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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로가기버튼 폭식의 군주 [E](종료240126)

폭식의 군주 1권 (1)

2016.08.19 조회 10,873 추천 89


 목차
 
 프롤로그
  1. 이변 (1)
  1. 이변 (2)
  1. 이변 (3)
  1. 이변 (4)
  2. 생존하라! (1)
  2. 생존하라! (2)
  2. 생존하라! (3)
  2. 생존하라! (4)
  3. 준비하라! (1)
 
 
 <프롤로그>
 
 드득, 드드득.
 온몸이 사방에서 죄어오는 강한 압력에 뒤틀리고 있다. 어깨뼈가 빠지고 골반이 틀어진다. 숨은 쉴 수조차 없었고, 곧 썩은 과일처럼 한 줌의 진물로 으깨질 것 같았다.
 머지않아 놈의 위장으로 넘어가면 모든 것이 녹아버리겠지.
 
 “끄으으..”
 입술을 열어 낼 수 있는 소리라고는 신음뿐!
 살아야 한다.
 살아야 해!
 나는 오직 그 생각뿐이다.
 
 누군가는 말했지? 호랑이 굴에 들어가도 정신만 바짝 차리면 산다고. 하지만 그건 호랑이니까 그런 거다. 호랑이가 투병 중일 수도 있고, 늙어서 이빨이 숭숭 빠진 녀석일 수도 있으니까.
 지금 내 경우엔 그것보다 더욱 심각한 위험에 직면해 있다.
 
 “끄으윽!”
 팔도, 다리도 내 뜻대로 움직일 수 없다. 윤활유처럼 미끄덩거리는 놈의 침은 나를 한 곳으로 밀어 넣고 있다. 이 강제적인 일방통행을 멈출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단 하나.
 
 쩌어억.
 내 입이 크게 벌어졌다. 압력 때문에 눈알이 터질 것 같고, 허리도 끊어질 것 같았다. 지금 막지 못하면 나는 반드시 죽을 것이다.
 
 콰콱!
 기이한 각도까지 벌어진 내 이가 주변의 돌기 하나를 사정없이 물었다.
 내 독니를 통해 맹독이 녀석의 살점과 미세 혈관을 통해 흘러들었다.
 
 크아아아아아아아.
 아련하게 들려오는 소리.
 하지만 이건 울림과도 같다. 고통에 찬 울음. 저 깊은 곳, 나를 끌어들이는 아주 은밀한 곳에서부터 터져 나오는 그것 말이다.
 
 그렇다.
 나는 지금 용에게 통째로 삼켜지고 있다.
 레드 드래곤.
 진홍의 왕 크림슨 로드에게 말이다.
 
 1. 이변 (1)
 
 하...
 절로 한숨이 터져 나왔다.
 서울특별시 을지로3가 미라클 빌딩.
 대한민국 최고의 기업 미라클의 본사다. 1층 로비에 있는 커피숍에 앉아 나는 누군가를 기다리는 중이다. 작년까지만 해도 내가 근무하던 곳. 하지만 이곳에 내 자린 없다. 그런데도 잘만 굴러가고 있는 걸 보니 부아가 치민다.
 나 하나쯤은 없어도 상관없다는 듯······.
 모든 열정과 시간을 바쳤지만 그게 모두 헛수고였다는 듯······.
 
 “빌어먹을..”
 나는 빌딩 입구에 검은 양복을 입은 녀석들을 보았다. 내가 녀석들의 얼굴을 모른다는 것은 놈들이 신입일 확률이 크다는 것.
 
 “개판이군.”
 한 녀석이 스마트폰을 보며 낄낄거리고 있다. 출입하는 사람들을 철두철미하게 감시해야 할 녀석이 대체 뭘 하는 거지?
 내가 이곳에 있었을 때는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일. 움찔거리는 다리를 손으로 꾹 눌렀다.
 아서라. 내가 저들에게 뭘 할 수 있다는 거냐.
 
 “여어, 윤진모씨!”
 내 이름을 부르는 소리에 급하게 머리를 돌렸다. 뒤에서 한 남자가 걸어오고 있었다. 녀석 특유의 재수 없는 미소를 띠면서 말이다.
 
 “철중아!”
 나는 욱신거리는 광대를 억지로 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아, 성치 않은 몸으로 무리하지 마세요. 앉아 있어요.”
 철중은 손사래를 치며 내 앞으로 걸어와 의자에 앉았다. 녀석은 테이블에 걸쳐놓은 내 목발을 힐끔거리다가 다시 웃으며 말했다. 잔뜩 거만한 폼으로 의자에 기대 다리를 꼬는 녀석.
 
 “1년 만이던가요? 겉보기엔 멀쩡하네요. 그래, 어떻게 지냅니까?”
 녀석의 눈은 꼭 뱀 같다. 전부터 그게 참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실력을 최우선으로 뒀기에 녀석을 부팀장 자리까지 올려준 거다.
 
 “재활이 잘 돼서 뛰는 것만 아니면 다 할 수 있다.”
 “그거 잘됐네요. 어린 딸내미도 있는데 다시 일어서야죠.”
 “그래. 그래서 이렇게 염치불구하고 찾아왔다. 철중아..”
 녀석이 오른손을 들고 멈추라는 뜻을 내비친다.
 
 “팀장이라고 불러주세요. 제가 윤진모씨하고 호형호제할 사인 아닌 것 같은데요?”
 녀석과 동고동락한 시간이 무려 6년. 그런데도 놈은 날 선 눈빛으로 나를 쏘아보고 있다.
 
 “이야- 많이 컸네, 우리 철중이?”
 “애 취급하지 마세요! 예전의 제가 아닙니다!”
 “······.”
 무거운 침묵 속에 녀석과 나의 눈빛이 허공에서 사정없이 격돌한다.
 아아, 내가 지금 뭘 하는 거냐. 이놈과 눈싸움이나 하려고 여길 온 건 아니지 않은가?
 나는 팔을 테이블 위로 뻗었다.
 움찔하는 녀석.
 이래도 애가 아니냐?
 “크흠..”
 내 움직임에 반응하는 자신이 쪽팔린지 헛기침을 해댄다.
 
 “하하! 강 팀장. 전화로 대충 얘기한 것처럼 일자리가 필요해서 이렇게 부탁 좀 하려고 찾아왔어. 현장 일은 힘들지만, 모니터 쪽이나 애들 교육하는 건 누구보다 잘할 수 있는데.”
 사설경호업체 SS(special secret)를 단 6년 만에 대한민국 최고의 자리까지 올려놓은 게 나다. 부산에서 열린 G20 정상회담 때 각국의 대통령들을 호텔 밀착경호까지 했을 정도로 SS는 이 분야의 탑이 되었다.
 
 “누구보다 잘한다고요?”
 “그럼! 아주 잘하지.”
 놈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녀석이 원래 지랄 맞은 성격이란 건 알고 있었지만, 이 정도는 아니었는데. 내가 알던 철중이는 없고 마치 딴 사람이 마주 앉아 있는 것 같지 않은가?
 놈의 시선 끝에 딸려오는 건 명백한 적대감이었다.
 
 “물론 윤진모씨 능력은 아주 잘 알죠. 대통령 표창까지 받았잖아요?”
 “그땐 참 대단했지?”
 놈은 어깨를 으쓱하더니 상체를 내 쪽으로 들이민다. 그러면서 하는 말.
 꼭 늑대가 으르렁 거리는 것 같다.
 
 “그런데요, 지금은 아니잖습니까?”
 저게 무슨 소리지?
 
 “그 다리로 뭘 하겠습니까? 젊은 애들에게 기회를 주세요. 그게 깔끔한 겁니다.”
 울컥했지만 참아본다. 나는 철중을 지그시 보다가 저쪽으로 시선을 잠깐 준다. 입구에 있는 녀석은 아직도 스마트 폰을 보고 있다.
 
 “저게 네가 말한 기회냐?”
 철중은 돌아보지도 않고 피식 웃는다.
 
 “내 동생이 뭘 하든 신경 끄시죠?”
 “허얼··· 동생?”
 나도 모르게 입이 쩍 벌어졌다.
 동생이라고? 이놈은 외동아들일 텐데?
 눈을 몇 번 깜빡거리며 놈의 표정을 본다. 딱히 관찰하지 않아도 알 것 같았다.
 낙하산.
 사촌이나 먼 친척쯤 되려나? 내가 이곳에 있을 때는 떠올릴 수도 없었던 단어다.
 어떻게 이 지경까지 되었나?
 
 “다신 오지 마십쇼. 애들이 불편해합니다. 그 다리. 전혀 못쓴다면서요? 어디 아파트 경비라도 알아보세요. 괜히 전 동료들 불편하게 하지 말고. 반병신이라도 노인네들보단 낫지 않겠습니까?”
 놈은 이죽거리다가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더니 뭔가를 꺼내 테이블 위에 놓는다.
 
 “딸내미 장난감이라도 사 줘요.”
 오만원권 두 장.
 나는 테이블을 잡고 벌떡 일어났다.
 
 “야! 철중아!”
 더는 참을 수 없다. 놈의 눈에 담긴 것은 멸시였다.
 
 “여기서 소란 피우면 어찌 된다는 걸 누구보다 잘 알지 않습니까? 목소리 낮추세요.”
 놈은 웃으면서 말했다. 어디 한번 해보란 듯이 말이다.
 이 개자식. 누구 덕분에 회사가 이렇게 컸는데!
 
 “바빠서 이만 갑니다. 오후에 회장단이 방문 예정이라서요. 알죠? 어떻게 돌아가는지.”
 빠득.
 이가 절로 갈렸다. 한솥밥을 먹은 게 몇 년인데 이런 취급을 한단 말인가?
 
 “야! 철······!”
 내가 녀석을 부르는 소리는 놈의 웃음소리에 묻혀버렸다.
 
 “하하하! 어디 아파트는 횡재했군! 대통령 표창까지 있는 경비를 쓰게 됐으니까 말이야!”
 십 년 묵은 찌꺼기를 토해내듯 외치며 저편으로 걸어가는 녀석. 나는 기막힌 얼굴로 그런 녀석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 * *
 
 어릴 적 나는 특별한 것 없는 아이였다. 공부도 그저 그랬고, 야구나 축구 같은 것도 잘 못 했다. 그런데 중학교에 올라가서 처음으로 누군가와 싸워본 뒤에 깨달았다. 나는 이쪽으로 뛰어난 게 아닐까? 하고 말이다.
 괴롭힘을 받던 녀석은 내게 눈물을 흘리며 고맙다고 말했고, 유치하지만 내가 싸움을 잘한다는 그 사실이 자랑스러웠다. 그 나이 때는 그랬다는 거다.
 뿌듯했다.
 타인을 도와주는 것에 이런 기분을 느낄 수 있다는 걸 그전엔 몰랐다. 단순하게 도와주는 것이 지켜주고 구해주는 것으로 발전하기까지 20년. 그렇게 나는 최고가 되었고, 그건 영원할 것만 같았다.
 
 끼이이이이익!
 “이 아줌마야! 죽고 싶어?”
 건널목. 빨간불인데 건너려던 아줌마가 아슬아슬하게 화를 면했다.
 
 “미안해요! 미안해요!”
 아줌마는 종종걸음으로 도로를 마저 건넜고, 멈췄던 차는 다시 달리기 시작한다.
 그 모습을 보던 내 가슴이 욱신거린다.
 
 무단횡단.
 신호를 무시하고 길을 건너는 노인을 피하려다 내 아내가 죽고 내 오른쪽 다리는 못 쓰게 되어버렸다. 전봇대를 조수석 쪽으로 정통으로 들이받는 바람에 벌어진 참사. 지난 1년 동안 몇 번이나 후회했는지 모른다. 차라리 그때 핸들을 돌리지 말아야 했다고······.
 그러나 시간을 돌이킬 수 없다. 내가 절실하게 깨달은 건 그 사실이다. 당장 죽고 싶을 만큼 비참한 삶. 그러나 나는 남은 시간을 살아야 한다.
 
 
  * * *
 
 
 또각, 또각. 또각.
 여자들의 하이힐처럼 규칙적인 소음을 만들어내던 목발이 아파트 복도를 울리다가 멈췄다.
 
 “아빠야?”
 현관문 뒤에서 들리는 목소리.
 
 “응! 아빠 왔어!”
 나는 애써 목소리를 밝게 만들었다. 덜컥, 열리는 문틈으로 보이는 작은 몸집.
 
 “늦었어! 아빠 나빠! 일찍 온다고 했으면서!”
 엄마 없이 자라서 그런지 고작 4살짜리 주제에 벌써 야무지게 바가지를 긁어댄다. 하지만 그 모습조차 너무도 예쁘다. 눈에 넣어도 안 아플 거라는 말, 이젠 이해할 수 있다.
 나를 살아갈 수 있게 만들어주는 원동력.
 
 “우리 신애! 씨리얼 먹었어?”
 “아니! 아빠랑 같이 먹을 거야!”
 “어이구! 내 새끼! 기다리지 말고 먼저 먹으라니까 누구 닮아서 이렇게 말을 안 듣지?”
 “아빠 닮았지!”
 
 내 딸 신애다.
 
 1. 이변 (2)
 
 “잠이 안 오니?”
 “응···”
 “그래도 아침에 어린이집 가려면 어서 자야 하는데? 그래야 친구들하고 선생님을 더 일찍 볼 수 있지! 신나게 놀고 싶지 않아?”
 “아니야, 난 아빠랑 노는 게 더 좋아.”
 
 내 일과는 아주 단순하다. 딱 한 단어로 정리된다.
 육아.
 나는 이게 힘들다는 것을 전엔 미처 몰랐다. 먹고, 싸고, 자고, 배우는 것.
 인간이 가장 기본으로 해야 하는 것들. 근데 아이들은 그걸 혼자서는 못한다. 잠시라도 한눈을 팔면 사고가 생기고, 눈에서 떨어지면 걱정부터 앞선다. 3년 동안 독박육아를 했던 아내에게 절로 미안해진다. 그때 조금이라도 도와줬어야 하는 거였는데······.
 
 “쓰읍.”
 다시 말하지만 이따위 후회는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다.
 
 “아빠? 뭐해?”
 “아냐! 아냐! 근데 오늘따라 우리 딸이 왜 이렇게 못 잘까?”
 보통 9시면 잠들어야 하는 녀석이 벌써 10시를 넘기고 있다. 녀석의 침대에서 읽은 동화책만 7권이다.
 
 “나도 몰라.”
 “그럼 우리 눈 꼭 감고 공룡 친구들 만나러 가볼까?”
 “공룡 친구들?”
 “응, 눈을 감으면 그 친구들이 찾아올 거야. 신애가 좋아하는 브라키오사우르스부터 불러볼까?”
 요즘 한창 공룡에 빠져있던 딸애를 어르고 달래본다. 제 엄마를 쏙 빼닮아서 눈이 크고 피부가 백설기처럼 하얀 녀석. 절대 안잘 것처럼 굴던 녀석이 어느 순간 거짓말처럼 숨을 고르게 쉬며 새근거린다.
 보석 같은 아이.
 그래, 이 녀석을 위해서라면 무슨 짓이든 못할까? 그따위 자존심이 문제냐? 내일 한번 다시 찾아가 보자.
 아파트 경비보다는 SS가 보수가 높다. 그리고 거긴 내가 가장 잘 아는 일터다. 철중이 놈이 내게 쌓인 게 많은 것 같은데 사내자식끼리 풀지 못할 게 뭐 있나? 삼겹살에 소주 한잔 마시면서 슬슬 똥꼬 좀 긁어주면 되겠지.
 
 나는 잠든 신애를 보다가 몸을 틀었다. 이제 하루를 정리하려는 거다. 간단하게 청소도 하고, 가계부도 다시 봐야 할 것 같다. 냉장고가 텅 비었으니 다시 채워 넣어야 한다.
 그런데 그때,
 
 어? 어어어?
 핑- 현기증이 잠깐 스치는 것 같더니 뒤바뀐 풍경.
 
 뭐야? 여긴 어디야?
 외쳤다. 하지만 목구멍으로 나온 소리라고는,
 
 “그르르, 그륵! 그륵!”
 꿈을 꾸는 걸까? 하지만 그렇다고 하기에는 너무 현실적이지 않은가?
 나는 눈을 깜빡였다. 그러다 손을 들어 뚫어지게 보았다. 집게손가락은 뼈가 훤히 드러날 정도였고, 손등은 뭔가가 파먹은 흔적까지 있다. 분명 내 의지대로 움직이는 손인데, 내 손이 아닌 것 같은 느낌. 그 반쯤 썩은 손으로 얼굴을 더듬어본다. 입을 벌리지도 않았는데 이가 만져진다. 오른쪽 볼에 살점이 없다는 거다. 거울이 있다면 더 확실했겠지만 내려다본 몸의 상태를 보고도 짐작할 수 있었다. 핏발선 두 눈에선 검은 피고름이 줄줄 흐르고, 오른쪽 다리는 완전히 짓뭉개져서 바닥에 질질 끌린다. 신기한 건 이런 상태인데도 걸을 수 있다는 거다.
 한 걸음. 다시 한 걸음.
 
 “그륵?”
 나는 분명 뭐야! 라고 말했다. 그런데 내 목구멍에선 전혀 다른 소리가 나온다.
 말조차 제대로 할 수 없는 썩어빠진 몸뚱이. 의지와 상관없이 이 와중에도 코는 벌름거리며 뭔가를 찾고 있고 배는 등가죽에 달라붙어 연신 밥 달라고 아우성이다.
 
 배고파! 미칠 것 같아! 배고프다고!
 그러다가 불현듯 떠오른다. 한 대 맞은 것처럼 허기를 이기고 정신이 돌아온다.
 무슨 일이지? 내가 꿈을 꾸고 있나?
 
 “그르륵!”
 생각해야 한다. 혼란은 아무런 도움이 되질 않는다.
 
 “후.. 하.. 후.. 하..”
 평정심을 되찾으려고 노력해 본다. 신애 침대에서 나도 모르게 잠이 들었나? 요즘 피곤해서 가위에 눌리는 걸까? 분명 조금 전까지 딸애의 침대 옆에 있었지 않은가?
 침착하자, 침착해.
 
 “흐으으으으..”
 후! 숨을 내쉬어도 이렇게 음침한 소리가 절로 나왔다. 심호흡하며 주변을 돌아본다. 그러나 을씨년스러운 반파된 마을에서 흐느적거리며 서 있는 내가 전부였다.
 
 여긴 폭격이라도 맞은 걸까? 멀쩡한 건물은 단 하나도 없고 불탄 흔적과 아주 오래된 시골 마을의 잔해들이 널려있다.
 그때 머리를 강타하는 어떤 울림.
 
 -당신은 좀비에게 깃들었습니다.
 
 「좀비
 하급 언데드 몬스터. 움직임이 느리고 그다지 강하지 않지만, 식탐이 강하고 전염이 빠르다.」
 
 방금 뭐였지?
 좀비라고?
 “그르륵?”
 환청이라고 하기엔 지나치게 선명하고 맑다. 나는 혹시 몰라 주변을 빠르게 눈으로 훑는다. 그러나 역시 아무것도 없다. 당장 귀신이라도 튀어나올 것 같은 으스스한 풍경이 전부.
 
 “흐으으으. 끄륵, 그륵.”
 내가 정신적으로 어떤 문제가 생긴 건가? 이게 환상이라면 이건 정말 심각한 문제다. 그 누구도 나를 써주지 않을 거라는 말이 되니까.
 내가 일을 못 하면 우리 신애는?
 정신병원에 입원이라도 하게 되면 우리 신애는?
 일단 벗어나야 한다. 이게 가위에 눌리는 건지, 꿈인지는 모르겠지만 잠에서 깨려면 뭔가를 해야 했다. 높은 곳에서 떨어진다든가 하는 것 말이다.
 
 나는 무작정 걷기 시작했다. 이게 무슨 상황인지는 모르겠지만 어처구니없게도 목발 없이 걷고 있다는 게 약간은 기쁘기도 했다.
 미친놈. 이런 상황에서 생각하는 거라고는······.
 비틀 비틀..
 감각조차 사라진 오른쪽 다리였었다. 그래서 이게 더 거짓말 같았다. 신경까지 완전히 죽었다던 그 다리가 움직일 리 없으니까.
 하지만 정상적이진 않았다. 가까스로 바닥을 찍으며 걷고 있다뿐이지 오른쪽 다리는 무릎조차 굽혀지지 않았다. 몇 번 자빠지길 반복하자 중심을 잡는 것이 조금씩 익숙해졌다.
 
 대체 내게 무슨 일이 생긴 거지?
 일단 한 건물 앞으로 이동해서 벽에 기댔다. 시선을 내려 박살 난 다리를 본다. 한숨이 절로 터진다. 이왕 꿈 같은 거라면 다리라도 멀쩡하게 해줄 것이지, 이게 뭔가? 그만큼 내가 오른쪽 다리에 원망하고 있다는 뜻일까? 이게 트라우마로 남아 내게서 떨어지지 않는 증거일까?
 
 하지만 문제는 다리가 아니었다. 왜 이렇게 배가 고프지? 너무 배가 고파. 그것 때문에 두뇌 회전이 원활하지 않다. 이건 위험해.
 시야도 흐릿하다. 본래 내 시력은 꽤 좋은 편에 속했다. 그런데 어쩐 일인지 지금은 사물의 분간이 쉽지 않을 정도다. 안경이 필요하지만 당장 그런 걸 구할 수 있을 것 같지가 않다. 좀비라니.. 황당해서 어떻게 반응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
 
 코는 당장에라도 떨어져 나갈 것 같았고, 광대는 뼈가 그대로 만져진다. 본래의 내 모습을 베이스로 했는지 묘하게 익숙하다. 키나 체형 같은 것들 말이다. 머리도 만져보고 뒷목도 쓸다가 관자놀이에 검지가 닿았을 때,
 
 [이름 : 너덜너덜한 좀비 직업 : 하급 언데드
 속성 : 어둠(12,843) 레벨 : 1(0%)
 힘 : 5 민첩 : 2
 정신력 : 1 체력 : 4
 종족스킬: 식욕, 섭취
 스킬 : 미설정
 특이사항: 오른쪽 다리가 망가짐, 배가 고픔]
 
 -스킬이 설정되지 않았습니다. 고유스킬을 선택해주세요.
 
 “그륵?”
 누가 내 표정을 봤다면 아마 똥이라도 씹은 줄 알았을 거다.
 이게 대체 뭐하는 거지? 저기 어른거리는 게 뭐야? 너덜너덜한 좀비? 스킬?
 친절하게 이름, 직업, 힘 같은 것들이 나열된 정보.
 미치겠군···.
 이게 무슨 일일까? 몰래카메라? 가상현실 영화나 게임 같은 걸 내가 하고 있었나? 어쩌면 기억상실?
 나는 입술을 깨물며 고민하다가 흠칫 놀랐다. 이로 살짝 깨문 것뿐인데 입술 끝 부분이 떨어졌다.
 염병..
 
 -고유스킬 중에 하나를 선택할 수 있습니다. 모든 사람은 자신만의 스킬 하나를 선택할 수 있습니다. 직업과 종족에 상관없이 스킬을 사용할 수 있습니다.
 
 친절한 톤의 여자 목소리가 내게로 흘러들었다.
 문제는 그 내용.
 뭐야 이게?
 수백 개의··· 정확히 말하면 214개나 되는 스킬명이 주르륵 떠오른다. 마치 홀로그램처럼 앞에 말이다. 「빨리 달리기」「은신」「통솔력」「교섭력」「회복력」「출중한 외모」이런 식으로 말이다.
 
 “..그륵!”
 나는 이 웃기지도 않는 상황에서 스킬이라는 것들을 보고 있다. 내가 이걸 왜 보고 있는지도 모르는 데 말이다.
 그래서 몰랐다. 저쪽 뒤편 골목에서 두 개의 그림자가 흐느적거리며 다가오고 있다는 것을.
 
 
  * * *
 
 철썩!
 강렬한 따귀가 날아왔다. 휘익! 공간을 가르는 팔이 엿가락처럼 늘어났다가 한 지점을 향해 다가든다. 볼살조차 없어서 놈의 타격이 그대로 잇몸에 전해졌다.
 
 “아악!”
 아프다.
 만약 이게 꿈이라면 방금 그 한방에 무조건 잠에서 깨야 했을 것이다. 이 고통, 이 감각!
 꿈이 아니다.
 우람한 근육질의 보디빌더들이 본다면 참으로 가냘픈 팔뚝이겠지만 지금 내겐 그게 아주 무시무시하게 보였다.
 
 철푸덕!
 바닥으로 사정없이 자빠진 좀비 한 마리.
 
 아아, 쪽팔리다. 크흑!
 한때 각국의 대통령까지 경호하던 내가!
 
 “내놔!”
 참으로 신비한 일이었다. 그륵그륵! 그륵! 하는 소리에서 정확하게 의미가 파악되고 있다.
 대체 내가 뭘 잘못했길래 다짜고짜 따귀를 후려쳤을까? 이 두 마리 좀비는 어디에서 튀어나온 거지? 나는 맞아서 욱신거리는 턱을 붙잡고 잠깐 생각하다가 몸을 일으켰다.
 
 “끄응..”
 더 누워있다가는 놈들이 발길질을 할 것 같았기 때문이다.
 
 “배고프다! 가진 거 다 내놔! 그러면 목숨만은 살려준다!”
 나는 멍하니 놈들을 바라보았다. 흐릿한 시야에 놈들의 머리 위로 빨간색 글자가 뿌옇게 보였다.
 
 「근처를 주름잡는 좀비」
 
 “······.”
 미친..
 
 “배고파! 빨리 내놔!”
 이게 녀석들의 이름인가 본데 물론 내 너덜너덜한 좀비라는 이름보단 훨씬 괜찮아 보이지만 정말 이게 뭐하는 짓인지 모르겠다.
 
 “죽고 싶어?”
 놈의 눈빛을 보니 알 수 있다. 이놈은 진심이다. 정말 나를 잡아먹을 것 같았다. 머릿속에서 경고등이 반짝거린다. 놈들의 눈에 들어있는 살기와 광기. 저건 진짜다.
 
 “배고프다고! 없으면 네 다리라도 내놔!”
 철석!
 또다시 날아오는 따귀!
 꽈당 넘어진 나는 입술을 깨물었다. 더는 열 받아서 참을 수가 없었던 거다. 그런데 왜 피할 수가 없지?
 
 “뭘 꼬나 봐?”
 좀비 두 마리는 내 눈빛이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인상을 잔뜩 찌푸렸다. 그렇지 않아도 배고파 죽겠는데 별게 다 기어오른다는 표정.
 
 “어쭈?”
 오른쪽 녀석이 주둥이를 쭉 내밀며 다가온다. 이놈들의 장점은 사지가 멀쩡하다는 거다. 덩치도 크다. 그런 두 녀석이 모여 다니니 시너지까지 발생해서 근처를 주름잡았던 걸까? 반면에 나는 보잘것없는 비쩍 마른 몸에 다리까지 불편하다.
 
 그러나 싸움은 체격으로 하는 게 아니다. 나는 그걸 아주 잘 알고 있고!
 나는 놈들이 눈치 채지 못하게 주변을 눈으로 빠르게 훑었다.
 그러다가 벌떡 일어나서 놈들의 이목을 잡아끌었다. 이놈들에게 틈을 주면 안 된다. 놈의 두 차례에 걸친 공격에 내가 무기력하다는 확신을 심어준 지금!
 이 기회를 살려야 한다.
 
 1. 이변 (3)
 
 “헛!”
 물론 그륵! 하는 소리로 흘러나왔지만 두 마리 좀비는 내 놀란 음성에 갸웃거리며 멈춰 섰다.
 
 “뭐냐?”
 “어디 묻어둔 뼈라도 생각 난 거냐?”
 좀비들은 기괴하게 변하는 내 얼굴을 보며 눈알을 데굴데굴 굴렸다.
 
 “그륵!”
 저기! 라는 뜻으로 외치며 뒤쪽을 놀란 눈으로 바라보는 나!
 크게 뜨인 눈. 놀라 약간 벌어진 입. 약간 움츠러드는 상체까지.
 
 “으응?”
 “응?”
 두 좀비 역시 동시에 고개가 돌아간다.
 
 “아무것도 없잖···”
 그때, 한 녀석의 뒤통수에 작렬하는 짱돌 하나!
 
 빠악!
 “······.”
 “크어어어억!”
 “······.”
 한 녀석은 자빠지고, 나와 좀비 한 마리는 서로를 보며 정적에 휩싸였다. 얼마나 세게 때렸는지 대가리가 박살이 난 상태로 꿈틀거리는 좀비. 그리고 아직 상황을 인식하지 못하고 엉거주춤하게 선 녀석 하나.
 
 -레벨이 올랐습니다. 보너스 스텟이 지급되었지만, 조건을 충족하지 못해 사용할 수 없습니다.
 
 나는 혀로 입술을 적시며 머릿속 울림을 스킵한다. 생각은 나중에. 아직 한 녀석이 더 남았다. 내가 고작 이딴 녀석들에게 질 수는 없지 않은가? 한때는 대통령도 경호하던 나였다!
 
 “흐으으.”
 
 그러나 이제부터가 문제다. 운 좋게 발치에 굴러다니는 짱돌로 한 녀석을 기습하는 데 성공했지만 이젠 남은 한 녀석이 녹록치 않을 거다. 잔뜩 경계할 테니 말이다.
 
  * * *
 
 예상처럼 싸움은 치열했다. 내가 아무리 기술로 승부를 보려 해도 체급이 주는 차이는 컸다. 게다가 나는 1년간 목발 생활했던 그 잔상이 남아 있다. 그게 핸디캡처럼 몸에 묻어 있던 것이다. 하지만 조금씩 적응이 되어간다. 사고 이전의 기억 속 저편에 있던 전투기술들이 되살아난다. 강한 공격을 하려면 중심축이 되는 발이 아주 중요하다. 하지만 내겐 오른쪽 다리가 없는 거나 마찬가지였기에 선택할 방법은 많지 않았다.
 개싸움···.
 서로 뒤엉켜 바닥을 구르고 꼬집고 할퀸다. 만약 한 녀석을 돌로 미리 처리하지 못했으면 죽어서 널브러진 쪽은 나였을지도 모른다.
 
 “헉, 헉.”
 간신히 넘어가는 침을 삼키며 적을 바라본다. 상체를 최대한 낮추고 놈에게 태클을 시도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그것도 쉽진 않다. 녀석이 생각보다 민첩했기 때문이다.
 
 “흐으으으.”
 어떻게 하지? 이 싸움이 힘든 이유는 단 하나다. 내가 놈보다 느리고 약하다는 것. 분명 기술은 앞서는데 기본 베이스가 너무 형편없어서 놈의 공격을 피할 수가 없다. 급소를 몇 번 공격 해봐도 놈이 좀비라서 그런지 불알 차기에도 반응이 없다. 놈에게 지면 뒷일은 생각하기 싫을 정도다. 지금 이게 뭐하는 짓인가 싶으면서도 이 생생한 현실감은 내게 계속해서 경고를 보내고 있다.
 
 죽음.
 지면 죽는다.
 
 “크아아아아!”
 내가 움직이기 전에 놈이 달려들었다. 시커먼 이를 한껏 드러내며 빠르게 달려드는 좀비! 왼쪽으로 피한 다음 뒤로 돌아가자. 놈과 타격전을 해서는 승산이 없어 보인다. 관절을 이용하는 게 좋을 것 같다. 그게 아니면 뼈를 부러뜨리는 방법도 괜찮겠다. 작은 실수를 해서도 안 된다. 놈보다 피지컬이 부족한 내가 이 기회를 살리지 못하면 더는 상대할 수 없을 것이 분명하다.
 나는 놈이 돌격하는 방향을 보며 상체를 옆으로 빼고 무게중심을 옮긴다. 놈의 얼굴이 변했다. 눈은 이쪽을 쫓지만 이미 관성이 작용한 몸뚱이는 본래 가려던 방향을 향해 나아간다.
 
 됐어!
 뒤를 잡을 수 있으면 이 싸움을 끝낼 수 있다!
 나는 속으로 쾌재를 부르며 성큼 움직였다. 아니, 그러려고 했다. 뭔가가 내 발목을 붙잡기 전엔 말이다.
 
 뭐야!
 “허억!”
 나도 모르게 내려다본 아래.
 머리가 깨져, 썩은 핏물이 철철 흘러내리고 있는 좀비 한 놈이 내 발을 붙잡고 있었다. 죽은 줄 알았는데 이 한순간을 위해 지금까지 그렇게 위장하고 있었나? 혹시 좀비라서 되살아 난 건가? 아니면 어떤 특수한 스킬을 가지고 있었던 걸까?
 
 “크흐! 죽여버리겠다!”
 “꽉 잡아!”
 “도망 못 가게 다리를 뽑아버려!”
 두 좀비는 나를 깔아뭉개고 웃어대기 시작했다. 그 얼굴이 어찌나 소름 끼치던지 절로 몸서리가 쳐진다. 이놈들 이런 일이 한두 번이 아닌 것 같다.
 
 정말 죽는다!
 내 머릿속엔 오직 그것 하나밖에 없었다.
 뭐든! 어떻게든! 제발!
 이 상황에서 벗어날 수 있다면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었다. 양팔은 제압당해 전혀 움직일 수 없고, 거꾸로 찍어누르는 녀석의 가슴 때문에 얼굴의 살점들이 벗겨져 나가고 있다. 이 상황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라고는 단 하나.
 
 제길! 원망하지 마라!
 우적!
 물어뜯는 것뿐이었다.
 치사하고 더럽지만 나도 어쩔 수 없다. 놈들은 둘 아닌가?
 그런데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아까 고르지 못했던 스킬 중에 하나가 우연히 선택되었다. 이 상황에서 벗어나고자 아무거나 찍은 것인데,
 
 -스킬, 「강탈」을 선택하셨습니다.
 -스킬, 강탈이 당신의 고유스킬이 되었습니다.
 -강탈을 통해 자신을 성장시킬 수 있습니다.
 -강탈을 통해 타인의 스킬을 빼앗을 수 있습니다.
 -강탈을 통해 스킬을 강화할 수 있습니다.
 
 아작!
 “아악!”
 
 -스킬, 강탈로 대상의 「리더쉽」스킬을 빼앗았습니다.
 -「섭취」로 생명력이 회복됩니다.
 -스킬, 「리더쉽」이 오릅니다. 0.19%.
 
 「강탈
 원하는 대상의 스킬을 빼앗을 수 있다. 단, 스킬을 사용할 때 선행되어야 할 요구조건이 있다. 「폭식」「스틸러」「접촉」「소매치기」「성행위」..」
 
 보통이라면 놈의 썩은 살점과 피를 뱉어버렸어야 했을 것이다. 구역질이 치밀어 삼킨다는 것은 상상도 못 했을 것이다. 하지만 이렇게 죽을 수는 없지 않은가? 게다가 살과 피가 목을 타고 넘어가니 놈의 스킬을 빼앗았다. 지친 몸에 활력이 돌기 시작하고, 곯았던 배가 아주 조금이나마 만족을 찾는다.
 
 “아아악! 이놈이 날 뜯어먹고 있어! 떼어줘!”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 진 몰라도 기회가 다시 찾아왔다는 것은 확실하게 알았다. 다른 한 놈은 내 다리를 뽑아내려고 하고 있었다. 그래서 지금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정확하게 알지 못하고 있다.
 
 아드득, 아득! 쿠드득!
 그 틈에 좀비의 가슴에 얼굴을 묻고 뼈까지 씹어대는 나!
 
 -스킬, 강탈로 대상의 「대식가」스킬을 빼앗았습니다.
 -스킬, 「리더쉽」이 오릅니다. 1.89%.
 -스킬, 「대식가」가 오릅니다. 0.11%.
 
 대식가 스킬을 얻자마자 나는 한 번에 더 많이, 그리고 훨씬 빠르게 먹을 수 있었다. 이게 참 기이한 느낌인데, 스킬이 생성되는 순간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일의 범위를 깨우쳤다. 밥을 한 숟갈만 먹을 수 있었는데, 두 숟갈을 동시에 입에 넣을 수 있달까? 거기에 먹으면 먹을수록 떨어졌던 체력이 올라가고 있다.
 
 퍼억!
 나는 다리 쪽에 얼쩡거리는 한 놈의 머리를 걷어차며 벌떡 일어섰다.
 
 「리더쉽
 비슷한 수준의 대상을 현혹할 수 있다.」
 「대식가
 배가 불러도 계속 먹을 수 있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참으로 신기한 일이었다. 놈을 먹다 보니 레벨이 올랐다. 고작 1레벨이 더 올랐다는 이유로 이놈들이 이젠 무섭거나 두렵지 않았다. 처음엔 빨갛던 녀석들의 이름도 점차 노란색에서 하얗게 변했다. 자신감이 차오르고 이길 수 있다는 강한 믿음이 생겨났다. 이름의 색이 저 녀석들과 나의 레벨의 차이를 나타내는 건가?
 
 “크흐흐흑! 아파! 너무 아파!”
 가슴이 거의 다 뜯어먹힌 좀비 한 마리는 아직 죽지 않고 고통을 호소하고 있고, 다리 쪽에 있던 녀석은 머리가 깨져서 몸 상태가 정상이 아니었다. 거기에 강하게 차이기까지 했으니 정신을 차릴 수 없을 것이다. 그런데도 이것들은 죽지 않고 살아있다.
 괴물···.
 
 “흐으..”
 나는 그런 둘을 내려보며 혀로 입술을 핥았다.
 애라 모르겠다! 어차피 이게 꿈이라면 내 마음대로 한들 어떨까? 누가 보는 것도 아니지 않은가? 현실이었다면 절대 할 수 없었을 일.
 너무 끔찍하고 처절한 모습!
 울컥!
 “꾸욱, 꾹.”
 놈의 썩은 살점을 먹었다는 생각에 헛구역질이 치밀었지만, 어금니가 부서질 듯 깨문다.
 뭐 어떤가? 꿈 아닌가?
 
 
  * * *
 
 “허어어어억!”
 잔뜩 굽어진 허리, 치켜뜬 눈!
 조금 전까지 분명 좀비들을 잡아먹고 있었는데 갑자기 잠에서 깼다. 그렇게 지독한 꿈이라니?
 깜빡, 깜빡, 눈을 반복해서 떠본다. 이 현실감. 그래, 이게 진짜다.
 
 하지만 그쪽도 너무 생생하지 않았나? 후.. 내가 아무래도 너무 지쳤나 보다. 깨어났으니 되었다. 그런데 문제는 그가 아니었다.
 
 “우우웁!”
 갑자기 속에서 뭔가가 치밀어 오른다. 나는 급히 화장실로 넘어질 듯 달려가서 허리를 숙였다. 변기를 잡고 한참을 게워낸다.
 
 “우에에에에엑!”
 그 생생했던 감각, 기억.. 맛.
 
 “컥, 컥!”
 태어나서 가장 끔찍한 경험이었다. 오장육부가 전부 목을 통해 튀어나오는 것 같았다. 그렇게 십여 분을 구토한 뒤 겨우 화장실에서 나왔다. 혹시 내 소란 때문에 신애가 깼을까 조심스럽게 아이의 방으로 들어갔는데,
 
 “어? 어어?”
 잠들었던 딸애가 눈을 번쩍 뜨고 멍하니 천장을 보고 있다.
 
 “시, 신애야!”
 귀신이라도 들린 것 같은 표정을 보며 소름이 쫙쫙 끼쳤다. 나는 신애의 얼굴을 보며 급히 물었다. 넋이 나가 있는 게 심각해 보였기 때문이다.
 
 “아..빠?”
 “그, 그래! 신애야. 아빠야! 정신 차려봐!”
 “으아아아아앙!”
 신애가 다급히 내 품으로 뛰어들었다. 부들부들 떨리는 몸. 말도 잇지 못하는 그 작은 아이를 안으며 그는 뇌리에 스치는 게 있다.
 
 설마? 신애도?
 오싹한 소름이 등줄기를 스칠 때,
 
 -튜토리얼을 마쳤습니다.
 
 머릿속에서 윙윙거리며 울리는 것 같은 목소리!
 움찔!
 신애의 몸이 반응한다. 너도 들려? 라는 말을 굳이 물어볼 필욘 없을 것 같다.
 
 -오늘의 튜토리얼도 업적에 반영됩니다.
 
 나는 주변을 급하게 두리번거렸다. 그래, 이 여자의 목소리는 또렷하게 기억에 남아 있다. 그 꿈에서 레벨이 오르거나, 스킬을 얻었을 때 들었던 목소리였으니까. 그런데 왜 이런 독한 장난을 치는 걸까? 대체 왜?
 
 “누구야! 나와!”
 나는 주변을 거칠게 두리번거리며 외쳤다. 이 방에 신애 말고는 아무도 없다는 것을 알았지만 지금 이 상황을 이해할 수 없어서 본능적으로 그런 것이다.
 
 -내일부터 본 게임이 시작됩니다.
 
 ‘녀석’은 그렇게 세상에 나타났다.
 
 1. 이변 (4)
 
 밤 10시 22분.
 
 정확하게 그 시간에 일이 벌어졌다.
 아직은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지는 모르겠지만 가장 급한 것은 놀란 신애를 진정시켜야 하는 것.
 
 “육식공룡 만났어? 티라노사우르스?”
 “아니! 아니! 나쁜 괴물들이.. 막.. 으아아아앙!”
 말을 잇지도 못하고 다시 울음을 터뜨리는 신애.
 
 “괴물이라니?”
 “몰라! 무서워! 티라노사우르스보다 백배 천배 무서워! 으아아아앙!”
 대체 이 아이는 무얼 본 걸까?
 
 “그게.. 어떻게 생겼냐면..”
 나는 간신히 신애를 달래 얘기를 들어본다.
 
 “헐크 같아. 괴물들은 녹색이니까.”
 신애의 어휘력엔 한계가 있었고, 명확하게 이거다! 라고 확신하기엔 정보가 부족했다.
 
 “그래도 어떤 착한 괴물 아줌마가 지켜줬는데, 나쁜 괴물들이 아줌마를 막, 막! 으아아앙!”
 아무래도 좀 더 아이를 진정시켜야 할 것 같았다.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거지?
 
 
  * * *
 
 “크륵! 그르륵!”
 좀비 한 마리가 양팔을 미친 듯이 휘두르며 뛰고 있다. 다리 하나가 말을 듣지 않아 넘어질 듯 위태롭지만, 잘도 뛴다.
 
 “꾸에에에엑!”
 멧돼지가 그런 좀비에게서 벗어나려고 혀를 길게 빼물고 도주 중이다.
 
 “서라!”
 “싫다!”
 치열한 추격전. 언데드 한 마리와 야수 한 마리는 둘 다 너무도 필사적이었다.
 
 “헉! 헉! 좀 서라니까..”
 “꾸에에엑!”
 폐가 터져버릴 것 같았던 좀비가 먼저 속도를 줄였다. 1시간은 달린 것 같다. 더는 못 뛴다.
 
 “망할!”
 너덜너덜한 좀비에서 한 단계 성장한 「좀 하는 좀비」의 이름을 거머쥔 자.
 그래. 나다.
 하지만 이름이 그렇게 바뀌었다고 뭔가 아주 특별해진 것은 아니었다. 성대가 약간 회복된 것과 몸놀림이 좀 나아진 정도?
 
 어김없이 밤 10시 22분이 되자 이곳으로 돌아왔다. 이게 꿈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은 나는 근처를 쑥대밭으로 만들며 신애를 찾아다녔다. 그 과정에서 마주친 3마리 좀비를 더 잡아먹었지만, 딸의 흔적은 어디에도 없었다.
 좀비들을 잡아먹었더니 스킬 「광란의 질주」와 「투지」가 생겨났다. 그러나 효과는 미미했다.
 고작 1%대의 스킬은 크게 영향을 주지 못하는 것이다.
 그래서 나왔다. 마을을 벗어나 오직 후각으로 방향을 정하고 걷기 시작했다. 왜 이런 일이 벌어졌는지 고민해봐야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오크』
 
 무섭게 생긴 얼굴에 180cm정도의 신장, 녹색 피부와 도구를 사용할 정도로 높은 지능. 신애가 한 얘기들을 종합해봤을 때 가장 가능성 있는 종족의 이름이다. 물론 아닐 수도 있고 오크라는 것을 영화에서만 봤지 실제로 본 적은 없다. 하지만 가만히 있을 수만은 없지 않은가?
 오크, 고블린, 트롤, 오우거? 뭐든 신애가 말했던 것들과 관련이 있는 것부터 단서를 찾아야 했다. 킁킁거리며 기억 속 딸애의 냄새를 찾아보려고 했지만, 그럴수록 허기와 갈증. 그것 때문에 도무지 집중할 수가 없었다.
 
 그러다가 마주친 게 이놈.
 핑- 정신이 나가버렸다. 보자마자 군침이 입안을 가득 메웠다. 침이 질질 흐르고 오직 너를 먹겠다! 라는 생각만 가득했다. 하지만 놈은 생각보다 강했다. 날뛰는 놈의 어금니에 뱃가죽이 뚫렸고, 워낙 날쌘 놈이라 뜀박질도 밀렸다.
 
 하지만 나는 좀비.
 다치고 깨져도 놈의 공격을 다 받아낼 수 있었다. 고름이 줄줄 흐르는 배를 손으로 막고 놈을 쫓아 달렸다. 부상보다는 허기가 더 끔찍했으니까. 멧돼지도 그걸 알기에 도주하는 것이다. 내 눈에서 놈도 봤겠지. 널 반드시 잡아먹고야 말겠다는 의지를 말이야.
 
 “아직은 무린가.”
 놈이 더 강하고 빠르니까 못 잡는다. 아주 단순한 법칙.
 덜컥, 덜컥.
 나는 발목을 바라본다. 이제 당장에라도 떨어져 나갈 것 같은 발이 보인다. 썩어빠진 근육과 피부가 무리해서 뛴 탓에 간신히 발을 붙들고 있는 거다. 그래도 이게 어딘가? 걷고 뛸 수 있다는 것 자체가 굉장한 것이다. 이마저도 못했다면 진즉에 죽었을지도 모른다.
 
 내게 있는 걸 최대한 활용해야 해. 생각하자. 또 생각해.
 멧돼지는 놓쳤지만 긴 시간을 질주할 수 있다는 걸 알았다. 1년간 목발만 짚다가 이렇게 전력으로 뛰었더니 가슴에 맺혔던 뭔가가 좀 뚫린 것 같기도 하다. 놈을 잡아먹든 아니든 어차피 배가 고픈 건 똑같다. 뭔가를 먹고 있을 때를 제외하면 이 배고픔은 사라지지 않는다. 그건 좀비들을 먹다 보니 깨달았다. 아쉬움은 일찍 털어내는 게 좋다는 거다. 좀 더 쉬운 사냥감을 찾아보자. 토끼나 그런 거 말이다. 나는 일어나려고 상체를 들다가 시야에 어른거리는 반짝임을 발견한다.
 이슬이 맺혀있는 어떤 것. 버섯인가?
 팔뚝만 한 버섯이었다. 대가리가 어찌나 새빨간지 혀만 갖다 대도 중독되어 죽어버릴 것 같다.
 배고파!
 하지만 나는 주저 없이 버섯을 향해 입을 벌린다.
 좀비도 먹었는데 버섯을 못 먹을까?
 와삭!
 
 -치명적인 독버섯을 먹었습니다.
 -스킬, 「독」을 얻었습니다.
 
 「독
 광범위한 영역에서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다.」
 
 “우우욱!”
 시궁창 맛!
 “퉤!”
 독이라는 스킬은 꽤 쓸모가 있어 보였다. 하지만 더럽게도 맛이 없다. 이것도 좀비라서 그런 걸까? 평소에 브로콜리와 과일을 즐겨 먹던 내게 너무도 이질적인 느낌이었다. 그렇게도 좋아하던 채소와 과일이 지금은 생각만 떠올리는 것으로도 구역질이 치밀었다. 마치 모래를 한 움큼 입안에 넣은 느낌 아닌가?
 
 “퉷퉷퉷!”
 고기가 필요해. 독이라는 스킬은 매우 탐나지만 연마하려면 이런 버섯을 한 트럭은 먹어야 할 것 같다.
 음..
 이런 것만 먹어야 한다면 차라리 죽는 게 나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먹을수록 스킬이 생기는 상황인걸 보면 처음 보는 것들은 한 번씩이라도 먹어봐야 한다는 걸까? 이게 꿈이 아니라는 것을 알기에 좀 더 진지하고 치열해야 한다. 내가 살아야 신애가 산다.
 
 세상엔 싫어도 해야 하는 것들이 있다. 그리고 지금 내겐 그게 바로 생존이었다. 딸애를 위해 살아야 한다는, 내가 없으면 신애는 아무도 돌봐줄 사람이 없을 거라는, 그 생각 하나.
 부르르 떨던 나는 다시 머리를 돌린다. 지금의 나는 시각보다는 후각이 더 발달한 상태다. 눈은 아주 가까운 것만 보일 뿐 조금만 멀어져도 흐릿하다. 냄새가 없으면 저 앞에 있는 커다란 게 바위인지 멧돼지인지 구분조차 할 수 없다는 거다. 이런 눈으로 멧돼지를 1시간이나 쫓아올 수 있었던 것도 모두 다 이 코 덕분이다.
 
 고기 냄새는 기막히게 맡는 콧구멍!
 거기에 인간 수준의 멀쩡한 청각도 부스럭거리는 소리 정도는 잡아준다.
 
 “킁킁!”
 코를 벌름거리며 지나가는 곤충이라도 잡아먹으려는 듯 엎드린 나는 갑자기 똥 마려운 강아지처럼 바르르 떨어댔다.
 핑- 핑-
 다시 도핑이라도 한 듯 강렬한 이끌림에 정신이 나가버린다.
 냄새!
 낭랑 십팔 세 소녀의 향긋한 머리칼 냄새가 아니다. 이건 역겨운 암내와 시큼한 땀내가 분명했지만 그게 이토록 매혹적일 수가 없었다. 마약에 이끌리듯 걷는다. 홀린 듯 걷다가 자빠져도 다시 일어났다. 이마는 깨져서 피고름이 뚝뚝 흘러나오고 앞니도 조금 부러졌지만, 전부 상관없다. 내겐 오직 단 하나만 중요했다.
 
 이 냄새!
 끓어오르는 강렬한 식욕!
 만찬이다!
 하나가 아닌 수많은 향기가 어우러진 향연!
 
 바바바바박!
 나는 미친 듯이 달리기 시작했다. 나뭇가지가 뺨에 생채기를 만들었지만 거침이 없다. 그렇게 달리고 달려서 발견한 동굴. 도중에 바람의 방향이 바뀌어서 흠칫흠칫 하긴 했지만 결국 찾을 수 있었다. 이 안에 뭐가 있기에 이런 향기가 나는 것일까?
 
 -주의, 당신의 레벨에 맞지 않는 던전입니다.
 -그래도 입장하시겠습니까?
 
 던전.
 너무 낯선 단어.
 위화감 때문인지 식욕을 이기고 머리가 맑아진다.
 확실히 뭔가 이상해. 왜 이렇게 게임 같을까?
 
 순간 위화감을 이겨버리는, 뭐랄까..
 이웃집 처녀의 다소곳한 웃음처럼 그의 코를 간질이는 향.
 나도 모르게 이끌리듯 한발을 더 내디딘다.
 
 -던전 「비틀어진 미궁」을 최초로 발견했습니다. 최초발견자에게 경험치 200이 주어집니다.
 -레벨이 오릅니다.
 -당신의 이름이 던전에 등록됩니다.
 -‘좀 하는 좀비’가 비틀어진 미궁에 흔적을 남겼습니다.
 
 그간 좀비들을 잡아먹고 이 미궁에서 받은 경험치까지 꽤 돼서 4레벨이 되었다. 아직 보너스 포인트를 사용할 그 조건이라는 것은 열리지 않았지만, 확실히 1레벨일 때보다 여러모로 강해지는 스스로를 느꼈다. 힘, 민첩, 체력 따위가 올랐으니 말이다.
 위험하다는 거겠지?
 경고 메시지가 신경이 쓰인다. 하지만 발길을 돌리기엔 이 엄청난 향기가 가만 놔두질 않았다.
 
 확인만 하자. 이 냄새가 뭔지···.
 입가에는 침이 줄줄 흘러내리고 있다. 이건 본능이다. 이성으로 통제할 수 없는 그런 종류의 것 말이다. 여기가 어딘지, 내가 지금 뭘 하고 있는지도 모르는 상황에서도 이 식욕만큼은 확실하게 자신이 할 일을 하고 있었다. 발 하나를 던전의 입구에 걸쳤던 나는 결심하며 몸을 디밀었다. 도무지 냄새의 유혹을 뿌리칠 수가 없다.
 
 그러자 저승사자의 목소리처럼 들려오는 메시지. 단언컨대 나는 이렇게 무서운 말은 사고 이후로 처음 들어봤다. 아내가 죽었다는 말 이후로······.
 
 -비틀어진 미궁에 입장하셨습니다.
 -던전 퀘스트를 완료하면 다시는 해당 던전의 재입장이 불가능합니다.
 -이 던전은 최소 10레벨 4인 파티를 권장합니다.
 -던전의 마스터를 파괴하기 전까지 탈출할 수 없습니다.
 
 탈출할 수 없어?
 거짓말이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무기로 쓸 곡괭이 하나 들지 못한 빈털터리 4렙짜리 좀비는 자신을 가로막는 투명한 막을 보며 멍하니 서 있었다.
 
 2. 생존하라! (1)
 
 눈을 깜빡였다가 뜬 것처럼,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그렇게 현실이 다시 찾아왔다.
 
 “흡!”
 
 -로그아웃 되었습니다. 정보가 기록됩니다.
 -업적에 맞게 라이프 포인트가 분배됩니다.
 
 화끈!
 갑자기 이마가 불로 지지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무의식중에 이마를 만져보던 나는 곧 눈이 튀어나올 것 같이 커진다. 신애의 이마에 선명하게 써진 숫자. 화상을 입어서 흉하게 그려진 게 아닌, 문신처럼 피부 안쪽에 색을 입힌 것 같은 그것.
 0.
 
 “어디 봐! 아파?”
 급하게 물었다.
 “아니.”
 괜찮아 보이는 신애.
 
 -업적에 따라 랭킹이 집계됩니다.
 
 랭킹?
 나는 이마를 만져보다가 크게 움찔했다.
 
 「업적보상.
 1~10위. 라이프 포인트 1000.
 11~100위. 라이프 포인트 500.
 101위~1,000위. 라이프 포인트 250.
 1,001위~10,000위. 라이프 포인트 100.
 10,001위~100,000위. 라이프 포인트 50.
 100,001위~1,000,000위. 라이프 포인트 10.
 1,000,000위~전체 99%. 라이프 포인트 1.
 하위 1%. 라이프 포인트 0.」
 
 호기심은 두려움을 이겨낸다. 눈물이 그렁그렁 맺혀있는 눈으로 신애가 신기한 듯 자신의 이마에 손가락을 대려고 하는 게 보인다.
 
 “훌쩍! 아빠! 이게 뭐야? 뭐지?”
 아직 5까지밖에 숫자를 세지 못하는 아이. 내 이마에 있는 숫자를 말해주지 못한다. 하지만 답은 곧 나왔다.
 
 「당신의 랭킹은 749,824위입니다.
 업적보상으로 라이프 포인트 10이 지급됩니다. 라이프 포인트는 타인에게 양도할 수 있으며, 모두 소진 시 사망합니다.」
 
 멍하니 신애의 얼굴을 보는데 귓가에 마지막 ‘녀석’의 음성이 울렸다.
 
 -타인의 라이프 포인트는 강제로 빼앗을 수 있습니다.
 
 훗날 이날을 ‘대멸종의 첫날’이라고 불렀다. 종말이 왔다고도 했고, 어떤 미친놈들은 그를 구원자라 부르기도 했다.
 2017년 지구 전체의 인구는 60억 명. 이 첫날 전체의 1%인 6천만 명이 심장마비로 죽었다. 그건 대한민국 전 국민보다 더 많은 숫자였다. 라이프 포인트로 타인을 살릴 수 있다고 하지만, 그래 봐야 모두를 살리기엔 턱없이 부족했고 사망자들은 대부분이 취약계층이었다. 통계에 의하면 독거노인, 병원에 입원해 있는 중증환자들, 아프리카나 인도, 중국의 빈곤층이 절대적으로 많았다. 그리고, 아이들······.
 
 혼자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그들이 타겟이 되었다. 아이, 노인, 가난한 자와 병자..
 혼란스러운 와중에서도 시간은 어제와 똑같이 흘러갔으며, 이윽고 10시 22분이 되었을 때, 시계는 멈춘다.
 
 내 라이프 포인트는 10. 신애의 라이프 포인트는 0. 우선 이걸 나눠야 했다. 처음엔 어떻게 해야 하는지 몰라 엄청나게 고생했다.
 
 ‘방법을 알려줘야지! 망할 년!’
 이라며 버럭버럭 외쳐보기도 했고, 손으로 비벼서 신애의 이마에 갖다 대보기도 했다. 하지만 결국 찾아냈다. 내 이마와 신애의 이마를 맞대면 되는 것이었다.
 
 -분배할 라이프 포인트를 지정하세요.
 
 서로의 이마를 접촉할 것.
 나는 신애에게 5포인트를 나눠주고 비장하게 말했다.
 
 “아빠 믿지? 아빠 손 꼭 잡고 있는 거야!”
 “응!”
 피할 수 없다면 이겨낸다.
 그게 내 방식이다!
 
 다시 꿈으로 되돌아가자 눈 앞에 던전이 다시 한 번 반긴다.
 되돌아갈 수는 없다. 한번 던전에 들어온 이상 방법은 두 가지뿐이다. 이 던전을 클리어하던지, 죽어서 나가던지.
 하지만 이게 보통 일이 아니라는 게 문제였다. 여기서 죽으면 무슨 일이 벌어질지 장담할 수가 없지 않은가? 뉴스와 인터넷을 온종일 붙들고 있었지만, 사실상 언론은 마비상태다. 수만, 어쩌면 수십만의 사람들이 갑자기 죽었는데 정부가 이걸 단박에 해결하리라는 생각은 안 한다.
 
 대혼란!
 
 「죽어도 상관없음. 나도 죽었는데 1포인트 받아서 살아있음!」
 「죽으면 끝일걸? 아니면 죽음 때문에 남은 시간에 다른 사람들처럼 업적을 쌓지 못해서 죽는 걸까?」
 
 어느 게 진실인지는 아직 모른다. 아직 휴대폰으로 인터넷을 검색하는 것은 가능했지만, 허위정보가 가득하고 보는 것만으로도 불안해지는 글이 난무했다. 신애의 어린이집도 휴교했고 아파트 밖에선 간혹 비명이 들려오기도 했다.
 
 일단 가보자. 가만히 있다고 해결되는 건 없어.
 몸을 사리는 것도 중요하다. 하지만 그만큼 정체된 것도 위험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슬금슬금 걸었다. 아주 조금씩 동굴처럼 생긴 통로를 따라 이동했다. 뭐가 튀어나올지 모르니 아주 조심하고 은밀하게 다리를 질질 끌었다.
 
 
  * * *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업적을 올릴 수 없을 것이고, 그러면 라이프 포인트를 얻을 수 없다. 이건 간단하게 생각해봐도 그럴듯하다. 천만다행으로 10포인트를 벌었지만, 신애와 내가 살려면 하루 2포인트가 있어야만 한다. 이런 던전에 갇혀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면 5일 안에 죽는다는 것.
 
 내가 가만히 있으면 다른 사람들은 쭉쭉 치고 올라가겠지. 뭐라도 해야만 해. 이건 절대평가가 아니라 상대평가야. 내가 살려면 남을 밟고 올라가야 해!
 
 신애를 살릴 수만 있다면 똥이라도 먹을 수 있다.
 바퀴벌레처럼 비굴하게 부스러기를 주워 먹으러 다닐 수도 있다.
 그게 나를 의지하고 있는 신애에 대한 내 의무다.
 하위 1%가 되면 타인에게 라이프 포인트를 얻거나, 이전에 모아둔 라이프 포인트가 없을 시엔 반드시 죽는다. 오늘 확실하게 알아낸 사실이 있다면 이 웃기는 상황이 ‘진짜’라는 것이다.
 
 달팽이가 흔적을 남기듯 내가 지나온 길에 흙이 파인다.
 여기엔 뭐가 사는 거냐···. 두 눈은 부리부리하게 정면을 주시하고 날카롭게 파악한다. 하지만 입가에는 주르륵 침이 흘러내리고 있다. 걸으면 걸을수록 더 진해지는 냄새! 도무지 견딜 수 없는 이 식욕 탓에 머리가 어지러울 지경이다.
 
 핑- 핑- 핑-
 또..
 “그르륵!”
 이성을 마비시키는 강렬한 식욕!
 
 참아야 해. 고작 이 정도도 못 버티냐!
 이렇게 심각한 상황에서도 이 좀비라는 특성 탓에 식탐이 더 우선시 되고 있다.
 벽을 더듬으며 계속해서 걸었다. 그러다가 돌연 뒤로 벌러덩 자빠졌다. 갑작스러운 기습에 전혀 대처할 수가 없었다!
 
 “크흡!”
 뒤통수가 박살 날 것 같은 충격!
 
 “호옹?”
 바닥에서 솟구친 녀석.
 제, 제기랄!
 하마터면 심장마비가 걸릴 뻔했다. 그만큼 놀랐다는 거다.
 녀석이 나를 보며 미심쩍은 얼굴로 갸웃거렸다.
 
 “호오오옹?”
 두리번거리다가 나를 다시 주시하는 녀석. 녹색의 싱그러운 줄기가 머리칼처럼 길게 자라있고, 몸뚱이는 아주 통통하다. 주황색의 역삼각형 길쭉한 모습.
 
 당근.
 그것도 무려 1미터가 넘어가는 초대형당근 말이다. 심지어 녀석은 눈과 코, 입도 있었고 지네처럼 가느다란 두 다리까지 있었다.
 
 “혼자 왔어?”
 녀석이 마치 홍등가의 여인네처럼 그렇게 물었다. 나는 어처구니가 없어서 당근을 보며 끄덕이다가 입가를 푸들거렸다.
 
 “에휴.”
 내 전신을 보며 실망한 듯 한숨을 쉬는 당근 녀석.
 
 “넌···, 뭐지?”
 잠깐? 이 홍당무.. 내가 이상한 건가? 아무리 미친 세상이라지만 이게 말이 돼?
 
 “당근이야. 보면 몰라?”
 그래. 누가 봐도 당근이라는 건 알겠다. 하지만 모든 당근이 너처럼 주둥이가 달리 진 않았다고!
 외치고 싶었지만, 간신히 참으며 묻는다.
 침착하자. 그래도 이놈이 당근이라 그런지 식욕이 발동하진 않는다. 놈이 향긋한 냄새 풀풀 풍기는 동물이었다면 이렇게 그가 맑은 정신을 유지하진 못했으리라.
 
 “이곳에 대해 알고 있나?”
 우선은 적대적이진 않은 것 같다.
 
 “알지! 여기가 내 집이니까!”
 당근 주제에 까르르 웃는 꼴을 보고 있자니 속이 뒤틀렸다. 아마도 녀석이 채소라 그런 것 같다. 좀비가 된 이후로 고기에만 호감이 가는 나였으니까.
 
 “원래 너에게 한 가지 부탁을 하려고 했어. 그런데 네 꼴을 보아하니······.”
 부탁? 나는 냉큼 일어나 당근의 커다란 얼굴을 양손으로 덥석 잡았다.
 
 “해! 들어주겠다!”
 나는 이글이글 불타오르는 눈으로 외쳤다. 뭐라도 이 절망적인 상황을 벗어날 방법을 찾아야만 했다. 그리고 그건 이 당근이 쥐고 있는 것 같지 않은가?
 
 “아잉, 만난 지 얼마나 됐다고 벌써부터 이러면······.”
 당근 주제에 얼굴이 당근처럼 붉어진 녀석이 몸을 비꼬며 말한다.
 
 “그리고 너는 내 스타일도 아니거든!”
 멸치처럼 가느다란 녀석의 팔이 내 가슴을 밀어낸다. 그런데 힘이 어찌나 강한지 민망하게 엉덩방아를 찧어 버렸다.
 
 크윽! 뭐야! 갑자기!
 
 -주의, 생명력이 8% 깎였습니다.
 
 파 뿌리 같은 팔에 담긴 힘이라니!
 
 “그렇게 원한다면 부탁할게. 안쪽에 내 언니가 잡혀있어. 그녀를 구해줘.”
 순간 수많은 질문이 내 머릿속에 맴돈다.
 네 언니도 당근이야?
 뭐에 잡혀 있지?
 등등 말이다. 하지만 그런 질문을 완전히 잊게 하는 눈부신 하나의 선명한 창이 내 앞에 떠올랐다. 마치 천사가 이 땅에 강림한 듯 그렇게 찬란하게 말이다.
 
 「홍시의 부탁
 사이가 좋았던 자매가 강제로 이별하고야 말았습니다. 무서운 몬스터들이 자매의 상봉을 방해하고 있죠. 둘이 다시 오순도순 행복하게 살 수 있게 해주세요.
 달성조건: 홍시와 연시를 만나게 하기
 달성보상: 선택
 -꼬깔마녀의 네일아트
 -홍시의 뿌리
 -뒤틀린 뿔
 -어느 모험가의 낡은 검
 -금화10」
 
 퀘스트!
 초보 유저를 강인하게 만들어주며 각종 장비와 돈을 몰아주는 고마운 시스템!
 하지만,
 뭐가 뭔지···, 모르겠군.
 나는 이때까지 이런 종류의 게임 시스템에 관해서는 잘 모르고 있었다. 그래서 보상 목록이 주르륵 떴지만 이름만 봐서는 뭐가 좋은지 전혀 모르겠다. 게다가 이렇게 퀘스트까지 받고 나니 그 녀석이 본격적으로 장난을 치는 것 같아 기분도 나빠졌다. 사람의 목숨을······. 어린 신애의 목숨을 가지고 놀다니!
 
 “후···.”
 하지만 하지 않을 수도 없는 일. 정말 죽지 못해 산다는 말이 딱 이럴 때 쓰는 것 같다.
 
 “그럼 부탁해! 홍홍!”
 마법처럼 뿅 하고 사라진 건 아니다. 다시 땅속으로 몸을 처박고 줄기만 밖으로 내밀고 있는 당근으로 돌아간 것이다.
 
 “······.”
 뭐지 이 새낀?
 나는 당근 잎을 한동안 물끄러미 보다가 다가가서 와락 쥐어 확! 뜯어냈다.
 
 “아악! 뭐 하는 거야!”
 우적우적···.
 혹시라도 뺏길까 허겁지겁 입에 처넣는다.
 
 -홍시의 줄기를 먹었습니다.
 -스킬, 「땅속에 파고들기」를 얻었습니다.
 
 2. 생존하라! (2)
 
 역시! 스킬이 생겼다!
 물론 맛은 더럽게 없었다. 다 먹지도 못하고 줄기를 씹다가 뱉어버릴 정도였다. 그러나 이렇게 얻은 스킬이 목숨을 부지해주는 중요한 무기라는 것을 이젠 안다. 뭐라도 먹을 수 있을 때 모조리 먹어야만 했다. 그리고 지금 내 눈앞엔 당근이 있다.
 
 “배가 고파서······.”
 나는 눈을 치켜뜬 당근을 보며 둘러댄다. 녀석이 당장에라도 그 가녀린 팔로 한 대 칠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날 먹으면 어떡해! 이 멍청한 좀비야!”
 땅속에 파고들기라······. 꽤 쓸 만한 걸 얻었다고 생각하며 튀어나온 홍시에게 묻는다.
 
 “설명이 부족해. 이 던전에 어떤 몬스터가 있는 거지? 그 정도는 알려주고 들어가야지.”
 “아이참! 말로 하지 그랬어! 여긴 햇볕이 안 들어서 머리를 다시 기르려면 얼마나 힘들 줄 알아? 광합성이 안된다고! 광합성이! 니가 그 기분을 알아?”
 작은 주먹을 쥐고 다가오는 홍시를 간신히 말리며 물었다. 왠지 저 주먹에 맞으면 가슴뼈가 작살 날 것 같았기 때문이다. 실 같은 당근 뿌리도 위협적이라니 왠지 서럽지만, 지금은 위기를 넘겨야 하니 잊자.
 
 “넌 짧은 게 더 잘 어울려.”
 “······.”
 우뚝 멈춰서는 홍시.
 녀석이 눈을 깜짝거리더니 곧 양손으로 얼굴을 감싸며 진모를 본다.
 
 “그래?”
 “그래.”
 “정말?”
 “응. 예쁜 얼굴은 가리는 게 아니다.”
 “오홍홍홍홍! 너 뭘 좀 아는 좀비구나?”
 이 당근이 스스로를 ‘여성’이라고 인식하고 있다는 걸 안 이후부터 나는 속으로 안도했다. 여자들이 칭찬에 약하다는 것을 안다. 이래봬도 3년 차 유부남이었으니까.
 
 “정보를 줘. 대체 여기 뭐가 사는 거지?”
 
 설명을 들어보면 토끼와 말, 소. 그게 이 동굴에서 당근들과 함께 사는 녀석들의 정체다.
 물론 우리가 가축으로 기르는 그런 것들과는 거리가 멀지만······.
 
 “그놈들은 우리만 보면 눈이 뒤집혀서 따라와. 어떻게든 잡아먹으려고 안달이 났거든. 무서워죽겠다니까?”
 그건 니가 당근이니까 그래. 라는 말을 해주고 싶었지만, 묵묵히 듣는다.
 
 “언니를 못 본 것도 벌써 몇 년이 지났는지 모르겠어. 하지만 나는 언니가 꼭 살아 있을 거라고 믿고 있어!”
 이 맛있는 냄새가 그놈들 것이었군. 언니를 향한 애절한 당근의 눈빛을 깔끔하게 무시하며 코를 킁킁거렸다. 진득한 노린내가 안쪽에서부터 흘러나오고 있다. 아까부터 조금씩 가까워지고 있는 듯하다. 녀석들이 이 당근 녀석을 찾는다니 이놈을 미끼로 쓸 수 있으면 좋겠지만······.
 애석하게도 이 당근이 나보다 셀 것 같다.
 
 “녀석들 외에 다른 건 없나?”
 “응. 없어.”
 “제길···.”
 뭔가 잡아먹고 레벨업을 할 수 있는 것들이라도 있길 바랐는데.. 하다못해 쥐새끼라도 말이다.
 
 어쩐다.
 이 당근조차 이리도 강한데 이놈을 잡아먹고 산다는 몬스터들을 내가 이길 턱이 없었다. 근데 왜 여기가 비틀어진 미궁이지? 아주 작은 단서라도 중요한 변수가 될 수 있다.
 
 “이제 다 알았지? 난 잔다! 깨우지 마!”
 드라이버처럼 빙글빙글 돌며 땅속으로 파고드는 당근을 보며 나는 한숨을 크게 내쉬었다.
 
 공략법.
 마땅한 게 떠오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 * *
 
 
 “왜 아직도 못 찾는 거야!”
 하얗고 토실토실한 다리가 허공을 가로질러 한 지점에 닿았다.
 
 빠악!
 그 발에 챈 육중한 몸뚱이가 저쪽 벽에 처박혔다.
 
 “놈들이 워낙 은밀하게 숨어 있어서 그렇습니다! 고정하십시오!”
 넙죽 엎드린 말 한 마리가 필사적으로 외쳤다. 다음은 자신 차례라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삿대질하며 분노를 터뜨리던 토끼는 씩씩거리다가 저편을 보며 말한다.
 
 “넌 언제까지 거기 처박혀 있을 거야? 빨리 안 튀어와? 더 맞아야 정신 차리지?”
 벽에 파묻혔던 소가 냉큼 일어나서 토끼 앞으로 달려와 엎드렸다.
 
 “아닙니다!”
 두 마리 몬스터 앞에 허리에 손을 올리고선 토끼 한 마리.
 
 “배고프다고! 배고파! 당근이 먹고 싶어!”
 “저, 저희도 그렇습니다.”
 “맞습니다! 다시 찾아보겠습니다!”
 발로 걷어차기만 해도 꽤액! 하며 죽어버릴 것 같은 토끼에게 쩔쩔매는 소와 말.
 
 “킁킁! 근데 이게 무슨 냄새야? 너 똥쌌어? 이젠 그것도 조절이 안 되는 거야?”
 “그게 무슨! 아닙니다!”
 “저도 10년째 먹은 게 없어서 방귀도 안 나옵니다!”
 “흐음.. 아주 불쾌한 썩은 내가 나는 것 같은데..”
 이상한 듯 코를 찡긋거리는 토끼가 둘을 의심스럽다는 듯 보다가 버럭 외쳤다.
 
 “빨리 찾으라고! 등신들아! 배고파 죽겠어! 죽겠다고!”
 소와 말은 토끼가 더 역정을 내기 전에 후다닥 뛰어나간다.
 
 “꼭 내가 직접 나서야겠니? 아휴, 답답이들!”
 토끼는 코를 벌름거리며 저쪽을 향해 걸어갔다. 세 마리의 몬스터가 사라지자 주변은 정적이 감돈다.
 애초에 이 던전엔 세 마리 몬스터와 당근 두 녀석밖에 없다.
 
 얼마나 지났을까?
 토끼가 밟고 서 있던 땅이 들썩거리기 시작했다.
 
 드드드득.
 썩어 문드러진 손이 불쑥 튀어나왔다. 그게 땅을 짚더니 상체를 끌어올린다. 심장 약한 사람이 봤다면 기겁을 하며 쓰러졌을 무서운 장면.
 
 드디어 찾았다!
 나는 <땅속에 파고들기> 스킬을 이용해 몇 시간째 숨어 있었다. 비록 스킬 숙련도가 높지 않아서 당근 녀석처럼 빠르게 땅으로 파고들지는 못했지만, 이 정도만 해도 아주 유용하게 써먹고 있었다. 금 같은 귀한 시간이 지날수록 신애 생각에 입술이 타들어 가고, 토끼가 냄새가 난다고 말했을 때 가슴이 덜컥 내려앉긴 했지만, 결과적으론 들키지 않고 놈들을 정찰했으니 목적은 이룬 셈이다. 하지만 놈들을 보고나니 더 암담하다.
 
 「주눅 든 미노타우르스」
 「말 잘 듣는 켄타로우스」
 
 두 놈의 이름은 아주 빨갛다. 그리고 오늘 처음 알았다. 빨강에도 등급이 있다는 걸.
 
 「비틀어진 미궁의 지배자」
 
 토끼 주제에 과분한 이름을 가졌다. 한데 그놈의 이름은 빨갛다 못해 불덩이가 활활 타오르는 느낌이었다. 말과 소의 이름이 연한 장밋빛이라면 그 토끼놈은 핏빛이랄까? 왜 여기가 비틀어진 미궁인지도 이제 알 것 같다.
 모든 것이 뒤바뀐 곳.
 토끼가 말과 소 위에 올라 호령하는 세상.
 
 방법이 있을 거야. 방법이.
 누군가가 도와준다면 일이 더 쉬울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는 철저하게 혼자였다. 당근들이 있다지만 그것들은 별 힘이 되어주지 못할 것이다.
 
 더 지켜보자. 조급하면 이쪽이 손해야!
 아직 대략 5일이라는 시간도 있고, 일단 땅속에 숨을 수 있는 스킬 덕분에 위기는 넘길 수 있다. 놈들을 관찰할 수도 있고 말이다.
 
 더 보자. 놈들에게 어떤 틈이 있을지를.
 나는 비틀비틀 걷다가 다시 땅으로 파고들었다.
 
  * * *
 
 “후후, 이번 사냥도 쏠쏠하군.”
 두둑한 돈주머니를 챙긴 사내.
 번쩍이는 갑옷을 입고 멋진 검까지 들었다. 부츠는 방수 기능까지 겸비했고, 경량화 마법이 걸린 배낭까지 등에 멨다.
 참으로 호화로운 장비가 아닐 수 없다. 단지 그의 외형이 조금 특이하다.
 송곳니는 뾰족하고 피부는 무척 검다.
 
 “신이시여! 감사합니다! 으하하하!”
 이런 세상이 오다니! 천국이 따로 없지 않은가?
 그는 웃으며 다시 발길을 돌린다. 장비가 어느 정도 갖춰지니 사냥이 쉬워졌다. 운도 좋아서 처음부터 하급 흡혈귀로 시작했다. 10레벨을 넘기니 이제 주변에서는 적수가 없었다. 국경 근처의 정찰병을 하나 습격해서 빼앗은 장비까지 있으니 무적이나 다름없다. 그게 그의 기분을 너무도 좋게 만든다.
 
 이 안에서는 신.
 무엇이든 할 수 있고 누구든 죽일 수 있다!
 잔소리를 하는 꼰대들도 없고 돈을 벌 필요도 없다!
 
 “이 근처에 있을 텐데.”
 그가 이곳을 떠나기 전에 마지막으로 하는 일. 근처의 던전을 모조리 터는 것이었다. 오랜 게임 생활로 다져진 경험. 남들은 자신을 보고 방구석 폐인이네, 히키코모리네 떠들어댔지만 이제 그가 가장 잘하는 것이 빛을 보는 시대가 도래한 것이다.
 게임!
 
 “흐음······.”
 본래 밑바닥부터 싹쓸이해야 나중에 여길 다시 오는 귀찮음을 피할 수 있는 거다. 특별한 업적이나 호칭을 딸 수도 있고 말이다.
 
 “저쪽인가?”
 그가 서늘하게 웃으며 힘차게 땅을 박찼다.
 
  * * *
 
 저건 또 뭐야?
 나는 땅속에서 움찔움찔하며 침입자를 느낀다. 사실 이 던전이 내건 아니었지만, 어제 그리고 오늘, 이틀째 숨어 살다 보니 이젠 집처럼 느껴진다. 그래서 낯선 자가 불쑥 들어오자 거부감부터 드는 것이다. 그러나 반대로 말하면 어서 빨리 이곳에서 나가고 싶은 생각뿐이다. 어딘가에서 오들오들 떨고 있을 신애만 생각하면 미쳐버릴 것 같다.
 
 갑자기 불청객의 난입이라니 새로운 이벤트인가?
 놈은 인간처럼 생겼지만, 곧 다른 점들을 찾아낼 수 있었다. 턱까지 뻗어나온 송곳니 2개. 태어나서 한 번도 안 깎은 것 같은 손톱. 한 달은 야근을 한 듯한 시뻘건 눈동자!
 
 -시간 없다! 뭐든 빨리 튀어나와! 이 잡것들아! 으하하하!
 
 놈이 뭐라고 고래고래 소리친다. 이젠 숨어서 작은 구멍을 뚫고 훔쳐보는 것 정도는 할 수 있었던 나는 곧 놈의 모습이 확실하게 보이기 시작하자 침을 꿀꺽 삼켰다. 놈이 접근하자 선명하게 이름이 보이기 시작했다. 영화나 만화책에서 봤던 흡혈귀의 모습과 판박이다. 이름조차 아주 빨갛다.
 
 「일대를 호령하는 뱀파이어」
 
 심지어 이름도 멋지다. 그런데 놈이 뭐라고 하는지를 모르겠다. 토끼, 말, 소···. 심지어 당근과도 대화가 되는데 왜?
 좀 더 지켜보기로 했다. 어떤 이벤트가 진행되는지 궁금하기도 했고 말이다.
 
 “웬 놈이냐!”
 반응은 즉각 나왔다. 애당초 이 던전 자체가 그리 크지 않다. 아무리 설정이라지만 초식동물 녀석들이 당근 잎사귀를 발견하지 못하는 것부터가 말이 안 되는 것이었다.
 
 “네가 이 던전의 보스 몬스터냐!”
 상체는 인간의 그것을 닮았고, 하체는 말이다. 「말 잘 듣는 켄타로우스」는 당장에라도 흡혈귀를 짓밟아버릴 것처럼 투레질하며 분노를 표출했다.
 
 “히이이이이잉! 넌 누구냐!”
 혹시 저놈이 토끼를 무찌르면 혹시 나도 이 던전을 나갈 수 있는 건가? 아직 확신은 없지만, 변수가 생기기 시작한 것만은 분명했다.
 일단 좀 더 지켜보자!
 
 “보아하니 잡몹이군! 꺼져라!”
 흡혈귀는 즉각 스킬을 난사하기 시작했다. 나는 숨어서 그걸 보며 혀를 내둘렀다.
 저렇게 멋지고 화려한 스킬이라니?
 서걱, 서걱!
 수십 마리의 박쥐 모양 강기가 말의 주변을 맴돌며 계속해서 타격을 가하고 있었다. 그 박쥐 날개 하나하나가 칼날보다 예리하다. 흡혈귀는 그걸 아주 능숙하게 조절하며 싸우고 있었다. 심지어 놈의 장비를 보라. 갑옷이라니! 저런 대검이라니!
 
 “고작 이 정도 패턴이냐? 눈에 훤히 보인다! 크하하!”
 “끄어어어어! 마스터! 도와주십시오!”
 
 말은 도저히 안 되겠는지 비명을 질러댔다. 그러자 저편에서 두두두두두! 달려오는 소 한 마리! 녀석의 등엔 토끼가 올라타 있었다.
 
 “누가 우리 애를 건드리냐!”
 
 2. 생존하라! (3)
 
 오호.
 나는 입맛을 다시며 시작되는 전투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과연 토끼는 강했다. 적어도 레벨이 10은 가볍게 넘어갈 것 같다. 소 역시 토끼와 오래 지내서 그런지 손발이 아주 잘 맞는다. 그런데도 흡혈귀는 버틴다.
 그 수상한 박쥐 모양의 강기를 몸 주변으로 두르고 공격을 막는다. 그러면서 틈틈이 검을 휘둘러 소부터 노린다. 토끼가 더 강하다는 것을 안 모양이다. 거치적거리는 잡몹부터 없앤다는 뜻.
 
 판단력이 좋군.
 이 싸움 볼만하다.
 꿀꺽!
 절로 침이 넘어간다.
 
 “차앗! 죽어라!”
 “웃기지 마라! 이 더러운 언데드 따위!”
 “헐! 뭐라? 산채로 구워 먹어주마!”
 싸움이 길어질 것 같다. 토끼와 1:1이었다면 흡혈귀 쪽이 앞섰겠지만, 소가 아주 적절하게 지원을 하고 있다.
 팽팽한 각축전.
 꾸울꺽!
 치열한 싸움이 이어지던 와중에······.
 
 “크으윽! 강하군! 두고 보자!”
 흡혈귀에게 맞아 나가떨어진 녀석 하나가 피를 철철 흘리며 회복을 하는 중이다.
 그것도 바로 내 위에서 말이다!
 천운이라고 해야 할까?
 지금이라면 가능할지도 모른다.
 놈의 새빨간 피가 그 어떤 향신료보다 매혹적으로 다가왔다.
 
 할 수 있다! 할 수 있어!
 이 기회를 놓치면 뼈저리게 후회를 할 것만 같았다. 그래서 움직였다. 앙상한 팔이 땅을 뚫고 불쑥 튀어나왔다.
 덥석!
 “커헉?”
 뒤에서 느닷없이 이빨이 박혀 들자 말이 기겁했다. 들러붙는 파리를 쫓듯 몸을 흔들어보지만, 손톱을 단단하게 박아넣은 좀비 한 마리는 떨어질 생각을 하지 않는다. 그만큼 내가 필사적이라는 뜻이다!
 
 우걱! 우걱!
 
 -스킬, 「샘솟는 힘!」을 얻었습니다.
 -신선한 피를 섭취했습니다. 체력이 회복됩니다.
 
 “아아악! 떨어져!”
 말은 비명을 지르며 굴렀다. 그 육중한 무게 때문에 바닥에 깔린 내 뼈가 으스러지고 살점이 뭉개졌지만, 그와 동시에 목구멍으로 흘러드는 피와 살이 회복을 시켜준다.
 버텨야 한다! 버텨야 해!
 
 -스킬, 「대식가」가 오릅니다. 41.11%.
 -스킬, 「대식가」가 오릅니다. 52.62%.
 -스킬, 「샘솟는 힘!」이 오릅니다. 0.92%.
 
 나는 새로 얻은 샘솟는 힘을 쓰면서 끈덕지게 달라붙었다. 만약 켄타우로스가 흡혈귀에게 당하지만 않았다면 내가 이렇게까지 하진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미 약해질 대로 약해진 켄타우로스는 나의 집요함을 이겨내지 못했다. 투지에서 밀린다. 싸움에 임하는 마음가짐에서부터 차이가 났다.
 
 난 살 거야!
 와작!
 거머리처럼 등짝에 달라붙어 녀석의 목덜미를 물었다.
 
 “끄어어어어!”
 
 -「켄타우로스를 먹은 좀비」가 되었습니다.
 -경험치가 큰 폭으로 오릅니다.
 -8레벨이 되었습니다.
 
 단박에 뛰어버린 레벨!
 
 “우에에에에엑!”
 속이 뒤틀렸다.
 나는 갑자기 먹었던 것을 게워냈다. 맨정신으로 하기 힘든 일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나는 눈물, 콧물을 줄줄 흘리면서도 다시 먹기 시작한다. 머리는 꼿꼿하게 들고 전방을 주시하며 손과 입을 끊임없이 놀린다. 말 녀석은 이미 유명을 달리했는지 움직임이 없다.
 
 챱챱챱챱!
 기회가 있을 때 조금이라도 더 먹어야 해! 그게 나를 위한 길이고, 신애를 위한 길이었다. 나는 그렇게 믿었다.
 
 “캬아악! 이 치사한 놈! 부하가 있었다니!”
 화가 치밀어 오른 토끼가 욕을 해댔다. 절친을 잃은 소 역시 눈깔이 뒤집힌 것은 마찬가지.
 졸지에 분노한 두 녀석의 공격을 받은 흡혈귀만 억울함에 치를 떨었지만, 워낙 공격이 거세 입을 열 틈도 없다.
 
 ‘저건 뭐야!’
 흡혈귀로서도 어처구니없는 상황이었다.
 
 -대식가 스킬의 추가 능력으로 폭식에 인한 경험치를 얻었습니다.
 -스킬, 「대식가」가 오릅니다. 85.22%.
 -레벨이 올랐습니다.
 -9레벨이 되었습니다.
 
 “크흡! 쿠에에엑!”
 힘겨웠지만 나는 구토를 반복하면서도 허겁지겁 먹었다. 빨리 먹어치우지 않으면 저놈들이 언제 이쪽으로 날아올지 몰랐기 때문이다.
 
 -대식가 스킬이 max 수치에 도달했습니다. 다음 단계로 진화합니다. 추가 능력으로 「빨리 먹기」가 생성됩니다.
 -스킬, 「위대한 대식가」를 얻었습니다.
 
 내가 말 한 마리를 통째로 먹어 치우는 데 걸리는 시간은 나조차 믿기 힘들 정도였다. 새롭게 얻은 빨리 먹기 스킬은 상상을 초월했다. 입에 들어가는 족족 삼켜진다. 머리통만 한 고깃덩어리도 그대로 넘어갔다. 뼈도, 근육도, 내장도 가릴 것이 없다.
 
 -축하합니다! 10레벨이 되었습니다.
 -「구울」로 전직합니다.
 -「고통감소」를 얻었습니다.
 -「강인한 육체」와 「독기」를 얻었습니다.
 
 “흐으으..”
 나는 일어섰다. 몸은 피범벅이고 말 한 마리가 통째로 들어갔음에도 아직 배가 홀쭉하다.
 하지만 그사이 많은 것들이 달라져 있었다.
 
 우선 두 눈!
 해볼 만하겠어. 자신감으로 가득 찬 동공이 놈들을 훑는다. 놈들의 이름이 더는 빨갛지 않다. 좀비에서 구울로 승격한 것이 내게 주는 힘은 놀라웠다. 단순히 이름만 바뀐 게 아니다.
 
 일개미가 병정개미가 된 것처럼,
 일벌이 말벌이 된 것처럼 변했다.
 좀비가 단순하게 피와 살을 쫓아다니는 하급 언데드였다면 구울은 전투를 위해 새롭게 태어난 언데드!
 그 차이가 확실히 인식된다.
 
 “흐으, 흐으.”
 물론 아직 썩은 목구멍이 재생된 건 아니라 말은 당연히 못 한다. 그러나 숨 쉬는 소리만으로도 충분히 위협적이다.
 전엔 바람 빠진 풍선 같았다면 이젠 사자의 울림이다. 늑대의 하울링이다.
 
 「구울」
 
 새로운 이름을 달고 나는 움직였다. 흡혈귀의 공격에 맞아 나가떨어진 황소를 향해 똑바로 말이다.
 
 휘익!
 쓸모없이 덜렁거리는 다리가 기막히게 땅을 짚었고, 내 몸이 풍차처럼 허공에서 돌며 자신을 저지하려는 토끼의 공격을 피한다.
 된다! 사고 이전의 감각들이 다시 내 몸을 통해 구현되기 시작한다.
 
 “아아아악!”
 소의 눈은 더 커질 수 없을 만큼 벌어져 자신을 향해 날아오는 나를 본다.
 
 “싫어어어어!”
 절친이 어떻게 잡혀먹혔는지 똑똑히 봤기에 공포감이 더 클 것이다.
 
 콰드득!
 하지만 인정사정없는 누런 이빨이 소의 빗장뼈에 박혀 들었고, 소의 품에 다소곳이 안긴 나는 놈의 가슴팍부터 먹어치우기 시작한다. 그 광경이 어찌나 끔찍했는지, 흡혈귀와 토끼의 싸움까지 멈춘다.
 
 ‘저게 뭐야..’
 토끼보다 흡혈귀의 놀람이 더 컸다. 같은 언데드고, 놈이 좀비라는 것도 안다. 하지만 그의 게임 지식엔 저런 좀비는 없었다!
 
 “너 이 자식!”
 토끼가 부하를 구하기 위해 몸을 돌렸다. 두 눈이 빨갛게 충혈된 토끼는 당장에라도 저 구더기 같은 놈을 찢어버리고 싶었다. 그런데 토끼는 뜻을 이룰 수가 없었다.
 
 푸훅!
 서늘하고 차가운 감각. 아주 불쾌하고 소름 끼치는 어떤 고통이 등에서 척추를 따라 온몸을 강타한다.
 
 “적을 앞에 두고 등을 보이면 쓰나.”
 토끼의 등에 대검을 박아넣은 흡혈귀는 만족스럽게 웃었다.
 
 “네놈들······.”
 “오해하지 말라고. 나는 정말 저놈을 모르니까.”
 토끼는 손을 바들바들 떨며 쓰러졌다. 아직 숨은 붙어 있었지만, 치명타를 입어 전투불능에 빠진 것이다. 당연하다는 듯 마무리를 하려고 검을 치켜든 흡혈귀. 하지만 그는 뜻을 이루지 못했다. 어느 샌가 바짝 다가와 음침한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어떤 녀석을 본 것이다.
 
 움찔!
 나는 녀석의 얼굴을 유심히 관찰한다.
 갈등하고 있군.
 하도 먹어댔더니 이젠 배고픔이 많이 진정되었다.
 
 서툰 녀석이야.
 잘하면 승기를 잡을 수도 있겠어.
 놈의 화려한 스킬이나 공격능력은 인정하지만, 묘하게 어떤 것들이 보인다. 이 흡혈귀보다는 전에 만났던 ‘근처를 주름잡는 좀비’녀석들이 더 치열해 보였달까? 그놈들이 더 절박했고 훨씬 투지가 넘쳤다.
 
 놈에게 한발 내디딘다. 그건 아무렇게나 걸은 게 아니다. 일단 쓸모없는 발을 앞으로 뻗었고, 그건 만약 놈이 공격했을 때, 내어줄 미끼가 될 것이다.
 살을 주고 뼈를 취하는 전술. 녀석이 들숨을 쉬기 직전을 노리기로 했다. 인간이란 기본적으로 숨을 들이켤 때 더 잘 놀란다. 여기에서도 통할지 그게 의문이었는데 녀석의 반응을 보아하니 되는 것 같다.
 
 움찔하며 물러서는 흡혈귀.
 긴장하고 있군.
 놈의 눈꼬리, 손가락 끝, 입술의 경련 정도를 보며 나는 다시 한발을 나아간다.
 내가 노리는 것은 단 하나.
 아직은 놈의 이름이 빨갛다. 놈이 나보다 레벨이 더 높다는 거지. 그건 저놈도 알고 있을 거야. 신속하게 토끼를 먹어야 해.
 
 놈은 갈등하고 있다.
 곰을 마주친 악어처럼,
 상어를 마주친 범고래처럼 말이다.
 다른 맹수를 처음 본 포식자가 보이는 반응.
 놈이 적에 대해 파악하기 전에 더 성장해야 한다. 그리고 내겐 그 방법이 바로 앞에 있었다.
 
 “네가 이 던전의 최종 보스였나?”
 놈이 뭐라고 하는지 알아듣질 못하겠다.
 
 “그으으으윽?”
 하지만 내 말투는 더 이상하겠지. 썩어빠진 목구멍으로 정상적인 대화가 될 리 만무했다. 이 와중에도 내 몸은 아주 찔끔찔끔 자신의 목적지로 향하고 있다.
 조금만 더, 조금만!
 
 “구울이라···. 조금 전까지는 분명 좀비였는데 성장을 한 건가?”
 나는 놈의 눈초리가 심상치 않게 변하자 성큼 앞으로 걸어나갔다. 그런 다음 손날을 세워 아래로 찔렀다.
 
 푸욱!
 “끼에에에엑!”
 토끼의 등에서부터 가슴으로 삐죽 튀어나온 손!
 
 “으음.. 저급한 언데드.. 걸신이 들렸군.”
 흡혈귀가 오만상을 찌푸렸다. 아무리 현실이 아니라도 이런 건 맨정신으로 보기 싫었다. 소고기는 맛있게 먹어도 도살하는 장면을 구경하는 건 싫은 느낌이랄까?
 
 됐어! 이 토끼만 먹으면 더 강해질 수 있다! 그래. 더 혐오해라! 보기 싫으면 꺼져버려!
 
 “그으으으윽!”
 잔뜩 웅크리고 놈을 쏘아보는 두 눈은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하지만 나의 뜻은 전해지지 않는다. 좀비들과는 서로 눈빛만 봐도 통하더니, 왜 이러는지 모르겠다.
 
 2. 생존하라! (4)
 
 첩첩첩첩!
 케첩을 먹는 것처럼 토끼의 피를 사방으로 튀며 폭식을 시작한다. 그러나 그 와중에도 두 눈은 똑바로 흡혈귀를 향하고 있다. 쪼그려 앉은 그 눈을 보며 흡혈귀는 소름이 끼쳤다.
 
 ‘뭐 이런 자식이 다 있어?’
 빨리 결정을 해야 했다. 싸워야 할까? 도주하고 다음을 노릴까? 그 역시 죽음에 대한 공포가 있기 때문이었다. 이 던전의 퀘스트는 당근 두 마리를 서로 만나게만 하면 되는 간단한 일. 이 좀비 놈이 먹는 것에 정신이 팔렸을 때 재빨리 해결하고 던전을 나가면 그만이다.
 
 “추잡한...!”
 흡혈귀는 결단을 내렸다. 그의 몸이 가볍게 떠올라 저편을 향해 날아간다. 흡혈귀 특유의 가벼움으로 깃털처럼 벌어지는 거리.
 
 -스킬, 「토끼의 간」을 얻었습니다.
 
 「토끼의 간
 상위 몬스터에게 배짱을 부릴 수 있다. 주눅이 들지 않는다.」
 
 -11레벨이 되었습니다.
 -「토끼의 간을 먹은 구울」이 되었습니다.
 
 황소나 말에 비해 토끼 한 마리쯤 먹어 치우는 것은 일도 아니었다.
 
 이상한 놈인데?
 나는 지금 심각하게 고민하고 있다. 대체 저놈은 뭘까? 무슨 수작이지?
 빠르게 머리를 굴리던 나는 놈의 눈빛에서 하나를 걸러냈다.
 
 잡는다!
 결심하고 한 방향으로 뛰기 시작했다. 여전히 다리 하나가 덜렁거렸고 절뚝이며 뛰었지만, 이전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빠르기였다.
 놈이 겁먹었어!
 그것으로 고민은 끝났다.
 
  * * *
 
 묘하게 찝찝한데?
 챱챱챱!
 
 -13레벨이 되었습니다.
 -스킬, 「흡혈귀의 민첩」을 얻었습니다.
 -언데드를 섭취하여 어둠 속성이 강화되었습니다.
 
 흡혈귀의 시체를 먹다가 든 불쾌함에 머리를 부르르 털었다. 지금은 잡생각을 할 때가 아니다. 난 신애를 위해서라면 뭐든지 한다! 토끼도 먹고, 소도, 말도, 좀비도 잡아먹었는데 흡혈귀라고 못 먹을 이유가 없었다. 그리고 이놈을 먹으면 더 강해질 수 있다는 확신도 들었고 말이다.
 
 놈을 잡는 방법은 매복을 선택했다. 당근 앞에 땅을 파고 숨어 있었다. 그건 어떤 예감이었다. 놈이 다시 이곳으로 돌아올 거라는 그런 감 말이다. 아니나 다를까 놈은 얼마 지나지 않아 당근 앞으로 돌아왔고, 적당한 타이밍을 노려 놈의 뒤를 덮쳤다. 자칫하면 당할 뻔했다. 하지만 언제나 선빵은 위대한 법.
 놈의 목줄기를 물고 절대 놓지 않았던 내 승리로 싸움은 끝이 났고, 놈의 뒤를 쫄래쫄래 따라온 당근 한 녀석이 설익은 놈처럼 파랗게 질려 있었다. 연시라는 당근이었다.
 
 “걱정하지 마라. 풀은 안 먹어.”
 부들부들 떨어대는 두 마리 당근.
 
 “당신, 강해졌군요!”
 그렇게 고자세였던 녀석이 존칭을 쓴다. 그리고 이젠 너의 그 야리야리한 팔뚝이 무섭지 않다.
 그때 든 생각 하나.
 이놈들도 먹어버릴까? 그러면 땅에 파고들기 스킬이 더 숙련되려나? 하지만 떠올렸던 생각의 잔상이 곧 끔찍한 ‘맛’으로 변해버린다. 절로 구토가 치밀어 오르는 그 맛 말이다.
 
 “정말 우릴 해치지 않을 건가요?”
 “응, 너흰 맛이 더럽게 없거든.”
 묘하게 상처받은 두 녀석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하지만 이건 진심이었다. 버섯도 그랬고 이 녀석들의 잎사귀도 정말 못 먹겠다. 차라리 썩은 시체나 똥물을 먹으라면 먹겠다. 식물을 먹는다는 건 마치.. 여름날의 걸쭉한 시궁창을 한 움큼 떠서 입에 넣는 맛이랄까? 이미 다른 것들을 많이 먹어서 배가 두둑하게 부른 것도 당근들의 목숨을 살리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당근들이 먹을 거로 보이지 않았으니까.
 
 “고, 고맙군요.”
 
 -‘홍시의 부탁’ 퀘스트를 완료하였습니다.
 -경험치를 얻었습니다.
 
 퀘스트를 완료하자 주르륵 떠오르는 보상목록을 보며 나는 잠시 갈등하다가 말했다.
 
 “뭐가 제일 좋지?”
 당근 한 녀석이 어처구니없다는 듯 대답한다.
 
 “보통 이런 건 알아서 고르는 거라고요.”
 하지만 나는 당당했다.
 
 “모르니까 묻잖아.”
 배움은 부끄러운 게 아니다.
 
 “으휴.. 참 이상한 분이시군요. 좋아요. 객관적으로 평가한다면 제 뿌리만큼 좋은 건 없어요.”
 「꼬깔마녀의 네일아트』와 『금화10』은 딱히 설명을 듣지 않아도 별로 호감이 가지 않았다. 하지만 『뒤틀린 뿔』과 『홍시의 뿌리』가 문제였는데 도무지 뭐에 쓰는 물건인지 감이 잡히질 않았기 때문이다. 『어느 모험가의 낡은 검』은 흡혈귀에게 빼앗은 검 쪽이 더 좋아보였고······.
 
 “뿌리라···.”
 미심쩍다는 듯 당근의 몸을 훑어본다.
 
 “그, 그렇게 뚫어지게 보지 말라구욧!”
 당근 주제에 팔로 몸을 가리며 비트는 꼴은 봐주기 불편하다. 저건 죽은 내 아내가 자주 하던 동작인데···. 샤워를 마치고 욕실에서 나올 때 말이다.
 
 “알았으니까 그거라도 내놔.”
 “그거라도 라니요! 이게 얼마나 귀한건지···.”
 “아 됐으니까 빨리 줘. 바쁘다고 나는.”
 당근 뿌리가 그래 봐야 얼마나 귀하겠나? 게다가 아내가 떠오르니 자동으로 신애의 얼굴이 겹친다. 조급함이 앞선다. 빨리 이곳을 나가 신애를 찾아야 한다.
 
 “쳇, 잃어버리지 마요!”
 홍시 녀석은 투덜거리며 손으로 자신의 옆구리를 주시하더니 뿌리 한 가닥을 톡 뽑았다.
 
 “아앗! 아파!”
 눈물까지 찔끔 흘리며 그걸 뽑아서 내게 내미는 홍시.
 
 “소중하게 간직해주세요.”
 뭐? 소중? 지금 장난 하냐? 빨래하려고 속옷을 벗으면 가끔 보이는 흔적. 딱 그렇게 생긴 가느다란 뿌리를 아주 불쾌한 얼굴로 받아서 주머니에 대충 쑤셔 넣는다. 뭐 이런 털 같은걸······.
 
 -선택보상으로 홍시의 뿌리를 선택하였습니다.
 
 당근들에게 보상을 받은 내가 막 던전을 나가려는데, 주저하던 당근이 말했다. 홍시였다.
 
 “잠깐만요.”
 “뭐지?”
 “사실 우린···.”
 
 홍시의 긴 이야기가 시작되었다.
 옛날 옛날에 당근 두 마리가 살았다. 어느 정도 스스로 대가리가 컸다고 느낀 자매는 좀 더 멀리 탐험을 해보기로 한다. 그러나 언제나 불행은 그렇게 예고 없이 찾아오고 폭풍 때문에 길을 잃고 헤매던 두 당근은 비를 피해 들어갔던 동굴에서 그만 뿌리를 내리고 말았다.
 
 「홍시의 부탁2
 북쪽 어딘가에 아버지가 살고 있어요. 우리가 살아있다는 것만 아버지께 전해주세요. 그분의 성격상 아직도 뜬눈으로 밤을 지새우며 우리를 기다리고 있을 거랍니다. 우리는 이미 이곳에 뿌리를 내린 몸. 안전하게 출가했다고 전해주세요! 흑흑흑!
 달성조건: 자매의 소식 전하기
 달성보상: 아름다운 자의 우호도」
 
 아버지와 딸.
 “쓰읍.”
 입맛이 쓰다. 신애를 생각하면 빨리 이 던전을 나가서 찾아야 하는데 이 당근의 부탁을 무시하기가 어렵다. 녀석이 아버지를 찾는다고 하지 않나? 그게 가슴을 욱신거리게 한다.
 
 “노력은 해볼게. 근데 기대는 하지 마라.”
 “고마워요! 이 동굴을 나가서 북동쪽으로 쭉 가시면 큰 산이 보일 거예요! 아버지는 바로 그곳에 계신답니다!”
 나는 끄덕이다가 뭔가를 떠올리고 갑자기 당근에게 바짝 붙었다. 이글이글 불타는 내 눈을 보며 홍시는 얼굴을 주홍색으로 물들였다.
 
 “왜 그러세요? 저는 이제 더 드릴 게 없는데.. 혹시 제 마음을 원하시는 거라면···.”
 당근 주제에 지금 뭐라고 지껄이고 있는 거야? 나는 녀석의 말을 깨끗하게 흘려버리며 물었다.
 
 “혹시 녹색 피부에 나와 비슷한 체형, 돼지같이 생긴 머리를 달고 있는 녀석을 아나?”
 “오, 오크?”
 “오크!”
 
 역시 오크인가?
 
 “움.. 동쪽 아주 먼 곳에 그런 몬스터들이 있다는 얘기는 들어본 것 같기도 한데..”
 
 
  * * *
 
 뜨거운 태양 빛이 대지를 이글이글 달구고 있다.
 쩔거덕! 쩔꺽!
 구울 한 마리가 넘어질 듯 한 걸음걸이로 비틀거리며 걷고 있었다.
 
 전보다 좀 나아진 건가?
 다리 한 짝이 균형을 잃은 상태라 걸을 때마다 삐거덕거리는 소리가 났다. 갑옷의 끝 부분과 엉덩뼈가 마찰을 일으키는 것이다. 그러나 구울이 된 이후 어딘지 모르게 걷는 게 좀 더 편해진 느낌이다. 『강인한 육체』 스킬 덕분일까?
 
 『아슬란 제국의 갑옷
 대륙에서 가장 강한 제국의 무구답게 아주 낡았지만, 아직 쓸만하다.』
 
 이 갑옷을 내가 입고 있는 건 흡혈귀의 물건들이 꽤 괜찮았기 때문이다. 구울로 성장했지만 그렇다고 육체가 환골탈태을 한 것처럼 매끈해진 것은 아니었기에 여기저기 썩어서 훤히 드러난 뼈는 여전하다. 그래도 아주 멀리서 얼핏 보면 사람처럼 보이긴 한다. 그 부분이 마음에 든다.
 
 “어디 보자. 저 산인가?”
 기암절벽과 그곳에 삐죽삐죽 자라있는 위태로운 나무들. 얼추 2천 미터는 되어 보이는 높은 봉우리 여러 개.
 
 “길이 저것밖에 없어?”
 주변을 둘러본다. 강제적으로 막아놨다는 느낌이 강한 지형. 단 한 곳만 인위적으로 뚫어놓은 것처럼 길이 나 있다. 거대한 절벽지대를 위에서 가위로 싹둑 오려놓은 것 같달까?
 
 “불길한데···.”
 보통 함정은 저런 곳에 파면 딱 좋다. 매복도 마찬가지. 저런 외길은 적을 일망타진하는 지름길이다. 과거의 직업 특성상 나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흐음.”
 하지만 당근이 알려준 동쪽이 저 산을 가리키고 있다. 가지 않을 수가 없다.
 더 지체할 시간이 없다. 신애를 생각하면 어떻게든 오크에 대한 단서를 찾아야만 했다.
 다시 걷다가 관자놀이에 손을 뻗었다.
 
 [이름 : 토끼의 간을 먹은 구울 직업 : 하급 언데드
 속성 : 어둠(12,943) 레벨 : 13(48.22%)
 힘 : 18 민첩 : 15
 정신력 : 14 체력 : 17
 보너스 포인트: 13
 종족스킬: 식욕
 고유스킬: 강탈
 습득스킬: 리더쉽, 위대한 대식가, 광란의 질주, 투지, 독, 땅속에 파고들기, 샘솟는 힘, 강인한 육체, 독기, 토끼의 간, 흡혈귀의 민첩, 고통감소.
 특이사항: 오른쪽 다리가 망가짐
 착용장비: 아슬란 제국의 갑옷, 아슬란 제국의 부츠, 아슬란 제국의 배낭, 아슬란 제국의 대검.]
 
 비록 말라비틀어진 종아리가 부츠에 비해 한참 모자라 보인다고 해도 일단 아이템은 만족스러웠다. 레벨도 하나씩 오를 때마다 힘, 민첩 같은 것들은 동일하게 1포인트씩 오르고, 추가로 보너스 포인트도 1개가 모인다.
 
 단, 스킬은 많은데 쓸모가 없었다. 문제는 이것이다. 예를 들어서 버섯에서 강탈한「독」을 보자. 거창하게 독이라는 이름을 가졌지만, 이 스킬을 써봐야 상대에게 끼치는 피해는 아주 적다. 면역력을 깨지 못하는 수준의 미약함. 써도 그만, 안 써도 그만인 정도라는 거다. 그러나 구울로 전직해서 얻은 2개의 스킬은 좀 달랐다. 강인한 육체와 독기는 체감이 될 정도로 쓸만하다. 그래도 없는 것보다는 낫다. 스킬은 언젠가 올리면 그만. 이런 위험한 곳에서는 뭐라도 있는 게 좋지 않겠는가. 당장은 쓸모가 없더라도 말이다.
 
 웃기게도 언데드라 며칠을 씻지 않아도 아무렇지 않다. 물론 비누나 샴푸가 있었다 해도 아마 씻을 엄두는 못 냈을 거다. 썩은 살점들이 다 벗겨질지도 모르니까. 목욕하다 스켈레톤이 될 순 없지 않은가?
 
 나는 다시 걸었다. 저 멀리 보이는 산을 목표로 잡고 마라톤을 하듯 꾸준히······.
 
 
 3. 준비하라! (1)
 
 
 걷다가 멈춰서 혼자 중얼거리는 구울 한 마리. 절뚝이며 갸웃거리고 머리를 벅벅 긁는다.
 “저 자식은 뭐야? 언데드가 어떻게 혼자 돌아다니는 거지?”
 절벽 위에서 그런 구울을 내려보던 한 남자는 황당한 듯 그렇게 말했다.
 그의 사명은 이곳을 지나는 모험가에게 임무를 부여하는 것.
 아직 한 번도 모험가를 보진 못했지만 언젠간 지나가리라 생각하며 살고 있었다.
 그래서 더 혼란스럽다.
 저 더럽고 추잡한 언데드 녀석을 과연 모험가로 분류해야 하는 것일까?
 
 “멈춰라. 이 신성한 땅은 네가 발을 들일 곳이 아니다!”
 그는 일단 대화를 시도했다.
 
 음?
 나는 갑자기 나타난 수상한 녀석을 보며 눈을 가늘게 떴다.
 이 녀석··· 강하군.
 이름은 토끼를 봤을 때처럼 새빨갛다. 물론 이름의 색 따위를 보지 않았어도 한눈에 알 것 같았다. 이놈은 상대할 수 없을 정도의 거물.
 두 가지 선택지가 있다.
 
 싸운다.
 지켜본다.
 
 “이곳이 어..딥니까?”
 일단 후자를 선택했다. 놈과 싸워서 좋은 꼴을 볼 수 있을 것 같지가 않기 때문이다.
 의심스럽다는 듯 나를 보는 남자. 그 눈동자의 확장과 시선이 머무는 시간, 움찔거리는 안면근육들을 면밀하게 관찰한다. 여차하면 기습을 해야 할 수도 있으니까.
 그나저나 참 잘생겼군.
 뾰족하고 큰 귀와 아름다운 얼굴. 상체에 걸친 활과 등에 멘 화살집까지.
 
 “이 앞은 엘드리샤의 영토다. 언데드 따위가 들어올 수 있는 곳이 아니다! 꺼져라!”
 당장 물러서지 않으면 벌집을 만들어버리겠다는 의지가 가득 담긴 음성.
 나는 놈을 보다가 한숨을 가볍게 내쉬었다.
 “저 산에 홍시 자매의 아버지가 있다 해서 이쪽으로 왔을 뿐입니다. 당신과 싸울 생각은 없습니다.”
 “홍시 자매? 그게 누구지?”
 나는 품에서 말라 비틀어진 뿌리 하나를 꺼내 손에 쥔다. 그 털 같은 거 말이다.
 “타향살이를 하는 가련한 자매가 아버지에게 자신들의 소식을 꼭 전해 주라고 간곡히 부탁해서 말입니다. 차마 외면할 수 없어 이렇게 여기까지 왔습니다.”
 손을 펴서 뿌리를 보여주었다.
 여전히 뭔가를 연상되게 만드는 아주 보잘것없는 뿌리였다.
 그런데 그 주황색 당근 뿌리 한 가닥을 본 남자의 안색이 변했다.
 “아니! 그건?”
 
 음?
 이런 반응은 나도 예상하지 못했던 것이라 속으로 움찔한다.
 “네가 천년당근의 뿌리를 어떻게 가지고 있는 것이냐!”
 
 엘프의 땅 엘드리샤.
 육식을 하지 않고 자연과 어울려 살아가는 엘프 종족은 본능적으로 식물들을 사랑한다. 나무와 풀, 각종 야채들에게까지 아침마다 입을 맞춰주며 자신들의 정체성을 확인했다.
 당연히 식물들은 엘드리샤가 천국이나 다름없다. 가뭄이 들면 노예 엘프들은 강에 가서 물까지 퍼다 날라줬으니까.
 그렇게 귀하게 자란 채소 중에서 몇몇이 특별한 성장을 이뤄냈다.
 엘프들의 가호와 사랑을 듬뿍 받아 특별하게 자라난 그것들은 스스로 잘난 맛에 다른 녀석들을 깔보기 시작했다.
 그렇다고 몹쓸 짓을 한 건 아니고, 대가리가 커진 거다. 사춘기 소녀들처럼 그렇게 말이다.
 
 “수확 시기가 다가온 천년당근 두 개체가 감쪽같이 사라졌었지. 어디에서도 찾을 수가 없었어. 담당자는 아직도 그때 그 일로 감옥에 갇혀 있고 장로님들은 큰 시름을 앓으셨었지. 그런데 그 천년당근들이 그런 곳에 뿌리를 내렸을 줄이야.”
 나는 멍하니 엘프를 바라보았다. 대체 지금 무슨 소릴 지껄이는지 전혀 공감할 수가 없었다.
 당근을 천년이나 길렀다고?
 그 멍청한 당근 자매가 천 년 묵은 보물이라고?
 
 “천년당근의 효능은 일일이 열거할 수도 없을 만큼 대단하다네. 그 뿌리 하나만으로도 간단한 질병은 치료할 수 있지. 자네의 복이니 잘 지키게나.”
 순간 가슴이 답답해졌다. 그런 보물 당근을 두고 왔다니! 하지만 이미 한번 클리어 한 던전은 다시 들어갈 수 없지 않은가?
 그때 맛없어도 잡아먹었어야 하는 건데!
 돈다발을 길에 버리고 온 느낌이다.
 “소식은 내가 전해주겠네. 언데드라고 편견을 가졌던 나를 용서하게. 자네는 가슴이 따듯한 남자군.”
 
 -‘홍시의 부탁2’ 퀘스트를 완료했습니다.
 -엘프족의 우호도가 올랐습니다.
 
 아쉬움에 부들부들 떠는 나를 오해한 엘프는 크게 끄덕이며 내 어깨를 다독여주었다. 물론 갑옷의 깨끗한 부분만 툭툭 말이다.
 
 처음부터 얻지 못하게 만든 아이템일 수도 있어. 초보에게 그런 보물을 떡 하니 줄 리는 없잖아. 미련을 버리자.
 어른거리는 주황색 당근들의 모습을 억지로 털어낸 나는 엘프에게 물었다.
 “저 반대편으로 가는 길은 이곳밖에 없습니까?”
 “왜 가려고 하는 건가? 그 자매의 소식은 내가 전해준다고 하지 않았나?”
 “꼭 찾아야 할 사람이 있습니다.”
 내 눈이 신애를 떠올리며 활활 불타기 시작했다.
 
 “허!”
 엘프는 나를 보며 혀를 찼다. 비록 광대뼈는 벗겨져서 아주 볼썽 사납고 다리 하나는 곧 떨어질 것 같이 위태로웠지만 두 눈에서 느껴지는 포부 하나만큼은 절절하게 전해졌다.
 “자네, 남자군!”
 그럼 여자겠냐? 라는 말은 속으로 삼킨다. 대신 이제 막 어른이 되기 시작한 소년의 얼굴로 뻔뻔하게 그를 바라볼 뿐.
 
 “크흠! 좀 치워주게. 아무리 내가 초탈한 엘프지만 그 얼굴은 계속 보고 있기가 힘들군.”
 물론 구울의 얼굴은 생기발랄한 소년과 거리가 멀었다.
 “자네가 비록 언데드지만, 모험가의 자격은 충분한 것 같군! 좋네! 자네에게 의뢰를 하나 하지!”
 “의뢰?”
 “그렇네! 이 증표가 있으면 저 반대편까지 가는 동안 공격을 받지 않을 걸세! 외부인이 엘드리샤를 가로지르는 유일한 방법이지. 하지만 명심하게! 절대 길을 벗어나면 안 되네."
 
 「엘드리샤의 열쇠
 평범한 나뭇잎으로 보이지만, 세계수의 잎사귀다.」
 
 증표라···.
 보라색으로 번쩍거리는 나뭇잎의 이름을 보며 내가 호기심 어린 눈으로 엘프에게 물었다.
 “제가 뭘 하면 됩니까?”
 “엘드리샤는······.”
 
 대륙의 남쪽에 위치한 숲 엘드리샤.
 그 크기가 한국보다도 큰 이 광활한 숲은 엘프들의 왕국이다. 하지만 최근 엘드리샤에 고민이 하나 생겼다. 북쪽에서부터 내려오는 간악한 무리들이 점차 영역을 확장해 숲을 침범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 오크놈들은 머릿수로 밀어붙인다네. 우리완 달리 호전적이고 잔인한 그놈들은 날이 갈수록 세력이 불어나고 있어서 큰일이야.”
 오크!
 나는 두 눈이 튀어나올 정도로 놀랐다.
 
 “다행히도 우린 아주 오래전에 신성제국과 협약을 맺었지. 오크들이 그렇게 늘어나면 제국으로서도 좋지 않을 일이 될 거야. 그들에게 오크들의 준동 소식을 알려주면 되는 것이라네.”
 아직 충격이 가시질 않은 나는 눈을 깜빡거리다가 툭 묻는다.
 
 “그 오크들이 어디에 있습니까? 얼마나···. 아니, 혹시 오른쪽 눈이 없고 이마에 흉터가 있는 오크를 아십니까?”
 “하루걸러 전투하는 오크들이니 상처는 다반사지. 오크에 왜 그렇게 관심을 가지는가?”
 “놈들에게 제 딸애가 잡혀있을지도 모릅니다!”
 “허! 그랬던가? 자네에게 위로의 말을 전하네. 하긴, 그 간악한 놈들은 인간이든 엘프든 가리지 않고 잡아가지. 특히 여자들을 말이야.”
 불같이 치솟는 분노. 하지만 그걸 간신히 억누른다. 지금은 감정적으로 행동할 때가 아니니까.
 
 “제가 꼭 그 신성제국으로 가야 합니까?”
 그에게 받은 의뢰.
 
 “그렇네! 우리 병력은 오크들을 막아내느라 지금도 피를 흘리고 있을 거야!”
 “제국이라면.. 혹시 인간들의 제국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아슬란 제국! 바로 그곳이네! 자네도 잘 알 것 아닌가!”
 “······.”
 나는 엘프의 얼굴을 한참 보다가 이 멍청한 녀석이 지금 큰 걸 놓치고 있구나 생각하고 입맛을 다신다.
 
 “전 구울인데요?”
 “······.”
 
 구울이 신성제국이라···.
 아차! 하는 엘프놈의 얼굴을 보며 나는 새벽 인력시장에 나온 아저씨처럼 말한다.
 
 “다른 일은 없습니까?”
 이 모습으로 제국에 가봐라. 어떤 일이 일어날까? 심지어 몸에 걸친 아이템들이 뭔가?
 그 제국의 것 아닌가?
 아무리 좋게 둘러대도 의심을 피할 길이 없다.
 
 “이상하군. 나는 자네가 살아생전에 제국군이었다고 생각했네. 그 갑옷과 검은 제국의 그것 아닌가?”
 나는 자신의 갑옷을 물끄러미 내려보다가 말했다.
 
 “오며 가며 주웠습니다.”
 “그런가? 뭐 그럴 수도 있겠군.”
 흡혈귀를 잡아먹고 빼앗았다고는 죽어도 말 못하겠다.
 
 “자네! 우리 만남은 여기까지로 하세. 빨리 천년당근에 대한 소식을 전해야겠어. 인연이 닿으면 다시 만나게 되겠지. 여행길에 행복과 축복이 가득하길 빌겠네. 어차피 가는 길이니 이 서신을 전진막사에 가져다주게.”
 “어.. 어?”
 
 제대로 된 퀘스트는 줘야지? 그냥 가?
 내가 어처구니없다는 얼굴로 손을 뻗어 그를 저지하려 했는데, 놈은 무슨 마법이라도 부린 것처럼 푹! 사라졌다. 자세히 보니 저편 하늘에 점 하나가 날아가고 있다. 내 시력이 너무 나빠서 잘 보지 못한 거다.
 후···. 빌어먹을.
 오크들의 정보를 얻으려면 어쩔 수 없이 저길 넘어가야 하나? 나는 찬바람 부는 평원에 서서 저쪽으로 난 협곡 사이의 외길을 보며 끄덕였다.
 
 신애를 위해서라면 가시밭길이라도 간다. 그래도 놈들이 저기 있다는 건 알아내지 않았나?

댓글(3)

na*******    
음 이거 쓰실 당시 밸런스 논란이 있었을 것으로 예상되는 군요. 타 고유능력에 비해 강탈이라는 스킬은 너무 오버밸런스합니다... ㅋㅋㅋ 완결된 글에 뭐하고 있는 건지
2017.06.09 15:25
OLDBOY    
잘 봤어요.
2018.04.06 13:24
킹입니다    
주황색 당근 뿌리일 뿐인데 음모라니 ㅋㅋㅋㅋㅋㅋ 발정났나요
2020.02.13 03: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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