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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군 1권 1화

2016.05.23 조회 2,966 추천 20


 서(序) 일(一)
 
 
 휘이잉······!
 매서운 칼바람이 시신들을 휩쓸고 지나갔다.
 “비, 비켯! 저리 비켯”
 겁에 질린 사내가 바들바들 떨면서 앳된 청년의 목에 칼을 겨눴다.
 푸르릉······!
 청년의 몸뚱이만큼 큰 대감도(大砍刀)가 시퍼런 도광(刀光)을 뿜어내며 요악한 소리를 흘렸다.
 “칼 버려. 네가 빠져나갈 구멍은 없어.”
 삭막하다 못해 무미건조(無味乾燥)한 음성.
 흑색 갑옷을 입은 사내는 이미 열 명을 베어 넘겼다.
 그의 검에서는 아직도 붉은 핏방울이 뚝뚝 떨어져 내린다. 옷은 피가 튀어 붉은 물감을 뿌려놓은 것 같다.
 그는 악마다.
 열 명을 죽이면서 눈살 한 번 찡그리지 않았다. 무덤덤한 얼굴로 닭이나 오리를 잡듯이 손쉽게 죽여 버렸다. 사람을 죽이는 데는 이골이 난 사람처럼 능숙한 솜씨였다.
 싸우는 도중에 이마를 찢겨서 핏줄기가 흘러내리고 있지만 닦을 생각도 하지 않는다.
 “비, 비켯! 비켯! 농담 아냐! 한 발짝이라도 다가서는 날에는 이 새끼 대가리를 잘라버리겠어!”
 말을 하는 사내는 청년을 인질로 잡고 있음에도 불안한 표정을 떨치지 못했다. 대감도를 들고 있는 손도 덜덜 떨렸다. 그는 사내가 한 걸음 다가오면 한 걸음 물러서면서 살 길이 청년에게 있다는 듯 청년의 몸뚱이만 바싹 움켜잡았다.
 “타협할까? 그 철부지를 놔줘. 허면 나도 널 놔주지.”
 “흐흐흐! 누굴 어린아이로 아나······ 장난하지 마!”
 “난 장난 같은 것 안 한다. 식언(食言), 허언(虛言)도 안 한다. 내 말은 믿는 게 좋아.”
 “흐흐흐! 이 새끼가 누군지 알아. 장군(將軍) 새끼 아들이잖아! 맞지? 흐흐흐! 내가 이런 놈을 놔줄 것 같아. 물러서! 안 물러서면 이 새끼 귀때기부터 잘라낼 거야!”
 대감도를 든 자는 청년을 질질 끌며 뒷걸음질을 했다.
 청년이 다급히 말했다.
 “저, 정말이에요. 저분 말을 믿으세요. 저분은 결코 식언 같은 건······”
 “시끄러워! 콱 배때기를 쑤셔버리기 전에 조용히 해! 너 같으면 손에 쥔 떡을 버리고 남이 먹다 남긴 누룽지나 달라고 하겠냐?”
 사내가 대감도에 힘을 주자 청년의 목이 살짝 그어지며 피 몇 방울이 흘러내렸다.
 “흐윽!”
 청년의 눈길이 다급해졌다.
 그는 사색이 된 얼굴로 천천히 다가오는 사내에게 간청했다.
 “제, 제발 이자 말대로······ 가, 가까이 오지 말고······ 이자를 보내줘. 제발.”
 “안 됩니다.”
 갑옷을 입은 사내는 싸늘하게 말하며 검을 들어올렸다.
 “내가 베풀 수 있는 최대한의 호의를 말했다. 받아들일 것인지 아닌지 확실하게 말해라.”
 “흐흐흐! 네놈 눈에는 이 새끼가 보이지 않냐? 이 새끼가 내 손에 있는 한······”
 그때였다.
 두두두두두!
 요란한 말발굽 소리가 들려왔다. 아직 모습을 보이고 있지는 않지만 뿌연 흙먼지가 피어나는 것으로 보아 백 장 정도 떨어져 있는 것 같다.
 그가 웃었다.
 “흐흐흐! 됐어! 됐어! 이 새끼 살리고 있으면 꼼짝 마. 한 발짝만 떼어놔도 죽여버리겠어. 흐흐흐!”
 득의양양한 사내와는 달리 청년의 얼굴은 새하얗게 질렸다.
 “나, 나 좀 구해······”
 갑옷을 입은 사내가 청년의 말을 잘랐다.
 “타협은 글렀군.”
 “흐흐흐! 미친놈. 이 상황에서 타협할 놈이 어디 있냐?”
 쒜에엑!
 사내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날카로운 파공음과 함께 핏빛 검광이 흘렀다.
 “컥!”
 “커억!”
 두 마디 비명이 동시에 터져 나왔다.
 갑옷을 입은 사내는 대감도를 든 사내의 머리를 정확히 반으로 갈라놨다.
 즉사다.
 또 하나의 죽음이 있었다.
 청년의 목이 깨끗하게 잘라져 둥실 떠올랐다.
 갑옷 사내는 섬광처럼 빨랐다. 허나 상대는 목에 칼을 바짝 밀착시켜놓고 언제든 벨 준비가 되어 있었다. 그런 사람을 아무런 대가도 없이 베어 넘기지는 못한다.
 휘이잉!
 다시 한 번 매서운 바람이 불어와 방금 생긴 주검을 쓰다듬었다.
 두두두두두!
 말발굽 소리는 오십 장으로 가까워졌다.
 사내는 재빨리 자신이 죽인 사내의 품을 뒤졌다.
 그의 손에 들려 나온 건 지도(地圖) 한 장이다.
 요즘 들어 부쩍 토노번인(土魯番人)들이 활개를 치기 시작했다. 무엇 때문인지 자주 국경을 넘어와서 군사 동향을 염탐해간다. 그가 펼쳐든 지도에도 서저(西宁) 일대의 군사 배치가 세밀히 그려져 있었다.
 그는 지도를 챙긴 후, 청년의 시신과 머리를 주워들고 걷기 시작했다.
 두두두두두!
 말발굽 소리가 지척에서 들려왔다.
 
 “어쩔······ 수······ 없었는가?”
 “용서하십시오.”
 “후후후! 용서하라. 용서하라. 용서하랏!”
 분노가 하늘을 찔렀다.
 허나 갑옷 사내는 무표정했다. 어떠한 분노도 그를 동요시킬 수는 없을 것 같았다.
 “자네는 늘 임무가 먼저군. 내 아들 목숨보다 그까짓 지도 한 장이 더 중요했어. 아들놈은 겉멋 부리기 좋아하는 철부지고 그 지도는 국가 기밀이니까.”
 “죄송합니다.”
 “참 충성심이 깊어. 자네처럼 충성심 깊은 사람은 처음이야. 인정해. 내가 감당하지 못할 그릇이라는 것. 그래. 화끈하게 싸울 수 있는 곳으로 보내주지. 그게 좋을 거야.”
 웬만하면 기가 죽을 말, 허나 갑옷 사내는 무표정하게 말했다.
 “감사합니다.”
 그는 예도 취하지 않고 돌아섰다.
 그의 오래된 습관 중에 하나다.
 누군가 그에게 물어본 적이 있다. 왜 인사를 하지 않느냐고. 최소한 상관에게는 예를 취하는 게 옳지 않냐고.
 그는 심드렁하게 말했다.
 ―군인은 싸움만 잘하면 돼.
 
 
 서(序) 이(二)
 
 
 “싸움이란 게 뭔지 아는 놈이면 좋겠지. 어느 정도 독기(毒氣)도 있어야겠고. 그렇다고 얍삽한 놈은 곤란해. 약간 미련한 쪽이 좋겠어.”
 “범위를 더 줄여주십시오. 여기 있는 놈들 중 아무나 골라잡아도 그 정도는 됩니다.”
 “그런가? 후후후! 자네가 싸움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알겠네. 내가 말하는 싸움이란 이런 변방에서 세월만 죽이다가 한두 명 깔짝거리는 소꿉장난을 말하는 게 아닐세.”
 “말씀이 좀 지나치십니다.”
 “사흘을 버틸 만한 자. 있나?”
 “사, 사흘······ 씩이나!”
 “있나?”
 “······”
 그토록 자신만만하던 사람이 입을 꾹 다물었다.
 “사흘은 버텨줘야 하는데······ 없다면 할 수 없지. 이 일은 다른 곳에서 알아봄세.”
 그가 몸을 일으켰다.
 그러자 무엇인가 생각난 듯 급히 말했다.
 “한 놈 있습니다.”
 “그래?”
 그가 다시 앉았다.
 “여긴 없습니다. 전출을 보내버린 놈이라.”
 “그건 중요한 게 아니지. 그런 놈이 있다면 세상 끝까지라도 가서 찾아내야지. 그래, 어떤 자인가?”
 “싸움밖에 모르는 놈입니다. 소신이 보기에도 정말 싸움 하나는 기막히게 합니다. 단지······”
 “단지?”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는 위인입니다.”
 “우직하다는 뜻이군.”
 “그게 우직 정도가 아니라서······”
 “후후후! 우직이란 건 말이네, 대부분 좋게 말하지만 난 그렇게 생각지 않네. 아주 커다란 성격 결함이지. 잔머리를 굴리는 놈들보다 오히려 고지식한 자들이 다루기 쉽지. 허허허! 자네를 질색케 한 놈이라······ 점점 궁금해지는군. 그래, 어디로 보냈나?”
 “그게······ 복여위(福餘衛)로······”
 “복여위? 보낸 지는 얼마나 됐고?”
 “이 년이 얼추 지나갑니다.”
 “이 년? 이 년이면 상당히 오래됐군. 그런 데는 보통 삼 개월 단위로 배치 순환되지 않나?”
 “그자는······”
 “후후후! 말 안 해도 알 만하이. 미운 털이 단단히 박힌 자로군. 복여위에서 이 년이라······ 아직 살아 있겠나?”
 “워낙 지독한 놈이라······”
 “여기서 복여위까지는 수천 리 길. 자네도 소식 들어본 지 오래겠지. 헌데도 자네는 살아 있다고 생각해. 죽음의 땅인 복여위에서 이 년을 보냈는데.”
 “살아 있을 겁니다.”
 “상당히 흥미로워. 무엇 때문에 자네에게 그토록 미움을 받았는지는 묻지 않겠네. 허니 자네도 지금 이 순간부터 그 놈에 대한 건 모두 잊어버리게.”
 “그놈을 쓰실 겁니까?”
 “아직은 호기심뿐이야. 자네에게 미움을 받은 자라······ 알아보고 괜찮으면 그 자로 할 생각이네. 허허허!”
 늦은 밤, 군막(軍幕)에서 조용한 결정이 내려졌다.
 
 
 제1장 출문(出門)
 
 
 1
 
 
 찌륵! 찌륵······!
 풀벌레 소리가 깊은 어둠을 잔잔하게 건드렸다.
 이글이글 작열한 태양은 대지를 뜨겁게 달궈놓았다.
 공기도 찜통처럼 후덥지근한데다가 바람도 불지 않는다. 지독하게 더운 날이다.
 밤이 되어도 열기는 가시지 않았다. 아니, 더욱 더워지는 것 같다.
 바짝 마른 풀냄새도 고역스럽다. 흙냄새와 뒤섞인 풀냄새는 갈증을 불러오고, 토악질을 일으킨다.
 컹컹컹······!
 개가 무척 사납게 짖어댄다.
 목표로 삼은 표적은 놓친 적이 없다고 들었다. 호랑이도 겁을 집어먹고 물러선다는 맹견 중의 맹견이다. 사람 하나 찢어발기는 것은 순식간이다.
 팔부군(八部軍)이 자랑하는 혈사견(血死犬)에 대한 소문은 너무 많아서 모두 다 열거할 수가 없다.
 컹컹! 컹컹컹! 우르릉······!
 소리만 들었는데도 소름이 쫙 끼친다. 금방이라도 달려들어 목덜미를 물어뜯을 것 같다.
 “으아아악! 아아! 아아악! 사, 살려줘! 살려······ 아아악!”
 처절한 비명이 울렸다.
 명견의 으르렁거림과 사람의 발버둥이 한데 뒤섞여 밤하늘에 핏빛 구름을 그린다.
 비명은 금방 그쳤다.
 팔부군은 혈사견에게 먹이를 주지 않는다. 사냥을 해서 잡은 것을 먹게 한다.
 으르릉······ 컹컹! 으릉······!
 맹견들이 사납게 짖어대며 살을 뜯어먹었다.
 가끔은 뼈를 씹는지 오도독거리는 소리도 들려왔다.
 침묵은 참 마음을 편하게 해준다. 영원히 이 시간이 지속될 것 같다는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다른 느낌을 줄 때도 있다. 시간이 흐를수록 이 지옥에서 빠져나갈 수 없을 것이라는 좌절감을 불러온다.
 “으으으······!”
 공포에 질린 자는 입보다 몸이 먼저 말을 한다.
 이빨이 다닥! 다닥! 부딪치고, 경련이 일어나고, 사지가 비비 뒤틀린다. 그 다음에 나오는 것이 신음이다. 본인도 자각하지 못하는 사이에 삶과 죽음을 가리는 소리가 새어나온다.
 “저기도 있다!”
 누군가 신음소리를 들었다.
 컹컹! 컹컹······!
 맹견들이 침을 질질 흘리며 다가들었다.
 “침착해라! 침착해!”
 발각될 위험까지 무릎 쓰고 정신을 일깨워줬지만 그는 이미 겁에 질려버린 후였다.
 자기 스스로 신음소리를 자각했고, 때맞추어 맹견이 달려들면 머리보다 몸이 먼저 반응한다.
 휘익! 후다닥······!
 그는 숨었던 곳에서 뛰쳐나와 있는 힘껏 치달렸다.
 ‘미련한······’
 그렇다. 미련한 짓이다. 사방 십 리가 움직임을 거부하는 수렁 밭이다. 이런 곳에서는 제 아무리 빠른 자라도 한낱 굼벵이에 불과하다. 수렁 밭에서 태어나 수렁 속에서 사냥을 하며 자란 팔부군 맹견들을 당할 재간이 없다.
 꺼엉! 우르르릉!
 “허억! 사, 살려줘! 아아악! 살려줘!”
 그는 대여섯 걸음도 떼어놓지 못하고 뒷덜미를 물리고 말았다.
 으릉! 꺼엉!
 코앞에서 맹견들이 사람을 물어뜯는다.
 살이 찢긴다. 파육음이 생생하게 전달된다. 그의 피가 수렁을 타고 육신을 적셔온다.
 으릉! 으르르릉······!
 사냥은 밤새도록 지속되었다.
 
 그는 숨었던 수렁에서 기어 나왔다.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깊은 개흙에 푹 파묻혔다가 나온 관계로 온몸이 재색 빛이다.
 유독 한 군데 하얀 곳이 있으니 두 눈, 두 눈이 하얗게 빛났다.
 그는 무심히 사방을 훑었다.
 지난 밤 동안 세 명이 죽었다.
 그들의 살과 뼈가 곳곳에 흩어져 있다.
 풀썩!
 수렁이 들썩이며 자신처럼 온몸이 잿빛인 건장한 사내가 몸을 들어올렸다.
 “병신들.”
 그는 몸을 일으키자마자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중얼거렸다.
 “그토록 겁먹지 말라고 말해줬는데······ 그게 그렇게 어렵나? 두 눈 꼭 감고 두 귀 단단히 틀어막고, 날이 밝을 때까지만 기다리면 되는데, 그게 안 돼?”
 “가지.”
 그가 말했다.
 
 “지독한 놈들, 또 살아 왔어.”
 “좌우지간 저 두 인간은······ 전생에 분명히 지옥에서 어떤 짓을 했을 거야. 그러니 염라대왕도 거부하지.”
 “좌우지간 억세게 운 좋은 놈들이야.”
 두 사람은 온몸에 개흙을 묻힌 채 걸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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