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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킬러 1권 - (상)

2016.02.04 조회 6,669 추천 79


 프롤로그
 
 
 
 
 
 전 세계인들에게 한 장의 신비한 카드가 아침 햇살처럼 찾아왔다.
 이 카드를 전달받은 자들은 사는 곳도, 나이도, 성별도, 지위도 다 달랐다.
 외관이 꺼림칙한 이 카드를 받은 자들은 처음엔 다들 의구심과 찝찝함을 드러냈다.
 하지만 인간의 본능 중 하나가 바로 호기심이지 않은가.
 사람들은 각자의 성격에 맞게 잡거나, 가볍게 건들거나, 혹은 툭 치는 식으로 카드에 자극을 주었다.
 그러자 카드는 놀랍게도 그 각각의 자극에 반응했다.
 자극이 전해진 카드는 그 순간 검은색 연기를 뿜으며 거짓말처럼 사라져 버렸다.
 그 어떤 흔적도 단서도 남기지 않았다.
 사람들에게 깊은 의문을 남긴 카드는 그렇게 모두를 찾아왔듯 놀라운 괴사를 남기며 홀연히 사라져 버렸다.
 그때까지 사람들은 이 일을 단순한 화젯거리로 삼았을 뿐 크게 생각하지 않았다.
 너에게도 그런 일이 있었니? 나도. 놀랍지 않던? 등등.
 언론인들도 이러한 경험을 했지만 그들은 자신들이 겪은 일을 보도하지 않았다.
 이런 일 말고도 세상에는 너무나 많은 놀라운 일이 매일같이 일어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카드에 관한 일은 인터넷에서 잠시 뜨거운 반응을 일으키다가, 곧 일상의 간식거리처럼 잊혀갔다.
 그리고 하루, 이틀, 사흘…… 열흘!
 픽션에나 존재하는 신비로운 기술(스킬)을 현실의 존재가 사용하는 일이 발생했다.
 한두 건이 아니었다. 어느 한 지역에만 국한된 이야기도 아니었다.
 그건 저 동방의 작은 나라 대한민국도 마찬가지였다.
 사람들은 이들을 스킬러라 불렀다.
 
 
 
 
 
 1장 격동기
 
 
 
 
 
 최근 뉴스에선 미스터리한 범죄사건이 연일 전파를 타고 있었다.
 이는 비단 언론에서만이 아니었다.
 인터넷상에서도 개인이 올린, 직접 겪었거나 혹은 풍문으로 들은 것들을 올려 열띤 공방거리가 되었다.
 예를 들면 인도로 돌진한 차량으로 인한 인명 및 재산 피해, 방화로 추정되는 크고 작은 화재, 납치와 강도, 살인, 성추행이나 성폭력, 그리고 학원 폭력까지.
 하지만 이는 이전에도 우리 사회에 꾸준히 존재하던 것들이었다.
 그럼에도 근래에 들어 이 사건들이 언론과 인터넷상에서 집중 조명을 받게 된 이유는 미스터리란 단어를 이 사건들에 넣지 않고서는 도저히 설명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TV 예능 프로그램에는 갑자기 초능력자들이 속속 등장하여 자신의 장기를 자랑했다.
 이들은 카메라 앞에서 상상으로나 가능할 법한 놀라운 능력을 보여주었다.
 처음엔 호기심과 경탄을 터트렸던 사람들은 어느 순간 미스터리한 범죄가 급증하자, 서서히 두려움에 빠져들었다.
 미국의 한 국영방송에 출연한 출연자의 신비한 능력을 본 사회자가 즉석에서 그에 대해 이름을 지었는데, 그 방송인이 붙인 이름은 스킬러였다.
 그 후 사람들은 이들을 초능력자가 아닌 스킬러라 부르기 시작했다.
 세상은 진지하게 이들을 주목하기에 이르렀다.
 각국의 정부와 언론은 두 가지 상황에 주목했다.
 스킬러들의 대거 등장과 함께 기존의 수사 기법으론 도저히 파헤칠 수 없었던 여러 사건을 살피기 시작한 것이다.
 이를 통해 대부분의 미스터리한 사건에 스킬러가 개입했음을 어렵지 않게 밝혀낼 수 있었다.
 문제는 스킬러가 우리와 다른 존재가 아닌, 기존의 우리 이웃이란 점이다.
 스킬러들 중에는 자신의 능력을 과시하려는 자가 있는가 하면, 반대로 이를 숨긴 채 제 이익을 추구하려는 자들도 있었다.
 물론 평범한 삶을 살아가는 자들이 대다수이긴 하지만 세상은 겉으로 드러난 사건에만 주목하여 스킬러를 매도해 버렸다.
 발작 같은 현상이었다.
 세상의 모든 범죄는 스킬러가 다 저지르고 다니는 것처럼 여겨지는 풍조가 그렇게 움텄다.
 “예지 엄마, 정부 발표 들었어?”
 “어, 초능력자들의 의무신고제 말하는 거지?”
 “공상 소설에나 나올법한 초능력자, 아니 스킬러라고 했지, 암튼 그런 사람들이 우리 주변에 살고 있다니…… 난 그 얘기 듣고 무척 오싹했어. 전에도 사람이 무서웠지만 지금은 더 무서워져 버렸어.”
 체형이 통통한 아주머니의 말에 예지 엄마라는 여인도 동의의 뜻으로 고개를 주억거렸다.
 스킬러에 관한 이야기는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모든 이들에게 중요 관심거리로 안착해 있었다.
 회사, 학교, 거리 할 것 없이 사람들이 모였다 하면 다들 스킬러에 관한 이야기뿐이었다.
 지금도 두 여인은 마트에서 물건을 사며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그래도 정부가 나서서 스킬러들을 통제한다고 하니 그나마 다행이지.”
 “그렇긴 한데, 인권단체들이 반발하고 있잖아. 거기다 그런 사람들이 정부의 통제에 따를까? 초능력이 있는데.”
 “그들이 괴상한 능력을 부리더라도 그 능력이 지속적이지는 않다던데? 암튼 그렇지 않다고 들었어. 전에 놀라운 TV에 나왔던 스킬러들이 그랬잖아. 자신의 능력 지속시간이 하루에 고작 1분이라고 말이야. 겨우 1분간 그 능력을 사용한다는 데 무슨 큰일을 벌이겠어. 안 그래?”
 스킬러에게 이러한 단점마저 없었다면 그들에 대한 일반의 공포는 더욱 강력하게 확장됐을 것이다.
 하지만 이 점이 인터넷상에서 열띤 공방거리가 되었다.
 1분이란 시간 안에 저지를 수 있는 범죄의 수, 그리고 발생한 범죄들의 사례를 조목조목 예를 들어 스킬러의 위험성을 강조한 글들이나 의견들이 너무 많았기 때문이다.
 이렇다 보니 스킬러에 대한 불안감은 강력한 여론을 형성하여 정부를 압박했다.
 그 결과 대부분의 나라에선 스킬러 통제법을 만들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그보다 약하게 자진 신고 기간을 두어 스킬러들의 자발적인 신고를 유도하고 있었다.
 문제는 스킬러에 대한 좋지 못한 여론이다.
 자유의 침해!
 대부분의 스킬러들은 세상의 눈치를 살피며 자신이 나아갈 바를 아직 정하지 못하고 있었다.
 “아무튼 세상이 점점 더 각박해지고, 무서워지는 게 아닌지 몰라.”
 “나도 요즘엔 애들이 걱정돼서 학원 다 끊고 일찍 귀가시키고 있어. 하지만 애들이 내 말을 도통 들어 먹질 않아. 어제도 예지랑 한참…….”
 두 아주머니의 수다를 뚫고 무심한 인상의 청년이 계산대에 구매한 물건을 올렸다.
 수다 삼매경에 빠져 있던 두 아주머니도 부랴부랴 이 청년의 뒤에 줄을 섰다.
 불안감이 깃든 두 여인의 수다는 여전히 그칠 줄 몰랐다.
 “예지 엄마, 그 얘기 들었어?”
 “무슨?”
 “상동 고교에서 학생이 선생님을 칼로 찌르는 일이 있었대.”
 “뭐야? 그런 일이 있었어? 세상이 대체 어찌 돌아가려고 이러는지. 휴우, 그런데 나 그 뉴스 못 들었는데?”
 “요즘 상황을 봐봐. 놀라운 일이긴 해도 뉴스로 다뤄질 만큼 큰 사건은 아니잖아. 다들, 스킬러에 관한 정부 발표와 대형 사건·사고를 방송하기도 바쁘잖아.”
 얼마 전까지만 해도 학생이 선생님을 칼로 찌른 사건은 언론의 주목을 받기에 충분했다.
 하지만 지금의 세상은 그 얼마 전과 크게 달라져 있었다.
 공상 세계와 현실세계가 겹쳐져 버린 듯한 일들이 주변에 만연하면서부터다.
 아직도 이 상황에 시민과 정부가 적응하지 못해 그 혼란이 사회 곳곳에서 가지를 뻗고 있었다.
 제삼세계에서는 스킬러들이 반군과 연대해 테러를 일삼는다고 했다. 그건 선진국이라 불리는 곳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그런 점에서 대한민국의 스킬러들은 매우 소심하고 얌전한 편이라고 봐야 했다.
 적어도 외국에서 벌어지고 있는 사건들에 비하면 말이다.
 “계산해 주세요.”
 뒤에서 들려오는 두 여인의 수다를 귓등으로 흘리며 무심한 인상의 그 청년이 계산원에게 말했다.
 인상적인 표정인 청년의 이름은 선우현성, 올해 22살로 그 나이에 어울리지 않게 독특한 직업을 갖고 있었다.
 “4만 5천 250원입니다. 포인트 카드 있으세요, 고객님?”
 “아뇨.”
 “만들어 드릴까요?”
 마트에서 물건을 사고 계산할 때마다 늘 듣는 이야기다. 그리고 그때마다 현성은 같은 말을 반복하고 있었다.
 계산원 역시 손님에게 매번 이러한 권유를 하는 것이 내키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어쩌랴, 상부에서 내려온 지시를 어기면 불이익을 받으니 싫어도 억지로 웃으며 매번 그리 권할 수밖에.
 “아뇨, 바로 계산해 주세요.”
 다행히 현성은 짜증이 심한 성격도 아니었고, 지금은 바쁘거나 화가 난 상태도 아니었다.
 어떤 이들은 이런 질문에 직원에게 면박을 주기도 한다.
 고객이라는 우월적인 지위를 이용해서 제 스트레스를 약자인 점원들에게 푸는 몰지각한 이들도 의외로 많다.
 “아, 예.”
 비닐봉지 하나를 부탁한 현성은 거기에 물건을 담고 밖으로 나왔다.
 반지하식 구조인 마트라 인도로 가기 위해선 계단을 밟고 올라가야 한다.
 마지막 계단에 선 현성이 막 인도에 발을 옮기려던 찰나, 우측에서 비명이 폭음처럼 터져 나왔다.
 걸음을 멈춘 현성은 고개를 돌렸다.
 사람들이 비명의 진원지로 흡사 물살처럼 우르르 몰려가고 있었다.
 현성의 뒤를 따라 나오던 수다쟁이 아주머니들도 사람들이 몰려 있는 곳을 향해 종종걸음으로 걸어갔다.
 잠시 그쪽을 보던 현성 역시 호기심이 동한 듯 그곳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그곳은 추락사 현장이었다.
 “우웁!”
 “헉!”
 “투신자살인가 봐. 어휴, 끔찍해.”
 십대로 보이는 소년이 붉은 핏물 위에 누워 있었다.
 내장이 밖으로 나오고, 머리가 짓뭉개진 끔찍한 모습이었다.
 청소년의 자살 문제는 어제오늘의 일은 아니다.
 학교와 가정이 나서서 그들의 문제를 보듬고 풀어줘야 하지만 학생들에게 가장 가까운 그 공동체는 제 본연의 기능을 망각해버린 지 오래다.
 인성을 말살해 버리는 현대의 교육과 뿌리 없는 정부의 교육 정책의 폐단을 비난하면서도 어쩔 수 없이 따라가는 부모들. 우리의 아이들은 그 사각지대에 놓여 경쟁과 이기심만 배우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 또래 집단에까지 버림받고, 멸시받는 아이들은 과연 어디로 가겠는가.
 하얗게 질린 얼굴로 사람들이 경찰과 119에 신고하느라 야단법석을 떨었다.
 지나가는 차량들도 멈추어 서서 무슨 일인가 확인하느라 때아닌 정체가 빚어졌다.
 그러다 아이의 시체를 보곤 허옇게 질린 얼굴로 도망치듯 차를 몰고 가버렸다.
 그때, 누군가 의문이 깃든 목소리를 나지막하게 흘렸다.
 “이상하네? 여긴 고층 건물이 없는데?”
 과연 이 남자의 말대로 주변엔 소년이 뛰어내려 온몸이 박살 날만큼 높은 건물은 없었다.
 물론 도심에서 높은 건물을 찾는 건 일도 아니다.
 당장 맞은 편 차도에도 10층 이상의 빌딩이 즐비하다, 하지만 사건 현장 주변에는 그러한 빌딩이 없다.
 설마, 저 맞은편 건물에서 뛰어내렸는데 여기까지 왔을까? 그건 상식적으로 불가능한 일이다.
 소년은 활공에 필요한 장비들을 전혀 갖추고 있지 않았으니까.
 인근 지구대에서 경찰들이 출동했다.
 주변은 사이렌 소리로 더욱더 소란해졌다.
 경찰들의 본격적인 통제가 시작되었다.
 사람들은 앞서 본 끔찍한 소년의 사체를 잊기 위해 진저리를 치며 물길을 만난 강물처럼 흩어졌다.
 현성 역시 그 무리에 섞여 현장을 떠났다.
 현성은 막다른 골목으로 들어갔다.
 이곳은 늦은 밤 취객의 노상 방뇨 장소로, 혹은 불량 청소년들이 만남의 장소로 자주 애용되는 도심의 사각지대다.
 그러한 곳에 발길을 옮긴 현성은 자신을 주시하는 시선이 없음을 확인하자 그 자리에서 꺼지듯 사라졌다.
 팟!
 스킬러, 현성 역시 세간의 화제로 급부상한 그들 중 하나였다.
 그의 능력은 공간도약.
 
 * * *
 
 띠리리리릭, 띠리리릭.
 알람 시계가 울리자 현성은 눈을 비비며 침대에서 상체를 일으켰다.
 멍한 정신을 수습하고 침대에서 내려와 냉장고로 곧장 향했다.
 현성은 중2 때 학업을 중단한 이후 지금까지 홀로 살아왔다.
 그의 부모님은 장의용품을 판매하는 가게를 했다.
 풍족하지는 않았지만 한 가족이 먹고살기에는 어려움이 없었다.
 그러던 현성이네에 먹구름이 드리운 건 그의 나이 9살 때였다.
 현성의 어머니가 교통사고로 목숨을 잃은 것이다.
 아내를 몹시 사랑한 현성의 부친은 술로 세월을 보내다 간암으로 그 생을 마감했다.
 그때 현성의 나이는 고작 15세였다.
 냉장고 문을 연 현성은 계란 두 개를 꺼내어 프라이를 한 뒤 고추장과 함께 밥을 비벼 먹었다.
 식사 시간은 십 분도 걸리지 않았다.
 욕실에서 대충 씻고 옷을 갈아입은 현성은 직장으로 향했다.
 스물두 살의 청년은 그의 부모님이 그러했듯 장의용품 판매점을 하고 있었다.
 어릴 때부터 봐온 게 이것이었고, 이 일 외에는 밥벌이를 할 수단도 없었다.
 그의 직장은 아래층에 있다.
 그래서 현성은 출퇴근의 고달픔을 알지 못한다.
 드르륵.
 낡은 창 미닫이문을 열고 외문을 틀에서 빼내어 가게 안에 들여놓은 현성은 청소를 시작했다.
 그의 가게 맞은 편, 빵집 주인이 현성을 못마땅한 표정으로 쏘아본다.
 빵집 맞은편이 음침한 장의용품 판매점이다 보니 싫어하는 건 당연했다.
 가게가 외관상으로라도 깨끗하면 모르겠지만, 척 봐도 낡고 오래되어 흉가 체험단이 찾아올 분위기다.
 특히 비바람이 치는 밤에 현성의 가게를 보노라면 섬뜩함마저 들게 한다.
 현성은 빵집 주인의 노골적인 시선을 외면했다.
 몇 년간 지속한 일상에 일일이 반응하는 자가 없듯, 현성에게도 맞은 편 빵집 주인의 시선은 이제 일상의 한 부분이 된 지 오래였다.
 햇살이 잘 드는 자리에 앉은 현성은 책을 펼쳐 들었다.
 
 현성의 가게는 거의 파리만 날린다.
 월세를 줘야 했다면 망해도 벌써 망했을 것이다.
 하지만 가게가 있는 건물이 현성이의 것이라 월세 걱정이 없었다.
 여기다 부모님이 남겨주신 현금과 땅도 있었다.
 얼마 전 그 땅은 팔아치워 현금화해서 은행에 모조리 넣었다.
 매달 발생하는 은행 이자만으로도 현성은 충분히 먹고 살 수 있었다.
 그럼에도 돈도 안 되고 사회적 인식도 별로인 이 일을 하는 것은, 몸과 마음이 편하다는 이유 단 하나뿐이었다.
 “안녕하세요, 오빠.”
 이 동네에서 현성을 아는 척하는 이는 거의 없다.
 나지도 않는 시체 썩는 냄새가 난다나 뭐라나. 물론 현성의 성격상 사람들의 이런 기피는 전혀 관심 밖이었다.
 자신만 귀찮게 하지 않으면 된다는 주의다.
 그런 현성에게 먼저 다가와 인사하는 사람이 있었으니, 바로 이 여고생 유아연이다.
 학일 상업고등학교에 재학 중인 아연은 술주정뱅이 아버지와 3살 어린 여동생과 살고 있다.
 경제적 능력이 전무한 그녀의 아버지는 알코올 중독자인데, 얼마 전 요양소에 들어간 상태였다.
 때론 가족이 사채업자보다 더 악랄하고 무서운 경우가 있는데, 아연에게 아버지가 그러한 경우였다.
 요즘 그녀의 얼굴에 화색이 도는 이유는 아버지의 폭언과 폭행으로부터 자유로워서였다.
 “그래, 가봐라.”
 현상의 태도는 늘 그렇듯 무심하고 무뚝뚝함으로 일관했다.
 이는 장의용품을 사러 온 손님에게도 마찬가지다.
 아연은 현성의 이러한 태도에도 불구하고 매번 그에게 먼저 인사를 건네 왔고, 가끔은 가게 청소도 해주었다.
 이는 현성에 대한 아연의 은혜 갚음이었다.
 “죄송한데 부탁이 있어요.”
 현성은 눈살을 찌푸리며 책에 고정된 시선을 그제야 아연에게 옮겼다.
 “네가 내 가족이냐?”
 “아뇨.”
 “친구냐?”
 “오빠는 친구 없잖아요.”
 농담처럼 들리지만, 아연의 말처럼 현성은 친구가 없다.
 그러니 어찌 들으면 상대에게 상처가 될 수 있는 진실이다.
 하지만 현성은 이에 상처받지 않는다.
 그는 이제까지 살아오면서 단 한 번도 친구의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다.
 그건 지금도 마찬가지다.
 현성의 성격을 나름 파악했기에 아연도 이처럼 말할 수 있었다.
 아마, 현성 본인보다 아연이 그에 대해 더 잘 알고 있을지도 모른다.
 “상처주려는 거냐?”
 “그런 일로 상처받을 분이 아니란 건 소녀도 안답니다.”
 하얀 얼굴에 날씬한 몸매의 아연은 이 동네에서 알아주는 미소녀다.
 그렇다 보니 그녀를 노리고 접근하는 또래 남자나 연상의 남자들이 많다.
 늑대로 득시글거리는 이 정글에서 아연은 스스로를 지켜왔다.
 그러던 어느 날, 몸가짐을 바로 하며 살던 아연에게 검은 마수가 찾아들었다.
 동네에서 양아치 짓을 하던 녀석들이 아연을 욕보이려 한 것이다.
 그때, 그곳을 지나가던 현성이 아연을 놈들의 손에서 구해냈다.
 참고로 현성은 싸움을 굉장히 잘하는 편이다.
 그때부터 아연은 현성을 오빠라 부르며 살갑게 다가왔다.
 겉으론 무뚝뚝하고 무심하게 구는 현성이었지만 이런 아연이 싫지는 않았다.
 그래서 그는 그녀의 통학 시간에 맞춰 매일 가게 문을 열었다.
 아연을 알기 전, 그의 가게는 오픈 시간이 일정하지 않았다.
 “성가신 녀석.”
 현성은 다시 책으로 눈길을 돌린다.
 하지만 그의 귀는 아연의 부탁에 귀를 열어 두고 있었다.
 “저…… 희연이 문제로 오빠한테 의견을 구할 게 있어요. 집에 어른이 없다 보니까 상의드릴 사람이 없어서요.”
 현성은 아연을 힐끔 보았다.
 그녀에게 꽤나 곤란한 일이 발생한 것 같았다.
 아니, 그녀의 여동생 희연에게.
 참고로 아연과 달리 희연은 현성을 달가워하지 않았다.
 술주정뱅이 아버지와 제 언니를 바라보는 남자들의 음흉한 시선 탓이다.
 희연은 남자에 대한 두려움과 경멸을 갖고 있는 여중생이었다.
 이는 현성도 알고 있는 부분이다.
 “그러든지.”
 퉁명한 그의 대꾸에 아연이 활짝 웃으며 연방 허리를 숙여 감사의 인사를 전했다.
 “오빠, 그럼 나중에 뵐게요. 오늘은 아르바이트가 없어서 일찍 올 거예요. 이따 봐요. 헤헤.”
 낡은 운동화와 가방은 아연의 경제 사정을 말해주고 있었다.
 매번 저 낡은 물건들이 현성의 눈에 거슬렸다.
 ‘귀찮은 건 질색인데.’
 내심 투덜거린 현성은 책을 덮어버렸다.
 책을 읽고 싶은 마음이 싹 달아나 버렸기 때문이다.
 TV를 켜자 어제 현성이 목격했던 투신 사건에 대한 뉴스 자막이 보였다.
 그리고 요즘 세상을 뜨겁게 달구고 있는 스킬러에 관한 정부의 조치가 보도되고 있었다.
 
 「정부는 스킬러의 자진 신고 기간을 이달 말까지로 정했습니다.
 관공서마다 창구를 마련했으니, 스킬러들은 최대한 빨리 신고해 주시기 바랍니다.
 이후에 발견되는 스킬러에 대해 정부는 스킬러 법을 적용해 불이익을…….」
 
 매일 같은 내용의 뉴스가 최근에 앵무새처럼 반복된다.
 거리마다, 관공서마다 자진 신고를 독촉하는 현수막이 걸려 있다.
 이를 볼 때마다 현성은 이러한 것들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타인의 일이라면 그냥 넘겨버릴 일이지만, 자신 역시 스킬러 중 하나이기 때문이다.
 전 세계인들을 방문한 의문의 카드, 현성 역시 그 카드를 만진 이후에 능력을 얻게 되었다.
 하지만 이 편식쟁이 카드는 전 인류에게 골고루 그 힘을 선물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극소수에게만 주지도 않았다.
 모르긴 몰라도 꽤나 많은 수의 사람들이 스킬러의 능력을 갖고 있을 터였다.
 이렇듯 어중이떠중이가 능력을 가지게 되니, 각자의 상황을 새롭게 생긴 능력으로 해결해 보려 했을 것이다.
 미스터리 사건·사고가 빈번히 발생한 것도 다 그 때문이리라.
 ‘들키지만 않으면 상관없겠지.’
 모르긴 몰라도 현성과 같은 생각을 하는 스킬러도 적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이미 밝혀진 스킬러들은 싫든 좋든 정부의 통제를 받아들여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불이익이 따를 테니.
 
 상동 고등학교 1학년생인 최동석은 사회적으로 문제가 되고 있는 왕따다.
 그는 성적도 바닥권이고, 가정 형편도 좋지 못한데다 몸까지 비만이라 모두가 그를 업신여기고 괴롭혔다.
 그랬던 동석이 최근 자신감을 되찾았다.
 스킬러 카드를 통해 힘을 얻고 난 후부터였다.
 동석은 자신이 가진 힘을 복수를 위해 사용했다.
 제일 먼저 그는 평소 자신을 대놓고 무시하고 모욕했던 선생님을 반장의 의식을 조종하여 칼로 찌르게 했다.
 이 일로 학교가 발칵 뒤집어졌다.
 사회적으로 스킬러 문제가 두드러지면서 상동 고교에서 발생한 이 사건은 외부에 알려지지 않았다.
 물론 일부 학생들의 입을 통해 그날의 사건이 주위에 퍼졌다.
 하지만 과거처럼 그 파장은 그리 크지 않았다.
 모든 이들이 스킬러에 집중해 있었기 때문이다.
 “야, 퍼진 하마.”
 수업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동석은 학교 일진들에게 가로막혔다.
 이전이라면 이런 상황에 오줌을 지릴 만큼 겁을 먹었을 테지만 스킬러의 능력을 가진 지금은 오히려 이 상황을 즐기고 있었다.
 동석의 앞길을 막아 세운 일진은 세 명.
 “왜?”
 일진 녀석들은 동석이 이전과 달리 자신들을 똑바로 바라보고, 또렷한 음성으로 대꾸하자 기분이 나빠졌다.
 한 아이가 동석의 멱살을 빨래 짜듯이 뒤틀어 잡았다.
 “이 새끼가 뒈지려고 스텝을 밟는구나, 밟아. 오늘 한번 제대로 밟혀볼래? 앙.”
 히죽.
 다른 이들이 볼 수 없는 조소를 동석은 제 멱살을 쥐고 있는 녀석에게 보였다.
 동석의 멱살을 잡고 있던 녀석의 얼굴이 잔뜩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야! 이 자식 안 되겠다. 곱게 보내주려고 했더니. 아지트로 끌고 가자. 오늘 이 새끼 제대로 푸닥거리 좀 해야겠어.”
 녀석의 말에 나머지 둘이 동석을 좌우에서 포위했다.
 동석은 이들이 말한 아지트로 순순히 끌려갔다.
 아니, 제 발로 걸어갔다.
 도로가에서 멀지 않지만 인적이 뜸한 음침한 주차장, 이곳이 놈들의 아지트였다.
 동석의 멱살을 잡았던 아이가 그의 허리를 발로 밀어 찼다.
 철퍼덕.
 바닥에 주저앉은 동석은 킬킬거렸다.
 섬뜩한 웃음이다.
 세 녀석은 잠시 움찔했다.
 아무리 봐도 동석이 평소와 너무도 달랐기 때문이다.
 요즘 화제가 되고 있는 것은 초능력자를 대표하는 단어가 된 스킬러다.
 순간, 세 아이는 동석도 스킬러 중 하나가 아닐까? 라는 생각을 했다.
 이 세 아이 역시 스킬러 카드를 받았지만 다들 카드의 선택은 받지 못했다.
 일반인과 다른 인간의 등장은 기존의 인간들에겐 분명 꺼림칙한 일이다.
 그건 힘으로 남을 괴롭히는 일을 재미로 삼는 이들에겐 더욱더 그러하다.
 만약 왕따 최동석이 스킬러라면? 이러한 생각은 세 아이의 얼굴에 두려움을 피어올랐다.
 “저딴 새끼가 스킬러일 리가 없잖아. 보나 마나 우리 겁주려고 쇼하는 거야. 내가 저 새낄…….”
 동석의 멱살을 잡아 여기까지 끌고 왔던 아이가 돌연 손가락으로 제 눈을 푸욱 찔렀다.
 엽기적인 그 행위에 모두가 깜짝 놀랐다.
 놀라지 않는 이는 동석뿐이다.
 “크아아악!”
 이 아이를 시작으로 나머지 두 아이도 제 의지와 상관없이 자기 눈을 스스로 푸욱 찔렀다.
 “아아아악!”
 “내 눈…… 내 누우우우운!”
 세 아이는 안구가 터져 영원히 실명했다.
 이 모든 게 악의적인 감정에 휩싸인 동석의 작품이다.
 동석은 시계를 보았다.
 디지털 초시계다.
 스킬러의 능력은 1일 1분이다.
 이는 지속 능력에 한해서다.
 참고로 공간도약 능력자인 현성은 횟수 능력으로 분류할 수 있다.
 1일 1회.
 동석은 녀석들의 실명 상태에 만족하지 않았다.
 그는 세 아이의 의지를 조정하여 대로를 향해 곧장 내달리게 했다.
 세 녀석은 차들이 쌩쌩 달리는 차도를 향해 뛰어들었다.
 갑자기 튀어나온 세 아이는 달려오던 버스와 트럭과 자가용에 잇따라 부딪치고 밟힌 후에 차량과 차량 사이에 끼였다.
 참으로 끔찍한 죽음이었다.
 보도의 행인들이 비명을 지르며 현장으로 몰려들었다.
 주변은 몰려드는 사람들로 인해 금세 아수라장이 되었다.
 인파 속에는 동석도 보였다.
 ‘네놈들이 그랬지, 약한 게 죄라고. 그래, 너흰 약해서 죄를 받은 거야. 잘 가라, 더러운 양아치 새끼들아.’
 하지만 동석의 가슴속에 맺힌 응어리는 여전히 풀어지지 않았다.
 세상은 너무 많은 악당을 동석에게 만들어 주었다.
 빵빵빵!
 애애애애애앵-!
 삐뽀, 삐뽀삐뽀.
 와글와글.
 세상은 다시 소음에 묻혔다.
 
 * * *
 
 짜장면 한 그릇과 군만두 한 접시, 단무지는 늘 그렇듯 부족하다.
 현성은 냉장고에서 단무지를 꺼내 왔다.
 조금씩 깨물어 먹는 단무지보단 큼지막한 걸 통째로 입에 넣고 와삭와삭 씹는 걸 좋아하다 보니, 점심때 매일 먹는 짜장면을 위해 그는 단무지 한 통을 늘 냉장고에 비치하고 산다.
 그가 마트에 가는 중요한 이유 중 하나가 바로 이 단무지 때문이라면 믿겠는가.
 묵직한 이것은 차량이 없는 그에겐 귀찮은 짐이었으나 최근에 스킬러의 능력을 얻은 이후엔 소소한 그 부담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일상의 편리. 능력을 이런 용도로만 쓴다면…….
 “하루도 조용할 날이 없군.”
 얼굴이 피범벅인 세 소년이 차도로 뛰어들었다는 뉴스가 나왔다.
 피해자들은 상동 고교의 학생들이라고 한다.
 상동 고교면 현성이 살고 있는 동네와 그리 멀지 않은 학교다.
 버스로 세 정거장, 걸어가면 십오륙 분의 거리쯤.
 사고현장은 모자이크를 처리해 보여주었다.
 그런데 바닥을 적신 저 적나라한 붉은색은 왜 모자이크를 하지 않을까? 예쁘게 핑크색으로 하면 좋을 텐데.
 장의용품점을 하고 있는 현성에게는 누군가의 불행은 수입의 발생을 의미한다.
 하지만 요즘 같은 세상에 상조 회사나 병원을 끼지 않고 운영하는 장의용품점을 찾는 고객은 거의 없다.
 파리만 날리는 가게 안을 스윽 둘러보는 현성.
 남들은 그의 가게 분위기가 음울하고 음습하다고들 한다.
 하지만 현성에게 있어 이곳은 자신이 마음 편히 살 수 있는 소중한 공간이었다.
 인테리어와 구조 변경이 필요하긴 하지만 주인이 마음에 든다는데 그 무슨 상관이랴.
 후루룩, 쩝쩝.
 드르륵.
 ‘뭐지?’
 현성의 가게를 찾아온 손님.
 자장면을 입안 가득 넣고 우물거리던 그는 우울한 표정의 아주머니를 보며 두 눈만 끔뻑거렸다.
 손님을 받은 지 너무나 오래되었기에, 저 여자가 손님인지 아니면 영업사원인지 알 수가 없어서다.
 영업사원이면 냉랭하게 가라고 해야 할 것이고, 손님이면…….
 끔뻑끔뻑.
 “조등을 사러 왔는데요. 있나요?”
 아주머니는 현성이 자신보다 어린 것을 알았지만 말을 낮추지 않았다.
 그녀의 옷차림은 허름했지만 말씨와 눈빛은 명품을 두르고 다닐 귀부인 같은 느낌이었다.
 꿀꺽.
 입안을 가득 채웠던 자장면을 목구멍으로 밀어 넣고 현성은 일어났다.
 무심한 표정과 무뚝뚝한 말투가 현성의 특징이다.
 하지만 그걸 시도 때도 없이 유지하지는 않는다.
 “손님이십니까?”
 오랜만에 가게에 찾아온 손님이다 보니, 현성은 무척이나 낯선 느낌을 받았다.
 현성의 태도에 아주머니가 약간 당황한 듯 보인다.
 하지만 곧, 그녀는 자신이 이 가게의 물건을 팔아줄 손님임을 차분하고 조금은 슬픈 어조로 말했다.
 현성은 생긋 웃으며 그녀에게 자리를 권했다.
 “여기 앉으세요. 차라도 한 잔 드릴까요?”
 “아, 아뇨. 조등만 사려고 왔어요.”
 조등이란 상가(喪家)임을 표시하는 등을 말함이다.
 현성은 지하 창고로 내려가 조등을 가져왔다.
 보통 문 양쪽에 달다 보니 두 개가 세트다.
 “가격이 얼만가요?”
 여자는 깐깐하지 않았다.
 물건을 만져본 뒤 그녀는 격조 있는 음성으로 가격만 조심스레 물어봤다.
 “5만 5천 원입니다. 저희 가게는 카드 결제가 안 됩니다.”
 낡고 오래된 가방에서 여자가 돈을 꺼낸다.
 다수의 천 원짜리와 오천 원짜리 2장, 그리고 꾸깃꾸깃한 한 장의 만 원짜리다.
 아주머니는 좀 부끄러운 듯 얼굴을 붉혔다.
 현성은 이 돈에 아주머니의 시간과 피땀이 고스란히 담겨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돈에 수질을 매긴다면, 이런 돈이 일급수가 아닐까 싶다.
 조등 가격을 잔돈까지 합쳐 겨우 맞춘 아주머니가 조금은 미안한 표정으로 말했다.
 “번거롭게 해서 미안해요.”
 “아뇨. 잠시만요. 포장해 드릴게요.”
 “저기 총각.”
 “예.”
 “배달은 안 되겠죠?”
 자장면 한 그릇도 배달되는 세상에 어찌 5만 5천 원짜리 물건이 배달되지 않겠는가.
 “주소와 전화번호 적어주세요. 오늘 안으로 배달해 드리겠습니다.”
 펜을 잡은 아주머니의 손이 수전증에 걸린 듯 떨리고 있었다.
 꼬불꼬불한 글씨체로 겨우 주소와 전화번호를 적었다.
 그러고 보니 아주머니의 안색도 그리 좋지 않아 보였다.
 가족 중에 누가 돌아가신 것일까? 라는 생각을 했던 현성은 이어진 그녀의 말에 불길한 짐작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저, 총각. 혹시 제일 싼 수의 가격이 얼만지 알 수 있을까요?”
 가끔 가난한 노인들이 현성의 가게를 찾는다.
 외관이 허름하다 보니 다른 곳보다 물건이 더 싸지 않을까? 라는 생각에서 말이다.
 뭐, 현성이야 물건을 팔아서 먹고사는 입장이 아니다 보니 상대의 형편을 고려하여 원가에서 조금만 남기고 팔기도 한다.
 그럼에도 그의 가게에서 물건을 사가는 사람은 거의 없다.
 수의 가격은 천차만별이다.
 싼 것은 단돈 몇만 원에 살 수도 있고, 비싼 건 천만 원이 넘는 것도 있다.
 형편에 맞게 사야 하지만 어떤 이들은 제 사정은 고려하지 않고 고가의 것을 찾기도 한다.
 저승 가서 수의로 유세 떨 것도 아닌데 말이다.
 아주머니는 개중 가장 싼 값의 수의를 골랐다.
 며칠 후에 오겠다며 씁쓸히 말하고 그녀는 등을 돌렸다.
 조금은 위태로워 보이는 아주머니의 뒷모습을 현성은 한참 동안 응시했다.
 “아연이 오기 전에 배달하고 와야겠군.”
 맞은 편 빵집 가게 사장이 문가에 서 있는 현성을 본다.
 그의 마수걸이에 배가 아픈 표정이 역력하다.
 참고로 현성은 맞은편에 빵집이 있지만, 그곳에선 단 한 번도 빵을 사지 않았다.
 빵이 먹고 싶으면 이곳에서 떨어진 빵집까지 걸어가서 사온다.
 그리고 자랑하듯 그 빵집의 봉투를 광고한다.
 이러니 이웃 사이가 좋을 리 만무하다.
 가게 문을 잠근 그는 조등을 들고 배달에 나섰다.
 그 아주머니의 집은 좁고 긴 구불구불한 골목길을 한참이나 올라가야 한다.
 이곳이 초행인 자들은 단숨에 미아가 되어버리는 미궁과도 같은 곳이 이 동네다.
 다행히 현성은 이곳 지리에 훤했다.
 다닥다닥 붙은 초라한 집들, 어른들은 새벽이면 이 좁은 비탈진 길을 사계절 내내 오르락내리락한다.
 학교 다니는 아이들 역시 그렇다.
 현성에게 살갑게 구는 아연이도 이곳에 산다.
 하루하루가 참으로 고단한 이들이 그렇게 모여 사는 달동네 빈민가다.
 학교에 다니지 않는 아이들은 끼리끼리 모여 좁은 골목에서 놀거나 헐벗은 뒷산에서 제 맘에 맞는 놀이를 찾아 놀곤 한다.
 이 무리에도 끼지 못하는 어린아이들은 제 부모에 의해 작은 집에 갇혀 창문에 매달려 하염없이 창밖만 바라본다.
 부모 입장에선 아이를 지키기 위한 행동이지만, 아이에겐 그저 답답하고 외로운 감옥일 뿐이다.
 그렇게 앉아 지나가는 사람 하나 없는 골목을 멍하니 보며, 매일 퇴근하는 부모를 기다리는 아이들은 낯선 누군가가 골목에 나타나자 다들 창문에 조그마한 제 얼굴을 붙였다.
 현성은 작은 아이들의 초롱초롱한 그 눈을 본 뒤 다리를 툭툭 치며 걸었다.
 “킥킥, 크하하하하.”
 정신이 외출 나간 듯한 웃음소리가 골목 모퉁이에서 들려온다.
 무슨 일인가 싶어 쳐다볼 법도 한데 현성은 그 방향으론 시선조차 주지 않았다.
 하지만, 그 방향이 배달 가는 길목이라 가지 않을 수 없다.
 비만의 소년이 대문 앞에 나와 앉아 있었다.
 그 소년은 자신을 괴롭히던 일진 세 명에게 최면을 걸어 차도로 돌진하게 만든 최동석이다.
 낯선 그림자를 본 동석은 흠칫했다.
 경계심이 가득한 그의 눈빛은 가시를 세우기 전의 고슴도치 같다.
 현성은 대문을 본다. 낡은 우편함에 매직으로 쓰인 주소가 보인다.
 “당신 뭐야?”
 동석이 먼저 시비조로 현성에게 말한다, 아니 시비조라 말하기엔 그 표정과 목소리에 긴장감 같은 게 담겨 있었다.
 “여기가 정양옥 씨 댁입니까?”
 동석의 눈길이 현성이 든 봉투에 간다.
 봉투에 ‘극락 장의용품점’ 이라고, 싸구려 잉크로 찍은 상호가 적혀 있다.
 통학로에 현성의 가게가 있었기에 동석 역시 이곳을 알고 있었다.
 “그런데요. 무슨 일입니까?”
 처음엔 낯선 자에 대한 경계심이 보였다면, 지금은 불안과 걱정이 동석의 얼굴에 드러나고 있었다.
 “정양옥 씨가 주문한 물건을 배달 왔습니다.”
 “장의용품점에서 무슨 배달을……?”
 동석은 말끝을 흐렸다.
 정양옥은 동석의 어머니로, 두 모자만 이곳에 산다.
 최근 동석은 어머니의 건강이 좋아지지 않은 것 같아 내심 걱정이 컸다.
 한데, 어머니가 장의용품을 배달시켰다고 하니 덜컥 겁이 났다.
 “정양옥 씨와는 어떤 사이입니까? 물건을 넘겨드려야 하는데.”
 “어머닌데요.”
 시무룩한 표정으로 대답한 동석은 종이봉투를 받는 게 싫은 듯 손을 뒤로 감추었다.
 한두 번 겪는 일도 아니다.
 현성은 평소의 모습으로 봉투를 동석에게 건넸다.
 짙은 그늘이 담긴 표정으로 동석은 봉투를 받아들었다.
 동석의 얼굴을 힐끗 본 현성은 곧장 발길을 돌렸다.
 그때, 현성이 올라온 골목으로 말쑥한 차림의 1남 1녀가 올라오고 있었다.
 남녀는 현성 뒤에 서 있는 동석을 예의주시하며 다가왔다.
 “최동석 군이 누구지?”
 남자가 말하였고, 그와 함께 온 여자는 동석을 바라보고 있었다.
 현성은 한 발 옆으로 물러서며 턱짓으로 동석을 가리켰다.
 쓸데없는 일에 휘말려 자신의 평온한 생활을 방해받고 싶지 않아서다.
 “자네는 동석 군의 가족인가?”
 동석은 남녀의 출현 이후 불안정한 모습을 보였다.
 하지만 그가 달아날 곳은 없었다.
 이를 알기에 남녀는 서두르는 기색이 없어 보였다.
 남자의 물음에 현성은 고개를 내저으며 말했다.
 “아닙니다. 한데, 당신들은 누굽니까?”
 고객의 아들이다, 거기다 청소년이다.
 그렇다 보니 아예 무시하고 가버리기에는 정양옥의 얼굴이 현성의 눈에 아른거렸다.
 “아니라면 됐어. 그만 가보게.”
 남자는 더 이상 현성에게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1남 1녀가 동석을 정면과 측면에서 압박해 들어갔다.
 생각에 잠겼던 현성이 남자의 앞길을 막아선다.
 내심 귀찮아지는 거 아냐? 라는 불평을 조금 했지만 그의 표정은 예의 그 무심함에 가려 드러나지 않았다.
 “신분을 먼저 밝히시죠.”
 남자가 현성의 위아래를 훑어보았다.
 그 눈빛에 현성은 기분이 나빠졌지만, 이런 사소한 일에 주먹다짐을 할 만큼 그의 수양은 낮지 않다.
 품속으로 손을 넣은 남자가 제 신분증을 꺼내어 현성에게 보여준다.
 국정원 특수국 요원, 박상철.
 TV 드라마, 혹은 뉴스에서 자주 언급되는 기관이 국정원이다.
 그 뒤에 붙어 있는 특수국이 뭐하는 곳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들의 조직도를 자세히 알지 못하는 현성으로서는 상대가 국가 공무원이란 사실에 멈칫할 수밖에 없었다.
 ‘특수국? 그건 뭐하는 부선데 저 꼬맹이를 잡아가려는 거지?’
 현성의 의문은 당연하다.
 설마, 최동석이란 아이가 간첩일 리는 없다.
 그렇다고 산업 스파이…… 가당치도 않다.
 그럼에도 국정원에서 나온 자들이 저 아이를 잡아가려는 것은 필시 그만한 이유가 있음이다.
 그게 뭘까? 현성의 생각은 오래가지 않았다.
 평범한 아이, 하지만 저 아이가 스킬러라면!
 그러고 보니 얼마 전 외국에서 스킬러 범죄를 전담하는 수사팀이 창설됐다는 보도를 접한 바 있었다.
 아마 그와 유사한 곳이 국정원 특수국이란 곳이 아닐까? 라고 현성은 짐작하며 옆으로 한걸음 비켜섰다.
 그러다 곧 저들이 가짜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최동석이 생판 남은 맞지만 고객의 아들이란 점에서 아예 모른 척 하기가 찜찜해진 현성은 상대의 신분을 확실히 알아야겠다는 생각을 굳혔다.
 가까운 파출소만 가도 금세 알 수 있는 내용.
 “됐나?”
 “신분증이 가짜일 수도 있지 않습니까?”
 동석이 이 자리에서 의지할 사람은 현성밖에 없었다.
 스킬러의 능력을 사용한 후였기에 내일이나 되어야 동석은 자신의 능력을 사용할 수 있었다.
 그러니 여기 있는 동석은 연약한 비만 청소년일 뿐이다.
 동석이 현성의 뒤로 몸을 숨긴다.
 “흐음, 우리 신분이 의심스럽다면 함께 가도 좋아. 갈 텐가?”
 국정원 요원을 따라갈 배포를 가진 대한민국 국민이 과연 몇이나 될까? 현성 역시 저들을 따라 국정원인가로 가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그러니 앞서 생각한 대로 가까운 파출소에 가서 저들의 신분만 확인하면 된다.
 “파출소에 들러 신분만 확인해 주시면 됩니다.”
 “흐흠, 좋아. 이인경 요원은 그 아이 체포해.”
 현성은 눈살을 찌푸렸다.
 하지만 자신이 앞서 생각한 게 맞는다면 이 일은 개입해선 안 될 일이었다.
 국가 권력 기관과 일개 개인이 싸워봐야 손해는 개인이 다 짊어져야 한다.
 자신의 도리는 저들의 신분을 확인하는 것까지다.
 이리 생각한 현성은 최동석의 체포를 방해하지 않았다.
 이인경이 동석에게 접근하자 동석이 그녀를 밀쳤다.
 넘어진 이인경이 동석을 향해 소리쳤다.
 그러자 달리던 동석은 마치 석상이라도 된 듯 그 자리에서 꿈쩍도 하지 않았다.
 이에 현성이 두 눈을 끔뻑거리자 박상철이 그의 어깨를 툭툭 치며 말했다.
 “그녀는 스킬러야, 물론 나도 그렇고.”
 국정원 특수국, 현성은 그제야 특수란 관형어가 ‘국’ 앞에 들어간 이유를 알 수 있었다.
 현성이 이인경을 본다, 이십대 초중반으로 보이는 여자는 170센티쯤 되어 보이는 훤칠한 키와 까무잡잡한 건강한 피부를 지니고 있었다.
 인물도 그만하면 어디 가도 빠지지 않을 것이다.
 잔뜩 겁을 집어먹은 동석이 도와달라며 고래고래 소리를 지른다.
 하긴 제 의지와 상관없이 몸이 움직이지 않으니 겁이 날 만도 하다.
 더욱이 체포되어야 하는 입장이니.
 
 
 
 
 
 2장 스킬러 자매
 
 
 
 
 
 인경은 동석의 손목에 수갑을 채웠다.
 1분이 지났는지 동석은 그제야 자유로울 수 있었다.
 현성이 보기에 인경의 스킬러 능력은 상대를 꼼짝 못 하게 하는 능력 같았다.
 제 눈으로 직접 다른 스킬러의 능력을 보긴 이번이 처음인 현성이다.
 그래서 무척이나 신기하게 다가왔다.
 끌려가던 동석은 현성을 간절한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하지만 현성이 그를 위해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래도 파출소에 가서 당신들 신분은 확인해야겠습니다.”
 “가지.”
 “상철 오빠, 우리가 저 사람을 납득시킬 이유는 없잖아.”
 “선량한 국민이 요구하는 일이잖아.”
 “알았어요. 뭐, 돌아가는 길도 아니니까.”
 낯선 사람들이 우르르 내려오자 어린아이들이 창문에 붙어 구경을 했다.
 그 모습에 인경이 눈살을 찌푸리며 한마디 한다.
 “아동 학대가 심하네요. 어떻게 애들을 저리 방치할 수가 있죠. 아무리 먹고살기가 바빠도 그렇지. 쯧쯧.”
 이 동네에 사는 사람들의 처지를 모르는 상태에서 겉으로 보이는 모습은 눈살을 찌푸리게 할 만하다.
 하지만 자식을 가두어 두고 일터로 나가는 부모는 좋아서 저리 했겠는가.
 어린이집에 맡길 형편이 안 되다 보니 다들 제 가슴에 비수 꽂는 심정으로 이리들 한다.
 매일 새벽 일터로 나가는 그들의 모습을 본다면 결코 저리 말할 수 없을 것이다.
 “자네 이름이 뭔가?”
 묵묵히 쫓아오는 현성을 돌아보며 박상철이 묻는다.
 이 가파른 좁은 길을 내려가려면 아직 한참이다.
 현성은 무뚝뚝한 음성으로 대답했다.
 “선우현성입니다.”
 “그렇군. 그런데 스킬러인 우리가 무섭지 않나? 요즘 스킬러에 대한 안 좋은 사건들만 매체들이 경쟁적으로 보도하는 바람에 우리에 대한 일반의 시선이 꽤나 차갑던데.”
 “제가 당신들을 무서워해야 할 이유가 있습니까? 공무원이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공무원에 대한 일반의 신뢰라, 글쎄.
 상철은 잠시 모호한 표정을 짓다 곧 피식 웃었다.
 “그래도 조심하는 게 좋아. 일반인과 스킬러는 차원이 다른 존재니까. 세상엔 우리처럼 법과 정의를 위해 일하는 건전한 공무원 스킬러가 있는 반면, 저 녀석처럼 제 이익을 위해 힘을 사용하는 녀석도 있으니까.”
 현성은 동석이 연행되어 가는 이유에 대해서 들을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래서 짐짓 모른 척 물었다.
 “무슨 뜻입니까?”
 “상동 고교에 다니는 세 아이가 차도로 돌진하여 사망한 이야기를 들어봤는지는 모르겠지만, 그 사건과 저 녀석이 깊은 연관이 있지. 아, 일반인에게 이런 이야기를 하면 안 되지만, 요즘엔 보기 드문 자네의 정의감에 감탄해서 말해주는 거야.”
 상철의 대답에 현성은 눈살을 찌푸리며 안절부절못하는 동석을 보았다.
 그런 일이라면 녀석은 벌을 받아 마땅하다.
 적어도 남을 괴롭혔으면, 그에 상응하는 대가를 자신도 받을 각오를 해야 한다.
 이것이 현성의 평소 지론이다.
 현성은 더 이상 아무것도 이들에게 묻지 않았다.
 박상철은 인근 파출소에 들러 현성에게 자신들의 신분을 확인시켜 주었다.
 파출소 앞에서 상철은 현성에게 자신의 연락처를 건넸다.
 “쟤 어머니와 연락이 되면 이리 전화해 달라고 말씀드려 주게.”
 대답 대신 고개만 끄덕이던 현성을 한차례 바라보던 상철은 자신들의 차량을 타고 떠났다.
 ‘국정원 특수국이라.’
 현성은 작게 뇌까리며 자신의 가게로 다소 무거워진 걸음을 옮겼다.
 빵빵빵!
 부르르릉.
 소음과 사람, 단단한 콘크리트와 사람들의 속을 보는 듯한 시커먼 아스팔트.
 눅진한 바닥.
 “……?”
 현성은 고개를 갸웃거려다.
 봄 가뭄에 눅진한 바닥이라니, 어디 상수도라도 터졌나 보다 하고 생각한 현성은 고개를 내저으며 가게로 걸음을 재촉했다.
 
 * * *
 
 정부에선 스킬러 전담수사대가 발족했음을 언론에 공표했다.
 또한, 스킬러 범죄에 한해서 특별법을 제정하여 일반인 범죄자보다 강도 높은 처벌을 한다는 것도.
 이에 인권단체 등이 형평성을 들어 반대하였다.
 당연히 이들의 목소리를 비판하는 자들이 속속 등장했다.
 세상은 여전히 스킬러로 인해 홍역을 앓고 있다.
 그리고 현성도.
 ‘아연과 희연이 스킬러라니…….’
 며칠 전 아연이 현성에게 상의할 게 있다고 말했었다.
 현성은 그녀의 부탁을 들어주었고, 그 날 저녁 자매가 나란히 그를 찾아와 자신들이 스킬러임을 밝혔다.
 남자에 대해 깊은 불신감을 갖고 있던 희연은 아연의 선택을 못마땅하게 여겼지만, 제 언니의 행동을 막지는 않았다.
 아연은 스킬러 자진 신고에 대해서 꽤나 걱정하고 있었다.
 보호자가 요양소에 있는 아버지 한 분뿐이다 보니 자매는 정부가 자신들의 처지를 만만히 보고 불이익을 줄까 싶어 염려했다.
 스킬러가 모종의 장소로 끌려가 생체 실험을 당한다는 소문이 인터넷상에 떠돌고 있었기 때문이다.
 가게 문을 닫던 현성은 동작을 멈추고 고개를 산동네 방향으로 돌렸다.
 “그 녀석은 어찌 되었을까?”
 오랜만에 찾아온 고객, 정양옥. 그녀의 아들이 스킬러의 힘을 악용하여 죄를 지어 잡혀 들어갔다.
 현성은 그 사건을 기억했다가 뉴스와 인터넷을 검색했다.
 한데 며칠이 지난 지금까지도 최동석에 관한 뉴스는 그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었다.
 자잘한 사건이 아님에도.
 “현성 오빠!”
 아연과 희연이 가게 문을 닫고 있던 현성을 향해 바쁜 걸음으로 다가왔다.
 현성에 대한 아연의 신뢰는 대단했지만 언니와 달리 현성을 대하는 희연의 태도는 늘 그렇듯 데면데면하다.
 희연의 이러한 태도를 현성은 모른 척했다.
 “가게 문 닫으세요? 도와드려요?”
 아연은 다른 사람들에겐 새침한 편이다.
 하지만 현성에게는 무척이나 쾌활하게 굴었다.
 “그래.”
 현성은 손바닥을 탁탁 털며 자리를 양보했다.
 “그거…… 빈말인데.”
 희연이 울상을 지으며 자신의 양손을 들어 보인다.
 왼손에 장바구니, 오른손엔 케이크 상자가 들려 있다.
 현성이 케이크 상자를 바라보자 아연이 제 여동생을 보며 말했다.
 “오늘이 우리 희연이 생일이거든요. 그래서 생일 파티 하려고요.”
 그녀의 말에 현성이 희연을 본다.
 희연은 그의 시선이 싫은 듯 거부감을 드러내며 고개를 옆으로 돌려버렸다.
 어제오늘 일도 아닌데다, 이런 일을 거슬려하는 성격도 아니기에 현성은 또 모른 척 넘어간다.
 “그래, 그렇군. 그런데 오늘 너희 동네 단수라던데.”
 “예?”
 인구 과밀 지역인 산동네이긴 하지만 어찌 된 게 걸핏하면 단수다.
 현성의 말에 아연의 얼굴에 당혹감이 어린다.
 요리 재료가 있어도 물이 없으면 말짱 꽝이다.
 희연은 언니가 큰맘 먹고 자신의 생일상을 차려주기로 한 날 단수가 되자 속이 상한 듯 인상을 찡그렸다.
 이를 본 현성이 내심 피식거린다.
 “저, 현성 오빠.”
 “응?”
 “저기, 오빠네 주방 쓰면 안 될까요?”
 해거름 때다. 곧 어두워진다.
 그런데 남자 혼자 사는 집에 소녀 둘이 겁도 없이 들어온다고 한다.
 물론, 그녀들이 스킬러인 점을 감안하면 어디든 큰 위험은 없겠지만 입소문이 빠른 동네에서 이런 일은 두 사람에게는 분명 안 좋은 일이다.
 현성이야 남들이 뭐라 하든 신경 쓰는 성격이 아니니 상관없지만, 여자애 둘은 아닐 것이다.
 빵집 주인이 이들을 훔쳐보고 있다.
 현성에 대한 악의적인 소문의 상당수가 저 빵집 주인에 의해서 나왔다.
 안 그래도 장사가 안 되는 현성의 가게는 이로 인해 더 큰 타격…… 까지는 아니더라도 뭐, 좋은 결과는 없다.
 물론 현성은 이것도 역시 신경 쓰지 않는 시원한 성격의 소유자다.
 “허락해 주세요. 예? 깨끗하게 쓸게요. 그리고 덤으로 오빠의 저녁은 공짜예요. 어때요?”
 “맘대로 해.”
 현성은 타인에게 자신의 공간을 허락하지 않는다.
 이유는 귀찮아서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아연의 부탁은 좀처럼 거절하지 못한다.
 “아! 고마워요. 희연아, 너도 괜찮지?”
 산산이 분해될 처지에 있던 자신의 생일상이 다시 기회를 얻었다.
 때문일까? 희연도 순순히 허락한다.
 양손이 자유로웠다면 여동생의 허락에 손뼉까지 치며 좋아했을 아연이다.
 “오빠, 나 2층으로 올라갈게. 정리하고 올라와요.”
 후다닥.
 희연을 남겨둔 아연은 쏜살같이 가게를 통해 2층 현성의 살림집으로 올라갔다.
 여긴 서먹한 둘이 남았다.
 현성은 가게 문을 닫는 일을 마무리했다.
 희연은 그때까지 입구에서 죄 없는 바닥만 툭툭 차고 있었다.
 “안 들어가고 뭐해?”
 “우리 얘기 다른 사람에게 안 한 거 맞죠?”
 희연은 언니가 현성에게 자신들의 비밀을 털어놓은 일을 내내 걱정하고 있었다.
 그녀의 걱정은 당연하다.
 현성은 무뚝뚝한 음성으로 그녀의 질문에 대한 답을 내려주었다.
 “난 친구 없다.”
 “…….”
 “들어가자.”
 현성이 앞장서자 그제야 희연도 마지못한 듯 따라 들어온다. 한데 그 발걸음이 참 가볍다.
 이를 본 빵집 사장이 호주머니에서 핸드폰을 빼 들더니 킥킥거리며 112를 누른다.
 원조교제는…… 범죄니까.
 
 * * *
 
 경찰이 출동했다. 당연히 그들은 빈손으로 돌아갔다.
 소란스러웠지만 그래도 어렵지 않게 일은 해결되었다.
 그리고 아연의 실력이 발휘된 생일상이 모두 앞에 차려졌다.
 미역국과 잡채와 두 가지의 밑반찬, 그리고 오늘의 하이라이트인 케이크까지.
 조촐하지만 파티 기분을 내기엔 충분했다.
 제 집에서 누군가 음식을 해주는 일이 상당히 오랜만인 현성이다.
 감회가 새로울 법도 한데 늘 있던 일인 양 그는 이를 티 내지 않았다.
 초에 불이 붙었다.
 아연이 생일 축하 노래를 부른다. 현성은 붕어처럼 입만 벙긋대다 희연과 눈이 마주치자 마지못해 노래를 불러준다.
 희연이 촛불을 끄자 아연이 준비한 축포를 터트렸다.
 귀가 먹먹해진 현성이 새끼손가락으로 귓구멍을 파다 희연의 눈총을 받고 슬그머니 내린다.
 생일상, 축가, 박수……. 현성에겐 참으로 낯선 것들이다.
 그리고 TV에서가 아닌 현실에서의 웃음소리 역시.
 “오빠, 우리 어떻게 하는 게 좋겠어? 자진 신고 기간이 이제 일주일도 채 안 남았는데.”
 그녀들의 고민은 현성의 고민이기도 했다.
 그도 아직 망설이는 중이다.
 그렇다 보니 아연의 질문에 쉽게 대답할 수 없었다.
 희연도 현성을 보았다.
 현성은 마치 이들의 가장이라도 된 듯한 기분이 들었다.
 나쁜 기분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편안하지도 않았다.
 오랫동안 혼자 살다 보니 이런 상황이 익숙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기간이 좀 남았으니 더 지켜보는 게 좋지 않을까 싶다.”
 현성이 그녀들에게 해줄 수 있는 대답은 이것이 고작이다.
 고위층에 인맥이라도 있다면 뒷구멍으로나마 이를 알아보겠지만 그런 인맥이 현성에게 있을 리 없다.
 아연과 희연 자매는 현성이 자신들의 비밀을 지켜주고, 여기에 신중하게 충고까지 해주자 든든함을 느꼈다.
 아연은 표정에 그것을 드러냈고, 희연은 시큰둥한 태도로 그가 자주 집어먹던 반찬을 그의 앞으로 스윽 들이미는 것으로 감사를 대신했다.
 표나지 않는 감사의 표시기에 현성은 이를 눈치채지 못했다.
 아연만이 여동생의 태도에 내심 놀라워했다.
 “저도 학교에서 친구들이 하는 얘기를 들었는데, 다들 무서운 소리만 하더라고요.”
 실질적인 사회생활은 현성보다 아연이 더 하는 편이다.
 학업과 일을 병행하다 보니 만나는 사람이 오죽 많겠는가.
 “소문은 소문일 뿐이야.”
 “그럼 왜 지켜보라고 하세요?”
 “매는 먼저 맞으면 아프니까.”
 “……? 그 말의 반대 아닌가요?”
 아연이 제 입술에 검지를 대며 고개를 갸웃한다.
 희연은 언니가 현성 앞에서 어리광에다 예쁜 척을 더하자 그 모습이 매번 낯설게 다가왔다.
 하지만 언니에게도 위로와 안식이 될 사람은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기에, 현성에 대한 언니의 태도가 마음에 들지 않으면서도 한편으론 이해하려고 노력했다.
 또, 현성이 그리 나쁜 인간은 아니라는 점을 느끼고 있었기 때문이다.
 “뭐든 상관없지. 어쨌든 좀 더 지켜보는 게 좋을 것 같아.”
 “아, 맞다. TV 좀 켤게요.”
 채널을 몇 번 움직이던 아연은 연예인들의 일상을 보도하는 프로그램에 멈춘다.
 현성은 연예인에 대한 관심이 전혀 없었기에, 간혹 채널을 돌리는 중 볼 뿐이다.
 나름 중대한 이야기를 하는 도중 아연이 TV를 켜자 현성은 이상히 여겼다.
 「연예가 뉴스의 창일호입니다. 요즘 스킬러에 관한 일로 전 세계가 혼란스러워 하는데요, 그 일은 연예계도 예외가 아니었습니다. 여러분, 레디핑크의 멤버 서지호 씨가 스킬러임을 밝혔습니다. 그녀는 모레, 거주지 관공서에 들러 자진 신고를 할 것이라 합니다. 현재 그녀는 외부와의 접촉…….」
 현성은 그제야 아연이 갑자기 TV를 켠 이유를 알 수 있었다.
 하긴 유명인이나 비유명인이나 가릴 것 없이 찾아온 것이 그 의문의 스킬러 카드다.
 그러니 연예인 중에도 스킬러가 없을 리 없다.
 이는 정치권이나 재계에서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문제는 이들에 대한 보도가 거의 없는 것으로 미루어볼 때 그들 역시 상황을 주시하고 있는 것이 분명할 것이다.
 정부가 정한 자진 신고 기한이 일주일도 남지 않은 상황에서 레디핑크 서지호의 결정은 숨죽이며 상황을 지켜보던 스킬러들에게 어떤 식으로든 영향을 끼칠 게 분명했다.
 그 영향은 당장 아연과 희연 자매에게서도 나타났다.
 “언니.”
 “응?”
 “언니는 어떻게 생각해? 서지호의 결정에 대해서 말이야.”
 “서지호 같은 유명한 연예인도 정부 정책에 따른다고 하니까, 마음이 흔들리네.”
 “그렇지?”
 두 사람은 현성이 자신들과 같은 스킬러일 거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현성이 밝히지 않았기 때문이다.
 아니, 물어봤다면 말해 줬을지도 모른다.
 확실하지는 않지만.
 자매가 이 상황을 어찌 생각하느냐 라는 의미를 눈에 담고 현성을 바라보았다.
 “전 인류가 스킬러 카드의 방문을 받았지. 하지만 모든 사람이 선택받지는 못했어. 만약 그랬다면 요즘과 같은 사회 분위기는 형성되지 않았을 테니까.”
 자신과 다른 존재에 대한 인간의 배척과 두려움은 늘 존재했다.
 무지에서 탈피한 현대인도 이 부분에선 예외가 아니다.
 오히려 예전과 달리 더 많은 정보를 습득하고, 접근할 수 있는 현대인의 삶을 들여다볼 때, 과거의 사람들과는 달리 다양한 방법으로 공격에 나설 수 있다.
 더욱이 방송에선 스킬러가 한 짓인지도 불분명한 사건들을 연일 경쟁적으로 부각 보도하다 보니, 이도 스킬러들에겐 악재가 아닐 수 없다.
 이종족.
 스킬러를 나와 다른 인간이 아닌, 아예 새로운 인종으로 구분하려는 사회 분위기.
 레디핑크의 서지호를 시작으로 이러한 분위기가 개선되기를 현성은 진심으로 바랐다.
 “악의적인 시선으로 스킬러를 보는 사람도 있어요.”
 아연이 말하자, 희연이 이에 수긍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현성보단 자매의 체감이 더 클 것이다.
 학교라는 공동체에 소속되어 학우들의 반응을 실시간으로 보았을 테니.
 “너 자신을 이상하게 생각하지 마라. 그건 희연이도 마찬가지야. 너희가 원해서 스킬러가 된 게 아니잖아. 모두에게 공평했던 사건이었어. 너희 모두 스킬러이기 이전에 인간, 유아연이고, 유희연일 뿐이야.”
 현성의 격려에 아연은 우울한 표정을 걷어내며 활짝 웃었고, 희연은 새로운 시각으로 현성을 보았다.
 “고마워요, 현성 오빠.”
 “말은 그럴듯하네요, 아저씨.”
 희연의 반항은 현성을 부르는 호칭에서 엿볼 수 있다.
 남자에 대한 근본적인 불신감을 희연이 가진 이상, 현성은 어쩜 평생 그녀에게 오빠란 소리는 듣지 못할 것이다.
 뭐, 그것에 연연하는 현성도 아니지만.
 하지만 분명한 것은 희연의 목소리가 이전과 달리 많이 누그러져 있다는 점이다.
 이렇듯 조금씩 친밀감은 쌓이는 법이다.
 아연이 뒷정리를 시작한다. 그 옆에서 희연도 거들자 조촐했던 생일상은 금세 치워지고 없었다.
 그리고 현성이 그간 쌓아두고 묵혀두었던 설거짓감도.
 “가볼게요. 오늘 고마웠어요, 오빠.”
 짐승의 내장처럼 꼬불꼬불하고 가파른 동네.
 취객도 있고, 부모의 관심에서 벗어나고 세상에 대한 증오와 열등감에 젖어 삐딱한 마음을 가진 녀석들이 마치 복병처럼 저곳에 있다.
 소녀 둘이 살기에는 매우 위험하다.
 그래도 같은 동네 사람은 건들지 않는다, 라는 무형의 룰이 그들 내부에 있어 큰일은 없다.
 하지만 얼마 전, 동네 불량배들이 취중이긴 했지만 아연에게 해코지를 하려고 했다.
 그렇다 보니 이 컴컴한 시간에 여자애들만 보내기가 쉽지 않다.
 “데려다 줄게.”
 “예? 아, 아니에요. 신세도 많이 졌는데.”
 “배불러서 산책하려는 거야. 가자.”
 현성이 먼저 나서자 아연이 수줍게 웃으며 그의 등을 바라본다.
 희연은 언니의 이런 모습에서…….
 ‘설마…… 저 아저씨 좋아하는 거야?’
 
 * * *
 
 “상배야, 괜찮을까?”
 “시발, 괜찮지 않을 게 뭐야. 오늘 내 그 도도한 년 밑구멍에 금테가 둘렸는지 보고야 말겠어!”
 네 명의 청소년들이 깨진 가로등 아래 모여 있다.
 덩치도 크고 인상도 제법 험악한 것이 청소년의 탈을 쓴 깡패 같다.
 담배를 하나씩 물고 있는 이들의 모습은 동네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불량 청소년의 전형적인 모습이다.
 “그 새끼가 가만있을까?”
 “지가 가만있지 않음 어쩔 거야? 전엔 우리가 놈을 잘 몰라서 당했을 뿐이야. 숫자도 우리가 많고 덩치도 우리가 더 커. 오늘은 아연이 년 따먹고, 다음엔 그 새끼를 조져버릴 거야.”
 상배의 넘치는 자신감에 세 아이는 불안한 표정을 짓는다.
 이들은 아연에게 치근덕거리다 현성에게 걸려 된통 혼이 난 녀석들이다.
 하지만 이들의 마음에, 특히 무리의 우두머리인 상배에겐 그 일들이 깊은 앙심으로 남아 있었다.
 자신만만한 상배의 태도에 다들 속으로 한숨을 쉰다.
 레벨이 다른 싸움꾼.
 세 아이가 겪어본 현성은 액션 영화에서나 등장할 법한 전투의 달인이었다.
 그런 자의 보호를 받는 아연을 건드리자니, 주저되고 겁이 난다.
 하지만 리더가 저리 자신만만해 하니 어디 믿을 곳이라도 생겼나 보다, 라고 여기며 다들 마지못해 그의 뜻에 동의했다.
 가는 날이 장날이란 말이 있다.
 현성과 아연, 희연이 골목길을 올라오고 있었다.
 자매의 집으로 가려면 산동네 공터를 지나야 한다.
 “사, 상배야. 장의사 새끼도 함께야!”
 “이런, 썅.”
 “하필이면 저 새끼가.”
 상배의 똘마니들이 당황하며 서로 바라보다, 곧 상배에게로 고개를 돌린다.
 “잘됐네, 잘 됐어. 일석이조지.”
 현성도 마침 이들을 보게 되었다.
 아연과 희연이 움찔한다.
 자매는 스킬러였지만, 비전투 능력이다.
 그러니 상배와 그 일당의 상대는 현성 단 하나뿐이다.
 상대의 숫자가 넷이었지만 현성은 담담했다.
 “오, 오빠. 되돌아가요.”
 아연이 떨리는 음성으로 현성에게 말했다.
 지금 달아나면 거리가 있어 따돌릴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그렇게 간다고 일이 해결되는 것은 아니다.
 저들 모두 자매의 집을 알고 있다.
 다행히 자매가 세 들어 사는 집은 여러 가구가 모여 있어 녀석들도 거기선 함부로 할 수 없다는 이점이 있지만, 언제까지 집안에 있을 수도 없는 노릇인데다가 제 식구도 아닌 타인의 일에 제 불편함을 감수하며 나설지도 알 수 없다.
 다들 하루 벌어 하루 먹고 사는 고단한 처지이기 때문이다.
 “너흰 여기 있어.”
 “나도 도울게.”
 희연이 말하며 현성과 나란히 선다.
 현성이 희연을 돌아보며 고개를 내젓는다.
 희연의 능력은 관통이다.
 대상을 구멍 내는 능력이 아니라, 이를 통과하는 능력이다.
 이는 지속 능력으로 분류되며 시간은 1분 안쪽이다.
 쓰기에 따라서는 전투에 도움이 되긴 하지만 싸움이 1분 안에 끝난다는 보장이 없는 한, 희연은 도리어 현성에겐 걸림돌일 뿐이다.
 “언니나 지키고 있어. 내가 위험하면 그때 도와주든가.”
 “아저씨, 자신 있어?”
 현성이 제 언니를 구해 주었다는 것은 희연도 알고 있다.
 하지만 실제 현성이 싸우는 모습을 본 적이 없었기에, 겉으로 드러난 현성의 평범한 마른 체형이 그녀로서는 미덥지 못했다.
 피식.
 현성의 눈엔 희연이 단단히 겁을 먹고 있음이 보인다.
 하지만 예민한 사춘기 소녀에게 이를 말할 수는 없었다.
 그래서 그냥 믿어보라! 는 뜻에서 웃음을 지었을 뿐이다.
 현성이 앞으로 나서자 이를 기다렸다는 듯 상배가 으스대며 앞으로 나왔다.
 상배의 똘마니들이 그를 돕기 위해 앞으로 걸어 나온다.
 상배는 이를 저지했다.
 “잘 봐둬라. 저 새끼 내가 오늘 병신으로 만들고 말 테니까. 흐흐흐.”
 저 끝없는 자신감.
 세 똘마니는 상배의 이런 자신감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
 현성에게 얻어터진 건 비단 자신들만이 아니었기에.
 어디 벼랑 아래 동굴에서 무공 기연이라도 얻은 걸까? 그렇지 않고서야 어찌 저리 당당할까.
 현성은 현성대로 상배의 자신만만한 태도가 의아했다.
 ‘못 먹을 거라도 먹었나?’
 현성이 이리 생각하고 있을 때, 상배가 현성에게 소리쳤다.
 “야, 장의사! 남자답게 일대일로 붙어보자. 이건 정정당당한 승부니까, 신고하거나 깽값 달라 하기 없기다. 동의냐, 아니냐? 아니면, 그냥 꺼져라.”
 상배의 거들먹거리는 태도에 현성은 한심하다는 듯 말없이 피식거렸다.
 이것이 상배를 도발한다.
 “그래, 지금은 웃지. 하지만 곧 그 웃음이 피눈물로 대체될 거다. 이 씨. 발. 놈. 아! 우아아아와!”
 성난 멧돼지처럼 상배가 현성을 향해 돌진했다.
 먼저 움직이는 쪽이 허점을 드러내게 마련이다.
 현성은 내심 한숨을 내쉬었다.
 이 나이에 고딩과 주먹질이라니, 열여덟이나 스물둘이나 별 차이도 없구만.
 ‘헛!’
 현성이 내심 신음을 흘린다.
 무작정 달려드는 상배의 움직임이 갑자기 빨라졌기 때문이다.
 잽싸게 옆으로 피한 현성은 대기를 갈라버리는 매서운 파공음을 들었다.
 주먹을 날린 상배는 자신의 공격이 실패했지만 이에 신경 쓰지 않았다.
 공격 실패로 몸의 중심이 흐트러진 상배는 그 자세를 가다듬지 않고 곧장 현성을 향해 주먹을 내질렀다.
 주먹엔 힘이 실려 있지 않았다.
 견제용 동작 그 이상의 의미는 없었다.
 현성은 상배의 힘이 예사롭지 않다는 걸 앞서의 공격을 통해 느낄 수 있었다.
 견제로밖에 볼 수 없는 상배의 공격을 현성은 팔뚝으로 막았다.
 공격을 막음과 동시에 상대를 제압하려는 목적이 깔린 방어였다.
 한데!
 빠아악, 콰직!
 “크흑!”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상배의 견제용 공격을 막은 현성의 팔뼈가 마치 썩은 잔가지처럼 그만 뚝 하고 부러진 것이다.
 이 장면은 모두에게 큰 충격을 안겨 주었다.
 특히, 아연과 희연에게.
 “악! 오빠!”
 “……!”
 아연이 놀라 비명처럼 그를 불렀고, 희연은 깜짝 놀란 듯 두 눈을 토끼처럼 떴다.
 가벼운 접촉임에도 불구하고 팔뼈가 부러진 현성.
 그는 부러진 팔을 수습한 뒤 백스텝으로 물러섰다.
 상배는 느긋한 태도로 자세를 바로잡으며 마치 호랑이가 강아지를 쳐다보듯 거만하게 노려보았다.
 “장의사 새끼야. 이제 이 형님의 실력을 알겠냐?”
 현성은 상배의 거들먹거림에 대꾸하지 않았다.
 방금 전의 일격은 인간의 것이 아니다.
 마치 차량에 부딪친 충격이다.
 팔뿐만 아니라 몸 전체가 충격의 여파에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저 녀석…… 스킬러인가?’
 그렇지 않고서는 말이 안 되는 상황이다.
 현성이 신중한 눈빛으로 상배를 본다.
 상배는 팔뼈가 부러졌음에도 고분고분하지 않은 현성의 태도에 찜찜함을 느꼈다.
 
 째깍째깍.
 시간은 흐르고 있었다.
 상배는 자신의 시계를 내려다보며 약간은 불안한 표정을 드러냈다.
 현성의 예상대로 상배는 스킬러다. 그것도 괴력의 스킬러.
 45초!
 상배는 스킬러의 유지 시간이 앞으로 15초밖에 남지 않은 것에 당황했다.
 하지만 상대는 이미 팔뼈가 부러진 상황이라 스킬러의 능력이 다하더라도 충분히 이길 것이라 확신했다.
 한 번만 더 치면 상대가 죽을지도 모른다.
 이 생각이 들자 상배는 스킬러의 힘으로 현성을 공격하지는 않았다.
 폭행죄와 살인죄는 엄연히 다르기 때문이다.
 “장의사 새끼, 완전 수수깡이네. 야, 저 새끼 조져라. 입에서 살려달라는 말이 튀어나올 때까지.”
 “어, 어…… 알았어.”
 상배의 압도적인 승리에 넋이 나가 있던 똘마니들이 그제야 움직인다.
 썩은 고기를 찾아 떠도는 하이에나 떼처럼 말이다.
 하지만 여기에 순순히 당할 현성이 아니다.
 팔 하나를 못 쓰고, 또 여기서 퍼져 나오는 고통이 몹시 크긴 했지만.
 현성은 사정 봐주지 않고 세 똘마니를 상대했다.
 상배는 제 똘마니들이 현성을 충분히 제압할 것이라 생각하곤 아연과 희연에게로 걸어갔다.
 아연의 얼굴은 눈물과 분노로 가득했다.
 희연 역시 마찬가지다.
 희연이 아연의 앞을 가로막으며 상배를 사납게 쏘아보았다.
 상배는 표독스럽게 쳐다보는 자매의 눈총을 오만한 표정으로 무시했다.
 그때, 뒤에서 격타음이 연이어 터졌다.
 “억!”
 얼굴에 머리가 틀어박힌 똘마니 하나.
 “컥!”
 명치가 무릎에 찍힌 또 하나.
 “크흑!”
 관자놀이에 팔꿈치가 찍혀 쓰러지는 마지막 하나.
 전방을 보고 있던 자매는 부상당한 현성이 세 똘마니를 순식간에 때려눕힌 것에 놀라 다들 입만 뻐끔거렸다.
 전날 현성의 실력을 본 아연도 마찬가지다.
 상배는 상배대로 들려온 신음이 세 마디이자 이에 깜짝 놀랐다.
 현성이 다친 제 팔을 몸에 붙인 채 상배를 쏘아보며 걸어온다.
 화르르.
 현성의 몸이 불꽃을 피워 올리고 있는 듯하다.
 상처받은 맹수와 같은 현성의 그 기세에 상배는 오줌을 지릴 뻔했다.
 상배의 상식에선 팔이 부러지면 싸움은커녕 반항도 못 한 채 벌벌 떨며 쓰러져 있어야 한다.
 제 상식이 파괴된 상배는 그래서 당황함이 목구멍까지 차올라 있었다.
 “어, 어…… 떻게?”
 순간 상배는 현성도 자신과 같은 스킬러가 아닐까? 라는 생각을 했다.
 그렇지 않고서는 눈앞의 저 상황이 납득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너…… 너도 스, 스킬러냐?”
 “너희 같은 고딩은 이 한 손으로도 충분하다. 싸움은 겉멋이 아니야.”
 타닥타닥타닥.
 현성이 상배를 향해 빠르게 뛰어든다.
 그의 기세에 놀란 상배는 몸을 움츠린 채 양팔로 머리를 보호했다.
 현성의 발끝이 상배의 정강이를 찬다.
 그 충격에 상배의 방어가 풀렸다.
 이를 기다렸다는 듯 현성은 자연스럽게 녀석의 이마에 제 이마를 들이박았다.
 빠아아악!
 상배는 그 순간 찬란한 백광을 보았다.
 흐물흐물한 스파게티의 면발처럼 상배는 그 자리에서 주저앉았다.
 의식을 완전히 잃은 듯 상배의 동공이 마치 텅 빈 것 같았다.
 털썩.
 양아치 넷을 순식간에 기절시킨 현성은 그제야 고통에 얼굴을 찡그렸다.
 그의 몸은 식은땀으로 흠뻑 젖어 있었다.
 “오, 오빠!”
 아연이 달려와 현성의 팔을 잡는다.
 작은 이 접촉에도 현성은 통증에 기절할 것만 같았다.
 하지만 여기서 쓰러지면 뒷일이 감당 되지 않는다.
 현성은 이를 악물며 도망가는 제정신을 겨우 붙잡았다.
 “음…… 아프다, 그만 잡아라.”
 화들짝 놀란 아연이 그의 몸에서 손을 뗀다.
 그녀의 얼굴에 걱정과 염려가 가득 채워져 있었다.
 “바, 바보같이 그 몸으로 왜 싸워!”
 “그만해. 머리까지 울려. 너희끼리 가라. 아무래도 난 병원에 가봐야겠다.”
 팔뼈가 부러졌으니 몇 개월은 불편한 깁스 상태로 살아야 한다.
 당장, 세수며 빨래며 청소며 가게 문은 어쩐다.
 일상의 소소한 것들이 거대한 부피의 부담감으로 현성에게 다가온다.
 이래서 혼자 사는 사람은 아프면 안 된다. 아픈 만큼 근심·걱정도 늘어나니까.
 ‘하아, 그게 더 무섭군.’
 하지만 현성이 여기서 깜빡한 게 있었다.
 아연이 치유의 스킬러라는 것을.
 
 * * *
 
 청량한 기운이 몸 전체를 감싸자 현성의 부러진 팔은 언제 그랬냐는 듯 순식간에 아물어 버렸다.
 이 놀라운 현상을 일으킨 주인공은 아연이었다.
 희연 역시 언니의 놀라운 치유능력에 깜짝 놀란 듯 신기한 표정으로 제 언니와 현성의 팔을 번갈아 본다.
 이곳은 자매의 집이다.
 여자애들이 사는 집이라 남다를 것 같다는 착각은 금물이다.
 걸레는 빨아도 행주로 사용할 수 없듯, 낡고 오래된 이 집은 요단 강을 앞둔 세상 다 산 노인네다.
 이러니 꽃단장하면 그건 상여밖에 안 된다.
 그래도 현성의 집과 달리 참 깨끗하다.
 “괜찮아요, 오빠?”
 현성은 제 팔을 휘둘러보고, 주물러보고, 살펴보느라 정신이 없었다.
 웬만한 일엔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는 그였지만 아연의 능력에는 정말 크게 놀라고 말았다.
 “어, 어. 아연이 같은 스킬러가 많으면 병원과 약국은 다 문 닫아야겠네.”
 아연의 치유 능력도 일일 1회에 한해서다.
 하지만 시간과 돈과 고통이라는 인내의 삼박자를 매일 치르고 살아야 하는 환자들에게 아연은 구세주와 다름없다.
 스킬러의 능력은 누군가를 다치게 하고, 곤혹스럽게 하는 것 외에도 이처럼 세상에 이로움을 주는 것도 있다.
 문제는 아연과 같은 치유의 스킬러들이 본격적으로 활동하면 제 밥그릇을 염려한 각종 협회에서 가만히 두고만 보지 않을 것이라는 데 있다.
 “괜찮다니 다행이에요. 저희 때문에 다치시고, 휴우.”
 상배가 스킬러임을 확인한 이상 그의 존재는 떨칠 수 없는 심중 복병이다.
 놈이 방심하지 않고 현성을 끝까지 물고 늘어지면 평범한 그가 감당할 수 없을 것 같았다.
 아연의 눈엔 그래서 걱정이 가득하다.
 “신고하는 게 좋지 않을까?”
 희연도 현성이 걱정된 듯 상배를 신고하는 게 어떻겠냐는 뜻을 내비쳤다.
 아연과 현성이 희연을 본다.
 이에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돌려버리는 희연이다.
 “오빠, 희연이의 생각대로 하는 게 좋겠어요. 그놈이 앙심을 품고 또 오빠를 노린다면…….”
 뒷말은 굳이 할 필요가 없다.
 아연이 말끝을 흐렸지만 뒤에 이어질 말을 현성은 짐작했다.
 확실히 상배의 능력은 위협적이다.
 오늘은 놈의 자만심이 놈을 패배자로 만들었지만 내일은 알 수 없다.
 인간은 바위가 아니다. 성장한다.
 그런 점에서 상배의 성장은 현성에게나 아연, 희연 자매에게도 곤란하다.
 “그건 내가 알아서 해결할게. 그보다…….”
 주방과 하나인 거실과 방 하나가 전부인 초라한 자매의 집.
 창문엔 투명 테이프가 반창고처럼 덕지덕지 붙어 있다.
 가재도구 역시 어디서 구타를 당했는지 곳곳에 수리한 흔적이 훤히 보인다.
 가난과 아버지의 폭력에 시달리며 살았을 자매의 지난 삶의 흔적이 초라한 집 곳곳에 문신처럼 새겨져 있다.
 똑똑.
 “아연이 있냐?”
 짜증이 묻어 있는 여성의 음성이 부실한 현관문 밖에서 들려온다.
 이 목소리를 들은 자매의 얼굴이 동시에 굳어진다.
 현성은 자기 때문에 저러나 싶었다.
 아연이 밖에 나갔다.
 “아연이 너도 알지? 더 이상 봐줄 수 없어. 그만 집을 비워줬음 싶다.”
 여자의 음성은 매몰찼다.
 아연은 사정 조로 집주인 여자에게 부탁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죄송해요, 아주머니. 조금만 기다리시면 보증금을 마련해서 드릴게요.”
 “그 말한 지가 벌써 넉 달이야. 미안하지만 이번 주 안으로 집을 비워줬으면 좋겠어. 아니면 보증금을 내던가. 그것도 어려우면 월세를 20만 원을 더 내든가.”
 아연이 성실하게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었지만 지금 내는 월세에서 20만 원을 더 내라는 것은 집을 비우라는 소리와 다름없다.
 자매의 아버지는 이 집에 걸려 있는 월세 보증금을 모두 노름판에서 잃어버렸다.
 아버지가 아니라 원수도 이런 원수가 없음이다.
 아연이 쩔쩔매며 사정을 했지만 집주인 여자는 요지부동이다.
 방 안에 있던 희연은 자신들의 치부가 현성에게 드러나자 얼굴조차 들지 못한 채 몸을 바들바들 떨었다.
 수치스럽기도 하고 두렵기도 할 것이다.
 이 넓은 세상천지에 제 몸 하나 뉘일 곳이 없다는 것은 무서운 일이다. 아니 뼈저리게 슬픈 일이다.
 희연을 바라보던 현성은 곧 시선을 돌렸다.
 테이프가 덕지덕지 붙은 창문 너머로 홀쭉한 초승달이 보인다.
 오늘따라 초승달이 참 가난해 보이는 현성이다.
 일방적인 통고를 끝낸 집주인 여자가 돌아갔다.
 아연은 바로 들어오지 않고 밖에서 서성이다 충혈된 눈으로 들어왔다.
 그러곤 현성을 향해 웃어 보인다.
 “다 들었다. 이 집…… 방음이 별로더군.”
 현성의 말에 희연이 날카로운 표정으로 그를 본다.
 하지만 곧 고개를 떨어뜨린다.
 아연은 씁쓸한 표정으로 말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하아.
 깊은 한숨을 토해내며 현성이 자매를 향해 하나의 제안을 던졌다.
 “내 집에 빈방이 좀 있는데, 괜찮다면 들어와 살아도 된다. 보증금도 월세도 필요 없어. 아! 그렇다고 공짜는 아냐. 입주 가정부 알지? 밥 해주고 청소 해주고 그럼 된다.”
 자존심이 강한 사춘기 소녀 희연, 성실하고 반듯한 성품의 아연.
 두 자매의 기분을 생각하여 나름 신경 써서 제안한 현성이다.
 겉으론 무심하고 무뚝뚝해 보여도 속정이 참 깊은 청년이 바로 현성이다.
 물론 모두에게 그러지는 않는다.
 순수함으로 자신에게 다가와 준 아연이 기특해서 도움의 손길을 내밀 뿐.
 그리고 오늘처럼, 좀 시끄럽고 어색하긴 했지만 함께 밥 먹고 TV 보는 것도 그리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즉흥적이긴 해도 나름 고민해서 내린 결정이자, 제안이다.
 “염치없지만…… 받아들일게요. 고마워요, 현성 오빠.”
 내심 자매가 자신의 제안을 거절하면 어쩌나 걱정했던 현성은 아연이 순순히 이를 받아들이자 한시름 놓을 수 있었다.
 문제는 희연이다.
 아연이 희연에게 뭐라 말을 하려던 찰나 희연이 벌떡 일어난다.
 현성과 아연은 희연이 상처받은 게 아닐까 싶어 다들 걱정된 눈으로 그녀를 보았다.
 하지만 이들의 걱정은 기우에 지나지 않았다.
 “지긋지긋한 골목길 벗어나서 좋네. 언니 짐 챙겨. 당장 떠나자. 나 이 동네 너무 싫었어.”
 희연이 지나간 비닐 장판 위에 물방울이 출렁이고 있다.
 이것이 그녀의 마음이리라.
 현성과 아연은 말없이 짐을 챙기는 희연의 가녀린 등을 바라보았다.
 
 * * *
 
 현성은 오랜만에 시내에 나왔다.
 압구정은 밤이 화려하다. 물론 낮에도 멋진 건물들과 고가의 외제 차들이 범접할 수 없는 아우라를 뿜는다.
 그리고 거리에 다니는 아름다운 선남선녀들. 한데 여자들은 어찌 그리 얼굴이 다 비슷비슷할까? 마치 쌍둥이들을 보는 것 같다.
 일부에선 저런 여자들을 성괴(성형괴물)라고 부른다.
 노천 카페를 찾은 현성은 밖에서 차를 마시고 있었다.
 ‘하아, 잘할 수 있으려나.’
 늘 혼자 생활하던 현성이다.
 그런 그가 3일 전부터 집안에 동거인을 들였다.
 아연과 희연 자매다.
 적막함이 꼭 묘지 같던 그의 집은 자매의 출현으로 활기와 향기를 띠었다.
 낯선 분위기, 그렇다고 그것이 나쁜 건 아니었다.
 애매함과 편안함이 그의 마음에 시소를 타며 공존한다.
 “현성 씨죠?”
 생각에 잠겨 있던 현성에게 다가온 여자. 현성이 고개를 돌리니 눈에 익은 얼굴이 서 있다.
 자리에서 일어선 현성은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오늘 그가 만나기로 한 사람은 여자가 아니라 남자다.
 그리고 이 여자와 그 남자는 한 조로 움직인다.
 그래서 남자를 찾기 위해 주위를 두리번거린 것이다.
 “상철 오빠는 못 와요. 약속 못 지켜서 미안하다고 대신 전해 달래요. 그리고 저도 바쁘니까, 용건만 간단하게. 일단 앉죠.”
 현성이 자리에 앉자 인경이 곧장 본론으로 들어간다.
 바쁘긴 확실히 바쁜가 보다.
 
 
 
 
 
 3장 미소녀 자매 세입자
 
 
 
 
 
 “무슨 일이세요? 최동석이란 아이 이야기면 기밀이라 밝힐 수 없어요. 그리고 그쪽이 그 아이의 보호자도 아니니 밝힐 의무가 제겐 더더욱 없고요.”
 딱 부러지는 성격의 인경은 제 말을 마친 듯 용건을 말해보라는 청자의 자세를 취해주었다.
 이 자세가 아니었다면 현성은 인경을 밥맛없는 인간으로 매도해 버렸을 터였다.
 어쨌든 보자고 한 쪽은 자신이니, 이유를 말해야 한다.
 하지만 상대가 자신이 원하던 박상철이 아니었기에 현성은 고민했다.
 “저 바쁘다고 했죠? 할 말 없으면 일어나야 해요.”
 외국영화를 보면 거기선 꼭 이런 말이 나온다.
 3분의 시간을 주겠어, 그 안에 용건을 말해…… 라고.
 그 상황을 직접 겪어보니 황당한 기분이 드는 현성이었다.
 하지만 바보처럼 말도 못하는 성격은 아니니 그도 본론으로 들어갔다.
 “바쁘시다니 본론으로 들어가겠습니다.”
 이리 운을 뗀 현성은 품속에서 곱게 접은 종이 한 장을 꺼내어 인경에게 내밀었다.
 “이건 뭐죠?”
 “보시면 압니다.”
 현성 특유의 무심한 표정과 무뚝뚝한 음성은 거슬릴 수 있었다.
 하지만 인경은 이를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종이를 펼쳐 든 인경은 눈살을 찌푸리다가 현성을 바라보았다.
 현성이 인경에게 건넨 것은 3일 전에 이상배와 관련된 사건 내용과 그의 현 거주지를 적은 쪽지였다.
 “그 학생이 분명 스킬러가 맞나요?”
 현성은 깁스한 자신의 팔을 들어 보였다.
 물론, 이 깁스는 아연을 감싸주기 위한 위장용이다.
 법치주의 국가에서 사사로이 사람을 때리고, 죽일 수는 없지 않은가.
 그러니 법의 테두리 안에서 현성의 선택은 폭이 좁을 수밖에 없다.
 엉덩이를 가볍게 들썩이던 인경은 묵직하게 자세를 잡고 앉으며 약간은 사무적인 느낌의 눈빛으로 현성을 보았다.
 “스쳐 맞았는데도 팔이 부러지는 건 평범한 일이 아니죠. 조사해 보시면 밝혀질 내용입니다.”
 자신만만한 현성의 태도에 인경은 핸드폰을 꺼내어 어딘가로 전화를 걸었다.
 “상철 오빠, 난데, 응. 만났어. 그래, 미안하다고 대신 말해줬어. 내가 무슨 나무토막이야? 안 딱딱하게 친절하게 말했어. 그보다 최동석을 잡은 그 동네에 새로운 스킬러가 있다는데, 그게…….”
 주절주절.
 “어, 알았어. 조사팀에 연락해 놓을게. 참, 정양옥 씨 아직도 있어? 하아, 그 아주머니도 참 대단하다. 어떻게 며칠 동안 그 자리에서 꿈쩍도 안하고 그럴 수가 있지? 그래, 알았어. 금방 들어갈 거야. 그래.”
 현성은 정양옥이 자신의 아들을 면회하기 위해 국정원 특수국에 있음을 인경의 통화 내용을 듣고 알 수 있었다.
 “정양옥 씨는 현성 씨도 알죠?”
 “압니다. 그런데 뉴스에선 최동석 사건이 보도되지 않던데, 왜 그런 거죠?”
 “사회적인 파장을 생각해서 그래요. 스킬러의 범죄가 언론에 자주 노출되다 보니 국민들의 불안감이 점점 커지고 있잖아요. 우리가 마귀도 아닌데 말이죠. 그러고 보면 우리를 바라보는 현성 씨의 시선은 그리 나쁘지 않네요. 현성 씨를 공격한 이상배란 아이도 스킬러, 그런 일을 당하면 보통 우리를 괴물처럼 볼 것 같은데 말이죠.”
 인경의 목소리엔 그녀 개인의 고충이 들어 있었다.
 현성은 이를 느꼈지만 상대의 기분 따위를 맞춰줄 의무가 없었기에 넘겨버렸다.
 “볼일이 끝났으니 전 가보겠습니다. 참, 최동석은 앞으로 어찌 됩니까?”
 “제정된 특별법에 따라 범죄 유무가 증명되면 옥살이를 하겠죠. 스킬러도 대한민국의 국민이니까, 공평한 재판을 받을 거예요.”
 “그렇군요.”
 더 이상 물어봐야 인경에게선 매뉴얼 그 이상의 대답은 듣기 힘들 것 같았다.
 “이 제보 고마워요. 사실로 판명되면 제가 술 한 잔 사죠.”
 “알겠습니다, 그럼.”
 스킬러 자진 신고를 독촉하는 현수막이 보인다.
 어디서나 흔히 볼 수 있는 것들이다.
 앞으로 3일 남았다.
 ‘하아, 어쩐다. 그런데 조사팀이라? 분업화 시스템인가.’
 조사는 말 그대로 자세히 살펴보는 것이다.
 대체 어떤 방식으로 조사를 한다는 걸까? 현성은 특수국이 보유한 그들의 능력이 궁금해졌다.
 이러한 궁금증도 그 자신과 아연, 희연 자매가 스킬러이기에 느끼는 감정이다.
 빵빵빵!
 “야 이 개새끼야! 왜 길을 쳐 막고 지랄이야. 이 길 네가 전세 냈어! 앙!”
 20대 초반으로 보이는 핑크색 머리의 남자가 현성을 향해 소리친다.
 남자가 타고 있는 차는 고급 외제 승용차다.
 상대의 욕설에 현성은 눈살을 찌푸렸다.
 잠시 딴생각을 하느라 현성은 차도에 걸쳐서 걷고 있었다.
 그렇긴 해도 여긴 일방통행로. 뒤의 차량은 위법을 저지르고도 큰소리를 뻥뻥 치고 있었다.
 이것이 이 거리의 일상일까? 아무도 저 핑크색 머리의 남자를 향해 손가락질하지 않는다.
 오히려 일부 여자들은 그 자리에서 고급 외제 차를 몰고 다니는 거친 이 남자에게 추파까지 던졌다.
 현성은 그 여자들에게서 썩은 악취를 맡았다.
 ‘역한 거리군.’
 현성은 길을 비켜주었다.
 핑크색 머리의 남자가 그에게 가운뎃손가락을 보이고 히죽거리며 지나쳐갔다.
 불법을 저지르고도 당당한 녀석.
 명품으로 제 육신을 치장한 화려한 차림의 행인들은 오히려 현성을 한심한 눈으로 본다.
 그가 이 거리의 오염물질이라도 되는 듯 말이다.
 
 * * *
 
 더러운 기분을 외관만 화려한 거리에 놓아둔 현성은 예의 그 무심한 표정으로 가게로 돌아왔다.
 깨끗하고 화려한 그 거리와 달리 현성이 사는 동네는 인간적인 냄새가 물씬 난다.
 물론, 그의 가게 맞은 편 빵집 주인은 그 인간미가 지나쳐 불쾌감을 느끼게 하지만.
 ‘애들 올 때가 됐군.’
 사교육비는 이 시대가 떠안고 있는 골칫거리다.
 대부분의 학생은 이 사교육의 유무를 통해 자신의 처지를 깨닫는다.
 가난이 죄가 된 세상.
 그 죄는 유전병처럼 아래로, 아래로 대물림된다.
 그래서 세상은 희망과 동떨어진 곳으로만 달리고, 또 달린다.
 가게에 앉은 현성은 밖을 보았다.
 거리는 한산하고, 사람들의 옷차림도 이 한산함처럼 검박하다.
 그러나 그들은 그 누구보다 부지런하다.
 그럼에도 가난이 저리 붙어 다니는 것은…….
 ‘짜장면이나 시켜야겠군.’
 현성의 점심은 늘 짜장면과 군만두다.
 그의 이 입맛은 몇 년째 변하지 않았다.
 현성은 중국집에 음식을 주문한 뒤 식사가 오기를 기다렸다.
 여전히 가게 문을 열고 들어오는 손님은 없다.
 저건, 벽이 아닌데.
 편안한 자세로 앉은 현성은 유일한 취미 생활인 독서를 시작했다.
 책이 가진 고유의 냄새와 활자를 현성은 좋아한다.
 새 책은 별로고 헌책을 좋아한다.
 그렇다고 기를 쓰며 모으지는 않는다.
 거칠지만 투박한 질감과 페이지가 넘어가는 소리를 그는 좋아한다.
 비라도 내리면 좋으련만, 야속한 하늘은 봄 가뭄을 여름까지 가져갈 생각인지 늘 쾌청한 하늘만 보여준다.
 황사 낀 하늘보다야 낫지만.
 짜장면이 배달되자마자 희연이 들어왔다.
 비닐 포장지에서 나무 젓가락을 꺼내 짜장면을 비비던 현성은 동작을 멈추었다.
 “밥은?”
 “먹었어요.”
 “그렇구나.”
 “짜장면을 좋아하나 봐요. 매일 점심은 짜장면을 드시네요.”
 현성은 희연이 이리 말을 오래 붙여주자 그게 신기했다.
 보통은 간단하게 한두 마디만 하고 올라가 버렸는데……. 설마 짜장면이 먹고 싶은 걸까?
 “먹을래?”
 “먹었다고 했잖아요.”
 “그렇구나.”
 희연이 현성을 스쳐 지나간다.
 그때, 그녀의 배에서 꼬르륵 소리가 났다.
 밥이 들어간 위장은 절대 저러한 소리를 내지 않는다.
 얼굴이 빨개진 희연이 후다닥 계단으로 뛰어가 버린다.
 ‘안 먹었군.’
 사춘기 여자아이, 참 어렵다.
 후루룩.
 “앗! 단무지.”
 중국집은 늘 단무지를 박하게 준다.
 사람이 쥐새끼도 아니고, 어찌 저 조그마한 단무지를 야금야금 씹어 먹는단 말인가.
 현성은 2층으로 올라갔다.
 냉장고에서 물을 꺼내 마시던 희연과 현성이 마주친다.
 현성의 입가에 묻은 짜장면 자국을 보며 희연이 한마디 한다.
 “어른이 왜 음식을 입가에 묻히고 다녀요.”
 “아, 짜장면은 원래 그런데.”
 “…….”
 “단무지 좀 꺼내줘.”
 나직한 한숨과 함께 희연이 단무지를 꺼낸다.
 노랑물이 찰랑대는 큼지막한 플라스틱 통.
 “그런데 단무지는 왜 이렇게 많이 사놓은 거죠?”
 “짜장면엔 단무지잖아.”
 “중국집에서 주잖아요.”
 현성은 오늘따라 희연이 자신의 말을 많이 받아준다는 데 다시 한 번 놀랐다.
 자신과 친해지기로 결심한 것일까? 반가운가, 그렇지 않은가? 잠시 이를 생각하다 곧 머릿속에서 털어버렸다.
 짜장면은 오래 두면 떡이 된다. 떡이 된 짜장면은 정말 맛이 없다.
 “양이 적어.”
 “더 달라고 하면 되잖아요. 그 집 단골 같은데.”
 “한국 사람은 단골한테 오히려 인심이 박해.”
 희연은 그의 말을 이해하지 못한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하지만 그녀가 어찌 알까? 세상이 상식과는 별개로 돌아간다는 사실을.
 “짜장면 먹을래?”
 “시, 싫어요.”
 “음…… 맛있는데.”
 “혼자 많이 드세요.”
 배고픔을 들켰다는 생각에 그녀는 몹시 민망해하고 있었다.
 어지간하면 모른 척 넘어갈 것이지, 또 눈앞에서 짜장면 타령하는 현성이 못내 얄미운 희연이다.
 “그럼, 군만두라도 먹을래? 짜장면 소스를 듬뿍 찍어서 먹으면 맛있는데.”
 “지금 나 놀리는 거죠? 가난한 계집애가 굶고 다니는 게 불쌍해서…… 동정하는 거죠!”
 희연의 두 눈이 붉게 충혈되었다. 몸도 바들바들 떤다.
 그리고 그 눈에서 닭똥 같은 눈물이 뚝뚝 떨어진다.
 진심으로 현성은 그녀를 울릴 생각이 없었다. 놀릴 생각은 더더욱 없었다.
 그냥 할 말이 없어 권했을 뿐이다.
 아연은 대하기 쉬운데, 그녀보다 어린 희연은 참으로 상대하기 어렵다.
 역시, 사춘기 여중생은…….
 ‘난적이군.’
 
 * * *
 
 다음 날, 현성은 평소보다 늦게 짜장면을 시켰다.
 그의 주문을 받은 중국집 사장은 깜짝 놀랐다.
 요 몇 년 동안 극락 장의용품점에선 짜장면 하나와 군만두 하나만 시켰었다.
 한데, 오늘은 짜장면 두 그릇을 주문했다.
 듣기로 그 집에 두 명의 소녀가 세 들어 산다고 하긴 했는데…….
 “별일이네. 야, 김 군아! 극락에 짜장 둘 군만두 하나다. 서비스로 단무지 하나 더 갖다 줘라.”
 짜장면이 현성의 가게에 배달된다.
 그리고 5분이 채 안 되어 희연이 학교에서 돌아왔다.
 탁자에 오른 짜장면 두 그릇과 군만두, 그리고 단무지 접시 두 개.
 현성은 희연을 보며 특유의 무뚝뚝한 음성으로 말했다.
 “짜장면은 두 개를 시켜야 단무지를 많이 주는구나.”
 생활의 발견. 현성은 오늘에서야 이를 알았다.
 희연은 그 자리에 서서 꼼짝도 하지 않았다.
 오늘도 그녀는 급식을 받지 못했다.
 학교에 신청하면 급식을 공짜로 먹을 수 있었지만 자존심이 강한 이 사춘기 여중생은 구걸로 제 배를 채우기는 싫었다.
 그래서 늘 그녀의 점심은 수돗물이었다.
 친구들에겐 점심 다이어트가 몸매 형성에 좋다는 유언비어를 퍼트리면서.
 배고플 때 짜장면 냄새는 사람을 환장하게 한다.
 그건 희연도 마찬가지다.
 “왜 두 개나 시킨 거죠? 그거 설마…….”
 날 동정해서냐! 라고 따지려던 희연은 그 말을 다하지 못했다.
 현성이 나무젓가락을 그녀에게 던졌기 때문이다.
 엉겁결에 이를 받아든 희연은 인상을 찡그렸다.
 “내 집에 들어와 살면, 내 가족이다. 그리고 가족은 함께 밥 먹는 거라더군. 와서 먹어. 짜장면 불면 떡이 된다. 떡 된 짜장면은 놀랍게도 맛이 없어.”
 무심한 표정과 무뚝뚝한 말투에서 현성의 마음이 둔중하게 희연의 가슴을 두드린다.
 현성은 희연을 쳐다보지도 않고 후루루 짭짭 군침을 유발하는 소리를 내며 짜장면을 먹었다.
 나무젓가락을 쥔 희연은 그 자리에서 꼼짝도 안 하고 서 있다가 나직이 한숨을 내쉬며 그의 맞은편에 와서 앉았다.
 남녀는 단 한마디의 말도 교환하지 않고 그저 짜장면만 먹었다.
 후루룩, 짭짭.
 식사 후의 커피 한 잔. 오늘은 현성이 직접 타지 않았다.
 희연이 말없이 뒷정리를 한 뒤 손수 커피를 타온 것이다.
 “자요.”
 머쓱한 표정으로 커피를 내미는 희연을 향해 내심 미소 지은 현성이 이를 받아 마신다.
 그러면서 그는 생각했다.
 커피는 자신이 타야겠구나! 라고.
 “장사가 이렇게 안 되는데 어떻게 생활하죠?”
 매일 파리만 날리는 가게다.
 평소 이것이 걱정됐나 보다.
 희연의 물음에 현성은 건성으로 대답했다.
 “그냥.”
 “저…… 아저씨. 요 앞에 좌판 하나 열면 안 될까요?”
 “좌판?”
 “곧 여름이니까, 팥빙수 같은 거 잘 팔릴 텐데.”
 희연은 언니 아연을 경제적으로 돕고 싶어 아르바이트 자리를 구하려고 백방으로 노력했다.
 하지만 중학생인 그녀를 받아주는 곳은 단 한 군데도 없었다.
 요즘은 우유 배달이나 신문 배달도 자리가 없다.
 그렇다 보니 내내 고생하는 제 언니가 소녀의 가슴에 비수처럼 박혀 있었다.
 아연은 학교를 마친 뒤 주방에서 보조로 일하고 있다.
 장의용품점 앞 팥빙수 가게였다.
 입도 시원하고, 마음도 시원할 것이다. 아니 으스스 하려나?
 그러다 문득 현성은 맞은 편 빵집 가게를 떠올렸다.
 여름이면 대문짝만하게 광고하는 그들의 간판 메뉴는 팥빙수다.
 “좋아.”
 현성이 허락하자 희연은 매우 기뻐했다.
 그 마음이 하얀 얼굴에 다 드러난다.
 “고마워요. 자릿세는 꼭 벌어서 드릴게요.”
 “그런데 기구 살 돈은 있어?”
 “중고로 기계를 사고, 재료 살 돈은 될 거예요. 좌판은 제가 학교 마치고 와서 틈틈이 만들면 돼요.”
 현성은 희연의 얼굴에서 처음으로 발랄한 여중생의 생기를 본다.
 들떠 있는 그 모습에 현성은 맹물 같은 커피를 단숨에 들이켰다.
 그러면서 그는 생각했다.
 커피는 여중생이 타면 안 된다는 것을.
 그 날 밤, 아르바이트를 끝내고 돌아온 아연은 희연의 사업 계획을 들었다.
 아연의 반응은 부정적이었다.
 그 시간에 동생이 공부를 더 하길 그녀는 바랐다.
 “언니, 나 해볼게. 하게 해줘. 공부도 물론 열심히 할 거야.”
 경기가 장기 침체로 접어들면서 아연이 일하던 식당도 인원 감축을 해야 한다는 말이 나오고 있었다.
 아르바이트생인 아연이 제일 위태롭다.
 이 때문에 요즘 그녀는 밤잠을 제대로 못 자며 고민 중에 있었다.
 그렇다 보니 희연의 사업 계획을 자신이 이어받으면 어떨까? 라는 생각을 하였다.
 학업도 중요하지만 당장 먹고살 일도 중요하기 때문이다.
 “그럼, 언니랑 같이하자.”
 “언니 아르바이트는?”
 “그게…… 요즘 식당이 잘 안 돼서, 해고될지도 몰라.”
 아연이 밤마다 잠을 못 자고 뒤척인 이유를 희연은 그제야 알 수 있었다.
 희연은 이를 내색하기 싫어 밝고 씩씩한 태도로 동업자로 받아 주겠다고 말했다.
 현성은 자매가 서로에게 의지하며, 힘을 북돋아 주는 모습이 좋아 보였다.
 TV에선 스킬러 자진 신고 기간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알리는 아나운서의 재촉하는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올 여름 팥빙수 장사도 중요하지만 당장은 저것이 문제다.
 “저기 현성 오빠.”
 아연이 신중한 표정으로 입을 뗀다.
 현성은 TV에서 눈을 돌려 그녀를 보았다.
 “저 내일 관공서에 들러 신고할게요. 자꾸 미뤄두면 안 좋을 것 같아요. 정부에서도 신고기피자들에게 불이익을 준다잖아요. 요즘엔 연예인들도 자진 신고를 하니까 괜찮을 것 같기도 하고요.”
 아연의 말에 희연도 동의했다.
 확실히 연예인들의 잇따른 스킬러 자진 신고가 사태의 추이를 조심스럽게 지켜보던 신중한 스킬러들을 대거 움직이게 했다.
 아직, 이들에 대한 통계는 나오지 않았지만 그 숫자가 결코 적지는 않을 것이다.
 문제는 스킬러에 대한 일반의 생각과 정부의 수용 자세다.
 현성도 이 점을 나름 신중하게 고민했었다.
 하지만 이 일을 더는 미룰 수 없겠다는 생각에 현성도 아연의 말에 동의했다.
 “셋이 함께 가자.”
 “안 그래도 돼요. 희연이랑 같이 가면 돼요.”
 두 사람은 현성이 자신들과 같은 스킬러임을 꿈에도 모른다.
 “나 자신의 일이기도 해.”
 “예?”
 “……?”
 자매가 현성을 집중해서 본다.
 현성은 담담하게 입을 열었다.
 “나도 스킬러야.”
 
 * * *
 
 다음 날, 현성과 두 자매는 관공서를 찾았다.
 현성이 경비원에게 스킬러 자진 신고부서를 묻자 경비원이 그의 아래위를 훑어보더니 3층으로 가라 했다.
 현성은 자매와 함께 3층으로 올라갔다.
 다른 곳보다 유독 사람들이 없었다.
 아니, 통제된 느낌이 든다.
 경비원의 연락을 받은 듯 남자 한 명이 나와 있었다.
 “어느 분이 스킬러십니까?”
 설마, 세 명 전부가 스킬러겠는가, 라는 생각으로 남자가 물었다.
 “우리 셋입니다.”
 현성의 무뚝뚝한 대답에 남자의 얼굴에 놀라움이 어렸다.
 남자는 곧 제 표정을 바로 잡더니 세 사람을 데리고 사무실로 들어갔다.
 넓지 않은 사무실. 단조로운 구조였다.
 접이식 철제 의자를 편 남자가 현성 일행에게 자리를 권했다.
 현성이 먼저 남자와 면담했다.
 “세 분 모두 신분증을 주시겠습니까?”
 남자의 태도는 정중했다.
 현성은 주민등록증을 내밀었고, 아연과 희연은 학생증을 건넸다.
 남자는 이들의 신상 기록을 적은 뒤 컴퓨터로 조회하였다.
 확인을 끝낸 남자가 신분증을 돌려주자 세 사람은 이를 지갑에 챙겨 넣었다.
 복사기를 돌린 남자가 세 장의 종이를 각자에게 내밀었다.
 “거기 빈칸에 기재를 해주시면 됩니다.”
 직업과 거주지, 그리고 스킬러 능력을 질문하는 문서였다.
 문항은 많지 않았기에 세 사람은 금세 이를 작성하여 제출했다.
 이를 받아든 남자의 두 눈이 동그래진다.
 남자는 표정을 고친 뒤 차후 별도의 통보가 갈 것이라며 짧은 면담을 끝냈다.
 몇 날 며칠을 고민한 것에 비해 너무 빠른 일 처리에 세 사람은 허탈감을 느꼈다.
 그래도 내내 목에 걸려 있던 일이 끝났기에 셋은 한결 가벼운 마음이었다.
 와글와글.
 관공서 앞에 한 무리의 취재진들이 몰려와 있었다.
 그리고 시커먼 벤 차량 한 대가 이들에게 포위되어 있었다.
 벤 하면 일단 연예인을 떠올리게 된다.
 현성과 두 자매는 가던 길을 멈추고 벤을 바라보았다.
 차량의 문이 열리고 선글라스를 낀 미모의 여인이 나왔다.
 주변은 곧 시장통처럼 소란스러워졌다.
 “저 여자…… 차민연이잖아.”
 “여긴 무슨 일일까?”
 아연과 희연이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기자들에게 둘러싸인 차민연을 보기 위해 까치발을 한다.
 차민연은 최근에 막을 내린 드라마의 여주인공으로, 그녀는 드라마의 높은 시청률과 함께 톱스타의 반열에 안착했다.
 기자들의 질문 공세가 노도처럼 그녀에게 쏟아진다.
 그 내용을 들어보니 차민연 역시 스킬러임을 알 수 있었다.
 유명인들의 잇따른 자진 신고는 그들의 팬 층을 시작으로 일반에 스킬러에 대한 편견과 오해를 불식시키는 데 힘을 싣고 있다.
 스킬러인 현성이나 자매의 입장에서도 이는 상당히 고무적인 현상이었으며, 마음 놓이는 상황이었다.
 “가자.”
 현성은 아연과 희연을 재촉했다.
 관공서 입구를 보니 한 무리의 새로운 사람들이 몰려오고 있었다.
 기자로 보이지는 않았다.
 취재에 지각하는 기자라면, 그 직업을 진작 때려치워야 할 것이다.
 아니, 그전에 선배들의 괴롭힘을 견디지 못하고 자진 퇴사하든가.
 휙휙휙!
 무언가를 투척할 때 들리는 파공성.
 이 소리가 향하는 곳은 취재진에 둘러싸여 관공서로 들어가는 차민연이 목표였다.
 모두의 시선이 이들에게 가 있었기에 누구도 이를 눈치채지 못했다.
 퍽퍽퍽.
 차민연의 수행원들과 취재진들이 계란 세례를 받았다.
 계란이 터지며 사방으로 비릿한 냄새를 풀풀 날렸다.
 계란은 보통 계란이 아니었다.
 썩은 계란이다.
 그 냄새가 어찌나 독한지 머리가 띵할 정도였다.
 현성은 황급히 아연과 희연을 챙겨 한산한 야외 휴게소 쪽으로 몸을 피했다.
 “스킬러는 물러가라!”
 “스킬러는 세상의 해악이다!”
 “신께서 저주한 자들이 스킬러다!”
 테러를 감행한 자들은 종교 단체에서 나온 자들이었다.
 이들은 스킬러의 능력을 신의 영역이라 간주하였다.
 스킬러 카드를 악마가 지상에 보낸 것이라 여긴 이들은 능력을 가진 자들을 악마의 자식으로 취급했다.
 관공서에서 직원과 경비원들이 나와 광신도들 앞을 막아섰다.
 금세 몸싸움이 벌어졌다.
 광신도들의 연령층은 다양했다.
 그들은 노인과 부녀자를 선봉에 세워 온갖 엄살을 떨었다.
 중간 열과 후방에는 젊은 사람들이 배치되어 있었는데 이들은 준비한 썩은 계란을 투척하며 찬송가를 불렀다.
 이 미친 짓거리에 아연과 희연 자매는 오싹한 공포를 느꼈다.
 계란 범벅이 된 취재진들은 광신도들을 촬영하는 한편 머리가 계란 범벅이 된 차민연이 벤 차량에 탑승하는 장면을 찍어댔다.
 관공서 입구가 광신도들로 인해 점령당했기에 벤은 오도 가도 못했다.
 현성과 자매 역시 빠져나가기 어려운 상황이다.
 “둘 다 내 손 잡아.”
 현성은 자매를 데리고 관공서 건물 뒤로 돌아갔다.
 그곳은 인적이 없었고, CCTV의 사각지대이기도 하다.
 “뭐하려고?”
 좀 전의 장면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는 듯 아연이 떨리는 음성으로 현성에게 물었다.
 희연은 입을 꾹 닫은 채 현성의 손을 꼭 움켜쥐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집에 가야지.”
 아연과 희연은 어리둥절했다.
 현성이 스킬러인 것은 알게 되었지만 그의 능력에 대해서는 모른다.
 그러나 자매는 곧 경험을 통해 그의 능력을 알게 되었다.
 팟!
 약간의 어지럼증을 동반한 소등 현상(?)과 함께 아연과 희연은 주변 환경이 확 달라진 것에 기함했다.
 그러다 곧 자신들이 서 있는 곳이 어딘지 깨닫고는 깜짝 놀란다.
 극락 장의용품점.
 현성이 운영하는 가게 내부에 서 있었기 때문이다.
 얼떨떨한 얼굴로 자매가 현성을 본다.
 현성은 별일 아니라는 듯 어깨를 가볍게 으쓱거렸다.
 “공간도약이야, 내 스킬러 능력은.”
 자매는 마치 자신들이 영화 속 세상으로 빨려 들어온 듯한 충격을 받았다.
 세상에, 공간도약 능력자라니. 그렇다면 영화 점퍼에서처럼 가고자 하는 곳은 세계 어디건 다 갈 수 있음이 아닌가.
 놀란 사슴처럼 두 눈을 반짝이는 자매의 모습에 현성은 별거 아니라는 듯 말했다.
 “그래 봐야 일일 편도야. 그리고 자칫 실수해서 이상한 곳에 떨어지면…… 사망이지.”
 스킬러의 능력은 횟수와 지속으로 나눈다.
 현성은 횟수에 속한다고 보면 된다.
 1일 1회, 아연 역시 횟수 스킬러다.
 희연만이 지속 스킬러이다.
 낡고 오래된 장의용품점에 스킬러 세 명이 모여 산다.
 참으로 신기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짜장면 먹을래?”
 점심은 무조건 짜장면과 군만두인 현성.
 “전, 짬뽕이 좋은데.”
 아연이 수줍은 미소를 띠며 말했고, 희연은…….
 “간짜장 먹어도 돼요?”
 현성은 자신보다 레벨이 더 높은 음식을 주문한 자매를 보며 갈릴레오가 재판장에서 나오며 나직하게 중얼거린, 그래도 지구는 둥글다! 와 같은 느낌으로 낮게 말했다.
 “……중국집은 짜장면인데.”
 
 * * *
 
 현성의 제보를 받고 출동한 특수국 조사팀이 습격을 받아 전원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들의 시신은 사건 현장에서 30킬로미터 떨어진 야산에서 처참하게 부서진 모습으로 발견됐다.
 특수국 조사팀은 지속 비전투 능력자로 구성되어 있다.
 국정원 특수국이 창설된 이후 처음 겪는 큰 파고였다.
 띠리리리릭, 띠리리릭.
 “예, 극락 장의용품점입니다.”
 “선우현성 씨?”
 “예, 그렇습니다만, 누구십니까?”
 “아, 날세. 박상철.”
 현성과 아연, 희연 자매가 스킬러 자진 신고를 한 지도 열흘이 지났다.
 이들의 일상은 열흘 전이나 지금도 변하지 않았다.
 그래서 현성은 이에 마음이 조금씩 놓였다.
 지금의 생활에 만족하는 그에게 외부의 개입으로 인한 생활의 변화는 불편하고 불쾌한 것이기에.
 그랬던 현성에게 박상철의 전화는 일상에 변화가 발생할 조짐이 아닐까라는 의구심을 심어 주었다.
 아직 확실한 것은 없기에 그냥 특유의 무뚝뚝한 음성으로 그는 응대했다.
 “무슨 일이십니까?”
 “얼마 전 자네가 제보한 이상배 있지?”
 현성은 최근 동네에서 이상배를 보지 못했다.
 산동네와 아랫동네를 연결하는 길목에 현성의 가게가 위치하고 있다 보니 산동네 주민은 누구든 그의 가게 앞을 지나가게 되어 있었다.
 상배의 똘마니만 몇 번 보았을 뿐이다.
 그래서 내심 국정원 특수국에서 녀석을 잡아간 것이라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데요? 잘못된 게 있습니까?”
 “이건 전화상으로 이야기하기 힘든데, 만날 수 있을까? 아니, 만나.”
 “지금 바쁜데요.”
 “바빠도 꼭 봐야 해. 자네에게도 중요한 일이니까.”
 “어디로 가면 됩니까?”
 또, 압구정이다.
 현성은 약속 장소를 듣자 인상부터 찌푸렸다.
 “짜장면 배달 왔습니다.”
 현성이 바쁘다고 말한 이유가 도착한다.
 긁적긁적.
 버스를 타고, 지하철을 타고 다시 환승을 반복하여 현성은 압구정에 도착했다.
 1일 1회의 공간도약 능력이 1일 2회면 참 좋을 텐데, 그래도 집에 갈 때는 눈 깜짝할 사이에 갈 수 있으니 그나마 위안이 된다.
 와글와글.
 소음과 향수와 화장품으로 온 거리가 포화 직전이다.
 명품으로 도배한 행렬, 행렬.
 고급 외제차량이 꼬리에 꼬리를 물며 매너 없게 빵빵거린다.
 전날 여기서 욕을 들어먹은 경험이 있었기에 현성은 벽 에 붙다시피 하며 움직였다.
 현성의 옷차림은 이곳에서 눈에 확 띈다.
 너무 평범해서.
 “어서 오세요.”
 커피숍 안으로 들어가자 종업원이 인사를 한다.
 그러곤 손님의 위아래를 살피는 몰상식한 짓을 한다.
 성격이 까칠하고 깐깐한 사람이었다면 종업원의 태도를 결코 용납하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현성은 그런 쪽과 거리가 멀다.
 전에도 한 번 와본 곳이기에 현성은 테라스 쪽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띠리릭, 띠리리릭.
 현성도 핸드폰이 있다. 하지만 그의 핸드폰은 시계 대용으로 주머니에 넣고 다니는 것이다.
 그런 그의 구식 핸드폰이 오랜만에 시원하게 노래한다.
 주변에 있던 사람들이 그의 벨소리에 피식거리며 본다.
 “예, 약속 장소에 도착해 있습니다. 그러죠.”
 상대는 박상철이다. 30분 정도 늦겠다며 미안하다고 한다.
 미안하다고 말하는데 어쩌겠는가, 양해해야지.
 드르르륵.
 주문한 음료가 나왔다. 현성은 표를 들고 차를 찾아왔다.
 한데, 그가 앉았던 자리에 다른 누군가가 앉아 있었다.
 굉장히 예쁜 여자와 명품으로 도배한 오크 남이었다.
 오크 남은 덩치도 산만하다.
 “거기 제 자립니다.”

댓글(4)

가상화폐    
너무 허접한 능력이라...
2016.04.26 16:52
따선생    
안 읽는걸 추천드림.
2016.05.25 15:38
금기린    
완결보고 허망...완결이라 적힌거 보고 진짜놀람. 종이책 안팔려 대충완결짓는거 많이봤지만 이북을 그렇게 끝맺고 서비스하는건 좀 아니잖아요.ㅋ
2016.07.05 05:34
wei    
완결까지 뭘 걱정하시나 앞부분만 봐도 미성년자 여자애들이랑 계속 엮이는게 볼생각이 안듬
2018.02.25 23: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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