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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을 바꿔라 1권-1

2016.09.09 조회 8,073 추천 68


 인생을 바꿔라 1권
 
 목차
 
 프롤로그
 1. 기생 에너지체, 염
 2. 갇히다
 3. 만남
 4. 분노라는 감정
 5. 바꾸다
 6. 제대로 바꾸다
 7. 유산
 8. 추억 만들기
 9. 연예계 생활
 10. 미래에서 온 메시지
 11. 직업과 취미
 12. 때론 하기 싫은 일을 해야 할 때가 있다.
 
 
 
 프롤로그
 
 
 
 난 내가 누구인지, 아니, 무엇인지에 대해 아주 간혹 의문을 가지곤 해.
 도깨비? 정신체? 귀신? 영혼? 유령? 염? 기생체?
 딱히 ‘이거다’ 하고 말할 단어는 없지만 굳이 정의하자면 간혹 인간의 정신에 침투하여 살아가는데 필요한 에너지를 얻는 ‘기생 에너지체’라고 할까?
 물론 아직도 정확하게 규정을 못 하고 있어.
 그렇다고 대단한 존재도 아니고 인간의 삶에 큰 영향을 끼치는 존재도 아니니 두려워하거나 부러워할 필요는 없어.
 아마도 나의 존재에 대해서 알게 된다면 대부분의 사람은 그렇게 사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냐고 말할지도 모르겠어.
 하지만 인간도 그냥저냥 의미 없이 살아가지 않나?
 그런 이들과 비교해자면―삶의 의미만 찾지 않는다면―꽤 즐거운 삶을 살고 있다고 자부해.
 어떤 삶인지 궁금하다고?
 별거 없어.
 뭐, 궁금하다면 한번 따라와 보든가.
 
 
 
 1. 기생 에너지체, 염
 
 
 
 내 이름은 염.
 이름이 필요하지 않을까라는 생각에 스스로 만들었지만 지금까지 이름을 불러줄 존재를 만난 적이 없으니 있으나 마나한 것이었다.
 그래서일까?
 우습게도 귀신같은 존재인 내가 오히려 귀신의 존재를 믿지 않고 있었다.
 내가 하는 일은 간단하다. 세상을 떠돌다 빙의할 사람이 생기면 그 몸속으로 들어가 있다가 일정량의 에너지를 얻고 빠져나오는 것.
 물론 원하는 사람에게 들어갈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머물고 싶다고 해서 더 머물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오로지 끌림에 이끌려 들어갔다가 시간이 지나면 자연스럽게 나와야 했다.
 아, 이제 타인의 몸에 들어갈 시간이 되었나 보다.
 마치 청소기에 먼지가 빨려 들어가듯이 내 몸은 누군가의 정신 세계로 끌려 들어갔다.
 
 “······.”
 일단 어떤 사람의 몸에 들어가면 그 즉시 그 사람의 기억을 읽어 들이고 몸을 움직일 수 있었다. 물론 튕겨져 나오면 그 사람의 기억의 대부분이 희미해지고, 아주 강력한 기억 몇 가지와 어렴풋이 누구였냐는 정도만 남을 뿐이지만 말이다.
 굳이 나에게 ‘기생’이라는 단어를 쓰는 이유도 이 때문이었다.
 “···이름은 유신인가?”
 몸을 차지한 남자는 약관이 조금 넘은 나이에 이 시대에서 제법 이름 있는 집안의 자제였는데, 친구들과 술을 먹고 집으로 가는 중에 잠시 잠이 든 상태였다.
 기억을 읽어낼 때 모든 기억을 읽지는 않았다.
 내게 필요한 기억, 즉 머무는 동안 즐길 수 있을 정도의 기억만 있으면 됐고, 유신이라 불린 남자의 뇌는 딱 그 정도만의 기억을 나에게 전해 주었다.
 “훗! 집에 가려고? 어림없지!”
 유신은 집으로 가는 중이었다.
 하지만 얌전히 집으로 갈 생각은 전혀 없었다.
 난 타고 있던 말의 머리를 머릿속에 있는 한 장소로 돌렸다.
 “네온사인이 번쩍이는 길도 좋지만 산새 소리와 풀벌레 소리가 가득한 이런 길도 괜찮단 말이야······.”
 현재 유신이 살고 있는 시대는 신라시대.
 지나가는 사람들 중 내 말을 들었다면 네온사인이 뭔지 의문을 표할지도 모르겠다.
 다소 이상하게 들리겠지만 난 말, 마차, 자동차, 자가용 비행기, 우주선 등 타보지 않은 것이 없었다. 왜냐하면 나에겐 시간개념이 없기 때문이었다.
 끌림이 있는 곳이 신라시대일 수도, 조선 시대일 수도, 혹은 여유 있는 집이라면 우주선 한두 대씩은 가지고 있는 시대일 수도 있었다.
 아! 지금 생각났는데 시간적으로는 제약이 없었지만 공간적으로는 제약이 있었다.
 이유는 나도 모른다.
 언젠가 들었던 노래를 흥얼거리며 말을 몰아 어느 정도 가자 목적지가 보였다.
 가야금 소리와 여자들의 웃음소리가 선선하게 부는 바람을 타고 들려왔다.
 “후후! 새로운 시대의 테크닉을 보여주지.”
 참고로 확연히 구분되는 성별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굳이 따지자면 남성이었다.
 거의 남자에게만 빙의가 되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객관적으로 봐도 100퍼센트 남성 취향이었다.
 물론 내가 이렇게 된 것은 주로 빙의되는 사람이 취한 사람인 경우가 많아서였는데 지금 빙의된 유신만 봐도 그렇다.
 친구들과 무예를 수련한 후 한잔 거하게 한 상태라 그에게 빙의할 수 있었던 것이다.
 잠시 후에 있을 므흣한(?) 일을 상상하며 말에서 내리려는 찰나였다.
 “젠장! 이 인간, 깨어나려 하는군.”
 정신력이 강한지 유신의 혼이 나를 밀어내려 하고 있었다.
 오랫동안 기생을 하며 살다 보니 원하는 만큼 머물 방법은 없었지만 약간이나마 시간을 연장하는 방법은 알고 있었다.
 손닿을 곳에 술이 있다면 잔뜩 먹어서 그 정신을 밀어낼 수 있겠지만 지금은 근처에 아무것도 없었다.
 “튕겨······.”
 말을 채 완성하기도 전에 내 정신은 유신의 머리에서 튕겨져 나왔다.
 아주 소량의 에너지를 얻고 말이다.
 아쉬움에 입맛을 다시며 유신의 주위를 서성여 보았지만 정신을 잃을 기미는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유신은 자신이 정신을 잃고 있는 동안 말이 기녀의 집으로 왔다고 검을 뽑아 칼의 목을 베어버리는 만행까지 저질렀다.
 ‘캬아! 역시 부잣집 도련님이라 그런지 다르네. 저 비싼 말의 목을 베다니 말이야.’
 괜히 심통이 나서 유신의 마음가짐에 대해 트집을 잡아보지만 그렇다고 달라지는 건 없었다.
 몸은 떠올랐고 빙의되기 전에 항상 머물고 있는 묘한 공간으로 이동했다.
 내가 머물고 있는 곳은 특이한 곳이었다.
 한눈에 대한민국이라고 불리는 곳이 보였고, 시간의 흐름이 없다 보니 시시각각 보이는 색깔과 모양이 조금씩 달랐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또다시 당겨지는 느낌을 받았다. 그리고 대한민국의 어느 한 부분으로 쑥하고 빨려 들어갔다.
 ‘쩝! 하필 여자라니······.’
 아까도 언급했듯이 거의 남자에게 빙의될 뿐, 100퍼센트는 아니었다.
 아주 가끔 여자에게 빙의가 되었는데 이럴 땐 몸은 여자지만 마음은 남자인 경우가 많았다. 하지만 반드시 그러라는 법은 없었고, 오늘이 바로 그날이었다.
 “하악∼ 하악∼”
 보영의 정신을 차지하자마자 남자의 거친 숨소리가 들렸고 엄청난 무게감에 몸을 짓누르고 있음이 느껴졌다.
 위에 있는 남자는 연신 보영의 몸을 더듬으면서 브라에 이어 팬티를 벗기고 있었다.
 기분은 몹시 더러웠지만 일단은 보영의 기억을 먼저 더듬었다.
 ‘쯧! 부킹한다고 아무 방이나 끌려가니 이런 꼴을 당하지. 조심성 없이······.’
 딱히 조선 시대 규수처럼 산 것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몸을 막 굴리며 산 것도 아니었기에 이대로 내버려 둘 수는 없었다.
 무엇보다도 지금 당하는 건 온전히 내가 당하는 것이기에 절대 사양이었다.
 빙의가 되려면 대상자가 정신을 완전히 잃어야 했는데, 그런 경우 중 대부분은 술을 마시는 경우였다.
 그러다 보니 숱한 경험이 있었다.
 그 모든 경험이 기억이 나는 건 아니었지만 지금과 같은 경우도 종종 있을 수밖에 없었다.
 아무것도 몰랐을 때는 괜스레 큰소리를 냈다가 정신을 잃을 정도로 맞고―내가 안에 있을 땐 정신을 잃지 않았다―끔찍한(?) 경험을 했어야 했다.
 여성의 힘으로 남자를 이긴다는 것은 참으로 힘든 일이었다.
 그 뒤로는 빙의를 했을 때 특별한 능력―가령 힘이 강해진다든가 초능력 같은 것이 생긴다든가―이 생기길 간절히 바랐지만 개뿔, 그딴 건 없었다.
 결국 몇 번 겪다 보니 자연스럽게 상황 대처능력이 생겼을 뿐이었다. 아니, 별 쓸모없는 능력도 찾아내긴 했었다.
 “···너, 지금 뭐하냐?”
 눈을 뜨고 말을 건넨 건 사내가 바지와 팬티를 반쯤 벗고 돌격 앞으로! 하기 직전이었다.
 “씨바! 약이 약했··· 컥!”
 사내는 말을 끝내기도 전에 앞으로 꼬꾸라졌다.
 무릎으로 인정사정없이 흉측한 물건을 찼으니 맨 정신으로 버티긴 힘들었으리라.
 난 손을 들어 놈의 머리를 옆으로 민 후 일어났다. 그리고 대충 옷을 입은 후 놈의 상태를 살폈다.
 남자의 아래는 급소였다. 그곳이 동시에 터진다면 단숨에 사망에 이를 수도 있다.
 운이 좋았는지 터지지도 죽지도 않았다.
 “···그냥 가자니 이놈의 태도가 석연치 않아.”
 정상적이고 죄책감을 가진 인간이라면 깨어나서 말을 걸었을 때 놀라거나 당황하는 표정을 지었어야 하는데, 이놈은 오히려 귀찮다는 표정이 영력했었다.
 경험을 통해 이런 놈들이 어떤 자들이라는 걸 알았기에 그냥 갈 수가 없었다.
 난 놈의 머리에 손을 올렸다.
 그리고 옮겨간다는 생각을 간절히 했다.
 그러자 내 정신 중 일부가 놈의 머리로 들어가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네놈의 기억을 읽어볼까?”
 경험으로 얻은 것이 바로 이 능력이었다.
 기억을 바꿀 수 있는 것도 아니었고, 그저 생각을 읽는 것이 다인 능력.
 게다가 일정량의 에너지를 잃게 되는 것이라 별로 하고 싶지 않은 일이기도 했다. 하지만 이상하게 빙의를 하게 되면 빙의한 사람의 생각이 내 생각을 잠식하게 되고, 평소 필요 없다고 생각하는 일들을 하곤 했다.
 어쩌면 기생의 한계인지도 모를 일이었다.
 “하! 이 새끼는 도대체 왜 사는 놈인지 모르겠군.”
 악질 중의 악질이었다. 범죄 사실만 일일이 열거하자면 A4용지 수십 장으로도 부족할 정도였다.
 특히 여성 관련 범죄가 셀 수도 없이 많았는데, 사진을 찍어 협박을 하는 것은 물론이고 돈을 뜯어내다 마지막엔 외국으로 팔아넘기기까지 했다.
 딱히 도덕적이라 보긴 힘든 나로서도 용서할 수 없는 놈이었다.
 난 사내가 벗어놓은 옷을 뒤져 마약을 찾아냈다.
 그리고 그 마약을 사내에 듬뿍 주사해 줬다.
 “경찰에 신고해 봐야 소용없을 테고······.”
 기억을 읽었을 때 경찰과 꽤 호의적인 관계를 유지하고 있음을 봤기에 신고해 봐야 좋은 꼴 못 볼 것이 분명했다.
 그렇기에 완전히 정신을 잃은 놈의 하체를 몇 번이고 밟았다.
 피투성이가 되었지만 마약 때문인지 잠시 꿈틀거리기만 했을 뿐 움직이지 않았다.
 딱 여기까지였다.
 사내가 어찌되었건 더 이상 신경 쓸 가치도 없었다.
 혹시 증거가 될 만한 것들을 챙기고 밖으로 나와 택시를 잡아탔다. 보영을 집에까지 데려다준 후 그녀에게서 튕겨져 나온 것은 새벽이 다 되어서였다.
 
 * * *
 
 나의 하루는 시간적인 개념이 없어서인지 딱히 구분하기가 애매하다. 그저 빙의를 해서 에너지를 다 채우고 잠시 쉬는 것이 하루라고 볼 수가 있었다.
 “으∼ 추워.”
 한겨울에 술에 취해 땅바닥에 누워 자고 있던 성욱의 몸은 차가워질 때로 차가워져 있었다.
 손을 비비고 발을 동동 구르며 몸을 푼 후 호주머니를 뒤져보았다.
 “젠장! 적당히 좀 먹지.”
 아리랑치기를 당했는지 무일푼이었다.
 아마 빙의를 하면서 가장 많이 한 일이 술 먹고 길거리에 쓰러진 사람을 집까지 데려다 준 일일 것이다.
 시대를 불문하고 흔한 일이었고 하루의 에너지를 이들을 귀가시켜 주는 것으로 채운 적도 부지기수였다.
 “택시!”
 일단 지나가는 택시를 잡았다.
 “기사님, 아리랑치기를 당해 한 푼도 없는데 집에 가서 드려도 되겠습니까? 넉넉히 드리겠습니다.”
 “어쩌다가··· 타십쇼.”
 “감사합니다.”
 “어디로 모실까요?”
 “음, 그러니까······.”
 택시를 타자 훈훈한 히트의 열기가 느껴졌고 그제야 살 것 같아 빙의한 중년 남자의 기억을 읽었다.
 “···화곡동 XX번지로 가주세요.”
 중년 남자, 성욱의 기억 속 집은 비닐하우스였다. 게다가 워낙 가난해 집에 도착한다고 해서 딱히 택시비가 있을 것 같지는 않았다.
 “···댁이 어디십니까?”
 1990년도의 화곡동은 밭과 비닐하우스에 즐비한 곳이었는데, 성욱이 사는 곳은 특히나 가로등도 없어 오싹한 느낌마저 들었다.
 “저기 비닐하우스입니다. 잠깐만 기다려줄래요?”
 택시 기사에게 양해를 구한 난 눈이 쌓여 제법 미끄러운 흙길을 걸어 비닐하우스 앞에 도착했다.
 기억대로라면 습기가 차 물방울이 방울방울 맺힌 비닐하우스 안에는 성욱의 처와 두 아이가 잠들어 있을 것이다.
 평소의 성욱이라면 그런 것을 딱히 신경 쓰지 않고 문을 열었겠지만 지금은 조금 달랐기에 조심스럽게 문을 열었다.
 “우웅∼ 당신 왔어요?”
 바람만 불지 않을 뿐이지, 바깥 공기와 다를 바 없는 실내에서 이불을 뒤집어쓰고 있던 성욱의 처가 인기척에 일어났다.
 “응. 한데··· 돈 좀 있어? 택시를 타고 왔는데 돈이 있어야지 말이야.”
 “내일 애들 육성회비 낼 돈이 있긴 한데······. 드릴 테니 일단 택시비부터 내요.”
 어두웠지만 아내의 얼굴에 드리워진 어둠을 못 볼 정도는 아니었다.
 ‘젠장! 얼어 죽을 사람을 데려왔는데 내가 왜 미안해해야 하는 건지··· 돈이라도 있다면 좀 주고 싶군.’
 돈이 필요하다고 생각하자 문득 언젠가 고문을 당해 죽은 사람이 생각났다.
 고문으로 기절한 이에게 빙의되었다가 말할 틈도 없이 끔찍한 고통을 겪다가 튕겨져 나왔던 기억이라 잊지 않고 있었다.
 비자금을 관리하던 이가 권력자가 맡긴 엄청난 금액의 돈을 빼돌렸다가 화를 당한 것이었는데 돈을 숨긴 곳이 어렴풋이 기억이 났다.
 ‘그때가 89년도였지.’
 내가 생각해도 워낙 은밀한 곳이었으니 아마 찾지 못했을 것이다.
 “다 줘봐. 애들 학교가기 전에 올게.”
 “···애들이 육성회비 때문에 담임선생님한테 많이 혼났나 봐요. 그러니······.”
 “걱정 마. 무슨 일이 있어도 돈 가지고 올 테니까.”
 일단 생각을 했으면 빠르게 움직이는 게 답이었다. 이러다 성욱이 깨기라도 한다면 말짱 헛일이었다.
 비닐하우스를 나가려는데 마침 반쯤 남은 소주가 보였기에 단숨에 들이켠 후 택시가 있는 곳으로 갔다.
 “오래 기다리셨죠?”
 “···아닙니다.”
 “택시비 가져왔으니 이대로 미아리로 가주시죠.”
 “저야 좋지만······.”
 머뭇거리던 택시기사는 꼬깃꼬깃한 지폐를 보여주자 그제야 차를 출발시켰다.
 미아리 텍사스촌이라고 불리는 집창촌 근처에 내려달라고 하자 택시기사는 묘한 웃음을 지으며 즐거운 시간을 보내라고 말한 후 떠났다.
 “그러고 싶지만 돈도, 시간도 없네요. 쩝!”
 나라고 노는(?) 걸 싫어할 리가 없었다. 하지만 지금은 아이들의 육성회비가 우선이었다.
 기억을 더듬어 집창촌 반대편으로 걸어 10분쯤 헤매자 어디서 본 듯한 7층 건물이 보였다.
 죽은 비자금 담당자가 차명으로 구입한 건물로 입구는 철문으로 닫혀 있었고, 건물 옆 경비실에 나이 지긋한 경비원이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톡톡톡톡!
 경비실의 창문을 두드렸다.
 “···으흠! 무슨 일이오?”
 “양 사장님 심부름으로 왔습니다.”
 “아, 네에∼ 무엇을 도와드려야 할지······.”
 “7층에 잠깐 들렸다 오면 됩니다.”
 “7층으로 올라가는 열쇠는 저에게 없습니다만.”
 “심부름을 왔으니 당연히 제가 가지고 있죠.”
 “허허허. 그러시겠죠. 문 열어드리겠습니다.”
 경비원이 별다른 의심 문을 열어줬고, 난 건물로 들어가 엘리베이터에 올랐다.
 ‘6층, 7층 버튼을 번갈아 가면서 세 번 누르다가 1번과 함께 동시에······.’
 우우우우∼ 털컹!
 엘리베이터는 6층에서 7층으로 올라가다가 중간에서 멈추며 문이 열렸다. 그리고 허리를 굽혀야만 들어갈 수 있는 작은 복도가 나타났다.
 허리를 굽힌 채 안으로 들어가 좌측으로 꺾자 작은 문에 다이얼식 잠금장치가 달린 방이 몇 개 나타났다.
 난 딱히 고민 없이 가장 좌측에 있는 문의 비밀번호를 눌렀고 문이 열렸다.
 대여섯 평쯤 되어 보이는 방 안에는 만 원권 지폐가 수북이 쌓여 있었다.
 인간들이 본다면 눈이 커질 만큼 많은 돈이었지만 나에게 딱히 감흥이 없는 물건이었다.
 지금까지는 말이다.
 “혹시 모르니 잊지 않도록 하자.”
 오늘과 같은 일이 몇 번이나 있을까마는 어찌 될지 모르는 것이 인간, 아니, 정신체의 삶 아니겠는가.
 다섯 다발을 대충 여기저기에 챙겨 넣고 재빨리 비밀의 장소에서 나왔다.
 “일은 끝나셨소?”
 “네, 덕분에 잘 끝마쳤습니다. 이건 담뱃값이라도 하십시오.”
 “아니, 뭐 이런 걸 다······.”
 경비원에게 몇만 원을 집어주며 말을 이었다.
 “어쩌면 간혹 양 사장님이 사람을 보낼지도 모르겠습니다. 수고스럽겠지만 그때도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나야 그저 고용된 사람일 뿐인데······.”
 “하하하! 고용인끼리 좋게 지내자는 거죠. 그럼 이만 가보겠습니다.”
 언젠가 필요할 때를 위한 작은 투자였다.
 성욱의 집인 화곡동 비닐하우스에 도착한 것은 해가 어렴풋이 떠오를 무렵이었다.
 “이게··· 웬 돈이에요?”
 “아무 문제없는 돈이니까 필요한 데 써. 당신 옷이랑 애들 옷이랑 사고, 연탄도 넉넉히 들여놓고. 먹고 싶은 거 먹고.”
 “그럴게요.”
 “그리고 혹시 내가 돈 달라고 하면 절대 돈 없다고 해. 아니면 평소처럼 1, 2만 원만 주든가 하고.”
 “네?”
 “이상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자고 일어나면 아마 그 돈을 준 거 절대 기억을 못할 거야. 그러니 절대로 그 돈에 대해서는 당신만 알라고.”
 “무슨 말인지 도통······.”
 하긴 납득을 하는 것이 오히려 이상한 일일 것이다.
 난 다시 한 번 얘기했다. 약간 밀리는 느낌이 나는 것이 곧 튕겨져 나갈 것 같았기에 길게 설명하고 있을 순 없었다.
 “당신한테 준 걸 내가 기억하고 있으면 그 돈을 다시 뺏어갈 게 분명해서 아예 잊어버리려고 하는 거야. 그러니까 그 돈은 당신과 애들을 위해 써. 무슨 말인지 이해하겠어?”
 “당신이 달라고 하면요?”
 “그런 일 없을 거야. 방금 말했잖아 잊어버린다고.”
 “휴우∼ 뭔지 잘 모르겠지만 그렇게 알고 있을게요. 어쨌든 아이들을 위해 잘 쓸게요.”
 “좋아, 이제부터 잘 테니까 일어나면 그 순간부터 모른 척하는 거야.”
 딱히 이해한 듯한 표정은 아니었지만 더 이상 얘기를 하고 있을 순 없었다.
 옷을 대충 벗고 자리에 누웠다. 차가움에 절로 몸이 떨려왔지만 억지로 눈을 감았다. 한데 갑자기 떠오르는 것이 있어 다시 몸을 일으켜 아내에게 말했다.
 “아! 내가 깨어나서 언제 들어왔냐고 물으면 새벽에 들어와서 잘 모르겠다고 말해.”
 “···네, 네.”
 아내는 더 이상 이해하기를 포기했는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대답했다.
 그런 그녀의 모습에 쓴 웃음을 짓고는 다시 누워 눈을 감았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난 성욱의 정신에서 빠져나왔다.
 ‘휴∼ 간발의 차이었군. 다음부터 이런 일은 자제해야겠어.’
 기생을 하다 보면 이런 날도 저런 날도 있지만 오늘은 꽤 유난스러운 날이었다.
 
 * * *
 
 “우리, 여기까지만 하자.”
 유리의 입에서 결국 헤어지자는 말이 나왔다.
 김철은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아니, 지금까지 자신의 곁에 있어준 것만 해도 너무 고마웠다.
 그는 하반신불구로 지금까지, 아니, 앞으로도 그녀에게 해줄 수 있는 것이 없었다.
 지난 3년 동안―고등학교 때까지 친다면 8년 동안― 아무 일없이 지내왔다고 해서 앞으로도 그럴 것이라 생각하는 건 오산일 것이다. 어쩌면 서로에 대한 감정이 더 깊어지기 전에 헤어지는 것이 두 사람을 위해 더 나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모든 것을 이해하면서도 하늘이 무너질 것 같은 느낌이 드는 건 머리로는 당연하다고 생각하지만 마음으로는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일 것이다.
 ‘말을 해. 그동안 고마웠다고··· 행복하라고······.’
 “그동안 고마웠어.”
 ‘아니, 내가 더 고마웠어, 유리야······. 빌어먹을! 입까지 장애가 된 거냐!’
 스스로를 다그쳐 봐도 떨어져 내린 고개를 들 수가 없었고 입은 열리지 않았다.
 왜냐하면 입을 여는 순간 눈물이 와락 쏟아질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휴우∼ 이유를 묻지 않아줘서 고마워. 이만 가볼게. 잘 지내고 꼭 건강을 되찾길 바랄게.”
 잠시 김철을 복잡한 표정으로 바라보던 신유리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작별 인사를 해. 쿨하게 그녀를 보내줘!’
 다그침 때문이었을까 김철의 입이 열렸다. 한데 생각과는 전혀 다른 말이었다.
 “종··· 수 때문이니?”
 나가려던 신유리의 발걸음이 멈췄다. 그리고 서서히 돌아서서 약간은 슬픈 표정으로 대답했다.
 “···응.”
 “그, 그렇구나······.”
 민종수.
 친구라고 부르고 있지만 사실은 악연 중의 악연으로 고등학교 때 자신의 하반신을 뺏어간 것도 부족해 이젠 사랑하는 연인마저 뺏어가려고 있었다.
 “···조심해, 좋은 녀석이 아니야.”
 뱉고 나서 ‘아차!’ 싶었다. 하지만 뱉은 말을 주워 담을 수 있는 방법은 없었다.
 아니나 다를까, 지금까지 안쓰럽게 그를 바라보고 있던 유리의 표정이 굳었다.
 “정신까지 병들지 마.”
 3년 동안의 연인 관계를 끊겠다는 듯 독한 말이 유리의 입에서 나왔다. 그리고 그녀는 차갑게 돌아섰다.
 “···고맙다고 하고 싶었는데.”
 김철은 이미 사라진 그녀를 향해 중얼거렸다. 그리고 그의 눈에서 참았던 눈물이 주룩 흘러내렸다.
 한참을 멍하니 앉아 그녀가 떠난 곳을 바라보던 김철은 서울시에서 운행하는 장애인 택시를 불러 집으로 향했다.
 “흐흑!”
 집에 도착하자 억눌려 있던 슬픔을 터뜨렸다. 가만히 있다간 정말이지 미쳐버릴 것 같아서였다.
 고등학교 때 사고로 하반신이 마비가 되었을 때도, 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도 살아갈 힘을 준 것은 옆에 있었던 유리였다.
 고등학교 2학년 때 교회에서 만난 유리는 친구였고 연인이었고 어린 시절 돌아가신 어머니였다.
 눈물이 흐른 만큼 슬픔을 씻어준다면 어떤 슬픔도 남지 않을 만큼 김철은 울었다. 그러나 결코 눈물이 슬픔을 씻어주진 못했다.
 “의미 없는 세상······.”
 김철은 모든 것을 포기한 눈빛이 되어 전동 휠체어를 움직였다.
 그리고 책상 서랍에서 수면제를 꺼냈다.
 3년 동안 자살 생각을 한 적이 없으니 3년이 넘은 수면제였지만 자기 위해 먹는 약이 아니었으니 상관이 없었다.
 물까지 준비한 김철은 잠시 거실에 걸린 부모님의 사진을 바라보았다.
 “···죄송해요, 아빠, 엄마.”
 두 사람 중 한 명만 옆에 있었다면 이렇게 극단적인 선택을 하지 않았을 것이 생각이 들었지만 부질없는 생각일 뿐이었다.
 왼손에 들고 있던 수면제 통을 잠시 바라보던 김철은 통을 그대로 입으로 가져가 약을 적당히 털어 넣고 물을 마셨다.
 그렇게 몇 번 반복하고 나니 어느새 빈 통.
 혹시 살아날까 두려워 다른 한 통마저 비우고서야 그의 행동이 멈췄다.
 물통과 빈 통을 거실 테이블 위에 올려놓은 김철은 스마트폰을 꺼내 유리의 사진을 봤다.
 “한 번쯤 안아주고 싶었는데··· 미안. 부디 행복하길 바랄게.”
 미워할 수 없는 여자였다.
 “···졸려. 다음 생이 있다면 그땐 행복하게 해줄게.”
 김철은 손가락으로 유리의 얼굴을 쓰다듬듯 만지다가 눈을 감았다.
 영원할 꿈속에서 신유리와 만나고 있는지 김철의 얼굴엔 편안한 미소가 감돌고 있었다.
 
 
 
 2. 갇히다
 
 
 
 살아 있는 생명체라면 분명 생존의 이유를 가지고 있을 것이다.
 어떤 이들은 자손 번창이라고, 어떤 이들은 자아실현이라고, 혹은 종교인들은 신에게 가까이 가기 위해서라고 말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무엇이 정답인지는 사람마다 분명 다를 것이다.
 그런 면에서 보자면 나 역시 살아 있는―육체는 없지만―존재라고 생각한다.
 허면 나의 생존 이유는 무엇일까?
 그저 남에게 빙의하여 하루하루의 에너지를 채우면서 사는 건 분명 아닐 것이다.
 ‘너무 오래됐나? 이제 기억이 안 나.’
 빙의가 되기를 기다리면서 빈둥거리던 나는 문득 존재의 이유에 대해서 생각해 보다가 중얼거렸다.
 분명 알고 있었던 것 같은데 지금은 가물가물한 정도가 아니라 ‘그런 것이 있었다.’ 라는 정도밖에 기억나지 않았다.
 ‘에이, 몰라!’
 정신체로 있을 땐 생각하는 것조차 귀찮았다. 뇌가 없어 생각하는 능력이 부족한 것일지도.
 물론 생각이 깊지 않다는 것이 나쁜 것만은 아니었다. 깊었다면 지독히 반복적이고 특별할 것이 없는 삶을 이미 오래전에 포기했을지도 몰랐다.
 ‘그나저나 뭐 재미난 일은 없을라나?’
 술 취한 사람 집에 데려다주는 것도 지겨웠고, 그들의 몸을 빌려 욕망을 해소하는 것도 너무 반복되니 이젠 딱히 재미도 없었다.
 그러나 뭔가 자극적인 일을 기대하기엔 빙의되는 시간이 너무 짧았다.
 이런저런 생각들을 하고 있는데 끌림이 느껴졌다.
 ‘자, 그럼 가볼까?’
 별 기대감 없이 끌림에 몸을 맡겼고 난 누군가의 머릿속으로 들어갔다.
 ‘빌어먹을, 처음부터······!’
 빙의 상대의 머리를 차지하고 몸에 대해 느끼자마자 현 상황을 이해했다. 왜냐하면 들어오자마자 튕겨나갈 것 같은 느낌이 들었고, 온몸이 당장에라도 녹아내릴 듯 힘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경험이 있는 증상.
 눈을 뜨는 것조차 버거운 상태에서 사력을 다해 팔을 들어 입으로 가져갔고 손가락을 목구멍 깊숙이 찔러 넣었다.
 “우우우웨에엑! 우웩!”
 몽롱한 정신 상태에서도 채 녹지 않은 알약이 바닥에 떨어졌다. ‘후두둑’ 소리가 들릴 정도로 많이도 처먹었다.
 구토를 한 번하고 나자 약간의 기운이 돌아왔다. 눈을 뜨고 주변을 살폈다. 물이 보였다. 당장 마실 생각으로 손을 뻗었다.
 한데 몸이 생각처럼 움직이지 않았다.
 이상함을 느끼고 나서야 휠체어가 눈에 보였다. 아무리 급해도 기억부터 읽어야 한다는 생각을 했고, 그 순간 사내의 기억이 들어왔다.
 ‘골고루 한다, 정말······.’
 왜 자살을 하려 했는지, 그의 몸 상태가 어떤지, 등 지금 필요한 몇 가지 사실만을 확인하고 손을 길게 뻗어 물통을 잡았다.
 벌컥벌컥!
 목구멍을 열고 들이부었다.
 그리고 구토. 다시 들이붓고 구토.
 냉장고에 있는 물까지 마셔가며 노란 위액이 나올 때까지 반복했다.
 “하아∼ 산 건가?”
 늘어질 대로 늘어진 몸을 무리해서 움직이다 보니 손가락 하나 움직일 힘도 남아 있지 않았다. 그러나 다행히 빠른 조치 덕분에 튕겨 나갈 것 같은 느낌은 사라지고 몸도 안정을 찾고 있었다.
 119에 신고를 할까도 싶었지만 이정도면 살 수 있겠다는 생각에 휠체어에 기대어 긴 한숨을 쉬었다.
 “어후! 냄새.”
 여유를 찾게 되니 옷, 휠체어, 거실 및 부엌 바닥에 있는 구토의 흔적들에서 냄새가 스멀스멀 올라왔다.
 몸이 멀쩡했다면 샤워와 청소라도 했겠지만 대상의 몸이 불편하니 빙의가 빨리 풀리기만 바랄 뿐이었다.
 “그나저나 이 인간 살려봐야 또 자살할 것 같은데 괜한 짓을 한 것 같군, 쩝!”
 김철의 기억을 마저 읽어보니 괜한 짓을 한 것 같았다. 그의 기억엔 살아야 할 이유가 없었다.
 “복에 겨웠어. 나 같은 기생 정신체도 이렇게 꿋꿋하게 살아가고 있는데 말이야.”
 물론 김철의 선택에 대해 왈가왈부할 생각은 없었다. 누구나 자신의 고통이 가장 큰 법이었고 나로서는 그저 에너지만 조금 얻어서 떠나면 그뿐이었다.
 “···어? 이거 왜 이러지?”
 이상함을 느끼게 된 건 냄새 때문에 옷을 갈아입을 때였다.
 휠체어에서 옷을 벗고 침대에 올라가 힘겹게 바지를 입고 있는데 나른하게 잠이 몰려왔다. 그리고 시간이 지날수록 그 정도는 심해졌다.
 “잠이 오다니······.”
 잠, 졸음, 불면증, 등 잠과 관련된 단어들은 알고 있었지만 실제로 그것이 어떤 느낌인지 알 수가 없었다. 왜냐하면 존재한 이후로 잠을 잔적이 없었기 단 한 번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한데 지금 이 순간 잠이 온다는 느낌을 확실히 알 수 있게 되었다.
 “도대체 뭐가··· 하아아함∼ 잘못된··· 거지? 아하함∼”
 생각할 틈도 없이 잠이 쏟아졌고, 반쯤 바지를 입다가 그대로 잠이 들었다.
 
 꿈을 꿨다.
 잠을 자본 적이 없으니 꿈을 꾼 적 또한 없었는데 그냥 꿈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인간이 되어 보통의 사람들처럼 살아가는 꿈. 일반 사람들이 보기엔 평범한 꿈이었겠지만 나에겐 조금은 특별한 꿈이었다.
 아내―얼굴이 보이지 않지만―의 배웅을 받으며 출근을 하고, 동료들과 웃으며 회사 생활을 하고, 퇴근을 해서는 아이들과 놀고.
 깨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지독한 허기에 절로 눈이 떠졌고 잠에서 깨어났다.
 “뭐, 뭐야! 아직도 빙의에서 못 벗어났단 말이야?”
 정확히 몇 월 며칠, 몇 시, 몇 분에 들어왔는지는 몰랐지만 시간이 꽤 흐른 것은 알 수 있었다.
 난 침대 한쪽에 던져놨던 스마트폰을 집어 들어 시간을 확인했다.
 “7월 17일, 11시?!”
 김철이 유리라는 여자와 헤어진 후 바로 집으로 와 약을 먹은 시간은 대략 2010년 7월 15일 오후 4시경.
 이틀이 훌쩍 지난 후였다.
 뭔가가 잘못됐다.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이토록 길게 사람의 몸에 머문 적이 없었다. 길어 봐야 반나절이 최고였고, 아무리 더 머물고자 해도 튕겨져 나갔었다.
 “···으∼ 배고파. 일단 뭐 좀 먹고 생각하자.”
 바지를 마저 입고 휠체어로 옮겨 탄 나는 거실로 나갔다.
 “큭!”
 구토한 것이 말라있었고, 냄새와 함께 각종 벌레들이 윙윙거리며 날아다녔다.
 모든 걸 무시하고 일단 냉장고에 붙어 있는 스티커를 보고 음식을 주문했다. 그리고 창문을 열어 환기를 시켜두고 배달이 오기를 기다렸다.
 “음식 주문하셨죠?”
 아직 점심시간 전이라 그런지 금세 도착했다.
 “네, 죄송한데 테이블 위에 놓아주시겠어요? 돈은 거기 놔뒀어요.”
 김철은 그의 아버지가 남겨둔 재산이 있었기에 먹고살 만큼은 돈이 있었다.
 그리고 몸이 불편해서인지 손닿는 곳 여기저기에 현금을 보관하고 있었기에 음식 값을 지불하는 것엔 문제가 없었다.
 허겁지겁 허기를 채웠다.
 넉넉히 3인분을 시켰는데 절반 쯤 먹고 나자 배가 불러 더 이상 들어가지 않았다.
 밥을 먹고 스마트폰을 이용해 청소업체를 검색해 당장 청소를 부탁했다.
 ―현재 일이 있어 2시쯤 될 것 같은데요.
 “그럼, 그때 오세요.”
 기억속의 김철이라면 돈이 아까워 혼자 끙끙대며 청소를 했겠지만 난 달랐다.
 덥기도 더웠지만 지금은 생각을 정리할 때였다.
 엉망이고 냄새나는 집에서 나와 놀이터 근처 나무 그늘에 전동 휠체어를 세웠다. 그리고 현 상황에 대해 머릿속으로 생각해 보았다.
 사실 처음 겪는 일이었기에 딱히 뾰족한 수가 있는 것은 아니었다. 다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내가 김철의 몸에 갇히게 되었다는 것이었다.
 “나로서는 손해 볼 것이 없는 상황인가?”
 처음엔 빙의가 풀리지 않는다는 것에 다소 놀라긴 했지만 여유를 가지고 생각해 보니 나에게는 오히려 기회였다.
 “이대로 한 달만 지속되었으면 좋겠다.”
 기생체로 살아오던 나에게 이만큼 자극적인 일이 어디 있겠는가.
 “으흐흠∼ 으흥∼”
 난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현 상황을 즐기기 시작했다.
 
 * * *
 
 “철이 총각, 휴가 갔다 오나 봐?”
 차에서 내리자 같은 동 위층에 사는 아주머니가 지나가다가 반갑게 인사했다.
 간혹 반찬도 갖다 주고 밖에 내놓은 재활용 쓰레기를 치워도 주는 마음씨 좋은 분이었다.
 “네, 동해안 일대를 한 바퀴 돌고 왔어요.”
 “즐거웠겠네?”
 “하하하! 바가지 왕창 쓰고 고생만 죽도록 했어요. 참! 이거 드세요.”
 휠체어 옆에 걸려 있던 봉지에서 오징어 한 축을 꺼내 건넸다.
 “뭘 이런 걸 다······. 그냥 총각이 심심할 때 먹어.”
 “별것도 아닌데요. 아주머니 생각나서 사온 거니까 맛있게 드세요.”
 “호호! 고마워, 잘 먹을게. 그나저나 요즘 많이 밝아진 것 같아 보기 좋아.”
 “그런가요? 하하하!”
 김철의 몸에 머물게 된지 한 달.
 왜 빙의에서 풀려나지 않는지에 대한 의문은 여전했지만 김철로 살아가는 것에 대해 꽤 만족하고 있었다.
 나다니기 불편한 몸이었지만 개의치 않고 여기저기 구경하러 다녔는데, 지금도 한 달 전에 주문한 장애인용 자동차가 며칠 전에 도착해 시승식 삼아 동해에 다녀온 길이었다.
 이렇게 평소의 김철이라면 전혀 하지 않았을 행동을 하다 보니 남들이 볼 땐 예전의 그와 많이 달라져 보일 것이 분명 했다.
 “근데, 요즘 예쁜 애인이 안 보이는 거 같은데 어디 갔어?”
 “헤어졌어요.”
 “아! 그, 그래? 내 정신 좀 봐. 마트에 국수 사러 가는 중이었는데··· 그럼 나중에 봐.”
 아주머니는 괜한 걸 물어 미안하다는 표정으로 도망가듯이 마트로 갔다.
 “쩝! 본인들이 잘못한 것도 아니면서.”
 여행을 하다가 만난 사람들도 애인과 헤어졌다고 하면 아주머니와 비슷한 반응을 보였었다.
 빙의와 동시에 대상의 기억에 영향을 받아 성격이나 생각이 비슷해지지만 그렇다고 감정적인 부분까지 영향을 받지는 않았다.
 즉, 신유리와 헤어진 것은 나에겐 기억일 뿐, 감정적으로 어떠한 영향도 미치지 못했다.
 게다가 김철과 성격과 생각이 비슷해지는 것도 의식적으로 꺼려하고 있었다. 왜냐하면 내가 보기에 그는 멍청할 정도로 착했다.
 물론 착하다는 것이 나쁜 건 아니었다. 그 나름대로 장점이 있었고 김철이 살아가는데 많은 도움이 되기도 했다.
 그러나 하반신불구가 되고도 관련자들을 용서하고, 헤어지자고 하는 애인에게 욕을 퍼붓지는 못할망정 그동안 고마웠다고 생각하는 것에 대해선 이해할 수가 없었다.
 내 성격은 받은 만큼 돌려줘야 했다. 그것이 은혜든 원한이든 말이다.
 짐을 챙겨 엘리베이터를 타고 집으로 올라갔다.
 당연히 아무도 없을 것이 생각하고 문을 열었는데 욕실에서 나오는 벌거벗은 장년인과 눈이 마주쳤다.
 “···큰아버지?”
 김철에게 남은 유일한 핏줄로 경기도 용인 정수산 인근에서 조상의 위패를 모시고 자연인처럼 홀로 살아가는 사람이었다.
 “잘 지냈니?”
 “네, 큰아버지도 잘 지내셨죠?”
 “나야 누구보다 잘 지내고 있지. 한데 지나가는 사람이 보는데 문 좀 닫지 그러냐?”
 “···네.”
 김철의 기억 속 큰아버지 김장성은 꽤 괴짜였다.
 서울 명문대를 수석 입학한 알아주는 수재였으나 4학년 때 할머니께서 돌아가시자 공부보다는 건강이 제일이라며 산으로 들어가 도를 닦은 인물이었다.
 김철이 그를 가장 최근에 본 것은 아버지 김유성의 장례식장에서였다.
 “언제 오셨어요?”
 “이틀 전에. 집 비밀번호는 여전하더구나. 참! 어제 사회복지사분이 다녀갔다.”
 정확하게는 사회복지사가 아닌 구청에서 지원하는 도우미 분이었지만 중요한 것이 아니었기에 굳이 정정하지 않았다.
 “그분이 제 전화번호 아는데 연락하시지 그랬어요?”
 “급할 것도 없는데 무엇 하러. 그래, 잘 놀다가 왔니?”
 “네, 한데 어쩐 일이세요?”
 어느 정도 예의는 차렸다고 생각한 난 그가 찾아온 이유를 물었다.
 “이상한 꿈을 꿔서 왔는데······. 기우였나 보다.”
 큰아버지는 나를 똑바로 쳐다보며 말했고 난 묘한 느낌에 되물었다.
 “이상한 꿈이라고요? 혹시 제가 죽는 꿈이라도 꾸셨어요?”
 “비슷해. 조상님 중 한 분이 나타나 대가 끊겼다고 날 혼내셨거든.”
 사람들의 기억을 읽다 보면 과학적으로 설명하지 못할 일들은 겪은 사람들이 의외로 많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누군가가 죽었다는 것을 알 수 있거나―죽은 자가 찾아와 작별 인사를 한다든가―혹은 미래에 일어날 일에 대해 꿈을 꾼다든지 하는 것들 말이다.
 “언제 꾸셨는데요?”
 “한 달 정도 전에.”
 놀랄 정도로 정확한 꿈이었지만 그렇다고 동요할 이유는 없었다.
 “아버지가 돌아가실 때 꾸셨어야 하는 꿈 같은 데요.”
 “무슨 말이냐?”
 난 대답 대신 움직이지 못하는 하체를 가리켰고, 큰아버지는 씁쓸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나을 가능성은 없다더냐?”
 “아마도요. 대가 안 끊기려면 큰아버지께서 노력(?)하셔야 할 거예요.”
 큰아버지는 더 이상 할 말이 없다는 듯 입을 닫았고 난 휠체어에 걸어뒀던 짐을 정리했다.
 
 * * *
 
 큰아버지는 내가(?) 무사하다는 걸 알자 그날로 용인으로 내려갔고 난 다시 김철로 생활하기 시작했다.
 아침 6시.
 알람을 듣고 일어난 난 가장 먼저 휠체어를 타고 화장실로 향했다. 그리고 좌변기에 앉아 속에 있는 것이 완전히 내려올 때까지 기다렸다.
 배에는 힘을 줄 수 있지만 하체에는 느낌이 없기 때문에 꼭 눈으로 직접 확인을 해야 했다.
 배변이 끝나면 앉은 자세 그대로 샤워기를 틀어 씻은 다음에 병원에서 움직이지 못하는 환자들을 위해 사용하는 소변기를 설치했다.
 그 위에 성인용 기저귀를 차고 난 뒤에야 욕실에서 나왔다.
 남들은 10분도 걸리지 않을 외출 준비를 한 시간을 넘게 준비해야 했고, 힘은 몇 배나 넘게 들었지만 조금만 먼저 일어나면 되는 일이었기에 딱히 불만이 없었다.
 물론 그렇다고 건강한 몸이 부럽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하반신 마비만 없다면 정말 완벽에 가까운 인간인데 말이야.”
 휠체어에 탄 채 전신 거울을 보고 있는 김철의 외모는 어느 누구에게도 빠지지 않았다.
 짙은 눈썹에 서글서글한 눈매, 작은 두상에 오뚝하게 솟은 코는 외국의 유명 배우를 생각나게 할 정도였다. 게다가 가계의 영향 때문인지 머리까지 좋았는데, 3학년 때―현재는 대한대학교 법학과 4학년이다―사법시험에 합격해 사법연수원 입소를 기다리고 있었다.
 “김철의 몸에 갇히게 된 이유를 알게 된다면 다음엔 더 좋은 몸을 차지할 수 있겠지.”
 갇히게 된 이유는 몰랐지만 벗어나는 방법은 짐작되는 것이 있었다. 바로 죽음을 선택하는 것이었는데 이유를 알게 되기 전까진 결코 실행할 생각이 없었다.
 집을 나와 주차장으로 간 난 리모컨으로 시동을 걸고 차의 트렁크를 열었다.
 장애인용으로 만든 특수한 자동차로 트렁크가 열리면서 경사로가 내려왔고 그 경사로로 차에 올라 운전석으로 이동했다. 그리고 휠체어를 바닥에 고정을 한 다음 모든 문을 닫고 나서야 출발할 준비를 마쳤다.
 “그럼 가볼까.”
 이제는 익숙해진 손으로 작동시키는 액셀을 누르자 자동차는 거친 엔진음을 토해내며 목적지를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생각보다 일찍 왔네.”
 김철이 등하교하던 기억을 떠올려 일찍 서둘렀는데 1시간이나 일찍 도착을 해버렸다.
 차가 없을 때 김철은 넓디넓은 캠퍼스를 느려터진 휠체어를 타고 다녀야 했다.
 물론 캠퍼스를 다니는 버스가 있었다.
 하지만 장애인용 버스가 아니었고 타고 내리는 걸 다른 사람들에게 의존해야 했다. 혹 타더라도 승하차 시간이 오래 걸리다 보니 승객들의 눈치를 봐야 했기에 처음 한두 번 이용하고 해본 적이 없었다.
 “편하게 살 것이지.”
 비가 오나 눈이 오나 힘겹게 휠체어를 타고 다니던 기억을 떠올리던 난 씁쓸하게 중얼거리며 열기 버튼을 눌렀다.
 김철은 신유리와의 미래를 꿈꾸며 돈을 아끼려고만 했지만 난 그럴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법과대학 안은 아직 이른 시간이라 다니는 사람들이 많지 않았다.
 난 커피를 마시며 휠체어를 움직여 익숙하면서도 낯선 그곳을 찬찬히 구경했다. 그때 누군가가 다가오며 밝게 인사를 했다.
 “철이 형! 방학은 잘 보내셨어요?”
 김철만큼은 아니더라도 꽤 멋쟁이인 남자의 얼굴을 보자 이름과 기본적인 것들이 떠올랐다.
 “아, 용수구나. 너도 방학 잘 지냈냐?”
 “공부하느라 죽을 맛이었죠. 절에서 그제까지 보내다가 어제 겨우 집에 왔다니까요.”
 조용수는 김철의 기억에 세 손가락 안에 꼽히는 괜찮은 후배로 분류되고 있었다.
 “커피 한 잔 할래?”
 “뽑아주신다면 먹어야죠. 하하하!”
 조용수와 난 커피 자판기가 있는 곳으로 향했다.
 “작년까지만 해도 형이 사법시험에 합격하는 걸 보고 저도 가능할 거라고 생각했거든요. 한데 완전 착각이었죠. 설마 1차에서 떨어질 줄이야··· 어쨌든 내년엔 정말 돼야 하는데······.”
 “로스쿨도 있잖아?”
 “저도 그렇게 생각하는데 부모님 생각은 안 그런가 봐요. 연수원 출신과 로스쿨 출신은 다르다고 절대로 사법시험에서 합격하래요.”
 “부모님들이 다 법조계에 계신다고 그랬었나?”
 “부모님뿐만 아니라 형, 누나도 검사예요. 그리고 친척들도 대부분 법조계에 계시고요.”
 “쩝, 고생이네. 아무튼 열심히 했다가 실패한다고 하더라도 너무 상심마라. 사법시험이 인생의 전부는 아니잖아.”
 김철의 인생을 보고 나름 생각해서 한 말이었지만 조용수에겐 조금 다르게 들렸나 보다.
 “악, 염장질! 합격한 사람한테 그런 말 들으면 더 비참해지거든요?”
 “그냐? 하지만 난 사법시험 합격보다 건강한 네 두 다리가 더 부럽다.”
 “형도 참··· 할 말 없으니까······.”
 살다 보면 가족을 위해 돈을 벌다 보니 가족에게 소홀한 경우처럼 본래 목적을 상실한 채 살아가는 경우가 허다했다.
 여느 부모들이 그러하든 조용수의 부모들도 그가 편안하게 행복하게 살기를 바라서 사법시험에 합격하기를 바라고 있을 것이다. 한데 그것이 그에게 진정한 행복일지는 모르는 일이었다.
 하긴 존재의 이유조차 잊고 있는 내가 충고라니, 조금은 우스웠다.
 그래서 적당한 말로 대화를 마무리했다.
 “다른 길도 있으니까 너무 부담 갖지 말라는 거야. 마음이 편안해야 시험도 잘 보지 않겠어?”
 “무슨 말인지 잘 알겠어요. 그건 그렇고 방학 동안에 무슨 일 있었어요? 뭔가 조금 바뀐 것 같은데요?”
 “바뀐 건 없다만 방학 동안 일이 있긴 있었지.”
 “오! 무슨 일이요? 혹시 이거 생겼어요?”
 조용수는 입꼬리를 올리며 새끼손가락을 들어올렸다.
 “있던 애인마저 떠난 마당에 무슨······.”
 “어? 예전에 말한 그분이랑 헤어졌어요?”
 김철이 신유리에 대해 조용수에게 얘기를 한 적이 있었나 보다. 세세한 기억은 떠올리기 전에는 알 수 없었고, 잃어버린 기억의 경우는 전혀 알 방도가 없었다.
 “응.”
 “괜찮아요?”
 “결혼한 사람들도 헤어지는 판국에 연인끼리 헤어지는 게 대수냐?”
 “형이라면 나중에 더 좋은 여자 만날 거예요.”
 예의상 하는 말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모성애가 넘치는 여자나 특이한 여자가 아니고서야 누가 하반신마비인 나와 사귀겠는가.
 이런저런 얘기를 하며 시간을 보내고 있는데, 문동환이 소리를 버럭 지르며 다가왔다.
 “철이 선배! 진짜 너무한 거 아냐!”
 조용수와 마찬가지로 올해 3학년인 문동환은 김철이 가장 싫어하는 후배였다.
 1학년 때부터 묘하게 거슬리는 말투와 행동을 보였고 둘이 있을 땐 맞먹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윽박지르는 듯한 기억도 있었다.
 ‘정말 육체적이 아니라 정신적으로 병이 깊었군.’
 문동환에 대한 기억을 떠올리던 난 한편으로는 이해를 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속이 답답해졌다.
 후배의 건방진 태도를 보고 찍소리도 못한 것은 둘째치고라도 호구가 되어 사법시험 시험을 준비하며 정리해 둔 노트와 자료들을 싫어하는 사람에게 빌려줬다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아서였다.
 과거의 김철이라면 현 상황에 주눅이 들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다리 때문에 자신감이 없고 한없이 착하기만 했던 그는 이제 없었다.
 난 살짝 인상을 찌푸리며 말했다.
 “뭐가?”
 “민사소송법이랑 형법, 형사소송법 자료는 어떻게 된 거야? 방학 내내 내가 얼마나 전화했는지 알아? 다음 달에 시험인데 떨어지면 선배가 책임질 거야? 그리고 전화는 왜 결번이라고 나오는 건데? 혹시 나 엿 먹일라고 작정한 거야?”
 문동환은 2차 시험을 준비 중이었는데 1학기 때 김철에게 헌법, 행정법, 상법, 민법에 대한 자료들을 받았고, 나머지는 정리가 끝나면 방학 때 받기로 했는데 자살사고가 일어나면서 그걸 못 받은 것이었다.
 난 그의 말에 어이가 없어서 피식 웃다가 얼굴을 굳히며 소리쳤다.
 “야, 말 똑바로 안 해?”
 “뭐······?”
 “내가 니 친구냐? 왜 말끝마다 반말이야? 이 싸가지 없는 새끼야!”
 “화를 낼 사람이 누군데 지금······!”
 “화를 낼 사람? 장난하냐? 니가 뭔데 나한테 자료를 내놓으라 마라야? 방학 동안 나한테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고 그따위로 지껄이는 거야? 니 공부는 니가 스스로 해. 그리고 내가 준 1차 시험 자료들하고 2차 시험 자료 당장 내놔.”
 “······.”
 문동환은 나에게 할 말이 있는 듯 입을 씰룩댔지만 조용수 때문에 하지 못하는 듯했다.
 “용수야, 동환이가 나한테 할 말이 있는 것 같은데 잠깐만 비켜줄래?”
 “···별로 좋은 생각은 아닌 것 같은데요?”
 “괜찮아.”
 조용수는 몇 번이고 망설이다가 자리를 비켜줬다.
 “아! 씨바, 정말 병신 같은 게 지금까지 선배 대접해 줬더니 존나 깝치네.”
 문동환은 조용수가 사라지자마자 본색을 드러냈다.
 “돌대가리 새끼가 말은 잘하네. 그게 하고 싶은 말이었냐?”
 “이 씨발 새끼가!”
 문동환은 손을 쳐들었다.
 “쳐 봐. 그 순간 넌 어디에도 발을 못 붙이게 해줄 테니까.”
 “아우∼ 증말!”
 “병신한테 알랑거려서 자료 얻을 생각하지 말고, 대가리 굴려서 공부해. 하긴 그 머리로는 힘들라나?”
 멱살을 잡아오는 문동환을 향해 이죽거리며 말했다.
 난 그가 홧김에 날 폭행하길 바라고 있었다. 그렇다면 지금까지 김철이 당했던 일을 깔끔하게 갚아줄 수 있을 테니 말이다.
 하지만 그는 완전히 돌대가리는 아니었다.
 “으휴∼ 씨바! 병신 새끼가 주둥이만 살아서. 혹시 밖에서 보면 그땐 계단에서 밀어버릴 테니까. 조심해라. 이 병신 새끼야.”
 문동환은 멱살을 놓으며 뒤로 물러섰다. 그리고 잠시 후 조용수가 다시 휴게실로 들어오며 물었다.
 “괜찮아요?”
 조용수의 물음에 난 고개를 끄덕여 대답을 한 후 스마트폰을 꺼냈다. 그리고 문동환을 향해 화면을 보여주며 녹음 종료 버튼을 눌렀다.
 “내가 뭘 녹음했을까?”
 “······!”
 “이걸 동문회나 방송국에 가져가면 어떻게 될까 궁금하네. 네 아버지가 판사라고 했었나?”
 “···원하는 게 뭐야?”
 “하∼! 이 새끼, 정말 대가리 나쁘네··· 아직도 선배한테 반말이냐?”
 “···뭡니까?”
 난 손가락을 까닥여 그를 내 앞으로 불렀고 문동환은 복잡한 얼굴이 되어 다가왔다.
 “고개 숙여.”
 “도대체 무······.”
 쫘악!
 문동환의 얼굴이 한쪽으로 홱 돌아갔다.
 잠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인식을 못하고 있던 문동환은 곧 상황을 깨닫고 죽이기라도 할 듯한 눈빛으로 날 노려보았다.
 “야, 눈깔에 힘 안 푸냐?”
 난 나지막이 중얼거렸고, 현실을 깨달은 문동환은 어금니를 악물며 눈을 내려 깔았다.
 “다음부터 선배한테 똑바로 해라. 그리고 당장 내가 줬던 자료를 가져와.”
 문동환은 복잡한 얼굴로 몇 번이고 망설이다가 가방을 열어 내가줬던 자료들을 꺼냈다.
 “나머지는 오늘 안에 용수한테 줘라. 아님··· 알지?”
 아무 말도 못하고 돌아서서 휴게실을 나가는 문동환을 보니 내가 직접적으로 당한 일이 아니었음에도 마치 가슴속에 쌓아뒀던 묵은 감정을 털어낸 것 같아 속이 시원해졌다.
 잠깐 빙의를 한 대상의 기억에도 영향을 받는 내가 50일이나 김철의 몸에 있었으니 어쩌면 당연한 일일 것이다.
 “우와! 진짜 활불이라고 불리던 철이 형 맞아요?”
 문동환이 사라지자 조용수는 엄지를 들어 올리면서 수선을 떨었다.
 “활불이 아니라 호구였겠지.”
 내색을 하지 않았다 뿐이지 후배들이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 모를 만큼 김철은 바보가 아니었다.
 그저 그의 입장에선 좋은 게 좋다는 생각으로 자신의 감정을 억누르고 있을 뿐이었다.
 “그렇게 생각하는 애들도 더러 있었지만 전 그렇게 생각한 적 없어요. 착한 게 나쁜 건 아니잖아요.”
 “알고 있다. 그건 그렇고 이건 네가 볼래?”
 문동환이 놓고 간 자료를 들어 조용수에게 건넸다.
 “지, 진짜요?”
 “필요하다면 봐. 어차피 이제 나에겐 더 이상 필요 없는 물건이니까.”
 “저야 좋지만······.”
 “근데 넌 왜 지금까지 한 번도 나한테 자료 달라는 소리를 안 한 거냐? 네가 달라고 했으면 줬을 텐데.”
 “형한테 해준 것도 없는데 미안하잖아요.”
 “미안하긴. 저딴 놈에게 준 내가 더 미안하지. 가자, 캐비닛에 다른 자료들도 있으니 줄게. 혹시 민주랑 요한이가 필요하다면 복사해 주고, 나머지 애들하고는 절대 공유하지 마라.”
 “그럴게요.”
 오늘 학교에 온 이유는 2학기 수업 문제로 담당 교수님들을 보기 위해서였다.
 사법연수원에 들어가기 전에 홀로 공부하겠다는 핑계로 수업을 듣지 않을 생각이었는데 김철의 기억을 더듬어보면 가능한 일이었다.
 조용수에게 캐비닛에 있는 자료를 넘긴 난 교수실을 돌았다.
 
 “그렇게 하고, 졸업식 때는 꼭 와라.”
 “네, 알겠습니다.”
 사법시험까지 이미 패스해서인지 모든 교수님께서 흔쾌히 허락을 해주었다.
 
 
 
 3. 만남
 
 
 
 2학기 수업을 뺀 것은 공부를 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여행을 다니기 위해서였다.
 장애가 있는 김철의 몸에 빙의를 해서인지 모르지만 대한민국 곳곳을 보고 싶다는 열망에 휩싸여 하루가 멀다 하고 돌아다니고 있었다.
 굳이 유명 관광지가 아니어도 상관없었다. 마을만 있으면 적당한 곳에 주차를 하고 휠체어로 돌아다녔다.
 “여기, 기억이 나.”
 충청남도 보령의 시골 마을에 들른 난 마을 입구에 있는 커다란 나무를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과거였는지, 현재였는지, 아님 미래였는지 모르지만, 언젠가 빙의를 했을 때 본 모습이었다.
 ‘마을 사람들에 의해 목이 매달렸던 남자였든가?’
 차츰 선명해지는 기억.
 휠체어로 나무 주위를 돌던 난 나무에 새겨진 익숙한 흔적을 찾을 수 있었다.
 “···과거였군.”
 과거에 자신이 한 일을 이백여 년이 지난 지금 보게 되다니 꽤 신기한 일이었다.
 “뭘 그리 유심히 보는겨?”
 평상에 앉아 있던 노인 분들 중 할머니 한 분이 내 행동을 보고 물었고 그제야 정신을 차렸다.
 “아! 여기 이상한 표식이 있어서 보고 있었어요.”
 “뭔 소리랴? 거기 뭐가 있다고 그려?”
 “하하! 제 눈에는 그렇게 보이네요. 번잡하게 해드렸다면 죄송해요.”
 난 살짝 고개를 숙이며 인사를 한 후 휠체어를 몰아 차로 향했다.
 마을을 보지 않았지만 알 만큼 충분히 알았다.
 “젊은이 말처럼 그건 표식이 맞네.”
 뒤를 돌아보니 아까 나무 밑 평상에 앉아 있던 백발의 노인이 다가오고 있었다.
 “···그런가요? 어떤 표식이죠?”
 “얘기가 긴데 들어보겠나?”
 “여행 중이라 남는 게 시간이죠.”
 “그럼 우리 집으로 가세나. 저기 보이는 오래된 한옥이 우리 집이라네.”
 노인의 집은 커다란 한옥으로 사랑채와 행랑채, 별당, 곳간 등 여러 채로 이루어져 있었다.
 “이제 이곳 안채를 빼고는 거의 쓰지 않는다네.”
 내가 이리저리 살펴보자 간단한 설명을 한 노인은 집과 어울리지 않는 냉장고에서 포도 음료를 꺼내줬다.
 “감사합니다. 자녀분들은?”
 “아들, 딸 두 명 있지. 모두 도시로 나가 자수성가해서 명절 때나 내려오지.”
 “그렇군요.”
 자녀와 손주들에 대한 자랑을 한참 늘어놨지만 그리 싫지 않았기에 적당히 맞장구를 치며 집의 풍광을 구경했다.
 “자네가 보기엔 나무에 새겨진 표식이 무엇 같은가?”
 “글쎄요? 어르신이 표식이라고 말하셨으니 아이들이 장난으로 새겨놓은 것 같지는 않고······.”
 “그건 내 고조부님께서 새긴 암호문이라네.”
 “암호문요?”
  암호문이라는 걸 몰라서 물은 것은 아니었다. 내가 새긴 것인데 무슨 의미인지 모를 리가 있겠는가.
 다만 표식을 새긴 이가 말하는 노인의 고조부라는 말에 놀라 반문을 했을 뿐이었다.
 ‘만났나 보군.’
 놀람도 잠시 왠지 모를 기쁨에 빙긋 웃음이 나왔다.
 “그렇다네. 누군가에게 어디 위치로 오라는 암호문이었지. 사실 내 고조부님은 원래 이 저택의 주인이었던 정씨 집안의 머슴이었다네. 한데 당시 머슴으로서 해서는 안 될 일을 하셨지. 당시 그 댁의 아씨를 좋아하게 된 거야. 그런데······.”
 노인의 입에선 옛 얘기가 흘러나왔다.
 드라마에서 흔히 나오던 얘기였다.
 사랑해선 안 될 사람을 사랑한 머슴과 아씨, 그리고 그 사실을 알게 된 양반.
 양반은 조용히 해결되길 원했다. 그래서 머슴이 자살한 것처럼 꾸미기 위해 다른 머슴들을 시켜 마을 정자나무에 목을 맨 것처럼 만들었다.
 노인의 고조부를 다른 머슴들이 가엾게 여겼는지 아님 운이 좋았는지 목이 완전히 조이지 않았고 기절한 채 서서히 죽어가던 머슴에게 빙의를 한 것이었다.
 무사히 나무에서 내려온 난 두 사람의 사랑에 꽤 마음이 먹먹했었다. 그래서 살려준 것에 만족하지 않고 혹시나 아씨가 보지 않을까라는 생각에 나무에 둘 만의 표식을 했고 표식이 가리키는 장소로 달려가 아씨가 오기를 기다렸었다.
 그러나 결과를 알지 못했다.
 아씨가 도착하기 전에 빙의가 풀렸기 때문이었다. 한데 이렇게 우연히 그때 일에 대한 뒷얘기를 듣게 되니 기분이 묘했다.
 “···고조부님은 꽤 당황하셨다는군. 분명 뭇매를 맞고 기절을 했었는데 전혀 엉뚱한 곳에서 깨어나셨으니 말이야.”
 “그래서 아씨는 만났나요?”
 “만나셨지. 고조부님이 목을 맸다는 소리에 황급히 정자나무에 달려가셨던 고조모님은 사라진 시체에 놀라 이곳저곳을 찾으시다가 고조부님이 남기신 표식을 보고 그대로 고조부님이 계신 곳으로 달려 가셨다네.”
 “다행이네요. 한데 할아버님이 이곳에 계신 거 보면 두 분의 사랑이 인정을 받았나보군요?”
 “그런 시대가 아니었네. 고조부모님께서는 그 길로 떠나서 평생을 타지에서 사셨지.”
 “허면 이 집은 어떻게?”
 “내 할아버님께서 고조부님의 유언을 받들어 이곳으로 돌아오셨고, 때마침 망해가던 정씨 집안에게 이 저택을 샀다네.”
 해피엔딩이었다.
 빙의를 하면서 즉흥적으로 했던 행동이 한 집안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고 생각하니 꽤나 재미있었다.
 그러나 그뿐이었다.
 지금은 염으로 돌아갈 수도 없었고, 혹 돌아갈 수 있다고 해도 돌아갈 생각도 없었다.
 “잘 들었습니다, 어르신.”
 “나야말로 오래전에 할아버지께 들었던 이야기를 생각나게 해줘서 고맙네. 지금까지 까맣게 잊고 있었거든. 한데 벌써 가려고?”
 “네.”
 “저녁이나 먹고 가지 그러나?”
 “몸이 이래서 웬만한 곳에 머물면 민폐도 민폐지만 제가 너무 불편하거든요.”
 “허허허. 그렇겠군. 조심히 가게나.”
 내가 빙의해서 살렸던 이의 고손자의 배웅을 받으며 난 저택을 빠져나왔다.
 
 * * *
 
 대동여지도를 만들었던 고산 김정호처럼 전국을 돌아다니는 스스로의 행동에 의문이 들기도 했지만 그저 하반신마비로 여행을 다니지 못한 김철의 잠재의식 때문이라고 생각하며 나의 방랑벽은 겨울이 되어서도 멈추지 않았다.
 일주일 동안의 여행을 마치고 차에서 내려 빨랫감이 잔득 든 가방을 휠체어에 걸고 있을 때였다.
 “김철 씨?”
 단정한 정장 차림의 중년 여자가 천천히 다가오며 말을 걸었다.
 “그렇습니다만 누구신지?”
 “제 명함이에요.”
 여자가 건넨 명함에는 변호사 하지영이라고 적혀 있었다.
 “하 변호사님이셨군요. 한데요?”
 “시간이 된다면 잠깐 얘기 좀 나눴으면 해요. 참고로 저는 대한대학교 법과대학 84학번입니다.”
 거절을 못하게 학교를 들먹이는 하지영이었다.
 사법연수원도 들어갈지 말지 고민하고 있는 나에겐 별 소용없는 간판(?)이었으나 사람 일이란 모르는 일이었기에 굳이 거절할 이유는 없었다.
 “선배님이셨군요. 괜찮으시다면 집으로 들어가서 얘기를 하는 게 어떠신지요?”
 “그게 편하다면 그렇게 해요.”
 보일러를 최소한 낮춰 둬서인지 집은 바깥 온도와 별 차이가 없었다.
 “집을 비워 뒀더니 좀 춥네요. 소파에 앉아 계세요. 커피와 녹차가 있는데 뭘 드릴까요?”
 “녹차로 하죠.”
 물을 끓여 잔에 붓고 티백 녹차를 넣어 하지영에게 건넸다.
 후루룩 한 모금 마신 그녀가 입을 열었다.
 “여행을 자주 다니나 봐요?”
 “머리 식힐 겸 다니고 있습니다.”
 “하긴 연수원에 들어가면 2년간 또 공부만 해야 하니 지금이 아니면 기회가 없겠네요.”
 딱히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았다.
 “한데 그렇게 여행만 다니면 여자 친구가 뭐라 하지 않던가요?”
 “지난여름에 헤어졌습니다.”
 “저런! 어쩌다가······.”
 “새로운 남자가 생겼더군요.”
 “괜한 걸 물었네요. 미안해요.”
 하지영은 안타깝다는 듯 말하고 있었지만 내가 보기엔 이미 알고 있었던 것처럼 보였다.
 ‘할 말이 있으면 후딱 할 것이지.’
 빙빙 돌려서 얘기하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래서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
 “하고픈 말 있으면 하세요, 선배님. 제가 며칠간 제대로 씻지를 못해서······.”
 “아! 내 생각만 했군요. 그럼 단도직입적으로 묻죠. 혹시 선 볼 생각 있어요?”
 “선이요?”
 정말 생각지도 못한 말이 하지영에게서 나왔다.
 “···농담이시죠?”
 “정말이에요. 내가 볼 때 어디 한 군데 부족함이 없는 여자예요.”
 “그런 말씀을 하니 더 믿을 수가 없군요.”
 사법시험에 합격을 하면 괜찮은 곳에서 선이 들어오고, 사법연수원에서 우수한 성적을 거두면 더 좋은 곳에서 선이 쏟아진다는 얘기를 선배들에게 들은 적은 있었지만 김철은 단 한 번도 경험한 일이 없었다.
 한데 뜬금없이 선이 들어왔다니 믿기지 않으면서도 한편으로 선 볼 여자에 대해 궁금해졌다.
 “혹시 저랑 비슷한 처지인가요?”
 “장애를 말하는 것이라면 없어요.”
 “음, 그럼 머리가 조금 이상한가요?”
 “아뇨. 고등학교를 조기졸업하고 예일 대학교 경영학과 역시 1년 먼저 졸업한 재원 중에 재원이죠.”
 “공부만 하다가 정신이 이상해졌나 보군요. 솔직히 그런 여자가 왜 저에게 관심을 가지는지 모르겠군요.”
 “김철 씨도 스스로에 대해 자신감을 가질 만큼 충분히 재원이에요.”
 “육체적인 것만 뺀다면 말이죠. 아, 그렇다고 스스로를 비관하지는 않아요. 그저 객관적으로 보는 거죠.”
 “좋은 마음가짐이네요. 그래서 선 볼 생각은 있나요?”
 “약간은요.”
 관심이 있다고 해서일까 하지영은 가방에서 노란색 서류 봉투를 꺼내 나에게 건넸다. 봉투 안에는 선 볼 여자의 사진이 들어 있었는데 상당한 미인이었다.
 “시간은 언제쯤 괜찮을까요?”
 “하루 이틀 전에만 연락주시면 언제든 괜찮습니다.”
 “알았어요. 그럼 약속이 잡히면 바로 연락하죠.”
 갑작스럽고 믿기지 않는 맞선 제안 때문이었을까, 하지영이 떠나고 한참 뒤에야 맞선 볼 여자의 이름조차 묻지 않았음을 깨달았다.
 
 * * *
 
 “반가워요, 류성은이에요.”
 170센티미터가 넘는 키에 하이힐을 신어 웬만한 남자보다 커 보이는 여자가 손을 내밀었다.
 “김철입니다.”
 난 손을 내밀어 가볍게 그녀의 손을 잡았다.
 선보는 자리라 꾸미고 나와서인지 류성은은 사진보다 훨씬 더 예뻤고 늘씬한 키에 어울리게 몸매 또한 상당했다.
 한데 살짝 올라간 눈꼬리와 흔들림 없는 눈빛 때문일까 다소 차갑게 보이는 것이 흠이라면 흠이었다.
 “일하다가 와서 배가 고픈데 저녁 먹으면서 얘기를 할까요? 여기 스테이크 맛있어요.”
 “그러시죠.”
 주문을 하자 테이블에 각종 식기류가 세팅되었다.
 포크, 나이프, 스푼 그리고 여러 종류의 컵이 테이블을 점령했다.
 “···어지럽군요.”
 솔직히 말했다.
 김철의 기억이나 내 기억을 뒤진다고 각각의 식기를 어디에 사용해야 할지 나올 것 같지 않아서였다.
 “잘못 사용한다고 못 먹는 거 아니니까 편하게 먹어요. 공식적인 자리를 위해 한 번쯤은 배워둘 만한 것이긴 하지만 허세가 가득한 식사법이긴 하죠.”
 그녀가 말을 하는 동안 소믈리에가 와인을 들고 왔고 와인 잔에 조금씩 따랐다.
 “괜찮네요. 오늘은 그걸로 하죠.”
 한 모금 마신 류성은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하자 소믈리에는 적당량의 와인을 채운 후 병을 놓고 밖으로 나갔고 뒤이어 식전 빵이 나왔다.
 “바깥부터 안쪽으로 사용하면 돼요.”
 빵을 먹자 전채 요리가 나왔는데, 그녀는 내가 보라는 듯 포크와 나이프를 천천히 들며 설명했다.
 전채 요리가 끝나자 스프가 나왔고, 스프를 먹고 난 다음에야 메인 요리인 스테이크와 곁들여 먹을 수 있는 신선한 샐러드가 나왔다.
 “저에 대해 궁금한 점 없나요?”
 그녀는 스테이크를 3분의 2쯤 먹고 나서야 포크와 나이프를 놓으며 입을 열었다.
 “아까 일을 하다가 오셨다고 했는데 무슨 일을 하세요?”
 “아버지 회사에서 일을 배우고 있어요.”
 “실례가 안 된다면 회사 이름이 어떻게 되는지 알 수 있을까요?”
 “어머, 저에 대해서 전혀 모르고 오셨어요?”
 “네, 이름도 오늘에서야 들었는걸요.”
 “이런. 하 변호사님께 최대한 비밀스럽게 추진해달라고 부탁했지만 설마 김철 씨에게도 비밀로 했을 줄은 몰랐네요.”
 “괜찮습니다. 덕분에 이렇게 자연스럽게 얘기할 수 있잖아요.”
 “호호호. 그렇게 생각해 주니 고맙네요. 아버지가 경영하는 회사는 창천그룹이에요. 전 창천화학에서 사장으로 일하고 있고요.”
 창천그룹이라면 우리나라 20대그룹 안에 들어가는 기업이었다.
 ‘창천그룹? 창천그룹이라······.’
 김철의 기억이 아닌 염일 때의 기억이 어렴풋이 떠올랐다.
 미래의 누군가에게 빙의를 했을 때 읽은 기억이었는데 그 기억에 의하면 창천그룹은 재계 1위 그룹이었다. 즉 미래의 어느 시점엔 창천그룹이 재계 1위가 된다는 얘기였다.
 ‘그런다고 달라질 것은 없지만 말이야.’
 오랫동안 염으로 살아서일까 딱히 인간적인 욕심은 없었다. 그저 염일 때 못했던 일을 하며 살다가 다시 염으로 돌아가면 된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별로 놀란 기색이 아니네요?”
 “놀라야 합니까?”
 “솔직히 말하자면 여러 번 맞선을 봤지만 김철 씨만큼 무덤덤한 사람은 처음이네요.”
 “현실에 만족하며 살 줄 알거든요.”
 “음, 그런가요?”
 “이왕 말이 나왔으니 물어보죠. 당신 말처럼 누구나 놀랄 정도의 배경을 지닌 이가 왜 굳이 나 같은 사람과 맞선을 보는 거죠?”
 내 질문에 류성은은 바로 대답하지 않고 와인 잔을 들어 건배를 제의했다.
 “다 마시면 대답하죠. 물을 맞는 건 괜찮은데 와인을 맞는 건 사양하고 싶거든요.”
 “앞에 있는 걸 뿌리고 싶어지는 대답인가 보군요. 하지만 제가 뿌릴 일은 없을 겁니다.”
 “장담하지 말아요. 대부분 그렇게 말해놓고 뿌리고 가거든요.”
 “나이프를 던진 사람은 없었나 보군요.”
 난 와인을 단숨에 마시고 류성은이 말하길 기다렸고 그녀는 한 잔 더 따라서 마신 후 입을 열었다.
 “저에겐 남성혐오증이 있어요.”
 “아!”
 난 단번에 그녀가 하는 말을 알아들었다.
 류성은은 남자가 아닌 그냥 호적에 이름을 올려줄 사람이 필요한 것이었다.
 김철이라면 검사나 판사가 될 가능성이 높았기에 최소한 욕을 먹을 수준은 아니었고 섹스를 아예 할 수가 없으니 딱이었으리라.
 “이해했나요?”
 “충분히요.”
 “이해가 빠르네요. 뿌려도 좋아요. 대신 오늘 있었던 일은 잊어주세요. 혹시나 소문이 난다면 물을 뿌린 것에 대한 대가를 치러야 할 거예요.”
 “훗! 그렇게 협박을 했는데도 뿌린 남자들이 있었다는 게 신기하군요. 전 뿌릴 생각이 없습니다. 대신 세 가지 물어보죠.”
 “···말해요.”
 “만일 결혼한 후 제가 아이를 원한다면 어떻게 할 생각이죠?”
 “아이는 두 명까지 낳아줄 수 있어요. 단 의학의 힘을 빌려야겠죠.”
 “꽤 구체적으로 계획을 세워뒀군요? 허면 부모님을 설득할 자신은 있나요?”
 다리를 손바닥으로 탁탁 치며 말했다.
 “부끄럽지만 사회적 지위로 사람을 보는 분이 제 아버지거든요.”
 “확실한 기준이 있으신 분이군요.”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겠네요. 마지막은 뭐죠?”
 “성은 씨의 제안이 다소 자존심이 상하는 제안이긴 하지만 그래도 야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충분히 허락할 만한데요.”
 “창천그룹과 관해서는 모든 권리를 포기해야 한다는 계약서를 작성해야 해요. 그리고 내가 원할 때 이혼을 해줘야 하죠. 물론 아이들에 대한 권리 또한 포기해야 하고요. 가질 수 있는 건 약간의 돈과 결혼을 하고도 마음껏 바람을 필 수 있다는 정도죠.”
 “다들 학을 뗄 만하군요. 뿌려도 될까요?”
 “늦었어요! 게다가 화가 나지도 않았잖아요?”
 류성은의 말처럼 기대한 것이 없었기에 화나는 것도 없었다. 호기심에 나왔고 호기심을 채웠으니 그걸로 만족했다.
 “하하! 천하의 창천그룹 영애에게 물을 뿌릴 수 있는 기회였는데 아깝군요. 얘기가 끝났으니 식사나 마저 할까요?”
 난 남아 있던 스테이크를 먹기 시작했다. 그런 나를 류성은은 특이하다는 듯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저랑 계약하지 않을래요?”
 후식으로 나온 달콤한 과일 아이스크림을 먹는데 류성은이 말했다.
 “싫습니다.”
 단칼에 거절했다.
 “당장 결정할 필욘 없어요. 어차피 김철 씨가 사법연수원에 가서 우수한 성적으로 검사나 판사가 되어야 계약이 시작되는 거니까요.”
 “사법연수원에 안 갈지도 몰라요.”
 “그럼 계약은 없는 거죠.”
 딱히 손해 볼 것은 없는 계약이었다. 그러나 얽매인다는 자체가 싫었다. 내 표정에 그런 생각이 비춰졌는지 류성은은 거절하지 못할 떡밥을 더했다.
 “여행을 좋아한다죠? 당신에게 맞춘 캠핑카를 선물로 드리도록 하죠.”
 “···계약을 못해도 준다는 겁니까?”
 “네, 계약이 안 된다고 해도 당신 거예요.”
 “좋습니다, 하죠!”
 딱히 소유욕이 없는 내가 유일하게 탐내는 것이 있다면 바로 캠핑카였다.
 “캠핑카를 주면서까지 굳이 저랑 계약하려는 이유를 모르겠군요.”
 류성은이 간단하게 손으로 작성한 계약서에 사인을 하면서 물었다.
 “당신 같은 사람은 처음이거든요. 가급적 사법연수원에는 들어가는 걸로 해봐요. 김철 씨라면 좀 더 많은 걸 줄 수도 있어요.”
 “제가 욕심이 없다는 걸 확신하고 있군요. 만일 이 모든 게 제 작전이라면 어쩌려고요?”
 “아니라는 거 알아요. 하지만 만일 완벽하게 날 속인 거라면······.”
 류성은의 눈빛이 날카로워지며 방 안의 공기가 순식간에 싸늘하게 바뀌었다.
 ‘이 여자, 위험해.’
 그녀의 눈빛을 보자 왠지 모를 섬뜩함이 등줄기를 타고 내렸다.
 “···어쩔 수 없죠. 속은 사람이 바보잖아요. 깔깔깔!”
 “그, 그렇군요.”
 류성은이 웃자 언제 그랬냐는 듯 싸늘함은 사라지고 밝은 분위기로 돌아왔다. 하지만 방금 전에 느꼈던 사이한 기분을 없애기엔 역부족이었다.
 계약서 작성이 끝나면서 맞선도 끝이 났다.
 “오늘 유익했어요. 계약이 시작되길 기다리고 있을게요. 그럼.”
 류성은은 작별 인사를 하고 휑하니 사라졌고 난 그녀가 사라진 문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절대 친해져서는 안 될 여자라고.
 
 * * *
 
 류성은은 약속을 확실히 지켰다. 맞선을 본 이튿날 캠핑카 업체에서 사람이 와서 어떻게 고칠지에 대해 물어보았고 이주일이 지난 오늘 캠핑카를 양도할 사람이 오기로 했다.
 “마트에 들러 일단 냉장고부터 채워야겠어.”
 캠핑카가 도착하면 바로 떠날 생각으로 짐을 정리하고 있었다.
 이번엔 돌아오지 않고 한 달 정도 머물다 올 생각이었는데 그럴 작정을 한 것치곤 짐이 많지 않았다. 왜냐하면 캠핑카엔 세탁기도 있었기 때문이었다.
 딩동! 딩동!
 “왔다!”
 캠핑카 업체에서 왔다고 생각한 난 서둘러 문을 열었다. 한데 캠핑카 업체가 아니라 뜻밖의 인물이었다.
 “···신유리?”
 “오랜만이네. 들어가도 될까?”
 금발로 염색한 머리, 몸에 착 달라붙은 원피스에 밍크코트, 명품 가방, 기억 속의 신유리와는 달라도 너무 달랐다.
 “들어와.”
 “잘 지냈어?”
 “덕분에. 마실 거라도 줄까?”
 “아무거나.”
 처음 김철에게 빙의했을 땐 신유리에 대해 별다른 감정이 없었다. 한데 김철로 오랫동안 지내다 보니 일체화가 깊어졌는지, 아님 실물로 봐서인지 약간의 감정이 일어났다.
 그 감정은 사랑의 감정이 아니었다. 들고 있던 잔을 그녀를 향해 던져버리고 싶은 걸 보면 분노였다.
 ‘···그럴 가치도 없는 일이야.’
 깊게 숨을 들이쉬는 것만으로도 사라질 만큼 보잘 것 없는 분노였다.
 “모습을 보니 잘 지내는 것 같은데, 어쩐 일이야?”
 “목사님께서 네가 안 나온다고 어찌된 일인지 나보고 알아보라고 해서 왔어.”
 신유리의 어머니가 다니던 교회의 집사였다.
 “헛걸음했구나.”
 “무슨 뜻이야?”
 “난 더 이상 신을 믿지 않아. 세상에 믿어야 할 것이 있다면 돈과 섹스, 이 두 가지겠지.”
 “······.”
 “시련을 이기면 다른 시련을 내리는 신 따위가 존재할 리가 없어.”
 “차라리 날 욕해.”
 “넌 정상적인 삶을 살고 있어. 예전이 비정상이었지. 널 탓하는 게 아냐. 나라고 해도 너와 같은 선택을 했을 거야. 삶은 드라마가 아니라 현실이니까.”
 “많이 바뀌었구나······?”
 “네가 그랬듯이 나도 현실을 알게 된 거야.”
 신유리가 헤어지자고 한 것은 7월이었지만 사실상 그녀가 민종수와 사귀기 시작한 것은 훨씬 이전부터였고, 김철도 어느 정도 눈치를 채고 있었다. 다만 그러한 사실을 말하면 그녀가 떠날 것 같아 모른 채 입을 닫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 비참한 감정들을 털어내기 위해 마음껏 비꼬며 얘기를 했고 결과는 성공적이었다.
 “···잘못 왔네. 갈게.”
 “두 번 다시 안 봤으면 좋겠어.”
 내 말에 거실로 가고 있던 신유리의 발걸음이 멈췄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곧 문을 닫고 사라졌다.
 “속이 다 시원하군.”
 신유리가 볼 땐 헤어진 여자에게 찌질하게 구는 남자로 보일지 몰랐다.
 하지만 상관없었다. 내 기분이 중요하지, 이미 떠난 여자의 감정 따위를 생각할 만큼 한가하지 않았다.
 신유리가 가고 얼마 지나지 않아 캠핑카업체에서 차를 가져왔고 난 여행을 떠났다.
 
 전국을 돌며 한 달을 보낸 난 정비를 하기 위해 집으로 돌아왔다.
 빨랫감을 세탁기에 넣어 돌린 후 욕조에 물을 받아 몸을 담갔다.
 “아∼ 좋다.”
 캠핑카가 좋다고 하더라도 집만큼 편하고 좋을 순 없었다.
 탈수를 하는지 덜덜거리는 세탁기 소리를 들으니 눈이 절로 감겼다.
 한데 그때 목욕탕 문이 벌컥 열렸다.
 혼자 사는 집이어서 누군가가 들어올 것이라고는 상상도 못하고 있었기에 깜짝 놀랄 수밖에 없었다.
 잠은 순식간에 달아났고 눈을 떠 문 앞에 서 있는 이를 확인했다.
 “니가 여긴 웬일로······!”
 착한 김철이 찢어죽이고 싶을 정도로 싫어했던 민종수가 비열한 웃음을 지은 채 서 있었는데, 험상궂은 두 명의 사내와 함께였다.
 “친구가 친구 집에 놀러오는 데 이유가 있냐?”
 “친구 같은 소리하네. 주거침입으로 신고하기 전에 어서 나가!”
 소리치는 내 목소리엔 힘이 없었다.
 나가란다고 나갈 놈이었으면 이렇게 찾아올 리도 없었고 사내들까지 대동한 것을 볼 때 앞으로 벌어질 일들이 예상되었기 때문이었다.
 “한동안 잠깐 친구로 지내줬더니 보이는 게 없나보구나? 할 말 끝나면 가지 말라고 붙잡아도 갈 테니까 그 입 좀 다물지?”
 타인의 기억을 통해서는 죽음의 공포까지 숱하게 겪어보았지만 두려움이란 나에게 무척 생소한 것이었다. 한데 민종수의 눈빛을 보며 두려움을 느끼고 있었다.
 ‘김철의 감정일 뿐이야!’
 난 익숙지 않은 두려움이란 감정을 김철의 기억 탓으로 돌리려 했다. 그러나 스스로는 알고 있었다. 두려움이라는 감정을 온전히 느끼고 있음을.
 “씨발! 나가라고!”
 난 생소하면서도 더러운 기분을 없애려는 듯 발작적으로 소리쳤다.
 
 
 
 4. 분노라는 감정
 
 
 
 “하아, 이 새끼가! 이제 잃을 게 없다고 생각하는 거냐? 일단 조용히 얘기하려면 그 입부터 닫게 해줘야겠군.”
 민종수는 뒤에 있는 사내들에게 눈짓을 보냈고 두 사내는 목욕탕 안으로 들어왔다.
 “나가라고, 이 개새끼들아! 나··· 꾸룩!”
 방금 전까지 나른함을 선사하던 욕조의 물이 입으로 들어오며 생명을 위협했다. 움직이지 않은 하체를 대신해 손을 움직여 이 상황을 벗어나라고 해봤지만, 두 사내의 악력을 당할 수가 없었고, 속절없이 당해야 했다.
 “푸하! 흐어업, 크··· 꾸룩!”
 제대로 숨을 쉬기도 전에 다시 머리가 물속에 박혔고, 물이 쉴 새 없이 목을 타고 넘었다.
 그와 함께 정신이 아득해졌다.
 염일 때 물고문을 당하며 죽어가는 사람들에게 빙의가 된 적도 있어 지금과 같은 고통엔 익숙하다면 익숙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의 난 그때와는 달리 필사적으로 살기 위해 손을 내젖고 있었다.
 ‘빌어먹을! 이럴 줄 알았어!’
 정신체인 내가 두려움을 느꼈던 것은 김철이 죽는다고 해서 빙의가 풀리지 않을 것이라는 걸 어렴풋이 느끼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김철의 몸에 완전히 적응을 해 더 이상 정신체가 아니게 된 것이었다.
 몇 번째 물속에 처박혔을까?
 거칠게 움직이던 손은 산소를 얻지 못하자 더 이상 움직이지 못했고 죽는다는 두려움이 산소 대신에 핏속을 채우며 모든 걸 포기하게 만들었다.
 하지만 정신이 아득한 곳으로 가기 직전, 두려움만큼 생소한 감정이 두려움을 자양분 삼아 생겨났다. 그리고 그 감정은 순식간에 두려움을 잡아먹으며 온몸을 장악해나갔다.
 ‘죽인다······! 죽여 버리겠어! 가장 비참하게!’
 분노였다.
 그러나 분노가 부족한 산소를, 힘을 주진 못했고 난 정신을 잃었다.
 
 * * *
 
 꿈을 꾸는 건지, 주마등이라고 죽기 전에 보는 과거의 모습인지 모르지만 김철의 고등학교 때를 봤다.
 큰 키에 잘 생긴 얼굴, 그리고 전국 상위 0.001퍼센트에 드는 성적, 선천적으로 몸이 약해 운동을 못한다는 걸 제외하곤 완벽한 엄친아였던 김철에게 고등학교 시절은 가장 행복한 시기임과 동시에 불행이 시작된 시기이도 했다.
 불행은 고등학교 2학년 때 민종수가 전학을 오면서부터였다.
 민종수는 전학을 오자마자 딱히 일진이라고 불리는 학생들이 없었던 학교에 일진회를 만들었고 김철을 괴롭히기 시작했다.
 처음엔 단순한 시비정도였지만 날이 갈수록 더해졌고 3학년 때 마침내 사고가 일어나고 말았다.
 방과 후 집으로 향하던 김철이 육교에서 민종수 일행을 만나게 되었고, 그들에게 떠밀려 계단에서 굴러 떨어지게 된 것이다.
 떠민 것은 민종수가 아니었지만 굴러 떨어지기 직전에 그의 얼굴에 피어난 잔인한 미소가 노리고 한 짓이라는 확신을 줬다.
 “아악!”
 허리에서 느껴지는 끔찍한 고통에 비명을 내지르며 꿈에서 깨어났다.
 눈을 뜨자 민종수가 두 명의 사내를 향해 목소리를 높이고 있었다.
 “아, 진짜! 병신 같은 놈 죽이고 깽값 물고 싶은 생각은 없거든?”
 “죄송합니다. 약간 겁을 준다는 것이······.”
 “다행이 깨어난 것 같습니다.”
 화를 내는 놈이나 대답을 하는 놈이나 실제로 죽었어도 별로 상관없다는 태도였다.
 자동소총이라도 있다면 당장 갈겨버리고 싶었지만, 같은 실수를 할 만큼 멍청하진 않았다.
 “그 새끼, 약해 빠져서는··· 그래도 아까처럼 고함을 지르지 않는 걸 보니 대가리는 제대로 돌아왔나 보네. 역시 거지같은 것들은 맞아야 정신을 차린다니까.”
 이죽거리며 다가와 테이블에 앉는 민종수를 보자 피가 거꾸로 솟는다는 말을 이해할 수 있었다.
 하지만 초인적인 힘으로 표정을 평소대로 유지했다.
 “이 새끼한테 덮을 거라도 갖다 줘. 여자도 아니고 사내새끼가 벗고 있는 모습을 보자니 토할 것 같아.”
 두 사내 중 한 명이 바닥에 있던 옷을 던졌고, 난 옷을 받아 하체를 가리며 물었다.
 “···무슨 일로 온 거야?”
 “진즉에 이렇게 나왔으면 서로 편했잖아, 안 그래?”
 “······.”
 “꼴에 자존심은. 킥킥킥! 나도 길게 있고 싶지 않으니 본론을 말할게. 앞으로 유리랑은 절대 만나지 마, 알았어?”
 “만날 생각 없었어. 단지 걔가 목사님의 부탁으로 찾아왔을 뿐이었지.”
 “그렇겠지. 내가 매일같이 행복하게 해주는데 걔가 너한테 무슨 미련이 있다고 왔겠어? 한데 말이야, 널 만나고 난 뒤로 며칠간 어지간히 떽떽거리더란 말이야. 난 그런 거 딱 질색이야.”
 고작 그까짓 일 때문에 날 죽이려 했다는 것에 속이 부글부글 끓어올랐다. 그러나 일단은 현 상황을 벗어나는 게 우선이었다.
 “절대 만나는 일 없을 거야.”
 “그래야지. 다음에도 날 귀찮게 하면 평생 병원에서 지내야 할 테니까. 아! 한 1년 정도 지나면 만나도 상관없어. 그때는 헤어진 다음일 테니까.”
 “······.”
 “병신, 그딴 눈으로 바라보지 마. 설마 내가 그딴 년이랑 결혼이라도 할 줄 알았냐? 그냥 데리고 노는 것뿐이야. 다만 아직까진 질리지 않았을 뿐이지.”
 “···알아서 해. 난 관심 없으니까.”
 “꼴에 자존심 세우지 말고 내가 버리고 나면 한번 잘해 봐. 입으로 꽤 잘하니까. 킥킥킥!”
 민종수는 뭐가 재미있는지 한참을 킥킥대다가 일어났다.
 “저 두 사람 얼굴 잘 기억해 둬. 경고를 무시하면 저들의 얼굴을 다시 보게 될 거야.”
 “···꼭 기억해 두지.”
 피식 쪼개며 사라지는 두 사람의 얼굴을 머리에 새겼다.
 어떻게 잊겠는가. 나에게 두려움과 분노라는 감정을 알게 해준 은인들인데.
 “으아아아아아아!”
 민종수와 두 사내가 간 다음 난 목까지 차오른 분노를 밖으로 토해냈다. 그리고 주먹으로 쓸모없는 다리를 내려쳤다.
 
 * * *
 
 “에구머니나! 이게 다 뭐람?”
 내가 여행을 간 줄 알고 노래를 흥얼거리며 들어오던 도우미 아주머니가 엉망진창이 된 거실을 보곤 깜짝 놀라며 말했다.
 “학생, 이게 무슨 일이야? 여행은 안 갔어?”
 “···일이 있어서요. 오늘은 그냥 가셔도 돼요.”
 “집 안 꼴이 이 모양인데 어떻게 그냥 가? 잠깐 학생, 방에 가 있어. 내가 금방 치울게.”
 “괜찮아요.”
 “학생은 괜찮을지 모르지만 내가 안 괜찮아.”
 몇 번이고 거부를 해봤지만 아주머니에겐 씨알도 먹히지 않았고 금세 내 방으로 쫓겨났다.
 “···좋은 방법이 없어.”
 당장 눈이 올 것 같이 구름이 잔뜩 낀 하늘을 보며 중얼거렸다.
 민종수를 만나고 삼 일 동안 어떻게 복수를 해야 할지 생각해 보았지만 도무지 길이 보이지 않았다.
 민종수에게 복수를 하려면 그의 집안까지 상대해야 하는데, 오래전부터 한국의 상류층에 있던 집안이라 인맥이 보통 좋은 곳이 아니었다.
 설령 내가 검사나 판사가 된다고 해도 당장 손을 댈 수 있는 곳이 아니었다.
 군자의 복수는 10년이 걸려도 늦지 않다고 하지만 난 군자가 아니었고, 10년을 기다릴 만큼 참을성도 없었다. 물론 10년이 지나도 복수를 할 수 있을지 미지수였지만.
 “역시 그 방법밖에 없나······.”
 그나마 가장 가능성이 높은 것은 판검사가 되어 류성은과 계약결혼을 하고 그녀를 이용해 복수를 완성하는 방법이었다.
 60년이 넘는 전통 있는 중견기업이라고 하지만 20대그룹 안에 들어가는 창천그룹에 비하면 태양 앞의 반딧불이나 마찬가지였다.
 갑자기 남의 도움이 없다면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무기력한 내 자신에게 짜증이 났다.
 3일 동안 지금과 같은 순간이 몇 번 있었다. 그때마다 손에 집히는 물건을 때려 부수는 것으로 풀었지만 지금 청소를 한참하고 있는 아주머니가 밖에 있으니 그저 속으로만 삭혀야 했다.
 “으득! 내가 이 몸을 빠져나갈 수만 있다면!”
 꽉 쥔 주먹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슈욱!
 그때 갑자기 이상한 느낌이 들며 손으로 뭔가가 빠져나가는 느낌이 들었다.
 “뭐, 뭐야!”
 시선이 두 개가 되는 느낌에 화들짝 놀라자 빠져나갔던 무엇은 놀란 듯이 안으로 들어왔다.
 염일 때 내 에너지의 일부를 사용해서 타인의 기억을 읽었을 때와 비슷한 느낌이 들었다.
 “하지만 어떻게······?”
 김철의 몸에 들어온 이후로 여행만 다닌 것은 아니었다. 여행 다니는 틈틈이 빠져나가려고 노력도 해봤고 빙의했을 때처럼 다른 사람들의 기억을 읽을 수 있는지도 테스트를 해봤었다.
 그러나 지금까지 모두 실패였다.
 “간절함이었나?”
 난 다시 손을 바라보며 빠져나가길 간절히 바랐다. 그러나 조금 전과 달리 전혀 반응이 없었다.
 ‘빌어먹을! 제발 되라고! 원한을 갚아야 한다고!’
 한참을 노려봐도 움쩍달싹하지 않던 것이 민종수를 생각하자 ‘꿈틀’ 움직이기 시작했다.
 간절함에 원한이 필요했나 보다. 민종수에게 고문을 당했던 생각을 하자 마침내 ‘무엇’이 손을 뚫고 밖으로 나왔다.
 ‘···침착해.’
 실수는 한 번으로 족했다.
 마음을 가라앉히고 몸 밖으로 나온 것이 ‘무엇’인지, 어떻게 나온 건지, 어떤 역할을 하는지 알기 위해 정신을 집중했다.
 ‘눈 두 개가 더 생긴 긴 것 같군.’
 밖으로 나온 ‘무엇’은 정신체의 일부가 확실했다. TV를 보듯이 ‘무엇’의 시점으로 방 안의 풍경을 볼 수 있었는데, 염일 때 세상을 보던 광경과 같았다.
 ‘근데 이걸 어떻게 사용해야 하는 거지?’
 시선이 두 개가 되었다는 걸 제외하곤 딱히 특별한 것이 없어보였다.
 똑! 똑!
 갑작스러운 노크소리에 집중이 깨졌고 ‘무엇’은 다시 손 안으로 쏙 들어가 버렸다.
 “학생, 밥 안 먹었지? 수제비 끓였는데 먹을래?”
 도우미 아주머니가 문을 빼꼼 열고 얼굴을 들이밀며 물었다.
 “···감사합니다.”
 집중력이 깨진 것에 살짝 짜증이 났지만 당장 해결될 일이 아니었고 자신을 위해 청소 외의 일까지 해주신 아주머니의 마음씀씀이가 느껴져 감사함을 표하고 밖으로 나갔다.
 
 * * *
 
 방에 콕 박혀 염―‘무엇’을 염이라고 부르기로 했다―에 대해 연구한 지 일주일이 넘었지만 딱히 알아낸 것은 없었다.
 단지 생각만으로 염을 뽑아낼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 진전이라면 진전이었다.
 “이제 슬슬 나갈 시간이군.”
 평소처럼 염을 뽑아놓고 고민을 하던 난 알람 소리에 하지영 변호사와의 약속 시간이 다가왔음을 깨닫곤 나갈 채비를 했다.
 약속장소는 날 생각해서인지 호텔 커피숍이었다.
 “즐거운 시간 보내십시오, 고객님.”
 “고맙습니다.”
 호텔 입구에서 커피숍까지 휠체어 옆에 붙어 안내를 한 호텔 맨에게 팁을 건네며 감사를 표한 후 시간을 확인했다.
 차가 막히지 않아 약속 시간까지 40분이나 넘게 남았기에 먼저 커피를 주문했다.
 ‘사법연수원 입소 때문이겠지?’
 류성은이 나에게 선택권을 줬다고 해도 마냥 내버려 둘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녀의 제안을 받아들일 사람을 구하기 위해서 최소한 나의 생각이라도 알고자 할 터였다.
 난 그녀와의 계약을 받아들여 사법연수원에 입소를 할 생각이었다.
 염이라는 걸 만들어낼 수 있게 되었지만 그걸로 민종수에게 복수를 할 수 있을지 없을지는 여전히 의문이었다. 그러니 현재까지 유일한 해결책이라고 할 수 있는 류성은이라는 카드를 버릴 수 없었다.
 ‘쩝! 팔자에도 없는 법 공부를 하겠군. 그나마 머리가 좋으니 천만다행인 건가······.’
 김철은 몸이 약한 대신에 탁월한 기억력을 타고났다. 책을 사진처럼 찍어 기억할 수 있었고, 컴퓨터보다 빠르게 책의 내용을 검색할 수 있었다.
 그리고 난 그가 기억한 것과 기억능력을 그대로 사용할 수 있었다.
 “후배님, 일찍 왔네요?”
 하지영 변호사가 도착했다.
 “조금 전에 도착했습니다, 선배님.”
 “훗! 커피의 상태를 보니 30분 정도 전에 도착한 거 같은데요?”
 “이런, 리필을 해둘 걸 그랬군요.”
 “리필하면서 내 것도 주문해 줄래요? 날씨가 추워도 너무 춥네요.”
 “그러죠.”
 난 손을 들어 종업원을 불렀고 리필을 부탁함과 동시에 새로운 커피를 주문했다.
 “후룩! 오늘 만나자고 한 건 말하고 싶은 것이 있어서예요.”
 “말씀하세요.”
 “사법연수원은 어떻게 할 건가요? 듣자 하니 들어갈지 말지 고민 중이라면서요?”
 “입소할 겁니다.”
 “잘 생각했어요. 특별한 계획이 없다면 한 해라도 빨리 들어가는 것이 나중을 위해서라도 좋아요. 본래 입소를 설득하기 위해 만나자고 했는데, 입소를 한다니 말하기가 한결 편하겠군요.”
 하지영은 커피를 한 모금 마신 후 말을 이었다.
 “조만간 성은이가 후배님에 대해 회장님께 말하게 될 것 같아요.”
 “사법연수원 성적이 나온 다음에야 말한다고 들었던 것 같은데요?”
 “개인적인 가정사라 자세하게는 얘기할 수 없지만 상황이 바뀌었어요.”
 “그렇군요. 제가 주의할 점이 있다면 말해 주세요.”
 계약을 깰 생각이 없어진 이상 상황이 바뀌었다면 그에 맞게 행동하면 될 일이었다.
 “성은이이에게 계약에 대해 별로 탐탁지 않아 한다고 들었는데··· 왠지 굉장히 적극적이네요?”
 “대단한 기회라는 걸 알게 된 거죠.”
 “그렇게 말하는 것치곤 담담한 것 같기도 하고··· 후배님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잘 모르겠네요. 어쨌든 나나 성은이로서는 좋아할 일이니 말을 계속하죠. 회장님께서 후배님에 대해 알게 되면 뒷조사를 할 거예요. 어쩌면 직접 만나고자 하실 수도 있겠죠. 그러니 미리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어야 할 거예요.”
 “드라마에서 나오는 상황이 일어나는 겁니까?”
 “어떤 드라마를 말하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걱정할 건 없어요. 예의 없는 분들은 아니거든요.”
 “다행이군요.”
 예의가 있는지 없는지는 두고 봐야 할 일이었지만 상황을 지켜보다가 결정을 해도 되었기에 미리부터 겁먹을 이유는 없었다.
 “아! 그리고 성은이가 간혹 연락을 해 만나자고 할 거예요.”
 “보여주기입니까?”
 “나중을 위해 미리 관계를 진척시켜 둔다고 생각하는 편이 낫겠죠. 괜찮죠?”
 “물론입니다. 그리고 이왕 할 거라면 확실히 하는 것이 좋겠죠.”
 “이거 너무 순순히 대답을 하니 오히려 당황스럽네요. 최소한 설득하는데 두세 시간은 걸릴 줄 알았는데 30분도 걸리지 않았군요.”
 “조금 튕길 걸 그랬나요?”
 “남자가 튕기는 건 별로 멋없어요.”
 하지영 변호사는 할 말을 다했는지 더 이상 말이 없었고 나 역시 딱히 할 얘기가 없었기에 그만 헤어지기로 했다.
 “가요. 차 타는 곳까지 배웅할게요.”
 “괜찮습니다. 저에겐 신경 쓰지 마시고 가세요.”
 배려 받는 것을 싫어하진 않았지만 그렇다고 딱히 좋아하는 것도 아니었다.
 하지영 변호사는 내 말투에서 그러한 점을 읽었는지 손을 흔들며 갔고, 난 휠체어를 움직여 천천히 밖으로 향했다.
 “간만에 나왔는데 드라이빙이라도 하고 갈까?”
 한동안 염을 연구한다고 방에서만 두문불출했더니 바로 집으로 들어가긴 싫었다.
 핸들을 집이 아닌 다른 방향으로 꺾었다.
 목적지가 있는 것도, 고속도로처럼 빨리 달리지 못하고 서다 가다를 반복했지만 달리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좋았다.
 신호등에 걸려 차가 한참동안 서 있어도 상관없었다. 시선을 돌려 사람들이 지나다니는 모습을 봐도 기분이 풀렸기 때문이었다.
 다시 차가 멈췄고 자연스레 시선은 우측을 향했다.
 개업 이벤트를 하는지 신나는 댄스음악을 틀어놓고 추운 날씨임에도 불구하고 짧은 미니스커트를 입은 아가씨 두 명이 알아듣지 못할 말을 하며 호객 행위를 하고 있었다.
 한쪽에서는 피에로 복장을 한 사람이 풍선을 불어 지나가는 아이들에게 나눠주고 있었는데, 추위 때문에 손이 얼어서인지 초보라서 그런지 몰라도 풍선에 헬륨가스를 넣다가 자꾸 터뜨리고 있었다.
 “추운데 고생이네.”
 안쓰러우면서도 한편으론 부지런히 움직이며 일하는 모습이 부럽기까진 했다.
 빵!
 뒤차의 경적소리에 신호등을 보니 어느새 녹색으로 바뀌어 있었다. 그러나 바로 앞에 있는 차는 움직이지 않고 있어 출발할 수가 없었다.
 “성질도 급하셔라······.”
 백미러를 보며 경적을 울린 뒤차 주인에게 혼잣말을 중얼거린 난 앞차가 움직이길 기다리며 다시 개업 행사장을 바라보았다.
 피에로가 터뜨리지 않고 무사히 가스를 넣은 풍선을 묶다가 이번엔 풍선을 놓쳐버렸고, 풍선은 둥실 떠오르기 시작했다.
 풍선을 받으려고 기다리고 있던 아이가 팔짝팔짝 뛰어보지만 눈 깜짝할 사이에 하늘로 올라가 버렸다.
 “···아!”
 하늘로 올라가는 풍선을 본 순간 머릿속에서 스위치가 켜지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빵빠앙∼!
 “···그만 좀 빵빵대라. 간다, 가!”
 뒤차의 경적소리에 정신을 차린 난 빠르게 차를 출발시켰다. 그리고 바로 집으로 향했다.
 
 “빨리! 빨리!”
 엘리베이터의 움직임도, 전자식 자물쇠의 반응속도도 더디게 느껴질 정도로 마음이 급했다.
 휠체어 바퀴에 묻어 있는 흙을 털지 않고 곧장 거실로 올라온 난 바로 손을 내밀어 염을 꺼냈다.
 “지금까지 더 크게 만들 생각을 왜 못했을까?”
 염을 더 크게 만든다고 해서 변화가 있을 것이라고는 장담할 수 없었다.
 그러나 시도해 볼 만한 가치는 충분했다.
 핸드볼만 한 염을 바라보며 중얼거리던 난 집중을 해 염을 더 크게 만들고자 노력했다.
 많은 집중력을 요했지만 그동안의 노력 덕분인지 온전히 유지할 수 있었고 시간이 지날수록 염은 조금씩 커져갔다.
 그리고 염이 농구공보다 조금 더 커졌을 때 변화가 일어났다. 헬륨가스가 든 풍선처럼 서서히 떠오르기 시작한 것이다.
 “됐다!”
 천장을 통과하여 아파트를 벗어난 염은 속도를 높이며 하늘로 치솟았다.
 난 분명 방 안에 있었지만 염은 동네를, 서울을, 대한민국을 한눈에 바라볼 수 있는 곳까지 올라갔다.
 그리고 마침내 염일 때 살았던 곳에 도착할 수 있었다.
 ‘집으로 돌아왔다!’
 단번에 내가 지내던 곳임을 알 수 있었다. 무엇보다도 확실한 증거는 아래에 보이는 대한민국의 모습이 쉴 새 없이 바뀌고 있다는 것이었다.
 감개무량하다는 뜻을 이해하는 순간이었다.
 ‘자, 이제 무얼 해야 할까?’
 집으로 돌아왔다는 기쁨도 잠시 난 다시 고민에 빠졌다.
 내가 아닌 나의 일부인 염이 집으로 돌아올 수 있을지에 대해선 상상조차 하지 않았기에 생각은 길어질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길어진 생각 끝에 내릴 수 있는 결론은 하나밖에 없었다.
 
 과거를 바꿔 인생을 바꿔라!
 
 “한데 어떻게······?”
 검지로 휠체어 팔걸이를 톡톡 두드리며 중얼거렸다.
 계획은 세웠으나 실행할 방법이 문제였다. 나의 일부인 염이 예전의 나처럼 규칙성 없이 빙의를 한다면 내가 늙어 죽을 때까지 이 몸의 과거를 못 바꿀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었다.
 결국 내 계획이 성공하려면 시간과 장소를 내가 선택할 수 있어야 했다.
 ‘과연 가능할까······? 아니, 무조건 가능하게 해야 해!’
 지금까지 내가 세운 어떤 계획보다 확실하게 인생을 바꿀 수 있는 기회가 생겼는데 시작부터 부정적인 생각을 하는 건 어리석은 짓이었다.
 어떻게 해야 할지에 대해 한참 생각을 하고 있는데 갑자기 당기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빙의가 시작된다는 신호였다.
 ‘안 돼! 끌려갈 수 없어!’
 끌려가면 죽기라도 하는 것처럼 당기는 느낌에 맹렬히 대항했다. 그러자 당기는 느낌은 천천히 약해졌고 잠시 후 사라졌다.
 ‘···뭐야, 거부가 가능했어?’
 거부가 가능할 것이라곤 생각도 못하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내가 염일 때 단 한 번도 거부를 한 적이 없었군.’
 살아가는데 필요한 에너지를 얻기 위함도 있었지만 빙의가 내 삶이었고, 살아가는 이유였으니 당연했다.
 어쨌든 거부가 가능하다면 나에겐 좋은 일이었다.
 이젠 정확한 시간과 장소를 골라 빙의하는 법만 알게 된다면 이 망할 놈의 인생을 바꾸는 건 식은 죽 먹기였다.
 ‘반드시 해내겠어!’
 염의 시선으로 시시각각으로 변하는 대한민국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난 각오를 다졌다.
 
 * * *
 
 “졸업 축하해요.”
 졸업식이 끝나고 동기들과 사진을 찍고 있는데 꽃다발을 든 류성은이 나타났다.
 “우와! 미인! 누구냐? 새로운 애인?”
 “젠장! 나도 사법시험를 합격했어야 하는 건데.”
 한마디씩 하는 동기들을 뒤로 하고 휠체어를 몰고 류성은에게 다가가 물었다.
 “여긴 웬일이에요?”
 “웬일이라니요? 서운하게. 애인이 졸업하는데 아무리 바빠도 와야죠.”
 류성은은 방긋 웃으며 말하면서 눈짓으로 뒤쪽에 감시자가 있음을 알려줬다.
  “···고마워요. 사진이라도 찍을까요?”
 연기를 한다면 연기로 받아주면 되는 일이었다.
 동기들에게 부탁해 사진을 찍은 우리는 곧장 졸업식장을 벗어났다.
 “차는 어디 있어요?”
 류성은은 확실하게 연인임을 보여주고 싶은 건지 주차장까지 휠체어를 밀어주었고 내 차에 올라탔다.
 “졸업식이니 외식을 해야겠죠? 뭐 먹을래요?”
 “아무거나요.”
 “그럼 중식으로 해요. 제가 잘 아는 식당이 있으니 예약할게요.”
 내비게이션에 주소를 찍은 류성은은 전화를 걸어 식사 예약을 했다.
 “한데 조금 피곤해 보이는데 어디 아파요?”
 “잠을 좀 못 잤어요.”
 시도 때도 없이 빙의 신호가 왔고, 잠시만 정신을 놓으면 빙의가 되려고 하니 잠을 거의 잘 수가 없었다. 다행히 며칠 전부터 염을 불러들일 수 있게 되어 그나마 이 정도지, 아니었으면 잠을 못 자 죽을 뻔했다.
 물론 그렇게 고생한 대가로 얻은 것도 있었다.
 장소의 경우 100퍼센트 내가 가고 싶은 곳으로 갈 수 있는 방법을 알게 되었고, 시간의 경우는 과거나 미래로 결정해 갈 수 있는 방법을 알게 되었다.
 내가 원하는 시간대로 정확히는 갈 수 없다는 것은 여전했지만 현 상황만으로도 꽤 고무적인 일이었다.
 “어때요? 분위기 괜찮죠?”
 “좋군요.”
 예약한 식당은 꽤나 비싸 보이는 곳으로 별도의 방이 있다는 것이 마음에 들었다.
 자리에 앉자 차 주전자가 들어왔고, 한 잔씩 마셨을 때 음식이 들어왔다.
 “코스 요리니까 앞에서 너무 많이 먹지 말아요. 뒤에 더 맛있는 게 나오거든요.”
 류성은은 내 앞 접시에 들어온 요리를 조금 덜어주며 말했다. 감시자도 없는데 진짜 애인처럼 구는 그녀의 모습에 적응이 되지 않았다.
 “보는 눈도 없는데 제가 하겠습니다.”
 “날 위해서 하는 일이에요. 지금부터라도 조금씩 연습하지 않으면 정작 필요할 때 어색할 수밖에 없거든요. 그러니 김철 씨도 연습한다고 생각하고 어색해하지 말아요. 말투도 조심하시고요.”
 꽤나 꼼꼼한 성격이었다.
 틀린 말은 아니었기에 난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음식은 입에 맞아요?”
 “맛있군요. 한데 한 가지 물어봐도 될까요?”
 “많이 물어봐도 돼요. 서로의 사소한 부분을 아는 것이 더 도움이 될 테니까요.”
 “그럼 편하게 묻죠. 남성혐오증은 무슨 일 때문에 생긴 겁니까?”
 “······.”
 류성은의 얼굴이 굳어졌다.
 그녀도 그것을 아는지 웃음을 지으려고 했다.
 하지만 트라우마가 큰지 한참 동안 말을 잇지 못하다 겨우 입을 열었다.
 “취미 같은 것을 물을 줄 알았는데······.”
 “괜한 걸 물었나 보군요. 불편하면 대답하지 않아도 됩니다.”
 “아니에요. 계약이라고 하지만 알아두는 것이 나중을 위해서라도 좋을 것 같으니 대답하죠.”
 류성은은 반주로 시켜둔 백주를 한 잔 마시고 이야기를 시작했다.
 “초등학교 때 두 번 납치를 당했어요. 그때의 영향으로 한동안 성인 남자만 보기만 해도 두려워서 떨어야 했어요. 날 아기 때부터 귀여워해 주던 집사 아저씨도 못 볼 정도였죠. 그 후로 3년을 넘게 정신과 치료를 받아 성인 남자를 보고도 떨지 않게 되었지만 극도의 남성혐오증을 가지게 되었어요.”
 “···유감스러운 일이군요.”
 ‘안 좋은 일을 겪었으리라곤 생각했지만 설마 납치일 줄이야. 한데 도대체 어떻게 보호했기에······’
 재계 서열 20위 안에 들어가는 기업의 자녀인 류성은이 한 번이라면 모를까 두 번이나 납치를 당했다니 이해가 되지 않았다.
 만일 내가 류성은의 아버지였다면 한 번 납치를 당한 후엔 군대라도 붙여서 보호를 하려고 했을 것이다.
 “아버지는 할 만큼 했어요.”
 “네?”
 “내 얘기를 들은 대부분의 사람들은 아버지가 방치를 해서 납치를 다시 당했다고 생각하죠. 하지만 그건 진실이 아니에요. 총 서른 명의 경호원이 3교대로 24시간 날 보호했어요.”
  “그런데도 납치를 당했다고요? 범인들이 꽤 많았나 보군요?”
 “아뇨, 한 명이었어요. 그 한 명에게 최고라고 하던 10명의 경호원들이 무기력하게 당했죠. 전 경호원들이 모두 쓰러지는 것을 보고 정신을 잃었고, 깨어 보니 허름한 창고 같은 곳이더군요.”
 “그래서요?”
 “납치범은 한참 창고를 서성이더니 날 죽일 생각을 했는지 다가왔어요. 그리곤 이해할 수 없는 소리를 했어요. 나라를 위해서 죽여야 한다면서 미안하다더군요.”
 과거의 트라우마를 건드린 것에 대한 미안함도 잠시, 어느새 흥미진진한 그녀의 얘기에 집중을 하고 있었다.
 “미친놈이군요.”
 “내가 보기에도 그런 것 같았어요. 돈을 준다고 해도 계속 같은 말만 반복할 뿐이었죠.”
 어린 류성은은 한 번 납치를 당한 경험을 이용해 납치범을 설득하기 위해 노력했다고 했다.
 “···설득한다고 들을 사람이 아니라는 걸 알게 된 나는 그대로 죽을 수 없다는 생각에 울면서 살려달라고 빌었어요. 그러자 당장 죽일 것처럼 굴던 그 남자가 주춤거리더군요.”
 “양심은 있었나 보군요. 그래서 살려주던가요?”
 “···모르겠어요. 한참 빌다가 정신을 잃었는데, 눈을 떠 보니 병원이었고 부모님이 옆에 계시더군요.”
 “그만하기 천만다행이군요. 참! 혹시 생일은 언제죠?”
 결말이 다소 허무했다.
 뭔가 숨기는 듯한 느낌이 들었지만 묻는다고 답해 줄 것 같지 않았기에 화제를 돌렸다.

댓글(4)

프로    
시작이 참.. 산만하네요..;; 진입 장벽이 제법;;
2019.03.17 16:02
미완결    
아... 내가 왜 저 댓글을 읽지 않았을까... 완결까지 보고 온 사람입니다. 요약하자면 타임루프 속 발정난 호구 얘기입니다. 읽다가 뭐 이런 새끼가 있지 하는 심정. 제일 어이 없는 부분이 가면파티에서 미약에 취해 자기 여친 베프랑 관계를 맺고 임신을 시킵니다. 거기다 여친이 어찌저찌 자기 베프랑 잔 걸 알고 한 소리 아니 변명이라도 듣고 용서하러 왔는데 거기에 지겹다고 폭언을 해서 자살하게 만듭니다. 그걸 보고 자기가 진심으로 사랑한건 여친이라고 징징... 그러다가 빌런으로 나온 새끼 애비를 제대로 처리 하지 않았던게 화가 되서 약물 맞고 쥬금.
2022.01.17 04:51
미완결    
쥬금 이후로는 이 악물고 해피엔딩 만들겠다고 임신 시킨 절친은 이복동생으로 만들기까지....
2022.01.17 04:53
너솔    
찐따 소설 ?
2022.12.30 17: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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