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물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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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령술사 1권 (1)

2016.04.26 조회 1,946 추천 23


 * 프롤로그
 
 
 
 대륙에는 축복받았다고 부를 정도로 뛰어난 핏줄이 많다.
 어떤 핏줄은 대를 이어 가면서 계속해서 뛰어난 기사를 배출한다. 이들은 태생적으로 힘이 장사이거나, 몸놀림이 날랜 편이다. 혹은 둘 다를 갖추거나.
 또 어떤 핏줄은 대대로 마나에 적합한 체질을 타고난다. 당연히 이런 핏줄은 뛰어난 마법사를 많이 배출한다. 이 덕분에 남들보다 나은 지위를 대대로 보장받는다.
 반면 저주받은 핏줄도 있다.
 저주받은 핏줄로 가장 유명한 곳은 페닌 제국의 황가였다.
 이들은 대대로 못생겼다. 토 나올 정도로 못생겨서, 오크, 고블린 같은 별명을 숱하게 달고 다녔다. 아무려면 총애를 받기 위해 애써야 할 후궁들마저 고개를 돌릴까.
 하지만 이들은 대대로 뛰어난 검사를 많이 배출했다. 몬스터를 닮아서인지, 몬스터에 버금가는 괴력을 가진 이들이 거의 매 세대에 등장했다.
 에미리안 후작가 역시 저주를 받았다고 할 만큼 문제가 많은 가문이었다.
 이들은 대대로 정령 친화력이 뛰어나서 정령사를 많이 배출했다. 역사서에 종종 상급 정령사가 등장하는데, 이들은 대부분 에미리안이라는 성을 가지고 있었다.
 이 능력만 가졌다면 축복이라 불렸을 것을, 그들은 대대로 손이 귀했다. 700년이 넘는 역사 속에서 형제가 있었던 적이 단 한 번도 없으니, 이는 분명 저주였다.
 그리고 샤이어 백작가.
 이들은 태생적으로 약한 심장을 가지고 태어났다. 그 때문에 기사나 용병처럼 몸을 움직이는 직업은 애초에 꿈도 꿀 수 없었다. 신관을 옆에 끼고 살면서 계속 치료를 받아도 스물을 넘기는 경우가 드물었으니, 어쩌면 가장 불행한 가문인지 모른다.
 그래서 샤이어 가문은 대대로 10대 후반에 배후자를 맞이한다. 일찍 결혼해서 후손을 보지 못하면 대가 끊길 판이라 어쩔 수 없었다.
 로이드 샤이어.
 그런 면에서 로이드 샤이어는 저주의 정점이었다.
 어머니는 로이드가 태어나던 날, 산고를 버티지 못하고 죽었다. 게다가 아버지는 로이드가 한 살이던 때에 심장병으로 유명을 달리했다. 이것만으로도 저주이거늘, 핏줄 대대로 내려오는 약한 심장을 로이드 역시 타고났다.
 
 로이드는 여느 날과 같이 서점에서 시간을 보냈다. 심장이 약한 그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소일거리가 독서였다.
 웅성웅성!
 서점에서 오전을 보내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 집 앞에 사람들이 모여 웅성거리고 있었다. 자기 집 앞이라 로이드가 사람들 틈을 파고들었다.
 “어?”
 집 앞에 기사들 수백 명이 모여 있었다. 잠시 기다리자 할아버지가 포박된 채로 한 기사에게 끌려 나왔다. 바닥에 내팽개쳐지는 할아버지를 보며 로이드가 눈을 부릅떴다.
 “할아······ 읍!”
 할아버지를 부르려는 찰나에 누군가 로이드의 입을 막았다. 로이드는 눈만 치켜떠서 상대를 확인하려 했다.
 “도련님, 무딘입니다.”
 ‘무딘이 왜?’
 무딘은 샤이어 가문의 하나뿐인 하인이었다. 하지만 아비 없이 자란 로이드에게 아버지나 다름없는 존재였다. 로이드도 무딘을 잘 따랐고, 무딘도 로이드를 무척이나 예뻐했다.
 로이드는 무딘이 왜 자신의 입을 막고 있는지 어리둥절했다.
 “도련님, 제가 손을 뗄 테니 부디 조용하셔야 합니다. 입을 열면 안 됩니다.”
 무딘이 목소리를 낮춰 말했다. 심상치 않은 느낌에 여섯 살 로이드도 고개를 끄덕였다.
 “푸하! 헉, 헉!”
 입이 풀리자마자 로이드가 숨을 몰아쉬었다. 코까지 막지는 않았는데도 꽤 오랫동안 숨을 못 쉰 느낌을 받았다.
 “도련님, 주인님은 죄를 지었습니다.”
 “그래서? 무슨 죄를 지었는데?”
 무딘의 낮은 목소리에 로이드도 목소리를 낮춰 대답했다. 그러면서도 끊임없이 할아버지를 힐끔거렸다.
 “우선 자리를 피해야 합니다. 나중에, 나중에 다 말씀드리겠습니다.”
 “무딘! 하지만 할아버지가······.”
 “주인님은 무사하실 겁니다. 그러니 저를 믿고 따라와 주십시오.”
 “무······딘.”
 로이드가 할아버지와 무딘을 번갈아 바라보며 망설였다. 반면 무딘은 절박한 심정으로 로이드만 바라봤다.
 “도련님, 제발.”
 “어디로 가는데?”
 고민하던 로이드가 되물었다. 이에 무딘은 내심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목적지를 묻는다는 건 어느 정도 마음을 정했다는 뜻이었다. 로이드가 나이에 비해 조숙하다는 건 알았지만, 그래도 쉽지 않은 결정일 터. 어려운 결단을 내린 로이드가 대견스러웠다.
 “주인님이 미리 준비해 둔 장소가 있습니다.”
 “할아······버지가?”
 “예.”
 “알았어. 무딘을 믿을게.”
 로이드가 어렵사리 대답했다. 할아버지와 무딘 둘 다 좋아하지만, 지금은 무딘의 말대로 해야 할 것 같았다.
 “업히시겠습니까?”
 “아니, 그냥 갈래.”
 무딘이 로이드의 손을 잡고 군중 사이를 빠져나갔다.
 둘이 막 몸을 돌릴 때, 로이드의 할아버지 레벤도 그들을 발견했다. 그리고 희미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우린 다시 만날 수 있을 게다.’
 “이 영감의 손자 녀석도 근처 어딘가에 있을 것이다! 당장 찾아라!”
 “예.”
 “놓쳐선 안 된다. 반드시 끌고 와라! 알겠느냐!”
 “예.”
 기사들은 집 안을 샅샅이 뒤졌다. 방과 헛간은 물론이고 천장과 마당까지. 아이가 갈 법한 곳은 모조리 뒤졌다.
 그러고도 아이를 발견하지 못하자 기사단장 발칸은 부하들을 마을에 풀었다.
 오늘의 임무는 레벤과 그의 식솔 전부를 사로잡는 것. 단 1명만 놓쳐도 임무 실패였다.
 
 
 
 * 레벤 샤이어의 사정
 
 
 
 레벤은 샤이어가 핏줄로는 유일하게 장수하고 있었다. 겨우 40대 후반이지만, 할부지라 불러 주는 로이드와 알콩달콩 사는 재미가 쏠쏠했다.
 며느리는 산고를 견디지 못하고 죽고, 아들마저 1년 뒤에 심장병으로 세상을 떠났지만, 손자 녀석이 있어서 외롭지 않았다.
 그날도 여느 날과 마찬가지로 마당에서 책을 보고 있었다. 하인인 무딘은 우는 로이드를 달래느라 진땀을 뺐고, 레벤은 그런 무딘을 보며 행복한 미소를 머금었다.
 레벤은 이런 행복한 날이 계속될 줄 알았다.
 하지만 악연은 그날부터 시작되었다.
 로이드가 태어난 지 1년 반이 된 어느 날.
 쾅쾅!
 “으앙!”
 문을 두드리는 소음에 로이드는 막 그쳤던 울음을 또다시 터트렸다. 이에 무딘은 문을 매섭게 노려보며 서글프게 웃었다. 로이드를 다시 달랠 생각을 하니 눈앞이 깜깜했다.
 “주인님!”
 “내가 나가지.”
 문을 열려 가면서도 레벤은 의아한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비록 영지는 없지만 그래도 샤이어 가문은 귀족가였다. 그것도 백작 가문이라, 예의 없이 문을 함부로 두드릴 수 있는 인물은 많지 않았다.
 “누군가!”
 “황명을 받고 나왔소! 문을 여시오!”
 굵직한 목소리에 레벤은 급히 문을 열었다. 황궁에서 나온 사람이라면 오히려 레벤이 예를 갖추어 맞아야 했다.
 레벤은 문을 열고 뒤로 몇 걸음 물러났다. 그러자 문밖에 있던 인물들이 우르르 안으로 들어왔다.
 “그대가 고대어 학자 레벤 샤이어 백작이 맞는가?”
 “예, 맞습니다.”
 “황명을 받으라.”
 레벤은 급히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였다. 손만 앞으로 내민 채로 극경의 예를 취했다.
 그동안 무딘은 서둘러 로이드를 안채로 옮겼다. 황명을 받는 자리에서 울음소리라도 터졌다가는 안 좋은 일이 생길 수도 있었다.
 “황명을 받들어 이 서책을 번역하라. 기한은 1년이며 그 안에 번역을 끝낼 시에는 상응하는 보상이 있을 것이다.”
 “소신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레벤의 대답에 황명을 전한 중년인이 서책 한 권을 내밀었다.
 양피지로 만든 서책의 겉은 고풍스러운 문양이 그려져 있었고, 두께는 한 뼘이나 될 정도로 두꺼웠다.
 “일찍 번역이 끝나면 연통을 주시오. 본인은 베일리 드 카샤드 백작이오.”
 “알겠소.”
 황명을 전하는 시간이 끝났다. 이제 중년인과 레벤은 같은 작위를 가진 위치였다.
 “근데 이 책은 대체 어느 시대의 책이오? 나 또한 역사학과 고고학을 공부하는 학자이오만, 이런 글은 난생처음 보는데.”
 “어디······ 음.”
 레벤이 중년인에게 받은 책을 몇 장 넘겼다. 그림인지 글자인지 구분하기 힘든 것들이 빼곡하게 적혀 있었다. 글자의 크기가 새끼손톱만 해서 머리가 어지러울 정도였다.
 “베켄국 언어군요.”
 “이게 베켄의 언어란 말이오? 흐음.”
 “베켄을 아는 모양이오?”
 “이름만 들어 봤소. 베켄에 대해서는 남겨진 게 거의 없으니. 근데 베켄 언어도 아는 게요?”
 뒤늦게 카샤드 백작이 놀라 되물었다.
 베켄은 지금부터 6,000년 전에 존재했던 나라로, 현재까지 남아 있는 유산이 거의 없었다. 몇몇 역사서에 이름만 겨우 등장하는 정도라서, 베켄국의 존재를 부정하는 학자도 많았다.
 “나도 베켄어를 다 알지는 못하오. 번역하면서 차근차근 공부해 봐야겠지.”
 “역시 대학자는 다르구려.”
 “대학자라······. 어차피 헛된 명성에 불과한 것을.”
 레벤 샤이어의 역사학과 고대어는 대륙에서 따를 자가 없었다. 수많은 학자들이 레벤 샤이어를 대학자라 높여 부르며, 자신들보다 한 단계 위에 있음을 인정할 정도였다.
 “하긴, 명성에 연연했다면 이리 지내지도 않겠지. 그럼 본인은 가 보겠소.”
 “살펴 가시오.”
 중년인이 사라지자 레벤은 책을 뒤로 치웠다. 오늘만큼은 황명보다 손자의 재롱이 더 절실했다.
 
 
 
 다음 날 레벤은 서재에서 어제 받은 책을 펼쳤다.
 “후우!”
 오랜만에 일을 하려니 한숨이 나왔다. 그냥 손자 녀석 재롱이나 보고 살면 좋으련만, 마냥 놀 수만은 없는 입장이었다.
 레벤은 부탁받은 옛 서적을 번역하며 수입을 얻는다. 그런데 로이드가 태어난 후부터 일을 쉬었다. 원래는 반년 정도만 쉴 생각이었는데, 아들 녀석까지 심장병으로 죽으면서 1년을 더 쉬어 버렸다.
 1년 반을 쉬었으니 이제 일을 할 때가 되긴 됐다. 손자의 미래를 대비해 두려면 지금 꾸준히 벌어 놔야 했다.
 그런 입장임을 아는데도 책을 보고 있으니 자꾸 손자 녀석 얼굴이 떠올랐다.
 “그래도 해야겠지. 빨리 끝내야겠어.”
 레벤은 번역을 좀 서두르기로 결심했다.
 번역은 의뢰자가 누구인가, 어떤 내용을 번역하는 것이냐에 따라서 가격이 달라진다. 당연히 아는 이가 적은 언어를 번역할수록 더 많은 돈을 벌 수 있다.
 고대어, 통상 고대 3국어라 불리는 언어를 번역하면 족히 300골드는 받는다. 이 돈만으로도 세 식구가 3년은 풍족하게 먹고살 수 있다.
 한데 의뢰받은 서책에는 베켄어가 적혀 있었다. 고대에 존재했지만 문헌이 거의 남아 있지 않은 나라이니만큼 고대 3국어 번역 비용의 족히 두 배는 받을 수 있다.
 게다가 의뢰자는 황실이고 책의 두께도 여타 서적의 세 배였다. 이 번역을 끝내면 족히 2,000골드 이상은 벌 것 같았다.
 그날부터 레벤은 서책 번역에 매달렸다. 워낙 난해한 언어라 수많은 참고 자료를 찾아봐야 했다.
 번역에 매달리고 한 달쯤 지났을 때, 무딘이 서재로 들어왔다.
 무딘은 명목상 하인이지만 이미 가족이나 마찬가지였다. 아들이 죽은 빈자리를 채워 주는 사람이 손자 로이드라면, 로이드의 아버지나 마찬가지인 존재가 무딘이었다.
 “무슨 일인가?”
 “주인님, 좀 쉬시는 게 나을 것 같습니다.”
 “흐음. 많이 안 좋아 보이는가?”
 “예. 눈 밑이 검고 피부가 거칠어졌습니다.”
 레벤은 샤이어 가문치고는 오래 살고 있지만, 심장이 안 좋은 건 여전했다. 로이드와 마찬가지로 뛰는 건 꿈도 꾸지 못하고, 조금만 무리를 해도 현기증을 느끼기 일쑤였다.
 “내가 좀 서둘렀나 보군. 알겠네.”
 “그럼 식사 준비하겠습니다.”
 “그래 주게. 아! 로이드는?”
 “방금 잠들었습니다.”
 레벤은 슬쩍 일어나서 로이드가 자고 있는 방에 가 봤다. 곤히 자고 있는 로이드를 보니 절로 미소를 짓게 됐다.
 “오늘은 그만 쉬겠네.”
 “잘 생각하셨습니다.”
 레벤은 식사를 마치고 잠이 들었다. 하지만 다음 날부터 다시 강행군을 시작했다. 몸이 안 좋아진다 싶을 때는 어김없이 무딘이 나타나서 쉴 것을 종용했고, 레벤은 무딘의 의견을 받아들였다. 무딘이 만류하는 날이 레벤이 쉬는 날이었다.
 
 일곱 달이 흐르고, 레벤은 보기만 해도 치가 떨리는 두께의 서책 번역을 끝냈다. 첫날부터 꼬박 8개월이 걸렸으니, 황실에서 생각한 기간보다 훨씬 빨리 끝낸 셈이었다.
 힘든 번역이었지만 레벤 스스로 만족스러웠다. 번역을 하면서 베켄국과 베켄어에 대해 더 많은 것을 알게 됐다. 다시 베켄국 언어를 번역하게 된다면 전보다 더 빨리 끝날 수 있을 것 같았다.
 번역은 힘들었지만 내용은 흔하디흔한 사랑 이야기였다.
 평민을 사랑한 공주와 그녀를 위해 기사가 되기로 결심한 착한 평민 사내. 결국 비극으로 끝나지만, 흥미진진하게 전개되는 내용이었다.
 레벤은 그길로 카샤드 백작을 찾아가서 서책 원본과 번역본을 전해 줬다. 의뢰비는 조만간 황실에서 직접 보내오기로 했다.
 
 한 달 후, 황실에서 다시 사람이 왔다. 이번에는 카샤드 백작이 아니라 기사 복장의 사내였다.
 “무슨 일이오?”
 “황실에서 나왔습니다.”
 “말씀하시오.”
 레벤의 음성은 무뚝뚝했다. 황명이라는 말을 하지 않았으니 굳이 저자세를 유지할 필요는 없었다.
 “지난번 일에 대한 의뢰비를 가져왔습니다.”
 사내가 품에서 곱게 접힌 종이를 꺼내서 건넸다. 황실에서 인증하는 화폐로, 5,000이라는 숫자가 적혀 있었다.
 ‘으음.’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큰 금액이었다. 내심으론 놀랐지만 겉으로는 담담한 척했다.
 “고맙소.”
 “그리고 이것을······.”
 사내가 다시 책 한 권을 내밀었다. 전에 번역했던 서책과 비슷한 두께였지만 색이 조금 더 짙었다.
 “번역 의뢰?”
 “예. 기한은 저번과 같이 1년이며, 일이 끝나면 이번 의뢰금의 두 배를 주겠다고 합니다. 맡아 주시겠습니까?”
 저번에는 황명이라며 강제로 일을 맡겼지만 이번에는 황명이 아니었다. 황실의 개인적인 부탁이라, 명령이 아닌 의뢰라는 표현을 직접적으로 사용했다.
 “이 서책은 어디로 보내면 되오?”
 “황실로 서신을 보내 주시면 제가 직접 올 겁니다.”
 “알겠소.”
 “그럼 다음에 뵙겠습니다.”
 사내가 나가고 레벤이 인상을 찌푸렸다.
 지난번 번역으로 무려 8개월 동안 손자 녀석과 놀아 주지 못했다. 그래서 앞으로 몇 달 정도는 일을 쉬면서 손자랑 놀아 주고 싶었다.
 그런데 하필이면 황실의 의뢰가 또 들어오다니. 아무리 의뢰 형식을 취했다 하더라도 황실의 부탁이다. 거절했다가는 어떤 불이익을 당할지 모른다.
 “무딘!”
 레벤의 낮은 음성에도 어딘가에 있던 무딘이 재빠르게 나타났다. 등에는 어린 로이드를 업은 채였다.
 “또 의뢰를 받아 버렸네.”
 “수락하셨습니까?”
 “황실에서 들어온 의뢰라 차마 거절할 수가 없었어.”
 “얼마나 걸리는 일입니까?”
 무딘은 표정 변화가 없었다. 늘 해 오던 일이라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글쎄, 해 봐야 알겠지만 저번보단 빨리 끝날 걸세. 같은 언어거든.”
 “이번에는 쉬어 가며 하십시오.”
 “노력하지.”
 레벤은 그날 일찍 잠이 들었다. 의뢰를 하자면 며칠을 고생해야 할지 모르기에, 미리 체력 비축을 해 두는 게 좋았다.
 
 레벤은 다음 날 아침 식사를 마치자마자 서재로 향했다. 그리고 전과 같이 식사 시간과 자는 시간을 제외하면 번역에 매달렸다.
 그렇게 열흘쯤 지났을 때, 번역을 하던 레벤이 주춤 펜을 멈췄다.
 ‘뭐지?’
 처음에는 무리 없이 번역이 진행됐다. 자료를 찾는 횟수도 적었고, 앞뒤 문맥 때문에 고민해야 하는 시간도 짧았다.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갑자기 번역 속도가 떨어졌다. 앞뒤 문맥상 안 맞는 단어가 숱하게 나왔고, 그에 따라 빠르게 움직여야 할 펜이 그 자리에 멈춰 있는 경우도 많았다.
 ‘부르다, 소망, 그것들, 이곳, 악하다······ 대체 무슨 뜻이지?’
 고민하고 또 고민했지만 제대로 된 문장이 안 만들어졌다. 마치 철없는 아이가 글을 배우기 위해 단어를 나열해 둔 것 같았다.
 ‘소망을 부르다? 아니야. 이곳에 부르다가 자연스러워. 그것들과 악하다는 악한 것들이라고 해야 되고, 소망이라······. 소망이 방법이라는 뜻도 있었으니까 이곳에 부르는 방법? 그래, 이게 자연스러워. 그럼 악한 것들을 이곳에 부르······ 맙소사!’
 레벤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방금 자신이 번역한 내용을 믿을 수가 없었다. 이게 사실이라면 지금 손에 있는 책은 너무 위험한 물건이었다.
 ‘악한 것들을 이곳에 부르는 법. 이건 악마 소환술이야!’
 악한 것들이 악마를 뜻하는지, 아니면 나쁜 무엇을 뜻하는지는 알 수 없었다. 그렇지만 소환 대상이 악한 존재임은 분명했고, 이것이 실현되었을 때 이 땅에 내릴 재앙도 불 보듯 뻔했다.
 ‘어쩌지?’
 이 책을 제대로 번역해서 넘긴다면, 자칫 세상에 재앙이 내릴 수도 있었다. 그렇다고 황실에서 직접 의뢰받은 서책을 번역하지 않을 수도 없는 노릇.
 레벤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에서 숨을 연방 내쉬었다.
 ‘황제는 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번역이 끝나면 당연히 황제의 손에 들어갈 터. 황제의 생각 여하에 따라 악마 소환이라는 끔찍한 마법이 구현될 수도 있다.
 레벤은 두려웠다. 이대로 넘겼을 때 세상이 위험해질 것도 두려웠고, 번역을 하지 않음으로써 자신에게 닥칠 화도 무서웠다.
 결국 그날 레벤은 더 이상 번역 작업을 재개하지 못했다.
 
 다음 날, 레벤은 일어나자마자 무딘을 불렀다. 마침 무딘은 아침 식사를 준비하는 중이었다.
 “부르셨습니까, 주인님.”
 “모두 돈으로 바꿔 오게. 인증 화폐는 받지 말고 무조건 돈으로 바꿔야 하네.”
 레벤은 무딘에게 황실 사내에게서 받은 인증 화폐를 건넸다.
 “알겠습니다.”
 무딘을 보내고 레벤은 다시 서재로 향했다. 서재에서 악마 소환술이 적힌 책을 한참 동안 노려봤다.
 ‘비우면 돼, 비우면.’
 레벤은 악마 소환 마법에서 핵심적인 몇 가지 단어를 빼놓기로 결심했다. 책을 전해 줄 때, 너무 생소한 단어라 도저히 번역을 못 하겠다고 말할 작정이었다.
 ‘후우.’
 일단 결심을 하자 마음이 편해졌다.
 레벤은 책을 처음부터 다시 번역했다. 책의 종류가 무엇이냐에 따라서 번역 방법이 달라진다. 하물며 베켄어는 여러 가지 뜻을 가진 단어가 숱하게 많은 언어. 처음부터 모두 건드려야 제대로 된 번역이 가능했다.
 레벤은 다시 번역하면서 핵심이 될 만한 몇 가지 단어를 의도적으로 번역하지 않았다. 원래 그 단어가 있는 곳은 공백으로 비워 뒀다.
 번역을 계속하면서 레벤은 놀람을 금치 못했다.
 예상대로 이 책에는 소환 마법이 적혀 있었다. 책 앞부분은 이 책이 무엇인지를 설명하는 것이었고, 나머지 책의 반 이상이 전부 주문이었다. 주문만 외워도 몇 시간이 걸리는 엄청난 마법인 셈이다.
 
 
 
 그렇게 여섯 달이 흘렀을 때, 레벤이 번역을 끝냈다.
 레벤은 번역을 끝낸 후에도 몇 번씩이나 다시 검토했다. 행여나 공백으로 남겨 둔 단어를 실수로 해석해 놓은 곳은 없는지, 혹은 이 마법에 필수적인 단어인데 해석을 해 버리지는 않았는지, 십수 번씩 검토하고 또 검토했다.
 다행히 실수는 없었다.
 레벤은 번역이 끝났다는 사실을 마탑의 통신 마법을 이용해서 황실에 전했다. 이번에는 채 보름도 지나지 않아서 사람이 나왔다. 전에 왔던 그 사내였다.
 “번역은 끝내셨습니까?”
 “후우, 미안하네. 거의 대부분 끝났지만 몇 개의 단어는 나로서도 모르겠더군.”
 “그, 그렇습니까?”
 레벤의 대답이 의외였는지, 사내는 당황하며 말을 잇지 못했다. 멍하게 생각하는 사내를 레벤은 차분하게 기다려 줬다.
 한참 멍하게 있던 사내가 다시 입을 열었다.
 “모르는 단어가 몇 개나 됩니까?”
 “8개쯤 된다네. 미안하게 됐네. 내 능력이 부족한 것이니 이번에는 의뢰비를 받지 않겠네.”
 “아닙니다. 그 정도만 해도 대륙에서 해낼 수 있는 사람이 샤이어 백작님뿐임을 알고 있습니다. 여기 의뢰금입니다.”
 사내는 1만이라고 적힌 황실 인증 화폐를 내밀었다. 전에 받은 금액의 딱 두 배였다.
 “사양 않겠네.”
 레벤은 거절하지 않고 받았다. 지나치게 큰 금액이지만 반드시 쓰일 곳이 있을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이번에도 의뢰가 있습니다.”
 “흐음. 그 의뢰 거절할 수는 없는 건가?”
 “거절요?”
 “이번 번역을 하면서 나 스스로도 부족하다는 걸 느꼈다네. 베켄어는 내게 무리였던 모양이야.”
 이번에 번역해서 넘긴 책만 해도 대륙을 뒤흔들 만큼 치명적인 내용이 적혀 있었다. 그 내용을 번역한 자신이 알고 있으니, 황실에서 그를 그냥 내버려 둘 리가 없었다.
 레벤은 황실에서 마음껏 부려 먹고 입막음을 할 것 같아 무서웠다.
 “황실은 거절하는 사람을 좋아하지 않으십니다.”
 명백한 협박이었다. 이에 레벤도 앞에 선 사내를 다시 봤다.
 이 정도 협박을 할 정도라면 번역해서 넘겨준 책의 가치를 아는 사람임에 분명했다. 악마 소환이라는 건 모를지라도 마법서라는 것 정도는 눈치챘을 사람. 그저 그런 심부름꾼이 아니었다.
 “알겠네. 의뢰를 받지.”
 “잘 생각하셨습니다, 백작님.”
 “이번에는 세 권이군. 기한은 언제까지인가?”
 “2년 안에 번역을 끝내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이전 번역은 한 권에 1년이라는 시간이 주어졌다. 시간을 줄인 것은 순전히 레벤의 능력이었다.
 그 때문인지 이번에는 2년 안에 세 권을 번역하라고 했다. 레벤이 번역을 빨리 끝내니 처음부터 시간을 줄여서 의뢰를 넣은 것이다.
 ‘실수했구나.’
 레벤은 자신이 번역을 빨리 끝내고 건네준 것을 후회했다. 책을 가까이 두는 것조차 끔찍해서 서둘러 전해 줬는데, 오히려 족쇄가 되어 레벤을 옥죄어 왔다.
 “알겠네.”
 “아! 혹시나 해서 말씀입니다만······ 번역한 내용은 누구에게도 발설해선 안 됩니다.”
 “알고 있네.”
 “그럼 다음에 뵙겠습니다.”
 사내가 나간 후에도 레벤은 한동안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주인님!”
 “으음.”
 무딘의 부름에 레벤은 침음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입을 여는 것조차 힘들 정도로 심적인 피로가 컸다.
 “주인님.”
 “말······하게.”
 “주변에 감시하는 자들이 있습니다.”
 “음?”
 무딘의 말에 레벤이 주변을 둘러봤다. 최대한 자연스럽게 마당을 쓸어 보고 담벼락을 살폈지만, 이상한 느낌은 받을 수 없었다.
 “언제부터인가?”
 “손님이 나간 후부터 3명의 감시자가 붙었습니다.”
 “결국 그렇게 됐군.”
 아무런 기척도 안 느껴지지만 레벤은 무딘의 말을 믿었다.
 무딘은 단순한 하인이 아니었다. 단 1서클에 불과하지만 마법도 사용할 수 있고, 검술도 상당한 수준이었다. 당장 용병계에 뛰어들어도 충분히 이름을 날릴 수 있는 실력자였다.
 “모르는 척해 주게.”
 “알겠습니다.”
 “내일 날이 밝으면 이 인증 화폐를 돈으로 바꿔 두게. 다른 사람들한테 들키지 않도록 은밀하게 해야 하네.”
 “그렇게 하겠습니다.”
 무딘은 굳이 의문을 표하지 않았다. 레벤은 언제나 옳았고, 그의 말을 따라서 손해 본 적은 없었다.
 무딘이 들어간 후에도 레벤은 오랫동안 바람을 맞으며 서 있었다. 오늘따라 바람이 더 차갑게 느껴졌다.
 
 레벤은 다음 날부터 다시 번역에 매달렸다. 일에 매달리면서 로이드와 놀아 줄 시간이 줄어들었고, 이에 로이드가 연일 칭얼거렸다.
 그래도 레벤은 마음을 굳게 먹고 번역에 매달렸다.
 세 권을 모두 번역하는 데 꼬박 2년이 소요되었다. 몸만 정상이었다면 좀 더 빨리 끝낼 수 있었을 텐데, 중간에 레벤의 심장병이 악화되어서 시간이 지체되었다.
 벌써 나이 쉰에 접어든 레벤.
 극도로 조심하면서 겨우 약해지는 심장을 붙잡아 뒀지만, 슬슬 한계가 오는 것 같았다.
 세 권을 모두 번역하면서 역시나 예전에 모른다고 했던 단어는 공백으로 남겨 뒀다. 이번에도 그때 쓰인 단어가 핵심이어서, 이 공백만으로도 마법의 실현을 막을 수 있을 것 같았다.
 번역이 끝났지만 레벤은 곧바로 책을 넘기지는 않았다. 약속한 시간이 며칠밖에 남지 않았음에도 의도적으로 시간을 끌었다.
 이번에 번역한 책 세 권 중 한 권은 소소한 연애사를 적은 글이었다. 너무 낯간지러워서 번역하는 내내 레벤은 얼굴을 붉혔다.
 그리고 나머지 두 권 중 한 권은 저주와 관련된 마법 주문이었다. 이 마법 역시 책의 앞부분은 마법에 대한 설명이, 뒤쪽 대부분은 주문이었다.
 마지막 한 권은 흑마법과 관련된 시체 마법이었다. 시체를 불러일으키는 마법이지만 좀비를 부리는 네크로맨서의 마법은 아니었다. 시체를 잠깐 일으켜서 말을 할 수 있도록 만드는 마법에 불과했다.
 이 마법도 앞부분 조금을 제외하면 전부 마법 주문이었다.
 악마 소환부터 저주 마법, 흑마법까지.
 레벤은 마법치고는 주문이 너무 길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1서클 마법을 알고 있는 무딘에게 물어봤지만, 그 정도로 긴 마법은 없다는 대답만 들었다.
 고민 끝에 레벤은 저주 마법과 흑마법을 몰래 따로 필사해 뒀다. 그러면서 예전에 번역한 악마 소환을 따로 필사해 두지 않은 것을 후회했다.
 
 의뢰를 받은 지 정확히 2년째 되는 날 예전의 그 사내가 찾아왔다. 이번에는 덩치 좋은 사내를 수행인으로 달고 나타났다.
 “왔구먼.”
 “번역은 끝났습니까?”
 “끝났네. 무딘.”
 “예.”
 레벤의 부름에 무딘이 책 여섯 권을 들고 나타났다. 세 권은 원본이었고, 나머지 세 권은 번역본이었다.
 “여기 있네.”
 “감사합니다. 돈은 여기 있습니다.”
 사내가 황실 인증 화폐를 건넸다. 무려 10만 골드. 세 권 이라는 것을 감안해도 과할 정도의 금액이었다.
 레벤은 별말 없이 받았다. 돈 밝히는 놈으로 비칠 수도 있겠지만, 나중을 위해서는 받아 두는 게 나을 듯했다.
 “이번에는 다섯 권입니다.”
 사내의 말이 끝나자 뒤에 있던 덩치 좋은 사내가 앞으로 다가와 보자기를 풀었다. 안에는 책 다섯 권이 다섯 겹으로 싸여 있었다.
 “후우. 이번에도 의뢰인가?”
 “예. 기한은 4년입니다. 그럼 알아들으신 것으로 알고 저는 이만 가 보겠습니다.”
 “잠깐만.”
 막 돌아서려는 사내를 레벤이 급히 불렀다.
 사내는 몇 걸음 더 걸은 후에 몸을 천천히 돌렸다. 절도 있는 모습에 레벤이 순간 움찔했다.
 ‘예상은 하고 있었지만.’
 보통 사내가 아니라는 생각은 진작부터 했다. 시종일관 담담한 표정으로 계속 대화하는 건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말씀하십시오.”
 “얼마나 남았는가?”
 “번역을 말씀하시는 거라면 이번이 마지막입니다.”
 “마지······막이군. 후후, 마지막이었어.”
 마지막 번역.
 레벤은 이번 일이 끝나면 황제가 자신을 처리할 거라 생각했다. 암살을 택하든 정식으로 구속 절차를 밟아 처형하든, 서책의 비밀을 알고 있는 자신을 살려 둘 만큼 황제는 만만한 사람이 아니었다.
 “노파심에서 말씀드리면, 허튼짓은 하지 않는 게 백작님을 위해서 좋을 겁니다.”
 “목 내밀고 기다리라는 뜻이군.”
 “폐하께선 백작님의 죽음을 바라지 않으십니다. 어떤 일이 있어도 백작님을 죽이는 일은 없을 겁니다.”
 입이 무거워 보이는 사내가 하는 말이니 사실일 것이다. 적어도 황제가 레벤의 죽음을 바라지는 않는 듯했다.
 ‘감금인가?’
 자유롭게 풀어 줄 리가 없으니 딱 떠오르는 것이 감금이었다. 번역이 완전하지 않으니 수시로 물어볼 수도 있고, 필요하다면 고문을 하기에도 감금은 괜찮은 선택이었다.
 “그렇군. 아! 자네 이름을 모르고 있구먼. 자네는 누군가?”
 “제가 제 소개를 안 한 모양이군요. 아이잭 이노에트라고 합니다.”
 “이노에트 공작가의 아들이었군. 차기 국검國劍에 가장 가깝다는.”
 “과분한 칭찬입니다.”
 이노에트 공작가는 대대로 친황제파였다. 그리고 지금은 황권이 그 어떤 때보다 강한 시기. 때문에 현재의 이노에트 공작가는 제국의 4대 공작가 중 가장 강한 힘을 가졌다. 황제가 자신의 권력을 위해 쥐여 준 힘이었다.
 아이잭 이노에트는 그런 공작가의 둘째 아들이었다.
 그는 기사 아카데미에 다닐 때부터 검으로 두각을 드러냈다. 졸업할 당시 성적이 차석이었고, 졸업과 동시에 황궁 근위대에 들어갔다. 황궁 근위대는 황실 친위대와 더불어 황가 2대 무력 중 한 곳이었다.
 그리고 10여 년이 흐르는 동안 황제의 치부를 감추거나 더러운 일은 그가 도맡아 했다. 겉으로는 쉬쉬하지만 어지간한 귀족들은 다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알겠네.”
 “그럼 이만.”
 사내가 돌아가자 레벤은 하늘을 바라봤다. 시리도록 푸른 하늘을 보니 괜스레 눈물이 나왔다.
 “주인님!”
 “후우, 신경 쓸 필요 없네.”
 “알겠습니다.”
 “이것도 돈으로 바꾸게. 그리고 오늘부터 집 안에 있는 값나가는 물건을 하나씩 정리하게. 북부에 있는 땅도 정리하고.”
 레벤의 명령은 정리 절차였다. 무딘은 이곳에서의 생활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직감했다.
 
 
 
 다음 날, 레벤은 점심까지 먹은 후에 번역을 시작했다.
 이번 번역은 시작부터 난관이었다. 어려운 단어가 마구 쏟아지는 데다 앞뒤 문장도 난해하기 그지없었다. 열흘이 지났음에도 첫 장 번역에서 멈춰 있었다.
 “툴로 케보나 파레티아. 이게 무슨 뜻이지?”
 레벤은 이 문장 때문에 다른 모든 문장 번역에 애를 먹었다. 이 문장만 번역이 되면 나머지도 수월하게 진행될 것 같았다.
 “문맥상으로는 마법이어야 되는데. 카스테이아. 이 단어가 마법이란 말이야.”
 레벤은 잠시 펜을 놓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런 식으로는 아무리 고민해도 번역이 불가능하다. 차라리 머리를 좀 식혔다가 새로운 마음으로 시작하는 게 나을 듯했다.
 “무딘!”
 “예, 주인님.”
 무딘은 오늘도 앞치마를 두르고 나타났다. 레벤은 피식 웃으며 무딘의 몸을 훑어봤다.
 “로이드는 뭐 하는가?”
 “며칠 전부터 책을 보고 있습니다.”
 “책? 벌써?”
 로이드의 나이 고작 네 살이다. 아무리 조숙해도 네 살에 책을 보는 건 너무 일렀다.
 “예. 며칠 전부터 책을 보고 계십니다.”
 “로이드가 책을 제대로 볼 수 있나?”
 “가끔 모르는 단어가 나오면 제게 묻기는 합니다만, 대부분은 혼자서 읽고 뜻을 알아내십니다.”
 “호오.”
 레벤의 입에서 놀란 음성이 나왔다. 천재 소리를 듣고 자란 자신보다 오히려 1년이 빨랐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이해가 되기도 했다.
 샤이어 백작가 후손들은 대대로 머리가 좋았다. 망나니라 불렸던 아들 그웬도 머리 하나는 기가 막히게 좋았고, 레벤의 아버지는 살아생전에 전술학 계통 최고의 권위자였다. 심장병이라는 천형을 안고 태어나는 대신 얻은 소중한 능력이었다.
 “사실은 작년부터 책을 조금씩 찾기 시작하셨습니다.”
 “그래?”
 “예. 근데 모르는 단어가 자꾸 나오자 제게 대륙어를 가르쳐 달라고 하셨습니다.”
 “자네가 고생을 했겠구먼. 고맙네.”
 레벤이 씁쓸한 표정으로 무딘에게 감사를 표했다.
 사실 이런 일은 자신이 해야 할 일이었다. 황실의 의뢰 때문에 시간을 빼앗기지만 않았더라도 웃으면서 가르쳤을 텐데. 의뢰 때문에 시간도 날리고 손자의 사랑도 잃은 것 같아서 기분이 좋지 않았다.
 “아닙니다. 도련님의 습득 속도가 워낙 빨라서 전 한 일이 별로 없습니다.”
 “아닐세. 자네가 로이드의 부모 노릇을 톡톡히 했어. 근데 로이드는 무슨 책을 보는가?”
 “이것저것 가리지 않고 보십니다.”
 “하긴, 너무 치우친 공부는 성장에 방해를 주기 마련이지. 수고했네. 나가 보게.”
 “예.”
 무딘이 나가자 레벤은 다시 ‘툴로 케보나 파레티아’에 대해 고민했다.
 “툴로는 동사일 가능성이 높아. 이다? 혹은 아니다? 흐음, 다른 단어가 있는데 이 단어를 쓴 이유가 무얼까?”
 역시나 케보나 파레티아의 뜻만 알면 나머지는 술술 풀릴 터. 막힌 한 단어가 레벤의 발목을 잡았다.
 “마법이 아니라면 마법과 비슷한 무언가라는, 설마 주술?”
 혹시나 하는 생각에 주술이라는 단어를 넣어서 차례로 번역을 해 봤다.
 “맙소사!”
 막혔던 번역이 풀렸다. 마법이라고 해석하면 어색했던 문장들이 자연스러워졌다.
 “아! 그렇다면 내가 실수를 한 건가?”
 이전에 번역했던 책들이 뇌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그 책들에는 케보나 파레티아라는 단어는 없었다. 하지만 어감상 마법을 뜻하는, 하지만 다시 생각해 보면 마법과는 미세하게 다른 무언가가 숱하게 많았다.
 “어쩌다 보니 황제의 계획을 방해해 버렸군.”
 마법이라는 생각으로 번역을 할 때와 주술이라는 생각으로 번역할 때는 세부적인 내용이 달라진다. 이전 번역서 모두 주술을 밑바탕에 깔고 시작해야 제대로 된 번역이었다.
 결과적으로 레벤의 실수 때문에 이전의 번역 모두 오역이 되어 버렸다.
 “그 끔찍한 마법, 아니 주술의 성공 가능성이 낮아졌으니 다행이긴 하지만 내 번역사에 큰 오점을 남겨 버렸군.”
 레벤은 피식 웃으며 다시 번역에 매달렸다. 오점을 남겼지만 오히려 기분은 좋았다.
 
 주술로 궁극의 경지에 이르렀지만 한계를 느낀다. 내가 익힌 주술 어디에도 저주받은 핏줄의 심장병을 고칠 수 있는 방법이 없었다.
 없으면 찾자. 찾아서 없으면 만들자.
 비록 약골이라도 열한 세대마다 나오는 나 같은 놈의 숙명이지 않겠는가.
 
 번역을 하던 레벤이 경악하며 펜을 놓쳤다.
 “심장병이라고?”
 샤이어 가문 역시 대대로 심장병을 앓고 있었다. 아들은 저주받은 심장병 때문에 죽었고, 어린 손자 역시 심장이 약해서 집 안에서만 지냈다. 그런데 베켄국의 누군가도 자신의 핏줄과 같은 저주를 안고 태어났다.
 레벤은 급히 책장을 뒤져 선조들의 기록을 찾아봤다. 왠지 열한 세대라는 말이 자신과 관계가 있을 것 같았다.
 “내 할아버지는 스물여섯에 요절. 그리고······.”
 한 세대씩 차례로 거슬러 올라갔다. 그리고 정확히 열한 세대 위의 선조는 쉰네 살까지 살았다.
 “내, 내······ 가문이란 말인가.”
 확신할 수는 없지만 가능성이 높아 보였다. 열한 세대마다 장수하는 핏줄과 심장병. 세상에 이런 가문이 또 있을까.
 레벤의 손이 파르르 떨렸다. 치료법이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 흥분을 주체하기가 힘들었다.
 “후우!”
 레벤이 급히 숨을 가다듬었다. 이대로 흥분했다가는 약해지고 있는 심장이 어떤 발악을 할지 모른다.
 레벤은 심장 뛰는 소리를 들으며 번역을 재개했다.
 서책에 적힌 내용은 대체로 푸념이었다. 망할 저주 때문에 창에 앉아서 밖을 보는 게 취미였다는 말, 열다섯 살이 되면 배우자를 구해야 하고, 스무 살이 되면 내일 해를 보지 못할까 노심초사했다는 말 등등.
 레벤은 번역을 하면서 자신도 모르게 눈물을 흘렸다. 모두 공감 가는 내용이기에, 모두 자신이 직접 겪은 일이기에 눈물을 참을 수가 없었다.
 첫 권의 번역을 끝내는 데에는 넉 달밖에 걸리지 않았다. 레벤은 자신이 일기를 쓴다는 생각으로 편하게 번역했다.
 그리고 둘째 권.
 첫 줄을 번역하면서 레벤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나는 빌어먹을 저주에서 벗어나기 위해 주술을 변형해 새로운 방법을 만들었다.
 
 선조일지 모르는 저자는 결국 핏줄로 내려오는 심장병을 치료했다. 그가 할 수 있다면 손자 로이드도 치료할 수 있을 것이다.
 레벤은 전보다 더 열심히 번역에 매달렸다. 식사도 서재에서 할 만큼 열중하면서 시간을 절약하고 또 절약했다.
 나머지 네 권을 모두 번역하는 데 1년 반밖에 걸리지 않았다. 한 권을 번역하는 데 채 반년도 걸리지 않은 셈이다.
 레벤은 번역을 끝낸 책 네 권을 따로 필사했다.
 
 에세날 드레이마.
 지금 말로 이식술인 이 방법은 다른 생명체의 신체 부위를 자신의 부위로 만들 수 있었다. 실패하면 자신의 신체 부위 자체가 박살 나지만, 성공만 하면 엄청난 능력을 가질 수 있다.
 카자미아 다알.
 복원술로 부를 수 있는데, 이식술 후의 끔찍한 외형을 원래의 모습으로 되돌리는 방법이었다.
 가령 몬스터의 팔을 에세날 드레이마로 이식하면 자신의 팔 모양이 몬스터의 팔 모양으로 바뀐다. 이때 카자미아 다알을 이용하면 원래의 팔과 같은 모양으로 되돌릴 수 있다. 이전의 특성이 그대로 남아 있기 때문에 몬스터의 힘을 가진 팔을 표 나지 않게 가지는 것이 가능했다.
 브에니아 토브레.
 달리 투영술이라 부를 수 있는데, 마법사의 패밀리어와 흡사한 술법이었다. 지속 시간에 상관없이 계속 유지할 수 있고, 시야만이 아니라 오감 전부를 공유할 수 있는 것도 장점이었다.
 이 세 가지가 각각 책 한 권에 하나씩 기록되어 있었다.
 그리고 나머지 한 권은 주술로 부릴 수 있는 간단한 재주가 기록되어 있었다. 불을 부르거나 기력을 빼는 저주, 힘을 북돋는 축복 등 대부분 마법으로도 가능한 간단한 수법들이었다.
 이 중 심장병을 극복할 수 있는 방법은 에세날 드레이마. 즉, 이식술이었다. 건강한 심장을 약한 자신의 심장으로 바꾸면 심장병을 극복할 수 있다는 원리였다.
 필사를 끝낸 레벤은 한동안 흥분을 주체할 수 없었다. 당장 로이드를 불러서 심장을 바꿀까. 혹시 위험할 수 있으니 자신의 심장부터 바꿀까. 별별 생각을 다 하다가 문득 움직임을 멈췄다.
 “황제가 문제야.”
 바뀐 주술법은 마치 샤이어 가문을 위해 만들어진 것 같았다. 정말 샤이어 가문의 선조가 만들었을지도 모른다. 그만큼 샤이어 가문에 필수적인 것이었다.
 이 주술법을 황실에 전해 주고 싶지 않았다. 제국에서 찾은 책이지만, 샤이어 가문만을 위한 책이니까.
 “절대 성공할 수 없게 만들어야 되는데.”
 황실에서 받은 의뢰이니 전해 주기는 전해 줘야 한다. 하지만 온전한 상태로 전해 줄 생각은 없었다.
 “해 보자.”
 이미 번역이 끝났지만 레벤은 다시 번역을 시작했다. 이번에는 마법이라고 가정하고 번역했다. 게다가 핵심 단어는 예전처럼 공백으로 만들었다.
 역시나 마법이라는 가정을 밑바탕에 두자 이해할 수 없는 문장이 종종 만들어졌다. 레벤은 무시하고 번역을 계속했다.
 뿐만 아니라 주술사가 되는 방법은 교묘한 이야기로 없애 버렸다. 주술임을 알아차리지 못하는 건 물론이고, 설사 알아차리더라도 주술사가 되는 건 불가능한 책으로 바뀌었다.
 세밀하고 꼼꼼하게 검토하기를 수십 번. 레벤은 만족한 얼굴로 책을 덮었다.
 “이 정도면 됐어.”
 내용이 크게 틀어졌음에도 조작했다는 흔적은 전혀 남지 않았다.
 “무딘! 무딘!”
 레벤이 밝은 목소리로 부르자 얼마 지나지 않아서 무딘이 나타났다. 오늘은 웬일인지 땀에 전 모습으로 나타났다.
 “뭐 하다 온 거야?”
 “필요해질 것 같아서 검을 좀 휘둘렀습니다.”
 “혹시 마당에서 휘두른 건 아니겠지?”
 “제 방에서 휘둘렀습니다.”
 감시자의 눈을 피해서 검을 휘둘렀다는 뜻이었다.
 살림을 도맡아 하는 무딘은 눈치가 빨랐다. 식사 시간에 보이는 레벤의 표정에서 번역이 막바지에 왔음을 눈치챘다. 그리고 그 끝이 도주 혹은 싸움이 될 거라는 것도 짐작하고 있었다.
 “오늘이 며칠이지?”
 “7월 10입니다.”
 “열흘 남았군.”
 번역해 주기로 한 날짜까지 열흘 남았다. 병을 핑계로 미루면 20일 정도는 더 얻을 수 있을 테니, 한 달 정도의 여유가 있는 셈이었다.
 “무딘, 잘 듣게.”
 레벤의 조심스러운 음성에 무딘은 커튼을 쳐서 창을 가렸다. 그리고 자세를 낮춰 레벤이 말하기 편하게 해 줬다.
 “말씀하십시오.”
 “만약에 내가 잘못되더라도 로이드는 자네가 책임져 주게.”
 “주인님! 걱정하실 필요 없습니다. 제가 길을 열 수 있습니다.”
 무딘은 강하다. 어지간한 기사들은 장난처럼 다룰 수 있을 만큼 강하다. 하지만 기사는 많다. 철인이 아닌 이상 기사들 전부를 처리할 수는 없을 터. 결말은 굳이 오래 생각하지 않아도 쉽게 알 수 있었다.
 “만약이라는 말일세, 만약.”
 “알······겠습니다.”
 무딘은 부들부들 떨면서 주먹을 꽉 쥐었다. 왠지 모를 불길한 느낌에 기분이 안 좋았다.
 “우선 루베일 부근에 적당한 집을 구하게. 그리고 여기 있는 책들을 은밀하게 옮겨 두게.”
 “알겠습니다.”
 “그리고 내가 골라 주는 책을 지하 서고로 옮기게.”
 “지하 서고라면 우물 밑에 있는 그곳 말씀이십니까?”
 지하 서고는 일종의 비밀 서고였다. 입구는 우물과 멀리 있는 야산의 헛간 두 곳이고, 겉만 봐서는 입구를 찾을 수도, 서고의 위치를 확인할 수도 없게 만들어져 있었다.
 “맞네. 그곳이면 기사들도 찾지 못하겠지.”
 “알겠습니다.”
 “아 참. 로이드는 뭐 하는가?”
 레벤이 화제를 돌렸다. 심각한 얘기는 이쯤 하는 게 좋을 것 같았다. 무딘도 의중을 눈치채고 억지로 안색을 풀었다.
 “오전에는 항상 서점에 가십니다.”
 “서점? 집에도 책이 많은데 굳이 서점까지 갈 필요가 있겠는가?”
 “집에 있는 책은 전부 역사학이나 언어학 책뿐이라······.”
 “아! 이런.”
 로이드처럼 어린아이는 다양한 분야의 책을 접하는 게 좋았다. 많은 것들 중에서 원하는 것을 스스로 찾도록 만들어야 했다.
 레벤은 손자를 사랑하면서도 무엇이 필요한지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 이게 다 황제가 준 번역 의뢰 때문이다.
 “서점에서도 더 읽을 책을 구하지 못하는 상탭니다.”
 “그 정도인가?”
 “예. 주인님껜 죄송한 말이지만 주인님보다 머리가 좋은 것 같습니다.”
 “허허허허, 죄송할 필요 없네. 난 오히려 듣기가 좋구먼. 아무튼 자네가 신경을 더 써 주게.”
 “알겠습니다.”
 레벤은 서재에 있는 책 중에서 베켄어와 관련된 책을 모두 골라냈다. 권수는 무려 120여 권이었다.
 무딘은 밤마다 레벤의 서재와 지하 서고를 은밀하게 오갔다. 한 번에 서너 권씩, 하루에 대여섯 차례 이동하자 엿새를 넘기기 전에 다 옮길 수 있었다.
 
 레벤은 한 번 미루어서 한 달의 여유를 얻었다고 생각했지만, 사달은 의뢰 기한을 사흘 남긴 시점에 벌어졌다.
 갑작스럽게 기사들이 들이닥쳐서 침대에 누워 있던 레벤을 끌고 나왔다.
 “찾았느냐!”
 “물건은 찾았습니다. 하지만 다른 식솔들은 집 안에 없습니다.”
 “흐음.”
 명령을 받을 때, 이 집의 식솔이 몇 명인지도 함께 들었다. 당사자인 레벤 샤이어 백작과 그의 손자 그리고 하인까지 모두 3명이었다.
 하인은 놓쳐도 상관없지만 로이드라는 이름의 꼬마는 무조건 잡아야 했다. 그게 명령이었다.
 “마을을 샅샅이 뒤져라. 절대 놓쳐선 안 된다. 반드시 끌고 와라! 알겠느냐!”
 “예.”
 단장의 명령에 기사들이 일사불란하게 흩어졌다. 그런 모습을 보며 레벤이 조심스럽게 주변을 훑었다.
 ‘무딘, 부탁하네.’
 2개의 익숙한 등이 보였다. 몸을 돌리고 있지만 손자 로이드와 무딘이 분명했다.
 ‘다행이구나.’
 레벤은 억지로 웃었다. 혹시나 로이드가 고개를 돌려도 웃는 모습을 보여 주고 싶었다.
 
 
 
 * 도주
 
 
 
 얼마 걷지도 않았는데 숨이 가빠 왔다. 로이드는 티 내지 않으려 안간힘을 쓰면서 슬쩍 무딘을 바라봤다.
 “업히십시오.”
 “난 괜찮아.”
 “늦으면 잡힙니다. 업히십시오.”
 무딘은 거의 끌다시피 해서 로이드를 업었다. 그러면서도 의식적으로 뒤는 보지 않으려 노력했다.
 “할아버지는 무사하시겠지?”
 “예. 무사하실 겁니다.”
 “흑흑!”
 로이드는 무딘의 등에 얼굴을 묻고 흐느꼈다. 소리 죽여 우는 로이드의 모습에 무딘은 입술을 깨물었다.
 ‘주인님은 무사하실 겁니다. 반드시.’
 무딘은 로이드를 업은 채로 마을 외곽의 헛간으로 갔다. 예전에 버려진 곳이라 보이는 사람은 없었다.
 “이곳에서 잠시만 기다리십시오.”
 “응.”
 헛간 뒤로 돌아간 무딘은 미리 숨겨 둔 커다란 가방을 꺼냈다. 가방에는 레벤의 명으로 바꿔 놓은 돈과 베켄어 필사본, 간단한 여행 도구가 들어 있었다.
 무딘은 가방을 등에 멘 후에 로이드를 그 위에 올렸다. 상당한 무게임에도 무딘은 아무렇지 않아 보였다.
 “안 무거워?”
 “후후, 제가 열다섯 살 때는 주인님을 업고 다녔습니다. 그때는 세상 안 돌아다닌 곳이 없습니다.”
 “할아버지를 업고 다녔다고? 말도 안 돼.”
 무딘이 열다섯 살이면 레벤은 서른 살이다. 열다섯 아이가 서른 살의 큰 덩치를 업고 다녔다는 걸 믿을 수 없었다.
 “정말입니다. 주인님을 업고 사흘 밤낮을 걸은 적도 있습니다.”
 “진짜 할아버지를 업고 다녔어?”
 “그렇다니까요.”
 레벤은 젊었을 때 자료 수집 때문에 대륙을 돌아다녔다. 보통은 마차를 이용하지만 종종 마차를 탈 수 없는 상황도 있었다. 그런 레벤에게 무딘은 엄청난 동료이자 하인이었다.
 무딘은 레벤을 업고 달려도 속도가 떨어지지 않을 만큼 힘이 좋았다. 덩치에 안 어울리게 세심한 면도 있어서, 레벤은 무딘을 타고 다니는 것이 마차보다 편하다고 입버릇처럼 말하고 다녔다.
 “무딘은 힘이 좋구나.”
 “힘 하면 무딘입니다. 주인님도 항상 그렇게 말씀하셨죠.”
 “응. 이제 알겠어. 근데 혹시 아버지도 업고 다녔어?”
 로이드가 죽은 아버지를 언급했다. 태어나서 지금까지 아버지 얘기를 거의 들은 적이 없었다. 할아버지는 항상 바빴고, 무딘은 되도록 언급을 피했다.
 “작은 주인님도 업고 다녔죠. 매일 업어 달라고 보채서 귀찮을 정도였다니까요.”
 “아버지가 그랬어?”
 “예. 제 등이 침대보다 편하다고 하셨죠.”
 한 번도 보지 못한 아버지가 지금은 그리웠다.
 로이드는 무딘의 등에 얼굴을 비비며 아버지의 체취를 찾아봤다. 남아 있을 리가 없는데도 왠지 아버지의 향기가 느껴지는 것 같다.
 “아버지는 어떤 사람이었어?”
 “아! 작은 주인님요?”
 로이드의 질문에도 무딘은 쉽사리 입을 열지 못했다. 사실대로 말했을 때 받을 충격을 생각하니, 입을 여는 게 쉽지 않았다.
 “무딘, 나도 아버지가 좋은 사람이 아니었다는 건 알고 있어.”
 “도, 도련님.”
 “서점에서 내가 책을 고르고 있으면 수군거리는 사람들이 많더라. 전부 아버지 얘기를 하고 있었어.”
 “아!”
 서점에 혼자 보내는 게 아니었다. 사람을 1명 더 고용해서라도 다른 사람과의 접촉을 막았어야 했다. 그랬다면 기억 속의 아버지는 아름답게 남았을 텐데.
 무딘은 자책하며 눈을 질끈 감았다. 귀도 막고 싶었는데 차마 그럴 수가 없었다.
 “아버지를 좋아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어.”
 “도련님.”
 “괜찮아. 죽은 사람은 죽은 사람이고 난 살아 있잖아. 난 내 삶을 살면 돼.”
 담담하게 말했지만 목소리에서 씁쓸함이 묻어났다.
 원래 무딘의 아버지 그웬은 다정다감한 사람이었다. 스스로 절제할 줄 알고, 할 일은 찾아서 하는 부지런함도 갖추고 있었다.
 하지만 저주스러운 심장병 때문에 오래 살지 못할 것을 안 뒤부터 사람이 변했다. 얼마 남지 않은 인생 실컷 즐겨 보자고 생각했는지도 모른다.
 아무튼 그때부터 그웬은 문란하게 살았다. 괜찮은 여자만 보이면 집적거리기 일쑤였고, 거슬리는 사람을 보면 욕부터 해 댔다.
 결혼 후에는 더 심했다. 욕은 일상사였고 심지어 부인을 때리기도 했다. 동네 주민들은 그런 그웬을 인간 망종이라 부르며 손가락질했다.
 “작은 주인님은 불쌍한 분이셨습니다.”
 “그래, 불쌍한 분이지. 저주받은 신체를 타고났으니.”
 “도, 도련님. 어떻게······.”
 레벤은 손자에게만큼은 핏줄이 가진 저주에 대해 숨겼다. 무딘도 레벤의 뜻을 이해하고 로이드에게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그웬의 전처를 밟게 하고 싶지 않았는지 모른다.
 “이미 알고 있었어.”
 “죄송합니다.”
 “무딘은 미안해할 필요 없어. 내가 물어보지도 않았잖아. 그리고 난 아버지하고 달라. 난 짧은 삶이라도 보람 있게 쓰고 싶어.”
 “도련님.”
 “가자. 기사들이 쫓아올 거야.”
 “예.”
 이제 일곱 살인 아이가 언제 이렇게 훌쩍 커 버렸을까.
 폐쇄적인 삶이, 남과 다르다는 자괴감이 그렇게 만든 건 아닐까.
 무딘은 괜스레 가슴이 찡했다.
 
 
 
 로이드를 업은 무딘은 무작정 산으로 들어갔다. 일단 사람들의 눈을 피하는 게 상책이라고 판단했다.
 한편 기사들은 마을을 샅샅이 뒤지고 다시 레벤의 집으로 모였다. 허탕을 친 후라 기사들 전부 표정이 좋지 않았다.
 “그래서 못 찾았다는 말이냐?”
 “예, 단장님. 아무래도 미리 빠져나간 것 같습니다.”
 “그놈들이 어떻게 알고 빠져나간단 말이냐! 벤슨, 넌 영주성으로 가서 영주에게 도움을 요청하고, 남아서 이곳을 다시 한 번 뒤져라.”
 “예, 단장님.”
 벤슨이 사라지고 단장 발칸은 고민을 계속했다.
 ‘처음부터 병사들을 동원했어야 했어.’
 황실 친위대는 1대부터 4대까지 네 곳이 존재한다. 각 대마다 250명씩이라 모두 합하면 1,000명이라는 엄청난 숫자였다. 이 많은 기사가 황제의 명령만 듣는 충복이었다.
 이번에 샤이어 가문으로 파견 나온 친위대는 3대였다.
 심장병을 앓고 있는 노소에 하인 1명을 압송하는 일. 게다가 기습적으로 들이닥쳤으니 상대가 대비도 못 하고 있을 것이다.
 그런 생각에 황실 친위 3대의 단장인 발칸은 이번 임무를 너무 쉽게 봤다. 들이닥치는 순간 임무가 끝날 거라고 단순하게 생각한 것이 실수였다.
 “파드, 넌 50명을 데리고 서쪽으로 가고, 카슨은 100명을 데리고 남쪽으로, 나머진 나와 같이 동쪽으로 간다.”
 “예, 단장님.”
 발칸은 수색 범위에서 북쪽을 제외했다.
 북쪽은 제국의 수도가 있는 방향이다. 아무리 멍청해도 수도가 있는 곳으로 도주했을 것 같지는 않았다.
 
 발칸의 예상대로 무딘은 북쪽이 아닌 서쪽을 택했다. 서쪽으로 쭉 뻗은 산맥을 이용해서 거의 직선으로 쉬지 않고 움직였다.
 “무딘, 우리 어디로 가는 거야?”
 “아직은 결정하지 않았습니다.”
 레벤은 루베일 쪽에 집을 구하라고 했지만, 무딘은 아직 집을 구하지 못했다. 며칠만 늦게 기사들이 들이닥쳤다면 쉴 곳을 미리 마련했을 테지만, 시간이 부족했다.
 어차피 거처를 미리 정하지 않았으니 굳이 루베일로 향할 필요는 없었다. 직접 이동하다가 마음에 드는 곳에 정착하는 것이 나을 것 같았다.
 “어디가 좋을까?”
 “사람들 눈에 띄지 않는 곳으로 갈 생각입니다.”
 “생각해 둔 곳은 있어?”
 “아직 없습니다. 필요하다면 산속에 집을 짓고 살 생각도 하고 있습니다.”
 보통 아이에게는 다른 사람과의 소통이 도움이 되겠지만 로이드는 아니었다. 심장이 약한 그에게 건강한 아이들이 뛰어노는 모습은 오히려 상처가 될 수 있다.
 “산속에?”
 “예. 도련님이 원하시는 책은 제가 어떻게든 구해 드릴 수 있습니다. 먹을 것도 제가 직접 장만할 테니, 도련님은 그저 좋은 공기 마시면서 쉬시면 됩니다.”
 “무딘은 항상 내 걱정만 하는구나.”
 “아닙니다.”
 로이드는 무딘이 고마웠다.
 어렸을 때부터 부모 대신 자신을 키워 준 사람도 그였고, 자신이 외로울 때 놀아 준 사람도 그였다. 자신이 아무리 짜증을 부려도 무딘은 싫은 내색 한번 안 했다. 마치 보물을 다루듯 조심스럽게 자신을 아끼고 보호했다.
 “무딘, 산으로 가자.”
 “예, 도련님.”
 무딘은 이동하면서 대강 목적지를 정했다.
 헤이그 산은 산세가 험하고 몬스터가 많다. 드물지만 오우거까지 나오는 곳이라 사람의 발길이 뜸했다. 그곳이면 로이드를 사람들에게 노출시키지 않고 키울 수 있을 듯 보였다.
 
 
 
 파드는 자신이 황실 친위대 소속이라는 것에 자부심을 가졌다. 황제 이외에는 그 누구의 명령도 받지 않는 자리. 명령이 떨어지면 제아무리 높은 귀족도 막 대할 수 있는 이 조직이 마음에 들었다.
 하지만 오늘은 아침부터 기분이 별로였다. 정확히는 임무를 받고 황도를 출발한 보름 전부터 기분이 안 좋았다.
 “어쩐지 이번 임무는 귀찮아질 것 같더라니.”
 “조장, 대충 하고 갑시다.”
 “맞습니다, 조장. 꼬맹이가 있다는데 설마 이런 산으로 왔겠어요?”
 50명을 이끌고 서쪽으로 온 파드는 인원을 10개의 조로 나누었다. 서쪽 자체가 워낙 산지가 많아서 50명씩 뭉쳐 다니는 건 손해였다.
 생각 같아서는 1명씩 따로 떨어져서 수색하고 싶기도 했다. 하지만 그렇게 했다가는 수색은 뒷전이고 끼리끼리 뭉쳐서 놀 것 같아서 5명씩 함께 움직이도록 지시했다.
 파드가 수색하는 곳은 서쪽의 산지 중 가장 깊은 곳이었다. 딴에는 조장으로서의 모범을 보이고자 이곳을 택했는데, 지금은 후회막급이었다.
 “그래도 단장이 시킨 일인데 하는 시늉이라도 해야지.”
 “언제까지 찾아야 됩니까?”
 “일단 산을 타고 이동하면서 다음 마을까지 가야지. 마을에서 연락하면 뭐라고 지시를 내리겠지.”
 파드는 단원들의 불만을 충분히 이해했다. 자신도 조장만 아니었으면 저들하고 같은 말을 했을 것이다.
 “조장, 이러다가는 노숙하겠는데요?”
 “노숙이 대수냐. 일단 계속 가 보자.”
 노숙을 자주 하지는 않았지만 경험은 충분했다. 며칠쯤 산에서 밤을 보낸다고 몸이 축나거나 하지는 않는다.
 어느 정도 이동하자 날이 어둑어둑해졌다.
 “조장, 저기 불빛이 있는데요?”
 “잘됐군. 저기서 오늘 밤을 보내면 되겠어.”
 산은 해가 빨리 떨어진다. 조금만 머뭇거려도 등 붙일 곳을 찾지 못할 수도 있다.
 “조장, 꼬맹이 놈은 아니겠죠?”
 “모르지. 혹시 모르니 전투준비 해라.”
 “알겠우.”
 파드와 조원들은 자세를 낮추고 조심스럽게 다가갔다. 손은 검집에 올린 채였다.
 “누구야!”
 기사들이 어느 정도 다가갔을 때, 반대쪽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이에 파드가 조심스럽게 나섰다.
 ‘용병인가?’
 모닥불 앞에 사내가 앉아 있었다. 키가 작고 호리호리한 외모라 마치 여자가 남장을 한 것 같았다. 턱과 코에 거뭇하게 난 수염만 아니었으면 파드도 상대를 여자로 착각할 뻔했다.
 ‘꼬맹이는 아니군.’
 찾고 있는 로이드는 당연히 아니었고, 함께 사라졌다는 하인도 덩치가 꽤 큰 편이라고 들었다. 앞에 앉아 있는 사내와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었다.
 “우리는 페닌 제국의 황실 친위대 소속이다.”
 “제길.”
 “용병인가?”
 사내가 욕을 하든 말든 파드는 하고 싶은 말만 했다. 이에 사내가 보란 듯이 인상을 썼다.
 “그렇소만.”
 “이곳은 우리가 써야겠으니 오늘은 양보해라.”
 파드는 황실 친위대에 들어간 후부터 점점 거만해졌다. 보는 사람들마다 두려워 몸을 떨다 보니 저절로 그렇게 됐다. 지금은 평민을 아예 인간으로도 안 보고, 귀족들도 어지간한 위치는 발아래로 보기 일쑤였다.
 “이보시오, 기사님들. 늦게 도착한 사람이 먼저 자리 잡은 사람한테 꺼지라는 게 말이 된다고 생각하시오?”
 “당연히 말이 된다. 우린 제국의 황실 친위대니까.”
 파드의 대답에 사내가 눈을 부릅떴다. 당장이라도 검을 뽑을 기세였다.
 ‘저런 망할 자식들.’
 슬로터는 용병계에서는 꽤 유명했다. 대륙에 채 100명도 안 되는 A급 용병 중 1명이며, 굵직한 의뢰를 하면서 단 한 번의 실패도 한 적이 없었다.
 용병계의 최상위 실력자로 꼽히는 슬로터는 기사들의 행태에 기가 막혔다. 상대는 5명. 하지만 싸운다면 까짓것 이기지 못할 것도 없었다.
 문제는, 둘 이상이 동시에 다른 방향으로 도망쳤을 때 잡을 방법이 없다는 점이다. 죽을 때까지 싸워 준다면 좋으련만, 패색이 짙은 상황에서 끝까지 싸울 만큼 기사들이 멍청해 보이진 않았다.
 “쳇. 쓰쇼.”
 결국 슬로터는 화를 억눌렀다. 몽땅 다 죽일 수 있다는 확신이 없는 이상 싸워 봐야 손해였다. 재수 없으면 황군에게 쫓길 수도 있다.
 “조장, 그냥 죽이지 그랬어?”
 “귀찮았어.”
 “안 그래도 답답했는데 속 풀이 좀 하게 해 주지.”
 “됐어. 피 냄새 나면 자리 옮겨야 돼.”
 자리를 양보해 준 슬로터의 귀에 속 뒤집는 소리가 들려왔다. 당장 몸을 돌려서 한판 할까 하는 고민을 수십 번도 더 했지만 결국 참았다.
 
 
 
 무딘은 이미 어두워졌음에도 산길을 거침없이 움직였다. 등에 멘 배낭과 로이드의 무게가 만만치 않았을 텐데도 속도는 처음과 같았다.
 “도련님, 오늘은 여기서 쉬어야겠습니다.”
 “응. 무딘, 고생했어.”
 “아닙니다.”
 무딘이 가방에서 주섬주섬 물건을 꺼냈다. 먼저 휴대용 삽을 꺼내서 땅을 고르고, 그 위에 모포를 깔았다.
 “도련님은 여기서 주무십시오.”
 “무딘은?”
 “저도 근처에 자리 잡겠습니다.”
 준비해 둔 모포는 2개였다. 원래는 레벤, 로이드와 함께 움직일 때 둘은 모포를 쓰고 무딘 자신은 적당한 땅에 몸만 누일 생각이었다.
 하지만 레벤이 빠지면서 2개의 모포 중 1개는 무딘의 차지가 됐다.
 “무딘, 이제 말해 줘.”
 “무얼 말씀이십니까?”
 “할아버지가 죄를 지었다면서? 무슨 죄를 지었는지 말해 줘.”
 “아, 예.”
 무딘은 잠시 생각을 정리했다.
 무딘은 레벤이 죄를 지었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낮에는 로이드를 데리고 자리를 옮겨야겠다는 생각에 그런 식으로 말했을 뿐이다.
 “주인님이 번역을 하시는 건 아시지요?”
 “응, 고대어 번역은 할아버지가 최고라고 들었어.”
 “예, 맞습니다. 음, 그러니까 6년쯤 전에 황실에서 주인님에게 번역 의뢰를······.”
 무딘은 자신이 듣고 본 사실을 최대한 간략하게 설명했다.
 로이드는 무딘의 말을 들으면서 의아함을 느꼈다. 아무리 생각해도 할아버지가 잡혀간 이유가 무엇인지 알 수 없었다.
 “할아버지가 무슨 죄를 지은 거야?”
 “주인님은 죄를 짓지 않았습니다.”
 “근데 왜 할아버지가 잡혀가야 되는 거야?”
 “황제의 욕심 때문입니다. 아마 황제는 고문서에 있는 어떤 내용을 자신만 알고 싶었을 겁니다.”
 무딘이 설명을 덧붙였지만 로이드의 의문은 여전했다. 어린 그로서는 무딘의 말을 제대로 이해하기 힘들었다.
 “모르겠어.”
 “나중에 저절로 알게 되실 겁니다. 그만 주무십시오.”
 “응. 무딘도 잘 자.”
 로이드는 눈을 감자마자 잠이 들었다. 무딘은 그런 로이드를 보며 서글프게 웃었다.
 ‘도련님, 부디 이겨 내셔야 합니다.’
 할아버지를 잃고 상심이 클 텐데도 로이드는 처음 잠깐 외에는 할아버지 얘기를 꺼내지 않는다. 자신이 미안해할까 봐 억지로 참는 게 분명했다.
 무딘은 로이드를 한참 쳐다보다가 잠이 들었다.
 다음 날 아침은 새벽에 일어나 식사를 준비했다. 말린 육포를 물에 넣어 끓이고, 옥수수 가루를 넣어 수프를 만들었다.
 “도련님.”
 “음? 으음.”
 무딘이 불러도 로이드는 계속 몸을 뒤척였다. 전날의 피로가 아직 남아 있는 듯했다.
 ‘좀 더 주무셔도 되겠지.’
 무딘은 로이드가 좀 더 잘 수 있도록 모포를 목까지 올려 줬다. 로이드는 그런 모포를 꼭 부여잡고 몸을 웅크렸다.
 부스럭!
 ‘음?’
 갑자기 들린 기척. 무딘은 조심스럽게 몸을 일으켰다.
 부스럭!
 또다시 기척이 들렸다. 이에 무딘은 가방에서 무기를 꺼내 허리에 꽂았다.
 “어이, 이 길이 맞는 거야?”
 “길이 맞고 아니고가 어디 있어? 가다가 찾으면 찾는 거고, 못 찾으면 어쩔 수 없는 거지.”
 말소리가 들리며 사람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인원은 모두 5명이었고, 그들이 입은 옷소매에는 황제의 표식이 새겨져 있었다.
 상대도 무딘을 발견했는지 우뚝 걸음을 멈췄다.
 “저놈들 아냐?”
 “글쎄, 비슷한 것 같기는 한데. 꼬마도 저기 있고.”
 “조장, 일단 족치고 봅시다.”
 사내들은 일찍 식사를 마치고 움직이던 파드와 조원들이었다. 파드를 제외한 4명은 건들거리며 무딘에게 다가갔고, 파드는 빠져서 팔짱을 꼈다.
 “어이, 네놈. 이름이 뭐냐?”
 “묻지 말고 일단 잡고 보자니까.”
 기사들은 이미 짜증이 머리끝까지 치솟은 상태였다. 무딘을 만나지 않았더라면 죄 없는 나무에라도 화풀이를 해야 할 판이었다.
 “그럼 나부터 움직여 볼까.”
 한 기사가 천천히 다가왔다. 하지만 무딘은 몸을 뒤로 빼서 아직 자고 있는 로이드를 등에 업었다.
 “으음. 무딘, 왜?”
 “적이 온 것 같습니다.”
 뒤척이며 깬 로이드가 주변을 둘러봤다. 기사들이 천천히 다가오는 모습에 몸을 바짝 움츠렸다.
 “무딘, 어쩌지?”
 “도련님, 눈 감고 기다리십시오. 제가 처리하겠습니다.”
 무딘은 파르르 떨고 있는 로이드를 다독였다. 그리고 천천히 몸을 돌리고 검을 뽑았다.
 “오호, 반응을 보니 우리가 찾는 놈들이 맞나 보네.”
 “그러게. 이거 길 잃고 헤매다가 대어를 건졌어.”
 “근데 저놈 손에 들고 있는 거, 검 맞나?”
 “그런가 본데.”
 “검을 들어 본 적은 있나 몰라.”
 기사들은 무딘을 우습게 봤다.
 자신들은 제국 내에서도 최고의 조직인 황실 친위대 소속이다. 상대가 기사라도 긴장할 이유는 전혀 없었다. 하물며 상대는 꼬마와 함께 사라진 하인. 이런 놈은 벌레 잡듯 죽일 수 있다고 생각하는 이들이 황실 친위대였다.
 “어디 얼마나 검을 쓰나 볼까.”
 한 기사가 검을 휘휘 돌리며 다가왔다. 어느 정도 가까워졌을 때, 무딘의 검이 움직였다.
 스팡! 서걱!
 “어?”
 다가가던 기사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무딘을 바라봤다. 뭐가 지나갔지 하고 묻는 듯한 얼굴이었다.
 “이······런.”
 뒤늦게 상황을 파악한 기사가 몸을 돌렸다. 아니, 돌리려 했다. 하지만 고개를 돌리는 것과 동시에 바닥에 쓰러졌다. 곧이어 반쯤 잘린 목에서 피가 분수처럼 쏟아졌다.
 “무, 무슨.”
 “이놈이!”
 놀란 기사들이 뛰쳐나왔다. 셋은 무딘의 앞을 막아섰고, 조장인 파드는 쓰러진 조원의 생사를 확인했다.
 “주, 죽었어.”
 “이 개자식이······. 쳐!”
 한 기사의 외침으로 본격적인 싸움이 시작되었다.
 기사들은 본능적으로 반원진을 구축해서 무딘을 압박했다. 반면 무딘은 작지 않은 검을 젓가락처럼 휘두르며 수비에 치중했다.
 ‘이러다간 위험해.’
 무딘은 자신의 안위는 신경 쓰지 않았다. 제대로 싸우면 다치지도 않겠지만, 설사 다친다 해도 큰 부상을 입진 않을 것 같았다.
 하지만 등에 업힌 로이드가 문제였다. 눈먼 검에라도 맞는다면 어린 로이드의 목숨이 위험했다.
 “이 자식이.”
 “흐음.”
 무딘과 검을 나눠 보며 기사들도 쉽지 않은 상대임을 깨달았다. 애초에 5명이 모두 덤벼도 이길 수 있을지 장담할 수 없을 만큼 강했다.
 ‘그래도 방법은 있어.’
 검을 휘두르면서 파드는 사내가 업고 있는 꼬마를 힐끔거렸다. 지금 사내의 유일한 약점은 바로 저 꼬마였다.
 파드가 동료 기사에게 눈짓했다. 그를 본 기사들의 움직임이 변했다.
 둘은 여전히 파드를 향해 검을 휘둘렀지만, 나머지 둘의 검은 사내가 업은 꼬마를 향했다.
 ‘됐어.’
 계속 움직이면서 뒤를 점하려 하자 사내의 움직임이 어지러워졌다. 아직은 잘 막아 내고 있지만 집중력이 흐트러지는 건 시간문제였다.
 “휘유! 신 나게 싸우고 있구나!”
 한창 싸우던 곳에 낯선 목소리가 들려왔다. 곧이어 작은 키의 남자가 검을 어깨에 걸치고 나타났다.
 낯선 이의 등장에도 무딘과 기사들의 싸움은 계속됐다. 양측 모두 고개를 돌릴 만큼의 여유가 없었다.
 “어디 보자. 애를 지키려는 아비와 재수 없는 놈들의 싸움이네. 어이쿠, 벌써 한 놈은 바닥에 누워 있네?”
 나타난 이는 어젯밤 기사들에게 야영지를 뺏긴 슬로터였다. 그는 기사들의 횡포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밤이슬을 맞고 자야 했다.
 그러던 차에 우연히 싸우는 소리를 들었다. 어렴풋이 어젯밤 들은 재수 없는 목소리도 들리는 것 같았다.
 ‘어디 보자.’
 슬로터는 양쪽을 번갈아 바라보며 실력을 가늠해 봤다. 기사 놈들을 혼내 주고 싶긴 하지만 턱없는 싸움에는 참가하지 않는 게 상책이다. 자칫 기사들 중 1명이라도 놓치면 용병 생활도 끝이었다.
 ‘오호.’
 실력은 기사들과 싸우는 사내가 나은데, 업은 아이 때문에 제 실력을 다 못 내고 있었다. 이런 상태에선 조금만 거들어 주면 된다.
 “누구 편을 들어야 할까?”
 “꺼져라!”
 슬로터의 이죽거림은 정확히 기사들을 향해 있었다. 이 싸움에 발을 담그겠다는 뜻을 온몸으로 표현한 것이다.
 “난 정의의 편이라서 말이야.”
 스르릉!
 슬로터는 검을 뽑고 천천히 걸어갔다. 이에 기사들 중 1명이 무딘을 두고 슬로터에게 다가왔다.
 기사 1명이 빠지자 무딘의 상황은 한결 나아졌다. 움직임도 어느 정도 자유를 얻었고, 로이드를 향하는 위험도 줄어들었다.
 반면 기사들은 1명이 빠짐으로써 곤란한 상황에 처했다. 공격권은 여전히 자신들에게 있지만 빈틈은 오히려 자신들이 더 많이 노출하는 상황이 되었다.
 “혼자서 나를 상대하겠다고? 이런 나를 너무 우습게 보는군. 하압!”
 슬로터가 다가오는 기사에게 쇄도했다. 엄청난 속도에 기사도 순간 움찔했다. 그제야 예사롭지 않은 실력자임을 눈치챈 것이다.
 채챙!
 슬로터는 혼자서 이곳에 있는 기사 전부를 상대할 수 있는 실력이었다. 그런 그가 1명의 기사와 싸우니, 검을 휘두름에도 여유가 있었다.
 슬로터는 기사와 싸우면서도 아이를 업은 사내의 움직임을 힐끔힐끔 쳐다봤다.
 ‘대단하군. 나보다 윗줄이야.’
 슬로터는 사내의 움직임에 감탄을 금치 못했다.
 아이를 업은 상태로도 자신보다 강해 보였다. 아이가 없는 상태로 마음껏 싸운다면 자신과 기사들이 힘을 합쳐도 이길 수 없을 것 같았다.
 “끝내자고.”
 슬로터의 검이 변했다. 단순하게 막고 찌르던 움직임이 좀 더 날카롭고 빠르게 바뀌자 기사는 허둥지둥 뒤로 물러났다.
 티잉!
 묘한 소리와 함께 슬로터의 검이 앞으로 날아갔다. 단검을 던지는 것보다 더 빠르게 날아간 검은 단번에 기사의 목을 꿰뚫었다.
 “자식이, 필살기까지 쓰게 만드네.”
 슬로터의 검은 평범한 검이 아니었다. 팔목과 연결된 교묘한 장치로 암기처럼 날아가게 만들어졌다. 슬로터에게는 최후의 순간에나 쓸 수 있는 비기나 마찬가지였다.
 슬로터는 남들에게 보여 준 적이 없는 비기를 이 자리에서 사용했다. 모두의 시선이 한쪽에 쏠려 있으니, 어차피 볼 사람이 없을 거라는 판단에서였다.
 “어이, 형씨. 내가 응원할 테니 마음껏 싸워 보라고!”
 기사를 죽인 슬로터는 크게 소리치고 뒤로 물러났다. 그러면서도 다른 기사들의 움직임을 하나하나 눈에 담았다. 혹 아이에게 위험한 상황이 올 것 같으면 참가하기 위해서였다.
 챙! 칵!
 한참 검을 부딪치던 기사 1명이 훌쩍 뒤로 물러났다. 조장인 파드였다.
 ‘승산이 없어.’
 이길 수 없다면 몸을 빼는 게 최선이다.
 파드는 동료를 방패막이로 전장에서 슬금슬금 물러났다. 하지만 파드의 움직임은 무딘과 슬로터 둘 모두의 시선에 잡혔다.
 “어딜!”
 결국 구경하던 슬로터가 다시 참가했다. 그는 파상적으로 검을 휘두르며 파드를 몰아세웠다.
 “크윽!”
 “컥!”
 두 무리의 싸움은 생각보다 오래 지속됐다.
 파드는 애초부터 수비적으로 검을 휘두르며 시간을 끌었다. 슬로터의 검술이 한 수 위이긴 하지만, 대놓고 수비만 하는 파드를 뚫는 건 쉽지 않았다.
 반면 무딘은 여전히 로이드가 짐이었다. 잔인하지 않게, 로이드가 보더라도 무섭지 않게 죽이려니 싸움이 자꾸만 길어졌다.
 로이드도 그런 무딘의 마음을 눈치챘다. 넷과도 잘 싸우던 무딘이 둘과 싸우면서도 결판을 내지 못하자, 이유가 자신 때문이라는 것을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었다.
 “무딘, 난 괜찮으니까 빨리 끝내자.”
 “도련님, 눈을 감으시면 제가······.”
 무딘은 2명의 기사와 싸우면서도 여유가 있었다. 로이드의 정서에 안 좋을까 봐 시간을 끌었을 뿐, 싸움은 이미 무딘이 지배했다.
 “두 눈으로 봐 둘 거야. 앞으로 이게 내 삶이잖아.”
 “도련님.”
 “난 진짜 괜찮아.”
 “알겠습니다, 도련님.”
 무딘은 마음을 굳혔다. 로이드가 충격을 받겠지만, 아니 이미 받았겠지만 더 이상 이곳에서 시간을 지체할 수는 없었다.
 파팟!
 무딘의 검이 급격하게 빨라졌다. 기사들은 갑자기 빨라진 검에 제대로 대응하지도 못하고 허우적댔다.
 푸욱!
 결국 무딘의 검이 기사의 복부를 뚫었다. 이에 남은 기사가 겁에 질려 몸을 돌렸지만, 바로 그 순간에 무딘의 검은 기사의 목을 잘랐다.
 “후우.”
 “무딘, 저 사람 도와야지.”
 “예.”
 무딘은 파드와 싸우고 있는 슬로터의 싸움에 개입했다. 슬로터만으로도 힘겨워하던 파드는 무딘이 개입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차디찬 바닥에 몸을 뉘었다.
 “히야, 대단하네.”
 “괜찮으십니까?”
 싸움이 끝나자 무딘은 슬로터를 쳐다보지도 않았다. 오직 로이드가 충격을 받았는지에만 신경을 집중했다.
 “응, 난 괜찮아. 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로이드는 의연한 태도를 유지했다. 손끝은 파르르 떨렸지만 담담한 척하기 위해 최대한 애썼다.
 “잠시만 앉아 계십시오.”
 “응? 어.”
 무딘은 로이드를 내려놓고 시체를 한곳으로 모았다. 그리고 남에게 들리지 않게 무언가를 계속 중얼거렸다.
 그 모습을 보며 슬로터가 혀를 끌끌 찼다.
 “어이, 설마 시체를 다 묻겠다는 멍청한 생각을 하는 건 아니겠지?”
 슬로터의 비꼼에도 무딘은 고개조차 돌리지 않았다. 로이드도 슬로터에게 관심을 끄고 무딘이 무얼 하는지 지켜봤다.
 “참 답답한 사람이네. 5명이라고, 5명. 그놈들 다 묻으려면 반나절은 걸릴 텐데, 대체 여기서······.”
 “······디그.”
 “헙!”
 주절대던 슬로터가 헛바람을 들이켰다. 무딘의 입에서 나온 말은 그만큼 충격적이었다.
 디그.
 널리 알려진 1서클 마법으로 땅을 파는 효과를 낸다. 고위 마법사는 한 번 시전으로 지하 창고만큼 큰 구덩이도 만들 수 있다.
 하지만 무딘의 마법은 가로세로 1미터가 채 될까 말까 할 만큼 작았다. 딱 1서클 마법사가 만들어 낼 수 있는 크기였다.
 아무리 그렇다 하더라도 마법사라는 직업은 그 자체로 희귀한 직업이다. 대륙 전체에서도 드물지만, 용병 중에서는 더더욱 그렇다. 길 가다 미친놈한테 뒤통수 맞을 확률보다 마법사를 만날 확률이 낮을 것이다.
 “넌 뭐야!”
 놀란 슬로터가 겨우 내뱉은 말이었다. 그러나 무딘은 다시 눈을 지그시 감고 중얼거리고 있었다.
 잠시 후, 무딘이 다시 마법을 시전했다.
 “디그.”
 무딘은 그렇게 같은 마법을 두 번 더 반복했다. 모두 합해서 네 번. 연속해서 사용된 마법 덕분에 5명을 묻을 수 있을 만큼 큰 구덩이가 만들어졌다.
 “후우.”
 “모습만 봐서는 용병 같은데, 아니었나 보네. 이봐, 대체 마법은 어디서 배운 거야?”
 무딘이 길게 숨을 내쉬자 슬로터가 다시 끼어들었다. 하지만 말을 이어 갈수록 목소리가 점점 작아졌다. 무딘이 자신을 안중에도 두지 않는다는 것을 뒤늦게 알게 되었다.
 스으윽! 턱! 터덕!
 무딘은 모아 둔 시체를 끌어서 구덩이에 넣었다. 그리고 주변 흙과 나뭇가지를 긁어모아서 교묘하게 위를 덮었다.
 “끝났습니다, 도련님. 근데 식사는 아무래도 나중에 하셔야겠습니다.”
 “난 괜찮아.”
 대답을 하며 로이드가 어색하게 웃었다. 무딘은 로이드를 업고 자리를 떴다.
 “이, 이봐!”
 뒤에서 슬로터가 다급히 따라오는 소리가 들렸다. 무딘은 슬쩍 몸을 돌려 매섭게 노려봤다. 쫓아오지 말라는 무언의 시위였다.
 “아, 하하. 나쁜 뜻은 없다고.”
 슬로터의 변명 아닌 변명에 무딘의 등에 업힌 로이드가 피식 웃었다. 기사를 상대할 때는 매서운 독수리 같더니, 지금은 동네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장난꾸러기 같았다.
 로이드의 반응 때문인지, 무딘은 다시 묵묵하게 걸음을 옮겼다. 로이드까지 귀찮아했다면 무딘은 슬로터에게도 손을 썼을지 모른다.
 “목적지가 어디야?”
 묵묵히 걷는 무딘을 쫓아가며 슬로터가 물었다. 역시나 이번에도 무딘은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그 자식들이 너희들 잡으러 온 거 맞지? 왜 쫓아온 거야? 무슨 죄라도 지었나?”
 슬로터는 꿋꿋하게 질문을 던졌다. 그러거나 말거나 무딘은 묵묵히 걸음만 옮겼다.
 “도련님이라고 부르는 걸 보면 이 꼬마는 귀족가 자제쯤 되는 것 같고, 아까 죽은 놈들은 황실 친위대였으니까······ 설마 역모 같은 건 아니겠지?”
 스윽! 턱!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무딘이 슬로터의 멱살을 잡았다. 그리고 슬로터의 눈을 똑바로 노려봤다.
 “그 입 조심하지 않으면 네놈도 죽일 수 있다.”
 “나를? 하하하, 이거 왜 이러시나. 나 슬로터야. 무법자 슬로터.”
 용병계에서 슬로터는 고독한 무법자라 불렸다. 이름만 들어 보면 꽤나 멋있지만 속내는 전혀 달랐다.
 사고를 너무 많이 쳐서 붙은 별명이 무법자였고, 그런 더러운 성격 때문에 아무도 동료로 받아 주지 않아서 ‘고독한’이라는 불명예스러운 별명이 더해졌다.
 결국 고독한 무법자는 성질이 더러워서 친구가 없다는 뜻과 같았다.
 “풋, 무법자면 법을 어기고 산다는 말인가요? 그건 나쁜 뜻 같은데요?”
 “꼬맹아, 어른들의 세계에는 어른들끼리 통하는 말이 있단다. 내 별명은 용병계에서 감히 범접할 수 없다는 뜻이지.”
 슬로터가 팔짱을 끼고 고개를 쳐들었다. 딴에는 잘난 척하는 모양새인데, 키가 너무 작아서 오히려 우습게 보였다.
 “무딘, 가자.”
 “어, 어이. 말하다 말고 그냥 가는 게 어디 있어?”
 “전 어른이 아니라서 어른들끼리 통하는 말을 못 알아듣겠어요.”
 무딘은 다시 묵묵히 걸음을 옮겼다. 슬로터가 뒤에서 쉬지 않고 떠들었지만 무딘이나 로이드 둘 다 시선조차 던지지 않았다.
 
 밤이 되자 무딘이 로이드의 잠자리부터 마련했다. 슬로터는 적당히 떨어져서 눈을 지그시 감았다.
 ‘실력은 A급 이상이야. 특급이라고 봐도 되겠어. 대체 저런 자가 어디서 튀어나왔지?’
 가벼운 듯 수다를 떨었지만 슬로터의 머릿속은 복잡했다. 겉과 다른 신중함이 지금의 슬로터를 만들었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었다.
 ‘적어도 용병은 아니야. 황실 친위대가 쫓을 정도면 꽤 대단한 가문인 것 같기도 하고. 근데 황실 친위대가 그리 한가한 놈들이 아닌데, 왜 저들을 쫓는 거지?’
 용병은 소문에 예민하다. 특히 전쟁이나 내분, 반란 같은 소식은 정보 길드에 버금갈 정도로 빠르게 알아챈다.
 슬로터는 최근에 반란이나 역모에 대한 소문을 들은 바가 없었다. 황제가 폭군이라 불리는데도 제국이 평온한 것도 어찌 보면 신기한 일이었다.
 ‘그럼 호위 무사라는 얘긴데······ 마법까지 쓰는 호위 무사라니. 대체 얼마나 돈을 쏟아부으면 저런 호위를 둘 수 있지?’
 슬로터는 의문을 접고 몸을 눕혔다. 궁금증보다 당장은 수면이 중요했다.
 하지만 눈을 붙이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다시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 개자식들이. 그러고 보니까 이름도 안 가르쳐 줬잖아.’
 이곳까지 오면서 시종일관 떠든 사람이 자신이었다. 반면 앞에 누운 둘은 자신을 없는 취급 했다.
 기사들에게 쫓기는 상황이니 타인의 동행이 반갑지 않았을 테지. 슬로터도 저들의 입장은 이해할 수 있었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하루 종일 동행했는데 상대의 이름도 듣지 못했다. 반기지 않은 정도가 아니라 애초에 인간 취급도 하지 않은 것이다.
 ‘썩을, 요즘 내 운수가 왜 이래?’
 결국 슬로터는 화를 억누르고 눈을 감았다. 착한 자신이 참아야지 하며 스스로에게 변명했지만, 내심은 상대를 이길 자신이 없어서였다.
 
 무딘은 자정이 넘지 않은 시간에 잠에서 깼다. 옆에 누운 로이드가 끙끙거리며 식은땀을 흘리고 있었다.
 “후우.”
 낮에 죽음을 본 후유증이 뒤늦게 찾아왔다.
 무딘도 첫 죽음을 어릴 때 봤고, 로이드와 비슷한 경험을 했다. 그래서 지금 로이드의 상태를 누구보다 잘 알았다. 이럴 때는 이겨 낼 수 있게 기다리는 방법밖에 없다.
 무딘은 밤새도록 로이드의 이마에 맺히는 땀을 닦아 줬다. 그런 무딘의 얼굴에는 수심이 가득했다.
 다음 날 로이드는 밝은 얼굴로 눈을 떴다. 밤새 시름시름 앓았지만, 다행히 충격을 극복한 모습이었다.
 무딘과 로이드는 간단하게 식사를 끝내고 곧바로 출발했다. 슬로터는 마을 근처까지 둘과 동행했다가 헤어졌다. 그때까지도 무딘과 로이드는 슬로터에게 말 한마디 걸지 않았다.
 
 
 
 * 위기
 
 
 
 페닌 제국의 황제는 대대로 아름다움에 대한 집착이 심했다. 화려한 옷을 입는 걸로 부족해서 각종 보석으로 치장된 장식을 항상 하고 다녔다. 심지어 잘 때도 화려한 옷과 장신구를 벗지 않았다.
 혹자는 이런 황제의 습성을 못생긴 스스로의 외모에 대한 반발 심리라고 했다.
 현 황제 브에노 에살리스는 이런 집착의 정점이었다.
 그는 대대로 해 오던 화려한 옷과 장신구로 부족해서 황궁 자체를 보석으로 도배했다.
 수많은 빈과 비가 묵는 곳은 물론이고 200개가 넘는 별실 천장에도 보석을 박아 넣었다. 황궁에서 가장 큰 대전에 사용된 보석은 황궁을 따로 한 채 지을 수 있을 정도였고, 정원에는 황금으로 만든 분수대도 있었다.
 이런 사치의 극치는 단연 브에노 에살리스 황제가 휴식을 취하는 개인실이었다.
 문 안쪽은 모두 황금이었고, 천장과 샹들리에는 루비와 사파이어로 만들어졌다. 촛대에는 다이아몬드 장식이 되어 있고, 탁자 위에는 흑요석으로 블랙 드래곤을 새겨 넣었다.
 “후우.”
 황궁의 가장 값비싼 방 입구에서 발칸이 긴 숨을 토했다. 두려움과 걱정이 교차하며 차마 발이 떨어지지 않았다.
 발칸은 황실 친위 3대의 대장으로 이번에 레벤 샤이어 백작을 잡는 임무를 받았다. 그리고 가장 핵심 인물인 레벤 샤이어 백작을 무리 없이 사로잡았다.
 하지만 샤이어 백작의 손자와 하인을 놓친 게 문제였다. 핵심 인물은 잡았지만 식솔을 둘이나 놓쳤으니, 임무는 반만 성공한 셈이었다.
 발칸은 절반만 성공한 임무를 황제에게 보고하는 게 무서웠다. 어쩌면 당장 경비를 불러 목을 치려 할지도 모른다. 황제의 성정을 생각하면 충분히 가능한 얘기였다.
 황실 친위대는 오직 실력으로 대를 나눈다. 1대는 1,000명의 기사들 중에서 가장 강한 250명이고, 나머지도 실력순으로 250명씩 끊어서 대에 편입된다.
 발칸은 3대의 대장이지만, 황실 친위대 전체에서는 겨우 중간 실력에 불과했다. 황제로서는 당장 죽여도 크게 아깝지 않은 인재였다.
 똑똑!
 몇 번의 심호흡을 하고 발칸이 문을 두드렸다. 이 간단한 동작에 엄청난 용기가 필요했다.
 “누구야!”
 “황실 친위 3대 대장 발칸 페르노입니다.”
 “들어와.”
 발칸은 조심스럽게 문을 열고 들어갔다.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황제와 이노에트 공작이 마주 보고 앉아 있었다.
 ‘휴유.’
 발칸은 내심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이노에트 공작은 제국 내에서 유일하게 황제의 화를 가라앉힐 수 있는 사람이었다. 공작이 이 자리에 있으니, 황제가 당장 죽이라고 명령해도 말려 줄 것이다.
 “어떻게 됐나?”
 “레벤 샤이어 백작을 사로잡아 압송 중입니다.”
 “잘됐군. 도착하면 감옥에 처박아 놔. 음? 그게 백작 집에서 나온 건가?”
 “예.”
 에살리스 황제의 시선은 발칸이 들고 온 보자기를 향해 있었다. 이에 발칸이 조심스럽게 보자기를 내밀었다.
 “그놈 가족은 어떻게 됐지?”
 “신을 죽여 주십시오.”
 발칸은 황제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주저앉듯 무릎을 꿇었다. 고개는 바닥에 파묻었고, 손바닥은 위로 향한 채 앞으로 내밀었다. 황제에게 할 수 있는 최대한의 예의였다.
 “놓친 모양이군.”
 “갔을 때는 이미 사라지고 없었습니다. 하지만 지금 기사들이 수색 중이니 곧 찾아낼 수 있을 겁니다.”
 “됐어. 기사들 불러들여.”
 “예, 예?”
 담담한 황제의 말에 발칸이 무의식적으로 되물었다. 황제 앞에서는 절대로 해서는 안 되는 행동이었다.
 “멍청한 놈! 같은 말을 몇 번 반복하게 할 셈이냐! 기사들을 불러들이란 말이다.”
 “알겠습니다, 폐하.”
 “나가 봐.”
 “예, 폐하.”
 발칸이 나가자 이노에트 공작이 의아한 표정으로 황제를 바라봤다. 황제는 공작의 시선을 눈치채고는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궁금한 게 있는 모양이군.”
 “후환을 남겨 두지 않는 게 좋지 않겠습니까?”
 “누구? 샤이어 백작의 손자라는 꼬맹이?”
 “예, 폐하. 나중을 위해서라도 깔끔하게 처리해 두는 게 나을 것 같습니다.”
 황제는 잔인한 폭군이지만 의외로 꼼꼼하고 치밀한 편이었다. 지금까지 많은 귀족을 숙청하면서 그들의 가족 중 단 1명이라도 살려 둔 사례가 없었다. 완벽하게 처리해야 뒤가 깔끔하다고 생각한 탓이다.
 그런 황제가 후환이 될 만한 존재를 남겨 둔다는 걸 공작으로서는 이해할 수 없었다. 지금까지 보여 준 황제의 모습이 아니었다.
 “공작은 그 꼬맹이가 내 제국에 흠집이라도 낼 수 있을 거라 생각하나?”
 “그런 건 아닙니다만, 만에 하나를 생각해서라도 깔끔하게 정리하는 게 나을 것 같아서 그렇습니다.”
 “공작, 샤이어 백작가에 대대로 내려오는 저주에 대해서는 들어 봤겠지?”
 이노에트 공작도 당연히 들어 봤다. 샤이어 백작가의 저주는 워낙 유명해서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들어는 봤습니다. 하지만 폐하, 레벤 샤이어는 쉰이 넘은 나이입니다. 드물게 오래 사는 자도 나오는 것을 생각하면 그 손자라는 아이도 그렇게 될 수 있지 않겠습니까?”
 “없어.”
 “예? 없다는 말씀입니까?”
 “응. 샤이어 백작가의 저주가 약해지는 시기는 레벤으로 끝이야.”
 황제는 맨 처음 레벤에게 고서를 맡기기 전에 샤이어 가문에 대해 조사를 해 봤다. 혹 과거의 선조 중에서 제국에 반기를 든 이가 있는지 조사해 보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황가에도 망할 저주가 있으니 혹시나 무슨 관계가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어느 정도는 있었다.
 그 과정에서 특이한 사실을 알아냈다. 샤이어 가문이 정확히 열한 세대마다 한 번씩 장수하는 사람이 나온다는 것이었다. 장수라고 해 봐야 고작 쉰 전후를 사는 정도지만, 샤이어 가문이라는 걸 감안하면 대단한 일이었다.
 “확실한 겁니까?”
 “공작은 의심이 너무 많아. 매사에 조심하는 건 좋지만 본인의 말을 의심하는 건 곤란해.”
 “아, 죄송합니다. 폐하.”
 “샤이어 백작가는 딱 열한 세대마다 좀 오래 사는 놈이 나오더군. 한 200년쯤 전에도 지금의 레벤 샤이어 백작만큼 산 놈이 있었어. 정확히 열한 세대 전이지. 그 이전에도 통상 200년 정도의 간격으로 오래 사는 놈이 나오더라고. 그 녀석도 정확히 열한 세대 전이었지.”
 샤이어 백작가는 태생적인 심장병 때문에 결혼을 일찍 해서 후손을 낳는다. 그렇게라도 해야 백작가의 명맥을 유지할 수 있다. 그 때문에 열한 세대임에도 겨우 200년에 불과했다.
 “허, 그런 비밀이 있는지는 몰랐습니다.”
 “내 장담하지. 레벤 샤이어 백작의 유일한 혈육은 어느 한적한 곳에서 죽을 거야.”
 “그럼 저도 샤이어 백작가에 대해서는 신경을 끊겠습니다.”
 말은 그렇게 했지만 이노에트 공작은 여전히 찝찝했다. 샤이어 백작가의 꼬마가 왠지 계속 신경을 긁을 것 같았다.
 “어디 샤이어 백작의 마지막 작품이나 읽어 볼까.”
 황제가 보자기에 싸여 있던 다섯 권의 책 중 하나를 꺼내 읽었다. 회색 표지로 된 이 책은 레벤이 마지막으로 번역한 거였다.
 “디시즈에 큐어 포이즌이라······. 쓰레기군.”
 잡다한 주술이 적힌 책에는 주술적 용어 대신 마법적인 용어가 적혀 있었다. 레벤은 1차 번역을 끝낸 후에 이런 식으로 수정했다. 도저히 주술임을 알아볼 수 없도록.
 “폐하, 쓸 만한 마법은 있습니까?”
 “없어. 여기는 전부 쓰레기뿐이야.”
 황제가 읽던 책을 뒤로 치웠다. 얼굴에 떠올랐던 기대감은 어느새 사라지고 없었다.
 황제는 마법을 쓸 줄 모르지만 마법에 대해서는 꽤 오랫동안 공부했다. 자신이 봐도 형편없는 얼굴을 바꿀 방법이 혹시나 마법에 있을까 싶어서였다.
 “다른 건 쓸 만한 내용이 있었으면 좋겠군.”
 황제가 또 다른 책을 꺼내 들었다.
 ‘오호.’
 사라졌던 기대감이 조금씩 다시 싹텄다. 확인은 해 봐야겠지만, 이번 마법은 현존 마법 체계에 없는 마법일 가능성이 높았다.
 “괜찮은 마법을 발견하신 모양입니다, 폐하.”
 “어쩌면 그럴 것도 같군. 바디 체인지라고 적혀 있어.”
 “바디 체인지라면 현재의 마법에는 없는 겁니까?”
 “글쎄, 난 들어 본 적이 없는데, 확인은 해 봐야겠지. 밖에 누구 있나?”
 황제의 외침에 밖에서 시종이 들어와 시립했다.
 “하명하십시오, 폐하.”
 “베일런을 데려와.”
 “예, 폐하.”
 궁정 마법사이자 6서클 마법사인 베일런이라면 현존하는 마법에 대해서도 박식할 터. 바디 체인지라는 생소한 마법에 대한 궁금증도 풀어 줄 수 있을 듯했다.
 페닌 제국과 에반스 제국은 앙숙이었다. 완충지대도 없이 국경이 맞닿은 탓에 매해 십수 번씩 시비가 벌어졌다. 그리고 이런 상황에서는 누구도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지 않는다. 자존심 문제였다.
 그런 에반스 제국이 페닌 제국에 큰소리칠 수 있는 일이 발생했다. 20년 전, 에반스의 궁정 마법사가 6서클에 올라선 것이다. 당시 페닌 제국의 궁정 마법사는 5서클이었다.
 두 나라 모두 마법이 아닌 검술이 중심인 나라였다. 어지간한 왕국조차 6서클 마법사를 보유하고 있지만 제국에는 6서클 마법사가 없었다. 그런 세월이 수백 년.
 한데 에반스 제국에 갑작스럽게 6서클 마법사가 등장했다. 페닌 제국으로서는 당혹스러운 상황이었다.
 그 후부터 페닌 제국은 엄청난 자금을 쏟아부어서 마법사를 육성했다. 마법사가 원하면 책이든 돈이든 아낌없이 지원했다. 그 결과물이 베일런이었다. 페닌 제국 역사상 두 번째 6서클 마법사. 대륙 전체에서는 아홉 번째 6서클 마법사가 탄생한 것이다. 그때가 3년 전이었다.
 똑똑!
 “들어가겠습니다, 폐하.”
 베일런이 들어와서 황제에게 깊이 고개를 숙였다.
 “부르셨습니까, 폐하.”
 “베일런, 혹시 바디 체인지라는 마법 들어 봤어?”
 그제야 베일런의 시선이 황제의 손에 들려 있는 책을 향했다. 샤이어라는 백작이 다른 책을 번역해서 보낸 모양이다.
 “바디 체인지? 그런 마법은 들어 본 적이 없습니다. 뜻으로는 몸을 바꾼다는 뜻 같습니다만.”
 “그렇다는군. 몸을 바꾸는 모양이야. 아! 신체 부위로군.”
 황제의 대답에 베일런의 머릿속이 복잡했다.
 새로운 마법의 출현은 언제나 반갑다. 특히 그 마법이 자신의 손에 떨어질 수 있을 만큼 가까운 곳에 있으면 더더욱 그렇다.
 하지만 지금은 몇 년 전에 받은 악마 소환 마법만으로도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다. 또 다른 마법이 등장하더라도 그 마법에 할애할 수 있는 시간이 없었다.
 “무엇이든 다 바꿀 수 있는 겁니까? 가령 머리 같은 것도 바꿀 수 있는지······.”
 “그거야 나도 모르······ 아!”
 황제가 좀 전에 뒤로 빼 둔 책을 다시 꺼내 읽었다. 얼핏 심장이 어쩌고 하는 내용을 읽은 것 같았다.
 “오호.”
 “왜 그러십니까, 폐하?”
 황제의 탄성에 베일런이 되물었다. 옆에 있는 이노에트 공작도 흥미진진하게 바라봤다.
 “심장을 바꿀 수 있는 모양이야. 심장이 된다면······.”
 “심장을 바꿀 수 있다면 인간의 신체는 무엇이든 바꿀 수 있을 겁니다.”
 베일런의 대답에 황제의 얼굴은 환희로 물들었다.
 신체를 바꾼다는 말은 인간의 몸 어떤 곳이든 더 나은 것으로 바꿀 수 있다는 뜻이다. 이 마법을 구현할 수만 있다면 빌어먹을 정도로 흉측한 외모도 바꿀 수 있을 게 분명했다.
 “베일런, 인원은 여유가 있나?”
 “악마 소환 마법에 모두 매달리고 있습니다.”
 “어차피 번역부터 신경 써야 될 테니 그리 많은 인원은 필요 없을 거야. 사람을 빼서 이 마법을 빠른 시일 안에 구현해라.”
 레벤이 공백으로 만든 부분은 황제가 따로 사람을 붙여서 번역을 명했다. 물론 처음부터 번역이 전혀 안 되어 있는 상태라면 다른 번역가들의 능력으로 불가능했을 것이다. 하지만 레벤이 거의 대부분을 번역해 뒀기 때문에 빈 단어는 앞뒤 문맥에 맞도록 단어를 끼워 맞춰서 번역이 가능했다.
 마법사가 번역 작업에 참여하는 건 끼워 맞춰야 하는 단어가 마법적인 언어이기 때문이다. 번역 자체에 도움을 주라는 의미는 아니었다.
 “알겠습니다. 한데 다른 색다른 마법은 없습니까?”
 “베일런도 흥미가 생기는 모양이군. 어디 보자.”
 황제가 또 한 권의 책을 꺼내 읽었다.
 “리커버리?”
 “그 마법은 이미 있습니다.”
 “그렇군.”
 황제가 다른 책을 다시 꺼냈다.
 “패밀리어?”
 “그 마법도 이미 있습니다.”
 레벤은 주술의 이식술을 바디 체인지, 복원술을 리커버리, 투영술을 패밀리어로 번역해 놨다. 주술이 아닌 마법을 밑바탕에 깔면서 번역에 왜곡이 생긴 것이다.
 “결국 건진 건 바디 체인지 하나뿐이군.”
 “예, 폐하. 고대 마법은 효율이 너무 떨어집니다. 실존하는 마법이 아닌 이상은 크게 관심을 두지 않으셔도 될 것 같습니다.”
 “폐하, 같은 마법이라도 고대의 마법이 더 위력적일 수도 있지 않습니까?”
 가만히 듣고 있던 이노에트 공작이 질문을 던졌다. 황제는 시선을 베일런한테 던지며 대신 해명하도록 종용했다.
 “우리 마법사들도 처음에는 그런 생각을 했소. 그래서 예전에 얻은 책 중에서 저주가 적힌 책을 복원하는 일에 매달린 적이 있소.”
 “복원은 성공한 게요?”
 “물론이오. 복원을 끝내고 마법을 직접 시전해 보기까지 했지.”
 마법사들은 현존하는 마법과 겹치는 마법 중 비교적 간단한 위크니스weakness를 복원하는 데 성공했다. 많은 마법사들과 번역가들이 동원됐음에도 1년이나 걸렸다.
 “어땠소?”
 “사형수를 데려다가 마법을 써 봤는데, 많이 약하더군. 우리가 쓰는 마법이 더 효과적이었소. 범위가 아닌 대상인 데다 효과 자체도 미미했으니.”
 현재의 위크니스는 대상 혹은 범위 모두 가능했다.
 둘 다 5서클 마법이지만, 대상을 상대로 쓰면 마나 소모가 적으면서도 강한 약화 효과를 만들어 낸다. 단점이라면 1인 상대라는 것뿐.
 반면 범위의 위크니스를 쓰면 마나 소모가 많고 효과 자체는 약해지지만 엄청난 지역을 덮을 수 있는 장점이 있다. 전쟁에는 후자가 훨씬 효과적이었다.
 “어떻기에 미미하다는 말이오?”
 “마법은 대상 지정인 데다 효과는 우리가 넓은 범위에 약화를 쓰는 것보다 못했소.”
 “흐음, 무엇 하나 나은 게 없다는 뜻이군.”
 “검술만 시간의 흐름에 따라서 발전하는 게 아니오. 마법 역시 시간이 흐르면서 계속 발전하고 개선되고 있소. 실존된 마법이 아닌 이상 과거의 마법보다는 현재의 마법이 더 효과적이고 강하다는 게 본인의 확신이오.”
 둘이 대화를 나누는 동안 황제는 차분하게 지켜봤다. 대화가 끝날 즈음에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둘은 서로 친하게 지낼 생각은 없는 거야?”
 “예?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폐, 폐하. 그게······.”
 황제는 공작과 베일런 사이에 흐르는 어색함이 마음에 안 들었다. 그렇다고 강제로 사귀라고 할 수는 없는 노릇. 괜스레 인상만 찌푸리며 답답함을 표현했다.
 베일런과 이노에트 공작은 동년배. 하지만 둘 사이에 별다른 친분은 없었다. 워낙 서로의 관심 분야가 다르다 보니 부딪치는 일 자체가 드문 편이었다.
 “됐고. 베일런은 당장 오늘부터 바디 체인지 구현에 힘쓰도록.”
 “예, 폐하.”
 베일런이 나가자 황제의 시선은 이노에트 공작에게 향했다.
 “검술 대전 준비는 잘······ 아! 엘더는 아직 소식이 없는가?”
 “예, 폐하.”
 검술 대전은 에반스 제국과 페닌 제국을 포함한 8개국이 참가하는 검술 대회였다. 각 나라에서 4명씩 참가해서 누가 가장 강한가를 가리는데, 한동안 최강자는 페닌 제국의 국검이라 불리는 엘더였다. 5회 연속으로 우승자가 페닌 제국에서 배출된 것이다.
 하지만 4년 전 검술 대전 이후, 국검 엘더의 행적이 묘연했다. 아무런 언질도 없이 갑자기 사라진 탓에 이노에트 공작도 머릿속이 복잡했다. 다음 검술 대전까지 겨우 석 달. 그 안에 엘더를 찾거나 그에 버금가는 실력자를 내놓아야 하는 입장이었다.
 “에반스 제국 따위에 지고 싶진 않은데.”
 “우선 카루스와 아이잭에게 준비하라고 했습니다.”
 “흐음, 힘들겠군.”
 황제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 태도에 이노에트 공작의 얼굴이 급격하게 찌푸려졌다.
 카루스와 아이잭은 이노에트 공작의 아들이었다. 차기 국검이라 불리며 황궁 근위대의 부단장으로 있는 아이잭과 특별한 직책은 없지만 아이잭보다 한 수 위의 실력을 가진 카루스. 그 둘을 무시하는 황제의 태도에 기분이 좋지 않았다.
 하지만 둘의 실력이 국검 엘더보다 못한 건 사실이었다. 실제로도 6년쯤 전에 카루스와 엘더가 대련을 했는데, 카루스는 채 1분도 버티지 못하고 나가떨어졌다. 비공개 대련이라 널리 알려지지 않았지만, 직접 그 자리에 있었던 이노에트 공작은 충격을 금치 못했다.
 “그동안 열심히 수련했으니 국검의 뒤를 잇기에 부족함이 없을 겁니다.”
 “자넨 엘더를 너무 몰라.”
 “그가 얼마나 강한지는 알고 있습니다.”
 “아니, 자넨 몰라. 엘더는 말이야. 검술 대전 8강에 오른 나머지 7명을 혼자 처리할 수 있을 만큼 강해. 차기 국검이라······. 그래, 카루스나 아이잭 둘 중 1명이 차기 국검이 될 순 있겠지. 하지만 제2의 엘더가 될 순 없어. 기량의 차이가 너무 크니까.”
 4년 전 검술 대전에서 8강에 오른 인물에는 아이잭도 포함되어 있었다. 황제의 말은 엘더가 아이잭만 한 실력자 7명을 혼자서 상대할 수 있다고 말한 것이다.
 “그······ 정도입니까?”
 “이미 사라진 놈 얘기를 더 해서 뭐하겠어? 아무튼 이번 검술 대전에서도 난 우승자가 우리 제국에서 나왔으면 좋겠어. 공작이 힘을 써야 할 거야.”
 “알겠습니다, 폐하.”
 대답을 하는 이노에트 공작의 목소리가 미약하게 떨렸다.
 그는 엘더가 그 정도로 강한 줄 몰랐다. 제국 내에서 가장 강한 건 알았지만, 그 아래의 강자보다 미세하게 강할 뿐, 절대 넘을 수 없는 벽이라는 생각은 해 보지 못했다.
 한데 황제의 말을 들어 보니 애초에 넘볼 수 없는 강자였다. 그제야 황제가 유독 엘더에게만큼 저자세를 취했던 이유를 납득할 수 있었다. 황제조차 엘더를 쉽게 다룰 수 없었던 것이다.
 
 한편 황제를 알현하고 나온 발칸은 기분 나쁜 보고를 들어야 했다.
 “그러니까 파드하고 몇 놈이 연락 두절이라는 말이냐!”
 “예. 수색을 하다가 10개 조로 나눴는데 파드 조장이 이끄는 조는 집결 장소에 나오지 않았습니다.”
 “수색은?”
 “대장님 명령을 기다리느라 아직······.”
 부하의 공손한 대답에도 발칸은 인상을 팍 찌푸렸다. 매사에 명령을 기다리고 수동적인 자세를 취하는 부하들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이럴 때마다 새삼 1조, 2조와 비교되는 느낌이었다.
 상위 2개의 대는 250명이 동시에 움직이는 일이 거의 없었다. 보통은 5∼6명, 많으면 30∼40명씩 움직이면서도 어지간한 영지 하나를 통으로 갈아엎고 나온다. 단순히 강해서가 아니라 항상 능동적으로 생각하고 판단하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기사들 전부 동원해서 수색을 시작해라. 인원이 부족하면 인근 영지에 병력을 요청하고.”
 “하면 꼬마를 잡는 문제는 어떻게 할까요?”
 “꼬마를 잡는 건 취소됐다. 실종된 부하들을 찾는 데 전력을 기울이고, 흔적이 발견되는 즉시 보고하도록.”
 “예.”
 부하가 사라진 후에도 씁쓸한 여운은 여전했다. 하지만 4조를 생각하며 애써 위안을 삼았다.
 ‘그래도 골칫덩어리보다 낫지.’
 
 수색을 시작한 지 며칠 지나지 않아서 보고가 들어왔다. 다섯 모두 시체로 발견됐다는 어이없는 소식이었다.
 “사인은?”
 “모두 검에 당했습니다.”
 “흉수가 혹시 그 꼬마와 하인은 아니겠지?”
 로이드와 무딘을 찾으러 갔다가 죽었으니, 발칸의 추리는 지극히 당연했다.
 “아닌 것 같습니다.”
 “이유는?”
 “시체에 남겨진 흔적으로 보면 흉수는 최하 2명입니다.”
 꼬마가 검을 썼을 리 없다는 가정을 하다 보니 로이드와 무딘은 용의 선상에서 제외됐다. 그래도 모른다는 생각에 발칸은 슬쩍 운을 뗐다.
 “용병을 동원했을 가능성은?”
 “근처 용병 길드를 모조리 뒤져서 확인했습니다. 꼬마와 하인은 용병을 고용하지 못한 것 같습니다.”
 “그럼 근처에 지나가던 어떤 놈들에게 시비를 걸다가 오히려 당했다는 건가?”
 파드의 거만함은 황실 친위 3대 내에서도 유명했다. 어디를 가든지 적을 만드는 바람에 주의를 받은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 성정을 생각하니, 까불다 죽은 게 확실해 보였다. 그렇다고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넘어갈 수는 없는 일이다.
 “어떤 조합이면 가능하지?”
 “A급 용병 1인 이상이 포함되어 있는 파티라면 파드 일행을 처리할 수 있다고 봅니다.”
 “A급 용병이라······. 많은 수는 아니겠군. 근처의 용병 길드를 다시 뒤져라. 최근에 행적이 불분명한 놈, 특히 A급 용병 위주로 집중적으로 조사해서 반드시 흉수를 밝혀내라.”
 “예.”
 용병을 잡아들여 조사하겠다는 생각은 시작부터 어긋났다. 조사를 위해 소환장을 보낸 용병들이 기사들을 얼마나 싫어하는지 감안하지 못한 게 실수였다.
 일정 이상의 용병은 기사들의 수사 요청에 응하지 않았다. 그나마 B급은 은밀하게 기습을 하면 잡아 둘 수라도 있었지만, A급은 기습을 해도 어느샌가 모습을 감춘 후였다. 눈치가 빠른 건지 다른 정보통이 있는지는 모르지만, 기사들보다 한발 빠르게 사라지는 이들을 잡을 방도가 없었다.
 그렇다고 용의자도 아닌 정보 수집을 위해 용병들 전부를 수배자 명단에 올릴 수도 없는 일. 기사들로서도 이래저래 난감한 상황이었다.
 
 
 
 무딘과 로이드는 산 중심부에서 방향을 바꿔 남쪽으로 향했다. 제국에서 조금이라도 더 멀어지기 위함이었다. 이동 중에 몬스터의 습격을 간간이 받았지만, 대부분 고블린이나 오크 같은 하급 몬스터라 어렵지 않게 처리했다.
 무딘은 열흘을 이동한 후에 로이드를 바닥에 내려놓았다.
 “여기가 좋을 것 같습니다.”
 주변에는 커다란 잎사귀를 가진 나무가 가득했지만, 중앙은 넓은 공터가 자리 잡고 있었다. 작은 마을을 하루 전에 통과했으니, 생필품을 사기에도 나쁘지 않은 거리였다.
 “이제 뭐 하지?”
 “도련님은 여기서 책을 보십시오. 제가 집을 짓겠습니다.”
 무딘은 당연하게 말했지만 로이드는 미안했다. 집에서 도움 받을 때는 몰랐는데, 막상 나오니 혼자서 할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었다. 심지어 걷는 것조차 무딘의 도움을 받아야 되는 입장이었다.
 “무딘.”
 “예, 도련님.”
 “고마워.”
 “아닙니다.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하는 것뿐입니다.”
 무딘은 원래 고아였다. 부모가 누구인지, 심지어 어디서 태어났는지도 몰랐다.
 어린 무딘이 굶어 죽어 가던 때에 구해 준 사람이 레벤이었다. 레벤은 생판 남인 무딘을 진짜 가족처럼 대하고 아꼈다. 몸이 커지자 검술이 어울릴 것 같다며 뛰어난 용병을 초빙해 주고, 마법이 뭐냐는 질문에는 마탑에서 하급 마법사를 데려오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그렇기 때문에 무딘은 로이드를 위해서 뭐든 할 수 있었다. 심지어 목숨을 달라고 해도 기꺼이 줄 생각이었다. 어린 시절 레벤의 도움을 받지 못했다면 죽었을 목숨. 수십 년을 더 살았으니 아깝지는 않았다.
 “그래도 고마워.”
 “저, 저는 집을 짓겠습니다. 근처에 있을 테니, 몬스터가 나타나면 크게 소리를 지르십시오.”
 “응.”
 무딘은 마을을 지나치면서 사 둔 도끼와 톱을 꺼내 산으로 들어갔다. 혼자 남은 로이드는 멍하게 앉아 있다가 가방에 손을 뻗었다. 언뜻 가방 안에서 책을 본 것 같았다.
 “할아버지가 쓴 건가?”
 표지가 깨끗했고, 표지에 적힌 글씨는 익숙한 필체였다.
 쿵! 쿵!
 산 쪽에서 둔탁한 소리가 들려왔다. 무딘이 도끼질을 하는 모양이다.
 로이드는 피식 웃고는 손에 든 책의 첫 장을 열었다. 할아버지가 남긴 물건이라 생각하니, 손이 저절로 떨렸다.
 “어?”
 첫 장에 적힌 글귀를 보며 로이드는 의아했다.
 번역 일을 하시는 할아버지이니, 당연히 고리타분한 고대어 얘기가 나올 줄 알았다. 설사 고대어가 아니더라도 편지 같은 형식의 글이 나올 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로이드, 내 사랑하는 손자.
 
 첫 글귀는 마치 로이드가 읽을 줄 알았다는 듯, 대화하듯 적혀 있었다.
 로이드는 숨을 가다듬고 책을 다시 읽어 내려갔다.
 
 아마 6년 전이었을 게다. 황실에서 사람이 나왔지. 의뢰를 부탁하더구나. 네가 태어나고 한동안 일에서 손을······ 난 충격을 받고 한동안 움직일 수 없었다. 번역본이 악마 소환이라니······ 심장병을 치료할 방법이 있다는 것을 알고 흥분을 감출 수 없었단다. 나를 수십 년 동안 괴롭혀 온, 그리고 너를 괴롭히는 그 저주를 벗을 방법은······.
 
 로이드는 시작부터 끝까지 단 한 번도 쉬지 않고 읽었다.
 “할아버지.”
 저절로 눈물이 흘렀다. 하지만 이내 눈물을 닦고 이를 악물었다.
 모든 일의 원흉은 황제였다. 황제로부터 의뢰가 시작되었고, 황제에 의해 할아버지가 잡혀갔다.
 “꼭 구해 낼게요, 할아버지.”
 다짐은 했지만 이내 맥이 빠졌다. 이 몸으로, 빈약하기 짝이 없는 심장으로 무엇을 할 수 있을까를 생각하니 이 몸뚱이가 저주스럽기 짝이 없었다.
 “심장병을 고칠 방법이 있다고 했어. 그래, 고치면 돼.”
 로이드가 급히 가방을 뒤졌다. 역시나 처음 읽은 책 외에도 많은 책이 들어 있었다.
 “도련님!”
 막 다른 책을 펼치려 할 때, 무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로이드는 책을 옆구리에 끼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무딘, 왜?”
 “우선 여기서 쉬고 계십시오.”
 로이드가 책을 읽는 동안 무딘은 임시로 쉴 수 있는 공간을 만들었다. 햇빛을 막기 위해 커다란 잎사귀를 엮어서 천장을 만들었고, 앉아서 쉴 수 있게 의자도 2개를 만들었다.
 “무딘, 집은 언제쯤 완성될까?”
 “며칠 걸릴 겁니다.”
 “무리하지 마.”
 “예, 도련님.”
 천막이나 야영지를 만드는 일은 레벤과 많이 해 봤지만, 집을 만드는 일은 무딘도 처음이었다. 로이드에게는 쉽다는 듯이 말했지만,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지 막막했다.
 “아 참, 무딘.”
 “예, 도련님.”
 “내 심장병을 치료할 방법을 찾았어.”
 “정말이십니까?”
 로이드의 말에 무딘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믿을 수 없어하는 빛이 역력했다.
 레벤은 무딘에게조차 주술에 대한 얘기를 하지 않았다. 말하고 의견을 나누기에는 심적인 여유가 부족했다. 쫓기는 기분 때문에 그 누구에게도 알리지 말아야 할 것 같다는 강박관념에 쌓여 있었다.
 “응, 할아버지가 찾은 것 같아.”
 “잘됐습니다. 정말 잘됐습니다.”
 “아직 나는 방법을 모르는데 뭐.”
 “그래도 희망이 생겼지 않습니까.”
 무딘의 눈에 눈물이 글썽거렸다. 자신보다 더 격한 반응에 로이드도 괜스레 코끝이 찡했다.
 “집 짓는 데 난 도울 거 없어?”
 “예. 도련님은 치료 방법을 알아내는 일만 하십시오. 집은 제가 다 지어 놓겠습니다.”
 “응, 나 힘낼게.”
 로이드가 책을 펼치자 무딘은 즐거운 마음으로 자리를 떴다. 톱과 도끼를 잡는 손에 저절로 힘이 들어갔다.
 
 
 
 경험이 얼마나 중요한지 무딘은 집을 지으면서 절실히 깨달았다. 며칠이면 뚝딱 만들어 낼 줄 알았는데, 무려 한 달이나 걸려서야 겨우 완성할 수 있었다.
 그리고 바로 다음 날 비가 쏟아졌고, 무딘이 만든 집 지붕에서는 비가 줄줄 샜다. 힘들게 완성한 집조차 불량품이었다.
 한 달간 퍼부은 비가 그치자마자 무딘은 다시 집을 만들어야 했다.
 이번에는 제대로 짓기 위해 전보다 더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기둥을 세운 후에는 수십 번씩 발로 차 봤고, 지붕은 올리기 전에 물을 받아서 새는지 확인했다.
 무딘의 노력이 만들어 낸 결정체는 재작업을 시작한 지 석 달 만에 완성되었다.
 로이드는 새로 만든 집이 무척 마음에 들었다. 이전에 지은 집보다 작았지만, 더 아늑하고 포근했다. 또 집이 줄어든 대신 마당이 넓어져서 보기에도 좋은 집이었다.
 
 집이 완성됐으니 집에 들여놓을 것들을 장만할 차례였다. 하루 거리에 마을이 있으니, 그곳에서 필요한 것들을 사 올 생각이었다.
 “절대 집 밖으로 나오지 마십시오.”
 무딘은 집을 나서며 로이드에게 단단히 주의시켰다. 그러고도 마음이 놓이지 않아서 주변 정찰까지 꼼꼼하게 한 후에야 출발했다.
 보통은 외출을 할 때 로이드와 함께 움직였다. 몬스터의 습격을 받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은 집이라는 보금자리가 완성되었다. 집 자체도 튼튼하지만 마당을 포함한 주변 난간은 사람 키의 두 배는 될 만큼 높고 튼튼했다. 오우거가 아닌 이상은 들어오고 싶어도 들어올 수 없게 만들어졌다.
 무딘이 출발하자 로이드는 다시 책을 펼쳤다.
 지난 몇 달 동안 할아버지가 남긴 책은 모두 읽었다. 내용도 모조리 머릿속에 담아 두었다. 이제 남은 일은 수련을 시작하는 것뿐이었다.
 한데도 로이드는 책을 반복해서 읽기만 했다.
 대개의 수련은 방법이 잘못됐을 경우 몸에 문제가 생긴다. 검술의 잘못된 수련은 근육 파열을, 마법의 잘못된 수련은 마나 폭주를 불러오기 마련이다.
 주술은 그런 경향이 유독 심해서, 단 한 번의 수련 실수가 목숨을 앗아 갈 수도 있다. 수련 방법을 정확하고 완벽하게 숙지하기 전에는 차라리 시작하지 않는 게 현명한 판단이다.
 “한 번만 더 읽어 보자.”
 이미 수련 방법이 머릿속에 들어 있는데도 불안함은 여전했다. 불안함을 털어 내기 위해 다시 책에 몰두했다. 무딘이 다녀오는 데 이틀은 걸릴 테니, 그 안에 모두 숙지해 둘 생각이었다.
 
 이틀 동안 머리를 쥐어짜 내며 수련 방법을 달달 외웠다. 그 덕분인지 수련에 대한 불안감이 사라졌다. 지금부터 수련하면 실수 없이 잘할 수 있다는 자심감이 붙었다.
 “무딘이 늦네.”
 이틀이 지나고 해가 뉘엿뉘엿 지는 저녁이 되었다. 별문제가 없었다면 무딘은 이미 도착했어야 했다.
 “무슨 일이 생긴 건 아니겠지?”
 나쁜 생각을 해서인지 덜컥 겁이 났다. 무딘 없이 혼자 살아갈 생각을 하니 눈앞이 깜깜했다.
 덜컥!
 결국 참지 못한 로이드가 집을 나섰다. 집 앞이나 안이나 별 차이는 없겠지만, 조금이라도 일찍 발견해야 마음이 놓일 것 같았다.
 “책이나 가지고 나올 걸 그랬네.”
 내심은 무딘이 안 올까 봐 불안했다. 그런 불안함을 잊기 위해 애써 다른 생각을 했다.
 “안 되겠다. 책이라도 가지고 나와······.”
 쿠어엉!
 갑자기 들린 굉음에 로이드의 몸이 뻣뻣하게 굳었다. 머릿속은 온통 공포뿐이고, 바지 아래로는 소변이 줄줄 흘러내렸다. 굉음이 들리자마자 벌어진 현상이었다.
 로이드는 드래곤이나 숲의 제왕만이 쓸 수 있다는 피어에 당했다. 수련을 받은 기사들도 버티는 게 쉽지 않다는 피어를 이제 여덟 살이 된 로이드가 견딜 수 있을 리 만무했다.
 “무, 무······.”
 정말 용기를 내서 입을 열었지만 끝까지 내뱉지 못했다. 로이드 바로 앞에 나타난 거대한 동체의 오우거 때문이다.
 오우거는 뜨거운 김을 연방 토해 내며 로이드의 주변을 맴돌았다. 조력자가 있는지 미리 확인해 보는 영리한 녀석이었다.
 ‘무딘, 빨리 와 줘. 무딘.’
 머릿속으로는 수십 번씩 무딘을 부르는데, 말이 되어 나오지가 않았다.
 크헝!
 오우거가 다시 포효를 터트렸다. 그리고 어슬렁거리며 로이드를 향해 다가왔다. 조력자가 없음을 확신한 눈치였다.
 ‘무딘.’
 쿠엉!
 오우거가 다시 한 번 포효를 터트리고 로이드를 덮쳤다. 거대한 주먹이 검은 사신의 낫처럼 보였다.
 로이드는 차라리 기절하고 싶었다. 의식이 없으면 커다란 주먹에 맞지는 않을 텐데, 또 뜯어 먹히는 고통은 당하지 않을 텐데.
 ‘커억!’
 “도련님!”
 퍽!
 익숙한 소리와 둔탁한 소리가 연이어 들렸다.
 “무딘.”
 “도, 도련님. 괜찮······으십니까?”
 무딘은 인상을 잔뜩 찡그린 상태로도 억지로 미소를 지었다. 아무렇지 않다는 걸 표정으로 말하고 싶은 듯했다.
 “무딘, 괜찮아?”
 “전, 괜······찮습니다.”
 무딘의 목소리가 끊겨서 들렸다. 게다가 미소를 짓고 있는 무딘의 입가로도 피가 새어 나왔다.
 무딘은 오우거의 거대한 주먹을 대신 맞았다. 막지 못하고 막은 것이라 내장이 크게 상했다.
 “무딘.”
 로이드의 부름을 뒤로하고 무딘이 허리를 폈다. 딴에는 완전히 폈다고 폈는데도 어정쩡한 자세였다.
 스르릉!
 무딘이 검을 뽑고 오우거를 매섭게 노려봤다. 기세에 밀린 오우거가 잠깐 주춤거렸지만 이내 포효를 토했다.
 쿠어어!
 무딘의 갑작스러운 출현으로 잠시 멍하게 있었지만 인간 따위를 무서워할 오우거가 아니었다.
 “하압!”
 선공은 무딘이었다. 빠르게 좌우로 틀며 오우거의 사각을 파고들었다.
 하지만 오우거는 숲의 제왕. 싸움에는 이골이 난 그는 자신의 사각도 잘 알고 있었다.
 오우거가 왼쪽으로 틀며 거대한 주먹을 휘둘렀다. 어느새 사각은 사라지고 무딘은 오우거의 공격권에 있었다.
 휘이잉!
 바람을 가르는 소리가 천둥소리 같았다.
 “크윽!”
 오우거의 주먹이 무딘의 어깨를 스치듯 지나갔다. 무딘은 빠르게 허리를 숙였지만, 앞서 당한 부상 때문에 몸이 둔했다. 미처 다 피하지 못하고 맞은 어깨의 감각이 조금씩 사라졌다.
 “도련님, 어서 안으로.”
 “무, 무딘.”
 “도련님, 어서요.”
 “발이 안······ 떨어져.”
 발뿐 아니라 말을 내뱉는 것도 힘들었다. 아직도 피어에 당한 여운이 그대로 남아 있었다.
 “이런.”
 오우거가 망치로 내려찍듯 무딘의 어깨를 내려쳐 왔다. 무딘은 몸을 굴리며 검을 가로로 휘둘렀다.
 스컥!
 무딘의 검이 오우거의 다리를 스쳤다. 싸움이 시작된 후 첫 타격이었다.
 하지만 너무 얕았다. 아니, 오우거의 가죽이 너무 두꺼웠다. 체중이 실리지 않은 검으로는 오우거에게 치명상을 줄 수 없었다.
 쿠오!
 생채기도 기분이 나빴던지 오우거가 다시 포효를 터트렸다. 이 때문에 막 발을 움직이려던 로이드의 몸이 다시 굳었다.
 하지만 무딘은 피어에 영향을 받지 않았다. 정신력은 이미 오우거를 압도했다는 증거였다.
 ‘이러다가 당하겠어.’
 처음 로이드를 대신해서 맞은 타격이 너무 컸다. 그 때문에 의식이 가물가물했다. 이대로 오래 버티기 힘들다는 걸 직감적으로 느꼈다.
 파파팟!
 고심 끝에 무딘은 땅을 긁어 퍼 올렸다. 뿌옇게 흩어지는 먼지가 잠시나마 오우거의 시선을 붙잡았다.
 턱! 서걱!
 몸을 굴린 무딘이 다시 검을 휘둘렀다. 이번에는 체중을 제대로 실어서 오우거의 왼쪽 무릎을 강하게 그었다.
 크컥!
 오우거가 묘한 신음을 터트리며 다리를 부여잡았다. 싸우면서 절대 하지 말아야 할 금기였다.
 기회를 잡은 무딘이 이번엔 뛰어올라 오우거의 목을 그었다. 무릎을 잡느라 상체가 내려와 있던 오우거의 목이 반쯤 잘린 채 덜렁거렸다. 그런 상태로도 오우거는 양팔을 마구 휘두르며 마지막 발악을 했다.
 퍽!
 “컥!”
 무딘이 급히 몸을 젖혔지만 미처 다 피하지 못하고 오우거의 주먹에 맞았다. 이번에 맞은 부위는 머리라 치명적이었다.
 “아, 안 돼.”
 무딘은 급히 머리를 휘저으며 오우거를 노려봤다. 마구 발악하는 오우거가 하필이면 굳어 있는 로이드를 향하고 있었다.
 “큭!”
 급히 움직이려 했지만 무딘도 다리를 옮기기 힘들었다. 머리를 맞은 탓인지 중심을 잡기 힘들었다. 거기다 이마에서 흐르는 피 때문에 현기증이 점점 심해졌다.
 ‘제발.’
 오우거는 이미 죽어 가고 있다. 문제는 시간이다. 오우거의 생명력을 생각하면 족히 수십 분은 살아 있을 텐데, 그 전에 로이드가 죽을 것 같았다.

댓글(2)

어리버리럽    
이소설끝이거지같아요 싸다만것같은기분입니다 아진짜재밌게봤는데끝이뭐이딴식인지...제가작가님들글에악평써보긴이글이처음인데 이거완결까지보면서한2만원은더썼을건데재밌게보다가날벼락같은결말어완전열폭했어요 이글외전있다는소리도못들었고 ㅠㅠ 진짜저처럼미치게짜증날독자분들위해서댓글남깁니다 다시한번써요 끝이거지같아요
2016.06.22 02:16
펭군    
동감입니다 보지마세요 여러분 ㅠㅠ 결말도 아니고 오픈도아니고 용두사미 그 자체 씨브닭 ㅠ
2016.06.22 21:49
0 / 3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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