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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이드 택틱스 1권

2016.01.18 조회 1,548 추천 31


 # Opening. 되는데요
 
 삐익-.
 날카로운 소리와 함께 TV가 켜졌다.
 리모콘을 손에 쥔 청년은 잠이 덜 깬 듯한 눈으로 팬티를 벅벅 긁으며 방에서 화장실로 향했고 잠시 후 조금은 개운해진 표정으로 다시 화장실을 나왔다.
 그때 TV속에서는 한 여자 MC가 격앙된 목소리로 누군가를 소개했다.
 “바로 오늘 새벽 4시! 타임리스 사가에서 불가능으로만 여겨졌던 일이 실제로 벌어졌습니다!”
 “응?”
 그 흥분된 기운에 소파에 앉으려면 청년, 태민도 잠시 동작을 멈추고 TV를 바라봤다.
 타임리스 사가라면 태민 역시도 즐기고 있는 게임이었으니까.
 “설마…….”
 “절대, 불가의 영역이라고 알려졌던 마의 장벽, 투(TWO) 클래스 마스터를 이룩한 유저가 나온 것입니다!!”
 “오오오오!!!”
 흥분은 관중들에게로 옮겨갔고.
 “그래서, 저희가 어렵게 모셨습니다. 기사 클래스 마스터이자 마법사 클래스 마스터! 마검사 발칸 님이십니다!”
 “와아아아아-!”
 흥분은 곧 열광으로 변했다.
 아직 하나의 클래스를 마스터 한 유저의 수도 천을 넘지 않는데 벌써 투 클래스 마스터라니!
 실로 경이로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하나의 클래스를 마스터하고 두 번째 클래스를 키우는데 필요한 경험치는 무려 두 배에 달했으니까.
 거기다 레벨보다 올리기 어렵다고 평가되는 숙련도를 올리기 위해서는 두 배 그 이상의 노력이 투여됐단 소리다.
 “발칸! 발칸! 발칸!”
 수많은 사람들의 연호 속에 발칸이라 불린 사내가 스튜디오에 모습을 드러냈다.
 이런 자리에 익숙한 듯 손을 들어보이는 여유까지.
 하기야, 타임리스 사가 속에서도 가장 큰 길드를 이끌고 있는 그였으니 이 정도에 벌벌 떠는 것은 말이 안 되는 일이다.
 자리에 앉고, 소란이 가라앉자 마이크를 가져가며 발칸이 입을 열었다.
 “안녕하세요. 마검사 발칸입니다.”
 “와아아아-!”
 또 한 번 소란이 일었다. 스스로 마검사라 밝히는 그의 당당함이 모두를 흥분시킨 것이다.
 진행을 위해 MC이 겨우 관객들을 진정시키고 나서야 겨우 첫 질문이 이어졌다.
 “발칸님. 어제, 아니 오늘 새벽에 드디어 투 클래스 마스터를 달성하셨는데요. 심정이 어떠신가요?”
 “네. 우선 무척 감격스럽습니다. 그리고 저를 위해 희생해준 길드원들에게 감사하다는 말을 전하고 싶습니다.”
 또 다시 함성이 터지고 MC들의 몇 가지 질문이 더 이어졌다.
 그때 다시 심드렁한 눈빛으로 변한 태민이 리모콘을 들고 일어났다.
 “난 또 뭐라고…….”
 투 클래스 마스터. 분명 대단하고 놀라운 일이다.
 그러나 그와는 별 상관없는 일이다. 차라리 최근 노리고 있던 콘돌 유적의 공략 소식이라면 열을 냈을까.
 “그럼 이제 쓰리 클래스 마스터에 도전하시는 건가요?”
 한참을 떠들며 그의 업적을 칭송하기 바쁘던 MC 중 하나가 물었다.
 “하하. 그랬으면 좋겠지만……. 무리라고 봅니다.”
 “아니, 왜죠?”
 당연히 도전을 외칠 줄 알았던 MC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실은 이미 세 번째 클래스를 선택해서 키우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건 뭐……. 사람이 할 짓이 아니다 싶더군요. 쓰리 클래스 마스터가 나오려면 적어도 2년은 더 있어야 한다고 확신합니다. 아니 이 게임이 사라지기 전까지 가능한 일인지도 모르겠군요. 당장 다음 투 클래스 마스터가 나오기까지도 몇 개월은 더 걸릴 테니까요.”
 삐익-.
 태민이 손가락을 놀려 TV를 껐다. 리모콘을 소파에 던져두고 꺼진 TV를 무심히 바라보며 살짝 입을 열었다.
 “불가능하다고?”
 다시 방으로 들어간 태민은 습관적으로 컴퓨터를 켜 타임리스 사가에 접속했다.
 화면 안에 나타난 그의 캐릭터.
 
 루인
 Lv. 307
 
 발칸이 불가능이라 말하던 쓰리 클래스 마스터가 바로 그곳에 있었다.
 잠시 자신의 캐릭터를 감상하던 태민의 입이 이죽거리며 열렸다.
 “되는데요.”
 
 
 # Chapter. 1 공략왕 루인
 
 3개월 전, 온 국가를 떠들썩하게 만든 사건이 발생했다.
 바로 가상현실게임의 등장.
 그간 가상현실을 표방하는 게임이 없던 것은 아니나 말뿐인 가상 현실이었다.
 기껏해야 마을 하나를 돌아다니는 ‘기분’만 낼 수 있고 그러다보니 한 자리에 모일 수 있는 유저의 수도 극히 제한적이었다.
 많은 게이머들이 손꼽아 기다리던 그런 ‘새로운 세상으로의 모험’과는 거리가 있었다.
 그러던 중 하늘에서 뚝 떨어지듯 진짜가 나타났다.
 최초의 다중접속 가상현실게임 이터널.
 (주)바빌론이라는 제작사도 생소했지만 개발 소식 하나 없이 클로즈 베타 서비스를 내놓은 이터널은 플레이를 해본 이들의 엄청난 흥분과 환호를 받으며 입에서 입으로 퍼져나갔다.
 최초의 ‘진짜’ 가상현실.
 덕분에 들뜬 것은 게이머뿐이 아니었다. 게임을 하지 않던 이들까지 두근거리며 오픈 베타 서비스를 기다렸다.
 더 놀라운 것은 클로즈베타 후 고작 한 달 보름 만에 정식 오픈과 함께 상용화를 선언했다는 것!
 그것도 백만 원이 채 되지 않는 저렴한 보급형 기기와 함께 말이다.
 지금까지의 어설픈 가상현실 기기들도 수백만 원을 호가했다는 것을 생각하면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었지만, 이터널의 제작사인 (주)바빌론은 그것을 가능하게 만들었다.
 때문에 정부의 특혜를 받았다, 정부에서 비밀리에 키운 집단이라는 등의 추측들이 난무했지만…….
 “다 헛소리지.”
 우리나라뿐이라면 혹시 모를 일이다. 그러나 이터널은 전 세계 동시 발매에 동시 보급이라는 말도 안 되는 예고를 내걸었다.
 전 세계가 기다리는 게임.
 일 분, 일 초를 카운트해가며 서버 오픈을 기다리는 게임.
 지금까지 없었던 대작임은 분명했다. 아니, 대작이라는 말 정도로는 표현이 안 됐다. 이미 이터널의 존재는 하나의 신드롬이었고 게임 산업 전체를 뒤흔드는 패러다임의 변화요, 일련의 사건이었다.
 누군가는 세계 2차 대전에 비교하기도 할 정도였다.
 “후우……. 나도 준비해볼까?”
 그리고 바로 오늘, 대망의 정식 오픈을 실시할 예정이었다.
 태민 역시도 이터널의 영접을 위해 만반의 준비를 해놓고 기다렸다. 남들과 다른 것이 있다면 이미 클로즈 베타 서비스를 통해 이터널을 경험해보았다는 것일까.
 이터널에 대한 입소문이 이렇게 빠르게 퍼질 수 있던 계기가 바로 각 게임의 스타플레이어들만을 모아 클로즈 베타 서비스를 진행했기 때문이다.
 태민 역시도 타임리스 사가의 유명인으로서 이터널의 클로즈 베타 서비스에 초청 받았다.
 최강자의 칭호를 갖지도 못했고 쓰리 클래스 마스터라는 사실도 밝혀지지 않았지만 태민의 캐릭터 루인은 발칸 못지않은 유명 인사였다.
 공략왕 루인.
 모든 것을 공략하는 자.
 퀘스트를, 던전을, 전투를 공략하는 자.
 가장 강하지는 않지만 준비된 싸움에는 절대 지지 않는다는 ‘준비된 자’.
 그리고……노가다 마스터!
 그것이 바로 공략왕이라 불리는 태민의 캐릭터 루인이었다.
 꿀꺽.
 마른 침을 삼키며 태민의 얼굴 근육이 꿈틀 거렸다.
 “5, 4, 3, 2……1!”
 드디어 시간이 되었다.
 “접속.”
 동시에 시야가 까맣게 변하며 정신이, 영혼이 어디론가 빨려드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longway, *********.”
 준비 한 대로 ID와 Password를 읊자 눈앞에 붉은 빛이 번쩍였다. 순간 눈을 깜박였지만 상관없다. 홍채인식은 이미 끝난 상태일 테니까.
 “스킵.”
 오프닝 영상이자 이터널이 ‘진짜’ 가상현실게임이라는 것을 각인시켜줄 환경의 변화에 루인은 단호히 스킵을 외쳤다.
 동시에 픽- 하고 사라져버리는 배경.
 한 마리 새처럼 하늘을 날아가며 대륙의 곳곳을 누비는 체험을 과감히 포기한 루인의 앞에 전신 거울 하나가 나타났다.
 그곳에 반사되어 비치는 익숙한 모습.
 
 루인
 Lv. 1
 
 베타테스터의 특권으로 아이디 선점과 함께 생성되어 있는 그의 캐릭터였다.
 “접속.”
 거울에 한 손을 얹고 말하자 그의 몸이 거울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으음.”
 몸을 기울여 쑥 들어가버린 루인이 다시 나타난 곳은 어느 한 마을의 광장이었다.
 어둠속에서 갑자기 빛으로 나온 것처럼 어질거렸지만 루인은 얼른 정신을 차리고 방향을 가늠했다.
 “제길.”
 그리고는 욕지거리와 함께 바람처럼 달리기 시작했다.
 자신을 앞서가는 일단의 무리를 발견한 것이다.
 루인과 같은 베타테스터들이다.
 베타테스터가 아니고서는 지금 루인의 앞을 달릴 수 없었다. 오프닝 영상에 심취해 한참의 시간을 보내거나 오프닝을 과감히 점프했더라도 캐릭터를 생성하기에는 모자란 시간이니까.
 그렇다면 저들의 목적지는 뻔했다.
 “늦으면 곤란한데…….”
 퀘스트.
 베타 테스트 때 겪어보았던, 곧 사람이 몰릴 것으로 예상되는 퀘스트 지점으로 향하는 것이다.
 딸랑.
 한참을 달린 루인이 거칠게 문을 열고 들어섰다.
 퀘스트를 위해 줄을 선 이들의 수는 다섯. 그렇게 늦지는 않은 모양이었다.
 하긴, 테스터 성향에 따라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1순위 퀘스트는 다를 테니까.
 더욱이 20레벨 이전까지 머무르는 이곳 초보존은 본토라 불리는 실제 필드와 다른 시스템을 적용하고 있었다.
 바로 채널 분리.
 과도하게 초반 인원이 몰려 서로가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상황을 방지하기 위해 평행차원처럼 동일한 세상(초보존)을 다수 생성하며 무작위 배치하는 것이다.
 처음부터 함께 플레이 하고자하는 이들을 위해 채널 이동 기능을 지원하고는 있지만 혼란을 막기 위해 1명의 캐릭터 당 단 한 번으로 제한했다.
 루인은 누군가 뒤따라오기 전에 얼른 줄을 섰다.
 “안녕하세요. 제인. 혹시 뭔가 도와드릴 일이 없을까요?”
 “아, 루인씨. 오랜만이에요. 그러고 보니 하나 부탁드릴 일이 있네요. 이것을 엘리사 아주머니께 전해주시겠어요?”
 띠링.
 준비된 멘트를 던지자 희뿌연 창과 함께 퀘스트가 발동했다.
 퀘스트 명은 ‘제인의 부탁’.
 제인에게 퀘스트를 요구하면 100% 확률로 발생하는 퀘스트였다.
 단, 심부름의 대상이 누구일지는 랜덤.
 그에 따른 보상도 랜덤이다.
 “쳇.”
 퀘스트를 받아 나오는 루인의 표정이 썩 좋지 못했다. 심부름의 대상에 따라 퀘스트의 보상이 달라지는 탓이다.
 이 퀘스트의 베스트는 대장간 푸터로의 심부름. 대장장이인 그에게 물건을 가져다주면 사냥과 도축에 쓸 수 있는 작은 칼을 선물해 주었다.
 [무딘 단검]만도 못한 공격력이지만 무딘 단검의 가격을 생각하면 어마어마한 혜택이 아닐 수 없다.
 더구나 작은 칼은 도축 스킬을 익힐 시 꼭 소지해야하기 때문에 어쨌든 사야하는 아이템이기도 했다.
 베타테스트 당시에도 도축은 초반 돈벌이에 가장 좋은 스킬로 꼽혔으니까.
 반면 루인이 부탁 받은 엘리사는?
 이름도 기억하기 힘든 평범한 마을 주민 NPC였다.
 심부름을 한다 해도 운이 좋으면 얼마간의 돈을 줄 테고 운이 나쁘면 간식거리, 심하면 식재료 정도나 주겠지.
 “그래도 목적은 그게 아니니까.”
 그나마 다행인 것은 엘리사가 잡화점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다는 것이다.
 루인은 서둘러 엘리사를 찾아 물건을 전달한 후 수고비로 달걀 두 개를 받아 돌아왔다.
 “제인. 혹시 뭔가 도와드릴 일이 없을까요?”
 다시 돌아온 루인이 묻자 제인은 또 다시 심부름 퀘스트를 주었다.
 그리고 또 한 번.
 총 세 번의 심부름 퀘스트를 마치자 띠링하는 기계음과 함께 알림창이 생성되었다.
 
 
 # Chapter. 2 달려라, 달려!
 
 [칭호 ‘해 뜨는 마을의 부지런한 일꾼’을 얻으셨습니다.]
 
 해 뜨는 마을이란 극악한 작명 센스가 돋보이는 이 초보자 마을의 이름이다.
 운도 없게 루인은 두 번의 심부름에서 당근 하나와 5쿠퍼라는 쌈짓돈을 얻었을 뿐이지만 개의치 않았다.
 운이 없는 것이 하루 이틀일도 아니고 애초에 이 퀘스트를 연속해서 수행한 이유는 따로 있었기 때문이다.
 
 [칭호 ‘해 뜨는 마을의 부지런한 일꾼’]
 - 해 뜨는 마을을 위해 열심히 일하는 부지런한 일꾼에게 주어지는 칭호.
 - 해 뜨는 마을의 모든 상점과 여관의 이용 요금 10% 할인.
 
 “오케이.”
 루인이 획득한 칭호를 확인하는 사이 어느새 잡화점 내부는 북적거리고 있었다.
 이미 퀘스트와 칭호에 대해 알고 있는 베타테스터들과 이제 막 접속해서 뭐가 뭔지 모르는 자들이 한데 뒤엉킨 것이다.
 하지만 서로가 퀘스트를 달라고 소리만 지르고 있는 탓에 퀘스트의 수급과 완료가 정상적으로 진행되고 있지는 못했다.
 조금만 늦었으면 같은 신세였을지 모른다는 생각에 고개를 저으며 루인은 잡화점을 빠져나왔다.
 ‘이상하기는 해.’
 이것만 보더라도 확실히 베타테스터가 압도적으로 유리하다. 이 불친절한 게임에서 무엇을 먼저 해야 할지 알고 있고, 어떤 현상이 벌어질지 예측 할 수 있었으니까. 마치 그들에게 일부로 빨리 성장 할 수 있는 발판을 마련해주는 모양새다.
 ‘어쨌든 땡큐긴 하지.’
 그러나 깊게 생각하지는 않았다. 어쨌든 자신은 선두 그룹이고, 이득을 보는 입장이었으니까.
 자, 그럼 다음은 어떤 퀘스트를 받을까?
 답은 이미 정해져있다.
 그는 ‘준비하는 자’.
 이미 다음 단계에 대한 안배는 모두 이루어져 있는 상태였다.
 잡화점을 나선 루인은 기억을 더듬어 한 NPC의 집으로 들어갔다.
 북적이는 바깥과 달리 아무도 찾지 않는 허름한 판잣집.
 그곳에는 금방 숨이 넘어갈 것만 같은 병든 소녀 NPC, 제나가 병석에 누워 있었다.
 퀘스트나 보상을 주기는커녕 약값을 내놓으라는 강제 퀘스트라도 줄 것만 같은 인상에 혹시나 하고 들어왔던 몇몇도 재빨리 문을 닫고 달아나버리기 일쑤였지만 루인은 제나의 두 손을 꼭 잡고 들릴 듯 말 듯한 대화를 주고받았다.
 “그럼 다녀올게.”
 귀중한 시간을 쪼개어 대화를 이어가던 루인이 퀘스트 발생과 함께 자리를 털고 일어섰다.
 제나는 그런 루인을 병석에서 기대의 눈으로 지켜보았고 판잣집을 나서는 순간, 루인이 또 다시 달리기 시작했다.
 이번에는 마을 안이 아닌, 마을 밖을 향해서였다.
 “응?”
 루인을 본 적 있다고 느낀 베타테스터 하나가 그 모습에 고개를 갸웃거렸지만 이내 다시 퀘스트를 받기 위해 분주히 움직였다.
 지금은 일 분 일 초가 중요한 게임의 극초반이었다.
 “하앗!”
 “몰아, 몰아!”
 “잡아!”
 마을의 입구에는 토끼와 개구리 따위의 하급 동물들을 잡으려는 자들로 장사진을 이루었다.
 일반 게임들과 같이 레벨 1부터 사냥을 통해 경험치를 얻으려는 잘못 된 생각에서였다.
 “헉헉, 겁나 빠르네.”
 “토끼가 이렇게 빠른 거였나?”
 그런 자들에게 루인은 눈길조차 주지 않고 도로를 따라 마을에서 멀어졌다.
 이터널에서는 1레벨의 초보자가 토끼를 잡기도 어려울 뿐더러 어찌어찌 사냥에 성공한다고 해도 몇 마리만으로 레벨 업을 할 만큼 많은 양의 경험치를 주지 않는다.
 토끼 고기나 토기 가죽을 모아오는 퀘스트가 있다면 퀘스트 완료 보상으로나 경험치를 제법 받을 수 있을까 초반에는 무작정 사냥에 나서는 이른 바 닥사만으로는 극악한 레벨 업 난이도를 보이는 것이다.
 몬스터 사냥에 대한 이터널의 원칙은 하이 리스크 하이 리턴.
 상대적으로 위험성이 거의 없는 초식 동물류의 경험치는 거의 없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이와 같은 삽질은 베타서비스 당시에도 똑같이 반복되었던 일이고, 베타테스터들이 발바닥에 불이 나도록 마을을 누비며 퀘스트를 해치우는 이유였다.
 때문에 일단 마을 안에서 기술을 배우거나 레벨을 올려서 육체적인 능력을 상승시킨 후 사냥에 나서는 것이 정석이라 할 수 있다. 베타테스터 중 그런 사실을 알려 이점을 포기할 사람은 아무도 없었지만.
 이런 면에서 확실히 지금의 이터널은 베타테스터들을 과도할 정도로 우대해주고 있었다. 특별한 아이템이나 스킬을 제공하지는 않았지만 캐릭터 사전 생성으로 미세하지만 출발선에서 먼저 떠날 수 있게 해준 것, 그리고 초보존에 한해서이지만 사전에 정보를 얻을 수 있게 한 것은 대놓고 그들에게 치고 나가라 종용하는 것과 같았다.
 베타 테스트에 참여한 사람들이 어디 보통 인간들인가? 폐인 중에서도 최고로 치는 인간들이다.
 실제 가장 빠르게 경험치를 쌓고 있는 것은 베타테스터들이었다. 루인처럼 각자가 초보존에서의 레벨 업 동선을 연구했을 뿐 아니라 한 번씩 걸어본 길이고 레벨 업 과정이니 훨씬 수월한 것이 당연하다.
 루인은 게임사의 이러한 특혜 아닌 특혜가, 게임 초반 그들의 스타성을 통해 후발주자들에게 동기부여를 하기 위함이 분명하다고 생각했다.
 “이쯤인가?”
 잠깐 딴 생각을 하는 사이 루인은 누구의 시선도 닿지 않을 만큼 먼 곳까지 달려나왔다.
 관도를 따랐기에 몬스터가 튀어나오지는 않았지만 길을 벗어나 조금만 움직여도 지금의 그가 상대 할 수 없는 몬스터들이 득실득실할 터였다.
 그리고 그것이 루인이 원하던 바였다.
 
 [둔한 고블린의 숲을 발견하셨습니다.]
 [발견 경험치 50을 획득합니다.]
 [퇴화한 코볼트의 숲을 발견하였습니다.]
 [발견 경험치 50을 획득합니다.]
 [노쇠한 오크의 숲을 발견하셨습니다.]
 [발견 경험치 100을 획득합니다.]
 [레벨 업을 하셨습니다.]
 
 신규 지역을 발견할 만큼만 최소한의 영역에 접근한다. 그리고 발견 경험치를 획득하는 즉시 안전하게 대로로 돌아온다.
 이것이 루인의 전략이었다.
 뭘 해 볼 수 없을 만큼 포화 상태에 이를 것이 예상되는 마을 퀘스트로부터 벗어나는 방법이었고 누구보다 빠르게 레벨 업을 할 수 있는 꼼수였다.
 50, 100씩 오르는 발견 경험치.
 나중에 레벨이 오르면 티끌처럼 느껴지는 적은 양의 경험치지만 극초반에는 충분히 레벨 업이 가능할 만큼 큰 수치다.
 실제로 몇 번 관도를 벗어나 왔다 갔다 하는 사이 레벨은 두 단계나 올랐고 루인은 레벨 업을 하며 획득한 스탯 포인트를 모두 힘에 투자했다.
 더 빠르게 레벨 업을 할 생각이라면 민첩에 투자하는 것도 좋았으나 언제까지 이 짓을 계속 할 것은 아니었고 힘을 투자하면 미약하게나마 스태미나 상승 효과도 있어 더 오래 달릴 수 있는 장점이 있다.
 “흐음, 여기까지인가?”
 그렇게 한 시간여. 기억을 되짚어 한 참을 더 달리던 루인이 어느 순간 걸음을 멈췄다.
 안전한 관도를 중심으로 위험 없이 발견 할 수 있는 지역의 한계에 맞닿은 것이다.
 이제 새로운 지역을 발견하려면 한 방만 맞아도 죽음을 맞게 될 강한 몬스터들이 있는 곳으로 들어가야 했다.
 돌아갈 것인가. 계속 나아갈 것인가.
 “하나, 둘, 셋.”
 후욱. 잠시 심호흡을 한 루인이 눈을 빛내며 한 방향을 향해 몸을 돌려 뛰어갔다.
 
 
 # Chapter. 3 전직
 
 [오크부족의 순찰지를 발견하셨습니다.]
 [발견 경험치 300을 획득합니다.]
 
 “취익, 취익.”
 투둑 투둑.
 수풀을 헤치는 격한 뜀박질 소리에 순찰을 돌던 오크들이 반응했다.
 멈추면 죽는다.
 오크 순찰자 무리가 자신을 향해 돌아서는 순간 루인은 직감했다. 지금으로서는 한 칼도 버텨 낼 수 없는 오크 정찰병의 시미터가 등짝을 꿰뚫을 것이다.
 으득.
 루인은 이를 꽉 깨물며 몸을 낮췄다.
 쐐액-.
 바람을 가르는 서늘한 화살대의 소리와 감촉이 루인의 어깻죽지를 스쳤다. 화한 느낌과 함께 체력이 뭉텅 깎여져나갔지만 개의치 않았다.
 아니, 체력이 0이 되어 죽지 않은 것이 다행이다.
 “윽.”
 연이어 감각에 들어온 불길한 느낌에 루인이 비틀대듯 몸을 흔들어댔다.
 어김없이 오크들의 시미터가 뒤땅을 팠다.
 오직 육체적인 힘에 의존해 공격하는 오크들. 우직할 정도로 정직한 공격 루트가 초보존 오크들의 공략 포인트였다.
 그렇다고 쉬이 생각할 수는 없었다. 오크들과의 레벨차이 때문에 유저들의 능력을 생각할 때 보고도 못 피할 수 있는 것이다.
 5레벨을 달성한 사람조차 없는 현재로서는 재앙 같은 힘이다.
 루인도 왠지 모를 불길한 느낌에 몸을 움직여 피한 것이지 보고서 피하려 했다면 무조건 죽음을 맞이했을 것이다.
 그때부터 루인의 움직임이 조금 달라졌다. 가고자 했던 길이 아니라 숲 쪽으로 몸을 날렸다.
 나무에서 나무 사이로. 어지러울 만큼 정신없게 나무 사이로 몸을 날렸다.
 체력 소모는 컸지만 오크 궁수의 화살과 오크 정찰병의 시미터를 피하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파박 팍.
 루인의 예측대로 그가 지나친 나무들에 화살과 시미터가 박혀들어갔다.
 머리가 나쁜 초보존의 오크들이 그의 이동 경로를 예측하고 막아설 생각을 하지 못하고 눈에 보이는 위치를 향해 화살을 날리고 칼질을 해대는 것이다.
 푹!
 개중에는 조준을 잘못해 아군을 맞추는 멍청한 오크 궁수도 있었다.
 치명상이라면 되돌아가 마무리 일격이라도 노려볼법하지만 불행히도 오크궁수의 조잡한 화살로는 어림없는 일이다.
 “쩝.”
 슬쩍 뒤를 돌아보며 입맛을 다신 루인은 계속해서 나무 사이로 나아갔다.
 이동 속도도 더디고 재수 없게 앞을 가로막는 오크가 있다면 꼼짝없이 죽어야 할 판이지만 이대로 죽어주기엔 너무 아깝지 않은가?
 스태미나가 바닥을 보이고서도 5분여가 더 흘렀을 때, 거친 숨을 헐떡이며 루인이 멈추어섰다.
 “터치다운.”
 
 [오크부족의 전초기지를 발견하셨습니다.]
 [발견 경험치 500을 획득합니다.]
 [레벨 업을 하셨습니다.]
 
 푸욱.
 그 소리와 함께 루인의 시야가 까맣게 변했다.
 
 첫 번째 죽음.
 그로인해 처음 시작했던 마을로 돌아온 루인은 판잣집으로 돌아가 퀘스트를 마쳤다. 바깥에 세상을 돌아보고 그에 대해 이야기를 해주는 퀘스트. 일단 ‘발견한’ 지역은 많았던 덕에 상당량의 경험치가 들어왔다.
 퀘스트가 완료되었음을 확인한 루인은 담담하게 상태창을 열었다.
 
 루인
 Lv. 5
 
 10레벨 이전까지는 죽어도 경험치가 하락하지 않는 덕에 레벨이 떨어지거나 하지는 않았다.
 “아이템 창.”
 레벨 업을 하면서 획득한 스탯을 모두 힘에 투자하고 이번에는 아이템창을 열었다.
 달걀 하나와 당근 하나. 그리고 5쿠퍼.
 퀘스트를 하지 않았으니 쓸 만한 아이템이 있을 리 없다.
 달걀과 당근을 꺼내 먹으며 루인은 다음 목적지로 걸음을 옮겼다.
 요리를 해서 먹는다면 포만감 수치가 더 크게 오를 테지만 지금은 그럴 여유도, 요리 스킬도 없었다.
 “어서 오십시오. 마법사 길드입니다.”
 루인이 찾은 곳은 5레벨부터 마법사로의 전직이 가능한 마법사 길드였다.
 아직 레벨을 올린 사람이 적어서일까? 마법사 길드에는 사람이 많지 않았다.
 그나마도 퀘스트가 없을까 기웃대는 사람과 마법을 구경을 하러 온 사람이 대다수였다.
 아니다. 사실은 다른 이유가 컸다.
 RPG룰을 따르는 경우 초반에 무자본으로 가장 빠르게 성장하고 돈을 모을 수 있는 직업은 근거리 클래스. 즉 기사나 전사였다.
 마법 가격이 비싼 마법사나 화살 값이 만만치 않은 궁수 등과 달리 기사나 전사는 몸으로 때우면 그만이니까.
 또한 거리를 재고, 마법의 쿨타임이나 화살을 재는 시간을 기다릴 필요 없이 붙어서 막고, 피하고, 때리면 그만이었다.
 때문에 실제 베타테스트 당시 플레이한 유저 중 80%가 근거리 클래스로 시작할 정도였다.
 그것은 루인도 역시 마찬가지였다.
 베타테스트 기간은 매우 짧았으니까.
 하지만 정식 오픈이 이루어진 지금은 달랐다.
 지금은 게임을 알아보기 위함이 아니라 플레이하기 위한 선택이다.
 사실 루인도 기사 클래스를 플레이 해보면서 적지 않은 매력을 느꼈다.
 그러나 그가 내린 결론은 하나였다.
 “날고 기어봐야 몸 쓰는 건 전문가를 이길 수 없지.”
 레벨 차이가 엄청나다면 모를까 비슷한 레벨이라면 현실에서 무술을 배운 사람을 이길 수가 없다.
 이터널이 튜토리얼에 굉장히 신경을 쓴 게임이기 때문에 기사나 전사 클래스를 익히면 기본적으로 간단한 검술을 익히게 되고, 또 실전을 겪으며 발전하게 되지만 오랫동안 숙련된 유단자를 능가하기는 쉽지가 않았다. 천재 중의 천재라면 모를까.
 그리고 루인은 스스로가 그런 천재가 아님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택한 것이다.
 마법사라는 직업을.
 “공략에 딱이기도 하고.”
 마법사는 변수를 만들어내는 존재.
 기사나 전사는 아무래도 가진 바 역량에 따라 할 수 있음과 없음의 경계가 뚜렷한 편이었다.
 하지만 마법사는 다르다. 마법이 가진 갖가지 효과들을 이용해 수많은 변수를 만들어내고 그 변수를 통해 승리 할 수 있는 존재다.
 그것이 루인의 선택을 이끈 가장 큰 이유였다.
 “마법사가 되고 싶습니다.”
 가진 것 없는 빈털터리지만 루인은 당당했다.
 처음 직업을 갖는 데는 별도의 비용이 요구되지 않기 때문이다.
 “여기에 손을 올려 주십시오.”
 두말 않고 수정구를 꺼내는 NPC.
 루인이 그 위로 손을 얹자 겪어본 적 있는 환한 빛이 뿜어져 나왔다.
 
 [마법사 직업을 얻으셨습니다.]
 
 기계음과 함께 몸 안에 새로운 기운이 생겨남을 느꼈다.
 마법사에게 주어지는 에너지원. 바로 마나였다.
 “기본 장비를 선택해주십시오.”
 그 청량한 기운을 느끼는 사이 두 가지 아이템 세트가 적힌 창이 떠올랐다.
 짧은 로브와 완드, 짧은 로브와 스태프의 조합이다.
 가볍게 손가락을 가져가자 정보가 떠올랐다.
 
 [초보자의 마법사 로브]
 - 마법에 갓 입문한 마법사에게 주어지는 로브. 특별한 능력은 없지만 마법에 대한 감을 익히는데 도움을 준다.
 - 10초당 마나 1 추가 회복
 - 방어력: 1
 - 내구도가 감소하지 않음
 
 [초보자의 마법사 완드]
 - 마법에 갓 입문한 마법사에게 주어지는 완드. 특별한 능력은 없지만 마법을 보다 쉽게 사용할 수 있도록 도와준다.
 - 공격력: 2 / 추가 마법 공격력: 3
 - 캐스팅 속도 5% 증가
 - 10초당 마나 1 추가 회복
 - 내구도가 감소하지 않음
 
 [초보자의 마법사 스태프]
 - 마법에 갓 입문한 마법사에게 주어지는 스태프. 특별한 능력은 없지만 마법의 위력을 조금은 높여 준다.
 - 공격력: 7 / 추가 마법 공격력: 5
 - 캐스팅 속도 15% 감소
 - 내구도가 감소하지 않음
 
 로브는 기본 아이템이니 제외하고 완드와 스태프 중 어떤 것을 고르냐의 문제였다.
 빠른 캐스팅과 날랜 몸놀림을 택할 것이냐, 조금 더 강한 위력과 느린 공격속도를 택할 것이냐.
 이 작은 결정이 앞으로의 전투 스타일에 많은 차이를 가져올 것이다.
 “이걸로 하죠.”
 사실 망설일 필요가 없었다. 두 아이템을 비교했을 때 십중팔구는 완드 쪽을 선택할 테니까. 캐스팅 속도를 올려주는데다가 마나회복 옵션까지 붙어있으니 마법사의 꿀 아이템이라 할 수 있지 않겠는가?
 마나회복이 크지는 않지만 로브의 옵션과 더해지면 장시간 사냥 시 차이를 느낄 정도는 될 것이다.
 루인은 주저 없이 손을 뻗었다.
 고른 것은 스태프였다.
 
 [스태프 마스터리를 익히셨습니다.]
 
 스태프를 고르자 마스터리가 자동 습득되었다. 완드를 택했다면 완드 마스터리가 습득되었겠지.
 “1서클 마법을 배우시겠습니까? 비용은 50쿠퍼입니다.”
 마스터리를 확인하기도 전에 NPC가 마법의 습득 여부를 물었다.
 그러나 수중에 있는 것은 5쿠퍼 뿐. 배울 수 있을 리가 없었다.
 50쿠퍼.
 결코 싼 비용이 아니다. 아니 상당히 비싼 편이었다. 보상을 가장 크게 주는 퀘스트만 했을 경우 5레벨까지 겨우 모을 수 있을까 말까한 액수가 40~50쿠퍼라는 것을 생각해보면 알 수 있다.
 때문에 베타테스트 당시에도 마법사로 전직은 했지만 마법을 배우지 못하는 마법사들이 수두룩하게 발생했고 퀘스트를 반복 수행해서 고생 끝에 마법을 익힌 후에도 문제는 있었다.
 “꼴랑 하나만 배워서는 쓸모가 없으니까.”
 바로 쿨타임.
 한 번 마법을 발현 한 뒤 다시 같은 마법을 사용하기까지 걸리는 준비시간.
 이 쿨타임이 10초가량이나 되는 바람에 한 번 마법을 쓰고 나면 손가락 빨고 앉아있다가 몬스터들에게 맞아죽거나 죽자고 도망다니다가 겨우 또 한 발을 쏘아야하는 것이다.
 파티 사냥을 한다면 그나마 낫다.
 쿨타임을 기다리는 동안 기사나 전사를 택한 동료가 몬스터를 몸으로 막아내 줄 테니까.
 그러나 한 번 공격하고 한참을 멀뚱히 서있어야 하는 마법사가 파티에 합류하기란 쉽지가 않았다. 그렇다고 혼자서 사냥을 하기에도 다소 무리가 있었고.
 판타지의 꽃이자 최강 화력을 자랑하는 것이 마법사라지만 숙련도도 높지 않은 1서클 초급 마법의 위력은 너무도 빈약했다. 아니, 위력이 아주 약한 것은 아니지만 일격필살이라 말하기엔 다소 무리가 있었다. 마법 쿨타임을 기다릴 시간에 근접 계열이 몇 대 더 때리거나 스킬을 한 방 날리는 것이 여러모로 효율이 더 좋았다.
 그래서 나온 방법이 마법사끼리의 파티 사냥.
 다섯 명 정도의 마법사가 파티를 맺고 동일한 대상을 향해 동시에, 혹은 순차적으로 공격하는 사냥법이다.
 그도 아니면 어떻게든 돈을 모아 두세 가지 정도의 마법을 익힌 후 쿨타임에 맞춰 순차적으로 발현하든지.
 “1서클 마법을 배우시겠습니까? 비용은 50쿠퍼입니다.”
 남의 속도 모르고 NPC는 계속해서 마법의 구매 여부를 물었다. 이터널의 인공지능은 상당히 뛰어난 편이지만 모든 NPC에 해당되는 것은 아닌 탓이다.
 대부분의 NPC는 정해진 스크립트에 의해 정해진 몇 가지 대사와 반응을 보였고 핵심적인 NPC들만이 자율성을 가지고 스스로 사고했다.
 “아니오. 마탑에 입장하고 싶습니다.”
 루인은 거절의 말과 함께 새로운 키워드를 꺼냈다.
 바로 마탑.
 정확히는 초보자의 마탑이라는 5층짜리 던전이었다.
 별로 대단하거나 숨겨진 던전도 아니었다. 이곳의 몬스터들은 경험치와 부수적인 재료 아이템은 주지만 완제품 형태의 아이템이나 돈을 주지는 않는다. 심지어 경험치도 필드의 몬스터보다 적다. 그래서 베타테스트 당시에도 초반에 외면 받던 곳이다. 아니 나중에도 호기심 때문에 공략에 들어갔을 뿐, 그다지 사냥터로서 인정받지는 못했다.
 “최상층을 제외한 마탑의 실험체들은 사람을 먼저 공격하지는 않지만 공격을 받으면 반격하거나 적대 할 수 있습니다. 그래도 입장하시겠습니까?”
 비선공 몬스터라는 뜻이다. 체력이 약한 마법사를 배려한 기초 던전답다.
 “예.”
 당연히 망설일 이유가 없었다.
 루인이 대답하자 NPC는 자신의 옆쪽으로 마법진 하나를 활성화시켰고 루인은 익숙하게 마법진에 올랐다.
 슈웅-.
 마법진이 진동하며 루인을 마탑 1층으로 옮겨놓았다.
 
 [초보자의 마탑에 최초 입장하셨습니다.]
 [하루 동안 경험치 획득률이 110%가 됩니다.]
 [하루 동안 드랍률이 150%가 됩니다.]
 
 베타테스터들에게도 외면 받았던지 최초 입장 알림이 떴다.
 숫자만 놓고 보면 크지 않아 보이지만 꽤 괜찮은 혜택이다. 몬스터 열 마리를 잡으면 열한 마리를 잡은 만큼의 경험치가 들어온다는 소리니까.
 문제는 마탑의 몬스터들이 애초에 바깥(필드)의 녀석들만큼 충분한 경험치를 주지 않는다는 것이지만.
 “시작해볼까?”
 하지만 개의치 않는다. 주는 경험치가 부족하다면 그만큼 많은 몬스터를 잡으면 된다.
 노가다는, 공략의 기본이자 모든 게임의 기본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루인을 다른 말로 노가다 왕이라고 불렀다.
 어떤 게임에서는 공격 당 1씩 데미지가 들어가는 체력 1만짜리 보스몹을 상대로 1만 번을 때려 클리어 한 적도 있는 루인이니까. 여담이지만 특정 아이템을 구해서 사용하면 5방 안에 죽일 수 있는 놈이었다.
 “하압!”
 시야를 확보한 루인은 가장 가까이에 있는 상자 모양 몬스터를 향해 스태프를 내리찍었다.
 빠각!
 미믹을 만드려다 실패한 실험체, 꽉끼니가 부서지는 소리와 함께 비명을 질렀다.
 자세히 보면 뚱뚱한 몬스터가 낡은 상자에 끼어버린 듯한 외형이다. 그래서 상자를 부수면 홀가분하게 도망갈 것 같지만 실상은 죽어버리고 만다. 생김만 그럴 뿐, 실제는 상자와 일체인 마법 실험체다.
 녀석의 약해빠진 방어력으로 공격력 7이나 되는 스태프를 버텨내지 못했다. 더구나 루인은 지금까지 획득한 추가 경험치를 모두 힘에 쏟아 부은 상태였다.
 덕분에 스태프를 제법 자유롭게 다룰 수 있었고 공격력은 더 증가했다.
 “좋았어.”
 강화된 공격력에 꽉끼니는 별다른 저항 없이 쓰러졌다. 꽉끼니의 파편이라는 나뭇조각을 남겼지만 개당 1개에 1쿠퍼를 겨우 받는 잡템일 뿐이다. 그마저도 드물게 떨어졌다.
 물론 5쿠퍼가 전 재산인 루인은 꽉끼니의 파편을 인벤토리에 고이 챙겨 넣었다.
 
 [스태프 마스터리가 0.1% 상승하였습니다.]
 
 동시에 스태프 마스터리가 상승했다. 우습게도 스태프 마스터리는 마법을 사용할 때도 오르지만 이렇게 직접 공격이나 방어에 사용할 때도 오르는 것이다.
 루인이 초반 스탯을 힘에 몰아준 이유 중 하나였다.
 “역시 초반에는 힘이지.”
 마법의 위력도 턱없이 부족하고 마나양은 딸리는 상황에서 굳이 마법에 집착하지 않는다. 레벨 업을 한 후 마나양과 파괴력이 늘어나면 그때 사용해도 늦지 않다.
 그런 판단이다.
 게다가 마법사라고 힘을 올리지 않을 수는 없다. 스스로 투자 할 수 있는 보너스 스탯 이외에도 레벨 업에 따라 자동으로 상승하는 수치가 있지만 그 수치만으로는 나중에 좋은 스태프를 들고 다니기 부족했다.
 보다 적극적인 전투에 나서고, 자기 몸을 보호하려면 어차피 스태프를 자유자재로 활용할 정도의 힘 수치가 필요하다.
 이것이 전부는 아니지만 루인이 초반 보너스 스탯을 힘에 몰아준 주된 이유였다.
 “일단은 레벨 업부터.”
 루인은 눈을 돌려 다음 사냥감을 찾았다.
 
 
 # Chapter. 4 공략에 왕도는 없다.
 
 루인의 사냥, 아니 학살은 7레벨을 달성할 때까지 계속되었다. 그 과정에서 꽉끼니의 조각도 40개가 모여가고 경쟁자가 없던 마탑에도 하나 둘 방문자가 생겨나면서 무한 사냥의 체제가 깨어졌다.
 바깥의 사냥터가 워낙 사람들로 붐비다보니 하는 수 없이 경험치와 수입이 적은 마탑까지 사람들이 들어서는 것이다.
 사람들을 피해 2층에 오를 수도 있었고 몇 마리 더 잡아 조각을 45개로 만들어 마법을 하나쯤 배울 수도 있었다.
 그러나 루인은 7레벨을 달성하는 순간 즉시 사냥을 멈추고 탑을 내려왔다.
 “휘유, 여전히 많군.”
 루인이 찾은 곳은 대장간이었다. 사람은 많았지만 실제 마을의 대장장이 하멜이 대꾸하고 있는 자는 몇 되지 않았다.
 아직 수리를 맡기거나 물건을 구매 할 만큼 돈과 레벨을 올린 이가 적기 때문이다.
 대장장이 하멜의 앞에 서서 루인은 정해진 키워드를 내뱉었다.
 “대장장이의 길을 걷고 싶습니다.”
 총 3가지를 선택해 배울 수 있는 부직업.
 그것을 가질 수 있는 최소한의 레벨이 바로 7이었다.
 “대장장이는 쇠를 만지는 직업이네. 괜찮겠나?”
 하멜이 루인을 똑바로 쳐다보며 물었다. 대장장이는 많은 사람들이 기본적으로 선택하는 부직업이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본인의 장비를 수리하여 수리비를 아끼기 위함이 컸다.
 대장장이의 스킬 레벨 업 속도가 극악하여 무언가를 만들어 이득을 챙기기까지는 초반 돈과 시간의 투자가 너무 커서 대부분이 그랬다.
 그러나 루인의 직업은 마법사.
 무기는 완드나 스태프를 사용하고 방어구는 로브나 가죽 갑옷을 사용하는 것이 정석인 클래스라 하멜이 의문을 가지는 것은 당연했다.
 정확히는 의문을 갖는 것이 아니라 확인차 묻는 것에 불과했지만.
 “예. 괜찮습니다.”
 물론 부직업의 경우 얼마든지 삭제하고 다른 부직업을 가질 수 있다지만 정상적인 선택은 아니었다.
 지잉.
 이명과 함께 주변의 사람들이 한순간 사라졌다.
 일종의 인스턴트 던전인 튜토리얼 공간에 들어온 것이다.
 부직업 NPC의 수는 한정되어 있고 플레이하는 유저는 많으니 부직업을 갖는 튜토리얼을 인스턴트 던전에서 개별적으로 진행하는 것이다.
 하멜은 아무 말도 없이 작업장 안으로 들어갔고 이미 베타테스트로 경험이 있는 루인은 곧장 따라 들어갔다.
 “먼저 광물을 녹이는 작업이네.”
 화로의 앞에 선 하멜이 막 캐낸 듯한 광석 한 움큼을 던져 넣었다.
 화르르륵!
 그리고 힘차게 풀무를 밟았다.
 잠시 불꽃이 솟아오르더니 던져넣은 광석이 녹아 하멜의 앞으로 흘러내렸다.
 쇳물로 변한 광석은 이내 틀에 따라 굳어졌고 작은 괴의 형태를 이루었다.
 “자, 만져보게.”
 
 [구리괴 3개를 획득하셨습니다.]
 
 광물 정제 작업이었다. 실제와는 사뭇 다른 형태의 제작 방법이지만 게임이라는 특성상 어쩔 수 없는 부분이다.
 만약 정말 실제와 똑같이 만들었다면 힘들고 까다로워서 아무도 스킬을 올리지 못할 테니까.
 “할 수 있겠지?”
 치사하게 줬던 구리괴를 빼앗아간 하멜이 팔짱을 끼고 뒤에 섰다.
 자, 이제 실습을 해볼 시간이다.
 루인은 본 대로 광석을 한 움큼 화로로 던져 넣고 열심히 풀무를 밟았다.
 잠시 후, 기계음과 함께 녹아내린 광물이 사라졌다.
 
 [광물 제련에 대해 알게 되었습니다.]
 [대장장이 스킬이 0.1% 상승하셨습니다.]
 [작은 구리괴 2개를 얻으셨습니다.]
 
 작은 구리괴 3개가 일반 구리괴 1개와 같은 역할을 했다. 구리는 광물 중에서도 가장 낮은 스킬을 요구하는 것이지만 루인의 스킬이 부족해 미흡한 결과를 낳은 것이다.
 “계속 해보면 실력이 늘 걸세.”
 작은 구리괴 2개를 건네자 하멜이 중얼거리며 자리를 옮겼다.
 이번에는 작은 모루의 앞.
 모루 위로 실금 같은 균열이 간 단검을 올린 하멜은 대장장이용 망치를 꺼내며 말했다.
 “무언가를 만들기에 앞서 망가뜨리는 법부터 배워야 하네.”
 가볍게 망치를 내려쳤다.
 쨍그랑.
 힘이 실리지 않은 가벼운 내리침에 균열이 가있던 단검이 산산이 부서졌다.
 “이렇게 노후화된 장비는 힘의 균형점이 깨어지면 파괴되기 마련이네. 그러니 제때 장비를 수리하는 것이 중요하지.”
 사방으로 파편이 튀었지만 하멜은 개의치 않고 새로운 단검을 다시 모루 위에 올렸다.
 그리고 동일한 힘과 속도로 내리쳤다.
 쨍그랑.
 새것이던 단검에 가느다란 실금이 갔다. 파괴되지는 않았어도 내구도에 심대한 타격을 받은 것이다.
 “하지만 균형점을 정확히 때리면 새 장비라도 여지없이 망가지고 말지. 그래서 우리 대장장이는 항상 이 균형점을 보고, 생각하며 물건을 만들어야 한다네.”
 하멜은 이야기를 하며 자리를 비켰다.
 그리고 루인에게 대장장이용 망치를 건넸다.
 “이걸 한 번 부숴보게.”
 그 순간 루인의 눈에 초록색 점이 보이기 시작했다.
 이 초록색 점에 충격을 주는 순간 단검은 깨어지고 말 것이다.
 반대로 이다음 단계에서는 정해진 붉은색 점을 균일한 힘으로 때려서 단검을 만들 것이고.
 경험을 통해 그것을 아는 루인은 대장장이용 망치를 받아들고 목소리를 내었다.
 베타테스트 시절, 염두에 두던 ‘그것’을 실행했다.
 “로그아웃.”
 파앗.
 순간 정전이 된 듯 루인의 시야가 까맣게 변했다.
 “접속.”
 루인은 즉시 재접속을 시도했다.
 또 다시 오프닝 영상을 스킵하고, 암호를 입력해 거울 속 세상으로 들어왔다.
 달라진 것이 있다면 주위에 사람들이 북적인다는 것이었다.
 “되네?”
 인벤토리를 열어 대장장이용 망치가 들어 있는 것을 확인한 루인은 빙긋 웃으며 하멜에게서 멀어졌다.
 다시 한 번 말을 걸면 인스턴트 던전에 재진입 할 수 있다는 것을 알지만 그 전에 해야 할 일이 있는 것이다.
 “마탑에 입장하고 싶습니다.”
 루인이 곧장 향한 곳은 마법사 길드. 정확히는 초보자의 마탑이었다.
 마탑에 재입장 하자 제법 많은 사람들이 보였다. 마을 밖 사냥터에서 밀려난 사람들과 갓 마법을 배워 시험해보고 싶은 사람들이 어느새 북새통이다.
 루인은 그들을 무시하고 더 안쪽으로 걸어갔다.
 마법진을 찾아 2층으로.
 2층에도 이미 적지 않은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1층이 포화 상태에 이르자 보다 쾌적한 사냥을 위해 2층으로 자리를 옮긴 것이다.
 2층에는 꽉끼니보다 조금 더 크고 단단한 미미믹이라는 몬스터가 있었지만 이미 요령을 터득했는지 서로 파티를 맺고 사냥을 하고 있었다.
 루인은 기억을 더듬어 3층으로 이동했다.
 3층은 스파크라는 이름을 가진 마법 몬스터의 영역이었다. 마법에 어느 정도 내성을 가지고 있어 데미지가 잘 박히지 않았고 속도도 제법 빨라서 혼자 사냥을 하다간 죽기 십상인 녀석이다.
 그래서인지 3층에는 아직 사람이 많지 않았다.
 베타테스터로 보이는 몇몇만이 서로 파티를 맺고 지형을 이용한 컨트롤로 사냥을 시도 할 뿐이다.
 루인은 그들마저 무시했다.
 마침내 도착한 4층.
 길이 복잡해 처음 오는 사람은 찾기도 어려운 4층에 도착하자 싸한 쇠냄새가 코를 찔렀다.
 아무도 사냥을 시작하지 않은 탓에 우글우글하게 쌓여있는 아머드. 리빙 아머를 본 따 갑옷에 정신을 불어넣은 마법 몬스터였다.
 생명 부여가 아닌 의지 부여 수준의 낮은 인챈트였기에 리빙 아머에는 비할 바가 아니긴 했지만 철갑옷에 마법적 처리가 되어 있어 마법 내성과 물리 내성을 동시에 가진, 마법사가 상대하기 까다로운 상대였다.
 마법 저항력을 가진 중기사를 상대하는 기분이랄까.
 대신 중기사처럼 행동이 느리다는 것이 약점이었다. 그렇지만 마법사 역시도 캐스팅 시간이라는 것이 필요했기에 까다롭다는 것에는 변함이 없었다.
 “어디, 되는지 볼까?”
 놈들을 보며 루인이 눈을 빛냈다.
 그리고 손에 들리는 대장장이용 망치.
 그것을 손에 들자 아머드의 몸체에서 초록색 빛이 보이기 시작했다.
 “좋았어!”
 반신반의하던 방법이지만 통하는 듯 했다. 지금 루인이 시도하려는 방법은 일종의 버그였다. 일반 게임이라면 제지를 당할 수도 있지만 이터널은 광오하게도 이런 말을 유저들에게 던졌다.
 [버그? 꼼수? 얼마든지 찾아내고 얼마든지 사용해라. 이터널 빈틈을 찾아낼 수 있다면 얼마든지 환영한다.]
 참으로 광오하지 않은가? 버그 제로에 도전한다는 대단한 포부였다.
 물론 패치를 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패치 전까지 이용하는 것은 웃으며 인정한다고 밝혔다.
 때문에 루인을 비롯한 일부 베타테스터들은 베타테스트 막판 버그가 될 만한 것들을 찾는데 열을 올리기도 했다.
 지금 루인이 시도하는 것도 그 중 하나였다.
 따앙-.
 쨍그랑.
 고작 공격력 5에 불과한 대장장이용 망치에 맞은 아머드의 몸체가 붕괴했다. 단 일격에 쓰러졌다.
 아머드의 조각이라는 철 조각만을 남기고 고철이 되어 사라져버렸다.
 다음 녀석도, 그 다음 녀석도 마찬가지였다.
 루인의 망치에 닿는 녀석들은 모조리 파괴되어 고철 신세가 되었다.
 “수거.”
 수북이 쌓인 고철들을 향해 외치자 아이템 수거 편의 기능에 따라 인벤토리에 아머드의 조각이 가득 쌓였다.
 예상대로 이것은 버그였다.
 대장장이 부직업 획득 중 강제로 접속을 종료하면 어떻게 될까? 하는 의문에서 시작된 버그. 튜토리얼을 완료해버린 다음 생각이 나서 실제 적용해본 것은 지금이 처음이지만 그간의 경험들로 비추어 충분히 가능성 있다고 판단했다.
 그리고 성공했다.
 대장장이 퀘스트에서 2단계를 완료하고 나면 다시는 시도 할 수 없는 균형점 파괴. 철제 장비의 일격 파괴라는 기능을 아머드에게 적용한 것이다.
 더구나 아머드는 비선공 몬스터였다. 반격은 하겠지만 일격에 박살이 나버리니 위험할 일도 없었고 지금 단계에서 4층까지 올라올 바보는 없었기에 이곳에 위치한, 또 리젠되어 나타날 모든 아머드가 다 루인의 차지였다.
 완벽한 독점 사냥터.
 루인은 몸을 날려 쉴 새 없이 아머드의 몸체를 두들겼다.
 
 ***
 
 루인이 마탑을 내려온 것은 인벤토리가 꽉 차서 더 이상 사냥을 할 수 없을 지경이 되었을 때였다.
 돈을 포기하고 더 레벨 업을 할 수도 있었지만 이 이상은 곤란했다. 얼마든지 버그를 사용하라 공표하긴 했지만 괜히 뒤를 닦지 않은 것처럼 찝찝했다.
 그래서 루인은 이 정도가 적당하다고 판단했다.
 이미 목표는 초과달성이다.
 “판매.”
 마탑을 내려와 명령어를 외치자 눈 앞으로 하나의 창이 열렸다. 루인의 인벤토리가 보이고, 상점창을 통해 팔 수 있는 아이템이 보여졌다.
 그 위로 놓은 아머드의 조각 344개. 스태프와 로브를 제외하고 현재 루인의 힘 수치로 들 수 있는 최대 무게만큼의 숫자였다.
 개당 20쿠퍼. 꽉끼니의 조각과는 20배 차이가 나는 가격으로 루인은 일괄 판매를 요청했다.
 “판매 완료 되었습니다.”
 NPC의 안내와 함께 수중에 5쿠퍼뿐이던 빈털터리가 순식간에 69실버 25쿠퍼라는 거금을 가진 갑부로 탈바꿈했다. 모아두었던 꽉끼니의 조각까지 마탑을 오르기 전 팔아치운 결과였다.
 과연 현 시점에서 이만한 돈을 가진 사람이 또 있을까?
 순간 루인은 현금 거래를 생각했다. 어지간한 기대작만 되어도 초반 게임머니 가격이 상당히 높았다. 중반 이후와 비교하면 10배 이상도 차이가 나는 것이 초반 게임머니의 가격이었다.
 초반에 격차를 벌릴수록 후반의 격차가 더욱 커진다는 것이 정론이기 때문이다.
 더구나 다른 게임도 아니고 이터널이니 시세야 부르는 것이 값일 터. 그것은 꽤 매력적인 유혹이었다.
 지존, 또는 랭커의 자리를 꿈꾸는 많은 자들은 아주 당연하게 초반에 현금을 투입해서 캐릭터를 강화해나갈 것이다.
 “시세가 얼마쯤 하려나.”
 루인의 생각은 조금 달랐다.
 초반 투자가 중후반의 격차를 벌린다는 것은 분명 맞는 말이다. 그러나 절대적이지는 않았다.
 장비를 업그레이드하고 포션을 무한정 구매해서 레벨을 남들보다 빠르게 올릴 수는 있겠지만 10레벨, 20레벨 씩 차이가 휙휙 벌어지는 것은 아니다.
 열혈과 근성. 그리고 게임에 대한 이해.
 이것들만 있다면 얼마든지 노가다로 극복할 수 있는 수준이다. 현금으로 판매하는 캐시 아이템만 존재하지 않는다면.
 실제로 루인은 최고의 장비와 어중간한 컨트롤을 가진 자들이 ‘절대’ 혼자서 깰 수 없다고 말하던 던전이며 퀘스트를 단신으로 클리어 해내곤 했다.
 스스로는 꼼수라고 부르지만 실제로는 게임에 대한 이해였다. 시스템을 이해하고, 스킬의 효능을 이해하고, 아이템의 쓰임을 이해한 결과다.
 그렇기에 루인이 여분의 돈이라 여겨지는 금액의 현금화를 생각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검색해볼까?”
 애초에 루인은 어떤 게임을 하든 가난하게 플레이하는 것에 익숙했다. 돈을 이용해 장비를 강화하고 캐릭터를 강화해서 쉽게 쉽게 플레이하는 것이 성미에 안 맞는 탓이기도 했다.
 모름지기 게임머니는 최소한의 것만 있어도 된다는 주의였기에 루인의 아이템거래 사이트 등급은 최고 등급인 VVVIP였다. 필요한 만큼을 제외한 게임머니만을 팔아서 현금화 한 게 그 정도다.
 “그렇군.”
 10실버에 현금 100만원. 역시 초반이라 시세가 천장에 닿아있었다. 그러나 무조건 당장 팔 필요는 없다. 시세는 쉽게 떨어지지는 않는다. 베타테스터이자 아이템거래 사이트 VVVIP등급인 루인의 판단이다.
 애초에 벌써 10실버를 가진 개인이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지 않는다. 그러니 이 시세는 장사꾼들이 담합하여 만들어놓은 가장의 시세이자 일종의 방어선일 것이다.
 즉, 한동안 시세가 크게 변동되지는 않을 것이라는 얘기.
 “서두를 필요는 없지.”
 루인도 당장 거래하지는 않을 생각이었다. 계획에 필요한 금액도 적지 않았고, 생각보다 돈이 많이 모인 탓에 계획을 일부 수정할 필요도 있었다.
 “그럼 가볼까?”
 필요한 마법 몇 개를 배운 루인은 음흉한 미소와 함께 마법사 길드를 빠져나왔다.
 마탑에 존재하는 1층에서 4층까지의 몬스터들은 적지 않은 능력 차이를 보이지만 그에 비례해 경험치를 제공하지는 않는다.
 때문에 돈은 많이 벌었지만 레벨 업은 뒤쳐져 있을지 몰랐다. 사냥터가 포화상태라 다른 이들도 쉽사리 레벨 업을 하지는 못했을 테지만 베타테스터들 중에는 아마 루인과 같이 준비해둔 패를 꺼낸 자들이 적지 않을 것이다.
 잡은 아머드의 숫자가 만만치 않으니 아직 상위 그룹에는 들었으리라 생각하지만 루인도 자신이 가장 높을 것이라고는 생각지 않았다.
 그러니 여유를 부릴 수 없었다.
 오픈 초기인 지금의 수입이 아무리 많다한들 조금만 지나면 금세 뒤집어질 것이다.
 이곳은 게임 민족이라 불리는 자들이 득실득실한 ‘한국’이다.
 “이봐, 내 차례야!”
 “그런 게 어딨냐? 먼저 먹는 놈이 장땡이지!”
 “너, 나중에 걸리면 죽는다!”
 “그래. 맘대로 해봐라.”
 마을은 여전히 북적거렸다. 분위기가 좋지 않은 것은 물론이다. 채널을 분리해두었다고는 하나, 한정된 NPC가 다수의 유저를 상대해야하니 먼저 퀘스트를 받기 위한 아우성이 계속됐고 그 중에는 차례를 지키지 않고 계속해서 NPC에게 말을 걸어 새치기하는 자들도 있었다.
 그때마다 한바탕 소란이 일었지만 어찌하랴, 마을 내에서 PK를 할 수도 없었고 한 두 명의 일도 아니니 화는 내지만 금세 잊어버릴 것이다.
 루인은 저 틈에 끼지 않은 것이 다행이라 여겼다.
 그리고 도착한 무기점.
 아직은 엄두가 나지 않는 가격에 실제 구매를 하는 사람은 보이지 않았지만 구경을 하는 사람들은 넘쳐났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혼란을 막기 위해 무기점 NPC는 10레벨 이전에 퀘스트를 주지 않는다는 것쯤일까.
 “물품 구매.”
 그들을 헤치고 들어선 루인은 명령어를 통해 상점창을 열었다. 그리고 찜해두었던 아이템들을 구매했다.
 
 [단단한 수련용 창을 구매하셨습니다.]
 [단단한 수련용 창을 구매하셨습니다.]
 [단단한 수련용 창을 구매하셨습니다.]
 [단단한 수련용 창을 구매하셨습니다.]
 [단단한 수련용 창을 구매하셨습니다.]
 
 돈이 부족했다면 가장 저렴한 [가벼운 죽창]을 선택했겠지만 루인은 큰맘 먹고 보다 상위 등급의 무기를 구매했다.
 인벤토리에 구매한 아이템들이 들어오며 총 45실버가 빠져나갔다. 호칭의 효과도 할인 받아서 개당 9실버. 상당히 큰 지출에 속이 쓰렸지만 그만한 가치를 할 것이다.
 인벤토리에는 비어버린 돈 대신 아이템 아이콘이 생겨났다.
 다행이다. 베타테스트 때야 다들 어떤 게임에서든 한가락씩 하던 사람들이라 서로에게 구걸 따위를 하지 않았지만 정식 서비스가 시작된 지금이라면 졸졸졸 따라다니며 “님아 돈좀!”, “님아 아이템 좀!”을 외치는 녀석들이 생겼을 것이다.
 덕분에 사람들의 눈에 띄지 않고 다시 무기점을 빠져나왔다.
 이어 빵집으로 향한 루인은 다시 물품구매창을 열어 가장 저렴한 빵 몇 개를 구입하고 다시 마을을 나섰다.
 초반이라 공복도의 효용이 그렇게 크지는 않았지만 스태미나와 체력, 마나 회복률과 연관이 있는 공복도는 ‘올려두면 좋은’ 것이다. 루인도 돈이 있으니 산 것이고 모자랐다면 사지 않았을 것이다.
 루인은 마을을 나서고 노쇠한 오크의 숲에 들어서서야 비로소 빵을 입에 물었다.
 초반의 달리기와 죽음으로 공복도가 절반 이하를 가리키고 있었지만 1쿠퍼가 아쉬운 이 때 음식씩이나 사먹는 것을 본다면 구걸하는 자들이 생길 것이고 앞으로의 행보가 꽤 귀찮아 질 테니까.
 “좋군.”
 이미 아머드 학살을 통해 9레벨을 달성한 루인은 둔한 고블린의 숲과 퇴화한 코볼트의 숲을 넘어 곧장 다음 사냥터로 향했다.
 노쇠한 오크는 10레벨은 되어야 사냥이 가능했기 때문에 전투의 흔적이나 소리는 찾을 수 없었다.
 그렇지만 이곳도 곧 북적거리게 될 것이다. 베타테스터들이라면 발 디딜 틈 없는 사냥터 대신 경험과 컨트롤을 통해 더 높은 레벨의 몬스터를 잡으려 할 것이고 10레벨이 되기 이전에 남들보다 먼저 이곳을 찾을 것이다.
 이미 9레벨로 이곳에 도착한 루인처럼.
 물론 베타테스터가 아니라도 센스가 좋은 자들은 베타테스터들만큼이나 빠르게 적응하여 이곳에 도달할 것이다.
 “인벤토리.”
 
 [단단한 수련용 창]
 - 제법 무기라 부를 수 있을 것 같은 끝이 뾰족한 수련용 창.
 - 공격력: 20
 - 내구도: 100/100
 
 루인은 구매한 무기 중 하나를 꺼내 쥐었다.
 
 
 # Chapter. 5 축캐?
 
 상점제 아이템이라서인지 무척 단순한 설명. 하기야 아이템에 공격력과 내구도만 있으면 됐지 무슨 설명이 더 필요하랴 싶었다.
 “프리즈 애로우.”
 노쇠한 오크 하나를 발견한 루인은 지체 없이 캐스팅에 들어갔다. 마법사 길드를 떠나기 전 배워놓은 몇 가지 마법 중 하나였다.
 쩌적.
 프리즈 애로우에 적중 당한 노쇠한 오크의 몸에 하얀 성에가 끼었다. 적중 당한 상대의 이동 속도를 늦추는 냉기 속성 특수 효과가 적용된 것이다.
 “꾸룩!”
 그러나 녀석을 해하기엔 위력이 많이 부족했다. 10레벨의 노쇠한 오크는 지금의 레벨과 숙련도에서 5가지 1서클 마법들을 모두 한 번씩 퍼부어야 겨우 잡을 수 있을 만큼 체력이 높았다.
 대신 안전하게 잡을 수 있지만 마나의 소모가 너무나 컸다. 그것이 초반에 마법사 클래스의 레벨 업이 느린 이유였다.
 숙련도가 높은 마법과 그렇지 못한 마법의 위력 차이는 그만큼 컸다.
 반대로 마법사가 후반에 강해지는 이유이기도 했다.
 “너한텐 마나가 아깝다.”
 명상 스킬을 얻지 못한 지금, 마나 회복 속도는 무척 느렸고 마나 포션은 초보존에서 팔지도 않았다. 판매한다 해도 엄청난 고가이겠지.
 멍하니 앉아서 마나가 다시 차기를 기다려야한다는 이야기인데 그 사이 기사며 전사 클래스를 택한 유저들은 사제 클래스의 회복 주문이나 체력 회복 포션을 마셔가며 빠르게 치고 나갈 터였다.
 “이거나 먹어라!”
 느려진 오크를 향해 루인은 들고 있던 창을 힘껏 투척했다.
 푸욱!
 발리스타처럼 쏘아진 수련용 창이 성질을 부리며 달려오던 오크의 몸에 꽂혔다.
 “끄앙!”
 배를 움켜쥐고 쓰러질 법도 하건만 복부에 수련용 창을 매단 채로 녀석은 콧김을 뿜고 달려왔다.
 레벨이 낮고, 여전히 둔화 효과가 유지되는 상태라 속도는 빠르지 않았다.
 “또 간다.”
 쐐액-.
 푸욱!
 놈을 맞추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둔화 효과에 걸려 행동이 느린 것이 있었지만 오크라는 종이 워낙에 단순한 탓에 정면으로 뛰어오고 있었으니 똑바로만 던지면 되었다.
 또 하나의 창이 녀석의 몸에 대롱대롱 매달렸지만 놈은 창을 뽑지도 않은 채 계속해서 다가왔다.
 뽑았다면 출혈 데미지가 추가되었겠지만 말이다.
 “마무리.”
 하얀 성에가 사라지며 둔화 효과가 끝나갈 때쯤, 세 번째 창날이 녀석의 몸에 꽂혔다.
 
 [레벨 업을 하셨습니다.]
 
 오크의 초록색 몸이 회색으로 변함과 동시에 알림음이 들려오고 체력과 마나가 최대치까지 차올랐다.
 녀석이 남긴 꽤 많은 경험치로 레벨 업을 한 것이다.
 이미 경험치 계산을 마친 루인은 담담히 명령어를 외쳤다.
 “수거.”
 그러자 시체에 꽂혀있던 세 자루의 창이 사라지며 루인의 인벤토리로 돌아왔다.
 “감이 죽지는 않았군.”
 한 번도 빗나가지 않은 것이 아직 베타테스트 때의 감각이 살아있는 모양이었다.
 루인은 직접 아이템을 줍는 대신 아이템 수거 기능을 이용하였다. 전투 중에는 사용할 수 없지만 전투가 끝난 후에는 명령어만으로 몬스터가 드랍한 아이템과 자신 소유의 아이템을 수거 할 수 있다.
 이것은 투척용 아이템 대신 수련용 창을 구매한 이유 중 하나이기도 했다.
 투척용 아이템은 기본적으로 한 번 사용하면 재사용이 불가능하다. 뿌옇게 흐려지며 사라져버린다. 그야말로 1회용 아이템인 셈. 때문에 수십 개씩 묶어서 팔기는 하지만 주력으로 사용하기에는 비용이 만만치 않아 전투 중 스킬 쿨타임 등으로 데미지가 비는 순간이 생길 때나 멀리서 마무리를 가하는 용도 정도로만 사용된다.
 반면 무기를 투척하면 한 방 한 방에 들어가는 데미지도 높을 뿐 더러 전투가 끝난 후 재사용이 가능하다.
 물론 한 사람을 무장시킬 수 있는 무기를 투척용으로 사용하기 위해서는 대단히 많은 돈이 들어간다는 것과 지속적으로 높은 데미지를 낼 수 있는 무기로 단 한 차례 데미지만을 입힌다는 것이 단점이지만 지금의 루인에게는 문제가 되지 않는다.
 “개털이군.”
 인벤토리를 살핀 루인이 툴툴거리듯 말을 내뱉었다. 소량의 돈을 제외하고는 획득한 아이템이 없는 것이다.
 “또 잡으면 되지.”
 어찌 첫 술에 배부르랴.
 평소에도 아이템 복이 많지 않던 루인이다. 가볍게 단념하고 다시금 인벤토리에서 창을 꺼내 쥐었다.
 “프리즈 애로우.”
 다시 사냥이 시작되었다.
 
 점차 노쇠한 오크의 숲 깊은 곳까지 들어가 1레벨을 더 올리는 동안 루인은 단 한 번도 위험을 느끼지 않았다.
 노쇠한 오크가 선공형 몬스터이기는 했지만 동족의식 또는 링크라는 표현으로 대표되는 현상이 일어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무리를 지어 움직이기를 좋아하는 오크의 특성이 이곳 초보존에서는 특별한 경우를 빼고 거의 존재하지 않았다.
 초보존은 어디까지나 유저들이 게임을 파악하고 익숙해질 수 있도록 돕기 위한 구역으로, 하나의 튜토리얼이라 보아도 좋았다. 그래서 위협적인 특성들이 많이 배제되어 있었다.
 “프리즈 애로우.”
 “쿠룩!”
 “꾹?”
 물론 동족 의식이 없다고 무조건 일대일 상황만 온 것은 아니다. 공격한 녀석과 가까운 거리에 미처 보지 못한 오크가 있을 경우 루인을 인식하고 함께 공격해보는 경우도 있었다.
 소위 몹이 애드(add)된 것이다.
 “쳇. 라이트닝 애로우.”
 재빨리 상황을 파악한 루인은 다른 녀석에게 포커스를 돌렸다. 먼저 라이트닝 애로우를 쏘아 흥분하게 만든 뒤 놈에게 먼저 창을 던져댔다.
 첫 번째 오크는 둔화 효과 때문에 상대적으로 다가오는 속도가 느리니 두 번째 녀석부터 해치우려는 것이다.
 “꾸엑.”
 다행히 일정 확률로 일어나는 감전(경직) 효과까지 일어나 수월히 잡아냈다.
 빠르게 거리를 가늠한 루인은 막 둔화 효과가 풀린 녀석을 향해 한 번 더 창을 던졌다.
 “파이어 애로우!”
 그리고 애로우 계열 마법 중 데미지가 제일 높은 파이어 애로우를 연달아 꽂아 넣었다.
 “꾸이이!!”
 벌겋게 익은 오크가 멱따는 소리와 함께 지척까지 다가섰다.
 “흡.”
 루인은 당황하지 않고 놈에게 꽂힌 창을 잡아채었다.
 그리고 힘으로 버텼다.
 주르륵.
 오크의 돌진력에 몸이 밀렸지만 둔화가 풀린 지 얼마 되지 않아 가속력은 얼마 되지 않았다.
 힘 수치를 높이지 않았다면 뒤로 나자빠졌겠으나 충분히 버틸 만했다.
 그걸로 몸이 꿰뚫렸다면 관통 데미지가 추가로 들어갔겠지만 아쉽게도 이미 창날이 박혀있어 추가 데미지는 미미했다.
 “그냥 죽어라.”
 휘익
 공격을 위해 오크의 칼이 높이 들어 올려지는 순간, 루인은 백스텝을 밟으며 박힌 창을 빼냈다.
 
 [출혈 데미지를 입혔습니다.]
 [노쇠한 오크가 10초간 출혈 데미지를 입습니다.]
 
 1초, 2초…….
 알림음과 달리 노쇠한 오크는 고작 2초 만에 체력을 모두 잃고 회색으로 변해버렸다.
 노쇠한 오크가 한 마리 더 달라붙은 것은 예상외의 상황이었으나 크게 어렵지는 않은 전투였다.
 “응?”
 그때, 반투명한 창이 열리며 공지사항이 나타났다.
 [공지사항]
 초보존 채널 확장 안내
 - 너무 많은 유저들이 몰려 퀘스트 수행이 정상적으로 이루어지지 않는 점을 확인하여 초보존의 채널수를 확대하였습니다.
 - 채널이동을 통해 보다 원활한 퀘스트 수행이 가능합니다.
 
 아이템 밸런스 수정
 - 일부 아이템의 정보가 수정되었습니다.
 
 (중략)
 
 대장장이 퀘스트 오류 수정
 - 대장장이 부직업 획득 도중 퀘스트를 임의로 중단할 경우 의도하지 않은 현상이 일어나던 현상을 수정하였습니다.
 - 대장장이 퀘스트의 균형점 파괴가 퀘스트 아이템에만 적용되도록 수정되었습니다.
 
 게임 초기에 있을 수 있는 흔한 패치소식이었다. 그 중에 루인의 시선을 끈 것은 대장장이 퀘스트의 수정. 내용을 자세히 적지는 않았지만 루인이 사용했던 그 방법이 패치를 통해 막힌 것으로 보였다.
 아무래도 단번에 아머드의 조각 300여개를 판매한 것이 데이터에 남아서겠지.
 이 정도면 꽤나 빠른 대응이라고 할 수 있었다.
 “운영자들 고생 꽤나 하겠군.”
 오픈 초기인 만큼 회사의 전 인력이 달라붙어서 모니터링이며 패치를 하고 있을 것이다.
 아마 공지사항을 통해 나타나지는 않았지만 일명 잠수패치라고 불리는 몰래 패치한 사항들도 셀 수 없이 많겠지.
 공지사항 중 대략적인 내용만 머릿속에 담은 루인은 다시 사냥감을 찾기 위해 눈동자를 굴렸다.
 
 ***
 
 1레벨을 더 올려 12레벨쯤 되니 노쇠한 오크를 잡아도 들어오는 경험치가 크게 줄었다. 대신 필요한 경험치는 늘었고 멀리, 노쇠한 오크의 숲 초입 부근에서 병장기 소리가 들리는 것이 후발주자들이 어느새 이곳까지 따라온 것을 알 수 있었다.
 “슬슬 바꿔 탈 때인가?”
 인벤토리를 열어 무게 게이지를 확인한 루인은 마을에 돌아가기로 마음을 먹었다.
 원래는 14레벨까지 이곳에 있기로 작정하였으나 다른 자들이 생각보다 빠르게 따라붙었고 무게 게이지도 슬슬 한계에 다다른 까닭이다.
 “귀환.”
 인벤토리에서 귀환의 돌을 만지작거리던 루인이 결국 시동어를 외쳤다.
 세 시간에 한 번 사용 할 수 있는 귀환의 돌. 사용하는 것이 아깝기는 했지만 10레벨부터는 사망 시 경험치를 일부 잃어버리기에 어쩔 수 없다.
 빛이 번쩍이는가 싶더니 시야가 변했다.
 눈앞에 마을 한복판 광장이 나타났다.
 귀환의 돌을 처음 사용해본다면 쉽게 적응 못할 변화였다.
 베타테스트 때 몇 번이고 사용해본 루인은 두리번거리며 나타나는 다른 이들과 달리 태연하게 광장을 빠져나왔다.
 인벤토리에 가득 쌓인 아이템들을 처분하기 위해서다.
 낡은 오크의 시미터, 낡은 오크의 방패, 노쇠한 오크의 가죽 방어구 시리즈 등등 저레벨에 착용하기 좋은 장비 아이템 일부와 노쇠한 오크의 이빨 같은 잡템이 다수 섞여있었다.
 좌판을 열까 잠시 생각한 루인은 생각을 접고 무기점으로 향했다.
 “물품 판매.”
 루인은 무기점, 방어구 상점, 잡화점을 돌며 스스로 사용할 방어구 일부를 제외한 대부분의 오크 아이템을 팔아치웠다.
 좌판을 열면 상점에 파는 것보다 값을 더 받을 수 있겠지만 당장 그런 푼돈이 아쉬운 상황도 아니었고 자신이 판매한 아이템으로 다른 이들이 빠르게 치고 올라오는 것은 썩 바람직한 일이 아니었다.
 대장간에 들러 수련용 창을 수리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직접 사용하지는 않았지만 투척을 통해 깎인 내구도가 적지 않았다.
 이 창들은 아직 더 써먹을 데가 있었다.
 “물품 제작 의뢰.”
 재정비를 마친 루인은 마지막으로 세공 상인을 찾았다. 재료를 모아 새로운 아이템을 만들어내는 부직업 세공사를 얻을 수 있는 NPC이기도 했지만 물품 제작 의뢰를 통해 NPC에게서 직접 물품을 받을 수도 있었다.
 다만 그럴 경우 제작비가 만만치 않게 들었다.
 부직업을 얻어 직접 만들고자 한다면 비용은 들지 않겠지만 원하는 물품을 만들 수 있을 때까지 숙련도를 올리는 시간과 노력이 들어가겠지.
 어디까지나 선택의 문제였다.
 “오크 이빨 목걸이.”
 명령어와 함께 팔지 않고 남겨둔 노쇠한 오크의 이빨 10개를 재료창에 올리자 완성된 모습의 목걸이 이미지가 떠올랐다.
 그 밑으로는 제작소요 시간 5분이라는 문구가 적혀있다. 문자 그대로의 뜻이다.
 미관상 보기 좋지는 않았지만 액세서리류의 아이템이 거의 드랍되지 않는 초반에 쓰기에는 능력치가 썩 괜찮았다.
 
 [오크 이빨 목걸이(제작)]
 - 오크의 이빨을 모아 만든 목걸이. 오크들의 집념이 깃들어 주술적 효과를 낸다.
 - 힘 수치 1 ~ 3 증가
 - 체력 수치 1 ~ 3 증가
 - 무작위 효과 + 1
 
 제작시 힘과 체력 포인트가 1~3사이로 랜덤하게 상승하고 그 외에 무작위 효과 1가지가 붙는다.
 무작위 효과가 아주 유용할 수도 있지만 보통은 쓰레기에 가까운 효과가 붙는다. 그래서 루인도 기대는 하지 않았다.
 오직 바라는 것은 힘과 체력 수치의 증가.
 둘 다 3이 뜬다면 더할 나위 없겠지만 적당히만 떠줘도 1, 2레벨을 올린 효과를 볼 수 있다.
 “제작.”
 루인이 물품 제작창을 조작하여 제작을 시작하자 인벤토리에서 5실버가 사라졌다.
 모아온 노쇠한 오크의 이빨은 많았지만 딱 1회분을 제작할 만큼만 남기고 팔아치운 이유이다.
 오크 이빨 목걸이는 여러 번 시도해 높은 수치를 띄울 만큼의 값어치는 없었고 여러 개를 제작해서 판매 할 만큼의 가치도 없었다.
 연속해서 높은 수치가 붙는다면 이문을 남길 수 있겠지만 어중간하거나 낮은 수치가 나온다면 판매하기도 애매했고 오히려 손해를 볼 수도 있는 까닭이다.
 게다가 지금 같이 돈 들어 갈 데 많은 초반부에 액세서리까지 풀세트로 갖추고자 하는 자들도 많지 않을 것이라서 판매하기까지 시간도 제법 잡아먹을 것이다.
 
 [오크 이빨 목걸이의 제작이 완료 되었습니다.]
 [오크 이빨 목걸이를 획득하셨습니다.]
 
 잠시 다음 행보를 머릿속으로 그리는 사이, 제작이 완료되었다.
 루인은 착용을 위해 인벤토리를 열었지만 크게 떨리지는 않았다.
 어차피 큰 수치가 아니라서? 아니다. 자신이 축캐가 아니라는 걸 알기 때문이다.
 
 [오크 이빨 목걸이(제작)]
 - 오크의 이빨을 모아 만든 목걸이. 오크들의 집념이 깃들어 주술적 효과를 낸다.
 - 힘 수치 2 증가
 - 체력 수치 3 증가
 - 불굴의 의지: 모든 상태이상을 3% 확률로 무시
 
 힘과 체력이 거의 최고 수치가 붙었다. 둘 다 1만 안 떠도 다행이라고 생각했는데?
 게다가 무작위 효과로 추가 된 능력이 대박이었다.
 “헐.”
 기절, 둔화, 경직, 침묵, 실명 등등 수많은 상태이상 중 하나에만 저항 할 수 있어도 상당한 대우를 받는데 3% 확률이긴 하지만 이것은 무려 ‘모든 상태이상’이다.
 정말 이게 내가 뽑은 것인가?
 루인은 믿기지 않는지 바로 착용하지 못하고 한참을 쳐다봤다.
 3%. 뭔가 부족한 숫자이긴 하지만 다년간의 게임 경험으로, 그것이 체감 상으로는 꽤 높은 확률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또한 상태이상에 걸리면 심각한 위기가 찾아올 수 있다는 것도. 때문에 3%확률이긴 하지만 여벌의 목숨을 챙긴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이 정도면 대박중의 대박이다.
 “이번엔 뭔가 좀 되려나?”
 일명 저주캐. 똑같이 사냥을 해도 상대적으로 좋은 아이템이 거의 나오지 않는 운이 지지리도 없는 캐릭터를 뜻한다.
 그리고 루인은 저주캐의 화신이라 불려도 할 말 없을 정도로 키우는 캐릭터마다 아이템이 더럽게 안 나왔다. 남들이 10마리 잡아서 얻을 아이템 100마리고, 200마리고 잡아서 얻을 만큼 재수가 없었다. 그저 노가다로 극복할 뿐.
 그런데 이터널에서는 뭔가 좀 풀리려는 징조일까? 시작부터 분위기가 좋았다.
 물론 그래봐야 초급 아이템이 아니냐는 말을 할 수 있다.
 실제로 후반에 가면 힘과 체력이 1이든 5든 없는 것과 다름없어 질 것이다. 아이템 하나에 스탯이 수십씩 붙을 테니까.
 어디 스탯이 하나만 붙겠나? 두 개, 세 개씩 붙으면 그 합이 수십, 백, 어쩌면 그 이상이 갈 수도 있다.
 하지만 루인은 이 아이템의 가치를 매우 높게 평가했다.
 적어도 중반, 스탯 한 가지 당 50정도의 수치가 붙을 때까지도 이 아이템은 가치가 있다. 그것이 그의 판단이었다.
 능력치가 높은 편이 훨씬 사냥에 유리할 테지만 때로는 능력치보다도 중요한 것이 있기 때문이다.
 퍼센트 효과라는 것이 특히나 그렇다. 10레벨 오크의 공격이든 100레벨 보스몹의 공격이든 모두에게 동일하게 적용되는 것이니까.
 상태이상이 골치 아픈 보스를 클리어하거나 그러한 지역을 통과할 때 이 아이템의 가치를 빛날 것이다.
 한껏 기분이 좋아진 루인은 흉물스러운 목걸이를 콧노래까지 부르며 목에 걸었다.
 적어도 초보존에서는 죽더라도 아이템을 드랍하지 않으니 차고 있는 편이 이득이다.
 나중에는 필요에 의해 판매를 할 수도 있겠지만 당장은 제 값을 주고 살 사람도 없을 테니까.
 기쁜 마음으로 세공상점을 나선 루인은 잡화점에 들러 몇 가지 아이템을 구매 한 후 다시 대장장이 NPC를 찾아 부직업 퀘스트를 마무리했다.
 그리고 향한 곳은 마을의 뒷문이라 할 수 있는 북문.
 이제 막 레벨을 올리고 숲으로 향하는 이들과는 정 반대 방향이다.
 동쪽과 남쪽에는 숲이, 서쪽에는 평야 필드가 있는 것에 반해 북쪽은 뒷산으로 막혀있는 곳이었다.
 “채광을 배우고 싶습니다.”
 “힘이 들 텐데, 괜찮겠나?”
 “예.”
 
 [부직업 ‘광부’를 얻으셨습니다.]
 
 말이 뒷산이지 실제로는 로메인이라는 이름을 가진 제법 깊은 광산이다.
 광산의 입구에 도착한 루인은 광부 NPC 중 칸이라는 이름을 가진 자를 찾아 두 번째 부직업을 획득했고 곧장 광산의 안쪽으로 향했다.
 잡화점에서 이미 곡괭이는 몇 자루 구매해둔 상태였다.
 “조심하게 그쪽은 위험한 코볼트들이 출몰하는 지역이네.”
 “괜찮습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입구부터 늘어선 광부 NPC들을 지나쳐 깊이, 더 깊이 들어가자 갈림길과 함께 NPC의 경고 음성이 들려왔다.
 이곳부터는 광산 코볼트라는 몬스터가 나오는 지역이다.
 “횃불 사용.”
 화르륵.
 광산 코볼트의 영역으로 들어가는 길은 무저갱이라도 되는 듯 어두웠다. 담이 약한 자라면 그 어둠에 겁을 집어먹고 달아날 정도로.
 그러나 루인은 횃불을 켜고 걸어나갔다.
 한 손에는 횃불, 한 손에는 수련용 창.
 언제든 창을 던질 수 있게 근육은 잔뜩 긴장한 상태였다.
 “세 마리쯤 있던 것 같은데…….”
 루인은 베타테스트의 기억을 떠올렸다. 이 광산에 대한, 코볼트에 대한.
 광산 코볼트의 구역이 전부 어두운 것은 아니었다. 인간들의 갱도와 구분을 위한 것인지 그 경계만이 어두울 뿐, 조금만 더 나아가면 다시 밝은 횃불이 벽에 붙어있다.
 대신, 그 빛이 나오기까지의 어둠 사이에 암살자와 같은 코볼트 3마리가 숨어 있는 것이다.
 사삭.
 “왔군.”
 휘익!
 루인은 인기척이 나자마자 횃불을 팽개치고 창을 던졌다.
 통로가 좁았고 일직선이라 피할 곳도 없다.
 까앙!
 “끼룩!”
 그러나 들려온 것은 금속의 마찰음과 코볼트의 날카로운 비명소리였다.
 “쳇.”
 그 소리에 혀를 차며 창을 재장전했다.
 빗맞았음을 직감한 것이다. 체력은 깎여나갔겠지만 놈은 여전히 건재했다.
 광산 코볼트는 레벨이 18이나 되고 광산용 헬멧이라는 투구와 곡괭이를 무기로 무장한 위협적인 녀석이니까.
 “파이어 애로우, 라이트닝 애로우, 프리즈 애로우!”
 “끼루룩!!”
 창을 하나 더 던져낸 루인은 마나를 아끼지 않고 마법을 퍼부었다. 가끔 레벨 업 즈음 난사하던 마법 콤보와는 정 반대의 순서였다.
 “거기구나!”
 화염과 전격의 마법으로 주위를 밝히고 다음 타격의 정확도를 높이기 위함이다.
 레벨은 올랐지만 아직은 마법보다 투창의 데미지가 더 컸으니까.
 느려진 광산 코볼트에게 두 대의 창을 정확히 꽂아 넣자 어느새 녀석의 위치가 떨어진 횃불에 비칠 정도로 가까워졌다.
 “자, 끝이다!”
 지척까지 다가왔지만 루인은 여유롭게 창을 움직였다. 이미 데미지 계산을 끝마친 것이다.
 던지는 대신 창을 찔러넣자 광산 코볼트는 회색빛으로 물들었고 약간의 돈과 함께 작은 돌멩이 몇 개를 떨어뜨렸다.
 “아싸!”
 루인은 돈 보다도 그 돌멩이를 주우며 기뻐했다.
 
 [구리 광물]
 제련을 통해 구리를 얻을 수 있는 광물. 제련을 위해서는 대장장이 직업이 필요하다.
 
 바로 채광을 통해 얻을 수 있는 광물을 드랍한 것.
 아직 채광 스킬이 낮아 획득률이 높지 않다는 점을 생각하면 큰 수확이라 할 수 있었다.
 정말 이번엔 축캐가 되려고 그러나?
 다시 횃불을 주워든 루인은 좀 더 안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천천히, 천천히.
 광산 코볼트는 가장 깊은 지역을 제외하곤 무리를 짓지 않았지만 루인의 걸음에는 신중함이 있었다.
 다음 녀석도, 그 다음 녀석도. 처음 녀석과 같은 방식으로 상대하자 전혀 피해 없이 사냥이 가능했다.
 어둠속에 떠오르는 녀석들의 눈만 보더라도 대략적인 위치가 가늠 되었고 연달아 날아드는 불과 전기의 화살은 정확한 위치를 알려주었다.
 그러나 루인은 끝까지 방심하지 않았다. 자신이 알고 있는 데이터는 어디까지나 베타테스트 당시의 것.
 세 마리가 아니라 열 마리가 되었어도, 불이 밝혀진 길이 끝까지 나오지 않더라도, 광산 코볼트가 무리지어 공격을 해온다 해도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다.
 “어디보자…….”
 불이 밝혀진 길 저 끝으로 드문드문 보이는 코볼트들을 살피며 자신의 상태를 점검했다.
 일단 수련용 창 3대의 내구도가 2 또는 3씩 깎여있었다. 잠수 패치를 한 것 중 내구도 관련한 것도 있었던가? 고작 3마리를 상대한 것치고는 과하다.
 루인이 살짝 인상을 찌푸렸다.
 “그래도 어떻게든 되겠군.”
 마나는 더디게 회복되고 있었지만 10레벨부터 추가 포인트를 마나에 몰아주고 있어서 그럭저럭 버틸 만하다.
 내구도도 무조건 투창 1회당 1씩 깎이는 것은 아닌 모양이니 목표한 바는 어떻게든 채우지 않을까 싶다.
 사냥이 끝난 후 수련용 창의 수리비용은 꽤나 들어가겠지만.
 “그럼 계속해볼까?”
 다시 사냥이 시작되었다.
 
 
 # Chapter. 6 준비완료
 
 사냥은 손쉬웠다.
 코볼트의 리젠 속도(죽은 몬스터가 같은 자리에 다시 나타나는 속도)는 느리지 않았지만 루인의 사냥 속도가 그보다 꽤 빨랐던 탓이다.
 밝은 곳으로 나오니 보다 효과적인 순서로 마법을 사용할 수 있었고 투창의 정확도도 더 높아져 훨씬 안정적으로 빠른 사냥이 가능했다.
 동굴의 안쪽으로 전진을 하면서도 수시로 광산 코볼트 간의 간격을 파악하여 안전지대를 체크한 덕에 마나가 30%이하로 떨어질 때마다 쉬어갈 수 있었다. 무리해서 가장 깊은 곳까지 돌파하지 않은 덕이기도 하다.
 “다른 유저가 없는 탓이기도 하고.”
 사람들이 사냥을 하러 들어오지 않은 덕도 컸다. 이미 적응되어 몇 레벨쯤 차이나는 몬스터들도 상대할 수 있을 베타테스터들 역시도 이곳은 찾지 않기 때문이다.
 그들의 가장 큰 강점이 컨트롤인데 이런 좁은 공간에서는 그 능력을 십분 발휘하기 어려웠다.
 “순조롭군.”
 통로 형태의 길을 계속 반복해 되짚어가며 사냥을 할 뿐, 루인은 결코 광산의 끝자락에 대한 호기심이나 욕심을 내지 않았다.
 베타테스트 당시 이미 그 끝을 확인한 까닭이다.
 “퀘스트 시작 아이템을 얻을 수 있기는 하지만…….”
 광산 코볼트는 스스로의 의지로 이곳에 있는 것이 아니었다. ‘악의 무리’로 보이는 어떠한 집단에 의해 지배당하고 있었다.
 광산의 끝자락에 가면 광산 코볼트들이 무리를 지어 채광을 하고 있고 그들을 감시하는 감독관이 있다.
 이들은 인간이지만 산적처럼 몬스터로 인식이 되어 죽여도 머더러 수치가 오르지 않았다.
 그리고 이 감독관을 해치우면 명령서라는 아이템을 얻게 되는데 이것은 ‘수상한 지배’라는 퀘스트의 시작 아이템이었다.
 “꼭 여기서 얻을 필요도 없지.”
 그러나 이 퀘스트는 굳이 수행할 필요가 없다. 중요 연계 퀘스트이기는 하지만 꼭 여기서 이 퀘스트를 수행하지 않아도 다음 퀘스트의 진행이 가능했고 진행을 해봤자 얻는 것은 약간의 추가 보상 정도였다.
 초반 치고 난이도는 높았지만 초반이라 보상은 높지 않다.
 차라리 루인처럼 통로를 반복해서 오가며 경험치와 광물을 모으는 것이 더 수지맞는 장사였다.
 “룰루~.”
 오크 이빨 목걸이 이후 운이 트이기라도 한 것일까? 구리 광물의 드랍률이 퍽이나 좋았다.
 초급 대장장이 스킬 레벨을 올리기 위해 필수적인 구리 광물. 비용 절감을 위해서는 채광 스킬을 최대한 발휘하여 대장장이 스킬을 올리는 것이 좋았지만 그러기엔 시간이 부족했다.
 또한 다른 부직업들에 비해 대장장이 스킬 레벨이 훨씬 올리기 어려워 자급자족으로만 스킬 레벨을 올리고자 한다면 광부 레벨이 훨씬 높게 올라버릴 수도 있었다.
 그러한 이유들로 광산 코볼트들이 드랍하는 구리 광물은 꽤나 비싸고 반가운 아이템이었다.
 
 [레벨 업을 하셨습니다.]
 
 그때 또 하나의 반가운 소리가 들렸다.
 마나와 체력이 가득 차오르고 구리광물이 습득되며 무게 게이지가 간당간당해졌다.
 14레벨. 이곳에서 무려 2레벨을 더 올린 루인은 미련 없이 광산을 빠져나왔다.
 돌아오는 어두운 길에는 어김없이 세 마리의 광산 코볼트가 매복하고 있었지만 아낌없이 마나를 쏟아 붓는 루인의 공세에 버텨내지 못했다.
 마나가 바닥나도록 써봐야 마을에서 정비를 하는 동안이면 모두 회복 될 것이다.
 “물품 판매.”
 마을에 돌아온 루인은 먼저 인벤토리의 잡템들을 팔았다. 그러나 무게 게이지가 크게 줄지는 않았다.
 지금 인벤토리의 무게 중 대부분을 차지하는 것이 구리 광물이기 때문이다.
 “다들 열심이로군.”
 인벤토리에 돈이 쌓이자 마음에도 여유가 생겼던지 주위를 둘러본 루인이 감상을 늘어놓았다.
 이터널의 초보존은 친절하면서도 불편했다. 가상현실에 익숙하지 못한 사람들을 위해 천천히 누구나 적응할 수 있도록 편의를 제공하는 한편 빨리빨리에 익숙한 사람들에게는 좀체 진도가 나가지 않아 답답한 마음이 들도록 만들었다.
 이런 부분은 몸을 사용하는 클래스를 선택한 이들일수록 더 심했는데 예를 들어 검도 등의 운동이나 격투기에 대한 경험이 없는 사람들을 위하여 누구나 몸을 쓰는 기본기를 익혀야만 하도록 강제한 것이다.
 덕분에 기사나 전사, 격투가 등의 클래스를 선택한 사람들은 1차 직업을 얻는데 만도 한참의 시간이 걸렸다.
 베타서비스 당시 기사 클래스를 택했던 루인 역시도 이것 때문에 상당히 애를 먹었고.
 이에 비해 마법사나 사제 클래스는 훨씬 나았지만 어느 정도 레벨까지는 혼자 전투를 수행하는데 있어서 어려움이 많았다.
 오히려 이들 클래스는 실제 전투를 통해 요령을 익히도록 한 것이다. 현실에는 전혀 존재하지 않는 능력들이니 이렇게 하는 것이 어쩌면 정답일 지도 몰랐다.
 그렇기 때문에라도 초반에 치고 나가는 이들은 베타테스터들이 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들은 이미 한 번 이 과정을 겪었던 자들이고 같은 조건이라도 훨씬 먼저 시험에 통과해 직업을 얻었을 테니까.
 “다른 사람들은 어디까지 왔을까?”
 루인은 문득 궁금해졌다. 베타테스트 당시부터 무시무시한 속도로 치고 나갔던 유저들. 그들은 지금 몇 레벨까지 달성했을까. 루인 자신보다 높을까?
 광속으로 레벨 업을 한 루인이지만 자신이 없었다.
 자신이 그러하듯 다른 어떤 초보존에서는 또 누군가가 엄청난 속도로 레벨 업을 하고 있을 테니까.
 더구나 루인은 애초에 초반 레벨 업 속도가 느린 마법사 클래스였다. 아직까지는 그다지 마법사스럽지는 않았지만.
 “곧 알 수 있겠지.”
 마법사 길드를 나와 분주히 돌아다니는 이들을 훑으며 다시 한 번 의지를 다졌다.
 분명 낭중지추처럼 두각을 드러내는 자들이 있을 것이다. 게시판이든 언론에서든 그들을 조명하겠지. 그때가 되면 그들과 자신을 비교해볼 어느 정도의 기준점이 생길 것이다.
 밀릴 수도, 오히려 앞서갈 수도 있지만 그때가 오기까지는 일단 최선을 다해야했다. 준비해둔 것들부터 완성시켜야 했다.
 “스킬 훈련, 블랙스미스(Train Blacksmith).”
 다시 대장장이를 찾은 루인은 창을 수리하고 숨겨진 키워드를 말했다.
 “흠, 7실버만 내게.”
 대장장이가 슥 훑어보곤 손을 내밀었다. 지독히도 비싸다.
 루인은 속이 쓰렸지만 하는 수 없이 손바닥 위에 7실버를 올려놓았다.
 
 [대장장이 스킬을 전수받으셨습니다.]
 [대장장이 스킬이 27.3%로 증가하였습니다.]
 
 직접 행동을 통해 스킬을 올리는 대신 돈을 주고 스킬 수치를 올린 것이다.
 대장장이 NPC에 따라 높일 수 있는 스킬의 숙련도가 다르기는 하지만 대도시의 장인을 만나도 30%까지가 한계라는 것이 베타 테스트에서 밝혀진 내용이다. 그러니 초보존에서 27.3%라는 수치는 결코 낮은 것이 아니다.
 “시작해볼까?”
 스킬을 전수받은 루인은 곧장 대장간 안쪽으로 들어서 자리를 잡았다. 사냥을 통해 얻은 광물을 제련하기 위함이다.
 광산 코볼트가 드랍한 것에 마나 회복을 하며 틈틈이 곡괭이질을 해 모은 것을 더하자 그 수가 제법 많았다.
 이것을 화로에 쏟아 붓고 풀무를 밟으면 시스템에 따라 상당량의 구리주괴가 만들어 질 것이다.
 “분리. 구리 광물.”
 하지만 루인은 다른 선택을 했다.
 인벤토리 한편에 [구리광물 x 43] 이라고 적혀있는 것을 굳이 하나씩 분리했다.
 번거롭기 짝이 없는 일이지만 꾹 참고 42번이나 같은 행위를 반복했다.
 그리고 총 43칸의 인벤토리창이 구리광물로 채워졌을 때, 하나를 꺼내 화로에 던졌다.
 푸욱 푸욱.
 이어지는 풀무질.
 한 번에 모든 광물을 녹일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굳이 하나씩 제련하기를 택한 것이다.
 
 [대장장이 스킬이 0.1% 상승하셨습니다.]
 [대장장이 스킬이 0.1% 상승하셨습니다.]
 [대장장이 스킬이 0.1% 상승하셨습니다.]
 
 이것은 하나의 꼼수였다.
 광물 제련을 통해서도 대장장이 스킬이 상승한다는 점을 이용하여 노가다로 스킬을 올린 것이다.
 광물제련 시 스킬에 영향을 주는 것은 횟수이지 광물의 수량이 아니었다.
 “후우, 역시 노가다는 보람차군.”
 한참 동안이나, 발에 쥐가 나도록 풀무를 밟아 구리주괴를 얻어낸 루인은 28.6%까지 올라있는 스킬을 보며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목표보다는 부족한 수치였지만 만들어낸 구리주괴를 이용하면 어떻게든 될 것도 같았다.
 아직 스킬이 높지 않아 잘 오르는 편이었으니까.
 “물품 생산.”
 힘들게 얻어낸 구리주괴지만 사용을 해야 의미가 있다.
 키워드를 외치자 현재 수준에서 만들어 낼 수 있는 아이템 리스트가 떠올랐고 루인은 주저 없이 가장 구리주괴가 적게 들어가는 얇은 구리 단검을 골랐다.
 “제작.”
 인벤토리에서 구리주괴 2개가 사라져 모루 위로 나타났다.
 리드미컬하게 초록색 점이 나타났다 사라졌다. 동일한 리듬으로 주괴를 두드리라는 소리이다.
 리듬액션 게임의 요소를 가미해서 정확한 타이밍에, 정확한 위치로, 정확한 힘을 가할수록 성공 확률과 고품질 제품이 나올 확률이 높아진다.
 언뜻 장난 같은 방법이지만 스킬이 오를수록 그렇지 않다는 것을 몸으로 알 수 있다.
 단순한 박자감이 아니라 망치를 내리치는 호흡이다.
 이미 베타테스트 시절부터 무구의 수리를 위해 대장장이 스킬을 익혀왔던 루인은 망설이지 않고 구리주괴를 때렸다.
 까앙 까앙 까앙.
 까앙 까앙 까앙.
 또 까앙 까앙 까앙.
 “휘유.”
 도합 아홉 번을 흐트러지지 않고 내리치자 목표했던 물건이 만들어졌다.
 
 [저급한 얇은 구리 단검 검신이 완성되었습니다.]
 [손잡이를 끼워 단검을 완성하십시오.]
 
 그것이 끝은 아니었다. 구리로 만들어낸 것은 검신뿐이고, 손잡이 부분을 따로 구매하여 두 개를 합쳐야 비로소 완성된 구리단검이 나왔다.
 ‘저급한’ 수준의 품질이 나와서일까? 루인은 더 보지도 않고 검신을 인벤토리 한 구석에 처박아버렸다.
 “제작.”
 대신 또 한 덩어리의 구리주괴를 모루 위에 올렸다.
 까앙 까앙 까앙.
 말없이 망치질을 시작했다.
 
 [볼품없는 얇은 구리 단검 검신이 완성되었습니다.]
 [손잡이를 끼워 단검을 완성하십시오.]
 
 이번엔 볼품없는. 저급한 보다도 낮은 등급이다.
 얼마나 초록점을 잘 맞추느냐도 중요하지만 기본적으로 스킬 숙련도에 가장 큰 영향을 받는 까닭이다.
 사실상 30%도 되지 않는 현재의 수준에서는 저급한 정도가 가장 높은 등급.
 까앙 까앙 까앙.
 이것은 루인도 모르는 바가 아니었다. 그럼에도 묵묵히, 망치질을 계속했다.
 마침내 마지막 구리주괴까지 사용했을 때, 루인은 화로 앞으로 자리를 옮기고 만들었던 구리 단검 검신을 하나씩 꺼냈다.
 후욱 후욱.
 그리고 힘차게 풀무를 밟아댔다.
 애써 만든 구리 단검 검신을 다시 녹여버린 것이다. 이럴 경우 재료를 100% 돌려받을 수 없지만 개의치 않았다.
 
 [대장장이 스킬이 0.1% 상승하셨습니다.]
 
 효과는 있었다. 무구를 녹이는 것 역시 대장장이의 능력 중 하나로 보았기 때문에 스킬이 오르는 것이다.
 광물을 녹일 때 한 번, 주괴로 아이템을 만들 때 한 번, 아이템을 녹이면서 또 한 번. 재탕, 삼탕까지 철저하게 우려먹으며 스킬 숙련도 향상에 매진하는 루인이었다.
 “다시 시작해볼까?”
 이내 모든 구리 단검 검신을 녹여내었을 때, 대장장이 스킬을 확인한 루인은 다시 모루로 다가가 망치를 잡았다.
 녹이는 과정에서 그 숫자가 반 토막 난 구리주괴이지만 다시 한 번 망치질을 해 얇은 구리 단검 검신을 만들어 내기 위함이다.
 그렇게 같은 과정을 두 번 더 반복했을 때, 루인은 원하던 바를 이룰 수 있었다.
 
 [대장장이 스킬이 0.1% 상승하셨습니다.]
 [대장장이 스킬 숙련도 30%를 달성하셨습니다.]
 [계열을 정할 수 있습니다. 직업 NPC를 찾아가십시오.]
 
 대장장이 숙련도 30%를 달성한 것이다.
 알림음이 나오자마자 루인은 가지고 있던 구리 단검 검신들을 모조리 녹여내고 대장장이를 찾았다.
 “계열 선택.”
 클래스에도 2차 전직, 3차 전직이 있듯 공통적으로 만들 수 있는 아이템도 있었지만 대장장이 역시 세분화 된 전문화 기술이 있었다.
 무기와 방어구 제작을 전문으로 다룰 수도 있었고, 강화를 전문으로 다룰 수도 있다.
 “기계장치.”
 그러나 루인이 택한 것은 기계장치. 주로 시계며 태엽 등을 만드는 가장 홀대받는 계열.
 중간중간 쓸 만한 물건들을 만들 수 있는 것으로 알려졌지만 그 중요도와 활용도 면에서 장비 제작 및 강화 전문화 유저들에 비해 낮게 평가받을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루인이 기계장치를 택한 이유는 단 하나였다.
 변수.
 위력보다도 특수효과를 가진 장치들이 많기에, 또 사람들이 잘 사용하지 않는 분야이기에 더 많은 변수를 일으킬 수 있는 것이 바로 기계장치라 판단했다.
 변수의 미학을 사랑하는 그로서는 어쩌면 당연한 선택이다.
 
 [대장장이-기계장치 전문화를 얻으셨습니다.]
 
 “됐군.”
 전문화 기술을 익힌 루인은 곧장 창을 열어 제작 가능한 아이템들을 살폈다. 기계장치 전문화는 베타테스트 당시부터 워낙 인기가 없던 터라 달라진 것은 없었다.
 확인을 마친 루인은 물품구매를 통해 필요한 부재료들을 구매하고 새롭게 얻은 제작법들을 토대로 몇 가지 물품을 만들었다.
 [소리 폭탄(제작)]
 - 구리와 화약으로 만든 소리 폭탄
 - 큰 소음과 함께 폭발하는 폭탄. 살상력은 없지만 순간적인 소음으로 겁을 주거나 시선을 끌 수 있다.
 - 공격력: 1
 - 특수 능력: Lv. 1 광역 도발
 
 [나무 허수아비(제작)]
 - 나무로 만든 최하급 허수아비. 허수아비가 필드 또는 던전에 나타날 경우 공격을 받지 않는 모든 몬스터는 이것을 최우선 공격 목표로 삼는다.
 - 허수아비는 모든 종류의 공격에 대해 1의 피해만 입는다.
 - 나무 허수아비 체력: 2/2
 - 특수 능력: Lv. 2 광역 도발
 
 거의 공격력이 없다시피 한 폭탄과 대신 공격을 받아 줄 허수아비. 제법 많은 돈을 투자해 NPC에게 재료를 사들이며 만들어낸 루인의 첫 번째 패는 이 두 가지였다.
 광물과 달리 목재의 경우 NPC가 판매하기는 했지만 제법 비싼 값을 치러야했고 나머지 부재료들도 일부는 제작할 수 있었지만 구리주괴의 소모를 막기 위해 어지간한 것들은 모두 돈으로 해결했다.
 현금으로 따져도 적지 않은 금액이지만 세력이 없는 상황에서 초반에 앞서가려면 어쩔 수 없었다.
 “이제 가볼까?”
 가방 가득 소리폭탄과 나무 허수아비를 채운 루인은 마지막으로 세 번째 부직업을 얻었다.
 세 번째로 선택한 부직업은 다름 아닌 광대. 이름만 들어서는 누구도 얻고 싶어 하지 않을 기피 직업이지만 부직업 획득과 함께 얻는 능력들은 초반에 꽤나 도움이 되는 것이었다.
 운 수치 상승, 민첩 수치 상승, [광대놀음] 스킬로 인한 몬스터 적대수준(어그로) 하락. [단검 투척] 스킬 획득.
 아주 큰 수치와 대단한 스킬은 아니었지만 직업을 얻는 것만으로 누릴 수 있는 혜택인 만큼 베타테스터 중 이 부직업을 택한 사람이 적지 않았다.
 그들과 다른 것이 있다면 루인은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는 것이다. 먼저 10실버로 스킬 숙련도를 29.8%까지 올렸다. 인기가 없는 부직업이라서인지 대장장이에 비해 가격도 저렴하고, 올릴 수 있는 수치가 높았다.
 곧장 노가다를 통해 숙련도를 30%까지 올리자 대장장이 때와 마찬가지로 계열을 선택할 수 있게 되었고 루인은 염두에 두었던 [기예]를 택했다.
 육체적인 능력을 강화시켜주는 [행동] 계열을 택하는 것이 당장에 유리할지 몰랐으나 [기예]를 택한 것은 단 하나의 스킬을 위함이었다.
 “스킬창.”
 이 역시도 베타테스트 때와 달라진 것이 없음을 확인한 루인은 마을에서 몇 가지 물품을 더 구입한 후 다시 마을을 떠났다.
 초보존의 마지막 던전, 암흑의 신단.
 세상에 검은 어둠을 몰고 오려는 이들의 소환 의식이 거행되는 곳.
 이터널 스토리의 큰 줄기인 암흑 제단과의 전투가 시작되는 메인 퀘스트 [용사]를 수행할 수 있는 스토리의 분기.
 그 입구에 루인이 당도했다.
 “어느 정도나 공략 됐으려나……?”
 눈을 반짝이는 루인의 눈치를 보며 한 무리의 유저들이 걸음을 재촉해 안으로 들어섰다.
 그러나 레벨은 썩 높아보이지 않는다.
 베타테스터가 아니라 신규 유저들로 추측했다.
 암흑의 신단, 다른 말로 어두운 그림자의 동굴.
 초보존의 첫 던전이자 마지막 던전.
 던전이 하나뿐이라는 뜻은 아니다. 초보존이라고는 하지만 여섯 개나 되는 다양한 종류의 던전이 준비 되어 있다.
 이 어두운 그림자의 동굴은 그 중 퀘스트를 통해 가장 먼저 접하게 되는 던전이었고, 그만큼 던전의 난이도도 낮았다.
 하지만 베타테스터들은 그것이 전부가 아니라는 것을 안다. 초보존의 퀘스트를 일정 단계이상 수행하거나 특정 조건을 만족하면 이곳에 숨겨진 통로가 드러나는 것이다.
 그 길로 들어서는 순간, 어두운 그림자의 동굴은 암흑의 신단이 되며 초보존 최종 퀘스트가 부여된다.
 상황에 따라 변화하는 이중 던전이다.
 “가보면 알겠지.”
 관련 퀘스트를 하나도 수행하지 않은 루인이지만 그 걸음이 당당했다.
 숨겨진 길을 열 수 있는 또 하나의 조건, 레벨9 달성. 이 조건을 만족했기 때문이다.
 레벨9를 달성하고 숨겨진 길을 찾는 방법만 안다면 굳이 퀘스트를 따로 수행하지 않아도 이 퀘스트에 도전이 가능하다.
 “강격!”
 “프리즈 애로우!”
 “야, 나한테 쏘면 어떻게 해!”
 5레벨부터 입장이 가능한 던전이라서인지 던전 안은 조합하고, 번잡스러웠다.
 이제 막 직업을 갖게 된 자들이 파티를 이뤄 사냥을 하는데 당장 전투에 익숙하지 않는 자들이 좁은 던전에 북적북적 모여 사냥을 하려니 컨트롤이 제대로 되지 않는 탓이다.
 덕분에 파티원을 공격하기도 하고, 약한 몬스터에 고전을 하기도 했다.
 이터널에서는 파티원을 공격하는 것이 가능했다. 다만 파티원에게 공격을 당해 죽을 경우 경험치 다운과 아이템 드랍의 페널티를 받지 않을 뿐이다.
 이 점을 악용하여 베타테스트 당시에는 사냥을 하다가 위험한 순간에 일부로 파티원에게 죽임을 당하는 경우가 빈번했고, 패치가 되어 몬스터에 공격을 받는 중에는 이 파티킬 시스템이 적용되지 않게 패치 되기도 했다.
 한창 던전 몬스터와 싸우고 있는 자들을 모르는 척 피해 지나간다는 것이 우습기도 했지만 어렵지는 않았다. 이미 너무 많은 유저들이 던전을 차지하고 있기도 했고 딱히 자신들의 사냥에 방해를 주는 것도 아니니 막아설 이유가 없는 것이다.
 나중이 되면 일부 길드에서 사냥터 독점을 위해 출입 제한을 하는 던전이 생길지도 모르지만 아직 이곳에는 그런 논리가 통용되지 않았다.
 “역시, 열려있나?”
 어두운 그림자의 동굴이 끝나는 2층까지 도달한 루인이 눈에 이채를 띄었다.
 암흑의 신단이 시작되는 3층으로 가는 입구가 열려있는 것이다. 열려있다 한들 조건을 만족시키지 못하는 자들은 벽처럼 느껴져서 통과하지 못할 테지만, 14레벨을 달성한 그에게는 해당 없는 일이다.
 스륵.
 얇은 막이 벗겨지듯 입구는 루인을 받아들였다.
 “이제 막 통과한 건가?”
 챙 채쟁.
 멀지 않은 곳에서 병장기의 소리가 들렸다. 한명이 아닌 듯 소리는 꽤 여러 개가 동시에 일어났고 루인은 조심스레 안으로 전진했다.
 그리고 머지않아 앞선 일행과 조우 할 수 있었다.
 “레디. 둘, 셋. 스나이핑!”
 “프리즈 애로우.”
 “방어태세.”
 궁수가 화살을 날려 몬스터를 하나씩 빼내고 다가오는 동안 마법사가 데미지를 집중시킨다.
 다가오면 기사가 방패와 도발 스킬로 자신에게 몬스터의 시선을 집중시키고 사제는 기사의 체력 관리에 집중한다.
 전형적이고 안정적인 파티 구성과 사냥법이었다.
 베타테스터들인지 호흡도 제법 잘 맞았고 스킬의 활용이나 타이밍도 썩 괜찮았다.
 아직 14레벨까지는 도달하지 못한 듯싶었지만 장비를 보니 10~12레벨 정도는 도달한 것 같고 그 레벨에 여기 있다는 것은 퀘스트도 성실히, 또 빠르게 수행했다는 뜻이다.
 루인은 이들이 노력 여하, 즉 플레이 시간에 따라서는 상위에 랭크 될 수 도 있는 정석적인 팀이라 생각했다.
 그리고 자신에게 크게 방해가 되지 않을 것이라 판단했다.
 “대기.”
 루인이 다가가자 리더인 듯한 궁수가 손을 들어 파티원들을 제지했다.
 
 
 # Chapter. 7 돌파
 
 루인이 다가가자 리더인 듯한 궁수가 손을 들어 파티원들을 제지했다.
 공격의 시작을 알리고, 멀리에서 전체를 볼 수 있는 위치이니 파티를 이끌기에 나쁘지 않은 선택이다.
 일반적인 PC게임에서는 선두에서 모든 공격을 감내하는 기사 클래스가 지휘를 맡기도 하지만 정신없이 치고 받아야하는 가상현실 게임에서는 거의 불가능한 일이다.
 사제는 사냥이라면 모를까 PK 상황에서 가장 먼저 노려져 지휘를 보기 어려웠고 마법사는 전황을 살피며 쉴 새 없이 캐스팅을 해야 해서 어려웠다.
 “무슨 일입니까?”
 “뭐, 그냥. 지나가려고요.”
 경계하는 궁수를 보며 루인이 어깨를 으쓱 거렸다.
 “혼자서……말입니까?”
 두 손을 들어 공격 의사가 없음을 밝혔지만 궁수의 눈에서는 선뜻 경계심이 풀리지 않았다.
 암흑의 신단은 초보존 치고 난이도가 꽤 높다. 자신들 역시 안정적인 사냥을 하고는 있지만 자칫 방심했다간 언제 전멸을 당할지 모르는 상황이고 길이 훤히 뚫린 던전인 터라 지형지물을 이용하기도 쉽지 않았다.
 클래스가 무엇이든 혼자서는 버티기 어렵다는 뜻이다.
 컨트롤에 자신이 있는 기사나 전사 클래스라면 어떻게든 해볼 수도 있기야 하겠지만 그것은 몬스터가 한 마리 일 때의 이야기이고, 두 마리 이상 몰리면 죽음을 각오해야하며 세 마리 이상 몰리면 무조건 죽는다고 보아야 했다.
 벌써 이곳에 들어왔다는 것은 자신들과 마찬가지로 베타테스터라는 소리이겠지만 …….
 “알겠습니다. 먼저 가시죠.”
 머리를 굴리던 궁수는 의외로 간단히 길을 열어줬다.
 알 수 없는 상대를 뒤에 두기보다는 먼저 보내는 것이 안전하다 판단한 것이다.
 “렌.”
 “괜찮아.”
 이 던전을 가장 먼저 공략하자 의기투합한 그들이었기에 누군가 불안한 듯 이름을 불렀지만 렌이라 불린 궁수는 그들을 안심시키며 길을 열었다.
 루인의 행동 하나하나를 주시하면서.
 “그럼 실례.”
 반면 루인은 빙긋 웃어보이며 여유롭게 앞장서 나갔다.
 “윈드 가드.”
 그들과 어느 정도 거리가 벌어지자 루인은 스스로에게 충격을 흡수하는 1서클의 보호 마법을 걸었다.
 지속 시간 1분. 재사용 대기시간 3분.
 시전과 동시에 재사용 시간의 초침이 돌기 시작하지만 재사용까지 2분이라는 시간이 비었고, 그 안에 일정치 이상의 충격이 흡수되면 저절로 사라졌다.
 타닷.
 루인이 달리기 시작했다.
 “캬릉.”
 “끽끽끽끽.”
 자신이 기억하는 최단 거리로 주파하는 루인의 뒤로 ‘이지가 없는 암흑 마수’들이 따라붙었다.
 암흑 신단의 신관들이 소환해낸 무지몽매한 마수들. 지능이 없는 대신 살육 본능만 남은 녀석들이 이빨과 발톱을 들이대며 쫓아왔다.
 “후욱 후욱.”
 루인은 호흡을 조절하며 뒤도 돌아보지 않고 뛰었다.
 체력에 추가 포인트를 주지는 않았지만 레벨 업 시 기본적으로 조금씩 스탯이 오르는 터라 숨은 가빠도 버틸 만했다.
 그렇게 달리자 한 박자, 또는 두 박자쯤 늦게 발견하고 쫓아오는 녀석들에게 쉬이 잡히지 않았다.
 아직은 초보존이기에 바로 옆을 지나쳐도 몬스터들은 한 발 늦게 반응했고 그 사이 루인은 저만치 거리를 벌린 것이다.
 “세이프!”
 개중 속도가 빠른 몇몇에게 공격당해 윈드 가드가 사라지려는 찰나, 4층으로 통하는 입구에 도달했다.
 4층으로 쏙 들어가 버리자 닭 쫓던 개 신세가 되어버린 마수들. 의도하지는 않았지만 몹 몰이가 되었다.
 뒤에 따라오던 녀석들이 고생 깨나 하겠지만…….
 “뭐, 어쩔 수 없지.”
 따라오던 파티가 안정적인 구성이기는 했지만 순간적으로 쏟아져나오는 마수들을 감당하지 못할 것이다.
 그것을 알았지만 어찌하겠나. 그것도 다 제 팔자인 것을.
 “으아아악!! 이 개새끼 죽여버릴거야!!”
 아니나 다를까, 잠시 실드의 재사용 시간을 기다리는 사이 층간의 장벽 너머 악에 받친 절규소리가 들려오는 듯 했다.
 루인에게 아무런 감흥도 주지는 못했지만.
 “윈드 가드.”
 윈드 가드의 사용이 가능해지자 루인은 다시 한 번 달리기 시작 했다.
 4층은 3층과 구조가 사뭇 달랐다. 3층이 계속해서 길로 이어진 구조였다면 4층은 넓은 3개의 광장이 이어지는 구조였다.
 물론 몬스터 다수의 무리가 몰려있기 때문에 사거리를 최대한 이용해 한 무리씩 빼내어 잡는 것이 일반적인 공략인 것이다.
 광장과 광장을 잇는 통로 입구를 이용해 장판교의 장비처럼 막아서고 싸울 수도 있지만 뒤편의 암흑 신관들이 전투에 참여하지 않는다는 전제였다. 아니면 화력을 퍼부어 그들부터 미리 해치우거나.
 그냥 돌파하려고 했다가는 그 숫자와 데미지를 감당하지 못하고 전멸을 당한다는, 그래서 합이 맞는 파티 구성이 반드시 필요하다는 베타테스트 공략이 올라왔던 곳이기도 하다.
 그러나 혼자인 루인은 돌파를 택했다.
 “저쪽이다. 바보들아.”
 휘익.
 까가강 깡깡 까강!!
 첫 번째 몬스터가 그를 인식하기도 전에 손을 떠난 소리폭탄이 멀리서부터 터지며 요란을 떨었다. 1레벨의 광역 도발이 그들의 시선을 잡아 끌었다.
 강력한 도발은 아니지만 소리인 만큼 범위가 상당히 넓었다.
 “끼에에엣!!”
 “침입자다!”
 동시에 사람과 마수의 소리가 섞이며 소리폭탄이 터진 쪽이 시끄러워졌다. 인근에 있던 ‘이지가 없는 암흑마수’와 ‘말단 암흑 신관’들이 모두 그쪽으로 몰린 것이다.
 그 사이 윈드 가드를 두른 루인이 그들이 빠진 공간을 통해 대담하게 전진했다. 하지만 그들의 영역에 들어선 만큼 곧 소리폭탄이 아무것도 아님을 알아차린 놈들이 그를 쫓을 것이다.
 “열셋, 열넷……. 열다섯.”
 속으로 열다섯까지 센 루인은 또 하나의 소리 폭탄을 던졌다.
 까가강 깡깡 까강!!
 이번엔 반대쪽이다.
 초보존의 몬스터들에게 학습 능력을 기대하기란 무리였다. 똑같은 소음임에도 소리폭탄이 터지자 강제 도발 효과에 의해 놈들은 또 다시 우르르 몰려갔고, 반대편에서 터진 만큼 동선 또한 길어졌다.
 그리고 그것은 루인이 움직일 수 있는 시간이 조금 더 길어졌음을 의미했다.
 “저리 비켜!”
 “끄악!”
 광장과 광장을 잇는 통로. 그 입구를 막아선 말단 암흑 신관을 향해 루인이 즉시 시전 가능한 모든 마법을 퍼부었다.
 거기에 창까지 꽂히니 아무 것도 하지 못하고 녹아내리듯 체력이 바닥을 친 말단 암흑 신관.
 순간적으로 꽤나 많은 마나가 사라졌지만 아직은 여유 있었다.
 “저기다, 잡아라!”
 “끼릭, 끽!”
 놈의 시체를 넘어서는 순간, 뒤편에서 그를 쫓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비교적 지속시간이 짧은 소리폭탄의 도발 효과가 끝난 것이다.
 다행히 사거리 때문인지 말단 암흑 신관들의 마법은 날아오지 않았고 이미 벌어진 거리를 이용해 무사히 첫 번째 광장을 통과 했다.
 “징한 놈들.”
 하지만 추격은 그치지 않았다.
 루인은 결국 지구 끝까지라도 쫓아올 기세로 따라오는 마수와 신관들을 등 뒤에 둔 채로 두 번째 광장에 진입했다.
 “하압!”
 “컥!”
 이제는 정말 멈추면 끝이었다. 두 번째 광장에 진입하자마자 마지막 소리폭탄을 던져낸 루인은 자신의 앞을 가로막는 신관 하나를 그대로 받아버렸다.
 지속시간을 다해 사라지기 직전이던 실드가 마지막으로 제 기능을 해내며 사라져버렸고 그대로 신관을 넘어선 루인은 인벤토리에서 나무 허수아비를 꺼내 반대쪽으로 던졌다.
 빼애앵-.
 사이렌 소리 같은 것과 함께 나무 허수아비가 광역 도발을 시전했다. 일순간 광장의 모든 몬스터들이 광전사라도 된 양 허수아비를 향해 달려갔고 순식간에 두 번의 공격을 당한 허수아비는 평범한 나무토막으로 변해 스러져버렸다.
 그 순간, 루인은 또 하나의 허수아비를 던졌다.
 그러자 루인에게 쏠렸던 시선이 다시 허수아비에게로 돌아갔다.
 “으다다다다!!”
 몬스터들이 모여든 반대쪽으로 힘껏 던졌기에 시간은 제법 벌었다.
 굉장한(?) 소리를 내며 도망치는 루인이었지만 누구하나 거들떠보는 녀석이 없었다.
 꽈직.
 이내 두 번째 허수아비가 박살났다.
 이제는 기호지세다.
 이미 삼십이 넘는 마수며 신관들이 자신을 인식했음을 아는 루인은 쉬지 않고 달렸고, 가까스로 신관들의 마법 범위를 넘어선 위치까지 도달할 수 있었다.
 “인벤토리.”
 전력으로 달리며 남은 허수아비를 세었다.
 앞으로 넷. 그 안에 5층 보스방에 도달하지 못한다면 모든 것이 끝장이다.
 “젠장.”
 세 번째 광장에 들어선 루인은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베타테스트 때보다 크기가 더 커진 것이다. 당연히 주둔하는 몬스터의 수도 늘었다.
 루인의 눈과 머리가 빠르게 회전했다.
 만일의 상황을 대비해 허수아비 하나쯤은 남겨야 했다. 그러나 얼핏 봐도 허수아비 세 개로는 감당이 안 된다.
 “이건 어떠냐?!”
 첫 번째 마수와 눈이 마주치려는 순간, 루인이 급히 방향을 틀었다. 멀리 돌아가는 길임에도 광장의 외벽을 타고 돌았다.
 대신, 따라잡히려는 순간 벽에 우둘투둘 돋은 돌을 밟고 날아올랐다.
 빼애애앵-.
 손이 닿지 않을 높은 곳에서 허수아비의 사이렌이 울었다. 광역 도발을 시전했다.
 땅에 떨어지는 루인을 노리던 손들이 일제히 방향을 바꿔 벽을 긁었다.
 하지만 닿을 수 없었다.
 허수아비가 턱에 걸려 내려오지 않는 것이다.
 도박에 성공한 루인은 속으로 예스를 외치며 달려나갔다. 바로 옆을 지나치는데도 뭐에 홀린 것처럼 놈들은 허수아비를 쫓았다.
 그 광경이 마치 좀비영화를 보는 듯싶었다.
 루인은 안도하지 않고 방향을 바꿔 최단 거리로 달렸다. 꽤나 높은 턱에 걸려 마수들에게는 닿지 않겠지만 신관들의 마법이 완성되면 곧 나무토막이 되어버릴 것이라는 걸 누구보다 잘 알기 때문이다.
 “저기다. 잡아라!”
 아니나 다를까, 광장을 절반쯤 지났을 때 정신을 차린 신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타이밍을 재고 있던 루인은 돌아보지 않고 준비한 허수아비를 던졌다.
 빼애애앵-.
 다시 남은 거리의 반을 좁혔다.
 빼애애앵-.
 마침내, 세 번째 광장을 통과했다.
 결국 루인은 나무 허수아비 1개를 남기고 마지막 층에 도달했다. 점차 커지는 원뿔 형태의 공간. 그 가장 큰 원의 중심에는 이 던전의 보스인 리세토가 기다리고 있을 터였다.
 베타테스터들조차 몇 번이고 파티를 맺어 도전한 끝에 겨우 잡아낸 초보존 최악의 보스.
 몸체는 커다래서 공격하기는 쉬웠지만 한 번 죽었다 살아난 언데드라는 설정이어서 패시브로 ‘커프스 스킨’을 갖고 있었다.
 시체의 피부란 무시무시한 이름의 스킬 효능은 바로 물리, 마법 저항. 잘못 칼을 박았다간 날이 좀체 빠지지 않아 버둥거리다 죽기 일쑤였고 마법 저항력을 가진 탓에 마법 공격도 데미지가 제대로 들어가지 않았다.
 그나마 상극인 사제 클래스의 공격은 배가 되어 잘 먹히는 편이었는데 문제는 갓 20레벨이 될까하는 사제 클래스에게 신성력이 있으면 얼마나 있겠냐는 것이다.
 신성 공격 주문뿐만 아니라 언데드이기 때문에 회복 주문으로 데미지를 입힐 수 있어 공격 방법은 다양했지만 공격하랴, 아군을 회복시키랴 신성력이 남아나질 않았다.
 때문에 한 파티는 아예 사제 클래스로만 구성해서 도전을 하기도 했었는데 그것은 그것대로 문제가 있었다.
 일단 이전 4개의 층을 뚫고 오기까지 시간이 너무 오래 걸린다는 것이 첫 번째 문제였고 놈의 일격을 버티기 어렵다는 것이 두 번째 문제였다.
 리세토가 이따금씩 쏘아내는 4서클의 주문이 규격보다 훨씬 약한 버전이라고 해도 체력, 방어력이 가장 높은 기사 클래스를 죽음 직전까지 몰고 갈만한 위력이다.
 나중에 매직 레지스트라는 마법 저항 패시브 스킬을 익히기 전까지 근접 클래스에게 고위 마법의 위력은 절망적이라 할 만큼 대단한 것이다. 마법사나 사제들은 마법 저항 패시브나 방어주문이 있었지만 기본 체력이 워낙 낮았다. 오히려 일격사를 면하면 다행일까.
 NPC들을 구슬려 얻은 정보에 따르면 마법사의 경우 2서클 주문 이후 3서클에서 특별히 강력한 주문이 없는 대신 4서클이 무지막지하게 강했다. 사기라는 단 한 마디로 표현할 만큼 그 위용이 대단했다.
 심지어 저 강력한 리세토의 마법들도 봉인 때문에 4서클로 보기 어려울 만큼 약화된 것이라고 했다.
 그만큼 4서클까지 레벨업을 하기도 어려웠는데 3서클까지의 부족한 공격력으로 어떻게든 머리를 굴려 경험을 쌓아야했고, 그 때문인지 고위 마법사의 수는 다른 클래스에 비해 절대적으로 적다고 했다.
 그 말에 루인은 마법사 클래스 유저들이 마법이라는 것을 난생 처음 사용하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4서클이 될 때쯤 상당히 능숙해질 것으로 기대했다. 의도한 것이든 그렇지 않든 적응을 통해 마법 사용법을 배워나가는 것이다.
 과연 그때까지 버틸 만한 인물이 얼마나 있을 지는 알 수 없지만.
 “후우, 그럼 가볼까?”
 쿨타임과 마나 회복을 기다리며 생각을 정리한 루인은 성큼성큼 중앙을 향해 걸어갔다.
 윈드 가드는 아직 두르지 않았다.
 “어디…….”
 마지막 층의 광장에는 암흑 신관들이 원을 이루며 서있었다. 차림새나 분위기가 오면서 보았던 말단 암흑 신관과는 뭔가 다른 느낌이다.
 원의 중앙을 바라보며 무언가 주문을 외는 듯한 모션. 그들을 향해 루인이 성큼성큼 다가섰지만 사거리에 들어와도 전혀 반응하지 않았다.
 루인은 조금은 긴장한 표정으로 마법을 시전했다.
 “파이어 애로우.”
 퍼엉!
 손끝을 떠난 불꽃 화살이 암흑 신관을 강타하자 녀석이 피를 토하며 휘청였다.
 그러나 필사의 의지로 주문만은 끊지 않았다. 그 모습에 루인의 표정이 조금은 풀렸다.
 “다행이군.”
 
 
 # Chapter. 8 흉내 내기
 
 베타테스트 때와 다르지 않다.
 지금 주문을 외는 녀석들은 중급 암흑 신관. 파이어 애로우에 타격을 입은 것처럼 보이지만 아마 주문이 끝날 때까지 파티 단위로 마법을 퍼부어도 한두 녀석을 채 해치우기 어려울 것이다.
 베타테스트 초반에는 그것도 모르고 어떻게든 이들을 잡기 위해 애쓰다가 정작 보스가 나타났을 때 마나와 기력 등이 동나서 무력하게 전멸 당한 파티가 참 많았다.
 특히 이들을 쓰러뜨린 수만큼 보스가 약해진다는 루머가 돌아서 고생들을 많이 했지.
 루인은 공격을 멈췄다.
 대신 몇 걸음 물러서서 그들의 주문이 완성되기를 기다렸다.
 “움 레비오 도로 비아!”
 휘이이잉-.
 신관들이 일제히 외치자 아무것도 없던 허공에 연기가 몰려왔다.
 연기는 곧 형태를 갖추었다. 마법사와 주술사의 중간 정도 되는 듯한 모습. 허나 양다리가 없이 허공에 떠있고 골반 위쪽으로만 인간, 아니 리치와 비슷한 형상을 띄어서 사뭇 그 모습이 위협적이다.
 “컥!”
 “으억!”
 놈의 형체가 완벽히 갖추어지는 순간, 역할을 마친 암흑 신관들이 자신의 목을 잡고 쓰러졌다.
 동시에 녀석들의 몸에서부터 빠져나가는 검은 기운들.
 그 기운은 곧장 리세토에게로 빨려들어갔다.
 이러니 신관들을 잡으면 리세토가 약해진다는 루머가 나돌 수밖에.
 “윈드 가드!”
 이 패턴을 알고 있던 루인이 그제야 윈드 가드를 둘렀다.
 “나의 잠을 깨우는 자 누구냐!”
 파앙.
 리세토의 고함과 함께 퍼져나간 힘의 파동에 윈드 가드가 깨어지고 체력이 루인의 조금 깎였다.
 등장부터 광역기를 시전해 유저들을 당황하게 만드는 것이 녀석의 전매특허.
 정작 나타나기도 전에 깨운 놈들을 죽여놓고 리세토는 루인을 향해 적의를 드러냈다.
 스토리 상 리세토는 과거 이 마을의 수호신이었던 용사.
 그런 자를 어둠의 힘으로 되살리니 분노한 것이다. 애초에 대상이 잘못되었다.
 “와라.”
 루인은 빠르게 백스텝을 밟으며 리세토에게서 거리를 벌렸다.
 동시에 애로우 계열의 즉시 시전 주문을 퍼부었지만 마법 저항력 때문에 고작해야 가려운 곳을 긁어주는 수준. 리세토의 HP에는 큰 변화가 없었다.
 그럼에도 루인은 약 올리듯 계속해서 마법을 퍼부으며 거리를 벌렸다.
 “조금만 더.”
 그런 루인을 향해 성질내듯 땅을 쓸며 팔을 몇 번 휘저은 리세토는 몸을 뻗어 닿을 거리가 아님을 알고 방법을 달리했다.
 “에어로 봄.”
 “젠장.”
 퍼엉!
 공간이 쪼그라들 듯 압축되는 가 싶더니 루인의 코앞에서 무언가 터져나갔다. 착시였다. 사실은 공간이 아닌 공기를 압축해 터트린 것이다.
 4서클 마법 중에서도 가장 위력이 약한 녀석이지만 레벨 차이가 한참 나는 마법사 하나를 죽이기에는 충분했다.
 “큭.”
 압축된 공기가 터지는 충격을 버텨낸 루인이 신음성을 토했다. 그러나 죽지는 않았다. 폭발이 일어나려는 순간 루인이 기지를 발휘한 덕이다.
 “골로 갈 뻔 했군.”
 만약을 대비해 마지막 남은 허수아비를 언제든 꺼낼 준비하지 않았다면 부활 시켜 줄 사람도 없는 이곳에서 일격사 당할 뻔 했다.
 “아직은 안 되지.”
 아찔한 충격에서 간신히 정신을 차린 루인이 고개를 저었다. 이대로 죽으면 계획이 틀어지는 것이다.
 나무 허수아비를 들어올린 루인이 오히려 조금 더 녀석에게서 거리를 벌렸다. 어떤 공격이든 무조건 1의 데미지만 받는 허수아비는 아직 한 번의 공격을 더 버틸 수 있었다.
 “가소로운 녀석들.”
 화르륵.
 일정 거리를 벗어나자 리세토의 눈빛이 변했다.
 주위로 화염이 일렁거렸고 루인은 그것이 뜻하는 바를 알 수 있었다.
 “좋았어.”
 초보존의 보스라고는 하나 아직 AI는 갖지 못했다. 즉 몇 가지 정해진 패턴을 따랐는데 이는 이미 베타테스트에서 겪은 바 있었다.
 “파이어 스트라이크!”
 “하앗!”
 폭발력이 강한 4서클 화염주문 파이어 스트라이크.
 리세토의 크기만큼이나 커다란 크기로 다가오는 운석 같은 불꽃을 똑바로 쳐다보며 루인은 허수아비를 힘껏 집어던졌다.
 퍼엉!
 굉음과 함께 허수아비가 박살이 났다. 아주 산산조각이 나서 나뭇조각이 비산했다. 그마저도 검게 타버려 숯처럼 변했고 일부는 그대로 재가 되어 흩날렸다.
 그러나 방어는 성공적이었다. 몸 바쳐 희생한 허수아비 덕분에 루인이 받은 것은 파편이 떨어져 입은 미세한 데미지뿐이다.
 곧 폭연이 걷히고 루인과 리세토가 마주섰다.
 “자, 그럼 잘 있으라고!”
 “……?”
 다음 리세토가 발견한 것은 어느새 귀환의 돌을 발동시킨 루인의 모습이었다.
 그런데 이상했다. 자신의 무력함을 깨닫고 멀어져가는 그의 입가에 미소가 걸려있다.
 “크아앙-!”
 리세토가 포효를 터트렸다. 온몸에 털이 곤두서고 멈이 뻣뻣해지는 느낌이지만 처음과 같은 물리력은 없었다. 귀환이 강제로 끊기지는 않았다.
 “파이어 스트라이크!”
 콰앙-!
 루인이 사라진 자리로 신경질적인 불꽃의 구만 떨어졌다.
 “좋았어.”
 마을로 돌아온 루인은 득의의 미소를 지었다. 가지고 있던 모든 것을 털어 고작 보스의 얼굴을 보고 왔을 뿐이건만, 그는 마치 혼자서 보스를 해치우기라도 한 듯한 표정을 지었다.
 “스킬창.”
 
 [흉내 내기(고유)]
 - 사용자가 직접 경험한 상대방의 행동을 흉내 내어 50% 위력으로 사용한다.
 - 고유스킬은 흉내 내기 불가.
 - 마나 소모량: 100
 - 상위 스킬: 따라 하기
 
 바로 이것 때문이다. 직접 보거나 몸으로 받아낸 스킬을 50%의 위력으로 복사해내는 능력. 바로 [기예]를 선택한 광대의 고유스킬이다.
 “흐흐흐흐. 등록.”
 50%라고는 하지만 20레벨 이하의 모든 클래스를 한 방에 잠재울 수 있을만한 위력이다. 그런데 심지어 범위 공격이기까지 했다. 이를 위해 10레벨 이후 얻은 보너스 포인트의 대부분을 마나에 투자했다.
 흉내 낼 스킬의 지정을 마친 루인이 사납게 웃었다.
 “다 죽었어.”
 4서클이라면 40레벨은 되어야 사용 할 수 있다. 그런데 고작 20레벨도 되지 않아 4서클 마법이라니. 천군만마를 얻은 루인의 머리가 빠르게 돌아갔다.
 파이어 스트라이크라면……. 바로 거기다.
 이미 어떤 마법을 얻을 때 어디를 간다라는 계산까지 마친 루인이기에 머뭇거림이 없었다.
 “아직은, 인가?”
 이미 와 본 바 있는 오크부족의 순찰지. 초보존의 다른 몬스터들과 달리 ‘진짜’ 오크에 가까운 녀석들을 만날 수 있는 곳이니 만큼 아직까지 사람의 발길이 닿지 않았다.
 경험치는 상대적으로 높은 편이지만 한 놈을 건드리면 다른 녀석들까지 줄줄이 엮여오는 ‘동족의식’, 또는 ‘링크 되어 있는’ 몬스터이기 때문이다.
 한 번에 다수를 몰아 잡을 수 있다는 점은 좋지만 초보존에는 비슷한 경험치를 주는, 훨씬 약하고 각개격파 할 수 있는 몬스터들이 꽤 많이 있으니 굳이 위험을 감수하고 이들을 사냥하러 올 이유가 없다.
 하지만 곧 레벨이 오르고 나면 이곳 역시도 사람이 붐빌 것이다. 지금의 추세로 보면 어떤 사냥터든 금세 자리가 가득 찰 테고, 결국 더 어렵더라도 사람이 적은 사냥터를 찾게 될 것이기 때문에.
 그렇기에 루인도 이곳을 찾았다.
 아직은 유저들이 감히 침범하지 못하는 곳.
 한 번에 무려 3~5마리의 오크 정찰병과 오크 궁수를 상대해야하는 곳.
 오크들의 레벨은 15 레벨 대 중반으로, 거의 초보존을 벗어날 무렵이 되어서야 파티를 이루고 사냥해볼만한 장소이다.
 “이게 바로 꿀이지.”
 씨익.
 다가오는 오크 무리들을 보며 나무 뒤에 몸을 숨긴 루인은 그들이 지척에 다다르자 몸을 날리며 스킬명을 외쳤다.
 “흉내 내기. 파이어 스트라이크!”
 “취익!!”
 화르륵!
 루인의 손에서 머리통만한 화염구가 쏘아졌다. 오크 정찰병과 궁수가 재빨리 무리를 꺼내보지만 이미 한참이나 늦어버린 뒤였다.
 흉내 내기 스킬의 특성상, 직접 캐스팅을 외우는 것보다도 오히려 스킬 구현이 빨랐다.
 “……!!”
 화염구의 열기가 폐부를 파고들었고 가운데 녀석에게 닿는 순간, 굉음과 함께 폭발해버렸다.
 동시에 네 개의 회색 덩어리들이 허공을 날았다. 루인의 일격에 체력이 0을 가리킨 오크들의 시체다.
 구현이 너무나 빠르고 가까이에서 공격이 날아온 터라 눈 뜨고 그대로 당해버렸다.
 눈에 띌 만큼 큰 경험치가 한 번에 들어왔다. 각각 1실버가 넘는 돈을 남겼고 그 이상의 오크들이 몰려오는 일도 없었다.
 오크 순찰대들은 일정한 간격을 두고 순찰을 돌기에 시간을 끌지 않는 이상 추가적으로 몬스터가 달라붙을 일은 없는 것이다.
 “유후~.”
 놈들이 남긴 잡템을 쓸어담는 루인에게서 콧노래가 흘러나왔다. 초보존에서 보스를 제외하고 가장 체력이 높은 편인 오크. 놈들을 일격사 시킬 수 있다면 다른 놈들은 말해야 입 아팠다.
 더구나 흉내 내기 스킬의 재사용 시간은 생각보다 짧았다. 이렇게 일격에 결착을 지을 수 있다면 다음 순찰대가 왔을 때 다시 사용 할 수 있을 정도.
 즉, 무한 사냥이 가능하다는 뜻이다.
 아이템 수거를 마친 루인은 마나와 쿨타임의 회복을 기다리며 다시 나무 사이로 몸을 숨겼다.
 “또 오는 군.”
 이번엔 궁수가 끼어있는 5마리 무리다.
 그러나 루인은 전혀 걱정하지 않았다. 기본적으로 오크 궁수는 시야가 그리 넓지 않다. 궁수가 끼어있다고는 하나 힘이 좋아 멀리 쏘아낼 수 있다 뿐이지 아이러니하게도 먼 거리를 감지해내거나 주변 지형을 샅샅이 훑지는 못했기 때문에 이렇게 숨어 있다가 튀어나가 기습을 한다면 아무런 위협이나 부담 없이 선제 공격을 가할 수 있다.
 “흉내 내기. 파이어 스트라이크!”
 “취익?!”
 당황한 듯 허둥대는 놈들의 사이로 파이어 스트라이크가 정통으로 꽂혔다.
 놈들은 그대로 익어버렸고, 루인은 무난히 아이템과 경험치를 챙겼다.
 그렇게 해가 저물 때까지 사냥을 반복하며, 루인은 누구보다 빠르게 20레벨을 달성 할 수 있었다.
 “좋았어.”
 한 번 20레벨을 달성한 이상, 초보존을 벗어나기 전까지는 레벨 다운이 되지 않는다.
 반면 20레벨 상태에서 쌓는 경험치는 누적되어 초보존을 벗어나 ‘인증’을 받는 순간 한꺼번에 적용된다. 초보존을 벗어나자마자 21레벨이든 31레벨이든 될 수 있는 것이다.
 물론 20레벨 몬스터의 경험치로 그 정도까지 많은 누적 경험치를 쌓지는 못하겠지만 알려진 정보에 의하면 이론상으로는 그랬다.
 대신 또 한 가지. ‘바깥’의 몬스터들이 더 많은 경험치를 주긴 하지만 이곳 초보존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 강함을 함께 가지고 있다는 정보도 있었다. 초보존을 생각하고 쉽게 사냥에 나섰다가는 큰 코 다치기 십상이라는 것. 극히 드물게 정보를 제공하는 이터널에서 제공 된 희귀하고 귀중한 정보였다.
 그래서 베타테스터들은 초보존에 더 머무르는 쪽으로 의견을 모았었다.
 루인 역시 마찬가지다. 초보존에는 정보가 있고, 경험이 있었다. 무리하지 않고 차분히 경험치를 쌓는 편이 여러모로 유리했다.
 “슬슬 가볼까?”
 20레벨을 달성하고 나서도 다시 한참동안 경험치를 쓸어 담던 루인이 고수하던 자리를 박차고 더 안쪽으로 움직였다.
 순찰대의 종착. 오크부족의 전초기지다.
 작은 성채와 같이 올려진 나무 성벽을 주시하며 루인은 가까이에 있는 나무를 타고 올랐다.
 “흉내 내기. 파이어 스트라이크!”
 콰광-!
 성벽과 비슷한 높이에까지 오른 루인이 튼튼한 가지를 딛고 마법을 날렸다.
 요란한 소리와 함께 무너지는 성벽. 동시에 몇 없던 궁수들이 전멸해버렸다.
 “침입자다! 인간이다!”
 “뿌우~!”
 뿔피리 소리와 함께 안쪽으로부터 오크 수비병 네 마리가 달려 나왔다.
 루인은 잽싸게 나뭇잎 사이로 숨었고 녀석들은 적을 찾지 못해 두리번거렸다.
 “저기다!”
 그때, 성벽 위에 있던 놈들 중 살아남은 한 녀석이 나무 위를 가리키며 소리쳤다.
 “칫.”
 루인은 나무를 꼭 붙들었다. 충격에 대비했다.
 “크엉!”
 오크 수비병 하나가 함성과 함께 몸을 날렸다. 몸을 부딪혔다.
 제대로 된 견갑을 갖추지 못해 충격을 고스란히 어깨로 흡수해야 했지만 마다하지 않았다.
 골이 울리는 충격이 나무와 몸을 동시에 뒤흔들었지만 루인은 떨어지지 않았다. 창을 나무에 박아 넣은 덕이었다.
 한참을 버틴 후 속으로 숫자를 거꾸로 셌다. 아홉, 여덟, 일곱, 여섯…….
 그리고 마침내 더 셀 숫자가 없어졌을 때, 지탱하던 힘을 풀고 놈들에게 소리쳤다.
 “흉내 내기, 파이어 스트라이크!”
 콰앙!
 나무꾼 마냥 아래 모여 있던 놈들에게 재앙이 떨어졌다.
 우지끈!
 네 녀석의 숨통을 한 번에 앗아감은 물론, 그 여파에 매달려있던 아름드리나무가 부러져버렸다.
 루인은 나무가 쓰러져 바닥에 닿기 전, 몸을 날려 뛰어내렸고 약간의 낙하 데미지만 입은 채 일어 설 수 있었다.
 “수거.”
 놈들의 사체를 향해 명령어를 외친 루인이 재빨리 전초기지 안쪽으로 들어섰다.
 
 
 # Chapter. 9 오크의 비보
 
 쉴 틈 따윈 없었다. 여기서 머뭇거린다면 오크 수비병들이 끊임없이 나타날 테고 그것은 그것대로 좋은 일이기는 했지만 루인은 이곳에 경험치 노가다를 하러 온 것이 아니었다.
 성벽 안쪽으로 들어간 루인은 안쪽 벽에 몸을 바짝 붙였다. 곧이어 줄줄이 나타날 오크 수비병들의 시야에 닿지 않기 위함이다.
 등잔 밑이 어둡다는 말처럼 나무 성벽 위에는 여전히 오크 수비병과 오크 궁수들이 눈을 부라리고 있었지만 루인을 알아채는 녀석은 단 하나도 없었다.
 “멍청한 놈들.”
 부족한 AI의 한계였다. 고등한 AI가 거의 존재하지 않는 초보존인 탓에 놈들은 그저 기지 외곽만을 주시할 뿐이고 루인은 안쪽 성벽에 붙어 천천히 이동했다.
 전초기지 내부 구조는 간단했다. 중앙에는 광장 같은 공터가 있었고 성벽에 딱 붙다시피 한 움막들이 동그랗게 공터를 에워쌌다. 어지간해서는 노출 될 수밖에 없는 구조다.
 거기다 공터에는 일정한 거리를 두고 순찰병과 수비병이 무리를 이뤄 돌아다녔고 각 움막에는 오크 수비병이며 중간보스급인 네임드 몬스터가 자리 잡고 있었다.
 이러니 초보존 던전의 최종 보스가 리세토라면 필드의 최종 난이도는 오크 전초기지라는 말이 있는 거겠지.
 베타서비스에서 밝혀진 공략 방법은 총 두 가지다.
 빠른 공략과 일기토.
 동족의식이 강한 오크들이지만 초보존이라서인지 한 무리를 상대하고 일정 시간이 지나기 전에는 아무리 큰 소음이 일어도 증원이 오지 않는다. 실수로 다른 움막 오크들의 영역을 침범하지 않는 한.
 이것을 이용해 빠르게 수비병 무리를 처치하고 보스에게로 진격하거나, 반대로 순찰을 도는 수비병 무리를 피해 움막의 오크들을 빠르게 제거하고 영역을 확보하는 방법도 있다.
 비록 리젠이 되는 시간과 다음 움막을 공략하는 시간을 잘 계산해야한다는 문제가 있지만.
 “잘못하면 양쪽에서 당하기 십상이지.”
 물론 시간 계산에 실패한다면 되살아난 움막의 오크들에게 후방을 기습당할 수도 있었다.
 일반 수비병들뿐이라면 계산이 어렵지 않겠지만 중간중간 끼어있는 네임드 몬스터들 때문에 생기는 변수가 너무 컸다. 놈들의 타입과 패턴, 체력을 정확히 알기 전에는.
 두 번째 방법은 바로 일기토.
 정정당당한 것을 넘어 무식해보이기까지 하는 방법이었다.
 “정면 대결을 펼쳐야 한다니, 우스운 노릇이야.”
 바로 오크 전초기지의 보스 몬스터인 라헬로와 일대일 대결을 벌여 이겨야하는 것. 물론 여기서 이긴다는 것은 일정 체력 이하로 떨어뜨리는 어설픈 짓이 아니라 체력을 0으로 만들어 목숨을 끊어놓는 것을 말한다.
 대신 그 전까지의 과정은 생략할 수 있는데 특수한 퀘스트를 거쳐 오크로 변신을 해야만 했다.
 시간제한이 있는 이 변신을 통해 다른 오크 순찰병이나 궁수, 수비병 등에게 제지 받지 않고 라헬로에게 다가갈 수 있다.
 결투도 아주 정정당당하게 치러졌는데 오크의 모습을 유지한 상태에서 라헬로를 찾아가 결투를 신청하면 놈이 받아들이면서 일대일 대결이 성사되는 것이다.
 물론 필드 최강급의 보스인지라 20레벨의 유저 혼자서 감당하기에는 다소 무리가 있지만 오크변신이 주는 스탯의 보정이 적지 않아서 아주 컨트롤이 좋은 유저라면 이길 수도 있었다.
 “손에 꼽을 정도이긴 해도 아예 없던 건 아니었지.”
 문제는 난다 긴다 하는 놈들을 모아 놓은 베타테스트에서도 이 퀘스트를 통해 끝내 라헬로를 잡은 유저의 수가 열을 넘지 못했다는 것이지만.
 “전사에 한정이었다고는 해도.”
 게다가 오크변신을 위해서는 전사 클래스 유저여야만 했다. 그러나 그것이 아니라도 그 수가 많았을 것 같지는 않다. 근접 전투가 특기인 오크전사 라헬로를 상대함에 있어서 일대일로는 똑같이 몸을 쓰는 기사와 전사 클래스가 가장 유리한 게 사실이니까. 하지만 만약 클래스의 제한이 없다면 적어도 몇 정도는 더 퀘스트를 완료 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꼭 그렇게 무식하게 잡을 필요는 없었는데 말이지.”
 그때의 기억을 떠올린 루인이 음흉하게 웃었다. 굳이 어렵게 라헬로를 잡으려 하지 않은 자들도 많았지만 루인은 애를 써서 라헬로를 잡아낸 케이스였다.
 그것도 최초 공략자 타이틀까지 따내고서.
 엄밀히 따지면 최초로 라헬로를 ‘죽인’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공략’했다는 표현을 받은 것은 루인이 최초였다.
 누구나 따라 할 수 있는 아주 쉬운 방법을 통해 라헬로를 잡아냈기 때문이다.
 “이래서 머리가 나쁘면 손발이 고생이라니까.”
 루인이 찾아낸 방법은 아주 간단했다.
 전초기지 안까지 빠르게 치고 들어가는 동일하다. 그러나 루인은 중간보스에게 도달하기 전 한 움막에서 진을 치고 기다렸다. 움막에서 되살아나는 오크수비병만 빠르게 처치하고 계속, 계속 기다렸다.
 약속한 ‘그’가 오기까지.
 루인과 사전에 말을 맞춘 전사는 오크변신을 통해 라헬로를 공터의 중앙까지 불러냈고 대결이 시작되는 것에 맞춰 루인의 파티는 움막에서 치고 나와 라헬로에게 일제히 공격을 퍼부었다. 그 과정에서 증원 나온 오크들에 의해 몇몇은 죽기도 했다. 대신 필드의 보스이기는 하나 리세토처럼 단일 전투력은 압도적이지 못한 라헬로 역시 파티의 화력을 버티지 못하고 허물어졌다.
 그러면 살아남은 누군가가 아이템만 챙기고 도망쳐 귀환을 하거나 그냥 죽어주면 되었다.
 어쨌든 라헬로를 죽였으니 목적은 달성.
 일대일을 신청한 전사는 퀘스트에 실패하겠지만 어디까지나 재시도가 가능한 일시적인 실패에 불과했다. 대신에 자기 몫을 받으니 오히려 이득이랄까.
 “이제는……그럴 필요도 없지.”
 다시 기억을 접어둔 루인이 사악하게 웃었다. 파이어 스트라이크의 위력은 파티 하나보다도 강력했다.
 “가볼까?”
 성벽에 바짝 몸을 붙이고 움막 사이를 빠르게 움직였다. 움막간의 거리는 제법 있었지만 서두른다면 수비병의 시선은 확실히 피할 수 있다.
 오히려 베타 때보다도 움막의 수가 많아진 것 같다. 난이도를 올리려는 것일까? 루인이 세운 ‘공략’을 막으려는 것일까? 어느 쪽이든 분명한 것은 그 생각이 지금 루인을 돕고 있다는 것이다.
 “읏차.”
 나무 벽을 딛고, 껑충껑충 뛰어 움막 뒤편을 넘어 다녔다.
 움막과 성벽 사이, 아무도 오지 않는 곳. 그 사각지대를 내 집처럼 뛰어다니며 루인은 가장 깊은 곳에 위치한 크고 튼튼한 움막에까지 다다랐다.
 “하나, 둘, 셋, 넷…….”
 라헬로의 움막 뒤편까지 도달한 루인은 꼬물꼬물 움막을 기어올랐다. 오크들이 쓰는 움막이라, 또 보스 몬스터인 라헬로의 움막이라 사람 한 둘이 올라서서는 끄떡없어 보였다.
 실제로 루인의 무게를 너끈히 버텨냈고, 움막의 꼭대기에 오른 루인은 그 앞을 지나는 수비병 무리의 걸음에 맞춰 초를 세었다. 앞 무리와 뒤 무리의 이동 속도와 간격, 시간을 가늠하기 위함이다.
 “십 분.”
 딱 십 분이다. 다음 수비병들이 움막 앞을 지나기까지의 시간. 그러나 앞의 수비병들도 되돌아오지 않을 거리만큼 보내야하니 실제로는 십 분이 채 되지 않았다.
 안전을 도모하기 위해서는 그 안에 라헬로를 쓰러뜨려야했다. 그 전에 흉내 내기의 쿨타임이 돌아오거나.
 “후우, 시작해볼까?”
 쑤욱.
 루인의 몸이 90도로 꺾이며 움막 아래로 걸쳐졌다.
 떨어져 내린 것이 아니라 허리힘으로 몸을 지탱하며 몸의 절반만 움막 안으로 들이민 것이다.
 기껏해야 가슴팍까지나 드러났을 뿐이지만 그것으로 족했다.
 “흉내 내기. 파이어 스트라이크!”
 그것만으로 원하던 충분한 시야와 마법을 발현할 각도를 만들어냈으므로.
 “?!”
 “크헝!”
 무시무시한 열기를 뿜으며 마법이 날아들자 라헬로가 뒤늦게 함성을 외쳤다. 방어력과 마법 저항력, 공격력이 함께 올라갈 테지만 무리였다.
 콰아앙-!
 움막을 지탱하는 기둥에 까지 타격을 준 건지 움막이 크게 흔들렸다. 하지만 대비하던 루인은 가까스로 떨어지지 않고 버텨냈다.
 “젠장.”
 힐끗 경험치를 살핀 루인이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보스몬스터를 잡았다고 보기엔 너무 적은 양의 경험치가 오른 것이다.
 라헬로는 살아있다.
 “크아아앙!!”
 재차 터진 녀석의 함성에 온 몸의 털이 곤두섰다. 포식자의 앞에 선 먹잇감 마냥 몸이 굳고 정신이 멍해졌다.
 쿵 쿵 쿵.
 거친 발 구름 소리와 함께 라헬로가 움막 밖으로 뛰쳐나왔다.
 주변을 두리번거리더니 기어코 얼어있는 루인을 찾아냈다.
 루인은 입술을 꽉 물었다. 약한 통증과 함께 정신이 돌아왔다. 몸의 통제권을 찾아왔다.
 “빌어먹을 인간들! 다 죽여버리겠다!”
 그때 라헬로도 같이 움직였다. 루인이 그랬던 것처럼, 움막의 위로 오르기 위해 뒤편으로 돌아왔다.
 “핫!”
 그런 놈을 향해 루인은 준비한 창을 던졌다. 2서클의 인챈트 주문이라도 걸면 좋으련만, 20레벨에는 도달했어도 초보존에서는 2서클 마법을 배울 수가 없었다.
 “가소롭다!”
 까앙 까앙.
 그때마다 사람 몸통만한 시미터를 휘둘러 창 자루를 쳐내는 라헬로를 보며 루인은 잠시 고민에 빠졌다. 흉내 내기의 쿨타임을 기다릴 것인가, 다른 마법으로 공격할 것인가.
 조금 전 라헬로가 내뱉은 “빌어먹을 인간들! 다 죽여버리겠다!”라는 대사는 가장 체력이 조금 남았을 때 발작적으로 외치는 것이다. 지금 마법을 난사해 놈을 공격한다면, 어쩌면 도달하기 전에 해치울 수 있다는 의미이다.
 “흥, 어디 따라와 봐라!”
 놈이 지척까지 다다랐을 때, 루인은 결정을 내렸다. 움막을 뛰어내렸다.
 녀석이 뛰어나온 움막의 입구를 향해서, 낙하 데미지를 각오하고 뛰어내렸다.
 “큭.”
 떨어지는 힘을 이기지 못하고 바닥을 구른 루인은 재빨리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혹시나 놈이 따라 뛰어내리면 말짱 꽝이었지만 그의 기억에 녀석의 인공지능은 그렇게 뛰어나지 않았다.
 “크아앙!”
 세 번째 포효를 터트리며 움막이 흔들렸다. 덜컹거렸다. 예상대로 놈이 따라 뛰어내리지 않고 다시 움막을 돌아내려오고 있었다.
 이래서야 가상현실이 아니라 정해진 스크립트대로 움직이는 온라인게임 같다고 생각했다.
 실망스럽지만 한편으로는 다행이다. 이런 경우 공략하기는 더 편하다. 이쪽은 어떤 식으로든 운신이 자유로운데 적은 그렇지 못하다면 공략을 생각보다 아주 간단해진다.
 “흐읍.”
 부욱.
 쿵쾅거리는 소리를 들으며 루인은 움막 한편에 칼집을 냈다. 움막을 이루는 천이 워낙 두꺼워 날이 잘 들어가지 않았지만 힘을 내어 몇 번이고 찌르니 크지 않은 구멍이 만들어졌다.
 “죽어라, 인간!”
 스치는 모든 것을 파괴 할 듯한 숄더 차지로 라헬로가 움막 안을 밀고 들어왔을 때, 루인은 그 구멍을 통해 다시 움막을 빠져나왔다.
 “크앙!!”
 네 번째 분노가 울려퍼지며 라헬로가 바보처럼 다시 움막을 돌아나왔다.
 “오호?”
 이 방법을 쓴다면 야금야금 마법을 날려 라헬로의 체력을 갉아먹을 수도 있을 것 같았다. 라헬로의 움직임이 아무리 재빠르다 한들 구멍사이를 오가는 것보다 빠르지는 못했고 그 동안 충분히 쿨타임과 캐스팅 시간을 벌 수 있겠다 싶은 것이다.
 새로운 공략법의 발견이다.
 그러나, 지금의 루인에게는 그런 번거로움이 필요 없었다.
 몇 번을 개구멍으로 오가고 나니 재사용 시간이 지나갔다.
 “자, 고깃덩이가 될 시간이다.”
 루인이 두 주먹을 마주치고, 라헬로를 향해 다시 뻗었다.
 “흉내 내기. 파이어 스트라이크!”
 “크허엉-!”
 화르르륵!!
 라헬로가 온 몸을 다해 부딪혀보지만 루인에게 닿기 전, 회색빛으로 물들며 무릎을 꿇을 뿐이다.
 “휴우. 수거!”
 라헬로가 드랍한 아이템을 챙긴 루인은 다시 움막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오크 수비병들이 되살아나기 전 상자 하나를 찾아냈다.
 이름하야 오크의 비보.
 라헬로가 드랍한 열쇠를 이용해 놈의 보물을 얻을 수 있는 전리품 상자였다.
 뿐만 아니라 앞으로도 특수한 필드 보스를 해치웠을 때 주변을 수색해 많은 아이템을 찾을 수 있게 된다. 이것은 그 사실을 알리는 효시와도 같은 것. 그만큼 모두의 주목을 받을 수 있는 강력한 아이템들이 준비되어 있다.
 “어디…….”
 딸깍.
 침을 꿀꺽 삼키고 열쇠를 돌리자 빰빠라밤하는 소리와 함께 기계음이 들려왔다.
 
 [오크의 비보를 습득하셨습니다.]
 [호칭 ‘오크 약탈자’를 얻으셨습니다.]
 
 “좋았어.”
 상자를 열자 즉시 인벤토리로 아이템이 들어왔다. 인벤토리에 깜박이는 아이콘들이 생성된 것을 확인한 루인은 다시 구멍을 통해 빠져나왔고 구석의 구석으로 가서 바닥난 마나를 회복시켰다.
 그리고 경건한 마음으로, 인벤토리를 열어 획득한 아이템을 살폈다.
 
 
 # Chapter. 10 언데드 공략법
 
 [라헬로의 강철 갑옷][세트]
 - 오크투사 라헬로가 입었던 강철 갑옷. 그 어떤 공격이라도 튕겨낼 수 있을 것 같다.
 - 방어력: 108
 - 내구도: 500 / 500
 - 24시간에 1번 스킬 [전장의 함성] 사용 가능
 
 [라헬로의 강철 투구][세트]
 - 오크투사 라헬로가 즐겨 쓰던 강철 투구. 이 투구만 있으면 적의 일격도 두렵지 않다.
 - 방어력: 54
 - 내구도: 300 / 300
 - 착용 시 [불굴의 의지] 자동 발동
 
 [라헬로의 강철 바지][세트]
 - 오크투사 라헬로가 입었던 강철 바지. 그 견고함이 믿어지지 않을 만큼 움직임이 자유롭다.
 - 방어력: 79
 - 내구도: 400 / 400
 
 “헐.”
 기대는 했지만 예상 밖이었다. 무려 세트 아이템이라니? 3피스짜리의 세트아이템이기는 했지만 모두 착용할 경우 무려 방어력을 50이나 추가로 올려주고 힘과 체력 스탯까지 소폭 상승시켜주었다.
 아니 세트 효과가 아니어도 좋았다. 각각의 아이템 하나하나가 가지는 방어력은 루인이 베타테스트 시절에도 들어보지 못한 수준이었다.
 “가만, 이 검은색이라면…….”
 그때 문득, 베타테스트의 기억이 떠올랐다.
 흑갑을 입은 돌격형 기사.
 일명 검은 소.
 직접 본 적은 없지만 베타테스터들의 커뮤니티에서 동영상을 본 적 있었다.
 적의 공격을 무시하고 돌진해서 베어버리는 과격하기 짝이 없는 전투법.
 믿을 수 없는 맷집의 소유자라고 생각했는데 이제 보니 이유가 있었다.
 라헬로의 세트 아이템이 주는 막강한 방어력. 현 레벨 대 기사 클래스가 가질 수 있는 최고 방어력을 몇 배나 상회하는 방어력이라면 충분히 그런 전투법을 선택 할 만 했다.
 “아론이라고 했던가? 속 좀 쓰리겠군.”
 이미 루인이 얻은 이상 다른 초보 채널에서는 라헬로의 세트 아이템을, 오크의 비보를 얻을 수 없다.
 보스 몬스터에게 최초로 얻을 수 있는 소위 ‘비보’는 단 하나씩 밖에 존재하지 않으니까. 그것은 채널이 분리되어 있는 초보존이라도 마찬가지이다.
 앞으로 라헬로는 쓰러뜨리는 자가 나온다 해도 오크의 비보가 아닌, 기껏해야 매직, 레어급의 전리품을 얻을 수 있을 뿐이다.
 아론만 불쌍하게 되었다. 물론 라헬로의 세트 아이템이 없어도 그는 강했다. 지금도 강할 것이고, 앞으로도 강할 것이다. 다만 베타테스트 당시에는 라헬로의 세트 아이템의 덕을 조금 많이 보았을 뿐이지 누가 뭐래도 그는 라헬로를 일대일로 쓰러뜨린 최초의 플레이어였다.
 그런 그에게 아이템이 없다한들 성장이 조금 느릴 뿐이지 실력이 저하되는 것은 아니다.
 “어떻게 할까…….”
 루인은 잠시 고민했다. 마법사 클래스를 포기하고 전사나 기사 클래스를 다시 선택할까? 나쁘지 않은 선택이다. 실제로 엄청나게 좋은 아이템을 얻은 뒤 캐릭터를 새로 키우거나 직업을 바꾸는 경우는 일반 RPG에서도 종종 있는 경우였다.
 더구나 이터널에서는 초보존에 한해 전직을 허용했다. 비록 전직과 동시에 익혔던 전용 스킬이 사라지고 레벨을 다시 키워야하는 수고가 생기지만 획득한 돈과 아이템은 그대로 유지되니 지금 상황에서는 제법 매력적인 생각이다.
 그러나 루인은 곧 생각을 접었다. 어차피 한계가 있다. 라헬로의 세트 아이템이 아무리 강력하다한들 일정 레벨에 이르러서는 더 이상 특별하지 않게 될 테고 처음 마법사 클래스를 선택할 때 했던 생각처럼 몸을 쓰는 것은 언젠가 전문가들에게 따라잡히게 되고 만다. 아이템 성능의 차이, 얼마간의 레벨 차이쯤은 그들에게 통하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역시 처음 생각한 것처럼 ‘변수’에 집중하는 것이 좋았다.
 “이제 돌아갈 시간이군.”
 생각을 정리한 루인은 마나가 가득차기를 기다려 전초기지를 빠져나갔다. 귀환석은 사용하지 않았다.
 대신 돌아오는 길에 네임드 몬스터 한 마리와 오크 수비병 몇 마리를 더 잡았다. 매직급 아이템이 하나 나왔지만 세트 아이템을 갖춘 루인의 눈에 들어올 정도는 아니었다.
 시간을 지체한 탓에 부서졌던 성벽이 다시 원상복구 되어 있었지만 다시 부수는 것쯤은 일도 아니었다.
 흉내 내기를 사용해 파이어 스트라이크로 날려버렸고 쏟아지는 화살은 어느새 장착한 세트 아이템의 방어력으로 무시해버렸다.
 무시. 말 그대로 무시였다.
 거짓말을 보태서 화살이 비처럼 쏟아졌지만 체력은 단 1도 줄지 않았다. 그냥 톡톡톡 갑옷에 부딪히는 소리만이 화살을 맞고 있구나 하고 알 수 있게 할 따름이다.
 비록 오크 정찰병보다도 레벨이 낮은 오크 궁수의 공격이기는 하지만 실로 어마어마한 방어력이 아닐 수 없었다.
 뒤도 돌아보지 않고 전초기지를 빠져나온 루인은 다른 유저들과 마주치기 전 장착을 해제했다.
 사냥에 바쁜 사람들이 잘 사용하지 않는 대로를 따라 마을에 들어섰고, 번잡한 광장을 지나 마법사 길드에 들어섰다.
 마법사 길드에 들른 루인은 가지고 있던 돈을 모두 털어 어떤 물건을 구매했다. 가지고 있던 잡템까지 모두 팔아치워 긁어모은 돈으로 개당 20실버나 하는 것들을 몇 개나 사서 인벤토리를 채웠다.
 남은 돈은 고작 10 실버 78쿠퍼.
 2서클 마법의 가격이라는 10실버를 겨우 남긴 금액이다.
 막 장비를 교체해 수리비가 필요 없었기 망정이지 거지꼴을 못 면할 뻔 했다.
 “간당간당하군.”
 인벤토리를 확인한 루인이 짧은 한숨을 쉬었다. 그가 하려는 것은 상당한 도박이었다. 성공하면 많은 것을 얻겠지만 실패하면 전 재산을 날릴 판이다.
 물론 성공해도 전 재산을 날릴 수 있었다.
 그러나 걱정하지 않았다. 설사 실패로 끝이 난다 해도 라헬로의 세트 아이템만 있다면 충분히 이득이다.
 그만큼 그 가치는 컸다.
 더구나 아직 초보존을 벗어난 유저가 있다는 소식은 듣지 못했다. 자신처럼 초보존에 웅크리고 있는 것일 수도 있지만 어쨌든 아직 상위권을 유지하고 있다는 의미이다.
 아니, 어쩌면 현재 가장 많은 누적 경험치를 쌓고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럼 가보실까?”
 초보존에서의 마지막 행보가 시작되었다.
 피로가 몰려들었다. 이미 접속한지 22시간이 넘어가고 있었고 온 몸이 비명을 질렀다.
 그러나 여기서 멈추면 진정한 게임폐인이라 할 수 없다.
 루인은 기분 좋게 웃으며 고통을 받아넘겼다.
 익숙한 경치가 스쳐갔다. 이미 와 본 적 있는, 암흑의 신단이다. 계속해서 유입되는 신규 유저들이 많은지 여전히 붐비는 1층과 2층을 빠르게 지나치고 3층에 도달했다.
 3층도 더 이상 비공개 지역이 아니었다. 정확히는 기존과 마찬가지로 조건을 만족한 사람들만 입장이 가능한 지역이었지만 이미 몇 개의 파티가 자리를 잡고 사냥하고 있었다.
 한 개, 두 개의 파티라면 모를까 광장 한 곳에 네 개 이상의 파티가 있으니 더 이상 몬스터들은 위협이 되지 못했다.
 리젠 시간은 빠른 편이 아니었지만 바깥도 경쟁이 치열하기는 마찬가지이니 차라리 자리 잡고 일명 말뚝 사냥을 하는 것이 유리하다는 생각인 듯 했다.
 루인은 조용히 그들을 지나쳤다. 루인이 지나갈 때마다 혹시나 깽판을 부리러 온 것은 아닌지 파티들의 눈빛이 달라졌지만 조용히 다음 광장으로 넘어가자 경계를 풀고 다시 사냥에 열중했다.
 하나, 둘, 그렇게 세 번째 광장까지 무사히 통과했다. 다행히 큰 패거리를 만들고 사냥터를 통제하려는 바보 같은 놈들이 적어도 아직은, 이 초보존에는 존재하지 않았다.
 마침내 루인이 4층의 입구로 쏙 들어가버리자 마지막 광장의 인물들은 슥 한 번 쳐다볼 뿐 고개를 저으며 루인의 존재를 무시해버렸다.
 4층인 보스존은 개인 또는 파티 단위로 입장 할 수 있는 공간이었다. 암흑의 신단 3층과 연결된 또 하나의 인스턴트 던전. 그렇기에 수십 개의 파티가 모여 리세토를 공략하는 행위가 불가능했다.
 루인이 이곳을 다시 찾은 이유가 바로 그것이다.
 아직 공략되지 않은 보스 몬스터.
 초보존 내에서 ‘비보’를 가진 또 하나의 몬스터이자 마지막 몬스터.
 “설마, 벌써 공략된 건 아니겠지?”
 4층에 들어선 루인이 홀로 중얼거렸다. 현 시점에서 리세토를 잡을 만한 파티는 없다고 생각되지만 자신이 그러한 것처럼 베타테스트에 참여했던 자들 중에는 괴물이 많았다.
 어떤 식으로든 자신의 게임에서 명성을 날리던 자들이니 어쨌든 게임의 일종인 이터널에서 두각을 나타내지 않을 수 없던 것. 물론 손가락만 까딱거리느라 몸을 움직여야하는 환경에 적응하지 못하고 빌빌대는 녀석들도 많았지만 이곳을 현실처럼 받아들이며 빠르게 적응해나간 자들이 더 많았다.
 어쨌든 게이머들이 꿈에도 그리던 가상현실이 아니던가.
 “곧 알 수 있겠지.”
 불안한 마음을 감추고, 루인은 또 한 번 리세토를 불러내기 위해 암흑신관들의 곁으로 다가갔다.
 “움 레비오 도로 비아!”
 휘이이잉-.
 신관들이 일제히 외치자 아무것도 없던 허공에 연기가 몰려왔다.
 연기는 곧 형태를 갖추었다. 이번에도 역시나, 암흑신관들은 리세토에 생명을 빼앗겼고 완전한 형태를 갖춘 리세토는 존재감을 뽐내며 소리쳤다.
 “나의 잠을 깨우는 자 누구냐!”
 다시 봐도 대단한 박력이다. 대비를 했어도 움찔 몸이 떨렸지만 루인은 지지 않고 준비한 아이템을 꺼냈다.
 “다시 잠들어라. 부활!”
 마법사 길드에서 구입한 부활 스크롤이었다.
 사망한 유저 또는 NPC를 즉시 부활시키는 주문서. 고레벨의 사제 클래스 유저가 나타나기 전까지는 즉시 부활을 시킬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기도 했다.
 그 부활 주문서를 루인은 리세토에게 사용했다. 녀석의 속성이 언데드라는 것을 노린 것이다.
 언데드에게는 치료 마법이나 포션도 데미지를 주는 공격 수단으로 작용한다. 그렇다면 부활 주문이나 아이템은?
 리세토에게 직접 사용해 본 것은 아니지만 베타테스트를 통해 이미 효과 확인은 끝났다.
 “젠장.”
 피시식.
 부활 스크롤은 사라졌지만 리세토는 멀쩡했다. 주문이 실패한 것이다.
 스크롤을 이용한 부활은 100% 확률로 작동했지만 그 대상이 몬스터가 될 경우 실패할 확률이 60%에 달했다. 그것도 보스몬스터가 아닌, 일반 언데드 몬스터 기준이다.
 이미 실험을 통해 그 사실을 확인한 루인은 포기하지 않고 또 한 장의 부활 스크롤을 찢었다.
 피시시식.
 이번에도 실패. 루인의 얼굴에 낭패라는 표정이 지나갔고 그 사이 리세토는 완성한 주문을 쏟아내었다.
 “죽어라!!”
 “흉내 내기, 파이어 스트라이크!”
 콰과과과광-!
 날아오는 불꽃을 향해 루인도 똑같은 주문으로 맞받아쳤다.
 흉내 내기로 복사한, 상대적으로 위력이 약한 주문이지만 허공에서 맞부딪히자 폭발과 함께 상쇄되었다.
 “으윽…….”
 루인은 그 반동에 몇 발자국이나 물러섰지만 다시 한 번 스크롤을 찢었다.
 “제발 좀 죽어라, 부활!”
 찌이익.
 피시시식.
 세 번째 실패. 이번만큼은 루인의 표정이 싸늘하게 굳어졌다.
 남은 부활 스크롤은 한 장. 한 번만 더 실패하면 놈에게 죽어주는 수밖에 방법이 없다.
 “다 쓸어버리겠다!”
 “크윽!”
 그러나 마지막 스크롤을 찢기 전, 놈이 지팡이가 지면을 쓸어왔다.
 워낙에 범위가 넓어 피할 수도 없는 상황.
 루인은 재빨리 갑옷을 장비해 피해를 최소화 했다. 물리 공격이라면 어떻게든 방어가 가능하지 않을까?
 쿠웅.
 둔탁한 소리와 함께 세트를 갖춘 루인의 몸이 붕 떠올랐다 떨어졌다.
 “으으으…….”
 체력이 바닥과 입맞춤하기 직전이었지만 어떻게든 목숨은 건졌다.
 그것이면 됐다.
 어차피 기회는 한 번 뿐.
 루인은 온 힘을 다해 부활 스크롤을 찢었다.
 “제발 뒈져라!!”
 “키에에에엑-!”
 마지막 스크롤이 재가 되어 사라짐과 동시에 심장마비가 온 사람처럼 리세토가 몸을 움츠리며 괴로워했다.
 그리고 한 순간, 회색으로 변해 추락하기 시작했다.
 즉사 효과였다.
 “성공……인가?”
 루인이 얼떨떨한 표정으로 몸을 일으켰다. 베타테스트 당시 일반 언데드 몬스터를 상대로는 시험해봤지만 보스 몬스터에게까지 통할지는 미처 시험해보지 못한 까닭이다.
 전 재산을 투자한 시도치고는 너무 무모했지만 라헬로의 세트 아이템이 있으니 실패해도 어떻게든 되겠지라는 생각이 그를 대범하게 만들었다.
 “쳇, 어차피 죽을 거 일찍 죽을 것이지.”
 결과는 이렇게 성공.
 첫 번에 바로 성공했다면 부활 스크롤을 되팔아 얼마라도 돈을 챙겼을 테지만 마지막에 간신히 성공한 터라 놈이 드랍한 돈과 아이템 밖에 건지지 못했다.
 “어디보자…….”
 돈과 아이템을 수거한 루인은 마음을 가라앉히고 천천히 살폈다. 일단 돈은 11실버 87쿠퍼. 부활 스크롤 값을 생각하면 적자였지만 애초에 돈을 기대하고 사냥한 것은 아니었다.
 
 [룬 열쇠][유니크]
 - 리세토의 마법 상자를 열 수 있는 열쇠
 
 돈을 제외한 드랍 아이템은 딱 하나였다. 별도의 드랍 아이템은 없었다. 비보를 가지고 있는 보스 몬스터를 처음 사냥할 때 주어지는 일종의 페널티다.
 비보를 얻지 못할 이후 공략자들과의 형평을 맞추기 위함이다. 그래봐야 한 번 잡은 이상 두 번이 어렵지는 않을 테지만.
 룬 열쇠를 가지고 주위를 살피자 열쇠가 꼭 맞게 생긴 상자 하나가 보였다. 사람의 체구만한 상자다.
 열쇠를 넣고 돌리자 딸깍. 상자가 열렸다.
 [리세토의 지팡이][영웅]
 - 먼 옛날 현자 리세토가 사용했던 지팡이. 오랜 시간이 흘렀지만 아직도 강력한 마법의 기운이 남아있는 것 같다.
 - 공격력: 59
 - 내구도: 300 / 300
 - 마법 공격력 + 60
 - 특수 능력: 화염계열 공격력 + 10
 
 들어 있는 아이템은 단 하나였다. 대신 능력치며 등급이 엄청났다. 세트 아이템보다 윗줄에 놓인 영웅급이라니! 고작 하나의 아이템이지만 그것이 갖는 의미는 어쩌면 라헬로의 세트 아이템보다도 컸다.
 공격력 59. 20레벨 전사 최고 무기의 2배가 넘는다. 그뿐인가? 마법 공격력 + 60. 즉시 시전이 가능한 1서클의 애로우 계열 마법 한 방 한 방이 전사의 스킬 이상으로 강력해진다.
 물론 일정 레벨 구간을 지나면 레어나 매직급도 비슷한 위력을 내게 될 테지만 초반에는 무시무시한 위력을 발휘할 거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심봤다.”
 루인은 그 한 마디로 모든 상황을 정리했다.
 금전적 손해는 막심했지만 그것은 아무 것도 아닐 만큼 대단한 아이템을 손에 넣었다.
 “으하하하하하!!!”
 리세토의 시체만이 허무하게 뉘어져있는 공동 안에 루인의 웃음소리가 가득 퍼져갔다.
 
 ***
 
 귀환의 돌을 사용해 마을로 돌아온 루인은 즉각 모험가 길드를 찾았다.
 초보존의 모든 유저는 각자가 속한 직업 길드의 소속임과 동시에 모험가 길드의 소속이기도 했다. 초보존 이외의 곳에서 모험가 길드는 용병 길드의 역할을 했지만 초보존에서는 초보 모험가(용병)를 길러내는 도우미 역할을 하고 있는 까닭이다.
 초보존의 탈출은 각각의 직업 길드와 모험가 길드에서 할 수 있었다.
 루인이 둘 중 모험가 길드를 선택한 이유는 간단했다.
 초보존 탈출 시 주어지는 보상이 다르다.
 마법사 길드는 아직 배우지도 못할 3서클 마법서 한 권과 장비 중 하나를 랜덤하게 제공했다.
 루인에게는 쓸모없는 것들이다.
 장비라면 어떤 것을 견주어도 비할 바가 아니었고 마법서는 차후 해당 레벨이 되었을 때 돈을 주고 구입하면 되었다.
 반면 모험가 길드는 사냥 또는 생활에 필요한 소모형 아이템을 지급했다. 안전한 로그아웃을 위한 ‘캠핑 아이템’이나 ‘요리도구’ 등 역시 딱히 쓸데가 많은 것은 아니지만 언젠가는 써먹을 수 있는 아이템들. 한 푼이 아쉬운 지금으로서는 차라리 이것이 나았다.
 “부디 세상을 지킬 힘을 얻으시길 바랍니다…….”
 응? 이런 대사가 있었던가?
 초보존에서 이른바 본토로 자신을 전송하던 모험가 길드 NPC의 말에 갸웃 했지만 루인은 곧 몸의 중심을 잡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몸과 영혼이 어디론가 쓸려가는 기분.
 기분 뿐 아니라 실제 몸의 균형도 흐트러졌다.
 “우욱.”
 금방이라도 토를 쏟아낼 듯 바닥에 주저앉았다.
 코끼리 코를 스무 바퀴쯤 돈 것처럼 머리가 돌고 세상이 돌았다.
 털썩.
 루인은 억지로 몸을 지탱하지 않고 바닥에 드러누워 버렸다.
 이렇다는 얘기는 못 들었는데. 무슨 빌어먹을 효과를 이따위로 넣은 거야. 속으로 외치며 슬쩍 눈을 떴다.
 서있던 초보존과는 전혀 다른 공간, 다른 하늘, 다른 감각.
 “응?”
 억지로 몸을 일으킨 루인이 이상한 듯 몸을 살폈다.
 감각이 달랐다.
 피부 호흡을 하듯.
 마치 마나를 진짜로 느낄 수 있게 된 것처럼.
 뭔가 바람도 아닌 것이, 알 수 없는 기운이 몸을 관통했다.
 “윈드 애로우.”
 루인은 시험 삼아 마법을 사용했다.
 “마나……인가?”
 몸 안을 간질이듯 무언가가 빠져나갔다. 루인은 그것을 마나로 추정했다.
 초보존에서 날아오면서 굉장한 고생을 시키더니 이것을 위한 것이었나. 이런 실감나는 싱크로를 위해서라면 한 번쯤 겪을 만하다고 생각했다.
 비틀비틀 몸을 일으키고 주위를 살폈다.
 모르는 곳이다.
 아니, 당연한 건가? 초보존은 서버 분리라는 방식으로 다수의 인원을 수용했지만 본토에서는 그런 것 없이 하나의 땅덩어리 안에서 모든 것이 해결된다.
 사람이 많으면 많은 대로, 적으면 적은 대로.
 대신 초보존에서 벗어나 이동하게 되는 지역은 랜덤. 무수히 많은 스타트 지점 중 한 곳으로 랜덤하게 이동된다.
 베타 테스트 당시에는 밟아 볼 수 없었던 영역이지만 NPC를 통해 알아본 바로는 이터널의 세계는 현실세계 못지않게 드넓었다. 이동 마법이라는 수단이 있지만 그렇지 않다면 평생을 걸어도 가보지 못하는 곳이 있을 정도로.
 다르게 말하면 그만큼 무궁무진한 모험이 기다리고 있다! 정도로도 해석이 되지만 말이다.
 “으음. 빠르군.”
 길을 찾으려는 루인의 눈앞에 몇 개의 창이 어지러이 떠올랐다. 초보존과는 또 다르다. 보다 현실감 있는 본토에 맞춘 인터페이스인지 반투명하니 시야에 지장을 주지도, 너무 생뚱맞지도 않았다. 마치 증강현실을 보는 것 같달까.
 내용은 역시나 수많은 패치사항에 대한 것이었다. 그 중에 루인을 겨냥한 듯한 ‘부활 스크롤의 언데드 즉사 효과 삭제’와 ‘흉내 내기’ 스킬의 위력 감소 및 사용 마나 증가 부분이 눈에 걸렸지만 이제는 상관이 없었다.
 자신이 생각해도 사기적인 스킬이었기에 패치 될 것을 예상했으니까.
 “응?”
 그리고,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을 발견했다.
 패치노트와는 별도의 창이었는데 아무래도 초보존을 벗어난 이에게만 보여지는 것 같다.
 그 내용을 확인한 루인의 표정이 단박에 일그러졌다.
 그에 맞춰 친절하게도 알림음까지 들려왔다.
 
 [활동력 적용! 지금부터 활동력이 적용됩니다.]
 [활동력은 현실시간과 동일한 기준으로 적용되며 활동력이 모두 소진 된 후 다시 활동력이 가득 차오르기까지는 24시간이 소요됩니다.]
 [특정 필드 및 던전에서는 특별한 활동력 룰이 적용됩니다.]
 
 활동력. 한 마디로 게임 시간을 제한하겠다는 것이다. 현실과 너무도 똑같은 이 게임에 빠져 식음을 전폐하는 폐인들을 막겠다는 취지.
 루인은 재빨리 상태창을 불러 살폈다.
 8만 6천이 넘는 어떤 수치가 모래시계처럼 천천히 떨어지고 있었다.
 슥슥 바닥에 숫자를 적어 셈을 한 루인은 그것이 행동력 수치라는 것을 확인했다. 24시간을 초로 환산했을 때 86,400이라는 숫자가 나오기 때문이다.
 그 뿐 아니라 수치가 떨어지는 간격이 일정했고 얼핏 1초당 1이라는 것도 확인되었다.
 활동력이 바닥나도록 플레이하고 나면 24시간 동안 게임을 접속 할 수 없는 것이다.
 물론 루인 같은 폐인들은 꼬박 24시간씩을 채워가며 플레이하고 말겠지만 오랜 시간 플레이하기 어려운 라이트 유저들에게는 제법 괜찮은 제약이 될 것이다.
 ‘24시간 게임을 하고 24시간을 쉬어야한다면 너무 텀이 긴 것이 아닌가?’ 하고 생각했지만 어쩌겠나. 게임사가 그렇게 정한 것을.
 “서둘러야겠군.”
 때문에 마음이 급해졌다. 시간은 많지 않았다. 적어도 루인처럼 하드코어한 게이머에게는.
 
 
 # Chapter. 11 초보존 탈출
 
 누군가 앞서 도착한 사람이 있었는지, 원래 길인건지 풀이 뉘어진 방향을 따라 움직인 루인은 곧 작은 마을을 발견 할 수 있었다.
 제대로 된 장비 등을 구하기 어려운 촌구석에 떨어졌단 사실이 못마땅하긴 했지만 이미 벌어진 일이다. 탓하기보다는 이용할 방법을 찾는 것이 현명하다.
 루인은 슬쩍 마을의 분위기를 살피며 안으로 진입했다.
 먼저 어떤 상점들이 있는지부터 살폈다.
 이런, 낡은 잡화점이 전부이다. 이런 경우 잡화점이 무기점의 역할까지 하는 경우가 많지만 그렇다 해도 쓸 만한 장비를 취급하는 경우는 드물었다. 방어구며 무기를 삐까뻔쩍하게 맞춘 루인이지만 신발이며 액세서리 등 더 구해야 할 것들은 있었으니 아쉬운 것은 아쉬운 것이다.
 “‘행정관’ 대신에는 촌장인 건가?”
 심지어 행정관 NPC도 없었다. 초보존에서 듣기로 본토에서는 레벨 업을 하기 위해 ‘등록’이라는 것을 해야 했다. 아무리 경험치를 많이 쌓은들 ‘등록’을 하지 않는다면 영영 레벨도 그대로고, 새로운 스킬이나 능력치를 얻지 못한다고 했다.
 이 등록은 모험가 길드나 용병 길드, 관청의 행정관 NPC를 통해 간단히 할 수 있는데 다행히 별도의 돈이 들어가는 것은 아니었지만 저절로 레벨이 올라가는 방식과 달리 꽤나 귀찮은 일인 것은 분명했다.
 쩝. 그러나 어쩌겠나. 그렇다고 게임을 때려 칠 수도 없고.
 “인증을 하고 싶습니다.”
 “호오, 그래. 자네는 자격이 되는구만.”
 ‘자격’이라고? 충분한 경험치가 모인 것을 ‘자격’이라 하는 모양이지? 보다 많은 정보를 얻기 위해 루인은 토씨하나 놓치지 않고 흡수하듯 기억해냈다.
 촌장은 묘한 눈으로 루인을 훑더니 이마에 손을 얹었다.
 그러자 환한 빛이 일었다.
 
 [인증을 마쳤습니다.]
 [레벨이 상승하였습니다.]
 
 바로 상태창을 불러보니 과연 레벨이 올라있었다. 그것도 무려 3씩이나.
 “혹시 랭킹도 볼 텐가?”
 “랭킹……이요?”
 잠시 능력치 선택을 고민하던 루인에게 촌장이 말을 덧붙였다. 랭킹이라니? 그런 게 있던가?
 “그래. 50실버 또는 차원석 조각 1개로 확인 할 수 있지.”
 랭킹 확인 한 번에 50실버? 그 돈이면 2서클 마법을 다섯 개나 배운다. 그런 돈을 고작 랭킹 확인에 쓰라고? 궁금하기는 했지만, 그럴 돈은 먹고 죽으래도 없었다.
 가만, 차원석 조각은 뭐지?
 “차원석 조각은 뭡니까?”
 “그런 게 있다네. 곧 알게 될 거야.”
 루인의 물음에 촌장은 입을 다물었다.
 실컷 제시해놓고서 정색을 할 건 또 뭐람. 민망해진 루인은 일단 촌장의 집을 나와 마을을 누비고 다녔다. 퀘스트를 얻기 위함이다.
 초보존에서 얻은 정보에 의하면, 다음 마을에 닿기 위해서는 처음 도착한 마을에서 ‘평판 관리’ 또는 ‘인정’을 받아야했다.
 
 [앞으로 5분 후 접속이 강제 종료됩니다.]
 
 한참이나 마을을 돌아다니며 심부름 퀘스트 등을 완료해내던 루인에게 아쉬운 알림이 나타났다.
 초보존에서 이른바 본토로 넘어오면 강제적으로 취해진다는 강제 로그아웃.
 현실시간으로 약 6시간 정보 접속을 할 수 없다고 했던가? 아마도 루인처럼 초보존에서부터 쉬지 않고 달려온 사람들에게 최소한의 휴식을 주기 위함이겠지.
 그렇기에 지친 상태에서 굳이 초보존을 넘어온 루인이다.
 이왕 쉬어야하는 거, 시간적 손해를 보지 않겠다는 것이다.
 잠시 후, 시간을 꽉 채워 강제 로그아웃을 당한 루인은 현실로 돌아와서도 알람을 맞추고 곧장 침대에 몸을 뉘었다.
 
 ***
 
 띠리리링- 띠리리링-.
 요란하게 울리는 시계의 알람을 탁 하고 끈 태민은 무거운 몸을 일으켰다. 현실과도 같은 가상현실 속에서 수십 시간을 보내고 고작 네다섯 시간을 잤으니 당연했다.
 그러나 억지로 몸을 일으켰다. 자려면 한 시간쯤 더 잘 수도 있지만 이터널에 접속하기 전, 다른 이들의 상황을 살필 필요가 있는 것이다.
 이터널은 컨트롤만 잘하면 되는 게임이 아니다. 정보야 말로 어떤 의미에서는 가장 큰 무기였다.
 “어디보자…….”
 이터널 공식 홈페이지와 대표 팬 사이트이자 공략 사이트인 이터널 드림이 동시에 펼쳐졌다.
 “다들 비슷하군.”
 올라오는 질문이나, 정보나, 자랑 따위가 베타테스트 당시와 크게 다르지는 않았다.
 다만 한 가지 다른 것이라면 확실히 레벨 업의 속도가 다르다는 것이다.
 베테랑 중에 베테랑만 모인 베타테스터들과는 달리 일반 유저들은 아직 많이 헤매고 있었다.
 강력한(?) 몬스터들을 당해내지 못해 레벨 업이 더딘 것은 물론 몸을 쓰는 직업 중에는 아직 직업 퀘스트를 완료하지 못해 버벅대는 이들까지 있었다.
 마법사나 사제 클래스야 별다른 퀘스트 없이 직업을 선택 할 수 있지만 기사, 격투가 등 소위 몸을 쓰는 직업의 경우는 상황이 달랐다.
 정해진 전직 퀘스트를 완수하지 못하면 직업을 얻을 수 없는 것이다.
 그 퀘스트란 당연히 ‘몸을 쓰는’ 것이었는데 이를 테면 레벨 10짜리 기사와의 대련이랄지, 허수아비 급소 타격 따위의 것들이다. 언뜻 쉽게도 느껴질 수 있지만 그 난이도는 상당한 것이어서 평소 운동신경이 둔한 편이라면 몇 번을 도전하고서야 간신히 통과할까 말까한 수준이다.
 운동신경은 제법이라 할 수 있는 루인조차도 베타테스트 당시 두 번의 시도 만에 겨우 통과했을 정도이니까.
 다행히도 시험에 필요한 기본적 소양인 ‘검술 지도’는 몇 번이고 다시 받을 수 있는 것이었지만 누군가 옆에서 봐주면서 하는 것과 홀로 수련해 완성시키는 것에는 다소 차이가 있는 법이다.
 물론 극악한 수준까지는 아니어서 다섯 번 이내에 통과하지 못하면 평생해도 통과하지 못한다는 우스갯소리가 있었지만 일반 유저들 중에는 열 번을 시도해도 통과하지 못하는 녀석들도 더러 있는 모양이다.
 하긴, 전 세계적으로 못해도 수백, 수천만 명이 플레이를 하고 있을 테니 이런 녀석들도 있겠지.
 “응?”
 게시글들을 슥슥 넘겨봤지만 별 소득은 없었다. 이미 알고 있는 얘기들이거나 이미 초보존을 벗어난 루인에게는 도움이 되지 않는 퀘스트 정도 따위였다.
 그러다, 새로 올라온 글 하나가 눈에 띄었다.
 
 [대박 사건. 비보 털렸다.]
 
 제목만큼 내용도 간단했다. 오크의 비보, 다른 말로 라헬로의 비보가 사라졌다는 것이다.
 신규 유저들이라면 무슨 소리인지 몰라 갸웃거릴 내용이지만 베타테스터들에게는 그 의미가 컸다.
 그 게시글에 루인도 정신이 번쩍 들었다. 이 말인즉 누군가 라헬로를 쓰러뜨렸다는 것 아닌가?
 라헬로를 쓰러뜨리고 비보의 존재를 확인했다.
 아마도 베타테스터 중 하나일 것이다. 그러나 그 영향은 한 사람에게만 해당되지 않을 터였다.
 비보를 노리고 있던 자들. 비보를 얻기 위해 아직 초보존을 벗어나고 있지 않던 자들.
 그들이 초보존을 벗어나 본토에서 새로운 행보를 시작할 것이라는 말이기도 했다.
 눈팅 중이던 베타테스터들이 순식간에 댓글을 산처럼 쌓았다.
 당황해서 제대로 말을 잇지 못하는 사람부터 거짓말 하지 말라는 사람까지. 대체로 믿지 못하는 분위기였지만 라헬로를 새로이 쓰러뜨린 사람이 ‘아론’이라는 아이디를 사용하는 베타테스트 유저라는 답변과 속속 나타나는 목격자들의 증언에 오크의 비보가 사라진 사실은 기정사실화 되었다. 아론이라면 베타테스트 당시 가장 먼저 라헬로를 쓰러뜨리고 오크의 비보를 획득한 자였다.
 그리고 그때, 누군가 또 다시 짤막한 댓글을 남겼다.
 
 [지금 이스 길드에서 리세토 트라이 중.]
 
 이스라는 이름의 길드가 리세토를 사냥중이라는 것이다. 그 말에 또 다시 댓글창에 불이 났다.
 현 시점에서 불가능하다느니, 이스는 무슨 듣보잡 길드냐느니. 이스라는 길드와 그 길드장이 베타테스트 때는 없었기에 불신은 무척 컸다.
 덕분에 또 한 번 설전이 오갔지만 루인은 그 중 하나의 댓글을 확인하고 ‘가능성 있는 일’이라 생각했다.
 
 [이스 길드장인 바스란이 엄청난 부자래요. 돈으로 베타테스터도 부리고 리세토 트라이 하려고 현질도 엄청 했다던데…….]
 
 베타테스트 당시 사용된 리세토의 공략은 한 마디로 정리 할 수 있다.
 물량공세.
 5명의 파티원 전원이 일격에 전멸 당하지만 않는다면 몇 번이고 부활하고 회복해서 죽을 때까지 두드려 팬다!
 아주 심플한 전략이지 않은가?
 “돈지랄로 잡을 수는 있지만 벌써 그렇게까지 지르는 녀석이 있을 줄이야…….”
 물론 그것을 위해 컨트롤이 좋은 두 명의 기사, 또는 전사 클래스 유저와 두 명 이상의 사제 클래스가 필요했다. 한 명의 기사 또는 전사가 붙어서 리세토를 패고, 둘 이상의 회복 담당이 번갈아가며 녀석의 체력을 회복한다. 여유가 있다면 언데드인 리세토에게 직접 회복 주문을 걸어 타격을 주어도 되고.
 그러다 놈이 4서클의 주문을 사용하려는 모습을 보이면 즉시 산개해 피해를 최소화 한다. 가장 좋은 것은 한 명만 죽는 것이고 최악의 상황에도 부활 스크롤을 찢을 한 사람만 살아남으면 된다.
 만약 일대일을 벌이던 자가 죽으면 예비로 대기하던 전투원이 재빨리 빈자리를 대체하고, 그 사이 후방의 누군가가 부활 주문서로 죽은 이를 부활시킨다. 다수가 죽었다면 살아남은 자가 어떻게든 도망치며 부활 스크롤을 찢어 한 명씩 부활시킨다.
 그렇게, 파산할 각오를 하고 돌아가며 포션과 부활 스크롤 등을 사용해서 리세토를 때리고 또 때린다.
 죽을 때까지 팬다.
 그것이 베타테스터들 사이에 알려진 리세토의 공략이다.
 심플하지만, 돈이 많이 들어가는 작업이다. 자칫 방심하다가 전멸이라도 당하면 쏟아 부은 그간의 돈이 모두 허공으로 날아가고 만다.
 게다가 회복 주문의 사거리와 4서클 주문의 사거리를 생각하면, 단 한 번의 시도로 성공한다는 장담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 숙련된 베타테스터들조차도 거의 성공하지 못한 일이 아니던가?
 물론 다른 방법도 있다. 일정 거리 안에 접근해있을 때 리세토는 4서클의 마법을 사용하지 않는다. 그것을 이용해 초근접전을 펼칠 수도 있지만 그건 놈이 죽을 때까지 맞지 않고 피해가며 공격을 퍼부을 수 있는 컨트롤과 스태미나가 필요한 일이었다. 적어도 베타테스터들 중에는 그걸 성공한 케이스가 없었다.
 “미안하게 됐군.”
 어쨌든 그런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리세토를 잡는다는 건 필시 비보를 얻기 위함일 터였다. 리세토가 4서클의 마법을 사용하니 4서클 마법서를 드랍할지도 모른다는 소문도 있기는 했지만 단 한 번도 실제 드랍된 적은 없었으니 아마도 목표는 확실할 터. 그러나 이미 루인이 선수를 친 덕에 고생해서 사냥에 성공해도 돌아오는 건 재정의 파탄 밖에 없을 것이다.
 음, 그것에 비관해서 게임을 접으면 어쩌지?
 어쩌긴 뭘 어째. 돈지랄하는 진상 하나 사라지면 좋은 거지.
 “서둘러야겠어.”
 짧은 감상을 마친 태민은 배를 채우고, 다시 접속할 준비를 했다. 루인의 성격상 다음번에는 아마 24시간을 꼬박 플레이하고 나올 것. 화장실도 미리 가둬야하고 배도 든든히 채워둬야 했다.
 비록 이터널에 접속해 있을 때는 느끼지 못할 것들이기는 해도 말이다.
 “접속.”
 초보존 탈출의 페널티 격인 접속 제한 시간이 끝나자 루인은 곧장 이터널에 접속했다.
 “퀘스트 창 오픈.”
 곧 베타테스터들이 본토로 몰려든다. 그렇다면 더 여유부릴 시간이 없다.
 즉시 퀘스트창을 연 루인은 빠르게 내용을 스캔했다. 퀘스트의 설명을 훑어 대략적으로 분류하고, 겹치는 내용 또는 같은 방향에 있는 것들을 손가락으로 끌어다 모았다.
 모름지기 초반의 퀘스트란 중복되고 반복되는 경향이 많은 법이다.
 “으음…….”
 한 번에 두 세 개의 퀘스트를 동시에 처리 할 수 있도록 동선을 짜는 동안 자신을 지켜보는 눈이 있음을 알았다.
 그러나, 곧장 무기를 겨누는 바보짓은 하지 않았다.
 이곳은 마을이고, 자신은 이방인이다. 이상한 시선쯤은 당연한 일이다. 굳이 경험치도 많이 주지 않는 퀘스트를 수행하는 이유도 바로 마을사람들과의 친밀도를 올리기 위해서이고.
 “응?”
 억지로 웃어 보이며 몸을 돌리던 루인의 눈에 의문의 빛이 스쳐갔다. 자신을 뱀처럼 훑어보는 시선을 느낀 것이다.
 로브를 쓴 그의 눈빛은 NPC들과 달랐다. 아니 NPC이긴 한 걸까? 몸속 깊은 곳까지 들여다보는 듯한 그 눈빛은 경계, 불안 따위와는 차원이 달랐다.
 “읏…….”
 잠시 멈칫하는 사이, 로브의 남자는 아무 일도 없다는 듯 신기루처럼 사라져버렸다.
 “뭐하는 녀석이지?”
 녀석이 사라지고도 뭔가 꺼림칙한 느낌은 계속됐지만 오랫동안 고민할 수는 없다. 이미 24시간의 제한시간은 계속해서 흘러가고 있었으니까.
 “일단 움직이자.”
 용건이 있다면 또 나타나겠지.
 어차피 녀석이 지금 다시 나타난다 한 들 자신의 상대는 아니다. 아마도 후반 퀘스트와 이어지는 초고렙 NPC는 아니었을까? 망상을 하며 남동쪽으로 산을 내려갔다.
 부여받은 퀘스트 중 ‘악동 고블린 퇴치’와 ‘밭을 망치는 괴물’, 그리고 ‘마을 외곽 순찰’, ‘화전 상태 점검’퀘스트를 수행하기 위함이다.
 “일단은 이쪽으로.”
 마을 밖 화전에 도착하자 일단 루인은 넓게 돌았다. ‘마을 외곽 순찰’과 ‘화전 상태 점검’ 퀘스트의 완료 조건을 달성하기 위함이다. ‘마을 외곽 순찰’의 경우 화전을 비롯해 마을의 경계 어디든 살펴보고 오면 완료 처리가 되었기에 화전 상태 점검 퀘스트와 한 번에 엮어서 수행하는 것이다.
 이때 중요한 것은 마을 외곽 말뚝에 적힌 번호를 외워 와야 한다는 것이다.
 가상현실인 만큼 PC로 하는 게임과 달리 순찰 퀘스트는 ‘자동 완료’ 따위가 없었다. 대신 순찰패를 돌리거나 번호 또는 문자를 외워와야만 했다.
 “퀘스트창을 대충 봤다간 똥개 훈련 좀 하겠구만.”
 덕분에 퀘스트창을 대충보고, 해당 문구를 발견하지 못하면 다시 다녀와야 할 판이다. 순찰 퀘스트는 초보자 마을마다 있는 것 같다고 하지만 모르고 당하는 자들은 꼭 있다. 그리고 앞으로도 있을 것이다. 나 혼자만 당할 수 없다. 라는 것일까?
 “이게 그 ‘괴물’의 흔적인가?”
 화전을 반쯤 돌았을 때 파헤쳐진 흔적과 함께 어지럽게 찍힌 발자국을 발견했다.
 연계 퀘스트라 할 수 있는 ‘밭을 망치는 괴물’의 주인공인 듯 했다.
 “‘그거’로군.”
 몇 개의 발자국을 비교하던 루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발견한 정황과 증거를 토대로 놈의 정체를 가늠한 것이다.
 “털이라도 줍는다면 좋겠는데…….”
 바닥을 뒤져보지만 아쉽게도 털 따위의 추가 증거는 없었다.
 루인은 실망하지 않고 계속해서 순찰을 돌았다. 밭이 끝나고 숲이 이어질 때까지. 그리고 숲이 나타나자, 순찰지를 이탈해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어차피 순찰 퀘스트에 시간제한은 없으니까.
 “끼끼끼끽.”
 “저긴가?”
 자세를 낮추고 천천히 오 분쯤 걷자 원숭이 울음소리 같은 기괴한 소리가 들려왔다.
 고블린이다.
 마을 외곽에 살며 화전에 일 나오는 마을 사람들을 괴롭히고 음식물을 빼앗아 달아나는 장난꾸러기. 일명 악동 고블린들.
 다행이라면 마비독침 정도만 쏠 뿐, 단검을 휘두르는 등 생명을 위협하는 행동을 하지는 않는다는 것이지만 그것만으로도 화전에 나오는 사람들은 스트레스가 이만저만이 아닌 모양이었다.
 “귀찮아지기 전에…….”
 발견한 놈들은 사람들에게 빼앗은 것으로 보이는 옷가지며 물건들을 가지고 노는 중이었다.
 놈들을 먼저 발견한 루인은 조용히 마법을 발현했다.
 “라이트닝 애로우! 윈드 애로우!”
 “끼엑-!”
 원샷원킬.
 루인이 발한 마법은 쏜살 같이 날아가 고블린 두 마리의 몸에 두멍을 내 놓았다.
 리세토의 지팡이에 의해 증폭된 마법 공격력이 놈들의 체력을 상회한 것이다.
 “끼익! 끼익!”
 “늦었어, 임마.”
 티디딩팅-.
 분노한 고블린들이 들고 있던 물건을 던지고 독침을 빼들었다. 한손에는 단검도 번쩍였다. 평소에는 장난만 치던 녀석들이지만 공격을 당하고 생명에 위협을 받자 본성이 드러난 것이다.
 그 때문에 마을 사람들의 요청도 생포나 추방이 아닌 사살이었다. 이곳은 또 하나의 세계. 그렇게 호락호락한 곳이 아니다.
 “끼긱!”
 푸슈슉-.
 티딩?
 아쉽게도 놈들의 공격은 오크의 비보 시리즈를 장착한 루인에게 전혀 통하지 않았다.
 압도적인 방어력.
 그 철벽같은 단단함은 놈들의 공격을 튕겨 내었고 흠집하나 나는 것조차 용납하지 않았다.
 “끽!”
 까앙
 참다못한 고블린 하나가 단검으로 직접 베어봤지만 마찬가지다. 오히려 루인의 사거리에 들어와 공격을 허용했다.
 “합.”
 퍼억.
 허술하게 휘두른 지팡이가 더 없이 강력한 흉기가 되어 놈의 두개골을 부쉈다. 단박에 머리가 박살난 녀석은 뇌수를 흘리며 그 자리에 쓰러졌고, 남은 놈들은 무언가를 계속 집어 던지는 한편 영리하게 빠져나갈 궁리를 했다.
 이것이 루인이 서두른 이유다.
 “아쿠아 애로우, 매직 애로우!”
 루인이 남은 즉시시전 주문을 쏟아 부었다. 장소가 숲이라 쓰지 못하는 화염계열과 준비 시간이 필요한 대지계열을 제외하면 할 수 있는 방법은 모두 동원한 셈이다.
 고블린은 근접계열이 아니었고, 지능이 높아 자신이 불리하면 달아나기도 했다. 걸음도 빨라 따라잡기가 여간 어렵지가 않다. 때문에 고블린을 사냥하려면 속전속결이 필요했고, 루인은 그에 맞춰 최선을 다하는 중이었다.
 “뀌엑.”
 다행히 달아나는 놈들 없이 모두 죽일 수 있었다.
 드랍된 ‘악동 고블린의 증표’와 ‘잃어버린 물건’은 퀘스트 완료의 지표가 되겠지.
 한 녀석이 단검을 들고 덤벼들어준 덕이 컸다.
 “끼끽?”
 그때였다. 또 한 마리의 고블린이 뒤늦게 등장했다.
 주위를 둘러보며 빠르게 상황을 파악한 녀석은 푸슉 하며 독침을 쏘았고, 소용없음을 깨닫자마자 뒤도 보지 않고 도망쳤다.
 동료인가? 지나가던 고블린인가?
 쫓아야하나? 말아야하나?
 잠시 갈등의 빛이 스쳤다.
 “젠장.”
 루인은 뒤늦게 쫓기 시작했다. 저 한 마리 때문에 보상이 낮아지거나 퀘스트 완료가 되지 않느니 쫓아가서 처리하는 편이 낫다고 판단한 것이다.
 그러나 그 잠깐의 머뭇거림은 꽤나 큰 차이를 만들었다.
 오크의 비보가 무시무시한 방어력을 자랑하지만 한편으로는 너무 무거웠다. 자연히 속도는 느려지고 날랜 고블린과의 거리는 점차 벌어졌다.
 라이트닝 애로우와 윈드 애로우의 쿨타임은 돌아왔지만 사거리가 닿지 않는다.
 닿을 듯 말 듯. 약올리는 것처럼 고블린은 마법의 사거리를 벗어나 달리고 있다.
 하지만 장착을 해제하기엔, 언제 독침을 쏘는 고블린이 등장할지 몰랐다.
 마비 독침을 사용하는 녀석들은 어떤 의미에선 오크보다도 훨씬 무서운 존재였다.
 “끼깃!”
 “라이트닝 애로우!”
 어느 순간 갑자기 쭈뼛거리며 멈춰서는 고블린에게 루인은 즉각 마법을 쏘아보냈다.
 부르르 떨며 죽음을 맞이하는 고블린.
 “오, 젠장…….”
 그것이 감전에 의한 것인지, 다른 어떤 것에 의한 것인지를 확인할 시간은 생각보다 빠르게 찾아왔다.
 “우우-웅.”
 고블린의 시체 뒤로 찾고 있던 또 다른 녀석이 나타난 것이다.
 바로 멧돼지였다.
 “괜찮으……려나?”
 멧돼지는 생각보다 강한 개체이다. 특히나 그 돌진력은 무시무시해서 정통으로 들이받히면 기사 클래스라 해도 방어구가 박살나거나 즉사를 면하기 어려웠다. 그만큼 체력이 높은 것은 말할 것도 없고 무엇보다 두려운 점은…….
 “망했다.”
 바로 무리를 지어 이동하곤 한다는 것이다.
 그것도 대장 멧돼지와 함께.
 “꾸이!”
 오크의 비보가 가진 방어력을 믿었지만 자신의 HP는 믿지 못했다. 방어구가 놈들의 공격을 데미지 0으로 만들지 못한다면 부족한 마법사의 체력으로 버텨내지 못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더욱이 놈들의 돌진력은 방어력을 무시하고 넉백(뒤로 물러남) 효과와 함께 골을 흔들어 놓을 것이다.
 “자아, 착하지?”
 루인의 얼굴에 긴장감이 어렸다.
 천천히 뒷걸음질을 치며 공간을 만들었고 놈들은 코를 벌렁거리며 제자리에서 발을 굴렀다.
 “아쿠아 애로우, 윈드 애로우, 파이어 애로우!”
 “꾸이익!”
 선수필승!
 물러설 생각이 없어 보이는 멧돼지를 향해 루인은 쿨타임이 돌아온 마법들을 몽땅 퍼부었다.
 “우이이-익!”
 집중 포화를 받은 멧돼지 하나가 회색빛으로 물들었지만 그것이 나머지 멧돼지를 자극했다.
 뜨거운 콧김과 함께 돌진하는 멧돼지 세 마리.
 그 거친 박력에 루인도 맞설 생각을 버리고 등 뒤에 둔 나무 뒤쪽으로 돌아갔다.
 쿠웅!
 두 마리를 비껴가고 한 마리가 나무를 들이받았다.
 쩌저적.
 사람키는 가뿐히 넘는 나무가 머리에 받혀 부러졌다.
 덕분에 멧돼지의 체력도 깎이고, 스턴에 빠졌다.
 루인은 그 틈을 놓치지 않고 들고 있던 리세토의 지팡이를 휘둘렀다.
 물리공격력 59!
 동레벨 둔기 전사보다도 배는 높은 공격력.
 한 번, 두 번, 세 번. 떡방아 찧듯 차지게 내리치자 녀석의 머리가 박살났다.
 “하나, 둘……!”
 회색으로 물드는 멧돼지의 시체를 보던 루인이 별안간 타이밍을 재더니 한 발 뒤로 물러섰다.
 쿠웅!
 서있던 자리로 대장 멧돼지의 돌진이 스쳐갔다.
 멧돼지의 돌진은 무척 빠르고 강력하지만 타이밍만 잘 맞춘다면 두렵지 않다.
 스스로 방향을 바꿀 수 없을 만큼 ‘돌진력’만 높은 탓이다. 빠르고 위력적인 대신 동선이 너무 단순했다.
 오크의 비보 세트 때문에 행동이 느려지긴 했지만 루인은 어렵지 않게 피해냈다. 온 몸에 바짝 힘을 주면 근거리 움직임의 둔화는 크지 않다.
 “흡!”
 쿠웅!
 주르륵.
 대신 남은 한 마리의 돌진은 몸으로 막아야했다.
 해머로 후려친 듯한 묵직함과 함께 몸이 밀려났다. 재빨리 상태창을 살피자 다행히 HP는 많이 빠지지 않았다.
 “대단한데?”
 무식할 만큼 높은 방어력이 제 몫을 톡톡히 한 것이다. 예상보다도 오크의 비보 세트가 가진 방어력의 효용은 높았다.
 “충격 자체를 이만큼이나 줄여주다니.”
 마냥 감탄만 하고 있을 수는 없다. 루인은 놀라워하면서도 대장 멧돼지가 돌아오기 전, 리세토의 지팡이를 휘둘러 멧돼지의 머리를 때렸다. 몸으로 받아낸 터라 멧돼지는 여전히 스턴에 걸린 상태였다.
 “아쿠아 애로우, 라이트닝 애로우, 윈드 애로우…….”
 눈앞의 몽둥이찜질을 놓으면서도 대장 멧돼지를 향해 마법을 뿌려댔다.
 견제의 의도도 있었지만 대장 멧돼지가 나무를 들이받아 스턴에 걸린 사이 최대한 체력을 빼놓으려는 것이다.
 “우위위익!!”
 남은 멧돼지마저 회색빛으로 물들었을 때, 대장 멧돼지가 때를 맞춰 정신을 차렸다.
 “이런…….”
 루인의 표정이 살짝 일그러졌다.
 멧돼지와 대장 멧돼지. 이 둘이 동시에 돌진을 준비하는 것이다. 지금의 민첩으로 둘 다 피하긴 어렵다.
 그렇다면 대장 멧돼지를 피하고 일반 멧돼지의 공격을 받아내야 하는데 재수 없게도 폼을 보니 일반 멧돼지가 먼저 달려들게 생겼다.
 “으득. 와라!”
 루인이 이를 앙 다물고 몸을 날렸다.
 선택지가 없다. 자신의 방어력을 믿는다.
 “꾸이!”
 묵직한 느낌과 함께 멧돼지가 스쳐간다. 피했다. 준비했던 동작 그대로, 깔끔하게 피해냈다.
 이어 대장 멧돼지의 육중한 몸이 짓쳐왔다.
 다시 자세를 잡았지만 피해내기는 무리다. 대신 루인은 지팡이를 짧게 쥐었다.
 “흐압!”
 쿠웅!
 대장 멧돼지를 바로보고, 미간을 향해 지팡이를 휘둘렀다.
 돌진의 충격은 방어력에 맡기고 카운터를 친 것이다.
 
 [크리티컬!]
 [크로스 카운터!]
 
 두 가지 알림음이 동시에 울렸다.
 하지만 그대로 침묵시키지는 못했다. 대장 멧돼지는 루인을 들이받은 채 계속해서 달려갔고 루인은 매달린 채 필사적으로 지팡이를 내리쳤다.
 “크으……. 파이어 애로우!”
 루인을 매단 채 나무에 부딪히기 15M전, 쿨타임이 돌아왔다. 지팡이 끝에서 마법이 터져 나오고 물리공격은 물리공격대로 들어갔다.
 순식간에 공격력이 두 배 이상으로 뛰었다.
 “우윅…….”
 투욱.
 그 결과, 대장 멧돼지가 침묵했다. 루인의 몸은 나무에 아주 살짝 닿았을 뿐이다.
 “휘유~.”
 루인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아직 한 마리의 멧돼지가 남아있긴 했지만 돌진조차 큰 위협이 되지 못한다는 것을 확인한 이상 마법을 쓰지 못한다 해도 거저먹는 경험치 덩어리에 불과했다.
 하물며 대장 멧돼지를 잃고 기세가 누그러진 녀석쯤이야.
 곧 상황은 완전히 정리됐다. 루인은 ‘악동 고블린의 증표’와 ‘잃어버린 물건’, ‘멧돼지의 어금니’, ‘대장 멧돼지의 어금니’를 챙기고 다시 숲을 빠져나왔다.
 돌아가는 길에 ‘무리에서 떨어진 코볼트’ 몇 마리를 만났지만 루인의 상대는 아니다.
 돌아오는 길에 마저 화전 순찰을 마저 끝냈다. 화전 경계 말뚝에 적힌 번호를 외우는 것도 잊지 않았다.
 
 마을에 다시 도착한 루인은 4개의 퀘스트를 일거에 완료하고 촌장의 인정을 받았다. 대단히 이례적인 일이라며 마을 사람들도 놀라워했다.
 작은 마을의 촌장이 인정하든 말든 그게 뭐가 중요하냐고? 중요하다. 초반엔 그 무엇보다도.
 본토에서 유저들은 이방인.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가장 기본적인 신분보증조차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렇기에 처음 시작하는 마을, 스타팅 포인트에서의 친밀도 상승과 인정을 받아야했다.
 물론 대도시의 경우 용병길드의 시험을 거쳐 용병패를 받는 것으로 대신 할 수도 있지만 갓 초보존을 벗어난 유저가 용병패를 받기란 불가능 하진 않아도 쉬운 일은 아니었다.
 “운이 좋았어.”
 사실 촌장의 인정은 고작 심부름 퀘스트를 포함해 10개도 되지 않는 퀘스트로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운이 좋게도 연계 퀘스트의 가장 마지막에 위치한 대장 멧돼지를 단박에 처치한 덕분에 모든 과정을 뛰어넘을 수 있었다.
 촌장의 편지를 손에 넣은 루인은 가장 가까이에 있다는 마을, 라이라를 향해 움직였다.
 불과 몇 시간 만의 신규 마을 진출이다.
 말과 같은 탈 것이 없는 탓에 제법 걸어야 했지만 꽤나 만족스러운 성과였다.
 외진 지역의 산이라 숲속 동물이나 몬스터를 사냥해서도 제법 경험치를 얻을 수 있었지만 마을에 도착하면 더 나은 환경이 기다릴 터였다.
 “기다려라, 내가 간다!”
 강제 접속 종료를 당하기 전, 퀘스트를 받으며 이곳이 바이런 왕국 외곽에 위치한 작은 화전민이라는 것을 확인했다.
 바이런 왕국이라면 대국의 축에는 들지 못하지만 소국이라고도 할 수 없는 제법 탄탄한 국가라는 것도.
 이정도면 괜찮다. 큰 국가에는 사냥터도 많고, 물품도 더 쉽게 구할 수 있겠지만 그만큼 경쟁도 치열하고 사냥터며 상점까지의 이동 거리가 길다. 그러니 스타팅 포인트가 대국이라고 무조건 성장속도가 빠른 것은 아닌 것이다.
 “응?”
 
 [카운트다운 시작. 900/1,000]
 
 출발한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알 수 없는 알림이 나타났다.
 “카운트다운? 900? 1,000?”
 카운트다운은 무슨 말이며 이 숫자들은 무엇이란 말인가? 의문을 가질 새도 없이 숫자는 빠르게 차올랐다.
 아무래도 1초에 1씩 상승하는 건 아닌 모양이다.
 카운트다운의 숫자는 계속해서 불규칙하게 차올랐고 루인은 왠지 모를 불안감을 느꼈다.
 걸음을 서둘렀다. 다행히 마을은 크게 멀지 않았다.
 
 
 # Chapter. 12 용병 시험
 
 화전민 마을을 벗어난 후 얼마 지나지 않아 바로 관도로 진입했기에 움직임을 제한하는 방어구를 착용할 필요도 없다. 움직임은 신속했고, 숫자가 950을 가리킬 때쯤 마을의 경계에 다다랐다.
 중간에 잠시 주춤하며 숫자가 오르지 않은 덕이다.
 “정지.”
 “거기 자네, 무슨 일인가?”
 경계 안쪽으로 들어서려하자 루인을 발견한 사내 둘이 다가와 제지했다.
 경비병이랄까, 문지기랄까. 아니 자경단 정도가 어울리겠다.
 성벽도 없는 작은 마을에 불과했으니까.
 “모험가입니다. 마을에 들어가고 싶습니다.”
 “그래? 내놔봐.”
 자경단원 중 하나가 손바닥을 펼쳐 까딱거렸다.
 멍청히 바라보는 바보짓은 하지 않았다. 아이템 ‘촌장의 추천장’을 꺼내 손바닥 위에 올렸고 곧장 뜯어본 자경단원은 추천장을 돌려주는 대신 작은 나무패 하나를 주었다.
 임시 호패. 이를 테면 출입증이다.
 “감사합니다.”
 루인은 기분 나빠하지 않고 목례를 한 후 지나갔다. 아직 자신의 능력이나 명성이 한참 모자란 것은 사실이니까.
 뒤를 훑는 경비병의 눈빛이 싸늘했지만 자신이 강해지고 나면 감히 쳐다보지도 못하게 될 것이다.
 루인이 속으로 장담했다.
 “어디보자…….”
 마을에 진입한 루인은 재빨리 주변을 살피고, 인근의 가장 높은 건물로 올라갔다. 위에서 마을 전체를 살피고 구조를 익히려는 것이다. 덤으로 각 상점의 위치도 파악할 수 있었다.
 무기점이며 방어구 상점, 잡화점 등 대표적인 상점들은 저마다의 문양을 간판처럼 걸고 있었으니까.
 슥슥.
 메모 기능을 이용해 빠른 손놀림으로 마을의 지도까지 그렸다. 세세한 골목까지 표현하지는 못하겠지만 대략의 구조와 상점 위치를 표기하기엔 충분하다.
 “이런 구조로군.”
 값비싼 지도를 대신할 간이 마을 지도를 완성하는 순간, 신경 쓰이던 알림이 다시금 들려왔다.
 
 [1,000/1,000. 카운트다운 완료.]
 [첫 번째 카운트다운 완료로 대기 상태에 돌입합니다.]
 [대기 모드. 1/10]
 
 알 수 없는 카운트다운의 완료를 알리는 소리였다. 특이한 것은 카운트다운이 완료되었음에도 또 다른 카운트다운이 시작되었다는 것이다. 대기 모드라는 표시와 함께 9개의 또 다른 무언가를 기다렸다.
 “대체 뭐지?”
 거의 모든 게임에 정통한 루인이지만 이것만큼은 예측하기 어려웠다.
 “일단은.”
 정보 부족. 분석 불가.
 의심 가는 부분이 아주 없는 것은 아니지만 확신 할 순 없다.
 결론을 내린 루인은 빠르게 그것을 잊었다. 답이 안 나오는 문제로 시간을 끌기에는 그에게 허용된 시간이 너무 짧았다.
 지붕을 내려온 루인은 일단 마법사길드부터 들렀다. 스타팅 포인트였던 화전민 마을과 달리 어쨌든 마을의 형태를 갖추고 있는 터라 각 직업의 길드들이 있던 것이다.
 마법사 장비? 의미 없다. 루인이 관심 있는 것은 오직 하나. 새롭게 익힐 2서클 마법들뿐이었다.
 “쩝. 그림의 떡이군.”
 마법사 점원의 안내를 받아 살펴본 2서클 마법 중에는 탐나는 것이 많았다. 보조 계열이 주를 이루는 3서클을 대신해 40레벨이 될 때까지 계속해서 주공격 마법이 되어야 했기에 공격력도 발군이고, 파티원들을 보조 할 수 있는 인챈트 마법들도 다양하게 존재했다. 이것들을 ‘비보’인 리세토의 지팡이로 사용하면? 어떤 위력이 나올지 생각만으로도 짜릿하다.
 그러나. 원하는 만큼 배우기엔 큰 장애물이 존재했다.
 돈이 부족했다.
 수중에 있는 돈은 고작해야 20실버를 조금 넘겼고, 2서클 마법은 1가지를 배우는데 10실버가 필요했다. 주머니를 털어봐야 2가지 밖에 배우지 못하는 셈.
 선택과 집중이 필요했다.
 설명을 들으며 마법을 하나하나 살핀 루인이 결단을 내렸다.
 루인의 선택은 파이어 볼과 라이트닝 인챈트.
 어차피 돈을 벌면 더 많은 마법을 익히겠지만 당장에 가장 강력한 효과를 낼 수 있는 조합으로 이 둘을 꼽았다.
 2서클 마법부터는 캐스팅 시간이 필요하다. 솔로 플레이를 즐기는 루인으로서는 첫 타를 제외하고 쓸 기회가 많지 않다는 것이다.
 물론 막강한 방어력을 믿고 몬스터들이 공격하든 말든 다시 캐스팅에 들어 갈 수도 있지만 나중을 생각하면 안 될 일일뿐더러 효율도 좋지 않았다.
 차라리 강력한 한 방을 선사한 후 즉시 시전 마법들로 견제, 전사보다 높은 공격력의 무기를 활용한 직접공격으로 마무리를 하는 편이 짜임새가 있고 효율도 좋았다.
 여기서 파이어 인챈트가 아닌 라이트닝 인챈트를 사용한 것도 한 수였다. 공격력 증가량은 비등하지만 라이트닝 인챈트를 했을 때는 타격 시의 반발력이 적고 낮은 확률이지만 [감전]효과가 걸린다. 적을 일시적인 스턴 상태에 빠트릴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 짧은 시간은 목숨을 구할 수도 있는 귀중한 기회가 될 것이다.
 새로운 마법으로 무장한 루인은 용병길드를 찾았다. ‘인증’을 하고 능력을 올려줄 행정관 NPC의 위치도 파악했지만 굳이 찾아가지는 않았다. 레벨이 올랐을 법도 하긴 했지만 고작 1레벨의 차이로 대단한 변화가 있을 것 같지는 않았다.
 “어서 오게.”
 루인의 등장에도 용병 길드 내부의 반응은 시큰둥했다. ‘비보’를 착용하지 않아 초보티 팍팍 나는 복장이니 당연한 일이다.
 “용병 등록을 하고 싶습니다.”
 “자네가?”
 접수원의 반응에 루인이 잠시 움찔거렸다. AI인가? 이것 봐라?
 “시험해보셔도 좋습니다.”
 그러나 그럴 수 있는 일이라 생각했다. 세트 아이템인 ‘비보’를 벗은 자신은 막 초보존을 벗어난 다른 이들보다도 한참 못한 차림이니까.
 자신만만한 루인의 태도를 보고 접수원이 이죽이며 다시 입을 열었다.
 “좋아. 그렇게 자신한다면 이렇게 하지. 얼마 전부터 서쪽 숲에 오크 한 부락이 자리를 잡았는데 번식력이 좋은 놈들이라 가만히 두었다간 금세 마을 단위로 커지고 말 거야. 가서 놈들의 수를 줄이고 오게. 그럼 인정해주지.”
 “……알겠습니다.”
 퀘스트 난이도가 상당하다. ‘비보’를 얻어서일까? 고작 용병 길드 등록을 위해 처음부터 오크를 잡으라니? 루인의 표정이 살짝 어두워졌다.
 베타 테스트를 경험해보지 못한 녀석들이라면 초보존을 생각하고 신이 나서 달려갔겠지만 그는 ‘진짜 오크’가 얼마나 강한지 이야기로나마 접한 상태였다.
 “어쩔 수 없군.”
 물론 잡지 못할 수준은 아닐 것이다. 비보가 있기도 했고, 비보가 없더라도 잘만 꾀어내면 일대일은 할 만하지 않을까? 루인 정도로 컨트롤이 되었을 때 이야기이긴 하지만.
 “서쪽이랬지?”
 알 수 없는 불안감을 품고 루인은 걸음을 재촉했다.
 용병 길드 접수원이 말한 서쪽 숲을 찾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이미 지붕 위에 올라 마을을 살피면서 인근 지형의 특징까지 대강 살펴둔 덕이다.
 “서울에서 김서방 찾기구만.”
 마을에서 숲까지의 거리도 거리지만 숲은 제법 깊기까지 했다. 이 넓은 지역에서 오크 한 부락을 찾아내라니, 아무래도 그 접수원은 루인을 받아주기 싫었던 게 분명하다.
 “그래도 찾아내주지.”
 퀘스트가 주어진 이상 해내야했다. 루인은 재빨리 머리를 굴렸다. 놈들이 어디에 있을까. 오크 한 부락 정도라면 숲의 안쪽에 위치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많아봐야 그 수가 열을 넘지 않을 테고, 이 숲에는 녀석들보다 훨씬 강력한 몬스터들이 즐비할 테니까.
 초보존에서 막 나온 자들에게 위협적이라고는 하나, 이 세계 몬스터들 중에서 오크는 약한 개체였다. 그나마 뛰어난 번식력을 바탕으로 한 물량공세가 위협적인데 아직 한 부락이라면 숲 외곽에서 몸을 사리고 있을 것이 분명하다.
 따라서 루인은 장비를 갖추고 외곽을 따라 천천히 숲으로 진입했다. 이동속도는 느려지지만 어쩔 수 없다. 오크를 만나기 전 고블린 떼라도 만난다면 꼼짝없이 마비되어 죽을 수도 있으니까. 스타팅 포인트에서 만난 악동 고블린은 초보존의 그것과 크게 다르지 않은 수준이었다.
 “생각보다 싱거울 수도 있긴 하지.”
 그가 알고 있는 본토 몬스터의 강함은 결국 이야기를 통해 들은 것이 전부다. 스타팅 포인트가 워낙에 작은 산골 마을이었던 터라 정말 강한 몬스터를 만나지 못한 것일 수 있지만 대장 멧돼지를 제외하고는 방심해도 좋을 만큼 힘의 격차가 있었다. 루인은 비보를 무려 두 개나 장착한 상태였으니까.
 그러나 방심하지 않았다. 어쨌든 스타팅 포인트보다 더 강한 몬스터가 나오는 다음 마을에 들어섰고, 이곳에서 어떤 몬스터가 나올지는 아무도 모르니까.
 바스락
 “……!”
 한참을 안쪽으로 들어갔을 때, 수풀을 헤치는 인기척이 들렸다. 소리를 지르거나 바로 달려드는 우를 범하지는 않았다.
 대신 리세토의 지팡이를 꼬나 쥐고 언제든 마법을 날릴 수 있게 준비했다.
 사삭.
 사슴이었다. 순진한 눈망울의 사슴이 수풀 밖으로 빼꼼 고개를 내밀었다.
 긴장했던 꼴이 우스워졌지만 감당 못할 적이 튀어나오는 것보다는 나았다.
 “오호, 가만?”
 안도하던 루인의 눈빛이 한순간 빛났다.
 “윈드 애로우.”
 그리고 지팡이를 휘둘러 사슴의 머리를 내리쳤다. 마법의 발동과 함께. 증폭된 데미지에 사슴은 반항 한 번 해보지 못하고 그대로 쓰러졌다.
 큰 뿔 사슴도 아니고 일반 사슴쯤이야. 루인은 쓰러진 사슴을 향해 몇 발의 윈드 애로우를 더 날렸고 녀석의 몸에는 작은 구멍이 뚫렸다.
 “읏차.”
 루인은 피가 줄줄 흘러나오는 사슴의 시체를 끌고 어딘가로 이동했다.
 
 ***
 
 “킁킁. 취잇, 췻. 이 근처다.”
 “췻. 거의 다. 왔다.”
 사슴의 시체를 나무에 매달아 피를 뺀 지 20여 분. 드디어 오크 두 마리가 루인의 앞에 섰다. 생긴 것 답지 않게 후각이 예민한 편인 오크를 유인하기 위해 일부로 피 냄새를 풍긴 것이다.
 그 과정에서 먼저 다가온 고블린 다섯 마리가 제물이 되어 혈향을 더 짙게 만들었다.
 사실 루인이 기사나 전사 계열이었다면 이럴 필요도 없었을 것이다. 막강한 방어력을 믿고 뛰쳐들어가 오크들을 도륙하면 그만이다.
 그러나 현실은 힘 수치가 조금 높은 마법사일 뿐이다. 마법과 전략의 이점을 버리고 막무가내로 들어갔다가는 부족한 민첩과 체력 때문에 오히려 맞아죽을 수도 있었다. 때문에 이런 꾀를 낸 것이다.
 계획은 적절하게 먹혀들어갔고, 오크들이 나타났다.
 “저기다. 췻.”
 “왜. 먹이가. 나무냐. 쿠잇.”
 허공에 매달린 사슴을 보며 놈들이 어리둥절해하는 동안 루인이 정신을 집중했다.
 2서클 마법의 발현을 위함이다.
 “파이어 볼!”
 콰광!!
 폭음과 함께 오크 두 마리의 몸이 허공을 날았다. 파이어 스트라이크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 증폭된 파이어 볼의 위력은 강력하기 그지없다.
 “갈기 빠진 오크라……. 그렇군.”
 증폭된 데미지는 정말이지 놀라웠다. 오크 중에서도 최하급에 속하기는 하지만 기본적으로 체력이 높은 오크를 한방에 해치운 것이다.
 회색빛으로 물들며 쓰러지는 놈들을 보며 루인이 빠르게 계산을 마쳤다. 파이어볼 한 방이면 일격사. 그렇다면 애로우 계열 마법을 몽땅 쏟아 부어도 원콤(one combo)으로 죽일 수 있다. 증폭된 공격력 덕에 더 여유가 있을 지도 모르지만 최소치로 잡아도 그렇다.
 매우 긍정적인 소식. 그러나 만약 리세토의 지팡이가 없었다면?
 파이어 볼을 쓰더라도 한 번에 두 마리는 동시에 상대하기 힘들었을 것이다. 한 마리쯤은 마법을 몽땅 쏟아 부어 제압할 수 있다고 해도, 이후의 한 마리는 쿨타임이 돌아올 때까지 육탄전으로 버텨야한다. 어쩌면 쿨타임이 모두 돌아온 이후에도 마법만으로는 죽이기 어려울 수 있다.
 “망할 놈.”
 역시 오버 밸런스다. 루인은 용병 길드 접수원을 욕해준 뒤 전리품을 챙겼다.
 [갈기 빠진 오크의 갈기]와 [1실버 82쿠퍼].
 이렇게 강한 놈들이 마리당 1실버도 채 주지 않았다. 아무리 생각해도 손해 보는 장사다.
 “저쪽이겠지?”
 단순히 수를 줄이라고 했으니 이쯤만 해도 퀘스트는 완료일 터. 그러나 돌아갈 생각은 없었다. 오크들이 멀지 않은 곳에서 찾아온 것 같았으니까. 이제 놈들의 발자국을 쫓아가면 서식지를 발견 할 수 있을 터였다.
 사슴 고기는 놔두었다. 도축 스킬을 배우지 않아 고기를 얻을 수 없었고, 저 상태로는 인벤토리에 집어넣을 수도 없었다. 통으로 마을에 가져가면 얼마의 돈을 받을 수 있겠지만 더 유용하게 쓰일 곳이 있었다.
 바로 유인이다. 루인이 오크들의 서식지를 찾아가는 동안 사슴고기는 인근 몬스터들을 유인해 그를 더 안전하게 만들 것이다. 숲의 몬스터들끼리 유대관계가 있는 것은 아니지만 인간을 적대시 한다는 것은 동일했다. 자칫 전투 중에 다른 녀석들이 난입 할 수 있었다.
 
 [대기모드. 3/10]
 
 발자국을 쫓아가던 중 시야 한편에 표시된 숫자가 바뀌었음을 확인했다. 둘이 더 늘었다. 한데 대체 무엇이? 알 도리는 없지만 루인은 왠지 마음이 급해졌다.
 “서둘러서 나쁠 건 없겠지.”
 추적에 한층 속도가 붙었다.
 과연, 놈들의 아지트는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었다. 다만, 루인이 돌던 방향과는 정 반대쪽이었다. 숲에 진입해 10분이면 도착할 장소를 자칫 숲 외곽을 뱅 한 바퀴 돌고 나서야 찾을 뻔 했다. 아이템 운은 제법 좋아졌지만 나머지는 아무래도 그렇지 못한 모양이다.
 아지트는 허름했다. 방벽을 세운 것도 아니고, 건축물이나 천막이라 부르기도 민망한 수준의 조잡한 피난처였다. 오크의 손재주야 조악하기 그지없으니 당연한 일이다.
 “췩췩. 안 온다. 가본다.”
 “췩. 나도. 간다.”
 루인이 놈들의 아지트에 막 도착했을 때, 기다리다 못해 아지트를 떠나려는 놈들이 있었다.
 당연히 루인은 몸을 낮췄다. 느긋하게 기다리며 눈으로는 안쪽을 살폈다.
 ‘안에 다섯. 나가는 게 둘. 잡은 게 둘. 총 아홉인가?’
 예상대로 열은 넘지 않았다. 그러나 열에 가까웠다. 그나마 둘을 이미 해치웠고, 둘 역시 어렵지 않게 해치울 수 있을 것 같지만 다섯은 여전히 부담스러웠다. 다행이라면 오크 전사나 투사 등의 상위 등급이 없다는 것일까?
 ‘일단은 두 녀석부터.’
 아지트는 떠나는 오크 둘을 따라나선 루인은 앞선 녀석들과 동일한 방법으로 해치워버렸다. 천천히 따라가서 파이어볼 한 방! 간단했지만 아지트에서 조금 떨어지기를 기다리느라 시간을 지체했다.
 다시 돌아오자 아지트에는 여전히 다섯 마리의 오크가 있었다. 한 둘이라도 더 사라지길 바랐는데 생각 같지가 않다.
 파이어 볼로 과연 몇 마리까지 한 번에 데미지를 입힐 수 있을까. 많아야 셋, 안정적인 게 둘 정도일 것이다. 그렇다면 적어도 둘이나 셋을 대처할 방법이 필요하다는 얘기인데. 다시 둘 정도가 따로 떨어져주지 않는다면 상대하기가 부담스럽다.
 ‘죽이지 말걸 그랬나.’
 루인은 너무 쉽게 앞선 오크 넷을 죽여버린 것을 후회했다. 바로 죽이지 말고 실험을 조금 더 해볼 걸. 그래서 공격 속도나 패턴, 공격력 따위를 알아 볼 걸. 비보의 방어력으로 어느 정도의 피해를 입는지 확인해볼걸.
 너무 안일했다는 자책과 함께 루인의 눈빛이 진지해졌다.
 그로부터 20분이 더 지났다. 그러나 남은 오크들은 미동도 하지 않았다. 동족의식이 강한 녀석들이라는 게 믿기지 않을 만큼 나간 녀석들에 대한 걱정이 없었다.
 ‘그렇다면.’
 이렇게 되자 초조한 건 루인이었다. 죽인 녀석들이 언제 다시 리젠 되어 살아날지 모른다. 그러면 아지트 공략은 무조건 실패다.
 차라리 사슴이라도 한 마리 더 잡아와야했나? 잠시 머릿속이 복잡했지만 루인은 결단을 내렸다. 그리고 보아두었던 위치로 몸을 낮추고 이동했다.
 “야 이 돼지새끼들아!”
 캐스팅을 하는 대신 힘껏 소리쳤다. 아지트에 있던 모든 오크들이 돌아볼 만큼 큰 소리였다.
 “프리즈 애로우.”
 가장 가까이에 있던 녀석에게 마법이 날아갔다. 둔화의 효과가 있는 프리즈 애로우. 그러나 놈을 쓰러뜨리기엔 공격력이 모자랐다.
 “자, 와라. 와라.”
 연타는 없었다. 대신 리세토의 지팡이를 앞세우고 빠르게 캐스팅에 들어갔다. 2서클의 파이어 볼이다.
 “췩. 인간이다.”
 “죽인다. 인간.”
 “뀍. 인간. 욕했다.”
 그 사이 오크들이 짓쳐들었다.
 “파이어 볼!”
 “쿠룩!”
 타이밍을 맞춰 화염구가 날아들었다. 좁아지는 길목을 선점하고 프리즈 애로우로 첫 번째 녀석의 움직임을 늦춰둔 덕에 한 번에 두 녀석이 사정권으로 들어왔다.
 콰앙!
 오크 둘을 통구이로 만든 후끈한 열기가 덮쳐왔다.
 “라이트닝 애로우, 파이어 애로우, 윈드 애로우!”
 쿨타임이 돌아오는 대로 연거푸 마법을 떨쳐냈다. 모두 즉시 시전이 가능한 마법이라 움직이면서 사용이 가능했다.
 “쿠룩. 인간. 쫓는다.”
 마법이 적중하는 것도 보지 않고 루인이 몸을 돌려 달아났다. 갑옷 탓에 속도는 느렸지만 나무 사이를 지그재그로 움직이자 남은 두 마리의 오크도 쉽게 따라붙지 못했다.
 휘익-.
 텅!
 “큭.”
 1서클 마법의 쿨타임이 돌아올 무렵 오크 한 마리의 손도끼가 어깨를 때렸다. 갑옷 덕분에 치명상은 면했지만 그 충격만으로 체력이 약간 깎여나갔다. 그래도 버틸 만은 하다.
 루인은 튕겨진 손도끼를 낚아챈 뒤 계속해서 달렸다. 스스로 무기를 버렸으니 굳이 줍게 놔둬 공격력을 올려줄 이유가 없다.
 “프리즈 애로우!”
 어느 정도 시간을 끌었다 여겼을 때, 루인이 돌아섰다. 그리고 마법을 퍼부었다. 재수 없게도 무기를 들지 않은 놈이 맨 앞이다.
 다행인 건 첫 난사에 당한 놈은 이미 죽은 듯하다는 것이다.
 “꾸엑!”
 “젠장.”
 한 놈이 더 꼬꾸라지고 시체를 넘은 마지막 오크가 뛰어들었다. 지팡이를 올려 막아본다.
 주르륵.
 그러나 힘의 차이에 도약력이 더해지자 속절없이 밀려났다. 무기와 방어력의 우수성과는 별개로 근력의 차이는 어쩔 수 없다.
 “퀴잇!”
 재차 오크의 손도끼가 머리를 쪼개왔다. 루인은 침착하게 지팡이를 비스듬히 세웠다. 충격과 함께 손도끼가 밀려나고 지렛대처럼 지팡이 끝이 올라갔다.
 “꾹!”
 휘청.
 지팡이의 끝이 오크의 머리를 때렸다. 동시에 균형을 잃은 오크의 몸이 휘청거렸다. 높은 공격력 탓에 살짝만 맞아도 데미지가 훅 들어간 것이다.
 그 모습에 루인의 입꼬리가 말려 올라갔다.
 “아자!”
 밀려났던 지팡이를 올려치고, 밀려나는 오크의 명치에 찌르기를 꽂아 넣었다. 스킬 따위는 없지만 그것으로 충분했다. 오크가 타액을 뿜으며 넘어졌으니까. 비록 마법사지만 그에게는 베타테스트 시절 전사 캐릭터를 키웠던 경험이 있었다.
 그 다음부터는 일방적이었다. 힘과 속도는 조금씩 부족했으나 압도적인 공격력과 경험을 통한 예측으로 간격을 메웠다. 레벨 업 시 자동으로 주어지는 스탯 덕에 사실 순간 속도에서는 크게 차이가 나지도 않았다.
 심지어는 오크의 공격력과 자신의 방어력을 시험해보기 위해 일부로 가슴을 열고 맞아주기까지 할 정도였다. 결과는 성공적. 정통으로 맞아도 한 방에 체력이 5% 이상 빠지지 않았다.
 체력이 부족한 마법사임을 감안하면 어마어마한 결과. 만약 체력과 방어력에 자체 보정이 들어가는 전사였다면 맞아주면서 싸워도 오 대 일, 아니 구 대 일을 압도 할 수 있었으리라.
 총 아홉 개의 증표, [갈기 빠진 오크의 갈기]를 수거한 루인은 달음질쳐 마을로 돌아왔다.
 
 [대기모드. 6/10]
 
 시야의 숫자가 바뀌었기 때문이다. 여전히 정체는 알 수 없었지만 저 숫자가 모두 채워지는 순간, 무언가 일어나리라는 것은 예측할 수 있다.
 “여기 있습니다.”
 “응? 무슨…….”
 용병 길드로 돌아가 접수원에게 갈기털이 담긴 주머니(퀘스트 아이템의 경우 인벤토리에 자동으로 주머니가 생성된다.)를 건네자 영문을 모르겠단 표정을 짓는다.
 그러다 생각났다는 듯, 황망한 표정을 짓는다. 정말로 오크들을 해치웠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한 거겠지.
 “헉!”
 주머니를 풀어본 접수원이 기겁을 하며 소리쳤다. ‘설마 오크들을 모조리 소탕할 줄이야!’ 하는 표정이 얼굴에 역력하다.
 
 [갈기 빠진 오크 부락을 완전히 소탕하셨습니다.]
 [믿을 수 없는 업적을 달성했습니다.]
 [용병길드에 당신에 대한 작은 소문이 퍼집니다.]
 
 “자네…….”
 루인을 보는 접수원의 눈빛이 달라졌다. 그 역시도 노련한 용병이라는 듯, 날카롭게 루인의 전신을 훑었다.
 “아니네. 정말 대단하군.”
 그러나 곧 표정을 풀고 진심으로 루인을 인정했다.
 “인증 퀘스트라 별다른 줄 건 없고……. 음, 이거 받게.”
 그가 내놓은 것은 용병패였다. 그것도 E급의.
 E급의 용병패. 언뜻 낮게 여겨질 수도 있지만 보통 처음 받는 용병패에 N자가 적혀있는 것을 생각하면 파격적인 대우다. N이 뜻하는 바는 Non. 즉, 등급 외라는 것이다.
 이후 수많은 퀘스트를 수행해야만 용병 등급을 올릴 수 있다고 하는데 NPC가 결코 쉽지 않다는 엄포를 놓을 만큼 어려웠다.
 따라서 시작부터 2등급을 뛰어넘은 것은 매우 고무적인 일. 단순히 오크를 잡아온 것이 아니라 부락을 단신으로 전멸시킨 것이 유효한 듯 했다.
 “충분합니다.”
 용병패를 본 루인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금세 따라잡히겠지만 E급 퀘스트를 남들보다 빠르게 시작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큰 혜택이다. 퀘스트 등급이 다르다는 것은 퀘스트의 보상 또한 다르다는 것을 의미하니까. 아직 초반이라 E급이라도 엄청난 보상이 있지는 않아도 앞서갈 수 있는 것만은 분명하다.
 경험치며 사례금이 F급의 배는 훌쩍 넘긴다고 하니까.
 “제가 할만 한 퀘스트를 보여주십시오.”
 “여기 있네.”
 루인의 요청에 따라 E급의 퀘스트가 펼쳐졌다. 그냥 ‘퀘스트를 달라’고 이야기 했다면 등급을 막론하고 깔아놓았을 테지만 요청을 한정지은 덕에 확인할 퀘스트의 개수는 많지 않았다.
 “음……!”
 퀘스트를 살피던 루인의 입에서 침음성이 흘러나왔다.
 퀘스트 내용을 살피다보니 조금 전 다녀온 서쪽 숲이 얼마나 무서운 곳인지 알게 된 것이다. 오크보다 강력한 놀들은 물론이고 상대하기 까다로운 드라이어드나 트롤까지도 존재했다. 그런 숲에서 고작 고블린 몇 마리를 만나고 오크 부락을 해치운 것은 운이 좋았다고 밖에 할 수 없었다.
 물론 강한 몬스터일수록 숲의 안쪽에 들어가야 만날 수 있겠지만 만약 피 냄새를 맡고 바깥까지 나왔다면? 비보고 뭐고 꼼짝없이 죽은 목숨이다. 아이템 빨이라는 것도 어느 정도 급이 맞을 때나 통하는 것이니까.
 등줄기를 타고 흐르는 식은땀을 느끼며 일단 서쪽 숲과 관련된 퀘스트를 제외했다.
 “이게 좋겠군.”
 그리고 괜찮아 보이는 퀘스트 두 개를 동시 수락했다. 동선이 비슷해 한 번에 해결하려는 것이다. 대신 포기하지 않는 이상 페널티가 발생하지 않는 것으로 받았다. 만약 도저히 지금 클리어하기 어렵다면 포기하지 않다가 나중에 레벨이 오른 뒤 클리어하면 그만이니까. 초반의 페널티를 받지 않기 위함이다.
 
 [대기모드. 7/10]
 [대기모드. 8/10]
 
 길드를 나오는 순간, 거의 동시에 알림의 숫자가 차올랐다. 이제 둘밖에 남지 않은 상황. 괜스레 마음이 조급이다.
 “대체 뭐하자는 짓거리야?”
 걸음을 서둘렀다.
 다음 루인이 찾은 곳은 소모품 상점이었다. 초보 존에서는 편의상 잡화점이 모든 물품을 다루었지만 필드에 나와서는 마을의 규모에 따라 세분화된 상점이 각각의 물품을 판매했다. 특정 상점에 사람이 몰리는 것을 막기 위함이기도 했지만 현실성을 살리는 요소이기도 했다. 루인의 스타팅 포인트, 화전민 마을의 경우 무구 수리를 위한 대장간과 잡템 처분을 위한 잡화점을 제외하면 상점이라 부를 만한 곳이 없었다.
 소모품 상점에 도착하자마자 가지고 있던 잡템들을 모두 처분하자 간신히 10실버 5쿠퍼가 남았다. 리세토를 잡는답시고 무리한 탓이다. 그나마도 갈기 빠진 오크들이 남긴 돈과 낡은 무기들이 아니었다면 빈털터리였을 것이다.
 “최하급 체력 포션 두 개, 구입.”
 그마저도 포션 두 개를 구입하니 사라져버렸다. 마법을 하나 더 익힐 수도 있는 돈이었지만 그보다는 여분의 목숨인 포션을 챙기는 편이 낫다고 판단했다.
 덕분에 수중에 남은 돈은 달랑 5쿠퍼. [딱딱한 검은 빵]정도나 살 수 있는 돈이다.
 나름 본토라고 마나 회복 속도를 올려주는 [평안의 포션]도 팔기는 했다. 그러나 루인은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체력 회복 포션을 택했다. 부족한 마나와 쿨타임을 몸으로 때울 생각이기 때문이다. 막강한 공격력과 방어력을 바탕으로 근접전도 불사하고, 위급상황에서는 약발(포션)로 버틴다! 마나가 차기만을 기다리는 일반 마법사보다 배는 빠르게 성장 할 수 있으리라.
 
 [대기 모드. 9/10]
 
 물품 구입을 마치는 순간 9까지 도달한 수치를 보고 루인은 마음을 비웠다.
 “니 마음대로 해라.”
 난 할 것 다 했으니 될 대로 되라지. 라는 거다. 마지막으로 인증까지 마치니 마음이 편해졌다.
 실제로 다음 퀘스트 장소인 남문으로 향하는 발걸음이 가벼워보였다.
 
 [대기 모드. 10/10]
 [1차 조건을 충족시켰습니다.]
 
 이내 모든 숫자가 채워지는 순간, 루인은 영혼이 빠져나가는 느낌을 받았다.
 
 [1차 조건……충족……1……던전……개방……니다.]
 
 떠나는 그의 귓가에 알 수 없는 알림이 더 들렸지만 분간해낼 수는 없었다.
 
 
 # Chapter. 13 세상이 변화하다
 
 “헉!”
 먼 우주공간을 유영하듯 내가 어찌 할 수 없는 곳에 강제적으로 끌려온 듯한 기분과 함께 태민이 눈을 떴다.
 자신의 의도와 별개로 이터널과의 접속이 끊긴 것이다.
 “젠장, 튕긴 건가?”
 그럼 그건 서버 점검 카운트다운? 그렇다고 보기엔 너무 불친절하고 갑작스러웠지만 당장 떠오르는 건 그것뿐이었다.
 “접속.”
 그래도 혹시 몰라 다시금 접속을 시도했다.
 “…….”
 돌아오는 것은 침묵뿐이었지만.
 서버 점검이라 확신한 루인은 몸을 일으켰다. 강제 종료라서인지 구토가 나올 듯한 어지럼증이 일었지만 벽을 잡고 간신히 정신 차렸다. PC로 홈페이지 상황을 살피기 위함이다. 이런 경우 대게 홈페이지가 폭주라 할 만큼 난리가 난다.
 “어?”
 PC가 있는 곳으로 향하던 태민은 뭔가 이상함을 느꼈다. 분명 게임에 접속 한 지 몇 시간쯤 지났을 텐데 시계가 그대로였다.
 시계가 죽었나? 아니다. 시계는 째깍거리며 잘만 움직이고 있다.
 내가 시계를 잘못 본건가? 아니라는 것을 알지만 그렇게 믿을 수밖에 없었다. 그렇지 않고서는 설명이 불가능했으니까.
 고개를 가로 저은 태민은 움직여 PC앞에 앉았다.
 “역시.”
 역시 홈페이지가 난리였다. 다들 태민과 같은 현상을 겪은 모양이다. 메스껍고 어지러운 증상까지 똑같다.
 재미있는 것은 주된 불만이 이런 육체적 고통이 아니라는 것이다. ‘왜 튕긴 것인가.’, ‘그 의미불명의 알림은 대체 무엇인가’, 또 ‘언제 다시 접속 가능한가.’가 주된 게시글이었다.
 그러나 게임사 측에서는 아무런 공지도, 답변도 내놓지 않았다. 유저들의 불만은 커져갔고 별의별 소리가 다 나왔지만 허공에 소리 치르는 격이라 몇 시간쯤 난리를 치다가 잦아들었다.
 대신 자신의 무용담을 늘어놓기 시작하는 자들이 늘어났다. 레벨이 몇이라는 둥, 어디까지 진출했다는 둥 자랑이 줄을 이었고 진짜네 가짜네 하는 갑론을박이 이어졌다. 그 와중에 태민이 챙긴 ‘비보’를 가졌다고 주장하는 자들도 나타났다. ‘진짜’를 아는 이들의 몇 가지 질문에 금방 들통나긴 했지만.
 그렇게 세 시간, 네 시간, 다섯 시간이 지나도 게임사에서는 아무런 공지도, 조치도 나오지 않았다. 여전히 접속은 불가한 상태였고 거짓으로 접속이 되었다고 말하는 관심병 종자들만 있을 뿐이다.
 화가 나지만, 아무도 접겠다 소리는 하지 않는다. 안 해봤다면 모를까, 이터널에 한 번이라도 접속해봤다면 이미 다른 게임은 할 수 없는 지경에 빠지게 된다.
 이러니 지금 같은 문제가 생겨도 게임사가 슈퍼 갑일 수밖에 없다. 쩝. 열 받지만, 이게 현실이다.
 “후우, 대체 어떻게 된 거야?”
 기약 없는 기다림에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모니터링을 하던 태민도 지쳐버렸다.
 “후우……. 어?”
 툭
 베란다로 나와 담배를 하나 꺼내 무는 순간, 낯선 창밖의 모습에 그대로 굳어버렸다.
 “달이……왜 저래?”
 하늘에는 평소보다 커다란 보라색 달이 떠있었다. 요사스럽다는 말이 딱 어울릴 만큼 섬뜩하고 기분 나쁜 달이다.
 “후, 후. 뉴스라도 봐야겠군.”
 레드문은 들어봤어도 퍼플문은 처음이다. 떨어뜨린 담배를 툭툭 털어 다시 물고 시원하게 한 대 빨았다.
 “켁, 켁!”
 그러다 또 한 번, 담배를 떨어뜨릴 뻔 했다.
 구름이 걷히고, 달이 하나 더 나타난 것이다. 아니, 달은 원래 거기 있었다. 잠시 가렸을 뿐이고, 달처럼 생긴 보라색 행성이 그를 착각하게 만든 것이다.
 “UFO야 뭐야?”
 소행성이 지나가기라도 하는 건가? 설마 우주인의 침공 같은 건 아니겠지. 하는 실없는 소리를 하며 담배를 마저 피웠다.
 이런 이상 현상이라면 아마 뉴스에서 신나게 떠들고 있을 테니까.
 삑-
 아니나 다를까, TV를 켜자 이터널의 접속 불가 현상으로 난리가 났다는 내용이 다뤄지고 있었다. 그리고 동시에 화면 하단으로 ‘갑자기 나타난 보라색 행성, 과연 정체는 무엇인가’, ‘천문학자와 NASA는 대체 무엇을 했나.’하는 자막이 깔렸다.
 달, 아니 저 행성의 정체는 학자들도 밝혀내지 못한 건가? 저정도로 큰 행성이라면 접근하는 걸 몰랐을 리 없을 텐데? 천문학적인 예산을 쓰는 우주과학 쪽에서 너무 물렁하게 대응하는 거 아냐? 하는 생각는 하는 동안 화면은 보라색 행성의 등장과 함께 소리 높이는 종말론자들의 이야기로 바뀌었다.
 “별 일 없어야 할텐데…….”
 알 수 없는 찝찝한 기분을 뒤로 한 채 태민은 다시 PC 앞으로 향했다.
 결국, 그날 밤 늦은 시간까지 이터널의 접속불가 현상은 고쳐지지 않았다.
 
 ***
 
 다음 날 아침, 혹시나 하는 마음에 알람을 맞추고 일찍 일어난 태민은 여전히 접속이 되지 않는 것을 확인하고 PC를 켰다. 홈페이지도 어제와 비슷한 영양가 없는 상황의 연속이었다.
 “헐.”
 보라색 달, 아니 행성도 마찬가지였다. 날이 밝아 달이 사라졌는데도 보라색 행성은 멀쩡하게 하늘에 떠있었다.
 대체 뭐지? 저거 위험한 거 아니야?
 지구로 추락하는 것은 물론이요, 지구의 자전 또는 공전에 조금만 영향을 줘도 생태계에는 어마어마한 일들이 일어난다. 어쩌면 사이비 교주들이 말하는 종말에 가까운 자연재해들이 일어날 수도 있는 것이다.
 혹시나 싶어 다시 한 번 TV를 켜보니 다급한 목소리의 앵커가 잡혔다.
 “다시 한 번 말씀 드립니다. 오늘은 가급적 집 밖을 나서지 마시기 바랍니다.”
 “응?”
 재난 방송인가? 벌써 어떤 영향이? 하고 생각하는 사이 화면이 전환됐다. 화면에 잡힌 것은 씽크홀이었다.
 “전국, 아니 전 세계에 갑작스레 생겨난 씽크홀로 많은 사람들이 실종되고 있습니다. 당국에서는 주변을 통제하고 빠르게 구조 인원과 탐사 인원을 씽크홀로 내려 보냈지만 실종된 인원도, 구조 인원도 아직 돌아오고 있지 않습니다.
 이번에 나타난 씽크홀은 그 깊이를 가늠 할 수 없는 것이 특징이며 전국적으로 실종 신고가 급증하여 같은 씽크홀로 인한 사고인지 확인 중에…….”
 “우리나라에 씽크홀이라니, 호수 주변에만 생기는 거 아니었어?”
 전국적으로 발생한 씽크홀과 실종사건이라니. 뭔가 무서웠다. 하필이면 보라색 행성이 나타난 다음날일 건 또 뭐람.
 인터넷으로 우리 동네에는 없나 검색해봤지만 다행히 태민의 동네에서는 아직 발생하지 않았다. 그래도 몸을 사리기로 했다. 태민은 현실에서 꽤나 안전을 중시하는 타입이었다.
 그렇게, 다시 사흘이 지났다.
 여전히 이터널은 접속 불가였고 서버가 터졌다느니, 서버과부하로 회사가 불이 났다느니 하는 헛소문이 무수히 생겨났다.
 정말 그런 거라면 그 카운드 다운은 뭐였을까. 서버가 터지고 불이 나서 회사가 홀랑 타버리는 카운트 다운? 말도 안되는 소리다. 오히려 힘을 얻은 건 ‘대규모 업데이트 패치’다. 라는 쪽이었다. 덕분에 유저들은 다시 한 번 기대감으로 불타올랐지만 회사쪽에서의 공지나 사과는 여전히 없었다.
 “정부는 위험요소로 판단되는 씽크홀을 막대한 양의 흙으로 메우자는 의견을 제시했으나 실종자와 구조대의 가족들의 거센 저항에 부딪혔습니다.”
 씽크홀에 대한 조치가 이루어지지 못한 것도 그대로였다. 실종된 사람과 구조하러 들어간 사람들 중 누구도 다시 나오지 못했으며 중대한 위험요소로 판단해 흙으로 메워버리자는 국가의 의견도 실종자 가족들과 국민의 저항에 부딪혀 성사되지 못했다.
 한 가지 변한 것이 있다면 이러한 위험요소가 씽크홀만이 아니게 되었다는 것이다.
 서울과 부산의 지하철 입구 중 일부가 동굴처럼 변하더니 씽크홀과 마찬가지로 아무도 돌아오지 못하는 곳으로 변했다. 지하철 뿐이 아니다. 몇몇의 ‘문’들이 같은 현상을 일으켰다. 정부는 경찰을 동원해 ‘문’들의 주변을 즉각 폐쇄했다. 그러나 사람들의 공포감은 점점 커져만 갔다.
 “후우……. 진짜 종말이라도 온 건가.”
 다시 사흘이 흘렀다. 입구를 폐쇄했음에도 실종자는 더욱 늘었다. 동굴처럼 변한 지하철 입구를 ‘지하철 던전’이라 부르던 호기심 많은 아이들이 밤에 몰래 숨어들었다가 사라졌고 아이들의 부모 역시 아이들을 찾겠다며 억지로 뚫고 들어갔다가 실종됐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정부는 경찰 뿐 아니라 군인들까지 동원해 입구를 틀어막았다. 쉬쉬하지만 지키던 경찰이며 군인 중 일부로 실종이 되었다는 소문이다. 동시에 곧 완전무장한 군대를 대규모로 지하철 던전에 들여보낸다는 소문도 있었다.
 공식적으로 발표 된 씽크홀과 지하철 던전의 수는 다 합쳐 열이 조금 넘었지만 생필품의 가격이 폭등했고 주가는 곤두박질쳤다. 사실 폭동이 안 일어난 것만 해도 다행이었다. 군인과 경찰이 눈에 불을 켜고 동네동네에 배치되어 있는 덕인지도 모른다.
 사이비 종말론 따위는 믿지 않는 태민이지만 정말 이 지구에 무슨 일이 난 듯 싶었다.
 “이러다 우리 동네에도 씽크홀이든 지하철 던전이든 생기는 게 아닌지 몰……?!”
 갑자기 발밑이 허전했다. 몸이 쑥 내려가는 듯한 기분이 들더니 눈앞이 번쩍였다.
 “젠장, 이게 무슨…….”
 엉덩방아를 잘못 찧었는지 꼬리뼈가 아프다. 태민이 똥침이라도 당한 듯한 자세로 엉덩이를 부여잡고 있을 때, 곁에서 사람의 말소리가 들렸다.
 “아야야. 여기가 어디죠?”
 “으아아아아악!!!!!”
 어리둥절해하는 소리도 있었고, 호들갑스러운 소리도 있었다.
 태민도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주위를 돌아봤다.
 동굴? 터널? 그가 있는 곳은 동굴이었다. 좀 더 정확히는 작은 공동이었고 눈 앞으로는 횃불로 밝혀진 긴 터널이 있었다.
 분명 집근처 편의점 문을 열었는데 동굴이 웬 말인가? 무척 당황스러웠지만 최대한 차분하게 주위를 살폈다.
 남자 셋에 여자 둘. 아니 자신까지 남자 넷. 한 명은 복장이 편의점 유니폼인 것이, 아무래도 편의점 안에 있던 중년 알바생인 듯 했다.
 가만, 복장?
 “당신은 누구지?”
 모두의 시선이 한 남자에게 쏠렸다. 나머지 사람들과 달리 이상한 복장의 남자가 터널의 입구 부근에 서있는 것이다.
 그의 복장은 마치……. 중세. 중세 유럽의 것과 같았다.
 ‘그것도 평민의 것은 아니야.’
 순간 떠오르는 모습이 있었지만 곧 머릿속에서 지웠다. 에이, 그건 말도 안 된다.
 “그래. 당신은 뭐야? 여기는 어디고?”
 “맞아요. 여기가 어디죠? 왜 우릴 데려 온 거예요?”
 태민에 이어 노랗게 머리를 물들인 남자가 따지고 들었다. 옆에 있는 여성은 여자친구인 듯, 건들거리며 허세를 부렸다.
 “이 자식, 말이 말 같지 않아?! 앙?”
 씨익 웃기만 하는 남자를 보고 더 열이 받았는지 노란 머리가 성질을 부렸다. 운동을 하긴 했는지 제법 다부진 몸매이긴 하다.
 그 모습에 태민은 슬쩍 뒤로 빠졌다. 가만히 있어도 알아서 나서주니 뒤에서 상황을 관망하겠다는 것이다.
 “어?!”
 휘익
 꽈당!
 남자의 멱살을 틀어쥐려던 노란 머리가 180도 회전하며 바닥에 내리 꽂혔다. 별로 힘을 쓴 것 같지도 않은데 어떻게 한 거지?
 “꺄악! 오빠!!”
 “윽, 이 자식이!!”
 꽈당!
 여자친구 앞에서 체면을 구긴 노란 머리가 재차 달려들어 보지만 결과는 같았다. 좀 전보다 더 추하게 나자빠졌고 나머지 사람들은 침을 꼴깍 삼키며 그를 경계했다.
 “진정하게.”
 노란 머리가 다시금 덤벼들려 하자 편의점 유니폼을 입은 중년 남자가 제지했다. 은퇴 후 편의점 아르바이트를 하는 중인지 얼굴에서부터 연륜이 묻어났다.
 노란 머리는 할 수 있다는 듯 으르렁 거렸지만 이미 두 번의 시도로 힘의 차이는 가려졌다.
 “일단 우리를 해하려는 건 아닌 것 같습니다만…….”
 연륜이라는 것인지 단번에 핵심을 파악했다. 노란 머리의 행패에 반격하기는 했지만 치명적일 만큼의 공격은 하지 않았다. 그 증거로 허리춤에 덜렁거리는 장검에는 손도 가져가지 않은 상태다.
 옳은 말이라는 듯 사내는 빙긋 웃음으로 답했다.
 “상황을 설명해줄 수 있겠습니까?”
 “좋습니다. 그게 제 역할이니까요.”
 “역할?”
 태민의 눈이 가늘어졌다.
 “여러분이 할 일은 간단합니다. 이 길을 따라 동굴을 빠져나가면 됩니다. 갈림길은 있지만, 오래 걸리지는 않을 겁니다.”
 “……그게 전부?”
 “이 자식, 무슨 속셈이냐!”
 황당하리만치 간단한 설명에 모두가 당황했다. 이대로 길을 따라 나가기만 하면 된다니? 그렇게 간단하다고?
 함정이다. 단순히 걸어 나가기만 하면 된다니, 절대로 그럴 리 없다.
 그의 말을 듣는 순간 태민은 그것을 파악했다. 저 남자는 동굴을 빠져나가면 된다고 했지만 ‘장애물’이 없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 장애물은 아주 위험한 냄새가 풍기는 것일 테다.
 “저 안에는 뭐가 있죠?”
 그때까지 조용히 있던 안경잡이 소녀가 경계하며 물었다.
 “저 안에는 뭐가 있죠?”
 그때까지 조용히 있던 안경잡이 소녀가 경계하며 물었다. 재미있다는 듯 한층 더 짙은 미소를 짓는 남자.
 “좋은 질문입니다. 저 안에는 ‘무언가’가 있죠. 하지만 미리 안다면 재미없을 테니 자세히 말하지는 않겠습니다. 직접 들어가 보면 금방 알게 될 겁니다.”
 “위험한…… 건가요?”
 그 위험한 미소에 소녀가 움츠러든 모습으로 물었다.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죠.”
 “빌어먹을 자식, 똑바로 대답해!”
 겁 먹은 강아지처럼 노란 머리는 악을 썼다. 그 모습에 태민은 쓰게 웃었다. 저런 행동은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
 “위험하지 않게 할 수 있는 방법이 있다는 건가요?”
 스무고개를 하듯, 질문을 바꾸었다.
 “글쎄요. 저런 약해빠진 녀석이라면 위험하겠지만, 몇몇 분들에게는 어렵지 않을 수도 있겠군요.”
 남자는 노란머리를 지목한 뒤, 사람들을 슥 돌아보았다.
 ‘대체 무슨 소리지?’
 남자라고는 셋 뿐인데 노란머리가 제일 약하다? 육체적 능력으로 보았을 때 가장 싸움을 잘 할 것 같은 것은 노란머리다. 태민도 게임에서의 감각과 평균정도의 체격을 가지고 있지만 몸이 좋은 편은 아니었다.
 ‘머리를 써야하는 건가?’
 때문에 태민은 함정을 생각했다. 오래전에 봤던 영화 큐브처럼 머리를 써서 단계별 함정을 통과해야만 나갈 수 있는 걸까? 노란머리가 그의 여자친구와 함께 제일 단순해보이기는 하니 그럴싸한 추리였다.
 “내가 약하다고? 이런 녀석들보다?”
 그 사이 노란머리가 쓸데없는데 힘을 쓰고 있었다. 남자에게는 순식간에 당하고 말았지만 다른 사람들보다 약하다는 말에 열이 받았는지 멧돼지마냥 콧김을 씩씩 내뿜었다.
 “진정하게. 이런 도발에 넘어가서는 안 돼. 지금은 우리끼리 힘을 합쳐야 할 때네.”
 “명령하지 마. 늙은이!”
 어이쿠야, 말이 통하지 않는다.
 최악의 상황에 태민이 얼굴을 짚었다. 그리고 노란머리와는 눈을 마주치지 않기 위해 고개를 돌렸다. 저런 단순한 녀석들은 꼭 눈을 마주치면 시비를 걸어오기 마련이다.
 “시간 제한은 없는 겁니까?”
 소란을 귀로만 듣다가 비로소 태민이 나섰다. 치명적일 수 있는 질문. 만약 시간 제한 같은 것이 있다면 여기서 이러고 있을 틈이 없었다. 죽이 되든 밥이 되든 일단은 나서봐야 할 터.
 “딱히 그런 것은 없습니다만…….”
 다행히 누군가 스톱워치를 재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
 “며칠쯤 굶는다면 힘을 쓰기 어렵지 않겠습니까?”
 “……!!”
 생물학적인 제한시간이 있다는 것이다. 인간이 아무것도 먹지 않고 버틸 수 있는 시간은 불과 며칠이 되지 않는다. 편의점의 과자나 음료 같은 것이라도 이 알 수 없는 공간에 함께 떨어졌다면 모를까, 이대로는 굶주림이 가장 큰 위험이 될 수 있을 터였다.
 “젠장! 미리 과자라도 집어둘걸.”
 쓸데없는 소리를 지껄이는 노란머리를 무시하고 태민은 빠르게 머릿속을 정리했다. 이 비현실적인 상황에 적응하기 위해서.
 “아저씨 생각은 어때요?”
 그때, 안경잡이 소녀가 다가와 태민에게 말을 걸었다. 바보 커플은 내버려두고 어느새 중년 알바생과 소녀는 연합을 한 상태였다.
 “생각은 무슨 생각, 들어갈 수밖에 없잖아. 이건!”
 그때 노란머리가 끼어들었다. 통로 입구를 지키고선 남자가 무서워서라도 갈 수밖에 없다는, 아주 단순한 생각. 그리고 아주 위험한 생각이기도 했다.
 “일단 이곳은 ‘안전지대’인 것 같군요.”
 생각을 정리한 태민이 비로소 입을 열었다.
 “안전지대?”
 “예. 저 안에 무엇이 있는지는 몰라도 일단 이 공간에서는 당장 무엇이 벌어지진 않을 것 같습니다. 저 사람이 지키고 있어서일지, 또 들어갔다가 다시 돌아와도 마찬가지일지. 들어갔다가 다시 돌아올 수는 있을지는 몰라도 말입니다.”
 몇 가지 가설. 그간의 게임 생활을 바탕으로 한 추론이지만 이미 비현실적인 상황에서 가장 합리적인 판단이기도 했다.
 일단은 호의적으로 보이는 그가 통로 안쪽의 ‘위험’을 막아주고 있는지, 한번 통로 안으로 들어갔다가 돌아와도 그가 여전히 자리를 지키고 있을지, 그가 오히려 다시 돌아오는 것을 막지는 않을지. 그 여부는 무척 중요했다.
 끄덕
 옳은 판단이라 생각했는지 소녀와 중년인이 끄덕거렸다. 노란머리와 여자친구는 뭐가 불만인지 인상을 쓰고 있었지만 당장 머릿속에 생각이 없으니 입 다물고 말을 들었다.
 “그렇기 때문에 조급해하기보다 이곳에서 작전을 짤 필요가 있습니다. 별로 모을 수 있는 정보는 없겠지만 뭐라도 준비하고 들어가는 것과 그렇지 않은 것에는 차이가 있겠죠.”
 하다못해 어떤 순서로 들어갈지를 정하거나 주위에 떨어진 돌멩이를 주워가는 것만으로 차이가 발생한다. 살인마 같은 것이 나와도 대항할 ‘공격력’이 달라질 테니까. 아, 이건 너무 게임적인 표현인가?
 “맞는 말이네. 일단은 이곳을 함께 빠져나가야 할 동료이니. 서로가 누구인지부터 알아야 할 것 같군. 난 서동혁이라고 하네. 보는 것처럼 은퇴 후 편의점에서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눈을 떠보니 여기더군.”
 “전 성지영이에요. 열여덟 살이고, 학원가기 전에 편의점에 들렀는데 이곳에 오게 됐어요.”
 “신태민입니다. 27세……. 취업 준비생입니다.”
 “권혁수. 29살이다. 국내 최고의 회사, 황성에 근무하고 있지. 이쪽은 내 여자친구 한혜미. 훔쳐보다 걸리면 죽을 줄 알아.”
 권혁수라 자신을 밝힌 노란머리는 짧은 자기 소개에 노골적으로 태민과 동혁을 무시했다. 팔뚝을 걷으며 위협을 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여자친구라는 한혜미는 가슴골을 강조하는 파인 옷으로 제법 육감적인 몸매를 자랑하고 있지만, 그렇다고 연예인 뺨칠 만큼 예쁜 것은 아니었다.
 “일단…… 공통점은 없군요.”
 태민이 짧은 자기소개에 대한 감상을 일축했다. 공통점은 없다. 오히려 너무 다른 것이 특징인 것처럼.
 “멘사에 가입됐다든가, 무술을 했었다든가 하시는 분…… 있습니까?”
 “내가 싸움은 좀 하지.”
 “없다는 거군요. 그럼 주머니에 음식물 같은 것을 갖고 계신 분 있습니까?”
 이 와중에 으스대는 혁수를 깔끔히 무시했다. 서두를 필요는 없지만 자기자랑이나 들어줄 시간도 없다.
 “없군.”
 “없어요.”
 “우리도 없다.”
 “주머니나 가방에 든 것들을 한 번 꺼내봐주시겠습니까?”
 주섬주섬 가진 것들을 모았다. 태민이 가진 거라고는 꼬깃한 지폐 몇장과 라이터가 전부. 아르바이트 중이던 서동혁도 마찬가지였고 권혁수도 의미없는 차키와 열 때 퐁 소리가 나는 라이터, 지갑이 다였다. 한혜미는 치장을 위한 화장품 따위가 전부였는데 특이하게도 지갑이 없었다.
 ‘호구였군.’
 아무래도 권혁수가 등골 빨아먹히고 있는 중인가보다.
 그나마 쓸 만한 것이 성지영이었다. 책가방을 메고 있던 터라 교과서, 노트, 문제집, 문구류 등을 가지고 있었는데 커터칼 등도 유용했지만 빵빵한 책가방은 앞으로 메면 그 자체로 하나의 보호구가 될 수 있을 듯 했다.
 “휴대폰은 일단 먹통이고…….”
 동굴이라는 것을 확인할 때부터 기대도 하지 않았지만 전화는 당연히 먹통이었다.
 “너무 어렵게 생각할 필요 없습니다. 이 난관을 해쳐나갈 ‘힘’은 이미 당신들에게 있으니까요.”
 고민이 깊어져갈 때,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힘’은 내 안에 있다? 대체 무슨 소리지?
 “뭐야, 결국 아무 도움도 안 되잖아? 이런 놈들을 믿는 내가 바보지.”
 그때, 권혁수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오래 참았다는 듯, 경멸에 가까운 눈초리를 하고서.
 “늙은이에 여물지도 않은 애새끼, 비실비실한 놈이라니. 따로 다니는 게 낫겠군. 자기야, 가자!”
 이들을 ‘짐’이라 판단하고 독자 행동을 개시한 것이다.
 탁
 성지영의 책가방을 강탈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거꾸로 메면 몸을 보호 할 수 있을 거라는 태민의 발언을 잊지 않은 것이다.
 “아저씨, 그건 제……!”
 “뭐! 꼬우면 경찰에 신고하든가!”
 공권력의 힘이 닿지 않는 무법지대라는 생각에 성지영은 얼른 입을 다물었다. 억울했지만 해코지를 당하는 것보다는 나았다.
 “그리고, 너!”
 “……?”
 “앞장 서라.”
 권혁수가 태민을 지목했다.
 퍼억!
 “억!”
 내가 왜? 라는 표정을 짓자 주먹이 먼저 날아왔다. 무방비로 앉아있던 태민은 그대로 나자빠졌고 이어 발길질까지 이어졌다.
 “으으윽…….”
 “일어서. 이 새끼야.”
 권혁수가 태민을 억지로 일으켰다. 그리고 터널을 향해 떠밀었다. 덕분에 태민은 정신을 못 차린 상태로 터널 안으로 떠밀려져 갔다.
 “잠깐, ……을…….”
 곁을 지나는 순간, 남자가 뭐라 이야기 했지만 권혁수는 멈추지 않았다.
 “어쩔 수 없군……. 괜찮겠니?”
 “하지만…….”
 어쩔 수 없이, 동혁과 지영도 따라 움직였다. 지금은 분산되기보다 뭉쳐야 할 때였다.
 ‘으음…….’
 간신히 정신을 차린 태민은 돌아서서 혁수와 맞설까했지만 일단은 뜻대로 움직이기로 했다. 어차피 가야 할 길이었고, 이런 위험 상황에 겁 없이 주먹을 휘두를 정도라면 자칫 두 사람이 다투다 불상사가 일어날 수 있다고 판단했다.
 화를 참는 대신 주변을 살폈다. 동굴에는 시야를 간신히 밝힐 만큼의 횃불이 달려있었고 눈을 부라리자 제법 먼 거리까지 동향을 살필 수 있었다.
 ‘응?’
 한 10분쯤 걸었을까, 집중하던 태민이 무언가 일렁임을 발견했다. 뒤에서는 기세 오른 혁수가 욕지거리를 내뱉으며 등을 밀었지만 태민은 발걸음을 무겁게 하며 천천히 접근했다.
 ‘뭔가 있다……!’
 자세를 낮추고 바닥에 떨어진 돌멩이를 양손에 주워들었다. 그 모습에 경계하며 혁수가 물러섰지만 태민은 그대로, 일렁임이 있던 지점을 향해 천천히 다가갔다.
 휘익
 툭 투둑
 어느 정도 가까워졌을 때, 왼손에 있던 돌멩이 하나가 날아갔다. 목표물이 있던 것은 아니지만 만약 무언가 있다면 시선을 끌기 좋도록 벽에 맞고 튕기도록 했다.
 ‘잘못 봤나……?’
 “뭐, 뭐야? 씨발.”
 그 모습에 오히려 혁수가 놀랐다. 아무 것도 없는 곳에 돌멩이를 던지다니? 뭔가 나올 것만 같은 분위기에 지레 겁을 먹은 것이다.
 “아무 것도 없잖아. 이 새끼야. 괜히 이상한 짓…….”
 ‘둘!’
 그때 태민이 빠르게 물러섰다. 아무 것도 없던 곳에 거뭇한 그림자 두 개가 움직인 것이다.
 ‘빠르다……!’
 “개새끼, 덤벼!”
 태민의 행동에 놀란 혁수가 금방이라도 달려들 듯 자세를 잡았다. 태민과 마찬가지로 그의 손에는 돌멩이 두 개가 들려진 상태였다.
 “꺄악! 오빠!!”
 “응? 헉!”
 다가오던 그림자에서 녹색 괴물이 튀어 올랐다. 횃불에 비친 놈의 손에는 작은 단도가 들렸고 혁수는 영문을 모른 채 그 자리에서 자지러졌다.
 까앙!
 그러나 녹색 괴물의 공격은 성공하지 못했다. 그림자에서 눈을 떼지 않던 태민이 돌멩이를 힘껏 집어던진 것이다.
 그 기세가 사뭇 위협적이던지 괴물은 혁수를 노리는 대신 단도로 돌멩이를 쳐냈다. 공격이 실패했다.
 삼대일은 무리라고 느꼈을까. 기습에 실패한 놈이 눈치를 보며 물러섰다. 덕분에 그림자 졌던 얼굴이 횃불에 드러났다.
 “고……블린……?!”
 놈을 확인한 태민이 화들짝 놀랐다. 놈의 외모는 게임에 자주 등장하는 고블린과 무척 흡사했다.
 놀라운 것은 그 뿐이 아니었다. 놈을 주시하자 머리 위로 글자가 떠오른 것이다.
 
 [암살 고블린]
 
 영락없는 게임의 그것이다.
 ‘아차!’
 그 순간, 태민은 정신이 번쩍 들었다. 발견한 그림자는 둘. 하나는 모습을 드러냈지만 하나는 아직이었다.
 “으악!!!”
 말하기가 무섭게 혁수의 비명이 들려왔다. 그의 허벅지에 낮게 접근한 암살 고블린의 단도가 박혀있다.
 혁수는 발작하듯 들고 있던 돌멩이로 놈의 머리를 내리찍었고 혜미는 옆에서 어쩔 줄 몰라하며 발만 동동 굴렀다.
 그러나 이번엔 태민도 도울 수 없었다. 새로 손에 쥔 돌멩이마저 소모해버린다면 자기 방어가 불가능해지기 때문이다.
 “끄아아악!!”
 몸부림을 친 덕분에 위협을 느낀 암살 고블린이 멀어졌지만 이미 바닥을 기며 기동력을 상실한 혁수가 살아남기는 힘들어보였다.
 ‘하필…….’
 게임 속 괴물이 눈앞에 나타난 것도 빌어먹을 일이지만 하필이면 암살형이 나타날 줄이야. 적이 굼뜨기라도 하면 안전지대까지 도망이라도 쳐 볼텐데 이래서야 도망도 쉽지 않다. 암살형의 장기는 속도. 그림자가 다가온 속도만 보더라도 따돌리는 것은 무리였다. 오히려 등만 훤히 내주고 말겠지.
 “으으으으…….”
 악감정이 있다고는 해도 고통에 몸부림치는 혁수와 패닉에 빠진 혜미를 두고 달아나는 것도 쉬운 결정은 아니고.
 “가방 벗어! 안전지대까지 물러난다.”
 혜미의 부축으로 몸을 일으키는 혁수에게 소리쳤다. 단도는 빨랐지만 정말 짧았다. 덕분에 상처가 깊지 않아 어떻게든 운신이 가능 한 것. 그렇다면 책가방을 이용해 어떻게든 공격을 봉쇄 할 수도 있을 터였다.
 “젠장!”
 다행히 알아들었는지 혁수가 가방을 벗었다. 뚱뚱한 가방 탓에 몸이 둔해진다는 것을 안 것이다. 대신 한 팔로 방패처럼 가방을 들었다.
 “제기랄…….”
 이번에는 태민이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한 번의 공격은 막겠지만 공격력을 상실했다. 혜미의 연약한 팔로는 돌을 던져봤다 따끔하기만 할 테고, 이미 혁수는 겁을 먹어 반격까지 생각하기 어려웠다.
 공격이 가능한 것은 태민 혼자. 뒤쪽의 두 사람과 합류하기 전까지는 최대한 몸을 사려야했다.
 ‘할 수 있을까.’
 일단 뒤로 돌아오지 못하도록 혁수의 옆에 섰다. 그러나 두 마리가 동시에 공격을 해온다면 막을 자신이 없었다. 만약 공격이 불가능한 혁수 대신 자신만 노린다면? 등줄기가 서늘해졌다.
 태민은 애가 타는 마음으로 뒤를 힐끗 쳐다봤다. 금방 따라올 것 같더니 합류가 늦는다.
 ‘설마……?’
 뒤쪽에도 나타난 건가? 그렇다면 최악이다. 건강한 남성 둘이서도 이러한데 그 둘이라면…….
 “온다. 으아아악!!”
 또 다시 그림자가 되어 다가온 암살 고블린들이 혁수를 향해 날아올랐다. 한번 위치를 들켜서인지 이동이 눈에 보였지만 상체와 하체를 동시에 노리고 드는 공격은 보고도 막기 어려웠다.
 “아아아악!!!”
 책가방을 들어 상체 공격은 봉쇄했다. 그러나 동시에 날아든 단도에 또 한 번 허벅지를 찔리고 말았다. 회복이 어렵도록 단도를 비틀었다. 기동력을 완전 분쇄하는 그 행동이 무척 영악했다.
 “저리 꺼져!!”
 뒤늦게 태민이 덤벼들었다. 돌멩이를 쥐고 힘껏 휘두르자 암살 고블린들도 쉽게 보지 못하고 물러났다.
 “제기라알!”
 책가방에 꽂힌 단도를 뽑아냈다. 하체에 꽂힌 단도는 달아나며 회수했지만 갑자기 덤벼든 탓에 책가방에 꽂힌 단도를 미처 회수하지 못한 것이다.
 드디어, 무기가 생겼다.
 그러나 전혀 기쁘지 않았다. 단도를 가졌다해서 놈과 일대일을 겨뤄볼 자신이 없었고, 무엇보다 저 멀리에서 또 다른 그림자가 일렁이는 것을 발견한 탓이다.
 “뛰어!!!”
 공포에 물든 혁수를 뒤로하고 혜미의 손목을 잡아챘다. 둘이어도 위험한데 여기서 더 늘어난다면 가망이 없다. 가장 운동 능력이 뛰어난 남자 둘이니 여기서 반전시키지 못하면 어렵다고 판단했지만 혁수의 육체적, 정신적 상태를 보니 꼭 그렇지도 않을 듯 했다. 속이 복잡했지만 태민은 혜미를 데리고 뛰었다.
 “멈춰! 이 씨발놈아! 혜미야! 혜미야!”
 이미 틀렸다는 것을 알았을까, 혜미도 조금 머뭇거리더니 태민의 인도가 필요 없을 만큼 전력을 다해 뛰었다.
 “끄아아악!!!”
 뒤에서 찢어지는 비명이 들렸다. 두 사람은 입술을 질끈 깨물며 더 속도를 냈다.
 그 뒤로 작고 검은 그림자가 뒤따랐다.
 “끼엣!”
 그림자는 금세 두 사람을 따라잡았다. 다가온 그림자는 뒤처지는 혜미를 향해 날아올랐고, 속도를 맞추던 태민이 기다렸다는 듯 돌아섰다.
 “이얏!!”
 “끼에엑!!”
 푹!
 날아오른 암살 고블린의 복부에 단도가 파고들었다. 반격에 성공했다!
 그러나 태민의 표정은 심하게 일그러졌다.
 ‘당했다!’
 놈의 손에는 단도가 없었다. 자신에게 단도를 빼앗긴 놈인 것이다. 동시에 또 하나의 그림자가 빠르게 뛰어들었다.
 “숙여요!!”
 귀를 때리는 고성에 태민이 반사적으로 몸을 숙였다.
 쉬익
 퍽!
 날아오른 고블린이 곧장 꼬꾸라졌다. 몸에 제 몸만 한 화살 한 대를 달고서. 화살이라고?
 “어딜!!”
 쉬익
 퍽
 또 한 대의 화살이 날았다. 이번엔 그림자에 꽂히더니 또 다른 암살 고블린이 모습을 드러냈다.
 이어 몇 발의 화살이 더 날아들었다. 이미 쓰러진 녀석들과, 태민이 상대하던 녀석에게 연달아 꽂혔다.
 “아저씨, 괜찮아요?”
 “자네들, 괜찮나?”
 안전지대 쪽에서 두 사람이 다가왔다. 놀랍게도, 화살을 날린 것은 지영이었다.
 “그 혁수라는 친구는…….”
 “어쩔 수 없었습니다.”
 “음……. 그렇군.”
 잠시 침묵이 흘렀다.
 “암살 고블린이라니, 이것들은 대체 뭔가?”
 태민에게만 보이는 이름은 아닌 모양이다. 억지로 정신을 추스른 태민이 고개를 저었다.
 “모르겠습니다. 게임에나 나오는 몬스터 같은데 이게 왜 여기에 있는지는…….”
 “어쩌면 우리는, 모르는 사이에 게임 속에 들어와 있는 것일지도 몰라요.”
 “……뭐?”
 구세주, 지영이 입을 열었다. 게임 속일지도 모른다니?
 “이 장비, 능력. 모두 제가 이터널이라는 게임 속에서 가지고 있던 것이거든요.”
 그러고 보니 지영의 복장이 달라졌다. 활이며 가죽 갑옷이며, 모두 현대의 것은 아니다.
 냉정히 돌이켜보니 암살 고블린들의 외형도 익숙했다. 완전히 동일하지는 않지만 상대해봤던 악동 고블린들과 닮은 구석이 있었다.
 “그러니까 여기가 게임 속이다?”
 그럼 권혁수도 죽은 게 아니라 로그아웃 된 것이고? 여전히 마음이 무겁고 믿기 힘들었지만 눈앞에 증거라고 할만한 지영이 서있다.
 “새로운 게임의 모르모트 같은 거 아닐까요?”
 모르모트? 우리가? 그럼 누가 우리를 납치했다는 것인가? 대체 왜?
 머릿속이 복잡했다. 그리고 뭔가 이상함을 느꼈다.
 “그렇다면 왜 시체가 사라지지 않는 거지?”
 지영에게 죽은 암살 고블린들이 사라지지 않는다. 게임이라면 회색빛으로 물들든 땅속으로 가라앉든 하며 사라져야 할 시체들인데 녹색 피를 흘리며 싸늘하게 식은 채로 계속해서 존재했다.
 “그, 그건…….”
 거기까지는 생각하지 못했는지 지영이 당황해했다. 가만, 이터널이라고?
 “그럼 그 장비와 능력은 어떻게 불러온 거지?”
 “입구를 지키던 그 남자가 각성시켜줬어요. 아니, ‘인증’이라고 해야 하나?”
 각성? 인증? 머릿속에 퍼뜩 떠오르는 생각이 있었다.
 “혹시 20레벨을 넘겼어?”
 “아, 네. 아시네요? 아저씨도 이터널을 하셨었나 봐요?”
 든든한 아군이 생길지 모른다는 기대감에서일까? 지영의 표정이 밝아졌다.
 “저요, 저도 했었어요!”
 가만히 떨고 있던 혜미가 소리쳤다. 워낙 유명한 게임이니 그녀도 해본 적 있던 모양이다.
 “일단 돌아가 보자.”
 여전히 사라지지 않는 암살 고블린들의 시체를 보다, 일행은 안전지대 쪽으로 발길을 돌렸다.
 “돌아오셨군요.”
 “어떻게 하면 되지?”
 빙긋 웃는 남자를 향해 태민은 화를 내지 않았다. 그에게 무슨 말을 하든 별 반응이 없을 거라는 생각에서였다. 대신 지영에게 인증 방법을 물었다.
 “인증하겠다고 말하면 돼요.”
 “인증하겠다.”
 “좋습니다. 잠시 이쪽으로.”
 가까이 다가서자 남자는 태민의 머리가 손을 얹었다.
 “으흠, 어디보자. 이건 상당하군요. 그렇다면…….”
 
 [인증을 마쳤습니다. 누적 경험치가 반영되어 레벨이 상승합니다.]
 [차원 인증 절차에 따라 능력이 동기화됩니다.]
 [능력과 장비를 동기화합니다.]
 
 몸에 힘이 솟았다. 주변의 공기가 다르게 느껴졌다. 익숙하지 않지만, 언젠가 느껴보았던 기분이다.
 “마나……?”
 마나였다. 이터널에서 초보존을 벗어나며 느꼈던 마나의 기운. 갑자기 주변으로 느껴지는 공기의 변화는 그것과 흡사했다.
 “저도, 저도 인증해주세요.”
 태민에 이어 혜미도 나섰다. 남자의 손이 닿는 위치까지 다가서서 인증을 재촉했다.
 그러나 남자는 고개를 가로저을 뿐이다.
 “당신은 기준에 부합하지 못하는 군요. 조건을 만족시킨 뒤 다시 찾아오시기 바랍니다.”
 “조건이라고요? 기준이 대체 뭐죠? 왜 난 안 되는 거예요? 왜? 으흐흑!”
 단호한 거절에 혜미가 주저앉았다. 서럽게 울었다. 참고 있던 공포와 불안이 한꺼번에 터져나온 것이다.
 그러고 보니 지영과 달리 동혁은 복장이 달라지지 않았다. 이터널을 하지 않았거나, 혜미처럼 조건을 달성하지 못한 모양이다. 태민은 순간적으로 그 ‘조건’이 바로 초보존 탈출 조건인 20레벨의 달성임을 알았다. 지금 이 상황이 ‘이터널’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는 것도.
 ‘대체 어떻게 돌아가는 거야?’
 얌전해보이는 지영이 20레벨을 돌파한 게임 고수라는 사실도 놀라웠지만 이 사건의 중심에 이터널이 있다는 것도 무척이나 놀라웠다. 최근 접속불가 상태에도 일언반구 없던 게임사가 사람을 납치해서 게임 속에 집어넣다니? 이것은 명백한 범죄가 아닌가?
 그러나 한편으로는 조금 안심이 되기도 했다. 정말로 ‘이터널’에서의 능력과 장비가 계승된 것이라면, 이 던전은 어렵지 않게 클리어 할 수 있으리라는 생각에서였다.
 “인벤토리.”
 게임에서와 똑같이, 반투명한 창이 생겨났다.
 ‘됐다.’
 태민을 안심하게 만든 것은 인벤토리 한켠에 고이 자리잡고 있는 ‘비보’들이었다.
 철컥 철컥
 오크의 비보인 강철갑옷 세트가 장착되고 손에는 리세토의 지팡이가 들리자 비로소 게임이라는 실감이 났다. 그리고 자신감이 충만해졌다.
 이제부터는 공략왕 루인이 나설 때다.
 “일단은 이 던전을 클리어하도록 하죠. 제가 앞장서겠습니다.”
 “부탁드려요.”
 견고해 보이는 갑옷을 확인한 지영이 고개를 끄덕였다. 지영은 자신을 ‘레나’라 밝혔다.
 루인이 앞장서고 레나가 뒤따랐다. 동혁은 혜미를 진정시키며 천천히 따라왔다. 루인의 요청에 따라 레나가 그들을 호위하듯 루인과는 조금 거리를 벌렸다. 어차피 지원형인 궁수 클래스이니 거리가 떨어져있는 것은 문제가 되지 않았다.
 갑옷 덕분에 레나는 루인이 둔기류를 다루는 전사나 기사 클래스인 것으로 오해했지만 굳이 바로잡지 않았다.
 “괘, 괜찮겠죠?”
 첫 번째 격전이 있었던 장소에 다다르자 혜미가 불안한 듯 물었다.
 “저, 저기……!”
 사라지지 않은 혁수의 시체를 먼저 발견한 것도 혜미였다. 사라지지 않은 것은 물론, 암살 고블린에 의해 훼손되기까지 한 혁수의 시체는 온전한 정신으로 보기 어려운 것이었다.
 “우욱!!”
 저항이 있었는지 난자당한 혁수의 시신에 모두들 고개를 돌려 구역질을 했다.
 루인도 속이 편하지만은 않았다. 그러나 그보다 주위를 살피는 것이 더 중요했다.
 “매복해있을지도 모릅니다. 모두 조심하세요.”
 ‘설마 그렇게까지…….’하는 생각도 들었지만 모르는 일이다. 조심해서 나쁠 것은 하나도 없었다. 이 정체를 알 수 없는 빌어먹을 실험에서는 더더욱.
 휘익
 데구르르
 이 구간이 제일 위험하다. 그렇게 판단한 루인은 벽에 걸린 횃불을 집어 앞으로 던졌다. 이상이 없으면 천천히 다가가 다시 집어들고, 조금 앞쪽으로 다시 던졌다. 지루한 작업이지만 꼭 필요한 작업이기도 했다. 그리고 다섯 번째 횃불이 던져졌을 때, 비로소 반응이 왔다.
 “끼룩!”
 “왔다!”
 꽁지에 불이 붙은 강아지마냥 다급하게 튀어나온 암살 고블린은 그리 위협적이지 못했다. 레나의 견제가 들어오기도 전에, 루인이 마주쳐갔다.
 “아까의 복수다!”
 티잉-
 빠각!
 루인은 일부로 암살 고블린의 일격을 허용했다. 피할 수 있었지만, 방어력을 시험한 것이다. 단도가 튕기고, 고블린의 머리통이 박살났다. 눈알이 튀어나오고 지팡이가 뇌를 휘저었다. 단 일격에 암살 고블린은 형체를 알아볼 수 없게 되었다.
 “……헐.”
 그 놀라운 공격력에 레나도 혀를 내둘렀다. 둔기류 전사의 공격력이 막강하다고는 하지만 이정도일 거라고는 생각지 못한 것이다.
 “아저씨, 그 무기 뭐에요? 공격력이 엄청난데.”
 “오빠라고 불러.”
 “치, 27살이면 아저씨지. 뭐.”
 그래도 이내 평정을 되찾았다. 도적 계통일 암살 고블린의 체력이 낮은 탓도 있겠고 머리를 정통으로 가격 당했으니 크리티컬이 터졌을 거라는 계산이다. 암살 고블린의 레벨을 알지 못하는 이유도 있었다.
 ‘충분하다.’
 확실한 것은 클리어하기 어렵지 않을 것이라는 것이다. 물론 초입이고, 이후에 어떤 몬스터들이 나타날지는 알 수 없지만 이번 암살 고블린의 공격으로 받은 충격은 전혀라 해도 좋을만큼 없었다. 이상하게 체력수치가 표시되지는 않지만 이정도면 혼자 학살도 가능할 듯 하다.
 “전진하죠.”
 이번의 교전으로 루인은 조금 더 과감해지기로 했다. 시간과 심력이 소모되는 횃불 던지기를 그만두는 대신, 몸으로 때우기로 한 것이다.
 수신호를 이용해 레나들과의 거리를 더 벌린 뒤 성큼성큼 앞으로 나아갔다.
 “전진하죠.”
 이번의 교전으로 루인은 조금 더 과감해지기로 했다. 시간과 심력이 소모되는 횃불 던지기를 그만두는 대신, 몸으로 때우기로 한 것이다.
 수신호를 이용해 레나들과의 거리를 더 벌린 뒤 성큼성큼 앞으로 나아갔다.
 “셋!”
 그러다 전방의 움직임을 발견하고 자세를 낮췄다.
 피잉-
 ‘속사(速射)’ 스킬이 발현되며 연달아 화살이 꽂혔다.
 “끽!”
 그러나 적중한 것은 단 한 발이다. 다른 한 발은 운 나쁘게도, 암살 고블린이 버둥대며 휘두른 단도에 맞아 튕겨 나갔다.
 “미안해요!”
 “괜찮아!”
 루인은 그것마저 계산에 있었다는 듯 자신 있게 지팡이를 휘둘렀다. 단도를 들어 막으려던 암살 고블린 하나가 함께 뭉개졌다. 그 사이 다른 한 놈이 공격을 적중시켰지만 피해는 전무했다.
 “으랏차!”
 오히려 루인은 그대로 몸을 부딪혀갔다. 숄더차지다. 그 단단한 어깨에 고블린의 안면이 뭉개졌다. 전사의 스킬이었다면 좀 전처럼 눈알이 터지고 목이 꺾였겠지만 정신을 잃고 튕겨지는 정도에 그쳤다.
 “어딜!”
 물론 끝은 아니었다. 원을 그리듯 휘둘러진 지팡이는 가슴뼈를 부수고 심장을 터트렸다.
 “낏!”
 “앗!”
 위험한 생물이라는 걸 알아서일까, 레나의 화살에 균형을 잃었던 녀석이 루인을 지나치려했다.
 혜미가 당황해 소리쳤지만 이미 그 또한 루인의 계산상에 있었다. 지나치려는 놈의 다리를 걸고, 뒤통수를 박살냈다. 순식간에 세 마리의 암살 고블린을 해치웠다.
 그 결과물이 처참해서 혜미가 또 다시 토악질을 했지만, 일단은 살아남는 것이 중요했다.
 “패치가 됐나? 과하게 사실적이긴 하군.”
 루인이 지팡이에 묻은 체액을 털어내며 인상을 찌푸렸다. 사실적인 것은 좋지만 과한 감이 있었다.
 그러나 투정만 하고 있을 수는 없다. 어차피 즉시 패치해 주지는 않을 테고, 일단은 나아갈 수밖에 없다.
 “템은 안 나오는 모양이네요.”
 어느새 다가온 레나가 투덜거렸다. 명색이 몹을 잡는데 아이템이 전혀 떨어지지 않는다. 잡템은 물론이고 1쿠퍼도 주지 않다니, 좀 너무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응?”
 그때, 루인이 암살 고블린의 시체에서 무언가를 발견했다.
 녹색 핏물이 묻어 잘 보이지 않았지만 이질적인 파편이었다. 현실의 하늘에서 본 이상한 행성과 같은 빛의 파편이다.
 마나와는 다른 묘한 기운이 느껴지는데 무엇인지는 정확히 모르겠다.
 “어디…….”
 내친 김에 루인은 다른 시체들에서도 파편을 찾았다. 둘에게서는 발견이 되었는데 다른 한 녀석에게는 없었다. 무언가를 떠올린 루인은 잔인하지만 남은 시체의 머리를 부쉈다. 그리고 찾아냈다. 똑같은 보라색 파편을.
 파편은 암살 고블린의 머릿속에 있었다.
 “그게 뭐에요?”
 “나도 몰라.”
 “에?”
 “이제 알아봐야지.”
 기껏 찾아낸 주제에 무슨 소리냐는 듯 쳐다보는 레나에게 루인은 쉽게 답했다.
 “확인.”
 “…….”
 그러나 생각했던 아이템 창은 나타나지 않았다. 이것도 패치가 된 건가? 아니면 테스트라서 적용시키지 않은 건가?
 “뭐래요?”
 “안 나와. 아이템창을 없앤 모양인데. 예상되는 건 있지만.”
 “뭔데요?”
 “예전에 몬스터를 잡으면 돈이나 아이템 대신 이렇게 보석이나 렌즈 같은 것들이 나오는 게임이 있었어. 에너지를 만들어내거나 증폭시키는 용도라던가. 아무튼 이걸 NPC에게 판매하거나 현금처럼 사용하는 거지.”
 그렇다면 챙겨둘 필요가 있다. 마지막 접속 때 포션을 사느라 돈이 바닥인 탓이다.
 “줘요.”
 “뭘?”
 “파티 플레이니까. 나한테도 분배해줘야죠. 하나만 받을게요.”
 어찌나 당당히 요구를 하는지 루인이 순간 멍한 표정을 지었다. 말이야 맞는 말이긴 하다. 그런데 이렇게 당당하게 요구할 줄이야. 얘도 확실히 보통내기는 아니다.
 “끙. 알았다. 알았어.”
 파편 하나를 넘기며 슥 돌아보자 ‘인증’받지 못한 두 사람은 여전히 잔뜩 긴장한 상태였다. 확실히 인증을 한 시점부터 서로의 관계와 위치가 달라졌다.
 “자요.”
 “네? 네??”
 “우리에게…… 주는 건가?”
 그 불안한 모습에 루인은 남은 파편들을 하나씩 건넸다.
 “파티니까요. 대신 다음 건 제겁니다.”
 앞으로 얼마나 더 많은 몬스터가 나올지는 모르지만, 100% 발견되는 것인지는 모르지만 지금 같은 상황이라면 몇 개쯤 더 구하는 것은 어렵지 않은 일이다. 물론 이후의 배분이 완벽히 같을 수는 없다. 그러나 일단은 ‘분배’되었다는 사실이 그들에게 중요했다.
 “자, 그럼 계속 가봅시다.”
 다시 포지션을 잡았다. 루인은 앞에서, 레나는 둘을 보호하며 뒤에서. 천천히 그러나 대담하게 나아갔다.
 이후로도 암살 고블린은 몇 마리고 나왔다. 다행히 그 수가 일시에 쏟아지지는 않았고, 보통이 하나. 많으면 셋이었다.
 그들 중 누구도 루인의 벽을 넘지 못했고 넘으려는 시늉만 해도 금세 화살이 날아와 이마에 박혔다.
 ‘제법……. 어디 속도를 높여볼까?’
 어느 정도 합을 맞추자 루인이 조금 더 속도를 올렸다. 일부로 틈을 보일 때마다 레나의 화살이 정확히 날아와 꽂힌 덕이다.
 초보존을 단시간에 벗어날 만큼 레나의 실력도 출중했다.
 “셋!”
 루인이 몸을 낮추자 레나의 화살이 날아왔다. 한 놈은 팔에, 한 놈은 복부에 적중했다. 이어 루인의 지팡이가 놈들을 향해 거침없이 쓸어갔다. 순식간에 두 마리의 골통이 박살난다.
 그때였다. 레나가 급하게 소리쳤다.
 “몹 애드! 더 와요!”
 앞쪽에서 일렁이는 그림자를 본 것이다.
 이미 화살은 시위를 떠난 상태였다.
 “이런!”
 갑작스러운 난입에 루인도 모두 막아내지 못했다. 눈앞에 있던 셋과 난입한 녀석들 중 하나를 후려쳤지만 두 마리가 빠져나간 것이다.
 심지어 두 마리는 일반 암살 고블린이 아니었다.
 
 [숙련된 암살 고블린]
 
 한 등급 더 높은 놈들이다. 덕분에 견제용으로 날린 레나의 화살이 통하지 않았다. 아니 한 놈은 옆구리에 화살을 달고도 그냥 질주했다.
 “파워샷!”
 “꾹!”
 조준된 일격에 고블린의 몸에서 화살 한 대가 또 솟아났다.
 덕분에 놈이 주춤했지만 레나는 만족하지 않고 검을 빼들었다. 이 이상 가까워진다면 근접전 밖에 없다.
 “프리즈 애로우! 라이트닝 애로우! 파이어 애로우!”
 “……!!”
 그때, 루인의 지팡이가 빛을 뿜었다. 동시에 1서클의 마법들이 발현되어 놈들의 몸에 꽂혔다.
 “이게 무슨…….”
 레나는 황당해 말을 잇지 못했다. 긴장한 자신이 우스워질 만큼 고블린들이 허무하게 뻗어버린 것이다.
 무슨 전사가 이런 위력적인 마법을 쓴단 말인가? 아니 마법사라 해도 이정도 위력을 내기는 쉽지 않았다. 마법 공격력을 올려주는 지능 스탯에만 올인을 하면 모를까.
 “방심했다. 영역이 바뀌는 구간이었나보군.”
 멍청히 서있는 레나가 무안하도록 루인은 아무렇지 않게 파편을 수거했다.
 “아저씨, 어떻게 된 거예요? 그 마법은?”
 “가만, 시체가 사라지지 않는다면. 그런 건가?”
 뒤늦게 정신을 차리고 졸졸졸 따라오며 묻지만 루인은 애써 모른 척 했다. 대신 새로운 것을 발견 한 듯, 숙련된 암살 고블린의 시체를 뒤졌다.
 “자, 이거.”
 루인이 찾아낸 건 숙련된 암살 고블린이 쓰고 있던 가죽 투구였다. 사이즈는 조금 작았지만 혜미에게라면 맞을 듯 싶다.
 “쓰고 있어. 뭐라도 방어력은 갖춰두는 게 좋으니까.”
 혹시나 하는 마음에 나머지 한 녀석의 것도 벗겨 동혁에게 건넸다.
 “고맙네만 나에게는 작을……. 아니?!”
 성의를 생각에 머리에 대보자 가죽 투구는 거짓말처럼 동혁의 머리 둘레에 맞춰 크기가 변형됐다.
 “역시, 직접 루팅 시스템인 건가?”
 루인이 알겠다는 듯 끄덕였다. 아이템 획득 방식의 변화였다. 기존의 방식이 아이템 드랍 형식이라면, 이제는 몬스터를 잡고 시체에서 쓸만한 아이템이나 재료를 직접 찾아내는 직접 루팅 방식으로 바뀐 것이다.
 예를 들어 과거에 트롤을 사냥하면 드문 확률로 병에 담긴 ‘트롤의 피’라는 아이템이 드랍됐지만, 이제는 직접 병을 가져가서 피를 채취해야 하는 것이다.
 어찌보면 훨씬 얻을 수 있는 것이 많아졌다고도 볼 수 있지만 보통 ‘채취’ 과정에서 유실되는 것들이 많고, ‘정제’하는 과정에서 또 한 번 유실이 일어나기 때문에 얻는 량은 비슷하게 조정된다. 때문에 오히려 훨씬 귀찮아지기만 했다고도 볼 수 있다.
 “귀찮게 됐군…….”
 “아! 저! 씨!!”
 레나의 고함소리에 몸이 부르르 떨렸다. 루인이 계속해서 무시하자 잔뜩 골이 나서 귀에 직접 대고 소리를 지른 것이다.
 “으으으, 그러다 몹들 몰려온다.”
 “흥, 오라고 해요. 어차피 지금 아저씨는 무쌍모드인 것 같은데.”
 “끄응. 좋아. 알려주지.”
 뾰로퉁 해있는 레나를 보며 루인이 결단을 내렸다. 사실 그다지 숨길 것도 없다. PK를 통해 아이템을 강탈해갈 것도 아니고, 설사 그런 마음을 먹는다 해도 지금 시점에서 루인을 잡으려면 상위 랭커 열 이상은 와야 할 것이다.
 “뭔데요?”
 “템빨!”
 “에에??”
 초롱초롱하던 레나의 눈이 순간 퀭해졌다. 워낙 간단한 답변이기도 했지만 허무했기 때문이다. 사실 어느 정도 예측은 했다. 암살 고블린의 공격을 주저않고 몸으로 받아내 때부터 장비가 보통이 아니라는 생각은 했다. 암살 고블린의 공격력을 떠나서, 어지간히 장비에 자신이 있지 못하고선 할 수 없는 행동이었다.
 무기도 마찬가지다. 일격에 골통을 부수는 공격력은 그녀가 초보존을 벗어나기까지, 아니 벗어나서도 본 적 없는 것이다.
 정확한 지팡이의 공격력은 보지 못했지만 공격력으로는 상위에 속하는 궁수의 화살에도 몇 발이고 버텼던 놈들이다. 그런 놈들이 한방감이니, 적어도 자신의 배는 더 강한 공격력을 지녔을 터다.
 그것도 서러운데 마법까지 내장되어 있다니! 1서클이기는 하지만 적어도 3종류의 마법이 내장되어 있는 지팡이라고 생각하자 상대적 박탈감이 밀려왔다. 물론 레나가 루인의 클래스를 착각하고 있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그것이 아니라도 너무 큰 차이였다.
 “아저씨……. 부자였어요?”
 “엥?”
 레나는 이 무지막지한 템빨의 비밀을 현질로 보았다. 루인이 대단한 부자여서 현금으로 골드며 아이템을 긁어모은 것이라고.
 그 뜻을 단번에 파악한 루인은 황당한 표정으로 되물었다.
 “내가 그래 보이디?”
 “아……뇨.”
 레나는 루인의 처음 행색을 떠올렸다. 무릎 나온 낡은 트레이닝 복에 헌 운동화. 부자와는 거리가 있는 그 모습에 고개를 가로저었다.
 루인이 씁쓸하게 웃었다.
 “나 베타 테스터야.”
 “헤에? 아저씨……. 엄청난 폐인이었구나?”
 그제야 이해가 간다는 표정이다. 베타 테스트 때 퀘스트든 아이템이든 먼저 발견했고, 정식 서비스 이후 곧장 찾아낸 거겠지.
 비로소 이해가 간다는 반응이자 루인도 한숨 돌렸다. 어차피 이 이상은 자세하게 이야기 할 생각이 없었다. 클래스를 오해하고 있다는 것도 어렴풋이 짐작했지만 바로 잡아줄 생각은 없다. 지금은 등 뒤를 맡기고 있지만 온전히 믿을 수 있는 동료는 아니었다.
 혜미도, 동혁도. 시체가 된 혁수도 마찬가지다. 스릴러 영화에서처럼 지금 이 상황을 만든 장본인이 이들 중에 없다고 누가 장담할 수 있으랴.
 능력과 장비가 온전히 획득된 것을 확인한 순간부터 루인은 꾸준히 살인 충동을 느끼고 있었다.
 엄밀히 말하자면 레나마저도 자신에게는 짐이 된다. 만약 혼자라면 더 빠르게, 이 동굴을 빠져나갈 자신이 있었다. 방어 특화형 기사처럼 몬스터들을 뒤로 보내지 않기 위해 무리할 필요도 없고, 능력을 감출 필요도 없이 간단히 공략 할 수 있다. 냉정히 말해 이들을 모두 죽이고 혼자 움직이는 편이 더 간단했다.
 다만 몇 가지 요인들 때문에 참고 있을 뿐이다. 일단 퀘스트 창이 열리지 않는다. 이들을 모두 죽였는데 사실은 호위 퀘스트였다면? 동굴을 탈출하는데 열쇠가 되는 능력을 이들 중 하나가 가지고 있었다면? 무척 난처해질 수도 있고, 죽임과 동시에 퀘스트가 실패 할 수도 있다.
 그리고 정말 그럴 리는 없겠지만, 이 모든 것이 현실일 수 있다는 가정 때문이기도 했다. 게임이라는 것만 확인이 된다면 1분도 안 되서 이들 모두를 죽이고 떠나는 것쯤 어려울 것 없다. 설사 퀘스트에 실패한다고 해도, 그저 퀘스트의 실패일 뿐 다른 퀘스트를 찾거나 몬스터를 100마리고, 1,000마리고 잡아서 레벨 업을 하면 된다.
 그런데, 이 모든 것이 현실이라면?
 물론 말도 안되는 소리라는 것은 안다. 어떻게 현실에서 이런 능력과 아이템을 갖출 수 있으며, 인벤토리가 열리겠는가.
 그러나 알 수 없는 묘한 기분이 들었다. 현실과 가상현실을 혼동하는 정신병 같은 것이 생긴 것일 수도 있다. 어쨌든 루인은 그 느낌을 무시하지 않기로 했다.
 “됐지? 이제 전진하자.”
 결정적으로, 어떤 기습 공격을 해도 레나들이 자신에게 치명상을 입힐 수는 없다는 판단에서였다.
 레나의 화살이 빠르고 강하다고는 해도, 그 모든 것을 뒤엎을 만한 공격력과 방어력이 루인에겐 있었다.
 “……좋아요.”
 다시 던전 공략이 시작됐다.
 
 
 # Chapter. 14 클리어
 
 이후로도 공략은 수월하게 이루어졌다. 주요 출몰 몬스터가 암살 고블린에서 숙련된 암살 고블린으로 바뀌고, 이제는 암살 고블린이 아주 가끔씩 나올 뿐이지만 대비를 하고 만나니 기존과 다를 게 없었다.
 어차피 인증을 통해 자기 방어를 할 수 있는 힘을 얻지 못한 이들을 지키기 위함이지 지금도 루인은 숙련된 암살 고블린 떼를 상대로 일방적인 학살을 할 수 있는 상태다.
 그런 상황에 놓치지 않도록 둘에서 셋 정도만 끌어와서 상대하니 너무라 할 만큼 안정적일 수밖에 없다.
 “정조준 일격.”
 패앵-
 여기에 레나가 마음먹고 가세하니 사냥 속도까지 올라갔다. 구불구불했던 길이 어느 정도 일직선 구조로 변하면서 훨씬 공격에 가담하기 수월해진 것이다.
 물론 뒤쪽에서 리젠되는 암살 고블린이 있는지 살피는 것도 잊지 않았다. 언제든 검을 빼들고 덤벼들 수 있게 대비했고, 만일을 위해 혜미와 동혁 모두 숙련된 암살 고블린이 남긴 가죽 갑옷과 단검으로 무장한 상태였다.
 혜미는 손을 덜덜 떠느라 제대로 휘두를 수나 있을지 싶긴 했지만 없는 것보단 나을 터였다.
 전진하는 속도가 빨라서인지 다행히 아직까지는 뒤에서 나타나는 고블린이 없었다.
 “후우……. 다 온 건가?”
 한참을 더 이동하고 나자 드디어 통로가 끝을 보였다. 대신 처음 있던 안전지대의 수십 배는 되는 커다란 공동이 나타났다.
 “켁! 와, 이거 진짜 난이도 미쳤네요.”
 “왜, 왜 그래? 문제가 있는 거야?”
 뒤따라온 레나가 감상을 늘어놓자 혜미가 울 듯한 표정을 지었다.
 “이건……많구만. 괜찮겠나?”
 동혁이 걱정스레 물었다. 숙련된 암살 고블린 둘에 암살 고블린 하나. 그렇게 세 무리. 거기다 누가봐도 보스처럼 보이는 대형 고블린 한 마리가 멀찍이 자리 잡고 있었다.
 “어떨 것 같아?”
 루인은 대답하는 대신 레나에게 물었다.
 “아홉 마리에 보스 하나. 보스의 뒤쪽으로 보이는 게 귀환석 같은데 저렇게 가까이 있어서야 몰래 이동하는 건 무리겠고……. 이거, 위험할 수도 있겠는데요?”
 레나의 표정이 진지해졌다. 보스는 몰라도 숙련된 암살 고블린까지는 접근전에 돌입한다 해도 어떻게든 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러나 문제는 이들 둘이었다. 난전이 시작되면 제대로 신경써주지 못할 테고, 자칫 두 사람은 목숨을 잃을 수도 있는 것이다.
 안쪽에 숨어 있게 하더라도 마찬가지다. 루인과 레나가 전투를 벌이는 동안 뒤쪽에서 암살고블린 하나만 나타나도 둘은 죽은 목숨이다.
 더구나 보스로 보이는 녀석이 얼마나 강한지도 모르니…….
 그때, 루인이 다른 판단을 내놓았다.
 “셋이야. 풀링을 할 거니까. 서로간의 인식거리가 얼마나 되는지는 모르지만 일단은 셋씩 뭉쳐서 돌아다니는군. 잘하면 셋씩 따로 상대 할 수 있을지도 몰라. 만약의 상황이라도 이쪽 통로까지 유인한다면 한번에 전부를 상대하지 않을 수 있지.”
 풀링. 몬스터를 한 마리씩 당겨 와서 잡아내는 가장 기초적인 공략법. 루인은 이 상황을 철저히 게임에 대입시켰다.
 그제야 레나도 고개를 끄덕였다. 가만보니 셋씩 링크된 암살 고블린들은 서로 영역이라도 정해놓은 듯 일정한 구역을 배회하고 있었다. 이런 식이라면 루인의 말처럼 충분히 나누어 잡을 수도 있을 듯 하다.
 “그리고 열둘이야.”
 “……아!”
 
 [고블린 암살 대장]
 [고블린 암살 대장의 그림자]
 [고블린 암살 대장의 그림자]
 
 레나의 고개가 다시 돌아갔다. 안력을 돋우자 고블린 암살 대장의 옆으로 거뭇한 그림자들에 이름이 떠오른다. 그림자 매복 스킬로 숨어있는 호위들이다. 다만 고위 스킬은 아니고, 주변 빛이 밝아서 집중을 하고 쳐다보면 확인이 가능했다.
 “죄, 죄송해요. 큰일 날 뻔 했네요.”
 레나가 즉시 사과했다. 자신의 오판을 믿고 덤볐다면 자칫 큰 낭패를 볼 수 있던 것이다.
 루인은 레나를 탓하지 않았다. 애초에 그녀의 판단력을 시험해보고 싶을 뿐이었으니까. 그래도 고블린 암살 대장의 뒤편에 있는 귀환석을 발견한 것은 칭찬해줄만 했다. 적어도 지형지물을 함께 볼 줄 안다는 것이었으니까.
 “어때, 할 수 있겠어?”
 “네. 물론이죠.”
 눈짓으로 말하는 루인에게 레나가 자신있게 답했다. 그리고 전투력이 없는 두 사람을 뒤로 물렸다. 만약을 대비해 바위로 가려진 공간에 들어가도록 했다.
 “시작하지.”
 “네. 정조준 일격.”
 패앵-
 시위를 조금 오래 당기는가 싶더니 여느 때보다 강력하게 화살이 쏘아졌다. 조준시간을 가지되, 공격력과 명중률, 치명타율을 크게 올려주는 궁수의 스킬이다.
 “꾸엑!”
 그 일격에 암살 고블린의 숨이 끊어졌다. 일격사. 치명타가 터졌다.
 “좋아.”
 부하의 죽음에 발끈한 숙련된 암살 고블린 두 마리가 짓쳐들어왔다. 그러나, 예상처럼 나머지 무리는 움직이지 않았다.
 나머지 무리와 보스를 자극하지 않기 위해 통로까지 놈들을 끌어당긴 루인이 풀스윙으로 한 놈의 가슴을 후려쳤다. 얄팍한 가죽갑옷과 함께 가슴이 함몰됐다.
 “꾹…….”
 비틀거리며 마지막 한 칼을 날려보지만 어림없는 일이다. 애초에 도둑 클래스인 주제에 몸을 훤히 내놓고 순찰을 다닌 것부터가 놈들의 실책이다.
 여기에는 보스 주변에 매복한 놈들이 더 극적이고 강력하게 등장하도록 하려는 계산이 숨어 있겠지만, 통할 사람에게 수작을 부려야지. 난이도만 떨어뜨렸을 뿐이다.
 “에잇!”
 깡!
 풀스윙으로 몸이 경직된 사이, 남은 녀석이 휘두르는 단검을 머리로 받아버렸다. 그럼에도 튕겨나가는 건 오히려 고블린 쪽이다. 루인은 내려간 투구를 살짝 들어올리며 도깨비 방망이 마냥 지팡이를 내리찍었다.
 쿵떡
 일격에 다리뼈가 부러지고, 이격에 머리통이 박살났다. 인챈트 때문인지 경련까지 일었다. 아직 리세토의 지팡이는 절망적인 수준의 공격력을 보여주었다.
 “다음!”
 처리가 끝나자마자 루인이 소리쳤다. 동시에 레나의 시위가 놓아졌다.
 “끽!”
 이번엔 치명타가 아니었다. 대신 모든 걸 예상한 듯한 연사가 이어졌다.
 “속사, 봉쇄의 화살.”
 말은 거창하지만 빠르게 쏘고, 다리를 맞추는 것이었다. 빠르게 쏘아내어 암살 고블린의 숨통을 끊고, 달려오는 숙련된 암살 고블린 중 하나의 속도를 늦추었다. 무리하면 한 발 쯤 더 쏠 수도 있지만 루인이 앞을 막았다.
 쉽게 갈 수 있는데 무리해서 스킬 쿨타임을 낭비시킬 필요가 없다.
 동시에 공격을 해도 모자란데, 시간차로 덤벼든다면 결과는 뻔했다. 능숙하게 지팡이를 휘돌린 루인의 공격에 무너졌고, 기세를 이어 남은 한 무리도 손쉽게 박살을 냈다.
 “바로 갈게요. 정조준…….”
 “잠깐.”
 세 번째 무리를 상대하는 동안 쿨타임이 돌아온 레나가 시위를 당기자 루인이 손을 들어 제지했다.
 여전히 움직이지 않는 암살 고블린 대장을 보니, 떠오른 게 있어서다.
 “바로 갈게요. 정조준…….”
 “잠깐.”
 세 번째 무리를 상대하는 동안 쿨타임이 돌아온 레나가 시위를 당기자 루인이 손을 들어 제지했다.
 여전히 움직이지 않는 암살 고블린 대장을 보니, 떠오른 게 있어서다.
 “매복해있다고 피해를 입지 않는 건 아니지.”
 “와, 진짜 사기다…….”
 루인의 지팡이에 불꽃이 맺히는 것을 보고 레나가 다시 투덜거렸다. 파이어볼의 캐스팅에 들어간 것이다.
 씨익
 캐스팅을 마친 루인의 입가에 사악한 미소가 떠올랐다.
 “파이어 볼.”
 콰광!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게 날아간 화염구가 일으킨 반향은 엄청났다. 뒤늦게 반응한 고블린 암살 대장이 충격과 함께 뒤로 나자빠진 것은 물론, 그림자 속에 숨어있던 호위 두 마리가 그림자 밖으로 튀어나온 것이다.
 “왼쪽부터 쩜사!”
 동시에 루인이 오더를 내렸다. 1초씩의 간격을 두고 1서클 마법을 날리는 한 편, 보스의 반응을 살폈다.
 그러는 사이 레나도 쉴 새 없이 시위를 당겼다. 보스가 정신 차리고 진형을 갖추기 전에 화력을 집중해서 호위들을 먼저 죽이겠다는 것이다.
 둘을 모두 잡아내면 베스트고, 아니어도 하나 정도는 무조건 죽여야 했다.
 “오른쪽!”
 보스가 제정신을 차릴 때쯤, 오더가 바뀌었다. 왼편의 호위가 죽은 것이다. 루인과 레나의 마지막 남은 스킬들이 집중됐다.
 “견제!”
 오버딜링. 체력을 알 수 없는 탓에 왼쪽 녀석에게 너무 많은 스킬을 퍼부었다. 숨을 끊기에 역부족임을 깨닫자 루인이 빠르게 달려갔다. 접근전으로 마무리를 짓기 위함이다.
 동시에 레나가 보스, 고블린 암살 대장에게 화살을 날렸다. 다가서는 루인을 방해하지 못하게 하기 위함이다.
 까강
 놈의 방어로 화살은 바닥에 처박혔지만 시선 끌기의 효과는 확실했다.
 “돌게요!”
 고블린 암살 대장이 쫓기도 전에, 레나는 이미 뛰고 있었다. 크게 원을 그리며 공동을 돌았고 한발 느리게 놈이 쫓았다.
 “신속한 이동!”
 궁수 전용의 도주기가 발동했다. 일시적으로 이동 속도가 두 배로 변하는 사기 스킬. 적의 속도를 늦추고 이 스킬로 거리를 벌리면 대부분의 상대는 아무 것도 못하고 죽을 수밖에 없다.
 게다가 궁수는 이동사격이라는 것이 가능했으니까.
 “조금만 버텨!”
 그 사이 루인은 호위를 마무리 지었다. 이런 상황을 대비해 베타테스트 당시에도 검 대신 둔기 전사를 택했던 루인이다.
 그 능숙한 무기술에 지팡이의 공격력이 더해지니 호위는 순식간에 떡이 되어 바닥에 뻗어버렸다.
 “아저씨! 빨리!”
 이동 사격으로 저지하곤 있지만 레나는 빠르게 따라잡혔다. 과연 보스 몬스터. 암살자면 속도와 일격필살이 특기라서 잘못 걸리면 순식간에 죽을 수 있었다.
 “매직 애로우!”
 호위를 잡자마자 소리가 들린 방향으로 남겨둔 마법을 쏘아냈다. 본래는 데미지가 미미했지만, 지팡이의 마법 공격력 때문에 막강한 힘을 갖게 된 기초마법이다.
 “끅!”
 강하게 등짝 스매싱을 당한 놈의 시선이 한순간에 돌아갔다. 레나보다 루인이 더 위험하다 판단한 것이다. 레나가 유효타를 날리지 못한 탓이기도 했지만 결과적으로는 잘된 일이다.
 “와라!”
 루인도 거침없이 지팡이를 휘두르며 부딪혀 갔다.
 “흥!”
 고블린 암살 대장은 과연 빨랐다. 열 걸음을 채 딛기도 전에 품으로 날아들었다. 문제는 루인이 이미 모두 파악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비스듬히 몸을 비튼 루인은 스쳐가는 놈을 향해 지팡이를 날렸다.
 이 또한 타이밍의 예측이었다. 눈으로 확인하고 휘두르면 피할 수도 있었다.
 “끼룩!”
 왼팔의 연골이 박살나며 비명을 토했다. 본래는 등뼈를 부숴놓으려 했지만 생각보다 재빠른 대응이다.
 “아싸, 명중!”
 그 사이 놈의 팔뚝에 처음으로 화살이 박혔다. 한 팔을 잃고 흥분한 덕에 레나의 공격이 성공한 것이다.
 “머리!”
 “네!”
 빠른 오더에도 레나는 정확히 화살을 날렸다.
 이 정도면 나쁘지 않다. 라고 생각하며 루인이 자세를 낮췄다.
 머리를 노린 화살은 미끼. 진짜는 이거다.
 “끽끽끼!”
 왼팔에 이어 오른 무릎이 박살났다. 찰나의 순간 녀석이 몸을 비틀었지만 지팡이의 사정거리는 꽤 길었다.
 보호대를 갖추지 못한 무릎을 박살내고, 다리를 꺾어 놨다.
 대신, 위에서 내리 꽂는 일격은 허용해야했다.
 “윽!”
 어깨를 때린 장검에 루인이 처음으로 충격을 받았다. 갑옷이 꿰뚫리거나 피를 토할 만큼의 강한 충격은 아니지만 어깨가 시큰거린다.
 뺄까? 계속 할까? 순간 두 가지 생각이 루인의 머리를 스쳤다.
 ‘뺀다.’
 생각은 즉시 현실이 되었다. 무리 할 필요는 없다. 다리를 망가뜨려 기동력을 빼앗았으니 이제는 시간 문제다. 레나와 자신은 원거리 공격수지만 놈은 아니다. 회복 능력을 가진 것도 아니니 시간을 갖고 천천히 무너뜨리는 것이 옳았다.
 “아저씨, 나이스!”
 루인이 몸을 빼자마자 레나의 화살이 집요하게 놈의 다리를 노렸다. 약점을 발견하면 계속해서 물고 늘어진다는 기본에 충실한 공격이다.
 쿨타임이 돌아오자 루인도 가세했다. 굳이 다시 다가가지 않고 적당히 백스텝을 밟으며, 기어오는 고블린 암살대장을 농락했다.
 그리고 돌아온 쿨타임에 맞춰 파이어볼까지 꽂아 넣고 나니 더 이상 아무런 움직임도 없었다.
 “휴. 드디어 해치운 건가?”
 완전히 숨이 끊어진 것을 확인하고, 루인은 전리품부터 챙겼다. 귀환석으로 보이는 비석이 있긴 했지만 던전을 클리어했다고 언제 강제 소환 당할지 모르는 것이다.
 고슴도치처럼 박힌 화살 탓에 건질 건 무기와 파편 정도가 고작이다.
 장검은 일단 인벤토리에 넣었다. 확인이 안 되니 능력치를 파악할 수도 없고 쓰자니 저주라도 걸릴까 찝찝하기도 했다.
 “역시 보스라는 건가? 이건 좀 크군.”
 그 다음으로 집어든 것은 파편. 기존의 것들이 손톱만 했다면 이번 건 손바닥만 했다.
 “가만?”
 가만히 파편을 보던 루인이 혹시나 하는 표정으로 파편을 인벤토리에 넣었다.
 “!!”
 들어갔다. 단순히 하나의 칸을 차지하고 들어간 것이 아니라, 게임속 화폐가 그러하듯 별도의 영역이 갱신되며 숫자가 올라간 것이다.
 
 [차원석 조각: 10]
 
 혹시나 하는 생각에 주머니 불룩하게 가지고 있던 작은 조각 하나를 더 넣어보았다.
 
 [차원석 조각: 11]
 
 “차원……석?”
 큰 것이 10개, 작은 것이 1개로 표기되는 듯 했다. 정말 이것이 화폐 대신인 걸까, 아니면 다른 용도가 있는 것일까?
 루인의 생각이 깊어졌다.
 “이제, 끝난 건가요?”
 그때 멀찍이 숨어있던 동혁과 혜미가 조심히 모습을 드러냈다. 적어도 시야 내에는 고블린이 없으니 숨어있기보다 자신들을 지켜줄 수 있는 둘과 가까이 있는 게 안전하다는 판단이다.
 “네. 맞아요. 이제 나갈 수 있을 거예요. 아마도…….”
 마지막 말을 하는 레나의 목소리에 자신이 없었다.
 정말 저 빛나는 비석이 귀환석일지도 알 수 없었고, 저것이 발동한다해도 현실로 돌아가는지. 다음 스테이지로 넘어가는지 알 수 없는 것이다.
 “모이세요. 일단 해봅시다.”
 불안감이 전파되려는 순간, 루인이 나섰다.
 일행을 한데 모으고, 비석 앞으로 다가갔다. 비석이 함정일수도 있으니 긴장은 놓지 않았다.
 “응?”
 비석에 무언가 새겨져 있었다. 루인은 직감적으로 그게 글자라는 것을 알았다. 읽을 방법이 없다는 게 문제였지만.
 여기에 적힌 것이 무엇이든 달리 방법이 없다는 것을 알기에 루인은 그대로 비석에 손을 얹었다.
 “아…….”
 찬란하게 빛을 발하는 비석. 마법이 부여됐다, 라는 설정이겠지만 재질이 궁금해질 무렵 눈앞이 새까매지며 네 사람 모두 정신이 아득해졌다
 
 
 # Chapter. 15 재접속
 
 “으으…….”
 태민이 약간의 어지러움과 함께 감겼던 눈을 떴다. 위치는 편의점 입구. 무릎까지 살짝 풀려 휘청이는 게 내가 빈혈이 있었나 싶다.
 “응?”
 눈을 깜박여보니 익숙한 얼굴들이 있었다. 계산대에 서있는 동혁과 지영. 과자 코너 앞에 있는 혜미. 그리고…….
 “……없다?”
 혁수가 없었다.
 “꺄아아악!!!!”
 모두가 두리번 거리며 어안이 벙벙해있을 때, 혜미가 소리를 지르며 주저앉았다.
 현실에 돌아왔지만 혁수가 없다. 순간 꿈이라고만 생각했던 일이 현실로 다가오며 부들부들 떨리는 손으로 휴대폰을 꺼내들었다.
 띠리리리- 띠리리리-
 통화음은 들리지만 받지 않는다. 그럴 리가 없는데. 자신의 전화라면 통화음이 세 번도 울리기 전에 냉큼 받아들던 혁수였는데. 통화음이 길어질수록 몸의 떨림도 심해졌다.
 “설마 그게……. 진짜?”
 지영의 목소리에서도 떨림이 느껴졌다. 혜미를 안아주는 그녀의 몸에도 잔 떨림이 일어났다. 게임이라 생각했기에 당당하고 태연할 수 있었지만 게임이 현실이 된 순간 그녀도 태연 할 수 없었다.
 “미친…….”
 기어코 태민도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첫 전투에서 튄 혁수의 피가 트레이닝복에 고스란히 묻어있다.
 비로소 모두가 현실이었음을 깨달았다.
 “속보입니다. 조금 전 면목동 씽크홀에 투입된 특수부대가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동시에 씽크홀은 사라졌고 도로도 원상태로 돌아왔습니다.”
 정신을 차릴 새도 없이 충전 중이던 동혁의 스마트폰 DMB에서 속보가 터졌다. 군대가 진입할 지도 모른다더니, 정말 특수부대가 투입됐던 모양이다.
 “총 몇 명의 특수부대원이 투입됐는지는 정확히 밝혀지지 않고 있으나 생존자는 총 세 명으로, 극심한 스트레스를 호소하여 병원으로 이송 중이라고 합니다. 목격자에 따르면 생존자가 괴물을 봤다는 말을 반복했다고 하며…….”
 “던전……괴물…….”
 확인사살이었다. 그들은 던전에 들어갔고, 게임 속 능력을 부여받아 간신히 살아 돌아왔다. 아마 게임속 능력이 아니었다면, 그 중에서도 특출났던 태민이 아니었다면 그들도 어떻게 되었을지 모른다.
 머리가 복잡해졌다.
 “정부는 생존자들의 증언이 확보되는 대로 추가 병력을 투입해 씽크홀을 줄여나갈 계획이라고 밝혔으며…….”
 모두가 말을 잃었다. 침통해진 분위기에 동혁이 DMB를 꺼버렸다. 뉴스 따윈 나중에 들어도 된다.
 “오빠는……. 죽은 거죠?”
 “……아마도…….”
 혜미가 서럽게 울었다. 어찌나 서럽게 울었던지 들어오던 손님 하나가 당황해하며 다시 나갔다. 새벽 시간대라 사람이 오지 않아 이곳이 던전화 되었던 것은 아무도 모르는 모양이다.
 “당신들 때문이야. 당신들이 조금만 더 빨랐어도……. 흐흐흑!!”
 갈곳을 잃은 원망은 태민과 지영을 향했다. 그런 힘을 갖고 있었으면서, 왜 더 빨리 각성하지 않아서 죽도록 내버려뒀느냐. 말도 되지 않는 원망이었다.
 “…….”
 입술을 깨문 태민이 편의점 밖으로 돌아나갔다.
 “아저씨!!”
 지영이 곧바로 따라 나왔다. 태민을 불러세우고 자신의 스마트폰을 꺼냈다.
 “번호 알려주세요.”
 가만히 바라보다가 자신의 휴대폰 번호를 찍었다.
 “연락 할게요.”
 지영은 다시 편의점 안으로 돌아갔다.
 “빌어먹을.”
 하늘에는 여전히 요사스러운 보라색 행성이 자리잡고 있었다.
 
 ***
 
 집으로 돌아온 태민은 사태 파악을 위해 TV부터 켰다. 채널을 뉴스에 맞추자 아까 들었던 속보가 나왔다.
 내용은 이러했다. 더 이상의 위험을 방치 할 수 없던 정부가 비밀리에 완전무장한 특수요원들을 면목동 씽크홀에 들여보냈고, 그 중 셋이 살아 돌아왔다는 것이다. 처음 몇 명이 투입되었는지는 밝히지 않았다.
 당연히 안에 무엇이 있었는지, 어떤 상황이 벌어졌었는지는 비밀에 부쳐졌다. 때문에 수많은 추측들이 난무했는데 공포감에 오발 사고를 내서 자기들끼리 쏴죽이고 나온 것이 아니냐는 얘기부터 목격자의 증언처럼 괴물과 맞닥뜨린 것이 아니냐는 의견 등 이야기가 각양각색이다.
 그 와중에 어떤 네티즌은 생존자의 탄창이 비워져있었다는 것과 수류탄이 옷에 붙어있지 않았다는 것까지 찾아냈다. 완전무장이라고 했으니 수류탄까지는 가지고 갔을 텐데 그것이 없다는 건 사용했다는 얘기.
 생존자가 나타나고 나서 씽크홀이 처음부터 없었다는 듯 사라져버린 것과 섞여 무수히 많고 위험한 이야기들이 퍼져나갔다.
 “무장한 특수요원과 암살 고블린…….”
 태민도 나타난 정보를 토대로 나름의 가설을 세웠다. 총기와 수류탄 같은 현대식 무기를 검과 마법에 비할 것은 아니지만 가만히 있을 수만은 없다.
 암살 고블린은 속도가 빠르고 공격력이 제법이다. 조악한 무기라고는 하나 일반인이 상대하기는 어렵고 특수요원 쯤이면 무기를 들고 일대일을 겨뤄볼만 할 것이다.
 문제는 숙련된 암살 고블린. 더 빠르고, 사거리도 길고, 힘도 강했다. 은신능력을 모른다면 특수요원을 아무리 높게 쳐줘도 비슷한 수준일 터. 변수는 총이었다.
 암살 고블린이고 숙련된 암살 고블린이고 총 앞에서라면 무력할 것이다. 어떤 가정을 넣어도 마찬가지다. 그럼에도 대다수가 죽었다. 남은 셋도 공포에 떨고 있다.
 “그렇단 말이지…….”
 예상되는 상황은 총 두 가지. 고블린을 만만하게 보고 총알을 낭비했거나,
 “아니면 암살 고블린이 아니었거나.”
 던전에 서식하는 몬스터가 무조건 고블린이라는 법은 없다. 오크, 코볼트, 놀 등일 수도 있고 이번 암살 고블린처럼 암살 특화 또는 방어 특화형 무리였을 수 있지 않은가?
 태민은 내가 본 것이 고블린이라고 해서 사고를 거기에 한정시키는 우를 범하지 않았다.
 암살형 몬스터를 만나 기습을 당했을 수도 있고, 총알을 어느 정도 막아내거나 버텨내는 방어 특화형 몬스터를 만나 탄을 소비해버렸을 수도 있다. 아니면 총알이 거의 떨어져갈 무렵에 보스몬스터를 만나 어쩔줄 몰라하다가 몰살 당했을 수도 있지.
 보스 몬스터라면 꼭 방어형이 아니더라도 몇 발의 총알쯤은 버티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었다. 가장 가능성 있는 이야기이기도 했고.
 “인벤토리.”
 더 이상 뉴스에서 얻을 것이 없다는 것을 확인했다. 그리고 조심스레 입을 떼었다.
 “……!!!”
 경악할 일이 벌어졌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내뱉은 명령어에 익숙한 알림음이 나타난 것이다.
 
 [인벤토리 기능을 사용할 수 없습니다.]
 [현재 임시 인증을 받은 상태입니다.]
 [정식 인증을 받으면 현실에서도 던전에서와 동일한 능력 사용이 가능합니다.]
 
 임시 인증 상태? 정식 인증은 또 뭐고, 그것을 받으면 인벤토리를 사용할 수 있단 말인가?
 아니, 그것보다 현실에서도 던전에서와 동일한 능력을 사용 할 수 있다니? 정말 판타지 소설에 나오는 것처럼 현실에서 검과 마법을 쓰는 시대가 열린다는 건가?
 혼란스러웠다. 그러나 이미 벌어진 일이다. 현실에 던전이 생기고, 특수부대가 들어가서 겨우 살아나왔다. 정말 고블린이나 오크, 트롤, 오우거 따위의 몬스터가 있다면 이제 어떤 일이 일어나도 이상하지 않았다.
 혼란스러운 마음을 다잡고 키워드로 생각되는 말을 내뱉었다.
 “정식 인증을 받겠다.”
 
 [정식 인증을 위해서는 차원석 조각 5개가 필요합니다.]
 [차원석 조각 5개를 소모하여 정식 인증을 받으시겠습니까?]
 
 혹시나 했던 말에 대꾸가 돌아왔다. 차원석 조각 5개로 각성 가능. 이미 차원석 조각이 인벤토리에 들어가 표기되는 것을 확인한 태민은 당황해하면서도 다음 단계를 진행했다.
 “바, 받겠다.”
 
 [차원석 5개를 사용하셨습니다.]
 [정식 인증이 완료되었습니다.]
 
 눈이 새로 뜨이고 몸에 피가 새로 돌았다. 없던 힘이 충만한가 싶더니 피부를 통해 새로운 감각이 느껴진다. 생소하면서도 익숙한 기운, 마나다.
 
 [능력을 정상적으로 사용 할 수 있습니다.]
 
 감각마저 달라졌다. 마나가 느껴져서일까. 육체적인 부분은 물론, 감각이 조금 더 예민해지고 육감이 상승하는 기분이 들었다. 게임 캐릭터의 능력치 이상의 것을 얻은 느낌이다.
 가만, 마법사라 분명 체력이 낮을 텐데 크게 감흥이 없다는 건, 원래 저질체력이라서 그런 걸까? 윽…….
 
 [정식 인증 후 갱신을 위해서는 수준에 맞는 차원석 조각이 필요합니다.]
 
 역시, 차원석 조각은 그 활용이 대단했다. 정식 인증은 물론 이후 능력의 갱신에도 사용된다니 만약 발견하지 못하고 던전을 빠져나왔다면 그 미친 던전을 또 돌아야하는 상황이 발생했을지 몰랐다.
 물론 능력과 장비를 동기화 해준다면 다시 클리어하지 못할 것도 없지만 그렇다 해도 굳이 다시 하고 싶은 경험은 아니다.
 더구나 게임이 아닌 현실임을 인식하고 난 후에야.
 “개, 갱신? 레벨 업이 가능하다는 건가?”
 어떻게? 다시 던전에 들어가서 몬스터를 잡으며?
 ‘갱신’이라는 부분에서 멈칫한 태민의 낯빛이 파리하게 변했다. 이터널의 시스템을 기준으로, 인증 이후의 갱신이라면 레벨 업을 의미한다. 그렇다는 것은 현실에서 레벨 업을 할 수도, 어쩌면 더 강한 몬스터가 출현할 수도 있다는 것이 아닌가?
 
 [게이머 ‘루인’의 레벨 1 던전 클리어가 확인되었습니다.]
 [일정 횟수 만큼 던전이 클리어 될 시 다음단계가 개방 됩니다.]
 
 “뭣?!”
 말이 씨가 된다는 것일까, 아주 쇼킹한 알림이 들렸다. 레벨 1 던전? 다음 단계? 뭔지는 모르지만 아주 위험하다는 것은 분명했다.
 “퀘스트! 맵!”
 명령어를 외쳐보지만 답은 주지 않았다. 게임에 비해 현실에서는 제한되는 기능들이 많았다.
 “후우……. 젠장.”
 뭔가 건드려서는 안되는 뇌관을 건드린 기분이다.
 한동안 미친 사람처럼 중얼거리고, 허공에 소리를 지르던 태민은 착잡한 마음으로 이터널 홈페이지에 접속했다.
 던전에서 획득한 능력과 장비가 이터널을 기반으로 했으니 이 안에서 뭔가를 발견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다.
 “……뭐라고?”
 그리고, 베스트에 올라있는 글 하나를 발견했다. ‘(주)바빌론 본사에 다녀왔다.’라는 짤막한 제목이었다.
 내용은 아주 황당했다.
 “직업이 기자여서 어떻게든 수소문해 찾아갔는데……. 그런 회사가 없어?”
 직업이 기자라는 필자가 수소문 끝에 (주)바빌론의 소재지로 찾아갔는데 그런 회사가 없더란다. 이사를 간 것도 아니고, 처음부터 그런 회사는 없단다. 너무 황당해 서류를 심사한 공무원에게 찾아갔더니 뭐에 홀리기라도 한 양 그 때의 일을 전혀 기억하지 못한다고 했다.
 결국 이터널을 만든 (주)바빌론은 유령회사였던 셈.
 “어쩐지,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것처럼 나타나더라니…….”
 그렇다면 실제 플레이가 가능했던 이터널은 어떻게 설명해야 하는 것인가? 혼란스러웠다.
 이건 정말 신이 만든 게임이라도 된 단 말인가?
 그때, 갑자기 게시판이 폭주했다.
 하나의 글 때문이다.
 
 [지금 이터널 접속 가능]
 
 낚시성 글로 생각하고 악플이 엄청나게 달리는가 싶더니, 또 하나의 글이 올라온다.
 
 [진짜다! 진짜가 나타났다!!]
 
 그 글에서도 같은 이야기를 했다. 이터널 접속 가능.
 
 [헐. 진짜 됨]
 
 다음 글이 올라와서야 욕설 뿐이던 댓글에 변화가 생겼다.
 진짜인가? 물음표를 떠올리는 사이 직접 접속해본 사람들의 증언이 봇물 터지듯 풀려나왔다.
 아무런 공지도 없이, 이터널의 접속 제한이 풀렸다.
 
 <『레이드 택틱스』 2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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