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序
음침한 분위기가 물씬 풍기는 석실.
그 음침함은 단지 어둑한 실내 때문만이 아니었다. 피가 뚝뚝 흘러내릴 듯한 시뻘건 법의를 입은 서역의 승려들이 알아듣기 어려운 진언을 외우고 있어서였다.
기괴한 공명음에 듣고 있는 것만으로 혼이 쏙 빠져나가는 기분이랄까.
귀가 아닌 머릿속으로 직접 진언들이 흘러들어오는 것만 같았다.
“아직 멀었소?”
이 모든 걸 차질 없이 준비한 초로인 등유의 재촉에 승려들이 자신들이 둘러앉은 중간 지점을 바라보면 진언의 속도를 높였다.
그들이 바라보는 지점엔 두 개의 침상이 놓여 있었고, 그 위에 두 사람이 누워있었다.
호화찬란한 금의를 입은 노인과 열다섯이나 되었을까 싶은 소년.
한데 그들의 머리엔 눈을 제외한 모든 부위에 보는 것만으로도 끔찍한 대침들이 빽빽하게 꽂혀 있었다.
그중 한 명인 노인의 탁한 눈동자가 등유 쪽을 향했다. 온몸이 점혈 당한 터라 말은 할 수 없겠지만, 등유가 그 시선의 의미를 모를 리 없었다.
“가주님께서 눈을 뜨시는 순간, 새로운 육신을 얻으시는 겁니다. 무공을 익힐 수 없었던 굴레를 벗어나는 거지요.”
“······.”
그 말에 노인의 거무죽죽한 안색에 호선이 그려졌다. 천인공노할 방법으로 삶을 연장하려는 추악한 늙은이의 욕망이 그득 담겨 있는 흉소였다.
사람 보는 눈이 누구보다 뛰어나다고 하여 심안으로 불리던 노인의 정체가 바로 강호에서 신비금가라 불리는 곳의 가주 여소평이었다. 무공을 익히지 못하는 몸인데도 일신의 능력으로 부와 권력을 거머쥔 강호의 기인이사였다.
그가 어마어마한 금력을 들여 준비한 일이 드디어 종착지에 다다랐다.
등유는 여소평에게서 시선을 떼고 그 옆 침상에 누워있는 소년을 바라봤다.
오늘을 위해 긴 시간을 들여 고르고 고른 인재였다.
무공을 익히기에 가장 적합한 신체에 먹어도 뒤탈이 안 생기는 그런 존재이기도 했고.
밤하늘의 별빛을 그득 담은 듯한 눈동자가 등유에게로 향했다.
“여운, 그간 가주님의 양자로서 형언할 수 없는 은덕을 받았으니 불만은 없을 테지. 거기다 장차 천하의 주인이 되실 가주님에게 육신을 제공하는 거니 영광으로 알아야 할 것이다.”
“······.”
여운이라 불린 소년은 그 말에 눈에 불똥을 튀길 만도 했지만, 그저 심유한 눈빛으로 바라만 볼 뿐이었다.
그래서 그런 걸까.
등유는 저도 모르게 그 눈빛을 피했다. 강호에서 알아주는 고수인 그가 무공도 익히지 않은 소년의 눈망울을 피하다니. 친동생이자 경쟁자인 등호가 봤다면 두고두고 비웃었을 것이다.
“그럼 시작하지요.”
등유는 애꿎은 헛기침과 함께 석실의 문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떠나는 그를 늙수그레한 목소리가 붙잡았다.
“교에 한 약속을 잊어선 아니 될 것이오.”
“가주님께서 직접 하신 약속은 억만금보다 무겁소이다.”
승려 중 우두머리인 노승의 말에 등유는 걱정하지 말라는 듯이 웃어주고는 석실의 문을 닫았다.
덜커덩.
완벽하게 밀폐된 공간이 됐다.
노승은 몸을 부스스 일으켜 두 침상의 가운데에 자리했다. 그리고 뼈만 남은 깡마른 두 손을 두 사람의 목에 대었다.
“······!”
그 순간 노승은 온몸을 찢어발길 듯한 살기에 등골이 오싹해졌다. 서역 최고의 고수인 노승마저도 전신에 땀이 송골송골 맺힐 정도로 어마어마했다.
물론 그건 침상에 누워있는 두 사람에게서 기인한 것이 아니었다. 석실 어딘가에 은신해있는 암부(暗部)의 고수 때문이었다.
“과연이구려. 여 가주님의 주위에 엄청난 고수가 있다더니.”
등유가 중요한 순간에 자리를 비운 것도 이 암부의 고수를 믿어서겠다.
노승은 온몸을 옥죄는 살기에 부탁하였다.
“부디 살기를 거둬주시구려. 대법에 차질이 생길 수도 있소만.”
물론 살기는 거둬지지 않았다.
살기를 내뿜는데도 감히 어디 있는지조차 감을 잡을 수 없는 괴물은 오직 여소평의 말만 들었다.
“여 가주님이 위험할 수도 있소이다. 부디.”
노승이 땀을 뻘뻘 흘리며 사정조로 말하자 그제야 살기가 거둬졌다. 사정 때문이 아닌, 여소평의 눈꺼풀이 한 번 움직인 까닭이었다.
“후우.”
노승은 깊은 한숨을 내쉬고는 턱밑까지 차오른 공포를 억눌렀다. 한참을 숨 고르기 하더니, 양손에 기운을 집중시키기 시작했다.
그러자 주위에 있던 승려들도 진언을 더욱 소리 높여 외쳤다.
두두두두두.
석실이 진동으로 흔들리기 시작했다.
여소평과 여운은 노승이 손댄 목이 점점 뜨거워짐을 느꼈다.
부들부들.
여소평과 여운의 육신이 풍이라도 맞은 사람처럼 떨리기 시작했다. 마혈을 짚였음에도 말이다.
노승의 얼굴빛도 하얗게 질렸다가, 시간이 흐를수록 점점 검은 빛을 띄워갔다.
그걸 본 승려들이 눈물을 주룩주룩 흘렸다. 역천을 행하는 이적에 대한 대가를 받게 될 노승의 최후를 잘 알기 때문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승려들은 멈추지 않았다. 몰락한 교를 위해 제 한 몸 희생하는 노승의 숭고한 희생에 찬물을 끼얹어선 안 됐다.
더욱 소리 높여진 진언과 석실이 흔들리는 진동.
푸화악.
그리고 전신의 구멍이란 구멍에서 막대한 양의 피를 내뿜는 노승의 모습.
기괴함을 넘어선 끔찍한 광경에도 여운은 시선을 돌리지 않았다.
이미 여소평은 두 눈이 뒤집어진 채 부르르 떨고 있었지만, 여운은 고통스러운 와중에도 제 피를 뒤집어쓴 노승을 바라봤다.
그 시선을 느꼈음일까.
피에 절은 몰골의 노승 또한 여운을 내려다봤다. 간곡한 눈빛이 동공을 아리게 하였다.
“······.”
“······.”
회한 어린 노승의 눈동자가 흔들리는 순간.
여운의 시야가 하얗게 점멸되었다.
***
석실에 들어온 등유는 비릿한 혈향에 미간을 찌푸렸다.
“끝났는가?”
사실 물을 것도 없었다.
밀실엔 답해줄 사람 따윈 없었으니까.
승려들은 하나같이 목이 잘린 채 가부좌를 틀고 있었다. 언제 제가 죽었는지도 모르고 당한 게 분명했다. 그렇지 않았다면 몸부림을 쳐 원래 있던 자리에서 굴렀을 테니까.
“하여간 대단해.”
목 없는 시신들의 절단면을 보면서 등유는 빙글거렸다. 어딘 가에서 지켜보고 있을 암부의 고수는 정말이지 사람 죽이는 실력 하나만큼은 끝내줬다.
고수는 고수를 알아보는 법.
지금껏 누구도 본적이 없는 여소평의 비밀병기에 관심이 생겼지만, 그 얼굴을 본 자 중 누구도 산 자는 없었다고 전해졌기에 호기심을 억눌렀다.
강호에서 쓸데없는 호기심은 죽음을 재촉하는 법이다.
등유는 승려 중 유일하게 머리가 붙어있는 노승을 일별하고는 두 개의 침상을 바라봤다.
대법은 성공적이었는지 두 개의 침상 중 한쪽의 가슴 한복판엔 기복이 없었다.
여소평.
차디찬 시신이 된 노안 위로 등유는 준비한 무명천을 덮어줬다.
“명하신 대로 장례는 반년 뒤에 치르면 될 터. 모든 일은 가주님께서 원하시는 대로 흘러갈 겁니다.”
등유는 품속을 뒤적여 부패를 막아주는 특별히 제조된 약물이 담긴 병을 꺼냈다. 그걸 여소평의 시신 위로 뿌렸다. 그리곤 밀실의 기관을 조작해 준비된 관 안에 여소평의 시신을 고이 눕혀 놨다.
덜컹.
몇 번의 조작으로 관은 흔적도 없이 밀실 안에서 사라졌다.
이제 가문 내에선 여소평이 와병에 들어간 상태로 알게 될 거고, 그 권력의 공백 기간을 후계자인 여운이 차근차근 흡수하면 될 터였다.
물론 양자의 탈을 쓴 여소평이겠지만.
“후후.”
등유는 나직한 웃음을 흘리고는 여운의 얼굴에 꽂혀있는 대침들을 모조리 뽑아냈다. 여운을 가볍게 안아 든 등유는 석실의 밖으로 나가려 했다.
“야, 약속은······.”
집중하지 않으면 듣기 어려울 정도로 미약한 목소리였다.
놀랍게도 피투성이가 된 노승은 아직 생명의 끈을 놓지 않고 있었다.
등을 돌리고 있던 등유가 피식 웃었다. 참 고래심줄처럼 질긴 목숨이란 생각이 들었다.
“약속은 지켜질 터, 그만 가시게.”
“······.”
엎드린 채 참담한 눈빛으로 주위를 훑어본 노승. 어차피 자신을 포함한 제자들은 살아남지 못할 거란 걸 알고 있었다.
이런 천인공노할 일에 입막음은 필수였으니까.
죽은 자는 말이 없는 법.
그건 노승 또한 마찬가지였다.
노승의 눈동자에 남은 생기가 점점 사라져갔다.
등유가 비웃음을 흘렸다.
“물론 직접 약속한 가주님께선 땅속에 묻히시게 될 테니 어찌 될지는 모르겠소만.”
“······!”
생의 마지막 순간, 노승이 표정을 일그러트렸다.
“내 그간의 노고를 보아 깨어나시면 전해는 드리겠소이다. 물론 그 약속을 이행 받을 교가 강호에 여전히 존재한다면 말이지.”
애초부터 약속을 지킬 생각 따윈 없다는 말이었다.
노기를 터트릴 법도 했지만, 이미 노승의 눈은 한껏 부릅떠진 채 굳어져 있을 뿐이다.
“저승 갈 노잣돈은 섭섭지 않게 챙겨드리지.”
툭.
등유는 전표를 둘둘 말은 걸 노승의 가슴께로 던져주고는, 여운을 안은 채 석실 밖을 나섰다.
덜컹.
석실 문이 닫혔다.
“······.”
곧 검은 음영이 소리 없이 석실 바닥에 내려섰다. 품속에서 약병들을 꺼내고는, 시신들 위에 내용물을 뿌렸다.
치이이이익.
섬뜩한 소리와 함께 역한 냄새가 풍겨왔다. 화골산이었다. 노승을 포함한 승려들의 시체들은 얼마 가지 않아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곧 어두운 석실 안엔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
덩그러니 놓인 전표 외엔 말이다.
# 第 一 章
1
대법은 성공적이었다.
적어도 여운에겐 말이다.
“······.”
하루를 감은 눈으로 꼬박 보낸 여운은 천천히 눈을 떴다. 홀로 남겨진 내실 안에서 제 손을 내려다봤다. 이게 대체 어찌 된 영문인지 몰랐다.
혼절하기 전 상황을 종합해볼 땐, 여소평이 여운의 육신을 차지했어야 했다.
꾸욱.
힘이 들어가는 손아귀는 여느 때와 다르지 않았다. 거머쥔 주먹 탓에 손톱이 손바닥 살을 파고들었다.
아팠다.
너무 힘을 꽉 준 탓인지 손톱이 파고든 손바닥에서 핏방울이 맺혔다. 덕분에 지독한 현실감이 엄습했다. 머릿속은 혼란스러웠지만, 한 가진 확실하다.
여소평의 시도는 실패했다.
그렇지 않으면 여운이 이렇게 앉아서 생각이란 걸 할 수가 없었을 테니까.
하면 대법 중 마지막으로 눈을 마주쳤던 그때의 노승이 등유와 여소평을 속인 걸까?
속단은 금물이나, 확실한 건 여소평이 원했던 결과는 나오지 않았단 것이다.
상황은 머릿속처럼 안개가 껴있는 듯했지만, 일단은 살아남았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
여운은 주위를 천천히 둘러봤다. 이곳은 여소평이 머물던 침실이 아닌, 자신의 침실이었다. 대법에 들어가기 직전 노승이 쩔쩔매던 목소리가 생각났다.
-과연이구려. 여 가주님의 주위에 엄청난 고수가 있다더니.
만약 등유가 자신을 여소평으로 알고 있다면, 이 내실에 그 엄청난 고수가 은신해 있을 게 분명하다. 작은 행동마저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여운은 앞으로 자신이 어떤 태도를 보여야 할지 슬슬 감이 잡혔다.
놈들이 의심하지 못하도록 여소평이 되어야 한다.
“후우.”
여운은 한숨을 내쉬었다.
홀로 남겨진 이 순간이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 어리숙한 모습을 보여 들키면, 놈들에 의해 제거될지도 몰랐으니까.
여운은 침착한 태도로 재차 숨을 고르면서 놈들의 의심을 피할 방도를 생각했다.5 침상 위를 벗어난 여운은 일단 의자에 앉았다.
그 엄청난 고수를 불러볼까? 하지만 무슨 수로? 그리고 부른 다음에 무슨 말을 할까?
오히려 쓸데없이 의심을 살 수도 있는 일이다.
여운은 장고 끝에 작게나마 결론을 내렸다. 지금 자신은 극도의 혼란을 겪는 상태여야 한다는 점이다.
갓 육신을 차지한 여소평이 느낄 생경함과 혼란이 여운에게 전화위복이 되어준다.
여운은 누군가 자신을 지켜본다는 전제하에 움직이기 시작했다.
스윽.
손을 들어 이마를 짚고는 고통 어린 한숨을 내쉬었다.
“머리가 깨질 것 같군.”
목소리는 제 목소리로, 그리고 말투는 지난날과 다르게 여소평처럼 해야 한다.
“소가주님, 기침하셨습니까?”
기다렸다는 듯이 내실 문밖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여운은 놀랄 새도 없었다.
여소평의 심복, 우사(右士) 등유였다.
역시나 주시하고 있었군.
한데 놈은 자신을 가주가 아닌 소가주라 칭했다. 어찌 대답해야 할지 머릿속이 팽팽히 돌아갔다. 생각은 많았지만, 혀는 생각보다 빠르게 움직였다.
아직은 혼란스럽다는 느낌이 다분해야 한다.
“······소가주?”
뜻밖의 되물음이었을까.
등유에게선 한참이나 답이 없었다.
여운은 초조함에 등골 위로 땀이 싸아악 올라왔다.
깨어날 시 자신을 철저히 소가주로 대하라고 했던 여소평의 대답을 상기한 등유가 말했다.
“잠시 결례를 범하겠습니다.”
말이 끝나기 무섭게 문이 열리는 소리와 함께 등유가 들어왔다. 역시나 의뭉스러워하는 얼굴이었다.
“······!”
등유를 마주하는 순간 여운의 눈동자가 잘게 떨렸다. 뭔가를 보고 놀란 사람처럼 굴었다.
“으음.”
등유는 쭉 째진 눈초리로 여운의 표정을 살피기 시작했다. 작은 행동 하나라도 놓치지 않겠다는 듯이.
그 집요한 시선에 여운은 등골이 오싹해졌다. 말을 이어가야 했지만, 살짝 벌어진 입은 움직이질 않았다. 이상한 점은 그것만이 아니었다. 눈은 등유을 바라보고 있었지만, 초점은 허공에 고정되어 있다.
혼란스러운 태도 덕분일까.
등유는 의심을 일단 뒤로 미뤘다.
“소가주님?”
해서 한 번 더 불렀다. 원래의 성격대로라면 이미 손을 쓰고도 남았지만, 대법의 준비에 들어가기 전 노승이 해줬던 말을 상기했다.
며칠간은 혼란스러워할 거라 했지.
한데 여운의 멍한 초점이 마음에 걸렸다. 혹시라도 있을 실패도 생각해야 한다.
둘 사이에 괴괴한 적막감이 내려앉았다.
등유는 참을성 있게 기다렸다.
슬슬 여운의 눈동자에도 초점이 잡히고 있었다. 어느 정도 정신 차린 듯하자, 등유는 여소평과 정해놨던 암어(暗語)를 떠올렸다.
확인이 우선이다.
등유가 유들유들한 미소를 지으며 입술을 뗐다.
“아직 머릿속이 정리되시지 않았나 보군요. 차를 올리겠습니다. 늘 드시던 용정차로 할까요?”
“······.”
여운은 대번에 여소평과 등유가 정한 질의라는 걸 깨달았다.
대답에 시간이 지체되자, 등유의 눈빛이 가늘어졌다. 오른손도 슬그머니 요대 쪽으로 향했다. 그곳엔 그의 독문병기인 혈겸(血鎌)이 있었다. 틀린 대답을 할 시 그 혈겸이 향할 곳은 분명했다.
등유의 행동으로 말미암아 내실에 숨이 턱 막히는 침묵이 찾아왔다.
여운은 긴장된 내심을 감춘 채 천천히 입술을 뗐다.
“됐다.”
입 밖으로 낸 말에 등유가 움찔하는 기색이 느껴졌다.
여운이 한 대답은 놀랍게도 여소평과 정해놓았던 암어였다.
“······정녕 필요 없으십니까?”
“······.”
여운은 대답 대신 등유를 또렷하게 직시했다. 두 번 말하게 하지 말라는 뜻이었다.
등유의 눈빛이 더욱 가늘어졌다.
슥.
여전히 혈겸의 손잡이에서 등유는 손을 떼지 않았다.
아직이다.
여운은 순간 바짝 긴장했지만, 끝까지 침착함을 유지하였다. 그렇지 않으면 그에게 남는 건 개죽음뿐이었다.
“제 이름이 뭡니까?”
등유라는 이름은 여운도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묻는다?
뭔가 더 있다. 암어라고 하기엔 다소 즉흥적인 느낌이었다.
“음.”
손을 들어 이마를 재차 짚은 여운은 찰나의 시간을 벌었다.
등유는 아주 약간의 말미를 주기로 했다.
그 시간은 매우 짧았다.
여운이 머뭇거리는 사이에 이미 혈겸은 소리 없이 뽑혔고, 막 여운의 정수리를 향해 날아가려는 찰나.
“아삼.”
“······!”
여운이 난데없는 호칭을 내뱉었는데, 그 말을 들은 당사자의 반응이 심상치 않았다.
등유는 눈매를 살짝 일그러트렸다.
여운은 여전히 이마에 짚은 손을 떼지 않고 말했다.
“질의는 그만, 피곤하군.”
“······.”
그 말을 끝으로 혈겸은 다시 원래의 위치인 요대로 돌아와 있었다.
가린 손가락 사이로 그걸 확인한 여운은 모골이 송연해졌다. 달리 대답했다면 그 혈겸에 의해 머리가 꿰뚫렸을 게 분명했다. 하지만 그런 내색은 일절 하지 않았다. 요동치려는 심장을 억누르며 과장되게 손바닥으로 얼굴을 쓸었다.
등유는 내천자(川)가 그려진 여운의 미간을 말없이 내려다봤다.
아삼.
등유의 아명(兒名)이었다. 여소평에 의해 거둬지기 전까지 기루에서 허드렛일이나 하던 시절, 불리던 지우고 싶은 오명이기도 했고. 삼십 년이 훌쩍 흐른 지금, 당시 아삼이란 이름을 아는 이는 여소평과 쌍둥이 동생인 등호밖에 없었다.
즉, 눈앞에 있는 여운이 그걸 알고 있다는 소린.
대법이 실패하지 않았다는 것.
등유의 눈빛에 서릿발이 일었지만, 나타난 것보다 빠르게 사라졌다.
확인과정이 끝난 상황에서 살의를 풍기는 건 명줄을 재촉하는 것이었다.
“많이 혼란스러우신가 봅니다.”
“······.”
여운은 구겨진 미간을 손가락으로 피는 걸로 답을 대신했다. 지금 그와 말을 많이 섞어봐야 여운에겐 좋을 것이 없었다.
“······나가보라고 했다.”
“그럼 쉬십시오. 내일 다시 문안 인사 올리겠습니다.”
냉랭한 축객령에 등유는 그제야 공수를 올렸다.
덜컹.
그가 내실 문을 닫고 나가자 여운은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물론 그런 내색은 일절 하지 않았다. 죽은 노승이 말한 엄청난 고수가 이곳에 있을 수도 있어서다. 하여 주위를 살피는 우를 범하지 않았다.
조금 전 여운이 죽을 뻔한 상황에서도 나서지 않았던 걸 보면, 그 엄청난 고수도 의심을 완전히 거두지 않았다는 소리다.
오금이 저렸지만, 여운에겐 짚고 넘어가야 할 중요한 문제가 있었다. 아니, 목숨을 구하는 데 도움이 됐으니 문제라고 할 수는 없겠다.
등유.
여운이 그를 안 건, 객잔의 뒷골목이나 전전하며 음식물을 뒤지던 석 달 전이었다. 그의 아명을 여운이 알 턱이 전무했다.
하면 대체 어떻게 알았을까?
오직 여운만이 그 답에 대해 알고 있었다. 흔들리는 눈빛으로 조금 전 등유와 마주하던 상황을 떠올린 여운은 떨리는 오른손을 반대쪽 손으로 잡았다. 떨림을 감추려는 행동이 부지불식중에 나올 정도로, 뒤통수를 호되게 얻어맞은 기분이었다.
⦙
등유.
나이는 오십. 과거 아삼으로 불리던 시절, 자신을 부단히 괴롭히던 술에 취해 떡이 된 세도가의 차남을 낫으로 죽이고 도주. 같은 층에 있던 여소평의 수하에게 잡혔고. 여소평의 충직한 개가 되겠다고 자처하여 겨우 목숨줄을 부지.
강호백대고수 서열 이십삼 위.
영약을 아낌없이 지원한 덕분도 있었지만, 무에 대한 재능이 상급.
시동 중 남아만을 수시로 건드는 악취미.
⦙
지금도 계속해서 머릿속에서 떠오르는 등유의 정보에 여운은 침음성을 삼킬 수밖에 없었다.
이게 대체 어찌 된 영문인지 모르겠지만 한 가지 확실한 건.
이건 여운이 가진 기억이 아니었다.
바로 신비금가의 가주 여소평.
그의 기억이었다.
2
기억이 홍수처럼 범람하는 건 아니었다.
한 사람의 구십 평생 기억이 쏟아져 들어온다고 생각해보자.
만약 그랬다면 여운의 머리는 과장 좀 보태서 뻥! 하고 폭발했을지 몰랐다.
자신이 여소평인지 여운인지 몰라 정체성에 혼란이 생길지도 모를 일이었으니까.
그저 등유를 보자마자 그에 관한 단편적인 정보들이 꾸준히 흘러들어오는 정도?
한데 여운은 그것만으로도 인상을 있는 대로 찌푸렸다. 등유에 관한 기억의 편린이 뇌에 콕콕 박히는 듯한 느낌 때문이었다.
처음엔 어찌할 바를 몰라 무력하게 받아들였지만, 여운은 곧 그 정보를 통제할 수 있게 되었다.
방법은 간단했다.
등유를 머릿속에서 지워내고는 여운 자신의 과거에 집중하면 되었다.
“후우.”
부랑아 시절을 떠올리자, 폐부 속 깊은 곳에서부터 한숨이 밀려 올라왔다. 이마에 땀이 송골송골 맺혔다. 새로운 능력이라고 하면 우습지만, 생각지도 못한 여소평의 기억 탓에 목숨줄은 부지할 수 있었다. 덤으로 얻은 두통도 참을 만했다.
등유에게 죽을 뻔한 위기를 모면한 것만 해도 어디인가.
여운은 탁자에 마련된 물병을 들어 벌컥벌컥 마셨다. 청량함이 식도를 지나 가슴을 적시자, 두통이 좀 가시는 듯했다.
전화위복이라고 해야 할까.
자신의 육신을 빼앗을 뻔했던 대법이 목숨줄을 부지하는 건 물론, 득이 되었다.
여소평의 기억.
그 가치를 상상하는 것만으로 여운은 온몸이 부르르 떨릴 정도였다. 아직은 그걸 조절하는 게 어수룩해 두통이 있었지만, 시간이 약이 될 성싶었다.
차차 익숙해지겠지.
여운은 물병을 탁자 위에 도로 내려놓았다. 그리고는 한편에 마련된 금으로 만든 대야에 담긴 물을 바라봤다. 세숫물이었다.
그걸 보자 목욕에 대한 욕구가 강렬하게 치솟았다. 몸에서 미약하게 느껴지는 비릿한 혈향과 흘린 식은땀이 이유였다.
혈향의 주인이 그때의 노승과 승려들이란 건 어렵지 않게 짐작됐다.
당연히 동정심은 일어나지 않았다.
자업자득이지.
여운은 고소와 함께 입술을 뗐다.
“밖에 아무도 없느냐?”
말이 끝나기 무섭게 밖에서 자박거리는 발걸음 소리가 들려왔다.
덜컹.
내실의 문이 열리자, 여운의 또래로 보이는 소녀가 들어왔다.
“부르셨습니까, 소가주님.”
살가운 목소리를 낸 소녀는 여운도 잘 아는 시비였다. 이곳에 온 이래로 그의 수발을 들어준 소녀였다.
여운은 시비의 커다란 눈망울과 마주하자마자 침음을 삼킬 수밖에 없었다. 또다시 기억의 편린들이 머릿속을 찔러대기 시작한 것이다.
⦙
사화.
나이는 육십. 소리장도(笑裏藏刀)로 유명한 마녀. 여운을 직접 보필하겠다며 백의종군하는 심정으로 자원했으나, 이복동생인 여중포의 끄나풀.
무에 대한 재능은 중상. 익힌 사이한 마공인 흡정공 덕분에 강호백대고수 중 서열 오십 위.
방중술이 단연 일품이지만, 그녀와 하룻밤을 보낸 사내 중 살아남은 이는 전무.
⦙
산 넘어 산이다.
“······.”
“왜 소녀의 얼굴에 뭐라고 묻었나요?”
시비 아니, 사화는 순진한 얼굴로 배시시 웃었다.
여운은 과거 자신에게 살갑게 웃어줬던 시비 사화를 마주하며 새삼 느꼈다.
이곳엔 믿을 놈 하나 없다는 사실을.
저 방년도 안 되어 보이는 극강의 동안을 가진 소녀가 실은 육십이 넘는 노파였고, 고수인 것도 모자라 강호의 공적이 되고도 남을 사파의 인물이었다니.
그것도 모르고 과거의 자신은 그녀가 동갑내기인 줄 알고, 편하게 대하는 것도 모자라 답답한 속내를 털어놓기까지 했다.
저 순진한 얼굴로 맞장구를 쳐주며 은근슬쩍 어깨를 기대어 방향을 풍기던 소녀는 없었다.
입을 쩍 벌리고 언제 잡아먹으면 좋을지 고민하는 늙은 암사자만이 있을 뿐.
여운이 넋 나간 표정으로 있자 사화가 귀엽게 고개를 갸웃거렸다.
저런 가증스러운 얼굴이라니.
여운은 양손의 검지로 양쪽 관자놀이를 꾹꾹 눌렀다.
“어디 불편하세요? 소가주님? 소녀가 안마 좀 해드릴까요?”
그러면서 나긋나긋한 손길로 어깨를 주무르는데.
소름이 쫙 돋았다.
여운의 하얀 살갗 위로 닭살이 오소소 돋아나자, 사화가 고개를 숙였다. 여운의 귓가에 바람마저 훅 불어넣었다.
“······!”
“오늘따라 왜 이리 기운이 없으실까? 소녀가 기분 좋게 해드릴까요?”
그러면서 여운의 가슴팍을 은근슬쩍 쓸었다.
여인에 관해 숙맥인 여운이라도 그게 유혹하는 손짓임은 잘 알았다. 그리고 어째서 유혹을 하려는지도 짐작해냈고.
신비금가의 이 인자이자 여소평의 자리를 노리는 여중포를 위해 정보를 캐내려 함이겠지. 아니면 사술로 여운을 꼭두각시로 만들 작정이거나.
정신을 바짝 차려야 한다.
이 노파를 어찌 대해야 할지도 감이 잡혔다. 아무도 모르게 일을 벌여야 했던 여소평의 행동을 떠올리면 어렵지 않았다.
등유 때와 달리 이 징그런 노파에겐 난 굴러들어 온 돌에 불과하다.
“······!”
한데 여소평은 어째서 사화란 노파가 여운의 시비가 되는 걸 묵인한 거지? 여중포의 인물임을 몰랐을 리 만무하잖은가.
순간 여소평의 기억이 뇌리에 떠올랐다.
⦙
하루가 다르게 늙어가는 여소평과 달리 사십 대 장한으로 보이는 거친 인상의 무인이 송충이 눈썹을 찌푸렸다.
어딘가 살짝 닮아 보인 탓에 둘은 마치 부자지간으로 보였다.
-형님. 근본도 없는 고아를 양자로 데려온 것도 모자라, 소가주로 책봉한 의도는 묻지 않겠소. 형님께서 신비금가의 주인이니 말이오. 하나 그 인물이 적합한지 아닌지는 내 알아야겠소.
-······.
여소평은 여중포를 지그시 바라봤다.
무언의 압박이 느껴지는 눈길에도 여중포는 괘념치 않았다.
-적어도 본인은 그 정도 자격은 된다고 생각하오.
여중포는 일방적으로 선언하고는 신형을 돌려 나갔다.
⦙
여운은 딱 그 지점에서 생각을 멈춰야 했다.
스윽.
어느새 사화의 음탕한 손길이 배꼽까지 내려와서다.
여운은 가볍게 몸을 일으켜 그 손길을 거부하였다. 내심 집요하게 굴면 어쩌나 싶었다. 다행스럽게도 사화는 화들짝 놀라는 척하며 물러났다.
“아, 혹 소녀가 기분 나쁘게 하였다면 죄송해요.”
정말 미안한 표정으로 고개를 떨구자, 하얀 목덜미가 드러났다.
혈기왕성한 사춘기 소년이라면 시선을 뺏겼겠지만, 여운은 아니었다.
아무래도 목욕은 다음으로 미뤄야 할 성싶었다.
목욕물을 준비하라고 하면 사화가 어찌 나올지는 불을 보듯 뻔했으니까.
“그만 나가 봐.”
담담한 어조에 사화는 순진한 눈망울로 눈물을 그렁그렁 매달았다.
어지간한 철석간장의 사내라도 달래주지 않고는 못 배기겠지만, 아리따운 소녀의 속이 실은 시커먼 속내를 가진 포식자란 걸 안 상황이다.
“소가주님, 부디 소녀를 내치지······.”
“피곤하군.”
여운은 사화의 말을 가볍게 일축했다.
과거와 달라진 쌀쌀맞은 축객령이었다.
사화의 눈동자에 싸늘한 한기가 스쳐 지나갔지만, 나타난 것보다 빠르게 사라졌다.
“네, 혹 소녀가 다시 필요해지시면 불러주세요.”
달칵.
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려왔다.
여운은 탁자에 마련된 의자 옆에 털썩 주저앉았다.
이곳이 호랑이 굴이라는 생각에 지금껏 조심스레 지내왔다고 여겼는데, 바로 옆에서 아가리를 쩍 벌리고 있는 암사자 한 마리를 두고 있었을 줄이야.
새삼 정신을 바짝 차려야겠다는 다짐을 하며 상황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현재 여운을 여소평으로 알고 있는 사람은 둘이다.
등유와 노승이 말한 엄청난 고수.
둘 외엔 여운을 여소평의 양자이자 소가주로 알고 있다. 하지만 여소평의 기억을 보면 소가주란 직책은 빛 좋은 개살구일 뿐이다.
여중포를 비롯한 신비금가 내의 인사들에게 여운은 굴러들어 온 돌에 불과하다.
거기다 아군이라고 하면 우습지만, 등유와 엄청난 고수는 여전히 의심스러운 눈치를 거두지 않는 듯했다. 그 둘은 여운에게서 약간의 틈을 발견하면 물어뜯고도 남았다.
이 혼란스러워하는 태세가 언제까지 먹힐지 모른다.
이상함을 발견하는 건 시간문제였다.
여운의 입장은 그야말로 풍전등화다.
신비금가 밖으로의 탈출?
그건 그 둘에게 나 좀 죽여달라고 게거품을 무는 짓이었다.
하면 무엇을 해야 할까?
여운은 곧 어렵지 않게 결론을 도출해낼 수 있었다.
여소평의 버릇과 말투를 완전히 자신의 것으로 만들어야 한다.
그렇지 못하면 자신은 죽는다.
여운은 떨리는 가슴을 억눌렀다. 아까 죽을 뻔했던 순간이 재차 떠올라서다. 실수했다면 어찌 됐을지는 뻔했다.
들켜선 안 된다.
그 둘 앞에선 반드시 여소평이어야 한다.
한데 만약 그 둘의 의심을 피할 수 없다면 어찌해야지?
그냥 순순히 죽어줘야 할까?
여운은 쿵쾅대는 심장 소리에 고개를 저었다.
살고 싶었다.
배곯지 않고 살게 해주겠다던 괴물들의 손을 멋모르고 잡았던 순간으로 되돌아갈 수 없다면.
방법은 단 하나.
강호백대고수 중 하나인 등유를 비롯한 놈들에게 휘둘리는 삶이 되지 않으려면.
누구보다 강해져야 한다.
“······!”
그리 마음먹는 순간 머릿속으로 여소평의 기억이 떠올랐다.
입가에 그린 듯한 미소가 지어진다.
그 방도는 이미 마련되어 있었다.
여소평이 준비해놨던 것들.
그걸 취하면 그만이니까.
# 第 二 章
1
여운은 자신의 침상 끄트머리에 교묘하게 숨겨져 있는 기관장치를 조작했다. 일정한 법칙에 따라 움직여야 했기에 여운의 손놀림은 조심스러웠다.
달칵!
곧 청명한 소리가 들렸다.
드르륵.
침상이 밀리자 비밀계단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걸 본 여운은 고소를 지었다. 이런 것도 모르고 그간 이 위에서 잘도 잤다니.
여운이 오기 전부터 여소평이 준비해놓은 암도.
저벅.
여운은 그곳의 비밀계단을 통해 내려갔다.
드르르, 쿵.
침상이 원래의 위치로 돌아갔는지, 다시 완벽히 밀폐된 공간이 되었다.
어두워진 암도 안은 곧 은은한 빛으로 밝혀졌다.
암도의 천장에 박힌 값비싼 야명주 덕분이었다.
하나만 떼어다 팔아도 평생을 먹고 살고도 남을 야명주가 암도의 천장을 수놓았다.
돈 지랄을 아주 정성껏 해댔다.
인상을 찌푸린 여운은 암도를 걷기 시작했다. 지하라 답답하다는 느낌이 들어야 했지만, 그런 느낌은 일절 없었다. 통풍까지 신경을 썼는지 눅눅한 공기 대신, 청량한 공기가 느껴졌다.
하지만 이곳을 지나는 여운의 표정은 밝지 않았다.
이 암도의 비밀을 유지하기 위해 여소평이 어떤 짓을 했는지 낱낱이 알게 되어서다.
⋮
“어흐흑.”
“가주님, 절대 이곳에 관해 입도 빵끗하지 않겠습니다. 원한다면 혀라도 잘라낼 터이니 제발 목숨만 살려주십시오.”
“제겐 처자식이 있습니다. 여 대협, 함구할 테니 제발 미천한 소인을 살려주십시오!”
사정하는 인부들을 내려다보는 여소평의 차가운 얼굴.
호선이 그려졌다.
그 모습에 인부들의 안색이 확 밝아지며 감사하다며 칭송했지만, 그 목소리가 처절한 비명으로 변하는 덴 촌각도 걸리지 않았다.
검은 음영이 그들 사이를 헤집고 다니며, 피의 비를 흩뿌리고 있었다.
⋮
암도 곳곳에 자리한 끔찍한 광경이 눈앞 아니, 뇌리에 선했던 여운은 저도 모르게 벽을 붙잡았다. 서둘러 자신의 과거에 집중하여 기억을 밀어냈지만.
“우웩!”
울컥 치미는 위액을 막아내진 못했다.
한참이나 위액을 게워내던 여운은 소매로 입가를 닦았다.
제기랄.
속으로 욕설을 내뱉은 여운은 파리해진 안색으로 걸음을 옮겼다.
얼마나 많은 인부의 피와 땀이 이곳을 적셨던가.
원통함과 비통함이 담긴 음성이 아직도 귓가에 선했다.
비틀거리며 걸음을 옮기는 여운의 눈동자에 점점 푸르스름한 독기가 자리하기 시작하였다. 인부들과 자신의 처지도 그리 다르지 않았다. 만약 대법이 여소평의 의도대로 성공했다면, 자신 또한 그들처럼 죽었을 테니 말이다.
개돼지만도 못한 늙은이.
그 원통함을 공감했기에 육두문자가 절로 떠올랐다.
여운은 턱밑을 타고 흐르는 물기를 소매로 거칠게 닦아내고는, 비틀거리며 발걸음을 옮겼다.
제법 걷자 암도의 끝이 보인다.
그 끝에 다다르자 시야가 환하게 밝아졌다.
“······.”
드러난 광경에 여운은 눈을 빛냈다.
텅 빈 암실에 놓인 건 관짝 하나.
수많은 피를 흘리게 하여 준비해놓은 비밀암실치고, 드러난 광경이 단출하고도 기괴했다.
눈에 띄는 영약이라든지 무공서적 하나 없어 어지간한 무인이라면 이게 뭔가 싶겠지만.
여운은 희미한 미소를 입가에 매달았다.
천무지체(天武之體) 연성관(練成關).
날 때부터 각종 영약과 초고수의 도움으로 벌모세수를 받는 것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 결과를 얻을 수 있다고 한다.
단편적으로 스쳐 지나가는 여소평의 기억이, 이게 자신을 위해 준비된 거란 걸 확인시켜줬다.
백일 간의 연성기간.
단 한 번에 모든 걸 바꾸기엔 위험부담이 너무 컸고, 강호에 그런 방법은 전설의 환골탈태(換骨奪胎) 이외엔 존재하지 않았다.
무공을 익힌 적이 없는 여운이 그런 대단한 이적을 할 수 있을 리 만무했다.
하지만 이 천무지체 연성관이라면 전설의 환골탈태에 준하는 효과를 얻을 수 있다고 한다.
하루에 세 시진씩.
이곳에 들면 갓 태어난 아기처럼 혈맥속의 노폐물을 완전히 제거, 무공을 익히기 가장 최적의 상태로 만들어준다.
머릿속에 떠오른 여소평의 기억임에도 여운은 믿기 어려웠다. 하지만 대법의 희생양이 될 뻔했던 자신이었다.
강호에 모래알처럼 많은 기인이사가 있는 것처럼.
말로 설명하기 어려운 기상천외한 방법들로 제 추한 생명줄을 이어가려는 노괴가 바로 자신의 옆에 존재했었다. 양아버지라는 탈을 쓰고.
여소평.
그를 떠올린 여운은 새삼 두려움이 치밀어 오르는 걸 느꼈다. 이미 눈앞에서 사라진 존재임에도 양민들이 생각하는 범주를 한참이나 넘어선 비인외도(非人外道)의 기인 아니, 괴인의 사고방식은 모골을 송연하게 만들었다.
“후우.”
내뱉은 숨결이 절로 떨려왔다.
저기에 누우면 다시는 일어나지 못하게 되는 건 아닌가 싶은 막연한 공포도 그렇지만, 여소평의 기억에 따르면 저 관짝에 눕는 순간.
매일 세 시진씩 상상도 할 수 없는 고통이 따라온다고 한다.
그렇다고 해서 도중에 멈출 수도 없다.
백일의 연성 기간 중 단 하루라도 빼먹는 순간.
온몸의 근골과 혈맥이 뒤틀려 평생 불구가 되거나 죽는단다.
그야말로 혹 떼러 갔다가 혹 한 개를 더 붙이고 오는 격이다.
새삼 강호엔 거저 얻게 해주는 법이 없단 사실을 깨달은 여운.
하지만 미뤄둘 수는 없는 상황이다.
눈앞에 강해질 방법이 있는데, 이를 외면한다는 건 말이 되질 않았다. 더구나 여운처럼 턱밑에 의심의 칼날이 드리워진 상태라면 더더욱 그렇고.
그야말로 첩첩산중.
그래, 끝까지 가보자.
마음을 굳힌 여운은 천무지체 연성관 앞으로 갔다. 그리고 여소평의 기억을 토대로 들어갈 준비를 서둘렀다.
철컥, 철컥.
장치를 조작하자 기괴한 울림과 함께 천무지체 연성관이 입을 쩍 벌렸다.
끔찍한 괴물의 아가리 앞에 마주 선 기분이 이와 같을까.
여운은 하얗게 질린 안색으로 괴물의 아가리 속으로 몸을 욱여넣었다.
여운의 몸이 관짝에 완전히 눕혀진 순간.
덜컹.
차가운 금속음과 함께 연성관이 닫혔고.
여운은 숨이 턱 막히는 걸 느꼈다. 관짝 안에 야명주 하나가 있다곤 하나, 그 은은한 빛이 자신의 현실을 적나라하게 알려줬다.
세상과 완전히 단절된 듯한 느낌.
폐쇄에 대한 공포증에 숨이 미친 듯이 가빠진다.
“으윽, 으으윽.”
억눌린 신음성을 낸 여운은 입술을 억세게 깨물었다.
조금만 버티면.
세 시진만 버티면 된다.
그래, 하룻밤을 눈감고 잔다고 여기자.
여운은 수도 없이 되뇌면서 두 주먹을 피가 나도록 쥐었다.
그리곤 연성관의 안쪽 벽면을 빼곡히 수놓은 첨예한 대침들을 보는 순간.
눈물이 주룩주룩 흘러나왔다.
“어, 엄마.”
저도 모르게 실언할 정도로 여운은 공황상태에 빠졌다.
남들이 경험할 수 없는 별별 일을 다 겪었다 해도.
전화위복으로 여소평의 기억을 얻었다고 하여도.
여운은 고작 열다섯 소년이다.
잠시 후.
“으, 으아아―!”
끔찍한 비명이 비밀암실을 쩌렁쩌렁 수놓았다.
2
푹푹푹푹.
눈을 제외한 모든 부위를 찌르는 대침들.
전신이 마비된 것처럼 딱딱하게 굳어졌다.
대침들의 높낮이가 달랐기에 여운이 고통으로 발버둥치기 전에 마혈을 제압당한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그 고통이 가셔지는 건 결코 아니었다. 오히려 결박당한 채 당하는 고통이 더욱 크나큰 공황을 불러왔다.
마음껏 소리라도 지를 수 있다면 이 끔찍한 고통 속에 위안이 되겠건만.
마지막으로 내지른 강해질 거란 비명 외에는 신음성조차 흘리지 못했다.
아혈마저 제압당한 채 무력하게 당하기만 할 뿐.
근골과 혈맥을 무자비하게 뚫고 들어온 대침을 타고 피가 뚝뚝 떨어져 내렸다.
한데 그 빛깔이 이상했다.
일반적으로 피의 빛깔은 선홍색이어야 했으나, 지금 대침 끝을 타고 떨어지는 피는 검은빛이었다.
고약한 냄새가 코를 찔렀다.
여운의 눈꼬리가 파르르 떨렸다. 콧속을 파고드는 악취가 뇌 속을 후벼 파는 기분이었다.
덕분에 공황 상태임에도 정신줄을 놓지 않게 만들어줬다.
눈 뜨고 당하는 처지에선 악재라면 악재였다. 차라리 기절이라도 했으면 좋겠다.
머리에 꽂힌 대침들은 그걸 허용하지 않았다. 더없이 선명해지는 이지에 여운은 침을 주르륵 흘렸다. 당연히 그 침에도 검은 피가 섞여 있었다.
몸속의 노폐물을 빼는 과정이란 걸 여실히 알려준다.
이러고 세 시진이라니.
여운은 육체적인 고통도 그렇지만, 극도의 정신적인 고통을 겪는 중이었다. 하지만 이게 여운에게 크나큰 도움을 주게 될 것이다.
대장장이가 철의 강도를 더하기 위해 망치로 수없이 두드리는 것처럼.
이런 극한의 상태는 여운의 정신을 괴롭히고 찢어발기면서 점점 그 질김을 더해주고 있었다.
천무지체 연성관은 완성된 근골을 만들어주는 것도 모자라, 정신력까지 단련해주는 기보(奇寶) 중의 기보였다. 물론 당하는 여운에겐 기보가 아니라 극악무도한 물건이었지마는.
잠시 후.
철커덩.
금속음과 함께 대침이 빠져나왔다.
이제 끝일까?
하나 여운의 표정은 밝지 않았다.
이제 시작이란 생각이 끝나기 무섭게 대침들이 위치를 바꿔 다시 쇄도했다.
“······!”
무기력하게 당하는 순간에 두 눈을 찢어지라 부릅떴다.
푸푸푸푹!
더욱 깊이 들어온 대침들.
만년한철이 섞여 더할 나위 없는 강도를 자랑하는 대침들이 이번엔 뼛속까지 파고들었다. 고통은 여전하다 못해 배가 되었다.
부들부들.
마혈을 제압당했음에도 사지가 바르르 떨릴 정도였으니까.
재차 흘러나온 눈물의 양도 더욱 많아져 눈두덩에 고일 지경이다.
모질게 시린 눈동자.
더는 버티지 못할 것 같아 할 수만 있다면 제 심맥을 끊어 자진하고 싶을 때쯤.
다시 대침들이 빠져나왔다.
퍼렇게 질린 여운의 낯빛은 결코 좋아 보이지 않았다. 골수까지 뽑힌 터라 어쩔 수 없었다.
하지만 천무지체 연성관은 결코, 사정을 봐주지 않았다.
철컥, 철컥!
대침들이 다시금 위치를 바꿨다.
푸부부부북!
대침에 찔리는 상황인데, 이번엔 둔기로 육신을 잘게 다져지는 극통이 찾아왔다.
천무지체 연성관은 그렇게 여소평이 의도한 대로 여운의 육신을 연성시켜갔다.
일각이 삼추(三秋) 같은 시간이 흐르고.
덜커덩, 푸확.
괴물의 아가리가 다시금 입을 쩍 벌리자, 핏방울이 허공으로 비산했다.
드디어 지옥 같은 세 시진이 끝났다.
여운은 부들부들 떨리는 손을 이용해 관짝을 서둘러 빠져나왔다. 못 볼 걸 본 사람인 것처럼 하얗게 질린 얼굴로 발버둥 쳐댄 덕분일까.
우당탕.
팔다리에 힘이 들어가지 않아 구르듯이 떨어져 나왔다.
환지통과 같은 격통의 잔재가 남아있었다. 상쾌함도 함께였지만, 몸서리가 절로 쳐졌다.
내일 아니, 앞으로 백 일간 버틸 수 있을까?
할 수만 있다면 무르고 싶은 심정이었으나, 여운이 가장 잘 알았다.
어느 쪽을 택하든 미쳐 죽든지 아니면, 주화입마로 근골이 뒤틀린 채로 평생을 살든지 둘 중 하나였다.
“흐우, 흐우.”
거친 숨을 토해내며 엉망이 된 소매를 들어 눈가를 닦아냈다. 연성관의 흔적이 잔뜩 묻은 의복에서 고약한 악취가 배어있었다. 덕분에 혼미해진 정신을 그나마 일깨워줬다.
“······.”
여운이 상체를 서서히 일으키자, 누군가의 발이 시야에 들어왔다.
기함할 정도로 놀란 상황이어야 하건만.
여운은 조금도 놀라지 않은 표정이었다. 오히려 이럴 줄 알았다는 듯이 고개를 천천히 들었다.
역시나다.
검은색 일변도의 경장을 입은 복면인이 여운의 눈앞에 서 있었다.
천무지체 연성관에 들어가기 전 떠들었던 소리를 들었다면 여운은 죽은 목숨이었다. 그런데도 여운은 담대한 눈빛으로 상대를 마주하였다.
즉, 그 말은 이미 이곳에 들기 전부터 상대에 대해 알고있다는 말이었다.
그에 대한 답례일까.
툭.
복면인은 검을 휘두르는 대신 목갑 하나를 여운 앞에 내려놓았다.
그게 뭔지 확인해볼 생각이 없었는지 여운은 정자세로 고쳐 앉았다.
분명 목숨이 경각에 달한 상황인데 미치기라도 한 걸까.
복면인은 말없이 그런 여운을 내려다봤다.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생기 잃은 눈빛을 마주한 여운은 고소를 지었다. 자신이 목갑 안에 있는 물건을 취하기 전까지 물러날 생각이 없는 복면인이었다.
“정말 실혼인(失魂人)이란 말인가.”
그랬다.
눈앞의 복면인은 여소평의 극악무도한 방법에 따라 키워진 사냥개에 불과했다.
것도 정상인이 아닌, 실혼인.
악취미도 이런 악취미가 없었다.
이미 이 비밀암실에 들어오기 전부터 여소평의 기억 덕분에 알게 된 사실.
오로지 여소평의 명만 듣는 살육인형(殺戮人形)이 바로 복면인이다.
여운은 안쓰러운 시선을 해 보였다.
당연히 감정이란 걸 느낄 수 없는 복면인은 무정한 눈으로 내려다봤다.
망부석처럼 복면인이 가만히 있자, 여운은 고소를 흘렸다.
여운이 목갑을 취하기 전까지 움직이지 않을 것이다. 실혼인은 오로지 여소평이 남긴 명령만 따랐으니까.
이 목갑 안의 것을 여운이 취해야 하는 절대명령.
여운은 멍하니 서 있는 실혼인을 일별한 뒤, 가부좌를 틀었다. 그리곤 목갑 안을 열어 단약을 꺼내 들었다.
청아한 향은 코끝을 자극하다 못해 입안에 군침을 돌게 하였다.
백일야화(百日夜話).
단약의 웃기지도 않은 이름이었다. 하지만 그 효능은 대단했다. 피폐해진 심신을 회복하는 건 물론이고, 백 일간 꾸준히 복용할 시 반 갑자의 공력을 얻을 수 있는 기보였다.
반 갑자, 삼십 년의 내공.
혹자는 그 효과가 너무 미비하다고 여길 수도 있겠지만, 사람마다 삼십 년이라고 다 같은 삼십 년이 아닌 것처럼 내공의 밀도 자체가 달랐다.
정종심법으로 막대한 공부를 쌓아 오랜 시간을 들인 것처럼 정순하기 이를 데 없어진 내공이, 더할 나위 없이 깨끗해진 혈맥을 내달린다고 상상해보라.
강호인이 흔히 말하는 삼십 년의 내공과는 궤를 달리할 게 당연하지 않은가.
그런 내공을 백일 안에 쌓는다?
강호에 이렇게 빨리 정순한 내공을 쌓을 수 있는 건 천고의 영약을 복용하는 방법밖에 없었다. 그것도 내공을 비이상적으로 쌓는 역천의 방법인 역혈심법을 운용한다는 전제하에서 말이다.
급하게 먹는 밥일수록 체할 확률이 높은 것처럼, 주화입마의 위험이 있는 역혈심법으로 쌓은 내공은 불순하기 그지없다.
하지만 천무지체 연성관과 백일야화란 단약의 장기복용은 그런 문제점을 단숨에 해결해주고도 남았다. 여소평이 오래도록 공을 들여 찾아낸 최고의 방법이니 당연했다.
생각을 마친 여운은 가부좌를 틀었다. 그리곤 손안에 쥔 백일야화의 그 첫 번째 단약을 망설임 없이 복용했다.
꿀꺽.
단약은 입안에 들어가자마자 사르르 녹았고, 곧 청명한 기운이 식도를 타고 단전을 향해 쏟아져 내려갔다.
실혼인도 그제야 신형을 움직였다. 여소평이 내렸던 절대명령에 따른 것이다.
스윽.
실혼인은 여운의 등에 장심을 대고 진기도인을 시작하였다.
무공을 익히지 않은 자신이 행여 실수할까 봐, 철두철미하게 준비했다.
하나부터 열까지 모든 게 그의 안배대로였다.
새삼 여운은 죽은 여소평에 두려움이 치밀었다. 하지만 그런 감정을 더 이어갈 수 없었다.
단전에서 시작된 청염(靑炎)의 불꽃이 엄청난 속도로 제 몸집을 키워나가고 있었다.
이번에도 역시 극렬한 고통은 덤이었다. 머릿속이 순간 하얗게 됐지만, 실혼인의 진기도인으로 그나마 정신이 돌아왔다.
뿌드득.
여운은 이를 악물었다.
지금보다 더욱 강해져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이곳에 사는 괴물들의 이빨들에 갈기갈기 찢겨버릴 테니까.
3
신비금가의 군사부 소속 매화당주의 거처.
단출한 내실에 두 인영이 있었다.
“벌써 석 달째 두문불출입니다.”
“······.”
호위무인인 설린의 보고에 매화당주 초유하가 고운 아미를 찌푸렸다.
어렸을 적부터 백년수재로 이름난 그녀였지만, 여운이란 소년은 도무지 모르겠다.
“여 가주님처럼 와병 중인 것도 아닌데, 폐인처럼 온종일 처박혀있답니다.”
“처박혀 있다니, 소가주님께 말버릇이 너무 없구나.”
초유하가 질책하자, 설린은 되레 콧방귀를 꼈다.
“흥, 가문 내에서 아무도 인정하지 않는 소가주에게 예를 차릴 필요가 있습니까?”
“그럼 내게도 예를 차릴 필요가 없겠구나.”
“그, 그건!”
초유하의 쓸쓸한 목소리에 설린은 움찔했다. 사실 초유하도 여운의 처지와 다를 바가 없어서다. 돌아가신 아버지와 의형제를 맺은 의숙부이자, 신비금가의 좌사인 등호의 후광을 업고 이름뿐인 매화당주 직위를 받았을 뿐이다.
벌써 삼 년이 흘렀다.
그럼에도 아직 그녀의 위치는 가문 내에서 말석이라고 봐야 했다. 아니, 거의 공기 같은 존재라 해야겠다.
등호 외엔 아무도 찾질 않으니까.
과거에도 그랬지만, 여소평이 와병에 들어간 현재.
신비금가 내의 중대사는 우사 등유와 여중포를 비롯한 친지들이 결정하였다.
대소사를 결정 아니, 참여조차 할 수 없는 직함은 빛 좋은 개살구에 불과했다.
그나마 의숙부인 등호가 우기고 우겨서, 회의에 입 다물고 있는 조건으로 가끔 얼굴을 비추는 정도였다.
그걸 잘 아는 설린도 뜨끔한 얼굴로 얼른 화제를 돌렸다.
“가, 간간이 식사만 안으로 가져다 달라 요구할 뿐. 예전과 달리 서고를 드나드는 일은 없었습니다.”
“흐음.”
처음 왔을 때만 해도 신비서고를 제집 드나들 듯이 문턱이 닳도록 다녔던 아이였다.
혹자는 용쓴다며 비웃었지만, 초유하는 그 모습이 마치 제 모습을 보는 것 같아 무척이나 안쓰러웠다.
영민해 보이는 아이였는데.
그녀의 수심 어린 화용에 설린은 미안함을 느꼈는지, 화제를 돌렸다.
“소가주는 너무 사교성이 없습니다. 방에만 가만히 있으면 떡이라도 나온답니까? 그렇지 않아도 가문 내에서 평판도 안 좋은데. 자신의 위치를 몰라도 너무 모릅니다.”
“아니, 본인의 위치를 누구보다 잘 아는 거지.”
“잘 알아서 그런다고요?”
“그래, 우리보다 자신의 위치를 잘 파악하고 있지 싶구나. 영민한 아이야.”
“설마요, 몇 개월 전만 해도 뒷골목이나 전전해대던 들고양이였다고요. 당주님이 너무 좋게 보시는 거 아닌가요?”
초유하는 그저 부드럽게 웃었다.
설린은 여운을 좋게 보는 초유하에 불만 어린 표정을 지었다. 왠지 초유하에게 후한 평가를 받는 게 마음에 들지 않는 듯했다.
시비였지만, 어렸을 적부터 같이 커왔고. 커선 자신의 호위무인이 되겠다며 무공을 배운 아이였다.
가세가 기운 후 자유의 몸으로 풀어줬는데도 불구하고, 이곳까지 따라온 아이다 보니, 입술을 불퉁하게 내밀고 있어도 어여뻐하지 않을 도리가 없었다.
그 따뜻한 시선에 설린은 한숨을 내쉬었다.
“사람을 보내 약속을 잡을까요?”
“아니.”
“하면 왜 제게 그 아이······.”
“설린.”
옥구슬이 굴러가는 듯했지만, 엄정한 부름에 찔끔 놀란 설린이 얼른 호칭을 정정했다.
“···소가주의 근황에 대해 알아오라 하신 겁니까?”
“후우, 글쎄.”
그저 잘 지내는지 궁금해서라는 말을 덧붙일까 했지만, 초유하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괜한 주위의 시선을 끌 필요는 없었다.
여운은 잊힌 그녀와 달리 신비금가 내의 걸어 다니는 진천뢰였다.
가주 여소평이 와병 중에 들어간 지금.
화약고나 다름없는 상태가 된 신비금가다.
한데 여기서 아무런 힘도 없는 그녀가 여운을 단독으로 만난다?
대외적으로 후계자 문제에 대해 중도를 선언한 좌사인 의숙부의 체면을 깎는 일이었다.
초유하는 자리에서 일어나 창가로 갔다.
그저 서 있기만 해도 그림이 되는 자태에 지켜보는 설린이 작게나마 감탄했다.
“정말 도무지 모르겠습니다.”
“뭐가?”
“당주님께서 왜 아직까지 시집도 못 갔는지 말입니다. 같은 여자인 제가 봐도 눈에서 불똥이 튀어나올 정도로 예쁜데 말입니다. 미색으로 유명한 여중포 대협의 천금인 여선 소저도 당주님 앞에선 보름달 앞의 반딧불이라고요.”
누가 들으면 큰일 날 소리에 초유하는 그저 작게 웃었다. 철없는 사내아이처럼 거침없이 제 할 말 하는 설린 덕분에 웃을 수 있었다. 때론 정도가 지나치긴 해도 작금의 상황에선 설린이 가장 큰 힘이 되어주었다.
설린은 짓궂은 표정을 지었다.
“차기 가주의 유력한 후보이신 여중포 대협께서 매파를 보내신 걸로 알고 있습니다.”
“······.”
그 상대는 여중포의 차남 여진이었다.
그를 떠올린 초유하의 눈망울에 보기 드문 노기가 떠올랐다.
설린은 그걸 아는지 모르는지 재잘거렸다.
“약관에 강호의 동량지재로 이름난 여진 소협이라면 뭇 강호의 여인들이 선망하는 상대잖아요. 나이도 아홉 살이나 어리고. 딱 아닌가요?”
“······.”
초유하는 답하지 않았다. 자신을 보던 여진의 징그러운 눈빛을 떠올리자 소름이 돋았다.
-어차피 하룻밤 자고 나면 끝날 일을 왜 자꾸 시간을 들이시오. 몰락한 집안에 것도 혼기를 놓친 여인하고 혼례를 올려야 하는 내 입장도 생각해보시오.
그러면서 여진의 시선은 초유하의 농염한 몸매에 고정되어 있었다. 단 한 번도 눈을 마주치지 않고, 몸매만 훑어보는지라 기도 안 찼다.
마치 발가벗겨진 기분이랄까.
-잘 생각해보시오. 누가 차기 가주가 누가 될지. 그대의 의숙부가 중도를 선언한 것도 다 이유가 있어서라오. 그러니 그만 버티시오. 여자 나이 서른을 넘기면 이젠 쳐주지도 않소. 올해 안에 가부를 결정하는 게 좋을 것이오.
초유하는 화가 머리끝까지 치솟았지만, 한마디도 내뱉지 못했다. 혹시라도 자신 때문에 의숙부와 여중포의 관계가 악화 될까 두려워서다.
뭔 생각을 하는지 모를 등유와 달리 등호 의숙부는 천상 호인이었다. 무공밖에 모르는.
가세가 기울다 못해 폭삭 망한 뒤, 일가친척도 없어 갈 곳이 없어진 그녀를 받아준 고마운 분이다.
해서 갖은 희롱을 받아넘겼다.
어쩔 땐 눈 한 번 딱 감고, 주둥이를 쳐버릴까도 싶었다.
그럴 때마다 얼마나 허벅지를 꼬집어댔는지, 아직도 그 피멍이 가시질 않았다.
설린은 아직 그에 대해 몰랐다. 다른 사람과 같이 있을 땐 누가 봐도 바른 청년이었으니까.
단둘이 있을 때나 흑심을 서슴없이 드러낼 뿐.
“여 대주 이야긴 그만 듣고 싶구나.”
“네.”
심기 불편한 목소리에 설린도 더는 말을 꺼내지 못했다.
창밖으로 보이는 거대한 전각들.
그 위로 날아가는 새들을 보면서 초유하는 한숨을 내쉬었다.
강호제일 금력가에서 매화당주 직위를 받을 때만 해도 청운의 꿈을 꾸던 때도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새장 안에 갇힌 새일 뿐이다.
누구도 그녀의 말을 들어주지 않았다. 제안문을 보내도 그나마 등호의 눈치를 봐서 받기만 했지, 제대로 읽어주는 이 하나 없었다.
우연하게 쓰레기를 담은 포대 자루에 섞여 나온 봉인된 제안문을 봤을 때의 충격이란.
오기가 생겨 계속해서 제안문을 보냈지만, 어김없이 포대 자루에 발견되었다. 봉인도 풀리지 않은 상태로.
풍비박산이 난 집은 이미 남의 손으로 넘어간 지 오래다. 돌아갈 곳도 없는 기구한 처지가 가슴에 피멍을 들게 했다.
처연한 미소를 짓던 초유하의 봉목이 점점 크게 치켜 뜨였다.
“······!”
생각지도 못한 인물이 이쪽을 향해 걸어오고 있었다.
설린도 발견했는지 화들짝 놀란 얼굴을 해 보였다.
“어? 소가주 아닙니까? 한데······.”
설린의 목소리에 믿기 어려워하는 기색이 담겨 있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여운은 뭔가 달라진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 그리고 그건 가까워질수록 더욱 강해졌다.
정기가 흐르는 눈빛.
그랬다.
여운의 그 눈빛이 원인이었다. 한창 성장기의 소년이 일신우일신(日新又日新)이라 하지만, 석 달 사이에 사람 자체가 달라진 느낌이었다.
초유하는 반년 전 자신이 먼발치에서 봤던 그 소년과 저기 걸어오는 소년이 동일인물 맞는지 강한 의심이 들었다.
# 第 三 章
1
지난 구십 일간 여운은 천무지체 연성관에 꾸준히 들었다. 그리고 더할 나위 없이 훌륭한 스승에게 심법을 배워왔다.
그 훌륭한 스승이 누구냐고?
누구긴 누구겠나.
여소평의 수신호위였던 실혼인이지.
하나부터 열까지 철두철미하게 준비해놓은 안배가 빛을 발한 것이다.
여운은 그저 비밀암실에서 실혼인과 함께 심법을 수련하면서 지내면 되었다.
심법은 실혼인의 진기도인과 건네받은 책자로 충분했다. 책자의 표지엔 아무런 글자도 적혀있지 않았기에 여운은 그걸 무명심법이라 불렀다.
그 연원을 정상인이 아닌 실혼인에게 물을 수도 없어서 어쩔 수가 없었다.
실혼인은 딱 자신이 명령받았던 선에서만 행동하였다.
여운이 어떤 말을 해도 반응조차 없었다. 하여 마른 솜이 물을 빨아들이듯이 끊임없이 심법 수련에 매진했다. 침식마저 잊은 채 말이다.
낮엔 내실에서 식사와 무명심법을 운공했고, 밤엔 잠자리에 드는 대신 연성관에 들었다.
그런 여운에게 등유는 무공수련에 매진할 수 있도록 일체의 편의를 봐주었다. 여운을 목적으로 찾아오는 어중이떠중이를 도중에 차단하면서 말이다.
시비로 분한 사화가 간간이 수발을 들려고 했지만, 여운은 말조차 섞지 않았다.
과거와 달리 그저 할 말만 하고, 축객령을 내리니.
사화의 입장에선 미치고 팔짝 뛸 노릇이었다.
하지만 어쩌겠나.
여운이 소가주고, 사화는 그저 시비에 불과한데.
어차피 내실에서 두문불출하고 지내니 문제 될 것도 없었다. 의심을 피하고자 신비서고의 서책이나 간간이 요구할 뿐이었다.
여운이 고수인 그녀에게 이렇듯 대범하게 나갈 수 있는 건, 오로지 실혼인 덕분이었다.
엄청난 고수인 실혼인이 주위에 은신해있는 이상.
자신을 해하진 못하리란 계산이 섰다.
하여 여운은 밖의 상황에 일체 신경을 끄고, 무명심법에 심취하였다.
“정말이지 대단해.”
무공이란 걸 처음 익혀본 여운은 주먹을 움켜쥐었다. 전신에서 용솟음치는 이 힘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모르겠다. 눈앞의 자단목으로 만들어진 탁자를 내리쳐 반으로 쪼개다 못해, 박살을 낼 수 있을 것만 같았다.
무학의 끝자락에 이제 발을 살짝 들여놨을 뿐인데도 이런 힘이라니.
이래서 강호인들이 무공에 미치나 보다.
하지만 이런 때일수록 경거망동을 하면 안 된다.
여운은 치밀어 오르는 호승심을 가까스로 참았다.
“후우.”
심호흡한 여운은 앞으로 자신의 행보를 어찌할지 생각했다. 일단 꾸준히 수련하는 건 당연하고, 제 몸을 지킬 다른 무공을 익혀야 했다.
아쉽게도 실혼인은 말을 하지 못했기에, 익힌 무공을 전수받을 순 없었다.
책자와 진기도인으로 심법을 익혀 무공의 기본 틀은 잡았지만, 그 안을 채우는 건 또 다른 이야기였다.
실혼인은 무명심법 외엔 다른 책자를 주지도 않았고, 여소평의 기억에도 다른 무공에 대한 건 없었다.
“일단은 이것만 죽으라고 파라는 이야기지.”
무공의 토대를 아주 단단하게 세우자는 여소평의 의도였다.
무공을 익힐 수 없는 천형이었기에 얼마나 무공에 대한 갈망이 컸겠나. 급할수록 돌아가라는 인생의 격언을 되새기며 차근차근 제대로 된 단계를 밟고 싶었던 거겠지.
여운은 고된 연성기관이 끝을 보이자 조금씩 여유를 되찾은 상태다.
앞으로 남은 며칠 동안 연성관에 더 들어야 하는 점이 걸리긴 해도, 조금만 참으면 된다.
그럼 삼십 년의 내공을 얻는 건 물론이고, 지옥 같은 고통에서 해방이었다.
“소가주님, 침소에 들지 않으셨으면 잠시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불청객이 찾아왔다.
암어를 물었던 그때 이후로 첫 방문이다.
“들라.”
여운은 의자의 등받이에 몸을 기대었다.
과거와 달리 힘이 실린 목소리에 등유가 살짝 놀라는 기색을 내비쳤다.
“······!”
설마 하는 심정으로 문을 열고 들어온 등유의 눈가가 파르르 떨렸다.
잠깐 눈을 마주친 순간, 이미 여운이 이룬 무공성취를 파악한 듯 보였다.
그럼에도 등유는 자신이 얼마나 놀랐는지 당혹스러워하는 표정을 해 보였다. 물론 이런 반응을 내비치는 건 여운의 비위를 맞춰주기 위함이었다.
“가, 감축하옵니다.”
가늘게 떨리는 목소리도 그렇고.
여운이 등유의 과장된 행동에 속지 않는 건, 그와 눈을 마주친 순간 스쳐 지나가는 차가운 눈빛을 놓치지 않아서였다.
예전이라면 놓쳤을지 몰랐지만, 지금 여운의 눈썰미는 과거와 달라져 있었다.
“그래, 무슨 일로 찾아왔지?”
등유는 무미건조한 여운의 반응을 개의치 않아 했다. 여소평의 평소 모습과 다를 바가 없었다. 하여 격정 어린 말을 내뱉었다.
“예, 몸조리를 잘하고 계실지 걱정이 되어왔지만. 소가주님이 이렇게 건강 아니, 익히고자 하셨던 무공을 드디어······.”
“용건만.”
짤막한 일축에도 등유는 미소 지었다. 계획대로 힘을 착착 얻어가는 여운의 모습에 의심을 완전히 거둔 듯이, 이번엔 그 미소가 조금은 진실해 보였다.
“예, 당연히 그리해야지요. 정말이지 소가주님의 안배는 대단하십니다.”
저와 여운만이 알고 있는 비밀 공유가 그리 좋은 걸까.
등유는 평소와 다르게 말이 많았다.
여운은 무미건조한 눈빛으로 지그시 바라봤다.
등유는 여소평의 기억 속에서 알랑방귀를 뀌던 그 모습 그대로였다.
그럼에도 여운은 긴장의 끈을 놓지 않았다. 왜인지 모르겠지만, 직감이 말해줬다.
겉모습에 속지 말라고.
아직 상대는 완전히 의심을 거둔 게 아니다.
그랬기에 저리 알랑방귀를 뀌면서 웃고 있는데도 눈빛은 여전히 차가웠다.
그리고 여운은 제 생각이 맞았음을 곧 알게 됐다.
“이제 슬슬 취하시러 가셔야지요.”
너무나도 뜬금없는 말이었다.
대체 뭘 취하라는 걸까.
여운은 내심 당혹했지만, 표정을 굳힌 채 등유를 바라봤다.
등유는 여전히 모호한 말을 내뱉었다.
“소인의 쌍둥이 동생 말입니다.”
좌사 등호?
순간 여운의 머릿속에 등호와 관련된 기억들이 물밀 듯이 밀려왔다.
“으음.”
여운은 침음을 삼켰다.
등유는 그런 여운을 바라보며 음흉한 미소를 지었다.
“정말 찾기 어려웠습니다. 강호에서 가장 특별한 음한지체의 여인을 찾는 건, 사막에서 바늘 찾기보다 어려웠으니까요.”
마치 뼈 빠지게 고생한 자신들의 노고를 알아달라는 듯이 말하는 등유에 여운은 할 말을 잃었다.
물론 여전히 무표정을 고수한 상태다.
하지만 내심엔 폭풍이 몰아쳤다.
“소가주님께 아주 큰 자양분이 되어 줄 겁니다.”
천무지체 연성관의 마지막 단계가 끝나면.
최고의 육체와 삼십 년의 내공을 얻게 되지만, 한 가지 부작용이 있었다.
급격하게 세를 불려 커진 순도 높은 양강지기가 문제였다.
정도가 지나치면 미치지 못하는 것만 못하다고 했다.
그 양강지기를 안정시키지 못하면 아주 크나큰 문제가 생긴다.
바로 여운에게 말이다.
2
자가당착에 빠지는 경우란 게 이런 걸까.
여운은 연성관의 마무리를 며칠 앞두고 길을 나섰다.
마음속의 심화 때문에 다소 즉흥적으로 결정한 첫행보였다.
너무 쉽게 생각했다.
한 번에 너무 많은 여소평의 기억이 범람하지 않아서 좋은 점도 있었지만, 기억이 단편적으로 일어나서 문제가 될 때도 있었다.
바로 작금의 상황이 딱 그러했다.
득(得)이 있으면 꼭 실(失)이 꼬리처럼 따라붙는 게 강호지사다.
솔직히 여운의 입장에선 그걸 실이라고 할 순 없었다.
혈맥이 터져 죽지 않게 되는 걸 어찌 실이라고 하겠나.
하나 눈앞에서 식은 찻잔 물을 다기에 버리고, 도로 잔을 채워주는 여인을 보노라면 정말 사람이 못할 짓이었다.
초유하.
군사부 소속 매화당주였다. 의숙부인 등호를 아비처럼 믿고 따르는 바보 같은 여인이기도 했다.
그녀는 차남 여진의 성화에 여중포가 매파를 보냈다고 할 정도로 아름다웠다. 스물아홉이란 나이가 무색하게 소녀 같은 동안이나, 은연중에 풍기는 성숙한 자태는 어린 여운이라고 해도 시선을 뗄 수 없을 정도다.
“어쩐 일로 저를 찾아왔는지 여쭤봐도 될까요?”
거기다 현기 넘치는 눈빛은 일견 정겨워 보인다. 벌써 차를 앞에 두고 말없이 있은 지 이 각이 흘렀다.
옆에 있던 호위무인 설린은 답답해 죽겠다는 듯이 안절부절못한 반면.
초유하는 재촉보다 부드러운 눈빛을 보냈다. 친누이가 보낼 법한 호의를 내포한 채.
참으로 난감하다.
여운은 고소를 지었다. 괜히 찾아왔다는 생각 반, 찾아오길 잘했다는 생각 반이었다.
“발길 하나라도 조심해야 할 소가주님께서 하릴없는 제게 찾아오신 연유가 무척이나 궁금한데 말이죠.”
박속같이 하얀 이를 드러내며 웃는 그 모습이 무척 싱그럽다.
“······.”
하지만 여운은 그 말 속에 담긴 염려 섞인 질책을 알아차렸다. 가문 내의 이목이 쏠린 시점에서 도움이 안 될 자신을 왜 찾아왔느냐는 씁쓸함도 함께.
이곳과 어울리지 않는 좋은 사람이다.
여운의 마음속 추가 기울어졌다. 제 목숨줄에 생각에 미치자 곧바로 균형을 유지했지만.
후룩.
여운이 찻잔을 들이마셨다.
쪼르륵.
그녀가 첨잔을 해줬다. 그러면서 묘한 눈길을 보내었다. 소가주는 할 말이 많은 듯 보였다. 하지만 침착했다. 열다섯이란 어린 나이에 어울리지 않게 자신의 말 한마디가 어떤 영향을 미칠지 알고 있단 소리다.
“그저 차 한 잔 마시러 오신 거라면, 잘 찾아오셨어요. 향기로운 차를 즐기는 건 군자의 덕목이지요.”
하여 초유하는 심유한 눈빛으로 말했다.
용건에 대해 말할 의향이 없다면 묻지 않겠다는 뜻에 설린은 얼굴이 벌게졌다. 답답함에 숨이 막히다 못해 뒤로 넘어가겠다.
“술과 여색을 즐기는 건 영웅의 덕목이오?”
“······!”
여운의 나직한 물음에 설린의 눈이 쭉 찢어졌다. 과년한 처녀들을 앞에 두고 할 말이 아니었다.
그에 반해 초유하는 말뜻을 가늠하려는 듯 골똘히 생각에 잠겼다. 모름지기 그 정도의 위치에 있으면 허투루 말을 내뱉진 않을 것이다. 그리고 호수처럼 깊고 맑은 눈동자엔 사심이 담겨 있지 않았다. 오히려 근심이 자리했다.
“흔히들 영웅호색이라 말하긴 하죠. 그럼 매화당주 초당주가 아닌 여인 초유하를 찾아왔다는 뜻으로 받아들여도 되나요?”
“당주님!”
설린이 여전히 웃는 낯의 그녀 앞에서 목소리를 높였다. 초유하의 앞만 아니었다면 단숨에 멱살잡이할 정도로 설린은 분개했다.
살벌한 기세다.
여운은 처음으로 설린에게 시선을 줬다.
“둘이 있게 해주겠나.”
나직한 청에 설린은 제 귀를 후벼 파고 싶었다. 실제로 양 귀를 검지로 벅벅 파댔다. 제가 들은 말이 도무지 믿기지 않았다.
이런 미친!
설린은 막 입을 열고 쏘아붙일 기세였지만, 이어진 초유하의 말에 넋이 나갔다.
“술상 좀 봐주겠니?”
“······!”
언니, 미쳤어요? 라는 말이 목구멍까지 치솟았다. 공적인 공간이 아닌 사석 자리에선 자매같이 지내는 둘이었다. 평소의 성격대로라면 설린은 이미 눈물을 한바탕 쏟아냈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단정한 초유하의 태도는 엄정한 눈길을 보냈다. 그러곤 여운만을 바라봤다. 조금 시간을 들인 뒤, 작약같이 붉은 입술을 슬쩍 뗐다.
“사적인 자리는 꽤 비싸게 먹힐지도 몰라요.”
초승달처럼 곱게 휜 눈가에 여운은 고개를 미미하게 끄덕였다.
“어느 정도 각오는 하고 있소.”
잠시 후.
셋은 초유하의 거처 앞에 마련된 운치 좋은 정자로 갔고, 간단히 술상을 봐온 설린은 죽상을 쓰며 자리를 피해줬다.
물론 먼발치에서 여운의 뒤통수를 뚫어지게 노려보고 있었지만, 초유하는 그 거리 정도는 묵인해줬다.
대화를 방해받지 않을 정도면 되었으니까.
초유하는 죽엽청이 든 술병을 들며 말했다.
“한 번도 제 거처에 사내를 초대해본 적이 없어요. 물론 간혹 초대받지 못한 불청객이 오긴 했지만요.”
여진을 말하는 것이다.
“오늘의 불청객은 내가 됐군.”
“설마요. 가문 내에 소가주님께서 못 가실 곳은 없지요. 오금지(五禁地)를 제외하고는요.”
거긴 가주만이 드나들 수 있었다.
쪼르륵.
술잔이 채워지자, 여운은 잔을 들었다. 하지만 어딘가 어색했다.
“······.”
생각해보니 처음 마시는 술이었다.
새삼 상대가 주도를 알 리 없는 나이임을 깨달은 초유하가 풋 소리를 내었다. 상대의 달라진 기도에 휩쓸려 잠시 잊고 있었지만, 여운은 열다섯 소년이었다.
그런데 여색을 논한다?
괘씸하다는 생각이 들어야 했지만, 순박한 눈으로 잔을 들고 주저하는 모습을 보자니 귀엽다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나이에 맞지 않는 어른스러운 말투가 그런 생각을 배가시켰다.
스윽.
초유하가 잔을 공수(拱手)로 들어 올리며 코앞으로 가져갔다.
“보통은 건배를 들죠.”
“으음.”
여운은 그녀를 따라 잔을 공수로 들어 올렸다. 멋쩍어하는 모습이었다.
“영웅호색을 생면부지의 여인 앞에서 논하는 소가주님을 위하여.”
“······.”
그녀의 놀리는 듯한 말에 여운은 이내 얼굴을 붉혔고, 그 붉힘을 숨기고자 입안에 죽엽청을 급히 털어 넣었다.
초유하는 소매로 슬쩍 입가를 가린 채 입술을 가볍게 적셨다.
단아한 자태로 가볍게 잔을 내려놓은 모습.
여운은 자신이 너무 급히 마셨음을 깨달았다. 술 한 잔 제대로 마셔본 적이 없단 사실이 들통이 났다.
소매로 입을 가리며 웃던 초유하가 물었다.
“기루에 가보신 적은 있으세요?”
기루? 당연히 없었다.
과거 홍등가의 뒷골목에 갔다가 곤욕을 치를 뻔한 뒤로는 아예 발길을 끊었다.
순간 여소평의 기억이 수면 위로 떠올랐다.
기루에서 주색잡기에 여념 없던 민망하기 그지없는 장면들의 향연.
“······!”
여운은 얼굴이 시뻘게졌다.
생각지도 못한 성교육이었다.
여인을 알 리 없는 여운의 입장에선 무진장 곤욕스러웠다.
발가벗겨진 여인들이 내지르는 교성과 늙은이의 거친 숨소리라니.
그야말로 난교의 장이었고, 목불인견의 참상은 저리가라였다.
“으윽.”
비위가 뒤틀린 여운에 초유하는 아미를 곱게 휘었다.
“첫 경험치고 좀 독하죠?”
초유하의 짓궂은 말에 여운은 벌게진 얼굴로 두 눈을 지그시 감았다.
해가 서산 너머로 기울어갔다.
여운은 한 잔을 급히 마신 뒤론 아예 술은 입에 대질 않았다. 무명심법을 운용하자 술기운이 서서히 가셨다.
초유하도 술을 즐기는 성격이 아니었기에 차분히 기다렸다.
이윽고 여운이 똑바른 시선으로 그녀를 쳐다봤다.
“날 어찌 생각하오?”
“······!”
처음으로 고매한 그녀의 미소가 흔들렸다.
3
생각지도 못한 당돌한 물음이었다.
놀란 초유하가 봉목을 치켜떴다. 해서 저도 모르게 목소리가 떨렸다.
“그, 그게 무슨?”
표정엔 당혹이란 감정이 머물렀다.
“······가문 내에서의 내 위치를 묻는 말이었소.”
여운은 무슨 오해를 하느냐는 듯한 눈빛을 보냈다.
초유하는 저도 모르게 얼굴을 붉혔다. 사내로서 어떠냐고 묻는 걸로 착각한 게 말도 못하게 부끄러웠다.
고작 열다섯도 안 된 소년에게 이리도 끌려다니게 될 줄이야.
초유하는 도홧빛으로 물든 화용을 감추려 공수를 들었다. 소매로 얼굴을 가린 채 잔을 든 것이다. 목이 탔는지 이번엔 술잔을 깊게 베어 물었다.
“후우.”
그러곤 옅은 한숨을 내쉬었다.
여운도 남몰래 한숨을 내쉬었다. 사실 그녀의 착각이 맞았다. 은근슬쩍 그런 의도를 내포시킨 건 사실이었으니까.
“짓궂군요.”
초유하가 여운을 향해 곱게 눈을 흘기며 잔을 내려놨다. 잠깐의 동작이 다시 그녀에게 평정심을 안겨줬는지, 눈빛이 다시 깊어졌다.
“좋은 대답과 나쁜 대답이 있어요. 어느 쪽을 듣길 원하시죠?”
“후자를 먼저 듣겠소.”
“무(無).”
“······.”
아무것도 없다라.
여운은 초유하를 지그시 바라봤다.
설명을 요구하는 눈길에 초유하는 입술을 재차 뗐다.
“가문 내에서 소가주님의 세력은 전무하죠. 근래 들어 우사님께서 소가주님의 처소를 드나들긴 하지만, 쌍둥이 동생인 좌사 등호님이 중도파에 드신 건 아시지요?”
“그렇소.”
여운은 그게 어떤 의도를 갖고 선언한 것인지 알기에 잠자코 있었다.
여소평을 향한 배신은 아니다.
초유하를 준비시킨 것만 봐도, 등호가 배신을 목적으로 그런 게 아님은 드러났다. 등호의 속내를 정확히 모르기에 확신을 가질 순 없으나, 일단은 등유와 함께할 것이다.
그렇지 않았다면 여진과 초유하의 혼사를 일사천리로 진행했을 터였다.
아직은 여운이 실패할 가능성이 있기에 잠자코 지켜보자는 거겠지.
이를 알 리 없는 초유하는 등호를 중도파라고 여겼고, 곧 그의 쌍둥이 형인 등유 또한 중도를 선언할 거라 어렵지 않게 짐작했다.
대외적으로 여소평은 와병 중이고 언제 숨이 넘어갈지 몰랐으니까.
신비금가 내의 중요인사 중 열에 아홉은 여중포가 차기 가주가 될 거라고 예상했다.
그들에게 여운은 언제 발로 걷어차도 무방한 굴러들어 온 돌에 불과하였다.
“솔직히 여소평 가주님께 안 좋은 일이 생기면 소가주님께선······.”
눈앞에서 듣는 이를 생각해 뒷말을 삼켰지만, 팽(烹) 당할 거라는 말이 턱밑까지 올라왔다.
상대의 기분을 배려해 말을 삼키는 그녀를 본 여운은 미소를 지었다.
가문 내에 세력이 전무한 여운의 처지를 알면서도, 여전히 소가주처럼 대해주는 그녀의 고지식함이 마음에 들었다.
적어도 자신의 기분을 맞추기 위해 그런 게 아님은 본능적으로 알겠다. 아무것도 모르는 그녀에게 여운은 썩은 동아줄 그 자체였다.
그런데도 초유하는 좋은 대답이란 여지를 남긴다.
자신에게서 가능성이란 씨앗을 본 거다. 해서 여운이 물었다.
“좋은 대답은?”
“무(武).”
초유하는 심유한 눈빛으로 여운의 기도를 살피며 말했다.
이번에도 없다는 뜻으로 한 말일까 싶었던 여운이었지만, 그녀의 눈빛은 그게 아니라고 말해줬다.
여소평의 기억에 따르면 그녀 또한 몰락한 무가의 자제.
여운이 이룬 성취를 읽어냈다.
무공을 익힌 설린이 여운을 보고 소스라치게 놀라기도 했지만, 초유하도 눈썰미가 있었다.
몇 개월 전 봤던 유약한 소년은 이 자리에 없다.
“······.”
“······.”
여운은 제 기도를 감추지 못했다. 아직 그만한 수준에 못 이르렀다. 아니, 어쩌면 앞으로 그럴 필요가 없을지도 몰랐다.
마침 초유하가 부연설명을 해줬다.
“지금처럼 단 몇 달 새에 이리 달라진 기도를 보이심을 가문 내의 중요인사들이 알게 된다면, 어찌 될지는 모르죠. 신비금가가 금력가라고 해도 강호의 일원임에는 분명하니까요. 못해도 최악의 상황을 모면할 타개책은 되지 않을까요?”
“사람들 눈에 띄는 게 꼭 좋은 것만은 아닐 수도 있지 않소?”
“그렇죠. 하지만 소가주님께선 양지로 나오셔야 해요. 모두가 주목하는 지금 뒤로 숨는다면 오히려 상대에게 빌미를 주고도 남음이죠.”
“······.”
추방이나 암살시도와 같은 걸 말하는 것이다.
“하지만 오늘 보니, 낭중지추란 말이 절로 떠오르는군요.”
“주머니 속의 송곳니라. 후한 평가요.”
“그럴지도요. 하지만 처음 봤을 때보다 비교도 안······.”
초유하는 순간 말을 삼켰다. 자신이 여운을 주목하고 있음을 스스로 시인하는 꼴이어서다.
마침 여운의 눈빛이 반짝였다.
“내게 관심은 있었군.”
“······.”
초유하는 아니라고 말은 못했다. 그리고 자꾸 사내로서 관심을 두는 게 아니냐는 말로 들려 곤혹스러웠다. 고작 열다섯에 불과한 아이인데도, 서른은 훌쩍 넘은 능구렁이를 상대하는 것만 같았다.
여인 경험이 닳고 닳은 여진도 이렇진 않았는데.
초유하가 침묵하는 시간이 길어졌다. 말을 하면 할수록 말리는 기분인지라, 그녀의 내심은 무척이나 혼란스러웠다.
눈앞의 상대가 정말 열다섯 소년이 맞는지 의문이었다.
“잘 알았소.”
여운은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불감청이언정 고소원이었던, 초유하도 따라 일어섰다.
여운이 뜻을 알 수 없는 눈빛으로 말했다.
“귀한 시간을 내줘서 고맙소.”
“유익한 시간이었어요.”
“유익한 시간인지는 두고 봐야지 않겠소?”
“······!”
초유하는 많은 뜻을 내포한 듯한 물음에 봉목을 치켜떴다. 더 묻고 싶은 말이 있었지만, 이미 여운은 포권을 취하고는 신형을 돌렸다.
“······.”
바람처럼 왔다가 바람처럼 사라지는 그의 뒷모습에 초유하는 손을 들어 이마를 짚었다.
여운이 떠나자 설린이 부리나케 다가왔다. 그리고 명궁이 속사를 쏘듯이 퍼부었다.
“혹시 저 어린놈이 무슨 실례되는 말이라도 했어요? 보기보다 굉장히 음흉한 놈이네요. 어린 게 벌써부터 발라당 까져가지고. 감히 언니와 독대도 모자라 술부터 찾다니. 싹수가 노란 게 아주 혼쭐을 내주어야 했는데, 어휴! 한 살이라도 더 먹은 내가 참는다, 참어!”
고까운 눈빛으로 떠나는 여운의 뒷모습을 흘겨보며 주먹을 쥐었다.
평소라면 무슨 말버릇이냐며 초유하에게 혼쭐이 나겠지만, 여운이 남긴 말에 심사가 너무나도 복잡한 그녀였다.
“···완전히 말렸어.”
“예?”
설린이 두 눈을 동그랗게 떴지만, 초유하는 부연설명을 해주지 않았다.
설린에게 어리다고 무시당하는 소년보다, 배나 산 자신이 대화의 주도권을 단 한 번도 쥐지 못했다는 걸 어찌 말한단 말인가.
“정말 창피해 죽겠어.”
고개를 푹 숙인 초유하는 그렇게 제 처소로 도망치듯이 사라졌다.
“잉?”
설린은 총총걸음으로 사라지는 초유하를 보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왜 저래?”
그러다 정자의 중앙에 놓인 술상을 보고는 이를 바득바득 갈아댔다.
“우으으. 싹수가 노란 놈이 먹은 술상까지 치워야 하는 처량한 신세라니! 가련한 미소녀의 숙명이라지만, 너무하네. 너무해.”
설린은 남들이 들으면 씨알도 안 먹힐 말을 하면서 구시렁댔다. 물론 그러면서 술상은 말끔하게 치웠다.
***
술자리를 빠르게 끝낸 여운.
탐색을 목적으로 온 길이었다. 초유하가 어떤 사람인지 직접 눈을 보고 확인하고 싶었다.
확인한 결과.
여운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여소평을 비롯한 놈들은 미혼약을 써서 그녀의 음기를 강제로 취할 작정이었지만, 여운은 그러고 싶지 않았다.
그녀는 좋은 사람이다.
갈 곳 없지 처지, 그러니까 사면초가에 몰린 상황임에도 자긍심을 잃지 않고 꼿꼿하나 기품 있는 태도를 보이는 게 굉장히 매력적이었다.
해서 그녀가 어떤 사람인지 단편적으로나마 알게 됐다.
하면 초유하를 취하지 않는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등유의 의심을 피해 갈 수도 없을 것이고, 계획대로 안 했을 시 실혼인이 어떻게 나올지도 몰랐다.
생존부터 장담키 어려운 상황.
그녀의 음한지기를 취하지 않으면, 혈맥이 터져 죽는다.
서산 너머 자줏빛 하늘을 바라보며 여운은 고소를 흘렸다. 눈 한 번 딱 감고, 일을 벌여보면 어떨까 싶은 제 생존 욕구 때문이었다.
아예 여소평이 되어야 한다. 자신을 위해서라면 누구라도 희생양으로 쓸 수 있는 독심을 가진 그처럼 말이다.
똑같은 놈이 되지 않으면 난 죽는다.
머릿속에 든 경각심에 여운이 발길을 돌려 뒤를 돌아봤다.
초유하의 처소가 보인다.
풍취 좋은 정자가 있다고 하나, 전각이 즐비한 화려한 이곳에 어울리지 않게 초라한 건 사실이다.
내가 살려면 남을 짓밟고 일어서야 한다. 그것도 약자라면 당연히 취해도 된다.
“······!”
여소평의 기억 때문이라곤 하나, 그와 다름없는 생각을 하다니.
여운은 허탈하게 웃었다. 처음에 들었던 거부감이 갈수록 옅어지고 있었다.
“제길.”
한차례 욕설을 내뱉은 여운은 다시금 발걸음을 옮겼다. 방향은 당연히 자신의 처소였다.
이제 곧 밤이 다가온다.
천무지체 연성관에 들 시간이 머지않았다.
4
“소가주님, 어디서 술 한잔하고 오셨나 봐요?”
내실에 다다르자 시비 사화가 기다렸다는 듯이 말을 걸어왔다.
여운은 그 말에 피식 웃었다. 술기운은 내공으로 날리고 온 뒤였다. 한데 술자리를 가진 걸 안다는 건 역시 감시당하고 있다는 소리였다.
초유하를 만나고 온 게 자극이라도 준 걸까?
오늘 사화는 단단히 각오하고 온 듯했다. 은연중에 여운의 앞을 가로막아 섰다.
“할 말이라도?”
“요즘 들어 소녀를 찾지도 않으시고, 좀 달라지신 것 같아서요.”
생긋 웃은 사화, 고수인 그녀이기에 잘 알았다.
여운이 내실에서 무공수련을 하고 있다는 걸 말이다.
석 달 만에 내공이 이렇게 급속도로 성장하는 건 듣도 보도 못했다. 물론 그녀가 익힌 흡정공이라면 가능은 했다. 하루도 빠짐없이 남정네들과 동침하여 정기를 흡수한다면 못할 것도 없었다.
하지만 눈앞에서 여운이 풍기는 먹음직스러운 향기처럼, 순도 높은 내공을 모을 순 없었다. 대체 어떤 방법인지 궁금해 미치겠다.
“후후.”
안달이 난 내심과 다르게 사화가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사실 그간 그 방법이 무척이나 궁금해 훔쳐보고 싶었으나, 여운의 축객령이 떨어지면 내실 안에 있을 수가 없었다.
그녀 정도 되는 고수가 여운의 말에 순한 양처럼 따르는 건 다 이유가 있었다.
여운은 몰랐겠지만.
축객령이 떨어지는 순간.
그녀에게 끔찍할 정도로 엄청난 살기가 집중됐다. 사화의 간담이 서늘하다 못해 덜컹 내려앉을 정도로 말이다. 해서 사화는 그간 일언반구도 못 하고 물러나야 했다.
같은 자리에 있던 여운이 그걸 모른다는 사실이 그녀를 더욱 경악하게 하였다. 어느 특정인을 대상으로 주위 사람들 모르게 살기를 쏘아 보내는 경지를 그녀는 꿈도 꿀 수 없었으니까.
즉, 엄청난 신비의 고수가 여운을 지키고 있다.
해서 늘 순한 양처럼 굴어왔다.
두고 보자는 심산으로 물러났지만, 겁을 완전히 집어먹은 것이다.
“혹 저 모르게 무공수련이라도 하시나 봐요? 사람이 날이 갈수록 달라지시는 게. 소녀의 가슴이 떨리는 걸 주체할 수가 없네요.”
그러면서 은근슬쩍 요염한 미소를 흘린다.
얼마나 급했으면 대놓고 유혹하는 것도 모자라, 미혼술까지 펼쳐댔을까.
여운의 축객령이 떨어지기 전에 승부수를 던졌다.
“······!”
여운의 눈동자가 급격히 흔들렸다.
사화는 그걸 보고 쾌재를 불렀다. 그래서 한 발짝 더 다가서며 여운의 귓가에 속삭였다.
“무공수련도 좋지만, 때때론 쉬어주면서 하는 게 더욱 효과가 배가 된답니다.”
베갯머리송사라고 했다.
한창 혈기왕성한 소년을 구워삶는 건 그녀에겐 일도 아니었다. 형언할 수 없는 쾌감을 미끼로 애를 태우는 건 그녀의 특기였으니까.
그러면서 작정하고 준비한 듯, 제 가슴의 앞섶을 살짝 벌리자 가슴골이 드러났다. 육감적인 그녀의 몸매로 시야를 강하게 자극하면, 사내는 열에 아홉은 넘어왔다. 거기다 미혼술과 춘약을 섞은 사향을 풍기기까지 했다.
상황종료였다.
사화는 여운에게 슬쩍 몸을 비비면서 귓가에 입김을 불어넣었다.
“무공수련으로 지치신 몸을 제가 달래드릴게요. 부디 거절치 말아 주세요.”
“······.”
그러면서 여운의 손을 잡아끌었다. 벌써부터 달아오른 육신에서 진한 여인의 향기가 풍겨왔다.
끈적끈적한 미소를 짓는 그녀가 허리를 배배꼬건 말건, 여운의 내면은 평온했다. 사화가 미혼술을 걸자마자, 정심한 내공들이 일어난 덕분이었다.
“······그러지.”
여운의 허락이 떨어지자, 사화의 눈빛이 기쁨으로 물들었다. 드디어 기회를 포착한 것이다.
한 번이 어렵지. 선을 넘으면 두 번 세 번은 쉽다.
사화는 여운에게서 풍기는 맑은 향기가 무척이나 탐이 났다. 해서 시간을 들여 여운의 정심한 내공을 차근차근 뺏어낼 작정이었다.
여운을 지키는 고수가 걸리긴 했지만, 지난 시간으로 정형화된 형식이 있음을 알게 됐다. 여운에게 은연중에 살기를 쏘아 보내봤다.
놀랍게도 반응은 없었다. 실제로 살수를 펼쳤을 시 어찌 나올지는 모르나, 그 이상의 선은 넘지 못하겠다.
어찌 됐든.
여운이 축객령을 내리면 그녀는 나가야 했다. 그 이후로 여운의 처소는 불가침의 영역이 된다.
한데 지금 여운은 축객령 대신 그러자고 하였다.
천재일우의 기회.
사화가 뛸 듯이 기뻐하며 말했다.
“목욕물을 데우겠습니다. 그리고 몸을 덥혀드릴 간단한 주안상도 봐 드릴게요. 내실에 먼저 들어가 계세요, 호호!”
사화는 여운을 향해 생긋 웃어주고는, 종종걸음으로 사라졌다.
둔부를 요란스레 흔들며 떠나는 요부의 뒷모습을 보던 여운의 눈빛이 착 가라앉았다.
드디어 방법을 찾았다.
여운은 사화에 대한 정보를 떠올렸다.
⦙
사화.
(중략)
무에 대한 재능은 중상. 익힌 사이한 마공인 흡정공 덕분에 강호백대고수 중 서열 오십 위.
⦙
흡정공.
여운은 그녀가 익힌 마공에 주목했다. 어째서 여소평이 그녀가 여운의 곁에 있는 걸 허용했는지, 그리고 저런 흑심을 여실히 보여주는데도 실혼인이 가만히 있었는지 이제야 알았다.
여운이 얻어야 할 첫 번째 무공이 바로 그녀가 익힌 마공이었다. 천인공노할 방법이긴 하나, 얼마 안 있으면 다가올 여운의 위기에 크나큰 도움이 되고도 남았다.
물론 여운은 그녀와 잠자리를 가질 생각이 털끝만큼도 없었다.
“요는 빼내기만 하면 된다는 거지.”
순간 여운의 머릿속을 비집고 들어오는 여소평의 기억이 있었다.
척하면 척이다.
“후우.”
여운은 악랄하기 그지없는 방법에 긴 한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다른 방법은 없었다. 자신이 생존하기 위해서라면, 초유하의 특별한 음한지기를 흡수하려면 이 방도가 최선이었다.
잠시 후.
사화가 목욕물을 데워왔다.
스르르.
여운은 의복을 벗었다. 불과 삼 개월 사이에 탄탄하기 이를 데 없어진 근육질의 몸은 더 이상 소년이 아님을 말해줬다.
“아······.”
사화가 저도 모르게 경탄성을 내었다.
“···목욕시중을 들어드릴게요.”
“주안상이나 봐오도록.”
“후우, 알겠어요.”
사화는 진한 아쉬움이 서린 눈초리였다. 앞으로 있을 운우지락을 기대했는지 순순히 따랐다.
여운은 간단하게 목욕을 마친 후, 새 의복으로 갈아입었다.
때맞춰 주안상을 봐온 사화가 요염한 미소를 흘렸다. 나삼으로 환복하고 온 그녀는 본격적으로 시작할 셈이었는지, 옆에 착 달라붙어 앉았다.
여운은 거절치 않고 그녀가 따라주는 술을 마셨고.
사화도 여운이 따라주는 술을 마셨다.
한두 잔이 서너 잔으로 늘었고, 이내 가져온 술병 두 개가 텅텅 비워졌다.
여운이 사화를 쳐다봤다.
사화도 여운을 촉촉한 눈빛으로 마주했다.
“침상으로 가지.”
“네에.”
여운의 나직한 목소리에 사화는 부끄럽다는 듯이 시선을 내리깔았다.
달칵, 달칵.
침상의 끄트머리를 조작하는 여운의 해괴한 짓거리.
사화는 드러난 광경에 말문을 잃었다.
드르륵.
비밀 암도가 있었다니.
사화는 심장이 쿵쾅대는 걸 느꼈다.
여운이 매력적인 미소를 지었다.
“색다른 즐거움을 원하지 않나?”
그러고는 비밀 암도로 내려갔다.
사화는 일순 멈칫했다. 시커먼 암도가 마치 괴물의 아가리처럼 보여서다. 하지만 그녀는 주저할 수가 없었다. 급속도로 강해진 여운의 비밀을 알아낼 절호의 기회였다.
거기다 먹음직스러운 향기를 풍기는 먹잇감이 술기운에 취해 비틀거리며 걷고 있으니.
사화가 비밀 암도로 걸어 들어가는 건 시간문제였다.
설마 무슨 일이 생기겠어? 내가 훨씬 강한데?
돌다리도 두들겨 보고 건너라는 격언 따위는 그녀의 머릿속에서 사라진 지 오래였다.
# 第 四 章
1
사화가 눈을 번뜩이며 주위를 둘러봤다.
“이런 곳이 숨겨져 있었다니.”
천장에 달린 최고급 야명주들을 보는 그녀의 눈엔 탐심이 진하게 어렸다. 여인이라 그런지 영롱한 빛을 뿌리는 야명주를 그냥 보아 넘기지 못하겠나 보다.
“야명주 좀 보세요. 소가주님. 저렇게 크고 아름다운 야명주는 처음 봐요. 하나 정도 있었으면.”
한두 개 떼어내 달라는 듯이 말했지만, 여운은 대꾸하지 않았다.
비밀 암실에 그녀를 데려온 지금 이 순간.
여운은 천 길 낭떠러지 위에서 아슬아슬하게 줄타기를 하는 기분이었다.
이유는 간단했다.
여소평의 기억대로라면 실혼인은 움직이지 않는다.
“설마 소가주님의 침실 밑에 이런 비밀 공간이 있었을 줄이야.”
“······.”
백치미를 한껏 강조한 헤 벌린 표정으로 주위를 둘러보고 있는 사화였지만, 강호백대고수 중 서열 오십 위에 오른 노고수였다. 순진한 소녀의 가면을 쓰고 있으나, 속은 닳고 닳은 노회한 여우이기도 했고.
한 치의 실수도 있어선 안 됐다.
“어째서 소녀를 이곳에 데려오셨나요?”
“특별한 여흥을 즐기기 위해서지.”
“호오, 소녀를 위해 특별히 준비한 여흥이라니. 무척 기대되네요.”
“좋아, 죽을지도 몰라.”
“흐흥.”
요부처럼 비음을 흘린 사화는 곧 짜랑짜랑한 웃음을 터트렸다. 하지만 눈빛은 북풍의 한설처럼 차가웠다.
눈앞의 애송이가 뭔가 수작을 부리려 함을 진즉 눈치챘다.
침상 위에서 거사를 치르면 될 걸, 이런 비밀 암도를 보여주고는 여흥을 즐기자고?
누굴 바보로 아나.
강호에서 자신이 가지고 있는 비밀을 알아서 까발릴 땐 다 이유가 있는 법이었다.
날 함정에 빠트리려 하는구나.
사화는 요요한 미소를 띠었다. 시비에 불과한 자신을 이런 비밀 암도로 데려온 것 자체만으로, 요 앙큼한 놈이 자신의 정체를 알고 있다는 뜻이었다.
와병 중인 여소평이 말해준 걸까?
사화는 최근 태도가 달라진 여운을 떠올렸다. 친근하게 대하다가 갑자기 쌀쌀맞았던 모습, 확신이 더해졌다. 하지만 사화는 돌아가지 않았다.
급작스레 강해진 여운의 비밀, 어쩌면 와병 중인 여소평과 연관이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 실마리를 알아내면 여중포가 자신에게 어떤 포상을 내릴지, 상상만으로 즐거웠다.
저벅저벅.
사화는 앞서 걷는 여운에 대해서만큼은 조금도 걱정하지 않았다. 급작스럽게 강해졌다고 해도, 상대는 열다섯 애송이에 불과했고 자신보다 약했다.
무공을 아예 익히지 않았던 애송이가 석 달 만에 자신을 능가한다고?
강호에 별의별 일들이 벌어진다 하나, 그녀의 상식에선 절대로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문제는 단 하나.
여운이 머물던 내실에서 살기를 쏘아 보냈던 정체불명의 고수였다. 그럼에도 사화는 자신 있었다. 여차하면 여운을 인질로 잡으면 됐고, 자신의 한 몸 정도는 내뺄 실력은 있었다.
강호백대고수 중 서열 오십 위란 직함은 투전놀음으로 딴 게 아니었으니까.
“벌써부터 가슴이 뛰네요. 소녀를 어떤 식으로 만족하게 해줄지.”
사화의 여유로움에 여운은 그저 걷기만 했다.
어차피 대답을 바라고 한 말이 아니었기에 사화는 입술을 삐죽였다. 그러면서 기감을 넓혀 주위를 살폈다. 주위엔 아무도 없었다.
뭐, 그건 두고 보면 알겠지.
일단은 상황을 두고 본다.
혀로 입술을 핥은 사화는 여운과 좀 더 거리를 좁혔다.
잠시 후.
암도의 끝에 다다르자 암실이 모습을 드러냈다.
여운이 뒤를 돌아보며 말했다.
“이곳이야.”
“호오.”
사화는 생각보다 단출한 내부에 실망감 어린 표정을 지었다. 재미난 유흥과는 거리가 멀어도 한참 먼 관짝 하나만이 놓여 있었다.
“설마 저곳에서 거사를 치르자는 건 아니겠죠?”
배시시 웃으며 묻는 사화에 여운은 어깨를 으쓱였다.
“순진한 척은 그쯤하고. 들어와서 직접 봐. 궁금하잖아.”
“예?”
“내가 왜 달라졌는지 말이야.”
지금까지와 달리 싸늘한 미소를 짓는 여운이었다.
사화는 가면을 벗어던진 여운에 실소를 흘렸다.
요놈 봐라.
당돌한 구석이 있는 건 알았지만, 꽤나 영민하다. 먼저 선수를 쳐 서로 패를 보이자고 하니.
사화로서는 따르지 않고는 못 배겼다.
해서 지금까지와 달리 순진한 가면을 벗어던진 사화가 음탕한 미소를 흘렸다.
“생각보다 앙큼한 구석이 있으시네요? 소가주님.”
“사화 너만 할까.”
“······!”
사화의 표정이 살짝 굳었다. 여운이 자신의 진명(眞名)을 알고 있다는 사실이 문제였다. 이 가문 내에서 사화란 이름을 아는 이는 단둘이었다.
여소평과 여중포.
그녀가 강호 공적임을 여소평이 알려줬다는 건, 여운을 그만큼 믿는다는 뜻이었다.
“알면서도 지금껏 절 그리 대하셨다니, 대단하세요.”
지금껏 흘리던 음탕한 웃음과는 다른 차가운 웃음소리였다.
그녀를 마주한 여운은 모골이 송연해짐을 느꼈다. 가면을 벗어던진 그녀의 기도는 상상 이상이었다.
이게 바로 강호의 고수란 건가?
피부 위를 뱀처럼 타고 오르는 살기가 온몸을 옥죄었다.
만약 무명심법을 수련하기 전이었다면 주저앉다 못해, 숨을 헐떡거렸을 터.
여운은 무명심법을 통해 내부의 들끓는 진기를 다스렸다.
사화는 그 모습에 여유로운 미소를 지었다. 자신의 살기에 내부가 진탕되는 모습을 보아 상대는 확실히 하수였다. 뭔가 더 있다고 하기엔 약했다.
“그럼, 질문 좀 해볼까요?”
사화는 거머쥔 주도권을 놓을 생각이 없었다. 해서 살기를 더욱 배가시켰다. 동시에 내부가 진탕된 여운을 향해 섭혼술을 펼쳤다. 어차피 처음부터 이럴 목적으로 온 거였기에, 그녀에게 주저함은 없었다.
섭혼술에 전력을 다했다.
“······!”
여운의 눈동자가 몽롱하게 풀렸다.
사화는 그 모습을 만족스럽게 보고는 기감을 넓혔다.
역시나 이 정도론 주위에 잡히는 기척은 없었다.
이미 여운은 자신의 손아귀에 잡혔다. 설령 고수가 나타난다고 해도 거칠 것이 없는 사화였다.
저벅.
사화는 둔부를 흔들며 다가왔다. 여운을 유혹하듯이 손끝으로 턱을 살짝 들어 올렸다.
“일단 거사를 치르기 전에 몇 가지 묻겠어요. 소가주님.”
“······.”
여운은 멍한 눈빛으로 사화를 내려다보았다.
“어떻게 해서 이리 급작스럽게 강해졌죠?”
“천무지체 연성관에 들어······.”
질문이 끝나기 무섭게 줄줄이 읊는 여운에 사화는 진하게 웃었다. 그러다 눈동자가 점점 놀라움으로 커졌다.
천무지체 연성관에 대한 설명은 도무지 믿기 어려웠다.
“내공의 순도를 지극히 정순하게 만들어준다니, 그게 정말인가요?”
“저, 정말이다.”
대답이 끝나기 무섭게 사화는 서둘러 여운의 완맥을 쥐었다. 내공을 흘려 넣으려 함이다.
아니나 다를까.
“······!”
승려들이나 가질 법한 정순한 내공의 반탄력이 여운에게서 느껴졌다.
아니, 그 이상이었다.
“이, 이럴 수가.”
천무지체로 만들어준다는 건 둘째 치고, 이토록 순도 높은 내공을 만들어준다고?
그녀의 코끝을 연신 자극하던 맑은 향기.
그게 바로 빼도 박도 할 수 없는 증거였다.
“혈맥의 노폐물을 제거해주는 것뿐만 아니라, 흐르는 내공의 순도까지 높여준다니!”
어느덧 그녀의 목소리엔 가슴 벅찬 기쁨마저 실려 있었다.
완맥을 통해 흘려 넣은 내공으로 알 수 있었다.
혈맥 안은 그야말로 탄탄대로였다.
갓 태어난 아기의 혈맥처럼 어느 하나 거리껴지는 게 없었다.
눈동자가 풀린 여운의 몸이 고통으로 부르르 떨었다. 완맥을 통해 들어오는 그녀의 탁한 진기가 원인이었다.
사화가 완맥을 놓아줬다.
풀썩.
여운은 그대로 주저앉았다.
사화는 이미 여운은 안중에도 없었다. 자신의 오랜 숙원을 풀어줄 열쇠가 눈앞에 있자, 눈동자엔 희열만이 가득했다.
흡정공의 폐해를 해결할 엄청난 열쇠.
수많은 사내의 정력과 내력을 갈취한 터라, 혼탁해질 대로 혼탁해진 그녀의 내공이, 서서히 몸을 갈아먹고 있었다.
물웅덩이에 고인 악취를 풍기는 썩은 물이 몸 안에서 흐른다고 생각해보라.
그녀 정도 되는 고수였기에 지금껏 버틴 거지.
빠르면 수년 내에 단전이 무너졌을지도 모른다. 그러면 그녀가 겨드랑이에 땀내 나도록 익힌 주안공도 사라진다.
검버섯 핀 노괴의 모습은 그녀로서는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모습이었다. 사내들로부터 외면받는 건 물론, 막대한 내공으로 그간 억눌렀던 독기들이 일순간에 전신으로 퍼질 것이다.
생사를 장담할 수 없는 상황 그 자체다.
한데 그 막대한 내공이 지극히 정순해진다고 생각해보라.
사화는 벌써 부터 배꼽 아래가 간질간질해지는 걸 느꼈다. 하늘 위를 걷는 듯한 느낌에 서둘러 물었다.
“작동방법은!”
2
사화는 자신의 섭혼술을 믿었다. 하수를 상대로 전력을 다하면 지금껏 단 한 번도 실패하지 않았기에, 가질 수 있었던 자신감이었다.
멍한 눈으로 중요기밀이라고 할 수 있는 천무지체 연성관에 대해 줄줄이 읊는 여운을 보면, 자신은 확신으로 이어졌다.
그래도 확인은 필요한 법이다.
그녀는 먼저 여운을 천무지체 연성관에 들게 했다. 적어도 그 과정을 봐야 안심이 될 성싶어서였다.
멍한 눈빛의 여운은 거부감 없이 관짝에 누웠고, 곧 연성관이 작동하는 소리가 들렸다.
그게 사화가 범한 결정적인 실책이었다.
천무지체 연성관에 들어 대침들이 여운을 찌르는 순간.
여운에게 걸렸던 섭혼술은 그대로 풀렸다. 눈동자에 돌아온 총기가 그걸 증명했다.
찰나지간.
“······!”
여운은 자신이 뭘 어찌해야 할지 깨달을 수 있었다. 절대 신음성을 밖으로 내선 안 된다는 걸 말이다.
사화의 의심을 피하기 위해선 섭혼술에서 풀려났다는 것도 들켜선 안 된다.
지난 구십여 일간 겪었던 지난한 시간이 도움이 됐을까.
여운은 끔찍한 연성과정 중에도 신음성을 입 밖으로 내지 않았다.
그야말로 초인적인 인내심이었다.
시간이 흐르자, 밖에 있던 사화의 눈동자엔 희열의 빛이 맴돌았다. 천무지체 연성관 밖으로 흘러나오는 불순물이 섞인 검은 피를 발견한 덕분이었다.
“아주 황홀할 지경이네.”
천무지체 연성관은 그야말로 기보 중의 기보였다.
사화는 여소평이 진정으로 여운을 후계자로 생각하고 있음을 알게 됐다.
여중포에게 보고할 사항이 생겼다. 물론 이 천무지체 연성관에 대한 건 쏙 빼놓을 것이다. 영약을 먹인다는 정도로 둘러대면 될 성싶었다.
몸에 좋은 건 혼자 먹는 법이지.
사화는 들뜬 얼굴로 천무지체 연성관이 어서 열리길 기다렸다.
세 시진이 흐른 뒤.
여운이 멍한 눈빛으로 천무지체 연성관에서 나왔다.
“날 이렇게 애태우다니, 기다리다 목 빠지는 줄 알았잖아!”
뾰족한 음성과 달리 얼굴엔 기쁨이 그득했다. 드디어 그녀의 차례가 온 것이다.
꽈악.
여운의 완맥을 쥔 그녀는 재차 확인했다. 놀랍게도 몸의 상태는 더욱 좋아졌다. 혈맥도, 내공도 더욱 정제되어 있었다.
도저히 의심할 수 없는 상황이나, 천려일실이라 했다.
탁, 탁.
혹시나 싶은 사화는 여운의 마혈과 아혈을 제압하였다. 거기다 거무튀튀한 검은 단약까지 먹였다. 이미 여운이 어떻게 작동시키는지 본 그녀였기에 주저함이 없었다.
“호호, 거기서 멍하니 지켜보라고. 이 누이가 새로이 태어날 모습을 말이야. 이것만 있으면 무공수위를 올리는 건 물론, 더욱 순도 높아진 내공으로 돌아올 테니까.”
완벽해질 주안공을 떠올린 사화는 멍한 눈빛의 여운을 만족스럽게 쳐다봤다.
오래 사는 것도 모자라, 예뻐지고 젊어질 수 있는데 이를 마다할 여인이 있을까.
달칵, 달칵.
천무지체 연성관의 기관장치를 조작한 사화는 서둘러 관짝 안으로 들어갔다.
덜커덩.
사화는 관짝의 문이 닫히는 걸 지켜보며 만면에 미소를 띠었다.
“더 강해지고 예뻐질 수 있는데, 고통 따위야 아무렴 어때?”
빼곡히 들어선 대침들을 그녀는 대수롭지 않게 훑어봤다.
드드드드.
천무지체 연성관이 작동했다.
“크윽, 크읏!”
생각보다 고통스러웠지만, 그녀는 참을 수 있었다. 이마 위의 힘줄이 지렁이처럼 툭 불거져도, 앞으로 얻을 엄청난 효과를 기대하며 감내했다.
잠시 후.
여운의 등 뒤로 나타난 검은 음영이 있었다. 정해진 시간이 되자 실혼인이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천무지체 연성관이 끝날 시간에 맞춰 나타난 실혼인은 손을 뻗었다.
타탁.
가볍게 손을 휘둘러 여운의 마혈과 아혈을 풀어줬다.
“후우.”
여운이 십년감수했다는 듯이 긴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곤 실혼인이 건넨 백일야화를 받아들였다.
“······.”
실혼인은 말없이 여운의 등 뒤에 시립했다. 천무지체 연성관이 작동하는 걸 보면서도 아무런 감흥이 없는 듯 보였다.
이를 알 리 없는 사화는 제 온몸을 관통하는 대침들이 주는 고통에 바들바들 떨고만 있었다. 여운이 그랬던 것처럼 그녀도 어서 빨리 끝나길 기다렸다.
여운은 사화가 들어있는 천무지체 연성관을 차가운 눈빛으로 바라봤다. 여소평의 기억에 따라 천무지체 연성관을 조작하기 시작했다.
달칵, 달칵!
드드드드드드―
괴이쩍은 작동음에 안에서 짤막한 비명이 터져 나왔다.
“꺄악!”
경악한 사화가 내지른 비명이었다. 하지만 움직일 순 없었다. 천무지체 연성관 안에서 이미 마혈이 제압당한 상태였기 때문이다.
사화는 혼란스런 얼굴로 눈알만 뒤룩뒤룩 굴렸다.
“이, 이게 대체 어떻게 된 거지?”
두려움이 잔뜩 깃든 목소리다. 뭔가 잘못됐음을 느낀 그녀였다.
스윽.
여운은 손으로 천무지체 연성관의 윗부분을 가볍게 쓸었다.
“어떻게 되긴 이제 끝장난 거지.”
“뭐, 뭐?”
마혈과 아혈을 제압당했던 여운이었다.
사화의 턱살이 부르르 떨렸다.
“부, 분명 마혈과 아혈을 제압했는데. 어, 어떻게?”
사화의 머리가 팽팽하게 돌아갔다.
섭혼술은 대체 언제 풀린 거지?
이내 정체불명의 고수에 대해 생각이 미쳤다. 자신이 너무 안일하게 생각한 것이다. 하지만 사화는 믿는 구석이 있었다. 숨을 몇 번 고르더니, 경직된 얼굴로 짜랑짜랑한 웃음을 터트렸다.
“호호, 동생 그거 알아?”
“뭘?”
“이 누이가 천무지체 연성관에 들기 전 동생에게 먹인 단약이 실은 아주 지독한 독약이란 걸.”
“그래?”
“그렇다마다, 그걸 해독하는 방법은 유일하게 이 누이만 알고 있다고. 그러니까······.”
“살려달라?”
“아니지, 동생이 살려달라고 빌어야지.”
자신만만한 목소리를 낸 사화는 확실히 치밀했다. 여전히 상황의 주도권은 그녀가 쥐고 있는 것만 같았다.
하지만 상황은 바뀌었다.
여운은 피식 웃었다.
“살려달라고 하면, 살려줄 건가?”
“그건 동생이 하는 것 봐서지.”
사화는 그럼 그렇지란 표정을 지었다. 열다섯 애송이를 요리하는 건 그녀에게 일도 아니었다.
“그럼 직접 알아내는 수밖에 없겠군.”
“뭐, 뭐?”
“워낙 오랫동안 사셔서 머리가 잘 안 돌아가는가 본데. 지금 급한 건 내가 아니야. 당신이지.”
“내가 해독약에 대해 말해줄 것 같아? 혀를 깨물고 죽는 한이 있어도 절대로 발설하지 않을 거라고! 그리고 내가 죽으면 여중포 님이 가만히 있을 것 같아?”
악을 바락바락 쓰는 사화의 말은 일견 타당했다.
여운은 조금도 당황하지 않았다.
“내가 당신을 왜 죽여?”
“그럼 당연히 그래야지. 그렇지 않으면 독약을 절대 해독 못 시킬 테니까. 쓸데없는 짓이걸랑 하지 말고, 어서 날 꺼내도록.”
철컹, 철컹.
여운이 순순히 따르는 듯하자 사화는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하지만 이어진 여운의 목소리는 그녀의 얼굴에 핏기를 가시게 했다.
“하나부터 열까지 알아서 불게 될 거다. 이 천무지체 연성관은 원래 다른 이름이 있었다더군.”
“뭐, 뭐라고?”
“지옥관(地獄關). 천무지체 연성관보다 수배나 되는 고통이라더군.”
이름만 들어도 끔찍한 광경이 절로 그려진 사화는 온몸을 부르르 떨었다. 새삼 천무지체 연성관이 줬던 격통이 떠올랐다.
“네, 네가 나한테 이러고도 무사할 것 같아! 행여 내가 죽기라도 하면 여중포 님이······!”
“죽는 건 아니고 분근착골보다 더한 고통을 겪을 거야.”
“부, 분근착골?”
그게 어떤 건지 잘 알고 있는 그녀의 눈빛이 흔들렸다.
여운의 말은 계속됐다.
“그래, 네 근맥은 뒤틀리기 시작할 테고. 시간을 지체하면 할수록 폐인이 되는 거지. 넌 악독한 마녀답게 기어이 버틸 테고. 결국, 버티다 버티다 백치가 되겠지. 강호에 마공을 익힌 사람 중 그런 사람들이 여럿 있다지? 흡정공을 익힌 네가 백치가 되면 어떨까?”
“······!”
싸늘한 여운의 목소리가 이어질수록 사화는 사색이 되었다.
“여중포도 강호인들처럼 그리 생각하게 될 거야. 넌 그냥 마공의 폐해로 퇴물이 된 마인 중 한 명으로 남게 될 거니까.”
“으, 으으.”
천무지체 연성관 안에서 사화의 울음 섞인 신음성이 들려왔다.
톡톡.
차가운 미소를 지은 여운이 천무지체 연성관을 손톱으로 살짝 두드렸다.
“시간은 많으니 천천히 생각해보라고.”
“······!”
사화는 저도 모르게 침을 꿀꺽 삼켰다. 폐쇄된 공간에서 이어지는 차가운 목소리에 심장이 오그라드는 것만 같았다.
“어차피 이곳에 찾아오는 이는 너 외엔 없으니까.”
3
“흐윽.”
고통 어린 신음성을 낸 사화는 겉보기엔 멀쩡했지만, 내부의 근맥은 상할 대로 상해있었다. 그보다 더 심각한 건 정신상태였는데, 머리 쪽에 꽂힌 대침들이 원인이었다.
철컹, 철컹.
기관장치가 작동하는 소리와 함께 관짝이 활짝 열렸다. 제 발로 걸어나온 여운과 달리 사화는 그러질 못했다.
총기가 사라진 눈빛과 바들바들 떨리는 사지.
자그마치 세 시진.
사화에겐 억겁과 같은 시간이었다. 밑천을 모조리 털어내기에도 충분했고.
흐리멍덩한 사화에게서 모든 걸 뽑아낸 여운은 심유한 눈빛으로 그녀를 내려다봤다. 그리고 그녀의 품속을 뒤적여 작은 단약 하나를 찾아냈다.
꿀꺽.
여운은 그걸 단숨에 집어삼켰다. 뒤이어 백일야화도 삼켰다.
털썩.
가부좌를 튼 여운은 운기행공을 시작했다. 이미 사화에 대한 걱정 따윈 저만치 치워놨는지 행동에 주저함이 없었다.
잠시 후.
여운은 운기행공을 마무리하고 일어났다. 그리고 사화의 말에 한 치의 거짓도 없음을 알게 됐다.
“미안하게 됐군.”
내뱉은 말과 달리 조금도 미안하지 않은 표정이었다.
사화가 봤다면 분개하다 못해 이를 갈았겠지만, 이미 그녀의 이지는 사라져 있었다.
덥석.
그저 여운이 잡아끄는 대로 일어났다.
사화는 멍한 눈빛으로 침만 질질 흘렸다.
여운은 사화가 그랬던 것처럼 그녀의 완맥을 틀어쥐었다. 그리곤 사화가 떠벌린 방법대로 진기를 운용하기 시작했다.
흡정공.
원래는 방중술로 펼쳐야 할 희대의 마공이 여운의 손을 통해 발현됐다.
“흡자결.”
백치가 되기 직전 사화가 떠벌인 구결대로 운용해보니, 놀랍게도 여운이 쥔 완맥을 따라 사화의 진기가 흘러들어왔다.
혼탁해질 대로 혼탁해진 진기였지만, 여운은 추호도 걱정하지 않았다.
천무지체 연성관.
그 혼탁함을 정제해주고도 남을 기보가 바로 눈앞에 있었다. 해서 느릿하지만, 천천히 그녀의 진기를 흡수했다. 물론 어느 정도 효용이 있을지 모르나, 없는 것보단 나았다.
어차피 빈 거죽만 남은 그녀에게 내공은 무용지물이었으니까.
좋은 곳에 써주면 됐다.
여운은 깊게 가라앉은 눈빛으로 흡자결을 계속해서 운용했다.
강호인들이 알면 기함하고도 남을 마공인 흡정공.
그걸 취한 여운은 별 감흥이 없는 표정이었다.
생각보다 방대한 내공을 다 흡수하려면, 못해도 칠 일은 걸릴 듯했다.
정공법인 정사를 통한 흡정공을 운용한다면, 단숨에 빨아들일 수 있었다.
여운은 당연히 그럴 생각이 없었다.
급하게 먹는 밥일수록 체할 것이고, 시간을 천천히 들여야 할 이유도 있었다. 천무지체 연성관을 통해 정제과정은 필수였고, 사화랑 관계를 맺고 싶은 생각도 아예 없었다.
“흐읍.”
여운은 단전에 십 년 내공이 쌓이자, 사화의 완맥을 놓아줬다.
“······!”
순간 사화에게 생긴 변화에 여운이 놀랐다.
기름진 검은 머리카락에 윤기가 사라져 있었다. 머리카락이 점점 하얗게 세기 시작한 것이다.
여운은 그 모습에 한숨을 내쉬었다. 죄책감이 아니었다. 어차피 부정한 방법으로 내공을 쌓아온 그녀였다. 수많은 희생자를 통해서 말이다.
“자업자득이지.”
여운은 그리 중얼거리고는 그녀를 한쪽으로 치워뒀다.
사화는 별다른 저항 없이 넋이 나간 얼굴로 한쪽 벽면에 서 있었다.
여운은 그녀의 마혈을 짚은 뒤, 휴식을 취했다. 한 시진 뒤에 도로 천무지체 연성관에 들기 위해서다.
실혼인은 백일야화를 준 뒤 이미 자취를 감춘 상태.
한 시진이 지난 뒤.
여운은 주저 없이 천무지체 연성관에 들었다. 앞으론 연이어 들 거 없이 연성관에 들기 전에 사화의 내공을 흡수할 것이다.
일단 급한 불은 꺼야했다.
철커덩.
천무지체 연성관이 문이 닫혔다.
여운은 안에서 숨을 몰아쉬었다.
냉혈한이 따로 없는 제 모습에 고소가 절로 지어졌지만, 어쩌겠나.
죽고 죽이는 무대 위에서 살아남으려면, 남을 짓밟고 올라서는 게 당연했다.
한 푼의 값어치도 안 되는 자비심은 이곳에선 사치였다.
내가 죽느냐 아님, 남을 죽이느냐다.
비로써 자신이 죽고 죽이는 나선 위에 올랐음을 깨달은 여운의 눈빛 속에 각오가 자리했다.
취해야 한다면 취할 뿐이다.
칠 일 뒤.
호피로 된 장포를 두른 근육질의 장년인이 턱을 괴고 있었다. 부복한 수하가 올린 보고가 썩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눈살이 찌푸려져 있었다.
“정말 그 노괴가 폐인이 됐다고?”
“예, 머물던 내실에서 발견됐을 땐 이미 내공을 잃은 뒤였습니다. 아무래도 주화입마에 빠진 듯이 근맥마저 뒤틀려 있었습니다.”
불안정한 마공을 익힌 마인들의 최후라면 최후인데.
어딘가 석연치 않았다.
여중포는 전혀 생각지도 않은 그녀의 최후에 고심에 빠졌다.
수하인 진호충은 그런 여중포의 생각을 방해하지 않기 위해, 숨소리마저 죽였다.
일각여가 흘렀을까.
“어찌 생각하나?”
“······.”
여중포가 묻는 말에 진호충은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분명 보이는 바대로 올린 보고였는데도, 묻는다는 건 다른 의견을 묻는 것이었다.
진호충의 머릿속으로 아예 두문불출하고 있는 여운이 스쳐 지나갔다.
큰 관심을 두지 않던 상대였는데, 어째서 그 소년이 떠오른 걸까.
그건 여중포도 마찬가지였는지 진호충에게 넌지시 물었다.
“그 애송이에게 당했을 거라 보나?”
하지만 상대가 상대인지라 묻는 여중포도 그리 큰 기대는 하지 않았다. 단지 사화가 여운의 시비로 잠입해있었다는 사실 때문에 물은 것뿐이다.
여운에게 희대의 마녀라는 사화가 당했다고?
차라리 길가다가 벼락을 맞아 죽을 확률이 높아 보였다.
여운이 그녀 정도 되는 노마두를 죽인다는 건 말도 안 됐다.
그녀는 강호백대고수 중 하나였다.
진호충 또한 그리 생각했지만, 그의 직감이 계속해서 속삭였다.
“한 번 확인해 보는 게 어떨까요?”
“직접?”
여중포의 눈빛이 사나워졌다. 그가 여운을 찾아가는 것 자체가 자존심을 무척 상하게 하는 일이었다.
그에게 여운은 어느 때고 치워버릴 수 있는 존재였다. 해서 여소평이 죽을 날만 기다리고 있었는데, 찾아간다는 건 말도 안 됐다.
솔직히 관심을 두기도 싫었다.
놈은 아예 처음부터 없었던 존재여야 했으니까.
여소평의 의도를 알기 위해 사화를 통하긴 했으나, 주위에 놈을 신경 쓰고 있다는 사실을 알리긴 싫었다.
그런데 진호충이 미소를 지었다.
방도가 있는 것이다.
“삼 일 뒤, 여진 소협의 생일연회가 있습니다.”
“흐음.”
나쁘지 않은 생각이었다.
끌린 듯한 여중포를 본 진호충이 제가 들은 바를 보고했다.
“그렇지 않아도 여진 소협이 그놈을 무척 보고 싶어한답니다.”
“어째서?”
여중포의 물음에 진호충이 싸늘한 미소를 지었다.
“그놈이 매화당주를 찾아갔다고 합니다.”
“흐음.”
어렸을 적부터 오냐 오냐 키워서 그런지 독점욕이 남다른 아이였다. 특히 무공과 여인에 있어서 그런 면모를 더욱 보였다.
차남을 떠올린 여중포가 피식 웃었다.
“좋다, 어디 한번 무대를 마련해보도록.”
4
“날 초대한다고?”
여운은 붉은색 배첩을 보고 골똘히 생각에 잠겼다. 여중포의 차남 여진이란 자가 연회에 자신을 초대한 의도가 궁금했다.
명목상으로는 문제 될 게 없었다.
같은 식구라면 생일연회에 참석해 축하해주는 게 당연했으니까.
문제는 지금껏 단 한 번도 얼굴을 비친 적이 없는 여진이 초대했다는 것이다.
석연치 않은 구석이 많다.
“······!”
순간 여운의 눈동자에 이채가 흘렀다. 폐인이 된 사화에 생각이 미친 것이다. 여진 쪽 인물들과 접점이 있다면 그것 하나였으니까.
비로소 여운은 자신을 초대한 연유를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었다.
“날 파악하고자 함이군. 사화의 일도 확인할 겸.”
그렇다면 이건 여진이 주도한 일이 아닌, 더 윗선에서 진행한 일일 공산이 크다.
여운은 자신이 어떤 태세를 취해야 할지 생각해봤다.
일단 공식적인 직함은 소가주였으나, 가문 내에 등씨 형제를 제외하고는 아무도 인정하지 않았다.
그렇다면 그곳에 오는 모든 인사는 적이나 다름없었다.
유일하게 초유하가 호의적이긴 해도, 여운은 매화당주인 그녀 또한 자신처럼 빛 좋은 개살구란 걸 알고 있었다. 연회에 온다고 해도 냉정하게 말해서 그녀는 도움이 안 됐다.
“나중에 큰 쓰임이 있을 테지만, 지금은 아니지.”
등유를 데려가면 어느 정도 숨통은 트이겠으나, 배첩에 적힌 후기지수들의 모임이란 단어가 걸렸다. 동년배들만 온단 소리다. 우사를 데려올 생각은 꿈에도 하지 말란 뜻이기도 했고.
고민이 길어졌다.
“소가주님, 손님이 찾아오셨습니다.”
처소 밖에서 들려오는 어린 시비의 목소리에 여운은 상념에서 깨어났다.
등유를 제외하고 오는 이 하나 없었는데 누굴까.
뜻밖의 방문자였지만, 여운은 일단 몸가짐을 바로 했다.
“들라 하여라.”
자박자박.
조심스러운 옥보(玉步) 소리에 발맞춰 성큼성큼 걷는 다부진 발소리가 이어졌다.
기감에 잡힌 건 두 여인이었고, 무공 수위는 이류 언저리였다.
여운도 잘 아는 이들이었다.
달칵.
내실의 문이 열리자 청초한 여인이 방긋 웃으며 들어왔다.
“그간 잘 지내셨나요?”
공수를 들어 올리며 예를 표하는 그녀에 여운도 마주 공수를 들었다.
“예, 초 당주가 어인 일로 이곳에.”
“마침 지나가는 길에 잠시 들렸어요. 혹 방해가 된 건 아닌지요?”
“그럴 리가요. 온 김에 차라도 한잔하고 가시죠.”
“······!”
초유하를 따라 공수를 취한 설린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여운의 기도가 예전과 달리 크게 느껴지지 않은 탓이다. 그땐 눈에 정광이 넘쳐흘렀는데, 지금은 흐릿한 안개에 가린 것처럼 평범하였다.
고개를 갸우뚱거리는 설린을 본 여운이 입가에 미소를 지었다. 무명심법으로 내공을 사지백해로 흩어버린 게 효과가 있었다. 물론 내공이 완전히 사라진 게 아니었다. 흡자결을 운용하면 언제 어느 때고 다시 단전으로 모을 수 있었다.
“일단은 앉으시지요.”
“네에.”
초유하도 여운이 권한 자리에 앉으면서 의구심이 섞인 시선을 보냈다.
그럴 만도 했다.
마주한 그녀들의 눈에 여운이 달리 보인 까닭이다.
눈높이가 살짝 달라져 있었다.
예전보다 여운의 신장이 커진 듯 보이자, 초유하가 그윽하게 웃었다.
“한창 성장기이셔서 그런지 볼 때마다 새롭네요.”
설린도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못해도 육 척(尺)은 되어 보였다.
천무지체 연성관을 마무리한 직후에 얻은 육신의 변화였다.
“아, 한창 성장기라 그런가 보지요.”
여운은 두리뭉술하게 넘어갔다.
그녀들이 보기엔 엄청난 성장세였는지라, 둘 다 눈이 한껏 커져 있었다. 소년의 태를 벗어낸 미청년이 눈앞에서 웃고 있으니 당연했다.
설린의 눈동자에 이채가 흘렀다.
피부가 아주 매끄러워진 것도 모자라, 귀티가 넘쳐흘렀다. 좋은 의복을 갖춰 입으니 그야말로 귀공자였다. 처음 보는 이라면 여운을 신비금가의 소가주로 인정하고도 남았다.
하지만 무공수위는 지극히 평범해져 있었다.
그게 의미하는 바가 뭘까.
설린이 머리 터지게 고민하고 있을 무렵.
초유하는 여운의 변화를 크게 괘념치 않아 했다. 보면 볼수록 신비한 소년 아니, 청년을 찾아온 용건이 더욱 중요했다.
“혹 배첩을 받으셨는지요?”
“예, 보다시피.”
여운이 배첩을 들어 보였다.
초유하는 순간 어두운 낯빛이 되었다.
“설마 했지만, 역시나였군요.”
“역시나라니요.”
“그게······.”
말을 잇지 못하는 초유하에 여운이 팔짱을 낀 채 잠자코 기다렸다.
곧 시비가 차를 대령해왔고, 세 사람은 제 앞에 놓인 찻잔을 말없이 바라봤다.
잠시 뜸을 들이던 초유하가 입술을 뗐다.
“이번 여진 소협이 주최하는 연회에 가시지 않으면 안 될까요?”
“어째서죠?”
염려 섞인 말이었기에 여운은 그 이유가 궁금해졌다.
초유하가 미안한 시선을 보내고 있었다.
“실은 여진 소협과 저 사이에 정혼 이야기가 오고 가고 있었습니다.”
“그래요?”
“네.”
여운은 한숨과 함께 대답하는 초유하를 지그시 바라봤다.
자신을 도와준 등호의 뜻이 정혼에 있다면 여진에게 갈 여인이었다.
그녀에게 등호는 형언할 수 없는 은혜를 베푼 은인이니까.
물론 등호는 절대 그녀를 위하는 호인이 아니었다.
여소평을 위해 아주 지저분하고 더러운 일을 벌이고도 남을 악인이지.
코웃음이 절로 나올 듯해 여운은 찻잔으로 시선을 돌렸다.
얼굴을 뚫어지게 살피는 설린의 집요한 시선이 거슬리긴 했지만, 지금 중요한 건 그딴 게 아니었다.
“한데 정혼이야기가 나와 무슨 상관이오?”
초유하는 한숨을 포옥 내쉬었다.
“여진 소협.”
“그가 왜요?”
“그자가 소가주님께서 저번에 절 찾아온 일 때문에 배첩을 드린 걸로 생각되거든요.”
“그래요?”
“네, 소가주님을 좋지 않은 목적으로 불렀을 공산이 커요. 아마도 망신을 주려함이 아닐까 해요.”
생각지도 못한 정보에 여운은 입꼬리를 올렸다. 하지만 진의는 그런 옹졸한 놈이 원인이라고 볼 순 없었다.
단지 남정네의 추악한 질시를 이용한 여중포 쪽 인물의 계략이겠지.
얄팍하다.
그리고.
“정말 옹졸하군.”
“······!”
난데없는 말에 초유하가 서둘러 말했다.
“낮말은 새가 듣고, 밤말은 쥐가 듣는다고 했어요. 도처에 귀가 있음을 잊으셔선 안 돼요.”
당황한 그녀가 걱정하는 건 시비를 비롯한 하인들이었다.
여운은 피식 웃었다.
“지금 남 걱정할 때가 아닌 듯하오만.”
“······!”
초유하의 고운 눈꼬리가 가볍게 떨렸다.
설린이 눈을 쫙 찢었다. 물론 초유하에 신신당부 받았기에 나서는 일은 없었다.
초유하는 냉랭한 여운의 반응에도 고매한 미소를 유지했다.
“제 조언이 고까우셨다면 사과드릴게요. 저로 인해 곤란한 상황을 겪으실까 봐. 걱정돼서요.”
“······.”
그녀의 표정과 목소리엔 진심이 뚝뚝 묻어났다.
여운은 한쪽 입꼬리를 올렸다.
“이만 일어나지요.”
“네, 하지만 연회에 참가하시는 걸 재고······!”
“하하.”
여운은 처음으로 소리 내어 웃었다. 인정이 있는 사람이 이렇게 허술할 수도 있다는 사실이 못내 우스웠다.
“뭐가 우습죠?”
날 선 목소리를 낸 건 설린이었다.
여운이 두 눈을 크게 뜬 초유하를 향해 말했다.
“그런 옹졸한 놈이 걱정된다면, 찾아오지 말았어야지.”
예를 거둔 평대에 설린이 벌떡 일어났지만, 여운은 처음부터 그녀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초유하는 얼굴을 살짝 붉혔다.
형언키 어려운 미인이 부끄러워하는 모습은 사뭇 자극적이었다.
“덕분에 이곳을 또 한 번 찾은 걸 알게 될, 그 옹졸한 놈의 질시는 배가 되겠군. 낮말은 새가 듣고, 밤 말은 쥐가 들을 테니.”
“······.”
초유하가 묘한 눈빛으로 응시했다.
여운은 팔짱을 낀 채 물었다.
“정말 이곳을 찾은 저의가 뭐지? 날 진심으로 생각해서 나선 길이 아니란 건 당신도, 나도 잘 알고 있잖아.”
여운을 보는 초유하의 눈빛도 점점 달라지기 시작했다.
# 第 五 章
1
화려한 연회실 안이 시끌벅적하다.
“소가주님, 경축하옵니다.”
과장된 언행과 행동으로 고개를 숙이는 후기지수를 필두로, 몇몇 후기지수들도 그를 따라 소가주란 직함을 함부로 입에 담았다.
그 대상은 당연히 연회의 주인공인 여진이었다.
가문 내 어른이 들었다면 언행을 조심하라고 할 법도 했지만, 오늘 이 자리엔 여진의 동년배들만 자리했다.
하여 그 말을 들은 여진은 당연하다는 듯이 껄껄거렸다. 물론 내뱉은 말은 본심과 달랐다.
“추 형, 그 무슨 망발인가? 버젓이 다른 소가주가 살아있는 마당에. 아무리 추가장의 기세가 하늘을 찌른다지만, 그래선 아니 되네.”
“그럼 소가주님을 소가주님이라고 부르지. 대체 뭐라 부른답니까? 안 그렇소, 여러분?”
“옳소!”
왁자지껄하게 웃음을 터트리며 자리한 태반이 동의를 표했다.
여진이 손사래를 쳤다.
“장남도 아닌 차남인 내가 소가주라니, 농이 지나치네.”
“십 년도 전에 연통이 끊긴 장남보다야 차남이 소가주 위에 오르는 건 당연한 거 아닙니까?”
가려운 데만 긁어주는 추영하였다.
“사람 참, 못 말리겠군. 오늘 내 생일이랍시고 너무 띄워 주는군.”
나무라긴 했지만, 여진은 흥에 겨운 얼굴로 어깨를 두드려줬다.
또한, 그들이 준비해온 선물들도 여진을 무척이나 만족스럽게 했다. 데리고 온 미녀들의 아리따운 자태는 더욱 흥취를 더해줬다.
이곳 성안에서 제일 유명한 기녀들은 죄다 끌고 온 듯, 두 눈이 휘둥그레지게 치장한 여인들이 앞다투어 여진을 칭송했다.
“갈수록 헌앙해지세요. 소가주님.”
“소가주님이 저희 소녀들의 방심을 이토록 설레게 하면. 소녀들 오늘 밤잠 다 잤사옵니다.”
설상가상으로 기녀들마저 소가주란 단어를 입에 담기 시작했다. 대세에 편승한 언사였지만, 그녀들이 입에 담으니 마치 민심이 그에게로 향한 것 같은 착각마저 들었다.
여진은 히죽 웃고는 기녀들의 엉덩이를 일일이 두들겨줬다.
“내 연회가 끝나는 대로 모조리 불면증에 걸리게 해줄 터이니. 기대하거라.”
음흉한 눈빛과 손장난에 눈살을 찌푸릴 만도 했지만, 기녀들은 오히려 짜랑짜랑 웃으며 팔짱마저 끼었다.
여진의 입이 헤 벌어지는 건 당연한 수순이었다.
추영하는 그 모습을 보며 데려오길 잘했다는 생각에 다른 후기지수들을 쳐다봤다.
역시 그에게 최고의 선물은 가슴을 흔들어대는 아름다운 기녀들이었다.
여인이라면 사족을 못 쓰는 그다웠다.
추영하는 여진의 갈수록 수위를 높여가는 음담패설에 장단 맞춰주다가, 음흉한 미소를 지었다.
연회장의 한쪽 구석에서 홀로 앉아있는 여인을 본 까닭이다.
초유하.
여진과 정혼 이야기가 오고 간다고 했지.
추영하는 여진을 슬쩍 바라봤다. 누구 들으라는 듯이 과장된 언사를 일삼는 여진의 모습이 보였다.
제 딴에는 여인의 질투심을 유발하겠다는 뜻이겠지만, 추영하가 보기에 초유하는 조금도 이쪽을 보고 있지 않았다. 간혹 눈길이 머물 땐 마치 벌레를 보는 듯한 눈초리였다.
그걸 여진이라고 모를까?
여진은 그럴수록 목소리를 높여댔다. 행동도 보란 듯이 더욱 질펀하게 굴었다.
“악취미야.”
추영하는 피식 웃고는 주위를 둘러봤다. 신비금가의 위세를 증명이라도 하듯 형형색색의 장식물들이 곳곳을 수놓았다. 그 값어치 하나만 해도 값을 헤아릴 수가 없었다. 만약 추가장에서 연회 한 번을 이 정도 규모로 했다간, 허리가 휘다 못해 뚝 부러질 것이다.
저벅.
여진의 비위를 잘 맞춰야겠다는 생각이 든 추영하가 향한 곳은 한쪽 구석이었다.
여진의 의도 하에 초유하가 홀로 앉아있게 된 자리였다.
모멸감을 줘 현 자신의 위치가 어딘지 똑똑히 알게 하려는 저급한 발상.
그걸 잘 알기에 초유하는 더욱 허리를 꼿꼿이 세웠다. 흐트러짐 없는 정자세여서 그런지, 이 자리에서 단연 빼어난 미모가 더욱 빛을 발했다.
금붙이와 노리개로 전신을 치장한 기녀들도 초유하 앞에선 보름달 앞의 반딧불이었다.
추영하는 속으로 깊게 감탄하고는 그녀의 앞으로 갔다.
초유하의 속눈썹이 위로 스르르 올라갔다.
여진이 어째서 그녀를 괴롭히지 못해 안달이 났는지 알 것 같았다. 시선을 받은 것만으로 심장이 떨릴 지경이다.
“잠시 동석해도 되겠소?”
“아뇨.”
추영하는 단칼에 거절당하자 할 말을 잃었다.
꿀 먹은 벙어리처럼 우물쭈물 대고 서 있자, 뒤에서 지켜보던 여진마저 킥킥댔다. 추영하가 자신을 위해 뭔가 하려고 한단 걸 알고는 있었지만, 시도조차 못 해보고 저리 서 있는 게 말도 못하게 우스웠다.
“그러지 말고, 잠깐이면 되오.”
“됐으니, 그만 가보세요.”
냉막 어린 표정에서 얼음가루가 풀풀 날렸다.
이런 푸대접을 처음 받아본 추영하는 울컥했지만, 아름다운 그녀의 눈동자를 보자니 있던 응어리도 풀렸다.
묘하게 사내의 정복심을 자극한달까.
추영하는 짓궂은 미소를 지었다. 이왕 이렇게 된 거 잘 됐다 싶은 것이다.
“에헤이, 그러지 말고. 잠깐 이야기라도 나눕시다. 오늘같이 기쁜 날 혼자 청승 떠는 것처럼 우울한 짓이 어딨겠소?”
쪼르륵.
추영하는 술병을 잡아 그녀의 빈 잔을 채웠다.
“소가주님께서 주신 잔이다 생각하고, 같이 한잔합시다. 내 웬만해선 신경 안 쓰는데, 너무 혼자 그러고 있으니까. 안쓰러워서. 자, 이 잔만 마시면 내 신경 끄고 갈 길 가겠소.”
“······.”
초유하는 말없이 추영하를 노려봤다. 이러는 의도 따윈 진즉 알고 있었다.
옆에 앉아, 바짝 다가오며 지분거리려는 행동만 봐도 알 만하잖은가.
“누가 소가주란 거죠?”
싸늘한 목소리에 추영하는 박장대소를 터트렸다.
“누구긴 누구겠소. 오늘 이 자리의 주인공이지. 아무리 이름뿐인 직함이라지만, 매화당주라면서 그것도 모르오? 정세를 보는 눈이 이리 어두워서야. 어디다 쓰겠소?”
주위에서 웃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기녀들이 더욱 짜랑짜랑하게 웃어젖혔다.
“······.”
모욕을 주기로 작정한 저급한 언사에 초유하는 치맛자락을 꽉 움켜쥐었다.
“자자. 너무 정곡을 찔렀다 하여 섭섭하게 생각하지 마시고. 술 한잔하고 이 나와 함께 소가주님의 생일은 축하하러 갑시다. 이런 자리에 왔으면 분수에 맞게 행동을 해야지.”
덥석.
그러면서 손까지 잡으려 했다. 기녀를 대하는 듯한 언사와 행동에 기어이 초유하가 폭발하고 말았다.
찰싹.
잡으려는 손을 매섭게 쳐낸 것이다.
쾅.
추영하는 그대로 탁자를 내리쳤다. 벌게진 얼굴로 길길이 날뛰었다.
“정말 보자보자 하니깐. 너무하는군.”
“소가주님?”
초유하의 커진 두 눈을 본 추영하의 입가에 저열한 미소가 걸렸다. 드디어 기다리던 순간이었다. 그녀 앞에 영웅처럼 나타난 여진에게 면박을 받고 물러나면 됐는데.
덥석.
뒷덜미를 낚아챈 손길이 좀 우악스러웠다.
이거 한 대 맞아줘야 되겠구나 싶은 추영하는 바짝 긴장했다.
하지만 상대는 그를 잡아당겨서 그녀에게 떨어트려 놓을 뿐이었다.
추영하가 얼떨떨한 표정으로 뒤를 돌아봤다. 표정이 딱딱하게 굳은 여진은 저만치 서 있었다.
그럼 누구?
생전 처음 보는 겉만 번지르르 한 놈이 초유하의 옆에 바짝 붙어 앉았다. 그 행동을 보아 저놈이 제 뒷덜미를 잡은 놈이 분명했다.
하면 초유하가 말한 소가주님이?
그제야 상대가 누군지 알아챈 추영하였다.
여운은 초유하 앞에 놓인 술잔을 마셨다.
“내 정혼녀를 대신해서 마셔주지.”
청천벽력과 같은 말에 여진을 비롯한 후기지수들 모두가 놀랐다.
“그러니 이제 그만 껄떡대고 가 봐.”
여운은 멍하니 있는 추영하를 향해 빈 잔을 던져줬다.
휙.
물론 약간의 내력은 담았다.
2
퍼억.
둔탁한 소리와 함께 추영하가 나뒹굴었다.
무공을 익힌 추영하였기에 심상치 않음을 느끼고 내력을 끌어올렸다. 하지만 빈 잔에 담긴 내력은 추영하의 내력을 상회하였다.
“쿨럭, 쿨럭!”
추영하는 연회실 바닥에 엎드린 채 기침을 해댔다. 내부가 진탕된 덕분에 가벼운 내상을 입었다.
얼굴이 시뻘게진 추영하와 앉아있는 여운을 번갈아 보는 시선들.
망신을 당한 추영하를 보는 여진의 시선에 놀라움이 담겼다. 곧 그 놀라움은 일그러진 감정으로 바뀌었다. 초유하의 옆에 딱 달라붙어 앉은 여운의 모습이 가슴에 불을 지핀 것이다.
“누가 네놈의 정혼녀라고?”
여진이 걸어오며 물었다. 바닥을 쿵쿵 찍으며 다가오는 기세가 심상치 않았다.
무공을 익히지 않은 기녀들의 안색이 새파랗게 질렸다.
그 외의 후기지수들은 흥미롭다는 시선을 던졌다.
추영하가 망신을 당한 뒤 일으켜주는 이는 없었다.
여운은 그 모든 걸 눈에 담으며 슬며시 미소를 지었다.
“초 당주와 소가주 사이에 정혼이야기가 오고 간다며?”
“······!”
그 말에 좌중이 술렁였다.
여진은 똥 씹은 얼굴이었다. 여기에서 그를 부르던 호칭을 되짚어 주는 여운이었기에, 할 말을 잃은 것이다.
“여기에 온 객들은 물론이고, 저기 피곤해서 나자빠진 놈이 그랬잖아? 소가주라면 나인데 말이야.”
“······.”
추영하가 호칭한 소가주는 여진 자신이었다. 공식적인 직함도 아닌, 비위를 맞춰주기 위한 호칭이 오히려 여진을 할 말 없게 만들었다.
눈앞에 버젓이 소가주란 직함을 가진 놈이 존재했으니까.
여진은 한 자 한 자 끊어 뱉듯이 말했다.
“비천한 네놈이 언제까지 그 자리에 있을 성싶으냐?”
“글쎄, 한평생?”
“하!”
가벼운 대답에 여진이 코웃음을 쳤다. 이건 몰라도 너무 모르는 놈이다.
“꿈이 야무진 놈이야. 주제를 몰라도······.”
“남아대장부라면! 꿈은 크게 가져야지.”
제 말을 끊는 여운에 여진이 인상을 찌푸렸다. 위압적으로 쏘아봤지만, 여운은 조금도 위축되지 않았다.
여진이 씹어뱉듯이 말했다.
“그 꿈은 저승 길동무로 사이좋게 간 뒤에 꿔야 할 것이다.”
누군지는 빠졌지만, 저승 길동무가 와병 중인 여소평을 의미하는 건 이 자리의 모두가 알았다.
여진은 이어서 이죽거렸다.
“네가 기호지세(騎虎之勢)를 부릴 수 있는 것도 그때까지다.”
“호가호위(狐假虎威)가 맞겠지.”
호랑이 등위에 올라탄 형세란 뜻보다, 여우가 호랑이의 위세를 빌린다는 뜻이 맞기에 정정해준 여운이었다.
한심해하는 표정에 여진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여소평의 위세를 빌린다는 뜻으론 놈의 말이 맞았다.
제기랄.
주위에서 풋! 하는 소리가 들려오자, 여진은 목덜미까지 빨개졌다. 안 쓰던 문자를 쓰려다 되레 망신당한 터였다.
초유하마저 웃지 않으려 애쓰는 기색이 역력했다. 자신이 웃으면 도화선에 불을 붙이는 꼴이란 걸 잘 알아서다.
부들부들.
여진이 두 주먹을 피가 나도록 쥐었다.
여운은 무공만 죽도록 익혀 뇌까지 근육질이 된 여진을 향해 품속에 있는 물건을 던져줬다.
탁.
신경질적으로 그걸 낚아챈 여진.
“뭐냐!”
“선물.”
“네까짓 놈이 내게 선물을?”
명목상으로 초대받은 손님이니 선물을 준비해온 것이다. 하지만 이미 심사가 틀어진 여진은 인상을 구겼다. 마음 같아서는 이걸 짜증 나는 놈의 면상에 후려갈기고 싶었다.
여운이 어깨를 으쓱였다.
“마음에 들 거야.”
하나 보는 눈이 많았다. 일단 준비해온 선물을 확인은 해볼 참이었는데, 놈의 얄미운 목소리가 이어졌다.
“이, 이건.”
“기왕 나온 김에 서고에 들렸는데, 나보다 네게 더 필요한 물건인 것 같아서.”
꾸욱.
여진은 제 손에 들린 서책의 이름을 보고 바들바들 떨었다. 툭 불거진 손아귀, 얼마나 억세게 쥐었으면 서책에 구멍이 뚫릴 정도였다.
무공서적과 그걸 읽기 위한 글공부 외엔 서책과는 담을 쌓은 여진이었다. 거기다 놈이 준 서책은 어렸을 적 그에게 정신적 외상까지 남긴 물건 중 하나였다.
도덕경.
백부인 여소평이 순응하는 삶을 살라는 의도로 여중포의 자식들에게 선물해준 서책이기도 했다. 우연인지 의도한 건지 모르겠지만, 그걸 받아든 여진은 눈동자마저 흔들리고 있었다.
여운이 심드렁한 목소리로 비수를 꽂았다.
“거기에 마음에 새겨도 될 좋은 구절이 있더군. 욕심을 드러내지 말라, 백성의 마음을 어지럽지 않게 라고.”
즉, 소가주란 직함을 탐내 신비금가 내의 분란을 일으키지 말라는 경고였다.
북, 북!
여진은 그 자리에서 도덕경을 찢어발겼다.
“감히 나를 가르치려 들어?”
흉흉한 기세를 풍기는 여진은 감히 마주 보기도 두려울 정도였다.
적어도 초유하의 입장에선 그랬다. 여진이 풍기는 살기에 영향을 받았는지 한기라도 든 것처럼 몸이 바르르 떨렸다.
“······!”
스윽.
여운이 그녀의 손을 슬며시 잡아줬다. 여운을 통해 전해진 정순한 진기가 그녀를 안심시켜줬다.
토끼처럼 놀란 얼굴로 여운의 옆얼굴을 바라본 초유하.
그는 여전히 유들유들한 태도를 고수했다.
“가르치긴, 차라리 소귀에 경을 읽어주는 게 낫지.”
저러다 사달이 나면 어쩌려고.
초유하가 여운을 보는 시선에 걱정이 어리기 시작했다.
그걸 바로 앞에 있는 여진이 못 봤을 리가 없었다. 가슴을 태우는 듯한 질투심에 머릿속마저 새카맣게 탄 여진이 발길질했다.
쾅!
내력이 담긴 발길질에 탁자는 포탄에 얻어맞은 것처럼 박살이 났다.
“꺄악!”
갑작스러운 폭거에 놀란 기녀들이 손으로 얼굴을 감싸 쥐었다.
비산한 탁자의 나뭇조각이 초유하를 향해 쏘아졌다.
휘릭.
그 찰나에 초유하의 앞을 막아선 여운, 그대로 팔을 휘두르자 장포의 기다란 소매가 나뭇조각들을 튕겨냈다.
후두둑.
어느 하나 뚫지 못하고 그대로 떨어져 내렸다.
“괜찮소?”
여운의 나직한 목소리에 눈을 질끈 감았던 초유하가 고개를 들었다. 커진 봉목이 여운의 턱선과 오똑한 콧날, 깊은 눈동자에 차례로 머물렀다.
그는 여전히 웃고 있었다.
“······!”
“네놈 걱정이나 하거라!”
격노한 음성과 함께 초유하는 거센 살기가 자신들을 향해 닥치는 걸 느꼈다.
“좋은 대답은 여전히 유효하오?”
하지만 흉흉해진 상황과 달리 여운은 그녀에게 묻고 있었다.
찰나지간.
초유하는 좋은 대답이 자신이 말했던 ‘무(武)로 주목을 받아야 한다고 했던 말임을 알아차렸다.
-지금처럼 단 몇 달 새에 이리 달라진 기도를 보이심을 가문 내의 중요인사들이 알게 된다면, 어찌 될지는 모르죠. 신비금가가 금력가라고 해도 강호의 일원임에는 분명하니까요. 못해도 최악의 상황을 모면할 타개책은 되지 않을까요?
“유효하오?”
닥친 위기에도 여운은 여전히 묻고 있었다.
초유하는 흔들리는 눈망울로 말했다.
“너무 위험한 길일지도 몰라요.”
“상관없소.”
이미 죽고 죽이는 나선 위에 올라섰으니까.
여운은 신형을 돌렸다.
초유하는 여운이 싱긋 웃고 있음을 보았다. 그럼에도 걱정이 가시지 않아 외쳤다.
“배움은요?”
그 짧은 시간에 무공을 제대로 익혔느냐는 물음이었다.
여운은 고개도 돌리지 않은 채, 깍지 낀 손을 쭉 펴며 말했다.
“지금부터 배우겠소.”
3
어째서 여소평은 무명심법 외엔 다른 무공을 준비해놓지 않았을까?
그 해답은 여소평의 기억 속에 있었다.
⦙
“이, 이걸 정말 제게 주시는 겁니까? 백부님!”
여진은 제 앞에 놓인 무공서적을 보고 감격에 겨워했다.
천군공수(天君攻守).
오래전 천군(天君)이라 불리던 위대한 무인의 심득이 담겨 있는 무공으로, 강호에는 실전된 걸로 알려졌었다.
한데 그게 지금 눈앞에 있었다. 여진의 손이 떨리는 것도 그래서였다.
비록 여소평이 심득만 쏙 빼놓았다고 할지라도 그 값어치는 헤아릴 수가 없었다.
미진한 부분이 있다는 말에도 여진은 물론이고, 곁에 있는 여중포마저 눈에 탐심이 그득한 것만 봐도 답이 나왔다.
무공에 대해 욕심이 큰 여진은 그걸 집는 것조차 황송해했다.
“익히거라. 워낙 오래되어 미진한 부분이 있다지만, 너의 무재라면 충분히 채우고도 남을 터.”
“암요!”
드디어 그 책자를 집어든 여진은 눈물까지 글썽거렸다.
여소평은 메마른 미소를 지었다.
“내게 소용없는 물건이라고 주는 게 아니다. 너 또한 앞으로 가문의 중요한 일원이 될 테니, 빈틈없이 익히고 또 익혀라. 그리고 가문을 위해 그 힘을 쓰도록.”
“바, 반드시 그렇게 하겠습니다! 백부님.”
여진은 대례를 올리며 목 놓아 감사를 부르짖었다.
여중포는 강호일절 중 하나였던, 천군의 무공을 얻은 제 자식을 흐뭇하게 바라봤다. 여소평을 향해 깊숙이 묵례까지 할 정도로 은혜를 베풀어줘 고맙다는 뜻을 내비치고 있었다.
⦙
기억은 거기서 끝이었다.
여운은 남몰래 고소를 지었다.
만약 여중포가 여소평의 속내를 알았다면, 그랬던 자신을 쥐어 패고 싶었으리라.
빠진 심득은 여운의 기억 속에서 스멀스멀 떠오르는 중이었다.
어째서 가장 중요한 심득을 떼고, 천군공수의 틀만 여진에게 익히게 했을까.
그 이유를 아는 여운은 여소평의 심계에 감탄을 금치 못했다.
여소평이 와병에 들 시.
여운을 향해 칼날을 들이댈 게 분명한 여중포를 억제하기 위한 마음의 빚이었다. 제 자식을 끔찍이 아끼는 여중포에게 빚을 지워두면, 적어도 여소평이 살아있는 한 다른 생각을 품지 않을 것이다. 여소평이 죽었다는 게 알려지면 탐욕스런 승냥이는 이빨을 드러내고도 남았지만.
즉, 심득이 빠진 천군공수는 여중포를 향한 최소한의 억제장치였다.
또한, 주된 목적은 그것만이 아니었다.
연성을 마친 천무지체에 대한 시험 그 자체에 있었다. 정말 무공을 익히기에 최적화된 육체가 되었는지, 직접 부딪쳐 알아보려는 심산이다.
“백부님께서 친히 익히라고 하사해주신 천군공수로 네놈을 개박살 내줄 것이다.”
여진이 으르렁거리듯이 외치며 기수식을 취했다.
소가주란 빈껍데기 직함은 네놈이 가지고 있지만, 여소평에게 진정으로 인정받은 건 자신이란 뜻이다. 세간에 알려진 대로 여운을 소가주로 임명한 건, 병환으로 인한 노망에 불과하다는 외침이기도 했고.
여진이 한 말이 미친 파급효과는 어마어마했다.
“처, 천군공수!”
추영하를 비롯한 후기지수들도 천군공수에 대해 들은 바가 있었다.
오래전 실전된 걸로 알려진 천군의 절기를 여진이 익히고 있었다니.
어째서 여진이 강호의 후기지수 중에서 단연 두각을 나타냈는지 알게 됐다.
부러움과 질시가 섞인 시선들이 여진에게로 향해졌다.
후기지수 또한 무가의 자식들.
엄청난 무공을 익히고 있는 여진이 새삼 대단해 보였고, 얼른 자신들의 안가로 돌아가 보고하기로 마음먹었다. 여진이 정말 여소평이 마음에 두고 있던 후계자란 보고와 함께.
물론 그 전에 견식은 해야겠지.
꿀꺽.
후기지수들은 천군공수란 무공을 견식할 생각에 잔뜩 들떠 있었다.
예상보다 뜨거운 반응에 여진은 득의양양한 얼굴을 해 보였다.
이보다 더 좋은 시기는 없었다.
자신의 생일연회에 맞춰 그간 꼭꼭 숨겨왔던 비밀을 강호에 알림으로써, 혼란에 빠진 후계구도를 바로잡겠다는 의지의 표명이었다.
진호충과 같이 나름 생각하고, 또 생각하여 마련한 자리였다.
실패는 조금도 염두에 두지 않은 계략.
천군공수의 등장으로 온 강호인의 이목이 쏠릴 이 순간.
농익은 과실을 취한다.
하나 그 달콤한 과실을 가져갈 건 여진이 아니다.
바로 여소평 아니, 여운 그였다.
꾸욱.
여운은 사람들이 마련한 공터에 마주 선 채 두 주먹을 쥐었다. 그 과실을 취하는 건 쉽진 않을 것이다.
사실 여운조차도 천무지체에 관한 확인을 못 해봤으니까.
연성관에서 나온 뒤 처음으로 가진 실전.
여진이 흉흉한 기세로 취한 기수식엔 빈틈 따윈 없었다. 심득이 빠졌다곤 하나, 천군공수의 수련을 게을리하지 않았다는 증거였다.
미진한 부분을 채우기 위해 매일같이 고련을 거듭한 여진이었다.
“각오하는 게 좋을 것이다.”
말만 앞선 게 아닌, 무인의 앞선 기도에 긴장감이 등골을 타고 찌르르 흘렀다. 하지만 내색을 하는 우를 범하지 않았다.
흡자결을 운용해 흩어놨던 내공을 결집시키자, 호기가 절로 치밀어 올랐다.
일 갑자를 웃도는 어마어마한 내공이 전신을 도도하게 흐른다.
사화의 내공 덕분에 내력에선 여운이 앞선다.
기세가 달라졌음을 느꼈을까.
여진의 눈썹이 보기 흉하게 일그러졌다. 여소평이 여운을 위해 뭔가 해줬음을 눈치챈 여진은 열불이 뻗쳤다.
“놈, 쥐새끼처럼 곳간에서 좋은 거라도 훔쳐 먹었나 보구나.”
말은 그렇게 했지만, 질투심에 눈이 멀 지경이었다. 그래도 주위의 시선을 어느 정도 신경은 썼는지 외쳤다.
“선공(先攻)은 비례라 했으니, 먼저······!”
“과공(過恭)은 비례겠지.”
도중에 말을 자른 여운이 틀린 점을 지적하자, 여진은 얼굴을 또 한 번 붉혔다.
후기지수마저 실소를 흘렸다. 왜 되지도 않는 문자를 쓰려고 하는지 모르겠다는 소곤거림마저 들려왔다.
제기랄.
여진은 부르르 떨다가, 이를 부서지게 깨물었다. 웃는 낯의 여운이 도발적으로 손가락을 까닥여서다.
“시건방진 놈, 언제까지 웃는 낯짝으로 있을지 두고 보마!”
파앙!
말이 끝나기 무섭게 신형을 박찬 여진이 선공을 취했다.
바야흐로 천군공수가 강호에 다시 한 번 모습을 드러내는 순간이었다.
휙!
위맹한 주먹질에 공간마저 요동치는 착각이 들 정도였다.
도발을 일삼던 여유로운 태도와 달리 여운은 두 눈을 크게 떴다.
드디어 시작된 실전비무.
천무지체가 가진 효용성을 처음으로 확인하는 순간이었다.
여진이 내뻗은 주먹은 그야말로 전광석화였다.
“······!”
집중도를 최고로 끌어올린 여운에겐 그마저도 보였다. 천무지체가 선물한 동체시력 덕분이기도 했고, 주먹이 그리는 경로가 뇌리에 콱 박혀있어서다.
처음은 흘린다.
여운은 한 발을 슬쩍 빼는 동시에 왼손으로 여진의 손목을 붙잡아 흘리려 했다.
여진 또한 그걸 눈치챘기에 변초를 부려, 금나수라 부르기엔 민망한 여운의 손짓을 가볍게 피했다. 동시에 퇴법을 펼쳐 여운의 디딤발을 노렸다.
“아!”
초유하가 저도 모르게 탄식을 내뱉었다. 저 위력적인 퇴법에 얻어맞는 순간, 여운의 다리는 그대로 똑 하고 부러질 게 분명했다.
여운의 반응이 늦었기에 여진이 사납게 웃었다.
“······!”
하나 웃던 표정이 굳어졌다.
놀랍게도 여운이 신형을 무리 없이 움직여 다리를 빼내고 있었다. 끝내주는 동체시력과 깨끗해진 혈맥으로 진기수발이 더없이 순조로웠기에, 가능한 기민한 반응이었다.
“쥐새끼 같은 놈!”
휘휘휘휙!
재차 천군공수를 펼친 여진의 주먹이 여운을 난타했다.
파앗.
여운은 맞서는 대신 뒤로 쭉쭉 물러났다. 감히 받아칠 엄두도 내지 못하는 모양새였다.
순식간에 수십 합이 흘렀고.
여운은 속절없이 물러나기 바빴다.
의기양양해진 여진이 소리쳤다.
“언제까지 꽁무니만 내뺄 것이냐!”
호기로움 외침과 함께 천군공수의 제 사초 섬전(閃電)을 펼쳐 들었다. 살심을 담은 섬전엔 가공할 위력이 담겨 있었다.
피잉!
바람이 찢어지는 듯한 날카로운 궤적 소리가 여운의 얼굴을 향해 쏘아진다.
“아, 안 돼!”
누군가 외친 째진 비명.
빛살과 같은 주먹질에 머리가 터져 나갈 끔찍한 광경이 눈앞에 그려졌다.
뻐엉―!
가죽 북이 터지는 소름 끼치는 소리가 들려왔고, 여인들은 두 눈을 질끈 감았다.
하지만.
“······!”
미소 짓고 있던 여진은 표정을 굳힐 수밖에 없었다. 놈이 양손으로 제 주먹을 막아선 것이다. 움켜쥔 주먹 너머로 보이는 눈동자 속으로 호승심이 활활 타오르고 있었다.
이번엔 여운이 사납게 웃었다.
“이젠 내 차례다.”
<『천하를 삼키다』 1-2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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