떨그렁.
창이 떨어졌다.
손 모양으로 파인 검 손잡이에는 손톱이 박혀있었다.
다리에 힘이 풀려 털썩 주저앉았지만, 정신은 명료했다.
널브러진 시체들.
야트막한 언덕을 뒤덮은 것들이 가루가 돼 사라졌다.
요정이 춤추는 것 같은 광경.
-한국이 승리했습니다! 러시아, 일본, 중국을 연달아 꺾은 우리 한국이 마침내! 미국마저! 쓰러뜨렸습니다!
-아무도 예상하지 못한 결과였죠. 심지어 국민 여러분 중에서도 한국이 미국을 이기리라고 생각한 분이 많지 않으실 겁니다.
-그렇습니다. 그만큼 불가능한 일이었고 기적 같은 순간입니다. 그뿐입니까? 이걸로 한국은 이제 멸망 위험 국가에서 벗어났습니다!
-맞습니다. 기적이죠. 그리고 그 기적은 한 사람의 손에서 일어났습니다. 바로 오늘 한미전의 주인공인 김대한 플레이어한테서요!
광화문을 가득 채운 사람들이 서로를 껴안고 방방 뛰었다.
아파트 단지에는 김대한이라는 이름이 울려 퍼졌다.
탑, 게이트, 몬스터로 만신창이가 된 나라에 기쁨만이 휘몰아쳤다.
엄청난 열기.
배틀리그가 종료되고 서울로 돌아온 김대한이 밟고 있는 땅이 흔들렸다.
몇백만 명의 힘이었다.
그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걸렸다.
마냥 웃을 수만은 없었다.
여기까지 오기 위해 몇 명이 죽었던가.
한국 유일 스타 플레이어를 위해 희생한 사람이 몇 명이었나.
스타 플레이어.
탑을 오르거나 배틀리그에서 싸우는 플레이어들의 정점.
중국에는 50명, 미국에는 30명이나 있으나 한국에는 단 1명도 없었던 존재.
김대한이 거저 얻은 행운.
중국, 미국, 일본, 러시아가 러브콜을 보냈고 한국은 귀화를 막으려고 100억 원을 일시불로 지급했다.
김대한은 한국에 오래 있을 생각은 없었다.
몇백억 더 받고 펑펑 쓴 뒤에 미국인이 되려 했다.
무려 1억 달러.
당시 환율로 1,400억 원.
미국이 제시한 금액이었다.
안 가면 바보지.
하지만 4년, 5년이 지나도 한국을 떠나지 않았다.
왜?
사람 때문이었다.
대한민국의 희망이라면서 간도 쓸개도 다 빼줄 것 같은 남자?
낮이든 밤이든 불러만 달라는 여자?
아니다.
스타 플레이어의 지원품을 구하기 위해 묵묵히 탑을 돈 사람.
외국이 보낸 암살자를 목숨 바쳐 막은 사람.
한국의 힘을 스타 플레이어에게 집중시킨 사람.
일면식도 없는데 한국을 위해서라며 대신 죽은 사람.
남을 위해 산 사람들.
바보들이라고, 누가 알아주기라도 할 것 같냐고 고래고래 소리쳤다.
이 나라의 애국자가 어떤 미래를 맞이하는지는 과거가 보여줬으니까.
김대한은 그들의 희생으로 성장했다.
스킬을 배웠고 아이템을 얻었다.
보상할 마음은 눈곱만큼도 없었다.
그렇지만 그들의 웃음과 눈물은 김대한을 할퀴었다.
깊게 스며들어 망나니를 뿌리째 바꿔 놓았다.
변했다고는 해도 고작 1명.
스타 플레이어가 있는 나라마저 속속들이 멸망하는 시기.
한국은 최약체였다.
한국인조차 한국이 오래 갈 거로 생각하지 않았다.
배틀리그 한일전.
일본이 패배했다.
배틀리그 한러전.
러시아가 꺾였다.
배틀리그 한중전.
중국이 무릎 꿇었다.
단 1명이 이뤄낸 결과.
단 1명이 중미일러의 기라성 같은 스타 플레이어들을 도륙했다.
중국이 경악하고 일본이 두려워하고 러시아는 벌벌 떨고 미국마저 놀랄 업적.
그리고 오늘 미국마저, 절대 지지 않을 것 같은 거인이 쓰러졌다.
그것도 고작 1명에게.
그래서였다.
강대국들이 한국을 물리적으로 제거하기로 합의한 것은.
미사일 사일로가 열렸고 대륙간탄도미사일이 솟구쳤다.
총 1,216발.
한반도를 초토화하겠다는 의지였다.
공습 경보 사이렌.
식은땀을 흘리고 헐떡거리면서 달리는 사람들.
도로에는 자동차가 뒤엉키고 넘어졌다.
하늘에서 불덩이가 떨어졌다.
김대한이 이를 악물었다.
창을 던져 5발은 요격했다.
하지만 그 뒤에는 10발이 더 있었다.
버섯구름이 피어올랐다.
도시는 폐허가 됐고 산림은 붉게 물들었다.
살아남은 사람이 있을까.
있다고 하더라도 한반도 전체가 방사능 지대가 됐다.
김대한의 전신 피부가 녹았다.
방사능은 내부와 유전자마저 파괴했다.
흘릴 눈물도 모조리 증발했다.
안구가 없어졌는데도 사방이 새하얗게 물든 게 느껴졌다.
과거가 떠오른다.
주마등일까.
스타 플레이어가 된 희열.
모든 걸 얕잡아 보며 주색잡기에 열중한 시절.
안 어울린 망나니가 없는 허송세월.
물질과 쾌락만으로 텅 빈 마음을 채울 수 없단 걸 조금이라도 일찍 알았다면 이런 미래를 맞이하지는 않았을 텐데.
후회는 언제라도 늦다.
지나간 일에서 묻어 나오는 것이니.
원통하다.
몸을 녹인 열기보다 타오르는 분노가 더 고통스러웠다.
핵미사일을 쏘겠다고 결정한 자들을 모조리 씹어 먹고 싶었다.
시간을 낭비한 자신의 머리통을 후려갈기고 싶었다.
하지만 곧 한 줌 재가 될 몸으로 시간을 거스르는 건 불가능한 일.
‘만약 다음 생이 있다면.’
김대한이 강렬히 염원했다.
‘너희를 위해 살겠다.’
새하얀 세상이 급격히 어두워졌다.
댓글(7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