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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제국 연대기 1권 (1)

2016.06.09 조회 10,971 추천 122


 대한제국 연대기 1권
 : 난세(亂世)의 구름은 창천(蒼天)에 피어오르고
 
 
 
 대한제국 연대기 1권 (1화)
 서장―회귀과거(回歸過去)
 
 
 「기묘(己卯)년, 제주도 남안(南岸)에 이인 한 명이 바닷바람에 배를 잃고 몸만 떠내려 왔다. 제주는 아조의 오랜 속방으로, 원조(元朝) 고려총관부가 물러간 이래 섬이 전조[高麗]에 환속되었으나 위에서 다스림이 잘 미치지 않아 예로부터 내려오는 그대로 탐라국왕의 말예(末裔)인 성주, 왕자, 도내라 불리는 자들이 섬에 다스림을 펴고 있었다. 이에 이 사람이 성주 고봉례에게 구명을 받아 그 밑에서 일하게 되니 본관 김해 김의 세훈이란 이름을 쓰는 경상도 진량 사람이었다.」
 ―해동속기(海東俗記) 3권
 
 
 
 2110년 5월 6일
 대한민국 전라남도 고흥군 봉래면 나로우주센터.
 
 우주는 멀었다. 21세기가 밝아 올 무렵에도 인공위성을 독자적으로 쏘아 올릴 능력도 없었던 한국이 우주 개발에 덤벼든 것은 꽤나 지난한 일이었다.
 가가린(Y. A. Gagarin)이 보스토크 1호에 올라 인류 최초로 유인 비행에 성공한 것이 1961년, 한국전에도 참전했던 해군 비행사 출신 암스트롱(N. A. Armstrong)이 달 표면을 밟은 것이 1969년의 일이다.
 그러나 한국은 2028년에 이르러서야 자력으로 유인 우주선을 쏘아 올리는데 성공했고, 2040년에야 처음으로 달에 유인 착륙에 성공했다.
 그러나 다행히도 기술력이 축적되기 시작하자 21세기 중반에 들어서서는 본격적으로 우주 개발 경쟁에 뛰어들 여지가 생기기 시작했다.
 2054년에는 세계에서 10번째로 월면 유인 기지 「을지」를 준공하여 연구원을 상주시키기 시작했고, 이듬해에는 화성에 유인 착륙을 시도하여 성공했다.
 2070년에 이르러서는 화성에도 미국, EU, 러시아, 중국, 일본, 인도에 이어 8번째로 유인 기지 「다산」을 건설하는 데에 성공했다.
 비록 2110년 현재에 이르러 태양계 행성 간(行星間) 우주 항로를 구축하는 데 열을 올리고 있는 미국에 비할 바는 못되었으나, 지구 궤도에 독자적인 정거장을 가지고 있고 달에 소규모 정착지를 포함한 기지 5개, 화성에 2개 그리고 목성까지 정기적인 유인 탐사선을 쏘아 올리는 한국은 2110년에 이르러서는 더 이상 우주 개발의 후진국은 아니었다.
 김세훈(金世勳)은 올해 나이 스물여섯의 미래가 촉망받는 우주 비행사였다.
 어릴 때부터 천재적인 두뇌로 언론에 이름이 오르내리곤 했던 그는 10살에 서울대학교 물리학과에 입학하는 기염을 토한 뒤로, 어린 나이에 여러 가지 전공을 섭렵하며 수학, 생물학, 화학 등의 학위도 취득하고 17살에 물리학 석사까지 마쳤다.
 여기까지만 해도 촉망받는 물리학자로서의 인생이 펼쳐져 있을 텐데, 뜬금없이 미국으로 건너가 프리스턴 대학 학부에서 역사학, 국제관계학, 언어학, 심리학으로 전공을 늘여 가며 공부하고서는 역사학과 심리학으로 석사 학위를 따고서 한국에 돌아온 것이다. 그것이 재작년의 일이었다.
 서울대와 프리스턴을 오가며 학사 학위만 8개에 석사 학위 3개를 가진 그는 가히 한국에서 최고 두뇌에 속하는 사람이라 해도 틀린 말이 아니었다.
 그리고 그가 한국에 돌아와서 선택한 것은 우주공학이었다. 우주 개발이 가속화되면서 독립 부처로 설치된 우주청(宇宙廳) 5급 공무원 공채에 합격한 그는 스물넷에 화성 개발 계획실의 사무관으로 근무를 시작했다.
 그러나 이내 그의 뛰어난 두뇌를 높이 산 상부에 의해 근무지가 나로우주센터의 실무 부서로 바뀌었고, 그 와중에 우주 비행사 훈련까지 마쳐 본래의 직무와는 상관없이 이번 제1차 토성 유인 탐사 계획의 일원으로서 참가하게 된 것이다.
 그리고 5월 6일. 오늘은 그 토성으로 가는 탐사선인 「고흥―13」이 하늘로 쏘아지는 날이다. 김세훈을 포함한 네 명의 비행사는 앞으로 370일간의 우주 항로를 거쳐 토성의 궤도권에 닿게 될 것이다.
 이번 탐사의 주 목적은 행성 간 운항 기술의 점검과 간단한 토성권 위성들의 구성 성분 분석으로서, 김세훈은 부함장으로서 항로를 점검하고 심리학 석사 학위 소지자로서 장기간 밀폐된 공간에서 이루어지는 항행 도중에 혹시라도 있을 수 있는 불상사에 대비해 팀원들 간의 의견을 조율하고 전체적인 협동심을 이끌어내는 역할을 맡았다.
 “김세훈 부함장. 기분이 어떤가?”
 탑승을 완료하고 자리에 앉아 중력 탈출에서 오는 거대한 압력을 견디기 위한 안전장치를 몸에 부착하고 나자, 사선으로 앞자리에 앉아 있던 「고흥―13」호의 함장 이승찬이 물어 왔다.
 고작 네 명이 타는 탐사선에 함장이 있고 부함장이 있는 것이 웃기다고 세훈은 생각했지만, 함장인 이승찬은 정말로 함장이 될 만한 자격이 있는 멋진 사람이었다.
 항공우주군(구 공군)대령으로 예편하기까지 300차례에 가까운 전투기 출격과 78회에 이르는 유인 우주 비행 실적을 인정받아, 5년 전부터 지구―화성 간 정기 연락선의 함장을 역임해 온 말 그대로 우주에 몸을 바쳐 온 사람이었다.
 이제 50줄에 들어서 2110년의 기준으로 보았을 때 한창 전성기로 접어든 그는 시원시원한 외모와 믿음직한 목소리를 가진 사내였다.
 “조금 긴장되는 것 같습니다. 작년에 화성을 한 번 다녀온 것을 제외하고는 이런 장기간 승선은 처음이나 다름없어서요.”
 세훈의 목소리는 정말 조금 떨리고 있었다. 그러나 우주 비행에는 베테랑인 이승찬 함장은 그저 조그만 미소를 지으며 웃었다.
 “우주에서의 커리어를 토성 탐사로 시작하는 뛰어난 두뇌도 아드레날린을 뿜어내긴 하나 보구먼. 하하! 긴장하지 말게. 왕복 2년간 토성을 다녀오고 나면 세상을 바라보는 시야도 많이 바뀌고 무슨 일에도 자신감이 생길 거네.”
 “말씀이라도 감사합니다.”
 “무슨, 나도 생도 시절 처음으로 훈련기를 몰았을 때의 그 떨리는 기분을 잊을 수가 없네. 비행기가 뜨자마자 구토가 치밀어 오르는 것 같은 기분이었어. 빨리 내리고 싶었지. 옆에 비행 교수도 탑승해 있고 겨우 비행장 주변을 한 바퀴 돌고 오는 것뿐인데도 말이야. 그런데 자네는 첫 비행이 토성이라니 떨릴 만도 하지.”
 함장은 이내 기지와 연결된 계기판으로 눈을 돌렸다. 호흡기를 착용하고 충격 흡수 장치 위로 머리를 누이자 이내 발사 센터로부터 전송되는 음성이 들려왔다. 발사가 얼마 남지 않은 것이다.
 ―곧 이륙하겠습니다. 10, 9, 8, 7, ······.
 하나하나 숫자가 줄어 갈수록 음성도 멀어지고, 어느새 위로부터 몸을 향해 강하게 충격이 밀려오는 것이 느껴졌다. 땅을 떠나 발사된 것이다. 기술적으로 충격을 흡수해도 중력의 몇 배나 되는 강한 힘이다. 1G의 지구 중력을 뚫고 나가려면 그 이상의 고통이 수반된다.
 ‘이제 지구를 떠나는구나.’
 대기권을 벗어날 때까지는 이 고통을 참고 인내할 수밖에 없었다. 중력 가속으로 인한 의식 상실, 즉 G―LOC 상태에 빠지지 않기 위해 훈련을 지난 수 개월간 받아 왔지만, 세훈은 온몸의 피부가 벗겨져 밀려 나갈 듯하고, 피가 거꾸로 솟구치는 충격에 정신이 아득해져 오는 것이 느껴졌다.
 흐린 의식으로 어렵게 앞을 보니 함장은 꿋꿋이 그 충격을 잘 받아내고 있었다. 세훈은 그가 역시 베테랑답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중력 가속으로 인한 충격은 아무리 생각해도 과한 듯했다.
 정밀하게 계산된 시뮬레이터로 받았던 훈련의 적어도 2배는 가까운 느낌이었다. 무언가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어렵사리 떠오를 즈음에 세훈은 의식을 잃고 말았다. 그때 얼핏 함장의 목도 고꾸라지는 것을 본 것 같았다.
 
 1399년 중하(仲夏)
 조선국(朝鮮國) 전라도 제주목(濟州牧).
 
 그해 여름의 태풍은 유난히도 드셌다. 바다로 집어(集魚) 나갔던 나무배들이 몇 채나 사람도 고기도 없이 부서진 채로 바닷가로 떠밀려 들어왔다. 원래 제주의 바람이란 거칠기 짝이 없는데 태풍까지 몰아치니 성난 파도에 제 갈 길을 잃고 꼼짝없이 수장당하고 만 것이다.
 이런 계절에는 원래 먼 바다를 다니는 외인들이 난파당해 떠밀려 오기도 했다. 조선 내륙의 어선들은 물론이고, 왜구나 명나라 사람에 저 멀리 유구(琉球)에서도 제주 바다로 표류하는 일이 드물지 않았다. 그러나 여름에 서귀(西歸) 앞바다에서 발견된 사내는 도무지 출신이 어딘지 가늠되지 않는 자였다.
 제주도에서는 큰 마을인 대정(大靜)으로 볼일을 보고 돌아오던 양노인이 섬 바닷가에 하얗고 검은색이 섞인 독특한 매끄러운 질감의 옷을 걸치고 누워 있는 그를 발견한 것은 8월 닷새의 저녁 무렵이었다.
 6척 장신의 튼튼한 몸의 남자는 숨은 붙어 있으나 바닷물에 몸이 반쯤 잠겨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었다. 노인은 마을에서 사람을 불러다가 사내를 구명한 다음에 집에 눕혔다.
 사내는 키가 크고 몸이 군살 없이 튼튼했다. 머리는 중머리는 아니었지만 상투도 틀지 않은 짧은 머리였고, 얼굴은 젊고 이목구비가 뚜렷한 미남형이었다. 전체적으로 보아 장수감이라 해도 좋을 정도였다. 바다에서 밀려온 사람을 보러 온 동네 사람들은 죄다 그 헌헌함에 감탄하곤 했다.
 그러나 문제는 사내가 정신을 차리고 나서부터였다.
 “날 봅서. 어디서 옵데까?”
 양노인이 정신을 차린 사내에게 물었을 때 사내는 의뭉스럽게 노인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아주 바깥 사람이라면 말이 통하지 않아야 할 텐데, 죄 알아듣지 못하는 것은 아닌 듯했다. 도리어 노인이 그 말하는 것을 알아듣지 못할 지경이었다.
 “어디라니요. 여기 한국 아닙니까? 어떻게 된 겁니까? 토성 발사선은 어떻게 됐습니까?”
 “호꼼만 이십서게. 무신 거예 고람신디 몰르쿠겐. 귀가 왁왁하우다.”
 양노인은 한숨을 내쉬고서는 육지에 몇 년 나갔다 온 적이 있는 옆집 상복이를 불러다가 데려다 앉혔다. 상복이는 제주 사투리를 쓰지 않고 밖에서 배워 온 육지말로 사내에게 물어보기 시작했다.
 “어느 나라해서 오셨나이까?”
 “여기 어딥니까? 제주입니까? 다들 말씀 하시는 것이······. 표준말로 말씀해 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닐오는 말이 쾌 닿지 아니하나이다. 차제 계샤는 곳이 제주 맞사온 종체 말이 닿지 아니 하여서······. 오 이브신 것을 보암도 짐작이 이르지 아니하고 말하시는 것을 보아도 어느 나라해서 오신 것인지. 륙지 말과도 맞지 아니 한.”
 “······.”
 청년은 한참을 말이 없었다. 양노인이 차려 온 조밥을 먹는 둥 마는 둥 하더니 감사하다고 말하며 상을 물렸다. 청년은 한참을 묵묵히 앉아서 집안을 둘러보고서야 입을 열었다.
 “혹시 지금이 몇 년인지 알 수 있습니까?”
 “몇 년이라 하옵면 금년은 기묘(己卯)년 이옵. 년호는 홍무(洪武)에서 금년 들어 건문(建文)이 되았이다.”
 “도대체 어디로 와 버린 거야.”
 “여기는 됴션국 제주이이다. 예전에는 탐나국(耽羅國)이라 하여 원조(元朝)에서 총관부 있샀나이다.”
 “그렇습니까?”
 양노인이 듣기에도 사내가 하는 말이 육지의 말과는 다르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상복이와 대화가 주고받고 이어지는 것이 신기하다고 여겨졌다.
 분명히 왜구들이 하는 말과는 달랐고, 양노인이 젊은 시절 많이 보았던 몽골 사람이 하는 말과도 달랐다. 분명히 조선말이 맞기는 한데, 말이 참 신기하다고 양노인은 생각했다.
 청년은 한참을 당혹스러운 표정으로 고개를 숙이고 있더니 한숨을 푹 쉬고서는 죄송하지만 옷가지를 좀 갖출 수 있겠냐고 물어보았다. 섬이라 옷이 귀하기는 매한가지라서 급한 대로 상복이의 낡아 헤어진 갈옷을 가져다 입혔다. 덩치가 워낙에 커서 겨우 5척을 조금 넘는 상복이의 갈옷을 입은 청년은 조금 우스꽝스러워 보였다.
 조밥도 해 먹이고 옷도 입혀 주었지만 이 정체불명의 외지인을 계속 데리고 있을 수는 없는 노릇이라 어떻게든 온 곳을 알아 돌려보내든 조치를 취해야겠다고 양노인은 생각했다.
 다음날 청년을 데리고서는 한라산의 언저리를 돌아 제주목이 설치된 큰 읍으로 나섰다. 동이 트기 전에 길을 나섰는데도 산등성이를 따라 멀리 솟은 오름들과 초지를 쉬엄쉬엄 건너는데 꼬박 하루가 지났다. 먼 바다 가까이 제주의 읍성이 보일 때는 벌써 저녁 무렵이었다.
 양노인은 허겁지겁 성내에 들어가 탐라 성주(星主) 고봉례(高鳳禮)의 집 앞에서 무릎을 꿇고 뵙기를 청했다.
 탐라의 성주라는 것은 옛날 신라왕에게 받아 온 칭호로 탐라국의 군주가 누리던 칭명이었다. 내지로부터 먼 바다에 떨어진 이 탐라는 고려에 제주군이 설치되고 나중에 원나라 총관부가 들어서 다루가치가 다스릴 때에도 그 혈통의 귀함을 인정받아 실질적으로 탐라국의 으뜸으로서 섬의 대소사에 대해 결정하고 다스리는 자리로 남아 있었다.
 성주에 이어 왕자(王子), 도내(徒內)라 칭하는 자들도 있었으나, 성주라 하면 곧 탐라국 왕이나 마찬가지인 자리였다.
 양노인은 그래도 옛 양을나(良乙那)의 적손 가계에서 멀지 않은 후손으로 산 남쪽에 꽤 많은 전답과 그럴듯한 물이 나오는 용혈도 하나 가지고 있는 유지였기에 성주 고봉례와는 면식이 있었다. 그렇기에 늦은 시간에 무례를 무릅쓰고, 사안이 급하기도 하여 이렇게나마 뵙기를 청할 수 있는 것이었다.
 원나라 총관부도 물러가고 전조인 고려도 문을 닫은 지 몇 년 째인 지금, 제주목에는 목사가 부임해 오지 않고 있었고 탐라의 대소사는 일단 이렇게 성주인 고봉례에게 찾아오고 있었다.
 성품이 박하지 않은 고봉례는 양노인과 표류했다는 청년을 불러다가 제주에서는 구하기 힘든 쌀밥으로 저녁을 든든히 먹이고서는 따로 일러 양노인을 하루 유숙시킨 뒤 돌려보내고, 청년만 남겨 별채에 일단 머무르게 했다.
 
 1399년 계하(季夏)
 조선국(朝鮮國) 전라도 제주목(濟州牧).
 
 세훈은 지난 3일간 겪은 일들에 도무지 당황스러워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분명히 토성으로 가는 탐사선이 발사되었을 때 중력 가속으로 인해 의식을 잃은 것까지는 기억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웬 전설 속의 탐라국이란 말인가. 도무지 납득도 되지 않고 꿈인가 싶었다.
 처음에 양씨라 불리는 노인에게 구함을 받았을 때, 그는 민속촌에서나 보던 제주의 전통가옥에 누워 있었다. 그때만 해도 뭔가 알 수 없는 상황에 처해 있다고 생각은 했지만 이런 어이없는 지경에 처하리라고는 누가 상상이나 했을까.
 22세기인 지금 정말로 사람이 살 것 같지도 않은, 말 그대로 민속촌에나 남아 있는 집에서 상투를 틀고 갈옷을 입은 노인이 알아들을 수 없는(지금은 아무도 쓰지 않는 제주 사투리라고만 생각되는) 말로 뭔가를 물어오는데 도무지 어떻게 해야 할지 감이 서지 않았다.
 그리고는 상복이라는 사내가 들어와 뭔가 말을 통해 보겠다고 말을 시작했을 때는 더욱 질겁했다. 세상에, 중세국어로 말을 걸어오는 사람이라니.
 세훈은 순간적으로 지금 자신을 놀리나 싶어 기가 막혔지만, 상황이 돌아가는 것을 보아하니 아무리 장난이라 해도 이렇게 그럴싸하게 만들어낼 수는 없을 것만 같았다.
 퍽퍽한 조밥을 먹고 갈옷을 받아 입었을 때는 정말 이해할 수 없는 곳에 와 있다는 것이 실감이 났다. 분명히 중국 명의 연호를 쓰고 있었고, 홍무에서 건문으로 바뀐 해라면 홍무제(洪武帝)의 주원장(朱元璋)의 손자이자 두 번째 황제인 주윤문(朱允炆)이 등극한 해였다. 건문 원년으로 연호를 쓰기 시작한 1399년임이 분명했다. 원나라 탐라 총관부가 멀지 않은 이야기고 고려를 일러 전조 운운하는 것이 바로 지척인 일인 것이다.
 그때까지도 사실 긴가민가한 일이었으나 세훈은 다음날 한라산을 넘어가며 이게 사실이구나 하고 절감할 수밖에 없었다. 분명히 우뚝 솟은 한라산은 이것이 현실이라고 말해 주고 있으나, 그 주변 풍경은 자신이 알던 22세기의 것이 아니었다.
 철근 콘크리트나 유리창은 아무리 보려 해도 보이지 않았고, 억새풀을 엮어 바람이 날리지 않게 돌을 주렁주렁 매달아 놓은 토막 같은 집들만이 돌담을 줄줄이 끼고 바다를 향해 서 있을 뿐이었다.
 거기에 제주읍성에 들어서 처음으로 보는 기와집에 들어가 탐라 성주라 하는 사람을 대면했을 때는 모든 것을 받아들이는 수밖에 없었다. 고려말에서 조선초까지 착용하던 원나라풍의 흑립(黑笠)을 입은 남자가 나왔을 때 결국 올 것이 왔구나 싶었던 것이다.
 ‘도대체 1399년이라니. 과학적으로 시간 여행이라는 것이 말이나 되는 거였나. 토성으로 가려다가 7백년을 거슬러 올라오다니.’
 세훈은 그저 당황스럽기만 할 뿐이었다. 도무지 사흘이 지나도 현실을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정체 모를 외지인이라고 성주라는 남자가 잡아 가두지 않고 별채에 데려다 놓고 입을 만한 옷도 주고 쌀밥이라도 먹여 주는 것이 그나마 다행이라면 다행인 일이었다.
 “이리 앉으시오.”
 하루를 그렇게 쉬엄쉬엄 보내고 나서야 성주는 세훈을 불러다 앉혔다.
 며칠간 이곳에서 머무르다 보니 역사학과 언어학을 전공한 이력도 있고 중세국어에 관한 짧은 논문을 쓴 적도 있는 세훈의 귀에는 이제 마치 현대어처럼 들릴 정도로 쉽게 귀에 익었다. 물론 아직 자연스럽게 말하는 것은 무리가 있었지만 대충 말이 통하는데는 지장이 없었다.
 “불러 계셨나이까.”
 지금 세훈의 입장에서 이 탐라 성주라는 고봉례는 이 세계와 일면식 없는 자신의 목숨을 쥐고 흔들 수 있는 중요한 자였다. 세훈은 깍듯이 몸을 낮추며 복배했다. 지금 아무것도 없는 자신이 이 남자에게 보여 줄 수 있는 것은 귀인에게는 마땅히 돌아가야 할 대접뿐이었다.
 “이제 말이 많이 익으신 것 같구려.”
 “원래 쓰던 말이 크게 다르지 않아 쉬이 익혔나이다.”
 “손을 앉혀 놓고 인사가 늦었소이다. 나는 옛 탐라국왕의 사손(嗣孫)으로 성주라 불리는 고가의 봉례라 하오이다.”
 “귀한 분께서는 말씀을 편히 하십시오. 김해 김의 세훈이라 하나이다. 경상도 진량 사람이나이다.”
 세훈은 일단 원래 세계에서 알고 있던 본관 본적을 대었다. 일단 조선 사람으로 인식되어지는 것이 앞으로 편할 노릇이었다. 고봉례는 일단 크게 의심을 하지 않는 듯했다.
 말이 잘 통하지 않았던 것은 그저 지역 간의 말이 크게 달라 그렇다고 생각하는 듯했다. 표준어라는 것이 없고 미디어가 없는 지금 시대에는 말의 전범(典範)이라 불릴 만한 것이 없었고, 당연히 방언이 제각기 융성하는 때인 것이다.
 “공도 품을 보아하니 공경대부(公卿大夫)의 후손이라 하여도 부족함이 없어 보이는데 어찌 자세히 알지도 못하면서 외지에서 사고를 당해 온 손에게 함부로 대하겠소. 이 탐라도의 성주래야 다 옛것을 못 잊어 칠칠치 못하게 아직 달고 사는 직책이지.”
 고봉례는 약간 씁쓸하다는 투로 말했다. 세훈은 뭔가 크게 와 닿지 않는 이야기들이었지만, 어차피 과거로 떨어진 마당에 모든 것이 익숙하지 않기는 매한가지였다.
 어차피 돌아갈 방법은 없을 것이다. 이 세계에서 어떻게든 몸을 비벼 살아남기로 결심했지만, 한 가지 걸리는 것이 있다면 같은 토성 탐사선에 타 있던 다른 세 명의 행방이었다. 특히 이승찬 함장이 곁에 있다면 큰 힘이 되어 주었을 거라고 세훈은 생각했다.
 “혹시 저를 제외하고 바다에 떠내려 온 이를 발견하지 못하셨나이까?”
 “근래에 표류한 사람은 김 공이 다이외다. 이 섬의 크고 작은 일들이 본인의 귀에 다 모이게 되는 일이오만, 아마 김 공이 쓸려 온 날 태풍이 천지를 진동하고 파도가 드셌으니, 그런 날 난파를 당했다면 목숨을 부지하기 힘들었을 것이오. 김 공이 특별히 운이 좋았었다고 생각하시오. 산 사람이라도 살아 나가는 것이 세상사는 묘리 아니겠소이까.”
 세훈은 고봉례의 말에 씁쓸히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제주도가 아닌 다른 곳으로 가게 되었을 가능성도 무시할 수는 없지만, 마음속에서는 이미 이 세상에 홀로 남겨진 것이 아닐까 하는 가능성을 받아들이고 있었다.
 아무런 아는 이 없이, 더군다나 도움 될 만한 미래의 물건 하나 없이, 그저 미래에 대한 지식만 있는 좀 쓸 만한 머리랑 튼튼한 몸뚱어리밖에는 지금 세훈이 가진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우선은 살아남기 위해서는 앞에 있는 탐라 성주 고봉례의 마음에 차야 했다.
 “저를 어찌 처분하실 요량이나이까.”
 “뭘 처분씩이나 하겠소이까. 여름 태풍도 슬슬 지나갈 무렵이니 곧 육지로 나가는 배가 하나쯤은 뜰게요. 배 가는 길로 모실 터이니 뜻하는 곳으로 가시면 될 것이오. 배가 뜰 때까진 이곳에 머물러 계시오. 이 성주가 섭섭하지 않게 대접하리다.”
 고봉례는 호의를 베푼다는 양 껄껄대며 웃었지만 세훈에게는 생각보다 좋지 않은 제안이었다. 경상도 진량 사람이라 둘러대긴 했지만, 21세기의 서울에서 나고 자란 세훈에게 경상도로 가 보아야 아무런 비빌 연고가 없었다.
 물론 그렇기는 이곳 제주도 매한가지였지만, 왕조 교체기의 권력 공백이 크게 작용하고 있는 이 외딴 섬에서라면 뭔가 제약 없이 앞으로 행동을 도모할 수 있을 것이라는 계산이 들었다. 그렇다면 이곳에 남아야만 했다.
 “염치없지만 섬에 흘러들어 온 자들은 추쇄(推刷)토록 되어 있나이까.”
 “그렇지는 않소. 섬의 인구가 늘어나고는 있으나 밖에서 외지인이 흘러들어 올 정도로 가까운 섬은 아니외다.”
 “그렇다면 소인이 이곳에 근거를 잡고 살아도 되겠나이까.”
 “왜 돌아가시잖고.”
 고봉례는 알다가도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느긋이 세훈을 바라보았다. 뭔가 들을 만한 이야기가 있으면 하라는 투였다.
 “본인은 원래 전조의 척신(戚臣)의 후손으로 조부가 일찍 죽어 가산이 몰락한 후에 태어났나이다. 어릴 적에는 어렵게 문리를 틔우려 공부했으나 갑작스레 나라가 바뀌어 붓을 꺾고 출사치 않기로 맹세하였나이다. 그 뒤로는 부끄럽사오나 장사를 조금 배워 경상, 전라를 오가며 미곡(米穀)을 매매하는 일을 했나이다. 이번에도 이곳 제주에 쌀을 좀 팔아 볼까 하여 가진 것을 정리하여 바다를 건너는 와중에 모든 걸 잃고 이렇게 떠내려 왔으니 돌아가 보아야 부모도 없고 가산도 없는 땅에 무슨 애착이 있겠나이까. 어차피 이리되어 목숨만 건짐 받아 홀로 여기 남게 된 것을 하늘의 뜻이라 여기고 새롭게 이곳에서 살아보려 하나이다. 그러니 귀한 어르신께옵서는 조금 은혜를 베푸셔서 이 못난이를 헤아려 주시옵소서.”
 “그러나 나도 공에 대해 잘 알지 못하는데 집이나 땅, 장사할 밑천을 내어 줄 수는 없소이다. 공부를 하셨다니 글은 아시오?”
 세훈은 한숨을 쓸어내렸다. 그래도 지금 상황에서는 제주를 다스리는 입장에 있는 성주이다 보니 섬의 대소사를 혼자 처리하기는 버거움이 있을 것이다. 밑에서 보좌를 봐 줄 머리가 하나 있으면 좀 든든하긴 할 터였다.
 혹시나 그런 사람이 필요치 않을까 싶어 버텨 보았던 것인데, 역시 글을 아냐 물어보니 예상이 얼추 맞아 들은 듯싶었다.
 세훈은 이때만큼은 진심으로 자신의 머리가 좋은 것에 감사했다. 한문이라면 당률(唐律)에 맞춰 한시를 척척 뽑아낼 정도는 아니라도 전적(典籍)을 읽고 사무를 보는 데는 지장 없을 정도였다.
 22세기의 컴퓨터공학과 심리학 그리고 교육학의 융합 수준은 놀라워 직접 뇌에 자극을 하는 방법으로 학습 시간은 기존의 1/5가량으로 단축되어 있었다. 가장 효율적인 커리큘럼에 효과 있는 교수 방법으로도 모자라 뇌가 잘 잊지 않게 뇌파로 시청각적인 자극을 줘 가면서 공부를 시키는 것이다.
 거기에 세훈처럼 머리가 좋은 이는 의지만 있다면 모든 것에 대한 배움의 길이 쉽게 열려 있는 셈이었다. 어쨌든 교양 삼아 배워 둔 한문이 이렇게 유용하게 쓰일 줄 알았다면 좀 더 열심히 해서 두보나 이백처럼 시 좀 뽑아낼 정도로 만들었을 것이다.
 “문자라면 읽고 쓰는 데는 지장 없나이다.”
 “역시 김 공은 선비시구려. 이 섬에는 글을 아는 이가 많지 않아 내 밑에서 일을 돌봐 주던 늙은이도 이두문(吏讀文) 나절만 쓸 따름이었소. 이제 그 노인도 나이가 차 뒷방에 들어가 앉으니 일을 돌봐줄 사람이 없구려. 김 공이 정 이곳에 머무르고 싶으시다면 내 일을 좀 도와주시구려. 먹고 자는 것은 내 해결해 드리리다.”
 섬에 인재가 부족하겠지만 이렇게 쉽게 쓰일 것이라고는 생각지 못했기에 세훈은 조금 놀랐다. 하긴 뭐 그렇게 대단한 일을 맡기는 것도 아니긴 했다. 현대로 치면 문서 기안을 할 줄 아는 행정 보조 정도의 의미랄까. 이두문을 쓰는 요령도 곁다리로 알고는 있었기에 크게 힘들 것 같지는 않았다.
 ‘정 안 되면 아직 정종 즉위년이니 내가 수십 년 앞서서 한글을 만들어다가 보급시켜 버리던가.’
 말처럼 쉬운 일은 아닐 테지만, 어쨌든 세훈은 우선 이 고봉례 밑에서 일을 좀 거들기로 결심했다. 우선은 찬밥 더운밥 가릴 처지가 아니었고, 살아남아 기반을 다지는 것이 가장 우선이었다.
 “그리하겠나이다. 잘 봐 주시오소서.”
 
 
 
 제1장―탐라여일(耽羅麗日)
 
 
 「제주 성주(星主) 고봉례가 철괴 300근, 비누 800포, 양마(良馬) 100필, 발화기 100개를 가져다 바쳤다. 고봉례가 말하기를 제주의 토산이 근시에 풍족해져 진상을 늘였으니 이 모든 것이 도내(都內), 제주만호(濟州萬戶) 김세훈의 공이라 하였다. 김세훈은 경상도 진량 사람으로 제주로 표랑했으나 그 기재가 탁월하여 고봉례가 사위를 삼았다. 주상이 그 물품들에 탄복하고 고봉례에게 쌀 백 섬과 콩 백 섬, 비단과 술을 주어 내려 보냈다.
 ○濟州星主高鳳禮貢 鐵塊三百斤, 石鹸八百, 良馬一百頭, 發火器一白. 鳳禮曰:“至近日, 土産於東瀛, 此以成豊, 屬邦增貢, 其是都內濟州萬戶金世勳之功也.” 世勳是慶尙津梁人, 前日漂浪於濟州, 其奇才卓越, 鳳禮以世勳爲壻. 上歎, 賜鳳禮米豆各白石, 繭, 酎等.」
 ―태종실록 제1권 2년 11월 8일
 
 
 
 1400년 맹춘(孟春)
 조선국 전라도 제주목.
 
 세훈이 제주에 흘러들어 와 탐라 성주 고봉례 밑에서 일을 한 지도 어느덧 반년 가까이 흘러 새해의 정월이 되었다.
 전조 고려 때에 제주가 본토에 복속되면서 기존의 지배층은 토관(土官)의 지위를 인정받아 바다 바깥에서 부임해 오는 명목상의 외관(外官)을 도와 실질상으로 제주를 지배해 왔는데 제주를 본관으로 삼고 있는 고(高)·양(梁)·부(夫) 세 성씨는 여말선초 제주 지역에서 강력한 토착 세력 집단이었다.
 여기에 복성현의 향리였던 문씨(文氏)가 제주 고씨 집안의 사위로 들어온 것을 계기로 제주 지역에서 삼성(三姓) 다음으로 영향력을 행사하게 되었다.
 이때의 고씨 가문의 당주(堂主)인 고봉례가 성주의 자리 외에도 여말에 받은 제주축마 겸 안무별감의 지위를 지니고 있었고, 문충세(文忠世)가 왕자의 자리를 지니고 있었다. 원래 양씨에게 돌아가야 할 왕자의 자리가 문씨에게 세습되고 있는 것은 이즈음 들어서 제주에서 고씨 다음으로 힘을 떨치고 있는 것이 문씨라는 것을 말해 주고 있었다.
 성주와 왕자, 그리고 유명무실한 도내의 자리 아래에는 몽골 지배 이래 내려오는 도천호(都千戶), 상천호(上千戶), 부천호(副千戶)라는 직위가 있었고 그 아래에 백호(百戶)들이 있었는데, 처음 세훈이 받게 된 자리는 그런 백호의 자리 중 하나로 힘이 있거나 하는 자리가 아니라 그저 고봉례의 뒤를 봐 주는 일이나 다름없었다.
 그러나 세훈 같이 출신도 불분명한 외지인에게 그 정도 토관직만 해도 감지덕지한 일이었다.
 세훈은 목구멍이 포도청이라 덜컥 자리를 받아 놓고 보니 일이 생각만큼 잘 돌아가지 않았다.
 외관, 그러니까 제주목사가 부임해 오지 않은 지도 꽤 되어서 육지로 나가는 공물을 모두 고봉례가 전담해 왔기 때문에 말고기 따위를 올려 보낼 때 진상문을 짓거나 제주도의 읍향(邑鄕)들에서 처결을 바란다고 올라오는 일들에 대해 문서를 쓰거나 하는 일이 전부였다.
 해 본 적이 없는 일이었지만 그럭저럭 잘해 보이고 있는데 머릿속에 든 지식으로 뭔가 원대한 일을 추진해 보겠다는 소기의 성과는 전혀 거두지 못하고 있었다.
 아무리 8개의 학사와 3개의 석사 학위를 지니고 있었던 22세기의 우수 인재라고 하더라도, 산업혁명을 거치며 수세기를 거듭해 발전해 온 현대 과학의 성과를 처음부터 혼자서 일궈 나가는 것은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었다.
 “김 공. 장사에 한 번 손대 보지 않겠나?”
 계속 이러고 있어도 되나 세훈이 고민을 거듭할 즈음에 고봉례가 해 온 제안은 솔깃한 것이었다.
 행정 잡무를 시켜 세훈의 됨됨이를 지켜보던 고봉례가 신뢰를 준 것이다.
 실제로는 장사꾼이 아니라 우주 비행사였던 세훈이지만, 전에 고봉례에게 이력이라고 소개했던 것이 장사인지라 고봉례는 그런 줄 알고 장사를 한 번 맡겨 보려 했던 것이다.
 “장사라 하옵시면?”
 “이 제주 땅에서 나오는 산품에 대해 수매권(收買權)을 내가 줌세. 나를 대신해서 이 물건을 받아다가 육지에 내다 팔아 주게. 일이 좀 편하도록 내 자리도 부천호로 올려 주겠네. 마침 부씨가 도내의 자리를 청했으니 그리로 올려 주고 자네가 부천호를 맡으면 되겠지. 말총이나 귤, 해산물들이 넉넉하니 그걸 가져다가 육지에 팔고 육지 물건을 사들여 오는 일이니 어렵지 않을 것일세. 가끔 조정에 보내는 진상품을 전라도 감사에게 보내는 일도 해 주고. 육지와 거래가 드문드문해진 지 벌써 여러 해니 장사로 겨룰 사람도 없고 무주공산이나 다름없으이.”
 고봉례가 흰 수염을 쓸며 말했다. 이제 슬슬 인생의 만년(晩年)에 접어드는 노인은 그저 사람 좋은 미소를 지을 뿐이었다. 세훈은 감읍하고 일을 받아들였다.
 “맡겨만 주신다면 성심을 다해 일을 하겠나이다.”
 “그럼 부탁함세. 장사 밑천으로 내가 쌀 백 석을 내어 줄 테이니 그것으로 먼저 물건을 구하도록 하게.”
 고봉례는 다음날 쌀 백 석을 내어 주었다. 화폐가 아직 공통되지 않는 시대였다. 쌀이나 면직물은 그래서 주요한 화폐 대용이었고, 백 석이라면 쌀이 귀한 제주에서는 아주 큰돈이나 다름없었다. 그런 돈을 고봉례는 세훈에게 믿고 맡겨 준 것이다.
 세훈은 우선 제주 읍내에다가 처마 올린 창고를 하나 들여놓고서 제주 전역을 돌아다니며 육지에 나가면 돈이 될 것 같은 물건들을 매수하기 시작했다.
 말은 큰 재산에 국가에 헌납되는 물건이라 함부로 매매할 수는 없었지만, 말총은 육지에서 고급 갓을 짜는데 사용되기에 육지로 나가면 비싼 값에 팔리는 물건이었다. 그리고 한랭한 육지에서 나지 않는 제주의 귤과 유자, 그리고 잠녀(潛女)들이 잡아오는 해산물 또한 잘 말려서 소금 간을 한 뒤 육지에 팔았다.
 부패하기 쉬워 해산물의 유통이 어렵고, 그것을 부득이 오래 저장하기 위해서는 소금을 간하는 수밖에 없는데 소금도 비싸기 짝이 없었다. 그러니 육지로 나가면 그 값이 상상을 초월했다.
 그야말로 세훈에게는 힘들이지 않고 그저 주워 먹는 장사나 다름없는 노릇이었다. 대보름이 지나고 바다에 배를 띄워 전라도 나주며 경상도 진주 같은 좀 큰 성읍으로 나가 물건을 팔기 시작했다. 여러 달에 걸쳐 서너 번을 오고 가니 백 석이 삼천 석으로 불어나 있었다.
 “부천호가 장사에 참 소질이 있구만.”
 삼천 석 중에 이천 석을 고봉례에게 올려 바치니 고봉례의 얼굴에서 웃음이 떠날 줄을 몰랐다. 이렇게 세훈의 객주(客主) 노릇이 시작된 셈이었다.
 
 “무얼 그리 열심히 하시나이까?”
 “아, 오 서방 왔는가?”
 세훈이 장사를 시작한 뒤 슬슬 돈이 쌓이자 처음 한 일은 예전 목숨을 구해 준 인연이 있는 서귀포의 양노인에게 쌀 오십 석으로 은혜를 갚고, 오상복을 불러다가 일을 돕게 한 것이다.
 제주의 토호 집안 출신도 아니고 그저 외지에서 흘러들어 온 양인인 오상복은, 나이가 거의 열 살은 어린 세훈에게 꼬박꼬박 존대를 썼다. 세훈은 그것이 내심 불편했지만 지금 시대에서는 이것이 당연한 것이었고, 그래야 자신도 오상복도 불편하지 않을 일이었다.
 “비누를 만들고 있네.”
 “비누라는 것이 뭡니까?”
 오상복에게는 비누라는 이름 자체가 엄청 생소한 것이었다. 세훈과 지내면서 그가 독특한 사람이라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산에서 잡아온 염소 가죽을 헤집어다가 지방을 꺼내 끓이고 있는 모습은 이상하기 짝이 없는 노릇이었다.
 “비누라는 것은 몸을 단장하기 위해 씻거나 옷가지를 세탁할 때, 때를 지우는 물건이네.”
 “그게 염소 지방에서 나온답니까?”
 “두고 보면 알 걸세. 하하!”
 제주의 물건을 받아다가 육지에 팔고, 제주에 필요한 물건을 다시 육지에 사오는 장사는 말 그대로 쉬운 장사였지만, 세훈은 그걸 반복하기만 할 생각은 없었다.
 올해가 1400년, 명나라 연호로 건문 2년, 곧 정종은 이방원에게 왕위를 양위하고 상왕으로 물러나 앉게 될 것이었다. 태종 이방원이 왕위에 오르면 강력한 중앙집권화 정책을 시도하게 되고, 1402년이 되면 자신이 지금 의탁하고 있는 성주 고봉례는 한성으로 올라가 그 지위를 반납하고 좌도지관(左都知官)이라는 유명무실한 관직을 받아 오고 제주목에 목사가 부임해 오면서 제주의 독립성도 차츰 사라지게 될 시기였다.
 세훈은 그전에 중앙에서 무시할 수 없는 영향력을 제주에서 키워서 세력을 구축할 생각이었다. 이왕 과거로 떨어진 것 역사의 흐름 속에서 부평초처럼 떠밀려 다니기만 할 생각은 없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그저 제주와 육지를 오가는 단순한 장사로는 부족했다. 그래서 처음 시도하는 것이 이 비누였다. 예전에 화학을 배울 때 간단한 알칼리성 비누를 만들던 과정을 떠올려 보니 여기서도 복잡한 설비 없이 충분히 가능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실제로 유럽에서는 중세에도 자연 성분으로 만든 비누를 널리 쓰고 있었다. 만들고자 한다면 어렵지 않게 만들 수 있을 것이었다.
 “만드는 방법을 자네에게도 일러 주겠네. 옆에서 잘 보아 두었다가 나중에는 직접 사람을 부려서 만들어야 할 것이야.”
 세훈의 말에 오상복은 의아해하면서도 고개를 끄덕이고선 옆에 와서 들여다봤다.
 먼저 수산화나트륨이나 수산화칼륨을 써서 양잿물을 만들어야 하지만 그런 화학 결정체를 지금 대량으로 구할 방법이 없으므로 그냥 잿물로 넉넉하게 만든 다음에, 말만큼이나 제주에 많은 염소를 잡아다가 지방을 끓여 불순물 없이 거른 다음 잿물을 천천히 붓는다. 지금 막 하려던 작업이 바로 그것이었다.
 “이렇게만 만들어도 때를 벗겨 내는 데는 일품이지만, 이렇게 녹두 빻은 것을 같이 넣어 향을 내게 할 수도 있네.”
 아침부터 열심히 빻아 둔 녹두 가루를 잿물과 함께 뿌려 지방에 흡수시켰다. 지방이 염기성이 강한 잿물과 만나면 덩어리를 만들기 시작하는데 이것을 저어 준 다음에 이레간 말리면 비누가 나오는 것이다.
 그렇게만 해도 되지만 세훈은 그냥 비누를 아무렇게나 만들어다 팔 생각은 없었다. 이것을 위해 만들어 둔 사각으로 칸이 나뉘어진 판에다가 저어낸 지방을 넣어 말렸다.
 칸마다 아래쪽에는 제주의 옛 이름인 동영(東瀛)이라는 한자 두 자가 마르면서 찍혀 나오도록 전각을 파 두었다. 처음부터 녹두를 넣어 향을 내고 상표라고 할 만한 것까지 찍어 팔 생각이었던 것이다.
 
 이레가 지나고 비누가 마루는 것을 지켜보던 오상복이 달려와 다 말라 쓸 수 있게 된 것 같다고 고하자, 세훈은 버선발로 달려 나가 비누의 상태를 보았다.
 비록 22세기에는 각종 효과 좋은 화학 세제에 밀려 아무도 쓰지 않는 원시적인 비누이건만, 여기서 이것을 보니 그렇게 반가울 수가 없었다.
 샤워는커녕 대충 멱 감는 것으로 만족해야 하는 15세기 초의 삶이 세훈은 도무지 적응이 되지 않았다. 상품으로서도 상품이지만 우선 자신부터 이 비누를 쓸 수 있다는 생각에 세훈은 들떴다.
 “오 서방, 자네 손 좀 줘 보게.”
 비누를 만들기 위해 세훈을 거들어 재를 가져다가 잿물을 게속 만들던 오상복의 손은 검댕이 잔뜩 묻어 얼룩덜룩했다. 세훈은 물을 한 동이 받아 오게 한 다음 오상복에게 비누를 쥐어 주며 말했다.
 “손을 물에 조금 적신 다음에 손에 쥔 비누를 힘차게 문질러 보게.”
 “어, 어, 이런 거품이 납니다요.”
 오상복은 정말로 깜짝 놀란 얼굴로 말했다. 생전 이런 괴상한 물건은 처음 본다는 표정이었다.
 “그 거품이 나야 때가 벗겨지는 것이네. 손에 검댕이 묻은 곳마다 힘 줘서 빡빡 문지른 다음에 물로 헹궈 보게나.”
 오상복은 고개를 끄덕이고서는 한참을 문지르더니 물에 손을 헹궈 보았다.
 그랬더니 그 검댕이 물에 다 씻겨 나가면서 깨끗한 손이 나오는 것이 아닌가. 거기에 손에는 기분 좋은 녹두향까지 나고 있었다.
 “어어? 이게 다 뭐답니까, 정말 기묘합니다. 손이 이렇게 쉽게 깨끗해집니까, 어째.”
 “그것 보세. 내가 쓸모 있는 물건이라 하지 않았는가. 하하! 어서 그걸 열댓 개만 추려 보도록 하게. 성주 어르신께 보여 드리고 물건을 팔 상담(商談)을 해 보야 하지 않겠나.”
 “예, 예. 여부가 있겠습니까? 하하!”
 오상복은 아직도 신기한지 녹두 냄새가 나는 손에 코를 가져다대고 킁킁거리며 비누를 주섬주섬 챙겨 세훈을 따라나섰다.
 “성주 어르신, 세훈입니다.”
 “어서 들어오게.”
 세훈을 맞이하는 고봉례의 얼굴에서는 웃음이 떠나지 않았다. 세훈이 장사를 잘해 준 덕분에 고봉례의 창고에는 쌀이 계속해서 쌓여 가고 있었다.
 처음에 그를 거둬 쓰기를 잘했다는 생각을 부쩍 하고 있던 차였다. 한 번 찾아올 때마다 쌀을 몇 백 석씩 가져오니 고봉례는 그저 세훈의 얼굴만 봐도 좋을 수밖에 없었다.
 “오늘 보여드릴 것이 있어 찾아뵈었나이다.”
 “우선 들어오게. 때마침 딸아이가 차를 달이고 있으니 함께 들도록 합세.”
 세훈은 웬 딸인가 싶어 의아했지만 이내 별로 개의치 않고 사랑방으로 따라 들어갔다.
 고봉례에게는 맏아들인 고상온(高尙溫) 외에도 여러 자녀가 있었는데, 그중에는 딸도 둘이 있었다. 그중 열여섯 된 둘째 딸 고상희(高尙喜)가 아버지의 예쁨을 독차지하고 그 수발을 모시고 있었는데, 아마 그녀가 차를 달이고 있다는 것일 터였다.
 “그래, 보여 주겠다는 것이 뭔가?”
 “비누라는 것이온데, 앞으로 제주의 산품 삼아서 팔아 볼 생각이나이다.”
 “비누라. 무엇하는데 쓰는 물건인고?”
 세훈에게 건네받은 비누를 이모저모 살펴본 고봉례는 도무지 알지 못하겠다는 표정이었다.
 네모나고 미끌거리는 덩어리에 동영이라는 두 자가 찍혀 있는 것 외에는 도무지 그 용도를 가늠할 수가 없었다.
 “사람이나 옷의 때를 벗기는 물건이나이다.”
 “이것으로? 어떻게 하는 것인가? 흠, 냄새는 좋구만.”
 오상복이 그랬던 것처럼 냄새가 신기한지 고봉례도 비누를 코에 가져다가 킁킁거리고 있었다. 때마침 딸 고상희가 차를 달여서 들어오길 청했다.
 “아버님. 손님과 함께 드실 차를 달여 왔나이다.”
 “그래, 어서 들어오거라.”
 문을 조심스레 열고 들어온 것은 묘령의 여자였다. 고봉례의 딸인 고상희가 틀림없었다. 크고 망울진 눈과 그림같이 휘어진 눈썹을 보니 재색을 겸비했다 소문난 것이 과장이 아닌 듯싶었다.
 세훈은 잠시간 그녀에게서 눈을 뗄 수 없었다. 열여섯이면 현대의 기준으로는 아직 미성년인 학생이지만 지금의 조선에서는 한창의 결혼 적령기였다. 그녀는 풋풋한 매력이 한창이었고, 키는 160cm가 넘어 보여 지금 시대의 기준으로는 큰 편이었으나, 22세기의 미적 기준을 가지고 있고, 그 자신의 키도 187cm에 가까운 세훈이 보기에는 전혀 크지 않은 키였다.
 세훈이 멀뚱히 자신을 보고 있는 것을 느끼자 고상희는 부끄러운 듯 얼굴을 새치름하게 붉히고서는 시선을 피했다. 그런 고상희의 모습을 보자 세훈은 잠시 장난기가 돌았다.
 “따님이 미인이시라는 소문을 들었사온대, 그 말이 허언이 아닌가 봅니다.”
 “그래, 그래. 내 딸이지만 참 참하긴 하지. 허허!”
 고봉례는 딸 칭찬에 얼굴에 화색이 돌며 껄껄 웃었다.
 제 자식 자랑하는데 좋아하지 않을 부모가 있으랴. 다만 고상희는 외간 남자의 미색 칭찬에 괜히 얼굴이 더 붉어져 고개를 푹 숙이고 있었다.
 세훈은 그 모습을 보고선 속으로 웃음을 삼키고는 놀림은 그만두고 찾아온 목적을 다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마침 따님이 오셨으니 물 한 동이 부탁드려도 되겠나이까?”
 “그래. 뭐 어려울 것이 있는가. 상희야, 손님께 물 한 동이 가져다 드려라.”
 “예, 알겠사옵니다.”
 고상희는 이내 밖으로 나가 물을 한 접시 받아 왔다.
 세훈은 그 접시를 고봉례에게 내밀어 아까 오상복에게 시켜 보았던 것처럼 한 번 사용해 보게 했다. 이내 고봉례와 고상희의 눈이 활짝 놀랐다. 특히 여자인 고상희는 그 진가를 알아본 모양이었다.
 “이게 정말 김 공께옵서 만드신 것입니까?”
 “예, 아가씨. 그렇나이다. 앞으로 제주에서 이것을 많이 만들어 육지에다 내다 팔 생각이나이다.”
 “아녀자들이 참으로 좋아할 물건 같사옵니다. 몸단장은 물론이거니와 빨래하는 데도 요긴하겠지요.”
 “앞으로 필요하신 대로 보내드릴 터이니 얼마든지 부탁하십시오.”
 고상희는 정말로 순순하게 감탄하고 있었다.
 얼굴을 발갛게 물들이며 좋아하는 그녀를 보니 왠지 모르게 세훈은 계면쩍어졌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고봉례는 짐짓 비누 때문이 아니라 다른 것 때문에 웃고 있었다. 고상희가 물러나고 나서 고봉례는 거두절미하고 세훈에게 이렇게 제안했다.
 “내 딸 어떤가? 색시감으로 부족하지 않은가 모르겠네.”
 한마디로 혼담을 제의하는 이야기였다.
 세훈이 살던 현대의 관념으로는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는 일이었지만, 고봉례의 입장에서는 마음에 들고 능력도 있는 청년을 자신의 아래에 잡아 두기 위해서 가장 유용한 수단을 제시한 것이다.
 때마침 고상희도 혼사를 치를 나이가 되었고 당시의 풍습대로 결혼은 나이가 차면 미루지 않는 것이 상례였다.
 원래 제주의 호족들 사이에는 서로 간의 혼사를 치르는 일이 빈번했고, 고봉례도 작년까지만 해도 양씨나 부씨, 아니면 문씨 집안으로 택일해 시집을 보낼 생각이었으나 세훈이 오고 난 뒤로 그 생각이 바뀐 것이다.
 “갑작스러운 이야기라······.”
 조금 당황스럽긴 했으나 세훈의 입장에서도 거절할 처지는 아니었다. 과거에 홀로 떨어진 뒤로 결혼 같은 것은 생각도 해 보지 않고 있었는데, 어쩌면 정착하기로 결심한 이상 언젠가는 치러야 할 관문이었다.
 어차피 연애혼이 힘든 시기이니 중매를 맺어 결혼하는 수밖에 없는데, 크게 신세를 지고 있는 고봉례가 직접 딸을 내어 주겠다 이야기하는 것이다.
 전적으로 몸을 맡기고 있는 처지라 거절하는 것은 결례일 뿐더러, 방금 본 고상희의 자태도 15세기의 조선 여자에게서 느끼기 힘든 현대적인 매력까지 느껴져서 마음이 이내 동했다.
 그러나 세훈은 잠시간의 유예를 뒀으면 하는 바람이었다. 적어도 고상희라는 여자에 대해서 조금은 알아야겠다는 생각이었다.
 “조금만 시간을 주십시오. 신변이 정리가 되는 대로 확답을 드리겠나이다. 거절코자 하는 말은 아니니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세훈의 말에 고봉례는 고개를 끄덕였다. 보면 볼수록 마음에 드는 사윗감이니, 이 정도 기다려 주는 것은 일도 아니었다.
 
 1400년 맹하(孟夏)
 조선국 전라도 제주목.
 
 멀리서 밀려오는 바닷바람에 곱게 흔들리던 버들잎이 때 아닌 소나기에 쓸려 갔다. 이내 얼마 지나지 않아 느릿한 구름이 한라산을 넘어 쏟아지듯 몰려왔다. 봄비였다. 스멀스멀 기어오르는 습기가 얼굴을 간질였다.
 세훈은 마루로 난 문을 닫고 아랫목에 누웠다. 방 안에는 정적 위로 비가 땅을 때리는 소리만 남았다. 조금 있으면 여름이 저 남쪽에서 너울거리며 밀려올 것이다. 이곳에 온 지도 어느덧 1년이 가까워져 가는 것이다.
 세훈은 이제는 돌아갈 수 없는 미래를 생각해 보았다. 이제 자신의 존재로 인해 역사가 달라지기 시작했으니, 그가 원래 있었던 22세기는 이제는 존재하지 않는 허상 같이만 느껴졌다. 돌아갈 수 없기에 이제는 홀로 있으면 그 생각이 더욱 간절했다.
 미래의 물건이라고 처음 남아 있었던 것은 세훈 자신이 입고 있던 우주복뿐이었다. 그나마도 고봉례의 아래에서 일을 하게 되면서 정리해 바다에 떠내려 보냈다. 그렇게 해류를 따라 떠다니다 보면 언젠가 그 질긴 우주복도 미래의 물건이란 것을 알아볼 수 없게 사라지고 말 것이다.
 사람이란 것이 얼마나 간사한 동물인가. 처음에는 낯선 세상에 떨어져 하나하나 마음에 들지 않고 도무지 살아 나갈 수 없을 것 같이 느껴졌지만, 운 좋게 고봉례를 만나 일을 시작하고 이곳의 생활이 적응되자 그냥저냥 지낼 만해진 것이다. 그러다 보니 슬슬 생존의 문제는 조금 뒤로 물러나고, 다른 생각들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굳이 그런 딴생각이 동한 원인을 따지자면, 비누를 바치러 고봉례의 집에 들어갔다 보게 된 그 여식이 문제긴 했다.
 그녀가 눈에 들어와 쉬 잊혀지지가 않았고, 거기에 고봉례가 혼사를 제안했으니 세훈은 도무지 그녀를 생각지 않을래야 안 할 수가 없었다.
 그녀는 부지런히 집안의 일을 돕고 있었다.
 본래 주인집 딸이니 규방(閨房)에서 물레나 돌려도 족할 일이었다. 그러나 그녀는 직접 마당으로 나서 몸이 좋지 않은 어머니를 대신해 집안의 대소사를 직접 챙기고 있었던 것이다. 하얗고 깨끗했을 손에 굳은살이 붙었지만, 그녀는 그런 것은 별로 아랑곳 않는 듯 보였다.
 굳은 제주의 바람을 아무리 맞아도 어딘가 모르게 청아하고 흔들림 없는 눈동자를 가진 예쁜 얼굴은 색을 바래지 않았다.
 괜스레 혼사 이야기가 오고 간 뒤로는 말 한 줄 붙여 보기가 되레 쑥스러운 일이었지만, 봄이 지나가기 전에 세훈은 어렵사리 그녀와 말을 텄다. 의외로 수줍음을 잘 타고 말이 없는 여자였다. 녹두향이 진한 머리카락이 바람이 불면 한 가닥 풀어져 나와 곱게 흔들렸다.
 세훈은 애써 말을 시키려 하진 않았다. 그냥 한 발짝 떨어져 앉아 그녀가 부엌에서 차려 나온 주안상 하나 객상 위에 걸쳐 놓고 바라보는 것으로도 충분히 만족스러웠다.
 혼자 물끄러미 보고 있다 가끔 고상희가 자신에게 시선을 줄 때면 왠지 모를 따뜻함에 마음이 편해졌다.
 “일전 주신 비누를 잘 사용하고 있나이다. 향이 좋아 몸을 단장하는데 쓰니 좋기만 합니다.”
 고상희도 세훈이 마음에 없지만은 않았다.
 괜스레 비누를 핑계 삼아 세훈에게 와서 말을 걸거나 좋은 술을 내다가 주안상을 차려 주거나, 이래저래 핑계 삼아 얼굴을 곱게 붉히고서는 부끄러운 듯 다가와 말을 건네는 것이었다.
 그녀도 아버지가 세훈을 사윗감으로 생각하고 있고, 세훈도 그것을 거절하지 않은 것을 들어서 알고 있는 터라 내심 남편감으로 생각하고 나니 괜히 한 번 더 눈이 가고, 좋아하는 마음이 생겨 옆에 자꾸 붙어만 있고 싶었던 것이다.
 그렇게 둘의 연애 아닌 연애에 서로 간의 생각하는 마음은 점차 깊어져 갔다. 더 이상 고봉례의 제안을 미뤄 둘 수도 없고 고상희를 생각하는 마음이 이제는 진실된 것이라고 느껴지자 세훈은 더 이상 혼례를 미루지 않기로 했다.
 그래도 청혼만큼은 스스로 할 생각이었다. 가문의 이름을 빌어 중매혼을 하게 된 것이 아니라 서로 간에 사랑해서 이뤄지게 된 것이라고 생각하고 싶은 터였다.
 세훈은 늦은 밤, 몰래 월장(越牆)해 고상희가 지내는 규방의 마루에 걸터앉아 나지막한 목소리로 그녀를 불렀다. 고상희는 그를 보고서는 깜짝 놀라서 새된 목소리로 다그쳤다.
 “어쩌자고 이 야심한 밤에 이리 넘어오셨습니까?”
 아무리 혼사를 치르기로 약조된 사이지만 남이 보면 구설수에 오를 수 있는 일이었다. 그러나 세훈은 능글맞게 웃으며 대답했다.
 “그대를 생각하니 도무지 잠이 오질 않아서 말이오. 내 꼭 그대에게 전하고 싶은 마음이 있어 이렇게 찾아오고야 말았소.”
 “무슨 말씀이시기에······.”
 세훈의 말에 짐작이 가는지 고상희가 약간 기대하는 듯 떨리는 목소리로 되물었다.
 세훈은 말없이 웃음을 지어 보이고서는 안 입는 속치마와 지필묵을 내어달라 청했다.
 고상희가 부끄러운 듯 그것을 내오자 세훈은 주저 하지 않고 칼로 팔을 따 피를 내어 벼루에 풀어냈다. 핏물이 발갛게 물을 타고 번지자 달빛을 등잔 삼아 그는 시 한 구절을 적었다.
 
 蘇州滿月夜 소주에 만월이 걸린 밤에
 소주만월야
 春花落長江 봄 꽃은 장강에 떨어지고
 춘화락장강
 心愰於汝項 마음은 네 목덜미에서 들뜬다.
 심황어여항
 薄鏡映戀糖 엷은 거울은 사랑의 달콤함을 비추누나
 박경영연당
 
 “내 마음이 이러하오. 집안에서 중신을 세워서가 아니라 내가 그대를 생각하는 것을 꼭 직접 전하고 싶었소. 나와 결혼해 주시오.”
 속치마를 건네받은 고상희는 그저 수줍게 웃을 따름이었다.
 그녀는 한서(漢書)를 읽을 줄 알았지만 그 뜻을 알고도 말할 수가 없었다. 부끄러웠기 때문이다. 게다가 청혼이라니, 직접 받게 될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한 터에 가슴이 뛰었다.
 세훈은 그녀의 귓가에 시의 뜻을 속삭여 주었다. 한시를 짓기에는 부족한 실력이나마 밤을 세워 가며 궁리한 시구였다. 자신의 숨결이 얄밉게 그녀의 귓가를 간질이고 있는 것이 세훈에게도 느껴졌다.
 이렇게 두 사람이 마음을 확인하고, 고봉례에게 중신을 받아들일 것을 말해 결정이 내려지자 그 다음은 일사천리였다. 4월이 되어 여름이 시작일 때 길일을 잡아 김세훈과 고상희의 혼례가 치러졌다.
 신방은 김세훈이 고봉례의 집으로 들어오는 것으로 결정하고 데릴사위처럼 들어와 살게 되었다. 명실상부하게 제주의 거족(巨族)인 고씨 가문의 일원이 된 것이다.
 세훈은 고봉례 한 사람의 은덕이 아니었다면 이렇게 될 수 없었기에 그저 감사할 따름이었다. 혈혈단신인 그에게 가족을 만들어 주고 물심양면으로 지원해 준 것이다.
 가족을 꾸리고 나니 다른 일도 술술 잘 풀리기 시작했다.
 여름 들어 처음 육지에 내다 팔기 시작한 비누는 입소문을 타기 시작해 기생들과 양반가를 위주로 크게 팔리기 시작했고, 좀 더 지방을 많이 얻기 위해 염소를 많이 들여와서 한라산 중턱에 목장을 만들고 키우기 시작했다. 부수적으로 염소 젖을 짜다가 제주 민간에 돌려 먹이기도 했는데, 염소젖은 소젖보다 영양분이 많고 어린아이들의 발육을 돕는데도 좋았다.
 다만 동양인은 선천적으로 나이가 들면 유당 분해 효소가 유전적으로 나오지 않아 유당을 많이 섭취하게 되면 설사가 나오고 흡수를 하지 못하게 되는데, 예전에 몽골인이 들어와 있을 때의 영향으로 제주도 사람들의 유당 섭취는 괜찮을 정도였다.
 어느 정도 제주 특산품과 비누의 판매가 안정기에 접어들자 세훈은 다른 것을 계획했다.
 바로 라이터였다. 처음에는 성냥을 생각해 보았지만 지금 기술로는 원료가 되는 염소산칼륨을 전기 분해로 얻어내는 것은 언감생심이었다.
 오히려 라이터가 더욱 어려울 것 같지만, 사실상에 소요되는 기술력은 오히려 이쪽이 경제성이 있었다.
 1400년인 지금으로부터 먼 이야기지만 22세기에서 보았을 때 큰 기술적 차이가 없는 1772년의 일본에서도 히라가 겐나이(平賀源內)가 기초적인 라이터를 발명했었다. 부싯돌에 용수철을 건 다음 작은 망치를 부딪쳐 점화하는, 약쑥을 연료로 사용한 것이었다.
 플린트록[燧石] 방식 총의 점화 기구와 유사한 것이다. 이 기술력만 확보하면 다음에는 1600년대 초가 되어야 등장하는 플린트록 방식 총을 제조할 기술을 확보하는 것도 무리가 아니었다.
 이제 막 명나라에서 화승총 기술이 등장하고 유럽에서는 아직 실용화되지도 않은 점을 감안할 때 그보다 한 단계 앞선 플린트록 방식의 총을 대중화시킬 수 있다는 것은 큰 유혹이었다.
 총이 전장식이라는 점에서는 화승총이랑 다를 것이 없지만, 화승에 불을 당겨 점화되기를 기다리는 것에 비해 플린트록 방식은 설치한 격철이 방아쇠에 의해 작동되고 부싯돌이 이에 따라 철과 스쳐 불꽃을 발한다. 동시에 그 충격으로 약실 뚜껑이 열리지만 용수철에 의해 순간적으로 그 뚜껑이 닫혀져 약실 내에서 불꽃이 갇혀 점화되는 구조였다. 상대적으로 화약의 손실이 적고 우천시에도 활용할 수 있는 장점이 있는 총이었다.
 그러나 다른 것보다 이 라이터와 총을 만드는데 가장 중요한 기술적 난제는 용수철이었다. 코일 형태의 용수철을 만들기 위해서는 강철이 필요했는데, 지금 이곳의 제련술로 쓸 만한 강철을 얻어낸다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었다.
 17세기에 이르러서야 철광석과 숯, 그리고 공기를 용광로 안에서 섞어 선철을 뽑아내는 기술이 개발된 것이다.
 현대에서야 숯 대신 코크스를 사용하긴 하지만, 이 제주라는 한정된 섬에서 코크스를 구한다는 것은 무리였고, 비교적 초기 방식대로 철광석과 숯 그리고 공기를 사용하는 방식은 시도해 볼 만했다.
 문제는 철광석의 수매였다. 제주도는 화산지형이라 철광석을 구할 수가 없었으니 천상 밖에서 들여오는 수밖에 없었다.
 세훈은 비누를 판 대금을 모두 철광석으로 바꾸는데 투자하여 철광석을 대량 확보하는데 성공할 수 있었다. 조선의 국가권력이 성장한 시기라면 말도 안 될 일이었지만, 정종이 한성에서 송도로 다시 재환도한 뒤의 정세는 어지럽기 짝이 없어서 소위 방간의 난이라 불리는 제2왕자의난이 일어나 방간과 방원이 서로 왕위 계승을 놓고 다투는 골육상쟁의 난중이었던 것이다.
 이런 시대의 어지러움을 이용해 세훈은 철광석을 매수해서 제주도로 무사히 가져올 수 있었다. 세훈은 필요한 재료가 확보되자 오상복에게 상단의 운영을 맡기고서는 철강을 우선적으로 개발하기로 했다. 철강이 개발되면 용수철을 만들 수 있고, 그 다음은 라이터와 플린트식 소총의 개발이 가능했다. 세훈은 가급적이면 빠른 시일 내에 이것을 마무리 지을 생각이었다.
 해안가 한적한 곳에 고로를 만들어 놓고 연일 실험을 거듭하는 세훈을 둘러싼 주위 사람들은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특히 고봉례는 독수공방하는 딸을 보니 사위가 그렇게 야속할 수 없었다. 장사야 세훈에게서 배운 오상복이 의외로 상재가 있어 어떻게 굴러 가고는 있지만, 뭔가 만들어 보려는 의지에 비해서 진척이 안 나니 세훈 본인은 물론이거니와 주위 사람들도 답답하긴 마찬가지였다.
 그사이에 송도에서는 방원이 방간을 누르고 권력을 탈취하여 왕세제(王世弟)의 자리에 올라 이내 상왕의 둘째 아들이자 지금 왕위에 올라 있는 방과로부터 왕위를 양위받게 되었다는 이야기가 공공연히 떠돌고 있었다.
 배다른 형제를 척살코자 왕자들이 난을 벌인 지가 몇 년 되지 않아, 한 때 같은 편에 섰던 왕자들끼리 다시 왕위를 놓고 골육상쟁을 하는 것에 좋은 이야기가 따라붙을 수 없는 노릇이었다.
 그러나 먼 곳에서는 어떤 일이 일어나든 중앙의 관심으로부터 한참은 벗어난 이 남해의 외딴 섬에서는 앞으로 세계의 역사를 뒤집을 중요한 발견들이 속속히 진행되고 있었다. 모두 실제보다 100여 년에서 300여 년은 빠른 기술들이었다.
 여러 번의 실패 끝에 세훈은 가을걷이가 끝날 무렵 결국 고로를 완성해 선철을 얻어낼 수 있었다. 이것을 잘 제련하면 강철이 되는 것이었다.
 임시 고로에서 만들어낸 강철로 도검을 지어다 고봉례에게 갖다 바치니 고봉례의 입이 헤벌죽 벌어질 수밖에 없었다. 모두 철이 귀한 탐라에서는 탐도 못내 볼 훌륭한 도검이었다.
 고봉례는 이내 근심을 잊고 사위를 독려해 정의읍에서 바다 가까운 곳에 제철소를 짓는 것을 도와주었다.
 제철소래야 현대적 규모는 물론이고 19세기의 것들과 비교해 봐도 원시적이고 소규모에 불과했지만, 1400년의 미명 속에서는 세계에서 유래를 찾아볼 수 없는 시설이었다.
 기와로 30칸에 가까운 규모의 공방들이 사방으로 둘러싼 형태에 중심부에는 사람 키의 네 배만한 높이의 고로 네 개가 세워졌다.
 “이거 참 거대하구만. 사위 자네의 기술이 참으로 용하이.”
 “여기서 뽑아져 나오는 강철들이 장인어른과 제주의 부를 늘려 줄 보물들이나이다.”
 “그렇네. 그렇지.”
 세훈의 말은 허언(虛言)이 아니었다.
 고봉례가 보기에 자신의 사위는 절대 실언을 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공장을 돌리고 개발을 계속하려면, 특히 철광을 수매하려면 돈벌이를 늘려야 했고 제주 안의 대장장이란 대장장이들은 다 모아서 도검을 만들고 철괴를 주조하게 만들었다.
 이것은 그대로 개경으로 보내져 송상(松商)을 통해 전국으로 팔려 나갔고, 특히 강철도검은 비누와 함께 기존의 제주 특산품들을 제치고서 개경 수창궁에서 이방원이 왕위에 오르는 즉위식에 보내졌다.
 고봉례는 특별히 그 아들인 고상온을 데리고 상경하여 성주자리를 아들에게 습작(襲爵)할 것을 허락받고 제주에서 강철을 계속 생산할 수 있도록 전라, 경상 양도에서 철광석을 수매할 수 있는 권리를 받아 왔다.
 기존 역사에서 공마(貢馬)며 말고기나 바치고 2년 뒤에는 스스로 성주의 자리를 폐하길 요청하는 것에 비하면 제주에서 중앙에 행사하는 영향력은 세훈이 온 뒤로 많이 달라져 있었다.
 해가 넘어가 이듬해가 되자 세훈은 용수철을 개발하는 데도 성공했다.
 이쯤 되자 혼자서 일을 전부 추진하기엔 힘이 벅차 대장장이들을 교육시켜 가며 일을 하고 있었는데, 그중에서도 부석소(夫石所)와 정탄(鄭坦)이라는 두 대장장이가 기술이 좋고 나이도 젊어 세훈의 양팔 노릇을 하게 되었다.
 특히 부석소는 용수철을 개발하는 데에 진력을 다하고 있었고, 정탄은 총기와 라이터를 만들 제련 기술 확보에 진력하고 있었다.
 그 부석소가 용수철을 만드는 데에 성공한 것이다. 대충 용수철이 완성되고 나자 약쑥을 연료로 하는 라이터도 곧 발명되었다. 세훈은 기름 라이터를 만드는 것은 합금 기술이 부족해 시도하지 못하고 있지만, 제련 기술이 좀 더 안정화되는 대로 시도해 볼 생각이었다.
 하지만 역시 산에서 구하기 쉬운 약쑥을 연료로 하는 것은 경제성 면에서도 좋은 노릇이었다.
 아직 신대륙에서 담배가 들어오기 전이라 판로는 생각만큼 크지는 않았지만, 불은 사람 사는 곳에서는 늘 사용되는 것이므로 호응은 좋았다.
 발화기(發火器)라 이름 붙인 라이터는 이내 비누, 강철, 말, 해산물과 함께 제주의 5대 산품으로 자리 잡게 되었다.
 이것은 혁신에 가까웠는데, 제주는 물론이고 조선 전역에서 특산품이라는 것은 자연물이거나 혹은 수공업에 가까운 물건들이었는데 5대 산품 중 비누, 강철, 발화기는 공장제공업으로 진입하는 신호탄에 가까운 것이었다.
 물론 그것은 아주 초보적이고 이 시대의 유럽에서는 도시를 중심으로 이미 자리를 잡은 길드공업에 비해서도 소규모였으나 생산해 내는 물품만큼은 이미 기술력에서 한참 앞서 있는 제품들이었다.
 
 1401년은 세훈에게는 특별히 기억할 만한 해였다. 강철과 비누, 발화기의 생산을 안정화시켰을 뿐더러 작년에 혼사를 치른 고상희에게서 득남을 한 것이다. 세훈은 자신이 기술을 개발한답시고 밖에서 도는 동안 혼자 어린 나이에 애를 배어 고생했을 아내를 생각하니 그저 미안할 따름이었다.
 “서방님도 참 야속하십니다. 이렇게 아내를 돌보지 않으십니까?”
 고상희는 총명하고 재기 넘치는 여자였지만, 아직 어렸고 산고(産苦)까지 겪은 뒤로 전에 없던 투정을 세훈에게 했다.
 “미안하오. 맡은 바 일이 있다 보니 그대에게 소홀했구려. 정말 미안하게 됐소.”
 “일전 치마폭에 적어 주신 시에 담긴 마음은 다 어디로 가고 밖으로만 다니시는지요.”
 고상희가 뾰로통한 표정을 지으며 말하자 세훈은 그저 난처한 웃음만 흘릴 수밖에 없었다. 세훈은 아내를 꼭 껴안아 주며 그 등을 도닥였다.
 “내 당분간 그대와 아이를 보며 집에 머무리다.”
 세훈은 결국 세 달여간 집에 붙잡혀서 꼼짝하지 않고 아내와 아들을 보는 것으로 만족하며 지냈다.
 아들의 이름은 장인 고봉례에게 직접 받아 현도(賢道)라고 지음했는데, 세훈은 그럭저럭 마음에 들게 생각했다.
 세훈이 집에서 여우같은 마누라와 토끼 같은 자식에게 꼼짝없이 붙잡혀 있는 동안에도 플린트록식 소총의 개발은 조금씩이나마 진도가 나가고 있었는데, 이론상의 문제는 세훈이 제시해 준 대로 문제가 없었지만 기존 설계에 강선을 도입한 문제가 대두되었다.
 세훈은 처음에 총열에 강선을 넣어 볼 것을 지시했지만 지금의 제련 기술로 깔끔하게 파는 데는 많은 수고가 들어가 제작 단가가 올라갔고, 기술력의 부족으로 발사 속도가 늦어지고, 총알을 담는 것이 수고로워지는 등 많은 문제가 뒤따랐다.
 이것은 원래 역사에서 100년 뒤쯤 오스트리아 빈의 야스파르트 졸러(Jaspard Zoller)가 개발하고 무구사(武具師)인 아우구스트 코터(August Kotter)가 개량을 시도했을 때도 똑같이 부딪힌 문제였다. 세훈은 결국 강선을 넣는 것은 포기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 다음 부딪힌 문제는 화약의 대량 확보였다. 국가에서는 최무선이 화약을 조제하는데 성공한 이래 화기도감 이외에서 화약을 생산하는 것을 일체 금하고 있었는데, 이것을 몰래 만드는 것은 많은 노고가 따르고 위험한 일이었다.
 그러나 지금처럼 중앙의 시선에서 벗어나 있는 제주라면 가능했다. 문제는 고봉례를 설득하는 일이었다.
 “화약은 무엇 때문에 제조하려 하는가? 금상께서 불안정한 권력을 단속하기 위해 다시 도읍을 한양으로 옮기고 지금 지방에 대한 숙군(肅軍) 작업을 하고 계시네. 아무리 이곳 제주라지만 사병을 길렀다가 크게 당하는 수가 있어.”
 고봉례는 여태까지 사위가 하는 일에 가타부타 말없이 그저 묵묵히 지원을 아끼지 않아 왔으나 화약과 총기에 관한 문제만큼은 민감했다.
 팔 수도 없는 것인데 왜 만들려 하냐는 것이다. 괜히 그런 것을 확보해서 가지고 있다가 중앙에서 크게 의심받는 순간, 대대로 누려 오던 토관(土官)의 지위도 잃고 심하면 역도로 몰릴까 싶어 노심초사한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세훈에게 있어서는 반드시 넘어야 하는 벽이었다.
 세훈은 이제 군사력을 길러 탐라의 독립성을 강화시킬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우선적으로 소총이 양산되어 부대화(部隊化)시키는 데만 성공하면 지금 조선의 능력으로는 바다를 건너 제주에 산재한 소총수들을 토벌할 수 없었다. 그러려면 일은 빨리 진행되어야 했다.
 이방원의 왕위가 안정되고 지방으로 눈을 돌려 제주목에 관리를 파견하겠다고 나오면 그때부터는 일이 차질을 빚을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우선 중앙에 대한 공포심 절반 경외심 절반으로 억눌린 고봉례를 다른 방법으로 설득해야 했다.
 “중앙에 반역하고자 함이 아니라 왜구의 침략을 막기 위한 것이라 잘 설명하면 되나이다. 작년과 올해까지는 아직 왜구의 준동이 없었으나, 국가에서 병력을 파유해 줄 수 있는 내륙과는 달리 이곳 제주는 먼 곳에 떨어진 섬이라 스스로 힘이 없으면 왜구의 준동에 도모당하기 쉬운 일이 아니겠나이까.”
 “그야, 그렇지만······.”
 결국 설득에 힘입어 고봉례는 몰래 화약과 총을 제조하는 것을 묵인할 수밖에 없었다. 고봉례 스스로도 바다 바깥의 조정에 굴종하는 것이 꼭 능사만은 아니라고 여겼지만, 제주 스스로 힘을 기른다는 것은 생각해 본 적이 없었기에 결심이 더뎠었다. 게다가 고봉례가 이렇게 생각하는 데에는 이력이 있었다.
 고봉례의 아버지는 고신걸(高臣傑)로, 1369년에 문과에 급제하고 제주로 내려와 서도부천호(西道副千戶)의 벼슬을 지낸 사람이었다.
 1374년에는 탐라에서 목호(牧胡), 즉 원나라가 철수한 뒤 남아 있던 말 기르는 몽골인들이 일으킨 반란을 최영(崔瑩)이 바다를 건너와 진압했으나, 이듬해에 토착민인 차현유(車玄有)가 마적(馬賊)의 무리를 이끌고 관아를 불태우고 제주안무사 임완(林完)과 제주목사 박윤청(朴允淸) 및 마축사(馬畜使) 김계생(金桂生) 등을 살해하는 반란을 일으켰다.
 이 반란은 최영의 목호의 난 평정 때 살아남은 잔존 세력까지 합세하여 반고려, 반명의 성격을 띠면서 더욱 확대되어 갔다. 이때 고신걸이 왕자 문신보(文臣輔)와 진무(鎭撫) 임언(林彦) 및 천호(千戶) 고덕우(高德羽) 등과 함께 반란을 진압했다.
 그 이듬해에는 왜구 600여 척이 침입해 오자 적의 화살에 맞았음에도 불구하고 고신걸이 적을 대파하였다. 고려 조정은 이를 가상히 여겨 호조전서에 임명하고 홍정(紅鞓)과 표리(表裏) 및 술 등의 하사품을 내렸다.
 고신걸은 1384년 탐라 성주가 되었으며, 1387년에는 아들 고봉례를 데리고 우왕을 알현했었다.
 고봉례는 자라 오면서 아버지의 이러한 고려 왕조에 대한 속신(贖身)과 반란의 진압을 쭉 봐 오면서 자라났는데, 때문에 고봉례는 육지 왕실의 무력시위에 민감한 편이었다.
 그러나 탐라 왕족의 후손으로서 제주 스스로 힘을 기르고자 하는 의지는 마음속 깊은 곳에 있었고, 결국 세훈이 그곳에 불을 지르는 데에 성공한 것이다.
 결국 사위의 간곡한 청에 마음을 돌린 고봉례는 동생인 고봉지(高鳳智)를 불러다가 세훈의 일을 단속하고 뒤에서 도와주도록 했다.
 고봉지는 곧 세훈의 든든한 아군이 되어 주었는데, 고봉지는 원래부터 새로운 것에 관심이 많은 사람이었기 때문에 세훈이 하는 일에 큰 흥미를 가지고 거들기 시작한 것이다.
 덕분에 일은 꽤나 속도가 붙어 고봉지가 구해 온 황, 초석, 숯으로 화약을 배합해 흑색 화약을 만들어내고 때마침 완성된 플린트록식 소총으로 시험 발사를 할 수 있었다.
 정의읍 제련소 근처의 들판에서 이루어진 시험 사격은 성공적이었고, 세훈은 여기에다가 보총(步銃)이라는 간단한 이름을 붙였다.
 “아!”
 세훈은 고봉지, 부석소, 정탄 등과 함께 고봉례를 찾아가 보총 5정으로 사격 시범을 보여 주었는데 300보 앞의 표적지를 거침없이 꿰뚫는 파괴력을 보고 고봉례는 놀라서 그저 감탄성만 흘릴 뿐이었다.
 “사위가 정말 수고해 주었네. 몇 정까지 만들어낼 수 있겠는가?”
 “인력만 조금 붙여 주셔서 숙달이 되면 하루에 다섯 정은 가능하나이다. 이참에 제주 성내(城內)로 시설을 옮겨 와 직접 가까이 두고 감독하여 만들고자 하나이다.”
 “그러나 성내는 외지인의 발길이 가장 닿는 곳인데 괜찮겠는가?”
 “어차피 낮에 하는 일은 새가 보고 밤에 하는 말은 쥐가 듣나이다. 언젠가는 알려질 것, 그전에 힘을 길러 두는 것이 가장 우선책이라 생각하나이다.”
 결국 고봉례는 고개를 끄덕이는 수밖에 없었다. 고봉례는 세훈의 지위를 올려 도내(都內)로 하고, 위치상 성주인 그와 왕자(王子) 다음에 오게 했다.
 이미 제주의 산품을 독점하고 바깥과 거래해 섬을 풍족하게 만들고 있는 세훈이 그런 지위를 지니는 것에서 불만을 가지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우선적으로 계획했던 것이 완료되자 세훈은 고봉례에게 허락받은 대로 우선 제주 성내에 그동안 비누와 강철 그리고 발화기를 팔아 모은 재산을 전부 털어 정의읍에 있던 제철소를 철수해 가져온 것을 더욱 크게 지어 동영고로(東瀛高爐)라 이름 지어 세우고, 그 아래에 제련소(製鍊所)와 제총소(製銃所)를 둬서 강철과 총, 도, 검의 무기 생산을 관장하게 했다.
 그리고 그 옆에는 화학소(化學所)을 설치해서 대외적으로는 비누의 생산을 그리고 내부적으로는 화약의 생산 및 개량을 맡겨 두었다.
 고로 전체는 도내의 지위 아래에 두고 제련소에 부석소를, 제총소에 정탄을 책임자로 보내고, 화학소에는 그간 비누를 열심히 판 오상복을 책임자로 보냈다.
 그러나 화학소는 대외적인 책임자인 오상복과 별도로 화학의 제조를 진두지휘하는 별감천호(別監千戶)의 자리가 만들어졌는데, 세훈을 조카사위로 두고 그간 화약의 제조에 깊숙이 개입해 왔던 고봉지가 그 자리를 수임했다.
 1401년, 명 건문 2년, 조선반도의 저 외딴 남쪽의 섬에서 새로운 시대를 열 초석이 다져지고 있었다.
 
 
 
 제2장―왜구내습(倭寇來襲)
 
 
 「일본국(日本國) 대마도(對馬島) 도총관(都摠管) 종정무(宗貞茂)가 사자를 보내어 방물(方物)과 말 9필을 바쳤다. 그 글은 이러하였다.
 “배신(陪臣) 형부 시랑(刑部侍郞) 종정무(宗貞茂)는 정승(政丞) 각하(閣下)에게 삼가 글을 올립니다. 오래도록 덕화(德化)를 앙모하였으나 첨배(瞻拜)할 길이 없었습니다. 50년 전에 우리 할아비가 일찍이 이 땅의 장관(長官)이 되었는데, 말하기를, ‘감히 귀국의 큰 은혜를 저버릴 뜻이 없다.’고 하였습니다. 그 뒤에 관차(官差) 오십과 혹리(酷吏)로서 탐욕스런 마음을 방자히 하여 좌우(左右)에서 죄를 얻은 자가 어찌 부월(斧鉞)의 베임을 면하였겠습니까? 이러한 무리들이 지난해에 하나도 남김없이 죽었으니 하늘이 패망하게 한 것입니다. 이제 불초(不肖)로써 할아비의 직책을 맡기었으므로, 이에 저의 역량을 헤아리지 못하고 외람되이 정성을 바칩니다. 대개 관서(關西)의 강한 신하들이 조정의 명령을 거역하고, 함부로 날뛰는 군사를 써서 침략함이 극심하였습니다. 바다와 육지에 관(官)의 법(法)이 미치지 못하여 변방 백성들이 해마다 마음대로 적선(賊船)을 놓아 귀국(貴國) 연해(沿海)의 남녀를 노략질하고, 불사(佛寺)와 인가(人家)를 불태웠습니다. 이것은 국조(國朝)에서 시킨 것이 아닙니다. 지금은 국토가 통일되어 바다와 육지가 평온하고 조용하여, 조정의 명령으로 엄하게 금하고, 인민들이 법을 두려워합니다. 금후로는 귀국 사람의 배가 거리낌 없이 내왕하고, 연해의 사찰과 인가가 전처럼 아무 탈 없이 경영하게 되는 것이 배신의 마음으로 원하는 바입니다. 하늘의 해가 밝으니 감히 식언(食言)하지는 못합니다. 삼가 단충(丹衷)을 다하고, 우러러 불쌍히 여기심을 바랍니다.”
 ○日本國對馬島都摠管宗貞茂遣使來獻方物及馬六匹. 其書曰:
 陪臣刑部侍郞宗貞茂拜書政丞閣下. 久仰德化, 無由瞻拜. 五十年前, 吾祖曾爲此地之宰, 曰: “不敢有負貴國鴻恩之意.” 爾後官差酷吏, 專縱貪婪之心, 獲罪於左右者, 豈免鈇鉞之誅乎? 此輩去歲, 曾無噍類, 天敗之也. 今以不肖, 補祖之職, 玆者不揣己量, 叨濫納款. 蓋以關西强臣, 拒朝命, 用縱橫之兵, 侵掠旁午. 海陸無官法, 邊民每歲, 縱放賊船, 虜掠貴國沿海男女, 燒殘佛寺人屋, 此非國朝所使也. 今則國土一統, 海陸平靜, 朝命嚴禁, 人民懼法. 今後貴國人船, 來往無礙, 沿海寺宇人家, 依舊經營, 則陪臣心願也. 天日明矣, 不敢食言. 謹罄丹衷, 仰冀憐.」
 ―정종실록 제1권 1년 7월 1일
 
 
 
 1402년 계춘(季春)
 조선국 전라도 제주도호부.
 
 “집총!”
 “집총!”
 “견착!”
 “견착!”
 “목표를 향해 조준!”
 “조준!”
 “발사!”
 타다다다다당!
 1402년 봄. 제주성 밖의 한산한 들 위에서 때 아닌 사격 훈련이 진행되고 있었다.
 작년부터 꾸준히 생산하기 시작한 보총은 어느덧 천여 정 가까이 생산되었고, 이에 맞추어 제주 각지에서 장정을 모아 사병을 편성하고 훈련을 시키기 시작한 것이다.
 겨울부터 보충되기 시작한 인원은 봄이 되자 2천 명에 육박했는데, 인구 5만의 작은 섬인 제주에서 2천 명의 군세는 위용스러운 것이었다.
 그중 천 명은 보병으로 총을 중심으로 훈련받았고 나머지 천 명은 제각기 기병과 창병, 궁병으로 나뉘어 훈련받았다.
 그러나 기병과 창병, 궁병도 장기적으로는 보조 무기로 총을 활용할 수 있게 훈련을 시킬 예정이었는데, 그것은 총의 생산이 이루어진 다음으로 우선은 미루어지게 되었다.
 고봉례는 요즘 그 병사들의 훈련을 자주 보러 나왔는데, 그 훈련 광경을 볼 때마다 마음이 흡족하기 짝이 없었다. 최근 자주 올려 보낸 진상품이 흡족해서인지 한양의 임금은 아예 제주목을 도호부로 승격시키고 고봉례를 도호부사에 임했다.
 원래 자기 출신 지역에 부임하지 못하게 하는 조선조의 관리 임관 방침으로 볼 때 변방 중의 변방인 제주의 특수성을 감안했을 때도 이것은 전례 없는 파격적인 대우에 다름없었다.
 물론 이 도호부사라는 자리가 세습직이 아니고 언제든지 임금의 명에 의해 바깥 사람이 들어와 앉을 수도 있는 것이었지만 이제 제주도는 우선적으로는 고봉례의 손에 있는 것이나 다름없게 되었다.
 제주가 도호부로 승격되면서 기존의 좌도천호와 우도천호가 폐지되고 대정군, 정의군의 두 군이 도호부 아래에 설치되어 이른바 제주삼읍(濟州三邑)을 이루게 되었다.
 대정군수에는 왕자(王子) 문충세, 그리고 정의군수에는 도내 김세훈이 임명되었는데, 이로서 제주도의 시정은 모두 현지 호족들에게 돌아온 것이다.
 도호부사라는 자리는 병권(兵權)을 함께 지닌 자리였고, 따라서 합법적으로 제재 없이 병력을 육성할 수 있게 되었다. 이로서 마음의 짐을 덜고 나니 날이 갈수록 강맹해지는 총병(銃兵)들이 그렇게 마음에 찰 수가 없는 것이었다.
 “사위, 덕분에 이런 광경도 보는구려.”
 “갈수록 강맹해질 군세입니다. 밖에서 들어오는 왜적이며 안에서 준동할지 모르는 호적(胡狄)들 또한 이로서 단단히 방비가 될 것이나이다.”
 “음, 그럼, 그렇고말고.”
 고봉례는 그저 감탄을 거듭했다. 사위의 지혜는 보면 볼수록 현묘하기 짝이 없었다. 한시(漢詩)도 짓고 글도 쓰는 것을 보면 영락없는 선비인데, 말을 타고 칼을 휘두르는 것을 보면 장군에 다름없었다. 그러나 그보다 놀라운 것은 기기묘묘한 물건이며 무기를 고안해 내는 것이었다.
 “그나저나 직제(職制)는 어찌한다 했는가?”
 직제라는 것은 새로운 특성의 군세를 대내적으로 통괄하기 위해서 조선의 무관직과 별도로 사용하도록 준비시킨 것이었다. 이것 또한 세훈의 제안으로 시작된 일인데, 세훈은 간단히 총병대(銃兵隊)와 정병대(精兵隊)로 만들어 이 두 대를 도호부사가 직접 총괄하게 하고, 그 아래에 총감(摠監)을 두어 세훈 스스로가 맡았다.
 이 총감 아래에는 총병대장과 정병대장이 있었는데, 총병대장은 고봉례의 동생인 고봉지가, 정병대장은 대정군수이자 왕자의 지위인 문충세가 맡았다.
 그 아래로 천부장, 백부장, 십부장을 두어 병력이 효율적으로 통솔되도록 만들었다. 세훈은 처음에는 근대군의 계급 제도를 도입하려고 했으나 어디까지나 지방군에 지나지 않는 정체불명의 군대에는 간단한 제도가 오히려 효율적일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훈련만큼은 20세기 군대에 버금가게 시켰는데, 일반 사병을 훈련시키기 전에 먼저 백부장과 십부장을 인선(人選)하여 세훈이 직접 대한민국 육군 훈련소 방식대로 교육 일정을 짜서 굴렸다.
 그렇게 두 달간 교육받은 백부장과 십부장들은 이제 훈련병들을 대상으로 훌륭한 훈련을 시킬 수 있는 뛰어난 조교로 거듭났다.
 특히 세훈의 목숨을 구해 준 양노인의 손자 양은계(梁殷啓)는 처음 십부장으로 인선되었으나, 그 기량이 출중해서 결국 훈련을 마칠 때는 천부장으로 승진시켜 내보냈다.
 “이상으로 총병 훈련을 모두 마치겠습니다. 필승!”
 훈련이 끝난 듯 총 소리가 멎자 병력이 모두 정렬하고 총병대의 제1천부장인 양은계가 최선임자로서 앞으로 나와 보고를 마쳤다.
 조선군에게 경례와 그에 붙이는 구호는 모두 생소한 것이었지만, 역시 양은계는 잘해 주었다. 그저 고봉례는 흡족해했지만, 세훈은 한 가지 성에 안 차는 부분이 있었다. 그것은 바로 병사들의 복장이었다.
 일반 병사들은 그저 전립에 남의를 걸친 복장이었고 십부장이래 봐야 거기에 엄심갑을 두른 정도였다. 백부장부터는 두정갑을 착용하고 있으나 앞으로 총기를 주로 다루게 될 병사들에게는 어울리지 않는 복장이라고 세훈은 생각했다.
 보다 효율적이고 앞으로 다가올 화약전 시대에 어울릴 근대식 군복을 마련해 줘야겠다고 생각했다.
 통일된 외관을 갖추고 제식훈련을 병행하면 보다 제대로 된 근대군이 탄생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방직(紡織)이었다. 이 군복을 잣는 데는 면만한 것이 없었는데, 목화가 고려말에 원나라로부터 들어오긴 했으나 아직 크게 보급되지는 못한 상황이었다. 그렇다고 아쉬운 대로 기존에 쓰던 삼베, 모시, 명주 따위로 새로 군복을 만들어 입힐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래서 우선 목화를 제주에 들여와 크게 밭을 만들고 내년쯤 그것이 산출되면 바로 대량으로 면직물을 자아낼 수 있게 그동안 방적기를 만들어 볼 생각이었다.
 목표는 1767년에 등장한 하그리브스의 제니방적기였다. 이 기계는 한 사람이 여러 개의 방추를 동시에 작동시킬 수 있는 생산력의 면에서도 탁월한 기계였다.
 지금 널리 사용되는 물레를 간단히 압도할 기계였다. 게다가 적은 인원으로 많은 양의 면직물을 생산해 낼 수 있다는 것은 인구가 적은 제주에서는 사용되기 적합한 것이었다.
 이제 5만 남짓한 인구에서 많은 인원을 면직공업에다가 고용해 버릴 수는 없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일단 대충 구상이 마무리되자 세훈은 바로 한라산 기슭에다가 드넓게 목화밭을 일구고 군사훈련이 없는 시간에 장병들로 하여금 이 목화를 돌보도록 했다.
 그리고는 방적기의 구상에 들어갔는데 몇 번의 실패를 거듭한 끝에 여름이 끝날 무렵 시제품을 완성할 수 있었다.
 그러나 군복을 만들어내고 면직물의 산출을 더욱 크게 늘려 제주는 물론이거니와 조선 전체에 내다 팔아 복식 문화를 크게 바꿔 보려 했던 세훈의 계획은 잠시 보류될 수밖에 없었다. 언젠가 오리라 예측했던 일이 결국, 8월이 끝나갈 무렵 제주를 찾아오고야 만 것이다.
 
 1402년 맹추(孟秋)
 조선국 전라도 제주도호부.
 
 하야다 사에몬 타로(早田左衛門太郎)는 대마도 왜구의 두령이었다. 대마도주 소 사다시게(宗貞茂)의 조선에 대한 굴신을 못 참고 마음껏 약탈을 자행하기 위해 근해를 떠돌며 노략질을 하다 이번에 크게 한탕해 볼 생각으로 제주로 향하게 된 것이다.
 “그렇게 몸을 사리다가는 아무것도 얻지 못하고 그저 변방의 섬으로 남게 될 것입니다.”
 하야다의 꾀하는 바를 알고 있었던 대마도주 소 사다시게가 그간 조선에 들였던 공이 전부 무너질까 두려워 하야다를 불러다가 다그쳤지만 햐아다는 코웃음 칠 뿐이었다.
 “네가 내가 주는 봉록(俸祿)을 먹고사는데 어찌 내 뜻과 다른 것을 탐하려고 하느냐. 기실 우리가 가진 땅이 척박하고 물산이 없는 것이 사실이나, 조선의 조정에 몸을 굽히고 들어가 물물을 거래할 수 있도록 허락받으면 피를 흘리지 않고도 필요한 것을 얻어 오고, 재화 또한 벌어들일 수 있으니 본국과 조선 사이를 이을 다리가 우리밖에 없기 때문이다. 괜히 또 도적질에 나섰다가 크게 경을 치면 어쩌려고 그러느냐.”
 대마도주는 정말로 그것이 걱정이었다.
 조선 조정에 사절을 보내 매번 방물을 바치며 몸을 사려 온 것은 다 이유가 있었기 때문이다. 노략질이 아니라 안정된 교역으로 굳건한 관계를 만들기를 그는 정말로 원하고 있었다.
 그러나 하야다를 비롯한 대마도주의 신하들이 가진 생각은 달랐다. 고려 말부터 삼남의 해안을 노략질해 얻은 세를 불려서 무사 계급에 올라 대마도의 세를 나누고 있는 이 호족들은 그간 세력을 키워 온 근간인 수적질을 그만둘 생각이 없었다.
 아직까지 그런 면에서 이들에게 대마도주가 행사할 수 있는 영향력은 제한적이었다.
 “나와 나를 따르는 이들은 배를 타지 않고는 살 수 없는 이들입니다. 슈고다이(守護代) 님께서 하시는 말씀은 잘 알겠으나 휘하의 불만이 가득하여 이제는 더 이상 감내할 수 없습니다.”
 이 당시 소 사다시게는 치쿠젠(筑前)국의 슈고다이의 직책을 받아 큐슈(九州)의 거족인 쇼니(少貳)씨의 휘하를 배종(陪從)하면서 대마도보다 본토의 일에 좀 더 신경을 쓰고 있었다.
 이런 상황이 대마도에서의 영향력 장악에 악영향을 끼친 것을 대마도주는 이제야 깨닫고 있었다. 그동안 하야다를 비롯한 왜구로서 세력을 얻은 측신들이 조선으로 출병하지 못하게 막아 두고 자신은 큐슈에서 좀 더 큰 정치를 하는 것에 불만이 쌓여 오고 있었던 것이다.
 “정 그렇게 가고 싶다면 마음대로 하게. 그러나 나는 뒷일은 책임질 수 없네.”
 하야다는 우선 출병 다음 일은 생각하지 않고 있었다. 대마도주의 엄포에도 그는 코웃음 쳤을 뿐이었다. 빠르게 치고 빠지는 데 실패할 일이 없었다. 게다가 그들이 대마도에서 건너온 것인지 누가 알 것이란 말인가.
 그렇게 대마도주의 반대를 무릅쓰고 거의 대마도 왜구의 전부라고 할 수 있는 60여 척에 이르는 대선단을 이끌고 하야다는 대마도를 나왔다.
 그는 고토제도(五島諸島)를 길게 돌아 서쪽 바다로 나아가 남쪽으로부터 치고 들어갈 요량이었다. 그간 조선으로 가는 약탈이 조선과의 선린통교를 원하는 소 사다시게에 의해서 많이 제약되어 오던 터라 이번의 도발에 가까운 습격은 하야다를 비롯한 많은 왜구들을 들뜨게 하고 있었다.
 바람은 순풍이었고 도검은 잘 벼려져 있었다. 이제 해안에 도착하기만 하면 내려서 감히 덤비는 것들은 추살하고 여자들은 사로잡아 처첩 삼아 돌아가면 될 일이었다. 게다가 제주 연안에는 조선 수군도 출몰하지 않으니 그야말로 금상첨화였다.
 “하야다 님. 이제 곧 탐라의 해안입니다.”
 “배의 속도를 빨리하도록 해라. 적들의 눈에 띄지 않게 빠르게 배를 대고 내려서 인근을 들쑤신다.”
 “예, 알겠사옵니다.”
 부장(副將)격인 카게야 마사노리(影屋政則)의 보고에 하야다는 신속히 명령을 내렸다.
 이제부터가 관건이었다. 과연 말마따나 수평선 너머로 한라산의 산정(山頂)이 멀리서부터 떠오르고 있었다.
 밤을 기다렸다가 몰래 들어갈 수도 있었지만 하야다는 이곳 제주 연안에는 좀체 쪽배나 다름없는 어선 말고는 배가 뜨지 않는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제주는 불비(不備)나 다름없는 노략처였다.
 배가 하나둘 동쪽 해안으로 들어서 안으로 조금 굽은 만구(灣口)로 들어가 정선을 시작했다. 하나둘씩 수십의 왜선이 박료(泊了)하고 나자 거기서 다시 물상 천 명에 가까운 왜구들이 떼 지어 내리기 시작했다.
 하야다는 배에 싣고 온 몇 필 안 되는 말을 타고 내려 노략을 지휘했다. 이내 주변의 어촌들은 쑥대밭이 되고 비명 소리가 하늘로 퍼졌다.
 “백여 명씩 흩어져서 마을을 밤이 될 때까지 노략하도록 하라!”
 하야다가 명령하자 이내 왜구들은 삼삼오오 무리를 지어 제각기 갈 길로 흩어졌다. 이런 대규모 상륙을 감행할 때는 한데 무리지어 다니지 않는 법이다. 특히나 이렇게 방비가 허술한 곳은 무리를 나누어 내륙까지 깊숙이 털고 나오는 것이 술책이었다.
 하야다는 어린 시절부터 배에 올라 옛 고려의 연안은 물론이거니와 일본 내륙으로도 들어가서 수적질을 하기도 했다. 대마도의 사무라이들은 무사(武士)라기보다도 수적패의 우두머리들에 가까웠다.
 하야다도 큐슈로 나가면 미관말직이나마 사족의 일원이었으나 바다로 나오면 다른 왜구들과 다름없는 수적이었다.
 하야다는 특히 정예라고 할 수 있는 패거리 삼백을 이끌고 상륙한 해안에서 내륙으로 점점 들어섰다. 가는 길 멀리에서는 약탈을 비해 떼를 지어 도망가는 토민의 무리가 보였고, 남서쪽으로는 또 마을 하나가 불타고 있었다.
 이번 노략은 느낌이 좋았다. 다소의 인명 피해가 발생하더라도 최대한 건져서 돌아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번에 생각보다 많은 이득이 있으면 대마도로 돌아갔을 때 소 사다시게의 인친책(隣親策)이라는 명목으로 조선에 굽실거리는 것을 그만두라 청할 명분도 설 것이었다. 이래저래 하야다는 들뜨는 기분을 감출 수 없었다.
 “멀리 성채가 하나 보입니다.”
 선봉을 이끌고 앞서서 탐색전을 벌이던 카게야가 말을 달려 돌아와 보고했다.
 “분명 성채를 열면 비축해 둔 곡식이 있을 것이다. 오늘의 목표는 그곳으로 한다.”
 “존명!”
 말을 탄 우두머리 여럿이 명을 받아 창이며 도를 제멋대로 빼어 들고 달음박질 치고 있는 왜구들을 독려해 성으로 가까이 진군시켰다.
 이제 곧 성문이 열리고 저들을 토색(討索)해 쓸 만한 몸은 대마도로 끌고 가서 부리고, 재물을 약탈해 가문의 영달과 제 몸의 입신에 쓸 것이다. 적어도 그때까지 하야다는 그 계획에 아무런 문제점을 느끼지 못하고 있었다.
 하야다가 그렇게 제주도 남동쪽 해안을 쓸고 다니다시피 하는 동안, 그 사실이 이내 관아에도 알려졌다.
 “표선면 해안에 상륙한 왜구가 읍성(邑城)까지 임박했나이다!”
 군수의 직무도 보고 천천히 방적기를 좀 더 효율적으로 개량해 볼 요량으로 정의군 읍성으로 내려와 있던 세훈은 이방의 보고에 깜짝 놀랐다.
 언젠가 왜구가 내습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하고 있었고, 또 병력을 기르는 핑계를 왜구로 대었던 세훈이었지만 정말 말 그대로 청천벽력 같은 일이었다.
 대충 닿는 대로 도포를 걸치고 전립을 쓰고 나와 성루(城樓)에 올라서니 과연 저 멀리 왜구들이 노략한 마을들이 불타고 있었고, 성루에서 훤히 보이는 거리에 왜구들이 바글거렸다.
 준비가 되는 대로 성문을 때려 부수고라도 쳐들어올 기세였다.
 “성안에 군사가 어느 정도 있느냐!”
 세훈이 심각한 표정으로 이방에게 다그쳐 묻자 이방이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총병은 죄다 훈련으로 인해 도호부 성내로 들어갔사옵고, 잡병 이백이 전부이나이다.”
 “내가 이곳에서 최대한 저들을 막아 볼 터이니 저들이 이곳으로 가까이 몰려오기 전에 너는 후문으로 바삐 말을 달려 나가 도호부에 이 사실을 알리고 병력을 청하라. 그들은 내가 지난 수 개월간 총을 쥐어 훈련시킨 정병들이니 오는 대로 왜구를 격퇴시킬 수 있을 것이다.”
 세훈은 이런 당혹스러운 사태에 노기가 치밀어 올랐지만 지금은 역정을 부릴 것이 아니라 냉정한 마음으로 적을 막아야겠다는 생각에 마음을 다잡았다. 부족한 병력이나마 그간 마련해 둔 보총을 든 신식 병력이 올 때까지만 버틸 수 있으면 해 볼 만한 일이었다.
 “분부 받잡겠나이다.”
 이방이 서둘러 뛰어 내려가자 세훈은 꽹과리를 쳐 성내에 남은 병력을 불러 모았다.
 이들은 새로이 훈련받은 병사들이 아니라 예로부터 제주에 있어 왔던 정병들로 군역을 지고 있는 이들이었다. 이들의 무장 상태는 형편없어서 칼이며 활에 무장도 제각기였고 훈련 상태도 엉망이었다.
 이런 것을 예견하지 못하고 새로이 편성한 군대를 좀 더 훈련시킨다는 요량으로 죄다 제주 도호부성 안에다가 모아 논 것이 실책이었다.
 군사들의 무예를 갈고 닦아 좋은 무기를 쥐어 준들 제때 있을 곳에 있지 아니하면 이렇게 심중한 타격에 직면하게 되는 것이다. 유비무환(有備無患)이라 하나 그것 또한 실기(失期)는 불비(不備)나 마찬가지였다.
 하야다가 이끄는 왜구 떼의 공격은 해가 중천일 무렵부터 시작되었다.
 정의군 내의 성읍을 둘러싼 마을들을 거의 초토화시키고 나서는 성을 공략하기 위해 흩어졌던 무리들이 떼 지어 모여들었다.
 천미천 개울을 따라 몰려 있던 왜구들은 어디서 마련했는지 모를 사다리를 가져와 낮은 성벽에 대어 기어오르려 했다.
 세훈은 병사들에게 창이며 낫, 조금이라도 날카로운 것을 되는 대로 들려서 그들을 막아서게 했다.
 성벽 아래로 뜨겁게 끓인 물을 붓기도 하고 돌도 던지며 막아 보았으나 성벽으로 올라오는 것들을 활을 쏘고 칼로 쳐 내어 걷어내면 그렇게 죽여서 막는 것보다 뒤에서 몰려오는 기세가 더 강맹했다.
 “이게 바로 왜구로구나!”
 과거로 떨어진 지 3년 만에 왜구라는 존재를 처음 본 세훈은 그 포악함에 혀를 내두를 수밖에 없었다.
 이런 자들이 수천수만 무리를 이루어 수륙으로 출몰하며 고려 말에서부터 지금에 이르기 까지 약탈을 일삼았다니 아무리 퇴락한 왕조라고 하지만 고려 조정에서 제대로 대응하지 못한 이유를 알 만했다.
 세훈 그 자신만 해도 갑작스레 해변에서 올라와 순식간에 마을들을 훑으며 쳐들어오는 진격 속도에 이들이 성문 앞에 밀려올 때까지 상륙한 사실조차 알지 못하지 않았던가. 현대전으로 치면 일종의 게릴라전이요, 유격술에 능한 이들이었다.
 적의 기세는 보이는 것만 대충 어림잡아도 천여 명에 가까운데 비록 성안에서 사수하고 있다 하나 이쪽은 이백에 불과했다. 거기에 애초에 이런 교전 상황은 크게 염두에 두고 지어지 않은 정의읍성은 허술한 토성으로, 조금만 기세에 밀리면 지금과 같은 상황에서는 언제고 함락 위험이 있었다.
 “목숨을 걸고 성루를 지켜내라! 저들이 넘어오면 아내와 딸들이 끌려가 겁간당하고 남정네들은 도륙당할 것이다!”
 성이 적의 수중에 떨어졌을 때 벌어질 비참한 일을 말하며 병정들을 자극해 보아도 이미 밀리는 기세는 어쩔 수 없었다.
 왜적들이 떼로 붙어 두들겨대는 통에 허술한 성문은 이제 반파되기 직전이었고 성벽으로 기어서 올라오는데 성공하는 왜구들의 숫자도 점점 늘어가고 있었다.
 이러다 성문이 열리고 세훈 자신도 성루에 갇혀 토살당하기를 기다리는 것은 순식간의 일이었다.
 ‘설마 과거로까지 오며 목숨을 건져 낸 나도 여기서는 죽을 수밖에 없는 것인가! 이제 시작인데!’
 세훈은 아찔한 기분에 눈을 감고야 말았다.
 “사또 어르신! 어서 몸을 피하셔야 합니다. 적의 기세가 성벽을 곧 넘을 듯하나이다!”
 병졸을 지휘하던 나장이 뛰어와 세훈에게 읍하고서는 말했다.
 세훈은 몸이 침침해지는 기분을 느꼈다. 한창 신혼의 즐거움을 누리는 아내 고상희와 이제 핏덩이 같은 아들을 생각해 보았다. 차마 여기서 목숨을 잃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지만 지방관으로서 이 성을 왜구에게 내어 주고 도망치는 것은 싫었다.
 그 와중에도 왜적 몇 명이 성루의 야대(夜臺)로 기어오르고 있었다.
 “어서 피하셔야 합니······!”
 타다당!
 나장의 목소리가 멀리서 들려온 소리에 묻힌 것은 그때였다.
 세훈은 귀가 바짝 열리는 느낌이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자신이 공을 들여 개발해 낸 보총이 쏘아지는 울음이었다.
 총성(銃聲)이 하늘에 울려 퍼지고 있었다.
 그 소리가 울려 퍼질 때까지 하야다는 기분이 좋았다. 이제 저 성읍은 함락될 것이다. 역시나 성을 지키는 군사는 얼마 되지 않았고 이제 곧 성문이 열릴 참이었다.
 저 성루 위에서는 저쪽의 관리로 보이는 자가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며 어떻게든 막아 보려 애쓰는 것이 눈에 보였지만 하야다는 코웃음 칠 수 있었다. 이런 허술한 성채로 이만큼 버틴 것만 해도 칭찬해 줄 수 있을 정도였다.
 “어서 어서 서둘러라! 성문이 곧 열······!”
 타다다다당!
 하야다가 소리치고 있는 와중에 어디선가 벼락 터지는 듯한 소리가 귀를 찢을 듯이 들려왔다.
 좌우를 둘러보니 하나둘씩 가슴이며 배를 부여잡고 쓰러졌다. 어떤 이는 머리에 피를 뿜으며 쓰러져 있었다.
 “이, 이잇! 이게 대체 무어냐!”
 “저쪽 언덕 위입니다!”
 카게야가 어느샌가 타고 있던 말도 잃어 버리고 거친 숨을 헐떡이며 쫓아와 손가락을 들어 동북쪽을 향해 보였다.
 과연 그 손가락 끝에 병사로 보이는 자들이 거의 천 명 가까이 열을 지어 도열해 있었다. 놈들은 열을 바꾸어 가며 뭔가를 계속 쏘아대고 있었는데 바다에서 왜선을 잡을 때도 쓰기 시작했다던 포(砲)의 일종인 듯싶었다.
 그러나 활도 닿지 않는 이렇게 먼 거리에서 사람마다 하나씩 들고 쏘아대는 것은 상상치도 못한 일이었다.
 하야다가 섣불리 판단을 못 내리고 있는 와중에도 왜인들은 계속해서 쓰러져 나갔다.
 성벽을 타고 오르고, 성문을 부수려고 달라붙어 있던 병력들도 전부 기세를 잃고 흩어지거나 주검이 되어 있었고, 어느새 총성은 하야다와 가까운 곳에 있는 자들의 목숨도 앗아 갔다.
 “이······! 후퇴하라!”
 하야다의 명령을 들은 것인지 못 들은 것인지 왜구들은 우왕자왕하더니 제멋대로 흩어졌다.
 “이게 대체 무슨 괴사인가!”
 하야다는 침음성을 흘렸다. 대체 상상치도 못했던 일이다. 일전에 바다에서 고려군이 쏘는 포에 왜구들이 수장된 이야기는 들어보았으나, 육지에서 저런 작은 포를 들고 멀리서 쏘아대는 것은 겪어 보지도 들어보지도 못한 일이었다.
 “적군의 공격이 드세다! 목숨을 부지하고자 하면 어서 도망쳐라!”
 큰소리로 휘하를 독려하며 말을 잃은 카게야를 뒤에 태우고서 하야다는 바다에 배를 매어 두었던 곳을 향해 빠르게 전장을 이탈했다. 이래서야 절반이나 살아서 돌아갈지 모르는 일이었다.
 다행이 왔던 길은 모두 초토화시키며 온 덕에 사람 하나 풀 한 포기 보이지 않는 황폐한 길이었다. 이렇게 후퇴하는 길은 역습이 두려운 것이 당연했다.
 그러나 이내 배를 매어 둔 곳에 당도했을 때 하야다는 고개를 숙일 수밖에 없었다. 배는 이미 나포당해 배 위에서는 조선군 병사들이 해안가로 도망 오는 왜구들을 향해 총을 쏘아대고 있었다.
 
 
 
 제3장―자강불식(自强不息) (1)
 
 
 「태조께옵서 이때에 임금의 학정(虐政)에 견디지 못하는 민중을 굽어 살피시고, 이에 마음을 아프게 여기사 잘못된 정치를 바로잡고 속민을 구제코자 하는 마음이 계셨다. 이때에 이를 헤아린 배신(陪臣)들이 주청하여 가로되······.」
 ―강재번(姜渽繁), 해동야승(海東野乘)
 
 
 
 1402년 맹동(孟冬)
 조선국 전라도 제주도호부.
 
 금년 중추(仲秋)에 있었던 왜노의 준동을 척결한 것을 치하하고 때 아닌 소동에 피해를 본 백성을 위로한다는 명목으로 조정에서 탐문사가 다녀간 것이 가을이 끝날 무렵이었다.
 좌정승씩이나 지낸 금상의 총애를 한 몸에 받는 노신 하륜(河崙)이 몸소 내려왔기에 제주 일대가 잔뜩 긴장했다.
 직접 전승을 보고하며 부득이하게 이번 승전에는 보총의 위력에 크게 힘입었음을 고해바치는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지방군을 양성해 왜구를 물리치고자 한다는 명분이 있었으므로 화약을 다루고 총포를 생산한 것에 대해 큰 질책을 사지는 않았다. 역모 운운하기에는 이번에 왜구를 천여 명이나 죽이고 사로잡은 전공이 컸다. 근래에 이런 공록이 없었던 것이다.
 하륜은 한양에 진상할 총포 십여 정과 이제는 제주에서 바쳐야 할 공납(貢納)품에 들어간 비누와 발화기를 잔뜩 실어서 올라갔다.
 고봉례의 동생이자 신식군의 총병대장을 맡아 이번에 승전에 큰 공을 세운 고봉지도 하륜의 일행을 수행해 따라 올라갔다. 운이 좋다면 치하를 받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높은 품계의 관직을 받게 될지도 모를 일이었다.
 제주 전역이 이런저런 일로 어수선한 사이에도 세훈은 잔뜩 풀이 죽어 있었다.
 비록 자신이 손수 길러낸 총으로 무장한 신식군이 왜구를 대파하긴 했지만 자신이 군수로 있는 정의군의 성읍 남쪽 지역이 왜구들에 의해 초토화되고 수백의 인명이 죽어 나간 것이 꼭 자신의 모자람에서 빚어진 일 같았기 때문이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아들 현도의 재롱도 그 가을에는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하륜 일행의 접대와 행객(行客)을 보아 주는 것은 장인 고봉례와 다른 토호(土豪)들에게 미루어 두고서는 세훈은 정의군 관내를 시찰하고 왜구의 준동에 피해를 입은 속민들을 위문하고 다니는 데에 시간을 썼다.
 보면 볼수록 그것은 참상이었다. 남편과 아들이 죽어 일손을 놓은 여자, 제 부모고 가족을 죄 잃고 고아가 된 아이. 가족들은 살아남았으나 집이고 농사 지어 놓은 작물이 모두 잿더미가 되어 당장 살길이 궁한 이들. 왜노에게 겁간당해 실성한 처녀. 그런 것을 보고 있자니 아무리 마음을 달래 보아도 기분은 영 가시질 않았다.
 “서방님께서 이렇게 기운이 없으시니 소녀까지 생각이 복잡하나이다.”
 고상희가 종종 꿀물을 내어 오며 세훈을 살살 달래 보았지만 세훈의 복잡한 심경은 쉬 가라앉지 않았다.
 “자네의 걱정은 고마운 일이나 시간을 좀 가지고 기다려 주게. 답답한 줄은 알지만 내 맘이 마음대로 안 되는 것을 어찌하나.”
 “······.”
 고상희는 그저 사랑하는 남편의 심신이 지치고 상할까봐 노심초사 걱정이었다. 자주 얼굴을 내비쳐 주지 않는 남편이 집안에 오래 있는 것은 고마운 일이었지만, 저렇게 지친 모습으로 있으니 그저 걱정이 태산이었다.
 아이가 생기고 나이도 좀 더 먹어 이제는 소녀라기보다 현숙한 여인이 된 고상희는 여전히 남편을 생각하는 마음은 작아지지 않았다.
 그렇게 그녀의 걱정 속에 가을이 지나가고 겨울이 찾아왔다.
 북쪽에서 차가운 바닷바람이 조금씩 밀려오기 시작하자 세훈은 그제야 기운을 조금 차렸다. 조정에 총을 올려 보냈으니 무언가 반응이 오겠지만, 우선 만들어내는 것을 쉴 수는 없었다.
 세훈은 왜노와의 전투에서 죽거나 크게 다친 이들을 솎아내어 생계를 마련해 주고 보상을 내어 준 다음에 그 손실을 메울 장정을 선발해 다시 훈련을 시키는 일에 들어갔다.
 겨울이 한창에 접어들 쯤에는 보병들뿐만 아니라 기병들에게도 총기 지급이 끝났고, 창병과 궁병들에게도 총을 주어 보병으로 전환시켰다. 그리고는 기병을 좀 더 뽑고 보병의 인원도 확충해 총 보병 2천에 기병 1천을 이루는 3천의 병력을 완성했다.
 구상했던 병력이 확충되자 세훈은 다시 군복을 만드는 일에 시선을 돌렸다. 지금 병사들이 입는 옷은 헤지기 쉽고 거의가 삼베나 마로 자은 옷들에 소매가 치렁치렁 넓어 전투에 과히 효율적이라 할 수는 없는 옷들이었다.
 우선 내년에 수확할 목화를 기다리기 전에 세훈은 겨우내 방적기를 완성했다. 소위 말하는 제니방적기의 형태로 완성된 방적기는 세훈에 의해 다축방정기(多軸紡績機)로 이름 지어져 세간에 모습을 드러냈다.
 목화가 산출되는 즉시 바로 수요에 응할 수 있도록 제주성 남문 앞에다가 널찍한 집을 올려 공장으로 삼아 방적기를 사십여 대나 들여놓았다.
 한 사람이 한 번에 여덟 개 이상의 물레를 빠른 속도로 잣는 것이나 다름없기에 기존의 집집마다 물레 돌리던 것에 비할 수 없는 대량생산이 가능해진 것이다. 역사상 발전으로 보았을 때도 몇 단계를 한 번에 뛰어넘은 것이나 다름없었다.
 다시 문제에 부딪힌 것은 목화였다. 작년에 심어 둔 목화는 중국에서 문익점이 가져온 그 목화의 종자로, 작년은 파종 시기를 놓쳐 수확을 제대로 하지 못하였고, 그나마 수확한 것도 종자 자체가 털이 성기게 나 솜을 만드는 데 유용할 뿐 방적에는 좀체 맞지 않았다.
 세훈이 알기로 가장 방적에 알맞은 목화 품종은 신대륙에서 재배되는 것으로 지금 상황에서는 아무리 해도 들여올 수 없는 것이었다. 그럼 품종을 개량하는 수밖에 없는 일이었다.
 다행히 좋은 품질은 아니나 그나마 방적을 시도해 볼 만한 종자가 몇 개 맺혔고, 이듬해가 되었을 때 세훈은 그 씨앗을 가져다가 봄이 오자 널리 파종했다. 여름이 될 때까지 짧고 성긴 면을 좀 더 잘 짜낼 수 있도록 방적기를 손보길 거듭했고, 그해 여름이 되었을 때 비로소 면을 방적기로 자아낼 수 있었다.
 품질은 현대의 것에 비하면 훨씬 미치지 못하지만 생각보다 만족스러운 것이었다. 우선적으로 고용한 아낙들로 하여금 40대의 방적기를 쉴 새 없이 돌려 면을 자아내게 하는 동시에 합성 염료를 연구했다. 이미 화학소에서 비누와 화약을 다루며 이런 종류의 업무에 익숙해진 사람들을 이제는 이런 쪽으로 전문가가 되어 가는 오상복에게 시켜 모았다.
 이들이 화학소 한쪽에다가 연구실을 차려 놓고 처음 한 일은 세훈이 일러 준 대로 산쪽풀을 잔뜩 모아다가 물을 먹여 가수분해(加水分解)시켜 인디고, 즉, 남(藍)을 얻어내는 일이었다.
 여기까지는 쪽풀로 자연 염료를 만드는 과정과 크게 다를 것이 없었다. 이렇게 얻어진 남을 가져다가 공기를 차단한 곳에서 열을 가열해 가열분해(加熱分解)시키면 아닐린 (Aniline)을 얻어낼 수 있었다.
 이 아닐린에 다시 묽은 황산을 섞어 내면 합성 염료인 모브(Mauve)가 얻어지는데, 이것은 바로 1856년 영국의 화학자 퍼킨이 최초의 합성 염료인 모브를 얻어낸 방법을 응용한 것이다.
 물론 모브는 쪽풀에서 직접 인디고를 채취하지도 않았고 퍼킨은 아닐린을 인디고가 아니라 콜타르에서 정제해 사용하는 등 다른 출발점에 있긴 했지만, 세훈은 이것을 시작으로 합성 염료의 개발을 서두를 계획이었다.
 그렇게 여름을 정신없이 보내고 1803년의 가을이 되자 처음으로 뽑아낸 면직물에다가 쪽풀에서 얻어낸 남색과 모브를 합성해 얻은 적색의 염료를 착색시켜 두 종류의 옷감을 얻어내는 데에 성공했다.
 군복의 개량은 주로 활동하기 편하게 기능적이면서도 군율(軍律)의 엄정함을 나타낼 수 있어야 했다. 세훈은 18세기의 유럽 군복을 참조하되 화려한 모자를 넣는 대신 기존의 전립을 착용토록 하고, 셔츠와 통이 좁은 바지 그리고 단추 달린 코트 형태의 외투를 입고 그 위에 소속을 나타내고 총이나 검을 매어둘 수 있게 하는 어깨띠를 착용하도록 했다.
 그리고 신은 가죽을 가져다가 혁화(革靴)를 만들었는데, 이것을 무두질할 기술을 가진 장인이 제주에 없어 마른 말고기인 건마육을 만들던 사람과 짚신 엮던 사람을 불러다가 연구하게 만들어서 겨우 만들어내었다.
 이렇게 조선 최초의 방직공업, 염료공업, 군수산업은 이런 조촐한 방식으로 제주도에서 1403년 시작되었다.
 
 1403년 맹춘(孟春)
 조선국 전라도 제주도호부.
 
 세훈이 일에 푹 빠져 있는 동안, 다른 이들도 제각기 삶을 꾸려 가기 정신이 없었다. 다들 명쾌하게 인지하고 있지는 않았지만 무엇인가 시대의 조류가 바뀌고 있는 것 같은 기분을 느끼고는 있었다.
 세훈의 처인 고상희는 뱃속에 아이를 하나 더 가졌다. 아들인 현도는 돌이 지나 이제 말을 하기 시작했고 세훈이 일로 정신없는 사이에도 탐라 성주 고봉례의 집은 아이의 웃음소리에 집안이 시끌벅적했다.
 그녀는 아이를 가진 와중에도 세훈에게서 방적기 한 대를 받아와 집에 두고서 직접 옷을 잣는 일에 푹 빠져 있었는데, 집안이 집안이니 만큼 밥을 짓고 빨래하는 일은 하지 않더라도 아녀자로서 옷만큼은 직접 잣는다는 생각이었다.
 그녀는 물레도 돌려 본 적이 있었는데, 방적기를 들여온 뒤로는 그 재미에 흠뻑 빠졌다. 오히려 세훈이 부족한 목화를 그만 가져가라고 할 정도였다.
 고봉례는 아들 고상온과 함께 군대를 돌보는 일에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고봉례가 근대군에 대한 지식이 있을 리 만무했지만, 그가 직접 군대를 훈련시킨다기보다는 그저 참관하는 재미가 쏠쏠했기 때문이다.
 반면 아들인 고상온은 달랐다. 차기 성주로서 그는 직접 천부장들과 함께 병사를 지휘하고 총을 쏘는 법도 익힐 뿐더러, 1개월간 연병장에서 뒹굴며 훈련도 받았다.
 이제 서른 줄을 넘긴 그에게 있어서 체력적으로 쉬운 일은 아니었지만 매제인 세훈의 능력에 감복해 있던 터라 최소한 군무에 있어서 만큼은 그 실력을 배양하여, 아버지나 세훈 앞에서 부끄럽지 않은 차기 성주의 능력을 보여 주고 싶은 마음도 있었기 때문이다.
 상업에 관해서는 세훈이 일선에서 벗어났기 때문에 오상복이 제주의 상계를 이끌고 있었다.
 예전 고려 시절의 개경상인들에, 조선이 들어서면서 출사를 거부하고 장사에 뛰어든 선비들까지 더해 지금 조선의 크지 않은 상계를 좌지우지 하는 송상(松商)과 함께 나상(羅商)이라 불릴 정도로 크게 성장한 제주의 상계가 내륙의 시장에 큰 영향을 행사하는 데는 오상복의 재능 덕을 보는 면이 있었다.
 그는 동영주상행계(東瀛洲商行契)라는 것을 조직해 비누, 강철, 발화기 등의 제품 및 말이나 그 말총, 해산물들은 조합 명의로 직접 고봉례에게 세를 치르고 받아 와서, 그것을 가져다가 소속된 조합원들에게 팔도에 퍼져 각기 맡은 지역에서 독점권을 가지고 장사할 수 있도록 했다.
 다들 귀한 물품으로 대접받고 있어 가져가기만 하면 쉬이 팔리는지라 제주 상인들은 쉽게 돈을 모았다. 거기에 대마도 왜구의 침입 후 나포한 왜선들 중 사용이 가능한 사십여 척을 고봉례가 이들 상인에게 불하(拂下)해 주어 섬 밖으로 장사 나가는 일이 더욱 용이해졌다.
 오상복의 상행 규모가 커지자 자연스레 회계 장부와 어음의 발행 필요성이 대두되었다. 특히 아직 화폐가 통용되지 않고 쌀이나 생필품으로 상행이 이루어지는 마당이니 그것을 필요한 곳으로 매번 실어 나르는 일도 쉬운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오상복은 제주도와 육지의 상행 거점에 있는 물상객주(物商客主)들을 모아 취체환계(取替換契)라는 것을 만들어다가 어음을 발행하고 대금(代金)의 입체(立替), 자금의 융통을 해 주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물건을 지점에서 맡아 두고 그의 가치에 상응하는 환표(換標)를 발행해 주어 현대의 환과 같은 기행을 수행하게 하는 한편, 어음의 발행이나 취인도 해 주어 그야말로 조선에 전국적이고 안정적인 상행망을 구축했다.
 이에 맞선 송상의 대항도 거셌는데, 여각(旅閣)들을 모아 송방(松房)이라는 지점을 전국에 깔아 나상의 취체환계에 대항했다. 거기에 사개송도치부법(四介松都置簿法)같은 앞선 회계술이 있었기에 새로 떠오르는 나상이 상대하기에 만만한 상대는 아니었다.
 제련소의 부석소와 제철소의 정탄 또한 물건을 생산하는 동시에 스스로 연구를 꾸준히 해 나갔는데, 그들이 가끔 떠올리는 발상은 실행하기 힘든 것이라 할지라도 그 창의성만큼은 세훈도 놀랄 정도였다.
 특히 둘은 야금술(冶金術)을 더욱 연마하는데 공을 들여 고로를 개선하는 작업에 몰두하고 있었다. 보다 크고 효율 좋은 고로를 만들기 위해 모양을 바꿔 보기도 하고, 공기의 흡입량을 조절하거나 숯 대신 다른 촉매를 넣어 보거나 하는 일이었다.
 모든 것이 잘 돌아가고만 있는 것 같았지만 의외의 복병은 다른 데에서 나왔다.
 하륜이 고봉지와 함께 포로로 잡힌 왜장 하야다와 왜구들을 이끌고 한양으로 돌아갔을 때, 경복궁의 임금은 복잡 미묘하게 사건을 처결했다.
 스스로 무력(武力)으로 왕위를 탈취한 것이나 다름없는 그이기에 화약을 제멋대로 다뤄 새로운 병과(兵科)의 병력을 양성한 제주의 일은 쉽게 넘어갈 수 없는 문제였다. 게다가 아직 왕자의 난을 다툰 형은 멀쩡히 살아 있고, 위로만 태상왕, 상왕에 전대왕이 둘이나 살아 있었다.
 비록 조선팔도를 호령하는 용상에 앉아 있다 하나 정당성이 없고 기반이 취약한 시점이었다. 하지만 제주의 병력 양성은 지방의 군권을 지니고 있는 도호부사의 재량으로 시작한 일이었고, 또한 실제로 대규모의 왜구 침입에서 크게 대승했으니 함부로 질책할 수도 없고 칭찬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제주만호 고봉지는 들으라.”
 조선의 왕, 정안군 이방원. 원래 역사 속에서 태종의 시호를 받게 되는 임금의 목소리는 크게 침중했다.
 “예. 전하.”
 고봉지는 대답이 조금 떨려 나오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우선 과인은 제주 수령 고봉례와 그 속하들이 이처럼 선견지명을 가지고 왜노의 내습을 막아낸 것에 대하여 치하하노라.”
 “성은이 망극하옵나이다.”
 “그러나 과인은 함부로 나라에서 다루는 화약을 방백(方伯)이 취급하고 총포(銃砲)를 제작한 것을 우려하는 바이다. 이번에 그 덕으로 왜구를 퇴치하였기에 책을 하지는 않을 요량이나 제주는 앞으로 보총과 화약을 계속 생산하여 제주 진영(陣營)에서 필요한 양을 제외하고는 모두 공납(貢納)할 것이오, 이를 감독하기 위해 군기시(軍器寺) 주부(注簿) 최해산(崔海山)을 전라도병선군기점고별감(全羅道兵船軍器點考別監)에 임명하여 그 일을 감독하게 할 것이니 이에 한 점 거짓이 없도록 하라. 주부 최해산은 공신 최무선의 아들로 화약을 다루는 일가의 기전을 지니고 있으니 이 일에 부족함이 없을 것이다.”
 임금의 목소리는 조금도 흐트러짐이 없었다. 감정을 드러내지 않고 천천히 따지듯이 하는 말들이 내전을 조아 오는 것처럼 느껴졌다.
 임금은 잠시 좌중을 둘러보고서는 말을 이었다.
 “또한 토관(土官)을 제 지역을 맡아 보는 도호부사의 자리에 임명한 것은 과인이 그 제주에게 방종하라 함은 아니었으나 이번에 왜구를 격퇴한 공이 있기에 고봉례를 비롯한 지방 군수들은 화약을 만들고 군사를 조련한 책임을 묻지 아니하고 유임(留任)하도록 하노라. 병조에서는 이를 받들어 최해산의 부임을 처결토록 하고, 고봉지는 이를 제주에 돌아가 빠지지 않고 고하도록 하여라.”
 대전은 마치 서리 낀 듯 정적 속에 차가운 공기만 흘렀다. 고봉지는 얼어서 떨어지지 않을 것만 같은 입을 억지로 열었다.
 “성은이 망극하옵나이다. 하명하신 일에 한 점 부끄러움 없이 처결하도록 하겠나이다.”
 태종은 마치 호랑이 눈 같은 매서운 눈매를 부라리며 고봉지를 바라보았다. 과연 고려의 왕조를 무너뜨린 제1공신이며 형제를 도륙해 가며 용상에 오른 패자(覇者)의 모습 그대로였다.
 고봉지는 식은땀이 흐르는 것을 느끼며 마음속으로 앞으로 제주의 행방을 점쳐 보았다.
 고봉지가 화약 제조를 감독할 최해산을 대동하고 제주로 내려온 것은 얼마 지나지 않아서였다. 화약과 총포를 만드는 과정을 옆에서 쭉 지켜보았던 고봉지였기에 최해산을 공방으로 출입시켜 감독할 수 있게 하는 것은 천근만근 마음이 무거운 일이었다.
 최해산은 제주에 잘 적응하는 듯 보였다. 그는 화학소와 제총소를 뻔질나게 드나들며 본래의 생산 감독 임무보다는 화학의 개량과 총기를 연구하는데 시간을 보냈다.
 그의 아버지는 유명한 여말선초의 명장 최무선이었고, 익히 아는 바대로 화약의 제조법을 들여와 화포를 생산한 인물이기도 했다. 최해산은 바로 아버지 최무선의 뒤를 이어서 배운 바대로 화약과 무기에 관해 조예가 깊었는데, 그런 그에게 제주에서 이뤄진 성과는 정말로 놀랍기 짝이 없는 것이었다.
 지속적으로 생산되는 화약의 안정성은 물론이거니와 개인용 화기로 이렇게 강력한 파괴력을 가진 보총이야말로 정말 놀라운 성과라 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었다. 거기에 무기에 사용하기 위해 강철을 생산하는 고로라던가, 비누, 발화기 따위도 최해산의 마음을 끌었다. 이 모든 것이 한 사람이 고안해 낸 것이란 사실이 그로 하여금 더욱 그 사실을 놀랍게 만들었다.
 최해산은 그 사람, 정의 군수 김세훈을 꼭 만나보고 싶었다.
 세훈은 그 당시 화학 염료를 고안해 내느라 정신이 없었는데, 일도 바쁠 뿐더러 내심 어렵사리 일구어 놓은 것을 권력을 이용해 공짜로 낼름 할 심산인 조정에서 보낸 최해선이 기꺼울 리가 없었다.
 김세훈은 와병(臥病)이며 일이 바쁨을 핑계로 찾아온 최해산을 수차례 돌려보냈다.
 “군수(軍需)에 관련한 일을 처결하느라 바쁘니 나중에 오시오.”
 최해산은 김세훈을 찾아갈 때마다 이런 이야기만 듣고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이쯤 되자 최해산도 오기가 생겼을 뿐더러 김세훈을 한번 보고자 하는 욕심도 생겨 삼 일 걸러 한 번 김세훈을 찾아가 시위하듯이 문을 두드려댔다.
 결국 모브 염료의 합성이 끝날 즈음에 와서는 김세훈도 지고서 최해산을 사랑방으로 불러들여 대접할 수밖에 없었다.
 “들여 주셔서 감사합니다. 최해산이라 합니다.”
 최해산이 사랑에 들어와 앉으며 말했다. 그는 생각보다 젊어 보였는데, 실제로 스물셋밖에 안 된 청년이었다.
 최무선이 세상을 등졌을 때 최해산은 겨우 열다섯의 나이였는데, 화약의 최무선과 목화의 문익점의 자제를 조정에 등용하여 쓰라는 권근(權近)의 주청을 받아 임금이 조정에 불러들여 군기시 주부의 자리를 내린 것이었다.
 오히려 최해산이 세훈을 보고 놀랐는데, 자기와 비견해도 나이가 그리 많아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실제 전생에서의 나이로부터 따져보아도 세훈은 아직 스물아홉으로, 서른에도 이르지 않은 젊은 나이었다.
 “병졸들에게 면 옷을 지어 입히고 거기에 입힐 염료를 짜내는 일에 골몰하다 보니 세상 시름 잊고 손님이 오신 줄도 모르고 지냈습니다.”
 뻔한 거짓말이었지만 세훈도 최해산도 그 문제에 관해서는 더 이상 이야기하지 않았다. 세훈의 처 고상희가 내온 다상을 앞에 두고서 찻잔 위로 김이 올라가는 동안 묵묵히 한참을 두 사람은 말이 없었다.
 세훈은 최해산에게 잘못이 없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지만, 단기적으로 탐라를 조선의 영향권에서 벗어나게 해 산업을 도모하고 바다를 경영한 다음, 그 힘으로 장기적으로 조선을 도모해 조선팔도 전체를 일신해 새로운 국가를 세울 생각을 하고 있었던 세훈에게, 병력을 길러 왜구를 잡았더니 기껏 돌아온 게 화약과 보총을 가져다 바치고 일개 공납이나 받아가는 변방 취급을 하는 것이 고깝기 짝이 없었다.
 게다가 왜구를 격퇴한 공을 화약을 밀제조했다는 명목으로 상쇄시켜 버리고 치사하지 않은 것은 세훈에게 큰 배신감으로 다가왔던 터였다.
 다른 이 시대의 사람들과 다르게 22세기에서 건너온 세훈에게는 조선 왕조에 대해 과거에 대한 향수(鄕愁) 비슷한 느낌 외에 어떤 충정이 있을 턱이 없었고, 오히려 한양의 조정이 세훈이 갈 길을 막고 있는 듯한 느낌을 강하게 받고 있었다.
 그러니 바로 그 임금이 보낸 최해산이 고까울 수밖에.
 “하명받으신 대로 화약과 보총을 생산하는 것을 감독하고 공납품을 수거하는데도 바쁘실 텐데 어이 이까지 오셨습니까?”
 세훈의 말에는 가시가 돋쳐 있었다.
 공납품이란 명목으로 수탈해 가기도 바쁠 것인데 뭣하러 예까지 왔냐는 소리였다.
 “그··· 조정의 일로 저를 달가워하지 않으신 건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루신 일들을 보고 꼭 뵙고 싶어서 이렇게 무례를 무릅쓰고 계속해서 찾아뵈었습니다.”
 최해산은 잔뜩 주눅 든 목소리였다. 세훈은 이 어린아이를 상대로 뾰족해져 있어 봐야 무슨 소용이 있으랴 싶어 조금 기세를 가라앉혔다.
 세훈의 표정이 한층 차분해지고 나서야 최해산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제 아버지가 자식이 늦어 막둥이로 태어난 덕에 아버님께서 돌아가셨을 때 겨우 나이가 고작 열다섯이었습니다. 아직 배움이 많이 부족한 시기라 어렵사리 아버님께서 남겨 놓으신 「화약수련법(火藥手練法)」, 「화포법(火砲法)」이라는 책 두 권으로 혼자 배워 아직도 그 깨달음이 부족한데, 이제 제 배움을 이끌어 주실 분을 만나게 되었다는 생각에 조금 들떠 있었습니다. 마음에 좀 차지 않으시더라도 가르침을 주셨으면 합니다.”
 갑작스레 큰절하며 문하(門下)되기를 청하는 최해산의 표정은 진지하기 짝이 없었다.
 세훈은 그저 당황해서 혀를 차다가 안 되겠던지 최해산의 어깨를 부여잡고 일으켜 앉혔다.
 “자세한 것은 나도 비전(秘傳)으로 지니고 있으니 알려 줄 수 없네. 다만 화약을 좀 더 안정화시키고 보총을 만드는 원리 정도는 알려 주겠네.”
 어차피 강철을 생산하는 비법을 모르니 당장은 방법을 알려 주어도 최해산이 본토에서 보총을 생산할 수는 없을 것이다.
 세훈이 직접 일을 추진하며 느낀 것이지만 기술의 발전은 하나의 혁신적인 아이디어만으로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었다. 그것을 실현하기 위해 다른 기술들이 수반되어야 했다. 보총의 설계나 원리만 가지고는 강철로 스프링을 만드는 핵심 기술이 없으면 보총을 만들어낼 수 없었다.
 “저, 정말이십니까!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최해산은 그 정도에도 정말 뛸 듯이 좋아하는 듯했다.
 그때부터 세훈은 오전에는 군복을 생산하는 일을 감독하고, 오후에는 화학소와 제총소에서 최해산에게 좀 더 안정된 형태의 화약 제조법, 관리법을 알려 주는 한편 이 시대에는 없는 기초적인 화학 상식을 에둘러 일러 주었다.
 그러는 한편 보총을 직접 한 자루 가져와 분해해 가며 그 제작법과 작동 원리를 알려 주곤 했는데 일부러 용수철을 만드는데 강철 기술이 필요하다는 이야기는 하지 않았다. 이를테면 핵심 기술이기 때문이다.
 “정말 가르침이 크십니다. 배울 때마다 스승님의 그 탁월한 혜안에 놀라움이 큽니다.”
 최해산은 이제 아예 김세훈을 스승님이라 불렀다.
 어려서 아버지를 잃은 최해산에게 김세훈은 어쩐지 그 그림자를 느끼게 해 주는 존재였다. 기술에 대한 의지와 탁월한 식견은 물론이거니와 그것을 한층 응용하고 발전시키는 태도는 쉬이 귀감 삼을 만한 일이었다.
 최해산은 아버지에게서 늘 그러한 모습을 바라보며 자라왔기에 비록 나이는 얼마 차이나지 않으나 훨씬 앞서 나가 있는 세훈을 따르고자 하는 마음이 생겨나고 있었다.
 물론 이 어린 청년이 세훈에게서 얻어갈 것만 챙긴 것은 아니었다. 그 자신은 보총을 만드는 기술에 비하면 별것 아니라 생각하고 있었으나, 대장군포(大將軍砲), 이장군포(二將軍砲), 삼장군포(三將軍砲), 육화포(六花砲), 석포(石砲) 등의 제작 기술을 일러 주어 세훈에게 포를 만들어 볼 생각을 심어 주게 되었다.
 비록 포의 역사로 보아 이제 걸음마 단계의 기술이었으나 여기서부터 세훈이 알고 있는 지식을 곁들어 개량해 나가면 머지않아 제대로 된 근대식 대포를 만드는 것도 꿈은 아니었다.
 세훈도 이 어린 청년이 조금씩 마음에 들어가고 있었다.

댓글(3)

달부진시    
이거 이책 보는 분둘 없나 보네요 흐미 아무리 그래도 세상에 표지에 오타를 그냥 방치하다니.. [대한재국 연대기] → [대한제국 연대기] 로 바꾸셔야 할듯 처음부터 이러면 ... ㅠ.ㅠ
2020.09.25 15:18
추영검    
예전에 재밌게 봤던 소설이네요. 추천합니다
2021.01.19 10:41
다크라이    
나무위키에 항목있음. 2010년작 수백년에 걸친 자손이 이어가는 소설에, 변화가 적고 전투묘사 부족. 고증 굉장히 잘됨. 뭐 그렇다는데 흠..
2021.01.22 1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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