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물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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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명 1권 (1)

2016.05.09 조회 936 추천 10


 * 2400년
 
 
 
 2100년, LA.
 재미 교포로서 세계적인 부호 중 하나인 김유혁.
 ‘스물다섯 살이 되던 2015년에 대한민국을 떠나 미국으로 이민 온 지 85년째. 내 나이가 벌써 백열 살이라니, 죽을 때가 가깝구나.’
 큰돈도 벌고 미국에서 하고 싶은 것 다 하면서 살았지만 가장 안타깝게 여기는 것은 한민족이 나라 잃은 백성이 되었다는 것이다.
 북한은 2020년에 중국에 흡수되어 이미 사라졌고, 한국도 2040년에 일본에 흡수되어 더는 나라 이름을 쓰지 못했다.
 뚝뚝, 뚝뚝.
 바닥으로 떨어져 내리는 눈물.
 ‘미안하다, 미안해. 한민족은 중국 놈들과 일본 놈들에게 얼마나 수탈을 당하며 노예의 삶을 살았을까. 혼자만 배불리 먹으며 살았으니 내가 죽일 놈이지······.’
 그동안 조국에 무슨 일이 벌어지든 철저히 무관심하게 살았다. 그런데 이제는 죽을 때가 가까워서인지 한반도가 있는 서쪽만 바라보아도 저절로 눈물이 흘러내렸다.
 ‘휴우, 기구한 내 인생. 아내는 벌써 30년 전에 죽었고, 자식이라고 아들 하나였는데 그 아들도 20년 전에 죽었다.’
 아들은 독신주의로 혼자 살아 자녀가 없었다.
 ‘내게는 재산을 남길 상속인도 없다. 그동안 번 돈은······. 내가 다 써 버린다!’
 죽을 때가 가까웠는데 어떻게 가진 재산을 다 쓴다는 말인가?
 물론 유혁의 마음이야 가진 재산으로 한민족을 구할 수만 있다면 아낌없이 내놓을 것이다. 하지만 어림도 없는 소리!
 설사 한민족 한 명 한 명에게 나눠 준다 하더라도 지배 계층인 중국 놈들과 일본 놈들이 다시 뺏을 게 뻔했다.
 이런 연유로 유혁의 머릿속에 있는 계획은 바로 가진 재산을 다 투자하여 ‘New Earth’ 프로젝트의 일원이 되는 것이다.
 2070년부터 시작된 번영의 시대.
 넘치는 부를 이용해 인류는 태양계를 벗어나 우주에서 새로운 지구를 찾겠다는 ‘New Earth’ 프로젝트를 진행한다.
 이후 2100년까지 무려 30년 동안, 전 세계가 참여하여 우주를 항해할 거대한 우주 전함 제네시스가 건조된다.
 전함의 크기는 무려 100만 톤!
 대서양에 가라앉은 타이타닉이 46,328톤이니 그것의 약 21.5배의 규모라고 할 수 있다.
 너무나 커서 지상에서는 제네시스 전함을 우주로 쏘아 올릴 추진력을 낼 수 없기에 우주왕복선들이 수도 없이 많이 재료를 날라서 무중력 궤도에 있는 열 개의 우주정거장을 이용해 건조되었다.
 완성된 후 약 천여 명의 인원이 탑승했는데, 이들은 전함을 움직이는 데 필요한 운항 요원들, 각 분야의 과학자들, 군인들, 의료진, 기술자들, 요리사들 등이었다.
 이외에 백인, 흑인, 황인 중에서 나이는 열여섯 살에서 열여덟 살 사이이면서 IQ 지수, EQ 지수가 높고 운동 능력도 뛰어난 젊은 남녀 서른 명 그리고 유혁처럼 거액을 기부한 자들 백 명이 냉동 수면 상태로 탑승했다.
 이들 젊은 남녀 서른 명은 새로운 지구를 찾았을 때, 그곳에서 짝을 지어 인류를 퍼트릴 재원들이었다.
 전함에 탄 천여 명의 남녀로부터 태어날 아이들이 있을 텐데도 굳이 서른 명을 따로 뽑은 이유가 있었다.
 수십 년이 될지 수백 년이 될지 모르는 우주여행 속에서 발생할 수 있는 반란이나 폭동, 우주에서의 장기간 여행으로 인한 DNA 변형, 예측하지 못하는 질병의 발생 등의 문제가 있을 수 있기에 순수한 지구인의 혈통을 유지시키고자 함이었다.
 제네시스의 건조가 끝나고 전함이 머나먼 우주를 향해 출발하던 날, 지구의 모든 사람들이 이를 지켜보며 감격스러워했다.
 
 
 
 A.D. 2400년.
 장장 300년에 걸쳐서 우주를 떠돌고 있는 전함 제네시스.
 선장 케일록은 비장한 얼굴을 하고서 조종실에 모인 이백여 명의 탑승자들을 향해서 질문을 던졌다.
 “여러분들 중 하울스 박사의 워프 장치를 이용해 지구로 워프하는 데 찬성하는 분은 손을 드십시오.”
 스윽, 스윽, 스윽······.
 계속 올라가는 손.
 잠시 후, 이백여 명 중 손을 올리지 않은 이가 없었다.
 “전원 찬성이군요. 저도 찬성입니다.”
 ‘New Earth’ 프로젝트는 실패했다.
 태양계를 벗어나 300년이나 돌아다니며 우주를 뒤질 만큼 뒤지고 다녔지만 두 번째 지구는 발견하지 못했다.
 ‘이만큼 찾아다녔으면 이젠 돌아갈 때도 됐다.’
 300년 동안 별별 일들이 다 있었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열두 번의 폭동과 다섯 번의 반란 시도. 이때마다 수많은 인명이 죽거나 다쳤지만, 다행인지 폭동과 반란은 모두 진압되었다.
 그런데 일주일 전에 일어난 반란과 진압 과정에서 대부분의 탑승자들이 죽고, 이백여 명만 겨우 살아남았다.
 제네시스가 가장 행복한 때를 보낸 것은 최초 항해로부터 약 100여 년간.
 이때는 새로운 지구를 찾겠다는 열망과 책임감이 강했기에 자잘한 사건 사고 외에 큰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인구도 크게 늘어나 3천 명이 넘을 정도였다. 하지만 이후로 폭동과 반란이 반복적으로 일어나면서 열망과 책임감은 다 사라졌다.
 최근 100년 동안은 두 번째 지구를 찾는 게 목적이 아니라 지구로 되돌아가는 게 목적인 항해였다.
 왔던 길을 되돌아가기만 하면 되는 게 아니냐고 하는 이들이 있을지도 모르지만, 돌아갈 길이 너무나도 멀었다.
 이 상황에서 희망의 빛이 나타났다.
 하울스 박사를 중심으로 한 과학자들이 먼 거리를 단숨에 뛰어넘을 수 있는 워프 장치를 발명한 것이다.
 그러나 지구로 돌아갈 길이 열렸으니 크게 기뻐하며 축제를 벌여도 모자랄 판에 뜻하지 않은 반란이 일어났다.
 반란을 일으킨 자들의 목적은 워프 장치를 독식하려는 것!
 큰 전투를 치른 끝에 제압하긴 했지만, 무수한 이들이 목숨을 잃은 데다 반란을 일으킨 자들이 폭발물을 터트리는 과정에서 냉동 수면 장치를 건드려 수면 중인 자들이 뇌사 상태에 빠졌다.
 이 중 단 한 명만이 살아남았는데 그자가 바로 유혁.
 천운으로 그의 냉동 수면 장치만 고장 나지 않았던 것이다.
 그런데 유혁은 전함에 탈 때 엄청난 거액을 투자했기에 전함의 탑승뿐만이 아니라 아래와 같은 여러 가지 옵션을 걸어 두었다.
 
 -운항 중에 만일 뇌사하는 20대 이하의 젊은이가 있다면 유혁의 뇌를 뇌사한 젊은이의 육체에 넣어 준다.
 -운항 도중에 발명되는 육체에 관한 과학기술은 최우선적으로 혜택을 받는다.
 -유혁의 안전과 생명 보호를 탑승자 그 누구보다 우선시하여 다루어야 한다.
 
 첫 번째 것은 쉽게 말해서 늙은 유혁의 육체에서 뇌만 빼내서 젊은이의 뇌와 바꿔치기하는 것이다.
 두 번째 것은 탑승자들 중에는 과학자들이 있고, 이들에 의해 불치병을 치료하거나 노화를 방지하거나 신체를 강화하거나 하는 등의 육체에 관련된 과학기술이 발명된다면 이를 최우선적으로 유혁에게 적용시킨다는 것이다.
 세 가지 옵션에 대해서 수십 개 보험사를 통해 천문학적인 액수의 보험을 걸어 놨는데, 제네시스가 지구로 귀환하였을 때 옵션이 제대로 적용되지 못했을 때는 탑승한 인원들이 책임을 지도록 했다.
 지구로 가지 않는다면 이 옵션들이 아무 의미도 없지만 제네시스는 워프 장치를 이용해 돌아갈 예정이었다.
 300년이나 지났기에 수십 개 보험사 중에 살아남은 게 있기나 할지 의심스러웠지만 그래도 혹시나 하는 심정에 케일록은 유혁이 건 옵션으로 인해 자신을 포함해 살아남은 탑승자들이 지구로 가서 불이익을 받지 않기 위해 바로 조치를 취했다.
 우선 냉동 수면 장치 속에서 죽은 젊은이들 중에서 열여섯 살의 동양인인 백희운을 골라 그의 육체에서 뇌를 제거하고, 그 자리에 유혁의 뇌를 집어넣었다.
 뇌사한 다른 젊은이들이 있는데도 굳이 백희운을 선택한 이유는 그가 유혁과 같은 동양인이며 한민족의 핏줄이기에 뇌를 이식했을 때 부작용이 가장 덜할 것으로 여겼기 때문이다.
 이 과정이 끝난 후, 케일록의 지시하에 유혁의 의식이 돌아오게 했다.
 “으으으.”
 “정신이 드십니까? 저는 제네시스 전함의 선장 케일록입니다.”
 낯선 이름에 유혁은 이마를 찌푸렸다.
 “케, 케일록? 선장이 바뀌었나요?”
 “그렇습니다. 지금은 2400년입니다. 전함이 우주 항해를 한 지 300년이며, 냉동 수면에 들어가신 지도 300년이 지났습니다.”
 “허! 그래요? 우리는 새로운 지구를 찾았습니까?”
 자신이 깨어났다는 것은 새로운 지구를 찾았다는 것으로 이해했기에 바로 이 질문이 가장 먼저였다.
 “실패했습니다.”
 “그, 그래요? 그런데 왜 나를······ 허억!”
 누워서 대화하다가 뒤늦게 바뀌어 버린 육체를 알아채고 화들짝 놀라며 상체를 급히 일으키는 유혁.
 케일록은 그를 부축하며 말했다.
 “많이 놀라셨죠?”
 “내, 내 몸이 왜 이렇죠?”
 “육체를 바꿨습니다. 하지만 뇌는 본인의 것입니다.”
 “아! 옵션.”
 뒤늦게 전함을 타기 전에 자신이 내걸었던 옵션이 떠올라 탄성을 지르며 놀란 가슴을 가라앉혔다.
 “기억하시는군요.”
 “이 육체의 주인인 젊은이에겐 미안하군요. 그런데 새로운 육체는 피부색을 보니까 동양인이군요.”
 “선생님과 같은 한민족입니다. 최근에 큰 사고가 있었고 많은 이가 죽었는데, 이 육체가 가장 적당하다 여겨 골랐습니다. 나이는 열여섯 살이었습니다.”
 너무 놀라 절로 반문하고 말았다.
 “오우, 열여섯 살요?”
 “그렇습니다.”
 “저에겐 너무나 과분할 정도네요. 그런데 같은 한민족의 젊은이였다니 안타깝군요. 그 젊은이는 이 몸을 가지고 백 살도 넘게 살 수 있었을 텐데. 그런데 기억하기로 다른 옵션도 있었던 것으로 아는데요?”
 “맞습니다. 바로 그것을 위해 깨웠습니다.”
 이때 유혁은 자신의 발음이 이상함을 여기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잠깐만, 내가 지금 한국말을 하는데 잘 알아들으시네요.”
 태어나서 스물다섯 살까지만 한국에서 살았고, 이후로는 미국으로 이민 가서 영어를 배워 냉동 수면에 들어가기 전인 백열 살까지 영어만 썼는데도 낯선 상황에다 놀라기까지 하니 튀어나오는 것은 한국말이었다.
 이래서 태생은 속이지 못하는구나 하고 생각하고 있는데 앞에 있는 케일록이 피식 웃으며 자신의 귀를 가리켰다.
 “여길 보세요.”
 “거기에······.”
 선장의 귀에는 작은 물체가 귀걸이처럼 걸려 있었다.
 “귀에 걸고 있는 게 통역기입니다. 선생님 귀에도 걸어 놨습니다. 그래서 제가 영어로 말하고 있어도 다 알아들으시는 겁니다.”
 손을 들어 귀를 만져 보니 잡히는 게 있었다.
 “오호, 그렇군요.”
 “냉동 수면 중이신 선생님을 깨운 이유부터 말씀드리죠. 선생님께서 전함에 타시면서 요구하신 옵션에는 운항 중에 발명하는 의료 기술은 최우선적으로 혜택을 받는다는 것이 있습니다.”
 “맞아요. 내가 요구한 옵션입니다.”
 “지난 300년간 전함에 있는 과학자들이 새로운 발전을 이루었습니다. 그중에 몇 가지를 해 드리려 합니다.”
 “어떤 것이죠?”
 케일록은 두꺼운 비닐처럼 생긴 네모난 것을 유혁의 앞에 내밀었다.
 “직접 보시면서 설명을 들으시죠.”
 파아앗!
 비닐에서 총천연색 화면이 나타났다.
 2100년에도 이런 것은 있었기에 유혁은 놀라지 않았다.
 “저희 과학자들이 이룬 것 중에 메모리얼 액터라고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인지 설명을 드리자면······.”
 메모리얼 액터는 전함 제네시스에 탑승한 과학자들이 만든 25세기형 액체형 컴퓨터로, 인공지능을 가진 뇌 주입형 모델이다.
 액체형 컴퓨터란 하나하나가 극소형으로 만들어진 작은 부품들이 특수하게 만들어진 젤과 같은 형태의 고체 속에 들어가 있는 것이다.
 극소형의 작은 부품 속에는 CPU(중앙 정보처리 장치)는 물론이고 제8세대형 플래시메모리와 그래픽 장치, 사운드 장치들을 비롯해 무선 네트워크 장치까지 있어서 이것을 가지고 외부와 통신은 물론 데이터 송수신이 가능하다.
 이 액체형 컴퓨터는 한 덩어리를 이루는 젤 형태의 고체로서 특수하게 제작된 주사기에 의해 머리에 삽입되는데, 이때 구불구불한 뇌의 빈틈으로 스며들어 인체에 흐르는 극소량의 전기를 이용해 작동한다.
 메모리얼 액터에 내리는 명령은 특별한 명령어나 입력 도구 없이 그저 생각만으로 할 수 있다. 인간이 어떤 생각을 하는가에 따라 달라지는 뇌파의 파동을 연구·분석하여 어떤 명령을 내리는지 구분하는 것이다.
 또 메모리얼 액터의 대답은 청각 신경을 자극하여 머릿속으로 바로 들려온다.
 메모리얼 액터의 인공지능은 명령 수행이나 정보 전달만 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판단할 수도 있다. 이는 쉽게 설명하면 메모리얼 액터가 주입된 사람에게는 자신 속에 또 하나의 자아가 있는 것과 같다.
 예를 들어 아름다운 여인이 맞은편에서 걸어온다고 하자.
 ‘저 여자의 키랑 몸무게는 얼마나 될까?’
 이렇게 머릿속으로 생각하면 메모리얼 액터가 작동하여 머릿속으로 답을 준다.
 -170센티에 49킬로그램입니다. 저 여성의 눈빛과 표정은 당신을 비웃고 있습니다. 접근을 시도하시면 여성은 당신에게 혐오감을 느낄 것입니다.
 또는 생각을 하지 않아도 미녀를 보고 신체가 반응한다면 메모리얼 액터의 인공지능이 알아서 충고할 수도 있다. 생각을 할 때마다 메모리얼 액터가 작동하는 게 싫다면 인공지능이 스스로를 필터링하여 중요한 순간에만 말하도록 할 수도 있다.
 또한 메모리얼 액터는 상대방이 어떤 행동을 취하려고 하는 찰나에 상대방의 시선이나 몸동작, 상대에게서 흘러나오는 뇌파의 흐름, 몸의 열기 등의 정보를 종합하여 상대방의 다음 행동을 미리 예측해 그 정보를 제공하며, 머릿속에 들려주는 음성만이 아니라 직접 뇌 신경을 자극해 머릿속으로 영상을 전달할 수 있다.
 메모리얼 액터는 젤 속에서 물방울 같은 작은 부품을 꺼내 이것을 시신경에 주입하여 인간이 볼 수 없는 자외선과 적외선까지 볼 수 있게 해 준다.
 또 귀에도 같은 방법으로 작은 부품을 주입해서 인간이 들을 수 없는 주파수의 소리까지도 들을 수 있으며, 후각, 미각, 촉각의 경우는 뇌를 자극해 코, 혀, 피부가 감지할 수 있는 최고 수준까지 감각을 끌어 올릴 수 있다.
 메모리얼 액터에 대한 장황한 케일록의 설명이 끝나자, 궁금함을 참고 있던 유혁이 질문을 던졌다.
 “그러니까 그 메모리얼 액터를 내 머릿속에 넣겠다?”
 “맞습니다. 그리고 특수한 약물을 신체 곳곳의 근육에 주사하여 영구적으로 동체 시력, 근육의 힘 그리고 순발력을 두 배까지 늘려 줍니다.”
 “오호, 두 배요? 운동을 안 해도 세지네요?”
 “그렇습니다. 하지만 운동하시면 그 효과가 더 커집니다. 그리고 위급한 순간이 닥쳤다고 느껴졌을 때는 동체 시력, 근육의 힘, 순발력이 다섯 배까지 늘어납니다.”
 “와아, 갑자기 그렇게 확 뛸 수가 있어요?”
 “우리 몸은 위급하다 여겨지면 뇌에서는 순간적으로 강한 힘을 발휘하는 호르몬을 만들도록 신체에 명령합니다. 주입된 약물은 위급 상황에서 신체가 강한 힘을 발휘하는 호르몬을 아주 많이 발생되도록 합니다.”
 무슨 말인지 유혁은 분명하게 이해했다. 이것에 관련된 기억도 있었기 때문이다.
 “아하, 그렇군요. 예전에 차에 깔린 자식을 구하기 위해 어머니가 초인적인 힘을 발휘해 차를 들어 올렸다는 기사를 본 적이 있습니다.”
 “잘 이해하셨네요. 그런데 다섯 배나 늘려 주는 것은 하루에 최대 두 번이며, 한 번 효과가 발휘되면 지속 시간은 한 시간가량입니다.”
 “한 시간이라······ 생각보다 길군요. 한 시간이면 순간적으로 초인적인 힘을 발휘하는 것 이상이잖습니까?”
 “그렇습니다.”
 “한 시간 이상으로 힘을 유지하는 것은 아직 개발되지 않았구요?”
 “아직입니다. 그리고 메모리얼 액터를 뇌에 넣지 않는다면 하루에 한 번밖에 효과를 발휘하지 못합니다. 메모리얼 액터는 뇌와 신체를 모두 조종해 호르몬 발생을 극대화시키기에 하루에 두 번까지 효과를 발휘할 수 있게 해 줍니다.”
 젊은 육체를 얻은 데다가 힘까지 세진다니 미래는 정말 좋구나라고 느끼던 유혁은 문득 의아한 생각이 들었다.
 “육체만 강화되나요? 뇌도 좋게 하는 건 없습니까?”
 “있습니다. 뇌에도 특수 약물을 주입해 사용량을 15%까지 올릴 수 있습니다.”
 “사용량이 15%면 대단한 거죠?”
 “과거에 아인슈타인이란 과학자가 뇌를 15% 사용했다고 하더군요.”
 케일록은 아인슈타인을 아주 먼 옛날의 과학자처럼 말했는데 그의 입장에서는 수백 년 전 사람이니 그럴 만했다.
 “맞아요. 들어 본 것 같습니다.”
 “요즘은 약물로 15%까지 뇌 사용량을 올리는 게 일반적입니다. 덕분에 과학기술도 더욱 빠른 속도로 올라갔죠.”
 “오오, 그렇군요.”
 “마지막으로 선생님의 육체는 열여섯 살이라 아직 성장판이 닫히지 않았을 테니 키도 키울 수 있고, 약간의 자연 성형도 가능합니다.”
 “자연 성형요?”
 새로운 용어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성형을 자연스럽게 한다는 말인가?’
 유혁의 추측은 어느 정도 맞았지만 사실은 그 이상이었다.
 “과거에는 직접 뼈를 깎는 방법으로 성형했지만 이제는 뼈를 물렁하게 한 후에 원하는 모양으로 변형시켜 굳힐 수 있습니다. 이런 식의 성형을 자연 성형이라고 말합니다.”
 갑자기 머리에 떠오르는 유명한 미남 배우들.
 ‘흐흐, 그렇단 말이지? 좋아, 평생 미남 소리 들어 보지 못하고 살았는데 아주 확 고쳐야겠다, 얼굴만으로도 여자들이 픽픽 쓰러질 정도로.’
 “메모리얼 액터를 머리에 넣는 거랑 육체 강화, 뇌 강화, 마지막으로 자연 성형까지 모두 꼭! 하고 싶습니다.”
 ‘꼭’이라는 말을 강조하자, 케일록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험험, 알겠습니다. 원하시는 대로 진행하도록 하겠습니다.”
 “잠시만요. 옛날에 영화를 보면 무술 같은 것도 머릿속에 업로드해서 바로 쓸 수 있게 해 주던데 그런 것도 가능합니까?”
 “메모리얼 액터를 통해 무술에 대한 정보를 알려 드릴 수는 있습니다. 예를 들어 무술을 쓰는 영상과 같은 것이지요. 머리에 업로드해서 바로 쓰는 것은 저희가 개발한 과학으로 불가능합니다.”
 “그래요? 아쉽네요.”
 유혁이 실망한 표정을 짓자, 케일록은 새로운 얘기를 꺼냈다.
 “실제로 무술을 연마하시려면 메모리얼 액터의 꿈을 통한 사용자 학습 프로그램을 이용하시면 됩니다.”
 “그건 또 뭔지······.”
 “쉽게 말씀드려서 꿈속에서 새로운 것을 익힐 수 있게 해 주는 것이지요.”
 “좀 더 쉽게 설명해 주세요.”
 “메모리얼 액터를 주입한 사용자는 잠이 들면 메모리얼 액터가 만든 가상현실 세계로 이동합니다. 이 가상현실을 사용자는 현실로 인식하게 되지요.”
 “아하, 그거 괜찮은 방법이네요.”
 “그리고 가상현실 속에서 메모리얼 액터는 가상의 인물을 만들어 사용자에게 직접 새로운 것을 가르쳐 줍니다. 무술을 예로 든다면 메모리얼 액터가 만든 무술 고수가 꿈속에서 사용자를 직접 지도하며 가르쳐 주게 됩니다.”
 “오호, 그러면 꿈속에서 익힌 것을 깨고 나서 바로 쓸 수 있나요?”
 케일록은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렇습니다.”
 “와아, 좋네요. 그럼 사용자 학습 프로그램을 하겠습니다.”
 “원하는 무술을 선택하실 수 있도록 화면에 띄우겠습니다.”
 유혁이 가진 화면 위에 수많은 아이콘들이 나타났다.
 하나하나가 바로 무술이었다.
 ‘으음, 뭘 고를까? 한국 사람이니까 태권도는 배워 두고, 배달민족이니 국궁이랑 양궁도 배우자. 택견도 배울까? 까짓거 선택만 하면 되는데 배우지 않을 이유가 없지. 다음은 이야호 하는······.’
 잠깐 기억이 나지 않았지만 바로 떠올랐다.
 ‘그, 그래! 홍콩 배우가 만든 절권도. 그리고 이스라엘에서 만든 크리브마가가 무술 중 최고라고 했던가? 무에타이도 실전에서는 최고잖아. 으음, 유도도 선택하고, 검도도 해 보자. 다음은······.’
 이십여 개나 되는 무술을 선택한 뒤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휴우, 다 끝냈네요.”
 “네, 이제 제 부하를 따라가시면 됩니다.”
 케일록은 빙그레 미소를 지은 뒤, 뒤에 있는 부하를 불러서 유혁을 의료 시설이 있는 제5구역으로 데리고 가도록 지시했다.
 유혁은 케일록 뒤편에 있던 남자의 인도에 따라 큰 방으로 갔는데 그곳에는 덮개가 열린 커다란 캡슐이 두 개 놓여 있었다.
 방에 있던 의사 복장을 한 여자가 방긋 웃으며 유혁을 맞이했다.
 “안녕하세요, 의사 줄리아예요.”
 “반갑습니다.”
 “원하시는 게 꽤 되네요? 메모리얼 액터에다 육체와 뇌 기능을 올려 주는 약물 주입, 자연 성형. 이렇게 네 가지를 진행하겠습니다.”
 “자연 성형으로 되고 싶은 얼굴이 있습니다.”
 “캡슐에 누우신 후에 원하는 얼굴을 떠올리시면 화면에 나옵니다.”
 “생각만 해도요?”
 “뇌파를 스캔하여 이미지화할 수 있습니다. 이쪽으로 누우시죠.”
 유혁은 의사의 지시에 따라 두 개의 캡슐 중 하나에 들어가 반듯하게 누웠다.
 지이이이잉, 지이이이잉.
 빨간 선이 머리부터 발끝까지 두어 번 왔다 갔다 하면서 유혁의 신체를 스캔했다.
 파아앗!
 허공에 나타나는 남자 얼굴.
 유혁의 얼굴이 아니라 유혁이 머릿속에 떠올리는 남자 얼굴이었다.
 줄리아는 감탄하며 한마디 했다.
 “오, 꽤 매력적인데요?”
 “그렇죠? 지구에 있을 때 유명했던 배우입니다.”
 “동양인이군요.”
 “저도 동양인이라서요.”
 “최대한 이 얼굴대로 자연 성형을 하겠습니다. 약간 다른 부분도 있을 수 있지만, 그건 어쩔 수가 없네요.”
 “그 정도로 차이가 나지 않는다면 더할 나위 없이 만족합니다.”
 “그럼 진행하겠습니다. 시간은 한 시간쯤 걸리구요, 전신마취를 하겠습니다. 그리고 수면 가스로 잠이 드시게 할 겁니다.”
 줄리아는 캡슐의 덮개를 닫았다.
 곧바로 어디선가 여러 개의 주사기들이 나와 몸 여기저기를 찔렀다.
 따끔따끔, 따끔따끔!
 ‘살짝 아픈 정도네?’
 의학 발달이 참 좋구나 여기는데 머리 부분에서 하얀 연기가 뿜어져 나왔다.
 치이이이익.
 “으으으.”
 유혁은 얕은 신음 소리와 함께 잠이 들었다.
 
 
 
 한 시간 후.
 “으으으.”
 “정신이 드세요?”
 목소리의 주인공은 줄리아.
 “네, 드네요. 끝났습니까?”
 “끝났습니다. 얼굴부터 확인하시겠어요?”
 파아앗!
 눈앞에 거울이 나타났다.
 “오호호, 이게 내 얼굴이 맞나요?”
 탄성을 지르며 기뻐하는 유혁.
 원하던 바로 그 남자 배우의 얼굴이었다.
 “맞습니다.”
 이때 어디선가 목소리가 들려왔다.
 -메모리얼 액터를 활성화합니다.
 “헛, 머릿속에서 소리가 들립니다.”
 줄리아는 빙그레 웃었다.
 “그게 바로 메모리얼 액터입니다. 메모리얼 액터는 뇌파에 자극을 주어 머릿속으로 말을 전달합니다. 메모리얼 액터가 언어를 사용하지만 정확히는 언어를 사용하는 게 아니라 뇌파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뇌파로 언어를요?”
 “그렇습니다. 누군가 ‘안녕하세요’라고 인사해 왔을 때 어떤 언어를 사용하든 인사를 한다는 것은 동일하기에 인사를 듣고 뇌가 반응하는 뇌파는 동일합니다. 듣는 것이 아니라 말하는 경우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죠.”
 “아하, 무슨 말인지 알겠어요.”
 “이 점에 착안하여 15만 개 단어에 대한 뇌파를 정리했고, 메모리얼 액터는 바로 이 뇌파를 이용해 주입된 신체의 주인과 대화를 나눕니다.”
 -사용 등록을 위해 이름을 말씀해 주십시오.
 유혁은 주저 없이 대답했다.
 “김유혁.”
 -김유혁 님, 반갑습니다. 신체 정보를 얻기 위해 스캔을 시작하겠습니다.
 지이이잉, 지이이이잉.
 머릿속으로 이상한 소리가 울려 퍼졌다.
 묘한 기분이 들었다. 마치 정체를 알 수 없는 수십 명의 눈이 온몸을 뚫어져라 관찰하는 것만 같았다.
 -스캔이 완료되었습니다.
 “스캔이 끝났다고 하네요.”
 “육체와 뇌 기능을 올려 주는 약물의 효과는 시간이 지나면서 서서히 나타나니 바로 확인하실 수 없습니다. 이제 회복 과정을 진행하겠습니다. 일어나셔서 이쪽에 있는 캡슐에 누우세요.”
 유혁은 줄리아의 부축을 받으며 일어나 다른 캡슐로 가서 누웠다.
 줄리아는 다시 말을 이었다.
 “여기서는 수면 가스를 마시고 여섯 시간 동안 잠을 주무시게 됩니다.”
 “다른 건 없고, 잠만 잡니까?”
 “그렇습니다. 잠을 주무시고 나면 몸이 개운해지시고 약물의 효과도 보실 수 있습니다. 여섯 시간 후에 다시 뵙죠.”
 줄리아는 미소를 지으며 덮개를 닫았고, 유혁은 수면 가스에 의해 잠이 들었다.
 
 
 
 * 지구로 워프!
 
 
 
 유혁이 잠이 들고 몇 시간이 흘렀을 때였다.
 에에에에에에엥.
 길게 울리는 비상벨 소리.
 -전함 제네시스에 있는 모든 사람들은 지금 즉시 제10구역에 있는 대피소로 모두 이동하시기 바랍니다. 지구로 워프하기 한 시간 전입니다.
 드디어 제네시스가 지구로 워프를 하려는 것이다.
 “어머, 빨리 가야겠네.”
 줄리아는 유혁이 자고 있는 것을 잊어버린 채 혼자서만 급히 밖으로 나갔다.
 한 시간 후, 지휘실에 있는 케일록은 목표 지점이 지구의 인공위성 궤도에 맞춰진 워프 장치의 버튼을 누르며 외쳤다.
 “워프 위치는 지구다!”
 우우우우우우웅~ 우우웅~ 덜덜덜, 덜덜덜.
 파아앗!
 엄청난 진동 음과 함께 제네시스가 크게 떨리더니 일순간 큰 빛과 함께 우주 공간에서 사라졌다.
 
 
 
 지구로 단번에 이동하기 위한 워프는 성공했다.
 하지만 아주 머나먼 우주에서의 이동이라 아주 미세한 차이의 좌표 오차가 발생하여 제네시스는 지구의 인공위성 궤도에 모습을 드러낸 게 아니라 한반도 태백산맥의 설악산 속으로 처박히고 말았다.
 쿠우우웅~ 우직끈.
 빠아아악~ 쾅쾅, 콰콰쾅!
 사방에서 터져 나오는 파괴 음들과 폭발음.
 요란스러운 소리에 유혁은 화들짝 놀라며 정신을 차렸다.
 -비상! 비상! 제5구역, 제7구역, 제13구역, 제14구역, 제15구역을 제외한 제1구역부터 제12구역까지 속히 폐쇄한다! 폐쇄 전에 이동이 가능한 것들은 제5구역, 제7구역으로 즉시 옮기도록 한다!
 -비상! 비상! 제7구역의 비상 발전기 가동!
 -비상! 비상! 제1구역 생존자 없음. 제1구역 폐쇄!
 -비상! 비상! 제10구역 생존자 없음. 제10구역 폐쇄!
 -비상! 비상! 제4구역에 있는 정찰 로봇들을 제5구역으로 이동 한다. 완전 폐쇄까지 앞으로 45초 남음.
 -비상! 비상!
 요란한 기내 방송이 계속해서 이어졌다.
 전함 제네시스는 총 열다섯 개의 구역으로 나뉜다.
 제1구역은 전함을 조종하는 조종실이 있는 부분.
 이곳에 있던 선장 케일록을 비롯해 전함의 선원들이 워프 후에 무너지는 흙과 돌덩이들에 깔려 즉사했다.
 제2구역은 선원실, 제3구역은 무기실, 제4구역은 로봇 및 소형 우주선 격납고, 제6구역은 공장, 제8구역은 식물 재배실, 제9구역은 가축 농장실, 제10구역은 대피소, 제11구역과 제12구역은 선실, 제13구역부터 제15구역은 식량 창고였다.
 선장과 선원 그리고 유혁을 제외한 모든 이들이 제10구역의 대피소에 있었는데 이들도 워프 후에 전함이 부서지며 함께 매몰되었다.
 제5구역인 의료 연구실과 제7구역인 핵융합 엔진실 그리고 제13구역부터 제15구역까지의 식량 창고를 제외하곤 사방에서 가해지는 압력을 견디지 못하고 그대로 부서져 완전히 파손되었다.
 유혁은 제5구역에 있었기에 다행히 죽음을 면했다.
 “으으, 이게 무슨 소리야?”
 캡슐의 덮개를 열고 밖으로 나왔는데 줄리아가 보이지 않았다.
 ‘왜 나만 놔뒀지?’
 방 밖으로 나가니 복도 천장에 있는 불들이 계속 깜박거리고, 로봇들이 분주히 왔다 갔다 하며 움직이고 있었다.
 그런데 이때 찌릿거리며 온몸에 힘이 들어갔다.
 “어어, 그, 근육이!”
 육체 강화의 효과가 나타나며 가만히 있는데도 몸에 힘이 솟구치고 있었다.
 기뻐해야 하지만 당장은 이게 중요한 게 아니기에 고개를 이리저리 돌리며 로봇이 아니라 사람은 없는지 찾으려 했다.
 ‘무슨 큰일이 벌어졌어! 그런데 왜 사람은 아무도 없지?’
 이때 머릿속으로 들려오는 목소리.
 -케일록 전 선장과 선원들이 있던 제1구역 함몰, 일반 탑승자들이 있던 제10구역도 함몰. 생존자는 김유혁 선장님이 유일하십니다.
 “나, 나만 살았어?”
 -그렇습니다. 이 시간 이후로 김유혁 님은 전함 제네시스의 선장으로 임명되어 모든 권한을 부여받습니다.
 “응? 내가 선장이라고?”
 -그렇습니다.
 “잠깐만, 왜 다들 죽었어? 왜?”
 유혁은 다급히 메모리얼 액터의 대답을 재촉했다.
 -전함 제네시스는 지구로 워프를 시도했습니다.
 “워프라니? 난 선장에게 아무 말도 못 들었는데?”
 -워프 중에 좌표의 오차가 발생하였습니다. 저희의 현재 위치는 지구 좌표로 위도 38도 11분 00초, 경도 128도 24분 00초. 설악산의 음지백판골 계곡입니다.
 “설악산이라면 남한? 대한민국?”
 -설악산은 과거 대한민국의 영토가 맞습니다. 전함 제네시스는 땅속에 있으며, 가장 상층부가 지상 50미터 아래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허억, 그게 무슨 말이야. 우리가 땅속에 처박혀 있다고?”
 부르르르.
 황당함에 몸까지 떨며 어쩔 줄 몰라 했다.
 -맞습니다. 전함 제네시스의 총 열다섯 개 구역 중에 다섯 개 구역을 제외한 나머지 열 개 구역이 외부 압력을 견디지 못하고 부서졌습니다.
 “끄응, 다섯 개만 남기고 전부?”
 -그렇습니다. 열 개 구역의 시설은 모두 파괴되었고 이곳으로 출입하는 통로는 모두 폐쇄되었습니다.
 “파괴되지 않은 곳이 여기랑 또 어딘데?”
 -파괴되지 않은 곳은 김유혁 선장님이 계신 제5구역 의료 연구실과 제7구역 핵융합 엔진실, 제13구역부터 제15구역의 식량 창고입니다.
 핵융합 엔진실이 파괴되었다면 엄청난 폭발이 있었을 것이다. 설령 폭발이 없다 하더라도 새어 나올 방사능으로 인해 한반도는 수만 년이나 수십만 년 동안 사람이 살 수 없는 땅이 될 것이다.
 ‘다행이다. 나 하나 죽는 것은 어쩔 수 없지만 한반도에 사는 같은 민족들까지 함께 죽는 일은 일으키지 말아야지.’
 안심하는데 메모리얼 액터의 말이 이어졌다.
 -제4구역에 있던 정찰 로봇들은 통로가 폐쇄되기 전에 빠져나와 제5구역으로 이동을 모두 마쳤습니다.
 “듣기 불편하니 선장님 소리는 빼라. 그냥 유혁 님이라고 불러.”
 선장이란 호칭이 너무 낯설어서 대화에 집중하지 못하게 했다.
 -네, 알겠습니다, 유혁 님. 명령을 내려 주십시오.
 “잠깐만, 상황부터 더 알아야겠다. 우리가 땅속에 처박혀 있다고 해도 지금 2400년이니까 지구에서 우리가 온 것을 모를 리 없을 거야. 우리를 구하러 구조대가 오겠지? 일본 놈들이 오려나?”
 -그건 확실하지 않습니다.
 “왜 확실하지 않아? 구조가 안 된단 말이냐?”
 -이미 구조 신호를 보내고 있으나 주위에 어떠한 신호도 잡히지 않습니다. 현재 범위를 넓혀 천 킬로미터까지 구조 신호를 보내고 있습니다.
 “설악산에서 천 킬로미터면 어마어마한데?”
 일본 본토나 중국 북경까지도 되는 거리가 아닌가 싶었다.
 왜 신호가 안 잡히는지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다시 보내 봤어? 구조 신호는 멈추지 말고 계속 보내야 한다.”
 -계속하고 있으나 안 잡힙니다.
 ‘2400년이잖아. 천 킬로미터나 신호를 보내는데 아무 반응이 없다니. 그리고 다른 신호도 잡히질 않는다고?’
 상식적으로 말이 안 되는 상황이라 유혁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신호가 왜 안 잡히는지 이해가 안 되는구나. 그런데 구조 신호를 보내는 것은 네가 하고 있는 것이냐?”
 -구조 신호는 전함 제네시스의 시스템을 제어하는 인공지능 컴퓨터가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유혁 님이 전함의 선장이 되셨기 때문에 제가 인공지능 컴퓨터의 제어권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너는 전함의 인공지능이랑 어떻게 통신하는데?”
 -저에게는 무선 네트워크 장치가 있습니다.
 머릿속에 있는 액체형 컴퓨터인데 별의별 게 다 있는 것 같았다.
 “지상으로 나갈 수 있는 통로는 있냐?”
 -제5구역은 전함 제네시스의 최상층에 있으며 이곳 D-3 비상구에서 지상의 공기가 유일하게 감지됩니다.
 “지상의 공기가 감지된다면 밖으로 나갈 통로가 있다는 얘기군.”
 -통로가 아니라 동굴이라 표현하시는 게 맞습니다.
 “후우, 일단 거기로 가 보자.”
 파아앗!
 머릿속에서 전함 제네시스의 내부 구조도의 3D 영상이 나타났다. 메모리얼 액터가 유혁의 머릿속에 영상을 띄운 것이다.
 ‘오호, 좋군. 이러면 길을 잃어버릴 염려가 없겠어.’
 머릿속에 나타난 내부 구조도를 따라 유혁은 D-3 비상구까지 갔다.
 -출구의 잠금장치를 해제하도록 하겠습니다.
 피시시시식~ 덜컹!
 지이이이잉~ 타악!
 출구가 열리고 밖에서 차가운 공기가 밀려들어 왔다.
 “어두운데?”
 밖은 칠흑 같은 어둠이었다.
 전함의 실내에서 나오는 빛 때문에 바로 앞에 있는 수 미터 거리는 보였지만 더 멀리 있는 것은 파악할 수 없었다.
 -자외선 모드를 시작합니다.
 파아앗!
 총천연색이었던 세상이 초록빛 세상이 되어 버렸다.
 “어윽! 내 시신경까지 조작하는 것이냐?”
 -그렇습니다. 이제 동굴 내부를 파악하실 수 있죠?
 메모리얼 액터의 말처럼 적외선 모드로 바뀌니 어두운 곳에 있던 동굴 내부의 모습이 잘 파악되었다.
 “그래, 네 말처럼 동굴이네. 이제는 내부가 잘 보인다.”
 내부의 크기가 겨우 사람이 하나 지나다닐 수 있을 정도로 좁았지만 동굴이 맞았다.
 ‘그래도 다행히 출구와 연결되었네.’
 밖으로 나온 후에 D-3 비상구는 닫고서 경사진 동굴의 내부를 따라 위쪽을 향해 계속 올라갔다.
 육체가 강화되어서인지 올라가는 게 전혀 힘들지 않았다. 오히려 몸을 쓸수록 개운해지는 게 기분이 좋아졌다.
 
 
 
 한참 후, 동굴 입구를 막고 있는 두꺼운 덩굴들을 만났다.
 두 손으로 힘을 써서 덩굴들 사이에 틈을 만들고 밖으로 나왔다.
 “오오, 신선하다!”
 절로 탄성이 나올 만큼 깨끗한 공기.
 전함 속에서 마시던 공기와는 비교할 수도 없을 정도라 그런지 머리가 맑아지며 뻥 뚫리는 기분이었다.
 기온은 따뜻한 게 늦봄이나 여름 같았다.
 ‘하아, 여기가 지구다, 지구!’
 사실 그동안 냉동 수면 중이었기에 솔직히 우주에서 지구로 돌아온 게 그렇게 감격스럽지는 않았다.
 속으로 지구라고 말하고 있었지만 머리에 떠올리는 것은 한국 땅이었으며, 민족의 땅으로 왔다는 점 때문에 유혁은 가슴이 먹먹해졌다.
 주르르르~ 뚝뚝, 뚝뚝.
 양쪽 눈에서 하염없이 눈물이 흘러 바닥으로 떨어졌다.
 ‘스물다섯 살에 미국으로 이민 간 후에 다시는 한국에 오지 않았는데, 이게 도대체 얼마 만인가? 그런데 나무들이 정말 울창하구나. 아주 잘 관리했어. 미래로 갈수록 더 숲을 보호하고 신경 썼나 봐.’
 한껏 감상에 젖어 있는데 메모리얼 액터가 눈치 없이 끼어들었다.
 -주변 정찰을 위해 말벌 로봇을 보낼까요?
 “말벌 로봇? 그런 것들도 있어?”
 -전함 제네시스에 있는 정찰 로봇들 중 한 종류입니다. 말벌을 형상화한 로봇이며, 영상 촬영 기능과 영상 및 음성의 송신이 가능합니다. 그리고 말벌 로봇을 이용하여 통신도 가능합니다.
 “다른 정찰 로봇도 있니?”
 -독수리 로봇이 있습니다. 기능은 말벌 로봇과 똑같으며 최대 20킬로그램까지 들 수 있습니다.
 “전부 몇 마리나 있어?”
 -독수리 로봇은 서른 마리가 있으며, 말벌 로봇은 삼백 마리가 있습니다.
 “좋아, 말벌 로봇들을 내보내서 정찰해 봐.”
 명령이 떨어지니 메모리얼 액터가 전함 제네시스 쪽으로 신호를 보냈고, 곧 동굴 밖으로 무려 삼백여 마리나 되는 말벌 로봇들이 쏟아져 나왔다.
 -우선 주위 10여 킬로미터까지 조사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리고 아무것도 발견하지 못하면 100킬로미터까지 조사 범위를 늘리겠습니다.
 “그래, 100킬로미터까지 조사하면 뭐라도 반드시 발견하겠지.”
 위이이잉, 윙윙, 윙윙윙윙······.
 요란한 날개 소리와 함께 말벌 로봇들이 날아올라 사방으로 퍼져 나갔다.
 
 
 
 말벌 로봇들이 정찰을 하는 동안 유혁은 동체 시력, 근육의 힘 그리고 순발력이 두 배나 올라간 육체를 시험해 보았다.
 힘껏 뛰어 보기도 하고, 나무 위로 올라가 보기도 하고, 돌을 들어 던지기도 했으며, 재빠르게 날아가는 새들의 숫자를 세어 보기도 했다.
 평소 20킬로그램을 들어 올렸다면 지금은 육체가 강화되어 40킬로그램을 들 수 있는 셈인데, 열여섯 살의 탄탄한 몸을 가진 유혁이 거뜬히 50킬로그램은 들 수 있으니 강화된 육체로는 100킬로그램 이상을 들 수 있는 것이다.
 한 손으로 움켜쥘 정도의 돌을 들어서 하늘을 향해 40도 각도로 힘껏 던지니 족히 100여 미터는 날아가는 것 같았다.
 또 제자리에서 뛰어도 사람 키 하나는 거뜬히 넘을 정도였으며, 달리기도 어찌나 빠른지 산속에서 뛰는 것임에도 평지와 다를 게 하나도 없었다.
 “하하, 내 생전에 이렇게 세 보긴 처음이네. 아니지, 새로운 육체를 얻었으니 생전이라는 표현이 안 맞는구나. 그렇다고 환생도 아니고. 어찌 되었든 즐겁다!”
 아쉬운 게 있다면 2400년에는 과학기술이 발달하여 굳이 약물로 육체를 강화하지 않아도 특수 제작된 슈트가 있어서 이걸 입으면 강화된 육체보다 훨씬 뛰어난 효과를 낼 수 있다는 점이다.
 ‘그래도 육체가 튼튼하고, 힘도 세고, 재빠른 게 좋지, 뭐.’
 한창 몸을 움직여 기분이 상쾌한데, 머릿속으로 메모리얼 액터의 음성이 들려왔다.
 -말벌 로봇이 사람을 찾았습니다. 영상을 보여 드릴까요?
 “사람? 그래, 보여 줘 봐.”
 슈우웃~ 파아앗!
 머릿속으로 말벌 로봇이 보내오는 영상이 나타났다.
 그런데······.
 “커억, 저게 뭐야?”
 너무 놀라 유혁은 큰 소리를 내고 말았다.
 ‘저 복장······. 저 사람들, 미친 거 아니야?’
 영상에 나타난 복장은 조선 시대 평민들이 입는 옷이었다.
 이들은 말벌을 보고 얼굴을 찡그리며 얼른 피하고 있었는데 얼굴 생김새나 표정 등이 도저히 2400년에 사는 사람들 같지 않았다.
 ‘혹시 설악산에 민속촌이 생겼나?’
 -다른 말벌이 잡은 영상도 있습니다.
 “그래? 보여 봐.”
 영상이 다른 것으로 바뀌었는데 이번에는 초가집 몇 채가 옹기종기 모여 있고, 딱 조선 시대 복장의 남녀와 아이들이 눈에 들어왔다.
 “저게 다야?”
 -아니요, 다른 것도 있습니다.
 메모리얼 액터가 계속 다른 영상을 보여 주는데 앞선 것과 다를 게 하나도 없었다.
 ‘민속촌이라 하기에는 너무 크잖아. 그리고 민속촌인데 관람객이 왜 하나도 없어? 내가 우주로 가 있는 동안에 한국 땅에 무슨 일이 벌어진 거야? 혹시 일본 놈들이 한국 사람들을 저렇게 만들었나?’
 부르르르르.
 분노로 얼굴이 시뻘게지는 유혁.
 ‘이 똥물에 튀겨 죽일 놈들! 오줌에 삶아 죽일 놈들! 우리 민족을 노예처럼 만드는 것도 모자라 아예 저따위로 살게 하는구나. 으으윽!’
 눈이 급히 충혈되어 더할 수 없이 뜨거운 눈물이 솟아났다.
 영상은 조선 시대처럼 보였지만, 2100년까지 지구에서 산 유혁의 눈에는 구석기나 신석기의 미개한 원시인 생활을 하는 것처럼 여겨졌다.
 그런데 점점 시간이 지나가며 유혁의 분노는 의아함으로 바뀌었다.
 ‘이상한데? 어떻게 다 저러고만 있지?’
 최소한 관리하는 로봇이나 관리하는 일본인은 있어야 했다.
 혹시나 위성을 이용한 원격 감시를 한다고 하더라도 말벌 로봇들이 정찰 중임을 일본인들도 알 텐데 왜 아무 반응이 없는지 이상했다.
 ‘그래, 구조 신호에도 응답이 없다고도 했잖아. 뭔가 이상해도 한참 이상하다. 이럴 게 아니라 사람들 대화를 들어 보자.’
 도저히 안 되겠다 느낀 유혁은 새로운 명령을 내렸다.
 “말벌 로봇에게 사람들 가까이 가서 그들의 대화를 보내도록 해라.”
 -알겠습니다.
 지시가 떨어지고 1분도 안 되어 사내 둘이서 나누는 대화가 전달되었다.
 -용천과 선천에서 난이 일어났다는데 그 소식 들었나?
 -응, 홍경래라는 자가 앞잡이라는데? 신분이 양반이라는 소리도 있어.
 -보나 마나 관군官軍에 잡혀서 죽겠지?
 -그렇겠지. 그런데 난이 어디 그거 하나로 끝이 날까? 요즘 같아서는 정말 세상천지가 다 뒤바뀌지 않고선 살 수가 없을 것 같아. 건너 마을의 막둥이 놈 얘기 들었나?
 -무슨 얘기?
 -일을 나갔다 들어오니 애가 하나 없더래. 부엌에 갔더니 보름이나 굶은 어미가 애를 삶아 먹고 있었다고 하지 않나? 눈이 돌아 아내를 때려죽이고 그놈은 미친놈이 되어 어디론가 사라졌다고 하더군.
 얘기를 듣던 사내는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휴우, 자식 팔아먹는 건 흔히 보았지만 죽여서 먹기까지 하다니.
 -남쪽의 제주라는 섬에서는 서로가 서로를 잡아먹어 밤잠도 제대로 못 잔다고 하던데? 이 정도면 정말 세상이 다 무너지고 새로운 임금이 나왔으면 좋겠어.
 -쓸데없는 소리! 괜한 소리 지껄이다간 관에 끌려가 죽도록 맞아. 분위기가 심상치 않으니 병졸들 눈빛이 험악하다구!
 얘기를 들으며 유혁은 입이 쩌억 벌어졌다.
 ‘호, 홍경래? 그거 1811년 일이잖아. 이런, 미친!’
 고등학교 때 다른 과목보다 제일 잘했던 것이 국사였던 유혁은 국사 교과서를 달달 외울 정도였다.
 임진왜란(1592~1598)과 병자호란(1636~1637)으로 인해 죽은 자의 숫자가 약 300만 명.
 하지만 이보다 더 큰 재앙이 있었으니 바로 기근이다.
 17세기 후반 동아시아를 휩쓴 소빙하기의 여파로 인해 경신 대기근(1670~1671), 을병 대기근(1695~1699)으로 약 260만 명이 죽었으며, 18세기 후반과 19세기 초에 장기간의 흉년으로 약 250만 명이 죽었다.
 이러니 백성들의 삶이 피폐해질 수밖에 없었다.
 19세기 조선은 최고의 개혁 군주였던 정조의 죽음(1800) 후에 노론老論 집권 세력과 세도 가문의 보수 반동 정치가 지배한 사회였다.
 이로 인해 극단적인 권력 독점과 전횡이 이루어졌는데 지배 계층의 부정부패, 가렴주구苛斂誅求로 인해 벼랑 끝에 몰린 백성들은 대규모의 민란民亂으로 저항하게 된다.
 민란의 시작은 평안도에서 일어난 1811년의 홍경래의 난이었으며, 1894년 동학농민운동으로 끝난다.
 첫 시작이었던 홍경래의 난은 단순한 반란이 아니라 ‘정감록鄭鑑錄’ 사상으로 무장한 주도 세력이 왕조 체제의 전복을 꿈꾼 대사건이었다.
 조선 사회의 신분 차별과 지역 소외를 없애고, 백성들이 잘 먹고 잘사는 이상적인 국가를 건설하겠다는 목표를 가지고 10여 년이나 치밀한 사전 준비를 거쳐 일으킨 조직적인 봉기蜂起였다.
 이 때문에 노론 집권 세력은 큰 정신적 충격을 받았으며, 토벌군은 난을 진압하는 과정에서 백성들을 무자비하게 학살한다.
 역사는 이렇게 평가하는데 유혁은 생각이 좀 달랐다.
 ‘10여 년이나 준비했는데 난은 고작 약 다섯 달 만에 진압된다.’
 봉기가 일어나고 처음 십여 일에는 인근 일곱 고을을 장악하고 백성들의 호응까지 받아 세력을 확대하나 관군의 공격에 패퇴하고 정주성에 쫓겨 들어간다.
 약 세 달을 버티며 싸우지만 정주성이 함락되면서 모든 게 끝이 난다.
 ‘10여 년이나 준비한 것에 비해 난의 기간이 너무나 짧다. 그래도 홍경래의 난은 왕조 체제를 전복시킨다는 꿈을 가진 민란이다. 그것만큼은 인정해 줘야 한다.’
 만일 홍경래의 난이 진짜 성공해서 조선 시대가 끝이 나고 새로운 왕조가 들어선 후에 서양의 문물을 받아들여 크게 발전했다면 일본의 자리를 우리가 차지하고 세계사가 바뀔 수도 있다.
 1811년으로부터 100년이 지나 1910년이 되면 조선은 한일강제 병합으로 인해 일본의 식민지가 되어 버린다.
 한일 합방은 일본 시각에서의 표현이며 한일 강제 병합이 맞다.
 너무 놀라 떨리는 음성으로 메모리얼 액터에게 물었다.
 “다, 다른 대화는 없니? 다른 거!”
 -있습니다. 잠시만요.
 메모리얼 액터는 계속해서 다른 대화들을 들려 주었다.
 시덥잖은 내용들이 대부분이었는데 일부는 아까 사내들처럼 홍경래의 난에 대해 얘기를 나누고 있었다.
 “하아, 내가 과거로 왔다고? 하하, 1811년?”
 난이 일어난 지 몇 달이 지났다면 1812년인지도 모른다.
 어찌 되었든 과거로, 그것도 수백 년이나 거슬러 왔다니 하도 어이가 없어 실없는 웃음이 입 밖으로 새어 나왔다.
 이후로 감당하기 힘든 사실에 배고픔도, 시간이 흐르는 것도 잊은 채 말벌 로봇들이 보내오는 영상과 대화를 계속 들었다.
 전함에서 자신 외에 숨을 쉬고 있는 자가 아무도 없다는 사실도 이제는 하나도 중요하지 않게 되었다.
 당장은 과거로 온 충격부터 가라앉혀야 했다.
 
 
 
 제네시스의 제5구역에 있는 어느 병실.
 동굴을 통해 다시 돌아온 후에 식사도 안 하고 병실 안의 침대에 누워 멍하니 천장만 바라보며 한밤까지 말똥말똥 눈을 뜨고 있는 유혁.
 메모리얼 액터가 전함의 파손된 곳을 알려 주고 이것저것 상황 보고를 해 왔으나 듣는 둥 마는 둥 했다.
 ‘살면서 가끔씩 과거로 와서 역사를 바꾸고 싶다는 생각도 하긴 했었지만 설마 현실이 되다니. 그것도 1811년······ 홍경래의 난이라······.’
 “하아, 어찌해야 하나?”
 이때 문득 떠오르는 게 있었다.
 ‘다시 워프할 수 있나?’
 세계사를 바꿀 수 있는 기회가 있는 때로 왔지만 이런 막중한 책임은 자기 것이 아닌 것 같았다. 그냥 피하고 싶었다.
 “메모리얼 액터."
 -네.
 “매번 메모리얼 액터라 부르기 힘드니까 그냥 메모, 아니, 이건 좀 이상하고, 에오! 그래, 넌 에오라 부르겠다.”
 -알겠습니다. 앞으로 제 이름은 에오입니다.
 “에오, 제네시스가 다시 워프할 수 있겠니?”
 -안 됩니다.
 조금의 주저함도 없는 단호한 대답.
 실망감이 몰려왔지만 재차 물었다.
 “수리해도 안 돼?”
 -워프 장치들은 전함의 외부에 설치되었는데 모두 파괴되었습니다.
 “그래도 워프에 대한 지식은 있잖아. 다시 만들면 되잖아.”
 -현재 땅속에 있기 때문에 불가능합니다.
 “그, 그래. 땅속에 있지.”
 잠시 동안 침묵이 흘렀다.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열린 유혁의 입.
 “에오, 말벌 로봇들은 아직 밖에 있니?”
 -아니요, 충전해야 해서 전함으로 돌아오게 했습니다.
 “말벌 로봇들이 물건을 들 수도 있니?”
 -안 됩니다. 물건을 나르는 목적으로 만들어진 드론이 따로 있습니다.
 드론은 원격으로 조종되며 하늘을 나는 무인 항공 장치다.
 “조선 후기에 드론은 절대 어울리지 않지. 독수리 로봇을 보내자! 독수리 로봇은 밤이라도 상관없지?”
 -적외선을 통해 사물을 구분하기에 빛이 없어도 상관없습니다.
 “그러면 아까 초가집들 봤지? 사람들이 사는 집 말이야. 독수리 로봇들을 그곳으로 보내서 옷을 훔쳐 오게 해라. 빨래해서 널어놓은 게 있을 거야.”
 한 시간쯤 후, 독수리 로봇이 훔쳐 온 흰색 저고리를 유혁에게 내밀었다.
 한민족을 백의민족이라 하지만, 그건 가난해서 염색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결코 흰색이 좋아서가 아니었다.
 “저고리만 가지고 어떻게 하라는 거냐?”
 -다른 것도 가져오라 할까요?
 “그래, 이것만 아니라 다른 것도 필요하다. 독수리 로봇에게 구할 수 있는 옷은 가리지 말고 다 가져오라고 해!”
 명령이 떨어지자 밤을 새워 새벽까지 서른 마리의 독수리들이 여기저기를 돌아다니며 옷을 잔뜩 훔쳐 가지고 왔다.
 나중에는 옷을 잃어버린 사람들이 얼마나 낙담할까 생각하니 미안해져 필요한 것만 빼고 도로 갖다 두도록 했다.
 아침이 되어 위아래로 차려입은 유혁.
 상투가 없는 짧은 머리는 감춰야 하기에 이마에 쓰는 망건을 하고서 상민들이 많이 쓰는 초립을 썼다.
 속옷으로 속적삼, 속잠방이를 입고, 겉으로 저고리, 바지와 두루마리까지 입었다.
 “휴우, 이쯤이면 충분하겠지?”
 거울로 자신을 보았는데 복장이 참 거식했다.
 ‘키가······ 크다.’
 어림잡아 180센티쯤.
 그런데 입고 있는 옷은 165센티 정도의 남자가 입어야 적당할 것 같았다. 그러니 팔과 다리가 드러나 어색하기 짝이 없었다. 또 얼굴은 너무 희고 번드르르하여 영상으로 본 사람들과 차이가 많았다.
 ‘이래서야!’
 옷만 입는다고 이 시대 사람처럼 보일 것이란 것은 정말 착각이었다.
 ‘차라리 양반처럼 입으면 어떨까? 그러면 한결 나을 것 같은데?’
 지금처럼 하고 나가면 분명 문제가 생길 것 같았다.
 ‘안 되겠어. 다시 구하자.’
 구해 온 옷은 벗었다.
 다시 밤이 되도록 기다린 후에 이번에는 독수리 로봇을 아주 멀리까지 날아가게 하여 옷을 가져오게 했다.
 에오에게 시켜 조선 시대 후기의 양반 복장에 대한 정보를 독수리 로봇에게 입력한 뒤, 필요한 것을 가져오도록 했다.
 에오가 인공지능이긴 하지만 조선 시대 후기의 양반 복장에 대한 정보까지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에오에겐 무선 네트워크 장치가 있고, 이것을 이용해 제네시스의 인공지능 컴퓨터에 접속했다. 게다가 현재 제네시스의 인공지능 컴퓨터는 에오에게 모든 명령권을 일임한 상태였다.
 제네시스의 인공지능 컴퓨터에는 조선 시대 후기만 아니라 인류 역사에 대한 막대한 양의 정보가 저장되어 있기에 에오는 이 정보를 검색해서 조선 시대 후기의 양반들이 입고 다니던 복장을 알아낼 수 있었다.
 
 
 
 * 과거로 오다
 
 
 
 독수리 로봇들이 명령을 수행하러 밖으로 나갔는데 강원도 설악산 계곡에서 양반 복장을 찾는 것은 무리였다.
 필요한 걸 다 구해 오는데 꽤나 오랜 시간이 걸렸다.
 유혁은 필요한 복장을 구할 때까지 제네시스에서 기다리며 말벌 로봇들을 각지로 보내 이 시대의 정보를 계속 모았다.
 제네시스의 인공지능 컴퓨터에 정보가 많이 있기는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현장에서 얻는 정보보다 나을 수는 없었다.
 다행히 식량 창고는 파괴되지 않아 먹을 것은 충분했으며, 그 안에 있는 것들은 모두 가공 처리되어 오랜 시간이 지나도 상하지 않도록 관리되고 있었다.
 처음에는 겁이 무척이나 많이 나서 다시 워프해서 빠져나가고 싶은 유혁이었지만 시간이 갈수록 점점 새로운 생각이 들었다.
 ‘국운이 다한 조선을 끝내고 대한제국大韓帝國의 시대를 열어야 한다. 이것은 천명天命. 하늘의 뜻이며, 하늘이 나에게 준 의무다. 이제부터 나는 자신을 버리고 만인萬人을 위해 일해야 해.’
 책임감을 가지고 어떻게 해야만 한민족을 구원할까 곰곰이 생각하니 시대 상황과 맞는 계획이 떠올랐다.
 ‘우선 조선 시대는 끝을 내야 한다.’
 홍경래의 난 이후로 일본에 먹히기 전까지 조선에는 수도 없이 많은 민란이 쉬지 않고 계속해서 일어난다.
 모두 조선이 부패한 까닭이다.
 세도 정권의 매관매직과 토호 세력의 횡포 속에서 백성들은 어쩔 수 없이 살아 보자고 난을 일으킨 것이다.
 ‘이 난세에 내가 모델로 삼아야 할 인물은······ 조조다!’
 삼국지의 주인공 중 하나인 조조.
 헌제를 옹립擁立하며 조조는 조그마한 군웅群雄에서 원소와 대적할 만한 거대 군웅으로 성장한다.
 이것이 가능했던 이유는 헌제를 통해 명분적 우위를 점했기 때문.
 ‘왕인 순조(조선 23대 왕:1790~1834)를 손아귀에 넣은 후, 정1품인 영의정, 좌의정, 우의정보다 높은 특1품 대승상이란 관직을 새로 만든다. 그리고 내가 대승상의 자리에 앉는다.’
 그 후에 섭정攝政을 펼치며 갖가지 개혁을 주도할 것이며, 이 과정에서 생기는 갖가지 불협화음은 때로는 채찍으로, 때로는 당근으로 조율할 생각이었다.
 ‘맨 처음에는 거센 피바람을 일으킬 수밖에 없다. 기득권 세력이 쉽게 고개를 숙일 리가 없으니까. 문무文武를 가리지 않고 높은 관직에 있는 자들과 함께 반항하는 사대부 양반 놈들을 죄다 쓸어버려야겠지.’
 개혁에 걸리는 시간은 몇 년, 또는 10년 이상이 걸릴 수 있었다.
 ‘시간이 흘러서 어느 정도 안정이 되었다 싶으면 그때는 조선 왕조王朝를 끝내고 대한제국을 세운다.’
 제국이라 하여 황제가 되겠다는 게 아니다.
 체제로 대통령제나 내각제를 생각하고 있으니 제국이라는 것은 대외적으로 강력한 국가라는 이미지를 내세우기 위함이었다.
 ‘대통령제로 가더라도 초기에는 의원들이 선출하는 형태로 가고, 임기도 30년쯤? 아니면 50년쯤 해야지.’
 20세기나 21세기의 사고방식으로는 말도 안 되는 얘기겠지만 아직 왕이 세습하여 다스리는 세상이니 30년이나 50년은 어찌 보면 짧은 기간이었다.
 새로운 시대를 열기 위해서 가장 먼저 해야 할 일로는 홍경래의 난에 동참하는 것으로 가닥을 잡았다.
 ‘홍경래의 난은 실패한다. 그러나 그의 난은 조직적으로 이루어졌고, 평안도 일대를 장악할 만큼 위세가 있었다.’
 만약 유혁이 옆에서 도와 난을 성공으로 이끄는 한편 홍경래를 제치고 우두머리가 된다면 조선을 끝내고 대한제국을 시작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물론 이 계획이 쉽게 이루어질 리 만무하다는 것은 잘 알고 있었다.
 ‘스스로 난을 일으킬 수 있다면 그리하겠지만 난 아무 배경도 없다. 출신도 가짜로 만들어야 할 판이다.’
 신분을 양반으로 한다면 족보도 있어야 한다.
 족보는 없더라도 아버지나 할아버지가 확실한 사람이어서 자신의 신원이 확인될 수 있어야만 한다.
 에오에게 시켜서 가장 적당한 자에 대한 검색에 들어갔다.
 
 
 
 오랜 검색 끝에 유혁이 가짜 신분의 배경으로 쓰기에 가장 적합한 자가 결정되었다.
 -평안도 박천의 양반 자제 중에 양인의 어머니를 두어 서자로 태어나서 청나라로 넘어간 김희재라는 자가 있습니다.
 “나에게 김희재가 되라고?”
 -아닙니다. 김희재의 아들입니다.
 “아하, 아들. 그러면 나는 서자의 아들이 되는구나.”
 서자庶子는 첩의 자식이라 무시를 받는데 서자도 아니고 그 아들이니 더욱 무시당할 게 뻔했다.
 ‘그래도 무슨 상관이냐?’
 어차피 난을 일으킨 자들에겐 신분보다도 능력 있는 자가 우선이다.
 게다가 유혁은 체제 자체를 뒤엎을 목적을 가지고 있으니 신분은 서자의 아들 정도가 적당했다. 너무 높은 신분을 원하면 그에 걸맞는 자를 찾아야 하는데 이것도 쉽지 않을 뿐 아니라, 조사하면 거짓으로 드러날 가능성도 높기 때문이다.
 게다가 김희재의 아들 노릇을 하면 유리한 점이 청나라에서 태어나 자랐기에 조선의 실정을 잘 모르는 것도 감안이 될 터이고, 자세히 따지는 이도 없을 게 분명했다.
 -그렇습니다. 더 높은 신분을 원하십니까?
 “아니, 적당하다. 그런데 김희재라는 사람에 대한 정보는 더 없어?”
 -김희재에 대해 더 자세한 기록은 없고, 청나라에서 일찍 죽은 것만 나옵니다.
 “으음, 좋아. 김희재라는 자의 아들 노릇을 해야겠다.”
 출신에 대한 것은 정해졌으니 이제 반란이 일어난 곳까지 가는 일만 남았다.
 ‘흐음, 여기서 난이 일어난 평안도까지 가야 하는군. 무사히 갈 수 있을까?’
 우선은 험준한 산길을 따라 북쪽으로 올라갈 테니 관병은 피할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언제든 한 번은 관병을 만날 테고 신분 패라도 내라고 하면 문제였다.
 ‘신분 패······ 가짜로 만들 수는 없나?’
 “에오, 조선 시대의 호패에 대한 정보가 있지?”
 호패號牌는 조선 시대에 열여섯 살 이상의 남자가 신분을 증명하기 위해 차고 다니던 직사각형의 패를 말한다.
 -전함 제네시스의 인공지능에 조선 시대의 호패에 대한 것이 있습니다.
 “그거 만들 수 있을까, 진짜처럼?”
 -조잡한 수준이니 충분히 만들 수 있습니다.
 “흐음, 이걸 만들려면 도구가 있어야 하는데?”
 -제5구역에 의료·과학 기기를 수리하는 도구가 있습니다. 이것이면 호패 제작은 충분히 할 수 있습니다. 다만 목재가 필요합니다.
 “나무? 그거라면 밖에 많잖아. 내가 구해 오지.”
 우선 의료·과학 기기를 수리하는 도구부터 찾았다. 도구는 생각보다 정교한 것들이었다.
 ‘오호, 좋은데? 이걸로 총을 만들 수 있나?’
 “에오, 여기 있는 도구로 총을 만들 수 있니?”
 -전함에는 3D 프린터가 있습니다. 그것으로 원하시는 모델의 총기류를 충분히 만들 수 있습니다.
 “아, 그래? 기관총이나 그런 것도 제작이 가능해?”
 -그렇습니다.
 총을 생각하니 자연스레 제7구역에 있는 핵융합 엔진이 떠올랐다.
 ‘혹시 제7구역에 있는 핵융합 엔진에서 핵 연료봉을 빼내서 가공한다면 핵무기도 만들 수 있지 않을까?”
 여기까지 생각이 미치니 세계 정복도 꿈이 아니었다.
 ‘하지만 내가 핵무기를 가지고 나타나면 다른 이들은 날 외계인처럼 볼 거야. 아니면 귀신? 아무튼 이건 안 돼.’
 한두 발자국만 앞서 나간 과학기술을 도입하기만 해도 대한제국의 장래는 충분히 밝다.
 ‘그래, 무작정 신무기로 세계만 정복하고 끝날 문제가 아니다. 사람의 의식구조부터 완전히 바꿔야 해.’
 신분제도는 고사하고, 상투를 틀고 사는 이들에게 상투를 자르게 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버거운 일일 게 분명했다.
 ‘어쩔 수 없이 강압적으로 문제를 해결해야 할 일도 많을 테고, 이에 반발하는 자들은 심한 처벌을 내리거나 죽이기까지 할 수도 있다. 이건 피할 수 없어.’
 무지한 자들이 고집스레 달려들면 처벌이나 죽임까지도 해야 했고, 이걸 피하고는 근대화가 될 수 없으니 유혁이 감내해야 할 숙제였다.
 ‘휴우, 어쩔 수 없이 사람을 죽여야 한다······. 물론 원대한 목적을 위한 것이지만 사람의 목숨을 어찌 끊지?’
 갈등이 생기지 않는다면 유혁은 사람이 아니란 소리.
 ‘우선 핵무기를 만들 수 있는지부터 알아보자.’
 “에오, 제7구역에 있는 핵융합 엔진에서 핵 연료봉을 가져다가 가공해서 핵무기를 만들 수 있지 않니?”
 -불가능합니다. 연료봉을 가공하는 장비가 모두 파괴되었습니다.
 “그래? 아쉽네. 혹시 제네시스에 용광로는 없니?”
 -마찬가지로 용광로도 파괴되었습니다.
 “끄응, 그렇구나.”
 우선은 무기 제조는 나중에 생각하고 호패부터 만들기로 했다.
 도구 중에 충전해서 쓰는 무선 전기톱이 있었다. 이걸 가지고 밖에 나가 나무를 베어 호패를 만들기에 적당한 크기로 자른 뒤, 제네시스로 돌아왔다.
 
 
 
 구해 온 나무로 저녁 늦게까지 작업하여 그럴싸한 호패를 만든 뒤에 잠을 자는데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번쩍!
 깊은 어둠 속이 갑자기 변하며 유혁은 하얀 공간 속에 서 있었다.
 ‘헛, 여기가 어디지?’
 이때 들려오는 에오의 목소리.
 -사용자 학습 프로그램을 시작하겠습니다.
 “아! 꿈에서 가르쳐 준다는 거?”
 -맞습니다. 김유혁 님이 배우고자 하셨던 무술은······.
 에오는 유혁이 선택했던 이십여 개의 무술명을 쭈욱 나열했다.
 “맞아, 내가 그것들을 선택했지.”
 -어떤 무술부터 배우길 원하십니까?
 “흐음, 한민족 무술인 택견부터 배울까?”
 -택견 훈련을 위해 새로운 장소로 이동하겠습니다.
 파팟!
 가상공간이 다시 바뀌었다.
 이번 장소는 고풍스러운 기와 건물들이 가득한 장소의 한가운데로 바닥이 판판하고 네모진 돌이 사방에 깔려 있었다.
 정면에 있는 큰 건물에는 무도학관이라 쓰인 간판이 달려 있는 게 보였다.
 “히야아, 멋지네.”
 감탄사가 절로 나왔다.
 이때 유혁의 맞은편에 범상치 않은 기운을 내뿜는 사내가 나타났다. 검은 머리와 황색 피부를 한 중년의 동양인으로, 저음의 허스키한 목소리로 자신을 소개했다.
 “나는 너를 단련시킬 이무혁 사부다. 앞으로 나를 스승님이라 불러라.”
 에오는 훈련을 위해 가상의 인물을 만든 것이다.
 유혁은 어이가 없어 피식 웃으며 따졌다.
 “하하, 너, 에오잖아. 갑자기 뭔 스승님이니? 그리고 이무혁이 누군데?”
 파아앗!
 유혁과 이무혁 사이에 황금빛 긴 머리를 휘날리는 팔등신의 미녀가 허벅지가 다 드러나는 짧은 드레스를 입고 나타났다.
 씽긋.
 미녀는 유혁에게 아름다운 미소를 날렸다.
 “저, 에오입니다.”
 “허억, 네가 진짜 에오?”
 “더욱 실감나는 사용자 학습 프로그램을 위해 지금은 사라진 대한민국에서 가장 뛰어난 무술인이었던 이무혁 씨를 가상의 인물로 만들어 스승님으로 내세웠습니다. 거부감이 드신다면 이무혁 씨가 아니라 제가 지도할까요?”
 “이무혁이라는 사람이 그렇게 대단했어?”
 “이무혁 씨는 다섯 살 때부터 무술을 익혔으며, 태권도, 택견, 쿵푸, 절권도, 합기도, 무에타이, 삼보, 유술 등에 능한 종합 격투가였습니다.”
 “오호, 뛰어나긴 하구나.”
 “이것만 아니라 중국에서 전해진 무예인 무예십팔반武藝十八般에도 능통했습니다.”
 “무예십팔반이 뭔데?”
 “그건 장창長槍, 당파??, 낭선狼据, 쌍수도雙手刀, 등패藤牌, 곤봉棍棒, 죽장창竹長槍, 기창旗槍, 예도銳刀, 왜검倭劍, 교전交戰, 권법拳法, 편곤鞭棍, 월도月刀, 협도挾刀, 쌍검雙劍, 제독검提督劍, 본국검本國劍을 말합니다.”
 유혁은 탄성을 터트렸다.
 “히야, 무예십팔반이라는 게 아주 대단한 것들이구나. 내가 선택한 무술들보다 이게 훨씬 나아 보이는데?”
 “그럼 선택하신 무술들을 취소하고, 이무혁 씨가 익힌 무예십팔반을 배우는 것으로 할까요?”
 “다 배우는 건 어때? 가능해?”
 “물론입니다.”
 “그럼 다 배울게. 아무래도 진지하게 훈련을 하려면 네 말대로 이무혁을 스승님으로 모시는 게 낫겠다.”
 이무혁은 두 팔을 허리에 올리고 가슴을 쭉 편 뒤, 당당하게 말했다.
 “잘 생각했다. 앞으로 나를 스승님이라 불러라.”
 유혁은 가상의 인물이지만 이무혁에게 허리를 굽히며 깍듯이 인사했다.
 “스승님, 제자는 김유혁이라 합니다.”
 옆에 있던 에오가 두 사람의 대화에 끼어들었다.
 “김유혁 님, 한 가지 더 설명드릴 게 있습니다. 꿈속의 가상공간에서는 현실 시간보다 최대 열 배나 느리게 시간이 흘러가도록 할 수 있습니다.”
 “헉, 그렇게나 느리게?”
 꿈의 영역은 신비로운 것이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시간을 느리게 하는 만큼 오랜 시간 동안 수련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수련하더라도 실제로 근육을 통한 훈련이 아니기에 꿈이 깬 후에 직접 몸을 움직이며 근육을 강하게 만드셔야 합니다.”
 “흐음, 알았어. 시간은 열 배로 느리게 흘러가게 해 줘.”
 유혁은 보통 하루에 일곱 시간을 잔다.
 잠자는 동안에는 열 배로 느리게 흘러가게 되었으니 하루에 일흔 시간. 사흘이면 일흔두 시간이니, 거의 그 정도의 시간 동안 훈련하는 셈이었다.
 훈련이 시작되니 이무혁은 유혁이 조금만 실수해도 다시 반복시키며 동작 하나하나를 꼼꼼하게 가르쳐 나갔다.
 땀이 비 오듯 쏟아졌지만 꿈속에서 훈련받는 것이라 침대만 젖을 뿐 실제로 근육운동을 한 것은 아니기에 육체적인 피로감은 없었다.
 
 
 
 현실 시간으로 일주일.
 꿈속에서 보낸 시간은 하루에 일곱 시간씩 해서 총 마흔아홉 시간.
 꿈에서는 시간 열 배로 늘어나니 사백아흔 시간. 이건 이십 일이 넘는 시간이다.
 게다가 꿈속에서는 잠을 잘 필요도, 밥을 먹을 필요도 없으니 사백아흔 시간을 온전히 훈련에만 쏟아부을 수 있었다.
 이무혁은 전면을 노려보며 자세를 잡고 있는 유혁을 바라보며 기특하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기본기가 좀 잡혔구나.”
 꿈속이지만 현실처럼 죽어라 열심히 했던 유혁은 한숨이 절로 나왔다.
 “휴우, 이제요? 그동안 쉬지도 않고 정말 열심히 훈련했는데요?”
 유혁은 훈련을 받으면서도 이렇게 미친 듯이 하는데 왜 지쳐서 쓰러지지 않을까 의아할 때가 많았다.
 ‘결국 현실이 아니라 꿈속이니까 쓰러지지 않는 거겠지.’
 힘들다는 것은 현실처럼 느끼도록 하지만 체력이 아주 바닥나는 일은 없었다.
 이무혁은 빙그레 미소 지으며 대답했다.
 “쉬지 않고 열심히 했기에 기본기가 잡힌 것이다. 어떤 무술이든 높은 경지에 이르려면 최소한 10년은 훈련해야 한다.”
 “끄응, 10년이라면 여기서는 열 배의 시간이라고 했으니 현실에서 1년. 하루의 3분의 1인 여덟 시간씩 잔다고 하면 3년. 배워야 할 게 한두 가지가 아닌데 하나에 3년씩 걸린다면 시간을 너무 많이 잡아먹네요.”
 지쳐서 쓰러지지만 않았을 뿐이지, 정신적으로는 녹초가 된 유혁은 이무혁이 익힌 무술을 다 배우려면 족히 수십 년은 해야 할 것 같아 기가 질려 버렸다.
 “3년 만에 높은 경지에 오를 수 있다면 짧다고 해야지.”
 스스로 생각해도 3년이 길다고 할 수 없었다.
 “물론 그렇기는 하지만······.”
 “그리고 운동도 하나를 잘하면 다른 것도 잘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무술도 똑같다. 무기가 달라져도 한 가지를 확실하게 터득하면 다른 것도 빠르게 익힐 수 있다. 그러니 단순히 계산기를 두드리듯 숫자로는 말할 수 없다.”
 이때 갑자기 드는 의문.
 ‘하나를 마스터할 때까지 죽어라 그것만 해야 하나?’
 “스승님, 하나를 터득할 때까지 계속 그것만 해야 하나요? 저는 여러 가지를 돌아가면서 배웠으면 좋겠습니다.”
 “그걸 원한다면 그렇게 가르쳐 주도록 하겠다. 자, 이쪽으로 와서 나를 따라 가부좌를 하고 바닥에 앉아라.”
 이무혁은 몸소 시범을 보이며 가부좌를 하고 앉았다.
 옆에 가서 가부좌를 하고 앉으니 이무혁이 다시 말했다.
 “이제부터 체내의 기를 다스리는 토납법을 가르쳐 주겠다.”
 “토납법······ 들어 봤습니다. 그거 복식호흡 아닌가요? 물론 배로 숨 쉬면 건강해진다고 하긴 하지만 글쎄, 전 별로······.”
 “흠흠, 토납법을 쓸모없는 짓이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많지만 운동 후에 격해진 몸 상태를 안정시키고 정신을 집중시켜 전투에서 평정심을 유지하는 데 뛰어난 효과를 볼 수 있다. 필요한 기의 흐름은 에오가 직접 네 몸을 자극하여 이끌어 줄 것이다.”
 “에오가요?”
 “우선 토납법을 하기 위해서는 지금처럼 상체를 세우고 앉는 자세가 필요하다. 그리고 마음을 고요히 한 후에 양손을 겹치고 아랫배의 중심에 둔다.”
 유혁은 순순히 이무혁이 시키는 대로 따라 했다.
 “숨은 입으로 가늘고 길게 내쉬며 아랫배가 들어가도록 한다. 하지만 절대 힘을 과도히 주지 않도록 주의해라. 숨을 들이쉴 때는 코로 들이쉬되, 마음은 아랫배에 집중하고 숨이 들어오면서 아랫배가 나오도록 해라. 숨을 내쉴 때는 몸의 탁한 것이 나가고, 들이쉴 때는 우주의 맑은 기운이 배꼽 아래의 단전으로 들어오는 것을 상상하면서 한다.”
 이무혁이 하는 말은 이론에 근거해서 하는 말이었다.
 유혁은 시키는 대로 상상하며 호흡했다.
 찌르르르.
 에오가 유혁의 배꼽 아래에 전기 같은 기운이 흐르게 하여 단전의 정확한 위치를 알 수 있도록 해 주었다.
 “당분간 토납법을 이용해 계속 숨쉬기를 한다. 이것이 충분히 익숙해지면 소주천을, 소주천 다음에는 대주천을 시행하겠다.”
 스르르르. 따끔따끔.
 아주 미약한 기였지만 혈도를 따라 흐르며 배 아래쪽에 모이는 느낌이었고, 그곳은 작은 가시가 찌르는 듯 따끔거렸다.
 ‘오호, 신기하네? 이거 내 느낌만인가? 아니면 진짜 육체에도 기가 생기나?’
 이무혁과의 훈련을 끝낸 유혁은 허공에 대고 크게 외쳤다.
 “에오! 에오!”
 파아앗!
 금발 미녀의 모습을 한 에오가 모습을 나타냈다.
 “절 부르셨나요?”
 “응, 오늘 토납법을 배웠는데 단전에 찌리리 한 느낌이 있었다. 이거 꿈속이니까 그런 거지? 실제로 내 육체에 기가 쌓이거나 하지는 않지?”
 “육체에 기가 쌓이는 게 맞습니다. 그러나 이 기를 무협지에 나오는 고수만큼이나 쌓는 것이 가능할지는 모르겠습니다.”
 에오가 말하는 고수의 기준이 어느 정도인지 모르지만 아무튼 단전에 기가 쌓인다는 말에 화들짝 놀랐다.
 “싸, 쌓여? 하! 진짜로? 정말 그렇다면 나는 내공을 쌓아 무협지에 나오는 고수가 되는 거잖아. 혹시 제네시스에 있던 선원들도 단전에 기를 쌓았었니?”
 “아닙니다. 선원들은 육체를 강화하는 약물로 만족했으며 무술을 배우고자 한 사람은 김유혁 님이 처음입니다. 선원들은 최첨단 무기들이 많기 때문에 무술의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습니다.”
 “그랬어? 나는 너무 옛날 사람이라서 무술을 배우기 원했나 보다. 그런데 나 부를 때 매번 김유혁 님, 김유혁 님. 그러지 말고 그냥 유혁 님이라고 해라. 불편하다.”
 “알겠습니다.”
 “흐흐, 단전에 기가 쌓인다니 왠지 의욕이 샘솟는걸?”
 육체 강화만 아니라 단전의 기를 쌓아 내공으로 하늘을 훨훨 날아다니는 상상까지 해 보는 유혁이었다.
 
 
 
 열흘이나 기다리며 독수리 로봇들에게 필요한 의복을 가져오게 한 끝에 원하는 걸 모두 구할 수 있었다.
 ‘이제는 더 이상 지체할 수 없어. 사람 죽이는 게 무섭다고 제네시스에 숨어 살 수만도 없잖아. 그리고 나라가 망해 가는 꼴을 지켜보며 살 수도 없고.’
 갓도 쓰고 비단 두루마리도 입은 후, 붉은색 술띠까지 하고서 거울을 보니 전보다 훨씬 어울리고 뽀대도 나는 게 딱이었다.
 ‘하! 신분제도를 없애야 할 내가 이렇게 양반이 잘 어울리다니. 그리고 성형은······ 다시 할 수 있다면 다시 해야겠다.’
 멋있는 얼굴이 싫은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
 설사 여자가 아닌 남자라도.
 원해서 했던 성형이지만 아무래도 이 얼굴은 시대를 앞서가도 너무 앞서간 얼굴이라 딱 봐도 확 튀었다.
 “에오, 자연 성형을 할 줄 아니?”
 -제네시스 인공지능에 명령을 내려 의료 기계의 조작을 할 수 있습니다.
 “나 얼굴 좀 바꿔야겠다.”
 -어떻게요?
 “내가 골라 주겠다. 이왕 바꾸려면······ 잘 뭉개 봐야지. 이번 생은······ 여자는 포기한다. 젊은 육체를 얻었으니 잃는 것도 있어야지.”
 이 모든 게 나라를 위해서!
 자연 성형 후에 얻은 얼굴은 보통보다 한참 아래인 우락부락한 생김새였다.
 ‘스스로 얼굴을 망가뜨릴 줄은 몰랐는데.’
 본격적인 출발 전에 선탠도 잔뜩 해서 최대한 이 시대에 살던 사람인 것처럼 외모를 꾸며 사람들을 만나도 위화감이 없도록 했다.
 무기로는 제5구역인 의학, 연구실의 벽 한쪽에 장식용으로 걸려 있던 장검과 식사용으로 쓰는 작은 칼을 챙겼다.
 그리고 머릿속에 있는 에오가 제네시스의 인공지능과 통신을 하기 위한 것으로 말벌 로봇 하나를 품에 넣었다. 에오도 무선통신을 하지만 그 거리는 불과 1킬로미터 정도이기에 먼 거리의 통신은 수백 킬로미터도 통신이 가능한 말벌 로봇이 필요했다. 날아다니게 하지 않고 통신만 한다면, 말벌 로봇은 1회 충전으로 백 일까지도 버틸 수 있다고 했다.
 먹을 식량도 짐에 포함시켰다.
 이 식량은 그냥 식량이 아니라 우주를 항해하는 제네시스에서 만든 식량으로 특별한 가공 처리가 된 것으로, 상하지도 않으며, 크기가 손바닥만 하지만 하나만 먹어도 하루 동안 배부를 정도였다. 그러다 보니 식량 백 개도 양이 얼마 안 되어 품에 넣기 쉬웠다.
 ‘산맥을 따라 가야 하니 맹수를 만날 가능성이 높다. 한국 호랑이는 무서운데.’
 한국 호랑이, 백두산 호랑이나 시베리아 호랑이라 부른다.
 호랑이들 중에 가장 큰 종으로 수컷은 약 4미터에 달하고, 암컷은 약 3미터. 몸무게는 수컷이 330킬로그램까지, 암컷은 250킬로그램까지 나간다.
 ‘무서워할 게 아니라 맞서서 싸워야지. 호랑이도 이길 정도는 되어야 조선을 깨고 대한제국을 만들 게 아니냐.’
 
 
 
 * 정주성을 향해
 
 
 
 출발은 새벽녘.
 지도도 없지만 가는 위치는 에오가 정확히 알려 주었다.
 에오는 주위에 퍼트린 말벌 로봇들을 이용해 삼각측량법을 써서 현재 위치를 정확히 알아내고 있었다.
 비록 도보였으나 전력 질주로 뛰는 것만큼 이동속도가 빨랐다. 젊은 육체에 육체 강화까지 해서 그런지 발을 내딛는 것부터 달랐다.
 땅을 한 번 디딘 뒤 발에 힘을 주어 허벅지를 쭉 뻗으면 세찬 바람 소리를 내며 몸이 솜털처럼 솟구치는데, 제대로 길이 나지 않은 산속을 가는데도 평지에서 달리는 것보다 훨씬 빠른 느낌이었다.
 ‘휴우, 이렇게라면 며칠이면 갈 수 있지 않을까?’
 설악산에서 민란이 일어난 평안도까지 날아간다면 불과 몇십 분.
 도로가 있어서 차를 몰고 가면 몇 시간.
 하지만 험한 산길을 따라 도보로 이동할 경우에 길을 잘 찾아서 간다고 하더라도 족히 며칠은 걸릴 거리다.
 아니, 산에 맹수가 우글거린다고 가정하면 며칠이 아니라 몇십 일이 걸려도 이상하지 않을 거리였다.
 산속의 공기는 너무도 맑아 숨을 쉴 때마다 기분이 좋아졌다.
 이렇게 가기를 몇시간.
 어흐으응!
 산을 울리며 퍼져 오는 호랑이의 울음소리.
 ‘헉! 호랑이네. 진짜 있기는 있구나.’
 자신감에 넘치던 몸이 살짝 움츠러들었다.
 갑자기 튀어나오면 어쩌나 싶어 허리에 찬 검을 손에 들고서 다시 이동했는데 저녁이 될 때까지 호랑이나 다른 맹수는 만나지 않았다.
 해가 떨어지고 저녁이 되니 날이 어두워 더는 이동을 할 수 없었다.
 시간을 보니 아직 저녁 6시.
 ‘으음, 더 갈까?’
 에오에게 부탁해 적외선 모드로 바꾸면 빛과 상관없이 사물을 구분할 수 있다.
 ‘오늘은 첫날이잖아. 벌써부터 무리하지 말자.’
 이른 잠을 청하기 위해 높은 나무를 찾았다.
 ‘동굴이라도 찾아서 그 안에 들어가 이슬비를 피하며 잠을 자면 좋겠지만 그러기에는 너무 위험해.’
 맹수가 나타나 동굴로 들어올 수 있어서였다.
 적당한 굵기의 나무를 찾자 두 팔과 두 다리를 이용해 올라갔다. 신발도 이 시대의 것을 써야 하기에 독수리 로봇이 가져온 짚신을 신었는데 나무 오르기가 여간 힘든 게 아니었다. 거의 두 팔의 힘과 재빠른 순발력으로 올라갔는데 육체 강화를 하지 않았다면 엄두도 못 낼 일이었다.
 ‘호랑이도 나무를 잘 타지만 이 당시에는 호랑이만 아니라 표범도 있다. 생각보다 높게 올라가야 해.’
 약 10미터를 올라왔지만 안심이 안 돼서 20미터까지 올라갔다. 몸을 지탱해 줄 만큼 굵은 가지를 선택해 주저앉은 후에 가슴에 두른 술띠를 풀러 나무를 두르고 허리에 묶었다.
 ‘밧줄이 아니라 내 몸을 지탱하기에 역부족일 수는 있겠지만 그래도 바로 떨어지는 것은 막아 주겠지.’
 에오를 시켜 자신이 있는 곳으로 말벌 로봇들 수십 마리를 보내 주위를 경계하고 다른 생명체가 다가오면 경고 음을 내도록 했다.
 말벌 로봇은 1회 충전으로 이틀 정도는 날 수 있기에 유혁이 있는 곳까지 날아와서 감시한 후에 돌아가는 것까지도 문제가 없었다.
 ‘이제 자면서 쉬어 볼까?’
 밤이 되니 호랑이만 아니라 여러 가지 맹수들의 울음소리가 여기저기에서 들려왔지만 눈을 감고 잠을 청했다.
 
 
 
 눈꺼풀을 통해 희미하게 들어오는 빛.
 ‘아침? 아직 새벽이겠지?’
 부르르르르.
 유혁은 몸을 떨며 눈을 떴다.
 밤새 이슬을 맞으며 잤으니 몸이 떨리지 않을 수 없었다.
 아무 일 없이 곱게 잠만 잔 것이 아니라 꿈에서 이무혁에게 무술 수업을 받았으며, 간밤에 주위를 경계하는 말벌 로봇이 두 번이나 경고를 보내는 바람에 잠을 깨 주위를 살폈다가 다시 잠을 청해야 했다.
 밝은 달빛을 이용해 무엇이 나타났나 확인했는데 한 번은 늑대들이었다. 이놈들은 나무를 타고 오르는 재주는 없으니 무시했다.
 두 번째는 정확히 무엇인지 보지는 못했고, 나무 틈으로 양쪽 눈에 일렁이는 푸르른 안광만 보았다.
 심상치 않은 놈이란 것은 직감했지만 말벌 로봇의 에앵거리는 경고 음 때문인지 나무 뒤에서 가까이 나오지는 않았다. 아마 놈도 생전 처음 듣는 에앵 소리가 무척이나 당황스러웠을 게 분명했다.
 ‘말벌 로봇이 내는 경고 음을 바꿔야겠어. 맹수야 상관없지만 사람들이 들으면 이상하다 할 게 분명하잖아.’
 당장은 어찌할 수 없지만 나중에는 꼭 바꾸리라 생각했다.
 품에서 챙겨 온 식량을 꺼내 손바닥만 한 것 하나를 먹으며 간단하게 아침 식사를 끝냈다. 그리고 조심하며 나무 위에서 땅으로 내려와 바로 검을 빼 들었다.
 어제 어슬렁거리던 늑대들이나 푸른 안광의 맹수가 언제 어디에서 갑자기 덤벼 올지 모르니 경계를 늦출 수 없었다.
 ‘일단 내려왔으니 쫓아오든 말든 빨리 이동하자.’
 가야 할 목표가 있는 북서쪽으로 방향을 잡고 냅다 뛰었다.
 후다다다닥.
 휙휙, 휙휙휙······.
 위급하다 여기고 힘내서 달리니 케일록이 말한 것처럼 몸에서 호르몬이 분비되며 다섯 배의 힘이 발휘되기 시작했다.
 하도 빨리 뛰어서 좌우로 스치고 지나가는 나무들이 만들어 내는 잔상들이 서로 이어지는 느낌이 들 정도였다.
 어떨 때는 다람쥐 같은 작은 동물들도 만날 때가 있었는데 이놈들은 어찌나 놀라던지 뒤로 발라당 넘어지며 몇 번이나 땅을 구르는 놈들이 많았다.
 한참을 뛰는데도 별로 지치지가 않으니 오히려 놀란 것은 유혁이었다.
 ‘내 몸 진짜 좋구나. 히야, 마라톤을 하면 한 시간도 안 되서 완주하겠는걸.’
 한 시간이 지나니 다섯 배의 효과는 사라졌다.
 한참이나 무리해서 힘을 썼기에 쉬어야겠다고 생각하는데 햇빛이 잘 드는 큰 바위가 눈에 띄어 그곳으로 갔다.
 바위 꼭대기로 올라간 후에야 멈추고서 제자리에 주저앉아 심호흡했다.
 후우우, 후우우. 후우우우······.
 온몸에서 땀이 비 오듯 쏟아져 내렸는데 땀과 함께 간밤의 이슬이 섞이며 이상하고 야릇한 냄새가 진동했다.
 ‘괜찮아. 이렇게 십여 일은 찌든 땀내가 몸에 배어야 조선 시대 사람처럼 보일거야. 위생은 당분간 잊고 살아야 해.’
 햇빛이 좋으니 젖은 옷도 말릴 겸해서 바위 위에서 점심 식사를 했다.
 한참이나 지나 다시 일어난 후에는 또다시 달리기 시작했다. 이번에는 다섯 배가 아니라 육체가 강화된 두 배의 힘으로 달렸다.
 유혁은 하루라도 빨리 산을 벗어나 난이 일어난 곳으로 가고 싶었다.
 
 
 
 산을 타고 다닌 지 나흘째.
 드디어 맹수와의 첫 대결이 펼쳐졌다.
 상대는 유혁이 쉬고 있을 때 접근한 호랑이.
 수컷인지 몸집이 족히 4미터는 될 정도로 우람하며 얼굴도 커서 저놈이 입을 벌리면 머리만 아니라 어깨까지 들어갈 것 같았다. 눈빛도 얼마나 매서운지 바라보기만 해도 기가 질릴 정도였다.
 동물원 우리에 갇혀 있는 호랑이나 보아 왔던 유혁.
 호랑이가 잇몸을 드러내며 수십 개나 되는 날카로운 이빨을 보이는데 저놈의 입에 물리기만 하면 살점은 물론이고 뼈까지 단박에 떨어져 나갈 것 같았다.
 스으윽.
 상대에게 허점을 보이면 안 되기에 부릅뜬 양쪽 눈으로 호랑이를 노려보며 한 발을 앞으로 내디뎌 자세를 취했다.
 두 손에 든 검은 언제라도 내리칠 준비가 되어 있었다.
 불끈불끈, 불끈불끈.
 위기 상황이기에 뇌의 명령에 따라 몸에서 육체를 강화하는 호르몬이 마구 분비되어 근육마다 힘이 솟구쳤다.
 ‘상대는 호랑이다. 대충은 없어!’
 호랑이도 번쩍거리는 검을 든 유혁이 만만치 않게 느껴졌는지 묵직한 네발로 옆으로 이동하며 달려들 타이밍을 찾았다.
 ‘와라! 와! 와!’
 속으로 외치고 있는데 드디어 호랑이의 첫 공격이 시작되었다.
 크아아아앙!
 호랑이는 굉음의 포효와 함께 네 다리로 땅을 박차며 유혁을 향해 날아올랐다.
 유혁은 피하거나 물러서는 게 아니라 호랑이가 몸을 솟구치려는 그 찰나에 바람을 가를 만큼 빠르게 검을 수직으로 올려 세웠다. 그러고는 우렁찬 기합과 함께 몸을 앞으로 숙이며 있는 힘을 다해 내리쳤다.
 “우와아아아앗!”
 휘이이익~ 서걱.
 호랑이의 머리 꼭대기부터 시작해 안면을 지나 윗잇몸과 아랫잇몸 그리고 턱까지 검이 지나가며 남긴 뻘건 검흔!
 철퍼덕.
 공중에 날아올랐던 호랑이의 몸뚱이가 수직 낙하하여 땅바닥에 떨어졌다.
 촤아아아아앗!
 머리 꼭대기부터 아래턱에 이르기까지 안면 전체에서 터져 나오는 피.
 끄르르르르~ 털썩.
 가래 끓는 소리를 내더니 눈이 뒤집히며 쓰러지는 호랑이.
 단 한 번의 공격. 그리고 유혁의 승리였다.
 치고받고 하는 것도 없었으며, 쫓고 쫓기는 것도 없었다.
 잔뜩 긴장한 상태라 평소보다 더 큰 힘을 발휘할 수 있는데 약물의 효과로 그것의 다섯 배나 되는 힘이 나오니 호랑이의 살과 뼈까지 그대로 잘라 버린 것이다.
 아주 단순한 결투 같지만 생사를 다투는 일이었다.
 태어나서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이렇게 긴박한 순간이 없었다.
 부들부들~ 주르르르.
 이기고 나서 뒤늦게 등줄기를 타고 차가운 한기가 좌르르 흐르는 바람에 심하게 몸을 떨었고, 자신도 몰래 오줌까지 지리고 말았다.
 ‘이, 이런.’
 승리의 기쁨보다 오줌을 싸 버린 게 부끄러웠다.
 ‘누구도 보지 않으니까 상관없잖아. 흘린 오줌 자국은 계곡물에 담가서 씻어 버리면 그만이다. 그보다 호랑이 가죽은 어떻게 벗기나?’
 그냥 버려두고 갈까 했지만 무두질도 경험이라 생각하니 해 보고 싶었다.
 품에서 단검을 꺼내 엉성한 솜씨로 가죽을 벗기기 시작했고, 여기저기 생채기가 많은 상태로 겨우 가죽을 벗길 수 있었다.
 ‘젠장, 무지 힘드네. 이렇게 생채기가 많아서는 팔아 봤자 많은 돈을 받기 힘들겠는데. 그리고 호랑이 가죽을 들고 나타나면 관병들이 가만히 있을까?’
 걱정은 들지만 당장 깔고 덮기에는 좋을 것 같았다.
 다른 이점도 생각났는데, 호랑이 특유의 냄새가 주위에 번질 테니 다른 맹수가 감히 접근도 못 할 것 같았다.
 ‘버리더라도 오늘만큼은 깔고 자자.’
 둘둘 말았더니 어깨에 짊어져야 할 만큼 부피가 크고 무게도 무거웠다. 그러나 편안한 잠자리만 생각하며 발걸음을 옮겼다.
 
 
 
 일주일 후, 정주성이 보이는 곳까지 도착한 유혁.
 호랑이 가죽은 하루만 덮고 잔 뒤, 다음 날이 되자 버렸다. 다른 동물들이 접근하지 않는 것은 좋은데 무거울 뿐만 아니라 빨리 가야 하는데 이것 때문에 지체되는 것 같아서였다.
 귀한 것이고, 조선 시대에 통용되는 돈을 하나도 가지고 있지 않기에 관병의 눈을 피해서 어떻게든 돈을 받고 팔까 생각도 했지만 어떻게 구했는지 설명하는 것이 난감해 그냥 버리는 걸 택했다.
 에오에게 지시해 삼백여 마리의 말벌 로봇들을 평안도 쪽에 보내어 감시토록 했는데 난을 일으킨 자들이 관군에 쫓기어 정주성에 들어갔다는 소식을 접했다.
 ‘으음, 정주성에 들어갔으니 곧 관군이 성 밑으로 땅굴을 파고서 폭약으로 성벽을 무너뜨릴 것이다. 그 후에 난은 진압되지. 홍경래는 죽고, 2천여 명의 백성이 잡혀서 무참하게 처형된다.’
 이 역사를 뒤바꿔야 하니 유혁은 마음이 급했다.
 시간을 단축하고자 산에서 나와 사람들이 가는 도로를 이용했다.
 가는 길에 마을을 몇 개나 만났는데 하나같이 피폐한 삶에 찌들어 있었고, 감시를 나간 말벌 로봇들이 모아 온 사람들의 대화를 들어 보니 실상은 더욱 심했다.
 이 중에는 배고픔을 덜기 위해 딸을 파는 부모의 대화도 있었고, 빚을 갚지 못해 노비가 된 자의 얘기도 있었다.
 또 옆집에 누군가가 간밤에 죽은 채 발견되었는데 마를 대로 말라 굶어 죽은 게 확실하다는 얘기도 있었으며, 인육을 사고판다는 대화도 있었다.
 듣고 있으면 어떻게 이런 세월을 지나면서도 자신이 살던 시대까지 대한민국이 없어지지 않고 이어졌는지 희한할 정도였다.
 난이 일어난 곳으로 가까이 갈수록 한민족을 구하겠다는 유혁의 결심은 더욱 단단히 굳어졌다.
 나름대로 조심한다고 했지만 난이 일어난 지역에 가까이 가니 관병들과 맞닥뜨리는 일이 생겨 버렸다.
 여차하면 관병들을 죽여 버리려 마음먹고 있는데 관병 중 하나가 신분을 확인하겠다며 호패를 요구했다.
 ‘가짜로 만든 호패다. 이것이 들통 나면 바로 검을 빼고 죽여 버리자!’
 단단히 마음을 먹고 품에서 호패를 꺼내 보였다.
 천만다행으로 관병은 호패에서 별 이상을 찾아내지 못하고 조심하라는 말만 하면서 다시 건네주었다.
 ‘휴우, 10년 감수했네. 앞으로는 난이 일어난 정주성으로 더 가까이 가니 가는 길목마다 관병들이 있겠지?’
 어쩔 수 없이 밤을 이용해서 몰래 이동하기로 했다.
 실제로 정주성에 가까이 갈수록 감시가 삼엄하여 가는 길목마다 관병들이 지키고 있었기에, 유혁은 밤을 이용해 몰래 지나갔다.
 
 
 
 드디어 정주성이 보이는 곳에 도착한 유혁.
 ‘휴우, 정주성을 그냥 들어갈 수는 없지. 맨몸으로 가면 첩자로 오인할 수도 있다. 커다란 선물을 가지고 가야 한다.’
 깊은 한밤중이 될 때까지 수풀에 숨어 기다렸다.
 시간이 지나 칠흑 같은 어둠이 찾아오자, 하늘도 유혁을 도우려는지 초승달로 평소에 비해 빛이 많이 약하였다.
 에오에게 지시하여 말벌 로봇 삼백여 마리를 죄다 풀어서 주변을 감시하며 관군의 진지를 확인하고 지휘부가 어디에 있는지도 파악했다.
 관군의 규모는 약 8천 명.
 ‘장수들이 머무는 막사를 급습해 장수들을 다 죽인다. 그리고 그들의 머리를 잘라 정주성으로 들어가 인정받고 병력을 지휘할 장군이 된다.’
 이것이 유혁의 일차 목표였다.
 ‘장군이 된 후에는 병사들을 이끌고 야습해서 관군을 모두 물리쳐 병력을 정주성 밖으로 빼낸다.’
 여기까지가 이차 목표였다.
 삼차 목표는 평안도만 아니라 다른 지역으로까지 세를 늘리는 것.
 경계가 삼엄했지만 정찰하는 말벌 로봇과 에오가 바꿔 주는 적외선 모드를 이용해 적병들의 빈틈을 파고들며 장수들의 막사가 있는 곳까지 갔다.
 장수의 막사는 총 다섯 개.
 밤이지만 장수가 있는 막사였기에 다섯 개의 막사에는 네 명이 조를 이루어 경계하며 입구 양쪽으로 횃불을 밝혀 놓고 있었다.
 횃불이 있기에 시야는 적외선 모드를 풀어 평소처럼 바꾸고, 가지고 다니던 장검과 단검을 양손에 나눠 들었다.
 ‘작전은 딱 하나다!’
 폭풍이 지나가는 것처럼 순식간에 경비병들과 장수들을 모두 죽이고, 적들이 당황하여 어쩔 줄 모를 때 바람처럼 도망치는 것!
 숨어서 접근하는 것은 더 이상 불가능하고, 다른 방법은 떠오르지도 않았다.
 무모하기 짝이 없는 작전이지만 때로는 무식한 방법이 통하는 법!
 육체 강화에다 위기를 느끼면 동체 시력, 근육의 힘, 순발력이 다섯 배로 늘어나니 무모하다고만 할 수도 없었다.
 어찌 보면 이것이 가장 최고의 방법이었다.
 또 사람을 죽여 본 적이 없어서 어떻게 해야 하나 걱정도 들기에 그냥 머뭇거릴 새도 없이 빠르게 움직이는 게 자신을 위해서도 좋을 것 같았다.
 후우우우, 후우우우, 후우우우.
 길게 세 번이나 숨을 들이쉬었다가 내쉬었다가 하기를 반복했다.
 불끈불끈, 불끈불끈.
 잔뜩 긴장하니 다시 다섯 배의 효과가 일어났다.
 ‘시작하자!’
 후다다다다다닥.
 장검과 단검을 든 두 손에 힘을 주고 숨은 곳에서 쏜살같이 뛰어나갔다. 달려가면서 머릿속으로 오로지 하나만 생각하려고 노력했다.
 ‘주사위는 던져졌다. 적을 죽이지 않으면 내가 죽는다! 난 죽기 싫다! 죽지 않으려면 적을 죽여야 한다!’
 꿈속에서 숱하게 연습을 했지만 실전은 처음.
 잔뜩 긴장할 수밖에 없었다.
 우선 목표는 다섯 개 막사를 경비하고 있는 스무 명의 병사들.
 휘익~ 서걱, 휘익~ 서걱, 휘이익~ 서걱······.
 팔이 한 번 움직일 때마다 양손에 든 장검과 단검이 병사의 목을 베며 지나갔다.
 다섯 배나 되는 동체 시력과 순발력은 바람처럼 빠른 속도로 움직이면서도 들고 있는 검으로 정확하게 목표 지점인 적병의 목을 향해 공격할 수 있게 해 주었으며, 굳이 많은 힘을 주지 않아도 휘두르는 속도가 워낙 빠르니 살과 함께 목젖까지 베이며 병사들은 픽픽 쓰러졌다.
 ‘하나, 둘, 셋, 넷······.’
 숫자를 세며 마음을 가라앉히려 노력했다.
 스무 명의 병사를 다 죽이는 데 걸린 시간은 불과 15초 정도. 한 명에 1초도 걸리지 않은 셈이었다.
 마지막 스무 번째 병사가 쓰러지는 순간에 주저 없이 가까운 막사를 향해 쏘아진 화살처럼 뛰어들었다.
 “누구냐!”
 일반 병졸이 아닌 장수라서 그런지 기감이 달랐다.
 연속해서 병사들이 쓰러지는 소리를 들어서인지 잠자리에 누워 있어야 정상인데 벌써 검을 들고 자세를 잡고 있었다.
 샤샤샤샥~ 휘이익.
 쓰으윽.
 “크으으윽.”
 빠름을 무기로 삼고 있기에 자세를 잡은 적을 두려워하지 않고 순식간에 접근해 장검을 휘둘러 병사들을 죽일 때처럼 적장의 목을 베었다.
 적장이 신음하면서 몸을 수그리자 옆으로 돌아 나오며 이번에는 장검을 위에서 아래로 힘차게 휘둘렀다.
 휘이이익~ 뎅강.
 떼구르르르.
 땅으로 떨어져 내리는 적장의 머리통.
 잽싸게 주운 다음 허리끈에 죽은 자의 머리카락을 감아 묶었다.
 이때 옆 막사에서 들려오는 다른 적장의 우렁찬 목소리.
 “무슨 일이냐!”
 유혁은 소리치며 막사 밖으로 뛰어나왔다.
 “사슴이 나타나 소동이 벌어졌습니다.”
 말은 이렇게 하면서 얼른 옆 막사로 들어가 자리에서 일어나 신발을 신으려는 적장에게 달려들었다.
 휘이이익~ 뎅강.
 두 번째 적장은 고개를 숙이고 있어 싸울 것도 없이 바로 머리통을 잘라 낼 수 있었다.
 ‘세 번째도 쉬우면 좋은데.’
 두 번째 적장의 머리통을 집은 후 머리카락을 허리끈에 감아 묶고 세 번째 막사를 향해 힘차게 뛰었다.
 후다다다닥~ 멈칫.
 막사로 들어가려는데, 눈앞에 번쩍거리는 게 느껴서 급히 몸을 세웠다.
 휘이이이익!
 코를 스치듯 지나가는 상대의 검!
 뛰어난 동체 시력과 순발력으로 얼른 몸을 세우지 않았다면 머리가 베이거나 적어도 코는 무사하지 못했을 것이다.
 위험한 순간이었다고 해서 쉬고 있을 틈이 없으니 바로 공격에 들어갔다.
 샤샤샤샤샤샥.
 “우와아아앗!”
 휘이이익~ 써어어어억!
 미리 방비하고 있다가 공격을 가할 정도이니 적장은 실력이 뛰어난 자였다.
 옆으로 얼른 피하며 처음으로 벼락같은 기합과 함께 검을 휘둘렀다.
 목소리가 바깥으로 퍼져 나가 병사들이 몰려올 테지만 당장은 눈앞의 적장을 죽이는 게 더 중요했다.
 유혁이 휘두른 검은 적장의 뒷목을 파고든 후에 가슴 앞으로 나오며 몸통을 통째로 베어 두 동강이를 내 버렸다.
 검은 지나갔지만 상대가 몸을 떨며 목석처럼 멈춰 있었다. 유혁은 재빨리 몸을 빙그르르 회전한 후에 다시 장검을 휘둘렀다.
 휘이이익~ 뎅강.
 세 번째 적장의 머리통이 땅바닥을 굴렀다.
 얼른 들어서 허리끈에 머리카락을 감고서 네 번째 막사로 향했다.
 이때쯤에는 근처에서 소리를 듣고 병사들이 다가오기까지 했다. 그리고 네 번째 장수는 이미 검을 들고 유혁을 맞이할 준비를 끝낸 상태!
 휘이익~ 차아앙!
 두 검이 부딪치며 내는 맑은 쇳소리.
 막사로 들어서며 검을 휘두를 때 이미 상대가 검으로 막을 것을 예상했기에 다른 손을 위로 올리며 들고 있던 단검을 내던졌다.
 보통의 경우라면 네 번째 장수는 검을 휘둘러 단검을 막을 테지만 그건 보통의 경우였고, 다섯 배나 되는 힘과 순발력으로 던진 단검을 어찌 막으랴!
 휘이익~ 푸우욱!
 단검은 심장이 있는 가슴팍에 자루까지 깊숙이 꽂혔다.
 “크아아악.”
 상대가 비명을 지를 때 어느새 옆에서 돌아가며 장검을 휘두르는 유혁!
 휘이이익~ 뎅강.
 이로써 네 번째 장수까지 마무리되었다.
 ‘휴우, 하나만 남았다. 잘해야 한다!’
 상대의 몸통을 발로 밟고, 가슴에 꽂아 놓은 단검을 우악스럽게 빼냈다.
 푸슈슈슈슛.
 분수처럼 솟아나는 피!
 단검 회수를 마치고 막사 밖으로 나오니 이미 창을 든 병사들 십여 명과 함께 활을 조준하는 병사들 십여 명도 눈에 들어왔다.
 다행인 것은 조총을 든 자가 없다는 점.
 아무래도 야간이고 조총은 화약을 집어넣는 등 손이 많이 가니 설사 가지고 있다 해도 지금 쓰기에는 적합하지 않았다.
 파아아악!
 유혁은 한 발을 들어 힘차게 땅바닥을 찍으며 앞으로 뻗었다.
 파바바바바바박.
 사방으로 퍼지며 번지는 흙.
 짚신을 신은 발로 내리쳐 많이 파내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평범한 사람의 다섯 배나 되는 힘으로 땅을 박찼기에 파내진 흙덩이의 양도 많았다. 병사들을 한꺼번에 막는 효과로는 만점이었다.
 “어이쿠!”
 눈을 찡그리며 고개를 돌리는 병사들.
 활을 든 병사들 중 몇몇이 시위를 놓아 유혁에게 화살이 날아왔으나 뛰어난 동체 시력으로 잽싸게 피하며 마지막 막사로 뛰어들었다.
 타아아앙!
 마지막 적장은 조총으로 대응할 준비를 갖추고 있었다.
 소리가 들리자마자 들고 있던 검을 몸 쪽으로 붙이며 날아오는 쇠구슬을 막았다. 보통이라면 불가능하지만 강화된 육체를 가진 유혁이기에 가능한 일!
 따아아앙~ 부드드드드드.
 쇠구슬은 검신의 한가운데를 맞힌 뒤 옆으로 튀어 나갔다.
 현대식 총이 아니라 조총이라 하지만 폭발하는 화약의 힘을 이용하는 것이라 쇠구슬에 맞은 검이 마구 떨려 하마터면 손을 놓을 뻔했다.
 조총의 약점은 공격 후!
 후다다다닥.
 휘이이익~ 푸우욱!
 떨리는 장검이 아니라 다른 손에 든 단검을 상대의 목 깊숙이 집어넣었다.
 털썩.
 마지막 장군이 두 무릎을 땅에 댔다.
 휘이이익~ 뎅강.
 떼구르르르.
 ‘끝냈다. 적장 다섯을 모두 죽였어!’
 이제 남은 것은 막사 앞에 있는 적병들을 물리치며 빠져나가는 것.
 “흐이챠!”
 마지막 장수의 머리통을 허리끈에 맨 후에 단검은 품에 넣고 죽은 장수의 몸을 한 손으로 힘껏 들어올렸다.
 밖에 있던 병사들 중에 벌써 서넛이 막사 안으로 들어온 상황.
 “우와아아아아앗!”
 죽은 장수의 몸을 앞으로 내밀며 땅을 박차고 앞으로 내달렸다.
 푸우욱, 푸욱, 푸욱.
 병사들이 든 창이 장수의 몸에 꽂히는 소리.
 힘이 장사인 유혁은 주춤거리지 않고 죽은 장수의 몸을 세우고서 힘을 가해 창을 든 병사 서넛까지 함께 밀어 버렸다.
 “으아아악.”
 벌러덩, 벌러덩, 벌러덩······.
 앞에 있는 병사와 뒤에 있던 병사들까지 대여섯 명이 함께 뒤로 넘어졌다.
 휙휙, 휙휙휙, 휙휙휙.
 이사이 유혁을 향해 날아오는 화살들.
 잽싸게 무릎과 상체를 숙여 화살을 모두 피했다.
 ‘화살을 장전하기 전에 움직여야 한다!’
 병사들의 창까지 꽂혀서 죽은 장수의 몸을 마음대로 움직이기가 힘들기에 이건 그냥 놓아 버렸다.
 대신에 큰 걸음으로 앞으로 나가 바닥에 쓰러진 병사 중 하나의 멱살을 잡은 후 몸을 빙그르르 돌리며 잡고 있던 병사를 화살을 쏘는 병사들에게 날렸다.
 “으으, 피해!”
 누군가 소리쳤지만 날아오는 병사를 피하기엔 그의 덩치가 너무 컸다.
 우당탕탕탕.
 여러 명이 한데 엉키며 난리가 났다.
 후다다다다다닥.
 기회를 놓치지 않고 어둠 속으로 내달리는 유혁.
 “적이 도망친다!”
 “잡아라! 잡아!”
 크게 소리치며 병사들이 뒤를 쫓았으나 유혁의 달리기는 너무나 빨라 이미 어둠 속으로 자취를 감춘 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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