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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계등선 1화 - 서(序)

2015.11.25 조회 6,073 추천 73


 서(序)
 
 정파와 사파는 물과 기름이다.
 본좌 또한 흑천(黑天)이란 이름에 걸맞게 정파 놈들이 덤벼들 때마다 가차 없이 목을 베었었다.
 그 수만 해도 무려 수백.
 하지만 단 한 명만큼은 목을 베지 않았었다.
 “내가 졌소이다. 허허허!”
 일(一)검에 온몸을 비틀거렸고, 이(二)검에 쌍코피를, 삼(三)검에 두 무릎을 꿇었던 정파의 한 늙은이. 요상하게도 그 늙은이에게만큼은 왠지 살기가 일지 않았었다.
 “목이 컬컬한데 술 한잔 주시겠소이까?”
 순순히 패배를 인정하면서도 술까지 요구한 늙은이였는데도 도리어 헛웃음만 나왔었다.
 칠선(七善).
 확실히 요상한 놈이었다.
 촌무지렁이 같은 낯짝도 그렇고, 정파 특유의 가식도 찾아볼 수 없어 그다지 밉지도 않았었다.
 본좌는 결국 술병 하나를 던져 줬었다.
 그리하여 술 한 잔이 두 잔이 되고 종국에는 항아리째가 되어, 그 늙은이가 철웅성으로 올 때마다 서슴없이 술잔을 서로 나눴고 그 세월도 어느덧 오 년이 다 되어 간다.
 
 “술 한잔 주시구려. 허허허!”
 오늘도 어김없이 본좌를 찾아와 공짜 술부터 요구한 칠선이다.
 본좌는 군말하지 않고 먹다 남은 술을 던져 줬다.
 한데 오늘은 아침밥에 독초라도 섞어서 먹은 것인지, 귀한 술을 앞에 두고 대뜸 이런 말을 던지는 칠선이었다.
 “하늘은 만물의 아비요, 땅은 만물의 어미다(天有萬夫 地有萬母). 물은 생명이며 바람은 삶이다(水卽萬生 風卽生雲). 빛은 만물을 활(活)하고 어둠은 만물을 정(靜)하게 하노니, 인간 또한 만물의 하나로 하늘, 땅, 물, 바람, 빛 그리고 어둠에 따라 생하고 사하리라…….”
 자다가 봉창을 두들기는 말이요, 다시 이어지는 그의 말은 아예 봉창에 구멍 낼 소리였다.
 “흑천마제여, 이참에 나와 함께 우화등선을 한번 해 보시겠소이까? 충분히 할 수 있으리라 보는데.”
 본좌는 술병을 도로 빼앗았다.
 “연배도 비슷하고 정사를 떠나 아주 조금은 말이 통해서 대면해 줬더니만, 우화등선? 쓸데없는 소리 계속 지껄일 요량이면 당장 물러가라!”
 권력, 부, 명예, 그 모든 것을 쥐고 있는 본좌가 뭐가 아쉬워 우화등선을 하리.
 차라리 등선이 아니라 풍광 좋은 오악산에 등산을 하는 게 더 나으리라.
 “아쉽구려. 이 늙은이와 함께 우화등선을 하면 좋을 텐데……. 어떻든 이제부터 두 번 다시는 철웅성을 찾지 않을 것이외다.”
 와도 그만 안 와도 그만.
 본좌로서는 아쉬울 것이 없었다.
 “대신 한 가지 청이 있는데 들어주시겠소이까?”
 “노잣돈이 필요하더냐?”
 “마지막으로 딱 일각 동안만 내 춤사위를 한번 봐 주시겠소이까?”
 일각.
 지랄 발광한다고 해도 충분히 참아 줄 수 있는 시간이라 호쾌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자, 그럼 시작하겠소이다.”
 후원 뒤뜰에 도착하자마자 신발까지 벗어 던지곤 어깨를 덩실거리는 칠선. 이곳 철웅성으로 오기 전 독초뿐만 아니라 낮술까지 건하게 걸친 겐지 이리저리 비틀거리며 오두방정을 다 떨었다. 그나마 눈빛만큼은 꽤 진지하여 일단 참고 지켜봤다.
 일각.
 본좌는 시간이 다 되었노라고 버럭 소리치려고 했지만 끝내 혀끝을 움직이지 못했다.
 ‘가, 갑자기 하늘이 왜 이래?’
 금방 전만 해도 구름 한 점 없는 화창한 날씨였는데 먹구름이 순식간에 가득 메워지는 게 아닌가.
 꾸르르륵!
 뿐만 아니라 먹구름 중앙이 갈라지면서 학 한 마리가 내려오고 있었다. 그것도 오색찬란한 광채를 사방팔방으로 퍼트리면서!
 “서, 설마 저 늙은이가 우화등선을!”
 믿을 수 없었다.
 그러나 학이 바닥에 살포시 날개를 접자마자 자연스럽게 학의 등에 올라타는 칠선이었으니…….
 우화등선(羽化登仙).
 이것이 아니라면 현 상황을 당최 설명할 길이 없었다.
 본좌는 황당했다. 아니, 기가 막혔다.
 “하늘이 미쳤어!”
 하늘 또한 제정신이 아닌 것 같았고, 칠선을 등에 태운 학의 머리가 닭대가리처럼 보이기까지 했다.
 “흑천마제여, 이제 정말 이별이외다. 허허허!”
 꾸르르륵!
 끝끝내 칠선을 태우고 유유히 하늘 위로 솟구치는 학이라…….
 “…….”
 본좌는 그 어떤 말도 할 수가 없었다.
 두근!
 대신 이십 년 전 천하제일의 반열에 우뚝 선 그날보다도 가슴이 더 두근거렸다.
 “허허허!”
 칠선의 웃음소리에 본좌 또한 절로 미소가 지어졌고, 칠선의 얼굴이 너무나도 환하게 보이기까지 했다.
 정확히 부귀영화, 심지어 모든 내공을 다 버리는 한이 있더라도 우화등선을 하고 싶을 정도로 너무나 부러웠다.
 한데,
 “마제여, 그대를 처음 본 순간부터 그대 또한 우화등선을 할 수 있는 자질을 보았소이다. 하니 내가 말한 것들을 곰곰이 생각해 보시구려. 허허허!”
 본좌 또한 우화등선을 할 수 있다?
 일각 전이었다면 미친놈이라 욕설을 곧바로 내뱉을 일이었지만, 지금은 아무런 말을 할 수 없었다.
 하늘을 향해 서서히 올라가는 칠선이 그저 부럽고 또 부러울 따름이었다.
 
 그 후 열흘.
 “날 찾지 마라. 굳이 날 찾고 싶다면 하늘로 올라와라.”
 본좌는 결국 수많은 제자들이 바짓가랑이를 붙들고 매달려도 철웅성 성문을 박차고 나섰다.
 상사병에 걸린 것처럼 자나 깨나 우화등선을 한 칠선의 환한 얼굴이 자꾸만 떠올랐던 탓도 있었지만,
 “비루먹은 늙은이도 할 수 있는 걸 이 본좌 또한 못 할 듯싶으냐. 오냐, 조금만 기다려라. 내 반드시 선계 입선할 것이니.”
 오기.
 정확히 천하제일의 자존심에 금이 쩍쩍 갈라진 것과 진배없어 더는 철웅성 안에 있을 수 없었다.
 그리하여 인적이 드문 태을산에 거처를 잡고 그놈의 도를 추구하기 시작했다.
 ‘하늘은 만물의 아비요, 땅은 만물의 어미다. 물은 생명이며 바람은 삶이다…….’
 그렇게 칠선의 말과 그 오두방정 맞은 춤사위를 얼마나 되새기고 되새겼을까?
 한 해, 두 해가 지나고 종국에는 아홉 번이나 겨울을 맞이했다.
 그럼에도 하늘은 그 어떤 응답도 없었다.
 까악까악.
 간간이 까마귀 한 마리가 머리 위로 빙글빙글 돌 뿐.
 본좌는 지치기 시작했다.
 때때로 칠선에게 사기를 당한 것 같아서 당장이라도 철웅성으로 달려가고 싶었지만 이놈의 오기가 뭔지 하루하루 계속 버티는 본좌였다.
 그러길 또다시 일 년, 딱 십 년을 채울 무렵이었다.
 눈송이 하나가 눈앞에서 살랑거리다가 코끝에 닿는 순간 몸 전체에서 이상한 현상을 느낄 수 있었다.
 ‘가볍다. 너무나 가벼워!’
 마치 온몸이 허공에 둥둥 떠 있는 것 같은 이 느낌.
 더 나아가 세상사 모든 것들이 코에 닿은 눈송이처럼 유존무존(有存無存), 즉 존재하되 존재하지 않는 만물의 근원을 어렴풋이 알 것만 같았다.
 쿠르르릉!
 한데 그 순간, 갑자기 천둥소리가 울리면서 먹구름이 본좌의 머리 위로 모여드는 것이 아닌가!
 심지어 먹구름 중심에서 강렬한 빛이 창날처럼 뻗어 와 오직 본좌만 비추고 있었으니…….
 ‘드디어!’
 우화등선의 징후가 틀림없었다.
 아니나 다를까, 먹구름 사이에서 오색찬란한 점 하나가 잠시 맴돌다가 본좌를 향해 서서히 내려오는 것을 똑똑히 볼 수 있었다.
 주르르륵.
 본좌는 눈물이 절로 나왔다.
 “하하하하!”
 대소와 함께 어깨가 절로 덩실거리기도 했다.
 그보다 칠선과 달리 왜 학의 형체를 드러나지 않고 구체 형태만 계속 유지하면서 내려오는 것일까?
 하긴 칠선과 급이 다른 본좌이니, 학이 아니라 봉황이 마중 나온 것일 수도 있으리라.
 “그래, 어서 오너라! 하하하하!”
 본좌는 더더욱 구체를 반겼다.
 어느덧 오색찬란한 구체가 지상 아래로 내려오자 파안대소와 함께 두 다리를 가볍게 놀렸다.
 그러길 이 장 정도 발걸음을 옮겼을 때였다.
 “……!”
 본좌는 걸음을 뚝 멈추고 온몸을 비틀거렸다.
 구체에서 대뜸 이런 말이 툭 튀어나온 것이다.
 「저승사자를 이렇게 반갑게 맞이하는 인간이 있을 줄이야. 꽤 기특한 인간이군.」
 
 
 제1장. 가슴에 그것이 있도다
 
 “하! 하!”
 사파 제일봉이자 천하제일 흑천마제, 그는 헛웃음을 흘렸다.
 무위 득도의 길을 걸은 지 어언 십 년. 그간 신심이 나약해지고 인세가 그리운 적이 부지기수였지만, 우화등선의 일심(一心)만은 절대 변하지 않았다.
 더군다나 돈오(頓悟)와 같은 깨달음까지 얻은 상황이지 않던가.
 이런 마당에 영물이 아니라 저승사자가 내려왔다?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그러나 지금 눈앞에 있는 존재는 확실한 저승사자였다.
 구체가 내려오자마자 뱁새눈과 길게 찢어진 입술, 그리고 새하얀 낯짝과 함께 흑의 도포 자락까지 휘날리는 모습으로 곧장 바꿨으니까.
 더군다나 자신과 똑같이 닮은 한 늙은이가 뒤편에서 반듯하게 누워 있기까지 했으니…….
 “세상천지에 이런 개 같은 일이 어디에 있단 말인가. 어찌-!”
 흑천은 노기충천을 넘어 주화입마에 빠질 것 같았다.
 눈앞의 저승사자가 수작을 부린 것 같기도 하여 당장이라도 요절내고 싶었다.
 그럼에도 계속 화를 돋우는 저승사자였다.
 「어떤 삶을 살았는지 몰라도 전혀 억울할 것이 없을 것이다. 오히려 고통 없이 편안한 죽음을 맞이한 것에 감읍하고 또 감읍해야 할 것이다.」
 불난 집에 아예 기름을 퍼붓는 격이었다.
 흑천은 당연히 욕설밖에 나오지 않았다.
 “이런 육시랄 놈! 당장 날 본래대로 돌려놓고 돌아가라! 아니면 그 찢어진 입을 가로세로 완전히 찢어 줄 것이야!”
 「아무래도 힘으로 끌고 가야 할 것 같구나.」
 “갈!”
 우화등선도 하지 못한 채 어찌 저승사자의 뒤꽁무니를 졸졸 따라갈 수 있으리.
 흑천은 두 손을 있는 힘껏 말아 쥐었다.
 그 순간,
 「무(無)와 같은 영체가 반항해 봤자 무슨 소용이 있으리. 포!」
 싸아!
 흑천은 저승사자의 손바닥에서 시커먼 연기가 창날처럼 뻗어 나오는 것을 볼 수 있었다.
 단순한 연기가 아니었다.
 휘리리릭!
 연기가 주먹에 닿는 순간 뱀처럼 똬리를 틀듯 그대로 휘감아 버렸고, 계속 늘어나 몸 전체를 번데기처럼 칭칭 감아 버리기까지 한 연기였다.
 이 모든 것은 찰나지간.
 흑천은 앞을 볼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손가락 하나 까딱할 수 없었다.
 “음! 음!”
 “쯧쯧! 반항하면 할수록 너만 더 괴로울 뿐이다.”
 혀까지 차는 망할 놈의 저승사자.
 “카아!”
 흑천은 노기의 비명이 절로 튀어나왔다.
 한데 그 순간 몸 전체에서 너무나 익숙한 내력이 발산하는 것을 느낄 수 있는 것이 아닌가.
 찌지지지- 직!
 아니나 다를까, 연기 껍데기가 가차 없이 찢어지는 것을 느낄 수 있었고,
 「여, 영결 포승줄을 풀다니! 어, 어찌 이런 일이!」
 곧이어 보름달처럼 동그랗게 눈을 뜬 저승사자를 볼 수 있었다.
 더군다나 두 손에 강력한 강기가 맺혀 있는 것까지 확인할 수 있었으니… 역시 죽어도 천하제일 흑천마제였다.
 흑천은 엄한 목소리를 냈다.
 “다시 말한다. 당장 날 본래대로 돌려놔라!”
 “…….”
 하얀 얼굴이 시커멓게 변하기까지 하는 저승사자였지만 잠시일 뿐, 더 매서운 눈빛을 드러내며 쥐고 있던 영결 포승줄을 제 허리에 감기까지 했다.
 「이미 망자가 된 자가 어찌 생자가 될 수 있으리! 무엇보다 이 줄을 내 허리에 묶은 이상, 절대 풀 수 없을 것이다. 그러니 현세에 더는 연연하지 마라!」
 “오냐, 정 그렇게 나온다면 할 수 없지. 본좌 또한 이판사판이다!”
 과연 언제까지 떵떵거릴 수 있을까?
 흑천은 신형을 곧장 뻗었다.
 그리고 최대한 족치고 또 족칠 생각이었다. 본래대로 돌아올 때까지.
 「결!」
 한데 저승사자가 딱 한마디 하는 순간,
 “컥!”
 흑천은 격한 비명과 함께 온몸을 비틀거렸다.
 
 
 다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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