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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타입 골게터 1-1권

2016.09.29 조회 3,488 추천 11


 # 001
 
 “오늘의 게스트는··· 놀라지 마세요, 여러분! 겨우 스무 살의 어린 나이로 J리그를 정복하고 세계 최고의 리그, 프리미어 리그가 있는 잉글랜드로 날아가 성공적으로 연착륙한 대한민국의 자랑, 아시아의 자랑, 뉴캐슬 유나이티드의 임시형 선수입니다!”
 밴드의 멋진 연주, 방청객의 열렬한 환호 속에 문이 열리고 게스트가 모습을 드러냈다.
 180cm 정도 되는 훤칠한 키와 운동선수임을 보여주는 당당한 체구, 그와 대비되는 깨끗한 피부와 잘생긴 외모가 인상적이었다.
 “안녕하세요, 반갑습니다. 임시형입니다.”
 이내 스튜디오 중앙에 도착한 시형은 미소와 함께 허리를 숙여 방청객과 시청자들에게 인사를 건넸다.
 “꺄아악!! 오빠아!!”
 의아한 것은 방청석의 반응이었다.
 일반적으로 운동선수가 출연하면 남성들이 열광하고 여성들은 조금 무덤덤한 경우가 많은데, 오늘은 여성들이 더욱 난리였다.
 마치 아이돌이나 남자배우가 출연했을 때와 비슷한 반응이었다.
 “역시 미남이시네요. 와··· 제가 매주 엄청 많은 연예인과 만나거든요? 그런데 그런 제가 보기에도 손에 꼽을 정도로 잘생기셨어요.”
 “감사합니다. 하하. 과찬이시죠? 제가 어느 정도 잘생긴 건 인정하지만, 그 정도는 아닌데요.”
 국내 최고의 토크쇼 MC로서 당대 최고의 배우들은 물론, 아이돌, 가수 할 것 없이 많은 연예인과 촬영을 함께한 강종효는 시형의 외모를 칭찬하는 것으로 말문을 열었다.
 “아뇨. 진짜 진심입니다. 진짜로 잘생기셨어요. 외모도 외모인데, 몸도 너무 좋으시고··· 정말 매력적으로 생기셨네요.”
 실제로 시형은 대한민국의 축구선수, 아니 모든 운동선수 중에서도 언제나 최상위권을 차지하는 미남이었다.
 여기에 지난 2006 AFC U-19 축구 선수권 대회, 2007 FIFA U-20 월드컵, 2008 베이징 올림픽까지 연달아 출전, 2007년 말부터는 고작 열아홉의 나이로 국가대표팀에 승선하는 등 증명한 실력과 잠재력 역시 뛰어났다.
 인기가 많을 수밖에 없는 조건들을 모두 가진 선수라는 뜻이었다.
 “감사합니다. 외모와 신체능력만큼은 부모님께 감사하고 있습니다. 제가 봐도 괜찮은 것 같거든요. 하하. 둘 다 최고라고 말하는 건 절대 아니지만.”
 실력도 좋고 인기도 많은 스물한 살, 만 스무 살의 젊은 선수.
 그래서 그런지 시형의 말투와 행동에서는 자신감이 철철 넘쳐 흘렀다.
 “그렇죠. 그러니 인기가 많으실 수밖에 없죠. 자, 저기 방청석을 보세요, 여러분. 지금 시청자 여러분께는 보이지 않겠지만, 시형 씨 팬클럽에서 정말 많이 와주셨어요. 진짜 어지간한 아이돌보다 많이 오셨습니다. 원래 신청해주신 분은 훨씬 많았는데, 자리가 부족해서 못 오신 분들이 열 배는 될 겁니다, 아마.”
 “와아아아아!!!”
 스튜디오 녹화였기 때문에 애초에 방청객은 별로 중요하지 않았다.
 기껏해야 들어올 수 있는 사람은 50명 남짓.
 그런데 시형의 팬클럽에서만 무려 200여 명이 방청을 신청했다.
 “항상 감사합니다. 사실, 제 팬이 아이돌 분들보다 많은 건 절대로 아닙니다. 솔직히 얼마 안 돼요. 축구선수 중에나 좀 많은 편이려나··· 다만, 다들 일당백은 거뜬하신 분들이라 좀 대단해 보이죠. 하하하.”
 아무리 시형의 인기가 많아도 연예인과 비교하는 건 절대로 무리수였다.
 하지만 적어도 축구계에서는 인기가 굉장히 많은 선수 중 한 명이었다.
 특히, 자신감 넘치는 시원시원한 태도와 기존의 정상급 선수들에게도 밀리지 않는 기량, 거기에 뛰어난 외모가 더해지니 흔히 ‘빠’라고 이야기하는 열성 팬의 빈도가 굉장히 높았다.
 물론, 가끔 있는 도를 넘어서는 발언들과 열성 팬들의 팬심이 안티를 생성해 열성 팬만큼 안티도 많은 선수이긴 했다.
 쉽게 말해 실력, 외모, 태도 등 모든 부분에서 항상 논란의 중심에 서 있는 선수였다.
 “자, 그럼 이제 축구에 대한 이야기를 좀 해볼까요? 메인은 뒤로 잠시 넘겨두고, 가볍게 애피타이저부터 즐겨보죠. 프로 데뷔와 동시에 J리그를 아주 두 손에 쥐고 흔드셨습니다. J리그는 임시형 선수를 품기엔 너무 작은 무대였나요?”
 시형은 데뷔를 K리그에서 하지 않았다.
 89년생이지만 빠른 생일이라 07학번이 된 시형은 2006 AFC U-19 축구 선수권 대회에서 압도적인 활약을 선보이며 J리그의 관심을 받았다.
 특히, 용병을 영입할 돈이 없는 중하위권 팀들은 흔히 말하는 C계약이 아닌 A계약으로 시형을 원했다.
 “달라진 건 하나밖에 없죠. 제가 지금 한창 성장기라는 것? 전 이제 겨우 만 스무 살입니다. 오늘보다 내일 더 잘하는 게 이상할 건 없죠.”
 시형의 J리그 성적은 2007시즌 28경기 5골 5어시스트, 2008시즌 33경기 13골 7어시스트였다.
 윙어 포지션의 선수인 데다가, 시형의 소속팀이 약팀이었다는 것까지 감안하면 굉장히 뛰어난 기록이었다.
 특히 2008시즌에는 J리그 득점 공동 5위에 랭크되기까지 했다.
 “확실히 임시형 선수의 말이 맞는 게, 프리미어리그로 가서도 그다지 헤매지 않고 좋은 모습을 보여주시지 않았습니까? 후반기에 이적했는데도 무려 열두 경기에 출전하셨고, 2골 3어시스트로 공격 포인트도 굉장히 많이 기록하셨어요.”
 “저는 거짓말 안 해요. 아니, 못 하는 거죠. 막 괜히 겸양 떨고 이러면 온몸이 간지러워서요. 하하. 이번 시즌에도 제가 잘하긴 했거든요.”
 이번 시즌 성적에 대한 강종효의 칭찬을 넙죽 받아들이는 시형이었다.
 분명 이적 첫해에, 그것도 J리그 한 시즌을 마치고 후반기가 진행 중인 프리미어리그로 이적해 반 시즌을 더 뛰면서 12경기 2골 3어시스트를 기록했다는 건 대단한 성적이었다.
 “아··· 재수 없어···.”
 “예?”
 “아, 아무것도 아닙니다. 역시 대단하십니다. 역시 우리 대한민국이 자랑하는 최고의 유망주다운 기량과 자신감이네요.”
 강종효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는 듯 짐짓 의뭉을 떨었지만, TV로 시청하는 시청자의 절반은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
 자신감을 갖는 것은 좋지만, 너무한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었다.
 잘난 놈이 나 잘났다고 이야기하니 눈꼴이 신 것도 있었다.
 나머지 절반은 패기 넘치는 모습이 보기 좋다고 생각했다.
 이게 시형에 대한 반응이 극과 극인 이유였다.
 “특히 마지막 38라운드 경기에서는 팀의 강등을 막는 동점 골은 정말 소름이 돋았습니다. 경기장 전체가 들썩일 정도로 엄청난 환호였거든요? 그때 기분이 어떠셨습니까?”
 “당연히 끝내줬습니다. 제가 받아본 가장 큰 환호였거든요. 그리고 그런 환호를 받을만한 골을 넣었다는 게 더 기쁘고요. 지금까지는 프로 데뷔 후 첫 골이었던 가시마 앤틀러스전에서의 득점이 제 인생 최고의 골이었지만, 이제 바뀐 것 같습니다.”
 2008/09시즌 프리미어리그 마지막 경기였던 뉴캐슬과 아스톤 빌라의 경기.
 데미안 더프의 자책골로 뉴캐슬이 한 골 뒤진 상황에서 시형이 동점 골을 터뜨렸다.
 2-2 무승부로 승점 1점을 추가한 뉴캐슬은 승점 35점을 기록했고, 37라운드까지 승점 35점으로 17위에 올라 있던 헐 시티가 맨유에게 패배하면서 골 득실에서 앞서 17위에 올라섰다.
 시형의 한 골 덕분에 프리미어리그 강등 클럽이 뒤바뀐 것이었다.
 “반응이 정말 엄청났겠어요? 잉글랜드의 축구 열기는 대단하잖아요? 그런데 거기서 강등에서 팀을 구해냈으니 팬들이 난리가 났겠네요.”
 “난리도 아니었죠. 잉글랜드에서도 손꼽힐 정도로 열광적인 팬들이 뉴캐슬 팬이거든요. 그 사람들은 축구에 미쳐있어요. 이번 시즌 뉴캐슬은 심각하게 부진했지만, 관중 동원력이나 수익은 상위권이죠. 그런 팬들이 팀을 살린 선수를 가만히 두겠어요? 진짜 인기가 장난이 아닙니다.”
 거짓말이나 과장은 전혀 없었다.
 실제로 현재 뉴캐슬에서 시형의 인기는 상상을 초월했다.
 말 그대로 팬들에게 구세주 대접을 받고 있었다.
 다만, 그런 말을 자신의 입으로 자랑스럽게 이야기하니 듣기 거북해 하는 사람도 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그런지 임시형 선수 또래의 J리그 진출이 활발해지고 있다고 하던데요? 사실 저는 잘 모르는데, 저희 담당 PD님이 엄청난 축구팬이시거든요. 그래서 이건 꼭 물어봐 달라고 하네요. 아니, 황금 시간대 토크쇼에서 할 질문이 있고, 스포츠 뉴스에서 할 질문이 있는 건데 말이에요. 음··· 하지만! 담당 PD님은 언제나 옳습니다. 사랑합니다.”
 시형의 성공과 K리그 드래프트 제도에 대한 불만, 그리고 J리그의 아시아 쿼터제 도입으로 인한 유망주들의 J리그 진출 러쉬.
 분명 황금 시간대의 연예인 토크쇼에서 다룰만한 주제는 아니었다.
 하지만 어쨌든 질문은 던져졌고, 시형은 입을 열었다.
 언제나처럼 직설적으로.
 “J리그 진출이라. J리그 진출 그 자체는 별로 나쁘게 보지 않습니다. J리그가 K리그보다 수준이 높은 리그도 아니라서 K리그에서 통할 능력이 있다면 J리그에서도 통합니다. 특히 공격수가 활약하기 쉬운 리그죠.”
 압박이 거의 없다시피 한 J리그에서는 공격수가 활약하기 쉬운 편이었다.
 특히 한국 선수들은 유소년 시절부터 승리하기 위한 경기를 하기에 압박에 익숙했고, J리그의 압박 정도는 쉽게 상대할 수 있었다.
 “하지만 모든 선수가 다 잘하는 건 아니지 않습니까? 실제로 임시형 선수의 성공 이후 비슷한 나이의 선수들이 성공기를 재현하기 위해 J리그로 떠났지만, 정작 성공한 선수는 거의 없고요.”
 시형의 성공은 또래 선수들에게 큰 영향을 주었다.
 안 그래도 K리그의 드래프트 제도에 많은 불만이 있었던 선수들이었다.
 특히 2002 한일 월드컵의 신화를 보고 축구선수의 길로 들어선 유망주, 2002세대가 프로로 나오게 되면서 논란거리가 되기 시작했다.
 1차 1라운드에 뽑히는 역대급 유망주나 1차 15라운드에 간신히 뽑히는 유망주나 첫해 연봉은 5,000만 원을 넘을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기본적으로 계약금과 연봉을 포함해 1억은 넘길 수 있는 J리그 진출의 유혹에 빠지는 것도 무리가 아니었다.
 “제가 말씀드렸지 않습니까. ‘K리그에서 통할 수 있다면.’이라고요. 그 친구들 대부분은 아직 K리그 수준도 안 돼요. 조금 더 경험을 쌓고 성장할 필요가 있었는데, 해외 진출이라니.”
 조금 전까지만 해도 J리그 진출을 지지하는 듯했던 시형이지만, 곧 헛웃음과 함께 또래 선수들에게 일침을 가하기 시작했다.
 “아무리 J리그 수준이 높은 편은 아니라지만, 그 정도 실력으로 성공할 리가 없죠. 한국에서나 유망주라면서 키워주지, J리그만 가도 용병입니다. 어떤 팀에서 용병을 키워서 씁니까?”
 시형을 보고 J리그 진출을 선택한 선수들은 한 가지를 간과하고 있었다.
 바로 시형과 자신들의 기량 차이였다.
 시형은 이미 고교 축구 최고 명문 상대고등학교 시절부터 초고교급을 넘어 프로급이라는 평가를 받았던 선수이고, 또래에서 시형과 비교가 가능한 선수는 FC 서울의 쌍용이라 불리는 구승용, 안찬용밖에 없었다.
 “제가 볼 때 찬용이나 승용이, 재철이 정도를 제외하면 J리그 가도 되는 선수는 한 명도 없어요. 나머지는 J리그 가면 다 망합니다. 한창 뛰면서 성장해야 할 시기를 그냥 버리는 거죠. 저랑 달라요. 저는 뛸 수 있을 거라는 자신이 있었기 때문에 연봉이 많은 J리그로 간 거고, 다른 친구들은 시간을 두고 키워줄 K리그에 남는 게 더 낫죠.”
 같은 89년생임에도 2008 베이징 올림픽 대표팀에 소집된 장윤철 역시 시형보다는 한 수 아래로 평가될 정도였다.
 아무리 뛰어난 유망주라도 프로와의 차이가 크다는 것을 감안하면 시형과 그들의 차이는 꽤 큰 편이었다.
 “저라면 절대 그런 계약으로는 안 갑니다. 그 사람들 아마 전부 다 C계약 일 걸요? C계약이면 전 절대 안 가요.”
 유망주들에게 J리그 붐을 일으킨 시형은 그런 그들의 선택을 바보 같다며 비판했다.
 인기의 근원이면서 안티의 근원이기도 한 직설적이고 화끈한 언행은 오늘도 변함없었다.
 "C계약은 진짜 바보 같은 짓이거든요. 아마 냉정하게 생각할 수 있는 사람이면 C계약은 절대 안 할 걸요? 아, 한 사람이 있다고요? 미안하게 됐습니다, 이거."
 J리그의 용병 계약에는 단순 용병 계약과 A계약, B계약, C계약이 있었다.
 ABC계약은 J리그의 모든 선수에게 적용되는 것인데, 쉽게 말해 A계약은 1군 선수로 25인 제한이 있었고, BC계약은 인원 제한이 없었다.
 “저는 A계약으로 갔습니다. C계약? 완전 바보 같은 짓입니다. C계약으로 가면서 저처럼 성공하겠다는 건 완전 망상이나 다름없어요. C계약으로 간 다음에 기량을 증명하면 물론 A계약으로 바꿔줍니다. 그런데 이제 막 아마추어 딱지 벗은 선수들이 J리그 1군에서 용병 신분으로 450분을 뛴다고요? 그 친구들한테 한마디만 하고 싶네요. 아시아 리그라고 우습게보지 마, 이 자식들아.”
 
 
 # 002
 
 즉전감 용병은 A계약으로 취급되고, 자국 선수 A계약과는 달리 1년 차에도 연봉 제한은 없었다.
 A계약으로 취급되는 용병은 3명 이하로 제한되지만, C계약으로 용병을 데려오면 두 명까지 더 데려올 수 있었고, 이번 시즌부터는 AFC(아시아 축구 연맹) 가맹국 소속 선수 한 명을 추가로 데려올 수 있는 아시아 쿼터제가 시행되면서 J리그 구단들이 한국 유망주들에게 눈을 돌렸다.
 문제는 C계약 선수의 연봉이 480만엔 이하로 제한된다는 것이었다.
 “망상에서 좀 벗어날 필요가 있어요. 근거 없이 자기 자신을 높게 평가하는 짓도 좀 때려치워야 하고요. ‘나는 다르다.’, ‘나는 특별하다.’하는 그런 생각들은 그들의 몫이 아니라 제 몫이거든요.”
 지나치게 진지해지고 축구인만 알아들을 수 있는 상세한 내용이 나와 스튜디오 분위기가 어수선해지자, 시형은 씨익 웃으며 직접 얼굴에 금을 바르는 발언으로 분위기를 바꿨다.
 “어쨌든 결론만 말하자면··· 친구들아, J리그 가지 마. K리그에서 좀 큰 다음에 더 큰돈 받고 유럽 가거나 자신 없으면 중국이나 중동 가라.”
 당장 5,000만 원이 작다고 1억 받으러 J리그로 건너간 선수 중장기적으로 봤을 때 100이면 90 정도는 K리그에서 데뷔해 성장하는 것보다 손해를 보게 될 것이 분명했다.
 나머지 10중 9는 J리그에서 나름대로 자리를 잡고 아시아권에서 통할 만한 뛰어난 선수가 될 것이었으며, 나머지 1 정도가 세계에서도 통할 만한 선수가 될 것이었다.
 ‘나는 당연히 남은 1이고.’
 시형은 자신을 그렇게 평가했다.
 과대평가는 아니었고, 자만도 아니었다.
 합당한 자신감이었다.
 직접 매긴 자신의 잠재력에 대한 평가는 ‘빅리그 하위권 클럽 에이스 혹은 중하위권 클럽 주전 공격수’ 정도.
 세계 축구 역사에 이름을 남기겠다는 거창한 꿈은 없었지만, 빅리그에서 오래 살아남을 자신은 있었다.
 한 번쯤 빅클럽의 유니폼을 입고 챔피언스리그 무대에 서보고 시다는 꿈 정도는 있었지만, 그것도 상황이 허락한다면··· 이라는 선결조건이 존재했다.
 항상 자신감에 넘치다보니, 본인을 과대평가하는 것 같다고 이야기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하지만 시형은 또래 선수들 중 자신을 객관적으로 파악할 줄 아는 몇 안 되는 선수였다.
 “그래서 드리는 질문인데, 축구를 시작하신 계기가 뭔가요? 처음 축구를 시작하셨을 때.”
 “계기요? 특별한 건 없어요. 다른 사람들처럼 그냥 축구가 재미있었거든요. 재미있는데 친구들이랑 하다 보니까, ‘어라? 내가 잘하네?’ 이렇게 된 거고, 마침 학교에 축구부가 있어서 5학년 여름쯤에 들어간 거죠.”
 아무래도 축구계 깊숙한 이야기를 다루기엔 그다지 좋은 프로그램이 아니었다.
 시형도 그를 잘 알고 있었고, 강종효도 베테랑이었다.
 대화의 주제는 순식간에 시형 개인에 대한 이야기로 넘어왔다.
 “5학년 여름이면 꽤 늦은 시작이네요. 제가 알기로는 혹시 축구를 그만두고 싶으셨던 적은 없으신가요?”
 “그만두고 싶었던 적은 수도 없이 많았죠. 특히 중학교 때는 하루에도 열두 번씩 그만두려고 했어요.”
 J리그 진출에 대해 비판하던 날카로운 분위기는 순식간에 사라졌다.
 강종효가 괜히 국내 최고의 MC 중 한 명으로 꼽히는 게 아니었다.
 “중학교 때 무슨 일이 있으셨던 건가요?”
 “뭐, 흔한 이야기죠. 아버지 사업이 망해서 가세가 기울었거든요. 빚은 생겼지, 당장 돈 들어올 곳도 없지, 식구는 여덟이지··· 다들 아시다시피 제가 6남매 중 둘째지 않습니까? 정말 힘들었습니다.”
 열네 살, 탄탄한 중소기업을 운영하던 아버지의 사업이 망했다.
 천만다행으로 마지막까지 무리하지는 않았고, 아버지가 맺어온 좋은 인연들의 도움으로 바닥까지 내려가진 않았지만, 그래 봤자 바닥 바로 위였을 뿐이었다.
 “뭐, 다음엔 뻔하죠. 아버지는 학원 차 알바를 시작하셨고, 어머니는 거의 15년 만에 다시 일을 시작하셨고. 그래도 빚을 갚기는 힘들었고. 게다가 6남매 먹이려니 고기나 이런 것들은 아주 간혹가다가 한 번 먹었죠. 저는 운동선수였는데요. 그래서 그때 많이 힘들었어요. 그만두려고도 많이 했고.”
 한창 성장기의 선수에게 좋을 수가 없는 시기였다.
 부모님도 그걸 알고 운동선수라는 이유로 시형에게 조금 더 신경을 써주었지만, 그 정도로는 부족했다.
 “저희에게는 다행이네요. 임시형 선수가 거기서 무너지지 않았다는 게.”
 “오늘 이 이야기를 할 줄 알았어요. 그리고 이 이야기가 나오면 꼭 언급해야 하는 고마운 친구가 있는데, 정말 그 친구 아니었으면 저는 여기 없었을 겁니다. 친구이면서 은인이죠.”
 시형의 토크쇼가 드디어 제 자리로 돌아왔다.
 이후에는 과거에 대한 이야기와 그동안의 에피소드, 미래에 대한 포부 등을 언급하는 정상적인 토크쇼였다.
 중간에 시형이 언급한 그 친구가 몰래 게스트로 등장하기도 했고, 둘의 호흡이 워낙 잘 맞아 연예인이 아닌 운동선수를 섭외해 걱정했던 PD의 우려를 깨끗이 씻어내 주었다.
 시형이 출연한 토크쇼의 시청률은 무려 17%.
 2008년 12월 현재 시형의 위상과 인기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수치였다.
 
 ***
 
 [IN - 19. 임시형 / OUT - 22. 숄라 아메오비]
 “임시형 선수, 드디어 출전입니다. 아메오비와 교체되면서 그라운드를 밟게 되었습니다.”
 2008/09시즌 후반기와 2009/10시즌 전반기.
 프리미어리그 진출 이후 1년 동안 시형은 27경기에 출전해 5골 7어시스트를 기록하며 부드럽게 연착륙했다.
 그리고 1년을 날렸다.
 “진짜 유니폼 등 부분에 마킹된 등번호와 이름이 아니면 어지간한 팬들은 임시형 선수인 걸 못 알아볼 것 같네요. 얼굴은 그대로인데, 몸은 완전히 달라졌어요.”
 시형의 외형은 1년 만에 크게 바뀌어 있었다.
 2010년 2월, 시형은 갑작스러운 무릎 통증으로 훈련을 건너뛰기 시작했다.
 계속된 통증에 병원을 찾아가 받은 진단은 무려 ‘성장통’.
 갑작스러운 통증에 심한 부상이 아닐까, 걱정했던 것을 생각하면 그나마 다행이었지만, 어떻게 보면 최악의 상황과 별다를 바 없었다.
 부상이라면 회복 기간과 복귀시기를 가늠할 수 있지만, 성장통의 경우에는 그냥 기다리는 것 말고는 할 수 있는 게 없기 때문이었다.
 “그나저나 정말 위협적인 무기를 갖추었네요. 성장통이 오기 전까지만 해도 179cm에 불과한 선수였는데, 지금은 191cm라고 합니다.”
 “1년 동안 10cm도 넘게 컸어요. 키가 가장 많이 큰다는 1차 성징 때도 그 정도 크는 건 힘든데, 만 스물한 살에 10cm가 크네요. 대단합니다.”
 경기 중계에서만 축구 선수를 찾아보는 사람들은 얼굴이 보이지 않게 멀리서 그라운드를 잡으면 시형을 찾을 수 없었다.
 얼굴은 그대로지만, 12cm의 차이는 상당했다.
 사실, 워낙 화제를 몰고 다니는 선수라 경기를 뛰지 못하는 동안에도 언론에 노출이 많이 되었기 때문에 이미 익숙해진 사람들이 대부분이긴 했다.
 “오늘은 어딘가요? 측면입니까, 최전방입니까?”
 성장통으로 강제 휴식기를 가지기 전까지 시형의 포지션은 측면 윙어였다.
 기본기가 탄탄하고 킥력과 정확도가 뛰어나 슈팅이 좋으며 스피드와 드리블이 뛰어난 윙어로 요새 유행하는 인사이드 포워드로 활약하면서 득점력을 앞세워 인상적인 모습을 보여주었다.
 “아메오비와 교체된 것을 보니 아마 최전방에서 활약할 것 같네요. 임시형 선수를 제외하면 딱히 최전방에서 뛰어줄 선수가 보이지 않아요.”
 하지만 지금은 윙어와 최전방 스트라이커를 번갈아 맡아주고 있었다.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12cm가 크면서 191cm까지 성장했고, 자연스럽게 민첩성과 스피드가 떨어져 버렸다.
 예전과 같이 날카로운 돌파와 침투를 보여줄 수 없었고, 플레이 스타일상 스피드가 떨어진 시형은 윙어로서의 위력이 급감했다.
 “복귀 후 최전방 스트라이커 역할을 자주 맡아주고 있는데, 딱히 인상적인 모습을 보여주진 못하고 있습니다. 3월에 복귀해서 시즌 마지막 경기인 오늘까지 총 7경기에 출전했는데, 한 골에 그치고 있지 않습니까?”
 “골도 골인데, 경기에 미치는 영향력이 많이 떨어졌어요. 윙어로 출전하든 스트라이커로 출전하든 영향력이 너무 미미합니다. 물론, 키가 너무 갑자기 크면서 아직 본인에게 맞는 밸런스를 찾지 못해서 그런 것이겠지만, 빅리그 클럽이 언제까지고 기다려주진 않거든요? 조금 서두를 필요가 있어요.”
 뉴캐슬은 그렇게 여유로운 클럽이 아니었다.
 흔히 빅4라 불리는 빅클럽이나 그에 준하는 클럽들은 아직 스물두 살에 불과한 시형의 성장을 충분히 기다려줄 수 있겠지만, 뉴캐슬은 아니었다.
 2009/10시즌 전반기에만 3골 4어시스트를 기록했던 시형이 이탈한 이후, 뉴캐슬은 최악의 부진에 빠지며 2년 연속 리그 17위에 그쳤고, 팬들의 분노는 하늘을 찔렀다.
 이번 시즌에도 10위권 바깥으로 밀려난 뉴캐슬이 시형에게 줄 수 있는 시간은 이제 얼마 남지 않았다.
 “그런데 상황이 좋아 보이지는 않습니다. 너무 갑작스럽게 신체가 성장하면서 너무 애매해져 버렸어요. 장점들은 무뎌졌고, 단점들은 그대로예요.”
 키가 갑자기 크면서 장점 중 슈팅 능력과 기본기를 제외한 스피드, 민첩성, 유연성, 드리블은 모두 자연스럽게 무뎌졌다.
 단점이었던 적은 활동량과 피지컬, 몸싸움 능력과 압박 대처 능력은 그대로였다.
 어정쩡한 선수가 되어가고 있는 것이었다.
 “단순히 키가 크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스트라이커로 뛰기엔 임시형 선수의 포지션 소화능력이 너무 떨어져요. 그렇다고 익숙한 윙어 자리에서 뛰기에는 민첩한 몸놀림과 정교한 드리블이 사라졌고요.”
 파듀 감독은 시형의 윙어 복귀에 회의적인 입장이었다.
 복귀 후 몇 차례 시험해보았지만, 과거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고, 경기 감각이 떨어졌다는 것을 감안해도 윙어로는 어울리지 않는다고 판단한 것이었다.
 이 시기 뉴캐슬은 공격수 고민에 시달리고 있었다.
 앤디 캐롤이 클럽의 뒤통수를 거하게 날리며 이적 마감 시한을 불과 몇 시간 앞두고 리버풀로 이적한 것이었다.
 숄라 아메오비와 피터 뢰벤크란츠를 기용했지만, 두 선수 모두 6골에 그치며 만족스럽지 못한 상황.
 191cm로 팀 내 최장신인 시형은 이런 상황 속에서 최전방 공격수로 테스트 받고 있었다.
 “루아루아의 측면 돌파! 중앙으로 밀어주고, 조이 바튼! 아, 줄 곳이 없습니다! 무리한 슈팅! 그대로 골라인 밖으로 날아갑니다.”
 “아··· 임시형 선수의 위치가 아쉽네요. 원톱으로 경기에 나섰으면 조금 더 자신 있게 안으로 들어가서 수비수들과 싸워줘야죠! 지금 임시형 선수가 페널티 박스 바깥으로 밀려나 있으니까 웨스트 브롬의 수비진이 전혀 흔들리지 않잖아요.”
 시형은 타겟형 스트라이커 역할에 적합한 신장을 가지고 있었지만, 몸싸움을 극히 꺼렸고, 파워도 약했다.
 191cm로 신장은 크지만, 시형의 피지컬은 아직 커진 신장에 맞춰지지 않았다.
 성장통을 겪기 전에도 179cm, 69kg의 마른 체구로 피지컬은 강한 편이 아니었다.
 급격한 성장으로 신장은 191cm까지 늘어났지만, 체중은 여전히 73kg에 불과했다.
 지나치게 빠른 성장으로 인해 최소한으로 맞춰놓았던 벌크까지 빠지며 피터 크라우치를 연상케 하는 호리호리한 몸이 된 것이었다.
 “임시형 선수, 다음 시즌에도 프리미어리그에서 활약하기 위해서는 선택이 필요할 것 같네요. 포지션부터 확실히 정하고, 그에 따라 몸을 만들어야 해요. 지금 상태로는 어정쩡한 선수가 될 뿐입니다. 아시아로 복귀할 게 아니라면 지금 피지컬로는 무리예요.”
 세계에서 가장 몸싸움이 거칠다는 프리미어리그에서, 그것도 최전방에서 이 몸으로 버틴다는 건 불가능에 가까웠다.
 시형 본인도 그걸 잘 알고 있다 보니 항상 박스 바깥으로 밀려나거나 물러나거나 둘 중 하나였다.
 “지금 상황이 좋지는 않지만, 그래도 임시형 선수라면 분명 금방 부활할 거라 믿습니다. 역대 최고 수준의 재능이지 않습니까?”
 “그렇죠. 아직 익숙해지지 않아서 그렇지, 금방 적응해서 돌아올 겁니다. 평가하기엔 좀 이르죠.”
 급격한 변화에 적응하고 플레이 스타일을 바꿀 시간이 필요한 것은 사실이었다.
 하지만 중계진의 말처럼 쉬운 건 아니었다.
 프로 무대에서는 젊다 못해 어린 유망주에 불과했지만, 그래도 경력이 10년이었다.
 10년에 걸쳐 천천히 쌓아온 기량과 정립된 스타일을 바꾼다는 게 절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아버지의 사업 실패와 같이 기량 외적인 부분에서 위기가 찾아온 적은 있었지만, 기량 때문에 위기를 맞이한 것은 처음이었다.
 그리고 이번 위기가 시형의 축구인생에 찾아온 가장 큰 위기였다.
 
 
 # 003
 
 ‘시간이 더 필요했는데.’
 투입된 지 오래되지도 않았고, 별다른 활약을 보인 것도 아니었지만, 시형의 숨소리는 이미 거칠어져 있었다.
 웨스트 브롬 수비수들과의 경쟁을 이겨내지 못해 바닥을 구르고, 원하는 플레이가 전혀 되지 않으면서 심리적으로 쫓긴 탓이었다.
 ‘젠장. 몸 만들 시간은 줘야지···.’
 성장통이 완전히 사라진 시기는 2011년 2월이었다.
 한 달도 제대로 준비하지 못한 채 경기에 투입되었고, 1년이 넘는 공백을 만회하기엔 턱없이 부족한 시간이었다.
 시형 입장에서는 신장에 맞춰 몸을 만들 시간이 필요했지만, 뉴캐슬은 그럴 여유가 없었다.
 몸 상태가 아직 엉망인 것을 알지만, 주전 선수들의 체력 안배 목적으로, 경기 막판 교체해 시간을 끄는 목적으로 활용하기 시작한 것이었다.
 결국, 시형은 완전히 무너진 신체 밸런스로 경기를 치러야만 했다.
 ‘안 그래도 몸싸움은 자신 없는데, 제일 치열한 자리에 박아놓다니.’
 선수 활용은 감독의 권한이었고, 시형의 위치에서 출전 지시를 거부한다는 건 쉽지 않은 일이었다.
 그래서 최소한 몸싸움이 심하지 않은 윙어 포지션으로 출전시켜 달라 요구했지만, 그것도 이뤄지지 않았다.
 키가 작을 때보다 오히려 더 약해진 피지컬로 그렇게 싫어하는 몸싸움을 하면서 좋은 활약을 펼친다는 건 불가능에 가까웠다.
 “뉴캐슬의 공격이 지지부진합니다. 3-1로 앞선 상황이긴 합니다만, 아직 안심할 순 없거든요?”
 최전방에서 상대 수비진을 흔들어줘야 할 시형이 아무것도 못 한 채 의미 없는 움직임만 반복하자, 뉴캐슬의 공격 역시 지지부진해졌다.
 시형은 활동량이 많은 선수도 아니었기에 전방에서 싸워주지 못하면 공격에 전혀 도움이 되지 못했다.
 파듀 감독도 딱히 뭔가를 기대한 것은 아니지만, 생각보다도 너무 부진한 모습이었다.
 “조이 바튼! 프리킥 얻어냅니다. 뉴캐슬의 프리킥으로 다시 경기가 재개되겠습니다.”
 인성에 큰 문제가 있어서 잉글랜드 대표팀의 부름은 받지 못하지만, 기량만 따지면 잉글랜드 최고의 미드필더 중 한 명인 조이 바튼의 활약이 그나마 뉴캐슬에 활기를 불어넣어 주고 있었다.
 바튼이 미친듯이 뛰어다니면서 경기장 이곳저곳에 나타나주지 않았다면, 뉴캐슬의 상황은 지금보다 훨씬 더 좋지 않았을 것이었다.
 ‘후우, 이번에는 뭔가 해야 할 텐데.’
 3-1로 앞서고 있었기 때문에 세트피스 공격의 핵심인 센터백, 파브리시오 콜로치니와 스티븐 테일러가 올라오지 않았다.
 제공권을 장악하는 역할을 시형이 해주어야 한다는 뜻이었다.
 ‘틈이 안 보이는데······.’
 하지만 시형은 여전히 웨스트 브롬 수비수들과 제대로 싸워주지 못했다.
 세트피스 상황에서는 양 팀 선수들이 페널티 박스 안에 모여 경쟁하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치열한 몸싸움이 전개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치열한 몸싸움은 시형이 가진 가장 큰 약점이었다.
 “박스 안에서 몸싸움이 치열하게 벌어지는데··· 임시형 선수, 조금씩 밀려나는 모습입니다. 아, 안타깝습니다.”
 “그래도 끝까지 붙어줘야죠! 피하면 안 돼요! 최전방 스트라이커로 나설 거라면 꼭 극복해야 하는 단점입니다!”
 시형의 안 좋은 습관이 또 한 번 드러나고 있었다.
 몸싸움에서 밀리기 시작하자, 아예 몸싸움을 포기하고 1.5선으로 내려가 버린 것이었다.
 가장 장신인 시형이 밑으로 내려가자, 뉴캐슬 선수들은 전혀 힘을 쓰지 못하고 밀려나기 시작했다.
 시형을 제외하면 182cm의 구티에레즈가 최장신인 뉴캐슬의 약점이었다.
 “프리킥 올라옵니다! 웨스트 브롬, 간단히 클리어! 아, 임시형! 밀려납니다!”
 시형이 자꾸 2선으로 내려가는 이유는 볼이 흐르는 경로를 파악하고 미리 자리를 잡는 능력에 자신이 있기 때문이었다.
 실제로 좋은 모습을 보여주었을 때는 수비수들의 이목을 속이고 뒤나 옆에서 갑자기 나타나 벼락같은 득점을 기록해주곤 했다.
 하지만 지금 시형이 보여주는 모습은 자신의 장점을 살리기 위한 움직임이 아니었다.
 전방에서 싸워줘야 하는 상황인데도 흐르는 볼을 잡겠다며 밑으로 내려가는 것은 자신 없는 역할에서 도망치고 스스로 합리화하는 것에 불과했다.
 본인도 그것을 알고 있는 상황에서 플레이가 제대로 이뤄질 리 없었다.
 “임시형, 넘어지고! 모리슨, 그대로 역습으로 전개합니다! 웨스트 브롬의 역습 찬스! 전방의 브런트에게!”
 “역습입니다! 역습! 웨스트 브롬, 역습 기회를 잡았어요! 중앙에서 포춘과 초이가 따라 들어가죠?”
 흘러나온 볼을 따내기 위해 웨스트 브롬의 제임스 모리슨과 경쟁하던 시형은 자신보다 10cm는 작은 모리슨과의 경합에서 형편없이 밀려나 넘어지는 굴욕을 겪었다.
 설상가상으로 자신을 밀어내고 볼을 따낸 모리슨으로부터 웨스트 브롬의 역습이 시작되기까지 했다.
 “브런트, 중앙으로 짧은 패스!”
 “반대쪽 뛰죠! 어? 이거! 이거! 뚫렸어요! 열렸어요! 초이! 초이입니다!”
 크리스 브런트와 소멘 초이의 역습에 뉴캐슬 수비진은 뒷공간을 완벽히 내주고 말았다.
 브런트에게서 볼을 받은 초이는 뉴캐슬의 센터백, 스티븐 테일러의 등 뒤로 파고들었고, 팀 크룰 골키퍼와 일대일 찬스를 만들어냈다.
 '제발, 제발 막아!'
 여기서 골이 들어간다면 팬들의 비난이 자신에게 향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시형으로서는 실점하지 않기를 기도하는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프리미어리그에서 활약하는 선수가 이런 기회를 놓칠 리 없었다.
 “초이, 초이!! 골! 들어갑니다! 소멘 초이! 두 번째 골! 멀티 골을 기록합니다! 그리고 3-2까지 따라붙습니다! 소멘 초이!”
 세인트 제임스 파크를 가득 메운 뉴캐슬의 팬들은 자신들의 클럽을 향해 야유를 쏟아부었다.
 불과 몇 년 전까지만 하더라도 챔피언스리그를 노리던 클럽이었다.
 그랬던 클럽이 지난 두 시즌 동안 피 튀기는 강등 전쟁을 치렀고, 그동안 팬들의 인내심은 한계에 다다랐다.
 “아, 임시형 선수의 움직임이 너무 아쉽네요. 최전방에서 뛴 시간이 짧으니 어쩔 수 없긴 하지만, 확실히 많은 준비가 필요해 보입니다. 프리미어리그에서 최전방을 맡을 준비가 전혀 안 되어 있어요.”
 뉴캐슬 팬들의 야유는 시형을 향했다.
 최전방에서 연달아 무기력한 모습을 보여주더니 자신의 역할을 내팽개치고 2선으로 도망가기까지 한 데다가 몸싸움에서 패배하며 추가 실점의 빌미를 제공했으니 야유를 받지 않는 게 이상할 정도였다.
 ‘젠장. 나는 한 번도 최전방에서 뛰어본 적이 없다고. 윙어일 때도 몸싸움이 약한 편이었는데.’
 시형 입장에서는 억울할 수 있는 상황이었다.
 키가 갑자기 큰 것은 자신이 원했던 게 아니었다.
 스피드와 민첩성은 무뎌지고 꽤 오랫동안 운동을 하지 못해 경기 감각도 떨어졌으며, 신체 밸런스가 완벽히 무너졌기에 키가 큰 것은 재앙에 가까웠다.
 심지어 원래 포지션인 윙어로서 경쟁력이 떨어졌고, 강제로 전향하게 된 스트라이커는 한 번도 경험해본 적 없는 포지션이었다.
 ‘방법을 찾아야 해. 이대로는 어릴 때 반짝했던 유망주들의 전철을 따라갈 수밖에 없어.’
 하지만 웨스트 브롬은 물론이고 그 어떤 클럽도, 심지어는 소속 클럽인 뉴캐슬까지도 그런 상황들을 배려해주지 않았다.
 세계 최고의 선수들이 모이는 프리미어리그에서 살아남으려면 첫째도 실력, 둘째도 실력, 셋째도 실력이었다.
 이런저런 이유를 따지지 않고 실력으로만 봤을 때, 지금의 시형은 도저히 프리미어리그에서 버틸 수 없는 수준이었다.
 
 ***
 
 [뉴캐슬, 한 선수를 막지 못해 해트트릭 헌납하며 무승부.]
 ···
 Worst : 임시형
 - 3-1로 앞서던 후반 20분에 투입되었고, 해트트릭을 기록한 웨스트 브롬의 소멘 초이에 이어 두 번째로 눈에 띄는 선수가 되었다.
 원톱으로 출전했지만, 최전방에서 상대 수비수에게 압살당하는 모습만을 보여주었고, 이후에는 원톱 스트라이커가 상대 수비에게 겁을 먹고 2선으로 내려가는 볼썽사나운 광경을 연출했다.
 임의 투입 이후 뉴캐슬은 웨스트 브롬에게 경기 주도권을 완벽히 내주었으며, 임은 두 번째 실점의 빌미를 제공하며 팀의 연속 실점에 가장 큰 공헌을 하고 말았다.
 
 결국, 뉴캐슬은 3-0의 리드를 지키지 못하고 마지막 30분 동안 웨스트 브롬의 소멘 초이에게 해트트릭을 헌납, 3-3 무승부로 시즌을 마무리했다.
 경기가 끝난 뒤에도 뉴캐슬의 홈팬들은 자리를 떠나지 않았다.
 뉴캐슬 선수단에게 야유를 퍼붓기 위해서였다.
 경기가 끝났음에도 자리를 떠나지 않고 야유를 퍼붓는 홈팬들의 분노에 뉴캐슬 선수들은 고개를 들지 못했다.
 시즌을 마치고 홈팬들에게 감사 인사를 전하는 내내 뉴캐슬 선수들의 표정은 좋지 않았다.
 야유 세례의 중심에는 시형이 있었다.
 고작 두 시즌 전에 같은 자리에서 결정적인 골을 터뜨리며 강등을 막아낸 영웅이 되었던 시형은 2년 만에 팬들에게도 야유를 받는 역적이 되고 말았다.
 급격한 성장으로 아직 일상생활에도 적응하지 못한 선수를 무리하게 출전시켜 이 사단을 만든 앨런 파듀 감독도 비난을 피하지는 못했다.
 하지만 경기장에서 형편없는 모습을 보여준 시형에게 비난이 집중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
 
 [임시형, 평가전 앞두고 국가대표팀 합류 위해 귀국.]
 
 뉴캐슬 유나이티드 소속의 공격수, 임시형(22)이 오늘 오전 인천 국제공항을 통해 귀국했다.
 지난 3월, 복귀와 동시에 국가대표팀에 소집되었던 임시형은 그때 보여주지 못했던 자신의 기량을 이번에야말로 보여주겠다는 각오다.
 열여덟 살에 불과했던 4년 전부터 국가대표로 활약하기 시작해 심한 성장통으로 이탈하기 전까지 2년 반 동안 핵심 공격수로 활약한 임시형의 가세는 대한민국 축구 대표팀에 큰 보탬이 될 전망.
 다만, 아직 경기력이 완벽하게 올라온 것은 아닌 만큼 전근영 감독이 임시형을 어떻게 활용할지 관심을 끌고 있다.
 ···
 ㄴ 임시형이라··· 분명 차세대 에이스나 다름없었던 선수지만, 지금은 좀 아니지 않나. 시즌 막판에 리그 경기 보니까 가관이던데. 피지컬은, 아니, 키는 컸는데 나머지가 전혀 받쳐주지 못하는 느낌? 전근영이 너무 서두르는 듯.
 ㄴ 확실히 그런 느낌이 있네요. 조금 더 참다가 변화에 적응하면 불러도 될 텐데. 괜히 서두르다가 기껏 나타난 천재 한 명 망가뜨리는 건 아닌지 걱정되네요.
 ㄴ 천재는 개뿔. 이번 시즌 기록이 7경기 출전에 1골이었던가? 거품이지, 거품. 배준열을 뛰어넘는 희대의 거품. 초반에야 상대 수비수들이 어디서 온 듣보잡인지 몰라서 당황했지만, 이제 익숙해지니까 안 통하는 거지. 그냥 원래 이게 실력.
 ㄴ 원래 실력? 무슨 헛소리임? 프리미어리그 진출하고 1년 동안 5골 7어시스트인데? 아시아에서 이런 선수가 나왔는데, 원래 실력이 지금 이 정도라고? 말이 되는 소리를 해야지. 이제 키까지 컸으니 적응만 되면 빅클럽들이 서로 모셔가려고 할 텐데.
 ㄴ 아, 왜 임시형 기사는 맨날 이렇게 진흙탕이냐? 빠랑 까밖에 없는 느낌이라고. 빠순이들은 팬카페 가서 놀고, 안티들은 안티카페 가서 놀아. 원래 실력이랑 잠재력 전부 뛰어난 선수인 건 맞는데, 그렇다고 단순히 키 하나 컸다고 빅클럽들이 모셔갈 정도로 축구가 단순한 운동도 아니니까.
 
 시형의 국가대표팀 합류 소식은 팬들 사이에서 큰 화제를 불러일으켰다.
 2010년 남아공 월드컵까지는 시형의 공백이 아쉽긴 해도 큰 문제는 아니었다.
 부동의 에이스 배진수와 배준열, 양배의 활약과 시형과 함께 대한민국의 미래라 불렸던 쌍용, 구승용과 안찬용의 활약에 힘입어 원정 첫 16강 진출을 달성한 것이었다.
 하지만 한문정 감독이 사퇴하고 전근영 감독이 지휘봉을 잡은 이후, 팬들은 시형의 빈자리를 실감했다.
 이론적으로는 강력하지만, 조직력을 쌓기 힘든 국가대표팀에서 구현하기는 불가능에 가까운 전술, 선수 구성과 어울리지 않는 축구 철학, 유럽파를 향한 맹목적인 신뢰에 따른 유럽파 혹사와 국내파 외면 등 전근영 호의 문제점은 수두룩했다.
 준비한 전술대로 경기가 이루어지지 않으니 선수 개개인의 기량으로 골을 노리는 플레이가 자주 나왔고, 대한민국에서 그런 플레이를 가장 잘하는 선수는 역시 시형이었다.
 
 
 # 004
 
 ‘후우··· 1년이라는 시간은 역시 길었어.’
 지난 3월, 팀 훈련 복귀와 동시에 국가대표팀 평가전 명단에 포함되었지만, 출전은 하지 못했었다.
 이번 평가전 명단에 이름을 올린 것 역시 유럽파를 맹목적일 정도로 선호하는 전근영 감독 덕분이었다.
 대표팀 선발이 확실한 선수로 다섯 손가락 안에 꼽혔던 시형은 1년의 공백기 동안 합류 자체에 찬반이 갈리는 선수가 되어 있었다.
 ‘급하게 가지 말자고. 어차피 내 재능이 어디로 사라지는 것도 아니고, 지금 몸 상태도 뭔가 해낼 수 있는 상황은 아니니까.’
 급하게 가지 않겠다고 자신을 설득해보았지만, 굳은 표정은 풀어지지 않았다.
 뛰어난 기량과 잠재력은 시형의 프라이드였다.
 아버지의 사업이 무너져 가세가 기울었을 때, 크게 엇나갈 뻔했던 상황에서 마음을 다잡을 수 있었던 것은 자신에 대한 자신감 덕분이었다.
 그 기량이 무너지고 기량은 물론 잠재력까지 의심받는 지금의 상황은 시형에게 견디기 힘든 괴로움으로 다가왔다.
 ‘빌어먹을! 조급해하지 말라고, 이 바보 같은 새끼야. 지금은 뭘 하려고 해도 할 수가 없는 상황이라고!’
 신체 밸런스가 완전히 무너져 있다는 것, 거의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한다는 것은 시형 본인이 가장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알고 있어도 조급해지는 마음을 추스른다는 게 쉽지 않았다.
 축구를 시작한 이후 성공가도 만을 달려왔던 스물두 살 어린 선수에게는 아직 위기에 대한 내성이 없었다.
 
 ***
 
 “도대체 저 친구를 어떻게 써야 할까?”
 파주 NFC, 소집된 국가대표팀 선수들의 훈련을 지켜보던 전근영 감독은 한 선수의 움직임을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자신의 대표팀에서 핵심으로 활용하려던 선수였는데, 구상에서 너무 많이 벗어나고 말았다.
 “그러게 말입니다. 완전히 다른 선수가 되어버렸는데요? 단순히 키가 큰 게 아니라 그냥 아예 다른 선수라고 생각해야 할 것 같습니다. 좀 컸어야죠.”
 봉태윤 수석코치 역시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이들이 보고 있는 선수는 시형이었다.
 지난 국가대표팀 소집 때도 그렇고, 이번에도 그렇고 전처럼 윙어로 박아놓고 훈련을 진행했는데, 성장통으로 이탈하기 전의 위협적인 모습을 전혀 보여주지 못하고 있었다.
 “단순히 감각이 떨어진 게 아니라는 거겠지. 뭐, 그럴 수밖에 없나. 3, 4cm만 커도 위화감을 느끼는 게 프로 선수인데, 출전을 아예 못하는 동안 10cm가 넘게 컸으니.”
 자신의 몸 상태와 기량, 장단점을 모두 고려해 플레이 스타일을 정하는 프로 선수들에게 신체 조건의 변화는 엄청난 변수였다.
 신체 조건이 변하면 단순히 신체 조건의 변화에서 끝나는 게 아니고 그동안 파악해놓았던 자신의 장단점이 모두 변하기 때문이었다.
 시형을 예로 들면 장점이었던 민첩성, 스피드, 유연함 등이 무뎌졌고, 단점이었던 제공권은 조금 더 강해졌다.
 이런 것들을 모두 고려해 플레이 스타일을 처음부터 뜯어고쳐야 하고, 뜯어고친 플레이 스타일에 익숙해져야 했다.
 말처럼 쉬운 일은 아니었고, 프로 선수쯤 되면 이미 플레이 성향이 굳어버리기 때문에 평생을 쏟아부어도 실패하는 경우가 많았다.
 “차라리 경기라도 뛰었으면 1년 동안 천천히 변화에 적응했을 텐데요. 그 정도 재능은 있는 선수지 않습니까?”
 “그래. 그게 문제야. 차라리 경기라도 뛰었으면··· 저 친구 재능은 솔직히 그동안 우리가 지켜본 선수 중 최고 수준이잖아. 그런데 아무리 재능이 있으면 뭐하나, 자기 몸도 제대로 모르는데.”
 이미 나이를 먹을 대로 먹은 상황에서 1년 동안 10cm도 넘게 크려니 그에 따른 성장통은 말 그대로 어마어마했다.
 허벅지와 무릎 관절의 통증, 그리고 급격한 성장 중 부상의 위험 때문에 경기 출전은 물론이고 훈련조차 제대로 소화하지 못한 시형이었다.
 지금의 몸으로 제대로 뛰어본 경험이 많지 않다는 뜻이었다.
 “윙어로 계속 훈련을 시킨다고 해서 예전 모습이 나올까요?”
 현 국가대표팀의 가장 큰 문제는 측면에 있었다.
 대한민국 최고의 무기이자 레전드급 라인이었던 배진수-윤기표 라인을 더 이상 가동할 수 없게 되었고, 양경현, 배준열, 제대현의 3톱 체제는 측면 공략에 약점을 노출했다.
 배진수가 빠진 왼쪽 주전 윙어 후보로는 양경현, 강병기, 노창윤 등이 있었는데, 세 선수 모두 주전으로는 뭔가 아쉬운 모습이었다.
 “아무래도 힘들지 않을까? 원래 기량을 회복하면 장신 윙어로 큰 힘이 되어 주겠지만··· 너무 큰 욕심이지.”
 원래 배진수의 후계자 자리를 걱정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시형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배진수가 은퇴를 선언하고 시형과 자연스럽게 교체되어야 했던 순간, 그 자리에 시형은 없었다.
 그리고 다시 한 번 그 자리로 돌아올 거라 기대하기도 어려웠다.
 “아쉽네요. 진수가 은퇴한 다음에 준열이랑 같이 팀을 이끌어줄 거라 생각했는데.”
 “괜찮아. 준열이도 건재하고 찬용이랑 승용이도 있으니까. 아쉽긴 하지만, 어쩔 수 없지. 아직 어린 친구니까 재기할 수도 있고. 그리고 지금 상태로도 주전까지는 무리지만, 백업으로는 데려갈 수 있어. 안 그래도 측면 자원이 부족한데, 양쪽 측면 다 소화해주잖아? 일단 신체 밸런스만 잡으면 백업은 가능할 거야.”
 그나마 다행인 점이 있다면, 현 국가대표팀 감독인 전근영이 유럽파를 맹목적으로 선호한다는 점이었다.
 일단 유럽에서, 그것도 빅리그인 프리미어리그에서 버텨낼 수만 있다면 국가대표팀 선발은 걱정하지 않아도 될 것이었다.
 하지만 전근영 감독의 상황이 그리 좋지만은 않았기 때문에 부활하지 못한다면 국가대표팀 경력 역시 머지않아 끊길 수 있었다.
 “뭐, 그건 그거고. 이번 평가전 두 경기에서는 경현이랑 대현이를 한 번 시험해보자고. 언제까지 임시형만 보고 있을 수는 없잖아? 적어도 밸런스를 다시 잡아내기 전까지 임시형은 써먹기 힘들어.”
 측면으로만 이동하면 파괴력이 확 줄어드는 제대현까지도 윙어로 실험해보려는 전근영 감독의 의도는 시형에게 상당한 위협이었다.
 최소한 지금 당장은 전근영 감독의 머릿속에 시형의 복귀 카드가 없다는 이야기였기 때문이었다.
 홈팬들에게마저도 야유를 듣는 소속팀에서의 상황처럼 국가대표팀에서의 입지 역시 사정없이 흔들리고 있었다.
 이 모든 것이 1년 만에 이루어진 일이었다.
 당장은 어떻게든 버티고 있었지만, 한 번 밀려나게 되면 다시 올라오는 게 처음보다 몇 배는 힘들 수밖에 없었다.
 커리어의 향방이 향후 몇 달에 달려 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었다.
 [임시형은 이제 끝난 거 아님? 몸이 못 따라가는데?]
 다른 건 모르겠고, 축구선수가 몸이 못 따라가면 끝난 거 아닌가?
 재능이 있다는 건 알겠는데, 운동선수는 일단 피지컬이 기본적으로 받쳐주고 그다음에 테크닉이든 돌파든 하는 거니까.
 지금 임시형 하는 거 보면 어떤 플레이를 하든 몸이 못 따라가는 것 같은데, 운동선수가 이런 상태면 끝났다고 봐야지.
 솔직히 그동안은 애가 말하는 게 너무 싸가지없어서 마음에 안 들어도, 실력이 있으니 뭐라 하기 그랬는데, 이젠 실력도 없으니 주둥이 한 번만 더 털면 극딜해야겠다.
 말은 똑바로 하랬다고, 얘가 무너지면 국대에 큰 타격이라는 건 알지만, 그래도 뭔가 고소하다.
 
 ㄴ 솔직히 나도 고소하긴 함. 그동안 실력 좀 있다고 나대는 거 별로 보기 안 좋았음. 역시 운동선수도 인성부터 되고 봐야지, 인성이 안 좋으면 결국 천벌 받는다니까?
 ㄴ 인성? 인성에 무슨 문제가 있었나? 그냥 다른 선수들보다 노는 것 좀 좋아하고 말을 좀 패기 넘치게 했을 뿐이지, 딱히 인성 문제는 없었던 거로 아는데? 오히려 성공해서 자기 힘으로 망했던 집안 일으켜 세우고 누나 공부시켜주고 싶다고 하는 거 보면 개념도 똑바른 것 같은데.
 ㄴ 일단 기량만 보자면 확실히 위기가 맞는 듯하네요. 말씀하신 대로 움직임을 몸이 버텨주지 못하고 있어요. 다만, 키가 너무 갑자기 커서 생긴 문제니까 앞으로 1, 2년 정도는 더 봐야 할 것 같네요. 그동안 밸런스를 잡으면 다시 살아날 수 있을 거고, 못 잡으면··· 다른 많은 유망주들처럼 이대로 사라지겠죠.
 ㄴ 1. 아버지 사업이 망하면서 떠안은 빚 갚느라 안정적인 K리그 대신 위험한 J리그 선택 - 2. 계약금 절반을 뚝 떼서 집안 빚 갚는 데 보탬 - 3. 돈을 많이 벌어 빨리 빚을 갚고 누나가 다시 공부할 수 있게 도와주는 게 꿈 : 이런 선수가 인성이 나쁘다고? 너는 저 나이 때 뭐했냐?
 ㄴ 돈 벌면 집안 돕는 게 당연한 거지, 칭찬받을 건 아님. 게다가 돈을 빨리 벌고 싶다는 그 꿈 때문인지는 모르겠는데, 스탯에 집착하는 경향이 있음. J리그 때도 그렇고, 프리미어리그에서도, 국가대표에서도 자기가 해결하려는 탐욕이 있다고 해야 하나? 어차피 그런 것들 때문에 크게 될 선수는 아니었음.
 
 연달아 펼쳐진 세르비아, 가나와의 평가전에서 시형은 딱히 눈에 띄는 활약을 보여주지 못했다.
 세르비아전과 가나전 모두 후반 막판에 왼쪽 윙어로 교체 투입되었는데, 장시간 비행의 피로로 상대 선수들의 몸놀림이 무거워 보였음에도 연신 가로막히는 답답한 모습을 보인 것이었다.
 세르비아와 가나가 만만한 팀은 아니라지만, 한국 축구팬들의 기대에 전혀 부응하지 못한 것은 문제가 있었다.
 
 [전근영 감독, “임시형, 아직 시간이 더 필요해.”]
 [전문가들, 임시형의 윙어 고집에 대해 부정적 의견 표시.]
 [다재다능? 스트라이커도, 윙어도 아닌 어정쩡한 플레이.]
 
 언론 역시 시형에게 우호적이지 않았다.
 상세한 조사가 바탕이 되는 기사보다 자극적인 제목과 내용으로 이목을 끌어 조회 수를 올려야 이슈가 되고 돈이 되는 인터넷 언론 시대의 특성상 극성 팬과 극성 안티가 모두 존재하는 시형은 그들의 좋은 먹잇감이었다.
 수많은 충성스러운 팬과 수많은 악질적인 안티를 모두 보유한 유명인은 언론사들이 가장 좋아하는 먹잇감이었고, 시형 역시 지금까지 수차례나 이들에게 물어뜯겼다.
 언론의 공격에 대해 시형 정도의 맷집을 가진 선수는 K리그의 사기유닛이라 불렸지만, 특유의 멘탈과 똘끼를 숨기지 못한 유철승이나 ‘축구천재’라는 별명과 ‘통수왕’이라는 별명을 동시에 보유한 배준열 정도밖에 없었다.
 시형이 프로 무대에 본격적으로 모습을 드러낸 지 4년밖에 되지 않았다는 것을 감안하면 그 짧은 사이 얼마나 물어뜯겼는지 쉽게 상상할 수 있었다.
 ‘몇 달 전까지만 해도 대한민국의 미래라느니, 어쩌느니 띄워주던 사람들이··· 내 덕에 조회수 올려서 먹고 살던 사람들이···.’
 하지만 그 맷집도 잘나갈 때나 발휘되는 것이었다.
 한창 성장해야 했던 21세 시즌을 통으로 날려버린 시형에게 이미 그런 맷집은 남아있지 않았다.
 단순히 부상으로 날려버린 거라면 다시 몸을 회복해 보란 듯이 증명해 보일 것이라는 오기라도 부려보겠지만, 신체의 변화로 기초 공사부터 다시 해야 하는 지금 상황에서는 그런 오기도 쉽게 부릴 수 없었다.
 ‘젠장. 나 안 죽었어. 임시형, 이렇게 안 죽는다. 대한민국, 이 땅에서는 내가 최고야. 당신들이 그렇게 함부로 이야기할 사람이 아니라고.’
 사춘기 시절을, 최악의 시기를 버티게 해주었던 것은 자신에 대한, 기량과 잠재력에 대한 프라이드였다.
 그 프라이드에 상처를 입은 시형에게 남은 것은 없었다.
 이대로 바닥을 찍을지, 이를 악물고 노력해 다시 정상을 노릴지, 시형에게는 두 가지 길밖에 없었다.
 
 
 # 005
 
 “너무 댓글에 신경 쓰지 마세요.”
 운전하면서도 매니저의 정신은 휴대폰으로 인터넷 댓글들을 읽으며 심각한 표정을 짓는 시형에게 쏠려있었다.
 방송이나 인터뷰 일정이 워낙 많은 시형을 위해 에이전트와는 별개로 매니저를 배정하고 있었다.
 “하아··· 쉽지 않네요. 예전에는 그냥 한 번 웃고 넘겼는데··· 이래저래 상황이 안 좋으니 예전에는 웃고 넘겼던 것들이 자꾸 심기를 거스르네요.”
 원래 시형은 악플의 영향을 거의 받지 않는 선수였다.
 시형의 프라이드는 자신의 실력에 한정된 것이었다.
 인성이나 성격을 욕하는 건 아무렇지도 않았다.
 자신이 인격적으로 완벽한 사람이라고 생각한 적은 없었다.
 인간인 이상 인격적인 결함이 있는 것은 당연했고, 그런 부분을 좋아해주는 사람이 있는 만큼 싫어하는 사람이 있는 것도 당연했다.
 흔히 인터넷 악플 중 최악으로 꼽히는 가족에 대한 욕설도 넘어갈 수 있었다.
 루머가 마치 진실처럼 여겨져 사회적으로 화제가 되는 것만 아니라면 단순 욕설은 “허, 이 사람 사회생활 가능해?”라며 웃어넘길 수 있었다.
 “이 악플들에 반박할 수 없다는 게 짜증나네요. 이들의 말이 사실이라는 게 견딜 수가 없어요. 내가 어쩌다 이렇게 되었는지 이해가 안 돼요. 내가 원해서 키가 큰 게 아닌데, 그것 때문에 고생한다는 게 억울하네요.”
 하지만 자신의 기량이 형편없다고 말하는 것은 참을 수 없었다.
 단순 비난이 아닌 근거가 존재하는 비판일 경우, 자신마저 반박할 수 없을 정도로 근거가 확실할 경우에는 더더욱 그랬다.
 기량에 대한 자부심 하나로 버텨온 시형에게 기량에 대한 비판을 반박할 수 없다는 건 너무나 괴로운 일이었다.
 “하··· 저도 이제 진수 선배처럼 일 년 365일, 하루 24시간 내내 축구만 생각하고 살아야 하는 걸까요? 그러면 좀 나아지려나? 하긴, 유현 씨는 잘 모르겠죠? 그냥 답답해서 그래요, 답답해서.”
 시형에게 축구란 직업이었다.
 축구에 대한 사랑이 넘쳐흘러 어쩔 줄 모르는 몇몇 선수들과 달리, 시형은 축구를 직업으로 생각했다.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일과 직업으로서 하는 일이 다른 대부분 사람처럼 시형 역시 그랬다.
 “글쎄요? 꼭 어느 하나에만 매달린다고 해서 그걸 잘하게 되는 건 아니지 않을까요? 지금까지 잘해오셨으니 딱히 바꿀 필요는 없을 것 같은데요. 훈련 시간에는 열심히 하시잖아요. 엄청난 노하우를 가진 유럽 클럽들이 훈련시간을 정해놓았다는 건 그게 가장 효율적이라는 것 아니겠어요?”
 흔히 아시아권의 선수들은, 아니, 사람들은 목표를 위해 자신의 모든 시간을 희생하는 걸 당연하게 여겼다.
 그래서 수험생들은 모든 일상을 포기하고, 친구를 만나거나 여행을 가거나 심지어 휴대폰을 해지해 연락까지 끊어가며 공부하곤 했다.
 “3년을 포기하면 60년이 편해진다.”
 그런 이들에게 흔히 건네는 말이었다.
 선수들도 마찬가지였다.
 컨디션이 좋지 않아도, 심지어 부상을 당해도 부진의 이유는 오로지 자신의 ‘노력’이 부족하기 때문이었다.
 멀쩡한 곳이 없을 정도로 몸이 망가져도 선수들은 훈련에 열을 올렸다.
 그리고 부상이 도지거나 악화되어 결과적으로 선수 생명을 갉아먹고 말았다.
 베테랑, 유망주 할 것 없이 이런 식으로 무너진 선수들은 한둘이 아니었다.
 “흐음. 그럴까요? 조급해하지 말고 하던 대로만 하면 다시 재기할 수 있을까요? 하아···.”
 시형은 “몇 년을 포기해서 몇십 년이 편해진다.”는 말을 싫어하다 못해 혐오했다.
 축구 외에는 꿈도 희망도 없었던 중학교 시절을 제외하면 훈련만큼이나 휴식을 중요하게 생각했고, 그렇게 살아왔다.
 이 때문에 감독이나 선배들에게 얼차려를 받기도 했고, 팬들에게 욕을 먹기도 했지만, 시형은 꾸준히 자신의 신념을 밀고 나갔다.
 그러는 동안 오해가 깊어지고 안티도 늘어났지만, 딱히 신경 쓰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 시형은 흔들리고 있었다.
 “너무 신경 쓰지 마세요. 혹시 알아요? 이제 신장까지 유럽 선수들을 압도하는데, 내년부터 프리미어리그를 씹어먹게 될 수도 있잖아요.”
 ‘글쎄. 그럴 수 있을까?’
 남들이 태워주는 비행기는 절대 거절하지 않았던 시형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수도 없이 해왔던 탑승 수속 절차가 좀 어려웠다.
 
 ‘2년 만에 이런 식으로 출연하게 될 줄이야.’
 2년 전에 단독 게스트로 출연했던 그 토크쇼에 시형은 다시 한 번 출연하게 되었다.
 이번에는 주인공이 아니었다.
 전에 출연했을 때 친구가 몰래 나와주었던 것처럼 시형도 깜짝 출연을 준비하고 있는 것이었다.
 ‘지금 실력 개판인데 또 방송 나온다고 뭐라 하겠지? 네가 선수냐, 연예인이냐 하면서.’
 안티가 많은 선수인 만큼 안티들이 어떤 행동을 꼬투리 잡는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다만, 남는 시간에 하는 일에 대해 가해지는 비난은 실력에 대한 비판이 아니었기 때문에 신경 쓰지 않았다.
 프로 선수라고 해도 하루 24시간, 1년 365일 훈련만 하는 건 당연히 아니었다.
 남는 시간에는 다들 휴식을 취하거나 취미 활동을 즐기고, 그중 인기가 있는 몇몇 스타 선수들은 연예활동도 하곤 했지만, 팬들은 스포츠 스타의 연예 활동에 이상할 정도로 부정적이었다.
 ‘아, 이런 거 원래 신경 안 쓰던 사람인데. 확실히 약해졌구나. 이런 걸 걱정하고.’
 시형은 헛웃음을 흘렸다.
 자신의 이런 모습이 낯설었다.
 나 잘난 맛에 살았던, 남들 눈 따위 신경 쓰지 않았던 자신이 왜 이렇게 되었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젠장. 누가 키 크게 해달라 했냐고. ··· 물론, 180이 넘었을 땐 잠깐 좋아하긴 했지만. 그래, 좋아했어, 잠깐은. 근데 190은 너무했잖아.’
 성장통이 오기 전까지 시형의 신장은 179cm였다.
 언젠가 있었던 ‘루저의 난’ 덕분에 180cm 이하의 남성들이 ‘루저’가 된 이후, 1cm만 더 커서 루저를 벗어나고 싶다고 생각한 적은 있었다.
 하지만 단언컨대 190cm를 넘기고 싶다고 생각한 적은 없었다.
 ‘빨리 방향을 잡아야 해. 최전방을 갈지, 측면에 남을지.’
 요즘은 시간만 나면 미래를 고민하고 있었다.
 축구를 시작한 이후, 이렇게 모든 시간을 축구에 투자하는 건 처음이었다.
 다음 시즌에 대비해 휴식을 취하면서도 머릿속에서는 축구에 대한 고민이 떠나지 않았다.
 지금 이 순간이 축구인생 최고의 위기이면서 중요한 분기점임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임시형 선수, 곧 들어가실게요. 준비해주세요.”
 “아, 네. 알겠습니다.”
 시형의 상념은 FD의 스탠바이 요구 때문에 끊겼다.
 어차피 지금 고민한다고 답이 나올 문제는 아니었기에 시형은 촬영에 집중하기로 했다.
 “네, 그렇습니다! 오늘, [까치가 운 손님]의 게스트, 대한민국 국가대표 축구선수, 임시형 선수입니다!”
 시형이 모습을 드러내자, 방청객의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
 비록 2년 전과 비교하면 화제성이 많이 떨어진 상태였지만, 하드한 축구팬이 아닌 일반인들, 특히 시형의 외모에 호감을 가진, ‘얼빠’라고 통칭되는 팬들은 여전히 시형을 잊지 않았다.
 “뭐야? 언제 왔어? 바쁘다고 술도 한 잔 못 한다면서?”
 오늘의 메인 게스트, 영화배우이자 시형의 가장 친한 친구인 채윤우는 깜짝 등장한 시형의 등짝을 후려쳤다.
 시간이 없으면 만들어서라도 만나던 두 사람이었지만, 시형은 깜짝 출연을 위해 이번 귀국 때는 만나기 힘들 것 같다고 연막을 쳐놓은 상황이었다.
 그랬기에 채윤우의 반가움은 더욱 클 수밖에 없었다.
 “바쁘긴 개뿔. 축구선수 안 바쁜 건 너도 잘 알잖아. 하하.”
 채윤우도 시형과 함께 대한민국 최고의 축구 명문 고등학교, 상대고등학교에서 2학년까지 축구선수로 활동했기 때문에 축구계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대충 알고 있었다.
 비시즌 중에 전혀 바쁘지 않다는 걸 잘 알고 있다는 뜻이었다.
 “그러니까. 안 바쁜데 안 만나준다길래 나 말고 다른 사람이 생긴 건가, 했지. 섭섭할 뻔.”
 “헛소리는 거기까지 해라. 토할 것 같으니까.”
 만나자마자 또 좋다고 시시덕대는 두 사람이었다.
 두 사람이 워낙 친하다 보니 사석에서 둘이 노는 사진도 인터넷에 굉장히 많이 돌아다녔다.
 두 명의 훈훈한 청년들이 애들처럼 시시덕대는 모습은 여성 팬들의 취향을 그대로 저격했다.
 시형이야 말할 것도 없고 윤우 역시 ‘윤우오빠’라는 애칭에서 알 수 있듯 “왜 당신은 저보다 어린가요? 왜 오빠가 아닌가요?”하는 팬들의 아우성을 듣는 어른스러운 캐릭터였다.
 혼자 있을 때와 함께 있을 때, 사진에서도 느껴지는 그 갭은 팬들의 마음을 저격했다.
 “아, 두 분. 지금 방송 중입니다. 나중에 따로 만나서 노시고, 지금은 방송에 집중해주세요. 하하하.”
 시형과 윤우는 자리에 앉으면서도 서로의 어깨를 때리는 등 그 또래 청년들처럼 장난치며 웃었다.
 팬픽까지 만들 정도로 두 사람의 모습을 좋아하는 윤우의 팬들은 눈이 이미 하트로 변해 있었다.
 이미 두 사람은 어느 정도 팬층을 공유하고 있었다.
 “자, 채윤우 씨가 임시형 선수에게 어떤 존재이길래 이렇게 몰래 출연까지 하게 되셨습니까?”
 “2년 전에 제가 나왔을 때 윤우가 나와줬었잖아요. 그 보답하러 나온 거죠. 그때 윤우는 신인이라 자기 유명해지려고 나온 거긴 하지만요. 제가 착하니까 봐줘야죠.”
 “야. 나도 나름 유명했을 때거든? 그때 찍은 [필드]가 얼마나 잘 나갔는데? 나도 나름 떠오르는 스타였어!”
 “스타는 무슨. 같이 나가면 아무도 못 알아보던데.”
 다시 본론으로 들어가려는 강종효의 노력이 무색하게 두 사람은 다시 투닥거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강종효도 괜히 대한민국 최고의 MC라 불리는 게 아니었고, 2년 전의 경험도 있었기 때문에 금방 수습할 수 있었다.
 “그렇게 보지 마세요. 농담이니까요. 솔직히 말하자면 조금 부끄럽긴 한데, 윤우는 제 인생의 은인이나 마찬가지예요. 도움이 된다면 이 정도는 얼마든지 할 수 있죠. 이렇게라도 조금씩 빚을 갚아나가야 하니까요.”
 시형이 출연했을 때도 언급했던 이야기였다.
 다만, 그때는 시형이 주인공이었기 때문에 살짝 훑고 지나갔던 이야기였다.
 “은인이요? 두 분 사이에 어떤 일이 있었나요?”
 “아니, 뭐 별 거 아니에요. 은인은 조금 과하고···.”
 “은인이죠. 지난번에 말씀드렸다시피 저희 집안이 어려워진 데다가 형제도 여섯 명이나 되기 때문에 밥을 먹는 것도 좀 힘들었어요. 밥을 못 먹을 정도는 아니었지만, 반찬이라던가 해서 풍족하진 않았죠. 그때 윤우랑 윤우 부모님이 운동선수인데 못 먹으면 어떡하냐고 저까지 챙겨주셨어요. 매일 저녁을 윤우네 집에서 먹었죠.”
 윤우네 집안은 유복한 편이었다.
 재벌이나 준재벌급은 아니었지만, 지역 유지 정도는 충분히 되고도 남는 수준이었고, 한 명 정도 더 먹이는 건 일도 아니었다.
 절친의 상황을 안타깝게 여긴 윤우가 부모님에게 말해서 시형에게 매일 저녁을 먹여주었고, 덕분에 시형은 운동선수에게 필요한 영양소들을 섭취할 수 있었다.
 “그런데 생각해보면 어머님이 너무 잘해주시긴 했어? 지금 봐봐. 키가 190이 뭐야, 190이. 좀 적당히 잘해주셨어야 했는데.”
 “야! 너 지금 우리 엄마한테 뭐라고 하는 거냐? 와, 배은망덕한! 이래서 머리 검은 짐승은 거두는 게 아니라고···.”
 “아니, 그게 왜 그렇게 돼? 어머니, 아닙니다. 그런 거 아니에요. 아시죠?”
 한마디 하기가 무섭게 다시 난장판이 되는 상황에 강종효마저 머리를 부여잡았다.
 두 사람 다 혼자 있으면 최고의 게스트인데, 둘을 붙여놓으면 도저히 방송 진도가 나가질 않았다.
 하지만 둘을 붙여놓으면 최고의 시너지가 나오기 때문에 섭외할 수밖에 없었다.
 이날도 두 사람이 보여준 호흡은 최고였고, 만들어진 재미 또한 최고였다.
 다만, 강종효를 비롯해 담당 PD와 기타 제작진들이 10년 정도 늙었을 뿐이었다.
 
 
 # 006
 
 “무슨 일이야? 왜 표정이 그렇게 어두워?”
 촬영 후, 두 사람은 그동안 하지 못한 이야기들을 나누기 위해 따로 술자리를 가졌다.
 그리고 앉자마자 윤우가 물었다.
 “눈치도 빠르셔라. 그렇게 티나냐?”
 원래 예전부터 채윤우는 눈치가 빠른 친구였다.
 이제는 윤우가 그렇다고 하면 그런 것이었다.
 어차피 변명해도 믿지 않을 테니 굳이 숨기지도 않았고, 숨길 생각도 없었다.
 “참, 너는 눈치가 빨라. 처음 만났을 때부터 그랬고.”
 처음 두 사람이 친해지게 된 것도 채윤우의 눈치, 쉽게 말해 오지랖 덕분이었다.
 고등학교 입학 후 처음 만났을 때, 시형은 아무에게도 마음의 문을 열지 않는 어두운 학생이었다.
 가세가 기운 이후 마음의 문을 닫고 성격까지 날카로워져 많던 친구들이 다 떠났고, 집에 들어가기 싫다고 혼자서 운동장에 열 시까지 남아 훈련했으니 친구를 사귈 틈도 없었다.
 “별로 특별한 것도 아닌데, 뭘. 그냥 너도 사람들한테 관심 좀 가져. 그럼 쉽게 알 수 있어.”
 이와는 반대로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나 부모님의 사랑을 한몸에 받으며 자란 윤우는 사랑이 넘치는 사람이었다.
 돈을 떠나 한 사람 한 사람에게 관심을 가져주니 친구들도 윤우를 좋아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게 특별한 게 아니면 내가 그 축구화를 아직까지 가지고 있겠냐. 그건 도저히 버릴 수가 없더라고.”
 윤우와 시형이 친해지게 된 계기는 축구화였다.
 어느 날, 윤우는 시형의 축구화가 헤질 대로 헤져 수명이 다한 것을 발견했다.
 대충 시형의 상황을 들어 알고 있었던 윤우는 시형의 자존심이 상하지 않게 축구부 모두에게 축구화를 선물했다.
 다른 부원들의 것은 모르겠지만, 시형의 축구화는 인사이드에 고무가 부착되어 슈팅의 제어와 정확도에 도움을 주는 형태였다.
 그것을 본 순간, 시형은 윤우에게 마음을 열 수밖에 없었다.
 “뭐, 축구화는 내가 이야기한 거지만, 그다음부터는 우리 어머니가 하신 거야. 네 덕에 아들내미 하나 더 생긴 것 같다고 얼마나 좋아하셨는데. 네가 고마워하는 만큼 나도 고마워하니까 쌤쌤으로 치자.”
 식구는 여덟인데 모두 풍족하게 먹도록 식탁을 차릴 형편이 되지 않다 보니 시형네 집의 식사시간은 항상 전쟁이었다.
 그게 보기 싫기도 하고 안타깝기도 해서 시형은 윤우의 식사 초대를 거절하지 못했다.
 아이를 더 낳으려 노력했지만, 아쉽게도 아들 한 명밖에 낳지 못한 윤우의 어머니는 시형을 아들처럼 대해주었다.
 윤우가 아닌 윤우의 어머니가 앞장서서 선수에게 필요한 것들을 이것저것 안겨주니 시형도 차마 거절하지 못했고, 이제는 진짜 아들처럼 되어 있었다.
 “그래? 쌤쌤이야? 그러면 내 마음도 좀 편하고.”
 어쨌든 이 두 사람의 사이를 정리하자면 이런 큰일들을 지금처럼 장난으로 넘겨버릴 수 있는 사이였다.
 어떤 말도, 어떤 짓도 이해해줄 수 있는 완벽한 내 편.
 그게 두 사람의 관계였다.
 “너 하고 싶은 말이 그거지? 요즘 축구가 너무 안 돼서 힘들다고?”
 “뭐, 결국은 그거지. 나머지는 다 그것 때문에 생긴 일이고.”
 윤우는 항상 시형이 말하기도 전에 고민거리를 알아채곤 했다.
 직접 말을 하지 않아도 되기 때문에 시형은 항상 윤우에게 고민을 상담하곤 했다.
 “야, 부러운 소리 하지 마라. 내 앞에서 지금 그런 소리가 나오냐? 프리미어리그까지 간 놈이?”
 물론, 중간에 축구를 그만둔 윤우에게 축구에 관한 고민을 상담한 적은 없었지만.
 "아, 이래서 내가 너한테 이야기하기 싫었다고! 네가 먼저 눈치채놓고 왜 나한테 지랄이야!"
 엄밀히 말하면, 시형은 윤우에게 고민을 털어놓은 적이 없었다.
 윤우가 자기 맘대로 시형의 마음을 읽은 것이었다.
 
 “그건 그렇지. 뭐, 어쨌든 이야기나 좀 들어보자. 뭐가 그렇게 문제야? 솔직히 네 키가 갑자기 그렇게 클 때부터 문제가 생기겠구나, 싶긴 했지만.”
 윤우 역시 선수 출신이었기 때문에 시형의 갑작스러운 신체 성장을 불안한 눈으로 보았다.
 그의 생각대로 시형은 복귀한 이후 몇 달째 감을 잡지 못하고 있었다.
 “뭐가 그렇게 문제긴. 총체적으로 난국이지. 장점들이 다 사라진 느낌? 무결점이 아니라 무장점이 된 느낌이야. 물론, 시간을 들여서 훈련하면 어느 정도 회복하겠지만, 예전 수준으로 회복되진 않을 것 같아.”
 시형은 지금의 몸으로는 이전과 같은 플레이를 펼칠 수 없음을 직감하고 있었다.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애초에 신체 능력이 다른 사람이라면 모를까, 같은 사람이 179cm일 때 보여주던 움직임을 192cm에서 똑같이 재현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그게 시형이 불안해하는 이유였다.
 “음··· 하긴, 너는 원래 벌크업을 최소화하고 스피드로 승부 보던 스타일이었으니까. 그래서 네가 J리그로 간다고 했을 때 좋은 선택이라고 말해줬던 거고.”
 축구를 그만두긴 했지만, 시형은 어떤 결정을 내려야 할 때마다 가장 먼저 윤우에게 조언을 구했다.
 선수 시절 공격형 미드필더로 뛰었던 윤우는 대한민국 최고의 유망주들이 모인 상대고등학교에서도 최고의 축구 지능을 보유한 선수였다.
 시형은 축구 지능이 평범한 수준에 불과했기 때문에 윤우를 부러워한 적도 많았다.
 반대급부로 신체능력이 상당히 떨어졌기에 일찌감치 축구를 포기하고 다른 길을 찾았지만, 시형에게 적절한 조언을 해줄 능력은 충분했다.
 “솔직히 성장통이 오기 전에도 좀 버겁긴 했어. 내가 몸싸움을 싫어한다는 걸 알고 수비수들이 다들 미친 듯이 달라붙더라고. 물론, 성장통이 없었으면 지금쯤 극복했을 수도 있지만, 어쩌면 여전히 헤매고 있었을지도 몰라.”
 흔히 공격수 유망주에게는 J리그 진출이 독이 된다는 말들을 하곤 했다.
 이는 J리그의 일반적인 특징 때문이었다.
 J리그는 수비수들의 압박이 거의 없었다.
 경험이 많지 않은 공격수 유망주들이 일찌감치 J리그로 진출하면 한창 성장해야 할 시기에 압박에 대처하는 방법을 배울 수 없었다.
 시형 역시 마찬가지였다.
 보통의 아마추어 선수들처럼 시형도 우직하게 키워야 하는 피지컬보다 화려한 테크닉과 돌파에 집중했고, 첫 프로 무대로 J리그를 선택하면서 압박 대처 능력을 키우지도 못했다.
 프리미어리그 진출 이후 빈약한 압박 대처 능력에 조금씩 발목을 잡히는 느낌을 받기도 했다.
 “뭐, 이제 예전 이야기는 해봐야 의미도 없잖아. 중요한 건 네가 앞으로 어떤 선택을 해야 하는지, 어떻게 변해야 하는지, 뭐 그런 거지.”
 “내 말이 그 말이야. 이젠 거의 신인이나 다름없어. 뭘 하든 다시 처음부터 시작하는 거나 마찬가지잖아. 물론 쌓아온 실력이 있고, 경험이 있지만, 딱히 이제 막 올라오는 유소년들도 이 정도 실력은 있으니까.”
 시형은 아직도 고민을 끝내지 못했다.
 사실, 뭘 선택해도 리스크가 클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이전처럼 빠르고 민첩하게 움직이긴 어려울 텐데 스피드와 민첩함을 앞세웠던 이전의 플레이 스타일을 고수하기도 힘들었고, 그렇다고 프리미어리그에서 알아주는 유망주로 활약했던 포지션을 버리고 낯선 포지션으로 전향하기도 어려웠다.
 “차라리 황문호 감독님한테 조언을 구하는 건 어때? 그래도 올림픽 대표팀 에이스인데 감독님도 신경 많이 쓰고 계실걸?”
 축구 지능이 뛰어나다고는 하지만, 엄밀히 말해 윤우는 고등학교 2학년 때 축구를 그만둔, 프로 무대도 밟아본 적 없는 선수 출신 연예인에 불과했다.
 대한민국 역사상 최고의 수비수였고, 주장으로 대한민국의 월드컵 4강을 이끌었던 황문호 감독과 비교하면 태양 앞의 반딧불 수준이었다.
 “몰라. 내가 다른 사람들한테 살가운 성격도 아니고··· 괜히 어려울 때만 아쉬운 소리 하는 것 같아서 민망하기도 하고.”
 시형은 아직 사람들과 친분을 쌓고 살갑게 대하는 것이 어색했다.
 자신보다 축구에 대해 잘 알고 이미 최고의 자리에 올라가 본 황문호 감독을 알고 있다는 건 지금 상황에서 엄청난 메리트였는데, 그걸 활용할 생각을 하지 못하고 있었다.
 무엇보다 사춘기에 어렵게 생활한 탓인지, 남들에게 아쉬운 소리를 하지 못했다.
 “너 자존심 강한 거, 아쉬운 소리 못하는 거 나도 다 아는데, 이제 좀 접을 때도 된 것 같지 않냐? 그 대단한 자존심, 나한테만 접어주는 거 참 고맙고 감동적인데, 네가 높이 올라갈수록 내가 너한테 해줄 수 있는 게 없어져. 사실, 네가 뉴캐슬에 입단한 순간, 나는 더 이상 너한테 해줄 수 있는 게 없었다고.”
 축구를 포기할까 생각했을 정도로 집안이 어려워졌을 때, 시형이 포기하지 않도록 붙잡아 여기까지 올려놓은 것도 그 자존심이었지만, 더 높은 곳으로 올라가기 위해서는 자존심을 버리고 남들에게 조언과 도움을 요청할 수 있어야 했다.
 시형이 유일하게 자존심을 버리는 상대가 윤우였는데, 위에도 말했듯 윤우는 축구 지능이 뛰어난 선수 출신 연예인에 불과했다.
 이미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선수 중 한 명이 된 시형에게 해줄 수 있는 조언은 없다고 봐야 했다.
 “하, 성격 까칠한 친구를 둬서 네가 고생이 많다. 새끼.”
 “까칠해? 넌 너를 되게 좋게 보는구나. 너 정도면 거의 쓰레기지, 쓰레기. 푸하하하.”
 잘하는 것은 축구, 좋아하는 것은 비디오 게임과 영화와 술과 여자, 특기는 노래와 춤, 친구는 채윤우 한 명.
 가족과의 관계도 소원해진 지금 상황에서 시형에게 이런 이야기를 해줄 수 있는 사람은 윤우 밖에 없었다.
 “야, 쓰레기. 감독님 찾아가 볼 거지?”
 나란히 온 더 락 한 잔을 비운 뒤, 윤우가 물었다.
 시형은 여전히 고민하는 얼굴이었다.
 “아, 몰라. 나도 그게 좋은 건 안다고. 그래도··· 모르겠다.”
 선배들이 대부분인 국가대표팀은 물론이고, 또래들로 구성된 올림픽 대표팀에서도 동료 선수들과 그다지 친하지 않은 시형이었다.
 그런데 그들보다 몇 세대는 위인 코칭스태프들과 친할 리 없었다.
 “그래, 나도 모르겠다. 너 알아서 해라. 이제 너도 알아서 할 때 됐지. 형한테서 그만 독립해라.”
 “형은 개뿔.”
 “형이지, 짜샤. 빠른 년생 주제에 어디서 맞먹으려고 들어?”
 “다 맞먹었어, 너도 마찬가지고. 내가 또 축구계의 족보 브레이커 아니냐. 경재철도 나랑 같은 빠른이라 친구고, 구승용은 그냥 89라 나보다 동생이고, 경재철이랑 구승용은 친구고.”
 시형은 대한민국 만의 특징인 ‘빠른’이었고, 윤우는 아니었다.
 그리고 다른 친구들처럼 이들 역시 틈만 나면 이걸로 형이네, 친구네를 따지며 의미 없는 논쟁을 계속했다.
 “야, 내가 여자애들 불러줄 테니까 오늘만이라도 형이라고 불러봐. 완전 장난 아닌 애들로 부를게. 여배우인데, 우리랑 마찬가지로 노는 거 좋아하는 애들이라 부담 없이 그냥 놀면 돼.”
 시형과 윤우의 공통적인 취미는 클럽, 음악, 춤, 그리고 자연스럽게 따라오는 여성과의 만남이었다.
 질펀하고 방탕하게 노는 건 아니었지만, 아무래도 재력이 있다 보니 평범한 그 나잇대 청년들보다 조금은 노골적으로 노는 편이었다.
 두 사람 다 굳이 숨기지 않았기에 팬들도 어느 정도 눈치채고 있었지만, 생각보다 큰 반향은 없었다.
 안티 팬들이 이걸 가지고 트집 잡긴 했지만, 원래 그런 걸 신경 쓰는 성격들도 아니었다.
 “됐어. 지금은 좀 생각도 복잡하고, 괜히 건수 던져주기도 싫으니까 참으련다. 너 혼자 놀거나, 내가 다시 재기할 때까지만 좀 참아.”
 “와, 임시형이 여자를 거부해? 말도 안 돼! 내일은 해가 서쪽에서 뜨려나?”
 “닥쳐. 누가 보면 카사노바에 쓰레긴 줄 알겠다. 여자 불러서 논다고 질펀하게 노는 것도 아닌데. 오늘은 그냥 우리끼리 얘기나 하자고.”
 윤우가 실질적인 큰 도움이 될 시기는 이미 예전에 끝났지만, 절친한 친구와 술 한잔은 심적으로 큰 도움이 되었다.
 “그래. 그러자고. 뭐, 우리가 할 말이 남았는지는 모르겠지만.”
 윤우는 한 번 피식 웃더니 시형의 잔을 채워주었다.
 평소보다 조용한 술자리였지만, 평소만큼 기분 좋은 술자리였다.
 시형도 윤우 덕분에 어느 정도 생각을 정리할 수 있었다.
 
 
 # 007
 
 “이거 선물이야. 운동하는 건 좋은데, 너무 무리하지는 마. 시형이는 재능이 있으니까 너무 급하게 하지 않아도 금방 부활할 수 있을 거야. 아줌마 촉 좋은 거 알지?”
 술자리를 끝내고 오랜만에 윤우의 집에서 잠든 시형이었다.
 밤늦게 찾아온 아들 친구를 귀찮아하는 게 평범한 반응이었지만, 이미 가족이나 마찬가지였기 때문에 윤우의 부모님도 아들 대하듯 시형을 대해주었다.
 귀찮아하기는커녕 오랜만에 아들이 돌아온 것처럼 기뻐하며 아침부터 상다리가 부러지도록 식사를 준비해주기까지 했다.
 이렇게 따뜻하게 대해주니 예의에 어긋난다는 것을 알면서도 자꾸 윤우의 집을 찾는 것이었다.
 “이게 뭐예요? 이건 또 언제 준비하셨어요, 갑자기 온 건데.”
 갑자기 찾아와 하룻밤 신세를 진 상황인데, 선물까지 준비하신 것에는 시형도 놀랄 수밖에 없었다.
 윤우의 부모님이, 특히 어머님이 친아들처럼 자신을 대해준다는 건 이미 알고 있었다.
 하지만 언제 찾아뵌다고 말씀드리지도 않았는데 자신이 귀국했다는 소식만 듣고 미리 선물을 준비한 그 마음에 또 한 번 놀라고 감동한 것이었다.
 “별것 아니야. 그냥 네 키가 갑자기 컸잖아. 키가 갑자기 크면 관절이 약해지니까, 다치지 말라고 무릎 보호대 하나 샀어. 운동할 때 끼고 해. 그런다고 안 다치는 건 아니니까 너무 무리하지 말고.”
 윤우의 부모님이 대단하다고 느낄 때가 바로 이럴 때였다.
 윤우도 마찬가지였다.
 이 가족이 보여주는 모든 행동에서 자신과 자신의 가족에게는 없는 여유라는 게 느껴졌다.
 단순히 경제적인 여유를 말하는 건 아니었다.
 물론, 경제적인 여유가 받쳐주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겠지만, 어쨌든 그 덕분에 항상 다른 사람들을 배려해주고 부담스럽지 않은 선에서 무언가 베풀기를 좋아했다.
 “··· 감사합니다. 훈련할 때마다 꼭 빼놓지 않고 찰게요. 경기 나갈 때도 차고 뛸게요. 정말 감사합니다. 잘 쓸게요.”
 아버지의 사업이 망하기 전에는 시형의 가족도 비슷했다.
 나름 유복한 집안이었고, 아버지는 사람 좋은 호인이었으며, 어머니는 따뜻하고 교양있는 분이었다.
 경제적으로 무너진 순간, 당장 먹고 살기 바빠지면서 여유를 잃었지만, 원래는 두 분도 그런 분이었다.
 ‘아니지, 나 혼자 너무 삐뚤어진 거지.’
 솔직히 말하면 자신만 빠지면 여전히 화목한 가족이었다.
 어쩔 수 없이 함께하는 시간은 적어졌지만, 부모님은 가족을 위해 최선을 다했고, 나름대로 머리가 좋았던 누나는 고등학교 졸업과 동시에 취직해 부모님의 짐을 나누어 들었다.
 한 살 아래의 남동생은 배우를 꿈꾸다가 부모님의 지원 없이 연기를 공부하기 위해 현실과 타협했다.
 별로 좋아하지 않았던 아이돌 연습생으로 들어간 것이었다.
 ‘자식. 같은 배에서 난 형제인데 나랑은 어쩜 그리 다를까.’
 아이돌을 좋게 보지 않았지만, 이왕 시작한 것 누구보다 열심히 연습하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피곤한 몸을 이끌고 집에 돌아와 자신이 해야 했던 큰 오빠 역할은 물론, 누나와 함께 동생들의 부모 노릇까지 했다.
 시형만 빼면 시형의 가족도 똘똘 뭉쳐 어려운 상황을 극복해나가는, 그런 모범적인 가족이었다.
 “무슨 생각하는데 표정이 썩어 있냐?”
 윤우는 팬들이 보았다면 순식간에 환상이 깨질 모습으로 하품까지 해가면서 시형을 배웅했다.
 “아우, 앞으로 끝까지 가지는 말자. 현역 운동선수랑 붙으려니 도저히 상대가 안 되네, 이거.”
 오랜만에 끝까지 달려보자며 호기를 부렸던 윤우는 시형의 등에 업혀서 집에 와야 했다.
 자고 일어났음에도 아직 정신이 돌아오지 않은 듯했다.
 “또 가족 생각하냐? 아, 맨날 그렇게 찌질댈 거면 그냥 남자답게 딱! 가서 부모님께 사과드리라니까?”
 “몰라, 인마. 그렇게 간단한 게 아니라고. 10년 가까이 쌓인 건데 그렇게 쉽게 풀 수 있으면 세상에 불효자가 왜 있고, 부모님 돌아가실 때 후회하는 자식새끼들이 왜 있겠냐. 아, 진짜··· 모르겠고, 난 이만 간다. 어머니! 저 갈게요!”
 “그래. 잘 가고, 힘내고! 출국하기 전에 한 번 와서 밥 먹고 가. 알겠지? 꼭 한 번 들렀다 가? 응?”
 “네. 나가기 전에 한 번 들릴게요. 그럼 들어가서 쉬세요.”
 윤우와 만나 술자리를 가지면서 어느 정도 안정을 찾긴 했지만, 아직 결론이 난 것은 아니었다.
 시즌이 시작될 때까지 아직 시간은 남아 있었지만, 빨리 결정할수록 계획을 세울 때 수월할 것이었다.
 “야! 황문호 감독님께 꼭 한 번 여쭤봐! 너 혼자 고민하는 것보다야 낫겠지!”
 ‘그래··· 민망하긴 하지만, 한 번 찾아뵐까. 선수가 감독 찾아가서 조언 구하는 건 당연한 거니까···.’
 이번에도 윤우는 시형의 도화선에 불을 붙여주었다.
 황문호 감독과의 면담을 통해 시형의 고민이 해결될 수도 있고, 어쩌면 해결되지 않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윤우 덕분에 시형이 조금씩 변화하고 있다는 것은 확실했다.
 그리고 그 변화의 방향은 꽤 바람직했다.
 
 ***
 
 “내 생각을 물어보는 거라면, 내가 좋을 대로 선택하라는 거라면 나는 윙어를 선택하고 싶은데?”
 황문호 올림픽 대표팀 감독에게 연락해 면담을 요청한 시형은 바로 그 날 저녁에 황문호 감독을 마주할 수 있었다.
 윤우의 말대로 황문호 감독은 시형의 면담 요청을 흔쾌히 허락해주었다.
 황문호는 그동안 자신에게 전혀 의지하지 않았던 시형의 연락이 기쁘다고까지 말하며 집중해서 시형의 말을 들어주었다.
 “역시 그런가요. 확실히 인제 와서 포지션을 바꾸는 건 문제가 좀 있겠죠.”
 “아니, 그게 아니고 지금 올림픽 대표팀에 윙어 자원이 부족하거든. 최전방이야 준열이를 와일드카드로 뽑으면 되고, 중앙 미드필더는 우리 대표팀의 가장 강력한 무기니까. 풀백이 불안하긴 하지만, 너한테 풀백으로 뛰라고 할 순 없지.”
 황문호의 말에 시형은 어이가 없다는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역시 괜히 온 건가. 혼자 해결할걸.’
 자신의 축구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분수령이 될지도 모르는 선택을 자신의 상황이 아닌 대표팀의 상황에 맞추려는 황문호의 말에 실망할 수밖에 없었다.
 “아아, 너무 그렇게 대놓고 실망했다는 표정은 짓지 마. 이건 그냥 해본 말이니까. 말이 그렇다는 거지, 말이. 농담도 못 하겠네.”
 이 기회에 시형과 좀 친해져 보겠다고, 무거운 분위기를 조금이나마 환기시켜보겠다고 농담을 던졌던 황문호는 실망했음이 드러나는 시형의 표정을 보고 깜짝 놀라 손사래까지 쳐가며 변명할 수밖에 없었다.
 “도대체 감독의 권위는 어디 있는 거냐? 네가 마이페이스에 감정에 솔직한 놈이라는 건 알지만, 그래도 감독인데 그렇게 대놓고 실망했다는 표정을 지으면 내가 민망하잖아. 안 그래?”
 “아, 죄송합니다. 제가 원래 이런 걸 잘 못 숨겨서요.”
 사실 굳이 감정까지 속여가면서 남의 비위를 맞춰줄 필요성을 못 느낄 뿐이었지만, 상대방이 기분 나쁠 수 있다는 건 이해했기에 우선 사과했다.
 남들보다 조금 솔직하고 직설적일 뿐, 인성이 쓰레기는 아니었다.
 “상관없어. 그럴 수도 있지. 너한테 악의가 없다는 건 나도 아니까. 그래도 나중에 좀 친해지면 농담도 좀 받아주고 해라. 하하.”
 다행히 황문호 감독도 40대의 젊은 감독이었기 때문에 표정 가지고 트집을 잡지 않았다.
 오히려 자신의 농담을 받아주지 않아 삐친 듯한 모습으로 시형에게서 실소를 끌어냈다.
 “그러니까 결국 나한테 묻고 싶은 건 너한테 윙어로 가능성이 있는지, 윙어로 남는 것과 포지션을 전향하는 것 중 뭐가 좋은지, 이 두 가지인 거지?”
 “예. 감독님은 올림픽 대표 선수들이 나온 경기는 대부분 챙겨보신다고 하셨죠? 감독님이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듣고 싶습니다.”
 시형을 비롯해 구승용과 경재철, 장윤철 등 A대표팀에서도 활약하는 선수들이 다수 포진한 이번 올림픽 대표팀은 대한민국 올림픽 축구 역사상 최초의 메달에 가장 가까운 팀이라 평가받았다.
 이런 팀을 이끄는 황문호 감독은 그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 선수들의 경기를 최대한 챙겨보며 전술을 준비하고 있었다.
 “음··· 굳이 길게 말할 필요는 없겠지? 결론부터 듣고 싶어 하는 것 같은데, 어디까지나 내 생각이니까 흘려 들어. 내 생각에 네가 윙어로 남는다면··· 지금 잘 회복한다고 해도 첫 시즌의 성적 정도가 한계이지 않을까? 한 시즌에 공격 포인트 열 개 정도?”
 시형은 반박하지 못했다, 아니, 반박할 수 없었다.
 아직 성장한 몸에 맞춰서 밸런스를 조정하지 못한 상황이지만, 그래도 대략적으로 예상할 수는 있었다.
 프로 선수 중에 어리고 경험이 적은 것이지, 시형 역시 10년 넘게 운동을 해온 사람이었다.
 대략 지금 상태에서 신체 밸런스를 잡으면 어느 정도가 되겠다, 하는 예상 정도는 할 수 있었다.
 “한 시즌 공격 포인트 열 개라··· 나쁘지는 않네요.”
 “나쁘지 않지. 그리고 나쁘지 않은 선수들은 많고. 뭐, 너는 인기가 많아서 관심과 스폰서가 필요한 하위권 팀들에게 매력적인 카드겠지만, 잉글랜드 출신 유망주가 등장하거나 좀 더 좋은 선수가 등장하면 바로 밀려나겠지. 그래도 어떻게든 프리미어리그에서 버틸 수는 있을 테니, 굳이 포지션을 변경할 필요는 없겠네.”
 그렇긴 했다.
 한 시즌 공격 포인트 열 개 정도를 올려주는 윙어가 적은 건 아니지만, 그렇다고 많은 것도 아니었다.
 게다가 논란은 많아도 대한민국 축구계 화제의 중심이었고, 일본에서도 인기가 상당한 선수였다.
 데리고만 있어도 경제적인 이익이 발생했기 때문에 항상 수익에 목마른 중하위권 팀 입장에서는 매력적인 카드였다.
 “그런데 그 정도에 만족할 수 있겠어? 아직 너를 잘 모르지만, 그런 나도 네 자존심이랑 욕심이 엄청나다는 걸 아는데? 첫 시즌 성적이 전성기 성적이라는 걸 네가 받아들일 거라 상상하기는 힘드네.”
 시형은 분명 기량에 대한 프라이드가 강한 편이었다.
 외모가 잘생기긴 했지만, 가난한 형편에 외모는 쓸 데가 없었다.
 그 상황에서 시형이 가진 것이라고는 실력밖에 없었다.
 월드 클래스에 대한 욕심은 없지만, 데뷔 시즌 성적이 전성기 성적이라는 걸 받아들일 순 없었다.
 “열 개라··· 열 개···.”
 “혹시 그 자존심이 포지션에도 적용되나? 네 스타일은 드리블과 슈팅, 스피드여야 하는 거야?”
 성공적으로 자리 잡은 선수 중 유별나게 자존심이 강한 선수들은 자신의 플레이에 간섭하는 걸 병적으로 싫어하곤 했다.
 시형도 자존심이 센 선수였기 때문에 조언을 해주는 황문호 감독도 조심하고 있었다.
 “아뇨. 그건 상관없습니다. 제가 뛰어난 선수이기만 하면 됩니다. 그럼 제 자존심은 지켜지는 거죠.”
 시형이 축구를 하는 이유는 두 가지가 있었다.
 자신이 가장 잘하는 것으로 특별함을 어필하기 위해서, 그리고 돈을 벌기 위해서.
 특별함을 증명해 돈을 벌 수만 있다면 포지션과 플레이 스타일은 전혀 상관이 없었다.
 “뭐, 따로 축구철학은 없다는 건가. 아니지, 그게 철학인 건가? 좋은 건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지금 상황에서는 다행이네.”
 “예. 포지션도, 스타일도 상관없어요. 제가 가지고 있는 재능에 어울리는 포지션에서 성공만 할 수 있으면 됩니다.”
 황문호는 한동안 시형을 빤히 쳐다보았다.
 그도 고민할 수밖에 없었다.
 처음 축구를 시작하는 사람에게 포지션을 추천해주는 것과 이미 경력만 10년이 넘은 데다가 세계 최고의 리그에서 활약하는 선수에게 포지션 전향을 추천하는 것은 그 무게감의 차이가 확연했다.
 굳이 포지션을 전향하지 않아도 뛰어난 선수로 남을 선수에게 포지션 전향을 추천한다는 건 그에게도 굉장한 부담이었다.
 “하아, 나도 모르겠다. 나는 어디까지나 추천만 하는 거니까 결정은 네가 해. 내가 네 감독이고 유명한 선수 출신이라는 이유로 무조건 따르지 말고. 나도 부담스럽고, 조심스러우니까.”
 “예. 참고만 할 테니까 부담 갖지 마시고 알려주세요.”
 길게 한숨을 내쉰 황문호가 입을 열었다.
 “내가 볼 때, 약점을 극복할 수만 있다면 최전방 스트라이커로 뛸 때 가장 높이 올라갈 수 있을 것 같다. 192cm의 타겟형 스트라이커는 어느 감독이든 사랑할 수밖에 없는 위력적인 무기니까.”
 황문호의 추천은 타겟형 스트라이커 전향이었다.
 192cm의 키를 살려 제공권을 장악하라는 것이었다.
 시형은 더 자세하게 말해달라는 듯 자세를 고쳐 앉으며 황문호를 바라보았다.
 
 
 # 008
 
 “일단 들어봐. 내가 생각하는 네 장점은 이거야. 넌 기본기가 좋고, 킥력이 좋지. 스피드나 드리블, 유연성은 키가 크면서 떨어졌지만, 아무리 그래도 타겟형 스트라이커 중에서는 수위권에 꼽히는 수준이겠지. 제공권이 뛰어나면서도 발밑 기술과 돌파력도 나쁘지 않은 타겟맨이 될 수 있다는 거야.”
 스피드, 유연성, 민첩성, 드리블 능력 등이 모두 무뎌지긴 했지만, 어디까지나 한창 좋을 때와 비교했을 때 무뎌졌다는 것이었다.
 192cm의 거구들과 비교하면 여전히 나쁘지 않은 수준이었다.
 황문호 감독의 말은 장신의 장점을 살리면서 원래 가지고 있던 장점까지도 살리라는 뜻이었다.
 성공적으로 적응할 수만 있다면 즐라탄 이브라히모비치나 크리스티안 비에리, 루드 반 니스텔루이 같은 괴물이 되지는 못해도 수준급의 타겟형 스트라이커로 인정받을 수 있을 것이었다.
 “그리고 너도 알지? 넌 이상하게 눈이 좋아. 계산하는 건지, 감이 좋은 건지는 모르겠지만, 골키퍼나 수비수한테 막힌 볼이 어디로 튀어나올지를 알고 있는 것 같달까? 그런 능력은 스트라이커한테 굉장히 중요한 능력이지. 그것만 갈고 닦아도 세계 최고가 될 수 있다고. 인자기처럼. 테크닉이 형편없었던 내가 이런 말 하긴 뭐하지만, 인자기도 테크닉이 뛰어난 선수는 아니니까.”
 시즌 막판, 파듀 감독의 결정에 따라 스트라이커로 출전하던 시형이 믿었던 게 바로 이 위치 선정 능력이었다.
 감이 좋은 편이었고, 눈도 좋았기 때문에 한 번 상대에게 끊긴 볼이 어느 방향으로 튀어 나갈지 예측하는 능력이 뛰어난 편이었다.
 비록 그라운드 위에서는 이 능력에만 의존해 형편없는 모습을 보여주었지만, 피지컬이 받쳐준다면 이만큼 효과적인 장점도 없었다.
 이 능력을 극한까지 갈고닦으면 쓰나미도 피해가는 ‘위치선정의 신’, 어느 샌가 아무도 모르게 나타나 골만 넣고 사라진다고 해서 ‘주워먹기의 신’, ‘닌자기’라 불리는 AC밀란의 레전드 스트라이커, “축구를 할 줄 모르는데 항상 올바른 위치에 서 있는, 골만 잘 넣는” 필리포 인자기가 되는 것이었다.
 “너한테 이야기했던 것 같은데, 넌 생각보다 연계가 좋지 않아. J리그에서 프로생활을 시작해서 그런지, 압박에 대처하는 능력도 떨어지는 편이지. 축구 지능이 막 그렇게 뛰어난 것도 아니고.”
 “그렇죠. 저도 알고 있는 부분이고요. 그런데 그건 타고나는 건가 봐요. 노력을 해도 좋아진다는 느낌이 안 드니까.”
 시형과 플레이가 가장 비슷한 선수를 꼽으라면 이번 시즌 분데스리가에서 34경기 15골을 터뜨리며 바이어 레버쿠젠으로 이적한 안드레 쉬얼레를 꼽을 수 있었다.
 오른발을 쓰는 왼쪽 윙포워드로 빠른 발과 준수한 드리블을 갖추고 있었고, 어시스트보다는 득점력이 뛰어나다는 공통점이 있었다.
 드리블과 돌파력은 시형이 조금 더 나았고, 침투 능력과 득점력, 활동량, 피지컬은 쉬얼레가 더 뛰어났지만, 어쨌든 역습 위주의 선수라는 점에서 상당히 비슷했다.
 즉, 시형도 연계 플레이와 축구 지능, 판단력이 그리 좋지는 않았다.
 “상대의 빈틈을 노려 움직일 수 없다면, 정면으로 붙어서 박살 내는 수밖에 없어. 다행히 이번에 키가 크면서 기본 조건은 갖춰졌으니까, 몸을 만들어서 파워를 키워. 너 정도 키에 파워만 키우면 굳이 빈틈을 노리지 않아도 네 힘으로 직접 틈을 만들 수 있어. 감독들이 파워가 뛰어난 타겟형 스트라이커를 좋아하는 이유이기도 하고.”
 시형은 황문호의 말을 귀담아들었다.
 사실, 시형도 어렴풋이 알고 있었다.
 지금 상황에서 자신이 가장 높은 곳까지 올라갈 수 있는 포지션은 최전방 스트라이커 포지션이라는 것을.
 192cm의 신장은 골키퍼, 센터백, 수비형 미드필더, 최전방 스트라이커에게 어울렸다.
 하지만 지금까지 공격수로 활약해온 시형에게 센터백은 어울리지 않았고, 수비형 미드필더는 시형의 활동량과 체력으로는 어림도 없었다.
 골키퍼는 애초에 필드 플레이어도 아니었다.
 윙어로 남을 것이 아니라면, 최전방 스트라이커밖에 답이 없었다.
 “아마··· 쉽지는 않을 거야. 네 체형이 원래 마른 편이기도 하고, 근육이 잘 붙는 편도 아니니까. 그래도 어쩔 수 없어. 예전에 천봉균 감독님께서 그러셨던 것처럼 한 끼에 스테이크 다섯 장씩 씹어서라도 몸을 키워. 그러면 적어도 프리미어리그에서 밀릴 일은 없을 테니.”
 “··· 어디 UFO 온다는 얘기 없습니까? 차라리 UFO에 가서 신체를 개조해달라고 하는 편이 빠르겠네요. 거의 인체 개조를 해야 한다는 이야긴데···.”
 대충 눈치를 채고 있었음에도 스트라이커 전향을 망설였던 이유가 바로 이것이었다.
 기본적으로 192cm의 키를 살리려면 파워도 그에 맞춰 키워놓아야 했다.
 안 그래도 근육이 잘 붙지 않는 몸인데, 몸을 키울 수밖에 없다는 뜻이었다.
 웨이트를 싫어하는 시형에게는 반갑지 않은 이야기였다.
 “하하, 너도 농담할 줄 아는 놈이구나? 네가 농담하는 건 처음 보는 것 같은데?”
 황문호 감독의 농담에도 시형은 웃을 수 없었다.
 예상은 했지만, 대한민국 축구계의 레전드인 황문호 감독에게 직접 확인사살까지 당하고 나니 눈앞이 캄캄해졌다.
 “말은 이렇게 했지만, 절대 쉬운 일이 아니야. 어설프게 했다가는 장점도 잃고 단점도 보완하지 못하는 어정쩡한 선수가 될 수도 있어. 어정쩡한 스트라이커는 어정쩡한 윙어보다 못하다는 거, 알지? 선택 잘해. 그냥 윙어로 남아도 프리미어리그에서 버틸 수는 있을 거야.”
 고민을 이해한다는 듯 황문호는 시형의 어깨를 두드려주었다.
 이미 대한민국 A대표팀 세대교체의 핵심으로 인정받으면서 프리미어리그까지 진출, 최고의 무대에서 뛰던 선수가 인제 와서 포지션을 변경한다는 건 절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최전방 스트라이커에게, 아니 어떤 선수에게든 가장 중요한 게 뭔지 알아? 우선 기량이지. 이건 기본이야. 그런데 한두 가지 전술에 특화되면 안 되는 것도 중요해. ‘이 전술이 아니면 못 써먹는 선수’는 어떤 감독도 좋아하지 않아. 전술이 읽혀버릴 수밖에 없거든.”
 원래 장점이었던 스피드나 민첩성 등을 지키려다가 애매한 선수가 될 수도 있었다.
 타겟형 스트라이커는 어떤 전술에서도 써먹을 수 있었다.
 하지만 키도 적당하고, 발재간도 적당하고, 스피드도 적당한, 딱히 장점도 없지만, 딱히 단점도 없는 무난한 선수는 오히려 활용하기 힘들었다.
 “쉽게 예를 들어 설명하자면··· 신체 조건과 기량 모두 뛰어난 스트라이커지만, 투톱이 아니면 안 되는 발로텔리, 우리나라에서는 석우 정도가 있겠네. 이 친구들을 써먹으려면 투톱이 강제되거든. 혼자서는 최전방에서의 치열한 경합을 버티지 못하니까.”
 두 선수의 특징은 신체 조건이 비슷한 다른 원톱들에 비해서 최전방에서 버텨주는 능력이 떨어진다는 것이었다.
 신체 조건은 원톱인데, 플레이 성향은 세컨톱이라서 이들을 제대로 활용하려면 어쩔 수 없이 투톱을 선택해야 했다.
 “최근 세계 축구의 추세는 무조건 원톱이야. 투톱은 거의 쓰는 팀이 없지. 열다섯 살에 데뷔했고, 골든보이 상까지 받은 발로텔리가 이번 시즌 왜 백업으로 뛰었는지, 올해 20골 가까이 넣은 석우가 아시안컵에서는 왜 백업일 수밖에 없었는지를 잊지 마.”
 황문호는 시형이 지금 자신의 장점들을 포기하지 못하고 포지션 전향에 나섰다가 이도 저도 아닌 선수가 될까 걱정했다.
 그래서 훌륭한 피지컬, 괜찮은 개인 기량을 가지고도 활용법이 어려워 계륵 취급받는 선수들을 계속 언급했다.
 “특히 전통적으로 대한민국의 원톱은 뛰어난 피지컬을 가진 타겟형 스트라이커였어. 아마 앞으로도 한동안은 바뀌지 않을 거고. 잘 생각해. 애매하게 다재다능한 선수가 되려다가 무색무취한 선수가 될지도 모르니까.”
 완성형 스트라이커, 무결점 스트라이커.
 말은 좋지만, 아무나 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아무나 할 수 있었으면 리오넬 메시는 절대로 최고의 선수가 되지 못했을 것이었다.
 제공권에 큰 약점을 가진 선수지만, 리오넬 메시는 축구 역사에 남을 최고의 선수라 평가받고 있었다.
 다재다능보다 알고도 못 막는 확실한 무기가 더 중요한 시대였다.
 “개인적으로는 포지션을 바꾸면 좋겠지만, 굳이 바꾸지 않아도 상관없다고 생각해. 선택은 네 몫이야.”
 “예. 알겠습니다. 어쨌든 조언해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결국, 결론을 내리는 것은 시형의 몫이 되었다.
 하지만 황문호 감독의 조언은 분명 큰 도움이 되었다.
 알고 있던 이야기지만, 조금 더 세세하게 생각해볼 수 있었고, 남의 입을 통해 듣게 되면서 확신도 얻을 수 있었다.
 이제 시형의 선택만이 남았다.
 시형의 남은 축구인생에 엄청난 영향을 미칠, 중요한 선택이었다.
 충분히 고민할 필요가 있었다.
 “자, 일단 좀 먹자. 말하면서 먹어도 되겠지, 싶었는데, 네가 너무 어려운 질문을 들고 와서 밥도 제대로 못 먹었네.”
 “아, 죄송합니다. 식사하시죠. 저도 배고프네요, 하하.”
 대충 이야기를 끝낸 뒤에야 마음 편히 식사를 할 수 있었다.
 그렇게 가깝다고 할 수는 없었던 두 사람이지만, 한 사람의 커리어를 좌우할 중요한 대화를 나누다 보니 어느새 조금 가까워진 느낌이었다.
 
 ***
 
 [집에 안 들리고 바로 나갈 거야?]
 “응. 며칠 전에 집에 들렀잖아. 뭘 또 가.”
 며칠 뒤, 시형은 인천 국제공항으로 이동, 잉글랜드 출국을 준비했다.
 휴가는 7월 중순까지였지만, 빨리 잉글랜드로 돌아가 다시 몸을 만들기 위해서였다.
 무너진 신체 밸런스를 바로잡는 것이 무엇보다 시급했다.
 [며칠 전에 들러서 밥만 먹고 갔잖아. 와서 며칠 자고 애들이랑도 좀 놀아주고 해야지. 오죽하면 애들이 너만 오면 긴장하잖아. 친동생들이 친오빠, 친형이 왔는데 긴장하는 게 말이 돼?]
 윤우의 집에서는 하룻밤을 보냈던 시형이지만, 본인의 집에는 오후에 잠시 들러 저녁만 먹고 호텔로 돌아갔다.
 부모님과의 어색함, 동생들과의 어색함을 참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누나랑 시윤이 봤으면 됐지, 뭐. 언제부터 내가 가족들이랑 친했다고. 됐어, 그 정도면.”
 시형이 속에 있는 마음까지 털어놓을 수 있는 가족은 네 살 위인 누나, 아진과 한 살 아래인 동생 시윤밖에 없었다.
 오로지 두 명.
 어린 동생들은 물론이고 부모님과도 관계가 소원해진 상황이었다.
 [언제까지 자꾸 애처럼 그럴 거야? 이제 너도 성공했고, 나도 취직해서 돈도 벌고, 시윤이도 이제 곧 데뷔하면 자리 잡을 텐데, 언제까지 그럴래? 이제 집안 사정도 많이 좋아졌어, 네 덕에. 그런데 정작 네가 바깥으로 나돌면 어떡해? 부모님도 많이 미안해하셔.]
 바닥을 찍기 직전까지 떨어져 바닥만은 찍지 않으려 아등바등했던 시형의 집안이었다.
 집안이 망한 뒤, 아버지는 시간이 되는 대로 학원, 유치원 등의 통학 버스를 운영하며 닥치는 대로 일했고, 곱게 자라 집안일도 제대로 해본 적 없던 어머니도 전공을 살려 중소 출판사나 언론사를 전전하며 일을 해야만 했다.
 그나마 버틸 만해진 것은 대학 진학을 포기하고 취업한 아진 덕분이었고, 아쉬운 대로 그냥저냥 살 수 있게 된 것은 시형이 J리그로 진출하면서 받은 금액의 절반을 비롯해 주급의 일부를 송금해주면서부터였다..
 “부모님도 나한테 미안해하고, 나도 부모님한테 미안해하지. 그래서 우리 사이가 멀어진 거야. 쉽게 좋아질 관계가 아니라고.”
 집안이 망했을 때, 누나인 아진은 열여덟 살로 사실상 철이 든 상황이었고, 시형은 열네 살, 빠른 생일이니 중학교 2학년으로 한창 질풍노도의 사춘기를 겪을 때였다.
 시윤은 열세 살로 아직 사춘기를 맞이하기 전이었다.
 아진은 집안의 장녀로서 바빠진 부모님을 대신해 엄마 노릇을 하게 되었고, 시형은 엇나가면서 밖에 있는 시간이 많아졌다.
 [쉽게 좋아질 관계가 아니니까 더더욱 노력해야지. 너도 부모님께 죄송하다며. 그러면 어떻게든 네가 먼저 다가가서 풀어야 하는 거 아니야? 부모님이 먼저 다가와 주시길 바라는 거야?]
 시형은 시형 나름대로 부모님께 섭섭한 부분이 많았다.
 그때, 철이 없었던 시형은 책임지지도 못할 거면서 왜 이렇게 자식들을 많이 낳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특히, 운동을 했기 때문에 주변 친구들이 몸에 좋다는 귀한 것들을 구해 먹는 동안, 자신은 보양식은커녕 제대로 끼니를 챙겨 먹는 것조차 힘들다는 사실을 견딜 수가 없었다.
 그런 불만들이 쌓이고, 집에 들어가는 것이 싫어지면서, 혼자서 밤 열 시까지 학교 운동장에 남아 훈련하고 집에서는 잠만 잔 뒤, 새벽에 다시 훈련하러 나가는 일상이 반복되었다.
 부모님도 집에 거의 안 계시는 데다가 시형까지 이렇게 생활하니 사이가 벌어지는 것이 당연했다.
 “글쎄. 그냥 지금은 아무 생각도 없어. 부모님께 죄송하지만, 아직은 웃으면서 다가갈 자신이 없고, 당장 내 앞길이 어떻게 될지 고민하느라 정신도 없어. 누나도 알잖아. 지금 내가 얼마나 힘든지.”
 사실, 가족 간의 갈등을 해결한다는 건 엄청난 심력의 소모를 유발했다.
 그런데 지금 시형은 커리어를 제 자리로 돌려놓아야 했기에 다른 곳에 신경 쓸 상황이 되지 못했다.
 
 
 # 009
 
 [뭐, 그건 알지만··· 차라리 네가 나쁜 놈이면 너라도 잘되라고 할 텐데, 넌 안 그런 척하면서 은근히 여리잖아. 괜히 센 척하다가 너까지 무너진다니까? 차라리 눈 딱 감고 대화로 풀면 좋을 텐데···]
 사춘기에 첫 단추를 잘못 끼웠을 뿐, 시형도 아진, 시윤과 같은 배에서 나온 형제였다.
 망하기 전에는 아진이나 시윤처럼 바르고 착한 아이였다.
 이는 방황하던 사춘기에도 행동의 바닥에 깔렸었고, 어린 동생들이 조금 더 먹고 싶다고 떼쓰는 게 안타까워 일주일에 세 번 이상 축구부 식당에서 혼자 밥을 해먹었을 정도였다.
 그런 동생이 가족과 계속 거리를 두는 모습에 아진은 이러다 시형이 무너질까 걱정을 숨기지 못했다.
 “이제 나 그 정도에 안 무너져. 나도 이제 스물둘이고, 타지 생활만 5년 째야. 충분히 버틸 수 있으니까, 누나 걱정부터 해. 공부는 잘하고 있어?”
 [공부? 아니, 이제 해야지. 근데 아직은 시간이 없네.]
 시형이 축구를 하는 목적은 두 가지가 있었다.
 한 가지는 자신의 가치와 능력을 증명하는 것이고, 다른 한 가지는 돈이었다.
 사춘기 시절, 돈 때문에 힘든 시기를 겪었던 시형에게 돈은 굉장히 중요한 삶의 가치였다.
 동경하는 화려한 삶을 영위하기 위해서이기도 했지만, 집안을 일으키기 위해서이기도 했다.
 특히, 대학 진학을 포기한 아진에게 다시 공부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주는 것과 배우를 꿈꾸는 시윤을 지원해주는 것이 가장 큰 목표였다.
 집안 사정을 배려해 각자 포기한 것들이 많았는데, 그나마 능력이 있는 자신이 그 포기한 것들을 돌려주고 싶었다.
 “시간이 없기는. 또 매일 시간 외 수당 챙긴다고 야근하지? 하아, 내가 미안하네. 빨리 성공해야 하는데. 미안. 빨리 재기해서 재계약할게.”
 [아니, 됐어. 지금 보내주는 돈도 많아. 너를 위해서 쓰라니까? 자꾸 보내주지 마.]
 “그만큼 안 보내주면 다 엄마 드릴 거잖아. 그 정도는 보내야 누나랑 시윤이랑 나눠서 쓰지. 시윤이 용돈도 좀 많이 챙겨주고, 누나도 따로 좀 써. 다 엄마 드리지 말고. 애들 용돈도 너무 많이 주지 말고. 우리 어릴 때는 학원도 못 다녔는데, 애들은 학원도 다니잖아. 그 정도면 됐지.”
 시형은 12만 파운드(약 2억2천만 원)의 계약금과 11,000파운드(약 2,000만 원)의 주급으로 2012년까지 계약되어 있었다.
 프리미어리그 계약치고는 큰 규모도 아니었고, 그나마도 1년밖에 남아있지 않았다.
 50%가 넘는 세금 때문에 집에 큰돈을 보내주지도 못한 상황이었다.
 [그래, 알았어. 나랑 시윤이도 부족함 없이 쓰고 있어. 걱정하지 마.]
 “거짓말하네. 또 엄마한테 다 드렸지? 따로 좀 쓰라니까? 자꾸 엄마한테 다 드리면 돈 안 보내줄 거야. 누나랑 시윤이 여유 있게 쓰라고 많이 보내는 거지, 엄마 다 드리라고 많이 주는 거 아니야. 다음번에 가서 엄마한테 여쭤볼 거야. 얼마나 받으셨냐고.”
 가족의 빚을 갚는 것도 물론 중요했다.
 하지만 그것도 아진과 시윤의 행복을 위해서였다.
 부모님과 다른 동생들도 당연히 중요하지만, 나이가 비슷해 어려운 시기를 함께 의지하며 보냈던 또래 형제들이 더 중요했다.
 시형에게는 그랬다.
 [알았어, 알았어. 무슨 엄마보다 잔소리가 더하네. 나랑 시윤이도 알아서 쓸 테니까 잔소리 좀 그만해.]
 말은 이렇게 해도 아마 시형이 준 돈 대부분은 가족들을 위해 쓰일 것이었다.
 두 사람이 제대로 돈을 쓰게 하려면 최소한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배진수와 비슷한 규모의 계약을 따내야 할 것이었다.
 “그래. 내가 지금 비행기 시간이 얼마 안 남아서 또 한 번 속아준다. 좀 맛있는 것도 사 먹고, 예쁜 옷도 사 입고 그래. 시윤이는 연예인 해야 하니까 더더욱 그래야 하고.”
 [알았다니까. 우리가 알아서 할게. 너부터 잘해. 지금 중요한 시기라고 했지? 가서 운동 열심히 하고, 그렇다고 다치지는 말고. 조심조심, 열심히. 알지?]
 “알았어. 그러면 또 올 테니까 누나도 일 적당히 하고 건강 챙겨. 나간다?”
 어차피 또 한 번 속아줄 수밖에 없었다.
 잉글랜드행 비행기의 탑승 절차를 밟으면서 시형은 다시 한 번 꼭 재기하겠다고, 자신의 커리어를 본 궤도로 돌려놓겠다고 다짐했다.
 
 ***
 
 “휴가는 잘 다녀오셨습니까? 휴가라고 하기에도 뭐하지만.”
 잉글랜드로 돌아온 시형은 시차 적응과 휴식을 위해 며칠 정도 휴식을 가진 뒤, 에이전트를 만났다.
 한 달 이상 휴가를 보내는 다른 선수들과 달리 시형은 A매치 종료 후 일주일도 되지 않아 복귀했다.
 “뭐, 대충 잘 다녀왔습니다. 오랜만에 친구도 만나고.”
 “조금 더 만나서 놀다 오시지 그러셨습니까···.”
 대충 고객들, 그러니까 선수들의 세일즈 포인트 정리는 끝났지만, 아직 이적시장은 열리지 않았고, 선수들도 모두 휴가를 떠난 지금이 그나마, 정말 그나마 에이전트가 쉴 수 있는 기간이었지만, 시형의 에이전트는 쉴 수 없었다.
 “그건 뭡니까? 계속 드시는 거?”
 에이전트와 만난 지 20분도 채 되지 않았지만, 시형은 벌써 물통에 가득 채워온 무언가를 거의 다 마셔가고 있었다.
 뭔지는 모르겠지만, 목이 말라서 마신다고 보기에는 지나칠 정도였고, 만약 목이 말라서 마시는 거라면 몸에 문제가 생긴 것이 아닌지 걱정해야 할 정도였다.
 “단백질 쉐이크, 게이너요. 체중 늘려야죠. 192cm에 76kg은 너무하지 않습니까? 이것도 그나마 3kg이나 찌운 겁니다. 다시 운동해서 몸 만들고 나면 기껏해야 74-5kg 정도 되겠죠. 에휴, 시즌 시작 전에 80kg은 만들어야 할 텐데.”
 191cm에서 성장통이 끝난 뒤, 4개월이 지난 지금은 192.4cm가 되었다.
 대략 상황을 보니 193cm가 조금 안 되는 정도에서 성장이 멈출 것 같았다.
 어디서 뛰든 최소한의 균형감각과 무게중심을 갖추려면 80kg 정도는 넘어줘야 했다.
 물론, 체중을 늘리기 위해 식사량을 늘리는 게 기본이었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한 감이 있었기에 보충제까지 마시는 중이었다.
 “어우, 원래 식사량이 많은 편은 아닌데, 거기에 보충제까지 마시려니 아주 죽겠네요. 먹는 것도 고문입니다, 아주.”
 운동선수들은 대체적으로 대식가가 많았지만, 시형은 일반인들보다는 당연히 잘 먹지만, 선수 중에는 소식가에 속했다.
 그런 시형이 체중을 늘리겠다고 하루 다섯 끼에 체중 증량을 위한 보충제, 게이너까지 마셔대고 있으니 식사가 고문이 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어후, 보고 있는 저도 괴롭네요.”
 에이전트도 시형의 평소 식습관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얼마나 괴로울지 대충 눈치챈 모양이었다.
 그런 에이전트를 향해 쓴웃음을 지어 보인 시형은 다시 물통을 입에 가져갔다.
 찌푸려지는 표정은 덤이었다.
 “그건 그렇고, 어쩐 일로 부르셨습니까? 아직 이적시장이 열리려면 열흘 정도 남았는데요.”
 남들 다 쉬고 있는 휴가 기간이지만, 시형은 쉴 수가 없었다.
 급격히 늘린 식사량과 게이너를 통해 흡수한 영양소를 적당히 소비해 몸을 만들어야 했다.
 최소한으로 맞춰놓은 벌크까지 다 빠져버렸기 때문에 다시 벌크업 할 필요가 있었다.
 “일단, 포지션 전향하신다면서요? 결정하셨습니까?”
 에이전트도 영업하기 위해서는 시형의 상황을 모두 알아야만 했다.
 선수의 포지션과 기량, 장점과 단점, 기타 개인적인 성향부터 성격, 가족관계까지 모든 것들이 에이전트의 무기였다.
 그렇기에 폭풍 성장과 함께 모든 것들이 달라져 버린 시형은 에이전트에게도 특별 관리 대상이었다.
 “음··· 사실, 아직은 모르겠습니다. 아직 다음 시즌 구상이 나온 것도 아니고요. 나 자신이 가장 중요하긴 하지만, 팀의 구상도 아예 무시할 순 없죠. 그럴 위치도 아니고.”
 포지션 전향이라는 게 쉬운 일이 아니다 보니 시형도 아직 제대로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있었다.
 결정을 내리지 못하는 이유 중에는 뉴캐슬의 다음 시즌 구상이 아직 나오지 않았다는 것도 큰 지분을 차지했다.
 뉴캐슬이 팀의 구상을 자신에게 맞춰줄 정도로 자신의 위상이 높지 않았기에 팀의 상황을 아예 무시할 수는 없었다.
 “그러면 휴가가 끝날 때까지 어떻게 하실 겁니까?”
 “일단 윙어로서 가장 좋은 몸을 만들어 놔야죠. 스피드, 민첩성, 유연성을 잃지 않으면서 최소한의 경합이 가능한 정도? 코어 근육 위주로만 단련해야겠죠, 아무래도. 누가 뭐래도 지금 상황에서 내가 가장 잘하는 건 슈팅과 드리블이니까. 달라진 몸으로도 전처럼 볼을 다룰 수 있게 훈련해야 할 거고··· 포지션 전향을 안 해도 일단 할 건 많아요.”
 다리도 길어지고 눈높이도 높아졌기 때문에 포지션 전향을 고려하지 않는다고 해도 당장 해야 할 일이 산처럼 쌓여 있었다.
 볼을 다루는 감각도 완전히 달라져서 새로 찾아야 했고, 달라진 신체로 플레이하는 것에도 익숙해져야 했다.
 자신의 몸에 자신이 어색함을 느끼고 있었기에 이 어색함을 없애고 예전처럼 자연스럽게 움직일 수 있어야 했다.
 포지션 전향은 그다음에 생각해도 늦지 않았다.
 “그래도 익숙해지실 수만 있다면 더 좋은 결과가 있을 겁니다. 누가 뭐래도 운동선수에게 신체 조건이란 굉장히 중요한 요소지 않습니까?”
 확실히 운동선수에게 타고난 신체 조건은 그 무엇보다 강력한 무기가 될 수 있었다.
 아주 나쁘게만 볼 것은 아니었다.
 “일단 컸으니 그렇게 생각하는 게 가장 좋긴 하지만··· 글쎄요. 그렇다고 좋기만 한 건 아니죠. 179cm도 나쁘진 않았어요. 윙어한테 그 정도면 충분하고··· 결국, 신체 조건을 살리려면 포지션을 바꿔야 한다는 이야기인데···.”
 신체 조건을 장점으로 만들기 위해서는 포지션을 바꿔야 하는데, 그건 너무 큰 도박이었다.
 그렇다고 윙어로 뛰자니 신체 조건이 큰 도움이 되지 않았고, 오히려 단점만 늘어난 상황이었다.
 “아, 도저히 결정을 못 하겠네요. 빨리 팀 구상이 나와야 거기에 맞춰서 결정할 텐데. 조, 뉴캐슬의 이적시장 움직임은 어떻습니까?”
 팀의 구상을 알기 위해서 가장 좋은 방법은 이적시장에서 어떤 방향으로 움직이고 있는지 살펴보는 것이었다.
 물론, 모든 클럽은 이적시장에서의 움직임을 비밀로 하려고 하지만, 에이전트들은 나름의 정보망을 가지고 움직였기 때문에 어느 정도 알고 있었다.
 “아쉽게도 우리 에이전시의 정보력으로 많은 걸 알 수는 없었습니다. 하지만··· 공격수 영입 계획이 있다는 건 알고 있습니다. 사실, 저희 말고도 어지간한 에이전시들은 다 알고 있는 이야기입니다만···.”
 2006년 AFC U-19 축구 선수권 대회를 계기로 일본의 유명 에이전시와 계약했던 시형은 프리미어리그 진출 이후 계약을 해지하고 잉글랜드의 에이전시와 계약을 맺었다.
 하지만 덮어놓고 이름값이 높은 곳과 계약한 것은 아니고 자신이 에이전시의 핵심이 될 수 있는 곳 중에서 골랐기 때문에 규모가 그렇게 크지는 않았다.
 정보력에 한계가 있다는 소리였다.
 “공격수라··· 숄라가 떠날 리는 없고, 한 명이 더 영입되면 1, 2옵션은 결정된다는 거네요. 음··· 쉽지는 않겠는데.”
 숄라 아메오비가 버티고 있는 상황에서 한 명의 공격수가 더 영입된다면 1, 2옵션은 결정되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뉴캐슬 정도의 클럽이면 최소한 아메오비 이상의 선수를 영입할 것이었기에 최소한 아메오비는 뛰어넘어야 백업으로라도 기회를 잡을 수 있다는 뜻이었다.
 “음, 일단 웨스트 햄의 뎀바 바 영입이 사실상 성사 직전이라고 합니다. 강등당하면 자유계약으로 풀어주는 조항이 있었다고 하더군요.”
 “뎀바 바요? 이런 미친··· 웨스트 햄에서 고작 반년 뛴 선수 아닙니까?”
 뉴캐슬의 레이더망에 들어온 선수는 바로 웨스트 햄의 뎀바 바였다.
 호펜하임 시절, 좋은 모습을 보여주다가 갑자기 몸 상태에 이상이 생기며 부진에 빠진 뎀바 바는 이적 명단에 올랐지만, 슈투트가르트와 스토크 시티, 두 곳에서 모두 메디컬 테스트를 통과하지 못했다.
 태업까지 불사하며 이적할 곳을 찾던 뎀바 바였지만, 메디컬 테스트에 두 번이나 떨어진 선수를 영입할 곳은 없었고, 이대로 끝인가 싶었을 때, 웨스트 햄이 나타났다.
 전반기가 끝났을 때, 팀이 완전히 무너져 다급했던 웨스트 햄은 메디컬 테스트도 없이 뎀바 바를 영입했고, 그는 열두 경기 출전에 7골을 터뜨리며 팀 내 최다 득점자가 되었다.
 하지만 다급하다는 이유로 강등 시 자유계약 선수로 풀어준다는 조항을 넣은 것이 치명적이었다.
 그리고 그 조항은 시형에게도 타격이 되었다.
 "웨스트 햄이 급하긴 급했나 봅니다. 어쨌든 자유계약을 사랑하는 뉴캐슬이 이 조항을 놓칠 리가 없죠. 사실상 뉴캐슬 이적이 확정되었다고 보면 됩니다.”
 “으음··· 뎀바 바면 당장 중상위권 팀으로 이적해도 주전으로 뛸 선수인데··· 어차피 주전은 기대도 하지 않지만, 원톱을 쓰는 팀에서 2옵션은 돼야 경기라도 나갈 텐데 말이죠. 뎀바 바는 어차피 주전일 거고, 아메오비도 2옵션 밑으로 내려오진 않을 거고··· 선수 영입이 있으면 있었지, 방출은 더 이상 없을 테니··· 스트라이커는 물 건너갔군요.”
 이렇게 되면 사실상 공격수 전향은 힘들어졌다고 봐야 했다.
 전향한다고 해도 기량이 올라올 때까지는 주전 출전 기회를 잡기 힘들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잦은 부상으로 인해 기동력이 떨어진 아메오비가 시형과 마찬가지로 191cm, 77kg에 불과했던 몸을 불려 타겟형 스트라이커로의 변화를 모색하고 있었다.
 아메오비는 뉴캐슬의 로컬 프랜차이즈 스타였기 때문에 같은 스타일이라면 경쟁이 더더욱 힘들었다.
 “이건 뭐··· 이적을 요청하지 않는 이상 윙어로 남아야겠는데요?”
 “그러면 윙어로 계속 남으실 겁니까?”
 에이전트의 말에 시형은 고민을 거듭했다.
 성공하기만 한다면 포지션 변경 카드가 훨씬 더 위력적이라는 것은 분명했다.
 하지만 이미 프로 무대까지 밟은 선수의 포지션 전향은 성공 케이스가 그리 많지 않다는 게 문제였다.
 잘못하면 앨런 스미스의 전철을 밟게 될지도 몰랐다.
 “아직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훈련을 하다 보면 알겠죠. 몸을 대충 만들고도 이전과 같은 플레이가 힘들다면 그때는 전향해야겠죠. 전향하게 되면 이적해야 할 것 같으니까 이적 요청서도 미리 준비해주세요.”
 어쨌든 확실한 것이 한 가지는 있었다.
 스트라이커 포지션으로는 뉴캐슬에서 살아남기 힘들다는 것이었다.
 “알겠습니다. 이적요청서랑 프로필 자료까지 미리 준비해놓을 테니 최대한 빨리 결정해주세요. 다른 팀들이 전력보강을 마치기 전에 이적 작업을 시작하려면 최소한 7월 중순까지는 알려주셔야 합니다.”
 앞에서도 말했지만, 시형은 지금의 에이전시에서 담당하는 대형 선수 중 한 명이었다.
 시형이 고꾸라지지 않도록 관리해주는 것이 에이전시의 주요 업무일 수밖에 없었다.
 포지션 전향과 이적 요청.
 이제부터는 에이전시도 바쁘게 움직여줄 것이었다.
 “조쉬! 조쉬! 아, 임도 계셨습니까?”
 그때, 에이전시의 직원 중 한 명이 사무실로 뛰어 들어왔다.
 호흡도 거칠고 얼굴도 상기된 것을 보니 뭔가 급한 일이 있는 듯했다.
 그의 손에는 한 장의 종이가 들려 있었다.
 
 <『뉴타입 골게터』 1-2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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