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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상검형(無狀劍形) 1화

2016.06.29 조회 1,974 추천 15


 서장 미안하다, 연자여······
 
 
 창궁무애검법을 펼치기 위해선 창궁무애검이 필요하고 사일검법을 펼치기 위해선 사일검이 필요하다.
 그 어떤 고절한 절정 검법이라 할지언정 창안할 때 쥐고 있던 검의 특색에선 벗어날 수가 없다.
 나아가 검을 쥔 자가 고수이고 검을 수족처럼 다스릴수록 검의 특색에 맞춰서 만들어지게 된다.
 그것이 검법이 가지고 있는 한계점이다.
 때문에 신검십이세와 무상검형은, 결코 이룰 수 없음을 이제야 깨달았다.
 그러니 연자여, 나와 인연이 닿았다면 어서 빨리 검을 꺾고 길바닥에나 나앉아라.
 이룰 수 없는 검법을 남겨 미안하다, 연자여······.
 
 “······이런 염병할 놈이. 이런 건 맨 앞장에 넣었어야지.”
 
 
 1장 거지 유운룡
 
 
 “으와아······.”
 “응? 왜 그러니, 혜아야?”
 할아버지의 물음에 손녀는 자그마한 손가락으로 담벼락을 가리켰다.
 “거지 오빠가 앉아 있어요.”
 “그렇구나.”
 할아버지는 대수롭지 않게 대답하고는 발을 멈추지 않았다.
 그러나 손녀는 쭈그려 앉아 있는 거지에게로 쪼르르 달려가서 말을 걸었다.
 “거지 오빠. 오빠는 왜 여기 앉아 있어요? 집에 안 들어가세요?”
 “······.”
 “우웅. 집이 없어요?”
 “······아가씨는 천자문 열심히 외워. 오빠처럼 되지 말고.”
 꼬르륵.
 때마침 거지의 배에서 소리가 났다.
 처절하게 해진 옷에 객잔 담장에 쭈그려 앉은 모양새에 배곯은 소리까지 나니 불쌍해 보였다.
 손녀는 할아버지에게 달려가서 투정을 부렸다.
 “할아버지, 저 거지 오빠에게 비취교라도 사 줘요.”
 “허허허······.”
 할아버지는 난처한 웃음을 지었다.
 시장 바닥에 거지가 한둘인 것도 아니고 이런 식으로 돕다 보면 끝이 없다.
 일반 교자도 아니고 부추로 색을 내고 해물을 채운 비취교는 특히 더 그렇다.
 사천 같은 내륙 지방에서 비취교는 이미 교자를 초월한 음식이다. 수라상에도 오르는 음식이다.
 ‘그래도 불쌍한 이를 돕지 못하게 하는 것보다는 돈 몇 푼 쓰는 게 낫겠지.’
 어릴 적에 해 보는 한두 번의 적선은, 분명히 인성 교육에 좋은 영향을 끼친다.
 “그러려무나. 은전을 좀 줄 테니 객잔에 가서 사다 주렴. 잔돈은 꼭 받아 오고.”
 할아버지는 주머니에서 은전 몇 개를 꺼내 손녀에게 쥐어 주었다.
 손녀는 해맑게 웃었다.
 “헤헤, 할아버지가 최고예요. 금방 사 올게요!”
 손녀가 객잔 입구를 향해 쪼르르 달려갔다.
 짧은 다리였지만 나름대로 경공을 놀리는 게 봐 줄 만은 했다.
 잠시 후, 객잔을 나온 손녀는 거지에게로 다가가 비취교 두 개를 내밀었다. 다른 손에는 잔돈을 꼬옥 쥐고 있었다.
 “거지 오빠, 이거 먹어요. 혜아가 좋아하는 거예요.”
 “······.”
 거지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양손을 내밀어 비취교를 받들듯이 받았다. 자존심을 세우기에는 굶은 시간이 너무 길었다.
 크지도 않은 비취교 두 개를 한 번에 입에 넣고 우물우물 씹었다.
 꼴깍.
 쳐다보고 있던 손녀의 목에서 침 넘기는 소리가 났다.
 좋아하는 거라 말했으니 거지 오빠가 하나는 줄 것이라 생각했었다.
 두 사람의 눈이 잠시 허공에서 부딪쳤다.
 거지의 입에는 아직 씹다 만 비취교가 들어 있었다.
 “맛있어요?”
 “응.”
 “네.”
 “음.”
 “······.”
 잠시 말이 없었다.
 두 사람 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를 몰랐다.
 하지만 거지는 비취교를 삼키고 싶었다. 먹기 전이었으면 모르되 입안에서는 이미 달달한 기름기가 녹아내리고 있었다.
 ‘먹고 죽자.’
 큰맘 먹고 단번에 삼켰다.
 꿀꺽.
 동시에 손녀의 목에서도 침이 넘어갔다.
 꼴깍.
 “······잘 먹었어, 착한 아가씨.”
 “네에······.”
 뒤에서 흐뭇한 표정으로 지켜보던 할아버지가 입을 열었다.
 “이제 그만 가자꾸나. 그 청년이 곤란해하겠구나.”
 “으응, 알았어요. 그럼 거지 오빠, 힘내세요.”
 손녀는 거지에게 다소곳하게 허리를 굽혀 인사하고는 할아버지에게로 가 찰싹 붙었다.
 “헤헤.”
 “녀석. 어서 가도록 하자.”
 “네!”
 할아버지와 손녀는 거지를 뒤로하고 발걸음을 옮겼다.
 그 조손이 몇 발자국 가지 않았을 때 거지가 입을 열었다.
 “아가씨, 방금 전의 경공은 세 걸음 더 일찍 속도를 줄이려고 해 봐. 그럼 깔끔하게 멈출 수 있을 거야.”
 손녀의 눈이 동그래졌다.
 “정말요?”
 고개를 돌려 할아버지를 쳐다보았다.
 할아버지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맞다. 충분한 속도가 나올 때까지 가속한 다음에 멈추려고 해서 한 박자 늦었었지. 혜아의 공부가 부족한 걸 보니 조만간 담벼락에 가서 나앉겠구나, 허허.”
 손녀가 볼을 부풀렸다.
 “거지 오빠가 혜아보다 잘 알 리가 없어요.”
 “분하면 노력하려무나.”
 “피이.”
 손녀는 짐짓 화가 난 태도로 성큼성큼 걸어가기 시작했다.
 할아버지는 그런 손녀를 보며 미소를 짓다가, 뒤를 슬쩍 돌아봤다.
 “무공을 배웠나?”
 “소싯적에요. 적선받을 정도에서 멈췄지만요.”
 “······욕심이 과하면 다치는 법이네.”
 “네?”
 그게 뭔 뚱딴지같은 소리냐는 표정을 짓는 거지를 향해 할아버지가 은전 한 개를 날렸다.
 “혜아의 조언에 대한 값은 거기까질세.”
 그러고는 강렬한 눈빛으로 거지를 한 번 쏘아보고는 손녀의 뒤를 쫓아 걸음을 옮겼다.
 거지는 고개 바로 옆 돌 벽에 박힌 은전을 바라보다가 툭 뽑았다.
 은전을 한참 동안 바라보다가 머리를 긁었다.
 “내가 뭘 잘못 말했나?”
 
 사천성 성도에는 사람이 많이 다닌다.
 사천 특유의 강렬한 맛을 찾는 여행객들은 물론이고 아미파와 청성파, 점창파, 당가까지 위치한 만큼 무인들도 많이 오가는 지역이다.
 구역에 따라서는 민간인보다 무림인 구경이 더 쉽기도 하다.
 거지 청년 유운룡은 하늘을 보고 시간을 감안했다.
 “슬슬 올 때 됐구만. 예정에 없던 비싼 교자를 먹었더니 배만 더 고파졌어, 쩝. 빨리 와라, 이놈들아.”
 유운룡은 담벼락을 돌아 객잔 뒤뜰로 들어갔다.
 이 시간쯤 되면 특별히 찾아와서 적선해 주는 사람들이 있다.
 현 무림 최대의 후기지수 양성 교육소, 정무학관의 수련생들이다. 굳이 불특정 다수에게 힘들게 구걸할 필요가 없다.
 방금 전만 해도 이마에 은자 하나 박을 뻔했다.
 삼 년 동안 쌓은 내공 있긴 하지만 그거 믿고 객기 부릴 생각은 추호도 없다.
 안전한 게 제일이다.
 “하여튼 노인이랑 애들만큼 위험한 게 따로 없는 동네라니깐.”
 배를 어루만지며 앉아 있자 잠시 후에 일단의 무리들이 객잔 뒤뜰에 나타났다.
 “형! 저희 왔어요!”
 “오오, 왔구나.”
 우르르 몰려온 무리는 유운룡보다 다소 어려 보이는 청년들이었다.
 유운룡이 싱글싱글 웃으며 물었다.
 “가서 칭찬 좀 받고 왔어?”
 그 한마디에 청년들이 흥분해서 입을 열었다.
 “조별 대련에서 일등 찍었어요!”
 “전 사일검법의 성취가 팔성으로 올라서 문파 사람들 분위기가 장난 아니에요. 영웅 됐어요, 어제.”
 “형이 가르쳐 준 대로 했더니 검격이 한층 더 예리해지더라고요. 서 소저의 눈빛이 달라지네요, 하핫.”
 “자식들.”
 유운룡은 고개를 끄덕이며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그러고는 손을 내밀었다.
 “그럼 오늘 치 적선.”
 그 말에 청년들이 허리춤에서 주머니 몇 개를 풀러 건넸다.
 사일검법의 성취가 올랐다고 한 청년은 아예 큰 보따리 하나를 내놨다.
 “몸보신 좀 하시라고 교관 식당 털어 왔어요. 들키면 저 죽는 거 알죠?”
 “교, 교관 식당이라니······.”
 유운룡의 눈가에 눈물이 살짝 맺혔다.
 “너 이 자식, 형을 위하는 씀씀이가 참으로 크구나. 오늘은 뭘 봐 줄까? 검강이라도 다듬어 줄까?”
 청년이 머쓱한 웃음을 흘렸다.
 “검강이라뇨. 그건 아직 멀었죠. 내공이 받쳐 줘야 되는 건데 아직 일 갑자는 어림도 없어요.”
 “십오 년이면 충분한데 무슨 소리야?”
 “예?”
 청년이 뜨악한 표정을 지었다.
 아무리 절세의 재능을 타고났다고 해도 검기만 해도 이십 년 내공은 필요한 게 상식이다.
 하물며 검강은 말할 것도 없다.
 “에이, 설마요. 말도 안 되죠. 그럼 저희들 전부 다 가능하다는 건데, 그렇게 되면 신진십룡(新進十龍)은 저희가 다 채우게요? 농담 마세요. 이건 그냥 그동안 도움받은 게 고마워서 챙겨 온 거예요.”
 청년이 정색을 하며 손사래를 치자 유운룡은 피식 웃었다.
 “됐음 말고. 어쨌든 이건 잘 먹으마. 안 그래도 아까 입에 기름칠당해서 무지 배고팠던 참이야.”
 유운룡은 주머니 속에 든 음식들을 하나씩 확인한 다음 큰 보따리를 풀었다.
 찐 돼지갈비와 갖은 산나물, 신선한 향채, 닭튀김 등이 한가득 담겨 있었다.
 “크, 맛있겠다. 이게 얼마 만에 먹는 고기냐. 우적우적.”
 입에 기름이 묻는 것도 상관 않고 허겁지겁 뜯어먹었다.
 바로 앞에서 청년들이 보고 있었지만 신경 쓰는 구석은 조금도 없었다.
 음식물을 입에 가득 채운 채로 입을 열었다.
 “그럼 어디, 꿀꺽, 하나씩 펼쳐 봐.”
 “네!”
 그때부터 진풍경이 펼쳐졌다.
 기다렸다는 듯이 발 빠르게 정렬한 청년들이 일제히 발검을 했다.
 그리고 제각각 배운 검법들을 하나씩 꺼냈다.
 사일검법부터 해서 창궁무애검법, 표풍검법, 적운수라검법, 유운검법 등 구파일방 오대세가의 무공들이 일사불란하게 허공을 수놓았다.
 유운룡에게 검법을 가르쳐 주려는 것이 아니다.
 지적받으려는 것이다.
 유운룡은 검들이 그리는 궤적을 하나씩 눈여겨보며 식은 음식을 입에 우겨 넣었다.
 “맛있다, 맛있어. 같은 요리라고 해도 재료가 다르고 씹는 맛이 다르네, 꿀꺽.”
 보따리의 음식을 삼분지 일쯤 먹었을 때 청년들의 검이 하나씩 멈췄다.
 완전히 다 멈춘 것은 절반을 먹어 치웠을 때였다.
 유운룡은 더러운 소매로 입가를 대충 닦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틀 사이에 많이들 좋아졌네. 사일이는 어깨 튕기는 걸 좀 더 부드러우면서 탄력적으로 해 봐. 어깨 근육도 기르고. 창궁이는 좀 더 넉넉한 마음으로 하늘처럼 휘두르면 되겠다. 음······ 비 갠 뒤 포근한 구름들이 노니는 하늘처럼 휘두르면 될 거야. 표풍이는······.”
 유운룡의 설명이 끝나자 사일이라 불렸던 청년, 종남파의 일대제자인 주진혁이 뒷머리를 긁적였다.
 “형, 제 이름은 주진혁이라니까요. 이제 이름 좀 외워 줄 때 되지 않았어요?”
 “에이, 무리야. 형이 네 이름을 그리 쉽게 외울 정도면 길거리에 나앉았겠냐? 그냥 받아들여.”
 “에휴. 그럼 저 말고 사일검법 쓰는 다른 사람이 오면요?”
 유운룡은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이사일!”
 “또 오면 삼사일이고?”
 “잘 아네.”
 “정말 못 말리신다니까.”
 주진혁의 뒤에서 다른 청년이 입을 열었다.
 “비 갠 뒤 포근한 구름들이 노니는 하늘처럼 휘두르라는 건 대체 무슨 소리예요? 저도 진혁이처럼 풀어서 좀 얘기해 줘요, 형. 꼭 나만 갖고 그런다니까.”
 남궁세가의 남궁창이다.
 유운룡은 남궁창을 보며 고개를 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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