두드리며 골을 만끽했다.
 그 순간, 아까의 알림음이 또 들려왔다.
 
 ●어시스트로 인해 명성이 0.3 상승합니다!
 
 세레모니 시간이라고는 해도 여전히 확인할 겨를은 없었다. 갑자기 우두커니 서서 혼잣말을 하고 있으면 미친놈과 다를 게 없기 때문이다.
 유지헌이 하늘에 만세를 하면서 세레모니가 끝났다.
 경기는 금방 속개됐다.
 중앙선에서 대구FC가 선축했다.
 최민규는 공을 잡고 있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부지런히 움직였다. 한시도 발을 멈추지 않았다. 경험치도 경험치지만, 교체 투입이어서 아직 체력이 많이 남아있었기 때문이다.
 후반 42분.
 부천FC는 역습찬스를 얻었다.
 우측 미드필더 김석태로부터 빠르게 공을 넘겨받은 최민규는 드리블하며 필드를 치고 나갔다.
 수비수들이 헐레벌떡 따라붙었다.
 예전 같았으면 분명히 뺏겼을 상황.
 ‘발이 빨라졌다.’
 최민규는 아슬아슬하게 수비수를 앞섰다.
 포인트 5개를 모두 드리블과 민첩성에 투자한 게 이런 식의 성과를 보였다.
 달려가며 공간을 확보한 그는 지체 없이 슛을 날렸다.
 더 끌었다간 뺏길 공산이 컸다.
 하지만 아쉽게도 슈팅은 실패로 돌아갔다. 재빨리 튀어나온 골키퍼가 페널티박스 안에서 공을 쳐냈다.
 이후로도 분위기는 부천FC가 계속 이끌어나갔다.
 대구FC도 분전하여 찬스를 만들어냈지만 골로 연결되진 못했다.
 후반 48분.
 추가 시간 3분까지 끝나면서 경기가 종료 되었다.
 류장일 감독은 선수들을 크게 칭찬했다. 경기 결과도 결과지만 내용이 너무 좋았다. 이렇게 일방적인 경기는 참으로 오랜만이었다.
 “다들 수고했다!”
 선수들의 어깨를 한 번씩 두드려주는 류장일 감독. 그는 서태준과 유지헌에게 환한 미소를 보였다.
 “우리 골잡이들도 참 잘했다.”
 “별 거 아니었습니다.”
 “감사합니다.”
 최민규도 류장일 감독의 칭찬을 받았다. 그런데 앞선 이들보다 조금 더 진득했다.
 “민규! 정말 잘했다! 플레이 타임은 30분이지만, 활약은 풀타임 퍼펙트였다!”
 “감사합니다, 감독님.”
 “조금만 더 힘내라!”
 최민규는 류장일 감독의 말에서 너도 반드시 클래식에 오를 수 있을 거란 마음이 느껴졌다. 괜스레 코끝이 짠했다.
 ‘정말…… 축구 온라인을 시작한 건 엄청난 행복이다.’
 노력의 수치화.
 즉, 분명하게 결실을 맺을 수 있다는 것.
 지금까지는 늘 불철주야 노력해도 그게 정말로 변화를 주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아니, 실제로 변화폭이 크지 않았다. 체력이나 몸싸움을 제외하면 드리블이나 슈팅, 패스 등 모든 면에서 제자리걸음만 했다.
 하지만 노력. 경험치를 쌓아 레벨 업만 하면 ‘100퍼센트’ 능력을 키울 수 있다.
 어떤 게 부족하다? 그러면 그 어떤 걸 찍으면 그만인 것이다.
 ‘아참.’
 행복한 생각에 빠져있던 최민규는 경기 중의 알림음을 떠올렸다.
 명성!
 ‘명성은 좋은 패스를 하거나, 어시스트를 하면 올라간다. 골을 넣으면 더 많이 올라가겠지. 근데…… 명성이란 게 대체 무슨 의미가 되는 거지?’
 일단 사전적 의미를 생각해보았다.
 세상에 널리 이름을 떨치거나 좋은 평판으로 유명해지는 게 명성이란 것이다.
 분명 축구와 연관성은 있었다. 좋은 어시스타나 멋진 골을 넣으면 그 직후 기사로 써져서 사람들의 환호를 받기 때문이다. 하지만 캐릭터 육성과의 연관성은 찾기 힘들었다.
 
 ●명성 500을 채우면 이용자의 신체가 전반적으로 대폭 상승합니다.
 
 ‘신체가 대폭 상승한다고?’
 
 ●스탯의 대폭 상승입니다.
 
 ‘오호. 그래?’
 최민규는 두 가지를 알았다. 하나는 알림음이 말한 것처럼 명성이 신체를 크게 강화시킬 수 있다는 점, 다른 하나는 알림음과 대화가 가능하다는 점이었다.
 ‘명성 500이면…… 매우 힘들겠군.’
 최민규가 오늘 한 경기를 뛰어서 얻은 명성은 0.9. 이런 식으로 500을 채우려면 한도 끝도 없었다.
 최민규는 그러려니 했다. 신체가 대폭 강화되는 엄청난 특혜를 쉽게 주면 그게 더 이상했다. 그저 노력이 능력치 이외로도 빛을 발한다는 것에 만족했다.
 최민규는 버스에 올랐다. 덜컹거리고 비좁은 곳에서마저 훈련을 할 수는 없기에 이번엔 눈을 좀 붙이기로 했다.
 아침부터 하루 종일 뛰어다닌 탓에 곧 잠에 빠졌다.
 
 ***
 
 다음 경기는 나흘 후.
 최민규는 그 때까지 오로지 훈련에만 매진했다. 먹고, 자는 시간을 제외하면 줄곧 훈련장에 나갔다.
 동료 선수들이 저마다 혀를 내둘렀다.
 김낙중이 시원한 냉수를 주며 말했다.
 “민규야. 좀 쉬엄쉬엄해.”
 “아직 쌩쌩해.”
 물을 들이키는 최민규를 보며 김낙중이 대단하다는 기색을 보였다.
 “너 무슨 월드컵 나가냐?”
 “월드컵만 대단한가.”
 “그래. 뭐 리그도 중요하긴 하지.”
 사실 최민규도 힘들다. 쉬지 않고 훈련만 하는 탓에 몸이 많이 지쳐 있다. 하지만 경험치가 올라가는 걸 보면 뛰는 걸 멈출 수 없었다.
 현재 레벨은 3.
 조금만 더 노력하면 4가 된다는 것에 온 신경이 쏠려 있었다.
 물론 절대 무리는 하지 않았다. 진짜로 쉬어야 할 상황이면 고민 없이 주저앉았다. 레벨이 아무리 높아도, 능력이가 아무리 좋아도 그걸 사용할 수 없다면 무용지물이니까.
 훈련은 계속 이어졌다.
 휴식 시간이 끝났기에 선수들 모두 훈련장에 들어왔다.
 체력, 순발력 등 다양한 훈련이 이어졌다.
 선수들의 조직력을 갖추기 위해 미니게임도 했다.
 “민규야!”
 한참 훈련에 열중이던 최민규는 류장일 감독의 부름에 잠깐 밖으로 나왔다.
 “예, 감독님.”
 “너 내일 경기에 선발 나가보자.”
 “제가요?”
 “어. 뛸 수 있지?”
 선발 출전이 대체 얼마만이던가?
 올 시즌, 골과 어시스트를 두루 기록하긴 했지만 거의 교체 출전을 했었다.
 서태준이 오고 나서는 더더욱 그랬다. 아니, 경기 때마다 그랬다. 모든 면에서 부족한 탓에 항상 서태준의 백업을 맡았다.
 최민규는 고민할 것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다만 한 가지 의문인 부분이 있었다.
 “저야 당연히 좋죠. 근데 태준이는요?”
 “태준이 다시 서울FC로 돌아갔다. 임대가 풀렸거든.”
 “벌써 그렇게 됐어요?”
 후유증이니 폼이 떨어졌느니 해도 역시 서태준이 가진 본연의 실력은 그대로인 모양이었다.
 임대가 풀리지 마자 복귀한 것만 봐도 그랬다.
 최민규는 두 주먹을 불끈 쥐었다.
 ‘잘 살리자.’
 최민규는 이번 기회를 놓치지 않으리라 다짐했다.
 그날 저녁.
 부천FC는 내일 있을 전주FC와의 원정 경기를 위해 버스에 탑승했다.
 최민규는 좌석에 앉아 능력치를 확인했다.
 ‘그래, 이게 낫다.’
 2레벨이 됐을 때와 달리, 3레벨 때는 5개의 포인트를 모두 골고루 분배했다. 슈팅, 패스, 결정력, 공간창출, 테크닉 능력치에 각각 1개씩 투자했다.
 ‘몇 가지만 집중해서 찍으면 밸런스가 무너진다.’
 현재 최민규에게 제일 부족한 건 드리블과 민첩성. 그래서 2레벨 때는 5포인트를 모두 그 두 가지에 투자했다. 하지만 3레벨 때는 단 한 개도 투자하지 않았다.
 ‘훗날을 생각하면 모두 발전해야해.’
 최민규는 2부리거다. 모든 면에서 부족한 그런 존재다. 조금 나을 뿐이지, 나머지 능력도 드리블과 민첩성처럼 부족한 면이 많다. 지금부터 준비해야한다. 이 정도면 괜찮겠지, 하는 생각은 버려야한다.
 버스는 금방 도착했다.
 부천FC 선수들은 경기장 근처에 마련된 숙소에 편히 몸을 뉘였다.
 최민규도 오늘만큼은 연장 훈련을 하지 않았다.
 선발출전!
 90분간 그라운드를 누비기 위해선 절대적으로 체력이 필요했다.
 다음 날.
 오전에 간단히 몸을 푼 부천FC는 오후에 가벼운 마음으로 경기장을 찾았다.
 전주FC도 일찍이 도착해 간단히 스트레칭 중이었다.
 류장일 감독은 선수들을 모아놓고 말했다.
 “전주FC는 수비축구다. 오늘은 공격이 잘 해줘야 승을 챙길 수 있어. 너무 무리하진 말고, 최대한 수비 진영을 파고들어라.”
 “예.”
 류장일 감독이 최민규를 쳐다보았다.
 “특히 민규는 힘 좀 내주고.”
 “예, 감독님.”
 최민규는 굳은 의지를 보였다.
 오랜만의 선발출전!
 없는 힘을 내서라도 좋은 성과를 보이고 싶었다.
 부천FC 선수들과 전주FC 선수들이 필드 중앙에 모였다.
 각자 돌아가며 한 명씩 악수를 나눴다.
 주심은 팀 간에 페어플레이를 약속 받은 후, 경기 시작 휘슬을 불었다.
 선축은 부천FC였다.
 최민규는 하프라인에서 김낙중에게 공을 건네받았다. 초장부터 뚫고 들어가는 건 무리였다. 살살 공을 굴리며 기회를 엿봤다.
 전주FC의 수비진영은 매우 촘촘했다. 수비를 1순위로 하는 팀답게 들어갈 공간이 보이지 않았다.
 일단 이민성에게 공을 넘겼다. 골을 넣으려면 앞으로 전진해야하지만, 틈이 보이지 않으므로 빼는 게 옳았다.
 패스를 받은 이민성은 곧바로 성태빈에게 공을 넘겼다.
 그때, 유지헌이 오른쪽 측면을 깊게 파고들었다.
 성태빈은 그걸 놓치지 않고 빠르게 땅볼패스를 보냈다. 하지만 실패였다. 매우 빠른 연계였음에도 불구하고 수비 발에 걸려 조기 차단되고 말았다. 수비축구의 강점이 드러남은 물론, 쉽게 공격되지 않음을 알 수 있었다.
 부천FC 선수들은 박수로 아쉬운 상황을 대신했다.
 볼은 전주FC 진영에서 움직였다. 미드필더들이 볼을 굴리며 빈틈을 찾았다.
 최민규는 전방에서 뛰어다니며 볼을 차단하고자 노력했다. 짧고 빠르게 패스가 이어지다보니 끊는 게 어려웠지만, 포기하지 않았다.
 ‘걸렸다.’
 
 # 선발 출전
 
 전주FC의 미드필더 하나가 압박에 의해 백패스한 볼을 차단한 최민규. 볼을 잡기 무섭게 필드를 갈랐다.
 축구는 1초로도 결과가 바뀔 수 있는 스포츠.
 지체 없이 볼을 몰아야 했다.
 ‘빠르다.’
 급작스럽게 볼을 뺏고 드리블했음에도 전주FC의 수비진은 침착했다. 최민규에게 2명이 붙고, 나머지 2명은 윙 포워드들을 견제했다.
 최민규의 앞은 금세 가로 막혔다. 수비수들이 탄탄하게 서있는 탓에 빠져나갈 공간이 보이지 않았다.
 ‘측면.’
 볼을 몰고 나가며 좌우측을 확인했다. 김낙중과 유지헌이 안쪽으로 파고들고 있었다. 하지만 따라붙는 수비수들 때문에 쉽사리 패스가 힘들었다. 여기서 볼을 넘기는 건 패스가 아니라 기회 양도였다.
 최민규는 두 주먹을 불끈 쥐며 정면을 바라보았다.
 패스할 수 없다면 남은 건 하나.
 수비수들을 제치고 골을 넣는 것이다.
 ‘2명.’
 몇 걸음만 가면 2명의 수비수들이 있다. 조금이라도 방심하거나 실수한다면 기회가 넘어가게 된다.
 수비수들이 달려들기 시작했다. 가만히 서서 공격수를 막는 건 비효율적. 지척까지 붙어서 볼을 노리는 게 가장 최선이다.
 최민규는 한 번 볼을 접었다. 예상치 못했는지 수비수의 발 하나가 허공을 디뎠다.
 남은 수비수는 한 명.
 발을 뻗는 수비수의 다리 사이로 볼을 쑥 찔러 넣었다.
 ‘됐다.’
 수비수가 좌우를 훑는 사이 최민규는 정면을 치고 들어갔다.
 근처 수비수들이 뒤늦게 뒤로 달라붙었지만, 허사였다.
 최민규는 이미 골키퍼와 1:1상황에, 슈팅 타이밍까지 만들었다.
 골키퍼의 손이 닿기 어려운 골대 우측 끄트머리.
 그곳을 노리고 왼발로 깊숙이 차 넣는 최민규였다.
 ‘아깝다.’
 너무 끝을 노린 것일까.
 볼이 골대를 약간 빗나가고 말았다. 유효슈팅도 아닌 그냥 슈팅이 돼버렸다.
 최민규는 긍정적으로 생각했다. 골 기회를 놓쳤다는 아쉬움보다 수비수 둘을 제쳤다는 기쁨이 더 컸다.
 상대 골키퍼는 손으로 짧게 볼을 넘겼다.
 발끝에 볼을 걸친 수비수가 살살 볼을 굴리며 천천히 미드필더 진영 쪽으로 패스했다.
 수비축구답게 공격이 빠르게 이루어지진 않았지만, 그만큼 정확하고 안전하다는 장점이 있었다. 하여 쉽사리 볼을 뺏기 어려웠다.
 최민규는 하프라인 아래까지 내려가 수비에 임했다. 달리 공격 상황이 아니라면 수비를 도와야 한다. 멀뚱히 서서 공격기회만 노리는 것은 프로답지 못하다. 물론 역습상황이라면 얘기가 다르겠으나, 지금은 그렇지 않다.
 볼은 부천FC 진영의 중앙에서 짧게 패스되고 있었다. 쉽사리 공간이 나오질 않아 전주FC 입장에선 굴릴 수밖에 없었다.
 그러던 중, 공격수 한 명이 페널티 라인 쪽으로 파고들었다.
 미드필더는 찬스를 놓치지 않고 긴 패스를 날렸다.
 중앙 미드필더 정만식의 헤딩!
 부천FC는 가까스로 위기 상황에서 벗어났다.
 수비축구가 중점임에도 불구하고 전주FC의 공격은 상당히 날카로웠다. 발 빠르게 움직이지 않았으면 실점까지도 했을 상황. 하지만 안심하긴 아직 일렀다.
 전주FC의 드로잉 공격.
 미드필더는 촘촘한 부천FC의 진영 쪽으로 던지기보다, 뒤쪽으로 빼는 걸 선택했다. 다시 차근차근 올라가기 위함이었다.
 후미에 있던 최민규는 드로잉 모션을 확인하고 빠르게 발을 굴렸다.
 상대 미드필더에게 날아가는 볼.
 최민규는 그 사이를 파고들어 헤딩으로 볼을 따냈다.
 ‘좋아.’
 지척에 떨어진 볼을 다시 앞으로 차내며 최민규가 빠르게 드리블했다.
 공격을 위해 다소 전진해있던 전주FC 수비수들은 서둘러 진영을 갖췄다.
 아까와 같은 상황이 벌어졌다. 수비수 2명이 최민규를 마크했고, 나머지는 윙 포워드를 상대하기 위해 측면으로 빠져있었다.
 최민규는 수비수를 제치는 것보다 패스를 선택 했다.
 우측에서 좋은 공간으로 파고든 유지헌!
 나흘 전 대구FC와의 경기를 되살리며 그에게 힐패스를 날렸다.
 안전하게 볼을 받은 유지헌은 그 자리에서 바로 강력하게 발을 올렸다.
 높게 솟아오른 볼은 정확히 골대로 향했다.
 ‘크으.’
 루트가 쉽긴 했지만 빠르고 강해서 들어가리라 생각했는데, 골키퍼가 대단한 선방을 해냈다. 그 순간에 그렇게 펀칭할 수 있다는 게 놀라웠다.
 그래도 기회는 아직 남아있었다.
 부천FC의 코너킥.
 킥력이 좋은 이민성이 코너로 향했다.
 전주FC는 키가 큰 선수들 위주로 마크했다. 아무래도 그들이 가장 헤딩에 용이하기 때문이다. 물론 중점을 그들에게 둘뿐이지, 전체적으로 모두 신경 써야 했다.
 이민성이 높이 볼을 띄웠다. 그것은 선수들로 뒤섞인 페널티 박스 한복판까지 날아왔다.
 최민규도 그 틈에 있었다. 고민할 것도 없이 높이 점프했다. 맞든, 안 맞든 일단 머리를 댔다. 운으로라도 들어가면 좋은 것이었다.
 ‘맞았다.’
 이마 정중앙에 볼이 닿았다. 최민규는 기회를 놓치지 않고 골대를 향해 이마를 밀었다.
 헤딩볼은 골키퍼가 막기 힘든 코스 중 하나!
 어디로 떨어질지 모르기 때문에 상당히 까다롭다. 특히 이마 가운데에 딱 맞는 볼은 더더욱 막기 어렵다. 하지만 운은 최민규의 손만 들어주진 않았다.
 감각적으로 왼쪽으로 몸을 뻗은 골키퍼의 손에 볼이 걸리고 말았다.
 최민규는 쓴맛을 다셨다. 어떤 일이든지 긍정적으로 생각하는 편이지만 이런 식의 유효슈팅이 날아간 건 그에게도 너무 아까운 일이었다.
 
 ●좋은 유효슈팅으로 인해 명성이 0.05 상승합니다!
 
 최민규는 경기 시작부터 명성이 올라도 신경 쓰지 않았다. 명성은 능력치처럼 직접적으로 영향을 끼치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갑자기 한 번에 500이 상승합니다! 라면 모를까. 하지만 이번은 조금 달랐다.
 ‘유효슈팅도 명성에 영향을 주는 군.’
 좋은 패스나 어시스트, 혹은 골을 넣어야만 오르는 줄 알았다. 그런데 유효슈팅도 0.05 명성에 영향을 줬다.
 ‘좋은’이라는 말이 붙긴 하지만, 이로써 명성을 올릴 기회가 더 많음이 증명됐다.
 경기는 무난하게 흘렀다. 점유율이나 슈팅횟수 등에서 양 팀 간의 차이가 크지 않았다.
 전반 23분.
 전주FC가 프리킥 찬스를 얻었다. 최소한의 선수만 남겨둔 채 대부분이 하프라인을 넘어왔다. 실패하더라도 금방 진영을 갖출 수 있단 계산에서였다.
 미드필더 한 명의 프리킥!
 루트는 좋았지만 중앙 수비수 문종현의 발에 닿아 직선으로 쭉 튕겨 나왔다.
 주인 잃은 볼이 필드를 가르는 찰나, 지척에 있던 최민규가 기회를 맞았다. 안전하게 트래핑한 후, 재빨리 하프라인을 넘었다.
 수비수는 있었다. 역습에 대비하기 위해 모든 선수가 하프라인을 넘지 않은 까닭이었다.
 ‘패스하긴 늦다.’
 현 상황에서 윙 포워드들에게 패스하는 건 좋지 않은 선택이었다. 그들은 수비수들보다 늦게 들어오고 있어서 패스해도 찬스를 못 만들 공산이 컸다.
 대기 중인 수비수는 3명.
 최민규는 그 중 한 명을 빠르게 드리블해서 따돌렸다.
 하지만 나머지 두 명이 문제였다. 아까 한 번 뚫려서 그런지 매우 침착하게 수비에 임했다. 함부로 달려들지 않고 몸을 밀착하며 따라붙었다. 갑자기 몸을 꺾어도 다른 한 명에게 뺏길 듯했다.
 ‘파울을 유도하자.’
 최민규는 그대로 돌진했다.
 수비수들이 진득하게 부딪치며 온몸으로 수비했다.
 오른쪽으로 갑자기 몸을 틀었다.
 수비수 하나가 발을 뻗으며 급하게 팔을 잡아당겼다.
 볼은 저만치 굴러가고, 최민규는 그대로 넘어졌다.
 “삑!”
 전주FC의 파울.
 최민규는 프리킥을 얻었다. 페널티박스에서 가까워서 바로 슛 연결도 가능한 지점이었다.
 키커로는 일단 셋이 나섰다.
 최민규. 김낙중. 이민성.
 셋은 어떻게 찰지 속삭이다가 이내 결론을 내렸다. 김낙중과 이민성은 차는 척 페이크만 주고 최민규가 마지막에 진짜 볼을 차기로 했다.
 인간 벽을 쌓은 전주FC를 혼동시키기 위함.
 볼 위치를 확인한 주심이 다시 한 번 휘슬을 불자, 김낙중이 힘차게 필드를 디뎠다.
 누가 봐도 볼을 차는 동작.
 전주FC의 인간 벽은 아랫도리를 가린 채로 높이 점프했다. 머리나 몸으로 볼을 퉁겨낼 필요가 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허사. 볼은 여전히 필드에 그대로 있었다.
 시간차로 이민성이 빠르게 킥했다. 놀란 전주FC의 수비벽은 다시 한 번 하늘로 올랐다.
 ‘지금이다.’
 이민성의 허공 킥을 확인한 최민규는 빠르게 필드를 디디며 진짜 슛을 날렸다.
 역동작에 걸린 전주FC의 인간 벽은 다소 엉성하게 점프할 수밖에 없었다.
 오른발로 잘 감은 볼은 바나나 모양을 형상시키며 골대를 향해 날아갔다.
 골대 오른쪽 구석을 노린 슈팅!
 방향을 읽은 골키퍼가 급하게 몸을 날렸다. 최대한 손을 뻗으며 어떻게든 볼을 퉁겨내고자 했다. 그러나 아쉽게도 손끝에만 살짝 걸리고 말았다.
 그물망을 완전히 가른 볼!
 작지만 응원석에서 함성이 쏟아졌다. 동료들이 머리와 어깨를 두드리며 축하의 뜻을 보냈다.
 최민규는 오랜만에 느껴보는 골 맛에 덩실덩실 춤을 추었다.
 
 ●골로 인해 경험치가 소량 상승합니다!
 ●골로 인해 명성이 0.5 상승합니다!
 
 ‘골이 육성엔 최고군.’
 하나의 골로 두 마리 토끼를 잡았다. 경험치가 추가적으로 더 상승했고, 명성도 0.5나 올랐다.
 “이야, 최민규!”
 “아주 물올랐다?”
 “너도 드디어 빛을 보나보다!”
 동료들이 축하해주자, 최민규는 그저 밝은 미소로 화답했다. 아무리 머리를 세게 두들겨 맞아도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이런 식으로 맞는 건 백 대, 천 대를 맞아도 좋았다.
 세레모니가 끝난 후, 전주FC 선수 두 명이 센터서클에 섰다.
 최민규는 들떠있는 심장을 가라앉혔다. 한 골 넣은 것에 취해있으면 방심과 실수가 동시다발적으로 찾아온다. 미리 방지하기 위해선 마음을 다 잡아야한다.
 전주FC 선수들의 얼굴에서 급박함은 보이지 않았다.
 이제 겨우 전반 27분.
 후반전까지 생각하면 동점골을 넣기에 충분한 시간이었다. 아니, 그 이상을 바라봐도 무방했다. 야구에서 9회말 2아웃이라는 말이 있듯, 축구에도 후반 추가시간까지 모른단 말이 있었다.
 이것은 부천FC에도 적용된다. 1:0에서 만족할 게 아니라 추가골을 노려 볼만 했다.
 주장 유지헌이 소리쳤다.
 “한 골 넣었다고 기세등등하지 말자고!”
 “예!”
 최민규의 생각처럼 유지헌 역시 경기를 이기고 있다고 해서 선수들이 들떠있는 걸 원치 않았다. 단숨에 경기를 그르칠 수도 있음을 아는 것이었다.
 
 삑-
 
 주심의 휘슬이 울리며 경기가 재개되었다.
 전주FC 선수들은 천천히 패스를 이어나갔다. 뒤지고 있음에도 전혀 급해하지 않았다. 미드필더들이 하프라인 근처에서 볼을 굴리며 구멍을 찾았다. 보통 골을 넣은 팀은 몇 분간 방심하기 마련. 하지만 구멍은커녕 오히려 더 촘촘해져 있었다.
 유지헌의 외침이 부천FC 선수들에게 크게 작용했다. 앞서고 잇단 사실보다 골을 허용해 동점을 주면 안 된다는 것에 더 중점을 뒀다.
 전주FC는 할 수 없이 오른쪽 측면으로 길게 볼을 올려 보냈다. 헤딩 경합에서 볼을 따낸 후, 페널티 박스로 파고들겠단 계산이었다.
 부천FC는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우측 수비수 나재홍이 점프와 몸싸움에서 전주FC 선수를 밀어내며 볼을 따냈다.
 가까스로 라인 안으로 떨어진 볼을 성태빈이 받았다. 곧바로 전주FC 선수가 달라붙자, 이민성 쪽으로 볼을 넘겼다.
 이민성은 볼을 굴리며 전방을 훑다가 유지헌에게 짧게 패스했다.
 오른쪽 측면에 있는 두 명의 수비수.
 깊숙이 파고들어 크로스를 올리는 것은 무리가 있었다. 유지헌은 할 수 없이 볼을 다시 뒤로 물렸다. 무리하게 돌파하다가 볼을 뺏기느니 한 타임 쉬는 게 나았다.
 다시 볼을 받은 선수는 나재홍.
 최민규는 그 모습을 확인하고 전주FC의 진영을 파고 들어갔다. 롱패스가 잘 들어오고, 또 그걸 잘 트래핑한다면 페널티 박스까지도 돌파할 만 했다.
 ‘좋아.’
 넓은 시야를 가진 나재홍이 롱패스를 올려줌으로써 일단 첫 단추는 잘 끼워졌다.
 문제는 지금부터.
 최민규는 가슴으로 트래핑한 후, 왼발로 볼을 한 번 접었다. 그 덕에 달려드는 수비수로부터 한시름 놓을 수 있었다.
 옆에서 번개같이 튀어나오는 다른 수비수.
 최민규는 오른 발로 다시 한 번 볼을 접고 돌파하려 했으나, 아쉽게도 수비수의 발이 먼저 닿았다. 볼은 하늘 높이 솟아올라 라인을 벗어났다.
 부천FC의 드로잉 공격.
 볼을 잡고 전방을 훑던 김석태는 일단 안전하게 수비수에게 볼을 넘겼다.
 드로잉을 받은 문종현은 볼을 최후방까지 물렸다.
 
 # 집중
 
 골키퍼 박형수.
 아크서클에 볼을 놓은 그는 힘껏 발을 움직였다. 볼은 하프라인을 벗어나 전주FC 진영까지 날아갔다. 멀리차면 같은 팀이 잡으리란 보장이 없다는 게 단점이지만, 반대로 한 번에 공격할 수 있는 장점이 있었다.
 필드로 떨어지는 볼을 잡기 위한 헤딩경합.
 선수 두 명이 높이 점프였다.
 한 명은 전주FC의 키 큰 수비수였고, 다른 한 명은 최민규였다.
 최민규의 키는 결코 작지 않았다. 183m이면 어느 정도 큰 편에 속했다. 하지만 상대 수비수가 더 크다는 게 문제였다.
 볼은 최민규의 머리에 닿지 않았다. 조금 더 높이 솟아오른 전주FC 수비수의 머리에 맞았다. 공격 기회가 다시 넘어가고 말았다.
 ‘그러고 보니 헤딩 능력치를 하나도 찍지 않았군.’
 최민규는 부천FC 진영으로 내려가면서 다시 한 번 능력치의 밸런스에 대해 깨달았다.
 당장 A가 필요하다고 A만 찍으면 안 된다. B나 C도 언제, 어느 순간 필요로 할지 모른다.
 경기가 속개되고 최민규는 꾸준히 필드를 누볐다.
 기회는 찾아오는 게 아니라 만들어야 하는 법.
 전반 총 47분까지 더 이상의 추가골은 없었지만 많은 찬스를 만들어냈다. 골로 연결만 됐다면 어시스트도 있었고, 프리킥 찬스 2번과 페널티 박스 근처까지 돌파한 것도 3번이었다.
 동료들은 최민규에게 크게 박수를 보냈다.
 “민규! 대박이었다!”
 “축구에도 득도가 있나?”
 류장일 감독도 최민규의 어깨를 두드렸다.
 “태준이보는 줄 알았다, 민규야.”
 “감사합니다.”
 최민규를 향한 칭찬세례는 라커룸에 들어와서도 계속되었다.
 “골에다가 폭풍 활약까지.”
 “종횡무진 아주 난리였다.”
 “밤낮 안 가리고 훈련한 게 여기서 드러나는구나, 민규야.”
 최민규는 뒷머리를 긁적이며 웃음만 보였다. 이렇게 칭찬만 듣는 건 정말 오랜만의 일. 잘 적응되지 않았다.
 양대섭 코치도 옆에서 거들었다.
 “너 이 녀석. 조만간 챌린지에서 호출 오겠는데?”
 “에이, 더 잘 해야죠.”
 최민규가 손사래를 치자 양대섭 코치는 짐짓 진중한 표정을 띠웠다.
 결코 빈말이 아니란 얼굴이었다.
 “아냐. 내가 보기엔 진짜 호출 온다.”
 양대섭 코치는 절대 선수들의 민감한 부분을 가지고 농을 할 위인이 아니었다. 정말로 최민규에게 가능성이 보였기에 해준 말이었다.
 동료 선수들이 감탄사를 쏘아냈다.
 “이야, 축하한다! 최민규!”
 “어휴, 선배님까지. 진짜 아녜요.”
 “아냐. 내가 보기에도 너 이번엔 가능성 있다.”
 주장 유지헌까지 거들자 최민규는 몸 둘 바를 몰랐다.
 ‘정말 올라갈 수 있을까?’
 최민규의 첫 번째 목표는 1부리거가 되는 것이다. 프로 생활을 시작할 때부터 정해져있었고, 항상 그걸 위해 노력했다.
 하지만 힘들었다. 2부 리그에서 1부 리그로 올라가는 산은 너무도 높고 험했다. 아무리 노력해도 끝이 보이지 않았다.
 ‘더 열심히 하자.’
 최민규는 선수들과 감독, 코치들에게 칭찬을 들었다고 절대 자만하지 않았다.
 그 동안 얼마나 노력했던가?
 한 순간 자만심에 빠져 일을 그르칠 순 없었다. 자만심은 늪과 같아서 한 번 디디면 나오기가 굉장히 어려웠다.
 최민규는 이온음료로 목을 적시며 상태창을 확인했다.
 경험치 바가 거의 채워져 있었다. 경기 도중 4레벨이 될 수도 있겠다 싶었다.
 명성은 1.65. 이건 그다지 눈 여겨 보지 않았다. 500까지 채우려면 여전히 까마득했다.
 ‘4레벨에 얻는 포인트도 골고루 투자하자.’
 전반 경기 중, 헤딩경합에서 밀렸던 것을 생각하며 최민규는 어떤 능력치를 찍을지 미리 정해놓았다.
 
 그 사이 하프타임이 끝났다.
 달콤한 휴식이었다. 목도 축였고, 땀도 닦았다. 다만 전반전이 끝나고 나서 후들거리기 시작했던 다리가 아직도 제 정신을 못 차리고 있었다. 못 뛸 정도는 아니었으나 경기를 시작할 때만큼의 상태는 아니었다.
 최민규는 생각했다.
 ‘후반전에는 너무 뛰면 안 되겠어.’
 전반전 내내 필드 곳곳을 뛰어다닌 탓에 다리가 많이 지친 듯했다.
 나름 체력에 자신감을 가지고 있었던 최민규는 갈 길이 태산임을 깨달았다.
 불철주야 훈련. 그것이 답이었다.
 양 팀 선수들이 필드에 모였다.
 각자 포지션을 잡고 경기 시작을 기다렸다.
 부천FC 선수들의 얼굴엔 추가골을 넣고 승기를 잡겠단 기색이 역력했다. 한 골만 더 들어가면 웬만해선 승부가 뒤집어지지 않을 터였다.
 전주FC 선수들은 어떻게든 동점골을 넣겠단 표정이었다. 아니, 그 이상을 바라보겠단 의지가 보였다. 이글이글 타오르는 눈동자에서 그 마음이 여실히 느껴졌다.
 후반전 선축은 전주FC에서 시작되었다.
 심판의 휘슬이 불리고, 둥근 볼이 다시금 45분간의 항해를 시작했다.
 ‘공격적으로 전환했군.’
 전주FC는 후반전에 많은 변화를 줬다. 포백 라인을 쓰리백으로 줄이며 공격형 미드필더를 교체 투입시켰다. 전체적으로 수비적이었던 포메이션 역시 앞으로 끌어당겼다.
 한 경기, 한 경기의 중요성!
 수비축구가 강점인 전주FC지만 지고 있음에도 그걸 고집할 순 없었다.
 반면 부천FC는 전혀 변화를 주지 않았다. 전반전과 마찬가지로 4-3-3 포메이션을 이어갔고, 따로 선수도 교체하지 않았다. 경기 흐름을 끌어가고 있기 때문에 굳이 모험을 할 이유가 없었다.
 최민규 역시 여전히 최전방에서 스트라이커로 나서고 있었다.
 ‘속공인가?’
 전주FC는 전반전과 다르게 빠르게 패스를 이어갔다. 볼을 돌리며 틈을 찾는 게 아니라 돌파하며 공간을 만들려는 듯했다.
 부천FC 진영에 전주FC의 공격수와 미드필더들이 대거 내려왔다. 좌우측에서 윙 포워드들이 파고들었고, 미드필더들이 중간을 받쳤다. 딱딱 맞아떨어지는 그들의 패스를 보면서 전주FC가 비단 수비에만 강점이 있는 게 아님을 느낄 수 있었다. 물론 역습에도 이미 대비가 되어 있었다. 수비수들은 안전하게 하프라인 아래에서 대기 중이었다.
 최민규는 볼보다 사람을 쫓으며 기회를 얻고자 노력했다. 하지만 교체 투입된 미드필더가 너무 날카로웠다.
 우측을 파고드는 포워드에게 긴 쓰루패스!
 나재홍이 급히 발을 뻗었지만 볼에 닿지 못했다.
 볼은 상대편 공격수에게 그대로 향했다. 코너에서 볼을 잡은 그는 수비수가 없는 빈 공간으로 빠르게 발을 움직였다.
 나재홍이 다시 급히 붙었으나, 이미 크로스가 올라가고 있었다.
 ‘이런.’
 최민규는 그저 멀뚱히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부단하게 필드를 누린다고 해도 진영 최후방까지 내려가진 않기 때문이다.
 부드럽게 날아간 크로스는 아크서클까지 안전하게 도착했다.
 골을 주느냐, 마느냐의 헤딩경합.
 정만식과 문종현이 높이 점프했다. 어떻게든 볼을 따내서 멀리 내보내야 했다. 하지만 불행히도 볼은 미리 공간을 파고든 전주FC 선수의 머리에 맞고 말았다.
 이마 정중앙에 맞은 직격탄.
 날아왔던 속도까지 가증되어 헤딩 볼은 매우 빠르게 나아갔다.
 박형수가 감각적으로 손과 발을 뻗었으나 볼은 이미 그물망을 가르고 있었다.
 전주FC의 동점골.
 경기는 다시 원점으로 돌아갔다.
 “괜찮아!”
 유지헌이 주장으로써 선수들을 독려했다.
 이제 겨우 후반 3분.
 추가골을 넣을 시간은 충분했다.
 최민규도 고개를 끄덕이며 유지헌의 말에 동조했다.
 한 골 먹힌 건 어쩔 수 없는 것이다. 조금만 더 잘했으면 먹히지 않았을 거란 생각은 버려야 한다. 그것에 얽매이면 사기 난조만 부를 뿐이다.
 동점골로 인한 하프라인 경기 재개.
 심판의 휘슬이 울리고, 최민규는 김낙중에게 볼을 받았다. 하프라인 시작이라 전주FC 선수들 모두 자기 진영에 있었기 때문에 돌파나 찔러주기는 무리였다. 찬찬히 볼을 돌릴 필요가 있었다.
 이민성에게 볼을 넘긴 후, 기회를 노렸다.
 전주FC도 슬슬 하프라인을 넘어오며 포지션을 잡았다. 역시 전반전과는 달리 공격적인 태세를 보이고 있었다. 내친김에 역전골까지 터뜨리겠단 모습이었다.
 최민규는 여전히 하프라인 근처에서 자리 잡고 있었다.
 ‘빈틈이 나올 게 분명해.’
 전주FC는 원래 수비에 중점을 두는 팀이다. 한데 전반전에 1점을 먹힌 후, 후반전부터 공격적으로 포메이션을 전환했다.
 잘했다. 절대 못하지 않았다. 그러니까 동점골을 넣은 것이다.
 하지만 최민규는 달리 생각했다. 훈련도 항상 수비 위주로 했을 터, 급작스럽게 포메이션을 변화시켰다면 필히 한 순간 빈틈이 나오리라 보았다.
 최민규는 그때를 노리기로 했다.
 부천FC 선수들도 같은 생각을 했는지 롱패스나 긴 땅볼패스로 공격을 나가기보다 중원에서 패스연결에 힘썼다.
 볼을 돌리길 몇 초.
 채 20초가 되지 않는 짧은 시간에 전주FC 선수들이 큰 실수를 저지르고 말았다. 압박하며 볼을 뺏으려다 진영 좌측에 빈 공간이 생겼다.
 볼을 가지고 있던 성태빈.
 기회를 치지 않고 김낙중에게 롱패스를 올렸다. 공간을 파고 들어가는 것까지 계산했기 때문에 볼은 정확히 김낙중의 지척에 떨어졌다.
 전주FC 수비수가 급하게 따라붙었다.
 하지만 김낙중이 기회를 줄 리 없었다. 볼이 움직였던 순간부터 필드 중앙을 가로 지르고 있던 최민규에게 그대로 땅볼을 보냈다.
 수비수가 발을 뻗었다. 하지만 가속력이 붙은 최민규가 훨씬 빨랐다.
 볼이 발끝에 걸린 걸 확인한 최민규는 강한 왼발 슈팅을 날렸다.
 좋은 패스. 그리고 이어지는 슛.
 포물선을 그리며 날아간 볼이 그대로 골대 안으로 빨려 들어갔다.
 골키퍼가 선방하고자 몸을 날렸지만 몸 어디에도 볼이 걸리지 않았다.
 
 삑-
 
 기쁨에 젖으려는데, 라인 밖에서 부심이 휘슬을 불었다.
 오프사이드 반칙.
 최민규는 수비수보다 먼저 필드를 갈랐고, 그 탓에 골이 인정되지 않았다.
 미안하단 제스처를 취하자 김낙중은 오히려 엄지를 치켜들었다. 전혀 그런 마음 가지지 말라며.
 ‘성급했다.’
 자신도 모르게 마음이 앞섰던 최민규. 그렇게 침착하게 플레이하자고 다짐했건만 결국 일을 그르치고 말았다. 조금만 느리게 들어갔다면 충분히 오프사이드를 피했을 터였다.
 ‘분발하자.’
 한 차례 위기에 직면해서일까. 전주FC 선수들은 공격적으로 태세를 바꿨음에도 불구하고 방금과 같은 실수를 재발하지 않았다.
 부천FC가 중원에서 볼을 굴리고 있어도 무리하게 포지션을 앞당기지 않았다.
 후반 15분.
 부천FC의 류장일 감독은 이민성을 빼고, 교체선수 이준호를 공격형 미드필더로 투입시켰다. 미드필더 수는 그대로 유지하면서 조금 더 공격적으로 나가겠단 계산이었다.
 놓치기 아쉬운 경기.
 충분히 이길 수 있는 경기이므로 무승부를 생각하기보다 한 골을 추가시켜 역전 경기를 만드는 게 옳은 판단이었다.
 이준호의 투입으로 인해 부천FC는 조금 활기를 찾았다. 좀 더 깊숙한 곳에서 볼을 굴리며 언제든 돌파할 수 있단 압박을 심어주었다.
 ‘두드리면 반드시 열린다.’
 열 번 찍어 안 넘어가는 나무 없듯 아무리 수비에 강점이 있는 팀이라고 해도 실점을 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있다.
 최민규는 그 기회를 찾아 끊임없이 필드를 달렸다.
 김낙중에게 다시 한 번 크로스를 받아 발리슛을 꽂기도 했고, 페널티박스 쪽으로 쓰루 패스를 찔러 유지헌에게 골 기회를 주기도 했다.
 수많은 유효슈팅들.
 ‘유효슈팅이 100개라도 골이 없다면 무용지물.’
 유효슈팅을 아무리 많이 해봤자 정작 골을 넣지 못한다면 의미가 없다. 차라리 1개의 유효슈팅을 가지고 있으면서 그게 골로 연결되는 게 이득이다. 축구의 승부를 가르는 건 결국 골이니까.
 유효슈팅이 많은 게 나쁘단 소리는 아니다. 높을수록 그 팀의 수준이 높다는 걸 의미하기 때문이다. 약팀이면서 유효슈팅이 앞서는 경우가 드물기도 하고.
 ‘결정력!’
 현재 최민규에게 부족한 건 골 결정력이다. 수차례 기회가 왔으나 볼은 그물망이 아닌 골키퍼의 손을 갈랐다.
 다른 경우도 많았다. 오프사이드에 걸리거나, 골대를 때리기도 했다. 헛발질로 볼을 놓치는 경우도 종종 있었다. 하나 같이 결정력 부족으로 인해 생긴 결과였다.
 그래도 위안 삼을 건 있었다. 점유율과 앞서 말했던 유효슈팅 횟수가 앞선다는 점이었다.
 전체적으로 경기를 끌고 간단 의미!
 전주FC에게 추가골만 허용하지 않는다면 이 경기를 이길 가능성은 충분했다.
 부천FC 선수들도 그 점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경기는 쉽사리 뒤집어지지 않았다.
 부천FC가 전반전의 승기를 다시 한 번 잡고 싶어 하는 것만큼 전주FC도 한 골을 더 넣어 역전을 노리고 싶어 했다.
 연이은 선수 교체.
 전주FC는 남은 교체 카드 2장을 모두 공격형 선수로 사용했다.
 무조건 이 경기를 잡겠단 의미였다.
 부천FC도 마찬가지였다. 같은 포지션 선수끼리 교체하긴 했지만 좀 더 공격적인 선수를 투입시켰다.
 ‘얼마 남지 않았다.’
 후반 42분.
 서서히 경기 종료 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
 
 # 성장
 
 ‘급할수록 돌아가라.’
 최민규는 옛말을 떠올리며 저도 모르게 급급해진 마음을 눌러 앉혔다.
 서둘러서 잘 되는 경우는 극히 드물다. 추가 시간까지 해서 경기 시간이 1분도 채 남지 않았다면 모를까, 아직은 정석적인 플레이를 해도 충분하다.
 부천FC 선수들도 그 점을 잘 알고 있었다.
 롱패스로 상대 진영까지 한 번에 패스하기보다 중원을 거쳐 찬찬히 올라갔다.
 골을 넣는 속도는 느릴지언정 뺏기거나 끊길 확률은 극히 낮았다.
 현재 볼을 잡고 있는 이는 이준호. 이민성의 교체 선수로 투입된 그는 아까부터 전주FC의 중원을 잘 흔들고 있었다.
 이준호의 시야에 세 명의 선수가 들어왔다.
 최민규. 김낙중. 유지헌.
 그들에겐 각각 두 명, 한 명, 한 명의 수비수가 붙어 있었다. 이 시간에 골을 허용하면 질 확률이 높다는 걸 알기에 중원 미드필더들까지 내려와 수비에 일조하고 있었다.
 이 정도면 패스해도 되겠지, 하는 마음으로 볼을 건네줬다간 뺏기기 십상.
 이준호는 일단 볼을 굴리며 구멍을 찾았다. 여차하면 바로 쑤셔 넣겠단 생각이었다.
 허나 쉽지 않았다. 선수들이 대거 수비에 동참하는 바람에 필드가 매우 촘촘했다. 길게 늘어나도 작은 구멍하나 비추지 않는 나일론의 그것을 보는 듯했다.
 남은 건 결국 롱패스.
 ‘준호야, 이쪽!’
 볼을 차려던 이준호는 최민규의 눈빛을 보았다. 정말 말 한 마디 없는 눈빛, 그 하나였다. 하지만 그는 그걸 완벽히 알아들었다.
 팀워크. 호흡.
 오랫동안 함께한 동료이기에 작은 동작하나만으로도 그의 생각을 읽을 수 있었다.
 이준호는 하프라인까지 내려온 최민규에게 어렵지 않게 패스를 보냈다.
 최민규도 롱패스로 기회를 만들어보려는 이준호의 생각을 읽었다.
 결코 틀린 판단은 아니다. 현 상황에서 제일인 타개책을 꼽으라면 분명 롱패스다. 하지만 그게 골문까지 연결될 거라는 건 장담하기 힘들다.
 ‘정공법.’
 어려운 일일수록 정면으로 부딪쳐야 하는 법.
 최민규는 수비수 세 명을 제치고 슈팅을 날리거나, 혼란을 틈타 페널티 박스 근처까지 파고들 김낙중과 유지헌에게 패스를 날리기로 했다.
 물론 말만 이럴 뿐 성공 가능성은 100보다 0에 가까웠다. 지금까지 경기를 뛰면서 단 한 번도 세 명을 제친 적이 없는 게 첫 번째 이유였고, 걸출한 실력을 가진 선수들에게도 어려운 일이라는 게 두 번째 이유였다.
 그렇다면 롱패스가 차라리 낫지 않냐고?
 ‘파울을 유도할 수도 있다.’
 설마 수비수가 셋이나 있는데 돌파하리라고는 생각지 못할 전주FC. 갑작스레 드리블을 시도한다면 손이 먼저 나갈 수도 있다.
 최민규는 그걸 노렸다.
 어떻게든 페널티박스 근처까지만 가서 파울을 얻어낸다면 좋은 프리킥 찬스를 만들 수 있었다.
 드리블을 해나갔다. 낼 수 있는 한 최고의 속도로 상대 진영을 파고들었다.
 예상치 못한 움직임에 전주FC 선수들이 물음표를 떠올리며 달라붙었다.
 두 명의 수비수. 한 명의 미드필더.
 최민규는 미드필더가 먼저 지척에 달라붙자 오른쪽 측면으로 볼을 차는 모션을 취했다.
 ‘오케이.’
 고개를 도리는 미드필더. 제대로 페이크 동작에 걸리고 말았다. 1초도 안 되는 찰나의 순간이지만 접고 제치기에는 충분했다.
 이제 남은 수비수는 두 명.
 최민규에게는 이와 같은 상황이 오늘 몇 차례 있었다. 돌파에 성공한 적도 있었고, 그러지 못한 경우도 있었다.
 요는, 충분히 가능성이 있다는 것.
 최민규는 파이팅을 외치며 볼을 몰았다. 역시나 수비수 둘이 한꺼번에 달라붙었다. 한명을 제치더라도 다른 한명한테 걸려서 볼을 뺏기는 구조였다.
 최민규는 왼 발로 볼을 오른쪽으로 보내며 몸을 틀었다. 자연스레 수비수들이 따라붙었다. 그리고 같은 동작을 재빠르게 한 번 더 반복했다.
 짧은 순간, 조그맣게 드러난 빈 공간.
 계산에 없던 찬스였지만, 그는 깊게 고민하지 않았다. 슛을 찰 수만 있다면 계산이 무슨 대수인가. 머리보다 발이 먼저 움직이는 게 바로 축구선수다.
 강력한 오른발 중거리 슈팅!
 공격수가 보였기에 골키퍼는 볼의 궤적을 읽었다. 완벽하게 몸을 날렸고, 볼 또한 그곳으로 갔다. 그러나 인간보다 빠르게 쇄도한 볼이 이미 그물망을 흔들고 있었다.
 부천FC의 추가골.
 동시에 최민규의 멀티골.
 감독, 코치, 선수들이 크게 환호했다. 본인이 직접 골을 넣은 것처럼 양 팔을 올렸다.
 빈 공간을 찾는 게 빠를 정도로 인파가 적은 응원석에서도 오랜만에 함성이 터져 나왔다.
 머리가 지끈거릴 정도로 선수들이 손바닥을 놀렸다.
 “세 명을 제치고 골을 넣어? 진짜 말도 안 돼!”
 “대단하다, 최민규!”
 류장일 감독도 그 두툼한 손으로 등짝을 휘갈겼다.
 “잘했다! 아주 잘했어!”
 알림음도 축하메시지를 보냈다.
 
 ●레벨이 4로 올랐습니다!
 ●멀티골로 인해 경험치가 소량 상승합니다!
 ●멀티골로 인해 명성이 0.8 상승합니다!
 
 겹경사였다. 입이 귀에 걸릴 만큼 기뻤고, 심장은 아리따운 여자의 나체를 봤을 때보다도 쿵쾅거렸다.
 최민규는 요동치는 마음을 붙잡았다.
 아직 경기는 끝나지 않았다. 추가시간까지 생각한다면 3~4분 정도가 더 남았다.
 “마지막까지 최선을 다하자!”
 주장 유지헌 역시 골에 대한 기쁨보다 아직 경기가 끝나지 않았다는 것에 더 중점을 뒀다.
 부천FC 선수들이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필드에 자리했다.
 이후 4분.
 전주FC는 역전은 고사하고 어떻게든 동점골을 넣고자 강하게 압박했다. 수비수들까지 전부 하프라인 근처까지 올라올 정도로 엄청난 폭격이었다.
 부천FC는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몇 분 후면 경기를 이긴다는 생각보다 몇 분만 버티면 경기를 이긴다는 생각으로 열의를 불태웠다.
 “삑!”
 뜨겁게 공방을 주고받던 중 주심의 휘슬이 울렸다.
 경기가 끝났음을 알리는 신호.
 부천FC가 전주FC를 상대로 멋진 2:1승리를 거뒀다.
 
 ***
 
 류장일 감독은 오전훈련을 생략했다. 전날 승리로 인해 거하게 회식을 한 터, 일찍부터 무리할 필요가 없었다. 다음 경기가 일주일 후에 있는 것도 영향을 끼쳤다.
 그런데 10시 즈음부터 훈련장을 누비는 사내가 있었다.
 ‘후아.’
 사내의 정체는 다름 아닌 최민규.
 그 역시 전날 밤 진탕 술을 마셨지만, 이상하리만치 숙취가 심하지 않았다. 술은 잘 안 받아도 해독은 잘 되는 모양이었다.
 ‘맞다.’
 간단하게 훈련장을 2바퀴 돈 최민규는 전날 올리지 않은 스탯을 떠올렸다. 골을 넣은 순간 레벨이 오르는 바람에 곧바로 올리지 못했었다.
 최민규는 상태창을 열었다.
 ‘확실히 태클, 위치선정, 대인방어는 그리 쓸모가 없다.’
 일단 태클은 공격수가 쓸 일이 드물다. 상대의 볼을 뺏을 때 쓰는 게 태클인데, 공격수는 그런 경우보다 반대의 경우가 더 많다.
 위치선정도 마찬가지다. 공격수는 어떤 지점에 가서 볼을 받는 게 아니라 볼을 받는 공간을 만드는 게 더 중요하다. 공간창출이라는 능력치가 존재하는 것도 그런 이유다.
 마지막 대인방어도 역시나 공격보다는 수비가 목적인 선수에게 더 의미가 있다.
 결론적으로.
 다른 스탯에 투자하는 게 더 이득이다.
 ‘리더십, 판단력, 예측력.’
 그리고 정신적인 능력치들. 언뜻 보면 경기에 전혀 도움이 될 것 같지 않다. 하지만 직접적으로 영향을 주지 않을 뿐, 간접적으로는 분명히 이득이다.
 리더십이 있으면 선수들을 이끌어가기에 용이하다. 아직은 후배보다 선배가 많고 주장완장도 차지 못했지만 훗날을 생각하면 분명 필요한 능력치다.
 판단력은 경기 중에 매우 주요하게 작용한다. 어떻게 플레이해야 할지 감이 안 잡히는 상황에서 발휘한다면? 유연하게 대처가 가능할 것이다.
 예측력은 일종의 운이라고 볼 수 있다. 파울을 유도할 수 있을지 없을지, 볼이 여기로 떨어질지, 저기로 떨어질지 등등의 효과가 클 것이다.
 ‘일단 리더십과 예측력을 한 개씩 찍자.’
 판단력은 55으로 수치가 높은 편이다. 굳이 지금 찍을 필요가 없다.
 남은 능력치 포인트는 3.
 ‘흠.’
 문득 이런 생각이 들다. 과연 잘 찍고 있는 것일까? 왜, 이런 말이 있지 않은가. RPG게임에서 가장 중요한 건 스탯이라고.
 최민규도 게임을 해봤다.
 ‘드리블과 민첩성을 먼저 맞춰주는 게 맞는 건가?’
 처음엔 달리 생각했었다. 드리블과 민첩성이 부족하더라도 다른 것도 같이 찍어줘야 한다고 말이다. 두 가지만 몰아서 올리는 사이 다른 것에서 발전이 없을 것 같아서 그랬다.
 한데 곰곰이 상태창만 들여 보고 있으니 점차 생각이 바뀌었다. 등산이 서툰 사람이 있으면 그 사람한테 속도를 맞춰줘야 하듯, 부족한 능력치가 있으면 다른 것과 비슷하게 포인트를 올려줘야 하지 않을까.
 ‘그래. 내가 드리블과 민첩성만 찍는 동안 다른 능력치는 더 나은 상황에서 기다리고 있는 것뿐이다.’
 최민규는 남은 3포인트를 드리블과 민첩성에 골고루 투자했다.
 ‘밸런스를 맞추자.’
 한 가지에 특화된 선수.
 밸런스 있는 선수.
 다양한 선수들이 있지만 최민규는 일단 두 가지만 놓고 비교를 해보았다.
 전자도 나쁘지 않다. 다른 건 평범하지만 잘하는 것 한 가지로 많은 점수를 뽑아낸다. 그 한 가지가 워낙 뛰어나서 막을 수가 없다. 하지만 크나 큰 단점이 있는데, 그걸 발휘할 수 없는 상황에선 빛을 못 볼 공산이 크다는 것이다.
 후자는 특출 난 건 없어도 모든 면에서 밀리지 않는다. 많은 점수를 뽑아낼 순 없어도 어떤 상황에서든 100퍼센트의 실력을 보인다. 훗날 완성형 플레이어가 될 확률도 매우 높다. 단점이 없지만은 않다. 성장할 때까지 주목받기 힘들고 일찍이 무너지는 경우가 많다.
 ‘그 날 밤이 없었다면.’
 실력을 능력치로 볼 수 있기 전. 그러니까 그 날 밤 상태창을 열어볼 수 있는 천운을 얻지 못했다면 최민규는 아마 조기에 무릎을 꿇었을 수도 있다. 끊임없이 노력해도 별 다른 성과를 얻지 못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반드시 빛을 볼 수 있단 확신이 있다.
 바로 능력치.
 내 자신이 얼마만큼 노력했는지 수치로 알 수 있다는 것은 정말 엄청난 행운이다.
 부족하면 더 노력하면 되니까.
 또 이 정도하면 된다, 라는 걸 알 수 있으니까.
 최민규는 상태창을 닫고 다시 훈련에 열중했다.
 슈팅훈련!
 임의의 공간에서 볼을 찼다. 넣는 것보다는 원하는 지점으로 향하는 지에 중점을 뒀다. 골키퍼가 없는 상황에서는 볼을 넣는 게 무의미하기 때문이다.
 볼의 궤적은 생각하는 대로 움직였다. 좌측이면 좌측, 우측이면 우측, 중앙이면 중앙.
 …….
 최민규는 금방 이 훈련의 문제점을 깨달았다.
 수비수의 부재.
 방해받지 않는 상태에서 볼을 차면 그만큼 결정력이 높아져서 훈련의 효율이 떨어진다. 더 큰 발전을 위해서는 방해꾼이 필요하다.
 ‘있다고 생각하자.’
 최민규는 드리블을 시작했다.
 곧 유령 수비수가 따라붙었다. 어떻게든 볼을 뺏으려는 듯 집요하게 괴롭혔다.
 간신히 빠져나와 슛을 때리려는데 갑자기 다른 놈이 튀어나오는 바람에 볼을 놓치고 말았다.
 ‘흠.’
 누군가 이 모습을 보고 있다면 정신이상자로 판단할 것이다. 자기 혼자 드리블하고 뺏기며 아쉬워하는 놈은 적어도 범인 중엔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최민규는 계속 달렸다.
 상태창에서 경험치가 올라가는 걸 확인했다. 훈련이 된다면 보이는 모습은 중요치 않았다.
 ‘레벨 업은 확실히 어려워졌군.’
 최민규의 현재 레벨은 4. 1~3레벨 때와 비교하면 분명히 레벨 업이 더뎌졌다.
 전에는 몇 시간만 뛰어도 쑥쑥 올랐던 경험치가 지금은 눈에 띄게 그 양이 줄었다. 여타 RPG게임의 캐릭터처럼 고 레벨이 될수록 육성이 힘들어지는 것이다.
 ‘좋다.’
 최민규는 그래도 좋았다. 레벨을 올리기 힘들다는 걸 떠나서 노력하면 100퍼센트 보상받을 수 있다는 사실이 더 중점이니까.
 현 상황만 봐도 그랬다.
 쉴 수 있음에도 훈련하고 있지 않은가.
 오전 내내 훈련 매진.
 기운이 빠지지 않고 오히려 술기가 싹 달아났다. 다소 침침했던 눈도 맑아졌다.
 어디 그뿐인가. 경험치를 벌써 7퍼센트나 채웠다. 부단히 훈련하면 이번 주 안에 5레벨을 찍을 듯싶었다.
 해가 중천에 떴을 때 쯤, 최민규는 오전 훈련을 끝냈다. 밥을 먹고 오후 훈련을 준비해야했다. 마음 같아서는 이어서 훈련하고 싶지만 규칙적인 생활은 축구선수에게 필수였다.
 식사 후 훈련장.
 느지막이 일어난 선수들이 제각기 몸을 풀고 있었다. 다들 푹 쉰 탓인지 안색이 밝았다. 다만 숙취해소가 안 돼서 고생하는 이들이 몇 있었다.
 “가볍게 돌고 시작하자.”
 양대섭 코치의 지시에 선수들이 일제히 훈련장을 돌기 시작했다. 가볍게 몸을 푼 후, 실시하는 뜀걸음은 워밍업에 제격이었다.
 
 # vs강원FC
 
 닷새 후.
 
 ●레벨이 5로 올랐습니다!
 
 최민규는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내일 경기 전까지 어떻게든 5레벨이 되고자 노력했는데, 그게 드디어 결실을 맺었다.
 포인트는 모두 드리블과 민첩성에 투자했다. 접때 확실히 정해두었기에 일절 망설임이 없었다.
 ‘내일도 선발.’
 류장일 감독은 내일 있을 강원FC와의 경기에서도 최민규에게 선발을 권유했다. 풀타임 소화가 가능하고, 전주FC와의 경기에서 보여준 걸 생각하면 자격은 충분했다.
 다음 날.
 류장일 감독은 강원FC와의 경기에서 여전히 4-3-3포메이션을 구사했다. 포백 수비, 중원에 세 명의 미드필더, 그리고 상대 진영에 공격수 셋이 들어가는 게 기본이었다. 다만 이전 경기들과 비교해 달라진 점이 있었다.
 좌우측에서 상대의 크로스나 돌파를 저지하는 역할을 맡았던 백윤민과 나재홍. 두 사람은 오늘 윙백으로 공격에 중점을 둔 측면수비수를 맡았다.
 남은 센터백 정만식과 문종현은 그대로 포지션을 유지했다.
 미드필더에선 이민성이 수비형 미드필더를 맡으면서 상대 공격수나 미드필더로부터 볼을 빼앗아 안전하게 볼을 전달하는 임무를 맡았다.
 성태빈과 김석태는 센터백 정만식과 문종현처럼 같은 포지션에 섰다.
 공격진은 바뀐 점이 없었다. 김낙중과 유지헌이 각각 좌우측 윙 포워드에 들어서고, 최민규는 그 사이에서 최전방 스트라이커로 나선다.
 중앙을 꼼꼼히 수비하면서 좌우측에서 활발하게 공격을 들어가겠단 계산이었다.
 상대편인 강원FC는 4-2-3-1 포메이션을 사용했다. 미드필더에 중점을 두면서 빠른 공수 전환을 노리겠단 뜻이었다. 이 경우, 최전방에서 뛰는 원톱의 역할이 굉장히 중요한데 강원FC에게는 그런 믿음직한 선수가 있었다.
 박대만!
 2012 K리그 챌린지 득점 선두.
 평균적으로 3경기를 뛰면 적어도 1골은 넣는 득점 괴물이었다. 올해 신인 드래프트에서 뽑혀 겨우 1년 차인 걸 감안하면 참으로 대단했다. 아마 올해의 챌린지 득점왕이 될 지도 몰랐다.
 ‘박대만.’
 최민규는 경기 전 악수 자리에서 박대만을 눈여겨보았다.
 포메이션 상 포지션만 약간 다를 뿐, 최전방에서 공격을 한다는 게 매우 비슷했다. 아니, 동일선상에 있다고 봐도 무방했다.
 ‘대단하다.’
 비록 2부리거지만 약관의 나이로 대단한 활약을 펼치고 있다.
 19라운드인 현재, 무려 10골을 기록하고 있고, 도움도 7개나 된다.
 반면 최민규는 5골에 도움 3개가 전부다. 낮은 성적이라고는 볼 수 없으나 박대만과 비교한다면 확실히 부족했다.
 ‘더 성장해야해.’
 2부 리그에서 가장 이름을 날리고 있는 선수도 아직 1부 리그에 오르지 못했다. 그만큼 1부 리그라는 산이 높고 험난하다는 것을 뜻한다.
 물론 박대만은 정황 상 곧 1부 리그에 올라갈 공산이 크다. 말했듯 좋은 인재가 좁은 세상에서만 구를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악수를 끝낸 선수들이 필드에 자리 잡았다. 부천FC는 4-3-3 포메이션으로, 강원FC는 4-2-3-1 포메이션으로 섰다.
 선축은 부천FC가 먼저였다.
 주심의 휘슬이 울리고, 김낙중이 최민규에게 가볍게 볼을 넘겼다.
 초장부터 돌파는 무리.
 강원FC 선수들이 전부 하프라인 앞쪽으로 있었기 때문에 미드필더 진에게 볼을 넘길 필요가 있었다.
 이민성.
 경기마다 매번 수비보단 공격에 가담하는 미드필더 역할을 맡았지만 오늘은 그 반대였다. 좌우측 윙백이 생겼기에 굳이 그까지 공격적일 필욘 없었다.
 이민성은 좌우를 훑더니 다시 성태빈에게 패스했다.
 ‘쉽지 않군.’
 부천FC는 쉽사리 수비의 망을 뚫지 못했다. 미드필더진이 워낙 두터운 탓에 상대 진영으로의 돌파가 어려웠다.
 최민규도 전방에서 물꼬를 틀고자 노력하고 있었다. 이곳저곳을 휘저으며 공간을 만들기 위해 힘썼다. 하지만 중간에 차단되거나 받아도 뺏기는 경우가 다반사였다.
 롱패스로 분위기 반전!
 성태빈과 김석태가 좌우측 포워드와 최전방 최민규에게 길게 볼을 올리며 패스했다. 정확도는 낮아도 받았을 경우 페널티 박스로의 진입이 원활했다.
 ‘탄탄해.’
 비록 순위는 낮지만 강원FC는 강했다. 박대만을 중심으로 한 공격만 뛰어난 줄 알았는데, 수비도 만만치 않았다. 전주FC와 합쳐진 느낌이랄까.
 공수 전환도 좋았다. 포메이션 자체가 그걸 노린 것이긴 하나, 이토록 잘 운용될 줄은 몰랐다. 물 흐르듯 자연스러운 움직임에 좀처럼 기회를 잡을 수 없었다.
 전반 25분.
 경기는 여전히 0:0으로 진행되고 있었다. 그러나 내용은 강원FC의 우세였다.
 점유율이 6:4로 밀렸고, 유효슈팅 횟수도 2배나 차이 났다. 코너킥이나 프리킥 시도도 강원FC가 월등히 앞섰다.
 부천FC가 앞서는 건 겨우 파울. 많아서 이득 볼 게 전혀 없는 싸움만 이기고 있었다.
 ‘전체적으로 밀리고 있다.’
 유효슈팅은 어느 정도 모든 걸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낮으면 상대보다 공격이 원활하게 이뤄지지 않고 수비가 흔들리고 있음을 뜻하는 까닭이다.
 여태 골을 내주지 않은 게 신기할 정도.
 ‘흐름을 바꿔야 한다.’
 야구에는 흐름이라는 게 있다. 한 번 흐름을 타게 되면 공격에 물꼬가 트인다. 8회까지 내내 삼자범퇴를 당했어도 9회에 10점을 뽑아낼 수도 있다는 것이다.
 축구도 마찬가지다. 어떤 방법으로든 흐름만 끌고 온다면 지금까지의 상황을 정반대로 뒤집어놓을 수 있다.
 ‘공격.’
 해답은 공격.
 상대 팀을 휘어잡는 유효슈팅을 뽑아내면 혼란을 만들어낼 수 있다. 그런 상황이 벌어지면 아무리 단단한 선수라도 흔들리기 때문이다. 물론 더 나아가 선취득점을 뽑아낸다면 그보다 좋을 순 없을 것이다.
 덧붙여 부천FC 선수들이 열의를 찾음과 동시에 불끈 힘을 낼 수 있을 터였다. 지금 설렁설렁한다는 건 결코 아니지만, 더 좋은 활약을 할 수 있는 원동력이 된단 얘기다.
 ‘이런.’
 하지만 필드에선 반대의 상황이 벌어지고 말았다.
 강원FC의 측면 크로스.
 페널티박스 뒤쪽에 있었던 박대만이 빠르게 문전 앞으로 쇄도했다. 이마 정중앙에 볼을 맞히며 그대로 헤딩골을 작렬시켰다.
 0:1.
 오히려 강원FC의 선취 득점.
 박대만은 크게 환호했다. 골도 골이지만 1부 리그에 올라갈 수 있는 명분을 또 한 번 다졌다.
 유지헌은 부천FC 선수들을 독려했다. 자칫 구렁으로 빠질 수 있는 분위기였다.
 “한 골 먹혔으면 두 골 넣으면 된다!”
 부천FC는 파이팅을 외쳤다. 경기 내용과 득점 상황, 두 가지 모두 밀리게 됐지만 고개 숙이지 않았다.
 이제 겨우 전반전 반 절.
 경기가 끝나려면 한참 남았다. 지금보다 더 열심히 달린다면 충분히 만회골이 가능했다. 그 이후에는 역전골도 바라볼 수 있고.
 낙심하면 더 힘들 뿐. 긍정적인 생각으로 흔들리는 마음을 가다듬는 게 최우선이었다.
 ‘아직 진 게 아니다.’
 최민규도 두 주먹을 굳게 쥐었다. 그 역시 상대가 먼저 앞서는 것이지 결코 경기를 진 게 아님을 잘 알고 있었다.
 하프라인에서 다시 시작되는 경기.
 부천FC는 침착하게 볼을 운용했다. 0:1로 지고 있다고 절대 서두르지 않았다. 계속 언급했듯, 경기 시간이 충분히 많이 남았기 때문이었다.
 허나 경기는 뜻대로 풀리지 않았다. 차근차근 볼을 올렸음에도 불구하고 항상 조기 차단됐다. 그것은 곧 강원FC의 역공을 불러일으켰다.
 박대만을 필두로 한 원톱 전술.
 좌우측에서 윙어들이 활발하게 움직이면 박대만이 센터에서 공간을 찾아 움직였다.
 부천FC도 쉽게 공간을 내주진 않았다. 더 이상의 추가 실점은 없다는 생각으로 몸을 아끼지 않고 수비에 임했다.
 
 삑-
 
 박대만을 막으려던 문종현의 파울.
 무리하게 옷을 잡아당긴 탓에 주심이 휘슬을 불게 만들었다. 같은 팀이 봐도 명백히 반칙이었기에 항의하는 이는 없었다.
 위치는 좌측 페널티 박스 근처. 골문과 가깝진 않았지만 그렇다고 먼 거리도 아니었다.
 잘만 노리면 충분히 슈팅도 가능한 거리.
 키커는 박대만이 나섰다. 킥력이 좋기에 프리킥에 제격이었다.
 볼의 위치를 확인한 주심이 다시 한 번 휘슬을 물었다.
 
 삑-
 
 오른발로 잘 감아서 찬 볼. 아슬아슬하게 인간 벽을 지나 골문까지 쇄도했다.
 부천FC와 강원FC 모두 골대만 쳐다봤다.
 ‘좋았어!’
 최민규는 환호했다.
 박형수의 선방!
 궤적을 읽고 몸을 날린 그의 손에 볼이 잡혔다. 조금만 늦었어도 골망을 울렸을 터, 절로 안도의 숨이 나왔다.
 하지만 부천FC는 아주 분위기를 치고 올리진 못했다. 유효슈팅이지만 너무 압도적이어서 쉽사리 열의가 생기지 않았다.
 반면, 강원FC는 승승장구였다. 스트레칭까지 하는 여유. 이런 상황이 지속된다면 강원FC가 승을 챙기는 건 기정사실화였다.
 유지헌은 다시 한 번 동료들을 독려했다. 침울한 걸 이끌고 경기를 뛸 순 없었다. 다행히 금방 ‘으쌰!’ 하는 분위기가 만들어졌다.
 ‘큰일이군.’
 최민규는 쓴 웃음을 지었다. 설마 이 정도로 경기가 밀릴 줄은 몰랐다. 지난 일주일 간 매일 열심히 훈련했는데 어찌 이리 일방적인 것일까.
 ‘어떻게든 만회골을 터뜨려야해.’
 무조건 골을 넣어야 한다는 생각만 가지고 있으면 오히려 더 경기를 그르치는 법이다. 강박관념에 사로잡히기 때문이다. 허나 어쩔 수 없는 상황이다. 서둘러 동점을 만들지 못하면 주도권을 가져오기 힘들다.
 ‘무리해서라도 돌파해보자.’
 현재 볼의 위치는 중원.
 이민성이 볼을 굴리며 패스할 공간을 찾고 있었다. 일단은 성태빈에게 넘겨 측면 패스나 롱패스를 노리기로 했다.
 성태빈의 롱패스!
 반대쪽 측면으로 길게 볼을 보냈다.
 그 사이, 유지헌이 빠르게 코너로 쇄도했다.
 무섭게 따라붙는 수비수들.
 이런 상황에서 볼 소유권을 주면 바로 크로스로 이어지기에 수비수들이 거머리처럼 들러붙었다.
 유지헌은 격한 몸싸움을 벌이며 볼을 가지기 위해 애썼다. 상대 수비수를 밀치기도 했다. 그러나 그가 그렇게 하는 만큼 수비수도 거칠게 대응했다. 어깨로 몸을 미는 것은 물론, 옷깃을 잡아당기기도 했다.
 몇 초간 이어진 볼 다툼.
 강원FC의 수비수가 라인 밖으로 볼을 내보내면서 일단락되었다.
 유지헌으로서는 그리 달갑지 않았다. 여전히 공격권을 쥐고 있긴 하지만 바로 크로스를 날렸으면 더 좋았을 상황이었다.
 나재홍의 드로잉 공격. 지척에 자리한 김석태에게 가볍게 볼을 넘겼다.
 그 순간.
 최민규가 상대 진영 중앙으로 뛰어들었다.
 그 모습을 확인한 김석태는 재빨리 땅볼패스를 보냈다. 빠른 연계 덕분인지 다행히 수비 발에 걸리지 않았다.
 볼을 잡은 최민규는 드리블하며 치고 나가다가 좌측 측면에서 달려오는 김낙중에게 다시 볼을 넘겼다. 상대 수비진의 시선이 가운데 모아진 틈을 타 이용한 패스였다. 허나 대단한 착각이었다. 그 정도에 시선을 뺏길 정도로 수비가 허술하지 않았고, 패스한 볼마저 먼저 발을 덴 수비수에 의해 높이 솟고 말았다.
 ‘돌파는 힘들다.’
 무리해서라도 상대 진영을 뚫자고 생각했던 최민규지만 방금 전의 상황에서는 그걸 적용하기 어려웠다. 수비진에 둘러싸여 드리블이 힘들었고, 골문과의 거리도 상당했기 때문이다. 차라리 패스하는 게 더 가능성이 있어보여서 김낙중을 택한 것이었다.
 다시 또 이어지는 부천FC의 드로잉.
 ‘그래도 분위기가 조금 살아났다.’
 거의 5분 동안 공격권을 쥐었다. 계속 끊기긴 했으나 강원FC가 수비만 한다는 것에 의미가 있었다.
 마냥 좋은 건 아니었다. 골은커녕 유효슈팅 하나 때리지 못한다면 공격의 의미가 없었다. 상대에게 조금도 혼란을 줄 수 없으니까.
 백윤민의 드로잉으로 부천FC가 재차 공격을 가했다.
 미드필더들은 공간을 찾거나 패스할 곳을 찾았다. 앗, 하는 순간에 상황이 확 바뀔 수 있는 게 필드란 곳이기에 잠시도 눈을 떼선 안 됐다.
 ‘빈 공간을 찾기보다 내가 빈틈을 만들어야 한다.’
 반면 공격수는 미드필더와 다르게 기회를 만들어야 한다. 패스보단 슈팅이 먼저이기에 상대 진영을 휘저어놓을 필요가 있었다.
 물론 무조건 제치는 건 상당히 어려운 일이다. 한 명도 아니고 두세 명을 지나쳐 슈팅을 날린다? 세계적인 플레이어에게도 무리다.
 김낙중과 유지헌과의 연계 플레이.
 어느 정도 돌파한 후 볼을 측면으로 보낸다. 그들이 바로 슛을 때려도 괜찮고, 다시 패스를 이어받아도 된다. 빠르게 볼만 연결된다면 충분히 찬스를 만들 수 있다.
 아니면 측면 미드필더들이 하프라인을 쭉 넘어와 같이 공격에 임하는 것도 괜찮다. 공격진이 대거 형성되면 공격에 매우 용이하기 때문이다.
 허나 모든 상황엔 약점이 있는 법.
 공격진이 두터워지면 자연스레 수비가 약해진다. 축구에서 가장 중요한 허리, 즉 중원이 밀려버린다. 그렇게 되면 상대팀이 매우 쉽게 공격을 이어가버린다.
 
 # 마인드의 차이
 
 ‘흐음.’
 물 흐르듯 계속 진행되는 경기. 필드가 선수들의 땀과 소리로 얼룩진다.
 하지만 스코어는 여전히 그대로다. 한 번 무너진 균형은 다시 본 모습을 찾지 못했다.
 오히려 전반 43분.
 박대만이 측면에서 패스를 이어받아 강하게 때린 중거리 슛이 그대로 골망을 강타했다. 어쩌면 승부의 쐐기가 될 수도 있는 추가골.
 강원FC는 크게 환호했다.
 특히 멀티골을 넣게 된 박대만은 많은 박수갈채를 받았다.
 ‘이런.’
 최민규를 비롯한 부천FC 선수들은 절로 한숨을 내뱉었다. 가뜩이나 갈 길이 급한데 또 한 번 벽에 부딪치고 말았다. 아직 후반전이 남았다 해도 0:2라는 스코어는 너무 큰 압박이었다.
 이후로 5분.
 부천FC는 추가시간까지 열심히 달렸으나 강원FC를 조금도 따라잡지 못했다. 오히려 휘슬이 울리기 직전, 또 한 번의 위협적인 슈팅으로 간담만 서늘해졌다.
 10분간의 하프타임.
 류장일 감독은 안 좋았던 점을 지적하며 선수 개개인을 쳐다보았다.
 “경기에서 지는 건 어쩔 수 없다. 하지만 내용까지 지면 안 된다. 아쉽게 지는 것과 압도적으로 지는 건 다르다.”
 부천FC 선수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류장일 감독의 말은 한 치의 틀림도 없었다.
 최민규는 크게 반성했다.
 ‘감독님 말씀이 옳다. 지고 있는 상황에서 생각해야 할 건 골이 아니라 내용이다. 내용이 괜찮으면 패배해도 그리 뼈아프지 않다. 나아가 경기를 역전할 수도 있게 된다.’
 경기 분위기가 안 좋다는 이유로 최민규는 무조건 골만 갈망했다.
 처음엔 선취득점으로 분위기 반전을 노렸다. 그게 안 되자 동점골을 노렸다.
 무조건 골로 해결하려는 생각.
 ‘아직 성장하려면 한참이구나.’
 비단 축구실력만 향상된다고 좋은 선수가 되는 게 아니다.
 위기 상황에서 적절한 판단을 내리는 것.
 상태창에 판단력이란 능력치가 존재하는 이유기도 했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는 사이 하프타임이 종료되었다.
 부천FC와 강원FC 선수들이 필드에 모였다.
 다들 포지션을 잡고 심판의 휘슬을 기다렸다.
 ‘교체된 선수가 없다.’
 강원FC는 선발멤버 그대로 후반전을 이어갔다. 분위기가 좋았기에 굳이 선수를 바꿀 필요가 없었다.
 한데 부천FC도 선수를 교체하지 않았다.
 
 -마인드의 문제지, 너희는 이상 없다.
 
 류장일 감독의 한마디.
 부천FC 선수들은 저마다 입을 앙다물며 열의를 다졌다.
 최민규도 골보단 내용을 먼저 생각하라는 말을 다시 한 번 되새기며 마음을 다잡았다.
 선축은 강원FC.
 주심이 후반전 시작을 알리는 휘슬을 울렸다.
 강원FC는 2점 앞서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빠른 공격을 추구했다. 내친김에 한 골 더 넣겠다는 기세였다.
 전반전 내내 부천FC의 골문을 휘저어놓았던 걸 생각하면 충분히 가능한 일이었다.
 부천FC 수비진은 이에 맞서 볼은 물론이요, 선수들의 족적조차 허용치 않겠단 움직임을 보였다. 개개인이 상대 선수 한 명씩을 마크하여 어디로도 볼이 빠질 수 없게끔 했다.
 매우 넓은 공간에 들어선 촘촘함.
 박대만 조차 쉽사리 돌파를 할 수 없었다.
 ‘롱패스가 나오는 군.’
 하프라인 근처에서 볼을 빼앗기 위해 질주하던 최민규는 상대 미드필더가 롱패스로 볼을 넘기자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롱패스가 나온다는 건 돌파가 힘들단 얘기.
 어느 정도 부천FC에게도 분위기가 넘어왔음을 알 수 있었다.
 ‘안심하긴 이르다.’
 설레발을 치면 될 것도 안 된다.
 최민규는 내용을 좋은 쪽으로 끌고 간다는 것에 만족하며 발을 멈추지 않았다.
 그 사이, 백윤민이 롱패스를 조기 차단했다.
 상대 선수가 급하게 다시 뺏으려 했지만 볼은 이미 동료에게 넘어가고 있었다.
 이민성!
 수비를 위해 하프라인 아래까지 올라와 있다가 여유롭게 볼을 받았다.
 근처에 있던 박대만이 볼을 뺏고자 달려왔다.
 ‘어딜.’
 동시에 그 근처까지 내려왔던 최민규. 이민성에게 패스를 받고 곧바로 중원을 넘었다.
 강원FC는 4-2-3-1 전술을 구사하는 팀답게 공수 전환이 매우 빨랐다. 분명히 수비진이 몇 되지 않았는데, 금세 공간이 메워졌다.
 최민규는 당황하지 않았다. 애당초 이번엔 돌파할 생각보단 패스 플레이를 할 계획이었다. 오른쪽 측면으로 길게 볼을 띠워 보냈다.
 유지헌에게 정확히 떨어지는 볼!
 공수 전환이 아무리 빠르다 한 들 기습적으로 올라가는 것까지 따라가기는 힘들었다.
 물론 여유를 가져선 안 된다. 유지헌의 앞과 옆으로 금방 수비진이 붙었다.
 ‘최소 파울이다.’
 유지헌은 바로 크로스하기보다 일단 버텼다. 몸을 틀어서 다리를 걸쳐놓으면 몇 초간은 볼을 뺏기지 않을 수 있었다.
 다급해진 강원FC의 수비수 중 하나가 결국 몸을 밀치고 말았다.
 
 삑!
 
 부천FC의 프리킥 기회.
 거리는 좋지 않았다. 페널티박스보다 하프라인에 가까웠다. 직접적인 슈팅은 거의 불가능하고, 두 번이나 세 번의 연계 플레이가 필요했다.
 ‘이것만으로도 충분해.’
 프리킥은 볼이 어떻게 날아가느냐에 따라 결과가 확연히 달라진다.
 운이 좋아 동료의 머리에 정확히 맞춘다면 그 즉시 골로 연결될 수 있었다.
 그밖에도 상대 팀이 인간 벽을 만드는 걸 이용해 일부러 짧게 패스한 후 급작스럽게 돌파하는 것도 좋았다.
 키커는 역시 킥력이 좋은 이민성.
 원하는 지점에 볼을 보낼 수 있는 능력을 가진 그였기에 프리킥하면 이민성, 이민성하면 프리킥이었다.
 “이번에도 페이크를 주자.”
 최민규가 속삭이자 이민성이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전주FC와의 경기 때 이런 식의 플레이로 이득을 취한 적이 있었다.
 비단 그 날만 그런 건 아니었다. 여타 경기에서도 이런 속임수를 많이 애용했다.
 강원FC의 수비진 몇이 인간 벽을 세우고 나머지가 진영 곳곳에 자리 잡은 부천FC 선수들을 마크하는 사이, 주심이 휘슬을 울렸다.
 
 삑-
 
 최민규는 정말 볼을 찰 것처럼 뛰어갔다.
 동시에 인간 벽이 높이 점프했다.
 ‘됐다.’
 최민규가 허공을 차자마자 이민성이 진짜 킥을 날렸다.
 의외로 인간 벽은 침착하게 대응했다. 허둥지둥 대는 것 없이 유연하게 점프했다. 종종 나오는 페이크다보니 쉽사리 속지 않았다.
 볼의 궤적은 좋았다. 어렵사리긴 하지만 인간 벽을 쑥 지나갔다.
 볼이 떨어진 곳은 강원FC의 아크서클.
 양 팀 간에 헤딩경합이 벌어졌다. 누가 볼을 따내느냐에 따라 바로 공격이 될 수도, 혹은 역습이 될 수도 있었다.
 부천FC가 노리는 건 당연히 전자.
 헤딩으로 볼을 따내서 바로 슛을 날리든, 한 번 접고 패스하든 연계 플레이가 필요했다.
 하지만 볼은 강원FC 수비수의 머리에 맞고 튕겨 나왔다.
 ‘좋아.’
 최민규는 아쉬워하지 않았다. 전반전에는 제대로 된 공격을 몇 번 못했었는데, 후반전 시작 몇 분 만에 이런 기회를 만들었다. 앞으로도 기회가 충분히 나온단 반증이다. 바로 지금 이 순간부터.
 최민규는 하프라인 근처까지 튕겨 나온 볼을 발 앞에 놓았다.
 강원FC가 부랴부랴 포지션을 잡기 시작했다. 프리킥을 막았다고 해서 아직 끝난 게 아니었다. 공격권을 부천FC가 쥐고 있는 한.
 ‘정면은 무리.’
 전방엔 수비진이 즐비했다. 프리킥 때문에 미드필더 진까지 모두 진영에 내려와 있는 상태였다.
 남은 건 측면 공격.
 최민규는 김낙중에게 볼을 보냈다. 수비진이 자리를 잡기 전에 패스한 것이라 볼은 유연하게 날아갔다.
 가슴 트래핑으로 볼을 잡은 김낙중은 곧바로 코너까지 볼을 몰고 나갔다. 최소 코너킥을 노리겠단 계산이었다.
 따라붙는 두 명의 수비수.
 김낙중은 현명하게 대처했다. 수비수들을 등지고 점점 협소한 공간으로 들어갔다. 매우 까다로웠다. 뺏으면 바로 뺏을 순 있으나 코너킥으로 이어질 공산이 컸다. 그렇다고 몸을 밀치자니 파울이 두려웠다.
 이도 저도 아닌 애매한 상황.
 김낙중은 끝까지 볼을 물고 늘어졌다. 드로잉만 빼면 앞으로의 상황은 모두 좋은 선택지였다.
 일단 코너킥. 프리킥과 마찬가지로 상대의 방해 없이 자유롭게 볼을 찰 수 있는 세트피스 상황이다. 문전까지 볼을 날릴 수 있으며, 짧게 볼을 주면서 연계 플레이도 가능하다. 확률은 낮지만 직접적인 슈팅까지도 나올 수 있다.
 그 다음은 크로스. 이 지점에선 어떻게 차도 페널티박스까지는 가기 때문에 곧바로 슈팅으로 이어질 수 있다.
 드로잉도 나쁘진 않다. 하프라인 근처가 아닌, 상대 골문과 가장 가까운 곳이라서 잘만 던지면 연계 몇 번으로 골문까지 쇄도할 수 있다. 단지 코너킥과 크로스와 비교해 안 좋을 뿐이다.
 5초 동안의 볼 다툼.
 현실에선 정말 너무나도 짧은 시간이지만 필드 안에선 매우 긴 시간이다. 당장 볼을 차는 것만 따져 봐도 채 1초도 걸리지 않으니까.
 ‘코너킥!’
 결과는 김낙중의 판정승.
 강원FC 수비수 중 하나가 무리하게 발을 뻗다가 코너로 볼을 내보내고 말았다. 다른 지역이었다면 수비를 잘했다며 칭찬 받을 일이지만, 지금과 같은 경우에선 실책이라고 볼 수 있었다.
 ‘좋은 기회다.’
 코너킥은 그야말로 마법이다. 어떻게 차도 찬스를 만들 수 있다. 짧게, 길게, 높게, 낮게 등등 무궁무진한 연계가 가능하다.
 1:0으로 후반 추가시간까지 이기고 있다가, 막판에 코너킥을 허용하여 동점골을 주는 경우도 종종 있지 않은가?
 강원FC의 페널티박스 안으로 선수들이 밀집하기 시작했다.
 한 팀은 수비를, 한 팀은 공격을 위해 저마다 몸을 흔들었다.
 부천FC는 선수 전부가 올라가지 않았다. 포백라인은 하프라인까지만 자리 잡고 역습에 대비했다.
 키커는 역시 이민성이 나섰다. 휘슬을 울리자 기다렸다는 듯 킥했다.
 높이 솟아오른 볼이 문전까지 빠르게 쇄도했다.
 골키퍼는 펀칭하기 위해 점프를, 양 팀 선수들은 헤딩하기 위해 점프했다.
 하지만 단 한 명만은 움직이지 않았다.
 ‘기회다.’
 그야말로 행운.
 골문 앞 우측에 서있었던 최민규는 볼이 자신에게 날아오는 것을 보았다. 헤딩보단 발리슛을 때리기 좋은 상황이었다. 그래서 점프하지 않았다.
 수비수 하나가 뒤늦게 눈치 채고 발을 뻗었으나 허사였다.
 최민규의 발등에 정확히 닿은 볼.
 날아온 속도와 맞은 속도가 합쳐져 빠르게 골문을 두드렸다.
 너무 급작스러웠던 데다가 점프 때문에 역동작에 걸린 골키퍼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었다. 그저 고개를 돌려 확인하는 것 밖에는.
 ‘들어갔다!’
 시원하게 그물망이 울린다.
 환호성이 터지고, 동료들이 머리를 두드린다.
 골이 터졌을 때만 나오는 상황들!
 알림음도 축하 메시지를 보낸다. 명성과 경험치가 소량 상승했단다.
 최민규는 필드를 누비며 마음껏 골을 만끽했다.
 ‘내용이 좋았기에 골을 넣은 것이다.’
 전반전과 마찬가지로 그저 ‘골’만 생각했다면 지금 이런 상황이 만들어졌을까?
 최민규는 아니라고 보았다. 류장일 감독의 말처럼 좋은 내용을 만들기 위해 노력했고, 그게 골을 만든 것이었다.
 생각해보라.
 아까의 코너 상황에서 김낙중이 골부터 떠올렸다면 무리하게 크로스를 올렸을 터였다. 그 상황에서 만들 수 있는 찬스보다 골에 대한 강박관념이 더 큰 탓이다.
 최민규는 짧게 세레모니를 끝냈다. 마음 같아선 필드를 한 바퀴 돌고 싶지만 참았다.
 강원FC가 센터서클에서 킥오프을 준비하는 사이, 유지헌이 연신 감탄사를 내뱉으며 말했다.
 “민규야. 내가 저번에도 말했는데, 너 진짜 득도한 거 아니냐?”
 유지헌의 표정은 매우 진중했다. 결코 빈말이 아니었다. 장난 역시 한 움큼도 섞여있지 않았다.
 그럴 것이 최민규가 이 정도로 활약하리라고 전혀 생각지 못한 까닭이었다.
 당장 오늘 경기를 떠나서 전주FC나 대구FC와의 일전만 봐도 그랬다.
 최민규는 뜨끔했다. 축구 온라인 육성. 득도라면 득도였다. 하지만 겉으론 전혀 내색 안 했다.
 “어휴, 선배님도.”
 “그치? 그냥 너 대단해서 하는 소리야.”
 그 사이, 주심이 입에 휘슬을 물었다.
 최민규는 다시 열의를 불태웠다. 판을 가를 둥근 주사위를 바라보며.
 후반전은 한 마디로 박빙의 승부였다.
 최민규의 만회골로 기세를 완전히 회복한 부천FC는 파죽지세로 강원FC를 밀어붙였다.
 점유율은 물론 유효슈팅을 서서히 따라잡았다.
 비단 그뿐인가. 박대만을 필두로 한 공격진도 가뿐하게 막아냈다. 전반전에 실축한 게 이상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강원FC는 결국 돌파는커녕 롱패스만 시도했다.
 그 틈에 최민규는 전방에서 활발하게 움직였다. 김낙중, 유지헌과 연계를 이루어 계속해서 골문을 두드렸다.
 명성이 오를 정도의 위협적인 슈팅도 2개나 나왔다.
 하지만 한 가지 큰 문제가 있었다.
 더 이상의 추가골이 없다는 것.
 
 # 두 번째 단추
 
 ‘상관없다.’
 최민규는 욕심 부리지 않았다. 경기 시작 전 다짐하지 않았던가. 애당초 후반전부터는 내용을 이기는 게 목표라고.
 이런 상황이라면 경기를 져도 뼈아프지 않을 수 있다. 아니, 오히려 기쁠 수도 있다. 완전히 밀렸던 경기를 뒤집어놨으니까.
 골은 한 골로도 충분하다. 그것만으로도 부천FC의 위상은 이미 세워졌다.
 필드에서의 시간은 잠잘 때만큼이나 빠르게 흐른다. 이제 막 뛰기 시작한 것 같은데, 벌써 후반도 10여 분밖에 남지 않았다.
 후반 38분.
 간만에 페널티박스 근처에서 프리킥을 따낸 강원FC가 선수들을 죄다 올려 보냈다. 경기는 이기고 있지만 이상하리만치 분위기가 가라앉아있어서 내친김에 한 골을 더 추가하려는 듯했다. 물론 수비수들은 하프라인을 완전히 넘지 않았다. 역습에 대비하는 건 기본 중의 기본이었다.
 ‘잘하면 기회가 온다.’
 최민규는 분명히 빈틈이 있으리라 보았다.
 수비진이 선을 넘지 않으며 역습에 대비한다?
 맞는 말이다. 그렇게 해야만 공격을 차단할 수 있다. 하지만 근본적으로 역습이라는 말이 있는 이유를 생각해봐야 한다.
 수비진이 미리 대기하고 있어도 속공이 가능하기 때문에, 그런 말이 존재하는 것이다.
 고로 이번 프리킥이 어떤 식으로 진행될 지가 관건이었다.
 ‘박대만이 키커군.’
 키커는 역시 박대만이 나섰다. 모든 면에서 뛰어난 그는 프리킥에도 일가견이 있었다.
 잔디에 볼을 비비며 완전히 고정시키더니, 심판의 휘슬과 함께 바로 킥했다.
 ‘좋아!’
 장신을 이용해 높이 점프한 성태빈의 머리에 박대만의 킥이 걸렸다.
 볼이 한 순간에 갈 길을 잃고 앞으로 쑥 튀어나왔다.
 지척에 있던 선수들의 눈이 이글거렸다.
 어떻게든 저 볼을 따내야했다.
 강원FC는 역습을 미리 차단하기 위해서, 부천FC는 그 차단을 당하지 않기 위해서.
 ‘됐다!’
 상대 선수와의 경합에서 승리한 김낙중이 볼을 따냈다.
 그 모습을 확인한 최민규는 단숨에 하프라인을 넘었다.
 하프라인을 가로 지르는 김낙중의 긴 패스.
 볼은 정확히 최민규의 발 앞에 떨어졌다.
 수비수는 셋.
 최민규는 겁먹지 않았다. 앞에서 가로막힌 형태가 아니라 옆에서 따라붙는 형국이었기에 충분히 드리블 돌파가 가능했다.
 수비 하나가 태클을 걸어왔다.
 최민규는 손 두 뼘 정도로 낮게 점프하여 태클을 피했다. 걸리면 파울을 유도할 수도 있지만 지금은 좋은 선택이 아니라고 보았다.
 ‘아크서클까진 충분히 간다.’
 두 명의 수비수가 좌우측에서 동시에 압박을 가했다. 몸을 밀치는 건 물론이요, 발을 뻗으며 볼을 뺏으려 했다.
 ‘내가 끝내야만 한다.’
 좌우로 동료들이 뛰어 들어오고 있긴 하나, 지금 패스하는 건 찬스를 날리는 것이다. 그 사이 상대 수비수들이 자리를 잡기 때문이다.
 하지만 위태로웠다. 앞이 아니라 옆에서 달라붙는 것인데도 압박이 상당했다.
 자칫 잘못하면 넘어질 상황.
 방금 전 태클 상황과는 다른 게, 지금 넘어지면 파울이 아니라 스텝이 꼬인 걸로 보일 수도 있었다.
 긴박한 상황에서 최민규는 결단을 내렸다. 볼을 왼쪽으로 차는 척 하다가 오른쪽으로 가볍게 밀었다.
 수비수들이 잠시 멈칫한 사이 그대로 슛 자세를 취했다. 원래는 아크서클까지 가서 찰 계획이었지만, 상대 골키퍼를 보고 생각을 바꿨다.
 뛰어 들어오는 최민규를 막기 위해 앞으로 나와 있었던 골키퍼.
 최민규는 지체 없이 강한 슈팅을 날렸다.
 당황한 골키퍼가 급히 몸을 날렸다. 슈팅 동작이 보였기에 볼이 날아오는 곳을 예측할 수 있었다.
 하지만 물은 이미 엎질러진 상태였다. 골키퍼의 손을 지나 골대 안에 깊숙이 박혀버리는 볼.
 동점골. 동시에 멀티골.
 알림말이 좌르르 떠오르고 뒤따라오던 유지헌과 김석태 등이 크게 환호했다.
 하프라인 아래에 있던 다른 동료들도 만세를 부르며 최민규가 있는 곳으로 달려왔다.
 멀리 벤치에서도 함성이 쏟아졌다. 설마 동점이 되리라고는 생각지 못했던 터라 기쁨은 곱절의 곱절이었다.
 ‘동점!’
 모두가 기쁨과 환호, 그리고 함성으로 젖은 이 상황을 만든 장본인인 최민규. 입 꼬리를 귀에 건 채 웃음을 만개하고 있었다.
 너무 만족스럽다. 내용만 좋게 하자는 생각으로 후반전에 임했는데, 그게 결국엔 두 골을 만들어냈다. 무조건 골만 노렸으면 이런 결과가 만들어졌을까.
 ‘욕심은 없다.’
 내친김에 한 골 더?
 좋다. 한 골을 더 추가해 역전 경기를 만든다면 그보다 행복할 순 없다. 하지만 무작정 그런 생각을 하면 안 된다. 그저 지금까지처럼 내용만이라도 좋게 하자는 마음으로 경기에 임해야 한다.
 “잘했다, 민규야!”
 류장일 감독이 손을 만세하며 최민규를 크게 칭찬했다. 좀처럼 세레모니에 반응하지 않는 그가 이런 행동을 보일 정도면 현 상황이 얼마만큼 짜릿한지 짐작 가능했다.
 최민규의 세레모니가 끝나고, 볼이 센터서클에 놓였다.
 강원FC 선수들의 얼굴에 그림자가 그윽했다. 전반 종료 때만 하더라도 승리를 점쳤었는데, 설마 상황이 이 지경이 될 줄이야. 꿈에도 예상치 못한 스코어였다.
 특히 박대만은 뭐 씹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많이 당황스러운 모양이었다.
 
 삑-
 
 강원FC는 그야말로 총 공세를 펼쳤다. 최소한의 수비만 남겨둔 채 무조건 공격.
 부천FC는 당황하지 않았다. 저마다 포지션을 지키며 파고드는 선수들을 상대했다.
 급급한 마음 때문에 실수를 저지르는 박대만. 오히려 또 한 번 역습 기회를 허용할 뻔 했다.
 그리고 7분 후.
 경기 중 지체된 상황이 없었음에도 추가 시간이 무려 4분이나 주어졌다.
 하지만 결과는 바뀌지 않았다.
 강원FC 2골, 부천FC 2골로 무승부.
 필드 분위기는 완전히 상반되어 있었다.
 축제의 장을 열고 있는 부천FC와 달리 강원FC는 아쉽다는 기색을 표하고 있었다.
 진다고 생각했던 경기를 무승부까지 이끈 팀과 이긴다고 생각했던 경기를 무승부까지 내준 팀의 차이였다.
 전자에 속한 최민규는 큰 환대를 받았다. 차림상만 없을 뿐, 부천FC에 속한 이들 전부가 그를 둘러싸고 있었다.
 그야말로 오늘의 사나이!
 “아닙니다, 아니에요.”
 최민규는 굉장히 부끄러웠다. 골만 2골 넣었을 뿐이지, 사실 승리의 공신은 부천FC 선수 전원이었다. 모두가 함께 뛰어주었기에 이런 결과가 나온 것이다.
 하지만 그 아무도 그런 말에 귀 기울이지 않았다.
 누가 뭐래도 MOM는 최민규.
 “거드름 피워도 된다.”
 “요새 진짜 아주 난리난다?”
 류장일 감독도 나섰다.
 “민규야. 정말 네가 살렸다.”
 사실은 모두 알고 있다. 최민규가 생각하는 것처럼 오늘은 모두가 승리의 주역이라고.
 그러나 축구의 승부를 가로 짓는 건 결국 골이다.
 최민규에게 포커스를 맞춰주는 건 당연한 것이다.
 
 ***
 
 “얘가?”
 K리그 클래식(1부) 서울FC 감독 이태양은 테이블 위의 종이를 가리키며 박승민 수석코치를 바라보았다.
 “네. 최근 활약이 아주 대단합니다.”
 “어떤데?”
 “골은 물론, 어시스트나 경기 전반적으로의 활약이 탈 2부리거입니다.”
 “그래? 근데 왜 여태 못 들어봤지?”
 박승민 수석코치도 그 부분에 대해선 고개를 갸우뚱하며 말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그저 그런 선수였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잘한다?”
 “예. 저도 처음엔 그 날 경기만 그런 줄 알고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는데, 이후 라운드에서도 수준급 플레이를 보였습니다.”
 “오호.”
 이태양 감독이 고개를 끄덕이면서 물었다.
 “계약은 언제까지야?”
 “이번 시즌 중간, 그러니까 딱 지금 끝납니다.”
 “그래? 좋아. 재계약하기 전에 오퍼 넣어.”
 “알겠습니다.”
 박승민 수석코치가 나가자 이태양은 흥미로운 눈동자로 다시 한 번 테이블 위의 종이를 훑었다.
 ‘최민규. 스물다섯. 경력은 데뷔 이후로 줄곧 2부리거라…….’
 
 ***
 
 부천FC의 훈련장.
 선수들이 밝은 표정으로 훈련에 임하고 있다. 막 강원FC와의 경기가 끝난 후라서 그런지 더더욱 열의가 보인다.
 그 중에는 당연히 최민규도 있었다. 잠깐의 휴식 시간을 이용해 상태창을 확인하던 참이었다.
 ‘곧 6레벨이군.’
 최민규는 소소한 웃음을 띠웠다. 경험치 바가 거의 풀로 채워져 있었다.
 그때, 양대섭 코치가 다가왔다.
 “민규야.”
 “네, 코치님.”
 “감독님이 찾으신다.”
 “감독님이요?”
 “좋은 일이니까 잔뜩 기대하고 가라.”
 최민규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무슨 일이냐고 묻자, 양대섭 코치는 그저 얼른 가보라는 말만 내뱉었다.
 짐작할 수 없었다. 어떤 좋을 일일까.
 ‘다음 경기에도 선발로 나간다는 건가?’
 매번 교체 선수로 뛰다가 이번에도 또 선발 선수로 나가게 된다면 그보다 좋을 순 없을 것이다.
 하지만 양대섭 코치의 말 속에는 뭔가 다른 의미가 있는 것 같았다.
 ‘혹시?’
 최민규의 뇌리를 스치는 생각이 있었다.
 지금은 12시즌 중반.
 부천FC 소속으로서의 계약이 종료되는 시점이다. 아마 계약해지나 재계약에 관한 말이지 싶었다.
 ‘후자이기를.’
 몇 라운드 전까지만 하더라도 최민규는 미래를 보장받기 힘든 선수였다. 골은 고사하고 플레이 자체가 매번 죽을 쑤다보니 안정적인 시선을 받기 힘들었다. 솔직히 말해서 그게 계속 이어졌다면 현 상황에서 계약해지를 통보받더라도 할 말이 없었다. 그만큼 못했다.
 ‘충분히 가능해.’
 최민규는 자신 있었다.
 최근 자신이 보여준 여러 활약들!
 자만하는 게 아니라 재계약하기엔 충분했다.
 
 똑똑.
 문을 두드리자 류장일 감독의 중후한 목소리가 울렸다.
 “민규냐?”
 “예, 감독님.”
 “들어 오거라.”
 이상하리만치 긴장이 돼서 최민규는 꿀꺽 침을 삼키며 들어갔다.
 누군가와 대화를 나누는 류장일 감독이 시야에 찼다.
 최민규는 의아했다.
 손님과 대화 중인데 자신을 불렀다?
 들어오래서 들어오긴 했지만 끼어드는 건 예의가 아닌 것 같아 다시 나가려 했다.
 헌데 류장일 감독이 그런 최민규를 붙잡았다.
 “앉아라, 민규야.”
 “네.”
 최민규는 고개를 갸웃거리면서도 일단은 류장일 감독의 말에 따라 소파에 앉았다.
 ‘누구시지?’
 옆자리엔 여전히 손님이 앉아 있었다. 꼬불꼬불한 파마머리에 선글라스를 걸친 수염 난 중년 남자였는데, 인상이 험악하고 덩치가 커서 인상이 다소 사납게 느껴졌다.
 류장일 감독이 허허, 웃으며 입을 열었다.
 “이 아이가 민규네.”
 “가까이서 보니 잘 생겼군요.”
 “실력도 그만큼 출중하지.”
 최민규는 무슨 얘길 하나 싶었다. 자신을 왜 손님에게 소개하는 것이며, 실력 얘기를 꺼내는 지 알 수 없었다.
 손님이 음료를 한 모금 들이킨 후, 자신을 소개했다.
 “반갑다, 민규야. 서울FC 수석코치 박승민이라고 한다.”
 “예?”
 최민규는 반문하면서도 우선은 소개부터 받았다.
 “아, 저는 최민규라고 합니다.”
 “요새 아주 활약이 대단해?”
 “아닙니다. 별 말씀을요.”
 류장일 감독이 옆에서 거들었다.
 “아주 필드를 씹어 삼키고 있네.”
 최민규가 여전히 멀뚱멀뚱한 얼굴로 있자 박승민 수석코치가 본론을 꺼냈다.
 “민규. 너 이번에 재계약하지?”
 “네.”
 “그 계약을 우리 서울FC와 하는 게 어때?”
 “네?”
 류장일 감독이 당황한 최민규의 어깨를 탁탁, 두드렸다.
 “그 동안 고생했다, 민규야. 다시는 이곳에 안 오겠다는 생각으로 열심히 경기 뛰어라. 최근처럼만 하면 입지를 굳힐 수 있을 거다.”
 “가, 감독님?”
 “너 1부 리그의 오퍼를 받은 거야. 그것도 서울FC에서.”
 “저, 정말이에요?”
 “그렇다니까.”
 사나이는 태어나서 세 번만 우는 거라지만, 최민규는 지금 그 기회를 한 번 쓰고 싶었다.
 울고 싶을 정도로 기뻤다. 가슴이 쿵쾅거렸고, 두 발은 방방 뛰고 있었다.
 그토록 염원했던 일!
 1부리거가 된다. 대단한 축구선수가 되겠다는 꿈의 초석이 라고 드디어 이루어진다.
 소위 말하는 ‘빽’으로 들어간 것도 아니다.
 오로지 실력.
 방금도 박승민 수석코치가 말하지 않았던가? 최근 경기에서의 활약을 보고 뽑았다고.
 최민규는 대관절 이 주체할 수 없는 기쁨을 어떻게 처리해야할지 감도 잡히지 않았다. 살면서 이토록 큰 기쁨은 처음이었다.
 류장일 감독이 그런 최민규의 심정을 읽었다.
 “좋지?”
 “너무 좋아서 말이 안 나와요.”
 “너라면 자격 충분하다. 대신 방금도 말했듯이 다신 여기로 돌아오지 말거라. 지만 다신 여기로 돌아올 생각이걸랑 꿈에서도 하지 마라. 2부리거로 떨어진 선수가 또 1부에 올라가는 건 드문 일이니까.”
 “명심할게요.”
 
 # 서울FC
 
 박승민 코치가 만면에 웃음을 띠우며 끼어들었다. 인상이 험상궂어서 사나운 사람인 줄 알았는데, 꽤 정감 있는 남자였다.
 “좀 당혹스럽겠지만 서울FC 생활은 바로 내일부터다. 오늘은 동료들과 작별 인사도 나누고 해라.”
 “네, 코치님.”
 박승민 코치가 넌지시 농을 던졌다.
 “너무 들떠서 오진 말고.”
 “네.”
 농이긴 하지만 최민규는 박승민 코치의 말을 명심했다. 1부리거가 된 건 매우 좋은 일이지만 들뜬 마음은 옳지 않다. 그런 상태론 일을 제대로 할 수 없다.
 이유?
 자만과 다를 게 무엇인가. 그런 마음은 도리어 화를 부를 뿐이다.
 박승민 코치는 그런 허영심을 버리고 오란 얘기길 하는 것일 터였다.
 박승민 코치가 아차차 하며 입을 열었다.
 “이거 가장 중요한 문제를 잊고 있었구먼. 자, 확인해 보거라.”
 계약서였다.
 서울FC로 입단했을 때의 연봉과 각종 플러스, 그리고 제약들이 적혀 있었다.
 어찌 보면 굉장히 뜬금없이 이뤄지는 계약.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건은 하나 같이 최민규에게 맞춰져 있었다.
 과연 서울FC구나 싶으면서 최민규는 망설임 없이 종이를 넘겼다.
 ‘4천만 원.’
 아주 높은 연봉은 아니었다. 하지만 최민규는 상심하지 않았다. 만족했다.
 여태 2부리거지 않았던가. 그런 선수에게 많은 연봉을 주기 힘들다는 걸 스스로 더 잘 알았다. 애당초 초점이 연봉보단 1부 리그 그 자체에 맞춰져있는 것도 있었다.
 최민규는 막장까지 꼼꼼히 확인한 후 망설임 없이 사인했다.
 박승민 코치가 류장일 감독에게 꾸벅 허리를 숙이며 일어섰다.
 “그럼 먼저 가보겠습니다, 감독님. 민규도 내일 보자.”
 “그래, 조심히 가게.”
 “안녕히 가십시오.”
 박승민 수석코치가 떠나고, 류장일 감독은 몇 시간 동안 이런저런 얘길 해주었다. 부천FC와 서울FC의 차이나 훈련 방식 등 잘 모를 수 있는 정보들. 난중엔 마음가짐에 대해 일러주기도 했다.
 최민규는 한 마디 한 마디 새겨들었다. 별로 필요 없고 중요하지 않은 사담들도 모두 가슴에 박아 넣었다.
 언젠가는 뼈가 되고 살이 될 것들.
 비록 2부 리그 감독이라고는 해도 과거엔 축구로 이름을 날렸던 사람이다. 그런 자가 해주는 말이라면 우스갯소리도 명언이 될 수 있다.
 두 시간 후.
 대화를 마친 최민규는 다시 훈련장을 찾았다.
 시끌벅적 했던 공간에 적막이 감돌고 있었다. 아직 이른 시간인데 벌써 숙소로 돌아간 것일까.
 최민규는 의아한 기색으로 등을 돌렸다. 평소라면 선수들이 있든 없든 그냥 훈련을 했을 테지만, 오늘은 그러지 않았다.
 작별인사.
 오랫동안 함께 했던 동료들과 얘기를 나누며 포옹이라도 한 번씩 해야 했다.
 ‘절대 돌아오지 말자.’
 부천FC만의 전통.
 사실 대부분의 2부 구단은 1부로 올라가는 선수가 있어도 별 다른 작별인사를 나누지 않는다. 다시 돌아올 수도 있으니까.
 하지만 이곳은 다르다. 오히려 더 내려오지 말라는 의미로 진한 인사를 나눈다. 민망해서라도 되돌아오지 말게끔 하는 것이다.
 물론 1부에 있다가 2부로 내려온 선수들에게는 해당되지 않는다. 최민규처럼 초장부터 2부이었던 선수들에게만 적용된다.
 여하튼, 놀라운 것은 이런 식으로 1부에 올라갔던 선수들 중에서 2부로 복귀한 선수가 전무했다. 그 팀에서 잔류하든 타 구단으로 이적하든 해서 무조건 1부에 남았다.
 최민규는 숙소를 찾았다. 훈련장에 없다면 선수들은 그곳에 있을 터였다.
 조용했다. 보통 때라면 밖을 돌아다니는 선수나 앉아서 전화를 하는 선수 등이 보여야하는데, 그러기는커녕 개미 한 마리조차 없었다.
 그때였다.
 익숙한 노랫말이 들리며 선수들이 나타났다.
 “축하합니다. 축하합니다. 1군에 올라간 최민규를.”
 과일이 조각조각 박힌 커다란 생크림케이크였다.
 최민규는 눈물이 날 뻔 했다. 전혀 예상치 못한 축하. 그래서 더 감격스러웠다.
 류장일 감독은 어느 틈에 온 건지 벌써 가운데에 자리를 잡고 있었다.
 미리 준비한 것일까.
 그제야 훈련장이 조용했던 이유를 알 수 있었다.
 그 날, 부천FC는 회식을 가졌다. 다음 경기를 위해 무리한 술잔치는 벌일 수 없어서 맛난 음식을 먹는 걸로 대신했다.
 저마다 여태까지의 얘기, 또 하지 못했던 말들을 꺼내놓는 시간도 가졌다.
 이별의 시간.
 최민규는 한편으로는 씁쓸한 마음도 들었다. 막상 길게는 수 년 동안 정들었던 이들과 떨어지려니 가슴이 먹먹했다.
 다른 선수들도 마찬가지였다. 겉으론 그렇지 않은 척 해도 얼굴에 아쉬운 기색이 역력했다.
 부럽다는 뜻을 밝히는 이들도 있었다. 1부 리그에 올라가는 건 모두의 꿈이니까.
 “절대 오지 마라.”
 “올 것 같으면 차라리 은퇴해.”
 “땅 속에 숨어있어서라도 무조건 버텨.”
 우스갯소리로 하는 말이지만, 그 속엔 진심이 있었다.
 다시 2부 리그로 내려오면 또 다시 여태까지의 나날을 걸어야만 한다.
 1부 리그에 영영 못 올라갈 수도 있다. 떨어졌다는 건 그만큼 가망성이 없다는 걸 뜻하기 때문이다.
 최민규도 그 점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장난스런 말임에도 불구하고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매일 천둥벼락이 몰아쳐도 그곳을 떠나지 않을 터였다.
 회식은 길게 이어지지 않았다. 내일 훈련도 해야 하고, 아주 특별한 날은 아니기에 정해진 패턴을 맞춰줄 필요가 있었다.
 달빛이 찬란한 늦은 밤.
 최민규는 숙소에 들어가기 전 ‘마지막’으로 훈련장을 찾았다.
 데뷔 이후 집보다도 더 오랫동안 생활했던 곳.
 눈을 감고도 어디에 뭐가 있는 지 알 정도로 익숙하다.
 뛰지 않았다. 볼을 만지지도 않았다. 오늘 밤만큼은 훈련보다 추억을 위해 훈련장을 찾았다. 이것저것 손가락으로 만져보았다. 아무렇지 않게 지나쳤던 것들이 살갑게 느껴졌다.
 ‘해내자, 민규야.’
 주먹을 불끈 쥐며 훈련장을 두어 바퀴 돈 최민규는 숙소로 돌아왔다.
 훈련을 별로 안 해서 그런 건지, 회식을 해서 그런 건지, 아니면 소속이 바뀐다는 건 때문인지 이상하리만치 잠이 오지 않았다. 그래도 꾸역꾸역 눈을 감았다. 내일 어떤 일이 기다리고 있을지 모르니 푹 자둬야 했다.
 
 ***
 
 이튿날.
 최민규는 마지막으로 감독, 코치, 그리고 선수들과 인사를 나누고 서울FC행 차에 탑승했다.
 박승민 수석코치가 최민규를 반겨주었다.
 “인사는 잘 나눴어?”
 “네.”
 “뭔가 좀 아쉽고 슬프지?”
 자신의 마음을 콕 대변하는 말에 최민규는 대답과 동시에 질문을 던졌다.
 “네. 어찌 아셨어요?”
 “준한이가 그러더라.”
 포워드 성준한.
 그는 원래 부천FC 선수였다. 최민규처럼 데뷔할 때부터 부천FC에서만 뛰었다.
 항상 열심히 했다. 훈련이 끝난 이후에도 자의로 남아서 훈련장이라도 한 바퀴 더 돌고, 볼이라도 한 번 더 찼다.
 노력이 빛을 바란 것일까.
 작년 봄, 그러니까 시즌이 시작하기 전에 서울FC로부터 콜을 받았다. 활약과 기량이 좋은 점수가 된 것이었다.
 ‘정말 부러웠었는데.’
 최민규는 성준한과 비슷했다. 나이, 경력, 그리고 훈련 습관까지.
 그래서 더 울분이 터졌던 것 같다. 똑같이 했는데 왜 성준한은 되고 자신은 되지 않는 건지.
 성준한을 시기하지는 않았다. 열심히 노력해서 그 보상을 받은 것이니 오히려 칭찬해줘야 마땅했다.
 ‘지금이라도 가게 됐으니.’
 최민규는 지난날은 잊어버렸다. 이제라도 1부에 오르게 됐다면 그것으로 족하다. 괜히 과거의 안 좋은 일을 떠올리면 머리만 아프다.
 박승민 수석코치가 뭔가 떠올랐다는 듯 말했다.
 “아참. 태준이랑도 잘 알지?”
 “네. 잘 알죠.”
 “태준이가 너 올라온다니까 되게 좋아하더라.”
 “태준이가요?”
 최민규가 그럴 리 없다는 표정으로 되묻자 박승민 수석코치가 하던 말을 멈추고 물었다.
 “왜?”
 “아니에요.”
 “싱겁기는. 아무튼 태준이랑 잘 지내봐라. 너랑 나이도 같고 리그는 다르지만 경력도 똑같으니까. 학교도 동문이라며?”
 “네.”
 사람을 의심하는 건 매우 잘못된 행동이다. 하지만 서태준에게만큼은 그게 허용 되도 괜찮다고 생각하는 최민규였다.
 ‘그 놈이 그럴 리가 없지.’
 코치 앞이라 일부러 좋아하는 티를 낸 것일 터였다. 여태까지 그가 보인 행동만 봐도 뻔했다.
 최민규는 고개를 저었다.
 시간 낭비.
 서태준에 대해 생각하느니 축구 관련 글이라도 한 줄 읽는 게 나았다.
 차는 오래 바퀴를 굴리지 않았다. 리그가 다르다고 거리까지 멀어지는 건 아니었다.
 “내리자.”
 최민규는 설렌 가슴을 안고 차에서 내렸다. 녹색 잔디가 시원하게 시야에 들어왔다. 항상 보던 곳과는 확연한 차이를 보였다.
 ‘넓고 크다.’
 아무래도 1부 리그가 환경이 좋을 수밖에 없다. 더 잘하고, 더 중요하니까.
 차별이라고 느낄 수도 있지만, 최민규는 수년간 2부 리그에 있으면서 단 한 번도 그런 생각을 하지 않았다.
 ‘잘난 사람이 잘나게 사는 법.’
 세상의 이치가 그렇다면 인정해야 옳다. 이미 정해진 것을 불합리하다 생각해 바꾸려든다면 그것은 너무나 이기적인 행동이다.
 ‘동료들이구나.’
 잔디밭 위에서 땀을 흘리는 선수들이 눈에 들어왔다. 팀을 나눠 미니 게임을 하고 있었는데, 그중엔 서태준과 성준한도 있었다.
 “감독님께 인사드리러 가자.”
 “네.”
 박승민 수석코치의 말에 최민규는 서둘러 걸음을 옮겼다.
 가는 길은 멀지 않았다. 훈련장 근처에 바로 건물이 있었다. 화려함은 없지만 깨끗함이 돋보였다.
 최민규는 그곳에서 서울FC의 이태양 감독을 만났다.
 “네가 민규구나.”
 “안녕하십니까, 감독님.”
 “반갑다. 앉아라.”
 안은 소박했다. 책상, 테이블, 소파 등의 기본적인 것밖에 없었다. 1부 감독이라고 해서 뭔가 특별함을 갖추고 있진 않았다.
 최민규는 이태양 감독과 앞으로의 일에 대해 얘기를 나누었다. 내용은 아무래도 류장일 감독이 해준 말보다 조금 더 세부적이었다.
 하나하나 고개를 끄덕이며 가슴에 집어넣던 중, 이태양 감독이 중요한 사안을 꺼내놓았다.
 “네 입단식은 할 수도 있고 안 할 수도 있다.”
 어떤 선수가 올라오든 입단식은 한다. 성대하게 하느냐, 조그맣게 하느냐, 어떻게 하느냐의 차이지 안 하는 경우는 극히 드물다.
 헌데 안 할 수도 있다니?
 최민규는 의아한 기색을 감추지 못하면서 이태양 감독의 말을 주시했다. 의도가 있으니 이런 말을 하는 것일 터.
 “21라운드까지는 앞으로 9일. 그때까지 네가 여기서 통한다는 걸 증명해보여라. 박승민 코치를 반하게 한 모습 정도만 보여줘도 충분하니 너무 걱정은 말고.”
 “알겠습니다, 감독님.”
 역시나…….
 절반은 농 섞인 말이었다. 하지만 최민규는 허투루 들을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십분 받들어 무조건 좋은 모습을 보여주기로 결심했다.
 ‘시작이 중요한 법이니까.’
 어쩌면 시험.
 1부 리그에 오르긴 했지만 아직 완전히 올랐다고는 볼 수 없다. 수준에 맞는 모습을 보여줘야만 진정한 1부리거가 되는 것이다. 물론 잘못한다고 해서 2부리거로 떨어지진 않겠지. 계약한 게 있으니 말이다.
 하지만 그러면 입지가 좁아진다. 더 좋은 벤치에 앉으려 1부리거가 된 게 아니니 열심히, 그리고 최선을 다해야 한다.
 입단식 얘기를 마지막으로 이태양 감독이 말을 끝맺었다. 한없이 진중한 표정이었던 그의 얼굴에 비로소 웃음이 떠올랐다.
 환영의 미소.
 최민규는 꾸벅 허리를 숙여 인사한 후, 방을 나섰다.
 벌써 해가 중천에 떠있었다.
 슬슬 배가 고프기 시작했다.
 “배고프지?”
 때마침 박승민 수석코치가 나타났다.
 “네. 식사하러 가세요?”
 “어. 애들도 지금 먹으러 가니까 얼른 가자.”
 식당 역시 지척에 있었다.
 최민규는 손으로 배를 어루만지며 식당을 찾는 선수들을 보았다. 십중팔구가 모르는 얼굴이었다. 다만 딱 두 명, 익숙한 이들이 있었다.
 잠깐 임대 왔었던 서태준.
 같은 부천FC 소속이었다가 이곳으로 올라온 성준한.
 박승민 수석코치가 간단히 입을 열었다.
 “이번에 입단한 최민규다.”
 “아, 얘가 민규에요? 반갑다. 주장 권진수다.”
 키가 매우 크고 덩치가 있는 선수. 최민규는 그가 누군지 단 번에 알 수 있었다.
 특급 골키퍼 권진수.
 서울FC 고정 선발은 물론, 대한민국 국가대표로 뛰었었던 선수다. 골키퍼하면 권진수라는 말을 생기게 한 장본인이기도 했다.
 TV에서만 보던 선수를 직접 본 터라 최민규는 그저 반가울 따름이었다.
 대단한 선수를 만나는 느낌.
 감회가 새로움과 동시에 얼른 성장하고 싶단 마음이 꾸물꾸물 일어났다.
 “통성명은 이따 밥 먹고 하자.”
 “예, 코치님.”
 박승민 수석코치의 말에 선수들이 모두 식당으로 들어섰다. 꽤나 많은 인파였다. 다 합치면 서른이 넘을 것 같았다.
 최민규는 후미에 있던 성준한에게 다가갔다.
 
 # 첫 인사
 
 “준한!”
 “축하한다, 최민규!”
 오지에 떨어져도 아는 사람이 있으면 안도할 수 있다고 했던가.
 성준한의 존재는 최민규에게 마른 땅에 쏟아지는 단비와도 같았다. 서로 알고 있어서 얘기를 할 수 있다는 게 좋았다.
 식당에 들어갈 때까지, 그리고 밥을 다 먹을 때까지도 성준한과 이런저런 얘기를 나눴다. 그 동안 여기서 어떻게 지냈고, 또 부천FC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서로의 1년을 주고받았다.
 식사 후, 한 자리에 모인 선수들이 간단히 자신을 소개했다.
 골키퍼 3명, 미드필더 12명, 수비수 12명, 공격수 6명으로 33명이었다. 여기서 주장인 권진수과 새로 들어온 최민규를 포함하면 선수의 총합은 35명이 된다.
 서태준과 성준한을 제외하고도 익숙한 얼굴이 몇 있었다.
 한 때 국가대표여서 전파를 자주 탔던 선수들.
 ‘미드필더 정혁, 박강현 선배님. 수비수 용지혁 선배님. 그리고 골키퍼 권진수 선배님까지. 서울FC엔 인물이 정말 많다.’
 언젠가 자신도 그 자리에 서길 꿈꾸며 마음을 다져보는 최민규였다.
 그는 선수들 개개인과 한 명씩 악수를 나눴다.
 마지막에 자신을 소개했다.
 “최민규입니다. 나이는 스물다섯이고, 포지션은 공격수를 맡고 있습니다. 데뷔 이후로 1부에 오른 적이 없어 굉장히 낯설지만 열심히 해보겠습니다.”
 당차게 인사하자 선수들이 어깨를 두드리며 답례해주었다.
 “환영한다. 잘 지내보자.”
 “잘 지내봐요, 선배님.”
 선배들에겐 깍듯이 허리를 숙이고, 후배들에겐 잘 지내보자며 다시 한 번 인사를 건넸다.
 동갑은 유일하게 2명이었는데, 말할 것도 업이 서태준과 성준한이었다.
 성준한과는 자연스럽게 어깨도 툭툭 치면서 재밌게 통성명을 나눴다.
 “용케 올라왔네.”
 서태준은 인사 대신 특유의 깐족거림으로 다가왔다.
 ‘역시.’
 박승민 수석코치가 서태준이 좋은 말을 해줬다고 해서 조금 변화를 기대했는데, 아주 오판이었다. 바뀌기는커녕 오히려 더 심해진 것 같았다.
 최민규는 무겁게 대응하지 않았다. 이런 일에 열을 내면 자신만 피곤해진다.
 “너야말로 다리 분질러진 줄 알았더니 어째 살았나보네?”
 서태준은 부들부들하면서도 비릿한 미소를 잃지 않았다.
 “여기서도 네 그 노력이 먹힐 것 같아?”
 “안 먹힐 것도 없지. 근데, 태준아.”
 “왜?”
 “그 노력에 밟히지 않게 조심해라.”
 순간적으로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해진 서태준.
 최민규는 그런 그에게 방긋 미소 지어 보이며 다른 선수들과 얘기를 나눴다.
 모두 착했다. 2부 리그에서 올라왔다 해서 깔보거나 하는 게 전혀 없었다. 오히려 더 챙겨주고, 불편한 건 없는지 물어봐줬다.
 텃세 역시 마찬가지였다. 후배들은 물론, 선배들조차 먼저 있었다고 해서 그걸 권력으로 사용하지 않았다.
 최민규는 한 시간 가량 얘기하다가 뒤늦게 숙소로 들어갔다.
 아직 훈련 시간이 한참 남았지만, 여태 짐을 풀지 않은 까닭이다. 얘기하다보니 시간가는 줄도 모르고 있었다.
 방은 1인실이었다. TV, 컴퓨터, 책상 등 생활하는데 필요한 물건이 전부 놓여있었다.
 공간은 그리 넓지 않았다. 부천FC 숙소와 비슷했다. 쾌적하고 인테리어가 좋다는 것에 만족했다.
 문 전면에 있는 창문의 커튼을 젖혔다. 따사로운 햇살이 얼굴을 간지럽혔다.
 ‘이 정기를 받아서.’
 최민규는 양 팔을 벌리고 햇빛을 마음껏 만끽했다. 입을 벌리고 한 움큼 들이키기도 했다.
 앞으로의 계획도 지금 이 순간처럼 순탄하게 진행되길 바라면서 짐을 풀었다.
 옷과 기본적인 생활용품을 말끔히 칸에 넣은 후, 숙소를 나섰다.
 아직 끝나지 않은 훈련.
 박승민 수석코치는 오늘하루만큼은 푹 쉬라고 말했지만, 최민규는 그럴 생각이 없었다.
 살다보면 일분일초가 인생을 바꿀 수도 있는 법이다.
 조금이라도 더 잔디와 뒹굴어야 했다.
 훈련장엔 선수들이 제각기 자신에게 필요한 훈련을 하고 있었다.
 ‘코치님들이 많군.’
 부천FC에는 코치가 몇 명되지 않았다. 수석코치라는 개념도 없어서 소수가 모든 선수를 관리했다.
 하지만 서울FC는 달랐다. 수석코치 1명과 기본 코치 2명을 필두로 피지컬 코치, 골키퍼 코치 등 도와주는 이가 많았다.
 부상으로 인해 재활이 필요한 선수들을 위한 트레이너도 존재했다. 하나 같이 국가자격증을 소유한 대단한 사람들이었다.
 부천FC와 비교하면 그야말로 엄청난 환경의 차이.
 입이 떡 벌어져도 이상할 게 없는 좋은 시스템이었다. 거짓말 조금 보태서 차려진 밥상 위에 숟가락만 얹어도 될 정도로 훈련이 용이했다.
 최민규는 생각했다.
 ‘얼른 대단한 선수가 되자.’
 지금도 좋다. 말이 안 나올 정도로 행복하다. 서울FC가 이 정돈데 대관절 이 위에 있는 선수들은 얼마나 대단한 대우를 받게 될까.
 당장 국가대표만 생각해도 알 수 있다. 최고급 시설에서 최고급 코치진의 훈련 아래, 최고급 감독의 지휘를 받으며 필드를 달릴 것이다.
 그야말로 금의환향.
 물론 최민규의 목적이 여기에 있는 것은 아니다. 좋은 대우보다 좋은 선수가 되는 것에 자신의 꿈을 맞추고 있다. 널빤지를 깔고 잔다 하더라도 최고가 될 수 있다면 그걸로 족했다. 단지 성장하면서 조금씩 더 나은 환경에서 뛴다는 게 긍정적으로 느껴질 뿐이었다.
 최민규는 코치진과 트레이너들과도 간단히 인사를 나누었다. 앞으로 쭉 함께 해야 하기에 선수들만큼 소중한 이들이었다.
 첫 훈련은 간단한 테스트.
 최민규의 수준이 어느 정도인지 판단하기 위해 각종 테스트가 이어졌다.
 체력, 피지컬, 근력, 순발력 등등.
 부담을 갖진 않았다. 그저 부천FC에서의 모습 그대로를 보여주면 되니까.
 코치진들이 다소 놀라운 표정을 지었다.
 “기량이 아주 출중한데?”
 “감사합니다.”
 “미리 입단식 준비해라.”
 정수현 코치의 말에 최민규는 멋쩍게 웃음을 지었다. 하지만 결코 우스갯소리는 아니었다. 실제로 최민규의 테스트 결과가 매우 좋았다.
 순발력에서만 B를 맞고 나머진 올 A를 받았다. 당장 1부 리그 선수로 뛰어도 손색없는 실력.
 경험이 부족하긴 하지만 리그가 바뀌었다고 해서 필드까지 바뀌지는 않으므로 그리 상관없는 문제였다.
 테스트를 끝낸 최민규는 비로소 선수들과 뒤섞여 훈련을 받게 됐다.
 딱히 어색한 점은 없었다. 모든 게 2부 리그에서 했던 훈련의 연장선에 있었다.
 다만 딱 한 가지.
 선수들의 기량이 매우 뛰어났다. 재미삼아 미니 게임을 해도 월등히 뛰어난 실력을 보였다. 한때, 과연 2부와 1부의 차이가 그렇게 많이 날까 했던 게 부끄럽게 다가왔다.
 최민규는 크게 반성하며 모든 걸 주시했다.
 그들이 어떤 식으로 훈련하고, 또 어떤 생각을 하는지 면밀히 관찰했다. 쓸 때 없는 것도 많았지만 조금이라도 도움 되는 걸 얻으면 그걸로 만족했다.
 훈련은 5시까지 이어졌다. 이후로는 부천FC과 마찬가지로 자율이었다. 숙소에 가서 쉬든, 근처에 나가든, 뭘 하든 마음대로였다.
 최민규는 저녁을 먹고 다시 훈련장에 왔다. 중요하게 할 일이 없다면 조금이라도 더 몸을 다져야 했다. 남들만큼 노력하기보다 남들보다 더 노력하는 게 그의 모토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오늘은 이유가 하나 더 있었다.
 얼마 남지 않은 레벨 업.
 최민규는 몸을 풀었다. 막 저녁을 먹은 상태라서 체력 훈련보단 드리블이나 근력 운동을 했다.
 송골송골한 땀이 얼굴을 뒤덮는다. 그것은 가슴에서도 흘러내려서 훈련복마저 적셔놓는다.
 기분 좋은 찝찝함.
 이득을 취할 수 있는 피곤함이라면 언제든 환영이었다.
 한참 동안 훈련에 열중하던 최민규는 문득 하늘을 올려다봤다.
 달빛이 그윽하다. 손가락 사이로 새어 들어오는 빛이 눈을 맑게 해준다.
 어느덧 밤 9시.
 저녁 훈련을 시작할 때만 해도 노을이 짙었는데, 그런 모습은 마치 처음부터 없었다는 것처럼 아무리 둘러봐도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최민규의 훈련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마지막으로 체력을 단련해야 비로소 오늘 하루를 닫을 수 있다.
 그는 목에 수건을 걸친 채로 필드 밖 라인을 돌기 시작했다.
 ‘후우.’
 가쁜 숨이 차오른다. 뜨거운 태양 아래서 하루 종일 몸을 움직였으니 정상적으로 작동할 리가 만무하다. 힘을 빼면 털썩 주저앉을 듯, 다리가 미세하게 떨린다.
 조금만 더.
 죽을 정도로 힘들지 않다면 괜찮다. 또 몸에 무리가 갈 정도만 아니라면 상관없다. 힘이 닿는 한 달리는 것. 그것이 최민규의 방식이었다.
 2바퀴를 돌았을 때, 익숙한 소리가 들렸다.
 
 ●레벨이 6으로 올랐습니다.
 
 ‘좋아!’
 힘이 불끈 솟는다. 한 계단 더 성장했다는 느낌에 열의도 차오른다.
 최민규는 달리면서 상태창을 확인했다. 초반에는 무조건 서서만 했는데, 이제는 능숙하게 뛰면서도 할 수 있었다.
 
 ━━━━━━━━━━━
 이름 : 최민규
 레벨 : 6
 소속 : 서울FC
 신장 : 183cm
 체중 : 75kg
 포지션 : FW(공격수)
 슈팅 : 51
 패스 : 51
 결정력 : 56
 공간창출 : 61
 드리블 : 47
 헤딩 : 50
 크로스 : 50
 테크닉 : 51
 체력 : 50
 민첩성 : 47
 몸싸움 : 50
 리더십 : 51
 판단력 : 55
 예측력 : 51
 태클 : 40
 위치선정 : 40
 대인방어 : 40
 사용 가능한 포인트 : 5
 ━━━━━━━━━━━
 
 일단 고민 없이 드리블과 민첩성에 포인트를 모두 투자했다. 드리블은 50이 되었고, 민첩성은 49가 되었다. 슬슬 다른 능력치와 엇비슷해지기 시작했다.
 최민규는 다음 레벨부터는 다른 것에도 골고루 분배해도 되겠다고 생각하면서 뜀걸음에 더 박차를 가했다.
 
 ***
 
 <2012 K리그 클래식 구단 순위(20라운드)>
 01. 전북FC(승점:41 / 승:12 / 무:5 / 패:3)
 02. 포항FC(승점:40 / 승:12 / 무:4 / 패:4)
 03. 수원FC(승점:35 / 승:10 / 무:5 / 패:5)
 04. 제주FC(승점:31 / 승:8 / 무:7 / 패:5)
 05. 울산FC(승점:30 / 승:8 / 무:6 / 패:6)
 06. 전남FC(승점:30 / 승:9 / 무:3 / 패:8)
 07. 서울FC(승점:25 / 승:6 / 무:7 / 패:7)
 08. 상주FC(승점:21 / 승:4 / 무:9 / 패:7)
 09. 인천FC(승점:20 / 승:4 / 무:8 / 패:8)
 10. 성남FC(승점:18 / 승:4 / 무:6 / 패:10)
 11. 부산FC(승점:16 / 승:3 / 무:7 / 패:10)
 12. 경남FC(승점:16 / 승:2 / 무:2 / 패:9)
 
 최민규는 턱을 괸 채로 모니터를 바라봤다. 잠이 오지 않아서 K리그 현황을 확인하고 있었다.
 서울FC의 순위는 7위.
 높지도 낮지도 않은 딱 중간 순위다. 하지만 좋게 말해서 중간이지 사실 타이틀을 생각하면 더욱 더 분발해야 한다.
 일단 리그 우승의 어려움.
 벌써 상위권과 승점이 10점 넘게 차이난다. 이 상태로 33라운드까지 진행된다면 서울FC는 우승의 문턱조차 밟을 수 없을 것이다. 패는 최대한 줄이면서 승을 따내는 결과를 만들어야 한다.
 다음은 리그 종료 후, 6강 플레이오프.
 말 그대로 6위까지만 진출할 수 있는 타이틀 매치다. 현재 7위이므로 한 계단만 오르면 진출하게 되지만, 중점을 거기에 두면 안 된다.
 1위와 2위의 엄청난 혜택. 전자는 바로 결승에 진출한다. 꾸역꾸역 이겨서 올라올 필요 없이 편하게 기다리면 된다. 후자 역시 마찬가지다. 1위보다 한 경기만 더 뛸 뿐, 다리 뻗고 상대를 기다릴 수 있다.
 그리고 내년에 있을 AFC 챔피언스리그.
 전년도 상위 3개 팀만 진출할 수 있다. 우승하면 아시아에서 최강 클럽이라는 명성을 얻는다는 것만 생각해도 무조건 따내야할 타이틀이다.
 물론 서울FC가 위 3가지 타이틀을 한 번도 따지 못한 건 아니다. 두 시즌 연속 정규리그 우승을 차지하기도 했고, 3위로 진출해 플레이오프에서도 우승한 적이 있다.
 ‘과거의 영광에 취하면 안 된다.’
 모름지기 현재가 중요한 법이다. 과거에 아무리 잘났어도 지금 못났다면 의미가 없다. 본인이나 타인이나 모두 지금 이 순간만 기억하기 때문이다.
 더욱이 서울FC가 타이틀을 따낸 게 엊그제의 일도 아니다. 모두가 수 년 전의 일이다. 멤버도 많이 달라졌기에 그 시절을 회상해선 안 된다.
 ‘득점왕.’
 최민규는 탭을 옮겨 현 시즌 득점왕을 확인했다. 전북FC의 김동국이 9골로 1위를 달리고 있었다.
 01년도부터 활약한 노장중의 노장.
 나이와 달리 실력은 노쇠하지 않았다. 오히려 발전에 발전을 거듭했다. 그게 현 시즌 득점 선두를 달릴 수 있는 이유였다.
 최민규는 자신의 이름이 1위 옆에 새겨지는 것을 상상해보았다.
 입가에 저절로 미소가 잡힌다.
 얼마나 좋고, 행복할까. 아마 한 경기에서 해트트릭해도 그보단 기쁘지 않을 것이다. 득점왕은 훗날 커리어로 작용하기 때문이다.
 최민규는 10여 분 정도 더 인터넷을 하다가 침대에 누웠다.
 이상하리만치 가슴이 두근거린다. 잠자리가 바뀌어서 그런 것일까, 아니면 아직 1부 리그에 적응하지 못해서일까.
 이유는 금방 나왔다.
 ‘8일 후 첫 경기.’
 
 # 독종의 등장
 
 최민규의 하루는 바쁘게 돌아갔다.
 다른 선수들보다 일찍 일어나 훈련장을 도는 게 시작이었다. 이미 앞서서 몸을 푼 상태에서 아침 훈련에 임하는 것이었다.
 빨리 움직임으로 인해 힘이 달리거나 졸린 건 없었다. 익숙한 일이니까. 부천FC에 있을 때 항상 했던 일이라 도리어 하지 않는 게 더 이상했다.
 훈련 중에도 최민규의 행동은 단연 돋보였다. 휴식 시간에도 자리에 앉는 법이 없었다. 항상 힘이 남아서 팔굽혀펴기 같은 간단한 운동이라도 했다.
 코치진과 선수들이 혀를 내둘렀다. 여러 독종을 봤지만 이 정도로 열심히 하는 이는 처음 봤다.
 서태준과 성준한은 부천FC에 있었던 적이 있어서 그런가보다 하고 있었지만, 처음 보는 사람에겐 그저 신세계였다.
 다들 한 마디씩 내뱉었다.
 “민규야. 너 2부 리그로 안 내려간다. 걱정하지마라.”
 “좀 쉬엄쉬엄해라.”
 “힘이 어디서 솟아나는 거야?”
 세계 탑 플레이어도 이 정도로 과하게 훈련하진 않는다. 그들도 남들처럼 정해진 시간에만 움직이는 게 기본이다. 일반화할 수는 없는 문제지만 보통 그렇다.
 ‘나는 타고난 게 없다.’
 최민규는 항상 생각한다. 타고난 재능이 없으면 무조건 노력해야 한다. 안 그러고서는 높이 올라가 있는 사람을 따라잡을 수 없다.
 당장 서태준만 봐도 그렇다. 결코 그가 노력을 안 한다는 것은 아니나, 훈련 시간에만 몸을 움직임에도 불구하고 항상 좋은 자리에 오르지 않았나.
 이유는 또 있다.
 경험치!
 쉬는 동안 얻지 못할 경험치를 생각하면 몸이 저절로 움직인다.
 식사 후 점심 훈련 때도 최민규의 진가가 드러났다. 일절 휴식 시간 없이 계속해서 몸을 굴렸다. 코치가 괜찮냐고 묻자 점심시간에 쉬어서 쌩쌩하다고 답했다.
 세 번째 휴식 시간.
 최민규가 여전히 훈련을 멈추지 않자 코치진과 선수들도 슬슬 익숙해지기 시작했다. 더 이상 그의 안부를 묻지 않았다.
 ‘경험치 오르는 게 많이 더뎌졌군.’
 훈련 종료 시간이 다 돼서야 잠깐 휴식 시간을 가진 최민규.
 상태창을 확인하며 아쉽다는 기색을 표하고 있었다.
 저 레벨임에도 불구하고 상승폭이 상당히 느렸다. 오늘 하루 쉬지 않고 훈련했음에도 겨우 3퍼센트였다.
 경기에 뛰든 안 뛰는 21라운드 전까지는 7레벨을 찍고 싶었는데, 좀 힘들 듯싶었다.
 ‘노력이 부족한 탓이다.’
 레벨 업이 힘들다 싶으면 포기하는 게 아니라 훈련 시간을 늘린다.
 최민규의 마인드는 참으로 긍정적이었다. 어떤 문제든지 부정적으로 생각하는 법이 없었다.
 “오늘도 고생들 많았다.”
 그 사이 박승민 수석코치가 훈련을 마무리했다. 코치진과 선수들이 저마다 인사를 한 후 훈련장을 벗어났다.
 “민규는 왜 안가?”
 “아직 힘이 좀 남았어요.”
 “어휴. 대단해, 대단해.”
 박승민 수석코치는 최민규의 어깨를 두드리며 질렸다는 얼굴로 퇴근했다.
 그야말로 훈련으로 시작해서 훈련으로 끝나는 하루. 작은 틈 하나 찾기 어려운 빡빡한 일과였다.
 최민규는 이것을 21라운드 전까지 똑같이 반복했다.
 
 ***
 
 2012년 8월 13일.
 K리그 클래식 제 21라운드 서울FC VS 전남FC.
 이태양 감독과 주장 권진수가 경기 전 인터뷰를 가졌다. 오늘 경기를 어떤 방식으로 할 것이며 동시에 전남FC를 어떻게 생각하는지에 대한 것들이었다.
 대략 10분.
 기자들의 던진 질문에 대한 답변을 끝낸 이태양 감독이 기자들에게 한 남자를 소개했다.
 키 183cm에 짧은 투블럭컷을 하고 있었는데, 햇빛을 많이 받았는지 얼굴이 다소 시꺼멓게 타있었다.
 ‘후아.’
 남자의 정체는 다름 아닌 최민규였다. 모든 테스트에서 합격점을 받은 그는 이태양 감독으로부터 서울FC 선수가 되는 걸 정식으로 임명받았다.
 그리고 오늘.
 경기 시작 전에 간단한 입단식을 하게 되었다.
 이태양 감독이 자리에서 일어나 입을 열었다.
 “이번에 부천FC에서 올라온 최민규라고 합니다.”
 이태양 감독의 말에 맞춰 최민규가 허리를 숙여 인사했다.
 기자들이 마구 플래쉬를 터뜨렸다. 특종은 결코 아니지만 새로운 선수가 들어왔으니 평범한 기삿거리 정도는 됐다.
 여기저기서 질문이 쏟아졌다.
 “어떤 선수입니까?”
 “포워드입니다. 실력이 아주 출중합니다.”
 “서태준 선수만큼 잘합니까?”
 “다른 선수와 비교는 삼가십시오.”
 “오늘 투입됩니까?”
 “선발은 어렵고 교체로 나올 듯합니다.”
 질문은 계속해서 이어졌다.
 이태양 감독은 하나하나 모두 답해주었다. 비슷한 질문도 많아서 짜증날 법도 한데 끝까지 웃음을 잃지 않았다. 아무래도 이런 자리를 많이 겪어서 익숙해진 듯했다.
 15분 쯤 지났을까.
 기자들의 질문이 끝나고, 드디어 최민규의 입단식이 진행됐다.
 먼저 최민규와 이태양 감독이 서로 정식으로 악수를 나누며 플래시를 받았다.
 그 다음엔 서울FC 유니폼을 들었다.
 “유니폼 조금만 더 낮게 들어주세요!”
 “좀 더 환하게 웃어주세요!”
 “살짝만 옆으로 가주세요!”
 기자들의 다양한 요구.
 최민규는 군말 없이 그 말에 따랐다. 전혀 귀찮지 않았다. 오히려 기분이 좋았다. 꿈으로만 꿨던 일을 직접 맞이하고 있는데, 어찌 싫을 수 있겠는가.
 입단식은 길게 이어지지 않았다. 최민규가 유명 선수나 프렌차이즈 스타가 아닌 이상은 성대함을 기대하기 힘들었다.
 최민규도 그 점을 잘 알고 있어서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할 수 있었다.
 “민규. 데뷔전이 교체라서 좀 아쉽지?”
 “아닙니다, 감독님. 뛸 수 있는 것에 만족합니다.”
 진심이었다. 최민규는 경기에 나간다는 것 자체로도 기뻤다. 사실 엔트리를 알려주기 전까진 교체로도 투입되지 않을 거라 생각했기 때문. 올라 온지 며칠이나 되었다고 경기 출전을 바라겠는가.
 “최대한 일찍 당겨볼 테니까 몸 잘 풀고 있어.”
 “감사합니다.”
 최민규는 이태양 감독과 주장 권진수를 따라 경기장에 들어섰다.
 그리고 입이 함지박 만하게 벌어진다.
 ‘엄청나다.’
 수많은 인파!
 셀 수 없을 만큼의 관중들이 좌석에 앉아있었다. 정말이지 계속 쳐다보면 눈이 돌아갈 정도로 빽빽했다.
 부천FC에서는 단 한 번도 이런 모습을 보지 못했다. 매번 셀 수 있을 만큼의 적은 관중만 왔었다.
 ‘괜히 부담되는 군.’
 경기를 뛰면서 부담감을 가져본 적이 없는 최민규는 처음으로 가슴을 졸였다.
 이렇게 많은 팬들 앞에서 안 좋은 모습을 보이면 어떡하지, 하는 생각이 가슴을 괴롭혔다.
 괜스레 두 주먹을 불끈 쥐게 된다.
 ‘도와드려야지.’
 최민규는 서울FC의 벤치로 걸어가 몸 푸는 선발 멤버들을 도와주었다.
 미세한 차이가 기적을 만든다고, 근육 한 개 더 풀어준 게 경기에서 좋은 영향을 끼칠 수 있었다.
 이윽고 선수들이 하프라인에 들어섰다.
 ‘전남FC.’
 현재 전남FC는 6위다. 서울FC보다 한 순위가 높다. 중요하지 않은 경기가 어디 있겠느냐만, 오늘은 특히 더 신경 써야 한다.
 따라 잡을 절호의 기회!
 이번 한 경기를 이기면 서울FC는 승점 3점을 추가해 27점이 된다. 전남FC가 30점이라 순위 변동은 없겠으나, 그래도 추격의 발판을 마련할 수 있다.
 ‘신인선수들이 많다.’
 전남FC는 선수층 네임벨류가 타 팀과 비교해 조금 약하다. 운영비가 적은 탓에 투자가 어렵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순위는 6위를 유지하고 있는데, 그것은 유소년시스템의 영향이다.
 신인선수들의 돌풍!
 경력과 경험이 적음에도 체계적인 시스템 덕에 항상 수준 높은 플레이를 펼친다. 나이만 어릴 뿐, 절대로 무시할 존재가 아니다.
 ‘우리도 나쁘지 않다.’
 최민규는 서울FC의 승리를 기원하며 필드로 시야를 옮겼다.
 
 - 오늘도 역시 서울FC의 멤버는 화려하군요.
 - 네. 중원에 정혁, 박강현 선수. 수비수엔 절대방어 용지혁 선수. 최후방엔 국민 골키퍼 권진수 선구까지. 비록 나이가 있어서 국가대표에는 승선하지 못했으나 한 때 시대를 풍미했던 대단한 선수들입니다.
 - 그렇죠. 그리고 최근 서태준 선수의 활약이 대단하죠?
 - 네. 저번 라운드부터 임대가 풀린 서태준 선수가 복귀전에서 1골 1어시스트로 맹활약했습니다. 당일 MOM도 차지했고요.
 - 대단하군요. 전남FC는 어떤가요?
 - 매번 그렇듯이 오늘도 신인선수들로 선발이 꾸려져있습니다. 다들 경력이나 경험 면에서 서울FC에 많이 밀리지만, 출중한 실력을 바탕으로 항상 좋은 경기를 펼치고 있습니다.
 선수들이 악수를 나누며 페어플레이를 다짐합니다.
 - 현재 두 팀이 6, 7위에 나란히 올라와있죠?
 - 네. 전남FC는 상위권 진입을 위해 무조건 승리해야 하고, 서울FC 역시 플레이오프 진출권을 따내기 위해서 반드시 승점이 필요합니다.
 - 치열한 대결이 예상되는군요.
 - 양 팀 모두 때려눕혀서라도 경기를 이겨야하는 상황입니다.
 - 네?
 - 큰 접전이 있을 거란 말입니다.
 - 아하하…… 네! 경기 시작합니다!
 
 주심의 휘슬이 울리고, 전남FC의 선축으로 경기가 시작됐다.
 “와아아아아!”
 서포터즈들의 함성이 크게 울린다.
 
 - 오늘 양 팀의 포지션은 어떤가요?
 - 서울FC는 4-2-3-1로 허리를 강화하면서 서태준 선수에게 힘을 실어주었고, 전남FC는 4-3-3으로 무난한 포메이션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 안종환 해설위원께선 오늘 경기 어떻게 보십니까?
 - 최근 서울FC의 페이스가 매우 좋습니다. 서태준 선수도 부상에서 복귀했고 최소 무승부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패전이 없습니다. 하지만 전남FC의 신인선수들의 돌풍이 매섭습니다. 득점 2위에 있는 선수도 있고, 경기를 장악하는 기세가 대단합니다. 조심스럽게 전남FC의 승리를 예상해봅니다.
 - 함부로 승부를 예상하면 곤란한데요?
 - 그럼 왜 물어봤습니까?
 - …… 네! 서태준 선수! 경기가 시작되자마자 치고 나갑니다!
 
 전반 1분.
 중원에서 공을 이어받은 서태준이 전남FC 진영 쪽을 파고들었다.
 ‘잘한다.’
 최민규는 늘 서태준의 실력만큼은 인정했다. 절대로 깎아내리지 않았다. 말하는 것과 다르게 공을 가지고 놀 줄 아는 선수였다.
 뛰어난 재능.
 그저 부러울 따름이었다.
 
 - 아! 역시 빠릅니다! 단번에 하프라인을 넘어 페널티박스에 가까워집니다! 그대로 슛 하나요!
 - 전남FC는 이럴 때일수록 측면도 신경써줘야 합니다. 갑자기 패스를 줘버리면 곤란해질 수 있거든요.
 - 말씀하시는 순간 서태준 선수! 정혁 선수에게 패스합니다!
 아쉽게도 패스가 닿지 못했다. 안종환 해설의 말대로 측면에 신경 쓴 전남FC가 유연하게 공격을 대처했다.
 - 그대로 슛을 날렸었어야 했나요.
 - 아마 실패했을 겁니다.
 - 왜 그렇죠?
 - 서태준 선수, 수비진이 견고해서 패스를 준 것이거든요.
 
 경기는 팽팽했다. 서태준의 공격이 끝나기 무섭게 전남FC도 맹공을 가했다. 신인선수라고 해서 전혀 기죽는 것 없이 마음껏 날개를 펼쳤다.
 최민규는 묵묵히 경기를 관찰했다.
 ‘모두가 뛰어나다.’
 잘하는 선수를 꼽으라면 어찌어찌 고르겠는데, 반대로 못하는 선수를 택하라면 쉽게 고르지 못할 것 같았다. 22명이 다 잘하니까.
 물론 포워드를 제외하면 다른 포지션에 대해서 잘 알지 못한다. 전술훈련만 놓고 봐도 포지션마다 맡는 분야가 다르기 때문이다.
 하지만 눈에 보인다. 지금까지 봤던 선수들과는 확실히 다른 움직임. 세세하게 하나씩 비교할 순 없어도 전체적으로 실력이 높다.
 
 - 경기가 아주 흥미진진하군요.
 - 양 팀 모두 마치 사활을 건 것 같아요
 시작한 지 몇 분 안됐음에도 불구하고 벌써 경기가 무르익는다.
 자신의 팀을 응원하는 서포터즈들과 쏟아지는 함성.
 벤치에서도 감독들이 일어나 여기저기 손짓한다.
 - 오늘 서울FC에 새로운 선수가 영입됐다고 하던데요?
 - 네. 최민규란 선수입니다.
 - 어떤 선수인가요?
 - 포지션은 포워드고 다방면에서 뛰어난 실력을 가지고 있다고 합니다. 아마 후반에 교체 투입이 될 듯싶습니다.
 - 서태준 선수나 성준한 선수 백업인가요?
 - 포지션을 맞춰서 교체한다고 하면 아마 그럴 듯합니다.
 
 최민규는 페널티박스와 하프라인 사이에서 기회를 노리는 성준한을 보았다.
 최전방 공격수는 아니지만 허리를 강화하며 공격을 감행하는 중요한 역할이었다.
 ‘준한이도 많이 성장했구나.’
 1년 사이 성준한은 몰라보게 바뀌어있었다. 속도나 드리블은 물론, 다소 부족했었던 피지컬까지 끌어올렸다.
 
 # 찰나의 기회
 
 ‘서동렬.’
 이번엔 전남FC의 공격수 서동렬을 주시했다. 전북FC 김동국의 뒤를 이어 득점 2순위를 달리고 있는 대단한 선수였다.
 불과 스물 하나의 나이.
 약관을 막 지난 청년이 K리그를 마구 활보하고 있었다.
 아직 시즌이 다 끝나지 않았고 일이 어떻게 될지 모르기에 함부로 장담할 순 없지만 뛰어난 건 분명했다. 아니고서야 8골이나 몰아치긴 불가능했겠지.
 최민규는 전남FC의 유소년시스템에 대해 다시 한 번 감탄했다.
 ‘발굴의 능력.’
 대게의 구단들이 그렇다. 잘하는 선수를 영입하려 하지 만들려고 하지 않는다.
 이유?
 전자가 더 쉽고 용이하니까. 없는 상태에서 있는 상태를 만드는 건 너무나 어려운 일이다.
 하지만 전남FC는 다르다. 자체적으로 키워낸 선수들을 리그에서 맹활약시킨다.
 서동렬을 비롯해 다양한 포지션에서 발군의 실력을 뽐내는 이들!
 다 잘하지는 않는다. 분명 뒤쳐지고 못하는 선수도 있다.
 ‘시간이 지나면 나아질 터.’
 최민규는 그런 선수들 역시 시간이 해결해주리라 보았다.
 처음부터 잘하는 경우는 없다. 뼈를 깎는 노력이 더해지면 비로소 실력이 나오는 것이다.
 
 - 서울FC의 프리킥 찬스입니다.
 - 서울FC는 세트피스 상황에 상당히 능합니다. 킥력이 좋은 서태준 선수가 있고, 그 볼을 받쳐줄 선수들이 굉장히 많거든요.
 - 이번에 골이 터진다보시는 겁니까?
 - 그건 장담 드리기 어렵지만 위협적인 상황은 나올 것 같습니다.
 - 말씀드리는 순간 주심의 휘슬이 울립니다.
 - 역시 볼은 서태준 선수가 차는데요.
 - 서태준 선수. 오른발로 차죠.
 - 바로 슛을 노리는 거 같은 데요?
 - 슛!
 - 아쉽게도 빗나갑니다. 골대를 살짝 벗어나네요.
 - 좋은 슈팅이었죠?
 - 네. 조금만 더 감아 찼다면 충분히 들어가지 않았을까 생각되네요.
 
 전반 27분에 터진 서태준의 강한 오른 발 슈팅.
 응원석이 크게 들썩였다.
 서울FC의 벤치에서도 아쉬운 함성이 터져 나왔다.
 ‘들어갈 뻔 했는데.’
 최민규 역시 아깝다는 기색을 표했다.
 
 - 전남FC는 중원을 많이 거치지 않는군요.
 - 차근차근 올라가기보단 롱패스나 빠른 쇄도로 돌파를 하는 팀이죠.
 - 그렇게 하면 패스 성공률이나 점유율이 낮아지지 않나요?
 - 그 두 가지 보단 공격을 성공시키면 된다는 것에 중점을 두고 있습니다.
 - 안종환 해설위원님이 보시기엔 좋은 방법인가요?
 - 각 구단마다 특성과 특징이 다르기 때문에 제가 가타부타 할 일이 아니죠.
 - 그래도 굳이 말하자면 어떤가요?
 - 제 주관은 별로 선호하지 않는 축구입니다.
 - 안종환 해설위원님께서 나쁘다고 하네요.
 - 네?
 
 전남FC는 필드를 두 가지로 나눴다.
 전방과 후방.
 중원은 별로 생각하지 않았다. 긴 패스로 한 번에 공격을 이어가거나, 공격형 미드필더들이 한 번에 하프라인을 넘는 걸 추구했다.
 최민규도 이걸 그다지 선호하지 않았다.
 ‘패스가 돼야 공격이 되고, 점유율이 높아야 기회가 더 많이 찾아온다.’
 그런데 놀랍게도 상황은 전남FC의 의도대로 흐르고 있었다.
 패스가 끊기고 점유율이 낮은 건 분명하나, 몇 차례 좋은 기회를 만들었다.
 골대를 맞추는 서동렬의 강력한 중거리 슛!
 긴 롱패스를 이어받아 바로 날린 슈팅이 아슬아슬하게 골대를 맞췄다.
 이후에도 공격수 하나가 측면에서 올린 크로스로 헤딩을 때리는 등 다양한 공격이 이어졌다.
 
 - 상당히 위협적인데요?
 - 역시 전남FC는 세트피스에 능한 팀이죠.
 - 서울FC가 어떻게 대처해야 한다고 보십니까?
 - 일단 개인 마크가 굉장히 중요합니다. 언제 어디로 튈지 모르기에 항상 주시하고 있어야 합니다.
 - 볼보단 사람을 노려야한다는 말씀이시군요.
 
 전반 42분.
 서울FC의 코너킥을 잘 받아친 전남FC가 역습기회를 맞았다.
 빠른 공격!
 비단 세트피스에만 능한 게 아니었다. 순식간에 하프라인을 넘어 페널티박스에 가까워지고 있었다.
 서울FC 수비진은 다급하게 발을 놀렸다. 까딱 잘못했다간 골을 먹을 위기였다.
 
 - 아! 서동렬 선수 굉장히 빠릅니다!
 - 문전 앞까지 갈 수 있겠는데요!
 - 심재영 선수와 용지혁 선수가 급하게 달라붙고 있는데요!
 - 서동렬 선수, 지금이 기회입니다. 바로 슛 때려야 돼요!
 - 아! 슛!
 - 골! 골입니다!
 
 골망이 크게 울리자, 권진수가 머리를 쓸어 올린다. 착잡할 때만 나오는 그의 버릇이다.
 전남FC 관중들이 크게 일어선다. 원정경기라서 수가 적음에도 불구하고 함성의 크기가 매우 시끌벅적하다.
 서동렬은 양 팔을 번쩍 든 채로 필드를 활보했다.
 이번 골은 의미가 컸다. 경기에서 유리한 고지를 점했다는 것도 있지만, 전북FC의 김동국과 득점 선두를 달리게 됐다.
 감독에게 달려가 포옹까지 한 서동렬의 얼굴엔 세상 그 누구도 따라하지 못할 미소가 걸려 있었다.
 ‘매우 빨랐어.’
 최민규는 전남FC의 역습 공격을 보면서 빠르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수비수 하나가 끊어낸 볼을 터치한 미드필더가 바로 서동렬에게 볼을 차 보냈고, 그는 그 순간부터 번개처럼 필드를 가로 질렀다.
 드리블하면서 치고 나가는 속도가 매우 일품.
 ‘세상엔 뛰어난 선수가 정말 많다.’
 상대성이 존재해서 100퍼센트 이렇다, 라며 말할 수는 없지만 최민규는 숨겨진 보석들이 참으로 많다고 느꼈다.
 
 - 드디어 균형이 깨졌군요.
 - 아주 멋진 골이었어요.
 
 서동렬의 세레모니가 끝나고 선수들이 다시 필드에 자리했다.
 한쪽은 다소 꺾인 기세, 다른 한쪽은 등등한 기세였다.
 골을 먹은 팀이 아무리 마인드 컨트롤을 한다 해도 넣은 팀보다 좋을 순 없는 법이다.
 물론 이게 역이용되기도 한다. 들떠 있는 상태를 이용해 빠른 공격을 감행하는 것이다.
 하지만 여기는 1부 리그.
 선수들의 정신력이 상당하기에 선취골을 득점했다고 해서 절대 방심하지 않을 터였다.
 전반전은 이후로 다시 팽팽해졌다.
 서울FC는 동점골을 터뜨리기 위해, 전남FC는 한 걸음 더 달아나기 위해 필드 이곳저곳을 누볐다.
 ‘침착하다.’
 최민규는 이태양 감독이 그저 놀라웠다. 한 골 먹혔음에도 불구하고 평온했다. 팔짱을 낀 상태로 묵묵히 경기를 바라보고 있었다.
 답답한 상황이 나올 때도 언성을 높이지 않았다. 아니, 아예 입을 열지 않았다. 선수들에게 모든 걸 맡겼다.
 필드의 주인은 감독이 아닌 선수.
 정말 필요한 지적이 아니라면 말보단 침묵이 옳았다.
 경기가 정신없이 진행되나보니 어느덧 추가 시간까지 왔다.
 딱히 지체된 상황이 없어서 주어진 시간은 2분.
 
 - 전반전은 이렇게 마무리 될 것으로 보입니다.
 - 간만에 땀을 쥐는 승부였습니다.
 - 안종환 해설께선 전반전을 어떻게 보셨습니까?
 - 네. 일단 경기가 매우 빨랐습니다. 양 팀 모두 수비보단 공격에 비중을 둬서 공방전이 아닌 흡사 공공전이었습니다. 초장엔 서태준 선수의 프리킥을 시작으로 서울FC의 우세가 아닌가 했는데, 전남FC가 끈질긴 세트피스로 여러 좋은 찬스를 만들어냈습니다. 비록 골은 역습 기회에서 터졌지만 세트피스도 훌륭했습니다.
 - 후반전은 어떻게 예상하십니까?
 - 그대로 이어질 것 같습니다. 서울FC는 동점골을 터뜨리기 위해서라도 공격을 이어나가야 하고, 전남FC는 골을 지키는 것보단 골을 늘리는 걸 선호하기 때문에 별 다른 변화가 없을 겁니다.
 - 하프타임 때 선수교체가 이루어질까요?
 - 체력에 문제가 없다면 그대로 나올 것 같습니다.
 
 전반전 막바지. 후반전을 준비하는 시간에 돌연 경기장이 들썩이기 시작한다.
 환호성을 터뜨릴 듯 입을 벌리는 관중들.
 벤치에서 일어나는 서울FC의 선수들.
 그리고 이 상황을 만든 필드에선 한바탕 소란이 일고 있었다.
 전남FC 진영의 왼쪽 측면!
 좌측 윙백 도진우가 코너 라인까지 내려와서 크로스를 올리고 있었다.
 다 끝난 줄 알고 전남FC가 방심했던 찰나의 순간을 놓치지 않은 것이다.
 길게 올려 진 볼은 안전하게 페널티 박스 안까지 도착했다.
 높이 점프하는 선수들!
 누가 헤딩 볼을 따내느냐에 따라서 경기가 한 번에 바뀔 수 있었다.
 
 - 역시 축구에도 9회말 2아웃이 있어요!
 - 양 팀 선수들 모두 높이 솟아오릅니다! 무조건 볼을 따내야 합니다!
 - 아! 박강현 선수!
 - 헤딩! 들어갑니다! 서울FC가 전반 막판 동점골을 터뜨립니다!
 - 전남FC, 마지막까지 방심하면 안 됐거든요!
 
 전반 46분 52초.
 서울FC의 동점골이 터졌다. 경기는 다시 원점으로 돌아왔다.
 여전히 잠자코 있던 이태양 감독의 손이 힘껏 올라갔다.
 ‘역시 끝까지 포기하란 법은 없지.’
 얼마 전까지만 해도 최민규는 거의 한계 상태와 다름없었다.
 아무리 노력해도 바뀌는 건 전무.
 하지만 포기하지 않았다. 뛰고 또 뛰었다. 그게 빛을 발하여 능력을 손에 쥐었다.
 경기 역시 마찬가지다. 주심이 휘슬을 불기 전까지 무조건 볼을 주시해야 한다. 뜻밖의 행운이나 찬스로 골문을 노리게 될지 모른다.
 
 삐이익-
 
 주심의 휘슬이 울린다. 드디어 전반전이 끝났다.
 양 팀 간 희비가 교차했다. 관중석에서도 기쁨의 환호와 아쉬움의 한탄이 겹쳐졌다.
 10분간의 하프타임.
 선수들은 라커룸에서 음료로 목을 적시고, 다리 마사지를 받았다.
 코치들은 잘했던 점보다는 못했던 부분을 위주로 짧게 설명했다.
 저마다 고개를 끄덕이며 후반전에는 그런 실수를 저지르지 않으리라 다짐했다.
 
 - 자, 후반전은 서울FC의 선축입니다.
 - 선수들 얼굴에 열의가 가득하네요.
 - 말씀드리는 순간 경기 시작합니다.
 
 서울FC는 따로 선수 교체를 하지 않았다. 전반 막판의 분위기를 이어가려는 것도 있었고, 체력이 달린 선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기세를 이어갔으면 좋겠는데.’
 최민규는 여전히 벤치에 있었다. 교체로 투입된다고 해도 아직 시기가 일러 한참을 기다려야 했다.
 경기는 무난하게 흐른다. 1:1의 상황에서 조금도 기울어지지 않는다. 필드에선 어떻게든 승부에 반동을 주고자 요란을 피우지만, 계속 중립이다.
 그러던 후반 39분.
 슬슬 경기의 진짜 마무리 시간이 다가온다. 초장부터 뛰었던 선수들은 조금씩 지쳐있다.
 최민규는 그때야 지시를 받았다.
 “민규야. 준비해라.”
 “예.”
 “10분도 못 뛰겠지만 그래도 데뷔전이니까 잘 해봐라.”
 “알겠습니다.”
 최민규는 서태준과 교체 투입되었다.
 서태준은 풀타임을 뛰길 원했으나 부상이 100퍼센트 치료된 게 아니라서 조심할 필요가 있었다.
 ‘익숙한 포지션이다.’
 최민규가 들어간 포지션은 최전방 스트라이커. 공격형 미드필더들과 센터 포워드의 힘을 받아 골에 결정력을 싣는 중요한 역할이었다.
 즉, 기회가 오면 골을 넣어야 한다는 것.
 
 - 저 선수가 최민규 선수죠?
 - 네. 서태준 선수만큼 잘 해줄 수 있을지 기대되네요.
 
 필드에 땀이 흥건하다. 거친 숨이 귓속을 간지럽힌다.
 현재 볼은 서울FC의 진영에 있었다. 공격 기회를 잡아서 찬찬히 볼을 올리고 있었다. 체력이 떨어진 탓에 빠른 연계가 이루어지진 않았다.
 상황은 전남FC도 마찬가지였다. 경기 초반과 비교해 움직임이 둔했다.
 최민규는 마음껏 필드를 활보했다.
 넘치는 게 체력.
 80분 동안 뛰지 못한 것을 이번 10분에 모두 풀어낼 생각이었다.
 중앙 공격형 미드필더 포지션을 맡은 정혁이 하프라인을 훑었다. 국가대표를 했던 경험이 있는 그는 노련미가 있었다. 빈틈이 있다 싶으면 그곳에 바로 패스를 찔러준다.
 
 - 최민규 선수 움직임이 아주 좋은데요?
 - 네. 수비진을 교란시키며 공간을 만들려는 행동이 보입니다. 교체 선수라 체력도 많아서 전남FC로써는 상당히 골치 아플 것 같습니다.
 
 최민규는 볼을 가진 정혁을 확인하고 그 즉시 수비진 사이로 파고들었다. 돌파보단 안전하게 패스부터 받겠단 생각. 무리하게 앞서나가진 않았다.
 땅볼로 빠르게 깔려오는 패스.
 노련한 정혁이었기에 상대 수비진에게 걸리지 않게끔 볼을 보냈다. 물론 최민규가 적절하게 위치를 잡고 있던 것도 컸다.
 
 # 클래식리그 데뷔
 
 - 정혁 선수 아주 좋은 패스죠!
 - 최민규 선수의 공간선정도 기가 막혔습니다!
 - 이대로 돌파하나요?
 - 하지만 마크하는 수비수가 둘이죠.
 
 1부와 2부는 다르다. 길게 말할 것 없이 실력이 월등히 좋다.
 수비진만 봐도 그렇다. 2부에서 2명, 3명을 제쳤다고 해서 그게 1부에서도 통할 리 없다.
 그러나 최민규는 자신감을 가졌다. 안 될 것 같다고 포기하면 끝까지 도전하지 못하게 된다.
 ‘패스 성공률은 낮다.’
 좌우 측면의 동료들에겐 이미 수비수들이 따라 붙었다. 당장 패스한다고 해도 뺏길 공산이 컸다. 그들이 돌파하다면 얘기가 달라지긴 하겠지만, 그러면 시간이 너무 지체된다. 그 사이 수비진이 갖춰질 것이다.
 수비수는 두 명. 최후방까지 치면 세 명이다.
 ‘가자!’
 최민규는 연습한대로 필드를 달렸다. 안 먹히면 어떡하지, 하는 생각은 조금도 하지 않았다. 부정적인 것은 잘 될 일도 그르치게 만든다.
 수비수들은 다소 놀란 눈치였다. 설마 단신으로 돌파를 감행하리라고는 예상치 못한 탓이었다.
 전방에서 뻗어오는 네 개의 다리.
 수비수 한 명의 다리 사이가 다소 많이 벌어져있었다.
 최민규는 그걸 놓치지 않았다. 재빨리 그곳에 볼을 밀어 넣었다.
 제대로 노린 타이밍!
 볼은 빠르게 수비수를 꿰뚫었다. 수비수가 당황한 그 찰나, 최민규는 그곳을 지나쳤다.
 아직 한 명의 수비수가 더 있었다. 다리 보폭을 줄이면서 끈질기게 따라붙었다. 여차하면 태클이라도 걸 기세였다.
 ‘파울을 기다리지 말자.’
 최민규는 21라운드 전까지 훈련장에서 땀을 흘리면서 생각했다.
 스스로 기회를 만드는 것.
 파울이나 동료에 의지하는 게 나쁘다는 건 아니다. 전자는 좋은 위치만 선점하면 바로 슛을 노릴 수도 있다. 후자도 동료가 찔러주는 패스를 잘 받아치면 역시 슛이 가능하다. 문제는 항상 그러긴 힘들단 것이다.
 바로 지금과 같은 상황.
 파울 위치도 별로고 동료한테 기댈 수도 없다면 어떡하겠는가.
 혼자서도 골을 만들 수 있는 능력을 길러야 한다. 지레 겁을 먹고 뒤로 빠지기 보다는 할 수 있다는 자신감으로 밀어 붙인다.
 
 - 최민규 선수 그냥 돌파하는데요?
 - 한 명을 제치긴 했지만, 아직 따라 붙는 수비수가 있거든요. 더 신경 써야 합니다. 태클은 피하면서 앞으로 치고나가는 센스가 필요해요.
 - 하지만 최후방에도 아직 수비진이 견고하죠.
 - 여차하면 중거리 슛을 날려도 됩니다.
 
 옆에 붙어있던 수비수가 몸싸움을 걸었다. 옷깃을 살짝 잡아당기며 옆구리를 밀었다. 심판에게 걸리지 않게끔 강도를 조절했다.
 최민규는 밀리지 않았다. 50의 몸싸움 스탯. 높진 않지만 그렇다고 밀릴 수치도 아니었다.
 급기야 다리를 걸어버리는 수비수. 뚫리느니 파울로 공격을 끊겠단 생각 같았다.
 최민규로서는 땡큐였다. 태클이 오기만을 기다리고 있던 터, 무리 없이 피했다.
 그리고 오른쪽으로 볼을 빼며 페널티박스 쪽으로 쇄도, 공격수의 면모를 드러냈다.
 
 - 아! 빠른데요!
 
 선수 한 명이 하프라인 아래에서 볼을 페널티박스까지 옮기는 기염을 토하고 있었다.
 그 덕에 최후방 수비수들의 얼굴은 사색이 됐다. 설마 여기까지 패스 한 번 없이 올 줄이야.
 급하게 몸을 던졌다. 상황이 어찌됐든 간에 무조건 막아야 했다.
 
 - 최민규 선수! 수비수 2명을 제칩니다!
 - 이런 플레이, 오래간만인데요!
 
 최후방 수비수는 최대한 침착하게 대응한다. 사색이었던 얼굴도 어느덧 진중해져있다. 자신마저 이 길을 내주면 바로 문전이다. 무조건 막아야내야 한다.
 최민규는 생각했다.
 ‘한 명만 더 제치면 된다.’
 원래 같았으면 바로 슛을 날렸을 것이다. 마지막 한 명마저 제칠 수 있단 확신이 없기 때문이다.
 매우 안 좋은 습관.
 최민규는 항상 축구를 확률적으로 계산했다. A, B, C라는 상황이 있다고 하면, 그 중에서 가장 성공률이 좋은 일에 싸움을 걸었다.
 맨날 긍정적인 마인드를 외치지만 이런 부분에선 또 부정적이었다. 안 되면 어떡하지? 란 생각이 무의식적으로 머리를 지배했다.
 이제는 달라졌다. 더 높은 확률에 싸움을 걸기보다 낮은 확률을 뚫는 선택을 했다.
 실패한다면?
 괜찮다. 훗날 또 이런 상황을 맞이했을 때, 그때 실수하지 않으면 된다.
 최민규는 무대포처럼 무식하게 돌진했다. 그 동안 불철주야 연습했던 것들을 마음껏 펼쳤다.
 ‘또 발을 걸 셈인가.’
 수비수는 막을 수 있으리란 확신이 들지 않았는지 태클을 걸 모양새였다. 몸을 낮추며 붙는 걸 보아 그럴 공산이 컸다.
 최민규는 볼을 왼쪽으로 차며 살짝 점프했다.
 놀랍게도 수비수가 정말 태클을 걸었다.
 미리 예상하고 있었던지라 이번에도 피할 수 있었다.
 판단력과 예측력 스탯의 힘!
 그리 많이 찍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이런 상황에서 빛을 발했다.
 
 - 최민규 선수! 골키퍼와 1:1 상황을 만들었습니다!
 - 지금 골문 앞으로 나와야 돼요! 몸을 날려서 쳐내야합니다!
 
 골키퍼가 급히 아크서클까지 달려 나왔다. 미리 몸을 날려야만 슛 공간이 나오지 않을 터였다.
 최민규는 급급해하지 않았다. 골키퍼가 다가오자 살짝 속도를 줄였다.
 ‘지금이다.’
 발치까지 온 골키퍼를 확인하고 볼을 위로 띄웠다.
 로빙슛!
 슛 자체만 보면 느려서 막기 쉬울 듯싶지만, 이처럼 골키퍼가 앞으로 나와 있는 경우엔 20m앞 무회전 킥만큼 상대하기 어렵다.
 예상대로였다.
 무게중심이 완전히 밑으로 쏠린 골키퍼는 볼에 손을 대지도 못했다.
 아무런 방해도 받지 않고 유유히 골문까지 들어가는 볼.
 “와아아아아!”
 “최민규! 최민규!”
 관중석이 크게 들썩였다. 아직 골망이 울리지 않았는데, 그들은 이미 축제를 열었다.
 벤치에서도 함성이 쏟아졌다. 만세를 부르며 자리에서 일어나는 이들도 있었다.
 눈을 두어 번 감았다 떴을 때, 비로소 볼이 골대 안으로 들어갔다.
 로빙슛은 역시 느렸다. 물론 사실 아무리 오래 걸려봤자 찰나이긴 하지만.
 최민규는 앞으로 고꾸라졌다. 동료들이 쫓아와 덮쳐버린 탓이었다. 멋들어지게 세레모니를 하고 싶은데 몸을 일으키기가 쉽지 않았다.
 
 ●K리그 데뷔골로 인해 경험치가 소량 상승합니다!
 ●역전골로 인해 경험치가 소량 상승합니다!
 ●역전골로 인해 명성이 0.7 상승합니다!
 
 갖가지 알림음이 복잡하게 떠올랐다.
 최민규는 경험치가 올랐다는 것만 확인하고 창을 닫았다. 레벨 업이 아닌 이상 당장은 쓸모가 없었다.
 
 - 골! 골! 골입니다! 최민규 선수가 데뷔골을 터뜨렸습니다!
 - 이거 아주 놀라운 데요! 수비수 세 명을 제쳤어요!
 - 마지막에 로빙슛도 기가 막혔습니다!
 - 판단과 예측이 정말 대단했습니다!
 
 최민규는 간신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동료들은 여운이 사라지지 않았는지 아직도 머리를 두드리고 있었다.
 순간, 현기증이 날 뻔 했다.
 ‘첫 골!’
 심장이 폭풍을 만난 것처럼 크게 요동친다. 안마기에 들어가지도 않았는데 양 손이 덜덜 떨린다.
 최민규는 벤치 쪽으로 달려갔다. 오늘 경기에 출전할 수 있게 해준 이태양 감독에게 가장 먼저 고마움의 인사를 건네고 싶었다.
 양 팔 벌려 환영해주는 이태양 감독!
 얼굴에 보름달만큼이나 환한 미소가 걸려 있었다.
 하지만 다소 오판이 있었다. 벤치에 있던 선수들을 예상하지 못한 것. 그들은 불 만난 나방처럼 무자비하게 달려들었다.
 다시 깔리고 만 최민규.
 데뷔골 세레모니가 허무하게 날아가고 말았다.
 ‘허무할리가.’
 당사자는 매우 기분이 좋아 보인다. 세레모니 쯤이야 안 해도 상관없다. 골을 넣었다는 그 자체가 중요했다.
 이후 다시 경기가 재개됐다.
 시간은 후반 43분.
 전남FC 선수들의 눈이 이글거렸다. 어떻게든 동점골을 만들겠단 기색이 역력했다.
 허나 서울FC가 추가골을 하나 더 터뜨리면 터뜨렸지 골을 내줄 팀은 절대 아니었다.
 
 - 경기가 거의 끝나가고 있죠.
 - 전남FC 많이 아쉬울 겁니다.
 - 저도 전혀 예상하지 못했습니다.
 - 저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설마 거기서 그런 플레이를 할 줄은……. 이거 K리그에서 대형 중고신인이 나오는 거 아닌가 모르겠습니다.
 - 더 지켜봐야 알겠지만 오늘 경기만 보면 저도 그렇게 느껴집니다.
 
 추가시간은 4분이 주어졌다. 중간 중간 파울로 인해 시간이 지체됐던 게 이런 식으로 작용했다.
 매우 긴 시간.
 당장 전반전만 생각해도 서울FC가 추가 시간에 동점골을 터뜨리지 않았던가?
 그때가 2분이었던 걸 감안하면 4분은 산술적으로 재역전골까지도 노릴 수 있는 시간이었다.
 
 - 서울FC, 매우 치밀하게 상대를 마크합니다.
 - 자신들이 전반전 이 시간에 골을 넣었기 때문에 알고 있거든요. 살짝만 방심해도 동점골이 들어갈 수 있어요.
 - 전남FC는 어떻게든 골을 넣고자 마지막 스퍼트를 냅니다.
 
 전남FC가 재차 공격을 가하려는데 무언의 소리가 필드를 잠재웠다.
 
 삑- 삑- 삐이익-
 
 주심의 휘슬.
 장내가 크게 진동했다. 서포터즈들이 입이 찢어져라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귀가 먹먹할 정도로 강렬한 외침!
 전혀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오히려 가슴이 벅차올랐다. 눈물이 흘러내릴 것만 같았다. 살아생전 이토록 짜릿한 경험을 한 적이 있었던가.
 그때였다.
 최민규의 귓전에 너무나도 익숙한 세 글자가 또렷하게 박혔다.
 “최민규! 최민규! 최민규!”
 셀 수 없을 만큼의 사람들이 한 목소리로 불러준다.
 5년 동안 잠들어있었던 이름 석 자.
 이게 과연 현실일까 싶어 저도 모르게 볼을 꼬집는 최민규였다.
 아프다. 결코 꿈이 아니다.
 최민규는 관중들의 박수세례를 받으며 경기장에서 퇴장했다. 손을 흔들어주자 더 큰 함성이 쏟아졌다. 너무 기분이 좋으면 말로 형용할 수 없다는 걸 지금 이 순간 뼈저리게 느꼈다.
 라커룸으로 돌아가는 길.
 눈을 뜨기 어려울 만큼의 플래시가 터진다.
 “아주 멋진 골이었습니다! 계획된 플레이였나요?”
 “왜 자신이 선발로 출전하지 못했다고 생각하십니까?”
 “오늘 경기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진즉에 1부로 올라오지 못한 이유가 있습니까?”
 그야말로 과부하. 머리로 들어오는 것에는 한계가 있는 법인데, 기자들은 앞 다투어 질문을 퍼부었다.
 최민규는 뒷머리를 긁적이며 일일이 대답했다. 질문이 많아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모든 대답을 끝내고 다시 움직이려는데, 뜻밖의 소리가 들렸다.
 “최민규 선수! 오늘 MOM 축하드립니다!”
 절로 벌어지는 입. 들썩이는 어깨.
 그리고, 다시 질문이 쏟아진다.
 “MOM가 되신 것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MOM를 예상하셨습니까?”
 “서태준 선수를 밀어내고 MOM에 뽑혔는데, 이 점에 대해선 어떻게 보십니까?”
 이러다간 끝이 없었다. 나가려 할수록 붙잡는 게 느껴졌다.
 최민규는 대답하는 척 하다가 자리를 빠져나왔다.
 놓칠 새라 기자들이 카메라를 들고 쫓아왔다. 저러다 넘어지진 않을까.
 “걱정 말고 가자.”
 어느 세 나타난 이태양 감독이 어깨를 툭 치며 턱 끝으로 라커룸을 가리켰다. 그냥 들어가잔다.
 최민규는 고개를 끄덕이며 걱정 없이 몸을 옮겼다.
 
 # 뜻밖의 성장
 
 <대형 중고신인의 탄생? 서울FC의 최민규!>
 
 기사는 길었다. 최민규가 서태준과 교체된 시점부터 벌어진 일을 모두 적어놓았다. 플레이 하나하나를 모두 써놓을 정도로 자세했다. 겨우 10분만 뛰었던 것을 생각해 대단하다고 할 수 있겠다.
 ‘쓰느라 고생했겠군.’
 최민규는 턱을 괸 채로 기사를 읽고 있었다. 부천FC에서는 멀티 골을 터뜨려도 기사는커녕 플래시조차 터지지 않았는데, 오늘은 골을 넣고 그 두 가지를 모두 이뤘다.
 ‘뿌듯하다.’
 절로 웃음이 났다. 1부 리그에 올라오자마자 데뷔 골을 터뜨리고, 또 이만큼의 관심을 받는다는 게 그저 기뻤다.
 스크롤을 내리니 칭찬 댓글이 마구 달려있었다.
 그 동안 2부 리그에서 고생했다는 글, 멋졌다는 글, 대단했다는 글 등등 하나도 빠짐없이 모두 호평 일색이었다.
 최민규는 이럴수록 마음을 다 잡았다.
 ‘순간의 행복에 취하지 말자.’
 매우 좋은 일임은 분명하다. 1부 리그 데뷔 무대에서 역전골을 터뜨렸으니까. 해설자들도 극찬을 아끼지 않을 정도로 멋진 플레이였다.
 하지만 자칫 잘못하면 자만에 빠진다. 무의식적으로 1부 리그도 별 거 없구나, 하는 생각을 하는 것이다.
 ‘더 노력해야 한다.’
 역전골 외의 상황에선 별 다른 찬스를 만들지 못했다. 패스하던 공이 차단되는 것은 물론, 드리블 중에 뺏기는 경우도 잦았다. 플레이 타임이 길었다면 안 좋은 상황이 더 많았을 터였다.
 물론 이태양 감독이나 코치진 외에 별 다른 지적은 없었다. 중요한 골을 넣었으니까. 승부에 쐐기를 박은 역전골이 지적보다 먼저였다.
 ‘다음 경기가 언제더라.’
 검색창에 서울FC를 검색했다. 구단 공식 사이트, 감독과 선수정보, 일정 및 결과 등등의 목록이 좌르르 떠올랐다. 그는 그 중에서 일정 란을 눌렀다.
 ‘8일 후군.’
 상대는 인천FC.
 최근 3연승으로 리그에 신바람을 몰고 다녔다.
 키 플레이어는 장우성이란 선수로 공격의 물꼬를 트며 엄청난 활약 중이었다.
 주요 포메이션은 4-2-3-1을 구사하는데, 이 대형에서 중요한 수비와 미드필더진이 그저 그렇다는 평이 많았다. 하지만 최근 분위기를 보면 뜬소문인 듯싶었다.
 ‘아!’
 인천FC에 대한 글을 읽던 최민규는 검색창 하단에 덩그러니 떠올라있는 무언가를 그제야 확인했다.
 2012 SG은행 FA컵!
 프로와 아마추어를 막론하고 축구협회에 등록되어 있는 모든 팀이 토너먼트 형식으로 국내 최고를 가린다. 오래 전, 잉글랜드를 시작으로 세계 각국에서 전파됐는데, 2부 리그나 아마추어 팀들이 실력을 과시할 수 있는 유일한 기회였다.
 ‘우리는 8강까지 진출해있는 상태고.’
 서울FC는 1~4라운드까지의 경쟁 팀을 모두 물리치고, 5라운드, 8강에 올랐다.
 상대팀은 부산시청!
 아마추어로 이뤄진 팀임에도 불구하고 프로팀을 꺾는 등 기염을 토하고 있었다.
 최민규는 FA컵 일정을 확인했다.
 ‘나흘 후잖아?’
 일정이 상당히 빡빡하다. 나흘 후에 FA컵을 뛰고, 다시 또 나흘 후엔 리그 일정을 소화해야 한다. 피파 규정 상 48시간만 지나면 다음 경기를 할 수 있기에 문제될 건 없지만 체력적으로 많이 달릴 듯싶었다.
 최민규는 이 점을 그리 문제 삼지 않았다.
 ‘교체일 가능성이 크다.’
 서울FC에서 최민규의 입지는 매우 좁다. 입단한 지 열흘도 되지 않았고 경력이나 커리어 면에서도 볼 게 없다.
 오늘 경기에서 활약? 조금 플러스가 될 진 몰라도 선발로 뛰긴 무리다.
 ‘두 게임 모두 원정 경기군.’
 엎친 데 덮친 격으로 FA컵과 리그가 모두 원정이다. 부산과 인천을 오가며 경기를 해야 한다. 사이에 사흘의 휴식기가 있긴 하지만, 체력적인 면을 고려하지 않을 순 없다.
 최민규는 마우스를 몇 번 더 클릭하다가 컴퓨터를 컸다. 경기 종료 후 회식까지 다녀온 터라 조금 피곤했다.
 
 ***
 
 이튿날.
 최민규는 어김없이 조기 기상했다. 아침 새가 지저귀는 소리를 들으며 햇살을 맞이하니 잠이 확 달아났다.
 대충 옷을 갈아입고 밖으로 나갔다. 한 여름임에도 불구하고 시간이 일러서 공기가 선선했다.
 기지개를 한 번 편 후, 가볍게 스트레칭 했다. 어깨를 풀어주며 팔목과 발목을 돌렸다. 자면서 굳어있었던 몸이 조금씩 생기를 찾았다.
 이후로 훈련장을 가볍게 돌았다. 이마에 땀이 송골송골 맺힐 때쯤, 선수들이 하나 둘 나타났다.
 저마다 간단히 몸을 풀며 아침을 시작했다.
 “민규야.”
 박승민 수석코치였다.
 최민규는 얼른 다가갔다.
 “네, 코치님.”
 “나흘 후에 FA컵 있는 거 알지?”
 “그럼요.”
 “너 선발 출전 해보자.”
 “네?”
 최민규는 좋으면서도 고개를 갸웃거리지 않을 수 없었다.
 전혀 예상치 못했던 일.
 서울FC의 대단한 공격진을 두고 자신을 선발로 쓴다는 게 쉽사리 이해가 가지 않았다.
 혹시 선수들이 다치기라도 한 것일까?
 훈련장을 바라보지만 다들 멀쩡하다 못해 쌩쌩했다.
 “제가요?”
 “부산시청이 8강에 진출하긴 했지만 전력은 확실히 리그 구단들에 비해 약하다. 네가 나가도 충분히 잘 싸울 수 있을 거다. 물론 너 자체로도 자격이 충분하다. 아직 서툰 부분이 많고 실수가 잦긴 해도 어제 보여준 모습은 확실히 1부리거답다.”
 “감사합니다, 코치님.”
 “감사는 감독님께 드려라. 나는 전달하는 입장이니까. 그리고 선발이라고 풀타임을 소화한다고는 생각하지 마라. 네가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조기 교체될 수도 있다.”
 “예.”
 최민규는 너무 기쁜 나머지 걱정이 됐다. 일이 술술 잘 풀리니 뭔가 큰 시련이 오는 게 아닐지 싶었다.
 ‘그럴 리가.’
 박승민 코치가 이유까지 말해주지 않았는가. 부산시청이 약팀이고 어제 경기에서 보여준 모습으로 인해 정해진 결정이라고.
 기분 좋게 받아들일 기회였다.
 ‘아자, 아자!’
 아침을 먹지 않았는데 이상하리만치 기운이 났다. 1부 프로 경기의 선발 출전은 그만큼 좋은 일이었다.
 식사 후, 다시 반복되는 훈련.
 어제 흘리지 못했던 땀까지 모조리 흘리기 위해 최민규는 쉴 세 없이 움직였다.
 코치와 동료들도 이 모습에 완벽히 적응해서 오히려 쉬고 있으면 더 안하냐고 묻곤 했다.
 ‘나흘 후까지 레벨 업이다.’
 최민규는 목표를 앞당겼다. 22라운드가 아니라 나흘 후 FA컵 경기 전까지 7레벨을 찍기로. 물론 말뿐인 다짐이 되지 않기 위해 부단한 필요하겠지.
 현재 경험치는 77퍼센트.
 밤낮 안 가리고 뛰어다녀도 올릴 수 있을지 의문이다. 레벨이 높아지며 요구하는 경험치가 늘어난 까닭이다.
 최민규는 개의치 않았다.
 ‘취침은 11시. 기상은 6시. 이 정도면 충분하다.’
 규정 상 11시까지만 자면 되기 때문에 다소 늦은 취침 시간도 문제가 되지 않는다. 기상 시간 역시 말할 것도 없다.
 식사와 휴식 시간을 제외해도 최민규가 훈련할 수 있는 시간은 무려 15시간!
 그 정도면 가만히 누워만 있는 것도 힘들다. 허리가 뭉치고 어깨가 뻐근해져 버틸 수가 없다.
 ‘힘내자.’
 최민규는 자기 주문을 걸면서 굳세게 의지를 다졌다.
 
 ***
 
 사흘 후.
 최민규는 한 가지를 깜빡했다. 원정 경기라 하루 전날 출발해야 한다는 것을.
 ‘아차.’
 계획이 완전히 꼬이고 말았다.
 ‘7퍼센트.’
 오늘 딱 하루만 더 훈련했으면 충분히 레벨 업 할 수 있었다. 찍을 능력치도 미리 정해뒀던 참이라 더욱 더 아쉬웠다.
 ‘쩝.’
 어쩔 수 없었다. 원정 경기를 어찌 당일 날 출발하랴.
 최민규는 달리는 버스 안에서라도 뭐든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선배님.”
 최민규의 옆자리엔 권진수가 앉아있었다.
 “어.”
 “버스 안에서 할 수 있는 운동이 뭐 있을까요?”
 “미친놈.”
 권진수의 말에 최민규는 헤헤 웃으며 재차 물었다.
 “몸이 심심해서요.”
 “운동 말고 생각해.”
 “네?”
 “머릿속에 필드를 그리고 상상의 나래를 펼쳐봐. 어떤 상황을 만들어서 네가 거기서 어떤 식으로 행동해야 할지 떠올리는 거야. 말도 안 되는 걸 생각해도 좋아. 필드는 선수가 경기 도중 급한 실례를 할 수도 곳이니까.”
 권진수는 말을 마치고 눈을 감았다. 부산까지의 거리를 생각해 잠을 자는 것이리라.
 최민규는 훈련에 대한 미련을 접었다. 하늘같은 선배가 자고 있는데 무턱대고 몸을 움직였다간 화를 면치 못할 터였다.
 대신 권진수가 알려준 상상훈련을 해보기로 했다.
 ‘으음.’
 조용히 눈을 감고 머릿속에 푸른 잔디밭을 그린다.
 바람이 솔솔 불고, 태양은 적당히 빛을 비춘다.
 곧 스물두명의 선수가 그라운드에 모습을 드러낸다.
 하나같이 열의에 젖은 얼굴들!
 그 속엔 최민규도 있었다.
 주심이 휘슬을 분다. 선수들이 약속한 듯 동시에 필드를 누빈다. 팀워크가 중요한 만큼 당장 할 게 없다고 뛰지 않으면 안 된다.
 여러 상황이 벌어진다. 파울, 역습, 크로스, 쓰루패스 등등 다양한 공격플레이가 필드를 뜨겁게 달군다.
 최민규는 자신에게 일어날 법한 상황을 모두 그려보았다.
 돌파 도중 수비수의 태클!
 드리블 도중 빈틈을 파고든 동료에게 패스!
 상황에 대한 해답은 쉬운 것도 있고 어려운 것도 있었다.
 후자는 정말 고민이 많이 됐다. 어떤 식으로 플레이 하는 게 가장 현명한 판단인지 쉽사리 판단이 안 섰다.
 일단 무작정 돌진하고 보는 정공법?
 나쁘진 않지만 매번 그럴 순 없는 법이었다.
 하지만 시간이 보약이라 했던가.
 점차 답이 보였다. 어려운 상황들이 점차 답을 드러냈다.
 그때.
 
 ●정신 수양으로 인해 경험치가 소량 상승합니다.
 ●좋은 깨달음으로 인해 명성이 0.4 상승합니다.
 
 최민규는 뜻밖의 상황에 입을 다물지 못했다.
 경험치가 오르다니? 거기다 명성까지?
 그저 상상의 나래를 펼쳤을 뿐인데 그게 육성으로 이어질 줄이야.
 혹시 몰라 상태창을 확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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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름 : 최민규
 레벨 : 6(95.5%)
 소속 : 서울 FC
 신장 : 183cm
 체중 : 75kg
 포지션 : FW(공격수)
 슈팅 : 51
 패스 : 51
 결정력 : 56
 공간창출 : 61
 드리블 : 50
 헤딩 : 50
 크로스 : 50
 테크닉 : 51
 체력 : 50
 민첩성 : 49
 몸싸움 : 50
 리더십 : 51
 판단력 : 55
 예측력 : 51
 태클 : 40
 위치선정 : 40
 대인방어 : 40
 사용 가능한 포인트 :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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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올랐다.’
 퍼센테이지가 오르며 경험치 바가 좀 더 진해졌다. 명성도 이전 수치와 비교해 정확히 0.4가 올라있었다.
 순간적으로 옆 좌석에 있는 권진수를 껴안을 뻔 했다. 모두가 그의 공이었다.
 자는 사람, 그것도 선배인 사람을 건드렸다간 욕을 들어먹어도 시원찮을 터, 최민규는 간신히 욕구를 눌렀다.
 그나저나 정말 좋은 걸 발견했다.
 꼭 몸을 쓰지 않아도 경험치를 올릴 수 있다는 사실!
 이제부턴 지나치게 훈련 시간을 늘릴 필요가 없으리라.
 ‘휴식 때도 그냥 쉬어도 되겠군.’
 다시 눈을 감았다.
 버스가 바퀴를 멈추려면 아직 한참. 조금이라도 더 정신 수양을 하고 싶었다.
 
 # 90분
 
 부산 아시아드 주경기장!
 2002년 한일 월드컵 축구대회와 제 14회 부산 아시아 경기대회가 열렸던 경기장이다.
 오늘은 SG은행 FA컵 8강 경기를 위해 문이 열렸다.
 선수들이 속속 도착하고 관중들도 조금씩 자리를 채우기 시작했다.
 ‘많지 않군.’
 최민규는 경기장을 쭉 훑어보았다.
 세월의 흔적이 곳곳에서 보였다. 하지만 오래됐을 뿐, 낡진 않았다.
 관중석엔 빈 공간이 많았다. 챌린지 리그 경기장을 보는 듯했다. 기대되는 매치가 아니고 결승전도 아닌 이상 관심이 많을 리 없었다.
 생각해보면 큰 문제였다. K리그가 발전되려면 이런 부분이 개선되어야 하는데, 나아지기는커녕 점점 더 퇴보하고 있었다.
 ‘어쩔 수 없지.’
 보기 싫어하거나, 안 봐도 상관없다는 사람을 굳이 끌어다가 앉힐 수는 없는 법이다. 축구 경기엔 강제성이 없기 때문이다.
 다만 관심은 없으면서 발전을 바라는 사람은 욕을 먹어야 마땅하다. 뿌리도 아껴주지 않으면 꽃을 피우지 못하니까.
 그래도 활기는 넘친다. 부산시청은 아까부터 도착해서 가볍게 볼을 차고 있었고, 서울FC도 지금 막 자리해 몸을 풀고 있었다.
 최민규는 이상하리만치 두근거리는 가슴을 부여잡았다.
 ‘흥분하지마라, 이놈아.’
 서태준이 질겅질겅 껌을 씹으며 다가왔다.
 “뒷돈 드렸냐?”
 “뭔 소리야?”
 “어떻게 선발을 따냈대?”
 대관절 답이 없는 놈이었다. 시비를 걸어야만 삶을 이어갈 수 있는 고질병에 걸렸는지, 눈만 마주쳤다하면 이런 식으로 나왔다.
 최민규는 침착했다.
 “너는 그럼 벌써 한 몇 억 쏟아 부었겠다?”
 “뭐, 뭐라고?”
 “수고해라.”
 여유롭게 자리를 뜨는 최민규. 몸을 다 풀었으니 이젠 선발 멤버들과 필드에서 상태를 점검할 차례였다.
 연습할 건 간단했다. 측면 크로스나 하프라인에서의 패스, 그리고 헤딩 볼을 따내는 게 바로 그것이었다. 이밖에도 돌파나 수비 같은 것들도 신경 썼다.
 ‘못하는 팀이 아니다.’
 박승민 수석코치는 부산시청을 약팀이라고 설명했다. 8강에 올라왔지만 여타 1부 구단들과 비교해 전력이 현저히 떨어지기 때문이었다.
 최민규도 여기엔 동의했다. 틀림없는 사실이다. 하지만 방심하면 안 된다. 전력은 약해도 저력이 있다. 괜히 8강까지 올라왔겠는가.
 그 사이, 경기가 시작할 기미를 보였다.
 심판들이 나타나고, 선수들은 하프라인을 갈라섰다.
 저마다 얼굴에 굳은 의지가 있었다. 절대 지지 않겠단 기색이 역력히 떠올라 있었다.
 최민규도 마찬가지.
 후반에 교체되지 않겠다는 일념으로 두 다리를 불사를 생각이었다.
 악수를 나누고 드디어 경기가 시작되었다.
 선축은 서울FC부터였다.
 
 - 자, 경기 시작했습니다. 안종환 해설께선 오늘 경기 어떻게 보십니까?
 - 전력만 놓고 보면 서울FC가 우세합니다. 스타플레이어도 많고 최근 전남FC와의 경기에서 좋은 모습을 보여줬습니다. 하지만 많이 쉬지 못했습니다. 부산시청의 저력도 무섭고요. 쉽사리 예측이 힘듭니다.
 - 네. 오늘 양 팀 포메이션은 어떻습니까?
 - 서울FC는 4-2-3-1포메이션으로 최후방엔 포백을, 중원엔 정혁, 박강현, 성준한 선수를 놓음으로써 허리를 강화하며 공격적으로 나설 듯합니다. 원톱 자리엔 최민규 선수가 있는데, 최근 아주 난리가 났습니다.
 - 전남FC와의 경기에서 역전골을 터뜨렸죠?
 - 네. 1면에 도배가 될 정도로 활약이 컸습니다.
 - 하지만 신인이라면 신인인데 선발이 괜찮다고 보십니까?
 - 챌린지 리그에서 많이 뛰었던 선수입니다. 경험이나, 체력적인 면에서 부족함이 없습니다.
 - 그렇군요. 그럼 부산시청은 어떻습니까?
 
 부산시청은 수비지향적인 팀이었다. 선취골을 뽑아내 경기를 이끌어가는 것보다 들어오는 공격부터 막는 걸 선호했다.
 막다보면 기회가 오는 법. 찰나의 순간만을 기다리는 사자와 같았다.
 덕분에 경기는 서울FC의 주도하에 흐르고 있었다.
 하지만 최민규는 마음을 편하게 먹지 않았다.
 ‘조심해야한다.’
 이런 방식으로 경기를 끌고 나가는 팀을 겪어본 적이 있었다.
 수비축구의 강자, 전주FC!
 지금의 부산시청처럼 막기만 하다가 한 순간 찬스를 만들어 득점까지 연결, 쏠쏠한 승리를 챙기곤 했다. 호되게 당한 기억이 많았다.
 전주FC는 2부 구단이니 지금 상황과 비교하는 건 문제가 있지만, 특징이 비슷한 것 맞았다.
 ‘실수만 하지 않으면 된다.’
 축구에서 가장 중요한 것 중 하나가 바로 내용이다.
 내용이 앞서면 자연스레 승이 따라온다. 절대적이라곤 할 수 없지만 대개 그렇다.
 현재 서울FC는 점유율, 패스 성공률, 유효 슈팅 등 다방면에서 우위를 점하고 있었다. 이변이 없는 한 이길 공산이 컸다. 경기를 끌고 나가는 만큼 실수만 줄이면 된다.
 그때.
 노련한 미드필더 박강현이 최민규에게 패스했다. 적절하게 자리 잡고 있던 최민규를 본 것이다.
 최민규는 살살 볼을 몰아가며 빈틈을 찾았다.
 하지만 발 하나 델 공간도 없을 만큼 수비진이 견고했다. 섣불리 나섰다간 기회만 헌납할 것 같았다.
 이럴 땐?
 돌리는 게 상책이었다.
 
 - 수비가 견고해서 들어가기가 쉽지 않습니다. 이럴 땐 어떤 방법이 좋죠?
 - 긴 패스로 헤딩경합을 유도하는 게 좋을 듯합니다.
 - 아군이 잡는단 보장이 없는데요?
 - 볼을 따내지 못해도 흔들 수 있다는 점에서 괜찮은 방법입니다.
 
 좌측 윙백 도진우가 슬슬 하프라인을 넘어왔다. 포지션 상 아래쪽에서 수비를 전담해야하지만, 이런 상황에선 공격에 가담하는 게 이득이었다. 멀뚱히 있는 것보다 수비수 하나 끌고 나가면 도움이 되니까.
 볼은 성준한이 가지고 있었다. 센터 포워드를 맡고 있는 그는 좌측코너를 파고드는 도진우에게 롱패스를 보냈다.
 높이 솟은 볼은 정확히 도진우 쪽으로 향했다.
 하지만 같이 움직이던 수비수가 먼저 발을 대서 라인 밖으로 내보냈다.
 다소 아쉬운 공격.
 서울FC는 드로잉으로 여전히 기회가 살아있다는 것에 만족해야했다.
 수비형 미드필더 김종성이 드로잉 라인에 섰다. 포지션도 포지션이지만 던지는 실력이 일품이라 이런 상황에선 항상 그가 나섰다.
 
 삑-
 
 김종성은 일절 고민 없이 볼을 던졌다. 그의 눈이 도진우를 보고 있었다.
 
 - 다시 도진우 선수에게 던집니다.
 - 괜찮은 선택이죠. 뒤로 빼봤자 다시 올라오는 건 마찬가지거든요.
 - 아! 도진우 선수, 안전하게 볼을 받아냅니다.
 - 역시 김종성 선수의 드로잉 실력이 상당하네요.
 
 도진우는 볼을 받자마자 코너 쪽으로 빠르게 쇄도했다.
 목표는 둘.
 코너킥을 만들거나 크로스를 올릴 생각이었다.
 허나 부산시청이 가만 놔둘 리 만무했다.
 수비수들이 도진우를 저지하고자 무섭게 달라 들었다. 한 명은 앞쪽에서, 다른 한 명은 옆쪽에서 진득하게 도진우를 괴롭혔다.
 아슬아슬 넘어질 듯 도진우의 몸이 기울었다. 살짝이라도 삐끗하면 고꾸라질 듯했다. 하지만 볼만큼은 포기 하지 않았다. 몸이 넘어지는 한이 있어도 볼은 지켜야했다.
 그 결과, 상대 터치아웃이 만들어졌다.
 
 - 역시 끈질깁니다. 끝까지 물고 늘어져서 다시 공격 기회를 얻었습니다.
 - 도진우 선수, 저런 플레이 굉장히 능하거든요.
 
 드로잉은 또 김종성이 맡았다. 휘슬이 울리자마자 아까처럼 바로 볼을 던졌다. 이번에도 시선은 도진우를 향하고 있었다. 그런데 볼은 전혀 다른 곳으로 움직였다.
 하프라인과 페널티박스 사이에 적절이 숨어든 최민규!
 수비수들이 밀착해있긴 했지만 김종성의 센스 있는 플레이 덕에 무리 없이 볼을 받을 수 있었다.
 ‘안 밀린다.’
 볼이 떨어지기 무섭게 지척에 있던 수비수들이 먹잇감을 만난 하이에나마냥 달라 들었다. 몸을 밀치는 것은 기본이요, 안 걸리게끔 다리까지 걸었다.
 최민규는 그런 것에 당할 위인이 아니었다. 날마다 체력을 다지고 근력을 키웠는데 한 순간에 무너질 리가 없었다.
 최민규는 수비수를 등진 채 볼을 발밑에 뒀다.
 수비수의 발이 무자비하게 필드를 휘저었다. 다리를 걸더라도 무조건 볼을 뺏겠단 심산이었다.
 두어 번 더 방해동작이 들어오는 찰나, 최민규의 몸이 갑자기 오른쪽으로 틀어졌다.
 순간적으로 중심을 잃은 수비수.
 기회를 놓치지 않고 수비수를 따돌리는 최민규였다.
 번개처럼 필드를 질주했다.
 옆쪽에서 급히 수비수가 나타났다.
 ‘우측.’
 빠르게 전방을 훑은 최민규는 안전하게 볼을 넘겼다.
 우측에서 따라오던 박강현!
 땅볼이었지만 수비수들 사이로 보낸 탓에 패스가 잘 붙었다.
 박강현은 안정적인 터치 후 라인 끝까지 몰고 올라갔다.
 
 - 크로스를 올려야합니다!
 - 페널티박스 쪽에 공격진이 많거든요!
 - 역시 박강현 선수! 수비수의 발이 닿기 전에 볼을 올립니다!
 
 아슬아슬하게 수비수의 발을 벗어나 하늘 높이 솟아오르는 볼. 바람을 타고 쭉 날아간 그것은 공수로 얼룩진 곳까지 도착했다.
 그 사이 이미 아크서클까지 질주해있던 최민규.
 볼이 날아오자 거침없이 점프했다. 장신 수비수들에 비하면 약간 모자란 신장이지만, 위치만 잘 잡으면 헤딩은 어렵지 않았다.
 ‘왔다!’
 눈 깜짝 할 사이에 지나가는 볼을 육안으로 확인하는 건 불가능에 가깝다.
 오로지 느낌!
 최민규는 볼 것도 없이 이마를 들이댔다.
 정중앙에 맞지 않아 볼이 조금 휘어졌다. 하지만 이득이었다. 가운데 맞으면 어느 정도 궤적을 예측할 수 있는데, 빗맞다보니 볼이 전혀 뜬금없는 쪽으로 향했다. 운 좋게도 그 뜬금없는 곳은 골문이었다.
 전반 41분.
 서울FC가 먼저 균형을 깨뜨렸다.
 
 - 최민규 선수! 선제골을 만들어냅니다!
 - 약간 빗맞았거든요! 하지만 노련하게 밀어 넣었습니다!
 - 정말 대단합니다! 2경기 연속 멋진 플레이를 보여줍니다!
 - 또 기사가 쏟아질 듯합니다!
 
 최민규는 허공에 양손을 휘저으며 벤치 쪽으로 달려갔다.
 자신에게 기회를 준 감독과 코치!
 가장 먼저 감사를 드리고 싶었다.
 팔짱을 낀 채로 경기를 주시하고 있던 이태양 감독은 달려오는 최민규를 번쩍 안아들었다.
 “후반도 나가자!”
 이태양 감독의 외침에 최민규는 하마터면 뽀뽀를 할 뻔했다.
 동료들도 달려와 축하세례를 해줬다. 칭찬과 박수보단 머리를 두드리는 게 대부분. 하지만 골을 넣은 후의 고통은 그저 즐겁기만 했다.
 최민규는 박강현에게도 감사를 전했다.
 “고맙습니다, 선배님.”
 “내가 고맙지. 네 덕에 어시스트 얻었다.”
 화기애애하게 세레모니를 끝낸 최민규는 다시 필드에 들어섰다.
 경기 시작 전보다 더 크게 가슴이 울린다.
 풀타임 출전!
 후반전까지 나가라는 이태양 감독의 말이 있었으므로 최민규는 오늘 풀타임을 소화하게 됐다. 리그 데뷔 단 두 경기 만에 이룩한 쾌거였다.
 이후, 부산시청은 2부리그의 전주FC와 똑같은 모습을 보였다. 선취점을 빼앗긴 이상 계속 수비만 할 수는 없었던 것이다.
 포메이션만 유지한 채로 조금씩 당겨지는 포지션.
 하지만 이미 이에 대한 대응책을 연습한 서울FC였다.
 박승민 수석코치의 철저한 분석!
 결국 부산시청은 전반 종료 전까지 아무런 이득을 취하지 못했다.
 
 삑-
 
 15분간의 하프타임.
 선수들은 가열된 몸을 식히기 위해 벤치에 앉거나 라커룸에 들어가는 식의 휴식을 가졌다
 다시 경기가 시작됐을 때, 서울FC 진영에는 조금 변화가 있었다.
 
 - 서울FC가 두 명의 선수를 교체했습니다.
 - 선취점을 뽑았으니 선수들의 체력을 안배하려는 듯합니다.
 - 아. 나흘 후에 또 리그 경기가 있죠?
 - 네. 그래서 주력 선수들은 관리해줄 필요가 있습니다.
 
 이태양 감독은 정혁과 박강현을 빼고 손준영과 강승헌을 투입했다. 전자에 비하면 여러 면에서 능력이 부족하지만, 이미 선취점을 따낸 상태라 무리 없는 선택이었다.
 한 가지 지시사항도 있었다.
 공격에 치중하라는 것.
 한 골을 넣었다고 해서 수비 위주로 전환하는 건 이태양 감독의 스타일이 아니다. 더 도망가서 아예 따라붙지 못하게 만드는 걸 선호했다. 지든 이기든 항상 이런 식이라 공격축구를 좋아하는 팬들에게 인기가 많았다.
 한편, 최민규는 하프타임 때 한 가지를 확인했다.
 
 # 45분
 
 ‘잘하면 후반전에 레벨 업이다.’
 최민규는 이미 45분이 넘게 필드를 활보했음에도 불구하고 초원 위의 들소마냥 여기저기 자취를 남겼다.
 볼이 있으면 공격을 해야 하니 당연히 뛰었고, 볼이 없어도 파고들만한 선수를 마크하며 발을 놀렸다.
 심장에 엔진이라도 장착한 것일까.
 우스갯소리기는 하나 정말 그 말이 무색할 정도로 대단한 움직임을 보였다.
 파울로 인해 잠깐 경기가 멈췄을 때, 성준한이 한 마디 했다.
 “왜 이리 잘 뛰어?”
 “남는 힘 어디에 쓰겠어.”
 최민규가 씨익 웃어보이자 성준한이 알겠다는 듯 미소로 화답했다.
 비단 훈련만 열심히 하는 게 아니라 경기에서도 단연 돋보이는 최민규의 노력.
 상대 선수들마저 혀를 내두른다.
 “동에 번쩍 서에 번쩍 하는군.”
 자기도 모르게 내뱉은 말.
 그럴 것이 볼을 쥐고 있으면 최민규가 나타났고 볼이 없어도 최민규로 인해 위치 선정이 곤란했다.
 물론 하프라인 주변에서만 벌어지는 일이었다.
 
 - 중원에서의 최민규 선수의 움직임이 활발합니다.
 - 체력이 대단하군요.
 - 아직 후반전 초반이라는 걸 감안해도 대단한 활동력입니다.
 
 초반만 그러지 않았다. 10분, 20분, 30분.
 후반 30분이 됐을 때도 최민규는 여전히 왕성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스코어는 여전히 1:0.
 부산시청은 아예 공격적으로 태세 전환했다. 다음 경기를 바라볼 수 없는 토너먼트. 무조건 경기를 따내야하기 때문이었다.
 다급해서일까. 별 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하는 부산시청이었다. 점유율과 유효슈팅이 올라간 점을 제외하면 전반전과 양상이 비슷했다.
 서울FC도 보다 더 적극적으로 나섰다. 이기고 있더라도 수비보단 공격에 치중하라는 이태양 감독의 말을 받들어 필드 여기저기를 쑤셨다.
 전반전에 비해 수비가 약해진 부산시청. 아무래도 포지션을 당긴 터라 빈 공간이 많아질 수밖에 없었다.
 서울FC는 그걸 기회로 삼았다
 
 - 부산시청의 수비가 위태위태합니다.
 - 너무 극단적으로 공격만 하거든요. 한 골을 더 내주고 세 골을 넣겠단 생각이 아니라면 막는 것에도 신경을 써야 합니다.
 - 서울FC는 아주 활발하죠?
 - 네. 점수를 지키기보다 추가골을 터뜨리겠단 마인드여서 그렇습니다.
 
 최민규가 페널티박스 근처에서 위협적인 슈팅을 날렸다.
 성준한의 백패스를 이어받아 지체 없이 날린 슛이었다.
 하지만 아쉽게도 몸 날린 골키퍼의 손에 펀칭되고 말았다.
 최민규는 코너킥을 얻은 것에 만족했다.
 정혁과 교체된 손준영이 키커를 맡았다.
 
 삑-
 
 박스 안쪽으로 볼이 솟아올랐다.
 최민규는 이번에도 높이 점프했다. 전반전에도 이런 식으로 선제골을 따낸 바 있었다.
 하지만 볼은 그가 아닌 수비수의 머리에 닿았다.
 뒤로 쑥 튀어나온 볼이 운 좋게 적 공격수의 발에 맞았다.
 오랜만에 찾아온 부산시청의 역습기회!
 서울FC 수비진이 서둘러 진영으로 복귀하기 시작했다.
 까딱 잘못했다간 골을 허용할 위기였다.
 최민규도 재빨리 볼을 쫓았다.
 
 - 빠른데요!
 - 위험합니다, 서울FC!
 
 최민규는 이런 상황에 대비해 민첩성을 적절하게 찍어놓았다. 어렵지 않게 지척까지 따라붙을 수 있었다.
 태클보다 몸싸움을 선택했다. 전자는 능력치 수치가 낮아서 잘못했다간 카드를 받을 터였다.
 키 183cm의 피지컬 좋은 최민규가 몸으로 밀어붙이자 적 공격수는 당황한 듯 보였다. 제법 덩치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맞서지 못했다. 역습이라 자세가 불안정한 점도 있었고.
 결국 좌측에서 올라오는 동료에게 패스하는 적 공격수.
 최민규는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도진우의 중간에서 기막히게 볼을 차단했다.
 부산시청의 역습 찬스가 허무하게 무너지고 말았다.
 
 - 최민규 선수, 수비에도 일가견이 있는데요?
 - 도진우 선수의 차단도 기가 막혔습니다.
 - 자, 부산시청은 얼른 수비에 집중해야합니다. 공격권이 다시 서울FC에게 넘어왔습니다.
 
 도진우가 한 번에 볼을 올렸다. 부산시청이 완전히 자리를 잡기 전에 휘저어놓겠단 심산이었다.
 성준한!
 가슴으로 안전하게 트래핑하며 떨어지는 볼을 왼발로 접었다.
 옆에서 수비수가 달라붙고 있기 때문이었다.
 “민규!”
 뒤에서 따라 들어오던 최민규에게 백패스, 최민규는 수비가 붙기 전에 강력한 왼발 슈팅을 날렸다.
 ‘후우.’
 아쉽게도 골대를 맞고 튕겨 나왔다. 조금 아까웠다.
 상대 골킥으로 다시 경기가 재개됐다. 이후, 쉴 틈 없이 공방전이 이어졌다.
 
 삑- 삑- 삐이익-
 
 오로지 경기에만 집중한 탓일까. 어느 세 추가시간까지 끝나버렸다.
 주심이 칼 같이 경기를 종료했다.
 부산시청 선수들의 얼굴엔 아쉬움이 역력했다. 이번 경기만 이겼으면 4강이란 대업 달성이었는데, 서울FC를 만나 무산되고 말았다. 그래도 후회는 없는 얼굴이었다. 90분 간 최선을 다해 투지를 불태운 탓이었다.
 반면 4강에 안착한 서울FC는 크게 환호했다. 리그 경기까지 더하면 2연승이라 기쁨이 두 배였다.
 그 중심엔 최민규가 있었다.
 이길 수 있는 절대 조건을 두 경기 연속으로 만족시킨 선수였다.
 이태양 감독을 비롯한 코치진은 그런 최민규를 크게 칭찬했다.
 오늘 플레이에는 군더더기도 별로 없어서 지적사항도 나오지 않았다.
 선배들도 최민규의 어깨를 두드리며 엄지를 치켜들었다.
 최민규는 방긋 웃으며 감사의 뜻을 밝혔다.
 “모두가 잘 뛰어준 덕분입니다.”
 승리의 기분을 만끽한 서울FC는 바로 서울로 올라왔다.
 나흘 후에 있는 22라운드.
 인천에서 하는 원정경기기 때문에 미리 올라가는 게 좋은 선택이었다.
 최민규는 버스 안에서 상태창을 확인했다.
 ‘드리블, 헤딩, 크로스, 체력 민첩성을 찍어주자.’
 비율을 맞춰주기 위해 50과 49인 능력치에 골고루 포인트를 나눴다.
 사용 가능한 포인트가 0이 된 걸 확인한 최민규는 눈을 감았다.
 풀로 경기를 뛴 탓에 졸음이 밀려왔다.
 
 ***
 
 인천문학경기장!
 1994년 7월 착공하여 2001년 12월 2일에 개장한 곳이다. 본래는 전국체육대회를 치르기 위함이었는데, 1996년에 월드컵(2002) 한일 공동개최가 결정되면서 설계를 변경했다.
 오늘은 K리그 클래식 22라운드, 서울FC와 인천FC의 경기를 위해 문을 열었다.
 나른한 시간인 오후 2시.
 뜨거운 태양이 온 몸을 후덥지근하게 만듦에도 불구하고 많은 관중이 경기장을 찾았다. 꽉 채우진 못했지만 선수들만큼의 열정이 보였다.
 중계석에선 해설 준비가 한창이었다.
 
 - 네, 여기는 인천종합경기장의 캐스터 김주성입니다. 오늘 해설엔 안종환 위원 나와 주셨습니다. 안녕하십니까?
 - 안녕하세요, 안종환입니다.
 - 벌써 열기가 뜨겁죠?
 
 경기가 시작되지도 않았는데 관중석에서는 벌써 응원이 시작됐다.
 인천FC 서포터즈들의 일방적인 공세!
 거리가 가까워 서울FC 서포터즈들도 경기장을 많이 찾았지만 홈팬들을 이기긴 무리였다.
 
 - 네. 하위권 탈출을 노리는 인천FC와 플레이오프 진출권을 따내려는 서울FC의 불꽃 튀는 접전이 예상됩니다.
 - 최근 두 팀의 분위기는 어떤가요?
 - 먼저 인천FC의 기세가 무섭습니다. 리그 3연승을 달리며 쾌주하고 있습니다.
 - 서울FC는 어떻죠?
 - 리그와 FA컵을 합쳐 2연승을 달리고 있습니다. 인천FC만큼 분위기가 좋은 상태입니다. 다만 빡빡한 일정으로 인해 체력이 많이 떨어졌을 겁니다. 오늘 경기를 포함, 최근 경기가 모두 원정이라는 점도 영향이 갈 테고요
 - 그렇군요. 그래도 최근 서울FC에 좋은 소식이 있죠?
 - 네. 2부에서 올라온 최민규 선수가 맹활약하고 있습니다. 리그와 FA컵을 오가며 모두 골을 터뜨렸습니다.
 - 오늘도 선발로 출전합니까?
 - 선발 스쿼드에는 빠져 있습니다.
 - 경쟁자가 많죠?
 - 서태준 선수나 성준한 선수 등 걸출한 스타가 너무 많습니다. 아직 주전은 무리인 것 같습니다. 조금 더 실력이 증명되면 곧 바뀌겠지요.
 
 필드에선 선수들이 볼을 굴리고 있었다. 오늘을 위해 연습한 전술들을 마지막으로 점검하는 것이었다.
 최민규는 벤치에서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얼른 더 커서 주전이 되고 싶다.’
 이태양 감독은 오늘 스트라이커 역할에 서태준을 넣었다.
  최민규도 대단한 활약을 했지만 중계석의 말마따나 뛰어난 선수들이 많았다.
 멀뚱히 필드를 바라보는 최민규에게 박승민 수석코치가 다가왔다.
 “민규야.”
 “네.”
 “하프타임 때 교체될 거니까 알고 있어라.”
 하프타임 교체!
 후반전을 풀로 뛸 수 있다. FA컵에서 풀타임 소화했던 걸 생각하면 겨우 절반이지만 최민규는 그저 좋았다. 리그에서도 어느 정도 인정받았다는 걸 의미하니까.
 
 삑삑-
 
 필드 안에 심판들이 들어서고 슬슬 경기가 시작될 기미가 보였다.
 심판들의 노란 상의와 까만 바지가 오늘따라 화사하게 느껴지는 건 기분 탓일까.
 
 - 선수들이 악수를 나누고 있습니다.
 - 관중석도 페어플레이를 다짐해야 할 텐데요.
 - 네. 응원은 좋지만 지나치게 과열되는 건 좋지 않습니다.
 
 못 잡아먹어서 안달이라는 말이 정말 잘 어울리는 관중들이었다.
 서로 신경전을 벌이며 소속팀을 응원하는 것은 기본, 험한 말을 하며 깎아내리기도 했다.
 팀과 선수에 대한 애정이라고 볼 수 있으나 눈살이 찌푸려질 정도라면 자제할 필요가 있었다.
 
 - 네. 선수들 각자의 포지션에 섭니다. 오늘 양 팀 포메이션은 어떤가요?
 - 서울FC는 서태준 선수를 원톱으로 내세워 4-2-3-1 포메이션을, 인천FC도 장우성 선수를 앞세워 4-1-4-1 포메이션을 사용합니다.
 - 양 팀 모두 원톱과 허리 역할이 중요하겠군요.
 - 네. 원톱이 결정력을 높여주면서 중원이 잘 받쳐주지 않으면 힘을 내기가 어려운 전술입니다.
 
 삐익-
 
 주심의 휘슬이 울리며 경기가 시작됐다.
 
 - 경기가 아주 치열하군요.
 
 추가시간까지 더해 총 47분.
 양 팀은 어떻게든 균형을 무너뜨리기 위해 노력했다.
 선취점으로 먼저 우위를 점하고자 기회가 생기면 바로바로 슛을 날렸다. 하지만 승부는 계속 원점이었다. 오히려 다른 곳에서 결판이 나고 있었다.
 인천FC 서포터즈들의 판정승. 그들의 함성소리가 서울FC 서포터즈들을 잠재웠다.
 15분간의 하프타임.
 온 몸에서 흘러내리는 땀과 가슴에서 울리는 거친 숨소리로 범벅된 라커룸.
 이태양 감독이 몇 가지를 지시했다.
 “진우랑 진현이는 무리하지 않는 선에서 자주 오버래핑 해줘라. 역습만 조심하면 그리 문제될 게 없다. 혁이랑 강현이는 볼터치 후 바로 패스한다는 생각보단 좀 더 밀고 나가라. 어정쩡한 진출보다 포지션을 앞당겨서 압박을 주는 게 낫다. 준영이도 미드필더지만 공격을 우선으로 해라. 대신 종성이가 허리 역할을 잘 해줘야겠지?”
 좌우측 윙백 도진우, 이진현과 공격형 미드필더 정혁, 박강현, 그리고 중앙 미드필더 손준영이 차례로 고개를 끄덕였다.
 수비형 미드필더 김종성은 가장 마지막에 알겠다고 대답했다.
 이태양 감독의 시선이 서태준을 향했다.
 “태준인 오늘 전반만 뛰자.”
 “예.”
 대답은 했지만 서태준의 표정은 밝지 않았다. 자신의 교체 대상이 최민규란 걸 알기 때문이었다.
 최민규에게도 한 마디 하는 이태양 감독이었다.
 “막혀도 좋으니까 슈팅 찬스가 오면 망설이지 말고 질러라. 가끔은 어설픈 골 하나보다 위협적인 슈팅이 더 빛을 발할 수도 있다.”
 “알겠습니다.”
 이태양 감독의 전술은 십중팔구가 공격이었다. 이기든 지든 비기든 수비보단 공격을 우선으로 했다. 그래서 포백을 유지하면서도 양쪽에 항상 윙어를 뒀다.
 최민규는 개인적으로 이런 전술을 좋아했다.
 화끈한 플레이!
 할 수 있는 걸 모두 뽐낼 수 잇다는 점에서 매력이 넘친다.
 “자자! 모두 파이팅!”
 멋들어지게 기합까지 외친 서울FC는 후반전을 위해 필드로 나섰다.
 
 # FA컵 4강
 
 - 서울FC가 선수를 교체했죠?
 - 네. 서태준 선수가 들어가고 최민규 선수가 투입됐습니다.
 - 최민규 선수가 몇 경기 만에 입지를 다진 듯합니다.
 - 최근 두 경기에서 좋은 활약을 보여준 게 컸던 것 같습니다.
 - 자, 경기 시작합니다.
 
 삐이익-
 
 서울FC의 선축으로 볼이 움직이기 시작한다.
 최민규는 성준한에게 받은 볼을 일단 뒤로 물렸다.
 ‘덩치가 다들 장난 아니군.’
 인천FC의 미드진과 포백진의 피지컬은 억 소리가 나왔다.
 큰 신장에 다부진 체격!
 움직임이 느리다는 단점이 있지만 볼을 가지고 있을 땐 위협적이었다. 몸싸움으로 볼을 뺏는 게 어려웠다.
 서울FC?
 왜소하진 않았다. 빠른 축구를 위해 호리호리함을 유지할 뿐이지 골격은 좋았다.
 최민규는 하프라인을 넘어 상대 진영으로 조금씩 파고들었다.
 ‘빈틈이 없다.’
 사람이 커서 그런 지 필드가 무척 좁아 보였다.
 
 - 최민규 선수가 과연 물꼬를 틀 수 있을까요?
 - 지켜봐야 알겠지만 움직임은 좋습니다.
 - 반대로 인천FC는 어떻게 나가야 할까요?
 
 부지런히 뛰어다니는 최민규의 모습과 어울리지 않게 경기는 지지부진했다.
 공격을 가려하면 조기 차단되기 일쑤였다. 롱패스나 세트피스를 이용하는 것도 번번이 실패했다.
 그러던 후반 31분.
 정혁이 툭 띄운 로빙 패스가 최민규의 발치에 떨어졌다.
 ‘오케이.’
 최민규는 그대로 필드를 치고 나갔다.
 가장 끝에 수비수 한 명, 그리고 옆에서 붙는 이가 두 명이었다.
 최근 두 경기로 자신감이 높아진 최민규는 측면에서 보내오는 사인도 잊은 채 자신의 드리블만 했다.
 
 툭툭-
 
 교란을 주기 위해 다리를 벌린 상태에서 볼을 두 번 움직였다.
 속은 듯 반대로 움직이는 수비수.
 최민규는 옳지 하며 자리에서 발을 뗐다. 하지만 몸만 움직였을 뿐 볼은 없었다. 제쳤다고 생각한 수비수가 뒤로 발을 뻗어 볼만 빼내갔기 때문이었다.
 다급해진 최민규는 저도 모르게 태클을 걸고 말았다.
 
 - 거친 태클입니다, 최민규 선수!
 - 큰 부상이 될 수 있거든요! 다행히 다치진 않았지만 이런 플레이는 곤란합니다!
 
 삑-
 
 근처에 있던 심판이 앞주머니에 손을 넣으며 파울 자리로 뛰어왔다. 그리곤 말없이 옐로우카드를 꺼내들었다.
 최민규는 항의하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미안했다.
 육두문자를 내뱉으며 일어나는 상대의 낯빛이 어두웠다.
 “누구 병상에 눕힐 일 있어?”
 “죄송합니다.”
 다행히 안면이 있었던 정혁이 잘 말해주는 것으로 상황이 일단락됐다.
 최민규는 면목이 없었다.
 멀리 벤치에서도 굳은 얼굴의 이태양 감독이 보였다.
 ‘뭐하는 거야, 대체?’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지는 최민규.
 후반전 들어서 한 게 아무 것도 없는데 카드 반칙까지 저질렀다.
 최민규는 마음을 다잡고 다시 경기에 임했다. 하지만 이후의 15분도 별 다른 성과를 못 거뒀다.
 지척에 떨어지는 볼조차 놓치는 경우가 많았다. 패스나 세트피스 역시 끊기거나 막히는 게 다반사였다.
 한 가지 다행이라면 골을 먹지 않았다는 것.
 
 삑- 삑- 삐이익-
 
 - 네. K리그 클래식 22라운드 서울FC VS 인천FC, 인천FC VS 서울FC의 경기는 무승부로 종료되었습니다.
 - 양 팀 모두 아쉬운 경기죠.
 - 어떻게 보셨습니까?
 - 서울FC는 오늘 특유의 공격 플레이를 전혀 보여주지 못했습니다. 패스나 세트피스는 물론, 상대 진영 중간에서 계속 맥이 끊겼습니다. 그나마 측면에서 빛을 발하긴 했지만 협동이 안 됐습니다.
 - 상대 진영 중간에서의 문제라면 최민규 선수를 말씀하시는 건가요?
 - 네, 그렇습니다.
 - 인천FC는 어땠죠?
 
 이태양 감독은 라커룸에 모인 선수들에게 박수갈채를 보내며 입을 열었다.
 “승점은 땄으니 기죽을 것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수들의 얼굴은 쉽사리 펴지지 않았다.
 벌써 중반을 넘어선 2012시즌.
 연승해도 플레이오프에 진출할지 의문인데, 무승부라니. 가능성을 점치기 힘들었다.
 “기회는 많다.”
 계속되는 이태양 감독의 위로에 선수들의 얼굴이 조금씩 생기를 찾았다.
 졌다고 풀죽으면 더 나락으로 떨어지는 법.
 단 한 명, 최민규의 표정은 펴질 기미가 안 보였다.
 ‘마인드가 잘못됐다.’
 최민규는 방금 경기에서 자신의 마음가짐이 매우 잘못됐음을 느꼈다.
 내가 할 수 있다는 자신감!
 좋게 말해서 자신감이지 그건 분명 자만이었다. 두 경기 연속 골맛을 봤다고 스스로를 과대평가했다.
 “민규야.”
 성준한이었다. 엄지를 치켜들며 미소 짓고 있었다.
 “감독님께서도 말씀하셨잖아. 기회는 많다고.”
 “하지만 오늘 너무 이기적이었었어.”
 “뭐든 처음은 실수야. 또 그러면 잘못인 거고.”
 “고맙다.”
 성준한의 말을 들으니 조금 위안이 되는 최민규였다.
 앞으로의 경기에선 절대 자만하지 말자고 다짐, 자리에서 일어섰다.
 복귀를 위한 준비가 한창이었다.
 
 ***
 
 최민규가 1군에 올라온 지도 벌써 두 달이 지났다.
 그 사이 많은 경기가 있었다.
 28라운드까지 리그가 진행됐고 중간엔 FA컵 8강도 있었다.
 21라운드부터의 리그 성적은 3승 2무 3패.
 총 8경기로 승점 11을 얻었다. 좋지도 나쁘지도 않은 무난한 승패였다.
 하지만 순위를 올리지 못했다는 점에서 아쉬운 부분이 크다 할 수 있겠다.
 더욱 더 힘을 내야 했다. 그래야만 K리그의 마지막 꽃, 플레이오프에 진출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성적만 바라보는 것은 잘못이다. 축구를 해서 이기고 것이지, 이기기 위해서 축구를 하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어쩔 수 없지.’
 승·무·패에 연연하지 않고선 선수로 생활하기가 힘들다. 미래, 연봉, 동료 등등 모든 걸 위해서 승리에 신경을 써야만 한다.
 그리고 FA컵.
 내일 드디어 2014 SG은행 FA컵 대망의 4강이 열린다.
 상대는 강원FC.
 이번 시즌 10위인데다가 5연패에 빠져있어서 서울FC의 승리를 점치는 이들이 많으나, 그렇다고 결코 얕볼 수준은 아니었다.
 ‘전 시즌 3위.’
 강원FC는 13시즌에서 잘했다. 초반에는 죽 쑤는 듯싶었는데, 중반을 넘어가며 연승괘도를 달렸다. 그 결과, 8위에서 3위까지 치고 올라오는 기염을 토했다. 이번 시즌에선 그 기세가 발휘되지 못한 게 강원FC로선 매우 아쉬울 것이다.
 ‘내일도 잘하자.’
 최민규는 서울FC에서 어느 정도 자신의 입지를 굳히는데 성공했다.
 주전 선발은 아니지만 꾸준히 경기에 출전한다. 나름 괜찮은 활약을 하면서.
 레벨도 9까지 끌어올렸다. 여러 라운드를 거치며 조금이라도 필드를 달리고, 불철주야 훈련한 결과였다.
 최민규는 길게 기지개를 펴며 숙소로 들어갔다.
 시간이 꽤 늦은데다가 내일 경기가 있으므로 일찍 누울 필요가 있었다.
 
 다음 날.
 서울FC는 아침에 간단히 몸을 푼 후 수원으로 향했다.
 수원월드컵경기장이 가까워지자 진즉부터 도착해있던 서포터즈들이 반겨줬다.
 최민규는 몇몇 사람이 자신의 이름이 들어간 카드를 들고 있는 걸 발견했다. 괜스레 기분이 좋아진다.
 그리 좋은 활약을 보여주지 못했는데, 팬이 있다니. 가슴이 뭉클했다.
 서울FC 선수들은 버스에서 내려 라커룸으로 들어갔다.
 이태양 감독과 권진수는 사전 인터뷰를 위해 잠깐 자리를 비웠다.
 이제는 기자들의 질문공세가 결코 좋은 게 아님을 잘 아는 최민규. 자신이 가지 않아 천만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박승민 수석코치가 입을 열었다. 오늘 펼칠 전술에 대한 내용이었다.
 막바지엔 선수들에게 일일이 격려의 메시지를 보냈다. 리그 분위기가 그리 좋지 않은 지금, 다그침보단 따뜻한 한 마디가 필요했다.
 경기 시간은 금방 다가왔다.
 선발 선수들이 다시 한 번 몸을 확인하며 필드에 나섰다.
 가을 냄새가 물씬 풍김에도 불구하고 태양이 꽤 뜨거웠다. 무슨 부끄러운 일이 있는지, 펄펄 열을 내고 있었다.
 손이 절로 이마 위까지 올라왔다.
 
 - 시월에 어울리지 않는 무더운 날씨입니다.
 - 날씨가 미쳐가는 것 같습니다.
 
 중계석에서도 볼멘소리가 터져 나오고 있었다.
 이태양 감독도 갑자기 더워진 날씨를 느끼며 선수들에게 말했다.
 “다들 체력 관리 잘해라.”
 “예!”
 굳세게 대답하는 선수들. 아이러니하게 얼굴이 일그러져 있었다. 덥긴 정말 더웠다.
 
 - 오늘 양 팀의 선발 스쿼드는 어떻습니까?
 - 서울FC는 리그 주전과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4강인데다가 토너먼트라 가장 좋은 멤버로 꾸렸습니다. 포메이션은 항상 애용하는 4-2-3-1을 사용, 원톱으로 서태준 선수가 나왔습니다.
 - 강원FC는 어떻습니까?
 
 필드는 모든 부분에서 정확히 절반으로 나뉘어 있었다.
 하프라인. 양 팀 선수들. 그리고 팬들.
 선수들이 악수를 끝내고, 포지션을 잡는다. 심판은 그 모습을 확인하고 센터서클에 선축 팀 선수들을 오게 한다.
 오늘 경기의 전반전 선축은 서울FC.
 
 삐익-
 
 성준한이 볼을 참으로써 비로소 경기가 시작된다.
 
 - 날씨의 영향 탓인지 선수들의 움직임이 무겁습니다.
 - 4강이란 부담감도 영향이 될 겁니다.
 - 오늘 경기. 어떻게 보십니까?
 - 양 팀의 전술이 다소 상반됩니다. 서울FC는 무조건 공격인 반면, 강원FC는 수비적으로 나가며 역습 위주의 플레이를 합니다. 언뜻 창과 방패의 대결이지만, 사실 창과 창의 대결이 될 수도 있습니다.
 - 무슨 말씀이시죠?
 - 역습이 자주 이뤄지면 그만한 공격 전술도 없기 때문이죠.
 - 말씀대로라면 경기가 정말 재밌을 것 같습니다.
 
 서울FC는 타 구단과 다르게 포백을 수비용도로만 쓰지 않는다. 좌우측 백을 윙어로 두어 언제든 오버래핑을 할 수 있게 한다. 하지만 역습이나 기습적인 공격에 불안한데, 중계석에서 말하는 부분이 아마 이것일 것이다.
 전반 13분.
 도진우는 자신에게 볼이 오자 지체 없이 하프라인을 넘었다. 자신의 진출로 인한 풀백의 공백은 신경 쓰지 않았다.
 심재영과 용지혁이 어떻게든 막아줄 것이니까.
 중원에서 김동성이 튼튼한 허리 역할도 하고 있어서 도진우의 발걸음은 가벼웠다.
 패스 역할만 끝나면 언제든 돌아갈 준비도 되어 있었고.
 도진우는 오른쪽 측면을 적절히 파고든 박강현에게 툭 볼을 띄워 보냈다.
 
 - 도진우 선수, 박강현 선수에게 롱패스.
 - 날카로운 패스입니다.
 - 헤딩. 역시 박강현 선수가 신체 조건이 좋죠.
 - 이제 선택지는 두 가집니다. 돌파하느냐 크로스를 올리느냐. 아무래도 후자를 택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 페널티박스 근처에 받아줄 선수가 많죠?
 - 네. 서울FC의 공격진이 비교적 장신이기 때문에…… 크로스!
 - 성준한 선수! 헤딩! 아! 아깝습니다!
 - 아쉽게 빗나갑니다!
 
 성준한은 박강현에게 미안하단 제스처를 취했다.
 박강현은 괜찮다는 듯 손바닥을 내저었다.
 결코 헤딩의 문제가 아니었다. 운이 나빠서 골대를 빗겨간 것이었다.
 
 - 노골이지만 서울FC의 세트피스 공격이 참 일품이군요.
 - 골킥 이어집니다.
 상대 골키퍼는 짧게 볼을 찼다. 멀리 차서 한 번에 오르기보단 차근차근 밟겠단 뜻이었다.
 - 경기가 다소 서울FC의 우세인 것 같은데 어떻게 보십니까?
 - 전체적인 내용만 보면 서울FC가 끌고 가는 게 맞습니다. 하지만 점유율이나 기타 슈팅횟수는 별반 차이가 없습니다. 좀 더 지켜볼 문제입니다.
 - 네. 말씀드리는 순간, 강원FC의 공격이 이어집니다!
 - 왼쪽 측면으로 굉장히 잘 파고들었는데요!
 - 돌파나 크로스보단 한 번 접는 게 좋을 것 같은데요!
 - 한 번 접고! 도진우 선수! 잘 마크했지만 공간을 내줍니다!
 - 그대로 돌파 하나요! 박스 안쪽으로!
 
 # 때 아닌 더위
 
 서울FC는 다급했다.
 패스가 잘 찔러 들어오긴 했으나 단번에 뚫고 들어올 줄은 전혀 예상치 못했다.
 센터풀백 용지혁이 급히 공격수를 막아섰다. 한 때 국가대표였던 그는 노련하게 발길을 차단했다.
 하지만 공격수는 한 발 더 앞서고 있었다.
 
 - 넘어졌습니다!
 - 용지혁 선수가 발을 걸었나요?
 - 난처한 상황입니다. 비디오 판독이 필요할 것 같습니다.
 
 심판이 하프라인에서 뛰어오며 급히 휘슬을 불었다.
 
 삑삑-
 
 불었다는 건 반칙이 됐다는 의미.
 문제는 휘슬이 불린 곳이 페널티박스라는 점이었다.
 서울FC 선수들은 크게 항의했다. 고의성이 없고 애당초 용지혁이 반칙을 하지도 않았기 때문이었다.
 심판은 판정을 번복하지 않았다. 강원FC의 공격수 입장에서 보면 충분히 반칙이란다.
 좀처럼 얼굴을 붉히지 않는 이태양 감독이 양팔까지 흔들며 나섰으나 경기는 그대로 진행되었다.
 
 - 서울FC, 많이 아쉬울 것 같습니다.
 - 반면 강원FC는 좋은 찬스를 얻었습니다. 먼저 달아날 수 있는 기회입니다.
 - 키커로 정용진 선수가 나옵니다. 킥력이 좋은 선수죠?
 - 네. 뭐 킥력을 떠나서 페널티킥 자체가 골 성공률이 높을 수밖에 없죠.
 
 정용진이 그어진 선에 정확히 볼을 놓자 심판이 확인 후 휘슬을 불었다.
 
 삐익-
 
 권진수는 양팔과 양다리를 벌리며 최대한 골문을 좁아보이게 만들고자 노력했다.
 정용진의 얼굴에선 긴장감을 찾을 수 없다. 그는 유연하게 볼을 찼다.
 이윽고 두 가지 함성이 경기장에 공존한다.
 하나는 강원FC 서포터즈들의 환호였고 다른 하나는 서울FC 서포터즈들의 탄식이었다.
 누구도 권진수에게 불만을 표하진 않았다. 아니, 불평하는 게 이상한 일이었다. 축구 경기에서 페널티킥이 나왔다는 것은 9할 이상으로 골을 내준다고 봐야하니까.
 이후 서울FC는 불똥이 튈 정도로 압박을 가했다.
 토너먼트라서 지면 경기 끝. 무조건 골을 넣어야 했다.
 애석하게도 심판의 휘슬이 먼저 울렸다.
 
 삐이익-
 
 라커룸에 들어서는 선수들의 얼굴에서 쉴 세 없이 땀이 흘러내린다.
 지고 있는 것도 지고 있는 거지만 날이 너무 더웠다.
 가만히 앉아만 있어도 땀이 줄줄 떨어지는데, 뛰는 사람은 오죽할까.
 코치들이 선수들의 몸을 체크했다.
 “이상 있는 사람 있어?”
 “없습니다.”
 이태양 감독은 안도하면서 전반전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내뱉었다. 당근과 채찍을 오가며 선수들을 지적하기도 하고 칭찬하기도 했다.
 하프타임이라 짧게 말을 끝낸 그는 성준한을 쳐다보았다.
 “준한이. 하프까지만 뛰자.”
 “예.”
 성준한은 부상을 당하지 않았다. 경기 시작할 때의 모습 그대로였다.
 하지만 포지션상 내내 필드를 뛰어다닌 터라 체력 소모가 많았을 것이다. 내색은 안 해도 많이 지쳐있으리라. 살갗이 들러붙을 정도로 끈적끈적한 날씨도 문제가 됐을 테고.
 이태양 감독의 얼굴이 이번엔 최민규를 향한다.
 “민규, 후반에 들어가자.”
 “예. 중앙 포워드로 들어갑니까?”
 “어. 최전방엔 태준이가 있으니 돌파보단 패스해준다는 생각으로 경기에 임해라. 물론 기회가 왔는데도 패스하진 말고.”
 “예.”
 하프 출전은 오랜만이었다.
 지난 22라운드에서 그렇게 출전한 이후로는 매 경기 플레이 타임이 15~20분을 넘지 못했다.
 딱히 기량이 하락한 건 아니지만 여전히 서울FC에 건재한 선수들이 많아서 나온 결과였다.
 오랜만에 찾아온 45분.
 무더운 날씨 따위 아랑곳 않고 질주하리라 다짐하는 최민규였다.
 필드에 들어서자 관중들의 거친 함성이 귓속에 박힌다.
 겨우 뜨거운 태양 정도가 구단을 향한 팬들의 열정을 삭히긴 힘들다.
 선수들은 각자 포지션에 서며 경기시작을 기다린다.
 “설마 너랑 동시에 필드에 설 줄이야.”
 “그러게.”
 “헛발하지 말고 잘 해라.”
 한쪽 입 꼬리를 말아 올리며 말하는 서태준을 보고도 최민규는 별로 신경 쓰지 않았다.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는 것쯤이야 이젠 익숙했다.
 다만 서태준의 말은 몰라도 플레이에는 촉을 기울여야 했다. 감독이 콤비네이션을 요구한데다 포지션 상으로도 협동이 필요한 까닭이었다.
 고로 서태준과 후반전을 어떻게 풀어나가느냐가 후반전의 관건이다.
 
 삐익-
 
 후덥지근한 날씨를 깨뜨리기라도 하듯 심판의 휘슬이 경쾌하게 울린다.
 선축은 강원FC.
 점수를 리드하는 입장이라 그들의 폼은 매우 여유롭다.
 최민규는 하프라인을 살짝 넘어 압박을 가했다. 중원 근처에서 볼이 돈다 싶으면 냅다 달려가 방해공작을 펼쳤다.
 경기는 아무리 잡아당겨도 끊어지지 않을 만큼 팽팽하게 이어졌다.
 0:1이라는 스코어만 빼면 양 팀은 그야말로 치열한 박투를 벌였다.
 ‘덥긴 진짜 덥네.’
 여름에 더운 건 여름이니까 이해하겠는데, 가을에 찜통더위가 오니 괜히 불쾌했다. 입안에 가뭄이 돌 지경이었다.
 동시에 흐트러지는 집중력. 필드 곳곳에서 다소 흐리멍덩한 눈동자가 눈에 띤다.
 그때였다.
 ‘굿 패스!’
 아군의 골킥 상황이라 잠깐 숨을 고르고 있던 최민규.
 권진수가 짧게 끊어 찬 볼이 툭툭 두 번의 패스로 자신에게 연결됐다.
 얼른 하프라인을 넘는 최민규였다.
 상대 진영에 있는 수비수는 다섯. 그 중 최민규의 앞을 막는 이가 둘이었다.
 
 - 최민규 선수, 좋은 볼 터치죠.
 - 최근 이렇다 할 활약을 보여주지 못했습니다. 지금이 그걸 깨뜨릴 좋은 기회입니다.
 - 돌파하나요?
 - 데뷔전에서도 이런 모습 보여줬거든요.
 
 최민규는 중계진의 예상과는 다르게 왼쪽으로 볼을 차며 뛰어갔다.
 빠르게 볼을 재터치하며 다시 툭 앞으로 밀었다.
 미리 오버래핑 해있었던 도진우!
 볼이 아슬아슬하게 수비수를 지나며 도진우의 발에 닿았다.
 최민규는 그 모습을 확인하고 재빨리 박스 안쪽으로 들어갔다. 크로스가 올라올 수 있으니 미리 자리를 잡겠단 생각이었다.
 
 - 기막힌 패스! 도진우 선수가 좌측 코너 쪽으로 올라갑니다!
 - 공격진이 박스에 포진해있는 상태거든요! 크로스만 잘 올려준다면 점수의 균형을 맞출 수도 있습니다!
 - 강원FC는 수비에 잔뜩 신경 써야 되겠고요!
 - 네! 볼을 주더라도 코너나 크로스보단 드로잉을 생각해야 합니다!
 도진우는 뛰어난 발재간으로 몇 초간 볼을 사수했다. 그리고 놀랍게도 그 포위망을 뚫어냈다.
 상대 수비수의 가랑이 사이로 밀어 넣은 볼이 운 좋게 빠져나왔다.
 - 도진우 선수! 치고 나오는데 성공합니다!
 - 얼른 크로스를 날려야 되거든요! 박스 근처에 수비수가 있기 때문에 돌파는 무리에요!
 
 시끌벅적한 중계진의 말대로 도진우는 지체 없이 측면을 가로지르는 크로스를 띄워 보냈다.
 그 순간, 페널티 박스가 혼잡해진다.
 서로의 옷깃을 잡아당기며 어깨를 누른다. 다소 험한 말도 오간다. 그만큼 지금이 중요한 순간이란 뜻이다.
 ‘당할쏘냐.’
 최민규는 밀리지 않고 접전했다. 휘슬이 불리지 않는 선에서 상대를 옭아매며 크로스가 날라 오는 순간을 노렸다.
 이윽고 찰나의 찬스가 왔을 때, 높이 솟아오른다.
 볼을 눈으로 보고 헤딩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
 감각적으로 이마를 들이대서 밀어 넣는 것이 헤딩슛의 정석이다.
 하지만 아무런 감촉도 느껴지지 않는다.
 적절하게 앞으로 나와있던 골키퍼가 미리 볼을 잡아버렸다.
 
 - 잘 잡았군요.
 - 강원FC가 위기 상황을 잘 넘깁니다.
 
 상대의 골킥은 여전히 짧게 이어진다. 찬찬히 올라간다는 전술 상 필드에 놓고 뻥 차는 경우가 거의 없었다.
 최민규는 볼을 따라 이리저리 필드를 활보했다. 본래 사람을 쫒는 게 정석이지만, 중원이라 간격이 넓어 그리 하긴 무리였다.
 ‘여기다.’
 상대 수비수 하나가 옆 동료에게 볼을 찔러주려는 순간, 최민규가 도중에 볼을 가로 챘다.
 이런 플레이는 원래 좀처럼 나오지 않는다. 아주 초보적인 실수니까. 아마 무더운 날씨가 집중력을 흐트러뜨린 것이리라.
 최민규는 쾌재를 부르며 폭풍 드리블을 이어갔다.
 터치부터 하프라인을 넘어있었던 상태. 박스까지 가는 건 그야말로 순식간이었다.
 물론 상대 진영에서 볼을 차단했기에 가능한 일이다.
 수비수들이 급하게 몸을 돌려 따라붙었다. 자칫 잘못했다간 바로 골키퍼와 1:1상황을 내줄 위기였다.
 최민규는 빠르게 전방을 훑었다.
 좌우측에 오버래핑을 오기엔 늦었고, 지척엔 서태준이 있었다.
 ‘개인감정 따윌 경기에 집어넣을 순 없지.’
 
 - 최민규 선수! 계속 달립니다!
 - 절호의 찬스입니다! 방금 전 상황보다도 좋습니다!
 - 서태준 선수에게!
 
 최민규는 수비수가 발을 데기 직전, 서태준에게 볼을 넘겼다.
 침착한 패스라 볼은 무리 없이 서태준의 발에 닿았다.
 놀란 수비수가 뒤로 돌아 거친 태클을 걸었다.
 서태준은 예상했다는 듯 쓱 피하더니 냅다 슈팅을 날렸다.
 
 - 슛! 고오올! 골! 골입니다!
 - 서태준 선수가 동점골을 터뜨립니다!
 - 골키퍼는 진즉 앞으로 나왔어야 했습니다! 급작스런 상황이라 미처 대처하지 못했네요!
 
 관중석에서 큰 함성이 터져 나왔다.
 더위를 날려버리는 시원한 골!
 서태준은 최민규에게 살짝 엄지손가락을 치켜들었다.
 ‘그래, 네 인성도 아주 바닥은 아니구나.’
 
 - 자, 경기는 이제부터 시작입니다.
 - 분위기가 서울FC쪽으로 기울었습니다. 점수는 같지만 막 골을 넣은 상태라 기세가 살아있어요.
 - 동점골도 실책에 의해 나왔죠?
 - 네. 그런 면에서 더더욱 서울FC에게 웃어주는 상황입니다.
 
 중계진의 해설대로 동점골 이후로의 분위기는 서울FC가 가져갔다.
 하지만 그뿐이었다. 더 이상의 추가골이 터지지 않았고, 결국 경기는 연장승부로 이어지게 되었다.
 그때부터는 양 팀의 유·불리를 가릴 것도 없었다.
 치솟았던 서울FC의 기세도 시간에 의해 꺾인 상태였다.
 더구나 풀타임을 소화한 선수가 많아서 체력도 대부분 방전이었다.
 양 팀 감독들은 연장전이 시작하기 전에 교체 카드를 모두 사용했다.
 1순위는 체력적으로 더 이상 경기가 힘든 선수들이었다.
 
 - 결국 연장승부까지 오게 되었습니다.
 - 선수들이 많이 지쳐 보입니다.
 - 이럴 땐 어떻게 해야 하나요?
 - 방법이 없습니다. 경기를 이겨야 하므로 없는 체력이라도 만들어서 뛰어야 합니다. 다만 교체 선수들이 두 배, 세 배로 달려주는 방법이 있습니다. 그러면 시작부터 필드에 있었던 선수들의 심통이 그나마 트입니다.
 - 그렇군요. 자, 이제 연장 경기 시작합니다.
 
 휘슬을 불려는 주심의 얼굴에도 다소 지친 기색이 보인다.
 선수들만큼은 아니지만 계속 필드를 뛰어다닌 탓에 체력 소모가 클 것이다.
 최민규는 하프라인에서 결의를 다졌다.
 ‘내가 더 뛰어줘야 한다.’
 하프출전이었기 때문에 최민규의 체력은 아직 많이 남아있었다. 더운 게 조금 문제긴 하나 못 뛸 정도는 아니었다.
 
 삐긱-
 
 휘슬도 더위를 타는지 먹는 소리를 낸다.
 선축은 서울FC.
 최민규는 서태준에게 가볍게 볼을 넘겼다.
 
 - 연장전. 어떻게 풀어나가야 한다고 보십니까?
 - 연장전에 왔다는 건 그만큼 양 팀이 막상막하라는 얘깁니다. 이 경우, 점유율이나 슈팅횟수도 물론 중요하긴 하지만 찬스가 왔을 때 골문을 가를 수 있는 결정력이 절대적으로 필요합니다.
 
 최민규는 부지런히 뛰어다녔다.
 기회를 만들고자 노력하며 하프라인 아래의 아군 진영까지 틈틈이 내려갔다. 수비 일조였다.
 그러나 경기 상황은 바뀌지 않았다. 22명이 서로 악착같이 하는데 쉽사리 승부가 날 리 만무했다.
 시간은 빠르게 흐른다. 정규시간의 1/2도 채 되지 않는 탓에 금방 전반전이 종료됐다.
 휘슬이 울리고 아주 잠깐의 휴식시간.
 이태양 감독은 일언반구도 하지 않고 선수들이 묵묵히 쉴 수 있는 여건을 만들어줬다. 대여섯 개의 지적받을 만한 상황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절대 입을 열지 않았다.
 배려.
 오히려 후반 시작 전, 선수들의 등을 한 번씩 두드려줬다.
 
 # 변화
 
 - 이제 마지막 플레이 타임입니다.
 - 15분 안에 무조건 승부를 내야 합니다.
 - 승부차기가 있는데요?
 - 지더라도 플레이 타임에서 무너지는 게 낫습니다.
 - 왜죠?
 - 승부차기에서 졌다는 건 누군가 슛을 실패했다는 건데, 그것만큼 쓰라린 일도 없습니다. 팀원, 감독, 코치, 그리고 팬들에게 너무 미안하기도 하고요. 그래서 마지막 불꽃은 이 15분 안에 터지는 게 좋다고 봅니다.
 
 최민규는 강원FC의 선축을 기다리며 웃옷으로 줄줄 흘러내리는 땀을 훔쳤다.
 ‘상대팀은 과반수가 체력방전이다.’
 기본으로 주어지는 교체카드는 3장이다. 강원FC는 그 기회를 후반전에 모두 사용했다.
 연장전에 들어가면서 추가적으로 얻은 1장 역시 전반에 긁었다. 결과적으로 상대 팀에서 6명은 110분 정도를 뛰었단 얘기다.
 무작정 좋은 것만도 아니었다. 서울FC도 마찬가지니까. 골키퍼를 제외한 10명 중, 6명은 정신력으로 필드를 뛰고 있었다.
 ‘나의 이점을 잘 살리자.’
 최민규의 양 다리는 아직까지 튼튼히 필드를 밟고 있었다.
 후반전부터 지금까지 60분.
 정규시간으로 따지면 풀타임도 채 뛰지 않았다. 침을 마르게 하는 더위만 빼면 체력적으론 전혀 문제가 없었다.
 
 툭.
 
 강원FC의 선축이 시작되자마자 최민규는 피 냄새 맡은 상어마냥 필드를 질주했다. 가장 방심하기 좋은 순간을 노리겠단 생각이었다.
 
 - 최민규 선수! 바로 달려듭니다!
 - 강원FC! 급하게 볼을 물립니다!
 
 아쉽게도 최민규가 달려들었을 땐 이미 볼이 떠난 후였다. 아무리 체력과 집중력이 저하됐어도 볼 하나 뒤로 빼는 걸 실수할 리 없었다.
 최민규는 실망하지 않았다. 볼을 빼앗진 못했어도 기세에서 우위를 점했으니까.
 
 - 강원FC, 우측으로 길게 패스를 시도합니다.
 - 미리 헤딩이나 킥으로 끊어줘야 하거든요.
 - 아무리 체력이 없어도 볼을 잡으면 힘이 나죠?
 - 네. 그래서 더더욱 조기에 차단해야합니다.
 
 다행히 오른쪽 윙백 이진현이 발을 뻗어 패스를 차단하는데 성공했다.
 더욱 좋은 일은 볼이 라인 안쪽으로 떨어졌다는 것.
 서울FC는 바로 공격 기회를 맞았다.
 수비를 위해 아군 진영 끝까지 내려왔다가 볼을 잡은 김종성. 지체 없이 앞으로 길게 패스를 보냈다.
 땅볼로 굴러간 패스는 안전하게 손준영까지 닿았다. 그는 빠르게 전방을 훑었다.
 시야에 들어오는 중앙의 최민규!
 패스를 받기 용이하게 수비수를 등지고 약간 앞으로 나와 있었다.
 덕분에 걱정 없이 볼을 넘기는 손준영이었다.
 ‘기회다.’
 최민규는 직감적으로 이 순간이 승부를 결정짓는 찬스라고 느꼈다.
 뜻하지 않게 볼을 빼앗기고 공격 기회까지 줘버린 강원FC.
 아군에게 마크 선수도 붙어있지 않았다. 당황하고 있단 증거였다.
 최민규는 두세 번 볼을 밀며 필드를 올라갔다.
 하프라인과 페널티박스의 중간.
 다양한 공격루트가 나올 수 있는 곳이다. 하지만 지금은 전방 밖에 길이 없다. 미드진과 좌우측 윙어가 수비를 위해 내려가 있기 때문이다.
 ‘서태준.’
 최민규는 발끝으로 볼을 찍어 로빙패스를 보냈다.
 약간 우측으로 빠져있던 서태준이 가슴으로 볼을 받았다. 수비수의 위치를 감안하고 준 패스라 볼터치가 좋게 이뤄졌다.
 동시에 골문으로 쇄도하는 최민규였다.
 제법 능숙한 개인기로 볼을 사수하고 있던 서태준은 최민규를 보며 다시 볼을 넘겼다.
 순식간에 벌어진 연계 플레이.
 최민규는 볼을 받자마자 왼발로 강하게 볼을 찼다. 더 이상 패스할 선수도 공간도 없으니 남은 건 하나였다.
 슈팅!
 짧은 순간 머리를 스치는 생각은 오직 한 가지였다.
 ‘들어가라!’
 결과는 굳이 눈으로 확인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지진이라도 난 것처럼 울리는 경기장. 귓전이 울리는 쩌렁쩌렁한 함성이 터져 나왔다.
 “이얏후!”
 애니메이션에서나 나올 법한 기괴한 소리를 내는 최민규. 시야에 일렁이는 골망이 들어왔다.
 역전골.
 최민규는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동료들을 위해 두세 배 더 뛰어다닌 탓인지 아니면 골을 넣은 탓인지 갑자기 진이 빠졌다.
 
 - 최민규 선수의 역전골입니다!
 - 드디어 승부가 나는 건가요!
 
 씨익.
 환한 미소가 최민규의 얼굴에 떠오른다. 몸에 힘은 빠졌어도 좋은 일을 웃음기 없이 지나칠 순 없다.
 필드에 드러누운 최민규의 곁에 선수들이 몰려들었다. 저마다 햄버거처럼 그를 깔아뭉갰다.
 ‘안 아프다!’
 이 세상에 골보다 더 효력 좋은 약이 있을까. 그 어떤 고통도 치유해주는 놀라운 효과를 가지고 있다.
 이후, 이태양 감독은 수비를 지시했다. 어떤 상황에서도 공격만을 외치던 그가 정말 오랜만에 정반대 전술을 쓴 것이다.
 그럴 수밖에 없는 이유가 있었다.
 진짜 막바지.
 장장 120분간의 혈투가 드디어 끝을 보이는데 구태여 공격을 고집하는 건 잘못된 판단이다.
 얼마나 더 땀을 흘렸을까.
 최민규도 더 이상 힘을 낼 수 없을 만큼 체력을 소진했을 때, 기다리고 기다리던 소리가 필드에 울렸다.
 
 삑- 삑- 삐이익-
 
 2012 SG은행 FA컵 4강은 서울FC의 승리로 끝났다.
 
 ***
 
 복귀 후 숙소.
 ‘쉬자, 쉬어.’
 평소 같았으면 추가 훈련을 이어갔을 최민규. 오늘은 그냥 넘어가갈 생각이었다. 뜨거운 햇빛 아래서 주구장창 필드를 달린 탓에 전신이 뻐근했다.
 과유불급.
 몸에 하루 쯤 휴가를 주는 것도 나쁘진 않겠지.
 최민규는 숙소에 들어가 말끔히 몸을 씻었다. 향긋한 바디워시를 적셨더니 걸어가는 향수가 따로 없었다.
 ‘리그가 6일 후였지?’
 괜찮은 일정이었다. 22라운드 땐 나흘을 텀으로 연달아 경기를 치르기도 했으니 아주 널찍했다.
 자동으로 최민규에게 목적이 생겼다. 29라운드까지 10레벨을 달성해보자는 것.
 그렇게 5일.
 최민규는 다음 날부터 닷새 동안 쉬지 않고 훈련에 임했다.
 목적이 있으면 일단 그것만 바라보는 성격!
 다행히 땀 흘린 게 좋은 성과를 보였다.
 
 ●레벨이 10으로 올랐습니다.
 ●이용자의 포지션에 세밀한 변화를 줄 수 있습니다.
 
 10레벨이 되었다는 알림임을 확인하면서 기다란 미소를 떠올리던 최민규는 돌연 고개를 갸웃거렸다.
 두 번째 말 때문이었다.
 포지션에 세밀한 변화를 주다니?
 쉽사리 이해가 가지 않았다.
 ‘무슨 말이야? 세밀한 변화라니?’
 
 ●밸런스형, 피지컬형, 돌파형, 체력형 중에서 한 가지를 택할 수 있습니다.
 
 ‘으음. 게임으로 따지면 각성 같은 개념인가?’
 
 ●맞습니다.
 
 고개를 끄덕이는 최민규의 귓가에 다시 알림음이 울렸다.
 
 ●변화 퀘스트가 생성되었습니다. 지금 바로 확인하시겠습니까?
 
 RPG게임을 많이 해보진 않았지만 각성해서 나쁠 게 없음을 잘 알고 있는 최민규였다.
 바로 ‘그러겠다.’라고 대답했다.
 익숙하지 않은 창 하나가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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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밸런스형으로의 전직
 피지컬형으로의 전직
 돌파형으로의 전직
 체력형으로의 전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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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단 설명을 보자.’
 최민규는 하나하나 면밀히 들여다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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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밸런스형>
 만능 플레이어. 골문 앞에서 키퍼를 면전에 두고도 침착하게 슈팅을 연결하는 침착성, 어떤 상황에서도 볼을 내 것으로 만드는 정교한 볼 컨트롤, 아무 각도에서 슈팅해도 위협을 가할 수 있는 정확성, 그리고 퍼스트 터치나 기타 감각, 끝으로 다른 전직 분야인 피지컬, 돌파, 체력까지 모두 소유한다. 하지만 모든 면에서 어중간하다는 게 단점이다.
 <피지컬형>
 극강의 신체로 소유하고 있는 볼을 빼앗기지 않을 수 있다. 강한 어깨는 그 어떤 선수도 상대할 수 있다. 문전에서의 헤딩상황이나 교전 중에 볼을 따내는 것도 용이해진다. 하지만 적절하게 힘을 쓰지 않으면 반칙으로 연결될 수 있다는 단점이 있다.
 <돌파형>
 화려한 개인기와 정교하고 섬세한 드리블로 가로막는 수비수를 모두 뚫어낸다. 추가적으로 증가하는 민첩성 역시 빠른 돌파를 위한 수단으로 작용된다. 단점으로는 피지컬이 떨어진다.
 <체력형>
 아무리 많이, 또 오래 뛰어도 떨어지지 않는 체력을 고수한다. 경기 시작 때나 끝날 때나 체력으로 인한 경기력 저하는 없다. 하지만 본인한테 기회가 왔을 때 결정력을 발휘하지 못하는 등의 단점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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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언뜻 보면 밸런스형이 가장 좋아 보인다. 최민규가 현재 추구하고 있는 모습이기도 하다. 하지만 마지막 줄이 마음에 걸린다.
 ‘어중간하다.’
 세상을 살면서 절대 가져서 안 될 것은 어중간한 것이다. 이도저도 아니면 필요한 순간에 힘을 발휘할 수 없다.
 최민규는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잘 싸워왔다.’
 큰 활약은 없었으나 최민규는 밸런스 맞게 능력치를 찍으면서 무난한 플레이를 해왔다. 딱히 욕을 먹은 적이 없으며, 슬럼프 또한 없었다.
 그때.
 문득 둔기로 머리를 맞은 듯 띵한 느낌이 들었다.
 ‘이게 어중간한 거잖아?’
 본인이 알고 있으면서 전혀 인지하지 못하고 있었다.
 가장 어중간한 놈, 최민규.
 이따금 수비수들을 제치고 골을 넣었던 것을 제외하면 보여준 플레이가 뭐있는가?
 킬 패스를 받아 헤딩을 하거나 바로 볼을 차는 것?
 물론 대단한 일이다. 축구가 혼자서 하는 게 아니니 어떤 식으로든 점수를 내면 그걸로 족한 것이다. 하지만 그게 한계란 게 문제다.
 ‘더 큰 무대로 가기 위해선 나만의 메리트가 있어야 한다.’
 동료와 잘 어울려 필드를 달리는 건 어떤 선수라도 할 수 있다. 기량의 차이는 있겠지만 기본적인 조건은 변하지 않는다.
 만약 스카우터가 왔다고 했을 때, 최민규는 뭘 보여줄 수 있을까.
 애매한 체력? 애매한 드리블? 애매한 돌파? 애매한 볼터치?
 최민규는 1부에 올라와서 잘한다는 소리는 들었지만, ‘이걸’ 잘한다는 소리는 단 한 번도 못 들었다.
 ‘깊이 생각해볼 문제다.’
 설명만 읽고 바로 밸런스형을 고르려던 최민규는 일단 퀘스트창을 껐다. 그리고 고민에 빠졌다.
 야간 훈련까지 잠시 접어두며 골똘히 생각했다.
 대단한 선수가 되기 위해 진짜 필요한 게 무엇일까?
 끝없이 머리를 굴렸다.
 해답은 쉽게 나오지 않았다. 어스름했던 달빛이 진득하게 떠오를 때까지 엉덩이를 뗄 수 없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최민규가 강건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내 포지션이 필요로 하는 것.’
 최민규는 네 가지 중에서 공격수에게 가장 중요한 것을 선택했다.
 돌파.
 상대 수비수를 뚫고 적진에 들어가 슈팅을 날리는 그 능력.
 공격수가 해야 할 제일의 목적이 무엇인가?
 골이다. 골을 넣기 위해 존재하는 포지션이며, 그렇기에 골 결정력이라는 말도 있는 것이다.
 ‘돌파로 가자.’
 민규는 퀘스트창을 열고 단 1초의 고민도 없이 돌파형을 선택했다. 머리가 터질 정도로 고심한 끝에 결정한 것이기에 망설임이 있을 수 없었다. 그런 만큼 절대로 후회도 하지 않을 것이고.
 
 ●정말 결정하시겠습니까?
 
 알림음이 다시 한 번 물어본다는 건 그만큼 중요하단 얘기다. 능력치를 찍을 땐 두 번 물어보지 않으니까.
 최민규도 이 점을 잘 알고 있었다. 게임으로 따지면 검사냐, 마법사냐, 궁수냐는 식의 문제와 같았다.
 고개를 끄덕이자 본격적으로 퀘스트가 진행됐다.
 
 ●첫 번째 퀘스트. 소속 구단의 공식 경기에서 해트트릭을 기록하십시오.
 
 최민규는 기가 막혔다.
 “뭐?”
 알림음은 강경했다.
 
 ●다음 퀘스트로의 진행을 위한 조건입니다.
 
 “다른 게 또 있어?”
 
 ●시험은 여러 단계로 나뉘어 있습니다.
 
 해트트릭.
 선수 1명이 1경기에서 득점 3개를 올리는 걸 말한다. 길게 말할 것 없이 한 마디로 정의가 가능하다.
 어렵다.
 한 경기 한 골만 넣어도 엄지를 받는데, 세 골이라니?
 ‘환장하겠군.’
 최민규 2부에서도 해트트릭을 기록한 적이 없었다. 그걸 1부에서 하란 얘기였다.
 ‘후우.’
 최민규는 미간을 좁혔다.
 
 # 만능 스트라이커
 
 K리그도 슬슬 막바지를 향해 달려간다.
 정규리그 종료까지 불과 다섯 개 라운드!
 상위권 팀은 순위를 확정짓기 위해, 중위권 팀은 플레이오프 진출권을 따내기 위해, 하위권 팀은 유종의 미, 혹은 기적을 위해 열심히 구슬땀을 흘린다.
 서울FC는 그 중 중위권에 속한다. 시즌 중반부터 지켜오던 자리를 아직도 고수하는 것이다.
 가볍게 생각하면 본전치기라도 했으니 무난한 듯 보이지만, 치열한 순위 경쟁 세계에서 발전이 없음은 그다지 좋은 의미가 될 수 없다.
 오늘은 29라운드가 열리는 날.
 서울FC 코칭 스텝들이 막바지 점검에 한창이다.
 “그래, 그렇지! 거기서 좀 들어가 주고!”
 안 중요한 날이 어디 있겠느냐만 오늘은 특히 더 신경 쓰고 있었다.
 리그 2위의 포항FC!
 시즌 중반, 절대강자 전북FC를 밀어내고 1위를 수성하기도 했던 강팀이다.
 초장부터 그러진 않았다. 용병 전무에 팀의 에이스도 이적. 추락의 우려가 많았다. 하지만 최근 측면 돌파가 살아나고 포항타카라는 포항FC만의 티키타카를 구축, 다양한 공격루트를 선보였다.
 서울FC는 초, 중반 라운드에서 포항FC를 만나 모두 패했다. 그냥 패배도 아닌 무기력한 패배였다. 포항FC의 패싱축구를 파훼하지 못한 탓이었다.
 이번에는 기필코 설욕하리라 다짐하지만 쉽지 않은 싸움이 뒬 게 불 보듯 뻔했다.
 한편, 최민규는 한 가지 생각을 굳히고 있었다.
 ‘전직 퀘스트는 생각하지 말자.’
 포항FC를 상대로 해트트릭.
 이건 아무리 긍정적인 마인드로 바라봐도 가능성을 점치기 힘들다.
 거기다 오늘은 교체출전. 많은 시간을 뛴다고 해서 골을 더 잘 넣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3골인데 어느 정도 충분한 시간은 있어야 했다.
 ‘그래도 홈경기다.’
 이번 포항FC와의 29라운드는 서울월드컵경기장에서 열린다.
 서울FC의 홈구장!
 거리는 물론이요, 응원에서도 큰 도움을 받을 터였다.
 “자자, 이제 점심 먹고 출발하자!”
 덕분에 서울FC는 다소 느긋하게 경기장으로 향할 수 있었다.
 
 ***
 
 서울월드컵경기장!
 만석은 아니지만 수많은 관중들이 자리를 매우고 있었다. 괜히 가슴이 벅차오르고 뛰지 않았는데 긴장감이 몰려왔다.
 최민규는 벤치에 앉았다.
 ‘언제 투입될까.’
 교체로 뛴다고만 말했지 언제 들어가는 지는 알려주지 않았다.
 이태양 감독이 원하는 타이밍.
 그걸 사전에 파악하는 건 불가능하다. 경기 내용을 보고 교체를 정하기 때문이다. 달리 말해 아예 뛰지 못하는 경우가 생길 수도 있단 소리다. 스쿼드 교체가 불필요하다고 느끼면 그대로 계속 가는 것이다.
 ‘흠.’
 경기는 포항FC가 주도권을 쥐고 있었다.
 활발한 측면 돌파와 짧게, 그러면서 정확하고 정교하게 이어지는 패스를 감당하기 힘들었다. 이번 시즌 두 번의 경기의 패인이기도 했다.
 
 - 패스가 부드럽습니다.
 - 네. 패스로 모든 공간을 만들고 있습니다.
 
 중계석에서도 극찬이 이어진다.
 보기엔 간단해보여도 포항FC식의 플레이는 실행하기 어렵다. 팀의 호흡이 좋아야하고 선수들 개개인의 터치나 컨트롤도 수준급이어야 한다.
 그렇다고 서울FC가 아주 밀리고 있진 않았다. 일명 홈 버프라 불리는 응원의 힘을 등에 업었고 전방이나 좌우측 윙어들이 매순간 자신의 역할을 툭툭히 해주고 있었다.
 하지만 전반 29분.
 하프라인에서부터 이어진 포항FC의 패싱이 결국 균형을 깨뜨렸다.
 툭툭 열다섯 번 정도 이어진 패스로 박스까지 연결, 지척에 있는 공격수에게 이어졌다.
 순식간에 터진 선제골.
 경기장이 찬물을 뒤집어쓴 것처럼 일순 조용해졌다.
 
 - 멋진 골입니다!
 - 기막힌 패스 플레이였습니다!
 
 최민규는 묵묵히 필드만 바라봤다.
 ‘역시 포항FC야.’
 눈이 돌아갈 정도의 빠른 연계 플레이!
 적팀이지만 한 순간 한 순간 감탄사가 나올 정도다.
 ‘면면이 화려하진 않지만 모였을 때의 힘이 엄청나다.’
 타 구단과 비교해 재정상태가 좋지 않은 포항FC는 값비싼 선수, 즉 흔히 잘한다고 불리는 그런 이들을 영입하기가 곤란했다. 좋은 선수 한 명 사자고 구단에 구멍을 낼 순 없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선택한 게 바로 조직력!
 선수들을 한데 모아 협동 위주로 훈련했다. 그 결과, 개개인은 뛰어나지 않아도 뭉쳤을 땐 힘이 두세 배로 껑충 뛰는 플레이가 만들어졌다.
 
 - 서울FC가 어떻게 해야 할까요?
 - 선수 마크에 신경 써야 합니다. 볼이 지척에서 움직이더라도 선수를 쫒는 게 중요합니다. 미리 대기하지 않는 이상은 차단이 어렵습니다.
 
 서울FC의 수비수들은 훈련한대로 상대 선수 마크에 충실했다.
 덕분인지 더 이상의 추가실점 없이 전반전이 종료됐다.
 엎치락뒤치락 하며 아직 7위에 머물러 있는 서울FC. 쓴맛을 다셨다.
 최소 비겨야 나머지 라운드에 승부를 걸 수 있는데, 이 분위기라면 그마저도 힘들 지경이었다.
 “후반전엔 태준이, 준한이가 빠지고 민규, 민재가 들어간다.”
 이태양 감독은 지고 있는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수비진을 교체하지 않았다. 공격진을 대거 교체하며 공격에만 변화를 줬다.
 1골만 먹혔을 뿐.
 전반전에서 수비는 크게 문제가 없었다. 훈련한 대로 포항FC의 공격을 차단했다. 몇 번의 역습 기회도 만들었다. 단지 앞서 말한 것처럼 1골만 먹혔을 뿐, 전체적으론 무난했다.
 
 - 서울FC가 두 명의 선수를 교체했죠?
 - 서태준, 성준한 선수가 빠지고, 최민규, 김민재 선수가 투입됐습니다.
 - 공격진에만 변화를 줬군요.
 - 네. 이태양 감독의 성향이 엿보입니다.
 
 최민규는 하프타임이 끝나고 필드에 올라서며 자신감을 가졌다.
 공격수에게 가장 중요한 요소.
 지고 있는 상황에서도 경기를 역전시킬 수 있는 힘.
 
 삑-
 
 서울FC가 선축으로 경기가 시작됐다.
 최민규는 가볍게 볼을 넘겨받았다.
 윙어들과 합세해 측면을 노리거나 김민재와 함께 중앙을 돌파하는 등 다양한 활약을 했다.
 상대에게 볼이 있을 땐 중간에 가로챈다거나 패스를 끊는 식의 효과를 노렸다.
 점수를 빼앗아 오진 못했어도 전반전과 달리 포항FC가 경기를 주도하는 걸 막았다.
 그러던 전반 38분.
 최민규는 골킥을 이어받아 하프라인 근처에서 볼을 받았다.
 역습 공격이 아니었기 때문에 상대 진영에는 수비진들이 대기하고 있었다. 쉽사리 들어갔다간 볼을 뺏기거나 기회를 잃을 터였다.
 전방을 훑으며 패스할 곳이나 돌파할 구멍이 없는 지 확인하는 최민규였다.
 ‘저기다.’
 최민규의 시야에 오른쪽 측면이 들어왔다.
 이진현이 오버래핑하여 올라가 있었는데, 적절히 자리 잡고 있어서 잘만 터치한다면 무난히 볼을 받을 듯싶었다.
 훅 떠오른 패스가 이진현의 발에 걸렸다.
 수비수가 헤딩하여 받으려 했으나 발 빠른 이진현이 그를 등지며 퍼스트 터치에 성공했다.
 꾸물댈 시간이 없었다. 헤딩엔 실패했어도 자신의 임무가 끝나지 않은 수비수가 곧장 들러붙은 탓이었다. 휘슬이 불리지 않는 선에서 몸을 밀치더니 급기야 옷깃까지 잡아당겼다.
 ‘왜 안 불지?’
 최민규는 심판을 바라봤다. 객관적인 입장에서 명백한 반칙이었다.
 심판은 휘슬은커녕 볼 따라 다리를 움직이고 있었다.
 불리지 않은 휘슬은 엎질러진 물과 같아서 항의해봤자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최민규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상대 골문으로 시선을 옮겼다.
 상대 수비진은 튼튼했다. 미드진이 대거 내려와 수비에 동참하고 있었다. 공격수 1명도 후방까지 이동해 공간을 매우고 있었다.
 빠른 공수전환.
 포항FC라 나올 수 있는 전술이었다.
 ‘젠장.’
 이진현은 밀착수비를 이겨내지 못하고 결국 급하게 볼을 차고 말았다.
 정확도가 떨어진 볼이 제대로 굴러갈리 만무.
 서울FC의 공격 기회는 허무하게 무너지고 도리어 포항FC의 반격했다.
 짧은 패스로 순식간에 하프라인까지 진출하는 포항FC.
 최민규는 재빨리 쫓았다. 하지만 볼의 속도를 이기긴 무리였다.
 ‘뭐 저리 빨라?’
 툭툭 끊어 치는 패스. 경악스러울 만큼 빨랐다.
 눈 깜짝할 사이에 하프라인을 넘더니 어느 세 박스 근처에서 압박을 가하고 있었다.
 최민규는 중앙에서 볼 차단을 노렸다.
 ‘해보자.’
 달려들자 옆으로 볼을 빼버리는 상대 미드필더. 볼을 소유하기보다 넘겨서 시야를 분산시키겠단 의도였다.
 하지만 최민규가 그런 속셈에 걸려들 리 만무했다. 축구의 가장 기본인 인간 마크에 충실하면서 중앙에 있는 상대, 13번만 죽도록 쫒아 다녔다.
 ‘수비하는 공격수다.’
 13번이 이맛살을 모았다. 스트라이커면서 왜 이리 질척거리느냔 얼굴이었다.
 최민규는 빙그레 웃으며 행동을 이어갔다.
 현재 볼의 위치는 왼쪽 측면.
 도진우가 단단히 봉쇄하고 있었기에 아직까지 코너로 파고들진 못했다.
 ‘방심은 금물.’
 전반전, 골을 허용할 때도 하프라인에 있었던 볼이 순식간에 페널티박스까지 이동했지 않은가. 이번에도 그럴 가능성이 있었다.
 ‘놓칠쏘냐.’
 최민규는 볼이 어디 있든 안중에도 없이 끈덕지게 13번만 따라다녔다. 숨소리가 들릴 정도니 아마 진절머리가 났으리라.
 ‘좋았어.’
 수확이 있어서 이런 플레이를 이어가는 것이었다.
 현저히 떨어진 13번을 향한 패스.
 아니, 최민규가 밀착 마크한 이후로는 단 한 번도 볼을 받지 못했다.
 ‘어딜.’
 도진우와의 경합에서 밀린 상대 윙어가 롱패스를 띄우자 13번이 돌연 페널티박스로 쇄도했다.
 최민규는 기다렸다는 듯 쫒았다.
 높게 솟아오른 볼이 박스까지 날아갔다.
 권진수를 비롯한 아군 선수들이 헤딩으로 쳐내기 위해 발을 디뎠다.
 최민규 역시 점프. 헤딩도 헤딩이지만 13번을 막겠단 생각이 컸다.
 심판이 오늘 좀 느슨하게 판정을 내리는 것 같아서 약간 어깨도 눌렀다.
 
 삑-
 
 ‘뭐야?’
 기가 막혔다. 겨우 이 정도로 휘슬을 불다니.
 그럼 아까 이진현의 상황 때도 파울 판정을 내렸어야 하는 것 아닌가?
 어이를 상실한 최민규가 심판에게 항의하려는 찰나, 포항FC 선수들이 우르르 하프라인을 내려갔다. 거기엔 13번도 포함되어 있었다.
 아군 파울이 아닌 상대 파울이었다.
 ‘오늘 심판 잘 보시네.’
 머쓱해진 최민규는 뒷머리를 긁적이며 얼른 하프라인을 넘었다.
 서울FC의 프리킥 찬스.
 위치가 위치인지라 골키퍼 권진수가 직접 나와 킥했다.
 크로스마냥 높게 솟은 볼은 하프라인을 넘어 단숨에 오른쪽 측면까지 날아갔다.
 ‘역시 선배님!’
 정혁이었다. 아까 그 놈이 또 옷을 잡아당겼으나 아랑곳 않고 가슴으로 볼을 따냈다.
 잘 떨어진 볼을 바로 중앙 쪽으로 연결하는 정혁.
 ‘오케이!’
 프리킥 신호가 떨어지자마자 하프라인을 넘었었던 최민규는 정혁의 패스를 무리 없이 받았다.
 위치는 하프라인과 페널티박스의 중간 지점.
 최민규가 가장 좋아하는 위치 중 하나였다.
 어느 곳으로든 연결이 가능하고 무수히 많은 플레이가 나올 수 있었다.
 ‘민재!’
 최민규는 두어 번 볼을 밀다가 지척에 있던 김민재에게 패스했다. 같이 교체 투입된 선수로써 다방면에서 탁월한 능력이 있는 후배였다.
 ‘들어간다!’
 ‘네!’
 벌써 2개월. 눈빛으로 서로의 생각을 읽기에 충분한 시간이었다.
 최민규는 박스와의 거리를 좁혔다. 수비수들 사이로 잘 파고든 순간, 발끝에 김민재의 패스가 걸렸다.
 받자마자 강한 왼발 슈팅!
 수비수들이 어떻게든 막으려 태권도 하듯 길게 발을 뻗었다. 하지만 오판이었다.
 상대를 속이기 위한 거짓 슈팅!
 최민규는 그 자세 그대로 한 번 접은 후, 왼쪽으로 다가온 김민재에게 다시 볼을 넘겼다.
 
 # 운 좋은 연결
 
 ‘질러라, 민재야!’
 협소하긴 해도 살짝 열려있는 공간이 있었다.
 김민재가 그곳을 잘 캐치한다면 무리 없이 볼을 밀어 넣을 수 있었다.
 골로 연결될 지는 물론 미지수지만 위협적인 상황만 만들어도 성공이었다.
 넋 놓고 김민재만 바라보고 있던 최민규의 눈이 돌연 부릅떠졌다.
 ‘다시?’
 ‘저한텐 공간 없어요!’
 최민규는 짧게 눈빛 대화를 끝내야만 했다. 볼이 오고 있는데, 어찌 김민재를 신경 쓰랴.
 ‘없다.’
 좌우를 훑은 최민규의 시야엔 패스할 동료가 들어오지 않았다.
 무리한다면야 밀어줄 수는 있겠으나 패스가 아니라 포항FC에게 공격 기회를 양도하는 꼴이 될 지도 몰랐다.
 최민규는 침착하게 숨을 고르고 빠르게 상황을 판단……
 ‘판단은 무슨!’
 그나마 보이는 구멍으로 힘껏 볼을 차는 최민규였다.
 들어갈 지는 미지수.
 수비수들의 압박에서 벗어나니 속은 후련했다.
 그런데.
 ‘들어갔잖아?’
 가끔은 생각 없이 사는 게 좋을 수도 있다는 말이 있는데, 최민규는 이 순간 그 말을 뼈저리게 공감했다.
 “와아아아아아!”
 관중석에서 커다란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 기분이 좋으면서도 뭔가 싱숭생숭한 최민규였다.
 “선배님, 어시스트 땡큐입니다.”
 “너, 이 새끼.”
 김민재는 헤헤 하며 웃음 지었다.
 “거기서 슛할 생각을 하다니. 놀랍다, 민규야.”
 “아닙니다, 선배님.”
 최민규는 ‘다 민재 놈의 계략이었습니다.’ 라고 하고 싶었으나, 뒷머리를 긁적이며 과분한 칭찬을 받은 척 했다. 어찌됐든 골이 들어갔으니까.
 ‘이게 결과론적 관점의 무서움이군.’
 좋은 내용은 좋은 결과를 만들고 좋은 결과는 좋은 내용이 더해진 것이다.
 김민재는 후자를 만들었다. 다시 볼을 돌려준 게 골의 지름길이 됐다.
 “와아아아!”
 최민규는 필드를 누비며 세레모니를 펼쳤다.
 잠시 후.
 센터서클에서 경기가 재개되려는데, 서울FC의 기세가 무섭게 필드를 달궜다.
 팬들의 옷도 대부분 붉은색이라 그 열기가 더욱 불타올랐다.
 무승부만 해도 좋다는 생각이 점차 이길 수 있단 자신감으로 바뀌었다.
 
 - 최민규 선수의 골로 서울FC의 분위기가 완전히 달라졌죠?
 - 네. 선수들의 열의가 살아났습니다.
 
 전반전에는 서울FC가 끌려다닌다는 느낌이 강했다. 특유의 공격성이 힘을 못 냈고 포항FC의 패스를 막기에 급급했다. 수비 후 공격이라는 축구의 기본을 생각하면 문제될 게 없지만, 말했듯 평소의 서울FC를 생각하면 좋지 않은 모습이었다.
 지금은 정반대였다. 압도하진 못해도 포항FC에게 조금씩 압박을 가했다.
 중원에서도 패스가 살아났다. 적진에서는 간간히 쓰루패스가 연결되는 등, 많은 진전이 있었다.
 
 - 마무리 시간이 다가오고 있습니다.
 - 양 팀 모두 1점보다는 3점의 승점을 얻고 싶을 거거든요.
 
 후반 41분.
 서울FC는 포항FC의 공격을 막고 후방에서 볼을 올리고 있었다.
 ‘그래, 롱패스가 답이다.’
 전방엔 수비수가 즐비한 상태. 아무리 발 빠르게 움직여도 돌파가 힘든 상황이었다.
 이런 땐 측면에서 상대를 흔들며 공격하는 게 좋았다.
 오버래핑한 이진현이 우측에서 볼을 잡아 몰고 올라갔다.
 앞에 예의 수비수가 또 등장했다.
 ‘좋아!’
 두 번 당하지 않겠다는 듯 이진현은 수비를 따돌리며 그대로 코너로 질주했다. 따라붙는 이가 있었지만, 그때는 이미 크로스가 올라간 후였다.
 ‘이런.’
 최민규는 재빨리 움직였다. 하지만 허사였다.
 퍼스트 터치는 포항FC의 손을 들어줬다. 볼이 쭉 튀어나와 아군 쪽 하프라인에 떨어졌다.
 최민규는 공격 기회가 살아있다는 것으로 자위했다.
 볼은 잡은 이는 김종성. 수비형 미드필더라 많이 올라가지 않아 볼을 잡을 수 있었다. 그는 일단 정면에 있는 김민재에게 땅볼로 패스를 보냈다.
 마찬가지로 깊숙이 들어가지 않았던 김민재는 안정되게 볼을 터치했다. 그리고 툭툭 대여섯 번 밀다가 측면으로 띄웠다.
 높이 점프해 볼을 따낸 도진우. 수비수의 발이 들어오기 전에 코너로 올라갔다.
 
 - 도진우 선수 코너로!
 - 수비수가 붙기 전에 크로스를 올려야 합니다!
 - 크로스! 서울FC, 다시 한 번 찬스입니다!
 
 박스 안은 그야말로 아수라장이었다. 볼을 쳐내려는 이들과 따내려는 이들로 격한 실랑이가 벌어졌다.
 최민규도 거기에 속해있었다. 반드시 볼을 터치하겠단 마음으로 묵직하게 솟아올랐다.
 ‘닿았다!’
 볼은 최민규의 머리에 닿았다. 하지만 그뿐이었다. 이마가 아니라 머리 쪽을 맞는 바람에 앞으로 가지 않고 옆으로 튀었다.
 아쉬움이 터지는 순간, 상대 골키퍼가 옆으로 몸을 날리고 있었다.
 ‘응?’
 빠진 볼을 정혁이 다시 헤딩한 것이었다.
 “와아아아아!”
 아이러니하게 만들어진 역전골!
 
 - 스코어 2:1! 서울FC가 경기를 뒤집습니다!
 - 최민규 선수, 졸지에 어시스트를 만드는군요!
 
 아까의 동점골이나 방금 전 어시스트나 좋은 일임에도 불구하고 이상하리만치 사람을 머쓱하게 만들었다.
 최민규는 개의치 않았다. 그냥 만끽했다.
 ‘내용이 좋았으니 골을 넣은 것이다.’
 부천FC의 류장일 감독이 해준 말을 곱씹으며 합리화하는 최민규였다.
 이후 추가시간까지 더한 7분.
 서울FC는 공수에 전념하며 끝까지 역전골을 지켰다.
 경기 막판 포항FC가 골키퍼까지 하프라인을 넘을 정도로 초강세를 펼쳤으나, 승리에 목마른 서울FC는 더 탄탄한 방어로 공격을 막았다.
 
 - 서울FC가 후반 41분 정혁 선수의 역전골로 승리를 따냅니다!
 - 대단했습니다! 패색이 짙었거든요!
 - 오늘 경기의 수훈은 누구라고 보십니까?
 - 역전골을 넣은 정혁 선수도 대단했지만, 그 골의 어시스트와 또 동점골을 터뜨린 최민규 선수라고 생각합니다.
 - 그렇군요. 오늘 경기로 순위 변화가 있죠?
 - 네. 7위였던 서울FC가 6위로 올라섰습니다.
 - 플레이오프 진출권을 따냈군요.
 - 그렇습니다. 하지만 아직 네 개 라운드가 더 남았습니다. 안심하긴 이릅니다.
 - 오늘 경기처럼만 해주면 될 것 같은데요?
 - 그럼 무난하게 진출할 수 있을 겁니다.
 
 포항FC를 상대로 29라운드를 승리로 가져간 서울FC.
 “와아아아아아!”
 선수들보다도 팬들이 더 크게 기뻐했다. 팔은 안으로 굽는다지만 사실 팬들도 오늘 경기는 어려우리라 점쳤다.
 전반전부터 시작된 포항FC의 강세!
 헌데 후반전 들어서 조금씩 분위기를 띄우더니 급기야 23분에 놀라운 슛으로 동점골을 따냈다.
 급기야 41분 째엔 좋은 크로스와 헤딩 두 번으로 역전골까지 터뜨렸다.
 이보다 기쁜 일이 어디 있겠는가?
 서울FC 선수들은 그런 팬들에게 손을 흔들었다.
 ‘울컥하네.’
 최민규는 쏟아지는 환호성 속에서 눈물이 날 뻔 했다.
 가수들이 왜 콘서트하면서 우는지 알 것 같았다. 말로 형용할 수 없는 강렬함이었다.
 “선배님? 우세요?”
 “안 울어, 인마.”
 “에이. 우시는 거 같은데요?”
 김민재의 엉덩이에 똥침을 놓는 걸로 상황을 마무리하는 최민규였다.
 라커룸에 들어가려던 최민규는 순식간에 기자들에게 둘러싸였다.
 “최민규 선수! MOM을 수상하신 것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MOM을 예상하셨습니까?”
 “역전골 어시스트는 운이었습니까? 의도였습니까?”
 “포항FC를 어떻게 보십니까?”
 “정혁 선수가 MOM이 될 수도 있단 생각은 안 해보셨습니까?”
 기자들의 질문공세도 이젠 익숙했다.
 최민규는 여유롭게, 그러면서 최대한 간략하고 빠르게 대답한 후 발 자리를 떴다. 미로보다도 끝이 안 보이는 곳에서 계속 발을 붙이고 있을 순 없었다.
 “잘했다, 민규야.”
 “축하드립니다, 선배님.”
 라커룸에 들어서자 미리 와있던 동료들이 한 마디씩 축하 인사를 건넸다.
 최민규는 뒷머릴 긁적이며 머쓱한 웃음을 띠웠다.
 90분 간 모두가 함께 싸웠는데, 이런 식으로 혼자 스포트라이트를 받으니 미안했다.
 어느 정도 상황이 마무리되자 박승민 코치가 박수치며 주의를 모았다.
 “자자! 모두들 고생했다! 얼른 복귀하자!”
 “예!”
 속속히 짐 챙겨 숙소로 복귀하는 길.
 ‘이거 뭐 어쩌란 얘기야?’
 최민규는 공식 경기에서 해트트릭을 기록하라는 메시지를 다시 한 번 확인했다.
 아무리 봐도 답이 없었다. 대관절 방도가 떠오르지 않았다.
 세계적인 공격수들도 어려워하는 걸 어떻게 하란 말인가?
 더군다나 최민규는 오늘 경기에서 MOM을 수상했다. 그랬음에도 불구하고 기록은 1골 1도움. 해트트릭은커녕 멀티골 조차 이루지 못했다.
 ‘이러다 평생 전직 못하겠는데.’
 최민규는 절레절레 고개를 저으며 단단히 주먹을 쥐었다.
 초심.
 부천FC에서의 생활을 생각해보라.
 하루하루가 고역과도 같았다. 미래가 보장되지 않는 상황에서 매일을 기약 없는 노력으로 보냈다.
 그와 비교하면 해트트릭은 오히려 가능성이 농후한 일이었다. 아무리 힘들어도 부천FC일 때만큼 어려울까.
 다시 한 번 다부지게 손가락을 모았다.
 노력하고, 노력하고, 노력한다면 분명히 기회가 찾아올 것이다.
 ‘정신 수양이나 하자.’
 선발 출전했던 선수들은 물론, 같이 교체 투입됐던 김민재마저 드르렁 코를 골며 깊은 잠에 빠져 있었다.
 반면 최민규는 그리 피곤함을 느끼지 못했다.
 반복된 훈련의 결과!
 취침 시간이 아니면 중간에 거의 잠을 자지 않는 최민규였다.
 ‘잠깐. 능력치를 찍어도 되는 건가?’
 게임에서는 보통 전직을 하게 되면 그때까지의 능력치가 전부 초기화 된다. 1차 전직에 한해서 이긴 하나, 어쨌든 그렇다. 이 부분에서 다소 의문이 생겼다.
 ‘변화레벨을 넘어서 퀘스트를 완료하면 어떡하지?’
 마치 최민규의 생각을 읽기라도 했다는 듯 알림음이 귓전을 울린다.
 
 ●변화 이후의 능력치는 모두 초기화됩니다.
 
 ‘그렇다면 안심이군.’
 최민규는 한시름 덜었다. 10레벨을 초과해서 전직을 하게 됐는데, 넘어간 레벨만큼 능력치를 돌려주지 않으면 이만저만한 손해가 아니기 때문이었다.
 ‘능력치는 찍던 대로 찍자.’
 생각을 정리한 최민규는 눈을 감고 정신 수양에 들어갔다.
 2시간 후.
 숙소로 복귀한 서울FC는 식사 후 휴식시간을 가졌다. 늦기도 늦었고 경기 후에 훈련을 할 정도로 몰상식한 구단이 아니었다.
 하지만 최민규는 가벼운 근력운동을 하고 나서야 비로소 숙소로 복귀했다.
 최민규는 깨끗이 몸을 씻고 잠깐 컴퓨터에 앉았다.
 대형 포털 사이트에 들어가니 메인화면에 오늘의 경기에 대한 기사가 수십 개나 올라와 있었다.
 서울FC가 포항FC의 발목을 잡았다는 것부터 시작해 극적인 역전골에 대한 얘기까지 다양한 내용이었다.
 최민규는 흥미가 끌리는 기사 순으로 하나하나 읽었다.
 직접 필드에서 뛰는 것과 글로 상황을 읽는 것은 뭔가 오묘한 차이가 있었다. 가끔은 이런 일도 있었나 싶을 정도로 자세히 기록 되어있는 것도 있었다.
 기사를 읽고 스크롤을 내리니 529개의 댓글이 있었다. 적다면 적고 많다면 많았다. 유명 기사는 1만 개가 넘게 달리는 경우도 있으니까.
 그냥 고마웠다. 읽고 지나칠 법도 한데, 흔적을 남겨줘서.
 내용은 대체로 서울FC 위주였다. 멋졌다, 잘했다, 놀랍다는 게 주를 이뤘다.
 유독 눈에 띄는 댓글이 있었다.
 
 [2부리거 주제에 꽤 하네ㅋㅋ]
 
 누가 봐도 최민규를 향한 일격이었다. 당사자인 최민규는 그걸 더더욱 잘 느꼈다.
 ‘칭찬이네.’
 최민규는 ‘ㅉㅉ 악플러 새끼’라는 식의 답 댓글을 단 네티즌들과 달리 반대로 생각했다.
 결국엔 잘했다는 거 아닌가?
 중점을 어디에 두냐 따라서 해석이 달라질 수 있음을 보여주는 최민규였다.
 ‘가만있자…… 일정이.’
 어느 정도 기사를 확인한 최민규는 차후 일정을 살폈다.
 
 # 리그 첫 선발
 
 ‘5일 후 30라운드. FA컵 결승은 보름 후.’
 먼저 30라운드 상대는 부산FC.
 결론부터 말하면 잘한다고는 볼 수 없는 팀이다. 리그 최하위를 달리고 있으며 공격이나 수비, 조직력 등에서 묵직함도 없다. 팬들도 중상위권만 되면 만족할 정도다. 하지만 엄연히 1군이고 프로구단이기에 결코 얕봐선 안 되겠지.
 대망의 FA컵 결승의 상대는 전북FC.
 현 시즌 리그 1위다. 우승 경험도 풍부하다. 각종 축구 전문가들로부터 가장 강한 전력을 가진 팀이라고 불린다. 주로 쓰는 것은 소위 ‘닥치고 공격’이라 불리는 전술인데, 어떤 상황에서도 수비보다 공격에 치중한다. 서울FC와 비슷한 전술. 아니, 거의 똑같다고 봐도 무방하다. 서울FC도 웬만한 상황이 아니면 무조건 공격을 하니까. 그야말로 착와 창의 대결이다.
 최민규의 심장은 벌써부터 요동쳤다.
 ‘밀릴 게 뭐 있어.’
 안 될 거 같다고, 질 거 같다고 뒤에만 있으면 아무 것도 못한다. 터무니없더라도 자신감이 있어야 가능성이 생긴다.
 최민규는 몇 개의 기사를 더 보다가 자리에 누웠다.
 이후 30라운드가 열리기 전까지 최민규는 훈련에만 매진했다. 기간이 짧아 11레벨을 찍진 못했지만, 경험치나 감각 등등 많은 걸 끌어올렸다.
 박승민 수석코치가 최민규를 찾았다.
 “민규야.”
 “예, 코치님.”
 “너 내일 선발이다. 잘 준비해.”
 리그 첫 선발 출전!
 최민규는 서울FC에 올라와서 단 한 번도 선발로 뛴 적이 없었다.
 FA컵?
 그건 리그와 다르기에 논할 문제가 아니었다.
 이 순간, 노력은 배신하지 않는다는 걸 다시 또 깨닫는 최민규였다.
 “감사합니다, 코치님.”
 “이런 인사는 감독님한테 하라니까.”
 다른 할 일이 있는지 박승민 수석코치는 최민규의 어깨를 두드려주며 자리를 떠났다.
 최민규는 기분이 좋아졌다.
 이제 어느 정도 자신이 믿음직하단 선수가 되었단 증거!
 더욱 더 힘을 내 훈련에 열중했다.
 다음 날.
 최민규에게 큰 의미가 될 수도 있는 30라운드가 부산 아시아드 주경기장에서 막을 올렸다.
 두 달 전 부산시청과의 경기가 있었던 곳.
 부천FC 때도 원정경기가 있으면 자주 왔던 곳이었다. 익숙했다.
 원정 경기임에도 불구하고 관중은 서울FC가 압도하고 있었다.
 ‘야구.’
 부산을 연고지로 하고 있는 야구팀이 이곳에선 하나의 문화처럼 작용한다.
 엄청난 팬들!
 홈 관중임에도 불구하고 부산FC의 팬 수가 적은 이유였다.
 
 - 서울FC와 부산FC, 부산FC와 서울FC의 30라운드가 시작됩니다.
 - K리그도 막바지가 다가오는 군요.
 - 아직도 순위 경쟁이 치열하죠?
 - 네. 정규리그 우승을 두고 전북FC와 포항FC가 치열한 싸움을 벌이고 있고, 중위권에서는 플레이오프 진출권을 따내기 위한 막판 스퍼트가 한창입니다. 오늘 서울FC도 후자의 대상이고요.
 - 서울FC는 오늘 경기를 반드시 따내야 하겠죠?
 - 네. 6위라고 안심할 상황이 아닙니다.
 
 삑-
 
 부산FC의 선축으로 경기가 시작됐다. 비록 플레이오프 진출은 힘들지만 유종의 미를 거두려는 듯 굳은 의지가 돋보였다.
 최민규는 최전방에서 스트라이커로 나섰다.
 뒤를 성준한이 받쳤고, 정혁 박강현 도진우, 이진현 등 걸출한 플레이어들이 각각 자신의 포지션에 섰다.
 부산FC의 공격은 포항FC와 비교해 막기가 수월했다. 짧고 정교하게 이어지는 패스가 아닌, 롱패스나 세트피스 위주인 탓이었다. 반칙만 범하지 않으면 괜찮은 승부를 낼 수 있으리라.
 전반 18분.
 상대 슈팅이 관중석으로 향하면서 서울FC가 골킥을 얻었다.
 권진우는 아크서클에 볼을 놓은 후, 멀찌감치 떨어지게끔 킥했다.
 헤딩교전!
 ‘안 뺏겨!’
 능력치가 올라가면서 헤딩 능력도 좋아진 최민규. 교전에서 상대를 밀어내고 볼을 땄다.
 이마에 정확히 맞은 볼은 일직선으로 뻗어 정혁에게 날아갔다.
 바로 이어지는 서울FC의 공격.
 정혁이 오른쪽 측면으로 이동하고 이진현이 재빨리 오버래핑 했다.
 최민규는 그 사이 페널티박스 쪽으로 쇄도하며 기회를 노렸다.
 ‘좋아!’
 노련한 정혁이 이진현을 놓칠 리 없었다. 잘 굴린 패스가 측면 구석까지 안전하게 뻗었다.
 이진현은 터치하자마자 코너를 올랐다. 접고 패스하거나 크로스를 올리면 더 좋겠지만 수비수가 있어서 무리였다.
 코너에서의 접전.
 이진현은 거기에서도 쉽게 크로스를 올릴 수 없었다. 수비수가 워낙 밀착해있어서 공간이 나오지 않았다.
 
 - 어떤 선수가 볼을 따낼까요!
 
 센스 있는 이진현은 툭 밀어 수비수의 발에 닿게 했다. 튕겨진 볼이 라인 바깥쪽으로 나갔다. 까딱 잘못하면 뺏길 상황을 코너킥으로 만들었다.
 
 - 좋은 플레이죠.
 
 서울FC의 세트피스 상황.
 김종성이 키커로 나섰다. 중원에서 전방이나 측면으로 항상 좋은 롱패스를 보내주기에 킥력은 믿을 만 했다.
 
 삑-
 
  심판의 휘슬이 울리기 무섭게 볼이 박스 안쪽으로 큰 포물선을 그렸다.
 - 잘 찼습니다!
 - 뒤로 빠지면 골키퍼가 펀칭하기 어렵거든요!
 
 자리 잡고 발 디딜 준비하던 최민규는 순간 미간을 좁혔다. 혼잡하단 이유로 대놓고 잡아당겨도 심판이 파울 선언을 안 했다.
 ‘뭐 이런 놈이 다 있어?’
 최민규는 당하더라도 피해가 없으면 나서지 않는 타입이었다. 서태준이 그토록 지독하게 입을 털어도 별 신경을 안 쓰는 것도 그런 이유였다.
 ‘아주 난리 났네.
 지금은 다르다. 당해서 피해가 오고 있다. 그냥 피해도 아니고 아주 지독하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다.’
 최민규는 수비수의 몸을 역으로 끌어당기며 뭉개버렸다.
 그 순간 날아드는 볼!
 피지컬의 힘으로 발을 디디는데 성공하는 최민규였다.
 탁.
 뭔가 닿는 느낌이 났다. 하지만 확인할 것도 없이 볼이 아님을 알았다.
 지끈거리는 머리.
 ‘젠장!’
 같이 점프한 수비수의 머리였다.
 볼의 행방은?
 하프라인까지 날아가 있었다. 다른 수비수의 머리에 맞고 튕겨 나온 걸 누군가가 멀리 찬 듯 했다.
 서울FC는 다시 포지션을 갖췄다.
 
 - 아직 공격이 가능합니다! 부산FC는 계속 신경 써줘야 하죠!
 - 네! 양 팀 모두 침착해야겠습니다!
 
 볼은 심재영이 잡고 있었다. 풀백이라 몰고 나가기보다 패스를 선택했다.
 근처에 있던 용지혁이 볼을 받았다.
 ‘기회가 한 번 더 오려나.’
 최민규는 적진에서 잠자코 기다렸다. 빠져나가 패스에 가담하느니 자리 잡고 골이나 킬패스를 노리는 게 나았다.
 비슷한 포지션인 성준한 역시 전방이나 측면으로 빠지지 않고 계속 박스 쪽에 머물렀다.
 ‘좋다.’
 아군은 툭툭 끊어 차며 전방과 측면에서 볼을 굴렸다.
 덕분에 정신없이 움직이는 부산FC였다. 언제 어디로 튈지 모르는 시한폭탄을 사수하기 위해 잠시도 발을 쉬지 못했다.
 그러던 중, 박강현이 조금 공격적으로 움직였다. 정혁에게 패스를 줌과 동시에 최민규와 성준한이 있는 곳으로 쇄도했다.
 최민규는 박강현의 모습을 확인하고 슬쩍 왼쪽으로 빠졌다.
 
 - 정혁 선수! 다시 박강현 선수에게 패스!
 - 바로 슈팅은 무리겠죠!
 - 최민규 선수, 잘 빠져나옵니다!
 
 잔뼈가 굵은 박강현이 최민규를 놓칠 리 없었다.
 빠르게 굴러가는 볼.
 수비수가 발을 데기 전에 먼저 볼을 건드리는 최민규였다.
 
 - 기횐데요!
 - 슈웃!
 - 고오오올! 고오골! 고오올!
 - 환상적인 패스플레이가 나왔네요!
 
 칠전팔기의 정신을 받들어 코너킥을 실패하고도 끝까지 포기하지 않으며 패스를 이어간 서울FC의 완벽한 골이었다.
 최민규는 양 팔을 높이 들며 필드를 활보했다.
 “와아아아아!”
 관중석이 들썩이고 알림음도 선제골로 경험치와 명성이 올랐다는 축하메시지를 보낸다.
 “요즘 아주 제대로 물올랐다?”
 “아닙니다, 선배님.”
 최민규는 동료들의 칭찬까지 받으며 세레모니를 끝냈다.
 다시 재개되는 경기.
 최민규의 머릿속에서 본능적으로 한 가지 생각이 꿈틀거렸다.
 ‘설마 이러다 세 골?’
 절레절레 고개를 저으며 자신의 뺨까지 때리는 최민규였다.
 티끌 모아 태산이라지만 겨우 한 골 넣고 세 골까지 기대할 순 없었다.
 
 - 부산FC의 움직임이 신중해졌습니다.
 - 패스가 어느 정도 살아났죠.
 
 방금 전까지의 부산FC는 패스횟수보단 패스를 준다는 것에 중점을 뒀다. 그래서 롱패스나 세트피스가 많이 나왔다.
 지금은 달라졌다. 감독과 코칭스텝에게 일언을 들었는지, 중원에서 볼을 굴리며 찬찬히 하프라인을 넘어왔다.
 ‘어떻게 하든 상관없다.’
 최민규를 비롯한 서울FC는 변화된 부산FC의 전술에 당황하지 않았다. 아무리 패스가 정교해져도 포항FC보다는 아니니까. 약간만 더 집중하면 공격을 막고 나아가 역습까지 가능할 터였다.
 
 - 최민규 선수, 오늘도 활발하게 움직여줍니다.
 - 골을 넣어서 더 그런 것 같습니다.
 - 저렇게 따라만 다녀도 중원에서는 큰 압박이죠?
 - 네. 상대 입장에선 자칫 볼을 흘릴 수도 있고요.
 
 최민규는 볼이 가는 곳으로 이리저리 움직이며 상대 미드필더들을 방해했다.
 상대로선 미칠 노릇이었다. 길게 패스하자니 다른 서울FC 선수들이 걸리고, 짧게 주자니 최민규가 등장해 훼방을 놓았다.
 결국 한 타임 뒤로 물러나는 부산FC.
 이것만으로도 절반은 성공했다. 한 차례 흐름을 꺾었으니 말이다.
 ‘순위가 실력에 어느 정도 영향이 있는 것 같다.’
 최민규가 누군가를 평가할 입장은 결코 아니다. 하지만 한 가지 확실하게 말할 수 있는 건 부산FC가 포항FC보다는 전력이 약하단 것이다.
 포항FC와의 결전만으로도 쉽게 알 수 있다. 그 날도 똑같이 했지만 압박은커녕 볼을 뒤로 물리게 하는 이득조차 못 취했으니까.
 ‘하기야 연봉이랑 비슷한 문제지.’
 연봉으로도 절대 평가가 가능하다. 몸값이 비싸면 잘하는 것이고, 싸면 못하는 것이다. 어느 구단에 들어가느냐에 따라 상대성이 있겠지만, 같은 경우를 예로 들면 대게 다 그렇다.
 고로 구단 순위가 높으면 잘하는 게 맞다.
 
 - 전반전이 끝나가고 있습니다.
 - 골을 내준 부산FC로서는 많이 아쉬울 겁니다.
 - 후반전에 더 분발해야겠습니다.
 - 서울FC는 이 골을 지키거나 나아가 한 골을 더 추가, 승부의 쐐기를 박는 것도 좋겠죠.
 
 전반전은 빠르게 지나갔다. 골도 터졌고 부산FC의 태세가 공격적으로 바뀌며 경기 양상이 180도 변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전반 종료 2분 전.
 막판 기회를 노렸던 부산FC의 공격이 실패로 돌아가면서 서울FC가 역습 기회를 얻었다.
 시작은 용지혁의 발끝이었다. 부산FC 진영이 갖춰져 있지 않은 걸 확인 후, 중앙으로 길게 볼을 밀었다.
 직선으로 빠르게 굴러간 볼은 성준한에게 닿았다. 툭툭 차며 하프라인을 넘고 다시 최민규에게 넘겼다.
 최민규는 전방과 측면을 훑으며 드리블해나갔다.
 ‘측면은 무리. 전방은 나 혼자다.’
 수비에 기여하느라 오버래핑한 좌우측 윙어도 없었고, 공격형 미드필더들은 한참 뒤에서 따라오고 있었다.
 백패스를 이용하면 되지 않냐고?
 앞으로 가면 되는데 굳이 뒤로 뺄 이유가 무엇인가. 더구나 그렇게 하면 부산FC가 수비진을 갖춰버린다.
 
 - 아!
 
 최민규의 다리에 이 순간을 막판 불꽃으로 만드느냐, 만들지 못하느냐가 달려있었다.
 
 # 불가능은 없다
 
 ‘먼저 막고 있는 놈은 한 명.’
 최후방에서 최민규를 기다리고 있는 수비수가 있었다. 좌우에도 따라붙는 이들이 또 두 명 있었다.
 양 옆부터 따돌리기 위해 볼을 살짝 길게 밀며 재빨리 파고들었다.
 ‘드리블 53에 민첩성도 53이다.’
 10레벨이 되면서 최민규의 드리블과 민첩성은 상당히 향상됐다. 흡사 먹잇감을 노리는 치타와도 같았다. 두 가지에 더해 체력, 몸싸움, 슈팅 등 다른 부분 역시 마찬가지였다.
 수비수들이 자기도 모르게 내뱉는 말이 들렸다.
 “뭐 저리 빨라?”
 거리상으로만 따지면 그리 차이가 크진 않았다. 기껏해야 두세 걸음이었다. 하지만 필드에선 그게 많은 걸 좌우한다.
 제치냐, 못 제치냐.
 골이 되느냐, 안 되느냐.
 최민규는 더욱 더 스퍼트를 올렸다.
 마지막 수비수와의 위치가 가까워져서 볼터치는 조금 짧게 했다.
 ‘중거리 슛?’
 슈팅을 때려도 무방한 상황이었다. 충분한 공간이 있었다.
 ‘아냐.’
 최민규는 고개를 저었다.
 골키퍼가 이미 자세를 잡고 있었다.
 수비수를 낀 상황이라 슈팅을 하더라도 불안전할 터였다.
 그럼 무작정 돌파?
 ‘힘들어.’
 수비수를 제칠 때 멈칫거리는 순간이 있다. 그 사이 뒤따라 붙은 이들에게 잡힌다면? 역시 문제다.
 ‘멈칫거리지 않게.’
 해답은 쉽게 나온다. 멈칫거리지 않으면서 마지막 수비수를 제치면 된다.
 최민규는 수비수의 빈틈을 찾았다.
 ‘달려온다?’
 가만히 앉아서 공격수를 기다리는 수비수가 있을 리 만무. 얼굴 가득 열의를 띄운 수비수는 다부진 체격으로 최민규를 압박해왔다.
 거리는 고작 2미터. 손 뻗으면 닿을 거리였다.
 ‘왼쪽? 오른쪽? 아니면 다리 사이로 빼?’
 짧은 찰나, 최민규의 머릿속에 많은 생각이 지나갔다. 어떻게 볼을 몰아야 가장 효과적일까.
 ‘됐다.’
 돌연 이 악물며 어지러운 머리를 정리하는 최민규였다.
 ‘그냥 들이대!’
 길지 않은 시간으로 가타부타 해봤자 정확한 답을 찾기 힘들다.
 자신감!
 최민규는 공격수가 가장 갖춰야할 덕목으로 밀어붙였다.
 
 - 최민규 선수! 그냥 달려드나요!
 - 수비수만 제치면 골키퍼와 1:1 상황이거든요!
 
 수비수가 지척까지 다가온 순간, 최민규는 볼을 툭 찍었다. 느리게, 그러면서 살짝 솟아오른 볼이 순식간에 수비수를 지났다.
 눈치 챈 수비수가 몸을 틀어 볼을 빼앗으려 했으나 이미 최민규의 몸이 한 발자국 더 앞서고 있었다.
 쭉쭉 밀며 필드를 치고나가는 최민규!
 이때, 골키퍼의 선택지는 두 가지다. 아크서클까지 튀어나와 최민규의 슈팅을 방해하던가, 골문에서 몸 벌린 상태로 세이브를 기대하던가.
 골키퍼는 전자를 택했다. 최민규와의 거리가 좀 되는 터라 앞으로 나가서 막는 건 무리라 판단한 것이다.
 
 - 최민규 선수가 일을 낼 것 같습니다!
 
 어떻든 간에 최민규에게는 이미 절호의 찬스가 왔다. 골을 넣을 수 있는 가장 좋은 상황.
 골키퍼와의 1:1 맞대면이다.
 ‘가라!’
 가슴 속에 의지를 터뜨린 최민규는 몇 발자국 더 치고 나가다 오른발로 강한 슈팅을 날렸다. 잘 감긴 볼이 부드럽게 골문까지 쇄도했다.
 사지를 흔들며 방어태세를 갖추던 골키퍼가 얼른 몸을 날렸다.
 
 - 슛! 고오오오올!
 - 최민규 선수가 멀티골을 터뜨립니다!
 
 필드가 한 순간 축제에 휩싸인다. 거의 다 끝나갔다고 생각한 전반전에 도망가는 추가골이 터졌기 때문이다.
 ‘2골!’
 기뻐하는 최민규에게 몇 가지 메시지가 떠올랐다.
 
 ●멀티골로 인해 경험치가 소량 상승합니다!
 ●멀티골로 인해 명성이 0.8 상승합니다!
 ●퀘스트 완료까지 1골 남았습니다!
 
 마지막 메시지가 최민규의 가슴을 두근거리게 만들었다. 어렵다고 생각한 일이 조금씩 가까워지고 있었다.
 후반에도 교체되지 않고 필드를 뛴다면? 정말 해트트릭을 만들지도 몰랐다.
 “아주 대단해?”
 “인마, 한 턱 쏴라.”
 선배들은 최민규를 칭찬하기 바빴다.
 “감사합니다.”
 즐거운 분위기 속에 세레모니가 끝나고, 경기가 바로 재개됐다. 하지만 이내 휘슬이 울렸다. 막바지에 넣은 골이라 추가 시간이 금방 끝났다.
 15분간의 하프타임.
 이태양 감독은 선수교체 없이 그대로 후반전을 치르기로 했다. 부상이나 카드를 받은 선수가 없고 체력적으로도 다 괜찮기 때문이었다.
 잠시 후, 다시 필들에 들어선 선수들.
 
 - 후반전에 부산FC가 반전을 노릴 수 있을까요?
 - 불가능하진 않습니다. 어려울 뿐이죠.
 - 점수뿐 아니라 내용면에서도 서울FC에게 많이 밀리고 있죠?
 - 네. 흐름이 완전히 넘어간 상태입니다.
 
 중계석의 의견과는 달리 이태양 감독은 후반전 시작 전, 이런 말을 했다.
 
 - 앞서고 있다고 생각하지 마라. 부산FC는 29라운드 때 전반전을 끝낸 우리들의 모습이다. 종료 휘슬이 울리기 전까진 모두 최선을 다하도록.
 
 최민규는 이태양 감독의 말을 곱씹으며 후반전 항해를 위한 돛대를 펼쳤다.
 
 삐이익-
 
 무난히 경기를 진행하는 서울FC. 하지만 후반 29분. 위기를 맞았다.
 
 - 부산FC! 기회입니다!
 - 저 정도 위치면 직접 슈팅도 가능합니다!
 
 부산FC의 역습을 차단하려던 김종성이 거친 태클을 걸면서 프리킥을 허용했다.
 골문과 가까운 위치라 불안 불안했다.
 키커로는 미드필더 한 명이 나섰는데, 전반전부터 좋은 슈팅을 날리던 선수였다.
 골을 허용하지 않기 위해 인간 벽을 쌓는 서울FC.
 
 삑-
 
 상대 미드필더는 아랑곳 않고 힘껏 필드를 디뎠다. 바나나처럼 휘어들어간 볼이 인간 벽을 아슬아슬 지났다.
 권진수는 볼의 궤적을 확인하고 그쪽으로 몸을 날렸다.
 ‘이런.’
 잘 막았다. 엎어지며 펼친 손에 확실히 볼이 걸렸다. 하지만 그뿐이었다. 손을 맞고도 힘이 줄지 않은 볼이 그대로 골망을 갈랐다.
 필드가 한 순간 탄식에 휩싸였다. 반면 부산FC는 크게 환호했다.
 추격의 발판!
 이러다 포항FC와의 일전처럼 서울FC가 역으로 역전을 당할 수도 있었다.
 
 - 지금 상황. 어떻게 보십니까?
 - 서울FC가 오히려 다급해질 수도 있습니다. 골문을 틀어막든 한 골을 더 추가하든 해서 격차를 벌려놔야 합니다. 흐름이란 게 참 무섭거든요.
 
 중계석의 예상은 그대로 들어맞았다. 골 하나였음에도 불구하고 부산FC가 슬슬 기세가 올랐다. 축 쳐졌던 분위기를 많이 끌어올렸다. 슈팅횟수와 패스 성공률 면에서도 상승세를 보였다.
 최민규는 개의치 않았다.
 ‘안 진다.’
 약간일 뿐이다. 전반전과 비교해서 조금 나아졌음에 불과했다. 다급해질 이유가 없었다. 하던 대로 필드를 활보하며 상대를 교란시키면 되리라.
 하지만 후반 35분.
 만회골을 허용한지 불과 6분 만에 또 한 번 서울FC의 골망이 울렸다.
 중거리로 때린 슛이 그래도 골로 연결된 것이었다.
 단숨에 2:2가 되버린 상황.
 ‘젠장.’
 서울FC는 딱히 실수한 게 없었다. 이태양 감독의 말처럼 매 순간 최선을 다했고 방심도 안 했다.
 ‘후우.’
 그럼에도 불구하고 경기는 동점이 돼버렸다.
 
 - 후반 시작 전 서울FC의 우세를 말씀드렸던 게 무색해집니다.
 - 2:0을 따라잡은 부산FC가 정말 대단합니다.
 - 투지의 위엄이군요.
 
 이후 10분이 흘러 후반 45분. 정규 시간이 끝났다.
 몇 개의 파울과 간단한 부상을 감안해 추가 시간은 4분이 주어졌다.
 부산FC는 내친김에 한 골 더 넣어 대 역전 시나리오를, 서울FC는 전반전의 기세를 이어가 경기를 끝내고 싶어 했다.
 ‘아직 할 수 있다.’
 전반전에도 추가 시간에 두 번째 골을 터뜨렸다. 후반전이라고 못할 게 무엇인가?
 때마침 공격 기회를 얻은 서울FC.
 여태까지 급하게 롱패스만 올렸던 것을 잠시 억누르고, 찬찬히 볼을 올렸다.
 ‘빈틈이 없다.’
 2:2까지 따라온 마당에 부산FC가 쉽게 골을 허용할 리 없었다. 좌우측 측면과 페널티박스 근처까지 모두 꽁꽁 싸맸다.
 ‘안 무너지는 벽이 어디 있어.’
 이 세상에 완벽한 건 없다. 두드리면 열릴 것이요, 분명 어딘가에 빈틈이 있을 것이다.
 그곳을 찾아내는 게 지금 이 순간의 관건이자, 최민규의 막바지 숙제였다.
 일단 김종성이 박강현에게 짧게 패스했다. 살살 굴러가는 땅볼이라 터치하기엔 무리가 없었다.
 부산FC는 패스를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전진해서 수비하기보다 제 진영에 박혀서 들어오는 걸 막겠단 계산이었다.
 ‘좋아.’
 하프라인 근처에 있던 박강현은 오버래핑한 도진우에게 다시 볼을 넘겼다.
 
 - 들어가기가 쉽지 않죠.
 - 공간이 없거든요.
 
 수비수들이 미리 대기하고 있어서 무작정 달려갔다간 빼앗길 공산이 컸다.
 도진우는 중앙 쪽으로 볼을 돌렸다.
 볼을 받은 이는 성준한. 그의 시야에 적 진영에 자리 잡은 최민규가 들어왔다.
 ‘미칠 노릇이군.’
 발끝에 볼을 걸친 최민규는 11명의 적군을 보았다.
 전원 수비.
 철벽이 따로 없었다. 부산FC 입장에선 이번에 골만 허용하지 않으면 최소 무승부. 그래서 던진 한수였다.
 ‘해답이 있을 터.’
 수비만 해서 골을 허용하지 않는다면 이 세상 모든 축구 구단이 그 전술을 쓸 것이다. 지지 않는 방법이 있는데 안 쓸 이유가 없다. 하지만 지금 부산FC의 모습은 아주 이따금 나온다.
 왜?
 역습이 어렵다. 공격 대형을 갖추는데 오래 걸린다. 중거리 슛에 취약하다. 짧게 패스를 이어가면 금세 수비진이 흔들리다. 이유야 많고 많다.
 최민규의 눈에 이채가 어렸다. 페널티박스와 멀찌감치 거리를 둔 그는 볼을 툭툭 오른쪽으로 밀며 몇 걸음 이동했다. 그리고 대뜸 슈팅을 날렸다.
 
 - 최민규 선수! 중거리슛!
 - 이야! 들어갑니다!
 - 골, 골, 골입니다!
 - 최민규 선수가 해트트릭을 기록하네요!
 
 찾기 힘들었다. 수비진의 견고함도 그렇고 공간 자체도 너무 작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최민규는 포기하지 않았다. 그게 지금의 결과를 만들었다.
 최민규는 무릎 꿇고 양 손을 치켜들며 크게 소리 질렀다.
 “와아아!”
 동시에 정말 기분 좋은 소리가 들린다.
 
 ●해트트릭으로 인해 경험치가 대량 상승합니다!
 ●해트트릭으로 인해 명성이 0.9 상승합니다!
 ●레벨이 11로 올랐습니다!
 ●퀘스트 조건을 완료했습니다!
 
 경험치가 대량 상승하며 레벨이 11로 올랐다. 명성도 0.9나 상승했다.
 ‘됐어!’
 무엇보다 최민규의 귀를 밝히는 건 퀘스트 조건을 완료했단 소리였다.
 ‘역시 불가능은 없구나!’
 최민규를 축하해주기라도 하는 듯 관중석에서 어마어마한 함성이 터져 나왔다.
 벤치에서도 예상치 못한 골을 두고 크게 소리를 질렀다.
 “너, 이 새끼!”
 “오늘 정말 한 턱 쏠 준비해라!”
 “축하한다, 민규야!”
 “MOM은 따 놓은 당상이다!”
 오늘따라 머리를 두드리는 손의 힘이 더욱 더 강하다. 동료들도 기쁨을 주체하지 못한 것이다.
 최민규는 눈물이 날 지경이었다. 겹경사로 찾아온 행복에 가슴이 쿵쾅쿵쾅 요란법석을 피웠다.
 세레모니는 금방 끝냈다. 아직 경기가 완전히 끝나지 않았으니 축포를 터뜨리기엔 일렀다.
 
 - 서울FC! 방심하지 않죠!
 - 2분만 더 버티면 되니까요!
 - 부산FC가 총 강세를 펼치고 있습니다!
 
 다 잡은 경기를 지는 것만큼 억울한 것도 없다.
 서울FC는 진영을 틀어막은 채 수비에 전념했다. 이 순간만큼은 무조건 공격이라는 전술을 버리는 게 좋았다.
 
 삑- 삑- 삐이익-
 
 - 치열했던 양 팀의 승부! 결국 서울FC가 승리의 깃발을 가져갑니다!
 - 최민규 선수에게 보상금이라도 줘야겠는데요?
 - 오늘 아주 활약이 컸죠?
 - 네. 최전방 스트라이커로써 무려 3골을 넣어주었습니다.
 - 정말 오랜만에 K리그에 해트트릭이 나왔군요.
 
 # 위기 봉착
 
 끝날 때까지 끝난 게 아니다.
 서울FC가 이 말을 십분 증명하고 있었다. 리그 중반까지 7위를 달리다가 계속된 연승으로 5위까지 치고 올라왔다.
 우승은커녕 준우승도 못 미치는데 뭐 그리 대수냐고?
 3위까지만 확정지으면 내년 AFC챔피언스 진출이 가능하다. 트레블 중 하나라 불리는 그 컵을 들어 올릴 수 있는 기회가 생긴다.
 정규시즌 종료 후 6강 플레이오프에서도 약간은 유리한 고지를 점한다. 첫 게임을 6위 팀과 할 수 있으니까.
 결론적으로.
 “자! 다들 조금만 더 힘내보자!”
 경기를 끝내고 숙소로 복귀한 선수들에게 파이팅을 넣는 이태양 감독이었다.
 더욱 더 솟는 의지!
 선수들은 저마다 결의를 다지며 남은 라운드도 잘 끝내리라 다짐했다.
 따로 추가 훈련은 없었다. 정상이 코앞이라고 무조건 달리는 건 옳지 않았다.
 하지만 최민규는 홀로 훈련장에 남았다. 부단히 필드를 누빈 터라 체력이 많이 떨어졌지만 한 가지 확인할 게 있었다.
 변화 퀘스트 중 그 첫 번째 클리어!
 그 다음 조건으로 무엇이 나올지 궁금했다.
 
 ●돌파형 변화를 위한 두 번째 퀘스트를 진행하시겠습니까?
 
 ‘응!’
 
 ●공식 경기에서 수비수 세 명을 제치고 골을 기록하십시오.
 
 ‘갈수록 태산이네.’
 해트트릭이야 그렇다 쳐도 이번 조건은 아무래도 돌파형 변화를 위한 초석 같았다.
 과연 네가 돌파형에 적합한지 보겠다 하는 느낌.
 최민규는 한숨을 내쉬면서도 낙심하거나 부정적인 생각은 안 가졌다.
 해트트릭은 과연 쉬운 일이었는가?
 똑같이 어려웠다. 아니, 어쩌면 더. 이번 조건에도 구태여 겁먹을 필요가 없었다.
 퀘스트창을 닫고 상태창을 띠웠다. 좀 전 경기에서 11레벨을 찍은 터라 그 결과물을 나눠야 했다.
 ‘드리블에 세 개, 슈팅에 한 개, 결정력에 한 개를 주자.’
 어느 스탯도 안 필요한 게 없다. 패스, 공간창출, 체력, 민첩성 등등 모두 좋은 경기를 위한 조건이다.
 ‘퀘스트를 클리어하려면.’
 수비수 세 명을 제치려면 나머지 스탯보단 드리블과 슈팅, 그리고 결정력이 가장 주요할 것이다.
 최민규는 가볍게 몸을 풀었다. 지친 몸으로 뭘 하겠느냐만 훈련장이라도 한 바퀴 돌아야 직성이 풀렸다.
 
 ***
 
 기적이었다.
 서울FC는 모두의 예상을 깨고 남은 다섯 라운드 중 무려 세 라운드에서나 승리를 따냈다.
 덕분에 순위는 다시 한 단계가 올라 4위.
 초반에 차이가 벌어지지 않았다면 그 이상에 이상도 바라봤을 터였다.
 아쉽게도 이어진 두 라운드에선 1무 1패를 기록, AFC챔피언스리그의 꿈은 멀어지는 듯했다.
 “아직 희망이 있다.”
 이태양 감독은 선수들을 독려했다.
 3위인 수원FC와의 승점 차는 불과 2점.
 만약 오늘 마지막 33라운드에서 서울FC가 승리하고 수원FC가 패한다면?
 가능성은 충분했다.
 자력으로 진출할 수 없음이 아쉽지만 기회가 있다는 것에 만족스러운 서울FC였다.
 ‘후회는 없다.’
 실패한들 실망할 이는 없을 것이다. 7위에서 여기까지 온 것만 해도 이미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한 까닭이다.
 “민규. 하프타임 때 나갈 거니까 대비하고 있어.”
 “네, 감독님.”
 2012 K리그 클래식 마지막 33라운드, 서울FC VS 전남FC.
 최민규는 오늘 교체 선수로 나서게 됐다. 부산FC와의 경기에서 해트트릭을 기록, 좋은 활약을 했지만 서울FC엔 그것만으론 커버할 수 없을 만큼 인재가 많았다.
 길게 말할 것도 없는 서태준.
 옛 동료였던 성준한.
 발 빠르고 순발력 좋은 김민재.
 등등 공격자원이 넘쳤다. 최민규가 항상 선발로 뛰기엔 무리가 있었다.
 최근 경기의 영향도 있었다. 직전 경기와 그 전 경기에서 각각 풀타임, 70분을 출전했으나 이렇다 할 모습을 보여주지 못했다. 패스트 터치도 안 되고 결정력은 더더욱 떨어졌다. 신체에 달리 이상이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최민규는 아마 급한 마음이 그 원인이리라 생각했다.
 ‘퀘스트를 신경 쓰지 말자.’
 절세미인을 보면 절로 눈이 가듯 한 번 퀘스트를 받으니 계속 그것만 신경 쓰였다.
 볼 받으면 수비수 제칠 생각.
 심판이 휘슬 불어도 수비수 제칠 생각.
 심지어 코너킥이 날아와도 수비수 제칠 생각.
 스스로도 인정했다. 자신이 보기에도 과한 게 많았다. 그래도 나름의 변명거리는 있었다.
 수비수 세 명을 제치고 골을 넣으라는 조건 하나를 위해 벌써 한 달을 고생하고 있었다.
 ‘급할수록 천천히.’
 인생사에서 중요한 말 중 하나.
 이 순간 최민규에게 딱 적합한 말이다. 오래 걸린다고 조바심 내지 말고 도리어 여유를 가져야 한다. 그러면 두 번째 조건도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해결할지 모른다.
 최민규는 굳게 다짐하며 이태양 감독을 쳐다보았다. 한창 열변을 토하고 있었다.
 “지든 말든 상관 안 한다. 무리하지 말고 최선만 다 해라.”
 “예!”
 “라고는 해도 꼭 이겨라.”
 선수들은 푸훕 웃음을 터뜨리면서도 쩌렁쩌렁하게 목청을 높였다. 무조건 이기겠다면서.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이태양 감독이 아무리 성적에 연연하지 않는다지만 오늘 같은 경기까지 놓칠 정도는 아니다. 4위로 정규시즌을 마무리 하느냐, 아니면 기적적으로 3위로 올라가느냐의 문제니까.
 그래도 부담주지는 않는 이태양 감독이었다. 지면 가만 안 두겠다느니 하는 식의 으름장은 조금도 놓지 않았다. 이 자리까지 온 것만 해도 선수들에게 너무 고마우니까.
 파이팅을 끝으로 서울FC 선수들이 필드로 나갔다.
 시즌 마지막 경기라 오늘따라 관중이 구름을 이뤘다. 셀 수 없을 만큼의 막대 풍선과 갖가지 응원 기구들이 보였다.
 보는 것만으로도 힘이 났다. 홈경기인 탓에 더더욱 그랬다.
 최민규는 응원석에서 쏟아지는 자신의 이름, 그리고 동료들의 이름을 들으며 생각했다.
 ‘승리로 보답하자.’
 감독과 선수들만큼이나 승리를 바라고 있을 팬들이었다. 그들 역시 시즌 내내 함께 해왔으니까.
 서울FC가 늠름하게 해외 구단들과 자웅을 겨루는 그 모습!
 팬으로서 꼭 보고 싶을 것이다.
 최민규는 필드로 나가는 선발 선수들을 뒤로 하고 벤치에 앉았다.
 상대팀인 전남FC도 거의 비슷하게 나와 동료들끼리 볼을 주고받고 있었다.
 ‘전남FC. 만만치 않겠어.’
 전남FC가 어떤 점이 강하고 유연하며 특출한지 하는 것들은 일단 논외였다.
 이유?
 서울FC처럼 오늘 경기가 순위에 영향을 줄 수 있기 때문이었다.
 33라운드 시작 직전인 현재, 전남FC의 순위는 7위.
 오늘 경기를 따내고 6위 팀이 비기거나 질 경우 순위 반등을 노릴 수 있었다.
 정규시즌 6위의 의미는 크다. 열 두 팀 가운데 중간은 갔다고 말할 수 있음은 물론, 결정적으로 플레이오프 진출이 가능하다. 그래서 전남FC도 이 악물고 경기에 임할 것이다. 승리를 쟁취해야만 한 번 더 불꽃을 태울 수 있으니까.
 최민규는 필드를 바라봤다.
 심판이 선수들의 포메이션을 지시하며 센터서클로 주장을 부르고 있었다.
 
 - 2012 K리그 클래식, 마지막 33라운드. 서로 절대 승리를 양보할 수 없는 두 팀, 서울FC와 전남FC가 만났습니다.
 - 제가 더 긴장되는군요.
 - 양 팀 모두 오늘 경기가 너무 중요하죠.
 - 누가 이기던 치열한 내용이 나올 것 같습니다.
 
 선축은 전남FC부터였다. 공격수 두 명이 센터 서클에 서고 나머진 전부 각자의 진영으로 내려갔다.
 준비가 끝나자 주심이 기다렸다는 듯 휘슬을 입에 물었다.
 보이지 않는 신경전이 폭풍전야처럼 필드를 감쌌다.
 
 삐익-
 
 - 전남FC. 뒷선으로 물려 천천히 진행합니다.
 
 경기는 느릿느릿 진행됐다. 초장부터 열을 낼 필요는 없기에 소극적인 플레이가 나왔다.
 이해되는 상황이었다. 중요한 시험을 치르는데 푸는 과정은 생각 않고 답 맞출 생각만 할 순 없으니까.
 
 - 좌측으로 크로스!
 - 아쉽게도 라인을 넘어갑니다.
 
 전반 15분.
 최민규는 쩝쩝 입맛을 다셨다. 모처럼 기회를 맞았는데 아깝게 놓치고 말았다.
 크로스를 올린 박강현이 살짝 미간을 찌푸리고 있는 게 보였다.
 그 마음이 다분히 이해가는 최민규였다.
 득점주자가 있는 상황에서 볼이 아슬아슬하게 외야수의 글러브에 들어간 격이니까.
 최민규는 냉철하게 경기를 판단했다.
 ‘무난해.’
 우위를 판가름 할 수 없었다. 서로 공수를 주고받으며 혈전을 벌이고 있었다.
 특히 몸싸움이 가장 치열했다. 휘슬이 불리지 않는 선에서 밀고 당기고 누르며 각자의 상대를 압박하고 있었다.
 허나 예리한 심판의 눈을 끝까지 피할 순 없는 법.
 
 삑삑-
 
 최민규는 환호했다.
 ‘좋았어!’
 골문과 멀지 않은 프리킥 위치!
 괜찮았다. 슈팅 각도 있고 낮게 패스해 연계 플레이를 할 수도 있엇다.
 키커로 서태준, 정혁, 박강현 세 명이 나왔는데, 최민규는 아무래도 정혁이 차지 않을까 싶었다. 정혁의 정교한 킥이라면 바로 슈팅도 가능하기 때문이었다.
 서태준과 박강현은 별로냐고?
 솔직히 말하면 그렇다. 전자는 좋은 드리블 실력을 가졌지만 킥력이 떨어진다. 후자 역시 정혁에 비해 감각이 나쁘다.
 
 - 프리킥 위치가 적절합니다. 정혁 선수라면 직접 슈팅을 때려도 좋을 것 같습니다.
 - 패스 플레이도 가능하긴 하죠?
 - 네. 쭉 빼서 박스 쪽으로 침투한 공격수에게 찔러준다면 가능합니다. 촘촘한 수비진을 어찌 뚫느냐가 관건이지만요.
 - 아무래도 가능성은 슈팅에 둬야겠군요.
 - 그렇게 보입니다.
 
 심판의 휘슬이 울리자 박강현이 먼저 달려 나갔다. 얼굴은 정말 찰 것처럼 이를 앙 다물고 있었다.
 전남FC의 인간벽이 일순 움찔하다 내려앉았다. 프리킥 페이크야 질리도록 당했고 역으로 써먹기도 했었으니까.
 다음으로 서태준이 나섰는데, 마찬가지로 살짝 흔들리다 이내 건실한 벽을 세웠다.
 결국 최민규의 예상대로 정혁이 키커가 된 셈이었다.
 
 - 정혁! 슛! 살짝 뜨고 맙니다!
 - 아쉽군요! 조금만 낮았다면!
 
 골문 사이드로 떨어지는 볼은 잡기가 쉽지 않다. 그게 프리킥이라면 더욱 그렇다. 워낙 정확하고 빨라서 건드리기나 하면 다행이다.
 그런 점에서 정혁의 프리킥은 아쉬움이 크다. 살짝만 낮았다면 선취점을 뽑거나 코너킥을 만들 수도 있었을 텐데.
 헌데 최민규의 표정이 밝았다.
 ‘물꼬가 트이는 구나.’
 꽉 막힌 감이 있었다. 계속 공격하지만 이렇다 할 성과가 없었다. 하지만 지금 그게 깨졌다.
 위협적인 슈팅을 함으로 인해 분위기를 끌고 왔다. 빗나간 거야 어쩔 수 없는 거니 신경 쓸 문제도 아니었다.
 
 - 서울FC가 주도권을 가져오기 시작합니다.
 
 이후로 정말 경기가 서울FC쪽으로 기울었다. 점유율. 패스. 세트피스 등등 다방면에서 포인트를 땄다.
 
 - 놀라운 일이군요!
 
 아이러니하게도 승리의 깃발에 먼저 다가간 건 전남FC였다.
 전반 38분.
 하프라인 밑에서 잘 굴린 볼을 롱패스로 깊게 찌른 전남FC가 빠른 돌파와 패싱을 앞세워 선제골을 넣었다. 꺾인 기세를 단숨에 역전하는 순간이었다.
 
 - 멋진 슈팅이었습니다!
 - 앞서가는 전남FC!
 
 서울FC는 분주히 움직였다. 부담 없이 뛴다고는 하나 오늘 경기를 승리로 가져가고 싶은 마음은 누구보다 컸다. 그걸 이루기 위해선 전반전이 끝나기 전까지 균형을 맞춰주는 게 좋으리라.
 
 - 거세게 밀어붙이는 서울FC입니다!
 - 박강현 선수! 하프라인 위로 치고 올라갑니다!
 
 원래 서울FC의 전술은 닥치고 공격이다. 수비와 조화만 갖추면서 포메이션은 주도권을 잡는데 열중한다.
 그게 지금 더 특히 두드러지고 있다. 초원 위의 야생 들소처럼 상대 진영을 마구 파고든다.
 
 - 깔끔한 수비!
 - 라인 밖으로 벗어납니다.
 
 전남FC는 침착하게, 그러면서 유연하게 대처했다. 급박한 상황이라고 허둥지둥 하지 않았다.
 1부리거들 다운 모습!
 결국 전반전은 0:1 스코어 그대로 끝나고 말았다.
 
 - 후반전엔 더욱 뜨거운 양상이 기대됩니다.
 - 선수 교체도 꽤 활발할 것 같군요.
 
 하프타임 간 이태양 감독은 별 다른 지시사항을 내리지 않았다. 전반전에서 한 대로 쭉 밀어붙이라고 했다.
 닥치고 공격!
 
 <『축구 온라인』 2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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