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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서클 대마법사 1권 (1)

2016.04.26 조회 9,003 추천 88


 * 프롤로그
 
 
 
 영계의 저승사자 중 예원계의 수장인 수영. 그는 요즘 심각한 고민에 빠져 있었다. 이 때문에 영계를 돌아다닐 때도 그의 얼굴은 어둡기 그지없었다. 걱정거리가 있으니 얼굴이 펴지지가 않는 것이다.
 “수영. 요즘 무슨 걱정 있는가? 얼굴이 말이 아니구먼.”
 “아닐세.”
 저승사자 수영의 가장 절친한 친구이자 같은 서열인 판테아. 그의 말에도 수영은 고개만 저을 뿐이었다. 자신의 걱정거리가 남에게 알려져서는 안 되는 내용이기 때문이다.
 생각 같아서는 다 털어놓고 홀가분하게 지내고 싶기도 했다. 하지만, 다시 한번 생각해보자 고개를 저을 수밖에 없었다.
 “그러지 말고 말해보게. 자네하고 나하고 어디 보통 사이인가? 이거 섭섭하이. 나한테도 말 못하는 비밀이 있을 줄이야.”
 “그게, 휴··· 잠시만 따라와 보게.”
 수영이 판테아를 구석으로 끌고 갔다. 남들의 이목이 미치지 않는 범위까지 자리를 옮긴 것이다.
 수영의 반응이 예상보다 심각하자 판테아도 얼굴을 굳혔다. 왠지 심상치 않은 사건에 휘말릴 듯한 불길한 예감을 받았기 때문이다.
 “무슨 일인데 그러는가? 혹시, 사고라도 친 건가?”
 “내가 친 사고는 아닌데, 그게 좀······.”
 수영의 입에서는 쉽사리 말이 나오지 않았다. 그만큼 그에게는 중요한 사안이라는 의미였다.
 수영의 망설임이 계속되자 판테아의 얼굴도 덩달아 어두워졌다. 이 일을 들어도 되는지를 마음속으로 고민하는 모습이었다.
 잠깐의 망설임 후, 판테아가 다시 입을 열었다.
 “우린 친구 아닌가? 우리가 어디 보통 친구인가. 영계 18지옥에도 함께 갔다 오지 않았는가? 말해보게. 내가 도와줄 수 있는 일이라면 뭐든지 돕겠네.”
 “그게··· 아, ···사실은 내가 관리하는 세계에 문제가 생겼네.”
 한참을 고민하던 수영이 어렵게 입을 열었다. 말해서는 안 되는 내용이기는 하지만, 답답함을 견딜 수 없었던 것이다.
 물론, 판테아가 믿을 수 있는 친구라는 것도 수영의 결정에 한몫했다.
 “문제?”
 판테아가 의아한 빛을 띠며 되물었다.
 실제로 판테아가 다스리는 세계에는 수시로 사건이 벌어졌다. 그 세계의 주축이 한 종족이 아닌 여러 종족이 다투는 곳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수영이 다스리는 세계에는 지금까지 큰 사건이 거의 없었다. 세계 자체가 인간이라는 종족이 거의 주도하다시피 했기에 다스리기 쉬웠던 탓이다.
 물론, 그 세계에도 다른 종족은 존재했다. 하지만, 그 모든 종족이 인간의 지배를 받거나 관리 하에 있을 뿐. 주도적인 입장은 아니었다.
 이 때문에 수영이 다스리는 세계는 3천 개가 넘은 차원 중 가장 다스리기 쉬운 세계로 손꼽혔다.
 “이걸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음, 간단하게 말하면 내가 다스리는 세계의 평균 수명이 너무 높아졌네.”
 “난 또, 별일 아닌 걸로 고민하는구먼. 평균 수명이 높아졌다면 낮추면 될 것을. 뭘 그리 고민하는가?”
 수영의 걱정을 들은 판테아가 별거 아니라는 투로 말했다. 오히려 수영이 하는 걱정을 부러워할 정도였다. 판테아가 다스리는 세계 판트리아는 한 때, 수명이 너무 낮았다. 이 때문에 턱 없이 오래 사는 종족까지 만들어야 할 정도였다. 그렇게 해서야 겨우 수명이 맞춰진 것이다.
 물론, 저승사자인 그는 그 세계를 관리하는 신에게 건의를 했을 뿐이다. 실제로 생명체를 탄생 시킬 힘은 신에게만 있으므로······.
 정말 많은 사건과 우여곡절 끝에 지금은 평균 수명이 대충 자리를 잡았다. 하지만, 과거에는 정말 견디기 힘들었다. 거의 매일 물질계로 불려 다니며 일을 처리했고, 신에게 호출 받아서 신계로 오고. 그런 생활을 수십만 년 동안 계속 한 것이다.
 “낮추는 방법이 문제란 말일세.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
 “그쪽 세계는 인간이 주 종족이지 않은가? 인간들이 잘 안 죽는가?”
 차원은 창조되면서부터 고유 수명을 가지고 있었다. 그 수명이 다하면 차원이 저절로 붕괴되는 것이다.
 하지만, 차원이 고유 수명을 제대로 누리고 사라지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차원 내부에서 터지는 각종 사건이 차원의 수명을 갉아먹기 때문이다.
 그리고 차원의 수명은 그 차원을 다스리는 신(神)과 하위 저승사자들의 수명과 일치했다. 신과 저승사자의 입장에서는 차원의 수명을 연장시키는 길만이 자신이 오래 사는 길인 셈이다.
 이에, 신과 저승사자는 차원의 수명에 대해 꽤 오래 고민했고, 그나마 수명을 늘이는 법을 발견할 수 있었다. 정확하게는 원래 정해진 수명을 그대로 유지하도록 하는 방법이었다.
 차원 내부에 존재하는 종족들의 수명을 맞추는 것. 즉, 각 종족이 처음 정해진 수명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으면 차원에 영향을 적게 주게 되고, 결국 차원 자체의 장수(長壽)로 이어지는 것이다.
 “그렇다네. 과학이라는 이상한 기술을 발전시키더니 수명까지도 길어졌네. 백 년을 사는 건 이제 장난처럼 생각할 정도지. 그 중에는 백오십 년을 사는 인간도 있을 정도니 말해 뭐하겠는가?”
 수영의 말에 판테아가 경악하며 입을 벌렸다. 백 년을 산다는 말에 충격을 받은 것이다.
 물론, 판테아가 다스리는 세계에도 백 년을 사는 인간은 있어왔다. 하지만, 세계 전체에서 고작 손가락으로 꼽을 정도일 뿐. 그리 많지는 않았다. 그런 그에게 백 년을 장난처럼 생각한다는 말은 충격이었다. 거기다 백오십 년이라는 말은 도무지 믿음이 가지 않았다.
 “흠, 심각하군. 백오십 년 넘게 사는 인간은 운명의 굴레를 벗겨주면 되겠지만, 백 년 이상이 그렇게 많다면 골치 아프겠군. 그 많은 사람에게서 운명의 굴레를 모두 벗겨줄 수는 없는 노릇이니.”
 너무 오래 사는 존재가 탄생한다면 그에게서 운명의 굴레를 벗기는 방법이 사용되곤 했다. 이렇게 하면 굴레를 벗은 존재의 긴 수명이 차원의 평균 수명에 영향을 미치지 않게 되는 것이다.
 일종의 편법이었다.
 하지만 그 수가 너무 많다면 그 일도 불가능했다. 운명의 굴레를 벗기는 게 편법인 만큼 그리 많이 사용할 수 있는 방법은 아니기 때문이다.
 거기다 이런 일이 잦아진다면 굴레를 벗은 존재들 자체에 의해 차원이 영향 받을 수도 있었다. 크게 차이나지 않는 선에서만 굴레를 벗겨야 하는 한정된 제약인 셈이다.
 “인간들만 오래 산다면 그냥 이해하고 넘어갈 수 있네. 다른 종족의 수명을 단축시켜서 평균 수명을 맞추면 되니 말일세.”
 “아, 그렇군. 그 방법이 있었어. 근데 그 방법도 안 통한다는 건가? 내가 보기엔 괜찮은 방법 같은데.”
 차원의 평균 수명을 종족별로 따로 책정하지는 않았다.
 때문에 오래 사는 종족을 만들어 평균 수명을 올리는 방법, 또는 짧게 사는 종족을 만들어 평균 수명을 내리는 방법으로 수명을 통제하곤 했다.
 “그 인간들이 문제지. 자기들만 잘 살면 될 것을. 괜히 환경 보호니 보호 동물 지정이니 해서. 에휴, 별 희한한 종족들까지 수명이 늘어나버렸네. 정말 미치겠어. 뭔가 방법이 없겠는가?”
 “방법이라······.”
 판테아가 고개를 까딱거리며 고민에 잠겼다.
 가장 좋은 방법은 신에게 이 일을 알리는 거였다. 하지만, 그렇게 된다면 저승사자의 무능함을 만천하에 알리는 결과를 낳게 될 터였다.
 수영이 망설이는 부분도 이 부분일 공산이 컸다. 결과적으로 저승사자의 손에서 다른 이의 귀에 들어가지 않게 이 일을 해결해야 한다는 소리였다.
 “괜찮네. 자네라고 무슨 뚜렷한 수가 있겠는가?”
 “사고사를 많이 만들면 어떨까? 자네 세계에 대형 사건을 여럿 터트려서 몰살을 시켜버리면······.”
 “신이 그 정도도 모를 거라 생각하나? 당장 조사를 할 텐데. 거기다가 전체 수명을 낮출 정도로 사고를 많이 터트리면 차원이 어떻게 될 거라고 생각하는가?”
 수영이 말도 안 된다는 듯 말하자 판테아가 다시 고민에 빠졌다.
 그의 오랜 지우인 수영. 그를 위해서 어떻게든 방법을 찾아주고 싶었다. 한참을 고민한 판테아가 손가락을 퉁겼다.
 딱-!
 “좋은 방법이 있네.”
 “방법? 정말 있는가?”
 판테아의 말에 수영의 얼굴이 순식간에 밝아졌다. 자신이 아는 판테아는 헛말을 하는 성격이 아니었다. 그가 방법이 있다면 분명, 있는 것이다.
 목을 두어 번 가다듬은 판테아가 입을 열었다.
 “이번에 새로 창조되는 존재들 몇을 골라서 계속 죽이게.”
 “계속 죽이라니 무슨 말인가?”
 수영이 의아한 빛을 띠며 되물었다. 판테아가 한 말의 의미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탓이다.
 수영이 의아한 기색을 보이자 판테아가 다시 입을 열었다.
 “말 그대로지. 한 존재가 창조되면 십만 번의 삶을 살다가 사라지지. 그 존재가 태어나자마자 죽는다면 어떻게 되겠는가?”
 “십만 번 모두?”
 “그렇지. 그 존재를 태어나는 순간에 계속 죽이는 거야. 어차피 일 년이 되지 않으면 모두 영으로 계산 되니까. 일 년이 되기 전에 죽이면 되지 않는가? 아무리 신이라 하더라도 몇몇 소수의 존재에 대해선 알아보지 못할 거야. 또, 소수만 피해를 보는 만큼 차원에도 영향을 주지 않을 걸세.”
 판테아의 설명이 끝나자 수영의 얼굴이 눈에 띄게 밝아졌다. 정말 오랫동안 고민했던 자신이 한심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좋아. 역시 자네뿐이군. 고마우이.”
 “하하, 별 말을 다 하는군.”
 판테아의 얼굴도 밝아지기는 마찬가지였다. 친구의 기쁨은 곧 자신의 기쁨. 그만큼 그 둘의 사이는 각별하고도 친했다.
 하지만, 한 편으로는 조금 미안한 마음도 들었다. 누가 될지 모르지만, 태어나자마자 사라져야하는 존재가 생길 터. 그들은 이유도 모른 채 소멸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어두운 마음을 털기 위해 수영이 말을 돌렸다.
 “요즘 묵주는 뭐하는가? 통 보이질 않던데.”
 “그 친구가 다스리는 세계가 엄청 시끄러운 모양이야. 뭐라더라? 제승업이라던가? 아무튼 이런 이름을 가진 인간이 나타나서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것 같더군.”
 그들이 말한 묵주는 그들의 또 다른 친구였다. 수영, 판테아, 묵주. 이 셋은 영계 18 지옥을 함께 겪은 동기였다. 때문에 고민도 같이, 즐거움도 항상 함께 나누었다. 물론, 각각 다른 성격의 다른 세계를 맡고 있었기에 서로간의 이해가 어긋날 때도 있었다. 그럴 때마다 서로를 널리 포용하며 친구 관계를 지속시켜왔다.
 
 
 
 * 기구한 운명
 
 
 
 어느 식당의 구석진 곳.
 썩은 물이 한 뼘 가량 고여 있었다. 얼마나 오랫동안 방치했는지 고인 물에서는 썩은 악취가 풍겼다.
 이 썩은 물의 아래에 새로운 생명이 꿈틀거렸다. 무려 팔 개월 동안, 유충으로 지낸 하루살이가 성충으로 변하려는 몸짓이었다.
 잠시의 꿈틀거림 후 유충의 몸에서 날개가 언뜻 비쳤다.
 ‘후후후, 이제 날 수 있겠군. 이제 나도 제대로 된 하루살이다. 크하하하.’
 유충의 몸이 하루살이의 몸으로 변하는 데에는 꽤 많은 시간이 소모되었다.
 양쪽 날개가 모두 나자 날개를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아직 축축하게 젖은 건 여전했지만, 날 수 있게 되는 건 시간문제로 보였다.
 위잉! 턱!
 ‘잘 안 되네. 어디 다시 한번.’
 위잉!
 몇 번의 퍼덕거림 후 하루살이의 몸이 서서히 떠올랐다. 오랫동안 고대하던 하늘을 드디어 누빌 수 있게 된 것이다.
 위잉!
 ‘난다. 난다. 하하하. 나도 날······.’
 팍-!
 “웬 모기가 날아 댕기냐?”
 무려 8개월간 유충으로 지낸 하루살이의 최후는 한 남자의 손짓에 의해 이루어졌다. 전혀 의도하지 않은 자연스러운 손짓에 의해 순식간에······.
 ‘망할.’
 
 
 
 어느 산의 거대한 나무 위.
 원숭이 한 마리가 소리를 질러댔다. 새끼를 임신한 원숭이가 산고 때문에 지르는 신음소리였다.
 꾸웩!
 임신한 원숭이의 산고는 생각보다 오래 지속되었다. 무려 여덟 시간.
 아이가 크기 때문인지 어미에게 문제가 있는지, 새끼의 탄생은 쉽사리 이루어지지 않았다.
 꾸웩!
 엄청난 신음소리와 함께 새끼 원숭이의 다리가 삐져나왔다. 오랫동안의 산고가 결실을 보는 순간이었다.
 하지만, 다리부터? 이런 경우는 태아(胎兒)나 산모(産母) 모두에게 위험했다. 자칫 난산(難産)이 될 수도 있는 것이다.
 크륵! 크륵! 꾸웩!
 신음을 터트릴 때마다 새끼 원숭이가 나오는 속도도 점점 빨라졌다. 이미 두 다리가 다 나왔으니 그 끝도 얼마 남지 않아 보였다.
 ‘후후, 무려 오 개월. 오 개월이나 뱃속에서 보냈다. 드디어, 드디어 나도 태양을 보는구나.’
 원숭이의 임신 기간은 대략 오 개월에서 육 개월이다. 지금 태어나는 새끼 원숭이도 그 기간을 어미의 몸속에서 보내야 했다.
 한참의 산고 끝에 새끼 원숭이의 두 팔이 빠져나왔다. 이제 머리만 남은 상태였다. 마지막 관문이기는 했지만, 그 끝도 얼마 남지 않았으리라.
 끝에 다다랐다는 생각 때문인지 어미 원숭이의 얼굴도 전보다 편안해보였다.
 ‘조금만 더 힘 줘봐. 딱 한 번이면 되잖아.’
 새끼 원숭이의 생각을 읽었음인지 어미 원숭이가 다시 힘을 주기 시작했다. 마지막 산통도 얼마 남지 않아 보였다. 하지만······.
 ‘어어? 뭐, 뭐야?’
 어미 원숭이가 나무 아래로 추락하기 시작했다. 원숭이도 나무에서 떨어질 때가 있다지만 그 시기가 너무 교묘했다.
 ‘설마? 아닐 거야.’
 퍽-!
 어미 원숭이가 바닥에 안전하게 착지했다. 허나, 그 자세가 치명적이었다. 일견 엉덩방아를 찧는 자세.
 이 때문에 머리만 남은 원숭이의 목이 심하게 꺾여나갔다.
 ‘또······.’
 목이 꺾인 새끼 원숭이가 결국 세상을 하직하고 말았다. 마지막 순간을 못 넘긴 한을 가슴에 남긴 채 그렇게 죽은 것이다.
 
 
 
 죽은 자들이나 가는 영계.
 이곳에 좀 전에 죽은 새끼 원숭이의 영혼이 모습을 보였다.
 하지만, 그 영혼의 모습에는 머리가 없었다. 미처 탄생하지 못한 머리였기에 영혼에서도 사라진 모양이다.
 “원숭이 영혼 24517호.”
 음침한 목소리에 새끼 원숭이의 영혼이 몸을 가늘게 떨었다. 목소리의 주인이 가지고 있을 물잔 때문이었다. 제 정신을 가지고 먹을 수 없을 만큼 지독한 물맛을 생각하자 소름이 끼칠 지경이었다.
 “망각의 샘물이다. 마셔라.”
 머리가 없는 영혼이었지만 마시는 데에는 문제가 없었다. 그냥 입이 있는 자리에 가지고 가기만 하면 저절로 흡수되기 때문이다.
 ‘젠장. 항상 먹는 거지만 진짜 맛없군.’
 대부분의 영혼은 망각의 샘물이 가진 맛을 알지 못했다. 먹기 전에는 모르는 게 당연했고, 먹은 후에는 지난 기억을 잊기 때문에 알 수가 없었다.
 허나, 방금 샘물을 마신 원숭이 영혼은 이 맛을 정확히 기억하고 있었다. 지난 수백 년의 삶 동안 수 없이 마셔왔기에 당연한 일이었다.
 ‘너무 많이 마셨더니 기억이 사라지지도 않는군. 쳇.’
 새끼 원숭이는 지난 수백 년 동안 수만 번이나 망각의 샘물을 마셨다. 즉, 새로 얻은 삶에서 일 년 이상을 산 적이 단 한 번도 없는 거였다.
 아니, 태어나자마자 죽은 경우가 더 많았다고 봐야했다.
 약도 자주 먹으면 내성이 생기기 마련. 시간 공백이 적은 상태로 망각의 샘물을 너무 자주 마셨기에 이젠 망각의 효능도 통하지 않았다.
 “다음 원숭이 영혼 24518호.”
 마지막 목소리를 끝으로 새끼 원숭이의 영혼이 어딘가로 끌려갔다. 마치 블랙홀에 빨려들 듯 빠른 속도였다.
 
 
 
 응애, 응애!
 “어이구, 착하지. 우리 아가. 뚝.”
 하얀 피부의 자그마한 아기가 목이 터져라 울어댔다. 그 울음을 들은 엄마가 달래도 봤지만, 아기의 울음은 그칠 기미가 안 보였다.
 응애, 응애!
 “얘가 왜 이렇게 울지? 어디 쉬했나?”
 ‘젠장. 밥 좀 달라고. 밥 좀.’
 아기는 조산으로 칠 개월 만에 태어났다. 일명 칠삭둥이였다.
 그 때문인지 성장이 무척 느렸다. 다른 아기가 걸음마를 배울 시기임에도 유모차를 벗어나지 못한 것이다. 내일이면 돌이 되는 아기라는 점을 감안하면 느려도 한참 느린 성장이었다.
 이 때문에 울음으로써 음식 달라는 농성을 벌일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 엄마는 아기가 의도하는 바를 전혀 알아채지 못했다.
 “우리 아기 뚝!”
 응애! 응애!
 보통 아침밥은 애기 아빠가 나가면서 주는 게 보통이었다. 엄마가 하는 일이 밤에 쇼핑몰을 관리하는 일이었기에 아빠가 편의를 봐준 것이다.
 허나, 오늘은 아빠가 깜빡하고 그냥 나가 버렸다. 아빠의 생각은 ‘엄마가 알아서 주겠지’였다. 허나, 엄마 역시 같은 생각을 하고 있으니 문제가 있는 가정임에 분명했다.
 응애, 응애!
 “왜 이러지? 쉬도 안했는데······.”
 엄마가 전혀 이해를 못하는 듯하자 아기가 손가락으로 밖을 가리켰다. 그 후 그 손으로 먹는 시늉을 하기 시작했다. 아빠가 이유식을 주지 않았다는 걸 온몸으로 표현한 것이다. 하지만, 엄마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이해했다.
 “어휴, 밖에 나가고 싶은가 보구나. 하긴, 너도 내일이면 돌이니 밖을 나가보는 것도 좋겠지. 으!”
 아기를 들어 올린 엄마가 그를 유모차에 태웠다.
 엄마의 갑작스러운 행동에 아기가 울음을 그쳐버렸다. 너무 황당해서 말이 안 나온 모양이다.
 “어이구, 우리 아기 똑똑하기도 하지. 손으로 말까지 하고. 그래 오늘은 멀리까지 가보자.”
 엄마는 아기가 울음을 그친 것을 자기 마음대로 해석했다. 밖에 나가는 게 좋아서 울음을 그쳤다는······.
 본래 아기가 태어난 지 일 년 정도가 되면 옹알이를 할 수 있어야 했다. 하지만, 조산의 영향인지 아기는 도통 말을 하지 못했다.
 이런 늦은 성장 때문에 엄마와 아빠도 많이 다퉜다. 아기의 느린 발육을 서로 상대방의 잘못이라고 미룬 것이다.
 그런 싸움이 날 때마다 아기는 황당해하며 고개를 가로저을 뿐이었다. 대체 뭐 이런 가정이 다 있냐는 생각과 함께 말이다.
 ‘분위기가 이상해. 마치, 마치··· 설마, 아닐 거야.’
 엄마의 행동에 아기가 불길한 느낌에 사로잡혔다. 하지만, 그 느낌을 애써 지워버렸다. 더 생각했다가는 정말 그렇게 될 것 같은 재수 없는 기분 때문에.
 
 
 
 소수의 명품만 골라서 파는 옷가게 앞.
 세일 기간인지 몇 가지 물품을 내놓고 행사를 벌이고 있었다. 각종 스피커에는 물건 홍보가 한창이었고, 늘어놓은 물건 뒤에는 홍보에 열을 올리는 도우미가 보였다.
 아기를 유모차에 태운 어머니가 행사장에 나타났다. 모자(母子)의 등장에 행사장의 도우미들이 아기를 바라보며 감탄을 토했다.
 “우와! 아기가 너무 예뻐요. 몇 살이죠?”
 “어머, 우리 아기 예쁘죠? 호호, 내일이면 딱 일 년이 되거든요. 근데, 우리 아기는 예쁘기만 한 게 아니에요. 머리는 또 얼마나 좋은지. 한 마디만 하면 열 마디를 알아듣는다니까요. 또··· 호호호······.”
 엄마가 아기 칭찬에 기분이 좋아진 듯 아기 자랑을 해댔다. 자기 자식 예쁘다는데 기분 나쁠 부모 없으리라.
 하지만, 그것도 도가 지나치면 안하느니만 못한 일. 자랑에 너무 열을 올린 나머지 아기가 탄 유모차를 깜빡하는 실수를 범했다.
 엄마가 아기 자랑에 정신이 없는 동안 유모차는 경사진 비탈길을 따라 서서히 내려갔다. 처음에는 인도로만 가던 유모차였지만, 한참 내려가더니 어느 순간 도로로 돌진해 가고 있지 않은가. 차가 자주 오지는 않지만, 위험에 직면한 건 분명했다.
 ‘젠장. 내가 이럴 줄 알았어. 왜 내 인생은 일 년을 못 넘기냐고.’
 아기가 체념하듯 고개를 저었다. 이런 일을 처음 겪은 게 아니었기에 체념도 빨랐다.
 “아줌마. 저기 아기요.”
 “예? 우리 아기가 왜요? 우리 아기··· 아가! 아가 어디 있니?”
 “저기요. 저기 내려가잖아요.”
 행사 도우미의 손짓에 엄마가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엄청난 속도로 굴러가는 유모차를 발견했다. 엄마의 얼굴에 경악한 빛이 떠올랐다. 유모차가 이미 도로에 접어들었고 또, 엄청난 속도로 내려가고 있음을 본 것이다.
 “아가!”
 외마디 외친 엄마가 유모차를 향해 달려갔다. 어머니는 위대하다고 했던가. 엄마가 달리는 속도는 건장한 남자와 비교해서 조금도 떨어지지 않았다. 모정(母情)이 낳은 기적이리라.
 
 
 
 ‘엄마 힘내. 나도 일 년 넘게 살아보자고. 조금만 더 조······.’
 엄마를 응원하던 아기가 다시 체념하는 빛을 띠웠다. 자신을 향해 어마어마한 속도로 다가오는 화물차를 본 것이다.
 엄마와의 거리와 화물차의 속도를 계산하던 아기가 이내 고개를 저었다.
 ‘또 죽겠군.’
 아기는 엄마보다 자동차가 더 빠를 거라 생각했다. 아니, 누구라도 그렇게 생각했을 거였다.
 허나, 가끔씩은 당연한 일이 당연하지 않게 될 수도 있었다. 지금 같은 경우가 바로 그런 경우였다. 자동차를 발견한 엄마가 엄청난 속도를 냈다. 가히 인간이 낼 수 없어 보이는 빠른 속도에 아기가 눈을 빛냈다.
 ‘좀 더. 좀 더.’
 끼이익! 쾅-!
 자동차의 급정거는 너무 늦은 감이 있었다. 이미 부딪힌 후에 밟은 거나 마찬가지였으니 늦었다는 말로도 부족했다.
 하지만, 아기의 목숨은 여기서 끊어지지 않았다. 유모차를 밀어내고 엄마가 대신 부딪혔기 때문이다. 엄마가 가진 모정이 불가능을 가능으로 만들어 낸 모습이었다.
 “앰뷸런스 불러!”
 “누구 의사 없어요?”
 “저 피 좀 봐.”
 “119불러요. 빨리요.”
 사고가 난 지역은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되었다. 전화기를 붙들고 전화를 하는 사람이 대부분이었고, 때로는 운전사의 멱살을 잡으며 소리치는 사람도 있었다. 하지만······.
 ‘어이, 이봐. 유모차 세워줘야지. 뭐하는 거야?’
 그 누구도 유모차를 거들떠보지 않았다. 당장 눈앞에 큰 사고가 터졌기에 신경을 분산시킬 틈이 없는 모양이다.
 유모차는 경사가 주는 속도와 엄마가 밀어낸 힘이 보태어져서 무섭게 질주했다. 누군가 본다면 세울 만도 하건만, 그 누구도 유모차에 신경 쓰지 않았다. 마치 한 편의 연극을 보듯 어처구니없는 상황이었다.
 ‘이건 분명 신의 농간이야. 저 많은 사람이 이 유모차를 세우지 않는다는 게 말이 돼? 말이 되냐고.’
 유모차는 공사장을 향해 곧바로 질주해갔다. 전보다 속도가 조금 줄었지만, 아기에게는 여전히 위험한 속도였다.
 ‘미치겠군.’
 아기가 몸을 조금씩 흔들었다. 속도를 늦추고 방향을 어떻게든 틀어보려는 나름대로의 발악이었다.
 퍽-!
 유모차가 부딪힌 곳은 공사장의 모래가 쌓인 곳이었다. 아기의 엄청난 집념과 노력이 이런 결실을 만들어 낸 것이다.
 얼핏 아기의 목숨도 무사해 보였다. 모래가 준 충격 완화에 유모차가 멀쩡했으니 아기도 살아 있을 터.
 ‘휴, 살았다. 빌어먹을 신. 두고 보······.’
 쿵-!
 아기의 머리 위로 엄청난 크기의 철근이 떨어졌다. 너무 절묘한 시기에 너무나도 정확한 자리였다.
 ‘그럼 그렇지.’
 아기의 이번 삶도 일 년을 넘기지 못한 채 마감되었다.
 
 그는 세상에 존재하는 많은 생명체로 태어나서 수많은 삶을 살았다. 하지만, 단 한 번도 일 년을 넘기지 못했다. 어쩌면 세상에 존재하는 가장 불운한 생명이 그일지도 몰랐다.
 
 
 
 영계의 영혼 대기 장소 루멜란.
 얼굴이 납작하게 변한 아기 형체의 영혼이 인상을 찌푸렸다. 끔찍한 맛의 망각의 샘물을 마실 게 두려운 모양이다. 매번 있어온 일이지만 망각의 샘물을 마시는 일은 좀체 적응이 되지 않았다.
 “인간 영혼 189763번. 앞으로!”
 샘물 담당자의 목소리에 아기 영혼이 몸을 움츠렸다. 망각의 샘물에 대한 두려움에 자신도 모르게 반응한 모습이었다.
 “뭐하나? 인간 영혼 189763번. 앞으로!”
 샘물 담당자의 재촉에서 아기 영혼은 앞으로 나서지 않았다. 왠지 이번만큼은 강하게 반항하고 싶었다.
 “이··· 1897······.”
 “잠깐 멈추게.”
 “예? 아, 묵주님! 여긴 어쩐 일로······.”
 묵주는 무령계를 담당하는 저승사자의 수장이었다.
 평소에 그는 무령계 일만으로도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다. 이 때문에 가깝지도 않은 루멜란에 모습을 드러내는 건 극히 드문 일이었다. 심지어 구백 년에 한 번씩 맡게 되는 루멜란 순찰도 빠지기 일쑤였다.
 친구인 판테아와 수영이 무슨 계획을 꾸몄다는 느낌이 아니었다면 이곳에 모습을 드러내지도 않았을 것이다.
 “저 아기 영혼을 잠깐 빌려도 되겠는가?”
 “예? 저기 묵주님. 저 영혼은 수영님이 특별히 관심을 두는 영혼이라서······.”
 ‘특별히 관심을 둔다?’
 ‘특별한 관심?’
 샘물 담당자의 말에 묵주와 아기 영혼이 동시에 똑같은 의문을 품었다.
 묵주는 저 영혼이 수영과 판테아가 꾸민 계획의 대상임을 확신했다. 수만 명의 저승사자를 거느린 수영이 일개 영혼에게 관심을 기울이는 일이 흔치 않은 까닭이다.
 반면, 아기 영혼은 자신이 왜 관심을 받는지 도무지 알 수 없었다. 자신이 평균 수명을 낮추기 위한 계획의 일부임을 모르는 아기 영혼. 수영이 관심을 기울이는 이유를 모르는 게 당연했다.
 “허허. 내가 수영 그 친구와 친하다는 건 자네도 알지 않은가? 수영에게는 내가 말할 테니 잠시만 빌리세.”
 “아, 뭐··· 묵주님께서 그렇게까지 말씀하시니······. 헤헤.”
 “루멜란 담당 저승사자에게는 자네 칭찬을 많이 해주겠네. 허허허.”
 “헤헤헤. 묵주님. 저는 묵주님을 도와서 무령계에서 일을 해보는 게 소원인지라······.”
 샘물 담당자의 말은 저승사자가 되고 싶다는 의미였다. 그것도 전 차원 가운데 상위의 차원에 속하는 무령계의 저승사자로······. 최소 다섯 단계 이상의 신분 상승을 꿈꾸는 샘물 담당자였다.
 “나도 자네처럼 일 잘하는 부하를 두고 싶구먼. 내가 알아보지. 후후. 그럼 이 친구는 내가 잠깐 빌리겠네.”
 “헤헤. 얼마든지 빌려 가십시오.”
 샘물 담당자의 인사가 끝날 때쯤엔 묵주와 아기 영혼이 모습을 감춘 뒤였다. 그는 자신의 신분 상승이 이미 기정사실이라도 된 양, 입가에서 웃음이 떠나지 않았다. 묵주가 간사한 부하를 싫어하는 걸 꿈에도 모르는 샘물 담당자였다.
 
 
 
 조용한 곳으로 자리를 옮긴 묵주가 아기 영혼을 내려놓았다. 그리고 그윽한 눈빛을 유지한 채 조용히 말했다.
 “아까 보니 망각의 샘물을 거부하는 모습 같던데··· 맞나?”
 묵주의 물음에도 아기 영혼은 아무런 대답을 하지 않았다. 영계에서는 영혼이 말을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런, 깜빡했군.”
 딱-!
 묵주가 손을 퉁기자 아기의 영혼에 미약한 빛이 어렸다. 묵주가 아기에게 염력을 사용한 듯 보였다.
 “이제 말을 할 수 있을 거다. 음··· 생각을 언어로 표현하면 내게 들릴 테니 말을 해 보거라.”
 -이···이렇게요?
 아기 영혼의 어색한 대답에 묵주가 슬쩍 미소 지었다. 이곳에서 처음 사용해보는 언어에 대한 염력. 처음으로 사용한 방법이 통했다는 게 만족스러운 모양이다.
 “그럼 대답해라. 아까 망각의 샘물을 거부한 게 맞느냐? 내 눈엔 네가 뒷걸음질 친 걸로 보였는데······.”
 -그, 그건요. 그 물이 맛이 너무 없어서··· 도저히 못 먹겠더라구요. 저 물을 먹을 때마다 미치겠다니까요.
 “맛이 없다라······. 맛이··· 맛. 뭐? 넌 그 물 맛을 기억한다는 말이냐?”
 묵주의 얼굴에 놀람이 가득했다.
 망각의 샘물 맛을 기억하는 존재의 등장? 자신도 망각의 샘물을 마신다면 기억을 잃을 게 분명했다. 헌데 일개 영혼이 망각의 샘물 맛을 기억한다? 절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최소 자신이 아는 지식으로는 불가능한 얘기였다.
 -그야 너무 자주 마시니까······.
 “너무 자주? 넌 기억을 잃지 않느냐?”
 -그게 그러니까······.
 “언제부터였지? 망각의 샘물을 마시고도 기억을 잃지 않은 게 언제부터였느냐?”
 묵주의 얼굴이 진지하게 변했다. 평소에도 장난과 실험을 좋아하는 묵주였다. 늘 사건과 사고를 찾아다니는 그에게 이런 사실은 간과할 수 없는 일이었다.
 -한 이천 년 정도 된 것 같은데요.
 “이천 년이라··· 환생 횟수로는?”
 -그야 저도 모르죠. 확실한건 기억을 유지하고 지내온 지 꽤 오래됐다는 것 정도예요. 한 오천 번 되나? 잘 모르겠어요.
 아기 영혼이 말한 이천 년은 임신 기간을 포함해서였다. 즉, 그 기간을 빼면 실제 살아온 건 몇 백 년도 안 되는 것이다.
 “왜 그러느냐?”
 -전 일 년 이상을 산 적이 단 한 번도 없거든요. 뭐, 거의 대부분은 하루도 못 넘기고 죽었지만요. 생각하면 할수록 열 받아서요.
 오천 번이라는 말에 묵주가 입 꼬리를 말아 올렸다.
 오천 번의 삶을 기억하는 존재는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없었다. 전혀 새로운 존재의 등장만으로도 묵주를 흥분시키기 충분했다.
 지금 묵주의 머릿속에는 이 존재를 어떻게 이용할까에 대한 생각으로 몹시 분주했다.
 “흠, 삶이 얼마나 남았는지 한 번 볼까? 인큐리어스 메모리얼 라이프!”
 묵주의 낮은 읊조림에 보라색 빛이 아기를 감쌌다.
 인큐리어스 메모리얼 라이프는 저승사자들의 수장들만 사용할 수 있는 고위급 염력이었다. 영혼의 남은 환생 횟수를 살피는 염력인 인큐리어스 메모리얼 라이프. 고위급 염력답게 한 번 사용했을 때의 기력 소모도 만만치 않았다.
 하지만, 묵주는 이 정도의 기력 소모가 조금도 아깝지 않았다. 어차피 시간 지나면 기력은 다시 차지 않은가. 거기다 호기심을 충족시키기 위해서라면 고위급 염력도 마다하지 않는 게 묵주의 본래 성격이었다.
 -뭐, 뭐하는 거예요?
 “한 번 남았군.”
 -뭐가요?
 “넌 한 번의 삶만 더 살면 소멸될 거라고.”
 -말도 안 돼요. 내가, 내가 뭐 한 게 있다고. 난 제대로 살아본 적이 단 한 번도 없다구요. 나도, 나도··· 좀 오래 살고 싶다고요.
 아기 영혼의 절규에도 묵주는 고개를 저을 뿐이었다.
 한 번 창조되면 정해진 횟수만큼만 환생하는 건 영계의 율법이다. 이 율법을 벗어나는 방법은 운명의 굴레를 벗는 법뿐. 하지만, 굴레를 벗으려면 속한 차원의 저승사자가 허락해야만 가능했다.
 허나 그가 속한 저승사자의 수장인 수영이 허락할 지 미지수였다.
 “나중에 다시 얘기하지. 일단 마지막 삶을 살아라. 방법을 생각해보마.”
 -부탁드립니다. 제발, 제발 살려주세요. 저도··· 저도··· 흑, 흑.
 “알았다.”
 묵주의 말이 끝나자 아기 영혼의 모습이 서서히 사라졌다. 그가 원래 있던 루멜란으로 돌아가는 현상이었다.
 ‘재미있는 녀석이군. 전생을 기억하는 놈이라······.’
 묵주에게는 아기 영혼을 측은하게 생각하는 마음은 없었다. 하루에도 수천만의 영혼이 소멸되는 차원계 내에서 한 영혼만을 불쌍하게 생각하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허나, 전생을 기억하는 영혼이었기에 재미있는 사건을 만들 수 있을 것 같았다.
 
 
 
 다섯 달 후 영계의 루멜란.
 아기 영혼이었던 그가 개의 형태로 모습을 드러냈다. 그에게 주어진 마지막 삶이 개였던 모양이다.
 “개 영혼. 678653번. 앞으로!”
 “잠시만 기다리게.”
 샘물 담당자의 말에 검은 피부의 묵주가 입을 떼었다.
 사건 사고를 좋아하는 그가 전생을 기억하는 혼을 그냥 놔둘 리 만무했다.
 “묵주님. 또 오셨군요.”
 “저 영혼을 잠시 빌리겠네. 아, 내가 관리하는 무령계에 저승사자가 좀 필요하더군. 나중에 봄세.”
 묵주가 샘물 담당자의 대답도 기다리지 않은 채 개의 영혼을 데리고 사라졌다.
 자신이 뒤에 단 말만으로도 샘물 담당자가 입을 다물리라는 걸 짐작했다.
 ‘무령계. 무령계··· 후후후. 나도 이제 저승사자가 된다. 크크크크, 키키키키.’
 샘물 담당자는 저승사자가 된다는 생각에 입안에서 절로 웃음이 새어 나왔다. 묵주의 속마음은 전혀 모른 채 혼자 좋아서 들뜨는 격이었다.
 
 
 
 한적한 곳에 도달한 묵주가 개의 영혼을 내려놓았다.
 딱 63일. 개의 임신 기간을 생각한다면 태어나서 얼마 살지도 못하고 죽은 셈이었다.
 딱-!
 묵주가 개의 영혼과 대화를 할 수 있도록 염력을 사용했다. 이전에 아기의 영혼일 때도 해본 적이 있었기에 개의 영혼도 자연스럽게 받아들였다.
 “지지리 복도 없는 녀석이군. 태어나자마자 죽은 건가?”
 -그래도 이번에는 운이 좋았습니다. 개로 태어났으니 최소한 임신 기간 동안은 존재했으니까요. 개는 임신 기간이 꽤 길거든요. 이곳에서는 산 걸로 생각하지 않겠지만, 저한테만큼은 살아 있는 기간이었습니다. 뱃속에 있으면서도 듣고 느끼는 건 가능하니까요.
 개의 영혼의 말에 묵주가 오히려 놀라워했다.
 이번 개의 삶이 마지막이었음을 그도 알 터. 헌데도 담담하게 반응하게 받아들이는 영혼이라······.
 묵주는 상대의 차분한 모습이 대단하게 느껴졌다.
 “억울하지 않나?”
 -억울합니다. 그래도 기억을 잃지 않았으니 소멸된 많은 영혼들보다 더 다양한 기억을 가지고 있지 않습니까?
 “특이한 놈이군. 좀 있으면 이곳에 수영이 나타날 거다. 아, 수영은 네가 살아온 차원의 저승사자다. 차원만 다르지 나와 같은 위치라고 할 수 있지.”
 -그렇군요.
 겉으로는 담담하게 반응했지만, 속으로는 화가 치밀어 올랐다. 허나, 어차피 소멸되어야 한다면 좀 더 담담하게 받아들이고 싶었다. 그게 수백 년의 기억을 가진 그가 취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
 “후후, 역시 특이한 놈이야. 제승업 그 녀석과 만나면 아주 재미있겠어. 크크크.”
 -예? 제··· 뭐라고 하셨죠?
 “아니다. 혼잣말이니 신경 쓸 거 없다.”
 묵주의 말에도 개의 영혼은 제승업이라는 이름을 지울 수 없었다. 특별한 이유는 모르나 자신과 어떤 관계가 있으리라는 생각이 든 것이다.
 ‘제···승업? 그게 누구지?’
 -언제 옵니까?
 “초조하냐?”
 -조금요.
 “후후, 나타날 때가 되면 나타나겠지.”
 
 
 곧 올 거라는 수영은 꽤 오랜 시간이 지나서야 모습을 드러냈다. 그가 다스리는 예원계에 무슨 문제가 생긴 듯했다.
 “어이, 묵주! 미안하이. 내가 좀 늦었구먼.”
 “아니네. 서로가 바쁘다는 걸 잘 알지 않은가? 충분히 이해하니 신경 쓰지 말게.”
 “허허, 묵주! 난 잊은 겐가?”
 묵주와 수영이 인사를 나눌 때, 그들의 뒤에서 판테아가 모습을 보였다. 친구라는 걸 자랑이라도 하듯, 친근한 어투였다.
 서로 지우(知友)라 할 수 있는 수영, 판테아, 묵주.
 서로를 충분히 이해하고 아끼는 사이였지만, 그들 셋이 다 함께 모이는 건 정말 오랜만이었다. 묵주가 다스리는 무령계와 수영이 다스리는 예원계가 너무 멀었기 때문이다.
 “이게 누군가? 판테아 아닌가? 우린 그저께도 만났지 않은가? 자네가 이해하게.”
 “허허허허. 그러지. 근데 우릴 급하게 부른 이유가 뭔가?”
 “맞네. 지금 내가 다스리는 예원계에 문제가 생겨서 곧 회의가 열릴 것 같네.”
 “허허허. 이거 다들 바쁜 듯하니 용건만 말하겠네. 수영. 이 영혼 기억나는가?”
 묵주의 말에 수영이 개의 영혼을 찬찬히 살폈다.
 자기가 선별해냈던 영혼이기는 하지만 일일이 기억할 수는 없었다. 또, 자신이 단명(短命)시키려고 했던 영혼의 수도 적지 않은 상황이었다. 한 번에 알아보지 못하는 게 당연했다.
 한참 살피자 개의 영혼이 누구인지 알 수 있었다. 헌데, 묵주가 어떻게 그를 아는지는 짐작이 가지 않았다.
 “묵주! 자네가 이 영혼을 어찌 아는가? 이 영혼은······.”
 “알고 있네. 얼마 전에 판테아를 만나서 다 들었지. 단명(短命)이라··· 좋은 계획이기는 하지만 당하는 입장을 생각해본 적이 있는가? 차원계 전체의 평균 수명을 맞추기 위해 사라져야하는 영혼을 생각해봤는가?”
 묵주의 말에 판테아와 수영이 놀란 표정을 지었다.
 평소에 자신들보다 더 냉정해보였던 존재가 묵주였다. 정과는 담을 쌓은 듯 보였던 그가 정에 이끌리는 말을 하다니. 평소와 너무 다른 모습에 의아한 기분이 들었다.
 “대를 위해서 소를 희생하는 건 늘 있어왔던 일이네.”
 “판테아! 자네도 그렇게 생각하는가? 아무것도 모르고 사라져야하는 저 영혼이 불쌍하지도 않단 말인가? 만약 내 눈에 보이지 않았다면 다른 소멸된 존재들처럼 이 영혼도 사라졌겠지. 난 다른 영혼을 발견하지 못한 게 아쉬울 따름이네.”
 수영의 냉정한 대답에 묵주가 안타까운 듯 말을 이었다. 시선은 판테아를 향한 채였다. 물론, 연기였다.
 “······.”
 판테아는 묵주의 시선이 자신을 향하자 고개를 푹 숙여 버렸다.
 이 중에서 정에 가장 약한 이가 판테아였다. 묵주의 날카로운 지적에 절로 마음이 약해진 것이다.
 “허허, 판테아. 이 계획은 자네 머리에서 나온 게 아닌가?”
 “그건 그렇지만··· 그게··· 나도 미안하기는 하네. 저기 아무것도 모르고 서 있는 영혼이 나라고 생각하면······. 휴, 죄를 지은거지.”
 판테아의 말에 수영이 눈살을 찌푸렸다.
 판테아의 대답으로 자신만 악당이고 다른 저승사자들이 천사가 된 기분. 이 때문에 그는 지금 자리가 불편하기 그지없었다.
 “수영! 너무 기분상해하지 말게. 내가 자네들을 모은 건 여기 이 불쌍한 영혼에게 제대로 살 기회를 주자는 생각에서라네. 생각 같아서는 자네 계획에 있는 다른 영혼들도 기회를 주고 싶지만··· 이미 소멸됐으니 어쩌겠는가?”
 실제로 수영의 계획에 사용된 영혼은 적은 수가 아니었다. 허나, 그 모든 영혼들은 자신들이 왜 불행하게 된 지도 모른 채 소멸되었다. 오직 지금 보이는 개의 영혼만이 살아 있을 뿐이었다. 지금의 개의 영혼도 묵주의 눈에 띄지 않았다면, 다른 여느 영혼들처럼 소멸되었겠지만.
 “난 회의가 있어서 가보겠네. 판테아와 묵주. 둘이서 알아서 결정하게. 난 자네들 의견을 따르겠네.”
 말을 마친 수영이 서둘러 모습을 감추었다. 그도 감정이 있는 이상 미안하긴 마찬가지였다. 자신의 임무가 있기에 애써 부인했을 뿐. 그런 수영이었기에 지금 이 자리에 있는 게 불편했던 모양이다.
 수영이 사라지자 판테아의 입장이 더 곤란해졌다. 같이 죄를 지은 사람이 사라졌으니 온갖 잘못이란 잘못은 자신의 차지가 될 터였다. 죄인이 된 기분에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
 “판테아! 어쩔 텐가? 수영은 우리 결정에 따른다고 했네. 어차피 한 존재 정도는 운명의 굴레를 벗겨주는 것도 나쁘지 않을 듯싶구먼. 운명의 굴레를 벗기는 건 늘 있어왔던 일 아닌가? 거기다 수명을 낮추겠다는 목적도 달성한 것 같은데. 어떤가?”
 “좋네. 좋아. 나도 자네 뜻에 따르지. 어차피 저 영혼은 수영이 다스리는 예원계 소속. 그가 허락한 거나 마찬가지니 내가 뭘 어쩌겠는가?”
 “아니네. 그가 우리 결정에 따른다고 한 건 저 영혼의 거처를 자네 차원계에 두고 싶었던 것 같네. 자네와 아무 상관도 없는 영혼에 대한 판정을 자네에게 맡겼겠는가?”
 묵주의 말에 판테아가 고민에 빠졌다.
 묵주의 말은 개의 영혼으로 있는 자를 자신이 다스리는 판트리아에 환생시켜야 한다는 얘기였다. 차원과 차원의 교차. 쉽사리 허락할 수 없는 일이었다. 이 일이 신의 귀에 들어가기라도 하면 큰 벌을 받아야할지도 몰랐다.
 “자네도 알다시피 우리 차원계는 너무 많은 전투와 싸움으로 평균 수명이 무척이나 짧네. 지금은 겨우 수명을 맞춘 셈이지. 근데 저 존재를 환생시켰다가 그가 또 다시 단명(短命)해버리면······.”
 “허허허, 저 영혼은 어차피 운명의 굴레를 벗길 생각 아닌가? 그 방법이 아니면 소멸해야 할 영혼이 환생할 수는 없을 테니 말일세. 그럼 그가 빨리 죽든 오래 살든 무슨 상관인가?”
 “아, 그렇군. 좋네. 그럼 자네 뜻에 따르지. 우리 판트리아에 환생시키겠네. 어차피 예원계와는 인연이 다했으니 내가 받아주지.”
 판테아의 말에 묵주가 환한 미소를 띠었다. 자신이 원하는 성과를 거둔 것에 대한 쾌감이었다.
 “허허허, 잘 생각했네. 우리가 저승사자로 있긴 하지만 영혼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도 가져야지. 암, 그렇고 말고.”
 “난 이만 가보겠네. 루멜란에는 내가 말해놓지.”
 말을 마친 판테아가 모습을 감추었다. 그 역시 이 자리에 있는 건 마음이 편치 않았다. 지금 이곳에서만큼은 죄인의 입장이었으니 벗어나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판테아가 사라지자 또 다시 개의 영혼과 묵주만이 남았다. 묵주 못지않게 개의 영혼도 얼굴 가득 미소가 떠올라 있었다. 겉으로 덤덤한 척 했던 그였지만, 소멸되기는 싫었던 것이다.
 “후후, 내가 자네에게 새로운 생명을 부여했군. 기쁜가?”
 묵주의 물음에 개의 영혼이 생각에 잠겼다. 잠깐 고개를 숙였던 개의 영혼이 어두운 표정을 지었다.
 -별로요. 생각해보니 별로 좋은 것도 없네요. 어차피 환생해봐야 일 년도 살지 못하고 죽을 테니. 차라리 지금 소멸되는 게 좋겠습니다.
 “왜 일 년도 살지 못할 거라도 생각하느냐?”
 -그게 제 팔자 같네요. 아까 판테아라는 분이 자신의 차원에 많은 전투와 전쟁이 일어난다고 했죠? 아마 전 그 전쟁이나 전투 중에 단명하게 될 겁니다. 지금까지 늘 그래왔습니다.
 개의 영혼이 푸념을 늘어놓자 묵주가 고개를 끄덕였다.
 엄청난 삶을 단명했던 그가 이런 생각을 하는 건 당연했다. 그의 마음을 십분 이해했기에 묵주도 고개를 끄덕였음이다.
 “그래. 그곳은 전쟁이 끊이지 않는다고 하더군. 내가 뭘 도와주면 되겠나? 나도 자네가 빨리 죽는 것은 원하지 않네. 어찌되었든 내가 부여한 삶이나 마찬가지 아닌가?”
 -살 수 있게 해주십시오. 누가 죽이려고 하면 도망칠 수 있도록 해주십시오. 주변에서 전쟁이나 전투가 치열해져도 나만은, 나 혼자만은 어떻게든지 도망갈 수 있도록 해주십시오. 그렇게 안 해주시면 그냥 여기서 소멸되겠습니다.
 개의 영혼의 말에 묵주가 생각에 잠겼다. 위를 쳐다봤다가 아래를 보기를 몇 차례나 반복하던 묵주. 시선이 개의 영혼에게 닿았을 때 인상을 찌푸렸다.
 “야! 너 그 침 좀 안 흘리면 안 되냐? 지저분하잖아.”
 묵주의 말처럼 개의 영혼은 끊임없이 침을 흘리고 있었다. 거품과 가래가 마구 섞인 지저분한 모습이었다. 나름대로 상위 직분인 묵주에게는 혐오스럽게 보였던 모양이다.
 -그게, 저··· 제가 죽을 때 미친병에 걸려서 죽었거든요. 그래서 이게 내 마음대로 안 되네요.
 ‘미친병? 개가 미친병이면··· 광견병?’
 “하하하하하.”
 광견병에 생각이 닿은 묵주가 대소를 터트렸다.
 어떻게 마지막 생마저 추하게 마무리되었는지······. 한편으로는 불쌍하면서도 개의 영혼의 살아온 시간이 우습기 짝이 없었다.
 -웃지 마세요. 누군 미치고 싶어서 미친 줄 알아요? 빨리 살 방법이나 내놔요!
 개의 영혼의 강한 반박에 묵주가 멍한 표정을 지었다. 대체 뭘 믿고 저렇게 강하게 나오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누가 뭐래도 자신은 저승사자가 아니던가? 일개 영혼이 저승사자에게 큰 소리를 치다니······. 뭔가 믿고 있는 구석이 있나 싶었다.
 ‘이놈이 내 목적을 눈치 챈 건가? 그럴 리 없는데.’
 개의 영혼은 묵주의 의도 같은 건 생각지도 않았다. 죽는 그 순간의 끔찍함을 다시 느끼고 싶지 않았을 뿐. 그의 의도를 알았다면 이보다 더 확실한 흥정을 걸어왔을지도 몰랐다. 누가 뭐래도 엄청난 시간의 기억을 간직한 존재 아니던가.
 “좋다. 살 수 있게 해주지. 내가 다스리는 무령계에는 신법이라는 게 있다. 엄청 빠르게 달리는 방법이지. 도망에는 그것만큼 좋은 게 없다. 그걸 너에게 주입시켜주지. 너한테 딱 맞는 신법이 떠올랐거든. 아, 네가 태어나고 열 살이 되면 저절로 알게 될 거다. 그 전에 기억나지 않는다고 날 원망하지 말도록.”
 묵주의 표정이 조금쯤은 음침하게 변했다. 그가 말했던 신법이 예사롭지 않음을 간접적으로 드러내는 모습이었다. 하지만 개의 영혼은 그의 표정에 신경도 쓰지 않았다. 살 수 있다는 데 뭘 더 바라겠냐는 생각에서였다.
 -열 살? 말도 안 돼. 내 말을 듣긴 들은 거예요? 난 일 년을 산적이 단 한 번도 없다고요. 근데 십 년이나 버티라는 게 말이 되요?
 “내가 열 살까지 살 수 있도록 해주마. 그 전까지는 절대 죽지 않을 거라고 약속하지.”
 물론, 묵주의 말은 거짓이었다.
 굴레를 벗으면 저승사자인 자신이라도 찾는 게 쉽지 않았다. 이 때문에 굴레를 벗은 존재를 다스리기 위해서는 굴레를 벗기 직전에 어떤 제약을 가해야하는 것이다. 거기다가 자신은 판트리아의 저승사자도 아니었으니 지켜주는 일 자체가 불가능할 수밖에 없었다.
 -아, 고맙습니다. 저······.
 “말해봐라. 들어줄 수 있는 거라면 들어주도록 노력해보마.”
 -아시다시피 전 일 년 이상을 산 적이 단 한 번도 없습니다. 그래서 말이라는 걸 단 한 번도 못해봤죠. 물론 글도 모릅니다. 지금 대화는 나도 모르게 되는 거라서 이런 건 싫고요. 그러니까 글이나 말을 알려 주십시오. 제 소원입니다. 누군가와 말을 해보고 싶습니다. 누군가가 쓴 글을 읽고 싶습니다. 누군가에게 글을 쓰고도 싶습니다. 제발 부탁입니다.
 개의 영혼이 한 말에 묵주가 한숨을 쉬었다. 자신이 기대했던 수준 이하의 부탁이었기에 맥이 빠지는 기분이었다. 그는 엄청난 무공이나 비밀을 알려달라고 할까봐 내심 조마조마했었다.
 “언어를 알아듣게 하는 건 어렵지 않다. 헌데··· 네가 언어를 구사하는 건 무리다. 언어를 구사하는 건 지식이 아닌 습관에 의해 이루어지기 때문이지. 말과 글을 알아듣고 이해하는 정도로 만족한다면 들어줄 수 있다.”
 -예. 그 정도면 충분합니다.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이 은혜 절대 잊지 않겠습니다.
 개의 영혼이 진심으로 감사해하며 고개를 숙였다.
 묵주를 만나지 못했다면 다른 여느 영혼들처럼 한줌의 연기로 소멸하게 되었을 터였다. 그런 자신을 구해주고 멋진 선물까지 줬으니 평생의 은인이라 생각했다.
 “판트리아에 환생을 하게 되면 넌 자유의 몸이 된다. 무슨 뜻인 줄 아느냐?”
 -예. 정말 잘 살아보겠습니다. 묵주님이 주신 목숨이니 정말 잘 살겠습니다.
 “그곳에서 네가 죽는다면 그건 네 잘못이다. 그곳에서 네가 잘 되어도 네가 잘해서 이루어진 일이다. 그 어떤 상황에서도 나나 다른 저승사자들을 탓해선 안 된다. 또, 신을 탓해서도 안 되고. 명심해라.”
 물질계의 존재가 신과 연결되는 유일한 방법은 간절한 기도뿐이다. 절실하고 간절하게 기도하면 그 내용이 신에게 전해지는 것이다. 허나 모든 득과 실을 자신의 탓으로 하게 되면 기도를 하지 않게 된다. 즉, 신과의 연결이 끊어지는 것. 묵주가 노리는 게 이것이었다.
 자신과 다른 저승사자들이 한 일이 신의 귀에 들어가게 된다면 징계를 면치 못할 터. 불상사를 미리 예방하는 차원에서 개의 영혼에게 재차 명심시키는 모습이었다.
 -하하하. 감사합니다. 이 은혜를 어떻게 갚아야 할지.
 “은혜를 갚을 생각은 하지 않아도 된다. 어차피 넌 거기서 태어나서 죽는 순간까지 날 만날 일은 없다. 아니, 죽어도 날 보지는 못할 거다. 다시 죽게 되면 죽음이 아닌 소멸이 될 테니까. 내가 주려했던 선물은 다음 차원에서 환생하게 된다면 머릿속에 각인되어 있을 거다.”
 -예.
 “그럼 가 봐라.”
 묵주의 짧은 말에 개의 영혼이 서서히 사라졌다. 예전에 한 차례 겪었던 강제 이동이었다.
 사라지면서도 개의 영혼은 지금의 상황이 행복하기 그지없었다. 그곳에서 어떻게 살건 저승사자가 주변을 살펴줄 터. 최소한 누군가에 의해 죽을 걱정은 없으리라 믿었다.
 대신 사고가 아닌 늙지 않는 방법을 찾는 건 순전히 자신의 몫이었다.
 ‘후후, 이제 하나는 끝났고 하나 남은 건가?’
 개의 영혼이 사라지자 묵주의 얼굴에 장난기가 어렸다. 자신이 원했던 사건의 조건 하나가 충족된 상황. 제 2의 조건만 이루어진다면 멋진 사건이 발생하리라 생각했다.
 
 
 
 삼 년 후 영계.
 묵주를 비롯한 전 차원을 다스리는 저승사자의 수장이 한 자리에 모였다. 단순한 친목을 위한 모임이었다면 좋았으련만. 이 자리는 저승사자들이 그간에 저지른 만행을 처벌하기 위한 자리였다.
 “무령계 저승사자 묵주 앞으로!”
 “묵주 대령했습니다. 하명하십시오.”
 이번 감사를 맡은 알파하파 영계 제 3 신의 호명에 묵주가 공손히 답했다.
 매 천여 년마다 있어온 감사였기에 묵주의 얼굴도 담담하기 그지없었다. 역시나 지금까지 호명된 구십여 명의 저승사자 역시 간단한 격려와 칭찬으로 끝나기 일쑤였다. 묵주 역시 이번 감사를 의례적인 인사로만 생각했다.
 “네 이놈! 네 죄를 네가 알렸다!”
 “예? 무, 무슨 말씀을?”
 담담하기만 했던 묵주의 얼굴에 놀람이 서렸다. 다른 저승사자를 대할 때와는 사뭇 다른 알파하파 신의 목소리. 마치 분노가 극에 달해 참지 못하는 모습이었다.
 아무 일 없이 끝나리라는 자신의 예상이 깨지자 순간 얼떨떨해졌다.
 “쉐파!”
 “예. 무령계 저승사자의 수장인 묵주는 무령계 내에서 874명의 영혼에게 사적인 행동을 취했습니다. 또, 그 874명의 영혼 가운데 76명은 말을 따르지 않는다 하여 소멸시켰으며, 나머지 영혼에게는 말을 잘 들은 대가로 운명의 굴레를 벗겨줬습니다. 또, 제승업이라는 영혼에게 사적인 감정이 실린 폭력을 행사했으며, 결국 그를 무령계가 아닌 판트리아계로 보내버리는 만행을 저질렀습니다.”
 “어, 어떻게?”
 서기장 쉐파의 말에 묵주의 몸이 심하게 떨렸다. 쉐파가 한 말은 그 누구도 모르는 일이 대부분이었다. 심지어 자신의 지우에게마저 말하지 않았던 비밀 중의 비밀이었다. 대체 어떻게 신의 귀에까지 들어갔는지 짐작이 가지 않았다. 그가 신이라는 존재를 너무 가벼이 생각했음이다.
 “네놈이 신을 우습게 봐도 단단히 우습게 봤구나. 쉐파! 계속해라.”
 “예. 얼마 전 묵주는 예원계의 한 영혼을 설득하여 소멸을 맞아야 할 영혼을 판트리아계로 보내버렸습니다. 예원계의 제승업이라는 영혼과 그 영혼을 만나게 할 속셈인 듯합니다.”
 “묵주! 이래도 할 말이 있느냐?”
 알파하파 신의 말에 묵주가 무릎을 꿇었다. 자신의 잘못이 백일하에 드러난 상황. 비는 일 외에는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살려주십시오. 다시는, 다시는 이런 일이 없을 겁니다. 제발 살려 주십시오.”
 “무령계의 영혼과 예원계의 영혼을 거의 동시에 판트리아계로 보냈더군. 이유를 말하라.”
 “정말, 정말 아무런 이유가 없었습니다. 그냥, 그냥 다른 차원의 영혼이 만나면 재미있을 거라는 생각에······. 살려주십시오.”
 묵주의 대답에 알파하파 신을 비롯한 주변 감찰신 모두가 황당한 표정을 지었다. 겨우 재미있으라고 두 영혼을 가지고 놀다니······. 저승사자로서 가져야 할 기본적인 소양마저 갖추지 못한 모습이었다.
 “이, 이······. 쉐파! 이놈을 영계 18지옥에 집어넣고 만 년 간 감금하라.”
 “예.”
 “다음 예원계 저승사자 수영!”
 이번 감사의 결과로 예원계 저승사자인 수영과 무령계 저승사자인 묵주, 판트리아계의 저승사자인 판테아가 영계 18지옥에 갇혔다. 오래전 우정을 함께 나눴던 그곳에 또다시 갇힌 것이다. 앞으로 만 년 동안은 저승사자의 직함을 버려야 했다.
 한때 개의 영혼이었던 자는 이런 사실도 모른 채 저승사자가 지켜줄 거라 굳게 믿었다. 절대 죽지 않으리라는 확신을 가진 채.
 “예원계와 판트리아, 무령계의 저승사자 중에 수성의 작(爵)을 통과한 이를 뽑아 수장으로 삼아라.”
 “저, 알파하파 신이시여! 예원계와 무령계에는 수성의 작을 통과한 이들이 두세 명 정도 있습니다. 헌데, 판트리아는 아직······.”
 수성의 작은 저승사자들을 지휘할 수장이 될 수 있는 일종의 관문이었다. 그 관문을 통과한 이들만이 저승사자들을 지휘할 자격을 취득하는 것이다.
 헌데, 쉐파의 말은 판트리아계에 수정의 작을 통과한 이가 없다는 얘기였다. 즉, 저승사자의 수장이 될 존재가 없다는 의미. 어쩌면 전 차원을 통 틀어 최초로 저승사자의 수장이 없는 차원이 탄생할 지도 몰랐다.
 “이런, 음··· 지금 수성의 작을 치르고 있는 이들은 있는가?”
 “예. 두 명 있긴 하지만 27년이 지나야 관문을 완전히 통과하게 됩니다.”
 “27년이라··· 뭐 상관없겠지. 27년 후, 그 두 명 중 뛰어난 성적을 보인 저승사자를 뽑아서 수장으로 삼아라.”
 “예.”
 알파하파 신의 결정으로 최초의 수장 없는 차원이 탄생했다.
 구심점이 없는 차원이 어떻게 변할지는 전혀 생각하지 못한 알파하파 신. 이 일이 판트리아계에 미칠 영향을 좀 더 세밀히 조사했다면 이런 결정을 내리지도 않았을 터였다.
 “쉐파! 그놈들에 의해 판트리아계로 간 두 영혼의 행방은?”
 “죄송합니다. 운명의 굴레를 벗은 자들이라 저희의 이목도 닿지 않습니다.”
 “찾을 가능성은?”
 “전혀 없습니다.”
 쉐파의 대답에 알파하파 신이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그들 역시 자신보다 상위 신의 눈치를 봐야하는 입장이었다. 이런 사실이 상위 신에게 알려진다면 자신 역시 징계를 면치 못하리라.
 한참을 고민하던 알파하파가 어렵게 입을 열었다.
 “오늘 감사 결과를 널리 발표하라. 단, 오늘 감사에서 나왔던 내용은 함구(緘口)에 붙인다. 묵주를 비롯한 수영, 판테아가 손을 쓴 영혼은··· 음, 지금 이 순간부터 잊어라. 이상!”
 “예.”
 신마저 손을 때 버린 두 영혼. 이제 그들은 신의 간섭에서 완벽히 멀어졌다. 의도하지는 않았지만 묵주가 원했던 그대로 된 셈이다.
 
 
 
 8백여 년 전.
 유일한 거대 국가였던 베르첸 제국이 멸망되었다. 대륙 전체에서 중심이 사라진 상태. 이 때문에 대륙은 분란이 끊이지 않았다. 대륙 전체의 힘이 사방으로 분산된 것이다.
 숨 죽여 지냈던 군소 왕국들이 대륙 통일을 표방하며 나섰고, 수많은 왕국이 사라지고 또 생성되었다.
 베르첸 제국의 멸망은 그 누구도 예상치 못했다. 대륙 전체의 1/4에 해당하는 막강한 영토와 군사력. 또, 희귀 광물과 풍부한 자원을 보유했던 초강대국 베르첸. 자타가 공인했던 최강국은 타국이 아닌 자국의 영웅 단 한 명에 의해 무너졌다.
 류카라한 디 로이페.
 그는 소국에 불과했던 베르첸 왕국을 제국으로 만든 영웅이었다. 뛰어난 검술과 그를 보조하는 마법으로 주변 왕국을 일거에 휩쓸었던 자. 베르첸 제국 뿐 아니라 주변 왕국에서도 영웅이라 불렸던 존재.
 황제와의 불화가 있은 후, 거대 제국 베르첸을 수년 만에 망(亡)하게 만든 신비인. 대륙에서 그를 부를 때는 신비롭다와 위대하다는 말을 수없이 사용해야했다.
 
 
 
 대륙력 1193년. 루이나 왕국의 수도 이필리에.
 멀리 왕궁이 보이는 필슨 백작의 저택에 많은 사람이 몰려들었다. 백작가의 부인이 해산을 한다는 소문이 퍼진 탓이다.
 “백작님. 아이 이름은 정하셨습니까?”
 “글쎄. 정해놓은 건 있는데··· 자네들이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겠군.”
 부관의 말에 필슨 백작이 어두운 표정으로 읊조렸다. 평소에 낙천적인 성격의 그가 이런 표정을 지을 때는 이유가 있으리라.
 “백작님께서 정한 이름인데 저희 생각이 중요하겠습니까?”
 “후후. 이번 셋째 녀석이 딸이면 카렌이라 부를 생각이네.”
 “이름이 참 예쁘군요. 역시 백작님이십니다. 헌데 아들이면요?”
 부관의 반문에 필슨 백작이 주저하는 기색을 보였다. 정한 이름을 알리는 게 쉽지 않은 모양이다.
 잠시 머뭇거리던 필슨 백작이 어렵게 입을 열었다.
 “···카라한이라 부를 생각이네.”
 “카라한. 멋진 이름입니다.”
 부관의 칭찬에 필슨 백작이 살짝 미소 지었다. 자신이 지은 이름이 너무 마음에 든 듯했다.
 “후후. 그렇지. 류카라한님의 이름에서 앞 글자를 뺀 거라네.”
 “예?”
 “류카라한이오?”
 필슨 백작의 말에 주변 사람들이 놀란 음성을 터트렸다. 한때 대륙의 영웅으로 불렸던 류카라한. 비록 끝이 좋지는 않았지만, 류카라한이라는 이름은 여전히 대륙의 영웅이었다.
 “왜 그런가? 카라한이라 부르면 안 되는 이유라도 있는가?”
 “저··· 백작님. 류카라한님은 8백 년 전에 대륙을 질타하던 영웅입니다. 그런 분의 이름을 사용한다는 건 아이에게 너무 가혹하지 않을까요?”
 실제로 류카라한이 영웅이든 효웅이든 부모나 주변 사람에게는 큰 상관없는 일이었다.
 부관 역시 필슨 백작이나 자신만 생각했다면 이런 충고도 하지 않았을 것이다.
 허나, 아이를 생각한다면 충고를 할 수밖에 없었다. 이 나라뿐 아니라 대륙 전체의 영웅으로 불리는 류카라한. 그 이름을 쓰는 아이가 가질 부담감을 생각하자 마음을 놓을 수 없었다.
 “왜? 아이가 부담을 가질까봐 그러는가?”
 “예. 백작님께 아들이 되겠지만 제게는 도련님이 될 분입니다. 그런 분이 이름 때문에 힘들어할 걸 생각하니······.”
 “난 내 자식을 그렇게 약하게 키우지 않을 걸세.”
 필슨 백작의 고집에 부관이 고개를 저었다. 실제로 필슨 백작은 남의 말에 귀를 기울일 줄 아는 상관이었다. 하지만 한 번 정한 고집은 절대 꺾지 않는 사람이기도 했다. 그의 고집을 부관도 알았기에 체념의 한숨만 내쉬었다.
 
 
 
 “헉, 헉. 아악!”
 “마님. 조금만 더. 조금만 더요.”
 약간의 화려함과 아름다움, 소박함을 함께 가진 방. 평민들에게는 과분하지만 귀족으로 보기에는 검소한 방안에서 신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열 달 동안 뱃속에 있던 아기를 낳는 모습이었다.
 “헉, 헉, 아악!”
 “마님. 다 됐습니다. 조금만 더요. 조금만 더.”
 산파(産婆)의 말에 중년 부인이 다시 힘을 줬다. 이미 늦은 나이에 낳는 아이이니만큼 고통도 적지 않은 듯 보였다.
 “아악!”
 “응애! 응애!”
 아기의 우렁찬 울음소리에 중년 부인이 고개를 떨구었다. 그녀는 아기를 낳겠다는 일념 하나로 힘들게 버텼었다. 그러다가 아이를 낳자 긴장이 풀려 잠이 든 것이다.
 
 
 아기의 울음소리가 퍼지자 산모가 있던 방 밖에서도 환호성이 들려왔다. 백작가 세 번째 아이의 탄생을 다 함께 기뻐하는 모습이었다.
 “백작님. 축하드립니다.”
 “축하드립니다.”
 “고맙네.”
 주변의 축하에 일일이 대답하던 백작이지만, 시선은 문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산모와 아기의 건강이 걱정되었음이다.
 잠시 문을 응시하던 필슨 백작이 뒤로 한 걸음 물러났다. 누군가 문으로 다가오고 있음을 느낀 것이다. 안에서 나오는 사람이라면 산모와 산파뿐. 산통을 겪었을 산모가 걸어 나올 리 없으니 산파가 분명했다.
 덜컥!
 “백작님! 축하드립니다. 건강한 사내아이입니다.”
 “허허허허, 고생 많았네. 그래 일레나는 좀 어떤가?”
 “건강하십니다. 늦은 나이에 산통을 겪은지라 의식을 잃었습니다. 하지만, 기력이 다해 수면에 빠진 것이니 너무 심려치 않아도 될 겁니다.”
 방에서 나온 산파의 말에 백작의 얼굴에 미소가 번졌다. 단순히 아기의 울음소리만 들릴 때와는 전혀 다른 밝은 모습이었다.
 “근데 아기는?”
 “그게··· 탯줄을 끊자마자 마님의 젖을 빠는 지라 데리고나올 수 없었습니다.”
 “태어나자마자 말이오?”
 “예. 그게 저도 처음 겪는 일이라서··· 대부분은 마구 울어야하는데, 처음 조금 울더니 바로 마님에게 달라붙었습니다.”
 산파의 말에 주변 사람들 모두가 기이한 표정을 지었다. 아기가 본능적으로 젖을 찾는 건 사실이지만 빨라도 너무 빨랐다.
 대부분은 아기에게 억지로 젖을 물려서 익숙해지도록 해야 했다. 아무것도 모르는 아기이기에 젖이 먹이임을 인지시켜야 하는 까닭이다.
 “백작님 자제분이라 역시 뭔가 다른 것 같습니다.”
 “맞습니다. 백작님. 너무 심려치 마십시오.”
 “흠, 첫째와 둘째는 이러지 않았는데······.”
 이번에 낳은 아기는 필슨 백작의 셋째 아이였다. 첫째의 나이가 열아홉 살의 건장한 청년이었고 둘째가 열일곱 살의 전혀 어여쁘지 않은 숙녀가 되어 있는 바. 늦어도 한참 늦은 임신이었다.
 필슨 백작은 너무 늦은 임신으로 아기에게 문제가 있는 건 아닌지 걱정스러웠다.
 “백작님. 아까도 말씀 드렸듯이 도련님과 마님. 모두 무사하십니다. 건강하시고요.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알겠네.”
 산파의 거듭되는 말에도 백작의 얼굴은 어둡기 그지없었다. 말 몇 마디로 걱정이 완전히 가시지 않은 것이다.
 
 필슨 백작의 부인인 일레나 필슨의 침실.
 백작부인의 가슴을 한 아기가 마구 빨아댔다. 지난 생에서 수없이 많은 삶을 단명했던 그가 지금의 아기였다.
 ‘마님이라고 했지? 일단 괜찮은 집안에 태어난 건 확실하군. 굶어죽을 걱정은 안 해도 되겠어.’
 그는 산파가 일레나 부인을 마님이라 부르는 걸 기억해냈다.
 마님. 이 말은 아랫사람이 윗사람을 부를 때 부르는 호칭이리라.
 아직 이곳 세계의 언어를 모름에도 말을 알아들은 건 묵주가 준 능력에 기인했다. 그 어떤 말이든 들으면 바로 이해할 수 있는 능력. 또 몇 차례만 듣고 입에 익힌다면 그 언어를 구사할 수도 있는 능력이었다. 심지어는 글까지······. 묵주가 별거 아니라 생각했던 힘이 지금의 아기에게는 무척이나 소중한 능력이었다.
 그가 태어나자마자 어머니의 젖부터 찾은 이유는 생존 본능 때문이다. 인간의 생으로 살아온 적도 수차례나 있었던 그. 아기가 젖을 먹어야 산다는 걸 모를 리 없었다.
 ‘일단 날 숨겨야한다. 알아도 모르는 척. 있어도 없는 척. 오래 살기 위해서는 이 길밖에 없어.’
 그는 본능적으로 사는 법을 깨달았다. 너무 많은 삶을 단명했기에 자신도 모르게 터득하게 된 지식이자 지혜였다.
 
 
 
 카라한이라 이름 붙여진 아기가 태어나고 일주일 후.
 아기와 백작부인의 방에 적막이 감돌았다. 신관이 백작부인을 진찰하는 것이다. 이에 부인을 위해 필슨 백작마저 침묵을 지켰다.
 “베르네 신관님. 아기는 어떻습니까?”
 “저기 그게······.”
 신관의 방문은 귀족가에게 당연한 수순이었다. 아기의 건강 상태를 살피고 신의 은총을 내리기 위한 의례적인 일. 때문에 대부분 이런 일에는 특이사항 없이 지나가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필슨 백작 역시 별일 없이 지나갈 거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일레나에게 무슨 일이라도 있는 겁니까?”
 “아닙니다. 백작부인께서는 무척이나 건강하십니다. 늦은 나이에 해산했다고 보기 어려울 만치요. 헌데 아기가······.”
 베르네 신관의 망설임에 필슨 백작이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부인인 일레나의 건강도 중요하지만, 아들인 카라한도 중요하긴 마찬가지였다. 비록 태어난 지 일주일밖에 안 되었지만, 부정(父情)이란 시간으로 계산할 수 없는 문제였다.
 “우리 아이한테 무슨 문제라도 있는 겁니까? 빨리 말 좀 해보십시오. 제발!”
 “아기는 무척이나 건강합니다. 헌데, 심장의 위치가 좀······.”
 “심장의 위치?”
 아기가 건강하다는 말에 필슨 백작도 한시름 놓았다. 베르네 신관의 말은 어찌되었던 건강하다는 의미였다.
 비록 큰 인물이 되길 바라는 마음에서 카라한이라는 이름을 지었지만, 건강하게 잘 자라길 바라는 건 여느 부모와 다를 바 없었다.
 “예. 아기의 심장 위치가 보통 사람보다 아래에 있습니다.”
 “얼마나 아래에 있다는 겁니까? 그게 우리 카라한에게 얼마나 안 좋은지요?”
 “대부분의 사람은 심장 위치가 왼쪽 가슴에 있습니다. 헌데, 이 아이는 심장이 배에 거의 붙어 있습니다.”
 베르네 신관의 말에 필슨 백작의 시선이 카라한에게 향했다. 숨 쉴 때 가슴의 오르내림을 살피기 위해서였다. 필슨 백작의 눈을 본 베르네가 조용히 입을 떼었다.
 “배에 손을 올려 보십시오. 무언가 강하게 뛰는 걸 느낄 수 있을 겁니다.”
 “예.”
 짧게 대답한 필슨 백작이 아기의 배 위에 손을 올렸다. 그리고 무언가 강하게 뛰고 있는 맥박을 느꼈다. 허파의 오르내림과는 또 다른 느낌이었다. 남들과 다른 카라한의 신체에 필슨 백작의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기형··· 이라는 말입니까?”
 “그렇게 보기는 힘듭니다. 보통 사람은 심장의 위치가 조금만 이동해도 무척이나 힘들어 할 겁니다. 헌데, 이 아이는 무척이나 건강합니다. 저도 이런 경우는 처음 겪어보는 지라 뭐라 말씀드리기 힘듭니다만··· 아기는 무척이나 건강합니다.”
 카라한의 심장은 가슴과 배꼽의 중간 부분까지 내려와 있었다. 거의 명치에 가까운 위치였다.
 “아무튼 건강하다니 다행이군요. 다른 이상은 없습니까?”
 “저기 또 있습니다.”
 “또요?”
 베르네 신관의 말에 필슨 백작의 애간장이 다 녹는 느낌이었다. 하나로도 부족해서 또 다른 문제가 있다니. 지금 당장은 신관의 입을 꿰매버리고 싶은 심정이었다.
 “아기에게 은총이 내려지지 않습니다.”
 “뭐? 설, 설마 신이 버린 아이라도 된다는 말입니까?”
 “아, 그런 건 아닙니다. 신께선 만인에게 평등하십니다. 태어난 지 얼마 되지도 않은 아이를 미워할 이유가 없지요. 흠, 이런 경우는 과거에도 몇 차례 있었습니다.”
 베르네 신관의 말에 필슨 백작도 약간은 마음을 놓았다.
 심장이 아래에 있는 건 전무후무한 일이었다. 허나, 이번 일은 유례가 있는 일이었으니 해결책도 있으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허허, 그렇군요. 내가 예민했습니다. 아이에게 은총을 내릴 방법이 뭡니까?”
 “없습니다.”
 “예? 좀 전에는 분명히 이런 일이 있었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럼 해결책도 있을 텐데. 어찌 안 된다고만 하십니까?”
 “오해가 있으셨나 보군요. 제가 말씀드린 예전의 경우는 지금 상황과 조금 다릅니다. 그분들은 지금 성인(聖人), 혹은 영웅이라 불리는 분들입니다. 엄청난 마법 실력으로 인간의 경지를 넘으셨던 분이나 검술로 일가를 이루어 영웅으로 기록된 분들이죠. 예를 들면 대마법사 셀티아 일레스, 호리아트 베타마리안, 헬론 드미트리 같은 분들입니다. 검술로는 휴아트 쿤사, 류카라한 레이샤, 시즈 듀라셀 같은 분들이죠. 이 외에도 많습니다.”
 베르네 신관의 말에 필슨 백작의 얼굴이 환하게 변했다. 베르네 신관의 말은 자신의 아들과 역사적인 영웅을 동격으로 본다는 말이었다.
 “허허허. 그럼 내 아들이 그들과 같다는 겁니까? 하하하하하.”
 “아? 예.”
 “더 할 얘기는 없습니까?”
 “아이의 심장 위치 때문에 건강이 나빠질 수도 있습니다. 말씀드렸다시피 처음 있는 일이라서······. 일 년에 한 번씩 찾아와서 아이를 살피겠습니다.”
 “고맙습니다. 베르네 신관님.”
 베르네 신관이 떠난 후, 필슨 백작이 대소를 터트렸다. 신관 앞이라 애써 참았던 웃음을 그제야 터트리는 모습이었다.
 ‘그럼 그렇지. 내 자식인데··· 암, 내 자식이니 큰 인물이 될 게야. 하하하하하.’
 반면, 방을 나온 베르네 신관은 또 다른 생각으로 호기심어린 빛을 띠었다.
 ‘1서클 마나를 가지고 태어나는 아이라······. 재미있군.’
 
 
 
 그날의 검진이 있고 일 년 후. 예전의 베르네 신관이 필슨 백작을 찾아왔다. 아이의 심장 위치가 몸에 미치는 영향을 살피기 위해서였다.
 아기를 살피던 베르네 신관이 도통 입을 떼지 않자 필슨 백작이 조바심을 냈다. 아들 소중하지 않은 부모가 어디 있겠는가. 카라한에 대해서만큼은 백작이고 뭐고 다 버릴 수 있었다.
 “어떻습니까? 아이는 건강해 보이던데······.”
 “아이는 건강합니다. 헌데, 심장 위치가 예전보다 더 아래로 내려간 듯합니다.”
 필슨 백작은 베르네 신관의 말에도 걱정하는 기색이 없었다. 영웅과 비견되었던 아이 카라한. 심장이 아래에 있는 것도 영웅의 특이한 탄생으로만 여겨졌다.
 “그런가? 허허허.”
 “저, 이대로 가다가는 4, 5년 안에 아이의 심장이 항문으로 나와 버릴지도 모릅니다.”
 “뭐?”
 필슨 백작이 뒤늦게 사태를 파악하고 놀란 음성을 내질렀다. 심장이 아래에 있는 건 어찌 살아간다 하더라도 심장이 아예 없다면······.
 베르네 신관의 말은 아이의 목숨이 위태롭다는 얘기와 같았다.
 “아직 확실한 건 아닙니다. 다만, 심장이 너무 아래로 내려왔기에······.”
 “그래도 아기는 건강하지 않습니까? 아무 이상도 없어 보이는 데 설마 무슨 이상이 있는 건 아니겠죠?”
 “예. 그게 저도 이상합니다. 심장의 위치가 바뀌고 있으니 아이의 몸에도 이상이 있어야 하는데··· 아이는 건강하니······. 거기다가 심장이 내려오는데 다른 장기들의 위치는 변함이 없다는 겁니다. 아니, 길을 잠시 비켜줬다가 다시 자리를 찾아가는 것 같군요. 전에도 말씀 드렸다시피 예전에 없었던 일이라서 확신할 수 있는 게 하나도 없습니다.”
 “알겠습니다.”
 카라한의 심장 위치는 매일 조금씩 이동했다. 베르네 신관을 비롯한 필슨 백작과 일레나 백작부인의 간담을 오므라들게 할 정도였다.
 허나, 배꼽 아래에 도착한 후로는 움직이지 않았다. 필슨 백작과 일레나 백작부인에게는 천만다행한 일이었다.
 
 
 
 * 현자 엘베로
 
 
 
 아기가 태어난 지 구 년.
 남들에게는 단순한 유년시절이었겠지만, 카라한이라 이름 붙은 아이에게는 남달랐다.
 지난 수많은 생에서 그는 일 년을 산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던 카라한. 그가 일 년이 아닌 구 년을 살았다는 건 평생의 소원이 이루어진 것과 같았다.
 “라한! 뭐해?”
 “아, 형님. 책 읽고 있었어요.”
 라한의 형 레테아 필슨의 말에 라한이 큰 소리로 대답했다.
 레테아는 현재 왕궁의 견습 기사가 되어 수련을 하는 중이었다. 처음 그는 검에 큰 자질이 없는 평범한 사람이었다. 대신 엄청난 집념으로 검을 손에서 놓는 법이 없었다. 부족한 재능을 노력으로 매운 경우였다.
 “식사 시간 다 됐다고. 어서 가자.”
 “읽던 책 끝까지 읽고 갈게요. 다 읽어 가니까 얼마 안 걸릴 거예요.”
 라한은 독서광으로 불렸다. 눈만 뜨면 서재로 달려가기 일쑤였고, 책을 읽느라 밤을 새는 일도 잦았다.
 그는 책을 통해서 오래 사는 법을 찾으려했다. 또, 위험한 상황을 지혜롭게 헤쳐 나가는 법을 얻고 싶었다. 일종의 처세술을 공부한 셈이다. 여분으로 받은 이번 생만큼은 오래 살고자하는 집념의 발로였다.
 허나, 아침마다 행하는 운동이나 식사를 거른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좀 더 많은 지식이 생명 연장의 길이기는 하지만 건강을 상하기는 싫었던 것이다. 때문에 독서광으로 불리면서도 그리 빈약한 몸은 아니었다.
 “알았어. 늦지 마! 어머니 걱정하시니까.”
 “예.”
 짧게 대답한 라한이 옆에 쌓인 책을 꺼내 들었다. 레테아의 말과는 달리 읽던 책이 아닌 새로운 책이었다. 아직 식사를 하러 갈 생각이 없는 모양이었다.
 ‘대마법사 헬론의 일대기라······.’
 책의 표지를 보며 라한이 중얼거렸다.
 그는 한때 장수의 비결이나 건강에 대한 책만 읽었다. 허나, 그런 책에는 단순히 건강을 위한 운동이나 채식의 유익한 점이 쓰여 있을 뿐. 그 어디에도 수명이 길어지는 법은 써 있지 않았다.
 한동안 읽을 책이 없어 고민했고, 지금은 건강과 관계없는 책에도 손을 뻗었다. 특히 어떤 이의 일대기를 다룬 내용을 무척이나 좋아했다. 여러 곳을 여행하며 쓴 이들이 장수에 도움이 되는 보물을 기록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서였다.
 
 대륙력 754년. 8월생. 난 생에 처음으로 마법이라는 학문을 접했다. 내 나이 스물한 살에 있었던 일이다. 대부분 열다섯 살 이전에 마법을 접한다는 걸 감안하면 늦어도 한참 늦은 나이였다.
 
 ‘흠, 스물한 살에 마법을 배웠다? 늦었군. 내가 알기로 마법은 어릴 때 마나를 느끼는 게 중요하다고 들었는데······.’
 대부분의 책이 그렇듯 일대기가 쓰인 책은 날짜가 서두에 나왔다. 라한이 든 책도 마찬가지였다. 지금이 대륙력 1202년이었으니 무려 450여 년 전에 만들어진 책이었다.
 “라한! 뭐해? 어머니가 찾으신다고.”
 “아, 누나! 곧 가요.”
 레테아의 말에도 라한이 책에만 빠져 있자 누나인 루시아가 재촉해왔다. 라한은 수련기사인 레테아보다 누나인 루시아를 더 무서워했다. 아니, 짜증스러워 했다는 게 더 정확했다.
 결혼할 나이가 훨씬 지난 나이임에도 결혼을 하지 못한 루시아. 그의 히스테리가 라한의 신경을 곤두서게 만들었다.
 “곧이 언제야? 빨리 안 와?”
 “예, 가요.”
 탁-!
 라한이 루시아의 말에 오금을 저리며 책을 덮어버렸다. 겉은 아홉 살이지만 머리만큼은 웬만한 성인 이상의 지식을 가진 라한. 그는 자신이 안전하게 오래 사는 법을 잘 알았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루시아의 비위만큼은 맞춰야 한다는 사실을······.
 ‘묵주는 뭐하는 거야? 내 주변 정리 해준다면서?’
 루시아에게 느끼는 공포에 애꿎은 묵주만 탓했다. 그는 자신이 두 살 때 묵주가 영계 18지옥에 갇혔음을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그가 갇혔음을 안다면 단순히 장수하는 법뿐 아니라 스스로를 지킬 힘부터 길렀으리라.
 
 
 
 식사를 마친 필슨 백작이 라한을 불러 들였다. 요즘 일이 바빠 가정에 충실하지 못한 그에게는 상당히 이례적인 일이었다.
 “라한아! 책을 무척이나 좋아하던데 커서 뭐가 되고 싶으냐?”
 “전 커서 뭐가 되어야겠다는 생각은 해 본적이 없습니다. 다만, 죽음이라는 게 너무 싫습니다. 그래서 전 책을 통해 죽음을 벗어나는 방법을 찾고 있습니다.”
 라한의 대답에 필슨 백작을 비롯한 식구들 모두가 멍한 표정을 지었다. 그가 죽음이라는 말을 너무 쉽게 꺼내버린 탓이다.
 이제 아홉 살에 불과한 그가 꺼내기에는 어려운 말임이 분명했다.
 “허허허허. 죽음이 싫다? 이제 아홉 살에 불과한 네가 죽음이라는 말을 꺼내다니. 너무 이른 게 아니냐?”
 ‘나이에 맞지 않는 말이었구나.’
 라한이 자신의 실수를 뒤늦게 깨달았다. 이곳에서는 아홉 살에 불과한 나이였기에 그 나이에 맞게 행동하자는 게 라한의 생각이었다. 허나, 잠깐의 방심으로 나이에 맞지 않는 말을 해버렸다.
 “맞아요. 그래도, 그래도 전 죽기 싫어요. 죽는 게 너무 싫은 걸요. 아빠도 오래오래 살았으면 좋겠고, 엄마도 오래오래 살았으면 좋겠어요. 또, 형님도 오래 살았으면 좋겠고 누나도 어, 어··· 오래 살았으면 좋겠어요. 다 함께 오래오래 살았으면 좋겠어요.”
 ‘못해먹겠군.’
 라한의 더듬거리는 말에 필슨 백작이 웃음을 터트렸다.
 “허허, 그래 오래 살자꾸나. 암, 우리 식구 모두 행복하게 오래 살아야지.”
 라한의 뒤늦은 수습에 주변 식구들의 얼굴에 미소가 떠올랐다. 아직 아홉 살에 불과한 라한의 말이 귀여웠던 모양이다.
 ‘십년감수했네.’
 “아버님. 전 그만 일어나보겠습니다. 오후에 왕궁에서 개최하는 검술 시합이 있어서요.”
 “오늘이 그날이더냐? 허허, 그래 먼저 가서 준비해라. 꼭 구경하러 가마.”
 “고맙습니다, 아버님.”
 정식 기사는 두 명의 수습기사를 거느리며, 수습기사 역시 두 명의 견습 기사를 거느리게 된다. 결국 정식 기사가 되기 위해서는 견습 기사와 수습기사. 이 두 가지를 거쳐야만 가능한 것이다. 이 가운데 가장 힘든 관문이 수습기사가 되는 일이었다.
 견습 기사는 배경이나 스승의 추천으로도 가능했지만 수습기사는 달랐다. 일 년에 한 번 있는 시합에서 10위 안에 들지 못하면 불가능한 위치가 수습기사였다.
 반면 정식 기사가 되는 건 의외로 쉬웠다. 수습기사의 위치에서 5년의 수습 기간만 거치면 가능하기 때문이다. 결국 이번 시합에서 좋은 성적을 거두지 못한다면, 또 다시 일 년을 허비해야만 다시 기회가 오는 셈이다.
 “형님! 꼭 이기세요. 형한테 덤비는 놈들을 다 꺾어 버리세요.”
 “후후, 그래 알았다. 귀여운 동생이 하는 말이니 꼭 지켜야지.”
 레테아는 이번 시합에 자신이 있었다. 그만큼 열심히 노력했고 동문수학하던 다른 동기들 중에서도 수위의 실력을 보여 왔다.
 밤낮 가리지 않고 수련에 수련을 거듭한 결과였다.
 “레테아. 넌 어서 준비해라. 미리 가서 몸이라도 풀어야하지 않겠느냐? 일레나! 우리도 준비합시다.”
 “예. 루시아, 라한. 너희들도 외출 준비를 하거라.”
 “예, 어머니.”
 “전 안 가면 안 돼요?”
 신나있던 분위기에 라한이 찬물을 끼얹었다.
 라한은 태어나서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저택을 나가보지 못했다. 위험의 가능성이 조금이라도 있다면 피하고 보는 성격이 이런 결과를 낳은 것이다. 이 때문에 위험이 언제 어디서 닥칠지 모르는 밖을 몹시 꺼려왔다. 집에 있는 게 오래 사는 길이라는 스스로의 판단 때문이다.
 물론, 그도 외출을 통해 잃는 것보다 얻는 게 더 많다면 흔쾌히 나갈 생각이었다. 생명 연장의 꿈과 관계가 있는 득(得)이라면 말이다.
 하지만, 형의 시합에서 자신이 얻을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괜히 밖으로 노출돼서 적을 만들지나 않을까 걱정스러웠다.
 “허허, 라한아. 지금까지 네가 저택을 나간 적이 없는 건 알고 있다. 하지만 오늘은 네 형에게 매우 중요한 날이다. 응원은 해야 하지 않겠느냐?”
 “저, 저··· 제가 없어도 형님은 우승할 거예요. 형님은 최고잖아요.”
 라한의 강경한 말에 필슨 백작도 할 말을 잃었다. 지금까지는 나이가 어렸기에 그러려니 했었다. 미지의 세계에 대한 두려움이 외출을 꺼리게 만들었으리라는 생각한 것이다. 또, 그의 특이한 신체도 한몫했으리라.
 허나, 레테아의 시합이 있는 오늘마저 이런 반응을 보일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 끔찍이도 형을 따르는 라한이 아니었던가.
 “네가 왜 그러는지는 모르지만 오늘은 네 형에게 무척이나 중요한 날이다. 넌 네 형을 몹시도 따랐지 않느냐? 헌데도 싫단 말이냐?”
 “죄송합니다, 아버님.”
 “네가 어려서 이런 얘기는 하지 않으려 했다만······. 비록 경비병들이 있다고는 하지만 내가 없는 저택은 그리 안전하지 않다. 내 정적들이 어떤 짓을 해올지 모른다는 말이다. 또, 우리 가족이 외출하면 상당수의 경비병들이 수행해야한다. 저택에는 경비병이 적을 거라는 얘기지.”
 필슨 백작의 말에 라한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한 명도 아닌 가족 전원의 외출. 이 말은 저택을 지킬 경비병의 수가 적어질 거라는 얘기와 일맥상통했다. 위험이라면 일단 피하고 보는 라한에게는 몹시 중요한 말이었다.
 “하하하. 아버님. 농담이었습니다. 제가 어찌 형님의 시합을 보지 않겠습니까? 헤헤.”
 “응? 허허허. 녀석. 벌써부터 이 애비를 놀리는 것이냐?”
 “허허허, 헤헤헤.”
 라한의 어색한 웃음에 주변 분위기가 싸하게 변했다.
 집에서는 웃음을 잃지 않는 필슨 백작이었지만, 실제로 밖에서는 철의 사자라 불렸다. 귀족 회의나 왕실 회의 때에는 말 한 마디에 사람을 얼어붙게 만들던 사람. 힘없는 국민을 위해서는 마냥 따뜻하지만, 힘을 가진 자들에게는 날카로운 검이 되는 사람. 이 때문에 그에게 농담을 하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집에서든 밖에서든······.
 어쩌면 그에게 농담을 건넬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 루이나 왕국의 국왕뿐이리라.
 “흠, 흠. 됐다. 준비 하거라.”
 “예.”
 필슨 백작도 검을 익힌 검사였다. 허나, 자질이 부족해서인지 노력이 부족해서인지 정식 기사가 되지 못 했다. 견습 기사 생활을 2년 간 했던 필슨 백작은 결국 스스로의 실력 부족을 통감하고 기사가 되길 포기해버렸다.
 대신 뛰어난 정치 능력으로 중앙에서 꽤나 힘 있는 귀족이 되기는 했다. 하지만, 그때의 포기가 평생 동안 꼬리표처럼 따라다녀 스스로를 아프게 만들었다. 자신뿐 아니라 조상 중에서도 기사 출신이 없었던 필슨 가문. 아들인 레테아만큼은 기사로 만들고 싶었으리라.
 ‘라한. 너 때문에······.’
 밖으로 나오던 루시아가 라한을 째려봤다. 화기애애하던 분위기를 라한이 망쳤다는 것에 대한 원망의 눈빛이었다.
 ‘쳇. 나보고 어쩌라고.’
 라한은 루시아의 눈빛에 조금도 주눅 들지 않았다. 성질 나쁘기로 이미 소문난 루시아. 그와 십 년 가까이 함께 산 라한이었기에 이미 적응이 된 상태였다.
 
 
 
 이필리에 기사 학교의 중앙 연무장.
 평소 기사 지망생 외에는 사람 보기 힘든 곳에 엄청난 인파가 모여들었다. 일 년에 단 한 번 있는 수습기사 자격시험이 열리기 때문이다.
 통상 레테오라 불리는 이 시합은 지망생들에게는 유일한 기회나 다름없었다. 반면, 일반인에게는 지루한 일상을 벗어날 수 있는 흥미로운 구경거리였다. 이 탓에 지방에 있는 돈 많은 귀족이나 상인, 혹은 상인의 자제들까지 구경 오는 경우가 많았다.
 와!!
 와!!
 “아아. 잠시 주목해주십시오.”
 구경꾼들의 엄청난 함성 사이로 낮지만 굵은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이필리에 기사 학교의 교장이자 레테오의 심판장을 맡은 유토 백작의 목소리였다.
 “지금부터 제 21회 레테오를 개최하겠습니다.”
 스퓽~.
 유토 백작의 개회 선언과 동시에 커다란 불꽃이 하늘로 솟아올랐다. 왕궁 소속 마법사들이 마법을 쓴 것이다.
 하늘로 한 없이 날아오르던 불꽃이 공중에서 화려하게 퍼져나갔다. 마치 폭죽을 연상케 하는 화려한 모습이었다.
 쾅-!
 와!!
 “루이나 왕국이여 영원하라!”
 “영원하라!! 와!!”
 마법이 시전되자 관중들 사이에 함성소리가 퍼져 나왔다. 어느 한 사람이 아닌 참가자 전원의 건투를 비는 함성이었다.
 한참 이어지던 함성이 서서히 잦아들자 유토 백작이 다시 음성을 높였다.
 “퍼거스 남작가의 엘베라 퍼거스, 슈라이번 자작가의 슈타렌 슈라이번 앞으로!”
 “앞으로!”
 “앞으로!”
 시합의 시작은 지방 귀족인 엘베라와 슈타렌의 대결이었다.
 딱히 정해놓은 규칙은 아니었지만 대체로 지방 출신의 시합이 먼저 이루어졌다. 높은 귀족일수록 뒤늦게 나와야한다는 별거 아닌 자존심이 그 이유였다.
 실제로도 우승자들은 고위 귀족가문에서 거의 독차지했다. 뛰어난 배경에 뛰어난 스승. 거기에 넉넉한 훈련 시간이 그런 일을 가능하게 한 것이다.
 
 
 
 시합장의 동쪽 선단.
 여든 살은 넘어 보이는 노인과 몇몇 수행원이 주위를 훑었다. 인자한 얼굴이지만 날카로운 눈빛의 노인이 조용히 입을 열었다.
 “이번 대회는 예전보다 뛰어난 젊은이가 많구먼.”
 “엘베로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시니 다행입니다.”
 “허허허.”
 내년이면 일흔 살이 되는 엘라 엘베로. 그는 루이나 왕국의 현자로 불렸다. 검과 마법, 정령뿐 아니라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지식에 해박하다고 알려진 존재. 루이나 왕국의 국왕을 제외한 모든 귀족이 고개를 숙여야 하는 사람이 그였다.
 실제로 그가 현자가 된 건 뛰어나서라기보다 왕국의 위신을 위해서였다. 각 왕국 당 한 명씩의 현자는 존재해야 한다는 왕국의 자존심이 그를 현자로 만든 것이다. 물론, 그의 지식이 부족한 건 절대 아니었다.
 다만, 역사서에서 볼 수 있는 인자하고 지혜로운 현자와 거리가 멀었을 뿐이다.
 “실제로 이번에 참가하는 지망생들은 실력이 대단합니다. 어쩌면 루이에 공작의 뒤를 이을 기사가 나올지도 모릅니다.”
 “백준의 기사 베라스무스··· 루이에······.”
 칼리토의 말에 엘베로가 낮게 읊조렸다. 단 5년 만에 루이나 왕국 최고의 기사가 된 루이에 베라스무스. 그는 공작의 위치까지 올랐지만 정치와는 담을 쌓고 지내며 검에만 매진했었다. 지식에 있어서 최고로 불리는 엘베로가 정치에 깊이 관여한 것과 대조적인 모습이었다.
 “죄송합니다, 엘베로님.”
 “아닐세. 자네가 죄송할 게 뭐 있는가. 그나저나 루이에 공작의 행방은 아직 인가?”
 “예. 여전히······.”
 베라스무스 루이에는 8년 전 갑작스럽게 사라졌다. 루이나 왕국으로서는 최고의 보물을 잃은 셈이다. 이 때문에 루이나 왕국 자체적으로도 수많은 조사단을 파견했다.
 몇 년간 루이에의 과거에 대해 낱낱이 조사해온 왕국 조사단. 허나, 수년간의 조사에도 그에 대한 그 어떤 것도 알려지지 않았다. 심지어 그의 과거와 검술의 원류에 대해서도······.
 ‘왜 사라졌는지는 모르나 내게는 다행스러운 일이지.’
 엘베로는 루이에의 갑작스러운 실종을 반긴 사람 중 한 명이었다. 루이에가 나타나기 전에는 엘베로가 루이나 왕국의 국민과 귀족 모두의 존경을 한 몸에 받았었다. 하지만, 그는 루이에의 등장으로 자신을 흠모하던 많은 사람을 잃어야만 했다. 겉으로 현자라 불리고 있지만, 실제로는 욕심이 많았던 그에게 루이에는 눈엣가시였다. 실제로 루이에의 실종이 조금만 늦었더라도 엘베로가 무슨 수를 썼을지 모를 일이다.
 “이번 참가 선수는 우승 후보 중 한 명인······.”
 ‘응?’
 칼리토의 설명을 듣던 엘베로가 다른 곳에 시선을 고정시켰다. 무언가 다른 이질적인 느낌을 받은 모양이다.
 “흠, 칼리토경. 저 아이가 누구인가?”
 “이번 등장하는··· 예? 누, 누구 말씀입니까?”
 “저기 저 아이 말일세.”
 엘베로가 가리킨 곳에는 검은 머리의 아이가 주변을 두리번거리고 있었다. 누가 봐도 영락없는 평범한 아이의 모습이었다. 허나, 엘베로에게는 평범하지 않은 무언가가 느껴졌다. 스스로도 확신 할 수 없는 이질적인 느낌이었다.
 “저도 모르는··· 아! 로테라이너 필슨 백작의 아들이군요. 저기.”
 “흠.”
 칼리토의 말은 아이의 곁에 루시아가 나타나면서 확실해졌다. 흔치 않은 검은 머리를 가진 필슨 가문. 거기에 아이의 곁에 악명으로 자자한 루시아까지 나타났으니 거의 확실해보였다.
 “가보세.”
 “예? 아, 예.”
 칼리토가 얼떨떨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엘베로의 행동이 그를 의아하게 한 것이다.
 엘베로는 어떤 일에 관심을 보이는 일이 거의 없었다. 최소한 겉으로 드러난 소문만큼은 그러했다. 현자라 불리는 엘베로였기에 그 호칭에 걸맞게 행동하려는 나름대로의 노력이었다.
 물론, 실제로는 많은 귀족과 친분을 가지며 정치에 깊이 참여하고 있었다. 겉으로는 책과 씨름하며 지식을 갈구하는 현자. 안으로는 상당한 지식으로 정치를 마음대로 휘두르는 위정자가 그였다.
 
 
 
 대회를 구경하는 군중과는 약간 떨어진 통로.
 라한이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무언가를 찾고 있었다. 아홉 살밖에 되지 않은 뽀얀 피부의 귀여운 아이. 허나 눈빛만큼은 현자를 방불케 하는 깊이가 느껴졌다.
 “야, 여기서 뭐해?”
 “누나! 어디 갔다가 이제 오는 거예요?”
 “오는데 다리도 못 쓰는 병신이 날 자꾸 쳐다보잖아. 꼴에 예쁜 건 알아가지고.”
 루시아의 말에 라한의 표정이 멍하게 변했다. 눈이 있다면 스스로의 외모에 대해서도 어느 정도는 알 터. 누가 봐도 루시아는 못생긴 얼굴이었다. 헌데도 그녀는 자신이 못생겼다는 걸 인정하지 않았다. 오히려 자신이 결혼을 못한 이유가 너무 뛰어난 미모 탓이라 돌린 것이다.
 그런 말을 할 때마다 주변에서는 고개를 가로 저으며 한숨을 쉬었다. 공주병은 약도 없다고 하지 않은가.
 “에휴, 누나라고 하나 있는 게 동생 속을 이렇게 썩이다니. 제발 철 좀 들어요.”
 “뭐야?”
 “아, 아녜요.”
 폭력 앞에서 진실의 힘은 미약할 수밖에 없다. 라한 역시 루시아의 외모에 대해 진실을 말하지 못했다. 그녀가 휘두를 폭력이 진실마저 감추게 한 것이다. 속으로는 오만가지 욕을 다하고 있었지만 말이다.
 “이놈들. 어디 있다가 지금 나타나는 거냐?”
 “아버지. 글쎄 누나가······.”
 “아버지. 제가 못 살겠어요. 아홉 살이나 되어서는 아무데서나 오줌이나 싸고. 라한은 언제나 철이 들까요?”
 라한의 말을 잽싸게 막은 루시아가 거짓으로 둘러댔다. 모든 잘못을 라한에게 돌리는 모습이었다. 라한이 황당함에 입을 벌렸음은 두 말할 필요도 없었다.
 “쯧쯧. 라한아. 아직도 소변을 못 가리는 거냐?”
 “아버지. 그게 아니라······.”
 “아버지.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제가 처음부터 하나씩 가르칠게요.”
 “그래. 루시아. 네가 데리고 다니면서 좀 가르치거라. 에휴, 누굴 닮아서······.”
 필슨 백작의 중얼거림에 라한이 울상을 지었다. 항상 당해온 일이지만 당할 때마다 억울한 건 마찬가지였다. 뭐라 변명하더라도 이제 아홉 살이 된 자신을 믿어주지 않으리라.
 ‘으드득! 누구보자. 루시아.’
 “오, 이게 누군가? 필슨 백작 아닌가?”
 “음? 엘베로님이시군요. 여긴 어인일로?”
 필슨 백작이 퉁명스럽게 되물었다. 그와 엘베로의 사이가 좋지 않았기에 저절로 나온 대꾸였다.
 많은 귀족을 선동하여 귀족 중심의 정치를 하려는 엘베로.
 반면, 몇 안 되는 귀족들의 존경을 받으며 평민 중심의 정치를 하려는 필슨 백작. 이 둘은 서로를 무너뜨려야 살아남는 정적 관계였다.
 “허허, 이 아이가 백작의 아들인가?”
 “그렇습니다만······.”
 필슨 백작은 능글맞은 모습의 엘베로가 싫었다. 겉으로는 온갖 현자의 행세를 하면서 속은 시커먼 엘베로. 비록 깨끗하게 살지는 않았지만 이중적으로 살지 않았던 필슨 백작에게는 역겹기 짝이 없었다.
 “별일 아니네. 그냥 뭐랄까? 동물 같은 느낌이 들었다고 할까?”
 “뭐라고 하셨습니까? 동물이오? 아무리 현. 자. 이신 엘베로님이라도 그런 말은 듣기 거북하군요. 우리 라한이가 라이칸이라도 된다는 말입니까?”
 필슨 백작의 날카로운 대꾸에 옆에 있던 칼리토가 어쩔 줄 몰라 했다. 실제로 정적 관계이긴 하지만 겉으로는 현자의 모습을 보여야 하는 사람이 엘베로였다. 헌데, 귀족의 자제에게 그것도 백작의 자제에게 동물이라 했으니 수습이 쉽지 않았으리라.
 “설마 내가 인간과 라이칸드로프를 구분 못하겠는가? 그냥 동물의 느낌이 들어서 해본 말이니 신경 쓰지 말게.”
 “남의 아들에게 동물이라 해놓고 신경 쓰지 말라구요? 허허허. 현자이신 엘베로님은 그게 되는 모양이군요. 전 현자가 아니라 참지 못하겠습니다.”
 “내가 깜빡했구먼. 미안허이. 자네가 평범한 인간이라는 걸 생각하지 못했네. 허허허.”
 “이, 이······.”
 라이칸드로프는 늑대의 얼굴과 사람의 몸을 가진 몬스터였다. 키가 3미터에 육박하는 거대한 크기와 그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엄청난 힘의 몬스터. 하지만 인간과 거의 흡사한 지능 탓에 상대하기 까다로운 몬스터이기도 했다. 때문에 인간을 욕할 때 가장 심한 말이 라이칸드로프 같은 놈이었다. 결국, 엘베로는 라한에게 가장 심한 욕을 한 셈이다.
 “이름이 무엇이냐?”
 “라한 필슨. 이게 내 이름입니다. 베어울프를 닮은 영감탱이님.”
 “쿨럭!”
 “큭, 큭!”
 분노에 차 있던 필슨 백작이 헛기침을 해댔다. 어리기만 한 라한이 필슨 백작의 복수를 대신 한 것이다. 라한의 말은 필슨 백작에게는 통쾌함을, 엘베로에게는 분노를 안겨다줬다.
 “흠, 나 같은 노인에게는 공손하게 대해야 한다. 넌 가정교육을 그렇게 받았느냐?”
 “예. 좋은 사람에게는 좋게 대하고 나쁜 놈에게는 심하게 대하라고 배웠습니다. 하지만··· 좀 전에 한 말은 사과드립니다.”
 라한의 말에 엘베로의 눈이 기대로 가득 찼다. 아직 어린 아이에게도 사과를 받고 싶었던 모양이다.
 “그래. 배우긴 제대로······.”
 땡그랑!
 라한이 엘베로의 발치에 동전 두 개를 던졌다. 루이나 왕국에서 쓰이는 가장 낮은 가치의 동전이었다.
 “예. 제가 실수했습니다. 영감님처럼 불쌍한 사람에게는 적선을 하라고 배웠습니다.”
 “음.”
 엘베로의 침중한 표정에 칼리토의 표정이 다급하게 변했다. 이곳에 더 있다가는 그간에 쌓았던 엘베로의 명성에 흠집이 갈 거라 생각했다.
 “엘베로님! 시합이 이미 막바지에 이르렀습니다.”
 “칼리토! 가세.”
 엘베로는 라한이 죽이고 싶도록 미웠다. 베어울프를 빗댄 것으로도 부족해, 거지 취급을 하다니······. 하지만, 자신의 명성을 생각하자 이 자리에서 화를 낼 수도 없었다.
 현자라 불리는 자신이 아홉 살짜리 꼬마와 싸워서 얻을 수 있는 이득이 아무것도 없는 것이다. 화가 나더라도 참고 넘길 수밖에 없었음이다.
 엘베로가 사라지자 필슨 백작의 얼굴에 미소가 떠올랐다. 항상 어려보이기만 했던 라한이 오늘처럼 대견스러운 적이 없었다.
 “허허허. 가자. 곧 네 형의 시합이 있을 것 같다.”
 “예, 아버지.”
 “예.”
 자리로 돌아가면서도 필슨 백작의 얼굴에는 미소가 사라지지 않았다. 상대 세력의 정점에 서 있던 엘베로를 놀린 게 즐거웠던 모양이다.
 
 
 
 레테아는 큰 무리 없이 결승전에 올랐다. 그와 대적했던 수많은 수련생들 모두 레테아를 위한 희생양에 불과했다.
 검사학교에서도 최고의 성적을 냈던 레테아. 그의 우승은 자신뿐 아니라 관계자 모두가 짐작했던 일이었다.
 “이제 결승전이구나. 잘 해야 할 텐데.”
 “어머니. 걱정 마세요. 형은 최고예요.”
 “그래, 그래.”
 필슨 백작이나 일레나 백작부인도 레테아의 우승을 의심하지 않았다. 예선부터 본선을 지나는 동안 압도적인 실력차이로 승리를 거두었고, 그들은 그 모습을 봤었다. 직접 두 눈으로 확인한 실력이기에 믿음을 가진 것이다.
 “아우, 재수 없어.”
 “응?”
 “루시아! 그게 무슨 버릇없는 말이냐.”
 느닷없는 루시아의 말에 필슨 백작을 비롯한 가족 모두가 인상을 찌푸렸다. 누가 뭐래도 백작 가문의 여식이 분명한 루시아. 귀족에게 어울리지 않는 몰상식한 말이 언짢았던 모양이다.
 “아버지, 저기 좀 보세요. 불구 주제에 저를 이상하게 쳐다보잖아요.”
 “어?”
 “흠.”
 루시아가 가리킨 곳에는 중년 사내가 작은 수레에 앉아 있었다. 다리를 쓰지 못하는 장애자들이 타고 다니는 그런 수레였다.
 “루시아. 불쌍한 사람에게 어찌 그리 막말을 하느냐? 내가 그렇게 가르치더냐?”
 “하지만 아버지. 불구 주제에 절 야릇하게 쳐다보잖아요. 불결해요.”
 루시아의 말처럼 불구가 바라보는 곳은 필슨 백작 가문의 자리였다. 허나, 루시아가 아닌 라한을 향해서였다.
 “루시아!”
 “힝. 아버지.”
 불구가 등장한 이후부터 라한의 시선도 그쪽을 향했다. 루시아와는 좀 다른 이유였다.
 ‘이상하군. 무언가 다르다. 인간이긴 하지만 이곳에서 봐온 인간과는 달라. 그게 뭔지는 몰라도 분명히 달라.’
 “네 형의 시합이 시작되는구나.”
 필슨 백작의 말에도 라한의 시선은 떨어질 줄 몰랐다. 뭔지 모를 동질감이 눈을 떼지 못하게 한 듯했다.
 
 
 
 라한을 바라보던 수레의 사내가 인상을 찌푸렸다. 라한의 모습이 그의 심기를 불편하게 한 모양이다.
 “뭐야? 어린애잖아? 젠장.”
 사내는 라한을 오랫동안 찾았었다. 잔뜩 기대했던 상대가 기대에 못 미치는 모습. 성질 급한 그에게는 분통 터질 일이었다.
 “빌어먹을. 아직 애라니. 시간이 별로 없는데.”
 사내는 중얼거리면서도 라한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아직 어리기는 하지만 그가 오랫동안 기다려왔던 사람이 라한이었다. 좀 더 시간이 지나야겠지만, 그를 찾은 것만으로도 다행한 일이었다.
 ‘어쨌든 아직 십 년은 더 기다려야겠군.’
 입맛을 다신 사내가 시선을 거두었다. 그리고 양 손으로 수레의 바퀴를 밀며 경기장을 벗어나 버렸다.
 
 
 
 화려함과 고풍스러움을 함께 갖춘 서재 안.
 탁-!
 흰 수염이 멋들어진 노인이 책을 내려놨다. 무언가 화가 났는지 얼굴까지 약간은 붉게 상기되어 있었다.
 ‘라한이라고 했나? 라한이라······.’
 “파론! 밖에 있느냐?”
 “예. 엘베로님. 부르셨습니까?”
 삼십 대 중반의 사내가 대답과 동시에 서재로 들어왔다. 음침함과 음흉함을 온몸으로 풍기는 사내였다.
 “필슨 백작가의 라한이라는 녀석을 조사해라.”
 “예, 엘베로님.”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마라. 그 녀석을 중심으로 가족과 하인들까지 샅샅이 조사해야 한다. 알겠느냐?”
 “명심하겠습니다, 엘베로님.”
 대답을 마친 파론이 서재를 벗어났다. 새로운 일감이 생긴 게 기쁜지 얼굴 가득 웃음기가 감돌았다. 하지만, 엘베로가 왜 저렇게 화를 내는지는 알 수 없었다. 지금은 그냥 일거리가 생겨서 기쁠 뿐이었다.
 ‘라한. 느낌이 안 좋아.’
 엘베로는 라한을 잊을 수가 없었다. 이제 아직 아홉 살에 불과한 어린 아이. 그런 라한이 자신을 농락했다. 현자라 불리는 자신의 위치를 교묘하게 이용해서······.
 거기다 라한이라는 이름을 가진 아이의 눈. 열 살짜리 꼬마가 가질 수 있는 눈빛이 아니었다.
 자신의 눈보다 오히려 더 깊은 눈빛이지 않은가. 그대로 뒀다가는 화근이 될 놈이었다.
 ‘어리다고 얕봤다간 곤란하겠어. 이제 아홉 살인 놈이 그런 능구렁이 같은 말을 하다니······.’
 지금의 라한은 걱정거리가 되지 못 했다. 잠깐의 기지로 자신을 눌렀다고는 하지만 아직 아이라는 건 변함없는 사실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가 어른이 된다면 문제가 심각했다. 아홉 살인 지금도 그 정도인데 더 많은 지식과 경험을 쌓는다면 자신을 누르는 건 시간문제일 게 분명했다.
 ‘화근이 된다면 잘라 버려야지.’
 엘베로의 미소에 살기가 젖어들었다. 라한을 죽이기로 마음을 굳힌 듯했다.
 
 
 8개월 후.
 서재에서 엘베로가 파론을 불러들였다. 지난 8개월 동안 라한의 모든 정보를 수집한 것이다.
 “라한은?”
 “별 이상한 건 찾을 수 없었습니다. 저··· 엘베로님. 고작 아이일 뿐인데 왜 이렇게 신경을 쓰는지 모르겠습니다.”
 “고작 아이라. 후후, 지금은 아이일 뿐이지. 근데 그놈이 커서 성인이 된다면 상대하기 까다로워진다. 내가 본 그 꼬마는 용 새끼였다. 어른이 되면 나조차 상대하기 힘든 용 새끼.”
 엘베로의 말에 파론이 놀란 표정을 지었다.
 다른 사람도 아닌 엘베로의 말이라면 근거 없는 말은 아닐 것이다. 스스로에 대한 자부심이 대단한 엘베로가 용 새끼로 칭한 라한. 자신이 그 아이를 과소평가했음이 분명했다.
 “그냥 죽여 버리는 게 어떻습니까? 다크라이더 길드에 의뢰하면 실수하지는 않을 겁니다.”
 “멍청하긴. 내가 죽일 수 없어서 그놈을 그냥 둔 줄 아느냐?”
 “그럼.”
 “그 녀석의 아버지는 필슨 백작이다. 암살자한테 자기 아들이 죽었는데 가만히 있을 것 같으냐? 백방으로 수소문하면 다크라이더의 짓이라는 걸 알아내는 건 그리 어렵지 않을 거다.”
 지난 8개월 동안 엘베로는 라한에게 아무런 짓도 하지 못했다. 죽일 자신이 없어서가 아니라 그의 아버지인 필슨 백작 때문이었다. 더 정확하게는 필슨 백작을 따르는 세력들이 문제였다.
 귀족보다 어둠의 세력이나 평민의 지지 세력이 더 많은 필슨 백작. 왕실이 아닌 세간의 정보라면 필슨 백작이 더 빠르고 정확할 수밖에 없었다.
 “다크라이더 길드는 충분히 숨을 수 있을 겁니다.”
 “용이 될지 어떨지도 확실치 않은 꼬마 놈 때문에 위험을 감수하라는 말이냐? 혹, 다크라이더 중 한 명이라도 사로잡히는 날에는 내가 이룬 모든 게 날아가게 된다.”
 엘베로의 말에 파론이 입을 다물었다. 자신의 생각이 너무 성급했음을 뒤늦게 깨달은 것이다.
 “죄송합니다, 엘베로님.”
 “흠, 그 녀석에 대한 주변의 평가는?”
 “그게 좀 이상합니다.”
 “이상하다?”
 파론의 말에 엘베로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지금까지 파론의 정보는 라한 본인에 대한 게 전부였다. 그 정보에 따르면 지극히 평범하지만 책을 좋아할 뿐인 어린아이였다. 파론에게서 라한에 대해 이상한 정보는 들은 기억이 없는 것이다.
 “예. 저택 밖의 사람들은 라한이라는 아이에 대해 거의 모르고 있습니다. 아는 거라고 해봐야 필슨 백작의 아들이라는 것 정도에 그치고 있더군요.”
 “모른다라······. 그 꼬마가 외출을 거의 안 하느냐?”
 “예. 지난 8개월간 저택을 나간 적이 단 한 번도 없습니다. 한창 놀기 좋아할 나이인데 이해가 안 갑니다. 더 이상한 건 라한이라는 꼬마 녀석에게는 나가고 싶어 하는 기색이 조금도 보이지 않는다는 겁니다.”
 파론의 대답에 엘베로가 이마를 두드렸다. 고민에 빠질 때마다 늘 행하는 엘베로의 버릇이었다.
 인상을 찡그렸다 펴기를 몇 차례 반복하던 엘베로가 다시 물었다.
 “아까 정보가 저택 밖이었지? 하인들이나 가족들의 반응은 어떤가?”
 “가족들은 그 꼬마를 약간 총명한 정도로 밖에 보지 않습니다. 대부분의 아버지들이 아들에 대해 생각하는 그 정도죠. 그런데 하인들의 반응이 좀 다릅니다.”
 “다르다? 어떻게 다르지?”
 엘베로의 질문에 파론이 잠깐 침묵을 지켰다. 자신이 알아낸 정보를 정리하는 모습이었다.
 잠깐의 침묵 후 파론이 입을 열었다.
 “총명함의 정도를 뛰어 넘었다고 생각하더군요. 개중에는 그 꼬마를 천재로 생각하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천재?”
 “예. 다른 집과는 반대 상황 같더군요. 대부분은 부모가 아이를 높게 평가하는 게 보통이지 않습니까?”
 파론의 설명에 엘베로가 인상을 찌푸렸다. 생각하면 할수록 라한이라는 아이가 신기하기 그지없었다.
 알면 알수록 그에 대해 더 모르게 되는 느낌. 어색한 상황에 절로 짜증이 솟구쳤다.
 “그 녀석이 자주 가는 장소를 찾아라. 기왕이면 인적이 드문 곳으로 하는 게 좋겠지. 조만간 그 녀석을 처리해야겠다.”
 “예, 엘베로님.”
 파론의 대답을 들으며 엘베로가 다시 고민에 빠졌다.
 죽이긴 하되 필슨 백작의 의심을 사지 않고 죽여야 했다. 아무리 불안해도 고작 느낌 때문에 대의를 저버릴 수는 없는 일이다.
 “셀베카를 어디서 구할 수 있지?”
 “예? 그, 그건 멸종된 지 오래 된 풀이지 않습니까? 그걸 어디서······.”
 “돈은 얼마가 들어도 좋다. 셀베카를 구해라. 아이 하나 처리할 정도면 되니까 많은 양은 필요 없을 게다.”
 “예.”
 셀베카는 백치의 풀이라 불리는 극악한 독이었다. 섭취하기만 하면 모든 기억을 잃고 바보가 되는 악의 종. 이 때문에 이미 이백 년 전에 대륙에서 셀베카에 대한 전쟁을 선포했다. 뛰어난 마법 시약이라고는 하지만 그 악용성이 너무 크기에 멸종시켜야 한다는 결정이었다.
 그리고 인간의 인위적인 멸종 행위가 대대적으로 벌어졌다. 그렇게 이십 년이 흘렀고 결국, 셀베카는 대륙에서 완전히 사라졌다. 더 이상의 재배가 불가능하게 된 것이다.
 
 
 
 책상 하나와 의자 두개가 전부인 밀실 안.
 엘베로가 날카로운 인상의 삼십 대 사내를 마주하고 앉았다. 현자라 불리는 엘베로에게도 이 자리가 불편한지 안절부절 못 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어쩐 일로 직접 납시었습니까? 존경하는 엘베로 현자님.”
 “의뢰 할 일이 있어서 왔네.”
 엘베로의 말에 사내가 비릿하게 웃었다. 비록 엘베로를 돕고는 있지만, 그의 이중적인 생활을 역겨워하는 사내였다.
 “오호, 세상에서 인정하는 현자님께서 우리한테 시킬 일이 있다니··· 또 무슨 추잡한 짓을 시키려고 그러십니까?”
 “비꼬지 말게.”
 “말씀하십시오. 저야 약속한 세 가지 일을 마칠 수 있으니 좋은 일이죠. 흐흐흐.”
 엘베로 앞의 사내는 다크라이더 길드의 길드장 다크시안이었다.
 어쩔 수 없이 엘베로의 소원 세 가지를 들어줘야만 하는 다크시안. 이미 두 가지를 완수했으니, 이번 임무만 맡으면 소원 세 가지를 모두 끝내는 셈이었다.
 다크시안이 치른 두 가지 임무는 모두 귀족의 암살이었다. 필슨 백작이 정계의 중심에 서기 전에 엘베로 자신과 적대했던 귀족을 암살한 것이다.
 당시에는 엄청난 사건으로 대두됐지만, 오래지 않아 유야무야 돼버렸다. 엘베로가 암암리에 조용히 무마시킨 결과였다.
 “꼬마 한 놈을 처리했으면 좋겠네.”
 “후후. 위대하신 현자께서 꼬마도 죽이십니까? 놀랍군요.”
 다크시안의 말을 흘린 엘베로가 가슴에서 작은 주머니를 꺼냈다. 중요한 게 들어있는지 이중삼중으로 감싼 모습이었다.
 엘베로가 책상 위에 주머니를 올리며 슬쩍 밀었다.
 “이걸 내가 알려주는 자리에 뿌려주기만 하면 되네.”
 “흠.”
 엘베로의 말에 다크시안의 표정이 차갑게 굳었다.
 자신은 다크라이더 암살자 길드의 길드장. 누굴 죽이든 죽이는 방법은 길드의 몫이었다. 헌데, 엘베로가 죽일 도구와 방법까지 설명하고 있으니 자신을 무시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추잡한 일로도 부족해 무시까지 당해야 하다니. 약속만 아니었다면 진즉에 그를 처리했을 터였다.
 “내가 생각한 최선의 방법이니 거부감 느끼지 말게.”
 “어디에 뿌리면 됩니까?”
 주먹을 움켜쥔 다크시안이 어렵게 되물었다. 자존심이 상하기는 했지만 의뢰는 의뢰, 빨리 일을 끝내고 엘베로와의 인연을 끊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여기일세.”
 엘베로가 저택의 모습이 그려진 종이에 붉게 표시된 곳을 가리켰다. 저택의 한쪽에 위치한 인적이 드문 장소였다.
 “알겠습니다. 그럼 이 일만 마치면 다시 만나는 일이 없겠군요. 그럼.”
 “잠시 기다리게.”
 밖으로 나가려는 다크시안을 엘베로가 급히 불러 세웠다.
 “더 하실 말씀이 있습니까? 엘베로 현자님.”
 다크시안의 되물음에 엘베로가 주저하는 모습을 보였다. 다음 말을 잇는 게 쉽지 않은 모양이다.
 잠깐의 망설임 후 엘베로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다크라이더 길드와의 이전 계약은 오늘 일로 끝나네.”
 “그래서요?”
 “새로운 계약을 했으면 좋겠군. 보수는 섭섭하지 않게 주겠네.”
 “하하하하하하.”
 엘베로의 말에 다크시안이 크게 웃어재꼈다. 약속에 의해 일을 해줄 때, 자신은 어쩔 수 없는 약자였다. 들어주지 않으면 그간에 쌓은 신용이 한 순간에 날아가기 때문이다. 헌데 지금은 엘베로가 부탁조로 말하고 있으니 상황이 역전된 셈이다. 다크시안은 갈아 마셔도 시원찮을 엘베로의 위에 선다는 게 무척이나 통쾌했다.
 “······.”
 “하하하. 정중히 거절하겠습니다. 저희 길드는 엘베로님과의 마지막 계약만 끝나면 이곳을 뜰 생각입니다. 엘베로님이 살고 있는 이 빌어먹을 루이나 왕국은 지긋지긋해서요. 그럼 이만.”
 
 이십 년 전.
 다크시안은 아버지의 장례식 비용을 빌리는 대가로 엘베로의 소원 세 가지를 들어주기로 했었다. 차라리 두 배 세 배의 금액으로 갚겠다고 했다면 이런 고생도 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때의 크지 않은 금액의 대가를 소원으로 한 게 실수였다. 그때의 작은 실수가 끈질기게 남아 다크라이더 길드를 만든 후에도 다크시안을 족쇄처럼 옥죄었다.
 정말 오랫동안 벗어나고 싶었던 엘베로의 그늘. 다크시안은 마지막 소원만 수행해주고 루이나 왕국을 깨끗하게 뜰 생각이었다.
 
 
 열 살을 하루 앞둔 라한.
 가족들에게는 단순한 생일이겠지만, 라한에게는 좀 중요한 의미가 담긴 날이었다. 묵주에게 받은 신법이 머릿속에 주입되는 날이 오늘이기 때문이다. 물론, 노력하지 않아도 저절로 들어오는 지식이기는 했지만, 기분이 들뜨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라한이 저택의 정원 구석에서 생각에 잠겼다. 처음에는 답답하거나 막히는 일이 있을 때 즐겨 찾던 곳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책을 읽거나 사색을 할 때 늘 찾는 아지트가 이곳이었다.
 ‘내일이면 빨리 달리는 법을 알게 된단 말이지? 후후후. 달리는 법만 터득하면 바깥세상을 마음껏 돌아다닐 테다.’
 라한이 천성적으로 폐쇄적인 성격은 아니었다. 혹시나 위험을 당해 목숨을 잃을까 두려웠을 뿐. 위험에서 자유롭다면 밖을 돌아다니며 많은 흥밋거리를 찾아 다녔을 터였다.
 ‘그나저나 오래 사는 법은 정말 없는 건가? 단순히 몸에 좋은 음식이나 먹으면서 적당히 운동하는 게 최고라고? 그럴 리 없어. 묵주는 운명의 굴레를 벗은 사람이 있다고 했다. 어느 세계든 분명히 있다고 했어. 그럼 이곳에도 있을 거야. 분명히.’
 하루 종일 책을 뒤지는 라한의 최종 목표는 오래 사는 법이었다. 지금까지 수많은 생을 어이없이 죽어야만 했던 라한. 이 때문에 지금까지의 보상으로라도 오래오래 살고 싶었다. 지금까지의 모든 생을 합한 것보다 더 긴 생을······.
 “근데, 이게 무슨 냄새야? 엄청 찝찝하네.”
 라한의 후각에 셀베카의 향이 들어왔다. 보통의 인간은 절대 맡을 수 없는 냄새였다.
 라한은 처음 이 향을 맡았을 때, 약간 어질한 느낌을 받았었다. 하지만, 이내 평정을 되찾으며 예전과 같은 모습으로 돌아왔다.
 그때의 과정을 라한은 망각의 샘물을 마실 때와 비슷하다고 생각했다. 무언가 효과가 있을 듯 몸에 반응이 있다가 이내 사라져버리는 그런 것.
 “라한! 라한! 어디 있어?”
 루시아의 목소리가 라한의 상념을 깨웠다.
 “예? 아, 누나.”
 라한이 큰 목소리로 대답했다. 아직 나무에 가려져 루시아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부를 때 재깍 대답하지 않으면 어떤 봉변을 당할지 모를 일. 조금이라도 큰 목소리로 대답해야 험한 꼴 당하지 않으리라.
 “야! 라한. 여기서 대체 뭐하는 거야? 이 불결한 장소에는 왜 자꾸 오는 건데?”
 “책 읽고 있었어요.”
 “넌 여기가 불결하지도 않니? 아무리 청소를 해도 여긴 더러운 벌레들이 날아다닌단 말이야.”
 루시아의 말처럼 라한이 있는 곳은 몹시 지저분했다. 정원의 밝은 곳이 아닌 나무들 사이의 음침한 수풀. 이 때문에 약간은 썩은 냄새와 작은 벌레들이 날아다녔다. 그리고 그 사이에 미약하게 섞인 셀베카의 냄새도······.
 “뭐가 지저분해요? 이리 오세요.”
 “싫어. 으··· 불결해.”
 “근데 무슨 일로 온 거예요? 누나는 웬만해선 여기 안 오잖아요.”
 루시아는 지저분하거나 추한 걸 극도로 싫어했다. 길 가다가도 못생긴 사람만 보면 이죽거리며 쫓아내기 일쑤였다. 또, 수도의 지저분한 골목은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백작가의 자녀인 자신에게 어울리지 않는다는 게 이유였다.
 “너 내일 생일이잖아.”
 “알아요. 근데 왜요?”
 라한의 무덤덤한 반응에 루시아가 눈살을 찌푸렸다. 라한의 태도가 마음에 들지 않은 듯했다.
 실제로 루시아는 라한을 몹시 싫어했다. 가끔씩 보이는 라한의 어른스러운 모습이 마음에 들지 않았기 때문이다.
 물론, 평소에도 계속 어른스러운 모습이었다면, 이 정도로 싫어하지는 않았을 터였다. 아버지나 어머니 앞에서는 한 없이 어린 아이로만 행동해오던 라한. 하지만 루시아에게는 세상을 다 산 듯 훈계를 한 적이 너무 많았다. 마치 딴사람처럼 행동했던 라한이 못내 꺼려진 것이다.
 “너 내일 백작 승계식 한다는 얘기 못 들었어?”
 “들었어요.”
 루시아의 질책성 질문에도 라한의 표정은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 백작 승계식이 주는 무게감이 라한에게는 조금도 전해지지 않는 듯했다.
 “근데 지금 이러고 있는 거야? 내일 승계식이 끝나면 넌 정식으로 우리 필슨가의 후계자가 될 거라고. 근데 한가하게 책이나 읽다니······. 너 내일 단상에서 할 소감은 다 작성했어?”
 “뭐 쓰진 않았지만······.”
 “너, 너 제 정신이야? 우리 필슨 가문을 대외적으로 망신시키려고 작정했어? 너 백작 승계식이 뭘 의미하는 지나 알고 그러는 거야?”
 루시아의 화난 목소리에 라한이 입을 다물었다. 할 말이 없어서가 아니라 루시아의 화를 가라앉히기 위해서였다.
 잠깐이 지난 후 라한이 루시아의 얼굴을 살폈다.
 ‘쯧쯧. 저 다혈질적인 성격 고치지 못하면 평생 결혼하긴 글렀군.’
 “소감문을 쓰진 않았지만, 내일 할 말은 전부 외웠으니까 걱정하지마세요.”
 “너, 너······.”
 “승계식 절차도 다 외우고 있으니까 걱정 마시구요. 그럼 용건 끝났죠? 식사 시간에 봐요. 안녕!”
 라한의 마지막 인사에 루시아의 눈이 붉게 변했다. 분노가 치밀어도 대꾸할 말이 없으니 어쩔 수 없는 반응이었다.
 “내일 실수하기나 해봐. 내가 가만히 안 둘 테니까.”
 “예. 예.”
 루시아의 떠나는 모습에 라한이 몸을 떨어댔다. 뒷모습에서도 그녀가 받은 분노를 능히 짐작할 수 있었다.
 ‘쳇, 뭐 어쩌겠어? 승계식이 끝나면 내 몸에 손대지도 못할 텐데.’
 백작 승계식은 후일 백작이 죽었을 때, 사후를 대비하기 위한 절차였다. 물론 형인 레테아도 백작 승계식을 거쳤다. 허나, 그는 언제 전장에서 죽을지 모르는 기사 지망생. 그가 검술이 아닌 정치를 공부했다면 라한이 백작 승계식을 거칠 필요도 없었을 것이다.
 “승계식은 무슨 승계식. 승계식 거친다고 다 백작되고 안 거친다고 백작 안 되나? 어차피 형식적인 건데 왜 저렇게 호들갑인지 원.”
 라한의 말처럼 승계식은 형식에 불과했다. 승계식을 거친다 해도 당장 백작이 되는 건 아니었다. 또, 승계식을 거치기 전에 귀족이 죽더라도 작위는 후인에게 이어지기 마련이다.
 하지만, 허례허식 좋아하는 귀족들에게는 이런 형식적인 절차도 중요했다. 별거 아닌 형식이지만, 귀족의 권위가 서느냐 못서느냐가 결정되는 것이다.
 “그나저나 오래 사는 법. 미치겠군. 뭘 해야 오래 사는 거야?”
 라한의 손에는 대마법사 헬론의 일대기가 들려 있었다. 무려 일 년 동안이나 수없이 반복해서 보던 책이었다.
 이미 책 내용은 훤하게 꿰뚫었지만 쉽사리 책을 놓을 수 없었다. 이 책에서 무언가를 발견할지도 모른다는 막연한 느낌 때문이다.
 
 대륙력 872년 미라셀라의 연구실에서 헬론이······.
 
 책의 마지막 페이지를 덮으며 라한이 고개를 저었다. 뭔가 있을 것 같으면서도 단순한 일대기일 뿐인 책이었다.
 ‘지금이 1203년이니 330년 전 사람인가? 후손들도 마법을 익히고 있을까? 아니지. 이 사람 결혼은 했나? 책에는 그 흔한 연애 얘기 하나 안 나오던데. 설마 결혼도 못했나? 쯧쯧. 불쌍한 사람이네. 대마법사면 뭐하나? 결혼도 못하고 그렇다고 오래 살지도······. 응?’
 생각을 거듭하던 라한이 책의 첫 페이지를 다시 폈다. 헬론의 출생이 적힌 페이지였다.
 
 대륙력 754년. 8월 생. 난 생에 처음으로 마법이라는 학문을······.
 
 ‘754년 8월 생··· 책을 끝낸 건 872년. 그럼 119년을 살았다는 건가? 평균 수명 70년인 이곳에서 119년을? 그, 그럼······.’
 라한이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뭔가 놓치고 있던 부분을 일 년이 지나서야 찾은 것이다.
 ‘대마법사 헬론이 119년을 살았다. 그럼 다른 마법사도······.’
 생각을 마친 라한이 서재로 달려갔다.
 지금 그의 머릿속에는 승계식에 대한 건 까맣게 사라진 지 오래였다. 그의 평생 목표인 오래 사는 법. 그 해답을 찾을 수 있다는 생각에 얼굴 가득 미소가 넘쳤다.
 
 
 
 * 미친개 신법
 
 
 
 서재에 도착한 라한이 미친 듯이 책을 훑어나갔다. 마법사의 일대기 뿐 아니라 마법사에 대해 쓰인 책이라면 모조리 모으는 중이었다.
 “엘레노아 6서클. 109세 사망.”
 책 하나를 살핀 라한이 다음 책에 손을 뻗었다. 어차피 그 책의 내용보다는 마법사의 최종 나이만 알면 되었다.
 “아그리스 5서클. 98세 사망.”
 “퍽시프리토 6서클 633년 생. 739년 사망.”
 “멜리아드 7서클 초입. 121세에 사고로 사망.”
 라한은 책을 하나씩 훑고 던지기를 반복했다. 그러다 어느 정도의 결과가 눈에 들어오자 자리에 주저앉아버렸다.
 “전쟁으로 죽거나 암살로 죽은 사람이 아니면 대체로 오래 살았군. 그것도 서클에 비례해서······.”
 라한의 얼굴이 묘하게 뒤틀렸다. 눈에는 눈물이 흘러내리고, 입은 묘하게 꼬여서 무슨 표정인지 짐작하기 힘들었다. 너무 큰 기쁨에 스스로를 주체 못하는 모습이었다.
 “하하하하하. 정했어. 마법사가 되겠어. 7서클? 인간의 한계? 그 따위 넘어서버리겠어. 그래야 오래 산다면··· 그래야 생이 길어진다면··· 까짓것 마법에 미쳐보자고. 하하하하하.”
 라한의 광소에 저택 식솔들이 몰려들었다. 평소에 라한이 자주 가던 곳에 미친 듯한 웃음소리가 들렸으니 침입자라고 생각한 모양이다.
 쾅! 쾅!
 “문 열어!”
 “안에 누구야? 문 열어!”
 식솔들이 잠긴 서재 문을 두드리며 소리 질렀다.
 평소에는 잠겨 있지 않던 곳이 필슨 백작가의 서재였다. 허나, 라한은 이번일이 중요하다는 생각에 문을 잠그고 들어왔었다. 그것이 이번 사건의 원인이라면 원인이었다. 물론, 원천적인 원인은 라한의 웃음소리에 있었지만 말이다.
 “안에 누구 있소?”
 “우리 도련님을 해코지라도 하면 가만두지 않겠소.”
 “도련님! 괜찮습니까?”
 “빨리 백작님 불러! 어서!”
 밖의 소동에도 라한의 대소는 멈출 줄 몰랐다. 무려 십 년간 고민했던 일의 해답을 찾았으니 당연했다. 라한은 한참이 지나고서야 정신을 차렸다. 기대가 큰 만큼 기쁨의 함성도 오래 지속되었다.
 “문 열어! 도련님에게······.”
 “그만하세요. 집사님! 저예요, 라한.”
 “아, 도련님. 몸에는 아무 이상 없습니까? 혹시 괴한이 다치게라도 하지 않았는지······.”
 집사의 조심스러운 말에 라한이 머리를 긁적였다. 자신 때문에 벌어진 소동에 괜히 민망해졌다.
 “헤헤. 괴한은 없어요. 제가 너무 기쁜 나머지 큰 소리로 웃어 버렸어요. 근데 웃음소리가 그렇게 이상했나요?”
 “예? 분명 짐승의 울부짖음 같은 소리가······.”
 “짐승이오?”
 집사의 말에 라한이 묘한 표정을 지었다.
 자신은 누가 뭐래도 내일 열 살 생일을 맞는 어린아이였다. 아무리 큰 소리로 웃어도 아이의 치기가 사라지지 않을 열 살. 헌데, 자신의 웃음소리를 짐승의 울부짖음으로 듣다니······. 지금 상황이 너무 억울했다.
 “아닙니다. 저희가 너무 경솔했나 봅니다.”
 “예? 예. 하하. 제 잘못인걸요.”
 그날의 소동은 일단락되었지만 라한의 의문은 좀처럼 가시지 않았다. 짐승의 울부짖음이라니······. 일 년 전 들었던 엘베로의 말이 세삼 떠올랐다.
 ‘그 영감이 나한테 동물 같다고 했던가? 집사는 내 웃음소리가 동물의 울부짖음이라고 했지? 동물이라······.’
 
 
 
 자정 무렵.
 라한이 침대에 누운 채 몸을 뒤척였다. 밤 12시만 넘어가면 묵주가 준 능력을 확인할 수 있기 때문이다.
 ‘미치겠네. 이놈의 시간은 왜 이렇게 안 가?’
 침대 옆에 놓인 모래시계를 보며 라한이 인상을 찌푸렸다. 평소에는 빨리만 흘러갔던 시간이 왜 이렇게 안 가는지······.
 이 시기에도 시간을 알아볼 수 있는 시계는 존재했다. 허나, 태엽을 감아서 가는 시계였기에 째깍거리는 소리가 클 수밖에 없었다.
 필슨 백작은 아직 어린 라한에게 태엽 시계의 소리가 방해될 거라 생각했다. 라한의 속내가 필슨 백작보다 더 깊다 하더라도 그건 어디까지나 라한 스스로만 알 뿐이다. 필슨 백작은 전혀 모르고 있었기에 태엽 시계를 빼 버렸다. 가정에 그리 충실하지 않은 필슨 백작의 또 다른 모습이었다. 그가 라한을 얼마나 아끼는 지 짐작할 수 있었다.
 ‘조금만 더. 조금만 더. 조금만··· 됐다.’
 모래가 모래시계의 붉은 선을 채우자 라한이 침대를 박찼다. 묵주가 준 신법이 무언지 확인해보기 위해서였다.
 ‘근데, 어떤 지식이 들어온 거지? 아무 변화가 없잖······.’
 “으, 으··· 으악!”
 라한이 엄청난 통증을 느끼며 침대 위를 굴렀다. 그는 묵주가 말한 지식 주입이 이렇게 고통스럽게 다가올지는 몰랐었다. 그냥 조용히 알게 되고 끝날 거라 생각했는데, 이런 고통이라니.
 쿵-!
 침대를 구르던 라한이 바닥에 떨어졌다. 머리를 움켜 쥔 채 바닥을 구르던 라한. 지금의 고통이 얼마나 큰지 새삼 느낄 수 있었다.
 쿵쿵쿵!
 “라한아! 무슨 일이니? 라한아!”
 문을 두드리며 문 밖에서 다급한 소리가 들려왔다. 라한의 방과 꽤 멀리 떨어진 곳에 있는 일레나 부인의 목소리였다.
 실제로 라한의 방 바로 옆방에는 시녀가 기거하고 있었다. 라한의 작은 몸 상태에도 빠르게 반응하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맨 처음 달려온 사람은 시녀가 아닌 어머니 일레나였다. 아들에 대한 지극한 사랑이 라한의 상태를 빠르게 파악할 수 있도록 한 모양이다.
 “으, 으··· 어, 엄마! 살려··· 살려······.”
 “라한아! 무슨 일이야? 왜 이래? 라한아! 라한아!”
 일레나가 하얗게 질린 채 어쩔 줄 몰라 했다. 시녀를 부르거나 백작을 불러야 한다는 건 까맣게 잊은 듯했다.
 “마, 마님. 도련님이······.”
 “베린, 베린 어쩌지? 우리 라한이가······.”
 “어, 엄마. 으, 으악!”
 머리를 움켜쥔 라한의 눈이 하얗게 뒤집혔다. 고통이 그만큼 심하다는 의미였다. 라한은 시선을 여기 저기 돌리더니 몇 차례나 경기를 일으켰다. 그리고 고통에 몸부림치며 바닥을 계속 뒹굴었다. 그를 보는 것만으로도 고통이 전염되는 느낌이었다.

댓글(5)

바로그사람    
ㄴㄴㄴ ㄴㄴㄴ
2017.09.04 22:16
바로그사람    
ㄴㄴㄴ ㄴㄴㄴ
2017.09.04 22:16
갈매기와책    
이거 재밌게 읽었는데 ㅋㅋ
2018.03.09 14:01
달달달냥    
주인공 개쌍마이웨이네 글구 대사 칠 때 어색한거, 작가님은 못느끼시나 대사를 책읽듯하네 게다 현자란게 죽이면안된다 8개월을 시간끌어놓고 바로 죽일준비를하는 데 2페이지걸림.. 이건뭐
2018.05.18 10:52
저녁노을로    
이거 언제 작품이죠? 오래된거 같은데?
2018.05.20 2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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