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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랑지왕(人狼之王) 1화

2016.02.22 조회 1,639 추천 10


 붉고 요염한 색기에 끌린 것인가. 향긋한 꿀의 향기에 홀린 것인가. 자그마한 벌이 꽃 끝에 드리운 날개를 접고 내려앉았다.
 청년의 동공에는 벌이 꿀을 빠는 그 세세한 과정이 들어찼다.
 벌은 꿀을 찾아 제 집에서 멀리 떨어진 곳까지 분주히 날갯짓을 한다. 그 고생의 종착점에서 달콤한 꿀이 깃든 꽃을 찾아낸다.
 어디든 갈 수 있는 날개를 가지고 자유로이 노니는 벌을 바라보는 청년의 시선이 아련해졌다.
 “산아, 뭐해?”
 순간 느닷없이 등에 몸을 밀착한 소녀의 탓으로 몸이 기우뚱하며 생긴 그림자에 놀란 벌이 꿀을 채취하는 것을 멈추고 저 멀리 날아가 버렸다.
 “뭐야? 이 계집애야.”
 인상이 절로 찌푸려지는 순간이었다.
 벌 관찰도 그것으로 끝이었다.
 밀려오는 짜증에 산은 머리를 북적북적 긁으며 자신의 등 뒤에 찰싹 붙어있는 소녀를 떼어냈다.
 아담한 키에 채 젖살이 빠지지 않은 순박한 얼굴의 이 소녀는 산의 평생에 걸쳐 이어진 방랑생활 내내 같이 씻고 같이 먹어온 소꿉친구다.
 이름은 아연(阿淵)으로, 이동생활을 함께하는 이웃들은 저들 멋대로 이미 둘을 미래의 신랑 신부로 점찍어두기까지 했다.
 ‘뭐 그건 어른들의 사정이고.’
 남의 운명을 그렇게 좌지우지하는 것도 마음에 안 들지만, 무엇보다도 산에게 있어서 아연은 그저 어린 여동생에 불과했다.
 “근데 여기서 또 뭐하고 있었던 거야?”
 “벌을 보고 있었어.”
 “벌? 왜 꿀이라도 먹고 싶어?”
 의미를 모르겠는지 아연은 고개를 갸우뚱했고, 그 순진무구한 표정을 보고 마음이 약해진 산은 한숨을 쉬며 대답해주었다.
 “자유롭잖아. 너무 자유로워서.”
 “으음 그게 뭐야? 너무 어려워.”
 “으휴, 됐다. 이 녀석아.”
 산은 피식 웃으며 보란 듯 한 번 더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아연도 이제 열일곱이 되었다. 보통이라면 아무리 소꿉동무라 해도 시집갈 나이가 된 여자의 몸을 건드리는 것을 곱지 않은 시선으로 볼 테지만, 마을 어른들은 그저 보기 좋다는 듯 흐뭇하게 볼 뿐이었다.
 “아앗! 또! 머리 쓰다듬지 말라니까.”
 최근 부쩍 여자 태를 내는 아연이 쑥스러워하며 산의 손을 홱 뿌리쳤다.
 “그나저나 너 뭐 때문에 왔냐?”
 “아! 아저씨가 슬슬 해가 저물어간다고 저녁 먹으러 오래.”
 “아버지가? 그럼 가봐야겠네.”
 눈을 동그랗게 뜨는 것이, 산은 진심으로 놀란 듯 보였다.
 이런 식으로 아버지가 먼저 부르는 것이 상당히 드문 경우였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더욱더 꾸물거릴 수가 없었다.
 오랜 시간동안 수풀 사이에서 노니느라 여기저기 풀물이 든 옷을 툭툭 털며 산은 아연과 산길을 내려갔다.
 
 ***
 
 낙양(洛陽)에 위치한 숭산 인근. 몽고족이 초원에서 흔히 사용하는 게르(움막)가 집단으로 펼쳐져 있었다. 마치 마을처럼 보이는 그곳에는 저녁밥을 짓는 구수한 밥 냄새와 연기가 하늘을 맴돌고 있었다.
 산은 그중에서도 제일 작고 초라해 보이는 게르의 문을 열고 안에 들어섰다.
 “왔느냐?”
 다른 이들처럼 가마솥에 장작불을 지피고 있던 아버지가 뒤도 돌아보지 않은 채, 산의 기척을 아는 체했다.
 “예. 다녀왔습니다.”
 산은 아연과 있을 때와는 또 다른 어색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부자지간임에도 그들은 서로에게 격식과 예를 갖추는, 흔하지 않은 분위기를 자아냈다.
 산은 물론 그의 아버지는 중원에만도 수도 없이 많은 소수민족 중 하나였다.
 본래는 제법 수가 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그들 부족은 과거에 벌어진 무슨 일로 인해 뿔뿔이 흩어졌고, 그 와중에 간신히 살아남아 한데 모인 수는 약 오십 여 가구. 대략 이백 정도의 인원뿐이었다.
 이백이라고는 해도 넓디넓은 중원 땅에서는 얼마 되지 않은 숫자이고, 오랜 시간 함께 이동생활을 한 결과 이제는 가까운 친척인 양 모두가 서로의 얼굴을 대부분 알고 지낸다. 제법 걸쭉한 농을 주고받아도 좀처럼 큰소리를 내는 일이 없는 화목한 집단이었다. 이를테면 피는 이어지지 않았지만 대가족에 가까운 집단이었다.
 사실 산과 그의 아버지는 다른 사람들과 거리를 두고 사는 편이었다. 그럼에도 산의 아버지는 그들을 모두 통솔하는 우두머리 격으로 추앙받았고, 마을 사람들도 그를 곧잘 ‘촌장’이라고 부르며 의지했다.
 이는 산의 아버지가 과거에 중원의 표국과 깊은 관계를 맺고 여러 곳을 돌아다녔던 덕분에 지리에 박식하고 셈도 밝으며, 또한 지금까지 그가 내린 판단은 한 번도 틀린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마을 사람들은 그의 판단을 신뢰하고 존경했다.
 그런 아버지의 아들로 태어난 산은 어느새 차기 촌장인 양 또래들을 이끌고 있었다. 그래서일까. 여느 부자와 달리 이런 불편한 분위기를 감수해야 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앉아라.”
 어느덧 단출한 저녁이 차려졌고, 산은 저녁상을 앞에 두고 아버지와 진지하게 대면했다.
 산의 눈동자에서 자리 잡은 아버지는 늘 그렇듯 무표정했다. 이제는 나이가 들었지만 아직도 눈의 총기는 조금도 가시지 않은 건장한 중년이다.
 중년에 접어들었다고 해도 본래 나이보다는 훨씬 젊어 보이는 외모를 가진 탓에 아직까지 꽤 많은 아낙네들의 눈길을 받고 다니기도 하지만, 산의 어머니를 먼저 보낸 후 그가 다른 여자에게 눈길을 준 적은 없다.
 왜인지는 산도 모른다. 재혼에 대해 물은 적도 없다. 그런 이야기를 나눌 만큼 살가운 부자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조만간 낙양에서 일을 마치면 다시 이동을 하려 한다. 겨울이 오기 전에 떠날 거고, 식량을 비축해두어야 하니 내일부터 너희도 손을 거들거라.”
 ‘젠장!’
 이곳에 정착한 지 얼마나 됐다고 또 이동을 한다는 것일까?
 티를 내지는 않았지만 산의 주먹에 힘이 들어갔다.
 늘 그렇다. 그들은 언제나 꽃과 꿀을 찾아 이동하는 벌 같은 삶을 살아가지만 그들에게는 거두어지는 벌꿀도, 편히 몸을 누일 벌집 같은 안식처도 없다. 무언가에 쫓기는 듯 늘 옮겨 다니기만 할뿐이다.
 산은 그것이 늘 불만스러웠다.
 아니, 사실 무엇이 불만인지 스스로도 알지 못한다. 단 한 번이라도 벌처럼 자유롭게 날아가길 원하는 것인지, 아니면 다른 평범한 이들처럼 언제든 돌아갈 수 있는 고향을 가지고 싶은 것인지 알 수 없었다.
 다만 벌처럼 분주하게 이동하되, 언제든 돌아갈 수 있는 한 뼘 땅조차 없는 정처 없는 삶. 이런 목적조차 없는 이동생활에 진력났다는 것만은 분명했다.
 그것은 비단 그의 생각뿐만이 아니다. 이런 삶에 대해 모두가 불만이 없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불만이 터져 나올 때마다 그의 아버지는 혹독하게 청년들을 다그쳤다.
 산은 이번에는 결국 참지 못하고 반박했다.
 “어째서 겨울을 앞두고 이동을 하는 거죠?”
 “……우리는 영원히 안식처를 가질 수 없는 운명을 타고 났기 때문이다. 지금은 이유를 말하여도 너는 이해 못 할 터이니 잠자코 따르거라.”
 “소자의 나이도 올해로 열일곱입니다. 충분히 어른이라 생각합니다. 이제는 이유를 말씀해주시면 충분히 납득할 수 있다는 말입니다.”
 그렇다. 산의 불만은 늘 있는 이동 따위가 아니었다. 정착하지 못하는 삶도 아니었다. 바로 그의 아버지가 아무런 설명도 없이 늘 명령만을 내린다는 것이었다.
 아버지와 비슷한 나이대의 사람들이나 더 윗대의 어른들은 아버지의 명령을 곧이곧대로 따르지만 도망치듯 이동만 하는 생활에 대해 산이 같은 청년층들의 불만과 원성은 하루가 다르게 높아지고 있었다.
 하지만 산의 아버지는 여느 때처럼 고개를 절레절레 저을 뿐이었다.
 “틀렸다. 너는 아직 어리다. 네가 어른이라고 생각하는 것 역시 젊은 치기이며 오만이다. 너는 아직 네가 사는 우물 안의 것만이 세상이라 생각하지만 우물 밖이야말로 진짜 세상이며, 그곳은 그리 만만치 않다. 너도 나중에 내가 죽고 마을의 사람들을 이끌게 될 때가 오면, 틀림없이 나와 같은 생각을 할 것이다.”
 결국 또 이유를 말해줄 수 없다는 말이다.
 꽉 쥔 주먹에 손톱을 박아 넣은 산은 입술을 말아 깨물었다.
 분하다. 그토록 많은 책을 읽고 그토록 많은 것을 경험하기 위해 노력했지만 아버지는 아직도 그를 인정해주지 않는 것이다.
 “후우……. 내일부터 손을 거들겠습니다.”
 “잘 생각했느니라.”
 그것을 끝으로 두 부자간의 대화는 단절됐다.
 모닥불이 피어오르는 따뜻한 움막 안, 부자간의 무거운 침묵만이 가득한 저녁식사가 이어졌다.
 
 ***
 
 고된 노동의 시작은 이른 새벽부터였다. 긴 여정을 시작하기 위한 준비는 하루아침에 끝날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아버지에게 화가 단단히 날 대로 난 산이었지만 그렇다고 준비를 소홀히 할 수는 없다.
 산은 작업 중이던 말린 육포를 우물우물 씹었다.
 떠나기 전까지 필요한 열흘치의 식량을 제외하고 이동하는 동안 먹을 수 있도록 훈제와 건조작업으로 얻어질 물기 없는 식량들을 비축하는 중이었다.
 그 외에도 힘을 쓰는 일은 어지간하면 그와 또래의 젊은 청년들이 도맡았기 때문에 그들의 불만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였다.
 힘든 것은 여자들도 마찬가지였다. 아연과 또래 처녀들은 하루 종일 숭산의 냇가에서 물을 퍼 날라야 했다. 또 그보다 더 어린 아이들은 말과 양들에게 먹일 풀을 쉴 새 없이 뜯어 모아야 했다.
 출발은 열흘 뒤로 결정되었다. 덕분에 그들의 작업은 해가 중천으로 뜰 때까지 지루하게 이어졌다.
 점심을 먹은 후 제풀에 지친 산은 하던 일을 대강 마무리하고 아름드리나무의 가지 위에 올라서 태평스레 누웠다. 낮잠이라도 한숨 잘 요량이었다.
 바람에 잔잔히 흔들리는 나뭇잎이며 수풀내음이 마음을 편하게 해준다.
 “아! 또 잔다! 정말이지!”
 그것도 잠시, 그새 산을 찾아낸 아연이 물동이를 머리에 얹은 채 볼에 바람을 집어넣고 단단히 삐진 양 타박을 뱉어냈다.
 “좀 놔둬. 사람이 좀 쉬면서 해야지. 오늘내일로 끝날 일도 아닌데 무리했다가는 떠나기도 전에 골병든다.”
 산은 어깨를 으쓱하며 대수롭지 않는 양 맞받아쳤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마음 깊숙이 한숨을 쉴 수밖에 없었다. 이렇게 그가 숨을 돌릴 만할 때쯤이면 그녀뿐만 아니라 또래 아이들이 그를 찾기 때문이다.
 잔꾀를 부린다고는 하지만 사실 산이 아이들을 통제하면서 작업을 진행하면 일이 빨라지는 것이 사실이다.
 그걸 보며 마을 사람들은 그 아비에 그 아들이라며, 장래가 촉망한 인재라고 호평하지만 산은 그런 칭찬마저 싫었다.
 그는 언제고 마을을 떠날 생각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지금처럼 모두가 자신을 의지하기만 하면 그 때가 왔을 때 여행을 하는 제 발걸음을 무겁게 만들 테니까…….
 나뭇가지 위에서 잠이 든 척하던 산이 아연에게 불쑥 물었다.
 “연아. 너는 이 생활이 안 지겹냐?”
 “힘들지. 근데 다 같이 있으니까 그래도 즐거워.”
 “그래?”
 아연의 말은 거짓이 아니었다. 물을 긷고 물동이를 지느라 온몸이 젖을 만큼 땀이 흐르고 있었지만 그녀의 입가에 걸려있는 미소에는 거짓이라곤 숨겨져 있지 않았다.
 그래서일까. 산은 그 미소를 볼 때마다, 왠지 모르게 마음이 약해지곤 했다.
 “자, 그럼 슬슬 가볼까?”
 왠지 모르게 잠을 자고 싶은 마음이 싹 가셨다.
 그를 따라 나무 그늘에 앉아 산을 기다렸던 다른 청년들도 그럴 줄 알았다는 양 씩 웃는다.
 ‘뭐, 나쁘지 않으려나.’
 나뭇잎 사이로 부서진 햇살 탓인가, 그런 그들의 모습이 한 폭의 그림처럼 느껴졌다. 마치 환상처럼…….
 “꺄아아악!”
 하지만 그런 평화로운 광경도 잠시, 숲 인근에서 한 여아(女兒)의 비명소리가 들려왔다. 그에 깜짝 놀란 아연이 물동이를 떨어뜨려버렸다. 맑은 냇물이 흙바닥에 얼룩처럼 번지기 시작했다.
 산의 눈살이 절로 찌푸려졌다. 외부인의 출입이 흔치 않은 곳에 위치한 그들의 거주지 부근에서 터져 나온 비명소리에는 여러 의미가 담겨져 있었다.
 “연아, 당장 근처에 있는 아이들을 모으고 없어진 애들이 있는지 확인해봐.”
 “으, 응!”
 호흡을 갈무리한 산의 시야가 다양한 신록의 사이를 훑기 시작했다. 그리고 천천히 다리의 근육을 수축시킨다. 몸 안의 혈관이 꿈틀거리며 그것이 퍼져 오르는 뒤숭숭한 감각과 함께 공기를 가르며 산의 몸이 앞으로 쏘아져 나아가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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