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윈드스톰 1권-1

2015.10.14 조회 1,441 추천 14


 프롤로그
 
 싸한 향이 가득한 침대 위에는 갓 스무 살이 된 듯 보이는 청년이 눈을 감은 채 누워 있었다. 빛나는 은색의 머리카락, 짙은 눈썹과 살짝 드러난 속눈썹, 새하얀 피부의 청년에게는 아무런 움직임도 없었다.
 햇빛은 더욱 길어져 이제는 침대 위까지 올라왔다. 길어진 만큼 더 약해진 햇빛이 청년의 눈을 자극했다.
 “으…….”
 입에서 신음이 새어 나왔다. 잘생긴 입술이 바르르 떨렸다. 청년에게서 이런 움직임이 보인 것은 정확히 일 년하고도 열흘이 지났다. 점차 움직임은 격렬해졌다. 그에 비례해 청년의 이마, 목, 팔, 가슴에 맺혀 흐르는 땀도 많아졌다.
 청년은 아무런 말도 없이 눈만 뜬 채 천장을 바라보았다. 체크무늬의 연속. 검붉은 줄무늬와 검푸른 줄무늬가 반복되어 이어지고 있었다.
 “…이곳은 어디지?”
 청년의 입술이 열리며 건조해서 갈라지는 듯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곧 청년은 땀범벅이 된 상체를 일으켰다. 귀족가의 화려한 실내 장식이 눈에 들어왔다.
 청년은 두 팔로 몸을 지탱한 채 사방을 둘러보았다. 도무지 아무것도 기억이 나지 않았다. 머릿속이 새하얀 방처럼 말끔히 씻겨 그 안에 무엇이 있었는지 알 수가 없었다.
 한참 끝에 청년은 다시 상체를 눕힌 후 눈을 감았다. 그는 여전히 자신이 누구인지, 이 방이 어디인지 알 수 없었다.
 삼공자 윈드가 깨어났다는 소식은 공작가 전체를 단숨에 관통했다. 하인이든, 하녀든, 공작가 소속 기사단의 기사들이든 상관치 않고 두세 사람이 만나면 깨어난 삼공자에 대한 이야기를 입에 올렸다. 윈드의 가족도 예외는 아니었다.
 저벅저벅.
 현재 수도 울펜으로 간 공작을 제외하고 장남인 요우와 차남인 바크 그리고 막내이자 유일한 금지옥엽인 세이린이 하인, 하녀들을 대동하고 깨어난 윈드를 만나러 가기 위해 열심히 걷고 있다.
 덩치가 크고 기골이 장대한 바크는 ‘스톰의 바바리안’이라는 별명을 가질 정도로 힘이 세고 거침이 없었다. 히죽 이를 내어 보이며 웃는 바크의 눈은 부리부리했고 코와 입도 모두 커 제국의 서쪽을 평정한 스톰 공작가의 명성을 입증하기에 충분했다.
 그에 비해 장남인 요우는 몸이 가늘고 얼굴이 하얀 귀공자였다. 바크에게 거대한 도가 어울린다면 요우에게는 가볍고 빠르게 휘두를 수 있는 얇은 검이 어울렸다. 푸른색의 머리는 흰 피부와 잘 어울려 ‘스톰의 나이트’라고 불리기에 충분했다.
 막내인 세이린은 두 오빠 뒤를 천천히 따라갔다.
 요우, 바크, 세이린이 안으로 들어가자 백향목의 침대 옆에는 공작부인 유렌이 앉아 있었고 그 주변으로 하녀 세 사람과 공작가에서 가장 유능한 의사인 마타가 서 있었다.
 들어온 세 사람은 일제히 방 중앙 침대 위의 청년을 바라보았다. 태피스트리 커튼을 통해 들어온 아름다운 햇빛이 윈드를 비추고 있었다.
 윈드는 매우 건강해 보였다. 일 년을 침대에서 먹지도 않고 지낸 사람 같지 않았다. 볼은 발그레했고 입술은 새벽의 이슬을 머금은 장미처럼 선명한 적색이었다.
 “윈드…….”
 “…윈드.”
 “윈드 오빠…….”
 저마다 다른 느낌의 말이 새어 나왔다. 요우와 바크의 목소리에는 예기치 못한 감정이 느껴졌고 세이린의 음성은 감격이 묻어 나와 방 안을 가득 울리다 서서히 줄어들었다.
 하지만 윈드는 그저 아름다운 검은 눈동자를 아주 조금 움직였을 뿐 반응이 없었다. 분명히 깨어났지만 어딘지 모르게 분위기가 달랐다.
 “이리들 와서 앉거라.”
 공작부인 유렌의 싸늘한 목소리.
 “어머님을 뵙습니다.”
 “어머님을…….”
 요우와 바크는 그제야 어머니인 유렌이 먼저 와 있음을 깨닫고는 예를 갖추었다. 하지만 차가운 유렌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그만해라. 이리 와서 앉도록 해라. 무엇보다 윈드가 깨어난 게 중요하니까 말이다. 마타, 말하세요.”
 공작부인은 아랫사람들에게 인기가 좋았다. 하녀라고 해서 무시하지 않았고 문지기라고 해서 하찮게 생각하지 않았다. 특히 마타와 같이 한 분야에서 인정받는 사람에게는 존칭을 했는데 그런 행동은 스톰 공작가에 인재들이 모이게 하는 원동력 중 하나였다.
 마타가 말했다.
 “윈드 공자님은 기억을 잃으셨습니다. 모든 것을 잃으신 건 아니지만, 기본적으로 과거에 알았던 사람들이 누구인지, 자신이 누구인지에 대해 모른다고 보시면 됩니다.”
 “잘 들었겠지? 그러니 윈드에게는 당장의 안정과 더불어 형제들인 너희들의 보살핌이 필요하다. 당분간 윈드는 이곳 여명의 성이 아니라 나와 함께 머물 테니 그렇게 알도록 해라.”
 공작부인 유렌의 말은 통보였다. 스톰의 바바리안도, 스톰의 나이트도 그 말에 따라야만 했다. 어색한 분위기. 윈드는 말없이 가족 사이에 형성된 긴장감을 관찰하고 있었다.
 
 
 1. 부활
 
 시원했다.
 윈드는 자신이 누구인지 기억하지 못하는데도 애마 아틸라는 그를 기억하고 있었다. 한때 타켄 공작의 애마였던 아틸라의 주인은 한 사건으로 인해 윈드로 바뀌었다. 그 누구도 올라탈 수 없었던 명마 아틸라와 함께 성 구석구석을 누비는 윈드의 모습에 타켄 공작은 호탕하게 웃으며 애마를 윈드에게 줘 버린 것이다.
 베렝 성 밖으로 이어진 길은 온통 황록색의 벼가 가득한 논의 중앙을 꿰뚫듯 지나갔다. 시원한 바람을 느끼던 윈드는 문득 예전에도 이런 적이 많았음을 깨달았다. 왠지 모를 친근함이 가슴을 메웠다. 화가 나거나 답답한 일이 있을 때면 아틸라를 타고 밖으로 나왔을 것이다. 어깨 위로, 허리 옆으로, 발아래로 스치듯 지나가는 바람의 숨소리는 귀에 익었다.
 “기분이 어떠냐?”
 상체를 숙여 목덜미를 손으로 만져 주는 윈드의 행동에 아틸라는 기분이 좋은 듯 앞으로 내달렸다. 뒤에서 쫓아오는 다섯 명의 기사들이 윈드를 따라올 수 없을 정도로 아틸라는 빨랐다. 몸 전체를 감싸는 듯 발달한 근육이 화려한 춤을 추고 있었다.
 “너도… 오랜만이었겠구나.”
 윈드가 침대 위에 있는 동안 아틸라는 마구간에만 있었다. 가끔 마구간지기 피덴이 아틸라를 끌고 나오기는 했지만 단 한 번도 이처럼 시원하게 달릴 수는 없었다.
 히히힝.
 아틸라는 물론 그 위에 올라탄 윈드 역시 자유를 만끽했다. 아직도 깨어났다는 것, 자신이 공작가의 일원이라는 사실이 그리 실감 나게 느껴지지는 않지만 다른 무엇보다 살아 있다는 것은 사실이며 진실이었다.
 “지칠 때까지 달려 보자!”
 오랜만에 윈드의 말에 감정이 섞이자 아틸라의 온몸은 마치 근육 덩어리로 변한 듯 탄력을 받으며 꿈틀 대기 시작했다. 작은 개울을 단숨에 뛰어넘고 언덕 위로 한 번에 올라간 아틸라에게 거칠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이런…….”
 뒤따라온 기사들은 녹초가 되었다. 기사들뿐 아니라 그들을 태우고 온 말들 역시 지친 상태였다.
 “다른 건 몰라도 말 타는 솜씨는 여전하셔.”
 “그래, 일 년 만에 깨어나셨는데도 기마술은 변함이 없으시다. 아에큠이 도우신 게지.”
 “대체 누가 삼공자님을 혼수상태에 빠뜨린 걸까?”
 “누가 알겠어? 루테니아 삼대 공작가 중 하나인 스톰 공작가이니만큼 그 암투는 상상을 초월하겠지. 안 그래?”
 “그렇고말고.”
 “삼공자님은 깨어난 이후 성격이 바뀐 것 같아. 예전에는 귀엽고 사랑스러웠는데 지금은 조금 차갑고 냉정한 것처럼 보이니까 말이야. 하긴, 눈을 떴는데 기억나는 사람이 하나도 없으니 그럴 만도 하지.”
 “기억이 없다는 게 사실이야?”
 “여명의 성에서 일하는 시종을 내가 좀 아는데, 사실이라고 하더군. 심지어 공작부인조차도 알아보지 못했다던데?”
 “일 년 동안의 혼수상태에 이어 이제는 기억상실증까지? 삼공자님이 불쌍해.”
 “불쌍하긴, 그래도 공작가의 자제잖아.”
 “뭐? 너라면 그 나이에 기억까지 다 잃고도 멀쩡하겠냐?”
 “그건 아니지. 그래도 삼공자님은 그런대로 잘 해 나가고 계시잖아.”
 기사들의 이야기는 언제까지나 계속 이어질 태세였다. 앞쪽에 선 적발의 기사가 입을 열었다.
 “그만. 최대한 빨리 쫓는다.”
 그가 말하고 앞으로 내달리자 기사들은 입을 다문 채 뒤처지지 않기 위해 이를 악물었다. 말은 근육을 최대한 움직여 빠르게 달려 나갔다.
 원래 윈드는 말 타는 것만 좋아할 뿐, 스톰 공작가의 일원으로 당연히 배워 익혀야 할 전투술 혹은 기초적인 마법 아이템 다루는 법 그리고 스톰 기사단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었다. 그보다는 말을 타고 평원을 달리거나 아주 오래된 옛일 중 영웅에 관한 일대기를 볼 뿐이었다. 그것도 아주 가끔.
 “어쩔 수 없다. 말이 쓰러지는 한이 있더라도 갈 수밖에.”
 기사들은 말을 재촉해 또 달리기 시작했다. 혹시라도 윈드에게 무슨 일이라도 생길 경우, 오랜 고생과 훈련으로 지금의 자리에 이르게 된 기사들은 하루아침에 공작가에서 쫓겨나게 될 것이다.
 기사들에게 스톰 공작가는 꿈에서도 그리는 이상적인 곳이었다. 귀족가라서 평민에 대한 차별은 여전히 존재했지만 그 정도가 다른 곳에 비해 현저하게 낮았다. 스톰 공작가는 그야말로 실력 위주였고 그 때문에 많은 인재들이 몰리는 곳이었다.
 기사들은 이를 악물고 말을 다루었다. 말이 쓰러지지 않도록 하는 가운데 멀리 가야만 하는 것이다.
 
 @
 
 한참을 달리다 보니 숲이었다. 나무들이 빽빽해 말을 달리지 못할 정도는 아니지만 자신도 모르게 온 곳이라 윈드는 아틸라를 멈추고 사방을 조심스럽게 바라보았다. 깨어난 이후, 윈드에게는 사물을 바라보고 또 바라보는 버릇이 생겼다.
 숲의 일부는 노랑과 빨강의 절묘한 조화 속에서 새롭게 태어난 듯 옷을 바꿔 입은 것 같았다. 기묘한 침묵이 무겁게 흐르는 숲의 축축한 바닥 위로 솟아오른 나무들은 제각기 정해진 자신만의 색으로 잎사귀를 변화시키려고 안달이 난 것 같았다. 바람은 사방에서 실처럼 불어왔고 그 때문인지 숲 속은 고드름을 손에 올려놓은 것처럼 서늘했다.
 척.
 가볍게 아틸라에게서 내린 윈드는 기분이 좋았다. 사람이 아니라 나무들 사이에 서서 가슴 깊이 신선한 공기를 들이마신다는 게 얼마나 큰 축복인지 알게 된 그였다. 공기는 폐를 가득 채웠다가 밖으로 빠지면서 윈드가 지니고 있던 감정의 기묘한 찌꺼기들을 몰고 나갔다.
 사람들에게 둘러싸이면 삼공자 윈드로서 행동하고 말해야만 했다. 그중에서도 어머니인 유렌과 동생인 세이린 앞에서는 더욱 그랬다. 그들의 기대를 어느 정도 충족시켜야 했다. 왠지 그래야 할 것 같았다.
 “내가 정말 스톰 공작가의 셋째 윈드일까?”
 윈드의 목소리는 냉정했고 진지했다. 정말 그 자신은 실감이 가지 않았다. 상류 사회의 까다로운 예의가 거북하지 않고 수십 가지의 요리에 익숙한 걸 보면 자신이 윈드일 거라는 생각이 지배적이었다.
 하지만 너무도 성격이 달랐다. 과거의 윈드는 사람들에게 사랑스러웠으며 장난기가 많은 청년이었다. 그는 사람들에게 웃음을 주었고 누구에게든 먼저 다가가 말을 거는 청년이었다.
 그에 비해 자신은 어떠한가?
 말을 걸어온 사람에게도 냉정한 모습이 자연스러웠다. 의식하지 않으면 사람들은 자신이 화가 나 있는 게 아닐까 하며 착각을 하곤 했다. 꽉 다문 입, 크고 서늘해서 정면에서 바라보기가 거북한 눈동자, 감정과의 연결이 끊긴 듯한 무뚝뚝한 얼굴 근육들. 거기에 정반대의 성격을 가진 사람이라니.
 “상관없다.”
 윈드는 살아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만족했다. 일 년의 그 기간 동안 죽음과 삶의 경계에 있었다면 그 이상의 변화도 그리 대수로운 일은 아닐 것이다. 죽는 것보다는 사는 게 훨씬 나으니까.
 순간 윈드는 몸을 돌렸다. 뭔가 날카로운 느낌이 뒤에서 다가오고 있었다. 무엇일까? 너무도 날카로워 베일 것만 같은 느낌은 처음이었다. 가만히 있으면 그 보이지 않는 기운이 몸을 꿰뚫어 버릴 것 같았다. 과거에도 이런 느낌을 경험한 적이 있을까?
 그럴지도, 그렇지 않을지도.
 크아아아.
 엄청난 기세의 고함.
 다가온 녀석의 키는 보통 사람보다 두 배는 되었고 녹색의 가죽은 돌기가 많아 우둘투둘했다. 엄청나게 큰 입에는 누런색의 어금니가 삐져나왔는데 그 근처는 샛노란 침으로 가득했다. 수십 구의 시체가 한여름의 햇볕을 받으며 썩어 가는 것만 같은 악취가 코를 찔렀다.
 눈은 부리부리한 게 둘째 형 바크와 비슷했다. 넝마와 같은 가죽으로 옷을 입은 그 존재는 심하게 으르렁거리며 윈드를 노려보았다.
 ‘살기다!’
 순간 깨달았다. 직감이었다. 저 녀석은 지금 자신을 먹잇감으로 생각하고 있음을. 하지만 그보다 더 놀란 건 그와 같은 결론을 얻었음에도 자신은 조금의 동요도 하지 않는다는 사실이었다.
 겉모습으로 보나 가진바 힘을 생각할 때, 윈드는 그 괴물의 상대가 아니었다. 맞붙으면 필패. 필패는 죽음과 직결될 것이다. 먹이가 될지도 모른다는 건, 저 괴물의 날카로운 이빨이 목덜미에 박히고 피가 분수처럼 사방으로 흩어지며 살점이 쭉쭉 찢어진다는 의미임에도 그는 당황하지 않았다. 당황이라는 상태를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사람처럼 그는 심각하게 왜 자신이 이렇게 냉정할까 살피는 중이었다.
 크아.
 괴물이 땅을 쿵쾅거리며 달려왔다. 윈드는 냉정하게 그 모습을 바라보다 뒤에 있는 아틸라의 엉덩이를 손바닥으로 내리쳤다.
 히히힝.
 순간적인 판단으로 아틸라를 멀리 피신시킨 것이다. 윈드는 아틸라의 엉덩이를 찰싹 때린 오른손을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말을 타고 도망을 간다고 해도 모자랄 상황에 왜 그랬을까? 이유는 알 수가 없었다.
 괴물은 그 모습에 아랑곳하지 않고 두 팔을 앞으로 쭉 뻗어 윈드를 잡기 위해 앞으로 달려왔다. 윈드의 두 눈에 괴물의 존재가 가득 들어왔다. 두 팔을 벌리고 입가로 침을 질질 흘리는 괴물의 눈은 굶주려 있었다. 조금 후에 무슨 일이 벌어질지는 명백했다.
 부웅.
 
 
 다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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