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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환마도사 1권-1

2016.04.06 조회 4,228 추천 31


 귀환마도사 1권-1
 
 
 제1장. 귀환
 
 
 어느 깊은 산의 숲 속.
 그곳엔 검은색 로브를 푹 뒤집어쓴 청년 하나가 서 있었다.
 “드디어······ 드디어 돌아왔다.”
 청년이 떨리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러면서 감격스러운 얼굴로 주변을 돌아보았다.
 보이는 것이라곤 오직 나무와 풀들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청년은 감동의 눈물을 흘렸다.
 ‘도대체······ 내가 고향에 돌아온 게 몇 년 만이란 말인가.’
 청년의 이름은 진명으로, 그는 자신의 바로 뒤에 솟아 있는 나무에 등을 기댄 채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푸르다고 하기엔 조금 그런, 거무스름한 매연이 끼어 있는 하늘이다. 하지만 그에겐 더없이 그리웠던 하늘이기도 했다.
 ‘오십 년 만에 보는 하늘이로구나.’
 50년 전, 불가사의한 자연현상으로 인해 차원의 균열에 휩쓸려 에메르 차원계라 불리는 이계로 떨어졌던 그다.
 그런 그가 지금 이렇게 지구로 돌아온 것이었다.
 그것도 에메르 차원계 전체를 놓고 보더라도 적수가 없을 정도로 강력한 마법사가 되어서 말이다.
 ‘정말 오랜 세월이었다.’
 처음 에메르 차원계에 떨어졌을 때, 그는 가진 것이라곤 몸뚱이 하나밖에 없는 평범한 지구인에 불과했다.
 지금 그가 가지고 있는 강대한 마법의 힘은 그때엔 상상도 하지 못했었다.
 그때엔 그저 살기 위해, 죽지 않기 위해 남의 밑에서 농사를 짓고 종으로 부려졌을 뿐이었으니까.
 ‘돌아오고자 하는 의지가 나를 살린 셈이지.’
 만약 돌아오고자 하는 의지가 없었더라면 그대로 에메르 차원계에서 살다가 죽음을 맞이했을 것이다.
 그는 오직 살아서 고향인 지구로 돌아오겠다는 일념 하나만으로 이를 악물고선 악착같이 살아왔다. 온 길이 있으면 돌아갈 길도 있을 것이라 생각하면서.
 그렇게 버티다가 그는 운 좋게 한 마법사의 시종이 되었고, 그에게서 마법을 배우며 마침내 에메르 차원계에서 제일가는 위대한 마법사가 되었다.
 본래대로라면 70세 노인의 몸을 가지고 살아갔을 그다.
 하지만 지금은 모든 세상을 이루는 구성 원자이자, 마법의 근원인 마나의 축복을 받아 젊음을 되찾은 상태였다.
 “후······.”
 길게 숨을 내쉬는 것으로 잠시 울컥했던 감정을 다스리며 진명은 몸의 자세를 바로 했다.
 마법사로서 지녀야 할 가장 중요한 덕목 중 하나가 바로 평정심이다.
 마법이란 마법사의 의지(意志)가 마나를 머금고 물리적인 현상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그런 만큼 마법사가 평정심을 잃고 날뛰기 시작하면 마나가 폭주할 위험이 있었다.
 스윽.
 울컥하며 요동치던 감정이 다시 잔잔해지자 진명은 볼을 타고 흐르던 눈물을 닦아 냈다.
 고향으로 돌아왔으니 꿈에서 그리던 가족들을 만날 수 있었지만, 잃어버렸던 것을 얻은 것일 뿐이니 기뻐하거나 슬퍼해야 할 이유가 없으리라.
 그는 그렇게 스스로를 각인시키며 자신의 몸 상태를 살폈다.
 ‘나쁘지는 않군.’
 그는 차원의 벽을 넘어서 지구로 돌아왔다. 정상적인 생명체라면 결코 할 수 없는 일이다. 하지만 그는 그것을 해냈고, 그 대가로 적잖은 마력을 잃을 수밖에 없었다.
 ‘서클 6개와 95듀론의 마력인가.’
 본래 그는 8서클 마스터의 대마법사였다.
 그가 가졌던 마력은 150듀론. 이는 1서클을 마스터한 마법사가 지닐 수 있는 최대 마력의 150배에 해당하는 수치였다.
 ‘그래도 이 정도면 충분하지.’
 지구에서 살아가는 데 이 정도면 차고도 넘친다.
 지구에는 에메르 차원계와는 다르게 마법의 힘을 가진 자들이 존재하지 않는다.
 인간의 신체 능력을 극한으로 끌어 올리는 오러 능력자 역시 마찬가지다. 인류가 지닌 힘은 오직 과학뿐이고, 각 개개인의 힘은 그 과학에 의지한 것일 뿐이다.
 이런 세상에서 마법의 힘을 가지고 있는 그의 존재는 무적자(無敵者)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였다.
 “플라이, 인비저블.”
 나지막한 주문과 함께 그의 몸이 하늘로 날아오르기 시작했다.
 전신을 투명하게 만들어 주는 인비저블 마법이 시전된 이상, 그의 모습을 다른 사람들이 볼 수 없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아름답구나.’
 하늘 위로 십수 미터 가까이 올라간 상태에서 진명은 자신의 앞에 펼쳐져 있는 콘크리트의 숲을 바라보며 그렇게 생각했다.
 수십 년 전의 과거, 아직 어린아이였던 시절의 그는 도시의 모습을 바라보며 아무런 감흥도 갖지 않았었다. 당시의 그에게 있어 도시란, 그저 언제나 보아온, 당연하기만 한 것일 뿐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다.
 지금의 그가 느끼는 도시의 모습은 이국적이면서도 그 인위적인 아름다움을 한껏 뽐내고 있는 기하학적인 예술품에 가까웠다.
 한참 동안이나 그렇게 도시의 전경을 바라보고 있던 진명의 몸이 도시를 향해 날아갔다.
 ‘제대로 온 게 맞는 것 같군.’
 산을 벗어나, 도시에 가까워지며 진명은 그렇게 생각했다.
 지금 그의 눈에 보이는 모습들은 너무도 오래되어 이제는 회색빛으로 변해 버린 과거의 기억 속에 있던 풍경과 너무도 비슷했다.
 ‘저 언덕을 넘어서 도서관에 가곤 했었지.’
 산으로 올라오는 길의 가파른 언덕이 보인다. 그 너머로는 가세가 기울기 전, 가족들과 함께 자주 가던 추어탕 전문점이 시야에 들어왔다.
 추어탕 전문점 주변으론 그가 자주 가던 구멍가게들과 PC방도 있었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그의 입가에 잔잔한 미소가 피어올랐다.
 이 모든 것들은 과거의 그에게는 정말로 하찮기만 했다. 당시의 그에게 있어선 그저 그 자리에 있는 것들, 그 자신과는 아무런 상관도 없는 것들이라고 생각했었으니까.
 하지만 50여 년이 지난 지금에 있어선 저러한 구멍가게들 하나하나 역시 너무도 소중하게 느껴졌다. 저 모든 것들은 그가 오랜 세월 곱씹었던 추억 속의 존재였다.
 스스스.
 한참 동안이나 동네 하늘 위에서 두둥실 떠 있던 진명의 몸이 땅으로 내려앉았다.
 “후······.”
 그는 건물과 건물 사이의 자그마한 골목 사이에서 마법을 해제하며 자신의 모습을 드러냈다.
 “드디어 집이다.”
 그의 시선이 한쪽을 향했다. 조잡하게 지어진 3층짜리 다세대 주택이다. 과거, 아니 현재의 그들 가족은 저 건물의 2층에서 세를 들어 살고 있었다.
 그가 골목에서 나와 집으로 걸어갔다.
 곧이어 언제나 활짝 열려 있던 대문이 그를 반겼다. 대문 옆의 우편함엔 각종 회사들이 보내 온 독촉장이 수북이 쌓여 있었다.
 ‘다들 어렵게 살았었지.’
 그들 가족뿐만 아니라 이 건물에 세를 들어 사는 이들이 모두 그랬다. 그나마 여유가 있는 것은 3층에 살던 건물 주인뿐이었다.
 뚜벅뚜벅.
 잠시 과거를 회상하던 그가 대문을 지나 2층으로 향했다. 어딘가에서 흘러나오는 김치찌개 냄새가 그의 코끝을 간질였다. 50년 만에 맡아 보는 고향의 냄새다.
 “얼른 가야지. 늦겠네.”
 그의 여동생인 민지의 목소리와 함께 신발을 신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토록 그리워하던 동생이 코앞에 있다. 마법사로서 늘 평정심을 유지하고 언제나 냉정함을 잃지 말아야 하는 그이지만 지금만큼은 도저히 평정심을 유지할 수가 없었다.
 그가 계단을 올라 집 앞에 섰다.
 “······정민지.”
 50년의 그리움이 담긴 그 아련하고도 애틋한 목소리로 진명이 말했다.
 “오빠, 어디를 갔다 온 거야? 그 옷은 또 뭐고?”
 170센티미터에 달하는 훤칠한 키와 아름다운 외모를 지닌 여동생의 모습이 진명의 시야에 들어왔다.
 저 수려한 외모와 환상적인 몸매를 발판 삼아 패션모델로 활동하고 있는 민지다.
 그런 민지는 한심하다는 얼굴로 진명의 위아래를 훑어보며 물었다. 당연한 반응이다. 과거의 그는 정말로 한심했었으니까.
 “잘 있었느냐.”
 “오빠, 말투가 왜 그래? 말도 없이 외박해 놓고 와서 한다는 소리가 그거야? 도대체 정신이 있는 거야, 없는 거야?”
 “미안하다.”
 오늘은 그가 50년 전의 에메르 차원계로 휩쓸리게 된 그 시점의 바로 다음 날이다.
 사정을 알 리 없는 민지는 그가 친구들하고 술을 마시고 노느라 외박한 것이라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됐어. 들어가서 밥이나 먹어.”
 민지는 그 말을 남기고서 진명의 곁을 지나 현관문을 나섰다. 진명은 가만히 그 자리에 서서 민지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지금의 이 시점에서 그들 가족의 실질적인 가장은 민지였다.
 ‘꼬일 대로 꼬인 상황이었지.’
 인테리어 업체를 운영하던 아버지는 사업이 망해 빚쟁이들을 피한답시고 어머니와 이혼을 하고서 집을 나갔다. 빚 때문에 어쩔 수 없이 한 이혼이었다.
 얼마 못 가 아버지의 사업 실패로 그들 가족의 집이 경매에 넘어갔고, 가족은 어쩔 수 없이 전에 살던 집 근처에 월세방을 얻었다.
 지금 진명이 들어와 있는 이 집이 바로 그 월세방이었다.
 방이라고 하기에도 민망한 크기의, 자그마한 공간이 3개, 그리고 작은 거실이 전부다. 다 합해서 그 넓이가 15평이나 될까, 40평 남짓한 큰 집에서 살던 그들 가족에게 있어선 너무도 좁은 곳이었다.
 “좋구나.”
 과거의 그는 이 집을 정말 싫어했다.
 본래 살던 집의 절반도 안 되는 이 좁은 집구석에 들어오면 숨이 턱 막히는 것 같은 느낌이 들 정도였으니까.
 하지만 지금은 아니다.
 집이 이렇게 좁음에도 불구하고 진명은 미소를 지었다.
 좁든 넓든 간에 이곳은 그가 그토록 돌아오기를 원했던 자신과 가족의 집이다.
 철없는 소년에 불과했던 과거의 그라면 또 모를까, 세상 만물의 이치를 모두 깨달은 지금의 그에게 있어선 가족들의 따듯한 보금자리였다.
 끼이익.
 그가 자신의 방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아무렇게나 쌓여 있는 옷가지와 책 더미들이 그를 반겼다.
 중학교, 고등학교 참고서와 교과서들이 대부분이다. 공부를 등한시했던 탓에 책에는 먼지가 수북이 쌓여 있었다.
 ‘그때 공부를 열심히 했더라면 좋았을 텐데······.’
 그가 아직 중학교 2학년생이었던 시절, 아버지의 사업이 망하면서 그는 공부에 흥미를 잃게 되었다.
 그때부터 그는 그저 친구들과 함께 어울려 이곳저곳으로 놀러 다니고, 술과 여자로 소일했을 뿐이었다.
 자신의 방을 바라보며 잠시 추억에 잠겨 있던 진명이 로브에 달려 있던 주머니를 책상 위에 내려놓았다.
 동시에 그는 로브도 벗었다. 그러자 그의 탄탄한 근육질 몸매가 모습을 드러냈다.
 진명은 방의 한쪽에 로브를 접어서 올려놓고선 전신 거울 앞에 섰다.
 “흠······.”
 전신 거울에 비치는 자신의 모습을 바라보며 그가 침음성을 내뱉었다. 마나의 축복을 받아 젊음을 되찾게 되었다고는 하지만, 그의 몸 곳곳에 나 있던 온갖 흉터들까지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거친 삶이었다.’
 에메르 차원계에서 살아온 자신의 인생을 그렇게 정의하며 진명은 옷을 꺼냈다. 그가 입은 옷은 긴팔의 회색 후드 티와 청바지였다.
 집으로 돌아왔으니 꼭 가 보아야 할 곳이 있다. 진명은 자신의 서랍에서 지갑을 꺼냈다. 지갑 안엔 만 원 남짓한 돈과 버스카드가 들어 있었다.
 “후우······.”
 그는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쉬었다. 그토록 그리워하던 집이건만 들어오기가 무섭게 이렇게 나서는 이유는 단 하나, 바로 어머니 때문이었다.
 이 시기에 간암 3기 진단을 받은 진명의 어머니는 항암 치료를 받기 위해 병원에 입원 중이었다.
 가세가 완벽하게 기울어 버린 지금의 상황에서도 어머니가 항암 치료를 받을 수 있는 것은 어디까지나 동생 민지의 노력 덕분이다.
 하지만 그것도 지금까지일 뿐.
 패션모델이라곤 하지만 민지의 한 달 소득이 아주 많거나 한 것은 아니기에, 앞으로도 어머니가 계속해서 항암 치료를 받을 수 있을지는 확신할 수 없는 상황이다.
 치료를 받는 도중이라 하더라도 병원비를 내지 않으면 더 이상은 치료해 주지 않으니까. 설령 환자가 자신의 목숨을 위협하는 병마와 싸우고 있더라도 말이다.
 어떻게 보면 참 냉정한 논리다.
 의사라는 것은 사람의 생명을 구하기 위한 직업이고, 사람의 생명이라는 것은 돈으로는 환산할 수 없을 정도로 고귀한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의사들과 병원에서는 치료의 대가를 지불하지 못하는 이들을 더 이상 보호해 주고 구해주려 하지 않는다.
 진명의 손이 책상에 내려놓았던 주머니를 향했다. 에메르 차원계에서 만들어 두었던 마법이 걸려 있는 무한의 주머니다.
 웬만한 성인 남성의 손바닥만 한 주머니일 뿐이다. 하지만 이 주머니에는 그 수십 배의 부피를 지닌 물건들까지 얼마든지 들어갈 수 있었다.
 게다가 그 안에 들어 있는 물건의 무게가 아무리 무거워도 실질적으로 진명이 느낄 수 있는 무게는 주머니 자체의 무게뿐이기도 했다.
 ‘괜찮을지 모르겠군.’
 차원계의 벽을 통과하며 부작용으로 체내의 마법 서클과 마력의 상당 부분을 잃어버린 그다. 경우에 따라서는 무한의 주머니에 걸려 있는 마법이 해제되었을 수도 있었다.
 차원계의 벽을 통과해 지구에 도착했을 때, 가장 먼저 살펴봤어야 하건만, 고향으로 돌아왔다는 생각에 경황이 없어서 그러지 못하고 이제야 확인하는 것이다.
 진명은 주머니 안으로 천천히 손을 밀어 넣었다.
 “······이런.”
 만져지는 것이 2덩어리뿐이다. 본래 무한의 주머니 안에는 진명이 에메르 차원계에서 모아 온 각종 보석들이 잔뜩 들어 있었다.
 현대의 가치로 환산하면 못해도 수십억, 잘하면 수백억에서 수천억에 이를 정도로 엄청난 보석들이었다.
 하지만 지금 남아 있는 것은 오직 2덩어리의 길쭉한 것들뿐이다. 금괴인 것 같았다.
 낭패한 얼굴로 진명이 그것들을 주머니 밖으로 꺼냈다. 그의 짐작이 맞았다. 노란색으로 반짝반짝 빛나는 금덩어리들이 세상에 모습을 드러냈다.
 ‘주머니에 걸린 주문도 일부 손상되었구나.’
 주문 자체가 해제된 것은 아니다. 하지만 차원계의 벽을 통과하는 과정에서 마나의 간섭이 일어나 무한의 주머니에 걸려 있던 공간 왜곡 마법에 변형이 일어난 것 같았다.
 ‘난감하군.’
 남아 있는 2덩어리의 금괴를 바라보며 진명이 입맛을 다셨다.
 본래 그의 계획은 주머니에 담아 온 보석들을 처분해 거금을 마련하고, 그것으로 가족들을 부양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지금 남아 있는 2덩어리의 금괴만으론 가족을 부양하기는커녕, 빚을 갚는 것조차도 불가능했다.
 “흠······.”
 진명은 금괴들을 들고, 자신의 방을 나서 거실에 있는 식탁 앞에 앉았다.
 ‘마법을 이용해서 돈을 벌어야겠군.’
 수천억에 달하는 돈을 만들 수 없다면, 마법을 이용해서라도 돈을 벌 수밖에 없다. 진명은 그렇게 생각하며 금괴를 향해 시선을 옮겼다.
 반짝이는 2개의 금괴다. 2덩어리 모두 팔아서 하나는 어머니의 항암 치료 자금으로 사용하고, 나머지 하나는 그가 생각해 두었던 사업 자금으로 이용해야 할 것 같았다.
 ‘가족들에겐 복권에 당첨된 것으로 얘기하고.’
 백수 한량에 불과한 그가 목돈을 마련할 수 있는 방법은 그것뿐이다. 비록 가능성이 낮긴 하지만 복권에 당첨될 확률은 누구에게나 존재하는 것이니까.
 진명은 그렇게 생각하며 몸을 일으켰다. 대충 생각을 정리했으니 이제는 움직여야 할 시간이다.
 다시 방으로 돌아가 무한의 주머니에 금괴를 넣고, 그것을 주머니에 담으며 진명은 그렇게 생각했다.
 ‘날아서 가 볼까.’
 제일 먼저 항암 치료를 받고 있는 어머니를 찾아뵙기 위해 집을 나서는데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에메르 차원계에서 그는 어지간해서는 걸어 다니지 않았다. 움직일 때엔 거의 항상 마법 아티팩트를 이용해서 허공에서 날아다녔었다.
 그런 탓인지 병원으로 가기 위해 지하철역까지 걸어가고, 거기에서 지하철을 타고 또 한참을 움직여야 하는 병원으로 가는 일이 너무도 번거롭게 느껴졌다.
 병원까지는 날아서 가면 몇 분이면 도착할 거리다.
 50년 만에 뵙는 어머니이다.
 어머니를 다시 뵙는 이 순간을 50년 동안 고대해 온 진명이기도 했다. 엄청난 세월을 기다렸지만 지금은 더 이상 기다리고 싶지가 않았다.
 진명은 신발을 신고 현관문을 잠근 후 집에서 나섬과 동시에 주문을 외웠다.
 “플라이, 인비저블.”
 진명이 주문을 외움과 동시에 그의 몸이 투명해지며 허공에 떠올랐다. 그런 그의 모습을 본 이는 아무도 없었다.
 진명은 그대로 하늘을 향해 날아올랐다. 병원까지 가는 길은 5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명확하게 기억하고 있는 만큼, 기억하고 있는 길을 따라 날아가면 그만이었다.
 부우우웅.
 허공을 날며 빠른 속도로 움직이고 있는 그의 귓가에 대기를 찢는 바람 소리가 들려왔다. 마치 고속도로를 달리는 차 안에서 창문을 열었을 때 들리는 소리와도 같았다.
 ‘편하군.’
 도로를 따라 하늘을 날며 진명은 그렇게 생각했다. 신호등에 걸리지도 않고, 느리게 달리는 앞 차 때문에 그의 속도가 줄어들지도 않았다.
 그저 자유롭게 허공을 날아 이동한 그는 어머니가 입원해 있는 병원까지 차를 타고선 40분이 넘게 걸리는 거리를 집을 출발한 지 10분 만에 도착할 수 있었다.
 ‘여전하군.’
 진명의 시야에 기분 나쁘리 만치 새하얗게 도장되어 있는 병원의 외벽이 들어왔다. 과거에 그는 이러한 병원의 외벽을 굉장히 싫어했었다.
 하얗게 도색된 외벽과 하얗기 짝이 없는 의사들의 가운을 보고 있노라면, 어딘지 모르게 인간미가 결여된 기계들을 대하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드는 탓이었다.
 하지만 이제는 나이를 먹은 탓인지 별다른 생각이 들지 않았다. 그저 무덤덤하게 ‘과거엔 내가 싫어했었지.’라는 기억을 떠올릴 뿐이었다.
 스스스스.
 병원 건물의 중간 정도를 날고 있던 진명이 인근의 외진 골목 쪽으로 향했다. 마법을 해제하고 모습을 드러내기 위함이었다.
 뚜벅뚜벅.
 마법을 해제한 상태에서 진명이 병원 건물의 본관으로 들어섰다. 그와 동시에 병원만의 독특한 소독약 냄새가 그의 코끝을 자극했다.
 이 냄새 역시 과거엔 꽤 싫어했었다. 하지만 웬일인지 지금은 이 냄새가 나쁘지만은 않았다.
 소독약 냄새를 맡으며 잠시 본관의 전경을 살피던 진명이 안내 데스크로 향했다. 그곳엔 회색 정장을 입은 젊은 여자가 한 명 앉아 있었다.
 “어떻게 오셨나요?”
 진명이 다가오기가 무섭게 그녀가 자리에서 일어나며 물었다.
 “면회를 왔는데 병실이 어딘지 모르오.”
 그의 말에 그녀의 표정이 묘하게 변했다. 친절을 가장하는 그녀의 미소 속에서 ‘이건 뭐지?’ 하는 의아한 기색이 피어올랐다. 바로 진명의 말투 때문이었다.
 “면회 오신 환자분 성함이 어떻게 되시죠?”
 “최소영, 간암 환자라오.”
 “잠시만요.”
 진명을 바라보던 그녀의 시선이 안내 데스크 안쪽의 모니터로 향했다.
 “사십구 세 최소영 님 맞으시죠?”
 “그렇소.”
 “면회 오신 분 성함은 어떻게 되시나요?”
 “정진명. 최소영 씨의 아들이오.”
 “네, 알겠습니다. 본관 5층 무균 면회실로 가세요. 십 분 정도 기다리시면 최소영 님께서 면회실로 나오실 거예요. 면회 시간은 앞으로 사십 분 정도 남았답니다.”
 “고맙소.”
 “사극 오타쿠인가? 말투 참 이상하네.”
 안내 데스크에서 멀어지던 진명의 귓가로 그녀의 중얼거림이 들려왔다.
 그 순간 진명은 멋쩍게 웃었다.
 에메르 차원계에서의 하오체가 입에 익은 탓인지, 지금 그는 계속해서 사람들에게 하오체로 이야기하고 있었다.
 동생 민지와 마주했을 때에도 그랬고, 방금 전 안내 데스크의 안내양과 대화를 할 때에도 그랬다.
 안내양의 중얼거림을 듣지 못했더라면 자신이 하오체로 말하고 있다는 사실을 의식하지 못했을 것이었다. 그렇게 말하는 것은 그에겐 너무도 당연한 일이었으니까.
 ‘바꿔야겠어.’
 현대의 대한민국에서도 하오체를 사용하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지금은 나이 지긋한 노인들만의 전유물로 남게 되었다.
 그런 상황에서 아무리 좋게 봐주어야 20대 초반의, 앳된 소년과 청년의 중간 정도밖엔 되지 않는 그가 하오체를 사용하는 것은 듣는 사람이 거북할 수밖에 없었다.
 ‘5층이라고 했었지.’
 엘리베이터에 타고 5층으로 가는 버튼을 누르며 진명이 벽에 몸을 기댔다. 곧이어 덜컹하는 소리와 함께 엘리베이터가 위로 올라가기 시작했다.
 두근두근.
 가슴이 뛰기 시작했다. 아마도 50년 만에 어머니를 만나 뵙게 되었다는 사실 때문일 것이다.
 병원에 오기 전까지는 마법사 특유의 냉정함과 오랜 세월을 살아온 그의 연륜 덕분에 평정심을 유지할 수 있었다.
 덕분에 그는 자신의 감정이 상당히 무뎌졌다고 생각하기까지 했다.
 하지만 그것은 그의 착각이었다.
 막상 병원에 도착해 엘리베이터에 오르니 뛰는 가슴을, 그리고 떨리는 마음을 주체할 수가 없었다.
 ‘어머니······.’
 이제는 기억조차도 잘 나지 않는 어머니의 모습이 눈앞에 아른거린다.
 진명은 여전히 벽에 기댄 채, 엘리베이터의 스크린에 표시되는 층수가 어서 빨리 5층이 되길 기다렸다.
 2······ 3······ 4······.
 그의 기억 속에 남아 있던 엘리베이터의 속도는 이렇게 느리지 않았다.
 어떤 곳에서 엘리베이터를 타건 간에, 10층이 넘는 높이를 올라간다 하더라도 잠깐 거울을 보거나 상념에 빠져 있는 10초에서 20초 내외의 시간이면 도착하기 마련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이 시간이 너무도 느리게 느껴졌다. 한 층 한 층 올라가는 데 마치 억겁의 시간이 걸리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후우······.”
 엘리베이터가 5층에 도착하며 문이 열렸다. 진명은 길게 숨을 내쉬며 엘리베이터에서 내렸다. 동시에 그는 고개를 두리번거리며 무균 면회실로 가는 길을 찾았다.
 ‘이쪽이군.’
 벽 위쪽의 안내판에 쓰여 있는 글자들이 진명의 시선에 들어왔다. 지금 그가 서 있는 곳에서 오른쪽 방향이었다.
 두근두근.
 가슴이 좀 더 세차기 뛰기 시작했다.
 숨 쉬는 것조차도 떨렸던 첫 경험의 그 아련한 기억처럼, 진명은 면회실을 향해 걸어가면서도 온몸이 긴장으로 딱딱하게 굳어지는 것을 느꼈다.
 정말 이상한 일이다.
 진명은 에메르 차원계에서 50년을 살아오며 이렇게 긴장해 본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지구에서 20년 넘게 살아오면서도 역시 마찬가지였다.
 더군다나 지금 그가 만나려고 하는 사람은 다른 사람도 아니고, 그에게 있어선 가장 가까운 사람인 어머니였다.
 “어떻게 오셨죠?”
 무균 면회실 앞에 서 있던 간호사가 진명에게 다가오며 말했다. 뻣뻣하게 굳어진 그의 고개가 간호사를 향해 움직였다.
 “며, 면회를······ 어머니의 면회를 하고자 왔소.”
 진명의 목소리가 파르르 떨렸다. 간호사는 진명의 어투 때문인지 이상하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리더니 말을 이었다.
 “최소영 님의 면회를 오신 건가요?”
 “그렇소.”
 “아드님이시죠? 안내 데스크 쪽에서 연락이 왔어요. 저기 앉아서 잠깐만 기다려 주세요. 환자분도 곧 나오실 거예요.”
 간호사가 면회실 안쪽의 의자를 손으로 가리켰다. 투명한 유리로 만들어진 벽 너머로 또 다른 방의 모습이 보였다.
 유리 벽을 사이로 양쪽엔 의자와 함께 유선 전화기가 놓여 있었다.
 무균실은 말 그대로 외부의 균이 침입해서는 안 되는 곳인 만큼, 외부와의 접촉을 차단하고자 이렇게 시설을 만들어 둔 것이었다.
 벽 너머의 무균실 쪽으로 들어오는 입구를 바라보며 진명은 의자에 앉았다.
 조금 있으면 저쪽에서 어머니가 모습을 드러내실 것이다. 정말로 조금만 기다리면 된다. 지금까지 기다려 온 세월에 비하면 정말 찰나와도 같은 아주 짧은 시간일 뿐이다.
 하지만 너무도 길게 느껴진다.
 진명의 시선이 시계를 향했다.
 시계의 초침이 움직이고 있다.
 똑딱똑딱.
 아주 짧은 1초일 뿐이다. 하지만 지금은 그 1초가 너무도 길게 느껴졌다. 마치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오던 때와 같았다.
 “아······.”
 그렇게 시계를 보고 있던 진명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유리 벽 너머의 무균실 쪽 문이 열리고 있었다.
 두근! 두근! 두근! 두근!
 심장이 거칠게 뛰었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왔을 때, 그리고 면회실로 들어오던 때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였다.
 “아······.”
 곧이어 한 여인이 모습을 드러냈다.
 머리에는 새하얀 벙거지 모자를 쓰고 환하게 웃고 있는 중년의 여인이다.
 “어머니······.”
 어머니다. 지난 50년간 그토록 그리워하던 바로 그 사람.
 여기에서 이렇게 부른다고 해서 어머니에게 목소리가 들리지는 않는다. 진명은 그것을 너무도 잘 알았다.
 하지만 어머니의 얼굴을 본 순간, 그는 자신도 모르게 그렇게 중얼거릴 수밖에 없었다.
 어머니는 옆에 서 있는 간호사의 부축을 받으며 유리 벽 너머의 의자에 앉고선 수화기를 집어 들었다.
 진명은 그런 어머니의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당연한 말이지만 어머니의 모습은 전혀 달라지지 않은 것 같았다. 50년 전의 어느 날, 그가 보았던 그 모습 그대로였다.
 톡톡.
 인자한 미소로 진명의 얼굴을 마주하던 어머니가 손을 들어 유리 벽을 톡톡 쳤다. 진명이 정신을 차리자 어머니는 손가락으로 수화기를 가리켰다. 어서 수화기를 들어서 대화를 하자는 의미였다.
 진명이 떨리는 손으로 자신의 앞에 있는 수화기를 들어 귀에다 가져다 댔다.
 -진명아.
 어머니의 따듯하고 자애로운 목소리다. 진명은 그 목소리를 들으며 눈을 감았다. 마음 속 깊숙한 곳으로부터 뜨거운 무엇인가가 울컥 치밀어 오르는 것 같았다.
 주르륵.
 진명의 눈가에 눈물이 고였다. 그의 눈물은 곧 볼을 타고 흘러내려 턱에 맺혔다.
 ‘정말로 돌아왔다.’
 이 목소리를 듣기 위해, 이 모습을 보기 위해 돌아온 것이다. 에메르 차원계에서 진명은 인류 최고의 대마도사라는 직함과 함께 공작의 작위를 가지고 있었다.
 그의 영지는 전 차원계를 통틀어 가장 부유하고 아름다운 곳이었다. 그의 재산 역시 엄청난 규모로 전체 인류 중, 다섯 손가락 내에 들 수 있을 정도로 많았다.
 하지만 그는 그 모든 것을 버리고 지구로 돌아왔다. 가족을 만나기 위해서다.
 사기를 당해 사업에 실패하고, 모든 것을 잃어버린 채 빚쟁이들에게 쫓기는 아버지.
 간암과 맞서 싸우는 어머니, 그리고 그런 아버지를 대신해 어떻게 해서든 가계를 유지하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동생 민지.
 다시 가족을 만나고, 자신의 능력을 바탕으로 가족들의 고난을 끝냄과 동시에 그들에게 행복한 인생을 선사하기 위함이었다.
 탁탁!
 눈을 감은 채 눈물을 흘리며 감격에 겨워하던 진명의 귓가에 다급히 유리 벽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눈을 뜨고 보니 어머니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다급히 벽을 두드리고 있었다.
 -진명아! 왜 그러니, 무슨 일이라도 생긴 거야? 응? 갑자기 왜 그래!
 진명의 무릎에 있던 수화기에서 어머니의 걱정스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당신의 생명을 위협하고 있는 병마와 싸우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보단 자식의 안위를 더 걱정하는 어머니다. 진명은 계속해서 흘러내리는 눈물을 닦으며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그러면서 그는 수화기를 귀에 가져다 댔다.
 “아닙니다. 아니에요. 그저······ 어머니를 다시 뵐 수 있게 되어서 기쁠 뿐입니다. 기뻐서 우는 거예요.”
 -진명아, 정말 무슨 일 생긴 것 아니니? 정말로 그것 때문에 그러는 거야? 아무 일도 없니?
 어머니는 여전히 걱정스러운 얼굴로 진명을 향해 반문했다.
 과거의 그는 철이 없었다.
 가세가 기울어 가족들 모두가 괴로워하는 상황 속에서도, 그는 가족들을 위해 뭔가를 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용돈이 줄어드는 것을 원망했다.
 그랬던 그인 만큼 어머니가 이렇게 반응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정말로 괜찮습니다. 정말로······. 그저 다시 어머니를 뵙게 되었다는 사실만으로도 기쁩니다. 이렇게 뵐 수 있게 되어서······.”
 진명의 말에 어머니는 더 이상 반문하지 않았다. 그저 긴가민가하는 얼굴로 그의 모습을 바라볼 뿐이었다.
 “어머니, 그동안 죄송했습니다. 앞으로는······ 효도하겠습니다.”
 그 말과 함께 진명은 앉아 있던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면서 의자를 옆으로 치우고는, 그 자리에서 벽 너머의 어머니를 향해 큰절을 올렸다.
 에메르 차원계에 있으면서 그는 어머니와 아버지에게 이렇게 제대로 된 큰절을 올려 보지 못한 것이 너무도 후회가 되었다.
 어렸을 적부터 친척들과 사이가 좋지 못했던 탓에 그들 가족은 단 한 번도 친척들과 설을 쇠어 본 적이 없었다.
 그 탓이었다. 그가 부모님께 절을 해본 적이 없는 것은. 그리고 절을 못한 것과 함께 정말로 후회가 되는 일이 하나 더 있었다.
 진명은 몸을 일으켜 의자를 제자리에 놓고 거기에 앉으며 수화기를 들었다.
 어머니는 진명이 왜 이러는지 모르겠다는 듯 어리둥절한 얼굴이었지만, 한편으로는 기특하다는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어머니, 사랑합니다.”
 -어머······ 그래, 진명아. 엄마도 많이 사랑한다. 우리 진명이 철들었네?
 진명이 이렇게 직접적으로 사랑한다는 말을 할 것이라고는 생각도 못했던 듯, 어머니는 살짝 놀라더니 이내 밝게 웃어 보였다.
 어머니의 미소는 그동안 진명이 보아 온 그 어떤 미소보다도 밝고 아름다웠다.
 
 
 제2장. 금괴
 
 
 병원을 나서며 진명은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이 세상의 하늘은 에메르 차원계의 하늘처럼 푸르기만 했다.
 ‘그곳에서도 이런 생각을 하곤 했었지.’
 가족들이 그리워질 때면 에메르 차원계와 지구의 하늘은 같다며 스스로를 위안하곤 했다. 저 하늘을 보고 있는 한, 언젠가는 가족들을 만날 수 있을 것이라면서.
 ‘그래서 지금은 가족들을 만났고.’
 민지를 만나고, 어머니를 만났다. 앞으로 조금만 더 있으면 아버지도 만날 수 있을 터다.
 진명은 기분 좋게 미소를 지으며 바지 주머니 속으로 손을 밀어 넣었다.
 바지 주머니 속에 담겨 있는 무한의 주머니가 만져졌다. 그 안에는 자신이 가지고 온 2덩어리의 금괴가 들어 있었다.
 ‘일단 이걸 팔아야지.’
 금괴를 팔아서 자금을 마련하고, 그 자금으로 어머니의 병원비를 댈 것이다. 남은 자금으로는 그들 가문을 일으킬 사업을 진행할 것이고.
 ‘못해도 일억 가까이 나오긴 하겠지.’
 자세한 것은 그가 직접 알아봐야 하겠지만 대략 그 정도는 될 것 같았다.
 진명은 한 손으로는 무한의 주머니를, 나머지 한 손으로는 반대쪽 주머니에 들어 있는 지갑을 만지작거리며 은행을 찾았다.
 금괴를 판매한 대금을 현금으로 받을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러니 통장을 개설해서 그 통장으로 대금을 받아야 했다.
 ‘저곳이 좋겠군.’
 병원에서 나와 길거리를 걸으며 주변을 두리번거리던 진명의 시야에 농협이 들어왔다. 진명은 곧장 농협으로 들어가 자신의 통장을 개설했다.
 ‘역시 간단해.’
 농협에서 통장을 들고 나오며 진명은 그렇게 생각했다. 단순히 예금 계좌를 하나 만든 것인 만큼, 시간은 5분여밖에 걸리지 않았다.
 농협을 지키고 있던 청원경찰의 안내에 따라 신청서를 접수하고, 신분증과 함께 창구의 직원에게 건네주는 것이 절차의 전부였다.
 ‘이제는 금은방을 찾아야 하는데······.’
 마땅히 보이는 곳이 없다. 덕분에 그는 금은방을 찾기 위해 20여 분 동안 거리를 헤매야만 했다.
 “어서 오세요.”
 간신히 찾아낸 금은방의 문을 열고 들어서기가 무섭게 중년 남성의 인사가 들려왔다. 진명이 무한의 주머니에서 금괴 2덩어리를 꺼내 남자의 앞에 내려놓았다.
 “이걸 팔러 왔······ 습니다.”
 무심코 하오체를 사용하려던 것을 간신히 바꾸며 진명이 말했다. 중년인은 진명의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더니 금괴를 향해 시선을 옮겼다.
 금괴라는 것은 엄청나게 귀한 물건이다. 가격만 놓고 보더라도 평범한 사람들은 구입할 엄두조차 내지 못할 정도다.
 게다가 개인이 소유하는 금괴엔 그것을 제련한 회사의 이름이나 그 품질을 보증하는 업체에 대한 내용이 새겨져 있기 마련이다.
 하지만 지금 진명이 내놓은 금괴엔 그러한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그저 금빛으로 빛나는 맨들맨들한 표면만이 존재할 뿐이었다.
 “굉장히 특이한 금괴로군요.”
 진명이 내놓은 금괴를 한 손으로 들고서 중년인이 말했다. 하지만 진명은 무표정한 얼굴로 중년인의 모습을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이 정도면······ 원래 있던 인장들을 지운 것 같지도 않은데······.’
 처음부터 이런 모양새로 만들어졌다고 생각하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혹시 감정서는 가지고 오셨습니까?”
 중년인의 물음에 진명은 고개를 저었다. 이 금괴는 에메르 차원계에서 만들어진 물건이다. 마법 한 방이면 금괴의 순도가 확인되는 에메르 차원계의 특성상, 감정서가 있을 리가 없다.
 설령 감정서가 있다 하더라도 이 자리에서 내보일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감정서도 없고 품질 인증 인장도 찍혀 있지 않은 금괴는 처음 보는군요.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안쪽에서 기계를 이용해 순도와 무게를 측정해 보겠습니다.”
 중년인은 그렇게 말하며 금괴를 들고선 가게 안쪽의 자그마한 방으로 들어갔다. 진명은 가만히 서서 그 모습을 바라볼 뿐이었다.
 ‘장물로 취급하려고 하겠군.’
 에메르 차원계에서 50년이라는 세월을 살아온 만큼, 진명은 현대의 지구에 대해서는 잘 알지 못했다. 그가 아는 것은 아득한 과거로부터 이어져 온 몇몇 기억이 전부니까.
 하지만 그는 인간이라는 존재에 대해서는 너무도 잘 알았다.
 에메르 차원계와 지구를 합쳐서 70년 가까운 세월을 살아온 그다.
 게다가 마법을 익히고, 마법의 극의를 깨달으며 그는 사람이 말을 하거나 생각을 할 때 뿜어져 나오는 그 미세한 에너지의 파장을 느낄 수 있게 되었다.
 덕분에 상대방이 어떤 것을 생각하고 있는지, 어떤 의도를 가지고 있는지 정확히는 몰라도 대강은 알 수 있는 수준이었다.
 ‘장물로 취급하면 가격을 상당 부분 깎을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있겠지.’
 이건 굳이 상대방에게서 뿜어져 나오는 파장을 느끼지 않더라도 알 수 있는 것이다. 상대의 숨겨진 의도라기보단, 장사꾼으로서 이윤을 창출해 내는 장삿속의 원리에 가까운 것이니까.
 조금이라도 낮은 가격으로 물건을 구매해, 그 과정에서 이득을 내려고 하는 것은 장사를 하는 이라면 당연히 추구하는 바였다.
 “순도는 확실하군요.”
 잠깐의 시간이 지나고, 중년인이 금괴를 들고 나오며 말했다. 중년인은 잠시 진명의 눈치를 살폈다.
 ‘시중에 유통되는 금괴들 중 이런 것은 없다. 검은 돈에 관련된 것이 아니라면 말이야.’
 돈세탁을 위해, 출처가 불분명한 검은 자금으로 시중에서 금을 대량으로 구입해 만들어 낸 금괴일 것이라고 중년인은 생각했다.
 그러지 않고서야 이런 금괴가 만들어질 수도 없고, 시중에 유통될 수도 없으니까.
 “하지만······ 저는 이런 장물은 어지간해서는 취급하지 않습니다. 별도의 상당한 수수료가 보장되어야만 가능하지요.”
 “장물이라······.”
 역시나 이런 전개다. 진명은 피식 웃으며 중년인과 자신의 사이에 놓여 있던 금괴 2덩어리를 모두 집어 들었다.
 당장이라도 금괴들을 들고, 금은방을 나설 것 같은 모습이었다.
 “장물이 아닙니다.”
 “이런 금괴가 장물이 아니라고요? 그럴 리가······. 농담이 좀 과한 것 같습니다.”
 중년인이 씩 웃으며 손가락으로 CCTV를 가리켰다.
 “저 CCTV로 손님의 모습은 모두 촬영되고 있습니다. 정말 손님의 말대로 이 금괴가 장물이 아니라면 다행이겠지만 만약 장물이라면······.”
 중년인이 말끝을 흐렸다. 장물이라면 지금의 이 인상착의를 경찰에 제공해서 수사에 협조하겠다는 의미였다.
 진명이 피식 웃었다. 지금 중년인은 자신에게 막대한 수수료를 안기는 방식으로 금괴를 팔라고 협박하고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수고하시오.”
 금괴를 다시 무한의 주머니에 넣으며 진명은 몸을 돌려 금은방을 나섰다. 장물이 아닌 만큼 굳이 이곳에서만 판매해야 할 이유가 없다.
 그의 모습이 촬영된 CCTV 자료가 경찰에게 넘어간다 한들 불법적인 루트로 금괴를 얻은 것이 아니니 그 역시 상관없었다.
 “자······ 잠깐!”
 길을 걸어가던 진명의 등 뒤에서 조금 전의 그 금은방 중년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돌아서서 보니 중년인이 그에게 다가오고 있었다.
 “정말로 장물이 아닙니까?”
 중년인이 방금 전과는 사뭇 다른 얼굴로 물었다. 진명은 그런 중년인의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더니 살짝 얼굴을 찌푸렸다.
 “조금 전에는 제가 실례를 저지른 것 같습니다. 죄송합니다. 잠시 저희 가게에서 대화를 좀 할 수 없겠습니까?”
 정말 정중한 태도다. 진명이 고개를 끄덕이며 중년인과 함께 가게로 들어갔다.
 “자, 여기 앉으십시오.”
 중년인이 가게 한쪽의 소파를 가리켰다. 진명이 소파에 앉자 중년인은 가게의 안쪽에서 차를 가지고 왔다.
 하얀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커피였다.
 “좀 전에는 정말 죄송했습니다. 금은방을 하다 보면 가끔 도둑들이 훔친 패물 같은 것들을 처리하려고 오는지라······. 그렇다고 해서 손님께서 도둑처럼 보인다는 말씀은 아닙니다. 금괴에 인장도 찍혀 있지 않고 감정서도 없어서 말입니다.”
 약간은 횡설수설하는 모양새다. 중년인은 어색한 얼굴로 웃고 있었다.
 “사실 이건 방금 전과는 조금 다른 이야기입니다만······ 손님께서 가지고 계신 그 금괴는 다른 금은방을 가셔도 처분하시기가 쉽지 않으실 겁니다. 요즘 금괴는 다 품질 인증 인장이나 감정서가 있는데, 손님은 그런 것들이 없으시니 말입니다.”
 중년인의 말을 들으며 진명이 고개를 끄덕였다. 일리는 있는 이야기였다.
 “물론 손님께서 그러시다는 건 아니지만 품질 인증 인장이나 감정서가 없는 금괴를 구입하는 것은 상당히 위험한 행위입니다. 만약 그 물건이 장물로 밝혀진다면, 법률상 구입을 한 업자들도 장물취득죄로 잡혀갈 수가 있는 탓입니다.”
 “장물취득죄라······.”
 “법률상의 문제입니다. 그래서 수수료를 제할 수밖에 없는 것이기도 합니다.”
 중년인은 그렇게 말을 끝마치며 진명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진명은 여전히 무표정한 얼굴로 앉아 있을 뿐이었다.
 ‘넘어와야 할 텐데······.’
 
 ***
 
 1억 325만 원.
 진명은 자신의 통장에 찍혀 있는 숫자들을 바라보며 피식 웃었다.
 에메르 차원계에선 모든 인간을 통틀어 가장 부유한 인물들 중 하나였던 그이지만 이곳, 지구에서의 그는 그저 가난하고 무능력한 철부지였다.
 지구에서 살아오며 쌓인 50년 전의 기억들 속에선 그저 가난에 찌들어 방황하던 스스로의 모습만이 있을 뿐이었다.
 하지만 이제는 다르다.
 그저 금괴 2덩어리를 판 것만으로 그는 1억이라는, 비교적 액수가 커다란 돈을 갖게 되었다.
 ‘일억이라는 돈이 엄청나게 큰돈은 아니지만······.’
 진명이 그 자신과 가족들의 미래를 설계하는 데 있어선 충분한 액수다.
 사실 1억이라는 현금은 다른 평범한 사람들 역시 미래를 설계할 수 있을 만한 액수이긴 하다. 1억으로 할 수 있는 것은 무궁무진하게 많으니까.
 그런 1억이 진명의 손에 들어 있다.
 비록 차원계의 벽을 넘어오며 약해지긴 했지만 그에겐 아직도 6서클에 달하는 마법이 있다. 이 마법과 1억의 현금을 함께 이용한다면 엄청난 시너지 효과를 낼 수 있을 것이었다.
 진명은 그렇게 생각하며 외진 골목으로 들어가 인비저블과 플라이를 시전했다. 금괴를 팔고, 돈을 얻었으니 이제는 다음 단계의 행동에 착수해야 했다.
 
 ***
 
 자신의 집, 진명은 자신의 방에서 가부좌를 틀었다.
 여전히 아버지는 빚쟁이들을 피해 도망치고 있고, 어머니는 병원에서 항암 치료를 받고 있으며, 동생은 일을 하러 나간 상태다.
 집에는 그밖에 없었다.
 “후우······.”
 길게 숨을 내쉬고, 눈을 감으며 진명은 자신의 모든 정신을 심장의 마나홀로 집중했다.
 차원계의 벽을 넘어오며 마법 서클이 2개가 사라졌다. 마나 역시 상당 부분 손실을 입었고.
 비록 에메르 차원계에서처럼 모든 힘을 동원해 전투를 벌이거나 할 일은 없다지만 손상된 마나홀을 가다듬을 필요는 있었다.
 ‘사실 제일 먼저 해야 할 일이었지.’
 손상된 마나홀을 가다듬는 것이 빠르면 빠를수록 더 많은 부분을 복구할 수 있다.
 그의 복구가 이렇게 늦어진 것은 순전히 지구로 돌아왔다는 환희와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 그리고 더 이상은 마법의 경지가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는 생각 탓이었다.
 사실 손상된 마법 서클이나 마나의 양은 지금 당장 복구하지 않아도 그가 시간만 투자한다면 얼마든지 천천히 회복할 수 있는 것이었으니까.
 그의 마나홀은 처음 지구에 돌아왔던 그 순간에 파악했던 것처럼 그다지 심각한 손상을 입은 것은 아니었다.
 몇 달 정도 요양을 취하며 복구에 전념한다면 얼마든지 예전과 같은 경지를 회복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몇 달이라······.’
 지금의 그에게 있어선 너무도 긴 시간이다.
 당장 그의 가족들은 하루하루를 간신히 살아가고 있다. 그가 금괴를 팔아 얻은 돈을 생활비 명목으로 건넨다 하더라도 크게 달라질 것은 없다.
 병원 치료비 걱정이 없어지고, 매달 월세 낼 걱정이 없어진다는 정도.
 하지만 어머니가 암을 이겨 내고 건강을 되찾는 것은 아니다. 아버지가 빚쟁이들에게 쫓겨 다니는 생활을 청산하고 다시 예전처럼 행복한 가정의 가장으로서 살아갈 수 있는 것 역시 아니다.
 힘이 아예 없다면 또 모를까, 이미 충분해서 차고도 넘치는 상황에서 가족들을 이대로 살아가도록 내버려 둘 수는 없다.
 지금 당장 마나홀을 복구하려 들지 않아도, 8서클 마법사가 아니라 6서클 마법사로서 지낸다 하더라도 이 지구에서 필요한 것은 모두 다 할 수 있다.
 심각하지 않은 병 따위는 주문 하나만으로 얼마든지 치료할 수 있고, 누가 되었든 간에 주문 몇 개면 흔적도 없이 암살할 수도 있다.
 이것이 현재의 그이고, 이 세상에서 그가 지닌 힘의 위력이다.
 8서클을 회복하겠다며 날뛰어야 할 만한 이유는 전혀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그럼에도 6서클보단 8서클이 더 나은 것이 사실이다. 어떻게 되었든 그는 현재 두 서클 밑의 경지로 내려온 것이니까.
 ‘천천히 복구해야겠어.’
 시간이야 좀 많이 걸리겠지만 그 편이 차라리 낫다. 우선 지금 당장은 가족들의 문제를 먼저 해결해야 하니까.
 진명은 그렇게 생각하며 마나홀 내부에서 흩어진 마법 서클의 잔재를 천천히 수습하기 시작했다. 이것만 하더라도 족히 일주일 가까이 걸리는 작업이다.
 마나홀 내부에 있는 다른 서클들에 영향을 주지 않으면서 오직 파괴되고, 손상된 서클들의 잔재만을 모으는 것은 마치 수술을 하면서 손상된 장기를 어루만져 주는 것만큼이나 까다로웠다.
 작업에 집중하고 있는 진명의 이마에 땀방울이 맺혔다. 그러면서도 진명의 자세는 한 점의 흐트러짐도 없었다.
 처음 앉았던 그 자세 그대로 허리를 꼿꼿이 세운 채 오직 마나홀 내부에 흩어진 마법 서클의 잔재를 수습하는 것에만 집중할 뿐이었다.
 드드드드.
 한참 작업에 집중하고 있던 진명에게 핸드폰 진동 소리가 들려왔다. 한 번 울리고 끊긴 것이 문자 메시지가 온 것 같았다.
 진명이 천천히 눈을 뜨며 자세를 편히 했다. 그러면서 그는 앉아 있던 자리에서 일어나 진동 소리가 들려온 방향을 향했다.
 그의 핸드폰은 책상 위, 한쪽 구석에 놓여 있었다.
 “음······.”
 문자 메시지의 내용을 확인하며 진명은 난감하다는 얼굴로 침음성을 내뱉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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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핸드폰 요금을 내지 않아서 온 문자 메시지다. 진명은 한참 동안이나 문자 메시지의 내용을 바라보다가 피식 웃었다.
 기억을 떠올려 보면, 그의 핸드폰은 수시로 발신이 끊기곤 했었다. 진명은 곧바로 몸을 일으켰다. 은행에 찾아가 현금을 좀 인출한 뒤 핸드폰 요금을 내야 할 것 같았다.
 철컥.
 그가 자신의 방을 나서는 순간, 굳게 잠겨 있던 현관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의 동생인 민지가 집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꽤나 피곤해 보이는 얼굴이다. 진명은 가만히 서서 민지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민지는 그런 진명은 본체만체하며 신발을 벗고선 자신의 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이랬었지.’
 자신을 무시하는 민지의 모습에 진명은 쓰게 웃었다. 그러면서 그는 민지의 방 앞에 섰다.
 스으윽.
 방문 너머로 민지가 옷을 갈아입는 소리가 들렸다. 진명은 민지가 옷을 다 갈아입을 때까지 기다렸다가 입을 열었다.
 “민지야, 잠깐만 얘기 좀 하자.”
 “무슨 얘기?”
 방문을 열며 무표정한 얼굴로 민지가 반문했다.
 “어머니 병원비······ 부족하냐?”
 “그걸 오빠가 알아서 뭐하려고? 돈이라도 보태 주게?”
 민지의 얼굴에 비웃는 기색이 떠올랐다. 그럴 만도 할 것이다. 본래의 그에겐 아무런 능력도 없었으니까. 하지만 이제는 아니다.
 진명이 고개를 끄덕였다.
 “돈이 좀 생겼다. 너 혼자서 어머니 병원비 대는 건 힘들 것 아니냐.”
 “······얼마나 생겼는데?”
 평소의 진명이라고는 할 수 없는, 어딘가 다른 이질적인 그의 모습을 바라보며 민지가 물었다. 그녀는 혹시나 하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좀 된다. 치료비 납부가 어떻게 되어 가는지 그것 좀 알려 줘.”
 “많이······ 부족해. 이번 3차 치료까지는 어떻게 치료를 받기는 했는데, 3차 치료비에서 아직 백만 원을 덜 냈어······.”
 말을 다함과 동시에 민지는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쉬었다. 그녀는 속이 답답하다는 듯 가슴을 두드리더니 주방으로 향했다.
 벌컥벌컥.
 민지가 물을 마시는 모습을 바라보며 진명은 의자를 빼고 식탁 앞에 앉았다. 민지가 그 옆에 앉으며 말을 이었다.
 “오빠도 알지? 엄마 항암 치료는 6차까지 있다는 거. 한 번 할 때마다 치료비만 삼백삼십만 원에, 약값도 계속 나가야 하는데······. 이번에 못 낸 것하고 다음번 치료비를 못 내면 아마 병원에서도 치료를 안 해 주려고 할 거야.”
 민지의 목소리에서 생기가 느껴지질 않는다.
 민지는 아직 20살의 어린 여자아이일 뿐이다.
 그 나이대의 여자아이들은 세상 물정 모르고 날뛰며 자신의 즐거움을 찾기에 바쁘다. 하지만 민지는 어려운 가정 형편 때문에 소녀 가장이 되어 현실의 무거운 짐을 저 가녀린 두 어깨에 지고 있었다.
 ‘기특한 놈.’
 정말 기특한 녀석이다.
 이 녀석이 아니었더라면 가족들은 지금까지 버티지도 못했을 것이었다.
 ‘병원비가 아깝긴 하지만······.’
 어쩔 수 없다.
 그에게 마법이 있다고는 하지만, 마법으로 암을 치료하는 것은 조금 다른 이야기다.
 암이라는 것은 단순한 외상이나 내상과는 그 범주를 달리하는 질병이다. 신체 내부의 세포들이 돌연변이를 일으켜 인간에게 유해한 존재가 되어 가는 탓이다.
 이런 암을 치료하기 위해서라면 체내에 존재하는 모든 암세포를 제거해야 한다.
 마법을 이용해서 치료하는 것이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하지만 마법을 이용한 치료도 100퍼센트 가능할 것이라곤 확신할 수가 없으니 병원 치료도 병행해야 한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었다.
 “당장 필요한 돈이 사백삼십만 원인 거냐?”
 “지금 당장은 백만 원 정도만 납부하면 돼. 다음번 치료를 시작할 때 삼백삼십만 원을 더 납부해야 하고. 오빠······ 그 돈 있는 거야?”
 민지가 파르르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그녀의 오빠인 진명은 파락호나 다름없는 인물이었다.
 어머니가 간암 3기 판정을 받았던 때에도 왜 용돈을 주지 않느냐며 술을 먹고 난동을 부렸을 정도다.
 그런 진명에게 병원비를 낼 돈이 있을 리가 없다.
 하지만 지금 민지의 눈에 비치는 진명은 불과 몇 달 전에 보았고, 며칠 전에 보았던 그 망나니나 다름없던 모습과는 달랐다.
 “네 계좌 번호를 알려 줘. 거기에 사백삼십만 원을 넣어 줄 테니. 네가 가지고 있다가 병원에 납부해라.”
 “정말로······ 그만한 돈이 있어?”
 “그래.”
 “어떻게 된 건데? 오빠는 지금까지 항상 놀기만 했잖아. 그동안 돈을 모았을 리도 없고······. 일을 하지도 않았는데 갑자기 그런 거금이 어디에서 생겨난 거야?”
 이런 반응이 나오는 것이 당연하다. 진명은 태연한 얼굴로 말했다.
 “복권에 당첨됐다.”
 “복권? 무슨 복권? 얼마가 당첨된 건데?”
 민지의 눈동자가 동그래졌다.
 “일억 조금 넘는다. 그리고······ 앞으로는 나도 일을 하면서 돈을 벌 거니까 그렇게 알아 둬.”
 진명은 그렇게 말하고서 몸을 일으켰다. 그런 그의 귓가로 민지가 멍한 얼굴로 ‘일억······.’이라며 중얼거리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정신을 차리면 자기가 관리하겠다고 난리를 치겠지.’
 민지는 그를 신뢰하지 못한다. 그의 손에 1억이라는 거금이 있으면 얼마 지나지 않아 주색으로 모두 탕진해 버릴 것이라 생각할 가능성이 높았다.
 ‘민지에게 돈을 넘길 순 없지.’
 그는 더 이상 과거의 그 망나니 같던 정진명이 아니다. 에메르 차원계에서 50년을 살면서 거대한 영지를 경영하던 공작이자 대마법사였던 것이다.
 그의 손에 들어 있는 1억이라는 돈은 단순히 지금 당장의 고난을 해결하는 것이 아니라, 가족의 미래를 건설하기 위해 쓰여야만 했다.
 “오빠!”
 현관문을 열고 밖으로 나오는데 집 안에서 그를 부르는 민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진명은 그 목소리를 뒤로한 채 빠른 걸음으로 그저 은행으로 향할 뿐이었다.
 
 ***
 
 드드드드드.
 기계가 돈을 세는 소리다.
 진명은 자신의 앞에 있는 ATM 기계를 바라보았다. 이 안에는 수천만 원에서 수억 원에 달하는 금액이 들어 있을 것 같았다.
 ‘이 안에 있는 돈을 가질 수만 있다면······ 좀 더 편할 수 있을 텐데 말이지.’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밤늦게 은행으로 쳐들어가 금고에 있는 돈을 가지고 도망치는 것. 지금의 능력이라면 가능하긴 할 터다.
 ATM 기계에서 인출된 돈을 지갑 속에 밀어 넣으며 진명은 피식 웃었다. 할 수 있는 일이긴 하지만 하고 싶지는 않다.
 만약 그에게 에메르 차원계에서 살아온 경험이 없고, 마법 능력만 있는 상태였더라면 고민할 것도 없이 바로 은행을 털어 버렸을 것이다.
 ‘그렇게까지 하고 싶지는 않다.’
 그에겐 은행을 털지 않으면서도 얼마든지 막대한 재산을 모을 수 있다는 자신이 있었다.
 그는 대마법사로서의 능력과 동시에 노인의 경험과 현명함, 그리고 젊음까지 모든 것을 한 몸에 지니고 있었으니까.
 사정이 정말로 절박하다면 또 모를까, 벌써부터 그런 일에 손을 대고 싶지는 않았다.
 진명은 그렇게 생각하며 은행을 나섰다. 그 직후, 그가 향한 곳은 인근에 있는 핸드폰 대리점이었다.
 핸드폰 대리점에서 밀린 핸드폰 요금을 납부하고 발신 정지를 해지하며 진명은 주변의 모습을 살폈다.
 대로를 중심으로 양쪽 길가에 펼쳐진 광경이 그의 시야에 들어왔다.
 음식집, 카페, 만화방, DVD방, 의류점 등등······.
 건물을 가득 메우고 있는 각종 가게들 사이로 PC방이 시야에 들어왔다.
 아직 중학생이었던 시절, 학교 수업이 끝나면 곧장 PC방으로 달려가던 기억들이 떠올랐다.
 철없던 시절이지만, 또 나름 좋았던 시절이다.
 그때엔 가세가 기울지도 않았고, 딱히 망나니 같은 짓을 하지도 않았었다.
 그저 남들처럼 게임을 좋아하는, 평범한 학생들 중 하나일 뿐이었다.
 ‘저곳으로 가면 되겠군.’
 빛바랜 옛 추억들을 음미하며 진명은 PC방으로 향했다. 아버지를 찾기 위해선 PC방에 들러야만 했다.
 드드드드.
 드드드드.
 PC방을 향해 걸어가는데 진명의 핸드폰이 계속해서 울려 댔다.
 민지가 거는 전화다.
 벌써 6통째다. 그가 민지를 뒤로하고 집을 나선 그 직후부터 몇 분 간격으로 이렇게 계속해서 전화가 걸려 오고 있었다.
 ‘계속 이렇게 무시할 수는 없는 노릇이지.’
 민지가 뭘 말하려고 하는지 뻔히 보이긴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전화를 안 받을 수만도 없는 일이다. 민지는 가족이니까.
 진명이 핸드폰을 귀에 가져다 댔다.
 “왜 계속 전화하는 거야?”
 -오빠! 지금 어디야!
 상당한 하이 톤의 몹시 흥분한 것 같은 민지의 목소리가 핸드폰 너머 저편으로부터 들려왔다. 귀가 다 따가울 정도였다.
 진명은 살짝 인상을 쓰며 핸드폰을 귀에서 떨어트렸다.
 “왜 그러는데?”
 -만나서 얘기해! 어디야? 내가 지금 당장 그쪽으로 갈게. 도대체 왜 집에서 뛰어나간 거야!
 “뛰어나가긴 무슨. 여유롭게 걸어서 나왔구먼.”
 사실이다. 그는 일절 뛰지 않았다. 그저 마법을 이용해서 살짝 빠르게 걸어 나왔을 뿐이었다.
 “민지야, 문자 메시지로 네 계좌 번호나 적어서 보내라. 좀 있다가 집에 들어가면서 입금할 테니까. 난 일 좀 보다가 들어가마.”
 -오빠! 그게 무슨 소리야! 오빠!
 다급하게 그를 부르는 민지의 목소리를 깔끔히 무시하며 진명은 핸드폰을 바지 주머니에 넣었다.
 더 얘기한다고 해서 민지가 그의 의도를 알아줄 것도 아닌 만큼 이쯤에서 끊는 것이 나았다.
 “어서 오세요.”
 PC방에 들어서기가 무섭게 아르바이트생의 인사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PC방 이곳저곳에서 총 쏘는 소리, 칼 부딪치는 소리들이 들려왔다.
 이곳에서 게임하는 이들의 컴퓨터에서 나는 소리들이다. 한때 자신 역시 저 사람들처럼 게임을 즐겼었다.
 잠시 가만히 서서 PC방의 전경을 바라보던 진명은 비회원 전용 카드를 하나 들고서 빈자리에 앉았다.
 막상 컴퓨터를 이용하려니 기계가 낯설게만 느껴졌다.
 너무도 오랜만에 컴퓨터 앞에 앉은 탓일 터다. 진명은 그렇게 생각하며 마우스를 붙들고 인터넷 창을 띄웠다.
 인터넷 창이 켜짐과 함께 검색창에선 검은색 커서가 깜빡였다. 저 안에 키보드를 쳐 글씨를 써 넣으면 된다. 진명은 어색한 손놀림으로 키보드를 눌렀다.
 <인천 계산동 심부름센터>
 <검색 결과가 존재하지 않습니다.>
 아무래도 이 동네엔 심부름센터가 없는 모양이다. 진명은 검색어에서 계산동을 빼고 다시 검색했다.
 ‘나왔군.’
 인천 각지에 존재하는 심부름센터들에 대한 위치 정보가 나왔다. 진명은 카운터에서 메모지와 펜을 빌려다가 그 위치들을 적고선 지금의 시간을 확인했다.
 오후 7시 20분이다.
 늦다면 늦고, 이르다면 이른 시간이다. 진명은 곧장 PC방을 나섰다. 의뢰를 일찍 하면 일찍 할수록 아버지를 찾는 것이 빨라질 것이었다.
 “부평구 부평동 144번지로 가 주세요.”
 택시에 올라타며 진명은 그렇게 말했다. 기사는 그런 진명의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더니 말없이 내비게이션에 주소를 입력하기 시작했다.
 지금까지 그랬던 것처럼 마법을 이용해서 날아간다면 좀 더 빠르게 갈 수는 있다. 하지만 주소대로 찾아갈 수는 없는 만큼 이렇게 택시를 타고서 가는 게 더 빠르게 나을 것 같았다.
 부우웅.
 도로를 달리는 택시 안에서 진명은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심부름센터에 가서 아버지의 행방을 찾아달라는 의뢰를 맡기려면 아버지의 사진이 필요했다.
 ‘이 사진으로 되겠지.’
 핸드폰에 저장되어 있는 5장의 아버지 사진. 그것들을 살피며 진명은 자신의 코끝이 찡해지는 것을 느꼈다.
 지금 이렇게 그가 택시를 타고 있는 이 순간에도 아버지는 어딘가에서 빚쟁이들을 피해 도망가며 고생을 하고 있을 터였다.
 ‘연락이라도 되면 좋으련만······.’
 워낙에 자주 거처를 바꾸는 데다 사용하던 핸드폰까지 정지가 되어 버린 탓에 연락이 끊어진 지 오래다.
 처음엔 친구들의 집을 전전했고, 그다음엔 공사판에서 막노동을 하는 것으로 돈을 벌어 지방의 모텔이나 여관방 위주로 거처를 옮겨 다녔다.
 이제는 어떤 곳에서 생활을 하고 계실지 감도 오질 않는다.
 “다 왔어요.”
 상념에 빠져 있던 진명에게 택시 기사의 뚱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진명이 정신을 차리며 택시비를 내고선 택시에서 내렸다.
 ‘만욱 흥신소라······.’
 자그마하게 걸려 있는 간판이다. 진명이 흥신소 안으로 들어갔다.
 “어서 오십시오.”
 담배 연기가 섞인 약간은 탁한 공기가 느껴짐과 동시에 한 중년인의 목소리가 그를 반겼다.
 “어떻게 오셨습니까?”
 “의뢰를 맡기려고 왔습니다.”
 “일단 이쪽으로 앉으시죠. 차라도 한 잔 드시겠습니까?”
 진명을 테이블 쪽으로 안내하며 중년인은 종이컵을 들어 보였다. 진명이 고개를 저었다.
 “차는 괜찮습니다.”
 “그러시군요. 어떤 의뢰를 맡기러 오신 겁니까?”
 중년인이 진명의 맞은편 자리에 앉으며 물었다. 진명은 핸드폰을 꺼내 아버지의 사진을 띄워 그에게 보여줬다.
 “이 사람을 좀 찾아 줬으면 합니다.”
 “사람을 찾는 의뢰시군요.”
 중년인의 시선이 핸드폰 액정 속 아버지의 사진으로 향했다.
 “이분에 대해서 얼마나 알고 계십니까? 찾는 데 사용될 만한 정보들 말입니다.”
 “이름, 나이, 주민등록번호, 핸드폰 연락처 정도밖엔 없습니다. 빚쟁이들을 피해서 도망을 다니는 중이신지라 공사판을 전전하고 계시지 않을까 생각하고 있습니다.”
 “흠, 그렇군요. 잠시 좀 봐도 되겠습니까?”
 중년인이 진명으로부터 핸드폰을 건네받았다. 그는 진명이 보여 준 5장의 사진들을 찬찬히 살피더니 길게 침음성을 내뱉었다.
 “사진은 상태가 괜찮아서 의뢰 대상의 얼굴을 알아보기가 용이합니다만, 정보가 좀 적군요. 비용이 좀 들 것 같습니다.”
 진명이 고개를 끄덕였다.
 “착수금으로 세 장, 그리고 의뢰를 달성했을 때 일곱 장을 주셔야겠습니다.”
 “삼백, 칠백입니까?”
 “예.”
 딱히 바가지를 쓰는 것 같지는 않았다. 평범한 직장인의 월급이 300만 원 정도 되는 것이 요즘이다.
 게다가 중년인에게서도 거짓말을 하는 것 같은 느낌은 들지 않았다.
 “적지 않은 금액이로군요······. 좋습니다. 찾을 수만 있다면······.”
 “아, 고객님, 계약을 맺기 전에 알아 두셔야 할 것이 있습니다. 저희가 의뢰를 받아들인다고 해서 백 퍼센트 달성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 부분에 대한 위험성도 인지해 주셨으면 합니다.”
 “찾지 못하면 나머지 칠백은 받지 못하는 것 아닙니까. 알고 있습니다.”
 당연한 얘기다. 애초에 이런 일에서 착수금과 성공 보수를 따로 나누어서 지급하는 것 자체가 그런 이유 때문이니까.
 “그럼 여기, 계약서입니다.”
 중년인이 테이블의 아래쪽의 서랍에서 계약서를 꺼내 펜과 함께 진명에게 건넸다. 계약서의 내용들을 찬찬히 훑어보던 진명이 제일 아래에 자신의 이름을 적어 넣었다.
 “그리고 여기엔 고객님께서 알고 계시는 정보들을 적어 주시면 됩니다.”
 중년인이 또 다른 종이를 내밀었다. 아무것도 적혀 있지 않은 백지장이었다. 진명이 그 안에 아버지의 이름을 포함한 각종 정보들을 적어 넣었다.
 “감사합니다. 여기······ 제 명함입니다.”
 정보를 다 적자 중년인이 진명에게 자신의 명함을 건넸다. 명함엔 ‘만욱 흥신소 대표 홍현식’이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었다.
 “착수금은 이틀 내로 명함 뒤편에 있는 계좌 번호로 부쳐 주시면 됩니다. 입금이 확인되는 그 즉시, 저희들은 의뢰 대상······ 정태성 씨에 대한 탐색을 시작할 것입니다.”
 진명이 적어 넣은 아버지의 이름을 보며 홍현식이 말했다. 진명이 그의 명함을 자신의 지갑에 집어넣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시간은 얼마나 걸리겠습니까.”
 “그건 뭐라고 말씀을 드리기가 굉장히 어렵습니다. 빠르면 일주일 내에도 가능하고, 길어지면 두 달 가까이 걸릴 수도 있습니다.”
 “그렇군요. 그럼 지금 바로 이 계좌에 착수금을 넣고, 명함에 있는 핸드폰 번호로 연락을 드리겠습니다.”
 “아이고, 알겠습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예. 최선을 다해서 찾아보겠습니다. 살펴 가십시오.”
 흥신소를 나서는 진명에게 홍현식이 고개를 숙여 정중히 인사했다.
 ‘만욱 흥신소라······.’
 PC방에서 적어서 나온 진명의 메모장엔 부평에 있는 심부름센터만 5개가 적혀 있었다.
 처음에 그는 일단은 다섯 곳 모두를 돌아보며 비교해 본 뒤에 가장 괜찮은 곳에 의뢰를 맡기려 했었다.
 하지만 만욱 흥신소에 들어가 홍현식과 대화를 나누면서 진명은 이곳에 의뢰를 맡겨야겠다고 생각했다. 이곳에서 느껴지는 느낌이 너무도 좋았던 탓이었다.
 마법을 수련하고 몸 안에 마나를 축적하면 마법적인 능력을 얻는 것 이외에도 직감이 굉장히 강해지곤 했었다.
 ‘잘되었으면 좋겠어.’
 진명은 그렇게 생각하며 집으로 돌아갔다.
 
 
 제3장. 아버지
 
 
 흥신소에 의뢰를 맡긴 직후, 진명은 컴퓨터를 한 대 사서 집에 가져다 놓았다. 그리고 그다음 날엔 인터넷에 가입하기까지 했다.
 인터넷을 이용해 이 세상에 대한 정보를 얻기 위함이었다.
 딱, 딱딱.
 조용하기만 한 방 안에서 마우스를 클릭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컴퓨터 앞에 앉은 진명이 인터넷 사이트의 이곳저곳을 정신없이 돌아다니고 있었다.
 <젊은 여성들이 갈 곳이 없으면 카페를 가고, 데이트를 하다가 갈 곳이 없어도 카페를 가며, 밖에서 공부를 하거나 책을 읽으려고 카페를 가고, 뭔가를 기다릴 때에도 카페에 가곤 합니다. 이처럼 카페는 수요가 무궁무진한 사업입니다.>
 누군가 인터넷에 올려 둔 글이다. 대기업에서 프랜차이즈 형식으로 제공하는 상품에 가입해서 카페를 운영하는 사장님이 되라는 내용이었다.
 찬찬히 그 글을 살피던 진명은 ‘뒤로 가기’ 버튼을 눌렀다. 그가 원하는 것은 자신의 마법과 융합해 막대한 자금을 벌어들일 수 있는 사업이었다.
 지난 며칠간 그는, 잘 때를 제외한 거의 대부분을 컴퓨터 앞에서 보냈다. 인터넷 세상에 있는 정보의 바다에서 그에게 유용한 것들을 찾기 위함이었다.
 컴퓨터 옆에 놓인 노트엔 지금까지 그가 봐 뒀던, 그나마 가능성 있는 사업 아이템들이 적혀 있었다.
 <피부 치료제. 고기 전문점. 피트니스 센터.>
 일단은 적어 두긴 했지만 만족스러울 만큼의 수입이 예상되지는 않는 것들이다.
 마법을 이용해서 여성의 피부에 획기적인 변화를 일으키는 약을 만들거나, 고기의 맛을 좋게 만드는 것. 혹은 아무리 격렬한 운동을 해도 피로가 느껴지지 않게 공간 자체에 리커버리 마법이 걸려 있는 헬스장을 운영하는 것.
 어느 정도의 수입은 예상되지만 진명이 생각하는 정도는 아니었다.
 ‘하려면 포부를 크게 가져야 하니까.’
 에메르 차원계의 거부였고, 공작씩이나 했던 그다. 지구가 아무리 에메르 차원계와는 전혀 다른 세계라지만 그의 포부는 아직도 크기만 했다.
 게다가 저런 자그마한 규모의 장사들을 가지고는 그가 만족할 만한 수준으로 가족들을 부양할 수 없다.
 그가 바라는 것은 단 하나다.
 그의 가족들이 역사 속의 왕족 부럽지 않은 풍요로움 속에서 행복하게 사는 것.
 그것을 위해서라면 하나의 거대한 기업을 차리는 단초가 될 만한 사업을 진행해야만 했다.
 드드드드.
 모니터 옆에 놓아두었던 핸드폰에서 진동이 울렸다. 만욱 흥신소에서 온 전화였다.
 -고객님, 정태성 씨를 찾았습니다.
 전화를 받기가 무섭게 홍현식의 걸걸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버지를 찾았다는 얘기에 진명은 순간 머리가 멍해지는 것을 느꼈다. 만욱 흥신소에 아버지를 찾아 달라는 의뢰를 맡긴 지 오늘로 4일째였다.
 “지금 어디에 계십니까.”
 -지금 저희 사무실로 모시는 중입니다. 바로 오시겠습니까?
 “예, 그리로 가겠습니다.”
 시간을 지체할 이유가 없다. 진명은 곧바로 컴퓨터를 끄고, 자리에서 일어나 집을 나섰다.
 “인비저블. 플라이.”
 택시를 타고 갈 마음의 여유 따위는 없다. 진명은 곧바로 마법을 시전하며 하늘로 날아올랐다.
 솨아아아아아.
 그의 몸이 허공을 가르며 부평 쪽으로 날아갔다. 급하기만 한 마음 탓에 허공을 가르는 그의 속도는 무지막지했다.
 그렇게 비행을 한 지 3분 정도가 지났을 때, 진명은 부평역 위에 도착할 수 있었다.
 ‘택시가······ 이쪽으로 갔었지.’
 지하철역 앞의 오거리에서 앞으로 나아가며 진명은 기억을 더듬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만욱 흥신소 건물을 찾을 수 있었다.
 “도착하셨습니까.”
 만욱 흥신소로 들어서기가 무섭게 진명이 홍현식을 향해 말했다. 자신의 책상 앞에 앉아 모니터를 바라보고 있던 홍현식이 화들짝 놀라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하, 하하······ 정말 빠르시군요. 방금 전화를 드렸는데 벌써 찾아오시다니 말입니다.”
 “마음이 좀 급해서 그렇습니다. 이리로 오시려면 얼마나 걸립니까.”
 “한······ 십오 분 정도면 도착하실 겁니다.”
 벽시계를 힐끔 쳐다보더니 홍현식이 말했다. 진명이 고개를 끄덕였다.
 “기다리시는 동안 차라도 한잔하시겠습니까?”
 “커피로 부탁합니다.”
 홍현식이 커피를 타는 모습을 바라보며 진명은 전번에 앉았던 테이블 앞에 앉았다. 그러면서 진명은 핸드폰을 꺼내 아버지의 사진을 액정에 띄웠다.
 아직 그가 철이 없던 시절, 아버지가 아들의 핸드폰에 자기 사진이 없는 게 서운하다고 강압하다시피 해서 저장한 사진이었다.
 그때엔 정말 저장하기 싫었건만, 지금은 이 사진이 너무도 고마웠다.
 “수색이 좀 많이 빨랐습니다. 정태성 씨가 의외로 가까운 곳에 계셔서 말입니다.”
 “어디에 계셨습니까?”
 “서울역에서 노숙자 생활을 하고 계셨었습니다.”
 “노숙자······.”
 진명이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인터넷에서 자료를 검색하며 보았던 노숙자들의 그 처량한 모습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확실히 운이 좋았어.’
 아버지의 모습을 회상하고 있는 진명의 모습을 바라보며 홍현식은 기분 좋게 미소를 지었다.
 진명에게 얘기하지는 않았지만, 이렇게 빚에 쫓겨서 생활의 터전을 잃어버린 사람들을 찾을 때면 1차적으로 서울역을 비롯해 노숙자들이 주로 많이 모이는 곳을 찾아보곤 했다.
 찾는 데 그다지 힘이 드는 것도 아닐뿐더러, 의외로 많은 이들이 노숙자가 되어 세상을 배회하기도 하는 탓에 의외로 꽤나 많은 의뢰에서 재미를 보는 편이었다.
 ‘만약 서울역에서 못 찾았으면 꽤나 난감했을 거야.’
 노숙자들의 사이에서는 없다는 것이 결론 나는 그 순간, 의뢰를 완수할 가능성이 30퍼센트는 떨어진다.
 이번의 의뢰 같은 경우는 전국 각지의 공사판이나 농장, 그리고 신분 여부를 따지지 않는 자그마한 공장 등을 돌아다니며 의뢰 대상인 정태성이 있는지 여부를 확인해야 했다.
 “형님, 나 왔어요.”
 사무실의 문이 열리며 익숙한 얼굴이 나타났다. 홍현식이 피식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와 함께 사무실을 운영하는 동생들 중 하나인 이강현이 활짝 웃고 있었다.
 “아버지······.”
 홍현식의 옆에서 진명의 파르르 떨리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진명은 이강현의 뒤를 따라 사무실로 들어오는 초췌한 몰골의 아버지를 바라보고 있었다.
 툭 튀어나온 똥배와 새까맣게 변해 버린 얼굴, 그리고 파뿌리 같은 흰머리가 많아진 아버지 역시, 진명을 발견하고선 그 자리에서 굳어져 있었다.
 눈물이 핑 도는 것 같다. 진명은 가슴속에서 치밀어 오르는 그 뜨거운 무엇인가를 억지로 꾹 내리누르며 아버지를 향해 다가섰다.
 “진명이······ 진명이니?”
 “그동안 고생 많으셨습니다.”
 진명이 어머니에게 그랬던 것처럼 아버지를 향해 큰절을 올렸다. 그러고 나서 다시 일어나 보니 아버지가 기쁜 얼굴로 눈물을 흘리며 그의 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아버지, 잠시만 기다리세요.”
 진명은 그 말과 함께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지난 며칠 사이 텔레뱅킹 서비스에 가입한 탓에 얼마든지 핸드폰으로도 계좌에 있는 돈을 이체할 수 있었다.
 “성공 보수 칠백만 원은 지금 입금했습니다.”
 “아, 네. 감사합니다.”
 진명과 아버지의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홍현식이 살짝 고개를 숙였다. 진명은 아버지를 모시고 흥신소 사무실을 나섰다.
 “진명아······ 정말 미안하다.”
 그의 뒤를 따라 나오며 아버지가 말했다. 그 말을 듣기가 무섭게 또다시 진명의 눈가에 눈물이 맺혔다. 진명은 그것을 닦아 내며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괜찮습니다. 아버지의 잘못이 아니에요.”
 “아니다······. 그래도 정말 미안하다. 내가 너나 민지에게 정말 몹쓸 짓을 했다.”
 사업이 망한 것을 말씀하시는 것일 터다.
 진명이 태어나기 전부터 인테리어 사업을 하던 아버지는 꽤나 돈을 잘 벌곤 했었다. 그래서 어릴 적부터 진명은 풍족한 생활을 영위할 수 있었고.
 그러던 사업이 갑자기 망하게 된 것은 3억짜리 공사에서 대금을 받지 못하면서부터였다.
 비록 철없던 시절이긴 했지만, 그는 그 사건을 똑똑히 기억했다.
 아버지에게 대금을 주어야 했던 자가 사진이 저지른 사기에 대한 책임을 회피하기 위해 바지사장을 내세운 일이다.
 결국 바지사장은 수감되어 징역을 살게 되었지만 실질적인 사장은 적잖은 이득을 보며 떵떵거리며 살고 있었다.
 ‘정말 고생을 많이 하셨었지.’
 3억이라는 대금이 허공으로 붕 뜨게 된 이후, 아버지는 이곳저곳에서 대출을 받아 모자란 돈을 메웠다.
 하지만 한 번 구멍이 난 댐은 결코 메워지지 않았고, 집을 담보로 한 대출에 이어 사채까지 썼음에도 불구하고 결국 모든 것이 무너져 버렸다. 그들 가족이 풍비박산 나 버린 과정은 이러했다.
 “아버지, 앞으로는 제가 잘 모실 것이니······ 걱정 마시고 행복하게 오래오래만 살아 주세요.”
 때가 잔뜩 묻어 검게 변한 아버지의 손을 붙잡으며 진명은 그렇게 말했다. 아버지는 그저 고개를 숙인 채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
 
 택시에 타고 집으로 돌아오는 내내 아버지는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아무리 진명이 괜찮다고 얘기하긴 했지만, 아버지 된 입장에서 가족들을 제대로 부양하지 못한 채 고통을 겪게 한 죄책감은 괜찮다는 말로 사라질 만한 것은 아니었다.
 진명 역시 그것을 이해할 수 있었으니, 그저 아버지가 스스로를 용서할 수 있을 때까지 기다릴 생각이었다.
 “여깁니다.”
 굳게 잠겨 있던 문을 열고 집으로 들어서며 진명이 말했다. 아버지는 복잡한 얼굴로 집 안을 바라보더니 또다시 주르륵 눈물을 흘렸다.
 역시 죄책감 때문이다.
 진명은 조용히 휴지를 가져다 아버지에게 건넸고 아버지가 그것을 받아 눈물을 닦았다.
 “아버지, 일단 씻으세요. 그러고 나서······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알았다.”
 화장실로 들어서는 아버지의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진명은 자신의 방으로 향했다.
 ‘아버지를 모셔 왔으니 이제는 일들을 해결해야겠군.’
 아버지의 사업이 망하게 된 전초를 제공한 자들, 그들을 찾아서 그들이 꿀꺽 집어삼킨 돈을 받아 낼 것이다. 밀린 이자와 보상금도 함께.
 필요하다면 마법도 사용하고 살생도 할 수 있다. 어차피 에메르 차원계에서 그는 많은 전투를 치렀었다. 사람을 죽이는 것 정도는 눈 감고도 할 수 있었다.
 게다가······ 그자들은 그들 가족에게 이토록이나 고통을 겪게 한 원흉이다. 그들을 죽이고 싶을 정도로 증오하지 않으면 그건 성자(聖子)나 마찬가지다.
 ‘법률적으로 해결할 수는 없을 테지.’
 가능하다면 제도적인 장치를 이용하고 싶지만 어쩔 수 없다.
 그들은 법을 이용해서 아버지를 사지로 밀어 넣었으니, 이번엔 법이 아니라 주먹을 이용해 그들에게서 아버지의 돈을 받아 내야 할 차례다.
 그들을 떠올리기가 무섭게 가슴속에서 뭔가가 계속해서 울컥울컥 치밀어 오른다.
 만욱 흥신소 사무실에서 느꼈던, 뜨거우면서도 아련하기만 한 그런 감정이 아니다. 이것은 그들에 대한 분노이고 증오다.
 솨아아아아.
 화장실에서 물소리가 들려왔다. 아버지가 샤워하는 소리다. 그동안 길거리에서 먹고 자며 제대로 씻지도 못했을 아버지의 고초를 생각하니 한숨이 나왔다.
 ‘잘해 드려야지.’
 그는 아버지보다 오랜 세월을 살았다. 비록 지금의 육신은 20대의 젊은 모습을 하고 있지만, 그 알맹이는 70년의 세월을 살아온 늙은이다.
 오랜 세월을 살아왔고 수많은 것을 경험해 온 만큼, 지금 아버지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고 어떤 마음을 먹고 있을지는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다.
 무능력한 자신이 한없이 밉고, 가족들에게 미안하며, 또 한편으로는 그동안의 노숙 생활 덕분에 자신감이 결여되어 세상으로 나서는 것이 두려울 것이다.
 이럴 때에는 곁에서 말없이 자리를 지키며 힘이 되어주는 것이 최선이다.
 이제 막 집으로 돌아온 아버지에게 당장 일을 시작해 가족들을 부양하라며 등을 떠밀 수는 없는 노릇이다.
 노숙이라는 것은 사회적으로 또 경제적으로도 완전히 폐인이 되어 버린 이들이 하는 것이다.
 그들을 잘 알지 못하는 이들은 그저 노숙자를 폐인에 패배자이며 일하기 싫어하는 이들로 손가락질하지만, 그렇게 간단하게 생각할 것만은 아니다.
 몸을 다친 이들에게 상처를 회복하고 재활 훈련을 할 시간이 필요하듯, 모든 희망을 잃어버리고 모든 것을 포기한 채 폐인처럼 살아온 그들에겐 다시 자신을 추스를 시간이 필요하다.
 지금 당장은 아버지에게 사업에 대한 이야기는 일절 꺼내지 않을 것이다. 그저 아버지의 재산을 갈취하고, 그들 가족을 사지로 내몬 자들을 단죄하기 위한 정보만을 얻어낼 작정이었다.
 “후우······.”
 한참이 지나고, 아버지가 화장실 문을 열고 나왔다. 진명이 자신의 서랍에서 아버지가 입으실 만한 옷들을 꺼내 아버지에게 건넸다.
 “······고맙다.”
 여전히 면목 없다는 얼굴로 아버지는 옷을 입었다. 그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던 진명이 냉장고에서 냉수를 꺼내다 컵에 따라선 아버지에게 드렸다.
 “그동안 정말 고생 많으셨습니다, 아버지.”
 “고생은 무슨······. 나보단 너나 민지, 그리고 네 엄마가 더 힘들었을 것 아니냐. 이 못난 애비야 무능력해서 그랬다 치더라도, 너희가 무슨 죄가 있다고 그 고생을 했을지······. 정말 미안하다.”
 고개를 푹 숙인 채 아버지가 말했다. 진명은 그런 아버지를 이끌고 식탁으로 가 앉았다.
 “그런 말씀은 하지 마세요. 과거는 과거고, 현재는 현재입니다. 과거에 불행했다고 해서 앞으로도 불행해야 한다는 법은 없잖습니까.”
 “그래······ 그렇긴 하다.”
 아버지가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면목 없는, 그리고 죄책감으로 가득한 표정은 여전했다.
 진명은 그런 아버지의 손을 붙잡았다.
 아버지의 따듯한 온기가 느껴졌다. 이 온기가 그리웠던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이렇게 아버지의 온기를 느낄 수 있는 이 현실이 그는 너무도 고마웠다.
 “아버지, 정말 궁금한 것이 있었습니다. 아버지께 사기를 쳤던 그놈들 말입니다. 어떤 놈들이었죠?”
 “그놈들······.”
 아버지가 나지막이 중얼거리더니 잔에 들어 있던 물을 단숨에 비웠다. 벌써 5년도 더 전의 일이지만 아버지는 여전히 분노하고 있었다.
 아버지를 만나고 나서 처음으로 보는 힘 있는 모습이다. 힘없이 축 쳐져 있는 것보단 차라리 이렇게 분노하는 모습이 더 보기가 좋았다.
 “대상물산이라는 놈들인데······ 아주 악질인 놈들이었다.”
 “대상물산······ 인천에 있는 놈들입니까?”
 “그래. 나한테 맡겼던 공사가 항만 쪽에 있는 본사 건물 인테리어였으니······ 아마, 아직 그쪽에 있을 게다.”
 “그렇군요.”
 진명이 주먹을 움켜쥐었다. 지금까지 그는 아버지가 사기를 당했다는 등의 사건의 전말만 알고 있었을 뿐 그 대상이 누군지는 알지 못했었다.
 ‘만욱 흥신소에 의뢰를 넣어 봐야겠어.’
 일단은 대상물산이 어떤 회사인지 그것을 알아봐야 할 것 같았다.
 가장 최선은 그들이 직접 아버지에게 사죄하며 과거의 잘못에 대해 배상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것이 가능할 리가 없다. 악인은 자신의 잘못에 대해 참회하는 경우가 거의 없으니까.
 아마도 아주 높은 가능성으로 그가 직접 그들을 단죄하게 될 것이었다.
 아버지는 한참 동안이나 푸념처럼 대상물산과의 일들을 늘어놓았다.
 그 후 아버지의 말을 듣던 진명이 앉아 있던 자리에서 일어섰다.
 “아버지, 잠시 전화 좀 하고 오겠습니다.”
 “그래, 알았다.”
 진명이 방에 들어가 핸드폰을 들고 집 밖으로 나갔다. 그러고는 만욱 흥신소의 사장인 홍현식에게 전화를 걸었다.
 -예, 고객님. 잘 들어가셨습니까?
 “새로운 의뢰를 맡기고자 연락드렸습니다.”
 -하하, 의뢰라면 저희로선 얼마든지 환영입니다. 이번엔 어떤 의뢰를 맡기시려는 겁니까?
 수화기 너머로 기분 좋게 웃는 홍현식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대상물산에 대해서 좀 조사를 해 주었으면 합니다.”
 -대상물산······. 어느 정도로 원하시는 겁니까?
 홍현식의 목소리에서 웃음기가 싹 가셨다. 도리어 약간은 긴장한 것 같은 기색까지 느껴졌다.
 “대상물산이 어떤 회사인지, 그 정체성을 알 수 있을 만한 자료였으면 좋겠습니다. 대상물산이 엮인 사건들에 대한 자료도 좋습니다.”
 -흠, 비교적 간단한 정보군요. 알겠습니다. 이번 건은 이십만 원 정도만 주십시오. 입금은 조사가 완료된 뒤에 해주시면 됩니다.
 “알겠습니다.”
 -그럼 곧 연락드리겠습니다.
 계약서 같은 것도 쓰지 않고 곧바로 의뢰를 받아들이는 것을 보니 확실히 그들의 입장에선 그다지 어렵지 않은 간단한 일인 모양이었다.
 ‘어쩌면 아버지의 의뢰 건으로 내게 호의적으로 나오는 것일 수도 있겠고······.’
 어느 쪽이 되었든 간에 그다지 크게 신경 써야 할 만한 일은 아니다. 진명은 다시 집으로 들어가 방에 핸드폰을 놓아두고선 식탁에 앉았다.
 “진명아, 애비도 궁금한 게 있는데 말이다······.”
 “예, 아버지. 말씀하세요.”
 “아까 흥신소에서 네가 그랬지, 칠백만 원은 바로 입금해 주겠다고······. 그런 큰돈은 어디에서 난 게냐?”
 조금 전까지 분노하던 아버지의 얼굴이 또 달라졌다. 죄책감과 함께 걱정이 깃든 눈빛이다. 아버지는 진명이 뭔가 잘못된 길로 빠진 것은 아닌가 싶어 마음을 졸이고 있는 것 같았다.
 무리도 아닐 것이다. 사람이 좋지 못한 길로 빠져드는 가장 큰 계기들 중 하나가 바로 생활고이고 가정의 불화이니까.
 “복권에 당첨되었습니다. 그래서 일억 원의 당첨금을 받았고, 그 돈으로 아버지를 찾은 겁니다.”
 “복권? 복권에 당첨되었다고?”
 믿기 힘들다는 얼굴로 아버지가 반문했다.
 “예. 아무래도 하늘이 우리 집안을 불쌍하게 여긴 모양입니다.”
 “흠······ 그렇구나. 그나저나 내 아들이 훌쩍 자라서 이젠 남자가 되었구나.”
 복권에 대해서 뭔가를 더 말하려던 아버지가 주제를 돌렸다. 어느새 아버지는 대견하다는 듯 진명을 바라보고 있었다.
 “솔직히 노숙 생활을 하면서 네 걱정을 많이 했다. 민지야 어렸을 적에 철이 들었다지만, 넌 정말로 철부지였으니까.”
 아버지의 거칠기만 한 손이 진명의 손을 붙잡았다.
 “오랜만에 본 내 아들이 정말로 의젓해졌어. 적어도 이제는 내 아들에 대해선 걱정하지 않아도 될 것 같아.”
 아버지의 말들을 들으며 진명이 가볍게 미소를 지었다. 그들 부자가 상봉한 첫날이 그렇게 저물어 가고 있었다.
 
 ***
 
 아버지가 집에 돌아오면서 진명은 더 이상 집에서 인터넷 사이트를 뒤지지 않았다.
 비록 그가 사업 아이템을 찾느라 인터넷을 하는 것이긴 하지만, 그 모습이 아버지에겐 걱정스럽게 비쳐질 것을 염려한 탓이었다.
 “다녀오겠습니다.”
 나지막한 인사와 함께 집을 나서며 진명은 며칠 전에 5년 만에 아버지와 마주한 민지의 모습을 떠올렸다.
 남들의 앞에선 더없이 도도하고 차가워 보이는 미녀가 바로 민지다. 그런 민지가 아버지의 모습을 보자마자 주르륵 눈물을 흘리며 대성통곡을 하고 한참 동안이나 아버지의 품에 안겨 있었다.
 ‘보기 좋았었지.’
 이런 게 정말로 가족애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애틋한 모습이었다. 지구로 돌아오길 정말 잘했다는 생각도 들었다.
 ‘내일쯤이면 어머니도 집으로 돌아오실 테니······ 아버지도 기뻐하시겠어.’
 동생 민지와 마찬가지로 5년 만에 서로를 마주하게 될 아버지와 어머니의 모습을 상상하니 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이렇게 하나씩 하나씩 그동안 망가져 온 가족들의 삶을 제자리로 돌려놓을 것이다.
 어머니의 병도 치료해 드릴 것이고, 아버지도 다시 예전처럼 성공한 사업가로서 남들 앞에서 목에 힘주고 다니실 수 있도록 만들어 드릴 것이다.
 동생 민지에게는 자신 혼자서 가족을 부양해야 한다는 부담감을 덜어줄 것이고······.
 그러기 위해선 적잖은 돈이 필요하다.
 ‘괜찮은 사업 아이템이 좀 나타나 주었으면 좋겠는데 말이지.’
 아무리 인터넷을 뒤지고 세상을 바라보며 고민해 봐도 괜찮은 아이템이 나타나질 않는다.
 해 봐야 그냥 그저 그런 것들, 예를 들면 일전에 그가 노트에 적어 두었던 마법 약품이나 지치지 않는 헬스장 같은 것들이 전부였다.
 ‘좀 더 획기적이고 스케일이 크면서도 적잖은 수입을 낼 수 있을 만한 아이템이 필요해.’
 그렇게 생각하며 진명은 PC방에 들어서며 빈자리를 찾아 앉았다.
 PC방에 출근 도장을 찍기 시작한 지 벌써 3일이 지났다.
 아침 10시 정도에 집에서 나와서 바로 앞의 이 PC방에서 오후 8시까지 인터넷 검색을 하다가 집으로 들어가는 것이 최근 그의 일과였다.
 ‘블러드 다이아몬드라······.’
 피의 다이아몬드라는 의미다. 꽤나 시적인 표현이다. 진명은 자신의 호기심을 자극하는 그 제목을 클릭했다.
 <블러드 다이아몬드는 전쟁 중인 지역(주로 아프리카)에서 생산된 다이아몬드로, 그 수입금이 전쟁 수행을 위한 비용으로 충당되는 것을 지칭한다.>
 블러드 다이아몬드라는 제목의 그 글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그 밑으론 아프리카 각국의 내전을 수행하고 있는 국가들이 어떤 방식으로 다이아몬드를 통해 전쟁 비용을 충당했는지, 그 사건 전말의 간단한 개요가 적혀 있었다.
 ‘역시······ 인간의 본성은 똑같군.’
 이런 것들을 볼 때면 항상 느끼는 것이다.
 지구의 인간이나, 에메르 차원계의 인간이나 결국 인간은 인간일 뿐이다. 살아오는 환경이나 역사, 문화는 다르지만 그 본성은 같았다.
 하지만 어쨌든 간에 이 자료는 사업 아이템을 구상하는 데에는 별다른 의미가 없는 자료다. 진명은 그렇게 결론을 내리며 뒤로 가기 버튼을 눌렀다.
 
 <마다가스카르에서 벌어진 대우그룹의 횡포>
 다시 인터넷을 헤매려던 찰나, 진명의 호기심을 자극하는 또 다른 제목이 시야에 들어왔다. 마다가스카르면 아프리카 동남부의 꽤나 큰 섬나라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 봐도 한국계 기업인 대우그룹이 마다가스카르에서 벌일 만한 일은 없었다.
 ‘뭐지?’
 궁금하다. 진명이 그 제목을 클릭했다.
 글의 내용은 이랬다.
 대우그룹이 최근 천정부지로 치솟고 있는 국제 식량 가격을 바라보며 마다가스카르에 투자해 그곳의 전체 농지의 절반에 달하는 130만 헥타르를 편법으로 임대받았다.
 식량 가격이 치솟고 있으니 마다가스카르에서 식량을 재배해 그것을 국제 시장에 내다 팔겠다는 의도에서였다.
 하지만 이 계약은 마다가스카르에서 살아가는 농민들 상당수의 생계를 위협하는 것이었다.
 그 탓에 농민들이 정부에 대해 항의 시위를 하고, 결국엔 이 시위가 계기가 되어 정권이 교체되고 내전이 발생할 위험이 생겨났다는 내용이었다.
 ‘마다가스카르에선 국가가 농민들에게 땅을 임대해 주었던 건가?’
 전체적으로 보았을 때, 사실 관계에 대한 근거가 꽤나 부족한 글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호기심이 가는 것은 사실이었다.
 진명이 검색창에 마다가스카르와 대우를 쳤다.
 몇 초가 지나자 그의 모니터엔 대우그룹이 마다가스카르에서 130만 헥타르의 농지를 99년간 조차하기로 합의했다는 내용의 글들이 검색되었다.
 전체 농지 면적의 10퍼센트도 아니고, 50퍼센트에 달하는 면적을 단순 임대도 아닌 99년 동안이나 조차한 것이다.
 이 일 때문에 군부와 민중이 한 번에 들고 일어나며 한때 내전이 발발하게 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 마다가스카르 전체를 휘감았다는 내용이었다.
 흥미롭다는 얼굴로 그 글들을 읽어 내려가던 진명의 시선이 글의 가장 말미로 향했다.
 그곳엔 ‘다국적 기업의 횡포, 제3세계에 내전을 일으키다.’라는 문구가 쓰여 있었다.
 ‘다국적 기업의 횡포라······.’
 이것 역시 마다가스카르에서 있었던 대우그룹의 농지조차 사건과 마찬가지로 진명의 호기심을 자극하는 문구였다.
 드드드드.
 새로운 검색창에 다국적 기업의 횡포에 대해 검색하려던 순간, 진명의 핸드폰에서 진동이 울렸다. 만욱 흥신소의 홍현식에게서 온 전화였다.
 “예.”
 -말씀하셨던 정보를 모두 정리해서 한글 파일로 만들었습니다. 입금 확인되는 대로 메일로 보내 드리겠습니다. 입금하시고 문자 메시지로 이메일 주소 좀 보내 주십시오.
 “알겠습니다.”
 전화를 끊으며 진명은 만욱 흥신소의 계좌 번호로 20만 원을 송금했다. 간단한 정보라더니 이렇게 시간이 걸린 것을 보면 꼭 그렇지만은 않은 모양이었다.
 드드드.
 입금했다는 내용과 함께 자신의 이메일 주소를 적어서 보낸 진명에게 홍현식의 문자 메시지가 도착했다.
 [이메일 발송 완료하였습니다. 다음번에도 저희 만욱 흥신소를 이용해 주십시오. ^.^]
 진명이 곧바로 자신의 이메일을 확인했다. 홍현식의 문자 메시지 내용대로 만욱 흥신소라는 이름으로부터 온 메일이 도착해 있었다.
 “어디······.”
 나지막이 중얼거리며 진명이 메일의 내용을 살폈다. 그 안에는 대상물산의 지금까지의 행보에 대한 자료들이 정리되어 있었다.
 회사의 이름만 놓고 보면 정말로 유통업이라도 하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만욱 흥신소에서 보내온 자료에 의하면 대상물산이라는 이름은 어디까지나 위장을 위한 간판에 불과했다.
 대상물산이 소유하고 있는 점포들은 총 4개. 그중 2개가 나이트클럽이고, 나머지 2개가 나이트클럽 인근에 있는 모텔 하나와 안마 시술소였다.
 나이트클럽은 밤 문화의 중심이다. 모텔은 나이트클럽에서 시작된 역사가 종지부를 찍는 곳이고.
 안마시술소는 나이트클럽과는 조금 다르게 역사가 시작됨과 동시에 마무리되는 곳이었다.
 이런 곳들을 운영하는 자들이 정상적인 사업가일 리가 없다. 이런 사업들에는 필연적으로 검은 세력이 끼어들기 마련이니까.
 몇 페이지 아래로 내려가자 또 다른 내용들이 진명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그곳엔 현재 대상물산의 바지사장 노릇을 하고 있는 한병철이라는 인물과 함께 실질적인 사장, 박문수의 사진이 첨부되어 있었다.
 성명 박문수. 1975년생. 전과는 없지만 인천 서구의 뒷골목 세계에선 상당히 유명한 편. 대상물산의 모체(母體)인 영광파의 보스.
 ‘영광파라······.’
 진명의 눈동자가 가늘어졌다.
 결국엔 아버지의 재산을 갈취한 자가 조직폭력배의 두목이라는 얘기나 마찬가지다.
 비록 아버지에게 직접적으로 사기를 친 자가 누구인지 그 이름을 듣지는 못했지만, 두목을 알게 된 이상 그 이름은 중요하지 않게 되었다.
 누가 사기를 친 것이든 간에, 두목의 명령 없이 사기를 계획했을 리는 없다.
 이런 조직은, 특히 조직폭력배들과 같은 뒷골목 세계의 조직들은, 두목의 명령이 없이는 어지간해선 그 어느 누구도 움직이지 않는다는 것을 진명은 알고 있었다.
 진명의 시선이 계속해서 이어지는 문서의 아래쪽을 향했다.
 ‘계속해서 대상물산은 회사를 부도나게 하고, 바지사장을 감옥으로 보내는 방법들을 통해 부정한 방법으로 십수억에 달하는 이익을 얻었을 것으로 추정됨······. 음······ 아버지 말고도 피해자가 더 있는 건가.’
 이 정도면 악질 중에서도 악질이다. 모니터를 바라보던 진명의 눈빛이 차갑게 가라앉았다.
 이들의 정체를 확인했으니 이제 그에게 남은 것은 단죄하는 것뿐이다. 진명은 곧 자리에서 일어나 PC방을 나서 대상물산의 본사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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