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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멸의 슬레이어 1권 (1)

2016.06.08 조회 4,179 추천 37


 #프롤로그
 
 세상에서 헌터는 오직 두 부류로 나뉜다.
 대다수를 차지하는 일반 헌터.
 처절함으로 불멸에 이르렀던 위대한 헌터, 정윤석으로.
 
 그것이······.
 
 헌터의 시대, 가장 첫 장에 기록된 신화다.
 
 #회귀
 
 쏴아아!
 하루 종일 창밖이 흐리다 싶더니 기어코 비가 쏟아지자 안 그래도 서늘한 교도소 분위기는 더 싸늘해졌다.
 번쩍!
 플래시처럼 터지는 번갯불 사이로 윤석이 자신을 찌른 자의 얼굴을 확인했다.
 “······너 이 새끼!”
 몸 깊숙이 파고든 칼을 움직이지 못하게 상대의 손을 와락 붙잡은 윤석은 남은 손으로 냅다 상대의 목을 움켜쥐었다.
 “컥!”
 설마하니 윤석에게 이런 힘이 있을 거라고는 생각지 못한 상대는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윤석은 상대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며 입을 열었다.
 “누가 시켰냐? 지충원이냐?”
 비릿한 핏물이 주룩 흘러내리는 윤석의 입에서 지충원이란 이름이 나왔다.
 이 교도소에 온 뒤로 그 누구보다 자신을 괴롭혔던 자이기에 가장 먼저 머릿속에 떠올랐다.
 하나 상대는 대답 대신 온몸을 들이밀며 윤석을 밀쳤다.
 쿵!
 그 힘에 못 이겨 밀려난 윤석의 등이 벽을 때렸다.
 충격의 여파로 몸을 찌른 칼이 좀 더 깊숙이 파고들어 왔지만 윤석은 이를 악문 채 신음 소리조차 내지 않았다.
 그 독기 어린 눈빛에 기가 눌린 상대는 황급히 뒤로 물러났다.
 수중에 있던 칼은 윤석의 몸에 박아 놓은 채였다.
 이윽고 놀란 토끼 눈으로 주위를 두리번거리던 상대가 이내 아무도 없음을 확인하고는 어둠을 틈타 후다닥 모습을 감췄다.
 차마 그 뒤를 쫓을 자신이 없던 윤석은 후들거리는 몸을 벽에 대고 바닥에 엉덩이를 붙였다.
 손으로 틀어막은 상처에서 연신 핏물이 꾸역꾸역 새어 나오자 윤석은 더 이상 가망이 없음을 느꼈다.
 그 순간 짙은 그늘 속에서 슬며시 모습을 드러내는 한 노인을 보고 윤석은 피식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그래도 죽기 전에 한 영감 당신 얼굴은 보고 가는군.”
 한씨라서 한 영감이라 불리는 노인은 윤석과 똑같이 파란 죄수복을 입은 채였다.
 얼마나 오래 이 교도소에 있었는지 그 누구도 몰라 나이조차 가늠할 수 없는 한 영감은 아무런 연고 없는 이곳에서 더할 나위 없는 벗이었다.
 그런 한 영감의 얼굴을 마지막 순간에 볼 수 있으니 윤석은 나름 다행이란 생각이 들었다.
 핏물이 쏟아지는 상처를 힐끔 쳐다본 한 영감이 한쪽 무릎을 꿇고 눈높이를 맞추더니 쭈글쭈글한 입을 열었다.
 “무엇이 제일 후회가 되지?”
 후회를 묻는 한 영감의 말.
 윤석은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이상하지만, 이런 상황에서 빨리 도움을 주기는커녕 그런 것을 물어보는 한 영감에게 화가 나지 않았다.
 어쩌면 이미 회생이 불가능하단 것을 직감적으로 알았기 때문일지도.
 회한에 잠긴 얼굴이 허공을 향했다.
 자신과 같은 상황이라면 대부분 끝내 범죄를 저질러 이 교도소에 온 것을 꼽을 터였다.
 이곳에 오지 않았으면 이리 외롭고 힘들게 갇혀 살다가 허무히 죽지는 않았을 테니까.
 하지만 윤석은 전혀 그렇지 않았다.
 저 밖에서 살 수 없기 때문에 이곳에 온 것이니까.
 그렇기에 감옥에 온 것이 후회되진 않는다.
 다른 것이 자꾸 생각날 뿐이다.
 윤석은 말문을 열었다.
 “내 나이 스물셋에 게이트가 처음으로 발견됐지. 그 뒤엔 헌터들이 등장했어. 세상은 게이트에서 몬스터들과 싸우는 헌터에 열광했고, 지금까지도 헌터는 사람들이 가장 선호하는 직업이지. ······오로지 선택받은 자만이 될 수 있는 헌터.”
 허공을 응시하던 윤석은 잠시 말을 끊고 한 영감을 바라봤다.
 한 영감을 직시하는 그 눈빛은 마지막이 부쩍 가까워졌기 때문인지 그 어느 때보다 강렬했다.
 마치 타오르는 것 같은 눈빛과 함께 윤석은 이내 말을 이었다.
 “선택받지 못했다는 것이 나를 너무 비참하게 만들었어. 그 비참함에 고집을 부렸지. 덕분에 나는 어머니 임종조차 못 지킨 불효자가 됐지.”
 못난 아들 때문에 힘들게 살다 가신 어머니.
 아직도 생각만 하면 가슴이 미어지고 스스로가 한심하여 견딜 수가 없다.
 “헌터가 되려고 하지 않았으면 내 인생이 이렇게까지 되지는 않았을 거란 건 이미 알고 있어. 그런데 말이야, 포기할 수가 없었어. 돌아가신 어머니는 가실 때까지 내가 헌터가 된 줄 아셨거든.”
 윤석은 잠시 말을 끊었다.
 어느새 목구멍으로 차오른 핏물이 올라오며 입가에 거품이 생겼기 때문이다.
 이에 한 영감은 말없이 소매로 입가의 핏물을 닦아 주었다.
 잠시 증세가 진정됐는지 윤석이 한 영감의 소매를 붙잡았다.
 “내 인생을 통틀어 가장 멍청한 거짓말이었어. 홀로 외로이 가실 때까지 이 못난 아들의 거짓말을 철석같이 믿으신 어머니를 생각하면 이렇게 죽는 게 너무 후회가 돼. 하다못해 헌터라도 됐으면 저승에서 만날 어머니에게 떳떳할 텐데······.”
 “······.”
 독백이나 다름없던 윤석의 말은 진즉에 끝이 났지만 한 영감은 별다른 말이 없었다.
 이윽고 윤석의 숨소리가 들릴 듯 말 듯 미약해지자 한 영감은 목에 걸고 있던 목걸이를 윤석의 손에 꼭 쥐여 주었다.
 “앞으로는 절대 후회하는 삶을 살지 말란 뜻에서 내가 주는 처음이자 마지막 선물이네.”
 이젠 정말 갈 때가 된 모양인지 점점 희미해지는 한 영감의 말에 윤석은 천근만근 무거운 눈꺼풀을 억지로 버티며 손에 쥔 목걸이를 쳐다봤다.
 별다른 장식 없이 그저 검은 줄에 영롱한 빛깔의 구슬 하나가 덩그러니 달린 것뿐이었지만 그 순간 친 번개 때문인지 윤석은 구슬이 번쩍인다 생각했다.
 헌터가 될 수 있었다면 난 패배자가 되지 않았다.
 헌터가 될 수 있었다면 이토록 서럽지 않았을 거다.
 헌터가 될 수 있었다면 배신당하지도 않았을 거다.
 헌터가 될 수 있었다면 어머니에게 떳떳한 아들이 되었을 것이다.
 모든 것을 헌터가 되지 못한 것을 탓하는 나를 두고 누군가는 욕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당신은 모른다. 나에게 있어서 헌터가 어떤 의미였는지를······.
 어머니······.
 못난 아들도 이제 당신을 따라갑니다.
 
 “헉!”
 윤석은 거칠게 숨을 내뱉었다.
 절로 부릅떠진 눈에는 핏발이 서 있었고, 이를 마주한 버스 기사의 얼굴에는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
 잠깐의 침묵이 두 사람 사이를 스쳐 갔다.
 이윽고 창백한 안색으로 식은땀을 줄줄 흘리는 윤석을 걱정스레 바라보던 버스 기사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어디 아파요?”
 “······예?”
 그게 뭔 소리냐는 듯 윤석이 눈을 동그랗게 뜨자 버스 기사는 아무것도 아니란 듯 손사래를 쳤다.
 “괜찮으면 됐소. 종점이니까 어서 내려요.”
 버스 기사의 등쌀에 버스에서 내리던 윤석은 문득 뒷문에 붙어 있는 반사경을 바라봤다.
 “음?”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본 윤석은 일순 그 자리에 얼어붙었다.
 그도 그럴 것이 자신이 죄수복이 아닌 군복을 입고 있었기 때문이다.
 “안 내릴 거요?”
 이게 어떻게 된 일인가 생각하느라 잠시 머뭇거리던 윤석은 버스 기사의 재촉에 서둘러 버스에서 내렸다.
 종점인 차고지에서 나온 윤석은 낯익은 주변 환경에 작게 눈빛이 흔들렸다.
 “여긴······.”
 정말이지 익숙한 풍경이었다.
 붉은 노을이 비스듬히 드리우는 풍광은 아릿한 향수마저 머금고 있었다.
 60년 인생의 반을 보낸 곳인데 이 광경, 이 익숙함을 어찌 잊을까?
 그저 단순한 익숙함을 넘어 포근함까지 느껴지는 어린 시절 동네의 풍광에 윤석은 마치 뭐에 홀린 사람처럼 걸음을 옮겼다.
 그렇게 얼마나 걸었을까?
 익숙한 대문 앞에서 윤석은 걸음을 멈췄다.
 대문이 닫혀 있긴 했지만 살짝 녹이 슨 탓인지 걸쇠가 걸려 있진 않았다.
 그저 가볍게 손을 뻗어 툭 치면 열릴 것 같은 대문 너머에서 기척이 들리자 윤석은 낮게 심호흡을 했다.
 “후우······.”
 몇 번의 심호흡 끝에 겨우 마음이 진정된 윤석은 대문을 향해 손을 뻗었다.
 끼익!
 손끝이 닿기가 무섭게 껄끄러운 비명을 지르며 미끄러지듯 대문이 열리고 웬 중년 여성의 모습이 보였다.
 여인도 대문이 열리는 기척을 느끼고는 마침 고개를 돌렸고, 그 순간 두 사람의 시선이 허공에서 마주쳤다.
 “이제 오니?”
 마치 자신이 올 것을 알았다는 듯 내뱉는 여인의 말에 윤석은 제 의지와 상관없이 차오르는 눈물을 훔치며 떨리는 목소리로 힘겹게 입을 열었다.
 “······어머니.”
 
 버스에서 자신이 군복을 입고 있었다는 것과 낯익은 동네의 풍광. 그리고 마지막으로 건재한 어머니의 모습까지.
 윤석은 자신이 꿈을 꾸는 것이라 생각했다.
 하나 이미 30여 년 전에 돌아가신 어머니와 식사를 마친 순간 윤석은 자신의 생각을 고쳐먹었다.
 그리고 식사를 마친 뒤 씻기 위해 욕실에 들어가 답답한 군복을 벗는 순간 윤석은 확신을 얻었다.
 교도소에서 죽기 전 한 영감이 자신에게 줬던 선물.
 받았을 당시의 영롱한 빛을 잃은 그 투박한 목걸이가 군번줄 대신 목에 걸려 있는 것을 보는 순간, 지금 이 상황이 꿈이 아니란 확신이 들었다.
 꿈이 아니라면 이것이 뜻하는 것은 단 하나.
 과거로의 회귀.
 너무도 뻔해서 오히려 식상한 상황이 자신에게 찾아왔다.
 마치 소설에서 말하는 것처럼 시간을 거슬러 눈을 뜬 것이다.
 두근!
 상황을 인지하는 순간 윤석은 가슴이 두근거렸다.
 뒤늦게 자신이 눈을 떴을 때 군복을 입고 있었단 사실이 떠올랐다.
 그리고 자신을 봤을 때 어머니의 반응까지.
 그것은 교도소에서 죽기 딱 40년 전, 군 복무를 마치고 전역한 자신을 맞이하던 어머니의 모습이었다.
 두근두근!
 상황을 보다 정확하게 인지할수록 가슴이 더욱 세차게 두근거리며 흥분을 감출 수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40년 전 자신이 전역할 때라면 게이트가 나타나기 딱 1년 전이지 않은가?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윤석은 거짓말처럼 침착해졌다.
 과연 방금 전 가슴이 두근두근 세차게 뛰며 흥분을 감추지 못한 사람이 맞나 싶을 정도였다.
 이내 윤석은 차분히 자신의 상황을 하나씩 체크했다.
 과거 회귀라는 신비한 경험을 한 사람답지 않은 차분함이었다.
 물론 그 속내야 무척이나 당황스러웠고, 당장이라도 소리를 지르며 환호하고 싶었지만 꾹 눌러 참았다.
 행여나 자신의 괜한 행동이 지금 이 현실을 앗아 가는 건 아닐까 싶어 일부러 태연하게 행동했다.
 윤석은 거울 속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바라봤다.
 상황을 인지하고 나서야 비로소 회귀 전 서른 중반 때부터 자리 잡았던 주름이 없다는 걸 깨달았다.
 몸도 회귀 전보다 탄탄하고 힘이 넘치는 것이 마치 회춘을 한 것만 같았다.
 과거 회귀를 했으니 크게 틀린 말은 아니었다.
 하지만 지금 중요한 것은 이런 게 아니었다.
 가슴, 정확히 심장 부근에 보이는 작은 문신이 윤석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알 수 없는 글귀로 작게 원을 그리고 있는 문신.
 얼핏 푸른빛을 띠는 그것을 윤석은 손으로 매만졌다.
 “마나의 징표.”
 흔히들 헌터의 상징이라고 하는 것이었다.
 체내에 마나가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가지고 있는 징표.
 그 옛날 헌터가 되고 싶었던 윤석은 이 징표를 얼마나 원했는지 모른다.
 오죽하면 거짓으로 그려 넣기까지 했겠는가?
 하나 진짜는 스펙트럼처럼 푸른빛을 띠었다.
 이는 아무리 기술이 좋다 한들 결코 만들어 낼 수 없는 신기였다.
 그 징표가 지금, 누가 뭐래도 진짜인 징표가 가슴에 새겨져 있는 것이다.
 이것이 뜻하는 것은 오직 하나.
 “······헌터가 될 수 있다.”
 두근! 두근두근!
 그 한마디로 현실을 마주하자 겨우 진정시켰던 가슴이 다시 세차게 뛰기 시작했다.
 머릿속에서 잠시 잊었던 것들이 다시 살아났다.
 게이트의 등장!
 앞으로 1년 뒤에 있을 미래의 일이다.
 세상에 몬스터라는 이형체가 등장하고 영화에서 보던 것처럼 세상 곳곳에 이들을 물리칠 헌터가 생겨나게 되는 그때.
 수많은 헌터가 게이트를 넘기 시작하고 산업의 패러다임 자체가 몬스터의 부산물로 일대 변혁을 이루었던 시기!
 윤석은 그때를 잊지 않고 있었다.
 자신에게 뼈저린 절망을 안겨 줬던 그 시절을.
 그 모든 일들이 지금으로부터 정확히 1년 후 시작될, 아직 일어나지 않은 미래였다.
 그리고 지금은 상황이 달랐다.
 그때와 달리 지금은 마나의 징표를 가졌으니까.
 거짓이 아닌 당당한 헌터가 될 수 있었다.
 기왕 헌터가 되는 것 최고가 되리라.
 과거의 어머니에게도 떳떳해질 수 있는 위대한 헌터가.
 “앞으로 1년 뒤.”
 윤석은 게이트의 등장까지 아직 시간이 있다는 점에 주목했다.
 그와 동시에 윤석의 머릿속엔 회귀 전에 명성을 날렸던 헌터들의 이름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그렇게 머릿속에서 걸러지고 남은 이름 하나.
 “건일식.”
 우연히 들어간 게이트가 고블린만 있는 곳이었고, 거기서 쌓은 능력으로 점점 발전해 종국에는 엘프에게 마법까지 전수받는 전무후무 유일무이의 헌터 건일식.
 더 이상 올라갈 곳이 없는 그의 일대기는 자서전과 방송을 통해 게이트의 위치까지 세세하게 소개됐고, 그 내용은 모두 윤석의 머릿속에 있었다.
 헌터들 중 지고한 위치라 일컫는 마스터 헌터 건일식의 모든 것이 찬찬히 다 떠올랐다.
 “만약에 내가 건일식처럼, 아니 건일식이 들어갈 게이트에 먼저 들어간다면······.”
 윤석은 직감적으로 알았다.
 지금 자신에게 엄청난 기회가 다가왔음을.
 예전에야 기회조차 없었지만 이번에는 달랐다.
 과거 회귀라는 삼생에 있을까 말까 한 기연을 받았다.
 덤으로 아직 일어나지 않은 미래도 알고 있다.
 기회가 오는 걸 아는데 그걸 놓친다는 건 바보가 아니고서야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반드시 기회를 잡는다.
 인생 역전!
 그것이 단지 꿈으로만 끝나지 않을 수 있다.
 그래, 이번에는 과거와 완전히 다른 삶을 살리라!
 반드시······ 반드시 그렇게 만들 것이다.
 윤석은 과거 건일식의 일대기를 곱씹으며 앞으로 어떻게 할 것인지 찬찬히 계획을 짜기 시작했다.
 
 “일단 남은 시간은 1년이군.”
 현재 윤석에게 남겨진 시간은 딱 그 정도였다.
 건일식보다 먼저 기회를 잡아채려면 최소한 그 전에 모든 준비를 마쳐야 한다.
 1년, 헌터가 되기 위한 준비 기간으로는 충분한 시간이었다.
 어차피 처음 들어갈 게이트가 인간보다 못한 능력을 지닌 고블린만 있는 곳이니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다만 한 가지 마음에 걸리는 것이 있었다.
 그것은 바로 어머니였다.
 수신제가 치국평천하.
 어머니를 잃고 감옥에 갇힌 뒤 나이 불혹이 넘어 깨달은 말이었다.
 어머니가 얼마나 고생을 하고 살았었는지 그전에는 꿈에도 몰랐었다.
 이 못난 자식 뒷바라지한다고 끼니를 거르면서 일만 했던 어머니다.
 덕분에 몸속 깊은 곳에서부터 병마가 자라 어머니를 좀먹고 있었지만 윤석은 그걸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자신이 아픈 줄도 모르고 헌터가 되겠다는 자식을 위해 죽어라 일만 했던 어머니.
 결국 이 못난 자식은 그런 어머니가 가여워 되지도 못하는 헌터가 됐다는 멍청한 거짓말을 하지 않았는가?
 그 때문에 자신은 감옥에 잡혀 들어가고 어머니는 홀로 쓸쓸히 죽음을 맞이해야 했다.
 과거 그것이 얼마나 큰 못이 되어 가슴에 박혔던가?
 정신을 차려도 모자랄 판국에 멍청한 자신은 오히려 더 엇나가지 않았던가?
 참으로 어리석었던 과거다.
 그리고 그 과거를 되풀이하지 않으려면 일단은 집안 살림을 어느 정도 일으킬 필요가 있었다.
 그래야만 비로소 마스터 헌터, 그 꿈의 이름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기에 전념할 수 있지 않겠는가?
 그런데 또 생각해 보니 지금 윤석에게는 돈을 벌 수 있는 수단이 그렇게 많지 않았다.
 남보다 머리가 좋아 공부를 잘했던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뭔가 특기가 있었던 것도 아니다.
 어중간하다고 해야 할까?
 그야말로 무능력의 극치가 지금 윤석의 위치였다.
 “······진짜 한심했었네.”
 하긴 그랬으니 이후에도 주야장천 고생만 했겠지만.
 윤석은 스스로의 위치에 대해 냉정하게 판단했다.
 할 수 있는 것과 반드시 해내야 할 것들.
 남들과 다르게 회귀했다는 장점도 지금은 딱히 쓸 곳이 없었다.
 자신의 머리에 남아 있는 기억이라고는 오직 건일식에 대한 것이 전부였을 뿐 나머지에 대해서는 생각나는 게 없었다.
 아니, 애초에 뭔가 관심을 가지고 유심히 살피지 않았던 과거니 기억이 나고 말고 할 것도 없다.
 결국 지금 윤석이 할 수 있는 것은 몸 쓰는 일뿐이었다.
 다른 말로 극한 알바 체험의 장에 스스로 몸을 던져야 하는 상황이었다.
 그럼에도 윤석은 낙담하지 않았다.
 적어도 과거의 자신은 꽤나 많은 일들을 해 봤기 때문이다.
 그것이 무능력의 극치라 어쩔 수 없이 겪어야 했던 고난이지만 뭐 어떠랴.
 지금은 그것조차 소중한 자산이었다.
 
 윤석이 제일 처음 찾아간 곳은 다름 아닌 신문과 우유 배달을 겸하고 있는 동네 출장소였다.
 우유 배달과 신문 배달.
 전통적으로 기술 없이 맨몸으로 할 수 있는 가장 쉬운 일이 바로 이것이다.
 물론 과거에 비해 신문의 부수가 줄다 보니 상대적으로 벌이가 시원찮을 수도 있지만 윤석은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어차피 새벽에 일어나 배달에 나서는 까닭은 돈도 돈이지만 스스로 체력을 기르기 위한 것도 있었다.
 다행스럽게도 이제 갓 전역한 쌩쌩한 상태라 체력에는 자신이 있었지만 그렇기에 더더욱 바삐 움직여야 했다.
 자주 사용 안 하면 녹이 슬기 마련이다.
 행여나 과거의 버릇이 툭 튀어나와 나태해질지 모를 정신을 다잡기 위해서라도 윤석은 아침을 일찍 시작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렇게 찾아간 출장소는 윤석의 집 근처에서도 가장 악명이 높은 곳이었다.
 그것이 무슨 악명이냐면, 배달해야 하는 곳이 죄다 언덕길이거나 차가 들어가기 힘들어 직접 움직여야 하는 장소였다.
 이게 얼마나 힘들었으면 종종 인터넷에 누군가 저주 서린 악담으로 후기를 남기기도 했다.
 윤석이 이곳을 선택한 이유는 바로 그것 때문이었다.
 다른 곳보다 더 힘든 장소.
 힘든 만큼 체력이 단련되지 않겠는가?
 “뭐?”
 출장소장인 윤희준은 동그랗게 뜬 눈으로 윤석을 바라봤다.
 방금 자신이 들은 말이 정말 제정신으로 한 소리인지 윤석의 속내가 궁금했기 때문이다.
 그도 그럴 것이 일을 하겠다고 찾아온 윤석이 두 발로 배달하겠다고 한 것이다.
 가뜩이나 코스가 힘들어서 악명이 자자한 곳이거늘 자전거도 아니고, 지게를 메고 두 발로 배달을 하겠다니?
 결국 참다못한 윤희준이 진지한 얼굴로 물었다.
 “자네, 미쳤나?”
 “멀쩡합니다.”
 윤석이 담담하게 대답하니 윤희준은 더 믿음이 안 갔다.
 한눈에도 막 전역한 놈처럼 보이기는 하지만 열정만 가지고 하기에는 이쪽 일이 만만치 않았다.
 하물며 배달을 두 발로 하겠다니?
 아무리 믿음을 가지려고 한들 생길 리가 없었다.
 안 그래도 악명이 자자해서 일하겠단 사람이 없어 윤석의 구직이 기껍기 그지없었지만 왠지 이상한 놈이 온 것 같아 영 껄끄러웠다.
 그렇다고 일하겠다고 굴러들어 온 놈을 걷어차자니 당장 아쉬움이 컸다.
 결국 불신감보다 아쉬움이 더 큰 윤희준은 슬그머니 속내를 드러냈다.
 “배달 시간 못 맞추면 곤란한데······.”
 “그런 일 없도록 하겠습니다.”
 확답을 하는 윤석의 말에 결국 윤희준의 마음이 기울었다.
 이렇게까지 말을 했으면 만약 문제가 생겼을 때 책임을 전가하기 쉽겠다는 생각에서였다.
 약간의 우여곡절 끝에 배달 일을 하게 된 윤석은 정말 다른 사람처럼 오토바이나 자전거를 이용하지 않았다.
 오로지 체력 단련을 위해 윤석은 윤희준에게 말했던 대로 직접 발로 뛰었다.
 설마하니 정말 발로 뛸 거라고는 생각지 못한 윤희준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지만 이미 윤석은 배달할 우유와 신문을 챙겨 떠난 뒤였다.
 
 첫날은 하늘이 노랗게 보일 정도로 힘들었다.
 죽어라 이를 악물고 이미 닳아 없어진 군인 정신까지 끄집어내 겨우겨우 마무리했지만 덕분에 다리가 후들거려 걷는 게 무척 힘들었다.
 “훅, 훅!”
 지게를 앞뒤 양쪽에 지고 앞에는 우유를, 뒤쪽에는 신문을 올리고 언덕을 오르내리는 모습이 다소 기괴하기는 했지만 윤석은 그것을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아니, 신경 쓸 힘도 없었다.
 당장이라도 주저앉아 버릴 것 같은 두 다리에 힘을 바짝 주고 뛰는 것만 해도 죽을 것 같았다.
 그런데 그렇게 며칠 동안 새벽마다 이상한 차림으로 동네를 뛰어다니다 보니 제법 많은 사람들 눈에 윤석이 띄었다.
 덕분에 윤석은 자신도 모르는 새에 그 모습이 동영상에 담겨 인터넷에 오르락내리락하기 시작했다.
 이른바 지게남으로.
 사실 이때까지만 해도 이런 윤석의 행동은 그저 사람들의 가벼운 호기심거리였을 뿐이다.
 그러던 것이 윤석에게 영향을 준 것은 그가 두 번째 일을 구하면서부터였다.
 새벽 배달 일만으로는 돈벌이가 안 되기에 윤석은 두 번째 일을 구했다.
 무엇을 할까 고민하던 그가 고르고 고른 것은 바로 노가다였다.
 딱히 기술이 필요치 않고 몸으로 때울 수 있는 일 중 그나마 짭짭하게 벌 수 있는 일은 노가다뿐이었다.
 “후.”
 윤석은 노가다를 하기 위해 건설 현장을 찾았다.
 이 일을 하려고 평소보다 훨씬 일찍 신문과 우유 배달을 마쳤더니 벌써부터 전신에 땀이 흘러 노곤했지만 그것을 티 내지 않았다. 그러다 행여 일을 못 잡을지도 몰라서였다.
 사실 이 바닥이란 게 그렇다.
 첫인상만 좋아도 절반은 먹고 들어가는 곳이고, 일만 성실하게 하면 그때부터는 고정적으로 일할 수 있었다.
 물론 경기에 따라 다소 부침이 있을 수 있지만 어떻게든 일거리가 나오는 것이 바로 건설업이지 않은가?
 “일을 하고 싶다고?”
 현장감독인 양중성은 맞은편에 앉아 있는 윤석을 멀뚱히 바라봤다.
 컨테이너 사무실을 벗어나 현장 구석진 곳에서 몰래 농땡이를 치던 양중성은 누가 자신을 찾아왔다는 말에 혹 본사에서 검시관이 왔나 싶어 부랴부랴 사무실로 돌아왔다.
 그러나 기다리고 있는 것이 검시관이 아닌 이제 갓 전역한 티가 팍팍 묻어나는 어린놈이자 왈칵 짜증이 몰려왔다.
 거기다 이놈이 한다는 소리가 일을 시켜 달라니?
 이곳 현장을 총괄하는 직책이니만큼 일이야 얼마든지 시켜 줄 수 있지만 양중성은 미심쩍은 기색을 숨기지 않았다.
 “아직 젊은 것 같은데 왜 현장에서 일을 하려고?”
 “일하는 데 뭐 이유가 있습니까? 당연히 돈 벌려고 하는 거죠.”
 뭘 그리 당연한 걸 묻느냐는 투로 대꾸하는 윤석의 모습에 양중성은 고개를 모로 꼬았다.
 “맞는 말이긴 한데, 내 말은 다른 편한 일도 많은데 왜 굳이 노가다를 하고 싶어 하느냐는 거지. 자네 또래면 카페나 뭐 그런 데서 일하지 않나?”
 양중성이 이렇게까지 말하는 것은 윤석 또래의 애들이 고작 하루 이틀 나오고 도망갔기 때문이다.
 아무리 젊고 생생한 놈이라고 해도 이 막노동판에서 오래 버티는 놈이 없었다.
 젊으면 젊을수록 빨리 떨어져 나가는 것이 바로 이 바닥 일이었다.
 요즘에는 현장에 윤석 또래의 사람이 보이면 대부분 중국인이었다.
 그렇기에 더더욱 일을 하고 싶다는 윤석에게 믿음이 안 갔다.
 같은 한국인이면 나이 차가 나거나 비슷한 또래면 말도 잘 안 통하는 외국인이거나 하는 이 현장에서 윤석이 과연 얼마나 버틸 것인가?
 양중성은 그런 속내를 숨길 생각조차 없는지 미심쩍은 눈빛으로 바라봤다.
 이미 앞서 출장소의 윤희준을 통해 이런 의심스러운 눈초리를 받아 본 윤석은 전혀 당황한 기색 없이 입을 열었다.
 “땀 흘려 번 돈보다 값진 것은 없다고 생각합니다.”
 젊은 놈이 땀 타령을 하자 양중성은 ‘어쭈!’ 하는 표정을 지었다.
 과연 지금의 말이 그저 말만 번지르르한 것인지, 아니면 진심인지 알아낼 요량으로 윤석을 살피던 양중성은 한 점 흐트러짐 없는 그의 모습에 마침내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패기 있어 보이는 게 아주 마음에 들어. 젊은 친구가 아주 생각이 옳구먼. 그래, 뭐 할 줄 아는 거 있어?”
 “예?”
 일순 당황한 듯 멀뚱한 표정을 짓는 것을 보자마자 양중성은 인상을 찌푸렸다.
 “딱 보아하니 할 줄 아는 거 없구먼. 노가다도 처음이지?”
 “······예.”
 어떻게 대답해야 하나 잠깐 망설인 윤석은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겉으론 갓 전역한 사회 초년생처럼 보이는데 안다고 티를 낼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이에 양중성은 곤란하다는 듯 절레절레 고개를 흔들었다.
 “사람들이 아무리 노가다라고 무시하고 그런다지만 노가다도 기술 없으면 못 해. 그렇게 만만한 곳이 아니라고.”
 “제가 할 수 있는 일이 없을까요?”
 정말 일이 하고 싶었던 모양인지 윤석의 얼굴에 음영이 드리우자 이를 빤히 바라보던 양중성은 문득 생각났다는 듯 눈을 빛냈다.
 “가만있어 봐. 자네, 어째 얼굴이 낯이 익은데······ 아, 그래! 지게남, 자네, 지게남이지?”
 지게남?
 인터넷에서 자신을 지게남이라 지칭하는 줄 몰랐던 윤석은 알 수 없는 양중성의 말에 멀뚱한 표정을 지었다.
 이에 양중성은 마치 자신이 이상한 사람이 된 것 같은 기분이 들자 이를 회피하기 위해 황급히 휴대폰을 꺼내 지게남을 검색해 보여 줬다.
 “자, 봐 봐. 이거 자네 맞지?”
 자신이 배달할 때의 모습을 담은 동영상을 본 윤석은 얼떨떨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예, 예······.”
 “캬아, 내가 이거 보고 감탄했잖아. 말이 나와서 말인데, 자네가 할 만한 일이 있기는 한데······.”
 “정말요?”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이 있다는 말에 윤석은 반색했다.
 설마하니 노가다에도 기술이 필요할 거라 생각지 못했던 그는 행여 일거리를 얻지 못할까 내심 노심초사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 윤석의 속내와는 상관없이 양중성이 말을 이었다.
 “양중이라고 현장에서는 곰빵이라고도 하는데, 그 벽돌 나르는 거 알지? 그거야. 어때, 할 수 있겠어?”
 가능 여부를 떠나 일거리를 주겠다는데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거기다 준다는 일거리도 벽돌 나르는 것이니 체력 단련으로도 안성맞춤이었다.
 적합한 일거리를 맡았단 생각에 윤석은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하겠습니다.”
 “거, 젊은 친구가 시원시원해서 좋네. 가자고, 안 그래도 이곳 현장에서 양중반을 맡고 있는 친구와 친분이 있는 사이니까 소개해 줄게.”
 그렇게 윤석은 양중성을 따라 복잡한 현장을 이리저리 움직여 양중반장을 찾아갔다.
 “어이, 한 씨!”
 현장을 이리저리 바쁘게 움직이던 한노순은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소매로 이마에 맺힌 땀을 닦아 내며 고개를 돌렸다.
 이윽고 자신을 부른 것이 현장감독인 양중성임을 확인한 한노순은 맞은편에 있던 젊은 사내에게 말을 건넸다.
 “내 잠시 갔다 올 테니까 이거 옮기고 쉬고 있어.”
 이에 젊은 사내는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고는 벽돌을 가득 실은 수레를 끌고 유유히 사라졌다.
 이를 뒤로한 채 터벅터벅 양중성에게 다가간 한노순은 그의 뒤에 서 있는 윤석을 한번 힐끔거리고는 용건을 물었다.
 “바빠 죽겠는데 무슨 일이야?”
 “여기 이 친구가 일을 하고 싶대.”
 “그래서?”
 “별 기술도 없고 해서 양중반에서 받아 줄 수 있나 하고.”
 양중성의 말에 한노순의 시선이 윤석에게 향했다.
 양중성을 따라온 것부터 뭔가 관련이 있겠다 싶었건만 결국은 일자리 청탁이었다.
 가뜩이나 일손이 부족하던 참이니 일손이 느는 것은 달가운 일이었으나 그렇다고 자신이 쉬이 결정할 문제는 아니었다.
 “그런 얘기라면 소장한테 가서 해야지.”
 “에이, 그쪽 소장은 자네 말이라면 껌뻑 죽으니까 자넬 찾아왔지.”
 현장감독인 양중성이 은근슬쩍 자신을 치켜세우자 한노순은 기분이 좋았다.
 사실 양중성의 말마따나 소장에게 말해 인부 하나 늘리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양중성 덕분에 우쭐해진 한노순은 비교적 밝은 얼굴로 윤석에게 말을 걸었다.
 “일해 본 적은 있고?”
 “처음입니다.”
 “솔직히 그저 벽돌이나 시멘트 나르는 일이니 어려울 건 없는데, 문제는 체력이지. 할 수 있겠어?”
 “시켜만 주신다면 없는 체력이라도 만들어서 하겠습니다.”
 윤석이 자신감을 드러내자 그 모습이 마음에 들었는지 한노순이 크게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
 “좋아, 소장에게는 내가 말해 둘 테니까 다음 주부터 출근해.”
 “알겠습니다.”
 허리를 숙이며 당차게 대답한 윤석은 그길로 양중성과 함께 걸음을 옮겼다.
 “내가 좀 바빠서 그런데 혼자 갈 수 있지?”
 바쁘단 핑계를 내세우며 배웅을 하다 마는 양중성이었다.
 하나 이미 대충 길을 외운 윤석은 아무 문제 없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나중에 보자고.”
 그렇게 양중성은 다음 만남을 기약하며 바쁜 걸음으로 사라졌다.
 이를 뒤로하고 현장을 나온 윤석은 손목에 찬 시계를 확인했다.
 “생각보다 시간이 많이 남네. 이왕 이렇게 된 거 그 사람을 찾아볼까?”
 
 
 #검술의 대가
 
 “그런 사람 없다고요? 분명 여기라고 그랬는데······.”
 “아, 글쎄 최동훈인지 뭔지 여기에 안 산다니까 그러네.”
 고개를 갸웃거리며 연신 물어보는 게 짜증 났는지 언성을 높이는 아줌마의 대답에 윤석은 미련이 남는 얼굴로 발걸음을 돌렸다.
 끝내 미련이 남았지만 당장 저 집에 살고 있는 사람이 그런 사람 없다는 데 별수는 없었다.
 “되도록 빨리 최동훈을 찾아야 하는데······.”
 건설 현장에서 면접 아닌 면접을 본 뒤 윤석이 지금 애타게 찾는 사람은 회귀 전 감옥에 있을 때 귀동냥으로 듣게 된 검술의 대가였다.
 감옥에 있던 윤석은 몰랐지만 회귀 전, 즉 미래의 최동훈은 헌터들 사이에서 유명한 사람 중 하나였다.
 나이는 윤석보다 훨씬 많아 중년이 아니라 노년에 접어들어 사람들은 따로 그를 일컬어 노도장, 혹은 노검객이라고 불렀다.
 헌터들 사이에서 알려진 것은 딱 그 정도였고, 최동훈이 어디에 살았으며 뭘 했는지에 관해서는 알려지지 않았다.
 하지만 윤석은 회귀 전 감옥에서 우연찮게 최동훈에 대해 아는 자를 만났다.
 한 번은 그가 최동훈의 거처를 말한 적이 있었는데, 그걸 떠올린 윤석이 검술을 배우기 위해 최동훈을 찾아온 것이다.
 하지만 감옥에서 들은 곳은 아직 최동훈이 살기 전이었는지 그에 대해 아는 사람이 없었다.
 결국 허탕만 쳤단 생각에 애써 무거운 발걸음을 옮기던 윤석은 방금까지 보고 있었던 집에서 웬 꼬마가 나오는 걸 봤다.
 그냥 그 집 꼬마인가 보다 했지만 그럴듯한 도복 차림과 허리에 제 몸에 맞춘 목도를 찔러 넣은 모양새가 눈에 밟혔다.
 가뜩이나 미래 최고의 검술가로 알려진 최동훈을 찾아온 터라 별거 아니게 여길 수 있는 꼬마의 모습도 심상치 않게 보인 것이다.
 그것은 사고마저 비약적으로 발전시켜 혹 저 꼬마가 최동훈의 제자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자 윤석은 더는 망설이지 않고 바로 꼬마에게 말을 걸었다.
 “야, 꼬마야.”
 “예?”
 “너 지금 어디 가냐?”
 “수련하러 가요.”
 아이가 수련이란 말을 꺼내자 윤석은 제대로 짚었단 생각에 눈을 반짝였다.
 “혹시 수련이란 게 이 칼 연습하는 거냐?”
 “칼 연습이 아니라 검도예요, 검도!”
 자신이 배우는 것을 한낱 칼싸움으로 취급한다고 여겼는지 꼬마의 말투가 여간 맹랑한 것이 아니었다.
 새파랗게 어린 꼬마에게 지적을 당하자 왠지 모르게 기분이 상했지만 그렇다고 꼬마와 실랑이를 벌여 어렵게 잡은 단서를 놓칠 수는 없었다.
 “그래, 내가 말실수를 했네. 미안하다. 그 수련이라는 것이 검도를 말하는 거지?”
 윤석이 순순히 사과를 하자 기분이 풀렸는지 꼬마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에 어느 정도 꼬마의 경계심이 허물어졌다 판단한 윤석은 슬그머니 본심을 드러냈다.
 “그 검도 누구한테 배우는지 물어봐도 될까?”
 “사부님요.”
 “사부?”
 “사부 아니고 사부님!”
 또다시 자신의 말꼬리를 잡는 지적에 순간 울컥했지만 윤석은 애써 마음을 다스리며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그래, 사부님. 그 사부님 어디 가면 만날 수 있니?”
 아이는 대답 대신 손으로 어딘가를 가리켰다.
 고사리 같은 아이의 손이 가리키는 곳으로 시선을 옮긴 윤석의 얼굴에 당혹감이 떠올랐다.
 “그 사부님이 저기에 계시다고?”
 “네.”
 “정말 저기에 계신 거 맞아? 거짓말하는 거 아니지?”
 “사부님이 거짓말은 나쁜 거랬어요. 그래서 거짓말은 안 해요.”
 확고하기 짝이 없는 아이의 말에 윤석은 나직이 한숨을 내뱉었다.
 그도 그럴 것이 아이가 가리킨 곳은 다름 아닌 북한산. 그것도 32개의 봉우리 중 가장 높다는 백운봉이었다.
 백운봉, 해발 836.5미터에 달하는 북한산 최고봉.
 솔직히 인근 산악인들이 즐겨 찾는 곳이 북한산이기에 해발 836미터라고는 하나 못 올라갈 만큼 높은 곳은 아니었다.
 문제는 눈앞의 이 꼬마였다.
 최동훈이 정말 백운봉에 있다면 이 꼬마는 백운봉까지 올라가 수련을 받는단 말이 아닌가?
 솔직히 어른들에게도 다소 버거운 곳이 백운봉인데 이런 꼬마가 오른다고 하니 선뜻 믿기지가 않았다.
 “네가 저기 백운봉에 올라간다고?”
 결국 윤석이 속내를 비치자 아이는 말똥말똥한 눈으로 윤석을 물끄러미 올려다보더니 이내 아무런 말 없이 걸음을 옮겼다.
 꼬마한테 무시당했단 생각에 순간 열불이 치솟았지만 윤석은 이내 꼬마의 발걸음이 백운봉으로 향한 것을 보고 천천히 그 뒤를 쫓았다.
 터벅터벅 어지러운 발걸음으로 북한산 초입에 들어서기가 무섭게 꼬마 놈이 냅다 뛰기 시작했다.
 “뭐야? 튄 거야, 지금?”
 날다람쥐처럼 쪼르륵 산등성이를 타고 올라가는 꼬마의 모습에 윤석은 기가 차서 헛웃음을 내뱉었다.
 자신을 따돌리려고 하는 게 눈에 훤히 보였지만 이제 갓 전역한 자신이 못 따라잡을 거라 생각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회귀 전에도 갓 전역한 지금의 몸 상태는 그 어느 때보다 훨씬 좋았기 때문이다.
 또래 애들보다 꼬마의 뜀박질 속도가 빠르긴 했어도 지금의 몸 상태라면 충분히 따라잡을 수 있을 거라 윤석은 자신했다.
 그렇게 꼬마의 뒤를 쫓아 산길을 뛰어오르기 시작한 윤석은 얼마 못 가 숨이 턱 끝까지 차오르자 버럭 성을 냈다.
 “쪼그만 게 뭐 저렇게 빨라!”
 그러거나 말거나 꼬마는 점점 더 거리를 벌렸고, 행여 놓칠세라 윤석은 이를 악물고 젖 먹던 힘까지 다해 뒤를 쫓았다.
 “헉, 헉, 허억! 야, 좀 천천히 가!”
 도대체 저 쪼그만 놈은 뭘 처먹었는지 지치지도 않았다. 덕분에 죽어나는 것은 그 뒤를 쫓는 윤석이었다.
 이제는 숨이 차오르다 못해 심장이 터질 것처럼 쿵쾅거리기 시작하자 윤석은 꼬마의 뒤를 쫓는 걸 포기하고 말았다.
 “허억, 허억!”
 곧 숨넘어갈 것처럼 파리해진 얼굴로 연신 가쁜 숨을 토해 내던 윤석은 이미 저 멀리 점이 되어 사라지는 꼬마를 보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헉, 허억, 굳이 저놈을 쫓아갈 필요가 없잖아?”
 어디로 갈지를 뻔히 아는데 굳이 뭐 빠지게 쫓아가 봤자 아무 의미 없었다.
 어차피 백운봉이 목적지란 사실을 알지 않는가.
 거기까지 생각이 이르자 윤석은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안 그래도 꼬마를 쫓느라 쉬지 않고 달려왔더니 고산병이라도 왔는지 눈이 빠질 것 같고 머리가 어지러웠다.
 힐끔 왔던 길을 돌아보니 이건 평범한 등산로가 아니었다.
 아니, 등산로 자체가 아니었다. 그저 나무가 듬성듬성 심겨 있는 비탈길일 뿐이었다.
 그래서인지 주위에 등산객의 모습은 고사하고 사람 기척마저 없었다.
 이러다 산에서 길이라도 잃는 건 아닐까 싶은 마음에 덜컥 겁이 나 돌아갈까 생각했지만 저 아래 산기슭이 까마득하게 보이자 생각을 고쳐먹었다.
 “여기까지 왔으니 백운봉에 가서 최동훈을 만나고야 말테다.”
 그리 말하며 스스로 기운을 북돋은 윤석은 내친김에 자리에서 일어나 저 멀리 보이는 백운봉을 향해 걸음을 놀렸다.
 한 걸음, 한 걸음 꾸준히 나아가자 어느새 백운봉이 가까워졌다.
 북한산을 푸르게 치장하던 나무들은 어느새 사라지고 삭막한 바위만 보이는 봉우리에 접어들자 윤석은 슬슬 숨이 차오르기 시작했다.
 다소 쉬어 가는 한이 있더라도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계속 봉우리를 오르던 윤석은 눈앞에 떡하니 길을 막은 집채만 한 바위를 보곤 기가 질려 버렸다.
 “크네, 커.”
 바위는 마치 누구한테도 백운봉의 정상을 넘겨줄 수 없다는 필사의 각오를 지닌 수문장처럼 떡하니 버티고 서 있었다.
 바위는 백운봉의 한 축을 맡고 있었다.
 옆으로 살짝 돌아가면 비교적 원만한 경사에 밧줄 하나가 늘어져 있었는데, 이를 잡고 올라야만 백운봉의 전망대 백운대에 오를 수가 있었다.
 생전 안 하던 등산을 해 다리가 후들거렸지만 윤석은 이를 악물고 밧줄에 몸을 싣고 바위를 넘어 기어코 백운봉 정상에 올랐다.
 발아래로 펼쳐지는 뽀얀 운해를 보는 순간 저도 모르게 가슴속 무언가가 상쾌하게 쏟아지는 것을 느낀 윤석은 주위를 둘러봤다.
 꼬마의 말로는 이 백운봉에 최동훈이 있다 했는데 아무리 봐도 보이는 것이라곤 이따금씩 백운봉을 오르내리는 등산객 말고는 북한산의 산자락뿐이었다.
 최동훈은커녕 좀 전의 꼬마도 코빼기 하나 안 보이자 윤석은 허탈한 마음에 털썩 백운봉을 깔고 앉았다.
 운해 너머 저 멀리 펼쳐진 도시를 멍하니 바라보던 윤석은 어느새 자신 말고는 아무도 없음을 깨닫고 퍼뜩 자리에서 일어났다.
 
 백운봉이 보여 주는 경치에 넋을 잃은 나머지 너무 늦게 내려오는 바람에 윤석이 집에 도착했을 때는 어느덧 달이 기울기 시작한 야심한 밤이었다.
 “이제 오니?”
 조심스레 현관문을 열기가 무섭게 고개를 내미는 어머니의 모습에 윤석은 멋쩍은 얼굴로 고개를 숙였다.
 “응.”
 “늦었구나.”
 벽에 걸어 둔 시계의 바늘이 12시를 가리키고 있는 것을 힐끔 본 어머니의 말에 그녀를 걱정시켰음을 깨달은 윤석은 미안한 마음에 머리를 긁적이며 말끝을 흐렸다.
 “먼저 주무시지······.”
 “새벽같이 나간 아들이 아직 안 왔는데 어떻게 먼저 자겠니? 이렇게 얼굴이라도 보려면 기다리는 수밖에.”
 너무 늦게 다니지 말라는 책망과 고작 아들 얼굴 한번 보려고 이 늦은 시간까지 안 주무시고 기다리는 어머니의 마음이 확 느껴지자 윤석은 울컥 눈물이 나오려는 것을 간신히 참았다.
 코끝이 찡해지자 행여 어머니가 이를 보시지는 않을까 염려한 윤석은 피곤하다는 듯 손으로 얼굴을 훔쳤다.
 “피곤하다, 먼저 들어가 잘게.”
 “그래, 잘 자라.”
 그리 핑계를 대며 자리를 피하려 했던 윤석은 어머니의 얼굴에 서운한 기색이 스치자 마음이 편치 않았다.
 하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이라 어떻게 주워 담을 새도 없이 어머니는 쓸쓸히 고개를 끄덕이고는 방으로 들어가셨다.
 오늘따라 어머니의 등이 부쩍 왜소해 보인다 생각한 윤석은 왠지 입안이 씁쓸해지는 것을 느끼며 제 방으로 들어갔다.
 탁!
 이윽고 등 뒤로 방문이 닫히기가 무섭게 윤석은 주먹으로 제 머리를 한 대 때렸다.
 “바보 같은 놈.”
 회귀 전 이맘때의 자신이었다면 방금 전 보았던 어머니의 쓸쓸한 뒷모습을 알아차리지 못했을 것이다.
 그때는 어머니의 사랑이 얼마나 큰 것인지 몰랐으니까.
 하지만 지금은 안다. 회귀 전 어머니를 잃고 느꼈던 공허함이 얼마나 지독했던가.
 그저 한없이 받기만 했던 사랑이 사라지고 나서야 느낀 고통이 얼마나 괴로웠던가.
 그랬기에 윤석은 방금 전 자신의 행동이 원망스러웠다.
 제 딴에는 어머니를 걱정해서 한 말이었지만 결국 그게 상처를 주고 말았다.
 자식은 뭘 하든 부모에게 상처를 줄 수밖에 없다는 생각이 들자 윤석은 그것을 참을 수가 없었다.
 침대에 걸터앉아 스스로를 원망하던 윤석은 어느새 울리는 알람 소리에 정신을 차렸다.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됐나.”
 어느덧 배달 일을 할 시간이 되자 윤석은 자리에서 일어나 방을 나섰다.
 이제는 밤이 아니라 이른 새벽이거늘 아직까지 주무시지 않으신 건지 아니면 방문 여는 소리에 깨신 건지 문밖으로 어머니가 고개를 빼꼼 내밀었다.
 “이제 나가니?”
 “아직 안 주무셨어?”
 “나이가 드니까 잠만 적어지는구나.”
 “그래도 좀 주무셔야지, 잠이 보약이라잖아.”
 좀 전의 일이 마음에 걸려 평소보다 더 말투가 부드러워진 윤석이었다.
 어머니도 그런 윤석의 변화를 느낀 것인지 피식 미소를 짓고는 이내 화제를 바꿨다.
 “일은 힘들지 않아?”
 며칠 전부터 새벽에 배달하러 나가는 자신을 걱정하는 어머니의 말에 윤석은 얼굴을 붉혔다.
 “부지런하게 살아야지.”
 쑥스러움에 대충 내뱉은 말에 감격했는지 어머니가 대견하단 눈빛을 보냈다.
 왠지 모르게 그 눈빛에 양심이 찔린 윤석은 벽에 걸린 시계를 훔쳐보며 도망치듯 자리를 피했다.
 “늦겠다, 갔다 올게.”
 그렇게 도망치듯 집을 나선 윤석은 윤희준의 출장소로 향했다.
 
 새벽 배달이 끝나자 윤석은 최동훈을 찾아 걸음을 옮겼다.
 어제 면접을 봤던 건설 현장은 다음 주부터 일하기로 했으니 그때까지 비는 시간 동안 최동훈을 찾을 요량이었다.
 어제 만났던 꼬마의 집 앞을 어슬렁거리던 윤석은 마침내 굳게 닫힌 대문 너머로 기척이 느껴지자 후다닥 근처에 주차된 차 뒤로 몸을 숨겼다.
 끼익!
 이윽고 대문이 열리며 예의 도복 차림의 꼬마가 모습을 드러내자 윤석은 눈을 빛냈다.
 “오늘은 안 놓친다!”
 잠복 아닌 잠복을 하며 어제의 일을 상기한 윤석은 이를 악물었다.
 이윽고 꼬마가 어제처럼 북한산으로 걸음을 옮기자 몰래 그 뒤를 쫓았다.
 어제는 방심한 탓에 꼬마를 놓쳤지만 오늘만큼은 기필코 꼬마를 뒤쫓아 최동훈을 만나고 말겠다며 다짐한 윤석은 어느새 북한산의 초입을 앞뒀다.
 산기슭에 가까워지고 꼬마가 돌연 뒤를 돌아보자 그는 황급히 근처 담벼락 뒤에 몸을 숨겼다.
 자신이 미행하고 있는 것을 들킨다면 꼬마를 쫓기가 힘들어질 것 같아서였다.
 “후우, 영악한 새끼.”
 고작 꼬마 하나 때문에 쥐 새끼처럼 몸을 숨겨야 한다는 굴욕감에 나직하게 꼬마를 욕한 윤석은 조심스레 담벼락 밖으로 고개를 내밀었다.
 다행히 꼬마가 자신을 발견하지는 못했는지 경계하는 기색은 아니었다.
 “자, 어서 가라. 어서 가서 날 최동훈에게 안내하라고.”
 이제 꼬마가 움직이기만을 기다리던 윤석은 순간 눈을 부릅떴다.
 아닌 게 아니라 경계심 없던 꼬마 놈이 갑자기 어제처럼 내달리기 시작한 것이다.
 “에이, 씨발!”
 난데없이 뜀박질을 시작한 꼬마를 보는 순간 윤석은 욕설과 함께 반사적으로 담벼락에서 튀어나와 꼬마의 뒤를 쫓았다.
 오늘만큼은 꼭 따라잡으리라 다짐을 했건만 자칫 눈앞에서 꼬마를 놓칠 판국이었다.
 “이크!”
 마음이 너무 앞서는 바람에 발이 꼬여 휘청거렸지만 재빨리 중심을 잡은 윤석의 시선이 그 순간에도 멀어지는 꼬마를 쫓았다.
 결코 놓치지 않겠다는 의지를 가지고 매의 그것처럼 눈빛을 번뜩이며 다리를 재촉한 그는 어제 꼬마를 놓쳤던 지점에 이르자 더욱 이를 악물었다.
 “안 놓친다!”
 씹어뱉듯 악다문 잇새로 내뱉은 다짐과 달리 꼬마는 점점 멀어졌고, 기어코 종국에는 꼬마의 신형을 놓치고 말았다.
 “허억, 허억!”
 어느새 턱 끝까지 차오른 숨을 몰아쉬며 제멋대로 쿵쾅거리는 가슴을 부여잡은 윤석은 머리가 핑 도는 현기증과 함께 다리가 풀려 결국 그 자리에 벌러덩 드러누웠다.
 “허억, 허억! 쪼그만 게······ 허억, 허억, 엄청 빠르네.”
 오늘도 어제처럼 꼬마를 놓쳤단 분함에 주먹으로 땅바닥을 내리치던 윤석은 벌떡 상체를 일으켜 세웠다.
 “여기서 포기할까 보냐!”
 기껏 여기까지 왔는데 꼬마 하나 놓쳤다고 돌아갈 수는 없었다.
 가뜩이나 며칠 뒤면 곰빵 일을 하게 되어 녀석을 쫓을 시간도 없어질 터였다.
 그렇게 분함은 오기로 바뀌었고, 벌떡 자리에서 일어난 윤석은 옷에 묻은 흙을 털 생각조차 안 하고 백운봉을 향해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어제도 백운봉에 올랐지만 최동훈의 코빼기도 보지 못했다.
 그 일로 미루어 보아 지금 이렇게 백운봉을 오른다 할지라도 최동훈을 찾을 거란 생각은 들지 않았지만 이미 오기가 뻗친 윤석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백운봉에 없다면 그 인근을 다 뒤져서라도 최동훈을 찾아낼 속셈이었다.
 그렇게 씩씩거리며 산을 오른 윤석은 마침내 백운봉에 도착했다.
 그래도 어제 한번 와 본 곳이라고 크게 길을 헤매지도 않고 곧장 와서 그런지 어제보다 더 빠른 시간에 백운봉에 도착할 수 있었다.
 북한산에서 가장 높은 백운봉에서 하늘을 올려다본 윤석은 어제보다 시간이 여유 있자 망설이지 않고 최동훈을 찾으려 근처를 배회했다.
 발품을 파는 것에 그치지 않고 윤석은 더 나아가 마주치는 등산객들에게 말을 붙였다.
 “안녕하세요, 이곳에는 자주 오세요?”
 “그런 편이지.”
 간단한 인사말과 함께 말을 붙이자 등산복을 차려입은 50대 중년 사내는 별 경계하는 기색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면 혹시 최동훈이라는 사람을 알고 계시나요?”
 “최동훈?”
 “예, 듣기로는 이 근처에 사는 것 같던데······.”
 “에이, 여기 사는 사람을 내가 어떻게 알아. 최동훈이란 이름은 들어 본 적도 없어.”
 사람 참 별 이상한 걸 묻는다면서 고개를 젓는 중년 사내의 말에 윤석은 내심 실망했지만 끝까지 희망을 놓지 않았다.
 “그러면 이 근처에서 사람 사는 곳은 본 적 없어요?”
 “움막이나 뭐 그런 거?”
 “예, 예!”
 뭔가 짚이는 것이 있는지 대번에 중년 사내의 입에서 움막이란 말이 나오자 윤석은 눈을 반짝였다.
 “당연히 없지. 여긴 국립공원이라 그런 거 짓고 살다간 바로 신고당해.”
 하지만 기대와 다른 대답이 나오자 윤석은 시무룩한 얼굴을 감추지 못했다.
 중년 사내는 더 할 말 없으면 이만 가겠다며 걸음을 재촉했고, 윤석은 혹시나 하는 마음에 다른 등산객들을 상대로 똑같은 질문을 반복했다.
 하나 돌아온 대답은 하나같이 다 똑같았고, 결국 해가 서쪽으로 기울기 시작하자 윤석은 아무런 소득 없이 하산했다.
 
 막차 버스를 타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 위에서 멍하니 창밖을 바라보던 윤석은 문득 언제까지 이렇게 지내야 하나 생각했다.
 그도 그럴 것이 어제도, 오늘도 최동훈을 찾지 못했는데 과연 내일은 찾을 수 있을까?
 더욱이 오늘은 등산객들을 상대로 탐문까지 했지만 그 누구도 최동훈에 대해 알지 못했다.
 따지고 보면 정말 최동훈이 북한산에 있기는 한 것인지 확신조차 없었다.
 그가 있다고 생각한 것은 그저 동네 꼬마의 말을 들은 것뿐이지 않은가.
 명확하게 말하자면 그 꼬마가 본인 입으로 ‘나 최동훈의 제자요.’ 한 것도 아니었다.
 그저 자신의 지레짐작으로 그렇게 생각했을 뿐이다.
 만약, 정말 만약에 그 꼬마의 사부가 최동훈이 아니라면?
 “그럼 나가리지.”
 이틀 연속으로 허탕을 쳤기 때문인지 별의별 생각이 들자 윤석은 저도 모르게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러고는 다시 창밖을 향해 시선을 던지려는데 뒤에서 누군가 어깨를 툭 건드렸다.
 “젊은 사람이 웬 한숨을 그리 쉬고 그래?”
 대뜸 자신에게 말을 걸어오는 자가 있자 윤석은 멀뚱한 시선으로 힐끔 뒤를 돌아봤다.
 시선이 닿는 곳에는 웬 할아버지가 싱긋 웃는 얼굴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윤석은 다소 기분 나빴던 속내를 감추고는 어색하게 미소를 지었다.
 그렇게 아무렇지 않게 넘어가려는데 이 할아버지가 또 어깨를 툭 치며 말을 걸었다.
 “젊은 사람이 무슨 고민이 있어서 그렇게 청승을 떨어! 모름지기 젊을 때는 패기, 패기가 있어야 하는 거야!”
 ‘지랄.’
 할아버지의 말에 윤석은 욕이 튀어나오려는 것을 간신히 참았다.
 보기에는 젊어 보여도 회귀 전의 나이를 들먹인다면 예순은 넘었다.
 껍데기는 젊을지 몰라도 알맹이는 나름 산전수전 다 겪은 몸이었다.
 오죽하면 감옥에서 최후를 맞이했겠는가?
 물론 감옥에 있던 시간이 대부분이었지만 감옥만큼 경험을 쌓기 좋은 곳도 없었다.
 감옥은 지혜의 창고라는 말도 있지 않은가?
 지혜가 아니라 지식이었던가?
 아무튼 그런 말이 있을 만큼 감옥은 결코 만만한 곳이 아니었다.
 하나 눈앞의 할아버지가 그런 것을 알 턱이 없으니 윤석은 그저 아까처럼 멋쩍게 웃어 보일 뿐이었다.
 윤석이 대답은 않고 웃음으로 때우려고 하자 그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할아버지는 지팡이를 짚고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아예 윤석의 옆에 엉덩이를 붙였다.
 “늙으면 말이야, 늘어나는 건 고집과 시간밖에 없다 이 말이야. 그러니까 고민 있으면 털어놔 봐. 혹시 아나, 이 늙은이가 도움이 될 수도.”
 순순히 물러설 기미가 보이지 않자 윤석은 난감하다는 듯 머리를 긁적였다.
 그도 그럴 것이 어느새 한산해진 버스 안에 남아 있는 사람들의 시선이 온통 자신에게 쏠려 있었기 때문이다.
 누구는 손에서 휴대폰을 꺼내는 것이 이러다 자칫 버스에서 할아버지를 괴롭힌 이상한 사람이 될 것 같았다.
 까마귀 날자 배 떨어진다고, 이런 상황에서는 아무 잘못도 없이 괜한 오해를 살 수도 있었다.
 옛 속담에 자두나무 밑에서는 갓끈도 고치지 말라지 않던가.
 이 순간만큼은 옆에 앉은 이 할아버지는 자두나무고 자신은 그저 갓끈 풀어진 선비에 불과했다.
 도통 빠져나갈 방법이 없다 여긴 윤석은 이 오지랖 넓은 할아버지에게 대충 맞춰 주다가 틈을 봐서 내려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집은 종점이었지만 이 할아버지가 언제 내릴지 알 수 없으니 몇 정거장 걸어가는 것쯤은 감수하잔 생각이었다.
 그렇게 마음을 먹은 윤석은 그 와중에도 자신을 보며 눈을 빛내는 할아버지를 보곤 나직이 한숨을 내쉬며 입을 열었다.
 “제가 찾은 이 길이 잘못된 길이면 어쩌나 고민입니다.”
 구구절절 헌터가 되기 위해 미래에 잘나갔던 검객에게 검술을 배우려고 백운봉 일대를 사방팔방 찾아다니고 있다고는 말할 수 없어 윤석은 대강 얼버무렸다.
 이것 가지고는 제대로 된 상담은커녕 대화조차 되지 않았지만 어차피 대충 할아버지를 상대할 속셈이었으니 상관할 바가 아니었다.
 차라리 할아버지가 내심 실망을 금치 못해 관심을 끊었으면 하는 마음도 있었다.
 하지만 윤석의 바람과 달리 할아버지는 뭔가 알기라도 하는 사람처럼 진지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 내가 가는 길이 옳은 길인지 아닌지에 대한 불안감이라······ 그것만큼 고민되는 건 없을 거야. 암, 나조차도 젊을 적엔 그런 고민들을 많이 했지.”
 이런 걸 연륜이라고 해야 하나?
 자신이 예상한 반응은 이런 것이 아닌데 말뜻을 정확하게 짚어 내는 모습에 윤석은 어떻게 반응해야 하나 갈피를 잡지 못하고 멍하니 할아버지를 바라봤다.
 이를 다른 의미로 받아들였는지 할아버지는 쭈글쭈글한 손으로 덥석 윤석의 손을 꼭 쥐며 말을 이었다.
 “하지만 젊은이, 걱정할 것 없어. 젊다는 건 말이야, 언제든 다시 시작할 수 있다는 뜻이거든. 그러니까 애써 찾은 길을 포기하지 말게. 그 길을 찾은 자신을 좀 더 믿어 봐.”
 그리고 할아버지는 힘내라며 윤석의 어깨를 토닥이고는 버스가 정차하자 홀연히 내렸다.
 본래라면 자신이 먼저 도망치듯 버스에서 내리려고 했지만 할아버지가 먼저 내리자 윤석은 멀뚱한 얼굴로 어깨를 으쓱였다.
 그러고는 정류장과 함께 멀어지는 할아버지의 뒷모습을 바라보다 고개를 바로 하며 할아버지의 마지막 말을 곱씹었다.
 “자신을 좀 더 믿어 봐라······.”
 누구나 할 수 있는 간단한 말이었지만 감히 누구도 진심으로 하지 못하는 말이었다.
 어쩌면 몸에 가득한 주름만큼이나 연륜이 쌓인 할아버지가 한 말이기에 남다르게 느껴지는지도 몰랐다.
 윤석은 자신을 믿어 보란 말이 묵직하게 가슴에 들어차는 것을 느꼈다.
 회귀 전 이맘때의 그는 과연 자신을 믿은 적이 있었던가?
 스스로에게 던진 물음에 대한 답은 ‘아니요.’였다.
 자신을 믿지 못했기에 끈기 있게 하는 것이 없었고, 자신이 없었기에 노력조차 하지 않았다.
 그래 놓고 맞이하는 실패에, 좌절에 대해 세상을 탓하며 불만만 늘어놓았다.
 얼마나 한심한 모습인가?
 그렇게 한심하게 살다가 세상과 단절된 감옥에서 후회하며 쓸쓸히 죽지 않았는가.
 회귀한 지금도 그랬다. 회귀 전의 한심한 자신을 알고 있으면서, 달라지겠다고 그렇게 다짐하고 결심했으면서 과연 자신을 믿기는 한 건가?
 역시나 답은 ‘아니요.’였다. 그랬다면 이렇게 고민하지도 않았을 테니까.
 이름도 모르는 생면부지 할아버지의 말 한마디가 많은 것을 깨치게 했다.
 “그래, 고작 이틀밖에 안 됐는데 포기하긴 이르지.”
 1년이란 기한이 정해져 있어 모든 것을 서두르려고 하다 보니 조바심이 들었다.
 하지만 조금만 달리 생각해 보면 고작 1년 중 이틀을 허비했을 뿐이다.
 과거의 1%도 안 되는 시간을 허비해 놓고 자신을 믿지 못하며 조바심을 낸 것이다.
 과연 이렇게 믿음이 없어서 마스터 헌터가 될 수 있을까?
 아마도 불가능할 것이다.
 아무리 자신이 미래의 일을 알고 있다고 한들 마스터 헌터가 되는 길은 최동훈을 찾는 것보다 더 고된 여정일 것이다.
 그런데 고작 과정에 지나지 않는 최동훈 찾기에 이렇게 좌절하는 자신이 마스터 헌터가 될 수 있을 리 없었다.
 꿈을 이루기 위해서는 달라져야 했다.
 포기가 빠른 사람이 아니라 포기를 모르는 사람, 자신을 믿는 사람으로 거듭나야 했다.
 그래야만 끝까지 살아남아 원하는 것을 쟁취할 수 있을 테니까.
 
 #모름지기 체력부터
 
 새벽이 되면 윤석은 어김없이 배달을 했다.
 그렇게 배달 일이 끝나면 최동훈을 찾아 북한산으로 향했다.
 이틀째를 제외하고 윤석은 아예 대놓고 예의 그 꼬마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최동훈을 찾는 가장 빠른 방법은 역시나 꼬마를 쫓는 것이란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틀째처럼 몰래 꼬마를 미행하는 것이 낫지 않나 하겠지만, 미행 같은 떳떳하지 못한 방법으로 꼬마를 이겨서 최동훈을 찾고 싶지는 않았다.
 뭣보다 미행을 한다고 해서 꼬마를 따라잡을 수 있을 거란 확신이 없었다.
 그렇게 새벽에는 배달 일을, 아침부터 저녁 무렵까지는 백운봉을 오르락내리락하며 지낸 지 어느덧 닷새째였다.
 내일부터는 건설 현장에 출근해야 하니 오늘이 최동훈을 찾을 수 있는 마지막 날이었다.
 “또 왔어요?”
 다행히 늦지 않게 꼬마의 집 앞에 도착한 윤석은 자신을 보고 귀찮다는 듯 눈살을 찌푸리는 꼬마의 반응에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러니까 사부님에게 얌전히 데려다주면 좋잖아.”
 짜증을 내는 꼬마의 반응에 위축되기는커녕 오히려 꼬마를 압박하는 윤석이었다.
 말은 이렇게 했지만 꼬마가 순순히 안내할 거란 생각은 하지 않았다.
 그럴 거였으면 이렇게 실랑이를 하지도 않았을 테니까.
 얼마 전부터 점점 당당해지는 윤석의 태도가 꼬마는 영 불안했다.
 그도 그럴 것이 시간이 지날수록 윤석을 따돌리기가 점점 힘들어졌기 때문이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자신이 조금만 속도를 내면 금방 따돌렸던 윤석이 언제부터인지 악착같이 쫓아오는 통에 어제도 엄청 고생하지 않았던가.
 점점 따돌리기가 어려워지는데 윤석은 포기하지 않고 계속 찾아오니 큰 부담이었다.
 오늘은 또 어떻게 윤석을 따돌릴지 생각하던 꼬마는 북한산의 초입에 들어서자 여느 때와 같이 내달리기 시작했다.
 팟!
 제법 기습적으로 지면을 박찼지만 이미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어렵지 않게 따라붙는 윤석의 모습에 꼬마는 이를 악물었다.
 윤석이 어느 정도 따라잡기 시작하자 꼬마는 늘 가던 길이 아닌 좀 더 험한 길을 택했다.
 덕분에 등산로에서 한참 떨어진, 길이라고도 할 수 없는 산등성이를 타게 됐지만 이래저래 체력이 단련된 윤석은 큰 무리 없이 꼬마를 따라잡았다.
 처음부터 체력이 차이가 나 따라잡지 못했을 뿐이지 신체적으로 본다면 몸이 훨씬 큰 윤석이 꼬마에게 뒤처질 이유가 없었다.
 꼬마는 그런 윤석을 어떻게든 떨쳐 내기 위해 점점 험한 길을 택했다.
 체력적인 우위를 잃은 마당에 자신이 윤석을 앞설 수 있는 것은 지형의 익숙함뿐이었다.
 그렇게 나무도 듬성듬성 심긴 비탈길을 내달리는 꼬마의 뒤를 쫓는 윤석은 한 걸음 내딛기가 쉽지 않았다.
 길은 점점 비탈지고 험해지는 데 반해 꼬마를 쫓으려면 속도를 내야 했기 때문이다.
 자칫 발을 잘못 디뎠다가 넘어지기라도 한다면 조난당하기 십상이었다.
 그만큼 지형이 험하기도 했고, 뭣보다 너무 깊은 곳으로 들어왔다.
 이미 방향감각은 잃은 지 오래고, 여기가 어디쯤인지조차 예상할 수 없었다.
 그래도 저 꼬마를 놓치지만 않는다면 문제 될 것은 없었다.
 이 북한산을 제집 안방처럼 드나드는 녀석이니 분명 여기가 어디쯤인지는 알고 있으리라.
 지금 상황에서 자신이 해야 할 일은 그저 꼬마를 놓치지 않는 것뿐이었다.
 그리고 뭣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꼬마를 놓칠 거란 생각이 안 들었다.
 이렇게 지형이 험해질 때까지 쫓아왔건만 숨도 별로 안 차오르는 것이 아직까진 여유가 있었다.
 반면 꼬마는 신체적 열세를 이기지 못했는지 뒷모습에서 제법 지쳐 보이는 기색이 드러났다.
 이대로 조금만 더 따라잡는다면 아마도 꼬마 쪽에서 먼저 백기를 들 터였다.
 스스로도 윤석과 똑같은 생각을 하고 있던 꼬마는 이를 악물었다.
 며칠을 그렇게 떨쳐 냈는데 고작 여기서 잡힌다는 것이 꼬마는 용납이 되지 않았다.
 어떻게 보면 어린애의 고집에 불과했다.
 왠지 여기서 잡히면 그동안 자신이 지켜 오던 것을 잃을 것 같은 기분이었던 것이다.
 결코, 결코 그것만은 참을 수가 없었다.
 그랬기에 꼬마는 이미 후들거리는 다리를 억지로 움직였다.
 하나 너무 억지를 부린 탓일까?
 막 발이 땅을 밟는 순간 다리에 힘이 쑥 빠지더니 몸이 크게 휘청거렸다.
 “어? 어, 어!”
 몇 걸음 뒤에서 지켜보던 윤석은 앞서가던 꼬마가 돌연 휘청거리자 눈을 부릅떴다.
 휘청거린 것이 이렇게 동요할 일은 아니었지만 문제는 이곳이 제법 경사가 비탈졌다는 것이다.
 “으, 으아악!”
 풀썩!
 생각이 이에 미치기 무섭게 중력을 이기지 못하고 넘어진 꼬마가 경사를 따라 데굴데굴 굴러가기 시작했다.
 어른이라면 근처 나무에 걸려 멈추기라도 했을 텐데 체구가 작아 나무들 사이를 요리조리 빠져나갔다.
 그 모습이 마치 핀볼 게임을 떠올리게 했으나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도무지 멈출 기미가 보이지 않자 윤석은 저도 모르게 계속해서 데구루루 구르는 꼬마를 쫓아 미끄러지듯 비탈길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듬성듬성 박힌 나무들이 방해를 했지만 때로는 어깨를 부딪치며 요리조리 피해 꼬마를 쫓던 윤석은 저 앞에 지평선 같은 게 보이자 얼굴을 굳혔다.
 “젠장!”
 이런 산속에서 지평선이 보인다는 말은 그 끝이 낭떠러지라는 뜻이었다.
 무슨 볼링공처럼 낭떠러지를 향해 미끄러지듯 굴러가는 꼬마를 보자 윤석은 애가 탔다.
 꼬마가 뭐라도 좀 잡아서 속도를 늦추기라도 했으면 좋으련만 구르는 와중에 정신을 잃었는지 별 반응이 없었다.
 점점 낭떠러지는 가까워지는데 꼬마는 정신조차 차리지 못하고 있으니 이러다 눈앞에서 어린애 하나 장례 치르는 것은 아닌지 두려운 마음이 들었다.
 “씨발!”
 턱 끝까지 차오른 숨이 욕으로 변해 입 밖으로 튀어나왔다.
 머릿속에서 그야말로 오만 가지 생각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났지만 나오는 것이라곤 욕밖에 없었다.
 이대로 꼬마가 낭떠러지에서 떨어져 죽는다면 최동훈을 못 찾는단 것보다 한평생 제대로 발 뻗고 잘 수 없을 것 같단 생각이 머릿속을 지배했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저 꼬마를 살려야 했다.
 윤석은 그야말로 젖 먹던 힘을 다했다.
 죽기 아니면 까무러치기라고, 그야말로 사활을 건 것이다.
 아무런 대책 없이 그저 무작정 비탈길을 뛰어 내려간 탓이었을까?
 철퍼덕!
 그만 윤석도 발을 헛디뎌 넘어지고야 말았다.
 “이 씨발!”
 대번에 입 밖으로 욕이 튀어나왔지만 그보다 빠르게 윤석은 용수철처럼 몸을 일으켜 달리기를 멈추지 않았다.
 여기서 자신이 포기하면 저 꼬마는 죽는다.
 머릿속에 온통 그 생각밖에 없었고, 이를 원동력 삼아 윤석은 필사적으로 달렸다.
 사사삭! 사사삭!
 가느다란 나뭇가지가 회초리처럼 온몸을 때리고 시야를 가렸지만 윤석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 덕분인지 아니면 정말 죽을힘을 다해 달렸기 때문인지 윤석은 꼬마와의 거리를 크게 줄일 수 있었다.
 “조금만, 조금만 더······.”
 어떻게든 꼬마를 붙잡으려 팔을 뻗어 보았지만 구르면서 속도가 붙을 대로 붙어서 그런지 꼬마는 잡힐 것 같으면서 잡히지 않았다.
 “제발 잡혀라, 좀!”
 꼬마가 손끝에 닿을 듯 말 듯 멀어지자 윤석은 참다못해 폭발하며 냅다 몸을 던졌다.
 기왕 이렇게 된 거 다 같이 죽거나 아니면 다 같이 산다는 생각뿐이었다.
 그야말로 물불 안 가리고 몸을 날린 덕분에 윤석은 꼬마를 잡을 수 있었다.
 하지만 가뜩이나 내리막길에서 몸을 날려서 그런지 멈출 수가 없었다.
 그래도 꼬마와 달리 어른인 자신은 어딘가 나무에라도 걸리겠지 싶은 마음에 윤석은 희망의 끈을 놓지 않았다.
 그런 그의 마음을 알기라도 한 것인지 때마침 정면에 나무 하나가 보이자 윤석은 반사적으로 꼬마를 가슴에 품고 몸을 웅크렸다.
 행여 나무랑 부딪히면서 꼬마가 다칠까 염려한 것이다.
 몸을 공처럼 웅크린 탓인지 굴러떨어지는 속도에 불이 붙었고, 윤석은 가차 없이 나무를 들이받았다.
 쿵!
 “컥!”
 순식간에 등을 강타하는 묵직한 충격에 저도 모르게 입 밖으로 비명을 토해 낸 윤석은 이제 됐다는 표정을 지었다.
 위험하고 거칠기는 했지만 그래도 멈추기는 한 것이다.
 등은 물론이고 온몸이 찌릿하게 울리긴 했지만 이제 조심스레 일어나기만 하면 모든 게 해결될 참이었다.
 “죽다 살······.”
 하지만 일은 그리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이제 막 중심을 잡고 몸을 일으키려는 찰나 방금 부딪힌 충격 때문인지 몸이 제 몸 같지가 않았다.
 “어, 어?”
 제대로 상황을 판단하기도 전에 몸이 기우뚱하더니 넘어진 윤석이 또다시 구르기 시작했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아직까지 품 안에 꼬마가 있다는 정도였다.
 ‘다행은 개뿔!’
 솔직히 전혀 다행인 일이 아니었다. 차라리 꼬마가 없었다면 어떻게라도 살려고 발버둥이라도 쳐 볼 텐데, 지금 이 상황에서 그랬다간 꼬마가 위험할지 몰랐다.
 어느새 낭떠러지가 지척에 이르자 윤석에게 한순간 망설임이 스쳐 갔다.
 진퇴양난이었다. 살려고 하면 품 안의 꼬마가 위험해질 테고, 꼬마를 지키자니 다 같이 죽을 판이었다.
 솔직히 단순히 이성적으로 생각하자면 꼬마를 포기하는 것이 옳을 수도 있었다.
 확률적으로 둘 중 하나는 살 테니까.
 하지만 그러고 싶지 않았다. 그것은 그저 확률에 불과할 뿐이었다.
 확률은 그저 수치, 숫자일 뿐이다. 그런 것에 누군가의 목숨을 걸고 싶지 않았다.
 그런 것은 이전에도 이골이 나도록 했으니까. 그리고 그것이 얼마나 후회스러운 것인지 겪어 봤으니까.
 절대 희망을 포기하고 싶지 않았다.
 “설령 죽는 한이 있더라도!”
 머릿속, 아니 가슴속의 다짐이 입 밖으로 튀어나오는 것과 동시에 밑이 허전했다.
 기어코 낭떠러지까지 굴러떨어지고 만 것이다.
 그 순간 윤석의 머릿속에는 어떻게든 이 꼬마만큼은 살려야겠다는 생각뿐이었다.
 “에이, 씨발!”
 욕설을 내뱉음과 동시에 윤석은 반사적으로 손을 뻗었다.
 어쩌면 꼬마를 살려야 한다는 생각보다 먼저 튀어나온 본능에 의한 움직임이었는지도 몰랐다.
 하지만 덕분에 윤석은 낭떠러지 밖으로 튀어나온 나무뿌리를 잡을 수 있었다.
 뿌리는 넝쿨처럼 되어 있어 용케 떨어지지 않고 대롱대롱 매달렸다.
 한 손으로 넝쿨을, 다른 손으로 꼬마의 허리를 붙잡은 채 낭떠러지에 매달린 윤석은 힐끗 아래를 내려다봤다.
 축 늘어진 발밑으로 들쭉날쭉한 바위들이 까마득하게 옹기종기 모여 있는 것이 무슨 함정 속 뾰족한 창살을 보는 것 같았다.
 투둑!
 그 순간 두 사람의 무게를 버티지 못하고 넝쿨이 덜컹 움직이자 낭떠러지 벽면의 흙이 부서지며 뭉텅이로 아래로 떨어졌다.
 그중에는 제법 큰 덩어리도 있었는데 밑의 바위에 부딪혀 깨질 때까지 꽤 시간이 걸렸다.
 새삼 지금 매달려 있는 낭떠러지의 높이를 실감하자 윤석은 눈앞이 깜깜해졌다.
 여기서 이렇게 천년만년 매달려 있을 수도 없는 노릇이고, 그럴 능력조차 되지 않았다.
 더군다나 등산로에서 너무 떨어진 산중이라 누구의 도움을 바라기도 힘들었다.
 “나는 그저 잘나가는 헌터가 돼서 떵떵거리며 살고 싶었을 뿐인데······.”
 이렇게 죽다니?
 그것도 이름도 모르는 꼬마랑 함께.
 도대체 전생에 무슨 죄를 지었기에 이러냐며 불평불만을 늘어놓았지만 공염불에 지나지 않았다.
 상황이 나아지기는커녕 괜히 힘만 빠지자 입을 다문 윤석은 손에 들린 꼬마를 바라봤다.
 쪼끄만 것이 도대체 뭘 처먹고 다녔는지 무겁기는 더럽게 무거웠다.
 그래도 아직 정신을 차리지 못해 발버둥 치지 않는 것이 다행이었다. 그랬다면 이렇게 버티고 있기도 힘들었을 테니까.
 아무튼 계속 이러고 있을 수는 없었다.
 둘 다 죽지 않으려면 뭔가 방법을 찾아야만 했다. 이대로 있다가는 기력이 다해 그대로 저 바위에 떨어져 죽을 것이 자명했다.
 어떡하면 이 상황에서 살아남을 수 있을까 윤석은 궁리했다.
 생명 줄처럼 붙잡고 있는 넝쿨의 강도를 볼 때 넝쿨을 타고 이 낭떠러지를 오르는 것은 불가능하다 봐야 했다.
 솔직히 끊어지지 않고 버티고 있는 것만 해도 용할 지경이었다.
 더군다나 손이 모자라지 않은가?
 꼬마가 정신을 차려 제대로 매달려 준다면 또 모르지만 깨어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방법이 없는 건가?”
 결국 이대로 죽는 건가 싶어 좌절하려는 순간 윤석은 손에 들린 꼬마가 눈에 밟혔다.
 “그래, 기왕 죽는 거 애라도 살리고 죽으련다.”
 어차피 반쯤 포기한 거 사람이라도 살리잔 생각을 한 윤석은 일절 망설임도 없이 꼬마를 들고 있는 팔을 앞뒤로 흔들기 시작했다.
 그 모습이 마치 나무에 매달린 고릴라를 연상케 했지만 보는 사람도 없는데 신경 쓸 이유가 없었다.
 바이킹처럼 팔을 앞뒤로 흔들던 윤석은 그 힘에 덩달아 몸까지 대롱대롱 들썩였다.
 과연 넝쿨이 이 힘을 견뎌 줄지 의문이 들었지만 이렇게 하지 않으면 꼬마를 절벽 위로 던질 힘을 얻을 수 없었다.
 “기회는 단 한 번, 실패하면 그냥 둘 다 죽는 거지 뭐.”
 이미 마음을 비웠기 때문일까? 실패에 대한 두려움도 일절 없이 윤석은 팔을 흔들어 키운 원심력을 이용해 냅다 꼬마를 절벽 위로 던졌다.
 “으-샤!”
 나지막한 기합과 함께 윤석의 손을 떠나 붕 날아오른 꼬마는 원심력을 제대로 받았는지 포물선을 그리며 절벽 위에 무사히 떨어졌다.
 행여 꼬마가 다시 굴러떨어지지는 않을까 노심초사하는 얼굴로 상황을 지켜보던 윤석은 제법 시간이 지났음에도 잠잠하자 비로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후우, 한고비는 넘겼군.”
 사실 이것도 반신반의했던 거긴 하지만 어쨌든 생각대로 성공했으니 다행이었다.
 더욱이 넝쿨이 아직까지 버티고 있단 사실에 윤석은 좀 더 희망을 가졌다.
 이제 손도 자유로워졌으니 넝쿨을 타고 절벽을 오를 여건이 된 것이다.
 문제는 과연 넝쿨이 그것까지 버텨 주냐는 것인데, 지금까지 버틴 걸로 봐서는 가능할 것 같았다.
 그렇게 계획을 굳힌 윤석은 바로 실행에 옮겼다.
 지체할 이유가 없었다.
 오히려 지체하면 할수록 넝쿨이 갖는 부담은 가중될 터였다.
 되도록 빨리 움직이는 것이 좋았다.
 그래서 윤석은 서둘렀다.
 아무리 체력이 좋아졌다고 하나 언제까지고 넝쿨 뿌리만 믿고 매달릴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좀 전에 비탈길을 구르고 나무에 부딪힌 충격이 이제야 고개를 든 것인지 온몸이 쑤시기 시작했다.
 특히 어깨가 가장 뻐근했는데, 아무래도 떨어지면서 넝쿨을 잡아챌 때 충격을 크게 받은 듯했다.
 “끄응!”
 입에서 절로 앓는 소리가 나왔지만 그렇다고 여기서 포기할 수도 없었다.
 지금 이 상황에서 포기란 바로 죽음과 직결됐다.
 대가리에 총 맞은 것도 아니고 누가 죽으려고 포기하겠는가?
 그야말로 온몸이 비명을 질러 댔지만 윤석은 애써 무시하며 넝쿨을 잡아당겨 몸을 끌어 올렸다.
 “끙!”
 젖 먹던 힘은 물론 없는 힘마저 끌어다 쓴 윤석은 듬성듬성 튀어나온 부분에 발을 디뎠다.
 바위나 나무가 튀어나온 것이 아니라 그저 흙이 단단히 뭉친 부분에 지나지 않아 불안했지만 그런대로 디딜 곳이 있어 다행이었다.
 잠시나마 중력의 압박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큰 축복인지 새삼 깨닫는 순간이었다.
 “후우!”
 그렇게 한숨 돌린 윤석은 고개를 들어 절벽이 어느 정도 남았는지를 살폈다.
 생각과 달리 고지가 얼마 남지 않았다.
 하기야 원심력을 이용했다고는 하나 한 손으로 어린애 하나를 던져 올렸을 정도이니 그리 많이 떨어진 것은 아니었다.
 “뭔가 단단히 디딜 곳이라도 있으면 좋으련만······.”
 지금 이 순간 가장 절실한 것은 두 발을 디딜 조그마한 공간 하나였다.
 그랬다면 힘껏 도약을 시도해 볼 법했다.
 하나 불행히도 윤석에게 그런 것은 주어지지 않았다.
 이가 없으면 잇몸으로 씹는다고, 상황이 여의치 않자 하는 수 없이 몸으로 때우는 수밖에 없었다.
 그나마 넝쿨이 절벽 바로 밑까지 뻗쳐 있어 어떻게든 오를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래도 사람이 죽으란 법은 없군.”
 방금 전까지 죽음을 예감하던 것에 비하면 상황이 많이 호전된 것을 느끼며 윤석은 다시 넝쿨을 타고 절벽을 올랐다.
 절벽 위 지면과 가까워져서인가 올라갈수록 넝쿨은 점점 튼튼해졌고, 덕분에 윤석은 생각했던 것보다 수월하게 절벽을 오를 수 있었다.
 이제 손만 뻗어 제대로 몸을 끌어 올릴 수만 있다면 드디어 이 지긋지긋한 절벽에서 해방이었다.
 한 손은 여전히 넝쿨을 붙잡고 몸을 의지한 채 다른 팔을 머리 위로 쭉 뻗은 윤석은 절벽 위를 손으로 더듬었다.
 행여 손으로 짚은 바닥이 부서지진 않을까 신중히 살핀 윤석은 마침내 팔에 힘을 주며 몸을 끌어 올렸다.
 “크, 크윽!”
 힘주느라 악다문 잇새로 바람 새는 소리가 나왔지만 점점 시야에 고지가 가까워지자 윤석은 더욱더 힘을 줬다.
 한데 너무 힘을 주었던 탓일까?
 이제 막 절벽 위로 고개를 내밀려는 찰나 짚었던 바닥이 돌연 맥없이 부서져 버렸다.
 퍼석!
 “어?”
 머리 위로 잔뜩 힘을 주고 있던 팔이 저도 모르게 아래로 쑥 내려가자 윤석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 순간 마치 시간이 멈춘 것처럼 아주 큰 정적이 찾아왔다.
 이윽고 부서진 바닥이 슬로비디오처럼 시야에 흩날리자 윤석은 비로소 사태를 인지했다.
 ‘이렇게 죽는구나.’
 죽음은 생각보다 차갑게 다가왔다.
 그러고 보니 회귀 전 감옥에서 죽을 때도 이와 비슷한 기분이었다.
 약간은 어리둥절하면서도 뭔가 마음만은 차분한 그런 느낌, 딱 지금과 같았다.
 ‘결국은 이렇게 허무하게 죽는구나.’
 “씨-이이이이이이이발!”
 하지만 그건 마음뿐이고 입에서는 용천수처럼 욕설이 뿜어져 나왔다.
 이윽고 윤석은 귓등을 스치는 바람의 감촉을 느끼며 반사적으로 절벽을 향해 손을 뻗었다.
 행여 아까같이 넝쿨을 잡아 구사일생하는 행운이라도 거머쥘까 기대했지만 잡히는 거라곤 허공뿐이었다.
 사사삭! 사사삭!
 척!
 “씨발! 이렇게 허무하게 뒈지긴 싫······어?”
 이렇게 죽는구나, 하는 순간 느닷없이 덥석 자신의 팔을 잡아채는 손길에 윤석은 눈을 부릅떴다.
 이윽고 절벽 위에서 누군가 빼꼼 고개를 내밀었다.
 갑작스레 나타난 사내는 코가 반듯한 것이 약간 눈이 가는 것만 빼면 꽤나 미남형인 중년 사내였다.
 이마의 주름과 허연 옆머리만 아니면 30대 중반 정도라 생각될 정도였다.
 아무튼 천만다행이었다.
 어찌 됐든 살지 않았는가?
 그렇게 살았다는 안도감을 느끼던 윤석은 문득 의아한 얼굴로 고개를 우러렀다.
 떨어진 자신을 잡아 준 것까지는 좋은데, 저 중년 사내가 도통 자신을 올려 줄 생각을 안 했다.
 “안 올려 줘요?”
 “누구냐?”
 “예?”
 절벽 위에서 자신을 내려다보던 중년 사내의 입에서 나지막이 흘러나온 물음에 윤석은 어이없는 표정을 지었다.
 누구냐고?
 지금 죽을 뻔한 사람을 구하다 말고 누구냐고 물은 거란 말인가?
 생각할수록 기도 안 차는 상황에 윤석은 저도 모르게 입 밖으로 욕설이 튀어나왔다.
 “아니, 씨발! 세상이 언제 이렇게 각박해졌어! 꼭 누군지 알아야 구해 줄 거요?”
 그러나 원래부터 표정 같은 것이 없는지 중년 사내는 무표정한 얼굴을 고수했다.
 이에 윤석은 자신이 누군지 알기 전까지 중년 사내가 천년만년 이대로 있을 거란 사실을 깨달았다.
 더 나아가 마음에 안 들면 가차 없이 손을 놔 버릴 것까지.
 ‘칼자루를 쥔 것은 자신이라 이거지?’
 결국 현실을 인정한 윤석은 의외로 덤덤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내가 누구인 게 그렇게 중요합니까?”
 “며칠 동안 날 찾아다닌 놈이니까.”
 “내가 언제 당신을······.”
 또다시 이상한 소리를 하는 중년 사내의 말에 윤석은 짜증을 내다 말고 말끝을 흐렸다.
 자신이 며칠 동안 찾았다고?
 “최동훈?”
 “넌 날 아는데, 난 널 모르는군. 불공평하다고 생각하지 않나?”
 윤석은 이제야 비로소 중년 사내, 아니 최동훈이 보인 반응을 이해할 수 있었다.
 역지사지, 입장을 바꿔 생각해 자신이라도 구해 주기 전에 정체를 물었을 터였다.
 설마하니 최동훈과 이렇게 만나게 될 줄은 예상치 못했지만 좋은 게 좋은 거라고 윤석은 차라리 잘됐다고 여겼다.
 이를 아는지 모르는지 최동훈은 다시 한 번 윤석의 정체를 물었다.
 “누구냐?”
 이번에도 말을 하지 않으면 가차 없이 손을 놓겠다는 듯 번뜩이는 최동훈의 눈빛을 본 윤석은 주저하지 않고 입을 열었다.
 “정윤석이라고 합니다.”
 목숨이 오락가락하는 상황에서 차분하게 자신을 밝히는 윤석의 모습에 최동훈은 눈을 빛냈다.
 보통 사람이라면 이런 상황에서 애원을 하거나 화를 내거나, 어떤 형태로든 극에 달한 반응을 보이기 마련이다.
 그런데 지금 눈앞에 있는 윤석은 너무나 침착했다.
 대충 정체만 알고 살려 주려던 최동훈은 이에 본래의 마음을 접고 윤석에게 의심의 눈초리를 보냈다.
 “나를 왜 찾았지?”
 “예?”
 정체만 밝히면 살려 줄 것 같았던 최동훈이 질문을 이어 오자 윤석은 당황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최동훈은 눈썹 하나 꼼짝하지 않고 재차 질문을 던졌다.
 “날 왜 찾았냐고.”
 본능적으로 이번이 마지막 질문이란 것을 깨달은 윤석은 망설이지 않았다.
 어차피 용건을 말해야 할 거 괜히 머뭇거릴 필요가 없었다.
 “검술을 배우려고요.”
 “검술?”
 “우연히 소문을 들었거든요. 검술의 대가라면서요?”
 윤석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최동훈은 마치 그 속내를 꿰뚫어 볼 것처럼 그의 눈을 바라봤다.
 자신이 회귀했다는 것만 빼고 모든 것을 사실대로 토로한 윤석은 하나도 꿀릴 게 없었다.
 거짓말을 한 적이 없는데 두려울 것이 뭐가 있겠는가?
 누구보다 그것을 크게 느낀 것은 바로 최동훈이었다.
 더 이상 수상한 낌새가 보이지 않자 그는 말없이 윤석을 절벽 위로 끌어 올렸다.
 “후아!”
 드디어 절벽 위로 올라온 윤석은 땅을 딛기가 무섭게 긴장이 탁 풀리며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그래도 행여 다시 절벽 밑으로 떨어질까 겁이 나 최동훈이 보고 있다는 사실마저 잊은 채 엉금엉금 기어 절벽으로부터 멀어졌다.
 절벽이랑 어느 정도 안전한 거리를 두자 탈진한 사람처럼 그대로 땅바닥에 대자로 뻗어 버렸다.
 저벅저벅.
 이내 최동훈의 발소리가 가까워지자 윤석은 몸을 돌려 울창하지는 않지만 나뭇가지 사이로 보이는 하늘을 우러렀다.
 이윽고 시야에 최동훈이 불쑥 나타나자 윤석은 힐끔 그에게 눈을 돌렸다.
 어느새 최동훈의 손에는 좀 전에 자신이 구해 낸 꼬마가 들려 있었다.
 “어디 다친 곳은 없죠?”
 꼬마를 보자마자 상태를 묻는 윤석이었다.
 그 모습이 마음에 들었는지 최동훈은 스윽 손에 들린 꼬마를 바라보더니 피식 미소를 지었다.
 “검술을 배우고 싶다고 했나?”
 
 극적으로 최동훈과 만난 윤석은 그길로 그에게 검술을 배우기 시작했다.
 최동훈의 꼬마 제자 진헌은 그런 윤석의 등장이 썩 반갑지가 않았다.
 자신만의 것이라고 여겼던 최동훈과의 관계를 빼앗긴 것 같은 기분이 들었기 때문이다.
 아직 어리고 미숙한 마음에서 나오는 시기심이었지만 누군가와의 관계가 소중할수록 나이를 떠나 느끼는 감정이었다.
 그 때문인지 진헌은 자신이 최동훈의 첫 번째 제자라는 점을 앞세워 사형師兄이라며 그에 맞게 대우하길 강요했지만 윤석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선후 배분이 중요하다고는 하나 역시 이 세상은 연장 우대, 먼저 태어난 사람이 짱이었다.
 거기다 자신은 회귀까지 했으니 따지고 보면 진헌은 거의 손자뻘이었다.
 그런데 사형 대우를 하라니?
 목에 칼이 들어와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때문에 진헌은 그를 마주할 때마다 입을 댓발 내밀었지만 윤석은 모르는 척 넘어갔다.
 어른이 꼬맹이랑 싸울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
 이런 일들을 뒤로하고 윤석은 비로소 그렇게 고대하던 최동훈에게 검술을 배웠다.
 하지만 그 시작이 좀 이상했다.
 “자!”
 불현듯 최동훈이 목도 한 자루를 휙 던져 주고는 손가락을 까딱이자 윤석은 어리둥절한 얼굴을 했다.
 이에 최동훈이 지금 뭐 하냐는 표정으로 발치에 떨어진 목도를 눈짓으로 가리키며 재촉하자 엉겁결에 목도를 집어 든 윤석은 엉거주춤한 자세로 고개를 갸웃했다.
 어째 돌아가는 분위기가 마치 자신에게 덤비라고 하는 것 같지 않은가?
 “나보고 덤비라고?”
 윤석은 당황한 나머지 저도 모르게 반말이 튀어나왔다.
 말을 하고 나서야 아차 싶었지만 정작 당사자인 최동훈은 개의치 않는지 예의 무표정한 얼굴로 말을 이었다.
 “손자병법에도 싸우기 전 나를 아는 것이 먼저라고 그랬다. 네가 어느 수준인지 알아야겠다.”
 돌아온 최동훈의 대꾸에 윤석은 빼도 박도 못했다.
 아니, 처음부터 피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최동훈이 스승이니 까라면 까야지 뭐 별수 있나.
 그래도 검술의 첫 교육이 최동훈과의 대련이라는 게 썩 달갑지는 않았다.
 “덤벼라.”
 다시 한 번 최동훈의 재촉이 이어졌지만 윤석은 선뜻 움직이지 못했다.
 그렇게 머뭇거리는 윤석의 모습에 최동훈은 실망한 표정을 지었다.
 “고작 이것밖에 안 되나?”
 최동훈의 도발에 윤석은 저도 모르게 이를 악물었다.
 화가 났다.
 자신을 깔보는 최동훈의 태도 때문이 아니라 그렇게 갈구하던 기회가 왔음에도 주저하는 자신의 모습에 윤석은 참을 수 없을 정도로 화가 치밀었다.
 그리고 그 분노는 고스란히 으스러져라 손에 쥔 목도에 쏟아졌다.
 “으아악!”
 기합이 아니라 거의 괴성에 가까운 함성을 내지르며 윤석은 최동훈에게 달려들었다.
 분노로 희번덕거리는 시야에 잡힌 최동훈이 일순 자신처럼 보였다.
 회귀 전, 꿈은 있지만 노력은 하지 않았던 나약하고 한심한 모습이었다.
 윤석은 그런 자신을 향해 용솟음치는 분노를 담아 목도를 있는 힘껏 휘둘렀다.
 자존심 좀 건드렸다고 갑자기 미친놈처럼 괴성을 지르며 달려드는 모습에 최동훈은 알게 모르게 입맛을 쩝, 다셨다.
 이윽고 그의 머리통을 부술 듯이 크게 휘두른 윤석의 공격을 살짝 몸을 틀어 피해 낸 최동훈은 아무 감흥 없는 눈빛으로 윤석을 바라봤다.
 “동작이 너무 커.”
 최동훈은 바로 윤석의 동작을 지적했다.
 하나 이미 이성을 잃은 윤석은 최동훈의 지적은 귓등으로도 듣지 않고 미친 듯이 목도를 휘둘렀다.
 “으악! 으아악!”
 마구잡이로 목도를 휘두르는 윤석의 행보에 최동훈은 재빨리 그에게서 멀찌감치 물러섰다.
 그러나 윤석은 그런 줄도 모르고 계속해서 목도를 휘둘렀고, 이를 보던 최동훈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아주 지랄 발광을 하는군.”
 사방팔방을 향해 닥치는 대로 목도를 휘두르는 통에 선뜻 윤석에게 다가가기 힘들었지만 최동훈은 어디 산책이라도 나온 사람처럼 아무렇지도 않게 터벅터벅 다가가 스윽 목도를 찔러 넣었다.
 퍽!
 듣는 것만으로도 절로 몸이 움찔거릴 정도로 묵직한 충격음과 함께 윤석이 새우처럼 등을 굽히며 숨넘어가는 소리를 내뱉었다.
 “컥!”
 다리가 풀려 그대로 무너져 내린 윤석은 아직 고통이 가시지 않았는지 얼굴이 뻘게져서는 이마에 핏대까지 세웠다.
 그 모습을 물끄러미 내려다보던 최동훈은 어느 때보다 진지한 얼굴로 나지막이 입을 열었다.
 “어떤 일이 있어도 평정심을 잃지 마라.”
 그 말과 함께 최동훈은 한 걸음 뒤로 물러나 어서 일어나란 듯 눈빛으로 윤석을 재촉했다.
 이에 윤석은 아직까지 손에 든 목도를 지팡이 삼아 몸을 일으켰다.
 “그래도 목도를 놓치지 않은 건 칭찬해 줄 만하군.”
 최동훈이 칭찬을 했지만 윤석의 귀에는 들어오지 않았다.
 그렇다고 방금 전처럼 이성을 잃은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지금 머릿속은 차가웠다.
 ‘바보같이 이성을 잃다니!’
 평정 뒤에 찾아온 것은 자책이었다. 아니, 반성이라 하는 것이 정확했다.
 자책과 반성 둘 다 스스로의 잘못을 돌이키는 말이지만 똑같은 말은 아니었다.
 자책이 그저 스스로를 책망하는 것이라면 반성은 책망은 하되 자신의 잘못을 돌이켜 보고 앞으로 나아가는 마음가짐이었다.
 “침착하자, 침착하게 행동하면 되는 거야.”
 윤석은 주문을 외우듯 침착하잔 말을 되뇌었다.
 한눈에도 아까와 확연히 달라진 그의 모습에 최동훈은 만족스러운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고는 다시 시작하자는 듯 손가락을 까딱였다.
 “다시 덤벼.”
 “합!”
 최동훈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윤석은 굵직한 기합과 함께 목도를 앞세워 달려들었다.
 방금 전의 마구잡이식 휘두르기가 아닌 자신이 당했던 것처럼 날카로운 찌르기였다.
 하지만 기세와 다르게 최동훈은 너무나 손쉽게 윤석의 목도를 잡아냈다.
 고작 목도를 잡혔을 뿐인데 꼼짝달싹할 수 없었다.
 “너무 간결하면 읽히기 쉽다.”
 또다시 지적이 이어지며 최동훈이 손에 쥔 목도를 가볍게 밀치자 윤석은 볼썽사납게 엉덩방아를 찧었다.
 “큭!”
 “엄살떨지 말고 일어나.”
 그러거나 말거나 최동훈은 전혀 아랑곳하지 않고 다시 덤비길 종용했다.
 그에 윤석이 벌떡 자리에서 일어나 기습을 노렸으나 최동훈은 보기 좋게 이를 막아 냈다.
 탁!
 “실력이 따라 주지 않으면 기습은 헛수고다.”
 “쳇!”
 이쯤 되니 윤석은 저도 모르게 어떻게든 최동훈에게 한 방 먹이겠다는 오기가 생겼다.
 “합!”
 이번에도 굵직한 기합과 함께 최동훈에게 달려든 윤석은 자세를 낮추며 그의 다리를 베어 갔다.
 비교적 막기 까다로운 공격이었지만 공격을 위해 너무 자세를 낮추게 된다는 단점이 있었다.
 이는 달리 말해 막기가 힘들 뿐이지 반격하기는 쉽다는 것이었다.
 하나 최동훈은 쉽사리 반격하지 못했다.
 넘어질 듯 한껏 자세를 낮춘 윤석이 자신의 눈만큼은 똑바로 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 녀석······.’
 이에 최동훈은 내심 놀람을 금치 못했다.
 비록 그것이 겉으로 드러나지는 않았으나 지금 윤석의 자세는 의외였다.
 상대의 눈을 끝까지 바라보는 것.
 이는 상대의 의도를 간파하기 위한 가장 단순하면서도 효과적인 수법이었다.
 또한 상대를 제압할 수 있는 가장 쉬운 방법이기도 했다.
 눈은 마음의 창이라고 하지 않던가?
 눈을 마주함으로써 상대의 의도를 읽고 기를 꺾을 수 있었다.
 윤석은 회귀 전 감옥에서 이를 터득했다.
 그만큼 감옥에서의 생활이 평탄하지 않았다는 뜻이었지만 윤석이 회귀했다는 것을 모르는 최동훈은 이를 알 턱이 없었다.
 탁!
 눈빛이며 다리를 노리는 것까지 제법 좋은 공격이긴 했지만 최동훈은 어렵지 않게 막아 냈다.
 이에 그치지 않고 부드럽게 윤석의 목도를 뒤로 넘겼다.
 마치 자석에 붙은 것처럼 최동훈의 손길을 따라 목도가 쭉 딸려 가자 윤석은 당황을 금치 못했다.
 그 와중에 행여 목도를 놓칠까 손에 힘을 꽉 준 윤석은 결국 무게중심을 이기지 못하고 몸이 앞으로 확 기울었다.
 다리를 공격한답시고 몸을 최대한 낮춘 결과였다.
 최동훈은 여기서 그치지 않고 윤석의 다리 사이에 목도를 찔러 넣었다.
 안 그래도 몸이 기울어 넘어질 듯 앞으로 나아가던 윤석은 기가 막히게 찔러 들어온 목도에 걸려 넘어지고 말았다.
 하나 언제 그랬냐는 듯이 오뚝이처럼 일어나는 윤석의 모습에 최동훈은 눈을 빛냈다.
 포기하지 않는 윤석의 자세에 감탄한 것이 아니라 그의 가장 큰 문제점을 발견한 것이다.
 애써 입 밖으로 토해 내지는 않았지만 다소 거칠어진 숨소리는 감출 수 없었다.
 그와 동시에 목도를 쥔 손이 미미하게 떨리고 있었다.
 매의 눈으로 이를 감지해 낸 최동훈은 목도를 거뒀다.
 “여기까지 하지.”
 “예?”
 한참은 더 할 줄 알았는데 최동훈이 돌연 물러서자 윤석은 의아한 얼굴을 했다.
 이에 최동훈은 터벅터벅 윤석에게 다가가 목도를 수거하며 말했다.
 “네 상태를 알았으니 더 할 필요 없다.”
 여전히 무표정한 얼굴로 최동훈이 설명해 주자 윤석은 곧바로 수긍했다.
 이 대련의 목적은 처음부터 자신의 수준을 알아보기 위함이 아니었던가.
 이를테면 점검이라 할 수 있었다.
 아무튼 점검이 끝났으니 결과가 있을 터.
 윤석은 그게 궁금했다.
 그가 자신을 향해 초롱초롱한 눈빛을 보내자 최동훈은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말을 이었다.
 “네 가장 큰 문제는 체력이 부족하단 거다.”
 체력이 없다니?
 그게 무슨 소리란 말인가?
 회귀 전을 포함해 여태껏 살면서 요즘만큼 체력이 좋은 적이 없었다.
 며칠 동안 이 북한산을 뛰어다니고 이른 새벽부터 우유 배달에 신문 배달까지 했음에도 불구하고 잠깐 눈만 붙이면 금세 생생해졌다.
 거기다 날다람쥐 같은 진헌이를 따라잡았으니 이 정도 체력이면 충분하지 않은가?
 “진헌이를 잡았으니 체력은 충분하다고 생각했나?”
 마치 독심술이라도 쓴 것처럼 정확하게 속내를 읽어 내는 최동훈의 말에 윤석은 움찔했다.
 그에 최동훈은 역시 그럴 줄 알았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아주 착각의 늪에 빠져 사는군. 고작 어린애 하나 잡았다고 세상을 다 가진 것처럼 굴지 마라. 아무리 남달라도 어린애는 어린애일 뿐이다.”
 그래도 나름 진헌이를 잡았다는 것에 자부심을 느끼고 있었는데 지금의 말로 그 자부심이 산산조각 났다.
 순간 뭐라고 반박을 하고 싶었지만 최동훈의 말은 하나부터 열까지 구구절절 맞는 말이었다.
 사실 윤석이 진헌이를 잡은 가장 결정적인 요인은 체격 차가 아니던가.
 따지고 보면 진헌이를 잡았다고 해서 윤석이 진헌이보다 체력이 좋다고 할 수는 없었다.
 최동훈의 신랄한 독설은 이를 뜻하는 것이었고, 윤석은 차츰 순순히 받아들였다.
 윤석이 수긍하는 기색을 보이자 최동훈은 그 틈을 놓치지 않고 말했다.
 “일단은 체력부터 키워.”
 그의 말에 윤석은 내심 잘됐다는 생각을 했다.
 아닌 게 아니라 내일부터는 새벽 배달을 마치고 현장에 나가 곰빵 일을 시작하기 때문이었다.
 
 #노가다
 
 이튿날 새벽 배달을 마친 윤석은 곧장 건설 현장으로 향했다.
 지난번 한노순에게 들은 대로 출근을 하는 날이었다.
 그렇다고 북한산에 안 가는 것은 아니었다. 현장에서의 일이 끝나면 그길로 집으로 퇴근하는 것이 아니라 최동훈을 찾아가야 했다.
 때문에 이동 간에 소모되는 시간을 줄이고자 현장도 북한산 근처의 재개발구역으로 고르지 않았던가?
 짧은 기간에 끝날 규모가 아니니 게이트가 열리기까지 1년 동안은 충분히 일할 수 있었다.
 “1년, 딱 1년만 고생하자!”
 그렇게 재차 자신을 다독인 윤석은 힘차게 현장으로 들어갔다.
 건설 현장의 아침은 생각했던 것보다 빨리 시작됐다.
 새벽 배달을 마치자마자 곧장 현장으로 온 덕에 아직 시계는 아침 7시가 조금 넘었을 뿐인데 이미 현장에는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부지런들 하네.”
 윤석은 작게 감탄을 흘리며 지난번 봤던 한노순을 찾아 고개를 두리번거렸다.
 그러다 마침 사람들 틈바구니에서 나오는 한노순을 발견했다.
 “왔어? 곧 체조 시작하니까 빨리 이쪽으로 와.”
 눈이 마주치자마자 먼저 말을 걸어 주는 한노순의 말에 윤석은 서둘러 그의 옆에 섰다.
 이윽고 한노순의 말처럼 현장감독인 양중성의 진행에 따라 아침 체조가 시작됐다.
 밖에서 몸을 쓰는 일이다 보니 이른 아침에 굳어 있는 몸을 풀어 주는 이 아침 체조는 안전 교육에서도 큰 비중을 차지했다.
 덕분에 새벽 배달을 하며 뭉친 근육들을 풀어 준 윤석은 몸이 한결 가벼워졌다.
 업무 첫날이라는 설렘 때문인지 아니면 오늘 정말 컨디션이 좋은 것인지 들뜬 기분으로 체조를 마친 윤석은 한노순을 따라 현장 안에 임시로 만들어 놓은 사무실로 들어갔다.
 “여기가 우리 사무실이야. 처음이라 길을 잘 모를 테니 문에 붙어 있는 회사 마크를 잘 기억해 두라고.”
 “아, 예.”
 “그나저나 소장님은 아직 출근 전인 모양이군.”
 텅 빈 사무실을 보며 혼잣말을 내뱉은 한노순은 마침 잘됐다는 듯 아까부터 자신의 옆에 서 있는 젊은 사내를 윤석에게 소개했다.
 “인사해, 여기는 나랑 같이 양중 작업하는 슌페이. 중국인이라 한국말이 서투르니 이해해. 슌페이, 저번에 말했지? 오늘부터 같이 일하게 될······ 근데 이름이 뭐더라?”
 난데없이 이름을 묻는 한노순의 말에 윤석은 당황했다.
 그도 그럴 것이 한노순의 추천을 받아 일하게 된 것인데 정작 그가 윤석의 이름도 모르는 것이다.
 어떻게 이름도 모르는 사람을 추천할 생각을 했는지 의아했지만 윤석은 크게 내색하지 않고 입을 열었다.
 “정윤석입니다.”
 “들었지? 앞으로 같이 일하게 될 테니 싸우지 말고 친하게들 지내.”
 그렇게 슌페이와 통성명을 마치기가 무섭게 사무실 문이 열리더니 머리가 반쯤 벗겨진 건장한 체구의 사내가 모습을 드러냈다.
 “뭐야? 벌써들 와 있었네?”
 “소장이란 사람이 뭐 이리 늦어?”
 대뜸 핀잔을 주는 한노순과 다르게 옆에 서 있던 슌페이는 살짝 고개를 숙여 사내에게 인사를 건넸다.
 한노순의 말이나 방금 슌페이가 보인 태도로 보아 눈앞의 머리가 까진 사내가 소장인 듯했다.
 이내 어정쩡하게 서 있는 윤석을 발견한 소장 박수광은 고갯짓으로 그를 가리키며 한노순을 향해 물었다.
 “이 친구야?”
 “그래, 인사해.”
 “박수광이라고 하네.”
 “정윤석입니다.”
 “그래, 젊은 친구가 일을 한다고 그래서 의외였어. 그래도 여기 한 반장이 적극 추천해서 믿고 맡기는 거니까 잘해 보라고.”
 “물론입니다.”
 그렇게 간단히 인사를 나눈 박수광은 사무실 한쪽 벽에 걸린 칠판을 바라봤다.
 칠판에는 작업 현황 따위가 휘갈겨 쓰여 있었고, 박수광은 몇몇 곳을 수정하며 입을 열었다.
 “어제 작업을 어디까지 했지?”
 “12층.”
 “상판은 얼마나 올라가 있는데?”
 “20층까지는 올라갔지.”
 “조적반은 벌써 작업 중인가 보지?”
 “노인네들이라서 그런지 잠도 없잖아.”
 한노순의 우스갯소리에 힐끗 미소를 머금은 박수광이 이내 고개를 끄덕이고 가볍게 손뼉을 쳤다.
 짝!
 “그러면 양중반도 가만히 있을 수 없지. 조금 있으면 물건 들어올 테니까 오늘 내로 15층까지 올려 주라고.”
 드디어 박수광의 입에서 오늘의 작업 목표가 정해졌다.
 3개 층의 작업량이 정해지자 슌페이가 움찔했지만 이내 윤석을 한번 힐끔거리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3개 층이면 일이 제법 되네.’
 대충 눈치를 봐 가며 돌아가는 분위기를 읽던 윤석은 이내 작업의 시작을 알리는 한노순의 목소리에 퍼뜩 정신을 차렸다.
 “자, 가자고.”
 먼저 앞서는 한노순을 따라 사무실에서 나온 윤석은 자신과 나란히 걷는 슌페이에게 슬쩍 말을 붙였다.
 “원래 이렇게 3개 층씩 올려?”
 초면이었지만 아무리 봐도 비슷한 또래로 보였기에 대뜸 말을 놓는 윤석이었다.
 “······.”
 그에 기분이라도 상한 것인지 슌페이는 슬쩍 윤석을 흘길 뿐 아무 말도 없었다.
 무시당했단 생각에 울컥 기분이 상하려는데 윤석의 말을 들었는지 한노순이 대신 입을 열었다.
 “윤석이라고 했나? 첫날인데 아주 일복 터졌어.”
 윤석을 완전 초짜라 여기는 한노순이 약간 농담조로 한 말이었다.
 이에 윤석은 멋쩍은 미소로 대꾸했다.
 “예? 아, 예.”
 “3개 층이면 한 3만 장 날라야 하나?”
 대충 목표 개수를 헤아리는 한노순의 말이었다.
 말이 3만 장이지 벽돌 천 장만 쌓아도 그 부피가 상당했다.
 그 30배인 무려 3만 장을 하루 만에 옮겨야 하는 것이다. 거기다 13층부터 15층까지 올라가야 하지 않는가?
 하지만 이 같은 사실을 이미 알고 있던 윤석의 표정은 덤덤하기만 했다.
 그런 윤석의 모습을 경직된 걸로 오해한 한노순은 걱정하지 말란 듯 그의 어깨를 다독였다.
 “너무 걱정할 필요 없어. 수레로 160장씩 옮기면 금방이야.”
 그러며 한노순은 자신 있게 수레를 내보였다.
 “이따가 벽돌이 들어오면 이 수레에 차곡차곡 쌓아서 수레째로 옮기면 끝이야. 여기 이 레버를 내리면······.”
 오늘 할 작업을 간략하게 설명하며 한노순이 직접 레버를 내리자 ‘철컹!’ 하는 소리와 함께 수레의 바닥이 열렸다.
 “우와!”
 이미 알고 있는 거였고 몇 차례 사용해 봤던 수레지만 윤석은 자신을 초짜라 알고 있는 한노순을 위해 짐짓 놀라는 척을 했다.
 이렇게라도 안 하면 혹 한노순이 의심할 것 같아서였다.
 이런 윤석의 속사정도 모르고 한노순은 마치 새 장난감을 자랑하는 어린애처럼 히죽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
 “봤지? 이렇게 바닥이 열리니까 벽돌 내려놓는 데 시간 걸릴 필요 없다고. 거기다 호이스트 타고 올라가면 되니까 금방이야. 거기다 오늘은 자네까지 세 명이니까 큰 문제 없어.”
 한노순은 큰 문제 없다고 호언장담을 했지만 그의 말과 다르게 문제는 생각보다 빨리 찾아왔다.
 잠시의 기다림 끝에 현장에 벽돌을 가득 실은 트럭이 줄지어 들어왔다.
 떨어지지 않게 팔레트 위에 차곡차곡 쌓여 비닐로 포장까지 된 벽돌들을 보자 윤석은 벽돌 3만 장의 위용에 압도됐다.
 한 대도 아니고 몇 대가 줄지어 들어와 현장 한쪽에 자리를 잡았다.
 이윽고 언제 사라졌는지 슌페이가 지게차 한 대를 몰고 와 트럭에 실린 벽돌을 팔레트째로 바닥에 내려놨다.
 지게차로 벽돌을 한꺼번에 하차했기 때문인지 줄지어 들어왔던 트럭들은 금세 짐칸을 비우고는 유유히 현장을 떠났다.
 대신에 그 자리를 벽돌들이 차지하고 있는 것을 본 윤석은 막막한 느낌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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