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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가무적 1권 (1)

2016.07.07 조회 1,705 추천 16


 #서장
 
 
 
 대륙의 끝에 위치한 북주는 혹한의 추위가 사시사철 닥쳐오는 곳이었다.
 북주에서도 가장 끝자락에 위치한 대설산은 그 누구의 발걸음도 허락한 적이 없는 신비지처였다.
 평생을 추위와 함께하며 살아온 북주의 인간들조차 대설산의 끝자락이나 겨우 오갈 수 있는 그곳은 사시사철 눈이 내려 사람의 발길을 거부하는 혹독한 추위를 자랑하는 산이었다.
 그중 눈꽃처럼 생겼다 하여 이름 붙여진 설화봉에 위치한 빙혼곡.
 이름 그대로 영혼조차 얼려 버릴 정도인 빙혼곡의 중앙에는 하나의 커다란 동굴이 있는데 항상 살을 엘 듯한 바람이 쏟아져 나와 그 누구도 동굴 안을 끝까지 가 본 이가 없다.
 주민들은 그 동굴을 산 너머 지옥으로 향하는 통로고 지옥에서 불어오는 바람이라 하여 두려워하며 억만금을 준다 해도 절대 가지 않았다.
 한데 그 동굴 입구에 한 초로의 노인이 초조한 표정으로 서성이며 동굴 입구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나이를 짐작할 수 없을 만큼 늙은 노인. 그의 눈가에 주름이 맺혀 있는 것이 고민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하아, 어쩌면 좋단 말인가. 본 궁의 숙원인 음공을 대성하는 거야 기쁜 일이다마는······ 차라리 실패하는 게······ 아냐, 그래도 조사 이래 천 년에 한 번 나올까 말까 한 기재인데 하지만······ 하아, 고민이로다······.’
 노인이 한숨을 쉬며 안절부절못하고 동굴 입구만을 바라보는데 어두운 동굴 입구에서 한 사람이 걸어 나오기 시작했다.
 주위의 세찬 바람에는 아랑곳없이 단정히 정리된 머릿결은 손대면 은분이 묻어 나올 것만 같았고 밝은 달빛을 받아 주변이 반짝이는 듯했다.
 새하얀 피부는 마치 눈 같았고 풍만한 가슴에 허리는 잘록했고 두 다리는 매끈하게 쭉 뻗어 있었다.
 밤하늘의 별보다도 더 아름답게 빛나는 맑은 눈을 가졌으나 아무런 표정도 감정도 새겨지지 않아 미인의 얼굴은 마치 인형을 보는 것 같았다.
 여인은 걸어 나오다 노인을 발견하고는 공손하게 허리를 숙였다.
 “사부님, 나오셨습니까?”
 아무런 감정이 담겨 있지 않은 목소리는 고저조차 없이 무미건조했지만 오히려 그것이 여인의 분위기와 더욱 잘 어울렸다.
 아름다운 목소리를 듣고 노인은 반가우면서도 껄끄러운 표정으로 여인을 맞이했다.
 “그래, 원하는 바는 얻었느냐?”
 “소녀, 사부님이 염려해 주신 덕분에 미흡하나 소성을 이룰 수 있었사옵니다.”
 “음······ 그럼, 어디 한번 보여 봐라.”
 “예.”
 여인은 가만히 서서 호흡을 가다듬었다.
 왼손을 허공으로 쭉 내뻗자 가느다랗고 투명한 얼음의 창이 생성되었다. 그 시간이 찰나라 마치 처음부터 창을 들고 서 있는 듯했다.
 노인은 그 광경에 두 눈을 부릅뜨고는 입을 쩍 벌리며 부르짖었다.
 “빙혼창! 음공을 대성해야지만 생성할 수 있다는 전설상의 경지! 그걸 해내다니!”
 노인의 경악과는 상관없이 여인은 천천히 창을 돌리기 시작했다.
 찌르고, 휘두르고 자유자재로 창을 쓰며 움직이는 여인의 모습은 마치 한 줄기 바람과 같았다.
 어떨 때는 따뜻한 봄바람처럼, 어떨 때는 매서운 광풍처럼 휘몰아치는 그녀의 창법은 한 자락의 춤같이 펼쳐졌다.
 노인은 그 광경에 자신도 모르게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다.
 “아아, 조사 이래 그 누구도 완성할 수 없었던 음공과 설풍창법을 저리도 쉽게 펼치다니, 내 이 말년에 무슨 복인지······.”
 이내 노인은 안색을 찌푸렸다. 고대로부터 내려오던 조사의 유언이다.
 빙궁의 일원이라면 그 누구도 어길 수 없고 따라야만 하는, 하지만 그 누구도 조사의 유지가 실제로 이행될 수 있으리라곤 상상하지도 못한 유언.
 그러나 가장 큰 고민은, 과연 제자가 그 명을 따를까 하는 점이었다.
 제자의 무공이면 어디 가서도 꿀릴 것이 없다. 물론 그럴 리야 없겠지만 수틀리면 확 뒤집어엎어 버리고 뛰쳐나가도 막을 수 있는 사람은 빙궁 내에 아무도 없었던 것이다.
 노인은, 어느새 창법을 마치고 곁으로 돌아온 여인을 바라보았다. 아무런 표정도 없이 감정조차 얼어붙은 것 같은 여인의 눈을 마주 본 노인은 굳은 결심을 하고 여인에게 말했다.
 “화린아······.”
 “하명하소서.”
 “······시집가야것다.”
 “······.”
 노인이 음공을 연마한 지 어언 칠십여 년. 참으로 오래간만에 덜덜 떨리는 추위를 느꼈다.
 
 
 
 해남주.
 말 그대로 남쪽 바다라는 지명을 가진 이곳은 대륙 최남단으로 변경이라면 변경일 수 있으나 지리적으로는 수도인 중천과도 가까웠다.
 풍부한 해산물, 서천과 동천과의 해상무역의 중심지로서 명성을 날리고 있는 곳이며 특히 무림에서 존경받는 문파인 검각이 위치한 곳이기도 하다.
 물론 구파일방의 일원인 해남파 또한 위치하고 있었지만 해남파는 검각에 속한 지파라는 인식이 강했고 해남파 또한 그걸 부인하지 않았다.
 그만큼 검각은 무림에서 검의 종주로 존경받는 곳이기도 했다.
 “하압! 질풍천하!”
 낭랑한 외침과 함께 상대를 향해 혼신의 힘을 다해 검격을 쏟아 넣는 해남파 장문인 구일성은 지금 자신의 처지가 믿기지 않았다.
 느닷없이 검각의 각주가 자신을 찾는다는 말에 가벼운 마음으로 인사도 시킬 겸 본파의 수제자들과 검각으로 올랐다.
 하지만 오랜만에 만난 각주는 대뜸 눈이 휘둥그레질 만큼 아름다운 여인을 소개시켜 주며 자신과의 비무를 명하는 것이었다.
 아무리 해남파가 검각의 한 지파라지만 엄연히 독립된 문파인데 그 문파의 수장에게 대뜸 자기 딸내미뻘 되는 여인과 비무를 하라고 하다니, 구일성은 불쾌한 마음에 투덜거리며 여인과 비무대에 섰다.
 물론 각주에게 항의할 생각은 절대 없었다. 그랬다간 자신을 존경과 선망의 눈초리로 바라보는 수제자들 앞에서 복날 개 맞듯이 얻어터질 게 분명했다.
 처음에는 가벼운 마음으로 선수를 양보했다.
 하지만 단 일 초에 검조차 빼 들지 못하고 어깨에 닿아 있는 상대의 검을 보며 지금 자신이 꿈을 꾸는 게 아닌지 참 의심스러웠다.
 “다······다시 한 번만······.”
 구일성의 요청에 여인은 부드럽게 웃으면서 승낙했다.
 구일성은 상대를 경시하는 마음을 버리고 진지하게 임했다.
 그 결과 일곱 번이나 계속된 비무에 구일성은 단 한 번도 여인의 검을 막지 못했다.
 자신이 알고 있는 가장 강한 수비식과 공세를 온몸의 내공을 끌어 올려 펼쳤지만 여인의 검은 참 신기할 정도로 구일성의 초식을 파훼하며 구일성의 요혈에 살포시 얹혔다.
 “대······대체 그 검은 뭐라 하오?”
 자신의 구명절초로서 단 한 번도 누가 보는 데서는 펼치지 않으며 비밀리에 익힌 질풍십이검의 마지막 검세마저도 그녀는 가볍게 막아 냈다.
 자신의 어깨에 검날을 갖다 댄 여인의 검을 보며 구일성이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여인은 보는 이가 시원해질 만큼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창공검예 제일초식 창공일성이에요.”
 “일초······ 단 일초식도 막지 못한 건가······.”
 구일성은 절망 어린 표정으로 고개를 푹 숙였다. 제자들 보기 부끄럽기도 했지만 딸내미뻘 되는 여인의 단 일초식도 못 막았다는 사실에 고개를 들 수 없었다.
 그런 그를 향해 각주가 다가오더니 구일성의 뒤통수를 손바닥으로 짝 소리가 시원하게 울려 퍼질 정도로 내리쳤다.
 “뭘 그리 세상 다 산 표정으로 풀이 죽어 있는 거냐! 내 나중에 부를 테니 오늘은 이만 내려가거라.”
 “누님은 위로는 못 해 줄망정······ 예, 내려갑니다. 가고말고요.”
 각주의 서슬 퍼런 눈길에 구일성은 본능적으로 목을 움츠리고는 황급히 제자들과 함께 검각을 내려갔다. 각주는 따스한 눈길로 여인을 바라보았다.
 “화연아, 이제 자신이 섰느냐? 저 해남파 장문인은 비록 밴댕이 소갈딱지에 소심하고 꿍한 성격이지만 그 실력만큼은 강호에서도 알아주는 놈이다.”
 “예, 사부님. 한데 비무행이 끝나고 할 일이 있다 하셨는데 그게 무엇인지요?”
 각주는 안쓰러운 눈길로 화연을 바라보았다.
 자신은 운 좋게 피해 갔지만 화연은 딱 적령기다.
 선조의 유지를 무시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그리고 자신이 생각해도 애가 좀 특이해서 그렇지 며느릿감으로 화연만 한 여인이 없었다.
 각주는 한숨을 내쉬며 화연에게 말했다.
 “화연아······.”
 “예?”
 “시집가야것다.”
 “에이, 사부님두 참······.”
 화연은 수줍게 웃으면서 쑥스러운 듯 볼을 발그스름하게 물들였다.
 “화연아······.”
 “예?”
 “이건 검각의 제자라면 피할 수 없는 선조의 유지다. 이미 상대도 정해져 있다.”
 화연은 두 뺨을 발그스름하게 물들이며 수줍게 웃는 모습 그대로 굳어졌다.
 
 
 
 홍등가.
 매일매일 손님을 유혹하는 여인네들의 콧소리와 호탕한 웃음소리, 우당탕 물건 깨지는 소리가 삼중주를 이루어 합주를 하는 곳. 그런 시끄러운 홍등가의 뒷골목에서도 제일 후미진 곳에 위치한 허름한 건물.
 지하의 어두운 그곳에서 지금 세 사람이 희미한 초롱불 하나만을 켜 놓은 채 심각한 표정으로 뭔가를 논의하고 있다.
 희미한 초롱불에도 반짝이는 하얀 손의 노인이 말했다.
 “구가야, 귀곡이 무너졌다며?”
 구가라 불린 노인은 자신의 자랑인 흰 수염을 만지작거리며 침통한 음성으로 말했다.
 “마룡방이랑 붙어서 깨졌다는군······.”
 “마룡방은?”
 “청방한테.”
 “청방은?”
 “흑림한테.”
 “흑림은?”
 “조화원한테.”
 “조화원은?”
 “고년이 먹었지.”
 “끄응······ 제길! 어쩌다가?”
 “거 왜, 귀곡주가 몇 해 전 첩실 하나 들였잖아.”
 “들었어. 노친네 정력도 좋지.”
 “그 들여놓은 첩실이 마룡방주가 찾던, 어렸을 때 헤어진 여동생이라더군······.”
 “진짜?”
 “아니. 고년이 철저하게 여동생으로 가장해서 믿을 수밖에 없게 만들었더군. 당연히 마룡방주는 눈이 뒤집혀서 귀곡으로 쳐들어갔고 귀곡주는 뭣도 모르고 맞서 싸우다가 다 말아먹고······.”
 “근데 마룡방은 왜 청방이랑 싸운 거야? 귀곡이 가지고 있던 이권만 해도 한동안 소화하기 힘들 텐데?”
 “전승 축하연에서 마룡방주가 여동생이라고 소개시키려고 데리고 나온 여인이 연회장에서 마룡방주 심장을 찔러 버렸댄다. 알고 봤더니 십 년 전 마룡방이 정가장을 멸문시킬 때 살아남은 정가의 여식이라는군.”
 “······아무리 그래도 칼 밥 먹고 사는 놈이 일반 여인네가 찌르는 칼을 못 피해?”
 “고년을 살문에서 교육시켰다는군······.”
 얘기를 나누던 두 노인의 눈초리가, 가만히 듣고만 있던 왼쪽 뺨에 긴 검상이 있는 노인에게로 향했다.
 물론 고운 눈초리는 아니었다.
 “선가야, 넌 살문의 문주라는 놈이 어떻게 문도 하나 간수 못 하냐?”
 선가라 불린 노인은 가소롭다는 눈초리로 두 노인을 바라보며 말했다.
 “남 말하네. 고년이 살문을 장악한 지 벌써 3년째다. 그러는 공가 너는 별다른 거 있냐? 공공문에서 하루아침에 쫓겨난 주제에.”
 공가라 불린 하얀 손의 노인은 발끈하여 뭐라 항변하려 했지만 구가라 불린 노인이 손을 들어 제지했다.
 “자, 자! 여기서 싸우지들 말고 계속 들어봐. 아직 안 끝났어.”
 “뭐가?”
 “마룡방주를 찌른 그 여자가 말이야······ 웃기게도 마룡방주의 심장에 청룡비를 박아 넣었더군.”
 “청룡비? 청방의 방주가 늘 가지고 다니면서 애지중지하던 그거?”
 “그래. 게다가 청방과 마룡방은 딱 알맞게 사이가 안 좋지.”
 “하지만 아무리 청방이래도 상인 집단이라 쓸 만한 놈들은 없었을 텐데. 게다가 청방 뒤를 봐주는 놈이 무주지사 곽현진 아니었나?”
 “초반엔 마룡방이 다 쓸어버릴 듯했지만 문주가 없다 보니 슬슬 지 밥그릇 챙기겠다는 놈들이 나왔지. 고년도 그걸 부추겼고.”
 “그래서 결국 지들끼리 밥그릇 챙기겠다고 까불다가 청방한테 뒤통수 맞았다?”
 “그렇지. 힘 다 빠진 마룡방을 쉽게 먹어 버렸지.”
 “근데 흑림은 또 왜 끼어들어?”
 “고년 때문이지. 청방의 주 수입원이 뭐냐?”
 “밀염이잖아.”
 “쩝, 청방 놈들 마룡방 친다고 있는 돈, 없는 돈 다 써서 무사들을 끌어모은 것까지는 좋았는데 마룡방 깨고 나서 자금줄이 다 끊겨 버린 거지.”
 “엥? 고놈들이 어떤 놈들인데 자금줄이 말라?”
 “흑림 애들이 길목을 탁 틀어막고는 청방 애들만 못살게 구니까 돈 들어오는 데가 없었던 거지. 결국 돈 못 받은 낭인들한테 가진 재산 다 털어 주고 개털 됐다.”
 “그럼 흑림은? 흑림은 어쩌다가 조화원한테 망했다는 거지? 듣기로는 관군한테 토벌당했다던데?”
 “조화원이 어디냐? 대륙의 모든 기루와 주점을 한 손에 틀어쥐고 있는 곳 아녀!”
 “그렇지. 게다가 고년이 조화원주를 언니라 부르는 곳이고.”
 “흑림 애들 이기고 나서 좋다고 술 퍼마시다 기녀들이 살살 꼬드기니까 지 잘났다고 산채에 대한 정보를 죄다 나불댔다는군······. 조화원은 고 정보를 청방 뒤를 봐주던 무주 지사한테 고스란히 일러바쳤고, 곽현진은 좋다구나 하고 관군을 이끌고 가서 싹 다 뒤집어엎어 버렸지.”
 “하지만 곽현진은 중천으로 소환당했잖아? 뇌물 수수 및 밀염 혐의로.”
 “흑림이 정리되고 나서 조화원주가 중천의 법현각에다가 곽현진의 비리 사실을 죄다 꼬발랐다더군.”
 “······그럼 정말 다 망한 거냐? 딸랑 삼 개월 만에?”
 “그래. 우리가 평생이 걸려도 못 한 일을 고년은 딱 삼 개월 만에 해치웠다.”
 “제길, 그래서 지금 우리가 여기 숨어 있는 거군. 멀리 변방으로 도망칠 시간도 없이 말이야······.”
 “그래, 너무 빨랐어. 미처 시간을 벌기도 전에 일이 다 끝나 버려서 황급히 여기에 숨은 거지.”
 “음······ 여기는 안전할까?”
 “크크, 고년이래도 여기는 절대 못 찾을 거다. 여기는 내 최후의 피신처로 아무도 모르는 곳이니까.”
 “그렇다면 다행이고······. 근데 고년이 지금쯤 두 번째 봉서를 열어 봤겠지?”
 “아마도. 하아······ 그거 보면 우리를 잡아먹으려고 할 텐데······.”
 “흥! 알긴 아는군요!”
 뾰족한 고성과 함께 ‘쾅!’ 하는 소리가 들리더니 어두운 골방의 문을 박차며 한 명의 여인이 뛰어 들어왔다.
 붉은 머리에 눈에 확 띄는 미모와 이를 돋보이게 만드는 화려한 봉황이 수놓인 비단 궁장을 걸친 미인은 골방 구석에 모여 애처롭게 서로를 부둥켜안고는 바들바들 떨고 있는 세 노인을 향해 기세등등하게 씨익 웃으면서 말했다.
 “이런 곳에 숨으면 제가 못 찾을 줄 알았나요? 자, 설명해 보시죠?”
 여인이 왼손을 내밀며 펼친 두루마리에는 단 한마디만 적혀 있었다.
 제자야, 시집가야겠다.
 
 
 
 오래전 태초라 불리는 시절, 수많은 무리가 소리 소문도 없이 나타났다.
 한 주먹에 바위를 부수고, 한 걸음에 땅이 갈라지며, 하늘을 휙휙 날아다니고, 온갖 귀신과 괴물을 부리고, 불덩이를 뿌리며 바람을 조종하는 이들은 이 땅의 주민들에겐 신이나 다름없었다.
 그들은 원주민에게 문명을 전파하고 같이 동화되어 살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뿐.
 자신들을 신으로 떠받드는 원주민들과 같이 동화되어 살려는 무리와 신으로서 추앙받으며 살려는 무리로 나뉜 그들은 격렬한 전투를 벌이기 시작했다.
 신들의 전쟁이라고 불리는 전쟁이 끝난 뒤, 어째서인지 그들은 사라지고 남은 건 그들이 남긴 문명의 잔재밖에 없었다. 시간이 지나 전쟁의 상처를 복구하고 문명이 발전함에 따라 나라가 세워지고 망하기를 수차례.
 마침내 대륙을 하나로 통일한 제국이 시작되었다.
 그리고 제국의 초대 황제는 자신을 도와 제국을 건국하는 데 앞장선 세 은인의 노고를 잊지 않았다.
 그동안 음성적으로만 쉬쉬해 왔던 강호의 존재를 공식적으로 선언하여 무림이라 칭하고 관과의 불가침 관계를 선언했다.
 이 선언 이후로 무림은 제국과 함께 크게 발전해 나갔다.
 하지만 흥이 있으면 망도 있는 법. 수백 년을 이어 오던 제국은 천혜의 험지를 기준으로 결국 네 조각으로 나뉘었다. 이를 각각 동천, 서천, 중천, 남천이라 불렀다.
 무림 또한 제국과 함께 그 성질에 따라 나뉘고 말았으니 법과 도를 따르던 자들은 동쪽으로, 술과 예를 추구하던 자들은 남쪽으로, 기와 내를 공부하는 자들은 중천에 그리고 마나라 칭하는 특유의 마와 선을 찾는 자들은 서천으로 뿔뿔이 흩어지고 말았다.
 서로의 존재는 알고 있으나 험난한 지형이 가로막고 있어 활발한 교류가 없는데 관에서는 십 년마다 한 번씩 사절단만 오갔다.
 호기심 강한 탐험가들과 무역을 통해 이익을 추구하는 상인들만이 왕래할 뿐인 각 천은 그렇게 갈라진 후, 무림과 관의 관계처럼 서로의 영역을 침범하지 않고 각자의 방식으로 발전해 오기를 또 수백 년.
 그리고 지금으로부터 약 이백여 년 전, 중천에는 우내삼존이라 불리며 사마외도를 가리지 않고 모든 강호인들로부터 존경을 받고 있는 세 명의 초인이 나타났다.
 
 한 자루의 검으로 절대자의 위치에 오른 검존 한시민.
 
 한 자루 창으로 세상을 모두 얼려 버린 빙존 설성룡.
 
 두 주먹으로 흑도를 평정한 마존 광무연.
 
 호사가들은 세 명의 절대자들을 떠받들면서도 그들 중 누가 진정한 천하제일인인지 궁금해하며 쉴 새 없이 떠들어 댔다.
 우내삼존 또한 진정한 천하제일인을 가리기 위해 한자리에 모이는 것에 동의, 비밀리에 중천과 동천의 경계선상인 해룡산맥에 모였다.
 하지만 명성에 걸맞은 무력을 지닌 세 사람은 초인이라 불리는 이들답게 장장 석 달여를 먹지도 자지도 않은 채 주야장천 싸워 댔으나 좀처럼 승부가 나지 않았다.
 결국 기진맥진한 채 서로를 노려보던 세 사람은 내상은 내상대로 입고 내상으로 인하여 더 이상 내공이 모이지 않자 이 방식으로는 승부가 나지 않는다고 판단.
 마존 광무연의 제안에 따라 산을 내려오는 길 중턱에서 기다리다 처음 만나는 사람에게 자신들의 무공을 보여 주고 그 사람에게 판단을 맡기기로 결정했다.
 하지만 그들은 생각지도 못한 실수를 하고 만다.
 가뜩이나 산세가 험하고 동천과의 왕래도 없는지라 산을 오르는 사람이 거의 없고 간간이 사냥꾼들이나 오르는 해룡 산맥 근처에서 경천동지할 위세로 석 달여를 싸워 댔으니.
 검존 한시민의 일 수에 산이 갈라져 계곡이 생기고 빙존 설성룡의 찌르기에 높은 산봉우리가 평지로 변하고 마존 광무연의 주먹질에 산이 와르르 무너지니 그 누구도 산맥에 접근할 생각을 하지 못한 것이다.
 
 그렇게 다시 한 달여의 시간이 지나갔다.
 우내삼존이 아무리 초인의 반열에 올랐다지만 기본적으로 먹고는 살아야 했다.
 평상시라면 아무것도 먹지 않은 채 일 년이 넘도록 버틸 수 있지만 지금은 온몸의 내공을 죄다 끌어 쓰고 내상 또한 점점 심해지고 있는 상태였다.
 그놈의 자존심이 뭔지 서로의 눈치만 보며 내상을 치유할 생각도 못 하고 산맥 중심에서 쫄쫄 굶으며 근성으로 버티던 세 사람은 마침내 제국이 갈라진 후 왕래가 거의 없어진 동천에서 넘어오는 자를 발견했다.
 삼존에겐 하늘에서 내려온 구세주로 보일 지경인지라 첫 만남에도 청년에게 상당한 호감이 갔다.
 반가운 마음에 뛰쳐나간 세 사람은 동천에서 온 자에게 자초지종을 설명했다.
 그리고 설명을 다 들은, 동천에서 넘어온 호감 가는 청년이 말했다.
 “장난하쇼? 그나마 지도에 나와 있는 길이란 길은 죄다 무너지고 뒤집어져서 없는 길을 타고 넘는다고 힘들어 미치것구만, 갑자기 튀어나와서 한다는 말이 누가 더 잘났는지 정해 달라고? 참 나, 노친네들! 할 일이 그렇게 없수? 아, 누가 더 잘났는지 내가 알 게 뭐야! 힘든 사람 붙잡고 장난질은······.”
 중천에서 우내삼존이라 하면 일단 엎드리고 보는 사람들의 반응만 겪어 보았기에 청년의 예상치 못한 반응에 아무 말도 못 하고 어처구니없는 표정을 지었다. 호감은 순식간에 사라지고 말았다.
 청년은 우내삼존을 무시한 채 산맥을 내려가기 위해 바삐 움직이려 했지만 우내삼존은 그들 스스로 처음 만나는 자의 판단에 맡기기로 맹세하였기에 그를 끈질기게 붙잡고 늘어졌다.
 “아, 거참 끈질기네. 관심 없다니까! 바쁜 사람 붙잡고 지금 뭐하자는 거여!”
 “허허, 그러지 말고 잠시만 시간을 내서 우리의 무공을 보고 누가 더 나은 것 같다고 말 한마디만 해 주면 된다네.”
 “아따, 그 잠시의 시간도 없다니까!”
 하지만 검존의 부탁도······.
 “네 이놈! 한주먹 거리도 안 되는 놈이 죽고 싶냐! 얌전히 따라와!”
 “헐씨구? 노인장, 잘못하면 치겠수? 자, 때려! 때려 봐! 때려 보라니까?”
 마존이 살기를 내뿜으며 외친 협박도······.
 “······이래도?”
 “오오! 안 그래도 빙 돌아가기 귀찮았는데 노인장, 고맙수다.”
 빙존이 바위를 부수고 나무를 산산조각 내는 무력시위를 펼쳐도 소용이 없었다.
 하지만 그대로 보낼 수는 없는 일. 성질 같아선 그냥 조용히 묻어 버리고 딴 놈을 기다리고 싶었으나 이대로 보내고 또 언제 올지 모를 사람을 기다리기엔 그들의 배가 너무 고팠다.
 그냥 운기조식을 통해 내상을 치유하면 될 것을 그놈의 자존심이 뭔지······.
 먼저 나서서 내상을 치료하자고 말 꺼내는 건 죽기보다 싫은지라 남은 방법은 청년에게 매달리는 것뿐이었다.
 결국 그들의 끈질긴 애원에 지쳤는지 청년이 말했다.
 “아, 알았어요! 거참, 노친네들! 고래 심줄보다 질기기는······.”
 “오오, 허락하는 건가? 자, 그럼 나부터 시작하겠네. 잘 보게나, 이 검법은 폭풍검법으로······.”
 “아, 잠깐! 내 가만 보니까 댁들 방식이 틀렸어요.”
 “그게 무슨 소리인가? 방식이 틀리다니?”
 “셋 중에 누가 더 잘났는지 정한다고 해 봤자 그런 건 아무 소용 없죠. 거, 화무십일홍이라 했잖아요. 아무리 지 잘났다고 떠들어 봐야 뭔 소용이에요. 후손들이 잘해야지! 지금 댁들 사문에 댁들만 한 인재가 있어요? 없죠?”
 우내삼존은 그 말에도 일리가 있다고 생각했다. 자신의 제자라는 놈들이나 사문의 문도들을 평가하자면 그들 수준에선 영 시답지 않은 놈들뿐이었다.
 “그래서 내가 제안하는 건데, 나 이참에 여기 중천에다가 내 가문을 세울 생각이오. 노친네들은 댁들 사문으로 돌아가 후진 양성에 힘쓰는 거요. 그래서 차후 내 가문으로 보내서 평가를 받으면 될 거 아니오.”
 “클클클, 그거 좋은 생각이다. 놈, 보기보다 똑똑하구만. 화무십일홍이라, 큭큭. 그 말은 흑도에 몸담고 있는 내가 저 두 놈보다 훨씬 더 절실하게 느끼는 말이지. 암, 그렇고말고.”
 마존의 말에 나머지 두 명은 수긍하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배신과 배반이 당연하게 벌어지는 흑도였기에 그런 흑도를 두 주먹으로 일통한 마존은 당당히 우내삼존의 위치에 오를 수 있었던 것이다.
 “단 우리 가문으로 무공을 평가받으러 찾아오기 위해선 몇 가지 조건이 있수다.”
 “조건?”
 “첫째, 여자라야 해요.”
 “여자?”
 “아, 남자보단 여자가 더 무공을 익히기 힘들 것 아니에요?”
 “그, 그건 그렇지만······.”
 “둘째, 찾아오는 건 좋은데 다 비슷한 또래의 음······ 젊은 여인네들이면 되겠군요.”
 “아니, 어째서냐!”
 마존의 반발에 청년은 피식 웃으면서 말했다.
 “그럼 꼬부랑할망구랑 예쁜 처자가 와서 무공을 펼치는데 누굴 뽑으시겠수?”
 “으음······ 납득이 가긴 하지만 이건 뭔가 아닌 것 같은데?”
 “셋째, 찾아오는 그 사문의 후손들은 무공 실력이 적어도 댁들 수준은 돼야 해요.”
 “말도 안 되는 소리! 지금 우리의 경지는 평생을 걸쳐 이룩한 경지이거늘, 그걸 이삼십 대의 젊은 여자가 이뤄야 한다니 그 전에 문파가 망하겠다.”
 “그럼 지는 거고.”
 우내삼존은 빙글빙글 웃으며 염장을 지르는 청년을 잡아먹을 듯이 노려보았다.
 하지만 청년은 조금도 무서워하는 기색 없이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그리고 넷째, 우리 가문으로 찾아올 때 우리 가문에도 비슷한 또래의 남아가 있어야만 해요.”
 “아, 그건 또 왜!”
 “그래야 불쌍한 우리 후손 장가보낼 거 아니우.”
 우내삼존은 청년의 말에 입을 딱 벌렸다.
 자신들과 비슷한 경지의, 그것도 한 명도 아니고 세 명이라면 중천무림을 일통할 수 있는 막강한 저력이다.
 그걸 날로 먹겠다는 심보라니, 청년의 배포에 어처구니가 없었다.
 항상 냉정하고 차분하게 살아왔던 빙존 또한 저 어처구니없는 청년의 말에 울화통이 뻗치는 걸 간신히 진정시키고는 청년에게 말했다.
 “여자여야 하고, 나이는 이삼십 대에다 무공 실력은 우리들 수준이고 세 사문에서 동시대에 나와야 하며 너의 가문에서 또한 또래의 남아가 있어야 한다? 그런 조건이면 시간이 얼마나 오래 걸릴지 아무도 모르는 노릇. 하지만 만에 하나 동시대에 우리의 사문에서 자네의 조건대로 제자를 배출하긴 했으나 그 전에 자네가 세운 가문이 망한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혈혈단신으로 중천에서 가문을 일구긴 쉬운 일이 아닐 텐데?”
 빙존의 말에 청년은 씨익 웃으면서 말했다.
 “그러니까 댁들 사문에서 안 망하도록 비밀리에 우리 가문을 보호해 주면 되죠.”
 청년의 말에 우내삼존은 저놈이 제정신인가 하는 표정으로 청년을 살펴보았다.
 우내삼존의 사문에서 보호하는 가문······.
 그야말로 천하제일가라 할 수 있었다.
 하지만 청년은 별다른 표정의 변화 없이 심드렁하게 결정타를 날렸다.
 “아, 싫음 그냥 가든가.”
 결국 생전 처음 겪는 굶주림과 자칫 잘못하다간 내상을 치료하지 못할 거란 위기감에 우내삼존은 별수 없이 청년의 조건을 수락했다.
 맹세를 하면서도 설마 그런, 번개를 연속으로 수십 번 맞을 확률보다 낮은 일이 일어날 거란 생각은 못 했던 것이다. 그들은 지키기로 맹세한 뒤 각자의 사문으로 흩어졌다.
 청년은 세 노인이 빠르게 사라진 방향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하따, 노친네들 질기기는. 뭐 그런 턱도 없는 조건을 붙여 놨으니까 더 이상 귀찮게 하지 않겠지. 킥킥, 내가 생각해도 참 어처구니없는 조건이란 말이야. 천 년이 지나도 실현 불가능할걸? 역시 난 똑똑하단 말이야. 그나저나 중천의 수준도 많이 올랐군. 무림인들도 한 십여 년 정도 더 수련해야 저 정도 경지에 오를 텐데. 흠, 중천의 무공 습득 정도가 빠른데?”
 청년은 중얼거리며 바삐 걸음을 놀려 산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하지만 청년이 모르는 사실이 있었다.
 동천의 무림은 선조의 유지라면 지키기는 하지만 그 유지란 게 이렇게 허무맹랑한 거라면 지키는 척만 하지 실제로 노력하지는 않는다.
 반면에 중천의 무림인이란 자신이 맹세한 일은 어떠한 일이 있어도 지키는 족속들이며 사문의 선조가 지시한 일은 그 사문의 명맥이 끝나기 전까지 무슨 일이 있어도 지켜 나가는 존재들이다.
 이는 동천과 중천의 문화적 차이에서 오는 착각이었으니 우내삼존의 후손에게는 불행이었고 청년의 후손에게는 행복한 일이었다.
 
 
 
 
 
 마누라가 오다
 
 
 
 중천 상남주 동현 동광시. 이 도시는 대도시라고 하기엔 많이 미흡하고 소도시라고 하기엔 너무 큰 규모를 가지고 있는, 그렇다고 중급의 도시라고 하기엔 또 왠지 모르게 애매모호했다.
 동광시는 빼어난 산천 경관이 있는 것도 아니고, 비옥한 토지를 가진 것도 아니고, 뭔가 특이한 산물조차 나지 않는 정말 평범한 곳이었다.
 많지도 적지도 않은 적당한 수의 상인들이 물건을 가지고 숙식을 위해 머무르며 소비하는 비용이 주요 소득원인 동광시에서는 많은 수의 노동력이 필요했다.
 일자리의 공급 또한 원활했지만 별다른 발전이 없는 그저 흔한 중소 도시 중 하나였다.
 하지만 그런 동광시에도 시민들이 손꼽는 유명한 것이 세 가지 있었다.
 첫째는 동광시의 새로운 시장이 무림의 인물이라는 것이었다.
 검을 잡으면 우아하면서도 기품이 넘쳐 군자라 불리기에 부족함이 없지만, 도를 잡으면 미친개처럼 날뛴다 하여 붙여진 이면쌍검도 막문기는 동광에서 태어나고 자랐다.
 그는 정도니 마도니 하는 것에는 관심 없고 자신이 옳다고 판단한 것은 남들이 아니라고 해도 소신 있게 밀고 나가는 중도적 성향을 지녀 마도로부터도 좋은 평가를 받고 있는 인물이었다.
 지닌바 무공 또한 젊은 나이에 군자십육검과 광견도를 대성하여 절정의 경지에 올라 무림의 후기지수 중 가장 뛰어난 이에게 붙여 주는 칭호인 구룡팔봉의 일원으로 정도 무림맹 상남주 지부장을 권유받았으나 뿌리치고 동광시의 시장으로 취임해 더 유명해진 인물이었다.
 둘째는 취임 후 탁월한 행정 능력과 강한 지도력으로 동광시에서 선량한 시민들의 고혈을 짜 먹는 무뢰배를 일거에 뿌리 뽑아 다시는 자생하지 못하게 막아 버렸다.
 그로 인해 하오배 무리는 발붙일 틈이 없었으며 외부의 무리 또한 기어들어 올 생각을 하지 못해 무림맹의 총단이 있는 대련시에도 존재한다는 무뢰배가 단 한 명도 없는 도시였다.
 셋째로 동광시는 유일하게 거지가 없는 도시였다.
 일하지 않는 자 먹지도 말라는 신념을 내세우고 있었는데 동광시의 거지들에게 일자리를 주선해 주고 살아갈 발판을 마련해 주었다.
 항의를 하러 찾아온 개방도들에게 동광시에 있고 싶으면 일을 하라는 호통과 함께 쫓아 버린 사건은 무림에서도 유명한 일화였다.
 “어이, 금 씨! 벌써 퇴근하는 건가?”
 “아니! 광씨 아저씨, 벌써라뇨! 퇴근 시간에서 이미 반각이나 늦었는데!”
 “허허, 퇴근 시간 하나는 칼일세, 칼이야······.”
 금 씨라 불린 청년 금적산은 유유히 휘파람을 불며 시청 문을 나섰다.
 잡졸 생활을 시작한 지도 벌써 육 개월이 지난 지금, 이제는 무덤덤해질 때도 됐지만 이놈의 칼퇴근은 할 때마다 기분이 좋았다.
 “나 왔다!”
 금적산은 도시 외곽에 위치한 자신의 집으로 들어가며 외쳤다.
 하루 벌어 하루 먹고사는 사람들이 주로 거주하는 구역에 위치한 적산의 초라한 집. 문 앞에는 어울리지 않게 삐까번쩍한 배경에 멋들어진 필체로 금가장이라고 적힌 현판을 내걸어 지나가는 이의 실소를 자아내는 이 자그마한 집이 적산의 유일한 보금자리였다.
 적산의 외침에 양 갈래로 검은 머리를 땋고, 낡았지만 깨끗한 옷을 입은, 이제 막 애티를 벗고 소녀티를 내기 시작한 여자아이가 부엌에서 쪼르르 달려 나와 적산의 품에 안겼다.
 “와아! 오라버니, 오셨어요?”
 적산은 자신의 품에 안겨 든 아이를 번쩍 들어 올려서 마당을 빙글빙글 돌기 시작했다.
 “청림아, 보고 싶었어〜.”
 “꺄악, 오라버니! 내려 주세요.”
 “우하하! 내가 싫증 나면.”
 청림과 적산은 마당을 한바탕 휩쓴 후에야 지쳤는지 마당 한쪽의 나무 밑 평상으로 다가가 주저앉았다.
 잠시 거친 숨을 가라앉히던 적산이, 헥헥거리며 어지러운지 울상을 짓고 있는 청림에게 빙글 웃으면서 말했다.
 “오늘은 나가서 먹을까?”
 “에? 나가서요? 하지만······.”
 청림은 적산의 말에 머뭇거렸다.
 집안 형편상 외식을 하기에 무리라는 것을 알기에 망설이고 있는데 그런 기색을 눈치챘는지 적산이 가슴을 탕탕 치며 말했다.
 “걱정 마라. 내가 누구냐! 며칠 전에 담 타 넘던 간 큰 놈 하나 잡았더니 문기 그놈이 오늘 포상금 주더라.”
 실제로 잡졸인 그가 잡았을 리도 없고, 잡을 수 있을 리도 없었다. 그저 우연히 포졸들과 순번을 돌다가 도둑을 잡는 것을 옆에서 구경하다 묻어간 것뿐이었다.
 그래서 포상금 또한 ‘딸랑 요거?’ 하는 소리가 나올 정도로 적었지만 적산에겐 그저 공돈이 생겼다는 것이 중요했다.
 “문기 오라버니가요? 와아! 그럼 오늘은 뭐 먹을 거예요?”
 “소면에 만두!”
 “에에! 그럼 뭐예요? 평소랑 똑같잖아요!”
 청림은 귀엽게 두 볼을 부풀리며 투덜거렸다.
 하지만 적산은 벌떡 일어나 팔짱을 끼고는 푸하하 크게 웃으며 기세등등하게 말했다.
 “소면이 그냥 소면이 아니지!”
 “에, 그럼요?”
 “무려 곱빼기다!”
 “와아, 곱빼기! 곱빼기로 먹는 거예요!”
 적산은 반색을 하며 눈을 초롱초롱하게 뜨고 기뻐하는 청림에게 고개를 끄덕여 준 뒤 말했다.
 “그리고! 만두는 고기만두다!”
 “와아! 고기다, 고기!”
 청림은 박수를 치며 적산의 주위를 빙글빙글 뛰어다녔다. 적산은 기뻐하는 청림의 모습을 잠시 흐뭇하게 지켜보다가 자신의 목에 청림을 목말 태우고는 말했다.
 “자, 고기만두를 향해서 출발!”
 “곱빼기를 향해서 출발!”
 
 
 
 적산과 청림이 집을 나서고 얼마 뒤, 한 여인이 적산의 집 앞에 도착했다.
 주위가 절로 환해지는 듯한 미모를 지닌 여인은 잠시 금가장이라 적힌 현판을 말없이 바라보다 안으로 들어갔다.
 은신한 채 여인을 은밀히 미행하던 사람들이 분주해졌다.
 여인은 자신을 끈질기게 따라오는 이들의 면면을 이미 알고 있었으나 상관없는 듯 관심조차 주지 않았다.
 마당으로 들어선 여인은 잠시 주위를 둘러보다 입을 열었다.
 “계십니까?”
 하지만 아무도 없는 집에서 반응이 있을 리 없었다. 여인은 조금 더 소리 높여 말했다.
 “안에 아무도 안 계십니까?”
 “뉘슈?”
 여인의 목소리에 적산의 옆집에서 초로의 노인이 방문을 열고 싸리 담장 너머로 여인을 바라보았다.
 생전 처음 보는, 눈에 확 띄는 미모의 여인을 휘둥그레진 눈으로 바라보고 있는데 여인이 노인을 향해 물었다.
 “금가장의 장주이신 금적산 님을 찾아왔습니다.”
 여인의 말에 노인은 헤에 하며 입이 벌어졌다.
 적산 그놈은 물론, 그놈 애비부터 틈만 나면 지겹게 떠들어 대는 금가장의 장주라는 헛소리를 무시하며 평생을 지냈는데 실제로 금가장의 이름을 대며 찾아오는 이가 있을 줄은 전혀 몰랐다.
 그것도 저리 아리따운 여인이 찾아오다니 어리둥절할 뿐이었다.
 “그······ 적산이는 지금 밖에 밥 먹으러 갔는데······.”
 딱 봐도 범상치 않은 신분으로 보이는 여인을 어떻게 대해야 할지 몰라 말을 얼버무리는 노인에게 여인이 다시 물었다.
 “그곳이 어디이옵니까?”
 “저 소향루라고, 여기서 조금만 내려가면 있는 곳인데······.”
 노인이 한 손을 들어 길 너머를 가리키자 여인은 꾸벅 고개를 숙여 감사를 표하고는 몸을 돌려 노인이 가리킨 방향으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여인이 사라지자마자 은신해 있던 인원들 중 일부가 스르륵 나타났다.
 “······들었냐?”
 “응. 여기가 목적지인가 보군.”
 흘깃 금가장이란 현판을 보고 집 내부를 살핀 남자가 뚱하니 말했다.
 “현판 하난 멋지구만.”
 “현판만 멋지지. 대체 금가장이 뭐야? 들어 본 적 있어?”
 “아니. 제대로 된 문파도 없는 이런 촌구석에 금가장이라? 몰락한 가문인가?”
 “모르지. 조사해 봐야겠다. 저! 말씀 좀 묻겠습니다!”
 여인이 사라지자마자 허공에서 귀신처럼 나타난 사내들을 놀란 눈초리로 바라보던 노인은 사내들이 갑자기 말을 걸어오자 움찔 놀라며 경계 섞인 시선으로 사내들을 바라보았다.
 아무리 무림의 인물들이 민간인은 건들지 않는다지만 말 한마디 잘못했다가는 자신을 모욕했다며 칼 들고 설치는 놈들이 모인 게 무림이라 경계할 수밖에 없었다.
 “······무엇이든 물어보세요.”
 
 
 
 적산과 청림이 도착한 곳은 그들의 보금자리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으로, 이 지역 주민들이 주로 이용하는 소향루라는 반점이었다.
 저녁 시간이라 그런지 소향루 안은 사람들로 북적였다. 적산은 청림을 데리고 반점 안으로 들어가 적당히 자리를 잡고는 당당하게 외쳤다.
 “어이, 삼진아! 여기 소면 곱빼기 두 개!”
 “곱빼기〜! 곱빼기〜!”
 삼진이라 불린 점소이는 투덜거리며 적산에게 다가갔다.
 “소면이 무슨 곱빼기가 있어!”
 “아, 그런가? 그럼 소면 두 개, 두 배로 줘.”
 “두 배로〜! 두 배로〜!”
 “아, 고기만두도!”
 “고기만두〜! 고기만두〜!”
 청림은 적산의 뒷말을 따라 하며 탁자를 두 손으로 탕탕 쳤다.
 삼진은 청림이 귀여운 듯 머리를 두어 번 쓰다듬어 주고는 자신의 밑에서 일하는 점원에게 음식을 가져오라고 시킨 후 청림의 옆에 앉았다.
 “금세 가져올 거니까 잠시만 기다려.”
 “어이, 점소이가 일 안 하고 놀아도 돼?”
 “이래 봬도 내가 소향루 후계잔데 이런 거야 아랫놈 시켜야지.”
 “오오! 근데 후계자라는 놈이 만날 친구한테 돈 받아먹냐?”
 “어허! 친구라고 막 퍼 주면 나는 뭐 먹고 살라고.”
 “그려, 꼴에 상인이라고 티 내기는.”
 두런두런 적산과 삼진이 얘기를 나눌 때 금세 소면과 만두가 나왔고 청림은 기뻐하며 그것을 맛있게 먹기 시작했다.
 적산은 미소 지으며 그런 청림을 바라보다 문득 생각난 듯 삼진에게 말했다.
 “근데 어째 칼 찬 사람들이 많이 보인다?”
 적산의 말대로 동광시의 주민만이 주로 이용하던 소향루 안에 주민은 별로 없고 보기만 해도 위협적인 칼을 찬 채 식사를 하고 있는 이들이 대부분이었다.
 “아, 그게 몇 달 전부터 무림에서 소문이 짜한 유명한 여걸 중 한 명이 이곳으로 온다고 해서 구경하러 모여든 사람들이야.”
 “호오? 누군데?”
 “무림삼화라고, 무림에서 가장 아름다운 세 명의 여인들 중 한 명인가 봐.”
 “헤에, 화라는 별호가 붙을 정도면 예쁘겠네? 근데 무림삼화가 누군데?”
 “빙화, 검화, 암화라고 불리는데 그중에 이리로 오고 있는 사람이 빙화라는 여잔가 봐.”
 “흐음, 딱 별호를 보니 빙공 계열의 무공을 쓰는 여자겠구만.”
 “그것도 보통 빙공이 아니랜다. 저기 상북주에서 유명한 현음곡 알지?”
 “현음곡이라······ 어디서 많이 들어 봤는데? 아! 그 뭐냐, 마도백대문파 중 하나라고 했던가?”
 “그래. 그 현음곡의 소곡주가 상북주에서 유명한 망나니거든. 근데 우연히 그 빙화라는 여자를 보고는 예쁘다고 발정 난 수캐 모양으로 덤벼들었다가 얼음덩어리로 변해서 그대로 녹아 버렸댄다.”
 “······사람이 얼음으로 변해? 에이,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 저기 서천의 마법이란 것도 아니고.”
 “뭐, 나도 소문으로 들은 거니까 알 수야 없지. 하지만 그 소곡주란 놈이 뒈져 버린 건 확실한 거 같아. 그 현음곡 곡주란 놈이 복수하겠다고 덤벼들었거든.”
 “헤에, 자기 혼자?”
 “아니, 그런 놈들이야 뻔하지. 쪽수로 밀어붙이잖아.”
 “그래서? 어떻게 됐어?”
 “그 뭐냐, 태화평인가 하는 곳에서 매복해 있다가 덮쳤는데 죄다 얼어 죽었댄다. 그리고 태화평에 사흘 동안 눈이 내렸다던가?”
 적산은 삼진의 말에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얼어 죽었다고? 게다가 사흘 동안 눈이 내려? 이 여름에?”
 “뭐, 나야 들은 대로 말하는 것뿐이니까 따지지 말라고. 그 사건으로 현음곡의 주력이 죄다 날아가 버려서 현음곡은 공중분해돼 버렸댄다. 그리고 그 여인은 빙화란 명성을 얻었고.”
 적산은 삼진의 말에 피식 웃으면서 말했다.
 “그렇게 유명한 여자가 여기는 왜 온다냐? 뭐 볼 거 있다고?”
 “모르지. 워낙에 말이 없고 주위에서 누가 말을 걸어도 다 무시하는 여자라고 그러더라. 그것 때문에 싸움도 많이 났었는데 태화평 사건 이후로는 아무도 말을 안 걸었대. 그래서 그 여자 이름도 모른댄다.”
 “근데 여기 온다는 건 어떻게 알고?”
 “뭐, 길을 모르는지 동광시로 가려면 어떻게 가야 하는지 물어봤댄다.”
 “헤에, 그렇게 예쁜가?”
 “천하절색이니 무림삼대미인이니 하는 소리가 나올 정도면 예쁘긴 한가 봐. 어때, 그 여자가 오면 한번 말 걸어 보지? 못 먹는 감 찔러나 본다는데.”
 “웃기는 소리 하네. 난 못 먹는 감은 쳐다도 안 보는 주의라서.”
 적산과 삼진이 시시덕거리며 얘기를 나눌 때 ‘쾅!’ 하는 소리와 함께 적산의 옆자리에 있던 한 청년이 식탁을 내려치며 벌떡 일어나 적산과 삼진에게로 다가왔다.
 “흥! 감히 버러지 같은 놈들이 빙화 소저를 모욕하다니! 동광시엔 무뢰배가 없다고 하더니 그렇지도 않군!”
 작은 소리도 놓치지 않는 무림인들이 모인 곳이라 대화 소리를 모두 들은 듯싶었고 적산과 삼진을 바라보는 눈초리가 전부 사나웠다.
 무림인이 있다는 걸 깜박하고 평상시처럼 대화를 나누던 적산과 삼진은 아차 하는 표정으로 눈치를 살폈다.
 무림인은 민간인을 건들 수 없다.
 관이 유일하게 무림에 개입하는 일은 민간에 피해가 발생했을 때뿐이다.
 민간인이 명예를 중시하는 무림인들의 명예에 손상을 주는 사건이 발생했을 경우, 억울한 일이 아닌 이상 개입하지 않았고 알아서 해결하도록 했다.
 물론 그렇게 되면 힘센 무림인이 이긴다.
 “헤헤. 대협, 저희가 말이 좀 헛나왔습니다. 죄송합니다.”
 삼진이 굽실거리며 헤헤거렸지만 청년은 용서할 생각이 없는 듯 오히려 잘됐다는 표정으로 모두에게 들으란 듯 외쳤다.
 “흥! 필요 없다! 너희들이 사과할 대상은 내가 아닌 빙화 소저다! 내 너희들을 일벌백계하여 직접 빙화 소저에게로 끌고 가 무릎을 꿇고 사죄하게 만들어 주마!”
 청년의 말에 주위의 무림인들은 감탄 섞인 시선으로 청년을 바라보았다.
 어떻게 안면이라도 틀까 싶어 용기를 내, 말을 걸어도 무시하기 일쑤인 빙화다. 그녀라 해도 자신을 모욕한 사람들을 끌고 가 사죄를 시키면 관심을 가질 수밖에 없을 거라는 생각에 몇몇 사람들은 먼저 나서지 못한 걸 후회했다.
 “아, 거 너무하네. 없는 데선 나라님 욕도 한다는데 보아하니 그 빙화 소저랑 아무런 관계도 없는 거 같구만. 너무 나서는 거 아뇨?”
 적산이 투덜거리며 말하자 모두들 입을 쩍 벌리며 적산을 바라보았고 청년도 당황한 듯 멍하니 적산을 쳐다보았다.
 “아이고, 이 미친놈아! 거 성질 좀 죽이라고 했잖아. 헤헤, 대협, 죄송합니다. 이놈이 낮술을 퍼먹어서 지금 제정신이 아니에요. 아하하! 죄송합니다! 이거 무림의 영웅 분들이 있는 데서 저희가 실수를 한 것 같습니다. 사죄의 의미로 제가 이곳에 계신 영웅 분들에게 술을 대접하겠습니다.”
 삼진의 말에 주위의 사람들은 좋다고 박수를 쳤다.
 삼진의 말에 청년은 당황한 표정으로 뭔가 말하려 했다. 하지만 이미 삼진이 선수를 쳐서 사죄의 의미로 술을 대접한다고 말해 버렸다.
 주위의 무림인들이 모두 호응하는 가운데 자신만 따지고 들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물론 주위의 무림인들도 그걸 잘 알기에 남 좋은 일 시키기 싫어서 일부러 더 환호하며 박수를 쳤다.
 청년은 아깝다는 듯이 입맛을 다시다 자리로 돌아갔고 적산은 불만에 찬 얼굴로 툴툴거렸지만 청림이 조용히 적산의 소매를 잡아끌자 어쩔 수 없이 다시 자리에 않았다.
 “썩을 놈! 너 때문에 이게 뭐냐? 애꿎은 술값만 나가게 생겼잖아.”
 “그러게 왜 막아?”
 “그러면 어쩌려고? 진짜 천주님을 욕하려고? 너 그러다 쥐도 새도 모르게 사라지는 수가 있다. 청림이 생각도 해야지. 닥치고 공짜 술이나 처먹어.”
 “쳇!”
 적산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바라보는 청림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곤 소면과 만두를 공짜 술과 곁들여 먹기 시작했다. 그때 소향루의 주렴이 걷히며 한 여인이 들어왔다.
 시끌벅적하던 소향루는 일순간 정적에 잠긴 채 모든 사람들이 여인만을 바라보았다. 적산과 삼진도 무심코 고개를 돌렸다가 여인의 미모에 넋을 잃었다. 직감적으로 지금 들어온 여인이 빙화임을 알 수 있었다.
 “헤에······ 예쁘긴 하네······.”
 “지, 진짜 빙화라 불릴 만하구만······.”
 “와아! 예쁜 언니다.”
 차가운 얼음의 꽃.
 말 그대로 그녀는 알게 모르게 냉랭한 분위기를 풍겼다.
 무심한 표정과 아무런 감정도 나타나 있지 않은 눈동자가, 부드럽게 흘러내리는 은발과 함께 바라보는 이의 심금을 떨리게 만들었다.
 그녀는 소향루 내부를 잠시 둘러보다가 적산과 청림이 앉아 있는 탁자로 걸어오기 시작했다.
 “어······ 어이, 이쪽으로 오는데?”
 “음? 에이, 설마! 이쪽에 빈자리가 많으니까 그냥 밥 먹으러 온 거겠지.”
 가슴이 두근거릴 정도로 아름답기는 했지만 자신과는 관계없는 무림의 여인이었기에 적산은 이내 관심을 끊고 삼진의 말을 무시한 채 청림과 함께 소면과 만두를 먹는 데 열중했다.
 하지만 그녀는 삼진의 말대로 정말 적산이 앉아 있는 탁자로 다가와 말했다.
 “금적산 님이 어느 분이십니까?”
 “음?”
 적산은 만두 하나를 입에 절반쯤 넣은 채 그녀를 바라보았다.
 가까이에서 본 그녀는 더더욱 환한 빛을 발하는 것 같았다.
 하지만 자신과는 전혀 상관없는 세계의 사람이기에 애써 무덤덤하게 한 손을 들어 자신이 금적산임을 밝혔다.
 그녀는 그런 적산을 잠시 바라보다 다소곳하니 큰절을 올렸다.
 “소녀 설화린, 서방님께 처음으로 인사 올립니다.”
 “······.”
 “······에에엑!”
 빙화의 말을 처음에는 이해하지 못했던 소향루 안에 있던 사람들이 그 뜻을 깨닫고는 동시에 비명을 질렀다.
 
 
 
 적산은 미치고 환장할 지경이었다.
 지금 객잔 안은 그야말로 바늘 하나 떨어지는 소리조차 들릴 정도로 조용했다.
 객잔 안의 사람들은 모두 숨죽인 채 적산, 아니 빙화 설화린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새 소문이 퍼졌는지 객잔 안은 조용히 그리고 빠르게 사람들이 늘어만 가고 있었다.
 설화린의 갑작스러운 폭탄선언.
 이후 삼진은 분위기에 밀려 자리를 비켜 주었고 설화린은 당연하다는 듯이 적산의 맞은편 자리도 아닌 옆자리에 떡하니 앉은 채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차분한 기색으로 차만 마시고 있었다.
 적산이 두어 번 조심스레 말을 걸어 보았지만 그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청림도 화린이 신기한 듯 이런저런 말을 걸었지만 그녀가 모두 무시하고 차만 마시자 두 볼을 부풀리며 부루퉁하게 투덜거리다가 졸린지 꾸벅꾸벅 졸더니 금세 탁자에 엎어져 잠이 들었다.
 뭔가 말은 걸어야겠는데,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자신과는 딴 세상 사람이라 여겼던 여인이 옆자리에 앉아 있는 것으로도 모자라, 그 아름다움이란 게 사람을 홀릴 정도의 미색을 지닌 여인이었다.
 피 끓는 청춘 적산은 심장이 두근거릴 정도로 긴장되면서도 숨이 턱하니 막혔다.
 그렇게 반 시진 정도를 아무 말도 못 한 채 묵묵히 고민할 때, 삼진이 은근슬쩍 다가와 비어 버린 술병을 치우고 새 술을 안줏거리와 함께 탁자 위에 올려놓고는 알 수 없는 미소를 지으며 잠들어 있는 청림을 안아 들고 사라졌다.
 삼진의 그 미소에 왠지 모를 울컥함을 느낀 적산은 끄응 하는 소리를 내고 술 한 잔을 마시기 위해 잔을 들었다.
 살아생전 처음 맡아 보는 향기로운 내음과 함께 술병이 들렸다. 적산이 쥔 술잔에 쪼르륵하고 맑은 소리를 내면서 술이 채워졌다.
 순간 ‘헉!’ 하는 신음성과 함께 객잔 안은 기이한 열기에 휩싸였다.
 아름다운 여인이, 그것도 무림에서 지닌바 무공과 명성이 하늘을 찌를 듯 욱일승천하는 무림삼화 중 한 명이 따라 주는 술이다.
 중천의 풍습상 기녀가 아닌 여인이 술을 따르는 경우는 자신의 지아비밖에 없기에 객잔 안은 적산을 향한 부러움에 가득한 시선과 남자만이 느낄 수 있는 질투 어린 살기가 쏟아졌다.
 적산은 식은땀을 흘렸다.
 “이거······ 심장에 안 좋은 술이구만······.”
 적산은 자신에게 가중되는 기운을 떨치고자 한 번에 술을 들이켰다.
 ‘캬아! 이제 좀 살 것 같군.’
 적산은 목구멍을 타고 내려가는 화끈한 기운에 정신을 좀 차릴 것 같았으나 턱도 없는 소리였다.
 스윽 하는 옷자락 스치는 소리와 함께 급하게 마시느라 적산의 입가로 흘러내린 술 자국을 설화린이 가만히 자신의 소매로 닦아 주었던 것이다.
 더욱더 가중되는 기세. 이제 부러움의 시선은 사라지고 오직 잡아먹을 듯한 질투 어린 시선만이 적산을 갈기갈기 찢어발기고 있었다.
 게다가 적산을 정신 못 차리게 만든 것이 또 있었다. 그녀는 소매로 적산의 입가를 다 닦은 다음 그 섬섬옥수로 안주를 집어 적산의 입으로 가져갔던 것이다.
 적산의 눈에는 그 안주가 대갓집에서 역적들한테나 먹이던 사약처럼 느껴졌다.
 그 와중에도 화린은 아무런 말도 표정도 감정도 없어서 적산을 더욱 미치게 만들었다.
 ‘에고, 모르것다. 일단 마시고 보자. 내가 언제 남들 시선 신경 썼다고······.’
 적산은 자포자기하는 심정으로 따라 주는 대로 넙죽넙죽 받아 마셨다. 그리고 술에 취해 저질러 버렸다.
 
 
 
 적산은 달콤한 잠에서 깨기 싫어 몸을 더욱더 뒤척였다. 정말 일어나기 싫었지만 어제의 술이 너무 과했는지 점점 머리가 아파 왔고 정신은 또렷해지고 있었다.
 하지만 억지로 눈을 감으며 조금만 더 이 아침나절의 풍요로움을 즐기고 싶었다.
 푹신한 침상, 따뜻한 이불, 귓가를 간질이는 아침 새소리, 어서 눈뜨라고 난리 치는 아침 햇살.
 그리고 특히나 적산을 일어나기 싫게 만드는 향기로운 살 내음과 마치 비단결을 쓰다듬는 듯한 느낌, 뭔가 탱탱하면서도 부드러운 걸 기분 좋게 조몰락거리는 두 손······.
 ‘음? 뭐지?’
 적산은 눈을 감은 채 손을 떼기 싫어지는 부드러움을 즐기다 정신이 또렷해질수록 비로소 의문을 가지고 가만히 실눈을 떠 그 물체를 확인하려 했다.
 하지만 눈을 뜨자마자 마주친 건 그 깊이를 알 수 없을 정도로 맑고 투명한 눈동자였다.
 적산은 마치 보석 같은 그 눈동자에 잠시 공황 상태에 빠졌다가 비로소 상황이 이해되기 시작했다.
 어제 자신은 그녀가 주는 대로 넙죽넙죽 받아먹다 만취한 상태로 쓰러졌다.
 그리고······ 지금 여기는 침상 안.
 자신의 두 손은 지금 어디에?
 거기까지 생각이 미친 적산은 황급히 비명을 지르며 무림고수가 부럽지 않을 정도의 몸놀림으로 침상에서 뛰쳐나오다 이불에 발이 걸려 나뒹굴고 말았다.
 “아고고, 아파라······.”
 적산이 이불을 둘둘 말고 옷장에 허리를 부딪혀 끙끙거리는 광경을 무심히 바라보던 그녀는 침상에서 일어나 차분히 옷을 입기 시작했다.
 허리를 부여잡고 끙끙거리던 적산은 그녀의 백옥 같은 나신에 시선을 빼앗긴 채 아픔도 잊고 멍하니 그녀만을 바라보았다.
 ‘꿀꺽.’
 자신도 모르게 침을 삼킨 적산을 그녀는 고개를 돌려 흘깃 보다 그와 눈이 마주쳤다.
 그녀는 이내 고개를 돌렸으나 적산은 그녀가 고개를 돌리기 전 본 광경에 대해 자신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어? 얼굴 빨개졌다.”
 적산의 말에 그녀는 잠시 멈칫했다가 이내 계속 옷을 입기 시작했다.
 그녀가 갑자기 귀엽게 보이는 자신이 미친 것 같아 적산은 피식 웃으며 일어서서 목소리를 가다듬고 진지한 기색으로 말했다.
 “흠흠······ 음, 저기 소저. 음······ 내 어제 술이 과해 아무래도 실수를 한 것 같소. 하지만 나 금적산! 내가 한 행동에는 책임을 지는 사람이오. 내 비록 보잘것없지만 소저만 좋다면 내 그대를······.”
 설화린은 옷을 다 입고는 적산이 떠드는 말은 들은 척도 하지 않은 채 그대로 방문을 열고 나가 버렸다.
 적산은 열변을 토하려다 그녀가 나가 버리자 뻘쭘한 기색으로 주춤거렸다.
 ‘제······젠장!’
 잠시 머뭇거리던 적산은 곧 침상에 뛰어 올라가 바동거렸다.
 “끄아악! 대체 어제 어떻게 된 거야! 기억이 안 나! 나 정말로 저질러 버린 건가?”
 한참을 바동거리며 사라진 기억을 떠올려 보려고 애쓰던 적산은 아무런 기억도 나지 않자 한숨을 내쉬고는 옷을 추스른 다음 슬그머니 밖으로 나섰다.
 예상대로 자신이 하룻밤을 지낸 곳은 소향루의 별채였다. 잠시 주위를 둘러보던 적산은 어슬렁어슬렁 식당 안으로 들어갔다.
 “어, 오빠다! 오빠, 여기!”
 객잔 안은 이른 아침인데도 사람들로 꽉 차서 발 디딜 틈도 없을 정도였다.
 적산은 겨우겨우 사람들 사이를 비집고 들어가려고 애쓰고 있었다. 그러다 적산을 발견한 청림의 외침에 바다가 갈라지듯 사람들이 쫘악 갈라졌다.
 그리고 그 끝에는 청림과 화린이 나란히 앉아서 아침을 먹고 있었다.
 “아, 하하. 아하······.”
 적산이 사람들의 부담스러운 시선에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화린과 청림이 앉아 있는 탁자로 다가가던 중, 등짝에 강한 충격을 느끼며 나뒹굴고 말았다.
 “케엑, 뭐······ 뭐야!”
 “금적산! 네놈을 부녀자 강간 혐의로 체포한다!”
 “에엑, 갑자기 뭔 소리야!”
 어디서 나타났는지 한 자루의 도를 들고 얼굴이 새빨개진 채로 씩씩거리고 있는 막문기를 향해 적산이 외쳤다.
 “시끄러! 어제 네놈이 무림삼화 중 한 명인 빙화 소저에게 술을 먹여 방으로 끌어들였단 정보를 입수했다. 그런 부러운······ 아니 그런 천인공노할 짓을 저지르다니! 넌 재판도 필요 없어! 즉결심판으로 사형을 선고한다! 죽어!”
 “자······ 잠깐! 대충 맞는 것 같으면서도 뭔가 미묘하게 어긋난 것 같은데?”
 “문답무용. 죽어라!”
 막문기는 도를 치켜들고 적산을 베어 버릴 듯한 자세를 취했으나 그 자세 그대로 멈출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무림의 후기지수 중 한 명으로 높은 명성에 걸맞게 절정의 경지에 다다른 자신이었다.
 하지만 어느새 다가왔는지 모를 투명한 얼음의 창날 끝이 자신의 목을 살포시 찌르고 있었던 것이다.
 막문기는 흘깃 빙화를 보았다.
 그녀와의 거리는 이 장 남짓.
 결코 짧은 거리가 아니었건만 그녀가 뻗은 왼손에서 나온 새하얀 창날은 자신의 목을 위협하고 있었다. 그녀는 무표정한 태도로 허튼짓하면 찌른다는 압박을 주고 있었다.
 ‘제길 이 장 남짓한 거리에서 순수한 내력만으로 이런 창을 만들어 내다니······.’
 그 사실 하나만 봐도 자신은 빙화의 상대가 되지 않음을 알 수 있었다.
 막문기가 식은땀을 흘리며 중얼거릴 때 적산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일어서더니 막문기에게 다가가 말했다.
 “이런 빌어먹다 체해서 물 마시다 익사할 놈 같으니라구! 친구란 놈이 앞뒤 재 보지도 않고 뛰어들어서 잡아먹으려고 들어?”
 적산은 기고만장한 표정으로 문기의 주위를 빙글빙글 돌며 툭툭 쳐 댔다.
 문기는 눈알이 튀어나올 정도로 적산을 노려보며 이를 부득부득 갈았으나 턱 밑에서 자신의 모가지를 살포시 누르고 있는 창날의 차가움에 움직일 수조차 없었다.
 하지만 청림의 한마디가 그를 살렸다.
 “에휴! 언니, 문기 오라버니랑 적산 오빠는 항상 저러고 놀아요. 신경 안 쓰셔도 돼요.”
 청림의 말에 빙화는 잠시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창을 거둬들였다.
 “어······ 어라? 잠깐······ 이게 아닌데······.”
 문기는 살얼음이 낀 자신의 목을 쓰다듬으며 어깨를 두어 번 돌리고는 당황한 표정으로 뒷걸음치는 적산에게로 다가갔다.
 “우리 잠깐, 앞으로의 인생과 삶의 목적을 주제로 심도 있는 대화를 나눠 볼까?”
 “아······하하, 하하······ 저기, 잠깐!”
 적산은 식은땀을 흘리며 뒷걸음치다 정색을 하고는 소리쳤다.
 “내가 뭘 잘못했는데! 난 하늘을 우러러 떳떳하다고!”
 “하늘을 우러러 떳떳하다는 건 절대 공감할 수 없는 헛소리지만 일단 그건 넘어가고. 니 죄를 니가 몰라? 어젯밤 저기 계신 빙화 소저에게 술을 먹여 방으로 끌고 들어갔으면서도 그런 소리가 나오냐!”
 “말이 되냐! 너도 찍소리 못 하고 찌그러질 정도의 무공을 지닌 여자에게 내가 어떻게 수작을 부려! 그리고 난 어제 술에 취해서 아무런 기억도 없다고!”
 “으음······ 납득이 가긴 하는군. 너같이 가소로운 놈이 부린 수작에 그녀가 넘어갈 리야 없고······.”
 “어이, 잠깐! 왠지 울컥한다?”
 문기는 적산의 말을 무시하고 화린에게 다가가 포권을 취하며 정중하게 말했다.
 “안녕하십니까, 본인은 이곳 광동시의 시장으로 있는 막문기라고 합니다. 어제 일어난 일에 대해선 정말 유감입니다. 뭐라 사과의 말씀을 드려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뭔가 착오가 있는 것 같은데 금적산 저놈은 그저 평범한 민간인일 뿐 무림인이 아닙니다. 그······ 빙화 소저가 알고 계시는 금적산이라는 사람은 그와 동일 인물이 아닌 듯싶습니다.”
 “제길, 저런 놈이 친구라고······.”
 “문기 오라버니! 언니가 그러는데 언니는 우리 오빠랑 정혼한 사이래요!”
 “그래, 청림아. 걱정 마라. 내가 어떻게든 적산의 목숨만은······ 뭐?”
 “아이, 참! 언니는 적산 오빠랑 그 뭐냐, 태······태······태 뭐지?”
 “태중정혼?”
 “예, 그거요! 선조의 유지에 의해 금가장의 장주와 태중정혼한 사이래요!”
 문기는 적산과 화린을 번갈아 쳐다보다 자신도 모르게 외쳤다.
 “저놈이 뭐 잘났다고!”
 “내가 어디가 어때서! 이만하면 일등 신랑감이지!”
 “시끄러워! 찌그러져 있어!”
 문기는 항의하는 적산을 향해 날카롭게 외친 후 헛기침을 두어 번 하고는 다시 말했다.
 “흠흠, 저기 소저, 뭔가 오해가 있나 본데 저기 적산이 놈의 가문인 금가장은 무림과는 전혀 관계가 없는 가문입니다. 정말 죄송한 말씀이지만 뭔가 잘못 아신 게······.”
 문기의 말에 화린은 마시던 찻잔을 내려놓고 그 특유의 아무런 감정도 들어 있지 않은 목소리로 말했다.
 “관계있다.”
 “······.”
 “저기······ 그게 답니까?”
 “······.”
 막문기는 전혀 부연 설명 없는 그녀의 확언에 잠시 입만 뻐금거리다가 머리를 두어 번 긁적이고는 한숨을 쉬며 말했다.
 “금가장도 알고 있는 걸 보면 잘못 찾아온 건 아닌 것 같고······ 좋소! 내 저 웬수 같은 적산과는 어찌할 수 없는 악연으로 인해 안타깝게도 친구라 부를 만한 사이니까 앞으로 제수씨라 부르겠소이다!”
 “어어? 야! 너, 너무 막 나가는 거 아니냐? 그리고 왜 제수씨야! 형수님이지!”
 “쓰읍! 찌그러져 있으랬지!”
 문기는 눈을 부라리며 적산을 노려보았지만 적산은 이미 기가 살았는지 화린의 옆에 앉으며 능청스럽게 말했다.
 “아! 배고프다. 야, 삼진아! 여기 아침 좀 갖다 줘!”
 “네놈이 떠먹어! 바쁜 거 안 보이냐!”
 “문기 것도 같이!”
 적산은 아침부터 북적거리는 사람들 때문에 바쁘게 돌아다니는 삼진에게 외친 후 문기를 바라보며 단호하게 선언하듯 말했다.
 “형수님이라고 불러!”
 “이런 미친놈 쌈 싸 먹는 소리 하네! 진도가 너무 빠른 거 아니냐!”
 “흐음······ 저기, 제수씨가 좋아요? 아니면 형수님이 좋아요?”
 “너 말이다, 당연히 제수······씨가 아니라 형수님이지요······.”
 문기는 적산을 노려보며 말하다 자신의 목에 또다시 살포시 얹힌 창날에 굴복하고 말았다.
 자신의 무공에 어느 정도 자부심을 가졌건만 이건 어째 상대도 안 된다. 문기는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넌 지금 이 일의 심각성을 알고 있냐?”
 “뭔 일?”
 “그 전에 묻겠습니다. ······끄응, 형수님이 무공을 사사한 곳이 어디입니까? 뭐, 밝힐 수 없다면 어쩔 수 없구요.”
 문기는 형수님이라 부르기 불편한지 끙끙거리다 어쩔 수 없다는 듯이 말했고 화린은 문기를 흘깃 보곤 말했다.
 “빙궁.”
 “빙궁? 서······설마? 그 빙존 설성룡의? 그렇다면 빙존의 의발전인입니까?”
 문기는 놀란 듯 소리쳤고 화린은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소향루 안에서 귀를 열고 대화를 엿듣던 사람들이 술렁거렸다.
 “어라? 빙궁? 어디서 많이 들어 봤는데? 어디서 들었더라? 뭔가 중요한 듯한 기분이······.”
 “빙궁은 저 중천의 북쪽 끝 대설 산맥에 위치한 문파다. 무림에서 활동은 거의 안 하지만 이백여 년 전 우내삼존의 일인이었던 빙존 설성룡 님이 빙궁의 궁주셨지. 그러니까 그 전인이라는 건 빙궁의 궁주, 아니면 소궁주란 소리다.”
 “헤에······ 듣고 보니 굉장한데?”
 “이게 지금 감탄사로 끝날 문제인 줄 알아!”
 “어이, 어이! 너무 성내지 말하고 진정해, 진정.”
 “끄응······ 각설하고. 저 빙화 소저······ 아니 형수님, 에휴······ 형수님은 무림삼화로까지 불리며 일거수일투족이 관심의 대상이 되는 무림의 신진 고수다. 당연히 끌어들이려는 문파도 많지. 웬만한 고수 한 명이 떨거지 수백 명보다 나으니까. 게다가 무림삼화라 불리는 여인 중에서 검화는 검각 출신이고, 암화는 그 정체조차 파악되지 않고 있지만 별호에서 알 수 있듯이 흑도의 인물이다. 그러니 전 문파의 관심이 빙화······ 아니 형수님에게 쏟아지는 건 당연하다는 거지. 형수님만 끌어들일 수 있다면 무림에서 세 손가락 안에 드는 문파로 성장할 수 있고 게다가 빙존의 전인이면······.”
 “움화화! 내 마누라가 한 솜씨 하지!”
 자랑스레 허리에 손을 얹고 웃어 재끼는 적산을 문기는 한심스레 바라보았다.
 “······너 말이다, 적응이 너무 빠른 거 아니냐? 에휴, 아직도 이해가 안 되는 널 위해서 내 알기 쉽게 설명해 주지. 지금 현재 무림에서 가장 아름답다는 무림삼화 중 한 명이며 그 지닌바 무공 또한 절정을 넘어선 고수로 판단되고 빙존의 전인에다가 빙궁이라는 확실한 뒷받침이 있는 곳의 차기 궁주, 게다가 여성이고······ 이 정도면 세도가나 무림에서 명문이라고 까부는 놈들은 전부 빙화 소저와 친분을 쌓기 위해 무슨 짓이든 할 거다. 소문으론 무슨 호화단인가 하는 어처구니없는 단체까지 결성된 모양이더군.”
 “호화단? 꽃을 보호한다고? 푸헤헤, 정말 할 일 없는 놈들이구만.”
 낄낄거리는 적산을 안쓰럽게 바라보며 문기는 말을 이었다.
 “후······ 그런데 갑자기 네놈이 나타난 거야. 나도 오늘 아침에 보고받았을 때 참 어처구니가 없더군······. 빙화 설화린······ 형수님은 가문끼리의 태중정혼 즉 혼인을 치르기 위해 너를 찾아왔다. 그리고 네놈은 앞뒤 가리지도 않고 이게 웬 떡이냐 싶어 바로 방으로 끌어들였고······.”
 “저기······ 난 기억이 없는데······.”
 적산은 화린의 눈치를 살피며 억울한 듯 중얼거렸지만 문기는 적산의 말을 무시하고 목소리를 높였다.
 “여기서 문제는! 형수님과 어떻게든 친해지려고 필사적이던 그 수많은 문파들이 네놈 하나 때문에 엿 먹었다는 거다!”
 “어이, 그게 어떻게 내 잘못인감! 나도 어제까진 몰랐다고!”
 “태중정혼이라지만 일면식도 없이 만난 지 하루밖에 안 된 사이! 게다가 그 상대는 무공이라고는 전혀 모르고 가문이라고는 삐까번쩍한 금가장이라는 현판 하나밖에 없는 혈혈단신! 얼굴이 잘난 것도 아니고! 가진바 재능이라고는 무공이라고밖에 안 느껴질 정도의 뻔뻔한 철면과 천재적인 능력을 자랑하는 친구한테 빌붙는 기술······.”
 “어이······ 그거 칭찬이지?”
 “하아······ 아직도 이해가 안 가냐? 무림의 가문 좋고 지 잘난 맛에 사는 놈들이 어떻게 생각하겠냐! 너만 없으면! 별 볼일 없는 네놈만 없으면 어떻게든 다시 한 번 기회가 생길 거라고 믿는 놈들이 대부분일 거다!”
 “······저기, 그 말은 지금 내 목숨이 위태롭다는 말?”
 “이제 이해가 되냐!”
 그때 객잔 안에 순식간에 겨울을 방불케 하는 싸늘한 한기가 몰아쳤다. 듣는 이의 귀에 얼음이 맺힐 정도로 차가운 목소리로 화린이 말했다.
 “서방님을 건드리는 자, 개인이든 단체든 구족을 멸하며 구족의 사돈에 팔촌까지 전부 죽인다······.”
 “아하하······ 저기, 진정 좀 하는 게······.”
 적산이 팔뚝에 솟은 소름을 문지르면서 조심스레 말하자 순간 객잔 안을 휘몰아치던 한기가 사라졌다.
 “서방님, 묻고 싶은 게 있사옵니다.”
 “아, 예. 뭐든지 물어보세요. 근데 저기 그 말투 좀 어떻게······.”
 적산이 부담스러운 표정으로 조심스레 말했지만 화린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말씀 낮추소서. 지아비는 하늘과도 같은 법입니다.”
 “아하하······ 그, 그래요? 아, 아니 그, 그래? 그럼 말 놓지, 뭐······.”
 금세 말을 놓는 적산의 태도에 문기는 작게 ‘저 뻔뻔한 놈!’ 하고 중얼거렸다.
 “예, 감사하옵니다. 묻고 싶은 건 다름이 아니오라, 저 여아는 누구이옵니까?”
 지금까지 흥미진진한 얼굴로 일행의 대화를 듣고만 있던 청림은 갑자기 시선이 자기에게로 오자 놀란 표정으로 눈을 동그랗게 떴다.
 “에? 저요?”
 “음? 청림이는 내 동생인데?”
 “동생이 있다는 보고는 없었사옵니다.”
 “아니 그게, 저 이삼 년 전에 길거리를 돌아다니는 게 좀 뭐해서 데려와 내 동생으로 삼았다고 할까나······.”
 “신분도 출생도 이름도 모르는 부랑아를 말이옵니까?”
 화린의 직설적인 말에 청림은 상처 받았는지 놀란 표정으로 눈물을 글썽이다 이내 엉엉 울기 시작했다.
 문기는 그런 청림을 품 안에 다독이면서 화린에게 뭐라 쏘아 주고 싶었다. 하지만 상대도 안 되는지라 아무 말 못 하고 노려보지도 못했는데 그런 자신의 신세가 처량하기만 했다.
 하지만 적산은 엉엉 우는 청림을 보자마자 화린에게 불같이 화를 냈다.
 “아니, 왜 애를 울리고 그래! 내가 동생으로 삼은 이상 청림은 우리 금가의 핏줄이며 내 동생이다! 그게 불만이면 당장 사라져!”
 문기를 비롯한 객잔 안의 사람들은 화린에게 역성을 내며 따지는 적산을 보고 같은 생각을 떠올렸다.
 ‘저놈 저거 복에 겨워 제대로 미쳤구나.’
 화린은 가만히 적산을 바라보았다.
 적산도 일순간 울컥해서 대들었지만 그녀의 눈을 바라보고 있자니 등으로 식은땀이 흘렀다.
 ‘내가 미쳤지, 어쩌자고······.’
 하지만 화린은 가만히 적산을 바라보다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제가 잘못했사옵니다. 고정하시옵소서.”
 화린의 말에 적산은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애써 대범하게 말했다.
 “흠흠, 거 나야 상관없지만 청림에게는 확실하게 사과하시오!”
 “알겠사옵니다. 내가 잘못했다.”
 하지만 청림은 화린의 시선을 피하며 계속 훌쩍였다. 그런 청림을 가만히 바라보던 화린이 청림에게 말했다.
 “눈깔을 뽑아서 구슬로 만들어 귓구녕에 박아 버리기 전에 그만 울어라.”
 “······히끅?”
 
 
 
 빙화 설화린이 동광시에 온 지도 일주일이 지났다.
 그간 무림에는 설화린이 태중혼약을 지키기 위해 일개 범부와 같이 산다는 소문이 퍼져 나갔고 그 여파는 생각보다 컸다.
 금적산은 천하제일 행운아라는 웃지 못할 별호가 퍼졌다.
 설화린의 미모를 한 번이라도 더 보기 위해 몰려드는 사람들과 어떻게든 자신과 안면을 트려고 덤벼드는 사람들 때문에 주위에 민폐를 끼칠 수밖에 없었다.
 적산은 별수 없이 자신의 보금자리에서 도망쳐 동광시청으로 피신해 떡하니 시청 한쪽의 빈객청을 보금자리 삼았다.
 “야, 이 미친놈아! 니놈이 지금 제정신이냐!”
 “아, 뭘? 보기 좋구만.”
 “시끄러! 당장 떼어 내! 그리고 너 빨랑 안 나가! 시청이 네놈 집구석 안방이냐!”
 “어어, 마누라한테 이른다?”
 막문기는 능글능글 웃으며 대꾸하는 적산 때문에 부들부들 떨리는 분노를 주체하지 못하고 칼집에서 도를 천천히 꺼내며 중얼거렸다.
 “이 빈대보다 더한 자식을 어릴 때부터 친구라고 그 고생을 해 가며 도와줬더니 이제는 마누라 치마폭에 숨어서 사람 염장을 질러? 이걸 오늘 포를 떠서 갯값을 치러? 말어?”
 “아하하, 진정하라고 진정.”
 빠직하며 뭔가가 끊기는 소리가 들리는 듯하더니 막문기는 시청 정문의 현판을 가리키며 외쳤다.
 “내가 지금 진정하게 생겼냐! 사람들이 저걸 보면 뭐라 생각하겠어!”
 시청의 정문, 동광시청이라 적힌 평범한 나무 현판 위에 금가장이라는 화려한 현판이 자리 잡고 있었다.
 모르는 사람이 지나가다 얼핏 보면 금가장에서 시청의 업무를 보는 것으로 착각할 만했다.
 “당장 떼 내! 도대체 너희 집에 있던 현판은 왜 가져온 거야!”
 “내가 머무는 곳이 바로 금가장이다!”
 배 째란 듯이 쭉 내밀고 양손을 허리에 얹은 채 당당하게 선언하듯 외치는 적산의 태도에 문기는 눈이 돌아갔다.
 “······네놈 무덤에 비석 대신 저 현판을 박아 주마! 죽어!”
 문기는 말은 그렇게 했지만 그래도 친구랍시고 적산을 차마 죽이지는 못하겠는지 다리몽둥이 하나 분질러 버리기 위해 도를 불끈 움켜쥐며 적산에게 다가갔다.
 “아니, 왜 문 앞에서 싸우고들 그래?”
 갑자기 들려온 소리에 고개를 돌려 보자 너저분한 넝마 차림에 덥수룩하게 떡진 머리, 허리춤에는 호로병을 하나 차고 있는, 딱 봐도 아, 저놈 저거 거지구나 싶은 사람이 씨익 웃으면서 서 있었다.
 “어? 이야, 거지새끼! 너 오랜만이다!”
 “소견이냐? 개방 일은 어쩌고 여기까지 왔냐? 말해 두지만 난 내 계획을 바꿀 생각이 없다. 여기에 분파를 세우고 싶으면 일을 해.”
 “어이, 어이! 오랜만에 만난 친구한테 고작 한다는 소리가 그거냐?”
 “회포는 나중에 풀기로 하자. 일단 저놈 좀 조져 놓고.”
 “어어? 너 진짜 마누라한테 이른다?”
 “크윽! 넌 남자로서 자존심도 없냐! 사내대장부가 여인의 뒤에 숨다니!”
 “흥! 우리 가문의 철칙인 금가십계 중 제일계! 남아는 스스로에게만 당당하면 된다! 내가 꿀릴 게 없는데 왜 자존심을 세우냐? 아하! 예쁘고 잘난 마누라 얻은 게 부러워서 그런 거지, 그치?”
 “크아악! 내 오늘 너 잡고 갯값 치르고 만다!”
 막문기는 괴성을 지르고는 도를 뽑아 들고 적산에게 달려갔다.
 적산은 황급히 뒤돌아 후다닥 도망쳤지만 일반인이 달려 봤자 무인에게는 한 걸음일 뿐이었다.
 순식간에 따라잡은 문기는 초식도 필요 없이 그냥 있는 힘껏 다리몽둥이를 분질러 버리려고 했으나 중간에 소견에게 가로막혔다.
 “엇차차, 이놈 이거, 한번 헤까닥하면 눈에 보이는 게 없는 건 여전하구만.”
 소견은 이화접목의 수법으로 문기의 도를 흘리며 적산을 발로 차 저 멀리로 떨어트리고 말했다.
 “지금 이럴 때가 아냐! 중요한 일이다.”
 “중요? 흐흐, 지금 나한테 저놈 갈아 마시는 것보다 중요한 일이 있다고 생각하냐?”
 흰자위만 가득한 눈을 희번덕거리며 광기를 흘리는 문기에게 소견은 굳은 표정으로 문기의 뒤쪽에 시선을 주며 말했다.
 “음······ 니 뒤에 빙화 소저가 와 있구만.”
 “흐흐, 웃기지 마. 형수님은 지금 청림이랑 같이 시장에 장 보러 갔다. 오려면 한참 멀었어······. 진짜냐?”
 말을 하면서도 걱정스러운지 문기의 돌아간 눈이 다시 돌아왔다. 그러곤 조심스레 소견에게 물었고 소견이 고개를 끄덕이자 문기는 황급히 도를 집어넣고는 재빨리 뒤돌아서서 굽실거렸다.
 “헤헤, 형수님, 이건 그저 오랜 친구 사이의 장난일 뿐······.”
 “푸하하, 우리 마누라가 무섭긴 무서운가 보구만!”
 “켈켈켈, 순진한 놈. 인생 참 불쌍하게 산다.”
 문기의 뒤에는 아무도 없었다.
 불쌍하다는 표정으로 문기를 바라보며 속삭이는 행인들밖에는······.
 “쯔쯔, 시장님 예전에는 안 저랬는데.”
 “역시 매 앞에는 장사가 없나 봐. 하긴 나라도 그렇게 맞으면 경기 일으키겠다.”
 “사람 참, 망가지는 건 순식간이라니까······.”
 배를 잡고 나뒹굴며 웃어 재끼는 적산과 소견. 문기는 그저 부들부들 떨며 서 있었다.
 “푸하하! 아, 간만에 실컷 웃었다. 역시 고향에 오니까 좋구만.”
 “······어.”
 “응? 뭐라고?”
 “전부 나가 죽어!”
 문기는 시뻘게진 얼굴로 양쪽 허리에 찬 도와 검을 모두 빼 든 채 엄청난 살기를 뿌리며 소견에게 달려들었다.
 
 
 
 한바탕 소란이 있은 후 객청의 접견실. 소견과 문기는 시퍼렇게 멍든 두 눈을 문지르며 투덜거렸다.
 막문기를 상대로 개방의 후계자인 후개라는 이름에 걸맞게 접전을 벌이던 중, 장을 보고 돌아오던 설화린에게 집 앞에서 난리를 피운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무지막지하게 얻어맞은 두 사람이었다.
 맞는 와중에 여기가 어떻게 집 앞이냐는 막문기의 항의에 화린은 때린 데 또 때리고는 청사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문기와 소견은 끙끙거리며 쑤신 몸을 부여잡고는 어느새 화린을 따라 들어가 버린 적산에게 이를 갈며 나란히 객청의 접견실로 향했다.
 “아이고, 삭신이야.”
 “에구에구! 야, 계란 좀 줘 봐.”
 “쯔쯔쯔, 아, 그러게 다 큰 어른들이 남세스럽게 왜 싸우고 그래! 애들도 아니고······.”
 “네놈 때문이잖아!”
 “네놈이 문제야!”
 소견과 문기는 유유자적하게 앉아서 깨작깨작 당과를 먹고 있는 적산을 노려보았다.
 “근데 거지, 너는 여기 웬일이냐?”
 적산의 물음에 소견은 한숨을 쉬며 말했다.
 “부러운 새끼. 내 어렸을 때부터 어처구니없는 금가십계를 들으며 저놈 저거 장가나 갈 수 있을까 걱정했는데 떡하니 무림삼화 중 하나를 꿰차?”
 “움화화, 이게 바로 내 능력이라는 거다!”
 소견은 팔짱을 끼고 오만하게 웃어 재끼는 적산을 노려보며 이를 갈았다.
 “······팔자 좋은 소리 하고 있네. 너 지금 어떤 상황인지 모르냐?”
 “훗, 당연히 알고 있지. 내 목숨을 노리는 떨거지들이 있다면서? 오라고 그래! 우리 마누라가 손봐 줄 거니까. 움화화! 그게 바로 영웅을 시기하는 소인배들의 어리석은 행동 아니겠냐?”
 소견은 멍하니 적산을 바라보다 고개를 돌려 문기에게 말했다.
 “저거 내가 갈아 마셔도 될까?”
 “반만 남겨 줘.”
 “어이, 마누라한테 이른다?”
 “하아······ 어렸을 때부터 거지한테 동냥밥 뺏어 먹던 너의 그 뻔뻔함은 여전하구나.”
 “에이, 쑥스럽게 칭찬은.”
 “그게 칭찬이냐! 크으······ 네놈이랑 말하면 혈압이 오른다. 지금 그런 떨거지들이 문제가 아니야.”
 “그럼?”
 “문기, 너도 바짝 긴장해야 할 거다.”
 “왜?”
 “지금 무림에서 한가락 하는 놈들은 죄다 이리로 몰려오고 있어.”
 “왜? 우리 마누라 보러? 푸하하, 우리 마누라가 쫌 심하게 한가락 하지!”
 본인이 당사자인 것처럼 거만하게 콧대를 치켜세우는 적산은 깨끗이 무시한 채 소견은 계속 문기를 바라보며 말했다.
 “끄응······ 문기, 너도 소문 들었지? 검화 백화연 소저가 구파일방과 오대세가를 상대로 비무행을 벌이고 다닌다는 거.”
 “그래. 검화란 별호를 얻은 것도 비무행을 다니면서부터니까 전부 상대가 안 된다면서?”
 “음······ 미혼공이라 착각할 정도의 미모에 그 엄청난 무공까지······! 우리 방주 할배가 단 일 초 만에 깨졌어.”
 “헤에, 그 정도야? 근데 뜬금없이 검화 얘기가 왜 나오냐?”
 “멍청한 놈! 검화 소저는 최근 남궁세가를 끝으로 비무행을 마쳤다. 그다음 행선지가 어디일 거 같냐?”
 “뭐, 내 알 바 아니지.”
 적산의 유유자적한 태도에 소견은 이빨을 갈았다.
 “뿌득! 남궁세가에서 다음엔 어디로 갈 거냐는 물음에 이곳 동광시로 온다고 했다는군. 무림에서 초절정을 넘어선 고수로 인식되는 검화와 빙화다. 궁금하지 않냐? 둘이 붙으면 어떻게 될지?”
 소견의 말에 문기는 심각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 말은 지금 검화 소저가 이곳으로 향하고 있다는 말?”
 “빙화 소저는 우내삼존 중 한 명인 빙존 설성룡의 의발전인. 검화 소저는 같은 우내삼존 중 하나인 검존 한시민의 의발전인. 이 정도면 싸움 구경 좋아하는 놈들이 눈에 불을 켤 만하지 않아? 아마 며칠 안에 정파의 대표들이 와서 이것저것 간섭할 거다. 인원 통제부터 시작해서 비무대를 세우는 일까지 꽤나 골치 아플걸. 그나마 무림맹은 체면 때문에 눈치만 보고 있지만 건수라도 생기면 당장에 끼어들 기세야.”
 문기는 소견의 말에 인상을 찌푸렸다.
 자신이 비록 이곳 동광시의 시장이라지만 상대는 무림의 명숙들. 애초에 상대가 되지 않는다.
 그들이 몰려와서 이것저것 시의 대소사에 간섭할 일을 생각하자 머리가 지끈지끈 아파 왔다.
 소견은 그런 문기를 고소하다는 표정으로 바라보다가 적산을 보니 적산도 안색을 굳히고 심각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걸 본 소견은 피식 웃으면서 말했다.
 “훗! 왜? 꼴에 니 마누라라고 걱정되냐?”
 “음······ 너 말이다.”
 “뭐?”
 “너! 왜 내 마누라한테 형수님이라고 안 부르고 자꾸 빙화 소저라고 부르냐? 우리 마누라한테 이른다?”
 “······.”
 잠시 적산을 바라보던 소견은 산뜻한 표정으로 문기를 향해 말했다.
 “······문기야, 우리 그냥 같이 갯값 물고 말까?”
 “······동의한다.”
 “어어? 뭐야? 우리 마누라한테 이른다?”
 “흐흐흐, 갯값 물지, 뭐.”
 “내 죽더라도 니놈 갈아 마시고 죽어야겠다.”
 “음······ 살려 주세요.”
 문기와 소견이 눈에 살기를 띠며 적산에게 다가갈 때 끼익 하는 마찰음과 함께 설화린이 쟁반에 다기를 들고 접객실 안으로 들어섰다.
 “앗, 마누라! 얘들이 나 갈아 마신대!”
 적산은 화린을 반기며 고자질하듯 외쳤고 화린은 무심한 눈길로 둘을 쳐다보았다.
 후다닥 제자리로 돌아가 딴청을 피우고 있는 둘을 바라본 화린은 탁자에 다기를 내려놓았다. 그러고는 무표정한 얼굴로 쟁반을 반으로 쪼개더니 두 손으로 비벼 가루로 만들어 버렸다.
 다시 시선을 피하며 딴청을 피우는 둘을 스윽 바라본 후 적산에게 고개를 살짝 숙이고 밖으로 나갔다.
 “으음······ 저거 건드리면 갈아 버리겠다는 뜻이겠지?”
 “······진짜 한다면 할걸, 아마?”
 “캬캬캬! 우리 마누라 참 대단하지? 네놈들은 우리 마누라 발끝에도 못 미쳐!”
 “네네, 대단한 마누······ 아니, 형수님 둬서 참 좋으시겠수.”
 “빌어먹을 놈······.”
 세 명이 찻잔에 차를 따라 한 모금씩 마시면서 이런저런 서로에 대한 험담을 나눌 때 문득 소견이 적산을 바라보며 말했다.
 “근데 너 혼인식은 안 하냐?”
 “혼인식?”
 “그럼 그냥 이대로 은근슬쩍 넘어가려고?”
 “아니, 그게 음······.”
 소견은 머뭇거리는 적산을 어처구니없다는 듯이 쳐다봤다.
 “마! 혼인식 한다 하면 하객이 줄을 설 텐데 뭐가 문제야?”
 “그게······ 나도 한번 말은 해 봤는데 쩝, 아직 때가 아니라나?”
 “뭔 때? 용한 점쟁이한테 길일이라도 받았대냐?”
 “나도 모르지, 뭐······. 우리 마누라가 싫다는데 강요할 수도 없고 게다가······.”
 “게다가?”
 “뭔가······ 문화적 차이가 엄청나다.”
 “뭔 소리여! 문화적 차이라니?”
 소견의 반문에 적산은 한숨을 쉬면서 말했다.
 “니놈이 못 봐서 그래. 일주일 전에 울 마누라가 청림이를 울린 일이 있었거든. 그래서 사과하고 애 달래라고 하니까 뭐라고 한 줄 아냐?”
 “아하! 그거 나도 보고받았다. 눈깔을 뽑아서 구슬로 만들어 귓구녕에 박아 버린다고 했다면서? 그거 때문에 빙화 소······ 아니, 형수님이 무림인 분류 목록에서 금촉 급으로 분류됐다.”
 “금촉 급이 뭔데?”
 “목적이 있어 지정한 인원 이외 절대 접근 금지, 접촉 금지, 뭐. 한마디로 성질 더럽고 무공도 세니까 건드려서 피 보지 말란 소리지.”
 “크크, 그렇게 오해할 만하긴 하지.”
 “오해?”
 “에휴······ 말도 마라. 지금도 그렇지만 그 예쁜 얼굴로 무표정에 변화 없는 목소리로 그런 험악한 소리를 하는데 누가 배겨 나겠냐? 청림이 그때 혼절해 버렸다. 근데 나중에 넌지시 물어보니까 빙궁에선 다들 그렇게 한댄다.”
 “······뭐야, 그 소리는? 빙궁에선 애 달랠 때 그런 협박을 한다는 거냐?”
 “그렇다니깐! 자기 딴에는 달랜다고 한 소린데 애가 혼절하니까 미안한지 그때부터 쭉 같이 돌아다닌다.”
 “허허, 참 빙궁이란 데가 그렇게 과격한 곳인 줄은 몰랐구만······.”
 “게다가 울 마누라 사부는 무슨 생각인지 사람은 맞아 봐야 본성이 나온다고 일단 패고 보라고 가르쳤으니, 원······.”
 “에? 잠깐? 일단 패고 보라니? 그럼 내가 맞은 것도?”
 “그래. 그래도 다행히 여자와 애는 때리지 말라고 가르쳤더라. 그리고 남편은 하늘같이 모셔야 한다고 해서 나한테는 손도 안 대고······ 그 말 들으니까 참 다행스럽더군.”
 “그럼 나는! 난 계속 맞으면서 생활해야 한다고?”
 “뭐 나만 안 때리면 되니까 내 알 바 아니지.”
 “너 이 자식······.”
 소견은 적산을 보며 부들부들 분노에 떨었다.
 자기는 안전하니까 딴 놈들은 어찌 되든 상관없다는 저 태연자약한 모습에 이가 부득부득 갈렸으나 어떻게 대응할 방법이 없었다.
 예전 같았으면 속 시원하게 한 대 후려치기라도 했겠지만 이제는 때리지도 못하니 이만 갈 뿐이었다.
 “아, 참! 잊을 뻔했다!”
 “뭘!”
 심사가 안 좋으니 나오는 소리도 곱지가 않다. 소견은 빽 하니 소리치며 적산을 노려보았고 적산은 빙글빙글 능글맞게 웃으면서 히죽거렸다.
 “너 온 김에 좀 보태라.”
 “뭐를?”
 “내 혼인식 축의금이랑 결혼 자금.”
 잠시 무슨 말인지 이해를 못 하던 소견은 벌떡 일어서며 외쳤다.
 “······크와악! 니가 인간이냐! 거지한테서 돈을 뜯으려고! 벼룩도 양심이 있다! 이 벼룩만도 못한 인간아!”
 “어라? 나 벼룩만도 못한 놈이야?”
 적산은 가증스럽게도 그 누구도 속지 않을 순진무구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당연하지! 거지한테 동냥은 못 해 줄망정 돈을 뜯어먹으려고 하다니!”
 “벼룩만도 못한 놈이라······. 흐음······ 그럼 우리 마누라는 벼룩만도 못한 놈이랑 혼인한 게 되는구만······.”
 납득이 간다는 듯 과장되게 고개를 끄덕이는 적산의 태도에 소견은 아차 싶었다.
 “아니, 저기······.”
 “뭐, 방금 그 발언은 그냥 넘어갈 수가 없구만······. 울 마누라한테 가서 말해야겠어.”
 적산은 은근슬쩍 일어나 나가려는 자세를 취했다. 소견은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한 채 부들부들 떨면서 적산을 노려보는데 문기가 결정적인 한마디를 날렸다.
 “그냥 갯값 물었다고 생각해라. 나도 안 준다고 버티다가 지옥을 경험했다.”
 문기의 진심 어린 충고에 소견은 결국 이번 일을 위해 준비해 온 전 재산 은자 세 냥을 탈탈 털어 고이 갖다 바치고 말았다.
 “크흑, 내 돈······ 그 돈이 어떤 돈인데······! 거지가 무슨 임무 수행금이냐며 제대로 나오지도 않는 돈을 악착같이 받아서 모으고 모은 돈인데······.”
 “뭐······ 팔자려니 생각해라. 저놈을 친구라고 사귄 순간 이미 우리 인생은 쫑 난 거야······.”
 적산이 소견에게서 받은 은자 세 냥을 들고는 흥얼거리며 마누라 준다고 쪼르르 달려 나갔다.
 이를 갈며 처절하게 울부짖는 소견에게 문기는 자조 어린 위로를 건넬 수밖에 없었다.
 
 
 
 
 
 비무 대회가 열리다
 
 
 
 “흐갸갹! 오늘 일도 끝났다!”
 적산은 시원스레 기지개를 켜며 뭉친 근육을 풀듯 어깨를 휙휙 돌렸다.
 동광시의 최하급 공무원. 일명 잡졸인 적산은 말 그대로 시의 온갖 잡스러운 일을 도맡았다.
 거리 청소부터 성벽 보수까지.
 안 하는 일이 없었고 못 하는 일도 없었다.
 물론 갑자기 하늘에서 떨어진 마누라가 무림에서 명성을 떨치는 고수인지라 알아서 편의를 봐주는 것도 있고 해서 요즘은 다가오는 여름을 대비한 배수로 공사와 제초 작업을 쉬엄쉬엄 해치우고 있었다.
 칼퇴근을 생활의 신조로 삼는 적산인지라 저녁 시간대를 알리는 타종 소리가 들리자마자 도구를 정리하고는 시청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다른 인부들은 모여서 작업 종료 확인을 받거나 작업반장에게 보고를 해야 하지만 적산과 같은 잡졸들은 작업 지원의 의미가 강하기에 퇴근 시간에 퇴근하면 되는 일이었다.
 평상시라면 집으로 향했을 적산이지만 몰려드는 사람들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문기의 신세를 지고 있는지라 시청으로 가야만 했다.
 도시 한가운데 위치한 시청으로 가기 위해선 그나마 번화가라 부를 수 있는 동광로를 지나쳐야 했다.
 “으음, 역시 사람 팔자는 모르는 거라더니 내가 주목을 받게 될 줄은 몰랐네······.”
 힐끔힐끔 자신을 곁눈질하며 수군거리는 사람들을 바라보며 적산은 쓴웃음을 지었다.
 느닷없이 자신의 인생에 끼어든 화린의 존재는 자신이 더 이상 평온한 삶을 살 수 없다는 걸 의미했지만 적산에겐 상관없었다.
 눈에 확 띄게 예쁜 미인이 자기 마누라다. 거기에 무지막지하게 강하다. 더 이상 뭘 바라겠는가?
 적산은 시청에서 자신을 기다리고 있을 화린을 생각하자 이내 싱글벙글 입이 째져라 웃음이 나왔고 발걸음도 절로 빨라졌다.
 “실례합니다. 혹시 빙화 설화린 소저의 부군이신 금가장의 장주, 금적산 대협이십니까?”
 “엥?”
 적산은 동그래진 눈으로, 갑자기 앞길을 가로막으며 깊숙이 허리를 숙인 채 포권을 하는 남자를 바라보았다.
 비단 장포를 몸에 감싸고 훤칠한 키에 반짝이는 금발, 곱상한 얼굴을 가진 공자님인지라 적산도 엉겁결에 마주 허리를 숙이며 말했다.
 “아, 예······. 근데 누구신지······?”
 남자는 적산의 말에 환하게 미소 지으며 다시 한 번 깊숙이 허리를 숙이면서 말했다.
 “오오, 반갑습니다! 저는 하북주에 위치한 하북팽가의 가주이신 오호도 팽일기 가주님의 차남인 일도단천 팽기진의 둘째인 팽진욱이라고 합니다. 강호의 동도들은 부끄럽게도 탈명삼도란 허명을 붙여 주었습니다.”
 “아, 예······. 금적산이라고 합니다.”
 뭔 놈의 소개가 이렇게 긴지······. 적산은 역시 속으로 투덜거리며 간단하게 화답했다.
 적산의 태도에 팽진욱은 약간 당황한 듯 머뭇거렸다.
 무림에 이름 높은 구룡팔봉 중 하나이자, 앞으로 무림을 이끌어 갈 후기지수로서 높은 명성을 지니고 팽진욱. 그 이름 석 자만 대면 어디 가서 꿀릴 일 없이 알아서 대접해 주는 일에 익숙해져 있던 그로선 적산의 데면데면한 태도가 당황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저······ 그럼 전 이만.”
 일면식도 없는 남자랑 길거리에 서서 대화하는 취미는 없기에 적산은 꾸벅 인사하고 지나치려 했지만 팽진욱은 황급히 적산의 소매를 잡으며 말했다.
 “어디 가십니까?”
 “예? 집에 가는데요?”
 “아하하! 이렇게 만난 것도 인연인데 그냥 지나칠 수야 없지요! 부디 저에게 금적산 대협을 모실 수 있는 기회를 한번 주시겠습니까? 제가 거하게 한번 모시겠습니다.”
 “예? 그게······ 마누라가 집에서 기다리는데······.”
 적산이 화린을 떠올리며 망설이자 팽진욱은 적산의 소매를 잡아끌며 말했다.
 “자, 자! 무림에 이름 높은 설 부인께서도 부군이 무림의 동도들과 친분을 나누는 걸 반대하지는 않을 겁니다. 자, 가시죠! 이미 준비 다 해 놨습니다.”
 “어어······ 이러면 안 되는데······.”
 적산은 안 되는데······를 중얼거리면서도 땀 흘려 일하고 나서 시원한 술 한잔이 생각나는지라 못 이기는 척 팽진욱을 따라 동광시에서 제일 크고 시설도 좋은 흑화루로 갔다.
 “크하하, 부어라! 마셔라!”
 처음엔 못 이기는 척 따라간 적산이지만 이내 술자리에 어울려 벌컥벌컥 술을 들이켜며 흥청망청 즐기기 시작했다.
 날이 어두워지고 등불이 도시를 밝힐 때 어떻게 알았는지 화린이 흑화루로 찾아왔다.
 “오오, 마누라! 잘 왔어! 헤헤.”
 “서방님, 취하셨사옵니다.”
 “음? 헤헤, 내가 기분이 좋아서 좀 마셨지! 우하하하하!”
 비틀거리던 적산은 발을 헛디뎠는지 쓰러졌고 그런 적산의 몸을 화린이 부축했다.
 만취해 정신을 잃은 적산을 부축한 화린은 방 안을 스윽 둘러보았다.
 화린이 등장했을 때부터 선망의 눈길로 화린만을 바라보던 팽진욱은 화린과 눈이 마주치자 황급히 포권을 하며 자신을 소개했다.
 “저는 하북주에 위치한 하북팽가의 가주이신······.”
 하지만 말을 채 끝내기도 전에 화린은 팽진욱의 말을 무시하더니 적산을 업은 채 밖으로 나갔다.
 팽진욱은 자신의 말이 무시당했음에도 불쾌해하기는커녕 허겁지겁 화린을 배웅했다.
 흑화루 밖으로 나온 화린은 구석구석 등불이 미치지 않는 어둠 속을 스윽 돌아보다 휙 몸을 돌렸다.
 화린이 사라질 때까지 망연히 바라보던 팽진욱이 안타까움에 한숨을 내쉴 때 기루 주변에 은밀히 매복해 있던 남자들이 진욱에게로 다가왔다.
 “성공했는가?”
 “아니, 실패야. 꼴에 화린 낭자가 무섭기는 무서운지 기녀를 붙여 주려고 해도 마누라 있다고 술만 마시더군.”
 “흥! 제깟 놈이 그래 봤자지! 조금 더 취하게 만든 다음에 은근슬쩍 붙여 주면 못 이기는 척 달라붙었을 텐데 아깝군.”
 한 남자가 입맛을 다시며 화린이 사라진 방향을 바라볼 때 진욱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 실패야. 기녀가 가까이만 가도 학을 떼면서 집에 가려고 하더군. 순수하게 술이랑 요리만 즐기겠다나?”
 “그럼 이제 어쩌지?”
 “훗! 걱정하지 말라고. 기녀를 붙여 바람피우는 장면을 화린 낭자가 목격하게 만들어 파혼을 유도한다는 유치한 계획은 성공해도 그만, 안 해도 그만이었으니까 이미 목적은 달성했어.”
 진욱은 품 안에서 한 장의 서류첩을 꺼내 바라보며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소견의 예상대로 사흘도 채 지나지 않아 문기는 수많은 사람들의 방문첩을 받았다.
 웬만한 사람들은 바쁘다는 핑계로 접견을 거부했다.
 그 지위와 배경이 좀 껄끄러운 사람들은 안 만날 거요, 만나고 싶으면 배부터 째쇼, 하는 식의 뚝심으로 밀어붙였다.
 하지만 지금 받은 방문첩은 도저히 거부할 수가 없었다.
 “패천맹 맹주 거력패도 양만기, 세가연합회 회주 창천일검 남궁상, 의협단 단주 구룡신창 악불만, 정의련 련주 매화검 한이상, 음? 호화단 단주 팽진욱? 뭐여, 이놈은?”
 문기는 호화단의 방문첩을 사정없이 찢어 버리고는 총관을 불러 방문첩의 주인을 접견실로 모시라 말했다.
 “에휴, 패천맹, 세가연합회, 의협단, 정의련······ 그 양반들 참 할 일 없다······. 그나마 무림맹이 안 끼어든 게 다행인가?”
 문기는 투덜거리며 싫은 기색이 역력한 표정으로 접견실로 걸어갔다.
 만나기는 싫었지만 만날 수밖에 없었다.
 웬만한 배경이면 시장이라는 직책으로 어떻게 배를 째 보겠는데 이들은 중천의 십팔 주를, 적게는 한 개 주에서 많게는 세 개의 주를 장악한 막강한 인물들이었다.
 세력이든 배경이든 지닌바 명성이든 무엇 하나 꿀릴 게 없는, 현 무림을 이끌어 가는 중추적인 인물들이었다. 배분에서도 상대가 안 되는 새까만 후배인 자신으로서는, 이렇게 정중히 방문첩이라도 들고 와서 말 한마디 해 주는 것도 많이 대우해 주는 거였다.
 무공이라고는 일초반식도 모르는 평범한 사람이 시장으로 있었더라면 방문첩은커녕 일방적으로 통보만 하고 끝날 일이었다.
 “허허! 오랜만이네, 막 소협. 아니, 시장님이라 불러야 하나?”
 “별말씀을, 소협이란 칭호도 과분합니다.”
 접견실에서 차를 마시며 담소를 나누던 네 사람은 막문기가 들어오자 반갑게 맞이했다.
 문기는 언제 찌푸렸냐는 듯이 환하게 웃으면서 정중하게 포권을 취하며 네 사람에게 예를 올렸다.
 자신이 싫건 좋건 그 네 사람은 현 무림을 지배하는 사람들이었다.
 서로의 안부를 물으며 한가로이 담소를 나누다 세가연합회의 회주인 남궁상이 은근슬쩍 지나가는 투로 물었다.
 “그러고 보니 요즘 무림에 명성이 자자한 빙화 여협이 이곳에 있다지요?”
 “아, 예. 빙화 여협과 백년가약을 맺은 인물이 저와 안면이 있는 사이라 불의의 사고를 미연에 방지하고자 거처를 이리로 옮기라 하였습니다.”
 문기는 이제부터 시작이라는 생각에 정신 바짝 차렸다.
 “허허, 잘하셨소이다. 요즘 하도 세상이 흉흉한지라 무슨 일이 일어날지 아무도 모르는 거지요······.”
 의협단 단주 구룡신창 악불만의 말에, 순간 문기의 이빨이 작게 갈린다.
 은근슬쩍 동광시의 치안이 형편없다고 비하하는 말. 하지만 이대로 당할 문기가 아니다.
 이미 삼 년여간 조정의 너구리들과 투덕거려 온 솜씨는 뽐낼 정도가 되었다.
 “하하, 그렇지요. 동광시는 별문제가 없는데 밖, 에, 서, 기어들어 온 어중이떠중이 같은 잡, 스러운 것들만 없으면 흉흉한 세상이란 소리도 안 들을 텐데, 참, 안타까운 일입니다.”
 문기가 한 자 한 자 은근슬쩍 강조하며 하는 말에 순간 네 명의 이마빡에 잠시 혈관이 솟았다가 가라앉는다.
 여기서 불편한 기색을 보였다간 문기의 말대로 밖에서 기어들어 온 잡스러운 것이 되기에 참을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그들은 이미 수십 년간 너구리나 능구렁이들과 싸워 온 백전노장이었다.
 “허허, 그런 잡것들이 있다니 참 안타까운 일일세. 하지만 자네라면 충분히 대처하리라 믿네. 그건 그렇고······ 자네도 바쁠 테니 단도직입적으로 말하지. 자네도 알다시피 검화 소저의 다음 행선지가 이곳 동광시라는 건 알고 있지?”
 “예. 그것 때문에 정신이 없습니다.”
 “알다시피 그 명성이 천하를 떨쳐 울리는 무림삼화 중 하나인 검화 여협이 이곳으로 오는 목적이 뭐겠나?”
 “그야 당연히 형수······ 흠흠, 빙화 소저와의 비무 때문이겠지요.”
 “맞네. 한데 전 무림의 이목이 쏠리는 근 백여 년 만의 초절정 고수들의 비무가 허술하게 치러져선 안 되는 거 아닌가?”
 “예, 그렇지만 제가 문의해 본 바로는 빙화 소저는 비무를 할 마음이 없는 듯합니다만.”
 “허허, 걱정 말게. 백여 년 만의 사건이야. 어영부영 넘어가서는 안 될 일이지. 이왕 전 무림의 이목이 집중되는 거, 거창하게 비무 대회를 열어야 하지 않겠나?”
 “무슨 말씀이신지?”
 “검화와 빙화의 비무라 하면 전 무림의 이목이 집중되지 않겠나? 하지만 비무를 할지 안 할지도 모르는 일인데 만약 비무가 성사되지 않는다면 비무를 보기 위해 먼 데서 이곳 동광시로 모여든 사람들이 실망하지 않겠나. 그럴 바엔 눈요깃거리라도 제공하잔 말일세.”
 “그래서 비무 대회를 여신다는?”
 “그렇네. 이왕 판이 벌어질 거 무림의 후기지수들이 한자리에 모여 서로의 기량을 나누고 친목을 다지는 행사를 통해 무림의 화합을 도모하자는 뜻이지.”
 “그러다 검화 소저와 어떻게든 맺어지면 더 좋고?”
 “하하, 바로 그거······ 흠흠.”
 거력패도 양만기는 말을 얼버무리며 헛기침을 했다. 문기는 짧게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비무 대회는 어떤 방식으로 하실 예정이십니까?”
 “일단 본선에 오를 서른두 명을 뽑기 위해 예선을 거치고 본선에서 우승한 자는 빙화 소저에게 도전할 수 있는 자격이 주어지네.”
 “······후, 조금 전에 말씀드렸다시피 빙화 소저는 비무에 관심이 없습니다.”
 “그건 지금 여기 자리에 없는 호화단의 단주란 직책을 맡고 있는 팽진욱이라는 건실한 청년이 해결했다네. 금가장의 장주를 만나 안사람이 우승자와 비무하기로 합의를 봤다는군.”
 “그게 무슨?”
 구룡신창 악불만은 웃으며 품에서 서첩을 꺼내 문기에게 건넸고 서첩을 받아 들고 펼쳐 본 문기는 부들부들 떨다가 외쳤다.
 “그음저억사안 !”
 
 
 
 쿠당탕!
 문기는 허겁지겁 방문을 열어젖혔다가 눈앞이 번쩍거리는 경험을 했다.
 “여어〜! 친구여! 아무리 너와 내가 막역지우라지만 남의 신방에 그렇게 함부로 쳐들어오면 안 되지. 우리 마누라가 싫어하잖아.”
 “너······ 너······ 너!”
 문기는 적산이 침상에 편안히 누워 화린의 무릎에 머리를 베고는 화린이 먹여 주는 과자를 날름날름 받아먹는 모습을 보고 덜덜덜 몸이 떨릴 정도로 부러웠다.
 하지만 부러운 건 부러운 거고 일단 눈앞에 닥친 일을 해결해야 했다.
 “너 이 계약서는 뭐야!”
 “음? 뭔 계약서?”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이 바라보는 적산을 향해 문기는 답답한지 가슴을 탕탕 치면서 서류첩을 내밀었다.
 “팽진욱이라는 작자하고 맺은 이 계약서 말이야!”
 “아! 그거? 거 팽진욱이라는 놈 요즘 애 같지 않게 꽤 싹싹하고 빠릿빠릿하더라고. 어제 우연히 만나서 동생 삼았지. 그놈이 뭔가 부탁하기에 수결을 한 기억은 나는 거 같은데 그게 계약서였냐? 근데 뭔 계약이여?”
 별거 아니란 듯이 말하는 적산의 태도에 문기는 목덜미를 부여잡고 끓어오르는 혈압 때문에 잠시 동안 끙끙거렸다.
 상황을 보아하니 우연을 가장하여 접근한 팽진욱이라는 놈의 계략에 공짜 술이라고 주는 대로 넙죽넙죽 받아 처먹다가 취해서 뭔지도 모르고 수결한 것이 눈에 훤했다.
 “뭔 계약인데 그렇게 죽을상을 하고 있냐?”
 문기는 부들부들 떨며 적산을 노려보면서 계약서를 또박또박 읽었다.
 “본인은 금가장의 장주로서 이번 비무 대회의 우승자는 빙화 설화린 소저에게 도전할 권리를 인정한다.”
 “뭐 별다른 내용도 없구만!”
 대수롭지 않다는 듯이 말하는 적산에게 문기는 목소리를 높였다.
 “단! 도전자가 자신의 미흡함을 인정하면 도전자는 금가장의 다른 인원과 비무할 수 있음을 인정한다.”
 “어라? 그건 또 뭔 소리여?”
 “또한! 금가장의 다른 인원과의 비무 시, 그 대체 인원이 비무에 패할 경우에는 비무의 승자가 금가장의 모든 권리를 양도받을 수 있으며 빙화 설화린 소저와의 혼약 또한 없던 일로 만들 것을 맹세하며 본 계약서를 남긴다.”
 “에엑! 뭐야, 그건? 난 그딴 거 본 적도 없어. 내가 미쳤다고 그런 계약서를 쓰냐!”
 적산은 놀라 침상에서 벌떡 일어서며 외쳤고 문기도 지지 않고 계약서를 홱 하니 적산에게 던지며 외쳤다.
 “니놈이 어제 술 처먹고 쓴 거 아냐!”
 “······서방님.”
 싸늘한 얼음 가루가 폴폴 날리는 듯한 화린의 차가운 어조에 적산은 찔끔한 표정으로 황급히 주절거렸다.
 “아니, 저기 마누라, 이건 정말 나도 몰랐던 일이야! 진짜야!”
 화린은 아무 말 없이 어쩔 줄 모르는 적산을 가만히 쳐다보다가 조용히 말했다.
 “앞으로는 주량을 조금 줄여야 할 것 같사옵니다.”
 “어······? 으응! 그······ 그렇지. 이놈의 술이 웬수지, 쩝······. 줄이긴 줄여야지. 아니! 내 기필코 줄이고 만다! 꼭 줄여야지! 근데, 그게 끝?”
 적산의 물음에 이해가 가지 않는 듯 화린은 고개를 갸우뚱 거리며 적산을 바라보았다.
 “아니, 뭐 그러니까, 그 뭐시냐. 난 저기 에······ 나한테 화를 낼 줄 알았거든.”
 적산의 말에 화린은 고개를 깊이 숙이며 말했다.
 “일개 아낙네가 어찌 지아비에게 소리를 높일 수 있겠사옵니까.”
 적산과 문기는 화린의 말에 입을 쩍 하니 벌린 채 화린을 멍하니 쳐다보았다.
 일개 아낙네란다, 아낙네.
 문기는 잠시 혼백이 떠나가는 신기한 체험을 했다. 이내 정신이 돌아오는지 헛기침을 두어 번 하고는 적산에게 말했다.
 “너 말이다, 이건 정말 심각한 문제다. 이건 대놓고 너를 노리겠다는 거야. 빨리 대책을 마련해야 해!”
 “끄응······ 청림이를 내보낼까? 설마 고 조그만한 애를 때리기야 하겠어? 그놈들도 설마 청림이가 나올 줄은 모를 거 아냐?”
 “이런 미친 쫑간나가 아직 술이 덜 깼냐! 점혈은 폼으로 있는 줄 알아! 니놈이 그럴까 봐 비무에 패하면 모든 권리를 박탈하고 혼인도 없었던 일로 한다는 조항이 들어 있잖아! 누군지 몰라도 짧은 시간에 너에 대해 연구를 많이 한 것 같다.”
 “으음······ 아, 뭔가 대책을 세워 봐! 대책을!”
 팔짱을 낀 채 끙끙거리던 적산이 답답한지 문기를 향해 소리쳤다.
 “이런 잡것이, 내가 왜!”
 발끈하는 문기를 향해 적산은 좋은 생각이 났는지 손뼉을 짝 치면서 말했다.
 “아! 니가 나가면 되것다!”
 “이런 썩을 놈! 내가 금가장 사람이냐!”
 적산은 양손을 허리에 떡하니 얹은 채 배를 쭉 내밀고 고개는 한껏 쳐든 채 거만하게 문기를 내려다보면서 말했다.
 “많이 부족하지만 아쉬운 대로 너를 금가장의 식솔로 받아 주겠다. 무릎을 꿇어라!”
 “그냥 내 손에 죽어라!”
 문기는 이성을 잃고 적산에게 달려들다가 화린이 던진 빙환이라 이름 붙인 작은 얼음덩어리에 얻어맞고는 뒤로 나뒹굴었다.
 적산은 그런 문기를 보면서 최대한 거만하게 웃어 재꼈다.
 “움화화, 우리 금가장의 위대함을 이제 알겠느냐!”
 “아이고, 아파라. 쳇, 위대는 개뿔!”
 “켁켁, 아이고 오랜만에 크게 웃었더니 목이 다 아프네.”
 적산은 화린이 건네주는 차를 시원하게 들이켜고는 말했다.
 “농담이 아니라 정말 나 대신 나갈 생각 없냐?”
 “현재 내 직책이 문제야. 시장이란 직책을 가지고 한 문파나 가문에 귀속되면 바로 중앙군이 들이닥친다.”
 “중앙군이 왜?”
 “시장은 한 도시의 모든 것을 책임지는, 과장되게 말하자면 도시의 왕이야. 근데 그 왕이 어딘가의 신하로 귀속된다는 건 왕의 도시 또한 같이 귀속된다는 의미지. 들어만 봐도 딱 반란 일으키는 거 같지?”
 “시장을 관두면 되잖아.”
 “이 썩을 놈이······! 시장 임기 오 년 동안 도시의 시민들이 탄핵하기 전엔 옷을 벗을 수도 없다는 거 모르냐!”
 “끄응······ 소견이한테 시킬까?”
 “소견이도 개방의 후계자인 후개의 몸이다. 일반 개방도가 아니라고. 시장이란 직책과 비슷한 처지야.”
 “아, 그럼 어쩌라고!”
 “그러니까 빨리 대책을 세워야지!”
 “걱정 마시옵소서, 서방님.”
 적산과 문기가 옥신각신하는데 화린이 조용히 말했다. 적산과 문기는 화린에게 뭔가 좋은 생각이 있나 싶은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서방님은 비무 우승자와의 대결을 하루만 늦추시면 됩니다.”
 “엥? 하루? 그럼 무슨 수가 나는데?”
 “제가 죽여 버리면 됩니다.”
 “······.”
 화린의 살벌한 말에 적산과 문기는 한기를 느꼈다.
 
 
 
 쉽게 무인을 접하고 원하는 자는 누구나 무공을 익힐 수 있는``—``문파나 군부에 들어가지 않는 한 좋아 봤자 이류에 불과하지만``—``중천에서 비무 대회는 자신의 실력과 기량을 뽐내는 자리임은 물론, 명성을 얻을 수도 있는, 무인들만의 행사가 아닌 모두가 즐길 수 있는 축제와도 같았다.
 작게는 시골 유지의 잔치에서부터 크게는 무파의 무인들을 뽑는 자리까지, 비무 대회는 사시사철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열렸다.
 대회의 상금만을 노리며 출전하는 비무 전문 고수에서부터 비무 대회가 열리는 장소를 쫓아다니며 물건을 파는 상인들, 비무 대회만 열렸다 하면 쫓아다니기 바쁜 떠들기 좋아하는 호사가들까지, 비무 대회 자체가 하나의 거대한 상품이자 상권이었다.
 하지만 그런 흔하디흔한 비무 대회가 아닌, 근 이백여 년 만에 열리는 초절정 고수, 그것도 무림삼화라 불리는 아리따운 여인들의 비무가 열린다는 소식에 있는지 없는지도 모를 흔한 중소 도시 중 하나일 뿐인 동광시는 삽시간에 유명해졌다.
 당연히 비무 대회란 이름의 상권을 쫓아온 호사가들과 자신의 무를 갈고닦으려는 무인들과 물건들을 팔려는 장사치들이 전부 동광시를 향해 몰려들고 있었다.
 사람들이 몰리는 곳에 사건 사고가 없을 수는 없었다.
 사고 치는 놈들의 대부분이 젊은 혈기와 자신의 힘만 믿고 얼간이처럼 날뛰는 무인들이라 일반 포졸들로서는 감당이 안 되어 문기가 직접 나서서 자근자근 밟아 버렸다.
 그걸로 끝나면 좋았을 테지만 문기가 밟아 버린 놈들 대부분이 비록 삼류 문파라지만 무림 문파에 속해 있었기에 그 문파의 사람들이 우르르 몰려와 항의하느라 정신이 없을 지경이었다.
 시청의 업무를 주관하는 청사에서 천지문이니 파천방이니 하는, 이름도 거창한 문파의 수장들이 흥분하여 떠드는 소리를 한 귀로 흘려듣던 문기는 최초 원인 제공자인 적산을 떠올리며 이를 갈았다.
 하지만 그 시각 적산은 문기가 알았다면 ‘장하다!’ ‘역시 내 친구다!’라고 칭찬할 만할 행동을 생애 최초로, 자기도 모르게 하고 있었다.
 “잠깐! 마누라, 좀 참으라니까! 살인은 안 된다고, 살인은!”
 “서방님, 말리지 마시옵소서. 감히 서방님을 속인 그 팽진욱이란 자를 용서할 수 없사옵니다.”
 “그렇다고 사람을 죽이면 안 된다니까!”
 “······알겠사옵니다. 죽이지는 않겠사옵니다.”
 “진짜지?”
 “예.”
 비무 대회 우승자를 죽여 버리겠단 화린을 문기와 함께 겨우겨우 설득했다. 그녀에게서 그날 죽이지 않겠다는 대답을 얻어 낸 뒤 그들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별다른 대책을 찾지 못한 채 끙끙거리며 하루를 보낸 뒤 다음 날에도 뾰족한 수가 없는지라 넌지시 화린의 의견을 구했다.
 그러나 화린은 모조리 죽여 버리면 만사가 끝인데 왜 그렇게 끙끙거리는지 도통 이해를 못 하는 듯했다.
 결국 문기는 아침을 먹은 뒤 업무 때문에 청사로 돌아갔다. 객청의 방에서 적산이 차를 한 잔 마시며 한탄 조로 중얼거린 말이 화린을 자극해 버렸다.
 “헤유······ 무림 명가의 도련님이 나 같은 놈에게 허리를 숙일 때부터 눈치챘어야 하는 건데. 쩝······.”
 자기 비하 조의 중얼거림에 화린이 발끈했다는 것도 모른 채, 화린이 지아비를 속인 자를 용서할 수 없다며 대뜸 팽진욱을 찾으러 나가려 하자 적산은 화린을 말리느라 진이 다 빠질 지경이었다.
 겨우겨우 죽이지 않겠단 확언을 얻어 낸 적산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려다 마지막의 죽이지는 않겠단 말이 귓가에 거슬려서 화린을 향해 조심스레 물었다.
 “저기······ 죽이지는 않겠단 게 무슨 뜻이야?”
 “말 그대로입니다. 사지를 찢어 버리고 눈알을 뽑고 혀를 자르고 귀를 뭉개 버린 채 고자로 만들어 버려도 살아갈 수는 있을 겁니다.”
 “······죽는 게 나을지도.”
 화린의 말 한 마디 한 마디에 머릿속에서 그 모습이 상상된 적산이 부르르 떨며 중얼거리자 화린은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사옵니다. 그러면 고통 없이 단번에 죽여 버리겠사옵니다.”
 “헉! 아니, 그러니까 그러면 안 된대도!”
 “그럼 죽이지는 않겠습니다.”
 “그러니까 죽여서도 안 되고, 죽이지만 않아서도 안 되고 팔을 자르거나 눈깔을 뽑거나 혀를 뽑거나 고자로 만들어 버려서도 안 된다고! ······아 놔, 내가 언제부터 이런 험악한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하게 된 거지?”
 “어째서이옵니까?”
 이해를 못 하겠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리는 화린의 모습은 표정만 있었으면 참을 수 없을 정도로 귀여울 수도 있었으나 무표정한 얼굴로 고개를 갸웃거리는 모습은 인형의 움직임처럼 어색하기만 했다.
 “에······ 그러니까 그 팽진욱이란 놈은 그 뭐시냐······ 아! 그래, 그 유명한 하북팽가의 자제라고! 그런 놈을 건드리면······.”
 적산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화린의 얼굴에 처음으로 분노의 기색이 나타났다.
 맑고 투명한 두 눈에서 새하얀 백광이 뿜어져 나왔고 주변의 기온이 급하강했다. 초여름의 무더워져 가는 날씨가 갑작스레 겨울로 변하더니 서리가 끼기 시작했다. 화린은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그자가 가문의 위세를 믿고 서방님을 속였사옵니까? 그럼 더더욱 용서할 수 없사옵니다. 지금부터 하북팽가는 저와 빙궁의 주적으로서 이 중천에 팽씨 성을 가진 모든 인간을 말살할 때까지 싸울 것이옵니다!”
 “으아아······.”
 화린을 말리려다 일만 커지자 적산은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한 채 울상을 지었다.
 청사에 이름만 거창한 삼류 문파의 수장들이 몰려와 항의하다가 갑자기 지들끼리 싸우는 걸 말리기도 귀찮아 구경만 하던 문기. 그는 갑작스레 발생한 이변에 얼씨구나 속으로 환호한 뒤 벌떡 일어나 도망치듯 청사를 벗어났고 곧 이곳으로 뛰어왔다.
 “뭐야! 무슨 일이야! 아이고, 형수님! 진정하세요!”
 “그, 그래, 마누라! 진정해, 진정! 응? 진정하라고.”
 화린이 냉기를 펄펄 풍기고 그 옆에서 적산이 안절부절못하는 모습을 보자 문기는 앞뒤 가리지 않고 일단 화린부터 말렸다.
 문기와 적산이 쩔쩔매며 화린을 말릴 때 근처 나무 밑에서 킥킥거리며 처음부터 그 광경을 구경하던 청림은 갑작스러운 추위에 으슬으슬한지 몸을 떨면서 계속 구경하려 했다.
 하지만 도저히 안 되겠는지 자리에서 툭툭 엉덩이를 털고 일어섰다.
 “에휴······ 언니, 그렇게 화 안 내셔도 돼요.”
 “······.”
 처음엔 벌벌 떨며 다가가기조차 무서워하던 청림은 이제 익숙해졌는지 화린의 시선을 받으며 싱긋 웃었다.
 “그 팽진욱이란 사람을 굳이 언니가 혼내 줄 필요는 없잖아요. 비무 대회의 우승자가 금가장에 도전할 권리를 얻는 거면 간단하게 문기 오빠나 소견 오빠가 참가해서 우승하면 되는 거 아닌가요?”
 “······.”
 청림의 말에 주위의 한기가 씻은 듯이 사라졌고 적산과 문기는 멍하니 청림을 바라보았다.
 “그, 그런 방법이 있었군.”
 적산이 고개를 끄덕이자 문기가 발끈하며 소리쳤다.
 “내가 왜 비무 대회에 참가해야 되는 건데! 내가 애송이들이랑 어울릴 수준······이죠. 네네, 목숨을 걸고 반드시 우승하겠습니다.”
 목덜미를 살포시 찌르는 창끝에 문기는 열심히 고개를 끄덕이며 전의를 불태웠다.
 어찌 됐건 화린이 진정한 듯하자 적산은 열심히 화린의 비위를 맞추며 잡아끌었다.
 “자, 자! 들어가자고. 날도 더운데 우리 마누라 고운 피부 까매질라. 마누라 나 차 한 잔 마시고 싶은데, 들어가자고.”
 적산은 화린과 함께 방 안으로 들어갔고 문기는 허무한 듯 한숨을 내쉬었다.
 그런 문기를 향해 청림은 힘내란 듯이 문기의 다리를 토닥였다.
 “호호. 오빠, 힘내요. 오빠가 나서면 우승은 따 놓은 거잖아요.”
 청림은 딴에는 격려한다고 말했다. 그냥 꾹 참고 청사에 있을 걸 괜히 싫은 소리 듣기 싫어 도망쳤다가 되레 일을 만든 문기로선 환장할 노릇이었다.
 보통 절정을 넘어서는 고수들 간의 비무에는 주연들의 비무가 펼쳐지기 전, 흥을 돋우기 위한 비무가 펼쳐진다. 그리고 그런 비무는 무림에 갓 출도하는 초짜들이 자신의 이름을 알리고 길 가다 칼은 안 맞을 만큼의 실력은 지녔다고 증명하는 자리인 것이 관례였다.
 그런데 무림의 초짜들과 같이 칼춤 추라는 것 자체가 문기에게는 추태였고 망신이었다.
 게다가 번갯불에 구워진 콩을 먹고 체해서 죽을 뻔하다 등짝을 스치고 지나가는 주마등에 잊어버린 비상금을 숨겨 둔 장소를 떠올린 찰나, 구사일생으로 살아나 그 비상금을 찾았다.
 그러나 이미 마누라가 날름 먹어 버린 지 오래라 아무 말도 못 하고 속으로만 끙끙댔다. 변비 걸릴 확률보다 낮지만 무림 첫 출도에 일류 이상의 무위를 가진, 이른바 기연 체험을 하고 세상에 나온 이들을 만나는 경우도 있었다.
 그리고 그런 이들은 큰 대회일수록 나올 확률이 높았다. 즉 이기면 당연한 거지만 재수 없어서 그 기연 체험자에게 지기라도 하면 망신도 그런 망신도 없었다. 그렇다고 출전을 안 하자니 진짜 화린에게 맞아 죽을 수도 있기에 별수 없이 출전해야만 했다.
 
 
 
 비무 대회의 준비는 차근차근 이루어졌지만 워낙 급조된 계획이라 곳곳에서 문제점이 발생하고 있었다.
 특히 지나가는 상인들의 중간 보급지로의 역할만 하던 동광시에 무인들과 그에 상응하는 상인들, 구경꾼들이 몰려들자 동광시 자체가 포화 상태에 이르렀다.
 숙박 시설은커녕 한 끼 식사도 제대로 할 수 있는 장소가 없고 한적한 뒷골목마저 사람들이 바글바글한 상태였다.
 그리고 무인들은 어디 어디 파의 장문인과 제자들, 무슨 무슨 방의 장로와 사숙들로, 적게는 대여섯 명에서부터 많게는 수십 명이 한꺼번에 우르르 움직이기에 동광시의 얼마 없는 숙박 시설은 동난 지 오래였다. 높은 값을 불러도 방을 구하기란 쉽지 않았다.
 재빠른 몇몇 시민들이 냉큼 빈집이나 빈방을 대여해 주는 민박 사업을 벌여 일 년 수입에 해당하는 금액을 한몫에 벌어들이자 시민들은 너도나도 할 것 없이 죄다 각자의 집 빈방을 민박으로 대여해 주었다.
 하지만 그런 민박의 수요도 차고 넘쳐서 부족해지자 집을 몇 채씩 가지고 세를 내주는 집주인들이 돈에 눈이 어두워 멀쩡히 집에 살던 사람들을 비무 대회가 끝날 때까지 쫓아내 버리는 일이 발생했다.
 비록 여관에서 금액은 잘 주었다지만 그거야 평상시의 가격일 뿐.
 지금은 작은 쪽방이라도 하룻밤 자려면 열 배에 가까운 돈을 줘도 구할까 말까였다.
 그나마 주위나 인근 도시에 친인척이라도 있는 이들은 잠시 그들에게 신세 지기 위해 떠나갔지만 그런 친인척조차 없는 이들은 길거리에 나앉게 생겼다.
 그리고 이미 가난한 무인들과 개인적으로 온 무인들이 공터란 공터는 죄다 차지하고 있는지라 작은 거적때기에 몸을 말고 사람과 마차가 지나다니는 차가운 길바닥에서 거지처럼 잠을 잘 수밖에 없었다.
 항의해 볼까 생각도 했지만 험악한 무인들을 상대로 항의해 봤자 콧방귀만 뀔 것 같았고 한 달 월세를 하루에 벌어들이는 집주인들에겐 이미 세 들어 사는 사람들의 목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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