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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장

2015.12.24 조회 49,999 추천 862


 오유진이 정신을 차린 것은 두통 때문이었다.
 
 “어머! 벌써 깨어난 걸 보니 아팠나보지?”
 
 눈을 아무리 깜빡여도 마이너스인 그의 시야는 원색의 뿌연 형체만 보여주었다.
 
 붉은색 원피스를 입은 여인이 오유진에게 안경을 씌워주어 눈앞이 밝아졌지만 그것이 상황을 좋게 이끌어주지는 못했다.
 
 의자에 앉아있는 것을 깨닫고 일어서려던 오유진은 몸만 움찔했을 뿐이다.
 
 그의 머리와 팔다리, 허리에는 폭이 10센티 정도 되는 가죽 끈이 의자와 함께 묶여 있었다.
 
 “놀랄 것 없어.”
 
 놀라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을 만들어놓고 놀랄 것 없다니.
 자신을 왜 납치했는지 묻고 싶었지만 입천장에 혀가 붙어 움직여지지 않았다.
 
 “혀를 움직이지 못하는 건 네가 먹은 약 때문인데 곧 풀릴 테니 걱정하지 마. 그보다 아픈 곳은 없지?”
 
 -대치동 펠리스오피스텔 가려면 어디로 가야해요?
 그렇게 물었을 때처럼 여인은 눈웃음을 짓고 있었다.
 
 네비게이션이 고장 났다고 말할 때도 저 웃음이었고 비타500을 권할 때도 웃음은 변하지 않았다.
 여인이 오유진의 왼쪽으로 돌아 시야에서 사라졌다.
 
 “올해가 4수 째지? 내가 사는 곳이나 여기나 좋은 대학 가기는 힘들다니까.”
 
 그녀가 뭘 하는지 삐-! 하는 기계음이 들렸다. 오유진은 일단 자신이 알 수 있는 것부터 알아보기 위해 눈동자를 돌렸다.
 
 네 개의 형광등이 달렸고 배관이 그대로 드러난 천장에 여섯 개의 환풍기가 돌아가는 방이었다.
 가로가15미터, 세로도 그 정도 되는 것 같았다.
 
 시멘트가 그대로 드러난 벽에 창문이 하나도 없다는 건 지하실일 가능성이 높았다. 하지만 지하실 특유의 곰팡이 냄새나 습한 기운은 느껴지지 않았다.
 
 여인이 앉아있었을 바퀴 달린 사무용 의자 외에는 아무 것도 갖춰지지 않은 방은 한여름인데 냉기마저 감돌았다.
 
 기계음이 들렸으니 오유진의 뒤쪽에는 무언가가 있을 것이다.
 
 여인이 다시 시야 안으로 들어왔다. 바퀴의자를 뒤로 치운 여인이 오유진의 앞에 서서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그녀의 서선은 오유진의 정수리 근처에 머물러 있었다.
 깨어난 것도 두통 때문이었는데 감각을 모아보니 머리에 뭐가 씌워진 듯 갑갑했다.
 
 “좀 헐렁한가?”
 
 중얼거린 여인이 가까워졌다.
 그의 무릎에 그녀의 무릎이 닿았다. 따뜻한 체온을 가진 그녀의 무릎이 더 안쪽으로 파고들어 허벅지까지 이어졌다.
 
 눈동자를 아래로 내린 오유진은 할 수 있다면 비명을 질렀을 것이다.
 여인의 것보다 커다랗고 축 늘어진 그의 가슴은, 새끼 열두 마리를 벤 돼지처럼 튀어나온 배 위에 걸쳐져 있었다.
 
 지독한 비만인 그의 몸은 열두 살부터 새삼스러울 것도 없었다. 문제는 그의 살들이 모두 보인다는 것이다.
 
 여섯 살 이후 누구에게도 보인 적인 없는 나체로 그는 묶여 있었다.
 
 타이트한 와이셔츠에 가린 여자의 큰 가슴이 눈앞에서 좌우로 흔들렸다. 머리 바로 위에서 볼트 같은 걸 조이는지 끼릭끼릭 하는 소리가 들리더니 관자놀이에 압박이 느껴졌다.
 
 “이 정도면 됐겠지.”
 
 한 발짝 물러난 여인은 허리에 손을 얹고 오유진과 그 주변을 훑어보았다.
 
 “오케이! 준비는 완벽해.”
 또 그 눈웃음.
 
 “흠. 살에 파묻혀서 그렇지 물건은 제법 튼실한데?”
 
 여인의 시선은 오유진의 몸 중심에 머물러 있었고, 그는 창피해서 죽을 수도 있다는 사실을 처음 알았다.
 
 짝!
 주위를 환기시키듯 손뼉을 친 그녀가 말했다.
 
 “이제부터 오유진 네가 처한 상황을 설명해 줄게. 넌 어떤 곳에 가서 어떤 여자를 구해야 해. 알겠지?”
 ‘알다니? 뭘?’
 
 더 설명이 이어져야 하건만 여인은 그리 친절하지 않았다.
 
 “네가 그 여자를 구하게 되면 훌륭한 대가가 있을 거야. 뭐냐면.... 에... 어디 뒀지? 아! 저기 있군.”
 
 두리번거리던 여인은 다시 오유진의 시야 밖으로 사라졌다가 나타났다. 그녀의 손에는 가벼운 등산을 할 때 매는 작은 가방이 들려 있었다.
 
 “너희 집이 제법 부자인 건 알지만 그렇다고 네가 부자인 건 아니잖아?”
 
 그에 대해 속속들이 알고 있는 걸 보니 이 납치가 실수는 아닌 모양이다.
 
 “더구나 넌 집안의 골칫덩어리고.”
 
 심하게 자세히 알고 있었다.
 여인은 가방의 지퍼를 열어 내용물을 보여주었다. 가방 안에는 오만 원짜리 지폐다발이 가득 들어있었다.
 
 “2억이야. 네가 해야 할 여행에 대한 대가지. 사실 여행보다는 조금 더 위험하지만 낯선 곳으로 떠나는 거고 다시 돌아오기 위해 가는 것이니 여행과 그리 다르지 않잖아? 그런 의미에서 널 여행자라고 부르면 좋겠다. 흠, 낭만적이고 멋진 이름이야.”
 
 가방을 바닥에 던진 여인의 웃음이 짙어졌다.
 
 “하지만 네가 받는 진짜 대가는 저 따위 돈과는 비교도 할 수 없어. 널 봐. 몸무게는 150킬로를 훌쩍 넘고 안경이 없으면 앞도 잘 보지 못하는 난시에 집안에 민폐만 끼치는 사수생이라니!”
 
 오유진 자신의 처지를 확실하게 설명해주고 있지만 여인의 입에서 직접 듣고 있자니 세상에서 가장 불쌍한 인간의 표본 같았다.
 
 “심지어 당뇨병도 있지.”
 확인사살까지.
 
 “하지만 이번 여행이 네 비참한 인생을 완전히 바꿔줄 거야. 정신이 육체를 지배한다는 말은 세상의 모든 명언 중에서 가장 옳은 말이야. 결국 뇌가 육체의 모든 걸 결정하거든.”
 
 여인이 하는 말은 알아들을 수 있었지만, 내용은 프랑스어를 성능 떨어지는 자동번역기로 돌려놓은 것처럼 이해할 수 없었다.
 
 “But! 그러나! 상이 있으면 벌이 있는 게 세상의 당연한 이치지. 너와 내가 속한 공간이 다르다 하더라도 말이야.”
 
 여인이 그와 시선을 맞추기 위해 허리를 숙였다. 위쪽 단추 두 개가 풀린 와이셔츠 안으로 그녀의 깊은 가슴골이 보였다.
 
 “반드시 그녀를 구해야 해. 임무에 실패하면 넌 어둠의 공간에서 영원히 배회하게 될 거야.”
 그 말을 할 때 여인은 웃지 않았다.
 
 어둠의 공간에서 영원한 배회가 무엇을 뜻하는지 감조차 잡을 수 없지만 왠지 정말 그렇게 될 것 같았다.
 
 “그럼 여행을 시작해 볼까? 그 전에 이빨 나가지 않으려면 이거 물고....”
 
 여인은 가방 안에서 투명한 마우스피스를 꺼내 오유진의 입에 물렸다.
 
 그리고 다시 시야에서 사라진 후 딸깍거리는 소리가 들리더니 위잉-! 하는 기계음이 전해졌다. 납치에 이어지는 이해할 수 없는 상황은 오유진을 미지의 공포로 몰아넣었다.
 
 가슴은 요동치고 혈당이 떨어질 때처럼 어지러웠다. 흐르는 식은땀으로 그의 생명이 줄줄 빠져나가 금방이라도 숨이 끊어질 것 같았다.
 
 “겁먹지 마. 이제 시작일 뿐이니까.”
 
 진정하라고 다독이는 것 같지만 절대 진정할 수 없는 말을 뱉은 여인이 시야에 들어왔다.
 
 “어금니 꽉 물어. 조금 아플 테니까.”
 
 갑작스럽게 밀려든 고통을 여인에게 느껴보라고 하고 싶었다.
 
 이건 감히! 절대! 결단코! ‘조금’이라고 말할 수 없는 고통이었다.
 
 드릴이 뇌를 파고들어 눈으로 나오고 척추를 거슬러 내려가 내장을 휘젓는, 그 어떤 표현으로도 백배는 부족한 차라리 죽음을 갈망하게 만드는 형벌이었다.
 
 “으어어어...!”
 
 너무 큰 고통에 안 나오던 목소리까지 삐져나왔다.
 
 “흠. 이제 때가 됐군.”
 
 허리 뒤로 돌아갔다가 나온 여인의 손에는 검 한 자루가 들려 있었다. 형광등 불빛을 받아 은색으로 반짝이는 검은 날과 손잡이 모두 금속으로 이루어진 30센티 정도의 단검이었다.
 
 고급스러운 식도의 칼등에 날을 세우면 저런 모양이 될 것이다.
 
 “부디 살아서 돌아오길.”
 
 
 크게 한 발을 내딛은 여인이 오유진의 가슴을 향해 검을 찔러 넣었다.
 
 
 
 (다음에 계속...)

댓글(48)

[탈퇴계정]    
블랙듀티 기대!
2015.12.30 17:55
가온뫼라온    
표지와 소개글이 재밌어 보이네요!
2016.01.01 17:19
무가지보    
잘 보고 갑니다
2016.01.02 19:54
he*****    
잘보고갑니다
2016.01.03 17:20
진주석    
조금난잡함이..
2016.01.07 17:50
렌마르크    
이런 비너스빤스 같은 뇬을 보았나! 갠 그래도 하다못해 사기계약 흉내라도 내었지 이건 그냥 묻지마 납치잖아
2016.01.09 17:56
청광류    
뭔가 2차원 용병 같은 분위기?
2016.01.10 20:54
세우깡    
시작부터 암유발...
2016.01.13 15:59
pr*****    
건필하십시오
2016.01.14 23:55
조르크    
부지인 건 => 부자인 건
2016.01.15 09: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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