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향(歸鄕)
서(序)
1 비해(蜚海)
하나뿐인 형이다.
어려서부터 침착하고 오성(悟性)이 뛰어나 가문을 빛내 줄 무골(武骨)로 기대되었다. 단지 투쟁심이 강하다는 것이 흠이라면 흠일까? 열 살 때쯤이었을 것 같은데······
따악!
경쾌한 소리와 함께 목검 하나가 허공을 날았다.
“형이 또 졌어.”
여장(女裝)을 입혀도 예쁠 것 같은 미소년이 자랑스러운 듯 목검을 살랑거렸다.
소년의 앞에는 머리 하나 정도 더 커 보이는 소년이 손목을 움켜잡고 잔뜩 인상을 찌푸린 채 노려보는 중이었다.
“약속대로 파랑검(波浪劍)은 내 꺼야?”
“흥! 주기나 한데? 파랑검은 꿈도 꾸지 마.”
열대여섯 정도 되어 보이는 소년은 찌푸린 인상을 풀지 않은 채 손목을 연신 주물러 댔다. 충격을 심하게 받은 듯 손목이 몹시 저린 표정이었다. 하기는 목검을 놓칠 정도였으니.
“약속했잖아!”
“흥!”
“일구이언(一口二言)은 이부지자(二父之子)라고 했어!”
기껏해야 열 살 안팎으로 보이는 미소년은 조금도 지지 않고 대들었다.
“뭐야? 이 육삭둥이 녀석이!”
“내가 왜 육삭둥이야! 형이 육삭둥이다!”
“누가 네 형이야! 보자보자 하니까 첩의 자식이 감히······”
“뭐, 뭐라고······ 형! 방금 뭐라고 했어?”
“쪼그만 놈이 귀는 밝아 가지고······”
코밑에 수염이 나기 시작한 소년은 황급히 말을 얼버무리며 목검을 주워들었다.
2 확인(確認)
그 때가 나이 열일곱.
어린놈이 술이나 처먹고 다닌다고 흠씬 두들겨 맞은 다음 날이었다.
얼마나 어렵게 사는지는 다 쓰러져가는 초옥(草屋)만 보고도 쉽게 짐작할 수 있었다. 산에서 약초를 캐어 입에 풀칠을 한다고 하지만 주요 생계원(生計原)은 도둑질인 듯 싶었다.
눈동자를 쉴 새 없이 굴리는 사내의 이름은 적묘(賊猫:도둑고양이), 그 옆에 마주 앉은 여인은 초초(稍稍)다.
초초는 꽤나 미인으로 적묘에게는 어울리지 않는 여자였다. 하지만 궁핍으로 뒤덮인 얼굴은 윤기가 없이 거칠었다.
“흐흐흐······! 네가 비사(蜚祀)의 둘째 자식이라고? 흐흐흐! 제 에미를 쏙 빼다박았구만.”
“저 눔의 영감탱이가 늙었으면 곱게 죽을 일이지, 망령이 났나.”
“흐흐! 왜? 내가 틀린 말했어? 쌍안피(雙眼皮:쌍꺼풀)하며 콧대가 반듯한 것이 영락없이 제 에미구먼, 뭘.”
“저 눔의 영감탱이가! 불쏘시개로 주둥이를 콱 뭉개놓기 전에 아가리 닥치지 못해!”
“흐흐흐······!”
불길한 느낌이 들었다. 그럼 뒷전에서 수군거리던 말이 모두 사실이란 말인가.
“휴우! 그래 맞다. 네 엄마는 시녀(侍女)였어. 나와 같이 비가(蜚家)에 팔려갔지. 내가 열 두 살, 네 엄마가 열세 살. 성격이 온순하면서도 싹싹해서 모든 사람이 좋아했어. 얼굴은 또 얼마나 예뻤다고. 처음에는 그저 예쁜 정도였는데 나이가 차서 물이 오르자······ 호호호! 내가 네 앞에서 못하는 소리가 없구나. 어쨌든 많은 사내들이 줄줄 따랐단다.”
“······”
절망은 시작되었다.
“······ 열여섯에 비가주의 첩(妾)이 되었지. 잘 된 일이지 뭐. 돈에 팔려간 시녀 주제에 보주(堡主)의 첩실이라도 되면 최고지. 안 그러니? 그 때는 행복해 보였는데······”
“제가······ 육삭둥이인가요?”
“어멋! 그것까지 알고 있었니?”
“······”
“그래. 첩실로 들어앉은 지 여섯 달 만에 네가 태어났지. 많은 사람들이 부정한 짓을 했을 거라고 쑥덕거렸어. 대부인(大夫人)의 투기(妬忌)도 무척 심했고. 안팎으로 그러니 산후조리라고 제대로 할 리 있겠니? 결국 너를 낳은 이듬해에 산후통으로 죽고 말았지. 열일곱 꽃다운 나이에.”
“하나만 더 여쭤 볼게요. 육삭둥이가 틀림없죠?”
“······”
초초는 곤란한 듯 대답하지 않았다.
“아버지를 닮은 구석도 있는데······ 이마하고 눈썹은 아버지를 닮았다고들······”
사실 아버지를 닮았다는 말은 한 가닥 희망에 불과했다. 누가 보더라도 얼굴윤곽이 형이나 누이와는 전혀 달랐으니까.
‘세상에 팔삭둥이는 있어도 육삭둥이가 어디 있니? 죽은 네 엄마한테 물어보지 그래?’
대답이 궁한 듯 얼버무리는 초초의 표정에서 그녀의 마음을 읽었다.
모든 사람이 생각하고 있는 것과 똑같았다.
제1장 귀향(歸鄕)
1
중원(中原) 최남단 항구인 해안소(海安所)에는 새벽이 빨리 찾아온다. 날이 빨리 밝는 탓만은 아니다. 살갗을 익혀버릴 듯 작렬하는 열기를 피하고자 어둑새벽이 밝아오기 전부터 밭일을 하러 나온 농부들이 많은 탓이다.
한 명, 두 명······ 손에 호미 같은 연장을 든 노인들이 몇 뙈기 되지 않는 밭을 일구기 위해 느릿한 걸음을 떼어놓았다. 희뿌연 새벽길을 느릿하게 열면서.
유소청(劉少靑)은 바닷바람을 즐기며 천천히 걸음을 떼어놓았다.
쏴아아······! 철썩, 철써덕······!
먼바다에서 달려온 파도가 검은 바위를 애무하듯이 쓰다듬은 다음 모래밭으로 기어올라왔다. 조금 있으면 멀리······ 바다 저 끝에서부터 여명(黎明)이 밝아오리라.
“휴우!”
유소청은 자신도 모르게 묵직한 한숨을 내쉬었다.
간밤에 깊은 잠을 못 이룬 탓인지 머리가 묵직하고 기분도 개운치 않았다.
침소에는 일찍 들었다. 허나 솜 속에 파묻힌 듯 푹 가라앉는 침상 때문에 깊은 잠을 이룰 수 없었다. 딱딱한 대나무 침상이었다면 눕자마자 잠에 들었을 텐데.
바다공기를 들이마시면 기분이 좀 나을까 싶어 새벽산책을 나왔지만 개운치 못하기는 마찬가지였다.
해남도(海南島)와 해안소의 바다는 느낌이 달랐다.
해남도 바다가 깨끗하고 정겹다. 해안소는 혼탁하여 정이 붙지 않는다. 모래사장만 해도 그렇다. 해남도의 모래는 부드러우면서도 딱딱하다. 맨발로 걸어도 발에 붙지 않는다. 그러나 해안소의 모래사장은 발을 내딛기가 무섭게 진흙뻘 마냥 쑥쑥 빠져든다.
아무래도 마음에 들지 않는다. 무엇보다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은 저 웃음소리.
까르르······! 깔깔! 하하하!
밤새도록 지겹게 귀청을 간질이던 술잔 부딪치는 소리와 깔깔거리는 계집의 웃음소리.
여명이 밝아오는 시각인데도 호명객사(湖明客舍)의 등불은 대낮처럼 밝게 켜져 있다. 술을 그렇게나 퍼 마셨으면 곯아떨어질 만도 하건만. 개중에 몇 놈은 계집의 야들야들한 품속에서 세상모르게 잠들어 있으리라.
얌전하고 착해서 새색시 같다는 사내들이 반도(半島)에만 나오면 왜 저토록 거칠게 변하는지.
폭주(暴酒), 폭언(暴言), 구토(嘔吐), 기녀(妓女)들의 분 냄새······
그런 밤은 정녕 싫었다.
어쩔 수 없이 같이 어울리기는 했지만 일이 끝난 이상 한시라도 빨리 돌아가 쉬고 싶은 생각뿐이었다.
“휴우!”
검푸른 바다를 바라보았다. 맑은 공기를 폐부 깊숙이 들이켰다.
무거운 머리가 조금은 가벼워진 듯 하다.
이제 술에 곯아떨어진, 혹은 아직도 술을 마시고 있을 사내들을 깨워야 한다.
모자란 잠은 배에서 자도 된다.
분명히 ‘낮에 출발해도 되는데’‘오랜만에 뭍에 나왔으니 좀 놀다 갑시다’하고 투덜거릴 테지만 그런 투정을 받아들일 생각은 없다.
첫배를 타도 오후에나 도착하는 먼 뱃길이다. 더군다나 바람결에 끈적끈적한 비린내가 묻어나고 있지 않은가.
폭풍이 다가온다는 전조(前兆)다.
폭풍이 지나가기를 기다리자면 사나흘은 더 머물러 있어야 하고, 그러기는 정말 싫다.
열 두엇 되었을 때는 뭍이라는 감흥에 이곳저곳이 궁금했지만 지금은 그런 감흥도 일지 않는다.
그녀의 눈에는 비친 해안소는 그저 방탕하고 타락한 포구였다.
‘신시(申時:오후3시)에 출항하는 배는 너무 위험해. 오시(午時:오전11시)에 출항하는 배를 타자고 하겠지만······ 폭풍이 다가오고 있어. 오시에 출항하는 배도 위험해. 진시(辰時:오전7시)······ 아무래도 새벽 배를 타야겠어.’
결심을 굳힌 유소청은 아직도 음탕한 웃음소리가 질펀하게 들려오는 마을을 향해 발길을 옮겼다.
‘사람? 고수닷!’
모래사장을 살포시 지르밟던 발걸음이 뚝 멈춰졌다.
두어 걸음이나 떼어놓았을까?
새벽어스름, 무거운 발걸음······
유소청은 반사적으로 검경(劍莖:손잡이)을 잡았다.
그녀는 당황했다. 검을 잡자마자 지금까지 한 번도 느껴보지 못했던 가공할 예기(銳氣)가 안개처럼 축축하게 젖어들었다.
‘이런! 한 번도 접해보지 못한 엄청난 고수!’
찰나간에 일어난 생각이다. 느낌만으로 충분하다. 상대는 적어도 아버지, 적검유사(赤劍儒士) 유질(劉窒)과 버금가는 고수가 분명했다.
유소청은 서늘한 아침 공기를 폐부 깊숙이 들이켜 놀란 가슴을 진정시켰다.
‘우선 상대가 누군지 알아야 돼.’
그녀는 슬쩍 옆으로 한 걸음 물러섰다. 손은 언제라도 검을 뽑을 수 있는 위치였고, 눈은 독수리처럼 날카롭게 빛났다.
일견하기에 나그네로 보이는 사내.
그도 무엇을 직감했음인가? 약간 긴장한 듯한 사내는 느릿하게 걸음을 떼어놓았다.
등줄기를 훑어 내리는 싸늘함.
유소청은 전신의 모든 근육이 팽팽하게 긴장되는 것을 느꼈다.
느낌은 현실로 드러났다. 사내는 그녀가 접해본 적이 없는 무서운 고수다.
천천히 걷는 발걸음 속에서 사람을 무수히 죽여 본 사기(死氣)가 물씬 풍겨 나온다. 무도(武道)를 걸어온 사람이 아니다. 백정(白丁)이 가축을 도축하듯이 사람을 도살하며 살아온 사람이다.
‘살수(殺手)?’
해남도와 뇌주반도(雷州半島)의 모든 무인을 손바닥 들여다보듯이 알고 있지만 이런 기도(氣度)를 지닌 무인은 들어보지 못했다.
갓이 큰 방갓, 짚으로 만든 우비(雨備)······
뇌주부(雷州府) 사람은 절대 아니다. 뇌주부 사람이라면 아무리 급해도 밤길을 걷지 않는다. 밤길을 재촉해야 할 만큼 급한 일도 없으려니와 천성이 느긋한 사람들이니. 밤길을 걷는 사람은 오직 외지인(外地人)뿐이다.
살을 저미는 기도, 낯선 행색, 사내의 일거수(一擧手) 일투족(一投足)이 모두 유소청을 긴장시켰다.
‘매, 맹수!’
유소청은 다시 한 번 긴장했다.
사내 곁에서 녹색 눈빛을 빛내고 있는 것은 틀림없이 맹수다.
무공(武功)을 익혔으니 들짐승쯤이야 단숨에 숨통을 갈라버릴 수 있지만 타고난 여인의 본능이 몸을 움츠러들게 만들었다.
손이 빳빳하게 굳는다. 머리카락이 쭈뼛서는 공포감도 어린 시절 밤길을 거닐다 나뭇가지를 귀신으로 착각하고 자지러지게 놀란 이후 처음이다.
사내는 유소청의 일 장 앞에 이르자 더욱 느리게 걸어왔다. 사내도 유소청이 내뿜는 예기를 읽었으리라.
아직은 서로를 식별할 만큼 가깝지 않다.
대낮이라면 사내를 알아보고도 남을 거리지만 동이 틀 무렵인지라 알아보기가 쉽지 않았다. 분명한 것은 있다. 사내 곁에서 녹색 눈빛을 뿜어내는 것이 흉포한 맹수라는 것.
‘으음······! 틈이 없다.’
유소청은 저미한 신음을 터트렸다.
이럴 때는 공격하지 말아야 한다. 언제 어디서 공격을 가하더라도 사내는 맞받아 내리라. 사내의 빈틈없는 발걸음이, 틀에 꽉 짜인 듯 조심스럽게 내딛는 좁은 보폭(步幅)이 결코 만만치 않은 상대라고 말한다.
그의 무공은 어느 종류인가? 그러고 보니 병기가 보이지 않는다. 권각(拳脚)? 권법(拳法)의 달인인가?
부지런히 생각을 하는 가운데도 유소청은 사내의 몸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사내가 풍겨내는 패도적인 기운이 금방이라도 숨통을 거머쥘 것 같았다.
맹수는 달랐다.
녹색 눈빛을 번뜩이는 맹수는 금방이라도 달려들 듯이 으르렁거렸다. 그렇다고 함부로 움직이지도 않는다. 마치 인간에게 길들여진 가축처럼 사내의 명령이 없이는 움직일 생각이 없는 듯 하다.
‘으음······!’
불현듯 유소청은 검을 뽑고 싶은 충동이 치밀었다. 그렇게라도 해서 숨막히는 이 순간을 벗어나고 싶다.
사내의 어깨가 움찔거린다.
‘이런!’
검을 뽑을 수도 없다.
사내는 기가 막히게도 사람의 마음을 꿰뚫어 본다.
그렇다고 길을 비켜줄 수도 없다. 조금이라도 몸을 움직이면 그 틈을 노리고 종류를 알 수 없는 병장기(兵仗器)가 날아들 것 같다.
만약 여족(黎族)의 살아있는 신(神), 우화(雨花)가 고용한 살수라면? 성공할지도 모른다. 저 정도의 기도(氣度)를 지닌 사내가 검을 뽑는다면······ 힘든 승부가 되리라.
득(得)보다는 실(失)이 많은 싸움. 그런데,
“오랜만이군.”
왼손으로 방갓을 살짝 들어올린 나그네가 착 가라앉은 음성으로 말했다. 뱃속에서 우러나온 듯한, 조금은 탁하면서도 듣기에 거북하지 않은 음성이다.
“누구냣!”
유소청은 아직 상대를 알아보지 못했다. 그녀가 기억하기로 자신이 아는 사람 중에 나그네와 같은 사람은 없다.
“후후! 섭섭하군. 기억해줄 줄 알았는데······ 하기는 많은 세월이 흘렀지.”
“······”
유소청은 다음 말이 이어지기를 기다렸다. 나그네의 말투로 미루어보면 자신을 아는 듯 한데. 그러나 나그네는 오히려 유소청이 말하기를 기다리는 듯 입을 굳게 다물고 뚫어지게 바라본다.
긴장된 침묵이 한참동안 지속됐다.
아니, 촌각(寸刻)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유소청은 솜털까지 곤두서는 긴장을 풀지 못했고, 시간에 대한 관념을 상실해버렸다. 그녀의 관심사는 오직 상대가 적인지 아닌지 판별하는데 있었다.
“긴장하고 있군.”
“······”
“긴장할 필요 없어. 나는 적이 아니니까.”
긴장할 필요 없어? 그렇게 놀랄 필요 없어.
나는 적이 아니니까? 나는 봉황(鳳凰)들 틈에 섞일 수 없는 까마귀니까.
유소청은 봉목(鳳目)을 부릅떴다.
나그네의 말투에서 아스라이 묻혔던 옛 기억이 본인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되살아났다.
“한눈 팔면 안 돼!”
“알았어.”
“피이! 무슨 대답이 그렇게 간단해?”
그는 비수(匕首)를 꺼내들었다. 그리고 왼손으로 날을 감싸쥔 다음 천천히 잡아당겼다.
“악! 지금 뭐하는 거야! 그만 둬!”
“이게 내 마음이야. 이 손금은 처음부터 끝까지 이어져 있어.”
그의 손바닥에서는 붉은 피가 철철 흘러 내렸다.
당시에는 그 행동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몰랐다. 그가 돌아가고 난 후, 총관(總管)에게 물어보았다.
“하하! 애정선(愛情線)입니다. 하하!”
여린 방심(芳心)을 빼앗은 사내.
그는 만나자마자 ‘같이 가자’는 말부터 꺼냈고, ‘싫어. 꼭 그렇게 해야돼.’하는 말로 응답한 것 같다.
“후후! 그렇게 놀랄 필요 없어. 나는 봉황들 틈에 섞일 수 없는 까마귀니까. 어쩌면······ 이렇게 사는 것도 감지덕지 해야 할지 모르지.”
“그러지 마. 나, 울고 싶어져.”
“울고 싶은데 눈물이 안 나온다 이건가?”
“어떻게 그런 말을······”
“나는 막돼먹은 인간이거든.”
“가! 가버리란 말야!”
“솔직히 말하지 그래? 부담된다고.”
“그래. 부담돼. 아버지도 어머니도 더 이상 만나지 말라고 한단 말야. 이제 됐어. 속 시원해? 시원하냐고! 흑흑······!”
벌써 팔 년이나 흐른 옛날 일이다.
하지만 결코 잊어버릴 수 없었다. 아직도 가끔가다 문득문득 떠오르곤 하는데······
상처 입은 들개처럼 피범벅이 된 몸을 난간에 의지하고 아련히 쳐다보던 눈길.
당시는 너무 힘들었다.
가족들의 질타(叱咤)가 견디기 힘들었고, 광명(光明)에서 암흑(暗黑)으로 떨어지는 공포가 두려웠다. 만나는 사람마다 모멸스럽게 쳐다보는 것 같아 문밖에 나서기도 겁이 났다. 천애고아(天涯孤兒)처럼 세상을 떠돌자는 말에는 화도 치밀었다.
왜? 무엇이 못나서? 정정당당하게 앉은자리에서 버틸 것이지 죄지은 사람처럼 도망 다닐 이유가 무엇인가?
그를 이해하기에, 세상과 부닥치기에 열여섯이란 나이는 너무 어렸다.
그것이 마지막 만남이다.
다음 날이면 어느 때처럼 만취(滿醉)된 상태로 흐느적거리며 나타날 줄 알았던 그는 그 후 영영 나타나지 않았다. 소식도 끊겼다. 오가는 인편(人便)을 통해 서신(書信) 한 장이라도 보내줄 만 한데 마치 죽은 사람처럼 철저히 숨어버렸다.
일 년, 이 년, 삼 년······
유소청은 자신이 너무 했다는 자책감(自責感)에 괴로워하며 그를 기다렸다. 나이 스물이 넘어서는 ‘지금이라면 따라갔을 텐데.’하고 고소(苦笑)를 짓기도 했다. 하지만 몸이 멀면 마음도 멀어진다고, 세월이 지남에 따라 그의 영상은 조금씩 희석되었다. 지금은 아름다운 추억으로 간혹 떠오를 뿐인 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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