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히이이익!”
“제발 살려줘! 다시는 안 그럴 테니까! 제발······!”
어둠이 짙게 깔린 어느 버려진 공사장. 두 사내의 절규가 고요한 겨울밤의 공기를 찢었다. 공포에 질려 어린애처럼 벌벌 떠는 사내들의 애원이 공사장의 정체된 공기를 휘저으며 메아리쳤다. 그러나 그 필사적인 탄원도, 압도적인 겨울밤의 스산함에 묻혀 조용히 사그라졌다.
버려진 공사장. 매일 밤 누군가의 절규가 끊임없이 메아리치던 곳. 그러나 지금까지 그 절규에 사내들의 것은 없었다. 사내들은 언제나 그 절규를 듣는 쪽, 절규를 만들어내던 쪽이었다.
그렇기에 이곳에서 아무리 소리치고 애원해봤자, 아무도 구하러 오지 못한다는 것은 사내들이 더 잘 알고 있을 터였다. 그러나 사내들은 그것을 모두 잊은 듯 필사적으로 애원했다. 목이 터져라 소리쳤다.
과거 그들에게 처참하게 맞았던 소년들처럼, 그들에게 비참하게 겁탈당하던 소녀들처럼.
사내들에 앞에 서 있는 자는, 놀랍게도 교복을 입은 한 명의 소년이었다.
소년의 입가는 붉은 자국으로 얼룩져 있었다. 마치 립스틱을 처음 발라보는 어린 소녀의 입가처럼, 스파게티를 먹다 토마토소스를 잔뜩 묻힌 어린 아이의 입가처럼.
소년은 얼룩진 입가를 어루만지며 두 사내의 눈에 담긴 공포를 음미했다. 그 여유로운 모습을 사내들은 다만 공포 어린 눈으로 올려다보며 애원할 뿐이었다.
소년의 왼손에 아무렇게나 들린 시체. 어린아이의 손에 붙잡힌 헝겊인형마냥 가볍게 들린 시체를 본다면 누구라도 두 사내를 겁쟁이라 비웃진 못할 것이다.
그 시체는 방금 전까지만 해도 두 사내의 동료였다.
소년의 손에 들린 시체에서 붉은색의 물방울이 똑, 똑, 떨어졌다. 소년은 그 물에 물들어 빨갛게 된 손끝을 바라보다, 문득 재미있는 생각이 났다는 듯 한쪽 입 끝을 끌어올렸다.
“알았어. 그러니까······.”
소년이 입을 열자, 사내들의 눈빛에 희망이 어렸다. 소년은 피식 웃으며 피 묻은 손을 들어 볼썽사납게 애원하는 사내 한 명을 겨눴다. 그리곤 물방울을 튀기듯, 피 묻은 손가락을 튕겼다.
“다시는 그런 짓 못하게 되고 싶단 말이지?”
피슝-!
그 장난스러운 손짓이 낳은 결과는 믿을 수 없을 만큼 처참했다. 소년에 손끝에 묻어있던 핏방울이 무서운 파공성을 일으키며 뻗어나갔다. 목표가 된 사내의 턱에서 섬뜩한 파열음이 터져 나왔다.
필사적으로 애원하던 사내의 턱이 부서졌다. 사내는 갑자기 들이닥친 끔찍한 고통에 비명을 질렀다. 하지만 부서진 턱은 기묘하게 덜걱거릴 뿐, 아무런 소리도 내보내지 못했다.
공사장 주변은 쥐죽은 듯 고요해졌다.
시체에서 떨어지는 핏방울 소리와, 부서진 턱이 내는 기묘한 덜걱거리는 소리. 그리고 거기에 맞춘 듯, 고통에 몸부림치는 사내의 억눌린 흐느낌소리만이 겨울밤이 만들어낸 정적의 커튼을 살며시 흔들었을 뿐이었다.
자박.
머리가 나쁘다니까. 소년은 피식 웃으며 뒷걸음질하는 사내에게 고개를 돌렸다. 아직도 모르겠어? 소년의 입가에 비웃음이 그려졌다. 너희들도 알고 있잖아? 이 버려진 공사장은 일단 끌려오면 아무도 도망칠 수 없다는 사실을.
그건 소년도 마찬가지였고, 이젠 저 사내들도 마찬가지가 될 것이다.
소년의 시선이 사내의 뇌리에 파고들었다. 어둠 속에서도 붉게 빛나는 포식자의 눈빛이 연약한 인간의 정신을 쥐고 흔들었다. 그 무서운 눈빛이 한 줌 남아있던 사내의 이성조차 말끔히 날려 보냈다.
“히이이이이익!”
결국 홀로 남은 사내는 등을 돌려 도망쳤다. 아니, 도망치려 했다. 사내가 등을 돌린 동시에, 소년은 손에 쥐고 있던 시체를 놓았다. 시체가 툭 땅으로 떨어졌다. 동시에 소년에게서 등을 돌린 사내는 다시금 소년의 붉은 눈동자와 마주쳤다.
“으, 으아아아악!”
털썩.
소년이 떨어뜨린 시체와 동시에, 뒤돌아 도망치려던 마지막 사내도 바닥에 널브러졌다.
“의리 빼면 시체라며? 그런데 친구도 버리고 혼자 내빼면 쓰나. 다 같이 사이좋게 죽어야지.”
소년은 빙글빙글 웃으며, 이번엔 부서진 턱을 붙잡고 버르적거리는 사내에게 다가가 한 손으로 가볍게 들어올렸다. 때마침 어두운 공사장에 희미한 달빛이 스며들어와 소년의 모습을 비춰주었다.
피를 뒤집어쓴 아름다운 소년. 밤의 귀공자. 소년의 눈과 마주친 사내는 고통도 잊고 공포에 미쳐버렸다. 소년은 눈이 뒤집힌 사내를 천천히 살펴보며 이를 드러내고 웃었다. 기묘할 정도로 날카로운 송곳니가 달빛을 머금고 반짝거렸다.
다음 순간, 사내는 기묘한 쾌감과 동시에, 온몸에서 힘이 쭉 빠져나가는 감각을 느꼈다. 정신이 희미해졌다.
그것이 사내가 마지막으로 느낀 쾌감이자 고통이었다.
공포에 질려 혼자 도망치려고 했던, 그리고 그 대가로 안면이 반쯤 뭉개진 사내는 동료의 피가 빨리는 것을 그저 지켜보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세 명의 피를 마셨지만, 소년의 갈증은 여전히 새로운 피를 갈망했다. 문명이 발달하고 도시화가 진행되면서, 오히려 '현대화'된 사람들의 피는 소년과 같은 막 태어난 흡혈귀에게 충분한 식사가 되지 못했다.
게다가 사내들의 피는 술과 담배, 심지어 마약에도 찌들어 있었다. 양은 많을지 몰라도 깨끗한 소녀의 피 반의반만큼도 흡혈귀의 갈증을 채워 주지 못했다. 차라리 물을 마시는 편이 더 나을지도 모를 정도였다.
소년, 준혁은 이젠 제법 흡혈에 익숙해진 탓에 피가 튀지 않은 교복셔츠를 만족스럽게 살펴보곤 천천히 공사장을 빠져나왔다.
식사는 불만족스러웠지만, 기분만큼은 더할 나위 없이 만족스러웠다.
한때 준혁을 무시하고 손가락질했던 모든 녀석들이 이젠 자신의 사냥감에 불과했다. 누구도 ‘밤의 귀족’이 된 준혁을 무시할 수 없었다.
세상 모든 인간들이 준혁의 사냥감으로 변한 지금, 준혁은 더 이상 예전의 별 볼 일 없는 비행청소년이 아니었다.
그를 똘마니처럼 부렸던 사내들이 어떤 꼴이 되었는지를 안다면, 그에게 쓸데없이 고지식한 잔소리를 퍼부었던 교사들도 조금쯤은 그를 다시 보게 될 것이다. 그리곤 밤마다 두려움에 덜덜 떨겠지.
피식.
절로 입가에 미소가 번진다. 멋지게 변한 육체, 끝내주게 강해진 힘. 모든 것이 만족스러웠다.
그러나 그거로도 모자랐던 것인지, 이미 많은 것을 베풀어준 행운의 여신은 준혁에게 새로운 행운을 쥐어주었다. 준혁의 눈이 번쩍 뜨일 만한 먹잇감이 포착된 것이다.
한 소녀가 이곳, 버려진 공사장 인근의 어둡고 음산한 길을 지나가고 있었다. 이미 어둠이 짙어질 대로 짙어진 늦은 시각, 그 어둠을 밝힐 가로등의 불빛은 금방이라도 꺼질 듯 미미하게 깜빡거렸다.
불행히도 소녀의 몸을 가려줄 밤의 장막은, 이미 밤의 일족이 된 준혁의 눈엔 아무런 장애도 되지 못했다. 오히려 소녀에게서 흡혈귀의 위험한 모습을 가려주었을 뿐이었다.
준혁은 어둠속에 몸을 숨기며 조용히 소녀의 반대편으로 넘어왔다. 밤과 동화된 뱀파이어의 몸은 마치 어둠 그 자체라도 된 듯 소리 없이 움직였다.
이윽고 소녀의 반대편에 선 준혁은 깜빡이는 가로등 불빛 아래 모습을 드러냈다. 걸음을 재촉하던 소녀는 준혁을 흘끔 보더니 조금 놀란 듯 몸을 움츠렸다.
준혁은 지나가는 길을 가장하며 천천히 걸음을 재촉하는 소녀에게 접근했다.
어둡고 외진 길, 그것도 이런 야심한 시각에 반대쪽에서 걸어오는 소년을 의식한 것인지, 소녀의 걸음은 한결 조심스러워졌다.
준혁은 소녀의 모습을 살폈다. 그리곤 속으로 조금 놀라고 말았다. 짙은 어둠에 가리어진 소녀의 얼굴은 놀랄 만큼 아름다웠다.
준혁은 좀 더 은밀하게 사냥하려던 계획을 수정했다. 아니, 애초에 그런 생각조차 들지 않았다. 다만 소녀가 준혁을 지나쳐가려는 순간, 준혁은 마치 이미 그러려고 했던 것처럼 소녀의 팔목을 잡아챘다.
너무나 놀란 탓일까. 소녀는 가엾게도 비명소리조차 내지 못했다. 다만 손을 뿌리치려고 발버둥 쳤을 뿐이었다. 그러나 그조차도, 흡혈귀가 된 준혁에겐 귀여운 앙탈에 불과했다.
준혁은 소녀와 눈을 마주쳤다. 반항하던 소녀의 몸짓이 점점 잦아들었다. 소녀의 눈동자가 마치 마약을 맞은 듯, 초점이 흐려졌다. 흡혈귀의 눈에 깃든, 인간에겐 극도로 치명적인 마력에 홀려 버린 것이었다.
준혁은 멍한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소녀를 보자 또 한 번 감탄했다. 가까이에서 보니, 소녀는 자신과 동류라고 해도 믿을 정도로 놀랍도록 아름다웠다. 소녀의 새하얀 얼굴에 달빛이 부서져 내렸다.
만약 소녀의 팔에서 느껴지는, 놀란 듯 커졌다가 점점 사그라지는 달콤한 맥박소리가 아니었다면 준혁은 정말 소녀를 자신과 동류라고 믿었을지도 몰랐다.
그래서였을까. 뜬금없게도 준혁은 이 순간 이 소녀와 만난 것을 사랑, 또는 운명이라고 믿어버렸다. 소녀의 모습은 준혁이 인간이었던 시절, 아직 비행청소년이었을 때 가지고 있던 어떤 감성을 일깨웠다.
흡혈귀가 되고 나서 좀처럼 느끼지 못했던, 고통에 가까운 짜릿한 감각. 멍하게 풀린 눈으로 준혁을 하염없이 바라보는 소녀의 얼굴은 준혁의 마음 어딘가를 건드렸다.
그래서였을까, 어디선가 본 적이 있었던 것처럼, 소녀의 모습이 어쩐지 낯익어 보였다. 그리고 그런 낯익은 모습조차, 지금 이 순간 준혁의 머릿속에 떠오른 생각을 증명하는 것처럼 보였다.
이 소녀는 자신의 운명의 상대라고.
그러나 그 순간, 흡혈귀의 야만적인 갈증이 비행소년의 감성을 뚫고 올라왔다. 아니, 오히려 소녀의 아름다운 모습이 흡혈귀로서의 갈증을 부채질한 셈이었다.
뱀파이어가 된 지 얼마 되지 않은 준혁이 그 갈증에 지배되는 것은 한순간이었다.
“아앗······!”
놀란 소녀의 신음성에 준혁은 문득 정신을 차렸다. 자신은 어느새 소녀의 목덜미에 얼굴을 파묻고 홀린 듯이 피를 빨아들이고 있었다.
준혁은 한탄했다.
‘아······. 이미 늦었어. 쩝. 어쩔 수 없지. 이렇게 된 거 남김없이 빨아 줘야겠다. 미안하다. 이렇게 될 것이 너와 나의 운명인가보다. 넌 이대로 죽겠지만 그래도 네 피는 영원히 내 혈관을 타고 흐를 거야.’
가혹한 운명의 장난이었다. 드디어 운명의 상대를 만났다고 생각했는데, 흡혈귀의 저주받을 본능에 이렇게 헤어져야 한다니. 준혁은 이 순간 자신이 비운의 주인공이 되어버린 느낌이었다.
준혁은 뱀파이어가 된 지 얼마 되지 않은 탓에 아직 피의 본능을 조절하지 못했다.
방금 전, 사내들의 피를 빨았을 때도 너무 맛이 없어서 빨다가 그만뒀는데도 사내들의 시체는 말라비틀어진 미라가 되었을 정도였다. 하물며 소녀의 피는 준혁의 이성을 날려 버릴 만큼 깨끗하고 달았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뜬금없이 소녀와 사랑에 빠졌다고 믿었던 준혁은 비운의 주인공이 된 기분에 젖어들면서, 동시에 흡혈이 주는 쾌락을 마음껏 만끽했다.
그 가증스럽고도 작위적인 슬픔도 잠시, 준혁은 곧 흡혈이 주는 쾌락에 완전히 지배되었다.
준혁은 원 없이 피를 빨았다. 소녀의 말초신경에 남아 있는 피 한 방울까지 긁어모을 정도로, 그렇게 무자비하게 소녀의 피를 빨아댔다.
남방대륙의 전설에 나오는 배고픔의 저주에 걸린 왕처럼, 준혁은 흡혈귀의 끊임없는 갈증에 이끌려 소녀의 가녀린 몸에서 끊임없이 피를 착취했다.
이상하게도 아무리 빨아도 소녀의 몸에서 흘러나오는 맑고 달콤한 피는 끊임없이 흘러나왔다. 하지만 흡혈의 쾌락에 이성이 날아가버린 준혁은 이상을 눈치채지도 못했다. 그저 끊임없이 피를 빨아댈 뿐.
준혁은 계속해 피를 빨았다. 어느새 자신의 몸이 타오르고 있다는 것도 모른 채, 눈처럼 새하얀 소녀의 목에 얼굴을 묻고는 아귀처럼 피를 빨아댔다.
어느새 등에서부터 준혁의 몸이 타오르며 재로 변하기 시작했다. 동쪽의 야트막한 산에서 해가 완전히 떠오를 때까지, 온 몸이 타오르는 고통조차 느끼지 못하고 그렇게······.
피를 빨리던 소녀는, 이제는 재만 남아 버린 준혁이 마치 아직도 거기에 서 있기라도 하듯 싱긋 웃어 보이며 말했다.
“이제 충분히 먹었어?”
***
옆 나라에서 테러가 발생해 수십 명이 죽든, 옆 동네에서 세 명의 건장한 남자가 말라비틀어진 변사체로 발견되든, 무심한 사람은 여전히 무심했다.
뉴스에서 연신 연쇄살인범에 관해 보도해도 사람들은 집 안으로 숨어들지 않았다. 오히려 밤 무서운 줄 모르고 술집에 모여들어 그 뉴스를 안주삼아 더욱 들썩하게 떠들어댔다.
소녀는 그 무지한 안전 불감증을 탓할 생각까지는 없었다. 달리 보면, 그 덕분에 위험한 밤거리를 어쩔 수 없이 나서야 하는 사람들의 위험이 분산되는 셈이기도 했으니까.
저 무지하고 몰상식한 사람들이 그 위험부담을 대신 짊어져준다면, 그건 그것대로 좋은 일이었다.
그러나 그들 때문에 고요해야 할 새벽의 산책을 방해받는 건 역시 불쾌했다. 지난밤 뉴스 속 위험한 연쇄살인범을 살해한 소녀, 한진아는 미간을 찌푸리며 새벽부터 고성방가를 내지르는 무뢰배들을 노려봤다.
이럴 줄 알았으면 그 녀석을 하루만 더 살려둘걸, 하고 뒤늦게 후회하는 마음이 들었다.
“휘이익~!”
진아의 시선이 향한 그곳, 반대편에서 다가오다 그녀를 지나친 술 취한 청년들 중 한 명이 노려보는 진아의 시선을 느끼고 돌아봤다. 청년은 진아의 모습을 보자 나직이 휘파람을 불어댔다.
곧이어 일행들도 청년을 따라 진아를 돌아봤다. 그들은 방금 전까지 의미 없는 고성방가를 내뱉던 그 입으로 이번엔 진아에 대해 떠들어대기 시작했다.
아름다운 소녀의 모습은 술에 취한 청년들의 시선을 사로잡기 충분했다. 그리고 청년들의 시선과 관심, 무신경하게 내뱉는 불건전한 지껄임 역시 진아의 신경을 건드리기에 충분했다.
불쾌감이 치솟았지만, 진아는 그 불쾌감을 토해내는 대신 시선을 피했다. 어떤 식으로든, 저런 치들과 시비가 붙어봐야 좋을 건 없었다. 진아는 이미 이와 비슷한, 아니 이보다 훨씬 적나라한 상황을 지겹도록 겪어봤다.
그때마다 여러 가지 방법으로 상황을 벗어나려 했지만, 어떤 방법을 동원해도 결과는 항상 같았다. 약간의 차이가 있을 뿐, 결국 감수해야 하는 건 진아의 몫이었다.
사람들은 혀를 몇 번 찰지언정, 사내들이 밤거리를 홀로 돌아다니는 예쁘장한 소녀를 희롱하는 상황을 별로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오히려 몇몇 시대착오적인 사람들은 소녀가 홀로 밤거리를 돌아다녔다는 이유로, 심지어 예쁘장하다는 이유로 소녀의 조심성을 탓하기도 했다.
불쾌한 쪽은 이쪽인데.
그러나 어떤 경우에도, ‘상식의 세계’는 그 예쁘장한 소녀가 사내들을 흠씬 두들겨 패는 상황을 결코 용납하지 않았다. 어떤 방식으로든, 상황을 반전시키는 순간 가해자는 진아가 되어버렸다.
상대가 ‘일반인’의 범주에 머물러 있는 한, 진아는 어떠한 경우라도 상식의 틀을 벗어날 수 없었다.
그러니 그들이 ‘일반인’의 범주에서 벗어나기 전까진, 진아는 아무것도 갚아줄 수 없었다. 그 더러운 흡혈귀처럼.
‘후유······.’
진아는 속으로 한숨을 삼켰다. 조금 지친 걸까. 평소처럼 그저 무시해버리면 될 일이었다. 어차피 저들은 ‘경계’ 안에 있는 자들, 그들의 말과 행동은 진아에겐 아무런 상관도 없었다.
그들이 상식의 밖, 홀로 동떨어진 세계, ‘영(另)의 세계’와 관계가 없는 이상······.
‘그래도 짜증나.’
······그렇다 해도, 그들의 고성방가가 새벽의 고요를 깨뜨리는 건 변함없는 사실이었으니까.
그렇게 생각한 순간, 청년들의 입에서 고성방가 대신 비명이 터져 나왔다.
“으아악!”
“어엇!”
우당탕 쿵!
빠각!
들려온 것은 청년들의 비명뿐만이 아니었다. 거기에 무언가 위험한, 이를테면 사람의 뒤통수가 차갑고도 딱딱한 아스팔트에 세차게 부딪혔을 때 날법한 소리가 더해졌다. 그 끔찍한 소리에 진아는 얼떨결에 고개를 돌렸다.
진아의 눈에 믿을 수 없는 광경이 펼쳐졌다.
서울 중구의 8차선 도로는 대한제국의 수도 서울에서도 가장 번화한 중심지답게, 가장 말끔하게 포장되고 관리되는 도로였다.
그런 눈감고도 걸어갈 수 있을 것 같은 대로에, 청년들은 꼴사납게도 엉망진창으로 엉겨 붙어 널브러져 있었다.
도로 위에 급조된 인간과속방지턱은 놀라운 효과를 자랑했다. 새벽을 틈타 마음껏 내달리던 차량들이 자진해서 속도를 줄였다. 타이어가 아스팔트를 긁는 자극적인 소리가 새벽의 고요를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찢어발겼다. 덕분에 운전자들은 특별히 급조된 과속방지턱을 이용해보는 대참사를 피할 수 있었다.
곧이어 차 창문을 내린 운전자들은 신형 과속방지턱의 경험후기를 경적과 욕설을 곁들여 강력하게 피력했다. 그렇게 진아가 그토록 바라마지 않았던 고요는 저 멀리 날아가 버렸다.
그 시끄러운 소음들 틈에서, 어쩐지 익숙한 휘파람 소리가 파고들었다.
“휘이익~!”
방금 전 청년들이 냈던 소리와 완벽하게 똑같은 휘파람 소리였다. 진아는 한숨을 내쉬었다. 이런 장난을 치는 녀석은 한 명밖에 없었다. 아니, ‘명’이라고 부를 수 있으려나.
진아는 돌렸던 고개를 바로 했다. 그러자 방금 전까진 없었던 한 소년이 진아를 마주 보며 서 있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