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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턴 마이 라이프 1권

2016.02.11 조회 5,069 추천 24


 # 프롤로그
 
 그것은 어느 날 갑자기.
 그리고 어느 날 예고도 없이 그의 눈앞에 나타났다.
 
 ***
 
 “일을 이따위로 해놓고 뭘 어쩌자는 거야!!”
 촤락!!
 눈앞에 날리는 다수의 종이 다발들.
 입을 굳게 닫은 채 그저 고개를 푹 숙이고 있는 젊은 사원을 향해 오늘도 그의 상관은 잔소리 속사포를 들려주기 시작한다.
 “일하는 거, 하루 이틀도 아니고 말이야! 이제 너, 인턴 아니다. 기껏 정직원으로 채용시켜줬더니만…… 쯧쯧!”
 “…….”
 “기획서 다시 작성해 와!!”
 “그치만 부장님. 오늘은 중요한 약속이 있어서 빨리 가봐야…….”
 “어쭈. 너 지금 회사에서 짤리려고 작정했냐? 기획서를 이 지경으로 작성해놓고 약속이 있어서 먼저 가본다고? 허이구, 참나! 대단한 벼슬아치 나셨구만!”
 “…….”
 “약속이고 뭐고 당장 취소해!! 오늘 제대로 기획서 못 쓰면 퇴근도 없을 줄 알아!!”
 굳은 표정을 지어 보이던 남성이 묵묵하게 떨어진 종이를 주워담기 시작한다.
 기획서가 퇴짜를 맞을 만큼 엉망이었느냐 묻는다면 그것도 아니다.
 일부러다.
 이 남자의 상관은 스트레스 받을 일이 생기면 이런 식으로 부하 직원에게 갑질 아닌 갑질을 늘어놓는다.
 높은 곳에 올라서게 되면, 자신의 발밑에 놓인 풍경이 가소롭게 보이는 경우도 있다.
 지금의 경우도 마찬가지.
 “…….”
 종이 다발을 꾸역꾸역 챙긴 뒤 복도로 걸음을 옮기는 한 남성.
 그가 받는 스트레스도 이만저만이 아니다.
 직장에서 따돌림 받는 것도 모자라 상관에게 일부러 갈굼을 받는 역할까지 자처해야 한다.
 이 회사에서 그는…….
 한 마디로 말해서 샌드백에 불과하다.
 사내에서 샌드백이라 불리는 이 남자의 이름은 성민호.
 수습사원 생활에서 벗어나 정규직으로 채용된 지 이제 근 1년이 다 되어간다.
 처음에는 어쩔 수 없다고 생각했다.
 자신이 일을 잘 못하면, 그만큼 잔소리를 듣는 건 당연하다고 생각을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렇게 계속 되는 잔소리들이 어느 순간 자연스러운 것이 아닌 인위적인 현상임을 알아차렸을 당시에는…….
 너무 늦어버렸다.
 정신을 차린 직후에 성민호는 뒤늦게 본인이 회사에서 왕따라 불리고 있으며, 상관들에게는 좋은 스트레스 풀이용 샌드백이라 지칭되고 있음을 깨닫게 되었다.
 그것도 아주 잔인한 방법으로 알아차렸다.
 화장실 안에서 대변을 보고 있을 무렵.
 소변을 보기 위해 화장실에 잠시 들린 사원들의 대화를 우연치 않은 기회로 엿듣게 되었다.
 두 사람의 대화에서 나온 건 바로 성민호라는 이름, 세 글자였다.
 “그 새끼…… 자기가 왜 정규직으로 뽑혔는지도 정확하게 모를 거야.”
 “하아…… 강 부장 성격 감내하려면 민호 같은 눈치 없고 무신경한 놈이 필요하긴 하지.”
 “뭐, 덕분에 우리는 편하게 지내고 있잖아.”
 “그렇긴 하지…… 근데 그 민호 녀석. 진짜 사회생활이 완전 꽝이더라. 낄 때 좀 끼지, 왜 자꾸 우리랑 어울리려고 하는지 모르겠다.”
 “내 말이 그거 아니냐. 그냥 우리한테 앵겨 붙지 말고 얌전히 혼자서 회사 생활하다가 강 부장 샌드백 역할 좀 해주고 퇴사했으면 좋겠다.”
 “크큭, 그러게 말이야.”
 두 사람의 대화가 가시넝쿨이 되어 성민호를 옭아맨다.
 어렴풋이나마 알고 있었다.
 인턴 생활을 하면서.
 그리고 정규직으로 막 전환이 되어 신입사원이 되었을 때부터.
 사내 동료들이 민호를 바라보는 눈빛에는 뭔가 이질감이 섞여 있었다고.
 이들은 성민호를 철저하게 아랫것 취급한다.
 성민호도 알고는 있었다.
 그러나 안다 하더라도 이런 식으로 직접 그 속내를 듣게 된다면…….
 제아무리 성민호라 하더라도 멘탈이 무너지기 마련이다.
 
 ***
 
 운이 안 좋았다.
 자살을 시도하기 위해 수면 약을 먹었지만, 운이 좋게도 병원 측의 뛰어난 의료 스킬로 인해 살아나고 말았다.
 대한민국의 의료 기술은 너무 좋아서 탈이다.
 속으로 그렇게 생각하며 자살 시도에서 겨우 다시 회복하게 된 성민호.
 그러나 그것도 잠시.
 “……호 씨. 제 말 들리십니까?”
 “…….”
 낯선 의사의 말에 겨우 정신을 차린 민호가 힘겹게 눈을 뜬다.
 그 순간.
 “……?!”
 놀라 눈을 크게 껌뻑이는 성민호.
 의사와 간호사가 이런 민호의 상태를 보고 뭐라 서로 주절거리고 있었지만.
 그의 귀에는 그들의 대화 따윈 전혀 들리지 않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성민호, 그의 눈에 비치는 세상은, 그전까지 알고 있던 추악한 세계와 다른 형태를 띠고 있었기 때문이다.
 
 ***
 
 어느 순간, 민호는 이렇게 생각했다.
 눈이 이상하다.
 사람들의 머리 위에 둥둥 떠다니는 메뉴 창.
 게임에서만 보던 바로 그 스텟 메뉴 창이 떠 있었다.
 꿈을 꾸고 있는 건가?
 그런 생각을 품기에는…… 뭐라고 할까. 보이는 것이 너무나도 적나라하다.
 너무 피곤해서 그럴 수도 있다.
 야근과 갈굼의 연속.
 직장생활에서의 따돌림.
 마지막으로…… 자살 시도.
 그것들이 모여서 성민호에게 많은 스트레스를 주고, 결국 이런 착시 현상까지 불러일으키게 만들었을지도 모른다.
 이 현상을 알아보기 위해 갈 만한 곳은 딱 하나다.
 정신병원.
 사실 일반인들의 입장에선 오는 것 자체를 쉽사리 결정짓기 힘든 장소가 아닐까 싶다.
 그러나 어찌하겠는가.
 지금도 그의 눈에는 이상한 숫자나 홀로그램 창 같은 것이 투영되고 있다.
 다시 한 번 용기를 내어 병원에 들어선 뒤 의사 선생님에게 이렇게 말했다.
 “…스텟 메뉴 창이… 보인다고요?”
 “예, 선생님.”
 “혹시 제 머리 위에도 있습니까?”
 “물론이죠!”
 “음…….”
 민호를 이상하다는 듯이 바라보는 의사 양반.
 물론 그건 지극히 당연한 반응이다.
 “게임을 너무 많이 하신 탓에 온 환각 증세인 거 같습니다만… 일단 약을 지어드리도록 하죠. 그리고 우선 안정을 취하세요. 그 이후로…….”
 설명을 듣던 민호가 속으로 이런 생각을 품기 시작한다.
 여기도 틀렸다.
 똑같은 진단 내용만 들려줄 뿐이다.
 다른 병원도 마찬가지였다.
 게임 중독이 의심되는 환각 증세.
 하지만.
 성민호는 확신을 담아 강하게 주장한다.
 환각 따위가 아니다.
 그의 눈에는 지금도 보인다.
 바로…….
 
 
 
 당신의 스텟 포인트가.
 
 
 # EP 1. 스텟 포인트
 
 어렸을 때부터 내 별명은 ‘불운 덩어리’였다.
 운이 없는 남자.
 아니, 운뿐만이 아니라 인생 그 자체에 저주라도 걸려 있는 마냥 모든 일이 뜻대로 잘 풀리지 않았다.
 나도 내가 왜 이런 인생을 살게 되었는지 모른다.
 부모님에게 버림받고, 고아원에서 온갖 핍박을 받으며 겨우겨우 독립을 하나 싶더니, 노가다 판을 전전긍긍하면서 인생역전을 목표로 계속해서 준비하던 사법시험도 떨어졌다.
 더 이상 낙이 없다.
 삶의 낙이 없다.
 인생의 바닥까지 떨어져본 사람.
 난 세상사람 모두에게 그렇게 자부할 수 있다.
 되는 것 하나 없고.
 하고 싶은 것 하나 이루지 못한 잉여 인생.
 그런 나에게 마지막 주어진 선택권이라고는…….
 아마도 스스로 목숨을 끊을 수 있을지 말지에 대한 선택만이 아닐까.
 
 ***
 
 “후우…….”
 유독 더운 날씨 덕분에 등에서 절로 식은땀이 떨어진다.
 아니, 날씨가 더워 생성된 땀이 아닐지도 모른다.
 고층의 빌딩.
 저 밑으로 뛰어내리면, 틀림없이 죽는다.
 그래도 나 때문에 괜한 사람 죽이기 싫은 탓에 일부러 길거리에 거의 아무도 없는 새벽 3시를 골랐다.
 특별히 내 인생에 의미가 있는 시간은 아니다.
 그저.
 내가 태어난 시간이 새벽 3시 15분이라고만 알고 있는 것뿐.
 일찌감치 부모에게 버림받았음에도 불구하고 고아원 원장님이 나에게 입버릇처럼 이야기해주던 시간이다.
 왜 하필이면 새벽 3시 15분일까.
 “뭐… 아무렴 어떠냐.”
 손에 들고 있던 소주도 이제 얼마 남지 않았다.
 마시는 것도 지긋지긋하다.
 35살.
 이 나이 먹도록 죽어라 어떻게든 살아보기 위해 노력해봤다.
 노가다 판도 굴러보고, 도박도 해보고, 구차하게 땅바닥에 머리를 조아리며 제발 한 번만 봐달라고 사채업자들에게 빌어보기까지 했다.
 그러나 이제는 그것도 지긋지긋하다.
 다시 돌아가고 싶다.
 아니지…….
 다시 태어나고 싶다!
 금수저가 아니라도 좋다.
 그저 평범한 인생으로 다시 태어날 수만 있다면, 어떻게 해서든 발버둥을 치며 살아남을 자신이 있다!
 세상의 단맛, 쓴맛을 다 맛본 불운 덩어리인 나, 오창식이다.
 “신이시여, 다음 생에는 부디 평범한 자로 태어날 수 있게 해주세요.”
 그것만으로도 감지덕지합니다.
 아주 작은 소원과 함께 건물 난간에 발을 올린다.
 매서운 바람이 마치 나의 등을 떠밀려는 듯이 몰아친다.
 그렇게 재촉하지 않아도 어차피 뛰어내릴 생각이라고.
 적어도 내 목숨 정도는 스스로 끊을 수 있는 결정권이라도 좀 보장해줘라.
 그렇게 투덜거리는 나에게, 전혀 예상치 못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 여기 있었네.”
 “……?!”
 낯선 이의 목소리에 나도 모르게 고개를 돌린다.
 뭘까.
 분명 이 건물의 옥상문은 잠겨 있다.
 경비로 근무했던 회사 빌딩인지라 잠금장치를 여는 건 사실 어렵지 않았으나, 외부인이 이 시간까지 남아있다고 보기엔 힘들다.
 게다가 분명 처음에 왔을 때 나보다 먼저 옥상에 올라온 사람이 있는지 없는지 철저하게 조사를 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누군가가 있다니?
 “이봐요, 거기 플레이어.”
 “…저요?”
 “네네. 아~ 거 참. 성질머리 참 급하시네. 자살하기 전에 미리 말이라도 좀 하든가.”
 도대체 누구한테 이야기하라는 거냐.
 약간 거친 말투와는 다르게, 외형적으로는 상당히 미인형에 속하는 20대 여성이 긴 머리를 휘날리며 종종걸음으로 나에게 다가온다.
 그러나 아리따운 외모와 다르게 목소리는…….
 …남자다.
 설마 이 여자, 트렌스젠더라든지 뭐 그런 건 아니겠지?
 “아, 이런 실수.”
 내가 이상하게 쳐다봄을 느낀 모양인지 여성이 갑자기 자신의 목 위로 손을 올려놓는다.
 그와 동시에 여성의 머리 위에 어떠한 반투명 홀로그램 창이 형성된다.
 나름 노가타판과 피시방 생활을 오가며 MMORPG 같은 게임을 많이 해왔던 터라 대충 무슨 소리를 하는지는 알고 있다.
 캐릭터 스텟 창 비스무리하게 생겼다.
 “잠시만요.”
 눈으로 쫓기 힘들 만큼 여러 개의 메뉴.
 이윽고 무수한 수치들이 변경되면서 다시 사라락 모습을 감춰버린다.
 “아아.”
 그리고 놀라운 일이 벌어진다.
 방금 전까지만 하더라도 굵직한 남자의 목소리를 지니고 있다.
 하지만 어느 순간 청아한 20대 여성의 목소리로 바뀐 것이다!
 “워낙 급하게 형성한 외형이라서 목소리 스텟 조정이 덜 되었나봐요.”
 “다, 당신 도대체 누구……”
 “뭐, 간단하게 말해서 NPC라고 불러주시면 돼요.”
 “NP… 뭐요?”
 “거두절미하고 이거 참… 미안합니다. 운영진 측에서 실수로 당신의 인생 스텟 조정에 착오가 생겨서… 졸지에 실패 인생을 살게 되어버렸네요.”
 이건 또 무슨 소리인가.
 내 인생 스텟 조정에 착오가?
 그 덕분에 실패 인생?
 어떤 판단을 내려야 좋을지 머릿속이 하얗게 된 와중에도 여성의 설명이 계속해서 귓가를 강타한다.
 “수소문한 결과, 당신의 분배 스텟 중 ‘운수’ 스텟이 비정상적으로 낮은 게 판명되었어요. 아마 버그라든지 그런 게 생겨서 그런 모양인가 본데… 운수 스텟은 상당히 중요하거든요. 제아무리 뛰어는 스텟 포인트를 지니고 있다 하더라도 결국 운적인 스텟이 받쳐주지 않는다면 말짱 꽝이니까요.”
 “운수…….”
 순간 내 별명이 뇌리를 스친다.
 불운 덩어리!
 그렇다면 이 모든 게 다…….
 신의 장난이란 건가?!
 “내, 내 인생은…….”
 “미안해요. 사과 한 마디로 끝나진 않을 거라고 생각해서… 특별히 당신에게 한 번 더 기회를 줄까 해서요.”
 “기회… 라고?”
 “네. 본래대로라면 ‘환생’은 허용되지 않는 시스템이지만, 플레이어 ‘오창식’에 한해서 단 한 번, 환생 시스템을 부여하기로 했습니다. 다시 죽다 살아나면, 새로운 인생을 살게 될 거예요. 그것도 완전히 달라진 인생을.”
 “그, 그건 또 무슨 말…….”
 “요약하자면 간단해요.”
 성큼성큼 나에게 다가오는 젊은 여성.
 그러더니 이내.
 가녀린 팔이 내 쪽으로 뻗어진다.
 “자, 잠깐! 이대로 떨어지면 죽는…….”
 “네, 맞아요.”
 순간 여성의 입가에 미소가 어린다.
 너무나도 아름다운 미소.
 지금까지 여자와 손조차 제대도 잡아본 적이 없는 나에게 있어서 엄청 과분한 미소다.
 그러나.
 그 아름다운 미소 사이로.
 섬뜩한 말이 들려온다.
 “일단 죽으시고, 그 다음에 다시 설명 드릴게요.”
 그 말을 끝으로.
 쿵! 소리와 함께 둔탁한 충격이 느껴진다.
 서서히 옅어지는 의식.
 처음부터 자살을 생각했지만…….
 “적어도… 내 목숨 정도는 스스로 끊게끔 선택권이라도…….”
 마지막에 마지막까지.
 역시 난 ‘불운 덩어리’였다.
 
 ***
 
 “……!!!”
 눈을 뜨자마자 나도 모르게 반사적으로 상반신을 일으킨다.
 “허억… 허억…….”
 거친 숨결이 똑똑히 내 귀에도 들릴 정도였다.
 이것은 즉…….
 “현실……?”
 분명 난 방금 전까지만 하더라도 고층 빌딩에 떨어져 죽었다.
 그 둔탁한 느낌.
 뒤통수에서 그대로 여과 없이 전해졌던 끔찍했던 감촉이 아직도 생생하게 남아 있었다.
 허나 지금 내가 눈을 뜬 곳은 어느 작은 단칸방.
 게다가 왠지 모르게 몸에도 뭔가 이질적인 감각이 느껴진다.
 “…….”
 다리에 힘을 주며 자리에서 일어서자, 머리 위치에 있던 벽면 거울에 절로 내 모습이 비춰진다.
 그와 동시에 나도 모르게 새된 비명을 지를 뻔했다.
 “이, 이게 뭐야!!”
 30대의 내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졌고, 젊음이란 두 글자를 형상화한 것처럼 파릇파릇한 외형의 20대 청년이 대신 자리를 잡고 있었다.
 누가 봐도 내 모습이다.
 이 방 안에는 나 말고 아무도 없었기 때문이 쉽게 인지를 할 수 있었다.
 하지만.
 왜 내가 이런 몰골을 하고 있는지에 대해선 도통 알 수가 없었다.
 더욱이 나의 20대 모습도 아니다.
 엄밀히 말하자면 다른 사람이다.
 “내가… 아직도 꿈을 꾸고 있는 건가?”
 일단 볼을 한 번 잡아당겨본다.
 통증이 느껴지지만, 그렇게까지 심한 통각까진 아니다.
 그렇다면 이번에는 허벅지살을 꼬집어보도록 하자.
 “아야야야야!!!”
 …무진장 아프다.
 설마 이렇게까지 아플 줄이야. 괜히 꼬집었다는 후회감이 듦과 동시에 여전히 머릿속은 패닉 상태다.
 천천히 생각을 해보자.
 그간 나에게 무슨 일이 벌어졌을까?
 이 불운 덩어리 인생을 탓하며 고층에서 뛰어내리려고 했었는데, 난데없이 자신을 NPC라고 소개한 여자가 대뜸 나타나서 스텟이 어찌구 버그가 어찌구 하는 그런 말을 했다.
 그러고 난 뒤 나한테 불쑥 다가와 이렇게 말했다.
 일단 죽고 다시 살아나면 편해질 거라고.
 그 결과가 바로 이거다.
 “꿈 내용치고는 상당히 디테일하군.”
 그것이 꿈이라면, 지금 이 현실은 무엇인가.
 이것도 꿈인가?
 아니면 그간 불운 덩어리로 살아왔던 35살의 내 인생 자체가 꿈이었던 것일까?
 “…씨발, 아침부터 술 땡기네.”
 절로 소주를 찾게 된다.
 이렇게 골치 아픈 적이 또 있었을까.
 좁은 단칸방 안에 보이는 냉장고 문에 손을 뻗는다.
 덜컹 소리와 함께 열리는 냉장고의 문.
 속 안을 들여다보지만, 내용물은 부실하기 짝이 없다.
 있는 거라고 해봤자 고작 생수 두 병과 달걀 3개다.
 “…….”
 순간 할 말을 잃고 만다.
 도대체 이 사람은 뭐하던 사람이기에 이리도 간편한 음식들만 냉장고 안에 넣어둔 것일까?
 이 정도면 오히려 냉장고에게 미안할 정도다.
 한참을 그렇게 투덜투덜 거리고 있을 무렵.
 -꼬르륵!
 …배가 고프다.
 그것도 매우.
 “일단… 삶은 달걀이라도 해먹을까.”
 냄비 정도는 있겠지 하면서 식기보관함으로 추정되는 싱크대 위 선반을 열어본다.
 역시 예상대로 냄비 정도는 있었다.
 이윽고 수돗물을 받은 뒤 삶은 달걀을 제조하는 동안, 의자에 앉아 다시 한 번 생각에 잠겨본다.
 나에게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에 대해서.
 그리고 이건 꿈인지, 현실인지에 대해서도 생각을 해본다.
 그 결과.
 “…모르겠다.”
 결론이 나지 않는다.
 생전 처음 경험해보는 일인데, 나보고 어떻게 정상적인 판단을 내리라는 건가.
 “그 여자, 죽다가 살아나면 편해질 거라고 말만 번지르르하게 해놓고서, 정작 현실은 삶은 달걀 3개로 공복을 해결해야 하는 상황이라니. 이야기가 다르잖아.”
 나도 모르게 볼멘소리를 자아낸다.
 이럴 줄 알았으면 차라리 그… 환생 시스템인지 뭐시긴지를 하지 말았어야 했다.
 그렇게 속으로 어제 만난 여자를 향해 욕지거리를 퍼붓고 있는 순간.
 이상징후가 발생한다.
 “뭐야, 새로운 몸인데도 잘 적응하고 있네. 벌써부터 먹을 것도 챙겨먹다니.”
 “……?!”
 분명 아무도 없었어야 정상인 단칸방이었다.
 고작해야 5~6평 남짓한 작은 단칸방 안에서 들려온 이질적인 목소리.
 아니, 이 목소리는…….
 분명 어디선가 들은 적이 있다.
 “어제 그 여자……!”
 “오랜만이야. 아니지, 근 하루밖에 안 되었으니 오랜만이라는 단어를 사용하기엔 좀 그런가?”
 “도대체 여긴 어떻게 들어온 거냐.”
 “처음부터 이 방 안에 있었어. 네가 인지하지 못했을 뿐이지.”
 “…….”
 이건 또 무슨 소리람.
 어제부터 자꾸 실없는 소리만 계속 해대니, 내 입장에선 답답할 노릇이다.
 아니, 그것보다 묻고 싶은 것투성이다.
 “이게 어찌 된 일이냐. 난 어디가고 왜 다른 사람 몸이 여기 있는 거야.”
 “못 들었어? 환생이라고 했잖아.”
 “…….”
 아무래도 이 여자는 환생에 대해 잘못 알고 있지 않을까 싶다.
 “그래, 일단 그건 넘기자. 그것보다 우선 설명부터 해줘라. 지금 내가 어떤 상황인지에 대해서 말이야.”
 “설정 상으로는 25살의 건강한 남자, 오창식으로 되어 있어.”
 “그밖에 다른 건?”
 “동일해. 어렸을 때 부모님에게 버림받고 고아원에서 나온 뒤 홀로 어찌저찌 아르바이트로 연명하며 자취 생활.”
 “…….”
 역시 이 여자.
 환생이 뭔지 모르는 게 확실하다.
 “아니, 다시 새로운 인생을 경험하게 해준다면서, 왜 고아 설정은 그대로고… 뭐냐, 아르바이트로 하루하루를 연명하는 자취 생활이라는 건. 이 전의 인생과 별반 다를 게 없잖아?!”
 “진정해, 진정해. 성격 참 급하네. 이제부터 말해주면 될 거 아니야.”
 여성이 긴 머리를 쓸어내리며 옅은 한숨을 내쉰다.
 한 여름이라 그런지 복장 또한 상당히 시원스런 차림을 하고 있었다.
 배 부분이 훤히 드러나는 배꼽티와 흰색 스키니진.
 어디 가서 제법 미인이라는 소리 정도는 쉽게 들을 법한 그런 모델 체형에 절로 눈이 돌아가지만, 지금은 남심을 바탕으로 한 성욕을 내뿜을 만한 시기가 아니다.
 내 인생이 걸려 있는 중요한 오리엔테이션이니 말이다.
 “간단하게 설명하자면… 네게 능력을 줬어. 본래 그 능력은 NPC 고유의 권한이기도 한데, 특별히 운수 스텟에 치명적인 오류가 발생해 불운의 인생을 살았던 플레이어에게 보상을 해주고자 두 번째 인생에선 너만의 고유한 특권을 준 셈이지.”
 “특권… 이라고?”
 “말로 설명하기 어려운데… 잠깐 나가볼까? 백 마디의 말보다 한 번의 행동이 더 효과적인 때가 있을 테니까.”
 “뭐?! 자, 잠깐! 아직 삶은 달걀이…….”
 “나간 김에 외식이나 하고 오지 뭐. 아, 물론 계산은 내가 할게. 지금의 넌 땡전 한 푼 없는 거지에 불과하니까.”
 “그러니까 두 번째 인생 설정 좀 잘 잡아달라니까, 왜 또 거지 인생이냐!!”
 “불평불만은 나중에 들어줄게.”
 덥석.
 대뜸 여성의 손이 내 손을 잡는다.
 부드러운 피부의 감촉에 순간 당황한 나머지 나도 모르게 여성에게 이끌려 단칸방 문 바깥으로 향하게 된다.
 고작 손잡는 거 한 번에 얼굴이 빨개지다니.
 여자 손 한 번 제대로 잡아본 적이 없던 과거의 내 인생을 잠시 원망할 수밖에 없었다.
 
 ***
 
 바깥으로 나오자마자, 순간 내 눈을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저게… 도대체 뭐냐.”
 나도 모르게 손가락으로 지나가던 사람의 머리를 가리킨다.
 아니, 정확하게 말하자면 머리 위에 떠 있는 어느 한 홀로그램 창을 가리켜 보인다.
 홀로그램 창에는 이런 문구가 떠 있었다.
 -포인트 메뉴(Point menu).
 “어이, 저게 뭐냐.”
 “뭐긴. 스텟 메뉴 단축 창이야. 개인 정보를 열람할 수 있지.”
 “뭐……?”
 도통 알 수 없는 말들을 늘어놓는다.
 스텟 메뉴 창이라고?
 나도 어느 정도 게임 폐인 생활을 해봐서 저게 무엇을 뜻하는지 잘 알고 있다.
 그건 둘째 치고 내 질문의 의도는 애초에 왜 현실 세계에 실제 게임 메뉴 창 같은 게 사람들 머리 위에 떠 있느냐 하는 거였다.
 우리 앞을 막 바쁘게 지나가는 양복 차림의 중년 남성 머리 위에도.
 버스가 왜 이리 안 오냐며 불만을 터트리는 젊은 여대생의 머리 위에도.
 전부 메뉴 창이 떠 있었다.
 “인간의 능력이라는 건 말이야. 일종의 ‘스텟 포인트’로 구성되어 있어. 예를 들자면…….”
 지하철 역 입구 근처에서 신문지를 깔아놓고 잠에 빠져든 노숙자에게 다가가는 여성.
 물론 노숙자의 머리 위에도 메뉴 창이 떠 있었다.
 “영차.”
 여자가 메뉴 창을 터치하자, 사이드 쪽에 역시나 마찬가지로 같은 반투명 홀로그램 창이 나열된다.
 메뉴 창에는 실로 다양한 항목이 새겨져 있었다.
 “스텟은 크게 6가지로 구분되어 있어. 육체, 정신, 감정, 성격, 운, 그리고 특수능력 항목으로 구분되어 있고, 각기 여섯 가지 분야별로 각양각색의 스텟 포인트를 할당할 수 있지. 어디 보자… 육체로 들어가 볼까?”
 여섯 가지 항목 중 육체 항목을 터치하자, 아까와는 비교가 안 될 만큼 무수한 항목들이 펼쳐진다.
 근력이라든지 체력, 지구력, 악력 등등등.
 새기도 힘들 만큼 많은 스텟 항목들이 시야에 들어온다.
 “이처럼 나머지 4가지의 항목들도 상세 항목으로 분류되어 있어. 이 사람의 경우에는 체력의 스텟이 50이니까… 체력이 좀 부족한 사람인가 보네.”
 “기준이 되는 수치가 따로 정해져 있기라도 하는 건가?”
 “응. 그러니까… 절대적인 수치는 아니지만, 보통 평균적으로 딱 중간 스텟이 90에서 110, 다시 말해서 100 정도가 평균치라고 생각하면 돼. 100이란 수치보다 낮은 스텟 포인트를 보유하고 있다면, 그 사람은 다른 사람들에 비해 그 스텟 항목이 부족하다는 뜻을 가리키는 셈이지.”
 “…그렇군.”
 인간의 능력을 스텟이라는 수치로 환산한다.
 그리고 그게 나한테 보이게끔 만들어줬다.
 자신을 NPC라고 주장한 여성의 말을 인용하자면 대략 그런 뜻이 아닐까.
 “…뭐냐, 아가씨. 나한테 무슨 볼 일이라도 있는 거야?”
 나에게 이것저것 설명을 해주던 찰나에, 여성의 말 덕분인지 도중에 잠에서 깨버린 노숙자가 노골적으로 불쾌하다는 시선을 띄우며 우리 둘을 번갈아 쳐다본다.
 “아니에요. 그냥 자던 거 마저 주무세요.”
 그렇게 말하고서 여성이 노숙자에게서 떨어져 다시 나한테로 돌아온다.
 허나 자신의 단잠을 깨운 여성의 행동이 상당하게 건방져 보였는지 대뜸 자리에서 일어나 우리에게 다가온다.
 “이봐, 형씨. 댁 여자친구가 내 잠을 방해했는데. 뭔가 사죄거리라도 없수?”
 “왜 내가 사과를…….”
 “그쪽 여자친구가 잘못을 했으니까 당신이 책임을 져야 할 거 아니야!!”
 “…….”
 뭔가를 요구한다.
 아마도 오늘 일용할 양식, 다시 말해서 술이라도 한 병 살 수 있을 법한 돈이라도 달라는 뜻이겠지.
 가급적이면 이런 부류의 사람들과 섞이고 싶지 않기에 자리를 뜨려고 생각하는 나였으나.
 “잘 됐네. 기왕 이렇게 된 거, 실험이라도 해볼래?”
 “…뭐?”
 대뜸 여성이 빙그레 웃으며 이렇게 말했다.
 실험이라니.
 도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 거냐, 이 여자.
 “어쭈, 이제는 남을 가지고 실험을 한다네! 동네 사람들! 여기 좀 보수! 내가 노숙자라고 아직 머리에 피도 안 마른 것들이 시비 터네!!”
 노숙자가 대뜸 고래고래 소리를 치기 시작한다.
 …상황이 점점 더 복잡하게 발전하는군.
 허나 여성은 그저 내 머리 위에 손을 올리며 이렇게 말할 뿐이었다.
 “잠깐 스텟 재조정 좀 할게.”
 “또 무슨 수작을 부리려는 거냐.”
 “잠깐만 기다려 봐.”
 삐빅, 삑.
 예상 외로 상당히 오리지널틱한 전자음 소리가 뇌리에 울려 퍼진다.
 한편, 자신을 완전히 무시한 채 행동하는 우리 두 사람의 모습에 잔뜩 화가 난 모양인지 노숙자가 대뜸 손에 소주병을 쥔다.
 “이 씨발 새끼들이! 가만히 있으니까 내가 봉으로 보이냐?! 어디 한 번 세상의 쓴 맛을 제대로 보여주마!!”
 약간 술 냄새가 풍기는 것으로 보아선, 아마도 제대로 취기가 풀리지 않은 모양인가 보다.
 이성을 잃은 사람만큼 상대하기 번거로운 존재도 없다.
 이럴 때는 그냥 경찰을 부르는 게 좋지 않을까 싶었지만…….
 부우웅!!
 “……!!”
 설마 진짜로 소주병을 휘두르리라 생각했던 내가 너무 안이했다.
 노숙자가 있는 힘을 쥐며 우리에게 소주병을 던진다!
 매섭게 날아오는 소주병.
 피할 수 없다!
 그렇게 생각하던 찰나였다.
 “……?!”
 어째…….
 뭔가가 이상하다.
 분명 소주병이 날아오고 있다.
 아니, 아직도 날아오는 도중이라고 표현하는 편이 더 좋지 않을까.
 맞았어도 진작 맞아야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내 눈에는 소주병이 빙글빙글 회전하며 날아오는 모습이 그대로 보이고 있었다.
 마치.
 슬로우 모션처럼.
 저 정도면 잡을 수도 있지 않을까.
 소주병이 날아오는 궤도와 속도를 잘 파악해 천천히 손을 뻗는다.
 천천히 날아오는… 아니, 날아온다는 표현을 쓰기에도 아까울 정도로 느린 속도를 자랑하며 나에게 다가오는 소주병을 그대로 공중에서 낚아챈다!
 덥석!
 손바닥에 전해지는 짧은 충격.
 그러나 그것보다 더한 충격이 내 뇌를 자극한다.
 “방금 그건…….”
 처음 경험해보는 체험이었다.
 세상이 멈춘 건가… 라는 착각도 했다.
 그러나 그게 아니다.
 지나가던 사람들도, 그리고 소주병을 던진 노숙자도 놀란 눈동자로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이것은 …현실이다.
 결코 꿈이 아니다.
 멍하니 서 있던 내 귓가에 여성의 말이 속삭임처럼 들려온다.
 “육체 항목에 있는 시력 부분의 스텟을 조정했어. 200에서 250 정도로 스텟을 상승시켰으니, 아마 권투선수보다도 동체시력이 더 좋아졌을 거야.”
 “…….”
 “물론 일시적이긴 하지만, 그래도 10분 정도는 내가 공짜로 준 스텟 포인트… 150 포인트 정도를 무료로 사용할 수 있게끔 했으니까, 어디 한 번 포인트를 활용해서 재분배해 봐.”
 방금 전까지만 하더라도 250 포인트를 자랑하던 내 시력 스텟이 다시 평균 수치로 돌아온다.
 스텟 포인트.
 이것은…….
 어쩌면 내 두 번째 인생을 보다 더 화려하게 꾸며줄 수 있을 만한 요소가 될 것 같다.
 “크크큭…….”
 그런 생각이 들자 나도 모르게 웃음소리가 절로 튀어나오기 시작한다.
 불운 덩어리라 불리던 나에게…….
 …설마 이런 대박 행운이 찾아오게 될 줄이야.
 
 ***
 
 스텟 포인트.
 그리고 재분배.
 그 모든 지식들이 내 머릿속에 차곡차곡 입력된다.
 저 여성이 나에게 준 150의 스텟 포인트를 어디에 분배하느냐에 따라 내 능력이 실시간으로 달라진다는 뜻이다.
 “재분배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냐!”
 “머릿속에서 이미지를 떠올려봐. 친절하게 네비게이터(Navigator) 프로그램도 입력해뒀으니 알아서 찾아줄 거야.”
 “네비게이터?”
 나도 모르게 여자가 알려준 단어를 반복해 풀어내자, 머릿속에 순간 낯선 여성의 음성이 들려온다.
 -어서오세요, 주인님. 무엇이 필요하십니까?
 인간의 목소리라고 하기에는 뭔가 좀 이질적이다.
 기계틱한 그런 부류의 음성이라고 할까.
 -넌 누구지?
 -레비라고 합니다. 주인님의 명령을 이행하기 위해 설정된 네비게이터 프로그램입니다.
 이 녀석이 방금 여자가 말했던 그 프로그램인지 뭐시긴지 하는 것으로 추정된다.
 -스텟을 재분배하시겠습니까?
 내 앞에 또 다시 반투명한 홀로그램 창이 형성된다.
 문구는 실로 매우 간단했다.
 -Yes / No.
 과연… 이런 식으로 재분배가 가능하다는 건가.
 시선을 돌리며 Yes를 버튼을 터치하는 이미지를 떠올린다.
 그와 동시에 레비라고 자신을 소개한 네비게이터 프로그램이 내 앞에 무수한 스텟 메뉴를 보여준다.
 -어느 스텟 포인트를 재분배하시겠습니까?
 -반사 신경, 그리고 근력 부분에 각각 75개씩 투자해줘.
 -네, 알겠습니다.
 띠리리링!!
 수치가 상승하는 소리가 전자음 형태로 들려오기 시작한다.
 나중에 이 사운드 효과음도 좀 손을 봐야겠군. 시끄러워 죽겠다.
 한편, 머릿속에서 무수한 작업들을 처리하고 있는 나를 향해 다시 근처에 있는 소주병을 든 노숙자가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기 시작한다.
 “저 개새끼가… 그래, 너 오늘 한 번 어디 죽어봐라!!”
 젊었을 때 한 성격 한 양반인 모양인가 보다.
 이성적으로 생각한다기보다는 몸이 먼저 앞서나가는 그런 부류의 다혈질 인간이 가장 다루기 짜증나는 타입이다.
 그래도 어쩔 수 없다.
 상황은 이미 벌어졌고, 그걸 해결하기 위해서는 내가 직접 나서야 한다.
 그리고 여자가 말했던 것처럼, 스텟 재분배를 통해 내 능력이 얼마나 상승하는지도 직접 체험해보고 싶었다.
 터벅, 터벅.
 나를 향해 비틀거리며 다가오는 노숙자.
 천천히 그의 모습을 응시한다.
 반사 신경 쪽에 75라는 스텟 포인트가 분배되었다면, 분명 노숙자의 공격을 충분히 감각적으로 피할 수 있을 것이다.
 평균치가 보통 100이라는 수치라고 했으니, 75를 더하면 다른 사람들에 비해 최소 1.5배 정도, 많게는 2배 가까이 반사 신경이 좋아졌다 봐도 무방하다.
 더불어 근력까지.
 이렇게 되면 노숙자도 어린아이 다루듯 쉽게 제압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부웅!
 다시 한 번 예고도 없이 휘둘러지는 소주병.
 그러나 아까와 마찬가지로 손쉽게 노숙자의 공격을 피할 수 있었다.
 “……!”
 자신의 공격이 헛스윙으로 이어지자, 몸의 무게중심을 잃고 크게 비틀거린다.
 딱히 노숙자를 찍어누르듯 제압할 생각은 없기에 가만히 그가 다시 균형을 잡기까지 기다려준다.
 “썩을 놈이!!”
 가로 방향으로 길게 소주병을 휘두른다.
 허나 그것 또한 너무 빤히 보이는 공격이었다.
 살짝 뒤로 발을 빼는 아주 간단한 행동만으로 노숙자의 공격을 회피한 뒤, 곧장 손을 뻗어 소주병을 쥔 노숙자의 오른쪽 손목을 낚아챈다.
 이윽고 살짝 힘을 주자, 노숙자의 입에서 새된 비명이 흘러나온다.
 “아이고오오오!! 나 죽어!!”
 “앞으로는 그렇게 함부로 지나가는 사람을 향해 마구잡이로 술병 휘두르지 마십시오. 그러다가 크게 다칩니다.”
 “씨발! 나 죽는다고오오!!!”
 고통에 몸부림을 치며 계속해서 비명을 내지른다.
 아마 노숙자의 입장에선 꽤나 통각을 많이 느꼈을 것이다.
 근력 수치를 늘렸기 때문에 보통 사람들에 비해 2배 정도 강해진 힘을 느낄 수 어렴풋이나마 느낄 수 있었다.
 물론 확연하게 느껴지진 않았지만, 몸에 힘이 솟는 듯한 그런 감촉이 미세하게 감지된다.
 손을 놓자마자 근처에서 막 출동한 경찰관들이 우리를 향해 다가온다.
 “신고 받고 왔습니다. 무슨 일이십니까?”
 “이분께서 술에 좀 많이 취하신 모양인가 봅니다. 다짜고짜 저희에게 술병을 휘두르더라고요.”
 “어이쿠… 다치신 곳은 없습니까?”
 경찰이 내 전신을 훑어보기 시작한다.
 외관상으로 봤을 때에는 그렇게까지 크게 다친 곳은 없어 보일 것이다.
 애초에 노숙자는 나에게 손 하나 까딱하지 못했다.
 “네, 괜찮습니다. 그보다 뒤처리 좀 부탁드려도 되겠습니까? 잠깐 볼 일이 있어서 먼저 자리를 떠야 될 듯싶습니다만…….”
 “아, 괜찮습니다. 따로 진술서나 그런 건 쓸 필요는 없으니까요. 그래도 혹시 모르니 연락처 정도는 남겨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연락처라…….”
 생각해보니 지금 다시 태어난 나에게 휴대용 전화번호라는 게 있을까?
 호주머니에 스마트폰도 없는데 도대체 어떤 번호를 알려줘야 좋을지 고민하는 나를 대신해 예상하지 못한 구원의 손길이 다가온다.
 “이 번호로 연락 주시면 돼요.”
 작은 쪽지에 자신의 전화번호를 적어 넘겨주는 여성.
 바로 이 모든 사건의 근황이기도 한 그 여자였다.
 
 ***
 
 노숙자 사건을 뒤로하고 인근에 위치한 어느 카페에 들어선 우리들.
 “그러고 보니 이름도 못 들었군.”
 계속해서 이 여자, 저 여자라고 부르기에는 예의가 아닌 거 같아 성함을 묻는다.
 통성명 정도는 해도 괜찮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내뱉은 질문에 여성이 난데없이 고민을 하기 시작한다.
 아니, 이름 말해달라고 했는데 고민할 게 뭐가 있나.
 설마 나에게 이름을 알려주기 싫어서 그런 건 아니겠지.
 “일단은… 바이올렛이라고 불러.”
 “마치 임시방편으로 지은 이름처럼 이야기하는군.”
 “응, 맞아.”
 “…….”
 뭐 이런 녀석이 다 있단 말인가.
 할 말을 잃은 나에게 바이올렛이 어쩔 수 없다는 제스처로 어깨를 살짝 으쓱여 보인다.
 “처음 만났을 때에도 말했지만, 갑작스럽게 외형 설정을 하느라 이름이라든지 이런 걸 지을 새가 없었으니까. 댁이 갑자기 예고도 없이 자살하려고 한 탓에 그렇다고.”
 “이게 전부 다 내 탓이냐.”
 “뭐… 원인을 따지고 보자면, 운수 스텟에 버그가 생기게끔 방치한 우리 측의 실수이기도 하지.”
 스스로의 잘못을 인정할 줄은 아는군.
 그런 점에선 나름 마음에 들었다.
 “뭐 또 궁금한 게 있다면 언제든지 질문해.”
 “아무거나 물어보면 다 대답해주는 건가?”
 “내가 대답할 수 있는 범주 내에서라면 성심성의껏 답해줄게.”
 “말해줄 수 없는 분야도 있다는 뜻이군.”
 “우리 측의 잘못으로 인해서 네가 불운 덩어리 인생을 살게 되었다는 것에 대해선 미안하다고 생각해. 하지만 그렇다고 이 세계가 품은 진실 전부를 플레이어(Player)에게 이야기해줄 순 없어. 우리도 극비사항이라는 게 있으니까.”
 “그렇군.”
 바이올렛은 자신을 NPC라고 말했다.
 게임 상 도우미 역할을 하는 존재, NPC.
 그리고 나를 향해 플레이어라는 단어를 사용한다.
 아마도 평범한 인간을 가리켜 플레이어라고 부르는 듯하다.
 내가 알던 기존의 세계와는 다른 이미지에 조금은 이질감도 들기 시작하지만…….
 그렇다고 이미 모든 것을 무시하고 다시 평범한 삶을 살기엔 너무 깊게 들어온 감 또한 없지 않아 있지 않을까.
 그리고 무엇보다도 스텟 재분배는 확실히 매력적인 기술이다.
 혹여나.
 이 스텟을 모을 수 있는 수단이 있다면…….
 다른 인간들에 비해 내 능력을 월등하게 키워나갈 수 있지 않을까.
 
 ***
 
 스텟 재분배.
 그 단어가 주는 무게감은 보통이 아니다.
 인생의 스텟을 재분배할 수 있다는 점은 분명 커다란 이점이 될 것이다.
 하지만.
 한 가지 궁금한 요소가 머릿속을 강타한다.
 “네가 준 150의 스텟 포인트처럼, 스텟 포인트를 벌어들일 수 있는 방법 같은 건 없나?”
 스텟을 재분배할 수 있는 능력은 분명 좋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이건 ‘재분배’에 불과하다.
 특정 스텟을 올리고 싶다면, 다른 스텟 분야에서 스텟 포인트를 가져와야 한다는 것을 뜻한다.
 기존의 분배되어 있는 스텟… 그러니까 예를 들자면 아까처럼 시력을 상승시킨다고 치자. 그렇다면 근력에 투자되어 있는 스텟 20을 줄이고 시력에 그 20 포인트를 재분배하면 된다는 것을 뜻한다.
 다시 말해서, 아까 바이올렛이 나에게 일시적으로 줬던 공짜 스텟 포인트와 같은 특수한 경우가 아니라면 기존에 내 스텟에 부여된 스텟 포인트를 끌어와서 다른 스텟에 투자해야 한다는 것을 뜻한다.
 이것만 놓고 보자면 사실 큰 메리트가 없다.
 스텟을 내 마음대로 재분배할 수 있다는 건 좋지만, 결국 플러스 마이너스 제로에 불과한 일이다.
 이 스텟 재분배 능력을 보다 좀 더 효율적으로 다루기 위해서라도 기존의 스텟 포인트에서 끌어오는 형태가 아닌, 바이올렛과 같은 외부 요인으로 인해 공짜 스텟 포인트를 얻어내야 제대로 된 이득을 볼 수 있을 것이다.
 스텟 포인트를 얻어내는 일.
 그 방법을 알아내야 하는 것이 가장 큰 숙제다.
 “과연, 머리가 전혀 나쁜 사람은 아니구나.”
 바이올렛의 입가에 미소가 새겨진다.
 나를 도대체 얼마나 과소평가했던 것인가, 이 여자.
 “마침 설명하려고 했으니 잘 됐네. 스텟 포인트를 벌어들일 수 있는 방법은 크게 두 가지 방법이 있어. 우선 첫 번째로 ‘경험치’를 쌓는 것이 있지.”
 “경험치?”
 “보다 더 어울릴 만한 표현 방법을 동원하자면 ‘숙련도’라고 생각하면 돼. 예를 하나 들어볼게. 네가 수학 공부를 한다고 쳐. 수학 공부에 대한 스텟이 100이라고 치면, 어떤 성적이 나올까?”
 “평범한 성적이 나오겠지.”
 “그래. 하지만 계속해서 열심히 공부를 하게 되면 언젠가는 만점 정도는 나오겠지?”
 “…아마도 그렇겠지.”
 공부는 대개 한 만큼 성적이 늘어나는 법이다.
 만약 내가 열심히 수학 공부를 했다면, 해당 시험 점수가 만점에 가까운 우수한 성적이 선보여질 것이다.
 그것은 다시 말해서.
 “수학 공부 이해도에 관한 스텟 포인트가 늘어났다는 뜻인가?”
 “정답.”
 바이올렛이 고개를 끄덕여준다.
 “경험치라는 것을 통해서 스텟 포인트를 올린 케이스라고 할 수 있지.”
 “과연… 그렇군.”
 어느 정도 이해가 된다.
 연습, 혹은 노력을 통해서 경험치라는 게 쌓이게 되고, 그 경험치가 쌓이게 되면 스텟 포인트가 늘어난다는 점이다.
 하지만 그만큼 시간과 노력이 있어야 얻을 수 있는 방법이라고 할 수 있다.
 “경험치를 통해 얻을 수 있는 스텟 포인트 말고 다른 방법이 또 있나?”
 “응. 여기서 두 번째 방법을 소개해줄까 하는데.”
 바이올렛의 입가에 진한 미소가 새겨진다.
 “퀘스트(Quest)라는 수단이 있어.”
 “퀘스트라고?”
 “그래. 스텟 포인트를 단기간 내에, 그리고 보다 많은 포인트를 얻을 수 있는 가장 확실한 방법이 바로 이 퀘스트 시스템(Quest system)이야. 또 다시 예를 들어준다면…….”
 말끝을 흐린 바이올렛이 가볍게 손가락을 튕긴다.
 따악! 소리와 함께 느닷없이 레비의 목소리가 뇌리에서 울리기 시작한다.
 -수행할 수 있는 퀘스트가 검색되었습니다. 확인해보시겠습니까?
 레비의 말과 동시에 내 시야에 특이한 점 하나가 포착된다.
 바이올렛의 머리 위로 물음표 아이콘 하나가 생성된 것이다.
 “내 머리 위에 뭔가 하나 보이지 않아?”
 바이올렛의 물음에 나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여준다.
 그와 동시에 흡족한 미소로 화답한 바이올렛이 손가락으로 나를 가리키며 말한다.
 “물음표를 터치해봐.”
 “…….”
 뭔가 불안불안하지만, 그래도 일단 시키는 대로 따라 해보기로 결정한다.
 손을 뻗어 앉아 있는 바이올렛의 머리 위에 새겨진 물음표에 손을 가져다대자, 레비의 음성이 다시금 울려 퍼진다.
 이윽고 머지않아 작은 홀로그램 창 하나가 생성된다.
 
 -퀘스트(난이도 : 일반)
 내용 : 아메리카노 한 잔을 시럽 없이 원샷하시오.
 보상 : 스텟 포인트 1점
 
 홀로그램 창 내용을 인식하자마자 다시금 레비가 재차 확인하듯 묻는다.
 -퀘스트를 수행하시겠습니까? Yes / No
 …설마.
 “이게 퀘스트라는 거냐?”
 “응.”
 “고작해야 아메리카노 한 잔 마시기만 하면 스텟 포인트를 한 준다는 뜻이야?”
 “맞아. 물론 내가 임의로 연습삼아 생성한 퀘스트이기 때문에 하찮아 보일지도 모르지만, 아메리카노 한 잔 마시면 목을 축임과 동시에 공짜로 스텟 포인트가 따라온다고. 나쁘지 않다고 생각하는데?
 “…그렇군.”
 시럽 추가 없는 아메리카노.
 개인 취향에 따라 상당히 쓰게 느껴질 수도 있는 커피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인생의 단 맛, 쓴 맛을 다 경험한 나에게 있어서 커피의 쓴 맛 정도는 웃으며 소화할 수 있을 것이다.
 눈앞에 놓여있는 아메리카노 한 잔을 원샷하자, 띠링! 소리와 함께 스텟 포인트 1점이 나에게 할당되었음을 알리는 메시지 창이 모습을 드러낸다.
 -축하합니다. 퀘스트를 클리어 하셨습니다.
 레비의 소소한 축하 메시지와 함께 거의 공짜로 스텟 포인트를 얻게 되었다.
 그렇군.
 대충 어떤 식인지 알겠다.
 “이런 방식으로 스텟 포인트를 얻을 수 있어. 물론, 퀘스트를 수행하는 데에 몇 가지 주의 사항이 있지만.”
 “어떤 거지?”
 “퀘스트를 받을 수 있는 건 오로지 나와 같은 ‘NPC’들을 통해서만 가능해. 즉, NPC가 주는 퀘스트 이외의 것은 보상 내역이 없는 일반적인 심부름에 불과하단 뜻이지.”
 “너 이외의 NPC라는 존재가 또 있단 말인가?”
 “물론이지. 아, 참고로 저기 카운터에서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는 저 젊은 웨이트리스 여성도 NPC야.”
 “……?!”
 바이올렛의 말에 무의식적으로 시선을 돌린다.
 그와 동시에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을 눈치챌 수 있었다.
 “…그렇군.”
 일반 플레이어들이라 불리는 평범한 인간은 머리 위에 ‘포인트 메뉴’라는 단축 아이콘 창이 떠 있다.
 그러나 바이올렛과 같은 NPC들은 그 포인트 메뉴 창이 머리 위에 떠있지 않다.
 즉, 다시 말해서.
 “포인트 메뉴 창이 보이지 않은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너와 같은 NPC라 봐도 무방하겠군.”
 “응, 맞아.”
 NPC와 플레이어.
 두 존재를 구별해가며 NPC들로부터 퀘스트를 얻는다면, 그리고 그 퀘스트를 클리어 할 수 있다면 단기간 내에 많은 스텟 포인트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 EP 2. 몬스터(Monster)
 
 퀘스트와 스텟 포인트.
 이 두 가지 요소를 통해서 앞으로 내 능력을 성장시킬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머리가 빠르게 돌아가기 시작한다.
 성공으로 향하는 인생의 지름길은 바로 자신의 능력을 키워가는 것이다.
 그런데 이 스텟 포인트를 획득, 그리고 분배함으로 인해 나의 능력을 키울 수 있다면?
 이건 더할 나위 없는 대박 찬스가 아닐까 싶다.
 “이야기는 대략 여기까지야.”
 바이올렛이 간략하게 설명을 끝냈다는 듯이 대화의 마무리를 짓는다.
 오늘 하루 동안 너무나도 많은 지식을 얻은 탓에 머리가 아파올 지경이었으나, 하나부터 열까지 전부 놓칠 수 없는 설명이었다.
 왜냐하면 바이올렛의 말 한 마디 한 마디가 나에게 중요한 정보로 제공되기 때문이다.
 “또 궁금한 거 있어?”
 “지금 당장은 딱히 크게 생각나지 않는군.”
 “뭐, 나중에 갑자기 묻고 싶은 게 생각난다면 언제든지 연락해.”
 “그러고 보니 난 스마트폰도 없는 거 같다만.”
 “돈 없는 가난뱅이니까 그렇겠지.”
 “…….”
 일리 있는 말이다.
 애초에 돈이 많았다면, 허기를 해결하기 위해 단칸방에서 삶은 달걀이나 삶고 있지 않았을 것이다.
 “그럼 연락은 어떻게 하지?”
 “네비게이터를 통해서 하면 돼. 머릿속에 입력되어 있는 그 네비게이터 프로그램을 활용하면 나와 텔레파시를 통해서 이야기를 나눌 수가 있거든.”
 “그렇군.”
 실험을 해보기 위해 정신을 집중시켜본다.
 그와 동시에 레비의 음성이 머릿속에서 울려 퍼지기 시작한다.
 -무엇을 도와드릴까요?
 -바이올렛과 텔레파시가 가능하다는데, 어떻게 하면 되지?
 -저에게 생각을 공유할 상대방이 누구인지 말씀해주시면 자동으로 연결됩니다.
 -바이올렛과 연결해줘.
 -네, 알겠습니다.
 레비의 말이 끝난 이후.
 띠링 소리가 몇 번 이어지더니 바이올렛의 말소리가 뇌리에서 울린다.
 -이제 들려?
 -…들리는군.
 -이런 식으로 어느 정도 거리가 있다 하더라도 서로 대화가 가능해. 굳이 휴대폰이라는 원시적인 수단을 거치지 않아도 충분히 의사를 전달할 수 있다 이거지.
 -휴대폰이 원시적이라고 말할 정도라니. 과학 기술의 진보를 상당히 얕잡아보는 말을 하는군.
 -우리 입장에선 그렇게 보일 수밖에 없으니까.
 -…….
 하기야. 머릿속으로 전음을 주고받는 시스템이 구축되어 있는데, 스마트폰과 같은 휴대 전화가 원시적인 통화 수단처럼 보여도 전혀 이상하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나도 모르게 들기 시작한다.
 “여하튼 이런 식으로 하면 돼. 오케이?”
 전음이 아닌 대화 형태로 말을 꺼낸 바이올렛.
 그녀의 말마따나 사용법도 간편하고 좋다.
 무엇보다도 스마트폰을 일일이 들고 다닐 필요가 없다는 점을 놓고 보자면, 휴대성 또한 가히 최상이라 할 수 있다.
 “알았다. 도움이 필요하다면 언제든지 이걸로 연락하도록 하지.”
 “뭐, 도움이라기보다는 감시관이라고 표현하는 게 더 어울릴지도 모르지.”
 “…감시관?”
 내 조력자가 아니었단 말인가.
 생소한 단어에 나도 모르게 반색을 표하자, 바이올렛이 앞에 놓인 아메리카노 한 잔을 음미하며 말을 이어간다.
 “넌 다른 사람들에 비해 비정상적인 능력을 손에 쥐게 되었어. 스텟 재분배, 그리고 퀘스트 수행을 통한 스텟 획득까지. 다른 사람들에 비해 월등히 그 능력을 자유자재로 다룰 수 있게 되었는데, 그 능력을 혹여나 우리가 관리하고 있는 이 인간계에 해를 끼치는 용도로 사용하게 될지도 모르잖아? 버그로 인한 피해 보상은 정당한 수순이지만, 그렇다고 새로 부여한 능력을 통해 인간계를 망치는 일을 하게 되는 것까지 봐줄 수는 없거든.”
 “…그렇군.”
 플레이어의 조력자가 될 수도 있지만, 동시에 감시관이 될 수도 있다.
 그게 바로 바이올렛과 같은 NPC라는 존재의 의의가 아닐까 싶다.
 “아무튼 이것으로 오늘 일은 끝. 집에 돌아가서 푹 쉬어.”
 “…그러는 게 좋겠군.”
 나머지는 내가 직접 확인해보면 된다.
 모르는 게 있으면 언제든지 레비, 혹은 바이올렛에게 물어보면 될 일이니 말이다.
 
 ***
 
 집으로 돌아오자마자 잠시 깜빡했던 사실 하나를 절로 떠올리게 된다.
 “…잊고 있었군.”
 바이올렛이 외출을 다급하게 재촉한 탓에 나도 모르게 까맣게 잊고 있었던 것 하나.
 바로 삶은 달걀이었다.
 끼니를 해결하기 위해 삶은 달걀을 만들고 있던 도중에 바이올렛이 난입해 졸지에 제대로 삶지도 못하고 가버린 탓에 이제는 달걀들이 차갑게 식어버린 물 안에서 반신욕을 하고 있었다.
 “기왕 이렇게 된 거, 먹을 거라도 사올걸 그랬군.”
 뭔가 씁쓸한 기분이 느껴진다.
 지금 당장 필요한 돈은 없다.
 자금을 마련하려면, 아르바이트 자리라도 하나 구해야 하는 게 그나마 나은 편 아닐까.
 모처럼 스텟 재분배라는 능력을 손에 얻게 되었는데, 능력을 얻자마자 하는 일이라고는 아르바이트 자리를 구하는 거라니.
 “이거 참… 폼 안 나는구만.”
 판무협 소설 같은 걸 보면, 다른 주인공들은 막 이계로 넘어가자마자 먼치킨인 마냥 9클래스 마스터만 사용할 수 있는 고급 마법도 부리고, 전설의 아이템을 얻거나 혹은 어여쁜 공주와 썸을 타는 둥 여러 가지 다양한 혜택을 누리곤 한다.
 “역시 판타지는 판타지에 불과한 건가.”
 물론 지금의 내 상황도 현실적인 말로 설명하기 힘든 판타지임에는 확실하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재분배할 스텟 포인트의 여유분이 있어야 활용 가능한 능력이다.
 어떻게 해서든 퀘스트를 수행해 스텟 포인트를 최대한 모은다.
 그러기 위해선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NPC들의 위치를 파악해두는 게 좋겠군.”
 퀘스트를 할당해주는 건 평범한 사람, 즉 나와 같은 플레이어가 아닌 NPC들이다.
 게임에서도 퀘스트를 주는 건 NPC들이었다.
 내일은 내가 살고 있는 이 근처를 돌아다니며 최대한 NPC들의 위치, 존재 여부를 파악해두는 것이 급선무가 아닐까 싶다.
 더불어서 알바 자리 같은 게 있다면 한 번 신청도 해보고 말이다.
 “내일부터는 바쁘겠군.”
 뭔가 삶에 목표가 생겼다는 점 때문일까.
 나도 모르게 활기가 느껴지는 듯한 그런 기분이 든다.
 “좋아, 일단 달걀부터 다시 삶고, 일찍 잔 다음에 일어나 볼까.”
 그런 의도를 품으며 자리에서 일어나려던 순간.
 -경고, 경고!
 레비의 목소리와 함께 사이렌 효과음 마냥 엄청난 사운드가 뇌리에 가득 울려 퍼진다.
 “무슨 일이냐?!”
 갑작스런 레비의 경고에 버럭 소리를 친다.
 그러자 레비가 전혀 예상치 못한 정보 하나를 나에게 전해주기 시작한다.
 -몬스터(Monster)가 감지되었습니다. 조심하십시오.
 “몬스터… 라고?!”
 말도 안 된다.
 몬스터라니?
 여긴 판타지 세계도 아닌, 평범한 인간계다. 그런데 몬스터가 나올 리가 없지 않은가!
 “위치도 알 수 있나?”
 -시야 간섭 권한을 허가해주신다면 몬스터의 위치를 표기해드릴 수 있습니다.
 “허가할 테니까 표기해 봐!”
 -예, 알겠습니다.
 그와 동시에 나도 모르게 순간 헛웃음을 삼킬 수밖에 없었다.
 레비가 표기해준 몬스터.
 그것은 바로…….
 어디서든 흔하게 볼 수 있는 ‘파리’였기 때문이다.
 
 ***
 
 어디서든 흔히 볼 수 있는 작은 생명체, 파리.
 요즘은 특히나 여름이라 그런지 파리가 더 많이 보이는 듯하다.
 아니, 많이 보이든 적게 보이든 그건 둘째 치고.
 “설마 저 파리가 몬스터라는 거냐?”
 -예, 그렇습니다. 주인님.
 “미친…….”
 나도 모르게 욕지거리를 내뱉고 말았다.
 경고음이 막 울리고 몬스터가 등장했다고 하기에 판타지 세계에서 볼 수 있을 법한 드래곤이라든지 오우거 같은 걸 상상했다.
 그러나 설마 고작해야 파리라니.
 “파리가 무슨 몬스터라는 거냐.”
 -프로그램상 플레이어와 NPC 이외의 동물은 전부 몬스터로 취급됩니다.
 “…뭐?”
 인간과 NPC.
 그 이외의 생물들은 몬스터로 표기된단 말이지…….
 이거 참.
 “얼추 알겠군.”
 온라인 게임에서도 엇비슷하다.
 인간과 다른 종족, 그러니까 엘프라든지 드워프 등 인간과 엇비슷한 종족 말고 다른 동물들은 소위 말해서 온라인 유저들이 잡으면 경험치와 아이템을 주는 몬스터로 표기가 되는 경우도 종종 있다.
 아마 레비나 바이올렛이 살고 있는 세계에선 초식 동물, 육식 동물, 곤충이나 어패류 등등 이런 구분은 전혀 없는 모양인가 보다.
 오직 몬스터라는 단어 하나로 통칭되어 사용하는 듯하다.
 하기사. 인간도 플레이어라고 부르는데, 동물을 몬스터라 부른다 해도 어색하진 않아 보인다.
 “저 몬스터는 위험한 게 아니니까 경고음부터 일단 꺼 줘.”
 -알겠습니다, 마스터.
 말이 끝남과 동시에 아까부터 계속해서 울리던 사이렌 경고음이 드디어 종적을 감추게 된다.
 아무래도 기본적으로 내 머릿속에 있는 이 네비게이터 시스템은 몬스터 출현 시 자동적으로 경고음을 들려주는 것으로 추정된다.
 그렇다면 설정을 해두는 수밖에.
 “레비, 이제부터 몬스터가 접근해도 내가 특별히 지시하지 않는 이상 경고음으로 알려주지 않아도 돼. 그렇게 설정해줘.”
 -예, 알겠습니다.
 인간이 아닌 단순한 프로그램 형태라 그런지 나에게 어째서 그래야 하는지에 대한 별다른 이유는 묻지 않는다.
 이런 점은 참으로 좋군.
 일일이 설명해주는 것도 귀찮으니 말이다.
 
 ***
 
 다음 날 아침.
 오전에 일어나자마자 우선 내일이라도 당장 돈을 벌어야 한다는 일념 하나를 품으며 아르바이트 자리를 찾기 위해 발걸음을 재촉해본다.
 어제 일수 관련 신문지를 통해서 어디어디 가게가 인력을 구하고 있다는 공고를 봤기 때문이 이리저리 떠돌아다닐 필요는 없다.
 모처럼 젊은 외형을 지니고 다시 환생했으니 젊은 청춘답게 허드렛일보다는 아르바이트의 대표 격이라 할 수 있는 서빙 쪽을 해볼까 한다.
 혹시 또 모르지 않겠는가.
 가게에서 일을 하다보면 먹을 거에 관한 콩고물이라도 떨어질지.
 “…여기인가.”
 근처 카페 아르바이트 자리를 노리고 무작정 돌진한다.
 “어서오세요.”
 “저기… 아르바이트 구한다고 해서 왔습니다만.”
 “아, 그러세요? 잠시만요. 점장님 모시고 올 계요.”
 “예, 감사합니다.”
 인상 좋아보이는 젊은 여성이 환하게 웃어주며 나에게 잠시 앉아있으라고 권유한다.
 머리 위에 포인트 메뉴 창이 있는 걸로 봐서, 이 사람도 나와 같은 플레이어로 추정된다.
 “…….”
 자리에 앉은 채 머릿속을 정리해본다.
 스텟 포인트를 재분배할 수도 있지만, 어제 일을 통해 한 가지 확인해보고 싶은 것이 있다.
 “안녕하세요.”
 점장으로 추정되는 30대 초반의 여성이 도도함을 뽐내며 내 앞으로 다가온다.
 역시.
 이 여자 또한 머리 위에 포인트 메뉴 아이콘이 떠 있다.
 ‘플레이어로군.’
 잘 됐다.
 시험해보고 싶은 것이 있었는데, 이번 기회에 한 번 도전을 해보는 것도 나쁘지 않으리라.
 “안녕하세요! 오창식이라고 합니다.”
 “반가워요. 아르바이트 때문에 오셨다고요?”
 “네, 그렇습니다.”
 “간단하게 면접이라도 잠깐 볼까 하는데. 괜찮나요?”
 “네.”
 “그럼 잠깐 자리를 옮기죠. 절 따라오세요.”
 점장을 따라 자리를 이동하기 시작한다.
 또각또각.
 힐굽 소리와 함께 직원들이 전용으로 사용하는 작은 휴게실에 도착한다.
 “앉으세요.”
 “예, 알겠습니다.”
 최대한 평정심을 유지하며 맞은편 자리에 앉는다.
 내가 알기론, 이 카페가 그나마 시급이 가장 센 걸로 알고 있다.
 임금도 떼어먹지 않고 확실하게 제때제때 주는 것과 더불어 근무환경도 좋은 편으로 잘 알려져 있어 젊은 층이 아르바이트로 일하고 싶어 하는 직장 중 하나다.
 물론, 대우가 좋은 만큼 합격하기에도 쉽지 않다.
 한편, 점장이 잠깐 다른 짓을 하는 사이에 속으로 레비를 호출해본다.
 -레비.
 -네, 주인님.
 -눈앞에 있는 이 여자… 아니, 플레이어의 포인트 메뉴 창을 열어줘.
 -알겠습니다.
 레비의 말이 끝나자마자 여자의 머리 위에 있던 포인트 메뉴 아이콘이 사라진다.
 동시에 바이올렛이 나에게 알려줬던 5가지 큰 제목의 스텟 포인트 메뉴와 더불어 상세적으로 구분된 항목까지 쭈욱 나열된다.
 내가 지닌 능력이 바로 스텟을 재분배할 수 있다는 점이다.
 그러나 여기서 한 가지 의구심이 든 게 바로 이것이다.
 내 자신의 스텟 분배 현황을 볼 수 있다면, 혹시 다른 플레이어의 스텟 분배 현황도 열람할 수 있지 않을까?
 노숙자의 경우에는 바이올렛이 손수 포인트 메뉴 아이콘을 터치해 나에게 열람을 시켜줬다.
 그때 당시 다른 플레이어의 수치를 내가 ‘볼 수 있다’는 것까진 확인을 했다.
 그렇다면 과연, 바이올렛이 아닌 내가 주도적으로 저 포인트 메뉴 아이콘을 건드려 스텟 분배 현황을 열람할 수 있느냐 없느냐가 여태껏 의문점으로 남아 있었다.
 그 실험의 결과.
 ‘…성공이군.’
 눈앞에 있는 점장의 스텟 분배 현황이 쫘악 펼쳐진다.
 항목 자체가 워낙 많기 때문에 일일이 전부 다 눈으로 쫓아가며 내가 원하는 스텟 항목을 찾기엔 시간이 너무 오래 걸린다.
 여기서 레비의 도움을 필요하다.
 -레비, ‘성격’ 분야 좀 검색해줘.
 -예, 알겠습니다.
 여섯 가지 큰 항목 중 하나인 성격 파트를 검색해본다.
 거두절미하고 성격에 관한 스텟 항목이 주르륵 나열된다.
 동시에 점장이라는 사람이 어떤 타입의 사람인지에 대해 쉽사리 파악할 수 있었다.
 ‘조급함이 150. 침착함이 89… 인내력도 78이군.’
 꽤나 급진적인 성격을 지닌 다혈질 여성인 것으로 판명된다.
 겉으로 보기엔 냉철하고 사무적인 샐러리맨 여성같이 생겼는데, 의외로 불같은 여자인가 보다.
 “…창식 씨?”
 “아, 네!”
 “제 말 들리시나요?”
 “…죄송합니다. 다시 한 번 말씀해주시겠습니까?”
 “…….”
 점장의 미간이 찡그려지기 시작한다.
 이런…….
 나도 모르게 너무 성격 분석에 심취한 나머지, 점장의 질문을 미쳐 새겨듣지 못했다.
 조심해야겠군.
 
 ***
 
 “…그럼 여기까지 할게요. 수고 많으셨어요.”
 “감사합니다.”
 대략 30분 간 이어진 면접의 끝을 알리듯 점장의 마무리 멘트에 나도 모르게 옅은 한숨을 토해낸다.
 긴장을 한 탓이 아니다.
 점장의 수많은 스텟 메뉴에 시선을 빼앗긴 터라 눈이 절로 피로함을 토해내고 있을 뿐이다.
 ‘이것도 참… 못할 짓이군.’
 반투명한 홀로그램 창에 빼곡히 새겨져 있는 무수한 스텟 포인트.
 그나마 레비의 검색 기능을 활용해 내가 필요한 정보를 콕 찍어 골라낼 수 있어서 다행이지, 만약 검색 기능이 없었다면 일일이 다 직접 눈으로 찾아내야 했을 것이다.
 그렇게 되면 이것도 노가다 수준의 노동이다.
 그래도 이번 면접을 통해 꽤나 많은 걸 알아냈으니 그것만으로도 큰 수확이라 할 수 있을까.
 자리에서 일어서며 휴게실을 나가려고 하는 순간, 점장의 말이 나의 발목을 붙잡는다.
 “출근은 언제부터 가능한가요?”
 “…출근… 말입니까?”
 “네. 개인적으론 당장 내일부터 나와서 일 해주셨으면 해요. 때마침 남자 직원이 한 명도 없어서 여러모로 좀 고충이 많거든요.”
 “내일이라… 가능합니다. 불러만 주신다면 바로 나올 수 있습니다.”
 어차피 지금 당장 필요한 건 여분의 돈이다.
 전생에서 온갖 잡노동을 다 해봤는데, 서빙이 힘들쏘냐.
 강한 자신감을 드러내는 내가 마음에 든 모양인지 빙그레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어가는 점장.
 “급여는 아까 말씀드린 그대로에요. 물론 근무 태도에 따라 보너스도 충분히 지급해드릴 수 있으니, 앞으로 잘 부탁드려요.”
 “예, 저야말로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가볍게 허리를 숙이며 인사한 뒤 휴게실을 나선다.
 스텟 포인트에 관한 정보뿐만이 아니라 일자리까지 얻게 될 줄이야.
 “이거… 오늘 운세가 나쁘지 않은데?”
 언제나 불운 덩어리라 불렸던 나에겐 이런 사소한 행운조차도 감지덕지할 정도다.
 
 ***
 
 내 파트타임을 다시금 확인하며 시원한 카페 안에서 나와 다시 무더운 시내 거리로 나선다.
 동시에 머릿속으론 점장과의 면담을 통해 확인했던 몇몇 사실들을 정리해본다.
 타인의 스텟 메뉴를 열람하면, 그 사람의 성격을 볼 수 있다.
 이거는… 꽤나 좋은 기능이군.
 만약 그렇다고 한다면…….
 타인의 스텟 분배까지 내 마음대로 할 수 있을까?
 만약 다른 사람의 스텟 분배까지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다면, 그 사람의 인생에 많은 영향을 미칠 게 틀림없다.
 “이건 아무래도 안 되겠군.”
 바이올렛은 분명 조력자이자 감시관으로서 내 곁에 머물겠다고 했다.
 인간계에 악영향을 미칠지도 모른다는 우려 때문이다.
 만약 그렇다면, 타인의 스텟을 조정하는 능력을 애초에 심어주지 않았을 것이다.
 그렇게 되면 내 입맛대로 그 사람의 스텟을 분배해버릴 수 있기 때문이다.
 내가 바라는 게 곧 인간계의 평화를 향한 일이라고는 확신할 수 없다.
 개인의 이득이 앞서는 순간, 분명 집단이란 존재에게 피해를 입힐 게 틀림없으니까.
 “그래도 나중에 실험은 해볼 만한 가치가 있겠어.”
 일단 이건 후순위로 미루도록 하자.
 지금 당장 중요한 건 내가 살고 있는 이 집 근처에 얼마나 많은 NPC들이 살고 있는지, 그리고 그 위치를 파악해두는 게 급선무다.
 스텟 재분배는 분명 좋은 능력이지만, 여분의 스텟 포인트가 없으면 아무런 의미가 없는 능력이기도 하다.
 여유분의 스텟 포인트를 수집해둬야 한다.
 그래야 필요할 때 즉각적으로 스텟 재분배를 통해 위기의 상황에 적절히 필요한 능력을 손안에 넣을 수 있게 될 테니 말이다.
 “그것보다 이 특수능력은 도대체 뭘까.”
 마지막 여섯 번째 항목에 있는 특수능력.
 열람을 하고 싶지만, 열람을 해도 자물쇠 아이콘으로 뜨면서 열람할 수 없다는 문구만 머릿속에 울려 퍼질 뿐이다.
 레비에게 물어봐도 ‘업데이트가 필요합니다.’라는 말만 중얼거린다.
 “…바이올렛을 불러볼까.”
 뭔가 필요한 게 있다면 언제든지 찾아달라고 본인이 말했으니, 사양하지 않고 직접 한 번 불러보도록 하자.
 어차피 혼자서 NPC 찾기 모험을 떠나도 재미없으니 말이다.
 -레비, 바이올렛과 연결해줘.
 -알겠습니다.
 위잉.
 작은 기계 소리와 함께 뒤이어 삐삐― 거리는 신호음이 들리기 시작한다.
 이윽고.
 -…세트로 해서 3,500원 되시겠습니다, 고객님!
 ……??
 뭐냐, 이건.
 뜬금없이 3,500원? 그리고 고객님?
 -야, 바이올렛. 아침부터 술이라도 마신 거냐? 뭔 헛소리야.
 -아……!!
 순간 아차 싶은 탄식을 자아낸 바이올렛이 다급하게 말을 바꾼다.
 -언제부터 전음이 연결되어 있던 거야?!
 -방금 전.
 -아이 씨… 왜 하필이면 일할 때 전음을 걸어가지고… 나도 모르게 손님한테 들려줘야 할 멘트가 전음으로 송신되었잖아.
 -너, 일하고 있는 중이냐?
 -물론이지. 일하지 않는 자, 먹지도 말라고 하잖아.
 -어디서 일하고 있는데.
 -시내 사거리에 있는 목도날드.
 -…….
 인간이 아닌 NPC가 설마 목도날드 같은 햄버거 가게에서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을 줄이야.
 하기사, 게임 세계의 NPC들도 하나씩 직업은 가지고 있었다.
 무기 상인이라든지 약초 상인, 혹은 창고지기나 마구간 관리인 같은 그런 거 말이다.
 아마 이 인간계의 NPC들 또한 플레이어들과의 접근성을 높이기 위해 직업 같은 걸 하나씩은 가지고 있는 모양인가 보다.
 그런데 햄버거 가게 아르바이트 점원이라니.
 ‘뭔가 폼이 안 나는구만.’
 나도 모르게 절로 쓴웃음이 새어나오고 있는 와중에, 바이올렛이 보내온 전음이 들려온다.
 -그보다 왜 불렀어?
 -이제부터 이 근방에 있는 NPC들을 찾아다녀볼까 해서. 기왕이면 네 도움을 받을까 했지. 그리고 물어볼 것도 있고.
 -물어볼 거?
 -여섯 번째 특수 항목에 대해서.
 -아, 그건 지금 네 단계에선 확인할 수 없을 거야. 조만간 나중에 그 특수 항목을 활용할 때가 올 테니 아직까지는 좀 참아둬.
 -명심하도록 하지.
 -그리고 아르바이트 곧 끝나니까 가게 앞으로 와. 아니면 햄버거라도 하나 챙겨줄까?
 -그래준다면야… 콜라와 감자튀김도 세트로 가져다주면 좋겠군.
 -욕심 봐라? 알았어, 알았다고. 가져다줄게.
 -고맙다.
 아직까진 가난뱅이 신세에 불과한 나로선 이런 사소한 친절 하나하나가 절실하게 필요하다.
 오늘 아침부터 잔뜩 굶은 채 아르바이트 면접을 보느라 얼마나 혼이 났겠는가.
 꼬르륵 소리가 최대한 점장의 귀에 새어 들어가지 않게끔 억제하느라 죽을 맛이었다.
 그래도 졸지에 햄버거 하나를 제공받게 되었으니…….
 “오늘은 역시 운이 좋은 날이구만.”
 
 ***
 
 “여기인가.”
 목도날드 앞에 도착한 뒤 자동문을 통과해 안으로 들어선다.
 그러자 유니폼을 입은 바이올렛이 반사적으로 나를 손님인 줄 착각하고 인사말을 건네준다.
 “어서오… 아, 너야?”
 “손님을 대하는 태도가 영 구리군.”
 “공짜로 햄버거 먹으러 온 사람을 손님이라고 불러도 되는 거야?”
 “돈의 유무는 둘째 치고, 손님은 손님이지.”
 “흐음… 뭐, 아무렴 어때.”
 일하던 도중에 나와 길게 말을 끌고 싶지 않다는 의지가 결연하게 느껴진다.
 “곧 있으면 일 끝나니까 잠시 기다리고 있어.”
 “먹을 거는?”
 “성질머리 하고는. 조금만 기다려 봐.”
 오후 3시 반이다보니 사람들이 그렇게까지 많은 편도 아니다.
 대체적으로 이곳 목도날드는 간편한 식사를 위해 방문하는 사람들이 많은 편이기 때문에 식사 시간 때가 아닌 경우에는 많이 한가할 수밖에 없다.
 적당히 근처에 있는 자리에 앉아 기다리고 있는 동안, 바이올렛이 햄버거 세트가 담겨진 쟁반을 내민다.
 “자, 본래는 서빙 같은 거 안 해주지만 특별히 서비스로 해주는 거야.”
 “고맙군.”
 카운터에서 볼 때는 몰랐는데, 유니폼의 치마 길이가 생각보다 꽤나 짧은 편이었다.
 탄력적인 허벅지가 그대로 다 드러날 정도로 아슬아슬한 노출 수위를 자랑한다.
 나도 모르게 시선을 다른 곳으로 돌리자, 눈치 빠른 바이올렛이 키득거리며 말한다.
 “숫기 없는 건 여전하구나.”
 “…시끄럽다. 일이나 빨리 끝내고 나와라. 기다리기 지루하니까.”
 “알았어, 알았어. 조금만 참아.”
 바이올렛이 손으로 가볍게 내 등을 살짝 친다.
 그렇게 한동안 햄버거와 감자튀김, 콜라로 허기를 달래고 있을 무렵, 평상복으로 갈아입은 바이올렛이 자연스럽게 다가온다.
 “어머, 벌써 다 먹었네.”
 “아침, 점심. 두 끼나 굶었으니까.”
 “가난뱅이는 서럽구나.”
 “이제부턴 가난뱅이 신세에서 벗어날 일만 있겠지.”
 “오호, 그래?”
 잔뜩 기대감 어린 시선으로 나를 바라보는 바이올렛.
 “부자가 되면 나한테도 비싼 거 좀 많이 사줘.”
 “NPC가 플레이어에게 구걸해도 되냐?”
 “뭐 어때. 그럴 수도 있지.”
 NPC라고 해서 틀이 박힌 대사만 반복해서 들려준다든지 하는 그런 이미지를 생각했지만, 바이올렛 하나만 놓고 보자면 평범한 인간과 다를 바가 없다.
 NPC와 플레이어.
 그리고 인간 이외의 생물들을 전부 몬스터 취급하는 이 세계.
 ‘내가 알고 있는 기존의 세계와는 다른 상식을 지니고 있군.’
 좀 더 깊게 파고 들게 되면 이 세계의 진실을 알아낼 수 있지 않을까 싶지만… 지금 당장은 우선 이 가난뱅이 인생에서 벗어나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 우선 NPC들의 위치부터 파악해둘 필요가 있다.
 스텟 포인트를 수집해 나의 능력을 기하급수적으로 상승시키고, 그 능력을 바탕으로 엘리트 인생을 걷는다.
 나름 완벽한 계획이라 생각하며 바이올렛과 함께 거리를 나서게 된다.
 “NPC들은 어디어디에 위치해 있지?”
 “음… 글쎄?”
 “…글쎄라고?”
 순간 내가 잘못 들었나 싶어 다시 되묻고 말았다.
 바이올렛이라면 NPC들의 위치를 다 알고 있을 거라 철썩 같이 믿었기에 나도 모르게 힘이 빠지고 만 것이다.
 “너, NPC라며.”
 “응, 맞아.”
 “그런데 네 동료들의 위치를 모른다는 게 말이 되냐?”
 “얼추 몇몇은 알고 있어. 하지만 모든 NPC들의 위치를 아는 건 아니야. 말이 NPC라고는 하지만, 플레이어들에 비해 몇 가지 이 세계의 시스템을 이용할 수 있는 권한을 지니고 있는 것 말고 플레이어와 다를 바가 없어. 생각해 봐. 내가 이 지역의 NPC인건 맞지만, 미국에 있는 NPC들의 정보와 위치를 알아야 할 의무는 없잖아? 알고 있다 해도 아무 쓰잘데기도 없고.”
 “…그렇긴 하지.”
 “결국 나도 모든 정보를 가지고 있진 않아. 각 NPC들이 지니고 있는 지식과 능력, 수행해야 하는 역할도 명확하게 한정되어 있으니까. 만약 모든 정보와 능력을 지니고 있으면 그건 NPC가 아니라 신이겠지.”
 “…….”
 맞는 말이다.
 NPC도 사실은 그 세계관의 주민이라고 할 수 있다.
 게임에서도 특정 에피소드, 혹은 특정 퀘스트에만 관여되는 NPC들에게 따로 그 역할이 배정되어 있다는 걸 고려해보면 바이올렛의 말도 이해가 된다.
 NPC 한 명이 모든 에피소드, 그리고 시나리오에 매번 관여되어 있는 건 아니니 말이다.
 “NPC라는 게 생각보다 별로 대단한 건 아니군.”
 “맞아. 결혼해서 애를 낳을 수도 있고, 한 가정의 가장이 될 수도 있고. 생활 자체는 플레이어들과 큰 차이가 없어.”
 “그렇군.”
 애도 낳을 수 있단 말이지…….
 그럼 바이올렛도 플레이어와 결혼해서 한 가정의 어머니가 될 가능성도 있단 뜻이 아닐까.
 “…….”
 아니, 지금은 불순한 생각 같은 건 접어두도록 하자.
 가장 중요한 것은 우선 스텟 포인트를 수집하는 일이니 말이다.
 “일단 내가 알고 있는 이 지역 NPC들의 위치부터 먼저 알려줄게. 그것만으로도 큰 수확 아니겠어?”
 “그럴지도 모르겠군.”
 “아, 레비에게 ‘맵’을 켜달라고 해서 내가 알려주는 곳에 NPC들을 위치를 표기해달라고 해둬. 그래야 나중에 NPC들이 어디어디에 있는지 너 혼자서도 쉽게 파악할 수 있으니까.”
 “그런 기능이 있었군.”
 게임상에서도 맵(Map)에 표기되어 있는 NPC들을 찾아가서 퀘스트를 깼던 기억이 난다.
 좋은 기능을 지니고 있구만.
 “자, 그럼 가볼까?”
 바이올렛이 기운차게 먼저 앞장선다.
 오늘 하루도 왠지 모르게 바쁜 시간을 보낼 거 같은 기분이 든다.
 
 ***
 
 나보다 앞서 걸어가던 바이올렛이 순간 갑자기 정지한다.
 출발한지 근 5분이 안 돼서 벌어진 이상 징후였다.
 “갑자기 왜 그러냐.”
 “너, 혹시 말이야.”
 바이올렛의 시선이 나에게 고정된다.
 “알림 기능 꺼놨어?”
 “알림 기능이라니… 그게 뭐지?”
 “몬스터 알림 기능 말이야.”
 “아… 그거라면 꺼뒀어. 고작해야 파리 같은 거에도 민감하게 막 울리고 그러더군.”
 “그럼 지금 당장 알림 기능 켜봐.”
 “왜.”
 “일단 내 말대로 해보라니까.”
 “…….”
 주변에 벌레 같은 것만 있어도 몬스터로 취급하고 막 울려대는 귀찮은 기능 아닌가.
 어쩔 수 없이 레비에게 지시를 내려 알림 기능을 다시 활성화시키자, 역시 예상대로 머릿속에 경고음이 울려 퍼진다.
 -몬스터가 감지되었습니다. 조심하십시오.
 그래, 나도 알고 있다. 발밑에 개미 무리가 지어가는 거 말이지.
 “켰어?”
 “시끄러운 경고음 덕분에 머릿속이 울렁거리는군.”
 “그럼 따라와 봐.”
 난데없이 내 손을 잡고 근처 골목길로 이끄는 바이올렛.
 설마.
 이 시추에이션은…….
 ‘이 녀석, 날 유혹하기라도 하는 건가?’
 방금 바이올렛의 말을 통해 NPC도 플레이어들과 별반 다를 바가 없는 생식 기능을 갖추고 있다 들었다.
 그렇다면 혹시…….
 “여기라면 아무도 없겠지?”
 “…….”
 나도 모르게 바이올렛의 전신을 훑어본다.
 잘빠진 몸매.
 모델을 해도 전혀 손색이 없을 만큼 환상적인 S라인이 남심을 마구 자극한다.
 게다가 외모도 상당히 괜찮다.
 바이올렛이라면 아마 남자도 상당수 꼬일 법하지 않을까 싶다.
 그런 바이올렛이 설마 나에게 호감을 품고 있는 건가?
 머릿속에서 온갖 상상을 하고 있을 무렵, 바이올렛이 대뜸 이렇게 말한다.
 “몬스터네.”
 “뭐… 곤충이라든지 작은 동식물은 어디서든 볼 수 있으니까.”
 “그게 아니라. 저기 저거 말이야. 저 몬스터를 가리키는 거야.”
 고작해야 고양이 정도겠지.
 그런 식으로 생각하며 바이올렛이 가리키는 방향으로 고개를 돌린다.
 그러나.
 그곳에는 내가 전혀 예상하지 못한 존재가 우두커니 서 있었다.
 판타지 영화에서나 볼 수 있을 법한 진짜 몬스터.
 …늑대인간이었다.
 
 ***
 
 “진짜 몬스터라고……?!”
 나도 모르게 놀란 나머지 새된 비명을 지르고 만다.
 그와 동시에 늑대인간이 우리 쪽으로 날카로운 시선을 던진다.
 “고, 고양이 같은 거 아니었냐?!”
 “무슨 헛소리를 하는 거야. 몬스터 맞잖아?”
 당황한 나완 달리 바이올렛은 오히려 이게 일상이라는 듯이 가볍게 한숨을 내쉬어보인다.
 저런 녀석을 어떻게 상대하란 말인가!
 머릿속이 말 그대로 패닉 상태가 되어갈 무렵, 낯선 목소리가 들려온다.
 “뭐야. 먼저 온 손님이 있었네.”
 “……!”
 언제부터 있었던 것일까.
 담벼락 위에 서 있는 한 중년 남성이 쓴웃음을 내지으며 나와 바이올렛을 내려다본다.
 턱수염이 단정하게 정리되어 있는 것이 댄디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늦었잖아, 아저씨. 바이러스가 그대로 형상화되고 있는데 여태 처리 안 하고 뭐하고 있던 거야?”
 “나도 사적인 일이 있었다고. NPC가 마냥 바이러스나 잡으러 다니거나 하는 그런 존재는 아니잖냐.”
 바이러스? 형상화?
 그보다 저 남자도 바이올렛과 같은 NPC인가?
 알 수 없는 말을 지껄이는 동안, 늑대인간이 엄청난 포효를 내지른다.
 -끄에에에에에엑!!!!!!
 마치 무협에서 보던 사자후(獅子吼)란 기술이 절로 떠오를 법한 그런 엄청난 굉음이 내 고막을 사정없이 강타한다.
 “큭……!”
 나도 모르게 두 손으로 귀를 틀어막지만, 새어들어 오는 광란의 소음은 도저히 막을 길이 없었다.
 고막이 찢어질 법한 굉음에도 불구하고 바이올렛과 중년 남성은 멀쩡하게 선 채 늑대인간을 바라본다.
 “바이올렛, 그 옆에 있는 플레이어는 뭐냐?”
 “저번에 말했던 그 사람.”
 “…아, 운 스텟에 버그가 생겨서 불운 덩어리 인생을 살던 그 플레이어인가 보군.”
 저 남자…….
 아무래도 나에 대해서 잘 알고 있는 모양인가 보다.
 “일단 저 바이러스부터 해결하는 게 어때?”
 “알고 있어.”
 중년 남성이 가볍게 어깨를 돌리며 준비운동을 시작한다.
 허나 중년 남자가 여유를 부리는 동안, 늑대인간이 지면을 박차고 나와 바이올렛을 향해 돌진해온다.
 파바박!!
 “……!!”
 눈으로 따라잡을 수 없는 속도다!
 노숙자의 술병 던지기에 비할 바가 못 되는 어마어마한 속도에 순간 나도 모르게 침을 꿀꺽 삼킨다.
 스텟 재분배로 반사 신경, 동체시력 스텟을 높여서 해결될 만한 그런 차원의 문제가 아니었다.
 애초에 그때는 바이올렛에게 임시적으로 많은 스텟 포인트를 할당받아서 재분배를 시도할 수 있었지만, 지금 내가 가진 여분의 스텟 포인트는 제로에 가깝다.
 피해야 한다!
 저 늑대인간이 팔 한 번 휘두르는 것만으로도 바이올렛과 나는 뼈가 바스러질 만큼 엄청난 충격을 받을 것이리라.
 머리는 경고음을 보내고 있지만, 몸이 쉽사리 움직이지 않는다.
 이럴 때 평균치에 머무르고 있는 나의 육체 계열 스텟 포인트들이 원망스러울 따름이었다.
 -크워어엉!!!
 “틀렸어……!”
 바이올렛을 데리고 피할 시간조차 없다!
 이대로 끝인가…….
 기껏 두 번째 인생에서 멋진 삶을 살아보려 했었는데, 그것도 전부 무용지물이라니.
 고작 이틀 산 것만으로 만족할 수는 없다.
 어떻게든 살고 싶다!
 그런 간절함이 하늘에 닿았을까.
 “아따, 거 참 시끄럽네.”
 깔끔한 정장을 갖춰 입은 중년의 남성이 그대로 담벼락에서 뛰어내린다.
 동시에 우리 쪽으로 돌진하던 늑대인간의 머리를 그대로 발뒤꿈치로 찍어버리는 게 아닌가!
 쿠웅!!!
 생각지도 못한 충격음이 우리에게까지 도달한다.
 아니, 충격음은 둘째 치고 그보다 더한 일이 발생했다.
 남자의 내려찍기 한 방에 그대로 늑대의 머리가 터져버린 것이다!
 뇌수가 질질 새어나오는 징그러운 장면 연출에 나도 모르게 구역질이 올라올 뻔한 것을 필사적으로 참아낸다.
 안색이 안 좋아진 내 모습을 지켜보던 바이올렛이 옅은 한숨을 내쉬며 등을 가볍게 두드려준다.
 “진정해. 아직 끝난 거 아니니까.”
 “…뭐……?”
 “웨어울프(Werewolf)란 이름을 가진 버그 몬스터의 특징은 바로 재생력이거든. 머리 하나 터졌다고 쓰러지거나 그럴 만한 버그는 아니야.”
 “아까부터 바이러스니 버그니… 도대체 무슨 말을 하는 거냐.”
 “늑대인간은 상식적으로 생각해봐도 인간계에 있어서는 안 될 몬스터야. 너도 알고 있지? 레비가 반응하고 있는 몬스터는 파리, 개미, 고양이 같은 동물체라는 거.”
 “그거야… 알고 있다만.”
 “그런데 웨어울프는 좀 달라. 바이러스(Virus) 라는 존재가 특정 동식물과 융합해 생기거나 아니면 자체적으로 외형을 갖춰 탄생한 것을 우리는 버그 몬스터(Bug monster)라고 부르고 있어. 즉, 네가 알고 있는 일반 몬스터와는 다른 녀석이지. 괴물이라고 하면 알아듣겠지?”
 “…….”
 “그래서 알림 기능은 켜놓는 게 좋을 거야. 저런 식으로 갑자기 버그 몬스터에게 습격당해 쥐도 새도 모르게 죽는 것보단 나은 편 아니겠어? 하다못해 몬스터 알림 기능이 귀찮다면 최소한 버그 몬스터 알림 기능 정도는 켜두라고.”
 “…좋은 충고, 정말 고맙다.”
 그런 게 있다면 진작 좀 알려달라고.
 직접 마주치고 나서 이런 중요한 설명을 들려주다니… 선 조치 후 보고의 부작용이 아닐까 싶다.
 “후우.”
 가볍게 한숨을 내쉰 중년 남성이 머리가 뭉개진 늑대인간을 바라본다.
 바이올렛이 말했던 그대로 늑대인간은 거동에 문제가 없어 보였다.
 늑대인간의 머리가 천천히 재생되기 시작하자, 남성이 짧은 기합을 내지르며 외친다.
 “스텟 포인트, 리셋(Reset)!”
 남자의 외침과 함께 그의 주변으로 무수한 스텟 홀로그램 창이 생성된다.
 “완력 스텟, 최대치로!”
 우우웅!!
 레비와 비슷한 효과음이 들려오면서 이번에는 남자가 늑대인간을 향해 먼저 돌진한다.
 “얌전히 뒈져라, 버그 새끼야!”
 퍼벅!!
 남자의 왼 주먹이 그대로 늑대인간의 옆구리에 꽂힌다.
 뒤이어 기다렸다는 듯이 오른 주먹이 늑대인간의 가슴팍에 정확히 꽂힌다.
 가슴팍을 꿰뚫어버린 오른손을 다시 회수하자, 남자의 오른 손에 무언가가 들려져 나온다.
 “저건… 뭐지?”
 나도 모르게 질문을 던지자, 바이올렛이 침착하게 설명을 이어나간다.
 “바이러스 핵이야.”
 “핵… 이라고?”
 “응. 버그 몬스터가 발생하게 된 근본적인 원인이지. 저 원인을 찾아 제거하면…….”
 바이올렛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남성이 오른손에 힘을 주며 바이러스 핵이라 불린 작은 구체를 그대로 박살내버린다.
 째쟁!!
 유리가 깨지는 듯한 효과음과 함께 그대로 산산조각이 되어 떨어지는 작은 빛의 구체.
 그에 따라 늑대인간의 몸이 푸른 불길에 휩싸이더니 이내 재로 변해 흔적도 없이 사라진다.
 동시에 바이올렛이 살짝 어깨를 으쓱하며 방금 전에 했던 말을 이어간다.
 “저런 식으로 버그 몬스터가 사라져.”
 “…그렇군.”
 바이러스와 버그 몬스터.
 그리고 저 정체불명의 NPC 남성.
 갑자기 이틀 새에 너무나도 많은 일들이 벌어진 탓에 나도 모르게 살짝 머리가 아파온다.
 
 
 # EP 3. 퀘스트(Quest) 수행
 
 바이러스.
 그리고 버그 몬스터.
 설마 진짜로 괴물이라는 놈들이 이 현실 세계에 도사리고 있을 줄은 꿈에도 몰랐다.
 아니, 애초에 스텟이니 NPC니 하는 이런 것들도 있는데, 괴물 하나 나왔다고 호들갑을 떠는 것도 이상해 보일지도 모른다.
 “…그래. 더 이상 내가 기존에 일던 상식선으로 이 세계를 이해하려고 하지 말자.”
 인간의 학문이 전부 다 뒤집어진 또 다른 세계.
 그것이 바로 현실이다.
 정신을 가다듬기 위해 화장실에 들어가 차가운 물로 세수를 한 뒤 시간을 바라본다.
 현재 시각, 오전 9시.
 “…슬슬 갈 때군.”
 어제 하루 종일 NPC들의 위치를 파악하기 위해 바이올렛까지 섭외했건만, 도중에 웨어울프라는 버그 몬스터로 인해서 그 계획도 다 틀어지게 되었다.
 대신 바이올렛과 같은 부류의 또 다른 NPC를 만날 수 있었다.
 이름은 최강철.
 어제 버그 몬스터를 맨손으로 때려잡은 그 중후한 댄디남 아저씨다.
 바이올렛의 설명을 인용하자면, 최강철이란 NPC는 주로 버그 몬스터 퇴치 퀘스트를 담당하고 있다고 들었다.
 그 말인즉슨.
 나도 나중에 스텟 포인트를 수집해 능력을 키우면, 버그 몬스터를 사냥할 수 있게 된다는 뜻이 아닐까.
 얼추 듣자하니, 버그 몬스터 퇴치 퀘스트는 보상도 짭짤하다고 한다.
 대신, 퀘스트의 난이도가 상당하다는 것도 얼핏 들었다.
 “어쩔 수 없지.”
 버그 퀘스트를 받고 싶다면 언제든지 자신을 찾아오라는 최강철의 말이 있었지만, 아직까지 늑대인간과 영혼의 주먹질을 주고받을 만큼 나의 능력은 그리 높지 않다.
 내가 지니고 있는 모든 스텟 포인트를 육체 쪽에 올인을 해야 겨우 상대가 가능하지 않을까.
 허나 무리를 해서라도 버그 퀘스트를 구태여 초반부터 노리고 싶진 않다.
 일단 기본적인 것들부터 시작해보자.
 바이올렛에게 자신이 알고 있는 NPC들의 위치와 정보를 레비에게서 다운로드 받아 맵에 표기를 해뒀다.
 맵에 표기가 되어 있으면 혼자서도 알아서 잘 찾아갈 수 있으리라.
 그렇게 믿으며 이른 오전부터 집을 나선다.
 아르바이트는 점심시간 이후인 오후 1시부터 저녁 7시까지다.
 그 전까지는 남는 시간을 활용해 최대한 NPC들을 만나보고, 그들에게 퀘스트를 받아 스텟 포인트를 늘릴 예정이다.
 각 NPC별로 담당하고 있는 퀘스트의 종류가 다르다고 하던데…….
 “버그 몬스터 퇴치만 아니면 뭐… 할 만하겠지.”
 이런 나의 말이 안이한 생각이었음을 머지않아 깨닫게 된다.
 
 ***
 
 오전 9시 30분.
 “앞으로 5분 정도 더 기다리면 되려나.”
 사거리 근처에 있는 편의점 앞에서 누군가를 기다려본다.
 바이올렛과 만나기로 약속되어 있는 건 아니다.
 그렇다고 딱히 누군가와 이 사거리 앞에서 만나기로 약속을 주고받은 것 또한 아니다.
 그저 하염없이 기다릴 뿐이다.
 -레비.
 -예, 주인님.
 -아직 오려면 멀었나?
 -이제 곧 도착합니다.
 -얼마나 걸리지?
 -정확히 3분 23초 뒤입니다.
 -…정말 얼마 안 남았군.
 바이올렛이 준 NPC의 정보에 의하면, 분명 이 사거리를 지나치는 NPC 한 명이 있을 거라고 했다.
 그 NPC가 누구인지는 나도 정확하게 모른다.
 하지만 나에게는 NPC와 플레이어를 구별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
 포인트 메뉴 창 아이콘이 머리 위에 있느냐 없느냐를 확인하기만 하면 된다.
 만약 머리 위에 포인트 메뉴 아이콘이 없다면, 그 사람은 플레이어가 아닌 NPC다.
 다시 말해서, 스텟 포인트를 보상으로 받을 수 있는 퀘스트를 나에게 제공할 그런 존재라고 할 수 있다.
 바이올렛도 그렇고, 버그 퇴치 전문 퀘스트를 부여하는 최강철도 그렇고 각자 특색이 있는 퀘스트를 담당하고 있다 들었다.
 내가 곧 마주할 NPC의 퀘스트 수행 방식은…….
 …선행(善行)이다.
 “저 사람이군.”
 슬슬 행동에 임한다.
 내 시선이 고정된 장소에는, 한 명의 어르신이 편의점에서 막 버린 다수의 종이 박스들을 이제 막 수거하기 위해 움직이고 있었다.
 “아구구… 허리야…….”
 가볍게 등을 토닥이며 수레 안에 다수의 종이 박스들을 차곡차곡 쌓아올리는 노인.
 수레를 끌고 장소를 이동하려 하지만, 가야 할 곳이 하필이면 제법 경사가 있는 언덕길이라 그런지 도저히 노인의 힘으로 무거운 수레를 감당하기 힘들어 보인다.
 “할아버지. 안 힘드세요?”
 “……?!”
 노인의 눈동자가 나를 쫓는다.
 뒤이어 자신에게 말을 걸어왔다는 걸 뒤늦게 눈치채고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여준다.
 “이 늙은이 몸뚱이로 수레 끄는데 안 힘들 리가 있나… 에휴…….”
 순간 노인의 머리 위에 물음표 표시가 생성되기 시작한다.
 이윽고 레비의 목소리가 뇌리에 퍼지며 퀘스트가 생성되었음을 알려준다.
 
 -퀘스트 ‘홍춘삼의 수레’ (난이도 : 일반)
 내용 : 홍춘삼의 수레를 언덕 위까지 대신 끌고 가시오.
 보상 : 스텟 포인트 5점.
 
 ‘수레 끄는 것 정도야… 그보다 이 NPC의 이름이 홍춘삼인가 보군.’
 퀘스트가 생성되면서 자연스럽게 바이올렛이 표기해준 맵 위로 ‘홍춘삼’이라는 NPC의 데이터가 갱신된다.
 이것으로 바이올렛과 최강철, 두 NPC를 제외하고 또 다른 NPC의 정보를 얻게 되었다.
 “제가 언덕길까지 수레 끌고 갈게요. 할아버지는 뒤에서 쉬면서 천천히 따라오시면 되요.”
 “하이고마… 안 그래도 되는디…….”
 “괜찮아요, 괜찮아. 너무 부담가지시지 마시고 저한테 맡겨주세요.”
 “그럼… 부탁 좀 해도 될런가?”
 “물론이죠!”
 기운차게 대답하며 수레를 끌기 위해 자세를 잡아본다.
 ‘별로 어렵진 않겠지.’
 그렇게 생각하며 힘을 주는 순간.
 ‘…음?’
 생각보다…….
 …무겁다!
 아니면 내가 허약한 건가? 보기와는 다르게 제법 무게가 나가는 탓에 나도 모르게 순간 잔뜩 긴장하고 만다.
 ‘스텟 포인트 5점을 주는 퀘스트라고. 게다가 이걸 위해 아침부터 일찍 나온 거 아니냐. 조금만 힘내보자!’
 속으로 의지를 굳히며 다시금 힘을 줘본다.
 “흐읍!”
 짧은 기합소리와 함께 천천히 수레의 바퀴가 움직이기 시작한다.
 꽤나 경사가 있는 언덕길이라 그런지 무게가 한층 더 무겁게 느껴진다.
 그래도 어떻게든 해내야 한다.
 겨우 일반 난이도 퀘스트에 쩔쩔매면, 나중에 보다 더 난이도 있는 퀘스트는 어떻게 수행할 수 있겠는가!
 일단 나의 목표는 버그 몬스터 퀘스트를 무난하게 수행할 수 있는 수준까지 스텟 포인트를 수집해두는 것이다.
 버그 몬스터 퀘스트는 난이도가 어려운 만큼 보상 스텟 포인트도 꽤나 짭짤하다.
 처음에는 이런 짜잘한 퀘스트로 스텟 포인트 좀 모았다가, 나중에 약한 버그 몬스터 정도는 혼자서 때려잡을 정도까지 능력을 키우게 된다면 대량으로 스텟 포인트를 획득할 수 있을 것이다.
 여분의 스텟 포인트가 많아지면 지능 부분에 집중적으로 투자한 뒤 사법고시에 단박에 합격해 변호사, 검사 생활을 노려볼 수도 있고, 금전운 스텟에 투자해 자금을 늘릴 기회를 엿보는 것도 가능하다.
 정말 다양하게 활용할 수 있는 스텟 포인트.
 이것들을 수집하면, 성공 인생은 거의 확정된 거나 다름이 없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선…….
 이 빌어먹을 수레를 저 언덕길 위에까지 끌고 올라가는 것부터 시작하자!
 
 ***
 
 “흡!!!”
 다시 한 번 기합소리를 내지르며 수레를 끌기 시작한다.
 거 참…….
 더럽게 힘들다!
 솔직히 말해서 별 거 아니겠지 하고 생각했던 게 안이했다.
 오전에 폐지를 수집하던 도중이라서 수레 안에는 그리 많은 종이들이 놓여 있지 않았다. 그래서 별로 무겁지 않을 거라 생각했었는데… 이 무게는 내 예상을 초월했다.
 ‘이대로는 안 되겠어!!’
 참다 참다 못해 결국 어쩔 수 없이 레비를 호출할 수밖에 없었다.
 -레비!
 -예, 주인님.
 -스텟 포인트를 재분배한다. 정신 파트에서 암기력, 응용력을, 그리고 성격 파트에서 인내력과 감수성 스텟을 각각 50씩 차감해.
 -알겠습니다.
 삐빅!
 홀로그램 창 하나가 형성되며 방금 전 내가 스텟 포인트 차감을 지시한 파트별로 수치가 하락하는 모습이 시야에 들어온다.
 이윽고 레비의 목소리가 이어진다.
 -차감한 스텟 포인트를 재분배하시겠습니까? Yes / No
 고민할 필요도 없이 Yes 쪽을 선택한다.
 그러자 역시나 마찬가지로 레비가 나에게 200의 스텟 포인트를 어디에 투자할 것인지 질문을 던져온다.
 -재분배할 스텟 메뉴를 지정해주시기 바랍니다.
 -육체 파트에 있는 근력 항목에 80, 지구력에 50, 그리고 나머지 스텟 포인트는 전부 체력으로 돌려!
 -예, 알겠습니다.
 또 다시 홀로그램 창이 하나 생성되면서 이번에는 반대로 스텟 포인트가 상승되는 수치 변환 현황을 보여준다.
 그와 동시에 수레의 무게가 가벼워진 듯한 느낌이 들기 시작한다.
 아니, 실제로 수레가 가벼워진 게 아니다.
 내 스텟이 상승했기 때문에 가볍게 느껴질 뿐이지, 실제로는 수레의 무게에 변동은 없다.
 ‘이제야 조금 할 만하군.’
 괜히 아침부터 팔뚝과 다리에 알이 배기는 참사가 생기는 건 결단코 사양한다.
 겨우겨우 언덕길 위에 올라서자, 내 뒤를 따라오던 홍춘삼이 환한 미소와 함께 작은 수건을 건네준다.
 “하이구! 고생 많았어, 청년!”
 “하, 하하… 아닙니다.”
 겉으론 웃고 있지만, 속으론 진짜 죽을 맛이다.
 뭐 이리 무겁단 말인가.
 아무리 봐도 이상하다.
 상식적으로 생각해봐도, 이 정도 무게가 나갈 법한 그런 외형은 아니다.
 그런데 어째서?
 -…레비.
 -예, 주인님.
 -NPC의 스텟도 볼 수 있나?
 현재까지 내가 알아낸 것은 타인의 스텟… 즉 타 플레이어의 스텟 현황까지 열람 가능하다는 정보까진 이미 습득한 상황이다.
 그렇다면 NPC는?
 때마침 레비의 대답이 내 의구심을 풀어준다.
 -가능합니다.
 -저 홍춘삼이란 NPC의 스텟 좀 확인해봐. 육체 파트만 열람시켜주면 돼. 전부 다는 말고, 완력이나 체력 같은 걸로 해서 대략 4개 정도만 예시로 보여줘.
 -알겠습니다.
 띠링!
 홍춘삼의 옆에 작은 홀로그램 창이 형성된다.
 그와 동시에 순간 나도 모르게 헉 하고 헛숨을 삼킬 수밖에 없었다.
 
 -홍춘삼 (NPC) 스테이터스
 -육체 파트
 완력 : 179
 근력 : 183
 지구력 : 180
 체력 : 199
 악력 : 169
 …(이하 생략)…….
 
 -…이상이 홍춘삼 NPC의 스테이터스 열람 내용입니다.
 이런 미친.
 무의식적으로 욕지거리가 튀어나올 뻔했지만, 필사적으로 다시 삼키는 데에 성공한다.
 바이올렛에게 들은 바로는, 분명 내가 기억하고 있는 바론 스텟의 평균치는 대략 90에서 110 정도라고 했다.
 그 정보를 적용시킨다면, 홍춘삼이란 NPC는 다른 사람들에 비해 최소 1.5배 이상은 육체 파트 스텟이 월등하게 높다는 뜻이다.
 저 정도 스텟은 되어야 홍춘삼의 수레를 끌 수 있다는 뜻인가.
 어쩐지… 평균치에 불과한 나의 스텟으론 저 NPC의 수레를 끌기에 많이 부족함을 다시금 통감한다.
 만약 스텟 재분배 능력이 아니었다면, 아마 언덕길을 오르던 도중에 퍼질러졌을지도 모른다.
 간단한 잔심부름같이 보여도, 결코 얕봐서는 안 될 것 같다.
 괜히 스텟 포인트를 5개나 주는 게 아니었군.
 “정말 고마우이, 고마워!”
 “아니에요, 하하.”
 홍춘삼에 계속해서 나에게 감사를 표한다.
 그 순간.
 띠링! 소리와 함께 홍춘삼의 머리 위에 있던 물음표 표식이 사라지면서 느낌표 표시가 새로 새겨진다.
 -퀘스트를 완료했습니다. 보상으로 스텟 포인트 5점이 할당됩니다.
 여분의 스텟 포인트가 늘었음을 알려주는 레비의 말이 들려온다.
 내가 스스로 NPC를 찾아내고, 혼자서 완료한 첫 번째 퀘스트인 셈이다.
 이것으로 목적은 달성했다.
 이제 슬슬 다른 NPC를 찾아 퀘스트를 수행하러 가볼까 생각하던 도중이었다.
 -수행할 수 있는 퀘스트가 검색되었습니다. 확인해보시겠습니까?
 퀘스트가… 또 하나 늘었다!
 뭔가 싶었는데, 난데없이 홍춘삼의 머리 위에 있던 느낌표 표식이 다시 물음표 기호로 바뀌어 있었다.
 “이 늙은이가 요즘 삭신이 쑤셔서… 아구구… 언덕길 아래까지 내려갈 수 있을지 모르겄네… 본래 산은 올라갈 때와 내려갈 때가 가장 힘들다고 하던데…….”
 “…….”
 누가 들어봐도 좀 더 도와줬으면 하는 사심이 가득한 그런 발언으로밖에 들리지 않는다.
 홍춘삼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레비가 내 앞에 홀로그램 창 하나를 띄워준다.
 
 -퀘스트 ‘홍춘삼의 수레’ (난이도 : 일반)
 내용 : 홍춘삼의 수레를 언덕길 아래까지 끌고 가시오.
 보상 : 스텟 포인트 5점
 
 …내 이럴 줄 알았다.
 혹시나 했는데, 역시 예상대로 추가 퀘스트가 발동된 것이다.
 -퀘스트를 받아들이시겠습니까? Yes / No
 -…받아들일 수밖에 없잖냐.
 하긴, 생각해보면 수행할 수 있는 일일 퀘스트가 반드시 한 번으로 끝나란 법은 없다.
 이렇게 퀘스트를 클리어하면, 추가적으로 연계 퀘스트가 생기는 건 게임 상에서도 충분히 있을 법한 수단 아니겠는가.
 ‘아침부터 땀 좀 흘리겠구만.’
 다음에 찾을 NPC는 좀 더 쉬운 퀘스트를 내줬으면 좋겠다.
 
 ***
 
 이른 오전에 예상치도 못한 몸 굴리기류 퀘스트 덕분에 체력은 벌써부터 하한가를 달리고 있었다.
 편의점에서 물 하나를 산 뒤 부족한 수분을 보충하고 있는 도중,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온다.
 “퀘스트 잘 수행하고 있어?”
 “…너였냐.”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을 줄 알았던 바이올렛이 편의점 앞에 놓여진 의자에 앉은 채 목을 축이고 있던 나에게 다가와 반갑게 인사를 건넨다.
 “내가 여기 있다는 건 어떻게 알았냐.”
 “어떻게 알긴. 맵을 보면 위치 파악이 가능하잖아?”
 “너도 맵을 볼 수 있나 보군.”
 “물론이지. 그보다 수레 끌기 퀘스트는 잘 수행한 모양이네. 여분의 스텟 포인트가 10개 늘어난 거 보니까.”
 “…그런 셈이지.”
 바이올렛도 내 스테이터스를 열람할 수 있다.
 그래서 그런지 늘어난 여분의 스텟 포인트를 확인한 것만으로도 내가 무사히 ‘홍춘삼의 수레’ 퀘스트를 수행했다는 걸 손쉽게 알 수 있는 모양인가 보다.
 “아르바이트는 어쩌고.”
 “오늘 쉬는 날이야. 마침 할 것도 없으니까 너 퀘스트하는 거 구경이라도 할까 해서.”
 “도와줄 생각은 없나보군.”
 “구경하는 게 훨씬 재미있으니까.”
 “…….”
 아무렇지도 않게 당사자인 내 앞에서 내가 고생하는 꼴을 가만히 방관만 하겠다고 선언한다.
 홍춘삼이란 NPC도 그렇고, 바이올렛도 그렇고… 이 세계에 사는 NPC들이란 존재는 다들 얼굴에 철판 정도는 하나씩 깔고 있는 거 같다.
 
 ***
 
 홍춘삼의 수레 퀘스트 이후 내가 수행해야 할 오늘의 일일 퀘스트 명단은 대략 2개 정도 된다.
 “어차피 하나는 저녁에 가능한 거니까, 아르바이트 가기 전에 퀘스트 하나만 더 수행하고 가면 되겠군.”
 “아르바이트가 언젠데?”
 편의점에서 아이스크림 하나를 구입해 맛있게 핥던 바이올렛이 급격하게 관심을 가지며 물어온다.
 “1시부터 7시까지.”
 “나쁘진 않네.”
 오늘 수행해야 할 일일 퀘스트들은 전부 다 바이올렛이 정보를 제공해줬다.
 굳이 내가 어떤 퀘스트를 수행할 것인지 말해주지 않아도 바이올렛 역시 이미 충분히 잘 알고 있으리라고 생각된다.
 “그럼 오락실 갈 거지?”
 “아무래도 그래야겠지.”
 다음 퀘스트 장소는 오락실이다.
 퀘스트 내용도 뭐라고 할까… 내 입장에서 보자면 조금 색다르다는 표현을 사용해도 무방하지 않을까 싶다.
 아니, 애초에 현실 세계에서 온라인 게임 마냥 퀘스트를 깨고 다니는 것부터가 애초에 색다른 체험이긴 하지만 말이다.
 “시간 낭비할 필요 없으니 후딱 가자.”
 “오케이.”
 내 말에 기운차게 대답하며 졸졸졸 따라오기 시작하는 바이올렛.
 그나저나 정말 구경만 할 생각인가.
 홍춘삼의 수레와 같은 퀘스트가 나온다면, 고양이 손이라도 빌리고 싶을 만큼 바이올렛의 도움이 간절하게 느껴질 때가 분명 있을 것이다.
 그래도 야박하게 못 본 척은 하지 않겠지.
 그런 생각을 품으며 오락실을 향해 발걸음을 옮긴다.
 
 ***
 
 대학가 인근에 위치한 대형 오락실.
 ‘테마 파크’라 이름이 붙여진 거대 오락실 안으로 들어서자, 이미 다수의 대학생들이 각각 오락기기에 자리를 잡고 앉아 있었다.
 개강 시즌인 터라 그런지 공강 시간이 생기게 되면 할 일 없는 대학생들이 시간을 때우기 위해 자주 오락실을 찾는 현상을 직접 목격할 수 있다.
 물론 나나 바이올렛은 애초에 대학생의 신분이 아니지만 말이다.
 “이 근처일 터인데.”
 다수의 사람들을 해치고 주변을 수색하던 찰나에, 레비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근처에 NPC를 발견했습니다.
 -잘했어.
 여러모로 유용한 레비의 검색 기능 덕분에 손쉽게 NPC의 위치를 파악할 수 있었다.
 앞서 성큼성큼 걸어가는 나를 향해 바이올렛이 언짢은 표정을 지은 채 묻는다.
 “찾았어?”
 “일단은.”
 “…근데 이곳은 왜 이리 사람이 많데. 전부 다 백수들인가?”
 “아서라. 그러다가 여기 사람들한테 따가운 눈총을 받을 수 있으니까 조용히 해.”
 백수… 아니, 다른 말로 표현하면 취업 준비생들에겐 백수란 단어가 상당히 민감한 단어로 들릴 수 있다.
 괜히 사람들에게 주목 받는 걸 싫어하는 터라 바이올렛에게 입단속을 하라는 식으로 주의를 준 뒤 레비의 안내에 따라 걸음을 재촉한다.
 우리가 도착한 곳은 바로 격투 게임기가 몰려 있는 장소였다.
 “이건 무슨 게임이야?”
 게임기를 가리키며 묻는 바이올렛에게 친절히 답변을 들려준다.
 “비주얼 파이터라고 해서, 예전부터 인기 있던 게임이야.”
 “흐음, 그래?”
 3D 대전액션 게임으로서, 시리즈가 벌써 5번째까지 나온 대작이기도 하다.
 예전에 나도 할 일이 딱히 없을 때에는 혼자서 오락실에 와서 자주 즐기고 했던 게임이기도 하다.
 “…저 사람이군.”
 정확하게 6대가 놓여있는 비주얼 파이터 5의 오락기기 중 하나를 차지하고 있는 한 명의 젊은 청년이 유독 눈에 들어온다.
 다른 사람들의 머리 위에 있는 포인트 메뉴 아이콘이 보이지 않는다는 걸 확인하자마자 저 사람이 NPC임을 직감할 수 있었다.
 띠링!
 전자 기계음과 함께 메시지 하나가 뜬다.
 -이정태(NPC)의 정보가 업데이트 되었습니다.
 ‘이정태라… 저 NPC의 이름인가 보군.’
 홍춘삼에 비해선 그래도 나름 평범한 이름을 지니고 있는 녀석이 아닐까 싶다.
 나와 바이올렛이 지켜보고 있다는 걸 전혀 눈치채지 못한 모양인지 조이스틱을 이리저리 움직이던 이정태가 언성을 살짝 높인다.
 “이런 씨발, X같은 콤보를 사용하냐!”
 콰앙!
 오락기기 위로 주먹을 내리치며 버럭 성질을 내기 시작한다.
 “연습도 안 되겠구만. 야비한 기술만 계속 써대니…….”
 그 순간, 정태의 머리 위에 물음표가 새겨진다.
 
 -퀘스트 ‘내일의 태양은 뜬다! (난이도 : 일반)
 내용 : 격투 게임 ‘비주얼 파이터 5’로 이정태의 연습 상대가 되어주십시오.
 보상 : 스텟 포인트 7점
 
 ‘홍춘삼의 수레보다 스텟 포인트를 2점 더 주는구만… 아니지, 연계 퀘스트까지 생각하면 수레 퀘스트는 다해서 총 10점이었지.’
 그래도 확실히 앉아서 게임만 하는 거라면 그다지 어렵진 않은 퀘스트처럼 보인다.
 주머니 안에서 500원짜리 동전 하나를 꺼낸 뒤 이정태가 앉아 있는 맞은편 게임기를 차지한다.
 망설임 없이 동전을 투여하자 ‘New challenger!’라는 문구와 함께 캐릭터 선택 화면이 등장한다.
 “음……?”
 맞은편에 앉은 나를 향해 슬쩍 흘겨보듯 몰래 쳐다본 정태였으나, 이내 곧 자신도 게임에 집중하기 위해 시선을 게임 화면으로 고정시킨다.
 한편.
 뒤에서 바이올렛이 내심 궁금함을 담은 표정으로 나에게 묻는다.
 “너, 이 게임 해본 적 있어?”
 “소싯적에 이름 좀 날렸었지.”
 “정말?”
 물론 과장이 보태진 거짓말이다.
 그렇게까지 잘하는 편은 아니고, 그냥 중간 정도 가는 실력을 가지고 있다 보면 되지 않을까 싶다.
 그나저나 연습 상대라니.
 퀘스트 내용에는 정태를 상대로 이기거나 지라는 내용 대신 ‘연습 상대가 되라’라는 내용밖에 없다.
 그 말인즉슨.
 게임 한 판만 같이 해주면 그걸로 퀘스트를 클리어할 수 있다는 뜻이 아닐까.
 500원을 투자해서 스텟 포인트 7점을 얻을 수 있다면 나야 감지덕지하다.
 홍춘삼의 수레처럼 이른 아침부터 땀을 삐질삐질 흘리면서 겨우 10점 얻는 것에 비해선 훨씬 나은 편 아니겠는가.
 “한 번 가볼까!”
 오랜만에 잡아보는 조이스틱의 감촉이 낯설게 느껴지지만, 그래도 게임 자체는 워낙 많이 해봤던 거라 그런지 머리보다 몸이 먼저 움직인다.
 타닥, 타닥!
 조이스틱의 움직임과 버튼을 누르는 소리만이 귓가에 들린다.
 게임 관련 NPC라고 생각해서 나름 긴장하고 있었는데, 생각보다 녀석의 실력은 그리 좋은 편이 아니었다.
 결과적으로 말하자면, 게임 자체는 내가 3대1로 승리를 거둘 수 있게 되었다.
 “우와, 제법이네.”
 뒤에서 바이올렛이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감탄사를 자아낸다.
 이 정도지, 뭐. 후후.
 웃음을 참으며 자리에서 일어서려던 찰나였다.
 “저기요!”
 난데없이 나를 불러 세운 이정태가 대뜸 이런 부탁을 해오는 거 아닌가.
 “실력이 나쁘지 않던데… 저랑 한 판 만 더 같이 게임 해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네?”
 혹시나 해서 퀘스트 창을 바라본다.
 그런데 역시나…….
 ‘아직… 클리어가 안 되었다고?!’
 게다가 이정태의 머리 위에 있는 물음표도 느낌표로 바뀌지 않았다.
 “부탁드리겠습니다! 돈은 제가 드릴게요!”
 “…….”
 도대체 얼마나 이 녀석이랑 어울려줘야 하는 거냐.
 무엇 하나 쉬운 퀘스트가 없다.
 
 ***
 
 타닥, 탁!
 마지막 피니시 콤보를 날리는 순간, 모니터에서 ‘You Win!’이라는 문구가 새겨진다.
 만약 내가 아무런 부담 없이, 아무런 생각 없이 게임에 임했다면 분명 기뻐할 만한 그런 문구라고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허나.
 지금 상황은 다르다.
 “왜 이길 수 없는 거지?!”
 콰앙!
 다시 한 번 오락기를 내려지는 이정태.
 이번이 벌써 12판째다.
 참고로 말하자면 난 현재 12연승 째고, 이정태는 12연패 중이다.
 솔직히 말하자면 허리가 다 아플 지경이다.
 오락실 의자는 대게 피시방에 놓여있는 의자와 다르게 등받이 부분이 없다.
 그래서 장시간 앉아 있으면 자연스럽게 허리가 아파오는 건 거의 피할 수 없는 부분이다.
 ‘나는 누구, 여긴 어디인가…….’
 그리고 왜 대전액션 게임을 12판째 계속 하고 있는 것인가.
 도통 이해할 수가 없다.
 허리도 아프고, 그리고 슬슬 아르바이트를 하러 가볼 시간이다.
 그러나 12판이나 했음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지 퀘스트는 클리어 되지 않았다.
 ‘망했군.’
 괜히 시간만 잡아먹었다.
 스텟 포인트 7점을 얻고자 오락실에서 30~40분을 죽치고 앉아있었다니.
 차라리 몸이 힘들긴 하지만, 그래도 끝나는 건 빨랐던 홍춘삼의 수레 퀘스트가 훨씬 더 좋다는 생각이 무의식적으로 들기 시작한다.
 게다가 그 수레 퀘스트는 보상이 자그마치 10점이나 되었다.
 그런데 이정태의 퀘스트는 7점인데다가, 심지어 끝날 기미가 도저히 보이지 않는다.
 ‘도대체 클리어 조건이 뭐냐.’
 속으로 온갖 불평불만을 다 털어놓고 있을 무렵, 이정태가 나에게 다가와 재차 부탁을 한다.
 “부디 한 게임만 더 해주시면…….”
 이것도 벌써 12번째다.
 이제는 정말 가봐야 하기 때문에 더 이상 그의 부탁을 들어줄 수 없다.
 차라리 다른 퀘스트를 찾아보는 편이 더 좋으리라.
 그런 생각을 품으며 정중하게 부탁을 거절한다.
 “죄송합니다. 이제 곧 알바 시간이 다 되어가는지라… 이만 가봐야 할 듯합니다.”
 “아… 그렇다면야 어쩔 수 없죠. 계속 부탁드리는 것도 민폐니…….”
 그래도 말은 통하는 녀석인 거 같아서 다행이군.
 솔직히 말해서 억지를 부리면서까지 나를 오락실 의자에 다시 앉혀두는 건 아닐까 하는 걱정도 들었다.
 천만 다행스럽게도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아서 속으로 안도의 한숨이 절로 나온다.
 한편.
 체념하는 듯한 정태의 표정과 함께, 전혀 예상치 못한 현상이 발생한다.
 띠링!
 -퀘스트가 완료되었습니다.
 -뭐어?!
 레비의 말을 듣자마자 나도 모르게 정태의 머리 위를 쳐다본다.
 …정말이다.
 레비가 말했던 그대로 정태의 머리 위에는 물음표가 아닌, 느낌표가 새겨져 있었다.
 -보상으로 스텟 포인트 7점을 얻었습니다. 축하드립니다, 주인님.
 -아… 그, 그래…….
 얼떨떨한 기분이 먼저 든다.
 동시에 어째서 퀘스트가 완료되었는지 다시금 생각을 해본다.
 분명 퀘스트 내용은 이정태의 연습 상대가 되어달라고 했다.
 딱히 이정태를 상대로 몇 승을 쟁취하든가, 혹은 몇 패를 하라는 그런 상세한 목표는 없었다.
 ‘저 이정태란 놈이 스스로 만족할 때까지 연습 상대가 되어주라는 뜻이었나…….’
 그럴지도 모른다.
 물론 아직까진 자신의 실력에 불만족스러워 보이긴 한다.
 허나 아르바이트 시간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먼저 가봐야 한다는 내 말을 듣고 체념한 순간, 자신의 욕망과 현실적인 면, 두 가지 요소를 저울질한 끝에 타협을 보고 ‘일단은 만족’이라는 합의점이 도출된 모양인가 보다.
 ‘이 퀘스트는 가급적이면 피해야겠군.’
 그렇게 생각하며 가벼운 인사를 건네면서 곧장 바이올렛을 찾으러 가기 위해 걸음을 재촉한다.
 바이올렛은 이미 내가 이정태와 5번째 게임을 할 때, 지겹다면서 혼자서 오락실 노래방 부스 안에 들어가 노래를 부르러 가버렸다.
 퀘스트 완료하면 찾아달라는 무책임한 말을 남기고서.
 후딱 바이올렛을 데리고 오락실을 나서려고 하는 순간.
 “저기, 잠깐만요!”
 이정태가 대뜸 내 발목을 잡는 말을 들려준다.
 “시간이 되신다면 내일도 연습 상대 부탁드려도 될까요?!”
 “예……?”
 “부탁드리겠습니다!”
 그와 동시에 이제는 익숙해진 효과음이 머릿속에 울려 퍼진다.
 띠링!
 
 -퀘스트 ‘내일의 태양은 뜬다! 2’ (난이도 : 일반)
 내용 : 격투 게임 ‘비주얼 파이터 5’로 이정태의 연습 상대가 되어주십시오.
 보상 : 스텟 포인트 15점
 
 퀘스트 내용은 똑같다.
 그러나 퀘스트 제목 뒤에 숫자가 매겨졌다.
 더불어…….
 ‘보상으로 주는 스텟 포인트가… 올라갔어?!’
 게다가 자그마치 15점이다.
 홍춘삼의 수레 연계 퀘스트보다도 5점이 더 많은 수치 아닌가.
 “…….”
 심적으로 갈등을 할 수밖에 없었다.
 15점.
 확실히 내가 지금까지 보아온 일반 퀘스트 난이도 중에서는 그나마 짭짤한 보상 스텟 포인트를 자랑하고 있다.
 허나 무의미하게 녀석의 연습 상대가 되어줄 수도 없는 노릇 아닌가.
 ‘이를 어쩐다…….’
 속으로 갈망하고 있을 무렵, 예상치 못한 목소리가 들려온다.
 “수락하는 게 어때?”
 “…뭐?”
 오락실 노래방 부스에서 한창 노래를 부르고 있어야 할 바이올렛이 어느 순간 내 곁에서 자신의 생각을 들려주기 시작한다.
 “퀘스트 명칭 뒤에 숫자가 붙었다는 것은 연계 퀘스트란 증거야. 연계 퀘스트는 일반적으로 봤을 때 수행하면 수행할수록 그 보상 내역이 짭짤해지거든. 지금이 퀘스트 2단계에 보상 스텟 포인트가 15점이잖아? 그럼 3단계나 4단계는 아마 보상 스텟 포인트가 대략 20점을 왔다 갔다 할 걸?”
 “일반적이란 소리는… 연계 퀘스트임에도 불구하고 보상 스텟 포인트가 상승하지 않는 퀘스트도 더러 있다는 뜻 아니냐.”
 “물론. 하지만 이 ‘내일의 태양은 뜬다!’ 퀘스트는 내가 알고 있는 한 그런 류의 퀘스트가 아니야. 보상 포인트도 제법 괜찮은 편이고, 그리고 장기간 반복적으로 수행할 수 있는 퀘스트지. 단적으로 끝나는 퀘스트보다 차라리 오랫동안 기간을 두고 계속해서 여분의 스텟 포인트를 수급할 수 있는 확실한 연계 퀘스트를 확보하는 편이 너에게 더 도움이 되지 않을까?”
 “…….”
 바이올렛의 말이 맞다.
 언제까지 매번 NPC들을 찾아 새로운 퀘스트들을 받으러 다닐 수도 없는 노릇이다.
 이런 고정적인 연계 퀘스트를 꾸준히 부여해줄 수 있는 NPC와 친분을 다져두는 편이 좋지 않을까.
 결국 고민에 고민을 거듭한 끝에 내린 결론은 대략 이러했다.
 “…알겠습니다. 그럼 내일 이 시간에 뵙도록 하죠.”
 “감사합니다!”
 이정태가 고개를 숙이며 나에게 고마움을 표한다.
 그와 동시에 퀘스트를 수락했다는 내용을 담은 레비의 알림이 들려온다.
 ‘고생길이 훤하구만.’
 그보다도 왜 이 NPC… 이정태란 놈은 도대체 무슨 이유로 비주얼 파이터라는 게임에 목숨을 걸 만큼 의욕을 보이는지 잘 모르겠다.
 무슨 속사정이라도 있는 것일까.
 
 ***
 
 결국 이정태와 내일 이 시간에 다시 격투게임 연습을 해주기로 약속을 한 뒤에야 겨우 오락실을 나올 수 있었다.
 얻은 거라곤 여분의 스텟 포인트 7점과 더불어 내일 수행해야 할 두 번째 이정태 퀘스트였다.
 “그저 한숨만 나오는군.”
 내일은 또 얼마나 같이 어울려줘야 퀘스트가 완료될 수 있을지 솔직히 말해서 감도 안 잡힌다.
 차라리 몇 승을 하라는 구체적인 내용이 기술되어 있다면 더 편할 텐데 말이다.
 “뭐, 힘내. 조만간 스텟 포인트를 왕창 늘리면, 보상 스텟 포인트가 짭짤한 상급 퀘스트를 노릴 수 있을 테니까.”
 바이올렛의 위로가 들려온다.
 확실히 그 말이 맞다.
 지금이야 어차피 일반 난이도에 불과해서 보상 포인트가 10점, 20점을 왔다 갔다 하고 있지만, 일반 난이도 이상의 퀘스트는 보상 스텟 포인트가 세 자리수도 있다고 들었으니 그걸 노리는 수밖에 없다.
 참고로 버그 몬스터 퇴치 퀘스트도 상급 난이도에 속한다고 한다.
 하지만 그 퀘스트는 가급적이면 당분간은 삼가할까 생각 중이다.
 목숨을 걸어야 할 정도로 위험한 퀘스트에 굳이 목을 매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보다 안전하게.
 최강철이라는 NPC만큼 손쉽게 버그 몬스터 퇴치를 수행할 정도로 스텟 포인트를 왕창 쌓은 뒤에 수행할 생각을 품고 있다.
 무엇보다도 내 안전이 최우선이니 말이다.
 “그것보다 알바가 몇 시부터라고 했지?”
 바이올렛이 자신의 손목시계를 내려다보며 묻는다.
 “1시.”
 “그럼 얼마 안 남았네. 간단하게 식사라도 같이 하고 갈까?”
 “그러는 편이 좋겠지.”
 어차피 앞으로 일할 카페에서 딱히 중식을 챙겨준다고 하진 않았으니, 미리 먹고 가는 편이 좋을 거라 생각해서 바이올렛의 제안을 승낙한다.
 
 ***
 
 “…창식 씨가 할 일은 대략 이 정도에요.”
 웨이트리스 복장을 갖추고 있는 여성 점원이 부드러운 미소와 함께 방금 전, 나에게 차례대로 할 일을 알려준 것에 대해서 내 의견을 묻는다.
 “어때요. 어려운 건 없죠?”
 “예. 그런 거 같습니다.”
 이 카페에서 내가 해야 할 일은 지극히 간단하다.
 서빙.
 그리고 가게 청소.
 이게 끝이다.
 나중에 가면 커피라든지 스무디, 과일주스 만드는 일도 알려준다고 하지만, 지금 당장은 우선 서빙과 매장 청소를 집중적으로 맡기려고 하는 모양인가 보다.
 “손님들이 주문한 음료 나오면, 해당 자리로 가져다주시면 되요. 그리고 불만사항 같은 게 있으면 웃는 얼굴로 들어주시고요. 명심하세요, 언제나 웃는 얼굴로. 스마일!”
 “스, 스마일.”
 어색하게 올라가는 입꼬리.
 그러나 내 선배 격이기도 한 여성 점원, 유미나는 나와 다르게 정말 천사 같은 미소를 눈앞에 선보여 준다.
 나도 저렇게 웃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창식 씨는 웃는 법 좀 더 연습하셔야겠네요.”
 난감하다는 식으로 말을 한다.
 물론 나도 잘 알고 있는 문제점이다.
 애초에 불운 덩어리라 불리며 최악의 인생을 살아왔던 나인데, 환한 웃음이 자연스럽게 연출될 리가 없을 것이다.
 그래도 미소라는 건 보는 사람들로 하여금 긍정 에너지를 심어준다고 하지 않던가.
 서빙 일을 하려면, 최대한 미소를 유지해야 하는 것이 업무상 필수적인 자세가 아닐까 생각하며 다시금 미소 짓는 연습을 시도해본다.
 그렇게 유미나라는 여성으로부터 카페 서빙 아르바이트에 관해 다수 교육을 받고 있을 무렵.
 띠리링!
 문에 달려 있던 작은 종이 딸랑 소리를 내며 손님이 들어왔음을 알려준다.
 “어서오세요! 주문 도와드릴게요.”
 방금 전까지 나에게 이런저런 팁을 알려주던 유미나가 빠르게 걸음을 재촉하며 카운터 석으로 자리를 잡는다.
 가게로 들어온 사람은 긴 생머리와 차가운 표정이 인상적인 한 미인이었다.
 20대 초반처럼 보이지만, 나이에 맞지 않게 뭐라고 할까… 풍기는 분위기가 왠지 살갑기도 하다.
 ‘독특한 아우라군.’
 혹시나 해서 여성의 머리 위에 신경을 집중해 응시한다.
 역시나 일반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포인트 메뉴 아이콘이 떠 있는 걸 확인할 수 있었다.
 그렇다면 일단 NPC는 아니다.
 다른 퀘스트를 얻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도 있었지만, 플레이어임을 확신하자마자 곧장 깔끔하게 미련을 버리기로 한다.
 “…….”
 메뉴판을 응시하던 여성이 드디어 주문에 임한다.
 “아메리카노 한 잔 주세요.”
 “아이스로 드릴까요?”
 “예.”
 “사이즈는 어떻게 하실 건가요?”
 “중간으로 해주세요.”
 “알겠습니다. 음료 나오면 자리로 갔다드리겠습니다.”
 “고마워요.”
 그렇게 미나와의 대화를 끝낸 뒤 창가 근처로 자리를 옮기는 여성.
 그 순간.
 “…….”
 내 착각일지도 모르겠지만…….
 이동하던 도중에, 나를 매섭게 노려본 듯한 착각이 든다.
 아니, 착각이 아니다.
 “……?”
 나와 눈을 마주쳤단 소리는… 저 여자가 분명 나를 보고 있었다는 뜻이 아닐까.
 짧은 순간이었지만, 나와 눈싸움을 하려는 듯이 매섭게 나를 응시하던 여성이 다시 창가 쪽으로 발걸음을 옮긴다.
 도대체 저건 무슨 반응인지 모르겠다.
 분명 처음 보는 사람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치 나를 아는 사람 쳐다보듯 저렇게 오랫동안 응시하다니.
 ‘알다가도 모를 여자군.’
 속으로 수상한 여자라는 생각을 품고 있을 무렵, 미나가 나에게 쟁반 하나를 내민다.
 “손님에게 갔다 주고 오시면 되요.”
 “알겠습니다.”
 생각보다 음료 나오는 속도가 빠르다.
 아메리카노라서 그럴까.
 여하튼 보기에도 시원한 아이스 아메리카노 한 잔을 쟁반 위에 올려놓은 채 천천히 여자가 앉아 있는 테이블로 향해 걸어간다.
 괜시리 무게중심을 잡지 못하고 바닥에 음료를 쏟기라도 한다면 욕을 한 바가지로 먹을 수도 있으니 신중에 신중을 기한다.
 그리고 드디어 목적지까지 도달하자, 미나에게 세뇌 당하듯 배웠던 영업용 미소를 지어준다.
 “손님, 아이스 아메리카노 나왔습니다.”
 “…….”
 그때까지도 아무런 말이 없던 여성이 다시 한 번 나를 빤히 응시한다.
 여자가 쳐다보든 말든 애써 시선을 무시하며 아메리카노를 테이블 위에 올려놓는다.
 “좋은 시간 보내세요.”
 마무리 멘트까지 들려준 뒤 다시 카운터 석으로 돌아가려던 찰나였다.
 “저기요.”
 처음 듣는 여성의 목소리.
 겉으로 보던 것과는 다르게, 예상 외로 목소리는 상당히 단아하고 청아한 음색을 지니고 있었다.
 “예, 더 필요한 거라도 있으신가요?”
 이것도 미나에게 배운 고정 멘트 중 하나다.
 손님이 직원을 불러 세우는 이유라고 해봤자 뭔가 필요한 게 있다거나 아니면 가게에 불평불만이 생겨 따지려는 경우가 대다수다.
 딱히 이 여성에게 잘못한 일은 없다고 생각해서 뭔가 더 필요한 게 있는지 물어보는 나를 향해 여성의 질문이 들어온다.
 허나 그 질문은 내가 전혀 예상치 못한 의외의 말이었다.
 “당신, 플레이어(Player) 맞죠?”
 “……!!”
 순간.
 나도 모르게 들고 있던 쟁반을 떨어뜨릴 뻔했다.
 
 
 # EP 4. 또 다른 플레이어
 
 “당신, 플레이어 맞죠?”
 그 한마디 덕분에 솔직히 말하자면 심장이 덜컥 내려앉는 듯한 충격을 받을 뻔했다.
 내가 알고 있는 스텟 포인트 법칙을 적용하자면, 분명 이 여성은 NPC가 아니다.
 혹시나 해서 내가 잘못 본 게 아닌가 싶어 다시 한 번 여성의 머리 위를 응시하며 확인해본다.
 머리 위에 여전히 포인트 메뉴 아이콘이 떠 있는 것으로 보아선… 틀림없다.
 이 여자는 분명 평범한 인간이다.
 그런데 어째서 플레이어 개념을 알고 있는 건가?
 나야 어차피 바이올렛을 통해서 이 세계의 또 다른 일면을 접했기에 알고 있다 치지만…….
 ‘혹시… 이 여자도 나와 같은 경우인가?’
 버그라는 것이 반드시 나한테만 발생하란 법은 없지 않은가.
 분명 나와 같은 비슷한 경우가 있을 거라는 생각도 문득 든다.
 내 표정 변화를 실시간으로 지켜보고 있던 여성이 포커페이스를 유지하며 말을 이어간다.
 “그 반응으로 보아선… 역시 내 예상이 맞았군요.”
 “…넌 누구지? NPC가 아니면서 어떻게 플레이어 개념을 알고 있는 거냐.”
 “일단 앉아 봐요. 이야기를… 아니, 아르바이트 중이라서 그러기엔 힘들어 보이는군요.”
 내가 입고 있는 가게 유니폼을 이제야 눈치챈 모양인지 옅은 한숨을 내쉰다.
 “아르바이트 언제 끝나요?”
 “…7시.”
 “그럼 그 시간에 맞춰서 다시 올게요. 어차피 이 가게로 온 목적은 저와 같은 플레이어를 찾기 위함이었으니까요.”
 “…….”
 “그래도 제 눈이 틀리지 않아 다행이에요.”
 그렇게 자신이 할 말만 주구장창 내뱉더니 대뜸 아메리카노를 들고서 가게 바깥을 나선다.
 오랜 시간동안 나와 이야기를 주고받는 거 자체를 견제하는 듯한 그런 느낌이었다.
 ‘감시의 눈길이라도 있는 건가.’
 타이밍을 봐서 나에게만 몰래 플레이어인지 아닌지 확인해보는 그 조심성을 고려한다면… 어느 정도 신빙성이 있는 추측이라 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물론.
 어디까지나 나 혼자만의 착각일지도 모른다.
 여하튼 다른 건 다 재껴두고, 그 여성도 나와 비슷한 부류의 플레이어라는 사실만큼은 확인했으니, 그나마 큰 수확이 아닐까 싶다.
 ‘다른 플레이어와의 만남이라…….’
 내 아르바이트 시간이 끝날 때 맞춰서 다시 이곳에 들린다고 했다.
 나에게 무슨 볼 일이 있다는 뜻이 아닐까.
 그보다도 바이올렛이라든지 최강철과 같은 NPC들이 아닌 여타 다른 플레이어와의 만남은 처음인지라 머릿속이 복잡해지기 시작한다.
 
 ***
 
 시계가 7시를 가리키자, 오늘 하루종일 나에게 이런저런 팁들을 알려주느라 고생했던 직장 선배, 유미나가 나에게 빙그레 미소를 지어준다.
 “오늘 수고 많았어요. 그럼 내일 또 봬요.”
 “예, 알겠습니다.”
 그렇게 근무 교대를 마친 뒤.
 옷을 갈아입고 카페 바깥으로 나가려는 순간, 나도 모르게 문고리를 쥐고 잠시 망설이기 시작한다.
 이 문을 나서게 되면…….
 내가 알지 못하는 또 다른 세계와 만나게 될지도 모른다.
 스텟 포인트와 더불어 재분배 능력.
 NPC.
 그리고 퀘스트.
 이제는 나와 같은 신세에 놓이게 된 또 다른 플레이어들까지 접하게 되었다.
 그녀는 나에게 있어서 동료일까? 아니면 적일까?
 머릿속에 온갖 잡생각을 다 하는 나에게 카운터 석에서 볼 일을 보고 있던 점장이 궁금증을 담아 묻는다.
 “퇴근 안하시나요?”
 “…아니요, 곧 할 예정이었습니다.”
 “그래요. 오늘은 첫 날이라서 피곤했을 테니 집에 가서 푹 쉬도록 하세요. 출근할 때에는 늦지 않게 오도록 하고요.”
 “알겠습니다. 그럼 먼저 가보겠습니다.”
 딸랑, 딸랑.
 문고리를 잡은 채 문을 열자, 이제는 익숙해진 작은 종소리가 귓가에 맴돈다.
 동시에 카페 입구 바로 근처에서 대기하고 있던 그 긴 생머리 여성이 성큼성큼 다가오며 말을 건다.
 “기다리고 있었어요.”
 “…….”
 “절 따라오시면 되요.”
 역시나 오후 때 보여줬던 태도와 마찬가지로 자신이 할 말만 들려주고 나서 곧장 내 대답 여부는 확인하지도 않고 앞장서서 걸어나가기 시작한다.
 뭔가… 독불장군 같은 여성이군.
 “내가 널 따라가야 할 이유가 있나?”
 “…….”
 “미안하지만 오늘 처음 만난 사람을 무턱대고 따라가는 건 초등학생들도 경계하는 일이야. 잘 알고 있겠지?”
 “물론 그 정도는 충분히 예상하고 있었어요.”
 여성이 나와 정면으로 시선을 마주한다.
 “당신을 따로 어디론가 꾀어날 생각은 없어요. 인적이 드문 장소로 가는 것도 아니고, 그저 NPC들의 감시망을 피하고 싶을 뿐이니까요.”
 “NPC들이 너한테 뭔가 잘못이라고 한 건가?”
 “아니요. 전 기본적으로 NPC들을 믿지 않거든요.”
 여성의 눈빛에 강한 이채가 어린다.
 “당신은… 인간이 아닐지도 모르는 존재의 말을 함부로 믿나요?”
 “…….”
 “전 조심성이 많은 사람이라서요. 기왕 누군가를 믿으라고 한다면, 인간이 아닌 존재보다 그래도 저와 같은 인간을 믿겠어요.”
 “나름 합리적인 소견이군.”
 “칭찬 고마워요.”
 하긴, 여성의 말에도 어느 정도 일리가 있다.
 죽다가 살아났는데, 대뜸 인간이 아닌 녀석들의 말을 곧이곧대로 믿으며 그대로 행동하는 것도 웃기지 않은가.
 사실 속으로 이 여자를 따라갈까 말까 고민도 많이 해봤다.
 플레이어라고 한들, 모두 다 좋은 사람만 있는 건 아니란 의심이 들었기 때문이다.
 자고로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것은 귀신도 아니고 괴물과 같은 버그 몬스터도 아니다.
 바로 나와 같은 인간이다.
 서로 속고 속이면서 언제 뒤통수를 칠지 모르는 욕망 덩어리.
 그게 인간 아니겠는가.
 그래도 혹시 또 모른다.
 바이올렛에게 듣지 못했던 또 다른 정보를 얻을 수도 있을지도.
 그리고 여성이 방금 들려준 말 그대로 NPC들 또한 아직까지는 많은 신뢰감을 보여줄 그런 깊은 관계까진 아니다.
 사실 오늘은 퇴근하자마자 바로 또 다른 NPC를 찾아 퀘스트를 수행하려고 일정을 잡아두고 있었다.
 그러나 낯선 플레이어와의 만남으로 인해 그 계획도 물거품으로 돌아가게 되었다.
 ‘뭐… 어차피 퀘스트는 내일 수행하면 되는 거니까.’
 NPC가 도망가지 않는 이상, 하루 차이 정도는 별다른 큰 상관이 없으리라 생각한다.
 그것보다 중요한 것은 따로 있다.
 “질문 하나 해도 될까?”
 앞서가는 여성을 향해 슬쩍 몇 마디 말을 걸어본다.
 발걸음을 멈추지 않은 채 계속해서 거리를 거닐던 여성이 뒤도 돌아보지 않은 상태로 대답을 들려준다.
 “제가 대답할 수 있는 범위 내에서 라면요.”
 “간단한 질문이니까 괜찮을 거야.”
 “그렇다면 다행이군요.”
 감정이 별로 느껴지지 않은 말투였다.
 “우선… 넌 NPC인가, 플레이어인가?”
 혹시나 하는 생각으로 다시금 확인을 해본다.
 그러자 여성이 살짝 호흡을 삼키며 내 질문에 대해 장황하게 설명을 늘어놓는다.
 “플레이어에요. 당신도 알잖아요? 머리 위에 특정 아이콘이 없으면 NPC, 있는 경우에는 플레이어. 이 법칙에는 변함이 없어요. 아… 참고로 말하자면 버그 몬스터는 좀 예외적이에요.”
 “버그 몬스터도 스텟이라는 게 존재하나?”
 “그건 나중에 상세하게 알려드릴게요. 여기서 모든 걸 설명하기에는 꽤나 길어질 거 같으니까요.”
 “그렇군.”
 저 여성이 플레이어인지에 대해서는 본인의 입을 통해 다시금 확인을 완료했다.
 그나저나 버그 몬스터도 스텟 포인트 법칙이 적용될 수 있는지 없는지도 고려조차 안 해봤다니…….
 이건 나의 안일한 생각이었다.
 NPC들도 스텟 포인트를 확인할 수 있는데, 하다못해 버그 몬스터라면 HP같은 거라도 체크할 수 있지 않을까.
 그렇다면 훗날, 내가 버그 몬스터 퀘스트를 수행함에 있어서 한결 수월해질 수 있을 것이리라 예상해본다.
 “그 다음 질문.”
 “또 뭐죠?”
 “아주 중요한 질문이니까 제대로 대답해줘.”
 “…알았어요.”
 여성 또한 고개를 살며시 끄덕여줌으로 인해 내 말을 새겨 듣겠다는 제스처를 선보인다.
 “이름이 뭐지?”
 “…정말 중요한 질문이군요.”
 아직 자기소개도 제대로 끝나지 않았다.
 이제야 그 사실을 눈치챈 모양인지 여성이 옅은 한숨과 함께 스스로 이름을 밝힌다.
 “이연희라고 해요.”
 
 ***
 
 “…….”
 방금 전까진 그래도 질문이라는 형태의 말을 통해 대화를 이어가기라도 했다.
 그러나 지금은 다르다.
 그저 침묵만을 지키는 나와 연희.
 말수가 없는 우리들과 다르게 주변 환경은 상당히 시끌벅적하다.
 연희를 따라 들어온 가게는 바로 이 근방에서도 꿀막걸리라는 메뉴를 통해 유명한 술가게, ‘조선 주막’이라는 이름을 술집이었다.
 중요한 이야기가 나오지 않을까 생각해서 사실 인적이 드물거나 혹은 분위기가 조용한 곳으로 인도되는 게 아닐까 예상했으나, 이건 완전히 내 생각과 반대되는 장소였다.
 “꿀막걸리를 좋아하나?”
 “전혀요. 애초에 술 자체를 별로 안 좋아해요.”
 “그런데 왜 하필이면 이곳에 왔지?”
 주변이 워낙 시끄러운 탓에 사실 평소 말하는 것에 비해 한 옥타브 더 올려 목소리를 유지해야 겨우 대화라는 게 가능할 정도였다.
 솔직히 말하자면 난 이렇게까지 시끄러운 분위기의 가게는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연희라는 여자의 표정을 보아선, 그녀 또한 나와 마찬가지인 듯하다.
 “이유는 간단해요.”
 나를 지그시 응시하며 굳이 자신이 싫어하는 술가게로 데려온 이유에 대해 들려준다.
 “여기가 NPC들의 감시를 피할 수 있는 장소 중 하나니까요.”
 “그 말은… 다른 장소들도 있다는 뜻이군.”
 “있긴 하지만… 먼저 이걸 말씀드릴게요. 어딜 가나 NPC들의 감시망이 닿지 않는 장소는 아마 거의 없을 거예요. 특히나 지켜보는 눈이 많은 이 도시 지역에서는 말이죠.”
 “그렇다면 이 장소도 안전한 곳은 아니란 뜻이잖아.”
 “그렇긴 하죠. 대신 시간별로 NPC의 시야가 미치지 않는 장소가 있어요. 여기 이 가게는 지금 시간대엔 안전해요. 7시 이후부터는 이 가게에서 일하는 아르바이트 NPC가 퇴근하는 시간이거든요.”
 “NPC가 없는 장소를 생각한다면, 네 집이라든지 아니면 내 집, 둘 중에 하나로 지정해도 괜찮았던 거 아닌가?”
 “처음 만나는 사이인데 함부로 집까지 데려오기에는 좀 그런 거 같아서요.”
 “…하긴, 그렇지.”
 묘하게 설득력이 느껴지기에 잠자코 수긍하기로 한다.
 만약 연희가 내 집에서 이야기를 하자고 했다면, 당연히 그 제안은 거절했을 것이다.
 아직 연희가 나에게 있어서 동료라는 확신도 가지지 않은 상태에서 굳이 내 본거지의 위치까지 공개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연희 또한 마찬가지일 것이다.
 NPC에 비해 같은 인간인 플레이어를 더 믿고 싶다는 말을 했을 뿐이지, 그렇다고 플레이어에게 자신의 모든 것을 공개할 만큼 100% 신뢰를 한다는 말은 나에게 들려주지 않았다.
 “서로 조심하는 편이 좋지.”
 “그러게요.”
 그나저나 인생 참으로 피곤하게 사는 여자다.
 굳이 이렇게까지 NPC의 감시망을 피해야 할 이유가 있는 걸까.
 아직까지는 내가 이 여자보다 바이올렛과 보낸 시간과 쌓아온 신뢰도가 더 높아서 그런 모양인지 연희의 방식에 대해 살짝 반감이 드는 건 어쩔 수 없는 모양인가 보다.
 연희는 NPC들을 조심하고 있지만, 난 오히려 사람을 조심하고 있다.
 아마도 인생의 경험에서 우러나오는 차이점이 아닐까 싶다.
 아니지, 오히려 이 여자가 나보다 나이가 많을 수도 있지 않은가.
 새로 환생을 했다는 가장 하에서 보면 말이다.
 “넌 몇 살까지 살다가 환생했지?”
 “…환생이라니요. 그게 무슨 말이죠?”
 “……?”
 오히려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냐는 듯이 의구심을 표한다.
 “아니… 그럼 넌 환생하지 않았다는 거냐?”
 “애초에 전 죽은 적도 없어요.”
 “…….”
 환생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플레이어의 자격을 얻었다니.
 이건 또 무슨 상황인가.
 “플레이어라는 건 보통 죽기 일보직전… 그러니까 생사의 기로에 설 만큼 위험한 순간에 NPC와 계약을 맺어 플레이어의 자격을 부여받아 퀘스트 수행을 통해 스텟 포인트를 수집할 수 있는 능력을 지니게 되는 거예요.”
 “…그런가.”
 “당신, 보기보다 묘하게 허당 끼가 있네요. 죽을 뻔한 위기를 ‘환생했다’라고 오해하다니.”
 물론 나는 연희와 다르게 진짜로 환생했다.
 허나 일부러 짐짓 모른 척을 하며 가볍게 환생에 관한 이야기의 화두를 돌려버린다.
 나에 대한 정보를 드러내고 싶지 않았을 뿐더러, 뭔가 내가 알고 있는 플레이어의 정의와 달랐기 때문이다.
 “그럼 너도 그런 식으로 플레이어가 된 건가?”
 “네. 저 같은 경우에는… 미안해요. 이건 개인적으로 그다지 말하고 싶지 않은 이야기라서 말을 아낄게요.”
 평범해 보이는 20대 여성이 죽을 뻔한 위기를 체험하게 되었다면, 대게 2가지를 생각할 수 있다.
 사건, 사고에 휘말렸거나.
 혹은…….
 자살을 시도하거나.
 “괜찮다. 본래 감추고 싶은 과거도 있는 법이니까.”
 “저 말고 다른 플레이어들과 만나게 되면 가급적 이런 이야기는 꺼내지 않는 편이 좋아요. 분명 싫어할 사람도 있을 테니까요.”
 “너와 나 말고 다른 플레이어도 있나 보군.”
 “네. 물론이죠.”
 그건 얼추 예상할 수 있는 범주였기에 그다지 놀랍진 않았다.
 그나저나 환생을 거치지 않고 플레이어가 되었다?
 다른 이들에 비해 나는 사뭇 다른 특별한 케이스다.
 혼란스러운 머릿속을 정리하기 위해 다시 한 번 재차 입을 열어 질문을 던진다.
 “그렇다면 너도 그렇고 그 플레이어들도 그렇고, 스텟 재분배는 가능하겠군.”
 연희가 있을 수 없다는 듯이 고개를 저어 보인다.
 “그런 권한까지는 부여되지 않았어요. 퀘스트를 통해서 스텟 포인트를 받아 자신의 능력을 키워가는 게 플레이어잖아요. 스텟을 재분배시킬 수 있는 플레이어는 없다고요.”
 “…….”
 이것도 내가 알고 있는 것과 다른 정보다.
 도대체 뭐지?
 스텟 재분배는 오로지 나만 가지고 있는 특수한 권한인가?
 “당신, 혹시 나중에 가면 스텟을 재분배할 수 있는 능력까지 얻을 수 있다고 생각했나요? 그런 거라면 일찌감치 기대하지 않는 편이 좋아요. 스텟 포인트를 재분배할 수 있으면 고생하면서까지 퀘스트를 깰 필요도 없을 테니까요.”
 환생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였듯이, 굳이 여기서 나의 능력을 상대방에게 전부 알려줄 필요는 없다.
 아직까지는 아군인지, 적군인지 판단 불가능한 녀석에게 필요 이상의 정보를 다 드러내면 오히려 안 된다고 생각했기에 짐짓 모른 척을 한다.
 “애초에 스텟 재분배를 할 수 있는 플레이어라니… 들어본 적도 없어요.”
 “그렇군.”
 스텟 포인트를 리셋해 다시 응용해 원하는 수치를 순간적으로 상승시킬 수 있다는 걸 전혀 모르는 모양인가 보다.
 ‘아무래도 내가 다른 플레이어들에 비해 특수한 능력을 하나 더 지니고 있는 거 같군.’
 새로 입수한 정보를 다시금 정리해보자.
 연희의 말을 인용하자면, 내가 살고 있는 이 구역 내에서도 그녀뿐만이 아니라 몇몇 플레이어가 거주하고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아마도 이들 또한 연희처럼 죽을 뻔한 위기에서 NPC와 플레이어 계약을 맺고 활동하는 게 아닐까 싶다.
 여기서 자연스럽게 의문이 발생하게 된다.
 NPC들은 어째서 굳이 능력을 지닌 플레이어를 양성하려는 것일까?
 그리고 두 번째.
 왜 바이올렛은 다른 플레이어들과 다르게 나한테만 스텟 재분배 능력을 준 것일까.
 ‘…도통 알 수가 없군.’
 이해하기 힘든 것 투성이다.
 
 ***
 
 “뭐… 이 시스템에 적용하려면 좀 걸릴 거예요. 저도 처음에는 그랬으니까요.”
 안주로 나온 파전 하나를 젓가락으로 먹기 좋게 조각내고 있던 연희가 고참의 위치에서 충고를 주는 듯한 말투를 들려준다.
 “모든 것이 낯설겠죠. 혼란스러울 거예요. 기존에 알고 있던 상식의 세계가 붕괴된 꼴이니까요. 저도 그 마음, 충분히 이해해요.”
 “넌 플레어어가 된 지 얼마나 되었지?”
 “대략 반 년 정도 된 거 같아요.”
 “오래 되었군.”
 확실히 나보다 선배다.
 난 기껏해야… 이제 3일차? 2일차? 그 정도밖에 되지 않았으니 말이다.
 “그래도 나중에 가면 다 적응하게 되어 있어요. 인간은 적응하는 생물이라고 하니까요.”
 “그렇겠지.”
 처음에는 당황스러울지도 모른다.
 사람의 머리 위에 새겨져 있는 포인트 메뉴 아이콘.
 개개인의 능력이 스텟이라는 숫자로 환산되어 표기되는 이 세상.
 처음에는 내가 꿈을 꾸고 있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도 해봤다.
 어쩌면 여기가 사후세계(死後世界)일지도 모른다는 가정도 해본 적이 있다.
 일단 내가 죽은 건 기정사실이니까.
 아직까지도 뒤통수에 그 감촉이 남아 있다.
 쿵! 소리와 함께 통각조차 느껴지지 않았던… 그 감촉이.
 지금도 생생하게 느껴지는 것으로 보아선, 아마도 꿈은 아니리라.
 “그러고 보니 날 어떻게 찾은 건지 묻고 싶군.”
 연희는 내가 카페로 첫 출근을 하기 전부터 이미 내가 플레이어란 사실을 눈치채고 있었다.
 우연의 일치로 카페에서 일하던 나와 마주치게 되었다는 듯한 느낌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당신이 퀘스트를 수행하는 장면을 봤으니까요.”
 “어느 퀘스트였지?”
 “이정태 퀘스트요. 격투 게임 연습 상대가 되어주는 퀘스트… 맞죠? 예전부터 그 퀘스트도 수행해둘까 생각하고 있었거든요. 어차피 제가 다니는 대학교 정문에 위치한 오락실이기도 하고, 사실 저도 오락실은 꽤 들락날락하는 편이니까요.”
 “의외로군. 오락이라든지 이런 것과는 연관이 없어 보이는데.”
 “친구가 없어서 자주 가요.”
 “…….”
 뭔가 건드리지 말아야 할 약점을 건든 기분이다.
 “아무튼, 이정태 퀘스트가 있다는 건 최근에 발견했어요. 그래서 그 퀘스트도 수행할까 했는데… 생각보다 장기 퀘스트더라고요. 게다가 전 대전액션 게임 같은 건 그렇게까지 잘하는 편이 아니라서요.”
 “그렇군.”
 “당신은 보니까… 격투게임은 좀 하던 거 같은데요? 이정태란 NPC도 나름 실력이 있어 보이던데. 그 NPC를 압도적으로 이길 정도라니.”
 “소싯적에 이름 좀 날렸거든. 아마추어 대회에서 상도 타본 적이 있을 정도니까.”
 “우와……”
 누차 말하지만, 상 탔다는 이야기는 거짓말이다.
 그냥 허세 끼가 다분한 말이라고 생각하면 될 듯싶다.
 “어쨌든 당신이 그 퀘스트 깨려고 다가가는 모습을 보자마자 의심했어요. 그래서 혹시나 했더니 역시나였죠.”
 “뭘 보고 확신했지?”
 “근처에 바이올렛이 있었으니까요.”
 “…바이올렛을 알고 있나?”
 “예. 대부분의 NPC들은 일단 체크해두고 있으니까요.”
 하기야. 반 년 동안 플레이어 생활을 해왔다면, 웬만한 NPC들의 정보는 대부분 다 꿰차고 있을지도 모른다.
 지역에 한정되어 있는 NPC들보다 플레이어가 행동적인 면에 있어서 자유도를 따져 봐도 더 높다.
 제대로 마음을 먹고 이곳저곳 돌아다니면서 정보를 수집하면, NPC들의 모든 위치를 입수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그 정보, 나한테도 공유해줄 수 있나?”
 스리슬쩍 딜(Deal)을 걸어본다.
 바이올렛에게서 받은 NPC들의 위치 정보는 그리 많은 편이 아니다.
 만약 연희에게서 NPC의 정보를 받을 수 있다면, 퀘스트 진행이 원활해질 수 있으리라고 본다.
 허나.
 세상에 공짜란 없는 법이다.
 “좋아요. 대신, 조건이 있어요.”
 “뭐지?”
 “정보를 공유해주는 대신, 저에게 협력해주세요.”
 그게 목적이었나.
 처음부터 일부러 나에게 접근한 이유가 분명 있을 거라곤 생각했다.
 얼추 나에게 요구사항이 있기에 스스로 플레이어라고 정체를 드러내면서까지 접근을 시도한 게 아닐까 싶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런 나의 예상은 정확하게 들어맞았다.
 “뭐지?”
 “저와 함께 ‘파티(Party)’를 꾸려주셨으면 해요.”
 “파티… 라고?”
 익숙하지 않은 용어에 무의식적으로 반색을 표한다.
 그러자 연희가 고개를 끄덕이며 부가적으로 설명을 들려주기 시작한다.
 “네. 퀘스트 중에는 혼자서 깰 수 없는… 소위 말해서 파티라는 것을 꾸려 다수가 수행할 수 있는 퀘스트가 있어요. 물론 여타 다른 일반 퀘스트에 비해 보상도 짭짤한 편이고요.”
 “그런 퀘스트도 있군.”
 “당신한테도 나쁜 제안은 아닐 거예요. 어차피 보상은 한 명이 독점으로 받는 게 아니니까요.”
 “모두가 공평하게 동일한 보상을 받는 시스템인가?”
 “네, 맞아요.”
 그렇다면 연희의 말대로 굳이 거절할 필요는 없어 보인다.
 어찌 되었든 나에게도 좋은 일이니 말이다.
 “좋아. 그렇게 하지.”
 “고마워요. NPC들에 관한 정보는 제가 따로 네비게이터 시스템을 통해 전달해드릴게요. 제 친구 신청을 받아들이면, 알아서 정보가 갈 거예요.”
 “친구 신청이라…….”
 연희의 말과 동시에 레비가 나에게 최근 갱신된 메시지를 알려준다.
 -이연희 님께서 친구 요청을 보내왔습니다. 승낙하시겠습니까? Yes / No
 고민할 여지가 없다고 생각했기에 곧장 레비에게 Yes 명령을 들려준다.
 -받아들여.
 -알겠습니다. 이연희 님께서 친구로 추가되셨습니다.
 띠링! 소리와 함께 친구 창에 이연희라는 이름이 등록된다.
 “친구로 받아줘서 고마워요.”
 “친구도 없다고 하니, 나라도 친구가 되어줘야지.”
 “…악의적인 농담이군요.”
 연희가 눈을 흘기며 하는 말에 그저 어색한 웃음만을 지어줄 수밖에 없었다.
 
 ***
 
 연희와의 대화를 마치고 난 뒤.
 술집을 나와 집으로 돌아가기 위해 발걸음을 옮기던 도중이었다.
 “과연… 이 지역에는 이렇게나 많은 NPC들이 존재한단 말인가.”
 내가 생각했던 것 이상으로 NPC들이 꽤나 많은 편이었다.
 물론 평범한 인간에 비하자면 압도적으로 적은 편이지만, 고작해야 4~5명 정도밖에 없을 거라 생각했던 것보다는 훨씬 많은 수치였다.
 게다가 연희의 말에 의하면 아직도 자신이 찾지 못한 NPC들도 있을지 모른다고 하니…….
 ‘뭐, 어찌 되었든 수행할 수 있는 퀘스트가 많다는 건 좋군.’
 그렇게 생각하며 골목길로 들어서려던 찰나였다.
 -근처에 NPC가 감지되었습니다.
 “그래?”
 때마침 잘 되었다.
 가는 길에 퀘스트도 받아갈까 하는 생각으로 NPC가 있는 위치를 향해 걸음을 돌린다.
 ‘꽤나 구석진 곳에 있군.’
 도대체 뭐 때문에 이런 어두컴컴한 골목길 구석에 처박혀 있는 것일까.
 나도 모르게 투덜거리면서 골목 코너를 막 도는 순간.
 예상치 못한 상황과 맞닥뜨리게 된다.
 “……!!”
 널브러진 시체들.
 붉은 피로 얼룩진 담벽.
 그리고…….
 “크르릉…….”
 낮게 울부짖는 괴물의 눈빛이 나와 마주친다.
 녀석은 분명…….
 “…버그 몬스터잖아……!”
 
 ***
 
 “크르릉…….”
 낮게 울음을 토해내며 나와 시선을 마주하는 버그 몬스터.
 겉으로 보기에는 늑대와 같은 생김새와 별반 다를 게 없어 보인다.
 다만, 매섭게 솟아 있는 이빨 사이로 뚝뚝 떨어지는 핏방울들이 보는 것만으로도 역겨운 기분을 선사해준다.
 주변에 널브러진 시체들.
 잔혹하게 절단된 팔과 다리들, 으깨진 머리 사이로 새어나오는 뇌수.
 이 모든 것들이…….
 …현실이다.
 “이건……!”
 나도 모르게 입술을 잘근 깨문다.
 피로 덕지덕지 얼룩진 들개 녀석의 눈빛이 점점 충혈된다.
 딱 봐도 평범한 동물처럼 보이진 않는다.
 -버그 몬스터의 정보가 갱신되었습니다. 확인해보시겠습니까?
 몬스터 정보도 있는 건가.
 확인 안 할 이유가 없기에 곧장 레비에게 정보를 들려달라고 재촉해본다.
 
 -버그 몬스터 : 하운드(Hellhound)
 타입 : 짐승
 등급 : D
 속성 : 물리
 약점 : ???
 
 약점까지 표기되는 건가!
 그러나 불행하게도 약점은 물음표로 표시되어 있다.
 -약점은 왜 안 나오는 거지?
 -하운드에 대한 정보가 부족합니다. 약점 항목을 보기 위해선 버그 몬스터에 대한 정보를 업데이트할 필요가 있습니다.
 -…….
 얼추 알겠다.
 한 번 사냥한 버그 몬스터는 그 데이트를 정보를 갱신해 나가는 것이리라 추정된다.
 훗날 내가 다시 한 번 이 하운드라는 버그 몬스터와 만나게 될 경우에는 아마 약점까지 표기되리라.
 -D 등급이면 얼마나 낮은 거지? 아니… 가장 낮은 등급이 몇인지나 말해줘.
 -F 등급입니다.
 F라…….
 일단 저 하운드란 몬스터가 버그 몬스터 중에서 가장 약한 놈은 아니란 뜻이 된다.
 내가 전에 가지고 있는 버그 몬스터 정보라고 한다면 분명… 웨어 울프 정도가 아닐까.
 -레비, 웨어 울프는 몇 등급이지?
 -B 등급이었습니다.
 -B란 말이지.
 웨어 울프보다 2등급 더 낮은 버그 몬스터란 의미군.
 하지만 내가 제대로 상대나 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비록 여분의 스텟 포인트는 없지만, 부족한 건 다른 스텟 포인트들을 차감하면서 동시에 재분배를 통해 전투에 필요한 부분을 기하급수적으로 올리면 된다.
 그게 바로 내가 여타 다른 플레이어들이 가지지 못하고 있는 강점 중 하나다.
 리셋이 가능하다는 점.
 사실 그것만 있으면 여분의 스텟 포인트는 필요가 없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활용할 수 있는 스텟 포인트가 많으면 많을수록 나를 강하게 해준다는 점에 있어선 변함이 없다.
 버그 몬스터 퀘스트가 발생하게 되면, 지금 당장은 피하자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스텟 포인트도 중요하지만, 목숨을 잃게 되면 아무런 소용도 없어지기 때문이다.
 가장 중요한건 내 목숨이다.
 바이올렛이 나에게 환생 시스템을 적용시켜 다시 되살려주긴 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딱 한 번뿐이다.
 여기서 죽으면 끝이다!
 ‘일단은… 자리를 피해야 하나.’
 그렇게 생각하며 슬금슬금 자리를 뜨기 위해 걸음을 뒤로 물리는 순간이었다.
 “크릉!!”
 하운드의 시선이 다른 쪽으로 향하기 시작한다.
 주변에 시체들이 하도 많이 널려 있어서 나도 잘 몰랐으나, 자세히 집중을 해서 둘러보니 생존자들도 몇몇 있었다.
 물론 전부 다 온전한 상태는 아니었다.
 “하악… 하악…….”
 거칠게 숨을 토해내는 한 명의 여성.
 교복을 입고 있는 것으로 보아선, 여고생으로 추정된다.
 “오, 오지 마……!!!”
 친구로 추정되는 또 다른 여고생을 품에 안은 채 고래고래 소리친다.
 죽은 건가?
 아니… 미약하게 숨을 내쉬는 것으로 보아선 살아있긴 한 모양인가 보다.
 그래도 부상 정도가 꽤나 심각해 보인다.
 -NPC에 관한 정보가 갱신되었습니다.
 하운드에게 가까이 오지 말라고 소리치는 여고생에게 표식이 새겨진다.
 레비가 내 시야에 간섭해 보여주는 표식이 아닐까 싶다.
 -유혜민. 18세 여성으로 평범한 여고생입니다.
 -…레비.
 -예, 주인님.
 -NPC도… 죽음이라는 개념이 있나?
 만약 바이올렛의 말대로 NPC들 또한 여타 다른 인간들처럼 동일한 육체를 부여받고 별반 다를 게 없는 일생을 보내도록 설정이 되어 있다면, 분명 저들에게도 죽음이란 개념은 존재할 것이다.
 이런 나의 예상에 맞게, 레비가 내 질문에 대한 답변을 들려주기 시작한다.
 -예, NPC들에게도 죽음은 평등하게 존재합니다.
 -…그렇군.
 죽음은 누구에게나 차등을 두지 않는다.
 그건 물론 NPC들도 마찬가지.
 쿵, 쿵!
 무거운 발걸음 소리와 함께 점점 다가오는 하운드.
 날카로운 이빨과 발톱이 벌써부터 NPC, 유혜민의 사지를 찢어발기기 위해 날을 바짝 세우고 있었다.
 덜덜 떨며 품안에 있는 여고생을 감싼 팔에 더더욱 힘이 들어간다.
 그 순간.
 “……!”
 두려움에 가득 찬 유혜민의 눈이 순간 나를 정면으로 응시한다.
 “프, 플레이어님… 맞죠?!”
 “…….”
 내가 레비와 머릿속으로 말을 주고받는 걸 눈치라도 챈 것인가.
 그것보다 내가 플레이어라는 걸 바로 알아본 게 신기할 따름이었다.
 NPC들은 자동적으로 플레이어를 감지할 수 있기라도 하는 걸까. 새로 입수한 정보를 머릿속에 쌓아둘 무렵, 애타게 울부짖는 유혜민의 목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한다.
 “제발… 제발 도와주세요! 전 죽어도 좋으니까 부디 이 아이만이라도… 제 소중한 친구만이라도 살려주세요!!”
 애원하기 시작한다.
 넘치다 못해 흘러내리는 눈물방울.
 NPC의 자존심이고 뭐고 그런 것도 없다.
 그저…….
 소중한 사람을 지키고 싶다는 일념 하나에 모든 희망을 담아 나에게 간곡히 부탁한다.
 “레비.”
 -예, 주인님.
 “퀘스트 정보는 어떻게 되어 있지? 왜 저 NPC의 머리 위에 물음표가 새겨지지 않는 거야.
 -NPC 유혜민이 줄 수 있는 퀘스트의 범주에서 벗어났습니다. 버그 몬스터 퇴치를 부여하는 건 유혜민의 권한이 아닙니다.
 “그 말인즉슨, 저 NPC를 도와줘도 스텟 포인트 같은 보상이 없다, 이 말인가?
 -예, 맞습니다.
 “…….”
 나의 혼잣말이 대략 어떤 뜻인지 알고 있다는 듯이 유혜민의 목소리에 더더욱 애절함이 담기기 시작한다.
 “보상 스텟도… 아무것도 줄 수 없지만… 제발 부탁드릴게요, 이대로 가다간… 친구들이 죽을 수도 있어요……! 이 애들은 NPC인 저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는… 평범한 인간이라구요!!!”
 “……”
 “부디 자비를 베풀어주세요, 플레이어님… 이렇게 부탁할게요……!”
 보상 스텟조차 받을 수 없다.
 어차피 저 몬스터를 퇴치한다고 해봤자, 나에게 돌아오는 건 아무것도 없다.
 단순한 선행(善行)에 불과하다.
 그 선행을 위해서 내 목숨을 걸어야 하는가?
 -주인님. 이번 일은 못 본 척 하는 게 좋을 거 같습니다. 비록 주인님이 스텟 재분배 능력을 지니고 있다곤 하지만, 아직까지 아무런 경험도 없는 상태에서 버그 몬스터를 제압하는 건 그리 쉬운 일은 아니라 생각합니다.
 처음으로 레비가 자신의 소견을 담아 나에게 충고한다.
 어쩌면 내가 죽을 수도 있다는 우려 때문에 네비게이터라는 신분을 넘으면서까지 참견을 해오는 것일 수도 있다.
 그러나.
 이미 내 마음은 굳어진 지 오래다.
 “이봐, 레비.”
 -예, 주인님.
 “난 말이다… 이 전 인생에서 불운 덩어리라 불리면서 최악의 인생을 살아왔었다고. 알고 있나?”
 -…예. 물론 알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간단하잖아.”
 작게 호흡을 가다듬는다.
 그러면서 동시에 하운드를 향해 매섭게 살기를 뿜어낸다.
 “이 정도 불운은… 과거의 내 인생에 비교하면 아무것도 아니라고!!”
 이대로 얌전히 모른 척하고 집으로 돌아가서 잠을 청한다면, 발 뻗고 편하게 잘 수 있겠나.
 천만에.
 꿈자리가 사나울 게 분명하잖아.
 그리고 어차피 조만간 내가 과연 어떤 수준의 버그 몬스터와 상대 가능한지 파악해보고 싶었다.
 즉, 연습 상대가 되어줄 버그 몬스터가 필요한 셈이다.
 내 실력이 어느 수준이 되는지 알아둬야, 나중에 최강철로부터 버그 몬스터 퇴치 퀘스트를 받을 때 등급에 알맞은 퀘스트를 받을 수 있지 않겠는가.
 비록 보상 스텟이 없다는 점이 좀 거슬리긴 하지만, 그래도 위기는 곧 기회라는 말도 있으니까.
 “후우…….”
 자.
 예정보다 조금 빠르게 마주친 셈이지만…….
 어디 한 번 해볼까.
 “오랜만에 개새끼를 상대로 몸 좀 풀어보는 것도 나쁘진 않겠군.”
 지금 이 순간부터는… 사냥꾼의 시간이다.
 
 
 # EP 5. 사냥꾼의 밤
 
 매섭게 몰아치는 들개 무리들의 공격.
 적어도 십여 마리 정도 되는 버그 몬스터, 하운드가 으르렁거리며 가운데에 우뚝 서 있는 한 남자를 경계하기 시작한다.
 “쥐도 새도 모르게 또 이렇게까지 숫자를 늘릴 줄이야… 방심했구만.”
 더운 날씨임에도 불구하고 트렌치코트를 입은 채 가죽 장갑을 고쳐 착용하던 최강철이 짧게 혀를 차며 하운드 무리들을 훑어본다.
 얼굴 라인을 따라 깔끔하게 다듬은 턱수염이 여전히 댄디한 느낌을 선사해주고 있었다.
 오밤중임에도 불구하고 선글라스를 착용한 채 담배 하나를 입에 문 최강철의 눈빛에는 당혹감보다는 냉철함이 어려 있었다.
 “집에 가서 커피나 한 잔 하고 싶은 밤이었는데… 졸지에 들개 무리들의 피 냄새나 맡게 되었군.”
 D급 몬스터라곤 하지만, 워낙 개체수가 많은 터라 인근 지역을 쑥대밭으로 만들어버릴 수 있는 규모를 자랑하는 버그 몬스터, 하운드 무리들.
 이 녀석들부터 처리하는 게 급선무다.
 “덤벼라, 개새끼들아.”
 손을 까딱거리며 도발을 시전하는 최강철의 제스처에 곧장 망설일 시간도 없이 이빨을 드러내며 다수의 하운드들이 그를 향해 돌진해온다.
 타다다다닥!!
 다다닥!
 한 마리씩도 아니고 십여 마리의 하운드들이 일제히 공격을 가한다.
 이들도 본능적으로 최강철이라는 사냥꾼이 얼마나 위험한지 잘 알고 있다.
 그렇기에 초반부터 그의 숨통을 끊기 위해서라도 전력으로 덤벼들 필요가 있었다.
 “한꺼번에 집중 공격이라… 몬스터 주제에 제법 머리가 잘 돌아가는군. 누군가가 명령을 내리는 존재가 따로 있기라도 하는 건가”
 담배를 바닥에 떨군 채 구두 굽으로 사정없이 밟으며 혹시나 남을지 모르는 불씨 하나까지 완벽하게 꺼버린다.
 이윽고.
 “스텟 포인트, 리셋!”
 그의 스텟 수치가 재조정되기 시작한다.
 여분의 스텟 포인트를 포함해 전투에 불필요한 스텟 포인트까지 싸그리 차감해 전부 육체를 강화시키는 데에 투자한다.
 “크워어엉!!”
 가장 먼저 입을 쩍 벌리며 자신의 머리를 단숨에 삼킬 기세로 날아드는 하운드의 목 안에 그대로 오른 주먹을 처박는다.
 퍼벅!!
 목구멍 안에서 등 뒤까지.
 최강철의 주먹이 하운드 한 마리의 몸을 관통한다.
 관통한 오른손에는 버그 몬스터의 근원이기도 한 바이러스 핵이 들려져 있었다.
 꽈직!!
 인정사정 볼 것도 없이 그대로 오른손에 힘을 주며 핵의 구체를 박살내자, 푸른 불꽃과 함께 하운드의 시체가 자취를 감춘다.
 “이제 겨우 한 마리인가.”
 왼쪽에서 자신의 옆구리를 물기 위해 몸을 날리는 또 다른 하운드의 기척을 감지한다.
 슬며시 반대 방향으로 몸을 뒤로 빼며 하운드의 물기 공격을 흘려버리는 최강철.
 어차피 하운드들은 별다른 특별한 속성도, 기술도 가지고 있지 않다.
 그저 물리적인 접근 공격 패턴만을 보여줄 뿐이다.
 하지만 개체수가 워낙 많다는 것이 그의 신경을 건드리고 있었다.
 “흡!”
 짧은 기합소리와 함께 그대로 왼발을 들어 방금 자신을 공격한 하운드 한 마리의 머리를 그대로 내려찍어버린다.
 빠지직! 소리와 함께 두개골과 뇌가 그대로 으깨지는 장관을 연출한다.
 박살이 난 머리의 틈으로 바이러스 핵이 모습을 드러내자 역시나 마찬가지로 재차 발을 내려찍어 하운드의 머리처럼 으깨버린다.
 비명조차 내지를 틈도 없이 순식간에 2마리의 하운드를 제거한 강철의 눈이 빠르게 다음 타깃을 찾는다.
 그 순간.
 “크릉!!”
 “……!”
 미처 기운을 감지하지 못한 하운드 두 마리가 각각 자신의 오른쪽 옆구리, 그리고 왼쪽 발을 물기 위해 거대한 입을 벌린다.
 피할 겨를도 없다!
 그대로 무심코 공격을 허용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하운드 두 마리가 기세 좋게 최강철의 각 신체 부위를 깨물기 시작한다.
 허나.
 예상치 못한 현상이 발생하게 된다.
 그의 옆구리와 발을 물어버리는 데에 성공했다고 생각한 하운드들이었으나…….
 피해를 입은 건 오히려 하운드 쪽이었다.
 “……!”
 기세 좋게 턱 힘으로 강철의 신체를 절단 낼 각오를 하며 물어버렸지만, 되려 하운드의 이빨에 금이 가며 가장 훌륭한 공격 수단을 잃어버리게 된 것이다.
 “쯧… 아끼는 양복이었건만.”
 최강철은 마치 이 결과가 나올 줄 알았다는 듯이 연이어 두 손으로 각각 자신을 공격한 하운드들의 머리를 잡아 끌어올린다.
 “수선에 드는 비용도 꽤나 비싸다고, 들짐승들아.”
 꽈지직!!
 양 손에 살며시 힘을 가하는 것만으로도 하운드 두 마리가 이 세상과 작별인사를 하게 된다.
 압도적인 최강철의 능력 앞에 순간 전투 의욕을 상실하는 하운드들.
 버그 몬스터 또한 본능이라는 걸 가지고 있다.
 자신들이 최강철의 적수가 되지 못할 거란 사실을 이제야 깨달은 모양인지 낮은 음성으로 으르렁거리며 서서히 뒤로 물러선다.
 그 순간.
 대여섯 마리의 하운드들이 전장을 빠져나가 최강철로부터 도망을 시도한다.
 이 공터를 빠져나가면, 머지않아 사람들이 다수 모여 있는 시내에 도달할 수 있을 것이다.
 그것만큼은 막아야 한다.
 NPC든 인간이든 무작정 ‘먹어 치운다’라는 코드가 입력되어 있는 버그 몬스터를 무방비로 방치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거 참… 귀찮게 하는 녀석들이군.”
 트렌치코트 속주머니 안에서 무언가를 꺼내든다.
 리볼버 타입의 원거리형 무기 아이템, M5 콜트 액션.
 은색으로 도금되어 있는 그의 전용 무기 아이템이 묵직한 총성과 함께 총구에서 불을 뿜어낸다.
 매섭게 날아가는 탄환이 때마침 담벼락을 넘어 도주를 시도하는 하운드의 핵을 정확하게 관통한다.
 연속으로 정확하게 4마리의 하운드를 처리하는 깔끔한 사격 솜씨를 보여주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3마리의 하운드가 어둠 속에 모습을 감춘다.
 “쳇.”
 짧게 혀를 친 강철에 귀에 꽂혀져 있는 통신기의 버튼을 누른다.
 “3마리가 도망쳤다. 위치 정보를 보내줄 터이니 보이는 즉시 사살하도록.”
 -예, 알겠습니다.
 “무슨 일이 있어도 인명 피해는 막아야 한다, 알겠나.”
 -예!!
 다수의 음성들이 최강철의 명령에 즉각 대답한다.
 옅은 한숨을 내쉬며 방금 전까지 하운드와 목숨을 걸고 싸운 현장을 살펴본다.
 워낙 많은 피가 사방에 여기저기 튀긴 탓에 원래의 담벼락 색이 무슨 색이었는지조차 판별 불가능할 정도였다.
 다수의 하운드가 등장했다는 부하 직원의 보고를 받고 곧장 현장으로 출동하긴 했지만, 설마 이리 많은 버그 몬스터들이 도사리고 있을 줄은 몰랐다.
 물론 D급 몬스터이기에 수십 마리가 덤벼들어봤자 최강철에게 상처 하나 주긴 힘들었다.
 허나 숫자가 많으면 많을수록, 방금 전과 마찬가지로 자신의 시야 망을 피해 더러 몇 마리가 도망칠 우려가 있다.
 한 번 추적에 실패하게 되면, 그 실수로 인해 인명 피해가 발생할 가능성도 크다.
 “나도 아직은 많이 부족하구만.”
 자신의 실수와 실력의 부족이 다른 생명을 앗아가는 최악의 결과로 이어질 수 있다.
 최강철은 여태 그 수많은 부담감과 죄책감을 등에 짊어진 채 버그 몬스터 퇴치 담당 NPC로 일해왔다.
 죽음이라는 경계선과 가장 가까운 현장에서 일생을 보내온 남자, 그게 바로 최강철이다.
 트렌치 코드 안으로 손을 뻗으며 무언가를 찾기 시작한다.
 그러더니 담배를 꺼내 곧장 입에 물고서 불을 붙인 뒤, 담배 연기를 길게 내뱉는다.
 “…이러다간 평생 금연은 못하겠군.”
 
 ***
 
 머릿속에서 울리기 시작하는 경고음.
 D급 버그 몬스터의 출연만으로도 이렇게까지 긴장이 되는데, 앞으로 상급 버그 몬스터들을 어떻게 상대해야 좋을지 솔직하게 말하면 머릿속이 벌써부터 캄캄해져 온다.
 그래도 어차피 한 번은 해내야 한다면…….
 “미리 해두는 편이 좋겠지!!”
 매도 먼저 맞는 게 좋다고 하니 말이다.
 파박!!
 지면을 박차며 하운드를 향해 무작정 돌진한다.
 그러면서 빠르게 시동어라 할 수 있는 말을 읊조린다.
 “스텟 포인트, 리셋!!”
 -리셋 모드를 실행합니다.
 레비의 말이 머릿속에 울림과 동시에 무수한 스텟 포인트 창들이 반투명한 홀로그램 형태로 보여지기 시작한다.
 처음 이 광경을 봤을 때에는 솔직히 말해서 어지럼증도 살짝 올 정도였으나, 이제는 익숙해졌다.
 “오늘 습득한 여분의 스텟 포인트를 포함해서 육체 파트를 제외하고 모든 스텟 포인트들을 20씩 차감해!”
 -차감 완료. 포인트 분배는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육체 파트에 전부 분할해!”
 -분배 방식 차등과 균등으로 나뉩니다.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일단은 균등으로!”
 -예, 알겠습니다.
 띠리링!
 특별히 전투에 임할 때 어느 부분을 유독 차등 분배시켜야 좋을지 마땅히 떠오르지 않아 일단은 균등 방식으로 육체 파트를 강화시킨다.
 전과는 다르게 근력이라든지 반사 신경, 심지어 신경까지 상승되기 시작한다.
 야밤임에도 불구하고 하운드의 외형이 또렷하게 보일 정도니 말이다.
 “선빵필승!!”
 돌진하는 속도를 늦출 생각도 없이 곧장 발을 뻗는다.
 오른발을 그대로 공중으로 들어올리는 형태로 하운드의 턱을 그대로 올려차버린다.
 빠아악!!
 경쾌한 타격음과 함께 하운드가 미처 반응조차 보여주기도 전에 내 공격으로 인해 공중으로 치솟는다.
 살아 있는 생물을 이렇게까지 전력을 다해 때려본 적은 처음이다.
 기습적인 일격이 제대로 통했을지 잘 모르지만, 그래도 먼저 타격을 입혔다는 점에 대해선 스스로에게 높은 점수를 부여하고 싶은 기분이다.
 대략 3미터 가까이 날아간 하운드가 공중에서 자세를 잡는다.
 동시에 네 발을 이용해 간신히 착지에 성공한다.
 성공적으로 공격 포인트를 쌓았다고 생각했지만…….
 역시나… 동물적인 감각은 무시할 수가 없구나.
 단번에 녀석의 바이러스 핵을 찾아 파괴하는 데엔 미수로 그쳤지만, 그래도 유혜민이라는 NPC와 그녀의 친구로부터 하운드를 떨어뜨려놨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충분히 만족스럽다.
 “고, 고맙습니다, 플레이어님……!”
 “인사는 나중으로 미루자. 아직 끝난 건 아니니까.”
 보아하니 일어설 기력조차 보이지 않는다.
 마음 같아선 내가 시간을 끄는 동안 도망치라 말해주고 싶지만, 그럴 만한 여건이 전혀 안 되어 보인다는 게 그저 안타까울 뿐이다.
 지켜야 할 대상자가 전장에 있으면 그만큼 내 활동 범위와 자유도가 줄어든다.
 ‘난감하군.’
 그렇다고 여고생들을 이대로 방치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위험한 상황에서 아이들을 지켜줘야 하는 것이 어른으로서 사명감 아니겠는가.
 설령 그것이 NPC라 해도 말이다.
 “후우.”
 옅은 한숨을 내쉰다.
 천천히.
 그리고 또 다시 천천히.
 설마 내 인생에 있어서 늑대 같이 생긴 들짐승과 이렇게 서로 주먹을 맞대고 싸울 줄은 꿈에도 몰랐다.
 아니지. 하운드에게는 주먹이란 개념보다 발톱과 이빨이라는 단어를 사용하는 게 더 어울릴지도 모르겠다.
 어찌 되었든 새로운 경험이다.
 그리고 개인적인 욕심이 있다면 두 번 다시 경험하고 싶지 않은 일이긴 하지만, 그래도 어쩔 수 없다.
 누군가를 지킬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나 몰라라 도망치는 건 조금 치사하지 않겠는가.
 “플레이어님…….”
 뒤에서 잔뜩 겁에 질린 목소리가 들려온다.
 아마도 그렇겠지.
 죽음의 위기에 놓여있는데, 그 누가 두렵지 않겠는가.
 물론 나 역시 두렵다.
 자칫 잘못하다가 저 날카로운 송곳니에 그대로 사지가 절단될 수도 있으니까.
 그래도 여기서 나까지 겁을 먹게 된다면 여고생들에게도 똑같이 불안감을 심어주는 꼴밖에 되지 않는다.
 “걱정하지 마라. 한 마리 정도는 어찌저찌 상대할 수 있을 거 같으니까.”
 허세에서 오는 말이 아닌, 진심을 담아 하는 말이다.
 괜히 여기서 허세를 부려봤자 무엇하겠는가.
 목숨이 왔다 갔다 하는 일인데 말이다.
 슬쩍 홀로그램 창으로 시선을 돌려 현재 육체 파트 부분에 할당되어 있는 스텟 항목들이 평균적으로 얼마나 상승했는지 눈짐작으로 가늠해본다.
 “대략 100 정도 올랐나…….”
 역시 균등 배분을 하다 보니 근력이라든지 특별한 부분이 눈에 띄게 상승되진 않았다.
 게다가 여분의 스텟 포인트도 없이, 다른 스텟 파트에서 차감해 온 것에 불과하니 실질적으로 육체 파트에 할당된 스텟 포인트는 그리 많이 않을 것이다.
 일반인에 비해 두 배 정도의 육체 능력을 보유하게 되었지만, 그것만으로 과연 저 D급 버그 몬스터를 상대할 수 있을런지 잘 모르겠다.
 전투 경험이 없으니 도무지 예측이 불가능하다.
 허나 걱정할 필요는 없다.
 왜냐하면.
 전투 경험은 지금부터 쌓아가면 되니까!
 “하압!”
 다시 한 번 짧은 기합을 내지르며 하운드를 향해 뛰쳐나간다.
 방금 전의 타격이 녀석의 뇌에 어느 정도 충격을 선사한 모양인지 어떤지는 정확하게 파악하기 힘들지만, 확실한 것은 아까보다 움직임이 많이 둔해졌다.
 그렇다면 망설일 이유 따윈 없다.
 녀석의 발이 느려진 순간이 바이러스 핵을 찾아낼 수 있는 절호의 찬스다!
 “……!”
 하운드를 향해 달려가는 순간, 바닥에 떨어진 무언가가 반짝거린다.
 나도 모르게 반사적으로 손을 뻗어 그 물체를 손에 쥔다.
 “커터칼인가……!”
 아마도 하운드에게 살해당한 여고생들의 가방에서 쏟아져 나온 학용품 중 하나가 아닐까 싶다.
 아무렴 어떠랴.
 지금 중요한 건 커터칼의 출처가 아니다.
 무기가 생겼다는 점에 의의를 두는 게 더 중요하다!
 드르륵!
 손가락으로 커터칼의 날을 세우며 곧장 무기로 사용할 수 있게끔 만들어둔다.
 어차피 하운의 거친 피부를 갈라내기에는 커터칼의 내구도가 너무 약하다.
 그렇다면.
 철저하게 약한 부분을 골라 찌르면 된다.
 “으랴아아아!!”
 오른손에 들려져 있는 커터칼을 추켜올린다.
 내가 뛰쳐온다는 사실을 인지하고 있는 거 같긴 하지만, 좀처럼 몸이 반응하지 않는 것으로 보아 아마도 부상 회복이 꽤나 더딘 편으로 보인다.
 오히려 나에게는 기회다.
 푸욱!!
 커터칼의 날 끝을 이용해 그대로 하운드의 오른쪽 눈에 찔러넣는다!
 “크워어어어!!”
 고막을 찢어버릴 기세로 울부짖기 시작하는 하운드.
 그러나 여기서 멈출 생각은 추호도 없다.
 이대로 바이러스 핵을 찾아낸다!
 “레비! 육체 파트에 할당된 여분의 스텟 포인트들을 전부 왼팔로 몰아줘!”
 -리셋 모드, 발동.
 왼손을 그대로 하운드의 배 쪽으로 향해 있는 힘껏 찔러넣는다!
 푸욱! 소리와 함께 그다지 좋지 않은 감촉이 손끝에서 전해진다.
 이윽고 왼손을 뽑아내지, 무수한 피의 분수와 함께 드디어 내가 찾던 바로 그 물건이 시야에 들어온다.
 작지만 마치 밤하늘에 떠 있는 달덩이와 같이 밝은 빛을 뽐내는 구체.
 바이러스 핵이었다.
 
 ***
 
 손에 들려져 있는 바이러스 핵.
 태어나서 처음 만져보는 물건에 순간 절로 헛숨을 삼키고 만다.
 “이게… 바이러스 핵이란 말이지…….”
 사물, 혹은 동식물과 융합하거나 아니면 스스로가 버그 몬스터라는 존재로 탈바꿈할 수 있는 근원체가 내 손에 있는 셈이다.
 이걸 이제 파괴하기만 하면 된다.
 내 기억을 인용하자면, 최강철은 분명 맨손으로 구체를 바스러트리는 것만으로 구체를 제거할 수 있었다.
 그렇다면 물리적인 힘을 가해도 제거가 가능하다는 뜻이 아닐까.
 혹시나 했는데 역시나였다.
 서서히 힘을 주기 시작하자, 바이러스 핵의 빛이 더더욱 강하게 발현되기 시작한다.
 그러더니 이내 빠직! 소리와 함께 구체에 금이 형성되며, 동시에 방금 전까지만 하더라도 매섭게 빛나던 강한 빛이 순식간에 자취를 감춘다.
 빛이 사라짐과 동시에 구슬 조각을 비롯해서 하운드의 시체가 서서히 가루가 되어 사라진다.
 이것으로…….
 이것으로 끝인가.
 “하아… 하아…….”
 이제야 긴장감이 한꺼번에 몰려온 모양인지 다리에 힘이 풀린다.
 털썩!
 바닥에 그대로 엉덩방아를 찧듯 앉은 채 다시금 호흡을 고른다.
 피 냄새가 코끝을 자극해오지만, 이제는 익숙해진 탓에 구역질도 올라오지 않는다.
 버그 몬스터 퇴치 퀘스트를 계속해서 수행하다보면, 아마도 이런 장면도 이제는 대수롭지 않게 여기리라.
 “…기대하고 있었는데. 역시 아무런 보상은 없구만.”
 버그 몬스터를 잡으면 뭔가 상이라도 나올 줄 알았지만, 그런 건 없는 모양인가 보다.
 물론 퀘스트조차 없는 상태라서 이미 별도의 보상이 없을 거라는 사실은 진작부터 알고 있었지만, 막상 고생해서 하운드를 잡았는데 아무것도 없다는 걸 직접 경험해보니 괜스레 힘이 빠진다.
 대신, 한 가지 얻은 건 있다.
 띠링!
 -버그 몬스터, 하운드에 관한 정보가 업데이트 되었습니다.
 레비가 초반에 말했듯이, 하운드의 전투로 인해 버그 몬스터에 관한 정보를 손에 얻을 수 있었다.
 이제는 약점 항목까지 정확하게 드러난다.
 “약점이 불이란 말이지.”
 -네, 그렇습니다.
 “하긴, 들짐승들은 불을 무서워하니까.”
 다시 말해서 화(火) 속성 공격에 약하다는 걸 의미하는 게 아닐까 싶다.
 “앞으로 이 녀석들 상대할 때에는 라이터라도 들고 다녀야겠군.”
 반은 농담을 담은 혼잣말을 중얼거리자, 레비의 목소리가 머리에 울려 퍼진다.
 -마법(Magic), 혹은 스킬(Skill)을 사용하면 보다 편하게 잡으실 수 있습니다.
 “…뭐라고?”
 마법과 스킬.
 설마… 스텟 항목에 그런 것이 존재하나?
 아니, 그럴 리가 없다.
 혹시 몰라서 심심할 때마다 스텟 항목들을 정리한 목록을 일일이 살펴보긴 했지만, 마법이라든지 스킬, 기타 특수 능력을 내포한 스텟 항목들은 존재하지 않았다.
 가만.
 “특수 능력… 이라고 했었지.”
 그 단어를 입에 담자마자, 다시 한 번 레비의 음성이 뒤이어 색다른 정보 하나를 들려주기 시작한다.
 -특수 능력 항목 해금까지 앞으로 199개 남았습니다.
 “그게 무슨 뜻이지? 뭐가 199개 남았다는 거냐.”
 -바이러스 핵의 파괴 횟수를 가리킵니다.
 “…….”
 역시 뭔가 있다.
 아직 내가 정확하게 볼 수 없는 6번째 특수 능력 항목에 분명 무언가가 숨겨져 있을 것이다.
 그것보다 해금 조건이 설마 일정 수치까지 바이러스 핵을 파괴하라니…….
 뭐 이런 괴랄한 조건이 있단 말인가.
 “레비, 바이러스 핵만 199개 처리하면 되는 건가? 아니면 또 무언가가 더 필요해?”
 -해금할 수 있는 방식은 정확하게 2개의 수단이 존재합니다. 바이러스 핵을 199개 파괴하거나, 혹은 퀘스트 클리어 횟수를 1000번 달성하는 겁니다. 오늘 주인님의 퀘스트 클리어 횟수까지 포함하면, 이제 997번 남았습니다.
 좀 더 쉬운 방법이 없나 싶었는데, 오히려 더 어려운 방법이 제기되었다.
 세상에, 천 번을 어떻게 클리어하라는 거냐.
 오늘 클리어한 2번의 퀘스트도 클리어하느라 어지간히 애를 먹었는데 말이다.
 그래도 바이러스 핵 파괴와 퀘스트 클리어 조건이 선택적 사항이라 천만다행이다.
 ‘3번이 클리어되어 있단 뜻은… 바이올렛이 나한테 초반에 시험 삼아 줬던 그 아메리카노 마시기 퀘스트도 포함이 되는 건가 보군.’
 그렇다면 바이올렛에게 그런 식으로 간단한 퀘스트를 매일 일정치 받아 클리어하면 되지 않을까?
 예를 들자면… 하루에 100개씩이라든지.
 아니, 어림도 없는 생각은 하지도 말자. 애초에 그 녀석 성격으로 봤을 땐 귀찮아서 그런 거엔 협조조차 안 해줄 거 같으니까.
 그것보다 한 가지 더 확인해볼 게 있다.
 “특수 항목을 개방하면 무슨 스텟을 올릴 수 있는 거지?”
 -업데이트가 필요한 부분입니다. 정보가 없습니다.
 “…역시 그렇군.”
 저번에 특수 항목에 대해 물어봤을 때와 엇비슷한 대답이 들려온다.
 아무래도 네비게이터 시스템의 한계인 모양인가 보다.
 데이터가 없으면 명쾌한 해답을 들려줄 수 없다.
 일단 해금 방식이 무엇인지에 대해 알아낸 것도 큰 수확이라고 위안을 삼아보자.
 “조만간 연희나 아니면 NPC들에게 물어보면 되겠지.”
 NPC라고 하니, 나에게 살려 달라 애원했던 그 여고생을 뒤늦게 떠올린다.
 하운드와의 혈전 이후 특수 능력 항목에 관심이 쏠린 탓에 잠시나마 유혜민과 그녀의 친구가 근처에 있다는 걸 잊고 있었다.
 “읏차.”
 가벼운 기합소리와 함께 자리에서 일어선다.
 터벅터벅 걸어가 자신의 친구를 바닥에 눕힌 채 다가오는 나를 응시하던 유혜민이 얼굴에 화색을 띄우며 감사 인사를 건네준다.
 “고, 고마워요… 플레이어님. 덕분에 살았어요…….”
 “고마워할 것까지야. 그보다 네 친구는?”
 “기절한 거 같아요.”
 “다행이군… 아니, 그렇게도 볼 수는 없나.”
 “…….”
 내 말에 유혜민의 눈에 서글픔이 어리기 시작한다.
 친구 한 명만 무사하다고 끝날 일이 아니다.
 근처에 널브러진 다수의 시체.
 입고 있는 옷이 유혜민과 같은 부류의 교복임을 눈치챈 순간, ‘다행이다’라는 말을 더 이상 꺼낼 수가 없었다.
 금방이라도 울 듯한 표정으로 친구를 내려다보는 유혜민.
 어떤 식으로 이 NPC를 위로해줘야 좋을지 마땅한 대사가 떠오르지 않는다.
 애초에 사교성이라든지 이런 건 나에게 부족한 부분이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이것만큼은 단호하게 말해줘야 한다.
 “일단 안전한 곳까지 대피하자. 최강철이란 녀석이 올 때까지는 최대한 위험 지역에서 벗어나는 게 좋을 거 같으니까.”
 “네……!”
 슬퍼할 만한 여유는 없다.
 죽은 자를 그리워하는 건 충분히 안전이 보장되고 난 이후에 해도 늦지 않으니까.
 그렇게 생각하며 유혜민을 대신해 그녀의 친구를 등에 업고 골목길을 빠져나가려던 순간이었다.
 말이 씨가 된다고 했던가.
 “크릉…….”
 피 냄새를 맡고 온 건지, 아니면 처음부터 매복을 한 채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인지 파악은 안 되지만.
 한 마리가 더 있다는 것만큼은 확실하게 알 것 같다.
 “프, 플레이어님!”
 “…쉿. 알고 있어.”
 당황해하는 혜민을 애써 진정시킨다.
 이번에는 한 마리도 아닌 두 마리다.
 그나마 어찌저찌 한 마리를 제압했는데, 이제는 더블로 상대해야 하다니.
 하지만 그다지 겁은 나지 않는다.
 “잠깐 친구랑 같이 얌전히 있어라.”
 등에 업었던 그녀의 친구를 다시 맡기기로 한다.
 두 마리라.
 나쁘진 않다.
 왜냐하면 오히려 내 머릿속에는 이런 생각만 들 뿐이었으니까.
 “이제 앞으로 해금까지 남은 개수는 197개째가 되는 셈이군.”
 이미 나에게 있어서 하운드란 이름의 D급 버그 몬스터는 겨우 그 정도밖에 안 되는 놈들이었다.
 
 ***
 
 -A 사이트, 클리어.
 -C 사이트, 클리어.
 “수신 양호.”
 귀에 꽂힌 통신기의 버튼을 누르며 즉각적으로 들어오는 보고에 대해서 알았다는 식으로 대답해주는 한 명의 여성.
 어디서나 흔하게 볼 수 있는 캐주얼 복장을 갖춰 입고 있지만, 그녀의 손에 들려 있는 자동소총을 보면 결코 평범한 여성이 아님을 곧장 깨달을 수 있을 것이다.
 어느 한 골목길 입구에 도달한 여성을 향해 그녀와 마찬가지로 평범한 복장을 착용한 다수의 남성들 중 한 명의 젊은 남자가 대표로 거수경례를 마친다.
 “상황은 어떻게 돌아가고 있지?”
 여성의 물음에 남자가 목소리를 낮추고서 짧게 보고를 이어간다.
 “3마리의 하운드가 이 골목길 안쪽에 들어선 이후로 종적을 감췄습니다.”
 “종적을 감췄다?”
 “관측반에선 버그 몬스터의 신호를 감지할 수 없다고 합니다.”
 “…….”
 믿기 힘든 일이라고밖에 생각이 들지 않는다.
 바이러스 핵을 지니고 있는 버그 몬스터들은 이들의 추적망을 피할 수 없다.
 그런데 갑자기 자취를 감췄다니.
 특 S급 버그 몬스터라면 레이더 망에서 자취를 감출 수 있는 특수 능력이라도 지녔을 가능성도 크지만, 하운드는 고작해야 D급 몬스터에 지나지 않는 하등 생물이다.
 물론 아무런 무장조차 하지 않은 일반인들에게 있어선 매우 위협적인 존재임에는 틀림이 없으나, 이들 BHU(Bug monster Hunting Unit)에겐 하운드가 크나큰 장애 요소로 작용할 순 없다.
 BHU에서 1중대를 책임지고 있는 여성, 유레희가 통신기 위로 손을 올리며 관측반을 부른다.
 “철산모, 철산모. 여기를 백수리라 알리고 현 위치에서 타깃이 종적을 감췄다는 말이 사실인지.”
 이윽고 통신기에서 지직거리는 소음이 몇 번 들려오더니 레희의 말이 사실이라는 뉘앙스로 마주 답변을 보내온다.
 -여기를 철산모라 알리고 백수리의 말이 사실이라는 통보. 수신 양호한지.
 “…양호.”
 통신기에서 손을 뗀 레희가 짧게 혀를 찬다.
 관측반의 실력을 의심하는 게 아니다.
 하운드 3마리가 BHU와의 격전도 없이 소멸했다는 게 믿기지가 않아서였다.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중대장님.”
 남성의 물음에 잠시 고민을 해보기 시작하던 레희였으나, 그녀의 고민은 그리 오래 가지 못했다.
 “소수의 병력으로 골목길 안을 수색한다. 나머지 병력은 민간인이 접근하지 못하게 통제함과 동시에 혹시 모를 습격에 대비해 주변을 경계하고… 그러면 되겠지.”
 “…대대장님!”
 레희의 뒤에서 모습을 드러낸 트렌치코트의 남자, 최강철이 명쾌한 해답을 제시한다.
 그의 등장에 레희가 부하들을 대표해 거수경례를 선보인다.
 가볍게 손을 흔들어주는 것으로 레희의 경례를 받아준 강철의 시선이 어두컴컴한 골목길의 끝을 향한다.
 “안에서 신호가 끊겼단 말이지.”
 “예, 그렇습니다.”
 “…거 참 상황이 묘하게 돌아가는군.”
 아무리 봐도 소멸되었다고밖에 볼 수가 없다.
 그러나 과연 누가?
 “플레이어의 소행일지도 모릅니다.”
 부하 대원 중 한 명이 넌지시 의견을 제시해본다.
 확실히 그의 말도 틀리진 않다.
 하지만.
 “퀘스트를 받지 않았는데도 플레이어가 알아서 버그 몬스터를 퇴치하는 건 거의 본 적이 없는데. 자원봉사도 아니고 말이지.”
 최강철의 입가에 쓴웃음이 번지기 시작한다.
 플레이어들은 스텟 포인트를 수집하는 데에 혈안이 되어 있다.
 그런데 아무런 보상도 없는 버그 몬스터 퇴치에 목숨을 걸고 스스로 나선다?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물론 버그 몬스터를 퇴치하면 스텟 포인트를 받을 수도 있을지 모르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최강철로부터 버그 몬스터 퀘스트를 받았을 경우에만 가능한 일이다.
 아직 최강철은 공식적으로 퀘스트를 등록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워낙 갑작스럽게 하운드 무리가 등장했을 뿐더러, 뒤늦게 플레이어들을 모아봤자 이미 인명 피해는 발생했기 때문이다.
 괜히 플레이어가 난입해 자신의 부대원들이 펼치는 작전에 혼란을 초래할 수도 있을 거란 우려도 퀘스트를 등록하지 않은 이유 중 하나이기도 하다.
 물론 BHU의 힘만으로 버그 몬스터를 퇴치하기 어려운 상황에 놓이게 되면 퀘스트로 다수의 플레이어들의 힘을 끌어 모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허나 지금은 아니다.
 “살펴볼 가치는 있겠지.”
 다시 한 번 코트 안에서 총기를 꺼낸 강철이 먼저 선두를 자처한다.
 “유레희, 넌 남아서 후방부대를 지휘해라. 그리고 병력 중에서 선임급으로 3명만 나를 따라오도록.”
 “예, 알겠습니다.”
 일사천리로 진행되는 강철의 지시에 따라 부대가 빠르게 행동에 임하기 시작한다.
 어두운 골목길을 걸어나가기 시작하는 최강철의 소수 부대.
 언제, 어디서 하운드가 튀어나올지 모른다는 긴장감을 가지고 천천히, 한 발자국에 모든 신경을 집중해 앞으로 나아가기 시작한다.
 “…….”
 “…….”
 선두에 선 최강철과 병사 한 명, 그리고 뒤로는 나머지 병사 두 명이 각각 후방과 측면을 엄호하며 최강철의 뒤를 따른다.
 좁은 골목길에 담벼락으로 둘러싸여 있는 환경인지라 언제 어디서 하운드가 이들을 급습할지도 모른다.
 게다가 전장도 상황이 좁은 곳이다.
 원거리 형태의 무기뿐만이 아니라 근접 무기도 휘두르기 어렵다는 점 때문에 최강철의 표정 또한 진지함으로 물들기 시작한다.
 공터에서는 여러 마리의 하운드를 상대하는 게 가능했지만, 좁은 골목길에서는 강철이라 하더라도 긴장을 늦출 순 없다.
 그리고 자신의 부하들은 리셋 모드라는 특수한 권한을 실행할 수 없다.
 어디까지나 이름 없는 NPC들에 불과하니 말이다.
 “……!”
 순간.
 앞서가던 강철이 주먹을 쥔 한 손을 머리 위치까지 들어올린다.
 수신호를 보자마자 3명의 병사들이 자세를 낮추며 경계 모드에 돌입하기 시작한다.
 최강철이 뭔가를 감지한 것이다.
 ‘설마… 하운드인가?’
 바이러스 핵의 신호를 더 이상 추적할 수 없다는 게 관측반의 보고였다.
 혹시나 레이더 망의 상태가 좋지 않아 신호를 놓쳤을 가능성도 배제할 순 없다.
 조심스럽게 탄환을 장전한 뒤 숨을 죽이는 최강철.
 “…요 앞에 있군.”
 그의 숨죽인 말에 병사들 역시 긴장의 끈을 놓지 않는다.
 바로 왼쪽으로 돌아가는 코너에서 뭔가가 인기척을 내며 걸어오고 있다.
 터벅, 터벅, 터벅…….
 소리를 통해서 예측하자면, 한 마리… 아니, 한 명의 것이 아니다.
 ‘사람인가?!’
 걷는 속도와 더불어 보폭의 거리가 짐승의 그것과 다르다.
 허나 마지막까지 방심할 순 없다.
 정체불명의 누군가가 코너를 도려고 하는 순간!
 철컹!!
 묵직한 쇳덩어리가 탄환 장전을 알리는 소음을 자아낸다.
 동시에 눈앞에 놓인 대상을 향해 4개의 총구가 겨눠진다.
 “꼼짝 마라, 움직이면 쏜…….”
 말을 이어가던 강철이었으나, 졸지에 타깃이 되어버린 남자가 돌발적인 발언을 내뱉는다.
 “이거 참 황송한 마중이구만. 기껏 들개 놈들 때려잡아줬더니, 수고하신 플레이어님에게 총구나 들이대고 말이야.”
 “넌…….”
 피를 잔뜩 뒤집어쓴 한 남자가 어이가 없다는 듯이 한쪽 입꼬리를 올리며 가볍게 웃어 보인다.
 “그래, 나다. 얼마 전에 봤던 오창식. 설마 기억 못하는 건 아니겠지?”
 “…….”
 전혀 예상치 못한 인물의 등장에 강철은 그저 침묵을 유지할 수밖에 없었다.
 
 
 # EP 6. 해커(Hacker)
 
 이른 아침.
 창문에서 들려오는 짹짹 소리에 나도 모르게 상반신을 천천히 일으킨다.
 “…….”
 부스스한 눈을 억지로 뜨며 벽에 걸린 시계를 확인해본다.
 현재 시각, 오전 9시.
 시계를 확인하기 전까지만 하더라도 왠지 늦은 시간에 일어난 거 같은 기분이 들었지만, 확인하고 나니 생각보다 이른 시각이라 그런지 짐짓 놀랄 수밖에 없었다.
 평소와 다를 바 없는 아침 기상 시간이지만, 어제 저녁을 고려해보면 결코 평범하다 보기에는 힘들 것이다.
 하운드와의 전투.
 생애 첫 버그 몬스터를 퇴치한 직후의 아침이다.
 최강철이 이끄는 BHU라는 버그 몬스터 소탕 전문 부대와 조우한 이후 유혜민과 살아남은 생존자들의 신변을 그들에게 인도했다.
 혹시나 어제 발생한 인명피해가 전파를 탈지 몰라 TV를 틀어본다.
 그러나 하운드로 인해 발생해버린 인명피해에 대해선 아무래도 그쪽이 은폐를 시도한 모양인지 아침 뉴스에는 어제 사건에 대한 소식이 전혀 담겨있지 않았다.
 “…혹시나 했지만 역시나인가.”
 사람이 살해당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떤 식으로 뒤처리를 해야 이런 식으로 깔끔하게 은폐가 가능한 것일까.
 뭐… 생각해보면 전혀 불가능한 일도 아닐 것이다.
 최강철을 포함해 이들은 탈 인간적인 능력을 지니고 있다.
 사건의 은폐 정도는 오히려 간단하지 않을까 싶다.
 그리고 버그 몬스터로 인해 발생한 인명 피해는 이번에 처음이 아니라는 말을 그 후에 들었다.
 “여러모로 무서운 세상이군…….”
 그래도 어제 저녁에 발생한 사건으로 인해 내가 얻은 소득은 꽤 크다고 할 수 있다.
 우선 특수 능력 항목에 대한 해금 조건을 알아냈다는 점과 더불어 버그 몬스터를 상대하는 방법까지 직접 체험해볼 수 있었다.
 물론 거기에 더해 스텟 보상까지 떨어졌다면 참으로 좋았을지 모르지만… 지나간 일은 잊어버리는 편이 좋다. 괜히 더 미련이 생길지도 모르니 말이다.
 여하튼 유혜민을 포함해 하운드의 공격에서 살아남은 생존자들을 인도한 직후, 난 그 뒤로 최강철에게 어떤 식으로 하운드를 퇴치했는지 등등을 포함해 간단한 진술을 남기고 곧장 집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그 다음 기억이 바로 지금과 이어진다.
 즉, 집에 오자마자 피곤해서 바로 자리에 뻗었다는 소리다.
 물론 간단한 샤워 정도는 했다. 말라붙은 핏자국들을 씻겨내는 데에 좀 애를 먹었지만, 그래도 그 상태로 바로 잘 수는 없었기에 어찌저찌 겨우 샤워를 마칠 수 있었다.
 그렇다 하더라도 피로 얼룩진 옷까진 어찌할 방도가 없었다.
 나중에 새로 옷을 사는 수밖에.
 그보다 일찌감치 일어나게 되었으니, 할 수 있는 일은 최대한 해두는 편이 좋지 않겠는가.
 “…지금 이 시간이라면… 딱이겠군.”
 세면세족을 마친 후에 간편하게 평상복을 차려입고, 사거리 편의점 앞으로 향한다.
 그러자 어제 아침과 같은 동일한 상황이 펼쳐진다.
 “안녕하세요, 할아버지.”
 “하이구마! 어제 그 청년이구마잉!”
 홍춘삼의 수레 퀘스트를 받기 위해 이른 아침부터 이곳에 오고 말았다.
 어제 저녁, 버그 몬스터와의 전투 이후에 한 가지 절실하게 깨달은 바가 있었다.
 여분의 스텟 포인트들을 미리 확보해둬야 한다.
 그러지 않고선 앞으로 하운드보다 등급이 높은 버그 몬스터를 상대할 때에는 꽤나 애를 먹을 거란 우려가 들 수밖에 없었다.
 보다 강해지기 위해선 내 능력을 강화시킬 수 있는 스텟 포인트들을 확보해두는 게 훗날을 위해서도 좋을 것이다.
 “도와드릴게요.”
 “어제도 그렇고 오늘도… 이거 미안해서 어쩌나.”
 “하하, 괜찮아요.”
 예상했던 바와 같이 홍춘삼의 머리 위에 물음표가 새겨진다.
 이윽고 이제는 익숙해진 퀘스트 창이 시야에 모습에 들어낸다.
 
 -퀘스트 ‘홍춘삼의 수레’ (난이도 : 일반)
 내용 : 홍춘삼의 수레를 언덕길 아래까지 끌고 가시오.
 보상 : 스텟 포인트 5점
 
 이정태의 퀘스트와는 다르게 홍춘삼의 퀘스트는 연계 퀘스트라기보단 일일 반복 퀘스트의 형태를 취하고 있다.
 물론 언덕 위까지 올라갔다가 아래까지 내려가는 추가 퀘스트가 있긴 하지만, 어제의 퀘스트가 오늘의 퀘스트로 이어지진 않는다.
 하루가 지나면 퀘스트가 초기화되는 홍춘삼의 퀘스트와는 다르게, 이정태의 퀘스트는 계속해서 하루하루가 지나도 퀘스트 자체가 연속으로 이어지는 연계 퀘스트다.
 두 퀘스트의 차이가 아마 거기서 오는 게 아닐까 싶다.
 가성비로 따져봤을 때에는 아직까지 홍춘삼의 수레 퀘스트가 더 나아보인다.
 이정태의 연습상대가 되어주려면 적어도 최소 30분 이상을 오락실에서 보내야 하니 말이다.
 대신 연계 퀘스트를 수행하면 수행할수록 보상 스텟 포인트가 늘어난다.
 그에 비해 홍춘삼의 퀘스트는 몸만 깔짝 고생하고 대략 10점 정도의 고정적인 보상 스텟 포인트를 챙겨갈 수 있다.
 결국 장기적으로 봤을 때에는 이정태의 연계 퀘스트가 훨씬 좋지만, 단기적으로 봤을 때에는 홍춘삼의 퀘스트도 제법 할 만하다.
 ‘일일 퀘스트로는 제격이구만.’
 부가적으로 수레를 움직이는 일을 반복적으로 하면, 자연스럽게 운동도 되고 하니 기회가 된다면 계속 해두는 편이 좋지 않을까 싶다.
 
 ***
 
 이정태의 퀘스트를 클리어하기 위해 오락실 ‘테마 파크’로 자리를 이동했다.
 그러나.
 “…아직 안 온 건가.”
 있어야 할 이정태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
 이상하군.
 퀘스트 내용대로라면, 분명 오늘 ‘내일의 태양은 뜬다!’ 두 번째 퀘스트를 수행해야 하는데 말이다.
 “내가 날짜를 잘못 기억하고 있는 건가?”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오락실을 다시 한 번 둘러보기 시작한다.
 그러나 바로 그때.
 “이정태라면 아마 오늘 안 나올 거예요.”
 눈에 익은 사람과… 아니, 플레이어와 마주치게 되었다.
 어제 처음 만난 여성이면서 나와 같은 플레이어인 이연희였다.
 “또 너냐. 그보다 왜 여기 있는 거지?”
 “어제 말씀드렸잖아요. 이 오락실 근처에 있는 대학교에 다닌다고.”
 “친구가 없어서 자주 오락실에 오고가고 한다고 그랬었나?”
 “쓸데없는 것만 잘 기억하시네요.”
 연희도 예전부터 이정태 퀘스트를 노리고 있었다는 말을 어렴풋이 기억해낸다.
 하지만 이정태보다도 격투 게임 실력이 낮기 때문에 그의 연습 상대로는 자신의 역량이 부족하다는 것을 알고 일찌감치 이정태 퀘스트를 포기했다고 들었다.
 그것보다 문득 한 가지 의구심이 들기 시작한다.
 “이정태가 어디 갔는지 알고 있나?”
 “얼추요.”
 연희가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정돈하며 나를 응시한다.
 “어제 당신이 하운드한테서 구해준 소녀 중에 ‘유혜민’이라는 NPC가 있었죠?”
 “…그걸 네가 어떻게 알고 있지?”
 “정보 같은 건 플레이어들끼리 공유할 수 있어요. NPC들의 감시망을 피해 만든 비밀 정보 공유 사이트가 있으니까요. 거기서 어제 당신이 하운드 3마리를 때려잡았다는 걸 봤어요. 아무리 하운드가 D급 몬스터라 하더라도, 고작해야 플레이어의 자격을 얻은 지 2~3일밖에 되지 않은 남자가 한 마리도 아니고 3마리나 제거했다니까 모두가 놀라더라고요.”
 “그랬었군.”
 하긴. 이미 최강철을 포함해 다수의 NPC들도 다 알고 있는 사실인데 플레이어들이 전혀 모를 거라곤 생각하지 않는다.
 정보 공유 사이트가 있다는 건 처음 듣는군.
 아니, 그 사이트의 유무는 나중에 묻도록 하고, 그보다 먼저 알아봐야 할 것부터 확인해보자.
 “유혜민과 이정태가 뭔가 관계가 있는 건가?”
 “네. 두 NPC는 서로…….”
 연희가 천천히 말을 이어가려던 찰나에.
 염두해두지 않은 제3자가 강제적으로 우리 두 사람의 대화에 참가한다.
 “안녕? 두 플레이어님. 여기서 다 만나다니, 우연이네.”
 “…….”
 순간 연희의 미간이 찡그려지기 시작한다.
 가벼운 말투로 우리에게 말을 걸어온 한 명의 여자가 연희의 기분을 망쳐버린 셈이다.
 “잘 지냈어?”
 연희의 기분은 전혀 고려하지 않는 듯이 밝게 인사를 건네 오는 녀석.
 바로 환생 이후 나와 처음 만났던 NPC, 바이올렛이었다.
 
 ***
 
 NPC를 싫어하는 이연희.
 그리고 그 싫어하는 당사자에 속하기도 하는 NPC, 바이올렛.
 두 여자의 만남은 그리 썩 좋지만은 않았다.
 “…바이올렛.”
 “오랜만이야, 연희. 그간 잘 지냈어?”
 “…왜 내가 너에게 그런 걸 대답해줘야 하는 거지?”
 “형식상의 질문이니까 정 싫다면 굳이 대답 안 해줘도 돼.”
 “…….”
 아는 사이인가?
 하긴. 연희가 건네준 NPC의 위치 정보에는 바이올렛도 포함되어 있었으니, 두 사람이 전혀 모른다는 관계라고 보기에는 다소 무리가 있을지도 모른다.
 애초에 난 처음에 만난 NPC가 바이올렛이었기 때문에 크게 염두해 두고 있지 않았지만 말이다.
 “네가 여긴 무슨 일이야.”
 따지듯 묻는 연희를 향해 바이올렛이 장난기 가득한 미소로 일관하며 답변을 들려준다.
 “창식이를 만나러 왔어.”
 “창식이?”
 “통성명도 안 한 거야? 네 옆에 있는 남자 이름인데.”
 “…알고 있었어. 다만, 익숙하지 않은 이름이라서 약간 헷갈렸을 뿐이야.”
 “그렇다면 다행이고.”
 말 한마디 한마디에 가시가 묻어나온다.
 이래서 사람들이 여자들 말싸움에 끼지 말라고 하는구나.
 “나한테 볼일이라니. 뭐지?”
 두 사람의 대화를 잠시 끊어내고자 제3자 격인 내가 도중에 불쑥 끼어들어 본다.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이 바이올렛이 별거 아니라는 식으로 입을 연다.
 “병문안 가보는 게 좋지 않을까 해서.”
 “병문안? 누가 다쳤나?”
 “어제 저녁에 네가 구해준 NPC 있잖아. 유혜민이라고… 벌써 잊은 거야?”
 “아니, 잊을 리가.”
 자신은 죽어도 좋으니, 제발 자신의 친구들만큼은 살려달라고 부탁했었던, 제법 기억에 남는 NPC였다.
 NPC치고는 인간에게 상당히 이타적이라고 할까… 그런 의미로 기억에 남는다.
 물론 유혜민뿐만이 아니라 다른 NPC들 역시 그런 성향을 가지고 있는 NPC가 있을지도 모른다.
 허나 아직까지 많은 NPC들과 직접 만나본 적이 없던 나에게 있어선 분명 유혜민이란 존재는 기존에 내가 알고 있던 정형화된 NPC란 개념을 많이 탈피한 모습을 보여줬다.
 프로그램으로 짜여진, 일정한 패턴 방식만을 보여주는 존재, NPC.
 그게 내가 알고 있던 NPC에 관한 고정관념이었다.
 허나 바이올렛은 얼마 전, 내게 이런 말을 해준 적이 있다.
 NPC라는 건 그저 평범한 사람이라는 기준에 한 가지를 더해, 퀘스트 시스템이라는 권한이 부여되었을 뿐인 존재란 것을.
 즉, 인간과 별반 다를 바가 없음을 뜻한다.
 “성자 병원이라고 해서… 인근에 있는 병원에 입원해 있다고 하더라. 그래서 나도 마침 가볼까 하는데, 도중에 네 생각이 들려서 여기에 와봤어.”
 “여기에 있다는 걸 어떻게 알았지?”
 “맵을 보면 알 수 있잖아.”
 “…그렇군.”
 아직까지 이 맵 시스템에 적응하지 못한 터라 차마 그게 있었다는 걸 잠시나마 잊고 있었다.
 플레이어 시스템이라는 건, 스텟 포인트 분배뿐만이 아니라 외적으로 은근히 편리한 기능을 많이 가지고 있군.
 “어때. 같이 갈래?”
 바이올렛이 다시 한 번 나에게 제안한다.
 나로서는 어차피 굳이 거절할 이유도 없기에 승낙을 하게 된다.
 게다가 성자 병원이라고 한다면, 홍춘삼의 수레 퀘스트를 매번 수행하는 그곳 바로 근처에 있다.
 어차피 아르바이트를 하는 곳과 그리 멀어 보이지 않으니, 잠시 들렸다가 바로 시간에 맞춰서 카페에 가면 될 일이다.
 “연희, 너는 어떻게 할 거지?”
 누가 봐도 바이올렛과 같이 가기 싫다는 얼굴을 하고 있지만, 그래도 혹시나 해서 의사를 묻는다.
 그러자 역시 내가 예상했던 답변이 나온다.
 “전 다음에 갈게요.”
 “그렇군. 알았다. 조만간 따로 보도록 하지.”
 “나중에 연락 줄게요.”
 “그래.”
 굳이 스마트폰이 없어도 서로 친구 등록이 되어 있기 때문에 네비게이터 시스템을 통해 연락이 가능하다.
 훗날을 기약하며 자리를 뜨는 연희.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바이올렛이 어쩔 수 없다는 듯이 옅은 한숨을 내쉰다.
 “사람 낯을 많이 가리는 건 여전하네.”
 과연 저게 낯을 가린다는 문제로 치부할 만한 것일지에 대해서는 한 번 더 고민해볼 필요가 있지 않을까 싶다.
 
 ***
 
 성자 병원에 도달한 나와 바이올렛.
 로비에서 근무 중이던 간호사에게 유혜민이 입원해 있다는 병실을 물은 뒤 곧장 망설임 없이 발걸음을 옮긴다.
 똑똑똑.
 가벼운 노크 소리와 함께 바이올렛이 선뜻 목소리를 높이 우리들의 방문 사실을 알린다.
 “바이올렛인데. 들어가도 돼?”
 “네, 들어오세요.”
 문고리를 잡으며 천천히 안으로 들어서기 시작한다.
 그러는 와중에, 문득 한 가지 궁금증이 들기 시작한다.
 ‘1인실이라니… 한창 민감할 사춘기 여고생이라서 그런지 아버지가 특별히 신경을 써준 건가?’
 오면서 바이올렛에게 대략이나마 유혜민의 간단한 설명을 들은 기억을 떠올린다.
 비록 혜민이 NPC라 하더라도, 그녀의 부모님들까지 NPC는 아니란 말을 들은 적이 있다.
 NPC가 결혼을 해 NPC를 낳는 시스템이 아닌, 플레이어와 마찬가지로 그 자격이 후천적으로 부여된다는 그런 형태의 시스템이라 들었다.
 물론 플레이어들은 죽을 뻔한 위기에서 플레이어가 될 수 있는 자격을 거머쥐게 되는 것이고, NPC는 그런 생사의 갈림길에 마주선 위기 없이 NPC가 될 만한 자격을 지니고 있는 사람을 중앙 컴퓨터가 선출해 NPC의 자격을 부여한다고 한다.
 여기서 바이올렛이 말한 ‘중앙 컴퓨터’란 존재가 무엇인지에 대해선 그 이상 설명을 들을 수가 없었다.
 세계를 관장하는 중심… 이라는 소리까진 들었으나, 정확하게 그것이 어떤 것인지 까진 파악하기 힘들다.
 신일 수도, 아니면 이 세계를 관장하는 거대 시스템일지도 모른다.
 어찌 되었든 이 세계의 비밀을 차츰 밝혀 가면 그만이다.
 처음부터 바이올렛이 나에게 많은 지식을 공유할 거란 기대 같은 건 하지 않았으니 말이다.
 “몸은 좀 어때?”
 “많이 괜찮아졌어요… 아, 뒤쪽에 계신 분은…….”
 나를 향해 놀란 눈으로 시선을 고정시키는 혜민을 향해 가볍게 손을 흔들어 보인다.
 “그래도 많이 다치지 않아 보여서 다행이군.”
 “어제는 정말… 고마웠어요, 플레이어님. 덕분에 저뿐만 아니라 제 친구들도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어요. 다시 한 번 정말 감사합니다…….”
 “아니, 괜찮아. 그저 할 일을 했을 뿐이니까.”
 여고생치고는 상당히 생각이 깊고 예의바른 아이로 보인다.
 뭐라고 할까.
 내 손으로 누군가에게 커다란 도움을 주는 것도 그리 썩 나쁜 것만은 아니구나 싶었다.
 멀뚱히 서 있는 우리 두 사람을 향해 혜민이 손짓으로 근처에 놓인 의자를 가리킨다.
 “여기 앉으세요. 안 그래도 플레이어님에게 전해드릴 말이 있었어요.”
 “나에게?”
 “네. 언니한테 들었는데… 현재 일하시는 카페 브랜드가 ‘쿠앤커피’라는 곳이죠?”
 “잘 알고 있군.”
 굳이 왜 이런 아이한테까지 내가 다니고 있는 아르바이트 직장을 알려준 것인지 모르겠다.
 알려줘 봤자 뭐가 도움이 되려나. 별다른 의미가 없지 않나.
 이런 내 생각을 읽은 모양인지, 바이올렛이 피식 웃으며 내 옆구리를 쿡 찌른다.
 “실은 이 아이 아버님이 그 ‘쿠앤커피’ 대표님이시거든.”
 “…뭐?”
 “그래서 혜민이가 자신의 능력이 닿는 한, 생명의 은인이기도 한 너에게 뭔가 도움을 줄 수 있는 거라면 최대한 주고 싶다고 하더라. 그게 금전적인 것이 될 수도 있고, 아니면 번듯한 직장이 될 수도 있고. 혹시 또 몰라? 괜찮은 분점 하나 받을지도.”
 “…….”
 대한민국 땅덩어리란 참으로… 정말 좁구나.
 머릿속에는 온통 그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
 
 쿠앤커피.
 대한민국에서도 요즘 한창 떠오르고 있는 신흥 카페 브랜드라 할 수 있다.
 여타 다른 유명 브랜드에 비해서 가격도 훨씬 저렴한데다가, 이벤트라든지 마케팅적인 면에 있어서도 상당히 공격적인 자세를 취하고 있어 커피 마니아들 사이에서도 최근 급속도로 선호되고 있는 카페다.
 나 또한 그 카페의 대표 이름 정도는 잘 알고 있다.
 쿠앤커피 대표, 유진태.
 아르바이트생이라서 그런지 모르겠지만, 그래도 자신이 일하는 직장의 대표명 정도는 외워두는 편이 혹시 나중을 위해서 좋을 거란 생각이 들어서 미리 알아뒀다.
 그런데 설마 그 유진태란 사람이 어제 내가 구해준 유혜민의 아버님일 줄이야.
 ‘어쩐지… 병실도 1인실로 사용한다 싶었더니, 기본적으로 어느 정도 집안에 재력이 있는 아이였군.’
 물론 1인실을 사용한다는 것 하나가지고 재력의 기준을 판단할 순 없다.
 그저 부수적인 요인에 불과할 뿐.
 어쨌든 실제로 잘 사는 집안의 부잣집 따님이라는 말을 접하게 되었으니, 대충 그런 쪽과 한 번 연결지어 봤다.
 “어제 플레이어님께 많은 도움을 받았는데도 퀘스트조차 줄 수 없어서… 죄송해요. 버그 몬스터 퇴치는 제 관할이 아니라서 차마 보상으로 스텟 포인트를 드릴 수가 없었어요.”
 혜민의 고운 미간이 살짝 찡그려진다.
 어제 저녁, 어두운 환경이었던 데다가 피로 얼룩져 있어서 잘 몰랐지만, 꽤나 어여쁜 외모를 지니고 있는 여고생이었다.
 19살, 고등학교 3학년이라는 나이를 고려한다면… 몇 년만 지나더라도 빼어난 미인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아니, 괜찮다. 애초에 나도 처음부터 보상 스텟이 없다는 걸 알면서도 도와준 거니까.”
 “…정말 고맙습니다, 플레이어님…….”
 버그 몬스터 퇴치 관련 퀘스트의 권한은 최강철을 비롯해 BHU라는 특수 부대 멤버들이 가지고 있다.
 일개 여고생에 불과한 유혜민이 그런 권한을 가지고 있을 리가 없다.
 하지만 어제 베푼 은혜가 반드시 스텟 포인트라는 형태의 보상으로만 떨어지라는 법 또한 없지 않은가.
 바이올렛의 말처럼, 그게 금전적으로… 혹은 사회적인 지위로 떨어져도 나에게는 충분히 좋은 보상이라 할 수 있다.
 게다가 지금은 일개 아르바이트생의 신분이다.
 사회적 지위 상승과 금전적인 지원은 나에게 충분히 도움이 될 만한 요소들이다.
 “조만간… 아버님께서 플레이어님이 일하고 계신 분점에 잠시 들리실 거예요. 어떻게든 절 구해준 점에 대한 보상을 해드리고 싶다고 하셨으니, 부담스럽게 생각하지 마시고 받아주셨으면 해요.”
 “…그렇군.”
 거절할 이유는 없다.
 그것보다도 비록 퀘스트 형태의 보상은 아니지만, 이런 식으로 사적인 보상을 주고받을 수도 있다는 점도 알게 되었다.
 그냥 단순히 전투 경험만 삼아보자 했던 전장이 설마 이런 식으로 도움이 될 줄이야.
 “그런데 너희 아버님도 혹시 버그 몬스터에게 습격 받았다는 걸 알고 있나?”
 만약을 대비해 어떤 식으로 혜민이 다치게 되었는지에 대한 이야기를 미리 듣고자 한다.
 혹여나 말을 맞출 게 있다면 나도 장단에 어울려줘야 하니 말이다.
 “그건 내가 말해줄게.”
 바이올렛이 때마침 입이 근질거렸다는 식으로 내 질문에 선뜻 답변을 들려주기 시작한다.
 “정신 나간 사이코패스 남자 3명에게 납치당해 살해를 당했다는 설정으로 잡고 있어.”
 “그 남자 3명은… 하운드인가?”
 “그런 셈이지.”
 “허상의 범인을 만들어뒀군.”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집단으로 살해당한 걸 설명할 수 없으니까.”
 “…그렇겠지.”
 버그 몬스터에 관한 진실을 뉴스에 특보로 보낸다 하더라도 과연 믿을 만한 사람이 있을까?
 천만에.
 오히려 바이올렛이 말한 것처럼 집단 사이코패스의 습격을 받아 무차별적으로 살해, 폭행을 당했다고 하는 편이 더 어울릴지도 모른다.
 “그리고 여차하면 허구의 인물도 재구성할 수 있으니까 그 정도는 어렵지 않아.”
 “설마 인간도 창조할 수 있다는 거냐?”
 “인간이 아니라 그저 더미에 불과한 허구체는 만들 수 있어. 만약을 대비해서 그렇단 뜻이지.”
 한 명이 희생된 것도 아니고, 다수가 희생된 사건이다.
 내가 최강철에게 별도로 들은 바에 의하면, 족히 6명에서 8명 사이의 죄 없는 민간인들이 하운드에게 무참히 사지가 찢겨나갔다고 했다.
 실로 어마어마한 사건이라 할 수 있다.
 “뒷수습 하는 것도 여간 일이 아니겠군.”
 “그러기 위해 만든 BHU 부대니까. 너무 신경 쓰지 마.”
 얼추 어떤 식으로 서로 입을 맞췄는지 알 수 있을 거 같다.
 “그럼 슬슬 시간도 되었으니, 나 먼저 가보마. 넌 어떻게 할 거냐?”
 바이올렛에게 따로 행방을 묻자, 여기에 남아 있겠다는 의사를 담은 말을 들려준다.
 “난 혜민이랑 좀 더 이야기하다 갈게.”
 “그래. 그럼 나중에 또 보자.”
 “조심해서 가세요, 플레이어님.”
 “너도 몸조심하고.”
 가벼이 작별인사를 건네고 발걸음을 옮긴다.
 출근 시간까진 대략 30분이라는 여분의 시간이 남아 있다.
 ‘지각은 안 하겠군.’
 일하기 시작한지 이틀 만에 지각을 하는 건 그 깐깐한 점장의 눈 밖에 나는 일이 아닐까 싶다.
 아니지. 이제는 그 쿠앤커피의 대표와 알고 지내기 시작하는데, 굳이 그런 사소한 일 같은 건 신경 쓸 필요가 없나.
 이런저런 생각을 품으며 병실 문을 열고 복도로 나서려던 찰나에,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온다.
 “혹시… 플레이어님 아니십니까?”
 “당신은…….”
 양손 가득히 뭔가를 들고 오던 남자, 이정태가 환하게 웃으며 나에게 다가온다.
 “접니다, 이정태. 설마 여기서 만나게 될 줄이야… 아니지, 혜민이를 구해주셨다고 들었습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고개를 숙이며 나에게 감사 인사를 표하는 이정태.
 오락실에서 만나던 그를 여기서 만나니 뭔가 기분이 새롭다.
 ‘그러고 보니 연희에게서 두 사람의 관계에 대해 마저 듣지 못했었군.’
 뭔가를 잊고 있었다 싶었더니, 바로 이거였다.
 아무렴 어떠랴.
 기왕 당사자를 만나게 된 김에, 직접 본인에게 들으면 될 일이다.
 “원래 오늘 두 번째 퀘스트를 수행했어야 했는데… 죄송합니다. 피치 못할 사정으로 플레이어님의 퀘스트 수행에 누를 끼쳤습니다.”
 “아닙니다. 그보다… 혜민이와는 뭔가 특별한 관계인가 보군요. 두 사람이 서로 별다른 접점이 없을 거라 생각했는데 말이죠.”
 “하하, 이런저런 사정이 있어서요. 그럼 잠깐 이야기하다 가시겠습니까?”
 “이런… 죄송합니다. 곧 아르바이트 시간이라서요.”
 “아, 그랬죠.”
 어제도 자신이 무리해서 대전액션 게임 연습 상대가 되어달라고 했었지만, 내가 아르바이트를 언급하며 그 자리를 다음 날로 미루게 되었음을 이제야 깨달은 모양인가 보다.
 “실은 말입니다.”
 정태가 옅은 한숨과 동시에 복잡한 표정을 지어 보이며 그와 혜민의 연관성에 대해 언급한다.
 “혜민이가 NPC의 길을 택하게 된 건… 다 저 때문이니까요.”
 
 ***
 
 띠링!
 -퀘스트가 완료되었습니다. 보상 스텟으로 10포인트가 지급됩니다.
 “겨우 10밖에 안 돼?!”
 20대의 젊은 남성이 미간을 잔뜩 찡그리며 제법 나이든 한 남성을 바라본다.
 “오늘 하루 종일 잃어버린 개새끼 한 마리 찾으려고 일대를 이 잡듯이 뒤졌는데 고작해야 스텟 포인트가 10이라니. 너무 짠 거 아니야!!”
 “…….”
 자신보다 나이가 한참 어려보임에도 불구하고 마구 반말을 해대는 젊은 남성을 향해 고령의 남성, 오금서가 억지웃음을 지으며 말한다.
 “퀘스트에도 나와있다시피, 처음부터 보상 내역은 10 포인트였습니다. 이미 플레이어님께서도 잘 알고 계셨을 텐데요?”
 “연계로 이어지는 퀘스트 같은 게 있을 거 아니야. 고작해야 이런 개새끼 한 마리 찾으려고 오늘 하루를 투자한 게 아니라고!”
 금서의 품안에 안겨져 있는 작은 개를 향해 있는 힘껏 고함을 질러댄다.
 지나가던 사람들도 이게 무슨 소란이냐는 듯이 두 사람을 관찰하기 시작한다.
 수의시를 역임하고 있는 금서가 자신의 동물병원 앞에서 행패를 부리기 직전인 젊은 플레이어를 달래주고자 노력해보지만…….
 “이거 완전 사기 아니야? 포인트가 짜다고 하면 이딴 퀘스트는 안 받았을 거라고!!”
 “…….”
 플레이어들이 보상 스텟 포인트에 혈안이 되어 있다는 건 이미 금서도 잘 알고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퀘스트조차 제대로 읽어보지 않은 자신의 책임은 머릿속에서 금세 잊어버리고 억지를 부리고 있으니…….
 ‘강철이 녀석에게 신고할 수도 없는 노릇이고.’
 그래도 여기서 괜한 충돌을 일으키고 싶진 않다.
 벌써부터 지나가던 구경꾼들이 ‘플레이어? 그게 뭐지?’라는 시선으로 두 사람을 쳐다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자칫 잘못하다가 이 두 사람이 플레이어와 NPC라는 걸 다른 사람들에게 들킬 우려가 있다.
 “일단 안으로 들어가서 이야기하죠. 지켜보는 눈들이 있으니…….”
 “가뜩이나 시간 날려서 짜증나 죽겠는데 노인네랑 차 한 잔 할 시간이 어디 있겠어?! 이럴 줄 알았으면 그냥 저 개새끼 콱 죽여버리고 퀘스트 포기했어야 했는데… 젠장!”
 지금이라도 당장 강아지를 죽이고 싶다는 듯이 살기를 드러내지만, 그렇게 되면 기껏 얻은 스텟 포인트마저 날아가게 되는 꼴이다.
 “다음부터는 조심하라고, 노인네. 내가 조금만 힘을 발휘하면 이 가게 따위는 다 쓸어버릴 수 있으니까.”
 “…….”
 거친 언행을 늘어놓으며 결국 동물병원을 떠나기 시작하는 플레이어.
 한동안 그의 모습을 지켜보던 금서였으나, 그의 품안에서 조금씩 뒤척이기 시작하는 강아지의 몸짓 덕분에 시선을 다시 거둬들인다.
 “그래, 그래. 시끄럽게 해서 미안하구나. 배고프지? 안으로 들어가서 맛있는 거 먹자꾸나.”
 “왈!”
 그간 얼마나 많이 굶주렸을까.
 그리고 그간 얼마나 많이 힘들었을까.
 주인에게 버림받고 유기견이 된 강아지였으나, 주인을 찾아가고 싶다는 마음 때문에 동물병원에서 멋대로 가출을 해버렸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퀘스트를 내걸어 플레이어들에게 유기견을 찾아달라 청할 수밖에 없었다.
 결과적으론 결국 다시 유기견을 찾게 되어 좋긴 하지만, 플레이어에게 욕을 한 사발로 먹게 되었다.
 “뭐… 이 정도야 늘 있는 일이니까.”
 방금 전까지만 하더라도 자신에게 욕설을 퍼부은 플레이어의 이름은 우석호라 하며, 이 근방에서도 성격이 더러운 것으로 잘 알려진 남자이기도 하다.
 “하필이면 저 남자가 퀘스트를 수락할 줄이야.”
 강아지를 다시 우리 안에 넣어두며 혼잣말을 내뱉는 금서를 향해 간호사로 일하고 있던 젊은 여성이 옅은 웃음을 흘린다.
 “재수 옴 붙었다고 생각하세요. 저런 플레이어들이 어디 한둘인가요? 저 같았으면 그냥 확 그 잘난 콧대를 부러뜨려줬을 텐데요.”
 “허허, 그래도 결과적으론 우리에게 이 아이를 다시 되돌려 줬잖냐. 그것만으로도 감지덕지 해야지.”
 “어휴… 원장님도 참. 요즘 플레이어들은 저희 NPC를 무슨 스텟 포인트 내뱉는 기계 취급한다고요. 얼마나 건방진 줄 아세요? 동등한 인간인데도 인간이 아닌 것처럼 하등 대우한다니까요.”
 “그것도 조만간 다 괜찮아질게야.”
 “…전 못 믿겠어요.”
 간호사 또한 금서와 마찬가지로 NPC의 소임을 다하고 있다.
 그러나 그녀는 플레이어들에 관해서 그다지 좋은 기억을 간직하지 못하다.
 “아무튼 저희도 뭔가 조치를 취해야 해요. 이러다가 저 갑(甲)질이 언제 끝날지 모르니까요.”
 “하하하…….”
 가급적이면 서로가 한 발자국 양보하며 배려하는 마음으로 공존한다면 참으로 좋겠지만.
 본래 인간이라 함은 애초에 탐욕과 욕심, 그리고 이기주의적인 존재이기도 하다.
 그런 존재들이 모인 곳에는 늘 우위에 서고 싶은 욕망이 마음속에 도사리고 있다.
 ‘힘들구만, 힘들어.’
 금서는 그저 이 상황이 안타깝게 느껴질 뿐이었다.
 
 ***
 
 “씨발… 진짜 기분 뭐 같구만!”
 파악!
 근처에 굴러다니던 돌맹이 하나를 발로 걷어차며 집으로 향하는 우석호의 입에서 여전히 욕설이 떨어질 줄 몰랐다.
 “그 노인네… 언젠간 크게 혼쭐을 내줘야겠어. 감히 NPC 주제에 플레이어에게 말대답을 해?”
 불평불만을 내뱉으며 길을 걸어가던 석호.
 그 순간.
 -퀘스트가 감지되었습니다.
 “…음?”
 머릿속에서 울리는 네비게이터의 음성에 의아함을 자아낸다.
 “이 주변에… NPC가 있었나?”
 자신이 보유하고 있는 맵의 정보에 의하면, 이 근방에는 NPC가 살지 않는 구역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퀘스트가 검색된 것이다.
 퀘스트는 NPC가 아닌 이상 받을 수 없다.
 “내가 모르는 NPC가 있는 모양인가 보군.”
 그래도 나름 이 일대에서 2년 이상 거주하며 웬만한 NPC들의 정보는 전부 다 수집했다 생각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모르는 NPC가 있을 줄은 몰랐다.
 코너를 돌자, 민가들 사이로 작은 놀이터가 모습을 드러낸다.
 그리고 그곳에 한 명의 나이 어린 소년이 흙장난을 하며 놀고 있었다.
 여타 다른 꼬맹이와 크게 다를 바가 없어 보이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일반인의 시각으로 봤을 때의 이야기다.
 “머리 위의 물음표는… 틀림없어.”
 플레이어들에게는 보이지 않는 무언가가 보인다.
 퀘스트 표시를 확인하고 천천히 꼬마에게 다가가는 우석호.
 ‘그래, 기분도 안 좋은데, NPC 녀석들이나 좀 괴롭혀야겠어. 크큭.’
 상대는 어린 아이에 불과하다.
 자신에게 대항할 능력 같은 건 없으리라.
 게다가 석호는 플레이어다.
 스텟 포인트로 육체 파트에 많은 투자를 해왔으니, 주먹질에서 질 리는 없다.
 더욱이 꼬마아이를 상대로 말이다.
 “꼬마야. 혹시 뭐 곤란한 거라도 있니?”
 아직까지 퀘스트 내용이 무엇인지는 열람할 수 없다.
 어떤 부류의 퀘스트인지 확인하고, 만약 보상 스텟 포인트가 10점 이하다 싶으면 곧장 이 NPC에게 실력 행사를 하기 위한 준비를 마친다.
 꼬맹이라고 봐주지 않는다.
 ‘어차피 이 녀석들은 NPC들이니까.’
 그렇게 생각하며 다시금 꼬마에게 말을 건다.
 “불편하게 있으면 이 형한테…….”
 “…이렇게 손쉽게 걸려들 줄은 몰랐는데.”
 “……?!”
 “당신이 우석호라는 플레이어인가?”
 분명 꼬마의 모습을 하고 있지만, 목소리는 꼬마의 것이 아니었다.
 그렇다고 나이조차… 심지어 성별의 여부도 판별할 수 없는 기이한 목소리가 새어나온다.
 그러나 그것보다 더욱 놀라운 현상이 벌어지고 있었다.
 “뭐, 뭐지?!”
 갑자기 석호가 보유하고 있던 스텟 포인트가 전부 차감되기 시작한 것이다!
 “많이도 모아뒀군. 역시 2년 동안 플레이어 생활을 해온 그 짬은 어디 안 가는구만.”
 “이, 이게 무슨……!”
 “그 스텟 포인트 말이야.”
 꼬마의 입가가 기묘한 미소를 띠기 시작한다.
 “내가 좀 가져가야겠어.”
 “미, 미친… 도대체 넌 누, 누구… 으, 으아아아악!!!”
 말을 하기도 전에, 석호의 전신이 푸른 불꽃으로 뒤덮인다.
 그러나 꼬마는 담담하게 입을 열어 말을 이어간다.
 “사람들은 날 이렇게 지칭하더군.”
 점점 타들어가는 그의 형체를 향해 꼬마가 여전히 기분 나쁜 미소를 지어 보이며 때늦은 답변을 들려준다.
 “…해커(Hacker)… 라고 말이야.”
 
 
 # EP 7. 금전운이 트이는구나
 
 “…….”
 아르바이트 장소이기도 한 쿠앤커피로 향하는 도중, 이정태가 나에게 했던 말을 곰곰이 떠올려본다.
 유혜민.
 그 아이가 NPC로 새로 배속되었을 당시에는 어느 일련의 사건이 하나 있었다.
 시간은 대략 2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때 당시, 이정태는 유혜민의 과외 선생을 맡고 있었다고 한다.
 격투게임만 주구장창 해대기에 잘 몰랐지만, 이정태란 남자는 의외로 머리도 좋은 모양이었나 보다.
 여하튼 그건 둘째 치고.
 그가 가르치던 고등학교 1학년 여학생, 유혜민은 어느 날, 정체불명의 괴한과 맞닥뜨리게 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특이한 점은, 그 괴한과 마주쳤음에도 불구하고 혜민은 아무런 상해를 받지 않았다는 점이다.
 여고생을 노리는 성범죄자라든지 강도 같은 그런 사람은 아니었다고 한다.
 그녀의 기억에 의하면…….
 나이를 가늠할 수 없는… 아니, 심지어 성별조차 불가능한 괴이한 목소리를 지닌 꼬마 아이라고 했다.
 그 꼬마와 마주한 순간.
 유혜민의 인생은 커다란 변화를 맞이하게 되었다.
 
 ***
 
 “저주… 였습니다.”
 “저주라고요?”
 “예.”
 병원 로비에 마련되어 있는 벤치에 잠시 자리를 잡은 나와 이정태.
 잠시 짐들을 내려놓은 정태가 깊은 한숨을 내쉰다.
 “혜민이는… 그 꼬마아이를 통해서 저주에 걸렸습니다. 그것도 아주 지독한 저주를 말이죠.”
 “마법이라도 부렸다는 겁니까?”
 “그건 알 수가 없습니다. 혹시 플레이어님은… 해커(Hacker)라는 단어를 들어보셨습니까?”
 물론 모르는 단어가 아니다.
 해커.
 일상생활에서도 흔히 들어볼 수 있는 용어 아닌가.
 “예, 알고 있습니다.”
 “세상에는 생명체를 몬스터와 플레이어, NPC 등등으로 구분하고 있습니다. 이들에게는 제각각 ‘법칙’이라는 틀에 놓여있죠. 예시로 저와 같은 NPC들은 플레이어님들에게 ‘퀘스트’를 부여할 수 있는 고유 권한이 있습니다. 플레이어님들은 퀘스트를 수행할 수 있는 자격이 있고, 클리어를 하게 될 경우 그에 합당한 스텟 포인트를 보상받을 수 있습니다. 이건 가장 일반적인 규칙이지요.”
 기본적인 내용이다.
 그 점은 나 또한 충분히 숙지하고 있기에 고개를 숙이며 정태의 말에 집중을 하고 있다는 식으로 표현을 해준다.
 “허나 이 법칙들을 무시할 수 있는 요소가 두 가지 있습니다.”
 “두 가지나요?”
 “예. 우선… 이 세계를 창조한 창조주가 있습니다. 저도 아직은 잘 모르지만, 세계를 직접 만든 그런 존재라고 들었습니다. 이분에 대해서 아는 사람은 NPC들 사이에서도 극히 드뭅니다.”
 “즉… 신이란 뜻이군요.”
 “맞습니다.”
 신의 존재는 얼핏 나도 추측할 수 있었다.
 결과가 있으면, 그 결과가 도출될 법한 원인이 있을 터.
 이 세계라는 결과물이 있다는 건, 세계를 창조한 누군가가 있다는 것을 뜻한다.
 그것이 바로 ‘신(God)’이라는 존재가 아닐까.
 “첫 번째는 납득이 되는군요. 하지만 신 이외의 두 번째 요소가 있다는 건…….”
 나도 모르게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생각에 잠긴다.
 신만이 가지고 있는 고유의 권한.
 신이 아닌 이상, 나와 같은 플레이어라든지 이정태 같은 NPC들은 규율과 규칙에 얽매일 수밖에 없다.
 그러나 이 모든 법칙을 무시할 수 있는 존재라 함은 바로…….
 “그자가 해커란 뜻입니까?”
 “예, 맞습니다.”
 정태가 고개를 끄덕여주며 내 말이 맞다는 식으로 답변을 들려준다.
 “해커는 모든 법칙을 무시할 수 있는 존재입니다. 그들은 특수 능력으로 ‘해킹(Hacking)’이라는 스킬을 가지고 있지요.”
 “특수 능력이라…….”
 내가 아직 해금하지 못한 스텟 포인트 메뉴이다.
 역시 내 예상대로 그 특수 능력 항목에 남들이 지니지 못한 이능력을 보유할 수 있는 스텟 항목이 포진되어 있나 보다.
 “해킹 능력을 지니고 있는 자들을 저희는 ‘해커’라고 부릅니다. 해커들은 모든 만물의 법칙을 무시할 수 있습니다. 자유자재로 모습을 바꿀 수도 있고… 규율과 규칙에 얽매이지 않는 무시무시한 존재들입니다. 최근 벌어진 사건을 예로 들자면… 우석호라는 플레이어가 해커에게 스텟 포인트들을 싸그리 빼앗겼다고 하더군요.”
 “스텟 포인트를… 강탈할 수도 있다는 뜻입니까?”
 “예. 물론 스텟 포인트 강탈뿐만이 아니라 해커의 해킹 능력에 따라 그 어떠한 범죄도 저지를 수 있습니다.”
 “…….”
 심각한 문제다.
 해킹을 통해서 타 플레이어의 스텟 포인트를 앗아갈 수 있다니.
 만약 지금의 내가 해커와 조우하게 된다면…….
 애써 모은 스텟 포인트들을 전부 얄짤없이 헌납하는 꼴이 될 것이다.
 비록 얼마 모으지도 않았지만 말이다.
 “다시 혜민의 이야기로 돌아오자면…….”
 정태가 호흡을 고르며 그때 당시의 기억을 회상하듯 괴로운 표정으로 말을 이어간다.
 “해커는 혜민의 스텟 포인트 항목을 하나 앗아갔습니다. 그게 바로 ‘건강운’이지요.”
 또 운적인 요소로군.
 내가 이 세계로 환생하게 된 이유는 바로 운이라는 파트에 버그가 생긴 탓에 그 보상으로 플레이어가 되었다.
 물론 다른 플레이어들과 다르게 죽음과 환생이란 특별한 수단을 거치게 되었지만 말이다.
 “혹시 알고 있습니까? 플레이어님. 스텟 포인트는 차감할 수 있지만, 그 어떠한 스텟 포인트 항목이라 하더라도 제로(Zero)로 만들 순 없습니다.”
 “즉, 무조건 최소 스텟 포인트 1 이상은 있어야 한다는 뜻이군요.”
 “네. 스텟 포인트가 0인 경우는 결코 없습니다. 0이 된다는 뜻은… 곧 인간이 아니게 된다는 의미지요.”
 “그건 무슨 뜻이죠?”
 “이 세계는 신이 만든 법칙에 위배된 존재를 알아서 스스로 제거하는 ‘백신(Vaccine)’ 기능을 지니고 있습니다. 스텟 포인트는 그 어떠한 항목이라도 0이 될 수 없다… 이 법칙을 위반한 존재가 나왔다고 생각을 해보세요. 그렇게 되면 그 존재는 어떻게 되겠습니까?”
 “이 세상에서 지워지겠군요.”
 “예, 그렇습니다.”
 백신(Vaccine).
 세계의 법칙에 어긋나는 존재를 알아서 스스로 삭제시켜 버린다.
 그렇다면…….
 “해커도 백신에게 삭제당할 수 있다는 거 아닙니까?”
 “아니요, 그건 힘듭니다.”
 정태가 고개를 좌우로 절레절레 흔들며 이야기를 꺼낸다.
 “해커는 해킹이라는 특수 능력을 통해 오히려 그 백신 프로그램을 해킹해버립니다. 즉, 자신은 이 세계에 부적절한 존재가 아니라는 식으로 인식하게끔 만들죠. 해킹 덕분에 백신은 해커의 존재를 인식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백신 프로그램이 해커에게 들지 않는 거죠.”
 “…그렇군요.”
 하기야. 세계의 법칙을 무시하는 가공할 만한 특수 능력을 지닌 이들이다.
 그런데 백신이 통할 리가 있겠는가.
 “혜민이 해커에게 받은 저주… 아니, 해킹의 내용은 ‘점차적으로 건강운을 0으로 차감한다’라는 것이었습니다.”
 “끔찍한 저주군요.”
 “예, 그것도 건강운 스텟이 갑자기 0으로 내려가는 것도 아니고, 하루하루가 지날수록 수치가 1식 차감하게끔 조절을 해뒀습니다. 혜민한테는 건강운이란 스텟 수치가 졸지에 자신이 살 수 있는 날을 가리키는 척도가 되어버린 셈이죠.”
 “…….”
 “그 사실을 뒤늦게 깨닫고, 결국 전 한 가지 결단을 내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NPC의 자격을 부여하는 겁니까?”
 정태의 말이 이어지기도 전에 먼저 선수를 친다.
 그러자 정태가 무겁게 고개를 끄덕이며 내 말이 틀리지 않았음을 알려준다.
 “어쩔 수 없었습니다… 중앙 컴퓨터와 NPC들의 지원을 받기 위해선, 혜민을 NPC로 바꾸는 걸 추천하는 길이 유일했습니다.”
 “이상하군요. 부당하게 해킹을 당했고, 예정되지 않은 죽음의 위기에 놓이게 된다면… 오히려 NPC보다 플레이어의 자격을 갖추는 게 아닙니까?”
 “보통은 그렇습니다만… 혜민에게 저주를 건 해커가 또 다른 뒷공작을 펼친 거 같더군요. 단지 심증에 불과하지만, 결과적으로 중앙 컴퓨터는 혜민에게 플레이어의 자격이 없다고 판단을 내렸습니다. 아마도 해커가 저지른 짓이겠지요.”
 “…….”
 “그리고 중앙 컴퓨터의 지원을 보다 더 많이 받을 수 있는 건 플레이어보다 NPC쪽입니다. 중앙 컴퓨터의 수족이 되어 활동하는 존재가 NPC이기 때문에 오히려 플레이어보다는 그쪽으로 일찌감치 방향을 트는 게 더 나을 수도 있을 겁니다.”
 “그런 속사정도 있군요.”
 “그나마 다행인건 NPC로서의 자질은 있다고 하더군요. 그래서 어쩔 수 없이 혜민을 NPC로 만들어버린 것입니다. 이 세계의 주민으로 만들게 되면, 보다 더 많은 지원을 받을 수 있게 되니까요.”
 그 덕분에 혜민은 해킹이란 저주에서 풀려날 수 있게 되었다고 한다.
 그나저나.
 ‘해커란 말이지…….’
 세계의 법칙이 통용되지 않았다.
 이것이 바로 해커의 능력인가.
 중앙 컴퓨터까지 그 영향권을 행사할 줄이야.
 ‘무서운 놈들이군.’
 플레이어들뿐만이 아니라 NPC, 그리고 평범한 인간까지.
 하나같이 전부 다 만나기를 꺼려해야 하는 경계 대상 1순위가 아닐까 싶다.
 “아무쪼록 플레이어님도 조심하시기 바랍니다. 최근에 이 일대에서 해커가 출현했다는 이야기가 삼삼오오 들리기 시작하니까요.”
 “…알겠습니다.”
 시간이 거의 다 되었기에 이 말을 끝으로 정태와 짧은 만남을 뒤로한 채 그대로 쿠앤커피로 되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그간 내가 알지 못했던 새로운 정보들도 많이 얻었지만.
 동시에 무시무시한 이야기를 들은 것 같은 기분도 든다.
 버그 몬스터는 그래도 때려잡을 수 있기라도 하지만, 해커는 버그 몬스터와 다르게 우리와 같은 인간이다.
 스스로 생각하고, 그리고 행동한다.
 그것만큼 무서운 게 또 있을까.
 ‘하다못해 해커에게 대항하려면, 적어도 나도 내 특수 능력 항목을 빨리 해금할 필요가 있겠군.’
 생존이 걸린 문제다.
 플레이어가 된 다음부터 창창한 성공 인생이 기다리고 있을거라 확신하던 나였지만…….
 설마 이런 식으로 또 다른 장애물과 조우하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버그 몬스터.
 그리고 해커.
 ‘인생이란… 참으로 쉬운 법이 없군.’
 
 ***
 
 그래도 마냥 괴로운 일만 있으면 어떻게 인생을 살아갈 맛이 나겠는가.
 때로는 그래도 활짝 웃을 만한 일도 있어야 살맛이 나는 법이다.
 “창식 씨! 거기 있는 화분 좀 빨리 옮기라고 몇 번이나 말씀드렸나요!!”
 “예, 알겠습니다. 바로 옮기겠습니다.”
 출근하자마자 대략 1시간 동안 쿠앤커피 직원들은 점장의 히스테리를 집중적으로 받고 있었다.
 물론 나를 포함해서 말이다.
 갑자기 점장의 신경이 잔뜩 날카로워진 것도 어느 정도 이해가 간다.
 왜냐하면, 조만간 이 가게에 큰 손님 한 명이 방문할 예정이기 때문이다.
 “아, 정말… 왜 갑자기 이곳에 오신다는 거지?!”
 점장이 마구 머리를 헝클어대기 시작한다.
 그런 그녀의 심정도 물론 이해 못하는 건 아니다.
 내 직장 선배이기도 한 유미나에게 듣자하니, 이 쿠앤커피 분점은 본사내에서도 총 매출액이 최하위권을 달리는 곳이라고 들었다.
 그래서 덕분에 본사에서는 이 분점을 없애느니 마느니 하는 논의를 시도 때도 없이 한다는 소문도 있다.
 가뜩이나 제대로 눈도장이 찍혀버린 곳인데, 갑자기 본사에서 사람이 온다고 하니 점장의 속은 아마 타들어가지 않을까 싶다.
 허나 난 얼추 이 모든 정황을 알고 있기 때문에 그리 긴장되진 않는다.
 “이 매장이 없어지기라도 하면… 좀 섭섭하겠네요.”
 유미나 선배가 곤혹스럽다는 식으로 말을 한다.
 하지만 그건 괜한 걱정이다.
 “그럴 리는 없을 겁니다.”
 “…네?”
 “점장님에게도 너무 걱정하지 말라고 슬쩍 귀띔이라도 해주세요. 이 분점을 없애기 위해 사람이 파견되는 게 아닐 테니까요.”
 “……?”
 내가 무슨 말을 하는지 잘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바라보는 유미나 선배였으나, 아직까지 모든 것을 이야기하기에는 시기상조가 아닐까 싶다.
 
 ***
 
 한창 가게를 깔끔히 하고 준비 중인 마당에, 갑자기 점장의 스마트폰이 매섭게 울리기 시작한다.
 다다다다다!
 하이힐을 신었음에도 불구하고 상당히 빠른 걸음으로 스마트폰을 캐치한 점장이 연신 굽신거리며 통화에 임하기 시작한다.
 “예, 지금 준비 중입… 네? 대, 대표님께서 오신다구요?!”
 역시 내 예상대로 흘러가고 있는 모양인가 보다.
 본사에서 사람이 나온다는 건 어렴풋이 알고 있었지만, 설마 쿠앤커피 대표가 나올 줄은 전혀 몰랐던 모양인지 점장의 얼굴이 더욱 사색이 되어간다.
 “아, 알겠습니다… 네… 최대한 준비를 서두르는 쪽으로…….”
 점장의 통화 내용을 몰래 경청한 미나 선배 역시 짐짓 놀란 눈으로 나를 바라보며 묻는다.
 “대표님이 왜 하필이면 이런 곳에… 설마 우리 매장, 정말로 폐점되는 거야?!”
 “그럴 리는 없을 거예요.”
 확신하는 나의 언행에 도리어 미나 선배가 의아함을 자아낸다.
 딱히 나와 유진태, 두 사람이 사적으로 아는 사이는 결코 아니다.
 얼굴 한 번 만나본 적도 없지만, 분명한 것은 유진태란 남자는 나를 만나기 위해 이곳으로 오고 있다는 점이다.
 유혜민의 말이 전부 사실이라는 가정 하에 말이다.
 
 ***
 
 시간이 흘러 머지않아 본사에서 파견된 사람들이 먼저 이 쿠앤커피 분점에 모습을 드러낸다.
 “오, 오셨습니까…….”
 점장이 허리를 숙이며 이들을 맞이한다.
 3~4명의 나이 지긋한 남자들을 포함해 젊은 사람들도 대다수다.
 누가 보면 이 카페에서 무슨 중대한 회의라도 여는 줄로 알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오늘 이들이 찾아온 목적은 간단하다.
 “어흠.”
 헛기침을 내뱉으며 가게 안으로 들어서는 한 명의 중년 남성.
 보자마자 반사적으로 저 남자가 유진태란 사람임을 확신하게 된다.
 “이곳에 혹시 ‘오창식’이라는 분이 계신가?”
 “오창식이라면… 얼마 전에 저희 가게에서 일하기 시작하는 아르바이트생입니다만… 서, 설마 창식 씨가 뭔가 큰 문제라도 일으킨 건가요?!”
 점장이 매섭게 나를 노려보기 시작한다.
 지레짐작은 금물이라 했건만. 그것보다 회사 대표가 나에게 올 정도로 악독한 잘못을 저지를 만한 사람으로 보이는 건가.
 점장의 시선 방향을 통해 내가 오창식이라는 걸 깨달은 유진태가 터벅터벅 나에게 다가온다.
 절도 있는 동작.
 풍채도 제법 있어 보이는 남자다.
 소싯적 운동 좀 하지 않으면, 저런 체형은 나오기 힘들다는 생각이 들 만큼 체격도 괜찮은 편이다.
 “혹시 오창식 씨입니까?”
 “예, 맞습니다.”
 “그렇군요.”
 고개를 끄덕이는 유진태.
 반면, 뒤에서 점장이 ‘이제 우린 끝이야……’라는 절망적인 표정을 선보이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우리 딸을 구해줘서 정말 고맙습니다.”
 “…네?!”
 점장도, 그리고 미나 선배도 이게 도통 무슨 일인지 모르겠다는 시선으로 나와 유진태를 바라본다.
 오늘의 만남이 성사되기까지, 알려지지 않은 일련의 사건들이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게 중요한 것이 아니다.
 “잠깐 둘이서 이야기 좀 하고 싶네만.”
 유진태가 점장을 향해 부탁한다.
 그러자 점장이 여부가 있겠냐는 식으로 날 데려가도 좋다는 말을 건네준다.
 쿠앤커피 대표와의 만남을 통해서 충분히 뽑아먹을 수 있는 건 뽑아먹을 생각이다.
 어차피 난 이 남자의 딸을 구해준 은인이니까.
 그렇다면 웬만해선 나의 이야기를 전부 수용해줄 것이다.
 이것도 어떻게 보자면 퀘스트 보상이라고 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물론 비공식 보상이긴 하지만 말이다.
 
 ***
 
 “그래… 괴한에게 습격당할 뻔한 우리 딸을 자네가 구해줬다고 들었네만.”
 “네, 그렇습니다.”
 가게 내부에 위치해 있는 작은 휴게실에 자리를 터 유진태와 담화를 나누게 되었다.
 점장이 타다 준 커피 한 모금을 들이켜던 유진태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어간다.
 “정말 고맙네. 자네가 아니었다면… 우리 딸은 지금쯤 이 세상 사람이 아니게 되었을지도 몰라.”
 “하하, 과찬이십니다.”
 “아닐세. 실제로 혜민이의 친구들 중에서도 희생자가 있지 않았던가. 물론 그 아이들도, 그리고 아이들의 부모님도 불쌍하지만… 그래도 난 내 딸이 무사하다는 것만으로도 정말 감지덕지하네. 예전에도 정체불명의 희귀병 때문에 한동안 병원 신세를 졌던 적도 있었는데, 이번에는 괴한 무리의 습격이라니… 굿이라고 해야 하나 고민되는군.”
 “…….”
 희귀병으로 인한 입원이라.
 틀림없이 해커의 저주로 인한 병세가 아닐까 싶다.
 “그래, 기왕 이렇게 찾아왔으니, 내 자네에게 섭섭지 않은 사례를 주고자 하네만.”
 “당연한 일을 한 것뿐입니다. 굳이 그렇게까지 하지 않으셔도…….”
 “어허. 당연한 일이라고는 하나, 소중한 생명을 구해준 장한 일을 해낸 걸세. 너무 그렇게 사양하지 않았으면 하는군.”
 “…….”
 “얼마 정도 필요한가? 섭섭하지 않게 주도록 하지.”
 “하하…….”
 “그러고 보니 대학생처럼 보이는데, 학기 중에 아르바이트를 하는군. 휴학이라도 한 겐가?”
 “아니요. 전 애초에 대학생도 아닙니다.”
 “학교를 안 다니고 있다고?”
 “예.”
 새로 환생한 오창식이란 인물의 설정은 대략 이렇다.
 최종학력은 고졸.
 그리고 현재, 별다른 직장도 없고 마땅한 수입원도 없다.
 한마디로 생활비를 벌기 위해 전전긍긍하고 있는 젊은 청춘이라는 소리와도 같다.
 “대학을 포기하고 일을 한단 말이지… 가정환경이 그리 좋지 않은 편인가?”
 “아니요. 고아입니다.”
 “…….”
 가정환경 설정 또한 어렸을 때부터 부모님에게 버림을 받고 고아로 자라왔다는 스토리를 지니고 있다.
 물론 이건 거짓이 아니다.
 전생에서도 난 고아였으니 말이다.
 “그런 속사정이 있었군…….”
 유진태의 미간이 미묘하게 찡그려지기 시작한다.
 물론 함부로 나의 가정사를 동정하는 건, 오히려 나에게 실례를 범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우려의 여지도 존재한다.
 그렇기 때문에 유진태도 별다른 말을 하지 못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조만간 취업을 생각하고 있겠군.”
 이야기가 내가 원하는 방향으로 흐름을 타기 시작했다.
 나의 장래에 대해 묻는 이 오지랖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아니요, 취업보다는 ‘사업’을 한 번 해볼까 생각하고 있습니다.”
 “사업?”
 “예. 사실 그간 여러 군데에서 잡일을 하면서 나름 기술과 경험을 갈고 닦았습니다. 동시에 돈도 좀 모으려고 했지요. 돈을 모아서 저만의 가게를 차리고 싶습니다. 그게 우선 저의 가장 첫 번째 목표이기도 합니다.”
 “사업이라. 사업…….”
 만약에 내가 취업에 관심이 있다는 대답을 들려줬다면, 분명 본사, 혹은 지점에 자리 하나를 내줄 터이니 거기서 정직원으로 일하란 제의를 해왔을 것이다.
 그렇기에 일부러 취업이 아닌 사업이란 단어를 선택했다.
 실제로 난 누군가의 밑에서 일하거나 하는 그런 체질은 아닌 것 같다.
 그냥 차라리 속편하게 내가 직접 내 가게를 꾸리는 게 더 나을지도 모른다.
 한동안 사업이란 단어를 반복적으로 중얼거리던 유진태가 나를 응시한다.
 “사업에는 수완과 특유의 감각이 필요하지. 젊음 하나만을 믿고 패기를 부렸다가, 애써 힘들게 모은 돈을 죄다 탕진할 수도 있어. 그만큼 사업은 어려운 일이기도 하지.”
 “그래도 우선 제가 하고 싶은 일에 한 번 도전해보고 싶습니다. 젊었을 때 도전해야지, 나중에 나이 들고 책임져야 할 가족들이 생긴다면 그때는 도전해보고 싶어도 도전하지 못하지 않습니까?”
 “…옳은 말이긴 하지.”
 어차피 난 더 이상 잃을 것도 없다.
 바닥까지 떨어져봤던 놈.
 그게 바로 나, 오창식이다.
 실패에 대한 두려움 따윈 없다.
 이미 밑바닥 인생을 경험해봤는데, 또 경험해본다고 한들 뭐가 두려울 게 있나.
 그저 싫증만 느낄 뿐이다.
 그리고 언제까지 바닥에서 놀 텐가.
 이제는 슬슬 위로도 올라가봐야 하지 않겠나?
 플레이어라는 자격과 동시에 스텟 재분배를 잘만 이용한다면, 분명 남부럽지 않은 호사까지 내 손 안에 거머쥘 수 있을 것이다.
 어차피 두 번 사는 인생이다.
 한 번은 바닥 인생을 살아봤으니, 이제 두 번째 인생은 정상 인생을 살아볼 차례라고 굳게 확신한다.
 “으음…….”
 옅은 숨을 내쉬며 나를 지그시 응시하는 유진태.
 그러더니 이내, 슬며시 입을 열며 다른 화두를 제시해준다.
 “…특별히 내가 자네에게 한 가지 정보를 흘려주지.”
 “무엇입니까?”
 고심 끝에 말하는 거라면, 아무래도 아직까지 외부에 공표되지 않은 정보이리라 예상된다.
 “조만간 강남에 분점 하나를 차릴 예정이네. 다른 지점과는 다르게 상당히 큰 규모로 진행될 예정이지.”
 “…그렇군요.”
 “만약, 자네가 스스로의 나에게 능력을 입증시킨다면, 그쪽을 자네에게 맡길 의향도 있네만.”
 쿠앤커피, 강남점.
 내가 알고 있는 정보에 의하면, 쿠앤커피는 인천, 부평, 부천 등 1호선 라인을 중심으로 해서 점점 서울권 안쪽까지 사업을 확장하고 있는 추세로 성장하는 중이다.
 다른 유명 커피 브랜드가 꽉 잡고 있는 서울 상권에 이제 쿠앤커피도 슬슬 발을 들여놓으려고 준비를 하고 있다는 증거가 아닐까 싶다.
 “강남을 기점으로 해서 서울 일대 근방에 점차적으로 분점을 넓혀나갈 계획을 잡고 있네. 물론 그 기획이 성공하려면, 우선 강남지점이 크게 활약을 보여줘야지.”
 “…….”
 “현재 자네가 일하고 있는 이 쿠앤커피 심곡지점은 전국을 통틀어 총매출이 가장 낮은 분점일세. 사람이 전혀 없는 외진 곳에 있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투자가 전혀 없던 것도 아니지. 하지만 심곡지점에는 주변에 워낙 브랜드 파워가 센 가게들이 즐비해 있네. 우리 같은 신흥 브랜드는 명함조차 못 내밀 정도로 말이지. 그래서 내가 한 가지 테스트를 해보겠네.”
 “말씀해보시기 바랍니다.”
 “이 심곡지점의 매출을 끌어올려보게. 상한선은 두지 않겠지만, 커트라인은… 그렇군. 중위권 정도로 잡으면 되겠지?”
 꼴찌에서 중간 성적으로 끌어올리란 말이지.
 게다가 유진태도 말했다시피 지리적인 조건도 그리 좋진 않다.
 “물론 이 테스트는 우리 딸을 괴한으로부터 구해준 보답과는 별개의 이야기일세. 거기에 대해선 따로 내가 개인적인 보답을 줄 테고, 이 테스트는 자네의 자격을 시험해보는 거라고 생각하면 되네. 제아무리 은인이라 하더라도 우리 쿠앤커피의 중요한 일이 될 수도 있는데, 무턱대고 자네에게 분점 하나를 맡겨서 사업체 하나를 통째로 말아먹게끔 할 수는 없지 않은가.”
 “맞는 말씀입니다.”
 “어떤가. 한 번 해볼 텐가?”
 순간 나도 모르게 레비에게 ‘이번 퀘스트 보상은 뭐냐?’라는 식의 질문을 할 뻔했다.
 하도 퀘스트, 퀘스트 하다 보니 이런 후유증도 생기는구나.
 설사 이번 제안이 퀘스트가 아니라 하더라도 거절할 생각은 없었다.
 “한 번 해보겠습니다.”
 “좋은 대답이군.”
 진태가 흡족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인다.
 NPC를 통해서만 퀘스트를 얻을 수 있는 건 아니다.
 이런 식으로 인간 대 인간이라는 인간관계에서도 다른 형식의 퀘스트를 받을 수 있으니 말이다.
 
 ***
 
 쿠앤커피 심곡지점의 매출 상승.
 그러기 위해선 한 가지 전제조건이 필요하다.
 “매출 상승을 위해서 충분한 노력을 기울이겠습니다. 하지만 그전에 저한테 몇 가지 보장을 해주시면 좋겠습니다.”
 “나와 합의를 보려는 건가? 원한다면 커트라인 정도는 충분히 낮춰줄 수 있네만.”
 매출 최하위 지점을 중위권까지 끌어올리라는 건 상당한 난이도를 자랑한다.
 아마 진태도 잘 알고 있을 것이다.
 그래서 나에게 충분히 난이도를 낮춰줄 의향이 있다는 말을 내비친 것이다.
 자신이 없으면 말하라.
 물론 말하면 편하긴 하다.
 커트라인이 낮아지면, 그만큼 난이도도 하향하는 셈이니까.
 하지만 그건 내가 원하는 게 아니다.
 난이도를 낮추면 낮출수록 그에 대한 보상의 규모 역시 낮아지는 법이다.
 결국 이것도 퀘스트와 마찬가지다.
 보다 많은 스텟 포인트를 얻으려면, 난이도가 높은 퀘스트를 수행하는 편이 가장 빠른 길이다.
 버그 몬스터 퇴치 같은 그런 퀘스트 말이다.
 “아니요. 제가 부탁드리고자 하는 건 그런 점이 아닙니다.”
 “그럼 뭔가?”
 “일개 아르바이트생에 불과한 저로선, 머릿속에 있는 계획을 그대로 실현하기에 다소 무리가 있습니다. 버젓이 점장이라는 분이 있는데, 어떻게 제 의견을 100퍼센트 수용하겠습니까?”
 “음…….”
 “제 발언에 힘이 실릴 수 있도록 대표님께서 도와주셨으면 합니다. 만약 그렇게 해주신다면, 내주신 숙제는 충분히 풀어갈 자신이 있습니다.”
 “과연… 그것도 일리가 있는 말이군.”
 고개를 끄덕이며 내 말에 공감대를 형성해준다.
 그러더니 알았다는 식으로 말을 이어간다.
 “그 점에 대해선 내가 따로 점장에게 말을 전해주겠네.”
 “감사합니다.”
 애초에 내가 노리고 있는 건 쿠앤커피 강남지점의 지점장 자리다.
 최중요 자리를 꿰차고 있으면, 분명 나에게 또 다시 기회가 찾아오게 될 것이다.
 서울 진출의 교두보가 될 강남지점.
 결코 놓칠 수 없는 기회다.
 “기한은 어느 정도로 잡아두면 되겠나?”
 “반년이면 충분합니다.”
 “반년이라… 그리 알아두도록 하지.”
 또 하나의 목표가 생겼다.
 비록 퀘스트는 아니지만, 그래도 이것 또한 중요한 숙제임에는 틀림이 없을 것이다.
 우선 돈을 모아야 한다.
 고작해야 버그 몬스터를 퇴치하기 위해 환생을 한 게 아니다.
 퀘스트를 수행하면서까지 스텟 포인트를 모으려고 하는 이유도 전부 다 성공 인생을 꿈꾸기 위함이다.
 그 초석을 마련하기 위해선 강남지점을 내 것으로 만들 필요가 있을 것이다.
 
 ***
 
 “그럼 살펴가시기 바랍니다.”
 점장과 나란히 고개를 숙이며 유진태를 배웅해준다.
 나중에 따로 점장에게 나에 관한 이야기를 별도로 들려주겠다는 약속을 한 뒤 다시 본사로 향한 유진태.
 뭐라고 할까.
 평범한 사람과는 다른 아우라를 자아내고 있었다.
 보잘 것 없는 사람을 대한다 하더라도 그 사람이 지니고 있는 가치와 가능성을 염두해두고 존중해준다.
 사람의 가치를 알아보는 것만큼 어려운 일 또한 없을 것이다.
 특별한 능력이 있는 플레이어도, NPC도 아니지만 유진태란 남자는 비범함이란 요소를 갖추고 있는 자였다.
 ‘쿠앤커피가 망하지 않고 크게 성장한 이유가 여기에 있었군.’
 앞으로 쿠앤커피는 계속적으로 그 규모를 넓혀갈 것이다.
 그렇다면 나 또한 거기에 발을 들여놓을 필요가 있지 않을까.
 ‘퀘스트 중에서도 금전을 보상으로 주는 퀘스트가 있으면 참 좋을 텐데.’
 이건 나중에 바이올렛을 통해서 한 번 확인해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다시 가게로 들어오자, 점장이 나를 향해 눈을 흘기며 묻는다.
 “창식 씨.”
 “예, 점장님.”
 “혹시 대표님하고 아는 사이신가요?”
 “…글쎄요. 안다고 해야 좋을지, 아니면 모른다고 해야 좋을지…….”
 “애매한 대답을 바라는 게 아니에요. 확실하게 말을 해주세요.”
 점장 입장에선 아마 궁금해 죽을 지경일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유진태와 어느 정도 친분이 있는 사람이 자신의 가게에서 아르바이트 생으로 일하고 있으니 말이다.
 비록 신분은 아르바이트생이라 할지 모르지만, 대표와 알고 지내는데 어찌 감히 홀대할 수 있겠는가.
 “서로 간접적으로 알고는 있었지만, 직접 대면한 건 오늘이 처음입니다.”
 “…그런가요.”
 “네.”
 “…….”
 잠시 말을 아끼던 점장이 옅은 한숨을 내쉬며 나에게 따로 할 말이 있는 모양인지 목소리를 낮춘다.
 “대표님께서 창식 씨를 매니저로 임명하라 말씀하셨어요.”
 “저에게… 말입니까?”
 “듣자하니 여러 방면으로 사업 경험도 있으시다고 하던데요?”
 “예, 비록 망하긴 했지만요.”
 환생하기 전의 삶에서 실제로 몇 번의 창업 도전이 있었지만, 그리 썩 좋지만은 않았다.
 변명을 해보자면, 내 능력 부족이라기보다는 바이올렛이 나에게 말했듯이 스텟 항목에 버그가 있어서 일이 원하는 대로 잘 풀린 적이 단 한 번도 없다.
 괜히 과거의 인생에서 ‘불운 덩어리’란 별칭을 받게 된 것이 아니다.
 “아무쪼록 서로 잘 해보도록 해요. 창식 씨도 이제는 어엿하게 직급을 가지게 된 직원이 되었으니까요.”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저야말로요.”
 점장의 말을 들어보니 아마도 매출 상승에 관한 건수는 이야기하지 않은 모양인가 보다.
 하기야. 점장의 말을 무시하고 내가 멋대로 약속을 했다. 점장에게 이런 말을 들려줘봤자 나를 결코 좋게 보지 않을 것이다.
 어차피 크게 상관은 없다.
 매니저라는 직급을 얻게 된 것만으로도 내가 제시한 매출 상승의 전제조건에 어느 정도 부합된 셈이니 말이다.
 이제부터는 어떻게 하면 꼴찌를 우수생으로 만들어야 할지 고민을 해볼 필요가 있다.
 내가 가지고 있는 플레이어로서의 능력과 스텟 포인트 재분배 스킬을 적절하게 이용하면, 분명 이 퀘스트를 무난하게 수행할 수 있으리라고 본다.
 남자는 결국 자신감이니까.
 
 ***
 
 태풍과도 같은 오늘 하루도 거의 다 지나갈 무렵이었다.
 퇴근을 하고 곧장 집으로 돌아가 쉴까 하던 찰나에, 레비의 음성이 들려온다.
 -이연희 님으로부터 메시지가 도착했습니다. 확인해보시겠습니까? Yes / No
 -연희한테서?
 생각해보니 오락실에서 만났다가 바이올렛의 의도치 않은 만남이 훼방으로 번져 연희와의 짧은 만남을 갑작스럽게 끝내고 말았다.
 -확인해줘.
 -예, 알겠습니다.
 레비의 말이 끝나자마자 시야에 반투명한 홀로그램 창 하나가 형성된다.
 뒤이어 천천히 창에 적혀 있는 문구를 읽어나가기 시작한다.
 
 저번에 만났던 그 술집으로 8시까지 오세요. 소개시켜줄 사람이 있어요.
 
 “소개시켜줄 사람?”
 보아하니 아마도 저번에 말했던 그 ‘또 다른 플레이어’중 한 명이 아닐까 예상된다.
 플레이어들과의 교류라…….
 물론 나도 그 점에 대해선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NPC들에게서 얻을 수 있는 정보와 플레이어들에게서 얻을 수 있는 정보가 서로 100퍼센트 일치한다고 생각하진 않기 때문이다.
 말마따나 NPC는 이정태의 말대로 중앙 컴퓨터를 대신해 수족처럼 일하고 있는 자들, 회사로 치자면 일종의 직원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플레이어들은 다르다.
 그들에게 있어서 고객과도 같은 위치를 고수하고 있는 게 바로 플레이어가 아닐까 싶다.
 물론 그렇다고 누군가는 갑이고 누군가는 을이고 하는 문제는 별개라고 생각한다.
 비록 플레이어, NPC로 나뉘어 있지만 이들 전부 다 똑같은 ‘사람’이다.
 사람과 사람이 만나는데, 서로 차등 대우를 한다는 건 나와 잘 맞지 않는 사상이기도 하다.
 “일단은… 가보는 게 좋겠지.”
 초대를 해왔는데, 굳이 거절할 필요는 없다.
 게다가 얼마 전, 연희가 나와 NPC에 관한 정보를 공유해준 조건으로 나 또한 그녀를 도와주기로 했다.
 -레비.
 -예, 주인님.
 -연희한테 메시지를 보내줘. 곧 가겠다고 말이야.
 -알겠습니다.
 레비에게 메시지 작성을 부탁한 뒤 빠르게 걸음을 이동한다.
 어차피 지금 있는 위치와 저번에 연희와 만났던 그 술자리는 그리 멀지 않다.
 얼추 15분 정도를 걷다보니, 목표로 삼은 가게가 눈앞에 모습을 드러낸다.
 장사가 잘 되는 가게답게 역시나 저번과 마찬가지로 손님들이 제법 많이 보인다.
 드르륵.
 미닫이문 형태로 되어 있는 가게의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서자, 종업원이 나에게 다가와 묻는다.
 “어서오세요! 몇 명이신가요?”
 “아, 일행이 먼저 와 있어서 뒤늦게 합류했습니다.”
 종업원에게 딱히 크게 신경 쓰지 말라는 식으로 말을 건네준 뒤 빠르게 가게 전경을 둘러본다.
 그러자 때마침 연희가 손을 들며 위치를 알려주기 시작한다.
 “이쪽이에요.”
 보아하니 연희뿐만이 아니라 플레이어로 추정되는 다른 남자 2명도 보이기 시작한다.
 가게 중에서도 구석진 곳에 위치한 테이블.
 “이분이 말로만 듣던 그 오창식 씨군요.”
 2명의 남성 플레이어 중에서도 금발로 머리를 염색한… 제법 가벼워 보이는 인상의 남자가 환하게 웃으며 나를 향해 고개를 살짝 끄덕인다.
 옆에 있던 남자 역시 같은 방식으로 나에게 인사를 건넨다.
 “우선 앉으세요.”
 연희가 손짓을 하며 나에게 착석을 권유한다.
 맞은편에 남자 2명이 앉아 있는 탓에 자연스럽게 비어 있던 연희의 옆자리에 엉덩이를 붙인다.
 “말씀드렸다시피, 이분이 최근 플레이어가 된 오창식 씨에요.”
 “처음 뵙겠습니다. 오창식이라고 합니다.”
 연희의 말을 이어받아 스스로 자기소개까지 연달아 소화한다.
 그러자 제법 나이가 있어 보이는 중년의 남성이 탄식을 자아낸다.
 “이분이 바로 그 커뮤니티에서 한창 오르락내리락하던 오창식 씨…….”
 “하하, 저도 모르는 사이에 나름 유명 인사가 되었나 보군요.”
 “암요! 유명하지요. 플레이어로 전직한지 얼마 안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하운드를 3마리나 때려잡은 분은 결코 흔치 않습니다. 전 플레이어가 된지 두 달이 지나고 나서야 겨우 D급 몬스터 한 마리를 혼자서 잡을 수 있을 정도였는데요, 뭘.”
 “그렇군요.”
 이렇게 듣고 보니 내심 내 활약이 결코 적은 게 아님을 알 수 있었다.
 여하튼 그건 둘째 치고.
 “슬슬 소개 좀 부탁할까 하는데.”
 “아, 네.”
 연희가 고개를 끄덕이며 첫 번째로 금발의 남자를 가리킨다.
 “이 사람은 민수배라고 해서… 플레이어 경력은 3개월 정도가 되는 사람이에요. 우리 4명 중 가장 나이가 어리죠.”
 “민수배라고 합니다. 형님이라 불러도 되죠?”
 녀석의 기습 제안에 반사적으로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뭐… 형님이란 단어가 딱히 나쁜 뜻은 아니니까 그러려니 하고 넘기자.
 “그리고 이분은 이홍조 님이에요. 플레이어 경력은 4년으로, 제법 경험이 많으신 분이에요.”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이홍조라고 합니다.”
 “저야말로 잘 부탁드립니다.”
 서로 가볍게 악수를 주고받는다.
 환생하기 전, 나와 나이대가 비슷한 것으로 보아 왠지 말은 잘 통할 것 같다.
 그것보다 플레이어 경력이 4년이라니.
 도대체 얼마나 많은 여분의 스텟 포인트를 모아뒀을지 감도 안 잡힌다.
 두 사람의 첫 인상에 대해 평가하고 있을 무렵, 연희가 다행이라는 듯이 목소리를 높인다.
 “인원도 모였으니, 슬슬 그 이야기를 해볼까 해서요.”
 “그 이야기?”
 “네.”
 연희가 나를 바라보며 작게 고개를 끄덕여준다.
 “레이드 퀘스트에 대해서요.”
 
 
 # EP 8. 대립
 
 레이드 퀘스트가 있다는 건 나 또한 얼추 짐작하고 있었다.
 애초에 연희가 나에게 접근한 이유도 처음부터 파티원을 모으기 위함이라고 들었던 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나저나 레이드 퀘스트란 말이지…….
 아직까지 난 일반 난이도 퀘스트밖에 수행해본 적이 없다.
 기껏해야 ‘홍춘삼의 수레’ 퀘스트와 이정태의 ‘내일의 태양은 뜬다!’, 두 개가 전부다.
 물론 둘 다 일반 난이도에 불과하다.
 아직까지 버그 몬스터 퇴치 퀘스트를 별도로 하고 있진 않으니 말이다.
 “형님은 아직 레이드 퀘스트가 뭔지 모르시죠?”
 “그렇긴 합니다만.”
 수배가 정확하게 내 핵심을 찌르듯 묻는다.
 아무래도 내가 여기서 플레이어 경력이 가장 적기 때문에 지레짐작으로 던진 질문이 아닐까 싶다.
 내가 플레이어가 된지 아직 일주일도 채 되지 않았다.
 체감 상으로는 한 몇 달 된 거 같은데, 겨우 그게 고작이다.
 “일주일이면… 아직 ‘클래스’는 없겠군요.”
 “클래스?”
 “어? 누님. 설명 안 해주신 겁니까?”
 수배의 시선이 연희에게 향하기 시작한다.
 그러자 연희가 쓴웃음을 지어 보이며 고개를 끄덕여준다.
 “오늘 오락실에서 만났을 때, 그것도 설명해주려고 했었는데 중간에 방해꾼이 왔었죠.”
 “아… 그랬었지.”
 방해꾼이라 함은 분명 바이올렛을 말하는 게 아닐까 싶다.
 이해는 한다.
 연희는 NPC를 싫어하고 있으니 말이다.
 물론 수배라든지 이홍조란 남자도 연희처럼 NPC를 싫어하는지 마는지에 대해선 아직까지 알 수 없다.
 “6번째 스텟 항목 중에 ‘특수 능력’이 있었죠?”
 연희의 물음에 고개를 끄덕여주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한다.
 “그게 바로 클래스에요.”
 “클래스라고 함은… 게임 상에서 직업을 나타내는 그 단어와 비슷하게 통용되고 있는 건가?”
 “네, 맞아요. 특수 능력을 해금하게 되면 플레이어별로 직업을 할당받게 되는데, 여섯 번째 항목은 거기에 관련된 능력들이 포진되어 있어요. 스텟 포인트를 모아 그쪽에 투자하면, 그만큼 이능력을 사용할 수 있다는 뜻이죠.”
 “그렇군… 너는 클래스가 뭐지?”
 “힐러요.”
 “힐러?”
 “네.”
 “…….”
 이연희라는 여자의 이미지에 그다지 안 어울릴 만한 그런 직업이 나온 탓에 순간 당황하고 말았다.
 이 당혹감을 숨기기 위해서라도 다른 인물에게 클래스가 무엇인지 물어볼 필요가 있다.
 “수배 씨는…….”
 “에이, 형님! 말 편하게 하세요. 어차피 앞으로 잘 알고 지낼 사이잖아요?”
 “…그럼 수배, 너는 클래스가 뭐지?”
 “저는 ‘격투가’입니다!”
 “격투가라…….”
 반팔 아래로 뻗은 잔근육을 보아하니, 제법 육체 파트 스텟을 많이 올려둔 모양인가 보다.
 아니면 처음부터 운동을 좋아하는 녀석일지도 모르지.
 “그럼 홍조 님은…….”
 “나도 그냥 편하게 형이라고 불러주게.”
 “알겠습니다. 그럼 저도 앞으로 수배처럼 형님이라 부르겠습니다.”
 “허허, 아저씨라고 불러주지 않는 것만으로도 고맙구만. 연희 양은 날 아직도 ‘아저씨’라고 부르는데 말이야.”
 언중유골(言中有骨)이라 했던가.
 말 속에 뼈가 담긴 한 마디였다.
 “그럼 형님은 어떤 클래스를 지니고 있습니까?”
 “난 ‘정보원’이라네.”
 “정보원… 말입니까?”
 “그렇지.”
 종합을 해보자.
 연희는 힐러, 수배는 격투가, 그리고 홍조 형님은 정보원.
 뭔가 연관성이 있는 건가.
 “직업은 선택할 수 있는 겁니까? 아니면 강제적으로 지정을 받게 되는 겁니까?”
 플레이어 경력이 가장 오래된 홍조 형님에게 질문을 드려본다.
 그러자 홍조 형님이 부드러운 미소와 함께 아직 아무것도 모르는 나를 위해서 친절하게 설명을 들려주시기 시작한다.
 “클래스는 지정을 받는 걸세. 우리가 자의적으로 선택할 수 있는 권한은 없지. 아마도 ‘이그드라실(Yggdrasil)’이 플레이어가 된 자들에게 직업을 배정하는 것으로 추정되네.”
 “이그드라실?”
 “소위 말해서 중앙 컴퓨터라 불리는 존재지.”
 “아…….”
 중앙 컴퓨터라는 단어를 듣자마자 한 방에 바로 이해가 되었다.
 이정태를 비롯해 바이올렛 등 NPC들이 주구장창 언급했던 바로 그 중앙 컴퓨터가 이그드라실이라고 불리는 모양인가 보다.
 “클래스를 배정받는 데엔 뭔가 규칙이 있는 거 같지만… 아직까지 플레이어들 사이에선 확실하게 알아낸 법칙은 없네. 다만, 내가 지금까지 조사해본 바에 의하면 무작위까진 아닌 거 같더군. 수배의 경우에도 격투가라는 클래스를 받게 되었지만, 실제로 이 녀석은 권투 선수로도 활약하고 있지. 참고로 나는 기자로 일하고 있네. 월급쟁이인 셈이지. 정보원은 말 그대로 정보에 관한 다수의 스킬들을 지니고 있다네. 덕분에 내 직업에도 은근슬쩍 스킬들을 많이 써먹을 수 있고, 참 편하더군. 하하하.”
 “그렇군요.”
 다시 말해서 어느 정도 플레이어와 연관성이 있는 클래스를 배정받게 된다는 것을 뜻하는 게 아닐까 싶다.
 그렇다면 연희는…….
 “…….”
 말없이 연희를 응시하자, 뭔가 복잡한 표정을 지어 보이더니 이내 내가 쳐다보는 의도가 무엇인지 잘 알고 있다는 식으로 대답해준다.
 “저희 집안이 기독교거든요.”
 “…그게 끝인가?”
 “네. 그게 전부에요. 참고로 집안이 기독교일 뿐이지, 저까지 교회를 나가거나 그러진 않아요. 전 무교거든요.”
 “…….”
 참으로 단순한 클래스 지정이 아닐까 싶다.
 고작해야 집안이 기독교를 가지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힐러를 배정하다니. 심지어 본인은 교회도 안 나간다고 한다.
 뭐 이런 경우가 다 있나…….
 아니, 곰곰이 생각을 해보면 연희가 기독교 이외의 독특한 이력이 없기 때문에 일부러 힐러란 직업을 배정한 게 아닐까 싶다.
 개성시대라는 말이 괜히 나오는 게 아닌가 보군.
 “자네는 무슨 클래스를 받게 될 거 같나?”
 “저 말입니까?”
 “그래. 보아하니… 딱히 뭔가 크게 부각되는 점 같은 건 없어 보이는군.”
 연희를 욕할 때가 아니었다.
 생각해보니 나 역시 마찬가지 아닌가.
 뭔가 특별히 눈에 띄는 이력이나 특징이 없다.
 수배처럼 권투 선수로 활약하는 것도 아니고, 홍조 형님처럼 기자라는 정보 관련 직업을 가지고 있는 것도 아니다.
 일을 하고 있긴 하지만, 서비스업 관련 클래스를 배정받는다면 그게 과연 무슨 이득일까.
 “창식 형님은 우선 특수 능력 항목 해금부터 하셔야죠. 벌써부터 무슨 직업일지 걱정하면 그거야말로 김칫국 마시기 아니겠습니까? 하하하!!”
 “…그렇긴 하지.”
 수배의 말이 맞다.
 아직 해금도 못했는데, 내 클래스가 무엇인지 고민을 해봤자 아무런 소용도 없을 것이다.
 어차피 홍조 형님의 말마따나 클래스는 이미 내 자의가 아닌 이그드라실이라는 존재에 의해 강제적으로 배정받는다 했다.
 즉, 내가 고민할 단계가 아님을 뜻한다.
 어찌 되었든 간에 특수 능력 항목을 해금하는 건 당연한 일이다.
 남들이 가지지 못하는 이능력을 손에 넣어야 보다 더 버그 몬스터 퇴치 퀘스트를 손쉽게 클리어할 수 있을 테니 말이다.
 그리고 굳이 꼭 전투 능력이 아니더라도 홍조 형님처럼 정보원이란 클래스 같이 실생활에도 도움이 될 만한 그런 직업이 나와 준다 해도 내게 있어선 그저 감사할 따름이다.
 말을 빙빙 돌려 했지만, 결국 다시 이야기를 되돌리자면 여섯 번째 항목을 해금시키는 일이 가장 선행적으로 펼쳐져야 할 작업이 아닐까 싶다.
 
 ***
 
 연희가 나를 이 자리에 부른 건 레이드 퀘스트를 비롯해 기타 수행에 관해 상세한 전략을 짜기 위함이라고 생각했지만…….
 …그렇게나 심도 있는 목적까진 아니었다.
 “당신을 부른 건 친목을 위함이에요.”
 “친목이라…….”
 눈앞에 놓인 술을 아직까지 한 모금도 입에 대지 않은 연희가 고개를 끄덕이며 내 말에 대답해준다.
 “네. 오늘 처음 이렇게 4명이서 만나게 되었는데, 만나자마자 레이드 퀘스트가 어찌구 저찌구 이야기를 해봤자 무슨 소용인가요? 이제 앞으로 보다 더 높은 난이도를 지닌 퀘스트를 같이 수행하게 될 공동체인데, 일단은 서로를 잘 알아가는 게 최우선이라고 생각해서요.”
 “나쁘진 않군.”
 어찌 보면 친목이란 콘셉트를 가지고 있는 이 모임 주최를 두고 합당한 근거를 들려주는 연희였다.
 그녀의 말을 들으며 술이 담긴 잔을 3개째 비워버린 수배가 도중에 우리 두 사람의 대화에 참가한다.
 “암! 누님의 말이 지극히 당연하지요! 이제부터 저희는 공동체입니다, 공동체! 파티라구요!”
 연희의 뒤를 이어 수배, 그리고 홍조 형님까지 이미 친구로 전부 다 등록을 한 상태다.
 동시에 4인으로 구성된 파티 모임 멤버로 자동 등록까지 해뒀다.
 추가적으로 더 설명하자면, 이 파티를 이끄는 리더는 다름이 아닌 이연희다.
 “힐러가 파티장이라니… 든든하겠군.”
 나의 혼잣말을 들은 모양인지, 연희가 옅은 한숨을 내쉬어보인다.
 “힐러라 하더라도 아직까지 특수 능력 항목에 많은 스텟 포인트를 투자하진 못했어요. 그래서 특별히 대단한 스킬 같은 건 아직까지 없어요.”
 “전투에선 치료를 담당하는 힐러 한 명 정도는 필수 아닌가. 게임에서도 마찬가지고. 난 오히려 네 존재가 상당히 가치 있다고 생각하는데.”
 “그렇게 생각해주신다면 그저 고마울 따름이에요.”
 기분 좋으라고 하는 사탕발림이라든지 빈말이 아니라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말이기도 하다.
 나도 제법 온라인 게임 경력이 되기 때문에 힐러의 중요성은 꽤나 크다는 걸 잘 알고 있다.
 회복 아이템이라든지 그런 게 따로 없다면, 그만큼 힐러가 얼마나 귀중한 존재인지 굳이 말할 필요도 없지 않을까 싶다.
 “아이템이라…….”
 그러고 보니 플레이어라든지 NPC, 몬스터가 있다면 아이템도 존재하지 않을까?
 문득 그런 의구심이 드는 순간, 내 중얼거림을 들은 모양인지 홍조 형님이 먼저 아이템에 관한 화두를 꺼낸다.
 “자네, 아직 아이템에 대해서 잘 모르는 것 같군.”
 “아이템이라는 것도 존재하나 보군요.”
 “물론. 하지만 얻기는 꽤나 힘들다네. 일반적으로는 버그 몬스터를 퇴치하거나 아니면 난이도가 꽤 되는 퀘스트를 클리어해야만 아이템을 얻을 수 있으니까.”
 이것도 거의 온라인 게임과 유사하다.
 아이템이란 것은 길거리를 돌아다니다가 쉽게 주울 수 있는 그런 흔한 물건이 아니다.
 “특수한 옵션을 지니고 있는 만큼 얻기도 어렵지. 하지만 얻어두면 분명 도움이 될 걸세.”
 “홍조 형님도 아이템을 가지고 계십니까?”
 “있기야 하지. 평소에는 인벤토리에 넣어두지만… 구경해볼 텐가?”
 “나중에 기회가 된다면 한 번 보여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지금은 워낙 보는 눈들이 많으니까요.”
 “허허, 현명한 선택이군.”
 아이템이라.
 듣던 중 반가운 소식이다.
 어차피 버그 몬스터와 겨루려면 아직까지 클래스 스킬을 쓸 수 없는 나로선 특별한 무기가 필요하다.
 특수능력을 해금할 때까지 당분간 아이템으로 부족한 실력을 충당하면 되지 않을까.
 속으로 쾌재를 내지르는 찰나에, 갑자기 가게 입구에서 웅성거리는 사람들의 소란스러움이 우리가 있는 테이블까지 전해진다.
 “무슨 일이라도 벌어진 모양인가 보군.”
 홍조 형님 역시 관심을 보인다.
 알아볼까 하는 생각으로 자리에서 일어서려고 하자, 나보다 먼저 일어선 수배가 시원스런 미소와 함께 동행을 제안한다.
 “같이 가서 한 번 확인해보시겠습니까? 형님.”
 “…그러자꾸나.”
 운동하던 친구라 그런지 행동 하나는 정말 빠르다.
 여하튼 수배와 함께 잠시 무슨 일인지 확인만 하고 오겠다는 말을 남기고 술집 입구로 향한다.
 입구 근처에 도달할 무렵이었다.
 “…노예 주제에 감히 이 플레이어님의 말을 거역해?!”
 “……!”
 결코 흘려들을 수 없는 단어가 우리 두 사람의 귓가를 자극해오기 시작한다.
 
 ***
 
 “…….”
 아직 코트를 입기에는 제법 더운 날씨임에도 불구하고 트렌치코트를 걸친 채 밤거리를 거닐던 강철의 시선이 어느 한쪽으로 고정된다.
 “…여기쯤인가.”
 품안에서 담배 하나를 꺼내 입에 문다.
 칙, 칙.
 지포 라이터로 불을 붙인 이후, 민가에 둘러싸인 작은 놀이터를 바라본다.
 “후우…….”
 길게 담배 연기를 뽐내며 놀이터 전반을 쭈욱 훑어본다.
 “그다지 좋지 않은 아우라가 감도는군.”
 사실 일만 아니라면 그다지 오고 싶진 않았다.
 그러나 어쩔 수도 없는 것이, 최근 의문의 상대에게 살해를 당한 플레이어의 수사를 여타 다른 평범한 NPC들에게 맡길 수도 없지 않은가.
 공식적으로는 버그 퇴치 관련 퀘스트를 할당하는 NPC를 맡고 있지만, 부가적으로는 플레이어들이 의문사를 당하는 이 수수께끼 사건도 담당하고 있다.
 범인은 누군지 뻔히 안다.
 해커(Hacker).
 세간을 뒤흔들고 있는 악질적인 녀석이라 할 수 있다.
 최근에 벌어진 사건의 희생자는 우석호란 이름의 플레이어다.
 2년이라는 플레이어 경력을 지니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해커에게 한주먹거리조차 안 된 불운의 인물이기도 하다.
 “스텟 포인트는 전부 빼앗기고, 그 자리에서 바로 연소(燃燒)되었단 말이지… 무슨 바이러스 핵을 파괴당한 버그 몬스터도 아니고, 연소라니. 거 참…….”
 씁쓸하게 웃어보이던 강철의 앞에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온다.
 “어머, 미리 온 손님이 있었네.”
 “…바이올렛인가.”
 목소리의 주인이 누구인지 직접 눈으로 보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단박에 알아차린 최강철이 쓴웃음을 내짓는다.
 “밤에도 일하는 이 불쌍한 아저씨를 위로해주려고 왔나?”
 “설마, 그럴 리가 없잖아.”
 “빈말이라도 그렇다고 해준다면 참 좋을 텐데 말이지.”
 애초에 농담으로 건넨 말이었기에 크게 신경을 쓰지 않기로 한다.
 “그나저나 네가 여기엔 무슨 일이지?”
 바이올렛을 바라보며 왜 이곳으로 왔는지에 대한 추궁을 해본다.
 최강철이야 어차피 이쪽 방면에 관련해서 업무를 처리하고 있는 NPC에게 자연스럽게 사건 현장으로 올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바이올렛은 이번 사건과 전혀 관련이 없는 NPC다.
 “우리 집이 바로 이 근처잖아? 산책 겸해서 주변을 돌아다니고 있었는데, 마침 맵에 네가 뜨더라고.”
 “아… 그랬었지.”
 이제야 생각이 난 모양인지 작은 탄식을 자아내는 강철이었다.
 사건 현장과 멀지 않은 곳에 살고 있는 NPC가 몇몇 있다.
 그중에 한 명이 바로 바이올렛이기도 하다.
 “뭐, 어차피 이사할 예정이지만.”
 “이사?”
 “응.”
 “그건 처음 듣는 말인데.”
 물론 최강철이라고 모든 NPC들의 사생활까지 전부 파악하고 있어야 한다는 건 아니다.
 NPC도 엄연히 말해서 사람이다.
 이들의 사생활을 보장해주는 건 당연한 일이라고 볼 수 있다.
 “나, 고시원에 살고 있잖아. 그래서 조만간 투룸으로 이사할까 해서.”
 “투룸이라… 혼자 살기엔 투룸은 사치라고 생각하는데. 원룸이면 족하지 않나.”
 “혼자가 아니라 둘이서 살 거거든.”
 “흐음.”
 친구랑 같이 돈을 합쳐 보증금을 해결하고 월세를 매달 반씩 나눠 체납하면, 보다 더 절약하는 생활을 보낼 수 있다.
 아마 그런 형태가 아닐까 싶다.
 바이올렛은 NPC들 사이에서도 독특한 포지션을 담당하고 있다.
 최강철이라든지 홍춘삼, 이정태 등 특별한 분야를 도맡아 플레이어에게 퀘스트를 부여하는 그런 역할이 아니다.
 바로 플레이어들을 감시하는 감시관의 역할을 맡고 있는 게 바로 바이올렛이다.
 그녀를 비롯해 몇몇 NPC들도 ‘감시관’이라는 포지션을 소화하고 있지만, 이 근방에는 바이올렛이 유일할 것이다.
 “생각해 보니 이번 사건에 너도 전혀 관계가 없는 게 아니군.”
 “그런 셈이지.”
 바이올렛이 고개를 끄덕이며 강철의 말에 대답을 해준다.
 플레이어를 감시하는 업무를 맡고 있는 바이올렛.
 그런데 그녀가 감시하던 플레이어 중 한 명이 해커에 의해 모든 스텟 포인트를 강탈당하고 그 자리에서 그대로 소멸되었다.
 어찌 보면 우석호의 위치를 제대로 추적하지 못한 바이올렛의 잘못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100퍼센트 그녀의 잘못이라고 보기에 힘든 것이, 애초에 상대방은 해커다. 충분히 정보 조작이라든지 그런 게 가능하기에 바이올렛보다 훨씬 더 웃도는 능력을 보유하고 있는 셈이다.
 그런데 과연 일개 NPC에 불과한 바이올렛이 해커를 어떻게 잡을 수 있을까.
 중앙 컴퓨터인 이그드라실마저 해킹할 수 있는 능력을 지닌 상위 해커들은 바이올렛조차 손을 델 수가 없다.
 오히려 해커와 조우했다가, 그녀조차 소멸 당할지도 모르니 말이다.
 “너나 나나 여러모로 위험한 계통에서 일을 하고 있군.”
 강철이 다시금 쓴웃음을 지어 보인다.
 피차일반(彼此一般)이라고 할까.
 “아무튼 수상해 보이는 플레이어가 있으면, 언제라도 연락 줘. 곧장 BHU를 움직여서라도 구속하거나 아니면 감금해 해커인지 아닌지부터 확인할 테니까.”
 “알고 있어, 아저씨.”
 바이올렛이 가볍게 윙크를 선보이며 작별인사를 알리듯 오른손을 가볍게 흔들어준다.
 “그럼 난 먼저 가볼게.”
 “그래, 수고해라.”
 “아저씨도 수고~”
 야밤에 성사된 짧은 만남을 뒤로하게 되는 두 NPC.
 그러나.
 이들을 몰래 지켜보는 시선이 있었음을 두 사람은 알아차리지 못하고 있었다.
 
 ***
 
 플레이어님이라는 단어를 듣자마자 불길한 느낌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NPC와 플레이어.
 그리고 플레이어와 NPC.
 두 존재는 분명 같은 인간이다.
 하지만 온라인 게임을 그대로 본떠 만든 것과 같은 이 세계에는 미묘하게 플레이어들이 스스로 ‘갑(甲)’이라는 강박관념을 가지고 있었다.
 물론 나도 어느 정도 이해는 한다.
 게임 상에서도 플레이어는 유저고, NPC는 그저 퀘스트를 주는 프로그램상의 등장인물에 불과하다.
 그렇기 때문에 플레이어가 된 이들 중에서는 더러 자연스럽게 NPC를 인간 이하의 취급을 할 때도 있을 것이다.
 실제로 그런 사례를 몇 개 들은 적도 있고 말이다.
 우리 눈앞에서 펼쳐지는 광경 또한 마찬가지였다.
 “모처럼 파티원들끼리 모여서 찐하게 술 한 잔 걸치려고 하니, 와서 술 좀 따라주는 역할이라도 해주면 좀 좋나! 안 그래?”
 “그럼! 그렇고말고!”
 5명 정도 되는 건장한 체격의 남자들이 고래고래 소리를 지른다.
 이미 술 좀 들어간 모양인가 보다.
 반면 남자들과 달리 젊은 여성 2명은 겁에 질린 눈으로 자신들을 둘러싼 남자들을 쳐다볼 수밖에 없었다.
 머리 위에 스텟 아이콘이 보이지 않는 것으로 봐선, 아마도 NPC가 아니리라 추정된다.
 아니, 추정이 아니라 확신한다.
 왜냐하면 플레이어로 보이는 남자들이 벌써부터 NPC 주제에 감히 플레이어님의 말을 거역하느니 마느니 하는 그런 말을 지껄이고 있었기 때문이다.
 주변에 듣는 귀들이 많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정신이 나간 녀석들이군…….”
 플레이어와 NPC, 기타 그 외적인 사실들도 일반인들에겐 결코 섣불리 밝혀선 안 된다.
 비밀유지를 엄수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녀석들은 이미 제정신이 아닌 모양인지 거리 한복판에서 목소리를 높여 소리를 내지르고 있었다.
 “NPC들 중에서는 경찰 같은 존재는 없나? 저런 놈들 안 잡아가고 뭐한데.”
 짜증 섞인 혼잣말을 내뱉자, 수배가 머쓱한 웃음소리를 토해낸다.
 “있긴 합니다만, 그래봤자 저 녀석들에게는 안 통할걸요.”
 “아는 놈들인가?”
 “이 일대 플레이어들 사이에선 유명합니다. 가장 막나가는 세력이라 할 수 있죠.”
 “세력?”
 “간단하게 말해서 뜻이 맞는 플레이어들끼리 뭉쳐 있는 그런 작은 집단이라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본래는 그런 집단을 특정 짓는 단어가 없었지만, 플레이어들 사이에선 암묵적으로 ‘길드(Guild)’라 부르고 있습니다.”
 “길드라…….”
 알면 알수록 점점 더 온라인 게임과 별반 다를 바가 없어진다.
 그래도 크게 상관은 없다.
 쉽게 예시를 들거나 이미지화 시킬 수 있는 무언가와 비슷하다면, 나로선 이해하기 쉬워지니 말이다.
 “저 녀석들도 길드에 소속되어 있단 뜻이군.”
 “예. 제가 알기론… ‘수성 길드’라고 알고 있습니다.”
 “수성 길드?”
 “힘 좀 쓰는 놈들끼리 만든 길드에요. 간단하게 그냥 이능력을 지닌 조직 폭력배들이라고 보시면 됩니다.”
 “과연, 그렇군.”
 어딜 가나 있다.
 남들에 비해 범상치 않은 능력을 지니거나, 혹은 자기가 좀 더 힘이 세다는 이유로 남들의 머리 위에 군림하려는 자들이 늘 있기 마련이다.
 수성 길드를 만든 길드장이 누구인지 모르겠으나, 녀석들이 이 일대를 접하고 있다는 건, 나로선 그다지 좋지 않은 사실이기도 하다.
 “저렇게 활개를 치고 다닌다면 NPC들 사이에서도 불만이 폭주할 터인데. 최강철 같은 놈들이 직접 나서지 않고 뭘 하는 거지?”
 “중앙 컴퓨터가 NPC의 인권까지 보호해주진 않으니까요. 물론 NPC들도 자신들의 인권을 위해서라도 수성 길드와 같은 세력에 적대해 싸워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그건 처음부터 NPC의 업무에 위배되는 일입니다. 이그드라실이 NPC들의 행동에 정당성이 없다고 판단하기 때문이거든요.”
 “…안타까운 일이군.”
 NPC는 이그드라실의 수족처럼 일하고 있다 들었다.
 이그드라실의 통제를 받는 만큼, 위에서 내려오는 명령을 거절할 순 없을 것이다.
 “플레이어들의 갑질이 심한 이유가 여기 있었군.”
 납득이 되었다.
 어째서 저들이 NPC를 저렇게나 홀대하는지 말이다.
 저항할 힘이 없는 약자는 한없이 괴롭힘을 받을 수밖에 없다.
 그리고 강자는 더더욱 기고만장해진다.
 그게 이 세계의 법칙이라고 한다면…….
 “지독한 곳이로군.”
 반사적으로 나온 혼잣말을 입에 담는다.
 그 순간.
 “그, 그만두시오! 사람들이 버젓이 보고 있는데… 무, 무슨 짓입니까!”
 “……?!”
 두 여성 NPC와 플레이어들 사이를 가로막듯 한 인물이 말을 더듬으며 엉거주춤한 걸음걸이로 등장한다.
 한 눈에 봐도 쇠약한 노인네에 불과하다.
 그런 노인네의 등장에 플레이어들의 이죽거림이 더욱 심해진다.
 “이 노망난 노친네는 또 누구야!!”
 “아니, 가만… 이 노인, 그 양반이잖아?”
 플레이어들이 누군지 알아보겠다는 식으로 지들끼리 대화를 주고받는다.
 물론.
 나 또한 노인의 정체가 누구인지 알고 있다.
 왜냐하면, 거의 매일 아침마다 만나고 있는 인물이기도 하니까.
 나뿐만 아니라 옆에 서 있던 수배 역시 깜짝 등장한 난입자의 정체를 알고 있는 모양인지 노인의 이름을 언급한다.
 “홍춘삼이군요.”
 “…….”
 왜 저 노인이 어째서 여기에 있는 건가.
 아니, 그보다 무슨 배짱으로 플레이어들을 가로막는지 모르겠다.
 상대는 일반인도 아닌 플레이어로, 자그마치 5명이나 된다.
 제아무리 홍춘삼이 스텟이 비교적 좋은 NPC라고 하나, 젊은 플레이어를 모두 상대할 순 없을 터이다.
 “…수배야.”
 “예, 형님.”
 “미안하지만, 이제 슬슬 한계인 거 같다.”
 불의를 보고 그냥 넘어가려 했던 자신이 한심스럽다.
 사실은 내가 자칫 먼저 주먹질을 휘두르면, 수배나 연희, 그리고 홍조 형님에게까지 피해가 갈지도 몰랐기에 어물쩍 방관자의 입장을 고수하려 했다.
 하지만.
 그건 어리석은 생각에 불과했다.
 저 힘없는 노인도 당당하게 나서는데, 나는 도대체 뭐가 두려워 이곳에서 꼼짝도 않고 서 있단 말인가.
 “어쩔 수 없군요. 저도 마침 녀석들이 마음에 들지 않았거든요.”
 수배 역시 가벼운 한숨을 내쉬며 주먹을 말아 쥔다.
 “기꺼이 같이 어울려 드리겠습니다.”
 
 ***
 
 NPC와 플레이어는 같은 사람이다.
 하지만 플레이어의 자격을 취득한 사람들은 어느 순간, 자신의 힘에 도취해 NPC들을 그저 보상 스텟이나 주는 도우미 역할로만 인식하게 되었다.
 NPC가 마음에 들지 않는 퀘스트를 보유하고 있으면, 자연스럽게 플레이어들은 그 NPC를 무시하기 마련이다.
 게다가 NPC들이 플레이어에게 저항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기에 그들을 괴롭히는 경우도 대다수 존재한다.
 이것이 바로 갑의 기분이 된 플레이어의 타락이 아닐까 싶다.
 그리고 일부의 플레이어 집단의 경우에는 NPC뿐만이 아니라 같은 플레이어들끼리 상위, 하위 그룹으로 나누려고 하는 움직임이 더러 보인다.
 얼마나 많은 퀘스트를 클리어했느냐.
 그리고 얼마나 많은 스텟 포인트를 보유하고 있느냐에 따라 해당 플레이어의 강함이 결정된다.
 언제부턴가 이들은 이들 나름대로 또 다른 계급 사회를 만들어가기 시작한 것이다.
 이 일대를 주름잡고 있는 플레이어 집단, 수성 길드.
 이 길드의 마스터이기도 한 남자, 김상남은 같은 플레이어들에게도 공포스러운 존재로 군림하고 있었다.
 플레이어 경력은 5년으로, 비교적 그리 오래 되진 않았지만 그래도 많은 인력과 더불어 자신이 이끌고 있는 수성 길드를 앞세워 단기간 내에 많은 퀘스트를 클리어할 수 있었다.
 덕분에 그는 수성 길드가 관리하고 있는 이 근방에선 가장 많은 스텟 포인트를 보유하고 있는 플레이어가 될 수 있었다.
 집단의 힘은 결코 무시할 수 없다.
 “…….”
 어두컴컴한 사무실 안에서 조용히 홀로 술잔을 기울이고 있던 상남의 눈에 공허함이 곁든다.
 반복되는 일상.
 퀘스트를 받고, 클리어하고, 그리고 스텟 포인트를 모은다.
 스텟 포인트는 무제한으로 올릴 수 있다.
 정해진 상한가가 없기에, 계속적으로 퀘스트를 클리어해 여분의 스텟 포인트를 모은다면 끝도 없이 자신의 능력을 키울 수 있는 게 바로 플레이어다.
 제한이 없기에 스텟 포인트를 수집하고는 있지만, 이 일대에선 사실 상남을 이길 수 있을 만한 플레이어는 없다 해도 무방하다.
 그에게는 자극이 필요하다.
 처음 플레이어가 되었을 당시에는 자신보다 한참 능력이 앞서는 플레이어들을 올려다보며 목표 의식을 불태웠다.
 넘어야 할 산이 있으면 그 산을 정복하기 위해 노력을 기울여야 하는 게 당연하다.
 허나 막상 산의 정상에 오르니, 더 이상 올라갈 곳이 없다.
 정복해야 할 곳은 딱 하나.
 바로 하늘이다.
 하지만 그 하늘을 오르기 위해선 등산이란 형태의 오름 수단이 아닌, 무언가 새로운 수단이 필요하다.
 상남은 그걸 ‘자극’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자신을 보다 더 강하게 만들어줄 수 있는 그런 자극이 필요하다.
 하지만…….
 “따분한 세상이군.”
 달성할 목표가 사라지면 결국 의욕 저하만이 남게 된다.
 자신도 모르게 연이은 한숨을 내쉬며 다시금 술잔을 기울이기 시작한다.
 허나 바로 그때였다.
 똑똑.
 노크 소리와 함께 자신이 거느리고 있는 부하 중 한 명의 목소리가 상남에게 양해를 구해온다.
 “마스터,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무슨 일이지?”
 “급히 전해드릴 말이 있습니다.”
 “…….”
 뭔가 사건이라도 발생한 것일까.
 하다못해 A급 이상의 버그 몬스터라도 등장했다고 한다면 좋겠다는 생각을 품으며 부하 직원의 출입을 허가한다.
 “들어오도록.”
 “예.”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선 검은 정장의 남성이 가볍게 목례를 하며 자신이 찾아온 이유에 대해 설명하기 시작한다.
 “문제가 발생했습니다.”
 “문제?”
 “예. 관할 구역 내에서 저희 수성 길드 일원에게 시비를 걸어온 플레이어가 나타났다는 소식입니다.”
 “…그렇군.”
 겁대가리를 상실한 녀석임이 틀림없다.
 수성 길드는 이 일대를 꽉 잡고 있는 세력이다.
 그런데 과연 누가 수성 길드에게 반기를 들겠는가?
 “트러블이 발생한 장소는 어디지?”
 “로데오 거리에 위치한 꿀막걸리 가게 앞이라고 합니다.”
 “그곳이라면… 내가 알고 있는 바론 도우석하고 몇몇 녀석들이 같이 술자리를 하러 간다고 들었는데. 혹시 그 녀석들이 트러블에 휘말린 건가?”
 “예, 그렇습니다.”
 “그럼 문제없겠군.”
 도우석은 수성 길드 내에서도 실력자로 잘 알려져 있는 행동대장이다.
 그와 맞붙게 된 플레이어라면 분명 뼈도 추스르지 못할 터.
 “어디 사는 누구인지 모르겠지만, 오늘이 그 녀석의 제삿날이 되겠군.”
 “저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어차피 이변이 없는 이상, 도우석의 선에서 끝날 것이리라.
 그렇게 생각하며 머릿속에서 트러블에 관한 내용은 깔끔하게 지워버리는 상남이었다.
 
 ***
 
 “홍춘삼이라… 잘 알고 있지. 수레나 밀어달라고 징징대는 NPC잖아?”
 “하하하! 그렇지, 그렇고말고!”
 “게다가 보상 스텟 포인트도 짜! 세상에 어느 누가 이 NPC를 거들떠보기나 하겠나!”
 수성 길드 조직원들의 말을 들으면 들을수록 참으로 가관이었다.
 그 퀘스트를 매일같이 수행하고 있는 나 같은 사람도 있는데 말이다.
 하기야, 저들이 나를 염두해두고 저런 말을 하는 건 아니겠지.
 “노친네한테 오늘, 플레이어의 맛을 제대로 느끼게 해줘야겠구만!”
 가장 선두에 선 녀석이 있는 힘껏 주먹을 말아 쥔다.
 딱 봐도 뭔가 묵직함에 느껴지지만, 그렇다고 여기서 수수방관할 생각은 추호도 없다.
 “가자, 수배야.”
 “예, 형님!”
 내 말이 끝나자마자 수배가 빠르게 행동에 임한다.
 한편.
 협박에도 불구하고 홍춘삼이란 노인은 결코 플레이어 앞에서 물러날 생각을 하지 않는다.
 자신과 같이 힘없는 NPC들을 지키고자 하는 의지가 엿보인다.
 하지만.
 누군가를 지키기 위해선, 절대적으로 힘이 필요하다.
 비록 홍춘삼이란 노인 자체가 근력적인 면에서 남들에 비해 좋은 스텟을 보유하고 있지만, 다수를 상대로 활약을 펼치기엔 다소 무리가 있지 않을까 싶다.
 “병원에 보내줄 테니까, 얌전히 가서 쉬기나 하셔!”
 남자가 말아 쥔 주먹을 있는 힘껏 휘두른다.
 허나 거기까지였다.
 “그쯤 해두시지.”
 빠아악!!!
 둔탁한 충격음과 동시에 오른손에 찌릿찌릿한 통각이 느껴진다.
 역시 보던 것과 별반 다르지 않게 상당히 무게감이 있는 주먹이었다.
 “넌… 뭐냐?”
 주먹을 거둬들인 남자의 인상이 잔뜩 구겨지기 시작한다.
 나 또한 가볍게 손을 풀면서 다섯 명의 플레이어와 정면으로 마주선다.
 “그저 지나가던 플레이어다.”
 “플레이어?”
 “그래. 너희와 같은 플레이어지.”
 “지랄하네. 수성 길드에 소속되어 있는 우리들과 동급으로 취급받길 원하냐? 정신이 나간 놈이구만.”
 “수성인지 유성인지 난 잘 모르니까, 괜히 약자 괴롭히지 말고 그냥 얌전히 가라. 여기서 괜히 망신살 당하고 싶지 않으면 말이지.”
 “…뭐어?!”
 남자의 안면이 사정없이 구겨진다.
 가뜩이나 인상이 더러운 녀석이 저러니까 더더욱 못 볼 꼴이다.
 “이 개새끼가……!”
 “형님이 말하는 대로 해라, 도우석.”
 “……?!”
 내 옆에 나란히 마주서며 상대방의 이름을 호명하는 수배.
 저 녀석의 이름이 도우석인가 보군.
 “네 녀석이 왜 여기에 있지?”
 도우석이라 불린 남자가 수배를 향해 시비조로 말을 걸어온다.
 서로 아는 사이라도 되는 건가.
 “난 술도 마시면 안 되나?”
 수배의 입가에 이죽거림이 새겨진다.
 그의 행동이 도우석이란 남자의 심기를 상당히 불편하게 만든 모양인지, 말아 쥔 주먹이 부들부들 떨리는 게 내 눈에 보일 정도였다.
 “죽고싶어 환장한 모양인가 보군.”
 살기를 가득 뿜어내는 도우석이었으나, 수배 역시 한 마디도 지지 않겠다는 식으로 그의 말을 맞받아친다.
 “죽긴 누가 죽어. 너, 나한테 한 번이라도 이긴 적이 있냐?
 “그건 너도 마찬가지가 아닌가.”
 “그렇다면 이번 기회에 누가 우위를 점하는지 한 번 제대로 붙어볼 필요가 있겠군.”
 “거절할 이유는 없지.”
 두 남자가 전의를 불태우기 시작한다.
 물론 지켜보는 입장이 된다면 편하겠지만, 애초에 이 대치 상황은 내가 자처한 것이다.
 그렇다면 해결 또한 내가 하는 편이 맞지 않겠는가.
 “수배야. 여기선 나한테 맡겨라.”
 “하지만 형님. 스텟 포인트도 얼마 없으신데 어떻게 저 녀석을 상대하시려고 하는 겁니까? 저 놈이 말은 험해도 모아둔 포인트가 꽤 된다구요.”
 “…….”
 물론 그 사실은 나도 잘 알고 있다.
 이미 레비를 통해서 녀석의 전력을 분석해봤다.
 뭐라고 해야 좋을까…….
 참으로 극단적인 녀석이란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클래스는 수배와 같은 격투가로 나타나 있지만, 정식으로 권투라는 무술을 배운 수배와 다르게 이 남자는 스트리트 파이터라는 느낌이 물씬 풍긴다.
 즉, 자신의 힘을 과신하고 멋대로 주먹을 휘두르는 그런 부류의 폭력배에 지나지 않는다.
 하지만 한 가지 눈에 확 띄는 정보가 있었다.
 육체 파트 중에서, 그것도 오른손에 관련된 근력 스텟만 비정상적으로 높다.
 오른손의 근력, 악력 등등이 최소 400 이상의 스텟 포인트가 투자되어 있었다.
 평균치가 100이라고 친다면, 녀석의 오른쪽 주먹은 일반인에 비해 4배 이상의 위력을 자랑한다는 뜻이다.
 거의 세계 톱 급 수준의 주먹질이라 봐도 무방하다.
 그러나 그런 녀석의 주먹질을 어렵지 않게 막아낸 사람 또한 나다.
 아마 녀석 또한 속으론 적지 않게 당황했을 것이다.
 “…….”
 내가 나서려고 하자, 도우석의 표정이 실시간으로 바뀐다.
 경계심.
 그 세 글자가 녀석의 얼굴에 그대로 나타난다.
 “형님, 저 녀석의 오른손 주먹 스텟은 400이 넘습니다. 형님의 스텟 포인트만으론 힘드실 겁니다.”
 “방금 저 녀석의 내가 주먹질을 막아낸 거, 너도 봤을 거 아니냐. 그것만으로도 부족한가?”
 “하지만 형님. 그건 저놈이 분명 힘 조절을 해서 그럴 겁니다. 녀석이 완력을 최대치로 발현하면, 형님의 뼈가 바스러질 수도 있다구요.”
 “그런 걱정은 안 해도 된다. 넌 그냥 보고만 있으면 돼.”
 “그래도…….”
 “이 싸움을 먼저 건 사람은 네가 아니고 바로 나다. 그 점을 명시해둬라.”
 “……”
 권투란 스포츠에 몸을 담고 있기에 수배 또한 남자들의 자존심 싸움이 얼마나 중요한지 잘 알고 있을 것이다.
 아마 수배라면 내 마음을 십분 이해해주리라 믿는다.
 “…알겠습니다. 하지만 형님은 저와 같은 파티원입니다. 위험하다 싶을 경우에는 제가 직접 나서서 녀석을 제지할 터이니 그것만은 이해해주시기 바랍니다.”
 “고맙다, 아우.”
 아마 수배의 입장에선 이 싸움이 불안하게 느껴질지도 모른다.
 아직 플레이어가 된지 채 1주일이 지나지 않은 나.
 그리고 최강의 오른 주먹을 지니고 있는 도우석.
 두 플레이어가 격돌하게 되면, 분명 결과는 뻔하다.
 아마도 나의 패배를 예상하는 쪽이 더 많으리라.
 “젊은이…….”
 홍춘삼이 비통한 표정을 지으며 나에게 미안한 감정을 담아 말한다.
 “이 늙은이 때문에 굳이 이런 싸움까지…….”
 “아닙니다, 어르신. 평소에도 저한테 소중한 퀘스트를 주시는데, 이 정도 보답은 해드려야지요.”
 남들이 제아무리 홍춘삼의 수레 퀘스트를 멸시한다 하더라도, 나에게 있어선 소중한 NPC임에는 틀림이 없다.
 “그렇게 생각해주니… 정말 고마우이…….”
 “감사는 나중에 받겠습니다. 우선은 먼저 해결해야 할 게 있으니까요.”
 그래. 지금 당장은 저 도우석이란 녀석의 콧대를 꺾을 필요가 있다.
 “덤벼보시지.”
 기만에 가득한 표정으로 나에게 도발을 시전하는 도우석이지만, 녀석의 어설픈 도발에 말려들 내가 아니다.
 -레비.
 -예, 주인님.
 가볍게 몸을 풀며 레비에게 명령을 내린다.
 -스텟 포인트를 재분배한다. 지금 즉시!
 -네, 알겠습니다.
 자, 그럼 어디 한 번…….
 스텟 포인트 400에 달하는 오른 주먹이 얼마나 강한지, 직접 한 번 체험해 볼까?
 
 <『리턴 마이 라이프』 2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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