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물함
뒤로가기버튼 포춘 리바이어던 [E]

포춘 리바이어던 1권

2015.11.25 조회 1,229 추천 17


 # 프롤로그
 
 콘크리트 잔해를 헤치며 국방색의 ‘풀 플레이트 아머’를 착용한 중세의 기사가 걸음을 내딛었다.
  회색의 도시에 여기저기 피어오른 시뻘건 불길 속에서 바라보기엔 심히 이질적인 모습.
  그러나 마찬가지로 현대적 건물의 무너진 잔해 위에 존재하기엔 너무나 비이상적인 ‘서큐버스’가 다가오는 그를 내려다보고 있음은, 작금의 공간 자체를 시대적, 문화적 배경 자체를 뒤틀어 놓은 것 같이 변질시켜버린다.
  국방색의 페인팅이 된 중세의 기사는 더군다나 검과 방패 대신 소총을 손에 쥐었다. 그 시선은 오직 붕괴한 아파트 건물의 첨단에 올라 요염히 다리를 꼰 채 자신을 내려다보는 서큐버스를 향한다.
  요녀(妖女)의 등에 펄럭이는 박쥐의 날개는 여기저기 구멍이 뚫려있었다. 언뜻 본다면 걸레짝이나 다름없다. 그 지경으로 만든 것은 누가 보더라도 알 수 있듯이, 소총을 들고 있는 국방색의 기사.
  그러나 기사 역시도 갑옷의 군데군데가 찌그러지고 패여 있으며 한 걸음을 걸을 때 마다 기분 나쁜 쇳소리가 사방에 울려 퍼졌다. 겉이 망가졌는데 속에 든 사람이라고 멀쩡할까. 날지 못하는 서큐버스의 앞에 마주선 일그러진 기사는 누가 보더라도 알 수 있을 만큼 거칠게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후욱…… 후욱…….”
  숨소리에 묻어나오는 피맺힌 탁음. 끓는 가래를 채 뱉지 못하고 다시 삼킨 기사가 천천히 소총을 들어 서큐버스의 미간을 조준한다.
  기사는 한 치의 흔들림도 없이 방아쇠를 쥔 손가락을 안쪽으로 지그시 눌렀다. 그 때 까지도 서큐버스는 미동조차 않는다. 생긴 건 인간의 여성과 동일하나 그것은 표면적인 것일 뿐, 인간의 말을 하지 못하며 그저 살육만을 위해 진화한 괴물에 불과한 존재. 그 사실을 알지 못하여 얼마나 많은 동료들이 서큐버스라는 종족에게 살해당하고 말았던가.
  ‘아니, 어쩌면 이렇게 미친 세상에서 저런 미인에게 최후를 맞이하고 싶었던 걸지도 모르지.’
  국방색의 풀 플레이트 아머를 착용한 기사, 그 속에서 삐걱거리는 몸을 움직이고 있는 ‘김경우’는 문득 든 생각에 실소를 머금었다.
  그가 신이 아닌 이상 어찌 타인의 생각을 알 수 있으랴. 허나 김경우의 머릿속에도 이런 지긋지긋하고 주옥같은 세상을 하루빨리 등지고 싶다는 생각이 불쑥불쑥 튀어나왔다. 지금껏 그 욕망을 참고 버틴 것만 해도 용하다는 말을 들을 것이다.
  무려 20년 동안이나 괴물들과 싸워왔다. 아무런 징조도, 예고도 없이 괴물들을 토해내는 포탈이 생성되고 그들을 막기 위해 얼떨결에 능력자가 된 사람들의 투쟁은 그렇게나 오래 전 시작된 일이었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소중한 사람을 잃어버렸고, 오직 절망과 분노만을 동력으로 삼은 채 지금까지 싸워왔다.
  하지만 날이 갈수록 생성되는 포탈의 수는 더해져가고 그곳에서부터 튀어나오는 괴물들의 수는 기하급수적으로 늘어갔다.
  최초 포탈이 생성된 이후로 10년의 시간동안 인간은 9/10의 인구를 잃어버렸다. 이후 10년 동안은 오로지 방어전만을 반복 할 뿐이었다.
  인간은 승기를 잡지 못했다. 그 패착이 지금에 까지 이른 것이다. 한 번의 실수, 한 번의 패배. 모든 것이 대수롭지 않게 여겼던 최초 포탈의 웨이브에서 비롯되었다.
  인간이 저지른 커다란 실수로부터 20년이 지난 지금, 이제 남아있는 인류는 거의 없었다. 아무리 방어를 하더라도 전세를 뒤집을 수 없다는 절망. 희망이 존재하지 않는 매일의 반복은 아무리 굳건한 인간의 정신력이라도 야금야금 갉아 먹혀 나락을 향한다. 능력자조차 비탄에 빠져 괴물들에게 스스로 모가지를 내놓아 자살하는 마당. 아무 능력이 없는 일반인들은 진작 죽어버렸다.
  그리고 마침내 지구의 90%이상이 괴물에게 점령당한다. 더 이상 막아낼 힘도 없는데 포탈은 생성되고 괴물들은 더더욱 강력한 놈들이 튀어나온다.
  깊은 지하 속에서 끈적한 절망에 빠져있던 사람들은 마침내 하나의 도박을 실행하기로 결심했다.
 [서먼 선 프로젝트]
  지구에 태양을 불러내는 계획이었다.
  쉽게 말해서 고성능의 핵융합 탄을 터트려서 ‘동반자살’을 하자는 것.
  그들의 목표는 지하 깊은 곳 까지 뒤집어 엎어버리는 어마어마한 폭발력을 생성해내는 것이었다. 지하라고 해서 안전하지는 않았다. 웜 계열의 괴물이 포탈에서 튀어나온 이후부터는 지하벙커가 단순한 무덤 이외의 것이 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생존자들은 마리아나 해구의 은밀한 곳에서 계획을 진행했다. 아직 바다를 마음껏 유영하는 괴물은 등장하지 않았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러나 언제 또 치명적인 괴물이 나타날지 알 수 없어 연구원들은 항상 무언가에 쫓겨 다녔다.
  그 때문에 ‘서먼 선’이라는 인류 역사상 최악의 폭탄, ‘지구 자체를 뒤엎어버리기 위한 자폭장치’를 만들어낼 수 있었던 걸지도 모른다.
  누구도 성공을 장담하지 못했지만 결국 태양을 생성하는 핵융합 폭탄이 만들어졌고 그것은 지금껏 살아남아있던 수백 명의 능력자들에게 안겨져 세계 각지로 이동되었다.
  그중 한국의 자폭을 담당하게 된 것이 김경우였다. 김경우를 제외하고도 서울에 두 명, 대구에는 세 명이 가 있었다. 각자가 하나씩의 폭탄을 가지고 있지만 이미 포탈로 부터 토해져 나오는 괴물들은 능력자 개개인이 상대할 수 없는 존재가 되어있었다. 놈들은 무언가 눈치를 챈 것인지 죽음을 도외시하며 능력자들에게 달려들었고 악착같이 ‘서먼 선’을 파괴하고자 했다.
  김경우는 서큐버스가 다리를 꼬고 앉아있는 곳을 바라보았다. 놈은 서울에 당도한 능력자들을 발견하자마자 수km밖에서 부터 날아와 한 명의 능력자를 가루로 만들어버렸다. 그때 하나의 서먼 선이 완전히 파괴되어 버렸다. 덕분이라고 해야 할지, 불완전 폭발이 일어나 김경우와 능력자, 그리고 서큐버스는 사방으로 튕겨져 잠시 동안의 소강을 맞이했다. 그 이후 다른 한 명의 능력자는 김경우와 함께 서큐버스를 상대하다가 무언가에 홀린 듯 스스로 몸을 던졌고, 서큐버스에게 갈가리 찢겨져 죽었다.
  그 사이 김경우는 서큐버스의 날개를 걸레조각으로 만들어 놓을 수 있었다. 거의 미사일급의 속도를 자랑하던 서큐버스의 비행은 막아냈지만 그것 뿐. 애초에 음속을 넘는 속도로 비행하는 서큐버스의 몸이 사람과 같이 연약하다고 판단하는 건 멍청한 짓이다.
  김경우는 어디 쏠 테면 쏴 보라는 듯 여유롭게 앉아있는 서큐버스를 보며 입매를 씰룩였다. 그는 조준하고 있던 소총의 방아쇠를 서서히 당겼고, 임계점에 도달했음에도 더욱 힘주어 방아쇠를 당겼다. 그러자 소총에서는 철컥, 하는 작은 소리와 함께 방아쇠가 더욱 뒤로 움직였다.
  그리고…….
  쾅!
  소총의 총구를 비롯하여 몸체가 폭발해 사방으로 조각나 떨어졌다. 김경우는 충격 탓에 뒤로 넘어져 바닥을 뒹굴었다. 그는 재빨리 몸을 일으키며 고개를 들었다. 분명 소총이 폭발했건만, 당황하는 기색은 보이지 않았다. 더욱이 입가에는 미소가 걸린다.
  지금껏 김경우가 조준하고 있던 서큐버스의 미간. 그곳에 선명한 구멍 하나가 뚫려있었다.
  서큐버스는 믿을 수 없단 양 부릅뜬 눈을 한 채 서서히 뒤로 넘어갔다. 아파트의 잔해로 부터 요란스런 소리가 들리며 서큐버스가 바닥을 향해 굴러 떨어졌다.
  김경우는 안도의 한숨과 함께 급히 잔해 위로 올라갔다. 어쩐지 지금까지와는 다른 조급함이 어린 모습이었다.
  그는 틀림없이 서큐버스의 미간에 구멍이 뚫린 것을 보았다. 그리고 관통되지 않았다는 사실도 알아차렸다.
  지금까지 김경우가 사용하던 소총은 매우 특별한 물건이었다. 소총을 만들 때 들어간 기술들도 예사 것이 아니었으나, 무엇보다 중요한건 그것이 ‘강화’된 소총이라는 것이었다.
  ‘일곱 번이나 강화된 소총으로 쏜 탄환이 머리뼈 하나만 뚫고 힘을 잃어버렸다.’
  김경우는 방금 파괴되어버린 소총을 만들기 위해 사용된 ‘비전력’을 가늠해보았다. 생각만으로도 숨이 턱 막힌다. 어마어마하다. 정확히 얼마인지 짐작도 되지 않았다.
  보통 한 번만 강화하더라도 현실의 물리법칙을 아슬아슬하게 유지하는 수준으로 ‘특성’이 강화되었다. 두 번 강화하면 평범하게 물리법칙을 거슬러버린다. 세 번 강화한 시점부터 그 물건은 더 이상 현실의 것이 아니라고 봐도 무방했다.
  그런 강화능력을 ‘살상’에 특화된 소총을 대상으로 일곱 번이나 중첩시켰다. 그런데도 서큐버스의 머리뼈 한 겹 뚫는 게 고작이라?
  김경우는 척추를 타고 스멀스멀 기어오르는 불안감을 쉽사리 떨쳐낼 수 없었다. 갑작스러운 회의감이 온 몸을 잠식했다. 그의 발치, 지금은 죽고 없는 능력자가 가지고 왔던 소형화된 ‘서먼 선’이 너무나 초라해 보였다.
  ‘아무리 태양을 불러낸다 한들 결국 강력한 핵물리력(核物理力)에 불과한 게 아닌가?’
  김경우의 시선에 형체를 알아보기 힘들만큼 찢겨진 능력자의 시체가 보였다. 그는…… 직접적으로 몸에 능력을 적용하여 싸우는 접근형 타입이었다. 그래서 먼저 이 사실을 알아차리고, 포기를 해 버렸던 걸지도 모른다.
  무슨 수를 쓰더라도 지구상에서 괴물들을 없앨 수는 없다.
  김경우는 이를 악물며 고개를 흔들었다. 그리고 서먼 선을 챙겨 어깨에 걸쳤다. 어차피 성공하든 그렇지 못하든, 장치는 작동시켜야 했다. 그는 무너진 아파트의 잔해에서 내려와 평평한 땅에 서먼 선 두 개를 내려놓았다. 처음 만들 때부터 서먼 선은 연쇄반응이 일어나도록 설계되어 있었다. 둘 중 하나만 작동시키더라도 인근 서먼 선이 자동으로 반응하여 동시에 폭발 할 것이다. 그러고 나면 자신은 더 이상 이 세상 사람이 아니게 될 것이다.
  “후…….”
  김경우는 긴 한숨과 함께 서먼 선을 조작했다. 안전장치를 해제하고 폭발 버튼을 손에 쥐었다. 문득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보았다. 어차피 삶에 미련은 없다. 10년 전, 인간이 괴물의 공세에 밀리게 되고 방어만을 급급히 하게 된 시점부터 인류의 멸망은 예견 된 일이었으니까. 너무나 오랫동안 절망 속에 살아왔다. 무언가를 기대하기에는 바싹 메말라 버린 마음이 단비를 적시지 못하고 마냥 흘러내 버리고 만다.
  그럼에도 하늘이 푸른 것은 참으로 아름다웠다. 하늘에 떠다니는 커다란 구름이 인상적이었다. 마지막을 장식하기에는 썩 괜찮았다.
  “……어?”
  김경우는 버튼을 쥔 손가락에 힘을 주려다 멈칫했다. 뭔가 이상했다. 지금껏 그가 바라보고 있던 하늘의 구름이, 점점 거대해지고 있었다.
  ‘아니…… 저건…….’
  거대해 지는 것뿐만이 아니었다. 바람을 타고 움직이는 구름과는 달리…… 제멋대로 움직인다. 마치, 물속을 헤엄치는 뱀 같았다.
  그 순간.
  너무나도 눈부신 빛이 하늘에서 터져 나왔다. 흡사 하나의 태양. 머리 위를 내리쬐는 태양이 아니라, 인간의 손으로 만들어낸 막대한 에너지의 덩어리가 갑작스레 지구상에 소환되었다. 분명 대구로 파견된 능력자들이 서먼 선을 터트린 것이리라. 수백 km나 떨어져 있는데도 온 몸이 불타오르는 것만 같았다. 네 번 강화된 풀 플레이트 아머가 없었더라면 빛이 번쩍 하는 순간 잿더미가 되고 말았으리라.
  그 강력한 에너지의 방출 속에서 김경우는 단 하나의 생각만을 반복했다.
  ‘부족해……!’
  실제로 에너지의 중앙에 위치한다면 그조차 버티지 못한다는 건 자명했다. 직접 몸으로 겪어보니 인간의 마지막 발버둥이 약하지만은 않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김경우는 안도하기는커녕 초조한 마음이 되어 백열을 터트리는 인조 태양을 바라보았다.
  그것은 틀림없이 하늘을 헤엄치는 뱀의 경로 상에 위치했다. 아마 대구의 능력자들은 저 뱀을 노리고 서먼 선을 터트린 것 같았다. 그런데도 김경우는 꼭 저 뱀이 스스로 태양을 향해 돌진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설마…….’
  김경우의 시선이 못 박힌 듯 고정되었다. 거대한 뱀과 인조 태양의 거리가 가까워진다. 그리고 거대한 뱀은 순식간에 입을 벌려 태양을 집어삼켜 버렸다.
  “뭐……?!”
  삽시간에 지면을 끓이던 에너지가 사라진다. 그 상실감에 싸늘한 한기마저 들었다. 김경우는 숨이 턱 막히는 것을 느꼈다. 온 몸을 옥죄는 공포감이 밀려들었다.
  그리고 온 몸이 뻣뻣이 굳어간다.
  대구의 상공에서 태양을 집어삼킨 놈은, 서울의 한복판에 있는 김경우를 노려보고 있었다.
  “젠장!”
  놈이 다가온다. 눈으로 확인 가능할 정도로 놈의 덩치가 급속히 커지고 있었다. 도대체 원래 크기가 얼마나 되기에 저 멀리서 바라봄에도 가까이 다가오는 만큼 몸집이 커지는 게 눈으로 보인단 말인가?
  “빌어먹을! 어떻게 하란 말이야!”
  너무나 처량하고 굴욕적인 기분이었다. 이미 끝장이 난 걸 알았음에도 십 년이나 버티며 기회를 찾았다. 그리고 모든 것을 포기하고 함께 죽으려고 했다. 그런데 그것도 하지 못한다. 김경우는 메마른 마음 속 깊은 곳에 남아있던 단 하나의, 악이 치밀어 오르는 걸 느꼈다.
  “네놈만은 기필코 불태워 버리고 말겠다!”
  한 번 말라붙은 마음을 들쑤시자 어떻게 이런 감정이 남아있었나 싶을 정도로 온갖 감정들이 김경우의 몸 곳곳으로 퍼져나갔다.
  처음 본 괴물에 대한 공포.
  부모님의 사망에 대한 슬픔.
  그들을 죽음에 이르게 한 괴물들에 대한 분노.
  인류의 패배에 따른 절망.
  끊임없이 방어만 하던 때의 고독.
  마지막으로 홀로 죽어야 한다는 외로움.
  그러나 남아있던 감정들마저도 지독히 부정적인 것들 밖에 없었다. 땅과 물속에 숨어든 인간들처럼, 깊은 곳에 묻어두었던 감정들은 너무나 차갑고 무거웠다.
  그러나 그것은 틀림없이 김경우를 움직이게 만드는 연료가 되었다. 어느덧 윤곽이 제대로 보이기 시작하는 거대한 괴물을 바라보며 김경우는 발치에 내려놓았던 서먼 선 두 개를 양 손으로 하나씩 움켜쥐었다. 그리고 그의 몸에서 푸른 불길이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김경우는 양 손에 의식을 집중했다. 그리고 손에 느껴지는 서먼 선 두 개가 처음부터 하나였다는 생각을 강하게 의식했다.
  그러자 김경우의 몸에만 머물던 청화(靑火)가 서먼 선에도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그는 푸르게 변한 눈동자로 그것을 바라보며 담담히 외쳤다.
  “각성!”
  김경우의 외침과 동시에 서먼 선에 머물던 청화가 서로를 향해 맹렬히 불타올랐다. 그리고 한 순간 빛이 번쩍이더니 김경우의 눈앞엔 하나의 서먼 선만이 덩그러니 놓였다.
  그리고 푸르게 변한 그의 눈에 보이는 문장.
 
  【Summon Sun+: 핵융합 폭탄: 99.9%
  정보: 각성 1단계.
  특성: 1. 현재의 지식으로 이해 할 수 없음】
 
  ‘이해 할 수 없다고?’
  김경우는 20년 동안 능력자로 살아오면서 처음 보는 설명에 의문을 품었다. 그러나 곧 고개를 흔들어 상념을 떨쳐냈다. 어쨌든 성공했다는 것에 의의를 두었다. 충분한 비전력만 있으면 몇 번이고 강화를 시도할 수 있는 ‘강화’와는 달리 실패하면 대상 물질이 파괴되어 버릴 수 있는 ‘각성’은 도박성이 큰 선택이었다. 하지만 두 개를 따로 터트리느니 고유한 특성을 생성하는 각성이 그나마 효과가 먹힐 것이라 생각했고, 이제 그 결과를 볼 차례가 되었다.
  “그 전에…….”
  김경우는 시시각각 다가오는 거대한 뱀을 바라보며 질린 표정을 지었다. 지금만 하더라도 시야를 가득 메우는 덩치는 어마어마했다. 그런데도 놈은 아직 서울에 당도하지도 못한 것이다. 그렇기에, 남은 시간동안 단 하나에 모든 비전력을 투자할 생각이었다.
  “강화!”
  김경우의 담담한 외침과 함께, 각성 전과 별다른 변화가 없는 서먼 선에 새로이 청화가 치솟았다. 그 결과는 즉시 나타났다.
 
  【Summon Sun+ Ⅰ: 핵융합 폭탄: 99.9%
  정보: 각성 1단계. 강화 1단계.
  특성: 1. 현재의 지식으로 이해 할 수 없음】
 
  동시에 김경우는 자신의 몸에서 무언가가 쭉 빠져나가는 탈력감을 느꼈다. 이는 물리법칙을 왜곡하는 비전력이 영구적으로 대상 물질에 적용되었기 때문에 나타나는 현상이었다. 이미 수십, 수백, 수천 번을 넘게 느꼈던 기분인지라 김경우는 망설임 없이 곧장 다음 강화를 시도했다.
 
  【Summon Sun+ Ⅱ: 핵융합 폭탄: 99.9%】
 
  “아직 실패 뜨기는 이르지?”
  김경우는 재빨리 세 번째 강화를 시도했다.
 
  【Summon Sun+ Ⅲ: 핵융합 폭탄: 99.9%】
 
  “크흡……! 퉤!”
  그의 입에서 검은 피가 울컥 토해졌다. 조금 전, 서큐버스와 싸우면서 엉망이 된 내장이 급격한 비전력 소모로 진탕이 되었다.
  하지만 어차피 죽기로 결심한 몸. 김경우의 입에서 피맺힌 외침이 토해졌다.
  “강화!”
 
  【Summon Sun+ Ⅳ: 핵융합 폭탄: 99.9%】
 
  순간, 김경우의 몸이 크게 휘청거렸다. 지금까지 몸에 담아두었던 대부분의 비전력이 일시에 소모되었다. 자칫 정신을 놓아버릴 수도 있는 일이었다. 김경우는 가까스로 정신을 추스르며 힘겹게 손을 뻗었다. 그 손끝에는 바닥에 널브러져 있는 서큐버스로부터 굴러 나온 보랏빛 보석이 있었다.
  “희귀한걸 드랍했군.”
  그의 얼굴에 보일 듯 말 듯한 미소가 어렸다. 그의 말대로 보랏빛 보석은 10년 전, 상급의 괴물들이 등장하면서 부터 나오기 시작한 물질이었다. 기존의 푸른빛 보석과 달리 대량의 비전력을 보유하고 있지만, 괴물들과 완전히 동화된 탓에 인간이 사용할 경우 신체가 오염되어 방사능에 노출된 것처럼 고통 속에 사망하게 되는 위험한 물질이었다. 따라서 기계로 된 장치의 동력원으로나 사용하곤 하던 것이었는데, 김경우는 그것을 그대로 손에 움켜쥔 채 다른 한 손을 서먼 선에 올렸다.
  “강화……!”
  채 입을 다 떼기도 전에 막대한 비전력이 팔을 타고 올라왔다. 그것은 충전이라기보다 침식에 가까운 종류였고, 삽시간에 그의 한쪽 팔이 시커멓게 오염되어 버렸다. 마찬가지로 서먼 선에 닿은 팔 또한 보랏빛 보석으로 부터 흘러나오는 비전력의 흐름에 따라 점차 검은색으로 변색되어갔다.
  “쿨럭!”
  분명히 느꼈다. 심장이 한 차례 멈췄다가 간신히 다시 뛰었다. 목을 타고 오염된 검은 피가 주르르 흘러내렸다. 그 충격 탓일까, 김경우의 한쪽 눈동자가 힘을 잃고 뒤집혀 버렸다. 하지만 남은 한쪽 눈동자에는 비전력이 응집되는 서먼 선이 보였고, 빛이 밝아졌다 흐려졌다를 반복하던 서먼 선 위로 마침내 문장 하나가 나타났다.
 
  【Summon Sun+ Ⅴ: 핵융합 폭탄: 99.9%】
 
  “하…… 하하, 처음이군. 한 번에 강화 다섯 번 중첩을 내리 성공시키는 건…….”
  김경우는 감탄인지 탄식인지 모를 말을 중얼거리며 풀려가는 눈동자를 힘주어 바로잡았다. 그의 앞으로는 거대한 뱀이 입을 벌린 채 다가오고 있었다. 도대체 얼마나 거대한 것인지, 고개를 들어도 그 끝이 보이질 않는다. 김경우는 마치 넋을 잃은 사람처럼 멍하니 뱀의 입이 자신을 덮치는 것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리고 입이 완전히 닫히는 순간, 서먼 선의 폭발버튼을 눌렀다.
 
 세상이 빛으로 가득했다. 어떤 고통도 없었고, 아무런 생각도 들지 않는 시간이 계속됐다.
  빛은 새하얀 색이었다. 온통 흰 빛이 가득했지만 눈부시지 않았고, 오히려 포근한 기분마저 들었다.
  너무나 오랜 시간동안 쉬지 않고 싸워왔다. 마치 태양빛을 머금은 이불 속에 웅크린 것처럼, 언제까지라도 이곳에 머물고 싶다는 마음만이 가득했다.
  그렇게 얼마나 오랜 시간이 흘렀을까.
  김경우의 머릿속에는 씨앗에서부터 싹트는 새싹처럼 자그마한 사고가 움트기 시작했다.
  ‘난…… 죽은 건가?’
  죽음을 인지 한 순간부터 분명하게 생전의 기억을 떠올릴 수 있었다. 그의 강화능력으로 비전력을 내포하게 된 핵융합 폭탄은 버튼을 누르는 순간 세상의 모든 것을 지워버렸다. 최심부에 위치한 김경우 역시 그 영향에서 벗어날 수는 없었다. 그를 삼켰던 거대한 뱀 역시도 마찬가지로.
  지구상에 소환된 태양은 도화지에 그린 그림을 지우개로 문질러 지우는 것처럼 세상에 존재하는 물질들을 입자를 넘어선 에너지 단위로 분해해버렸다. 그 에너지는 태양의 연료가 되어 연쇄반응을 일으켰다. 에너지가 존재하는 한 태양은 끝없이 타오를 것이며, 그로 인해 분해된 에너지는 또다시 태양의 연료로 공급된다. 어쩌면 지구 자체가 태양의 연료가 되어 사라졌을지도 몰랐다.
  분명 김경우는 버튼을 누르는 순간 최초로 서먼 선의 연료가 되었을 것이다. 그런데 어떻게 그 이후의 결과를 알 수 있는지는 스스로도 이해하지 못했다. 마치 누군가가 귓가에 속삭여 주는 것처럼 당연히 알 수가 있었다. 김경우는 신기해하면서도 동시에 의아해했다.
  ‘나는…… 어떻게 생각을 할 수가 있지?’
  그는 자신이 죽었음을 확신했다. 그가 착용하고 있던 국방색의 풀 플레이트 아머 Ⅳ 따위로는 서먼 선이 방출하는 에너지의 한 줄기조차 견뎌내지 못할 테다. 고작 서큐버스와 싸우면서도 여기저기 찌그러지던 갑옷이 어찌 태양의 현신을 버틸쏘냐. 하지만 김경우는 생각을 할 수 있었고, 그것은 뇌가 사멸되지 않았음을 의미했다. 그건 자신이 죽지 않았다는 뜻이다.
  ‘내가…… 살아있어?’
  소환된 태양의 에너지는 한낱 인간의 신경속도를 아득히 웃돌았다. 뜨거움이고 아픔이고 뭐고 간에 느낄 새도 없이 에너지 단위로 분해되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살아있다는 건……. 도대체?
  “크윽.”
  이해 할 수 없는 일들이 지금까지의 스트레스와 겹치자 두통이 밀려들었다. 김경우는 머리를 움켜쥐며 신음을 흘렸다. 그리고 그 상태로 굳어버렸다.
  “…… 목소리가…….”
  그 뿐만이 아니다. 머리를 짚은 손에서는 체온과 함께 손가락 마디마디가 분명히 느껴졌다. 손가락 사이로 흐르는 머리카락의 감촉. 눈꺼풀 아래를 비집고 들어오는 밝은 태양의 빛이 오랜 시간 어두운 곳에 있다가 나온 것처럼 망막을 자극했다.
  눈이 부셔서 잘 떠지지 않는 눈꺼풀을 조금씩, 천천히 들어올렸다.
  이윽고 눈을 떠 바라본 세상은…… 새들이 지저귀는 푸른 아침이었다.
  20년 전 사라져 버린 세상의 모습.
  그것이 지금 김경우의 눈앞에 펼쳐져 있었다.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이야?”
  그는 무엇 하나 이해 할 수 없었다.
  김경우는 곧 주변을 둘러봤다. 그가 있는 장소는 창문이 딸린 작은 방이었다. 침대가 있고 책상이 있다. 벽의 군데군데엔 물리법칙과 화학기호가 적힌 포스트잇이 규칙성 없이 여기저기 붙어있었다. 그렇다고 연구실은 아니었다. 그저 독특한 대학생의 방이었다.
  “아…….”
  무척이나 그리운 풍경. 이곳은 20년 전, 그가 마지막으로 가족과 함께 살았던 집이었다. 아침이면 어머니가 아침을 차려주었고 아버지가 회사에 출근한다며 급히 밥을 드시고 나가던 공간. 종종 서류가방을 잊어버려 그가 버스 정류장 까지 달려갔던 추억도 있었다.
  다시는 볼 일이 없다고 생각했다. 10여 년 전 부터는 단 한 번도 이 집에 대해 생각 해 본 적이 없었다.
  그런데 이렇게…… 다시 보게 될 줄은…….
  김경우는 자신의 몸에 덮인 이불을 바라봤다. 조심스레 그것을 집어 들어 냄새를 맡았다. 합성세제의 냄새가 난다. 언젠가 부터 생산이 중단되어 물빨래를 하게 되고 나서부터는 더 이상 맡아볼 수 없던 냄새. 조금은 자극적인 향에 김경우는 이불을 움켜쥔 손을 덜덜 떨었다.
  억지로 눈물을 참는다. 그는 하나의 가정을 세우고 있었다. 김경우는 침대에서 내려와 비틀거리는 걸음으로 방의 끝에 위치한 문을 향해 다가갔다.
  ‘만약…… 만약 강화된 서머 선이 비전력 때문에 5차원 공간 이상을 붕괴시켰다면…….’
  자세한 이론은 알지 못한다. 그러나 그의 입장에서 작년 이맘때쯤, 핵융합 폭탄이 완성 될 시점에 연구원들이 지나가듯 중얼거린 이야기를 들은 것이 있었다.
  한 순간에 태양을 만들어낼 정도의 에너지가 집중된다면, 그 중심부의 공간은 아주 찰나지만 3차원을 붕괴시키고 4차원에 강제적으로 도달 한다는 것.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의미가 없는 이야기일 뿐이었다. 4차원에 도달한들 인간이 그곳에 간섭 할 여지는 없을 테니까.
  하지만 실제로 폭발한 서먼 선은 김경우의 강화 능력으로 인해 비전력이라는 논외의 에너지가 적용되었다. 그것이 어떻게 간섭을 하게 되었는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그로 인해 상위 차원 몇 개가 더 붕괴되었다면…….
  가장 최심부에 있었던 김경우라는 존재는, 틀림없이 그 영향을 받는다.
  확정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그렇지만 중요한 것은 김경우의 메마른 마음속에 한 방울의 희망이 적셔지기 시작했다는 점이었다.
  그는 손을 뻗어 문손잡이를 잡았다. 차가운 감촉이 척추를 타고 짜릿하게 퍼져나간다. 한동안 손잡이를 잡은 채 긴장된 숨을 몰아쉬던 그는 마침내 손목을 비틀었고, 서서히 문을 열었다.
  “어머, 경우야. 일찍 일어났네?”
  경우는 한달음에 뛰어가 어머니를 와락 끌어안았다. 목에서는 아무런 소리도 나지 않았다. 그동안 막혀있던 둑이 터지기라도 한 듯, 뜨거운 눈물만이 펑펑 쏟아져 내렸다.
  그런 경우를 소파에 앉아서 신문을 보고 계시던 아버지가 당황스럽게 쳐다보았다. 어머니는 살짝 놀란 듯 했지만 이내 미소를 지으며 아들을 꼭 끌어안아주었다.
  “왜 그러니? 우리 경우, 무서운 꿈 꿨나봐?”
  이미 스무 살이 넘었건만, 어머니에게 아들은 언제나 어린아이였던가? 경우는 그저 고개만 끄덕이며 한참을 울었다. 두 모자의 곁으로 다가온 아버지는 경우의 어깨를 큰 손으로 두드렸다.
  “녀석, 다 커서 뭐하는 거냐.”
  “미안해요…… 고마워요…….”
  경우는 울면서 확신했다. 이유는 알 수 없지만, 그 원리도 알 수 없지만, 결과적으로 그는 틀림없이 과거로 돌아왔다. 그것도 언제나 바라 마지않던 두 부모님이 살아계시는 세상으로 말이다.
  경우는 가슴으로 느껴지는 부모님의 체온을 느끼며 끌어안은 팔에 더욱 힘을 주었다. 이것은 소중한 것이다. 다시는 잃지 않는다. 무슨 일이 있더라도 지킬 것이다! 그는 마음속으로 끊임없이 다짐하고 또 다짐했다.
  경우의 갑작스런 소란 통에 아침은 정신없이 지나갔다. 이처럼 경우가 극심한 감정 변화를 보이는 적은 처음이었던지라 걱정이 된 아버지는 회사 출근을 빠지셨다. 결과적으로 그건 다행스런 일이 되었다.
 
  경우는 심각한 표정으로 달력을 노려봤다. 오늘은 11월 8일. 어머니와 아버지의 제삿날이었다.
  ‘이제는 아니지만.’
  즉, 미래의 경우는 오늘 어머니와 아버지를 잃어버렸다.
  세상에 예고도, 징조도 없이 갑작스레 생성되는 포탈. 그것이 나타나는 최초의 시기가 바로 오늘.
  경우는 아버지가 회사를 출근하지 않고 하루 쉬겠다고 하시는 말씀을 듣고 적잖이 가슴을 쓸어내렸다. 최초로 포탈이 생성된 날짜는 기억하지만 시간은 기억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경우의 입장에서는 오늘의 일이 20년도 더 지난 과거의 일이었다. 날짜는 기억하더라도 시간까지 기억하기에는 그간의 괴리차가 너무나 컸다. 하지만 적어도 오늘 저녁이 되기 전에는 포탈이 생성 될 것이고, 그때엔 과거와 달리 가족의 곁에 자신이 있을 것이다.
  ‘아니지, 과거라고 해야 하나, 미래라고 해야 하나?’
  갑자기 든 쓸데없는 생각에 피식 웃어버린 경우는, 두 손을 들어 달력을 팍! 소리 나게 짚었다. 다시 소중한 것을 잃는 경험은 사양이었다. 그야말로 천운으로 주어진 재시작의 기회. 반드시 가족을 안전하게 지키고, 인류의 잘못된 선택도 바로잡고 말겠다는 다짐을 세웠다. 세상에 등장하는 포탈은 사람 한 명이 죽을수록 막아내는 것이 그만큼 힘들어진다. 피할 수 없는 선택이기도 했다. 될수록 많은 사람을 구할수록 가족의 안전도 높아지는 일이었다.
  ‘우선, 가장 먼저 해야 할 건…… 최대한 많은 포탈을 파괴하고, 동시에 비전 등급을 높이는 일.’
  경우는 미래에 ‘강화’ 능력자가 되었다. 일종의 버프에 해당하는 비전투적 능력이지만, 현대무기에 적용이 가능하다는 점 덕분에 최후의 순간까지 살아남은 능력자 중 하나가 될 수 있었다. 그러나 강화능력은 생명체에게는 적용이 불가능했다. 즉, 강화된 무기나 방어구를 온전히 본인의 힘만으로 사용해야 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강화된 물건의 반발력을 평범한 인간의 몸으로는 감당하기가 힘들었다. 미래에 사용했던 소총도 반동이 심해서 강화된 갑옷을 입은 상황에서조차 뒤로 튕겨나가 버리지 않았던가? 결국 사용자의 신체가 부하를 견딜 수 있어야만 했다. 그리고 그것은 능력자가 되면서 생기는 비전력으로 충당이 가능했다. 비전력은 능력자들의 고유한 비전을 사용하는 것뿐만 아니라 신체를 월등히 강화시켜주는 효능도 갖고 있기 때문이었다.
  ‘최소한…… D등급은 되어야 두 번 강화한 물건을 감당할 수 있어.’
  F에서부터 시작하는 비전등급은 비전력의 최대 보유치를 나타낸다. 얻게 되는 능력에 따라 얼마간의 차이는 있지만 편차는 대동소이한 수준. 이 비전등급은 쉽게 말해 비전력을 담는 그릇의 강도를 의미했다. 비전등급이 클수록 보다 많은 비전력을 가질 수 있고, 그만큼 몸이 강해지는 것이다.
  경우는 미래(?)의 경험을 바탕으로, 우선적으로 달성해야 할 목표를 D등급으로 상정했다. 그리고 포탈의 파괴와 괴물의 제거를 위해 필요한 물건을 찬찬히 짚어보았다. 최초로 얻게 되는 F등급의 비전력으로는 1단계 강화조차 몇 번 하지 못한다. 게다가 비전등급이 낮을수록 비전력이 완충될 때까지 시간이 꽤 걸린다. 신중하게 선택해야만 했다.
  ‘특성이 뚜렷한 물건이 강화로 인한 능력치 상승폭이 크지만…… 그만큼 강화 할 때 비전력이 더 소모된다는 단점이 있으니까.’
  평범한 활동복을 강화하는 것과 전문가용 체육복을 강화하는 건 능력치 상승의 범위가 달랐다. 애초에 물건이 만들어진 목적이 다르기 때문에, 그 부분의 특성에 맞춰 능력치가 상승하는 것이었다. 더군다나 같은 목적으로 만들어진 물건이라 하더라도 그 전문성이 어느 정도냐에 따라 강화 시 소모되는 비전력이 달라졌다. 만약 진검 같은 것을 강화한다면 F등급의 비전력으로는 단번에 총량이 거덜 나 버릴 것이다. 비록 능력자이긴 하나 버프 능력자로 분류되는 경우는 비전 등급으로 인한 신체능력 상승폭이 여타 공격형 능력자들보다 낮았다. 비전등급 F로서는 세계 챔피언 수준의 신체능력밖에 가지지 못한다. 그것이 결코 낮은 건 아니지만, 이세계의 괴물과 맞서기에는 너무나 위험했다. 방어력이 낮고, 회피력도 딸렸다.
  그것은 경우가 미래에서 괴물들과 싸울 때, 구태여 온몸을 뒤덮는 갑옷을 강화해서 입던 이유였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무기로 괴물을 쓰러뜨리기 전에 자신이 먼저 쓰러뜨림 당해버린다. 실상 경우에게는 공격보다 방어가 더욱 우선시 되는 것이었다.
  ‘게다가 아직…… 지금은, 평화로운 세상이야. 진검 같은걸 함부로 구할 수가 없어. 그리고 오늘 안에 구할 수도 없고.
  만약 괴물들이 포탈에서 튀어나와 세상을 혼돈에 빠뜨리던 시점이라면, 길거리 음식을 사 먹는 것 보다 더욱 구하기 쉬운 게 무기일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다. 당장 진검을 사겠다고 하면 부모님들부터 그를 이상한 자식이라 생각할게 분명했다. 분명 머지않은 시간 안에 포탈이 생성되고 괴물이 나타난다. 그 사실을 알고 있음에도 당장 취할 수 있는 선택폭은 상당히 제한적이었다.
  “그러고 보니…….”
  경우는 베란다에 나가 새삼 아파트 단지를 둘러보았다. 벌써 20년이나 지난 까닭에 어떤 건물이 있었는지 몽땅 잊어버렸다. 그렇기에 하나하나 찬찬히 살펴보던 경우는 이내 화색을 지으며 한 건물을 응시했다.
  검도관. 동네 아이들이 다니는 자그마한 도장이었다. 하지만 틀림없이 ‘검도복’이 있을 것이다. 또한 목도도 있을 터. 그 두 개 라면 F등급의 비전력으로도 충분히 1단계 강화가 가능하다는 계산이 나왔다.
  경우는 즉시 움직였다. 머뭇거릴 시간이 없었다. 언제 포탈이 생성될지 알 수 없었기에 순간순간이 귀중했다.
  “다녀오겠습니다.”
  “어디 가니?”
  “잠깐 밑에요. 빨리 돌아오겠습니다. 그리고 오늘은 정말로 외출하지 마세요.”
  “그래. 그 이야기 귀에 딱지가 앉도록 들었어. 조심해서 다녀오렴.”
  “……네, 조심해서…… 다녀오겠습니다.”
  경우는 좀 전에 그렇게 울었으면서도 다시금 목이 메는걸 느끼며 현관문을 닫았다. 그의 눈동자는 붉게 충혈 되었으나 결심이 서린 의지가 담겨있었다.
  ‘반드시…… 지킬 겁니다. 제가, 모두를.’
  잠시 벽에 기대어 마음을 추스른 경우는 소매를 들어 눈을 슥슥 닦았다. 거울을 보고 옷매무새를 정돈한 그는 아파트 단지 인근의 검도관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검도복과 목검을 빌려달라고?”
  “예. 오늘 하루만 부탁드립니다. 내일 아침에 깨끗이 돌려드리겠습니다.”
  경우는 자신의 앞에 선 검도관의 관장님을 향해 정중히 부탁했다. 대충 동아리 활동으로 ‘검도부 촬영’이 있을 거라고 둘러댄 상황. 하지만 내심 가슴이 찔리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내일이면 이곳에 안 계실 테니까요…….’
  괴물을 토해내는 포탈은 오늘 저녁을 맞이하기 전에 전 세계적으로 무작위 생성된다. 그리고 내일이 되면 세상은 혼란에 빠진다. 그런 마당에 마음 편히 검도관을 운영 할 수는 없을 것이다. 한국에도 적지 않은 포탈이 생성되었음을 어렴풋이 기억하기 때문이었다.
  결국, 말로는 빌려달라는 것이지만 속내는 그냥 가져가겠다는 것이다.
  그러한 내막을 알 길이 없는 관장님은 한동안 고민을 하는 듯하더니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어차피 몇 개 남으니까 가져가도 좋다. 단, 호구(護具)에 문제가 생기면 배상해야 한다.”
  “네! 감사합니다!”
  경우는 감사한 마음을 담아 인사를 하고서 곧 묵직한 호구와 목검을 받을 수 있었다. 선뜻 부탁을 들어준 관장님께 자신의 연락처와 함께 작은 음료수 상자를 선물로 건네준 경우는 호구와 목검을 들고 곧장 집으로 돌아왔다. 부모님들은 갑작스레 호구를 들고 온 경우에게 무슨 일이냐는 질문을 하셨지만 지금으로서는 딱히 무어라 답을 할 수가 없어 그냥 촬영용 소품으로 빌려왔다는 이야기를 했다. 즉흥적인 대답에 반신반의하는 두 분이셨지만 그렇다고 해서 뭔가 문제가 되는 것도 아니었기에 넘어가는 눈치였다.
  그렇게 하나의 준비를 마치자 어느새 아침이 흘러가고 점심때가 되었다.
  경우는 20여년 만에 어머니께서 해주시는 점심을 먹고 감동의 여운에 잠겼다. 음식 하나하나가 입 안에서 녹아내리는 것만 같았다. 그 까닭에 평소보다 훨씬 많이 먹는 경우를 보며 부모님들은 신기해하는 눈치셨다.
  게다가…….
  “어머니, 제가 설거지 할게요.”
  “네가……?”
  “네. 그러니까 쉬고 계세요.”
  “흐응…….”
  예전엔 시켜도 그렇게 하지 않던 설거지를 먼저 나서서 하겠다고 하니 어머니는 의심스러운 눈초리를 보내면서도 살짝 기쁜 미소를 지으셨다. 경우는 그런 어머니를 거실로 돌려보내고 콧노래 까지 부르면서 설거지를 했다.
  십 여분 정도 수세미를 문지르던 중.
  ‘응……?’
  경우는 갑자기 가슴을 무겁게 짓누르는 기이한 감각을 느꼈다. 마치 심장을 두 손으로 움켜쥐는 듯한 압박감.
  그것은 두 번째 겪는 감각이었고, 앞으로 일어날 일들의 시발점을 찍는 현상이었다.
  “결국…… 시작되는 건가…….”
  경우는 마지막으로 씻던 그릇을 식기대에 조심스레 내려놓고 긴장된 표정을 한 채 방으로 들어갔다. 지나가며 바라본 부모님들은 거실에서 텔레비전을 보고 계셨다. 안색을 살펴보니 아무것도 느끼지 못한 모양이었다. 경우는 그 사실에 안도했다. 능력이 없다면, 싸울 필요도 없다.
  경우는 자신의 방에 들어가 침대 옆을 바라보았다. 몇 평 되지 않는 작은 방의 한편엔 아침에 빌려온 호구와 목검이 가지런히 놓여있었다.
  그 앞에 양반다리를 하고 앉은 경우는 두 눈을 감고 길게 숨을 들이쉬었다. 설마 설마 했건만, 이제는 정말 각오를 다져야 할 때가 되었다.
  “후우…….”
  조금 전, 심장의 압박을 느꼈던 순간부터 경우는 이미 비전력을 지닌 능력자가 되었다. 자신의 기억으로도 과거에 이날 언제쯤인가 심장이 이상하게 욱신거렸던 기억이 있었다. 다만 그때엔 그 증세가 무엇인지 몰랐지만 지금은 알고 있다는 것. 그리고 어떻게 활용해야 하는지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는 점이 다를 테다.
  “어디에 있더라…….”
  하지만 F등급의 비전력은 너무나 작은 양이기 때문에 가장 처음엔 집중해서 찾아야만 하는 필요성이 있었다. 단순히 비전력을 지닌 것만으로는 흔히 능력이라 일컫는 ‘비전’을 사용하지 못한다. 비전력이 완전히 신체와 동화되어야만 진정한 비전능력자로 각성하기 때문이었다.
  물론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 생활을 하더라도 언젠가는 이질적인 기운을 느끼고 비전력을 알아차리게 된다. 하지만 경우는 한시가 급했기 때문에 직접 체내의 비전력을 찾는 수고를 했다. 이틀, 하루, 혹은 몇 시간이라 할지라도, 허투루 낭비할 수 없었다.
  ‘찾았다.’
  한동안 심장 주변에 의식을 집중하던 경우는 씨익 웃으며 그곳에 존재하는 이질적인 무언가를 정확히 인식했다. 그의 비전력은 최초 압박을 느꼈던 부위인 심장의 중심에 머물러 있었다. 그 크기가 쌀 한 톨 정도인지라, 위치를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정확히 포착하는 데에 몇 분의 시간이 걸렸다. 하지만 일단 찾고 나자 뭉쳐있던 비전력이 화악 풀려나가며 몸 전체에 고루 퍼졌다. 동시에 경우의 눈이 푸르게 물들었다.
  ‘우선 호구부터.’
  경우는 몸에 비전력이 차오르는걸 느낀 순간 곧장 강화를 시도했다. 딱히 몸 상태에 대해 알아 볼 필요성은 느끼지 않았다. 미래에서 20년 동안이나 미친 듯이 사용 해 왔던 비전력이다. 비록 과거로 돌아왔다고는 하나 그 경험이 고스란히 남아있는 마당에 어수룩이 더듬거릴 이유는 없었다.
  경우는 눈앞의 호구에 손을 얹었다. 그리고 비전력이 강화하고자 하는 물체에 깃든다는 생각을 했다. 그의 입술이 열리며 담담한 음성이 흘러나왔다.
  “강화.”
  순간, 경우는 눈앞이 새하얗게 물드는 걸 느꼈다. 피가 머리에서 쫘악 빠져나가는 기분이다. 도무지 몸을 가눌 수가 없어 그대로 호구에 엎어져 버리고 말았다. 용케 정신은 잃지 않아 생각을 이어갈 수 있었다.
  ‘무, 뭐냐 이건……!’
  마치 몸 안의 모든 비전력을 일시에 쏟아 부은 느낌이었다. 경우의 기억으로는 이렇게 비전력이 바닥 날 때 까지 강화를 한 것은 15년 전, 적의 공격에 지상 벙커가 붕괴되는 걸 막기 위해 정신을 잃을 때 까지 벙커를 강화했던 적이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그때엔 정말로 정신을 잃어버렸고, 결국 괴물들의 공격에 벙커가 파괴되어 모든 능력자들이 처참히 살해당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당시 경우는 무너진 벙커의 잔해에 깔려있었기에 괴물들의 눈을 피할 수 있었다.
  아무튼 그 일을 계기로 비전력을 모두 소모하는 건 자살행위나 마찬가지라는 걸 알게 되었고, 다시는 그런 실수를 범하지 않았다.
  그런데 지금 경우는 비전력을 몽땅 소모해 버렸다. 간신히 몸 상태를 살펴보니 고작 손가락 사이에 쥔 모래알 티끌만큼의 비전력이 남아있을 뿐이었다. 아주 조금만 더 비전력이 소모되었다면 누군가를 지키기는커녕 소중한 사람들이 죽어가는 걸 보지도 못한 채 기절한 상태로 괴물에게 살해당할 뻔 했다. 절로 오한이 치민다.
  경우는 억지로 몸을 움직여서 호구의 상태를 살펴보았다. 그의 푸른 눈동자 위로 짤막한 문장이 떠올랐다.
 
  【검도 호구(護具) Ⅰ: 방어구: 72.8%
  정보: 강화 1단계.
  특성: 없음.】
 
  정상적으로 1단계 강화가 되었다. 내구도는 새 물건이 아닌지라 높지 않은 편. 각성을 하지 않았으니 특성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 외의 특별한 부분은 없었다.
  다시 살펴봐도, 정상적으로 강화가 되었다. 그리고 강화를 통해 비전력을 갖게 된 물체의 정보를 볼 수 있는 것도 정상적이었다.
  강화 능력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문제는, 경우의 몸속에 비전력이 몇 알의 모래알 티끌 마냥 남았다는 점.
  ‘뭐가 잘못 된 거지?’
  무려 20년 동안이나 강화 능력을 사용 해 왔다. 숨 쉬는 것처럼 자연스럽게 강화능력을 사용할 수 있는 경우였다. 또한 어느 정도의 물건이 얼마만큼의 비전력을 필요로 하는지도 훤히 꿰고 있었다. 틀림없이 비전등급 F의 강화능력자는 호구와 목검 정도의 물건을 각각 1단계 강화하더라도 여유 비전력이 남는다. 그런데 이 꼴은 도대체 뭐란 말인가?
  “크윽……!”
  언제까지나 이렇게 고꾸라져 있을 수는 없는 노릇이다. 경우는 식은땀을 흘리며 힘겹게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책상 위에 놓인 작은 거울을 집어 들었다.
  그곳에 자신의 모습을 비췄다. 그러자 거울 너머로 안색이 새하얀 자신의 모습이 보인다.
  그리고 그 위로 덧씌워지듯 나타나는 몇몇의 문장들.
 
  【김경우: 인간: 비전등급 F
  정보: 비전력이 부족하다.
  특성: 행운(fortune)】
 
  “행…… 운……?”
  경우는 몇 번이나 눈을 비비고 다시 살펴봤다. 그러나 몇 번을 보더라도 자신의 몸 위로 표시되는 문장은 변함이 없었다.
  한참을 멍히 쳐다보던 경우는 서서히 눈살을 찌푸렸다.
 
  ……뭔가 잘못되었다.
 
 
 # 포탈
 
  ‘어째서 비전특성이 강화가 아닌 거지?’
  갖가지 가설들이 머릿속을 맴돌았다. 경우가 지닌 지식으로는 이해범위를 벗어난 상황이었기에 잡다한 생각들이 대부분을 차지했다.
  ‘이 세상은 과거로 돌아오기 전과 다른 세상인가?’
  ‘평행세계?’
  ‘내가 미래와는 달리 집 안에서 비전능력자로 각성을 했기 때문에?’
  쓰잘데 없는 생각들이 사고를 어지럽힌다. 답을 찾고자 했으나 외려 머리만 복잡해지고 말았다.
  하지만…… 동시에 미래의 기억 중 하나가 떠오른다. 언뜻 흰 가운을 입고 있던 한 남자의 모습이 보이는 듯 했다. 그가 옅은 미소와 함께 입을 열었다.
  ‘5차원 이상에 간섭을 하게 되면, 엔트로피의 법칙의 반대격인 역엔트로피 상수가 적용되오. 척력과 인력이 존재하듯, 확장하는 우주공간에는 최초의 형태로 돌아가고자 하는 아주 미약한 인력이 존재하는 것이지. 만약 역엔트로피 상수를 임의로 컨트롤 할 수 있다면 어떠한 제약 없이도 시간 역행을 할 수가 있을 거요. 그러나 그것은 지금의 차원에서는 측정도, 관측도 불가. 게다가 억지로 상위 차원으로 올라간다 한들, 그 상수에 간섭 할 기술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사실상 시간 역행은 이론도 아닌, 가설로만 존재하는 기술이오.’
  유달리 떠들기 좋아하던 한 연구원의 말이었다. 그는 가벼운 행동을 많이 하긴 했으나 그건 그만큼 아는 게 많다는 반증이며, 실제로도 서먼 선을 완성시키는데 핵심적 기술을 개발한 것도 그 연구원이었다.
  덕분이랄지, 엉킨 실타래 같던 사고가 깨끗이 정리되었다. 경우는 지금의 시공간으로 ‘시간 역행’ 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서먼 선의 엄청난 순간에너지가 상위의 차원을 부수고 역엔트로피 상수마저 변동시켰으리라.
  더불어 자신의 비전특성이 변해버린 이유를 이해했다.
  ‘시간 역행을 했기 때문에…….’
  시간 역행 자체는 아무런 영향도 끼치지 않는다. 그러나 중요한건, 경우가 겪은 시간 역행이 그의 삶에 커다란 변수로 작용했다는 점이었다.
  비전특성은 해당 능력자가 지금껏 살아오면서 가장 크게 영향을 받은 하나의 요인을 모델로 삼았다. 가치관이라고도 볼 수 있었다. 지난 삶의 경우는 스스로의 힘이 아닌, 어떠한 물건의 힘을 빌려 문제를 해결하고자 하는 소극적인 성향이 강했었다. 그렇기 때문에 자신을 비롯한 생명체에게는 간섭할 수 없으나, 온갖 물건들에는 간섭을 할 수 있는 강화 능력을 특성으로 얻게 된 것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경우는 앞으로 닥칠 문제에 적극적으로 대처하려 하고 있으며, 그 수단으로 강화능력을 얻고자 했다. 만약 이것 뿐 이라면 각성하는 비전특성에 큰 영향이 없었겠지만…… 현재 경우는, 이렇듯 과거로 돌아온 일 자체가 하늘의 축복이라 여길 만큼 엄청난 행운임을 잘 알고 있었다. 이 시간대에 존재하는 경우는 천운으로 빚어진 존재나 다름없었다.
  그렇기에 그 어떤 가치관이나 사고보다도 존재의의 자체에 기인했다. 애초에 이 시간대에 경우가 살아가는 이상, 벗어날 수 없는 결과였다.
  따라서 주어진 비전특성, 행운(fortune).
  경우는 이 특성에 대해 인정하며, 동시에 낭패한 심정을 감출 수 없었다.
  ‘명확한 개념이 정립되지 않은 패시브 계(界). 공격도, 방어도, 게다가 버프도 아니야. 생존에 직접적인 연관이 없어. 즉……. 비전등급이 높아져도, 상승하는 신체능력의 폭이 매우 낮을 것. 게다가 가장 큰 문제는…… 부적합 판정…….’
  경우의 시선이 1단계 강화된 호구에 이르렀다. 이것은 틀림없이 경우의 비전력으로 ‘강화’되었다. 비전력은 보유한 사람에 따라 특색이 존재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비전력이 다른 무언가가 되는 건 아니었다. 비전력은 비전력. 전기와 같다. 사람에 따라 병렬이나 직렬로 사용방법을 바꾸는 경우는 있겠지만 전기 자체가 다른 에너지로 변하는 건 아닌 것과 마찬가지였다.
  즉, ‘비전에 맞는 비전력 사용방법만 알고 있다면’ 비전특성에 관계없이 어떤 비전이라도 사용하는 게 가능하다.
  다만 비전특성에 따른 적합성 문제.
  그것은 예를 들어 220v의 가전제품에 110v전기를 연결한 것과 유사하여…… 하나의 비전을 사용하는데 수 가지의 문제점을 야기한다.
  비전의 발현속도, 크기, 지속시간 등. 무엇보다 비전을 완성하는데 필요로 하는 비전력의 소모량이 늘어나며, 부적합 판정을 받는 비전은 모든 조건이 갖춰지더라도 독립적으로 실패 할 확률이 존재했다.
  경우는 미래에 얼마 남지 않은 비전능력자들과 함께 생활하면서 서로의 비전을 기탄없이 공개하고 공유하는 자리를 가졌었다. 이미 세상이 멸망을 향해 치닫는 마당에 비밀이랍시고 감추며 숨길 까닭이 없었던 것이다. 게다가 혹시나 전세를 역전시킬 하나의 방도가 되지 않을까 하는 희망을 품기도 했었다.
  그러나 결과는 대실패.
  당시 막대한 비전력을 보유하던 생존자들이었으나 ‘부적합 판정’을 받은 채 사용하게 된 타인의 비전은 위력도 위력이거니와 몇 번 사용하지 못 할 정도로 비전력의 소모가 극심했다. 더불어 독립적 실패확률의 영향으로 위급한 상황에 오히려 목숨을 위협할 가능성도 있었다.
  물론 경우의 강화 능력과 같이 비전투적인 버프 능력은 전투가 벌어지기 전에 확률적 성공을 띄운 뒤 전투에 임할 수 있었으나, 차라리 그럴 바에는 직접 경우에게 강화를 부탁하는 게 백배 나았다. 여러 가지로 실망만을 안겨준 채 끝나버린 회담이었다.
  하지만 ‘부적합 판정’이라는 조건이 존재한다는 걸 알 수 있었고, 그것은 지금의 경우에게 혼란을 벗어나도록 만들어주는 큰 도움이 되었다.
  실질적인 해결 방안은 되지 못할지라도.
  “경우야, 빨리 나와보렴! TV좀 봐!”
  그때, 거실에서부터 어머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경우는 그사이 조금 회복된 비전력에 힘입어 간신히 자리에서 일어섰다. 문득 발치에 놓인 호구에 미련 어린 시선이 꽂혔다. 얼마 지나지 않으면 경우는 저 호구를 입고 괴물들 속으로 뛰어들어야 할 것이다. 계획 한 대로였다면 목검마저 강화하여 전설적인 명검 부럽지 않게 휘두를 수 있었을 텐데, 그러지 못함으로 인해 상당한 시간적 소요가 발생하리라. 그 피해를 막기 위해서는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할 지…….
  경우는 씁쓸한 입맛을 삼키며 방문을 열었다. 그렇지 않아도 이제부터 일어날 일들에 대해 부모님께 설명 드려야 할 참이다. 경우가 각오를 다진 채 거실로 나가보니, 부모님들은 두 눈을 커다랗게 뜬 채 TV를 지켜보고 계셨다.
  방송은 공영방송국에서 틀어주는 것이었다.
  화면 상단에 위치한 LIVE 로고.
  TV에서는, 전국 각지에 등장한 괴물들에 대해 보도하고 있었다.
  “세상에, 이게 무슨 일이니?”
  들려오는 어머니의 음성은 놀란 기색이 다분하다. 경우는 거실로 나와 소파에 걸터앉았다. TV화면 속을 보니 지금껏 영화나 만화로만 보았던 기괴한 괴물들이 거리를 활보하는 장면을 방송하고 있었다.
  「킥…… 키긱…….」
  「꺄아아악! 도망쳐!」
  “저런……!”
  화면 속 놈들은 닥치는 대로 인간의 문물을 파괴하고 다녔다. 차량, 도보, 건물 할 것 없이 사람의 손이 닿은 것이라면 모든 것을 부수고 망가뜨렸다. 그러다 움직이는 사람이 눈에 띄기라도 하면 모든 걸 제쳐놓고 달려들었다. 너무나 일방적인 살의를 드러낸다. 엄청난 근력으로 풀쩍 풀쩍 뛰어가 단숨에 연약한 인간의 몸을 찢어버린다.
  찢어지는 비명과 함께 피와 살이 거리 한복판에 흩어졌다. 너무나 자주 보아 온 경우조차 눈살이 찌푸려지는 광경일진데 아무것도 알지 못하는 부모님들은 오죽할까. 방송국에서도 상황이 상황인지라 모자이크 같은 건 생각도 하지 못한다. 그들도 빠르게 이동하는 차량을 타고 대략적인 상황만을 카메라에 담을 뿐이었다. 적나라한 모습이 그대로 방송되었다.
  어머니는 헛구역질을 하시곤 화장실을 다녀왔다. 그 사이 아버지께서 TV채널을 돌렸지만 모든 방송에서 괴물들의 모습만을 보여 줄 뿐이었다. 그 중에는 외국 방송도 있었는데, 그곳은 개인이 소유한 총기로 대응사격을 하는 장면이 나왔다. 그러나 괴물의 몸에는 탄환이 스친 흔적만 남을 뿐, 무엇 하나 실질적인 피해를 주는 것이 없었다. 그 탓에 한동안 대치상태를 보이던 사람들은 결국 흉포해진 괴물의 습격을 막지 못하고 산 채로 사지가 뜯겨나가는 죽음을 맞이했다.
  아버지께서 믿을 수 없단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어째서 총으로도 잡지 못하는 거냐?”
  “육체에 분포하는 비전력이 물리력을 저항하기 때문이에요. 그래서 피부의 일부만을 상처 입히고 튕겨나가 버리는 거죠.”
  “그…… 뭐라고? 경우, 너…….”
  의아한 표정으로 고개를 돌리며 물으시던 아버지는 순간 흠칫 놀라고 말았다. 어느새 경우는 방에서 들고 나온 호구를 착용 중이었다. 갑작스런 아들의 행동에 의구심이 들기 이전에, 어째서 ‘이 상황에?’라는 의문이 떠올랐다. 그리고 이내 아버지의 눈이 서서히 커지기 시작했다.
  “경우야. 너 설마…….”
  “……저는 저 괴물들이 무엇인지, 어떻게 상대해야 하는지 알고 있어요. 그리고 그만한 능력도 갖고 있구요.”
  ‘지금은 모르겠지만요.’
  경우는 뒤의 말을 삼키며 소파에 기대어 두었던 목검을 집어 들었다. 그 모습까지 보고서 경우가 무엇을 하려는지 모를 부모님이 아니시다.
  “위험하다! 지금 저 모습을 보고도 밖에 나갈 생각을 하느냐? 곧 군인들이 올 게다. 얌전히 기다리고 있어!”
  “아버지. 저는 단순히 제 자존심을 과시하기 위해 나가려는 게 아니에요. 저놈들은 방금 말했듯이 총과 포탄이 통하는 놈들이 아닙니다. 더군다나 시간이 지날수록 더욱 많이 나타날 겁니다. 아니, 틀림없이 더욱 많아지지요. 그건 저 괴물들을 뱉어내는 포탈이란 것이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저는…… 그걸 부수러 가는 거예요. 괴물들과 싸우려는 게 아니에요.”
  경우는 처음 이 시공간에 떨어져서 지금껏 생각했던 계획을 간략화 하여 말씀드렸다. 비록 그것이 무엇 하나 이해하지 못할 것이라고 해도, 아무 생각 없이 뛰쳐나간다는 게 아니라는 걸 알리기 위해서였다. 이미 이십년 넘게 함께 살아온 가족이다. 그 뜻은 알지 못하더라도, 의미는 이해할 수 있다. 아버지는 호구를 착용하고 목검까지 움켜쥔 경우를 보며 반쯤 들어 올렸던 손을 멈추었다. 자신의 아들은 역정을 내며 말린다 하더라도 제 발로 걸어 나갈 것이다. 그런 직감이 들었다.
  말릴 수 없다. 대신 걱정만이 가득 차오른다.
  “왜…… 너냐?”
  “제게 그럴 능력이 주어졌기 때문입니다.”
  “너 말고도 있는 것이냐?”
  “있습니다. 숫자로 따지자면 상당할겁니다. 하지만 비율로 따지자면 턱없이 부족합니다.”
  경우는 미래, 메뚜기 떼처럼 밀려드는 괴물 앞에 잘 익은 벼처럼 삼켜져 버렸던 수천, 수만의 사람들을 떠올렸다. 그들은 너무나 방관했다. 물론 나름대로 열심히 노력했지만, 그래서는 안 되었다. 필사적이어야 했다. 작정하고 덤벼오는 놈들을 간만 보고 방치했다. 안 된다. 철저히 말살시켜야만 했던 것이었다.
  경우는 그러기 위해 필요한 최초의 시간을 벌고자 했다. 지금 당황하고 혼란스러운 사람들이 정신을 차리고 대책을 마련하기까지의 귀중한 시간. 상황을 분석하고 적절한 방안을 마련하기까지의 ‘안전한’ 여유시간이 필요했다. 그래야만이 앞으로 발생할 피해를 줄이고, 효과적으로 괴물을 막아낼 수 있을 테니까.
  그러기 위한 최초의 방편이 바로 포탈의 파괴. 이미 넘어온 놈들은 어쩔 수 없으나 앞으로 넘어올 놈들을 미연에 차단한다. 포탈이 파괴되면 다음 포탈이 생성될 때 까지 분명 적지 않은 시간이 주어질 것이다. 그 사이에 경우는 괴물에 대한 정보와 대처방안을 널리 퍼트릴 계획이었다.
  하지만 이곳의 주변에 생성된 포탈은 무엇보다 우선해서 파괴한다. 자칫 부모님이 괴물의 습격을 당할 수 있는 것이다.
  아무리 경우가 날고 기어서 괴물에 대한 정보와 대처방안을 퍼트린다 할지라도 부모님의 털끝 하나라도 다친다면 그건 모두 부질없는 짓이 된다. 경우에게 있어서 세상의 모든 사람들은 지킬 수 있을 만큼 지켜야 할 존재지만, 가장 앞에 놓여있는 것은 부모님의 안전이었다. 결코 다시 잃지 않겠노라 스스로에게 다짐하였으니.
  그러기 위해서 경우는 걸음을 떼었다. 어느덧 어머니도 거실에 나와 경우를 지켜보고 계셨다. 지금까지 하는 말을 모두 들으셨는지 경우가 문을 열고 나감에도 아무 말이 없으셨다. 그저 양 손을 모아 꼭 움켜쥐실 뿐.
  말 하지 않았지만, 알 수 있다. 그들의 자식이 누구를 위해 저 끔찍한 곳으로 발을 들여놓으려 하는지…….
  경우는 현관문을 닫고, 이내 부모님의 시야에서 사라졌다.
 
  거리는 사람과 괴물의 도가니로 아비규환이었다. 불과 몇 시간 전 까지만 하더라도 평온한 평일의 점심이던 공간이 피와 인육, 사람의 비명, 괴물의 기분 나쁜 울음소리로 가득했다. 부서진 건물은 흉측히 뼈대가 되는 철근을 드러냈으며 뒤집히고 찌그러진 차량은 기름에 불이 붙어 거칠게 타올랐다.
  사람들은 급히 건물로 도망쳤다. 하지만 대부분의 유리문은 괴물을 막지 못했고, 두터운 문 뒤로 숨지 못한 사람들은 깊은 절망과 함께 산 채로 몸이 짓 뜯기는 죽음을 맞이해야만 했다.
  간혹 아파트나 빌라로 도망치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굳게 닫힌 문 앞에서 처참히 죽어갔으며, 혹여 이웃을 숨겨준 사람들은 괴물이 철문을 부서뜨리고 난입하여 함께 죽임을 당했다.
  괴물의 앞에서는 도덕과 윤리가 적용되지 않았다. 철저히 방관하는 것만이 조금이나마 더 오래 삶을 연명할 수 있는 방법이었다.
  사람들은 그것을 학습하기 시작했고, 곳곳에서 살려 달라 외치며 도움을 청하는 목소리에서 귀를 닫았다. 그런 목소리는 하나 둘씩 멎어갔으며, 그럴수록 사람들은 더욱 멀리 도망칠 수 있었다.
  그런데, 그런 사람들의 행로를 역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한 명의 사람이 있었다. 그는 참혹한 상황에 맞지 않게 너무나 나약해 보이는 호구를 착용하고, 한 손에 목검을 들고 있었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하단 양, 저 멀리 보이는 괴물들의 모습에도 주저하거나 망설임 없이 걸음을 옮겼다.
  포탈을 찾아 나선 경우였다.
  그는 밀려오는 인파가 너무 거센 탓에 차마 달리지 못하고 꾸준히 걸어서 이동하는 중이었다. 경우는 도망치는 사람들과 반대 방향으로 걸어가고 있었기 때문에 다급한 사람들은 경우의 몸을 밀치기도 하고 부딪치기도 했다. 하지만 마치 서서히 나아가는 전차에 충돌하기라도 하는 양, 경우는 어떠한 흔들림도 없이 묵묵히 걸음을 내딛었다. 오히려 그와 부딪친 사람들이 고통을 호소하며 옆으로 튕겨나갔다. 고작 호구 하나를 착용한 한 명의 사람에게서 말이다.
  시간이 지날수록 도로에 분포하는 사람의 밀도가 줄어들고 좀 더 자세히 괴물의 모습이 보일 때가 되서야 경우는 조금씩 속도를 내서 달려갔다. 탄력이 붙은 경우는 다리에 힘을 주었고, 그럴수록 지면이 쭉쭉 뒤로 밀려갔다. 종국엔 거의 육상선수가 선보이는 전력질주 급의 이동이 되었다. 그럼에도 호구 속의 경우는 고른 숨만을 내쉬었다. 그러면서 눈동자는 괴물이 퍼져나가는 방사상 파형으로부터 중심부를 탐색했다.
  지금 경우의 최우선 목표는 괴물의 처치도, 그들에게 죽임을 당하는 사람들의 구원도 아닌, 포탈의 파괴였다. 한시라도 빨리 포탈을 파괴해야만 늘어날 괴물로 인한 피해가 줄어들게 분명했다.
  아직 최초로 등장한 괴물들이라 그런지 어디에서도 조직적인 움직임은 보이지 않았다. 그것은 즉, 놈들이 포탈의 위치를 숨기려고 하지 않는다는 뜻이었다. 아마 이대로 괴물들이 퍼져 나오는 곳을 거슬러 올라가기만 해도 그곳에 포탈이 있을 것이다. 경우는 한층 더 발걸음에 힘을 더했다.
  그때였다. 경우는 자신의 진로 상에 떡하니 괴물 하나가 가로막고 서 있는 것을 보았다. 놈은 빠르게 달려오는 경우를 발견하지 못했는지 마냥 눈앞의 사냥감에 대해서만 온 관심을 집중하고 있었다.
  괴물의 앞에는 중형 승합차가 있었고, 놈은 간을 보는 것인지 차량에 두 손을 얹고 앞뒤로 거칠게 흔드는 중이었다. 그럴수록 안에서 터져 나오는 비명이 더욱 커져갔다. 차량의 겉을 보니 어느 방송국의 차량인 것 같았다. 빠져도 한참 전에 빠졌어야 했는데, 촬영을 중단할 시기를 잘못 판단해서 그만 붙잡혀 버린 모양이었다. 지지리도 운이 없었다.
  ‘구해줘야 하나?’
  도리 상으로는 저들을 도와주는 게 맞다. 하지만 경우는 한시라도 빨리 포탈을 찾아야만 했다. 몇 분 지체하는 것만으로도 상당한 수의 괴물들이 쏟아져 나올 것이다. 놈들이 튀어나오는 포탈은 이동하는 인원의 한계가 없었다. 단지 포탈의 크기에 따라서 이동하는 괴물의 종류가 제한될 뿐이었다. 즉, 포탈을 없애기 전까지는 무한대로 괴물들이 나오게 되는 것이다. 그 탓에 최초의 승기를 빼앗겨 버린 인류는 20년이라는 긴 시간동안 투쟁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괴물에게 패배 해 버리고 말았다. 경우가 초조해 하는 것도 그런 연유가 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아무리 급하다고는 하나, 바로 눈앞에 보이는 적을 내버려 두는 것도 우스운 일이다.
  경우는 정면의 괴물을 다시 살펴봤다. 놈은 쥐 같은 생김새에 몸집은 사람만하고 누더기 같은 옷까지 걸쳐 입었다. 얼굴이 짐승의 형상을 유지하고 있으므로 수인형 괴물 중에서도 하급에 속하는 놈이었다. 힘은 셀지 몰라도 판단력은 떨어진다. 단지 신경 쓰이는 건 짐승에 가까운 만큼 본능적인 방어신경이 발달했다는 점.
  지금 경우의 무기인 목검으로는 한 번 놓치면 다시 제대로 된 피해를 입히기 까지 꽤 시간이 걸릴 터였다. 만약 강화된 목검이었다면 이야기가 달라졌겠지만, 지금은 평범한 나무로 만든 목검일 뿐이다.
  ‘차라리…….’
  경우는 괴물의 앞까지 당도했을 때, 지면을 있는 힘껏 박차고 달려들었다. 그러자 삽시간에 괴물의 얼굴이 코앞에 다가온다. 경우는 그대로 머리를 들이밀었다.
  쾅!
  사방에 폭음에 가까운 충돌음이 울려 퍼졌다. 호구의 머리를 보호하는 단단한 호면이 수인형 괴물의 안면을 정확히 가격했다. 비전력으로 강화된 경우의 호구는 괴물의 신체에 깃들어 있던 비전력을 완벽히 상쇄시켰다. 더군다나 육상선수의 전력질주 급 에너지를 고스란히 받아낸 상황. 괴물은 차량에서 멀찍이 튕겨나가 몇 번이나 바닥을 나뒹굴었다.
  경우는 재빨리 달려가 손에 쥔 목검으로 놈의 머리를 내리쳤다. 갑작스런 기습(?)에 정신을 차리지 못하던 괴물은 뒤이어 날아오는 목검을 피하지 못하고 고스란히 공격을 허용하고 말았다. 그리고 비전력이 흩어져 물리력이 통용되는 괴물의 두개골은 망설임 없는 경우의 목검에 그대로 부서졌다.
  퍼석!
  “후우.”
  한숨을 내쉰 경우는 경련을 일으키는 괴물의 몸을 발로 툭 차서 완전히 넘어뜨렸다. 이 시공간으로 돌아온 이후 처음으로 괴물을 죽인 것이다. 경우는 쓴 미소와 함께 다시 한 번 자신이 비전능력자가 되었음을 인지했다. 비록 과거와는 주어진 특성이 다르지만…….
  “위험해요!”
  경우가 도와주기 위해 괴물을 날려버린 차량에서, 한 사람이 비명을 지르며 경우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정확히는 그의 뒤편. 경우는 흠칫 놀라며 급히 뒤를 돌아보았고, 시야를 한가득 메운 묵직한 쇠몽둥이를 볼 수 있었다.
  콰앙!
  눈앞이 새하얗게 물들었다. 경우는 뒤로 고개가 꺾이며 허공을 날아 무너진 건물의 잔해에 틀어박혔다. 그 상태로 경우는 움직임을 멎었다.
  차량에 숨어있던 사람들은 비명을 삼켰다. 경우를 날려버린 놈, 개의 얼굴을 한 수인형 괴물이 그들을 돌아보았다.
  “스읍…….”
  아주 잠깐 동안의 안식이었다. 마치 이십대 초반의 세상 물정 모르던 청년의 모습이던 경우는 피 냄새가 나는 공기를 한 번 들이쉬는 것으로 평생을 전쟁터에서 뒹굴어온 노장의 숨결을 내뱉었다.
  지금껏 막혀있던 귀와 눈, 그리고 두꺼운 옷을 벗어던진 것 삽시간에 주변의 ‘위험’정보가 뇌리로 쏟아져 들어온다. 귀가 먹먹하고 눈이 욱신거린다. 피부는 또 얼마나 따끔거리는가. 하지만 오히려 그것이 미래에 경우가 항상 느껴왔던 감각이었다. 공격도, 방어도 아닌 버프 타입에 불과했던 경우가 평생을 괴물들과 뒹굴며 각성시킨 단 하나의 ‘생존전략’.
  “……내가 무슨 소드마스터도 아니고.”
  경우는 손 안에 움켜쥐고 있던 목검을 놓아버렸다. 그리고 오랜 잠에서 깨어 일어나는 것 양 손으로 건물의 무너진 잔해를 짚고 몸을 일으켰다.
  그로부터 몇 걸음 앞에 등을 돌리고 선 괴물의 등이 보인다. 경우의 눈이 호면(護面)의 안에서 귀신의 그것마냥 푸르게 타오르기 시작한다.
 
  【치프: 수인: 비전등급 ?】
 
  “네임드로구만.”
  짧게 뱉어 말한 경우는 숨을 크게 들이쉬더니 이내 거친 고함을 내질렀다.
  “그아아아아!”
  갑작스런 괴성 때문인가, 경우로 부터 완전히 관심을 끊고서 차량에 몸을 숨긴 사람들을 향해 다가가던 개머리의 괴물, 치프는 걸음을 멈추고 고개를 돌렸다. 그런 치프의 눈에 자신을 향해 맹렬한 기세로 달려오는 경우의 모습이 각인되었다.
  “크아앙!”
  치프가 마주 괴성을 질렀다. 분노에 찬 음성이었다. 분명 죽었거나 움직이지도 못하리라 판단했다. 이 세상의 생물체는 너무나 나약했다. 그래서 더 이상 신경도 쓰지 않았다.
  그런데 어째서 저 인간은 저리도 멀쩡한 모습으로 움직이는가?
  경우가 치프의 앞에 도달했다. 치프는 손에 쥔 쇠몽둥이를 힘껏 내리쳤다. 큰 힘을 담는 만큼 동작이 느렸다. 일단 비전능력자로 각성 한 순간 이 세상의 어떤 일반인보다도 월등한 신체능력을 가지게 된다. 특별한 기교가 있는 것도 아니고 그저 힘차게 내리치는 쇠몽둥이 따위, 피하지 못하는 게 이상한 일일테다.
  경우는 달리는 상태 그대로 어깨만 비틀었다. 그러자 치프의 쇠몽둥이가 경우의 가슴 앞을 스쳐지나간다. 순식간에 놈의 품 안으로 파고들게 된 상황, 경우의 발이 치프의 허벅지를 박차며 그의 몸을 높게 띄워 올린다. 거의 3m에 이르던 치프보다 경우의 눈높이가 더욱 높아졌다.
  그리고 놈의 머리와 경우의 허리가 일직선상에 놓이는 순간.
  경우는 있는 힘껏 허리를 비틀어 무릎으로 치프의 턱을 후려쳤다. 전속력으로 달려오던 에너지와 놈의 허벅지를 박차고 뛰어오르던 에너지가 허리를 비틀어 후려친 경우의 무릎에 집중되었다. 그것이 고스란히 치프의 턱으로 흘러들어간다.
  우둑!
  무언가 부러지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무엇이 부러졌는지는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치프는 고개를 높게 쳐든 채 스르르 무너졌다. 그 뒤를 이어 허공에 떠 있던 경우가 지면에 착지한다.
  그때, 쓰러진 줄만 알았던 치프가 마지막 발버둥을 치듯 손에 쥔 쇠몽둥이를 집어던졌다.
  그것은 곧장 경우의 가슴을 향해 날아갔고, 경우는 팔을 휘둘러 손목을 보호하는 호완(護腕)으로 힘껏 쳐내버렸다.
  탱그랑…….
  맥없는 쇳소리가 아스팔트 도로 위에서 들려온다. 마지막 공격이 실패하는 것과 동시에 치프는 바닥으로 쓰러졌다.
  경우는 호완으로 막아낸 치프의 쇠몽둥이를 집어 들었다. 그리고 이전과 마찬가지로 치프의 머리를 향해 수차례 내리쳤다.
  규격화된 움직임? 절제된 동작? 전부 필요 없다.
  애초에 전투 방식이 다르다.
  데미지를 주고 싶다면 무기를 강화하면 된다. 공격 타입이 아닌 탓에 상대적으로 부족한 신체능력은 굳이 애써 보완하지 않는다.
  강화된 보호 장비로 그냥 맞아주면 되는 것이다. 그러기 위한 강화능력이다.
  “단단한 놈이군.”
  퍽! 하며 치프의 두개골이 부서졌다. 그제서야 경우는 쇠몽둥이를 휘두르던 손길을 멈추었다. 그리고 방금 전 치프의 공격을 막았던 손목을 바라봤다. 애초에 상대방으로 부터의 손목 공격을 보호하기 위한 호완이다. 당연하게도 어떤 피해도 없었다.
  알고 있지만 다시 확인해본 것이다. 자신의 20년을 지탱해 주었던 강화능력이 제대로 성공 한 것인지.
  결과는…… 나쁘지 않다.
  그러나 좋은 것도 아니었다.
  경우는 이전의 20대 청년의 부드러운 표정이 아닌, 전쟁터의 참혹함을 목전에 둔 백전노장의 굳은 표정으로 고개를 들었다.
  그 때를 맞춰 푸르게 타오르는 그의 눈앞으로 몇몇의 문장들이 나타났다.
 
  【누적된 비전력이 한계치를 돌파했습니다. 한계를 넘어선 비전력에 맞춰 비전등급이 상승합니다.】
  【비전등급이 상승했습니다. 비전력의 총량이 늘어나며 비전력의 회복속도가 상승하고 회복량이 증가합니다.】
  【최초로 비전등급을 상승시켰습니다. ‘각성의 선구자’ 타이틀이 생성됩니다.】
  【최초로 ‘비전등급 E’ 가 되었습니다. 비전력 총량에 추가 비전력이 주어지며, 비전력의 회복속도와 회복량 수치가 상승합니다.】
  【최초로 포탈 가디언을 쓰러뜨렸습니다. 모든 포탈 가디언으로 부터 우선적인 공격을 받게 됩니다.】
  【28-7 포탈 가디언을 쓰러뜨렸습니다. 포탈 가디언으로 부터 총 비전력의 0.1%를 빼앗아 옵니다.】
  【28-7 포탈 가디언을 쓰러뜨렸습니다. 인근 10km반경의 적들이 포탈로 되돌아옵니다.】
  【모든 신체이상이 회복됩니다.】
 
  “호오……?”
  경우는 욱신거리던 몸이 따뜻한 물속에 들어간 것 부드럽게 풀리는 걸 느꼈다. 더불어 바닥을 치고 있던 비전력이 온 몸 가득 차오른다. 또한 쓰러뜨린 치프로부터 정제된 비전력이 흘러들어왔다. 분명 온 몸 가득 차올랐다 생각했던 비전력이 미량이나 조금 더 틀을 깨고 확장 된 것을 알 수 있었다.
  기분 좋은 안락함 속에서 경우는 눈앞에 떠오른 문장들을 보며 흥미롭다는 표정을 지었다.
  타이틀이나 최초의 업적 등, 이것은 미래의 경우가 겪지 못했던 상황이었다.
  “저, 저기……!”
  그때, 지금껏 방송국 차량 안에서 숨죽인 채 경우의 싸움을 지켜보던 이들은 다급함 어린 목소리로 경우의 우측편을 가리켰다. 경우가 고개를 돌려 바라보니, 그곳에는 유리같이 투명한 크리스털 결정체가 허공에 둥실둥실 떠 있었다. 개수는 네 개. 각각의 크리스털들이 하나씩의 꼭짓점을 이룬 채 정사면체의 왜곡점을 형성하고 있었다. 바로 그 왜곡된 공간에서부터 쥐의 머리를 한 괴물이 고개를 들이밀고 나오려는 중이었다.
  “포탈이로군.”
  경우는 포탈을 향해 뚜벅뚜벅 걸어갔다. 그리고 손에 쥔 쇠몽둥이를 어깨 위로 치켜들고, 가차 없이 눈앞의 크리스털 하나를 후려 쳐 버렸다.
  깡!
  “키이이익!”
  포탈이 고장난 TV화면처럼 지직거렸다. 잠시 제 위치를 벗어났던 크리스털은 재빠르게 원래의 위치로 돌아갔다. 그러자 포탈이 점차 안정되기 시작한다. 경우는 그 틈을 기다리지 않고 재차 쇠몽둥이를 휘둘렀다.
  깡! 깡! 깡! 깡!
  “키익! 키이익! 키륵……!”
  포탈에 끼인 쥐머리의 괴물이 비명을 질렀다. 놈의 눈은 붉게 충혈 되었고 얼굴엔 터질 듯한 실핏줄이 솟아올랐다. 이미 입과 코에서는 피가 줄줄 흐르고 있었다. 경우가 포탈을 유지하는 크리스털을 두드릴 때 마다 통로가 되는 공간이 일그러져 버리니, 이미 놈의 몸 안은 곤죽이 되어 있을 것이리라.
  “하압!”
  깡!
  탱그랑.
  몇 번이나 크리스털을 두드리고서 힘껏 쇠몽둥이를 휘두른 경우는 마침내 정사면체를 이루는 크리스털 중 하나를 궤도에서 벗어나게 만들었다. 그 순간, 그의 눈앞에 열려있던 포탈이 사방으로 찢어져 나가며 남아있던 세 개의 크리스털마저 제 궤도를 유지하지 못하고 바닥에 떨어져 버렸다.
  그 사이에 끼어있던 괴물은 온 몸이 갈가리 찢겨져 머리만이 이 세상에 툭 떨어졌다. 경우는 그것을 발로 차서 치워버리고, 바닥에 떨어진 네 개의 크리스털을 집어 들었다.
  “……신기하군.”
  미래의 경우는 지금 손 안에 있는 크리스털을 영상이나 사진으로만 봤을 뿐, 직접 눈으로 본 적이 없었다. 단지 포탈을 유지하는 핵심적 역할만 한다고 들었을 뿐이었다. 그래서 손 안에서 차가운 기운을 흘리는 크리스털을 향해 절로 관심이 향했다.
  하지만 여유롭게 크리스털을 보고 있을 새도 없이 새로운 문장들이 경우의 눈앞으로 나타났다.
 
  【최초로 포탈을 파괴했습니다. ‘수호의 선구자’ 타이틀이 생성됩니다.】
  【최초로 포탈이 파괴되었습니다. 28-7 구역의 경계도가 높아집니다.】
  【28-7 포탈이 파괴되었습니다. 인근 10km반경의 적들이 약화됩니다.】
  【약화된 적은 일정 확률로 물리공격이 통용됩니다.】
  【약화된 적이 28-7 구역을 벗어납니다.】
 
  경우의 시선엔 조금 전 까지만 하더라도 저 멀리서 부터 자신을 향해 미친 듯이 달려오던 괴물들이, 이제는 기겁하며 사방으로 뿔뿔이 흩어지는 광경이 보였다. 놈들도 이제는 자신이 이 세계에서 절대적인 우위를 차지하지 못하게 되었음을 아는 것인가. 실제로 급하게 투입된 군인들이 정신없이 도망치는 괴물들을 향해 사격을 실시했고, 놈들은 이전보다 분명하게 상처를 입고 쓰러지기 시작했다.
  경우는 그 모습을 보며 슬쩍 건물의 잔해들 사이로 몸을 숨겼다. 이곳에 더 있어봐야 좋은 대우를 받을 것 같지는 않았다. 그보다는 미래에 겪지 못했고 이번에 새로이 얻은 것들에 대해 알아보고 싶은 마음이 더 컸다. 틀림없이, 어떠한 반전의 주축이 될 것이라는 확신이 들고 있었다.
  게다가 포탈도 파괴했으니 더 이상 볼 일도 없었다. 경우의 뒷모습이 전쟁터의 폐허나 다름없는 건물들 사이로 사라져갔다.
  고아원으로 거액의 기부금이 들어왔다. 그 금액만 하더라도 500만 루블에 해당했다.
  정체를 알 수 없는 부잣집 도련님으로 부터의 기부금이라고만 알고 있었다. 그러면서 요구한 조건은, ‘아나스타시야 오르셰 프라비톄’에게 한 통의 편지를 전해달라는 것.
  ‘부탁’이 아닌 ‘요구’라는 점에서 고아원장은 고민에 빠질 수밖에 없었다. 아무리 편지를 전하는 것이라 하나, 좋지 못한 목적을 가진 것일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특히나 아나스타시야는 이곳 고아원에서도 마음씨 여리고 무척이나 착한 아이였다. 왠지 모르게 고아원장은 몹쓸 짓을 하는 것 같은 기분을 떨칠 수 없었다.
  하지만 어디서 이야기를 들은 것인지 아나스타시야가 직접 고아원장을 찾아왔다. 그리고 괜찮으니 편지를 달라고 했고, 고아원장은 어쩔 수 없이 그녀에게 편지를 건네주었다.
  그런데 그 이후로 아나스타시야는 처음부터 그곳에 존재하지 않았던 것 고아원에서 사라져 버렸다.
  아나스타시야가 다시 나타난 것은 그로부터 한 달 뒤, 세계 각지에 괴물이 나타난 순간이었다.
  “크와아앙!”
  거대한 괴물이 너클을 낀 주먹을 바닥에 내리쳤다. 그 충격으로 사방에 콘크리트 파편이 튀었다. 하나하나가 사람에게 맞으면 심각한 부상을 입힐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었다.
  그것들을, 한 명의 소녀가 팔에 착용한 둥근 방패로 막아내며 빠르게 접근했다.
  “핫!”
  괴물의 주먹이 정면을 찌르며 다가온다. 소녀의 짧은 외침과 함께 그녀의 몸이 허공으로 솟구쳤다. 머리와 다리가 반대로 뒤집힌다. 그 상태로 반대편 손에 쥔 날카로운 검을 아래로 힘껏 내질렀다.
  푸욱, 어깨의 살점이 베어진다. 괴물은 고통에 겨운 괴성과 함께 마구잡이로 주변을 휘두르기 시작했다.
  하지만 소녀는 이미 괴물의 등 뒤로 착지해 멀찍이 물러난 상태. 마치 미끄러지듯 자리에 엎드린 소녀는 등 뒤에 매어두었던 러시아제 AK소총을 빼어들어 조준사격 자세를 취했다.
  목표는 곰과 같은 형태를 한 괴물의 머리. 소녀는 한쪽 눈을 지그시 감고, 방아쇠에 손가락을 얹었다.
  순간 그녀의 푸른 눈동자가 마치 불길에 휩싸이듯 거세게 타오른다. 더불어 소녀의 손에 쥐인 AK소총 역시 푸른빛이 불타올랐다.
  소녀는 망설임 없이 방아쇠를 당겼다. 그 충격에 아름다운 금빛 머리카락이 흩날린다.
  탕! 타-앙!
  “그워어엉!”
  분명 조준은 완벽했다. 하지만 곰 같은 모습을 한 놈이 반사 신경은 엄청나게 빨랐다.
  그 찰나를 피해 두 발의 탄환 모두 안면부를 맞추지 못했다. 고작 한쪽 귀와 볼살의 일부가 떨어져 나갔을 뿐이다.
  소녀는 피해상황을 확인하고는 혀를 찼다. 그리고 소총을 등 뒤로 넘기는 것과 동시에 허리춤에서 두 자루의 권총을 뽑아들었다.
  소녀의 푸른 눈동자가 불길에 휩싸이는 것과 함께 손에 쥐인 두 자루의 권총도 푸르게 빛났다. 소녀는 재빨리 자리에서 일어나 총구를 괴물에게 향한 뒤, 뒷걸음을 치며 방아쇠를 당겼다.
  탕탕탕탕탕……!
  “크어어…… 크워엉!”
  권총에서 사출된 탄환이 푸른 궤적을 남기며 괴물의 몸을 헤집었다. 팔, 다리, 가슴 할 것 없이 온 몸을 벌집처럼 구멍 내 버린다. 망가진 호스처럼 바닥으로 피가 줄줄 흘러내렸다.
  하지만 그럼에도 괴물은 기세를 잃지 않았다. 오히려 더욱 흉포히 날뛰며 소녀를 덮쳐든다.
  온 몸으로 소녀를 뭉개버리기라도 할 셈인가, 괴물의 그림자가 소녀의 금발을 어둡게 드리웠다.
  너무나 급작스런 움직임이었기에 마땅히 피할 공간이 존재하지 않았다. 이대로 총을 쏘거나 검으로 베더라도 곰 같은 괴물의 몸은 그대로 소녀를 압착시켜 버리고 말리라.
  절체절명의 순간. 죽음밖에 존재하지 않는 그 길 위에서, 소녀는 덮쳐드는 괴물의 두 눈을 흔들리지 않는 눈동자로 똑바로 마주보았다.
  그리고 왼쪽 팔을 앞으로 뻗는다. 그곳에 착용된 방패로 부터 철컥, 하며 장치가 풀려나가는 소리가 들려왔다.
  찰나의 순간, 둥근 방패를 가로지르며 내면에 고정되어 있던 압축된 창(spear)이 양 방향을 향해 튀어나가듯 사출되었다.
  쿵!
  소녀의 어깨 방향으로 튀어나간 창이 지면에 박혀들었다.
  그 반대편. 내뻗은 주먹이 향하는 방향은, 거침없이 내리치는 번개와 같이 괴물의 심장을 그대로 뚫어버린다.
  콰득!
  “크, 크륵…… 그르르…….”
  부서진 심장이 창에 꿰였다.
  덮쳐들던 자세 그대로 허공에 매달려 버린 곰 형태의 괴물은 마지막 울음소리를 뱉어내고는 서서히 힘을 잃어버렸다. 눈에서 붉은 빛이 사라지고, 가슴에 꽂힌 창과 함께 옆으로 무너져 내렸다.
  소녀는 침착한 표정으로 그것을 보더니 이내 조용히 중얼거렸다.
  “……체크메이트.”
  치직─ 하는 소리와 함께 소녀의 귀로 한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잘 했다, 아나스타시야. 포탈 가디언을 이처럼 완벽히 제압하다니, 훌륭해.」
  “고맙습니다. 다 아저씨 덕분이에요.”
  「겸손 할 필요 없다. 너는 분명히 대단해. 아무튼 이걸로 포탈을 파괴하는데 걸림돌이 될 괴물은 처리 한 것이고…… 이제 포탈을 파괴해야 한다. 네가 가진 탐색장비로는 10m 반경 안에 포탈을 이루는 크리스탈이 있다고 나오는군. 주변을 살펴봐라.」
  금발의 소녀, 고아원에서 모습을 감추었던 아나스타시야는 손에 쥔 권총을 다시 허리춤에 매고는 신중히 주변을 살피기 시작했다. 이미 포탈을 비롯한 다양한 지식들을 한 달이라는 시간 동안 철저하게 배웠기 때문에 허둥대거나 놓치지 않는다. 다만 크리스탈의 크기가 작아서 찾기 힘들 뿐이었다.
  “아. 찾았어요.”
  그러기를 1분 정도, 아나스타시야는 허공에 둥실둥실 떠 있는 투명한 보석 조각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귓가로 예의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포탈은 최소 구성단위가 크리스털 네 개다. 하나만 빼버려도 포탈은 파괴될 거다.」
  “알겠어요.”
  그녀는 포탈로 다가가 두 손으로 크리스털 중 하나를 감싸 쥐었다. 그리고 눈동자를 푸르게 불태우며 몸 안에 자리 잡은 비전력을 크리스탈로 쏟아 부었다.
  그러자 미약한 적빛을 보이던 크리스탈이 점점 빛을 잃더니 어느 순간 청빛을 띠기 시작했다. 바로 그 순간, 크리스탈들의 가운데에 생성되어있던 포탈이 사방으로 찢겨나갔다.
  아나스타시야의 발치로 나머지 크리스탈 세 개가 떨어져 내렸다.
  “후우, 비전력이 절반이나 소모돼 버렸어요.”
  「그건 아직 너의 비전등급이 낮아서 그런 것이니 신경 쓰지 않아도 된다. 그보다 내가 약속했던 대로 너는 괴물로 부터 네 고아원 가족들을 지켜냈다. 이걸로 계약은 성립이라고 판단해도 되나?」
  “물론이에요. 반신반의는 하고 있었지만 정말로 괴물이 나타날 줄은 몰랐거든요. 먼저 제게 연락해서 도움을 주신 점 정말 감사드려요.”
  「나도 네가 필요했으니까 감사 할 필요는 없다. 그보다…… 뭔가 변한 점은 없나? 네 몸 상태라던가…….」
  “제 몸 상태 말인가요? 글쎄요…….”
  아나스타시야는 엉덩이 뒤에 매어두었던 단검을 뽑아들어 눈앞으로 들어올렸다. 검면에 비치는 그녀의 눈동자가 푸르게 불타올랐다.
  “아까 비전등급이 올랐다고 했는데, 좀 더 강해진 기분이에요. 어떤 적이라도 쓰러뜨릴 수 있을 것 같은…… 그리고 어떤 무기라도 제 의지대로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을 것 같은…….”
  그녀는 단검을 서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푸르게 빛나는 검날이 궤적을 그리며 허공에 잔상을 남긴다.
  아나스타시야는 단검을 휘두르는 속도를 조금씩 가속시켰다. 사방에 머무르는 청광이 하나 둘 씩 늘어나기 시작했고, 어느덧 그녀는 구형의 푸른 막에 감싸이게 되었다.
  그와 동시에 아나스타시야의 눈앞엔 하나의 문장이 나타났다.
 
  【검막(劍幕): 스킬: 비전등급 D
  정보: 시전자의 주위에 무엇도 뚫지 못하는 막을 생성한다. 검을 들고 있을 때 사용 가능하며, 비전력을 지속적으로 소모한다.
  특성: 검(劍)】
 
  그 뒤를 이어 여러 문장이 아나스타시야의 눈앞에 나타났다.
 
  【최초로 스킬을 생성하였습니다. ‘비전의 선구자’ 타이틀이 생성됩니다.】
  【최초로 비전등급 D의 스킬을 생성하였습니다. 비전등급 D 기준의 스킬에 소모되는 비전력 수치가 감소합니다.】
  【비전등급의 괴리가 느껴집니다. 괴리가 사라질 때 까지 ‘검막’ 스킬을 사용 할 때 소모되는 비전력이 늘어납니다.】
 
  “어머…… 뭔가 나타났어요.”
  아나스타시야는 휘두르던 단검을 엉덩이춤의 검집에 꽂아 넣으며 신기하단 목소리로 얘기했다. 그녀의 설명을 들은 통신장비 너머의 남자는 살짝 의문이 서린 음성으로 되물었다.
  「혹시 포탈 파괴나 가디언을 해치웠을 때 능력의 향상이 이루어진 것은 없었나?」
  “아뇨, 그때엔 포탈 파괴에 따라 인근 괴물들이 영향을 받는다는 문구만 나타났었고 제게 직접적으로 뭔가가 적용되지는 않았어요.”
  「흐음…….」
  묘하게 감정이 서린 목소리가 들려왔다. 지금껏 객관적이고 사무적인 어조로만 말하던 것과는 다른 느낌이었기에 아나스타시야가 고개를 갸웃했다.
  그런 그녀의 귓가로 살짝 떨리는 목소리가 들릴 듯 말 듯 들려왔다.
  「그렇단 말이지…….」
 
  경우는 집으로 돌아왔다. 돌아온 경우를 맞이한 부모님께서 피칠을 한 호구를 보며 기겁을 하는 해프닝이 발생했지만 어찌됐든 무사한 모습을 확인시켜 드렸고, 또한 부모님이 ‘다음 번 포탈’이 생성될 때 까지는 안전하실 것이라는 생각에 경우는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더군다나 이번 싸움으로 얻게 된 것은 결코 작은 게 아니었다. 어쩌면 작은 발걸음. 그러나 1년, 10년, 20년 뒤에 정해져 있는 미래를 바꿀 수 있는 핵심적인 열쇠가 될 수도 있었다.
  경우는 호구를 벗어 방 한편에 내려놓으며 눈동자를 푸르게 불태웠다. 그 상태로 거울을 바라보니, 그곳에 비친 자신의 모습 위로 여러 문장들이 떠올랐다.
 
  【김경우: 인간: 비전등급 E
  정보: 비전력(9700/8000 x 120% + 100)
  특성: 행운(fortune)】
 
 【각성의 선구자(활성): 타이틀: 비전등급 C
  정보: 비전력 총량 120% 증가, 비전력 소모율 80% 감소.
  특성: 최초 타이틀】
 
 【수호의 선구자(비활성): 타이틀: 비전등급 C
  정보: 포탈 가디언의 공격 10% 방어·반사, 반경 10m내의 공간에서 ‘약화’발동(20% 확률).
  특성: 최초 타이틀】
 
  ‘세상에…….’
  비록 미래에서는 타이틀이란 것을 가져 본 적이 없는 경우였지만, 그의 20년이 넘는 세월동안의 전투감각이 ‘이건 엄청나다!’라는 사실을 끊임없이 주장하고 있었다. 그것이 아니더라도 객관적인 수치만 보더라도 타이틀이 제공하는 효과는 믿기 어려울 만큼 대단했다. 마치 처음 타이틀을 얻은 유저에게 모든 혜택을 몰아주겠다고 작정 한 것 같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추가적으로 포탈 가디언인 치프를 잡으며 획득한 일부 비전력까지 더해서, 경우의 비전력은 상당한 증가율을 보이고 있었다.
  아쉬운 점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비전투 계열에다가 버프도 아닌 비전특성 ‘행운’탓에 오히려 이제야 간신히 일반적인 비전력 총량에 도달했다는 점이었다.
  미래에도 전투계열은 아니었지만, 오히려 버프 계열이었기 때문에 비전력 총량에 있어서는 더욱 혜택을 보았던 경우로서는 그야말로 빛 좋은 개살구에 불과한 것이었다. 하지만…… 문제는 그 개살구조차 없어서 못 쓴다는 것이다.
  경우는 쓴 미소를 머금으며 이번 싸움 도중 얻게 된 물건들을 살펴봤다. 바닥에는 잡다한 물건들이 가득했다.
  그 중에서도 가장 신경 쓰이는 것은, 역시 크리스털이다.
  “어디…….”
  경우는 집게손가락으로 조심스럽게 크리스털을 집어 들었다.
  지난 생에서도 그렇지만, 크리스털을 직접 보는 것은, 그리고 직접 만져보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도대체 크리스털에는 어떤 비밀이 있는 것일까?
  경우의 눈동자가 푸르게 물들기 시작했다.
 
  【손상된 비전의 크리스탈 F: 보석: 49.8%
  정보: 일정 수준 이하로 손상되어 본래 능력이 상실되었다.(자체회복 불가)
  특성: 1. 소유자의 비전력을 증가시켜준다. 비전력 +50】
 
  “헉……!”
  경우는 저도 모르게 숨을 들이쉬며 두 눈을 껌벅거렸다.
  수십 년의 삶을 살아온 탓에 웬만해서는 메마른 그의 마음을 놀래킬만 한 일은 없으리라 생각했건만, 이건 그야말로 신세계를 본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경우는 두 눈을 비비고 다시 바라봤다. 비전력을 거두었다가 다시 불러일으켜서 보기도 했다.
  하지만 눈앞에 펼쳐진 푸른 글귀는 어서 자신을 인정하란 양 떳떳이 그곳에 떠올라 있을 뿐이었다.
  “비전력을…… 증가시켜 준다고……?”
  너무나 놀란 나머지 혼잣말이 튀어나왔다. 심지어는 손까지 떨리고 있었다.
  경우는 적어도 지난 삶에서 비전과 관련된 것은 전부는 아니더라도 거의 대부분을 파악하고 있다고 자신했다. 그도 그럴 것이, 그는 미래에 강화능력을 사용했었고, 그 탓에 그를 거쳐 가지 않은 무기들은 없다고 단언할 수 있을 정도였다.
  그렇기 때문에 홀로 바다를 가르고 하늘을 무너뜨리는 경천동지할 능력을 지닌 능력자의 무구도 강화를 해 보았고, 그들이 지닌 온갖 종류의 비전 무구들의 정보를 두 눈으로 볼 수가 있었다.
  그것들은 그 자체만으로도 F등급의 비전능력자가 사용하더라도 엄청난 위력을 발휘할 수 있는 이능과 힘이 담겨있었다. 공간을 뚫어버리는 것은 물론이고 운석을 불러오는 주술과 마법적인 능력도 숱하게 존재했다.
  하지만 그 어떤 것에서도 이와 같이 사용자의 비전력 자체를 증가시키는 특성은 없었다. 그것은 즉, 대다수의 비전능력자들이 이러한 크리스털의 특성에 대해 몰랐거나, 이에 대해 하는 관계자들이 일부러 크리스털에 대한 정보를 감추었다는 것이다.
  경우는 두 가지 모두가 해당된다고 확신했다.
  어느 순간부터 결계를 파괴하기 위한 별동대는 상위 조직에 의해 독립적으로 활동하기 시작했었다. 경우를 비롯한 다른 비전능력자들의 역할은 그들이 결계에 도달 할 때 까지 엄호를 하는 일. 결계 인근은 km단위로 통제가 되었고, 절대 결계 근처로는 다가가지 못했다.
  따지고 보면 이상한 일이었다.
  하지만 그때엔 엄호를 하는 것만으로도 버거울 정도로 최악의 상황이었던지라 그것이 효율적이라고 믿고 있었다.
  실제로 포탈이 생성되기 시작한 이후 15년 즈음까지는 신속하고 정확한 성과를 거두기도 했었다.
  그 이후로는 아주 기본적인 것들. 물량이나, 힘에 밀려서 싸그리 몰살당하고 말았지만.
  경우는 저도 모르게 이빨을 으드득 갈았다. 도대체 무엇 때문에 크리스털에 대한 정보를 감추었단 말인가? 이런 것이 있었다면, 이것을 알고서 모두가 사용할 수 있었다면 세상의 판도는 10년에 기해서 큰 폭으로 달라질 수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굳이 감추어서 인간은 자멸의 길로 향하고 말았다.
  도대체 왜……?
  “앗!”
  경우는 너무 정신을 쏟은 나머지 크리스털을 향해 자신의 비전력이 흘러들어가고 있음을 뒤늦게 알아챘다. 재빨리 비전력을 거둬들이려고 했으나, 이미 수십 년 동안 익숙해진 경우의 몸은 반사적으로 비전력이 흘러들어간 물체를 ‘강화’의 대상으로 인식했다.
  그리고 강화 준비가 되어 푸르게 불타오르는 크리스털로 부터 갑작스레 선명한 문자가 불쑥 눈앞으로 튀어나왔다.
 
  【비전력의 간섭이 발생합니다.】
  【극도로 불안정한 상태입니다.】
 
  “뭐, 뭐……?”
 “뭐, 뭐……?”
  경우는 다시 한 번 놀랐다. 과거, 이런 문구는 몇 만 번을 넘게 강화하는 동안에도 단 한 번도 보지 못했던 ‘경고’였다.
  이대로 진행하면 좋지 않을 텐데, 계속 할래? 라는.
  “강화를 하면…… 파괴 될 수 있다…….”
  경우는 눈앞의 문구를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그리고 문득 고개를 뒤로 꺾으며 허탈한 숨을 뱉어냈다.
  드디어 알아낸 것이다.
  왜 그들이 그토록 크리스털에 대해 감추고자 했는지.
  그로 인해 무엇을 얻고자 했는지.
  “그놈들…… 크리스털을 독점해서…… 강화를 했군…….”
  강화 능력자는 자신뿐만이 아니다. 다양한 비전능력이 존재하지만, 수억에 달하는 사람들 중 자신과 같은 강화능력자가 없지는 않았다.
  실제로 만난 적도 있다. 그리고 그들 중 누군가는 자신과 달리 조직에서 쓰이는 강화능력자가 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크리스털들을 강화했을 것이고.
  통상적으로 강화능력자의 강화는 절대 실패하지 않는다. 좀 더 자세히 말하자면, 강화를 실패했다고 해서 대상이 된 물체가 파괴되거나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단지 고도로 축적된 비전력이 더욱 축적되는 과정에서 서로 다른 극의 자석이 밀려나가는 것 튕겨나가 버리게 된다. 그러면 강화 단계가 오히려 떨어지거나, 아예 처음의 평범했던 물건으로 돌아가기도 한다.
  그러나 다시 강화를 시도하면 그만이다. 그로 인한 대상 물체의 손상은 없으니까.
  결국 실패는 없는 것이다.
  그러나 크리스털은 다르다. 강화에 실패하면 강화 단계가 감소하는 게 아니라 크리스털 자체가 파괴되어 버린다.
  결국, 보유 수량이 줄어드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니까 비밀로 했을 것이다. 강화에 실패해서 파괴될수록 다른 비전능력자들과 나눌 수 있는 크리스털의 수는 줄어들 테니까.
  물론 결과적으로는 그런 독점욕이 멸망의 길로 인도한 것이지만…….
  “……그러고 보니, 나는 이제 강화 능력자가 아니지.”
  경우는 눈앞에 떠올라 있는 경고 문구를 보며 숨을 한 번 크게 들이쉰 다음, 담담히 내뱉었다.
  “강화.”
  삽시간에 눈부신 빛이 터져 나온다. 일반적인 발광 수준의 강화와는 차원이 다른 폭발적인 빛이었다.
  그 시간 역시 무척이나 길었다. 손 안에 들린 크리스털은 덜덜 진동하며 끊임없이 흔들렸다.
  마치 경우의 비전력을 온 몸으로 거부하는 듯한 반응이었다.
  그것이 임계점에 도달한 순간.
 
  【행운 특성에 의해 최악의 상황은 좀 더 나은 방향으로 변화합니다.】
 
  갑자기 빛이 사라졌다.
  경우의 손 안에는 이전과 다를 바 없는, 그러나 조금은 더 밝아진 청빛의 크리스털이 쥐여져 있었다.
  그것을 보며 경우의 입가엔 미소가 걸렸다.
 
  【손상된 비전의 크리스탈 F Ⅰ: 보석: 49.8%
  정보: 강화 1단계. 일정 수준 이하로 손상되어 본래 능력이 상실되었다.(자체회복 불가)
  특성: 1. 소유자의 비전력을 증가시켜준다. 비전력 +100】
 
  “강화.”
  다시 한 번 빛이 폭발했다.
 
  【손상된 비전의 크리스탈 F Ⅱ: 보석: 49.8%
  정보: 강화 2단계. 일정 수준 이하로 손상되어 본래 능력이 상실되었다.(자체회복 불가)
  특성: 1. 소유자의 비전력을 증가시켜준다. 비전력 +200】
 
  “호오…….”
  경우의 입가에 맺힌 미소가 더욱 짙어졌다. 그리고 이번에는 결계가 붕괴되며 자연스레 힘을 잃었던 온전한 크리스털을 집어 들었다.
 
  【비전의 크리스탈 F: 보석: 98.7%
  정보: 없음.
  특성: 1. 소유자의 비전력을 증가시켜준다. 비전력 +100】
 
  “강화.”
 
  【비전력의 간섭이 발생합니다.】
  【극도로 불안정한 상태입니다.】
  【행운 특성에 의해 최악의 상황은 좀 더 나은 방향으로 변화합니다.】
 
  【비전의 크리스탈 F Ⅰ: 보석: 98.7%
  정보: 강화 1단계.
  특성: 1. 소유자의 비전력을 증가시켜준다. 비전력 +200】
 
  경우는 마치 무언가에 홀린 사람처럼 계속해서 웃음 짓고 있었다. 그의 손에는 두 개의 크리스털이 청빛으로 빛나고 있었다.
  그것을 내려놓은 경우는 남은 두 개의 크리스털을 각각 양 손에 집어 들었다. 그리고 이번엔 주저하지도, 망설이지도 않고 확신에 찬 기색으로 힘주어 외쳤다.
  “각성!”
 
  【매우 큰 비전력의 간섭이 발생합니다.】
  【너무나 극도로 불안정한 상태입니다.】
  【행운 특성에 의해 최악으로 치달은 절망적인 상황은 좀 더 나은 방향으로 변화합니다.】
 
  지금까지와는 비교 할 수 없는 빛의 산란이 발생했다.
  무작정 빛이 폭발하는 것이 아닌, 경우 주변의 일대가 눈송이와 같은 빛의 무리로 가득 차올랐다.
  그리고 그 속에서 두 개의 크리스털은 너무나 자연스럽게 하나의 물체로 합쳐졌다.
  하나의 푸른빛이 아닌, 오로라처럼 일렁이는 맑고 순수한 빛.
  경우는 빛의 결정 같은 크리스털을 집어 들어 눈높이로 들어올렸다.
  그의 눈이 푸르게 타오르며, 그 정보를 읽어냈다.
 
  【비전의 크리스탈 F+: 보석: 98.7%
  정보: 각성 1단계.
  특성: 1. 소유자의 비전력을 증폭시켜준다. 비전력 +100%】
 
  “강화.”
 
  【비전의 크리스탈 F+ Ⅰ: 보석: 98.7%
  정보: 각성 1단계. 강화 1단계.
  특성: 1. 소유자의 비전력을 증폭시켜준다. 비전력 +200%】
 
  “강화.”
 
  【비전의 크리스탈 F+ Ⅱ: 보석: 98.7%
  정보: 각성 1단계. 강화 2단계.
  특성: 1. 소유자의 비전력을 증폭시켜준다. 비전력 +400%】
 
  “강화.”
 
  【비전의 크리스탈 F+ Ⅲ: 보석: 99.9%
  정보: 각성 1단계. 강화 3단계.
  특성: 내구도가 감소하지 않습니다.
  1. 소유자의 비전력을 증폭시켜준다. 비전력 +800%】
 
  【김경우: 인간: 비전등급 E
  정보: 비전력[8/(8000 x 120%) + (8000 x 800%) + 400 + 100)]
  특성: 행운(fortune)】
  【비전력이 부족합니다.】
 
  “……이거였구만.”
  경우는 찬란히 빛나는 크리스털을 손 안에 꾸욱 움켜쥐며 기쁨에 겨운 웃음을 터트렸다.
  드디어 찾은 것이다.
  자신의 특성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그리고 어떻게 해야 미래를 바꿀 수 있는지.
 
  ‘그 전에.’
  경우는 괴물 격멸에 있어 최우선 사항을 크리스털의 확보로 잡았다.
  현재 경우가 알고 있는 크리스털의 확보 방법은 포탈을 파괴하고 포탈을 이루는 크리스털을 획득하는 것.
  그러기 위해서는 포탈을 찾아 이동해야만 하며, 필연적으로 부모님이 계신 집에서 멀리 떨어질 수밖에 없었다.
  그것은 다시 말해 시야 안에 소중한 사람을 둘 수 없다는 것. 즉, 위험한 상황에 처했을 때 지킬 수 없어진다는 뜻이었다.
  다른 무엇보다 부모님의 안전을 중요시 생각하는 경우로서는 정면으로 상충될 수밖에 없는 사항이었다.
  경우는 강해지기 위해 집을 떠나야 한다는 판단과 부모님을 지켜야 한다는 감정을 두고서 절충 방안에 대해 심각하게 고민했다.
  둘 중 하나만 선택하는 방법은 없다.
  경우는 미래를 알고 있다. 이대로 있다간 애초에 인류 자체가 멸망 해 버린다. 그렇다고 아무런 대책을 강구 해 두지 않는다면 부모님이 죽을 수도 있다는, 그야말로 최악의 선택지만이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경우는 과거로부터 근 20여 년 동안 가장 심각하게 고민했다.
  단순히 강화를 하고 적에게 달려드는 것 보다 훨씬 리스크가 크고 정답이 나오지 않는 문제였다.
  ‘차라리 누군가가 부모님을 지켜드린다면…….’
  그렇게만 된다면 더 없을 만큼 좋을 테지만, 그것이 실현 불가능한 일임을 잘 알고 있다.
  세상에 어느 능력자가 자신의 활동을 제한당한 채 타인의 가족을 지켜주고자 하겠는가? 그러려면 어마어마한 돈을 지불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신뢰조차 할 수 없다.
  비전능력자는 자신의 능력을 높이는 것이 돈을 버는 것 보다 훨씬 이득인 사항이다. 비전능력이 상승할수록 돈은 더욱이 덤, 뒤따라오는 부산물에 불과하다.
  경우만 하더라도 강화능력을 사용해서 갖가지 도구를 강화하여 판다면 순식간에 돈을 벌 수 있는 것이다.
  그 돈으로 어떠한 방안을 세울 수도 있겠지만, 괴물의 출현은 그야말로 천재지변. 언제 어디서 나타날지 알 수 없다. 벙커를 지어봤자 그 안에서 나타난다면 오히려 무덤이 되는 격이다.
  실제로 미래엔 그렇게 해서 죽어간 국가 수뇌부들이 사망자의 대다수를 차지했다.
  ‘그렇다면 도대체 어떻게 해야…….’
  경우는 두 손으로 머리를 움켜쥐었다. 머리에 쥐가 날 것 같다.
  시간은 흘러가는데 마땅한 대책 방법이 떠오르지 않으니 그야말로 속이 타들어가는 기분이었다.
  “……어?”
  문득 바닥에 내려놓았던 강화된 비전의 크리스탈들이 경우의 시야에 들어왔다. 시릴 듯 맑은 빛이 그의 두 눈에 비친다.
  그와 동시에, 자신의 비전 총량에 대해 생각이 미친다.
  아이템의 버프를 받는다. 경우의 비전 총량은 이미 E등급을 넘어선지 오래였다.
  즉, 과거의 자신의 능력에 어느 정도 다가간 상태이며, 그만큼 당시에 사용했던 여러 가지 ‘이단’을 사용 할 수 있다는 뜻이었다.
  “……그놈의 비전능력을 사용한다면…… 충분하고도 넘치는군.”
  경우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어느새 입가엔 미소가 걸려있었다.
  ‘정답’을 찾았다.
  그리고 큼직한 배낭을 짊어지고서 집을 나섰다.
  경우가 향한 곳은 조금 전, 괴물들과 일전을 벌였던 거리였다.
  그 중에서도 포탈의 주변. 포탈 가디언과 전투를 치렀던 부근에 도달한 경우는 신중한 눈빛으로 주변을 살펴보았다.
  군인은 없었다. 아직 한국의 모든 지역이 정리 된 것이 아닌 만큼 금세 다른 지역을 방어하기 위해 이동했을 터였다.
  실제로 포탈과 포탈간의 거리는 짧을 경우 10km가 채 되지 않을 때도 있었다.
  심지어 이전의 포탈이 파괴되지 않은 상황에서 다음번 포탈이 생성된다면 그 간격은 더욱 좁아진다. 다만 경우는 지금이 최초 포탈, 그리고 이전에 나타났던 ‘약화’범위를 가정하여 그보다는 범위가 넓을 것으로 짐작하고 있었다.
  그러니 군인들은 꽤나 멀리까지 이동해 있을 것인 바.
  즉, 지금 경우를 방해 할 요인은 존재하지 않는다.
  ‘치프의 시체가 이 부근에 있었을 터.’
  경우는 천천히 거리를 걸어 다니며 조금씩 반경을 넓혀갔다. 포탈이 생성되었던 부근을 중심으로 100m에 이르는 지역을 돌아다녔다.
  ‘찾았다.’
  포탈이 생성되었던 지역이 정확히 어디였는지 기억하느라고 찾는 데에 시간이 조금 걸렸으나, 경우는 자신이 원했던 것을 찾을 수 있었다.
  그것은 ‘머리통을 부숴놓았던 치프의 시체.’
  경우는 즉시 등에 메고 있던 가방을 내려놓았다.
 
  【등산 가방 Ⅲ: 생활용품: 99.9%
  정보: 강화 3단계.
  특성: 내구도가 감소하지 않습니다.
  1. 수납 용량이 증가한다.: 부피 8배】
 
  비전력이 회복되는 순간마다 강화를 마쳤기에 현재 강화할 수 있는 최대 단계로 강화되어있었다.
  특성으로는 수납 용량 증가라는, 현실의 물리법칙을 엿 먹이는 기능을 가지게 되었다.
  미묘하게도 무게의 가감은 그대로였다.
  애당초 처음 목적 자체가 치프의 시체를 회수하는 것이었으니 큰 문제는 없지만.
  “끄응.”
  일단 비전능력자가 되면서 신체능력 자체가 어느 정도 상향 된 상태다. 신장만 3m를 넘는 치프라지만, 두 팔에 힘을 주니 충분히 가방의 입구로 집어넣을 수 있었다.
  “더럽게 무겁군.”
  경우는 두 손을 툭툭 털었다. 손에 끈적히 굳은 피가 엉겨 붙어 기분이 썩 좋지 못하다.
  하지만 지금부터 하려는 건 남들에게 보여줘서 그다지 좋은 것이 아니었다.
  경우는 발치에 내려놓았던 가방을 짊어지고 멀리 떨어진 다른 건물로 이동했다.
  어차피 길거리에 사람이라고는 그림자도 찾아볼 수 없었지만, 되도록이면 조용한 곳에서 처리하는 게 좋았다. 혹시라도 아직 길거리를 주시하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기에 최대한 사람의 눈이 들지 않고 어두운 곳을 찾았다.
  경우는 인근 건물의 지하실로 내려가 그곳에 치프의 시체를 꺼내놓았다.
  그리고 치프의 머리와 가슴에 두 손을 얹은 뒤 몸속에 머물러 있던 비전력을 치프의 시체로 주입시켰다.
  ‘이제부터 네 기술을 내가 사용하마.’
  경우의 눈빛이 가라앉았다. 그의 표정엔 언뜻 그리움과 슬픔이 교차했다.
  15년 전, 경우는 괴물들에게 포위되어 죽을 뻔 한 적이 있었다.
  지상 벙커가 파괴되어 밀려드는 괴물들을 더 이상 막을 수 없게 되었을 때. 그때 마지막 순간까지 경우의 앞에서 적들과 맞서 싸웠던 비전능력자가 있었다.
  그는 적들의 시체를 되살려내어 두꺼운 방벽을 두르고, 모든 비전능력자가 죽은 상황에서도 홀로 남아 적들을 상대했다. 무려 한나절 동안이나 해일처럼 밀려드는 괴물들을 시체와 함께 맞서 싸운 것이다.
  결국 시체의 방벽은 무너져 내렸고 그는 산 채로 괴물들의 이빨에 뜯겨져 죽었지만…….
  그는 자신이 죽기 얼마 전 부터 마치 누군가에게 들으라는 듯이 스스로의 능력에 대해 떠들고 다녔었다. 정신이 나간 것처럼 하루에도 수 십 번씩 자신의 능력을 사용하는 방법과 그 과정을 외치고 다녔기에 당시 같은 파티를 이루었던 비전능력자라면 그의 사령술에 대해 모르는 것이 없을 정도였다.
  어쩌면 죽음과 가장 가까운 비전능력을 가졌었던 만큼 가까운 시일 내에 자신이 죽을 것이란 사실을 알았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하지만 그 덕분에 경우는 괴물들과 맞설 수 있는, 정해져 있던 절망적인 미래를 바꿀 수 있는 힘을 가질 수 있게 되었다.
  결코 그의 외침은 덧없는 것이 아니었다.
  경우는 잠시 눈을 감고서 그와의 추억을 되새겼다. 지닌 능력과는 반대로 울적하고 음울하기 보다는 상당히 유쾌한 녀석이었다. 그리고 가장 마음이 여린 녀석이기도 했다.
  경우는 눈을 뜨고서 숨을 들이쉬었다. 그의 의지를 따라 비전력이 새로운 형태로 구성되기 시작한다.
  목소리에 담긴 뜻은 틀림없는 하나의 스킬로 적용되는 것이었다.
  “……강시 소환.”
  나지막한 중얼거림에 치프의 몸이 들썩이기 시작했다. 치프의 시체에 차오르기 시작한 비전력은 이내 몸 밖으로 흘러넘칠 만큼 가득 찼다.
  그리고 마침내 치프의 시체 전체가 경우의 비전력으로 푸르게 빛나게 된 순간, 경우의 눈앞으로 여럿의 문장들이 주르륵 생성되었다.
 
  【강시 소환을 시도합니다.】
  【비전스킬로 등록되지 않은 능력입니다.】
  【비전특성에 적합하지 않은 비전 사용법입니다.】
  【부적합 판정!】
  【비전력의 추가 소요가 발생합니다.】
  【극도로 불안정한 상태입니다.】
 
  경우는 눈앞을 번쩍번쩍 밝히는 경고문을 보면서 무심한 눈빛으로 마지막 비전력을 주입했다.
 
  【실패 시 비전력의 폭주로 시체가 손상될 수 있습니다.】
 
  치프의 시체가 격한 진동을 일으키기 시작했다.
  이미 경우는 시체로 부터 손을 뗀 채 자리에서 물러서서 치프가 강시로 새로이 태어나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 모습엔 강시의 소환이 실패 할 것이라는 한 치의 의심도 서려있지 않았다.
  찰나의 시간이 지나며 시체의 떨림이 삽시간에 임계점에 도달했다.
  당장이라도 치프의 몸이 부서질 것만 같은 상황!
  그때, 경우의 눈앞에 두 줄의 문장이 떠올랐다.
 
  【행운 특성에 의해 최악의 상황은 좀 더 나은 방향으로 변화합니다.】
  【강시 소환에 성공했습니다.】
 
  경우는 당연하다는 듯 씨익 미소 지었다.
  ‘과거로 회귀를 할 수 있을 정도의 천운을 뛰어넘는 확률이 아니라면, 내 앞에 확률로서의 실패란 절대 존재하지 않는다.’
  이미 경우는 그 사실을 명확히 인지했고, 확신했다.
  행운 특성이란…… 바로 그러한 뜻을 의미하는 말이었으니까.
  다시 한 번 증명됐을 뿐이다.
  감흥이 있을 리가 없다.
  이후 한 차례 푸른빛이 눈앞에 깜박였다.
 
  【최초로 소환에 성공했습니다. 소환과 관련된 스킬에 소모되는 비전력 수치가 감소합니다.】
 
  다만, 정상적인 비전 스킬로 소환을 한 것이 아니라서 칭호는 주어지지 않는 것 같았다.
  아쉽긴 했으나 확률의 문제가 아닌 부분에 대해서는 어쩔 수 없는 노릇. 경우는 간단히 미련을 떨쳐냈다.
  “그러면…… 집 지키는 개의 능력을 보지.”
  푸른 비전력이 가라앉은 그의 앞에는 차렷 자세를 한 채로 두 팔을 꼿꼿이 치켜든 치프가 서 있었다.
  어쩐지 음울한 사기가 감도는 그 모습은 흔히 공포영화에 나오는 강시의 모습이 분명했으나, 혈색이 없어 비쩍 마르고 두 눈이 퀭해 박제와도 같은 모양새였다.
  하지만 커다란 덩치의 개과 형 괴물인 치프가 군기 바짝 든 신병처럼 앞으로 나란히 자세를 취하고 있으니 우스꽝스러운 모양새이기도 했다.
  경우는 실소를 머금으며 눈동자에 푸른 불길을 피워냈다.
 
  【치프 E: 강시: 69.8%
  정보: 죽음의 안식을 얻지 못한 채 김경우에 의해 되살아난 존재. 한때 포탈을 지키는 가디언의 역할을 수행했으나 이제는 소환자의 명령만을 듣는 꼭두각시가 되었다. 시체이기 때문에 부드러운 동작은 불가능하나 신체능력만은 생전에 비할 수 없이 강화되었다.
  특성:
  (+)버서커
  (봉인)통솔 F
  (봉인)위압 F
  신체강화 E
  (-)거동제한
  (-)흡혈 F
  (-)공포(방울소리, 붉은 콩, 찹쌀, 쇳가루)
  (-)약화(태양광, 화염)】
 
  약점이 많았다.
  특히나 주술과 관계된 부분에서는 치명적이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 강약이 뚜렷한 모습이었다.
  무엇보다 흡혈의 경우엔 죽음의 공포가 사라진 광전사가 되는 버서커 스킬과 부적절한 시너지를 일으켜 전장의 한복판에서 희생자의 피를 탐하는 멍청이로 만드는 디버프 스킬이었다. 뿐만 아니라 태양광을 받으면 능력치가 대폭 하락하는 약화 스킬 탓에 낮에는 밖에 꺼내놓는 것조차 불안할 지경이었다.
  좋게 말하자면 재활용 가능한 부하였고, 나쁘게 말하자면 일회용 쓰레기다.
  그 사실을 직접 두 눈으로 확인하고서도 경우의 표정은 이렇다 할 큰 변화가 없었다. 오히려 고개를 끄덕이며 한 걸음 다가서서는 치프의 배 위에 턱하니 한 손을 얹어놓았다.
  “강화.”
  순간 눈이 멀 듯한 빛이 치프의 몸에서 솟구쳤다. 동시에 경우의 눈앞으로 푸른빛이 떠올라 새로이 그 내용을 갱신했다.
 
  【소환된 강시를 강화합니다.】
  【비전스킬에 적합하지 않은 대상입니다.】
  【부적합 판정!】
  【비전력의 추가 소요가 발생합니다.】
  【극도로 불안정한 상태입니다.】
  【행운 특성에 의해 최악의 상황은 좀 더 나은 방향으로 변화합니다.】
  【[강시: 치프 E]가 [강시: 치프 E Ⅰ]로 강화되었습니다.】
  【(-)거동제한 스킬이 제거되었습니다.】
  【(-)흡혈 F 스킬이 제거되었습니다.】
 
  믿을 수 없는 일이 벌어졌다.
  강화 능력이라 함은 사람이 사용하는 도구에 비전력을 주입하여 그 특성을 강화시키는 능력이었다. 그런데 경우는 치프의 시체를 ‘죽었기 때문에 자율성을 잃어버린 하나의 물체’로 보았고, 그로 인해 단순 사물에 불과했던 치프의 시체가 강시가 되고서도 강화 능력의 적용을 받았다.
  물론 이것은 개념적, 이론적 문제였고 실질적으로는 강시가 되는 데에 사용된 비전력이 강화에 사용되는 비전력과 반발하기 때문에 그 확률은 지독히도 낮은 것이었다.
  그렇기에 이는 ‘이단’으로 취급된다.
  추론으로는 가능하되 실현 가능성이 한없이 낮은 비전능력의 사용법.
  하지만 경우에게는 0%의 확률이 아니기에 강시가 된 시체의 강화를 100% 성공시킬 수 있다.
  만약 살아있는 소환체였다면 강화를 시도하기도 전에 경우의 비전력이 튕겨나가 버렸으리라.
  다만 확률의 문제라면, 경우에겐 논외에 불과하다.
  ‘예상대로군.’
  경우는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시작이 좋았다.
  눈앞의 치프에게서는 외형적인 변화도 나타나는 중이었다. 알림이 나타남과 동시에 치프는 앞으로 치켜들고 있던 두 팔을 스르륵 늘어뜨렸다. 어쩐지 경직되어있던 몸 역시도 자연스러운 느낌으로 풀어졌으며 신기하게도 얼굴엔 혈색이 조금 돌아온 것 같았다.
  경우는 치프의 변화를 확인하고는 재차 입술을 열었다.
  “강화.”
  눈앞에서 푸른빛이 번쩍였다.
 
  【[강시: 치프 E Ⅰ]가 [강시: 치프 E Ⅱ]로 강화되었습니다.】
  【(-)공포 스킬이 제거되었습니다.】
  【(-)약화 스킬이 제거되었습니다.】
  【신체강화 스킬의 등급이 D로 상향되었습니다.】
  【신체강화 스킬D 의 영향으로 망가진 신체가 수복됩니다.】
  【통솔 F, 위압 F 스킬의 봉인이 해제되었습니다.】
  【잔여 비전력 10% 이하.】
  【치프 E Ⅱ: 강시: 69.9%
  정보: 죽음의 안식을 얻지 못한 채 김경우에 의해 되살아난 존재. 한때 포탈을 지키는 가디언의 역할을 수행했으나 이제는 소환자의 명령만을 듣는 꼭두각시가 되었다. 시체이기 때문에 죽음의 공포를 잊었으며 신체능력은 생전에 비할 수 없이 강화되었다.
  특성:
  (+)버서커
  통솔 F
  위압 F
  신체강화 D】
  【비전력이 부족합니다.】
 
  경우는 치프의 머리에서 손을 떼며 지친 기색으로 숨을 뱉어냈다. 한순간에 비전력이 빠져나갔기에 탈력감이 밀려들었다.
  하지만 경우의 눈빛은 여전히 빛나고 있었다. 그의 입술에서는 뜨거운 열기가 흘러나왔다.
  ‘아직…… 부족해. 이 정도로는 나 하나도 지키지 못해.’
  경우는 두 눈을 감고 천천히 숨을 내쉬었다. 고작 하나의 강시를 만드는 데에도 기진맥진 해 버린다면 앞으로의 계획은 생각만으로 그치게 될 뿐이었다.
  생각 해 본다.
  어떻게 해야 할 지, 지금 나에게 무엇이 부족한지에 대해!
  답은 금방 나온다.
  당연히…… 비전력의 총량. 지닌 바 비전량의 부족.
  그걸 높이기 위해서는 포탈을 파괴하고 결계를 이루는 크리스털을 획득해야만 했다.
  아직 세상은 결계나 크리스털은커녕 괴물들이 무엇인지조차 모르고 있었다.
  당연히 괴물들에 대한 모든 정보는 낱낱이 공개 할 것이다.
  사냥법이라거나 각종 괴물들의 특성을 모조리 밝힐 계획이다.
  포탈의 파괴도 적극 주장해야만 할 것이니.
  하지만…… 크리스털만은 논외다. 아직 다른 이들이 크리스털의 능력에 대해 알지 못할 때 남들보다 먼저 확보해야만 하는 것이었다.
  다만, 그래서는 이전 삶의 문제점이 똑같이 드러나는 것 있었다. 그렇기에 두려움이 밀려든다.
  ‘내가 잘못 된 판단을 하는 건 아닐까? 그로 인한 결과는 나 혼자 책임 질 수 있는 것인가?’
  하지만 시도는 해 봐야 했다. 미래의 참극을 되풀이하는 건 절대로 사양이다.
  무슨 짓이라도 할 것이다.
  경우는 시간 계산을 해 보았다. 앞으로 부모님이 계신 이곳에 파괴된 포탈을 대신하여 다시 새로운 포탈이 생성 될 시기가 언제인지에 대해.
  ‘포탈의 크기로 봐서는 대략…… 재생성까지 1주일.’
  그 기준은 20년 후의 미래를 상정한 것이지만, 오차가 크게 달라지지는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오차를 고려하여 다시 돌아와야 하는 시간이 최대 5일 뒤.
  아무리 빠르게 이동한다고 해도 경기도나 강원도 이상을 넘어가기엔 힘들었다.
  그 이외의 지역은 5일 뒤에 돌아와서 준비를 마치고 떠나는 것으로 가정함이 옳았다.
  ‘고민은 신중하되 결심했다면 몸부터 먼저 움직여라.’
  경우는 치프의 어깨 위로 훌쩍 올라탔다.
  사실상 신체능력은 강시로 되살아난 치프가 훨씬 뛰어나다. 게다가 지치지도 않으니 운송수단으로는 이보다 좋은 것이 없다.
  경우를 어깨에 태운 치프는 지하실을 벗어나 밝은 태양이 내리쬐는 건물의 밖으로 나섰다. 그리고 어떠한 거부감도 없이 하늘 아래 내리쬐는 햇살을 느긋이 만끽했다.
  치프는 한 차례 나지막이 으르릉 거리고는 힘껏 땅을 박차며 경우의 부모님이 계시는 아파트를 향해 달려갔다.
  ‘디펜서’
  세상이 괴물에 의해 혼란에 휩싸인 순간, 돌연 나타난 하나의 무장집단이었다.
  스스로를 디펜서라 일컬은 정체불명의 단체는 자신들이 모두 괴물들과 대적할 수 있는 어떠한 능력을 가진 존재라고 주장했으며, 지금까지 인간이 사용하고 있던 모든 통신매체를 활용하여 괴물에 대한 정보와 능력자라고 부르는 자신들에 대한 정보를 낱낱이 공개했다.
  뿐만 아니라 디펜서라는 단체는 폐쇄된 집단이 아니라 언제 어느 때라도 열려있는 단체, 가입하고자 희망하는 이들에겐 누구라도 손을 내밀 것을 강조했다.
  그로 인해 주어지는 혜택은 돈이나 명예, 권력 따위가 아니었다.
  단 하나. ‘복수’.
  가족을, 친구를, 연인을, 내가 좋아하고 사랑했던 모든 사람들을 한낱 고깃덩이로 만들어 버린 괴물들에 대한 처절한 응징!
  그것이 가능하도록 해 주겠다며 약속했다.
  이미 능력을 가지고 있을지도 모르지만 아직 스스로의 힘을 각성하지 못한 사람.
  지금은 아니지만 다가올 순간을 위해, 그리고 전선에 나가있는 능력자들을 도와 더욱 많은 괴물들을 죽일 수 있도록 조력 해 줄 수 있는 사람.
  ‘지닌바 모든 능력을 철저히 분석하고 연구해서 적을 격멸할 확실한 힘으로 되돌려준다.’
  그 때 까지만 해도 세상은 갑작스레 출현한 디펜서라는 단체에 대해 의심과 비난을 쏟아냈다.
  지금이 어떤 정세인데 이처럼 철없는 행동으로 민심을 혼란에 빠뜨리느냐고.
  모든 국가들이 하나같이 입을 모아 소리쳤다.
  반성하라!
  하지만 괴물 출현 일주일이 되던 날.
  디펜서는 당당하게도 각 국의 방송망을 침투하여 해킹, 완전 장악을 해 버리고, 뉴스를 통해 그들이 괴물과 맞서 싸우는 모습을 생중계로 방송해버렸다.
  지금까지 집 안에 숨어 괴물의 아가리에서 꼭꼭 감추었던 머리를 빼꼼히 내민 채.
  숨소리라도 들릴까 노심초사하며 뒤집어썼던 이불을 살짝 들어 올린 채 사람들은 눈앞에서 번쩍거리는 텔레비전 화면에서 고개를 돌리지 못했다.
  어떤 총기도, 포탄도, 미사일마저도 괴물들의 표피만을 벗겨내는 데에 그쳤던 절망감은 지금 이 순간 존재하지 않았다.
  텔레비전 화면 속의 능력자들은 허술한 칼질, 어린아이들이나 배울 법한 발길질, 어딘가의 테러 단체에서 구입했을법한 소총 한 자루를 가지고 흉포히 날뛰는 괴물들을 압도적으로 쓸어버리고 있었다.
  그 중에서도 대미는 ‘비전’이라는 것을 사용하는 한 명의 여인이었다.
  그녀는 돼지의 머리를 어깨 위에 올려놓은 이족보행 괴물들 백여 마리를 눈앞에 둔 채 두 팔을 펼치며 하늘 높이 날아올랐다. 그러자 허공에서 무수한 빛의 입자가 모여들더니 푸르른 마법진을 형성, 등 뒤로부터 나타난 마법진에서는 눈을 멀게 할 듯한 벼락의 섬광과 끓어오르는 고온의 불길, 닿는 것은 모조리 분쇄 해 버리는 빛의 광선들이 끊임없이 쏟아져 나왔다.
  고작 십여 초.
  그 찰나에 하늘로 날아오른 여인을 바라보던 돼지머리의 괴물들은 시체조차 남기지 못한 채 증발하듯 소멸해버렸다.
  생방송은 그 광경을 마지막으로 종료되었다. 텔레비전 화면에는 멍한 표정을 지은 아나운서들이 보였고, 화면의 아래로는 정부의 긴급 속보 문구만이 약속이나 한 것 줄줄이 나타나고 있었다.
  사람들은 그 때 생각했다.
  디펜서라는 단체는 적극적이고 실질적으로 괴물을 상대하고 있는데, 정부는 이처럼 시간이 지날 때 까지 도대체 무엇을 하고 있었느냐?
  괴물 등장 후 일주일이라는 시간.
  적어도 내가 알던 사람 중 둘 이상은 죽어 세상에 존재하지 않게 되기에 충분한 시간이었다.
  아무것도 하지 못한 정부의 모습은 그 순간 사람들의 뇌리에 뚜렷이 각인되었다.
  사람들은 너도나도 할 것 없이 디펜서로의 가입을 신청했다. 디펜서의 공식 홈페이지에는 한 시간 만에 수천만이 넘는 사람들이 접속을 시도했으며 그 숫자는 시간이 지날수록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났다.
  이미 보이지 않는 흐름은 국가의 통제를 완전히 벗어나버렸다.
  어쩌면 디펜서라는 단체는 일부러 이러한 상황을 연출 한 것일지도 몰랐다.
  애초에 괴물에 대해 알고서 대처하는 것과, 모른 채 대처하는 것은 그 결과가 상이하게 나타날 테니까.
  괴물이 나타난 즉시 대응하는 것도 아니었고, 굳이 7일이나 지나서 대응하는 모습을 공개적으로 보여준 것도 다분히 의심스러웠다.
  하지만 사람들은 공포와 분노에 사로잡혀있었다.
  자신들에게 손을 내미는 것이 천사이건 악마이건 판단하지 않는다.
  힘이 필요했다.
  세상에 나타난 괴물들을 죽여 없앨 수 있는 절대적인 힘이……!
  일주일이 지난 시점, 괴물로 부터 살아남은 인류 중 90%가 디펜서에 가입을 완료했다.
  디펜서라는 단체가 생겨난 이후 인간의 피해는 현격하다고 불러도 좋을 정도로 줄어들었다.
  마치 과거의 일들이 꿈이라도 되는 듯 세상은 급속도로 안정을 되찾아갔고, 한 달이 지난 시점에 이르러서는 디펜서로부터 제공되는 ‘비전력’을 활용한 신생 에너지가 인간의 기술 발달에 날개를 단 듯 박차를 더해주고 있었다.
  그만큼 사람들은 괴물이 나타나기 시작한 세상에 적응을 해 나가는 중이었다.
  하지만 적응을 한 것이지, 극복 한 것은 아니었다.
  비록 비전능력자의 위치와 활동이 체계적으로 관리되면서 더 이상 괴물이 시민을 위협하지 못하게 되었다 할지라도, 여전히 괴물은 말 그대로 괴물 같은 존재였다.
  불규칙적으로 생성되는 포탈은 간신히 구축해놓은 민간 도시에 괴물을 쏟아냈으며 그럴 때 마다 사람들은 과거의 공포를 떠올리며 혼란과 절망의 도가니에 빠져들었다.
  정상적인 사회활동이 이루어 질 리 없었고, 대부분의 직장은 아예 정규직이라는 단어를 입 밖에 꺼내지도 않게 되었다.
  오늘 출근하던 사람이 내일 장례식장에 있을 수도 있었다. 아예 건물 내부에 포탈이 생성되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
  그런 마당에 안정적인 수입을 얻기란 불가능에 가까웠다. 일 하던 사람이 멀쩡하다 하더라도, 회사 건물이 괴물에게 장악되면 그날로 월급 받기는 그른 것이었으니까.
  그래서 사람들은 시선을 괴물에게 돌렸다. 정확히는 그들의 몸에서 나오는 부산물을 취하는 것이었다.
  디펜서는 괴물이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자마자 가장 먼저 사회의 경제구조가 무너지는 것에 대한 대응책을 마련했다.
  그들은 각 등급의 괴물로 부터 얻을 수 있는 여러 가지 부산물들에 대해 경제적 가치를 매기고 그것을 직접 구매하기 시작했다.
  가장 대표적인 것은 괴물의 머리 부분에서 찾을 수 있는 ‘비전의 결정’이었다.
  그것은 신생 에너지원으로서 막대한 에너지로 변환이 가능한 자원이었다.
  하지만 그러한 변환 기술을 디펜서만이 지니고 있는 까닭에 비전의 결정을 사고 팔 수 있는 곳은 디펜서의 본사와 지사 밖에 없었다.
  이러한 점을 이용하여 디펜서는 전 세계의 국가로 부터 산업과 사회 활동에 사용되는 에너지를 판매하는 대신 자신들의 단체가 활발한 활동을 할 수 있도록 적극적인 편의를 제공받을 수 있는 권한을 요구했다.
  이미 수많은 에너지 발전소들이 괴물로 인해 파괴되거나 기능이 마비된 상황에서 한 국가가 국민을 위해 취할 수 있는 선택지는 그리 많지 않았다.
  무엇보다 국가 여론이 디펜서라는 단체에 호의적으로 형성이 된 상태였다.
  가장 중요한건, 국가의 고위 관직에 자리한 이들마저 괴물에 의해 가족과 친구를 잃었고, 그들 자신의 목숨마저 위험에 처했다는 사실이었다.
  일단 디펜서의 지사가 설립되면 그곳을 중심으로 광범위한 비전능력자 지대가 형성된다. 그 말인즉, 괴물이 나타나더라도 즉각 대응 할 수 있는 안전지대가 형성된다는 뜻이었다.
  어떤 이유로 보나 그들의 호의를 거절을 할 까닭이 없었다.
  결국 전 세계는 디펜서를 정식 단체로 인정하며 모든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그러자 디펜서는 아주 오래 전 부터 계획을 한 것 마치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당연한 일이라는 듯 삽시간에 자신들의 뿌리를 내리기 시작했다. 모든 산업시설과 경제구조에 디펜서의 손길이 뻗지 않는 곳이 없었고, 괴물이 존재하기 이전의 사회구조는 괴물과 디펜서가 존재하기 시작한 이후의 사회구조로 한 순간에 교체되었다.
  그 변화의 시간이 너무 짧아 대다수의 사람들은 무엇이 변하는지조차 인지하지 못한 채 생활을 영위했다.
  하지만 점점 거리에는 비전능력자들이 늘어났고, 괴물들은 사람들의 머릿속에서 절망의 대상이 아니라 돈을 벌 수 있는 수단으로 취급되기 시작했다.
  이것이 좋은 일인지, 나쁜 일인지는 알 수 없는 일이었다.
  단지, 사람들은 죽음이라는 단어로 부터 조금이나마 자유로워졌다.
 
  “하아아앗!”
  한 청년이 손에 든 철검을 힘껏 휘둘렀다. 그것은 청년의 눈앞에 있던 개머리의 괴물을 정확히 노리고 떨어졌다.
  하지만 개머리의 괴물은 청년의 검을 옆으로 훌쩍 뛰어서 피하고는 쏜살같이 달려와 입을 쩍 벌렸다. 괴물의 턱은 살짝만 힘을 줘도 청년의 머리뼈를 젤리처럼 으깨버릴 수 있을 것 같았다.
  그야말로 절체절명의 순간!
  그때 위기에 처한 청년의 눈이 푸르게 빛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의 몸 전체가 삽시간에 푸른 불길에 휩싸였다.
  그러자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지금까지 허우적거리던 청년의 모습은 거짓인 양, 청년의 손에 들린 검이 고속으로 이동하며 눈 한번 깜빡 할 사이에 괴물의 몸을 다섯 번이나 베고 지나갔다.
  칼 자체도 날카로웠지만 무엇보다 중요한건 속도였다. 고속의 칼날에 몸을 난자당한 괴물은 조각조각 흩어져 바닥으로 떨어졌다.
  청년은 그 모습을 확인하고는 눈동자에 머물렀던 푸른 불길을 거두었다. 그리고 한숨과 함께 자리에 풀썩 주저앉고 말았다.
  “젠장, 이번에도 등급이 안 올랐어!”
  그는 투덜거리는 푸념과 함께 손을 움직여 조각난 괴물의 시체 몸 여기저기를 헤집었다. 그러다가 사선으로 등분된 괴물의 머리 일부분에서 반짝이는 조각을 발견하고는 재빨리 손을 뻗어 그것을 빼내었다.
  손을 펴 살펴보니 푸른빛이 감도는 작은 보석이었다.
 
  【비전의 결정 F: 보석: 88.3%
  정보: 비전력을 극소량 보유하고 있는 결정.
  특성: 없음.】
 
  그것을 손에 든 청년은 희희낙락한 표정으로 결정에 들러붙은 피딱지를 닦아냈다.
  “십 만원 벌었다.”
  기쁨에 겨운 중얼거림이 고요한 빌딩 숲 사이로 울려 퍼졌다. 청년은 푸른 결정을 품속에 집어넣으며 허리춤에 매어둔 질긴 가죽 포대를 펼쳐서 괴물의 조각난 시체를 그 안에다가 집어넣었다.
  고작해야 종량제 봉투 20L 크기일 뿐이었다. 하지만 인간과 비슷한 덩치를 가지고 있던 개머리 괴물의 시체는 마치 텅 빈 공간에 들어가는 것 한 조각도 남김없이 모조리 가죽 포대의 안에 들어갔다. 겉으로 보기에 불룩해진 흔적도 없었다.
  청년은 개 괴물의 시체를 담은 가죽 포대를 등에 맨 가방에 집어넣었다.
  “진짜 신기하단 말야…… 그냥 보기엔 가죽 포댄데, 실제로는 비전력으로 만들어진 비전 아이템이라니…….”
  하지만 무게는 여전한 듯, 가방을 등에 맨 청년은 잠시 휘청거리는 모습을 보였다.
  재차 등을 쳐 올려 자세를 잡은 청년은 주변을 경계하며 아무도 살지 않는 빌딩 숲의 바깥으로 걸음을 옮겼다.
  이곳은 최초 괴물의 등장 시 적절한 대처를 하지 못해 이미 온 천지가 괴물의 마을이 되어버린 ‘필드’중의 하나였다.
  이곳에 살던 사람들은 모두 괴물의 손에 산 채로 잡아 뜯겼거나, 아니면 먼 곳으로 이사를 해서 지금은 사람이 살았다는 콘크리트의 흔적만이 남아있을 뿐이었다.
  그만큼 을씨년스럽고 으스스한 기분이 드는 곳이었다.
  청년은 필드의 바깥을 향해 걸음을 재촉했다.
  무려 다섯 겹의 철조망이 쳐진 필드의 외곽에는 비록 능력자는 아니지만 괴물들에게 충분한 살상력을 낼 수 있는 ‘비전 무기’를 지급받은 군인들이 지키고 있을 터였다.
  사실 자신의 ‘순간가속’능력보다는 원거리에서 적을 사살할 수 있는 비전 소총이 더욱 탐이 났다.
  하지만 군인이 아닌 이상에야 비전 무기를 사용하기 위해서는 개인적으로 구매 할 수밖에 없는데, 디펜서의 공식 사이트나 협회 혹은 지사에서 구매하기에는 돈이 부족했다.
  그렇다고 개인 판매자에게 사는 게 또 결코 싼 값이 아니다.
  청년은 저도 모르게 나온 한숨을 내쉬며 저 멀리 윤곽이 드러난 철조망을 바라봤다. 저 곳 까지만 가면 더 이상 괴물의 습격에 대비한다고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을 필요가 없다.
  절로 발걸음에 힘이 들어갔다.
  “응?”
  그때, 저 멀리서 철조망이 열리며 누군가가 안으로 들어오는 모습이 보였다.
  이미 해는 붉게 변해 지평선 아래로 떨어지는 중이었다.
  특히 괴물들은 저녁이 되는 시점부터 체감상 1.2배 이상 신체능력이 향상된다는 디펜서의 공식 연구발표가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아무리 비전능력자라 하더라도 저녁의 괴물사냥은 암묵적으로 금지되는 분위기가 형성 중이었다.
  그런 비전능력자들에 대해서는 군인조차도 달가워하지 않는다. 혹여 라도 괴물들을 끌고서 철조망 까지 도망 쳐 온다면 그것을 상대해야 하는 건 고스란히 자신들의 몫이 되기 때문이었다.
  그런 까닭에 웬만해서는 군인들은 비전능력자들을 저녁 이후에 필드 안으로 들여보내주지 않는다. 그러니만큼 지금 이 시간에 필드로 들어오는 남자에 대해 호기심이 슬쩍 고개를 내밀었다.
  “……어?”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가자, 이제 막 스물이 되었을 법한 남자의 모습이 보였다.
  그는 디펜서에 처음 가입하면 지급되는 기본적인 비전 무기와 방어구조차 착용하지 않은 상태였다.
  어디서나 볼 수 있는 캐주얼 복장에 심지어 신발은 운동화 차림이었다. 거기에 등에는 백화점에 들러서 살 수 있을법한 평범한 등산배낭이 매여 있다.
  만약 필드가 아니었다면, 저녁이 시작되는 무렵에 철조망을 지나오는 것을 보지 못했더라면, 그가 비전능력자라는 것을 짐작조차 하지 못했을 것이었다.
  아니, 비전능력자라 하더라도 미친놈이라고 외쳤을지도 모른다.
  청년과 남자의 시선이 마주쳤다.
  그 순간, 청년은 저도 모르게 옆으로 비켜서고 말았다.
  ‘뭐지?’
  남자의 인상 자체는 평범한 축에 속했다. 그저 그런 얼굴. 어디서나 볼 수 있는 외모였다.
  하지만 두 눈동자의 눈빛만은 도저히 똑바로 쳐다볼 수 없었다. 그렇다기보다는, 그 눈빛을 보고 있기가 싫었다.
  가슴이 답답해질 만큼 너무나 어두운 빛이었다.
  곧 그를 지나쳐 남자가 필드 안쪽으로 들어갔다. 청년은 한참이나 그의 뒷모습을 보다가 고개를 흔들고는 철조망의 앞으로 다가갔다.
  군인들은 문을 열어서 그를 밖으로 보내주었다.
  이제 해는 완전히 붉게 물들어 있었다.
  해가 사라진 밤.
  필드의 사방에서는 괴물들의 발소리가 가득했고 돌아보면 보이는 것이라곤 괴물들의 붉은 눈동자밖에 없었다.
  그들은 언젠가 지나쳐 올 연약하고 부드러운 먹잇감을 찾아 사방을 두리번거리고 있었다.
  가끔씩 내지르는 포효 외에는 상당히 고요한 편이었다.
  하지만 한 곳, 유달리 시끄러운 장소가 하나 있었다.
  어두운 밤 속에서 선명한 적색 빛을 밝히며 허공에 둥실둥실 떠 있는 네 개의 보석이 존재하는 장소. 포탈.
  그곳에서 괴물들은 정체를 알 수 없는 침입자들과 처절한 싸움을 벌이고 있었다.
  기본적으로 괴물들은 굶어 죽을 정도가 되더라도 집단을 형성해 인간을 공격하며 같은 괴물을 먹는 경우는 없었다. 심지어는 그 자리에서 굶어 죽기까지 한다는 연구 결과가 공개되어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든 적이 있었다.
  그만큼 괴물들은 철저히 인간만을 살육하기 위해 탄생한 존재였다. 그야말로 인간에겐 증오의 대상인 것이다.
  하지만 이 순간, 괴물들은 자신들을 공격하는 적들에게 제대로 된 저항을 할 수가 없었다.
  그것은 자신들을 공격하는 적들이 자신들과 똑같은 모습을 한 괴물들인 까닭.
  심지어 그 중에는 인근의 포탈을 지키던 포탈 가디언이 포함되어 자신들의 정신에 강제적인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다.
  “크허엉!”
  거대한 호랑이의 형상. 그리고 얼굴과 가슴, 양 어깨와 다리에 착용한 허술한 갑주는 틀림없이 27-14 구역의 포탈 가디언이었다. 그가 포탈 가디언으로서 지니는 통솔 스킬을 사용하자 한순간 인근의 괴물들은 누가 적이고 아군인지 판단하지 못한 채 그 자리에 못 박힌 듯 굳어버리거나 옆의 괴물 동료를 공격하는 모습까지 보였다.
  그 모습을 보며 72-14의 포탈 가디언은 적잖이 당황했다.
  아무리 포탈 가디언이라고는 하나 자신의 구역을 벗어난 장소에서는 통솔의 위력이 떨어지기 마련이다. 또한 자신의 구역에서는 무엇보다 해당 구역의 포탈 가디언이 통솔의 우선권을 가진다.
  그런데 눈앞의 포탈 가디언은 그런 순리를 깡그리 무시한 채 자신의 휘하 괴물들을 잘 마른 짚단처럼 우수수 쓰러뜨리고 있었다.
  그에 분노하여 당장이라도 뛰쳐나가고 싶었으나, 이미 주변에는 흉흉한 기세의 쥐, 혹은 개머리의 괴물들이 포위를 하고 있었다.
  그뿐이라면 코웃음 치며 단숨에 쓸어버렸을 터. 일반적으로 포탈 가디언은 E등급 중에서도 더욱 강한 능력을 지니고 있다.
  F등급에 불과한 하급 괴물들은 백 마리가 덤벼도 어쩌지 못한다.
  그런데 어째서 이놈들에게는 하나하나가 자신과 엇비슷한, 혹은 자신보다 더욱 강력한 기운이 느껴지는 것인가?
  저놈들 중 하나만 상대하더라도 이기지 못 할 것이라는 불길한 직감이 들었다.
  멧돼지의 형상을 한 포탈 가디언은 포위를 하던 괴물들 중 쥐의 머리를 한 괴물 하나가 앞으로 걸어 나오자 발바닥이 축축이 젖어드는걸 느꼈다.
  믿을 수 없다. 단순한 비전력의 기세만으로 패배를 떠올리게 된다.
  그것도 E등급인 포탈가디언인 자신이 고작 F등급의 하급 괴물 따위에게……!
  “우어어엉!”
  멧돼지 형상의 포탈 가디언이 호리호리하게 서 있는 쥐머리의 괴물에게 달려들었다. 그 모습이 매우 흉흉하여 당장이라도 쥐 괴물의 몸을 찢어발기고 몸을 조각 낼 듯만 했다.
  하지만 포탈 가디언은 자신의 머리가 쥐 괴물의 가슴에 부딪치는 순간, 그것이 잘못 된 상상임을 깨달았다.
  마치 쇳덩이를 두드리는 것만 같았다.
  텅! 하며 모든 충격이 고스란히 자신의 뇌로 흘러들어왔다. 머릿속이 엉망진창으로 진탕되었다.
  그 사이, 쥐 괴물은 움켜쥔 주먹을 치켜들어 단번에 멧돼지 괴물의 이마를 내리찍었다.
  꽝!
  어마어마한 굉음이 울려 퍼진다. 멧돼지 괴물은 그 일격으로 단번에 기절 해 버렸다. 쥐 괴물은 다시 한 번 주먹을 들어 올려 멧돼지 괴물의 이마를 내리찍었다.
  꽝! 꽝! 꽝! 꽝!
  콰직!
  쥐 괴물의 주먹질에 멧돼지 괴물의 이마가 박살났다.
  그 속에서 푸른 결정이 드러나 빛을 밝혔다.
 
  【누적된 비전력이 한계치를 돌파했습니다. 한계를 넘어선 비전력에 맞춰 비전등급이 상승합니다.】
  【비전등급이 상승했습니다. 비전력의 총량이 늘어나며 비전력의 회복속도가 상승하고 회복량이 증가합니다.】
  【최초로 ‘비전등급 D’ 가 되었습니다. 비전력 총량에 추가 비전력이 주어지며, 비전력의 회복속도와 회복량 수치가 상승합니다.】
  【72-14 포탈 가디언을 쓰러뜨렸습니다. 포탈 가디언으로 부터 총 비전력의 0.1%를 빼앗아 옵니다.】
  【72-14 포탈 가디언을 쓰러뜨렸습니다. 인근 10km반경의 적들이 포탈로 되돌아옵니다.】
  【모든 신체이상이 회복됩니다.】
 
 
 # 던전
 
 “끝났군.”
  경우는 눈앞을 가득 메우는 청빛의 문장을 보고는 작게 중얼거렸다. 하지만 별다른 감흥은 없는 목소리였다.
  애당초 포탈 가디언이 포함된 레이드였다. 이보다 빠르면 빨랐지, 늦을 수는 없는 일이었다.
  시작도 전에 정해진 결과. 당연한 일이다.
  그보다는 최초로 비전등급 D가 되었다는 문장이 신경 쓰였다.
  설마 아직까지 비전등급 D에 도달한 비전능력자가 없다는 말인가?
  이러면 안 된다. 적들은 지금 눈에 보이는 만큼 약한 놈들이 아니란 말이다.
  사력을 다해 강해지고자 발버둥 쳐도 살아남을 수 있을지 가늠하기 힘든데, 도대체 디펜서라는 단체는 무엇을 하고 있는 것인가!
  ‘조금만 더…… 조금만 더 준비가 된다면, 지구상의 포탈을 쓸어버릴 수…….’
  경우는 마음속에 피어나는 작은 분노, 초조함과 함께 눈앞에 떠오른 문장을 치워버리며 손 안에 둥실둥실 떠 있는 적빛의 크리스탈을 움켜쥐고 비전력을 주입했다.
  그러자 잠시 적빛을 반짝이던 크리스털은 이내 경우의 비전력을 받아 청빛으로 빛나기 시작했고, 하나의 크리스털이 궤도에서 이탈하자 나머지 세 개의 크리스털은 포탈을 유지하지 못하며 바닥으로 떨어졌다.
  경우는 네 개의 크리스털을 집어 들었다.
  손 안에서 느껴지는 청량한 감촉이 뜨겁게 끓어오르던 마음을 조금이나마 진정시켜주었다.
  ‘그래, 어차피 미래를 아는 것은 나뿐이다. 내가…… 책임지면 되는 일이다. 내가 모든 적과 맞서 싸운다면…….’
  “큭!”
  순간 머릿속이 찡 하고 울렸다.
  과도한 신경성 스트레스다.
  경우는 자신이 하루에 몇 시간을 잤는지도 모르고 있었다.
  비전능력자로서의 강화된 신체가 몸의 피로를 감당하고 있지만, 정신적인 부분까지는 어떻게 하지 못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경우는 굳은 표정으로 지도를 펼쳤다.
  쉬기엔 이른 시간이다. 그의 눈이 지도를 훑었다.
  그곳엔 붉은 펜으로 표시된 지역이 있었다. 그중 하나에 X표시를 그렸다.
  그곳을 중심으로 근처에 표시된 지역은…… 전부 X표시가 되어있다.
  “이 근처는 끝났군.”
  그 사이 주변의 정리를 마친 괴물들이 하나씩 경우의 주변으로 모여들었다. 그리곤 바닥에 내려놓았던 등산 배낭을 향해 스스로 걸어서 머리를 들이밀었다.
  호랑이의 형상을 한 포탈 가디언이 가방 속으로 들어가고, 마지막으로 쥐머리를 한 괴물들이 이번에 죽인 괴물의 시체와 포탈 가디언의 시체를 집어넣는 것을 마지막으로 모두 가방 속으로 모습을 감추었다.
  가방의 크기는 고작해야 성인 남성의 등을 가릴 정도. 그런데도 수십이 넘는 괴물과 그 시체가 가방 속으로 들어갔다.
  그런 가방을 집어든 경우는 살짝 눈살을 찌푸렸다.
  “좀 무거워졌군.”
  경우의 눈동자가 푸르게 불타올랐다.
 
  【등산 가방++ Ⅳ: 생활용품: 99.9%
  정보: 각성 2단계. 강화 4단계.
  특성: 내구도가 감소하지 않습니다.
  1. 수납 용량이 증가한다.: 부피 81배
  2. 수납 중량이 감소한다.: 무게감소 81배】
 
  “각성 2단계로 3배수 적용, 중량 감소 추가…… 그런데도 이정도 무게라면, 강화를 한 번 더 해야 되겠는데.”
  경우의 말 속에는 강화가 실패 할 것이라는 걱정이나 우려 따윈 한 조각도 들어있지 않았다.
  단지 신경 쓰이는 것은 지닌바 비전력의 총량.
  강화야 얼마든지 시도 할 수 있지만, 일정 단계 이상의 강화를 하기 위해서는 한 번에 소모되는 비전력이 존재했다. 그 탓에 강화 단계를 5이상으로 올리지 못하는 상태였다.
  성공은 보장되어 있으나 시도를 하지 못하는 상황.
  경우는 이번에 획득한 크리스털 네 개를 바닥에 내려놓고 품속에서 거울을 꺼내들었다.
  작은 손거울이지만 그곳에 자신의 모습을 비추자 거울 너머의 자신의 위로 푸른 문장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김경우: 인간: 비전등급 D
  정보: 비전력[400000000/(80000000*5)]
  특성: 행운(fortune)】
 
  4억.
  어마어마한 수치다.
  비전력 총량이 억 단위에 이르기 위해서는 비전등급이 C등급으로 올라가야만 가능했다.
  고작 D등급으로 4억의 비전력을 갖기 위해서는 400배 이상의 비전력 뻥튀기를 한 것이었다.
  그럼에도 경우는 5단계의 강화를 시도하지 못하고 있었다.
  하나의 단계가 높아질수록 간섭받는 비전력이 늘어나기 때문에 그것을 압도하는 비전력을 때려 박아야 하는 탓.
  그 까닭에 강화단계 하나가 높아질수록 요구되는 비전력의 양은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하게 되었다.
  과거 20년의 시간을 강화능력자로 살았었던 경우조차 최대 일곱 번을 강화하는 게 한계였었다.
  물론 당시에는 행운 특성이 아니었고 크리스털로 인한 비전력의 뻥튀기도 없었지만, 그만큼 강화 능력이라는 것이 수많은 특성 중에서도 한 번에 소모하는 비전량이 많다는 걸 뼈저리도록 잘 알았다.
  비전 능력자는 인간을 초월하는 힘을 가지지만, 그 근원을 이루는 비전력이 바닥나게 된다면 순간 쇼크로 인해 정신을 잃어버리게 된다.
  결국 평범한 사람보다도 못한, 그야말로 쓰레기로 전락하는 것이다.
  그렇기에 강화능력은 어떤 특성보다도 악질적이다.
  성공하면 대박, 실패하면 쪽박.
  물론 지금의 경우에게는 해당사항이 없는 이야기였다.
  경우는 손을 들어 목 언저리를 더듬었다. 그리고 목에 걸어두었던 목걸이를 풀어서 바닥에 내려놓았다.
  그것은 목걸이라기보다는 마치 염주와 같았다.
  빈 공간이 103개에 달하는 108염주.
  그 나머지 공간에는 다섯 개의 크리스털이 영롱한 맑은 청빛을 밝히고 있었다.
  마치 이 세상의 것이 아닌 것만 같은 무척이나 아름다운 보석.
  가히 경외감마저 드는 신물(神物)이라 칭할 법 했다.
 
  【비전의 크리스탈 F++ Ⅳ: 보석: 99.9%
  정보: 각성 2단계. 강화 4단계.
  특성: 내구도가 감소하지 않습니다.
  1. 소유자의 비전력을 증폭시켜준다. 비전력 +8100%
  2. 소유자의 비전력을 회복시켜준다. 회복력 +8100%】
 
  무려 81배의 증폭과 회복력을 가진 크리스털이 다섯 개나 있다.
  이 목걸이 하나만으로 수백 명에 달하는 비전능력자와 견줄 수 있는 비전력을 가진다.
  총 108개에 달하는 염주 중 고작 5개의 염주만을 크리스털로 채웠을 뿐임에도 말이다.
  그렇다면 108개를 모두 크리스털로 채우게 된다면, 그때엔 어떤 일이 벌어지게 되는 것일까.
  경우는 단언할 수 있었다. 지난 20년 과거를 통틀어 봐도, 당장 지금 그가 지니고 있는 목걸이에 버금가는 비전 아이템은 전 세계에 단 하나도 존재하지 않았다고.
  그저 비전 아이템을 속 빈 구슬로 엮었을 뿐인, 아이템 축에도 속하지 않는 물건임에도 말이다.
  제대로 된 비전아이템이라 부를 수 있는, 포탈 저편에서 넘어온 물건들 중에서도 마찬가지다.
  경우는 손 안에 들린 염주를 바라보며 자신이 선택한 길이 틀리지 않았음을 몇 번이고 재차 확인했다.
  그것은 스스로에 대한 최면과도 같은 것이었다. 기회는 이제 없다는 사실에 대한 초조함과, 반드시 바꾸지 않으면 안 된다는, 이미 정해진 미래를 알고 있다는 공포감.
  그것을 간신히 마음속에 억누르며 경우는 손에 쥔 염주를 한 알 한 알 손끝으로 밀어냈다.
  ‘근처 포탈은 이제 없어. 부모님은 집 안에 숨겨놓은 괴물들이 지키고 있으니까 걱정 없고.’
  “으음…… 좀 더 멀리 나가면 되겠지만…….”
  최초 포탈이 생성되었던 날로부터 한 달이 지난 시점이다. 그 이후부터 세상에는 평균 일주일에 한 번 꼴로 새로운 포탈이 생성되었다.
  과거였다면 점점 중첩되는 포탈들과 그곳에서 쏟아지는 괴물들로 인해 인간의 생활공간은 파괴되고 산업시설은 붕괴되었을 것이다.
  사회 시스템이 망가지고 인간들 사이의 커뮤니케이션이 단절되면서 심각한 국가적, 지역적 고립에 빠지게 된다.
  결국 인간들이 서로를 찾아 나설 시점엔 복구 할 수 없을 만큼 치명적인 피해를 입은 이후의 상황이었다.
  그때의 암흑기를 기억하는 경우는 인터넷과 SNS, 각종 방송 매체와 뉴스를 통해 새로이 생겨나는 포탈들을 찾아다니며 생겨나는 족족 소멸시키고 다녔다.
  간혹 ‘디펜서’에서 파견 나온 비전 능력자들과 마주치는 일도 있었다. 그리고 그들을 지켜보며 알게 된 것은, 그들 역시 포탈에서 얻을 수 있는 ‘비전의 크리스털’을 목표로 하고 있다는 것.
  그것의 진정한 위력에 대해 ‘디펜서’는 이미 알고 있다는 뜻이었다.
  ‘크리스털의 정체에 대해 알기엔 빠르다고 할 수 만은 없는 시기지만…… 공교롭군. 과거에도 그놈들은 처음부터 크리스털에 대해 알고 있었던가?’
  분명 기억을 되새겨 본 과거에는 자신들, 비전 능력자를 규합했던 단체가 상당히 늦게 등장했었다.
  하지만 지금은 이상하리만치…… 너무 준비가 잘 되어있다.
  이것이 결코 나쁜 일은 아니지만, 신경이 쓰이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그만큼 내가 더 빨리 강해지면 되는 일.’
  변하는 상황에 적응한다면 이미 뒤쳐지고 만다. 주도는 하지 않더라도 압도는 해야 한다.
  만약의 상황에 대처하기 위한 힘은 필수불가결한 것이다.
  ‘디펜서’라는 단체 역시도, 어쩐지 웃으며 손을 마주잡을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자칫 잘못하다간, 먹힌다.
  ‘조금 더 빨리 움직여야겠군.’
  경우는 생각을 굳히며 발걸음을 떼었다. 이젠 좀 더 멀리 나가서 포탈을 제거 할 생각이었다.
  경우의 활약 덕분에 인근에는 안정적으로 군과 디펜서가 자리를 잡았다. 어부지리 격이지만, 그것이 최종적으로 부모님의 안전을 보장하니 꼭 나쁜 일은 아니었다.
  그들에게 부모님을 맡기기엔 불안한 감도 있으나 지금으로서는 최선이었다.
  그나마 집 안의 강화된 가방과 집 밖의 땅 속에 묻어둔 보호용 괴물들의 존재가 작게나마 든든함을 뒤받쳐 줄 따름이니.
  ‘좀 더 작고…… 항상 곁에서 따라다닐 수 있는, 애완동물 같은 괴물이 나온다면 좋겠는데.’
  경우는 생각을 하면서도 실소를 터트리고 말았다. 10년 전, 바로 경우가 생각했던 그 애완동물 같은 작은 괴물 때문에 중국의 절반이 지도에서 지워졌었던 기억이 떠오른 탓이었다.
  그놈은 다섯 개의 꼬리를 가진 여우였다. 하지만 그놈의 울음 한 번에 지진이 일어나고 해일이 몰아치며 거대한 회오리와 태풍이 일고 천둥이 쏟아졌다.
  그로부터 1년이 지나기까지 끈질기게 공략을 해서야 놈을 죽일 수가 있었고, 살아남은 사람들은 놈을 다른 무엇도 아닌 ‘천재지변’이라고 불렀다.
  비전력을 머금은 눈으로 본 정식 명칭은 ‘지천호’였지만, 누구도 그렇게 부르지 않았다. 경우 역시도 놈을 떠올리면 몸서리가 일 정도였다.
  ‘귀엽긴 했었는데.’
  유일하게 좋게 볼 만 한 건 귀여운 외형 뿐.
  비단결 같이 부드럽고 풍만한 털은 꼭 여우가 아니라 강아지 같은 느낌이었다.
  그러니만큼 지금 생각과 연관되어 떠오르는 건 어쩔 수 없었다.
  “그놈은…… 10년 뒤에 등장하겠군.”
  경우의 입장으론 10년 전 과거에 등장한 괴물이다. 현재의 입장에서는 10년 후의 미래가 된다.
  만약 그 때가 된다면…… 놈을 막을 수 있을지, 적잖은 근심이 들었다.
  ‘반드시 막아낸다. 그 놈 뿐 아니라, 모든 천재지변 급의 괴물들을.’
  미래에는 지천호뿐만 아니라 여럿의 천재지변 급 피해를 유발하는 괴물들이 중간 중간 모습을 드러냈었다. 그 시기가 인간이 회생하려는 때와 꼭 일치해서, 인간은 번번이 세력을 축소 할 수밖에 없었다.
  다시 생각 해 보면, 마치 누군가가 지켜보고 있다가 시기적절한 순간에 재앙을 터트리는 게 아닐까 하는 의심마저 고개를 내밀 정도였다.
  ‘그럴 일은 없겠지만…….’
  경우는 빈 웃음을 매달며 고개를 흔들었다. 그런 지능적인 활동을 하려면 인간적인 소통이 가능한 괴물이 있어야 하는데, 괴물들은 최후에 등장한 인간형 괴물들조차 상당히 본능에 지배된 채 살육만을 목표로 하는 짐승의 상위호환 격에 불과했다.
  결국 인간은 지독히도 운이 없었던 것이다.
  경우가 실없는 상념을 지우며 멀리 보이기 시작하는 철조망을 향해 걸음을 옮길 때였다.
  갑작스레 그의 눈앞에, 푸른 문장이 나타나 선명한 불길을 피워 올렸다.
 
  【단시간에 수많은 포탈이 파괴되었습니다. 경계 등급이 상승합니다.】
  【1달 간 전 세계에 포탈이 생성되지 않습니다.】
  【경고! 특정 지역의 파괴된 포탈로부터 반경 1km 내에 존재하는 비전능력자가 ‘소환 대상’으로 지정됩니다!】
  【도망치십시오! 적은 당신을 찾아내려 할 것입니다!】
  【‘던전’에 역소환 포탈이 생성되었습니다! 10초 뒤에 소환이 시작됩니다!】
  【10, 9, 8, 7…… 3, 2, 1】
  【‘소환 대상’이 ‘던전’으로 소환됩니다.】
 
  그 문장을 마지막으로, 경우의 몸이 허공에 빨려 들어가듯 그 자리에서 지워져 버렸다.
 
  【‘던전’에 소환되었습니다.】
  【이 곳은 이질적인 기운이 분포되어 있습니다. 농축된 비전력이 회귀를 방해합니다.】
  【조심하십시오! ‘던전’은 비전 능력자를 사냥하기 위해 만들어진 사냥터입니다. 강력한 괴물들이 존재하고 있습니다! 그들로 부터 도망치십시오! 결코 섣불리 상대할 수 없는 존재들입니다!】
  【‘던전의 코어’를 찾으십시오. 그리고 부수십시오! ‘던전’이 파괴되고 원래 세상으로 돌아가게 될 것입니다.】
 
  경우는 눈앞에 떠오른 문장을 바라보며 이마를 손으로 짚었다.
  “이딴 건 들어 본 적도 없는데.”
  과거, 이러한 강제 소환이 있다는 건 누구에게도 들은 적이 없는 일이었다.
  있거나 비슷한 일이라도 겪은 자가 있다면 1년 전, 최후의 시절에 지나가는 말로라도 언급을 한 적이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누구도 이런 ‘소환’이라느니 ‘던전’같은 이야긴 꺼낸 적도 없었다.
  경우는 누군가가 실종되었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는지 기억을 되새겨 보았으나, 설령 실종이 되었다 치더라도 그게 지금과 같이 던전으로 끌려 온 것인지 지나가던 괴물에게 씹어 먹힌 것인지는 알 수 없는 노릇이다.
  그리고 정말 던전으로의 소환이 있었다면 소환은 둘째 치고서도 ‘던전’의 존재에 대해 이야기를 했었을 것이다.
  그렇다는 건 결국 과거에도 ‘던전’이 있었다면, 이 던전에서 살아 돌아온 비전 능력자가 단 한 명도 없다는 이야기가 된다.
  경우의 표정이 크게 찌푸려졌다.
  ‘설마 포탈을 좌표로 삼아서 인근 비전 능력자를 모조리 휘말리게 할 줄은 상상도 못했군.’
  짐작컨대 이러한 행위는 쉽게 벌이지는 못하는 것일 테다.
  몇 번이고 가능한 일이었다면 굳이 괴물과의 전쟁이 20년이나 지속되지 않았을 터.
  던전에 끌어들여서 소리 소문 없이 죽여 버리면 그만인 것을, 시간 낭비하며 질질 끌지는 않았을 것이다.
  즉, 괴물들의 측에서도 상당한 손해 혹은 페널티를 감수하고서 벌인 일이라는 뜻이다.
  경우는 주변을 둘러보다 발치에 뒹굴고 있는 ‘비전의 크리스털’ 여섯 개를 발견했다.
  자신들을 소환하는 데에 사용 된 것이 틀림없다.
  경우는 손을 뻗어 그것을 주워들었다. 곧 그 정보가 푸른 문장으로 떠오른다.
 
  【비전의 크리스탈 E: 보석: 68.2%
  정보: 없음.
  특성: 1. 소유자의 비전력을 증가시켜준다. 비전력 +1000】
 
  “……E 등급……?”
 
 
 
  경우는 그 뒤로 붙어있는 비전력 1000증가를 보고선 눈을 휘둥그레 뜨고 말았다.
  지금, 강화되지 않은 상태의 크리스털이야 고작 1천의 비전력을 증가시켜주는 좋은 아이템에 불과하지만, 각성을 거치게 된다면 1천 퍼센트의 증폭을 일으키는 신물(神物)로 재탄생된다.
  경우의 입장에선 아이템이 존재하기만 한다면 완전성공을 보장하는 바, 상황이 암담하긴 하나 돌부리에 걸려 넘어진 자리에서 백만 원 치 지폐다발을 발견 한 것이나 다름없는 일이었다.
  경우는 즉시 두 손에 하나씩의 크리스털을 쥔 채 힘주어 소리쳤다.
  “각성!”
 
  【매우 큰 비전력의 간섭이 발생합니다.】
  【너무나 극도로 불안정한 상태입니다.】
  【행운 특성에 의해 최악으로 치달은 절망적인 상황은 좀 더 나은 방향으로 변화합니다.】
  【비전의 크리스탈 E+: 보석: 68.2%
  정보: 각성 1단계.
  특성: 1. 소유자의 비전력을 증폭시켜준다. 비전력 +1000%】
 
  “흡……!”
  숨이 턱 막힌다. 순간적으로 몸의 신체 일부가 소실되는 정도의 막대한 비전력이 일시에 쑥 빠져나갔다.
  그리고 동시에 남아있던 비전력이 10배 증폭되어 몸 안에 휘몰아쳤다.
  갑작스레 늘어난 비전력에 너무나 맑아진 정신은 오히려 지독히도 청량하여 되레 머리가 어지러울 지경이다.
  하지만 떨리는 손으로 다른 하나의 E급 크리스털을 손에 쥐었다. 그리고 소리쳤다.
  “각성!”
 
  【비전의 크리스탈 E++: 보석: 68.2%
  정보: 각성 2단계.
  특성: 1. 소유자의 비전력을 증폭시켜준다. 비전력 +1000%
  2. 소유자의 비전력을 회복시켜준다. 회복력 +1000%】
 
  총 세 개의 크리스털이 하나의 크리스털로 합쳐졌다. 덕분에 강화를 통한 배수율은 3배로 상승되었다.
  경우는 거의 절반이나 빠져버린 비전력 탓에 헛구역질이 올라오는 속을 다독이며 이어서 E++급 크리스털의 강화를 진행했다.
  “강화.”
 
  【비전력의 간섭이 발생합니다.】
  【극도로 불안정한 상태입니다.】
  【행운 특성에 의해 최악의 상황은 좀 더 나은 방향으로 변화합니다.】
 
  【비전의 크리스탈 E++ Ⅰ: 보석: 68.2%
  정보: 각성 2단계.
  특성: 1. 소유자의 비전력을 증폭시켜준다. 비전력 +3000%】
  2. 소유자의 비전력을 회복시켜준다. 비전력 +3000%】
 
  남아있던 비전력의 일부가 빠져나가고 그 이상의 배수가 적용되었다.
  강화는 각성보다 소모되는 비전력이 현저히 적다.
  두어 번 정도는 더 강화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강화.”
  그리고 또 강화.
 
  【비전의 크리스탈 E++ Ⅲ: 보석: 99.9%
  정보: 각성 2단계. 강화 3단계.
  특성: 내구도가 감소하지 않습니다.
  1. 소유자의 비전력을 증폭시켜준다. 비전력 +27000%
  2. 소유자의 비전력을 회복시켜준다. 회복력 +27000%】
 
  경우는 새로이 만들어낸 강화된 크리스털을 염주의 빈 공간에 결속시키며 아이템으로 증폭된 현재 상태를 되짚어보았다.
  이젠 퍼센트를 제외한 플러스 비전력은 그야말로 있으나 마나 한 수준이었다.
  아직 강화시킨 E++급 크리스털을 비전력 총량까지 강화하지 않았고, 강화하지 않은 E급 크리스털도 세 개가 더 남아있다.
  시간이 지난다면 전부 강화 할 수 있으리라.
  경우는 아예 그 자리에 주저앉아버렸다.
  “회복력 675배. 비전총량은 C급을 넘었지만…… 회복력은 D등급 수준이니까, 전부 채우려면 좀 걸리겠는데.”
  ‘게다가 뭐가 튀어나올지 모르니 지금은 기다리는 게 상책이지.’
  비전 능력자는 체내의 비전력으로 인해 신체회복력이 인간의 범주를 넘어선다.
  단순히 움직이지 않는 행위뿐이라면 며칠을 굶어도 허기를 느끼지 못 할 정도.
  오히려 낮선 상황에 섣불리 움직이는 게 더욱 바보 같은 일이다.
  만약 급하다면 괴물 쪽에서 먼저 다가 올 것이다.
  이곳으로 불러들인 주인은 다른 무엇도 아닌 바로 인간의 적, 증오스런 괴물 그 본인들이다.
  경우는 손님의 입장에서 맞이 받을 준비를 해야만 하는 것이었다.
  경우는 등에 메고 있던 가방을 발치에 내려놓았다. 그러자 열린 가방의 입구에서부터 안에 들어있던 ‘시체’들이 하나 둘씩 밖으로 나와 경우의 주변을 둘러싸기 시작했다.
  경우는 그들이 자신의 주위를 호위하듯 둘러싸는 모습을 지켜보며 문득 가벼운 한숨을 내쉬었다.
  ‘이것들도 추가 강화를 해야 하고…… 할 일이 많군.’
  오히려 경우는 이 자리에 앉은 채 해야 할 일이 더욱 많음을 깨달았다. 그 동안의 시간은 아무 연락도 없이 사라진 자신을 부모님이 걱정하는 시간이기도 할 테지만, 그렇다고 급하게 움직이다간 돌이킬 수 없는 길을 건너게 될 수도 있음을 누구보다도 잘 안다.
  이럴 때엔 스스로 모든 준비가 되었다고 판단을 하고 나서도 더욱 신중히 고려한 후에 움직여야 한다.
  애당초 이곳은 괴물들이 비전 능력자를 사냥하는 목적만으로 만들어낸 위험천만한 곳이다.
  경우는 과거에서조차 이곳에서 누구도 빠져나오지 못했음을 상기하며 다급해지려는 마음을 조용히 내리눌렀다.
  일주일이 지났다.
  경우는 손에 쥐고 있던 염주를 자신의 목에 걸었다.
  그 안엔 총 일곱 개의 보석이 푸르게 빛을 밝히고 있었다.
  연청의 밝은 보석 다섯 개와, 진청의 맑은 보석 두 개.
 
  【비전의 크리스탈 F++ Ⅴ: 보석: 99.9%
  정보: 각성 2단계. 강화 5단계.
  특성: 내구도가 감소하지 않습니다.
  1. 소유자의 비전력을 증폭시켜준다. 비전력 +24300%
  2. 소유자의 비전력을 회복시켜준다. 회복력 +24300%】
  【비전의 크리스탈 E++ Ⅳ: 보석: 99.9%
  정보: 각성 2단계. 강화 4단계.
  특성: 내구도가 감소하지 않습니다.
  1. 소유자의 비전력을 증폭시켜준다. 비전력 +81000%
  2. 소유자의 비전력을 회복시켜준다. 회복력 +81000%】
 
  또한 기존의 크리스털들을 한 차례씩 더욱 강화했다. 그러자 비전총량이 C등급의 비전능력자의 스무 배를 넘어서는 수치가 만들어졌다.
 
  【김경우: 인간: 비전등급 D
  정보: 비전력[2835x10^6/28억]
  특성: 행운(fortune)】
 
  그리고 경우의 주위로 호위하듯 서 있는 괴물의 시체는 5단계 강화에 도달하여, 이제 어느 누가 보더라도 ‘시체’가 아닌 살아있는 ‘괴물‘로서 보이게 되었다.
  하지만 오히려 강화를 거치며 각종 비전 버프가 추가되어 살아있는 괴물보다 압도적인 능력치를 보유하고 있었다.
  겉으로 보기엔 다를 바 없으나, 그 속은 그야말로 ‘괴물’인 것.
  “가 볼까.”
  던전에 들어오고 난 이후 경우는 처음으로 몸을 일으켜 자리에서 움직였다. 그 뒤를 수십의 괴물 시체들이 뒤따른다.
  그런 경우의 앞에는 4단계 강화된 ‘가디언’급 괴물들이 주변을 경계했다.
  이로써 준비는 모두 끝난 상황.
  앞으로 무엇이 나타날지 알 수 없음에도, 경우의 걸음엔 주저하거나 망설임이 없었다.
  ‘걱정하시겠군. 곧장 던전 코어를 부수고 돌아간다.’
  경우는 담담히 걸음을 내딛으며 앞으로 나아갔다.
  던전은 말 그대로 복잡한 미로와 갈림길이 가득한 곳이었다.
  처음 자리에서 움직인 이후, 약 한 시간 정도를 걸어가던 경우는 봐도 똑같이 생긴 던전의 형태에 진저리가 나는 기분을 느꼈다.
  길을 헤매는 것 같지는 않는데, 어디쯤에 위치했는지 알 길이 없었다.
  ‘다른 방법이 필요하다.’
  이렇게 돌아다녀서는 끝이 없음을 깨달았다.
  분명 어디론가 이동은 하고 있는데, 위치를 종잡을 수가 없었다.
  특별한 비전력이 작용하는 것인지, 아니면 단순히 넓은 것인지는 모르겠으나 걸어서 이동해서는 답이 없었다.
  “가라.”
  경우가 짤막히 말했다. 그러자 앞서던 가디언급 괴물들이 경우의 주변에 모여들었다.
  그리고 뒤를 따르던 괴물들이 한 순간 걸음을 내딛더니 일제히 던전의 각 골목골목으로 삽시간에 달려가 시야에서 사라졌다.
  신체능력으로만 따지자면 전투형 비전능력자는 커녕 생활형도 아닌, 특수형 비전능력자에 속하는 경우보다야 5단계나 강화된 괴물들이 압도적인 스펙을 자랑하는 건 당연한 일이다.
  그야말로 눈 깜짝 할 사이에 사라져 버린 경우의 소환된 괴물들이지만, 아무리 멀리 떨어져 있어도 계속해서 그 신호를 경우에게 전달한다.
  그들은 경우가 전속력으로 달려도 쫒지 못 할 속력으로 던전의 구석구석을 헤집었고, 고작 10여 분 지난 시점에서 던전 속의 또 다른 괴물들을 발견해냈다.
  비록 비전특성이 일치하지 않는 탓에 ‘스킬’이 생성되지 않아 소환한 괴물과의 시야 공유는 할 수 없었지만, 적을 발견했을 때의 비전 파장이 경우의 머릿속에 흘러들어왔다.
  “가자.”
  경우는 27-14 구역의 포탈 가디언인 은백의 범, ‘룰’의 등에 올라타며 빠르게 던전 안을 달려갔다.
  룰은 네 발 짐승의 형태를 한 만큼 지상에서의 속력은 희끗한 뒷모습만이 잡힐 만큼 빠른 질주를 보였다.
  뒤에서 치프가 72-14 구역의 포탈 가디언인 멧돼지의 형상, ‘바이서스’를 타고 뒤따르는 모습이 보였다.
  이미 4단계 강화된 ‘가디언’급의 몸체는 고작 치프의 무게 따위 짐도 되지 않는다는 양 전혀 뒤쳐지지 않는 속력으로 경우의 뒤를 쫒아왔다.
  그들은 이미 죽은 시체이기에 피로 같은 건 일절 존재치 않는다. 처음부터 끝까지 전속력으로 달려온 룰와 바이서스는 이내 경우가 소환한 괴물이 기다리고 있는 골목에 들어섰다.
  고작해야 몇 분가량.
  5단계 강화를 거쳤다지만 일반 괴물보다 4단계의 강화를 거친 가디언급 괴물이 더욱 스펙이 높음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경우는 룰의 걸음을 이끌며 천천히 앞으로 다가갔다.
  곧 골목 너머로 펼쳐진 모습이 드러났다.
  그 곳에는 경우가 곁에서 줄곧 보아 온 익숙한 얼굴이 있었다.
  바로 치프였다.
  그것도, 머리가 두 개 달린 치프.
  그런 치프가 그곳에, 수십 마리가 우글거리고 있었다.
  “끄아악!”
  그 뿐이면 좋으련만, 골목 너머에는 이미 다수의 손님들이 먼저 잔치에 들어선 참이었다.
  ‘나만 소환 된 게 아니었군.’
  머리 둘 달린 치프의 무리 속에는 십여 명에 가까운 사람들이 필사적으로 그들과 맞서 싸우고 있었다.
  이곳에 소환되었다는 것은 즉, 그들 모두가 비전능력자라는 뜻.
  게다가 손과 몸에서 푸른빛이 번쩍거리는 모양새를 보니 모든 인원이 전투형 비전특성을 지닌 자들이었다.
  각자 손에 든 무기와 몸에서 뻗어나가는 비전력이 우글거리며 몰려드는 트윈헤드 치프들을 격렬히 밀어내고 있었다.
  “으아아악!”
  “죽어! 죽으라고!”
  하지만 결정적인 치명타가 없었다.
  모두가 체계적인 교육과 훈련을 받은 듯 효과적인 공격을 이어나가고 있었지만, 필살에 이르는 기술은 단 하나도 존재하지 않았다.
  트윈헤드 치프는 한쪽 머리가 파괴되더라도 아무런 영향도 받지 않는다는 듯 묵직한 쇠몽둥이를 비전능력자들에게 휘둘렀다.
  그 탓에 막 머리 하나를 부수고 긴장을 풀던 비전능력자 한 명이 그와 마찬가지로 머리에 쇠몽둥이를 직격으로 맞아 쓰러졌다.
  인간에게 머리는 하나뿐인지라, 그는 다시는 일어서지 못했다.
  “레인!”
  안타까운 음성이 찢어진 목소리로 울려 퍼졌다.
  목소리를 낸 비전능력자는 금빛 머리카락이 흩날리는 아름다운 소녀였다.
 
  그녀는 손에 든 둥근 방패로 트윈헤드 치프의 몽둥이를 막아내며 잠시 생긴 틈으로 권총을 밀어 넣어 방아쇠를 잡아당겼다.
  탕탕탕! 거세게 울리는 총성에 언뜻 푸른빛이 어려 있었다.
  “크워어어!”
  트윈헤드의 두 머리가 일제히 비명을 토해냈다.
  인간의 화기로는 뚫지 못하는 비전력이 결집된 괴물의 몸체가 몇 번의 사격으로 단숨에 관통되었다.
  뒤편으로 진득한 핏방울이 후두둑 튀어나왔다.
  처음으로 입힌 강력한 피해였다.
  “꺄악!”
  하지만 죽음에 이르는 피해는 아니었다. 오히려 분노에 찬 트윈헤드 치프의 몽둥이질에 소녀가 든 방패의 가운데가 굉음과 함께 찌그러졌다.
  “아나스타시야!”
  곁에 선 남자가 다급한 음성으로 외쳤다. 그는 크게 검을 휘둘러 트윈헤드 치프를 밀쳐내고는 재빨리 쓰러진 소녀에게 달려갔다.
  막 그녀의 몸에 떨어지려는 쇠몽둥이를 두 손으로 움켜진 검을 들어 막아냈다. 하지만 듣기 싫은 쇳소리와 함께 검면에 거미줄 같은 금이 내달린다.
  “큭!”
  철컥! 소녀가 팔을 뻗어 총구를 치프의 하나 남은 머리에 들이밀었다.
  그리고 격발─ 하지만, 어찌 된 일인지 더 이상 손에 쥔 총에서는 불꽃이 뿜어져 나오지 않았다.
  손가락을 몇 번 더 당겨 본 소녀는 사색이 되어갔다.
  “아나스타시야! 무슨 일이야?!”
  “탄환이 다 떨어졌어요! 하필이면 이럴 때……!”
  “물러서!”
  검을 들고 막고 있던 남자의 머리 위로 또 다른 트윈헤드 치프가 다가와 쇠몽둥이를 내리쳤다. 그러자 챙! 하는 가벼운 소리와 함께, 그의 손에 들려있던 검이 두 동강 나 버리고 말았다.
  이미 남자는 손에서 검을 놓고 뒤로 물러선 참이지만, 그의 얼굴엔 절망이 어리기 시작했다.
  “끄아아아악!”
  “헉, 노웬!”
  등 뒤에서 처절한 비명이 들려온다. 피 끓는 고함이 아수라장으로 변한 공간에 흩뿌리듯 울려 퍼졌다.
  살아남은 사람은 여덟. 그들은 몸 성한 군데 하나 없이 지친 기색을 숨기지 못하며 서로의 등을 향해 뒷걸음질 칠 뿐이었다.
  눈앞에 모여드는 것은 머리 두 개 달린 그야말로 괴물의 무리들. 반면 둥글게 뭉쳐있는 인간들의 모습은 웅크린 채 가느다란 가시를 뻗은 겁에 질린 새끼 고슴도치의 모양이었다.
  “크허어엉!”
  트윈헤드 치프가 괴성을 질렀다. 바로 코앞에서 놈의 입천장이 고스란히 보였다.
  지독한 냄새가 맡아진다. 머리 위로 금속 빛의 쇠몽둥이가 음울한 빛을 받아 아지랑이처럼 흔들거렸다.
  “아아…….”
  아나스타시야는 앞으로 한 걸음 내딛으며 찌그러진 둥근 방패를 내밀었다.
  방어를 할 수 있는 비전능력자는 자신밖에 없었다.
  최소한 이 한 번의 공격을 막아낸다면, 적어도 하나의 괴물은 더 죽이고 길동무로 삼을 수 있을 것이다─
  “큭!”
  하지만 지척에 다가온 쇠몽둥이를 보고선 그만 두 눈을 감고 말았다.
  조금 전 느껴졌던 어마어마한 충격이 뇌리에 떠오른 탓이다.
  그것은 훈련용으로 제작된 거대한 바이스가 내리치던 쇠말뚝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 아픔이며 공포였다.
  아무리 전문적인 훈련을 받았더라도, 그녀는 15세의 어린 소녀였다. 폭력과 고통에 익숙할 리 없는 것이다.
  쾅!
  던전 안에 굉음이 울려 퍼졌다.
  그것은 쇠와 쇠가 부딪친 소리라기엔 너무나 큰 것.
  예를 들자면, 전투기와 전투기가 정면충돌 한 것 같은 파괴적인 소음이었다.
  “……어?”
  그리고 그 소리의 진원지는 소녀가 움켜쥔 작고 둥근 방패의 찌그러진 표면이 아니었다.
  “헉!”
  바로 그녀의 앞, 가려진 방패 너머로 푸른 눈동자에 비치는 광경은 하나 남은 트윈헤드 치프의 머리를 또 다른 치프의 주먹이 두부를 으깨듯 파고드는 모습이었다.
 
 
 
  마치 슬로우모션을 보듯 믿기지 않는 장면을 본 소녀의 사고가 과부하를 일으켰다.
  찰나의 순간, 세상은 다시금 원래대로 흘러가기 시작했고, 방금 본 장면이 거짓이 아니라는 듯 트윈헤드 치프의 몸뚱이는 움직임을 멎은 채 저 멀리 날아가 던전의 바닥을 사정없이 나뒹굴었다.
  “크와아앙!”
  하나의 머리를 가진 평범한 치프가 거친 음성으로 포효했다. 소녀는 마치 그 모습이 웃고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크워어어!”
  단번에 어그로가 돌아갔다. 지금껏 비전능력자들을 둘러싸고 있던 트윈헤드 치프들이 일제히 그 표적을 난입한 치프에게로 돌렸다.
  보통 괴물들끼리는 서로를 공격하지 않는 습성을 가졌지만, 던전 안의 괴물들은 지나치게 지능이 높았다. 괴물임에도 불구하고 사리분별은 할 줄 아는 것이었다.
  누가 적이고 아군인지 안다.
  트윈헤드 치프들은 주저 없이 치프를 향해 달려들었다.
  “위험해!”
  아나스타시야는 저도 모르게 소리쳤다.
  방금 전 눈앞에서 보았던 모습이 머릿속에 남아있어서일까. 그녀는 머리 하나 달린 치프가 곧 처참한 시체가 되어 쓰러지게 될 것이라는 상상에 안타까운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그것이 착각에 불과하다는 걸 깨닫기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크아아아!”
  쾅! 콰앙! 콰광!
  귀를 찢는 굉음이 쉴 새 없이 울려 퍼졌다. 바로 옆에서 융단폭격이 퍼부어지는 듯한 기분마저 들었다.
  그들에게로 난입해온 치프는 자신을 향해 덤벼드는 트윈헤드 치프를 향해 거침없이 두 주먹을 내질렀다. 그럴 때 마다 사방으로 피와 살 조각이 하얀 뼛가루와 함께 붉은 꽃잎처럼 흩날렸다.
  무작정 달려드는 트윈헤드 치프들에겐 가슴 앞으로 끌어당긴 두 주먹을 연속으로 뻗는 것만으로 달려드는 속력보다 더 빠르게 뒤를 향해 날려버렸다. 놈들의 가슴과 머리가 주먹의 형태 그대로 움푹움푹 패여 들어갔다.
  그것을 본 트윈헤드 치프들이 옆에서 달려들자 치프는 오히려 그들을 향해 뛰어들며 다가오는 놈들의 머리를 무릎으로 찍어버렸다. 엄청난 충격량에 하체는 앞으로 달려오지만 상체는 뒤로 꺾여버린다. 그것을 발로 걷어 차 버렸다.
  실 끊어진 연 마냥 트윈헤드 치프들이 하늘을 날아다녔다.
  “……굉장해.”
  아나스타시야는 넋을 잃은 채 눈앞에서 벌어지는 광경을 바라봤다. 믿을 수 없었다. 자신의 비전력을 가득 담은 총탄을 맞고서야 간신히 관통되는 몸을 가진 놈들인데, 지금은 평범한 치프가 휘두르는 주먹과 발길질 몇 번에 몸 여기저기가 부서지고 터져나가며 죽거나 행동불능 상태에 빠져버린다.
  고작해야 오 분 정도.
  그 사이에 자리에는 더 이상 두 발 딛고 서 있는 트윈헤드 치프가 존재하지 않았다.
  압도적이다.
  치프의 몸에는 긁힌 상처 하나 보이지 않았다. 그저 몸에 뭍은 트윈헤드 치프의 살점과 핏자국을 툭툭 털어 낼 따름이다.
  아나스타시야는 그런 치프의 모습에 그가 혹시 비전능력자가 괴물의 힘을 빌려 쓰고 있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버렸다. 그도 그럴 것이, 이렇듯 괴물이 같은 괴물을 죽이면서까지 자신들을 도와 줄 까닭은 없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곧 들려온 목소리에 그녀는 상념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용케 살아남았군. 괜찮나?”
  그녀의 곁으로 20대 초반의, 나이에 어울리지 않는 아저씨 말투의 청년이 담담한 걸음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당신은 누구죠?”
  비전능력자가 되어서 좋은 점 중의 하나는, 체내의 비전능력이 자연스럽게 상대방의 기운을 읽어낸다는 것이다.
  그 말은 즉, 실시간 통역을 듣는 것과 다를 바 없다는 뜻이었다.
  경우는 소녀의 생소한 외국어를 들으며 아무 거리낌 없이 한국어로 대답했다.
  “한국. 김경우.”
  “……러시아. 아나스타시야 오르셰 프라비톄.”
  “아나스타시야?”
  경우는 오랜만에 듣는 이름에 그만 목소리를 높이고 말았다. 그녀는 과거, 꽤 오랜 기간 동안 괴물을 죽이고 다녔던 ‘5인의 구원자’중 한 명에 속하는 비전능력자였다.
  그녀의 비전능력을 사용하면 모든 종류의 무기에 비전력을 담을 수 있어 인간의 무기체계가 괴물들에게 고스란히 통용된다는 어마어마한 이점이 있었다. 그런 특징 탓에 종국엔 어딘가의 방호 쉘터에 들어가서 얼굴을 볼 수 없게 되어버렸지만, 확실히 그 이름만큼은 기억하고 있었다.
  그녀 덕분에 인간의 멸망이 10년 늦춰졌다고 할 정도로 엄청난 잠재력을 가진 비전능력자였기에 잊을래야 잊을 수가 없었다.
  ‘아나스타시야라니…….’
  그런 ‘거물’이 난데없이 자신의 눈앞에 나타났다. 이는 우연으로 치부 할 수도 있지만, 경우는 결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무엇보다도 이곳은 과거 존재 한 적 없는 ‘던전’의 안이다.
  다른 곳도 아닌, 이곳에서 그녀와 만났다는 건 특별한 의미가 있다는 뜻이었다.
  “……저를 아나요?”
  하지만 감회와 동시에 복잡한 생각에 빠져버린 경우와는 달리, 아나스타시야는 그저 경우를 향해 안도와 경계의 감정만을 동시에 띌 뿐이었다. 지난 일주일간 당해온 일들이 너무나 지독한지라 한 순간도 경계를 풀지 못하게 되어버린 것이다.
  경우는 상념을 접어두고 겁에 질린 듯한 아나스타시야를 자세히 바라봤다.
  그냥 대충 훑어보더라도 몸이 성한 구석이 없었다.
  몸에 걸친 건 입은 건지 매달아 놓은 건지 알 수 없는 지경까지 이른 장비들이 대다수였고, 그나마도 거의 반파된 상태였다.
  이 상태라면 하루라도 더 지날 즈음엔 차가운 시체가 되어 던전의 바닥과 입맞춤을 하고 있을게 틀림없었다.
  아무리 경우의 성격이 20년의 처절한 전쟁동안 피폐해져 메말라 버렸다지만, 인류의 멸망을 막는 데에 커다란 기여를 한 전설적 인물을 눈앞에 두고서도 목석같은 마음을 유지 할 수는 없었다.
  그것이 과거 일어났던, 앞으로는 일어나지 않을 일이라고는 하더라도 말이다.
  더군다나 눈앞의 소녀를 도와준다면 이 빌어먹을 괴물들과의 전쟁도 더욱 빨리 그 끝을 맞이할 수 있을 터였다.
  경우는 잠깐 생각하더니 손을 뻗어 그녀가 손에 쥔 방패에 손끝을 닿았다. 아나스타시야가 의아한 눈길로 바라보자 피식 웃으며 말했다.
  “전생의 너한테 감사해. 아니, 미래의 너인가?”
  “무슨 말을 하려는 건가요?”
  “강화.”
  순간, 눈부신 빛이 던전 한 곳에서 터져 나왔다.
  아나스타시야는 갑작스레 빛이 폭발한 자신의 방패를 보고선 깜짝 놀라 뒷걸음질 쳤다.
  하지만 그녀를 따라 걸어오며 경우는 다시금 방패에 손을 얹어 비전력을 주입했다.
  “강화.”
  “이, 이봐요! 이게 도대체 뭐 하는…….”
  “강화.”
  눈앞이 하나도 보이지 않을 정도의 빛이 사방에 가득 차올랐다. 아나스타시야는 후다닥 뒤로 물러섰다. 그리고 그 와중에 시야에 들어온 자신의 방패를 보고선 그만 손에서 놓쳐버릴 듯 화들짝 놀랐다.
  “찌그러진 게…… 복원됐어?”
  “3단계 강화의 부가적인 옵션일 뿐이지. 자세히 봐.”
  경우는 더 이상 다가오지 않고 자리에 선 채 아나스타시야에게 말했다. 그녀는 곧 눈동자에 청광을 피워 올리며 자신의 손에 들린 방패를 쳐다봤다.
 
  【장전식 합금 방패 Ⅲ: 복합방어구: 99.9%
  정보: 강화 3단계.
  특성: 내구도가 감소하지 않습니다.】
 
  “내구도가…… 감소하지 않아……?”
  아나스타시야는 그야말로 경악한 모습으로 방패에 시선을 떼지 못했다. 경우는 그런 그녀를 내려다보며 말을 덧붙였다.
  “특성엔 표시되지 않았지만 방어력과 충격 흡수력도 월등히 높아졌을 거다. 이제 트윈헤드 치프 따위는 껌이겠지.”
  “그런…… 말도 안 되는…….”
  “똑같은 방패가 하나 더 있었다면 각성으로 특성 추가가 가능했을 텐데, 아쉽구만.”
  경우는 어깨를 한 번 으쓱하고는 뒤를 돌았다. 그런 그를 아나스타시야가 다급히 불러 세웠다.
  “잠시 만요!”
  “뭐지?”
  “저희를…… 도와주세요.”
 
 경우는 그녀의 말에 눈을 살짝 치켜떴다.
  놀라운 일이다.
  비전능력자는 자신의 비전력에 대해 엄청난 자부심을 가진다. 그건 동시에 자만이 되어 타인과의 상하관계를 결정짓는 데에 혁혁한 애로사항을 꽃피우는 요인이 되는 것이다.
  아무리 어려운 지경에 놓이더라도 쉽사리 도와달라는 이야기를 하지 않는 것이 비전능력자들의 특징이었다.
  ‘디펜서라는 집단의 영향인가? 아니면 원래 성격인가?’
  혹은 그만큼 던전에서의 생활이 지독히도 끔찍했던 것 있었다.
  어찌되었든 간에 경우는 뒤로 돌렸던 등을 다시 돌리며 자신의 앞으로 다가온 아나스타시야를 바라봤다.
  그녀의 눈동자는 바라보는 사람을 맑게 씻어주는 듯 시원한 사파이어 빛으로 반짝이고 있었다.
  문득 그녀는 슬쩍 시선을 피했다.
  “그렇게 빤히 쳐다보면 부끄러워요.”
  “흠…… 그래서, 어떻게 도와달라는 거지?”
  경우의 말에 아나스타시야는 환한 얼굴로 고개를 들었다. 마치 물안개를 걷고 꽃이 피어나는 것 같다.
  그녀는 경우의 말을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한 번 더 그에게 되물었다.
  “도와주시는 건가요?”
  “나는 비전능력자가 더 많이 살아남고, 더 많이 강해질수록 좋으니까.”
  그 뜻은 미래의 인류 멸망을 가정한 것이지만, 아나스타시야가 그것까지 알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단지 같은 동료가 많다면 좋다는 뜻으로 받아들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고마워요.”
  “감사는 이르지. 나는 이대로 곧장 던전 코어로 향한다. 가까이 갈수록 더욱 위험해질 거다. 그래서 너희들을 데려가지 않을 거다.”
  “그러시다면……?”
  “너희를 지켜줄 놈들을 여기에 남겨두고 갈 생각이다. 단, 공짜로는 안 되지.”
  경우의 말에 아나스타시야는 힐끗 그의 등 뒤에 선 치프를 바라봤다. 확실히 저런 괴물이 하나만 있더라도 엄청난 도움이 될 터였다. 어떻게 저런 무지막지한 괴물을 길들였는지는 모르겠지만…… 나쁜 조건은 아니었다.
  “좋아요. 그럼 조건을…….”
  “잠깐!”
  그때, 아나스타시야와 경우의 대화를 듣고 있던 한 남자가 둘의 말을 끊으며 도중에 끼어들었다.
  그는 찢어진 머리에 붕대를 감은 모습이었다. 새빨간 피가 배어있는 것으로 보아 방금 전의 전투 도중 부상을 입은 것이리라.
  경우는 그를 바라봤다. 그의 표정은 한껏 찌푸려진 인상이었다.
  “무슨 일이지?”
  “당신, 그게 말이 된다고 생각해? 여긴 던전이야! 다 같이 힘을 합쳐도 모자랄 판에, 뭐? 우리를 남겨둔다고? 혼자서 놈들을 이길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해!?”
  “세이드씨!”
  아나스타시야가 다급히 그를 말렸다.
  하지만 아나스타시야는 나이에 걸맞게 상대적으로 작은 체구였다.
  비전능력을 사용하기 전의 그녀는 그저 한 명의 어린 소녀에 불과했다.
  더군다나 서른 살에 이르는 남자가 피워 올리는 흉악한 기세는 아직 익숙하지 않은 것이었다.
  세이드라 불린 남자는 아나스타시야를 옆으로 밀쳐내며 경우의 앞으로 다가섰다.
  “웃기는 소리 하지 말고, 가진 거나 다 내놔. 멀쩡한 모습인걸 보니 어디 숨어있기라도 했나보지? 물자야 풍족하겠군. 그걸로 모두가 회복하면, 다 함께 간다.”
  “내가 왜 그래야 하지?”
  “이놈이 아직 정신을 못 차렸나?”
  세이드는 경우의 눈동자를 바라보며 주먹을 꾸욱 움켜쥐었다.
  비전능력자는 비전능력자들 간에 서로의 특성에 대해 딱 하나 알 수 있는 게 있다.
  바로 비전력의 파장. 그것이 동일한지 그렇지 않은지를 감각적으로 알 수가 있었다.
  즉, 전투형 비전능력자는 전투형 비전능력자들 끼리 서로를 알 수 있고, 비전투 비전능력자들은 그들 서로를 알 수가 있었다.
  다시 말해, 세이드는 경우가 전투형 비전능력자가 아니라는 걸 알 수 있는 것이었다.
  “전투형도 아닌 놈이 까불거리거나 하고, 엉? 우리들 전투형이 네놈들 비전투형을 지켜주고 있으니까 겁이 없지? 괴물이 얼마나 무서운지도 모르고? 우쭈쭈, 우리 꼬맹이 겁에 질리셨어요?”
  “흐음…….”
  경우는 슬금슬금 비전력을 끌어올리는 세이드의 모습을 보며 낮은 한숨을 내쉬었다. 예나 지금이나, 전투형 비전능력자가 텃세를 부리는 건 달라지지 않는 전통인 것 같았다.
  곁에 선 아나스타시야만이 사색이 되어 안절부절 못 할 따름이었다.
  그녀로서는 경우가 은인이었고, 도와주어야 하는 대상이었다. 하지만 동시에 세이드 역시 지난 일주일 동안 괴물들과 싸워 온 동료였다. 그 실력 또한 상당하다.
  지금 당장으로서는 그녀가 뛰어든다면 오히려 더 큰 피해만 입힐 것이었다. 제압은 불가능했다. 섣불리 나설 수 없었다.
  “세, 세이드씨…….”
  “닥쳐. 끼어들지 마라. 이놈은 버릇을 고쳐놓아야 해.”
  세이드는 아나스타시야를 노려봤다. 그에 움츠러든 그녀는 불안한 눈길로 경우를 바라봤다.
  그런데, 그녀가 바라본 경우는 오히려 자신을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이거, 네 동료냐?”
  “……네?”
  “죽여도 되냐?”
  “아, 안 돼요!”
  “그럼 반만 죽여 놓지.”
  “무슨 헛소릴!”
  세이드는 조금 전 보았던 치프의 위력을 똑똑히 두 눈으로 보았다. 그렇기에 조금 전 부터 계속해서 치프를 곁눈질로 주시하고 있었다.
  저 괴물이 먼저 움직이기 전에 눈앞의 경우를 처치한다면, 자신의 승리다.
  세이드는 단숨에 모든 비전력을 끌어올렸다.
  그 순간은 찰나, 동시에 움켜쥔 주먹이 허공에서 사라진 듯한 착각이 들 만큼 빠르게 쇄도했다.
  그리고 주먹이 경우의 안면에 정확히 꽂혔다.
  쿵!
  콘크리트를 내리친 듯한 굉음이 울렸다. 작은 충격파가 아나스타시야의 옷깃을 흩날렸다.
  그녀는 두 손을 가슴 앞에 모은 채 뻣뻣이 굳어있었다.
  누가 보더라도 전력으로 공격한 모습이다. 아무리 비전능력자라 할지라도 공격형 비전능력자의 공격을 제대로 맞으면 즉사를 면치 못한다.
  반면 세이드는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경우의 등 뒤에 선 치프를 바라봤다. 놈은 잠깐의 미동도 하지 않았다.
  그렇다면 경우를 처치한 것이 틀림없다─
  “재미있군.”
  “……뭣……?!”
  그때, 내리친 주먹의 반대편에서 경우의 담담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 그의 손이 세이드의 주먹을 움켜쥐었다.
  그러며 주먹을 치워낸 경우의 얼굴은 조금 전과 전혀 다를 바 없는 모습이었다. 어떠한 피해도 받지 않은 것이었다.
  순간, 엄청난 악력이 느껴졌다. 주먹의 뼈가 삽시간에 조각 나 부러지기 시작했다.
  한 조각 한 조각 부러뜨리는 것도 아니고, 그냥 뭉개서 으깨는 것이었다.
  “끄아아아아아아악!”
  “시끄럽군.”
  경우의 반대편 주먹이 세이드의 얼굴을 후려쳤다. 그러자 폭탄이 터진 것 같은 굉음이 울리며 세이드의 고개가 홱 돌아갔다.
  그의 벌어진 입에서 끈적한 피와 함께 부서진 이빨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커, 쿨럭…….”
  “너 같은 놈 때문에, 인간들은 괴물 앞에서 조차 하나로 뭉치지 못하고 뿔뿔이 흩어졌다.”
  쿵!
  세이드의 배에서 묵직한 충격이 발생했다. 아나스타시야는 그 충격파에 그만 뒤로 밀려나 자리에 주저앉고 말았다.
  “커헉……!”
  “다시는 비전투 비전능력자를 무시하지 말아라.”
  경우의 주먹이 세이드의 배에서 뽑혔다가 다시 한 번 그 속으로 파고들었다. 그러자 세이드의 몸이 허공에 붕 떠올라 바닥에 추락했다.
  경우는 그런 그를 한 번 쳐다본 후, 시선을 자리에 주저앉은 아나스타시야에게로 옮겼다.
  “조건을 말해도 되겠지?”
 “……부, 부디!”
  “너희들 중, 비전의 크리스털이라는 비전아이템을 가지고 있다면 나한테 넘겨라. 비전력을 증가시켜 준다는 건 이미 알고 있다. 그러니까 크리스털을 나한테 준다면 그 인원의 모든 장비를 3단계 까지 강화시켜주지. 너희를 지키는…… ‘가디언’들은 덤이다.”
  경우는 그리 말하며 경악에 찬 얼굴로 바라보는 일곱 명의 비전능력자들을 천천히 돌아봤다. 그 중, 아나스타시야가 가장 빠르게 품속으로 손을 집어넣었다.
  “이걸 말하는 거죠?”
  그녀는 경우를 향해 둥글게 모은 두 손을 뻗었다. 그녀의 손엔 무려 열 개가 넘는 크리스털들이 빛을 반짝이고 있었다.
  ‘F급 여덟, E급 여섯.’
  경우는 태연히 숫자를 세며 그것들을 건네받았다. 그리고 손을 뻗어 아나스타시야의 몸 여기저기를 만졌다. 그렇게 손길이 지나간 곳 마다 그녀가 착용하고 있던 장비들이 환한 빛을 밝히며 마치 새것처럼 반짝반짝 빛을 내뿜었다.
  “하앗!”
  그녀는 엉덩이 뒤에 매어두었던 단검을 뽑아들어 눈앞으로 들어올렸다. 그리고 단숨에 휘둘러 자리에 쓰러져 있던 트윈헤드 치프의 몸을 갈라냈다.
  눈동자를 푸르게 밝힐 필요도 없었다. 단검은 마치 젤리를 자르듯 트윈헤드 치프의 몸을 부드럽게 가르고 지나갔다.
  “굉장해요!”
  그녀는 피 한 방울 묻지 않은 단검을 바라보며 감탄을 내뱉었다.
  조금 전만 해도 놈들의 몸에 검이 틀어박히지 않아 얼마나 고생했던가.
  그것만 생각하면 치가 떨릴 지경이었다.
  지금은 속이 뻥 뚫린 것처럼 시원했다.
  그런 아나스타시야의 모습을 본 비전능력자들은 슬금슬금 서로의 눈치를 보기 시작했다. 그들의 입장에서는 비전의 크리스털이 탐이 나지 않을 수 없었다.
  특히 E급의 크리스털은 1천이나 되는 비전력을 증가시켜준다.
  하지만…… 1천이 아니라 1만이 있더라도, 공격 자체가 통하지 않는 상대에겐 아무 소용이 없는 것이다.
  그들은 하나 둘씩 품속에 간직하고 있던 비전의 크리스털들을 주섬주섬 꺼내놓기 시작했다.
  “이놈 것도 가져간다.”
  그들의 장비를 모두 강화시켜 준 경우는 여전히 자리에 쓰러져 기절 해 있는 세이드의 몸을 살펴 비전력이 흘러넘치는 묵직한 주머니를 발견했다.
  그 안엔 놀랍게도 서른 개에 달하는 E급 크리스털들이 담겨있었다.
  “죽어간 사람들의 것들을 챙겼었어요.”
  곁에서 아나스타시야가 말해주었다. 확실히, 그들은 처음 던전에 소환 된 순간부터 지금까지 계속해서 전투를 치러왔던 것 같았다.
  그 동안 몇 명이 죽었는지는 굳이 물어보지 않았다.
  ‘F급 크리스털 34개, E급 크리스털 51개.’
  경우는 이들로 부터 받은 크리스털들을 모두 정리해 넣은 뒤, 다시 한 번 그들을 바라보았다.
  “이제 나는 던전 코어를 처리하러 간다. 모든 장비를 강화 해 줬다고는 하지만, 장비와는 별개로 너희들의 실력이 모자란다. 비전등급도 낮아. 여기에 가디언으로 ‘놉’ 다섯을 둘 테니까 절대 다른 곳으로 움직이지 말고 던전이 사라질 때 까지 가만히 있도록 해.”
  “저기, 던전 코어가 있는 위치는…… 알고 있나요?”
  아나스타시야가 걱정스레 물어왔다. 경우는 피식 웃으며 답했다.
  “방금 찾았다.”
  “……네?”
  “한 일주일 정도 더 걸릴 거다. 그 안엔 무조건 결판 낼 거니까, 만약 일주일이 지나도 던전이 사라지지 않는다면 내가 죽은 거라고 생각해.”
  “그런……!”
  아나스타시야가 막 무어라 할 참이었으나, 경우는 손을 들어 그녀를 제지했다. 그리고 ‘룰’의 등에 올라탄 뒤 한 번 손을 흔들곤 반대편 길을 향해 순식간에 사라져 버렸다.
  남겨진 아나스타시야만이 들릴 듯 말 듯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당신은…… 도대체 누구인가요……?”
 
  “강화.”
  경우의 손 안에서 오색찬란한 광채가 흘러나왔다. 그와 동일한 것들이 경우의 목에 건 염주에서 은은히 빛을 밝히고 있었다.
 
  【비전의 크리스탈 F+++ Ⅵ: 보석: 99.9%
  정보: 각성 3단계. 강화 6단계.
  특성: 내구도가 감소하지 않습니다.
  1. 소유자의 비전력을 증폭시켜준다. 비전력 +409600%
  2. 소유자의 비전력을 회복시켜준다. 회복력 +409600%
  3. 소유자의 비전력 소모량을 감소시켜준다. 감소량 +409600%】
  【비전의 크리스탈 E+++ Ⅴ: 보석: 99.9%
  정보: 각성 3단계. 강화 5단계.
  특성: 내구도가 감소하지 않습니다.
  1. 소유자의 비전력을 증폭시켜준다. 비전력 +1024000%
  2. 소유자의 비전력을 회복시켜준다. 회복력 +1024000%
  3. 소유자의 비전력 소모량을 감소시켜준다. 감소량 +1024000%】
 
  “설마 각성 3단계의 특성이 소모량 감소였다니.”
  경우는 마지막 강화된 비전의 크리스털을 비어있는 염주의 안에 채워 넣었다. 이제 염주의 빈 공간은 81개가 남아있었다.
  그중 F급의 크리스털이 13개, E급의 크리스털이 14개를 차지했다.
  그로 인한 증폭률은 자그마치 20만 배. 만약 ‘비전의 크리스털’ 각성의 3단계가 비전력 소모량 감소가 아니었다면 이보다 훨씬 많은 크리스털을 획득해야만 이루어 낼 수 있는 경지였을 것이다.
  경우는 급속히 차오르는 비전력을 느끼며 자신의 상태를 살펴봤다.
 
  【김경우: 인간: 비전등급 D
  정보: 비전력[19660x10^8/(2조 -1천억)]
  특성: 행운(fortune)】
 
  “A급 비전능력자의 총량인가…….”
  실제로 두 눈으로 보고서도 믿기지 않는 상태였다.
  경우는 지난 삶에서 지금의 비전 총량에 이르기까지 무려 15년에 이르는 세월을 때려 박아야만 했다. 그런데 지금은 세상에 포탈이 생성되고서 고작해야 두 달이 채 되지 않은 상황.
  아무리 ‘행운’특성을 지녔다 하나, 절대로 ‘우연’은 아니라는 직감이 들었다.
  경우는 왠지 모르게 조금씩 무언가에 대한, 무언가로 부터의 ‘책임’을 느끼고 있었다.
  비전력의 총량이 늘어나면 늘어날수록 경우의 몸과 피부를 통해 느껴지는, 알 수 없는 무언가가 아주 어렴풋이 지만 조금씩 그 형태가 보이기 시작하는 것이었다.
  “도대체 내가 어떻게 하면 되는 거지?”
  대답 없는 질문이 텅 빈 던전의 안에 울려 퍼졌다.
  경우는 한숨을 한 번 내쉬고는 고개를 돌렸다.
  그의 시선이 향한 곳에는, 말 그대로 산산조각 나 버린 ‘레취’의 몸뚱아리가 흩어져 있었다.
  1주일 전, 경우에게 던전 코어를 발견했다는 신호를 주었던 가디언이었다.
  ‘그 뒤로 신호가 왜 끊겼나 싶었더니.’
  분명 저 레취가 쓰러진 골목의 너머에는, 지금의 비전능력자들이라면 절대로 상대 할 수 없는 괴물이 도사리고 있을 것이다.
  이 던전 안의 모든 비전능력자들이 모인다 할지라도, 상처 하나 줄 수 있을까 의심이 들 정도로 지독히도 강력한.
  경우는 잠시 죽어버린 레취의 모습을 살펴보더니 피식 웃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리벤지다.”
  경우의 말이 끝나자마자 그의 등 뒤에서 50마리에 달하는 ‘레취’들이 푸른 안광을 번뜩였다.
 
 【레취 F Ⅵ: 강시: 99.9%
  정보: 죽음의 안식을 얻지 못한 채 김경우에 의해 되살아난 존재. 한때 인간을 살육하는 역할을 수행했으나 이제는 소환자의 명령만을 듣는 꼭두각시가 되었다. 시체이기 때문에 죽음의 공포를 잊었으며 이미 살아생전의 등급과 능력은 한계를 초월했다.
  특성: 내구도가 감소하지 않습니다.
  (+)버서커
  중독 C
  가속 C
  신체강화 C】
 
  “캬아아아!”
  성난 괴성이 던전의 골목을 가득 채웠다.
  일제히 달려드는 레취의 회색 털빛은 달밤 아래에 비친 파도의 물결 같았다.
  경우는 룰을 타고 그 뒤를 따라갔다. 이미 골목 어귀에 다다르기 전 부터, 그 이면에는 온갖 괴성과 폭음이 귀를 먹먹하도록 울리고 있었다.
  “저건…….”
  완전히 골목을 돌아간 경우의 눈엔 사방에 가득찬 괴물들의 모습이 보였다.
  이전에 본 적 있는 트윈헤드 치프는 물론이거니와 털 색깔이 금빛인 레취, 그리고 인간의 기사처럼 무장을 걸친 놉 등.
  심지어는 중화기로 무장을 한 그리즐리 베어도 그 속을 뛰어다니고 있었다.
  경우는 자신을 향해 날아온 기관총탄을 손등으로 쳐내며 턱으로 슬쩍 가리켰다. 그러자 치프가 자신이 탄 멧돼지, ‘바이서스’를 몰아 맹렬한 기세로 괴물들의 틈바구니에 뛰어들었다.
  가장 먼저, 경우에게 기관총을 겨누었던 곰 한 마리가 그 자리에서 산산조각 났다.
  “삐익!”
  그때, 후끈한 열기가 사방에 몰아쳤다.
  마치 같은 괴물은 안중에도 없단 양 닥치는 대로 쏟아지는 불기둥이 경우의 두 눈에 선명히 들어왔다.
  “설마?”
  경우는 룰의 등에서 내려와 고개를 들어 살펴봤다. 그러자 여기저기서 희끗희끗 나타나는 갈색의 덩어리가 있었다.
  조금 더 자세히 살펴보니, 그들의 머리 위를 뛰어다니며 불길과 번개를 쏟아내는 한 마리의 작은 여우가 보였다.
  “지천호?”
  경우의 목소리에 놀란 기색이 어렸다.
  설마 여기서 지천호를 보게 될 줄은……!
  ‘지천호가 여기 있다는 건…… 미래에 나타나기 전 까지, 던전에서 사람을 잡아먹으면서 힘을 키워왔던 거군.’
  드디어 궁금증이 해결되었다. 지천호의 등장으로 열쇠가 모두 맞춰지게 되는 것이었다.
  던전은 과거에도 존재했었으며, 그곳에서 살아나온 비전능력자는 단 하나도 없다는 것이 진실이다.
  지천호는 수백만 명의 비전능력자가 덤벼들어야 상대할 수 있는 괴물이었다. 당연히 협소한 던전 안에서는 그 누구도 지천호를 상대 할 수 없었으리라.
  ‘저런 게 있었으니 몰살을 당했겠지.’
  하지만 경우는 긴장하기 보다는 오히려 신기한 듯 전장을 헤집고 있는 지천호를 바라보았다.
  ‘꼬리가 두 개군.’
  과거에 중국을 쑥대밭으로 만들었던 지천호는 지금의 녀석보다 몸집이 더 컸고, 꼬리가 네 개였다. 게다가 당시의 놈은 불과 번개는 물론이거니와 지진과 태풍마저 일으켰었다.
  하지만 지금은 고작해야 불과 번개. 그것도 소유모의 단일 위력이었다.
  틀림없이, 아직 성장이 덜 된 것이다.
  경우는 사방팔방 뛰어나다는 놈을 바라보며 짤막히 말했다.
  “‘수호의 선구자’ 활성.”
 
 【타이틀: 수호의 선구자(활성)가 적용되었습니다.】
  【포탈 가디언의 공격을 10% 방어·반사하며, 반경 10m내의 공간에서 20%확률로 ‘약화’가 발동됩니다.】
  【비전특성 ‘행운(fortune)’의 영향으로 인해 반경 10m내의 공간에서 100%확률로 ‘약화’가 발동됩니다.】
  경우의 입가에 유쾌한 미소가 걸렸다.
  “룰. 죽여. 최대한, 깨끗하게.”
 
  “삐이이익!”
  귀를 찢는 비명이 넓은 홀을 가득 채웠다.
  호랑이 형상의 괴물, 룰은 그 덩치에 걸맞지 않은 어마어마한 빠르기로 조그만 털 뭉치 같은 지천호를 바로 뒤에서 쫓아다니고 있었다.
  이미 손만 뻗으면 지천호의 머리를 손바닥으로 때려 깨부술 수 있는 상황이었다. 한참 전 부터 결판은 나 있었다.
  하지만 그래서는 지천호의 시체가 엉망이 되어버린다. 지금 룰의 스펙으로는 지천호 따위 일격에 산산조각 내 버릴 수가 있었다.
  오히려 그것이 문제.
  어느 정도 적당한 힘으로 죽이는 게 가능해야 하는데, 너무 큰 격차 탓에 쉽사리 손을 대질 못하고 있었다.
  그렇다고 다른 ‘가디언’들을 붙이자니 지천호의 도망치는 속도가 상당히 빠르다.
  무려 A급의 비전능력자에 해당하는 비전력을 보유하는 경우의 눈에서 조차 그 움직임을 쫒아가는 게 전부일 정도였다.
  쫒아가서 때려잡기엔 너무 빠르다.
  그걸 따라잡을 수 있는 게 룰뿐인데, 룰은 속도뿐만 아니라 힘 역시 엄청나다.
  경우는 한 시간 넘게 술래잡기를 하고 있는 둘을 바라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뭔가 해결책을 만들어낼 필요가 있었다.
  “기억이 잘 안 나는데…….”
  경우는 두 눈을 감고서 서서히 과거의 한 기억을 되새겼다.
  그의 기억 속에는 무려 20년 동안이나 뒹굴어온 전쟁의 지식이 담겨있었다. 그 중에서 어느 한 비전능력자의 스킬을 떠올리고자 하는 것이었다.
  ‘스파이더맨이라고 불리던 여자였는데…….’
  경우는 그 대상의 별명을 기억해내곤 피식 웃음을 짓고 말았다.
  그 말대로, 경우가 기억해내려는 비전능력자는 자신의 몸에서 거미줄을 뽑아내는 스킬 탓에 스파이더맨이라는 별명을 가졌었다.
  하지만 그녀의 거미줄은 비전력이 허용하는 한 무한히 뽑아낼 수 있었고, 그 점성과 강도 또한 비전력으로 한계까지 버텨낼 수 있는 특성이 있었다.
  그러나 비전총량이 부족했던 그녀는 꽤 빠른 시기에 죽어버리고 말았다. 그래서 그녀의 거미줄에 관련된 비전 스킬에 대한 이야기도 많이 들어보지 못했다.
  하지만 자신의 비전능력을 자랑하듯 떠벌리고 다녔던 기억은 있어서, 어느 정도 추측은 가능했다.
  그리고 추측으로 말미암은 확률은 0%를 벗어나 ‘가능성’을 가진다.
  그 정도면, 이미 충분했다.
  경우는 감았던 눈을 뜨고서 몸 안의 비전력을 자신의 두 손 안에 모았다. 그것은 경우의 의지를 바탕으로 점차 끈끈한 형질을 지니기 시작했다.
  그리고 막 눈 앞으로 지천호가 꽁지 빠지게 뛰어가는 모습이 보였다. 경우는 녀석이 달려갈 방향을 예측하곤 그곳을 향해 손 안에 뭉쳐두었던 비전력 덩어리를 힘껏 집어던졌다.
  “퀸즈 웹!”
 
 【비전력으로 구성된 거미줄 생성을 시도합니다.】
  【비전스킬로 등록되지 않은 능력입니다.】
  【비전특성에 적합하지 않은 비전 사용법입니다.】
  【부적합 판정!】
  【비전력의 추가 소요가 발생합니다.】
  【극도로 불안정한 상태입니다.】
  【비전력이 폭주 할 수 있습니다.】
  【행운 특성에 의해 최악의 상황은 좀 더 나은 방향으로 변화합니다.】
  【여왕의 거미줄 생성에 성공했습니다.】
 
  한 번 거미줄을 만들어내는 데에 귀찮은 알림이 좌르륵 떠올랐다. 시끄럽지만 경고에 해당하는 알림이기에 캔슬이 불가능한 종류였다.
  경우는 거미줄 생성에 성공 했다는 사실에 위안을 가지며 방금 던진 거미줄의 상태를 살펴봤다.
  “삐익! 삐이익!”
  지천호의 울음소리는 경우의 등 뒤에서 들려오고 있었다.
  경우가 던진 거미줄은 넓게 퍼진 채 던전의 벽 한 귀퉁이에 달라붙어 있을 뿐이었다.
  “삐이이익! 삑삑!”
  지천호가 잽싸게 달려가며 소리쳤다.
  비전력은 사람, 짐승, 괴물을 가리지 않고 그 말에 담긴 의미를 짐작하게 해 준다.
  저 놈은, 비웃고 있었다.
  경우의 이마에 핏줄이 솟았다.
  “퀸즈 웹!”
 
  【비전력으로 구성된 거미줄 생성을 시도합니다.】
  【비전스킬로 등록되지 않은 능력입니다.】
  【비전특성에 적합하지 않은 비전 사용법입니다.】
  【부적합 판정!】
  【비전력의 추가 소요가 발생합니다.】
  【극도로 불안정한 상태입니다.】
  【비전력이 폭주 할 수 있습니다.】
  【행운 특성에 의해 최악의 상황은 좀 더 나은 방향으로 변화합니다.】
  【여왕의 거미줄 생성에 성공했습니다.】
 
 “퀸즈 웹! 퀸즈 웹! 퀸즈 웹! 퀸즈 웹! 퀸즈 웹! 퀸즈 웹!”
  경우는 닥치는 대로 지천호의 모습이 보이는 곳에 거미줄을 만들어 집어던졌다.
  당연히 앞서가는 방향을 예측하며 던졌지만, 놈은 신기하게도 달려가는 경로를 바꾸며 날아오는 거미줄을 모조리 피해냈다.
  오히려 덩치가 크고 뒤를 쫒아가던 룰이 거미줄에 걸려버리고 말았다.
  “삐이이이익!”
  지천호가 경우의 주변을 맴돌며 소리쳤다. 경우의 이마에 핏줄이 한 개 더 솟아났다.
  “……퀸즈 웹.”
  사방으로 무차별적인 거미줄이 뿌려졌다.
  잠깐의 시간 사이에, 경우의 손에서 날아간 거미줄이 던전의 모든 통로를 뒤덮어 버렸다.
  뒤이어 통로로부터 던전 홀의 모든 구역 구역을 새하얀 거미줄이 그 자리를 침식하기 시작한다.
  거의 수백만 개에 달하는 거미줄을 쏟아낸 것이지만, 넘쳐나는 비전력이 뒤를 받쳐주니 거미줄은 끝도 없이 솟아나왔다.
  그리고 경우는 던전의 홀 전체를 거미줄로 뒤덮어 버렸다.
 
  【비전력이 절반 이하로 떨어졌습니다.】
 
  총 비전력 약 2조. 그 중의 1조를 거미줄을 만드는데 소비했다.
  그것도 비전 소모량의 감소와 비전력 회복량을 감안하면, 그보다 훨씬 많은 비전력을 사용 한 것이 된다.
  “쁘으읍!”
  경우는 눈앞에서 거미줄에 꽁꽁 묶여있는 지천호를 바라보며 싸늘한 눈빛을 번뜩였다. 그 외에도 던전의 홀은 앞을 내다보기 힘들 만큼 새하얀 거미줄로 완전장악 되어있었다.
  수백의 괴물들이 난리를 쳐도 될 정도의 넓이였건만, 그것을 전부 뒤덮어 버린 것이다. 그 탓에 던전의 코어가 있는 홀에는 적이고 아군이고 가릴 것 없이 모두가 거미줄에 칭칭 묶여있는 상황이었다.
  오직 경우만이 거미줄 속을 자유롭게 돌아다닐 따름.
  경우는 거미줄에 온 몸이 묶여 옴짝달싹 하지 못하는 지천호의 머리에 한 손을 얹었다. 놈은 입마저 묶였기에 불길과 번개 스파크만이 입술 사이로 언뜻 보일 뿐, 어떠한 저항도 할 수 없었다.
  경우는 그 상태의 지천호에게 체내의 잔류하는 비전력을 고스란히 퍼부었다.
  “끄으으읍……!”
  그 순간, 놈의 이마에서 붉은 빛이 번쩍였다.
  그 빛은 경우로 부터 주입되는 푸른 비전력을 정면으로 저항하는 것이었다.
  그러자 적잖은 반발이 발생한다. 지천호가 비명을 질렀다.
  ‘비전의 결정인가?’
  짐작은 하고 있었다. 그리고 이 결정을 파괴한다면 지천호는 단숨에 즉사 할 것이다.
  그 빛이 점점 밝아질수록 지천호의 비명은 점점 괴로워지고 있었다.
  온 몸이 멀쩡한 상태로 비전력이 정면으로 충돌하는 고통을 고스란히 느끼고 있다.
  신경의 단위가 아닌, 비전력이라는 본질을 무너뜨리고 있는 것이다.
  틀림없이 죽음보다 더한 고통일 터.
  몸이 찢어지는 정도로는 비교도 할 수 없을 것이다.
  ‘차라리 단숨에 목을 치는 게 더욱 편안할 테지.’
  하지만 경우는 오히려 주입하는 비전력의 양을 배로 늘려버렸다.
  “인간을 살육하는 괴물에게 자비는 가당찮다.”
  지천호의 이마에서 빛나는 붉은 섬광이 점점 강하게 타오르기 시작했다.
  경우는 다시 한 번 더, 지천호의 이마에 집중되는 비전력을 세 배로 늘렸다.
  “크륵…….”
  지천호의 입에서 붉은 피가 흘러내렸다. 서서히 눈동자가 하얗게 뒤집혔다.
  비명마저 사라져 버렸다.
  얼마 남지 않은 게 느껴졌다. 경우는 네 배 까지 비전력을 쏟아 부었다. 그에 맞추어 지천호의 이마에서 빛나는 붉은 섬광이 더 이상 없을 만큼 섬뜩한 빛을 토해냈다.
  바로 그 때.
  “……!”
  경우는 지천호의 이마에서 무언가가 깨져나가는 소리 같은 것을 들었다.
  그리고 지천호의 몸 안에 잔뜩 주입되어있던 자신의 비전력이 한 순간 이마의 깨져버린 공간으로 모여드는 것을 알아챌 수 있었다.
  “무슨……?”
  지천호의 이마에서는 더 이상 붉은 빛이 점멸하지 않았다. 조각 난 듯 파편으로 흩어진 그것은 물에 녹은 설탕처럼 서서히 경우의 비전력에 삼켜져 사라지고 있었다.
  그 순간을 기점으로, 경우의 비전력은 더 이상 지천호를 압박하지 못했다. 지천호의 몸속으로 주입되는 비전력은 마치 물속을 유영하듯 부드럽게 그 속을 통과 해 버리는 모습만을 보여 줄 뿐이었다.
  설마 이런 결과가 벌어질 줄은 예상하지 못했다.
  경우는 지천호의 이마에 여전히 손을 댄 채 놈의 몸 안에서 벌어지는 광경을 가만히 지켜보았다.
  그로부터 지난 시간은 그야말로 찰나.
  지천호의 이마로 모여들던 경우의 비전력은 그곳에서 새끼손톱만한 크기로 압축되었다. 그것은 푸른색의 결정이 되었으며, 마침내 지천호의 이마에서 푸른 불길을 피워 올리기 시작했다.
  마치…… 비전의 결정과 같은 것이었다.
  그것을 지켜보던 경우의 눈앞으로, 선명토록 푸른 문장이 좌르륵 생성되었다.
 
  【정신파괴! 최초로 당신의 적의 정신을 단 한 조각도 남김없이 소멸시켰습니다!】
  【‘지천호’의 정신이 파괴되었습니다! 더 이상 지천호는 살아있는 존재라고 볼 수 없습니다.】
  【충분한 비전력이 주어졌습니다! 지천호의 몸 안에 새로운 비전의 결정이 생성됩니다.】
  【새로운 비전의 결정의 영향으로 지천호의 부서진 정신이 다시 살아납니다.】
  【귀속! 지천호의 몸에 당신의 비전력이 자리 잡았습니다. 더 이상 지천호는 당신을 벗어날 수 없습니다.】
  【조건이 충족되었으므로 ‘신규 시스템’이 생성됩니다.】
  【앞으로 귀속된 대상을 원격 관리할 수 있습니다.】
  【신규 시스템을 불러오고 있습니다.】
  【귀속 관리창
 ▶ 지천호(地天狐): 호선(狐仙): 비전등급 B
 ▷ 정보: 땅과 하늘의 이치를 탐하는 여우 요괴이다. 인간의 지식을 탐하므로 사람을 죽이고 먹어치움으로써 점차 성장한다. 그러나 김경우에 의해 본질을 파괴당하고 근본이 재구성되어 이제는 살육하지 않는 여우 요괴가 되었다. 그만큼 성장의 가능성이 낮아졌다. 하지만 보다 삼라만상의 이치에 더욱 가까이 다가갈 수 있게 되었기에, 성장한다면 신선이 될 것이다.
  성장: 2단계 12%
  특성: 김경우에게 귀속되어있다.
  청천벽력(靑天霹靂) B
  풍운조화(風雲造化) B
  뇌정벽력(雷霆霹靂) C
  경천동지(驚天動地) C
  일호지천(一壺之天) E
  천재지변(天災地變) E
  천지개벽(天地開闢) F
  (봉인)우화등선(羽化登仙)
  (봉인)천지창조(天地創造)】
  【누적된 비전력이 한계치를 돌파했습니다. 한계를 넘어선 비전력에 맞춰 비전등급이 상승합니다.】
  【비전등급이 상승했습니다. 비전력의 총량이 늘어나며 비전력의 회복속도가 상승하고 회복량이 증가합니다.】
  【최초로 ‘비전등급 C’ 가 되었습니다. 비전력 총량에 추가 비전력이 주어지며, 비전력의 회복속도와 회복량 수치가 상승합니다.】
  【던전의 코어 가디언의 비전의 결정을 파괴했습니다. 코어 가디언의 부서진 결정으로 부터 총 비전력의 0.1%를 빼앗아 옵니다.】
  【던전의 코어 가디언을 귀속시켰습니다. 던전 내부의 모든 적들이 코어로 되돌아옵니다.】
  【모든 신체이상이 회복됩니다.】
  【김경우: 인간: 비전등급 C
  정보: 비전력[19660x10^10/(200조 -10조)]
  특성: 행운(fortune)】
 
  “이건…….”
  경우는 지천호의 이마에서 손을 떼었다. 그의 눈이 크게 흔들렸다.
  이러한 신규 시스템이 생성된다는 것 자체도 몰랐던 일이지만, 괴물이 비전능력자에게 귀속된다는 것은 가능성은 커녕, 절대로 생각조차 할 수 없던 일이었다.
  괴물과 비전능력자는 서로의 죽음만을 노리는 철천지원수다. 그런 괴물이, 비전능력자에게 귀속되어 함께 지내고 힘이 된다……?
  직접 보고 겪는 상황이 아니었다면 틀림없이 미쳤다고 치부했으리라.
  경우는 헛웃음을 흘리며 눈앞의 지천호를 바라보았다.
  이미 지천호를 묶었던 거미줄은 눈 녹듯 사라진 상태. 지천호는 푸른빛에 감싸여 그 속에서 몸을 둥글게 웅크렸다.
  마치 심장이 두근거리듯, 청색의 빛은 밝고 어두워지기를 반복했다. 시간이 지날수록 그 빛은 점점 더 선명해지고, 밝아지고 있었다.
  방금 비전등급이 한 단계 상승 한 것은 이미 관심 밖이었다.
  경우는 허공에 떠올라 비전력을 몸에 두른 채, 푸른 구슬처럼 변해버린 지천호에게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끼이이익!”
  “크워어어어!”
  던전 코어의 홀로 향하는 통로가 괴물들의 울음소리로 시끄러워졌다. 알림에서 경고 한 대로 던전 안의 모든 괴물들이 던전의 코어를 지키기 위해 모여들고 있는 것이었다.
  경우는 힐끗 거미줄로 뒤덮인 통로를 바라보고는 시간을 계산했다.
  거미줄은 단일 대상을 상대로는 효과적이지만 물량으로 밀어붙이면 그다지 큰 효과를 발휘하지 못한다.
  그나마 말도 안 되는 양의 비전력을 쏟아 부어서 만들어낸 거미줄이라서 조금 버티는 중이지, 그마저도 곧 찢어지고 말리라.
  경우는 시선을 옮겨 푸른빛의 구슬 속에 웅크리고 있는 지천호를 바라보았다. 녀석은 깊은 잠에 빠진 듯 눈을 뜰 생각이 없어보였다.
  “도와주지.”
  경우는 손을 뻗어 푸른 구슬을 움켜잡았다. 그로부터 미약한 온기가 느껴졌다.
  그것을 잠시 느껴본다. 그리고, 100조에 해당하는 비전력을 모조리 그 안으로 쏟아부어버렸다.
 
  【누적된 비전력이 한계치를 돌파했습니다. 한계를 넘어선 비전력에 맞춰 비전등급이 상승합니다.】
 
  경우의 눈앞으로 예의 문장이 튀어나왔다.
  그리고 그 대상은, 지천호였다.
 
  【지천호의 비전등급이 상승했습니다.】
  【지천호의 비전등급이 A가 되었습니다.】
 
  거기서 그치지 않는다.
  비전등급이 상승하여 증폭된 경우의 비전 총량은 200조에 이르는 것이었다.
  자그마치 S급 비전능력자의 비전총량을 두 배나 넘어서는 양이다.
  그 중에서도, 아직 경우가 주입한 비전력은 100억 밖에 흡수되지 않은 상태였다.
  “크워어어어!”
  등 뒤에서 괴물의 괴성이 들려왔다. 겹겹이 둘러친 거미줄을 뚫고 어느새 괴물들이 지척까지 다다르고 있었다.
  “치프.”
  경우의 부름에 치프가 위치한 장소로부터의 거미줄이 사르르 녹아내리며 길을 만들었다. 그곳으로부터 치프가 어깨를 한 바퀴 흔들며 경우의 곁을 지나쳤다.
  콰앙!
  폭음이 터져 나온다.
  치프의 주먹이 막 거미줄 뒤에서 버둥거리고 있던 개머리의 괴물을 후려쳤다.
  놈은 곧장 움직임을 멎었고, 주변의 거미줄을 붉은 피로 흠뻑 물들였다.
 
  【지천호의 성장률이 50%에 도달했습니다.】
 
  경우의 눈앞으로 푸른 문장이 떠오르고 퍼센트 수치가 조금씩 올라가는 모습이 보였다. 그 사이 등 뒤에선 끝도 없이 시끄러운 폭음이 터져 나왔다.
  치프의 무시무시한 주먹질에 괴물들은 쉽사리 다가오지 못했다. 그러나 물량으로 밀어붙이면 곧 한계에 다다를 것이다.
  “흡수율을 높일 수도 없으니…….”
  경우는 묵묵히 지천호의 모습을 바라봤다. 그의 등 뒤로 수백에 달하는 괴물들이 비명과 괴성을 지르고 있건만,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는 모습이었다.
  이미 그의 등 뒤에는 강화된 치프가 서 있고, 그것만으로도 경우가 괜한 근심을 가질 이유는 없었다.
  아무리 물량이 많아도 치프 혼자서 막아낼 수 있다는, 믿음이 아닌 확신이 서려있었다.
 
  【지천호의 성장률이 90%에 도달했습니다.】
 
  퍼센트 수치가 90에 다다르는 순간, 지금껏 둥글게 웅크린 모습을 하고 있던 지천호의 주위로 눈이 멀 정도의 푸른 섬광이 불타오르기 시작했다. 그 뿐만 아니라 푸른 구슬의 크기가 점점 더 커져간다.
  처음엔 수박 정도의 크기였던 것이, 이제는 성인 어른이 두 팔을 벌려도 안기 힘들 정도로 크게 변했다.
  그에 따르듯 괴물들의 모습도 거미줄 너머로 확연히 드러나 보일 정도가 되었다. 치프의 주먹질을 벗어나는 놈들이 하나 둘 생겨나는 참이었다.
  경우의 뒷머리에 괴물의 손톱이 아슬아슬하게 스친다.
  경우는 묵묵히 눈앞에 나타날 푸른 문장을 기다렸다.
 
  【지천호의 성장률이 100%에 도달했습니다.】
  【지천호의 비전등급이 상승했습니다.】
  【지천호의 비전등급이 S가 되었습니다.】
 
  마침내 경우가 쏟아 부은 비전력을 모두 흡수했다는 알림이 나타났다.
  지천호는 모든 비전력을 흡수 한 순간, 허공의 푸른 구슬을 깨뜨리며 사뿐히 바닥에 내려섰다.
  그 꼬리는 이미 두 개를 뛰어넘어 네 개가 되어있었다.
  과거, 중국을 지도에서 지워버릴 뻔 했던 바로 그 모습.
  경우는 흡족한 표정으로 지천호를 바라봤다. 적이었을 땐 악마와도 같은 존재였으나, 같은 편이라고 생각하니 이보다 든든할 수 없었다.
  지천호는 세상에 그 모습을 드러낸 순간, 사방을 향해 시퍼런 번개줄기를 쏟아내었다.
 
  【뇌정벽력(雷霆霹靂): B】
 
  어마어마한 번개의 폭풍이 몰아쳤다.
  압축된 번개줄기가 정확히 적의 괴물만을 노리며 삽시간에 시커먼 잿 가루로 태워버렸다.
  경우는 재빨리 거미줄을 치웠다. 하지만 채 덜 녹아내린 거미줄마저 지천호의 번개는 가벼이 증발시키며 그 너머의 괴물을 세상에서 쓱싹 지워버렸다.
  심지어는 아직 모습을 드러내지 않은 통로 너머의 괴물들까지 ‘체인(Chain)’이 걸려 벼락이 사이사이를 뛰어다녔다. 섬뜩한 비명이 옅어지는 섬광을 따라 통로의 먼 곳까지 이어져나갔다.
  그야말로 ‘천재지변’.
  경우는 이 세상에 돌아온 이후, 처음으로 몸을 흠칫 떨었다. 과거의 트라우마가 살아나는 광경이었다.
  하지만 이제는 걱정 할 필요 없는 든든한 아군.
  경우는 번개의 방출 탓에 사방에 피어오른 먼지를 헤치며 지천호가 선 곁으로 다가갔다.
  “……응?”
  그런데, 지천호의 모습이 조금 이상하다.
  경우는 코끝을 스치며 팔락이는 하늘하늘한 옷가지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두 발을 딛고 선 조그마한 체구를 내려다보았다.
  그 곳에는 이미 과거에 지천호라 불리던 여우 괴물은 존재하지 않았다.
  단지 꼬리 네 개 달린 여자아이가, 경우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아빠?”
  그 여자아이가, 머리에 달린 여우 귀를 쫑긋하며 배시시 웃음 지었다.
 
 
 # 코어
 
 “이게 무슨 일이지…….”
  경우는 자신의 품에 안겨 둥글게 몸을 웅크리곤 잠들어 있는 지천호를 바라보며 작은 한숨을 내쉬었다.
  일단, 지천호의 능력 자체는 큰 변화가 없음에 안도했다. 모습이 여우에서 인간처럼 변했지만 그 능력은 과거와 마찬가지로 압도적이었다.
  그렇다면 지천호를 부모님에게 맡겨서 두 분을 지키게 한다는 계획엔 별 문제가 없다. 오히려 사람의 모습이니 더욱 좋다고 볼 수 있었다.
  다만, 어째서 사람의 모습이 되어버린 걸까?
  ‘둔갑이라는 스킬은 없었는데.’
  스킬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건 곧 이 모습이 완전히 본신이라는 뜻이다. 다시 여우로 변하거나 하지 않고, 평생 이 모습으로 지낸다는 걸 의미하는 말이었다.
  사람으로 변한 것 자체는 큰 문제가 되지 않는다. 능력만 온전하다면 어떤 형태든지 상관없으니까.
  하지만, ‘왜’ 변하게 되었는지를 모른다. 이유를 알아야 했다. 이대로 아무것도 모른 채 넘어가 버린다면 결국 이후 어딘가에서 자신의 발목을 잡는 문제로 나타나게 될 것이기 때문이었다.
  사소한 정보 하나가 커다란 파급효과를 가져온다.
  그 사실을 지난 삶에서 수없이 많은 동료들의 죽음을 바라보며 깨달았다.
  경우는 새삼 자신의 몸에 깃들어 있는 비전력을 끌어올려보았다. 그러자 뜨겁지 않은 푸른 불길이 그의 손에서 피어올랐다.
  세상의 법칙을 초월하는 ‘비전’을 사용케 만드는 절대적인 힘.
  ‘내 비전력에 문제가 있는 건가?’
  하지만 비전력은 단순한 에너지에 불과하다. 그걸 사용하는 사람에 따라 다양한 결과로 도출되는 것이지, 에너지 자체는 모두 동등한 것이었다.
  ‘잠깐, 사람?’
  경우는 숨을 한 번 들이쉬고는 묘한 눈길로 지천호를 바라봤다.
  이 아이는 원래 괴물이었다. 그리고 괴물일 때 이마에 가지고 있던 비전의 결정은 산산조각 나 증발했다.
  그 뒤를 이어 생겨난 것이 새로운 비전의 결정. 바로, 자신의 비전력으로 만들어진 것이었다.
  그리고 경우는 인간이다.
  즉, 인간의 비전력인 것.
  ‘비전의 결정은 정신에 영향을 미친다. 이 녀석은…… 스스로의 존재를 재정립 한 것인가? 자신이, 인간이라고?’
  여기서 부터는 정신의 문제로 넘어간다. 따라서 직접 지천호가 되어보지 않는 한은 이거다! 하는 확답을 내릴 수 없다.
  다만 이유는 알게 되었다.
  기존의 괴물이 지닌 비전의 결정을 부수고, 그 빈 자리를 인간의 비전력으로 만들어낸 비전의 결정으로 채우게 된다면, 그 괴물은 인간의 편이 된다.
  ‘죽여서 강시로 만드는 게 훨씬 다루기 쉽고 간단하지만…… 일단 하나의 새로운 방법은 알게 된 거로군.’
  경우는 품에서 잠든 지천호의 머리를 가볍게 쓰다듬었다. 그 너머로 부드러운 머리카락과 따뜻한 체온이 느껴졌다.
  이는 강시에게선 느낄 수 없는 것들이었다.
  ‘……나쁘지는 않군.’
  슬쩍 미소 지은 경우는 지천호를 안은 채 던전 홀의 가운데로 걸음을 옮겼다.
  이제 남겨둔 마지막 문제를 처리해야 할 때였다.
  “던전 코어라.”
  그곳엔 자신을 지킬 괴물을 모두 잃어버린 붉은 빛의 던전 코어가 허공에서 진득한 불길을 밝히고 있었다.
  그 불길이 너무나 탁해 가만히 바라보고 있노라면 흡사 삼켜져 버릴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기분 나쁜 빛이군.”
  하지만 경우는 100조를 넘는 비전력을 보유한 상태. 그러한 까닭에 현기증을 느낄 정도로 지독히 맑은 정신을 강제로 유지당하는 중이었다.
  던전 코어의 현혹은 눈길조차 가지 않는다. 그저 코웃음만으로 무시 해 버렸다.
  이어 두 눈동자에 푸른 불길을 피워내 살펴본다.
  그러자 두 눈 앞으로 던전 코어의 정보가 아지랑이처럼 서서히 떠오르기 시작했다.
 
  【던전 코어: 코어: 99.9%
  정보: 던전을 유지하는 코어. 막대한 에너지를 끊임없이 뿜어내고 있다. 어지간한 힘으로는 파괴하더라도 금세 복구되어버리고 만다.
  특성: 초회복.
  1. 던전 생성
  2. 현재의 지식으로 이해 할 수 없음.】
 
  “……!”
  경우는 던전 코어의 정보를 본 순간, 그 자리에 시간이 멈춘 것 딱딱하게 굳어버리고 말았다.
  그의 시선은 가장 아래의 2번 항목에 고정된 듯 멈춰있었다.
  지금껏 건조하기만 하던 경우의 눈동자는 작은 돌멩이를 던진 것 마냥 파문이 일어나고 있었다.
  “이해…… 할 수…… 없다……?”
  경우의 눈앞으로 문득 1달 전의 광경이 스쳐지나갔다.
  이미 더 이상 절망으로 치달을 수 없던 지옥의 한복판. 그곳에서 나타난 거대한 뱀 괴물과, 그놈과 함께 자폭하기 위해 각성시켰던 ‘서먼 선’의 개방된 특성 1의 항목.
 
  【특성: 1. 현재의 지식으로 이해 할 수 없음】
 
  “이게…… 어째서 여기에…….”
  경우는 반쯤 넋이 나간 채 던전 코어를 뚫어져라 쳐다봤다.
  아무 생각도 들지 않았다.
  그저 이 상황을 이해하고 싶다는 집착적인 의지만이, 머릿속을 가득 채울 뿐이었다.
  초조해진 눈길에 의식이 서린다.
  그에 따라 경우의 두 눈동자에 피어오른 청화는 더욱 맹렬히, 선명토록 타오르기 시작했다.
  총 비전력 200조에 달하는 어마어마한 양. 무려 비전 능력자 사이에서도 또다시 그 존재를 초월해야 만이 도달할 수 있는 ‘S급’ 비전 능력자를 넘어서는 그것이, 경우의 몸 안에서 시리도록 차가운 기운을 불러일으키며 그의 두 눈에 모여들었다.
  단순히 눈동자에 푸른 불길이 피어오르는 게 아닌, 눈동자 자체가 푸른 비전력으로 물들었다. 마치 투명한 빙하를 조각 한 것 같은 지경에 이른 순간이었다.
 
  【충분한 비전력을 보유하고 있습니다.】
  【혜안(慧眼)이 개방됩니다.】
  【감춰져 있던 정보를 간파합니다.】
  【이해할 수 없던 정보가 해석됩니다.】
  【보유한 총 비전량과 대상의 본질을 비교합니다.】
  【해석 확률 27%!】
  【비전특성 ‘행운(fortune)’의 영향으로 인해 해석 확률이 100%로 보정됩니다.】
  【‘던전 코어’를 해석했습니다!】
 
  순식간에 경우의 눈앞이 푸른 문장들로 채워졌다. 그것은 지금까지의 흐릿하던 글자가 아닌, 펜촉으로 눌러 쓴 것 선명하고 뚜렷한 필체를 가지는 것이었다.
  경우의 눈앞엔 알림 문구가 사라지고 지금껏 보고 있던 던전 코어의 정보가 다시금 고쳐 써지기 시작했다.
 
  【던전 코어: 심장의 파편: 99.9%
  정보: 던전을 유지하는 코어. 막대한 에너지를 끊임없이 뿜어내고 있다. 어지간한 힘으로는 파괴하더라도 금세 복구되어버리고 만다.
  해석: ‘레비아탄의 심장’의 아주 극히 일부분입니다.
  특성: 초회복.
  1. 던전 생성 (1단계 던전: 최소 요구 비전력 100조 [1m^3: 100 비전력])
  2. 레비아탄의 심장에 지배당하지 않을 경우 본인의 심장에 안착할 수 있다. (성공 확률: 0.21%)】
 
  “심장……?”
  경우는 깜짝 놀라 비전력을 흩트리고 말았다. 그러자 눈앞에 뚜렷이 쓰여 있던 푸른 글자는 다시금 이전의 흐릿한 형태로 돌아가고 말았다.
  하지만 이미 한 번 갱신 된 내용은 여전히 남아있었다. 이미 해석이 끝난 까닭이다.
  그 사실에 안도한 경우는 다시금 천천히 바뀐 내용을 읽어 내려가기 시작했다.
  갱신된 던전 코어의 정보는 그야말로 믿을 수 없는 것이었다.
  기존에 기록되어있던 던전의 생성은 그 조건이 드러나 완벽하게 사용 할 수 있는 상태가 되어있었다.
  더욱이 그 최소요구량이 100조의 비전력이라는 것에서 경우는 섬뜩함을 느꼈다.
  만약 비전량이 100조에 도달하지 못해 총량이 부족한 능력자가 이 기능을 사용했다면, 그는 순식간에 비전력이 빨려 비쩍 마른 미라가 되어 죽었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더욱이 비전 아이템에 불과하다 생각했던 던전 코어가 심장의 파편이라는 사실이 밝혀졌다.
  이는 단순한 물건의 개념이 아닌 것을 의미했다.
  직접 필요에 의해 변형하고 가공한 것.
  즉, 어떠한 ‘목적’을 가진 ‘의지’의 개입이 드러난 것이나 마찬가지인 것이었다.
  경우는 불길한 생각이 사고를 파고드는 것을 막아낼 수 없었다.
  누군가가…… 의도적으로, 포탈을 생성하고 있었다.
  “……레비아탄…….”
  그리고 해석에 이르러서는 눈살을 깊이 찌푸리고 말았다.
  그곳에 적혀있는 하나의 단어가 그의 머릿속을 두통처럼 쿡쿡 찌르고 있었다.
  그것이 무엇을 뜻하는지는 굳이 고민 할 필요도 없었다.
  세상의 종말이 찾아온 날.
  그 끝을 알 수 없을 만큼 거대하고 두려웠던 최후의 괴물.
  인간이 만들어낸 태양을 한 입에 삼켜버린, 뱀.
  ……그놈이다.
  “그 놈의 심장이라고?”
  경우는 눈앞에서 끈적한 적빛을 흘리는 조각난 보석을 바라보았다. 그로부터 끊임없이 지독한 기운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자칫 잘못 건드리기라도 한다면 몸과 정신, 영혼마저 삼켜져 괴물의 일부가 될 것이라는 건 본능적으로 느낄 수 있었다.
  그렇다고 이것을 부서뜨리기 위해서는 얼마나 오랜 시간이 걸릴지 알 수가 없다. 그리고 얼마나 많은 비전력이 필요할지 역시 모르는 일이었다.
  주먹보다도 작은 파편이라고는 하나, 경우는 이것이 모든 것의 시작이자 끝임을 어째서인지 알 수가 있었다.
  마치, 과거로 돌아간 순간 이미 죽어 보지 못했어야 할 미래의 결말을 누군가가 곁에서 속삭여 준 것처럼, 모든 걸 알 수 있었던 그때처럼.
  이미 확신은 끝났다.
  경우는 손을 뻗어 던전 코어를 두 손으로 움켜쥐었다.
  더 이상 생각 할 이유가 없었다.
  “‘각성의 선구자‘ 활성.”
 
 【타이틀: 각성의 선구자(활성)가 적용되었습니다.】
  【비전력 총량이 120% 증가하며, 비전력 소모율이 80% 감소합니다.】
 
  “한번…… 누가 이기나 해 보자고.”
  경우는 심호흡을 한 번 하고는, 힘껏 주먹을 내리쳐 자신의 가슴을 향해 던전 코어를 찔러 넣었다.
 
 
 
  꿈을 꾸었다.
  경우는 하늘 위를 천천히 날아다니고 있었다.
  하지만 인간의 몸이 아니었다.
  그것은 커다란 뱀. 그리고…… 비늘과 돌기가 솟은, 물고기가 뒤섞인 듯한…….
  ─무어라 특정 할 순 없었다.
  다만, 세상 무엇도 자신과 견줄 수 없다는 ‘진실’만은 알 수 있었다.
  단지 거대하기 때문이 아니었다.
  몸 안에 꿈틀대는 막대한 에너지는 세상을 한 번 부수고 다시 만들 수 있을 정도였으니까.
  그야말로 ‘본질’에 해당하는 힘.
  경우는 스스로를 ‘신’이라고 정의했다.
  그 말대로, 경우는 세상의 모든 것을 볼 수가 있었다.
  가만히 눈을 감고 있으면 저 하늘을 흐르는 모든 공기의 흐름을 읽을 수 있었고, 눈을 떠 아래를 내려다보면 수천km 밖에 있는 모래알 하나의 위에 앉은 먼지의 크기를 잴 수도 있었다.
  숨을 쉴 때 들어오는 공기 속에 어떤 성분이 얼마큼의 비율로 포함되어 있는지는 무의식 수준에서 계산이 끝나버렸다.
  그리고 동시에, 이 세상은 더 이상 ‘힘’이 없다는 걸 ‘확신’할 수 있었다.
  경우는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보았다.
  그곳은 검은 구름과 보랏빛 천둥이 치는 세상이었다.
  그곳에서부터 천둥이 내리치면 사방 수십km는 번개의 줄기로 가득 뒤덮여 버린다.
  구름의 아래에선 회색빛 토양이 먼지를 일으키며 불타오른다.
  귓가로 수억 명의 비명과 괴성이 들려온다.
  살아 움직이는 모든 생물체가 서로를 향해 이빨을 드러내며, 조금이라도 더 많은 식량과 땅을 차지하기 위해 싸우는 모습이 보인다.
  그 중에 이제 갓 태어난 새끼가 울부짖고 있었다.
  그것을 지나가던 괴물이 두 손으로 부둥켜안아 힘껏 짜부라뜨렸다.
  체액이 두 팔을 타고 흘러내렸다.
  텅 비어버린 시체를 버리니, 그 자리로 수십의 괴물들이 모여들어 시체를 뜯어먹고자 목숨을 건 싸움을 벌인다.
  참으로 처절한 광경이었다.
  서로가 서로와 공존 할 수 없게 되었고, 가진 것을 나누기는 커녕 빼앗아도 부족함이 몸에 사무칠 정도이리니…….
  이 세상은 점차 무너져가고 있었다.
  다만 경우는 그것이 잘못되었다 생각하지 않았다.
  힘 있는 자가 힘없는 자를 지배하는 것은 당연한 논리이니까.
  하지만, ‘힘 있는 자가 살아가지 못하는 세상’은 틀림없이 ‘잘못’된 것이다.
  세상은 끊임없이 먹고 먹혀야 한다.
  하지만 이 세상엔 더 이상 먹을 것이 없었다.
  그것이야말로 이 세상이 무너져가고 있다는 반증.
  그리하여 경우는 몸 안에 잠들어 있던 거대한 힘을 밖으로 끄집어냈다.
  그리고 한 차례 포효하여 이 땅 위의 모든 ‘지배자’들을 불러 모았다.
  경우는 신이었다. 지배자들은 신의 부름에 달려와 조용히 고개를 조아렸다.
 
  【준비하라.】
 
  “무엇을 말인지요?”
  한 지배자가 물었다.
 
  【전쟁.】
 
  “누구와의 전쟁입니까?”
  또 다른 지배자가 물었다.
 
  【다른 세상.】
 
  “아빠!”
  경우의 귓가로 어린 여자아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무거운 눈꺼풀을 들어 올리니 하얀 빛과 함께 두 개의 큼직한 여우귀와 네 개의 꼬리가 비쳐보였다.
  “끄응…….”
  머리가 수천 대 두드려 맞은 것 묵직했다. 동시에 갑갑하다.
  마치 드넓은 벌판에 누워 있다가 갑자기 1평 남짓한 컨테이너 속에 들어온 것 같은 기분이었다.
  “아빠, 이거!”
  문득 어린 여자아이는 자신의 목에 염주 같은 목걸이를 걸어주었다.
  그러자 순식간에 감각이 확장되었다.
  경우는 마른 땅에 스며드는 단비처럼 촉촉이 젖어드는 비전력을 느끼며 모든 사고와 정신이 명료해지는 걸 실시간으로 체감 할 수 있었다.
  일단 비전력이 차오르니 몽롱하던 정신이 깨어나는 건 한순간이었다.
  경우는 고개를 돌려, 자신을 바라보며 걱정스런 표정을 짓고 있는 지천호를 마주보았다.
  그의 손이 지천호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지천호.”
  “우웅?”
  “고맙다.”
  “……응! 헤헤.”
  지천호의 꼬리 네 개가 이리저리 흔들렸다. 경우는 아예 지천호를 안아 품에 껴안고는 자그마한 등을 토닥여 주었다.
  그리고 두 눈에 청화를 담으며 서늘한 눈길로 그의 주변에 선 사람들을 바라보았다.
  “워어, 진정키 바라오.”
  그들 중 가장 앞에 서 있던 한 남자가 두 손을 들어 올리며 유쾌히 말했다. 그런 그의 뒤에서 문득 귀에 익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깨어나셨군요.”
  “아나스타시야?”
  익숙한 목소리와 얼굴을 본 경우는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어째서 아나스타시야가 여기에 있는 건가?
  경우의 어리둥절한 표정을 본 그녀는 작게 미소를 지으며 이야기했다.
  “여기는 한국의 ‘디펜서’ 지사 본부에요.”
  “디펜서라고? 어째서 내가 여기에 있지?”
  “그건…… 제가 데려왔으니까요.”
  아나스타시야는 멋쩍게 웃으며 아름다운 금빛 머리카락을 검지로 빙글빙글 꼬았다.
  “경우씨는 일주일 동안 정신을 잃고 있었어요.”
  “일주일 동안이라고?”
  “네. 정확히는 일주일 하고도 스무 시간……. 곧 하루가 더 지날 뻔 했지만요.”
  그녀는 안도감 가득한 미소를 입가에 건 채 계속해서 얘기했다.
  “던전은 경우씨가 저희 곁을 떠난 지 정확히 일주일 뒤에 붕괴하기 시작했어요. 그리고 저희들은 마치 튕겨나가듯 원래 장소로 내팽개쳐졌구요.”
  “그랬었군.”
  “그 뒤로 디펜서에 돌아가 던전에 관한 여러 가지 정보를 갱신하던 도중, 경우씨에 대한 정보를 찾아봤어요. 하지만 디펜서에 가입된 한국 능력자 중에는 경우씨와 일치하는 사람이 없더군요.”
  “가입하지 않았으니까.”
  “네. 하지만 그럼에도…… 오히려 저희 디펜서가 나서기 전 부터 괴물들에 대한 정보를 알리고 다니셨다는 기록을 찾았어요.”
  “꽤 찾고 다녔나보네. 그래서?”
  “디펜서에서는 경우씨가 중요한 인물로 판정되어서, 급히 만나고자 계획을 잡았어요. 한국의 서울에 살고 계시는 걸로 확인이 되어서 제가 직접 찾으러 왔어요. 하지만 집에는 안 계시고…… 그래서 근방의 필드를 돌아다니다가 우연히 저 아이를 만났어요.”
  아나스타시야는 경우의 품에 안겨있는 지천호를 가리켰다. 지천호는 기분 좋은 듯 경우의 품에 둥글게 웅크린 채 미동도 하지 않고 있었다.
  하지만 그런 지천호를 바라보는 아나스타시야의 안색은 새파랗게 질리다 못해 아주 죽어버린 시체마냥 창백했다.
  경우는 어떤 상황이었을지 짐작하고는 쓰게 웃으며 말했다.
  “죽을 뻔 했겠군. 살아있는 게 기적이야.”
  “……아무튼 어떻게든 진정을 시켜서 이곳으로 데려왔어요. 이미 경우씨의 부모님께는 연락을 마쳤구요. 특별하게 다쳤다는 이야기는 하지 않고, 그냥 연수 차원으로 함께 있다고만 알려드렸어요.”
  “그래? 그건 정말 고마운데.”
  경우는 망설임 없이 아나스타시야를 향해 고개를 꾸벅 숙여보였다. 아나스타시야는 두 손을 황급히 휘저으며 말했다.
  “그, 그러실 필요 없어요. 저도…… 경우씨가 아니었으면 어딘지도 모를 던전에서 죽었을 테니까…….”
  그녀의 말에 경우는 고개를 들고 피식 웃어보였다.
  “그건 그거고 이건 이거지.”
  동시에 경우는 지천호를 쓰다듬던 손을 멈추고, 자신의 가슴 위로 손을 얹었다.
  ‘그러고 보니 던전 코어는 어떻게 된 거지?’
  그는 분명 꿈을 꾸었다. 그 꿈에서 경우는 세상의 종말의 순간 나타난 바로 그 괴물이 되어있었고, 그의 정신으로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괴물…… ‘레비아탄’의 기억을 보았다.
  그것은 한낱 인간의 정신으로는 절대 견딜 수 없는 것이었다. 아무리 100조 단위를 넘어서는 비전력이라 할지라도, 레비아탄과 비교한다면 손톱의 부서진 조각 끄트머리에 새겨진 긁힌 자국 하나에도 미치지 못하는 미약하디 미약한 것에 불과했다.
  직접 몸과 정신으로 겪어보고 온 경우는 누구보다도 현실적으로 그 사실을 받아들일 수 있었다.
  이 세상을 침략하려는 존재는…… 절대로 맞설 수 없는, 거대한 괴물이었다.
  ‘하지만.’
  경우는 푸르게 타오르는 눈동자로 눈앞에 선 아나스타시야를 바라봤다. 그리고 그녀의 가슴에 부착된 금속 배지를 향해 시선을 고정했다.
  그 배지 너머로, 경우의 모습이 비쳐 보인다.
  자신의 모습 위로 선명히 타오르는 문장들이 그의 두 눈에 똑똑히 보였다.
 
  【김경우: 인간: 비전등급 C
  정보: 비전력[19660x10^10/(200조 -10조)]
  특성: 행운(fortune)】
  【레비아탄의 심장: 심장의 파편: 99.9%
  정보: 인간의 심장에 동화된 레비아탄의 심장. 막대한 에너지를 끊임없이 뿜어내고 있다. 어지간한 힘으로는 파괴하더라도 금세 복구되어버리고 만다. 동화 비율이 100%에 이르면 더 이상 심장에 안착할 수 없다.
  해석: ‘레비아탄의 심장’의 아주 극히 일부분이 김경우의 심장에 37.4% 동화되어 있습니다. 동화 비율이 100%에 이를수록 레비아탄의 능력이 개방됩니다. (현재 1개 개방.)
  특성: 초회복 능력.
  1. 던전 생성 (1단계 던전: 최소 요구 비전력 100조 [1m^3: 100 비전력])
  2. 타이틀 생성(레비아탄의 화신: 비전등급 Ex)】
 【레비아탄의 화신(비활성): 타이틀: 비전등급 Ex
  정보: 한 순간 레비아탄의 심장을 각성시켜 그 힘을 100% 사용할 수 있다. (기본 비전력 소모량: 초당 1조, 각성확률 0.11%)
  특성: 아이템 타이틀】
 
  “……레비아탄…….”
  경우의 입술이 조그맣게 달싹였다.
  그의 중얼거림에 반응하듯 레비아탄과 동화된 심장이 크게 두근거렸다.
  경우의 심장에 동화 된 것이건만, 자신의 존재감을 과시하듯 드러내고 있었다.
  나의 힘을 네가 알겠느냐는 듯한…….
  마치, 심장의 주인이 바뀌어 버린 것 같지 않은가.
  “마음에 안 드는군.”
  경우는 몸 안의 비전력을 움직여 심장을 향해 집중시켰다.
  그 양은 자그마치 200조에 달하는 것.
  한 순간 하나의 점에 집중되는 비전력 탓에, 경우의 심장은 밖에서도 볼 수 있을 만큼 맑고 청명한 빛으로 물들기 시작했다.
  경우는 레비아탄의 심장을 지워버릴 기세로 비전력을 쏟아 부었다.
  그러자 진득한 빛으로 물들어 있던 레비아탄의 심장이 격렬하게 저항했다.
  지금껏 경우의 심장에 일부 안착되어있던 레비아탄의 심장은 그저 담아 둔 채 밖으로 내어놓지 않았던 모든 비전력을 거칠게 뿜어냈다.
  동시에 경우의 심장이 진득한 빛에 휘감긴다.
  마치 뿌리를 내리듯, 레비아탄의 심장이 경우의 심장 구석구석으로 촉수와 혈관을 뻗어 성장 해 나가기 시작했다.
  심장 전체가 레비아탄의 심장으로 뒤덮여 버린다.
  그리고 이어지는 강렬한 수축.
  ─가슴이 옥죄어든다.
  심장이 터질 듯 고통을 호소하고 숨은 턱 막혀 머릿속이 하얘진다.
  하지만 경우의 표정은 태연하기 그지없었다.
  부족한 산소와 공급되지 않는 에너지 등, 생존과 관련된 그 모든 것은 인간을 초월케 해 주는 ‘비전력’이 감당해낸다.
  굶어도 죽지 않으며 마시지 않아도 괴롭지 않고, 숨 쉬지 않아도 살아갈 수 있다.
  비전능력자가 된 순간, 그들의 생사는 오직 비전력에만 달리게 되는 것이었다.
  그것을 알기에 신체의 고통을 초월할 수 있다.
  아무리 괴롭고 고통스러워도, 비전력이 잔류하는 한 절대로 죽지는 않는다는 진실.
  더군다나 경우는 그러한 고통을 20년 동안이나 질리도록 겪으며 괴물들과의 전쟁을 치러 온 노장이었다.
  이미 ‘익숙하다.’
  레비아탄의 심장이 달성코자 하는 정신의 붕괴 따위, 기도 차지 않았다.
  “허튼 짓을 하는군.”
  비전력과 저항력이 팽팽히 부딪친다.
  경우는 집중되는 비전력의 양을 폭발적으로 증가시켰다.
  일순, 레비아탄의 심장이 요동치며 날카로운 섬광을 방출시켰다.
  그 충돌의 여파는 근처에 서 있던 사람들의 비전력을 직접적으로 자극해 충격을 안겨 줄 정도였다.
  경우의 근처를 둘러싸고 있던 사람들이 당황과 혼란스러운 표정을 감추지 못한 채 뒤로 물러섰다.
  그들과 경우 사이의 거리가 열 발자국은 더 넘어서는 공간이 되어서야 몸 안의 비전력을 자극하던 기류가 미약해짐을 느낄 수 있었다.
  무려 열다섯 걸음이나 물러선 아나스타시야는 떨리는 눈동자로 침상에 앉아있는 경우를 바라보았다.
  ‘어떻게…… 비전력이, 타인의 체내에 자리 잡은 비전력을 물리적으로 밀어 낼 수 있는 거지? 도대체, 얼마나 농도가 짙기에……?’
  그녀는 경우의 몸이 붉고, 푸른빛으로 점멸하듯 반투명한 기운을 흩뿌리는 광경을 똑똑히 두 눈으로 볼 수가 있었다.
  그에 따라 주변의 물건들이 흔들리고 이불자락과 커튼이 펄럭인다.
  물리력을 가지지 않는 비전력이, 대기를 뒤흔들어 놓고 있는 것이었다.
  마치 방 안에 폭풍이 일어나는 듯한 모습이었다.
  “아빠?”
  그 때가 되자 지금껏 경우의 품에 안겨있던 지천호가 두 눈을 큼지막이 뜨며 그를 불렀다.
  그리곤 잠시 큰 눈을 깜박이더니, 이내 자그마한 두 팔을 뻗어 경우의 가슴을 꼭 끌어안았다.
  순간, 막대한 비전력이 외부로 부터 흘러들어와 경우의 심장을 둘러쌌다.
  그것은 S급. 자그마치 4단계에 이른 성장을 완성한 지천호의 몸에서 부터 쏟아져 나온 비전력이었다.
  경우와 같은, 똑같은 파장의 비전력은 어떤 저항이나 거부도 없이 그의 몸에 스며들었다.
  그러자 맹렬히 저항하던 레비아탄의 심장이 예상치 못한 상황에 당황한 듯 크게 위축되었다.
  지금까지 버텨오던 경우의 비전력이 200조에 달하는데, 거기에 완충된 경우 한 명 분에 달하는 비전력이 새로이 추가 된 것이었다.
  ……미칠 노릇이다.
  레비아탄의 심장이 잘게 떨기 시작했다. 붉은 빛이 눈에 선명히 드러날 정도로 옅어졌다.
  하지만, 그럼에도 그 힘이 완전히 굴복하지 않는다.
  경우는 두 팔을 뻗어 자신을 꼭 안고 있는 지천호를 마주 끌어안았다.
  지천호의 꼬리가 살짝 흔들거렸다.
  지천호로부터 유입되는 비전력이 더욱 밝아졌다.
  경우의 비전력이 맹렬히 레비아탄의 심장을 공략했다.
  끈질긴 반발을 깎아내며 조금씩, 조금씩 맑은 빛으로 바꾸어가는 과정이 반복되었다.
  길면서도 짧은 시간.
  이윽고 동화된 심장의 절반 이상을 경우의 비전력이 장악 한 순간이었다.
  그로부터 판도를 뒤집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단숨에 집중된 비전력이 레비아탄의 심장을 조각내고 그 파편을 집어삼켜 버린다.
  경우의 심장이 푸른빛으로 은은히 물들었다.
  일순, 경우의 몸에서 따스히 내리쬐는 햇살과도 같은 빛무리가 흘러나왔다.
  마치 푸른 하늘 아래 맞이하는 봄바람처럼 부드러운 바람은 경우의 몸에서 부터 흘러나와 방 안을 한 차례 휘감았다.
  여린 손길과도 같은 바람은 지나간 자리에 따뜻하고 맑은 빛무리를 하나 둘씩 남겨놓고 사라졌다.
  더 이상 경우의 몸 안엔 진득하리만치 지독했던 붉은 비전력이 더 이상 존재치 않았다.
  방 전체를 부드러운 빛의 눈송이로 물들인 그 곳에서, 경우는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마침내 선언했다.
  “난…… 리바이어던(Leviathan)이다.”
 
  【레비아탄의 명칭이 리바이어던으로 정립되었습니다.】
  【타이틀 활성화! ‘레비아탄의 화신’이 ‘리바이어던‘으로 변경됩니다!】
 【리바이어던(활성): 타이틀: 비전등급 Ex
  정보: 한 순간 리바이어던의 심장을 각성시켜 그 힘을 100% 사용할 수 있다. (기본 비전력 소모량: 초당 1억, 각성확률 100%)
  특성: 아이템 타이틀】
  【동화율 100%! 리바이어던의 심장이 완벽히 융화되었습니다!】
  【성장 제한! 동화율이 100%에 도달하여 성장이 끝났기에, 더 이상 능력이 개방되지 않습니다!】
  【혜안(慧眼) 개방! 감춰져 있던 정보를 간파합니다.】
  【간파 대상…… ‘비전의 크리스탈’을 해석합니다!】
  【레비아탄의 뼛조각 E+++ Ⅴ: 뼈의 파편: 99.9%
  정보: 각성 3단계. 강화 5단계.
  해석: ‘레비아탄의 뼈레비아탄의 화신의 아주 극히 일부분입니다.
  특성: 내구도가 감소하지 않습니다.
  1. 소유자의 비전력을 증폭시켜준다. 비전력 +1024000%
  2. 소유자의 비전력을 회복시켜준다. 회복력 +1024000%
  3. 소유자의 비전력 소모량을 감소시켜준다. 감소량 +1024000%】
  【‘비전의 크리스탈’의 명칭이 ‘레비아탄의 뼛조각’으로 변경됩니다.】
  【리바이어던의 심장이 100% 동화율에 이르렀기에 고유 스킬이 활성화됩니다.】
  【리바이어던의 고유 스킬 ‘귀화(歸化)’가 활성화 되었습니다.】
  【‘귀화(歸化)’ 스킬로 인해 ‘레비아탄의 뼛조각’이 리바이어던의 신체에 귀화됩니다.】
  【정화 된 레비아탄의 뼛조각은 리바이어던의 신체에 50%확률로 귀화됩니다.】
  【비전 특성으로 인한 확률보정 100%! 소지 중인 레비아탄의 뼛조각을 모두 받아들였습니다!】
  【누적된 비전력이 한계치를 돌파했습니다. 한계를 넘어선 비전력에 맞춰 비전등급이 상승합니다.】
  【김경우: 리바이어던(11일 13시간 46분 40초): 비전등급 S
  정보: 비전력[10^14(-1억/초)/100조]
  특성: 행운(fortune)】
  【비전등급이 상승했습니다. 비전력의 총량이 늘어나며 비전력의 회복속도가 상승하고 회복량이 증가합니다.】
  【최초로 ‘비전등급 S’ 가 되었습니다! S급 비전능력자의 고유스킬 ‘천리(天理)’가 개방됩니다!】
  【스킬 성공확률…… 100%!】
  【하늘이 열립니다!】
 
 
 
  “뭐, 뭐야……!?”
  아나스타시야는 삽시간에 두 눈이 새하얀 빛으로 물드는 것을 느끼곤 당혹에 겨운 비명을 질렀다.
  그녀뿐만이 아니었다. 바로 곁에 있었던 사람들 역시 모두가 갑작스러운 사태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우왕좌왕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게다가, 아무런 기척이 느껴지지 않는다.
  바로 전 까지만 해도 비전능력자로서 증폭되었던 감각이 멀리 떨어진 사람의 심장 소리까지 들을 수 있도록 해 주었었다.
  하지만 지금은 마치 평범한 사람이 된 것처럼 아무 감각도 느낄 수 없게 되어버렸다.
  비전력이 정상적으로 작용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었다.
  마치, 무거운 물속에 푹 잠겨버린 것 같았다.
  몸이 둔해지고, 움직임마저 억눌려 버린다.
  아나스타시야는 저도 모르게 어깨를 흠칫 떨고 말았다.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무력감이 마음 속 깊이 잠재워 놓았던 공포를 다시금 일깨운 것이었다.
  “……천사…….”
  그들 사이에서 유일하게 말이 없던 한 사람.
  맨 처음, 경우의 곁에서 호들갑스레 물러났었던 남자가 긴장 된 듯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하늘에서, 천사가 내려왔다.”
  “……네, 네……?”
  아나스타시야는 그의 말에 정면을 뚫어져라 노려봤다.
  천사라니,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는 거지?
  그보다, 이 남자는 어떻게 천사가 내려왔다는 걸 알 수 있는 걸까……?
  “이렇게 가까이서 보는 건 처음이지만…… 굉장하군. 이 정도의 힘, 그리고 이렇게나 빨리…….”
  “아저씨……?”
  “반드시…… 반드시 천사의 힘을 손에 넣어야 해……. 그들의 힘이 있어야만…….”
  그는 마치 무언가에 홀린 사람처럼 중얼거렸다. 아나스타시야는 앞이 보이지 않는 새하얀 빛 속에서 웅얼웅얼 목소리만 들리는 사태에 질겁할 것만 같았다.
  세상이, 미쳐가는 기분이었다.
  그녀는 어떻게라도 대화를 하고자 가장 궁금했던 질문을 내뱉었다.
  “아저씨는…… 천사를 볼 수 있나요?”
  아나스타시야의 의혹 찬 물음에 바로 곁에 있던 그는 문득 중얼거림을 멈추곤 피식 웃음을 터트리며 대답했다.
  “천사를 볼 수 있냐니? 너도 보고 있잖나?”
  “저는…… 아무것도 안 보이는데요……?”
  “아무것도 안 보이다니? 지금 우리 눈앞에 있는, 바로 ‘이게’ 천사인데?”
  “처음 보는군.”
  경우는 눈앞을 하얗게 물들이는 빛을 바라보며 눈살을 찌푸렸다.
  과거, 20년의 전쟁 동안 그는 단 한 번도 천사라는 존재를 본 적이 없었다.
  혹시 S급이 되지 않아서 그런 건 아닐까 생각 해 봤지만, 경우 역시도 19년 차에는 비전등급이 S급으로 올라갔었다.
  하지만 그 시절의 경우에겐 ‘천리(天理)’는커녕 어떠한 스킬조차 생성되지 않았었다.
  그저 비전총량이 늘어났을 뿐.
  그렇기에 경우에게는 갑작스레 나타난 천사가 그저 여타 괴물과 마찬가지로 달갑지 않은 존재일 뿐이었다.
  그나마 ‘적’으로 규정된 괴물과는 달리, ‘불청객’수준에 그쳤을 따름.
  경우는 여전히 활성화 된 혜안(慧眼)을 통해 사방을 ‘가로막듯’ 펼쳐져 있는 빛의 무리를 노려보았다.
 
  【감춰져 있던 정보를 간파합니다.】
  【이해할 수 없던 정보가 해석됩니다.】
  【보유한 총 비전량과 대상의 본질을 비교합니다.】
  【비전력의 격차가 미미합니다!】
  【해석 확률 13.06%!】
  【비전특성 ‘행운(fortune)’의 영향으로 인해 해석 확률이 100%로 보정됩니다.】
  【‘천사’를 해석했습니다!】
  【로엘리아: 하급천사(下級天使): 비전등급 S
  정보: ‘하늘’을 경계로 둔 저 세상 너머의 존재. 천리(天理)를 통해 강림했다. 하급천사(下級天使)는 태천사(太天使) 휘하의 아래 위계로서 능히 산을 부수며 바다를 가를 힘을 지니고 있다 전해진다.
  해석: 천사는 ‘계약’으로 인해 이쪽에서의 합당한 격을 지닌 존재가 하늘을 열 때에만 세상을 넘어올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전반적인 행동은 그들의 자유에 달려있기에, 만약 내키지 않을 시에는 강림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또한 하급천사는 가장 약한 존재로서, 한 판 떠도 승부를 가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특성: 피해무효, 불사
  교화(敎化) A
  치유의 빛 B
  쇄산(碎山): C
  분해(分海): C
  소환: 성광(星光)의 활 D
  소환: 천뢰(天雷)의 창 D
  소환: 신화(神火)의 검 D】
 
  “허허.”
  눈앞을 메우는 푸른 문장을 보고서, 경우는 헛웃음을 흘리고 말았다.
  “완전 지멋대로네.”
  그의 입에서 튀어나온 불쾌함은 모든 사람들이 들을 수 있을 정도로 선명했다.
  성스러운 존재에 대한 예우나, 격식 따위는 일절 존재치 않는 거친 말투.
  경우의 가시 돋친 목소리를 들은 아나스타시야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것만 같았다.
  ‘말조심 좀……!’
  아무것도 보지 못하고 천사에 대해 아는 것이라곤 하나도 없는 그녀라지만, 직감적으로 지금 이곳에 강림해 있는 존재가 절체절명의 위기에 놓인 인류의 구원 줄이 되리라는 건 쉽사리 짐작 할 수 있었다.
  그럴진대 이처럼 막 나가면 어쩌자는 것인가……!
  그 때를 맞추듯, 지금껏 조용하던 빛의 공간에서 혹 머릿속을 화살로 꿰뚫는 듯한 선명한 음성이 들려오기 시작했다.
  「인간의 자식이여……. 그대가 ‘하늘’을 연 자인가?」
  “나한테 하는 말인가? 뭐, 대답하자면 ‘그렇다.’”
  「어찌하여 하늘을 열게 되었는지는 모르나……. 본래라면 너무나 이른 시기. 그리고 준비되지 않은 상태일 터. 필히 천계의 힘을 빌려주더라도 능히 감당치 못하리라.」
  “흐음…….”
  「그럼에도 태천사께서는 인간의 위기를 두고 볼 수 없다 여겨 친히 내게 명하였노라. ‘인간의 몸을 빌려, 그들을 해하는 적을 물리치라’고.」
  경우는 묵묵히 천사의 이야기를 들었다. 경우의 침묵이 긍정이라 여긴 천사는 그를 향해 엄숙한 음성으로 고하였다.
  「따라서, 격에 맞는 자의 몸에 나를 강림하리라.」
  “누구 맘대로?”
  「뭣…….」
  “겨, 경우씨! 잠깐……!”
  그들의 이야기를 듣고 있던 아나스타시야는 난데없는 경우의 폭언에 기겁을 하며 소리쳤다.
  “분명히 말하는데, 싫다.”
  하지만 경우는 한 치의 주저함도 없이, 일언지하에 답했다.
  그러자 눈앞에 펼쳐진 빛은 일순 시간이 멈춰버린 듯 어떠한 말도 꺼내놓지 않았다. 오히려 빛의 점멸이 불안정히 밝기를 흔들 뿐이었다.
  그에 경우는 마치 빛의 한 곳을 노려보듯, 시선을 집중하며 그 곳을 향해 입을 열었다.
  “만일의 가정이다. 만약, 인류의 90%이상이 괴물에 의해 멸망당했다고 치자. 그 때, 너희 ‘천사’들은 인간의 세상에 강림 할 것인가?”
  대답은 없었다.
  경우는 계속해서 이야기했다.
  “다시 한 번 만일의 가정이다. 만약, 너희 ‘천사’가 인간의 세상에 강림하여 인간의 몸을 빌었을 때…… 그 ‘인간’은 더 이상 ‘인간’이라고 부를 수 있는가?”
  “겨, 경우씨……?”
  “마지막으로 묻겠다. ‘천사’는 ‘인간’의 ‘편’인가?”
  더 이상 빛의 공간 속에 소리라고는 들려오지 않았다.
  아나스타시야를 비롯한 여러 사람들의 침 삼키는 소리만이 간간이 들려올 뿐.
  경우는 입을 닫았고, 천사는 말을 하지 않았다.
  그리고 귓가를 울리는 초침 소리가 마침내 시계의 한 바퀴를 돌았다.
  아나스타시야가 정적을 참지 못하고 막 무어라 입을 열 찰나.
  ─경우의 눈앞에, 순백의 밝은 빛무리가 모여들었다.
 
  「너를 교화(敎化)하리라.」
  “……!”
  빛이, 폭발했다.
  창문을 비롯한 모든 유리제품이 깨져나가며 숨을 쉴 수 없을 정도의 압력이 사방으로 터져나갔다.
  그 속에서 외마디 소리와 함께 경우의 몸이 침상 뒤편의 벽으로 날아갔다.
  엄청난 반발 탓에 철근 콘크리트가 두부마냥 으깨지고 산산조각 나 사방으로 흩어진다.
  그럼에도 경우의 몸은 이어진 방 두 개의 벽을 부수고서야 그곳에 처박혀 간신히 멈춰 설 수 있었다.
  더 이상 하늘에서 내려온 빛은 사방을 밝히지 않았다.
  오직 경우만을 노리며, 둥글게 뭉쳐 하나의 빛 덩어리가 된 채 삽시간에 그의 눈앞에 도달했다.
  그리고 경우는 무언가에 목을 붙잡혀 천장 위 까지 끌어올려지고 말았다.
  그의 등이 벽에 쓸릴 때 마다 콘크리트 파편이 가루가 되어 바닥에 떨어져 내렸다.
  “크읍……!”
  「너의 두 눈과 귀를 덮은 마귀를 걷어 내리라.」
  “큭…… 하하, 내가 마귀에 씌었다고?”
  「불신으로 가득 찬 자에게 옳은 말은 들리지 않으리니.」
  “……우, 웃기지 마라. 네…… 네놈처럼 편협한 사고는 모든 가능성과 판단을 망치지.”
  경우는 자신을 뒤덮은 순백의 빛에 대항해 몸 전체로부터 비전력을 방출시켰다. 그러자 천사와 경우의 사이에 얇은 벽이 생성되었다.
  그러나 그것은 스킬이 아닌, 막무가내로 방출하는 비전력이었다.
  그 탓에 현기증이 날 만큼 한 순간에 기운이 빠져나간다.
  의지를 지니지 않은 비전력은 체외로 방출되는 순간 힘을 잃고 증발되어 버린다.
  한 순간의 방벽은 될지언정, 결국 아무 소용이 없게 되는 것이었다.
  그를 비웃듯 천사의 음성이 경우의 뇌리에 꽂혀들었다.
  「언제까지 버틸 수 있는지 궁금하군.」
  “글쎄……! 흐읍…… 언제까지일 것 같아?”
  「어떠한 연유로 격에 오른 자가 되었는지 모르겠으나, 이제 곧 너의 몸은 나의 신체(神體)가 되리라. 성인(聖人)으로서 괴물을 멸하고 인간을 구원 할 존재가 될 것이니, 감사하라.」
  “이거 완전…… 천사가 아니라 날강도네. 큭…… 천국보다는 감옥에…… 가야되는 거 아냐?”
  「무슨 말을 하든 소용없다. 그 말이, 네 마지막 말이 될 것이니.」
  천사의 빛이 점점 밝아진다. 지상에 강림한 빛이 모두 한 곳으로 모이는 만큼 천사의 힘이 강해지고 있었다.
  그에 반해 경우의 몸에서 방출되는 비전력은 눈에 띨 만큼 현격히 줄어들었다. 경우와 천사의 사이를 가로막던 벽이 조금씩 얇아지고, 그 농도 역시 더욱 옅어졌다.
  경우나 천사나 둘 모두 동일한 S급의 비전력을 지닌 존재.
  하지만 지금껏 빛으로 흩어져 있던 천사가 한 곳에 힘을 모으자, 전투 특성에 속하지 않는 경우로서는 감당 할 수가 없었다.
  비전력의 격차가 존재치 않는다면 결국 비전특성이 직접적인 상성을 정하게 되는 탓이었다.
  “크으…… 마지막 말이라…….”
  이윽고 경우의 몸에서 흘러나오던 비전력은 완전히 끊어지고 말았다.
  남은 것이라곤 종이 한 장 보다도 얇은 비전력의 푸른 기운 뿐.
  경우는 목을 조이는 틈 사이로 쉰 소리를 내뱉으며 간신히 한 움큼의 숨을 폐 속에 담을 수 있었다.
  “……좋아, 정했다.”
  그리 중얼거린 경우는, 문득 어금니를 드러낼 만큼 씨익 웃음 지으며 하나의 단어를 입에 담았다.
  “‘일호지천(一壺之天)’”
  “아빠아!”
  일순, 어마어마한 압력이 경우의 주변을 휩쓸었다.
  그것은 밀쳐내는 것이 아닌, 끌어당기는 것.
  「이, 이건……!?」
  삽시간에 빛이 흩어지며 경우의 몸에서 떨어져 나갔다.
  그 빛이 향하는 곳은 경우가 붙잡혀 있던 반대편 벽.
  그곳에서부터, 이곳에 이르기 까지 경우가 부수고 넘어온 벽의 파편 사이로 네 개의 큼지막한 여우 꼬리와 쫑긋 솟은 두 개의 귀가 나타났다.
  “잘 했다, 지천호.”
  지천호는 귀염직한 얼굴 위로 한층 고운 눈썹을 찌푸린 채, 어디서 난 것인지 모를 조그마한 호리병을 두 손에 움켜쥐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본 천사는 믿을 수 없단 양 높아진 음성을 내질렀다.
  「고, 고작 이 시기에…… S급이 둘이나 된다고……?!」
  “하하, 너 혹시 호리병 속의 세상이라고 들어봤나?”
  「이…… 이 정도 따위에……!」
  천사의 음성이 거칠게 늘어졌다. 하얀 빛은 강렬한 섬광을 밝히며 자리를 벗어나고자 발버둥 쳤으나,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더 호리병의 입구와 가까워 질 뿐이었다.
  경우는 그런 천사의 모습을 보며 콘크리트를 부수고 날아가느라 엉망이 된 옷을 가뿐히 찢어버렸다.
  그러자 드러난 경우의 몸엔, 단 하나의 상처도 남아있지 않았다.
  “기본 특성 초회복에 추가로 능력을 쓰려면 비전력이 더 빨리 소모되는군. 덕분에 좋은 정보를 얻었어.”
  「그 모습은…… 설마, 비전력이 바닥 난 게 아니었나?」
  “응. 이거 초회복이라는 특성, 비전력도 초회복 시켜주더라고. 굉장하지?”
  「이, 이 놈…… 잔머리를……!」
  천사의 빛이 눈이 부시도록 밝아졌다. 분노에 겨운 듯 점멸하는 주기가 짧아진다.
  경우는 그런 천사의 곁을 태연히 지나쳐 걸어갔다.
  천사의 곁을 지나가는 순간, 경우에게로 빛의 섬광이 뻗어나갔으나 잠깐이라도 빛의 덩어리에서 멀어지면 강력한 흡인력에 끌려 호리병 속으로 빨려 들어가 버릴 뿐이었다.
  경우는 분노하는 천사를 뒤로 한 채 무너진 벽의 잔해 위에 올라서 있는 지천호에게로 다가갔다.
  “아빠…… 안 아파?”
  곁으로 다가온 경우에게 지천호가 눈꼬리를 축 늘어뜨리며 물어보았다. 어느새 눈가엔 작은 눈물방울이 맺혀있었다.
  경우는 그런 지천호를 두 손으로 안아들고 눈가에 맺힌 눈물을 엄지손가락으로 닦아주었다.
  “……헤헤.”
  지천호는 경우의 모습에 안심한 듯 그의 품 안으로 파고들었다.
  경우는 지천호의 머리를 한 차례 쓰다듬고, 지천호가 쥐고 있던 호리병을 받아들었다.
  그 순간, 지금껏 천사를 끌어당기던 압력이 폭발적으로 증가했다.
  천사를 이루는 빛의 덩어리가 훅 하고 호리병 쪽으로 끌어당겨졌다.
  「어…… 어떻게 이런 비전량을 보유하고 있는 것이냐……!」
  천사로 부터 경악한 음성이 흘러나왔다.
  지금 경우가 하는 행동은 틀림없는 비전스킬이다.
  그리고 지속적인 흡인력은 그만큼의 추가 비전력을 계속해서 요구하는 것이었다.
  그럼에도 천사를 끌어들이는 힘은 더욱 강해지고 있었다.
  말 그대로, 비전력이 펑펑 솟아나지 않는 한, 절대로 S등급의 비전량이라고 할 수 없는 모습이었다.
  “귀찮네 이거. 그냥 진짜 한판 떠버릴까.”
  경우는 혀를 차며 중얼거리고는, 호리병에 주입되는 비전량을 열 배로 늘렸다.
  그만큼 비전력이 뭉텅 빠져나가고, 리바이어던의 심장이 그 빈 자리를 새로운 비전력으로 가득 채워 넣어버린다.
  소모되는 비전량이 조 단위 이하로 떨어지질 않았다.
  단일성 대량소모의 비전스킬이 아니라면─ 평생이라도, 유지할 수 있을 터였다.
  그리고 지천호가 만들어낸 호리병에 주입되는 요구 비전량은 리바이어던의 심장이 보충하는 비전력을 넘어서지 않았다.
  경우는 호리병에 주입되는 비전량을 스무 배로 늘렸다.
  「이, 이……! 믿을…… 수…… 없다……! 어찌 한낱 인간이 중급천사급의 비전량을……!」
  “믿을 수 없어? 네가 산 증인이 될 거야.”
  천사의 빛은 마치 폭죽이라도 된 마냥 사방을 향해 빛을 폭발시키고 있었다. 그러나 그 모든 빛의 줄기와 마디가 손가락 한 마디의 공간조차 벗어나지 못한 채 호리병의 속으로 빨려 들어가 버렸다.
  천사는 빛으로 존재한다. 그러니 빛의 속력으로 움직일 수 있건만, 지천호가 만들어낸 호리병은 그 빛마저 빨아들여 버리는 것이었다.
  애초에 개념이 다르다.
  ‘일호지천(一壺之天)’은 대상이 된 물체를 다른 장소로 옮기는 게 아닌, 그 대상이 존재하는 ‘세상’자체를 바꿔버리는 것.
  ‘작용’이 아니라 ‘적용’의 개념이었다.
  결국 지천호가 호리병을 만들어 낼 때 사용한 비전량을 월등히 넘어서는 비전력을 보유 한 것이 아닌 이상에야, 절대로 벗어날 수 없다.
  그리고 지천호는 천사 ‘로엘리아’와 동일한 S등급의 비전력을 보유한 존재.
  이미 결과는 정해져 있었다.
  “그리고 너, 인류를 구원하느니 뭐니 했는데.”
  경우는 코 앞 까지 끌려온 빛 덩어리를 향해 환한 미소를 지어보였다.
  “─난 세상을 구할 거거든.”
  그 표정은 너무나 밝았지만, 어째서인지 무거웠고, 입술로 부터 흘러나오는 목소리엔 한 치의 흔들림도 없는 ‘신념’이 서려있었다.
  그의 모습을 본 천사는 일순 움직임을 멎어버리고 말았다.
  경우는 빛의 점멸을 멈춘 천사의 모습을 바라보며, 호리병으로 주입되는 비전력의 양을 백배로 늘려버렸다.
  “그러니까 거기서 다른 세상 구경이나 하고 있어.”
  천사의 빛이, 호리병 속으로 사라졌다.
 정적이 감돈다.
  경우에게 거칠게 덤벼들던 천사는 그의 손에 들린 호리병 속으로 삼켜져 버렸다.
  건물은 이미 모든 사람들이 바깥으로 대피를 한 상태였고, 지금 한국의 디펜서 지사 내에는 경우와 그의 병실에 함께 있었던 몇몇의 사람들이 전부였다.
  만약 S급 비전능력자와 그에 준하는 괴물이 맞붙었을 경우엔, 건물은 고사하고 지역 자체가 초토화 되어버린다.
  이만큼의 피해로 끝난 것은 정말로 천만다행이었다.
  하지만, 그러한 사실을 지금의 사람들은 전혀 모르고 있었다.
  경우는 시선을 옮겨 조금 전 침상에 누워있었던 방을 바라보았다.
  가장 먼저, 방패를 들고 앞에 나서있는 아나스타시야가 보인다. ……하지만, 다른 사람들은 그것으로 충분한 듯 어떠한 대비태세도 갖추지 않은 모습이었다.
  그들은 그저 무너진 콘크리트의 잔해 위에 선 경우를 말없이, 조금은 겁에 질린 듯 바라보고 있었다.
  마치, 통제할 수 없는 우리 밖 맹수를 보는 듯한 표정으로.
  “후우.”
  경우는 손에 쥔 호리병의 마개를 눌러 닫고는 품 안에 웅크린 지천호를 안은 채, 무너진 잔해를 넘어 그들의 곁으로 다가왔다.
  그러자 아나스타시야를 제외한 모든 사람들이 움찔하며 뒷걸음질 친다.
  “……천붕(天崩).”
  짤막한 그의 음성에, 곧 하늘로부터 우렛소리와 같은 뇌성이 울려 퍼졌다.
  그것은 길지 않았으나 분명 모두의 귓가에 뚜렷이 울려 퍼지는 것이었다.
  그리고 뒤이어 ‘쿵’하며 무언가가 닫히는 듯한 소리가 들려왔다.
  “무슨…… 소리죠?”
  아나스타시야가 눈동자를 움직여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물었다.
  조금 전 부터 상상도 하지 못할 일들이 연이어 벌어지는 까닭에 그녀의 신경은 더 이상 예민할 수 없을 정도로 바짝 서 있었다.
  그러나 그녀의 물음엔 누구도 답하지 못했다.
  그녀를 비롯한 이들은 지금 무슨 일이 일어났고, 그것이 어떻게 끝났는지조차 모르는 상황이었다.
  아는 것이라곤 전무한 바.
  대답 할 수 있다면, 이미 이러한 일을 겪어 본 사람뿐일 터였다.
  ─그런 이들 중 한 사람이, 문득 발소리를 내며 걸음을 떼었다.
  잔뜩 긴장한 채 경우를 지켜보고 있던 사람들 중, 한 남자가 앞으로 나서며 경우와 마주 선 것이었다.
  “하늘을…… 닫았구려.”
  조금은 굳은 듯한, 그리고 경계가 서려있는, 그럼에도 놀라움이 뒤섞여 있는 참으로 형언하기 힘든 표정을 동시에 지니고 있는 남자.
  줄곧 아나스타시야로부터 ‘아저씨’라 불리던 그 남자가, 경우를 향해 거리낌 없는 걸음으로 다가왔다.
  그리고 그의 얼굴을 본 경우는 미세하지만 틀림없이 눈가에 인상을 찌푸렸다.
  “난…… 너를 안다.”
  “그거 참 우연이구려. 저도 당신을 ‘안다오.’ ……김경우 씨.”
  그의 화답을 들은 경우는 미간의 골을 더더욱 깊이 팰 수밖에 없었다.
  그의 ‘안다’는 말에는 그저 사람에 대한 정보를 안다는 것이 아닌, 한 대상의 존재에 대한 모든 의의를 헤아리고 있다는 의뭉스런 분위기가 서려있었다.
  예를 들면,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았던 경우의 ‘비밀’이라던가.
  혹은 ‘진실’같은 것.
  그런 심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경우의 앞에 선 남자는 태연스레 안경을 고쳐 쓰며 애매한 미소를 입가에 매달았다.
  경우는 신중한 눈빛으로 그를 바라봤다.
  그를 바라보고 있자니, 아직도 눈앞에 생생한 기억의 편린이 하나 둘 다시금 맞춰지는 것 같았다.
  점차 과거의 기억들이 눈앞의 현실에 겹쳐지기 시작한다.
  평소에도 그렇지만, 어떠한 사건이 터지더라도 결코 마이페이스를 무너뜨리지 않는 남자가 얼핏 머릿속에 떠오른다.
  그리고 전 생을 걸쳐 세계 각지의 비전능력자를 아우르고, 그들을 하나의 조직으로 뭉쳐 통솔권을 발휘했던 어떤 남자의 눈빛이 기억난다.
  더불어, 경우의 과거 마지막 순간에서 ‘서먼 선 프로젝트’의 완성을 이루는데 핵심적 역할을 했던 한 남자의 목소리가, 뇌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5차원 이상에 간섭을 하게 되면, 엔트로피의 법칙의 반대격인 역엔트로피 상수가 적용되오.’
 
  ‘만약 역엔트로피 상수를 임의로 컨트롤 할 수 있다면 어떠한 제약 없이도 시간 역행을 할 수가 있을 거요.’
  ‘사실상 시간 역행은 이론도 아닌, 가설로만 존재하는 기술이오.’
  그러한 말을 하는 와중에도 자신감에 가득 차 자신의 업적을 줄줄이 늘어놓았던 한 인물.
  이미 더 이상 회생 할 수 없는 지구를 그 자체로 뒤엎어버리기 위한 ‘자폭장치’의 개발에 가장 앞서 주장을 내세웠던 한 비전능력자.
  최후의 날, 자신의 손에 직접 그 손으로 ‘서먼 선’을 안겨주었던 한 연구원.
  경우는 마침내, 인상을 와락 일그러뜨리며 입가에 한 남자의 이름을 담았다.
  “……루사인.”
  “반갑구려. 드디어 만나 뵙게 되었소, 김경우 씨.”
  그는 과장된 몸짓으로 인사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한 마디를 더 덧붙이며 말했다.
  “96만 5천 21번 째 만나게 되어 영광이오.”
 
 
 # 진실
 
  “무슨…… 뜻이지?”
  경우는 저도 모르는 새 주먹을 꾸욱 움켜쥐며 물었다. 그러한 모습을 본 아나스타시야는 사색이 되면서도 급히 방패를 들어올려 ‘아저씨’의 앞을 가로막았다.
  “겨, 경우 씨…… 부탁이에요. 조금만 진정 해 주시면 안 될까요?”
  “비켜, 아나스타시야. ‘5인의 구원자’ 중 한 명을 내 손으로 죽이고 싶진 않아.”
  “호오, ‘5인의 구원자’도 알고 계시오? 이거, 본인이 예상했던 것과 한 치도 틀림이 없구려!”
  아나스타시야를 앞에 둔 루사인은 무엇이 즐거운지 한 손으로 이마를 짚으며 크게 웃음을 터트렸다.
  그런 그의 모습을 본 경우는 움켜쥐었던 주먹을 서서히 비틀었다.
  “겨, 경우 씨…….”
  그에 맞서듯 아나스타시야의 눈동자에 푸른 불길이 치솟는다. 그녀의 방패가 청화에 휩싸였다.
  그런 그녀를 앞에 두고서, 경우는 능글맞은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는 루사인을 향해 거칠어진 음성으로 말했다.
  “대답해! 루사인…… 너는, 도대체 무엇을 알고 있지? 그리고 어떻게 그것을 알게 된 거지?”
  “그에 대한 답은 이미 스스로도 알고 있지 않소? ‘시간 역행’이오. 그것 말고는 아무것도 설명이 되지 않잖소?”
  “내가 묻는 건, 어째서 네가 ‘시간 역행’에 대한 걸 알고 있냐는 말이다!”
  “워어, 진정하시오 진정. 좀 전 부터 이상한 걸 자꾸 묻고 있는데…… 당연한 일 아니겠소? ‘시간 역행’이라는 거, 본인이 완성시킨 것이니 말이오.”
  “……뭐?”
  루사인의 말을 들은 경우의 표정이, 돌처럼 딱딱해졌다.
  그것이 의미하는 말은 오직 하나의 결말로 밖에 귀결되지 않는 것이기에─
  “네놈은…… ‘시간 역행’을 하기 위해서, ‘지구를 자폭’시킨 것이냐……!”
  “뭐, ‘그렇소.’“
  순간, 경우의 모습이 아나스타시야의 눈앞에서 사라졌다.
  뒤이어 어마어마한 풍압이 일어나 그녀의 방패를 정면으로 몰아쳤다.
  마치 태풍의 모든 풍압을 방패라는 한 점에 집중 받고 있는 듯한 압력.
  그녀는 필사적으로 방패를 치켜들었다.
  뒤이어 콰드득! 거리는 소리와 함께, 그녀의 두 다리가 발을 딛고 선 콘크리트를 부수고 파고들었다.
  그 상태로, 수m를 다리가 콘크리트에 박힌 채 밀려나갔다.
  쿵!
  등 뒤에 벽이 닿는다.
  순간 숨이 턱 막혔다.
  “커헉……!”
  메마른 기침이 토해졌다.
  아나스타시야는 간신히 멎은 바람을 느끼며 몸 앞으로 치켜들었던 방패를 내려놓았다.
  그러자, 그곳엔 ‘경우의 주먹이 얼굴을 꿰뚫은 루사인’의 모습이 있었다.
  “꺄아아아아악! 아, 아, 아저씨!!”
  높은 비명이 방 안을 메아리쳤다.
  아나스타시야는 만신창이가 된 몸을 이끌고 힘겹게 벽에서 등을 떼었다.
  그리고 두 다리를 파고든 콘크리트 속에서 뽑아내어 쩔뚝거리며 그를 향해 다가갔다.
  “아, 아저씨……! 도, 도대체…… 어째서 이런……!”
  그녀의 얼굴이 핏기가 가셔 창백히 질렸다. 사파이어같이 아름다운 파란색 눈동자가 진정되지 않고 흔들렸다.
  경우는 본래 그녀가 서 있었던 자리에 선 채 아무 말 없이 그녀가 다가오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리고 천천히, 루사인의 머리에서 자신의 주먹을 빼내기 시작했다.
  “히익……!”
  그 너무나도 잔혹한 광경에, 아나스타시야는 흠칫 눈을 감고 말았다.
  “눈을 뜨고, 잘 봐라.”
  그녀의 귓가로 무정한 경우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당신은……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했는데……. 서로 대화 할 수 있는 사람이라고…… 믿었는데…….”
  아나스타시야의 후회와, 원망 가득한 목소리가 적막한 방 안에 울려 퍼졌다.
 “당신은……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했는데……. 서로 대화 할 수 있는 사람이라고…… 믿었는데…….”
  아나스타시야의 후회와, 원망 가득한 목소리가 적막한 방 안에 울려 퍼졌다.
  그 속엔 작은 눈물마저 섞여있었다.
  그리고 마침내 고개를 든 그녀는, 두려움 가득한 눈동자를 한 채 경우가 죽여 버린 루사인의 모습을 바라봤다.
  그 곳엔 ‘여전히 멀쩡한 모습으로 자리에 서 있는 루사인’의 모습이 있었다.
  “……어?”
  아나스타시야의 눈꺼풀이 깜박이고, 맺혀있던 작은 눈물방울이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
  경우는 루사인의 앞에 서서 그의 몸을 자신의 손으로 휘저었다.
  그러자, 손이 몸을 통과 해 버렸다.
  “……어어?”
  “……잔꾀를 쓰는군.”
  경우는 눈앞에서 능글능글 웃고 있는 루사인의 얼굴에 어퍼컷을 날렸다.
  그러자 다시 한 번 막대한 풍압이 몰아치며 건물의 천장을 분쇄시켜 버린다.
  하지만 루사인의 모습은 그 자리 그대로였다.
  “환영…… 인가?”
  “그렇소. 정식 스킬명칭은 ‘미러 이미지’라는 것이오.”
  “젠장, 어쩐지 내가 화를 내는데도 지천호가 가만히 있더라니.”
  경우의 품에 안겨있던 지천호는 그의 입에서 자신의 이름이 불리자 무슨 일이냐는 듯 고개를 들고 커다란 눈동자를 깜박거렸다.
  그리곤 경우의 앞에 서 있는 루사인을 보고는 흥미 없다는 듯 고개를 홱 돌려버렸다.
  그 모습을 보며 경우는 쓴 표정을 지었다.
  “혜안(慧眼)이 있어도 정신이 성숙하지 않으니 아무 쓸모가 없군.”
  경우가 차분히 마음을 가라앉히니, 곧 온전히 푸른 눈동자로 루사인의 ‘허상’을 보았다.
  그러자 이내 푸른 문장이 뚜렷한 필체로 그 앞에 나타났다.
 
  【미러 이미지(mirror image) Lv56: 스킬: 비전등급 C
  정보: 지정한 대상의 형상을 특정된 장소에 투영한다.
  해석: 해당 스킬은 레벨이 존재하며, 레벨의 변동에 의해 그 위력이 가변적입니다. 현재 스킬 대상자(루사인)와 사용자(젤리니아)가 다릅니다.
  특성: 마법(魔法)】
 
  “마법인가……?”
  “그렇소. 따라서 그대는 나를 찾을 수 없고, 그렇기에 해할 수 없다는 뜻이오. 설마 S급의 비전능력자일줄은 몰랐지만…… 그럼에도 결국 한계는 있는 법이지.”
  루사인은 양 팔을 들어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그 모습은 자신의 판단에 한 치의 의심도 없는 자신감을 가진 자 만이 보일 수 있는 여유가 서려있었다.
  그런 그에게, 경우는 손을 뻗어 멱살을 움켜잡듯 주먹을 쥐었다.
  하지만 경우의 주먹은 그대로 루사인의 몸을 통과 해 버렸다.
  “소용없다지 않소?”
  “너는 못 찾아도, 스킬을 사용 중인 놈은 찾을 수 있겠지.”
  “……무슨……?”
  “【탐색】”
  경우의 담담한 외침에, 한 순간 루사인의 몸이 경우의 비전력으로 푸르게 번쩍였다.
 
  【비전스킬로 등록되지 않은 능력입니다.】
  【비전특성에 적합하지 않은 비전 사용법입니다.】
  【부적합 판정!】
  【비전력의 추가 소요가 발생합니다.】
  【스킬 사용자의 위치를 탐색합니다. 탐색 확률 2%】
  【비전특성 ‘행운(fortune)’의 영향으로 인해 탐색 확률이 100%로 보정됩니다.】
  【탐색 성공!】
  【북위38도 서경77도: 미국 워싱턴】
  【비전력이 미치지 않는 범위이기에 더 이상의 세부 탐색은 불가능합니다.】
 
  경우는 이빨을 드러내며 씨익 웃었다.
  “미국 워싱턴이군.”
  “뭐, 무슨……?!”
  “조만간 직접 찾아 갈 테니, 기다리고 있어라.”
  경우는 양 손에 비전력을 모아 고스란히 방출시켰다.
  그러자 두 손이 곧 푸른빛으로 물들었다.
  이전, 천사의 침입을 막기 위해 사용했던 것과 같은 방법.
  그러나 이번엔, 그것을 있는 힘껏 양 손바닥으로 마주쳤다.
  ─파아앙!
  마치, 풍선이 터지는 듯한 소리와 함께 비전력이 사방으로 터져나갔다.
  그리고 그 여파로 【미러 이미지】가 산산조각 나 흩어져버린다.
  경우는 사방으로 조각나는 비전스킬의 잔재를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마법은…… 지독하게 당해봤다고.”
  그의 말이 끝남과 함께 미러 이미지를 구현하던 비전력의 잔재는 완전히 사라져버렸다.
  경우는 그것을 잠시 바라보다가 이내 고개를 돌려 여전히 멍한 눈을 하고 있는 아나스타시야를 향해 시선을 옮겼다.
  그녀는 마치 무언가로 머리를 두드려 맞은 것 같이 넋을 잃은 듯한 표정이었다.
  경우는 그녀에게 다가가 어깨를 잡아 살짝 흔들었다.
  “어이, 아나스타시야. 정신 차려.”
  “방금…… 그건……?”
  “마법이라는 특성의 비전스킬이다. 아마도 그 놈은 어딘가의 지하벙커 같은 곳에서 안전하게 숨어있겠지.”
  그녀는 경우의 말을 듣고선 떨리는 고개를 들어 흔들리는 눈동자로 경우의 눈동자를 바라봤다.
  “경우씨는…… 그 사실을, 알고 있었나요? 아저씨가…… 여기에 안 계시다는 걸……?”
  “짐작은 했다. 만약 진짜였다면 애초에 지천호가 먼저 날뛰었을 테니까. 그러지 않은 시점에서, 혹시나 가짜가 아닌가 하고─”
  짜악─!
  순간, 메마른 소리가 방 안을 날카롭게 울렸다.
  “……!”
  가장 먼저 반응 한 것은, 지천호.
  두 귀가 쫑긋 세워지고 큼직한 눈동자에 살기가 어린다.
  하지만 경우는 한 손으로 지천호의 머리를 토닥이며 당장이라도 뇌전을 뿜으려는 걸 진정시켰다.
  그의 앞엔, 경우의 뺨에 있는 힘껏 손바닥을 날린 아나스타시야가 두 눈동자에 눈물을 가득 담은 채 어깨를 떨며 서 있었다.
  “당신…… 최악이야…….”
  그녀는 경우에게 등을 돌리며 방을 뛰쳐나갔다.
  방패가 들리지 않은 오른팔로 훔치는 눈가로 부터 눈물방울이 허공에 흩뿌려졌다.
  경우는 어떠한 통증도, 충격조차 없는 뺨을 한 손으로 문지르며 그녀의 뒷모습을 말없이 바라봤다.
  그녀와 경우는 비전등급의 격차가 세 단계가 넘는다.
  필살의 공격이라도 지금의 경우에겐 멍 자국 하나 낼 수 없으리라.
  그럼에도…… 어쩐지, 뺨이 아픈 것 같았다.
  “저기, 쫓아가 보는 것이…….”
  그런 경우를 지켜보고 있던 방 안의 사람들 중 한 명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하지만 경우의 날카로운 눈빛을 받고는 곧장 시선을 피하며 휘파람을 불었다.
  「♬♩♩♪♬♪♩♪~」
  그 때, 전화벨이 울렸다.
  본래 경우의 휴대폰은 경우가 잠들어 있는 동안 누군가가 충전기에 꽂아 둔 상태였지만, 지금은 여러 사건과 폭발들로 인해 바닥을 나뒹굴고 있었다.
  경우는 두어 걸음 떨어진 곳으로 걸어가서 구식 벨소리를 울리는 휴대폰을 집어 들었다.
  뒤집어져 있던 것을 돌려보니, 액정 화면에는 외국 전화번호가 떠 있었다.
  “……전화 받았습니다.”
  잠깐 고민했지만 결국 경우는 통화 버튼을 눌렀다.
  그러자 귓가에 조금 전 까지 들었던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온다.
  「하하, 설마 마법을 캔슬시켜 버릴 줄은 몰랐소.」
  “무슨 할 말이 더 남았지?”
  「할 말이야 많소만, 그대가 마법을 캔슬시켜 버린 탓에 이렇게 전화로나마 이야기를 하는 것이오. 뭐, 피차 시간이 없을 테니 우선은 가장 중요한 걸 말하리다.」
  전화기 너머론 언뜻 굳은 듯한 루사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대는 천사와 척을 진 것이오. 그것도 인간 전체를 대표해서 말이지.」
  “천사는 믿을 것이 못 된다. 성경에 나오는 그런 신의 사자가 아닌 것은 알 거라고 생각했는데.”
  「물론 잘 아오. 그 천사와 이 천사는 애초에 다른 세계의 존재이니 말이오. 허나, 그럼에도 천사는 반드시 인간과 손을 잡아야만 하는 대상이었소.」
  전화기 너머로의 잠깐의 침묵─ 그리고, 루사인의 말이 들려온다.
  「김경우 씨, 당신은 당신의 그 행동으로 인해 5인의 구원자 중 제이(第二)의 구원자를 잃었소.」
  “……무슨 뜻이지?”
  「인류에게 남은 20년의 시간 중, 최후의 5년의 시간을 벌게 만들어 준 광휘(光輝)의 존재. 그는, 천사가 강림한 능력자였소.」
  루사인은 다시금 입을 다물더니 생각을 정리한 듯 곧이어 말을 이어나갔다.
  「지금까지…… 본인이 ‘서먼 선 프로젝트’를 통해 과거로 돌아 온 횟수는 총 534만 776번이오. 김경우 씨, 당신은 그 중에서 고작 96만 5천 20번만을 인류의 마지막 순간까지 살아남았을 뿐인 사람이오.」
  “그 말은…….”
  「시간 역행은 항상 동일하오. 이 지구를 연료로 삼아 별 전체를 자폭시키는 거대한 힘을 사용하더라도, 과거로 돌아갈 수 있는 최대 기간은 20년. 그 속에서 전송 가능한 데이터는, 채 1mb도 미치지 못하는 조그마한 양에 불과하오. 몇 번을 반복하더라도, 아무리 기술력을 쥐어짜내도 더 이상은 늘어나지 않았던 것이지.」
  전화기 너머로 흥분 한 듯 거칠어지는 루사인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그 아주 티끌 같은 데이터의 파편에, 본인은 평생의 모든 경험을 저장시켜서 과거로 보내는 것이오. 그것이 인류가 살아남기 위해 수천, 수백만 번을 반복한 ‘서먼 선 프로젝트’의 진정한 목적이오.」
  경우는 그의 입을 통해 밝혀지는 진실에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그것을 마냥 듣기만 할 뿐이었다.
  「본인의 비전특성이 뭔지 아시오? ‘기억(memory)’이외다. 본인은, 1억 681만 5520년─9357억 395만 5200시간의 기억을, 단 하나도 잊지 않고 기억하고 있소이다.」
  “그렇다는 건…….”
  「인류는 단 한 번도 20년 차에 ‘레비아탄’이 등장하는 걸 막지 못했소. 그 놈이 지구를 먹어치우기 전에 자폭시키는 것이 유일한 방법이었고─ 그리고, 그것을 위해 20년이라는 시간을 벌 수 있는 열쇠가 바로 ‘5인의 구원자’였소.」
  경우의 귓가로 들려오는 루사인의 목소리엔 어느덧 비난만이 실려 있을 따름이었다.
  「그 모든 시간 속에서, 이처럼 ‘레비아탄의 공략법’이 무너진 것은 처음이오. 당신이라는 존재가 이 시기에 본인의 앞에 나타나게 된 것도 처음이며, 5인의 구원자가 탄생하기도 전에 사라져 버린 것도 처음이오. 본인은 모든 시간과 가능성을 계산하여 지금까지 ‘엔딩’을 향해 나아가고 있었건만, 당신이 모든 걸 망쳐버린 것이오.」
  그는 뒤이어 말했다.
  「그대가 어떤 행운 덕분에 과거의 기억을 갖고, 또 지금에 이르게 되었는지 본인은 알지 못하오. 그러나 본인은 ‘행운’따위, 믿지 않소이다.」
  “…….”
  「그리고 조금 전…… 그대는 마치, 겁에 질린 것 같았소. 본인이 ‘지구를 자폭시켰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그대는 틀림없이 ‘공포’에 질려 있었소이다. 알 수 없는 일이구려.」
  루사인은 경우와의 전화를 끊으며, 하나의 ‘진실’을 얘기했다.
  「다음 번 포탈까지 일주일이 채 남지 않았구려. 이번 포탈을 막아내지 못한다면 인류는 그 즉시 멸망이오. 김경우 씨, 기억하시길 바라오. 다음 번 ‘시간 역행’은 이제 없소이다.」
 
 “……젠장.”
  경우는 무겁게 가라앉은 눈으로 전화가 끊어진 휴대폰을 내려다봤다.
  검게 변한 액정이 마치 죽어버린 미래의 모습처럼 겹쳐 보인다.
  희망이 보이지 않았다.
  그의 가슴으로, 지독한 절망감이 밀려들었다.
  ‘정신 차려라.’
  나약해지려는 정신을 100조에 이르는 비전력이 억지로 떠밀며 맑게 유지한다.
  그럼에도, 경우의 어깨는 쉽사리 펴 지지 않았다.
  정신이 맑은 것과, 맑은 생각을 하는 건 다른 것이었다.
  마치 구멍이라도 뚫린 것처럼 몸에서 힘이 빠져나가고 있었다.
  분명 그 홀로 산을 부술 수 있는 힘을 가졌을진대, 온 몸이 무기력하기만 하다.
  모든 걸 포기하고, 손에서 놓아버리고만 싶었다.
  눈앞이 핑 돌았다.
  ‘나는…… 이제 어떡해야…….’
  지금껏 견뎌왔던 걱정과 근심, 그리고 공포. 그 모든 것이 한꺼번에 밀려들었다.
  감당 할 수 없는 책임이, 그의 행동으로 죽어버리게 될 수십억명의 목숨으로 변해 경우의 두 어깨를 무겁게 짓눌렀다.
  도저히…… 견딜 수 없었다.
  일순 경우의 무릎이 휘청거려, 쓰러질 것만 같이 되어버렸다.
  경우의 손에서 휴대전화가 떨어져 바닥과 세게 부딪쳤다.
  귀퉁이가 부서지고 파편이 튀어오른다.
  그와 마찬가지로, 경우의 정신 한 구석이 금이 가 깨어지고 있었다.─
  ─그때, 경우의 품에서 자그마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빠, 힘들어? 괜찮아, 내가 있잖아.”
  경우의 품에 안겨있던 지천호가, 물끄러미 고개를 든 채 경우의 눈을 바라보고 있었다.
  “내가 지켜 줄 거야. 아무 걱정 하지 마.”
  “……지천호…….”
  “나, 안아줘. 응?”
  지천호는 더더욱 경우의 품에 파고들며 새하얀 얼굴을 그의 가슴에 문질렀다.
  경우는 그 온기에, 그 무게감에 지천호를 끌어안은 팔에 힘을 줄 수밖에 없었다.
  지천호의 꼬리 네 개가 부드럽게 살랑거렸다.
  “……하하, 내 꼴이 이게 뭐냐.”
  경우는 굽었던 등을 바르게 세워다. 위태롭게 꺾일 것 같던 무릎에 힘이 들어갔다.
  그리고 두 눈동자에 담담한 빛이 어린다.
  경우는 자신의 뺨을 주먹으로 힘껏 때렸다.
  쾅!
  두꺼운 철근이 부러질 때나 나는 굉음이 터져 나온다.
  그 소음에 경우를 지켜보던 사람들이 흠칫 놀라며 걸음을 물렀다.
  그런 이들의 앞에서, 경우는 벌겋게 부은 볼을 드러낸 채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아프네. 진짜, 오랜만에 아프다.”
  그리고, 찔끔 흘러나온 눈물을 손등으로 닦아내며 중얼거렸다.
  “이런 고통…… 나만 겪어야지. 안 그래?”
  경우는 안고 있던 지천호를 바닥에 내려놓으며 말했다.
  “가방 좀 가져와줄래?”
  “응!”
  지천호는 쪼르르 달려가 이내 큼지막한 등산 배낭을 짊어지고 돌아왔다.
  그것을 경우의 앞에 내려놓자, 경우는 가방을 열고 그 속에 손을 쑥 집어넣어 무언가를 끄집어냈다.
  경우가 하는 양을 지켜보고 있던 사람들이 눈을 커다랗게 떴다.
  “게틀링건……?”
  그들 중 한 사람이 경우가 꺼내든 것을 보며 말했다.
  틀림없이 경우가 가방에서 꺼내 든 것은, 그의 몸집보다도 큰 중화기였다.
  일전, 던전에 있었을 당시 중화기로 무장을 한 그리즐리 베어가 가지고 있던 것이었다.
  경우는 그것을 앞에 두고서 그 위에 한 손을 가볍게 얹었다.
  사람들은 경우의 행동을 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도대체 무엇을 하려는 것인지 짐작조차 되지 않는 모습이었다.
  “기관총 보다는 저 가방이 더 굉장한데…….”
  그들 중 한 명이 중얼거렸다.
  기관총이야 한국 디펜서 지사에도 수백정이 보관되어있다. 그런 것 보다야, 저런 거대한 물건을 용량 제한 없이 집어넣을 수 있는 등산 배낭에 더욱 관심이 가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하지만 경우는 그저 눈앞에 둔 게틀링건을 향해 담담한 어조로 말을 할 뿐이었다.
  “강화.”
  순식간에 빛이 번쩍인다.
  그제서야 사람들은 경우가 무엇을 하려는지 이해하곤, 보이지 않는 실소를 머금었다.
  “강화능력자셨군요. 하지만 강화능력자는 저희 지사에도 몇 명 있으니, 굳이 무기를 강화하실 필요는…….”
  “강화.”
  경우의 외침에, 다시 한 번 빛이 번쩍였다.
  “저어…….”
  “강화.”
  빛의 점멸.
  그리고, 경우는 쉬지 않고 입을 떼었다.
  “강화.”
  순간, 오로라와 같은 오색 빛이 그들의 눈을 비추었다.
  4단계 강화부터는 그 물건이 더 이상 물리법칙에 얽매이지 않는 존재가 되는 단계. 따라서, 그 빛의 밝기마저 아름다움을 더한다.
  오색찬란한 빛은 4단계 강화의 성공을 알리는 증표였다.
  그것을 알기에, 그를 지켜보던 사람들은 흥미로운 표정을 지었다.
  한국 디펜서 지사에 강화능력자가 있다고는 하나, 실패확률이 워낙 높은 탓에 3단계 강화가 된 무기조차 몇 되지 않았다.
  게다가 4단계 강화가 된 무기는 하나도 존재하지 않는 상태.
  하지만 이어지는 경우의 행동에 사람들은 흠칫 몸을 떨 수밖에 없었다.
  “강화.”
  “자, 잠깐……! 실패하면 강화단계가……!”
  그들의 주변으로, 빛의 눈송이가 찬란히 펼쳐졌다.
  그 속에서 경우는 태연한 얼굴로 다시금 입을 열었다.
  “강화.”
  그러자 형언키 힘든 빛의 산란이 그들의 눈앞을 드리웠다.
  그저 보고만 있음에도 가슴이 뛰며, 절로 미소가 지어진다.
  마치 천상의 세상에 펼쳐진 빛이 이러할까─
  “강화.”
  “허, 헉……! 그, 그만……!”
  그런 사람들의 귓가로, 경우의 목소리가 파고들었다.
  지금까지 최고의 강화단계는 4단계였다.
  디펜서 본사의 강화능력자들이 단 하루도 쉬지 않고 강화를 하여 간신히 만들어낸 한 자루의 검.
  그것만으로도 그 검을 사용하는 비전능력자는 괴물들을 상대로 압도적인 무위를 떨치고 있었다.
  그런데 지금 눈앞에 탄생한 것은 그것을 두 단계나 뛰어넘은 무려 6단계 강화가 된 ‘게틀링건’이었다.
  마냥 휘두르는 칼도 아니고, 중화기에 속하는 파괴적인 현대무기임을 감안하면 이것 하나만으로도 1개 ‘필드’에 존재하는 모든 괴물들을 격멸할 수 있을 터였다.
  그런데 그것을 더 강화한다면─ 반드시 실패한다!
  “이 정도로도 충분합니다! 욕심을 부리시면……!”
  “더 좋은 게 나오겠지.”
  경우는 빛의 입자가 내려앉는 세상 속에서, 지금껏 대고 있던 손을 뗀 채 게틀링건을 가리키며 말했다.
  “이것처럼.”
  경우의 말은 분명히 하나의 결과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그의 말을 들은 사람들은 두 눈을 커다랗게 뜬 채 소리 없는 경악을 내질렀다.
  “서, 서, 설마…… 성공…… 한 겁니까……?”
  “너희들도 비전능력자라면 대상의 정보 정도는 알아볼 수 있을 텐데?”
  경우의 말에, 사람들은 앞을 다투듯 눈동자에 푸른 불길을 피워 올렸다.
  그리고, 곧 찢어져라 눈을 치켜떴다.
 “공격등급…… A급……!”
  누군가가 소리쳤다.
  “그 뿐만이 아닙니다! 사출되는 탄알에 10%의 유도특성을 부여, 추가로 물리속성을 무시하는 ‘비전탄환’을 쿨타임 1분으로 5만 발 발사 가능합니다!”
  그들 중, 네모난 뿔테 안경을 낀 남자였다. 그는 한 걸음 앞으로 나서며 수첩을 꺼내들어 무언가를 적어 내려갔다.
  “게다가 비파괴성, 내구도 회복…… 경량화에, 기본 탄속 12800%상승……. 이, 이건 도대체……!?”
  그가 수첩에 적어 내리던 볼펜의 움직임을 멎고 경우를 쳐다봤다.
  “하지만…… 장전 탄알의 추가조건…… ‘강화 4단계 이상’……?”
  “제한조건까지 읽을 수 있나?”
  “그, 그렇습니다. ‘감별’특성은 봉인되지 않은 물건이라면 A등급 이하 모든 항목을 살필 수 있는지라……. 아, 아니, 중요한건 이게 아니지 않습니까!”
  그의 손가락이 경우와 그들의 사이에 놓인, ‘7단계 강화가 성공한 게틀링건’을 향해 매섭게 노려졌다.
  “‘이것’…… 저희들이 사용 할 수 없는 것이지 않습니까!”
  “어째 서지?”
  “제한조건이 너무 큽니다! 총을 사용하려면 탄알이 있어야 하는데, 그 탄알 한 개당 강화조건이 ‘4단계’라구요……!”
  억울하다는 듯한 남자의 외침에 경우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 반문했다.
  “그런가? 흐음…… 하지만 ‘비전탄환’은 따로 탄알이 필요한 게 아니라 자체생성일 텐데?”
  “그, 그건…… 분당 5만 발 발사가 가능하지만, 그것만으로 괴물들을 전부 상대하기엔 턱없이 부족합니다! 생존성 보장도 문제거니와, 지속적 억제력과 집단살상력이라는 이점이 사라지는 겁니다!”
  “호오…….”
  경우는 눈빛을 바꾸며 자신의 앞에 선 남자를 바라보았다. 그런 경우에게, 남자는 떨리는 눈빛이지만 분명히 고개를 들고 마주 바라보았다.
  그는 디펜서라는 단체에 있으면서 괴물에 대한 두려움을 똑똑히 알고 있는 사람이었다.
  높은 곳에 있을수록, 더 많은 것이 보인다.
  그리고 그것을 떠안아야 하는 책임 역시도 무거워진다.
  그는, 경우와 루사인의 대화 속에서 조만간 거대한 절망이 찾아오리라는 걸 짐작할 수 있었다.
  아마도 그 모든 걸 해결하는 중심은 각 국가의 디펜서 지사…… 한국이라면, 바로 이곳이 된다.
  하지만 본사에 있는 루사인마저도 인류의 멸망을 예고했다. 고작 지사의 힘으로는, 절대로 감당 할 수 없다.
  이런 상황에서, 굳이 경우라는 자가 직접 강화하는 과정까지 보여주며 이러한 무기를 자신들에게 내놓는 이유가 무엇인가?
  ‘우리에게…… 바라는 것이 있다!’
  쉽게 짐작할 수 있었다.
  인류의 멸망을 눈앞에 두고서 자신의 이득을 위해 밀고 당기기를 하는 것이 참으로 가증스럽다.
  그러나 우선권은 저 쪽에 있었다.
  눈앞의 게틀링건으로 할 수 있는 일들이 머릿속에 펼쳐진다. 그것은 분명, 서울을 비롯한 경기도 지역만이라도 완전방어가 가능한 ‘디펜스 시스템’이었다.
  바로 조금 전 까지만 해도 상상조차 하지 못했던 것이지만, 지금은 ‘가능성’이 보인다.
  하지만 그 가능성을 현실로 끄집어내기 위해서는 눈앞의 남자와의 거래가 필수적이었다.
  그는 무심한 듯 바라보는 경우를 향해, 불쾌하면서도 확신을 담은 목소리로 물었다.
  “……원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그의 물음에, 경우는 지천호가 가져다놓은 등산 배낭의 위에 걸터앉고는 그 속에 손을 집어넣어 큼직한 상자를 꺼내들었다.
  네모난 철제 상자.
  그것을 손에 쥔 채 경우는 웃으며 말했다.
  “─강화.”
  총, 네 번의 빛이 사람들의 시야를 비추었다. 그리고 경우가 철제 상자의 덮개를 열어 뒤집자, 서로서로가 연결된 링크탄이 촤르륵 쏟아져 내렸다.
  많은 양은 아니지만, 이것으로 분명히 입증되었다.
  경우는 ‘원하는 만큼의 강화된 탄알을 얼마든지 만들어 줄 수 있다.’
  “원하는 건 내가 아닐 텐데.”
  “크으……!”
  남자의 인상이 와락 구겨졌다. 어느 정도라면 적당히 거래를 해 볼 텐데, 이건 완전히 물 길어 파는 장사가 아닌가.
  ‘내가 강화특성이었다면……!’
  그의 속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경우는 손을 털며 자리에서 일어서 그의 앞으로 다가갔다.
  상당히 긴장 한 듯 주춤 뒤로 물러서는 남자에게 경우가 말했다.
  “이름은?”
  “뭐, 뭡니까?”
  “이름을 알아야 앞으로 거래를 할 것 아닌가?”
  “아…….”
  경우의 말에 남자는 들릴 듯 말 듯한 한숨을 내쉬곤 이내 굳어있던 입술을 열었다.
  “……재호입니다.”
  “흠, 반갑습니다 재호씨.”
  문득, 경우는 존칭을 하며 재호에게 손을 내밀었다.
  오히려 재호가 당황하며 그의 손을 맞잡았다.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이야기를 제대로 안 들어 줄 거라고 생각해서 말입니다.”
  “……하, 하아.”
  “……20년 동안 하도 많이 당해봐서 잘 압니다.”
  경우는 재호에게 영문 모를 말을 던지면서도, 눈빛만은 한 순간 싸늘하게 가라앉혔다.
  그 눈빛에 재호는 움찔하며 맞잡았던 손을 거둬들였다.
  “감별 특성이니만큼 제 조건에 맞는 수준을 잘 제시하시리라 믿습니다.”
  “무, 무엇입니까?”
  재호는 침을 꿀꺽 삼키며 물었다.
  조금 전 까지만 해도 어떻게든 눌러보겠다고 생각했던 마음이 잘게 부서진 얼음조각마냥 한 순간 날아가 버렸다.
  그런 재호의 모습을 보며, 경우는 두 가지 조건을 꺼내들었다.
  “하나. 탄알과 같이 소모성 물건을 강화할 때에는 무게로 계산합니다. 해당 물건의 총 무게에 해당하는 만큼의 ‘온전한 괴물의 시체’를 받겠습니다.”
  “괴물의…… 시체 말입니까……?”
  “불가능합니까?”
  “아, 아닙니다. 지금 괴물의 시체는 모두 밀폐 처리하여 보관중이니…… 마침 본사에 보내기 전이라서 상당히 남아있습니다.”
  “좋습니다. 그러면 다음 조건입니다.”
  경우는 열심히 수첩에 펜을 놀리고 있는 재호를 향해 두 번째 조건을 얘기했다.
  “어떤 무기든지, 7단계 강화를 한 개수만큼 동일한 수의 ‘F등급 비전의 크리스탈’을 받겠습니다.”
  경우의 말을 들은 재호의 손에서 볼펜이 떨어져 내렸다.
 
  “이 조건을 들어줘야 하는 겁니까?”
  한국 디펜서 지사의 회의실에서 한 남성이 목소리를 높였다. 그의 말에 여러 사람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애초에 저 사람도 한국 사람이지 않습니까? 우리나라가 위기에 놓였는데, 이렇게 조건을 들고 거래를 하려고 하다니요! 그 인간은 한국인도 아니란 겁니까?!”
  “게다가 시체를 가져가려고 하는 것도 이상하지……. 본사에서도 비전력을 함유한 무기나 방어구를 만드는 데에 사용될 뿐인데, 그걸 가져가서 자기가 무기를 만들겠다는 건지 뭔지 원…….”
  “무엇보다 비전의 크리스탈이라니요? 그건 절대로 넘겨줄 수 없는 겁니다! 잘 아시지 않습니까? 그게 얼마나 굉장한 물건인지! 한낱 개개인의 손에 함부로 들어가서는 안 되는 겁니다! 이미 법원에도 제제 조항의 요구를 제출 한 상태입니다! 국가적으로 관리해야 하는 물건이란 말입니다!”
  한두 명의 목소리가 거칠어지자 점점 사람들의 목소리가 올라가기 시작했다.
  회의실에 모인 사람들 중 고위 직책이 아닌 사람이 없었다.
  그러니만큼 여러 가지 의견을 내세우며 자신의 주장에 대한 정당성을 피력했다.
  각자 맡은 분야가 다른 까닭에 저마다 내뱉는 말들은 제각각의 의견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한 가지, 일치하는 주장이라면 ‘김경우의 조건을 들어줄 수 없다’는 것.
  그들의 모습을 지켜보던 재호는 골치 아픈 듯 머리를 벅벅 긁어댔다.
  ‘고작 비전력 100을 증가시켜주는 물건이 무엇이 그리 대단하다고!’
  재호는 비전의 크리스탈이 갖는 상대적 가치 때문에 경우의 조건을 들어줄 수 없을 것 같다고 말했었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비전의 크리스탈이 갖는 절대적 가치는 7단계에 이르는 무기에 견줄 바가 아니었다.
  비전의 크리스탈 백 개가 모여 1만의 비전력을 증가시켜준들, 7단계 강화된 게틀링건의 ‘비전탄환’ 1초 분량이면 몸 자체가 남아나지 않게 된다.
  그런 무기를 백 개도, 열 개도 아닌 단 한 개의 비전의 크리스탈과 맞바꿀 수 있는 것이다.
  게다가 모든 비전의 크리스탈을 요구 한 것도 아니었다.
  그저 1:1 교환의 형식.
  필요한 만큼만 강화를 부탁하고, 그 개수만큼 크리스탈을 주면 되는 것이다.
  이미 한국 디펜서 지사에는 전국에 발생한 포탈을 파괴하면서 획득한 비전의 크리스털이 천 개는 넘는다.
  그중 몇 백 개만 줘도 될 텐데, 그게 그리 아쉬운가?
  심지어 소모성 물건은 비전의 크리스탈로 계산하는 것도 아닌, 괴물의 시체로 퉁 쳐준다고 하지 않는가!
  괴물의 시체 하나의 무게로 따지면 오천에서 만 발의 탄알을 4단계로 강화시켜서 얻어 낼 수가 있다.
  괴물의 시체는 넘쳐나서 썩어갈 지경이다.
  그런데 그것이 뭐가 아깝다고……!
  ‘만약 탄알이 아니라 포탄, 혹은 미사일을 강화시킨다면…….’
  “……제 말이 그겁니다! 강화 특성이라니, 전투 특성도 아닌 자가 전장의 무서움에 대해 무엇을 알겠습니까? 이참에 한 몫 잡아보려는 쓰레기에 불과합니다!”
  “크으…….”
  재호는 시끄러운 회의장의 소란 탓에 생각이 자꾸 끊겨 속이 부글부글 끓었다.
  지금 회의장의 분위기는 완전히 경우를 체포하고 한국 디펜서 지사에서 무기 강화만을 시켜야 한다는 결과로 맺어지는 상황이었다.
  잠깐 딴 생각을 하는 사이에 이 지경까지 와 버렸다.
  도무지 그 과정이 상상조차 되지 않았다.
  “다들─”
  참지 못한 재호가 막 손을 들어 올리며 입을 열 찰나.
  회의장의 문이 거칠게 열리며 커다란 고함소리가 울려 퍼졌다.
  “─지금 뭐 하고 있는 겁니까!”
  유달리 높은 목소리.
  그리고, 틀림없는 ‘러시아어’.
  “……아, 아나스타시야.”
  그곳에는, 눈가에 붉은 기가 남아있는 아나스타시야가 험악한 표정을 한 채 서 있었다.
  “최초, 디펜서 지사 설립 시 명시되어 있는 항목일겁니다. 각 국에서 획득한 비전의 크리스탈은, 각 국에서 보관하나 소유권은 본사에서 가진다.─”
  그녀의 목소리에 불 같이 뜨겁던 회의장이 시베리아 벌판에 놓인 것 마냥 싸늘히 얼어붙었다.
  아나스타시야는 회의장에 엉거주춤 서 있는 모든 사람들의 얼굴을 하나하나 바라보곤 멎어있던 입을 열었다.
  “만약, 지금 이 순간 비전의 크리스탈을 개인적으로 보유하고 있는 ‘디펜서 관계자’들은…… 디펜서 본사에서 제공했던 모든 것을 압수하고, 배제합니다.”
  그녀는 막 손을 든 채 무언가를 말하려고 하던 모습의 재호를 발견하곤, 그를 향해 말했다.
  “비전의 크리스탈을 보관중인 곳으로 안내하세요.”
  “아, 예. 알겠습니다. 이 건은 공식 절차로 기록하면 되겠습니까?”
  “예기치 못한 사건으로 인한 루사인님의 부재로, 제가 대리 역할을 맡아 수행합니다.”
  “그렇게 알겠습니다.”
  재호는 차갑게 뒤돌아 가는 아나스타시야의 뒤를 쫒아 허겁지겁 회의실을 가로질렀다.
  이미 회의장은 사색이 된 사람들로 인해 적막이 내려앉은 상황.
  문득 재호는 그들 사이를 지나가며 조용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누군가’로 인해 ‘분실’된 비전의 크리스탈은…… 저희로써도 어쩔 수 없는 거 아니겠습니까?”
  뒤이어, 회의실의 문이 굳게 닫혔다.
  “흐음…….”
  경우는 재호가 떠나고 난 뒤, 지천호를 안은 채 한국 디펜서 지사의 내부를 돌아다니고 있었다.
  아무 말 없이 움직인다 하더라도 건물 안이라면 충분히 위치를 찾을 수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렇다면 굳이 가만히 있을 필요는 없었다.
  ‘루사인, 너는 무슨 준비를 하고 있는가.’
  경우는 디펜서라는 단체에서 괴물들에게 대항하기 위해 어떠한 준비를 한 상태인지 무척이나 궁금했다.
  애초에 이 시설 자체가 ‘인류의 멸망’을 예고한 인간이 만들어낸 것이다.
  그렇다면 지금, 자신으로 인해 수많은 변수가 발생하고 미래가 바뀌어 버린 이 상황에서…… 루사인은, 무엇을 준비하고 있을까?
  ‘지금 시기라면 본래 E등급 정도의 괴물이 조금씩 등장 할 텐데…… 무기를 만든다고 한다면, D등급은 필요할 터.’
  경우의 걸음이 디펜서 건물의 상층부를 향했다. 그럴수록 보안이 삼엄해지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그러나 이미 경우의 얼굴이 알려진 것인지, 주변을 지나가는 사람들은 누구도 경우를 막아서거나 하지 않았다.
  마치 의도적으로 피하는 기분이 들었지만…… 괜한 시비는 없으니 그것으로 만족했다.
  외부인인 자신이 이만큼 들어오는 것도 쉽지 않은 일이다. 부수는 것과, 온전한 상태로 보는 건 다른 일이니까.
  경우는 비상사태가 아닌, 지금의 평상시 상태의 디펜서 건물을 살펴보고 싶었다.
  ‘뭔가…… 다른 것이 있다.’
  경우는 건물 내부의 비전력을 읽으며 유독 다른 장소보다 비전력이 집중되어있는 두 장소를 발견했다.
  그 중 한 장소는 익숙한 파장이 느껴지기에, 비전의 크리스탈─레비아탄의 뼛조각이 보관된 장소이리라 짐작했다.
  하지만 나머지 한 장소는 지금껏 처음 느껴보는 비전력의 파장이었다.
  ‘이런 건 과거에도 있었던 건가?’
  경우는 과거의 기억을 되새겨보며 위층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비전력이 늘어난 덕분에 상당히 먼 과거도 어렵지 않게 기억해내는 게 가능했지만, 그럼에도 경우의 기억 속에는 디펜서라는 단체에 대해서는 많은 정보가 남아있지 않았다.
  애당초 경우는 그다지 높은 영향력을 가진 비전능력자가 아니었다.
  그나마 지구를 자폭시키는 순간까지 살아남아있었기에 루사인으로부터 ‘서먼 선’을 받았던 것이지, 그 전에는 단지 디펜서의 정보력이나 물건 등을 구매 할 뿐인 평범한 소시민이었다.
  그러니만큼, 디펜서에 대해 아는 것이 없다.
  경우는 새삼 디펜서 건물을 전체적으로 살펴보았다.
  건물의 아래층에는 디펜서에 가입된 비전능력자들을 위한 무기와 방어구가 준비되어있었다.
  그보다 아래, 지하에는 괴물의 시체를 비롯한 창고와 비전투 특성의 비전능력자들이 사용하는 다양한 공방과 연구실이 존재했다.
  건물의 중앙에는 사무시설과 개인별로 지정된 방들이.
  그리고, 상층에는 구역별로 나눠진 특별 공간이 있었다.
  그 중 한 구역으로 경우가 막 들어설 참이었다.
  “당신……?”
  그때, 골목 저편에 있는 엘리베이터가 열리며 익숙한 얼굴이 나타났다.
  “아나스타시야?”
  경우 역시 자리에 멈춰 선 채, 그녀가 다가오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여긴 관계자 외 출입금지에요.”
  차갑게 말을 뱉은 아나스타시야는 경우의 곁을 성큼성큼 지나쳐 걸어갔다.
  웬일인지 그녀의 뒤를 재호가 뒤따르고 있었다.
  “저, 너무 문제를 일으키진 마시고 계셔주십시오.”
  어쩐지 피곤한 기색으로 웃어 보인 재호는 멀어져가는 아나스타시야를 따라 빠른 걸음으로 쫒아갔다.
  마지막으로 엘리베이터에서 내린 것은, 불안한 듯 그들을 뒤따르는 몇몇의 사람들─
  “음?”
  문득, 경우의 품 안에 네모난 상자가 안겨졌다.
  이미 경우는 지천호를 안고 있었기에 지천호의 머리 위에 상자가 놓인 꼴이 되었다.
  그 탓에 지천호가 잠깐 귀를 까딱거렸지만 경우가 재빨리 상자를 치워버리니 이내 다시금 귀를 늘어뜨리고 고른 숨소리를 내었다.
  “이건…… 흐음…….”
  자신을 지나쳐가며 상자를 건네주고 간 사람들은 틀림없이 한국 디펜서 지사의 고위직 요인들이었다.
  그들이 이처럼 불편한 얼굴을 한 채, 던져주듯이 ‘비전의 크리스탈’을 건네고 사라졌다.
  지난 20년 동안 겪어봤기에, 보지 않아도 대강 상황이 이해가 된다.
  “탈탈 털리겠군.”
  아나스타시야가 주관으로 문책을 나선 모양이다.
  그녀의 성격상 적당히 넘어가진 않을 터.
  경우는 그들이 사라져 간 방향을 한 번 바라보고는, 반대편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그래도 덕분에 일찍 해결됐군.’
  경우는 등산 배낭에 비전의 크리스탈이 든 상자를 집어넣었다.
  사실 내심으로는 하루 안에 결론이 나오지 않을 것이라 짐작했었다.
  ‘오늘 나온 결론이래 봐야 기껏해야 나를 정치적으로 묶어두려는 속셈이었을 텐데.’
  디펜서의 높은 분들은 질리도록 보아와서 잘 안다. 자기 손해는 절대로 보려 하지 않을 테다.
  하지만 우연히도 아나스타시야가 잔뜩 뒤집어놓았다.
  그 탓에 수작을 부릴 여유가 사라진 것이다.
  경우는 뜻하지 않은 행운에 그만 피식 웃어버리고 말았다.
  ‘뭔가 해줘야겠네.’
  잠깐 아나스타시야에 대한 생각을 마치고, 경우의 걸음은 곧 S구역이라 표시된 구역에 도달했다.
  그곳은 지금까지의 곧은 복도와는 달리 상당히 좁고 살짝 안쪽을 향해 휘어있는 모양이었다.
  바닥에는 다른 금속이 사용된 듯, 색이 조금 달랐다.
  “여긴가?”
  확실히 뭔가가 다르다.
  그리고 안쪽에서부터 상당한 비전력이 느껴지고 있었다.
  그곳을 향해 막 한 걸음을 내딛을 찰나였다.
  문득 천장에 달린 스피커로부터 부드러운 여성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인가되지 않은 대상입니다. 접근을 통제합니다.」
  그리고, 경우의 바로 코앞에 두꺼운 합금 방호벽이 솟아올랐다.
  그에 그치지 않고 양 벽과 천장, 바닥에서부터 두꺼운 파이프가 튀어나온다. 그 사이를 굵직한 막대들이 가로지르며 서로의 톱니를 맞물었다.
  곧 드르륵! 하는 소리와 함께 방호벽이 완전히 고정되었다.
  경우는 그 모습을 지켜보고는 고개를 갸웃했다.
  ‘뭐가 있기에……?’
  “굳이 부술 필요는 없으니까…….”
  말썽 부리지 말라며 핀잔도 들었겠다, 조용히 해결하는 게 좋을 터였다.
  경우는 두 눈동자를 푸르게 밝히며 방호벽 너머를 주시했다.
  현재 ‘리바이어던’타이틀이 활성화 된 상태이기에, 혜안(慧眼)이 상시 준비상태에 놓여있었다.
  혜안이라면 저 너머에 어떤 물건이 있는지 알 수 있을 터.
  경우가 혜안을 밝히며 방호벽 너머를 주시하려는 순간, 천장에서 고운 여성의 목소리가 다시 한 번 울려 퍼졌다.
  「비전력의 유동을 감지했습니다. 보안등급 상승. 물러나 주십시오.」
  그러한 말이 귓가에 들리는 즉시, 방호벽의 양측 벽으로 부터 틈이 벌어지며 수많은 피뢰침 같은 것들이 튀어나왔다.
  가만히 지켜보고 있으려니, 그 중 하나에서 적색의 섬광이 번쩍였다.
  “음……!?”
  그것은 스파크처럼 튀어 경우의 몸에 부딪쳐 튕겨나갔다.
  하지만 튕겨나가 부딪친 벽에선 섬뜩한 빛과 함께 벽의 일부가 주먹 하나만큼 가루가 되어 흩어졌다.
  그것을 본 경우는 눈빛을 가라앉히며 자신을 향해 겨누어진 수십개의 피뢰침들을 노려보았다.
  “호오…… 비전 능력자를 죽여서라도 감춰야 하는 것이라……?”
  「대상의 위험등급을 재조정 합니다. 격멸 모드로─」
  “지천호, 이것 좀 치워줄래?”
  “웅……?”
  경우의 부름에 지천호는 새근새근 잠들어 있던 고개를 들고 커다란 눈망울을 떠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적…… 없는데……?”
  “여기, 이 문 좀 열어주렴.”
  “문……?”
  지천호는 경우가 가리키는 ‘벽’을 바라보곤 의아하단 양 고운 눈썹을 찌푸렸다.
  하지만 이내 경우의 품 안에서 폴짝 내려서더니 두 손을 앞으로 뻗었다.
  앙증맞은 지천호의 손가락이 살짝 구부정해진다.
  그 끝에서, 손톱이 조금 더 길어졌다.
  지천호는 그것을 벽의 가운데에 폭, 박아 넣더니 그대로 양 팔을 옆으로 활짝 펼쳐버렸다.
  콰드드드득!
  그러자 듣기 싫은 굉음과 함께 합금으로 된 방호벽이 짜부라진 찰흙마냥 두 쪽으로 갈라져 양 옆으로 찌그러졌다.
  특수하게 만든 것임을 증명하듯, 지천호가 손톱을 박아 넣어 찢어낸 부위 외에는 단지 찌그러졌을 뿐, 갈라지거나 부서져 조각 난 부분이 없었다.
  경우가 주먹으로 때렸다면 찌그러지기는 했을지언정 안으로 들어가는 데에는 시간이 걸렸을 터였다.
  “정말 뭔가가 있구만.”
  고작 한 달이 지나갔다.
  괴물을 뱉어내는 포탈의 등장은 시작조차 하지 않은 것이다.
  이제 겨우 E등급의 괴물이 모습을 드러내려는 참인 마당.
  그러한 시기에, S급 비전능력자의 힘을 견뎌내는 합금을 이만큼이나 만들어냈다.
  경우는 눈앞에서 신나게 방호벽을 찢어내고 있는 지천호를 뒤따르며, 어딘가에 몸을 감추고 있는 루사인을 떠올리며 경각심을 일깨웠다.
  ‘내가 미래를 뒤집어 놓았으니, 적으로 볼 지도 모르겠군.’
  그렇게 되면 움직임에 엄청난 제약이 발생한다.
  전 세계에는 아직도 계속해서 디펜서 지사가 건설되는 중이었다.
  그들 전부로 부터 견제를 받는다면, 상당히 불편해진다.
  ‘이러고 있는 것도 그 놈 귀에 들어가면 골치 아파지겠군.’
  하지만 경우도 여기서 멈추고 돌아갈 생각은 없었다.
  루사인은 지금까지 한 치도 다름이 없는 20년분의 절망을 수백만 번이나 되풀이 해 온 인간이다.
  그런 자가 준비한 것이 무엇인지 알아야만…… ‘인간의 한계’가 어느 정도인지 짐작할 수 있다.
  경우는 막 방호벽의 끄트머리에 도달해 마지막 남은 벽마저 찢어버린 지천호의 곁으로 다가가 틈새로 몸을 빼내었다.
  지천호가 그런 경우의 품에 매달렸다. 경우는 지천호의 머리를 쓰다듬어주며 한 팔로 엉덩이를 받쳐주었다.
  그리고, 고개를 들어 방호벽 안쪽에 감춰져 있던 공간을 바라보았다.
  마치 달팽이 마냥 크게 돌아왔기에 그 내부는 기둥과 같이 둥근 형태였다.
  “……이건…….”
  그곳엔 네모나고 둥근 유리관들이 세워져 있었다.
  그리고 각각의 유리관 속엔 하나씩의 물건이 보관되어있는 모습이 보인다.
  그냥 둘러봐서는 박물관의 전시실 같은 풍경이었다.
  하지만 그런 유리관 중 하나의 앞에 이르러, 경우는 걸음을 멎고 말았다.
  경우가 멈춰 선 유리관 안에 들어있던 것은 ‘국방색의 풀 플레이트 아머’.
  그리고 그 아래의 네모난 동판에는, 틀림없는 음각으로 몇 단어가 선명히 기록되어 있었다.
  「96만 5천 20번 생존. 김경우. Korea. 18년 차 부터 20년 차 자폭까지, 생존하는 데에 필수 장비로 입증됨.」
  그러한 것이, 열 개 가량 이 공간 속에 준비되어 있었다.
  그리고 잠깐 말을 잊은 경우의 앞으로, 두 명의 소녀가 모습을 드러냈다.
  “당신은…….”
  “누구……?”
  “……쌍둥이?”
  경우는 고작해야 열 살도 되지 않은 것 같은 두 소녀를 돌아보았다.
  두 소녀는 모습이 똑같았다.
  허리까지 내려오는 긴 흑발에, 빛을 보지 못해 도자기처럼 하얀 얼굴.
  그리고 눈처럼 하얀 원피스에, 가느다란 목에는 ‘비전의 크리스탈’을 세공한 것 같은 은빛 목걸이가 걸려있었다.
  하지만 무엇보다 경우의 눈을 사로잡은 것은, 두 소녀의 눈이었다.
  경우의 시선을 느낀 것인지 두 소녀가 입을 모아 얘기했다.
  “괜찮아, 다친 게 아니니까.”
  “태어날 때부터─ 눈이 안 보였어.”
  두 소녀는, 경우를 향해 눈을 꼭 감은 채, 그렇게 얘기했다.
 “너희들은…… 어째서 여기에 있지? 너희들은 누구야?”
  경우의 물음에 대한 대답은 오히려 소녀들의 의아한 듯한 반문이었다.
  “여긴 우리를 지키기 위해 만들어진 곳이야.”
  “억지로 들어온 건 그쪽인걸?”
  “지키기 위해……?”
  “오히려 우리가 알고 싶어.”
  “당신이 누구인지, 왜 여기에 왔는지.”
  경우는 두 소녀가 한 사람처럼 입을 모아 말하는 것을 들으며 잠시 안색을 굳혔다.
  그녀들은 이곳, S급의 비전능력자 마저 단번에 뚫고 들어올 수 없는 특수한 합금으로 만든 이 공간이, 그녀들 자신을 지키기 위해 만들어진 곳이라고 했다.
  이 장소를 만든 건 결국 루사인이다.
  그는, 도대체 무슨 이유로 이정도의 시설을, 이 두 소녀를 지키고자 하는 목적만으로 만들어낸 것인가?
  비록 이 공간에 과거 경우의 무구를 비롯한 여러 ‘최후의 생존자’들의 무구가 전시되어 있다고는 하나, 그것들은 사용 할 사람이 없다면 그저 진열 해 놓았을 뿐인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물건에 불과하다.
  오히려 과거의 물건을 재현해 놓은 것 보다야, 사실상 기술력의 적용만을 따지자면 합금 방호벽이 더욱 우위에 있었다.
  맨 처음 공격당했던 붉은 섬광 같은 것도, 개인 무기화 형태로 만든다면 지금의 괴물들에게 상당히 위협적일 것이었다.
  처음부터 이런 것들로 무기를 만들어 괴물들과 싸웠다면 좀 더 확실히 괴물들과의 관계에서 우위를 점할 수 있었을 터였다.
  ‘그 모든 걸 포기하고, 이러한 방어 시설을 만드는 데에 총력을 기울였다……?’
  루사인은 끔찍이도 긴 시간동안 절망적인 과거를 반복 해 온 인간이다.
  자신의 행동이 어떤 결과를 초래하는지 이미 ‘겪어 보았다’.
  즉, 미래를 아는 상태에서 행동한다는 것.
  결국 그가 이처럼 두 소녀를 지키려는 데엔, 특별한 이유가 있다는 뜻이었다.
  ‘정체부터 알아야겠군.’
  경우는 두 눈동자를 선명한 청빛으로 밝히며 혜안(慧眼)을 열었다.
  그 상태로 눈앞의 두 소녀를 바라본다.
  그녀들은 경우의 앞에 꿋꿋이 서 있긴 했으나 자세히 보면 상당히 위축되어 있었다.
  겁먹고, 두려워한다.
  그것은 낯선 사람에 대한 무서움,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특별한 능력을 가진 비전능력자라기 보단, 그저 사람과 많이 만나지 못해 본 어린아이일 뿐인 모습.
  정말로…… 이 장소가, 여기 단 두 소녀만을 위한 방호시설인 것인가?
  경우는 혜안(慧眼)을 통해 드러나는 정보들을 보며, 다시금 눈을 크게 떠 두 소녀를 바라보았다.
 
  【루인: 인간: 비전등급 F
  정보: 비전력[(200)1/1]
  해석: 태어날 때부터 앞을 보지 못했습니다. 선천적으로 몸이 몹시 약합니다(몸 전체에 냉기가 퍼져 근육이 얼어있습니다). 루사의 언니.
  특성: 천리안(satellite)】
  【루사: 인간: 비전등급 F
  정보: 비전력[(200)1/1]
  해석: 태어날 때부터 앞을 보지 못했습니다. 선천적으로 몸이 몹시 약합니다(몸 전체에 화기가 퍼져 뼈가 물러있습니다). 루인의 동생.
  특성: 천리안(second sight)】
 
  “루인…… 루사…… 너희들, 설마?”
  경우의 중얼거림에 두 소녀는 깜짝 놀라는 모습을 보였다.
  “어떻게 우리 이름을 알았어?”
  “당신의 푸른 눈…… 그거 때문인 거야?”
  문득, 두 소녀 중 한 명. 루사의 언니인 루인의 몸에서 미약한 비전력이 흘러나왔다.
  그것은 그녀의 머리 위에 날개가 달린 듯한 한 쪽 눈의 형상을 만들어냈다.
  마치 고대 벽화를 보는 것 같은 모습의 그 눈은, 경우를 향해 눈동자를 돌려 꿰뚫어 버릴 양 또렷이 바라보았다.
  틀림없이, 누군가가 지켜보고 있다는 기분이 들었다.
  눈이 보이지 않더라도, 저것을 통해 앞을 볼 수 있으리라.
  경우는 그 눈을 마주 바라보며 상당히 낮아진 목소리로 두 소녀를 향해 물었다.
  “너희들, ‘루사인’의 가족인가?”
  상당히 고민 한 듯한 경우의 물음이었으나, 두 소녀는 망설임 없이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응, 맞아.”
  “우리─ 아빠야.”
  경우는 루사의 대답에, 눈을 한 번 질끈 감았다가 떴다.
  그 짧은 사이에 어느덧 루인의 머리 위에 나타났던 눈은 비전력의 고갈로 형상이 흩어지며 사라져 버렸다.
  그리고 그만큼 루인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고작 일부의 비전력를 소모한 것만으로, 생명에 직접적인 위협을 받는 것이었다.
  경우는 짐작 가는 것이 있어, 언니의 등에 살짝 숨듯이 서 있는 루사를 바라보며 물었다.
  “너희들의 아버지…… 루사인의 특성은 기억(memory)이었지. 언니, 루인은 세상 어디든 볼 수 있는 눈일 테고. 맞나?”
  “……맞아.”
  “그렇다면 동생…… 루사는, 미래를 보는 눈인가?”
  경우가 루사를 향해 말하자, 오히려 대답은 루인에게서 나왔다.
  “루사는 몸이 약해서 비전스킬을 쓰지 못해.”
  마치 경우가 루사에게 비전스킬의 사용을 강요 할 것이라 짐작한 마냥, 루인의 몸이 조금 더 앞으로 나서며 루사를 뒤로 숨겼다.
  그리곤 그녀는 습관적인 듯 자신의 목에 걸린 목걸이를 한 손으로 살짝 움켜쥐었다.
  그러자 손이 너무 작은 탓에 지금껏 발견하지 못했던 반지 하나가 그녀의 손에 끼워져 있는걸 볼 수 있었다.
  그 둘 모두, 틀림없이 비전의 크리스탈의 느낌이 났다.
  하지만…… 뭔가 다른 것 같다.
  경우는 루사의 목에도 똑같이 걸려있는 목걸이와 손에 끼워진 은빛의 반지를 보며, 눈동자에 청화를 피워 올렸다.
  “그 목걸이는…… 루사인이 준 건가?”
  “선물로 받았어.”
  이번엔 루사가 조심스레 답했다.
  경우는 고개를 끄덕이며, 눈앞에 나타나는 아이템의 정보를 보았다.
 
  【생명의 크리스탈 목걸이 F Ⅱ: 목걸이: 59.1%
  정보: 강화 2단계. 세공.
  해석: ‘레비아탄의 뼈’를 비전스킬 ‘세공’을 통해 ‘생명’의 특성을 부여한 목걸이입니다. 비전력이 생명력으로 전환되며, 성능이 대폭 감소합니다. 레비아탄의 뼈로부터 지속적인 생명력이 흘러나옵니다.
  특성: 1. 소유자의 생명력을 증가시켜준다. 생명력 +100】
  【생명의 크리스탈 반지 F Ⅱ: 반지: 43.8%
  정보: 강화 2단계. 세공.
  해석: ‘레비아탄의 뼈’를 비전스킬 ‘세공’을 통해 ‘생명’의 특성을 부여한 반지입니다. 비전력이 생명력으로 전환되며, 성능이 대폭 감소합니다. 레비아탄의 뼈로부터 지속적인 생명력이 흘러나옵니다.
  특성: 1. 소유자의 생명력을 증가시켜준다. 생명력 +100】
 
  “생명의 크리스탈…….”
  경우는 이곳에 도착하기 전 부터 느껴졌던 낯선 비전력의 파장이 무엇이었는지 알게 되었다.
  비전력이 아닌, 생명력을 뿜어내는 아이템이 2단계나 강화된 상태로 두 개나 존재하고 있다.
  거기다 세공으로 인한 특성 부여라니, 당연히 알지 못했다.
  그러니 처음 느껴보는 비전력의 파장이었던 것.
  경우는 잠깐 그것을 바라보더니, 힐끗 뒤를 돌아 엉망이 된 방호벽의 상태를 확인했다.
  ……저 멀리서, 누군가가 이곳을 향해 달려오고 있었다.
  이만큼이나 엉망으로 뒤집어 놓았는데 아무도 달려오지 않는다면 오히려 그것이 더 이상한 일일테다.
  무엇보다 이곳은 ‘루사인’이 ‘자신의 두 딸’을 지키기 위해 만들어놓은 공고한 라푼젤의 탑이다.
  그것이 파괴당했다면─ 자신이라도, 목숨 걸고 덤벼들 것이다.
  ‘만약 부모님께 위험이 처한다면, 나라도 그리 할 것이니.’
  경우는 생각을 굳히곤 눈앞의 두 소녀를 향해 한 걸음을 내딛었다.
  비록 보이진 않지만, 비전능력자로 각성된 신체능력과 예민해진 귀로 인해 두 소녀는 경우가 다가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고작해야 경우와 두 사람의 거리는 몇 걸음 안팎이었다.
  경우는 곧장 두 소녀의 앞에 주저앉아 그녀들과 눈높이를 맞추었다.
  그리고, 손을 뻗어 목에 걸린 목걸이에 손가락을 대었다.
  “……강화.”
  곧, 눈부신 빛이 어두운 공간의 안쪽에 환하도록 피어올랐다.
 
 
 
  “허, 허억……!”
  가장 먼저 목걸이의 강화를 받았던 루인의 입에서 거친 숨이 토해졌다. 그녀는 마치 무언가가 목을 조르듯 괴로운 모양으로 두 손을 가슴 위에 모으며 자리에 주저앉고 말았다.
  “강화.”
  하지만 경우는 멈추지 않고 다시금 손을 뻗었다. 한 번 더 빛이 터져 나오고, 그 순간 루인의 몸 위에 새파란 핏줄이 비쳐보였다.
  “강화.”
  주춤주춤 뒷걸음질 치는 루인에게 다시금 경우가 손을 대었다. 그러자 일순, 루인의 몸이 얼음에 뒤덮이듯 파란 성에에 감싸였다.
  그 속으로 손을 집어넣어 경우가 목걸이를 움켜쥐었다.
  언뜻 성에에 닿은 피부가 ‘카각, 카각’하며 긁히는 소리가 났지만, 오히려 성에가 부서져 떨어져 나갈 뿐이었다.
  “강화.”
  경우의 외침으로 한 번 더 빛이 터져 나왔다. 주변을 밝히는 영롱한 빛이, 그녀의 몸에서 자라난 성에에 반사되어 방 안에 아름다운 무지개를 비춘다.
  그리고 그 다음.
  루인의 몸에서 열기가 치솟았다.
  “조심.”
  재빨리 뒤를 돌아 멍하니 서 있던 루사의 몸을 경우가 끌어안듯 등으로 감쌌다.
  그 위를 화끈한 열기가 스치고 지나간다.
  그렇지 않아도 찢어진 옷이, 완전히 잿가루가 되어버렸다.
  하지만 그런 것 보다, 경우는 얼굴에 은은한 열기를 띠어 홍조가 드리워진 루인의 모습을 보았다.
  그녀는 여전히 눈을 감은 상태였지만, 자신의 두 팔을 살펴보고 손을 들어 얼굴을 더듬었다.
  그리고 조용히 중얼거렸다.
  “따뜻해…….”
  울컥, 그녀의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렸다.
  그런 루인의 모습을 본 경우는 안도한 듯 작은 한숨을 내쉬곤, 품에 안고 있던 루사를 살짝 놓아주었다.
  “어, 아……? 무슨 일이……?”
  루사는 루인과 달리 현재를 볼 수 없다. 더군다나 비전특성인 천리안(second sight)에 해당되는 비전스킬을 사용하기 위해서는 언니보다 더욱 많은 비전력을 소모해야 하는 모양.
  그러니만큼 루사만은 정말로 아무것도 보지 못하는 상태였다.
  그런 그녀에게, 경우는 살며시 손을 잡아 나지막한 음성으로 말했다.
  “강화.”
  루사의 손에서 은은한 빛이 흘러나왔다.
  새끼손가락에 낀 자그마한 은빛의 반지가, 아름답게 반짝였다.
  경우는 흠칫 몸을 움찔거리는 루사를 주시하며 재차 외쳤다.
  “강화.”
  반지에 영롱한 빛이 어린다. 그것은 마치 얼음을 깎아 만들어낸 보석 같았고, 하늘에 흐르는 은하수를 담은 빛이었다.
  반지에 빛이 담긴 순간, 루사는 휘청거리며 쓰러지고 말았다.
  그렇게 쓰러지는 루사를 경우가 재빨리 등을 받쳐 안아들었다.
  “으음…….”
  그렇게 맞닿은 피부로 부터 엄청난 열기가 느껴진다.
  루인의 경우엔 얼어붙은 근육을 신진대사를 높임으로써 온기를 방출해 녹여낸 것이지만, 루사는 오히려 뼈 속의 열기를 밖으로 배출해야만 하는 상황이었다.
  그러한 과정에서 다시금 열기가 터져 나올 것은 자명한 사실.
  경우는 한숨과 함께, 짤막히 비전스킬의 이름을 입에 담았다.
  “강화.”
  “아, 흑……!”
  루사의 몸이 크게 펄쩍 뛰었다. 그리고 경우의 귓가로 ‘우둑, 드드득’하며 무언가가 다시금 맞추어지는 듯한 작은 소리가 들렸다.
  여기서 멈추면 애매하게 고통만 더해질 따름.
  경우는 루사의 자그마한 손을 커다란 손으로 꼬옥 움켜쥐었다.
  “강화.”
  경우가 쥔 손가락 사이로 맑은 빛이 흘러나왔다.
  그리고 루사의 몸 밖으로는 열기가 쏟아져 나온다.
  루인의 열기와는 비교도 할 수 없는 뜨거움이었다.
  몸 밖으로 불꽃이 넘실거린다.
  마치 불의 정령이 자리에 현신 한 것만 같은 모습.
  그러나, 이내 루사의 몸에서 얼음 조각 같은 푸른 냉기가 사방으로 터져나갔다.
  진득한 용암마냥 루사의 몸에 들러붙어있던 열기는 냉기의 방출과 함께 수증기가 되어 흔적도 없이 흩어져버렸다.
  갑작스런 온도 변화 탓에 바로 곁에 있던 경우는 물에 흠뻑 젖은 것 같은 꼴이 되었다.
  머리카락 끝으로 물방울이 뚝 뚝 떨어진다.
  머리카락을 대충 손으로 쓸어 넘긴 경우는 곧 자신의 손에 등을 맡긴 채 안겨있는 루사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어두운 탓에 드러나진 않았지만 열사병에 걸린 듯 상당히 새빨간 느낌이었던 루사의 얼굴이, 이제는 목욕을 마친 것 같이 붉은 정도로 생기 있게 변했다.
  그녀 역시도 정신을 차리곤 조심스럽게 손등을 자신의 볼에 얹어보았다. 그리고 경우의 품에서 벗어나 주변을 한 걸음 한 걸음 걸어본다.
  이윽고 작은 목소리가 경우의 귓가에 들려왔다.
  “아프지 않아…… 시원해…….”
  “루사!”
  “어, 언니……?”
  차마 말을 잇지 못하고 자신의 팔을 껴안고 있던 루사를 향해, 루인이 한달음에 달려와 와락 끌어안았다.
  “괜찮니? 아프지 않았어? 이제 걸을 수 있는 거야?”
  “으, 응. 괜찮아, 언니. 나 이제 걸어도 아프지 않아. 그리고 뜨겁지도 않아.”
  루사가 배시시 웃으며 대답했다. 그 모습을 보고 싶은 양, 루인의 머리 위로 고대 벽화와 같은 눈의 상징이 떠올랐다.
  “다행이다…… 정말 다행이다……. 아아, 감사합니다…….”
  루인은 루사를 양 팔로 껴안으며 그녀의 볼에 자신의 볼을 문질렀다. 그런 언니의 애정에 루사가 부끄러운 양 얼굴을 붉혔다.
  이런 사소한 행동조차─ 바로 조금 전의 두 사람은, 할 수 없던 것이었다.
  근육이 얼어붙고, 뼈가 불타오른다.
  도대체 지금까지 어떻게 살아왔던 걸까?
  비전능력자가 되었지만, 그것은 오히려 고통스러운 시간을 늘려주는 형벌에 지나지 않았던 것일 터였다.
  경우는 두 사람으로부터 시선을 옮겼다.
  그리고 주변을 둘러보았다.
  “지천호?”
  경우는 저 멀리 유리관 뒤에 숨어서 열기와 냉기로 부터 등산 배낭을 대피시키고 있던 지천호를 손짓으로 불렀다.
  지천호는 둥근 유리관 너머로 큰 눈동자를 깜박이며 경우를 지켜보고 있다가 경우의 손짓을 보고는 등산 배낭을 가지고 쪼르르 달려왔다.
  경우는 지천호에게 등산 배낭을 받아 안쪽으로 손을 집어넣어 무언가를 찾았다. 그리고 양 손을 움켜쥐고, 여전히 서로를 끌어안고 있던 루인과 루사에게 다가갔다.
  그녀들은 경우가 다가오는 것을 알아채곤 고개를 돌려 그를 올려다봤다.
  경우가 그들의 앞에 쪼그려 앉아 한 쪽씩의 손을 각각 내밀었다.
  “이거, 받아라.”
  “뭔가요……?”
  언니인 루인의 말투가 부드럽게 바뀌었다. 그에 경우는 피식 웃으며 그녀와 동생의 손에 그가 쥐고 온 것을 놓아주었다.
  “나도 예전에 몇 번 사용 해 본 적 있거든.”
  “이건…… 길고…… 딱딱하고…….”
  “뭔가…… 뜨거운 열기가 느껴지네요?”
  루인과 루사는 경우가 건네준 것을 자그마한 손으로 조심조심 만져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루사의 경우엔 정말 아무것도 보지 못하는 상태였지만, 그마나 루인은 천리안을 통해 손에 쥔 것을 볼 수가 있었다.
  “새빨간 색인데…… 느낌이 이상해…… 기분이 좀 별로네요.”
  “이게 뭐야?”
  고민하는 듯한 루인과는 달리, 루사는 대뜸 경우를 바라보며 물어왔다.
  루인도 더는 모르겠는지 경우를 올려다보며 궁금한 표정을 지었다.
  그런 두 사람의 모습을 보며 경우는 슬쩍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역시 본 적 없나보네. 그건 ‘비전의 결정’이라는 건데, 이걸 너희들 힘으로 부서뜨리면─”
  “─멈춰, 이 변태─!”
 
  막 경우가 입을 열려는 찰나.
  지금껏 전속력으로 달려 온 것인지, 숨이 턱에 차 있는 아나스타시야가 비명 같은 고함을 질렀다.
  그리곤 찢어놓은 방호벽의 틈을 비집고 나와, 있는 힘껏 경우를 향해 ‘3단계 강화 된 단검’을 집어던졌다.
  “잠……!”
  그 일련의 과정이 너무 빨라, 경우는 그녀에게 무어라 채 말 할 새도 없었다.
  아무리 경우가 아나스타시야의 필살의 공격을 받더라도 멍도 들지 않는다지만, 그 필살의 공격에 ‘3단계 강화가 된 무기’가 포함된다면 경우라고 해도 상당히 위험해진다.
  그건, 경우의 피부를 베어낼 수 있다.
  더군다나 아나스타시야의 특성이 발동되어 투척된 단검은 맹렬한 기세를 품고 정확히 경우의 가슴을 노렸다.
  막 날아오는 단검을 보며 경우가 손을 뻗을 찰나.
  문득 곁에서 무언가가 휙 솟구치더니 눈 깜짝 할 새에 날아들던 단검이 허공에서 사라져 버렸다.
  “큭……!”
  아나스타시야는 그것을 확인하고는 재빨리 방패를 치켜들었다. 그리고 허리춤에서 자동권총을 뽑아들어 앞을 겨누었다.
  그러한 태세로 완전무장 한 아나스타시야의 앞에, 어느 순간 경우의 곁에서 사라졌던 지천호가 사뿐히 자리에 내려섰다.
  그리고 큼직한 눈동자에 살기를 피워 올린다.
  “크르르…….”
  지천호는 입에 물고 있던 단검을 바닥에 뱉어버렸다.
  “읏…….”
  공격적으로 변한 지천호를 앞에 마주하자, 아나스타시야의 안색이 창백하게 질렸다.
  지난번, 경우를 찾고자 필드를 뒤질 때 우연히 만나게 된 지천호는 그야말로 지옥에서 올라온 사신과 같은 느낌이었다.
  검은 옷과 낫 대신, 네 개의 꼬리와 섬뜩한 송곳니를 가진 악마 같은 존재.
  입에서 불과 번개를 쏟아내고, 한 번 내딛는 걸음엔 지진이 일어 그녀의 앞에선 자리에 서 있을 수조차 없었다.
  그때엔 하늘마저 어두운 빛을 뿌렸다.
  짙게 낀 먹구름 아래, 사방이 불타고 뒤집어져 초토화 된 지면의 위에서, 아나스타시야는 자리에 선 채 모든 무기와 방어구를 벗어 보이는 것으로 간신히 지천호의 신뢰를 얻을 수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완전무장을 한 채로 지천호에게 총을 겨누고 있다.
  신뢰라거나, 용서 같은 건 기대도 할 수 없으리라.
  그녀는 힐끗 지천호의 뒤에 보이는 루인과 루사를 바라봤다.
  저 두 사람은 루사인 에게 세상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소중한 존재임을 잘 안다.
  비록 경우가 자신을 구해줬다고는 하나…… 디펜서의 고위 간부로서의 직책이 그녀의 선택을 강요했다.
  루사인이 아니었다면, 고아원 아이들을 구할 수 없었을 터.
  아나스타시야는 이를 꽉 악물며 그를 향해 외쳤다.
  “김경우씨, 당신을 특별 위험대상자로 지정하여 신변을 구속합니다! 방해하거나 거부 시에는…… 사살하겠습니다!”
  ‘반드시…… 잡아야 한다.’
  결심을 굳힌 아나스타시야는 지천호가 먼저 움직이기 전에 재빨리 총구의 방아쇠를 당겼다.
  타타타탕!
  연속적으로 총알이 사출되었다.
  현재 아나스타시야가 손에 쥔 총은 일전 경우가 3단계 까지 강화를 해 준 것.
  그 때 당시는 총알이 모두 소진되어 위력을 실감할 수 없었으나, 지금은 충분한 탄을 소지하고 있다.
  ‘게다가…….’
  그녀는 강화된 총의 사용에 ‘강화 된 총알’이 필요치 않다.
  언뜻 푸른 불길이 아나스타시야의 눈동자에서 불타올랐다.
  그것은 막 쏘아낸 총알의 탄두에 피어오르는 불길과 동일한 것이었다.
  푸른 궤적을 남기며 빛과 같은 속도로 총알이 날아간다.
  콰과광!
  합금으로 이루어진 지면에 총알이 박혀든다.
  그러자 소용돌이 모양의 흔적과 함께 합금이 찌그러졌다.
  S급 비전능력자의 공격도 어느 정도 막아낼 수 있는 것이건만, 그에 간단히 총알이 박혀들고 찌그러져 버린다.
  아나스타시야는 자신이 쏜 것이면서도 눈을 크게 뜨며 놀랐다.
  ‘대단해…… 이것이, 강화 능력…….’
  하지만 감탄도 잠시, 곧 자리에 있어야 할 대상이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사라졌어?’
  분명 총의 방아쇠를 당길 순간 까지만 하더라도 지천호의 모습은 그녀의 눈앞에 있었다.
  그러나 총알이 날아가고, 그것이 지면에 박혀드는 그 사이의 시간─
  문득, 아나스타시야는 헛숨을 들이쉬며 방패를 두 손으로 힘껏 움켜쥐었다.
  ‘왼쪽─’
  구우웅……!
  묵직한 울림과 함께 아나스타시야의 몸이 포탄처럼 튕겨져 날아갔다.
  좀 전 까지만 해도 아나스타시야가 있었던 자리엔 한 손을 반쯤 뻗은 지천호의 모습이 보였다.
  지천호는 곧장 고개를 돌려 아나스타시야가 날아간 장소를 노려봤다.
  그녀의 송곳니 사이로 시퍼런 번개줄기가 번쩍였다.
  살짝 벌어진 입 사이론 끓어오르듯 붉은 불길이 비친다.
  뒤이어, 지천호가 으르릉 거리듯 이빨을 드러내며 자그만 입을 벌렸다.
 
  【뇌정벽력(雷霆霹靂): B】
 
  “끄응…… 헉……!?”
  그로부터, 아나스타시야가 처박혀 움푹 패인 구석을 향해 고온의 불길과 시퍼런 뇌전이 폭풍처럼 쏟아졌다.
  쿠화아아악!
  쾅! 콰광! 꽈아앙!
  치솟은 화산마냥 용암 같은 불길이 끊임없이 쏟아진다.
  그 위를 초고압의 번개가 내리꽂히며 공기를 찢어발기는 파열음을 토해냈다.
  한 점에 집중된 그야말로 자연의 대재앙.
  도저히 인간이 살아남을 수 없는 환경이었다.
  “하, 하아…….”
  지천호가 마침내 숨을 몰아쉬며 입가를 손등으로 쓱 문질렀다.
  지천호의 입가에서 스파크가 튀어오르고 작은 불덩이가 바닥에 떨어진다.
  그것이 닿은 바닥이, 녹아 흘러내린다.
  고작 불꽃이 떨어져서 이럴진대, 그것들이 일제히 퍼부어진 자리는─
  형체마저 남지 않고, 커다란 구멍이 뻥 뚫려버렸다.
  ─그 너머로 하늘이 보인다.
  해당 층의 일대 구역을 방어하듯 둘러싼 합금이지만, 건물의 벽에 이르기까지 모조리 녹아버린 것이었다.
  지천호는 그 모습을 보며 커다란 두 눈을 가볍게 깜박깜박 거렸다.
  눈동자에, 살짝 당혹감이 어린다.
  뭔가 믿을 수 없는 광경을 본 듯한 표정이었다.
  “우웅……?”
  분명히 눈앞의 광경은 그 누구도 살아남을 수 없을 만큼 처참한 것이었다.
  하지만…… 어째서인지, 하늘이 보이는 풍경 가운데에 누군가가 웅크려 있는 모습이 보였다.
  그것은 언뜻 보더라도 중세 시대의 ‘기사’라 불리던 모습.
  또한, 국방색 페인트가 칠해진 풀 플레이트 아머의 모습이었다.
  바로 그 기사가, 자리에 웅크려 앉은 채 둥근 방패를 앞으로 내밀고 있었다.
  상처라고는─ 단 하나도 없다.
  문득, 지천호가 사납게 찌푸리고 있던 눈썹을 부드럽게 가라앉히며 의아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아빠?”
  그녀의 목소리를 들은 갑옷의 기사가 손에 든 방패를 내리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의 뒤로, 자리에 주저앉은 채 공포에 질려 눈물을 머금고 있는 아나스타시야의 모습이 보였다.
  “너무 심하잖냐.”
  투구의 가리개를 올리며 쓴 표정을 지은 경우가 지천호에게 말했다.
 
  【합금-풀 플레이트 아머 Ⅵ: 갑옷: 98.8%
  정보: 강화 6단계. 진화 1단계.
  특성: 내구도가 감소하지 않습니다(비전손상 적용).
  진화 특성: 합금-소립자 보존(boson)체계 적용】
  【합금-장전식 합금 방패 Ⅵ: 복합방어구: 91.3%
  정보: 강화 6단계. 진화 1단계(비전손상 적용).
  특성: 내구도가 감소하지 않습니다.
  진화 특성: 합금-소립자 보존(boson)체계 적용】
 
  “와아, 아빠 멋있다! 이거 뭐야?”
  하지만 지천호는 생글생글 웃으며 달려와 경우의 앞에서 갑옷을 입은 모습을 이리저리 살펴 볼 뿐이었다.
  경우가 무사하기만 하다면, 다른 건 아무래도 상관없는 듯한 모습.
  그에 경우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등 뒤에 주저앉아있는 아나스타시야를 돌아보았다.
  “괜찮냐?”
  “……히, 히끅…….”
  그녀는 너무나 놀란 나머지 숨이 제대로 쉬어지지 않았다.
  아나스타시야의 몸이 떨려 눈가에 맺혀있던 눈물이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
  그녀는 바로 코앞까지 죽음의 문턱에 다가갔다 온 상황이었다.
  당장이라도 펑펑 울고 싶은 마음을 간신히 억누르고 있었다.
  “괘, 괜찮…… 괜찮…….”
  “무리하지 마라. “
  경우는 잠깐 아나스타시야를 향해 손을 뻗었다가 이내 주먹을 쥐고 거두어들였다.
  지천호를 말리지 못했던 건 자신의 잘못이다.
  겨우 총알 하나 날아왔다고 설마 이처럼 공격적으로 나올 줄은 짐작하지 못했다.
  하지만 전부 자신을 지키기 위해서 달려 나간 것을 알기에, 지천호를 나무랄 수는 없었다.
  경우는 그저 조용히 마음을 추스르고 있는 아나스타시야를 잠시 바라본 후, 고개를 돌렸다.
  그곳엔 어느덧 곁으로 다가와 있는 루인과 루사가 있었다.
  “알려줘서 고맙다.”
  “큰일 날 뻔 했어.”
  두 사람 중 루사가 경우를 향해 말했다.
  그렇게 말하는 루사는, 머리 위에 나비의 날개와도 같은 아름다운 문양을 피워 올리고 있었다.
  마치 화사히 화장한 여인의 두 눈처럼 보이는 나비의 날개가 천천히 날갯짓을 한다.
  그것은 틀림없는 루사의 비전특성 천리안(second sight).
  루사는, 경우를 향해 ‘미래를 본 것’을 이야기하고 있었다.
  “나는 분명히 아나스타시야 언니가 번개에 불타오르고 불길에 녹아내리는 모습을 봤어.”
  “끔찍한 일이군. 그래서, 네가 본 미래의 시점은 언제였지?”
  “조금 전에 지났어. 이젠 과거가 돼 버렸지. ……그러니까 더욱 알 수 없어.”
  그녀는 고개를 들어 똑똑히 경우를 바라보며 물었다.
  “어째서 미래가 ‘바뀌어 버린 거지?’“
  “글쎄?”
  아는 바가 없다.
  경우는 그저 고개를 가로저을 뿐이었다.
  그런 경우에게, 루사가 호기심 가득한 목소리로 물었다.
  “경우 삼촌이 미래에 개입하기 전 까지는 내가 본 대로였어. 하지만 경우 삼촌이 움직이기 시작 한 이후엔 결과가 완전히 뒤바뀌어 버렸어. 경우 삼촌은 도대체 뭘 한 거야?”
  “아니, 야, 삼촌이라니.”
  경우가 질색하며 중얼거렸다.
  “뭐…… 네가 본 미래에서, 나는 뭘 하고 있었는데?”
  “저기에 있는 유리관을 깨고, 갑옷을 강화하고 있었어.”
  “정확히 봤네. 그러면 내가…… 지천호의 불길을 막아내지 못했다는 건가?”
  경우의 혼잣말에 루사가 고개를 저었다.
  “아냐, 경우 삼촌은 아나스타시야 언니가 죽어가는 순간까지도 계속 강화를 하고 있었어.”
  “뭐? 잠깐, 그건…….”
  경우는 눈살을 살짝 찡그리며 말했다.
  “강화가, 성공하지 못한 미래잖아?”
  그때, 지금껏 조용히 곁에 다가와 아나스타시야의 등을 쓰다듬어주고 있던 루인이 문득 고개를 들어 휑하게 구멍이 뚫린 벽 너머를 쳐다보며 말했다.
  “아빠가 오고 있어요.”
  그녀의 말에 경우와 루사가 말을 주고받던 걸 멈추고 루인을 바라봤다.
  그녀는 무언가에 집중하듯 고개를 돌린 채 벽 너머로 뚫린 하늘을 향해 시선을 고정했다.
  “어…… 저기, 점점 볼 수 있는 거리가 줄어들고 있어서 자세히는 모르겠지만…….”
  루인은 마침내 머리 위에 밝혀두었던 눈의 문양을 지우며 짤막히 이야기했다.
  “아빠가 탄 전투기가 날아오고 있어요.”
  그 말이 루인의 입술에서 떨어진 직후.
  경우는 앞으로 달려 나가려는 지천호를 재빨리 품 안으로 낚아채며 귀를 쫑긋거리는 지천호를 품 안에서 부드럽게 토닥였다.
  “아마…… 방호벽이 부서진 것 때문에 본사에도 경보가 울렸을 거에요.”
  자리에 주저앉은 채 어깨를 양 팔로 감싸 안고 있던 아나스타시야가 떨리는 목소리로 얘기했다.
  “어쩌면, 루인과 루사가 죽었다고 생각할지도 모르는 일이죠…….”
  아나스타시야의 목소리엔 불안감이 어려 있었다.
  경우는 이윽고 자신의 귀에도 들려오기 시작하는 전투기의 소리를 들으며 올려두었던 투구의 얼굴 가리개를 다시 내렸다.
  혹시나 먼저 공격 해 오진 않을 테지만…… 혹시나 모르는 일이다.
  경우의 시선이 등 뒤에 서 있는 루인과 루사를 훑었다.
  비록 자신은 그녀들의 몸에서 배출된 열기에 옷이 다 타 버렸지만, 다행히 그녀들은 비전력이 의복에도 작용을 한 것인지 티끌 하나 묻어있지 않은 깨끗한 모습이었다.
  단지 목소리만 듣고 칼을 집어던졌던 아나스타시야와는 달리 오해 할 소지는 없어 보인다.
  그렇지만, 아마도 지금의 루사인이라면 머리끝까지 피가 몰렸을 테다.
  문답무용으로 공격을 퍼부을지도 모르는 상황.
  “방패 좀 더 빌린다.”
  경우는 아나스타시야의 방패를 치켜들고 뻥 뚫려버린 벽을 향해 걸어갔다.
  “【쉴드】”
  그곳에서 방패를 앞으로 내밀었다.
  그러자 방패가 푸른빛으로 불타오른다.
  그 불길은 가장 중앙에서 방패 전체로 퍼져나가기 시작했다.
  그것은 방패의 테두리를 넘어, 허공으로 뻗어나가는 것.
  마치 푸른 불꽃의 투명한 벽과 같은 방어벽이 만들어지는 모습이었다.
  그 크기는 완전히 구멍 난 통로 전체를 막아설 수 있을 정도.
  경우는 자리에 멈춰선 채, 푸른빛으로 물든 눈동자로 하얗도록 푸른 하늘을 지켜보았다.
  “날씨 참 좋다.”
  경우가 하늘을 보며 중얼거린 순간.
  무언가가 하늘에서 반짝이더니, 순식간에 경우의 앞에서 폭발이 일어났다.
  구우우웅…….
  경우가 방패를 치켜든 뒤편으로는 그저 묵직이 가라앉은 울림만이 미약하게 들려 올 뿐이었다.
  하지만 아주 조금, 경우의 발이 뒤로 밀려나갔다.
  경우는 미간을 좁게 찌푸렸다.
  “……미사일이 아닌데……?”
  다음 순간, 다시 한 번 더 어마어마한 폭발이 일어났다.
  경우의 발이 끼긱, 거리는 소리와 함께 바닥에 스크래치를 일으키며 밀려나갔다.
  한 번 더 폭발.
  경우는 재차 뒤로 밀려나가며 혀를 찼다.
  “젠장, 이거 신의 지팡이……! 아니, 롱기누스의 창이냐?!”
  경우의 시선이 하늘 저 편을 향했다.
  그곳을 향해 표적을 고정하고 시야에 비전력을 더한다.
  그러자 그곳의 광경이 바로 앞에서 보는 것처럼 선명히 확대되었다.
  “분명 10년 뒤에나 만들어졌던 무기인데…….”
  하늘의 저편, 아직 대한민국의 영공에 조차 접근하지 않은 동해안 상공에서, 한 대의 전투기가 호버링을 하며 멈춰선 채 서울의 한 건물 상층부를 정확히 조준하고 있었다.
  전투기의 아래에는 선박의 용골과도 같은 뼈대가 설치되어 있었다.
  그곳의 위쪽 사출구로부터, 빛이 반짝였다.
  “아오, 진짜.”
  경우의 눈앞에서 폭발이 일어났다.
  틀림없이 전투기에서 쏘아진 것은 성인 남성의 팔뚝만한 백색 창이었다.
  그것이 초고속으로 날아와 모든 질량을 고스란히 에너지로 바꾸어버린다.
  경우는 뒤로 밀려나가며 그 모습을 멀뚱히 지켜보고 있던 등 뒤의 사람들에게 소리쳤다.
  “연락이든 뭐든 해서 이거 좀 멈춰 봐! 저거, 백 발 넘게 들어있다고!”
  “아, 아…… 알겠어요!”
  경우의 고함을 들은 아나스타시야는 떨리는 몸을 추슬러 건물 안쪽 어디론가를 향해 달려갔다.
  그리고 어디론가 통화를 연결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후, 두어 발의 폭발이 더 일어난 다음에서야 경우는 한숨을 내쉬며 치켜들었던 방패를 내릴 수 있었다.
  “너희들, 아빠 오신다.”
  경우는 팔에 착용했던 방패를 풀어버리고 루인와 루사의 곁을 지나쳐 찢어진 방호벽 너머로 걸음을 옮겨버렸다.
  가족과의 만남에 불청객은 필요치 않았다.
  곧 한국 디펜서 지사의 건물 상층부로 한 대의 전투기가 다가오는 모습이 보였다.
 
 <『포춘 리바이어던』 2권에 계속>

이용약관 유료이용약관 개인정보처리방침 청소년보호정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