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물함
뒤로가기버튼 라만차의 전사

◈ 프롤로그

2016.10.06 조회 6,714 추천 107


 ◈ 프롤로그
 
 어디 검도 하는 사람인지 일본 하까마 비슷한 옷을 입은 사람이 짚단 앞에 서 있었다.
 눈을 감고 기 모으듯 호흡을 고르던 그가 눈을 번쩍 뜨더니, 얍! 하고 기합을 넣으면서 번개같이 칼을 뽑아 짚단을 쳐 날렸다. 한 번만 베는 것도 아니고, 폴짝폴짝 뛰면서 점프 회오리 베기로 두 번 세 번 반복해서 짚단을 썰어 댔다. 오두방정도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칼집에 납도할 때는 또 어찌나 고요하고 느릿한지, 계룡산에서 십 년은 도 닦은 포쓰가 줄줄 새어 나왔다.
 이곳은 교외의 어느 베기장.
 베기용 짚단이나 대나무를 판매하고, 베기 수련을 할 수 있게 공간을 제공하는 곳이다.
 옆의 허세 쩌는 아저씨를 흘깃 눈짓하다가 나는 양손검을 들어서 내 몫의 대나무를 겨누었다. 대충 간격을 잡고 그냥 속도로 후려쳤다. 하지만 대나무는 베이는 것이 아니라 폭발하듯 파편이 튀며 갈라져 버렸다.
 에잉, 처음이라 그런지 잘 안 되네.
 그 꼴을 보고 하까마 허세 아저씨가 묘한 시선을 보낸다.
 “그거 서양 칼이죠?”
 “예, 롱소드요.”
 “서양 칼은 갑옷 때려 부수는 무식한 칼이라 그런가 보네. 검선이 영······.”
 그 말에는 비웃음이 잔뜩 담겨 있었다.
 왠지 울컥 한다. 서양검이 갑옷 때려 부수는 칼이다 뭐 그런 건 대표적인 잘못된 지식이다.
 근데 내가 대나무 베기 초보라서 깔끔하게 베질 못하니 반박하기도 그렇고, 아 놔.
 부아가 난 나는 짚단과 대나무를 왕창 놓고 베기 연습을 시작했다. 무수한 몬스터들을 쑹덩쑹덩 썰어 온 나다. 단지 요령이 부족해서 대나무를 뽀개 먹었을 뿐이다. 익숙해지면 나도 잘 벨 자신이 있다. 그래서 대량으로 베며 집중 연습을 시작했다.
 그러자 하까마 아저씨는 다시 한 번 보란 듯이 짚단을 썰어 대며 난리 부르스를 추었다. 아 진짜, 저거 짚단베기용 삼각도 가지고 너무 유세 떠시네.
 서로 이상한 경쟁 심리가 들어서 마구 베어 댄 끝에, 준비했던 짚단이 다 떨어져서 잠시 쉬는 타임이 왔다.
 “님도 헌터 지망생이죠? 딱 보니 알겠네.”
 “뭐, 비슷하죠.”
 음료수 캔을 꺼내던 나는 멋쩍어서 얼버무렸다.
 혼자 먹기도 눈치 보여서, 그에게도 캔을 하나 건네자 하까마 아저씨가 친한 척을 한다. 일단 호구조사부터 하더니, 나보다 몇 살 나이가 많다는 것을 알고 오지랖 넓게 간섭하기 시작했다.
 잘 베려면 무기부터 바꿔라. 괴수한테는 그런 칼 안 통한다. 날카로운 건 일본도가 최고다. 검도 얼마나 다녔냐. 동생 기초부터 배워야겠네. 내가 일본 중촌류를 배웠는데 말이지······.
 왱알앵알 하는 게 참 귀찮아져서 나는 살인을 계획했다.
 “그러고 보니 아는 헌터 형님이 있는데, 아저씨하고 비슷한 말씀을 하시더라고요.”
 “오, 그래? 거 봐. 그분이 맞는 말 한 거야.”
 “그런데, 그 형님은 이미 고인이시죠. 말만큼 실력이 안 따라 줘서······.”
 말하는 뽄새 보면 헌터 지망생인데, 어디서 훈장질이냐고 돌려 말하자 잠시 후 하까마 아저씨의 귓바퀴가 붉게 달아올랐다.
 촌철살인 성공, 크크크. 인생은 실전이야, 존만아.
 그때 휴대전화가 울렸다. 괴수 긴급대응반(Monster Emergency Response Team)의 김대훈 경위님이다.
 “경위님?”
 - 함 헌터! 상황이 걸렸네. 지금 빨리 와 주게.
 “여기 시외라서 시간이 좀 걸릴 것 같은데요.”
 - 이런 급한 때에 또 어딜 가 있는 거야!
 “베기장에 연습 좀 하러 왔습니다.”
 - 베기장? 이런 비상 시국에 뭐하러 그런 데를 가!
 “참 나. 헌터가 어디 저뿐이랍니까. 다른 사람들 보내세요.”
 - 아냐, 함 헌터가 도와줘야겠어. 사상자가 많다고 한다. 헬기 보낼 테니 기다려.
 “경찰 헬기를요? 뭐 큰 거라도 나왔습니까?”
 - 동영상으로 보낼 테니 직접 봐.
 곁눈질하며 귀를 기울이던 하까마 아저씨는 경찰 헬기를 보낸다는 말에 눈이 휘둥그레졌다. 같은 헌터 지망생인 줄 알았는데 헌터라고 하니 기가 죽은 표정이다.
 의기양양하던 것도 잠시. 내 표정도 심각해졌다.
 동영상 안에는 여태껏 보지 못한 거대한 덩치가 도심 안을 배회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김대훈 경위가 보낸 영상이 아니었다면, 잘 만든 CG로 생각했으리라.
 마치 이족보행하는 티라노사우루스처럼 보인다. 하지만 앞발 역시 뒷발 정도로 굵고 강력하며, 머리에 솟은 두 개의 뿔과 등을 따라 쭈욱 이어지는 번들거리는 등딱지는 한눈에 봐도 공룡과 확연하게 차이가 난다.
 5층 빌딩만 한 놈이 시가지 안에서 돌진하면서 자동차를 걷어차고, 사람을 낚아채서 입안에 털어 넣는 것을 보고 나는 신음했다.
 “타라스크(Tarrasque)······.”
 영상은 헬기에서 촬영한 것으로 바뀌었다.
 타라스크의 만행을 견딜 수 없었는지 드디어 전차가 나타났다. 타라스크의 뒤쪽에서 접근한 전차가 주포를 뿜었다. 하지만 등딱지에 맞은 포탄은 어이없을 정도로 간단히 튕겨 나갔다. 공교롭게도, 허공으로 튕겨 난 날탄은 촬영하던 헬기에 피격했다.
 동영상은 혼란스럽게 흔들리다가 바뀌었다.
 이번엔 진지를 구축한 군인들의 시점이었다.
 도심이 전쟁터로 변해 있었다. 저 멀리, 고층 빌딩을 타고 올라가는 타라스크가 보인다. 니가 ○콩이냐?
 그때, 공격헬기가 나타나서 대전차 미사일을 날렸다. 작정했는지 달고 온 미사일을 모두 쐈다. 폭발에 휩쓸린 타라스크는 지상에 추락해서 근처를 뭉개 놨다. 군인들이 “겟썸!”하고 환호하는 것이 들린다. 이번에는 조금 피해가 있었던 것 같다.
 하지만······.
 나는 예감했다. 별로 효과가 없을 거라고.
 효과가 있더라도, 오래가지 못할 거다.
 타라스크는 가루로 만들어도 재생하는 놈이거든.
 헬기 소리가 들려오자 나는 동영상을 껐다.
 곁에서 같이 들여다보던 헌터 지망생 하까마 아저씨는 식은땀을 흘리고 있었다. 헌터가 돈 되는 직업이라고 생각했지, 저런 괴물하고 맞서야 한다고는 생각해 보지 않았으리라.
 가까운 농작지에 내려앉은 헬기를 향해 내가 떠나자, 굳어 있던 하까마 아저씨가 난데없이 화이팅을 외쳤다.
 난 씩 웃고 말았다. 예, 화이팅해야죠. 타라스크랑 싸우는데.
 그나저나, 햐. 내가 드디어 타라스크하고도 싸워 보는군. 20레벨 캐릭터가 팀을 짜야 덤빌 수 있는, 도전지수―Challenge Rating: 몬스터의 위험도. 약어 CR. 도전지수와 같은 레벨의 캐릭터 4인 파티가 그 몬스터 한 개체에게 중간 정도 위험도를 가지는 것을 기준으로 한다.― 20짜리 괴물하고 맞짱 뜬다니. TRPG라면 몰라도 실제로 해 보는 건 아무래도 떨린다.
 경찰 헬기에 올라타자마자 김 경위님이 USB를 내밀었다. 아이고 바쁘기도 하셔라.
 엔진 소리에 지지 않게 소리를 질렀다.
 “거기 미국 아닙니까? 어차피 거기까지 가는데 시간 걸릴 텐데요!”
 김 경위는 곁의 사람을 힐끗 손짓했다. 그러고 보니 파일럿이나 경찰로는 보이지 않는, 정장 차림 회사원 같은 사람이 동승하고 있었다.
 “미스터 함, 이름 많이 들었습니다. 미 대사관 지역조사과(Office of Regional Study) 도장훈입니다.”
 “무슨 일로 어떻게 들으셨는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어쨌든 반갑습니다. 함철입니다.”
 김 경위님에게 진짜인지 눈짓을 보냈더니, 고개를 미미하게 끄덕인다. 공식적인 채널이라는 뜻이다.
 명함을 주고받으면서 나는 미묘한 표정을 감추려 애썼다.
 지역조사과는 미 대사관 내의 CIA 한국지부를 가리킨다.
 요새 반미 감정을 고려해서 코메리칸들을 많이 배치한다고 신문 기사를 읽은 적은 있지만, 정말로 한국계 CIA 요원을 보니 묘하다.
 게다가 겉보기에는 그냥 회사 다니는 아저씨 인상이다. 세계적으로 악명 높은 정보조직 요원 같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하긴, 그런 평범함이 오히려 요원으로서는 장점이겠지만.
 그런데 이 사람 이름 이상해. 한국명 도장훈 아래에 미국식 이름도 적혀 있는데, John H. Doe라고 적혀 있다.
 존 도는 미국에서 익명을 가리킬 때 쓰는 이름이다. 우리나라로 치자면, 아무개 혹은 홍길동 정도의 이름이랄까?
 내 시선을 눈치챘는지 그가 부담 없이 웃었다.
 “아버지께서 지어 주신 이름이라서요.”
 거 참 자식 이름 한 번 성의 없이 짓는 부모로구먼.
 CIA 요원이 붙을 정도라면, 아무래도 사태가 영 급한 모양이었다. 김포 공항으로 가는 동안 USB 자료를 검토했는데, 아까 영상으로 본 것은 일부에 지나지 않았다. 나는 영상과 사진, 서류 파일을 살피면서 태블릿을 꺼내 자료를 뒤졌다. 도 요원이 내 자료를 힐끔 들여다보지만, 일부러 보라는 의미로 꺼낸 것이다.
 나는 던져니어(Dungeoneer)라는 닉네임의 민완 민속학자로 알려져 있다. 학자는커녕 대학교 졸업장도 못 딴 아마추어지만, 표면적으로는 그렇다.
 “무슨 괴물일까요? 우리는 터틀 드래곤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만.”
 “터틀 드래곤이라. 사실 그렇게 부를 만한 놈은 따로 있을 거라고 보지만요. 흠, 이게 좀 비슷하겠군요.”
 나는 프랑스 타라스콩(Tarascon) 마을의 축제 사진을 띄웠다.
 몸통이 마치 악어처럼 삐죽삐죽하고 기다랗지만, 머리통은 사자탈춤의 가면처럼 생긴 커다란 괴물 모형 주변에서 사람들이 축제를 벌이는 장면이었다.
 “13세기 이탈리아의 연대기 기록자이자 제노바 대주교였던 자코뷔 드 보라진(Jacobus de Voragine)이 엮은 황금 전설(Legenda aurea)에, 프랑스 프로방스의 넬루크 지방에 나타난 무서운 괴물 이야기가 있습니다. 이 괴물 이름이 타라스크(Tarasque)라고 하는데, 원래 갈라티아 지방―현재 터키 아나톨리아 고지대―에 살던 놈이라고 합니다.갈라티아 지방에는 오나츄스라는 황소 또는 뱀을 닮은 괴수가 살았다고 하죠. 오나츄스는 불에 관련된 괴수라서 죽음과 재생에 연관이 있는 것으로 보이는데······ 아, 잡설이 길었군요. 하여튼 타라스크는, 오나츄스와 레비아탄 사이에서 난 자식이라고 합니다. 레비아탄 아시죠? 기독교 성경에 나오는 리바이어던 말입니다. 황금 전설이 원래 기독교 성인에 관계된 설화집이라서 좀 뜬금없이 그런 요소가 들어가 있습니다.
 하여튼 타라스크는 레비아탄과 오나츄스의 자식이라고 불릴 만큼 거대하고 강력한 괴물이었습니다. 묘사를 보면 곰 같은 굵고 튼튼한 다리에, 황소 같은 거대한 몸통, 사자 같은 무시무시한 머리통, 그리고 거북이 같은 등딱지와 전갈 같은 가시가 난 꼬리를 지닌 드래곤의 일종이라고 돼 있죠. 뭐, 세세한 것에 너무 구애될 필요는 없습니다. 원래 중세 전설의 묘사란 게 대충 쎄 보이는 짐승 묘사를 섞어 놓거든요.
 중요한 부분은 여기입니다. 타라스크가 출몰하자 넬루크의 왕은 기사와 공성 무기를 보내서 상대했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습니다. 그때 성녀 마르타―베타니아의 마르타,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던 여인 중 하나―가 괴물을 기도와 노래로 감화시켰고, 얌전해진 괴물을 데리고 마을로 돌아왔습니다. 하지만 괴물을 두려워한 사람들은 괴물이 다가오자 죽을 때까지 돌을 던졌고, 괴물은 저항하지 않고 순교했습니다.
 예, 그것도 순교인 거죠. 제아무리 괴물이라도 개종한 후에 죽었으니까요. 어쨌든 기독교로 개종한 괴물이 순순히 죽음을 맞이하자 죄책감을 느낀 마을 사람들이 성녀 마르타의 설교에 감화되어 기독교로 개종합니다. 그리고 괴물을 기리는 마음을 담아서 마을 이름을 타라스콩으로 바꾸고 매년 축제를 열게 되었죠.”
 타라스콩 마을 축제의 모형이나 마을에 남겨진 옛 조각상 같은 자료로 볼 때, 전설의 타라스크는 동양의 현무 조각상과 비슷하지만 좀 더 괴상하고 흉악하게 생긴 형태다.
 이번에 출몰한 타라스크와는 비슷하다면 비슷하고, 안 닮았다면 안 닮은 꼴.
 하지만 전설에서 모티브를 따온 것은 확실한 사실이다.
 “성녀 마르타가 타라스크를 굴복시킨 것은, 지역 전설을 각색해서 기독교 성인 설화에 편입시키면서 생겨난 이야기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순결한 처녀가 괴수를 굴복시키는 것은, 유니콘 설화도 그렇고 세계적으로 흔한 모티브죠.”
 영화 킹○ 또한 그런 모티브의 현대적 연장선상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니 기독교 관련된 부분은 일단 무시할 경우, 전설 속 타라스크를 이야기할 때 중요한 것이 이거죠. 타라스크는 죽음과 부활에 관계된 괴물의 자식입니다. 왕이 보낸 기사나 공성 무기가 통하지 않았다는 데서 볼 수 있듯이, 아주 강력한 재생 능력이나 부활 능력이 있을 겁니다. 아까 본 영상에서 미사일 맞았는데도 금방 재생했죠? 타라스크를 기려서 마을의 이름을 바꾸고, 축제를 매년 유치하는 것 또한 전설에 힘을······ 음, 잠깐.”
 나는 받았던 자료를 다시 돌려보면서 미간을 접었다. 왜 이걸 이제야 눈치챈 거지.
 “혹시나 해서 묻는데. 이거 혹시······ 두 마립니까?”
 자료상에서 타라스크의 외모가 바뀌었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걸 염두에 두고 사진이나 영상을 다시 검토하니, 어느 시점부터 외모가 상이해졌다.
 대사관 직원의 탈을 쓴 CIA 요원은 잠시 뜸을 들이다가 실토했다.
 “세 마리입니다.”
 아 놔, 나 그냥 여기서 내리면 안 됨? 무리다. 아무리 나라도 타라스크 세 마리는 무리야.
 나는 맹렬하게 후회하면서 어쩌다가 이런 골치 아픈 일에 휘말리게 됐는지 반성했다.
 아아, 그래, 그날이 시작이었던 것 같다. 늦겨울, 어느 분위기가 좋다가 만 날이었다.
 내 인생 처음으로 소개팅한 날.

댓글(19)

서리바람    
작가님 건강은 괜찮아지셨나요? 완결까지 연재하실 수 있을지 좀 걱정스럽네요
2016.10.07 07:34
렌마르크    
제가 잘 몰라서 틀릴수도 있습니다만, 한 행성에 3마리나 있을 수 있습니까? 워낙 강하고 불사에 가까운 놈이라 한 세계에 한마리만 존재한다고 들은 기억이 얼핏 있는데... 제가 잘못 알고 있는 건가요?
2016.10.07 11:13
흉갑기병    
와, 도입 부분이 완전히 바뀐 것 같군요. 기대됩니다.
2016.10.12 23:56
[탈퇴계정]    
믿고 읽는 지뢰 소설!
2016.10.13 18:11
드르렁큐우    
호에에엥에엑?!!!! 라만차닷!!!!!!!!!!!!!!!
2016.10.13 20:14
이라로무아    
드디어 이걸 볼수 있구만
2016.10.13 21:43
상상중독자    
음~ 이북으로 계속 나오는 건가요? 북큐브에서 6권까지 구매했었는데...
2016.10.18 19:29
유몽혼    
돌아오셨군요 작가님ㅜ
2016.10.22 20:11
아틀락나차    
문피아 연재 환영합니다!
2016.10.31 18:35
he*****    
잘 보고갑니다^^
2016.11.02 19: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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