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낭만이 사라진 필드 1권

2015.11.25 조회 3,743 추천 48


 # 낭만필드 - 001
 
 원 클럽 맨.
 이 얼마나 낭만적인 단어인가!!
 
 프로 스포츠 종목에서 이 원 클럽 맨이라는 단어는 대부분의 프로 스포츠가 연고 지역을 기반으로 성장하는 만큼 그 클럽, 나아가 그 지역을 대표하는 얼굴이라는 뜻과 동일해진다. 그야말로 그 팀, 그 지역 자체가 되는 것이다.
 
 프로에 데뷔한 이후, 임대로 다른 클럽에서 활약한 경우도 없이 최소한 10년 이상 한 클럽에서 활약한 경우, 원 클럽 맨이라는 칭호를 얻을 수 있다.
 
 믿기 힘들겠지만, 이 원 클럽 맨들은 생각보다도 많은 숫자가 존재한다.
 
 그 팀에서 꾸준히 은퇴할 때까지 버림받지 않고 뛸 수 있는 실력, 그리고 팬들의 지지, 이적 제의를 받더라도, 더 좋은 조건이더라도 팀을 옮기지 않고 자신의 팀에 충성을 바치는 의리까지. 선수와 팬, 그리고 클럽이 하나가 되어야 나올 수 있는 것이 바로 원 클럽 맨이다.
 
 그런데도 생각보다 많이 존재한다. 그렇지만, 여전히 원 클럽 맨에 대한 로망이 있고, 이를 쉽지 않다고, 나타나기 점점 더 어려워진다고 이야기한다.
 
 이유는 무엇일까?
 
 원 클럽 맨에 대해 낭만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 관심이 많은 사람들도 분명 많을 것이다.
 
 이 글을 읽고 있을 당신들의 시대에 뛰었던 원 클럽 맨들 중 당신은 라이언 긱스를 알고 있는가?
 폴 스콜스는?
 프란체스코 토티는?
 다니엘레 데 로시, 카를레스 푸욜, 안드레스 이니에스타, 파올로 말디니 등…… 아마 다 아는 이름일 것이고, 원 클럽 맨에 대해 로망을 가지고 있다면 아마 조금 더 특별한 이름일 것이다.
 
 그렇다면, 당신은 진파올로 벨리니라는 이름을 알고 있는가?
 사브리 사르올루는?
 마르크 플라뉘, 스티븐 체룬돌로, 미켈 아란부루, 라르스 리켄은?
 이 선수들도 모두 원 클럽 맨이다. 유명하지 않은 리그의 선수가 아니냐고?
 
 전혀. 이들은 모두 흔히 말하는 4대 리그 소속 클럽의, 1부 리그 소속의 선수들이다.
 사르올루는 그렇지 않지만, 그래도 챔피언스리그 단골 참가 팀. 갈라타사라이의 선수이다. 하지만 당신들은 아마 이 선수들의 이름을 잘 모를 것이다.
 이들도 특별한 원 클럽 맨이지만, 당신들은 이 이름을 모를 것이다.
 
 축구계는 변했다. 원 클럽 맨이라는 칭호보다 주급 10만 유로를 초과한 선수라는 칭호가 절대적으로 선호되고 있다.
 
 아무리 자신의 팀을 사랑한다고 하더라도, 어렸을 때부터 서포트하던 팀에서 에이스로 뛰고 있다고 하더라도 언젠가부터 선수들은 막강한 자본력을 앞세운 클럽들의 돈을 앞세운 러브콜에 넘어가게 되었다.
 
 그리고 원 클럽 맨이라는 칭호를 획득할 기회 역시 이런 팀에서 데뷔한 선수들에게만 주어지게 되었다.
 
 그렇지 않은 팀에서 데뷔해 원 클럽 맨으로 남는 선수들은, 빅 클럽에 갈 실력이 없어서 팀에 남는 선수. 그런 인식을 받게 되었다.
 
 이 이야기는, 그런 인식을 받는 선수 중 한 명에 대한 이야기이다.
 
 빅 클럽에 갈 실력이 없어서 팀에 남는 선수라는 평가를 받았지만, 그래도 선수 본인은 팀에 대한 충성심과 애정 하나로 더 좋은 조건들을 마다하고 팀을 위해 뛰었던, 그런 선수에 관한 이야기이다.
 
 ***
 
 “주!! 준비하게!! 이제 얼마 남지 않았어!!”
 “알겠습니다.”
 성배는 출전을 준비했다.
 오늘 경기는 아마도 자신의 선수 인생에 있어서 마지막 기회일 것이 분명했다.
 소속팀인 로얄 앤트워프는 벌써 2부 리그로 떨어진 지 올해로 딱 20년이 지났다.
 
 유럽 4대 무역항 중 하나이면서 벨기에 제2의 도시인 이곳, 안트베르펀을 연고로 하는 명문 클럽의 성적이라고 하기에는 지나치게 형편없는 성적이었다.
 그리고 그러는 와중에 자신의 선수 생활도 이제 마지막에 다다르고 있었다.
 
 스무 살. 아무것도 모르던 시절, 대한민국을 떠나 벨기에 2부 리그 소속의 로얄 앤트워프에 둥지를 틀고 벌써 16년 째였다.
 이제는 팀 내 최고참이 되었고, 백업으로 시작해 점점 늘어나 주전 자리까지 따냈던 팀 내 위상은 다시 점점 줄어들어 백업으로 돌아왔지만, 그래도 축구 인생 마지막 장을 멋지게 마무리하고 싶었다.
 ‘그래. 마무리 멋지게 하고, 다음 시즌에는 1부 리그에서 멋진 에필로그를 써나가는 거다.’
 [IN - 16. 주성배 / OUT - 3. 그레고리 빌헬름]
 “잘 부탁해요. 우리 꼭 승격해요!!”
 “인마, 넌 한참 멀었어.”
 자신과 교체된 선수가 숨을 헐떡거리면서 간절히 외쳤다.
 앳된 얼굴. 스물세 살의 그레고리는 이미 자신을 밀어내고 자신의 포지션에서 주전으로 뛰고 있었다.
 2부 리그 소속의 팀이지만, 후보로라도 올림픽 대표에 선발되었을 정도로 잠재력을 인정받고 있는 선수였다.
 팀을 위해서, 팀의 승격을 위해서는 당연히 그레고리가 주전으로 뛰는 것이 옳았다.
 ‘그래도, 그래도 이 팀에 대한 애정, 승격에 대한 간절함은…… 내가 최고다.’
 그래도 성배는 이 팀에서 16년을 뛰었고, 로얄 앤트워프가 2부 리그에서 보낸 20년의 시간 중 80%를 함께 겪은 선수였다.
 팀 내 최고참. 이번 시즌에는 백업으로 활약하며 선발 출전과 교체 출전을 합쳐 겨우 13경기밖에 출전하지 않았지만, 그래도 승격을 결정짓는 이 경기의 그라운드를 밟을 수 있다는 것이 행복했다.
 [Bijou!! Bijou!! Bijou!! Bijou!! Bijou!!]
 교체 출전하는 자신을 향한 팬들의 환호.
 저것도 16년간 이 팀을 떠나지 못한 하나의 이유였다.
 
 Bijou. 프랑스어로 보석, 패물, 주옥같은 작품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는 단어였다. 그렇다고 자신의 그런 선수라는 이야기는 아니고, [성배 주]라는 이름 덕분에 뒤의 발음이 비슷하다는 이유로 자신의 별명이 된 것뿐이었다.
 그래도 이 팀에서 16년을 뛰면서 팬들의 마음을 얻었고, 뛴 기간에 비하면 보잘것없지만 그래도 최소한 팬들 중 자신을 싫어하는 사람은 없었다. 나름대로 성공한 선수 생활이라고 자평할 수 있었다.
 “야!! 라인 정리해!! 얼마 안 남았어!! 몸으로 막아!!”
 백업이지만 이래 보여도 프로 생활만 16년이었다.
 안 그래도 형편없었던 피지컬이 노쇠화로 인해 더욱 형편없어지면서 백업으로 밀렸을 뿐, 경기를 보는 눈과 상대의 플레이를 읽어내는 능력은 최소한 2부 리그에서는 최고 수준이었다.
 전성기라고 이야기하기도 뭐하지만, 그래도 나름 가장 실력이 좋았을 때는 1부 리그에 승격하는 클럽들에서 영입 제의가 왔었을 정도였다.
 ‘와라, 애송이. 네가 아무리 날고 기어도, 아직은 내가 한 수 가르쳐 줄 실력은 되니까.’
 상대팀 줄테-바레헴의 공격수가 자신의 앞에서 드리블을 치면서 틈을 노리는 모습이 보였다. 자신이 알기로는 열여덟 살의 선수였다.
 빅 리그로 선수들을 보내는 것이 목표일 정도로 리그 자체가 셀링 리그, 빅 리그로 향하는 중간 경유지와 같은 느낌이었기 때문에 대체적으로 선수들이 어렸지만, 그래도 열여덟 살의 나이에 1부 리그에서 주전으로 활약한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었다.
 
 비록 그 팀이 강등을 눈앞에 둔 약팀이라고 하더라도.
 ‘으쌰!! 눈에 빤히 보인다고, 어린 친구.’
 열여덟 살에 1부 리그인 주필러 리그의 주전으로 활약하는 선수.
 분명 자신감이 넘칠 수밖에 없는 시기였다. 2부 리그에서도 백업으로 나서는 서른여섯 살의 아저씨는 간단히 스피드로 제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던 것 같다.
 하지만 성배는 그리 간단하게 놓아주지 않았다.
 ‘노장에게는 노장의 방식이 있는 거란다.’
 일반적으로 한 선수의 전성기는 20대 후반에서 30대 초반, 수비수의 전성기는 그것보다 조금 더 느린 30대 초반이라는 것이 일반적인 인식이었다.
 전성기 나이와의 거리를 생각하면 성배가 상대인 크리스티안보다 더 가까웠다.
 수비수의 전성기는 축구 지능과 예측력의 성장과 함께 시작된다는 것을 감안하면, 성배는 피지컬을 제외하면 지금도 전성기 기량을 갖추고 있었다.
 ‘너는 분명 빅 리그로 가겠지. 그 전에 좋은 공부 한다고 생각해라.’
 볼을 가볍게 차 놓고 스피드로 성배를 따돌리려고 했던 크리스티안은 빈 공간으로 달린다고 생각했겠지만, 성배의 등과 충돌하고 말았다.
 이미 크리스티안이 어느 방향으로 빠져나가려고 할지 알고 있던, 아니, 일부러 그 방향을 열어주고 있던 성배는 볼이 빠져나간 이후 바로 등으로 길목을 막아냈다.
 ‘스피드가 약하면…… 상대도 스피드를 못 내게 하면 그만이야.’
 볼은 그대로 골라인을 넘어섰고, 앤트워프의 골킥이 선언되었다.
 이미 1-0으로 앞서고 있는 앤트워프였다. 이 스코어만 지켜내면 20년 만에 다시 1부 리그, 주필러 리그의 그라운드를 밟을 수 있었다.
 ‘무슨 일이 있어도 지켜낸다…….’
 이제 성배의 선수생활은 거의 막바지였다. 이제 마지막 남은 꿈은 주필러 리그의 그라운드를 한 번이라도 밟아보는 것.
 선수 생활을 오래 해봐야 겨우 1, 2년 정도일 것이었고, 팀의 사정과 전력을 감안하면 이번이 사실상 마지막 기회일 것이 분명했다.
 “내려와!! 카요!! 왼쪽으로 움직여!! 야!! 야!! 데니스!! 저기 8번이 비잖아!!”
 교체 선수로 활약하지만, 최소한 성배가 그라운드 위에 있을 때는 그가 수비 라인의 조율을 담당했다.
 주전 센터백 두 명과 수비형 미드필더들은 나름 잠재력과 재능이 있었지만 20대 초반의 어린 선수들이었기 때문에 수비 라인을 조율하는 능력은 부족할 수밖에 없었고, 성배가 투입되면 자연스럽게 수비 라인의 리더 역할이 넘어왔다.
 지금도 성배는 목이 터져라 소리를 질러대면서 다른 선수들의 위치를 지정해주고 있었다.
 
 어차피 성배에게 맡겨진 시간은 10분에 불과했다.
 이미 경기는 거의 끝나기 직전이었고, 90분으로 설정된 정규 시간 타이머는 멈춘 지 오래였다. 오늘 목이 찢어지더라도 다음 시즌까지는 석 달의 시간이 있었다.
 그 정도 시간이면 찢어진 목도 다시 붙을 것이었다.
 
 어차피 그라운드 위가 아니면 목을 쓸 일도 별로 없었고, 다음 시즌을 진행하는 것에 문제가 없다면 목이 찢어져도 상관없었다.
 “막아!! 데니스!! 이 자식이!!”
 결국 탈이 났다. 수비형 미드필더가 상대 공격형 미드필더의 움직임을 놓치면서 슈팅 찬스를 내준 것이었다.
 페널티 박스 정면에서 상대 선수가 발을 들어 올리는 모습이 슬로우 모션처럼 보였고, 성배는 자신이 막던 선수를 놔두고 급하게 박스 안으로 움직였다.
 중거리 슈팅을 막아내기 위해서, 그리고 최소한 리바운드 된 볼을 상대에게 넘겨주지 않기 위해서였다.
 -퍼--억!!
 ‘크윽……. 어디냐……. 어디로 떨어지냐!!’
 다행히 슈팅은 성배의 머리를 때렸다.
 순간 정신이 멍해질 정도로 강렬한 충격이었지만, 지금은 그것보다 튕겨져 나간 볼을 제대로 처리하는 것이 중요했다.
 성배의 머리에 맞고 흐른 볼은 상대 선수의 앞으로 향했고, 다리를 뒤로 빼면서 휘두르려는 상대 선수의 모습을 본 순간, 성배는 자연스럽게 앞으로 몸을 날렸다.
 -뻐--억!!
 
 
 # 낭만필드 - 002
 
 [로얄 앤트워프!! 20년 만에 주필러 리그 복귀!!]
 결과부터 이야기하자면, 로얄 앤트워프는 1부 리그, 주필러 리그 승격에 성공했다.
 줄테-바레헴의 마지막 슈팅은 사력을 다해 다시 몸을 날린 성배의 등에 막혔고, 앤트워프의 수비수에게 향했다.
 그리고 그 볼을 멀리 걷어낸 순간, 경기 종료를 알리는 주심의 휘슬이 울렸다.
 20년 만의 1부 리그 승격이 확정된 것이었다.
 
 “해냈다……. 드디어, 드디어 해냈다고!!”
 승격이 확정되고 며칠이 지났지만, 성배는 아직도 그 여운에서 빠져나오지 못하고 있었다.
 프로의 세계에 뛰어든 지 16년, 16년 만에 1부 리그의 무대를 밟게 된 것이었다.
 가슴 속 깊은 곳에서부터 솟구치는 이 흥분감, 기분 좋은 고양감을 놓치고 싶지 않았다.
 조금 더 오래 즐기고 싶었다.
 ‘선수 생활 말년에…… 드디어 이런 날이 오는구나. 1부 리그 그라운드는 밟아보지도 못하고 은퇴할 줄 알았는데…….’
 성배의 시선이 자신의 방을 한 바퀴 훑었다.
 16년이나 프로로 활약한 선수라고 하기에는 굉장히 초라한 방이었다.
 일반적으로 프로 축구 선수의 방을 떠올렸을 때, 가장 먼저 언급하는 트로피도 고작 세 개가 전부였는데, 그중 한 개는 한국에 있던 시절 받았던 것이었다.
 한국에서는 프로 생활을 한 적이 없었기 때문에 결국 프로 생활 16년 동안 받은 트로피는 두 개가 전부라는 뜻이었다.
 ‘그래도…… 나름 충실한 삶이었어. 너무 자학하지 말자.’
 선수 생활의 마지막 꿈으로 삼았던 1부 리그 진출이 확정되자, 새삼스럽게 자신의 축구 인생을 천천히 돌아보게 되었다.
 
 고등학교 1학년 때 당했던 심각한 부상과 항상 꼬리표처럼 자신을 따라붙었던 피지컬이 형편없다는 타이틀은 결국 K리그 진출도, 대학 진학도, 내셔널리그 진출도 불가능하도록 만들었다.
 그렇게 좌절하고 축구 선수의 길을 포기하려는 순간, 지금의 자신을 만들어 준 은인을 만나 벨기에행 비행기에 올랐고, 그 순간부터 지금까지 벨기에 2부 리그, 로얄 앤트워프에서 지금까지 16년 동안 활약했다.
 처음 벨기에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을 때는 축구만 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었고, 그다음에는 로얄 앤트워프를 시작으로 빅 리그 무대를 밟겠다는 꿈을 가졌었다.
 “하하하, 그때는 내가 여기에 이렇게 오래 있을 줄 몰랐는데…… 어쩌다가 이렇게 된 건가.”
 젊은 시절을 생각하자, 자신도 모르게 웃음이 터져 나왔다.
 로얄 앤트워프의 입단테스트에 통과했을 때까지만 하더라도 여기서 잘만 하면 빅 리그 강등권 팀이나 승격 팀 정도는 언젠가 이적할 수 있을 줄 알았다.
 당장은 힘들겠지만, 언젠가는 그럴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이 있었다.
 
 하지만 유럽 무대의 벽은 높았다.
 유럽 무대에서 가장 몸싸움을 꺼리는, 얌전한 리그 중 하나인 벨기에 리그임에도 불구하고 성배는 그 정도 몸싸움마저도 버거웠다.
 고등학교 1학년 때, 군대도 면제받을 수준의 큰 부상을 당했던 성배는 안 그래도 몸싸움을 꺼려했는데, 자신보다 머리 하나는 더 큰 유럽 선수들에게 부딪히기 전에 이미 지고 들어갔으니 몸싸움을 버텨낼 수 있을 리 없었다.
 
 그 이후로는 스트라이커에서 윙어로 포지션도 전향했지만, 여전히 백업 선수 위치를 벗어나지 못했다.
 대충 이 시기를 전후해서 성배는 빅 리그에 대한 꿈을 접고 벨기에의 최상위 리그, 주필러 리그를 꿈의 마지막 종착역으로 정했다.
 현실에 순응하기 시작한 것이었다.
 [A new world!! This one thing, I want to ask of you, world. To say adieu, world!!]
 “응? 무슨 일이지?”
 자신의 선수 생활을 돌아보면서 감상에 빠져있던 성배는 휴대폰 벨소리에 현실로 돌아왔다.
 휴대폰 액정에는 로얄 앤트워프 계약 담장자의 번호가 찍혀있었다.
 “여보세요?”
 [아, 주!! 할 이야기가 있어서 그런데, 내일 오후쯤에 방문할 수 있나?]
 “뭐, 시간은 되는데요. 무슨 일이에요?”
 [음…… 그건 내일 오면 이야기해주지. 그럼 내일 보자고.]
 “그래요, 그럼. 내일 두 시? 그쯤 가면 되죠?”
 성배가 처음 이 팀에 입단할 때부터 계약 담당자는 바뀌지 않았다.
 즉, 성배가 처음 프로 계약을 맺을 때부터 클럽과 계약을 갱신할 때, 계약을 진행했던 담당자는 오직 이 한 사람뿐이었다.
 성배가 2부 리그의 다른 클럽들, 1부 리그 승격이 유력하다고 평가되었던 팀들의 영입 제안을 전부 물리치고 로얄 앤트워프와 재계약을 맺어왔던 덕분에 담당자와는 상당한 친분을 쌓게 되었다.
 
 이제 와서는 두 사람과 함께 커리어 초반을 보냈던 사람들 대부분이 팀을 떠난 상황이었기 때문에 더욱더 친분을 유지하고 있었다.
 그래서 성배는 담당자의 착 가라앉은 목소리가 심상치 않다는 생각도 하지 못했다.
 그저 오늘 기분이 조금 안 좋은 것 같다는 생각을 했을 뿐이었다.
 
 ***
 
 “…… 은퇴…… 말입니까?”
 “그렇네. 은퇴. 이제 은퇴하고 로얄 앤트워프의 코치로 새로운 인생을 시작하는 것이 어떤가?”
 다음 날, 클럽을 찾은 성배를 맞이한 것은 계약 담당자와 함께 앉아있는 감독과 단장이었다.
 여기까지는 별문제가 없었다.
 1부 리그 승격에 의한 새로운 연봉 협상이라면 단장이 자리하는 것이 당연한 일이었다.
 하지만 현실은 잔인했다.
 재계약 제의라고 생각했던 성배의 생각은 옳았다.
 그것이 선수로서의 재계약이 아니라 코치 계약이었을 뿐이었다.
 “은퇴…… 그러면 저는 1부 리그의 그라운드를 밟지 못하는 겁니까?”
 “그럴 리가!! 다음 시즌, 우리는 1부 리그에 참가하게 될 것이고, 자네는 우리 로얄 앤트워프의 코치로서 당당히 그 그라운드 위에 서 있을 것이네.”
 “그 이야기가 아니지 않습니까!! 저는, 저는…… 선수로서 1부 리그의 그라운드에서 활약하기 위해 지금까지 버텨왔습니다!! 제 인생의 반을 바친 이 로얄 앤트워프와 함께요!!”
 어제 성배와 통화를 나누었던 계약 담당자는 성배의 얼굴을 바라보지 못하겠는지, 눈을 감고 이를 악문 채 앉아있을 뿐이었다.
 어제의 통화에서 왜 그의 목소리가 착 가라앉아 있었는지, 이제는 이해할 수 있었다.
 오늘의 만남은 성배의 새로운 시작을 위한 것이 아니라 성배의 선수 생활을 끝내기 위한 만남이었던 것이었다.
 “주. 솔직히 말하자면…… 나는, 그리고 우리 코치진은 자네의 현재 기량이 1부 리그에서 통할 것이라 생각하지 못하겠어. 자네는 노련하지. 그리고 똑똑해. 그리고 킥도 정확한 편이라서 후방 빌드업을 맡아줄 수도 있지. 하지만 그게 전부야. 1부 리그의 선수들을 상대로 자네의 스피드와 피지컬이 통할까? 아니, 아니야. 힘들 거야.”
 “하, 하지만!! 아직 백업으로는 충분히 활약할 자신이 있습니다!! 그래, 그래요. 백업!! 저는 오른쪽, 왼쪽 풀백으로 다 뛸 수 있고, 수비형 미드필더로도 뛸 수 있지 않습니까? 잘 아시잖아요!!”
 “하지만 그 어느 것도 다음 무대에서는 통하지 않을 거야. 측면 수비수로 뛰기에 자네는 이제 너무 느리고, 상대와의 몸싸움에서 이겨낼 수도 없어. 그런데 수비형 미드필더로 뛴다고? 측면 공격수의 피지컬도 이겨낼 수 없는 선수가? 무리야.”
 이제는 감독이 나섰다.
 결국, 감독의 말은 성배가 전력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말이었다.
 나이가 들어서 그나마 상위권이었던 스피드도 많이 떨어졌고, 원래 약했던 피지컬은 이제 최소한의 경쟁력도 잃었다는 것이 감독의 판단이었다.
 성배도 인정하지 않을 수는 없었지만, 그렇다고 이대로 인정할 수도 없었다.
 “그래도!! 그레고리의 체력 안배를 위해서 제가 필요할 겁니다!! 그 정도는 충분히 할 수 있어요. 마지막 몇 분 정도 막아내는 것은 아직 충분히 할 능력이 있습니다!! 몸 관리도 잘 해왔어요, 아시잖아요?”
 “주. 우리는 이미 백업 풀백을 찾고 있네. 왼쪽 백업 풀백은 자네도 알고 있는 그라함이 맡을 것이고, 오른쪽 백업은 이제 구하는 중일세. 냉정하게 들릴지 모르겠지만, 자네의 자리는 이제 없어.”
 
 18세의 뱅상 그라함.
 그레고리의 뒤를 이어 또 한 번 로얄 앤트워프가 발굴한 수준급의 왼쪽 풀백 유망주였다.
 전 세계적으로 왼발잡이 레프트 백을 찾기가 어려워지면서 희소성으로 인해 가치가 높아지고 있는 가운데 또 한 번 유망주가 나타난 것이었다.
 셀링 리그인 벨기에 리그의 로얄 앤트워프로서는 큰 이적료를 받을 수 있는 기회였기에 이를 놓칠 수 없었다.
 “하아…… 제 연봉이 너무 높습니까? 절반까지 깎아도 남겠습니다. 제 선수 생활의 마지막을 1부 리그에서 마무리할 수 있도록 기회만 주십시오.”
 “…… 미안하네. 우리도 그 정도 여유는 없어. 쓰지 않을 선수 때문에 수만 유로를 지출할 여유가 없네. 만약, 자네가 은퇴해서 코치가 되는 것이 싫고, 선수 생활을 이어나가고 싶다면 이적료는 받지 않겠네.”
 사실 성배의 연봉은 꽤나 높은 편이었다.
 아무리 프로의 세계라지만 한 팀에서 16년을 활약한, 몇 년간은 부동의 왼쪽 풀백으로 활약한 성배에게 최소한의 대우를 해주지 않을 수는 없었던 것이었다.
 하지만 1부 리그에서 경쟁력은 거의 없다고 봐도 무방한 성배와 이제 더 이상 프로 계약을 이어나갈 마음은 없었고, 그래도 16년 동안 함께 해왔기 때문에 코치직을 제시했다.
 
 로얄 앤트워프로서는 나름대로 해줄 수 있는 최대한의 대우를 내밀었지만, 성배는 그것으로 만족할 수 없었다.
 “하, 하하하…… 방출입니까……? 16년 동안 이 클럽을 위해 뛰었습니다!! 두세 번은 1부 리그 승격이 유력한 클럽으로부터 영입 제의를 받았지만!! 이 팀!! 로얄 앤트워프와 함께 1부 리그를 밟고 싶어서 남았습니다!! 그런데!! 그 결과가 고작 이겁니까?”
 “흥분하지 말게. 우리는 자네에게 코치직을 약속했어. 우리로서는 자네에게 최대한의 대우를 해주고 있는 걸세. 더 이상 경쟁력이 보이지 않는 선수를 방출하는 것은 프로의 세계에서 당연한 일이네. 하지만 우리는 지난 16년간 우리를 위해 뛰어준 것에 대한 감사의 표시로 코치 제안을 하고 있는 거야. 그래도 자네의 심정을 대충 이해할 수는 있으니 이번에는 그냥 넘어가겠네.”
 이제 와서 이적료 없이 풀어준다고 해서 1부 리그의 그라운드를 밟을 수 있는 확률은 거의 없었다.
 감독과 코치들이 말했던 것처럼 이제 더 이상 성배에게는 1부 리그에서 경쟁할 기량이 남아있지 않았다.
 지금까지 활약해왔던 로얄 앤트워프와 함께 올라가는 것이 아니라면, 결국 선수 생활을 이어나간다고 하더라도 다른 2부 리그 팀에 입단하는 것 외에는 방법이 없을 것이 분명했다.
 “으으…… 소란을 피워서 죄송합니다……. 일단, 생각할 시간을 조금만 주시겠습니까?”
 “알겠네. 16년의 선수 생활을 정리하는 것이 쉽지는 않겠지. 하지만 우리도 시간을 오래 줄 수는 없네. 코치진을 빨리 개편하고 선수단도 개편해야 해. 이를 이해하고, 최대한 빨리 결정해주게.”
 고개를 숙이고 나오는 성배의 표정이 흔들렸다.
 안 그래도 비참한데, 자신을 더 비참하게 만들고 싶은 것인지 눈물이 흐르려는 것을 어떻게든 참아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성배는 볼 수 없었지만, 계약 담당자도, 감독도 성배의 초라한 등을 더는 볼 수 없었는지 눈을 감고 있었다.
 당황한 성배의 에이전트도 어찌할 줄을 모르다가 인사를 건네고 성배를 따라 나왔다.
 아직 초보 티가 물씬 풍기는 에이전트가 현재 성배의 위상을 말해주고 있는 것 같았다.
 
 
 # 낭만필드 - 003
 
 “어이!! 여기다!!”
 “아, 아저씨. 일찍 오셨네요?”
 클럽으로부터 사실상의 방출 통보를 받고 며칠이나 방에 혼자 널브러져 있던 성배는 전화를 받고 시내의 한 펍으로 향했다.
 이미 펍에 도착해있던 약속 상대는 밝은 얼굴로 성배를 향해 손을 흔들어 보였다.
 아직 소식을 듣지 못한 것 같았는데, 아무래도 또 자신의 입으로 전하기 싫은 소식을 전해야 할 것 같았다.
 “그래. 녀석, 축하한다. 그렇게 로얄 앤트워프에서 1부 리그로 가겠다고 하더니, 결국 갔구나!!”
 “아, 예…… 로얄 앤트워프는 갔죠. 하하…….”
 역시나.
 자신에게 축하를 건네는 상대의 밝은 표정에 성배는 또 씁쓸한 표정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항상 로얄 앤트워프와 함께 1부 리그로 올라가겠다고 말해왔던 자신이었고, 상대도 그것을 알고 있어서 축하를 건넨 것이었는데, 정작 로얄 앤트워프가 1부 리그로 승격한 지금, 성배의 마지막 꿈마저 산산조각이 나고 말았다.
 “…… 무슨 소리야? 앤트워프는 갔다니? 너는 못 갔다는 이야기처럼 들리는데?”
 “하, 하하…… 그러게요. 왜 앤트워프는 갔는데 저는 못 가는 걸까요?”
 지금 성배가 만나고 있는 사람은 처음 벨기에에 왔을 때부터 성배를 돌봐주었던 사람이었고, 지난 16년 동안 연고도 없는 타지에서 성배의 정신적 지주이자 멘토가 되어주었던 에이전트, 헤르만이었다.
 성배에게는 두 번째 아버지와 같은 존재였기 때문에 성배의 표정만 보고도 뭔가 심상치 않은 상황을 눈치채고 표정을 싹 굳혔다.
 “하아…… 은퇴하라고 하네요. 코치 자리 하나 던져줄 테니까 은퇴하래요.”
 “…… 은퇴? 지금 이 시점에서?”
 “네. 선수 생활을 계속하고 싶다면, 이적료 없이 놔주겠다고……. 하지만 그렇게 하면 코치 자리는 날아가겠죠.”
 클럽에서 내준다는 코치 자리.
 이 코치 자리를 받아들이면 은퇴 이후의 생활이 가능해질 것이었다.
 이 자리도 물론 절대로 안정적인 것은 아니었다.
 초보 코치의 앞길은 언제나 바람 앞의 촛불 신세가 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아니면 은퇴 이후에 어떻게 살아나가야 할지 막막했다.
 만약 선수 생활을 조금 더 지속하겠다고 이적을 선택하게 되면, 최소한 초보 코치의 연봉보다는 많은 돈을 받겠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자신이 선수 생활을 지속할 수 있는 기간은 길어야 2년이었다.
 지금 로얄 앤트워프에서 코치 자리를 제안한 것은, 16년이라는 오랜 기간 동안 로얄 앤트워프에서만 뛰어준 성배를 위해서가 아니라 그런 선수를 클럽에서 이렇게 대우해준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한 것일 뿐이었다.
 만약 여기서 성배가 팀을 옮겨 선수 생활을 이어간다면, 결국, 그 코치 자리도 그대로 날아갈 가능성이 높았다.
 “내가 알아봐 줄 테니까 에이전트로 한 번 일 해보는 건 어떠니? 너라면 에이전트 일도 잘해낼 거야. 너는 축구를 보는 눈이 뛰어나니까.”
 “에이전트라…… 그것도 나쁘지는 않네요.”
 지금은 은퇴했지만, 헤르만은 40년 가까이 에이전트로 일 해왔던 인물이었다.
 비록, 그가 뛰어난 능력을 가지고 있는, 정상급으로 인정받았던 에이전트는 아니었지만 그래도 나름대로 인지도를 가지고 있었다.
 인간적인 매력을 갖춘 그는 클럽과 선수들로부터 신뢰를 얻었다.
 당연히 그를 좋아하는 인물들은 현장에 많이 남아있었다.
 “어때? 선수 생활에 아직 미련이 남아있으면 다른 팀을 알아봐. 그리고 그다음에 네 생각만 있다면 내가 에이전트로 길을 알아봐 줄게.”
 “아니요. 사실…… 이미 결정은 했어요. 은퇴…… 하려고요.”
 “역시…… 그런가…….”
 지난 며칠 동안 집에서 혼자 폐인처럼 지냈지만, 아무 생각도 없는 진짜 폐인은 아니었다.
 상황이 상황인 만큼 깨어있는 시간에는 미래에 대한 고민이 성배의 머리를 가득 채웠었다.
 그리고 그렇게 며칠이 지나자, 나름대로 생각의 정리를 끝낼 수 있었고, 성배는 결국 은퇴를 결정했다.
 “제가 더 뛰고 싶었던 건, 1부 리그의 그라운드를 밟아보고 싶다는 이유, 그 하나뿐이었어요.”
 “그래……. 역시 그렇구나. 하긴, 너도 이제 적지 않은 나이니까. 이제 와서 같은 2부 리그의 새로운 팀에서 새로운 환경에서 뛰는 건 의미가 없겠지.”
 “그렇죠. 1부 리그가 아니라면……. 다음 인생을 생각해야 할 때니까요.”
 지금 성배가 미련을 가지고 있는 부분은 선수 생활 자체에 대한 것이 아니었다.
 1부 리그의 그라운드에서 한 번만이라도 뛰어보고 싶다는 것. 그것이 성배에게 남아있는 선수 생활에 대한 마지막 미련이었다.
 로얄 앤트워프와 함께 1부 리그로 올라가는 것이 1부 리그에서 활약할 수 있는 사실상의 마지막 기회인데 그것이 좌절된 이상 이제 선수 생활에 대한 미련은 접어야 할 때였다.
 “그때 내가 너를 설득하지 말았어야 했는데……. 로얄 앤트워프가 이렇게 냉정하게 결정을 내릴 줄은 몰랐다. 하아…… 미안하다. 주. 내가 그때 너를 괜히 설득했구나.”
 “…….”
 성배의 원래 포지션은 스트라이커였다.
 하지만 고작 두 시즌도 뛰지 못하고 피지컬적인 측면에서 문제를 드러낸 성배는 결국 측면으로 빠졌다.
 그러면서도 백업 이상의 활약은 하지 못했는데, 28세, 풀백으로 포지션을 전환한 성배는 그때부터 본격적으로 2부 리그에서나마 자신의 이름을 알리기 시작했다.
 원래부터 장점이었던 경기의 흐름을 파악하는 능력과 축구 지능을 바탕으로 풀백으로서 빠르게 성장했다.
 공격수로 15년 넘게 활약했던 경험까지 더해지며 상대 공격수의 생각을 읽는 것이 가능했고, 미리 움직여 막아낼 수 있었다.
 또한, 풀백치고는 공격력이 좋다는 평가도 받을 수 있었다.
 하지만 그 시점에서 영입을 제의한 여러 클럽들의 제안은 헤르만에게 설득당한 성배가 모두 거절했다.
 헤르만은 에이전트로 일하고 있지만, 클럽과도 사이가 좋았는데, 이는 의리를 중요하게 여기는 헤르만의 성격 덕분이었다.
 하지만 결국 성배는 그로 인해 마지막 꿈을 이루지 못하게 되었다.
 2부 리그로 강등된 지 15년을 막 넘어가고 있던 시점이었기 때문에 그때도 로얄 앤트워프의 주역으로 팀의 승격을 이끌 수 있다면 외적으로 상당한 보상을 기대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결과적으로는 실패했지만, 당시에는 충분히 설득력이 있었다.
 그 자신도 로얄 앤트워프에 대한 의리와 충성심으로 가득했기 때문에 결국 헤르만의 말대로 영입 제안을 거절하고 더 낮은 연봉으로 로얄 앤트워프와 재계약을 체결했다.
 그리고 다섯 시즌을 더 2부 리그에서 활약했고, 드디어 승격을 이뤄낸 순간, 팀으로부터 전력 외 통보를 받은 것이었다.
 “그때 이적했다면……. 지금까지 1부 리그에서 살아남으면서 훨씬 더 많은 연봉을 받을 수 있었을 텐데……. 내가 미안하다.”
 “…… 아저씨가 미안할 게 뭐 있나요. 다 제 선택이었는데요.”
 그래도 헤르만을 원망할 수는 없었다.
 헤르만은 성배가 축구 선수로 활약할 수 있게 만들어 준 사람이었다.
 아버지와의 인연으로 성배를 알게 된 헤르만은 축구 선수라는 것을 알고 아버지에게 영상을 얻은 뒤, 성배의 상황을 알고 직접 한국으로 날아와 성배에게 기회를 준 사람이었다.
 고등학교 졸업 이후 K리그는 당연한 거고 대학 진학과 내셔널리그 진출마저도 좌절되어 선수 생활을 끝내려고 했던 성배에게 다시 용기를 주고 기회를 주었던 사람이 헤르만이었다.
 그래서 헤르만은 성배에게 은인이었다.
 쉽게 원망할 수 없는, 그런 존재인 것이 당연했다.
 영입 제안을 받았을 때, 자신을 헤르만이 설득하지 않았다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은 있었지만 결국 선택은 자신이 한 것이고 그것 때문에 원망하지는 않았다.
 “그래도…… 에이전트로서 그 상황에서 선수에게 좋은 선택을 해야 했는데 생활을 하면서 적지 않은 실수들을 했지만, 이제 와서 보니 그때 너의 이적을 말린 게 가장 큰 실수였구나, 싶다.”
 “하아…….”
 헤르만을 원망하지는 않는다고 생각하지만 그래도 그 사건에 대한 아쉬움은 분명히 있었다.
 헤르만이 계속 그 일에 대해서 미안함을 표현하고 있는데, 성배도 그 앞에서 더 이상은 그를 위로할 수 없었다.
 지금은 자신이 위로를 받고 싶은 순간이었고, 자책하는 헤르만을 위로할 정신은 없었다.
 그리고 솔직히 말하면 그러고 싶지도 않았다.
 “이럴 땐 그냥 마시는 거예요. 아저씨도 그런 것 같고, 저야 벌써 며칠째 기분 뭣 같으니까 그냥 마시고 다 날려버리자고요.”
 “허, 허허……. 자네 아버지도 자주 그랬지. 뭔가 괴로운 일만 있으면 술로 푸는 사람이었어. 한국인은 다 그렇다고 했었나……. 그래, 그러자. 오늘은 신나게 마시고, 둘 다 괴로운 일은 다 잊어버리자.”
 
 
 # 낭만필드 - 004
 
 “팀이 나한테 이래서는 안 되는 거잖아요!! 어떻게!! 어떻게 나한테 이럴 수 있냐고요!!!"
 "그래. 이러면 안 되지."
 "내가 아니었으면, 1부 리그 승격은커녕 3부 리그 강등을 걱정했어야 할 팀이라고요!!”
 “그래, 알지. 내가 왜 모르겠니. 굳이 그게 아니더라도 너한테 그러면 안 되지.”
 지난 며칠의 괴로움을 술로 날려버리기 시작한 성배는 곧 알코올의 기운을 이기지 못하고 점점 감정을 표출했다.
 며칠 동안 폐인처럼 방에 처박혀 지냈고, 사람 자체가 궁지에 몰려있다 보니 알코올을 이겨내지 못하고 있는 것이었다.
 3년 전 시즌, 로얄 앤트워프는 무슨 마가 낀 것처럼 심한 부진에 빠졌고, 결국 강등 결정전 플레이오프까지 떨어지고 말았다.
 다행히 강등 결정전 플레이오프에서의 3부 리그 팀들을 상대로 승리를 거두며 겨우 2부 리그에 잔류했는데, 이때, 마지막 경기에서 결승 골을 넣었던 선수가 바로 성배였다.
 “그때는 무슨 클럽의 영웅처럼 대우해주던 사람들이라고요……. 내가 잘했을 때, 그러니까 5년 전에…… 내가 떠날까 봐 전전긍긍하던 사람들, 재계약 날 직접 우리 집에 나를 데리러 왔던 사람이 바로 그 단장이에요. 그런데…… 그런데!! 나한테 이래!! 나한테!!”
 “주, 조금만 목소리를 낮춰. 여기 있는 사람들 중에 자네 얼굴을 아는 사람들도 많으니까.”
 로얄 앤트워프를 가족이라고 생각했다.
 16년을 이곳에서 뛰면서 한국에 있는 가족들보다 훨씬 더 많은 시간을 함께 보낸 것이 로얄 앤트워프, 그리고 안트베르펀의 팬들이었다.
 자신을 진심으로 아껴주고 있다고 믿었고, 몇 년 전, 이적 제의를 모두 걷어차고 잔류했을 때 클럽과 팬들이 보내주었던 환호와 사랑은 진심으로 남기 잘했다는 생각에 눈물이 났을 정도였다.
 선수의 가치가 기량이라는 것은 자신도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이미 프로 스포츠 시장이 자본의 법칙에 지배당했다는 것 역시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래도 자신과 로얄 앤트워프의 관계는 다를 것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자신도 특별하지 않았다.
 “술 먹으면서 이런 이야기도 못 합니까!? 내가 뒤에서 겨우 이 정도의 섭섭한 점도 이야기 못 합니까? 내 꿈을 짓밟았으면!! 내 마지막 꿈을 짓밟았으면!! 이 정도 욕하는 건 좀 봐줘야 하는 거 아닙니까!! 예?”
 “허허……. 많이 취했구나. 겨우 이 정도로…… 너도 나이가 들기는 들었나 보다. 네가 나이가 들었으니, 나도 참…… 많이 늙었구나. 그리고…… 그 사이에 이 바닥도 참 많이 바뀌었지.”
 성배의 목소리는 헤르만의 만류에도 오히려 점점 더 커졌다.
 성배가 헤르만을 아버지처럼 생각해왔던 것처럼 헤르만 역시 자신과 코드가 잘 맞고 성격이 비슷한 성배를 아들처럼 여겨왔었기 때문에 무너져버린 성배의 모습에 깊은 한숨을 쉬었다.
 사람이 좋고 항상 부드러운 표정을 짓고 있었으며 훈련장은 물론이고 일상생활이나 그라운드 위에서도 결코 화를 내거나 흥분하는 법이 없었던 성배였다.
 그런 성배가 지금 다른 사람도 아닌 자신의 앞에서 이렇게 흐트러진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그것이 마치 자신의 탓인 것 같아 헤르만의 마음도 좋지 않았다.
 “빌어먹을…… 빌어먹을!! 으아아악!!”
 “…… 과거의 낭만에서 벗어나지 못했던 내가, 내가 결국 네 꿈을 가로막았구나…….”
 성배는 결국 탁자 위로 무너져 내렸다.
 이미 적지 않은 사람들이 성배의 모습을 지켜보고 있는 중이었다.
 아마 그들 중 몇 명은 성배의 정체를 눈치챘을 것이고, 얼마 뒤 성배의 은퇴 소식이 들리면 평소 얌전한 모범생 스타일로 유명했던 성배가 이렇게까지 괴로워했던 이유가 무엇이었는지 알게 될 것이었다.
 
 결국, 무너진 성배를 지켜보는 헤르만은 착잡하고 미안한 기분 외에는 아무것도 느낄 수 없었다.
 헤르만은 확실히 옛날 사람이었다.
 40년 전, 이 세계에 처음 발을 들인 헤르만은 시작부터 은퇴할 때까지 믿음, 의리, 신의와 같은 가치에 기본을 두고 일을 해왔다.
 
 하지만 헤르만은 이 세계의 흐름이 빠르게 변화했음에도 불구하고 변화를 선택하지 않았고, 결국 말년의 계약들은 자잘한 실패들이 많았다.
 그리고 결과적으로 가장 큰 실패는 성배의 재계약이 되었다.
 
 ***
 
 -쿵!!
 “악!! 아오, 아파라…….”
 헤르만과 헤어지고 어찌어찌 집까지는 돌아왔지만, 여전히 몸을 제대로 가누지 못하는 성배였다.
 문을 열고 들어오자마자 바로 신발장에 무릎을 찧었고, 아프기는 해도 별것 아닌 충격이었지만 앞으로 넘어졌다.
 “에이, 빌어먹을!! 뭐, 제대로 되는 일이 하나 없어!!”
 술 취한 사람의 전형적인 모습이었다.
 술에 취하면서 감정 조절도 제대로 안 되고 있었기 때문에 신발장을 걷어차려던 성배는 순간적으로 발을 멈추었다.
 선수생활을 이어오면서 그라운드나 훈련장이 아닌 공간에서는 발을 최대한 쓰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하도 오랫동안 습관이 되어서 그런지 술에 취해도 그런 원칙만큼은 몸이 기억하고 있었다.
 -빡!!
 “젠장!! 이제 그게 다 무슨 소용이야!!”
 이미 은퇴를 결정한 상황이었다.
 하지만 그런 상황에서도 자신의 몸은 아직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이런 상황에서도 꾸역꾸역 발을 아끼고 있었다.
 그것이 성배를 더욱 비참하게 만들었다.
 아직 준비가 되지 않은 상태에서 반강제적으로 결정하게 된 은퇴. 성배는 그것을 받아들이기가 힘들었다.
 “1부 리그에서…… 1부 리그의 잔디를…… 한 번이라도, 1분이라도 밟아보고 싶다는 내 꿈이…… 내 꿈이 그렇게, 그렇게 큰 거냐!! 씨발…….”
 성배는 신발장을 걷어차고 혼자 신발장을 상대로 씩씩대다가 그냥 현관에 누워버렸다.
 오른팔에 가려져 있던 성배의 눈에서 바닥으로 눈물 한 방울이 떨어졌다.
 술로 인해 고양된 감정과 며칠 동안 쌓였던 자괴감, 그리고 지난 가족이라 생각했던 클럽에 대한 배신감은 그 16년 동안 힘들게 버텨왔던 성배를 무너뜨렸다.
 “한 번쯤은 1년, 아니 반년!! 반 시즌이라도 나한테 시간을 줄 수 있었잖아……. 은퇴가 재계약이냐!! 이적이냐고!! 꼭 이적시장에서 해야 되는 거 아니잖아!! 반 시즌 있다가, 한 경기라도 뛰고 난 다음에…… 그다음에 은퇴해도 되잖아……. 응!! 내 말이 틀려!! 틀리냐고!!”
 내일이면 아마 옆집에서 쳐들어올지도 모르겠지만, 아니, 거의 십중팔구 옆집 사람에게 욕을 들어먹겠지만, 지금은 이렇게라도 표출하지 않고는 버틸 수가 없었다.
 혼자서 고래고래 미친놈처럼 소리를 질러서라도 이 울분을 풀지 않으면 자신은 당장 오늘 밤에라도 일을 치를지도 모를 것 같다는 직감이 성배를 감싸고 있었다.
 “하, 하하……. 신발도 안 벗고 내가 이러고 있었네……. 미니나 엘리가 봤으면 한마디 했겠어. 안 되지, 안 돼. 혼나면 안 되지.”
 울다가 갑자기 웃으면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성배는 비틀거리면서 자신의 방으로 향했다.
 비틀거리기는 했지만 놀라울 정도로 빠르게 움직여 자신의 방으로 들어가 바로 책상 첫 번째 서랍을 열었다.
 서랍 안, 가장 잘 보이는 자리에 엎어져 있는 액자를 집어 든 성배는 환한 웃음을 지으면서 한참 동안 사진을 사랑스러운 눈빛으로 쳐다보았다.
 “엘리야…… 엘리. 어떠니? 지금 잘 지내고 있니? 아빠는 말이다, 이제 인생의 두 번째 장을 시작하려고 한단다. 첫 번째 장이 제대로 완결이 나지 못하고 조기 종결로 끝나고 말았지만, 그래도 두 번째 장을 잘 쓰고, 인생의 마지막 완결을 잘 내면 되는 거 아니겠니? 아빠 걱정은 하지 말고, 거기서 행복하게 지내렴.”
 사진 속에는 두 명의 여성이 성배를 바라보면서 활짝 미소 짓고 있었다.
 아직 학교에 들어갈 나이도 안 되는 것처럼 보이는 작은 여자아이가 바로 성배의 딸이었다.
 마치 직접 아이와 이야기하는 아버지처럼 속마음은 전부 다 안으로 삭히고 겉으로는 희망찬 이야기들을 내뱉는 성배는 웃으면서 울고 있었다.
 딸, 엘리자베스가 자신의 얼굴을 볼 수 없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하기는 처음이었다. 그리고 아마 마지막일 것이었다.
 “미니…… 너도 좋아 보이네. 잘살고 있지?”
 3년 전에 이미 헤어졌지만, 벨기에로 건너온 이후 성배가 유일하게 마음을 주었던 사람이었다.
 이런저런 힘든 일들을 많이 겪고도 겨우 자리를 잡은 이후 만난, 그렇게 10년을 이어가며 성배를 붙잡아주었던 한 명의 여자. 법적으로 가족이었던 것은 아니지만, 사실혼 관계로 10년간 성배를 지탱해주었던 사람이지만, 지금은 옆에 없었다.
 성배는 눈물로 인해 뿌옇게 변한 세상을 다시 선명하게 되돌리면서 휴대폰을 꺼내 들었다.
 미친 짓인 줄은 알지만, 그리고 아마 내일 일어나서 가장 먼저 후회할 일인 것도 알지만, 지금은 그녀의, 자스민의 목소리가 듣고 싶었다.
 [……여보세요?]
 “아!! 미ㄴ…… 아니, 자스민? 나야, 주.”
 [알아. 무슨 일이야, 갑자기?]
 헤어지고 나서 몇 번 연락을 주고받다가 끊은 뒤에 이렇게 연락을 한 것은 거의 2년 반 만이었다.
 2년 반 동안 연락을 하지 않았던 전 애인의 연락이었으니 수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자스민의 목소리가 살갑지 않은 것도 당연했다.
 “아니, 뭐. 마땅히 이유는 없고!! 그냥…… 그냥 자스민 목소리가 듣고 싶더라고…….”
 [술 취했어? 웬일이야. 최소한 술은 입에도 안 대던 사람이……. 그나마 그 덕분에 50점은 넘었는데, 술까지 입에 댔으니 남편으로서는 이제 50점도 안 되겠네.]
 “하하하!! 그런가? 아아, 미안, 미안…….”
 헤어졌고, 그렇게 좋은 이별이라고는 할 수 없었지만 그래도 서로에게 완전히 정이 떨어지기 전에 이별을 선택했기에 좋은 추억들은 지킬 수 있었다.
 그래서 여전히 성배에게 나눠줄 정이 남아있는 것인지 자스민은 성배를 타박하면서도 그 속에 성배에 대한 걱정을 담고 있었다.
 “뭐…… 그냥 목소리 들으려고 전화했어. 잘 지내고 있지? 비밀인데, 가끔 영상 확인하거든. 잘 지내는 것 같더라. 다행이야.”
 [그래. 1부 리그 승격했더라. 축하해.]
 “…… 하하!! 고마워!! 내가 언젠가 그 팀도 1부 리그 갈 거라고 했잖아. 내가 맞았지?”
 [그래. 내가 틀렸어. 축하해.]
 더 좋은 조건과 강한 전력을 갖추고 있는 클럽으로의 이적을 계속해서 거절한 성배의 행동은 둘의 사이를 나빠지게 만들었던 이유 중 하나였다.
 어쨌든 로얄 앤트워프의 승격은 성배가 틀리지만은 않았다는 것을 증명한 것이었고, 자스민도 그 부분에 대해 축하를 건네주었다.
 [늦었으니까 다음에 연락하든지, 해. 졸리니까.]
 “…… 그래야겠지? 지금은…… 너무 늦었지?”
 늦은 시간이었기 때문에 자스민은 통화를 끊으려 했다.
 시간도 시간이지만 이미 끝난 전 애인과의 통화가 부담스럽기도 했을 것이었다.
 내일이 되어 술기운을 잃으면 용기를 내지 못할 것임을 알고 있는 성배는 조금 더 오래 통화를 하고 싶었지만, 자스민이 저렇게까지 말하는데 통화를 이어갈 방법이 없었다.
 결국, 어쩔 수 없이 전화를 끊은 성배는 의자에 가만히 앉아 사진만 쳐다보았다.
 
 
 # 낭만필드 - 005
 
 “은퇴…… 하겠습니다. 코치로, 앞으로는 코치로서 로얄 앤트워프를 위해 열심히 노력해보겠습니다.”
 “잘 생각했어!! 워낙 똑똑하고 경기를 보는 눈이 좋으니까 코치로서 성공할 수 있을 거야!!”
 다음 날, 구단 사무실을 찾은 성배는 결국 클럽 측에 은퇴 의사를 전달했다.
 처음부터 성배에게 선택지 따위는 없었다.
 선수생활에 대한 미련은 남아있었지만, 1부 리그 진출에 대한 미련이었다.
 1부 리그 진출로의 길이 사실상 막혀버린 현실에서 선수생활을 지속하는 것은 의미가 없었다.
 의미가 없는 것을 넘어서 그나마 클럽에서 던져 준 코치직도 건지지 못하는, 최악의 선택일 수밖에 없었다.
 모아놓은 돈은 앞으로 까먹는 것밖에 남아있지 않았다.
 연봉은 대폭 깎이겠지만, 코치직이라도 손에 쥐지 못하면 그야말로 경제력이 시한부 판정을 받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지금까지 16년 동안 쌓아온 노하우를 총동원해서 최대한 클럽의 전력에 도움이 되겠습니다. 저, 특별한 재능도 없고 포지션도 세 번이나 전향했지만 결국 이렇게 살아남았습니다. 축구라는 스포츠에 대한 이해도, 여러 포지션에 대한 이해도 다 자신 있습니다. 꼭, 저에게 코치직을 맡겨주신 클럽에게 보답하겠습니다.”
 “좋아, 좋아. 자네라면 잘하겠지!! 알고 있다고. 자네를 처음 봤을 때부터 이 친구는 선수보다 지도자로서 대성할 거라는 직감이 왔어. 한 번 다음 시즌부터 우리 잘 해보자고.”
 다행히 감독의 반응은 좋았다.
 진심으로 성배가 코치직을 맡는다는 것에 대해 기뻐하고 있는 것 같았다.
 클럽에 고용되는 형태이기는 하지만 결국 직속상관은 감독이 될 수밖에 없었기 때문에 감독이 성배의 코치 선임을 만족한다는 것은 그래도 좋은 시작이었다.
 ‘그래…… 이거면 된 거야. 이 정도면 됐어. 좋은 시작이야.’
 클럽에게 서운한 감정은 여전히 가지고 있었다.
 솔직히 이야기해서 클럽의 입장을 이해는 하지만 그래도 16년을 이렇게 함께 달려왔으니 상징적인 존재로 한 시즌 정도는 1부 리그에서 함께 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단 한 번의 기회도 주지 않은 클럽에게 서운한 것은 당연했고, 고작 며칠 만에 사라질 수 있는 성격의 감정도 아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언제까지나 클럽에게 불만을 표시할 수는 없었다.
 사실, 클럽도 그 16년의 시간을 생각해서 던져주다시피 한 것이지만 어쨌든 코치직을 준비해준 것이었다.
 자신은 냉정하게 말해 클럽 입장에서 별로 중요한 존재도 아닐 것이 분명했다.
 지난 시간 동안 클럽을 가족이라 여긴 것은 자신 하나였고, 클럽도, 팬도 자신을 가족이라 여기고 있지 않았던 것 같았다.
 ‘가족은 무슨…… 싼 가격에 비해서 효율이 좋았을 뿐이지. 젊을 때 백업, 나이 들어서 주전으로 활약할 때도, 동급 선수들에 비해서 싸게 계약해줬으니까.’
 선수생활 초기에는 선수생활 그 자체에 만족해서 그리 큰 연봉을 요구하지 않았고, 나중에는 자기 혼자 가족이라는 허울 좋은 생각에 빠져서 디스카운트를 자처했다.
 팀에서는 선수가 알아서 디스카운트를 해주니까 효율에 비해 낮은 가격으로 쓸 수 있는 선수를 내보낼 필요가 없었던 것뿐이었다.
 ‘그레고리랑 뱅상이 나타나니까 바로 버려지잖아. 제길…… 돈이 걸린 세계에 의리란 없다는 것을 빨리 알아챘어야 했는데…….’
 어차피 이제는 다 지나간 이야기였다.
 자신과 클럽이 가족과 같은 관계라는 환상에서 깨어난 성배는 이제부터라도 다른 사람들처럼 자신을 어필해야 할 필요를 느꼈다.
 그저 조용히, 묵묵히 할 일을 하는 것만으로는 분명히 부족한 부분이 있을 것이었다.
 방금 했던 것처럼 자기 자신을 어필할 필요성도 느꼈고, 그것뿐만 아니라 윗사람들과 친분도 쌓아보기로 했다.
 
 선수야 기량만 갖추고 있다면 어디서든 뛸 수 있는 기술직이었다.
 반면, 코치는 대충 보면 선수와 마찬가지라고 생각하겠지만, 기술직보다는 사무직에 가까웠다.
 그라운드 위에서의 플레이로 실력에 순위가 매겨지는 선수와 달리, 코치의 역할은 애매한 부분이 있었다.
 선수들에 대한 영향력, 선수 관리, 선수 성장 등 코치의 역할은 분명히 눈으로 확인하고 순서를 나누기 애매한 부분이었다.
 
 게다가 선수에 비해 코치는 TO 자체가 적었다.
 중소 규모의 클럽으로 내려오면 코치의 숫자가 5명을 겨우 넘기는 경우도 많았다.
 게다가 한 팀에서 5년 이상 머무는 경우가 많지 않은 선수에 비해 코치는 10년을 넘기는 경우도 수두룩했다.
 한 팀에서 코치로 활약하다가 나가게 되면 다른 일자리를 찾기가 쉽지 않다는 뜻이었다. 정치 싸움에 대해서도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주! 단장님이 찾으십니다. 감독님이랑 이야기 끝나면 단장실로 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단장님이요? 무슨 일이시지…….”
 감독과의 대화를 마치고 밖으로 나온 성배에게 클럽 직원이 단장의 말을 전했다.
 감독과의 대화가 끝나면 바로 올라오라는 단장의 말에 왜 부르는 것인지 의아해하면서도 서둘러 단장실로 올라가는 성배였다.
 이렇게 부르면 바로바로 뛰어가는 것부터 사내 정치의 시작이었다.
 “아, 왔군. 이야기는 들었네. 은퇴하고 코치생활을 시작하기로 했다고? 잘 생각했네.”
 “네, 감사합니다.”
 성배가 은퇴를 선택했음에도 불구하고 단장의 표정은 그렇게 좋지 않았다.
 그것이 성배를 불안하게 했다.
 단장이 원하는 대로 은퇴를 선택했는데 표정이 좋지 않다.
 기본적으로 미소는 짓고 있지만 원래 그 정도의 미소를 항상 짓고 있는 단장이었고, 단장을 오래 봐온 성배 입장에서는 그렇게 좋은 표정은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이번 클럽의 대우가 섭섭하다는 것은 알고 있네. 하지만 20년 만에 1부 리그로 올라가는 것인데, 철저한 준비를 하고 싶다네. 이해해주었으면 좋겠군.”
 “네……. 이해는 합니다. 클럽으로서는 당연한 선택이었습니다.”
 ‘철저한 준비……. 클럽을 위해 16년을 바친 선수를 본인의 의지와 관계없이 은퇴시켜버리는 게 철저한 준비구나.’
 단장이 말하는 철저한 준비는 최대한 여기저기 지출 금액을 줄여서 최대한 좋은 전력의 선수단을 갖추는 것이 목적이라는 뜻이었다.
 다만, 성배의 입장에서는 그래도, 그래도 팀의 암흑기를 함께 버텨왔던 정신적 지주 역할을 해줄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 그 기회마저도 주지 않았다는 것에 불만이 있었다.
 
 이제 1부 리그 승격에 성공했기 때문에, 로얄 앤트워프도 그에 어울리는 선수들을 영입하기 시작할 것이었다.
 그 과정에서 로얄 앤트워프를 1부 리그로 승격시키는 데 큰 역할을 했던 선수들 중 적지 않은 수가 애매한 대우를 받게 될 것이었다.
 1부 리그로 무대를 옮기면서 더 많은 연봉을 받고 더 좋은 대우를 받고 싶었던 선수들. 그 선수들 중 상당한 숫자는 이번 이적 시장에서 새롭게 영입된 선수들로 인해 자리를 잃고 또 다른 2부 리그 클럽으로 무대를 옮기게 될 것은 자명했다.
 기존의 선수들과 새롭게 영입된 선수들 사이가 꺼림칙해지는 그때, 분명 자신의 역할이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맞는 말이지만 어디까지나 성배의 입장에서 생각한 것이고, 현재 선수단에서 성배만 할 수 있는 일은 아니었지만 어떻게든 선수로서 자신의 존재 가치가 이제는 거의 없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기 위한 발악과 같은 것이었다.
 “자네의 역할은 다음 시즌, 1부 리그에서 경험이 없는 선수들의 멘탈을 잡아주는, 그런 역할을 맡게 될 것이네. 선수로서도 할 수 없는 일은 아니지만, 아무래도 그 부분에 온전히 집중할 수 있다는 것, 그리고 자네의 축구 지능이 자네 혼자의 플레이가 아닌 다른 선수들의 플레이에도 도움이 될 수 있다는 부분 등에서 코치직이 더 나을 것이라 결정한 것이니 섭섭함이 남아있다면 훌훌 털어버리게.”
 “이제 괜찮습니다. 다 털어버렸고, 제 새로운 역할에 집중하도록 하겠습니다.”
 이제 단장이나 클럽 측에서 입에 발린 말들을 그대로 믿을 수가 없었다.
 불과 며칠 전까지만 하더라도 가족인 자신에게 거짓말을 하지 않을 것이라 생각했지만, 이제는 어떤 말을 해도 걸러들어야 한다는 생각뿐이었다.
 
 이전 같았으면 이런 이야기를 들었을 때 위로가 되었겠지만, 지금에 와서는 머리에서 걸러지는 이야기들이었다.
 “그런데 오늘 내가 이상한 이야기를 들었네.”
 “예? 갑자기 무슨…….”
 “자네가 어제 술이 좀 과해서 클럽에 대해 좋지 않은 이야기들을 했다는 소식을 들었네.”
 순간, 성배는 올 것이 왔다는 생각을 했다.
 사실, 단장이 자신을 부른다는 이야기를 듣고 가장 먼저 떠올렸던 것이 바로 어제 술집에서 자신이 했던 말이 단장의 귀에 들어간 것이 아닐까, 하는 것이었다.
 선수생활의 연장을 포기하고 클럽에 남기를 선택한 상황에서 단장의 심기를 거스르는 것은 미친 짓이었다.
 
 그래서 어제 자신도 모르게 술에 취해 쏟아냈던 푸념들이 제발 단장이나 구단주의 귀에 들어가지 않기를 바랐는데, 결국 그의 귀에 들어가고 만 것이었다.
 “아…… 죄송합니다. 제가 술에 취해서 감정이 격해졌던 것 같습니다.”
 “뭐, 이해는 할 수 있네. 아무래도 16년 동안 2부 리그에서만 뛰었으니 1부 리그에서 한 번은 뛰고 싶었겠지. 하지만 클럽은 다른 많은 선수들의 꿈 또한 짊어지고 있다네.”
 “…… 예. 잘 알고 있습니다. 죄송합니다.”
 죄송하다는 말 말고 성배가 할 수 있는 이야기는 없었다.
 성배도 클럽의 운영이라는 측면을 생각했을 때, 자신을 지금 방출하는 것이 옳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다만, 성배가 섭섭한 부분은 16년이나 팀을 위해 공헌해온 자신에게 아름답게 선수생활을 마무리할 수 있는 단 1년도 클럽에서 내주지 않은 부분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자네만을 위해줄 수 없어. 자네가 팀을 위해 공헌한 부분들이 상당히 많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우리의 입장도 이해해주게.”
 “아닙니다. 제가 죄송합니다. 저도 잘 알고 있지만, 술에 취해서 이성을 잃었던 것 같습니다. 클럽의 입장은 저도 백분 이해합니다.”
 그런 성배를 설득하기 위해 계속해서 자신들의 입장만을 내세우는 클럽에게 점점 더 섭섭함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자신은 그저 자신이 클럽을 생각하는 것처럼 클럽도 자신을 생각한다는 것을 느끼고 싶을 뿐이었다.
 하지만 이래서는 클럽 측에서 자신의 기분을 풀어주려고 하면 할수록 오히려 이 팀만을 위해 달려온 지난 16년의 세월이 후회될 뿐이었다.
 “아, 그리고. 이번 일까지는 이해하겠지만, 앞으로는 이런 불미스러운 소문들이 나돌지 않았으면 좋겠네. 클럽 입장에서는 별로 반가운 일이 아니라서 말일세.”
 “죄송합니다. 앞으로는 절대 이런 일 없을 겁니다.”
 어차피 이제 더 이상 팀을 가족이라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가족에게는 보여줄 필요가 없는 가식적인 태도를 자주 취하고, 마찬가지로 가족이라면 필요 없는 정치적인 접근도 앞으로 자주 취하게 될 것이었다.
 아직은 이럴 때마다 씁쓸함이 찾아왔지만, 앞으로 익숙해지면 버텨낼 수 있을 것이었다.
 그렇게 믿고 버틸 수밖에 없었다.
 
 
 # 낭만필드 - 006
 
 ‘담배라도 배워볼까…… 그거 피면 스트레스가 풀린다고 하던데…….’
 사무실을 나와 밖으로 나온 성배는 하늘을 올려다보며 한숨을 크게 쉬었다.
 항상 자신이 친근함과 함께 소속감을 느꼈던, 그런 포근한 공간에 있다가 나온 것인데, 등이 땀으로 흠뻑 젖어있었다.
 포근했던 단장 사무실은 자신의 가치를 냉정하게 평가해 구매를 결정하는 상품 진열대 같았고, 단장은 말 한마디로 자신을 날려 보낼 수 있을 것 같았다.
 “아…… 주!!”
 “응? 아, 그레고리냐.”
 이전에는 절대 이해하지 못했었다.
 왜 사람들이 담배를 시작하는지. 하지만 서른여섯이 되어 새삼스럽게 사람들이 왜 담배를 시작하는지에 대해 심도깊고 쓸데없는 이해를 시작한 성배를 다시 쓸 데 있는 현실로 돌아오게 만든 것은 그레고리였다.
 자신과 같은 레프트 백 포지션에서 같은 세대 중에는 그래도 손에 꼽히는 뛰어난 유망주라고 평가받지만, 1부 리그로 떠나지 않은 친구였다.
 “주!! 은퇴한다는 이야기가 들리던데요? 그거 진짜예요?”
 “그래, 뭐…… 그렇게 됐다. 나이도 있고, 팀도 이제 1부 리그로 올라갔으니 내 역할은 이제 끝이지.”
 “아…… 아직 배울 게 많은데……. 아직 저한테 가르쳐줄 게 많은데 이렇게 은퇴하시면 어떡해요! 다 가르쳐준다면서요.”
 “하하하, 당장 몇 달 뒤에는 올림픽 무대에서 뛰고 있을 놈이 만년 2부 리거한테 배울 게 뭐가 있다고 그래. 올림픽 대표면 그 급에 맞는 선수들한테 배워야지.”
 두 시즌 전부터 자신을 백업으로 밀어낸 선수였지만, 그레고리에 대해서는 좋은 감정뿐이었다.
 나름 유명한 유망주임에도 불구하고 자신을 잘 따라주었고, 만년 2부 리거에 불과했던 자신에게도 내려다보지 않고 항상 뭔가를 배우기 위해 자세를 낮췄다.
 그리고 여러 벨기에 내 빅 클럽들의 러브콜에도 불구하고 팀에 남아 승격의 주역으로 활약했다.
 그래서 기특했지만, 지금은 그래서 안타까웠다.
 “주가 2부 리그에서만 뛴 건 우리 팀을 위해서 주가 직접 선택했기 때문이잖아요. 그리고 주는 여전히 제가 아는 선수 중에는 제일 영리하다고요. 그 부분은 저에게 꼭 필요한 부분이에요.”
 “너는 경험이 적을 뿐이지, 영리하지 못한 게 아니라고 항상 말했잖아. 뭐, 그래도 아예 팀을 떠나는 건 아니니까 너무 섭섭해 하지 마. 감사하게도 팀에서 코치 자리를 내줘서 이제는 코치로 있을 테니까.”
 “아…… 역시!! 역시 주가 이렇게 팀을 떠날 리 없었죠!! 제가 괜한 걱정을 했네요.”
 팀을 떠나지 않고 코치로 남는다는 이야기에 표정이 확 밝아지는 그레고리였다.
 자신을 왜 이렇게까지 따르는지, 그 이유는 모르겠지만, 그레고리는 그 자신의 위상에도 불구하고 거의 멘토처럼 성배를 따르고 있었다.
 이 정도 재능이 있는 유망주라면 당연히 이 나이 즈음에는 세계 최고의 선수들을 롤모델로 놓고 따라가기 위해 노력할 텐데, 왜 자신에게 그런 마음을 가지고 있는 것인지 기분이 좋았지만 답답하기도 했다.
 ‘나에게 너 같은 재능이 있었으면, 나는 절대 너와 같은 선택을 하지 않았을 거다. 이미 옛날에 안더레흐트나 브뤼헤로 떠나고, 지금쯤 빅 리그로 나가있겠지…….’
 자신이 클럽을 위해 한눈팔지 않고 16년을 헌신해왔다는 점이 그레고리의 무언가를 건드린 것 같지만, 성배가 그레고리의 나이일 때는 그런 생각도 다 사치였었다.
 하루하루 살아남기 위해, 더 이상은 밀리지 않기 위한 투쟁이었고, 지금 그레고리처럼 팀을 위해 전적으로 희생하는 역할이 아니었다.
 “그레고리. 올림픽에서 좋은 활약을 펼치면, 좋은 제안들이 많이 들어올 거야. 그러면…… 이번에는 긍정적으로 추진해봐라. 여기는 너에게 너무 좁아.”
 그래서일까, 성배는 그레고리에게 굳이 하지 않아도 될 조언을 건넸다.
 사실, 그레고리는 그냥 두어도 크게 성장할 선수였고, 자신이 몇 년 만 데리고 있으면 그레고리를 키우는데 자신의 역할이 적지 않았다면서 실적을 주장할 수 있을 것이었다.
 하지만 그레고리는 자신처럼 클럽에 의해 거취가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직접 자신의 거취를 정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주…… 주가 그런 이야기를 하니까 조금 낯선데요?”
 “나는 이적하는 것과 팀에 남는 것의 차이가 그리 크지 않았기 때문에 남았던 거야. 내 수준과 팀의 수준이 큰 차이가 나지 않았던 거지. 그런데 너는 아니야. 너는 이 팀을 나갈 마음만 먹으면 당장 2~3년 뒤에 빅 리그에서 챔피언스리그 무대를 밟고 있을지도 모른다고.”
 이런 이야기를 굳이 그레고리에게 해줄 필요는 없었다.
 자신의 실적은 차치하고라도 코치직을 맡게 되면서 정치적으로 움직이기로 했다면, 이럴 때, ‘팀을 위해서 자신을 희생할 줄 아는 네가 대견하다.’는 한마디를 던졌어야 하는 타이밍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런 선택을 한 자신, 그리고 그 자신의 마지막을 겪은 뒤라서 차마 그런 말은 할 수 없었다.
 “하하, 코치하신다면서요? 그런 이야기 막 하고 다니셔도 되는 거예요?”
 “아, 그런가? 아아, 나는 사람이 너무 좋아서 문제야. 그냥 이럴 때는 좋은 선택을 했구나, 라고 넘겨야 하는데 말이지.”
 그레고리의 농담에 성배도 농담으로 대답했지만, 아차, 싶기는 했다.
 크지 않은 클럽이었기 때문에 아마 며칠 안에 자신이 그레고리에게 어떤 말을 했다는 것이 퍼질 것이었다.
 주변을 둘러 보니 많은 사람이 있지는 않았지만, 한두 명 정도는 자신의 이야기를 들었을 것 같기도 했다.
 “아오…… 코치 되자마자 이거 잘리는 거 아냐?”
 “하하, 그럴 리가 있나요. 주가 이 팀에 어떤 존재인데요. 그리고 코치가 선수 걱정해주는 건 당연한 거죠.”
 ‘순진하구나. 낭만주이자이기도 하고…… 나랑 어쩜 이렇게 비슷한지…….’
 그레고리의 순진한 말에 성배는 그저 미소 지을 뿐이었다.
 이 친구는 제발 자신과 같은 마지막을 경험하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신은 결과적으로 기량이 부족하고 모든 클럽들이 원하는 선수가 되지 못해서 이렇게 끝냈지만, 그레고리만큼은 클럽과의 관계에서 철저히 갑이 되어 자신의 낭만을 지키면서도 얻어낼 것들을 모두 얻어낼 수 있었으면 좋겠다, 그런 생각도 들었다.
 ‘그래. 일단 이 친구를 한 번 지켜보자. 이 친구와 로얄 앤트워프가 어떻게 헤어지는지를 보고, 코치로서 나의 방향도 한 번 생각해보자.’
 선수생활의 마지막이 꼬인 이유가 자신의 기량 부족인지, 아니면 클럽 경영에 있어서 의리가 들어갈 자리가 애초부터 없었던 것인지 확인하기에는 그레고리만큼 적당한 대상이 없을 것이었다.
 마음 같아서는 삶의 방향 자체가 잘못되었다는 것보다는 기량이 부족했다는 쪽으로 결론이 나기를 바랐다.
 기량이 부족하다는 것은 이미 알고 있었고, 삶의 방향이 애초부터 잘못되었다고 한다면 자신이 너무 불쌍해지는 것 같았다.
 “뭐, 어쨌든 진지하게 생각해 봐. 네가 이 팀을 위해 도움을 줄 수 있는 부분은 꼭 여기서 활약하는 것이 전부가 아니니까. 네 이적료라면 1부 리그로 올라가는 팀에게도 큰 도움이 되겠지. 적당한 이적료로 1부 리그 수준의 선수들 여러 명을 데려올 수 있을 테니까.”
 “…… 참, 현실적인 이야기네요. 저에게도 물론 그쪽이 좋겠지만. 그래도, 주랑 조금은 더 함께하고 싶어요. 주의 경험도 조금 더 흡수하고 싶고요.”
 “그래. 그것도 좋겠지. 내가 얼마나 가르쳐줄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그래도 자신의 16년을 이해해주는, 높이 평가해주는 사람이 있다는 것은 기쁜 일이었다.
 비록, 자신의 거취에 하등 영향을 주지 못하는 한 명의 유망주의 생각일 뿐이지만, 그래도 기뻤다.
 단장, 감독, 그리고 사랑하는 여자에게도 이해받지 못했기 때문에 더욱 기쁜 것이리라.
 
 
 # 낭만필드 - 007
 
 ‘그레고리가 일단 이번 시즌까지는 남는다고 생각하면…… 왼쪽은 전혀 문제가 없고, 1부 리그에서 통할 만한 센터백 한 명이랑 스트라이커 한 명 정도는 필수적으로 필요할 것 같은데.’
 선수생활에 대한 미련을 버릴 수는 없지만, 그렇다고 해서 마냥 넋을 놓고 있을 수 있는 상황도 아니었다.
 당장 다음 시즌이 끝난 뒤, 2부 리그로 강등당할 확률이 높았기 때문이었다.
 로얄 앤트워프는 사실상 다음 시즌 최약체였다.
 이번 시즌의 승격도 벨기에 리그의 독특한 구조 덕분으로, 사실상의 전력은 2부 리그에서도 중상위권에 불과했다.
 ‘한 시즌 동안 코치로서 나의 가치를 확실하게 보여야 한다. 나는 젊으니까 포지션도 확실해. 선수생활을 마무리한 지 얼마 되지 않았다는 것도 나한테는 메리트다. 확실히 살려야 해.’
 감독과 코치들이 아무리 팀의 전반적인 부분을 관리한다고 해도, 직접 그라운드에서 몸으로 느낄 수는 없었다.
 하지만 성배는 달랐다.
 다른 코치들과는 달리 그라운드 위에서 직접 팀의 장점과 단점을 몸으로 느꼈다는 장점이 있었다.
 
 당장 몇 년 정도는 이를 살릴 수 있었고, 잘만 이용하면 확실히 자리를 잡을 수 있을 것이었다.
 ‘얀은 분명히 빨라. 하지만 그라운드 위에서 볼을 주려고 보면 이상하게 볼을 줄 기회가 별로 없어. 영상으로는 오프 더 볼 움직임이 좋은 것 같지만, 동료가 볼을 잡았을 때는 이상하게 공간을 만들어주지 못해.’
 얀은 신기한 선수였다.
 영상으로 보면 항상 볼을 주기 좋은 위치로 파고드는 것처럼 보이지만, 정작 그라운드 위에서 함께 뛰는 선수들은 얀에게 볼을 넘기는 것에 대한 어려움을 토로했다.
 항상 결정적인 순간, 몇 초 정도 패스를 줄 수 없는 위치에 위치하고 있었다.
 킬 패스는 1초가 길 정도로 순간적인 타이밍이 중요했기 때문에 얀이 결정적인 패스를 받지 못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동료가 볼을 잡았을 때, 자신의 움직임 말고 상대 수비수들의 움직임도 잘 파악해줘야 돼. 기회가 왔다는 생각이 들면 상대 수비수들에 대한 집중력이 흐트러지는 게 얀의 문제야.’
 [A new world!! This one thing, I want to ask of you, world. To say adieu, world!!]
 “응? 누구지?”
 그라운드 위에서 자신이 겪은 경험과 영상으로 보여지는 선수들의 움직임을 파악하며 다른 코치들이 보기 힘든 부분들을 찾기 위해 집중하던 성배는 갑자기 울리는 벨소리에 놀라 휴대폰을 찾았다.
 로얄 앤트워프, 그리고 축구에만 집중하던 성배는 인간관계가 넓지 않았기 때문에 이 시간에 울리는 벨소리가 어색하기까지 했다.
 “…… 자스민?”
 상대방이 누구인지 확인한 성배는 미묘한 표정을 지었다.
 헤르만과 만나 술을 마시고 10여 년 만에 정신을 놓을 정도로 취했던 날, 자신이 자스민에게 전화를 걸었던 것은 기억하고 있었다.
 휴대폰 액정에 뜬 자스민의 이름을 보고 마음이 복잡한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 여보세요?”
 [아, 주…… 나야. 잘 지내지?]
 “잘 지내지…….”
 멍하니 휴대폰에 적힌 자스민이라는 이름을 바라보고만 있었던 성배는 이러다가 전화가 끊길 것만 같아 급하게 전화를 받았다.
 역시나 어색했다.
 3년 만의 통화, 그것도 아이까지 낳았지만 결국 헤어진 사랑했던 사람과의 통화가 어색하지 않을 리 없었다.
 침묵은 생각보다 길었다.
 [당신…… 은퇴했다며. 사실상 반강제라고 들었어.]
 “…… 응. 맞아. 그랬지. 1부 리그에서는 내 경쟁력이 없다더라.”
 [그러게, 진작 환상에서 깨고 더 좋은 팀으로 가라고 했잖아!]
 “그래. 네 말이 다 맞더라. 하하, 이제 이 바닥에 낭만, 의리, 신의. 이런 것들이 있을 자리는 없더라고. 내가 바보였지.”
 자스민이 전화를 건 이유는 역시 성배의 은퇴 때문이었다.
 여기저기 말하고 다니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성배와 10년을 넘게 만난 자스민이었다.
 성배 주변의 아는 사람들이 꽤 있었고, 그중 몇몇과는 성배 못지않은 친분을 쌓아서 성배와 헤어지고도 연락을 유지하고 있을 것이었다.
 “헤르만이 말해줬구나?”
 [그래. 주가 취해서 나한테 전화한 다다음 날. 그 날 전화해서 말해줬어……. 팀에게 배신당해서 힘들어한다고.]
 “하아…… 배신이라고 할 게 있나. 나 혼자 믿었고, 나 혼자 상처받은 것뿐인데. 애초에 팀에게 나는 중요한 존재가 아니었더라고.”
 [아휴……. 그러니까, 내 말 좀 듣지 그랬어]
 “하하하, 아쉬워해 주는 거야? 기분 좋네. 옛날 생각도 나고…….”
 자스민은 분명히 아쉬워하고 있었다.
 성배의 은퇴와 그것이 성배의 선택이 아니었다는 것, 그 부분에 대해 자스민은 분명 아쉬워하고 있었고, 상처를 받았을 것이 분명한 성배를 걱정해주고 있었다.
 최근 기분 좋을 일이 없었던 성배는 자신을 걱정해주는 자스민 덕분에 오랜만에 정말 기분 좋게 웃을 수 있었다.
 
 자스민은 현명한 여자였다.
 정식으로 결혼하지는 않았지만, 굉장히 오랜 시간을 함께 살았고, 법적으로 사실혼 부부이기도 했었다.
 그리고 성배와 사랑의 결실인 아이, 엘리자베스까지 낳았다.
 자스민, 그리고 엘리자베스와 함께 한 시간은 지금까지 성배의 인생에서 가장 행복한 시기였다.
 엘리자베스가 성장하면서 성배도 성장해 전성기를 달렸고, 현명한 자스민의 내조는 성배가 오로지 그라운드에만 집중할 수 있도록 해주었다.
 그렇게 행복했기 때문에 결국 불행해졌다.
 [그래서, 앞으로 어떻게 할 거야?]
 “일단 코치로 계약하자고 하니까, 열심히 해 봐야지. 내가 이제 와서 뭐 다른 걸 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결국, 어떻게든 이 바닥에서 버텨봐야지.”
 […… 생활은 괜찮아? 돈은 좀 모아놨어?]
 “그럼. 잘 알잖아. 내가 돈 쓸데가 어디 있어. 연봉도 적지만, 씀씀이도 적었으니까……. 아껴서 살면 그래도 문제는 없을 거야.”
 완전히 두 사람 사이의 모든 것이 파탄 나기 전에 이별을 선택했기 때문에 두 사람 모두 서로에게 나쁜 기억보다는 좋은 추억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도 서로를 응원해줄 수는 있을 정도였다.
 20대를 전부 함께 보낸 상대를 아름답게 기억할 수 있는 상황에서 헤어졌기 때문에 후회는 덜했지만, 성배는 시간이 흐를수록 미련이라는 녀석이 고개를 드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그래, 알았어. 그래도 잘 버티고 있는 것 같아서 다행이네.]
 “하하, 그래? 잘 버티는 것처럼 보여? 그거 다행이네.”
 잘 버티고 있다기보다는 체념에 익숙해졌을 뿐이었다.
 이미 스무 살에 포기하는 법을 배운 성배였다.
 두 번에 걸친 포지션 전향, 빅 리그에 대한 꿈의 좌절, 15번에 걸친 1부 리그 승격 좌절 등, 성배는 스무 살 이후로도 수많은 경험을 거치며 포기하는 법을 배웠고, 이제는 포기하는 법을 완전히 깨우친 상황이었다.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마지막까지 처절하게 달려드는 법.
 그것은 16년의 선수생활과 36년의 인생 속에서도 성배가 배우지 못한 것이었다.
 [앞으로도 잘 버텨. 혹시 알아? 엄청난 지도자가 될지……. 응원할게.]
 “…… 지금 이 통화가 끝나면, 앞으로는 또 몇 년 동안 안부도 전하지 않는 사이가 되겠지?”
 […….]
 자스민과의 통화가 끝을 향해 나아갈수록, 성배는 점점 더 초조해졌다.
 지금 이 통화가 끝나면 앞으로 자스민과의 유대는 더욱 옅어질 것이었다.
 자스민과 자신이 공유했던 선수로서의 시간은 끝이 났고, 성배의 앞에는 이제 자스민이 알지 못하는 지도자의 길이 펼쳐져 있을 것이었다.
 “자스민…… 아니, 미니. 우리…… 우리 사이에 대해서 다시 한 번 생각해보자.”
 [이제 와서 우리가 뭘 할 수 있는데…….]
 “미니, 이제는 네 웃는 얼굴 말고는 기억이 안 나. 우는 얼굴, 화난 얼굴은 이제 떠올릴 수가 없어. 그래서 너와 함께 하면서 힘들었던 시간, 화났던 시간도 함께 잊을 수 있었어. 너와 함께했던 행복했던 시간들이 지금 나를 지탱해주고 있어. 우리…… 다시 시작하자.”
 
 
 # 낭만필드 - 008
 
 [우리가 이제 와서 뭘 할 수 있겠어……. 행복했던 시간들만 생각난다고? 당신…… 매일 내 얼굴을 보면서, 엘리……를 떠올리지 않을 자신…… 있어?]
 성배는 자스민에게 더 이상 다시 시작하자는 말을 할 수 없었다.
 아직 자스민을 원한다고 생각하지만, 자스민과 함께하면서 엘리자베스를 떠올리지 않고, 떠올리면서도 가슴 아파하지 않을 자신은 없었다.
 전화를 끊고도 담담하게, 하지만 떨리는 목소리로 내뱉은 자스민의 말이 잊히지 않았다.
 [나는…… 못해. 주. 주는 지금까지 내 인생에서 가장 오랜 시간을 함께 사랑한 사람이고, 내 20대를 빛나게 해준 사람이야. 하지만…… 이제 우린 너무 늦었어. 우린…… 큰 슬픔 앞에서 서로를 보듬어 줄 수 없었고, 그래서 헤어진 거야. 주도, 나도…… 각자의 아픔을 견디기도 버거워서……. 서로를 만져주지 못했어. 다시 만난다고…… 달라질까?]
 결국, 성배는 더 이상 말을 하지 못하고 끊을 수밖에 없었다.
 불행한 사고로 엘리를 잃은 뒤, 성배와 자스민의 사이는 급격하게 얼어붙었다.
 얼어붙었다기보다는 서로가 서로를 신경 쓸 수 없을 정도로 핀치에 몰려버렸다는 말이 더 어울렸다.
 감당할 수 없는 슬픔을 서로 돌보아주면서 함께 헤쳐나갔어야 했는데, 그렇게 하지 못했다.
 
 그리고 그렇게 멀어졌다.
 각자의 슬픔을 각자, 자신의 힘으로 혼자 버텨냈던 두 사람이었다. 그리고 그 과정은 엄청난 감정 노동이었다.
 그리고 그 감정의 소용돌이 속에서 여러 감정들이 마모되고 잘려나갔고, 서로를 이어주던 여러 가지 유대감들 역시 마모되어버렸다.
 이후 3년을 더 버텼지만, 결국…… 두 사람은 갈라설 수밖에 없었다.
 [A new world!! This one thing, I want to ask of you, world. To say adieu, world!!]
 ‘젠장……. 오늘 전화가 많이 오네. 울고 싶어도 울 수가 없구나.’
 자스민과의 통화가 끝난 이후, 성배는 자스민과의 나날들을 떠올리며 멍하니 앉아있었다.
 자스민과 헤어진 이후, 6개월 동안은 매일 흘리다가 최근 몇 년 동안 흘리지 않았던 눈물이 다시 흘러나오고 있던 중이었다.
 하지만 그런 자신을 가만히 놔두고 싶지 않았는지, 휴대폰 벨소리가 다시 한 번 울렸다.
 “여보세요?”
 [아, 주. 나야. 비안키 감독.]
 “아, 감독님. 어쩐 일이세요?”
 이번에는 로얄 앤트워프의 비안키 감독으로부터의 전화였다.
 신임 코치로 선임된 성배의 직속상관이라고 할 수 있는 사람이었기 때문에 성배도 긴장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제 막 시작된 새로운 생활이었다.
 감독에게 잘못 보이면 새로운 인생의 첫 번째 장이 시작부터 꼬일 수도 있었기 때문에 자연히 전화를 받는 자세마저도 반듯해졌다.
 [음……. 코치로 부임하자마자 사고를 한 건 쳤더군? 자네…… 그레고리에게 팀을 떠나라고 했다면서?]
 “아…… 그…… 떠나라고 한 건 아니고…… 그게 말입니다…….”
 이런, 결국 걱정했던 일이 벌어진 것이었다.
 그레고리에게 괜한 조언을 건넨 것은, 자신보다 훨씬 뛰어난 선수가. 자신이 아끼는 후배가 자신과 비슷한 길을 걷고 결국 자신처럼 후회하게 되는 것이 싫다는 생각에 충동적으로 행한 행동이었다.
 
 그리고 그다음부터 곧바로 후회했다.
 로얄 앤트워프는 작은 클럽이고, 소문이 퍼지는 속도는 상상을 초월했기 때문이었다.
 혹시나, 하는 기대를 걸어보았지만, 역시 결국 감독에게 이야기가 들어가고 말았다.
 [정확히 자네가 어떤 생각으로 그런 이야기를 건넸는지, 대충은 알고 있어. 나도, 나도 선수들을 아끼는 사람이니까. 하지만 감독이라는 자리, 코치라는 자리는 선수들을 아끼는 마음만으로 해낼 수 있는 자리가 아니야.]
 “…… 죄송합니다.”
 확실히 성배의 조언은 팀의 입장에서 받아들일 수 없는 내용이었다.
 팀에서 그레고리를 팔지 않겠다는 것은 아니었다.
 사실 그레고리나 뱅상이나 성배의 자리를 꿰찬 선수들은 팀의 입장에서 봤을 때, 그 무엇보다도 가치가 높은 상품이었다.
 하지만 선수가 떠나고 싶어 해서 떠나는 것과 팀에서 높은 가격을 받게 되어 떠나보내는 것.
 어느 쪽이 팀에 이득이 되는지는 굳이 따져볼 필요조차 없었다.
 [그래서 나를 비롯한 우리는…… 자네가 은퇴와 관련된 모종의 일들로 클럽에 대한 애정이 식은 것은 아닐까, 하고 생각할 수밖에 없어.]
 “!!! 그럴 리가!! 아닙니다. 아시지 않습니까? 제가 16년 동안 이 팀에 얼마나 애정을 쏟았는지, 그리고 이 팀을 사랑하는지 말입니다!!”
 […… 그럴 수도 있겠지. 아마 그럴 거야. 하지만 지금도 그럴 것이라 장담할 수 있을까? 누가? 죽고 못 살던 연인도 하루아침에 원수가 되어버리는 세상인데 말이야. 자네를 1군에서 쓰지 않겠다고 하던 날, 구단 사무실에서 소리치던 자네의 얼굴을 잊을 수가 없는데.]
 지금 감독은 외부 인사 출신이었다.
 로얄 앤트워프에서 이제 겨우 세 시즌째를 맞는 감독이었기 때문에 성배가 그동안 팀을 위해 어떻게 뛰었는지 몰랐다.
 성배가 겪은 지난 감독들은 전부 다 코치에서 승격하거나, 클럽에서 뛰었던 선수 출신이었기 때문에 성배에게 어느 정도 편의를 봐주었지만, 지금 감독은 그런 것이 없었다.
 “죄송합니다. 하지만 팀을 향한 제 마음은 전부 다 진심입니다. 그레고리에게 큰 가능성이 보였기 때문에 한 말입니다. 그레고리가 저를 잘 따랐다는 것을 잘 아시지 않습니까. 그래서, 그레고리가 조금 더 큰 무대에서 뛰는 것을 보고 싶었습니다. 죄송합니다.”
 [맞아. 그레고리는 자네를 잘 따르지. 다른 선수들도 일부 마찬가지이고. 그래서 자네를 끌고 가려 했던 건데……. 지금 와서 보니까 과연 그것이 잘한 결정인지 확신을 할 수가 없어.]
 “감독님!!”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자신의 코치 선임이 잘한 일인지 모르겠다는 말은 결국 코치 선임이 무산될 수도 있다는 뜻이 아닌가!
 구두로 합의가 되었을 뿐, 아직 확실히 계약서를 작성한 것은 아니었다.
 클럽이 계약을 다시 고려한다고 하면, 성배가 어떻게 할 수 있는 방법은 없었다.
 
 안 그래도 현 감독은 이미 기량이 많이 떨어지고도 클럽 구성원 대다수에게 지지를 받고 있어 건드리기 힘든 성배를 불편해하는 모습을 보였다.
 결국, 실수라고도 하기 애매한 성배의 말실수를 꼬투리 잡아 내치려고 하는 것이었다.
 [우리에게 굉장히 중요한 시즌이야. 하나가 되어 모든 힘을 모아야 1부 리그에서 살아남을 수 있어. 그런데…… 자네가 나와 같은 생각을 하고 있는지, 그것을 확신할 수가 없게 되었단 말이야. 그런데 자네는 또 선수들로부터 많은 지지를 받고 있어. 그렇게 되면…… 팀이 나뉘어 버릴지도 몰라. 그런 위험을 감수할 수는 없지.]
 “…… 누구의 뜻입니까?”
 [누구의 뜻이라니…… 굳이 이 이야기까지 할 필요는 없지만, 말하자면 자네가 그레고리에게 건넨 이야기의 내용을 들은 내가 단장님께 상담을 요청했고, 상담 결과 단장님께서도 심각성을 느끼셨는지, 허가를 해주셨지.]
 “허, 허허허……. 결국, 이렇게 되는 겁니까? 팀과 16년을 함께 한 제가……. 1부 리그 승격과 함께 이렇게 버려지는 겁니까? 저는 그저 돈이 안 되는 2부 리그 생활을 견디기 위한 부품에 불과했던 거군요.”
 [나는 이 클럽에 온 지 얼마 되지 않아서 그런 것까지는 모르겠는데. 그리고 설마? 그럴 리가 있나? 클럽이 1부 리그에서 살아남고 안정을 찾는다면, 그때 좋은 소식이 있겠지.]
 성배는 더 이상 항의할 기력조차 없었다.
 클럽에서 은퇴를 종용했을 때는 그래도 이해할 수 있었다.
 자신의 기량이 떨어진 것은 분명했고, 이제 기량이 떨어질 일만 남은 자신보다는 조금 기량이 떨어지더라도 잠재력이 있는 선수를 영입하는 것이 나은 것은 당연했다.
 모든 포지션의 백업 선수까지 영입할 수는 없는 상황에서 굳이 자신이 있음에도 자신의 포지션의 백업을 보강하겠다는 클럽의 계획이 섭섭했지만, 그래도 이해할 수는 있었다.
 
 하지만 이건 아니었다.
 마음에도 없는 은퇴를 선택하게 만들고 이제 와서 선심 쓰듯 던져주었던 코치직까지 거두어 간다는 것은 그야말로 자신을 버리는 것이었다.
 자신의 16년을 그대로 쓰레기통에 버리는 것보다도 더 심한 짓이었다.
 짧은 기간에 자신의 모든 것을 바친 클럽에게 두 번이나 배신당한 것이었다.
 “차라리…… 차라리 처음부터 은퇴하라고만 하지 그랬습니까……. 아니면, 그냥 방출을 해버리지 그랬습니까……. 내가 바친 16년이…… 이렇게 끝나버리면 제가 뭐가 됩니까?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하는 겁니까…….”
 [안타깝게 생각해. 지금 무슨 말을 해도 들리지 않겠지만, 이건 진심이야. 하지만…… 생각해봐. 자네의 문제가 없었나? 은퇴? 그건 자네가 들었고, 기량이 떨어졌기 때문이야. 그리고 이번 코치 선임 건이 엎어진 건…… 자네가 처신을 잘못했기 때문이지. 너무 클럽에게 서운해하지는 말게. 어쨌든, 결론이 확실히 나면 다시 연락해주지.]
 “…….”
 성배는 감독의 말에 대꾸할 힘도 없어서 그냥 전화를 끊었다.
 컴퓨터에는 자신이 조금 전까지만 해도 열심히 분석하고 있었던 로얄 앤트워프의 지난 경기가 일시 정지 되어 있었다.
 성배는 그 화면을 더 이상 쳐다보고 있을 자신이 없었다.
 “으아아아아악!!!!!”
 -퍼어-억!! 콰앙!!
 분노를 이기지 못한 성배는 그대로 모니터를 들어 바닥에다가 내리 꽂아버렸다.
 당연히 그 충격을 버티지 못한 모니터는 산산조각이 나면서 여기저기로 파편을 튕겨냈다.
 분노를 이기지 못하고 발을 들어 올렸던 성배는 또 한 번 습관적으로 발을 멈추었다가 자신을 비웃었다.
 이제 발을 아낄 필요가 없었다.
 지금까지 자신을 먹여 살렸던 고마운 발이지만, 이제 아껴줄 필요가 없어졌다.
 -퍼억! 퍼억!! 퍼억!!!
 “이런, 썅!! 아파!! 아프다고!! 너무 아파!!!!!”
 아프다고 비명을 지르면서도 성배는 발을 멈추지 않았다.
 깨진 모니터의 조각들, 그리고 단단한 모니터의 프레임들을 맨발로 걷어차고 있었으니 발이 성할 수가 없었다.
 이미 성배의 왼발은 피투성이가 되어 여기저기 찢어지고 있었고, 부서진 모니터의 파편들은 물론이고 방바닥도 이미 피로 흥건히 젖어버렸지만, 성배의 발길질은 멈추지 않았다.
 “아파!! 아프다고!! 너무 아파!! 아파서 죽을 것 같다아아아!!!!!”
 계속해서 단단한 모니터의 조각들을 걷어차고 있었기 때문에 발에서 엄청난 고통이 몰려왔지만, 아무리 발이 아파도 마음의 통증에는 비교하기도 미안할 정도의 미미한 고통일 뿐이었다.
 아프다고 절규를 내뱉는 성배는 모니터를 발로 후려차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손으로 가슴을 강하게 쥐어뜯고 있었다.
 
 
 # 낭만필드 - 009
 
 [A new world!! This one thing, I want to ask of you, world. To say adieu, world!!]
 …….
 [A new world!! This one thing, I want to ask of you, world. To say adieu, world!!]
 “시끄럽네…….”
 성배는 다시 폐인처럼 생활하기 시작했다.
 클럽으로부터 은퇴를 종용당했을 때, 어렵사리 떨치고 일어나 힘들지만 그래도 의욕적으로 코치 생활을 준비하려던 순간, 두 번째로 당한 배신은 성배의 모든 의욕을 꺾어버렸다.
 
 며칠 전, 클럽으로부터 코치 계약을 무기한 미루겠다는 연락을 받은 뒤부터는 걸려오는 전화들도 전혀 받지 않고 그저 폐인처럼 침대에 누워 아무런 일도 하지 않고 있었다.
 “…… 자스민이구나. 헤르만 아저씨가 또 연락하셨나 보네.”
 자스민의 전화 역시 받지 않았다.
 지난 통화에서 둘 사이가 이제는 더 이상 예전으로 돌아갈 수 없다는 것을 깨달은 성배였다.
 자스민의 목소리를 들으면 그것을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추하게 매달릴 것만 같았다.
 
 헤르만과 그레고리에게도 계속 전화가 걸려왔지만, 성배는 그 전화마저도 피하고 있었다.
 분명, 지금의 성배에게는 누군가의 위로가 필요했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성배는 누구의 위로도 받고 싶지 않았다.
 지금 누군가에게 위로의 말을 들으면 그대로 무너져 추한 꼴을 보여줄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자신에게 미안해하는 헤르만의 모습도 보고 싶지 않았고, 보잘것없는 자신을 잘 따라주는 그레고리에게는 그런 모습을 보여주고 싶지 않았다.
 ‘하, 하하하……. 내 바닥을 보여줄 수 있는 사람이……. 내 바닥을 보여주어도 괜찮을 사람이……. 어떻게 한 명도 없을 수가 있을까. 내 나이가 서른여섯인데……. 정말, 인생 헛살았구나…….’
 스무 살에 한국에 있던 연고를 모두 버리고 벨기에로 날아온 성배였다.
 어릴 적 만들었던 인간관계는 모두 자연스럽게 정리되어 어린 시절, 학창 시절 친구가 전혀 없었다.
 그리고 벨기에로 와서부터는 살아남기 위해 축구에만 목숨을 걸었기 때문에 친구를 만들 시간이 없었다.
 동료 선수들과 시간을 보내기보다는 공과 시간을 보냈고, 선수가 아닌 코치들과 훨씬 더 많은 시간을 보냈다.
 
 그리고 그나마 두 명 있는 자신의 사람, 헤르만과 자스민 중 한 사람은 자신의 곁을 떠났다.
 헤르만은 아버지와 같은 사람이었기 때문에, 힘든 모습을 부모님에게 보여주기 싫은 것처럼 헤르만에게도 보여줄 수가 없었다.
 부모님은 한국에 있었고, 또 부모님이었기 때문에 마찬가지로 괜찮은 척을 해야만 했다.
 
 결국, 자신의 곁에 남아있는 사람이 없었다.
 자신의 삶을 상당 부분 포기하면서까지 최선을 다했던 클럽은 이용 가치가 떨어지자 자신을 비참하게 버렸다.
 인간관계를 포기했던 성배는 클럽에게까지 배신당하면서 인생을 바친 모든 것들을 잃어버렸다.
 움직일 수 있는 모든 동력들을 잃었기 때문에 다시 시작하는 것도 쉽지 않았다.
 [A new world!! This one thing, I want to ask of you, world. To say adieu, world!!]
 “…… 엄마?”
 하지만 부모님의 전화까지도 받지 않을 수는 없었다.
 아버지와 절친한 사이인 헤르만이 연락했을 것이었다.
 며칠째 전화도 받지 않고 있었으니 걱정이 될 수밖에 없었을 터, 이 전화마저 받지 않는다면 둘 중 하나의 일이 벌어질 것이었다.
 경찰이 출동하거나, 부모님이 출동하거나.
 어느 쪽이든 부모님이 크게 걱정할 것이 분명했기 때문에 전화를 받을 수밖에 없었다.
 “…… 여보세요?”
 [성배야!! 성배야……. 오, 감사합니다. 아무 일 없는 거지?]
 “네, 아무 일 없어요. 그냥……. 지쳐서 조금 쉬었어요.”
 성배가 전화를 받자, 어머니는 흥분한 목소리로 빠르게 말을 건넸다.
 얼마나 걱정했는지 목소리만 들어도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젊음을 모두 바친 클럽으로부터 버림받았다는데, 며칠째 전화도 받지 않고 있다는 소식까지 들으셨으니 혹시나 잘못되었을까, 걱정하시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었다.
 [그래……. 혼자서 생각을 정리할 시간도 필요하겠지. 별일 없는 거지? 나쁜 생각을 한다거나, 한 거 아니지?]
 “네. 나쁜 생각을 왜 해요……. 그쪽으로 가도 누가 반겨준다고……. 엘리한테 혼나기나 할 텐데, 미룰 수 있을 만큼 미뤄야죠.”
 [그래, 그래. 잘했어. 이럴 때일수록 마음 굳게 먹어야지.]
 죽고 싶을 만큼 힘들지만, 그렇다고 죽을 수는 없었다.
 엘리를 먼저 보냈다.
 그 이후로 죽음이란 것을 떠올리기만 해도 가슴이 찢어질 듯 아픈데, 사고도 아니고 자신의 선택으로 목숨을 끊었을 때 부모님의 아픔을 생각하면 절대로 죽을 수는 없었다.
 게다가……. 딸에 이어 전(前) 남편이라고는 해도 딸의 아버지까지 잃을 자스민을 생각해서라도 꾸역꾸역 어떻게든 살아내야 했다.
 [성배야……. 이만 한국으로 돌아오는 건 어떻겠니? 이제…… 그곳에서 더 할 일도 없지 않니?]
 “한국…… 이요? 제가 지금 가서 뭘 해요. 연고도 없고, 이름도 없는데……. 그리고 유소년 팀 코치나 일반 축구 클럽 코치를 하려고 해도 유럽이 훨씬 편해요. 팀이 많으니까요. 평생 이것밖에 한 게 없는데, 결국 축구로 먹고살아야죠.”
 [에휴…… 그러니? 그러면 할 수 없지…….]
 이번 일을 겪고 나서 불안해지신 것 같았다.
 하긴, 큰일을 겪은 아들이 며칠 동안이나 연락도 안 된다는 이야기를 들으셨으니, 당장 찾아가 볼 수도 없다는 것이 불안하셨을 것이었다.
 이렇게 불안해하시는 어머니의 모습을 본 것은 자신이 선수생활에 치명적일 수도 있는 부상을 당했을 때 처음, 엘리가 세상을 떠났다는 이야기를 전했던 몇 년 전에 두 번째, 그리고 이번이 세 번째였다.
 “전 괜찮아요. 아버지도 잘 계시죠?”
 [그럼. 정년퇴임하신 뒤에는 하루가 멀다 하고 놀러 다니신단다. 아주 즐거워 보이셔. 워낙에 사람 만나는 것을 좋아하는 분이지 않니? 그래도…… 헤르만 씨의 전화를 받으신 뒤부터는 영 저기압이셔…….]
 “에휴…… 죄송해요. 걱정 끼쳐드려서. 그래도, 별일 없었고, 없을 테니까 이제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외교관으로 오래 일하셨던 아버지는 얼마 전 정년퇴임으로 일선에서 물러나셨다.
 아들인 성배도, 딸인 유빈이도 나름대로 자리를 잡고 잘 지내고 있었기 때문에 걱정 없이 은퇴 후 생활을 즐기고 계셨을 텐데, 괜히 걱정을 끼친 것 같아 죄송해졌다.
 […… 만나는 사람은…… 있니?]
 “하아…… 없어요. 쉽지 않네요. 이래저래 생각도 많아지고, 무섭기도 하고요.”
 [그래, 그렇겠지……. 그…… 미니…… 는 잘살고 있는 것 같아요. 얼마 전에 몇 년 만에 통화했어요. 잘 사는 것 같더라고요.”
 정식으로 식을 올리지는 않았지만, 진짜 며느리처럼 자스민을 대해주셨던 부모님이었다.
 엘리가 태어났을 때는 모든 일을 다 뒤로 하고 벨기에로 날아와 입꼬리를 차마 귀에서 내리지 못하시기도 했었다.
 엘리를 먼저 떠나보냈을 때, 자신 못지않게 힘들어하셨고, 자스민이 떠날 때도 차마 성배와 자스민을 말리지 못하면서도 누구보다도 더 안타까워하셨을 것이었다.
 [엄마가 이런 말을 꺼내는 게…… 주책일 수도 있지만……. 다시…… 그, 만나는 건…….]
 “어머니. 죄송해요. 저도, 자스민도 다시 만나면 서로를 보면서 엘리를 떠올리게 될 거예요. 그런 시간이 행복하기는…… 어렵겠죠.”
 [휴우……. 미안하다. 괜히 엄마가 주책을 떨어서……. 안 좋은 기억…… 을 떠올리게 했지?]
 건너편에서 애써 울음을 삼키는 어머니의 목소리가 들리자, 성배도 울컥하고 차오르는 울음을 참을 수 없었다.
 엘리가 태어난 뒤, 그리고 엘리를 먼저 보내고 난 뒤, 성배는 부모님의 마음을 최소한 절반 이상은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부모님의 입장에서 자신을 바라보면, 얼마나 속을 썩이고 있을지 상상조차 할 수 없을 정도일 것이었다.
 기록에 남지는 않았지만, 결혼에도 실패했고, 일에서도 실패했고, 자식까지도 잃은 아들. 그리고 서른여섯의 나이에 모든 것을 잃은 아들.
 ‘하아……. 이 얼마나 큰 불효냐……. 한심하다, 주성배.’
 결국 마지막까지 미안해하시는 어머니의 목소리를 들으며 성배는 전화를 끊었다.
 어머니께는 더 이상 드릴 말씀도 없었다.
 매번 자신으로 인해 가슴이 찢어지고 있으실 텐데, 걱정하지 말라는 자신의 말이 공허한 울림이라는 것도 잘 알고 계실 텐데, 매번 애써 밝은 모습을 보여주시는 어머니의 목소리를 듣자면 성배는 너무 가슴이 아파 견딜 수 없었다.
 “엘리야…… 아빠가…… 너무 이기적으로 살아서 벌 받는 걸까? 엄마가 맞는 말을 해도 너무 아빠 고집만 부려서 벌 받는 걸까? 어떻게 생각하니……. 엘리야…….”
 성배는 침대 옆에 놓여있던 가족사진, 자신과 자스민, 엘리자베스가 웃고 있는 사진을 가슴에 안으면서 결국 참았던 눈물을 흘렸다.
 처음 감독으로부터 전화를 받은 뒤, 모니터를 박살 내던 날부터 지금까지 마음이 너무 아픈데도 흐르지 않았던 눈물이 결국 터져버린 것이었다.
 
 [자기는 어떻게 자기 생각만 해? 자기, 기회가 있고, 실력이 있는데도 결국 2부 리그에서 시간을 낭비하기만 할 거야? 자기 나이도 이제 서른이 넘었어!! 은퇴 후도 생각해야지!! 은퇴 후를 생각하면 한 번이라도 1부 리그 무대를 밟아야 할 거 아니야!!]
 [그래도…… 그래도 어떻게 팀을 버려. 이 팀이 나한테 어떤 의미인지 잘 알잖아? 나를 다시 살려 준 팀이나 다름없다고.]
 [10년이나 뛰었으면 할 만큼 했어!! 자기가 지금까지 그렇게 생각하니까 연봉도 매일 후려치고 있잖아!! 당신, 축구 선수가 평생 직업이 될 수 없다는 것도 잘 알고 있는 사람이 왜 그래!!]
 로얄 앤트워프와 재계약을 할 때마다 화를 내던 자스민의 모습이 떠올랐다.
 운동선수의 가치는 연봉이라며, 연봉은 돈 이상의 자존심이라면서 자신보다 더 안타까워했던 자스민이었다.
 그럴 때마다 자신과 클럽의 사이는 그 이상의 무언가가 있다며 무시했던 자신의 모습, 그리고 자신과 엘리의 미래는 생각하지도 않는 것이냐며 화를 냈던 자스민의 모습이 떠올라 눈물이 그치지 않았다.
 
 [이 새끼!! 이 새끼야!! 너는 왜 살아있냐, 이 개새끼야!! 네가 왜 살아있어!! 너도 죽었어야지!! 너도 죽었으면, 너도 죽었으면 억울하지는 않을 거 아냐, 이 개자식아!! 네가 무슨 낯으로 살아있냐고!! 엘리, 엘리 살려내, 이 씨발 새끼야!!!!!!!!!!!!!]
 [주……. 주……. 그만해……. 그만해……. 그만…… 해 흐윽…….]
 [으아아아아악!!!!!!!! 으헝, 으허어엉!!! 어헝, 크아, 크아아악!!!!]
 불의의 사고로 엘리를 먼저 보낸 날, 엘리가 타고 있던 통학 버스 운전자의 멱살을 붙잡고 흔들었던 것도 떠올랐다.
 마약에 취한 운전자가 몰던 트레일러가 중앙선을 넘어 엘리가 타고 있던 통학 버스를 덮쳤다.
 그 과정에서 운전자는 본능적으로 마주 오는 차가 자신이 있는 운전석을 덮치지 않도록 핸들을 꺾었고, 트레일러는 정확히 엘리자베스가 앉아있는 좌석을 강하게 들이받고 말았다.
 
 이 사고로 세 명의 아이가 사망했고, 운전자는 전치 4주의 부상에 그쳤다.
 성배는 사고의 전말을 알고 난 이후, 이성을 잃고 운전자를 찾아가 멱살을 잡고 흔들면서 폭언을 쏟아냈고, 안트베르펜 지역에서는 나름 인지도가 있는 성배를 자스민이 힘들게 뜯어말려 다시 집으로 데려온 날, 그런 날도 있었다.
 
 [주……. 우리…… 이제 그만하자. 주도, 그리고 나도…… 너무 지쳤어. 서로가 서로에게 힘이 되어주지 못하고 있을 바에야, 끝내는 게 맞는 것 같아.]
 [미, 미니!!]
 [엘리는 우리에게 내려온 선물이었고, 천사였어. 하지만 그 이후에도 우리가 서로를 보듬어주고 위로해가면서 살았다면, 그래도 살 수 있었을 거야. 그런데…… 우리는 각자의 아픔에만 빠져서 서로에게 소홀했어. 미안해. 내 잘못이야. 나라도 주의 아픔을 안아주었어야 했던 건데…….]
 [미, 미니!! 아니야……. 그렇지 않아.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어. 지금까지 우리가 너무 힘들어서 그랬던 거야. 이제부터라도 함께 헤쳐나가자. 우리가 함께라면 정말 힘들고 죽을 것같이 힘들지만, 그래도 살아나갈 수 있을 거야.]
 [아니야, 주……. 이미 너무 늦었어. 엘리가 떠난 뒤 2년 동안 우리는 서로에게 너무 상처를 줬어. 자신의 슬픔에만 빠져서 상대가 얼마나 상처를 받고 있는지 몰랐던 거야. 그런데 더 큰 문제는……. 우리는, 최소한 나는 그러는 동안 주에 대한 감정들이 너무 무뎌졌어. 잘은 모르지만, 주도 알고 있을 거야. 우리의 사이가, 서로를 생각하는 우리의 감정이 예전 같지 않다는 것을…….]
 그동안 애써 잊었다고 자신을 세뇌해놓았던 기억들이 성배가 약해진 틈을 타서 끝없이 밀려들어 왔다.
 고등학교 1학년 때 당했던 심각한 부상, 나름대로 유망한 선수에서 재기가 불투명한 선수로 추락했던 시절, 결국 아무 곳에서도 선택받지 못해 은퇴를 각오했을 때, 10년 가까이 스트라이커와 윙어, 미드필더까지 오가며 자리를 잡지 못하던 시절.
 
 결국……. 이렇게 버림받게 된 상황.
 전혀 순탄치 못했던 선수 생활과 그보다도 훨씬 더 비극적인 가정사. 성배가 겪어왔던 수많은 아픔이 한 번에 성배의 머리를 가득 메웠다.
 평생 동안 겪은 모든 아픔들이 한 번에 밀려오는 통에 견딜 수 있는 한도를 훌쩍 넘어섰고, 결국 성배는 정신을 잃고 졸도하고 말았다.
 가슴 속에 행복했던 짧은 시절의 사진은 여전히 꼭 끌어안은 채였다.
 [A new world!! This one thing, I want to ask of you, world…….]
 그 때, 휴대폰의 벨소리가 다시 한 번 울렸다.
 하지만 뭔가 달랐다.
 원래 성배의 휴대폰 벨소리는 그저 평범한 스마트폰의 음질이었는데, 지금 울리는 벨소리는 소름이 돋을 정도로 웅장한 느낌이었다.
 그리고 휴대폰에서 울린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고, 공간 자체에서 울리고 있었다.
 
 음악이 점점 더 고조되면서 믿을 수 없는 현상이 벌어지기 시작했다.
 피투성이가 되었다가 이제 겨우 딱지가 지기 시작한 성배의 왼발, 그리고 고등학교 시절 큰 부상을 당했던 오른쪽 무릎에서부터 은은하게 빛이 퍼지기 시작하더니, 곧 온몸을 감쌌다.
 은은하게 퍼져있던 빛 무리들은 점점 한곳으로 모이기 시작했고, 가슴 부근에서 보는 사람이 있었다면 눈이 멀어버렸을 강렬한 빛이 되어 반짝인 후에 성배의 가슴 속으로 빨려 들어가듯 사라졌다.
 
 [TO…… SAY ADIEU!! WORLD!!]
 
 그리고, 빛이 사라진 순간, 방 안에서 성배의 모습이 사라졌다.
 
 
 # 낭만필드 - 010
 
 “이 새끼야!! 빨래가 이게 뭐야!! 이게 빨래라고 한 거냐? 이게 돌았나…….”
 “아, 아아……. 다시 하죠.”
 “요? 요? 아니, 이 새끼가 완전히 쳐 돌았나……. 너 미쳤냐? 응? 어디서 선배한테 그따위 태도를 보이고 지랄이야!?”
 성배는 완전히 정신이 빠져있는 모습이었다.
 사실, 성배에게는 지금 일어나고 있는 일들이 전부 꿈이라는 느낌이었다.
 있을 수 없는 일, 상상할 수 없는 일이 자신에게 벌어지고 있었다.
 분명, 며칠 전 밤에 자신의 전 애인인 자스민, 그리고 사랑하는 딸 엘리자베스, 그리고 자신이 행복한 표정으로 찍은 사진을 가슴에 안고 쓰러졌는데, 그 다음 날에는 어릴 적 살았던 청주의 한 아파트에서 눈을 떴다. 절대로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이 새끼…… 일단 빨래하고 보자. 오늘 훈련 끝나고 남아라. 정신 교육 좀 해야겠다. 이 개념 없는 새끼야.”
 “아…… 예…….”
 시기는 중학교 마지막 대회가 끝나고 진학이 결정된 고등학교 축구부 훈련에 합류했던 16살의 겨울이었다.
 청주의 한 사립학교 재단인 영원 재단의 영원중-영원고를 나온 성배는 이 시기 즈음해서 예비 입학자 자격으로 미리 영원고 축구부 훈련에 합류해 있었다.
 
 이 시기가 얼마 안 되는 성배의 학창시절 중에 가장 힘들었던 시기였다.
 밑에 아무도 없는 완전 쌩 막내 시절이었고, 운동부 내에서 군기를 잡는다는 명목하에 별의별 가혹 행위들이 벌어지던 시기였기 때문에 마음고생을 심하게 했던 성배였다.
 욕설은 기본이고 체벌이나 구타까지 만연하던 이 시기에 어린 시절의 성배는 매일 눈물을 흘렸었다.
 ‘젠장…….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거냐……. 뭘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네.’
 하지만 지금의 성배에게는 전혀 영향을 주지 못했다.
 이미 서른여섯까지 인생을 살았고, 그 과정에서 인생의 쓴맛이라는 쓴맛은 모두 경험했던 성배가 고작 육체적인 고통에 힘들어할 리가 없었다.
 당하는 그 순간에는 힘들었지만, 그냥 그 순간만 지나가면 그것으로 끝이었다.
 “어, 뭐야? 이거…… 주부습진 아닌가?”
 선배들의 트집에 빨았던 빨래들을 다시 빨기 시작한 성배는 자신의 손을 보고 흠칫 놀랐다.
 다시 돌아온 지 불과 며칠 만에 손에 주부습진이 걸린 것이었다.
 혈기왕성한 고등학생 수십 명들이 매일매일 몇 시간씩 훈련을 진행하는 과정에서 땀에 젖은 빨래의 양은 그야말로 어마어마했고, 그로 인한 빨래의 양 역시 엄청날 수밖에 없었다.
 주부습진이 걸리는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하긴……. 이때쯤 주부습진을 달고 살았던 것 같기도 하고…….”
 그냥 꿈을 꾸는 느낌이었다.
 자신이 직접 살아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현실감이 너무 없었다.
 당연한 일이었다. 갑자기 20년이나 뒤로 돌아오고 나서 금방 적응한다는 것은 어려웠다.
 사실, 지금 이 생활이 현실인지, 아니면 자신이 너무 힘들었던 나머지 미쳐가고 있는 것인지도 모르는 상황이었다.
 
 빨래를 마친 성배는 다시 그 유니폼을 들고 행거에 옷을 널기 시작했다.
 불과 며칠도 안 되어서 선배들에게 찍혀버린 성배였기 때문에 혼자서 빨래를 할 수밖에 없었지만, 다행히 빨래를 너는 것은 동기들이 함께 도와주어서 금방 끝낼 수 있었다.
 동기들이 자신을 불쌍하게 쳐다보았지만, 정작 성배는 아무렇지도 않았다.
 동기라는 이름이고, 다들 기억이 나는 얼굴이었지만, 그냥 귀여웠다.
 “아, 진짜……. 선배들 너무하네. 성배가 뭘 그렇게 잘못했다고…….”
 “그러게. 아무리 선배들이라고 해도 너무한 거 아니냐?”
 “우리는 나중에 선배 되면 절대 그러지 말자.”
 빨래를 널고 있는 성배를 도우면서 함께 선배에 대한 불만을 토로하고 있는 동기들이었다.
 하지만 정작 선배들의 앞에서는 절대로 이런 말들을 하지 못했다.
 운동부의 쓸데없는 똥군기가 한창인 시절이었기 때문에 선배들도, 후배들도, 심지어 감독마저도 이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하고 있었기에 반항이 나올 리 없었다.
 “됐다. 빨래나 널어. 어차피 시킨 건 다 해야 할 거 아냐? 개길 생각 없으면 시킨 거나 열심히 해.”
 “에이, 새끼……. 하여튼 재미없다니까. 재미없는 새끼.”
 “지 편을 들어줘도 난리야. 알았다, 빨래나 널지, 뭐.”
 뒷담화라는 것은 잠깐 속을 시원하게 만들어줄 수 있었지만, 근본적으로 뭔가를 바꿀 수는 없었다.
 그리고 선배들에게 까이는 것이 성배에게 전혀 영향을 끼치지 못하는 것처럼 동기들의 위로나 뒷담화도 전혀 영향을 주지 못했다.
 
 지금의 성배는 정말 그 어떠한 것에도 흔들리지 않는 부동심을 가지고 있었다.
 말이 좋아 부동심이지, 그냥 현실에서 한 발자국 떨어져 있다고 해야 했다.
 
 빨래를 다 널고 나서야 성배와 동기들도 유니폼과 장비, 그리고 축구화까지 갖추고 운동장으로 나설 수 있었다.
 다행히 선배들이 운동장으로 나오기 전, 집합 시간 10분 전에 미리 운동장에서 준비를 마칠 수 있었다.
 “전에 말했던 대로, 오늘은 연습 시합을 한 게임 한다. 2학년이 한팀이고, 1학년이랑 예비 1학년이 한팀이다.”
 영원고등학교는 축구로 그렇게 유명한 학교가 아니었다.
 청주에서는 그나마 조금 알려진 학교였지만, 전국으로 따지면 그렇게 유명하지 않았다.
 청주에서 두세 번째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고, 전국으로 따지면 한 40번째에서 50번째 정도의 위치를 차지하는 중간 정도의 학교였다.
 당연히 부원들의 숫자는 그렇게 많지 않았다.
 이제 졸업을 코앞에 둔 3학년들은 K리그 진출자는 없었지만 각자 자신의 길을 가고 있었고, 2학년 10여 명, 1학년 10여 명, 그리고 입학 대기자 10여 명이 전부였다.
 “야, 주성배. 너 왼발잡이지? 그러면 네가 왼쪽 풀백으로 들어가라.”
 “예.”
 그러다 보니, 각 학년으로 구성했을 때 열한 명의 한 팀을 구성하기가 쉽지 않았다.
 한 학년에 같은 포지션 경쟁자들이 두 명에서 많게는 네 명까지 있는 경우도 있었기 때문에 이제 곧 2학년으로 진학하는 1학년들로는 한 팀을 만들 수 없었다.
 예비 입학자들 가운데 몇 명이 주전으로 나서야 하는 상황이었고, 1학년과 예비를 모두 찾아봐도 왼쪽 풀백을 맡아줄 선수가 없었다.
 
 사실 왼발잡이도 흔치 않고 수비수가 인기가 없는 데다가 대한민국 축구계에 포백이 도입된 지 얼마 되지 않은 시절이었다.
 여전히 학원 축구계에서는 쓰리백이 대세였고, 심지어 작년에 있었던 한일 월드컵에서도 대한민국 대표팀은 쓰리백을 사용했다.
 성배가 입학한 영원고는 작년부터 포백 시스템을 쓰고 있는, 포백을 사용하는 몇 안 되는 팀이었는데, 작년에 이어 올해에도 풀백 자원을 구하는 것이 당장 급한 상황이었다.
 “대충 수비 어떻게 하는지는 알지? 걸리적거리지 마라. 뭐하려고 하지 말고, 그냥 뚫리지만 마. 나대지 말고.”
 “…….”
 “이 새끼가, 대답 안 하냐?”
 “아……. 예…….”
 1학년의 구심점인 센터백 선배가 성배에게 소리를 질렀다.
 하지만 성배는 지금 선배가 뭐라고 하는 것에 신경 쓸 상황이 아니었다.
 연습시합이지만, 돌아온 이후 처음으로 그라운드에 서는 것이었다.
 시간을 거슬러 오기 전을 합쳐도 그라운드에 서본 지 한 달이 넘었다.
 ‘다시는 이곳에 서지 못할 줄 알았는데…….’
 누가 뭐라고 하더라도 성배는 그라운드에, 축구에 거의 평생을 바친 사람이었다.
 평생이라고 해도 30년이 조금 안 되는 수준이었지만, 서른여섯에서 이상하게 끝난 성배의 인생에서 30년이 조금 못 되는 시간은 어마어마한 시간이었다.
 그 오랜 시간을 뒤로하고 그라운드에서 쫓겨나면서 억지로 포기하려 했던 축구.
 무슨 일인지는 아직도 모르겠고, 이것이 현실인지 아닌지도 모르겠지만, 그래도 다시 그라운드에 섰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가슴이 벅차올랐다.
 “에휴…… 야!! 저 새끼 불안하니까 왼쪽 커버 잘해라. 3학년 선배들 다 나갔고, 우리도 이제 2학년이다. 지금부터 눈에 못 띄면, 너희 프로는커녕 대학도 못 가, 새끼들아.”
 1학년부터 주전급 센터백으로 뛰었던 선수는 동기들을 채찍질하면서 2학년 선배들을 잡아내겠다는 의욕을 불태우고 있었다.
 성배와 함께 경기에 나선 동기는 한 명.
 그 친구도 비인기 포지션인 수비형 미드필더였다.
 성배를 빼고는 모두 불안하다고 생각하는 왼쪽 측면 수비에 대한 임무를 받고 혼자서 의욕을 불태우고 있는 녀석이었다.
 ‘음……. 이게 꿈이라면 몸이 내 마음대로 따라주겠지만……. 현실이라고 해도 고등학생들, 그것도 뛰어난 것도 아닌 고등학생들 정도는 가볍게 막겠지.’
 꿈이 아니라면, 어제까지 공격수로 뛰었던 자신이기 때문에 분명 몸이 마음대로 움직여주지는 않을 것이었다.
 왼쪽 풀백으로 움직이는 방법은 잘 알고 있고, 그대로만 하면 문제없이 왼쪽 풀백 역할을 수행할 수 있겠지만, 문제는 머리와 몸이 따로 놀 것이라는 부분이었다.
 2부 리그이지만 프로에서 16년을 구르면서 지금의 몸에서 어느 부분이 발전하고 어느 부분이 떨어졌는지, 그것을 파악할 필요가 있었다.
 ‘제발……. 제발, 꿈이지 마라. 이게 현실이어라……. 무슨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이번에는 더 나은 커리어를 만들 수 있게 해 줘…….’
 그라운드에 발을 내딛은 순간부터 조금씩 성배에게 현실감이 돌아오고 있었다.
 현실이든 꿈이든 별로 상관없다고 생각했던 것이 방금 전이었는데, 지금은 제발 지금 이것이 현실이기만을 바라고 있었다.
 이것이 현실일 경우, 자신이 기억하는 서른여섯 주성배의 마지막 순간에 피눈물을 흘릴 정도로 후회했던 일들을 모두 바로잡을 수 있었다.
 이 세계에서 현실감을 되찾은 성배였기 때문에 이것이 현실이 아니고, 눈을 떴을 때 자신이 기억하는 서른여섯의 몸에서 깨어나면 더 이상 살아갈 힘을 잃을 것이었다.
 그것이 무서워서 어떻게든 이 상황에 빠져들지 않으려고 했지만, 그라운드를 밟은 순간, 그 모든 결심은 깨지고 말았다.
 
 
 # 낭만필드 - 011
 
 “쟤……. 뭐냐? 스트라이커라며?”
 “그러게요? 지금 제가 뭘 보고 있는 걸까요?”
 연습시합을 지켜보고 있는 영원고등학교의 감독과 코치는 지금 벌어지고 있는 상황을 믿을 수가 없었다.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일이, 예상하지 못했던 선수의 활약이 계속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다른 선수들도 추운 날씨, 군데군데 얼어있는 운동장의 환경을 감안하면 나쁘지 않은 모습을 보여주고 있었지만, 그런 수준으로는 단 한 선수에게 시선이 집중되는 것을 막을 수 없었다.
 “뭐야!! 지금 타이밍 죽이잖아!!”
 “저거 진짜로 공격수 맞습니까? 지금 오버래핑 타이밍 하며, 태클 타이밍 하며 모자란 부분이 없는데요? 완전 정통 풀백인데요?”
 왼쪽 풀백으로 경기에 나선 성배가 감독과 코치들을 놀라게 한 주인공이었다.
 공격수 출신으로 알고 있었고, 불과 어제까지만 하더라도 훈련에서 공격수로 만족스러운 모습을 보여주었던 성배였는데, 왼발잡이라는 이유로 그저 포지션을 맞추기 위해 출전시켰을 뿐인 왼쪽 풀백 자리에서 그야말로 날아다니고 있었다.
 풀백이 경기를 지배하기 시작한 것이었다.
 
 사실, 당연한 일이었다.
 2부 리그라고는 하지만 어쨌든 프로 선수로 16년을 뛰었던 성배였다.
 그중 풀백으로 활약한 시간은 절반인 8년 정도밖에 되지 않았지만, 그래도 2부 리그의 최정상급, 1부 리그에서도 통할 수 있는 수준까지 올랐던 성배가 고작 고등학생들 연습경기도 지배하지 못할 리 없었다.
 ‘음……. 이 정도 스피드로 달려보는 건 오랜만이군.’
 지금의 성배는 무릎에 심각한 부상을 당하기 전의 몸을 가지고 있었다.
 어마어마한 스피드를 가지고 있다거나 하는 것은 아니었지만, 부상을 당하기 전까지만 하더라도 그래도 손에 꼽힐만한 스피드를 가지고 있는 선수였기 때문에 현재 상대편에서는 성배의 스피드를 따라올 수 있는 선수가 많지 않았다.
 ‘에이, 확실히 스킬들은 고등학교 때 수준이구나.’
 하지만 좋아진 부분이 있으면 당연히 나빠진 부분도 있었다.
 선수생활에 위기를 겪게 만들었던 무릎 부상과 그로 인한 스피드 저하는 사라졌지만, 그 외에는 역시나 아직 크게 부족했다.
 아무리 피지컬이 쓰레기라고 불리는 서른여섯의 노장이었다고 하더라도 열여섯 살의 지금보다는 피지컬, 체력, 스킬 등 모든 부분이 나았다.
 지금도 서른여섯의 자신이었다면 놓치지 않았을 크로스를 저 멀리 날려버리고 말았다.
 ‘좋아, 좋아……. 한 번 가본 길, 다시 가는 게 뭐 어렵겠어…….’
 일단은 프로시절 갈고 닦아왔던 풀백으로서의 플레이 방식을 알고 있다는 것부터가 엄청난 장점이었다.
 지금으로부터 20년의 경험이 자신의 머릿속에 들어있었다.
 풀백이라는 포지션이 어떤 식으로 돌아가는지, 어떻게 움직여야 하는지, 태클의 타이밍과 수비에서의 위치선정, 오버래핑의 타이밍 등을 모두 기억하고 있었고, 출발선 자체가 이미 남들보다 세 발자국 이상은 앞에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저 새끼……. 이 기회를 이따위로 그냥 날려놓고 미안하다는 말 한마디 없이 다시 내려가네…….”
 “와. 싸가지없는 새끼네. 오늘 끝나고 집합 걸었지?”
 지금까지는 이 세계를 자신의 세계로 받아들이지 않아서 붕 떠 있었던 성배였지만, 그라운드에 다시 선 이후에는 너무 자신의 세계에 확 몰입해 있었기 때문에 또 붕 떠 있었다.
 성배는 자신이 원하는 움직임이 이루어지고 있는지, 자신의 몸이 서른여섯의 몸과 어떻게 다른지 파악하는 것에 중점을 두고 있을 뿐이었다.
 프로 생활이 몸에 익은 성배에게 연습시합의 가치란 그 정도였다.
 
 하지만 다른 선배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원래부터 나름대로 유망한 후배라고 듣기는 했지만, 최소한 오늘 경기에서는 전혀 신경을 쓰지 않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원래 공격수로 들어온 선수였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자신의 포지션도 아닌 곳에서 뛰고 있는 성배가 지금 이 연습시합을 지배하고 있었고, 그러면서도 자기 혼자 잘난 것처럼 다른 팀원들과의 의사소통도 전혀 하지 않고 있으니 선배 입장에서는 아니꼬울 수 있었다.
 
 어쨌든 전, 후반 각각 25분씩 진행된 연습시합은 2학년 팀의 2-1 승리로 마무리되었다.
 이 나잇대에서 1년의 차이가 얼마나 큰 것인지 보여주겠다는 듯 초반부터 2학년 팀이 강력하게 압박했던 것치고는 팽팽한 스코어였다.
 사실, 자칫했으면 1학년 팀이 이길 수도 있었을 정도로 경기 자체가 중반부터는 팽팽하게 진행되었다.
 “주성배!! 너 공격수 맞아? 풀백으로는 한 번도 뛰어본 적 없어?”
 “예. 없습니다.”
 1학년 팀이 2학년 팀과 비등한 경기를 펼쳤던 데는 성배의 역할이 결정적이었다.
 중앙에 위치한 선수들에 비해, 그리고 공격수나 미드필더에 비해 경기 자체를 자신들의 분위기로 끌고 올 수 있는 영향력 자체가 미미한 측면 수비수로 뛰었음에도 성배의 플레이는 팀 전체의 플레이에 큰 영향을 주었다.
 
 성배가 혼자서 상대의 오른쪽 공격을 모두 막아냈고, 시기적절한 타이밍에 오버래핑을 올라가면서 반대로 자신은 상대 오른쪽 측면을 초토화시켰다.
 성배의 플레이에 1학년 팀의 왼쪽 측면 미드필더 역시 힘을 냈고, 한쪽 측면이 무너진 2학년 팀의 밸런스 자체가 크게 흔들리며 개인기량에서 확고한 우위를 지니고 있었음에도 1학년 팀과 비등한 경기를 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었다.
 “너, 내일부터 왼쪽 풀백으로 뛰어라.”
 “예.”
 감독과 코치가 눈을 부릅뜨고 열렬하게 찾아 헤맸던 풀백이 바로 이곳에 있었다.
 포백 시스템의 핵심은 강력한 풀백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을 정도로 포백 전술에서 풀백은 굉장히 중요한 포지션이었다.
 
 아직은 세계적으로도 지지를 받지 못하고 있는 주장이었지만, 십 년 정도 뒤에는 꽤나 많은 지지를 받게 되었다.
 카푸-카를로스의 브라질이나 리사라수-튀랑의 프랑스처럼 강력한 풀백을 가진 팀들이 월드컵 우승을 차지하는 등 몇 년 만 더 지나면 풀백의 가치가 높아지게 될 것이었다.
 특히, 대한민국은 쓰리백 일변도에서 이제 조금씩 포백을 사용하는 팀들이 늘어나고 있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제대로 된 풀백, 그리고 제대로 될 풀백 유망주의 가치가 점점 오르고 있었다.
 별 뜻 없이 왼발잡이라는 이유만으로 레프트백 자리에 넣었던 감독은 보물을 발견한 기분이었다.
 “좋아!! 그러면…… 오늘은 여기까지 하자. 다들 다치지 않게 몸 풀어주고 들어가라. 이만!!”
 “차렷!! 경례!!”
 ““수고하셨습니다!!””
 아직 겨울이고 방학이었기 때문에 훈련은 그렇게 오래 진행되지는 않았다.
 예비 입학생들이 빨래를 하느라 참가하지 못해도 신경도 안 쓰는 간단한 기본기 훈련 이후에 연습시합, 그리고 훈련 종료.
 선수들에게 인사를 받고 감독과 코치가 퇴장하자, 2학년 선배들이 왕이 되었다.
 “야, 예비!! 엎드려뻗쳐!!”
 훈련이 시작되기 전부터 예고했던 대로 얼차려의 시간이 되었다.
 새롭게 주장이 된 2학년의 구심점, 진현필을 중심으로 2학년들이 앞에 서고, 그 옆으로 1학년들이 예비 입학생들을 둘러싸며 자리를 잡았다.
 그리고 예비 입학생들은 빛보다 빠른 속도로 바닥에 손을 짚고 엎드렸다.
 
 
 # 낭만필드 - 012
 
 “이 새끼들…… 존나 빠져가지고!! 여기가 중학교인 줄 아냐? 너희가 아직도 중3인 것 같아? 며칠 전까지 위가 없었다고, 지금도 그런 것 같냐?”
 선배들의 단골 레퍼토리였다.
 대한민국의 교육 제도상 어제까지 최고 선배였던 학생들이 상급 학교로 진학하면 막내가 되는 구조였다.
 그리고 선배티를 못 지웠다는 말은 선배들이 후배를 갈구는 단골 레퍼토리가 되었다.
 “선배는 개뿔……. 빨래도 제대로 못 하는 새끼들이……. 선배대접 받다 보니까, 빨래하는 법도 까먹었냐? 엉?”
 엎드려뻗쳐. 기합을 받을 때 가장 기본이 되는 자세였지만, 생각보다 오래 하기는 힘든 자세였다.
 아무리 운동선수들이라고 하더라도 몇 분만 이 자세를 유지하고 있으면 곧 팔이 후들거리고 땀이 쏟아질 수밖에 없었다.
 운동장 모랫바닥에 엎드렸기 때문에 손바닥이 아픈 것은 덤이었다.
 ‘앞으로는 그럼 어떻게 해야 하는 거지…….’
 하지만 성배는 지금 그런 것에 신경을 쓸 정신이 없었다.
 지금 성배에게 중요한 것은 이 상황을 받아들이는 방법이었고, 오늘 연습 시합을 계기로 완전히 진지하게 이 상황을 생각해보기로 한 만큼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하는지 계획을 짤 필요가 있었다.
 무슨 이유인지는 모르겠고, 앞으로도 영원히 모르겠지만, 지금 이때부터 20년 동안 별로 행복한 일도 없었고, 슬픈 일만 가득했던 삶을 바꿀 수 있는 소중한 기회가 주어진 것이었다. 계획이 필요했다.
 ‘이전의…… 삶이라고 해야 하나? 그러면 전생 같은 느낌인데……. 전생은 아니고, 과거로 돌아온 건데……. 평행 세계? 그러면 저쪽에 있던 내 영혼이랑 여기 있던 내 영혼이 바뀐 건가? 그러면 저쪽으로 건너가 버린 친구한테 너무 미안한데…….’
 지금 이 시점에서 20년이 더 지난 자신의 삶을 부정하지는 않았다.
 분명 그 인생도 존재하는 인생이었다.
 말도 안 되지만 [백 투 더 퓨처]를 비롯한 여러 영화들처럼 과거로 거슬러 온 것인지, 아니면 가끔 인터넷에서 보이는 ‘평행 세계’라는 것인지 알 수는 없었지만 서른여섯의 자신도 분명히 존재했던 인물이고, 그 경험들도 모두 진짜였을 것이었다.
 
 꿈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길었고, 너무 생생했다.
 -퍼--억!!
 “야!! 이 새끼야!! 너는 왜 대답 안 하냐? 씨발, 네가 제일 문제야!!”
 그렇게 생각에 잠겨있던 성배는 옆구리를 밀치는 힘에 쓰러질 수밖에 없었다.
 아무래도 자신이 생각에 잠겨있던 사이에 선배들이 뭔가 말을 했고, 자신만 대답을 하지 않았던 것 같았다.
 차인 것은 아니고 밀린 것이기는 한데, 옆구리가 따끔한 것을 보니 축구화 바닥에 있는 스터드에 긁힌 것 같았다.
 “죄송합니다.”
 “죄송해? 진짜 그렇게 생각 하냐? 진짜 죄송해? 씨발, 그러면 뭐가 좀 달라져야 하는 거 아니냐?”
 성배는 지금 선배들에게 완전히 찍혀있었다.
 선배들에게 막 대하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깍듯하지도 않았고, 욕을 해도, 체벌을 가해도, 심지어 때리기까지 해도 행동에 변화가 없었다.
 맞을 때 아파하는 모습도 보이지 않으니 오기가 생겨 더욱더 성배를 괴롭히는 선배들이었다.
 그래서 성배는 본의 아니게 군대로 따지면 고문관 역할을 하고 있었다.
 “지금 너 때문에 네 동기들 다 혼나고 있는 거 안 보이냐? 지금 이게 진짜로 너희가 다 마음에 안 들어서 이러고 있는 것 같아? 그렇게 생각하면 넌 진짜 개새끼다.”
 “죄송합니다.”
 “맨날 말로만……. 말은 잘해요, 미친 새끼. 됐고, 새끼들아. 머리 박아라.”
 모래와 자갈로 만들어진 학교 운동장에서 속칭 ‘원산폭격’이라고 불리는 자세로 기합을 받게 된 예비 입학생들이지만, 아무 소리도 나오지 않았다.
 대한민국 엘리트 축구의 현실이 이랬고, 그것에 익숙해진 선수들은 어린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이미 이러한 부조리에 순응한 것이었다.
 그리고 지금 기합을 받으면서 선배들을 욕하고 있을 선수들도 나중에 선배가 되면 또 똑같은 짓을 할 것이었다.
 
 그 과정에서 수많은 유망주들이 사라지게 된다.
 중학교 1학년 때 이미 포항제철에 합류해 훈련을 받았을 정도로 그 어떤 선수와도 재능의 레벨이 달랐다는 김병수 선수가 대표적이었다.
 야구계의 전설인 최동원 선수도 연세대학교 시절 2실점을 해서 패배했다는 이유로 심한 구타를 당해 허리 아래 부분이 까맣게 죽어버려 100일 이상 누워있어야 했고, 고교 최고의 강타자였고, 한 대회에서 8개의 홈런을 날린 천재 타자 박동혁 선수도 구타로 인해 심각한 허리 부상을 당하며 선수생활을 접어야 했다.
 아무리 엄청난 재능을 가지고 있어도 대한민국 학원 축구의 병폐 아래에서 사라지는 선수들은 수도 없이 많았다.
 
 천부적인 패싱 능력과 득점 감각, 정교한 스핀킥과 프리킥 능력, 공격 진영 모든 곳에서 최고의 활약을 보여줄 수 있어 그라운드 자체를 지배해버리는 축구 천재 김병수는 그 재능이 너무 빛났고 엄청났기 때문에 혼자 힘으로 게임의 분위기를 바꾸어버릴 수 있는 대한민국 역사상 최고의 유망주라는 이야기를 들었다.
 
 하지만 재능이 너무 뛰어났다.
 부상을 당해도 선수 관리에 대한 생각조차 없었던 학원 축구계는 그를 계속 그라운드로 몰았다.
 찜질 한 번, 주사 한 대에 경기를 출전시켰고, “오른발이 다쳤어? 그럼 왼발로 차.”라는 소리를 들어가며 경기에 또 나섰다.
 결국, 대학 진학 후에는 뛰는 날보다 서 있지도 못해서 앉아있는 날들이 더 많을 정도였다.
 
 고려대학교 진학 후에 그가 뛴 경기는 단 네 경기.
 그중 세 경기가 연세대학교와의 정기전 경기였다.
 너무 가난했기 때문에 한 달 이상 운동을 해본 적이 없을 정도로 몸 상태가 최악이었던 그는 그 재능만으로 국가대표에 선발되었다.
 1년에 정기전 한 번 뛰는 선수가 국가대표에 선발된 것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당시 대표팀 감독이었던 이회택 감독이 반할 수밖에 없는 플레이를 보여주었다.
 하지만 이미 양 발목은 인대가 1인치씩 늘어났고, 국가대표에 선발된 후에야 수술을 받을 수 있었지만 이미 너무 늦어버렸다.
 무려 네 번이나 수술을 받았고, 그 와중에 발목 부상의 여파로 무리가 가버린 무릎 수술까지 받아버렸다.
 결국, 국내에서 자리를 잃은 그는 막 창설된 JFL, 일본 실업리그에 진출했는데, 그 팀에서 특급 대우를 받아 재수술, 재활 비용 보장을 약속받았다.
 
 실업리그라지만 100경기 정도 출장해 70골 정도를 넣은 김병수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훈련에도 나서지 못했고, 매 경기 진통제를 맞고 시합에만 뛰었다고 전해졌다.
 지금에서는 사실 상상할 수 없는 일이지만, 그렇다고 엄청나게 바뀐 것도 없었다.
 부상을 당해도 성적에 목을 매는 감독 때문에, 성적을 내서 선수들을 대학에 보내 자신의 경력을 쌓으려는 감독 때문에 쉬지 못하는 것은 여전했다.
 이런 상황에서 지금의 성배 정도의 선수가 커리어를 위해 관리를 받을 수 있는 확률은 전혀 없었다.
 
 부상을 당해도 동료를 위해서…… 라는 말에 경기를 뛰어야 할 것이었다.
 자신의 커리어와 선수 생활은 다 무시당할 것이고, 동료들의 대학 진학을 위해, 감독의 경력을 위해 자신의 몸은 소모품처럼 쓰일 것이었다.
 그리고 대학을 졸업한 이후에는 만신창이가 된 몸을 이끌고 프로 무대에 진출하거나 그마저도 하지 못할 가능성도 작지 않았다.
 ‘일단……. 한국을 뜨자. 여기서는 아무것도 못 한다.’
 적극적으로 다시 한 번 자신의 삶을 살아내겠다고 결심한 성배였다.
 지난 생에서는 마지막에 꾸었던 꿈이 겨우 벨기에 1부 리그의 그라운드를 밟는 것이었지만 다시 기회가 생겼고, 그런 초라한 꿈이 아닌 진짜로 멋진 꿈을 꿀 수 있는 여건이 갖추어졌다.
 유럽 무대에서 16년을 활약하면서 몸으로 익힌 경험들로 동년배의 다른 선수들보다 몇 걸음은 더 앞서나갈 수 있을 것이었다.
 유스 시스템이 아직 형편없는 한국에서 이대로 있다가는 또다시 몸이 망가질 수도 있었기 때문에 어떻게든 이 나라를 뜰 필요가 있었다.
 
 ***
 
 “아버지, 그리고 어머니. 저 할 말이 있습니다.”
 “응? 뭔데? 뭔데 갑자기 그렇게 무게를 잡고 그래?”
 “그러게요. 성배가 저렇게 나오니까 무서운데요?”
 그 날, 성배는 바로 집으로 돌아가 부모님의 앞에서 무릎을 꿇었다.
 이 상황을 타개할 수 있는, 새로운 꿈을 향해 첫발을 내디딜 수 있는 방법이 바로 곁에 있었기 때문이었다.
 자신의 아버지, 주장석의 직업은 바로 외교관이었고, 이번에 발령 난 재외공관은 바로…….
 “저, 학교 그만두고 아버지 따라서 벨기에에 가겠습니다.”
 성배가 16년의 삶을 보냈던 벨기에였다.
 
 
 # 낭만필드 - 013
 
 “벨기에에 가겠다고? 학교는? 축구는 어떻게 하려고!!”
 역시 어머니가 굉장히 놀라신 것 같았다.
 사실, 이번에도 아버지 혼자서 벨기에로 떠나시고, 어머니와 자신, 그리고 여동생은 한국에 남기로 되어있었다.
 자신과 여동생은 학업 문제도 있었고, 특히 자신은 축구 선수로 진로를 이미 잡은 상태였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갑자기 벨기에로 떠나겠다고 하니, 어머니가 당황하시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그래……. 일단 알겠다. 이유부터 들어보고 싶구나.”
 “…… 그래. 일단 이유는 들어봐야지. 성배야, 왜 그런 생각을 했니?”
 두 분의 반응에 성배는 속에서 뭔가가 울컥하고 올라오는 기분을 느꼈다.
 뜬금없는 이야기였고, 잘 다니고 있는 학교, 그리고 나름대로 잘 이어가고 있는 선수생활을 통째로 버리고 새로운 곳에서 새로운 생활을 한다는 대책 없는 이야기였는데, 먼저 설득하려고 한다거나 혼을 낸다든가 하는 것이 아니라 먼저 자신이 그렇게 생각한 이유를 물어봤다는 것.
 그것만으로 두 분이 자신의 편이라는 것을 확실히 알 수 있었다.
 주변에 자신의 편이 한 명도 없었던 서른여섯의 자신이 떠올라 순간적으로 눈물을 흘릴 뻔했다.
 “저…… 확실한 목표를 잡았습니다. 유럽에서 뛰고 싶어요. 더 큰 무대에서, 세계 최고라는 무대에서 그 일원으로 뛰어보고 싶어요. 그래서 더 많은 기회를 잡을 수 있는 벨기에에서 더 늦기 전에 축구를 배우려고요.”
 “그래. 네 뜻이 어떤 건지는 알겠다. 하지만 절대로 쉽지 않을 거야. 언어도 다르고, 축구를 가르치는 방식도 아마 다르겠지. 차라리 한국에서 최고가 되어 유럽으로 나가는 것이 낫지 않을까?”
 축구를 좋아하는 아버지이기 때문에 성배가 무슨 말을 하는지 이해하신 것 같았다.
 그리고 그에 대한 아버지의 반론 역시 일반적인 경우, 훨씬 더 나은 선택일 것이었다.
 수많은 유망주들이 어린 시절 해외 유학을 떠나지만, 그 중 성공해서 외국에 자리 잡은 선수는 거의 없다시피 하고, 대부분은 K리그에서도 자리를 잡지 못한 채 선수생활을 그만두게 되는 경우가 많았다.
 
 하지만 다른 언어와 다른 문화, 그리고 여러 가지 다른 점들로 인해 문제를 겪고 방황해 결국 성장까지도 멈춰버리고 마는 다른 유망주들과 성배는 결정적인 차이가 있었다.
 성배에게 벨기에는 낯선 곳이 아니라는 것이었다.
 스무 살부터 서른여섯 살까지 16년을 벨기에에서 생활한 성배에게는 오히려 한국보다 벨기에가 더 익숙하고 편한 곳이었다.
 “한국에서 최고가 되어 유럽으로 나간다라…… 어려운 일은 아니겠죠. 하지만 저는 이제부터 왼쪽 풀백으로 뛰어볼 생각이에요. 한국은 쓰리백을 사용하기 때문에 풀백을 어떻게 키워야 하는지도 잘 모르고, 가르쳐줄 사람도 거의 없어요.”
 “왼쪽 풀백이라……. 축구를 좋아하기는 하지만 자세히는 몰라서 잘은 모르겠지만, 우리나라가 포백을 쓰지 않는다는 것은 안다. 그래서 대충은 이해할 수 있어. 하지만…… 그래도 쉽사리 허락하기는 힘드네.”
 “성배야. 외국 유학이라는 것이 생각처럼 쉬운 일은 아닐 거야. 외국 유학을 나가는 사람은 많지만, 거기서 성공하는 사람보다 실패하는 사람이 훨씬 많잖니? 외국 생활이라는 건 생각보다 더 힘든 거야. 엄마도 해본 적은 없지만, 일단 모든 것이 달라지는데 생활에 적응할 시간도 없이 거기에 축구까지 배워야 하잖아. 굉장히 어려울 거야.”
 성배의 부모님은 자신들이 원하는 것을 아이들에게 강요하지 않는 좋은 부모였다.
 축구를 하고 싶다는 성배의 말에 반대하지 않고 축구를 하면서 겪을 힘든 일들을 말해주면서 버틸 수 있다면 해보라고 응원해주었고, 성배가 축구를 선택한 이후에도 항상 응원해주었다.
 아이가 원하는 길이 있으면 그 길의 어려운 점을 이야기해줄 뿐, 자신들의 의사는 거의 말하지 않고 아이의 선택을 존중해주는 이상적인 부모였다.
 
 하지만 이번 일은 달랐다. 나고 자란 한국의 땅과 문화가 아니라 태어나서 처음 겪어보는 벨기에행을 결정한 성배를 그냥 지지해줄 수는 없는 일이었다.
 축구 선수로의 진로 선택은 실패하더라도 어쨌든 익숙한 한국에서 생활하면서 어떻게든 다른 진로를 잡을 수 있는 선택이었다.
 하지만 벨기에 축구 유학은 달랐다.
 벨기에에서도 학교는 다니겠지만, 사회생활에 필요한 것들을 배운다기보다는 결국 축구를 배우는 것이었고, 실패했을 때는 한국에서도, 벨기에에서도 자리를 잡기가 쉽지는 않을 것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이번에는 마냥 지지해줄 수 없었다.
 “아빠. 엄마. 수없이 많은 선수들이 프로 축구 선수의 꿈을 꿔요. 초등학교에 200개, 중학교에 150개, 고등학교에 120개의 팀이 있어요. 초등학교에서 중학교로 넘어가면서, 중학교에서 고등학교로 넘어가면서 그만큼의 선수들이 도태된다는 거죠. 그리고 결국 프로에 지명되는 선수는 100명 정도예요. 그중 같은 나이의 선수가 70명 정도라고 치면 지금 저와 같은 나이의 5,000명도 넘는 선수들 중에 K리거가 되는 선수는 겨우 70명 정도라는 거죠.”
 “그렇구나.”
 “그래, 성배야. K리그에서 뛰는 것도 그렇게 힘든데, 유럽 빅 리그로 가는 건 얼마나 힘들겠니? 그러니까 너무 힘든 길로 가지 말고, 우선 여기서 K리그를 노리는 게 어떨까?”
 아버지는 이미 성배의 결심이 강하게 섰다는 것을 눈치챘고, 지금 이 대화에서 어떤 이야기를 하려는 것인지도 대충 아셨는지 한숨을 내쉬며 눈을 감았다.
 하지만 어머니는 성배의 유학 결정만큼은 막고 싶으신지 계속해서 성배를 설득하려고 하셨다.
 그래도 이번 결정은 무슨 일이 있어도 자신의 뜻대로 해야 했기 때문에 성배도 강하게 나갔다.
 “K리그에서 뛰는 것도 그렇게 힘든데, 유럽 빅 리그로 가는 게 얼마나 힘들겠어요. 그런데 남들처럼 해서 어떻게 그 자리에 설 수 있을까요? 남들보다 더 독하게 해야 하고, 남들보다 더 과감하게 해야죠. 실패할 경우의 대비책까지 준비하는 식으로는 절대로 그 위치에 못 가요. 2부 리그나 더 밑의 리그라고 하더라도 프로로 살아남는 것 자체가 쉽지 않은데, 다른 살 길까지 준비하면서 어떻게 최고의 무대에 설 수 있겠어요.”
 “그렇기는 하지만……. 그래도, 그래도 불안한 걸 어떡하니. 아무리 네가 원하는 인생을 살게 해주겠다는 마음을 가지고 있어도, 어쨌든 사랑하는 내 아이인데…….”
 운동선수들의 딜레마였다.
 운동선수로 성공하는 것은 굉장히 어려운 일이었다.
 한국에서 2부 리그 격인 내셔널 리그까지 포함하더라도 프로 축구 선수가 되기 위해서는 최소한 50:1의 경쟁을 펼쳐야 하는데, 그런 경쟁 속에서 다른 살 길까지 마련한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었다.
 
 하지만 모든 것을 축구에 걸게 되면 50:1이라는 어마어마한 경쟁률 속에서 도태되었을 경우 인생의 다음 단계로 넘어가기가 굉장히 힘들 수밖에 없었다.
 올인과 안정적인 베팅, 그리고 완전한 포기.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선택이 어려운 일이지만, 이 세 가지 방법 사이에서 하나를 선택하는 것도 보통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이날은 결론이 나지 않았다.
 하지만 며칠 동안 계속해서 성배가 두 분에게 자신의 진심을 전한 결과, 드디어 성과가 나타났다.
 “성배야.”
 “예, 아버지.”
 아버지는 일주일 내내 허락해달라는 성배의 전화를 받았다.
 그리고 집에 돌아오자마자 성배를 안방으로 불렀다.
 그리고 나서 한참 동안 눈을 감고 고민에 빠져있던 성배의 아버지, 주장석이 드디어 눈을 떴다.
 
 어차피 결정권자는 아버지였다.
 평소에는 어머니의 말을 대부분 들어주시는 자상한 아버지였지만, 중요한 결정들은 주로 아버지가 결정하고 어머니가 그에 따라가는 식이었기 때문에, 이번 일은 아버지를 설득해야 하는 일이었다.
 그래서 아버지의 입이 열린 지금, 성배는 상당히 긴장할 수밖에 없었다.
 “정말로, 정말로 그렇게 모든 것을 다 바쳐서 노력할 자신이 있어? 순간의 충동으로, 괜한 치기로 말하는 것이 아니라 정말 네 모든 것을 다 바칠 준비가 되어 있니?”
 “……여보…….”
 “예. 자신 있어요. 바닥의 바닥까지 부딪혀서 결국 위로 올라갈 거예요.”
 성배는 강렬한 눈빛으로 아버지의 시선을 마주 쳐다보았다.
 이미 한 번 죽은 몸이었다. 실질적으로 죽음을 경험한 것이 아니라 그저 갑자기 이전의 생이 끊긴, 그런 느낌이었지만, 사실 그 당시에 이미 성배는 죽은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일생을 바친 모든 것들로부터 버림받은 서른여섯의 주성배는 이미 그 순간 죽었다.
 
 그런 잔인한 일을 겪은 성배에게 이번 생에서의 모험이 실패하는 것쯤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어린 나이에 벨기에로 다시 날아가서 축구에 집중하는 이 선택으로 인해 2부 리그에서도 뛰지 못하는 선수가 되거나 선수생활을 그만두게 될 수도 있겠지만, 그 정도 일은 별것 아니었다.
 처참하게 바닥으로 추락한 경험도 있었다.
 이제 남은 것은 자신의 못다 이룬 꿈을 위해 처절하게 구르는 일이었다.
 “좋다.”
 “여보!! 잠깐만요. 고민을 조금 더 해보는 것이 좋지 않을까요?”
 “아니야, 여보. 저 녀석 눈빛 좀 봐. 얼마나 믿음직해? 우리 성배가 다 큰 것 같아. 하하하, 뭔가 대견하지만, 서운하기도 하지 않아? 저 어린아이가 사실은 이미 어른이었어.”
 “여보……. 에휴, 그렇게까지 말하면 어쩔 수 없죠.”
 장석의 말에 성배의 어머니, 성혜진도 결국 더 이상 안 된다는 말을 입에 담지 않았다.
 너무나도 걱정스러웠기 때문에 애써 밀어냈지만, 혜진이 보기에도 성배의 지금 모습, 특히 지금의 눈빛은 이미 자신의 길은 자신이 결정할 수 있는 성인의 그것이었다.
 저렇게까지 믿음직한 모습으로 자신의 진로를 결정하고 자신들에게 이야기하는 성배를 더 이상 외면할 수 없었다.
 “성배야. 아버지가 이번에 가게 된 벨기에는 네덜란드어와 프랑스어를 함께 쓰는 곳이란다. 영어도 필수적인 곳이지.”
 “예. 알고 있어요. 이미 알아봤죠.”
 “정말로 네가 네 모든 것을 던질 준비가 되어있는 것인지 작게나마 확인을 해보고 싶구나. 준비할 것이 많으니 많은 시간은 줄 수 없고……. 잠시만 기다리고 있어.”
 성배는 주먹을 꽉 쥐었다.
 이제 마지막 시험만 남은 것이었다.
 아버지의 이번 시험만 통과하면 이제 완전히 부모님을 설득하고 자신의 꿈을 위한 첫 발걸음을 내디딜 수 있었다.
 잠시 뒤, 아버지가 손에 책을 한 권 들고 다시 방으로 돌아왔다.
 “받아.”
 “이건……. 프랑스어 입문 책 아닌가요?”
 “맞아. 네덜란드어와 프랑스어를 모두 쓰기는 하지만, 우선 아버지가 있을 브뤼셀은 프랑스어를 쓰는 인구의 빈도가 더 높은 곳이야. 네덜란드어와 프랑스어를 모두 구사하는 인구를 더하면 대략 80% 정도가 프랑스어를 구사할 수 있지. 네덜란드어를 사용하는 인구는 50% 정도 되겠구나.”
 마지막 시험은 언어 능력에 대한 것으로 보였다.
 비록 네덜란드 어를 쓰는 안트베르펜 지역에서 16년을 살았던 성배이지만, 기본적으로 프랑스어와 네덜란드어, 독일어 등 세 가지 언어가 공용어로 지정되어 있고, 이 중 프랑스어와 네덜란드어는 거의 비슷한 빈도로 쓰이는 벨기에였기 때문에 기본적으로 어느 정도의 프랑스어는 할 줄 알았다.
 마지막 시험은 생각보다 훨씬 쉽게 통과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같이 떠나게 될 경우, 시간이 급하니까 일주일의 시간을 줄게. 그 일주일 안에 그 책의 기본 파트인 2장까지. 2장까지 나와 있는 내용에 대해서 나와 대화를 할 수 있다면, 적어도 뜻이라도 파악할 수 있다면 허락해줄게.”
 “여보. 일주일은 너무 짧은 거 아니에요?”
 “하하, 왜 그래? 반대하는 거 아니었어?”
 “사실 아직 걱정되기는 하지만……. 그래도 아이가 저렇게 원하는데 가능한 숙제를 내주셔야죠.”
 “축구에 모든 것을 걸 수 있다고 했어. 그러면 보여줘야지. 축구에 대한 것은 아니지만, 성배가 원하는, 벨기에로 갈 기회를 준 거야. 정말로 간절하다면 충분히 할 수 있어. 어차피 저기 나와 있는 문장을 그대로 사용할 거니까.”
 정작 지금까지 반대해왔던 혜진이 무리가 아닌가, 생각해서 이야기할 정도로 쉬운 시험은 아니었다.
 아무리 일주일이라는 시간을 받았고, 초급 프랑스어 입문 책이라고는 하지만 기본적으로 프랑스어 자체가 어려운 언어였다.
 1/5에 달하는 30페이지 이상이 시험 범위였기 때문에 외우는 것도 불가능했다.
 하지만 성배에게는 초등학교 수준의 받아쓰기 난이도에 불과했다.
 “걱정하지 마세요. 무조건 할 수 있어요. 제가 보여드릴게요.”
 이로써 첫 번째 난관은 무사히 통과해냈다고 볼 수 있었다.
 앞으로 자신의 새로운 꿈을 향해 나아가는 데 있어서 수많은 난관들이 있겠지만, 지금처럼 무사히 통과해낼 수 있기를 바랐다.
 
 
 # 낭만필드 - 014
 
 “으, 으으…… 으으으…….”
 열여섯 살이던 시절, 그러니까 로얄 앤트워프 입단도, 자스민과의 만남도, 그리고 딸인 엘리자베스의 탄생과 사고도 일어나지 않은 세상이었지만, 성배의 기억 속에서까지 지워진 것은 아니었다. 이제는 일어나지 않은 일이 되었지만, 성배에게는 어제 일처럼 생생한 그 일들.
 
 이해할 수 없는 일이 벌어진 현실을 현실이라 받아들인 이후부터 자스민과 엘리자베스가 성배의 꿈에 나타나기 시작했다. 한때 축구와 로얄 앤트워프를 뒤로 밀어내고 자신의 모든 것이 되었던 두 여자를 잊을 수 없었다. 슬픈 과거는 잊고 다시 새로운 세상에서 행복한 미래를 다시 써나가기로 결정한 순간, 마치 자신을 어떻게 잊을 수 있냐며 성배를 비난하듯, 두 여자가 꿈으로 찾아오기 시작했다.
 
 “아, 아……. 아악!!”
 결국, 성배는 꿈에서 깨어났다. 꿈이라는 것이 어떠한 메커니즘으로 이루어지는지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주장이 존재하는데, 가장 유력한 이론이 있을 뿐, ‘그래, 이거다!!’ 할 만한 것은 아직 없었다.
 가장 유력한 주장은 자는 도중에 뇌에서 기억이나 정보를 무작위로 자동 재생한다는 것인데, 무작위라면 최근 들어서 갑자기 늘어난 그녀들의 출현을 설명할 방법이 없었다. 마치 뭔가 하고 싶은 말이라도 있는 것처럼 자주 찾아오고 있는 그녀들.
 반갑기도 했지만, 그녀들로 인해 성배도 상당히 혼란스러웠다.
 “젠장……. 나보고 어쩌라는 거야……. 내가 돌아오고 싶어서 돌아온 게 아니라고…….”
 꿈속에서 그녀들을 볼 때마다 성배의 가슴은 찢어졌다. 자신에게 없었던 사람처럼 되어버린 그녀들도 슬프겠지만, 자스민의 기억에서 완전히 없는 사람이 되고, 태어나지도 않은, 그리고 앞으로도 태어나지 않을 아이가 된 엘리자베스로 인해 성배가 겪는 아픔은 그것보다 훨씬 더 컸다.
 두 사람은 떠올리며 아파할 기억 자체가 사라진 것이지만, 성배는 앞으로도 계속, 얼마가 될지 모르는 오랜 기간 동안 이 기억을 붙잡고 살아야만 했다.
 “너희는 이제…… 나의 기억이 아예 없어졌잖아……. 왜 자꾸 나타나는 거야……. 나 혼자 이 기억을 안고 평생 살아가야 하는데……. 그것만으로도 너무 힘든데……. 너희까지 왜 그러는 거야…….”
 결국, 성배는 눈물을 참지 못했다. 돌아온 이후, 이 현실을 인정하지 않으면서 애써 두 사람에 대한 기억도 떠올리지 않으려 했지만, 자신이 회귀했음을 인정하고 다시 돌아온 지금의 현실에 충실하겠다고 마음을 먹은 순간 두 사람의 기억은 기다렸다는 듯이 나타나 성배를 괴롭혔다.
 두 사람에 대한 기억을 잊는 것도 성배에게는 가슴이 찢어지는 고통이지만, 두 사람의 기억이 계속 떠오르는 것도 지금의 성배에게는 못지않은 고통이었다.
 결국, 다시 잠들지 못한 성배는 침대에 누워 두 사람에 대한 기억을 곱씹으며 고장 난 수도꼭지처럼 계속 눈물을 흘릴 뿐이었다.
 
 ***
 
 -뻥!! 뻥!! 뻥!!
 “어? 뭐야? 저 새끼, 저거…… 주성배 아냐?”
 “응? 그 개념 없는 새끼? 에이, 설마…… 아무리 개념이 없어도 우리한테 말도 없이 훈련용품 꺼내서 쓰고 있으려고?”
 부모님에게 사실상 벨기에 유학을 허락받은 성배는 이제 더 이상 거칠 것이 없었다.
  아니, 애초부터 거칠 것이 없었지만 이제 최소한의 눈치도 볼 필요가 없었다.
 아침 일찍부터 운동장에 나온 성배는 교무실에서 축구부실 열쇠를 가져왔고, 공들을 전부 꺼내놓고 훈련에 열중하고 있었다.
 ‘음……. 일단 킥력 부족, 체력 부족, 킥 정확도 부족, 피지컬 부족, 발끝 감각 부족, 거기다가 신장도 크지 않고……. 뭐, 생각보다는 나쁘지 않네.’
 지난 며칠 동안 파악한 자신의 약점들이었다.
 물론, 성배의 기준은 어디까지나 프로 기준이었기 때문에 동년배와 비교하면 나쁘지 않은 부분들도 있었다.
 예를 들면 킥력이나 체력, 킥의 정확도는 동년배의 유럽 선수들과 비교해도 크게 밀리지 않았다.
 부상을 당한 이후에도 이 부분들에서는 나름 좋은 평가를 받았던 성배였기 때문에 부상도 당하기 전인 지금 상황에서 나쁘지 않은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근력의 변화에 적응하지 못한 것만 빼면 킥 자체는 나쁘지 않았다.
 ‘문제는 피지컬이랑 개인 기술인데……. 신장이야, 뭐……. 내가 어떻게 한다고 할 수 있는 게 아니고.’
 이미 20년을 살아본 입장에서 성배는 자신의 약점을 확실히 파악하고 있었다.
 성배의 피지컬은 정말이지 형편없는 수준이었다.
 벨기에 리그가 유럽 리그 중에서도 몸싸움을 기피하는 리그로 꼽히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성배는 그곳에서도 누구 한 명 피지컬로 이기는 경우가 없었다.
 설상가상으로 대형 부상에 대한 트라우마로 몸싸움을 무서워하기까지 했으니 성배는 피지컬로 인해 선수생활 내내 발목을 붙잡힐 수밖에 없었다.
 아무리 몸싸움에 대한 부담이 덜한 풀백이라고 하더라도 몸싸움 자체가 되지 않는 수비수는 분명한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개인 기술의 투박함 역시 성배가 가지고 있는 큰 단점이었다.
 한국 엘리트 축구의 병폐이기도 한 이기기 위한 축구 속에서 성장했기 때문에 어릴 때부터 개인기를 활용하면 감독과 코치들, 선배들에게 기합을 받았다.
 그 결과, 패스와 공간을 향한 움직임 등 전술적인 움직임만을 익혔고, 프로 데뷔 후에는 개인기가 되지 않으니 패스를 위한 공간 자체를 만들어내지 못할 정도가 되고 말았다.
 개인 기술은 개인 돌파를 위해서가 아니라 팀플레이를 원활하게 하기 위해서도 필수적으로 갖출 필요가 있는데, 한국 유소년 지도자들은 이를 너무 소홀히 하는 면이 있었다.
 ‘당장 중요한 건 개인기술을 익히는 거야. 발끝의 감각을 예민하게 만들고 볼을 섬세하게 다루는 연습을 해야 해. 피지컬은…… 아직 때가 아니야.’
 아직 한참 자라고 있는 몸이었다.
 지금부터 피지컬을 키우겠다고 웨이트에 집중하면 나중에 성장했을 때, 신체의 밸런스가 깨질 수도 있는 일이었다.
 또한, 그 신빙성에 문제가 없지는 않지만, 어려서부터 웨이트에 집중해 근육을 키울 경우에는 신장 발육에 문제가 생긴다는 연구도 있었기 때문에 어쨌든 너무 일찍부터 근육을 키우는 것은 좋은 선택이 아니었다.
 최종적으로 몸이 어떻게 성장하느냐에 따라 선수 성장의 방향도 바뀔 수밖에 없었기 때문에 일찍부터 벌크 업에 열중하는 것은 당연히 좋지 않은 행동이었다.
 
 또, 전문가의 도움도 받지 않고 실행하는 웨이트 트레이닝은 축구 선수에게 독과 같았다.
 피지컬도 중요하지만, 그것보다 스피드가 훨씬 더 중요한 포지션의 선수들에게는 특히나 더 그랬다.
 벌크 업은 그야말로 양날의 검이었다. 벌크 업을 하면서 스피드를 잃어 평범한 선수로 전락하는 선수들도 많았다.
 치고 달리기로 유명했지만 벌크 업 이후 장점을 잃어 한참을 헤맸던 가레스 베일의 예를 들 것도 없었다.
 
 결국, 지금 당장 가장 시급한 일은 개인기술을 발전시키는 것이었다.
 다른 부분들은 당장 별로 마음에 들지는 않아도 욕심을 살짝 줄이고 동년배 선수들과 비교하면 크게 문제가 되는 수준은 아니었다.
 다만, 개인기술, 즉 테크닉은 동년배의 유럽 유망주들과 비교하면 중간도 가지 못할 수준이었기 때문에 당장 오늘부터라도 보강에 들어가야 하는 상황이었다.
 “야!! 너 미쳤냐? 우리들이 말한 게 무슨 뜻인지 모르겠어? 정신병자야? 아니면 머리가 좀 모자라? 장애야?”
 “아…….”
 자신의 약점과 당장 필요한 그 극복방안들에 대해서 고민하던 성배는 옆에서 자신에게 언제나처럼 욕을 퍼부으며 등장한 선배들로 인해 생각의 끈을 놓치고 말았다.
 이런저런 방법들을 생각하며 집중하고 있었기 때문에 더 아쉬웠다.
 어차피 며칠만 더 지나면 안 볼 사람인 선배들에게는 아무런 신경도 쓰지 않았다.
 “와, 진짜 이 새끼만 만나면 울화통이 터진다. 너 그것도 재주야!! 어떻게 볼 때마다 이렇게 빡치게 만드냐?”
 “예. 죄송합니다.”
 이제는 미래가 된 과거에서의 성배는 모든 사람들과 원만한 관계를 유지하는 사람이었다.
 로얄 앤트워프를 거치면서 성배를 만났던 모든 사람들은 성배를 좋아하지는 않아도 최소한 싫어하지도 않았다.
 한 팀에 16년간 충성을 바쳤고, 마지막까지 의리를 다했던 성배는 팀에게 그러했던 것처럼 다른 사람들을 대할 때도 의리와 신의로 대했다.
 당연히 싫어할 일 자체를 만들지 않았다.
 
 하지만 그런 생활의 마지막에 결국 단장과 감독으로부터 거하게 뒤통수를 얻어맞은 성배는 아직 사람을 대할 준비가 되지 않은 상태였다.
 게다가 그 대상이 며칠 뒤에는 볼 일이 없는 사람들이라면 더욱 그러했다.
 선배들이 뭐라고 하든지 간에 전혀 신경을 쓰지 않아 점점 더 미움을 사고 있는 성배는 본의 아니게 사람들로부터 미움받는 법을 배우고 있었다.
 “하아……. 지금은 바쁘니까 그냥 간다. 너 오늘 점심 먹고 바로 축구부실로 와라.”
 “예.”
 “아오, 빡쳐!! 예, 예. 너는 예, 말고 할 줄 아는 말이 없냐? 무슨 말이라도 붙여 봐!! 무슨 벽에다 대고 이야기하는 것 같잖아!! 씨발, 네가 심심이냐? 맨날 똑같은 말이야!! 매크로냐고!!”
 “죄송합니다.”
 “으아아악!!!!!”
 선배가 옆에서 지랄발광해도 성배는 신경 쓰지 않았다.
  대충 선배의 용건이 끝난 것 같아 선배들이 오기 전에 했던 고민을 다시 시작할 뿐이었다.
 성배의 이런 반응에 선배들은 제대로 열이 받았는지, 한참 동안 욕설을 내뱉다가 교실로 올라갔지만, 성배에게는 전혀 신경 쓸 가치도 없는 일일 뿐이었다.
 
 
 # 낭만필드 – 015
 
 “허, 허허……. 눈빛을 봤을 때, 예상은 했지만……. 내 생각보다도 훨씬 더 훌륭하게 해냈네. 정말 간절한가 보구나.”
 “여보, 합격이에요?”
 “응. 완벽해. 일주일 동안 한 것치고는 엄청나네. 성배, 너…… 생각보다 머리가 훨씬 좋았던 거 아니냐? 지금이라도 의대나 법대 같은 것 노려보지그래?”
 약속 이후 일주일이 지났다.
 그때 말했던 대로 아버지의 앞에서 프랑스어 시험을 본 성배는 당연히 아무 문제 없이 완벽하게 시험을 통과해냈다.
 어느 정도 틀려도 열심히 한 티가 나면 허락해주려고 했던 장석이 놀라지 않을 수 없을 정도였다.
 “저 그러면…… 내일 바로 학교에 나가서 이야기할게요. 어차피 아직 정식으로 입학한 건 아니니까 별문제 없겠죠.”
 “그래. 아빠도 곧 시간 내서 학교 한 번 찾아갈게. 갑자기 같이 가게 되니까 준비할 게 한두 개가 아니더라고.”
 성배는 아직 정식으로 영원고등학교 학생이 아니었다.
 지금 성배가 영원고등학교에 합류해 훈련을 하고 있는 것은 신입생 리쿠르팅, 즉, 교육부의 절차와는 별개로 고등학교 축구부에서 성배를 스카우트했고, 성배도 동의했기 때문에 미리 적응한다는 의미였지, 공식적으로 성배는 여전히 영원중학교 학생일 뿐이었다.
 중학교는 이미 졸업 요건을 모두 채운 상태였고, 고등학교는 배정도 나지 않은 상황.
 성배의 유학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벨기에로 유학을 갔을 때, 그곳에서 학업을 진행할 수 있는 학교만 구하면 끝이었다.
 “그래. 짧은 기간이었지만, 그래도 몇 달 동안 얼굴을 본 사이인데, 인사 정도는 해야겠지.”
 ‘별로 인사하고 싶은 사이는 아니지만…….’
 어쨌든 아버지가 저렇게 말씀하시니 인사 정도는 드려야 할 것 같았다.
 장기 부상으로 1년이 넘게 쉬어야 했던 자신을 제대로 관리도 해주지 않은, 꼴도 보기 싫은 감독이었기 때문에 그냥 내일부터 축구부 안 나옵니다, 라고 한 마디 던져주고 나올 생각이었다.
 
 ***
 
 “저, 내일부터 축구부 안 나옵니다.”
 “뭐, 인마? 너 지금 뭐라고 했냐?”
 “말씀드린 그대로입니다. 아마 내일부터는 훈련에 참가하지 않을 겁니다.”
 생각했던 것처럼 한 마디로 끝내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두 문장 내로 끝낸 성배는 고개를 숙이고 다시 돌아 나오려고 했다.
 감독이라는 사람에게 조금이라도 존경심 비스무리한 것이 있었다면, 이번에 유학을 간다, 아버지를 따라 벨기에로 가게 되었다, 는 등의 첨언을 했겠지만 그런 것이 있을 리 없었다.
 안 그래도 좋은 기억이 없는 감독인데, 감독이라고 하니까 또 비안키 감독이 떠올라서 더욱더 거부감이 들었다.
 ‘이러면 안 되는데……. 감독이라고 괜히 미워하는 건 하지 말자.’
 앞으로 계속 선수생활을 해야 하는데 감독이라는 사람들을 만날 때마다 이렇게 날카로운 태도를 보이면 좋을 것이 없었다.
 굳이 감독이라는 이유가 아니어도 싫어할 이유는 많은 영원고등학교 석영균 감독이었기 때문에 싫어하는 이유에서 ‘감독이기 때문’이라는 것은 빼기로 했다.
 “뭐야!? 다른 학교로 가려고 하는 거냐!! 이런 경우 없는 새끼가 있나!! 이미 우리랑 이야기 다 된 거잖아!!”
 “아니, 뭐……. 그런 건 아닙니다.”
 “아니긴 뭐가 아니야!! 보성고냐? 매강고냐? 그 자식들이 뭘 어떻게 해준다고 한 거냐!!”
 감독은 성배가 다른 학교의 스카우트 제안을 받고 전학 가려 한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성배는 아니라고 했지만, 흥분한 감독에게는 이미 들리지 않았다.
 보성고와 매강고는 한국에서 가장 강력한 전력을 자랑하는 고등학교 축구부임과 동시에 올해를 기점으로 포백으로의 전환을 계획하고 있는 학교였다.
 아무리 명문 고등학교라도 쓸 만한 레프트백 유망주를 데려오는 것은 어려웠기 때문에 성배에게 손을 내민 것이라 넘겨짚은 모습이었다.
 “젠장!! 이런 경우가 어디 있냐!! 도의가 있지!! 네가 제일 문제야!! 이미 구두 합의까지 다 된 것 아니야? 구두 계약도 계약이야, 이 어린놈의 새끼야!! 그따위로 살면 안 되는 거야!!”
 “그런 거 아닙니다. 다른 학교로 가지는 않지만, 중요한 건 제가 이곳에 더는 오지 않는다는 거 아닙니까?”
 여기서 감독과 드잡이질을 할 시간이 없었다.
 이전의 삶에서는 사람이 좋다 못 해서 바보 같을 정도로 호인이었던 성배였다.
 어느 한 명과도 척을 진 적이 없었고, 모든 사람들과 두루두루 원만한 관계를 형성했다.
 그 과정에서 여러 가지 손해들도 많이 보았다.
 여러 상처들이 쌓이는 중에도 이미 형성된 성격을 버릴 수 없었지만, 마지막 순간, 큰 손해를 감수하면서도 의리를 지켜왔던 로얄 앤트워프에게 강렬한 배신을 당한 것은 결정적이었다.
 
 이후, 과거로 돌아온 성배는 의도적으로 마음을 닫아버렸다.
 과거로 돌아온 자신의 모습에 충실하기로 했지만, 아무리 보잘것없더라도 어쨌든 자신이 살아온 20년의 흔적이 모두 사라졌다는 것에서 오는 충격도 만만치 않았다.
 때문에, 도저히 자신 외의 모든 사람과 모든 것에게 나눠줄 마음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나마 성배가 마음을 내어주고 있는 사람들은 완전히 방전되어버린 자신을 지탱해주고 있는 가족들밖에 없었다.
 “그게 아니면 뭔데!! 네가 지금 할 수 있는 게 뭐가 있냐!! 어차피 고등학교는 갈 텐데, 여기 안 오겠다면 다른 학교로 가는 거지!! 이 새끼가 계속 사기를 치려고 해?”
 “고등학교는 가죠. 벨기에 학교 갑니다.”
 “벨기에? 벨기에? 네까짓 게 유럽을 간다고? 그걸 지금 나보고 믿으라고 하는 소리냐?”
 사실을 말했지만, 감독은 믿어주지 않았다.
 이 당시만 하더라도 유럽으로 진출하는 한국 선수가 많지 않아 유럽 무대는 그야말로 꿈의 무대라는 인식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유럽으로 나간 선수도 거의 없었고, 그 중 성공한 선수는 2002 한일 월드컵의 신화의 주역인 박인진과 윤기표, 성규한, 그리고 대한민국의 절대적인 레전드 채범진, 하대욱 정도가 전부였다. 그나마 채범진을 제외하면 전부 중소리그에서의 활약이었다.
 
 그래서 이 시대에는 선수들이 유럽 진출에 대한 꿈을 표현하는 것마저도 조롱거리가 되는 경우까지 있었다.
 “네까짓 게라……. 뭐, 그건 잘 모르겠지만, 아버지가 외교관이셔서 따라가는 겁니다. 감독이라면, 최소한 선수의 신상에 대한 정보 정도는 아실 줄 알았는데 말이죠.”
 “이런, 건방진!! 이 건방진 새끼야!! 그게 감독한테 할 소리냐!! 싸가지가 없어!! 그 상태로 벨기에 유학까지 가면 아주 싸가지가 볼만하겠구나!! 예의는 배우고 유학을 가도 가야지, 부모님은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 모르겠다. 알만하다, 알만해!!”
 지금 성배에게 남아있는 유일한 것, 가족을 건드린 감독으로 인해 성배도 살짝 뚜껑이 열려버렸다.
 다행히, 16년 동안 그저 그런 선수로, 그것도 타지에서 살면서 더러운 대우를 받은 적도 많았기 때문에 이성을 놓을 정도로 분노하지는 않았다.
 “이제 제 감독 아니라고 지금 계속 말했던 것 같은데, 감독님은 언어를 배우셔야겠네요.”
 “뭐, 뭐야!?”
 “예의라는 건 말입니다, 예의를 지킬만한 상황과 지킬만한 사람에게 지키는 겁니다. 선생님이 예의를 지킬만한 사람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적어도 이 상황이 예의를 지킬만한 상황이 아니라는 건 아셔야죠. 저랑 같이 다시 배우실 생각은 없으신가요?”
 흥분한 감독과 여전히 이성을 붙잡고 있는 성배.
 이 말싸움의 승패는 시작부터 명확하게 정해져 있을 수밖에 없었다.
 상상하지도 못했던 일들을 연달아 겪으면서 성격에도 큰 변화가 생긴 성배는 이제 다른 사람에게 싫은 소리를 참지 않기로 했다.
 
 그리고 건장한 성인의 분노를 마주하면 겁에 질리는 열여섯의 중학생이 아니라 서른여섯, 사회에서 닳고 닳은 베테랑이었다.
 흥분해서 두뇌 회전이 둔해진 성인 한 명 정도는 말로 가볍게 상대해줄 수 있었다.
 “어쨌든, 저는 이제 나가보겠습니다. 제가 드릴 말씀은 다 드린 것 같네요. 어쨌든 지난 한 달 동안 고생하셨습니다. 나중에 볼일이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잘 지내시길.”
 “이…… 이 새끼!! 너!! 부모님 모셔 와라!! 내가 한마디 해야겠다. 아들 새끼를 어떻게 키운 거냐고!!”
 “이상하네요. 저는 애초에 선생님의 제자였던 적이 한 번도 없는 데 말이죠. 저는 지금도 영원중학교 학생이고, 영원고등학교에는 아직 배정조차 받지 않았습니다. 엄밀히 따지면 선생님은 제게 선생님도 아닙니다. 아저씨죠. 동네 아저씨가 저희 부모님을 모셔오라고 말할 권리가 있었던가요?”
 성배는 마지막까지 감독의 속을 긁어놓았다.
 속이 시원했다.
 지난 삶에서는 도대체 왜 이렇게 속이 시원한 행동들을 하지 않고 가슴 속에 꾹 눌러만 놓고 숨겼던 것인지…….
 자신을 이해할 수가 없을 정도였다.
 과거로 돌아온 뒤, 가족을 다시 만났을 때, 그라운드에 다시 섰을 때, 그리고 지금. 세 번째로 온몸에 소름이 돋는 순간이었다.
 “너……. 너!! 다시 이 바닥으로 돌아올 생각은 절대로!! 하지 마라!! 내가 무슨 수단과 방법을 써서라도, 네놈이 다시는 이 바닥에 발도 못 붙이게 할 거다!! 유럽에서 성공해라!! 너, 유럽에서 성공하지 못하면, 선수생활은 그때 끝이다!! 돌아올 생각도 하지 마라!! 어차피 아무것도 못 할 테니까!!”
 “감사합니다. 유럽에서 꼭 성공해야 할 이유가 하나 늘었네요. 굳이 이런 것은 필요 없었는데……. 어쨌든 꼭 명심하고 성공하겠습니다. 나중에 성공하면……. 인터뷰에서 한 번쯤은 언급해드리죠. 어떤 방향일지는……. 뭐, 그럼.”
 마지막까지 감독의 속을 긁어놓은 성배는 경쾌하게 문을 닫고 부실을 나왔다.
 또 한 번, 현실이 마음에 든 순간이었다.
 뭔가 자신을 짓누르던 것이 사라진 것처럼 몸이 가벼워졌다.
 자신은 이제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된 것이었다.
 지난 20년의 기억에 더 이상 얽매이지 말고, 완전히 다른 사람으로 다른 인생을 살아가 종국에는 완전히 다른 위상을 가진 선수가 될 것이다.
 그런 다짐을 다시 한 번 하게 되었다.
 
 
 # 낭만필드 - 016
 
 “생각지도 못한 곳에서 성공해야 하는 이유가 또 생겼네……. 어차피 모든 것을 다 걸고 가는 유학인데……. 굳이 이렇게까지 해주다니. 역시, 세상에 쓸모없는 사람은 없다는 옛말, 정확하구나.”
 한국인으로서 유럽에서 성공한 축구 선수. 자신의 기억 속에는 상당히 많았지만, 지금의 이 시점에서는 전부 벌어지지 않은 일이었다.
 하지만 지금 벌어지지 않은 일이라고 해서 한국인도 충분히 유럽 무대에서 통할 수 있다는 것이 증명되었던 것까지 없어진 것은 아니었다.
 게다가 자신에게는 수비수에게 가장 중요한 경험이라는 자산이 있었다. 성공 가능성은 충분했다.
 “어이!! 모지리!! 일찍 왔네? 오늘은 집에서 나올 때 개념도 챙겼나 봐? 혼자서 훈련한다고 꼴값 떨지 않는 거 보니까?”
 “아…… 기분 좋았는데…….”
 감독을 향해 시원하게 할 말을 다 하고 후련한 마음으로 걷고 있던 성배의 앞에 불청객이 또다시 찾아왔다.
 첫 번째 불청객인 석영균 감독의 입을 다물게 하면서 좋아졌던 기분이 다시 나빠지려고 했다.
 “뭐? 기분 좋았는데? 그건 나를 만나서 기분이 나쁘다는 이야기냐?”
 “예.”
 “거기다가 요? 요? 새삼 느끼지만 너 진짜 미친놈이구나? 개념 챙겨왔다는 말은 취소한다. 와……. 진짜 강적이다, 이 새끼.”
 어차피 이제 다시 볼일도 없는 사람이었다.
 지금까지는 그래도 귀찮았기 때문에 최소한의 대우는 해주었지만, 오늘 이후 오랫동안 볼 일도 없는 데다가 좋은 감정도 전혀 없는 사람이기 때문에 이제는 굳이 그럴 필요도 없었다.
 지금까지는 그들이 마음대로 만들어놓은, 웃음밖에 나오지 않는 유치한 룰을 지키지 않았을 뿐, 그래도 조용히 살았던 성배가 갑자기 대들며 나서자 진현필은 상당히 당황하는 모습을 보였다.
 “너, 뭐냐? 우리가 하도 미쳤다, 미쳤다, 그랬더니 진짜 미치기로 한 거냐?”
 “아니요.”
 “또……. 또, 요? 이건 이제 막 가자는 거지? 나한테 아주 제대로 개기는 거지?”
 “그동안에도 계속 개기고 있었는데요.”
 감독은 그래도 권력이 있는 사람이었고, 자신을 화나게 하였기 때문에 말이 많아진 것이었다.
 
 과거로 돌아온 이후에는 가족을 제외하면 두 문장도 제대로 말해본 적이 드물었던 것을 생각하면 감독에게는 거의 연설을 했다고 해도 과장이 아니었다.
 하지만 고작 나이 좀 있다고 허세를 부리고 싶어 안달이 난 어린아이를 상대로는 손톱만큼의 감정적 변화도 일어나지 않았다.
 “으아…… 아앍!! 너 나 울화통이라도 터뜨려서 복수하려고 하는 거냐? 씨발, 무슨 말이 안 통해?”
 “그렇게 죽으면 저한테는 책임 없습니다, 아니. 없어요.”
 “…… 놀리냐? 놀려? 굳이 ‘다’로 잘 끝내놓고 다시 바꿔? 가지고 노냐? 맞먹자고?”
 “하아……. 나, 이 학교 안 다니게 됐거든요? 이제 그냥 남이니까 신경 쓰지 말고 가세요.”
 “뭐, 뭐라고? 이 새끼, 진짜 미쳤어!! 와, 진짜 돌겠네…….”
 “엄밀히 말하면 지금까지도 같은 학교 학생은 아니었지만 말이죠.”
 과거, 그러니까 쉽게 말해 전생의 마지막에서 그렇게 후회했던 오지랖 병이 또 도지고 말았다.
 어차피 좋은 이야기도 아니고, 진현필을 위해서가 아니라 내 마음 편하자고 하는 말이었기 때문에 전과는 달랐지만, 그래도 아직 다른 사람에게 아예 신경을 끄고 살기에는 수행이 부족하구나, 싶었다.
 “후배들 기합 줄 시간에 개인 훈련이라도 하시죠. 그편이 훨씬 유익할겁니…… 아, 유익할 테니까요. 다른 선배들이야 재능이 없다고 쳐도, 선배야 재능은 충분히 프로를 노릴 정도는 되잖아요?”
 실제로 성배의 영원고등학교 선배인 진현필은 착실하게 엘리트 코스를 밟아 청주 FC까지 입단해 K리그에서 활약했다.
 최고의 수비수는 아니었지만 나름대로 A매치 출전 경험도 여덟 경기에 달할 정도로 K리그 최고의 수비수 중 한 명으로 인정받으며 훌륭한 커리어를 쌓았을 정도로 재능은 확실히 갖추고 있는 선수였다.
 ‘젠장……. 이딴 녀석도 한 팀의 레전드로 출세가도를 달렸는데…….’
 청주에서 태어나 청주에 위치한 영원중-영원고를 다니다가 대학 때 서울로 올라갔지만, 다시 청주 FC로 돌아온 진현필은 그야말로 흔히 말하는 로컬보이였다.
 청주가 고향이고 청주에서 자라 선수생활도 청주에서 시작하고 끝낸, 성배와 비슷한 선수생활을 한 것이었다.
 하지만 성대한 은퇴식과 함께 선수생활을 마친 뒤에 바로 1군 코치로 합류했고, 전생의 마지막 시점에서 청주 FC의 감독직에 가장 가까운 사람이라는 평가까지 받았다.
 다른 선배들도 진현필과 비슷한 수준으로 자신을 괴롭혔지만, 대부분 기억도 나지 않는 것에 비해 마지막까지 진현필에게 만큼은 분노를 간직하고 있었던 것의 뒤에는 이런 이유가 존재했다.
 
 “뭐, 그럼 이만.”
 진현필의 잘못도 있지만 진현필에 대한 자신의 분노는 대부분 자신의 열등감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자스민과 엘리자베스의 기억은 절대로 잊지 못하겠지만, 기타 다른 기억들은 모두 잊고 새롭게 시작하려 마음을 먹은 이상 진현필에 대한 분노도 이제는 그만 접어둬야 했다.
 “아오, 저거 뭐야!!! 뭐 저딴 새끼가 다 있어!!”
 성배는 진현필을 뒤로하고 쿨하게 자리를 빠져나왔다.
 뒤에서 진현필의 사자후가 들렸는데, 그것이 그렇게 통쾌할 수가 없었다.
 저렇게 화도 내지 못할 정도로 멘탈을 털어보고 싶었지만 그렇게 못해서 아쉬웠는데, 분노를 참지 못해 소리를 지르는 진현필의 찌질한 모습도 보기에 그렇게 나쁘지는 않았다.
 
 ***
 
 “오빠!! 그러면 내일부터 아침에 안 나가는 거야?”
 “응? 아, 응. 내일부터는 집에 있을 거야.”
 회귀한 이후에도 동생과 시간을 보낼 여유가 마땅히 없었던 성배는 더 이상 학교 훈련을 나가지 않게 되어 드디어 여유가 생긴 김에 학원에 가는 유빈이와 함께 집을 나섰다.
 성배와 네 살 터울인 유빈이는 이제 초등학교 6학년이 되는 나이였다.
 나중에는 초등학교 고학년들이 무서운 존재가 되지만, 아직까지는 그 나이에 맞는 순수함을 갖추고 있던 시기여서 유빈이도 한창 귀여웠던 때였다.
 “에잉……. 부럽다아……. 집에서 매일 쉬고…….”
 “야, 누가 보면 너는 하루 종일 공부하는 줄 알겠다. 미술학원 하나밖에 안 다니는 주제에…….”
 “헤헤, 말이 그렇다는 거지-! 원래 누가 학교 안 나가면 보통 다 이런 이야기 하잖아.”
 2000년대 초반이면 아직 어린아이들에게까지는 사교육의 열풍이 불어 닥치지 않은 시대였다.
 그래서 이제 막 6학년이 되는 유빈이는 미술 학원 외에는 학원에 다니지 않았다.
 미술 학원도 본인이 미술을 워낙 좋아했기 때문에 다니는 것이고 미술학도의 꿈을 키우고 있는 것이었기 때문에 부모님의 욕심으로 다니게 하는 학원은 하나도 없었다.
 “으음……. 뭐…….”
 “그런데 그건 재미있어서 하는 거야? 정신없어…….”
 “아아, 연습이지, 연습. 재미가 없는 건 아니지만.”
 유빈이와 함께 걷는 동안 성배는 공을 몸에서 떨어뜨리지 않고 계속 트래핑하고 있었다.
 발밑 감각과 개인 기술을 갈고 닦아야 한다고 절실히 느끼고 있는 성배였기 때문에 상황이 허락하는 한 볼을 몸에 항상 붙이고 있었다.
 걸어가고 있는 동안에도 몸의 여러 부분들을 사용하며 볼을 다루는 중이었다.
 “와아, 잘하네? 축구 좀 한다더니, 잘난 척하는 게 아니었나 봐?”
 “이 정도로, 뭘……. 아직 멀었지. 이건 고등학생 정도 되면 누구나 다 하는 거니까.”
 “뭐야, 그런 거야? 그 쉬운 걸 오빠는 근데 왜 연습하고 있어? 오빠는 못하는구나? 에잉, 그러면 잘하는 것도 아니었네, 칫.”
 “야, 야. 못 한다고 안 했어. 연습하는 것도 아니고.”
 어린 시절에도 항상 유빈이와 대화를 하면 네 살이나 더 어린 꼬맹이에게 항상 끌려가고는 했었는데, 그것은 정신연령으로 서른여섯의 아저씨가 되어도 변함이 없었다.
 오히려 어른의 마음으로 아이와 대화하려고 하니 더욱 말리는 것 같기도 했다.
 무슨 말을 해도 마냥 귀여우니 어릴 때처럼 마주 상대할 수 없어서 더 그랬다.
 “공이랑 친해지려고 하는 거지. 친구랑도 계속 붙어있으면 친해지잖아? 앞으로 오빠는 이 공이랑 매일 같이 지내야 하니까 내 몸처럼 다룰 수 있게 하려고 그러는 거야.”
 “음……. 공을 어떻게 몸처럼 다뤄?”
 “아……. 그러니까…….”
 엘리자베스가 네 살, 다섯 살 때 한창 입에 ‘왜’라는 질문을 달고 다니며 성배를 괴롭게 한 적이 있었다.
 이제 막 열세 살이 된 유빈이에게 다섯 살짜리 아이가 너랑 똑같은 질문을 한다고 말하면 화내겠지만, 사실 그때의 엘리자베스와 별 차이를 느끼지 못하는 성배였다.
 “아, 그래!! 너도 붓으로 그림을 그리다 보면 가끔 막 선을 삐져나올 때가 있지?”
 “응. 아무리 조심해서 칠하려고 해도 자꾸 삐져나와.”
 “그건 붓이 네 손이 아니라서 그런 거잖아. 손으로 하면 막 섬세하게 끝을 먼저 칠하고 할 수 있을 텐데. 그런데 선생님들은 같은 붓으로 칠해도 잘 안 삐져나오지?”
 “맞아!! 진짜 잘하셔. 절대로 색도 안 삐져나오고, 4B 연필로 그려도 스케치북에 안 번져. 진짜 대단하다니까?”
 미술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자 눈이 초롱초롱해지면서 속사포처럼 말을 내뱉는 유빈이의 모습은 성배로 하여금 쓴웃음을 짓게 만들었다.
 눈빛에서 빛이 날 정도로 반짝거리며 좋아하는 유빈이의 지금 모습과 처음 축구를 하고 싶다고 부모님께 말했던 자신의 모습은 아마 비슷할 것이었다.
 하지만 지금 자신에게 축구에 대해 말하면서 저렇게 좋아할 수 있냐고 묻는다면, 절대로 자신 있게 대답할 수 없을 것이었다.
 현실을 알게 된 이상 어쩔 수 없는 일이었지만, 그래도 입맛은 조금 썼다.
 “붓을 엄청나게 오래 쓰셔서 익숙해지신 거야. 그러니까 붓으로 그려도 손으로 하는 것처럼 섬세하게 하실 수 있는 거지. 나도 마찬가지야. 볼을 매일 가지고 놀다 보면 익숙해져서 신경을 쓰지 않아도 내 몸처럼 다룰 수 있게 되는 거지.”
 “아아……. 그런가? 그러면 나도 매일 붓을 들고 다녀야 되는 거야? 으음……. 불편할 것 같은데에…….”
 “하하, 뭐 그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을까? 나야 볼을 계속 몸으로 움직여야 하는 축구선수니까 이러는 건데, 너는 연습하려면 계속 그림을 그려봐야겠지?”
 “좋아!! 그러면 하루에 세 장씩 그려봐야지!! 그리고…… 혹시 모르니까 잘 때는 붓을 안고 자야겠어!!”
 “음……. 그러면 붓이 부러질 것 같은데…….”
 어차피 아이들이 다 그렇듯 며칠이나 갈지 모를 결심이기 때문에 그냥 웃고 말았다.
 자신이 볼을 능숙하게 다루기 위해 연습하는 것을 보고 자신도 열심히 그림을 배우겠다고 다짐하는 유빈이의 모습이 귀여우면서도 대견스러웠다.
 자신의 동생이라는 것을 알지만, 엘리자베스가 아니라는 것을 알지만 유빈이의 모습에서 엘리자베스를 떠올리지 않는다는 것은 무리였다.
 엘리자베스에게 사고가 일어나지 않았다면 지금쯤 열 살이 되었을 것이었다.
 연령대가 비슷해서 더욱 유빈이에게서 엘리자베스가 보이는 것인지도 몰랐다.
 ‘이번에는 너도 꼭 꿈을 이뤘으면 좋겠다, 유빈아.’
 전생에서 유빈이는 결국 미술에 대한 꿈을 접고 공부에 열중해서 부모님을 따라 공무원이 되었다.
 예술중학교까지 진학하며 꿈을 키웠던 유빈이가 꿈을 접었던 시점은 성배 자신이 부상으로 고생하면서 한참 예민했던 시기였다.
 성배와 항상 장난식으로 우리 집에는 자식 둘이 다 예체능으로 진로를 잡았다며 우리 집 어떡하냐는 대화를 나누었던 유빈이는 결국 좌절하는 성배의 모습을 보면서 진로를 바꾼 것이었을지도 몰랐다.
 확실한 것은 아니었지만, 그 당시 워낙 부정적으로 살았었기 때문에 모든 것을 자신의 탓으로 돌릴 때였고, 그래서 혼자 상당히 힘들었던 기억이 있었다.
 
 이번에는 유빈이에게 반면교사가 아니라 성공모델이 되어주고 싶었다.
 유빈이와의 사이가 만화책이나 애니메이션에 나오는 것처럼 죽고 못 살 정도는 아니었지만, 그래도 싸운 적도 거의 없고 서로에게 선물도 자주 사주었을 정도로 친한 편이었기 때문에 유빈이에게 조금이라도 나쁜 영향을 미칠 수 있는 행동은 하고 싶지 않았다.
 
 
 # 낭만필드 - 017
 
 “으음……. 어쩔 수 없이 혼자서 훈련을 해야 하나?”
 출국까지는 대략 2주 정도의 시간이 남아있었다.
 평범한 학생이 유학을 간다면 2주의 짧은 시간을 친구들과 마지막으로 시간을 보내는 데 쓰거나, 유학 가는 나라의 언어를 공부하는 데 쓰겠지만, 지금 성배는 훈련을 하지 않는 1분 1초가 아까웠다.
 
 벨기에로 가면 학교 축구부가 아닌 유소년 클럽이나 아카데미로 들어가야 했고, 가장 좋은 것은 주필러 리그 소속 클럽의 유소년 팀에 들어가는 것이었다.
 처음부터 높은 평가를 받아 자신에게 기대하게 만들기 위해서는 최대한 테스트 날까지 조금이라도 과거의 감각을 살릴 필요가 있었다.
 “그 깽판을 치고 고등학교에 갈 수는 없고……. 그렇다고 중학교를 찾아갈 수도 없고…….”
 유학이 결정되었다는 말을 전하러 갔을 때, 자신이 한 행동을 생각하면 유학 전까지 학교에서 훈련해도 되냐고 물어보는 순간 뺨을 내줘야 할 것이었다.
 그렇다고 중학교에서 훈련을 하기도 뭐했다.
 새로 합류하게 된 입학 예정자들과 함께 한창 내년을 준비하고 있을 시기였기 때문이었다.
 “혼자는 할 수 있는 게 제한되는데…….”
 지금 당장 시급한 발밑 감각을 끌어올리는 훈련은 혼자서도 할 수 있었다.
 하지만 선수 한 명 정도는 제칠 수 있는 개인 기술을 갖추기 위한 훈련이나 킥 훈련 같은 것은 혼자서 할 수 없었다.
 할 수는 있지만 차는 시간보다 한 번 찬 볼을 다시 가져오는 시간이 훨씬 더 오래 걸릴 것이었다.
 “아!!”
 순간, 누군가를 떠올린 성배는 바로 휴대폰을 집어 들었다.
 이 당시 저가 휴대폰 시장에서 꽤나 힘을 쓰고 있었던 CYON에서 출시된 32화음 벨소리, 65,000컬러 LCD와 유기발광 외장 LED를 탑재한 폴더폰이었다.
 “아니, 그게 중요한 게 아니지.”
 잠시 이 신형 휴대폰에 대한 생각에 빠졌던 성배는 정신을 차리고 전화번호부 창을 띄웠다.
 처음 회귀했을 때는 한동안 이 작은 화면에 적응하지 못했지만, 지금은 그나마 다시 익숙해진 LCD 화면에서 찾던 이름을 발견하고 미소를 지은 성배는 바로 전화를 걸었다.
 [여보세요?]
 “아, 코치님!! 저예요, 성배.”
 훈련을 도와줄 수 있는 사람을 찾던 성배가 떠올린 사람은 바로 얼마 전까지 영원중학교에서 성배를 지도했던 유영민 코치였다.
 작년을 마지막으로 영원중학교를 떠난 유영민 코치는 무명이기는 하지만 나름 K리그에서 활약했던 전력을 가진 프로 출신 코치였다.
 나중에는 K리그의 명문 클럽, 수원 유나이티드의 2군 코치까지 하는 사람이었기 때문에 중학생인 성배가 부탁할 수 있는 사람 중에는 가장 고급 인력이라고 할 수 있었다.
 [아, 성배? 갑자기 무슨 일이냐?]
 “다른 건 아니고, 본론부터 말씀드리자면……. 저 훈련 좀 도와주실 수 있으신가, 해서요.”
 [응? 훈련? 너 영원고등학교에서 훈련하는 거 아니었어?]
 “일이 그렇게 되었네요.”
 [그럼 지금은 어떻게 훈련하고 있는데?]
 “오늘부터 혼자 해야 하는데, 도와줄 사람을 좀 찾고 있는 중이었어요.”
 무엇보다도 유영민 코치는 한국에서 좋은 기억이 거의 없는 성배가 좋게 기억하고 있는 정말 몇 안 되는 사람 중 한 명이었기 때문에 더욱 함께하고 싶었다.
 진심으로 아이들을 위해주었고, 아이들의 성장과 미래를 최우선으로 생각하는 것이 보이는, 그런 사람이었다.
 젊은 코치였기 때문에 힘이 없어서 큰 영향을 끼치지는 못했지만, 당연히 선수들에게 인기가 많을 수밖에 없었다.
 또한, 능력도 충분히 갖추고 있어서 고작 열여섯의 선수가 일대일로 훈련을 받기에는 과분했지만, 일단 지금 일이 없었기 때문에 한 번 기대해볼 만 했다.
 [그래, 뭐 마침 마땅히 할 일도 없었으니까 내가 봐줄게. 어디로 나가면 되는데?]
 “그러게요……. 그러고 보니까 그것도 문제네요. 주변 학교 운동장 아무 데나 빈 곳으로 가야겠죠?”
 [그렇겠지. 영원중학교나 고등학교는 축구부가 훈련하고 있을 테니까. 그나저나, 나 이제 코치 아니라고 듣기 싫은 다, 나, 까는 안 쓰네. 하하하.]
 다행히 유영민은 성배의 부탁을 들어주었다.
 훈련 장소야 찾아보면 많이 있었다.
 대부분의 학교가 방학을 한 상황이었기 때문에 비어있는 운동장들이 꽤 있을 것이었다.
 시합하는 것도 아니고 테크닉 연습과 킥 연습 정도는 운동장의 1/3이면 충분했다.
 
 과거로 돌아온 이후 다시 보고 싶지 않은 얼굴들은 실컷 봤지만 정작 진짜 보고 싶은 사람 중 한 명이었던 유영민 코치는 보지 못했던 성배는 훈련에 도움도 받고 유영민을 다시 한 번 만날 수 있다는 것이 만족스러웠다.
 
 ***
 
 “그래서, 도대체 어떻게 된 거야?”
 “뭐……. 별일은 아니고 이번에 아버지 따라서 유학 가게 되었거든요. 그래서 학교 축구부에는 안 나간다고 말했어요. 선배라고 하는 것들 꼴이 마음에 안 들기도 하고…….”
 “하긴, 너는 중학교 때도 애들한테 아쉬운 소리 잘 못 하는 성격이었지.”
 얼마 뒤, 유영민 코치가 직접 자신의 차를 끌고 성배를 데리러 왔다.
 덩치도 산만하고 우락부락한 남자가 마티즈에서 내리는 것은 조금 어울리지 않았지만, 성배와는 상관없는 일이었다.
 다행히 차 뒷좌석에는 여러 훈련용품들과 축구공들이 가득 차 있어서 훈련용품이 없는 것에 대한 성배의 고민을 해결해주었다.
 “뭐, 그거랑은 별로 상관없지만요.”
 “확실히 나 어릴 때보다는 조금 나아졌지만, 이 나라의 유소년 축구는 그게 문제야. 도대체 선수들 사이에서 군기를 잡을 필요가 뭐 있어? 나쁜 길로 빠지지 않게 하는 건 부모님이랑 감독, 선생님들의 역할이지, 같은 아이들끼리 무슨…….”
 유영민 코치는 한국 엘리트 축구의 고질적인 문제점인 폭력적인 문화에 대해 상당한 반감을 가지고 있었다.
 대부분의 감독들이 결국 축구인 출신으로, 이전에 그런 문화의 희생자가 되었던 사람들인데, 본인들이 그렇게 배웠으니 그렇게 가르친다는 태도와는 확실히 다른 부분이었다.
 “뭐, 때릴 필요까지는 없긴 하죠. 기합 정도야 어떻게 관대하게 넘어간다고 해도.”
 “그러니까 말이지. 언젠가는 없어져야 할 텐데…….”
 아마 절대로 없어지지 않을 것이었다.
 자신이 받는 스트레스를 다른 사람에게 푸는 행동은 어쨌든 스트레스를 풀 수 있는 가장 쉬운 방법 중 하나였다.
 이러한 것들이 용납되는 운동부의 문화가 없어지기를 바라는 것은 이상에 불과했다.
 “뭐, 그 이야기는 이쯤 해두고, 유학 간다고?”
 “네. 벨기에로 가려고요. 아버지가 외교관이시라 따라가는 거예요.”
 “유학 가는데도 나까지 불러서 훈련하려고 하는 걸 보면…… 거기 가서도 축구는 계속할 생각인가 보네?”
 “네. 혹시 알아요? 나중에 유럽 무대에서 뛰게 될지…….”
 엄밀히 말하자면 굳이 안 가도 되는 것을 자신이 요구해서 가게 된 것이지만, 굳이 그렇게까지 말할 필요는 없었다.
 지금의 인식으로는 말해봤자 너무 큰 모험을 하는 것이 아니냐며, 성공 가능성이 너무 낮다면서 걱정하는 반응만 돌아올 것이었기 때문에 괜히 말해서 스트레스받을 이유도 없었다.
 “하긴, 그럴 수도 있겠네. 지금부터 유럽에 나가서 뛰는 거면…….”
 “아, 참고로 저 왼쪽 풀백으로 뛰어볼 생각이에요. 고등학교 훈련에서 몇 번 뛰어봤는데, 가능성이 있겠어요. 고등학교 감독님이랑 코치님들한테도 엄청나게 칭찬받았고요.”
 “왼쪽 풀백? 포백에서 왼쪽 수비수 말하는 거 맞지? 음…… 괜찮겠어? 지금까지 공격수였잖아?”
 “윤기표 선수도 공격수에서 풀백으로 전향한 케이스인데 이렇게 잘 됐잖아요. 늦은 것도 아니죠. 어차피 제가 스트라이커 포지션에서 경쟁력이 있었던 것도 아니고…….”
 무릎에 심각한 부상을 당하기 전에도 성배는 사실 스트라이커로서의 발전 가능성에서는 높은 평가를 받지 못하는 선수였다.
 스피드, 그리고 위치 선정 능력을 비롯한 머리 쓰는 부분에 강점이 있었을 뿐, 슈팅의 정확도나 골 결정력, 피지컬 등에서 스트라이커로 활약하기에는 부족하다는 평가를 받았다.
 대신 스피드나 공간 활용 능력 등에서는 높은 평가를 받았고, 그것 덕분에 나름 이름을 날렸었기 때문에 성배가 레프트백으로서 가능성을 보이기 전에는 영원고등학교의 석영균 감독도 장기적으로 성배를 윙어로 쓰려고 했었다.
 “그건 그렇지. 그런데 성배야. 수비수는 경험이라는 것이 압도적으로 중요한 포지션이야. 그런데 완전히 낯선 유럽에 가면서 포지션 전향이라니…… 어렵지 않을까?”
 “어차피 풀백에 대해 배우려면 유럽이 낫죠. 한국은 아직도 거의 대부분의 팀들이 쓰리백을 쓰잖아요. 게다가 풀백이 귀한 것은 유럽도 마찬가지니까 살아남을 가능성도 높고…… 이래저래 풀백 전향이 옳은 선택인 것 같아요.”
 “모르겠다. 뭐, 당사자인 네가 선택한 길이니까 이래저래 많이 알아보고 고민하고 했겠지. 어쨌든 잘 해봐라. 네 말처럼 풀백은 지금도 귀하고, 앞으로도 계속 귀할 거야. 특히 우리나라처럼 포백 시스템을 들여온 지 얼마 안 되는 나라에서는 더욱 그렇겠지. 대신 아무리 그래도 늦게 시작한 거니까 할 거면 정말 제대로 해보고.”
 왼발을 잘 쓰는 레프트백.
 이 포지션은 성배가 회귀하기 전이었던 2020년대에도 여전히 귀한 몸이었다.
 어느 정도 기량과 가능성만 보이면 유망주로 이름을 알릴 수 있고, 귀하기 때문에 빅 클럽들도 일단 영입하고 보는 포지션 중 하나였다.
 유망주 때의 평가만큼 성장하지 못한다고 하더라도 최소한 1부 리그에서 버틸 수는 있는 포지션이기도 했다.
 
 이래저래 재능의 한계가 뚜렷한 성배가 이 왼쪽 풀백으로서의 경험이 풍부하다는 것은 엄청난 장점이었다.
 어쨌든 이 포지션도 수비수인 이상 경험이 매우 중요했기 때문이었다.
 타이밍을 읽고 경기의 흐름을 읽는 능력, 상대 공격수의 움직임에 대응하는 능력 등은 정말 엄청난 재능의 소유자가 아닌 이상 많은 경험을 쌓아야 키울 수 있는 것들이었다.
 하지만 성배는 이미 그것을 가지고 있었다.
 
 
 # 낭만필드 - 018
 
 “그래서 벨기에로 가면…… 안더레흐트나 클럽 브뤼헤, 로얄 앤트워프 같은 팀 유스로 들어가려고?”
 “로얄…… 앤트워프…….”
 이 시기의 로얄 앤트워프는 벨기에 내부에서 밀리는 입지를 활발한 해외 교류를 통한 해외시장 개척으로 돌파하려고 하고 있었기 때문에 벨기에 리그 내에서의 위상에 비해 해외에 많이 알려져 있는 편이었다.
 한국의 성규한 선수가 잠깐 뛰기도 했었기 때문에 한국에서도 나름대로 인지도가 있었다.
 “왜 그래? 로얄 앤트워프에 아는 사람이라도 있어?”
 “아, 아니요. 그냥 어감이 마음에 안 들어서요.”
 과거의 일은 확실히 잊기로 결정했지만, 아직은 당연히 잊을 수 없었다.
 하지만 확실히 돌아온 이 현실에 충실하기로 마음을 먹으면서 점점 과거의 일이 떠올랐을 때 흔들리는 빈도와 흔들리는 수준은 많이 줄어들고 있었다.
 이대로 시간이 지나면 그리 오래 지나지 않아서 로얄 앤트워프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도 전혀 흔들리지 않을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래서 네가 하고 싶은 훈련이 뭔데?”
 
 “결국, 기본기죠. 아무래도 유럽 친구들에 비하면 기본기가 밀릴 수밖에 없으니까요.”
 “어차피 기본기에서 밀리는데, 그것보다는 차라리 네 장점을 갈고 닦는 게 낫지 않아?”
 “제 장점이라고 해봤자 팀 게임이 아니면 드러나지 않잖아요. 어차피 지금 못 하는 거면 약점 보완이라도 해야죠.”
 항상 한국 선수들의 문제점으로 지적되는 것은 기본기였다.
 선수 개인의 기량을 향상시켜야 할 어린 시절부터 이기기 위해서 기본기는 무시하고 이기는 축구를 가르치다 보니 결국 나중에는 최소한의 기본기조차 갖추지 못해 세계무대에서 힘을 쓰지 못하는 것이었다.
 
 다행히 성배는 재능이 부족한 대신에 축구 지능만큼은 세계 수준으로 봐도 밀리지 않았다.
 이런 선수들은 보통 개인 기량을 어느 정도 이상으로만 끌어 올리면 적어도 자신의 역할, 1인분만큼은 충분히 해줄 수 있었다.
 비록, 경기를 지배하는 능력에서 약간 부족하기는 하겠지만, 모든 선수가 경기를 지배할 필요도 없고, 수비수에게는 경기 전반에 영향을 미치는 능력만큼이나 안정감이 중요했고, 성배에게는 그것이 있었다.
 ‘그걸 얻기 위해 지불한 대가가…… 너무 크기는 하지만.’
 선수로서 성공하고 싶었지만, 지금 이것이 만약 전생의 불행에 대한 대가라고 한다면 이 대가를 준 사람이 신이든 악마이든 간에 상관없이 바로 멱살을 잡고 어떻게든 죽여 버릴 것이었다.
 지금은 어떻게든 마지막 꿈을 이루기 위해 발악을 시작하려는 상황이지만, 전생의 자신은 축구 선수로서의 꿈이 큰 평범한 사람이었다.
 사랑하는 사람들과의 이별을 대가로 받은 기회, 거기에 선택권이 있었다면 절대로 받아들이지 않았을 것이었다.
 ‘이왕 받은 기회……. 최대한으로 살려준다. 그리고…… 이번에는 내 인생도 놓치지 않을 거다.’
 자신의 불행의 대가로 이번 기회를 받은 것이 아니라 자신의 불행을 안쓰럽게 여긴 누군가가 자신에게 기회를 준 것이라 생각하는 것이 성배의 마음도 편했다.
 이왕 상황이 이렇게 된 것, 어차피 받은 기회 제대로 살릴 생각이었다.
 벨기에와 벨기에 축구에 대한 해박한 지식, 풍부한 경험을 가지고 어린 시절부터 벨기에에서 뛸 수 있다는 것은 큰 메리트였다.
 “자, 일단 그러면 워밍업부터 빨리 시작해볼까요?”
 “그래, 몸 제대로 풀어라. 아무리 몸 많이 안 쓰는 기본기 훈련이라고 해도 우습게 보다가는 부상당하니까.”
 이번 생에서 이뤄내려고 하는 모든 것들은 결국 성배의 기량이 어디까지 올라가느냐에 달려있었다.
 결국, 지금 해야 할 것은 훈련, 그리고 또 훈련이라는 이야기였다.
 머릿속을 복잡하게 하고 있는 생각들을 다시 한 번 애써 뒤로 밀어놓은 성배는 훈련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
 
 “자, 잠깐 쉬자!!”
 “허억……. 허억……. 허억…….”
 기본기 훈련도 정말 제대로 하게 되면 상당한 체력을 요구하는 훈련이었다.
 코치가 볼을 던져주면 그것을 발등, 인사이드, 발바닥 등으로 트래핑하는 간단한 훈련부터 양발을 번갈아서 빠르게 볼 위에 올리다가 불규칙한 간격으로 그 동작 그대로 이동하는 훈련까지 역동적이지는 않지만 빠르게 반복해야 하는 훈련들이 많아 보이는 것에 비해 상당히 힘들었다.
 “뭐야? 뭐 이렇게 빨리 늘지? 너 무슨 한 1년 쉬다 왔냐? 원래 이런 기량을 가지고 있다가 적응하고 있는 것도 아니고……. 이렇게 빨리 늘 수가 있나?”
 “하아……. 제가…… 맘먹으면 못 하는 건 없다니까요? 저 지금 제대로 맘먹었어요.”
 지금 성배는 모든 요령은 알고 있지만, 그것이 몸에 익지는 않은, 그런 상태였다.
 몸에 익지는 않았다고 해도 기본적으로 요령이라는 것, 어떻게 해야 하는지 방법을 알고 있으니 당연히 빠르게 숙달될 수밖에 없었다.
 처음 훈련을 시작할 때만 해도 중학생다운 어설픔이 남아있었던 성배의 동작들은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더 프로페셔널한 수준으로 가다듬어져 갔다.
 “이 정도면 걱정할 것도 없겠는데? 이거 레알 마드리드라도 가는 거 아냐?”
 “에이……. 한참 부족해요. 한참…….”
 아쉽게도 전생의 모든 요령과 테크닉들을 몸에 익힌다고 해도 성배가 원하는 수준에는 한참을 못 미쳤다.
 전생에는 잃어버렸던 스피드를 가지고 있었고, 부상으로 놓쳤던 성장 시기에 피지컬을 보완한다고 해도 잘해야 1부 리그 중하위권 클럽에서 활약할 수 있을 정도의 기량이었다.
 성배가 모든 것을 잃고도 프로 무대에서 16년을 버틴 힘은 결국 축구 지능이었다.
 기술이 투박해도, 피지컬이 형편없어도, 탑 클래스 수비수들과 비교해도 떨어지지 않는 영리함으로 버틴 것이었다.
 
 달리 말하면, 아무리 그렇게 뛰어난 지능을 가지고 있어도 1부 리그에 올라가지 못할 만큼 다른 부분들이 부족했다는 것이었다.
 “자, 다시 시작할까요? 기본기는 이쯤 하고 킥 연습하고 싶네요.”
 “킥? 하긴……. 풀백이면 킥도 중요하지. 그러면 내가 움직이면서 받아줄 테니까 내가 소리 지르는 타이밍에 맞춰서 보내줘. 처음에는 천천히 움직이다가 나중에는 빨리 움직일 거야.”
 영리한 플레이 외에도 성배의 또 다른 장점을 하나 더 꼽으라면 킥 정확도를 꼽을 수 있었다.
 부상 이후에 많이 떨어지기는 했지만, 그래도 킥력이 나쁘지 않은 편이었고, 훈련으로 크게 성장시키지 못한 기본기에 비해 킥의 정확도는 크게 성장했었다.
 덕분에 2부 리그에서는 찾기 힘든 후방 빌드 업이 가능한 풀백이 될 수 있었다.
 후방에서 볼을 뿌려줄 수 있는 수비수의 가치는 점점 시간이 갈수록 훨씬 더 높아질 것이었다.
 그것이 예정된 미래였고, 성배가 킥 연습에 집중하는 이유였다.
 “예. 까다롭게 움직여주세요. 하드코어 하게 갈 거니까요.”
 “…… 아니, 네가 하드코어 하게 가면 내가 볼 주우러 다녀야 하잖아…….”
 정확한 킥을 보내기 어려워질수록 볼을 받아주는 유영민이 힘들어지겠지만, 그런 것을 배려해 줄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유영민도 착한 사람이었기 때문에 성배를 도와주기로 한 이상 끝까지 책임지고 도와줄 것이었다.
 사실 유영민 정도의 코치가 겨우 열여섯 살짜리 학생의 훈련을 무상으로 도와준다는 것 자체가 말이 되지 않는 일이었고, 성배가 절을 해도 부족한 일이었다.
 
 하지만 이왕 시작한 것 성배는 유영민을 최대한 활용할 생각이었다.
 유영민에게 고마운 것은 고마운 것이고, 유영민을 최대한 이용하는 건 또 다른 일이었다.
 ‘이런 것까지 계산하고 부탁하는 거구나. 다른 사람들도 나한테 그랬겠구나…….’
 바보 같기까지 했던 자신에 비해 유영민은 그 정도는 아니었다.
 애초에 사람이 아무리 좋고 능력이 있어도 착하기만 했다면 냉혹한 프로 세계에서 코치직을 맡기 힘들었을 것이었다.
 다만, 학창 시절 무슨 일이 있었는지 유영민은 자신의 제자들에게만큼은 모든 것을 다 해주는 성향이 있었고, 성배도 그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래. 이렇게 살아야 하는 거야. 남들에게 미움은 받으면 안 되겠지만, 미움을 받지 않는 선에서 최대한 도움을 받아야 돼.’
 새로운 삶을 살아가면서 하루하루 자신의 과거를 돌아보게 되는 성배였다.
 조금 다르게 생각하니 좀 더 편하게 세상을 살아가는 방법들이 하나씩 보이고 있었다.
 새로운 삶에서는 자신만 생각하면서 이기적으로 살겠다고 생각했지만, 36년간 형성된 바보같이 착한 성격이 사라진 것은 아니었기 때문에 적당한 수준에서 두 성격이 섞이고 있는 과정을 겪고 있었다.
 
 
 # 낭만필드 - 019
 
 “감사합니다. 별로 도움이 되는 것도 없으실 텐데 이렇게 나서서 도와주시고……. 진짜 감사해요.”
 “뭘……. 어차피 나도 특별히 하고 있는 건 없었으니까……. 그리고 지도자를 목표로 하고 있는 사람이니까 한 명이라도 더 가르쳐보면 나도 좋지. 공부해본 것들 실전에서 써 먹어볼 수 있으니까.”
 첫날의 훈련은 만족스러웠다.
 유영민은 정말로 최선을 다해서 성배의 훈련을 도와주었다.
 덕분에 많이 어색했던 기본기나 킥과 같은 부분들에서 조금씩 감각을 찾을 수 있었다.
 2주 정도면 상당 부분 감각을 되찾을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나저나, 확실히 풀백이 네 천직인가 봐. 뭐 이렇게 빨리 늘어? 스트라이커로 뛸 때는 잘 몰랐는데, 원래 네 킥이 이렇게 정확했던가? 처음에도 놀랐는데, 훈련을 하면 할수록 점점 더 정확해지는 게 무섭기까지 하더라.”
 “하하하, 그러게요. 저도 놀랐어요.”
 과거에 킥에 있어서만큼은 벨기에 리그 한정으로 1부 리그까지 다 합쳐도 수위권에 들었던 성배였다.
 킥을 어떻게 차야 잘 차는지는 이미 다 알고 있었다.
 처음에는 바뀐 몸이 가지고 있는 다리의 근력이나 발목의 힘 등이 전생과 달랐기 때문에 생각했던 것과 상당한 오차를 보였지만, 점점 바뀐 몸을 파악하면서 감각을 찾아 어느 정도 오차를 줄일 수 있었고, 그 정도로도 같은 나이 또래에서는 손꼽힐 정도의 킥을 보여주었다.
 “출국까지 2주 남았다고 했지? 그 2주 동안 한 번 제대로 해보자고.”
 “네! 근데 진짜 감사해요. 그렇게까지 안 해주셔도 되는데…….”
 “아니야. 오늘 보니까 2주 동안 얼마나 늘지 궁금해졌어. 진짜 장난 아닌데? 이러다가 윤기표도 위협하는 거 아냐?”
 “에이…… 윤기표 선수가 얼마나 잘하는데요. 아직 멀었죠.”
 “당연하지, 인마. 당연히 멀었지. 나이 차가 10년이 나는데, 우리나라 역사상 가장 뛰어난 윙백이라고 하는 윤기표에게 비견되면 그게 더 이상한 거지. 그래도 내가 볼 때, 너 가능성 있어.”
 오늘 훈련을 함께했던 유영민은 성배가 보여준 풀백으로서의 가능성에 놀라움을 표시했다.
 성배의 비밀을 알지 못하는 한, 모든 사람들이 아마 같은 반응을 보일 것이었다.
 하지만 그들이 보고 있는 이 빠른 성장은 성배가 전생의 기량을 되찾는 순간 바로 끝이었다.
 그것이 성배의 약점이기도 했지만, 동시에 가장 큰 무기이기도 했다.
 “감사합니다. 비행기 타는 것 같지만 그래도 기분은 좋네요.”
 “비행기 아니야. 진짜 내 말 한 번 믿어봐. 크게 될 수 있을 거다.”
 아마 자신을 본 사람들은 백이면 백, 이런 생각을 할 것이었다.
 이는 유럽 클럽이라고 해도 다르지 않을 것이 분명했다.
 어린 나이임에도 노련하게 경기의 흐름을 읽을 줄 아는 능력을 갖추고 있고, 눈이 번쩍 뜨이는 플레이는 못 해도 실수를 최소화할 줄 아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상당한 메리트였다.
 그것이 성배와 언젠가 고용하게 될 에이전트가 어필하는 세일즈 포인트가 될 것이었다.
 클럽 관계자 정도 되면 성배가 안정적인 플레이를 할 수 있는 선수이지만, 잠재력은 그렇게 크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었다.
 결국, 최고가 되기 위해서는 피지컬이나 천재성 등에서 예상을 벗어날 수 있어야 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성배는 어느 리그, 어느 클럽에서든 무난하게 연착륙할 수 있는 능력은 가지고 있지만, 하드웨어 측면에서 상당히 떨어지고, 소프트웨어의 성능도 뛰어난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예상을 벗어나지 못하고 예상할 수 있는 요소들을 잘 사용하는 스타일이 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전에도 말했듯 모두가 주인공이 될 필요는 없었다.
 그리고 그런 선수들로 스쿼드를 채우는 것도 현실적으로 불가능했다.
 그런 선수들을 몇 명 데리고 있으면 그들을 묵묵하게, 안정적으로 받쳐줄 수 있는 선수들이 무조건 필요했고, 성배가 노리는 시장은 바로 그쪽이었다.
 “그러면 내일 뵐게요. 내일은 굳이 데리러 오지 마시고, 제가 한 시까지 오늘 갔던 운동장으로 나가 있을게요.”
 “그래, 그래 주면 나도 편하지. 그럼 내일 보자. 잘 쉬고. 쉬는 것도 훈련하는 것만큼이나 중요하니까.”
 “예. 잘 쉴게요. 코치님도 좀 쉬세요. 오늘 힘드셨을 텐데.”
 “인마, 너 때문이잖아!! 어렵게 뛰어달라고 나름 열심히 뛰었는데 생각보다 킥이 정확해서……. 에이…….”
 처음 성배가 패스를 보내기 어려울 정도로 뛰어달라고 부탁했을 때는 사실 별로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았던 영민이었다.
 하지만 점점 시간이 지날수록 성배의 킥은 정확해졌고, 그에 따라 영민도 점점 더 바쁘게 움직여야만 했다.
 나중에는 현역에서 물러난 지 몇 년이 지난 영민의 입장에서 상당히 부담되는 속도로 달릴 수밖에 없었다.
 ‘이제부터가 진짜 시작이다…….’
 차를 타고 사라지는 유영민에게 고개 숙여 인사하면서 두 눈을 빛내는 성배였다.
 벨기에 유학이 결정되었고, 훈련도 주먹구구식이 아니라 도와줄 코치와 함께 본격적으로 시작했다.
 유럽 나이로 열여섯 살. 어리다면 어린 나이지만 생각해보면 마냥 어린 나이도 아니었다.
 향후 2년 정도가 전체 커리어를 결정지을 것이었기 때문에 하루도 허투루 보낼 수가 없었다.
 
 ***
 
 “다녀왔습니다, 라고 해도 아무도 없지…….”
 “응? 오빠 왔네?”
 “어? 너 있었어? 학원 가는 시간 아니야?”
 “오빠가 안 나간다고 해놓고 아침 일찍 나갔잖아!! 심심해서 나도 아침에 갔다 왔다, 뭐.”
 아버지는 외교관이 직업이라서 국내에 있을 때는 본부에서 근무하셨기 때문에 보통 집에는 주말에만 오시는 편이었다.
 아버지와 마찬가지로 어머니도 시청에서 근무하는 공무원이셨기 때문에 유빈이는 항상 집에 혼자 있는 경우가 많았다.
 학교 갔다가 돌아와서 미술 학원 두 시간 정도 다녀오면 계속 혼자인 것이었다.
 다행히 학기 중에는 학교를 마치고 학원을 다녀오면 곧 어머니가 돌아오시지만, 지금과 같은 방학 중에는 하루의 절반 정도를 혼자 보내야만 했다.
 “에구구, 미안, 미안. 많이 심심했어?”
 “당연하지! 오늘은 그래도 오전에 놀아줄 사람이 있는 건가, 했는데……. 나갈 거면 나간다고 말이라도 하지……. 칫.”
 이 당시에는 성배도 훈련이다, 기합이다 하는 것들 때문에 바빠서 유빈이가 혼자 집에서 지내는 것을 신경 쓰지 못했다.
 사실, 돌아오고 난 뒤에도 자신의 미래에 대해 생각하기 바빠서 마땅히 신경을 쓰지 못했었다.
 하지만 혼자 소파에 앉아서 별로 재미있어 보이지도 않는 애니메이션을 보고 있는 유빈이의 모습을 직접 본 순간, 미안한 마음이 들어 뭐라도 같이 해주고 싶었다.
 “그러면 뭐라도 같이 할까? 점심은 먹었어?”
 “점심…… 안 먹었어. 빵은 있었는데, 별로 안 먹고 싶어서…….”
 “그러면 내가 떡볶이 해줄까? 배고프지?”
 “…… 오빠가 떡볶이도 할 줄 알아?”
 “그럼!! 당연하지. 이 오빠가 집에 잘 안 붙어 있어서 몰랐나 본데, 생각보다 요리를 꽤나 잘한단다.”
 “치이. 떡볶이 그거 생각보다 안 어렵다더라. 내 친구들도 해먹는 애들 있대.”
 “그래, 그래. 쉬운 거니까 그러면 내가 가르쳐줄게. 나중에 먹고 싶으면 혼자 있을 때라도 해먹어. 불만 조심하고.”
 축구 선수가 외국에서 몇 년을 혼자 살았는데 음식을 못한다는 것도 말이 되지 않았다.
 자취 생활을 벨기에에서 처음 시작했기 때문에 한식 쪽은 몇 가지밖에 하지 못했지만, 비교적 간단한 음식들은 자신 있었다.
 그리고 애초에 떡볶이라는 음식은 굉장히 하기 쉬운 음식이기도 했다.
 “자, 그러면 냉장고 한 번 보고 필요한 거 사러 가자. 잠깐만 기다려.”
 “…… 튀김도 사줘.”
 “하하하, 알았어. 오는 길에 분식집에 들러서 튀김이랑 다른 먹고 싶은 거 있으면 사오자.”
 원래는 훈련을 마친 뒤, 방에서 앞으로의 일정에 대해 깊게 생각해보려고 했지만, 유빈이를 계속 혼자 둘 수 없어서 뒤로 밀어놓기로 했다.
 자신의 의도대로 훈련을 진행한 것은 돌아온 이후 처음이었고, 그 과정에서 지금 당장 필요한 것들에 대해 많은 생각을 했기 때문에 정리가 필요했지만, 지금 당장 해야 할 것은 분명 유빈이와 시간을 보내는 것일 터였다.
 “아싸!! 오뎅도 사와야지-이”
 “대신 엄마한테는 비밀이다!! 그냥 내가 해 준 떡볶이만 먹은 걸로 하는 거야?”
 “알았어, 알았어. 말하면 나도 혼날 텐데 내가 바보야?”
 분명 어머니한테 들킬 것이었다.
 비밀로 한다고 말은 하지만 자신은 몰라도 유빈이가 어머니께 계속 들키지 않을 리 없었다.
 아무리 군것질이나 길거리 음식을 좋아하시지 않는 어머니지만 어쩌다 한 번 먹은 거로 화를 내실 분도 아니고, 어쩌면 자신이 출국하기 전까지는 유빈이가 비밀을 잘 지켜줄지도 모르는 일이었기 때문에 문제는 없었다.
 
 
 # 낭만필드 - 020
 
 “으아아…… 또 죽었어. 오빠 진짜 못한다. 예전에는 그래도 이 정도는 아니었는데……. 그사이에 왜 이렇게 못해졌어?”
 “으, 으으……. 또 졌네. 너, 밥 먹고 이거만 하는 거 아냐? 공부해야지!! 왜 이렇게 잘해!!”
 “나 잘하는 거 아닌데……. 친구들이랑 하면 엄청 져. 오빠랑 하니까 이겨서 좋다. 우리 매일 할까?”
 떡볶이를 배부르게 먹은 성배와 유빈은 컴퓨터 앞에 앉아서 게임을 즐겼다.
 이 당시 컴퓨터를 사면 이미 깔려있던 경우가 많았던 뿌요뿌요라는 고전게임이었는데, 성배는 유빈이에게 거의 8할 이상의 확률로 패배하고 있었다.
 예전에 자주 했던 기억도 있고, 나이 차가 있었던 덕분에 옛날에 더 많이 이겼었다는 기억도 있었지만, 거의 20년 만에 하는 게임이었기 때문에 어제까지도 이 게임을 즐겼던 유빈이를 이길 수 없었다.
 “엄마 왔다!! 뭐 하고 있니?”
 “어, 엄마다!!”
 그렇게 게임을 하면서 함께 놀던 와중에 어머니가 퇴근해 집에 돌아오셨다.
 성배와 함께 놀고 있던 유빈이는 어머니가 돌아오시자마자 바로 방에서 튀어 나가 어머니를 맞이했다.
 혼자 있는 유빈이가 안쓰러워서 자신이 원해서 함께 놀아주고 있었던 성배였지만, 이제 슬슬 힘에 부치고 있었는데 적절한 타이밍에 어머니가 돌아오셔서 다행이었다.
 “으이구, 우리 유빈이. 잘 있었어요?”
 “응!! 학원 갔다가 와서 TV 보다가 오빠랑 같이 게임했어. 오빠 게임 엄청 못해!! 한 달 전에만 해도 잘했었는데 완전 못 해!! 바보인가 봐. 한 달 만에 다 까먹었어.”
 "유빈아, 그래도 오빠한테 바보가 뭐니?"
 “야……. 그래도 내가 두 시간이나 같이 놀아줬는데 너무한 거 아냐?”
 어머니가 오시자마자 유빈이는 오늘 하루 무슨 일이 있었는지 재잘거렸다.
 게임을 하면서 유빈이에게 계속 졌던 성배를 무시하는 내용도 당연히 포함되었다.
 내 할 일까지 미루고 같이 놀아줬는데 저게 오빠를 무시하네, 라는 생각이 들기는 했지만, 그런 거로 삐질 나이는 아니었기 때문에 그 모습도 그냥 귀여웠다.
 “배 안 고파? 저녁 해줄 테니까 조금만 기다려.”
 “음……. 나 배 안 고파!! 오빠가 떡볶이 해줘서 그거 먹었어.”
 “음? 오빠가 떡볶이를 해줬어?”
 “응. 게임은 못하는데 떡볶이는 잘해!! 맛있었어. 그거 먹어서 지금 배불러어……. 이거 봐, 헤헤…….”
 유빈이는 자신의 볼록 나온 배를 어머니께 내보이면서 성배가 해준 떡볶이가 맛이었다고 자랑했다.
 자신이 해준 음식이 맛있었다고 자랑하는 유빈이의 모습이 귀엽기도 하고, 어쨌든 자신이 해준 음식을 좋아하는 모습에 뿌듯하기도 했다.
 “넌 또 떡볶이는 언제 배웠어? 요리도 할 줄 알아?”
 “에이, 떡볶이가 뭐 요리인가요? 간단한 분식이지……. 가만히 있어도 한창 배고플 나이에 죽어라 운동하니까 간식이라도 해 먹으라고 부실에 요리 기구들 있어요. 부원들끼리 돌아가면서 가끔 해 먹어서 간단한 건 할 줄 알아요.”
 학교에서 아무리 급식을 준다고는 하지만 보통 훈련은 일곱 시, 여덟 시까지 진행되었기 때문에 부실에는 요리를 할 수 있는 시설들이 전부 갖춰져 있었다.
 저녁 식사는 보통 집에서 집안일을 하시는 부원들의 어머니들께서 돌아가면서 해주시지만, 한창 성장기인 아이들 수십 명이 모여 죽어라 운동을 하는데 세 끼 식사만으로 버틸 수 있을 리 없었다.
 그래서 훈련 중간에 간식을 먹는 시간이 따로 있었다.
 이때 빵이나 김밥처럼 간단한 것을 사 와서 먹을 때가 많지만, 라면이나 떡볶이처럼 간단한 것들을 직접 해서 먹을 때도 있었다. 보통은 후배들이 담당했고, 덕분에 성배도 어느 쉬운 음식들은 할 줄 알게 되었다.
 “우리 아들 진짜 다 컸네? 벨기에에 내보내도 걱정은 없겠어.”
 “음……. 아버지랑 같이 가는 건데요?”
 “아버지보다 네가 더 믿음직스러운 걸 어떡해. 히히.”
 어느새 마흔 줄을 훌쩍 넘으신 어머니지만 여전히 농담도 잘하시고 잘 웃으시는 소녀 같은 면모가 남아있었다.
 전생에도 성배가 그렇게 속을 썩였음에도 해맑은 미소와 소녀 같은 면모를 잃지 않으셨으니 이 시점에서의 어머니는 훨씬 더 발랄한 느낌인 것이 당연했다.
 “오빠랑 슈퍼 가서 재료 산 다음에 떡볶이도 해먹구……. 아!! 튀김이랑 김밥도 먹었어.”
 “…… 튀김이랑 김밥? 그것도 오빠가 해준 거야?”
 “아니!!”
 “어라? 유빈아? 저기…… 그거 비밀…….”
 “먹었어!! 떡볶이 국물에 찍어 먹으면 엄청 맛있다아!!”
 불안하다 했더니 결국 저질러버렸다.
 어머니한테 자신이 해준 떡볶이를 먹어서 배부르다고 할 때는 별생각이 없었지만, 떡볶이가 맛있었다고 자랑할 때는 설마…… 하는 생각이 들었던 성배였다.
 결국, 기세를 탄 유빈이가 끝까지 가고 말았고, 분명히 두 시간 전에 말하지 않기로 굳게 약속한 비밀을 누설하고 말았다.
 “오빠가 튀김이랑 김밥을 사.서 줬어? 맛있었니?”
 “응!!”
 최소한 20분은 잔소리를 들어야 할 사건이었다.
 결국, 상황에 순응한 성배는 평화로운 마음으로 어머니를 마주 보며 미소 지었다.
 
 ***
 
 ‘으으……. 고 녀석. 일부러 한 거 아냐? 게임 하는 거 보니까 말괄량이도 그런 말괄량이가 없던데……. 분명히 결국 내가 혼날 거라는 걸 알고 있었던 게 분명해. 악마네, 악마야…….’
 “어릴 때부터 그런 음식들 너무 많이 먹으면 안 좋아.”라거나 “너도 그래. 운동하려면 몸에 좋은 것만 먹어도 모자란 데, 그런 기름 덩어리에 위생적이지 못한 걸 먹으면 어떡하니?”라던가 하는 어머니의 잔소리는 성배의 예상대로 정확히 21분 동안 이어졌다.
 정작 튀김이 먹고 싶다며 사달라고 했던 유빈이는 귀신같이 빠져나갔고, 성배가 거실로 나왔을 때는 TV를 보면서 깔깔대고 웃고 있어서 성배를 허탈하게 만들었다.
 어머니가 화를 내신 것도 아니고 혼내신 것도 아니고 그저 걱정을 좀 길게 하신 것뿐이었기 때문에 오히려 더 마음이 따뜻해졌지만, 나는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이 혼자 낄낄대고 있는 유빈이가 얄밉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콩!
 “아코!!”
 “요 녀석이……. 고작 두 시간도 못 가서 우리끼리의 비밀을 이른단 말이더냐!!”
 “치……. 일부러 그런 건 아니다, 뭐. 어쩌다 보니 말이 나온 거지.”
 성배는 가볍게 유빈이의 머리에 땅콩을 먹여주었다.
 장난치자고 살짝 어루만져 준 것이었기 때문에 별로 아프지는 않은지 유빈이도 놀라서 머리를 어루만지다가 곧 배시시 웃으면서 애교를 부렸다.
 평소 같았으면 아등바등 대들었을 유빈이가 이렇게 나오는 것을 보니 자기도 미안하긴 미안한 것 같았다.
 사실 열두 살의 어린아이가, 그것도 부모님이 집에 오시면 그때까지 있었던 모든 일들을 미주알고주알 보고하는 유빈이가 비밀을 지킬 수 있을 거란 생각은 전혀 하지 않았다.
 예상했던 일이었다.
 “뭐, 어차피 네가 어머니한테 계속 숨길 수 있을 거라고는 생각 안 했어. 생각보다 그 시간이 너무 짧아서 당황하기는 했지만…….”
 “뭐야!! 무슨 뜻이야!! 나 입 무거워!! 비밀 잘 지킨다고. 친구들이 비밀 얘기는 다 나한테 한다니까?”
 “그래서 우리 비밀 얘기는 두 시간 만에 다 잊어버리고 어머니한테 말한 거야?”
 어린 시절로 돌아와 여동생과 함께 있으니 아무 생각 없이 유치해질 수 있었다.
 게임을 하면서 같이 놀아주는 동안 당한 일도 있지만, 그것보다는 귀여워서 놀려주고 싶어졌다.
 귀여운 아이를 보면 더 놀리고 싶은 생각이 드는 것은 모두가 다 마찬가지일 것이었다.
 성배도 그랬고, 오랜만에 본 어린 시절의 여동생은 그야말로 놀리는 맛이 있는 아이였다.
 “으으……. 그건 할 말 없지만……. 그냥 엄마니까 긴장이 풀린 것뿐이야!!”
 “응. 나도 어머니니까 네가 말할 것 같았어. 설마 유빈이가 다른 사람이었으면 그런 비밀을 말하진 않았겠지.”
 “그럼!! 나는 입이 무거운 여자니깐!!”
 여자…… 라고 하기에는 아직 많이 빈약한 아이지만, 한창 자신이 다 컸다고 생각할 때였기 때문에 그냥 웃고 넘어갈 수도 있었고, 굳이 태클을 걸 필요는 없었지만, 탄력을 받아버려서 그냥 넘어갈 수가 없었다.
 여동생을 놀려먹는 것을 삶의 낙으로 삼았던 시절이 분명 있었는데, 수십 년 만에 다시 이 맛을 보고 나니까 견딜 수가 없었다.
 “에이, 우리 꼬맹이가 무슨 여자야. 아직 애기지. 이렇게 귀여운데…….”
 “귀여운 건 사실이지만……. 으으……. 그래도 여자야!! 나 이제 다 컸다구!!”
 귀엽다 - 그러면 아이다. 라는 말도 안 되는 논리였지만 유빈이는 바로 그런 반박을 할 수 있을 정도의 아이는 아니었다.
 아니, 어쨌든 초등학교 고학년이니까 그 정도 반박은 가능하겠지만, 자신이 귀엽다는 말에 꽂혀서 뒤의 말은 별로 신경을 쓰지 않고 있다는 말이 더 정확했다.
 “에이……. 이렇게 귀여운데? 이렇게 귀여운 여자가 어디 있어. 보통 다 큰 여자라고 하면 키도 크고, 그리고 그…… 나올 곳은 나오고 들어갈 곳은 들어가서 몸매에 굴곡이…….”
 ‘내가 지금 애를 데리고 뭔 소리를 하고 있는 거야?’
 유빈이를 놀리겠다는 마음에 불타서 괜히 하지 않아야 할 이야기를 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한 성배는 자신이 말을 하면서도 깜짝 놀랐다.
 아무래도 오랜 시간 혼자 외롭게 살다가 갑자기 가족들과 만나게 되니까 컨트롤이 되지 않고 있는 듯했다.
 이것도 결국 전생의 외로움으로 인한 것이라고 생각하니 새삼 자신의 전생이 불쌍해졌다.
 “뭐? 굴곡이 뭐? 지금 무슨 말을 하는 거야!! 이 변태!!”
 “음? 알아들었구나……. 어쨌든!! 그런 이유로 너는 아직 애기다!! 땅땅땅!!”
 요즘 초등학생들은 이런 은유적인 비유도 알아듣는구나, 하는 것에 충격을 받았지만 생각해보면 자신이 어릴 때도 초등학교 고학년 정도 되면 일찌감치 그런 쪽에 관심을 가지는 얼리 어답터들이 있었다.
 고작 4년의 차이였지만 아이들의 세계는 생각보다 빨리 변하기 때문에 4년 정도면 그럴 수도 있겠다, 라고 납득이 되기도 했다.
 “그럼 나는 이만 들어간다. 너도 TV 너무 많이 보지 말고 들어가서 책이라도 좀 보고 그래.”
 “배애!! 도망가냐? 변태 오빠야!!”
 혹시나 어머니라도 나오셔서 들으셨다가는 또 잡혀 들어갈 수도 있었기 때문에 성배는 빠르게 자신의 방으로 향했다.
 이 정도면 대략 40분 정도로 예상되는 일이었기 때문에 정말 진이 다 빠질 수도 있었다.
 이제는 물러설 때라고 생각한 성배는 빠르게 자리를 빠져나갔다.
 
 
 # 낭만필드 - 021
 
 “읏차, 드디어 내 시간인가…….”
 생각했던 것보다 상당히 늦은 시간이었다.
  훈련을 마친 그 순간부터 바로 오늘 훈련의 성과와 훈련을 통해 느낀 앞으로의 발전 방향, 그리고 앞으로의 계획까지 정리하려고 했는데, 유빈이와 함께 놀아주다가 생각보다 늦어지고 말았다.
 [RSC 안더레흐트 입단!!]
 “안더레흐트……. 우선 제일목표는 이걸로 한다. 안더레흐트!!”
 성배는 새 노트를 펴서 첫 장에 큼지막하게 자신의 목표를 적었다.
 벨기에 최고의 클럽을 꼽을 때 무조건 첫 번째로 꼽히는 안더레흐트에 입단하는 것을 가장 우선적인 목표로 잡은 것이었다.
 RSC 안더레흐트. 명실공히 벨기에 주필러리그의 최강자로 꼽히는 클럽이었다.
 벨기에 최강의 클럽이자 유럽의 빅 리그에서 매년 주목하는 유망주들의 화수분. 안더레흐트는 성배가 꿈을 이루기 위해 가장 먼저 몸담을 곳으로서 완벽한 조건을 가지고 있었다.
 아버지가 일하게 될 해외공관이 브뤼셀에 있었고, 안더레흐트 역시 브뤼셀 주에 속해있었기 때문에 오고 가는데에 있어서의 불편함도 없었다.
 ‘전생에서는 이곳이 나의 꿈의 구단이었는데…….’
 다른 사람들은 모든 축구 선수들의 꿈의 구단이 그 유명한 ‘레알 마드리드’나 ‘바르셀로나’라고 이야기하지만, 사실과는 많이 달랐다.
 애초에 꿈에서조차 그런 클럽들을 노리지 못하는 선수들도 많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성배도 마찬가지로 그런 클럽들에 대한 꿈은 20대가 되기도 전에 완전히 접을 수밖에 없었고, 현실적으로 설정한 꿈의 구단이 바로 이 안더레흐트였다.
 
 벨기에에서 축구 선수로 활약하면서 벨기에 리그를 떠나기 힘들 것이라 스스로 판단한 선수들의 꿈의 구단은 거의 다 안더레흐트였다.
 클럽 브뤼헤, 스탕다르 리에주 등 명문 클럽들이 있었고, 벨기에 선수들은 출신 지역에 따라 꿈의 구단이 다른 선수들도 있었지만, 객관적으로 봤을 때는 안더레흐트 이상 가는 클럽이 없었다.
 ‘안더레흐트에 입단해서 스무 살이 되기 전, 10대에 프로 무대에 데뷔하고 2년 안에 이적한다. 이게 두 번째 스텝.’
 성배는 계속 이어서 노트에 자신의 다짐을 적기 시작했다.
 목표라는 것을 그냥 머릿속으로 생각만 하지 말고 어딘가에 확실히 적어서 남겨놓으면 이루는데 더 큰 도움이 된다고 하는 것을 들은 적이 있었다.
 꿈을 이루는데 이보다 더 좋을 수 없는 기회가 왔고, 이번에는 무슨 일이 있어도 성공하겠다고 다짐한 만큼 조금이라도 도움이 된다면 못 할 일이 없었다.
 ‘벨기에 유스 클럽 출신 선수 중에서 스무 살이 되기 전에 해외로 나가지 못하면 병신이라고 그랬지. 무슨 일이 있어도 스무 살 전에 해외로 나가야 해. 빅 클럽들은 벨기에에서 유망주를 원하지, 완성된 선수를 원하지 않으니까.’
 벨기에 리그는 분명 셀링 리그였다.
 유망주를 데려와서 그들의 실력을 증명할 기회를 주고 실력과 잠재력이 증명되면 바로 비싼 이적료를 받고 유망주를 공급하는 개념이었다.
 유스 시스템이 잘 되어있는 클럽과 그렇지 못한 클럽의 차이가 좁혀지기는커녕 점점 벌어질 수밖에 없었다.
 
 안더레흐트는 포르투나 세비야 같은 클럽처럼 거상은 아니었다.
 빅 리그는 아니지만 바로 그 아래 급으로 평가되는 포르투갈 프리메라리가의 절대 강자인 포르투나 라 리가에서도 강팀에 속하는 세비야에서 증명된 선수들과 안더레흐트에서 증명된 선수는 평가 자체가 달랐다.
 때문에 아무리 유망주라고 하더라도 비싼 값에 팔 수는 없었다.
 그래서 유망주들은 더 많은 빅 리그 진출 기회를 잡을 수 있었고, 클럽들 역시 그런 선수 한 명의 이적료로 세 명 정도는 영입할 수 있었기 때문에 꾸준히 유망주를 키워서 해외로 이적시켜 벨기에 리그의 강자 자리를 지키는 것이었다.
 ‘안더레흐트에 들어가서 스무 살 즈음에 선발로 활약할 수 있으면 빅 클럽까지는 몰라도 빅 리그 진출 정도는 쉬운 일이지. 벨기에 리그는 또 내가 활약하기 좋은 리그이기도 하니까…….’
 그런 이유로 벨기에 리그가 성배에게 안성맞춤이 되는 것이었다.
 위에 설명했던 것처럼 벨기에 리그는 유망주 시장과 같은 곳이기 때문이라는 것이 첫 번째였다.
 벨기에에서 좋은 모습을 보여준다면 우선 빅 리그 클럽들의 관심을 받을 수 있다.
 수준 높은 유망주가 많이 등장하고 유망주의 능력을 증명하기에 충분한 수준을 갖춘 리그이면서 유망주들의 몸값도 그리 비싸지 않다는 것은 빅 리그 클럽들이 벨기에 리그를 주목할 수밖에 없도록 만들었다.
 
 그리고 두 번째 이유는 그 덕분에 벨기에 리그는 유럽 리그 중에서도 가장 몸싸움을 기피하는 스타일이라는 것이었다.
 위에도 말했지만, 벨기에 리그는 유망주들에게 잠깐 거쳐 가는 곳이라고 인식되었다.
 당연히 자신의 몸값을 올리기 위한 리그이고, 모든 유망주들이 자신의 가치를 보여주려고 하면서도 몸을 사리는 경향이 있었다.
 당연하다면 당연한 것이 당장의 성적보다 자신의 가치를 올리기 위한 리그인데, 부상이라도 당하면 큰일이었기 때문이었다.
 ‘특히 공격수들, 나에게는 천적이나 다름없는 돌파 유형의 공격수들이 몸싸움을 꺼린다는 것은 딱 나를 위한 리그라는 뜻이지.’
 수비수에게는 피지컬도 기량이었기 때문에 수비수 유망주들은 몸싸움을 눈에 띄게 마다하지 않았다.
 다른 리그보다 약하기는 하지만 공격수들이 몸싸움을 훨씬 더 기피했기 때문에 크게 티가 나지는 않았다.
 
 반면 공격수들은 굳이 몸싸움을 통해 터프함을 보여주지 않아도 보여줄 수 있는 것들이 많았다.
 스피드, 테크닉, 슈팅, 골 결정력, 위치 선정 능력, 연계 능력 등등 보여줄 것들이 많은데 부상 위험이 있는 몸싸움까지 거칠게 해가면서 피지컬을 보여줄 필요는 없었다.
 어차피 빅 클럽들도 벨기에에서 완벽한 선수를 원하는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한두 가지 정도의 단점은 신경 쓰지 않았다.
 
 벨기에 리그가 성배를 위한 리그인 이유였다.
 성배에게는 피지컬을 앞세운 공격수들이 천적이었다. 스피드는 돌아왔기 때문에 스피드 중심의 선수들은 별로 무섭지 않지만, 피지컬은 여전히 별로였고, 과거를 생각해보면 지금 수준에서 크게 개선될 것 같지도 않았다.
 그래서 헐크처럼 몸으로 밀고 들어오는 선수들이 부담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그런 선수들이 알아서 몸을 사려주는 벨기에였기 때문에 성배가 출발점으로 삼기에 완벽한 리그라고 할 수 있었다.
 ‘할 수 있는 것만 하고, 할 수 없는 것은 과감히 버려야 해.’
 누군가가 그랬다.
 나이가 들수록 자신에게 ‘무엇을 선택해야 하는가.’라는 질문이 아닌 ‘무엇을 포기해야 하는가.’라는 질문을 던져야 한다고.
 수명이 짧은 운동선수들은 노쇠화가 시작되는 30대 초반부터 무엇을 포기해야 하는지를 잘 결정해야 했다.
 지금은 열여섯 살이지만 그 속에는 서른여섯의, 구를 만큼 구른 베테랑이 숨 쉬고 있는 성배였기 때문에 포기해야 하는 것은 깔끔하게 포기할 수 있었다.
 ‘내 세일즈 포인트는 어디까지나 쉽게 구할 수 없는 왼발잡이 레프트 백이라는 포지션, 영리한 플레이를 앞세운 안정적인 수비력, 후방 빌드업이 가능한 풀백이라는 희소성이야. 아무리 과거로 돌아와서 몸 상태가 좋아졌다고 하더라도 절대로 이걸 잊어버리면 안 돼.’
 노트에 자신이 생각하는 자신의 장점들을 적은 성배는 빨간 펜으로 진하게 밑줄을 그었다.
 사실 과거로 돌아와 그라운드에 서면서 훨씬 더 몸값이 비싸고 주급을 많이 받는 공격수 전향에 대해 생각을 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적어도 이 몸은 공격수에 더 익숙했고, 전생에서도 스물한 살까지는 스트라이커로, 스물여덟 살까지는 윙어로 활약했었다.
 그런 욕심이 드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하지만 이후 냉정해지면서 공격수에 대한 미련은 접을 수밖에 없었다.
 경험이라는 것의 위력이 아무리 강해도, 수비수의 일반적인 플레이에 대해 정확히 꿰뚫고 있어도 공격수에게는 그것이 전부가 될 수 없었다.
 
 공격수라는 포지션은 계속 막히다가도 골만 넣으면 되는 포지션이었고, 매 경기 준수한 플레이를 해주지만 특별함이 없는 공격수보다는 한 경기에 몇 번 정도 박수갈채를 받는 공격수가 더 높은 평가를 받았다.
 최소한 번뜩이는 플레이를 할 줄 알아야 했는데, 성배에게는 그것이 없었다.
 게다가 기술이 투박한 성배는 돌파나 문전 마무리 능력에 있어서 약점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사실 아무리 기본기를 연습해도 발밑 감각 역시 어느 정도는 타고나야 하는 것이었다.
 
 성배가 지금 기본기를 최우선적으로 연습하는 것은 다른 경쟁자들에게 뒤떨어지지 않기 위함이었다.
 전생의 경험을 통해서 성배는 자신에게 타고난 발밑 감각이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단언컨대, 공격수라는 포지션은 애초에 재능이 기본적으로 바탕에 있어야 하는 포지션이었다.
 ‘벨기에로 건너가서도 최소한 반년은 몸의 감각을 되살리는 데 집중. 그리고 반년 이후부터 과거에 부족했던 부분들을 살리는 거야. 어쨌든 측면 공격을 담당해야 하니까 러닝 크로스는 무조건 연습해야 되고. 체력도 길러야 해. 끊임없이 달려야 하는 포지션이고 많이 뛸수록 팀에 도움이 되는 포지션이니까 체력도 한계까지 길러보자.’
 성배가 과거로 돌아왔기 때문에 가질 수 있는 가장 큰 장점은 자신이 필요한 것을 바로바로 파악할 수 있다는 점이었다.
 자신의 훈련을 자신이 알아서 준비하고 설계할 수 있다는 것은 생각보다도 더 대단한 일이었다.
 아무리 대단한 코치가 있어도 결국 자신의 몸은 자신이 가장 잘 알고 있을 수밖에 없었고, 전생의 경험들을 통해 자신의 장점과 단점을 잘 알고 있는 성배는 그 중 어느 것을 살려야 자신에게 가장 효율이 좋은지를 알고 있었다.
 기본기, 킥 정확도, 경기의 흐름을 보는 능력 등 과거의 장점들을 반년 정도는 집중적으로 살릴 계획이었다.
 그리고 과거 자신의 몸과는 다를 수밖에 없는 지금의 몸과 근력, 체력에 익숙해지는 것도 반년 동안 할 일이었다.
 
 원래는 오른발도 왼발 비슷한 수준으로 쓸 수 있었는데, 지금의 오른발은 굉장히 낯선 느낌이 들었다.
 이것도 반년 안에 해결해야 했다.
 그리고 그다음에는 전생에서도 오래 연습했지만 잘 안 되었던 러닝 크로스 훈련과 좋은 편이었지만 뛰어나지는 않았던 체력 단련의 차례였다.
 수비수이지만 윙어가 있다면 윙어와 함께, 윙어가 없다면 혼자서 측면 공격을 담당해야 하는 풀백이 달리면서 크로스를 정확히 올릴 수 있다는 것은 큰 장점이었고, 이를 놓칠 수는 없었다.
 그리고 체력이 좋다면 틈이 날 때마다 줄기차게 상대의 측면을 공략하고 다시 빠르게 돌아올 수 있었다. 이것도 필수적인 능력이었다.
 ‘그리고 신체의 성장이 끝나면……. 뛰어난 피지컬 코치의 도움을 받아 다른 장점이 죽지 않는 선에서 벌크 업도 해야 해. 이건 무조건이야.’
 신체의 성장이 끝나는 스무 살 무렵에 꼭 좋은 클럽으로 이적해야 하는 이유였다.
 나름 괜찮은 수준의 스피드나 안 그래도 좋지 않은 민첩성 등을 건드리지 않으면서 벌크 업을 시켜줄 수 있는 피지컬 코치가 꼭 필요했다.
 아무리 풀백이라도 기본적으로 윙어들과는 경쟁할 수 있는 피지컬을 길러야만 했다.
 ‘좋아. 계획은 대충 끝났다. 계획대로만 움직이면 빅 클럽도 꿈은 아니야.’
 16년의 경험을 총동원해서 세운 계획이었다.
 자신의 몸이 따라주지 않을 가능성은 있어도 이 계획이 틀릴 가능성은 없었다.
 그리고 몸이 따라주지 않아서 계획한 것을 지킬 수 없다는 것은 너무 비참했다.
 세상 사람 모두 부자가 되는 법은 알고 있지만 모두 부자가 될 수는 없다고 하더라도 자신만큼은 다르다고 생각하는 것이 사람이었다.
 성배는 다른 사람들보다도 훨씬 더 자세하게 부자가 되는 법을 알고 있는 만큼 무조건 부자가 될 생각이었다.
 
 
 # 낭만필드 - 022
 
 “오늘이 마지막 훈련인 거지?”
 “네. 내일이면 출국이니까요.”
 2주라는 시간은 굉장히 짧았다.
 그리고 그 2주를 치열하게 살았던 성배에게는 더욱 짧게 느껴졌다.
 이제 막 열일곱 살이 된 주제에 유영민이라는 좋은 코치를 만났고, 개인 코치를 두고 일대일로 훈련할 수 있는 기회를 대충 흘려보낼 성배가 아니었다.
 그 결과, 당연하게도 과거의 감각을 상당 부분 되찾은 상태였다.
 “그동안 정말 수고했다. 너처럼 어린 나이에 이렇게 치열하게 살기 힘들 텐데 말이지. 지금 실력도 실력이지만, 그 태도 덕분에 분명히 거기서 성공할 수 있을 거다.”
 “열심히만 한다고 성공할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요. 코치님도 아시잖아요. 이 바닥에서 재능이라는 놈이 얼마나 중요한지…….”
 “야, 인마. 정말 평범한 애들이 보면 너도 재능 덩어리야. 이 나이에 이 정도 실력을 갖추고 있는 애들이 흔한 줄 알아?”
 유영민은 2주라는 시간을 함께 보내면서 성배에게 반해버렸다.
 과거로 돌아온 이후 성배의 플레이를 보지 못했던 유영민이지만 가끔 휴식의 개념으로 일대일 대결을 할 때마다 나이에 맞지 않는 성배의 노련한 수비에 깜짝 놀란 적이 많았다.
 11 : 11의 경기에서만 보여줄 수 있는 성배의 진정한 장점을 보지 못했어도 성배의 축구 지능이 보통이 아니라는 것은 충분히 확인할 수 있었다.
 또한, 기본기나 스피드, 킥의 정확도나 파워도 같은 나이 또래에서는 흔히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대단했다.
 지금 실력도 대단하기는 했지만, 그것보다는 처음 봤을 때에 비해서 너무나도 빠른 속도로 성장하는 그 성장 속도가 더욱 대단했다.
 그런 유영민에게는 성배의 말이 그저 겸손으로밖에 들리지 않는 것도 당연했다.
 “코치님도 아시잖아요. 제 비교 대상은 우리나라 선수들이 아니에요. 제 또래 친구들도 아니고요. 지금 유럽 무대에서 활약하고 있는 1군 선수들. 그들이 제 경쟁자라고요. 아직 턱없이 부족해요.”
 하지만 성배는 당연히 만족할 수 없었다.
 여기까지는 과거에 밟았던 길이었다.
 요령을 알고 있고 직접 경험해본 기억이 있으니 빠르게 성장하는 것이 당연할 수밖에.
 그러나 전생의 수준까지 기량을 끌어올리고 나면 그다음부터는 그야말로 처음 밟아보는 단계였고, 지금처럼 빠른 성장은 불가능할 것이었다.
 
 전생에 없었던 스피드를 찾았다는 부분에서는 분명 플러스 요인이었다.
 그러나 그 정도로는 새로운 목표인 빅 클럽 진출을 이뤄내기에 부족했다.
 빅 리그로 나간다면 하위권 클럽, 프랑스나 포르투갈과 같이 살짝 아쉬운 리그에서는 중상위권 클럽 주전 레프트백.
 그것도 대단한 일이지만, 어마어마한 기회를 얻은 성배가 그 정도로 만족할 리 없었다.
 
 게다가 몸싸움에 대한 트라우마가 없어졌는지도 확실하지 않은 상황이 아닌가. 부상을 당했던 과거는 없는 일이 되었지만, 그 기억까지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결국, 트라우마는 정신적인 문제이고, 그 기억은 아직 성배의 머릿속에 선명하게 남아있는 만큼 예상컨대 트라우마는 여전히 남아있을 것이었다.
 아무리 풀백이라도 수비수에게 피지컬은 분명 중요한 요소였고, 그렇기에 걱정이 되지 않을 수 없었다.
 “마지막으로 한 마디 해주자면……. 너무 급하게 가려고 하지 마라. 너는 아직 한창 성장할 나이고, 고등학교도 안 들어간 어린아이라고. 유소년의 실력이 부족한 건 당연한 거야.”
 “그리고 부족함을 알면 정진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하셨죠. 옛 성현들께서.”
 “에휴…… 한 마디를 안 져요. 알았다, 인마. 너 알아서 해라. 그래도…… 너무 무리하지는 마라. 무조건 열심히 한다고 다가 아니야. 오히려 적절히 끊고 쉬는 것이 훨씬 더 좋은 훈련 방법이니까.”
 “아시잖아요. 적절하게 잘 컨트롤하고 있다는 거.”
 “그러게……. 그게 신기하다는 말이지. 네 나이 때는 훈련에 목숨을 걸지 않거나 완전히 목숨을 걸거나 둘 중 하나이고, 프로가 되어도 그 중심을 잡는다는 게 쉬운 일은 아닌데 너는 목숨을 걸거나 둘 중 하나이고, 프로가 되어도 그 중심을 잡는다는 게 쉬운 일은 아닌데 너는 목숨을 거는 것 같으면서도 쉬어야 할 때는 철저하게 쉬어주니까. 무슨 프로에서 10년은 넘게 구른 베테랑을 보는 것 같단 말이야.”
 프로 무대에서 구를 만큼 구르다가 결국 다 닳아 없어지기까지 했을 정도의 베테랑이 바로 성배였다.
 조급하게 생각하고 급하게 달리면서 몸에 무리를 주는 미련한 짓을 할 리 없었다.
 물론 급한 것은 맞았다.
 지금 같은 나이의 그 어떤 선수도 성배보다 급하지는 않을 것이었다.
 브라질 뒷골목에서 맨발로 공을 차며 인생을 바꾸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도, 아프리카의 내전 속에서 꿈을 키우며 언젠가는 탈출하겠다고 다짐한 사람도, 이민자 출신으로 하루하루 근근이 먹고사는 가정의 사람도. 그 어떤 사람도 지금의 자신보다 절박하지는 않을 것이었다.
 아무리 비참한 현실에 놓인 사람이라고 하더라도 비참하게 실패한 인생을 겪고 다시 돌아와 기회를 얻은 사람의 절박함을 넘어설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그래도 조급해하는 것은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았기 때문에 애써 조절하고 있었고, 다행히 정신이 무너지지 않아 조절할 수 있었다.
 “정말로 감사했어요. 코치님이 아니었으면 혼자서 트래핑이나 하는 것이 전부였을 거예요. 코치님 아니면 제가 이 나이에 아무런 배경도 없는데 무슨 수로 개인 코치를 두고 일대일로 훈련을 했겠어요. 정말 큰 도움을 받았네요. 감사합니다.”
 “무슨. 나야말로 너같이 재능 있는 선수를 지도할 수 있어서 행운이었지. 막말로, 이제 겨우 지도자 생활 3년 차에 선수 시절 유명한 선수도 아니었던 내가 너같이 재능 있는 선수를 언제 또 보겠냐. 이거 앞으로 지도자 길이 막히는 거 아냐? 다른 애들 전부 다 너랑 비교하게 될 텐데…….”
 “하하하, 겨우 열일곱 살짜리가 이런 말 하기는 뭐하지만, 코치님 진짜 유능한 것 같아요. 코치님도 보셨죠? 지난 2주 동안 제가 얼마나 빨리 늘었는지.”
 분명, 이 시간은 두 사람 모두에게 큰 도움이 된 시간이었다.
 코치와의 일대일 훈련은 2주의 시간을 거의 통으로 날릴 뻔했던 성배에게 황금과도 같은 기회였고, 지도자 생활을 잠시 쉬면서 코치 자리를 알아보고 있는 영민에게도 감을 잃지 않으면서 하나하나 자신의 방식을 시험해볼 수 있는 기회였다.
 다만, 조금 더 절박했던 성배가 조금 더 많이 고마워하고 있을 뿐이었다.
 “어디 그게 내 덕분이냐. 네가 워낙에 자질이 뛰어났던 거지. 퍼거슨 감독을 데려와도 너처럼 빠른 성장을 이끌어내는 건 불가능해.”
 “그렇다고 저 혼자 할 수 있는 일도 아니죠. 코치님, 자신감을 가져요. 선수경력이랑 지도자경력은 전혀 상관없다고요. 진짜 유명 감독 중에 유명선수 출신은 얼마 안 돼요.”
 유영민 코치는 이제 성배에게 내 사람이 되었다.
 적절히 이용해먹기도 했지만, 기본적으로 사람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면 이렇게 주절주절 많은 말을 하지도 않았을 것이었다.
 이번 인생을 살아가는 성배의 방식이 그랬다.
 남들에게 나쁜 이미지를 심어주지는 않을 것이지만 그렇다고 필요 이상으로 가까이 다가서지도 않겠다는 것.
 그 방식에 따르면 성배가 이 정도로 살갑게 대해주고 격려해주는 것은 내 사람으로 인정하겠다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래도 벌써 3년 차인데 너무 시작이 늦는 건 아닌지 모르겠다. 휴우…….”
 “어디 제의 들어온 곳은 없어요?”
 “있어. 며칠 전에 들어왔지. 안 그래도 더 늦으면 올해를 통으로 날려야 할 것 같아서 받아들이려고 하는 중이야.”
 아무리 아마추어 학교 축구부라고 하지만 시즌 중반에 코치를 영입하는 일은 별로 없었다. 기본적으로 계약 단위가 년 단위였고, 프로팀들과 마찬가지로 시즌이 치러지는 중간에 코치를 영입하는 일은 잘 일어나지 않았다.
 그래서 유영민도 더 이상은 재고만 있을 수 없었을 것이었다.
 “무슨 학교인데요?”
 “음……. 아마 너도 알 걸? 작년 전국대회에서 우리 학교한테 이기고 바로 다음 경기에서 탈락한 수원 이매중. 거기야.”
 “꽤 강팀으로 가네요? 적어도 전국 대회 16강 정도로 평가받는 학교잖아요?”
 “그렇지. 아무래도 청주 내에서 다른 학교를 알아보는 것보다는 수원에서 살아야 한다고 해도 강팀으로 가는 게 내 커리어를 위해서 좋을 것 같으니까.”
 “분명히 거기서 잘 될 거예요. 제가 장담할게요.”
 “뭐? 네가 뭘 안다고 장담을 해. 잘 됐으면 좋겠지만, 확신할 수는 없지.”
 어이가 없다는 표정을 짓는 유영민이었지만, 성배는 그저 웃을 뿐이었다.
 성배의 기억 속에서 유영민은 수원의 이매중학교 코치로 갔다가 2년 뒤 한국의 2부 리그인 N리그의 수원시청의 코치로 영입되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몇 년 뒤에는 K리그 수원 유나이티드의 2군 코치로 영입되었는데, 나이에 비하면 나쁘지 않은 경력이었다.
 “에이, 어쨌든 믿어 봐요. 좋은 생각을 하면 좋은 결과가 따라온다는데, 믿어서 손해 볼 건 없잖아요.”
 “뭐……. 그건 그래. 그러면 네 말 믿고 희망차게 한번 시작해보지, 뭐. 나중에 너는 성공하고 나는 실패하면 대신 네가 나 책임져라.”
 “…… 아니에요. 코치님은 망할 거예요. 아주 폭삭. 조기 축구회라도 가입할 수 있을지 모르겠네요.”
 “야…… 알았다. 알았어. 나 책임지라고 안 할 테니까 그런 말은 하지도 마라. 아주 소름이 다 끼친다.”
 “아니에요, 코치님은 분명 성공할 거예요.”
 “…… 하지 말아줄래? 그냥 내가 알아서 할게. 부탁이야.”
 지난 2주의 시간 동안 두 사람은 상당한 친분을 쌓을 수 있었다.
 성배의 중학교 시절에도 두 사람은 나름 친분을 쌓았었지만, 일대일로 시간을 보낸 적도, 보낼 이유도 없는 정도, 딱 코치와 선수의 관계였을 뿐이었다.
 그리고 성배에게는 잘 기억도 나지 않는 과거의 일이었다.
 
 하지만 일대일로 2주의 시간을 보내고, 서로가 필요한 시점에 딱 만나 서로에게 도움을 주게 되면서 두 사람은 확실히 친해졌다.
 서로가 서로에게 도움을 줄 수 있고, 서로가 서로의 성격과 실력을 마음에 들어 했기 때문에 빠르게 가까워진 두 사람이었다.
 “그럼 전 이만 가볼게요. 코치님도 수원에 가서 꼭 성공하세요. 거기 애들한테도 잘 해주시고요.”
 “그래. 가끔 연락하고. 잘 가라. 너는 분명 성공할 거야. 나도 스포츠 신문 1면에서 내 제자 얼굴도 보고 좀 그래 보자.”
 “꼭 그렇게 해드릴게요. 2주 동안 정말 감사했어요. 건강하시고요.”
 “나도다. 그럼 잘 가고, 건강해라.”
 오늘 훈련을 끝으로 한국에서 할 수 있는 일은 모두 다 끝냈다.
 아직 불안하기는 하지만, 더 이상 잘할 수 없을 정도로 충실하고 열심히 살아온 2주였다.
 최소한 이 2주일이라는 시간에 후회는 남기지 않았고, 이제는 본격적으로 벨기에에서 맞부딪힐 시간이었다.
 
 
 # 낭만필드 - 023
 
 “다녀왔습니…… 으앗, 깜짝이야!!”
 “헤헤……. 엄마가 주관하는 송별 파티!! 우리 자기랑 우리 아들이 이제 외국으로 떠나는데 파티해야지. 파티.”
 “아…….”
 유영민과 헤어지고 집에 들어온 성배는 갑자기 들리는 폭죽 소리에 깜짝 놀라 현관 미닫이문에 머리를 부딪치고 말았다.
 도대체 어디서 난 소리인지, 소리의 원인을 찾아보던 성배는 곧 폭죽을 손에 들고 이상한 고깔모자를 쓴 어머니를 발견할 수 있었다.
 “이제 곧 떨어져야 한다고 서로 우울해 하면 좋을 게 없다니까? 이럴 때는 그냥 마지막까지 더 시끌벅적하게 지내야 하는 거야. 우리 자기도, 우리 아들에게도 좋은 일이잖아. 우리 자기는 승진해서 가는 거고, 우리 아들은 더 넓은 세상으로 가기 위해 도전하러 가는 거니까. 그러면 나랑 유빈이도 기쁘게 보내줘야지.”
 “어머니……. 감사합니다. 아들이 고집을 부렸는데 이렇게 파티까지 준비해주셔서.”
 “어머? 원래 가정에서 어머니의 역할이 이런 거 아니겠니? 전에도 말했지만, 엄마는 걱정을 안 할 수 없어. 하지만 지난 2주 동안 성배를 보면서 많은 걱정을 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해. 그러니까 기쁘게 보내줄 수 있을 것 같아. 그러니까 오늘은 즐겁게 보내자고!!”
 성배의 어머니인 성혜진은 성배가 생각하는 이상적인 아내, 이상적인 어머니의 모델이었다.
 성배와 유빈이가 한창 어릴 때, 아버지가 외국에 나가계셨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일과 아이들의 육아를 동시에 훌륭하게 수행할 정도의 강단으로 슈퍼맘의 면모도 가지고 있으면서 소녀 같은 천진함과 통통 튀는 말투로 친구의 역할도 해주었다.
 ‘이런 어머니, 이런 아버지가 계시는데 내 인생이 실패하다니……. 정말, 나라는 놈은 여러모로 부족했구나…….’
 호부 밑에 견자 없다는 말은 대체로 맞는 말이지만, 꼭 그렇지만도 않았다.
 자신의 아버지는 만나는 모든 사람들에게 평생 좋은 사람이라고 칭찬을 들으면서도 절대로 바보같이 살지는 않았다.
 민감한 문제에 있어서는 자신의 원칙을 지켰고, 자신과 가족에게 큰 부담을 지우지 않았다.
 자신은 아버지의 그런 모습이 존경스러워 본받으려 했지만, 결국 그 '정도'라는 것을 현명하게 지키지 못해 실패하고 말았던 것이었다.
 
 서로를 열렬히 사랑하면서도 철저하게 존중하는 두 분의 결혼 생활은 성배가 꿈꾸는 결혼 생활이었다.
 하지만 결국 성배는 결혼 생활에서도 성공하지 못했다.
 아버지는 아버지 대로, 어머니는 어머니대로 이상적인 모습을 성배에게 보여주어 부모의 역할을 완벽하게 수행했지만, 성배는 결국 그를 본받지 못했다.
 “어머니, 정말 감사합니다. 아버지도요. 무리일 수 있는 부탁이었고, 저도 한바탕 떼를 쓸 각오까지 하고 드린 말씀이었는데, 이렇게 흔쾌히 믿어주시고 밀어주셔서 감사해요.”
 “방금 전에도 말했지? 엄마는 아들이 그 정도로 성장했다는 것이 기뻤어. 처음에 반대한 것도 당연히 걱정되어서 그런 거고. 그렇지만, 아들이 이렇게까지 믿음직스러운 줄 알았으면 처음부터 절대로 반대하지 않았을 거야. 부모란 그런 거거든.”
 “그럼!! 부모는 아이가 원하는 길을 갈 수 있게 길을 만들어주고, 그 길을 밀어주는 사람들이지. 간혹 반대하는 것은 아직 어린 우리 아이가 한때의 생각에 사로잡혀 무리하지는 않을까, 하는 마음에서 그런 것뿐이야. 우리에게 벨기에로 가겠다는 말을 했던 그 날, 너는 믿음을 보여주었고, 우리는 너를 믿었을 뿐이지. 그게 전부다.”
 부모의 당연한 역할을 했을 뿐이라 말하고 있는 부모님이었지만, 그것이 그리 쉽지 않음을 성배도 잘 알고 있었다.
 당장 부모 자신의 욕심으로 아이들을 이 학원, 저 학원으로 쉴 새 없이 돌리고 자신들의 시대에 성공하는 방법이었던 명문 대학 진학을 강요하는 부모들이 판을 치고 있는 시대였다.
 
 안 그래도 부모가 아이들을 키우는 방식에 대해 말들이 많이 나오는 현대 사회였다.
 아이들은 부모에게 자신의 말이 먹히지 않으니 경제권을 쥐고 있는 부모님에게 겉으로나마 복종할 수밖에 없고, 자신들끼리의 대화와 인터넷에 싸지르는 글에서나마 부모님에게 불만을 표시하고 있었다.
 이런 사회에서 자신을 한 명의 온전한 인간으로 대해주고 자신의 선택을 지지해주는 부모님이 있다는 것은 성배에게 큰 행운이었다.
 “유빈아. 유빈아-아. 오빠 이제 내일이면 가는데 웃어줘야지.”
 “히잉……. 싫어!! 거기 가면 이제 못 보잖아…….”
 “백 밤만 자면 오빠 올 거야. 헤헤헤…….”
 “거짓말!! 나 이제 애 아니야!! 그게 거짓말인 건 다 안다, 뭐.”
 요즘 초등학교 5학년이면 그래도 알 건 다 아는 나이였다.
 이제 곧 초등학교 6학년이 되는 아이를 저렇게 설득하려고 하는 어머니도 참 대단한 분이었다.
 시청에서도 업무 능력에 대해 인정을 받고 계신 것 같고, 필요할 때는 정말 똑 부러지는 모습을 보여주시는데, 평소에는 어딘가 맹하고 어설픈 모습을 보인다는 것이 참 신기했다.
 “유빈아. 오빠는 조금 더 축구를 잘하고 싶어서 가는 거야. 응원해줘야지. 네가 응원을 안 해주면 나도 힘이 안 난단 말이야.”
 “그래도…… 가면…… 아빠처럼 일 년에 몇 번밖에 못 오는 거잖아. 그건 싫단 말이야…….”
 “그래도 난 가야 해. 나는 세계 최고의 선수가 될 거야. 그러기 위해서 가는 거야. 유빈이도 응원해줄 수 있지?”
 브라더 콤플렉스나 시스터 콤플렉스가 굳이 없더라도 자신의 가족과 오랫동안 떨어져 있어야 한다고 하면 슬픈 것이 당연했다.
 유빈이도 마찬가지였다.
 친구들에게 이야기를 들어보면 보통 오빠가 있는 아이들은 매일매일 싸운다고 했다.
 컴퓨터 때문에 싸우는 것은 물론이고, 매일 라면을 끓어오라고 한다든지 심부름을 시킨다든지 하는 일로 싸웠고, 그래서 오빠가 싫다는 말을 매일 들었다.
 
 하지만 유빈이는 이해할 수 없었다.
 자신의 오빠는 축구하느라 매일 늦게 들어왔고, 매일 피곤한 얼굴이었지만 특별히 자신을 귀찮게 하지 않았다.
 오히려 같이 게임하자고 떼를 쓰거나 하면 피곤해하면서도 종종 같이 놀아주기도 했다.
 막 살갑거나 잘 대해주지는 않아도 최소한 다른 오빠들보다는 훨씬 나았고, 친구들에게 자기 오빠는 막 이렇게 해준다면서 자랑을 하기도 했었다.
 
 그리고 얼마 전, 며칠 동안 넋이 나가 있던 오빠는 갑자기 전보다 훨씬 더 어른 같아졌다.
 그리고 자신에게도 훨씬 더 잘해주었다.
 갑자기 학교도 안 가고 혼자서 훈련하더니 자신과 함께 있을 때는 떡볶이도 해주고 배가 고프다고 하면 뭔가를 만들어주었다.
 그리고 자신과 많이 놀아주었다.
 이제 아이가 아니라서 오빠보다는 친구랑 노는 것이 더 좋았지만, 그래도 혼자 있어야 하는 시간이 줄어서 좋았다.
 그런데 그런 오빠가 이제 외국에 가야 한다고 하니까 당연히 슬플 수밖에 없었다.
 “이씨…… 오빠 혼자 세계 최고가 될 수 있게 놔둘 수 없지!! 나도 세계 최고의 화가가 될 거야!! 그래서 맨날 오빠 무시할 거야!!”
 “그래, 그래. 그러니까 오빠 외국에 있는 동안 유빈이도 미술 공부 열심히 하고 있어. 미술이 아니더라도 뭐든지 열심히 해야 한다? 알았지?”
 “흥!! 몰라!!”
 어쨌든 대충 유빈이도 달랜 것 같았다.
 내일이면 헤어져야 하기 때문에 마지막 순간에는 웃는 모습으로 헤어지고 싶었는데 다행이었다.
 유빈이의 마음도 대충 풀리자 그제야 제대로 송별 파티를 진행할 수 있었다.
 화기애애한 분위기로 마지막 밤을 보낼 수 있어 다행이었다.
 
 ***
 
 “아아, 벨기에 가서 우리 자기가 해주는 음식이 먹고 싶으면 어쩌지? 으으……. 벌써부터 힘들다.”
 “걱정 말아요. 택배로 보낼 수 있는 건 자주 보내줄 테니까. 마누라 없다고 밥도 제대로 안 먹고 그러면 안 돼요? 성배도 운동해야 하는데 잘 먹여야 되는 거 잘 알죠? 거기서 자기도 같이 먹어요.”
 진지할 때는 서로를 여보라 부르는 부모님이었지만 가끔 분위기가 좋을 때는 ‘우리 자기’라고 서로를 불렀다.
 젊었을 적에 썼던 애칭인 것 같은데, 마흔이 넘은 지금까지도 그러시니 사실 좀 불편하기는 했다.
 부모님을 존경하고, 사랑하고, 항상 애정이 충만한 두 분의 모습은 좋지만, 그래도 보기 힘든 것은 힘든 것이었다.
 ‘하하, 음식이 맛있네…….’
 결국, 성배는 두 분의 모습에서 고개를 돌려 음식에 집중했다.
 아버지의 말처럼 벨기에에 가면 한동안 한식에는 소홀해질 수밖에 없을 것이었다.
 자신이 요리를 좀 한다고는 하지만 주로 유럽식이었고, 아버지는 요리에 취미도, 관심도 없으셨다. 먹을 수 있을 때 최대한 먹는 것이 남는 것이었다.
 
 
 # 낭만필드 - 024
 
 “흐엥……. 오빠 진짜 가는 거야? 안 가면 안 돼?”
 “아이고, 우리 유빈이 또 우네? 유빈이가 이렇게 자꾸 울면 안 되는데……. 유빈이가 계속 이렇게 울면 아빠랑 오빠가 마음 놓고 갈 수 있겠어?”
 “응? 아빠는 끌어들이지 마. 나는 괜찮으니까. 내가 가서 우는 것도 아니잖아?”
 “여보!!”
 “아……. 말이 헛나왔네. 여보, 신경 쓰지 마.”
 다음 날, 성배의 가족은 모두 함께 인천 공항으로 향했다.
 이제 아버지와 자신은 벨기에로 떠나게 될 것이었고, 어머니와 유빈이는 한국에 남을 것이었다.
 어제까지만 해도 오빠를 응원한다던 유빈이는 결국 이별이 바로 눈앞으로 다가오자 참지 못하고 눈물을 흘렸다.
 아무래도 열두 살의 어린아이에게 이별의 아픔을 감당해달라고 말할 수는 없었기에 성배는 그저 토닥여주는 것밖에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유빈아. 어제 오빠랑 약속했지? 나는 벨기에에서 열심히 축구하고, 너는 한국에서 열심히 그림 그리기로 했잖아.”
 “훌쩍……. 응……. 그랬어.”
 “다음에 내가 귀국하면 너 그림부터 그려보게 할 거야. 마음에 안 들면 바로 다시 가버려야지.”
 “이잇!! 그런 게 어딨어어!! 흐끅! 시험, 흐끅! 싫어!!”
 미운 네 살도 키워봤던 성배였다.
 네 살 짜리 아이에 비해 열두 살짜리 아이는 성인이나 다름없었다.
 최소한 덮어놓고 떼를 쓰지는 않았기 때문에 차분하게 이야기하면 거의 통했고, 이번에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니까 엄마 말씀 잘 듣고, 그림도 열심히 그리면서 있어. 그러면 오빠가 와서 맛있는 거 또 해줄 테니까.”
 “…… 응. 알았어. 오빠도 가서 축구 열심히 해. 최고로 잘하기 전에는 오지 마!! 어…… 아니, 아니야. 최고 아니어도 괜찮으니까 오고 싶으면 언제든지 와도 돼.”
 성배가 했던 것처럼 한 번 으름장을 놓고 싶었던 것인지 강하게 나가봤던 유빈이는 곧 꼬리를 말고 자신이 한 말을 부정했다.
 생각해보니까 역시 오빠가 최고의 축구선수가 되는 것보다는 자신과 함께 놀아주는 것이 더 중요했다.
 괜히 자기가 한 말 때문에 정말로 최고가 되지 못하면 돌아오지 않을까 봐 불안한 모양이었다.
 “그럼, 당연하지. 유빈이도 보고 싶고, 어머니도 보고 싶은데 어떻게 안 올 수가 있어? 시간 날 때마다 올 테니까 걱정하지 말고 재미있게 놀고 있어.”
 “알았어……. 자주 와야 해? 알았지?”
 “그럼!! 약속할까? 손가락 걸고?”
 이제 울음을 그친 유빈이가 새끼손가락을 내밀어 왔다.
 왼손으로 눈물을 닦으면서 새끼손가락을 내미는 유빈이는 정말 귀여웠다.
 함께 나이를 먹었던 서른두 살의 유빈이의 모습이 보이기도 했지만, 그래도 역시 열두 살의 동생이 훨씬 더 귀여운 건 어쩔 수 없었다.
 “크흠…… 우리도 저거 할까?”
 “어머, 좋죠. 뭘로 할 건데요? 바람피우면 접시에 코를 박고 이 세상을 떠나겠다, 뭐 이런 거로 할까요?”
 “저, 저기……. 여보? 여보?”
 이별의 순간에 그다지 어울리지 않는 장난스러운 대화였지만, 이것이 부모님의 이별 방식이었다.
 직접 보지는 못했지만, 아버지가 처음으로 해외 공간에 발령을 받아서 떠날 때도 이런 식으로 이별했다고 들었다.
 어린 성배와 아주 어린 유빈이를 두고 떠나는 아버지와 두 어린아이를 혼자서 키워야 하는 어머니는 그때도 이렇게 장난을 쳤다고 했다.
 ‘그 뒤에 혼자 우셨다고도 하셨지만…….’
 어머니도 마음이 좋지 않으실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첫 해외 공관 발령 때도 외교관이 되어 교육을 마치고 처음으로 제대로 된 업무를 맡은 좋은 날이었고, 이번에도 남들보다 일찍 2등 서기관으로 승진해 나가는 좋은 날이었지만 부부가 몇 년을 떨어져야 하는데 슬프지 않을 리가 없었다.
 그래도 최소한 서로가 보는 앞에서는 슬픈 티를 내지 않으려는 것뿐이었다.
 “어머니, 그럼 이제 그만 가볼게요. 이러다가 비행기 놓치겠어요.”
 “그래, 가봐야지. 여보도 빨리 들어가요. 비행기 놓치면 시말서로 안 끝날 걸요?”
 “알았어. 그럼 가볼게. 도착하면 전화할게. 들어가서 쉬어.”
 이별은 참 힘들었다.
 가야 한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생각과는 달리 발이 참 떨어져 주지 않고 있었다.
 떨어지지 않는 무거운 발을 힘들게 움직이면서 성배와 아버지, 어머니와 유빈이는 헤어질 수밖에 없었다.
 “아버지.”
 “응? 왜 불러?”
 “저 꼭 성공할 거예요. 그것도 엄청나게.”
 “그래, 그것도 좋겠지.”
 16년 만에 되찾은 가족과의 행복한 시간을 자신의 의지로 박차고 나선 길이었다.
 최소한 그 시간들을 대체할 수 있을 만큼, 아니 무조건 그 이상의 것을 얻어내야만 하는 길이었다.
 아버지도 굳이 성공하라고 말씀하시지는 않았지만, 자신이 가는 길을 전폭적으로 밀어주실 것임을 잘 알고 있었다.
 이번에는 절대로, 부모님과 유빈이를 가슴 아프게 하지 않을 것이었고, 나름대로 자신도 있었다.
 
 ***
 
 “으아아아…… 아버지, 이거 엄청나게 힘드네요. 차라리 하루종일 훈련을 하는 게 낫겠어요.”
 “삶의 터전을 바꾸는 일인데 당연히 힘들지. 이사라는 거, 아무리 세상이 좋아져서 알아서 짐을 다 날라준다고 해도 절대로 쉬운 거 아니다. 특히 정신적으로 얼마나 힘든지……. 에휴…….”
 나라에서 외교관에게 내어주는 관저는 생각보다 나쁘지 않았다.
 아니, 상당히 좋은 편이었다.
 남자 두 명이 사는 집으로 방 두 개 딸린 18평짜리 집은 차고도 넘칠 만큼 좋았다.
 게다가 공관이 있는 브뤼셀은 벨기에의 수도이면서 유럽의 수도이기도 했기 때문에 도시 자체도 굉장히 잘 만들어져 있었다.
 살기에는 이보다 더 좋을 수 없을 정도였다.
 “프랑스어 공부는 많이 했지? 내일부터는 당장 어학원에 다녀야 하니까 미리미리 쉬어둬라. 피곤할 텐데.”
 “뭐……. 어찌어찌 대화는 할 수 있을 정도니까요. 뭐, 괜찮아요.”
 9월에 시작해서 6월에 끝나는 일정으로 학교가 돌아가는 벨기에였기 때문에 성배는 9월까지 어학원에 다니게 되었다.
 그리고 내년 9월에 만 12세부터 18세까지 다니는 Secondary School 5학년으로 편입하게 될 것이었다.
 벨기에는 18세까지는 의무적으로 교육을 받도록 하고 있었는데, 한국은 중학교까지가 의무 교육이었기 때문에 성배는 굳이 학교에 다니지 않아도 상관없었다.
 그러나 벨기에에 적응하기 위해서는 학교에 다니는 것이 좋았고, 유럽 클럽들은 유스 평가 기준에 일정 수준 이상의 학업 성적이 포함되어 있었기 때문에 학교는 다니기로 했다.
 “입단 테스트는 언제 보러 갈 거니? 언제 있어?”
 “며칠 뒤에 있어요. 테스트 비용이 엄청나게 비싼 건 아니지만 그래도 돈을 내야 하는 거니까 한 번에 붙어야죠. 붙을 자신도 있고요.”
 불안한 부분은 분명 있었지만, 그래도 충분히 붙을 것이라는 자신이 있었다.
 사실 공동 개최국 자격으로 참가한 지난 유로 2000에서 최악의 부진을 겪은 벨기에 축구는 위기에 빠져있었다.
 성인 대표팀은 물론, 청소년 대표팀의 FIFA 랭킹도 겨우 30위권에 불과했다.
 이 위기를 타개하기 위해 벨기에가 선택한 것은 유스 시스템의 개선이었다.
 하지만 그것은 3년 정도 뒤부터 시행되었고, 현재는 아직 과도기적인 시기였다.
 벨기에 유스도 성적을 굉장히 신경 쓰고 있는 시기라는 뜻이었다.
 ‘지금의 나는 유스 팀들이 노릴 수밖에 없는 선수야. 무조건 뽑힌다.’
 2006년의 개혁 이후로 벨기에는 협회 차원에서 유스팀들의 승리에 대한 집착을 없애는 것에 주력했다.
 2003년의 벨기에 유스 클럽은 선수를 키우기보다 승리에 초점을 맞추었고, 그것이 벨기에의 축구를 망치고 있다고 진단한 것이었다.
 반대로 말하면 지금의 벨기에 유스 클럽들은 대한민국보다는 훨씬 낫지만 어쨌든 승리에 집중하고 있었고, 성배는 잠재력은 몰라도 당장의 승리를 따내기 위해서는 완벽한 선수였다.
 
 그리고 일반적으로 유스 지도자들이 중요하게 생각하는 6가지 요소, 즉, 위닝 멘탈리티, 성격, 정서적 안정성, 현명한 의사결정, 가속의 폭발력, 신체 지배력 중 성배는 가속의 폭발력을 제외한 모든 부분에서 우수한 평가를 받을 자신이 있었다.
 아직 성장기인 유스 선수들을 평가할 때, 피지컬을 보지 않는다는 것은 성배에게 행운이었다.
 위닝 멘탈리티와 현명한 의사결정 부분에서는 성배보다 나은 선수가 아마 거의 없을 것이었다.
 성격은 서른여섯의 삶을 살았던 성배가 충분히 조절할 수 있는 부분이었다.
 신체 지배력은 피지컬과 달리 자신의 몸을 얼마나 잘 다루는가를 뜻했기 때문에 이것도 자신이 있었다.
 “아마 나는 바빠서 못 갈 것 같은데……. 혼자서도 잘할 수 있지?”
 “그럼요. 겨우 입단 테스트인데 거창하게 무슨 아버지까지 모시고 가요. 나중에 제 프로 무대 데뷔전 때 정식으로 초대할게요.”
 “그래, 그럼 나는 너만 믿고 있으면 되는 거네.”
 여섯 개의 중요 평가 요소 중에 네 개에서 탑을 찍는데 유스 따위에서 떨어질 리 없었다.
 어쨌든 현재의 벨기에 축구는 분명 위기였고, 자신의 기억 속에서도 90년대 생들이 폭발적으로 성장해 황금세대라고 불리기 전까지는 벨기에에서 특별한 선수들은 많이 나오지 않았었다.
 자신 정도의 유망주라면 감지덕지할 수밖에 없다는 뜻이었다.
 “내가 간다, 안더레흐트!!”
 “그래, 그래. 힘내라. 알았으니까 소리는 그만 지르고 이사나 좀 도와.”
 이제 정말로 벨기에에 왔고, 새로운 인생의 본격적인 첫발을 내디딘다는 것을 조금씩 실감하고 있는 성배였다.
 과거, 자신의 꿈의 구단이었던 안더레흐트가 이번 생에서는 고작 꿈을 이루기 위한 첫걸음이 되었다는 것은 성배를 더없이 기쁘게, 더없이 설레게 하였다.
 ‘이제 겨우 시작이야. 과거가 어땠는지는 이제 다 잊고 진짜 내 목표를 보고 달려야 해. 벌써부터 기뻐하고 설레면 어떻게 하려고 그러냐. 과거를 잊으려고 했지, 과거의 비참함까지 잊으려고 하지는 않았어.’
 안더레흐트에서 큰 기대를 받고 성장한 선수들 중에서 빅 클럽의 주전으로 자리 잡은 선수들은 몇 명 없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90년대 이전에 출생한 선수들 중에서는 몇 명 없었다.
 그리고 사실 지금 시점에서 가장 강력한 유스 시스템을 가지고 있다고 평가되는 것은 안더레흐트가 아니라 KRC 겡크였다.
 안더레흐트 1군에 주전으로 합류할 수 있다면 그때는 벨기에 최고의 엘리트 코스를 밟았다고 할 수 있겠지만, 그전까지는 최고의 코스를 밟고 있다고 말할 수 없었다. 아직은 만족할 때가 아니었다.
 
 
 # 낭만필드 - 025
 
 RSC 안더레흐트.
 벨기에의 안더레흐트를 연고지로 하고 있는 축구 클럽.
 안더레흐트라는 도시는 브뤼셀 수도권에 포함되는 지역이었다.
 엄밀하게 따지면 브뤼셀 수도권에 있는 브뤼셀 시가 벨기에의 수도였지만, 실질적으로 따지면 브뤼셀 수도권 전체가 사실상 단일 도시로 인식되고 있었기 때문에 그 안에 있는 안더레흐트는 벨기에의 수도를 연고로 하는 클럽이나 마찬가지였다.
 1909년에 창단된 RSC 안더레흐트는 벨기에 리그를 대표하는 최강자 이미지와는 다르게 창단 당시 벨기에 내에서 가장 낮은 리그에 참가했다.
 일반적으로 최강 팀들이 리그 창설 직후부터 강자로 군림했던 것과는 다른 역사를 가지고 있는 것이었다.
 1895년에 시작된 벨기에 프로리그에서 안더레흐트가 첫 우승을 경험한 시기는 무려 1946/47시즌.
 리그 창설 이후 50년이 훌쩍 지난 이후였고, 초기 안더레흐트의 행보는 그다지 성공적이지 못했다.
 하지만 그 이후 안더레흐트의 행보는 놀라웠다.
 첫 우승을 차지한 이후 57년이 지난 현재 안더레흐트의 우승 횟수는 리그에서만 26회.
 우승 횟수로 2위, 3위에 해당하는 클럽 브뤼헤와 스탕다르 리에주를 합친 것보다도 많은 횟수였다.
 그야말로 벨기에 리그에서 독보적인 위상을 가지고 있는 클럽이었고, 그 클럽이 바로 지금 성배가 뛰고 있는 클럽이었다.
 
 얼마 전 있었던 유소년 입단테스트에서 성배는 가볍게 합격해 안더레흐트의 유니폼을 입을 수 있었다.
 기본기, 피지컬, 스피드 등 다방면에 걸친 테스트에서 피지컬을 제외하고 모두 우수한 성적을 받은 성배는 마지막 연습경기에서 완벽한 플레이를 선보이며 좋은 조건의 유소년 계약을 맺었다.
 테스트 당시 자신을 보던 코치들의 눈빛을 감안하면 프로 계약도 그리 먼 일이 아닐 거라 기대해봐도 좋을 것 같았다.
 ‘내가 이 유니폼을 입다니……. 하하, 전생의 꿈은 거의 이룬 거나 다름없나…….’
 보라색과 흰색의 줄무늬가 교대로 그려져 있는 안더레흐트의 유니폼은 전생에서 성배가 그토록 선망하던 그것이었다.
 나중에는 이 유니폼을 입는 것마저도 너무 높은 꿈이라 생각해 포기하고 그저 1부 리그의 그라운드 한 번 밟아보는 것을 꿈으로 삼았었는데, 시작부터 이 유니폼을 입을 수 있다는 것이 신기했다.
 ‘좋아. 아직 유스 통합 정책은 시행되지 않았지만, 그래도 안더레흐트 유스 정도면 유럽 전체에서도 그리 밀리지 않는 수준이지. 여기서 한 번 미친 듯이 해보자.’
 뱅상 콤파니, 로멜루 루카쿠, 안토니 반덴 보레 등 벨기에 황금세대의 주축 선수들을 다수 배출한 안더레흐트가 본격적으로 유망주들의 천국이라 불리기 시작한 것은 유스 통합 정책 시행 이후였다.
 벨기에에서 가장 좋은 유소년 시설을 갖춘 안더레흐트, 브뤼헤, 겡크, 그리고 로얄 앤트워프가 유스 훈련을 위한 모든 시설을 공유한다는 이 정책의 최고 수혜자는 최강자 자리를 오래 유지해 자본이 빵빵한 안더레흐트였다.
 
 정책 시행 이후 입단한 유망주들은 이 네 개의 클럽 중에 선택해서 입단할 수 있었기 때문에 돈이 많고 전력이 강한 안더레흐트가 좋은 유망주들을 쓸어간 것이었다.
 그리고 1군에서도 강팀에 속하는 브뤼헤와 겡크도 나름대로 수확을 얻었고, 당시 2부 리그에 있었던 앤트워프는 준수한 유망주들을 모두 빼앗겨 20년의 암흑기에 빠질 수밖에 없었다.
 ‘참……. 그렇게 원망했던 정책이 아직 시행되지 않았다고 아쉬워하다니. 상상도 못 했던 일인데 말이지.’
 로얄 앤트워프 몰락의 결정타와 같은 사건이었기 때문에 전생에서 그렇게 원망했던 정책인데, 지금은 시행되지 않은 것을 아쉬워하고 있었다.
 사람이란 참 간사한 동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로얄 앤트워프를 위한 애정은 더 이상 남아있지 않았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자신의 변화가 성배에게 헛웃음을 짓도록 만들었다.
 ‘그래. 그 정책 같은 것 없어도 충분히 말도 안 되는 기회를 얻었어. 별 볼 일 없는 선수였다고는 하지만 그래도 프로 무대에서 16년을 버틴 기억이 있는데, 고작 유스 무대 따위는 순식간에 정리하고 1군으로 가야지.’
 안더레흐트의 U-17 유스 팀의 일원이 된 성배였다.
 이제 막 16세 생일이 지난 성배는 U-17 팀에서 가장 어린 선수 중 한 명이었다.
 이번 시즌이 시작되는 시점에서 15세인 선수는 U-15팀에서 뛸 수 있었기 때문에 성배와 동갑인 선수들이나 1년 위인 86년 말에 태어난 선수들까지도 아직 U-15에 속한 선수들이 많았기 때문이었다.
 ‘반덴 보레……. 저 녀석도 요주의 인물이지.’
 벨기에를 대표하는 오른쪽 수비수로 성장할 것이라는 평가를 받았던 반덴 보레이지만, 성배의 기억에 의하면 기대만큼 성장하지는 못했다.
 황금세대를 이끄는 베테랑 역할로 2014 브라질 월드컵에 참가하기는 했지만, 생각만큼 성장하지 못하고 2010년 즈음부터 이미 대표팀과는 멀어진 그런 선수였다.
 하지만 성배의 전생과 비교하면 화려하게 빛나는 커리어였고, 절대 성배가 만만히 볼 수 없는 선수면서 현재의 입지 역시 큰 차이가 있었다.
 “코치!! 팀 훈련 끝난 거면 개인 훈련 좀 부탁드려도 될까요?”
 “얼마든지. 그래, 뭐가 하고 싶은 건데?”
 “기본기요. 아무래도 제가 기본기가 부족하지 않습니까? 개인 훈련으로 따라잡아야죠.”
 현재 시점에서 기존의 벨기에 유망주들에 비해 성배가 가장 떨어지는 부분은 역시 기본기였다.
 물론, 어중이떠중이들보다는 훨씬 나았지만, 성배의 경쟁자들은 그런 선수들이 아니었다.
 정말 뛰어난 선수들과 비교하면 기본기에서 분명 떨어지는 부분이 있었다.
 
 벨기에는 나이에 따라 유소년 선수들에게 집중적으로 훈련시키는 내용이 달랐다.
 6세부터 8세까지는 공과 친해지도록 해주고, 8세부터 12세까지 기본기와 전술 기술을 배운다.
 12세부터 18세까지 팀 내에서 자신이 어떻게 기능해야 하는지, 어떤 역할을 맡아주어야 하는지를 배우고 그 이후에 진짜 프로 선수가 되는 시스템이었다.
 12세부터 18세의 훈련 내용은 굳이 성배가 배울 필요가 없는 내용이었다.
 그 누구보다도 성배가 잘 알고 있는 내용이었고, 현재 안더레흐트의 1군 선수들 중에서도 성배보다 그에 대해 잘 알고 있는 선수는 드물 것이었다.
 하지만 8세부터 12세 시기를 놓친 성배는 기본기에 있어서 분명 부족한 부분이 있었기 때문에 필수적으로 이를 보강할 필요가 있었다.
 “훌륭하군!! 기본기 훈련은 아무래도 재미가 없기 때문에 어린 선수들이 별로 좋아하지 않는데 말이야. 확실히 주는 지금 당장 해야 하는 것이 어떤 것인지를 알고 있는 것 같은데, 그건 참 대단한 거야. 앞으로도 계속 그런 훈련 태도를 보여주었으면 좋겠다.”
 ‘좋아. 제대로 점수 땄구나. 보고서에 한 문장 정도는 좋은 의견이 추가되겠지.’
 성배는 마음속에 만족스러운 미소를 그렸다.
 굳이 기본기 훈련을 코치에게 봐달라고 부탁한 이유가 바로 이것 때문이었다.
 사실 기본기 훈련은 생각보다 단순했고, 어렵지 않았다.
 그래서 어린 선수들이 별로 좋아하지 않는 것이었고, 따로 훈련을 도와줄 사람도 동료 한 명이면 충분했다.
 하지만 성배는 굳이 코치에게 부탁해 자신이 기본기 훈련을 할 것임을 넌지시 알렸다.
 ‘36년의 살았던 경험을 가지고 돌아온 내가 가지고 있는 무기는 축구에 대한 것만이 아니야. 열여섯 순수한 아이들에게는 없는, 서른여섯 어른의 방식도 내가 가지고 있는 무기 중 하나라고.’
 과거의 경험을 굳이 그라운드 안에서만 활용할 필요는 없었다.
 과거의 자신은 그 누구보다 정직하고 의롭게, 당당하게 살았지만, 그랬기 때문에 오히려 더욱 어떻게 해야 아주 조금의 이득이라도 얻어야 하는지를 잘 알고 있었다.
 자신이 그 피해자가 된 적이 많았기 때문이었다.
 
 코치들도 사람이었다. 코치뿐 아니라 선수, 감독, 스카우터, 팀 닥터 등 모두가 사람이었다.
 그 사람들이 나빠서가 아니라 사람이기 때문에 호감을 가진 사람에게 더욱 마음이 가고, 신경이 쓰이고, 호의를 베푸는 것이 당연했다.
 코치들에게 잘 보이면 선수 평가 때 자신에 대한 좋은 이야기를 더 많이 해줄 것이었고, 그런 이야기가 감독의 귀에 들어가면 자신에게 기회가 더 많이 주어질 것이었다.
 그렇게 유스 팀 감독의 호의까지 얻어내면 또 그렇게 2군 감독의 호의를 얻어낼 수 있고, 결국 1군 감독의 호의, 단장의 호의, 구단주의 호의까지 모두 얻어낼 수 있게 되는 것이었다.
 ‘악행을 하고 싶지는 않아. 하지만…… 영악한 행동까지도 하지 않을 필요는 없지. 법이 허락하는 한도 내에서, 남들이 용납할 수 있는 범위 내에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아. 순백의 하얀 마음을 가지고 있는 좋은 사람이 되는 것보다 내 꿈을 이루고 행복해지는 것이 훨씬 더 중요하니까.’
 성인(聖人)이 되고 싶지 않았다.
 과거에는 오로지 옳은 길만을 고집하며 살아왔지만, 마지막 밑바닥에서 느낀 것은 자신의 영달과 가족의 행복을 갈망하는 마음이었다.
 그를 위해서 할 수 있는 것은 다 할 생각이었다.
 이는 분명 자신이 가지고 있는 무기였고, 무기가 있는데 사용하지 않을 생각은 없었다.
 
 
 # 낭만필드 - 026
 
 ‘이곳도 많이 발전했구나…….’
 시간은 빠르게 흘렀다.
 성배가 안더레흐트에 입단한 지도 어느새 1년하고도 반이 넘었고 2002/03시즌을 지나 2003/04시즌도 마지막 경기만을 앞두고 있었다.
 그리고 지금 성배는 안더레흐트가 아닌 다른 팀의 최종전 경기를 관람하기 위해 브뤼셀이 아닌 다른 도시에 와있었다.
 ‘전생에 처음 왔을 때보다도 전이니까……. 확실히 기억 속의 모습이랑은 조금 다르네.’
 성배가 현재 와있는 곳은 바로 전생의 16년 기억이 모두 남아있는 곳, 안트베르펀이었다.
 브뤼셀에서 고작 40km 정도밖에 떨어지지 않은 가까운 곳이었기 때문에 아직 차가 없는 성배도 버스를 타고 쉽게 방문할 수 있었다.
 유럽에서 네덜란드 로테르담에 이어 가장 큰 항구가 있는 곳이고, 항만 산업이 발전해 중세 영국의 양모 수출 루트였던 곳.
 석유화학을 발전시켜 석유화학 클러스터 부분에서 세계 2위의 지위를 차지하고 있는 곳.
 다이아몬드 관련 산업이 발달했고, 패션 산업에서도 나름대로의 입지를 가지고 있으며, 그 덕에 중세부터 부유한 도시로 이름을 날려 그 유명한 안트베르펀 대성당을 비롯한 볼거리와 루벤스, 반 다이크 등의 거장을 배출한 도시,
 안트베르펀.
 
 하지만 그런 것들은 성배에게 전혀 중요하지 않았다.
 성배에게 안트베르펀의 의미는 ‘청춘’이자 ‘모든 것’이었었다.
 안트베르펀의 영어 발음은 앤트워프, 이곳은 바로 로얄 앤트워프의 연고지였고, 지금 성배는 2003/04시즌 로얄 앤트워프의 주필러 리그 최종전이 펼쳐지게 될 보사윌슈타디온을 찾아가고 있었다.
 청춘을 모두 다 바쳤던 바로 그곳을 찾아가고 있는 것이었다.
 ‘내가 보지 못했던 1부 리그에서의 마지막 모습, 이번에는 내 두 눈에 담아준다.’
 지금, 성배는 소속팀 안더레흐트의 리그 최종전이 아닌 로얄 앤트워프의 리그 최종전을 관람하러 가고 있는 것이었다.
 안더레흐트는 이미 일찌감치 리그 우승을 확정한 상황이었기 때문이었기 때문에 마음 편히 이곳을 찾을 수 있었다.
 ‘그리고 오늘……. 로얄 앤트워프에 대한 모든 미움, 미련, 증오…… 등을 모두 잊어버리겠어. 전생의 유쾌하지 못했던 기억들은 전부 오늘로 털어주지.’
 성배는 오늘 전생의 모든 유쾌하지 못한 기억들을 잊기로 했다.
 그리고 그 기억들을 잊기 위한 계기는 로얄 앤트워프의 강등이 결정될, 바로 오늘 경기였다.
 오늘 경기를 마지막으로 로얄 앤트워프의 홈구장인 보사윌슈타디온에서는 20년 동안 주필러 리그 경기가 펼쳐지지 않을 것이었다.
 그리고 성배는 그것이 로얄 앤트워프와 자신의 거리를 크게 벌려줄 수 있을 것이라 기대하고 있었다.
 
 ***
 
 ‘전력의 차이가…… 확실히 있네. 팀 자체의 분위기가 도저히 이길 수 있는 상태가 아니야.’
 보사윌슈타디온에서 펼쳐지고 있는 로얄 앤트워프와 KSK 베베런의 경기는 KSK 베베런이 압도하는 분위기 속에서 진행되었다.
 10승 5무 18패로 리그 13위에 올라있는 베베런도 그렇게 강한 팀은 아니었지만, 7승 6무 20패로 리그 최하위에 머무르고 있는 로얄 앤트워프의 경기력이 훨씬 더 아래였다.
 ‘피발레비치, ……무기력해. 예전에는 넘어설 수 없을 것처럼 보였는데.’
 현재의 성배는 이미 전생에서의 전성기와 비슷한 수준까지 기량을 끌어 올려놓은 상황이었다.
 전체적으로 보면 전생에서의 전성기보다 아주 조금이지만 더 나은 기량을 갖추고 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전생과 비교하면 함께 훈련하고 플레이하는 동료들의 수준 자체가 달랐다.
 아직 U-17 팀에 속해있었지만, U-19 팀에서 훈련하는 경우도 많았고, 1군 선수들과의 훈련 시간도 적지 않았다.
 한국 최고의 선수 중 한 명인 성규한과 데샤크트, 해리슨, 콤파디 등 벨기에 리그 최고의 선수들과 훈련을 함께한 성배였고, 그런 성배에게 로얄 앤트워프 선수들의 플레이는 큰 감흥을 주지 못했다.
 
 전생에서 성배의 앞을 가로막고 스트라이커에서 윙어로 밀려나게 만들었던, 벽이라고 느꼈던 전생의 동료들이 이번 생에서는 지금 당장에라도 그라운드로 내려가 틀어막을 수 있는 수준에 불과했던 것이었다.
 ‘바슬리가 이때는 여기서 뛰었구나. 확실히…… 재능이 보이기는 하네.’
 로얄 앤트워프에서 그나마 가장 눈에 띄는 선수는 오른쪽 풀백으로 뛰고 있는 필 바슬리였다.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유스 출신으로 이번 시즌 프로계약을 맺고 임대 생활을 시작한 필 바슬리는 이후 선덜랜드로 이적하는 2008년까지 네 시즌 동안 임대를 전전하게 될 선수였다.
 선덜랜드나 스토크시티와 같은 프리미어리그 하위권 클럽에서 주로 활약한 선수로, 인지도가 그리 높지는 않았지만, 스코틀랜드 대표로 가끔 뽑히고 어쨌든 프리미어리그에서 활약한 선수였기 때문에 성배와는 비교할 수 없는 커리어를 쌓았었다.
 ‘바슬리가 저 정도 수준이면…… 충분히 해볼 만하겠다.’
 하지만 그의 플레이를 보면서 성배는 자신감을 갖게 되었다.
 프리미어리그에서 주전으로 활약했던 바슬리의 플레이는 성배의 눈에 그리 대단하게 보이지 않았다.
 아무래도 포지션이 포지션이다 보니 풀백들의 활약을 주의 깊게 살피고 있었는데, 바슬리의 플레이는 성배에게 전혀 놀라움을 주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물론 바슬리가 본격적으로 주전으로 활약하기 시작하는 것은 4년 뒤이고, 지금의 바슬리는 아직 기량이 올라오지 못한 상황이었지만 자신도 마찬가지였다.
 비록 전생의 기량들을 거의 다 찾는다고 해도 빅 리그에서 살아남기 쉽지 않겠지만, 전생에서 경험하지 못했던 수준 높은 리그에서의 플레이를 통해 빠르게 성장할 수 있는 나이였다.
 바슬리보다 오히려 더 유리하면 유리했지, 불리할 것은 전혀 없었다.
 [우우우우우우우우!!!!!!!!!!!]
 ‘저 사람은 확실히…… 여기 있을 선수는 아니야.’
 KSK 베베런의 네 번째 득점과 로얄 앤트워프 팬들의 야유가 동시에 터져 나왔다.
 이번 득점을 올린 선수는 이번 경기 내내 압도적인 플레이로 로얄 앤트워프를 유린하고 있었던 중앙 미드필더, 야야 투레였다.
 성배가 경기를 지켜보면서 그 대단함을 몸으로 느낄 수 있을 정도로 차원이 다른 플레이를 펼치더니 기어이 골까지 넣은 것이었다.
 
 굳이 설명이 필요 없는 선수였다.
 코트디부아르의 ASEC 미모사에서 유소년 시절을 보낸 야야 투레는 성배의 전생에서 18살에 데뷔한 이후 KSK 베베런, 메탈루흐 도네츠크, 올림피아코스, AS 모나코를 거치며 차근차근 조금 더 큰 리그를 경험했는데, 그 간격이 겨우 한 시즌에 불과했다.
 한 시즌 만에 자신의 가치를 증명하고 더 강한 리그, 더 강한 클럽으로 이적했을 정도로 리그 수준을 훌쩍 넘는 플레이를 보여준 것이었다.
 
 바르셀로나와 맨체스터 시티를 거치며 세계 최고의 선수가 된 야야 투레는 확실히 가진 바 재능 자체가 격이 달랐다.
 두 팀 모두 벨기에 리그에서도 약팀이기는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1부 리그 선수들인데 야야 투레가 내뿜고 있는 포스에 근접하는 선수조차 없었다.
 아직은 아스날의 무패 우승 도전의 핵심 멤버로 활약 중인 콜로 투레의 동생으로 더 유명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형보다 훨씬 더 큰 주목을 받게 될 것이 분명했다.
 
 이후 야야 투레는 다섯 번째 골까지 집어넣으며 로얄 앤트워프를 완전히 침몰시켰다.
 2-5. 보사윌슈타디온의 전광판에 기록된 스코어였다.
 점점 시간이 흐를수록 경기장의 분위기는 침통해졌고, 몇몇 팬들이 분노해 울부짖는 외침을 제외하면 16,000여 명의 관중들이 있다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조용했다.
 “흑, 흐윽……. 흑흑…….”
 “제길 제기랄……. 빌어먹을…….”
 성배의 주변에 자리를 잡고 있는 로얄 앤트워프 팬들 몇몇은 이미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성배의 주변만이 아니라 경기를 관람하고 있는 팬들 중 상당수가 이미 눈물을 참지 못하고 울고 있었다.
 오늘 경기에서 꼭 이겨야 강등 결정전 플레이오프라도 치를 수 있었지만, 이미 승리는 물 건너간 상황이었고, 최하위로 강등이 확정되기까지 몇 분 남지 않았다.
 
 팬들이 우는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네 개의 벨기에 리그 우승 트로피를 가지고 있는 로얄 앤트워프는 안더레흐트, 브뤼헤, 생 지루아즈, 리에쥬, 비어쇼트, 브뤼셀 FC에 이어 우승 횟수 공동 7위에 이름을 올리고 있는 명문 클럽이었다.
 하지만 그것은 로얄 앤트워프의 강등을 막는 데 전혀 도움을 주지 못했다.
 지금 확실한 것은 로얄 앤트워프가 이번 시즌 주필러 리그의 최하위에 그칠 확률이 압도적으로 높다는 것, 그래서 강등당할 것이 거의 확실시된다는 것뿐이었다.
 -삑!! 삐--익!!
 […….]
 결국, 기적은 일어나지 않았다.
 주심이 분 경기 종료 휘슬 소리가 마치 보사윌슈타디온 안에서 몇 번이고 메아리치는 듯했다.
 16,000여 명이 넘게 모인 이곳에서 소리를 내고 있는 것은 KSK 베베런의 원정 팬 2,000여 명과 30여 명의 KSK 베베런 관계자들뿐이었다.
 나머지 15,000여 명의 사람들은 아무 소리도 내지 못하고 그저 눈물을 흘리며 고개를 숙였다.
 ‘이것으로 끝이다. 로얄 앤트워프……. 당신들의 마지막을 보러 와주었으니, 내 마지막 의리도 여기까지야. 앞으로…… 당신들과 나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사람인 거야.’
 경기가 끝나자마자 성배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로얄 앤트워프에게는 애증에서도 증오의 감정이 더 크지만, 팬들에게는 아무런 악감정이 없었다.
 오히려 로얄 앤트워프의 강등이 결정됨으로 인해 슬퍼하고 오열하는 팬들의 모습에서 20년 뒤, 승격이 결정된 날에 기뻐하며 날뛰었던 모습이 떠올라 더욱 가슴이 아팠다.
 이 자리를 더 지키고 있기가 힘들 정도였다.
 ‘이것도 나 혼자 느끼는 감정이지. 어차피 지금 이 사람들에게 나는 아무런 연관이 없는 귀한 몸의 유망주일 뿐…….’
 안더레흐트나 스탕다르 리에쥬, 클럽 브뤼헤와 같은 클럽의 유망주들은 이런 중소클럽의 팬들에게는 입맛만 다실 수밖에 없는, 그림 위의 떡과 같은 존재였다.
 아마 로얄 앤트워프의 팬들이 자신을 보는 눈도 지금은 그 정도에 불과할 것이었다.
 ‘오늘로…… 로얄 앤트워프에 대한 내 감정은 모두 털어버리자. 저쪽에서는 아무 기억도 하지 못하는데, 나 혼자 가지고 있는 이 쓸모없는 기억들. 다 치우고 진짜로 새롭게 시작하자.’
 자리에서 일어난 성배는 보사윌슈타디온의 그라운드와 그곳을 가득 메운 로얄 앤트워프 팬들의 모습을 잠시 눈에 담다가 곧 관중석을 빠져나왔다.
 한 번 뒤돌아 걷기 시작한 뒤로는 단 한 번도 뒤를 쳐다보지 않았다.
 이제부터 로얄 앤트워프와 자신은 아무런 관련이 없는 것이었다.
 16년을 함께 한 애정도, 그것을 한 번에 쓰레기통에 박아버리게 만들었던 증오도, 이제는 없는 일이 되어야만 했다.
 
 <『낭만이 사라진 필드』 2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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