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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로가기버튼 대형 설서린

대형 설서린 1권 1화

2016.05.30 조회 1,232 추천 9


 序
 
 
 열두살 때인가?
 시골 촌구석에서 늘 일어나는 일이 나에게도 일어났다.
 “꿇어.”
 “······”
 “새끼야, 무릎 꿇으란 말야!”
 이상하게도 그 말만은 듣고 싶지 않았다. 겁에 질린 꼬마아이가 무슨 생각이 있으랴마는 뱃속 깊은 곳에서 뜨거운 무엇이 울컥 치솟는 느낌이 들었다.
 “어! 이 놈 봐라? 네가 그렇게 싸움꾼이라며? 그래서 버티는 거야? 이 쥐방울만한 새끼가!”
 퍼억!
 묵직한 주먹이 머리통을 휘갈겼다.
 눈에서 번갯불이 튀었다.
 나이가 네다섯 살이나 많아 체격이 어른과 별반 다를 바 없는 형들은 주먹은 또래의 아이들이 조막손을 휘두르며 달려드는 것과는 차원이 달랐다.
 “머리 때리지 마!”
 “어쭈! 이게 이제는 앙살앙살 대들기까지 하네? 오냐, 어디 오늘 한 번 죽어봐라.”
 말 그대로 흠씬 두들겨 맞았다.
 맞지 않으려고 피해보기도 하고, 대들기도 했지만 빙 둘러선 형들에게는 웃음거리밖에 되지 않았다.
 결국 난 울음을 터트렸다.
 코에서 코피가 났다고 운 것이 아니라 분해서 울었다.
 형들은 그제야 때리는 것을 멈췄다.
 “너 앞으로 한 번만 더 환(晥)이에게 손대면 아예 죽여 버릴 거야. 알았어! 꼬마새끼가 뭐가 되려고 주먹질이야, 주먹질이.”
 
 그날 나는 얌전히 잠을 청했어야 했다.
 어린아이들끼리 서로 맘이 안 맞아 주먹이 오간 것 가지고 형들이 나서서 몰매를 가한 건 억울하기 짝이 없지만, 하룻밤 푹 자고 나면 나 자신도 잊어버릴 일이었다.
 난 자지 못했다.
 ‘비겁하게 네 명이서······’
 물론 일 대 일로 붙었어도 상대가 되지 않을 것은 뻔하지만 그래도 한두 대 정도는 때릴 수 있었을 것 같았다. 그 한두 대······ 겨우 주먹 몇 번 때리지 못한 것이 억울했다.
 그날부터 뒤뜰에 나무를 박아놓고 주먹질, 발길질을 해댔다.
 “아예 싸움꾼으로 나설 생각이냐!”
 훈장의 호통은 귀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형.”
 “뭐야!”
 “한 번 더 해볼까?”
 “이 새끼가 건방지게 눈을 치뜨고······ 뭘 하잔 말야, 새끼야!”
 쒸익!
 어김없이 주먹부터 날아들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상황이 달랐다. 주먹이 날아올 것을 예측한 나는 번개같이 튀어 오르며 머리로 형의 얼굴을 들이받았다.
 뻐억!
 둔탁한 소리가 났다.
 “악! 아악! 내 코! 내 코······”
 형은 얼굴을 움켜잡고 풀썩 주저앉았다. 두 손 사이로 붉은 피가 줄줄 흘러내렸다.
 싸움은 끝났다. 내가 이겼고, 형이 졌다.
 
 그 날 저녁, 나는 또 흠씬 두들겨 맞았다.
 인근 십여 리 주민의 생계를 좌지우지 한다는 대부호의 아들을 그 모양으로 만들어놨으니 무사할 리가 없다.
 그건 지금 생각이다. 당시에는 날벼락이었다.
 얼굴을 잘 알고 있는 어른들이 우르르 들이닥치더니 다짜고짜 두들겨 패기 시작했다.
 훈장은 멀거니 지켜보기만 했다.
 하인들의 몰매는 까무러치고 난 다음에야 멈췄다. 아니, 그 후에도 얼마나 더 몰매를 가했는지는 모른다. 좌우지간 죽지는 않았지만 보름간이나 피똥을 쏟아냈다.
 훈장이 말했다.
 “그러게 주먹질을 하려면 상대를 잘 골라야지. 매를 사서 번 거야.”
 난 키득키득 웃었다.
 뼈가 가루가 될 만큼 두들겨 맞았지만 얼굴을 움켜잡고 풀썩 주저앉던 모습만 생각하면 통쾌하기 이를 데 없었다.
 
 나나 형이나······ 별 것 아닌 사건 때문에 운명이 뒤엉켰다.
 그 일만, 그 일만 없었다면······ 지금쯤 훈장이 되어 아이들이나 가르치고 있을 텐데. 아니다. 내 성격에 훈장처럼 답답한 일을 하고 있을 리는 없고, 홍루(紅樓)에서 값싼 계집들이나 껴안고 술 취해 해롱대고 있을지도 모른다. 조금 정신을 차렸다면 소작농 정도 하고 있을 테고.
 어떤 것도 지금보다는 낫다.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것도 모자라서, 늦은 밤에도 어디서 검이 날아올지 몰라 잠을 이루지 못하는 지금보다는.
 
 
 제1장 죽은 빚이 되살아나
 
 
 1
 
 
 “빌어먹을 놈! 밤새 또 어디서 뭔 짓을 하다가 이제야 기어드는 거야! 저승사자는 뭐하는지 몰라, 저런 놈 안 잡아가고.”
 노인은 아침도 한참 지나 점심으로 치달을 무렵에서야 어기적거리며 나타난 아들을 고운 눈으로 보지 않았다.
 덩치가 산만한 칠척장신(七尺長身) 거구는 술에 만취되어 제대로 걷지도 못했다. 털이 북슬북슬한 가슴을 환히 드러내놓고, 한손으로는 바지춤을 움켜잡고 있었다.
 “꼴 하고는······ 쯧!”
 노인이 혀를 끌끌 찼다.
 어디서 허리띠를 흘린 모양인데, 한두 번 있는 일도 아니라서 이제는 만성이 되어 버렸다. 술 취한 놈이 소변을 싸대는 거야 흔한 일이지만 아들놈은 유독 허리띠를 챙기지 못했다. 한걸음만 떼어놓아도 바지가 흘러내리니 잊어버리려야 잊어버릴 수 없는 일인데도.
 “흐흐흐! 할망구, 기다렸어?”
 “징그러워, 이놈아! 어휴! 술 냄새. 돈도 없는 놈이 어디서 맨날 술타령이야. 그 돈 있으면 쌀이나 한 말 팔아와!”
 노인은 와락 껴안은 장한의 품에서 벗어나려고 발버둥쳤다.
 형영(邢穎)은 바지가 흘러내리는 것을 의식한 다음에야 노인을 놓아 주었다.
 “도, 독사. 독사 놈은 어디 있어?”
 “그 놈은 왜 찾아! 하나같이 식충이들 같으니라고. 뒤채로 가봐.”
 노인은 패악을 부리면서도 독사가 있는 곳을 일러주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한 마디 더 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분명 소귀에 경 읽기겠지만.
 “밥이나 처먹고 자!”
 
 덜컹!
 헛간 문을 거칠게 열자 장정 대여섯 명이 탁자를 중심으로 모여앉아 있는 모습이 제일 먼저 눈에 들어왔다.
 “왔냐.”
 장정 중 한 명이 속삭이는 듯 작고 가는 음성으로 말했다.
 “투전(投錢)이야? 흐흐! 좋지, 좋아. 암! 세상에 투전처럼 시간 죽이기 좋은 건 없지. 흐흐흐!”
 형영이 걸걸한 음성을 토해냈다.
 탁자에 앉아 있던 사내 중 한 명이 벌떡 일어나 다가왔다.
 그가 어깨를 부축해주며 말했다.
 “쉿! 목소리가 너무 커. 조용해.”
 “뭐?”
 “독사가 공부하고 있어.”
 “고······ 공부?”
 “아버님이 뭔 책을 한 권 건네줬거든.”
 “빌어먹을! 그 늙은이는 꼭 쓸데없는 짓만 한다니까.”
 형영은 못마땅한 듯 인상을 찡그렸지만, 음성은 다른 사내들처럼 낮아졌다.
 “술 많이 취한 것 같은데 좀 자라.”
 “그래야겠어. 끙! 몇 독 먹지도 않았는데 취하네.”
 사내가 형영을 부축해 침상으로 데려갔다.
 “제대로 좀 걸어. 두어 걸음만 더 걸으면 되는데, 꼭 내게 이래야겠냐!”
 사내가 상당히 힘겨운 듯 투정을 토해냈다.
 술 취해 흐느적거리는 칠 척 거한을 부축한다는 것은 여간 고역이 아니었다.
 “다시 하자. 패 돌려.”
 “누가 선(先)이지?”
 “나.”
 탁자에 앉아 있던 사내들이 소곤거렸다.
 
 형영은 심한 갈증을 느끼며 눈을 떴다.
 물병이라도 있으면 기갈이라도 해소할 텐데, 망할 놈의 헛간에는 흔하디흔한 물병 하나 없다. 물을 마시려면 밖으로 나가 우물물을 길어 마셔야 된다.
 ‘망할! 오늘은 꼭 물병 하나 구해놔야지.’
 사위에는 칠흑 같은 어둠이 깔렸고, 유등(油燈)에서 번져오는 불빛이 답답하게 헛간을 비쳤다.
 작게 소곤거리는 소리가 신경에 거슬린다.
 “제길! 오늘 끗발 정말 안 나네.”
 “흐흐흐! 딸 때도 있으면 잃을 때도 있는 거지 뭘 그래. 어제 많이 땄잖아.”
 “뭘 많이 땄다고 그래. 겨우 두 냥 땄는데.”
 “이 도둑놈 봐라. 두 냥이란다. 에잇, 도둑놈아. 나만 해도 닷 냥은 잃었다.”
 “넌 촌스럽게 그런 걸 셈하고 있냐? 어서 패나 돌려. 네 말대로 잃을 만큼 잃었으니 이젠 따겠지.”
 투전만 잡으면 이틀이고 사흘이고 엉덩이를 들지 않는 족속들.
 형영은 잠시 누워 있다가 몸을 일으켰다.
 일어나봤자 딱히 갈 곳이 있는 것도 아니지만 빌어먹을 갈증은 도무지 참기 힘들었다. 그렇다고 투전하는 놈들 중에는 대신 물을 길어다 줄 놈이 없다.
 “일어났냐?”
 투전하던 놈 중 한 놈이 건성으로 물었다.
 지금 일어나든 내일 새벽까지 푹 잠에 파묻혀 있든 상관하지 않을 놈들이다.
 할 일 없는 날건달들의 생활이란 으레 그렇다.
 형영은 밖으로 나와 우물을 길었다. 입에 대고 벌컥벌컥 들이키다가 두레박을 머리에 대고 쏟아 부었다.
 정신이 확 깨는 듯했다. 한 밤을 하얗게 지새우며 들이켰던 술이 말끔히 씻겨 내려가는 듯했다.
 하늘에는 별이 총총하다. 여인의 눈썹처럼 가는 초승달이 은은하게 사방을 밝힌다.
 형영은 뚜벅뚜벅 걸어 헛간으로 돌아갔다.
 투전에 몰두한 사내들은 형영을 쳐다보지도 않았다. 물귀신처럼 물에 흠뻑 젖어 들어섰는데도.
 “아! 제길! 오늘은 정말 안 되네. 어지간히 밀리면 어떻게 해보겠지만 꼭 한 끝 차이로 밀리니. 이게 더 사람을 미치게 한다니까.”
 “흐흐! 꽤 잃었지?”
 “그래, 자식아. 이젠 정말 불알 두 쪽 밖에 남지 않았다.”
 “흐흐흐! 쓸 만한 불알이면 말도 안 해요. 너 토끼라며?”
 “뭐? 말 다 했어!”
 “마, 떼어버려라. 사내자식이 토끼가 뭐냐, 토끼가.”
 “너 이 새끼! 주둥이 찢어졌다고······”
 “주둥이고 나발이고 소홍(小紅)이가 그러더라. ‘시작하자마자 끝나는데 나 미칠 뻔 했어. 세상에 그렇게 빠른 토끼는 처음 봤다니까. 크기도 새끼손가락만 해가지고는. 뭐? 대물(大物)? 그게 대물이면 세상 사내들 대물 아닌 사내 없겠다.’ 이러더라. 흐흐흐!”
 “킥킥!”
 “소홍이가 묻더라. 왜 대물이라고 부르느냐고. 그래서 말해줬지. 대물이 그 대물이 아니고 똥을 한 부대씩 싸대서 대물이라 부른다고. 킥킥킥!”
 사내들은 박장대소(拍掌大笑)를 억지로 삭히며 웃어댔다.
 “소홍이 년이 그랬어? 이 년 주둥이를 콱 찢어놓던가 해야지······”
 놀림을 받은 대물도 분기를 안으로 삭혔다.
 소리를 죽이며 웃고 떠드는 것은 습관이 되어서 어색하지 않았다.
 형영이 탁자에 놓인 돈을 한 손으로 쓸어 담으며 말했다.
 “독사는 언제부터 저기 파묻힌 거야?”
 “어제 저녁부턴가? 네가 나간 바로 다음부터야.”
 사내들은 형영이 돈을 쓸어가도 인상 한 번 찡그리지 않았다. 돈이 있으면 같이 쓰고, 없으면 굶는 생활이 몸에 배었다.
 “그때부터 너흰 계속 이 짓거리고?”
 “할 일도 없는데 뭘······”
 “일어서. 오늘 내가 술 한 잔 내지.”
 “정말?”
 “내가 언제 허튼 소리 하든?”
 “햐아! 오늘 잘 하면 소홍이 년 품을 수 있을 것 같은데?”
 금방까지도 주둥이를 찢어놓겠다고 이를 갈던 대물의 입이 헤벌쭉 벌어졌다.
 형영은 그들을 지나쳐 짚으로 엮은 거적을 들췄다.
 헛간 한 귀퉁이를 거적으로 가려놓은 좁은 공간이 독사만의 보금자리다.
 원래는 헛간 전부가 독사의 보금자리였다. 농기구도 놓아두고, 팥이며 콩 같은 농작물도 쌓아두는······ 헛간 한 구석에 놓인, 누가 내다버린 침상을 주워 놓은 것이 독사의 유일한 가구였다.
 그곳에 파락호(破落戶)들이 모여들기 시작한 것은 삼 년 전부터다.
 그들은 점점 영역을 넓혔다. 헛간에 탁자를 들여놓고, 의자도 들여놓고······ 침상도 먼저 드러눕는 사람이 임자였다.
 결국 독사는 헛간 한 구석으로 밀려났다.
 거적을 풀어서 헛간 한 구석을 가리고, 파락호들이 가져온 작은 책상을 벽에 붙여놓았다.
 사방 한 평이 채 안되는 작은 공간.
 형영의 눈에 작은 공간이 들어왔다.
 “나 왔다.”
 “······”
 “쳇! 이 놈아, 어르신이 왔으면 고개라도 돌려봐라.”
 “······”
 “정말 더럽게 재미없네. 그 영감은 뭐 하러 책을 구해 와서는······ 할 일이 그렇게도 없나.”
 “······”
 “요락(妖樂)에 갈 건데, 같이 안 갈래?”
 “······”
 “있다가라도 들러. 요빙(妖氷)이 그 년, 살쾡이가 다 되어가지고는 보는 사람마다 물어뜯는다. 어제는 나도 물릴 뻔 했다니까. 여기 온다는 걸 억지로 말렸거든.”
 “······”
 “못 말리겠네. 간다. 이따 꼭 와. 너 안 오면 요빙이 년이 정말 내 뼈를 갈아먹을 거다.”
 대답은 여전히 들리지 않았다.
 
 ***
 
 다다다닥······!
 이층에서 거칠게 뛰어내려오는 소리에 주객(酒客)들의 시선이 일제히 쏠렸다.
 요락은 주객들을 철저히 차별했다.
 명색이 기루(妓樓)인데도 일층 주객들은 기녀 손 한 번 잡아보지 못한다. 그들이 볼 수 있는 것은 이층 회랑(回廊)을 오가는 기녀들의 고운 자태뿐이요, 그들이 들을 수 있는 것은 간드러진 웃음소리와 벽창 너머로 들려오는 노랫소리, 그리고 비파나 생황 같은 악기 소리들뿐이다.
 일층 주객들의 눈은 계단에 쏠린 채 흩어지지 않았다. 그것도 그럴 것이 기녀가 일층으로 내려오는 경우는 거의 없기 때문이다.
 발걸음 소리의 주인공은 스물이 갓 넘었을까 말까 한 묘령의 기녀(妓女)다.
 그녀는 어느새 일층으로 내려와 누군가를 찾는 듯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벌써 적잖은 술을 마신 듯 얼굴이 불그레했다. 짓궂은 손님을 맞은 듯 머리도 헝클어졌고, 앞가슴도 약간 벌어져 속살이 내비쳤다.
 일층 주객들에게는 좋은 요깃거리가 아닐 수 없다.
 그러거나 말거나 기녀는 백여 평에 이르는 주루를 꼼꼼히 훑어보다가 이윽고 원하는 사람을 찾았는지 얼굴에 함빡 웃음을 지었다.
 그녀가 주루 한 귀퉁이에 모여 앉은 사내들에게 다가갔다.
 주객들은 그제야 고개를 돌려 자신들만의 화제로 돌아갔다. 술잔을 들고 있던 자는 입에 털어 넣었고, 안주를 집어먹으려던 자들은 다시 저금을 놀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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