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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序)

2015.10.13 조회 4,846 추천 129


 서(序)
 - 너는 이미 영웅(英雄)이로구나!
 
 
 “독하구나. 독해. 허허허.”
 역겨운 피비린내가 진동하는 평야의 한가운데에서 나이를 종잡을 수 없는 노인이 웃었다.
 열다섯 즈음의 또래로 보이는 네 아이들은 웃고 있는 노인을 두려운 눈빛으로 훔쳐보았다.
 그들의 목숨이 경각에 처했을 때 나타난 노인이 십여 명의 적들을 손짓 몇 번으로 제압했기 때문이었다.
 차마 꿈속에서조차 그렇게 놀라운 광경을 본 적이 없는 아이들이었다.
 그렇게 감히 노인의 얼굴을 제대로 보지 못하는 상황에 선두에 있던 아이만이 빤히 고개를 들고 있었다.
 노인은 샛별처럼 빛나는 그 아이의 까만 눈동자가 무척이나 마음에 들었다.
 “네 이름이 무엇이냐?”
 “성은 남(南), 이름은 무린(務鱗)입니다.”
 얼어붙은 평야에는 일백이 넘는 시신들로 인해 짙은 혈향(血香)이 맴돌고 있었다. 굳이 소년들이 말하지 않아도 상황은 얼추 짐작할 수 있었다.
 무린이라는 아이와 세 동료는 패잔병이었다. 그리고 추격자들과 격렬하게 싸우면서 도망치는 중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피투성이의 무린이 방금 노인이 한 말을 상기하고는 대답했다.
 “독하다 하셨지만, 독하지 않으면 살아남을 수 없는 것이 전쟁입니다. 이름을 알려주시면 훗날 반드시 갚겠습니다. 살아남는다면…… 말입니다.”
 무린의 음성은 공손함 속에 경계심을 담고 있었다. 자색(紫色)의 낡은 도포를 입고 있는 노인은 무린을 응시하며 말했다.
 “난 내 이름을 잊은 지 오래다. 그건 그렇고, 정말 대단하구나. 장정들도 모두 전사했는데 최후까지 남은 이들이 새파랗게 어린 너희들이라니.”
 노인의 느릿한 말에 무린의 호흡이 빨라졌다.
 다른 무리의 추격자들이 언제 들이닥칠지 모르는 상황에서 한가하게 문답이나 나누고 있을 시간이 없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무린은 애써 차분한 얼굴로 대답했다.
 “비록 나이는 어리지만 이들과 저는 전장(戰場)에서 거두어졌고 그곳에서 자라왔으니까요.”
 노인은 어느 정도 납득이 간다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며 질문을 던졌다.
 “너희들을 이렇게 만든 적들에 대한 증오심이 대단하겠구나?”
 피식.
 무린이 고개를 저으며 실소를 흘렸다. 노인은 의외란 생각에 다시 물었다.
 “그렇지 않다는 것이냐?”
 “전쟁이니까요.”
 피식.
 노인도 실소를 흘렸다.
 우문현답(愚問賢答).
 전쟁이란 상대를 죽이지 않으면 당연히 자신이 죽는 것이다.
 노인은 이리 어린 나이에 그런 것을 알고 있는 무린이 대견스러우면서도 안쓰러웠다.
 또한 자신의 안목이 정확했다는 생각에 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하지만 섣부른 판단은 독(毒)이라는 사실을 노인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렇다면 복수를 하지 않겠다는 뜻이구나.”
 무린은 대답하지 않았다. 너무 당연한 것을 대답할 필요성을 못 느꼈기 때문이었다.
 약한 자에게 돌아갈 자비란 것은 오직 강자만이 결정할 수 있는 법이다. 강자가 단 하나도 남기지 않고 죽이라 명했다면, 약자는 그것을 거스를 수 없었다.
 그것은 전장에서 당연하게 받아들여지는 불문율이었다. 노인은 무린의 눈빛과 근골을 다시 유심히 보다가 물었다.
 “강해지고 싶으냐?”
 예상치 못한 뜻밖의 말에 무린의 눈에 당혹감이 피어났다. 노인은 그런 무린을 직시하며 말을 이었다.
 “나를 따라오너라. 내 너를 세상에서 가장 강한 이들 중 하나가 되게 해주마.”
 세상에 이토록 광오(狂傲)한 말이 있을까? 지나가다가 이 말을 우연히 들은 사람이 있다면 배꼽을 잡고 파안대소할 말이었다.
 그러나 무린과 세 소년은 웃지 못했다.
 노인이 기세등등했던 십여 명의 적을 단지 손짓 몇 번으로 잠재운 것 때문만이 아니었다.
 노인이 말하는 순간 모두는 그 말이 한 치의 거짓도 없을 거라 직감했던 것이다.
 그건 단순한 말이 아니라 울림이었다. 귀뿐만 아니라 머리와 가슴까지도 울리게 하는 괴이한 경험이었다.
 어느새 침착함을 되찾은 무린이 눈을 빛내며 물었다.
 “어르신께서는 저와 이 친구들을 제자로 받아들이시겠다는 겁니까?”
 노인이 흐릿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니다. 저 아이들은 아니다. 내 마음에 든 것은 무린이, 너 하나일 뿐이다. 아쉽지만 난 넷을 가르칠 정도로 시간적인 여유가 없으니……. 으음. 너희들을 쫓는 사람들이 있으니 서두르는 것이 좋겠구나.”
 말을 듣는 내내 미간과 눈살을 동시에 찌푸리던 무린은 입술을 꾹 깨물었다.
 노인은 무린의 입가에 생긴 차가운 미소가 점차 얼굴 전체로 번져나가는 모습을 말없이 바라보았다.
 “죄송하지만 어르신의 고마운 제안을 받지 못하겠습니다.”
 어떤 일이 있어도 흔들릴 것 같지 않던 노인의 눈동자가 파문을 일으켰다. 노인은 무린의 눈동자를 잠시라도 놓칠 새라 뚫어지게 바라보며 말을 받았다.
 “살 기회를 버리고 죽겠다는 것이냐? 어설픈 전우애나 우정이 목숨보다 더 중요하다는 것이냐? 전장터에서 부상당한 전우를 보살피는 것은 소탐대실(小貪大失)일 뿐이다.”
 “…….”
 “무릇 장부란 크고 넓게 보아야 하지. 작은 희생에 얽매여서는 더 큰 피해를 자초하게 될 뿐이다.”
 “압니다.”
 무린이 여전히 냉담한 어조로 대답했다.
 “허허허. 안다? 아는 녀석이 살 수 있는 기회를 차버리겠다는 것이냐? 아니 살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너는 매우 강한 무공을 배울 수 있는 기회도 잃게 되는 것이다. 훗날 너에게 명예와 권력, 그리고 부(富)가 따라올 호기를 놓치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도 나를 따르지 않겠느냐?”
 노인이 꾸짖는 어조로 무린을 다그쳤다. 그러나 무린은 고개를 돌려 후위에 서 있는 세 동료의 얼굴을 하나씩 바라보고 난 뒤 대답했다.
 “어르신의 말씀 모두가 옳습니다. 하지만 그 옳은 말씀들이 저의 가슴에 와 닿지 않기 때문입니다.”
 노인의 눈빛이 바다보다 더 깊어졌다.
 “무슨 뜻이냐?”
 “방금 전 보여주신 어르신의 능력이면 저 뿐만 아니라 여기 있는 세 명도 충분히 구해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이들을 방관하는 어르신이라면…… 전 어르신을 따르지 않을 것입니다. 그렇게 몰인정한 분을 스승으로 모시고 제가 배울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
 예상치 못한 대답에 노인은 말문이 막혔다.
 뒤통수를 둔기로 맞은 것처럼 머리가 멍했다. 그때 부상을 입고 있는 세 아이가 머뭇거리다가 한 명씩 입을 열었다.
 “대장……, 우린 괜찮수.”
 “그래, 대장 아니면 우린 벌써 죽었어.”
 “하하하. 우리 걱정은 붙들어 매라고. 반드시 살아남을 테니까. 나중에 꼭 다시 만나자고.”
 무린 또래의 아이들이 웃으며 말했다. 피투성이의 세 얼굴은 웃고 있었다. 그러나 그들의 눈에 어려 있는 것은 분명 두려움과 슬픔이었다.
 그들을 복잡한 시선으로 보던 무린이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너희들에게 말했었다. 죽거나…… 혹은 병신이 되어 남은 동료들에게 짐이 되지 않는 이상 끝까지 함께 간다고! 난…… 내 스스로 한 말을 지키고 싶은 것뿐이야. 어차피 한 번 죽는 삶이다. 가치 있게 죽자.”
 노인은 소년들의 대화를 들으며 쓴웃음을 깨물었다. 그리고 무린을 노려보며 물었다.
 “노부를 따라가 제자가 되어 강해지는 것은 가치 있는 삶이 아니고, 여기서 개죽음을 당하는 건 가치 있는 것이란 말이냐?”
 무린은 입을 열었다 다물기를 몇 차례 반복했다. 그리고는 곧 엷은 한숨과 함께 대꾸했다.
 “제가 아직 어리고 배움이 짧아 어떤 것이 가치 있는 것인지 잘 모릅니다.”
 “……?”
 “다만, 저 홀로 어르신을 따라간다는 생각을 할 때 제 마음이 너무 아팠습니다. 그런데 이 친구들과 함께 남으면 어떨까 생각하니까 죽음이 두렵긴 하지만 마음이 편해졌습니다.”
 노인은 침묵했다.
 하지만 그런 노인의 눈에 생기(生氣)가 피어나고 있었다.
 무린이 다부진 입술을 꾹 깨물었다가 단호한 어조로 말했다.
 “전…… 제 삶을 살고 싶습니다. 누군가의 꼭두각시로 부귀영화를 누리며 오래오래 사는 것보다 짧게 살아도 진짜 삶을 살고 싶습니다. 그런 의미로 죽음도 제 의지대로 선택할 것입니다.”
 “진짜 삶이라. 죽음도 네 의지대로 선택하겠다고?”
 노인은 자신이 수십 년 만에 설레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의 눈이 오랜 세월 속에 묻어두었던 희미한 추억을 더듬었다.
 달랐다.
 예전 자신이 거뒀던 제자들과의 첫 만남.
 근골의 뛰어남이나 무서울 정도로 빛나던 눈동자는 비슷했으나 사고방식은 너무나 달랐다.
 잠시간 대화를 나눈 것으로 어찌 한 사람을 다 알 수 있겠냐 만은 노인은 무린의 말이 진심임을 느낄 수 있었다.
 두두두두.
 그때 그들의 오른쪽에 위치한 구릉 저편에서 말발굽 소리가 희미하게 들리더니 점차 커졌다. 그러자 무린의 표정이 다급해졌다.
 “추격대가 지척에 다가와서 더 이상 여기서 지체할 수가 없습니다.”
 노인이 대꾸할 기미를 보이지 않자 무린은 급히 허리를 숙였다 펴고는 다시 말했다.
 “살아남는다면, 그리고 다시 만나게 된다면 오늘 도와주신 은혜는 반드시 갚겠습니다.”
 무린 일행이 채 서른 발자국도 움직이기 전에 구릉 위로 수십의 기마대(騎馬隊)가 올라섰다.
 그들은 평야의 상황을 보고는 대노하여 언덕 밑으로 질주하기 시작했다.
 노인은 뿌연 흙먼지를 일으키며 다가오는 그들을 무덤덤한 얼굴로 보다가 어느새 훌쩍 떨어진 무린의 등을 바라보았다.
 “지친 너희들의 몸으로 말을 탄 저자들을 따돌린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마지막으로 묻겠다. 개죽음을 당하겠느냐? 아니면 지금이라도 내 제안을 받아들이겠느냐?”
 나직하게 말했지만 노인의 음성은 무린의 고막으로 뚜렷하게 파고들었다.
 무린은 오십여 장 떨어져 있는 숲을 향해 전력을 다해 도망치면서도 큰 목소리로 대꾸했다.
 “저도 마지막으로 어르신께 한마디 드리자면…… 그렇게 살지 마십시오!”
 “……!”
 노인의 눈이 치켜떠졌다. 하지만 그의 가슴 깊은 곳에서부터는 웃음이 터져 나오고 있었다.
 무린이라는 아이는 멋지게 자신의 시험을 통과한 것이었다.
 저 아이라면…… 예전의 그 제자들처럼 자신을 배신하지 않으리라. 자신이 죽고 난 뒤에도 옳은 길을 가리라.
 “허허허. 허허허허…….”
 갑자기 터진 노인의 웃음소리가 허공을 우레처럼 울렸다. 노인이 갑자기 웃음을 멈추고 정색했다.
 “넌 이미 영웅이로구나. 부디 지금 네가 한 말을 잊지 말거라. 죽음보다 더 강한 너의 양심과 신념. 그 두 가지를 잊지 않는다면, 넌 강호의 희망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니. 부디…….”
 노인은 다시 웃음을 터트렸다. 그 웃음은 한참 동안이나 계속됐다.
 수십의 기마대가 속절없이 그 앞에서 무너져 내리는 순간에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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