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돌아가는 길.
호피(虎皮)를 깔고 앉은 장년인이 술잔을 기울였다.
“크흐, 뱃속까지 뜨끈해지는 것이 좋군. 좋아!”
호공채(虎恐寨)의 채주가 하는 말이다.
산적들은 이구동성으로 채주의 호쾌함을 칭송했다.
“역시 채주께서는 풍취를 아십니다.”
“술잔을 꺾는 모습에서 품격이 느껴집니다.”
채주는 한 잔을 더 들이킨 후 술자리에 모인 수하들을 내려다봤다. 이 놈들을 제외하더라도 밖에 대기하고 있는 산적들의 숫자만 백여 명이 넘었다.
‘입신양명이 별거더냐? 살아서 떵떵거리면 그것이 장땡이지!’
지난 오 년 간 참 열심히 산 듯싶다.
오 년 전 그는 산채에 굴러들어온 돌이었다.
하나 어설프게 박힌 돌을 걷어차고, 주인 자리를 차지하기란 그리 어렵지 않았다.
그렇게 채주가 된 이후 세를 두 배나 불렸고, 웅 급이었던 산채를 호 급으로 격상시켰다. 그렇기에 호공채 내에서는 산신과 동급일 정도로 위세가 대단했다.
‘그래, 이렇게 된 이상 녹림왕이라도 한 번 되어봐야 사내라고 할 수있지 않겠어?’
산적들의 연합인 녹림칠십이채는 산채의 규모를 용호웅표(龍虎熊彪)로 급을 나눴다. 한데 호공채는 호(虎) 급의 산채 중에서도 손꼽힐 만큼 규모가 크다.
그러니 채주가 거드름을 피우는 건 당연했다.
“크흠! 이번에 충원한 녀석들은 밥벌이 좀 하던가?”
잔머리가 쓸 만해서 군사로 삼은 녀석이 헤죽거렸다.
“스물은 칼받이로 쓸 만하고, 열 놈은 칼 좀 쓰더이다.”
채주는 만족스러운 듯 한 잔 더 들이켰다.
“일단 최대한 끌어 모아. 일단 머릿수부터 채워야 용공채가 될 수 있지 않겠어?”
그 뒷말은 말하지 않아도 뻔했다.
강호에 일곱 곳만 존재하는 용 급이 되면 녹림왕에 도전할 자격이 생겼다.
군사를 비롯해 수뇌부는 침을 꿀꺽 삼키며 찬란한 내일을 상상했다.
녹림왕(綠林王).
생각만 해도 두근거렸다.
채주가 누구던가?
지금은 마도 내의 파벌 싸움으로 인해 사라졌지만, 명색이 혈검가(血劍家)의 대주까지 지냈던 사람이다.
일개 산적들과는 출신 성분부터 달랐다.
“믿습니다! 채주가 아니면 누가 녹림왕이 되겠습니까?”
“녹림왕은 이미 따 놓은 당상이지요.”
“장차 녹림왕이 되실 채주를 위해 제가 한 잔 올리겠습니다.”
채주의 신임을 얻기 위해 수뇌부의 혀가 춤을 췄다.
속이 뻔히 보이는 녀석들이다.
하나 그래도 좋았다.
“크하하! 혈검가의 대주로 있었을 때보다 지금이 더 좋아. 이처럼 마음이 맞는 의제들이 한 가득이니 강호를 다 얻은 듯하군!”
군사가 재빨리 아부를 했다.
“모두 채주의 은덕이시지요. 제가 최대한 빨리 머릿수를 채워 채주가 영전할 수 있는 발판이 되겠습니다.”
고개를 끄덕이던 채주가 불현 듯 무엇을 떠올렸는지 얼굴을 굳혔다.
“흐음, 아니야. 아니지. 내가 너무 흥에 겨웠군. 이럴 때일수록 침착해야지. 급하게 먹으면 체하는 법이야. 조금 늦어도 되니까 신분이 확실한 녀석들만 받게. 괜히 미친 놈 한 명 잘못 받았다가 패가망신하는 경우도 있으니까.”
“네?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채주는 불콰한 김에 옛 일을 떠올렸나 보다.
“우리가 의형제를 맺은 것도 꽤 되었으니 얘기해주는 걸세. 사실 혈검가는 내분으로 몰락한 것이 아니야.”
군사와 수뇌부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사라졌다.
대저 비사(秘事)란 호기심을 충족시키지만, 동시에 독이 든 술잔이나 다름없는 게다.
모르는 게 약이라는 말은 괜히 있겠는가.
하나 술 취한 채주의 앞에서 듣기 싫다고 일어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재해! 그래, 그 놈은 살아있는 재해였어. 처음에는 외단의 타격대와 시비가 붙었었지. 술자리에서 기녀를 희롱한 것 때문에 벌어진 일이었어. 아니! 자네들도 알잖아? 기녀란 주무르라고 있는 거지. 그림처럼 분위기만 살릴 거면 뭣 하러 거금을 주고 기루에 가겠어!”
채주는 다시 한 번 술을 들이켰다.
“그 날 타격대를 시작으로 외단이 무너졌어. 양 손에 시퍼런 칼을 쥔 놈이 날뛰기 시작하니까 흉신악살이 따로 없더군. 마치 대붕이 날갯짓을 하는 것처럼 눈에 보이는 건 죄다 박살냈지. 혈검가에 비상이 걸린 거야. 세력의 삼분지 일이 풍비박산 났으니 당연했지. 비번까지 모조리 불러 들여서 놈을 치려고 했어. 그런데······.”
군사와 수뇌부는 침을 꿀꺽 삼켰다.
본래 산적이란 정보에 민감했다.
비렁뱅이인 줄 알았는데 개방의 고수였고, 여염집 아낙인줄 알았더니 명가의 여고수인 경우가 어디 한둘이던가.
채주는 연이어 석 잔의 술을 마신 후 말했다.
“크흑! 그 놈이 제 발로 찾아온 거야. 그 때야 알았지. 기녀고 뭐고 중요한 게 아니었어. 놈은 그냥 혈검가가 싫었던 거야. 시빗거리로 기녀를 삼았을 뿐이지. 하여간 혈검가의 정문을 절반으로 쪼개버리더니 마치 옆 마을에 놀러온 사람처럼 외치더라고. 뭐라고 했더라? 잠깐! 기억이 가물가물하네. 어쨌든 혈검가의 십기혈조가 죽었고, 팔대장로도 모두 팔이 잘렸어. 삼대봉공과 가주까지 나섰지만, 놈의 곡도는 신병이기라도 되는 것처럼 강기를 잘라내는 것이 아닌가!”
군사는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제아무리 신병이기라고 해도 강기(罡氣)를 자를 수 있다는 소리는 들은 기억이 없었기 때문이다.
채주는 아예 병을 들더니 술을 목구멍에 쏟아 부었다.
“씨벌. 진짜 오금이 저리고, 소름이 너무 돋아서 닭이 된 것만 같았어. 나중에는 죽일 사람이 없으니 건물에 화풀이를 하더군. 때려 부수고, 불을 지르고 아예 미친놈처럼 날뛰었지. 그리고는 혈검가의 보고를 털어서 사라졌어.”
군사는 그제야 깨달았다.
채주는 분해서 술을 마시는 것이 아니었다.
두려운 게다. 미지의 대상에게 느꼈던 공포가 되살아나서 현재의 그를 옥죄는 것이 분명했다.
그 증거로 채주의 손은 사시나무 떨 듯 떨리고 있었다.
‘도대체 어느 정도의 고수이기에······.’
지금껏 굳건했던 채주에 대한 신뢰가 무너지는 듯했다.
“그 후 나를 비롯한 몇몇만 겨우 몸을 피했지. 그 후 소문이 돌았어. 혈검가만 무너진 것이 아니었어. 사도련의 칠대가문 중 철룡방도 쌍도를 든 놈에게 홀라당 털렸다더군. 이유가 뭐였는지 아는가? 길 가다가 어깨가 부딪쳤다는 거야. 빌어먹을! 철룡방도 그렇게 망했지.”
채주는 비밀을 털어놓듯 조심스럽게 읊조렸다.
“마교와 사도련은 놈에게 쌍익광마라는 별호를 붙이고, 쉬쉬했지. 혈검가나 철룡방과 같이 기세등등하던 곳이 거지가 돼서 망했다고 소문이라도 나면 그만한 개망신이 어디 있겠어. 하여간 그 미친놈은 고향을 찾아다닌다고 했으니 언제 또 나타날지 몰라. 군사, 내 말 이해하겠어?”
“네, 네.”
“괜스레 이상한 놈이다 싶으면 그냥 버려. 괜히 그런 미친놈이 또 한 번 나타나면 다 같이 망하는 거야. 늦어도 좋으니까 신분 확실한 놈들만 모아서 탄탄하게 가자고.”
군사는 부복하며 말했다.
“명심하겠습니다.”
하나 속으로는 채주에 대한 충심을 버렸다.
한 번 꺾인 존재는 기회가 왔을 때 또 꺾이는 법이다.
‘내가 꺾지 말라는 법도 없고.’
쌍익광마(雙翼狂魔)의 이야기는 두려웠지만, 어차피 남의 일이 아니던가. 마교나 사도련을 상대하던 자가 미친놈처럼 산채에 쳐들어올 리도 없고 말이다. 차라리 요즘 들어 산채나 수적만 골라서 털고 다닌다는 도둑놈을 걱정하는 편이 나을 듯했다.
그러고 보니 그 놈도 쌍도를 들고 다닌다던데.
‘그건 중요치 않아. 먼저 수뇌부를 회유한 후 채주의 목을 따야겠어. 다 그렇게 먹고 먹히는 거잖아?’
채주가 마음을 가라앉히기 위해 연거푸 술을 마셨고, 군사는 다른 마음을 품었을 때였다.
눈보라를 뚫고 대갈일성이 들려왔다.
“여기 두목이 누구냐? 나와 봐! 돈 좀 빌려주라!”
군사는 경박한 목소리에 미간을 찡그렸다.
동네에서 어린애들끼리 싸움을 할 때나 내뱉을 법한 유치한 한 마디가 아닌가.
호공채에는 번을 서는 산적들의 숫자만 해도 기십이다.
당장 번을 서던 녀석들을 불러 모아 치도곤을 내려야 할 듯싶다. 놈들이 멀쩡히 번을 섰다면 뜨내기가 멀쩡하게 여기까지 올 수 있을 리가 없지 않은가.
“무슨 일이냐?”
군사의 짜증 섞인 외침에 수하가 들어와 보고했다.
“정문에 비렁뱅이 한 놈이 왔답니다. 애들 보고 처리하라고 했으니 신경 쓰지 않으셔도 됩니다.”
“빨리 치워버려. 동네 소문나면 산적질도 못해먹는다.”
잠깐! 산채의 정문에서 난리를 친다고?
그런데 눈보라를 뚫고 여기까지 목소리가 들린다고?
‘뭔가 이상한데?’
군사는 고개를 갸웃하다가 코를 벌름거렸다.
어디선가 퀴퀴한 지린내가 풀풀 풍기는 것이 아닌가.
냄새의 근원지는 상석에 앉은 채주였다.
“채, 채주.”
채주는 군사의 부름에도 점혈이라도 당한 사람처럼 말이 없다. 아랫도리가 축축해진 것도 모를 만큼 넋이 나간 상태였다.
“채주! 채주! 정신 차리시오!”
채주는 그제야 힘겹게 입을 뗐다.
“기억났다.”
“네?”
“쌍익광마가 혈검가에 와서 했던 말.”
군사와 수뇌부가 의아함에 눈을 끔뻑이는 사이 하얗게 질린 채주가 말을 이었다.
“저 목소리였어. 그 때도 그놈은 두목 나오라고······. 고향에 갈 여비 좀 빌려달라고······.”
채주는 황급히 심호흡을 하더니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는 자신의 신물인 보검을 뽑았다.
“결정했어.”
그 순간 군사가 꿈꾸던 시기가 코앞으로 다가왔다.
채주가 보검을 건네더니 뒷걸음질 쳤다.
“오늘 부로 채주 자리를 이양하겠네. 그럼 나는 이만.”
그는 농담이 아니었는지 냅다 뒷문으로 사라지는 것이 아닌가.
“저런 미친!”
군사는 검을 쥔 채로 어이없는 웃음을 내뱉었다.
하나 잠시 후 그의 얼굴은 채주가 그랬던 것처럼 하얗게 질려갔다.
콰콰쾅!
진천뢰가 터진 것처럼 폭음이 일더니 대전의 입구가 터져나간 것이다.
사내는 환도(環刀)를 쥔 손으로 길게 늘어진 머리카락을 쓸어 올렸다. 그리고 다른 손에 쥔 환도로 군사를 가리키며 물었다.
“네가 두목이냐?”
사내의 말에 군사는 황급히 주변을 살폈다.
하나 수뇌부라는 작자들은 멀찍이 떨어져서 눈알만 굴리고 있는 것이 아닌가.
“제가 두목이 되기는 했는데······.”
부서진 문 밖을 보니 눈발이 잦아든다.
지독했던 폭설이 이제야 물러가나 보다.
하나 군사의 마음속에는 폭우가 내리기 시작했다.
그 사이 사내의 환도는 햇살을 반사시키며 더욱 시퍼렇게 번뜩였다.
고민은 짧았고, 결정은 빨랐다.
“얼마나 드리면 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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