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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장기 1권 1화

2016.02.03 조회 1,353 추천 9


 현신(現身) - 모습을 드러내다
 
 
 序言
 
 
 오래전 무협이 생활의 일부가 된 적이 있었습니다.
 단지 읽는 재미로 시작한 무협이 생활을 하기 위한 수단이 되고 나니 읽는 것이 아닌 연구하는 일이 되어 버리고는 무협의 재미를 잃어버리기도 했습니다.
 대학을 다니던 시절 우연하게 아르바이트를 하기 위해 들렀던 사무실에서 200자 원고지에 습작을 위하여 수많은 밤을 새기도 했습니다.
 단 한 줄을 쓰기 위해 몇 십 장의 원고지를 구겨 버리고, 선물 받은 만년필도 부러뜨려 보았습니다.
 지금도 다른 분들처럼 내세울 만한 작품이라곤 쓰지 못했고, 이름도 얻지 못했지만 그래도 몇 편 끼적거렸던 덕분에 대학과 대학원을 무사히 마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십여 년 동안 잊어버렸던 무협을 최근에야 다시 보았습니다.
 과거의 작가들은 이미 잊혀 졌고 소위 신무협이라는 작품들은 놀랄 정도로 재미있었습니다.
 
 무협은 재미입니다.
 요사이 환타지 소설들이 각광을 받고, 공상과학 스릴러도 인기가 있습니다.
 무한한 환상의 세계를 꿈꾸는 것이 인간입니다.
 무협은 그저 과거로의 회귀가 아닌 신세계의 환상입니다.
 어떻게 포장을 하든 환타지임에는 틀림없습니다.
 
 언제부터인가 머릿속에서만 뱅뱅 돌던 이야기를 쓰기 시작했습니다.
 이십 년 동안이나 놓아버렸던 무협은 생소하기도 하고 내 자신에게 새로운 의욕도 불러일으키고 있습니다.
 직장생활로 그리 많은 시간을 내지는 못하지만 시간만 나면 자료를 정리하고 새로운 시각에서 다시 구상을 합니다. 즐겁습니다.
 하지만 분명 단 한 줄도 쓰지 못하는 그 상태의 괴로움을 맛볼 겁니다.
 마구 풀어헤쳐지다가 어느 한 순간 꽉 막혀 버리는 그 괴로움.
 하지만 이제는 그 괴로움도 즐기렵니다.
 
 이 이야기는 정통무협입니다.
 그럴듯하게 역사 기록에 나와 있는 사건들을 삽입하기도 했고, 실제 존재했던 인물들도 수없이 등장하지만 분명 환상의 세계입니다.
 명을 건국하는데 밑거름이 되었던 백련교도들의 한이 그 주제입니다.
 명 초기를 역사적으로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수도 있고, 교과서에 그저 흘려보냈던 인물들의 이름이 새롭게 다가올 수도 있지만 실제 역사는 아닙니다.
 
 권력과 돈, 명예란 것이 어떻게 유착되는지…
 왜 패거리를 만들어야 하는지…
 내가 옳다고 주장하는 것과 반대되는 주장도 옳을 수 있다는 사실을 왜 부인해야 하는지…
 이념(理念)이 현실에 부닥칠 때 어떻게 변형되어지는지…
 이념과 이념이 대립되고 끝없이 되풀이될 수밖에 없는 가진 자와 가지지 못한 불평등과 기회박탈…
 그리고 해결책이 없이 다가오는 답답함…
 여하튼 주제는 인간의 갈등관계에서 표출되는 인간 군상들의 다양한 모습을 투영하려 합니다. 그러한 것들을 무협이란 이름으로 포장하여 내보이려 합니다.
 
 두렵습니다.
 하지만 그 두려움까지도 즐기렵니다.
 
 2003. 8월 이매촌에서
 이웅래 배상
 
 
 1장 변신(變身)
 
 
 살아가는데 있어 아무런 목적이 없다면 얼마나 힘든 일일까?
 왜 사느냐는 질문에 대답할 사람은 많지 않다.
 특별히 살아가야 할 이유가 있어 태어난 것이 아니듯, 살아가는데 특별한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그저 삶이 주어졌기에 살아가는 것뿐이다.
 하지만 지나온 삶이 자신에게 어떠한 이유가 되지 못할 때,
 그리고 앞으로의 삶 역시 자신에게 어떠한 의미도 되지 못할 때,
 인간은 죽음보다 더 비참한 삶을 보내야 한다.
 
 나는 지난 3년 동안 죽음보다 더 비참한 삶을 보냈다.
 그리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라 생각했다.
 어차피 그 이전의 삶도 내 의지로 살아온 것이 아니었고, 3년 동안의 비참한 삶은 그저 내 자신이 스스로 버린 삶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아무런 예고도 없이 나에게도 살아가야 할 이유가 생겼다.
 
 기이한 일이었다. 그녀와는 단지 십여 일을 동행했을 뿐이었는데, 그녀가 위험에 처한 그 순간 생각보다 몸이 빠르게 반응했다.
 부러진 삼봉창(三峰槍)을 던져버리고 누군가 내버린 검을 쥐는 순간 이미 뇌리 속에서는 사라져 버린, 아니 애써 지워버리려 했던 검로(劍路)가 펼쳐지고 있었다. 새하얀 검광과 함께 주위의 모든 빛을 가두어 버리는 칙칙한 기류가 흘렀다. 그것은 음울하면서도 너무 예리했고, 정확했다.
 “헉…!”
 헛바람 빠지는 소리와 함께 짧은 경악성이 주위에서 터져 나왔다.
 털---썩!
 주위의 표사들을 장난하듯 혼절시키고 시비차림의 여자를 사로잡으려 했던 복면인은 자신을 향해 쏘아오는 검기를 느끼며 검을 쳐내 막으려는 순간 자신의 몸에서 뿜어지는 피분수를 보며 둔탁한 소리와 함께 뒤로 넘어갔다. 검은 예리하게 심장을 갈라낸 상태였다.
 “이런 일이… 어떻게…?”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그와 일행이었던 나머지 두 명의 복면인이 경악과 함께 침음성을 터트렸다. 어떻게 그들의 형제가 갑작스럽게 쓰러질 수가 있을까?
 이런 상황이 발생하리라곤 전혀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삼봉창으로 어린애 장난과 같은 창법을 휘두르다 섬전수(閃電手)를 맞고 나뒹굴었던 놈이 갑자기 일어나 단 일초로 둘째를 죽이리라고는 생각할 수 없는 일이었다.
 더구나 자신들이 누군가? 비록 지금은 피치 못해 복면을 하고 있지만 자신들 셋이 모이면 구파일방의 수뇌들이라도 한 수 양보한다는 풍운삼절(風雲三絶)이다.
 또한 검으로 심장이 정확하게 반 토막 난 채 죽어 있는 둘째는 검에 있어 일가(一家)를 이룰 수 있다고 평가받던 검절(劒絶) 양위헌(楊暐憲)이었다.
 그런데 그가 검으로 죽은 것이다. 그것도 단 일초 만에.
 아무리 자신이 상대하고 있던 계집의 무공이 범상치 아니하였고, 지금 자신들이 하고 있는 일이 누군가의 강요에 의하여 할 수 없이 하고 있어 최선을 다하지 않고 있었다고는 하나 이미 일각 안에 상황이 끝날 터였다.
 그들은 부르르 몸을 떨었다. 처음에는 경악과 분노 속에서 정확히 사태를 파악할 수 없었지만 그들은 이미 어언 사십여 년을 강호에 몸담고 있던 인물들이었다.
 “……!”
 변해 있었다. 일개 표사 정도로 보이던 자가 갑자기 동공을 가득 메울 정도로 거대하게 다가왔다. 검을 곧추 세운 자세를 보면 예사로운 놈이 아니었다. 어찌 한 순간에 저리 기도가 변할 수 있을까?
 아무리 다시 보아도 조금 전까지 삼봉창(三峰創)으로 어설프게 휘둘러대던 일개 표사가 아니었다. 사람이 어찌 한순간에 저렇게 변할 수 있는지는 보고도 믿을 수 없었다. 하지만 그것은 중요한 일이 아니었다. 지금 이 순간 믿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났고, 상대는 믿을 수 없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는 사실이 중요했다.
 그가 둘째를 베었던 것은 아무리 부인하려 해도 실로 우연이 아니었다. 강호에서는, 특히 고수의 대결에 있어서는 어떠한 암습이나 비겁한 짓을 하더라도 우연하게 이기는 경우는 없다. 그리고 그가 지금 내뿜고 있는 예기만으로도 충분히 그 사실을 인정할 수밖에 없다.
 지금 심정이야 사십여 년 동안 생사고락을 같이해 온 형제의 복수를 위해서 저 젊은 놈을 죽이고 싶은 마음뿐. 하지만 상대는 절대 하수가 아니었다. 적어도 호락호락한 상대가 아님을 느끼는 것은 그의 전신에서 일고 있는 알 수 없는 기운 때문이었는지도 몰랐다.
 처음부터 내키는 일은 아니었지만 이제는 물러갈 수가 없게 되었다. 풍운삼절의 첫째인 장절(掌絶) 하구연(何具淵)은 전신의 기를 서서히 끌어 올렸다.
 “만물표국(萬物驃局)의 일개 표사가 숨은 고수였다니 놀랍군.”
 입술을 짓이기며 새어나오는 목소리였다. 장포가 부풀어 오르고 소매가 펄럭이고 있는 것을 보더라도 그의 분노를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다. 그와 함께 셋째인 도절(刀絶) 염무(廉武)의 도가 상단으로 치켜 올라갔다.
 지금까지 그들은 사람을 죽이는 것을 극도로 피해왔다. 도저히 거절할 수 없었던 부탁을 해 온 인물이 여자 두 명을 생포해 올 것을 바랬었고, 더구나 그녀들의 몸에 상처가 나면 안 된다고 신신당부를 한 터였기 때문이었다.
 또한 여자를 호위하는 자들도 일개 도적들이나 상대하던 표국의 표사들이었기 때문에 굳이 죽여야 할 이유도 없었고, 죽인다는 것 자체가 자신들의 명예를 더럽히는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달랐다. 자신들의 명예를 위해서도 이제는 저 여자 둘을 제외한 모두를 죽여야 하는 것이다. 어쩌면 그의 부탁에도 불구하고 저 여자들도 죽여야 할지 모른다. 하구연의 오른손이 천천히 가슴께로 모여졌다.
 우르르---릉!
 단지 기를 모아 준비를 하고 있었을 뿐인데도 벽력이 치는 듯한 뇌성이 울렸다. 자신에게 장절이란 칭호를 가져다준 풍뇌벽장(風雷霹掌)을 펼치려 하는 것이다. 그의 주위로 광풍이 일기 시작했다. 때 이르게 떨어진 낙엽이 사방으로 휘몰아쳤다.
 그 속에서 불쑥 붉게 물든 손바닥이 춤추기 시작했다. 허공에 장영(掌影)이 꽃잎이 흩날리듯 사방으로 비산되었다. 그와 동시에 도절 염무의 도가 일직선으로 뻗어 나갔다. 서쪽 하늘의 노을 닮은 붉은 색의 도기가 중간에서 갑자기 두 갈래로 갈라졌고, 금세 네 갈래, 여덟 갈래로 갈라지면서 상대에게 쏟아져 갔다.
 도절 염무의 관홍도법(貫虹刀法)이었다. 무지개를 가르다는 뜻을 가진 관홍도법은 너무 살기가 짙고, 잔혹한 면이 있었다. 도법 그 자체가 정도보다는 오히려 마도 쪽에 가까워 지금까지 펼치는 것을 극히 자제해 왔던 도법이었다.
 일단 펼치면 반드시 피를 보아야 하는 살초들로 이루어진 도식이자, 그 도기가 혼을 빼는 듯한 검붉은 노을빛이었기 때문에 과거 마교의 염황도법(閻皇刀法)과 흡사하다는 것도 그 이유였다.
 하지만 지금은 자제할 이유가 없었다. 아니 오히려 이보다 더 사악한 무공을 알고 있었다면 그것을 사용했을 것이다. 하지만 자신의 관홍도법은 완벽했다. 지금껏 단 두 번을 사용했지만 두 번 모두 절정고수라는 상대는 삼초를 넘기지 못하고 쓰러졌다.
 도에 모든 것을 걸고 살아온 그였다. 그는 평생을 도에 쏟아 부었다. 그 때문에 그는 풍운삼절의 막내였지만 세간에서는 그가 삼절 중 가장 강하다고 인정하고 있는 터였다.
 이번에도 염무는 자신이 있었다. 이미 그의 도기는 상대의 옆구리를 파고들고 있었다. 별로 즐기는 편은 아니지만 자신의 도가 살을 헤집고 들어가는 느낌은 야릇한 쾌감을 주기에 충분했다.
 스--읏--
 도가 갈리는 소리가 들렸다.
 “……!”
 도가 사람의 살을 파고드는데 이런 소리가 난다는 것은 기이한 일이다. 염무는 본능적으로 등줄기를 타고 오르는 위험을 느꼈다. 본래 그의 의도는 자신의 공격이 상대를 죽이지는 못한다 할지라도 최소한 상대방이 피하고자 좌측으로 밀려나가게 의도한 것이었다. 자신의 공격을 막거나 피하려고 좌측으로 피하는 순간 장절의 풍뇌벽장은 천라지망을 펼치며 상대의 오장육부를 으스러뜨릴 터였다.
 하지만 상대는 자신의 의도대로 좌측으로 피하거나 물러나지 않았다. 오히려 쏘아져가는 자신을 향해 한걸음 내어 딛고 검으로 도신을 좌측 옆구리 쪽으로 밀어내며 자신의 어깨를 베어왔던 것이다.
 그러한 형상은 도절 자신이 상대의 방패막이가 되어 상대를 공격하는 장절의 공격을 오히려 막게 되는 결과를 가져왔을 뿐 아니라 어깨에 느껴지는 화끈한 느낌에 용수철이 튀듯 뒤로 이삼 장 물러나야 했던 것이다.
 “헉…!”
 도절의 입에서 헛바람이 새어 나왔다. 어느새 자신의 몸을 파고든 상대의 검날은 화끈한 느낌을 주었다. 왼쪽 가슴부터 치켜 올라간 검상이 좌측 어깨까지 뻗치고 있었다. 아마 흑포에 가려서 그렇지 갈비뼈가 보일 정도의 심한 부상일 것이다.
 하지만 도절 염무는 본래 무귀(武鬼)로 이름난 자. 죽는 그 순간까지 적 앞에서 나약한 모습을 보일 인물이 아니었다. 단 한숨의 진기라도 남아 있다면 도를 휘두를 진정한 무인이 바로 그였다. 그는 쏟아지는 피를 지혈시킬 생각조차 하지 않은 채 도를 움켜쥐며 자세를 바로 세웠다.
 ‘강하다…! 저 젊은 나이에 어떻게 저러한 상승무공을 익혔을까? 더구나 짧은 순간에 보여 준 임기응변까지 뛰어나다.’
 염무는 상대에 대해 진심으로 감탄했다. 겨우 이십대 중반을 갓 넘은 듯한 모습이었다. 그런 상대가 그 짧은 순간에 자신들의 합공을 예상하고 그것을 간단하게 사전에 차단함과 동시에 더구나 자신에게 심각한 부상까지 입힌 것이다.
 “아우… 괜찮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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